무아 · 오온 無我 · 五蘊

무아 · 오온

석존의 가르침

無我 · 五蘊「무아상경」 · 『밀린다왕문경』 · 『구사론』 파아품 · 『중론』 관법품 · 『마하지관』 · 「일념삼천이사」 · 『어의구전』

기원전 2세기, 인도 서북부를 다스리던 그리스계의 왕 밀린다가 한 비구에게 이름을 물었다. 비구는 대답했다. 「대왕이여, 저는 나가세나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는 이름일 뿐, 거기에 사람이라는 실체는 붙잡히지 않습니다.」 왕은 웃었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옷과 음식을 바치는 이는 누구이고, 계를 지키는 이는 누구이며, 죄를 짓는 이는 누구인가. 머리털이 나가세나인가, 손톱이 나가세나인가, 느낌이 나가세나인가. 비구는 하나하나에 「아닙니다」라고 답한 뒤, 왕이 타고 온 수레를 가리켰다. 「대왕이여, 굴대가 수레입니까, 바퀴가 수레입니까?」 수백 년 전 석존이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 그 물음이, 이렇게 동서가 만나는 자리에서 다시 문답이 되었다.

무아(無我)는 불교를 다른 모든 종교·철학과 가르는 표지로 꼽혀 왔다. 그러나 이 말만큼 거칠게 이해되는 말도 드물다. 「나는 없다」 —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것은 누구인가.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은 누구이며, 성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무아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의 선언으로 읽으면 이런 물음이 끝없이 이어지고, 무아를 「나를 버려라」는 윤리의 훈계로 읽으면 무아는 자기 부정의 금욕이 된다.

석존이 실제로 한 일은 조금 달랐다. 석존은 사람을 물질·느낌·지각·의지 작용·의식의 다섯 무더기(오온)로 나누어 보이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라고 했다. 그리고 한 유행자가 「자아는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정면으로 물었을 때는 어느 쪽으로도 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무아는 처음부터 「없다」는 답이 아니라, 「나」라고 붙잡는 손을 풀게 하는 관찰의 방법이었다.

그 뒤의 불교사는 이 무아를 둘러싸고 길게 다투었다. 무아라면 윤회하는 것은 무엇인가 —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사람(뿌드갈라)」이 있다고 한 부파가 있었고, 그것을 외도의 아(我)로 되돌아간 것이라 논파한 논사가 있었다. 「나」는 없어도 「법」은 있다고 한 아비달마에 맞서, 대승은 법도 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열반경』은 마침내 「아(我)란 곧 여래장이다」라고 선언했다. 무아를 가르친 불교가 다시 「나」를 말하게 된 것이다.

이 페이지는 무아라는 개념이 걸어온 길을 여섯 부로 나누어 읽는다. 1부는 석존의 무아 — 오온의 분석, 무아상경, 바차곳타 앞의 침묵, 그리고 「자기를 섬으로 삼으라」. 2부는 아비달마의 무아 — 오온·십이처·십팔계의 분류, 나가세나의 수레, 독자부의 뿌드갈라와 『구사론』 파아품의 논쟁. 3부는 대승의 무아 — 인무아와 법무아, 용수의 「무아도 아니다」, 유식의 말나식, 『열반경』의 대아. 4부는 천태의 오음 — 삼세간의 하나인 오음세간과, 『마하지관』이 일념삼천을 펼친 자리인 「오음을 관하라」. 5부는 대성인의 무아 — 오음이 거짓 화합한 몸, 그리고 「무아에 굳게 집착하는 것이 미혹의 근본」이라는 「십법계사」의 말씀. 6부는 무아를 넘어선 「나」 — 『어의구전』의 「나란 법계의 중생이다」와, 오온이 그대로 묘법의 다섯 자라는 법문이다.

  1. 우파니샤드변하지 않는 주인 아트만(ātman)
  2. 석존「이것은 내가 아니다」 오온의 분석 · 무기(無記)
  3. 아비달마아공법유(我空法有) · 독자부의 뿌드갈라 논쟁
  4. 반야 · 용수오온개공 ·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無我無非我)」
  5. 유식 · 『열반경』말나식의 아집 · 「아는 곧 여래장」
  6. 천태오음세간 · 「장을 버리고 척으로」 음입계경
  7. 니치렌 대성인「堅く無我を執して…此れ迷の根本なり」굳게 무아에 집착하는 것이 미혹의 근본「我とは法界の衆生なり」나란 법계의 중생이다
도표 1 · 무아 사상의 계보
1부 석존의 무아「이것은 내가 아니다」

아트만과 아낫타

무아는 산스크리트 아나트만(anātman), 팔리어 아낫타(anattā)의 번역이다. 아트만(ātman)은 본래 「숨」을 뜻하던 말로,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자기, 곧 몸과 마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안에서 다스리는 주인을 가리켰다. 우파니샤드는 이 아트만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보는 자이면서 보이지 않는 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트만이 우주의 근본 원리 브라흐만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었다.

핵심 개념 「무상」에서 보았듯이, 석존의 무상은 이 아트만의 「늘 그러함(nitya)」을 겨눈 말이었다. 무아는 같은 아트만의 다른 성격, 곧 「주인임」과 「실체임」을 겨눈다. 무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를 말한다면, 무아는 「다스리는 주인으로서의 나, 모든 경험 뒤에 숨은 실체로서의 나는 붙잡히지 않는다」를 말한다. 그러므로 석존의 무아는 처음부터 일상의 「나」 — 이름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 를 지우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일상의 나를 떠받치고 있다고 여겨진 또 하나의 「참된 나」를 찾아보라고, 찾아보면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가르침이었다.

다섯 무더기 — 오온

석존은 「나」를 찾는 방법으로 사람을 다섯 무더기로 나누었다. 무더기로 옮긴 칸다(khandha, 산스크리트 skandha)는 「더미」, 「덩어리」를 뜻한다. 구마라집은 이것을 「음(陰)」 또는 「중(衆)」으로, 현장은 「온(蘊)」으로 옮겼다. 오음(五陰)과 오온(五蘊)은 같은 말의 옛 번역과 새 번역이다.

첫째는 색(色, rūpa) — 물질, 특히 몸이다. 땅·물·불·바람의 네 원소(사대)와 그것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둘째는 수(受, vedanā) — 느낌이다. 대상과 만날 때 일어나는 즐거움·괴로움·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의 세 가지 느낌이다. 셋째는 상(想, saññā) — 지각, 곧 「이것은 파랗다」, 「이것은 길다」처럼 대상의 모습을 알아보고 마음에 그리는 작용이다. 넷째는 행(行, saṅkhāra) — 의지 작용이다. 경전은 이것을 「여섯 가지 의도의 무리」라고 정의하는데, 무엇을 하려 하고 지어 내는 마음의 움직임, 곧 업을 짓는 힘이다. 다섯째는 식(識, viññāṇa) — 의식, 곧 대상을 하나하나 알아 가르는 작용이다.

석존은 사성제의 첫째 괴로움의 진리를 설하면서, 태어남·늙음·병·죽음과 미운 이와 만나는 괴로움 등을 들고 나서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가 괴로움이다(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라고 맺었다(「초전법륜경」, SN 56.11). 「취착의 무더기(upādānakkhandha)」, 곧 오취온(五取蘊)이란, 이 다섯 무더기가 「나」와 「내 것」으로 붙잡힐 때의 모습이다. 다섯 무더기 그 자체보다, 그것을 붙잡는 손이 괴로움의 자리다.

색(色, rūpa)물질 · 몸
수(受, vedanā)느낌: 즐거움 · 괴로움 · 어느 쪽도 아님
상(想, saññā)지각: 모습을 알아봄
행(行, saṅkhāra)의지 작용: 지어 내는 힘 · 업
식(識, viññāṇa)의식: 알아 가름
색 = 물질의 면
수 · 상 · 행 · 식 = 마음의 면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가 괴로움이다」(「초전법륜경」, SN 56.11)

도표 2 · 다섯 무더기

무아상경 —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다섯 무더기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인가. 석존의 두 번째 설법으로 전하는 「무아상경(Anattalakkhaṇa sutta)」은 이렇게 시작한다.

Rūpaṃ, bhikkhave, anattā. Rūpañca hidaṃ,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ṃ rūpaṃ ābādhāya saṃvatteyya, labbhetha ca rūpe: 'evaṃ me rūpaṃ hotu, evaṃ me rūpaṃ mā ahosī'ti.

비구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은 병들지 않을 것이고, 물질에 대해 「내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 내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무아상경」, SN 22.59

석존의 논증은 단순하다. 만약 몸이 참으로 「나」, 곧 나를 다스리는 주인이라면 몸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몸은 병들고, 「이렇게 되어라」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은 주인으로서의 나가 아니다. 경은 같은 말을 느낌·지각·의지 작용·의식에 되풀이한다. 느낌도 「즐거운 느낌만 일어나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마음도 「이렇게 생각하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다섯 무더기 어디에도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주인은 없다.

경의 둘째 부분은 핵심 개념 「무상」 1부에서 본 문답이다.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의 셋째 부분은 관찰의 정식을 준다.

Yaṃ kiñci rūpaṃ … sabbaṃ rūp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어떤 물질이든 —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 모든 물질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같은 경

「내 것(mama)」, 「나(aham asmi)」, 「나의 자아(me attā)」 — 이 세 가지는 각각 갈애(taṇhā)와 자만(māna)과 견해(diṭṭhi)의 붙잡음이라고 주석서는 풀이한다. 무아의 관찰은 「나는 없다」는 새 견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섯 무더기 하나하나에서 이 세 가지 붙잡음을 풀어내는 일이다. 경은 이 설법을 들은 다섯 비구가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했다고 전한다.

① 주인이 아니다「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병들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되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무상 · 고이다「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을 '나'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습니다」
③ 이렇게 보라
  • netaṃ mama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 nesohamasmi이것은 내가 아니다
  • na meso attā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내 것 = 갈애나 = 자만나의 자아 = 견해

색 · 수 · 상 · 행 · 식에 같은 관찰을 되풀이한다(「무아상경」, SN 22.59)

도표 3 · 무아상경의 세 단계

물거품 덩이와 파초

석존은 다섯 무더기가 얼마나 속이 비었는지를 비유로도 보였다. 갠지스 강가의 아요다에서 설했다는 「물거품 덩이 경(Pheṇapiṇḍūpama sutta)」에서 석존은 강물이 실어 오는 큰 물거품 덩이를 가리킨다. 눈 밝은 사람이 그것을 자세히 살피면 비어 있고 속이 없고 알맹이가 없음이 드러난다. 물질은 물거품 덩이 같고, 느낌은 빗방울에 이는 물방울 같고, 지각은 더운 철 마지막 달 한낮의 아지랑이 같고, 의지 작용은 파초 줄기 같으며 — 겹겹이 벗겨도 단단한 심이 나오지 않는다 — 의식은 네거리에서 마술사가 부리는 환술 같다(『상윳따 니까야』 「물거품 덩이 경」, SN 22.95).

핵심 개념 「무상」 3부에서 본 『유마경』의 「이 몸은 물거품 덩이와 같고 … 파초와 같아 속에 단단함이 없다」는 이 경의 비유를 잇는다. 무상의 비유로 쓰인 것들이 처음에는 무아의 비유였다. 변하는 것이기에 비어 있고, 비어 있기에 변한다.

해 질 녘 넓고 느린 강 위로 흰 물거품 덩이들이 떠내려가고, 왼쪽 강둑에는 잎이 넓은 파초 무리가 서 있으며, 멀리 모래톱과 안개 낀 산이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1 · 물거품 덩이와 파초
  • 색물거품 덩이(pheṇapiṇḍa)
  • 수물방울(bubbuḷa)
  • 상아지랑이(marīcikā)
  • 행파초 줄기(kadalikkhandha)벗겨도 심이 없다
  • 식환술(māyā)

살펴보면 비어 있고 속이 없고 알맹이가 없다(「물거품 덩이 경」, SN 22.95)

도표 4 · 다섯 무더기의 다섯 비유

짐과 짐꾼

그런데 석존은 「사람」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는가. 석존은 「나는」, 「그대는」이라고 말했고, 제자들을 이름으로 불렀으며, 업을 지은 사람이 그 과보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짐 경(Bhāra sutta)」에서 석존은 이렇게 설한다.

Bhārā have pañcakkhandhā, bhārahāro ca puggalo; bhārādānaṃ dukhaṃ loke, bhāranikkhepanaṃ sukhaṃ.

다섯 무더기는 참으로 짐이요, 짐을 지는 자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짐을 지는 것은 괴로움이요, 짐을 내려놓는 것은 즐거움이다.

『상윳따 니까야』 「짐 경」, SN 22.22

산문 부분에서 석존은 짐은 다섯 취착의 무더기이고, 짐을 지는 자는 「이러이러한 이름과 이러이러한 성을 가진 존자」, 곧 사람(puggala)이며, 짐을 지는 것은 갈애이고, 짐을 내려놓는 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없애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 경은 뒤에 큰 논쟁의 씨앗이 된다. 짐이 오온이라면 짐꾼은 오온과 다른 무엇이 아닌가. 2부에서 보듯이, 독자부는 이 경을 근거로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바지라 비구니의 수레

『상윳따 니까야』의 비구니 상윳따는 바지라(Vajirā) 비구니와 악마 마라의 문답을 전한다. 숲에서 홀로 좌선하는 비구니에게 마라가 다가와 묻는다. 「이 중생은 누가 만들었는가. 중생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중생은 어디서 생겨나고 어디서 사라지는가.」 비구니는 게송으로 답한다.

Kiṃ nu sattoti paccesi, māra diṭṭhigataṃ nu te; suddhasaṅkhārapuñjoyaṃ, nayidha sattupalabbhati. Yathā hi aṅgasambhārā, hoti saddo ratho iti; evaṃ khandhesu santesu, hoti sattoti sammuti.

마라여, 그대는 어찌 「중생」이라고 여기는가. 그것은 그대의 그릇된 견해가 아닌가. 이것은 다만 지어진 것들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은 붙잡히지 않는다. 마치 부품들이 모일 때 「수레」라는 말이 있듯이,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통칭이 있다.

『상윳따 니까야』 「바지라 경」, SN 5.10

이 게송에서 무아의 논리가 분명해진다. 수레는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수레를 타고 다닌다. 다만 「수레」라는 것은 바퀴와 굴대와 수레틀이 모였을 때 붙이는 이름(sammuti, 통칭)이지, 바퀴와 굴대 말고 따로 「수레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생」, 「나」도 다섯 무더기가 모였을 때 붙이는 이름이다. 글머리에서 본 나가세나의 수레 비유는 이 게송을 대론의 형식으로 펼친 것이다.

침묵한 질문 — 바차곳타와 무기

석존의 무아가 「자아는 없다」는 단언과 다르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상윳따 니까야』의 「아난다 경」(SN 44.10)에서 유행자 바차곳타가 석존을 찾아와 묻는다. 「고타마여, 자아는 있습니까?」 석존은 침묵했다. 「그렇다면 고타마여, 자아는 없습니까?」 석존은 또 침묵했다. 바차곳타가 돌아간 뒤 아난다가 그 까닭을 묻자 석존은 이렇게 답했다.

만약 「자아가 있다」고 답했다면, 그것은 영원한 자아를 주장하는 상주론(常住論)의 사문·바라문들 편에 서는 것이 된다. 또 「모든 법은 내가 아니다」라는 앎이 일어나는 데에도 맞지 않는다. 만약 「자아가 없다」고 답했다면, 그것은 죽으면 끊어진다는 단멸론(斷滅論)의 사문·바라문들 편에 서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미 혼란스러운 바차곳타는 「전에 있던 나의 자아가 이제는 없어졌구나」 하고 더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물음 1 「자아는 있습니까?」
침묵
「있다」고 답하면→ 상주론(常住論) 편→ 「모든 법은 내가 아니다」는 앎과 어긋남
물음 2 「자아는 없습니까?」
침묵
「없다」고 답하면→ 단멸론(斷滅論) 편→ 「전에 있던 나의 자아가 없어졌다」는 더 큰 혼란

무아는 「있다」와 「없다」 어느 쪽 대답도 아니다(「아난다 경」, SN 44.10)

도표 5 · 바차곳타 앞의 침묵

석존의 침묵은 대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물음 자체가 「자아라는 실체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라는 전제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아는 그 전제를 받아들인 뒤 「없다」 쪽을 고르는 대답이 아니다. 핵심 개념 「무상」 3부에서 본 용수의 「항상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다(不常亦不斷)」가 이 침묵을 논리로 다시 쓴 것이다. 계보 二 「공 · 중도」에서 다룬 「두 개의 중도」 가운데 상견과 단견을 떠난 중도가 바로 이것이다.

초기 경전은 석존이 답하지 않은 물음들을 「무기(無記, avyākata)」, 곧 「설명하지 않은 것」이라 부른다.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세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생명(영혼)과 몸은 같은가 다른가,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 팔리 경전은 이것을 열 가지로, 한역 경론은 열네 가지로 정리한다. 『맛지마 니까야』 「말룽꺄 소경」(MN 63)에서 이 물음들의 답을 듣기 전에는 수행을 그만두고 환속하겠다는 비구에게 석존은 독화살의 비유를 든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누가 쏘았는지, 그의 성이 무엇인지, 활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하면 그는 답을 알기 전에 죽을 것이다. 석존이 설한 것은 괴로움과 그 원인과 그 소멸과 그 길이었다.

무아는 이 무기의 물음들과 깊이 이어져 있다. 「생명과 몸은 같은가 다른가」,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모두 그 밑바닥에 「나」라는 실체를 깔고 있다. 석존은 그 실체를 전제한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대신 다섯 무더기를 하나하나 살펴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보는 길을 주었다.

「나는 있다」는 냄새 — 케마카

무아를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이 몸에 배는 것은 다르다. 「케마카 경」(SN 22.89)에서 병든 비구 케마카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다섯 무더기 어느 것도 나라고, 내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섯 무더기에 대해 「나는 있다(asmi)」는 느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빨래한 옷에 남은 잿물 냄새와 같다. 옷을 향 상자에 넣어 두면 그 냄새도 마침내 사라지듯이, 다섯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거듭 관하면 남은 「나는 있다」는 자만(asmimāna)도 뽑혀 나간다. 경은 이 말을 들은 비구들과 케마카가 함께 해탈했다고 전한다.

이 경은 무아의 이해에 층이 있음을 보여 준다. 「다섯 무더기 가운데 무엇이 나인가」라는 견해(유신견)는 바른 이해로 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있다」는 막연한 자만은 더 깊은 곳에 남는다. 2부에서 보듯이 아비달마는 이것을 견혹과 사혹의 구별로 정리했다.

자기를 섬으로 삼으라

그렇다면 무아를 가르친 석존은 「자기」라는 말을 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담마파다』는 이렇게 노래한다.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anā hi sudantena, nāthaṃ labhati dullabhaṃ.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다.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는가. 자기를 잘 다스릴 때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는다.

『담마파다』 제160송, Dhp 160

그리고 「대반열반경」(DN 16)에서 석존은 마지막 여행 중에 병을 앓고 일어나 아난다에게 이렇게 이른다.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한역은 이것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으로 옮겼다.

무아를 설한 같은 석존이 「자기를 의지처로 삼으라」고 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무아가 부정하는 것은 다섯 무더기 뒤에 숨은 변하지 않는 주인이지,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핵심 개념 「업」 1부에서 보았듯이 석존은 「의도가 곧 업」이라고 했다. 의도하는 주체로서의 사람은 무아의 가르침 안에서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을 진다. 정해진 실체로서의 「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의도와 행위로 자기를 만들어 간다. 「자기를 잘 다스릴 때」라는 말에서, 자기는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다스려 가는 과정이다.

「대반열반경」의 이 대목은 「자기」와 「법」을 나란히 놓는다. 자기를 섬으로 삼는 것과 법을 섬으로 삼는 것은 같은 일의 두 면이다. 다섯 무더기를 법(dhamma)대로 관찰하는 사람이 자기의 의지처가 된다. 6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나」를 「법계의 중생」으로 열어 보이신다.

부정하는 것다섯 무더기 뒤에 숨은 변하지 않는 주인「이것은 나의 자아다」라는 붙잡음(「무아상경」)
부정하지 않는 것의도하고 행위하고 책임지는 사람「짐을 지는 자는 사람이다」(SN 22.22)
권하는 것「attā hi attano nātho」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다(Dhp 160)「attadīpā … dhammadīpā」자기를 섬으로, 법을 섬으로(DN 16)
도표 6 · 무아와 자기
2부 아비달마의 무아「나는 없고 법은 있다」

세 갈래의 분류 — 오온 · 십이처 · 십팔계

석존 입멸 뒤 부파의 논사들은 「나」를 찾아 해부하던 석존의 방법을 체계로 만들었다. 사람과 세계를 이루는 요소를 빠짐없이 헤아리는 분류가 셋 세워졌다.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다. 이 셋을 삼과(三科)라 한다.

오온은 앞에서 본 색·수·상·행·식이다. 십이처는 여섯 감각 기관(안·이·비·설·신·의의 육근)과 그 여섯 대상(색·성·향·미·촉·법의 육경)이다. 처(處, āyatana)는 「들어오는 곳」, 마음이 일어나는 문이라는 뜻이다. 십팔계는 십이처에 여섯 의식(안식에서 의식까지의 육식)을 더한 것이다. 계(界, dhātu)는 「종류」, 「요소」라는 뜻이다. 눈과 빛깔과 눈의 의식이 만나는 데서 본다는 경험이 일어나고, 귀와 소리와 귀의 의식이 만나는 데서 듣는다는 경험이 일어난다. 경험은 열여덟 가지 요소의 만남으로 남김없이 설명되고, 그 어디에도 「보는 자」나 「듣는 자」라는 요소는 따로 없다.

왜 같은 것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가. 『아비달마구사론』은 「어리석음과 근기와 좋아함이 각각 셋이므로 온·처·계의 셋을 설했다(愚根樂三故 說蘊處界三)」고 답한다. 마음의 작용을 「나」라고 잘못 아는 이에게는 마음을 넷(수·상·행·식)으로 잘게 나눈 오온을, 몸과 물질을 「나」라고 잘못 아는 이에게는 물질을 열로 나눈 십이처를, 둘 다에 어두운 이에게는 십팔계를 설했다는 것이다. 근기가 예리한 이, 중간인 이, 둔한 이, 그리고 간략한 것 · 중간 것 · 자세한 것을 좋아하는 이에 맞추었다는 풀이도 함께 있다. 세 분류는 세계를 정리하는 도표이기 이전에, 「나」라고 붙잡는 곳을 찾아 풀어 주는 처방이었다.

  • 오온(五蘊)색 · 수 · 상 · 행 · 식마음을 넷으로 나눔→ 마음의 작용(심소)을 「나」로 아는 이에게
  • 십이처(十二處)안 · 이 · 비 · 설 · 신 · 의(육근)+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육경)물질을 열로 나눔→ 몸을 「나」로 아는 이에게
  • 십팔계(十八界)육근+ 육경+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육식)둘 다 나눔→ 둘 다에 어두운 이에게
「愚根樂三故 說蘊處界三」어리석음과 근기와 좋아함이 각각 셋이므로 온 · 처 · 계의 셋을 설했다(『구사론』 분별계품)
도표 7 · 삼과 — 오온 · 십이처 · 십팔계

나는 없고 법은 있다 — 아공법유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는 이 분석을 끝까지 밀고 갔다. 세계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요소, 곧 법(dharma)들로 이루어져 있다. 후대의 구사학은 『구사론』의 체계를 다섯 부류 일흔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물질(색법) 열하나, 마음의 왕(심왕) 하나, 마음의 작용(심소법) 마흔여섯, 물질도 마음도 아닌 것(심불상응행법) 열넷, 그리고 지어지지 않은 것(무위법) 셋이다. 이것을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라 한다.

이 일흔다섯 가지 법은 각기 고유한 성질(자성, svabhāva)을 지니고 실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목록 어디에도 없다. 나는 법들이 모인 것에 붙인 이름, 곧 가설(假設, prajñapti)이다. 이렇게 「나는 공하지만 법은 실재한다」는 입장을 뒷날 대승은 아공법유(我空法有)라 불렀다. 석존의 「이것은 내가 아니다」가 「나는 없고, 있는 것은 법이다」라는 존재론으로 바뀐 것이다.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구별에 대해 부파마다 견해가 달랐다. 설일체유부는 마음의 왕과 그 작용이 같은 찰나에 함께 일어난다고 보았고, 『성실론』의 논사들은 마음이 차례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4부에서 보듯이 천태는 『마하지관』에서 두 견해를 「유문(有門)」과 「공문(空門)」의 설명으로 나란히 소개하고, 5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일념삼천이사」에서 그 대목을 인용하신다.

나가세나의 수레

이 「이름일 뿐인 나」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 준 것이 글머리에서 본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a)』이다. 한역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으로도 전하는 이 대론에서, 왕이 「머리털이 나가세나인가」, 「몸이 나가세나인가」, 「느낌·지각·의지 작용·의식이 나가세나인가」, 「이것들을 합친 것이 나가세나인가」, 「이것들 말고 따로 나가세나가 있는가」라고 차례로 묻자, 나가세나는 모두 「아닙니다」라고 답한다. 왕은 「그렇다면 나가세나는 없다. 그대는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세운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왕에게 무엇을 타고 왔는지 묻는다. 수레를 타고 왔다는 왕에게 같은 물음을 돌려준다. 굴대가 수레인가. 바퀴가 수레인가. 수레틀이 수레인가. 멍에가 수레인가. 이것들을 합친 것이 수레인가. 이것들 말고 따로 수레가 있는가. 왕도 모두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왕은 무엇을 타고 오셨는가. 왕은 깨닫는다. 「굴대와 바퀴와 수레틀과 멍에에 의지하여 '수레'라는 호칭, 통칭, 가설, 이름이 있을 뿐이다.」 나가세나는 답한다. 「바로 그렇습니다. 저도 머리털과 몸과 느낌과 지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에 의지하여 '나가세나'라는 호칭, 통칭, 가설, 이름이 있을 뿐, 궁극의 뜻에서는 여기에 사람이 붙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1부에서 본 바지라 비구니의 게송을 인용한다.

왕의 물음
머리털이 나가세나인가?
몸이?
느낌 · 지각 · 의지 작용 · 의식이?
이것들을 합친 것이?
이것들 말고 따로?
→ 모두 「아닙니다」
나가세나의 물음
굴대가 수레인가?
바퀴가?
수레틀이?
멍에가?
합친 것이?
따로?
→ 모두 「아니다」
결론
부분들에 의지하여 「수레」라는 이름이 있다=오온에 의지하여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있다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통칭이 있다」(SN 5.10, 『밀린다왕문경』 인용)

도표 8 · 나가세나의 수레
저녁, 옛 궁전 마당의 돌바닥 위에 수레의 두 바퀴와 굴대, 수레틀, 끌채가 따로따로 나란히 놓이고, 낮은 담 너머로 꽃나무와 먼 산이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2 · 흩어 놓은 수레

이 비유는 무아를 이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비유에도 한계가 있다. 수레를 쪼개어 「수레는 없다」에 이르는 방법은, 수레를 이루는 부품들, 곧 법들의 실재는 남겨 둔다. 4부에서 보듯이 천태는 이것을 「석공(析空)」, 곧 쪼개어 공에 이르는 낮은 단계의 공관으로 평가했다.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나」 — 독자부

부파 가운데 무아의 해석에 정면으로 이의를 단 무리가 있었다.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와 그 계통의 정량부(正量部, Sammitīya)다. 이들은 사람, 곧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사람은 오온과 같은 것도 아니고 오온을 떠난 것도 아니다(非即蘊 非離蘊). 오온과 같다면 오온이 사라질 때 사람도 끊어져 단견이 되고, 오온과 다르다면 영원한 자아가 되어 상견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온에 의지해 있되 오온과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不可說)」이다. 후대의 전승은 독자부가 법을 과거·현재·미래·무위의 넷에 「말할 수 없는 것」을 더한 다섯 곳간(五法藏)으로 나누었다고 전한다.

독자부가 이런 「사람」을 세운 데는 까닭이 있었다. 1부에서 본 「짐 경」은 짐(오온)과 짐꾼(사람)을 나누었다. 석존은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했고, 과거세의 자신을 「그때의 그 왕이 바로 나였다」고 했다. 무엇보다, 무아라면 윤회하는 것은 무엇이고,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은 누구이며,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누구인가. 독자부는 이런 물음에 답하려 한 것이다. 이들이 든 비유는 불과 땔감이었다. 불은 땔감에 의지해 타지만 땔감과 같지도 않고 땔감을 떠나 있지도 않다. 사람과 오온의 관계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구사론』 파아품 — 천친의 논파

천친(세친, 바수반두)은 『아비달마구사론』의 마지막에 아홉째 품 「파집아품(破執我品)」, 곧 파아품을 붙였다. 앞의 여덟 품이 법의 분석이라면, 이 품은 「나」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는 결론이다. 천친은 이 품을, 이 가르침을 떠나서는 해탈이 없으니 그것은 「나」에 대한 헛된 집착에 미혹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독자부의 보특가라와 외도(주로 승론)의 아트만을 차례로 논파한다.

천친의 논지를 간추리면 이렇다. 첫째, 보특가라가 실재한다면 그것은 오온처럼 원인에서 생겨난 것(유위)이거나 생겨나지 않은 것(무위)이어야 한다. 유위라면 무상하여 오온과 다를 바 없고, 무위라면 아무 작용도 할 수 없어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대답을 피하는 것이다. 둘째, 불과 땔감의 비유는 오히려 사람이 가설임을 보여 준다. 불은 땔감이 타는 찰나찰나의 흐름에 붙인 이름이지, 땔감 말고 따로 있는 실체가 아니다. 셋째, 기억과 업의 과보에는 실체로서의 「나」가 필요 없다. 마음의 흐름, 곧 상속(相續, santāna)에서 앞의 마음이 뒤의 마음을 낳고, 어떤 경험이 남긴 특별한 상태에서 기억이 일어난다. 「데바닷타가 간다」고 할 때, 실제로 있는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어지며 일어나는 찰나의 오온일 뿐이다. 마치 불이 들판을 타고 번져 가는 것과 같다. 넷째, 석존이 「생명과 몸은 같은가 다른가」에 답하지 않은 것은 묻는 이가 실체로서의 생명을 전제했기 때문이며, 보특가라가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가 아니다.

독자부의 주장보특가라(pudgala)는 오온과 같지도 않고 오온을 떠나지도 않는다(非即蘊 非離蘊)「말할 수 없는 것(不可說)」근거「짐은 오온, 짐꾼은 사람」 (SN 22.22)불과 땔감의 비유윤회 · 업 · 기억의 주체
천친의 논파(『구사론』 파집아품)실재라면 유위이거나 무위 — 유위면 오온과 같고, 무위면 작용이 없다불은 타는 흐름에 붙인 이름기억과 과보는 마음의 상속(santāna)으로 설명된다무기는 묻는 이가 실체를 전제했기 때문

독자부의 가운데 길과 천친의 가운데 길 — 무엇이 상견과 단견을 함께 넘는가

도표 9 · 독자부와 천친

이 논쟁은 무아를 둘러싼 불교사의 가장 오랜 긴장을 보여 준다. 독자부는 단견을 피하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을 세웠고, 천친은 그것이 상견으로 돌아간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천친의 「상속」도 하나의 물음을 남긴다. 찰나마다 생멸하는 오온의 흐름을 무엇이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가. 이 물음은 뒤에 유식학의 아뢰야식으로 이어진다(핵심 개념 「업」 2부 「업은 어떻게 남는가」, 핵심 개념 「구식」).

중국과 일본의 교학은 독자부를 「부처의 가르침에 붙은 외도(附佛法外道)」라 불렀다. 대성인도 「개목초」에서 불법을 바르게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말씀하시며 이들을 드신다.

犢子・方広が聡敏なりし猶を大小乗経にあやまてり、無垢・摩沓が利根なりし権実・二教を弁えず

독자와 방광이 총명하였어도 오히려 대승경과 소승경을 그르쳤고, 무구와 마답이 근기가 예리하였어도 권교와 실교의 두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하였느니라.

「개목초」, 199쪽

창가교학연구실의 「개목초」 강의의 어구 풀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독자와 방광은 모두 불교에 붙은 외도다. 독자는 소승 부파인 독자부의 부주(部主)로, 외도에서 나와 불교에 귀의했으나 「말할 수 없는 나(不可說我)」를 세워 무아의 이치에 미혹했다. 방광은 「일체법은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공하여 있는 바가 없다」고 하여 외도에 떨어졌다. 묘락대사는 『지관보행전홍결』에서 「독자는 소승에 의해, 방광은 대승에 의해 아견(我見)을 세웠다」고 했다.

소승을 잘못 붙잡으면 독자부의 「나」가 되고, 대승의 공을 잘못 붙잡으면 방광의 허무가 된다. 정법의 시대, 인도 땅에서도 이러했다는 것이 대성인의 뜻이다.

「나」라는 견해 — 견혹의 첫째

아비달마는 「나」에 대한 집착을 번뇌의 체계 안에 자리 매겼다. 그것이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곧 「지금 있는 이 몸(다섯 무더기)을 나라고 보는 견해」다. 『맛지마 니까야』 「교리문답 소경」(MN 44)에서 담마딘나 비구니는 이것을 스무 가지로 헤아린다. 물질을 나라고 보는 것, 내가 물질을 가졌다고 보는 것, 내 안에 물질이 있다고 보는 것, 물질 안에 내가 있다고 보는 것 — 이 넷을 다섯 무더기에 각각 적용하면 스무 가지가 된다. 무아의 관찰은 이 스무 갈래의 길목을 하나하나 막는 일이다.

  • 색①색을 나라고 본다②내가 색을 가졌다고 본다③내 안에 색이 있다고 본다④색 안에 내가 있다고 본다
  • 수①수를 나라고 본다②내가 수를 가졌다고 본다③내 안에 수가 있다고 본다④수 안에 내가 있다고 본다
  • 상①상을 나라고 본다②내가 상을 가졌다고 본다③내 안에 상이 있다고 본다④상 안에 내가 있다고 본다
  • 행①행을 나라고 본다②내가 행을 가졌다고 본다③내 안에 행이 있다고 본다④행 안에 내가 있다고 본다
  • 식①식을 나라고 본다②내가 식을 가졌다고 본다③내 안에 식이 있다고 본다④식 안에 내가 있다고 본다

4 × 5 = 20

무아의 관찰은 이 스무 길목을 하나하나 막는다(「교리문답 소경」, MN 44)

도표 10 · 유신견의 스무 갈래

이 유신견은 다섯 가지 그릇된 견해의 첫째로 꼽혔다. 대성인은 「일대성교대의」에서 삼장교(소승교)의 수행을 정리하시며, 견도(見道)에서 끊는 견혹의 첫머리에 이것을 두신다.

見惑とは一には身見亦我見と云う二には辺見亦断見常見と云う三には邪見亦撥無見と云う四には見取見亦劣謂勝見と云う五には戒禁取見亦非因計因非道計道見と云うなり見惑は八十八有れども此の五が根本にて有るなり

견혹이란, 첫째는 신견(身見)이니 아견(我見)이라고도 하고, 둘째는 변견(邊見)이니 단견·상견이라고도 하며, 셋째는 사견(邪見)이니 발무견(撥無見)이라고도 하고, 넷째는 견취견(見取見)이니 열등한 것을 뛰어나다고 여기는 견해라고도 하며, 다섯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니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여기고 길이 아닌 것을 길로 여기는 견해라고도 하느니라. 견혹은 여든여덟 가지가 있으나 이 다섯이 근본이니라.

「일대성교대의」, 393쪽

강의는 신견, 곧 아견을 「내 몸이 오음이 거짓으로 화합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참으로 '나'라는 본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번뇌, 또 자기 주변의 것이 모두 자기 소유라고 집착하는 미망」이라고 풀이한다. 「나」와 「내 것(我所)」 — 1부 「무아상경」의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가 그대로 견혹의 첫째가 되었다. 그리고 둘째 변견이 바로 단견과 상견이다. 아견을 끊으려다 단견에 떨어지고, 단견을 피하려다 상견에 떨어지는 길이 견혹의 목록 안에 이미 나란히 놓여 있다. 5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십법계사」에서 이승의 무아가 바로 이 단견·상견의 함정에 빠졌다고 하신다.

견혹은 이치를 바로 알면 끊을 수 있는 「견해의 번뇌」이고, 사혹은 탐·진·치·만처럼 사물에 부딪쳐 일어나 오래 닦아야 끊어지는 「정서의 번뇌」다. 1부의 케마카가 유신견을 이미 끊고도 「나는 있다」는 자만(慢)이 남았다고 한 것은, 견혹과 사혹의 이 구별에 해당한다.

아공에서 멈춘 길

아비달마의 수행자는 고·공·무상·무아를 관하여 견혹과 사혹을 끊고 아라한이 된다. 「나」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 다시 태어날 원인도 없다. 핵심 개념 「무상」 2부에서 보았듯이, 그 끝은 몸도 마음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회신멸지(灰身滅智)다. 「나는 없고 법은 있다」고 본 아공의 지혜는 「나」를 지우는 데까지는 갔지만, 그 지혜를 지닌 생명 자체도 함께 지워 버렸다. 대승은 바로 이 지점을 겨누어, 「나」만이 아니라 「법」도 공하다고, 그리고 공한 그 자리에서 다시 중생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

3부 대승의 무아법도 공하고, 무아도 아니다

오온은 모두 공하다 — 인무아와 법무아

반야경 계통의 대승 경전은 아비달마가 남겨 둔 「법」을 겨누었다. 『반야심경』은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넜다.

『반야바라밀다심경』, 현장 역, T8 no.251

「오온이 모두 공하다(五蘊皆空)」. 「나」가 오온의 가설이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나」를 해체하고 남은 오온, 곧 색·수·상·행·식이라는 법들 자체도 고유한 성질(자성)을 지니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은 이어서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라고 하고,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 안계도 없고 의식계까지도 없다」고 하여, 2부에서 본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삼과를 모두 공으로 돌린다.

이렇게 해서 무아는 두 겹이 되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인무아(人無我, pudgala-nairātmya)와, 「나」를 이루는 법들에도 실체가 없다는 법무아(法無我, dharma-nairātmya)다. 대승은 아비달마의 아공법유를 넘어 아법구공(我法俱空), 곧 나도 법도 함께 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승은 인무아만 알고 보살은 두 무아를 함께 안다고 하여, 이승과 보살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았다.

인무아(人無我)「나」라는 실체가 없다 · 오온에 붙인 이름일 뿐아비달마 · 이승: 아공법유(我空法有) — 나는 공하나 법은 있다
법무아(法無我)「나」를 이루는 법들에도 자성이 없다반야 · 대승 보살: 아법구공(我法俱空) — 나도 법도 함께 공하다
「照見五蘊皆空」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았다(『반야심경』)
도표 11 · 두 가지 무아

『금강반야경』은 이 두 겹의 무아를 보살의 마음가짐으로 말한다. 「만약 보살에게 나라는 생각(我相), 사람이라는 생각(人相),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 목숨이라는 생각(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 역, T8 no.235). 그런데 같은 경은 보살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되, 실은 열반을 얻은 중생이 하나도 없다」고 본다고 한다. 「나」도 「중생」도 붙잡지 않기에, 보살은 끝없이 중생을 구할 수 있다. 무아가 회신멸지의 길이 아니라 보살행의 근거가 되는 자리가 여기서 열린다.

용수 —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

용수(나가르주나)는 『중론』의 열여덟째 품 「관법품(觀法品)」에서 「나」를 정면으로 다룬다. 첫 게송은 2부의 독자부 논쟁을 단 네 구로 정리한다.

若我是五陰 我卽爲生滅 若我異五陰 則非五陰相

만약 내가 곧 오음이라면 나는 생멸하는 것이 되고, 만약 내가 오음과 다르다면 (나는) 오음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용수 『중론』 관법품 제18, 구마라집 역, T30 no.1564

내가 오음과 같다면, 오음은 찰나마다 생멸하니 나도 생멸하여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내가 오음과 다르다면, 나는 몸도 느낌도 지각도 의지도 의식도 아닌 무엇이 되어 경험될 수 없다. 둘 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결론은 무엇인가. 용수는 「내가 없다면 어찌 내 것이 있겠는가(若無有我者 何得有我所)」라고 이어 가며 나와 내 것의 집착을 함께 거두어들이고,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諸佛或說我 或說於無我 諸法實相中 無我無非我

모든 부처는 때로는 「나」를 설하고 때로는 「무아」를 설했다. 그러나 모든 법의 실상 가운데에는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

같은 품

이 게송은 무아 사상의 전환점이다. 주석가들의 풀이로는, 부처가 「나」를 설한 것도 「무아」를 설한 것도 듣는 이에게 맞춘 방편이다. 「나」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무아를, 무아를 허무로 받아들여 업도 과보도 없다고 하는 이에게는 「나」를 설했다. 그러나 법의 실상에서는 「나」도 「무아」도 붙잡을 것이 아니다. 무아 역시 하나의 견해로 붙잡으면 그것도 집착이다. 1부의 바차곳타 앞에서 석존이 「있다」로도 「없다」로도 답하지 않은 그 침묵이, 여기서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라는 논리가 되었다.

용수는 또 「관여래품(觀如來品)」에서 여래와 오음의 관계를 다섯 방향으로 살핀다. 여래는 오음이 아니고, 오음을 떠나 있지도 않으며, 여래 안에 오음이 있지도 않고, 오음 안에 여래가 있지도 않으며, 여래가 오음을 가진 것도 아니다(非陰不離陰 此彼不相在 如來不有陰 何處有如來). 2부에서 본 유신견의 네 방식에 「떠나 있음」을 더한 이 다섯 겹의 살핌을 「다섯 가지로 찾음(五種求)」이라 한다. 「나」를 찾는 이 살핌은 여래에게까지 적용되어, 여래조차 오음과의 어떤 관계로도 붙잡히지 않는다. 용수는 「관연가연품(觀燃可燃品)」에서도 불과 땔감의 관계를 같은 방식으로 살핀 뒤, 그 결론을 「나」와 오음(취착)의 관계에까지 적용했다. 뒤의 주석가들은 이 대목을, 불과 땔감의 비유로 「말할 수 없는 나」를 세운 독자부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다.

「若我是五陰 我卽爲生滅 若我異五陰 則非五陰相」내가 곧 오음이라면 생멸하고, 오음과 다르다면 오음의 모습이 아니다(『중론』 관법품)
① 나는 곧 오음인가→ 그렇다면 나는 생멸한다
② 나는 오음을 떠나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경험되지 않는다
③ 내 안에 오음이 있는가
④ 오음 안에 내가 있는가
⑤ 내가 오음을 가졌는가

→ 어느 것으로도 붙잡히지 않는다(『중론』 관여래품)

「諸法實相中 無我無非我」모든 법의 실상 가운데에는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같은 품)
도표 12 · 오음과 나의 다섯 관계 — 다섯 가지로 찾음

무아인데 업은 누가 받는가 — 『유마경』

무아에 대한 가장 오랜 물음 — 「나」가 없다면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이는 누구인가 — 에 대승은 어떻게 답했는가. 『유마경』 불국품에서 장자의 아들 보적은 부처를 찬탄하는 게송 가운데 이렇게 노래한다.

以因緣故諸法生 無我無造無受者 善惡之業亦不亡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생겨나니, 나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으나, 선악의 업은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유마힐소설경』 불국품 제1, 구마라집 역, T14 no.475

나도 없고, 업을 짓는 이도 없고, 과보를 받는 이도 없다. 그런데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짓는 주체가 없는데 업이 남는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게송의 첫 구가 답을 준다. 모든 법은 「인연 때문에」 생겨난다. 업과 과보를 잇는 것은 실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인연의 이어짐이다. 실체가 없기에 오히려 인과는 어김없이 이어진다. 만약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면, 그 나는 업을 지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과보를 받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성인은 「일대성교대의」에서 법화경 이전의 원교(이전의 원)를 설명하시며 이 경문을 증문의 하나로 드신다.

浄名経に云く「無我無造にして受者無けれども善悪の業敗亡せず」文

정명경(유마경)에 이르기를 「나도 없고 짓는 이도 없어 받는 이가 없으나, 선악의 업은 무너져 없어지지 않는다」 하였느니라.

「일대성교대의」, 396쪽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이 문을 「모든 법에는 '나'가 없고 '짓는' 것도 없고 과보를 받는 '받는 이'도 없다. 그러나 선악의 업도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풀이하고, 「무아무조」는 원교의 평등의 뜻을 나타낸다고 한다. 핵심 개념 「업」에서 본 업의 상속은 이 「무아이되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위에 서 있다. 업과 무아에 관해서는 핵심 개념 「업」 2부와 3부에서 다루었다.

유식 — 아뢰야식을 「나」로 붙잡는 마음

2부의 끝에서 남은 물음 — 찰나마다 생멸하는 마음의 흐름을 무엇이 하나로 묶는가 — 에 답한 것이 유식학이다. 유식은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의식 밑에 두 겹의 마음을 더 두었다. 일곱째 말나식(末那識)과 여덟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아뢰야식은 모든 업의 종자를 간직하고 끊임없이 흐르며 생을 이어 간다. 그리고 말나식은 이 아뢰야식을 바라보며 그것을 끊임없이 「나」라고 붙잡는다.

『해심밀경』은 이 깊은 마음을 처음 밝히면서 한 가지 걱정을 덧붙인다.

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

아다나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여 모든 종자가 폭류처럼 흐른다.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이것을 펼쳐 설하지 않으니, 그들이 분별하여 이것을 「나」로 집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해심밀경』 심의식상품, 현장 역, T16 no.676

생을 이어 가는 깊은 마음을 밝히면 사람들은 그것을 곧 「영원한 나」로 붙잡으리라는 것이다. 2부에서 독자부가 윤회의 주체로 「사람」을 세웠던 그 유혹을, 경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유혹은 우리 마음속에 늘 작동하고 있다고 유식은 말한다. 천친의 『유식삼십송』은 말나식을 이렇게 노래한다.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四煩惱常俱 謂我癡我見 并我慢我愛

다음 둘째 능변식은 이 식의 이름이 말나이니, 그것(아뢰야식)에 의지해 구르고 그것을 대상으로 삼으며, 헤아림을 성품과 모습으로 삼는다. 네 가지 번뇌와 늘 함께하니, 아치(我癡) · 아견(我見)과 아만(我慢) · 아애(我愛)다.

천친 『유식삼십송』, 현장 역, T31 no.1586

「나」에 대한 어리석음, 「나」가 있다는 견해, 「나」를 높이는 교만, 「나」를 아끼는 사랑. 이 네 가지가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1부의 케마카가 견해를 끊고도 남았다고 한 「나는 있다」는 냄새를, 유식은 마음의 한 층으로 자리 매긴 것이다. 무아의 수행은 이 말나식의 아집이 뒤집혀 「나와 남이 평등하다」는 지혜(평등성지)로 바뀌는 데서 완성된다. 유식의 팔식과 천태 · 대성인의 구식에 관해서는 핵심 개념 「구식」에서 다시 다룬다.

말나식(末那識)「依彼轉緣彼」그것에 의지해 구르고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늘 함께하는 네 번뇌
  • 아치(我癡)나에 대한 어리석음
  • 아견(我見)내가 있다는 견해
  • 아만(我慢)나를 높이는 교만
  • 아애(我愛)나를 아끼는 사랑
(『유식삼십송』)
「나」로 붙잡음
아뢰야식(阿賴耶識)모든 종자를 간직하고 폭류처럼 흐른다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범부에게는 펼쳐 설하지 않으니, 그것을 「나」로 집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해심밀경』)

전환아집이 「평등성지」로

도표 13 · 말나식의 네 번뇌

『열반경』의 「아」 — 여래장과 불성

이렇게 무아를 철저히 밀고 간 대승이, 마침내 「나」를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대반열반경』이다. 핵심 개념 「무상」 3부에서 보았듯이, 이 경은 이승이 열반과 부처까지 「무아」라고 보는 것을 전도라 하고, 열반의 네 덕으로 상·락·아·정을 세웠다. 그 「아」란 무엇인가. 경은 이렇게 말한다.

我者卽是如來藏義 一切衆生悉有佛性 卽是我義

「나」란 곧 여래장의 뜻이다.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으니, 이것이 곧 「나」의 뜻이다.

『대반열반경』 북본 여래성품, 담무참 역, T12 no.374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이란 「여래를 품은 것」, 곧 중생 안에 감추어진 부처의 성품이다. 『열반경』은 이 불성을 「나」라고 불렀다. 그러면 무아를 설한 앞의 가르침은 거짓이었는가. 경은 「젖과 약」의 비유(애탄품)로 답한다. 옛날 어떤 왕의 나라에 서툰 의사가 있어 어떤 병에나 우유로 지은 약만 썼다. 새로 온 명의는 왕에게 우유 약을 금하게 하고 다른 약으로 병을 고쳤다. 뒤에 왕이 열병에 걸리자 명의는 이번에는 우유 약을 쓰라고 했다. 왕이 놀라 묻자 명의는 답한다. 예전의 의사는 병을 가리지 않고 우유를 썼기에 금한 것이요, 지금의 병에는 우유가 맞는 약이다. 외도가 말한 「나」는 벌레가 나무를 갉아 우연히 글자 모양이 된 것과 같아서 참된 「나」를 알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는 먼저 「무아」를 설해 그것을 깨뜨렸고, 이제 때가 되어 참된 「나」를 설한다는 것이다.

이 「나」는 외도의 아트만과 어떻게 다른가. 『열반경』은 부처의 「나」를 여덟 가지 자재(自在)로 설명한다. 한 몸을 여럿으로 나타내고, 한 티끌 같은 몸으로 삼천대천세계를 채우며, 마음대로 오가되 걸림이 없다는 것들이다. 이것은 다섯 무더기 뒤에 숨어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무아를 철저히 깨달아 무엇에도 걸리지 않게 된 자재로움이다. 1부의 「무아상경」에서 다섯 무더기는 「내 뜻대로 되지 않기에」 내가 아니었다. 『열반경』의 「나」는 거꾸로, 그 무엇에도 붙잡히지 않기에 자재한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의 「나」는 언제나 외도의 아트만으로 오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능가경』에서 대혜보살은 바로 이것을 묻는다.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여래장은 외도가 말하는 「나」와 무엇이 다릅니까. 부처는 답한다. 여래장은 외도의 「나」와 같지 않다. 무아를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이끌기 위해 여래장이라는 문을 열어 보였을 뿐, 여래장은 공 · 실제 · 열반 · 불생 · 무상(無相) · 무원(無願) 같은 뜻을 가리켜 설한 것이다(『능가아발다라보경』 권2). 그래서 이 경은 「무아의 여래장」이라는 말을 쓴다.

외도의 아(我)오온 뒤에 숨은 변하지 않는 주인「벌레가 나무를 갉아 우연히 이룬 글자」
부처의 무아(無我)「이것은 내가 아니다」외도의 아를 깨뜨리는 약
『열반경』의 대아(大我)「我者卽是如來藏義 一切衆生悉有佛性 卽是我義」나란 곧 여래장의 뜻이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니 이것이 곧 나의 뜻이다여덟 가지 자재
비유젖과 약 — 같은 우유가 때에 따라 금지되고 처방된다 (『열반경』)

『능가경』 — 여래장은 외도의 아와 같지 않다 · 「무아의 여래장」

도표 14 · 세 가지 「나」

1부에서 무아를 설한 불교는 3부의 끝에서 「대아」를 말하게 되었다. 여기서 핵심 개념 「무상」에서 본 것과 같은 구조가 되풀이된다. 무상을 설한 불교가 『열반경』에 이르러 「여래는 상주한다」고 했듯이, 무아를 설한 불교가 「나란 여래장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물음이 남는다. 이 「대아」는 무아를 철저히 지난 뒤에 열리는 저편의 「나」인가, 아니면 지금 여기의 이 오음, 이 몸과 마음 그대로의 「나」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천태의 오음세간이요, 6부에서 볼 대성인의 「나란 법계의 중생이다」이다.

4부 천태의 오음「오음을 관하라」

「음」이라는 이름

천태대사 지의는 구마라집의 옛 번역을 따라 오온을 「오음(五陰)」이라 불렀다. 「음」이라는 글자에 천태는 두 가지 뜻을 읽었다. 『마하지관』은 이렇게 말한다.

陰者陰蓋善法 此就因得名 又陰是積聚 生死重沓 此就果得名

음(陰)이란 선한 법을 덮어 가리는 것이니 이는 원인에 나아가 이름을 얻은 것이다. 또 음은 쌓여 모인 것이니 생사가 거듭 포개어지는 것이며, 이는 결과에 나아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천태대사 지의 『마하지관』 권5상, T46 no.1911

「덮어 가림(陰蓋)」은 원인의 면이다. 오음에 대한 집착이 본래의 선한 성품을 가린다. 「쌓여 모임(積聚)」은 결과의 면이다. 가려진 채 지은 업으로 생사가 겹겹이 쌓인다. 천태에게 오음은 단지 사람을 이루는 요소의 목록이 아니라, 범부가 생사를 거듭하는 생명의 현실 그 자체였다.

삼세간의 첫째 — 오음세간

천태는 『대지도론』에 보이는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을 일념삼천의 구성 요소로 삼았다. 오음세간(五陰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이다. 세간의 「세(世)」는 옮겨 흐름을, 「간(間)」은 사이의 차별을 뜻한다. 오음세간은 생명을 이루는 오음에 십계의 차별이 있음을, 중생세간은 그 오음이 모여 이루어진 중생에 십계의 차별이 있음을, 국토세간은 중생이 사는 곳에 십계의 차별이 있음을 말한다.

오음과 중생의 관계를 『마하지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중생은 이름일 뿐(假名) 따로 가를 수 있는 실체가 없고, 실재하는 법(오음)을 끌어모아 거짓으로 세운 것이다. 그리고 「오음을 끌어모아 통틀어 중생이라 부른다(攬五陰通稱衆生)」고 한 뒤 이렇게 잇는다.

攬三途陰罪苦衆生 攬人天陰受樂衆生 攬無漏陰眞聖衆生 攬慈悲陰大士衆生 攬常住陰尊極衆生

삼악도의 오음을 끌어모으면 죄와 괴로움의 중생이요, 인간과 천상의 오음을 끌어모으면 즐거움을 받는 중생이요, 번뇌가 없는 오음을 끌어모으면 참된 성인인 중생이요, 자비의 오음을 끌어모으면 대사(보살)인 중생이요, 상주하는 오음을 끌어모으면 지극히 존귀한 중생(부처)이다.

『마하지관』 권5상

여기서 천태의 오음관이 아비달마와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난다. 2부에서 아비달마의 오온은 「나」를 해체하기 위한 분석의 재료였다. 천태에게 오음은 십계의 어느 생명으로도 모일 수 있는 바탕이다. 삼악도의 오음이 모이면 지옥·아귀·축생의 중생이 되고, 자비의 오음이 모이면 보살이 되며, 「상주하는 오음」이 모이면 부처가 된다. 부처에게도 오음이 있다. 그것도 「상주하는 오음」이다. 3부에서 본 『열반경』의 「대아」를 천태는 오음을 떠난 저편이 아니라 「상주하는 오음」의 모임으로 읽은 것이다.

「攬五陰通稱衆生」오음을 끌어모아 통틀어 중생이라 부른다
  1. 상주하는 오음지극히 존귀한 이(부처)
  2. 자비의 오음대사(보살)
  3. 번뇌 없는 오음참된 성인(이승)
  4. 인간 · 천상의 오음즐거움을 받는 중생
  5. 삼악도의 오음죄와 괴로움의 중생

오음세간 · 중생세간 · 국토세간 — 삼세간(『마하지관』 권5상)

도표 15 · 십계의 오음

「장을 버리고 척으로」 — 음입계경

『마하지관』은 수행자가 관할 대상(境)을 열 가지로 든다. 그 첫째가 음입계경(陰入界境), 곧 오음·십이입·십팔계다. 2부에서 본 삼과가 지관의 첫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천태는 이 셋을 다 관하라고 하지 않는다.

今當去丈就尺 去尺就寸 置色等四陰 但觀識陰 識陰者心是也

이제 마땅히 장(丈)을 버리고 척(尺)으로 나아가고, 척을 버리고 촌(寸)으로 나아가야 한다. 색 등 네 음은 두고 다만 식음을 관하라. 식음이란 마음이 이것이다.

『마하지관』 권5상

열여덟 가지 계(界)는 너무 넓다(장). 열두 가지 입(入)으로 좁히고(척), 다시 다섯 가지 음으로 좁힌다(촌). 그리고 오음 가운데서도 색·수·상·행을 두고 오직 식음, 곧 마음을 관하라. 천태는 이것을 뜸을 뜰 때 혈 자리를 찾는 것에 견주었다. 병을 다스리려면 뿌리를 쳐야 하고, 오음·십이입·십팔계는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식음을 관하라」에서, 열 가지 관법의 첫째인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이 펼쳐진다. 『마하지관』의 가장 유명한 대목이 여기에 있다.

夫一心具十法界 一法界又具十法界 百法界 一界具三十種世間 百法界卽具三千種世間 此三千在一念心

무릇 한마음에 십법계가 갖추어져 있고, 한 법계에 또 십법계가 갖추어져 있으니 백법계다. 한 법계에 서른 가지 세간이 갖추어져 있으니, 백법계에는 곧 삼천 가지 세간이 갖추어진다. 이 삼천이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

『마하지관』 권5상

일념삼천은 오음을 관하는 자리에서 설해졌다. 무아를 관하기 위해 해부되던 오음, 그 오음 가운데 식음, 곧 지금 이 한 생각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 삼천의 세간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2부의 아비달마가 오음을 쪼개어 「나는 없다」에 이르렀다면, 천태는 오음의 한 점인 한 생각에서 「삼천이 다 있다」에 이르렀다. 일념삼천의 구성과 의미는 계보 五 「일념삼천」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열 가지 관할 대상(十境)의 첫째, 음입계경 (『마하지관』 권5상)

장(丈) — 십팔계
척(尺) — 십이입
촌(寸) — 오음
「置色等四陰 但觀識陰」색 등 네 음은 두고 다만 식음을 관하라「識陰者心是也」식음이란 마음이다
관부사의경「此三千在一念心」이 삼천이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
비유뜸을 뜰 때 혈 자리를 찾듯 뿌리를 친다
도표 16 · 장을 버리고 척으로

오음은 함께 일어나는가 차례로 일어나는가

같은 대목에서 천태는 오음이 일어나는 모습에 대한 두 견해를 소개한다.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수인(數人)」)은 오음이 동시에 일어나며 식은 마음의 왕(심왕)이고 나머지 넷은 마음의 작용(심수)이라고 한다. 이것은 「있음의 문(有門)」에서 뜻을 밝힌 것이어서, 왕과 신하가 서로 도와 함께 일어난다고 본다. 한편 『성실론』의 논사들(「논인(論人)」)은 식이 먼저 대상을 알아 가르고, 다음에 수가 받아들이고, 상이 모습을 잡고, 행이 거스르거나 따르는 마음을 일으키며, 색은 행으로 말미암아 느껴진다고 한다. 이것은 「공의 문(空門)」에서 뜻을 밝힌 것이어서 차례로 서로 낳는다고 본다.

2부에서 본 심왕·심소의 논쟁을 천태는 어느 한쪽이 틀렸다고 하지 않고 두 문(門)의 설명으로 함께 둔다. 5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일념삼천이사」에서 『마하지관』이 「바사」를 인용했다고 하시며 이 차례를 드시는데, 『마하지관』은 이것을 『성실론』 논사(논인)의 설로 소개한다. 마음이 먼저 알아 가르고, 그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느낌과 생각과 의지가 일어나며, 몸(색)마저 의지 작용으로 말미암아 감득된다는 이 차례는, 「한 생각의 마음」에서 오음 전체를 보려는 천태의 관법과 맞닿는다.

석공과 체공 — 무아를 보는 깊이

천태는 무아를 보는 방법에도 깊이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장교(소승)의 공관은 석공관(析空觀)이다. 2부의 나가세나처럼 수레를 굴대·바퀴·수레틀로 쪼개고, 사람을 오음으로 쪼개어 「나는 없다」에 이른다. 쪼개어야 비로소 공이 드러난다. 통교의 공관은 체공관(體空觀)이다. 쪼갤 필요 없이, 오음 그 자체가 환술 같고 꿈 같아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공하다고 본다. 3부의 「오온이 모두 공하다」가 이것이다.

그러나 두 공관 모두 「공」에서 멈춘다. 천태는 이것을 단공(但空), 곧 「다만 공」이라 하고, 별교와 원교의 중도와 구별했다. 공에서 멈추면 2부 끝의 이승처럼 「나」와 함께 생명도 지우거나, 2부의 방광처럼 「일체가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에 떨어진다. 원교의 눈은 공·가·중의 셋을 한 생각에서 원만히 본다. 오음은 공하여 붙잡을 실체가 없고(공), 그러면서도 인연 따라 십계의 갖가지 모습으로 뚜렷이 나타나며(가), 그 둘이 하나인 것이 오음의 실상이다(중).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라고 한 3부의 용수를, 천태는 이렇게 오음의 실상으로 읽었다.

원교 · 공 · 가 · 중오음은 공하되(공) 십계로 뚜렷이 나타나며(가) 둘이 하나(중)
여기까지 단공(但空) — 공에서 멈춘다 → 회신멸지 · 허무의 위험
통교 · 체공(體空)그 자리에서 곧바로 공예: 「오온이 모두 공하다」
장교 · 석공(析空)쪼개어 공에 이른다예: 수레를 부품으로, 사람을 오음으로 (나가세나의 수레)
「無我無非我」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 (『중론』) → 오음의 실상
도표 17 · 무아를 보는 깊이

가는 곧 중생, 실은 곧 오음

천태의 이 삼세간은 묘락대사 담연에 의해 더 분명하게 정리되었다. 대성인은 「일념삼천이사」에서 일념삼천에 관한 천태와 묘락의 글을 모아 인용하시는데, 그 가운데 묘락의 『법화현의석첨』의 한 구절이 있다.

籤の二に云く「仮は即ち衆生実は即ち五陰及び国土即ち三世間なり千の法は皆三なり故に三千有り」文

『석첨』 제2에 이르기를 「가(假)는 곧 중생이요, 실(實)은 곧 오음과 국토이니 곧 삼세간이니라. 천의 법이 모두 셋이므로 삼천이 있느니라」 하였느니라.

「일념삼천이사」, 408쪽

중생은 「가(假)」, 곧 이름으로 세운 것이고, 오음과 국토는 「실(實)」, 곧 실재하는 법이다. 2부의 아공법유를 떠올리게 하는 구분이다. 그러나 묘락이 이 구분을 둔 것은 중생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계·십여시의 천 가지 법이 각각 이 세 세간으로 나타나 삼천이 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나는 없다」의 근거였던 「가명」이 여기서는 삼천의 한 축이 된다. 중생이 가명이라는 것은 중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중생이 오음과 국토와 떨어질 수 없이 함께 있다는 뜻이다.

같은 글에서 대성인은 『지관보행전홍결』이 인용한 『화엄경』의 게송도 드신다.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 오음을 그려 낸다. 일체 세계 가운데 법으로서 지어 내지 않는 것이 없다.」 오음은 마음이 그리는 그림이다. 이 게송을 대성인이 어떻게 읽으셨는지는 5부에서 본다.

5부 니치렌 대성인의 무아「무아에 굳게 집착함이 미혹의 근본」

오음이 거짓 화합한 몸 — 「일념삼천이사」

대성인은 초기의 교학 저술인 「일념삼천이사」에서 일념삼천을 이루는 요소들 — 십이인연, 십여시, 삼종세간 — 을 차례로 풀이하셨다. 그 가운데 삼종세간을 풀이하시는 대목에 오음에 대한 대성인의 가장 자세한 설명이 있다.

三種世間とは五陰世間止に云く十種陰果不同を以ての故に五世間と名くるなり文、衆生世間止に云く十界の衆生寧ろ異らざるを得る故に衆生世間と名くるなり文、国土世間止に云く十種の所居通じて国土世間と称す文、
五陰とは新訳には五蘊と云うなり陰とは聚集の義なり一に色陰・五色是なり・二に受陰・領納是なり・三に想陰・倶舎に云く想は像を取るを体と為すと文・四に行陰・造作是行なり・五に識陰・了別是れ識なり・
止の五に婆沙を引いて云く識・先ず了別し・次に受は領納し・想は相貌を取り・行は違従を起し・色は行に由つて感ずと。

삼종세간이란, 오음세간은 『마하지관』에 「열 가지 음의 과보가 같지 않기 때문에 오(음)세간이라 이름한다」 하였고, 중생세간은 『마하지관』에 「십계의 중생이 어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생세간이라 이름한다」 하였으며, 국토세간은 『마하지관』에 「열 가지가 머무는 곳을 통틀어 국토세간이라 일컫는다」 하였느니라.

오음이란 새 번역에서는 오온이라 하느니라. 음이란 모여 쌓인다는 뜻이니라. 첫째는 색음이니 다섯 빛깔이 이것이요, 둘째는 수음이니 받아들임이 이것이요, 셋째는 상음이니 『구사론』에 「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 하였고, 넷째는 행음이니 지어 냄이 곧 행이요, 다섯째는 식음이니 알아 가름이 곧 식이니라.

『마하지관』 제5에 「바사(婆沙)」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식이 먼저 알아 가르고, 다음에 수는 받아들이며, 상은 모습을 취하고, 행은 거스름과 따름을 일으키며, 색은 행으로 말미암아 느낀다」 하였느니라.

「일념삼천이사」, 407쪽

창가교학연구실의 「일념삼천이사」 강의는 이 대목을 자세히 풀이한다. 먼저 삼세간의 서로의 관계다. 『마하지관』에 「중생세간은 이미 가명이어서 가를 수 있는 체가 없고, 실재하는 법을 끌어모아 거짓으로 세운 것일 뿐」이라 하였고 「오음을 끌어모아 통틀어 중생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곧 중생이란 오음이 거짓으로 화합한 것(五陰仮和合)이어서 실체로서는 오음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오음이 갖가지 업인과 결합하여 지옥계에서 불계까지 십계 각각의 중생이 거짓으로 생기며, 십계 사이에 옮겨 감과 차별이 있으므로 중생세간이라 한다. 오음세간을 풀이한 『마하지관』 원문은 「열 가지 음계(十種陰界)」이니, 「열 가지」란 십계이고 「음계」란 오음과 십팔계이니, 십계 각각의 오음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을 오음세간이라 한다.

다음은 오음 하나하나의 풀이다. 강의는 대성인이 『구사론』의 설명에 따라 풀이하셨다고 하며 이렇게 보충한다. 색음은 몸과 물질의 면이고, 나머지 넷은 마음의 면이다. 『구사론』 권1에 따르면 색음은 다섯 감각 기관과 그 다섯 대상,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행위의 여세(무표색)를 합친 열한 가지다. 「다섯 빛깔」이라고 하신 것은 다섯 감각 기관과 다섯 대상을 가리키신 것으로도, 빛깔의 기본인 청·황·적·백에 흑을 더한 다섯 빛깔을 가리키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수음은 「받아들임」이니, 감각 기관이 대상에 닿아 괴로움·즐거움·어느 쪽도 아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감각 작용이다. 상음은 「모습을 취함」이니, 파랑·노랑 같은 빛깔, 길고 짧음 같은 모양, 남녀나 원수·친구 같은 사람,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갖가지 모습을 마음에 붙잡고 떠올리는 표상 작용이다. 행음은 「지어 냄」이니, 만들어 이루어 내는 형성 작용이다. 『구사론』은 경전이 「여섯 의도의 무리」를 행온이라 한 것은 의도(思)가 업의 성품이어서 지어 내는 힘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식음은 「알아 가름」이니, 여섯 감각 기관의 대상을 하나하나 알아 가르는 판단 작용이다.

그리고 뒤의 인용은 4부에서 본 『마하지관』의 대목이다. 강의는 설일체유부의 「수인」이 오음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 것은 「있음의 문」에서, 『성실론』의 「논인」이 차례로 일어난다고 한 것은 「공의 문」에서 뜻을 밝힌 것이라는 천태의 해석을 소개하고, 대성인도 『성실론』 논사들의 견해를 옳다고 하셨다고 풀이한다.

「陰とは聚集の義なり」음이란 모여 쌓인다는 뜻이다
  • 색음「五色是なり」다섯 빛깔이 이것이다몸 · 물질
  • 수음「領納是なり」받아들임이 이것이다괴로움 · 즐거움을 받아들임
  • 상음「想は像を取るを体と為す」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표상
  • 행음「造作是行なり」지어 냄이 곧 행이다형성 · 업
  • 식음「了別是れ識なり」알아 가름이 곧 식이다판단
차례
  1. 식
  2. 수
  3. 상
  4. 행
  5. 색
「識・先ず了別し・次に受は領納し・想は相貌を取り・行は違従を起し・色は行に由つて感ず」식이 먼저 알아 가르고, 수는 받아들이며, 상은 모습을 취하고, 행은 거스름과 따름을 일으키며, 색은 행으로 말미암아 느낀다(「일념삼천이사」 407쪽)
도표 18 · 대성인의 오음 풀이

강의가 짚은 「중생은 오음이 거짓으로 화합한 것」이라는 설명은 2부에서 본 아비달마의 무아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 설명을 「나는 없다」의 근거로 쓰지 않으셨다. 이 풀이는 일념삼천을 이루는 삼세간의 하나로서, 십계 각각의 오음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같은 글의 다음 대목에서 대성인은 지옥에서 불계까지 십계 각각에 「중생세간·오음세간·국토세간」의 십여시를 하나하나 배열하신다. 부처에게도 오음세간이 있고, 지옥의 중생에게도 오음세간이 있다. 4부에서 본 천태의 「상주하는 오음을 끌어모으면 지극히 존귀한 중생」이 대성인의 손에서 일념삼천의 표로 정리된 것이다.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 — 「십계의 오음」

4부 끝에서 본 『화엄경』의 게송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 오음을 그려 낸다」를 대성인은 「일대성교대의」에서 이렇게 읽으신다.

大乗の心は心より十界を生ず、華厳経に云く「心は工なる画師の如く種種の五陰を造る一切世界の中に法として造らざること無し」文、造種種五陰とは十界の五陰なり仏界をも心法をも造ると習う・心が過去・現在・未来の十方の仏と顕ると習うなり

대승의 뜻은 마음에서 십계가 생긴다는 것이니라. 화엄경에 이르기를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 오음을 지어 낸다. 일체 세계 가운데 법으로서 지어 내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느니라. 「갖가지 오음을 지어 낸다」란 십계의 오음이니, 불계도 심법도 지어 낸다고 배우며, 마음이 과거·현재·미래의 시방의 부처로 나타난다고 배우느니라.

「일대성교대의」, 400쪽

「갖가지 오음」은 「십계의 오음」이다. 오음은 하나의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같은 마음이 지옥의 오음도 그리고, 보살의 오음도 그리고, 부처의 오음도 그린다. 무아 — 정해진 「나」가 없다는 것 — 는 여기서 마음이 십계의 어느 생명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 화엄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극치로 두지 않으셨다. 같은 대목에서 대성인은 법화경 이전의 별교·원교는 「마음에서 십계가 생긴다(心生の十界)」를 설할 뿐이라고 하신다. 「십법계사」 강의와 그 어구 풀이는 이 구별을 이렇게 설명한다. 심생십계는 마음이 십계의 경지를 차례로 지어 내어 불과에 이른다는 법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계가 시간의 차례를 따라 생겨난다고 보므로 십계 사이에 간격이 있다. 이에 비해 법화경은 「마음에 본래 십계가 갖추어져 있다(心具の十界)」, 곧 십계호구를 밝혔다. 마음이 화가처럼 오음을 「지어 낸다」면, 지옥의 오음을 그리는 동안 부처의 오음은 아직 없다. 마음에 십계가 「갖추어져 있다」면, 지옥의 오음 그 자리에 부처의 오음도 함께 있다.

이전의 별교 · 원교심생십계(心生の十界)「心は工なる画師の如く種種の五陰を造る」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 오음을 지어 낸다「造種種五陰とは十界の五陰なり」갖가지 오음을 지어 낸다란 십계의 오음이다(「일대성교대의」 400쪽)십계가 차례로 생긴다 · 십계 사이에 간격이 있다
법화경심구십계(心具の十界)마음에 본래 십계가 갖추어져 있다 · 십계호구지옥의 오음 그 자리에 부처의 오음도 함께 있다
도표 19 · 심생의 오음과 심구의 오음

「굳게 무아에 집착함이 미혹의 근본」

이제 무아에 관한 대성인의 가장 날카로운 말씀을 읽는다. 「십법계사」는 묻는 이와 답하는 이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글로, 묻는 이가 대성인의 입장에서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으로는 성불할 수 없음을 따진다. 그 셋째 힐난에서 대성인은 이승의 무아를 정면으로 다루신다.

所以に彼の外道五天竺に出でて四顚倒を立つ、如来出世して四顚倒を破せんが為に苦・空等を説く此れ則ち外道の迷情を破せんが為なり、是の故に外道の我見を破して無我に住するは火を捨てて以て水に随うが如し堅く無我を執して見思を断じ六道を出ずると謂えり、此れ迷の根本なり故に色心倶滅の見に住す大集等の経経に断常の二見と説くは是れなり。

그 까닭은, 저 외도가 오천축에 나와 네 가지 전도를 세우자 여래가 세상에 나오시어 네 가지 전도를 깨뜨리기 위해 고·공 등을 설하셨느니라. 이는 곧 외도의 미혹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서였느니라. 그러므로 외도의 아견을 깨뜨리고 무아에 머무는 것은 불을 버리고 물을 따르는 것과 같으니, 굳게 무아에 집착하여 견혹·사혹을 끊고 육도를 벗어난다고 여기느니라. 이것이 미혹의 근본이니라. 그러므로 색심이 함께 멸한다는 견해에 머무느니, 대집경 등의 여러 경에 단견과 상견의 두 견해라고 설한 것이 이것이니라.

「십법계사」, 418쪽

「외도의 아견을 깨뜨리고 무아에 머무는 것은 불을 버리고 물을 따르는 것과 같다.」 불이 위험하다고 물로 뛰어드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외도의 「나」라는 불길은 피했지만, 무아라는 물에 빠졌다. 그리고 대성인은 단언하신다. 「굳게 무아에 집착하는 것, 이것이 미혹의 근본이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십법계사」 강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소승의 이승은 석존의 「무아」의 가르침에 집착했다. 그러나 소승교 자체는 당시 인도의 외도가 설한 상·락·아·정의 네 전도를 깨뜨리기 위해 설한 것이었다. 석존은 외도의 아견을 깨뜨리는 방편으로 외도와 반대로 공(무상)·고·무아·부정을 설했을 뿐인데, 이승은 이 무아의 가르침에 집착하여 도리어 미혹을 낳았다. 그 결과 번뇌가 나오는 근원인 몸과 마음을 함께 멸한다는 「색심구멸(色心俱滅)」, 곧 회신멸지의 견해에 떨어졌다. 그리고 대집경이 설하는 단견과 상견의 관점에서 보면, 무아의 경지를 실체로 보아 상주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는 상견이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함께 완전히 멸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는 단견이 된다.

이것은 무아 사상의 역사 전체를 한 문장으로 꿰뚫는 판정이다. 1부에서 석존은 바차곳타 앞에서 「없다」고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답하면 단멸론의 편에 서기 때문이었다. 3부에서 용수는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라고 했다. 무아조차 견해로 붙잡으면 집착이 되기 때문이었다. 대성인은 이 흐름을 받아, 이승의 무아가 바로 그 함정 — 무아를 「붙잡을 것」으로 만들어 상견이 되고, 몸과 마음을 지우려 하여 단견이 되는 — 에 빠졌다고 하신다. 무아는 「나」라는 집착을 푸는 약이었지, 새로 붙잡을 진리가 아니었다. 약을 음식처럼 먹으면 그것이 다시 병이 된다.

같은 대목은 권대승의 보살에게도 칼날을 돌리신다.

又大乗の菩薩に於て心生の十界を談ずと雖も而も心具の十界を論ぜず、又或る時は九界の色心を断尽して仏界の一理に進む是の故に自ら念わく三惑を断尽して変易の生を離れ寂光に生るべしと、然るに九界を滅すれば是れ則ち断見なり進んで仏界に昇れば即ち常見と為す九界の色心の常住を滅すと欲うは豈に九法界に迷惑するに非ずや。

또 대승의 보살에 있어서는 마음에서 십계가 생긴다는 것은 말하지만 마음에 십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논하지 않느니라. 또 어떤 때는 구계의 색심을 끊어 없애고 불계의 한 이치로 나아가니,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삼혹을 끊어 없애고 변역의 생을 떠나 적광토에 태어나리라」 하느니라. 그러나 구계를 멸하면 이는 곧 단견이요, 나아가 불계에 오르면 곧 상견이 되느니라. 구계의 색심의 상주를 멸하려 하는 것은 어찌 구법계에 미혹한 것이 아니겠는가.

「십법계사」, 418쪽

이승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지우려 했고, 권대승의 보살은 구계의 몸과 마음을 지우고 불계에만 오르려 했다. 강의는 이렇게 풀이한다. 구계의 색심을 멸한다는 점에서 단견이요, 불계의 한 이치만을 상주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상견이다. 법화경의 십계본유상주의 입장에서 보면 구계의 색심도 본래 상주하는데, 그것을 멸하려 하는 것은 구계에 미혹한 것이다. 강의는 「일대성교대의」의 「법화경 이전의 여러 경은 십계호구를 밝히지 않으므로 부처가 되기를 원하면 반드시 구계를 싫어한다. … 이것을 묘락대사는 '염리단구(厭離斷九)의 부처'라 이름하였다」(403쪽)를 함께 들어, 구계를 싫어하여 떠나고 끊는 부처가 권대승의 부처라고 한다.

「구계의 색심의 상주」. 대성인은 지옥에서 보살까지의 몸과 마음 — 우리 범부의 이 오음 — 이 본래 상주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외도의 「상주하는 나」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외도는 오음 뒤에 변하지 않는 「나」를 세웠다. 이승은 그 「나」를 지우고 오음까지 지우려 했다. 권대승은 구계의 오음을 지우고 불계의 오음만 남기려 했다. 법화경은 십계의 오음 어느 것도 지우지 않는다. 핵심 개념 「무상」 6부에서 본 「무상을 상주라고 설한다」, 「본유의 생사」가 여기서 「구계의 색심의 상주」로 다시 나타난다.

  1. 외도상견「四顚倒を立つ」네 가지 전도를 세운다= 오음 뒤에 변하지 않는 「나」
  2. 이승상견단견「堅く無我を執して…此れ迷の根本なり」굳게 무아에 집착하는 것이 미혹의 근본「色心倶滅の見」색심이 함께 멸한다는 견해= 무아를 실체로 붙잡음(상견) + 몸과 마음을 지움(단견)
  3. 권대승의 보살단견상견「九界の色心を断尽して仏界の一理に進む」구계의 색심을 끊어 없애고 불계의 한 이치로 나아간다= 구계를 멸함(단견) + 불계만 상주(상견)
  4. 법화경「九界の色心の常住」구계의 색심의 상주= 십계호구 · 어느 오음도 지우지 않는다

(「십법계사」 418쪽)

도표 20 · 무아에 대한 네 가지 태도

창가학회 교학에서 무아는 외도의 아견을 깨뜨리는 방편이다. 그 방편에 굳게 집착하면 몸과 마음을 지우는 단견과 무아를 실체로 삼는 상견에 함께 떨어진다. 법화경은 십계의 색심이 본래 상주한다고 밝혀, 무아를 붙잡지도 「나」를 붙잡지도 않는 길을 연다.

오음 · 십이입 · 십팔계가 곧 법신

그렇다면 지워서는 안 되는 이 범부의 오음은 어떻게 부처의 생명이 되는가. 대성인은 도키조닌이 어머니의 삼회기 추선 공양을 올린 데 답하신 「시문불승의」에서 그것을 「상대종(相對種)의 개회」로 설명하신다. 『마하지관』의 「생사가 곧 법신이요 번뇌가 곧 반야요 결업이 곧 해탈이라고 듣는 것」을 인용하신 뒤 이렇게 풀이하신다.

生死とは我等が苦果の依身なり所謂五陰・十二入・十八界なり煩悩とは見思・塵沙・無明の三惑なり結業とは五逆・十悪・四重等なり、法身とは法身如来・般若とは報身如来・解脱とは応身如来なり我等衆生無始曠劫より已来此の三道を具足し今法華経に値つて三道即三徳となるなり。

생사란 우리의 괴로움의 과보인 의지하는 몸이니, 이른바 오음·십이입·십팔계이니라. 번뇌란 견사·진사·무명의 삼혹이요, 결업이란 오역·십악·사중 등이니라. 법신이란 법신여래요, 반야란 보신여래요, 해탈이란 응신여래이니라. 우리 중생은 무시광겁 이래로 이 삼도를 갖추어 왔으나, 지금 법화경을 만나 삼도가 곧 삼덕이 되느니라.

「시문불승의」, 983쪽

2부에서 아비달마가 「나」를 찾아 해부했던 오음·십이입·십팔계의 삼과가 여기 그대로 나온다. 대성인은 그것을 「우리의 괴로움의 과보인 몸」, 곧 생사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생사가 그대로 법신여래라고 하신다. 아비달마에서 오음은 「나」가 아님을 보여 주는 재료였고, 이승에게는 지워 없애야 할 괴로움의 몸이었다. 법화경에서 같은 오음이 그대로 법신이 된다.

강의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한다. 취류종(就類種)의 개회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종류여야 한다는 전제에서, 번뇌와 미혹을 물리치며 청정한 불성만을 열어 불과에 이르는 길이다. 이에 비해 상대종의 개회는 번뇌·업·고의 삼도라는, 불성과 서로 맞서는 것들을 감싸 안아 그 당체를 그대로 법신·반야·해탈의 삼덕이라 일컫는 법화경 독자의 법문이다. 오히려 맞서는 것이 있기에 불성의 개발이 촉진되는 힘을 불종 자체 안에서 찾아낸 것이다.

무아의 문제에 비추면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하다. 오음을 「나」로 붙잡는 것은 외도와 범부의 미혹이다. 오음을 「나 아님」으로 보고 지우려는 것은 이승의 미혹이다. 법화경은 오음을 붙잡지도 지우지도 않고, 그 당체를 그대로 법신으로 연다. 「나」가 없다는 것은 오음이 텅 비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음이 어떤 정해진 「나」에도 갇히지 않고 법신으로 열릴 수 있다는 뜻이다.

  1. 생사「我等が苦果の依身なり所謂五陰・十二入・十八界なり」우리의 괴로움의 과보인 몸이니 이른바 오음 · 십이입 · 십팔계
    법신여래
  2. 번뇌견사 · 진사 · 무명의 삼혹
    반야 · 보신여래
  3. 결업오역 · 십악 · 사중
    해탈 · 응신여래
취류종의 개회번뇌를 물리치고 불성만 연다
상대종의 개회번뇌 · 업 · 고의 당체를 그대로 삼덕으로 연다
「今法華経に値つて三道即三徳となるなり」지금 법화경을 만나 삼도가 곧 삼덕이 된다(「시문불승의」 983쪽)
도표 21 · 삼도와 삼덕
6부 「나란 법계의 중생이다」무아를 넘어선 나

「我とは法界の衆生なり」

5부에서 대성인은 무아에 굳게 집착하는 것을 미혹의 근본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무아를 넘어선 자리에서 「나」는 무엇인가. 『어의구전』은 법화경 여래수량품의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한량없고 끝없는(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이라는 경문을 이렇게 읽으신다.

御義口伝に云く我実とは釈尊の久遠実成道なりと云う事を説かれたり、然りと雖も当品の意は我とは法界の衆生なり十界己己を指して我と云うなり、実とは無作三身の仏なりと定めたり此れを実と云うなり成とは能成所成なり成は開く義なり法界無作の三身の仏なりと開きたり、仏とは此れを覚知するを云う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나는 실로(我實)」란 석존이 구원에 실로 도를 이루셨다는 것을 설하신 것이니라. 그렇지만 이 품의 뜻은, 나(我)란 법계의 중생이니 십계 저마다를 가리켜 「나」라고 하느니라. 실(實)이란 무작삼신의 부처라고 정하였으니 이것을 실이라 하느니라. 성(成)이란 이루는 것과 이루어지는 것이니, 성은 연다는 뜻이니라. 법계가 무작의 삼신의 부처라고 열었느니라. 불(佛)이란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하느니라.

『어의구전』 수량품 제3 「아실성불이래무량무변 등의 일」, 753쪽

경문의 표면에서 「나」는 석존이다. 오백진점겁의 옛날에 실로 성불한 부처가 「나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 품의 뜻」에서 「나란 법계의 중생」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십계 저마다를 가리켜 나라고 한다」고 하신다. 지옥의 중생도 「나」요, 아귀도 축생도 인간도 천상도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부처도 저마다 「나」다.

1부에서 석존은 다섯 무더기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보라고 했다. 대성인은 여기서 거꾸로, 십계 하나하나를 가리켜 「이것이 나다」라고 하신다. 이것은 외도의 「나」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외도의 「나」는 오음 뒤에 숨은 하나의 변하지 않는 주인이었다. 대성인의 「나」는 오음 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십계의 중생 그 자체, 곧 십계의 오음이 모인 그 모습 저마다다. 그리고 그 「나」가 「실(實)」, 곧 무작삼신의 부처다. 무작(無作)이란 지어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러하다는 뜻이다. 2부에서 아비달마는 「나」를 오음이 모인 데 붙인 거짓 이름(가명)이라 했다. 대성인은 바로 그 오음이 모인 중생을 「나」라 부르고, 그 「나」가 본래 그대로 부처라고 하신다. 「성(成)」은 무엇을 새로 만들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여는 것」이다.

이 말씀은 3부의 끝에서 남겨 둔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열반경』의 「대아」는 오음을 지난 저편의 나인가, 지금 이 오음 그대로의 나인가. 대성인은 「나란 법계의 중생」이라고 답하신다. 「대아」는 오음 저편에 있지 않다. 십계의 중생 저마다가 그대로 「나」이고, 그 「나」를 깨달아 아는 것이 부처다.

자는 구계, 아는 불계

수량품 자아게(自我偈)의 첫 구 「내가 부처를 얻은 이래(自我得佛來)」를 대성인은 이렇게 읽으신다.

御義口伝に云く一句三身の習いの文と云うなり、自とは九界なり我とは仏界なり此の十界は本有無作の三身にして来る仏なりと云えり、自も我も得たる仏来れり十界本有の明文なり、我は法身・仏は報身・来は応身なり此の三身・無始無終の古仏にして自得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이 구절은) 한 구에 삼신을 갖춘다고 배우는 글이라 하느니라. 자(自)란 구계요 아(我)란 불계이니, 이 십계는 본유무작의 삼신으로서 와 있는 부처라고 하였느니라. 자도 아도 얻은 부처가 와 있으니, 십계본유의 분명한 글이니라. 아(我)는 법신이요 불(佛)은 보신이요 래(來)는 응신이니라. 이 삼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옛 부처로서 스스로 얻은 것이니라.

『어의구전』 수량품 제11 「자아득불래의 일」, 756쪽

「자아(自我)」라는 두 글자에서, 「자(自)」는 구계, 「아(我)」는 불계다. 우리말에서 「자아」는 곧 「나」를 뜻하지만, 대성인은 이 두 글자를 구계와 불계로 나누어 읽으신다. 그리고 「자도 아도 얻은 부처가 와 있다」 — 구계도 불계도 함께 본래의 부처라고 하신다. 같은 『어의구전』은 자아게 전체에 대해서도 「자란 구계요, 아란 불신이다. 게(偈)란 밝힌다는 뜻이니, 본유라고 밝힌 게송이다」라고 하신다(759쪽).

5부에서 권대승의 보살은 구계의 색심을 끊고 불계로 나아가려 했다. 그것을 대성인은 단견이자 상견이라 하셨다. 여기서 대성인은 「자아」 두 글자 안에 구계와 불계를 함께 넣으신다. 구계를 버린 불계는 「아」만 있고 「자」가 없는 반쪽의 나다. 불계를 모르는 구계는 「자」만 있고 「아」가 없는 반쪽의 나다. 참된 「자아」는 구계와 불계가 함께 있는 십계의 나다. 그리고 「아는 법신」이라 하신 데서, 이 「나」가 곧 법신, 곧 5부에서 본 「오음·십이입·십팔계가 곧 법신」과 이어진다. 삼신에 관해서는 핵심 개념 「삼신」에서 다시 다룬다.

自「自とは九界なり」자(自)란 구계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 ·성문 ·연각 ·보살
我「我とは仏界なり」아(我)란 불계
「自も我も得たる仏来れり十界本有の明文なり」자도 아도 얻은 부처가 와 있으니 십계본유의 분명한 글이다(『어의구전』 756쪽)

아 · 불 · 래 = 법신 · 보신 · 응신

구계를 버린 불계 = 「아」만 있는 반쪽 · 불계를 모르는 구계 = 「자」만 있는 반쪽

도표 22 · 「자아」 두 글자

법계를 자신이라고 연다

자아게의 처음과 끝에 대해서도 대성인은 같은 뜻을 읽으신다.

御義口伝に云く自とは始なり速成就仏身の身は終りなり始終自身なり中の文字は受用なり、仍つて自我偈は自受用身なり法界を自身と開き法界自受用身なれば自我偈に非ずと云う事なし、自受用身とは一念三千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첫 구의) 자(自)는 처음이요, (마지막 구) 「속히 불신을 성취한다(速成就佛身)」의 신(身)은 끝이니, 처음과 끝이 자신(自身)이니라. 가운데 글자들은 수용(受用)이니라. 그러므로 자아게는 자수용신이니라. 법계를 자신이라고 열고 법계가 자수용신이므로 자아게 아닌 것이 없느니라. 자수용신이란 일념삼천이니라.

『어의구전』 수량품 제22 「자아게 시종의 일」, 759쪽

자아게는 「자(自)」로 시작해 「신(身)」으로 끝난다. 처음과 끝을 이으면 「자신(自身)」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글자는 그 자신이 법의 즐거움을 스스로 받아 쓰는 「수용(受用)」이다. 그래서 자아게 전체가 「자수용신(自受用身)」, 곧 스스로 얻은 법을 스스로 받아 쓰는 부처의 몸이다.

「법계를 자신이라고 연다(法界を自身と開き)」. 1부의 무아는 「이것은 내가 아니다」였다.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의식도 내가 아니다. 그 끝에서 이승은 「나」를 지웠다. 대성인은 여기서 정반대 방향으로 「나」를 넓히신다. 다섯 무더기 어느 것에도 갇히지 않는 「나」는, 법계 전체를 자기 몸으로 삼는다. 「나」가 없다는 것과 「법계가 나」라는 것은 같은 사실의 두 면이다. 어디에도 정해진 경계로서의 「나」가 없기에, 법계 전체가 「나」로 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는 「일념삼천」이다. 4부에서 천태가 오음 가운데 식음, 한 생각의 마음을 관하여 거기서 삼천을 보았던 그 자리가, 여기서 「자수용신」, 곧 법계를 자신으로 삼는 부처의 몸이 된다.

본문의 석존은 우리 중생

『어의구전』 방편품에서 대성인은 「나와 같이 다름이 없게 하리라(如我等無異)」는 경문의 「나」를 이렇게 읽으신다.

御義口伝に云く我とは釈尊・我実成仏久遠の仏なり此の本門の釈尊は我等衆生の事なり、如我の我は十如是の末の七如是なり九界の衆生は始の三如是なり我等衆生は親なり仏は子なり父子一体にして本末究竟等なり、此の我等を寿量品に無作の三身と説きたる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나(我)란 석존이요,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의 구원의 부처이니라. 이 본문의 석존은 우리 중생을 말하는 것이니라. 「여아(如我)」의 아는 십여시 가운데 뒤의 일곱 여시요, 구계의 중생은 처음의 세 여시이니라. 우리 중생은 어버이요 부처는 자식이니,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어서 본말구경등이니라. 이 「우리」를 수량품에서 무작의 삼신이라고 설하였느니라.

『어의구전』 방편품 제6 「여아등무이 여아석소원의 일」, 720쪽

같은 대목은 이어서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이니라. 인과의 공덕이 골수가 아니겠는가(妙覚の釈尊は我等が血肉なり因果の功徳骨髄に非ずや)」라고 하신다. 부처의 「나」가 우리 중생이고, 부처의 공덕이 우리의 피와 살과 골수다. 3부의 『열반경』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니 이것이 곧 '나'의 뜻이다」라고 한 것을, 대성인은 「본문의 석존은 우리 중생이다」로 더 분명히 하신다. 「나」는 중생 안에 숨겨진 어떤 씨앗이 아니라, 중생 그 자체다.

이 다섯 자의 몸 — 오음세간과 사의 일념삼천

『어의구전』 방편품의 「오직 일대사인연으로(唯以一大事因緣)」에 대해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又云く我等が頭は妙なり喉は法なり胸は蓮なり胎は華なり足は経なり此の五尺の身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此の大事を釈迦如来四十余年の間隠密したもうなり今経の時説き出したもう此の大事を説かんが為に仏は出世したもう我等が一身の妙法五字なりと開仏知見する時即身成仏するなり

또 이르기를, 우리의 머리는 묘(妙)요, 목은 법(法)이요, 가슴은 연(蓮)이요, 배는 화(華)요, 발은 경(經)이니라. 이 다섯 자(尺)의 몸이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字)이니라. 이 대사를 석가여래는 사십여 년 동안 감추어 두셨다가 지금 이 경에 이르러 설해 내셨느니라. 이 대사를 설하기 위해 부처는 세상에 나오셨느니라. 우리의 한 몸이 묘법의 다섯 자라고 부처의 지견을 열 때 즉신성불하느니라.

『어의구전』 방편품 제3 「유이일대사인연의 일」, 716쪽

1부에서 석존은 몸(색)을 두고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대성인은 그 몸 — 머리와 목과 가슴과 배와 발 — 을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라고 하신다. 몸은 「나」가 아닐 뿐 아니라, 「나」보다 큰 것, 곧 법 그 자체다. 같은 대목은 끝에서 「사(事)의 일념삼천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대사이니라. … 사(事)란 중생세간이요, 인(因)이란 오음세간이요, 연(緣)이란 국토세간이니라」라고 하신다. 일대사인연의 「사(事)·인(因)·연(緣)」 세 글자가 삼세간이 되고, 그 가운데 오음세간에 「인(因)」이 배당된 것은, 오음이 중생을 이루는 바탕이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다.

『어의구전』은 여러 곳에서 법화경의 경문을 삼세간으로 읽으신다. 비유품의 「지금 이 삼계는 … 그 가운데 중생은(今此三界 … 其中衆生)」에서 「삼계」는 국토세간, 「그 가운데 중생」은 오음세간이라 하시고(724쪽), 수량품의 「나의 이 국토는 안온하여 … 보배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많다(我此土安穩 … 寶樹多華菓)」에서 「보배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많다」를 오음세간이라 하신다(757쪽).

我此土安穏とは国土世間なり、衆生所遊楽とは衆生世間なり、宝樹多華菓とは五陰世間なり是れ即ち一念三千を分明に説かれたり

「나의 이 국토는 안온하다」란 국토세간이요, 「중생이 노니는 곳」이란 중생세간이요, 「보배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많다」란 오음세간이니, 이것은 곧 일념삼천을 분명히 설하신 것이니라.

『어의구전』 수량품 제15 「중생견겁진 … 이중견소진의 일」, 757쪽

핵심 개념 「무상」 4부에서 본 수량품의 이 경문은, 중생이 겁이 다해 큰불에 타는 것을 볼 때에도 부처의 국토는 안온하다는 대목이었다. 대성인은 그 안온한 국토에 서 있는 「꽃과 열매가 가득한 보배 나무」를 오음세간이라고 하신다. 1부에서 물거품 덩이와 파초에 비유되던 오음, 속이 비어 단단한 심이 없던 그 오음이, 여기서는 꽃과 열매가 가득한 보배 나무가 되었다. 오음의 속이 비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정해진 「나」의 심이 없기에, 그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고요한 정원의 언덕 위에 꽃과 둥근 열매가 함께 가득 달린 큰 고목이 서 있고, 그 가지가 앞의 연못에 비치며 여러 갈래 풀길이 나무 쪽으로 이어지는 금박 수묵화
그림 3 · 꽃과 열매가 가득한 나무
  • 「我等が頭は妙なり喉は法なり胸は蓮なり胎は華なり足は経なり此の五尺の身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머리는 묘 · 목은 법 · 가슴은 연 · 배는 화 · 발은 경, 이 다섯 자의 몸이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다(716쪽)
  • 「事とは衆生世間・因とは五陰世間・縁とは国土世間なり」사란 중생세간 · 인이란 오음세간 · 연이란 국토세간(716쪽)
  • 「其中衆生の文は五陰世間なり」그 가운데 중생의 글은 오음세간이다(724쪽)
  • 「宝樹多華菓とは五陰世間なり」보배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많다란 오음세간이다(757쪽)
물거품 덩이 · 파초(SN 22.95)
꽃과 열매가 가득한 보배 나무
도표 23 · 오음세간을 읽는 『어의구전』

오음이 곧 묘법의 다섯 자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은 같은 뜻을 더 큰 틀에서 말씀하신다. 대성인은 먼저 「무릇 일대성교는 한 사람의 법이니 자기 몸의 본체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것을 부처라 하고 이것에 미혹한 것을 중생이라 한다」고 하시고, 사람의 몸이 천지를 본떴다는 『지관보행전홍결』의 긴 글을 인용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五行とは地水火風空なり五大種とも五薀とも五戒とも五常とも五方とも五智とも五時とも云う、只一物・経経の異説なり内典・外典・名目の異名なり、今経に之を開して一切衆生の心中の五仏性・五智の如来の種子と説けり是則ち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此の五字を以て人身の体を造るなり本有常住なり本覚の如来なり

오행이란 지·수·화·풍·공이니, 오대종이라고도 하고 오온이라고도 하며, 오계라고도 오상이라고도 오방이라고도 오지라고도 오시라고도 하느니라. 다만 한 가지 것을 경마다 달리 설한 것이요, 내전과 외전에서 이름을 달리한 것이니라. 지금 이 경(법화경)에서 이것을 열어 일체중생의 마음속의 오불성·오지의 여래의 종자라고 설하였으니, 이것이 곧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이니라. 이 다섯 자로써 사람의 몸의 체를 짓느니라. 본유상주이며 본각의 여래이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8쪽

「자기 몸의 본체를 잘 알라.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부처요, 이것에 미혹한 것이 중생이다.」 무아의 가르침은 본래 「나」를 찾아 들여다보는 길이었다. 1부에서 석존은 다섯 무더기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했다. 대성인은 같은 「자기 몸의 본체」를 들여다보라고 하시면서, 그 본체가 오온 — 경마다 오대·오계·오상·오지로 이름을 달리하는 「한 가지 것」 — 이고, 그것이 곧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라고 하신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일대성교는 생명의 있는 모습을 밝힌 것이며, 이 자기 생명의 본체를 철저히 깨달은 이가 부처다. 오행·오대종·오온·오계·오상·오방·오지·오시의 이름은 「다만 한 가지 것」이 경에 따라, 또 내전과 외전의 차이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법화경은 이들의 정체가 일체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오불성 · 오지의 여래의 종자임을 열어 보이고, 그것을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로 나타냈다.

2부에서 아비달마는 오온을 「나」가 없음을 증명하는 재료로 해부했다. 대성인은 그 오온을 「본유상주의 본각의 여래」라고 하신다. 같은 글은 바로 앞에서 「이 금강처럼 부서지지 않는 몸을 생멸무상의 몸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생각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과 같다」는 해석을 인용하신다(핵심 개념 「무상」 6부). 오온을 「나」로 붙잡는 것도, 오온을 「나 아님」으로 지우는 것도 아니다. 오온 그 자체가 묘법이다.

「我が身の本体を能く能く知る可し之を悟るを仏と云い之に迷うは衆生なり」자기 몸의 본체를 잘 알라. 이것을 깨닫는 것을 부처라 하고 미혹한 것을 중생이라 한다(같은 글)
  • 오행
  • 오대종(지 · 수 · 화 · 풍 · 공)
  • 오온(색 · 수 · 상 · 행 · 식)
  • 오계
  • 오상
  • 오방
  • 오지
  • 오시
「只一物・経経の異説なり」다만 한 가지 것을 경마다 달리 설한 것이다
「一切衆生の心中の五仏性・五智の如来の種子」일체중생의 마음속의 오불성 · 오지의 여래의 종자
「是則ち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이것이 곧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다
「本有常住なり本覚の如来なり」본유상주이며 본각의 여래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8쪽)

도표 24 · 「다만 한 가지 것」

상락아정의 「아」 — 네 보살

3부에서 『열반경』은 열반의 네 덕으로 상·락·아·정을 세웠다. 대성인은 『어의구전』 종지용출품에서 도섬(道暹)의 『법화문구보정기』를 인용하시어, 땅에서 솟아 나온 지용보살의 우두머리 네 보살이 이 네 덕을 나타낸다고 하신다. 상행보살은 「아(我)」를, 무변행보살은 「상(常)」을, 정행보살은 「정(淨)」을, 안립행보살은 「낙(樂)」을 나타낸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사람이 이 네 뜻을 갖춘다」고 한다(751쪽).

상행보살이 나타내는 「아」에 대해 보정기는 「두 가지 죽음(분단생사와 변역생사)의 겉으로 나오는 것을 상행이라 한다」고 풀이한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개목초」 강의는 이것을, 생사의 안에 가라앉는 것은 얽매여 자재롭지 못한 것이요, 생사의 겉으로 나오는 것은 해탈하여 자재로운 것이므로 상행이 「아」를 나타낸다고 풀이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네 뜻을 갖춘다」는 말에서, 말법의 지용보살에게는 상락아정의 네 덕이 한 몸에 갖추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아」의 뜻이 분명해진다. 1부의 「무아상경」에서 다섯 무더기가 「나」가 아닌 까닭은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몸은 병들고 마음은 흔들린다. 상락아정의 「아」는 그 반대편, 곧 생사에 얽매이지 않는 자재로움이다. 그러나 그 자재로움은 생사를 떠나 얻는 것이 아니다. 지용보살은 땅 밑에서, 곧 생사의 대지에서 솟아 나왔다. 생사 한가운데서 생사에 휘둘리지 않는 것, 그것이 상행보살의 「아」다.

  • 상행(上行) — 아(我)두 가지 죽음의 겉으로 나온다 · 해탈하여 자재롭다
  • 무변행(無邊行) — 상(常)단견과 상견의 경계를 넘는다 · 중도상주
  • 정행(淨行) — 정(淨)오주(五住)의 번뇌의 때를 넘는다 · 청정
  • 안립행(安立行) — 낙(樂)보리수 아래에서 덕이 원만하다 · 안락

「어떤 때는 한 사람이 이 네 뜻을 갖춘다」(도섬 『법화문구보정기』, 『어의구전』 종지용출품 인용 751쪽)

「무아상경」의 오온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내가 아니다
상행의 「아」생사에 얽매이지 않는 자재
도표 25 · 네 보살과 네 덕

한 중생이 곧 열 중생

마지막으로, 무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자. 「십법계사」는 법화경의 십계호구에 서면 이승과 보살과 범부의 성불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真実に証する時は一衆生即十衆生・十衆生即一衆生なり、若し六界の見思を断ぜざれば二乗の見思を断ず可からず。

참으로 증득할 때는 한 중생이 곧 열 중생이요, 열 중생이 곧 한 중생이니라. 만약 육계의 견혹·사혹을 끊지 못한다면 이승의 견혹·사혹도 끊을 수 없느니라.

「십법계사」, 421쪽

강의는 이것을, 십계호구로 성불을 증득할 때는 지옥의 중생이라는 한 중생의 성불이 그대로 십계 중생 모두의 성불을 뜻하게 된다고 풀이한다. 이승은 「나」를 지워 홀로 열반에 들려 했지만, 육도의 중생을 떠나서는 이승 자신의 미혹도 끊어지지 않는다. 「나」가 정해진 경계를 가진 실체가 아니기에, 한 사람의 생명은 다른 모든 생명과 이어져 있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사이렌보에게 보내신 「생사일대사혈맥초」에서, 이것을 문하의 실천으로 말씀하신다.

総じて日蓮が弟子檀那等・自他彼此の心なく水魚の思を成して異体同心にし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処を生死一大事の血脈とは云うなり

대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이 나와 남,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마음 없이 물과 물고기 같은 생각을 이루어, 몸은 달라도 마음을 같이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생사일대사의 혈맥이라 하느니라.

「생사일대사혈맥초」, 1337쪽

「나와 남,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마음 없이(自他彼此の心なく)」. 무아가 가르친 것이 「나」라는 경계의 해체였다면, 그 해체가 가장 구체적으로 살아나는 자리가 여기다. 그러나 대성인은 「한 몸(同体)」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몸은 다르되(異体)」라고 하신다. 저마다의 몸, 저마다의 오음, 저마다의 「나」는 지워지지 않는다. 6부 첫머리에서 본 「십계 저마다를 가리켜 나라고 한다」가 그대로 살아 있다. 저마다 다른 「나」이면서, 나와 남을 가르는 마음이 없다. 무아는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두던 담을 허무는 것이다.

① 「나」를 붙잡는다외도의 아트만 · 유신견「身見亦我見」신견은 아견이라고도 한다(「일대성교대의」)
② 「나」를 지운다이승의 무아「堅く無我を執して…此れ迷の根本なり」굳게 무아에 집착하는 것이 미혹의 근본이다「色心倶滅の見」색심이 함께 멸한다는 견해(「십법계사」)
③ 「나」를 법계로 연다「我とは法界の衆生なり十界己己を指して我と云うなり」나란 법계의 중생이니 십계 저마다를 가리켜 나라고 한다(『어의구전』 753쪽)「法界を自身と開き」법계를 자신이라고 연다(759쪽)「自他彼此の心なく…異体同心にして」나와 남을 가르는 마음 없이 몸은 달라도 마음을 같이하여(「생사일대사혈맥초」 1337쪽)
도표 26 · 「나」를 대하는 세 단계
맺으며

「나」를 가두던 담

석존은 「변하지 않는 주인」을 찾아 사람을 다섯 무더기로 나누었고, 그 어디에서도 그런 주인을 찾지 못했다. 몸은 「이렇게 되어라」 해도 그렇게 되지 않고,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의식도 뜻대로 부릴 수 없다. 그래서 석존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라고 했다. 그러나 「자아는 없습니까?」라는 물음 앞에서는 침묵했다. 「없다」고 답하는 순간 무아는 또 하나의 견해, 단멸의 견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섬으로 삼으라」고 했다. 무아는 처음부터 「나」를 지우는 말이 아니라 「나」를 붙잡는 손을 푸는 말이었다.

아비달마는 오온·십이처·십팔계로 세계를 빠짐없이 헤아려 「나는 없고 법은 있다」고 했다. 나가세나는 수레의 비유로 「나」가 이름일 뿐임을 보였고, 독자부는 무아가 단견이 될 것을 걱정해 「말할 수 없는 사람」을 세웠으며, 천친은 그것을 상견으로 돌아간 것이라 논파했다. 대승은 법마저 공하다고 했고, 용수는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고 했다. 유식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나」를 붙잡는 말나식을 찾아냈고, 『열반경』은 마침내 「나란 여래장이다」라고 했다.

천태는 그 오음을 십계의 어느 생명으로도 모일 수 있는 바탕으로 보았다. 부처에게도 「상주하는 오음」이 있다. 그리고 오음 가운데 식음, 한 생각의 마음을 관하여 거기서 삼천을 보았다. 대성인은 이 흐름을 받아, 오음이 거짓 화합한 몸임을 풀이하시면서도 그것을 「나는 없다」의 근거로 쓰지 않으시고 십계의 오음으로 펼치셨다. 그리고 「굳게 무아에 집착하는 것이 미혹의 근본」이라 하시어, 무아를 붙잡아 몸과 마음을 지우려는 이승과 구계를 끊고 불계로만 오르려는 권대승을 함께 꾸짖으셨다. 지워서는 안 되는 「구계의 색심」, 곧 우리의 오음·십이입·십팔계가 그대로 법신이다.

그리고 『어의구전』은 「나란 법계의 중생이니, 십계 저마다를 가리켜 나라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자아」의 「자」는 구계, 「아」는 불계다. 법계를 자신이라고 열고, 이 다섯 자의 몸이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이며, 보배 나무에 가득한 꽃과 열매가 오음세간이다. 1부에서 물거품 덩이와 파초에 비유되던 오음이, 6부에서는 꽃과 열매가 가득한 보배 나무가 되었다. 오음의 속이 비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그 빔을 보는 눈이다. 빈 것을 두려워하여 「나」를 세우거나, 빈 것에 머물러 「나」를 지우는 대신, 빈 것이기에 무엇으로도 피어날 수 있음을 보는 눈이다.

수레는 부품이 모인 것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수레는 사람을 싣고 길을 간다. 무아가 가르친 것은 수레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수레에 「변하지 않는 수레 자체」가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법화경은 그 수레를 흰 소가 끄는 큰 수레라 했고, 대성인은 그 수레가 「자신이라는 법성의 대지를 생사생사로 굴러간다」고 하셨다(핵심 개념 「무상」 6부). 정해진 「나」가 없기에 그 수레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나와 남을 가르는 담이 허물어진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몸으로 같은 마음을 품는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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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 「바지라 경」 SN 5.10, 「짐 경」 SN 22.22, 「무아상경」 SN 22.59, 「케마카 경」 SN 22.89, 「물거품 덩이 경」 SN 22.95, 「아난다 경」 SN 44.10, 「초전법륜경」 SN 56.11
  •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 「교리문답 소경」 MN 44, 「말룽꺄 소경」 MN 63
  •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 「대반열반경」 DN 16
  • 『담마파다』(Dhammapada) — 제160송
  •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a) · 『나선비구경』 T32 no.1670
  • 천친 『아비달마구사론』 분별계품 · 파집아품, 현장 역, T29 no.1558
  • 『반야바라밀다심경』, 현장 역, T8 no.251
  •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 역, T8 no.235
  • 용수 『중론』 관법품 · 관여래품 · 관연가연품, 구마라집 역, T30 no.1564
  • 『유마힐소설경』 불국품, 구마라집 역, T14 no.475
  • 『해심밀경』 심의식상품, 현장 역, T16 no.676
  • 천친 『유식삼십송』, 현장 역, T31 no.1586
  • 『대반열반경』(북본), 담무참 역, T12 no.374
  • 『능가아발다라보경』, 구나발타라 역, T16 no.670
  • 『대지도론』, 구마라집 역, T25 no.1509
  • 천태대사 지의 『마하지관』 권5상, T46 no.1911
  • 묘락대사 담연 『법화현의석첨』 T33 no.1717,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 도섬 『법화문구보정기』 권9 (『어의구전』 인용)
  • 니치렌 대성인 「일념삼천이사」 · 「일대성교대의」 · 「십법계사」 · 「시문불승의」 · 「개목초」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 「생사일대사혈맥초」 · 『어의구전』 (창가학회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강의 · 연구

  • 창가교학연구실, 「一念三千理事」 · 「十法界事」 · 「一代聖教大意」 · 「始聞仏乗義」 · 「開目抄」 · 「三世諸仏総勘文教相廃立」 각 장 강의
  • 平川彰, 『インド仏教史』 上, 春秋社,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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