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기경 간다라, 한 브라만 집안에 세 형제가 태어났다. 셋 모두 바수반두라는 이름을 받았다. 둘째 바수반두는 카슈미르에서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배워 불교 학문의 교과서가 된 『구사론(俱舍論)』을 지었고, 대승을 「부처의 말씀이 아니다」라며 비판했다. 그런데 형 무착(無著)의 부름을 받고 대승 경전을 들은 밤, 그는 지난날 대승을 헐뜯은 혀를 끊으려 했다. 형은 말렸다. 그 혀로 대승을 찬탄하라. 그 뒤 그는 유식의 논서들과 인도에 남은 유일한 법화경 주석을 지었고, 「천 부의 논사」라 불렸다. 동아시아는 그를 천친(天親), 또는 세친(世親)이라 부른다.
용수가 공(空)의 논사였다면, 천친은 마음(識)의 논사였다. 용수가 「모든 것은 연기하므로 자성이 없다」고 했다면, 천친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앎이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인도 대승 불교의 두 기둥,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을 대표한다. 동아시아의 삼론종이 용수를, 법상종이 천친을 조사로 받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천친의 생애에는 용수에게 없는 극적인 전환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대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소승의 가장 뛰어난 학자로 이름을 떨친 뒤, 중년에 대승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전환을 참회로 기억했다. 대성인은 이 참회를 여러 어서에서 이야기하셨다. 「방법(謗法)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 천 부의 논사가 참회를 했겠는가」(「현방법초」, 455쪽).
대성인은 천친의 생애 전체를 또 하나의 눈으로 보셨다. 천친은 먼저 소승의 『구사론』을, 다음에 권대승의 논서들을, 마지막으로 『불성론』과 『법화론』을 지었다. 석존이 아함에서 방등 · 반야를 거쳐 법화경에 이른 순서와 같다(「창법화제목초」, 8쪽). 이 페이지는 그 길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따라간다.
- 1부 간다라의 세 형제 — 시대, 전기, 이름, 카슈미르의 유학.
- 2부 『구사론』의 저자 — 소승 교학의 집대성, 중현과의 논쟁, 아요디야.
- 3부 형의 부름 — 무착과 미륵, 한밤의 독송, 혀의 참회, 천 부의 논서.
- 4부 오직 앎뿐 — 『유식삼십송』, 아뢰야식과 종자, 법상종과 오성각별.
- 5부 『법화론』 — 인도에 남은 법화경 주석, 연꽃의 두 뜻, 종자무상, 네 가지 성문.
- 6부 대성인이 본 천친 — 권에서 실로, 『불성론』과 방법, 혀의 참회, 안으로 안 법, 교법 유포의 선후.
- 푸루샤푸라간다라 · 지금의 페샤와르 — 출생지
- 카슈미르설일체유부의 본거지 — 유부 유학
- 도솔천지도 밖 위쪽 — 무착과 미륵 (전승)
- 아요디야굽타 왕조 · 현장의 「아유타국」 — 후반 생애와 입멸
- 날란다뒤의 유식 학문 중심 · 5세기 이후
- 중국으로지도 밖 오른쪽 — 보리류지(508 낙양) · 진제(546 남조) · 현장(645 귀국)
시대 — 굽타 왕조의 인도
용수가 세상을 떠나고 한두 세기 뒤, 북인도는 다시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 4세기 초 갠지스 강 유역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가 찬드라굽타 2세 무렵 북인도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다. 산스크리트 문학과 천문학, 수학이 꽃핀 이 시대를 흔히 인도의 고전기라 부른다. 5세기 초 인도를 여행한 중국의 법현(法顯)은 불교 사원들이 곳곳에서 번성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뒤에 동아시아 불교 학문의 중심이 되는 날란다 사원도 이 왕조 시대에 세워졌다.
같은 시대, 브라만의 전통도 다시 힘을 얻었다. 상캬(數論) · 니야야(正理) · 바이셰시카(勝論) 등 여섯 학파의 철학이 체계를 갖추었고, 이들은 불교와 치열하게 논쟁했다. 용수 편 14절에서 본 인식 수단의 논쟁은 이 시대에 더 정교해졌다.
불교 안에서는 세 흐름이 겨루었다.
-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서북 인도와 카슈미르에서 가장 강한 부파. 모든 법(dharma)이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쳐 실재한다고 보고, 거대한 주석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이백 권을 교학의 근본으로 삼았다.
- 경량부(經量部) — 논서가 아니라 경(經)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의 이름. 유부의 실재론을 비판하고, 법은 현재 한 찰나에만 있다고 보았다.
- 유가행파(瑜伽行派) — 대승의 새 흐름. 요가(瑜伽), 곧 선정의 수행 속에서 마음을 관찰한 끝에 「세계는 오직 앎(識)의 드러남」이라는 유식의 이론을 세웠다. 전승은 그 시작을 미래불 미륵(彌勒)에게 돌린다.
천친의 생애는 이 세 흐름을 차례로 지나간다. 유부의 교학을 배우고, 경량부의 입장에서 그것을 비판하고, 마침내 유가행파의 대승으로 들어갔다.
전기의 층
천친의 생애를 전하는 가장 자세한 기록은 6세기 중엽 중국 남조에 온 인도 승려 진제(眞諦, Paramārtha)가 옮긴 『바수반두법사전(婆藪槃豆法師傳)』(T50 no.2049)이다. 진제는 천친의 유식 논서들을 중국에 옮긴 번역가이기도 하다. 7세기의 현장은 『대당서역기』 권2 간다라 대목에서 천친이 태어난 집터를, 권5 아유타국(阿踰陀國) 대목에서 무착과 천친이 머문 곳을 전한다. 티베트의 부톤과 타라나타의 불교사도 천친의 전기를 전하는데, 날란다와의 관계, 여러 왕과의 인연이 더해져 있다.
연대 대조 — 천친의 연대는 학계에서 오래 논쟁되어 왔다. 4세기로 보는 견해(대략 320~400)와 5세기로 보는 견해(대략 400~480)가 있고, 오스트리아의 불교학자 프라우발너(E. Frauwallner)는 1951년 『구사론』의 저자와 유식 논서의 저자를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보는 「두 세친설」을 내놓았다. 이 설은 지금은 소수 견해이며, 많은 연구자가 한 사람으로 보되 연대를 4세기 후반~5세기로 둔다. 불전의 전통 연대는 천친을 「불멸 후 구백 년」의 사람으로 전하며, 대성인도 「수호국가론」에서 「여래 멸후 구백 년에 세상에 나와(如来の滅後・九百年に出世して)」(49쪽)라고 쓰셨다. 이 페이지는 본문에 「4~5세기경」을 쓴다.
| 항목 | ① 『바수반두법사전』6세기 · 진제 | ② 『대당서역기』 권2 · 권4 · 권5646 · 현장 | ③ 티베트 불교사부톤 1322 · 타라나타 1608 |
|---|---|---|---|
| 출생과 형제 | 있음 | 권2 집터 | 확인 중 |
| 카슈미르 유학 | 확인 중 | 확인 중 | 다르게 전함 — 신분을 숨기고 네 해 |
| 『구사론』 | 확인 중 | 확인 중 | 확인 중 |
| 중현과의 논쟁 | 확인 중 | 권4 | 확인 중 |
| 아요디야와 굽타 왕 | 있음 | 권5 아유타국 | 확인 중 |
| 무착의 부름 | 있음 | 확인 중 | 확인 중 |
| 혀의 참회 | 있음 | 확인 중 | 확인 중 |
| 대승 논서 | 있음 | 확인 중 | 확인 중 |
| 입멸 | 여든 살 | 확인 중 | 확인 중 |
- 출생과 형제
- 있음
- 카슈미르 유학
- 확인 중
- 『구사론』
- 확인 중
- 중현과의 논쟁
- 확인 중
- 아요디야와 굽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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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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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슈미르 유학
- 다르게 전함 — 신분을 숨기고 네 해
- 『구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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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형제의 이름
『바수반두법사전』은 천친을 북천축 간다라국 푸루샤푸라(富婁沙富羅,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사람으로 전한다. 아버지는 교시가(憍尸迦) 가문의 브라만으로 나라의 스승이었다. 아들 셋이 모두 「바수반두」라는 이름을 받았다. 전기는 이름이 같으면서도 셋을 구별하는 별명을 전한다.
- 맏이 — 무착(無著, Asaṅga). 처음에 설일체유부로 출가했으나 공(空)의 뜻을 깨닫지 못해 괴로워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신통으로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에게서 대승의 공관을 배웠고, 그 뒤 미륵에게 청해 대승의 가르침을 인간 세계에 전하게 했다. 「집착 없음」이라는 이름은 이 깨달음에서 온 것이라 한다.
- 둘째 — 바수반두(婆藪槃豆, Vasubandhu). 이 페이지의 주인공이다. 「바수(vasu)」는 신(天) 또는 세간(世)을, 「반두(bandhu)」는 친족을 뜻한다. 6세기 초 보리류지(菩提流支) 등의 옛 번역은 「천친(天親)」, 7세기 현장의 새 번역은 「세친(世親)」으로 옮겼다. 대성인의 어서에는 두 이름이 함께 나온다.
- 막내 — 비린지발바(比隣持跋婆, Viriñcivatsa). 설일체유부로 출가해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한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무착의 전승을 이렇게 적으셨다. 「서천의 불멸 후 구백 년에 무착보살이라는 대논사가 있었다. 밤에는 도솔천 내원에 올라 미륵보살을 뵙고 일대성교의 의문을 풀고, 낮에는 아유사국에서 법상의 법문을 넓히셨다. 그 제자는 세친 · 호법 · 난타 · 계현 등의 대논사다(彼の御弟子は世親・護法・難陀・戒賢等の大論師なり)」(198쪽). 법상종이 스스로 내세운 계보를 대성인이 옮겨 적으신 대목이다. 무착과 세친을 스승과 제자로 두는 이 계보에서, 두 사람은 형제이자 사제였다.
세 아들 모두 「바수반두」
(3부)
연구 노트 — 무착이 도솔천의 미륵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전승과 관련해, 유가행파의 기본 논서들(『유가사지론』 · 『대승장엄경론』 · 『중변분별론』 등)이 미륵의 저작으로 전한다. 학계에는 이 「미륵」을 무착의 스승인 역사적 인물로 보는 견해와, 무착이 선정 속에서 받은 가르침을 미래불의 이름으로 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카슈미르의 유학
천친은 형처럼 설일체유부로 출가했다. 그 무렵 유부 교학의 본거지는 카슈미르였다. 카슈미르의 유부는 자신들의 교학, 특히 『대비바사론』이 다른 나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지켰다고 전한다. 티베트와 중국의 전승에는 천친이 신분을 숨기고 카슈미르에 들어가 네 해 동안 비바사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배우는 동안 스승의 설명에 자주 반론을 제기했고, 그 날카로움 때문에 정체가 드러날 뻔했다고도 한다.
『바수반두법사전』은 또 한 가지 일을 전한다. 상캬 학파의 논사 빈디야바사(頻闍訶婆娑)가 아요디야에서 불교의 논사들과 논쟁했는데, 천친의 스승인 불타밀다라(佛陀蜜多羅)가 늙어 이 논쟁에서 졌다. 상캬 논사는 왕에게서 큰 상을 받고 자신의 학설을 『금칠십론(金七十論)』으로 남겼다. 천친은 돌아와서 이를 알고 크게 분하게 여겨, 『칠십진실론(七十眞實論)』을 지어 상캬의 학설을 낱낱이 깨뜨렸다. 상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왕은 천친에게 금 삼십만 냥을 상으로 주었고, 천친은 그것으로 절 세 곳을 지었다고 전한다.

젊은 천친은 무엇보다 논쟁가였다. 그의 학문은 외도의 철학과 불교의 여러 부파를 모두 상대로 삼았다. 용수가 인도 논리학 전체와 맞섰던 것처럼, 천친도 당대의 모든 학문과 겨루며 자신의 사상을 다듬었다.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정법 뒤 오백 년의 논사들이 「처음에는 외도의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에는 소승경을 끝까지 배우고, 뒤에는 여러 대승경으로 여러 소승경을 깨뜨렸다」고 쓰셨다(261쪽, 용수 편 9절). 브라만의 집에서 태어나 유부의 교학을 끝까지 배운 천친은 그 길을 가장 뚜렷하게 걸은 사람이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의 자세 하나를 읽는다. 천친은 외도와 소승을 겉핥기로 배우고 버리지 않았다. 끝까지 배웠기에 그 한계를 알았고, 그 한계를 알았기에 대승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대성인 자신도 이십 년의 유학으로 팔종과 여러 종파를 「대략 익힌」 뒤에 입종하셨다(니치렌 편 4절).
『구사론』 — 「지혜의 곳간」
카슈미르에서 돌아온 천친은 유부의 교학을 강의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하루 강의를 마칠 때마다 그날의 내용을 한 게송으로 요약했고, 그렇게 모인 약 육백 게송을 카슈미르의 유부 학승들에게 보냈다. 카슈미르의 학승들은 자신들의 교학이 이처럼 정확하게 요약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천친이 그 게송에 스스로 산문 주석을 붙여 보내자 태도가 바뀌었다. 주석 곳곳에서 천친은 유부의 주장을 소개한 뒤 「이것은 유부의 설이다」라고 적고, 경량부의 입장에서 반론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책이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bhāṣya)』이다. 「구사(kośa)」는 「곳간 · 칼집」이라는 뜻이다. 아비달마, 곧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모두 담은 곳간이다. 한역은 6세기 진제의 『구사석론』(T29 no.1559)과 7세기 현장의 『구사론』 삼십 권(T29 no.1558)이 있다.
『구사론』은 아홉 품으로 되어 있다.
- 1 계품(界品) · 2 근품(根品) — 존재를 이루는 요소(法)의 분류.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 3 세간품(世間品) — 중생이 사는 세계의 구조와 윤회. 십이연기(교리 一).
- 4 업품(業品) — 행위와 그 과보.
- 5 수면품(隨眠品) — 번뇌.
- 6 현성품(賢聖品) · 7 지품(智品) · 8 정품(定品) — 수행의 단계, 지혜, 선정.
- 9 파아품(破我品) —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논증. 뒤에 따로 붙은 품.
- 색법色法11
- 심법心法1
- 심소법心所法46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14
- 무위법無爲法3
『구사론』은 곧 불교 학문의 교과서가 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구사종(俱舍宗)이 성립했고, 대승의 학승들도 불교의 기초 개념을 이 책으로 배웠다. 일본의 학승들 사이에는 「유식 삼 년, 구사 팔 년」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구사를 제대로 익히는 데 팔 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대성인도 『구사론』을 깊이 읽으셨다. 교리 一에서 보았듯, 대성인은 서른일곱 무렵의 초고 「일념삼천이사」에서 십이인연의 열두 마디를 하나하나 『구사론』의 게송으로 풀으셨다(406쪽). 「일대성교대의」는 견혹과 사혹을 설명하며 「이 법문은 아함경 사십 권, 『바사론』 이백 권, 『정리론』, 『현종론』, 『구사론』에 자세히 밝혔다. 따로 구사종이라는 종파가 있다」(391쪽)고 적는다. 대성인은 소승의 교학을 버리기 전에 먼저 그것을 정확히 배우셨다.
중현과의 논쟁 — 「나는 이미 늙었다」
『구사론』은 유부 안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카슈미르의 유부 논사 중현(衆賢, Saṅghabhadra)은 십이 년에 걸쳐 『구사론』을 반박하는 책을 썼다. 『구사박론(俱舍雹論)』, 곧 「구사를 우박처럼 부수는 논」이라 이름한 이 책이 뒤에 『순정리론(順正理論)』(T29 no.1562)이 되었다. 중현은 책을 들고 천친과 직접 논쟁하려고 길을 떠났다.
현장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천친은 중현이 온다는 말을 듣고 자리를 피했다. 제자들이 까닭을 묻자 천친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미 늙었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막을 수 없다. 그가 온다 해도 내 논의 뜻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중현은 천친을 만나지 못한 채 길에서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중현은 천친에게 편지를 남겨, 자신의 책이 천친의 뜻을 드러내는 데 쓰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천친은 그 책을 읽고 「이 논은 내 뜻을 잘 밝혔다」며 이름을 『순정리론』, 곧 「바른 이치를 따르는 논」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적수의 책에 새 이름을 붙여 준 이야기다. 논쟁의 승패보다 이치가 드러나는 것을 중시한 논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연구 노트 — 중현과의 일화는 『대당서역기』 권4 등에 전하며, 세부는 전승마다 다르다. 학계는 『순정리론』이 실제로 『구사론』의 경량부적 비판에 대한 유부의 체계적 반론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논쟁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본다. 천친이 『구사론』을 쓸 때 이미 대승에 기울어 있었는지는 연구자 사이에 견해가 갈린다.
아요디야의 두 왕
『바수반두법사전』은 천친의 후반 생애를 중인도의 아요디야(阿踰闍, Ayodhyā)에 둔다. 서사시 『라마야나』의 무대로 알려진 옛 도시다. 전기에 따르면 그곳의 왕 정근일(正勤日, Vikramāditya)이 천친을 깊이 공경했고, 왕비와 태자 신일(新日, Bālāditya)도 천친에게 배웠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천친을 나라에 머물게 하여 받들었다. 천친은 이 도시에서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현장은 아유타국에 무착과 천친이 머문 옛 절이 있다고 기록했다.

연구 노트 — 전기의 「정근일」 · 「신일」을 굽타 왕조의 어느 왕으로 볼지는 천친 연대 논쟁의 중요한 근거다. 찬드라굽타 2세(비크라마디티야 칭호)와 그 아들로 보면 천친은 4세기 후반~5세기 초의 사람이 되고, 5세기의 스칸다굽타와 나라심하굽타 발라디티야로 보면 5세기 중후반의 사람이 된다. 정해지지 않았다.
『구사론』은 소승의 교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대성인은 이 소승의 교학을 「부처가 삼장교에서 설하신 것」으로 존중하면서도, 거기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셨다. 「개목초」는 「구사 · 성실 · 율종 등은 아함경에 의지했다. 육계를 밝혔으나 사계를 알지 못한다(倶舎・成実・律宗等は阿含経によれり六界を明めて四界をしらず)」(189쪽)고 한다. 지옥에서 천까지의 여섯 세계(六道)는 자세히 분석했으나, 성문 · 연각 · 보살 · 부처의 네 세계는 온전히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창가학회는 『구사론』의 정밀한 분석을 불교 학문의 토대로 배우면서, 그 분석이 가리키는 곳, 곧 괴로움의 생명에 부처의 생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법화경의 뜻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천친 자신이 그 길을 걸었다.
무착과 미륵 — 유가행파의 성립
천친이 『구사론』으로 이름을 떨칠 무렵, 형 무착은 이미 대승의 논사가 되어 있었다. 무착의 대표작 『섭대승론(攝大乘論)』은 대승의 가르침 전체를 열 가지 주제로 정리한 책으로, 유식의 체계를 처음으로 온전하게 세웠다. 전승은 무착이 도솔천의 미륵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인간 세계에 전했다고 하며, 그 가르침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백 권(T30 no.1579)으로 전한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무착의 이 전승을 두 번 부르셨다. 한 번은 3절에서 본 법상종의 계보이고, 다른 한 번은 용수 편 5절의 해석에서 본 대목이다. 「용수처럼 용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무착보살처럼 미륵보살을 만나지 않아도(無著菩薩のごとく弥勒菩薩にあはずとも), 일대의 우열은 알 수 있을 것이다」(223쪽). 용궁의 용수와 도솔천의 무착. 인도 대승의 두 흐름이 모두 인간 세계 밖에서 가르침을 받아 왔다는 전승을 가졌다. 대성인은 그런 신비한 체험 없이도 법화경의 경문으로 일대의 우열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한밤의 독송 — 혀를 끊으려 하다
『바수반두법사전』이 전하는 천친의 회심은 이렇다.
무착은 동생의 재능이 뛰어나 대승을 깨뜨리는 논을 지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병이 깊다는 소식을 보내 동생을 불렀다. 천친이 급히 찾아와 병의 까닭을 묻자 무착은 답했다. 내 마음에 큰 병이 있으니 그 병은 너 때문에 생겼다. 네가 대승을 믿지 않고 늘 헐뜯으니, 그 업으로 반드시 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근심스러워 목숨이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그날 밤 무착은 제자에게 동생의 방 밖에서 대승 경전을 읽게 했다. 『십지경(十地經)』과 『무진의경(無盡意經)』이었다. 천친은 경을 듣다가 대승의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난날 자신이 대승을 헐뜯은 일을 뼈저리게 뉘우쳤다. 전기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칼을 구해 자신의 혀를 끊으려 했다. 이 혀로 대승을 헐뜯었으니 이 혀를 끊어 그 죄를 참회하겠다.
무착이 그를 말렸다. 네가 혀를 끊는다 해도 그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네가 지난날 혀로 대승을 헐뜯었다면, 이제부터 그 혀로 대승을 잘 풀이하여 찬탄하라. 그것이 죄를 없애는 길이다.

그 뒤 천친은 형에게서 대승을 배우고, 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대승의 논서들을 차례로 지었다. 『십지경론』은 그날 밤 들은 『십지경』에 대한 주석이다.

연구 노트 — 천친이 혀를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는 『바수반두법사전』과 여러 전승에 공통되며, 동아시아에서 참회의 전형으로 널리 알려졌다. 학계에는 천친의 초기 저작(『구사론』)과 후기 저작(유식 논서) 사이에 사상의 연속성이 크다는 점을 들어, 「극적인 회심」이 뒤에 정형화된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페이지는 전승을 전승으로 전한다.
천 부의 논사
회심한 천친은 소승의 논 오백 부에 이어 대승의 논 오백 부를 지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천 부의 논사(千部の論師)」라 불린다. 대성인도 이 이름을 여러 번 쓰셨다(「법화행자봉난사」, 965쪽 · 「관심본존초」, 243쪽 · 「찬시초」, 267쪽). 실제로 한역과 티베트역에 천친의 이름으로 전하는 논서는 수십 부에 이른다.
유식의 논서 —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T31 no.1590) ·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T31 no.1586) ·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T31 no.1614) · 『대승오온론』 ·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형 무착과 미륵의 논서에 대한 주석 —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진제 역 T31 no.1595 · 현장 역 no.1597) · 『변중변론(辯中邊論)』(T31 no.1600) · 『대승장엄경론』의 주석(전승).
대승 경전의 주석 — 『십지경론(十地經論)』(T26 no.1522) · 『금강반야바라밀경론』(T25 no.1511) · 『묘법연화경우바제사(法華論)』(T26 no.1519 · 1520) ·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往生論)』(T26 no.1524) · 『열반론』(T26 no.1527, 귀속 논쟁).
그 밖에 — 『불성론(佛性論)』(T31 no.1610, 진제 역 — 귀속 논쟁) · 논리학의 논서들(전승).
千部の論師— 소승 오백 · 대승 오백(전승)
| 이름 | 한역 (역자 · T번호) | 귀속 |
|---|---|---|
| 소승아함 십이 년의 뜻 | ||
| 『구사론』俱舍論 | 현장 역 T29 no.1558 · 진제 역 『구사석론』 T29 no.1559 | 확실 |
| 『칠십진실론』七十眞實論 | 전하지 않음 | 전승 |
| 권대승사십여 년의 뜻 | ||
|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 현장 역 T31 no.1590 | 확실 |
|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 현장 역 T31 no.1586 | 확실 |
|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 현장 역 T31 no.1614 | 확실 |
|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 진제 역 T31 no.1595 · 현장 역 no.1597 | 확실 |
| 『변중변론』辯中邊論 | 현장 역 T31 no.1600 | 확실 |
| 『십지경론』十地經論 | 보리류지 등 T26 no.1522 | 확실 |
|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蜜經論 | 보리류지 역 T25 no.1511 | 확실 |
| 『왕생론』往生論 | 보리류지 역 T26 no.1524 | 확실 |
| 실대승대략 실대승의 뜻 | ||
| 『법화론』法華論 | 보리류지 · 담림 역 T26 no.1519 · 늑나마제 · 승랑 역 no.1520 | 확실 |
| 『열반론』涅槃論 | 달마보리 역 T26 no.1527 | 귀속 논쟁 |
| 『불성론』佛性論 | 진제 역 T31 no.1610 | 귀속 논쟁 |

이 목록에서 눈에 띄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왕생론』이다. 정토왕생을 노래한 이 짧은 게송과 주석은 뒤에 중국 정토교의 담란(曇鸞)이 『왕생론주』를 지어, 용수의 『십주비바사론』 이행품과 함께 정토교의 근거로 삼았다(용수 편 18절). 다른 하나는 『법화론』이다. 인도에서 지어진 법화경의 주석으로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이 책 하나뿐이다. 5부에서 자세히 본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렇게 쓰셨다. 「세친보살 · 마명보살은 소승으로 대승을 깨뜨린 죄를 뉘우쳐 혀를 끊으려고까지 하셨다(世親菩薩・馬鳴菩薩は小をもつて大を破せる罪をば舌を切らんとこそせさせ給いしか)」(315쪽). 그 대목은 이렇게 이어진다. 세친은 부처의 말씀인 아함경이라도 「장난으로라도 혀 위에 올리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마명은 참회를 위해 『기신론』을 지어 소승을 깨뜨렸다. 대성인이 이 이야기를 드신 까닭은 6부 21절에서 본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짚는다. 천친은 뉘우침을 혀를 끊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 혀로 천 부의 논을 지었다. 창가학회는 이것을 참회가 과거를 벌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의 행동으로 바뀌는 모습으로 읽는다. 교리 一 25절에서 본 「전중경수(轉重輕受)」와 같은 방향이다.
『유식이십론』 — 꿈속의 세계
천친의 대승 논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것은 짧은 두 편이다. 스물두 게송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서른 게송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앞의 것은 유식의 논증을, 뒤의 것은 유식의 체계를 담았다.
『유식이십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승에서는 삼계가 오직 앎(唯識)이라고 세운다. 마음 밖에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이 일어날 때 대상처럼 보이는 모습이 함께 나타날 뿐이다. 마치 눈병 난 사람이 허공에 머리카락이나 파리가 있는 듯이 보는 것과 같다.
그러자 반론이 나온다. 대상이 마음 밖에 없다면 왜 어떤 것은 어떤 장소에서만, 어떤 때에만 보이는가. 왜 여러 사람이 같은 것을 함께 보는가. 왜 그 대상이 실제로 작용하는가. 천친은 이 네 반론에 꿈으로 답한다. 꿈속에서도 특정한 장소와 때에 특정한 것이 보이고, 꿈속의 음식도 꿈속의 배를 채우며, 꿈의 경험도 몸에 흔적을 남긴다. 여러 사람이 같은 것을 보는 일은 아귀들이 같은 강을 보고 모두 고름과 피가 흐른다고 보는 것과 같다. 같은 업을 지은 이들은 같은 세계를 본다.
눈병 난 사람이 허공에 머리카락을 보듯 (첫 게송의 비유)
이것은 세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바깥의 세계」라 여기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앎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말이다. 교리 一 15절에서 본 화엄경의 「삼계는 허망하니 다만 이 마음이 지은 것이다」, 교리 一 5절에서 본 「식과 명색은 갈대 묶음처럼 서로 기댄다」가 유식에서 체계적인 이론이 되었다.
『유식삼십송』 — 여덟 가지 앎과 세 가지 성품
『유식삼십송』의 첫 게송은 이렇다.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거짓으로 「나」와 「법」을 말하기에 갖가지 모습이 굴러간다. 그것은 앎이 바뀌어 나타난 것에 의지한다. 바꾸어 나타내는 앎은 오직 셋이니, 이숙(異熟)과 사량(思量)과 대상을 가려 아는 앎이다.
「나」와 「세계」는 앎이 바뀌어 나타난 것이다. 그 앎은 세 층으로 되어 있다.
- 아뢰야식(阿賴耶識) · 제8식 — 「이숙」의 앎. 모든 경험의 종자(種子)를 간직하는 가장 깊은 층의 앎. 지은 업이 종자로 심어지고, 종자가 무르익어 다음의 경험으로 드러난다. 교리 一 15절의 「이세일중인과」는 이 아뢰야식의 종자로 십이연기를 다시 읽은 것이다.
- 말나식(末那識) · 제7식 — 「사량」의 앎. 아뢰야식을 붙잡고 「이것이 나다」라고 끝없이 헤아리는 앎. 나에 대한 집착의 뿌리.
- 여섯 가지 앎(六識) — 눈 · 귀 · 코 · 혀 · 몸 · 뜻의 앎. 대상을 가려 안다.
- 제1~6 육식了別境대상을 앎눈 · 귀 · 코 · 혀 · 몸 · 뜻의식 → 묘관찰지전오식 → 성소작지
- 제7 말나식思量「나」라고 헤아림나에 대한 집착의 뿌리→ 평등성지
- 제8 아뢰야식異熟종자를 간직지은 업이 종자로 심어지고, 무르익어 드러남→ 대원경지
그리고 천친은 모든 존재를 세 가지 성품(三性)으로 나눈다. 교리 二 9절에서 짧게 보았던 것이다.
-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두루 헤아려 집착한 모습. 어두운 길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보는 것과 같다. 뱀은 없다.
- 의타기성(依他起性) — 다른 것에 의지해 일어난 모습. 새끼줄은 삼과 꼬임이라는 조건에 의지해 있다. 연기하는 세계다.
- 원성실성(圓成實性) — 두루 이루어진 참된 모습. 의타기의 세계에서 헛된 집착을 떠났을 때 드러나는 진여(眞如). 새끼줄이 본래 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수행의 끝에서 이 여덟 가지 앎은 네 가지 지혜로 바뀐다. 이것을 「앎을 바꾸어 지혜를 얻는다(轉識得智)」고 한다. 아뢰야식은 모든 것을 거울처럼 비추는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말나식은 나와 남이 평등함을 보는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뜻의 앎은 모든 것을 바르게 관찰하는 묘관찰지(妙觀察智)로, 다섯 감각의 앎은 해야 할 일을 이루는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바뀐다. 미혹의 앎과 깨달음의 지혜는 두 개의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앎이 바뀐 것이다. 교리 一 19절에서 본 「무명과 법성은 한 몸」, 교리 二 15절의 「흐린 거울도 닦으면 구슬이 된다」와 방향이 닮았다.
연구 노트 — 『유식삼십송』은 천친이 게송만 남기고 주석을 달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뒤에 인도의 열 논사가 저마다 주석을 달았고, 현장은 그 가운데 호법(護法, Dharmapāla)의 해석을 중심으로 열 가지 주석을 하나로 엮어 『성유식론(成唯識論)』(T31 no.1585)을 옮겼다. 동아시아의 법상종이 따른 것은 이 호법 계통의 해석이다. 학계에는 천친 자신의 유식과 호법 계통의 유식, 그리고 안혜(安慧, Sthiramati) 계통의 유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연구가 많다.
법상종과 「오성각별」
천친의 유식이 동아시아에 크게 뿌리내린 것은 7세기 현장(玄奘)에 의해서였다. 인도에 열일곱 해를 머문 현장은 날란다에서 계현(戒賢)에게 유식을 배우고 돌아와, 『성유식론』과 『유가사지론』 등을 옮겼다. 그의 제자 자은(慈恩) 대사 규기(窺基)가 이를 바탕으로 법상종(法相宗)을 세웠다. 법상종은 일본에 일찍 전해져, 나라의 흥복사(山階寺) · 약사사를 중심으로 남도 육종의 하나가 되었다.
법상종의 교의 가운데 대성인이 가장 강하게 비판하신 것이 「오성각별(五性各別)」이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다섯 가지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 보살정성(菩薩定性) — 반드시 부처가 된다.
- 연각정성 · 성문정성(緣覺 · 聲聞定性) — 연각 · 성문의 깨달음에 이를 뿐, 부처가 되지 못한다(決定性의 이승).
- 부정성(不定性) — 가르침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다.
- 무성(無性) — 어떤 깨달음의 종자도 없어 영원히 해탈하지 못한다(無性有情).
그렇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법화경의 일불승은 무엇인가. 법상종은 법화경의 일승이 부정성의 중생을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다(一乘方便 · 三乘眞實).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법상종의 주장을 그 목소리 그대로 옮기셨다.
まづ眼を閉じて案ぜよ法華経・涅槃経に決定性・無性有情・正く仏になるならば無著・世親ほどの大論師・玄奘・慈恩ほどの三蔵・人師これをみざるべしや此をのせざるべしやこれを信じて伝えざるべしや、弥勒菩薩に問いたてまつらざるべしや
먼저 눈을 감고 생각해 보라. 법화경 · 열반경에서 결정성과 무성유정이 참으로 부처가 된다면, 무착 · 세친 같은 대논사와 현장 · 자은 같은 삼장 · 인사가 이것을 보지 못했겠는가, 싣지 않았겠는가, 믿고 전하지 않았겠는가, 미륵보살께 여쭙지 않았겠는가.
법상종은 무착과 세친의 권위를 들어 법화경의 이승작불을 방편이라 했다. 대성인은 「개목초」의 이 대목에서 법상종의 주장을 끝까지 들려주신 뒤, 법화경의 경문으로 답하셨다. 「중생심어서」는 현장이 전한 이 종지를 「천태종과 물과 불(此の義は天台宗と水火なり)」(1592쪽)이라 했고, 「보은초」는 「법화경을 뒤집어 삼승이 진실이고 일승은 방편이며 오성은 각각 다르다고 한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法華経を打ちかへして三乗真実・一乗方便・五性各別と申せし事は心うかりし事なり)」(301쪽)고 했다.
- ●보살정성→ 부처
- ◐연각정성→ 벽지불에 머묾
- ◐성문정성→ 아라한에 머묾
- ○부정성→ 인연에 따라
- ✕무성→ 해탈 없음
1592
- 보살정성→ 부처
- 연각정성→ 부처
- 성문정성→ 부처
- 부정성→ 부처
- 무성→ 부처
그렇다면 대성인은 천친을 법상종과 같은 자리에 두셨는가. 그렇지 않다. 용수 편 20절에서 본 「관심본존초」의 천태 인용이 여기서도 기준이 된다. 「천친 · 용수는 안으로 비추어 봄이 맑고 분명하였으나 밖으로는 때에 맞추어 방편에 의거했다. 그런데 인사들은 한쪽으로 풀고 학자들은 구차하게 집착했다」(244쪽). 무착과 천친이 유식을 설한 것은 그때에 맞춘 방편이었고, 그것을 모든 중생의 성품이 영원히 정해져 있다는 교의로 굳힌 것은 뒤의 인사들이었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수호국가론」에서 「법상종의 정성 · 무성의 불성불」을 「역자와 인사의 잘못」의 목록에 넣으셨다(45쪽).
유식은 마음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불교 사상의 하나다. 창가학회는 유식이 밝힌 마음의 구조, 특히 행위가 종자로 심어지고 그 종자가 다시 삶으로 드러난다는 이해를 가볍게 보지 않는다. 대성인의 「숙명전환」과 「인간혁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 통찰은 깊이 닿아 있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 마음의 밑바닥에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는 종자, 곧 「무성」이 있다는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교리 五 「일념삼천」이 밝히듯, 지옥의 생명에도 부처의 생명이 갖추어져 있다. 교리 一 13절에서 본 「볶은 종자」의 이승조차 법화경에서 부처가 된다. 천친이 연 유식의 문은 법화경의 일불승을 향해 열려 있을 때에야 제자리를 찾는다. 그 문을 천친 자신이 열었다는 것을, 5부의 『법화론』이 보여 준다.
인도에 남은 유일한 법화경 주석
천친의 『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憂波提舍)』, 줄여서 『법화론(法華論)』은 인도에서 지어진 법화경의 주석 가운데 지금까지 전하는 유일한 책이다. 「우바제사(upadeśa)」는 「가르침을 풀어 설함」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전하지 않고, 6세기 초 북위에서 두 차례 한역되었다. 보리류지(菩提流支)와 담림(曇林)의 번역(T26 no.1519)과, 늑나마제(勒那摩提)와 승랑(僧朗)의 번역(T26 no.1520)이다.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한 문답을 두셨다. 정법 천 년의 논사들도 법화경을 넓히지 않았느냐는 물음이다.
天親菩薩は千部の論師・法華論を造りて諸経の中第一の義を存す真諦三蔵の相伝に云く月支に法華経を弘通せる家・五十余家・天親は其の一也
천친보살은 천 부의 논사로서 『법화론』을 지어 (법화경이) 여러 경 가운데 제일이라는 뜻을 두었다. 진제 삼장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인도에서 법화경을 넓힌 집안이 오십여 가 있었고 천친은 그 하나라고 한다.
대성인은 이 물음에 「기(機)에 따라 법을 설한다는 것은 세간의 학자들의 생각이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시며, 법이 퍼지는 것은 기가 아니라 「때」에 달려 있다고 하셨다(267쪽). 천친이 『법화론』을 지어 법화경이 제일임을 알았다 해도, 그것은 아직 법화경이 널리 퍼질 때가 아니었다. 이 뜻은 6부에서 본다.
『법화론』은 법화경 전체를 고르게 주석한 책이 아니다. 서품과 방편품을 자세히 풀고, 그 뒤로는 비유품에서 안락행품까지의 일곱 가지 비유(七喩)와 그것이 다스리는 일곱 가지 교만, 성문들의 수기, 그리고 여래수량품 이후의 몇 대목을 간추려 푼다.
- 1서
- 2방편
- ①3비유
- ②4신해
- ③5약초유
- 6수기
- ④7화성유
- ⑤8오백제자수기
- 9수학무학인기
- 10법사
- 11견보탑
- 12제바달다
- 13권지
- ⑥14안락행
- 15종지용출
- ⑦16여래수량
- 17분별공덕
- 18수희공덕
- 19법사공덕
- 20상불경보살
- 21여래신력
- 22촉루
- 23약왕보살본사
- 24묘음보살
- 25관세음보살보문
- 26다라니
- 27묘장엄왕본사
- 28보현보살권발
- 자세히 풂 — 서품 · 방편품
- 간추려 풂 — 칠유 · 칠종 교만 · 수기
- 수량품 이후 몇 대목
연꽃의 두 뜻 — 물에서 나옴과 꽃이 핌
『법화론』은 「묘법연화」라는 경의 이름을 풀면서 연꽃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대성인은 「당체의초」에서 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셨다.
所謂法華論に云く「妙法蓮華とは二種の義有り一には出水の義、乃至泥水を出るをば諸の声聞・如来大衆の中に入つて坐し諸の菩薩の如く蓮華の上に坐して如来無上智慧・清浄の境界を説くを聞いて如来の密蔵を証するを喩うるが故に・二に華開とは諸の衆生・大乗の中に於て其心怯弱にして信を生ずること能わず故に如来の浄妙法身を開示して信心を生ぜしめんが故なり」
이른바 『법화론』에 이르기를, 「묘법연화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물에서 나오는 뜻이다. …… 진흙물에서 나오는 것은, 여러 성문이 여래의 대중 가운데 들어가 앉아 여러 보살처럼 연꽃 위에 앉아서 여래의 위없는 지혜와 청정한 경계를 설하는 것을 듣고 여래의 비밀한 곳간을 증득하는 것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꽃이 피는 것은, 여러 중생이 대승 가운데서 그 마음이 겁약하여 믿음을 내지 못하므로, 여래의 깨끗하고 묘한 법신을 열어 보여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첫째 뜻은 성문이다. 진흙 속에 있던 연꽃이 물 위로 나오듯, 이전의 경들에서 부처가 될 수 없다던 성문들이 법화경에서 보살과 나란히 연꽃 위에 앉는다. 둘째 뜻은 겁약한 중생이다. 봉오리가 열리듯, 부처의 법신을 열어 보여 믿음을 일으킨다. 대성인은 「『법화론』의 글에 『여러 보살(諸の菩薩)』이라 한 『여러(諸)』 자는, 법화경 이전의 대승 · 소승의 여러 보살이 법화경에 와서 부처의 연꽃을 얻는다는 뜻이 분명하다」고 풀으셨다(515쪽).

이 대목에서 대성인이 증명하려 하신 것은 「당체연화(當體蓮華)」다. 묘법연화경의 「연화」는 법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법 그 자체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천태가 이 『법화론』의 글을 풀어 「의보와 정보, 인과 과가 모두 연꽃의 법이다. 어찌 비유로 드러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고 인용하시고, 이어서 용수의 『대지도론』 「연꽃이란 법과 비유를 함께 든 것이다」(용수 편 16절)와 전교가 「천친 · 용수의 두 논의 글(天親・竜樹の二論の文)」을 풀이한 대목을 드신다(516쪽). 그리고 이렇게 맺으셨다. 「무릇 법화경의 뜻은 비유가 곧 법체이고 법체가 곧 비유다(凡そ法華経の意は譬喩即法体・法体即譬喩なり)」(516쪽). 인도의 두 논사가 연꽃의 뜻을 밝히고, 천태와 전교가 그것을 풀었으며, 대성인이 그것을 당체연화로 완성하셨다.
- 천태依正因果悉く是れ蓮華の法
- 용수 『대론』法譬並挙용수 편 16절
- 전교天親・竜樹の二論
열 가지 위없음과 「종자무상」
『법화론』은 법화경이 다른 경보다 뛰어난 점을 열 가지 「위없음(無上)」으로 든다. 그 첫째가 「종자무상(種子無上)」, 곧 부처가 되는 종자가 위없다는 것이다. 법화경은 성문 · 연각 · 보살 모두에게 부처의 종자가 있음을 보여, 그들에게 수기를 준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이 「종자무상」을 결정적인 자리에 두셨다. 여러 종파가 저마다 성불의 종자가 자기 경에 있다고 다투는 대목이다.
宗宗・互に種を諍う予此をあらそはず但経に任すべし、法華経の種に依つて天親菩薩は種子無上を立てたり天台の一念三千これなり
여러 종파가 서로 종자를 다툰다. 나는 이것을 다투지 않는다. 오직 경에 맡길 뿐이다. 법화경의 종자에 의지하여 천친보살은 종자무상을 세웠다. 천태의 일념삼천이 이것이다.
천친이 『법화론』에서 세운 「종자무상」과 천태의 「일념삼천」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어서 화엄경 · 대일경 등 여러 대승경의 부처와 보살의 종자도 「모두 일념삼천」이며, 화엄종의 징관과 진언종의 선무외는 천태의 이 뜻을 훔쳐 자기 종파의 간심으로 삼았다고 하셨다. 바로 앞 절에서 대성인은 부처의 종자가 법화경 한 경에만 있다는 것을 밝히고, 석존을 「하종(下種)의 아버지」로 받드는 것을 논하셨다.
- ①종자무상種子無上
- ②확인 중
- ③확인 중
- ④확인 중
- ⑤확인 중
- ⑥확인 중
- ⑦확인 중
- ⑧확인 중
- ⑨확인 중
- ⑩확인 중

「종자」는 대성인 불법의 핵심 개념이다. 석존 편 26절과 교리 四 8절에서 본 대로, 부처가 중생을 성불시키는 과정은 씨를 뿌리고(下種) 기르고(熟) 거두는(脫) 것이며, 말법의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씨 자체다. 천친은 법화경이 다른 경과 다른 점을 「종자」에서 찾았다. 대성인은 그것을 천태의 일념삼천과 같은 것으로 읽으셨고, 그 일념삼천의 종자가 말법에 남묘호렌게쿄로 뿌려진다고 하셨다.
네 가지 성문 — 두 번역 사이
그러나 『법화론』에는 법화경의 일불승과 쉽게 맞지 않는 대목도 있다. 『법화론』은 성문을 네 가지로 나눈다. 결정성문(決定聲聞) ·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 · 퇴보리심성문(退菩提心聲聞) · 응화성문(應化聲聞). 그리고 부처가 수기를 준 것은 뒤의 두 성문, 곧 한때 보리심을 일으켰다가 물러난 성문과 보살이 성문의 모습으로 나타난 성문이며, 앞의 두 성문은 근기가 아직 익지 않아 수기를 주지 않았다고 푼다.
이 풀이는 뒤에 법상종이 오성각별의 근거로 삼았다. 법화경에서도 결정성의 성문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것을 어떻게 보셨는가. 「수호국가론」은 여러 경론에 섞여 든 잘못을 늘어놓으며 그 가운데 「『법화론』과 『묘법화경』의 차이(法華論と妙法華経との相違)」를 넣고, 「이것들은 모두 역자와 인사의 잘못이다(此等は皆訳者人師の誤りなり)」라고 하셨다(45쪽). 그리고 설령 법화경 · 열반경에 잘못이 있든 없든, 사십여 년의 경을 버리고 법화경 · 열반경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관심본존초」는 이 문제를 더 날카롭게 다룬다. 십계호구와 일념삼천을 믿기 어렵다는 반론자는 이렇게 묻는다. 「천친보살의 『법화론』과 견혜보살의 『보성론』에도 십계호구가 없다(天親菩薩の法華論・堅慧菩薩の宝性論に十界互具之れ無く)」. 일념삼천은 천태 한 사람의 그릇된 견해가 아닌가(243쪽). 대성인은 여기서 앞의 천태의 말로 답하셨다. 천친 · 용수는 안으로 비추어 봄이 맑고 분명했으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에 펴지 않았다(244쪽). 『법화론』에 십계호구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은 천친이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구 노트 — 『법화론』의 두 한역은 곳곳에서 문장이 다르고, 산스크리트 원문이 없어 어느 쪽이 원래의 뜻에 가까운지 가리기 어렵다. 학계에는 『법화론』이 법화경을 유가행파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어서 일불승을 삼승과 조화시키려 했다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의 길장과 천태는 『법화론』을 법화경의 일승을 뒷받침하는 논으로 적극 인용했다. 대성인이 「역자와 인사의 잘못」이라 하신 것은 경을 기준으로 논을 가린 것이다.
『열반론』과 제호
천친의 이름으로 전하는 『열반론(涅槃論)』(T26 no.1527)은 열반경의 주석이다.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구카이(홍법)가 천태를 두고 「중국의 인사들이 다투어 제호를 훔쳤다」고 비난한 것을 반박하시며 천친을 증인으로 부르셨다. 「법화경을 제호라 한 것은 천태 등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다. 부처가 열반경에서 법화경을 제호라 설하셨고, 천친보살은 법화경 · 열반경을 제호라 쓰셨으며, 용수보살은 법화경을 묘약이라 이름하셨다(天親菩薩は法華経・涅槃経を醍醐とかかれて候、竜樹菩薩は法華経を妙薬となづけさせ給う)」(277쪽). 법화경을 제호라 하는 것이 도둑질이라면 석가 · 다보 · 시방의 부처와 용수 · 천친도 도둑이 되는가.
제호(醍醐)는 석존 편 22절에서 본 다섯 가지 맛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맛이다. 우유에서 낙, 생소, 숙소를 거쳐 제호에 이른다. 천친도 용수도 법화경이 석존 일대 가르침의 마지막 맛임을 알았다. 대성인은 인도의 두 논사를 법화경 제일의 증인으로 세우셨다.
『법화론』은 천친의 생애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준다. 소승의 『구사론』에서 출발한 논사가 유식의 논서들을 거쳐, 마지막에 법화경을 「여러 경 가운데 제일」이라 하는 주석을 남겼다. 대성인은 그 책에서 두 가지를 건져 내셨다. 연꽃의 두 뜻은 당체연화로, 종자무상은 천태의 일념삼천으로. 동시에 대성인은 그 책의 한계도 분명히 보셨다. 십계호구는 드러나지 않았고, 네 가지 성문의 풀이는 뒤에 법상종의 오성각별로 굳어졌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논을 대하는 대성인의 방법을 배운다. 논사를 사람으로 받들지도 버리지도 않고, 그 논을 법화경의 경문에 비추어 무엇이 법화경의 뜻이고 무엇이 때에 맞춘 방편인지를 가린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용수 편 27절)의 실천이다.
권에서 실로 — 한 생애에 담긴 일대 오십 년
대성인이 천친의 생애에서 가장 먼저 주목하신 것은 그 순서였다. 입종 일곱 해 뒤의 「창법화제목초」는 이렇게 쓴다.
故に如来の滅後後の五百年・九百年の間に出で給いし竜樹菩薩・天親菩薩等徧く如来の聖教を弘め給うに天親菩薩は先に小乗の説一切有部の人・倶舎論を造つて阿含十二年の経の心を宣べて一向に大乗の義理を明さず次に十地論・摂大乗論釈論等を造つて四十余年の権大乗の心を宣べ後に仏性論・法華論等を造りて粗実大乗の義を宣べたり竜樹菩薩亦然なり
그러므로 여래 멸후 뒤의 오백 년, 구백 년 사이에 나오신 용수보살 · 천친보살 등이 두루 여래의 성교를 넓히셨는데, 천친보살은 먼저 소승의 설일체유부의 사람으로서 『구사론』을 지어 아함 십이 년의 경의 뜻을 펴고 대승의 뜻은 전혀 밝히지 않았다. 다음에 『십지론』 · 『섭대승론석』 등을 지어 사십여 년의 권대승의 뜻을 폈다. 뒤에 『불성론』 · 『법화론』 등을 지어 대략 실대승의 뜻을 폈다. 용수보살도 또한 그러하다.
「수호국가론」도 같은 순서를 적는다. 천친은 『구사론』으로 소승의 뜻을, 『유식론』으로 방등부의 뜻을 펴고, 「마지막에 『불성론』을 지어 법화 · 열반의 뜻을 펴고 요의경과 불요의경을 가려 부처의 유언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最後に仏性論を造りて法華涅槃の意を宣べ了教不了教を分ちて敢て仏の遺言に違わず)」(49쪽). 그리고 뒤에 혜심승도 겐신이 『왕생요집』을 먼저 짓고 스무 해 뒤 『일승요결』을 지은 것을 두고, 「권을 먼저 하고 실을 뒤에 한 것이 마치 부처와 같고, 또 용수 · 천친 · 천태 등과 같다(権を先にし実を後にする宛も仏の如く亦竜樹・天親・天台等の如し)」(55쪽)고 하셨다.
석존은 먼저 아함을 설하고, 방등 · 반야를 거쳐, 마지막 팔 년에 법화경을 설했다(석존 편 5부). 천친은 먼저 『구사론』을 짓고, 유식의 논서들을 거쳐, 마지막에 『법화론』과 『불성론』을 지었다. 한 논사의 생애가 부처 일대의 설법 순서를 그대로 되밟았다. 대성인은 이것을 천친이 부처의 뜻을 어기지 않은 증거로 보셨다. 「권과 실의 두 가르침은 부처의 말씀에서 나왔고, 천친 · 용수가 거듭 이를 정했다(権実の二教は仏説より出でたり天親・竜樹重ねて之を定む)」(「수호국가론」, 58쪽).
権を先にし実を後にする宛も仏の如く수호국가론 55権実の二教は仏説より出でたり天親・竜樹重ねて之を定む수호국가론 58
『불성론』과 방법(謗法)의 정의
대성인이 천친의 논서 가운데 가장 자주 인용하신 한 구절은 『법화론』이 아니라 『불성론』에 있다. 방법(謗法), 곧 바른 법을 비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한 구절이다. 「수호국가론」에서 대성인은 호넨이 법화경을 비방했다는 증거를 묻는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다.
法華経の第二に云く「若し人信ぜずして斯の経を毀謗せば則一切世間の仏種を断ぜん」経文不信の相貌は人をして法華経を捨てしむればなり、故に天親菩薩の仏性論の第一に此の文を釈して云く「若し大乗に憎背する者此は是れ一闡提の因なり衆生をして此の法を捨てしむるを為の故に」論文謗法の相貌は此の法を捨てしむるが故なり、選択集は人をして法華経を捨てしむる書に非ずや閣抛の二字は 仏性論の憎背の二字に非ずや
법화경 제2권에 「만약 사람이 믿지 않고 이 경을 헐뜯는다면 일체 세간의 부처의 종자를 끊으리라」 하였다. 경문이 말하는 불신의 모습은 사람에게 법화경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친보살의 『불성론』 제1권에서 이 경문을 풀어 「만약 대승을 미워하고 등지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일천제의 원인이다. 중생에게 이 법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논문이 말하는 방법의 모습은 이 법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선택집』은 사람에게 법화경을 버리게 하는 책이 아닌가. 「제쳐 두고(閣) 던지라(抛)」는 두 글자는 『불성론』의 「미워하고 등진다(憎背)」는 두 글자가 아닌가.
방법은 법을 욕하는 말에만 있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그 법을 버리게 하는 것이 방법이다. 이 정의로 보면, 법화경을 직접 욕하지 않고 「제쳐 두고 던지라」고 권한 『선택집』이야말로 방법이다. 대성인은 이 『불성론』의 구절을 「십법계명인과초」에서도 인용하시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퍼진 세상에 오로지 소승만 넓히고, 자신도 대승을 등지고 남에게도 대승을 버리게 하는 것, 이것을 방법이라 한다」고 풀으셨다(428쪽). 「현방법초」도 방법의 모습을 묻는 물음에 천태의 『범망경소』와 함께 이 구절을 들어 「바른 법을 남에게 버리게 하는 것이 방법이다(正法を人に捨てさせるが謗法にてあるなり)」라고 하셨다(449쪽).
연구 노트 — 『불성론』(T31 no.1610)은 진제의 한역만 전하며, 학계에는 천친의 저작이 아니라 진제 자신이 여래장 사상과 유식을 엮어 편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성인은 이 논을 전승대로 천친의 논으로 인용하셨다. 이 페이지는 대성인이 이 구절에서 읽으신 「방법의 정의」를 기준으로 쓴다.
혀의 참회 — 「방법이 죄가 아니라면」
3부에서 본 천친의 참회를 대성인은 생애에 걸쳐 여러 번 이야기하셨다. 가장 이른 것은 이즈 유배 중의 「현방법초」다.
天親菩薩は小乗の論を作つて諸大乗経をはしき、後に無著菩薩に対して此の罪を懺悔せんがために舌を切らんとくい給いき、謗法もし罪とならずんば・いかんが千部の論師懺悔をいたすべき
천친보살은 소승의 논을 지어 여러 대승경을 깨뜨렸다. 뒤에 무착보살을 대하여 이 죄를 참회하기 위해 혀를 끊으려고 뉘우치셨다. 방법이 만약 죄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 천 부의 논사가 참회를 했겠는가.
「천 부의 논사」라는 이름이 여기서 무게를 가진다. 불교의 학문을 누구보다 깊이 안 사람이 혀를 끊으려 할 만큼 뉘우친 것이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 대성인은 이 이야기로 방법의 무거움을 증명하셨다.
열네 해 뒤 「보은초」에서 대성인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쓰셨다. 천태에게 귀의한 길장이 몸을 다리 삼아 천태를 업어 강을 건네며 섬겼지만, 그래도 이전에 법화경을 비방한 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목이다. 그러니 홍법 · 자각 · 지증 등은 설령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 해도 그 죄가 사라지기 어려울 텐데, 하물며 뉘우치는 마음조차 없다. 그리고 세친과 마명을 든다. 「세친보살 · 마명보살은 소승으로 대승을 깨뜨린 죄로 혀를 끊으려고까지 하셨다. 세친보살은 부처의 말씀인 아함경이라도 장난으로라도 혀 위에 올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世親菩薩は仏説なれども阿含経をば・たわふれにも舌の上にをかじとちかひ)」(315쪽). 「하산어소식」도 「옛 논사 천친보살은 소승경을 혀 위에 올리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현자였던 길장대사는 법화경조차 읽지 않으셨다. 이것은 본디 소승경으로 대승경을 깨뜨리고 법화경으로 천태대사를 헐뜯은 방법의 중죄를 없애기 위해서였다」(362쪽)고 쓴다.
안으로 안 법 — 「천친보살이 부르신 것처럼」
용수 편 25절에서 본 대성인의 평가, 곧 「알면서 말하지 않은 분들」은 언제나 용수와 천친을 함께 부른다. 「관심본존초」의 「천친 · 용수는 내감냉연」(244쪽), 「개목초」의 「용수 · 천친은 알면서도 아직 건져 내지 않았다」(189쪽), 「법화행자봉난사」의 「용수 · 천친은 함께 천 부의 논사다. 다만 권대승을 펴고 법화경은 마음에 두어 입으로 토하지 않으셨다」(965쪽),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의 「오직 용수 · 천친만이 마음 밑바닥에 아셨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셨다」(1016쪽). 이 평가의 자세한 뜻은 용수 편 25절에 모았다.
천친에 대해서는 여기에 두 대목을 더한다. 하나는 「삼대비법초」다. 「정법에는 천친보살 · 용수보살이 제목을 부르셨으나 자행뿐이었고 거기서 그쳤다」(1022쪽). 다른 하나는 입종 열한 해 뒤, 한 재가 여성의 물음에 답한 「월수어서(月水御書)」(1264)다. 이 여성은 날마다 「남무일승묘전(南無一乘妙典)」이라고 만 번씩 부르고 있었다. 대성인은 편지 끝에 이렇게 권하셨다.
又南無一乗妙典と唱えさせ給う事是れ同じ事には侍れども天親菩薩・天台大師等の唱えさせ給い候しが如く・只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させ給うべきか、是れ子細ありてかくの如くは申し候なり
또 「남무일승묘전」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같은 일이기는 하지만, 천친보살 · 천태대사 등이 부르셨던 것처럼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어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다.
「천친보살이 부르셨던 것처럼」. 대성인은 천친을 남묘호렌게쿄를 부른 사람으로 들으셨다. 그러나 「삼대비법초」가 말하듯, 그것은 자신의 수행을 위한 제목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제목을 부르라고 권하는 것, 곧 자행과 화타에 걸친 제목은 말법의 처음을 기다려야 했다.
- 정법천친 · 용수題目を唱えさせ給いしかども自行ばかり
- 상법남악 · 천태自行の為にして広く他の為に説かず · 理行の題目
- 말법니치렌自行化他に亘りて南無妙法蓮華経
교법 유포의 선후 — 「무착보살이 세친의 소승을 깨뜨린 것처럼」
대성인은 법을 펼 때 알아야 할 다섯 가지를 「종교의 오강(五綱)」으로 정리하셨다. 가르침(敎) · 근기(機) · 때(時) · 나라(國) · 그리고 가르침이 퍼지는 앞뒤의 순서(敎法流布의 先後)다(니치렌 편 8절). 그 다섯째를 설명하시며 대성인은 무착과 천친을 예로 드셨다. 고마쓰바라 법난 한 달 뒤, 난조 효에시치로에게 보낸 편지다.
又仏法流布の国においても前後を勘うべし、仏法を弘むる習い必ずさきに弘めける法の様を知るべきなり、例せば病人に薬をあたふるにはさきに服したる薬の様を知るべし……仏教においても小乗の弘まれる国をば大乗経をもつてやぶるべし、無著菩薩の世親の小乗をやぶりしが如し、権大乗の弘まれる国をば実大乗をもつて・これをやぶるべし、天台智者大師の南三・北七をやぶりしが如し
또 불법이 퍼진 나라에서도 앞뒤를 헤아려야 한다. 불법을 넓히는 법도는 반드시 앞서 넓혀진 법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병자에게 약을 줄 때는 앞서 먹은 약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 불교에서도 소승이 퍼진 나라는 대승경으로 깨뜨려야 한다. 무착보살이 세친의 소승을 깨뜨린 것과 같다. 권대승이 퍼진 나라는 실대승으로 깨뜨려야 한다. 천태지자대사가 남삼북칠을 깨뜨린 것과 같다.
3부에서 본 형제의 이야기가 여기서 교법 유포의 법칙이 된다. 무착은 동생의 소승을 대승으로 깨뜨렸다. 천태는 중국의 남삼북칠이 넓힌 권대승을 법화경으로 깨뜨렸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대성인은 이어서 쓰셨다. 일본은 천태 · 진언의 두 종이 퍼진 지 사백여 년, 모든 사람이 법화경의 근기로 정해진 나라다. 그런데 호넨이 나와 사람들에게 구슬 대신 돌을 쥐게 했다(1497쪽). 법화경이 이미 퍼진 나라에 그보다 얕은 법을 넓히는 것은 순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 1외도가 퍼진 나라→ 불법으로 깨뜨림인도의 석존 · 중국의 가섭마등과 축법란 · 일본의 쇼토쿠 태자
- 2소승이 퍼진 나라→ 대승으로무착이 세친의 소승을
- 3권대승이 퍼진 나라→ 실대승으로천태가 남삼북칠을
- 4법화경이 퍼진 일본✕ 거꾸로 염불을 넓힘호넨셋째 단에서 계단을 거꾸로 내려감
「시대로써 과보를 논하면 용수 · 천친을 넘어서고 천태 · 전교보다 뛰어나다」(「현불미래기」, 505쪽). 용수 편 28절에서 본 이 말씀은 천친에게도 그대로 해당한다. 천친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권에서 실로 나아간 것은 그의 시대에 맞는 가장 깊은 걸음이었다. 말법의 법은 그 걸음이 향한 곳, 법화경의 문저에서 나온다.
대성인이 천친에게서 보신 것은 무엇보다 「뉘우칠 줄 아는 대논사」였다. 천 부의 논을 지은 지혜보다, 자신이 대승을 헐뜯었음을 깨달은 순간 혀를 끊으려 한 정직함을 대성인은 거듭 말씀하셨다. 창가학회는 이 이야기를 두 방향으로 읽는다. 하나는 방법의 무거움이다. 법화경을 버리게 하는 것은 천 부의 논사도 혀를 끊으려 할 만큼 무거운 일이다. 다른 하나는 참회의 모습이다. 천친은 혀를 끊지 않았다. 형의 말대로 그 혀로 대승을 찬탄했고, 마지막에 법화경의 주석을 남겼다. 잘못을 안 사람이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끝까지 나아가는 것. 소승에서 대승으로, 권에서 실로 걸어간 천친의 생애 전체가 그 모습이다.
세 층의 천친
이 페이지는 천친을 세 층으로 읽었다.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천친을 알수록, 한 사람이 평생 배우고 고쳐 가며 나아간 길의 길이가 보인다. 동아시아의 천친을 알수록, 한 사람의 논이 뒤의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굳어지고 갈라졌는지가 보인다. 그리고 대성인이 본 천친을 알수록, 그 모든 것을 법화경의 경문에 비추어 가리는 눈이 보인다. 천친이 형의 방 밖에서 들은 것은 『십지경』의 한 대목이었다. 그 한 대목이 소승의 대논사를 대승으로 돌려세웠고, 그 길의 끝에 『법화론』이 있었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 4~5세기경—간다라 푸루샤푸라의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남전승 · 세 형제의 둘째
- ——설일체유부로 출가 · 카슈미르 유학전승
- ——『칠십진실론』으로 상캬를 깨뜨림전승 · 『바수반두법사전』
- ——『구사론』 저술학계 · 게송 뒤 주석
- ——중현의 『구사박론』 → 『순정리론』전승 · 『대당서역기』 권4
- ——아요디야 · 정근일왕과 신일왕전승 · 굽타 왕 비정은 논쟁
- ——형 무착의 부름 · 한밤의 독송 · 혀의 참회전승
- ——『십지경론』 · 『섭대승론석』 · 유식 논서학계
- ——『법화론』 · 『불성론』『불성론』은 귀속 논쟁
- ——아요디야에서 입멸(여든 살)전승
- 508~—보리류지 낙양 도착 · 『십지경론』 · 『법화론』 한역북위
- 546—진제 남조 양에 도착뒤에 『섭대승론석』 · 『구사석론』 · 『바수반두법사전』
- 646—현장 『대당서역기』간다라 집터 · 아유타국
- 651–654—현장 『구사론』 한역
- 659—현장 『성유식론』 한역호법 계통 · 법상종의 근본
- 7세기 후반—자은 규기 · 법상종 성립
- 1259—「수호국가론」「九百年」 · 『불성론』의 「憎背」 · 「宛も仏の如く」
- 1260—「창법화제목초」소승 → 권대승 → 실대승
- 1262—「현방법초」「千部の論師懺悔」
- 1264—「월수어서」 · 「남조병위칠랑전어서」「天親菩薩…の唱えさせ給い候しが如く」 · 「무착이 세친의 소승을」
- 12722월「개목초」종자무상 = 일념삼천
- 12734.25「관심본존초」「天親竜樹・内鑒泠然」
- 12756월「찬시초」오십여 가 · 제호
- 12767.21「보은초」「舌を切らん」 · 오성각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