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뜬 밤, 구름 위로 솟은 봉우리와 벼랑의 소나무가 물에 비친 금박 수묵화

구원실성

久遠實成법화경 여래수량품 · 천태 『법화문구』 · 「개목초」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존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내가 석가족의 궁을 나와 가야성 가까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로 성불한 지는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다.

이 한 문장이 구원실성(久遠實成), 곧 「아득한 옛날에 실로 성불하였다」는 법문이다. 불교사 전체에서 이만큼 대담한 선언은 드물다. 서른다섯에 깨닫고 여든에 입멸한 한 사람의 스승이, 실은 시작을 헤아릴 수 없는 옛날부터 부처였고, 입멸도 방편일 뿐 지금도 이 세계에 늘 머문다는 것이다.

셋째 자리 제법실상에서 우리는 모든 법이 평등하게 묘법연화경의 모습이라는 것, 곧 법의 보편성을 보았다. 넷째 자리의 물음은 그 법이 누구의 생명인가다. 대성인은 「제법실상초」에서 「실상의 깊은 이치는 본유의 묘법연화경」이라 하고, 그것을 「본문 위의 법문」이라 했다. 적문이 법을 밝혔다면, 본문은 부처를 밝힌다. 그리고 부처를 밝히는 순간, 부처가 사는 이 땅과 부처가 가르친 모든 중생의 자리가 함께 바뀐다.

스물다섯 살의 아버지 — 동집생의(動執生疑)

수량품의 선언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바로 앞 종지용출품에서 경은 청중의 상식을 한 번 크게 흔든다.

석존이 멸후에 이 경을 넓힐 이를 찾자, 땅이 갈라지며 헤아릴 수 없는 보살들이 솟아오른다. 그 하나하나가 금빛 몸에 위엄을 갖추고, 저마다 수많은 권속을 거느린다. 석존은 이들이 모두 자신이 교화한 제자라고 말한다. 미륵보살이 대중을 대신해 묻는다.

如來為太子時 出於釋宮 去伽耶城不遠 坐於道場 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從是已來 始過四十餘年 … 譬如有人 色美髮黑 年二十五 指百歲人 言是我子 其百歲人 亦指年少 言是我父

여래께서 태자이셨을 때 석가족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무상정등각을 이루셨고, 그로부터 겨우 사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 비유하면, 얼굴빛 곱고 머리 검은 스물다섯 살 된 사람이 백 살 된 사람을 가리켜 「내 아들」이라 하고, 백 살 된 사람도 젊은이를 가리켜 「내 아버지」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지용출품

천태는 이 장면을 동집생의(動執生疑), 곧 「집착을 흔들어 의심을 일으킨다」고 불렀다. 청중이 굳게 믿고 있던 것 — 석존은 사십여 년 전 가야성 근처에서 처음 부처가 되었다(始成正覺) — 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다음 말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방편품에서 사리불이 세 번 청해야 했듯(三止四請), 수량품에서도 석존은 세 번 「여래의 진실한 말을 믿으라」고 경계하고, 대중은 네 번 설법을 청한다(三誡四請). 법화경은 가장 깊은 법문 앞에서 늘 듣는 이의 기존 이해를 먼저 무너뜨린다.

2방편품사리불이 세 번 청함 — 三止四請
같은 구조
15종지용출품지용보살 출현 → 미륵의 의심 「父少而子老」
16여래수량품三誡四請 → 「然我實成佛已來」
도표 1 · 동집생의 — 종지용출품에서 수량품까지

이 물음은 셋째 자리 끝에서 남겨 둔 물음과 정확히 같다. 제법실상이 모든 법의 평등한 참모습이라면, 그것을 깨달은 부처는 언제, 어떻게 부처가 되었는가. 사십여 년 전 보리수 아래라면, 그 부처는 시작이 있는 부처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다. 끝이 있는 부처가 설한 법은 그 부처와 함께 사라지는가.

초기 불교 — 붓다는 떠났고, 법이 남았다

구원실성의 무게를 알려면 먼저 불교가 붓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보아야 한다.

초기 경전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 DN 16)』에서 붓다는 여든의 몸으로 마지막 여행을 한다. 그 도중에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가지 신통의 기반(四神足)을 닦은 이는, 원한다면 한 겁(kappa)이나 그 남은 동안 머물 수 있다. 그리고 여래는 그것을 닦았다. 붓다는 이 말을 세 번 되풀이하지만, 아난다는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해 붓다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그 뒤 붓다는 석 달 뒤의 입멸을 결정한다.

이 장면은 초기 불교 안에 이미 「붓다가 원했다면 더 오래 머물 수 있었다」는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입멸을 앞두고 붓다는 말한다.

아난다여, 내가 설하고 제정한 법과 율, 그것이 내가 떠난 뒤 너희의 스승이 될 것이다. (DN 16)

붓다는 떠나고, 법이 남는다. 셋째 자리에서 본 것처럼 초기 불교에서 연기의 법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늘 머무는 것이었다. 늘 머무는 것은 법이고, 부처는 그 법을 발견하고 가르치고 떠나는 사람이다. 법은 영원하고, 부처는 역사적이다. 이것이 초기 불교의 기본 구도다.

부파와 대승 — 부처의 몸을 다시 묻다

붓다 입멸 후 수백 년,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불교 사상의 한 중심이 되었다. 이것을 불신론(佛身論) 이라 한다.

대중부 — 부처는 한계가 없다

부파 불교의 여러 학파 가운데 대중부(大衆部)는 부처를 넘어서는 존재로 보았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은 대중부의 주장을 이렇게 전한다.

如來色身實無邊際 如來威力亦無邊際 諸佛壽量亦無邊際

여래의 색신은 실로 끝이 없고, 여래의 위력도 끝이 없으며, 모든 부처의 수명도 끝이 없다.

이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늙고 죽은 붓다는 중생을 위해 나타난 모습이고, 참된 부처는 한계가 없다. 설일체유부는 이와 달리 붓다의 생신(生身)은 유한하며 번뇌 없는 공덕만이 참된 부처라고 보았다. 법화경 수량품의 구원실성은 이 가운데 대중부 계통의 불신관과 가장 가깝다고 학계는 본다.

대승 — 법신, 그리고 삼신

대승은 부처의 몸을 여러 겹으로 나누었다.

유식학파의 자성신·수용신·변화신도 같은 구조다. 『대반열반경』(대승)은 「여래는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다(如來常住無有變易)」고 하여 부처의 영원성을 강조했다. 화엄경의 비로자나불, 대일경의 대일여래는 모두 형체 없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영원한 부처, 곧 법신불이다.

초기 불교法爲師붓다는 역사적법과 율이 스승「한 겁 머물 수 있다」 (DN 16)
부파無邊際대중부 — 색신 · 수명 무변유부 — 생신은 유한
대승法身常住법신 상주 · 삼신비로자나 · 대일 — 법신불
법화경 본문三身常住삼신 모두 상주구원실성
도표 2 · 불신론의 전개 — 초기·부파·대승·법화

법신만의 영원 —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서 결정적인 물음이 생긴다. 대승 여러 경전도 부처의 영원을 말했다. 그렇다면 법화경의 구원실성은 무엇이 다른가. 오히려 대일경의 대일여래는 「시작도 끝도 없다(無始無終)」고 하니, 「오백진점겁 전에 성불했다」는 법화경보다 더 영원하지 않은가.

이 물음은 대성인 당시에도 실제로 제기되었다. 대성인은 「법화진언승렬사(法華眞言勝劣事)」에서 이렇게 답한다.

今大日経並に諸大乗経の無始無終は法身の無始無終なり三身の無始無終に非ず、法華経の五百塵点は諸大乗経の破せざる伽耶の始成之を破りたる五百塵点なり

지금 대일경과 여러 대승경의 무시무종은 법신의 무시무종이지, 삼신의 무시무종이 아니다. 법화경의 오백진점은 여러 대승경이 깨뜨리지 못한 가야의 시성을 깨뜨린 오백진점이다.

「법화진언승렬사」, 125쪽

핵심은 이것이다. 진리(법신)가 영원하다는 것은 새로운 말이 아니다. 진리가 시간 속에서 생겼다 사라진다고 믿는 불교도는 없다. 여러 대승경은 법신의 영원을 말하면서도, 지금 눈앞에서 설법하는 석존은 여전히 가야성 근처에서 처음 성불한 부처로 남겨 두었다.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 진리를 깨닫고 설하는 부처는 여전히 시작이 있는 것이다.

수량품은 다르다. 수량품의 부처는 형체 없는 진리가 아니라, 오백진점겁 전에 성불하고(보신), 그 이래로 늘 이 세계에서 설법해 온(응신) 부처다. 법신·보신·응신의 삼신이 모두 영원하다. 진리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지혜와 중생을 교화하는 자비의 활동이 모두 영원하다. 이것이 「삼신상주(三身常住)」이며, 대승 여러 경전이 하지 못한 일이다.

여러 대승경 — 법신만의 무시무종법신의 선만 끝없이 이어지고, 보신·응신은 가야 시성의 점에서 시작하는 짧은 선이다.法身법신報身보신應身응신가야 시성
法身の無始無終なり三身の無始無終に非ず
법화경 본문 — 삼신의 무시무종법신·보신·응신 세 선이 모두 끝없이 이어진다.法身법신報身보신應身응신
도표 3 · 법신만의 무시무종과 삼신의 무시무종

여래수량품 — 오백진점겁과 방편 열반

수량품의 핵심 대목을 차례로 읽는다.

가야의 시성을 깨뜨리다

一切世間天人及阿修羅 皆謂今釋迦牟尼佛 出釋氏宮 去伽耶城不遠 坐於道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然善男子 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는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로 성불한 지는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다.

「그러나(然)」 한 글자가 사십여 년의 가르침 전체를 뒤집는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이 문장이 화엄경의 「처음 정각을 이루었다」, 아함경의 「처음 이루었다」, 무량의경의 「내가 먼저 도량에서」, 그리고 법화경 방편품의 「내가 처음 도량에 앉아」까지를 한 마디로 큰 허망이라 깨뜨리는 글이라고 했다.

오백진점겁

검은 우주에 고리를 두른 금빛 세계들이 끝없이 늘어서고, 금가루의 긴 자취가 먼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금박 수묵화
그림 1 · 오백진점겁

그 「헤아릴 수 없는 겁」이 얼마나 먼지를 석존은 비유로 보인다.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를 어떤 사람이 부수어 티끌로 만들고, 동쪽으로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나라를 지날 때마다 티끌 하나씩을 떨어뜨려 그 티끌이 다하도록 간다고 하자. 그리고 티끌이 떨어진 나라와 떨어지지 않은 나라를 모두 다시 티끌로 만들어, 그 티끌 하나를 한 겁으로 친다. 내가 성불한 지는 이보다도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 겁이 더 지났다.

이것을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 이라 한다. 이 비유의 목적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이 닿지 않는 곳까지 과거를 밀어 올리는 데 있다. 적문 화성유품의 삼천진점겁(대통지승불의 인연)도 이보다는 가깝다.

  1. ① 삼천대천세계 → 티끌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세계를 부숨
  2. ② 나라마다 한 티끌동쪽으로 같은 수의 나라를 지날 때마다
  3. ③ 다시 티끌로, 한 티끌 = 한 겁떨어진 나라 · 안 떨어진 나라 모두
  4. 復過於此④ 이보다도 더 지났다
적문 · 삼천진점겁화성유품 · 대통지승불
본문 · 오백진점겁여래수량품 · 구원실성
비교는 상징적이다 — 눈금 없이 상대 길이만.
도표 4 · 오백진점겁의 비유

부처는 삼계를 삼계처럼 보지 않는다

이어지는 한 구절은 셋째 자리 제법실상과 둘째 자리 공·중도를 한꺼번에 불러낸다.

如來如實知見三界之相 無有生死 若退若出 亦無在世及滅度者 非實非虛 非如非異 不如三界 見於三界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나고 죽음도, 물러남도 나옴도 없고, 세상에 있는 자도 멸도하는 자도 없으며, 실(實)도 아니고 허(虛)도 아니며, 같음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다. 삼계가 삼계를 보듯이 보지 않고 삼계를 본다.

「실도 아니고 허도 아니다」는 둘째 자리의 사구 부정이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如實知見)」는 셋째 자리의 제법실상이다. 구원의 부처가 세계를 보는 눈은 공·가·중이 원융한 실상의 눈이다. 그 눈으로 보면 부처가 이 세상에 「있다」거나 「멸도한다」는 것 자체가 실체적 사건이 아니다.

본인·본과·본국토

천태는 수량품의 세 구절을 뽑아 본문의 핵심을 셋으로 정리했다. 이것을 삼묘합론(三妙合論) 이라 한다.

본인묘가 특히 중요하다. 부처가 된 뒤에도 보살로서의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 부처는 수행을 끝낸 자가 아니라, 부처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보살행을 하는 자다. 이것은 불계와 구계가 서로를 갖춘다는 십계호구가 부처 자신의 생명에서 성립함을 뜻한다.

久遠구원
  • 本果妙본과묘我實成佛已來
  • 本因妙본인묘我本行菩薩道 …今猶未盡
  • 本國土妙본국토묘我常在此娑婆世界
도표 5 · 삼묘합론 — 본인·본과·본국토

방편으로 나타낸 열반

새벽의 옛집 안, 낮은 상 위에 약 사발과 접은 약봉지가 놓여 있고, 툇마루 너머 안개 낀 산길로 늙은 의사가 떠나가며 방 안의 아이들이 깨어나는 금박 수묵화
그림 2 · 양의병자 — 여기에 남겨 둔 약

그렇다면 석존은 왜 입멸하는가. 자아게(自我偈)는 이렇게 답한다.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 億載阿僧祇 常說法教化 無數億衆生 令入於佛道 爾來無量劫 為度衆生故 方便現涅槃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내가 부처를 얻은 이래 지나온 겁의 수는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재 아승기이다. 늘 법을 설하여 무수억 중생을 교화해 불도에 들게 하였다. 그 이래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중생을 건지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을 뿐 실은 멸도하지 않고 늘 여기에 머물러 법을 설한다.

부처가 늘 곁에 있으면 중생은 게을러지고 부처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는 떠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것이 양의병자(良醫病子)의 비유다. 독을 먹고 본심을 잃은 아이들이 아버지인 의사가 지어 준 좋은 약을 먹지 않자, 아버지는 먼 나라로 떠나며 사람을 보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알린다. 아이들은 슬픔 속에 본심을 되찾고 약을 먹어 낫는다. 떠나기 전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是好良藥 今留在此 汝可取服 勿憂不差

이 좋은 약을 지금 여기에 남겨 두니, 너희는 가져다 먹어라. 낫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

「여기에 남겨 둔다(今留在此)」. 셋째 자리에서 본 「제법실상초」의 한 구절이 여기에 겹친다. 대성인은 결집의 장면을 그리며 이렇게 썼다. 석가·다보가 미래 일본국의 일체중생을 위해 남겨 두신(とどめをき給ふ) 묘법연화경이라고, 이와 같이 나도 들었다. 양의가 남긴 좋은 약이 무엇인가 — 이것이 뒤의 문저 해석으로 이어진다.

  1. 1독을 먹은 아이들↳ 중생의 미혹
  2. 2좋은 약을 거부↳ 부처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없음
  3. 3아버지가 떠나며 「是好良藥 今留在此」↳ 방편 열반
  4. 4부고를 듣고 본심 회복↳ 연모(戀慕)
  5. 5약을 먹고 나음↳ 득도
도표 6 · 양의병자의 비유

천태 — 발적현본과 천월(天月)

발적현본(發迹顯本)

천태는 법화경을 적문(1~14품)과 본문(15~28품)으로 나누고, 본문의 핵심을 발적현본, 곧 「자취(迹)를 걷어내고 근본(本)을 드러낸다」고 불렀다. 가야성에서 처음 성불한 석존은 자취이고, 오백진점겁에 성불한 석존이 근본이다. 같은 뜻으로 개근현원(開近顯遠), 곧 「가까운 것(사십여 년)을 열어 먼 것(구원)을 드러낸다」고도 한다.

천태는 『법화현의』에서 적문의 열 가지 묘(迹門十妙)에 대응하는 본문의 열 가지 묘(本門十妙)를 세웠다. 본인묘·본과묘·본국토묘·본감응묘·본신통묘·본설법묘·본권속묘·본열반묘·본수명묘·본이익묘다. 부처의 원인과 결과, 국토, 중생과의 감응, 신통, 설법, 권속, 열반, 수명, 이익이 모두 본래의 것으로 다시 읽힌다.

하늘의 달, 연못의 달

하늘 높이 뜬 금빛 보름달 하나가 호수·연못·논·돌확·절 계단의 물그릇 등 크고 작은 물마다 똑같이 비친 밤 풍경의 금박 수묵화
그림 3 · 하늘의 달과 만 갈래 물

천태는 본문과 적문의 관계를 달로 비유한다. 구원의 부처를 모르고 가야성의 부처만 보는 것은 「하늘의 달을 모르고 연못의 달만 보는 것(不識天月 但觀池月)」 과 같다.

대성인은 이 비유를 여러 어서에서 쓴다. 「일안녀조립석가불공양사(日眼女造立釋迦佛供養事)」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例せば釈尊は天の一月・諸仏・菩薩等は万水に浮べる影なり

비유하자면 석존은 하늘의 한 달이요, 제불보살은 만 갈래 물에 뜬 그림자다.

1187쪽

그리고 「개목초」에서는 화엄의 대상(臺上) 부처, 아함의 작은 석가, 방등·반야·아미타경·대일경의 부처들이 모두 이 수량품 부처의 하늘의 달이 잠시 크고 작은 그릇에 그림자를 띄운 것이라고 한다.

이 비유를 둘째 자리의 「물속의 달(水中月)」과 나란히 놓아 보라. 둘째 자리에서 물속의 달은 「분명히 보이나 자성이 없다」는 공의 비유였다. 넷째 자리에서 그 물속의 달들 위에 하늘의 달 하나가 떠오른다. 여러 경전의 부처들은 거짓이 아니다. 분명히 보인다. 그러나 스스로의 근원을 갖지 않는다. 그 근원이 구원의 부처다. 대성인은 「법화진언승렬사」에서 근원 없이 그림자만 있는 부처를 「본무금유(本無今有)」, 곧 「근본은 없는데 지금만 있다」고 부르며, 수량품이 밝혀지지 않으면 대일여래도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다」고 했다.

하늘에 금빛 달 하나 — 구원의 석존. 아래의 크고 작은 물마다 그 달이 비친다: 화엄 대상불, 아함 소석가, 아미타, 약사, 대일.天の一月구원의 석존화엄 대상불아함 소석가아미타약사대일제불보살은 만 갈래 물에 뜬 그림자
본무금유(本無今有) — 하늘의 달 없이 그림자만 있다고 여김
도표 7 · 천월과 만수의 그림자

제불의 통일

구원실성이 밝혀지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모든 부처가 하나로 거두어진 것이다. 「개목초」는 이렇게 쓴다.

此の過去常顕るる時・諸仏皆釈尊の分身なり、爾前・迹門の時は諸仏・釈尊に肩を並べて各修・各行の仏なり

이 과거상주가 드러날 때, 제불은 모두 석존의 분신이다. 이전 경전과 적문의 때에는 제불이 석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마다 따로 수행한 부처였다.

215쪽 부근

아미타불, 약사여래, 비로자나불, 대일여래 — 이전의 경전들에서 이들은 석존과 동격인, 각자의 정토를 가진 독립된 부처들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부처를 믿었다. 수량품이 구원실성을 밝히자, 이 모든 부처가 구원의 석존의 분신이 되고, 그 부처들의 제자인 보살들도 모두 석존의 제자가 된다. 견보탑품에서 시방의 분신불이 모여든 장면이 이 통일을 미리 보인 것이었다. 흩어져 있던 부처의 세계가 한 근원으로 모인다.

사바즉적광 — 부처가 사는 이 땅

구원의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수량품의 답은 분명하다. 「나는 늘 이 사바세계에 있다(我常在此娑婆世界)」, 「나는 늘 여기에 머문다(我常住於此)」, 그리고 자아게의 유명한 구절.

衆生見劫盡 大火所燒時 我此土安穩 天人常充滿

중생이 겁이 다하여 큰 불에 타는 것을 볼 때에도 나의 이 땅은 안온하여 하늘과 사람이 늘 가득하다.

양쪽 끝의 산과 성은 붉은 금빛 윤곽으로 타오르고, 가운데 골짜기는 꽃나무와 전각 사이로 사람과 천인이 평온히 거니는 금박 수묵화
그림 4 · 불타는 겁 속의 안온 — 我此土安穩

정토는 저편에 있지 않다

이전의 경전들은 이 사바세계를 괴로움과 더러움에 찬 예토(穢土) 로, 부처의 정토(淨土) 는 서방이나 동방의 먼 곳으로 설했다. 수량품은 이 구도를 뒤집는다. 구원의 부처가 늘 머무는 곳이 이 사바세계라면, 이 사바세계가 곧 부처의 본래 국토다. 묘락은 『법화문구기』에서 「적광의 밖에 따로 사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대성인은 「수호국가론」에서 이것을 이렇게 풀었다.

此の文の如くんば本地久成の円仏は此の世界に在り此の土を捨てて何の土を願う可きや、故に法華経修行の者の所住の処を浄土と思う可し何ぞ煩しく他処を求めんや

이 경문대로라면 본지가 구원에 성불한 원만한 부처는 이 세계에 있다. 이 땅을 버리고 어느 땅을 원하겠는가. 그러므로 법화경을 수행하는 이가 머무는 곳을 정토라고 생각해야 한다. 어찌 번거롭게 다른 곳을 구하겠는가.

72쪽

그리고 이전 경전들의 여러 정토 — 서방 극락, 도솔천 — 는 진실한 정토인 사바세계를 방향에 따라 나누어 거기에 이름을 덧붙인 것, 곧 「분첨(分添)의 정토」 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개목초」는 더 선명하다. 이전에는 시방을 정토라 하고 이 땅을 예토라 했으나, 그것을 뒤집어 「이 땅이 본토이고 시방의 정토는 수적(垂迹)의 예토」 가 되었다고.

본시(本時)의 사바세계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이 법문을 가장 깊은 형태로 말한다.

今本時の娑婆世界は三災を離れ四劫を出でたる常住の浄土なり、仏既に過去にも滅せず未来にも生ぜず所化以て同体なり此れ即ち己心の三千具足・三種の世間なり

지금 본시(本時)의 사바세계는 삼재를 떠나고 사겁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다. 부처가 이미 과거에도 멸하지 않고 미래에도 생하지 않으니, 교화받는 중생도 그와 같은 몸이다. 이것이 곧 자기 마음에 삼천을 갖춘 세 가지 세간이다.

248쪽 부근

「부처가 멸하지 않고 생하지 않으니, 교화받는 중생도 같은 몸이다(所化以同體).」 부처가 영원하면, 그 부처가 교화한 중생도, 그 부처가 머무는 국토도 영원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마음에 삼천을 갖춘 세 가지 세간」, 곧 일념삼천이다.

이전 경전 — 정토는 저편가운데 작은 원: 사바 = 예토. 멀리 흩어진 서방 극락 · 도솔 · 동방 정유리가 정토.서방 극락도솔동방 정유리사바= 예토
본문 — 이 땅이 본토가운데 큰 원: 사바 = 본토 · 상주의 정토. 둘레의 여러 정토는 흐린 분첨의 정토.서방 극락도솔동방 정유리분첨의 정토사바 = 본토상주의 정토

我此土安穩 天人常充滿

도표 8 · 예토와 정토의 역전

일념삼천의 완성

여기서 셋째 자리 끝에서 예고한 것이 성립한다. 일념삼천은 십계호구(십계가 서로 십계를 갖춤) × 십여시 × 삼세간(오음·중생·국토)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적문에는 국토세간이 빠져 있었다. 적문의 석존은 시작이 있는 부처였고, 그 부처가 머무는 국토도 성겁·주겁·괴겁·공겁을 돌며 사라지는 무상한 국토였다. 「관심본존초」는 이전의 모든 정토가 「성겁 위의 무상한 땅」이며, 변하게 한 교주가 열반에 들면 변한 제불도 따라 멸진하고 국토도 그러하다고 했다.

본문의 구원실성과 본국토묘가 밝혀짐으로써 비로소 부처와 중생과 국토가 모두 상주하게 되고, 삼세간이 갖추어진다. 「개목초」의 말대로 적문만으로는 「참된 일념삼천도 나타나지 않고, 이승작불도 정해지지 않는다」. 본문에 이르러서야 일념삼천이 완성된다.

「개목초」 — 본인본과와 진실한 십계호구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구원실성의 뜻을 가장 체계적으로 논한다. 그 핵심 대목을 읽는다.

두 가지 허물

華厳乃至般若・大日経等は二乗作仏を隠すのみならず久遠実成を説きかくさせ給えり、此等の経経に二つの失あり、一には行布を存するが故に仍お未だ権を開せず迹門の一念三千をかくせり二には始成を言うが故に曾て未だ迹を発せず本門の久遠をかくせり、此等の二つの大法は一代の綱骨・一切経の心髄なり

화엄 내지 반야·대일경 등은 이승작불을 감추었을 뿐 아니라 구원실성도 설하지 않고 감추셨다. 이 경들에는 두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차별의 단계를 남겨 두므로 아직 방편을 열지 못하여 적문의 일념삼천을 감추었다. 둘째는 처음 성불하였다고 말하므로 아직 자취를 걷어내지 못하여 본문의 구원을 감추었다. 이 두 가지 큰 법은 일대 가르침의 뼈대요 일체경의 심수다.

197쪽 부근

이승작불과 구원실성 — 적문과 본문의 두 기둥이다. 이승작불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구원실성은 그 부처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이 둘을 법화경이 다른 경보다 뛰어난 근거로 삼는다(記小久成).

이전 경전의 허물법화경이 밝힌 것적문
存行布차별의 단계를 남겨 둠적문의 일념삼천을 감춤
이승작불
본문
言始成처음 성불했다고 말함본문의 구원을 감춤
구원실성

記小久成 — 일대의 강골, 일체경의 심수

도표 9 · 이종의 허물과 법화경의 두 기둥

물속의 달, 뿌리 없는 풀

迹門方便品は一念三千・二乗作仏を説いて爾前二種の失一つを脱れたり、しかりといえども・いまだ発迹顕本せざれば・まことの一念三千もあらはれず二乗作仏も定まらず、水中の月を見るがごとし・根なし草の波の上に浮べるににたり

적문 방편품은 일념삼천과 이승작불을 설하여 이전 경전의 두 가지 허물 가운데 하나를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 발적현본하지 않았으므로 참된 일념삼천도 나타나지 않고 이승작불도 정해지지 않았다. 물속의 달을 보는 것과 같고, 뿌리 없는 풀이 물결 위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적문의 제법실상과 이승작불은 물속의 달이다. 분명히 보이지만, 하늘의 달이 없으면 비칠 수 없다. 뿌리 없는 풀이다. 떠 있지만, 붙잡을 땅이 없다. 이승이 부처가 된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한 부처가 시작이 있는 부처라면 그 약속은 무엇에 뿌리를 두는가. 구원실성이 그 뿌리다.

본인본과 — 무시의 불계와 무시의 구계

本門にいたりて始成正覚をやぶれば四教の果をやぶる、四教の果をやぶれば四教の因やぶれぬ、爾前迹門の十界の因果を打ちやぶつて本門の十界の因果をとき顕す、此即ち本因本果の法門なり、九界も無始の仏界に具し仏界も無始の九界に備りて・真の十界互具・百界千如・一念三千なるべし

본문에 이르러 처음 성불하였다는 것을 깨뜨리면 사교의 과(果)가 깨어지고, 사교의 과가 깨어지면 사교의 인(因)도 깨어진다. 이전 경전과 적문의 십계의 인과를 깨뜨리고 본문의 십계의 인과를 설하여 드러낸다. 이것이 곧 본인본과의 법문이다. 구계도 시작 없는 불계에 갖추어져 있고 불계도 시작 없는 구계에 갖추어져 있어, 참된 십계호구·백계천여·일념삼천이 된다.

197쪽

이 대목은 구원실성의 철학적 핵심이다. 순서대로 풀어 보자.

첫째, 과(果)가 깨어진다. 이전의 모든 가르침에서 부처가 되는 것은 「결과」였다. 오랜 수행(因) 끝에 어느 시점에 부처가 된다(果). 장교·통교·별교·원교, 사교가 모두 이 구조였다. 수량품이 「처음 성불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순간, 이 「어느 시점의 결과로서의 성불」이 깨어진다.

둘째, 인(因)도 깨어진다. 결과가 깨어지면, 그 결과를 향해 쌓아 올리던 원인도 의미가 바뀐다. 성불이 먼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면, 수행은 먼 곳을 향한 계단이 아니다.

셋째, 본인본과가 드러난다. 부처가 된 결과(본과)도 구원하고, 그 원인인 보살행(본인)도 구원하다. 결과와 원인이 시간의 앞뒤로 나뉘지 않고 함께 있다.

넷째, 무시(無始)의 십계호구. 구계가 시작 없는 불계에 갖추어져 있고, 불계가 시작 없는 구계에 갖추어져 있다. 적문의 십계호구는 「구계의 중생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본문의 십계호구는 「부처의 생명에는 시작 없는 옛날부터 구계가 있었고, 구계의 생명에는 시작 없는 옛날부터 불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능성이 사실이 된다. 이것이 「참된(眞)」 십계호구다.

  1. 장교因→果
  2. 통교因→果
  3. 별교因→果
  4. 원교因→果
始成正覺을 깨뜨림
하나의 원 안에 본인과 본과가 겹친다. 둘레에 무시의 불계와 무시의 구계.本因本果무시의 불계 ⇄ 무시의 구계
도표 10 · 사교의 인과를 깨뜨리고 본인본과로

셋째 자리에서 적문은 구계즉불계(아홉 세계가 곧 부처의 세계), 본문은 불계즉구계(부처의 세계가 곧 아홉 세계)라고 했다. 적문은 중생의 쪽에서 부처를 보고, 본문은 부처의 쪽에서 중생을 본다. 두 방향이 합쳐질 때 십계호구는 원을 완성한다.

문저 — 구원실성의 또 한 겹

여기까지는 수량품의 문상(文上), 곧 경문에 쓰인 대로의 뜻이다. 대성인과 그 문하의 교학은 여기서 한 겹 더 들어간다. 이것을 문저(文底), 곧 「경문의 밑바닥에 잠긴 뜻」이라 한다. 이 사이트가 「깊이 읽기」라고 부르는 일의 가장 깊은 층이 여기다.

오백진점겁에도 시작이 있다

오백진점겁은 헤아릴 수 없이 먼 과거지만, 그래도 한 시점이다. 석존은 그 시점에 부처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석존은 보살로서 수행했고(我本行菩薩道), 그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었다. 창가학회 교학의 해설은 이 점을 이렇게 짚는다. 오백진점겁에 성도한 석존도, 그때까지 보살이던 존재가 수행의 결과 일정한 시점에 성불했다는 「시작이 있음(有始性)」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며, 시작도 끝도 없는 참된 근원의 부처는 아니다. 수량품은 오백진점겁의 성도를 설함으로써, 구원의 석존이 스승으로 삼은 근원의 묘법을 암시한 것이다.

물음은 이렇게 바뀐다. 석존은 오백진점겁 전에 무엇을 수행하여 부처가 되었는가. 수량품은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그 밝혀지지 않은 법, 모든 부처를 부처로 만든 근원의 법이 문저에 잠긴 법이다.

구원의 당초에 깨달은 일념삼천

대성인은 「삼대비법품승사(三大秘法稟承事)」에서 이렇게 쓴다.

方便品に云く「諸法実相・所謂諸法・如是相・乃至欲令衆生開仏知見」等云云、底下の凡夫・理性所具の一念三千か、寿量品に云く「然我実成仏已来・無量無辺」等云云、大覚世尊・久遠実成の当初証得の一念三千なり

방편품의 「제법실상 …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열게 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낮은 범부의 이성(理性)에 갖추어진 일념삼천인가. 수량품의 「그러나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하는 것은 대각세존이 구원실성의 당초(當初)에 증득한 일념삼천이다.

1023쪽

그리고 같은 어서에서 삼대비법 —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단, 본문의 제목 — 을 「실상을 증득한 당초에 수행하신 바의 수량품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오자」 라고 한다. 석존이 구원에 부처가 될 때 깨달은 것, 수행한 것이 바로 남묘호렌게쿄라는 것이다.

「관심본존초」의 말로는 이렇다. 석존의 인행(因行)과 과덕(果德)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갖추어져 있다. 구원의 부처가 부처가 된 원인과 결과, 그 전부가 다섯 글자에 들어 있다.

始成가야 시성 (사십여 년)적문까지
五百塵點오백진점겁 성도수량품 문상 (有始)
久遠元初구원원초 · 묘법 (無始無終)문저

석존의 인행과덕은 묘법연화경 오자에 갖춰짐
(관심본존초)

도표 11 · 문상과 문저 — 세 겹의 구원

구원원초(久遠元初)

문저 교학은 오백진점겁보다 더 근원적인 「때」를 구원원초(久遠元初) 라 부른다. 창가학회 교학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구원원초란 수량품에 맞추어 표현하면 「구원 오백진점겁의 당초」라는 뜻으로, 시간적 표현으로 석존의 구원 성불의 밑바탕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묘법을 범부의 믿음의 한 생각에 열어 깨닫고, 범부의 모습 그대로 무작삼신을 성취하는 근원적 성불의 때는 모두 구원원초다.

이 설명은 구원원초를 먼 과거의 한 시점에서 지금 이 순간으로 옮겨 놓는다. 먼 과거의 성불이 오늘의 신심과 무관한 신화라면 그것은 역사일 뿐이다. 구원원초는 범부가 묘법을 믿고 부르는 그 한 생각 속에서 다시, 늘 새로 열리는 「근원의 때」다.

무작삼신

『어의구전』은 수량품의 「여래」를 이렇게 읽는다.

如来とは釈尊・惣じては十方三世の諸仏なり別しては本地無作の三身なり、今日蓮等の類いの意は惣じては如来とは一切衆生なり別しては日蓮の弟子檀那なり、されば無作の三身とは末法の法華経の行者なり無作の三身の宝号を南無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

여래란 석존이며, 총(總)해서는 시방삼세의 제불이고, 별(別)해서는 본지무작의 삼신이다. 지금 니치렌 등의 뜻으로는, 총해서는 여래란 일체중생이며, 별해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이다. 그러므로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며, 무작 삼신의 보호(寶號)를 남묘호렌게쿄라 한다.

752쪽

무작삼신(無作三身) — 「만들어지지 않은(無作)」 삼신. 삼십이상 팔십종호로 장엄하게 꾸민 부처(작용의 부처)가 아니라,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생명이 법신·보신·응신을 갖춘 부처라는 뜻이다. 셋째 자리에서 「제법실상초」의 「범부는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이라는 말을 읽었고, 이 사이트의 이름 「앵매도리 각각의 당체를 고치지 않고 무작삼신으로 열어 본다」를 읽었다. 그 무작삼신이 바로 수량품의 「여래」를 문저로 읽은 것이다.

구원의 부처는 저 멀리, 오백진점겁 전에 있지 않다.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지금의 범부 안에서, 고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무작삼신의 여래가 열린다.

재세의 탈익, 멸후의 하종

『어의구전』은 또 이렇게 말한다.

然りと雖も而も当品は末法の要法に非ざるか其の故は此の品は在世の脱益なり題目の五字計り当今の下種なり

그러나 이 품은 말법의 요법이 아닐 것이다. 그 까닭은, 이 품은 재세의 탈익이고 제목의 오자만이 지금의 하종이기 때문이다.

753쪽

농사에 비유하면 부처가 중생을 성불시키는 과정은 씨를 뿌리고(下種), 기르고(熟益), 거두는(脫益) 세 단계다. 석존 재세의 중생은 구원의 옛날 이미 씨를 받았고(그래서 지용보살도 「구원부터 교화한 제자」다), 법화경 수량품을 듣고 거두어졌다. 그러나 말법의 중생은 아직 씨를 받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확의 가르침이 아니라 씨 자체다. 수량품이라는 경문은 재세의 수확을 위한 것이었고, 그 밑바닥의 씨 — 남묘호렌게쿄 — 가 말법의 하종이다.

양의가 「여기에 남겨 둔」 좋은 약이 무엇이었는가. 문저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수량품의 경문 자체가 아니라 그 경문의 밑바닥에 담긴 묘법이다.

재세
  1. 구원의 하종下種
  2. 대통지승불 이래 숙익熟益
  3. 법화경 탈익脫益

재세는 탈익, 멸후는 하종 (어의구전)

말법
  1. 남묘호렌게쿄의 하종지금
도표 12 · 하종·숙익·탈익 — 재세와 말법

다시 이 사이트의 이름으로

셋째 자리까지 「앵매도리」는 삼제로, 그리고 「지옥은 지옥의 모습 그대로」로 읽혔다. 넷째 자리에서 그 구절의 마지막 두 글자, 무작삼신이 제자리를 찾는다.

桜梅桃李の己己の当体を改めずして無作三身と開見すれば

어의구전, 784쪽

벚꽃·매화·복숭아·자두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 있는 것을 무작삼신으로 열어 본다는 것은, 그 꽃들 하나하나가 오백진점겁보다 더 근원적인 부처의 생명, 시작 없는 불계와 시작 없는 구계를 함께 갖춘 생명이라는 뜻이다. 꽃은 부처가 되기 위해 무엇이 될 필요가 없다. 시작 없는 옛날부터 이미 그러했다. 다만 그것을 「열어 보는(開見)」 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구원실성이 가르치는 것은 부처의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아니다. 부처가 되는 것이 먼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시작 없는 옛날부터의 생명을 지금 여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음 자리로 — 일념삼천

지금까지 여섯 자리 가운데 넷을 걸었다.

이 모든 것을 한 생각 안에 거두어들인 것이 천태 지의의 일념삼천(一念三千) 이다. 십계호구(적문의 이승작불 + 본문의 무시 십계), 십여시(방편품의 제법실상), 삼세간(본문의 상주 국토)이 한 생각에 갖추어진다. 다섯째 자리에서는 『마하지관』 권5의 일념삼천 성립 대목을 읽고, 천태의 이(理)의 일념삼천과 대성인의 사(事)의 일념삼천이 어떻게 다른지를 본다.

참고 문헌

원전

  • 『묘법연화경』 종지용출품 · 여래수량품, T9 no.262
  • Dīgha Nikāya 16, Mahāparinibbāna-sutta
  • 세우, 『이부종륜론』 현장 역, T49 no.2031
  • 『대반열반경』 북본, T12 no.374
  • 천태 지의,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묘락 담연, 『법화문구기』 T34 no.1719
  • 니치렌 대성인, 「개목초」 · 「관심본존초」 · 「삼대비법품승사」 · 「수호국가론」 · 「법화진언승렬사」 · 「일안녀조립석가불공양사」 · 『어의구전』

연구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平川彰, 『初期大乗仏教の研究』, 春秋社, 1968
  • 横超慧日 編, 『法華思想』, 平楽寺書店, 1969
  • Paul Williams, Mahāyāna Buddhism: The Doctrinal Foundations, 2nd ed., Routledge, 2009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