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은 불교에서 가장 자주 쓰이면서 가장 자주 잘못 읽히는 말이다. 흔히 「없다」, 「비었다」, 「허무하다」로 받아들여지지만, 불교사 이천오백 년 동안 이 말은 한 번도 그런 뜻으로 쓰인 적이 없다. 공은 초기 경전에서 관계를 서술하는 말로 시작해, 반야경에서 모든 법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용수(龍樹, Nāgārjuna)에게서 연기(緣起)와 같은 것으로 논증되었으며, 천태 지의(天台智顗)에게서 공·가·중 삼제(三諦)로 다시 읽혔고, 니치렌 대성인에게서 「일념의 마음이 불가사의한 것」, 곧 묘(妙)의 풀이가 되었다.
이 글은 그 길을 원전을 따라 걷는다. 첫째 자리 십이연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조건성의 법칙을 보았다. 둘째 자리의 물음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면, 그렇게 일어난 것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
공은 '없음'이 아니다 — 물음의 자리
니치렌 대성인은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에서 한 생각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然れば即ち起るところの一念の心を尋ね見れば、有りと云はんとすれば色も質もなし、又無しと云はんとすれば様様に心起る。有と思ふべきに非ず、無と思ふべきにも非ず。
그러므로 즉 일어나는 바의 일념의 마음을 찾아보면, 있다고 말하려 하면 색도 질도 없고, 또한 없다고 말하려 하면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나니, 유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느니라.
마음은 「있다」고 하기에는 잡을 형체가 없고, 「없다」고 하기에는 분명히 일어난다. 이 짧은 문장은 공 사상이 천오백 년 넘게 씨름해 온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있다(有)」와 「없다(無)」는 우리가 사물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두 틀이다. 공은 그 두 틀 어느 쪽으로도 사물의 실상이 붙잡히지 않는다는 발견이다.
만약 공이 단순히 「없다」는 뜻이라면 불교는 허무주의가 된다.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도 없고, 수행도 없고, 성불도 없다. 실제로 용수의 시대에 이런 반론이 있었고, 『중론』 제24장 전체가 그 반론에 대한 답이다. 용수의 답은 뜻밖이다. 공이기 때문에 괴로움도 수행도 성불도 성립한다. 공이 아니라면, 곧 사물이 고정된 제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아무것도 변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이 글이 따라갈 물음은 그래서 세 겹이다.
- 공은 무엇의 부정인가 — 무엇이 「비어」 있다는 것인가.
- 공과 연기는 어떤 관계인가 — 왜 용수는 둘을 같다고 했는가.
- 공에서 어떻게 중도가 나오고, 중도가 어떻게 삼제로, 삼제가 어떻게 한 마음의 묘로 이어지는가.
용수 『중론』에서 구마라집 장안 역경로, 구마라집 장안 역경에서 혜문 → 혜사 → 지의로, 혜문 → 혜사 → 지의에서 니치렌 대성인로 이어진다.
- 기원전 5세기인도석존 · 초기 경전소공경 · 가전연경
- 기원전 2세기~인도설일체유부 아비달마자성 · 삼세실유
- 기원전 1세기~인도반야경 성립법공 · 색즉시공
- 2~3세기인도용수 『중론』연기=공=가명=중도
- 5~7세기인도청변 · 월칭유식 삼성설
- 401~중국구마라집 장안 역경『중론』 번역
- 5세기 초중국승조 「부진공론」부진고공
- 6세기중국승랑 · 길장 삼론학사중이제
- 6세기중국혜문 → 혜사 → 지의삼제원융
- 13세기일본니치렌 대성인「일생성불초」
말의 뿌리 — śūnya와 空
산스크리트 śūnya(팔리 suñña)는 「부풀다, 속이 비다」를 뜻하는 어근 √śvi에서 온 것으로 설명된다. 겉은 부풀어 있으나 속이 비어 있는 것, 곧 「무엇이 들어 있지 않은」 상태다. 추상명사 śūnyatā는 「비어 있음」, 한역으로 공성(空性)이다. 인도 수학에서 영(0)을 가리키는 말도 śūnya였다. 영은 「아무것도 아님」이 아니라 자리를 표시하는 수, 그것이 있어야 자릿수 체계 전체가 작동하는 수다. 이 우연한 겹침은 뒤에서 볼 용수의 명제 「공이 있으므로 일체가 성립한다」와 묘하게 어울린다.
초기 경전에서 공은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관계를 서술하는 말이었다. 세 용례를 보자.
① 「소공경(小空經, Cūḷasuññata-sutta, MN 121)」. 부처님은 녹자모 강당을 예로 든다. 이 강당은 코끼리·소·말에 대해서도, 금과 은에 대해서도, 남녀의 모임에 대해서도 비어 있다(suñña). 모두 세속의 삶에 속한 것들이다. 그러나 비어 있지 않은 것, 곧 비구 승가는 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여기에 없는 것은 없다고 보고, 남아 있는 것은 있다고 안다」. 공은 「A는 B에 대하여 비어 있다」는 형식이다. 무엇이 없는지가 분명하고, 없는 것을 지운 뒤에도 남는 것은 남는다.
② 「공경(Suñña-sutta, SN 35.85)」. 아난다가 「세간이 공하다고 하는데 어떤 뜻입니까」 묻자 부처님은 답한다. 세간은 자아(atta)와 자아에 속한 것(attaniya)이 비어 있으므로 공하다고 한다. 여기서 공의 대상, 곧 「없는 것」은 자아다. 초기 불교의 공은 무아(無我)와 한 몸이다.
③ 『숫타니파타』 1119게. 모가라자가 죽음의 왕에게 보이지 않는 길을 묻자 부처님은 답한다. 「항상 깨어 있으면서 세간을 공한 것으로 보라(suññato lokaṃ avekkhassu). 자아에 대한 견해를 뽑아 버리라.」
세 용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초기의 공은 무엇이 없다는 것인지가 명시된 부정이다. 없는 것은 「자아」, 「자아에 속한 것」, 곧 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주재하는 실체다. 세계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점을 붙잡아 두어야 뒤의 전개가 모두 이해된다.
두 개의 중도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는 말은 초기 경전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맥락으로 쓰인다.
첫째는 실천의 중도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극단과 자기를 괴롭히는 고행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고 하며, 그 내용을 팔정도로 제시한다. 이것은 삶의 방식에 관한 중도다.
둘째는 존재의 중도다. 「가전연경(迦旃延經, Kaccānagotta-sutta, SN 12.15 / 잡아함 301경)」에서 부처님은 말한다.
가전연이여, 이 세간은 대개 두 가지에 의지한다. 있음(atthitā)과 없음(natthitā)이다. … 여래는 이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중간에 의해 법을 설한다. 곧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식이 있다 …
주목할 것은, 유무의 두 극단을 떠난 「중간」의 내용이 바로 십이연기라는 점이다. 세계가 영원히 「있다」는 상견(常見)도, 죽으면 끊어져 「없다」는 단견(斷見)도 아니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진다. 첫째 자리에서 본 십이연기가 여기서 곧바로 중도의 이름을 얻는다.
용수는 『중론』 제15장에서 이 경을 직접 인용한다.
佛能滅有無 於化迦旃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부처님께서는 유와 무를 멸하셨으니, 가전연을 교화하신 경 가운데에서 「유를 떠나고 또한 무를 떠난다」고 설하셨다.
이 인용은 결정적이다. 용수는 자신의 공 사상을 새로운 교설로 내세우지 않았다. 부처님이 가전연에게 설한 중도, 곧 연기의 가르침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스스로 이해했다. 공 사상은 초기 불교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아니라, 초기 불교의 중심을 다시 드러내려는 운동이었다.
아비달마의 법과 자성(自性)
그렇다면 용수는 누구를 향해 공을 말했는가. 반야경과 용수가 겨냥한 것은 불교 바깥의 사상만이 아니었다. 불교 안의 가장 정교한 체계, 아비달마(阿毘達磨), 특히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법(dharma) 이론이었다.
부처님 입멸 후 제자들은 가르침을 분석하고 분류했다. 그 결과 「나」라고 부르는 것은 오온의 모임일 뿐 실체가 없지만(人無我), 그 「나」를 구성하는 궁극의 요소들, 곧 색·수·상·행·식을 더 쪼갠 75가지 법은 실재한다는 체계가 세워졌다. 설일체유부의 정의에 따르면 법은 「자기 특징(自相, svalakṣaṇa)을 지니는 것」이며, 각 법은 고유한 자성(自性, svabhāva)을 가진다. 더 나아가 법의 본체는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쳐 실재한다(三世實有 法體恒有).
이 입장을 흔히 인공법유(人空法有) 라고 한다. 사람은 공하지만 법은 있다. 반야경과 용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도 공하다(法空) 고 말했다. 사람을 이루는 요소들조차 자성을 갖지 않는다. 대승이 스스로를 「인법이공(人法二空)」을 설하는 가르침이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공법유인법이공
왜 법의 자성을 부정해야 했는가. 자성의 정의를 보면 문제가 드러난다. 용수는 이렇게 쓴다.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為無作 不待異法成
자성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찌 자성이라 하겠는가.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며, 다른 법에 의지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자성이란 정의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런데 연기의 법칙은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성을 가진 것은 연기할 수 없고, 연기하는 것은 자성을 가질 수 없다. 법에 자성이 있다고 하는 순간, 아비달마는 자기가 출발한 연기의 가르침과 충돌한다. 공은 이 모순을 해소하는 말이다. 공이란 자성이 비어 있다는 것(svabhāva-śūnya), 곧 무자성(無自性)이다.
초기 경전의 공이 「자아가 비어 있음」이었다면, 대승의 공은 「자성이 비어 있음」이다. 부정의 대상이 사람의 실체에서 모든 법의 실체로 넓어졌을 뿐, 공이 「무엇이 없는지 분명한 부정」이라는 구조는 그대로다.
반야경 — 색즉시공 공즉시색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성립한 반야경 계통(『팔천송반야』를 비롯해 『대품반야』, 『금강경』, 『반야심경』 등)은 이 법공을 선언의 형태로 내놓았다. 가장 널리 읽히는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다.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을 건넜다. …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이 등식의 방향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rūpaṃ śūnyatā śūnyataiva rūpam, rūpān na pṛthak śūnyatā śūnyatāyā na pṛthag rūpam — 「색은 공성이고 공성이 곧 색이다. 색과 떨어져 공성이 있지 않고, 공성과 떨어져 색이 있지 않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이 등식은 색이 사라지고 공만 남는다는 말이 아니다. 공은 색 바깥에 있는 어떤 영역, 모든 것이 녹아드는 텅 빈 바탕이 아니다. 공은 색의 존재 방식이다. 색은 자성 없이, 조건에 의지하여 색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은 색의 부정이 아니라 색의 정체에 대한 서술이고, 「공즉시색」은 공이 색으로서만 드러난다는 서술이다. 두 구절이 짝을 이루어야 공은 허무로도, 형이상학적 실체로도 떨어지지 않는다.
『금강경』은 같은 사태를 독특한 논리 형식으로 표현한다.
佛說般若波羅蜜 即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그 이름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흔히 「즉비(即非)의 논리」라 불리는 이 형식은 세 단계로 되어 있다. A라고 말한다 → 그것은 자성으로서의 A가 아니다 → 그러므로 이름으로서 A라 한다. 부정을 거친 뒤 이름이 되살아난다. 부정만 하고 멈추지 않고, 긍정으로 곧장 돌아가지도 않는다. 이 3단 구조는 뒤에서 볼 용수의 「공·가명·중도」, 천태의 「공·가·중」과 형식상 닮아 있다. 다만 이 닮음을 역사적 영향 관계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 대승 사유가 공유하는 하나의 문법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반야경은 공을 여러 겹으로 나누어 설하기도 한다. 『대품반야』와 그 주석인 『대지도론』은 18공을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 공공(空空), 곧 「공도 또한 공하다」가 들어 있다. 공이 새로운 실체, 붙잡을 수 있는 궁극의 무엇이 되는 것을 막는 장치다. 이 문제는 용수에게서 가장 날카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용수의 『중론』 — 팔불과 희론적멸
용수(150–250년 무렵)는 반야경의 선언을 논증으로 바꾸었다. 그의 주저 『근본중송(Mūlamadhyamakakārikā)』은 27장 약 450게로 되어 있으며, 동아시아에는 5세기 초 구마라집이 청목(靑目)의 주석과 함께 번역한 『중론(中論)』(T30 no.1564)으로 전해졌다.
『중론』은 부처님께 올리는 귀경게로 시작한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 이 인연을 설하여 모든 희론을 잘 멸하신 부처님께,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분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이것이 팔불(八不) 이다. 네 쌍의 대립 — 생/멸, 상/단, 일/이, 래/출 — 은 우리가 사물을 파악하는 기본 범주다. 무엇이 생겨난다고 할 때, 우리는 생겨나기 전에 없던 「그것」과 생겨난 뒤에 있는 「그것」이 같은 하나라고 전제한다. 용수는 그런 자성적 「그것」이 없다고 말한다. 조건이 모여 나타날 뿐,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귀경게에서 팔불과 짝을 이루는 두 말이 중요하다. 팔불로 부정된 것이 바로 인연(pratītyasamutpāda, 연기) 의 참모습이며, 그 가르침의 효과가 희론적멸(戲論寂滅, prapañcopaśama) 이라는 것이다. 희론(prapañca)은 「확산, 증식」을 뜻한다. 대상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실체로 여기고, 실체들 사이에 관계를 짓고, 그 관계에 다시 이름을 붙이며 끝없이 늘어나는 개념의 그물이다. 공은 이 그물이 멈추는 자리다. 새로운 이론이 하나 더 보태지는 자리가 아니다.
네 쌍 — 생/멸 · 상/단 · 일/이 · 래/출. 팔불로 부정된 것이 인연(연기)의 참모습이다.
사구(四句)와 그 부정
용수의 논증 방식을 이해하려면 인도 논리의 사구(catuṣkoṭi) 를 알아야 한다. 어떤 명제 P에 대하여 가능한 판단은 네 가지다.
- P이다 (有)
- P가 아니다 (無)
- P이기도 하고 P가 아니기도 하다 (亦有亦無)
- P인 것도 아니고 P가 아닌 것도 아니다 (非有非無)
용수는 여러 곳에서 이 네 구를 모두 부정한다. 예컨대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네 구 어느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제22장, 제25장). 이것은 모순을 즐기는 말놀이가 아니다. 네 구는 모두 「자성을 가진 무엇」을 전제로 한 판단이다. 전제가 무너지면 네 판단 모두 그 발판을 잃는다.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인가」라는 물음에 「예」도 「아니오」도 적절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데 같은 용수가 사구를 긍정의 형태로 쓰기도 한다.
一切實非實 亦實亦非實 非實非非實 是名諸佛法
일체는 참되다, 참되지 않다, 참되기도 하고 참되지 않기도 하다, 참된 것도 아니고 참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 이것을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라 한다.
청목의 주석에 따르면, 이것은 듣는 이의 근기에 따라 차례로 베푸는 가르침의 단계다. 사구 부정이 희론을 끊는 칼이라면, 사구 긍정은 방편으로 쓰이는 사다리다. 같은 네 구가 부정되기도 하고 긍정되기도 한다는 것, 이 이중성이 바로 뒤에서 볼 이제설(二諦說)의 논리적 뿌리다.
연기인 것, 그것이 공 — 『중론』 제24장 18게
『중론』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은 공 사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으로 시작한다.
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약 일체가 모두 공하다면 생도 없고 멸도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사성제의 법도 없을 것이다.
반론자는 이어서 말한다. 사제가 없으면 고를 아는 일도, 집을 끊는 일도, 멸을 증득하는 일도, 도를 닦는 일도 없고, 따라서 사과(四果)도, 승가도, 법도, 부처도 없다. 공을 말하는 자는 삼보를 파괴한다(24:2–6).
용수의 답은 반론을 정확히 뒤집는 것이다.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
공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일체법이 성립할 수 있고, 공의 뜻이 없다면 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론자의 첫 게송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약 일체가 공하지 않다면 생도 멸도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사성제의 법도 없을 것이다.
논리는 이렇다. 만약 괴로움이 자성을 가진다면 괴로움은 원인 없이 존재하고 결코 없앨 수 없다. 만약 번뇌가 자성을 가진다면 끊을 수 없다. 만약 범부가 범부라는 자성을 가진다면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 자성이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는 변화도, 수행도, 해탈도 불가능하다. 공, 곧 무자성이야말로 인과와 수행과 성불이 성립하는 조건이다. 유튜브 대본에서 「공은 희망을 말하는 말」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24장의 논리를 한 문장으로 줄인 것이다.
이 반론과 응답의 한가운데에 동아시아 불교사 전체를 움직인 게송이 놓여 있다.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sā prajña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眾因緣生法 我說即是無(空)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산스크리트 구문으로 읽기
산스크리트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연기(緣起)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 부른다.
그것(공성)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가명, prajñaptir upādāya)이며, 그것이야말로 중도(madhyamā pratipat)이다.
문법적으로 셋째·넷째 구의 주어 sā는 여성 대명사로, 여성명사 śūnyatā(공성)를 받는다. 즉 이 게송은 두 개의 동일성을 말한다.
- 연기 = 공성. 조건에 의지해 일어난다는 것과 자성이 비어 있다는 것은 같은 사태의 두 표현이다. 연기하므로 무자성이고, 무자성이므로 연기할 수 있다.
- 공성 = 가명 = 중도. 공성 자체도 무엇에 의지해 붙여진 이름일 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공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유와 무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다.
둘째 동일성이 중요하다. 공은 연기하는 것들의 「실체」나 「바탕」이 아니다. 공도 또한 공하다(空空). 그렇기 때문에 공은 허무(無)라는 극단으로도, 무언가가 실재한다(有)는 극단으로도 떨어지지 않는다. 인도 중관학파의 전통적 해석, 특히 월칭(月稱, Candrakīrti)의 주석 『쁘라산나빠다(Prasannapadā)』는 대체로 이 선에서 게송을 읽는다. 공과 가명은 이제(二諦)의 두 측면이고, 중도는 그 둘을 함께 보는 것이다.
한역의 한 글자
구마라집 역 『중론』의 대정장 본문은 둘째 구를 「我說即是無」로 전하고, 천태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我說即是空」으로 널리 인용되었다(부록 B 확인). 원어 śūnyatā를 옮긴 말이 「無」에서 「空」으로 정착한 과정 자체가, 중국 불교가 공을 무(無)와 구별하려고 애쓴 역사를 비추어 준다(9절).
천태의 독법 — 네 구에서 세 진리로
한역 게송은 네 구로 끊어지고, 각 구가 독립된 문장처럼 읽힌다.
- 衆因緣生法 —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 我說即是空 — 나는 곧 공이라 말한다 → 공
- 亦為是假名 — 또한 가명이라 하고 → 가
- 亦是中道義 — 또한 중도의 뜻이다 → 중
이렇게 읽으면 주어는 모두 「인연으로 생겨난 법」이 되고, 한 법이 동시에 공이요 가요 중이라는 구조가 나타난다. 이것이 천태의 삼제게(三諦偈) 독법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의 구조(연기 = 공성, 공성 = 가명 = 중도)와 비교하면, 천태의 독법은 원문의 문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한역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재해석이다.
이 사실을 감추거나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불교사에서 위대한 사상은 대개 앞선 경론을 새로 읽는 데서 나왔다. 천태는 용수의 한 게송을 새로 읽어 삼제원융을 세웠고, 대성인은 천태의 삼대부와 법화경을 다시 읽어 문저의 법문을 세웠다. 「깊이 읽기」라는 이 사이트의 방법 자체가 이 계보에서 배운 것이다.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sā prajña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
衆因緣生法我說即是空亦為是假名亦是中道義
이제(二諦) — 세속과 승의
24:18의 앞에는 공 사상의 해석학적 기초가 놓여 있다.
諸佛依二諦 為眾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真實義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모든 부처님은 이제에 의지하여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첫째는 세속제요 둘째는 제일의제다. 이제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깊은 불법의 참뜻을 알지 못한다.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고,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지 못한다.
세속제(saṃvṛti-satya) 는 일상의 언어와 관습 속에서 참인 것이다. 「이것은 물병이다」, 「그는 나의 스승이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승의제(paramārtha-satya, 제일의제) 는 궁극의 관점에서 참인 것, 곧 모든 법이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월칭은 saṃvṛti라는 말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풀었다. 첫째는 「덮음」이다. 무명이 실상을 덮어 사물을 자성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둘째는 「서로 의존함」이다. 세속의 사물은 서로 기대어 성립한다. 셋째는 「언어 관습」이다. 이름과 약속으로 성립하는 세계다. 세속은 거짓이 아니라 조건 아래에서의 참이다.
24:10이 말하는 것은 두 진리의 위계가 아니라 의존이다. 승의는 세속을 버리고 도달하는 곳이 아니다. 세속의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승의를 가리킬 수 없고, 승의를 알지 못하고서는 세속에 매이지 않을 수 없다. 이 관계를 가장 과감하게 밀어붙인 것이 제25장이다.
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世間與涅槃 亦無少分別
涅槃之實際 及與世間際 如是二際者 無毫釐差別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고, 세간은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열반의 끝과 세간의 끝, 이 두 끝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열반은 세간 저편에 있는 다른 세계가 아니다. 세간을 자성 있는 것으로 붙잡는 집착이 멎은 것이 열반이다. 뒷날 동아시아 불교가 생사즉열반(生死即涅槃), 번뇌즉보리(煩惱即菩提) 라고 말할 때, 그 논리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24:10세속제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고,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지 못한다.
공을 잘못 쥐는 위험
용수는 공이 오해될 때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大聖說空法 為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위대한 성인께서 공의 법을 설하신 것은 모든 견해를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다시 공이 있다는 견해를 가진다면, 모든 부처님도 교화하지 못한다.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咒術 不善捉毒蛇
공을 바르게 관하지 못하면 둔근은 스스로를 해친다. 주술을 잘못 부리는 것과 같고, 독사를 잘못 잡는 것과 같다.
공은 약이다. 모든 견해라는 병을 고치는 약이다. 그런데 약을 먹은 뒤 약까지 붙들고 있으면, 약이 새로운 병이 된다. 공을 「모든 것은 결국 없다」는 또 하나의 견해로 붙잡는 것을 동아시아에서는 악취공(惡取空), 또는 공견(空見) 이라 불렀다. 뱀의 꼬리를 잡으면 물린다. 공을 허무로 읽는 것은 뱀의 꼬리를 잡는 일이다.
논쟁의 계보 — 무주장과 공의 자기 부정
공 사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반론은 이것이었다.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하는 당신의 그 말은 공한가, 공하지 않은가. 공하다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공하지 않다면 「모든 것이 공하다」는 주장이 거짓이 된다.
용수는 『회쟁론(廻諍論, Vigrahavyāvartanī)』에서 이렇게 답한다.
만약 내게 어떤 주장(pratijñā)이 있다면 그 허물이 내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장이 없으므로 허물도 없다. (제29게)
이 유명한 「무주장(無主張)」의 선언은 공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명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공은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자성을 전제하는 모든 이론의 전제를 드러내 무너뜨리는 작업이다. 그리고 같은 논서 끝에서 용수는 이렇게 맺는다.
공성이 성립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성립한다. (제70게)
인도에서 용수 이후의 중관은 크게 두 흐름으로 갈렸다. 청변(淸辨, Bhāviveka)은 중관도 정식 논증식을 세워 자기 입장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고(뒷날 티베트에서 「자립논증파」로 분류), 월칭은 중관은 상대의 주장이 스스로 모순에 빠짐을 보여줄 뿐 자기 주장을 세우지 않는다고 보았다(「귀류논증파」). 또 유가행파(유식)는 반야의 공이 허무로 오해되는 것을 경계하여,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依他起)은 있고 그 위에 망상으로 덧씌운 것(遍計所執)이 없는 것이 공이며, 그 공이 드러난 것이 원성실(圓成實)이라는 삼성설(三性說)을 세웠다. 『해심밀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有, 아함) → 공(空, 반야) → 유도 공도 아닌 중도(해심밀의 요의교)의 세 시기로 나누는 교판을 내놓았다.
이 삼시 교판은 흥미롭다. 「유 → 공 → 중」이라는 순서로 불교사 전체를 정리하려는 시도가 인도에서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천태의 오시팔교도 같은 과제를 중국에서 훨씬 더 크게 풀어낸 것이다. 다만 두 교판은 무엇을 최후의 요의로 보느냐에서 갈린다. 유식은 해심밀경을, 천태는 법화경을 최후에 둔다.
주홍 칸 — 무엇을 요의로 보는가
동아시아의 공 — 격의에서 삼론까지
격의(格義)의 시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śūnyatā를 이해할 틀로 노장 사상의 「무(無)」를 끌어왔다. 이를 격의불교라 한다. 4세기의 반야학은 여러 해석으로 갈라져 「육가칠종(六家七宗)」이라 불렸는데, 그 가운데 본무종(本無宗)은 만물이 본래 무에서 나왔다고 보아 공을 노자의 무와 거의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공이 우주의 근원, 만물이 거기서 나오고 거기로 돌아가는 「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용수가 경계한 「공을 실체로 붙드는」 오해였다.
구마라집과 승조
401년 장안에 들어온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론』, 『백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대품반야』, 『법화경』을 번역하여 이 혼란을 바로잡았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 384?–414) 는 『조론(肇論)』에 실린 「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 공을 이렇게 정의했다.
欲言其有 有非真生 欲言其無 事象既形
있다고 말하려 하면 그 있음은 참된 생겨남이 아니고, 없다고 말하려 하면 사물의 모습이 이미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만물은 「참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不眞故空)」. 공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성으로서 참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장을 1절의 「일생성불초」와 나란히 놓아 보라. 「있다고 말하려 하면 색도 질도 없고, 없다고 말하려 하면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난다.」 문장의 형식이 거의 그대로 겹친다. 대성인이 승조를 직접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있다고 하려니 / 없다고 하려니」라는 이중 부정의 형식이 중국 반야학의 정통 해석에서 천태를 거쳐 대성인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사유 문법임은 분명하다.
- 승조 「부진공론」 · 5세기 초欲言其有 有非真生 欲言其無 事象既形
- 「일생성불초」 · 13세기有りと云はんとすれば色も質もなし、又無しと云はんとすれば様様に心起る。
- 풀이 — 같은 형식승조 — 있다고 말하려 하면 그 있음은 참된 생겨남이 아니고, 없다고 말하려 하면 사물의 모습이 이미 드러나 있다.대성인 — 있다고 말하려 하면 색도 질도 없고, 또한 없다고 말하려 하면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나니.
삼론학과 승랑
구마라집이 번역한 『중론』·『백론』·『십이문론』을 근본으로 하는 학파를 삼론종(三論宗) 이라 한다. 이 학파를 중흥시킨 인물이 고구려 출신의 승랑(僧朗) 이다. 그는 강남의 섭산(攝山)에서 삼론학을 새롭게 일으켰고, 그 학통은 승전 → 법랑을 거쳐 수대의 길장(吉藏, 549–623) 에게서 집대성되었다. 길장은 이제를 진리 자체가 아니라 가르침의 방편(敎二諦)으로 보았고, 이제를 네 겹으로 올라가며 부정하는 「사중이제(四重二諦)」를 세웠다. 한반도 출신의 사상가가 동아시아 공 사상의 한 축을 세웠다는 것은 한국의 독자가 기억해 둘 만한 사실이다.
길장은 천태 지의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용수를 근거로 삼았지만, 길장이 이제의 부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쪽으로 갔다면, 지의는 이제를 삼제로 다시 짜서 공과 가를 원융하게 긍정하는 쪽으로 갔다.
천태 — 삼제원융(三諦圓融)
혜문의 깨달음
천태종은 스스로의 기원을 이렇게 전한다. 북제(北齊)의 혜문(慧文) 이 『대지도론』을 읽다가 일체지·도종지·일체종지의 세 지혜가 「한 마음 가운데서 얻어진다(三智實在一心中得)」는 구절에 이르렀고, 다시 『중론』 「관사제품」의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이라 하고, 또한 가명이라 하며, 또한 중도의 뜻이라 한다」는 게송을 읽고 크게 깨달아 일심삼관(一心三觀) 을 세웠다(『불조통기』 권6). 이 법이 남악 혜사(慧思) 에게, 혜사에게서 천태 지의(智顗, 538–597) 에게 전해졌다.
천태의 삼제원융은 이렇게 용수의 한 게송과 한 마음에 대한 관법에서 출발했다. 이론의 출발점이 수행이라는 것, 이것이 천태 교학의 성격을 정한다.
삼제
- 공제(空諦) —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겼으므로 자성이 없다.
- 가제(假諦) — 자성은 없으나 인연에 따라 거짓으로(임시로) 분명히 나타나 있다.
- 중제(中諦) — 법은 공만도 아니고 가만도 아니며, 공이면서 가이고 가이면서 공이다. 공과 가를 함께 비추는 절대의 실상.
여기까지는 용수의 이제에 중을 하나 덧붙인 것처럼 보인다. 천태 교학의 참된 새로움은 셋의 관계에 있다.
차제삼관(次第三觀)과 일심삼관(一心三觀)
『보살영락본업경』은 세 관법을 차례로 설한다. 가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관(從假入空觀, 이제관), 공에서 가로 나오는 관(從空入假觀, 평등관), 그리고 중도제일의제관이다. 먼저 현상(가)의 무자성을 깨달아 공에 들어가고, 다시 공에서 나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현상의 차별을 알고, 마지막에 둘을 함께 비추는 중도에 이른다. 이것이 차제삼관, 셋을 차례로 닦는 관법이다.
천태는 이것을 별교(別敎) 의 관법으로 자리매김했다. 별교에서는 공·가·중이 사다리의 칸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 이를 격력삼제(隔歷三諦) 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중도는 공과 가 바깥에, 그 위에 따로 있는 중도, 곧 단중(但中) 이다.
원교(圓敎)의 관법은 다르다. 공·가·중은 한 마음 한 순간에 동시에 갖추어져 있다. 『마하지관』은 이렇게 쓴다.
一空一切空 無假中而不空 總空觀也
一假一切假 無空中而不假 總假觀也
一中一切中 無空假而不中 總中觀也하나가 공하면 일체가 공하니, 가와 중도 공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총체적 공관이다. 하나가 가이면 일체가 가이니, 공과 중도 가 아님이 없다. 이것이 총체적 가관이다. 하나가 중이면 일체가 중이니, 공과 가도 중 아님이 없다. 이것이 총체적 중관이다.
이것이 즉공즉가즉중(即空即假即中) 이며, 원융삼제다. 셋은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다(非三而三 三而不三). 중도는 공과 가의 바깥에 있지 않고 공과 가 그 자체다. 이를 부단중(不但中) 이라 한다.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차제삼관에서 중도는 먼 끝에 있다. 공을 깨닫고, 다시 가로 나오고, 오랜 수행 끝에 중도에 이른다. 원융삼제에서 중도는 지금 일어나는 한 생각 속에 이미 온전히 있다. 천태가 『마하지관』 첫머리에서 「한 빛깔 한 향기도 중도 아님이 없다(一色一香 無非中道)」고 한 것은, 중도가 저 멀리 있는 궁극의 경지가 아니라 눈앞의 꽃 한 송이, 향 한 줄기의 실상이라는 뜻이다.
화법사교에서 본 공
천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용에 따라 장·통·별·원 네 가지로 나누었다(化法四敎). 이 교판은 곧 공을 이해하는 네 가지 깊이이기도 하다.
- 藏장교(藏敎)석공관(析空觀) — 사물을 요소로 쪼개어 분석한 끝에 공을 안다중도중도를 설하지 않음. 공은 번뇌가 끊어진 자리(偏空)4절 ↑
- 通통교(通敎)체공관(體空觀) — 쪼개지 않고 사물 그 자체가 곧 공임을 체달한다중도공에 치우침. 불공(不空)은 아직 보지 못함5절 ↑6절 ↑
- 別별교(別敎)차제삼관 — 공·가·중을 차례로 닦는다중도단중(但中) — 공·가 바깥의 중도11절 ↑
- 圓원교(圓敎)일심삼관 — 한 마음에 공·가·중을 동시에 관한다중도부단중(不但中) — 공·가 그 자체가 중도11절 ↑
장교의 공이 아비달마의 분석적 공에, 통교의 공이 반야경과 용수의 체공에 대응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 교판이 인도 불교 사상사를 천태의 눈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4절에서 9절까지 걸어온 길이 천태의 사교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삼관 · 삼지 · 삼안 · 삼혹
천태는 삼제를 수행의 전 체계와 연결했다. 세 관법은 세 지혜를 낳고, 세 눈을 열며, 세 가지 미혹을 끊는다.
| 삼제 | 삼관 | 삼지(三智) | 삼안(三眼) | 끊는 미혹(三惑) | 삼덕(三德) |
|---|---|---|---|---|---|
| 空諦공제 | 공관 | 일체지(一切智) | 혜안(慧眼) | 견사혹(見思惑) | 반야(般若) |
| 假諦가제 | 가관 | 도종지(道種智) | 법안(法眼) | 진사혹(塵沙惑) | 해탈(解脫) |
| 中諦중제 | 중관 | 일체종지(一切種智) | 불안(佛眼) | 무명혹(無明惑) | 법신(法身) |
견사혹은 사물을 자성 있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견해와 그에 따른 탐·진·치다. 공관이 이것을 끊는다. 진사혹은 공에 머물러 중생의 무수한 차별을 알지 못하는 무지다. 가관이 이것을 끊는다. 무명혹은 공과 가를 둘로 보는 근본 무지다. 중관이 이것을 끊는다. 원교에서는 이 셋이 한 마음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동시에 사라진다(一心三智).
중도와 불성
천태가 늘 인용한 『대반열반경』(북본 권27, 사자후보살품)에는 중도에 관한 결정적인 구절이 있다.
佛性者名第一義空 第一義空名為智慧 … 中道者名為佛性
불성은 제일의공이라 이름하며, 제일의공은 지혜라 이름한다. … 중도를 불성이라 이름한다.
여기서 공은 드디어 부처의 본성과 하나가 된다. 공이 단순한 부정이라면 이런 말은 성립할 수 없다. 공은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을 비추는 지혜이며, 그 지혜가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다. 중도가 불성이라는 것은, 공에도 가에도 치우치지 않고 둘을 함께 비추는 그 자리에 부처가 있다는 뜻이다. 반야의 공과 열반경의 불성, 이 둘을 하나로 꿰는 것이 천태의 중도다.
한 마음의 묘 — 「일생성불초」
이제 1절에서 던진 대성인의 문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일생성불초」(어서 384쪽)의 해당 단락 전체는 이렇다.
夫れ妙とは何と云う心ぞや、只我が一念の心不思議なる処を妙とは云うなり。不思議とは心も及ばず語も及ばずと云う事なり。然れば即ち起るところの一念の心を尋ね見れば、有りと云はんとすれば色も質もなし、又無しと云はんとすれば様様に心起る。有と思ふべきに非ず、無と思ふべきにも非ず。有無の二の語も及ばず、有無の二の心も及ばず、有無に非ずして而も有無に遍して、中道一実の妙体にして不思議なるを妙とは名くるなり。
대저 묘란 무슨 뜻이뇨. 오직 나의 일념의 마음이 불가사의함을 묘라고 하며, 불가사의란 마음도 미치지 못하고 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즉 일어나는 바의 일념의 마음을 찾아보면, 있다고 말하려 하면 색도 질도 없고, 또한 없다고 말하려 하면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나니, 유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느니라. 유무의 두말도 미치지 못하고 유무의 두 마음도 미치지 못하며, 유무가 아니면서도 또한 유무에 두루 미치어, 중도일실의 묘체로서 불가사의함을 묘라고 이름하느니라.
이 단락은 이 글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압축한다.
| 어서의 구절 | 삼제 | 앞선 전통 |
|---|---|---|
| 있다고 하려니 색도 질도 없다 | 공 — 자성이 없음 | 반야경 「색즉시공」, 승조 「있음은 참된 생겨남이 아니다」 |
| 없다고 하려니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난다 | 가 — 조건 따라 분명히 나타남 | 반야경 「공즉시색」, 승조 「사물의 모습이 이미 드러나 있다」 |
| 유무의 두 말도, 두 마음도 미치지 못한다 | 사구 부정 · 희론적멸 | 용수 귀경게, 『회쟁론』 무주장 |
| 유무가 아니면서 유무에 두루 미친다 | 중 — 부단중, 공·가를 함께 비춤 | 천태 「즉공즉가즉중」 |
| 중도일실의 묘체 | 원융삼제 | 「일색일향 무비중도」 |
| 나의 일념의 마음 | 일심삼관의 「일심」 | 혜문의 「한 마음 가운데서 얻는다」 |
- 어서의 구절
- 있다고 하려니 색도 질도 없다
- 삼제
- 공 — 자성이 없음
- 앞선 전통
- 반야경 「색즉시공」, 승조 「있음은 참된 생겨남이 아니다」
두 가지를 짚어 두어야 한다.
첫째, 대성인은 삼제를 「묘(妙)」의 풀이로 쓰셨다. 묘법연화경의 묘, 곧 남묘호렌게쿄의 묘다. 공·가·중은 여기서 교리의 한 항목이 아니라 묘법이 무엇인지 밝히는 열쇠가 된다. 불가사의란 「마음도 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용수의 희론적멸, 사구 부정과 정확히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둘째, 대성인은 삼제를 「나의 일념의 마음」에서 말씀하셨다. 저 멀리 있는 우주의 이치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한 생각이다. 그리고 그 한 생각은 「선악에 따라서 일어나고 일어나는 바의 염심의 당체」, 곧 착하든 악하든 지금 일어나는 범부의 마음 그대로다. 삼제원융은 성자의 청정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범부의 번뇌심에서 성립한다. 번뇌즉보리가 여기서 구체적인 얼굴을 얻는다.
관법에서 창제로
그렇다면 이 한 마음의 묘를 어떻게 체득하는가. 천태의 답은 일심삼관, 곧 지관(止觀)의 수행이었다. 고요히 앉아 한 생각을 관하여 그것이 즉공즉가즉중임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법은 근기가 뛰어나고 수행의 여건을 갖춘 이에게나 가능한 길이었다.
대성인은 같은 어서에서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
只今も一念無明の迷心は磨かざる鏡なり、是を磨かば必ず法性真如の明鏡と成るべし。深く信心を発して日夜朝暮に又懈らず磨くべし。何様にしてか磨くべき、只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たてまつるを是をみがくとは云うなり。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니라. 이를 닦는다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리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해서 닦을 것인가.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것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거울은 닦기 전에도 거울이다. 닦는다고 새 거울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닦지 않았다고 거울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일념무명의 미심과 법성진여의 명경은 두 개의 거울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이다. 이것이 공·가·중이 한 마음에 원융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거울을 닦는 일, 천태에게는 일심삼관이던 그 일을,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로 바꾸셨다. 「관심본존초」에서 대성인은 석존의 인행과 과덕이 모두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 공덕이 주어진다고 밝히신다. 관하는 것(觀心)이 곧 받아 지니는 것(受持)이라는 수지즉관심이다. 이 법문은 다섯째 자리 「일념삼천」과 여섯째 자리 「남묘호렌게쿄」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앵매도리 — 당체를 고치지 않는 중도
이 사이트의 이름은 어의구전의 한 구절에서 왔다.
桜梅桃李の己己の当体を改めずして無作三身と開見すれば
앵매도리의 각각의 당체를 고치지 않고 무작삼신으로 개현해 본다면
삼제의 눈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 그 무게가 새로 드러난다. 벚꽃은 벚꽃으로, 매화는 매화로, 복숭아는 복숭아로, 자두는 자두로 조건에 따라 분명히 피어 있다 — 가다. 그 어느 것도 고정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공이다. 그리고 그 각각의 모습을 「고치지 않은 그대로」가 부처의 생명이다 — 중이다. 천태 교학에서 삼제는 삼신과도 짝을 이루어, 중제는 법신에, 공제는 보신에, 가제는 응신에 대응한다고 설해진다. 당체를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가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에 들어가기 위해 현상을 지우지 않고, 중도에 이르기 위해 지금의 나를 다른 무엇으로 바꾸지 않는다. 차제삼관의 사다리를 오르지 않고, 원융삼제의 한 자리에서 그대로 무작삼신을 연다.
첫째 자리 십이연기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본 연기는, 둘째 자리에서 「연기이므로 공이고, 공이므로 가이며, 공과 가가 둘이 아니므로 중」이라는 삼제가 되었고, 대성인에게서 「지금 이 한 생각이 곧 묘」라는 말씀이 되었다. 공은 없음이 아니었다. 정해져 있지 않음이었고,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이 몸 그대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다음 자리로 — 제법실상
천태가 삼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곳은 법화경 방편품의 한 구절, 이른바 십여시(十如是) 를 읽는 방식이었다.
所謂諸法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究竟等
천태는 이 구절을 같은 글자 그대로 세 번 끊어 읽었다(三轉讀文, 『법화현의』 권2상).
| 끊어 읽기 | 뜻 | 삼제 |
|---|---|---|
| 是相如 是性如 … | 이 모습이 여(如)하다 — 차별 없이 한결같다 | 공제 |
| 如是相 如是性 … | 이와 같은 모습, 이와 같은 성품 — 낱낱의 차별 | 가제 |
| 相如是 性如是 … | 모습이 곧 중도실상의 「이러함」이다 | 중제 |
| 是相如 | 是性如 | 是體如 | 是力如 | 是作如 | 是因如 | 是緣如 | 是果如 | 是報如 | 열째 · 그대로如是本末究竟等 | 空공 |
|---|---|---|---|---|---|---|---|---|---|---|
| 如是相 | 如是性 | 如是體 | 如是力 | 如是作 | 如是因 | 如是緣 | 如是果 | 如是報 | 假가 | |
| 相如是 | 性如是 | 體如是 | 力如是 | 作如是 | 因如是 | 緣如是 | 果如是 | 報如是 | 中중 |
글자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읽는 방법만 바뀌었다. 같은 법이 공이면서 가이면서 중이라는 원융삼제가, 법화경의 한 줄 안에서 문법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십여시가 곧 「제법실상(諸法實相)」, 모든 법의 참모습이다.
공과 중도는 여기서 법화경 적문의 핵심 법문으로 이어진다. 셋째 자리 제법실상에서는 방편품의 십여시를 중심으로, 모든 법의 참모습이 어떻게 부처의 지견 그 자체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승작불과 일불승의 근거가 되는지를 읽는다.
참고 문헌
원전
- 『잡아함경』 301경(가전연경) / Saṃyutta Nikāya 12.15, 35.85 / Majjhima Nikāya 121 / Suttanipāta 1119
- 『반야바라밀다심경』 현장 역, T8 no.251
-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 역, T8 no.235
- 용수, 『중론』 청목 석 · 구마라집 역, T30 no.1564 / Mūlamadhyamakakārikā
- 용수, 『회쟁론』 Vigrahavyāvartanī
- 『대지도론』 구마라집 역, T25 no.1509
- 승조, 『조론』 「부진공론」, T45 no.1858
- 『보살영락본업경』 T24 no.1485
- 『대반열반경』 북본, T12 no.374
- 천태 지의, 『법화현의』 T33 no.1716 / 『마하지관』 T46 no.1911
- 지반, 『불조통기』 T49 no.2035
- 니치렌 대성인, 「일생성불초」(어서 384쪽), 「관심본존초」, 『어의구전』(어서 784쪽)
연구
- 김성철 역주, 『중론』, 경서원
- 中村元, 『ナーガールジュナ』, 講談社, 1980
- 梶山雄一·上山春平, 『空の論理〈中観〉』(仏教の思想 3), 角川書店, 196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平井俊榮, 『中国般若思想史研究 — 吉蔵と三論学派』, 春秋社, 1976
- Jay L. Garfield, The Fundamental Wisdom of the Middle Way,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 Mark Siderits & Shōryū Katsura, Nāgārjuna's Middle Way, Wisdom Publications, 2013
- Paul L. Swanson, Foundations of T'ien-t'ai Philosophy: The Flowering of the Two Truths Theory in Chinese Buddhism, Asian Humanities Press, 19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