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넓은 강, 건너편 바위 언덕 위의 작은 승원과 탑, 강가 큰 나무 아래 아주 작게 앉은 뒷모습을 그린 금박 수묵화

용수보살

龍樹菩薩2~3세기경 · 남인도의 대논사

2~3세기경 남인도, 한 브라만 출신의 수행자가 있었다. 전승은 그가 설산의 늙은 비구에게서 대승 경전을 받고, 용궁에 들어가 구십 일 동안 경전을 읽고, 붉은 깃발을 들고 일곱 해 동안 왕의 앞을 걸었다고 전한다. 그는 「모든 것은 연기하므로 공하다」는 한 줄의 논리로 인도 사상 전체와 맞섰고, 그가 남긴 논서들은 뒤에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거의 모든 종파가 저마다 조사(祖師)로 받드는 근거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나가르주나(Nāgārjuna), 곧 용수(龍樹)라 불렀다.

용수만큼 이름이 크고 생애가 흐릿한 사람도 드물다. 확실한 것은 몇 가지뿐이다. 그는 남인도 사람이었고, 사타바하나 왕조의 한 왕과 가까웠으며, 『중론(中論)』이라는 짧고 날카로운 게송집을 지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그가 죽고 이백 년 넘게 지나 쓰인 전기와 전설이다. 그 전설들은 서로 어긋나고, 여러 시대의 「용수」들이 한 사람의 이야기로 겹쳐 있다. 연구자들은 적어도 둘, 많게는 넷의 용수를 가려내려 한다. 공의 논사 용수, 밀교의 용수, 연금술사 용수.

그러나 전설도 사료다. 전설은 뒤의 사람들이 용수를 무엇으로 기억하려 했는지를 보여 준다. 욕망이 괴로움의 뿌리임을 깨달은 젊은이, 모든 경전을 읽고도 교만했던 천재, 바다 밑에서 끝없는 경전 앞에 선 구도자, 외도의 왕을 일곱 해 동안 기다린 사람. 이 페이지는 전설을 전설로 밝히면서 그 이야기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 생애를 또 하나의 눈으로 읽는다. 니치렌 대성인은 용수를 여러 어서에서 불렀다. 정법 천 년의 후반 오백 년에 대승을 넓힌 부처의 사자, 「비유하면 뛰어난 의사가 독으로 약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한 구절로 법화경의 「묘(妙)」를 읽은 사람. 동시에 대성인은 용수가 법화경의 참뜻을 「안으로는 알았으나 밖으로는 펴지 않았다」고 보셨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페이지는 그 관점을 따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

전승의 네 장면설산의 노비구용궁의 구십 일붉은 깃발 일곱 해흑봉산의 입멸
대성인의 한 줄「이들 성인은 알면서 말하지 않은 분들이다」 — 「관심본존초」, 245쪽此等の聖人は知つて之を言わざる仁なり
  1. 설산히말라야 — 늙은 비구에게 대승 경전을 받음 (전승)
  2. 간다라북쪽 쿠샨 왕조의 땅
  3. 날란다용수가 가르쳤다는 티베트 전승
  4. 남교살라현장이 전한 흑봉산 — 자리는 정해지지 않음 ?
  5. 아마라바티크리슈나 강 하류 · 사타바하나 왕조의 대탑
  6. 나가르주나콘다「나가르주나의 언덕」 — 용수와의 관계는 정해지지 않음 ?
  7. 슈리샤일람슈리파르바타(吉祥山) 후보 ?
  8. 용궁바다 밑 궁전 (전승)
  9. 쿠차(구자)지도 밖 북쪽 — 구마라집의 고향, 장안으로
용수의 활동지는 남인도로 보는 데 전승이 모이나, 구체적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 윤곽은 대략이며 측량 지도가 아니다 · 점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1 · 용수 생애의 땅
1부 남천축의 브라만

시대 — 두 왕조 사이의 인도

2~3세기경 · 인도 아대륙

석존이 입멸하고 대여섯 세기가 흐른 뒤, 인도 아대륙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북쪽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쿠샨 왕조가 간다라와 갠지스 상류를 다스렸다. 이 왕조의 카니슈카 왕은 불교를 보호한 왕으로 이름이 높고, 그의 시대에 간다라에서 처음으로 부처의 모습을 사람의 형상으로 새긴 불상이 만들어졌다. 남쪽 데칸고원과 동해안의 크리슈나 강 유역에는 사타바하나(Sātavāhana) 왕조가 있었다. 한역 문헌은 이 왕조의 이름을 「사다바하(娑多婆訶)」, 「인정(引正)」 등으로 옮겼다. 로마와의 바닷길 교역으로 부유해진 이 왕조의 땅에서, 아마라바티(Amarāvatī)의 대탑처럼 인도 불교 미술의 걸작이 세워졌다.

불교 안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기원 전후부터 「대승(大乘, Mahāyāna)」이라 스스로 부르는 새 경전들이 나타났다. 모든 법이 공하다고 설하는 반야경,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설하는 법화경, 부처의 깨달음의 세계를 장엄하게 그리는 화엄경, 아미타불의 정토를 설하는 경전들. 이 경전들은 기존의 부파 교단, 특히 가장 정교한 교학을 세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긴장 속에 있었다. 부파의 학승들은 이 새 경전들이 부처의 말씀이 아니라고 보았다. 대승을 따르는 이들은 부파의 교학이 부처의 참뜻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았다.

용수는 이 긴장의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그의 일은 새 경전들, 특히 반야경의 「공」을 논리로 세우는 것이었다. 대승이 부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부처가 설한 연기(緣起)의 가장 깊은 뜻이라는 것을, 부파의 교학과 브라만 철학의 언어로 논증하는 것이었다.

학계는 용수의 활동 시기를 대체로 150~250년 무렵으로 본다. 근거는 셋이다. 그의 저작이 반야경과 몇몇 대승 경전을 이미 전제한다는 점, 그가 편지를 보낸 왕이 사타바하나 왕조의 왕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3세기 이후 그의 저작이 인용되고 5세기 초 구마라집이 그의 전기와 저작을 한역했다는 점이다.

북인도쿠샨 왕조1~3세기경카니슈카 왕2세기 전반경간다라 불상2세기경~
남인도사타바하나 왕조~3세기 초이크슈바쿠 왕조3세기 · 나가르주나콘다아마라바티 대탑2세기경
불교반야 · 법화 · 화엄 등 대승 경전의 성립기원 전후~마명1~2세기경용수150~250경제바3세기경
연대는 모두 대략(경) · 막대 끝을 흐리게 한 것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다는 뜻
도표 2 · 용수의 시대 — 북인도 · 남인도 · 불교

연대 대조 — 불전은 용수의 출현을 「불멸 후 칠백 년」(『마하마야경』), 「불멸 후 육백 년」, 「불멸 후 팔백 년」 등으로 전한다. 이것은 석존 입멸을 기원전 949년으로 보는 동아시아의 전통 연대에 기댄 표현으로, 학계의 연대(2~3세기경)와 직접 맞추면 어긋난다. 대성인이 쓰신 연대는 6부 24절에서 따로 본다.

네 갈래의 전기

5세기 초 ~ 17세기 · 전기의 성립

용수의 생애를 전하는 기록은 모두 그가 죽고 한참 뒤에 쓰였다. 가장 이른 것조차 이백 년쯤 떨어져 있다.

①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T50 no.2047) — 5세기 초 장안에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옮긴 것으로 전한다. 한 권의 짧은 전기로, 출가 전의 방황, 설산의 노비구, 용궁, 남천축 왕의 교화, 입멸을 차례로 전한다. 동아시아에서 용수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거의 이 책이다.

②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 (T50 no.2058) — 472년 북위에서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가 옮겼다. 석존에서 사자존자까지 법을 이어받은 스물세 사람(또는 스물네 사람)의 전기로, 용수는 마명 · 가비마라 다음에 온다. 용수 대목은 『용수보살전』과 거의 같다. 천태의 교판과 대성인의 어서에 나오는 「부법장의 사람들」이 이 책의 계보다.

③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 7세기 인도를 여행한 현장(玄奘)과 의정(義淨)의 기록이다. 현장은 권10의 남교살라국(南憍薩羅國) 대목에서 용수를 「용맹(龍猛)」이라 옮기며, 「옛 번역에서 용수라 한 것은 잘못」이라 적었다. 현장은 용수와 사타바하나 왕의 관계, 흑봉산의 승원, 그리고 전혀 다른 입멸 이야기를 전한다. 의정은 용수가 옛 후원자인 남방의 왕에게 시로 된 편지를 보냈으며, 인도에서 그 편지를 어린 학인들까지 외운다고 적었다.

④ 티베트의 불교사 — 14세기 부톤(Bu ston)과 17세기 타라나타(Tāranātha)의 불교사는 용수가 날란다에서 가르쳤고, 연금술로 기근을 구했으며, 나가(nāga, 용)들에게서 반야경의 긴 판본을 가져왔고, 육백 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인도 후기 밀교의 성취자(siddha) 나가르주나의 전승이 공의 논사 용수와 한 사람으로 겹쳐 있다.

① 『용수보살전』5세기 초
출가 전(은신술)
있음
설산의 노비구
있음
용궁
있음
왕의 교화
있음
제바
확인 중
입멸
있음
기타
확인 중
② 『부법장인연전』472
출가 전(은신술)
있음
설산의 노비구
있음
용궁
있음
왕의 교화
있음(세부 확인 중)
제바
있음
입멸
있음
기타
확인 중
③ 『대당서역기』 · 『남해기귀내법전』646 · 691
출가 전(은신술)
확인 중
설산의 노비구
확인 중
용궁
확인 중
왕의 교화
다르게 전함 — 인정왕 · 흑봉산 승원 · 왕에게 보낸 시
제바
있음
입멸
다르게 전함 — 인정왕 · 마른 풀잎
기타
다르게 전함 — 「용맹」 — 옛 번역의 「용수」는 잘못
④ 티베트 불교사1322 · 1608
출가 전(은신술)
확인 중
설산의 노비구
확인 중
용궁
다르게 전함 — 나가에게서 반야경
왕의 교화
확인 중
제바
확인 중
입멸
다르게 전함 — 육백 년을 삶
기타
다르게 전함 — 날란다 · 연금술
있음 확인 중 다르게 전함— 여러 사람의 전승이 겹쳐 있다는 견해(2절 연구 노트)붉은 깃발 일곱 해 — 보은초 297
도표 3 · 네 갈래의 전기

연구 노트 — 학계에는 「용수」라는 이름 아래 여러 사람의 전승이 겹쳐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중론』의 저자인 2~3세기의 논사, 7세기 이후 인도 밀교의 성취자, 그리고 연금술과 의술의 대가로 전하는 인물이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도 「같은 이름의 여러 인물의 전승이 섞여 전한다」고 적는다. 이 페이지는 1~2부에서 전설을 전설로 밝혀 따라가고, 3부 이후에서 저작을 기준으로 역사 속의 용수를 본다.

용과 나무 — 이름, 그리고 브라만의 소년

2세기경 · 남천축

『용수보살전』은 용수를 「남천축의 브라만 종성」으로 소개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젖먹이 때 브라만들이 베다를 외우는 소리를 듣고 그 뜻을 알았고, 스무 살 전에 이미 천문과 지리, 예언과 온갖 술법에 두루 통했다고 한다. 인도 사상의 정통을 이어받은 브라만의 학문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뒤에 용수가 브라만 철학의 논리학과 정면으로 겨룰 수 있었던 것도 이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름의 유래도 같은 전기가 전한다.

其母樹下生之。因字阿周陀那。阿周陀那樹名也。以龍成其道。故以龍配字。號曰龍樹也。

그 어머니가 나무 아래에서 그를 낳았으므로 「아주타나」라 이름했다. 아주타나는 나무의 이름이다. 용(龍)으로 말미암아 그 도를 이루었으므로 「용」을 이름에 붙여 용수라 불렀다.

『용수보살전』, T50 no.2047

아르주나(arjuna)는 인도에 흔한 큰 나무다. 나가(nāga)는 인도 신화에서 물과 땅속에 사는 뱀 모양의 신적 존재로, 한역 경전은 이를 「용(龍)」으로 옮겼다. 나가르주나(Nāgārjuna)라는 이름은 「나가」와 「아르주나」를 합친 말이다. 현장은 이 이름을 「용맹(龍猛)」으로 옮겼는데, 아르주나를 나무 이름이 아니라 「빛나는 · 뛰어난」의 뜻으로 읽은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구마라집의 「용수」가 널리 쓰였고, 진언종은 현장 계통의 「용맹」을 즐겨 썼다.

보이지 않는 몸의 술법

『용수보살전』은 용수의 출가 전 한 사건을 숨기지 않고 전한다. 이름난 젊은이 넷이 모여 이렇게 의논했다. 세상의 이치와 학문은 이미 다 알았다. 이제 무엇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인가. 그들은 몸을 감추는 술법(隱身術)을 배워, 그 술법으로 왕궁에 몰래 드나들며 궁녀들을 욕보였다. 백여 일 뒤 궁녀 가운데 아이를 가진 이들이 생기자 왕은 크게 노했다. 신하 하나가 꾀를 냈다. 문마다 고운 흙을 깔아 두면 몸은 보이지 않아도 발자국은 남으리라. 발자국이 드러나자 왕은 수백의 무사를 시켜 허공에 칼을 휘두르게 했다. 셋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용수는 몸을 움츠려 왕의 곁, 칼이 닿지 않는 일곱 자 안에 붙어 섰다가 살아남았다.

전기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적는다.

始悟欲為苦本眾禍之根。敗德危身皆由此起。

그때 비로소 욕망이 괴로움의 근본이요 온갖 재앙의 뿌리임을 깨달았다. 덕을 무너뜨리고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모두 여기서 일어난다.

『용수보살전』, T50 no.2047

그리고 그는 스스로 맹세했다. 여기서 벗어나면 사문에게 가서 출가하리라. 궁을 빠져나온 용수는 산으로 들어가 한 탑(塔)에서 출가했다.

연구 노트 — 은신술 이야기는 인도의 설화 문학에 흔한 틀을 따르고 있어,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다만 전기의 편찬자가 이 이야기를 굳이 첫머리에 둔 뜻은 분명하다. 모든 학문을 갖춘 천재가 가장 낮은 욕망에 끌려 죽음 앞에 섰고, 거기서 「욕망이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부처의 첫 가르침을 몸으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석존 편 1부의 「세 가지 교만의 끊음」(AN 3.38)과 같은 자리, 곧 사성제의 둘째 진리(집성제)에서 용수의 구도가 시작된다.

출가 — 구십 일의 삼장과 설산의 노비구

출가 직후 · 남천축에서 설산으로

출가한 용수는 구십 일 만에 삼장(三藏), 곧 경·율·논을 모두 읽고 통달했다고 전기는 전한다. 그는 다른 경전을 구했으나 더는 얻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설산(雪山), 곧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산속의 한 탑에 늙은 비구가 있었는데, 그가 용수에게 대승의 경전들을 주었다. 용수는 그 경전들을 외우고 기뻐했으나, 뜻을 다 알고도 아직 이르지 못한 곳이 있다고 느꼈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이 대목을 「히말라야 지방에서 한 늙은 비구에게서 대승 경전을 받고, 그 뒤로 대승 불법을 널리 펴는 데 힘을 다했다」고 요약한다. 소승의 삼장을 다 배운 뒤 대승을 만났다는 이 순서는, 부파 교학의 한복판에서 반야의 공을 논증한 용수의 실제 저작과 잘 맞는다. 『중론』은 부파의 법(dharma) 이론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 쓸 수 없는 책이다.

교만

그러나 전기는 용수를 성인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대승 경전을 두루 읽은 용수는 여러 나라를 돌며 외도의 논사들과 사문의 논사들을 모두 논파했다. 그러자 교만한 마음이 일어났다. 부처의 경전은 비록 미묘하지만 이치로 따지면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다. 그 다하지 못한 곳을 내가 풀어 새로 세우리라. 그는 스스로 새 계율과 새 옷을 정해 부처의 가르침에 덧붙이고, 한 절에 머물며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려 했다.

모든 것을 알았다고 여기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석존 편 2부에서 본 웃다카 라마풋타, 곧 가장 높은 선정에 이르러 스스로 도를 얻었다고 여긴 스승의 모습이 여기에도 있다. 전기는 이 교만을 꺾은 것이 용궁의 경전들이었다고 전한다.

용궁의 구십 일

전승 · 바다 밑의 궁전

대룡보살(大龍菩薩)이 교만에 빠진 용수를 보고 안타깝게 여겼다. 대룡은 용수를 바다 밑 용궁으로 데려가 궁전 안의 칠보 창고를 열고, 칠보로 된 꽃 모양 함들을 열어 온갖 방등(方等)의 깊은 경전들을 보여 주었다.

龍樹受讀九十日中通解甚多。其心深入體得寶利。龍知其心而問之曰。看經遍未。答言。汝諸函中經多無量不可盡也。我可讀者已十倍閻浮提。

용수는 구십 일 동안 받아 읽어 통달하고 이해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 마음이 깊이 들어가 보배로운 이익을 체득했다. 용이 그 마음을 알고 물었다. 「경을 다 보았는가?」 용수가 답했다. 「그대의 여러 함 속에 있는 경은 한량이 없어 다 볼 수 없다. 내가 읽은 것만 해도 이미 염부제(인간 세계)의 열 배다.」

『용수보살전』, T50 no.2047

구십 일 만에 삼장을 다 읽었다고 여긴 사람이, 같은 구십 일 동안 바다 밑에서 끝이 없는 경전 앞에 섰다. 「다 볼 수 없다」는 대답은 앞 절의 교만, 곧 「부처의 경전에는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다」는 생각에 대한 답이다. 다하지 못한 것은 경전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용수는 깊은 법인(法忍)을 얻고, 대룡은 그를 남천축으로 돌려보냈다.

전승
  1. 브라만의 소년베다 · 천문 · 술법
  2. 은신술과 궁중벗 셋은 죽고 홀로 살아남음
  3. 「욕망은 괴로움의 근본」
  4. 탑에서 출가구십 일의 삼장구십 일 — 다 읽었다
  5. 설산의 노비구대승 경전
  1. 교만새 계율 · 새 옷
  2. 용궁의 구십 일대룡보살구십 일 — 다 볼 수 없다
  3. 남천축 귀환
  4. 왕의 교화
  5. 입멸조용한 방

두 「구십 일」 — 삼장은 다 읽었다 / 용궁의 경은 다 볼 수 없다

『용수보살전』(T50 no.2047)의 순서 · 금 테두리 두 칸은 같은 「구십 일」
도표 4 · 『용수보살전』의 생애 흐름
바다 밑 넓은 궁전, 뱀이 휘감은 기둥들 사이로 연꽃 모양 함과 상자들이 끝없이 늘어서고, 가운데 열린 함 하나 앞에 한 스님이 등을 보이고 작게 앉은 금박 수묵화
그림 1 · 바다 밑의 경전 창고

용궁은 무엇을 말하는가

용궁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전해졌다. 화엄종은 용수가 용궁에서 화엄경의 긴 판본들을 보고 그 가운데 가장 짧은 「하본(下本)」을 인간 세계로 가져왔다고 전하고(법장 『화엄경전기』), 티베트 전승은 나가들이 지키던 십만 송 반야경을 용수가 가져왔다고 전한다. 대성인도 일체경의 우열을 말씀하시며 「인도 · 중국 · 일본뿐 아니라 용궁 · 천상 · 시방세계의 일체경(月氏・竜宮・天上・十方世界の一切経)」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쓰셨다(「선무외삼장초」, 881쪽 등).

연구 노트 — 학계에는 용궁 전승을 대승 경전의 출현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읽는 견해가 많다. 석존 입멸 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대승 경전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물음에, 사람의 세계가 아닌 곳에 감추어져 있다가 때가 되어 나왔다고 답한 것이다. 남인도가 나가 신앙이 강한 지역이었다는 점, 「나가」가 용수의 이름에 들어 있다는 점도 이 전승과 이어져 있다. 한편 대승 경전이 용수 이전에 이미 성립해 있었다는 것은 학계의 통설이며, 용궁 이야기가 그 성립을 설명하는 역사 기록은 아니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 리를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지 않아도, 세 해를 걸려 영산에 이르지 않아도, 용수처럼 용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무착보살처럼 미륵보살을 만나지 않아도, 두 곳 세 회의 설법을 듣지 않아도, 일대의 우열은 알 수 있을 것이다(万里をわたて宋に入らずとも三箇年を経て霊山にいたらずとも竜樹のごとく竜宮に入らずとも無著菩薩のごとく弥勒菩薩にあはずとも二所三会に値わずとも一代の勝劣はこれをしれるなるべし)」(223쪽). 법화경 보탑품의 육난구이(六難九易)를 알면 일체경을 다 읽지 않아도 그 우열이 보인다는 것이다. 용수가 바다 밑에서 끝없는 경전 앞에 섰다면, 대성인은 한 경의 한 구절에서 그 전체를 보라고 하셨다. 「한 방울을 맛보고 큰 바다의 짠맛을 알고, 한 송이 꽃을 보고 봄을 헤아리라(一渧をなめて大海のしををしり一華を見て春を推せよ)」(같은 곳). 창가학회는 용궁의 이야기를 끝없는 경전의 바다에 대한 경외로 읽으면서, 그 바다의 간심이 법화경 한 경, 그리고 그 경의 제목에 있다는 대성인의 가르침으로 돌아온다.

2부 붉은 깃발

붉은 깃발 일곱 해

전승 · 남천축의 왕궁

남천축으로 돌아온 용수는 불법을 크게 넓히고 외도를 꺾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왕은 외도를 믿고 불법을 가볍게 여겼다. 『용수보살전』은 용수가 왕을 교화한 방법을 이렇게 전한다.

그 무렵 왕은 사람을 모아 군대를 거느리게 했다. 용수는 그 모집에 응해 한 부대의 장수가 되었다. 창을 메고 앞장서 부대를 정돈하니, 위엄을 부리지 않아도 명령이 행해지고 법을 드러내지 않아도 병사들이 따랐다. 왕이 이상히 여겨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시종이 답했다. 「모집에 응해 왔는데 녹봉도 받지 않고 돈도 쓰지 않으면서 일을 이처럼 잘합니다.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용수가 답했다. 「나는 일체를 아는 사람(一切智人)이다.」

왕은 놀라 그 말을 시험했다. 「지금 하늘의 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용수는 「지금 하늘과 아수라가 싸우고 있다」고 답했고, 곧 하늘에서 창과 방패, 끊어진 손발이 떨어졌다고 전기는 전한다. 왕은 머리를 숙이고, 궁 안의 브라만 만여 명이 모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부법장의 전승은 같은 일을 「붉은 깃발」로 전한다. 붉은 깃발(赤幡)은 왕의 군대 모집에 응한 이가 드는 표지였다. 용수는 그 깃발을 들고 왕의 앞을 걸으며 일곱 해를 기다렸다. 대성인도 이 전승을 「보은초」에서 부처의 사자들이 겪은 난의 하나로 드셨다.

付法蔵の人人は四依の菩薩・仏の御使なり提婆菩薩は外道に殺され師子尊者は檀弥羅王に頭を刎ねられ仏陀密多・竜樹菩薩等は赤幡を七年十二年さしとをす馬鳴菩薩は金銭三億がかわりとなり如意論師はおもひじにに死す。此れ等は正法・一千年の内なり

부법장의 사람들은 사의(四依)의 보살이요 부처의 사자다. 제바보살은 외도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자존자는 단미라왕에게 목이 베였으며, 불타밀다 · 용수보살 등은 붉은 깃발을 일곱 해, 열두 해 들고 다녔고, 마명보살은 금전 삼억의 대가로 넘겨졌으며, 여의논사는 원통하게 죽었다. 이것들은 정법 천 년 안의 일이다.

「보은초」, 297쪽

「일곱 해, 열두 해」는 용수의 일곱 해와 불타밀다의 열두 해다. 불타밀다(佛陀蜜多)는 부법장의 여덟째로, 역시 외도를 믿는 왕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열두 해를 걸었다고 전한다. 대성인은 이 일을 제바의 죽음, 사자존자의 순교와 나란히 두셨다.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왕을 불법으로 돌리기 위해 일곱 해를 신분을 숨긴 채 병사로 걸은 것도 법을 위한 난이었다는 것이다.

새벽의 남인도 왕궁 앞 넓은 광장, 창을 멘 병사들의 긴 행렬 한가운데 가사를 입은 한 사람이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성문을 향해 걸어가는 금박 채색화
그림 2 · 붉은 깃발

연대 대조 — 붉은 깃발의 일곱 해는 『부법장인연전』 계통의 전승이며, 『용수보살전』은 모집에 응해 장수가 된 이야기로만 전하고 햇수를 강조하지 않는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남인도의 국왕이 외도를 믿고 있었으므로 이를 파절하기 위해 붉은 깃발을 들고 왕궁 앞을 일곱 해 동안 오갔다. 마침내 왕이 이를 알고 외도와 토론하게 하니, 용수는 외도를 모두 논파하고 국왕의 공경과 믿음을 받아 대승경을 넓혔다」고 요약한다. 전승마다 세부는 다르지만, 「오랜 인내 끝에 왕을 돌렸다」는 줄기는 같다.

왕에게 보낸 글 — 『보행왕정론』과 『권계왕송』

2세기 후반 ~ 3세기 초 · 사타바하나 왕조

전설의 왕과 달리, 역사 속에서 용수와 왕의 관계를 전하는 것은 두 편의 글이다. 둘 다 왕에게 보낸 편지 형식이다.

『권계왕송(勸誡王頌)』(Suhṛllekha, 「벗에게 보내는 편지」) — 7세기 말 인도에 머문 의정은 『남해기귀내법전』에서 이렇게 전한다. 용수보살이 시로 편지를 대신하여 옛 단월(檀越)인 남방 대국의 왕, 사타바하나(娑多婆漢那)에게 보냈다. 이 글은 인도에서 몹시 소중히 여겨져, 어린 학인들이 처음 배울 때부터 외운다. 의정은 이 글을 직접 한역했고(『용수보살권계왕송』 T32 no.1674), 그보다 앞서 5세기에도 두 차례 한역되었다(T32 no.1672 · 1673). 백이십여 게송의 짧은 글에서 용수는 재가의 왕에게 계율과 보시, 인욕과 정진, 육도의 괴로움, 팔정도를 간곡히 권한다.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Ratnāvalī, 「보배의 꽃다발」) — 6세기 진제(眞諦)가 한역했다(T32 no.1656). 다섯 장, 약 오백 게송으로, 한 왕에게 이 세상의 안락(增上生)과 궁극의 해탈(決定勝)을 함께 가르친다. 앞의 장들은 공과 무아를 설하고, 넷째 장 「정교왕품(正敎王品)」은 왕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한다.

  1. 1安樂解脫品안락해탈품이 세상의 안락(增上生)과 궁극의 해탈(決定勝)
  2. 2雜品잡품공과 무아 · 선행을 섞어 설함
  3. 3菩提資糧品보리자량품깨달음의 자량 — 복덕과 지혜
  4. 4正教王品정교왕품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 · 대승은 부처의 말씀
  5. 5出家正行品출가정행품출가자와 보살의 수행
넷째 장 · 왕에게 권한 일쉼터와 우물길의 등불병든 이에게 의사와 약가난한 이 · 늙은 이 · 장애가 있는 이에게 음식가벼운 세금죄수에게도 자비
『권계왕송』 Suhṛllekha의정 — 「인도의 어린 학인들이 외운다」
진제 역 T32 no.1656 · 게송 번호는 원문 확인 뒤 표기
도표 5 · 『보행왕정론』 다섯 장

넷째 장에서 용수가 왕에게 권하는 일들은 놀라울 만큼 구체적이다. 절과 탑과 함께 길손을 위한 쉼터와 우물을 짓고, 길에 등불을 밝히고, 병든 이에게 의사와 약을, 가난한 이와 늙은 이, 장애를 가진 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세금을 가볍게 하고, 죄수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형벌을 가혹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연민으로 하라. 공의 논사가 한 나라의 왕에게 남긴 글은 추상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돌보는 정치의 윤리였다.

연구 노트 — 『보행왕정론』과 『권계왕송』이 받은 이가 사타바하나 왕조의 어느 왕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2세기 후반의 야즈냐슈리 사타카르니(Yajñaśrī Sātakarṇi)로 보는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확정되지 않았다. 두 글을 용수의 저작으로 보는 데에는 학계의 견해가 대체로 모이지만, 『보행왕정론』의 일부 게송은 후대의 첨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넷째 장의 정치 윤리 가운데 형벌과 죄수에 관한 게송의 해석은 부록 C-3에서 원문을 확인한다.

「부처의 말씀이 아니다」 — 대승을 둘러싼 비난

2~3세기 · 부파 교단과 대승

용수가 대승을 넓히던 시대, 가장 큰 반대는 외도가 아니라 불교 안에서 왔다. 부파의 학승들은 대승 경전을 부처의 말씀이 아니라고 보았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그 비난을 세 가지로 정리해 전하신다.

馬鳴・竜樹菩薩等は仏の滅後・六百年・七百年等の大論師なり、此の人人世にいでて大乗経を弘通せしかば諸諸の小乗の者・疑つて云く迦葉・阿難等は仏の滅後・二十年・四十年住寿し給いて正法をひろめ給いしは如来一代の肝心をこそ弘通し給いしか、而るに此の人人は但苦・空・無常・無我の法門をこそ詮とし給いしに今.馬鳴・竜樹等かしこしといふとも迦葉.阿難等にはすぐべからず是一、迦葉は仏にあひまいらせて解をえたる人なり、此の人人は仏にあひたてまつらず是二、外道は常.楽・我.浄と立てしを仏・世に出でさせ給いて苦.空・無常.無我と説かせ給いき、此のものどもは常楽我浄といへり、されば仏も御入滅なり又迦葉等もかくれさせ給いぬれば 第六天の魔王が此のものどもが身に入りかはりて仏法をやぶり外道の法となさんとするなり

마명 · 용수보살 등은 부처 멸후 육백 년 · 칠백 년 등의 대논사다. 이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 대승경을 넓히자 여러 소승의 사람들이 의심하여 말했다. 「가섭 · 아난 등은 부처 멸후 이십 년 · 사십 년을 살며 정법을 넓혔으니, 그것이야말로 여래 일대의 간심을 넓힌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은 오직 고 · 공 · 무상 · 무아의 법문을 요체로 삼았다. 지금 마명 · 용수 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가섭 · 아난 등보다 뛰어날 수는 없다. 이것이 첫째다. 가섭은 부처를 만나 뵙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부처를 만나 뵙지 못했다. 이것이 둘째다. 외도는 상 · 낙 · 아 · 정을 세웠는데, 부처가 세상에 나와 고 · 공 · 무상 · 무아를 설하셨다. 그런데 이자들은 상락아정을 말한다. 그러니 부처도 입멸하시고 가섭 등도 세상을 떠나시자, 제6천의 마왕이 이자들의 몸에 들어가 불법을 깨뜨려 외도의 법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보은초」, 326–327쪽

비난은 셋이었다. 부처의 직제자보다 뛰어날 수 없다. 부처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은 부처가 버린 외도의 가르침과 닮았다. 대성인은 이어서 그 비난이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고 쓰셨다. 「불법의 원수는 머리를 깨고 목을 베고 목숨을 끊고 먹을 것을 막고 나라에서 쫓으라」고 소승의 사람들이 말했으나, 「마명 · 용수 등은 다만 한두 사람이었다. 밤낮으로 욕하는 소리를 듣고 아침저녁으로 몽둥이를 맞았다(馬鳴・竜樹等は但・一二人なり昼夜に悪口の声をきき朝暮に杖木をかうふりしなり)」(327쪽).

용수의 반론

용수 자신도 이 비난에 답했다. 『보행왕정론』 넷째 장의 후반은 대승이 부처의 말씀임을 논증하는 긴 게송들로 되어 있다. 대승이 설하는 보시와 계율과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 곧 육바라밀은 부파가 인정하는 부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대승이 설하는 공은 부처가 설한 무아와 연기의 가장 깊은 뜻이다. 부처의 공덕이 헤아릴 수 없다면 부처의 가르침도 헤아릴 수 없으니, 소승이 전한 것만이 부처의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승을 미워하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대승은 부처의 말씀인가

소승 측의 세 비난 — 「보은초」 326–327쪽① 가섭 · 아난보다 뛰어날 수 없다② 부처를 만나지 못했다③ 상락아정은 외도의 설昼夜に悪口の声をきき朝暮に杖木をかうふりしなり
↔
『보행왕정론』 넷째 장의 반론(요지)육바라밀은 부파도 인정하는 가르침공은 무아 · 연기의 깊은 뜻부처의 공덕이 한량없으면 가르침도 한량없다
而れども此の二人は仏の御使ぞかし「보은초」 327쪽 · 摩耶経 · 楞伽経 · 付法蔵経
도표 6 · 대승을 둘러싼 논쟁

대성인은 같은 「보은초」에서 소승의 비난에 이렇게 답하셨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부처의 사자다(而れども此の二人は仏の御使ぞかし)」(327쪽). 『마하마야경』은 「육백 년에 마명이, 칠백 년에 용수가 나오리라」고 예언했고, 『능가경』에도 적혀 있으며, 『부법장인연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소승의 사람들은 이를 쓰지 않고 「눈먼 공격(めくらぜめ)」으로 몰아세웠다. 대성인은 그 대목을 이렇게 맺으셨다. 「『여래가 계신 때에도 원망과 질투가 많은데 하물며 멸도한 뒤이랴』는 경문이 이때에 이르러 조금 알려졌다(如来現在・猶多怨嫉・況滅度後の経文は此の時にあたりて少しつみしられけり)」(327쪽). 석존 편 4부에서 본 법사품의 경문이, 부처 멸후 처음으로 용수와 마명의 몸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새 법을 펴는 사람은 반드시 그 시대의 권위와 부딪친다는 불법의 법칙을 읽는다. 용수가 겪은 것은 뒤에 천태가, 전교가, 그리고 대성인이 더 크게 겪는 난의 첫 모습이었다.

제자 제바 — 물그릇과 바늘

3세기경 · 남교살라

용수의 법을 이은 제자는 제바(提婆, Āryadeva)다. 한 눈을 잃었다 하여 가나제바(迦那提婆, 한쪽 눈의 제바)라고도 불렸다. 스리랑카 출신으로 전하는 이 제자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외도의 논사들과 논쟁하여 이름이 높았고, 『백론(百論)』과 『사백론(四百論)』을 지었다. 중국의 삼론종이 『중론』 · 『십이문론』과 함께 근본으로 삼은 「세 논」 가운데 하나가 이 『백론』이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제바가 처음 용수를 찾아온 장면을 전한다. 제바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용수는 제자에게 발우에 물을 가득 채워 내어 보이게 했다. 제바는 그 물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바늘 하나를 던져 넣었다. 용수는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현장이 전하는 풀이는 이렇다. 가득 찬 물은 용수의 지혜가 두루 가득함을 보인 것이다. 제바가 바늘을 던져 넣은 것은 그 지혜의 바닥까지 뚫고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스승이 한마디 말도 없이 물음을 던지고, 제자가 한마디 말도 없이 답했다. 용수는 제바를 자리에 앉히고 법을 설했고, 제바는 이 자리에서 제자가 되었다.

검은 바탕 위, 천을 깐 받침 위에 물을 가득 채운 둥근 발우 하나가 놓이고, 가는 금빛 바늘 하나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수면에 동심원 물결이 번지는 금박 정물화
그림 3 · 물그릇과 바늘

제바의 최후는 비극이었다. 외도의 논사들을 논파하던 제바를 원망한 한 외도의 제자가 칼로 제바를 찔렀다. 제바는 죽어 가면서도 자신을 죽인 이를 쫓지 말라고 제자들을 말렸다고 전한다. 대성인은 이 일을 여러 어서에 적으셨다. 「천축에 사자존자라는 사람은 단미라왕에게 목이 베였고, 제바보살은 외도에게 찔려 죽었다(天竺に師子尊者と申せし人は檀弥羅王に頸をはねられ提婆菩薩は外道につきころさる)」(「좌도어감기초」, 891쪽). 다쓰노구치 법난 직후, 사도로 떠나기 전의 편지다.

부법장의 계보

용수와 제바는 『부법장인연전』의 계보 한가운데에 있다. 석존에게서 가섭이 법을 받고, 가섭에게서 아난이, 그렇게 이어진 법이 마명(馬鳴)과 가비마라(迦毘摩羅, 比羅)를 거쳐 용수에게, 용수에게서 제바에게, 제바에게서 라후라발타라(羅睺羅)에게 전해졌다.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정법의 뒤 오백 년에 나온 이 사람들, 곧 마명 · 비라 · 용수 · 제바 · 라후라에서 사자존자에 이르는 십여 명을 차례로 부르시고, 그들이 「처음에는 외도의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에는 소승경을 끝까지 배우고, 뒤에는 여러 대승경으로 여러 소승경을 여지없이 깨뜨리셨다(始には外道の家に入り次には小乗経をきわめ後には諸大乗経をもて諸小乗経をさんざんに破し失ひ給いき)」고 쓰셨다(261쪽).

「처음에는 외도, 다음에는 소승, 뒤에는 대승」. 1부에서 본 용수의 생애, 곧 브라만의 학문에서 출발해 구십 일 만에 삼장을 배우고 설산에서 대승을 만난 길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찬시초」 261쪽이 부르는 열세 사람(마명 ~ 사자)
  1. 1가섭
  2. 2아난
  3. 3상나화수
  4. 4우바국다
  5. 5제다가
  6. 6미차가
  7. 7불타난제
  8. 8불타밀다붉은 깃발 12년(보은초 297)
  9. 9협비구
  10. 10부나사
  11. 11마명
  12. 12비라(가비마라)
  13. 13용수
  14. 14제바외도에게 살해
  15. 15라후라
  16. 16승가난제
  17. 17승가야사
  18. 18구마라타
  19. 19사야나
  20. 20반타
  21. 21마노라
  22. 22학륵야나
  23. 23사자단미라왕
순번은 제13 — 말전지를 넣으면 제14 · 선종 서천 28조에서는 제14조
도표 7 · 부법장의 계보

연대 대조 — 용수를 부법장의 몇째로 헤아리는지는 전승마다 다르다. 가섭에서 사자존자까지를 스물세 사람으로 세면 용수는 제13이고, 아난의 방계 제자 말전지(末田地)를 넣어 스물네 사람으로 세면 제14가 된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부법장의 제13(付法蔵の第十三)」이라 하셨고(209쪽),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제13과 제14를 함께 적는다. 선종의 「서천 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에서는 제14조다.

흑봉산 — 두 가지 입멸 전승

3세기경 · 남교살라 흑봉산(전승)

용수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두 이야기가 전한다.

『용수보살전』의 전승. 한 소승의 법사가 늘 용수를 미워하고 시기했다. 용수가 세상을 떠나려 할 때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가?」 법사가 답했다. 「진실로 바라지 않습니다.」 용수는 조용한 방으로 물러나 여러 날 나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용수는 이미 매미가 허물을 벗듯(蟬蛻) 세상을 떠나 있었다. 전기는 용수가 세상을 떠난 뒤 백여 년 동안 남천축의 여러 나라가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부처처럼 받들었다고 맺는다.

『대당서역기』의 전승. 현장은 남교살라국의 흑봉산(黑蜂山, 발라말기리 跋邏末耆釐)에 사타바하나 왕, 한역으로 인정왕(引正王)이 용수를 위해 산을 깎아 큰 승원을 지었다고 전한다. 산의 바위를 뚫어 오 층의 누각을 만들고, 층마다 네 채의 큰 방과 정사를 두었다. 용수는 약술에 밝아 약을 먹고 몸을 기르니 나이가 수백 살이 되어도 모습이 쇠하지 않았고, 그 약을 받은 왕도 수백 살을 살았다. 그러자 왕의 어린 아들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나는 언제 왕이 될 수 있습니까?」 어머니는 이렇게 일러 주었다. 왕의 수명은 용수에게 달려 있다. 용수가 죽으면 왕도 죽을 것이다. 용수보살은 자비로워 목숨까지도 남에게 베푸니, 가서 그의 머리를 달라고 하라.

왕자가 흑봉산에 가서 머리를 청하자, 용수는 그 뜻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고 현장은 전한다. 목숨에는 끝이 있고 몸은 덧없다. 그대의 뜻을 어기지 않겠다. 그러나 무엇으로 자르겠는가. 왕자는 칼을 뽑아 내리쳤지만 용수의 몸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그러자 용수는 마른 풀잎 하나를 뽑아 스스로 목을 그었고, 날카로운 칼로 벤 것처럼 머리와 몸이 갈라졌다. 소식을 들은 왕은 슬픔 끝에 목숨을 마쳤다.

전승
『용수보살전』
  1. 소승 법사의 시기
  2. 「내가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가」
  3. 조용한 방
  4. 매미가 허물을 벗듯(蟬蛻)
  5. 남천축 여러 나라가 사당을 세움
두 이야기의 공통세상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있으면 목숨을 내려놓는다
『대당서역기』 권10
  1. 인정왕 · 흑봉산 승원
  2. 장생약
  3. 왕자의 물음과 어머니의 말
  4. 머리를 청함
  5. 마른 풀잎
  6. 왕도 목숨을 마침
도표 8 · 두 가지 입멸 전승

두 이야기는 사실로서는 서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그리는 용수의 모습은 같다. 자신이 세상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있으면 그 뜻을 따라 목숨을 내려놓는 사람. 석존 편 4부에서 본 「사은초」의 말, 곧 부처가 남은 수명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는 이야기와 같은 방향에, 목숨마저 남에게 베푸는 보살의 모습이 있다.

저녁, 골짜기 너머 높이 솟은 검은 바위산 위쪽 절벽에 다섯 층의 아치 창이 겹겹이 뚫린 석굴 승원이 있고, 산기슭 숲과 작은 강이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4 · 흑봉산의 승원

나가르주나콘다

오늘날 남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 크리슈나 강가에는 「나가르주나콘다(Nāgārjunakoṇḍa, 나가르주나의 언덕)」라는 곳이 있다. 3세기 이크슈바쿠 왕조의 도읍 비자야푸리의 유적으로, 1920년대의 발굴에서 여러 부파의 승원과 대탑, 불전 부조가 드러났다. 1960년대 댐 건설로 유적 대부분이 물에 잠기자, 주요 유적은 호수 가운데 섬으로 옮겨져 박물관이 되었다.

연구 노트 — 나가르주나콘다라는 지명은 용수 전승과 이어져 있으나, 이 유적에서 용수와 직접 관련된 명문이 나오지는 않았다. 티베트 전승이 용수의 만년의 땅으로 전하는 「슈리파르바타(Śrīparvata, 吉祥山)」를 이곳이나 가까운 슈리샤일람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정되지 않았다. 현장이 전한 흑봉산의 위치도 오늘날의 어디인지 정해지지 않았다. 이 페이지의 지도(도표 1)는 이 후보지들을 물음표와 함께 적고 어느 쪽으로도 정하지 않는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쓰신 편지들과 미노부의 「하산어소식」에서, 자신이 법을 펴는 모습을 부법장의 사람들에 견주셨다. 「경문에 맡겨 유배되고 칼끝에 닿는다면 법화경 한 부를 읽어 드린 것이라 각오하고, 일부러 불경보살처럼, 각덕비구처럼, 용수보살 · 제바보살 · 불타밀다 · 사자존자처럼 더욱 강성하게 말했다(わざと不軽菩薩の如く覚徳比丘の様に竜樹菩薩・提婆菩薩・仏陀密多・師子尊者の如く弥強盛に申しはる)」(「하산어소식」, 356쪽). 붉은 깃발의 일곱 해, 밤낮의 욕설과 몽둥이, 제자 제바의 순교. 2부에서 본 용수는 공을 논한 학자이기 전에, 법을 위해 난을 견딘 부처의 사자였다. 창가학회는 대성인이 그 계보를 자신의 몸으로 잇고자 하셨다는 데에서, 법을 넓히는 사람이 걷는 길의 연속성을 읽는다.

3부 공의 논사

무엇이 용수의 저작인가

2~3세기 · 인도 / 5~11세기 · 한역과 티베트역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이렇게 쓰셨다. 「용수보살이 지은 논은 삼십만 게송이지만, 모두 중국과 일본에 건너오지 않았으므로 그 뜻을 알기 어렵다(竜樹菩薩の所造の論三十万偈・而れども尽して漢土・日本にわたらざれば其の心しりがたし)」(267쪽). 「법화행자봉난사」에서는 용수와 천친을 「함께 천 부의 논사(共に千部の論師)」라 부르셨다(965쪽). 전승은 용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작을 돌렸다. 한역 대장경과 티베트 대장경에 용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글은 백 편이 넘는다.

근대 학계는 이 가운데 무엇이 『중론』의 저자와 같은 사람의 글인지를 가려 왔다. 기준은 사상의 일관성, 문체, 그리고 인도 주석가들의 인용이다. 그 결과는 대체로 세 층으로 정리된다.

첫째 층 — 용수의 저작으로 널리 인정되는 것. 티베트 전통은 이 가운데 논증을 다룬 다섯 편 또는 여섯 편을 「논리의 무리(Yukti corpus, 正理聚)」라 부른다.

둘째 층 — 귀속이 논쟁 중인 것. 동아시아 불교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논서들이 여기에 든다.

셋째 층 — 후대에 용수의 이름을 빌린 것. 7세기 이후 인도 밀교의 문헌들, 연금술과 의술에 관한 글들, 그리고 동아시아 진언종이 근거로 삼은 『보리심론(菩提心論)』(19절)이 여기에 든다.

竜樹菩薩の所造の論三十万偈찬시초 267千部の論師법화행자봉난사 965

첫째 층용수의 저작으로 널리 인정
『중론』中論Mūlamadhyamakakārikā한역 청목 석 · 구마라집 역 T30 no.1564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있음 (『정명구론』 인용)
『회쟁론』廻諍論Vigrahavyāvartanī한역 T32 no.1631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있음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Yuktiṣaṣṭikā한역 T30 no.1575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일부
『공칠십론』空七十論Śūnyatāsaptati한역 —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
『광파론』廣破論Vaidalyaprakaraṇa한역 —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Ratnāvalī한역 진제 역 T32 no.1656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일부
『권계왕송』勸誡王頌Suhṛllekha한역 의정 역 T32 no.1674 외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
둘째 층귀속 논쟁 중
『대지도론』大智度論한역 구마라집 역 T25 no.1509 · 티베트역 — · 산스크리트 원문 —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한역 구마라집 역 T26 no.1521 · 티베트역 — · 산스크리트 원문 —
『십이문론』十二門論한역 구마라집 역 T30 no.1568 · 티베트역 — · 산스크리트 원문 —
『인연심론』因緣心論한역 T32 no.1654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일부
『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한역 T30 no.1576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있음
셋째 층후대에 이름을 빌림
『보리심론』菩提心論한역 불공 역 T32 no.1665 · 티베트역 — · 산스크리트 원문 —
『밀교 문헌』한역 —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
『연금술 · 의술 문헌』한역 — · 티베트역 있음 · 산스크리트 원문 —
티베트역 · 산스크리트 원문 칸은 대략의 현황 — 「일부」는 단편 · 인용으로 전하는 것
도표 9 · 용수 저작의 세 층

연구 노트 — 저작의 귀속은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크다. 『대지도론』에 대해서는 용수의 저작을 구마라집이 옮긴 것이라는 전통 견해, 인도에서 용수 이후의 누군가가 지은 것이라는 견해, 구마라집과 그 제자들의 손이 크게 들어갔다는 견해가 함께 있다. 『십주비바사론』과 『십이문론』도 비슷한 논의가 있다. 이 페이지는 이 논서들을 「용수의 이름으로 동아시아에 전해져 동아시아 불교가 용수의 글로 읽은 논」으로 다룬다. 대성인도 「즉신성불초」에서 「『대론』이 용수의 논이라는 데에는 자타가 다투는 일이 없다(大論は竜樹の論たる事は自他あらそう事なし)」, 「『보리심론』은 용수의 논인가 불공의 논인가 하는 다툼이 있다(菩提心論は竜樹の論・不空の論と申すあらそい有り)」고 두 논의 처지를 가려 적으셨다(1006–1007쪽).

『중론』 — 스물일곱 장의 논증

2~3세기 · 남인도

『중론』의 산스크리트 이름은 『근본중송(Mūlamadhyamakakārikā)』, 곧 「중도에 관한 근본 게송」이다. 약 사백오십 게송, 스물일곱 장의 짧은 책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7세기 월칭(月稱, Candrakīrti)의 주석 『정명구론(淨明句論, Prasannapadā)』에 인용된 형태로 전한다. 동아시아에는 409년 구마라집이 청목(靑目, Piṅgala)의 주석과 함께 옮긴 『중론』 네 권(T30 no.1564)으로 전해졌다.

책은 부처에게 올리는 귀경게로 시작한다.

anirodham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m,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yaḥ pratītyasamutpādaṃ prapañcopaśamaṃ śivam, deśayām āsa saṃbuddhas taṃ vande vadatāṃ varam.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이러한 인연(연기)을 설하여 모든 희론을 잘 멸하신 부처님께,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분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중론』 귀경게, T30 no.1564

네 쌍의 부정, 곧 팔불(八不)로 그려진 연기. 그리고 그 연기의 가르침이 가져오는 것은 희론(prapañca), 곧 끝없이 늘어나는 개념의 그물이 고요히 멎는 것이다. 이 귀경게에 『중론』 전체가 담겨 있다. 그 논리의 자세한 내용은 교리 二 「공·중도」 6절이 다루었다.

그 뒤의 스물일곱 장은 부처가 설한 거의 모든 주제를 차례로 다룬다. 원인과 조건(1장), 감과 옴(2장), 감각 기관(3장), 오온(4장), 요소(5장)에서 시작해, 업(17장), 나(18장), 시간(19장), 여래(22장), 사성제(24장), 열반(25장), 십이연기(26장), 그릇된 견해(27장)에 이른다. 각 장에서 용수는 하나의 주제를 붙잡고, 그것이 자성(自性)을 가진다고 가정하면 어떤 모순에 빠지는지를 보인다.

不生亦不滅…善滅諸戲論

  1. 1觀因緣원인과 조건
  2. 2觀去來감과 옴
  3. 3觀六情감관
  4. 4觀五陰오온
  5. 5觀六種요소
  6. 6觀染染者탐욕과 탐하는 자
  7. 7觀三相생주멸
  8. 8觀作作者행위와 행위자
  9. 9觀本住선행하는 자
  10. 10觀燃可燃불과 땔감
  11. 11觀本際시작
  12. 12觀苦괴로움
  13. 13觀行형성
  14. 14觀合결합
  15. 15觀有無자성
  16. 16觀縛解속박과 해탈
  17. 17觀業업
  18. 18觀法나와 법
  19. 19觀時시간
  20. 20觀因果인과
  21. 21觀成壞생성과 소멸
  22. 22觀如來여래
  23. 23觀顛倒전도
  24. 24觀四諦사제→ 교리 二 7절
  25. 25觀涅槃열반→ 교리 二 8절
  26. 26觀十二因緣십이연기→ 교리 一 14절
  27. 27觀邪見사견
한역 품명은 끝의 「品」을 줄여 적음 · 금 테두리 칸을 누르면 교리 페이지의 해당 절로 간다
도표 10 · 『중론』 스물일곱 장

용수의 논법은 흔히 「귀류(歸謬, prasaṅga)」라 불린다.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 뒤, 그 주장에서 상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보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1장에서 용수는 묻는다. 결과가 원인 안에 이미 있다면 새로 생길 필요가 없다. 결과가 원인 안에 없다면 무엇이든 무엇에서나 생길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같다고 해도, 다르다고 해도 생겨남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성을 가진 것」의 생겨남은 성립하지 않는다. 용수가 부정하는 것은 생겨남 자체가 아니다. 자성을 가진 무엇이 생겨난다는 생각이다.

연기인 것을 공이라 한다 — 칠십 가의 주석

3~8세기 · 인도 / 5~7세기 · 중국

『중론』의 한가운데에는 24장 18게가 있다.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 부른다. 그것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가명)이며, 그것이야말로 중도다.」 한역으로는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이라 말하고, 또한 가명이라 하며, 또한 중도의 뜻이라 한다」. 이 게송의 산스크리트 구문과 천태의 독법, 그리고 이제(二諦)와 「공이기 때문에 일체가 성립한다」는 24장의 논리는 교리 二 7·8절이 자세히 읽었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짚는다. 용수에게 공은 「없음」이 아니라 연기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래서 괴로움도 수행도 성불도 공이기 때문에 성립한다는 것이다. 교리 二의 말로 하면, 공은 「희망을 말하는 말」이었다.

칠십 가(家)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이렇게 쓰셨다. 「용수보살의 흐름이 천축에 칠십 가 있다. 칠십 사람이 모두 대논사다. 그 칠십 가의 사람들은 모두 『중론』을 근본으로 삼는다(竜樹菩薩の流・天竺に七十家あり七十人ともに大論師なり、彼の七十家の人人は皆中論を本とす)」(268쪽). 실제로 『중론』은 인도에서 가장 많은 주석을 낳은 논서의 하나였다.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의 제자 승조(僧肇)가 공을 「참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不眞故空)」고 풀었고, 고구려 출신의 승랑(僧朗)이 강남에서 삼론학을 일으켜 수나라의 길장(吉藏)에게서 집대성되었다. 이 흐름이 삼론종이다(교리 二 10절).

용수『중론』제바『백론』
인도竜樹菩薩の流・天竺に七十家あり찬시초 268청목4세기경 · 한역 중론의 주석불호5~6세기청변6세기 · 『반야등론석』월칭7세기 · 『정명구론』티베트
자립논증파청변의 흐름귀류논증파월칭의 흐름
중국구마라집401 장안
승조부진공론승랑고구려 · 섭산
길장삼론종
천태5부 21절 — 천태의 고조혜문일심삼관혜사지의
도표 11 · 중관의 흐름

논쟁의 기술 — 『회쟁론』과 『광파론』

2~3세기 · 인도 논리학과의 대결

용수의 시대, 인도의 사상가들은 논쟁의 규칙을 정교하게 다듬고 있었다. 니야야(Nyāya) 학파는 올바른 인식의 수단(pramāṇa)으로 지각 · 추론 · 비유 · 증언의 넷을 세우고, 논쟁에 쓰이는 모든 개념을 열여섯 범주로 정리했다. 무엇이 참인지를 가리려면 먼저 무엇으로 참을 아는지가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회쟁론』은 이 입장에서 나온 반론으로 시작한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모든 것은 공하다」는 그대의 말도 공할 것이다. 공한 말은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다. 또 그대는 무엇으로 모든 것이 공함을 알았는가. 지각으로 알았다면 지각 자체는 공하지 않은가. 용수의 답이 유명한 「무주장」의 선언이다. 「만약 나에게 어떤 주장이 있다면 그 허물이 나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장이 없으므로 허물도 없다」(29게). 용수는 인식의 수단 역시 다른 것에 의존해 성립하므로 자성을 갖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인식의 수단이 대상을 증명한다면, 인식의 수단은 무엇이 증명하는가. 그리고 이렇게 맺는다. 「공성이 성립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성립한다」(70게).

『광파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니야야의 열여섯 범주를 하나하나 검토하여,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자성을 가진 실체로 세워질 수 없음을 보인다. 논쟁의 규칙 그 자체가 연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론①공한 말은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다②인식의 수단(지각 · 추론 · 비유 · 증언)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용수의 답①「나에게는 주장이 없다」(29게)②인식의 수단도 대상에 의존해 성립 — 자성 없음③「공성이 성립하는 자에게는 일체가 성립한다」(70게)
『광파론』Nyāya — 니야야 16범주를 하나하나 검토
논쟁의 계보는 교리 二 9절 · 도표 9
도표 12 · 『회쟁론』의 구조

이 논쟁의 기술은 교리 二 9절에서 본 대로 인도 중관의 두 흐름을 낳았고, 중국의 삼론학에서는 「그릇된 것을 깨뜨리는 것이 곧 바른 것을 드러내는 것(破邪卽顯正)」이라는 원칙이 되었다. 그리고 대성인이 여러 종파의 교의를 그 종파 자신의 경론으로 따져 묻는 방법, 곧 상대가 의지하는 경문에서 상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법에서도 같은 정신을 볼 수 있다.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중론』 네 권 스물일곱 장의 간심이 「인연소생법의 사구게」에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판정하셨다. 「이 사구게는 화엄 · 반야 등의 사교 · 삼제의 법문이다. 아직 법화 개회의 삼제는 펴지 않으셨다(此の四句の偈は華厳・般若等の四教・三諦の法門なりいまだ法華開会の三諦をば宣べ給はず)」(268쪽). 대성인은 용수의 공의 논리를 가볍게 보지 않으셨다. 그것은 부처가 설한 연기를 가장 깊은 곳까지 따라간 논리였다. 그러나 그 논리가 드러낸 것은 반야경의 공이었고,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법화경의 뜻은 아니었다. 3부에서 본 용수의 저작이 이 판정의 근거다. 대성인의 이 평가는 5부 23절과 6부 25절에서 다시 본다.

4부 동쪽으로 건너간 용수

구마라집 — 용수를 동쪽으로 옮긴 사람

401 — 409(또는 413) · 후진의 장안

동아시아가 만난 용수는 한 사람의 번역자를 거친 용수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이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왕국 구자(龜茲, 쿠차)에서 인도 출신의 아버지와 구자 왕의 누이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계빈(罽賓, 카슈미르)에서 소승의 교학을 배웠다. 그리고 소륵(疏勒, 카슈가르)에서 대승의 스승을 만나 『중론』과 『백론』을 배우고 대승으로 돌아섰다. 소승을 끝까지 배운 뒤 용수의 논서로 대승을 만났다는 점에서, 구마라집의 길은 용수 자신의 길과 닮았다.

384년 전진(前秦)의 장수 여광(呂光)이 구자를 정복하면서 구마라집은 포로로 끌려와, 양주(涼州)에서 열일곱 해를 머물렀다. 401년 말, 후진(後秦)의 왕 요흥(姚興)이 그를 장안으로 맞아들였다. 그 뒤 여덟 해 남짓, 구마라집은 수백 명의 학승과 함께 국가의 번역 사업을 이끌었다. 이때 옮겨진 경론이 뒤의 동아시아 불교의 골격이 되었다. 『묘법연화경』, 『유마경』, 『아미타경』, 『대품반야경』, 그리고 용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논서들이다.

  1. 344(또는 350)구자 출생
  2. —계빈 유학소승
  3. —소륵대승 · 『중론』 · 『백론』
  4. 384여광의 구자 정복양주 17년
  5. 401장안 도착
  6. 402–405『대지도론』
  7. 403–404『대품반야』
  8. 404『백론』
  9. 406『묘법연화경』 · 『유마경』
  10. 409『중론』 · 『십이문론』
  11. 409(또는 413)입적
연대 미상『십주비바사론』 · 『용수보살전』
연대는 『출삼장기집』 등 전승에 따름 · 금 테두리는 용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논서, 주홍은 법화경
도표 13 · 구마라집의 장안 번역
넓은 목조 전당 안, 수백 명의 스님이 줄지어 앉아 등을 보이고, 맨 앞 낮은 단 위에 경전 묶음을 곁에 둔 한 스님과 붓을 든 필수들이 앉은 금박 수묵화
그림 5 · 장안의 번역장

같은 번역자의 손으로 용수의 공과 법화경이 함께 중국에 들어왔다는 것은 뒤의 역사에 결정적이었다. 한 세기 반 뒤 천태 지의는 구마라집이 옮긴 『대지도론』과 『중론』의 논리로 구마라집이 옮긴 법화경을 읽었다(5부). 교리 二 10절에서 보았듯, 구마라집의 번역은 공을 노장의 「무(無)」로 이해하던 격의불교의 혼란을 바로잡은 일이기도 했다.

대성인은 구마라집의 번역을 특별히 믿으셨다. 「즉신성불초」에서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경론을 옮긴 사람이 백칠십여 명이지만 「그 가운데 구마라집 한 사람만이 교주 석존의 경문에 사사로운 말을 넣지 않은 사람(其の中に羅什一人計りこそ教主釈尊の経文に私の言入れぬ人にては候へ)」이라 하셨다(1007쪽). 전승에 따르면 구마라집은 「내가 옮긴 경에 잘못이 없다면 내 몸을 태운 뒤에도 혀만은 타지 않으리라」고 했고, 화장한 뒤 과연 혀가 타지 않았다고 한다. 대성인은 이 전승을 「찬시초」(269쪽)와 「즉신성불초」(1007쪽)에 적으시며, 이것이 구마라집이 옮긴 경, 특히 법화경이 중국에 널리 퍼진 까닭이라 하셨다.

『대지도론』 백 권

402 — 405 한역 · 대품반야의 주석

『대지도론(大智度論)』(T25 no.1509)은 『대품반야경(摩訶般若波羅蜜經)』의 주석이다. 「지도(智度)」는 반야바라밀, 곧 「지혜로 건너감」을 옮긴 말이다. 구마라집은 402년부터 405년까지 이 논을 옮겼다. 제자 승예(僧叡)의 서문에 따르면, 경의 첫째 품(序品)에 대한 주석은 서른네 권으로 모두 옮겼으나, 나머지 여든아홉 품에 대한 주석은 줄여서 예순여섯 권에 담았다. 모두 옮겼다면 열 배는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대성인이 「개목초」에서 「『대지도론』 천 권(大智度論千巻)」이라 하신 것(209쪽)은 이 전승을 따른 것이다.

『대지도론』은 한 경의 주석을 넘어 대승 불교의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반야경의 공을 풀면서, 육바라밀과 보살의 수행 단계, 부처의 몸(法身과 生身), 이제(二諦), 여러 부파의 교리, 수많은 비유와 설화를 두루 다룬다. 법화경을 비롯한 다른 대승 경전도 자주 인용한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이 논을 「법화경 등 여러 대승교의 사상을 받아들여 해석하므로, 단순한 한 경의 주석서에 그치지 않고 모든 대승 사상의 모체가 되었다」고 평한다.

1~34권서품 전역(全譯)35~100권나머지 89품 초역(抄譯)
모두 옮겼다면 열 배(승예 서)大智度論千巻개목초 209
주요 논제
  • 육바라밀
  • 보살의 계위
  • 불신(법신 · 생신)
  • 이제
  • 사실단→ 22절
  • 薩とは六なり→ 개목초 209 · 관심본존초 246
  • 法譬並挙→ 당체의초 516
  • 권100 「반야와 법화」→ 17절
막대 한 칸은 한 권 · 승예의 「대지도론서」에 따름
도표 14 · 『대지도론』의 구성

동아시아 불교가 이 논에서 가장 많이 가져간 것 가운데 셋만 들어 둔다.

사실단(四悉檀). 권1은 부처가 법을 설하는 네 가지 방식을 든다. 이것이 천태의 설법론이 되었다(22절).

「살(薩)은 여섯이다」. 『대지도론』은 산스크리트 「사드(ṣaṭ, 여섯)」를 풀며 「살(薩)은 여섯」이라 했고, 동아시아의 주석가들은 여섯을 「갖추어짐(具足)」의 뜻으로 읽었다. 천태는 『법화현의』에서 「살(薩)은 범어로, 여기서는 묘(妙)라 옮긴다」고 했다. 대성인은 「개목초」와 「관심본존초」에서 열반경 · 『대지도론』 · 길장 · 천태의 풀이를 나란히 들어, 묘법의 「묘」가 곧 「갖추어짐」이라는 것을 밝히셨다(「개목초」, 209쪽 · 「관심본존초」, 246쪽). 「관심본존초」는 이 풀이 바로 뒤에 「석존의 인행과 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갖추어져 있다」는 수지즉관심의 법문을 둔다.

「법과 비유를 함께 든다」. 대성인은 「당체의초」에서 『대지도론』의 「연꽃이란 법과 비유를 함께 든 것이다(蓮華とは法譬並びに挙ぐるなり)」를 인용해, 묘법연화경의 「연화」가 비유이면서 동시에 법 그 자체(當體蓮華)라는 것을 논증하셨다(516쪽).

연구 노트 — 『대지도론』에는 인도의 논서로 보기 어려운 대목, 곧 중국인 번역자의 설명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섞여 있다. 벨기에의 불교학자 라모트(É. Lamotte)는 이 논의 앞부분을 프랑스어로 역주하면서 저자가 용수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고, 이후 저자가 서북 인도의 설일체유부 출신 대승 학승이라는 견해, 구마라집이 번역하며 손을 크게 댔다는 견해 등이 이어졌다. 한편 용수의 저작으로 보는 전통 견해를 지지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 페이지는 동아시아 불교와 대성인이 이 논을 용수의 글로 읽었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쓴다.

반야에 의거할 때, 법화에 의거할 때

『대지도론』 권100 · 촉루품의 주석

『대지도론』의 마지막 권은 반야경의 촉루품(囑累品), 곧 부처가 경을 제자에게 맡기는 대목을 푼다. 여기서 한 물음이 나온다. 반야경은 아난에게 맡겨졌는데, 법화경 등 다른 경은 보살들에게 맡겨졌다. 반야보다 더 깊은 법이 있어서인가. 논은 이렇게 답한다.

般若波羅蜜非祕密法。而法華等諸經說阿羅漢受決作佛。大菩薩能受持用。譬如大藥師能以毒為藥。

반야바라밀은 비밀의 법이 아니다. 그러나 법화 등의 여러 경은 아라한이 수기를 받아 부처가 된다고 설하니, 대보살만이 받아 지녀 쓸 수 있다. 비유하면 뛰어난 의사가 능히 독으로 약을 만드는 것과 같다.

『대지도론』 권100, T25 no.1509

반야경은 누구에게나 드러난 가르침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성문의 아라한, 곧 이전의 대승 경전들이 「불에 탄 종자」라며 성불할 수 없다고 한 이들에게 성불의 수기를 준다(교리 一 13절). 독과 같던 것을 약으로 바꾼다. 그래서 법화경은 「비밀」이고, 대보살이라야 맡을 수 있다.

같은 논 안에서 용수는 반야경에 의지해 말할 때는 이승의 성불을 허락하지 않고, 법화경을 말할 때는 허락한다. 대성인은 입종 여섯 해 뒤의 「수호국가론」(1259)에서 이 점을 정확히 짚으셨다.

滅後の論師.竜樹.天親も亦倶に千部の論師なり所造の論に通別の二論有り通論に於ても亦二有り四十余年の通論と一代五十年の通論となり、其の差別を分つに決定性の二乗・無性闡提の成不成を以て論の権実を定むるなり、而るに大論は竜樹菩薩の造・羅什三蔵の訳なり般若経に依る時は二乗作仏を許さず法華経に依れば二乗作仏を許す、十住毘婆沙論も亦竜樹菩薩の造・羅什三蔵の訳なり此の論にも亦二乗作仏を許さず之を以て知んぬ法華已前の諸大乗経の意を申べたる論なることを

멸후의 논사 용수 · 천친도 함께 천 부의 논사다. 지은 논에 통론과 별론의 둘이 있고, 통론에도 또 둘이 있으니 사십여 년의 통론과 일대 오십 년의 통론이다. 그 차이를 가르는 데에는 결정성의 이승과 무성천제의 성불 여부로 논의 권실을 정한다. 그런데 『대론』은 용수보살이 짓고 구마라집 삼장이 옮긴 것인데, 반야경에 의거할 때는 이승작불을 허락하지 않고 법화경에 의거하면 이승작불을 허락한다. 『십주비바사론』도 용수보살이 짓고 구마라집 삼장이 옮긴 것인데, 이 논에서도 이승작불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로써 법화경 이전의 여러 대승경의 뜻을 편 논임을 알 수 있다.

「수호국가론」, 57쪽

논의 권(權)과 실(實)을 가르는 기준은 이승작불이다. 이것은 논사를 사람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논이 어느 경에 의지해 무엇을 말하는가로 판단하는 방법이다. 같은 용수의 글이라도 반야경에 의지한 대목은 법화경 이전의 뜻을, 법화경에 의지한 대목은 법화경의 뜻을 담고 있다. 대성인은 뒤에 「찬시초」에서 「용수보살은 법화경을 묘약(妙藥)이라 이름하셨다(竜樹菩薩は法華経を妙薬となづけさせ給う)」고 하셨는데(277쪽), 그 근거가 이 「대약사」의 구절이다. 이 구절의 무게는 6부 26절에서 다시 본다.

반야경에 의거할 때반야는 비밀이 아님이승작불을 허락하지 않음법화 이전의 뜻
법화경에 의거할 때아라한 수기작불대보살이 지님大藥師能以毒為藥
決定性の二乗・無性闡提の成不成を以て論の権実を定むる수호국가론 57
『대지도론』 권100 · 「수호국가론」 57쪽
도표 15 · 『대지도론』 안의 두 목소리

『십주비바사론』 — 난행과 이행

5세기 초 한역 · 화엄경 십지품 앞부분의 주석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T26 no.1521) 열일곱 권은 화엄경 「십지품」의 앞부분, 곧 보살의 열 단계 가운데 첫째(歡喜地)와 둘째(離垢地)를 넓게 풀어 설명한 논이다. 「비바사(毘婆沙)」는 「넓게 풀이함」이라는 뜻이다. 이 논의 한 품이 뒤에 동아시아 불교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다. 제9 「이행품(易行品)」이다.

보살이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자리(阿惟越致, 不退轉)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다. 한 제자가 묻는다. 이 길은 너무 어렵다. 더 쉬운 길은 없는가. 논은 이렇게 답한다.

佛法有無量門。如世間道有難有易。陸道步行則苦。水道乘船則樂。菩薩道亦如是。或有勤行精進。或有以信方便易行疾至阿惟越致者。

불법에는 한량없는 문이 있다. 세간의 길에 어려운 길과 쉬운 길이 있어, 뭍길을 걸어가면 괴롭고 물길을 배로 가면 즐거운 것과 같다. 보살의 길도 이와 같아, 부지런히 정진하는 길도 있고, 믿음의 방편으로 쉽게 행하여 빨리 불퇴의 자리에 이르는 길도 있다.

『십주비바사론』 권5 이행품, T26 no.1521

그리고 그 「믿음의 방편」으로 시방의 여러 부처와 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공경하는 길을 든다. 아미타불은 그 가운데 한 부처로 나온다.

왼쪽에는 바위 언덕을 넘어가는 험한 산길 위에 지팡이 짚은 나그네 하나, 오른쪽에는 넓은 강 위에 돛단배 한 척이 떠서, 둘 다 먼 금빛 산을 향해 가는 금박 수묵화
그림 6 · 뭍길과 물길

담란에서 호넨까지

이 한 품이 한 세기 반 뒤 중국에서 새로 읽혔다. 북위의 담란(曇鸞, 476–542)은 『왕생론주(往生論註)』 첫머리에서 이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를 끌어와, 오탁악세에 부처 없는 때에 스스로의 힘으로 불퇴를 구하는 것이 난행이고, 부처의 원력에 의지해 정토에 태어나는 것이 이행이라고 했다. 당의 도작(道綽)은 이것을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선도(善導)는 「잡행(雜行)」과 「정행(正行)」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본의 호넨(法然)은 『선택집(選擇集)』에서 이 모든 구분을 이어받아, 법화경을 비롯한 모든 경을 「난행 · 성도 · 잡행」에 넣고 「버리고 닫고 제쳐 두고 던지라(捨閉閣抛)」고 가르쳤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서 이 『선택집』의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 보이셨다(22쪽).

대성인은 이 흐름의 출발점인 용수를 탓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용수의 말을 가져다 쓴 방식에 있었다. 「수호국가론」에서 호넨의 제자들이 「이것은 호넨의 새 주장이 아니라 용수의 『십주비바사론』에서 나온 것이다. 호넨을 비방하면 용수도 비방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竜樹菩薩並に三師の意は法華已前の四十余年の経経に於て難易等の義を存す、而るに源空より已来竜樹並に三師の難行等の語を借りて法華真言等を以て難・雑等の内に入れぬ

용수보살과 세 스승(담란 · 도작 · 선도)의 뜻은 법화경 이전 사십여 년의 경들에 대해서 난이 등의 뜻을 둔 것이다. 그런데 겐쿠(호넨) 이래로 용수와 세 스승의 난행 등의 말을 빌려 법화 · 진언 등을 난행 · 잡행 등의 안에 넣어 버렸다.

「수호국가론」, 51–52쪽

대성인은 그 증거를 『선택집』 자신의 문장에서 찾으셨다. 호넨은 도작의 성도문을 「법화 이전의 대승 · 소승」으로 설명한 뒤,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밀교의 대승과 실교의 대승도 넣어야 한다(之に準じて之を思うに応に密大及以び実大をも存すべし)」고 썼다. 대성인은 「『선택집』 열여섯 단에 걸쳐 한량없는 방법(謗法)을 짓는 근원은 오로지 이 네 글자(準之思之)에서 일어난다」고 지적하셨다(52쪽). 그리고 『십주비바사론』 자신이 「성문지나 벽지불지에 떨어지는 것을 보살의 죽음이라 한다」(권5)며 이승작불을 허락하지 않으니, 이 논은 법화경 이전의 경들의 뜻을 편 논이라는 것이다(57쪽).

대성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난이(難易)의 기준 자체를 경에서 찾으셨다. 무량의경은 법화경 이전의 사십여 년을 「험한 길을 가니 장애가 많다(険逕を行くに留難多き)」고 하고, 법화경을 「큰 곧은 길을 가니 장애가 없다(大直道を行くに留難無き)」고 한다. 부처 스스로 난이를 가르셨다면, 법화경이야말로 이행이다. 수행하기 쉬운 것을 이행이라 한다면 법화경 수희공덕품의 오십전전(五十展轉)은 칭명염불보다 쉽고, 뛰어난 것을 이행이라 한다면 분별공덕품의 일념신해(一念信解)는 사십여 년의 오바라밀보다 백천만억 배 뛰어나다(「수호국가론」, 53–54쪽).

陸道步行則苦뭍길 · 도보 — 괴로움난행도
水道乘船則樂물길 · 배 — 즐거움이행도
해석의 전개
  1. 용수법화 이전의 난이
  2. 담란난행 · 이행 = 자력 · 타력
  3. 도작성도 · 정토
  4. 선도잡행 · 정행
  5. 호넨 「準之思之」 — 법화를 난행에
대성인의 판정무량의경険逕を行くに留難多き大直道を行くに留難無き「법화경이야말로 이행」· 오십전전 · 일념신해수호국가론 51–54 · 57
『십주비바사론』 권5 이행품 · 「수호국가론」 51–54 · 57쪽
도표 16 · 난행도와 이행도

『보리심론』 — 이름을 빌린 논

8세기 · 불공의 한역

용수의 이름은 진언종에서도 크게 받들어졌다. 진언종은 대일여래의 법이 금강살타를 거쳐 용맹(龍猛, 곧 용수)에게, 용맹에게서 용지(龍智) · 금강지(金剛智) · 불공(不空)을 거쳐 혜과(惠果)와 구카이(空海)에게 전해졌다고 본다. 용맹이 남천축의 쇠탑(南天鐵塔)을 열고 그 안에서 금강살타에게 밀교의 경전을 받았다는 전설도 있다. 대성인은 「본존문답초」에서 진언종이 스스로 내세우는 이 계보를 그대로 옮겨 적으셨다(「대일여래와 금강살타 · 용맹 · 용지 · 금강지 · 불공 · 혜과 · 홍법」, 367–368쪽).

진언종이 용수의 이름으로 가장 중시한 글은 『보리심론(菩提心論)』(T32 no.1665)이다. 8세기 당의 불공(不空)이 옮긴 한 권의 짧은 논으로,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唯真言法中即身成佛故。是說三摩地法。於諸教中闕而不書。

오직 진언의 법 가운데에서만 즉신성불하므로, 이 삼마지의 법을 설한다. 여러 가르침 가운데에서는 빠뜨려 쓰지 않았다.

『보리심론』, T32 no.1665

구카이는 이 문장을 근거로 진언만이 즉신성불의 법이라고 했다. 대성인은 「즉신성불초」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셨다.

但し大論は竜樹の論たる事は自他あらそう事なし、菩提心論は竜樹の論・不空の論と申すあらそい有り、此れはいかにも候へ・さてをき候ぬ、但不審なる事は大論の心ならば即身成仏は法華経に限るべし文と申し道理きわまれり、菩提心論が竜樹の論とは申すとも大論にそむいて真言の即身成仏を立つる上唯の一字は強と見へて候

다만 『대론』이 용수의 논이라는 데에는 자타가 다투는 일이 없다. 『보리심론』은 용수의 논인가 불공의 논인가 하는 다툼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간에 제쳐 둔다. 다만 의심스러운 것은, 『대론』의 뜻으로 보면 즉신성불은 법화경에 한한다는 것이 글로 보나 이치로 보나 분명하다. 『보리심론』을 용수의 논이라 한들, 『대론』을 거슬러 진언의 즉신성불을 세운 데다가 「오직(唯)」이라는 한 글자는 억지로 보인다.

「즉신성불초」, 1006–1007쪽

같은 용수의 논이라면서 『대지도론』과 『보리심론』이 물과 불처럼 다르다. 대성인은 이것을 「용수가 달리 말한 것이 아니라 번역자의 짓(此れは竜樹の異説にはあらず訳者の所為なり)」이라 하셨다(1007쪽). 그리고 15절에서 본 구마라집의 혀를 들어 「구마라집의 혀는 타지 않았고 불공의 혀는 탔다. 거짓말은 타고 참말은 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셨다. 「보은초」에서는 「진언종의 원조라는 용수보살의 뜻도 이와 같다. 『대지도론』을 잘 살핀다면 이 일은 분명할 것인데, 불공이 그르친 『보리심론』에 모두가 속아 이 일에 헤매는 것인가(又真言宗の元祖という竜樹菩薩の御心もかくのごとし、大智度論を能く能く尋ぬるならば此の事分明なるべきを不空があやまれる菩提心論に皆人ばかされて此の事に迷惑せるか)」라고 쓰셨다(305쪽).

『대지도론』구마라집 역 · 5세기 초阿羅漢受決作佛 … 大藥師즉신성불은 법화경에 한함羅什は舌やけず
水火の異竜樹の異説にはあらず訳者の所為なり즉신성불초 1007
『보리심론』불공 역 · 8세기唯真言法中即身成佛귀속 논쟁(정원록은 불공 역 목록)不空は舌やけぬ
経に依らざる法門をば黒論 — 自語相違あるべからず→ 27절
도표 17 · 같은 이름, 두 개의 논

연구 노트 — 학계는 『보리심론』을 2~3세기 용수의 저작으로 보지 않는다. 논의 내용이 7~8세기 인도 밀교의 체계(오상성신관 등)를 전제하고 있어, 밀교의 논사 가운데 누군가가 지었거나 불공 자신이 편찬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당의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錄)』이 이 논을 용맹의 이름이 아니라 불공의 번역 목록에 넣었다고 전한다. 「진언의 조사 용맹」이 공의 논사 용수와 같은 사람인지도 학계는 대체로 부정적이다(2절 연구 노트).

팔종의 조사

5 — 13세기 · 중국 · 한국 · 일본

동아시아에서 용수는 「팔종의 조사(八宗の祖)」라 불렸다. 일본 나라와 헤이안 불교의 여덟 종파, 나아가 거의 모든 대승 종파가 저마다 용수를 조사로 받들었기 때문이다. 대성인도 「개목초」에서 용수를 「진언 · 화엄 여러 종파의 원조(真言・華厳・諸宗の元祖)」라 부르셨다(209쪽). 종파마다 용수를 받드는 근거는 달랐다.

삼론
근거(논 · 전승)『중론』 · 『십이문론』 · 『백론』
용수의 자리종조
천태
근거(논 · 전승)『대지도론』 · 『중론』 → 혜문
용수의 자리고조 · 동토 구조의 첫째
화엄
근거(논 · 전승)용궁의 화엄경 전승 · 『십주비바사론』
용수의 자리경의 전래자
절5 · 18절
진언
근거(논 · 전승)남천철탑 · 『보리심론』 귀속 논쟁
용수의 자리부법 제3조 용맹
정토
근거(논 · 전승)『십주비바사론』 이행품
용수의 자리정토진종 칠고승 제1
선
근거(논 · 전승)서천 이십팔조
용수의 자리제14조
절9절
天親竜樹・内鑒泠然 … 各一辺を保ちて大に聖道に乖けり — 관심본존초 244
도표 18 · 팔종이 받드는 용수

한 사람을 이렇게 많은 종파가 조사로 받든다는 것은 용수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동시에 그것은 한 사람의 가르침이 얼마나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읽혔는지도 보여 준다.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천태의 말을 인용해 이 사정을 짚으셨다.

天台大師云く「天親竜樹・内鑒泠然たり外には時の宜きに適い各権に拠る所あり、而るに人師偏に解し学者苟も執し遂に矢石を興し各一辺を保ちて大に聖道に乖けり」

천태대사가 이르기를, 「천친 · 용수는 안으로 비추어 봄이 맑고 분명하였으나, 밖으로는 그때의 마땅함에 맞추어 저마다 방편에 의거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인사(人師)들은 한쪽으로 풀고 학자들은 구차하게 집착하여 마침내 화살과 돌을 주고받으며 저마다 한쪽 끝을 지켜 크게 성인의 길에 어긋났다」.

「관심본존초」, 244쪽

용수는 때에 맞추어 방편을 썼다. 반야경에 의지할 때는 반야의 뜻을, 화엄경 십지품을 풀 때는 그 경의 뜻을 폈다. 그런데 뒤의 사람들은 저마다 그 한쪽만을 붙잡고, 그것이 용수의 전부라고 다투었다. 18절의 난행 · 이행, 19절의 『보리심론』이 그 예다. 「안으로 비추어 봄이 맑고 분명하였다(內鑒泠然)」는 앞 구절의 뜻은 6부 25절에서 본다.

같은 용수를 조사로 받들면서 종파들이 서로 다툰 까닭은 무엇인가.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여러 종파의 인사들이 「모두 조금씩 경론에 의지해 우열을 가리는 듯하지만 모두 자기 종파를 굳게 믿고 앞선 스승의 그릇된 뜻을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에 맞춘 우열이요 자기 뜻을 꾸민 법문(皆自宗を堅く信受し先師の謬義をたださざるゆへに曲会私情の勝劣なり荘厳己義の法門なり)」이라 하셨다(219쪽). 기준을 사람에 두면 용수는 누구의 조사도 될 수 있다. 기준을 경에 두면, 용수의 여러 논은 저마다 어느 경에 의지했는지에 따라 제자리를 찾는다. 대성인이 「수호국가론」에서 『대지도론』과 『십주비바사론』을 이승작불의 기준으로 가르신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 곧 「경에 의지하라」는 것은 용수 자신이 『십주비바사론』에 남긴 말이기도 했다(6부 27절).

5부 천태의 고조(高祖)

「이 집안의 교문은 용수를 시조로 삼는다」

6세기 · 북제에서 수나라로

천태종은 스스로의 기원을 용수에게서 찾는다. 교리 二 11절에서 보았듯, 북제의 혜문(慧文)은 『대지도론』을 읽다가 일체지 · 도종지 · 일체종지의 세 지혜가 「한 마음 가운데서 얻어진다(三智實在一心中得)」는 구절에 이르렀고, 다시 『중론』의 「인연으로 생겨난 법」의 게송을 읽고 크게 깨달아 일심삼관(一心三觀)을 세웠다(『불조통기』 권6). 이 법이 남악 혜사(慧思)에게, 혜사에게서 천태 지의(智顗)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천태종은 용수를 「고조(高祖)」, 곧 먼 조상의 자리에 둔다. 송나라 때 정리된 천태의 계보 「동토 구조(東土九祖)」는 용수를 첫째로 두고, 혜문 · 혜사 · 지의 · 관정 · 지위 · 혜위 · 현랑 · 담연(묘락)으로 이어진다. 대성인은 「입정관초」에서 묘락의 『지관대의(止觀大意)』를 인용하신다.

止観大意に云く「今家の教門は竜樹を以て始祖と為す慧文は但内観を列ねて視聴するのみ南岳天台に及んで復法華三昧陀羅尼を発するに因つて義門を開拓して観法周備す」

『지관대의』에 이르기를, 「이 집안의 교문은 용수를 시조로 삼는다. 혜문은 다만 내관(內觀)을 펼쳐 보고 들었을 뿐이다. 남악 · 천태에 이르러 다시 법화삼매다라니를 일으켜 의문(義門)을 개척하니 관법이 두루 갖추어졌다」.

「입정관초」, 528쪽
  1. 龍樹용수고조 · 『대지도론』 「三智實在一心中得」 · 『중론』 24:18
  2. 慧文혜문일심삼관
  3. 慧思혜사법화삼매 · 남악
  4. 智顗지의삼대부 · 천태
  5. 관정→지위→혜위→현랑
  6. 湛然담연(묘락)
今家の教門は竜樹を以て始祖と為す『지관대의』 · 「입정관초」 528쪽
教門
용수
内観
혜문
観法周備
남악 · 천태
송나라 때 정리된 「동토 구조」의 순서 · 교리 二 도표 1 · 공의 계보
도표 19 · 천태의 계보

이 인용에서 눈여겨볼 것은 역할의 나눔이다. 용수는 교문(敎門), 곧 가르침의 틀을 열었다. 혜문은 그것을 마음을 관하는 수행으로 옮겼다. 그리고 남악과 천태는 법화경의 삼매를 체득하여 그 관법을 법화경 위에 두루 갖추었다. 용수의 공의 논리는 천태에서 법화경을 읽는 도구가 되었다. 대성인은 「입정관초」에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천태가 법화경에 의지하고 용수를 고조로 삼으면서, 경문을 어기고 자기 말을 뒤집어 외도의 법에 의지해 『마하지관』을 풀었을 리는 전혀 없다(「천태는 법화경에 의지하고 용수를 고조로 삼으면서(天台は法華経に依り竜樹を高祖にしながら)」, 527–528쪽). 『마하지관』이 법화경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논증에 용수가 불려 나온 것이다.

사실단 — 네 가지로 설하는 법

『대지도론』 권1 · 천태 『법화현의』

『대지도론』 첫 권은 부처가 법을 설하는 방식을 넷으로 나눈다.

有四種悉檀。一者世界悉檀。二者各各為人悉檀。三者對治悉檀。四者第一義悉檀。四悉檀中。一切十二部經八萬四千法藏。皆是實無相違背。

네 가지 실단(悉檀)이 있다. 첫째는 세계실단, 둘째는 각각위인실단, 셋째는 대치실단, 넷째는 제일의실단이다. 이 네 가지 실단 가운데 일체의 십이부경과 팔만사천 법장이 모두 참되어 서로 어긋남이 없다.

『대지도론』 권1, T25 no.1509

「실단(siddhānta)」은 「이루어진 가르침」, 「정해진 도리」라는 뜻이다. 용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1. 세계실단 — 세상 사람들이 쓰는 말과 개념을 따라 설하는 것. 수레는 바퀴와 굴대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 실체는 없지만, 세상의 말로 「수레가 있다」고 한다. 듣는 이를 기쁘게 한다(歡喜益).
  2. 각각위인실단 — 듣는 사람 하나하나의 처지에 맞추어 설하는 것. 인과를 믿지 않는 이에게는 업보를 설하고, 「나」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무아를 설한다. 선을 일으키게 한다(生善益).
  3. 대치실단 — 병에 맞는 약처럼 번뇌를 다스리도록 설하는 것. 탐욕이 많은 이에게는 부정관을, 성냄이 많은 이에게는 자비관을. 악을 깨뜨린다(破惡益).
  4. 제일의실단 — 말과 생각이 끊어진 궁극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이치에 들게 한다(入理益).

앞의 셋은 방편이고 넷째는 진실인데, 네 가지가 모두 참되어 어긋나지 않는다. 같은 부처의 말이 한 곳에서는 「있다」 하고 다른 곳에서는 「없다」 해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리 二 6절에서 본 사구의 긍정과 부정, 8절의 이제와 같은 구조다.

천태는 이 사실단을 설법론의 중심에 두었다. 『법화현의』는 부처가 경을 설하는 까닭과 방식을 사실단으로 풀고, 네 가지 이익(歡喜 · 生善 · 破惡 · 入理)을 곳곳에서 쓴다. 석존 일대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게 보여도 모두 사실단에 따라 중생을 이끈 것이라는 이해가, 오시팔교(석존 편 5부)의 바탕에 있다.

一切十二部經八萬四千法藏 皆是實無相違背『대지도론』 권1

방편世界悉檀세계실단歡喜益수레의 비유 — 세상의 말로 「수레가 있다」
방편各各爲人悉檀각각위인실단生善益업보와 무아 — 듣는 이의 처지에 맞춤
방편對治悉檀대치실단破惡益부정관 · 자비관 — 병에 맞는 약처럼
진실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入理益言語道斷 — 궁극의 진리를 그대로
未開会の四悉檀열어 모으기 전 — 방편은 방편일 뿐開会の四悉檀법화경으로 열어 모은 뒤

法華経を以て一切経の心をえて「현방법초」 459쪽

도표 20 · 사실단

대성인은 「현방법초」(1262)에서 이 사실단을 짚으셨다. 『대지도론』의 사실단과 『섭대승론』의 사의취(四意趣)는 「용수보살과 무착보살이 멸후의 논사로서 법화경으로 일체경의 마음을 얻고, 사실단 · 사의취 등을 써서 이전 경들의 뜻을 판단한 것(無著菩薩・竜樹菩薩・滅後の論師として法華経を以て一切経の心をえて四悉・四意趣等を用いて爾前の経経の意を判ずるなり)」이며, 「개회되지 않은 사실단과 개회된 사실단을 같다고 한다면 어찌 방법이 아니겠는가(未開会の四意趣四悉檀と開会の四意趣・四悉檀を同ぜば、あに謗法にあらずや)」(459쪽).

용수가 사실단으로 여러 경을 판단한 것은 「법화경으로 일체경의 마음을 얻고」 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단은 여러 경의 차이를 그대로 모두 옳다고 하는 틀이 아니다. 법화경의 눈으로 보았을 때 비로소 이전 경들이 저마다 무엇을 위한 방편이었는지가 밝혀진다. 대성인은 법화경으로 열어 모으기 전의 사실단과 열어 모은 뒤의 사실단을 구별하셨다. 같은 네 가지 설법이라도, 법화경에 이르러 모두 일불승으로 열리기 전에는 방편은 방편일 뿐이다.

두 가지 삼제 — 「인연소생법」과 「법화 개회」

교학 · 용수에서 천태로

3부 끝에서 본 「찬시초」의 판정으로 돌아가자. 『중론』의 간심인 「인연소생법의 사구게」는 「화엄 · 반야 등의 사교 · 삼제의 법문」이지만 「아직 법화 개회의 삼제는 펴지 않으셨다」(268쪽). 같은 게송을 두고 두 가지 삼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법화경 이전의 여러 경에서 설해진 삼제다. 교리 二 11절에서 본 대로, 천태는 공과 중도를 이해하는 깊이를 장 · 통 · 별 · 원의 네 가르침으로 나누었고, 대성인은 「소야입도전답서」에서 그것을 석공(析空)에서 부단중(不但中)까지의 여섯 이름으로 부르셨다. 이전 경들의 원교, 곧 부단중까지 이르러도 「아직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삼천세간의 묘각의 공덕은 듣지 못한다」(1057쪽). 『어의구전』의 말로는 「법화경 이전에도 삼제는 있으나, 부서진 구슬은 보배가 아닌 것과 같다」(716쪽).

다른 하나는 법화경에서 열어 모은(開會) 삼제다. 법화경은 이전의 모든 가르침이 일불승을 위한 방편이었다고 밝히고(開三顯一), 그 모두를 하나의 법으로 모은다. 그때 공 · 가 · 중은 따로 떨어진 세 조각이 아니라, 지옥에서 부처까지 십계가 서로를 갖춘 한 생각의 실상, 곧 일념삼천의 삼제가 된다. 천태는 용수의 한 게송을 이 법화경의 눈으로 다시 읽어 「즉공즉가즉중」의 원융삼제를 세웠다.

대성인은 용수를 이렇게 평가하셨다.

仏の御入滅の次の日より一千年をば正法と申す、この正法一千年を二つにわかつ、前の五百年が間は小乗経ひろまらせ給う、ひろめし人人は迦葉・阿難等なり、後の五百年は馬鳴・竜樹・無著・天親等・権大乗経を弘通せさせ給う、法華経をば・かたはし計りかける論師もあり、又つやつや申しいださぬ人もあり、正法一千年より後の論師の中には少分を仏説ににたれども多分をあやまりあり、あやまりなくして而もたらざるは迦葉・阿難・馬鳴・竜樹・無著・天親等なり

부처가 입멸하신 다음 날부터 천 년을 정법이라 한다. 이 정법 천 년을 둘로 나눈다. 앞의 오백 년 동안은 소승경이 퍼졌으니, 넓힌 사람들은 가섭 · 아난 등이다. 뒤의 오백 년은 마명 · 용수 · 무착 · 천친 등이 권대승경을 넓히셨다. 법화경을 한 귀퉁이만 쓴 논사도 있고, 전혀 말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정법 천 년 뒤의 논사들 가운데에는 적은 부분은 부처의 말씀과 비슷하나 많은 부분에 잘못이 있다. 잘못이 없으면서도 모자라는 이는 가섭 · 아난 · 마명 · 용수 · 무착 · 천친 등이다.

「중생심어서」, 1591쪽

「잘못이 없으면서도 모자란다(あやまりなくして而もたらざる)」. 대성인의 용수 평가를 이보다 짧게 요약한 말은 없다. 용수의 공의 논리에는 잘못이 없다. 그것은 부처가 설한 연기를 끝까지 따라간 논리였다. 그러나 그 논리가 드러낸 것은 아직 법화경 이전의 경계였다. 모자람은 용수의 잘못이 아니라 때의 한계였다. 그 뜻은 6부에서 본다.

衆因緣生法我說即是空亦為是假名亦是中道義

『중론』 24장 18게
① 용수 자신緣起=空性=假名=中道연기 = 공성 = 가명 = 중도교리 二 7절 · 도표 7
② 법화 이전의 사교 삼제
  1. 석공
  2. →단공
  3. →체공
  4. →부단공
  5. →단중
  6. →부단중
砕けたる珠は宝に非ざるが如し『어의구전』 716쪽교리 二 11절 · 도표 11
③ 법화 개회의 삼제即空即假即中→ 십계호구 · 일념삼천교리 五 「일념삼천」
いまだ法華開会の三諦をば宣べ給はず「찬시초」 268쪽あやまりなくして而もたらざる「중생심어서」 1591쪽
도표 21 · 한 게송의 세 가지 읽기

용수가 세운 공의 논리는 천태에서 법화경을 읽는 눈이 되었고, 대성인에게서 묘법의 「묘」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교리 二 13절에서 보았듯, 대성인은 「일생성불초」에서 「있다고 하려니 색도 질도 없고, 없다고 하려니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난다」는 문장으로 한 생각의 마음의 불가사의를 묘라 하셨다. 그 문장의 뿌리는 천태의 『법화현의』를 거쳐 반야와 용수의 공에 닿아 있다. 창가학회는 용수를 「모자란」 논사로 낮추어 보지 않는다. 그가 없었다면 천태의 삼제도, 대성인의 「묘」의 풀이도 그 형태로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용수가 연 문은 법화경이라는 집의 문이었고, 그 집의 가장 깊은 방, 곧 법화경 본문의 문저(文底)에 잠긴 남묘호렌게쿄는 말법을 기다려야 했다. 5부에서 본 용수는 그 집을 향한 길을 가장 멀리까지 닦은 사람이다.

6부 대성인이 본 용수

부처의 예언 — 정법의 뒤 오백 년

「불멸 후 칠백 년」 · 전통 연대

대성인은 용수를 이야기하실 때 언제나 「때」에서 시작하셨다. 부처는 자신이 입멸한 뒤 정법 천 년 · 상법 천 년 · 말법 만 년 동안 누가 어떤 경을 넓힐지를 미리 정해 두셨다는 것이다. 「하산어소식」은 이렇게 쓴다.

如来は未来を鑑みさせ給いて我が滅後正法一千年・像法一千年・末法一万年が間我が法門を弘通すべき人人並に経経を一一にきりあてられて候……所謂・我が滅後の次の日より正法五百年の間は一向小乗経を弘通すべし迦葉・阿難乃至富那奢等の十余人なり、後の五百年には権大乗経の内華厳・方等・深密・般若・大日経・観経・阿みだ経等を弥勒菩薩・文殊師利菩薩・馬鳴菩薩・竜樹菩薩・無著菩薩・天親菩薩等の四依の大菩薩等の大論師弘通すべしと云云

여래는 미래를 비추어 보시고, 나의 멸후 정법 천 년 · 상법 천 년 · 말법 만 년 동안 나의 법문을 넓혀야 할 사람들과 경들을 하나하나 정해 두셨다. …… 이른바, 나의 멸후 다음 날부터 정법 오백 년 동안은 오로지 소승경을 넓혀야 하니 가섭 · 아난 내지 부나사 등 십여 명이다. 뒤의 오백 년에는 권대승경 가운데 화엄 · 방등 · 심밀 · 반야 · 대일경 · 관경 · 아미타경 등을 미륵보살 · 문수사리보살 · 마명보살 · 용수보살 · 무착보살 · 천친보살 등 사의(四依)의 대보살 등 대논사가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하산어소식」, 346쪽

그리고 용수 한 사람에 대해서는 부처가 따로 이름을 불러 예언했다고 하셨다. 「찬시초」는 「용수보살의 일은 사사로이 말할 것이 아니다. 부처가 예언하셨다. 나의 멸후에 용수보살이라는 사람이 남천축에 나올 것이며, 그 사람의 요체는 『중론』이라는 논에 있으리라고(仏記し給う我が滅後に竜樹菩薩と申す人・南天竺に出ずべし彼の人の所詮は中論という論に有るべしと仏記し給う)」라고 쓴다(268쪽). 그 예언은 『능가경』에 있다.

南天竺國中 大名德比丘 厥號為龍樹 能破有無宗 世間中顯我 無上大乘法 得初歡喜地 往生安樂國

남천축국 가운데 크게 이름난 덕 있는 비구가 있으리니, 그 이름은 용수라. 능히 유(有)와 무(無)의 종지를 깨뜨리고, 세간에 나의 위없는 대승의 법을 드러내며, 초환희지를 얻어 안락국에 왕생하리라.

『대승입능가경』 권6 게송품, T16 no.672

「유와 무의 종지를 깨뜨린다」. 교리 二 3절에서 본 가전연경의 중도, 곧 「있음」과 「없음」의 두 극단을 떠난 연기가 이 예언의 핵심이다. 「초환희지」는 보살의 열 단계 가운데 첫째로, 『십주비바사론』이 풀이한 바로 그 자리다. 대성인이 「개목초」에서 용수를 「초지의 대성(初地の大聖)」이라 부르신 것도 이 전승을 따른 것이다(209쪽).

대성인은 이 시기를 대집경의 「다섯 오백 년」으로도 설명하셨다. 부처 멸후 첫 오백 년은 해탈견고(解脫堅固), 둘째 오백 년은 선정견고(禪定堅固)의 때이며, 마명과 용수 등의 대사들은 「정법의 뒤 오백 년, 대집경의 선정견고의 때에 해당한다(此等は正法の後の五百年・大集経の禅定堅固の時にあたれり)」(「찬시초」, 261쪽).

  1. 불멸 ~ 500앞 오백 년 — 소승가섭 · 아난 … 부나사 · 해탈견고
  2. 600마명『마하마야경』의 예언
  3. 700용수『마하마야경』 · 『능가경』의 예언 — 南天竺國中 … 厥號為龍樹
  4. 900무착 · 천친뒤 오백 년 — 권대승 · 선정견고

「하산어소식」 346쪽 · 「찬시초」 261쪽

어서의 여러 햇수 — 600(「개목초」 203쪽) · 700(「보은초」 327쪽) · 800(「수호국가론」 49쪽)

햇수는 석존 입멸을 기원전 949년으로 보는 전통 연대 · 도표의 용수는 칠백 년(24절 연대 대조)
도표 22 · 정법 천 년의 두 오백 년

연대 대조 — 용수의 출현 시기를 어서는 여러 가지로 적는다. 「보은초」는 『마하마야경』을 들어 「육백 년에 마명이, 칠백 년에 용수가 나오리라」(327쪽)고 하고, 「개목초」는 같은 경을 들어 「나의 멸후 육백 년에 용수보살이라는 사람이 남천축에 나올 것이다(我が滅後・六百年に竜樹菩薩という人・南天竺に出ずべし)」(203쪽)라고 하며, 「수호국가론」은 「여래 멸후 팔백 년에 세상에 나와(如来の滅後八百年に出世して)」(49쪽)라고 한다. 한역 『마하마야경』은 「칠백 년 뒤 한 비구가 있어 이름을 용수라 한다」로 전하며,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도 「불멸 후 칠백 년 무렵」으로 적는다. 이 페이지는 도표에 칠백 년을 쓰고, 어서의 여러 표현은 이 상자에 함께 둔다. 이 햇수들은 모두 석존 입멸을 기원전 949년으로 보는 전통 연대에 기댄 것이다(석존 편 1부 3절).

내감냉연 — 알면서 말하지 않은 사람

「관심본존초」 1273 외

대성인의 용수 평가 가운데 가장 자주, 가장 여러 어서에 나타나는 것은 한 가지다. 용수는 법화경의 참뜻을 알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관심본존초」는 이것을 문답으로 적는다.

夫れ仏滅後に至つて一千八百余年・三国に経歴して但三人のみ有つて始めて此の正法を覚知せり所謂月支の釈尊・真旦の智者大師・日域の伝教此の三人は内典の聖人なり、問うて曰く竜樹天親等は如何、答えて曰く此等の聖人は知つて之を言わざる仁なり、或は迹門の一分之を宣べて本門と観心とを云わず或は機有つて時無きか或は機と時と共に之れ無きか

무릇 불멸 후 천팔백여 년, 세 나라를 거치는 동안 오직 세 사람만이 비로소 이 정법을 깨달아 알았다. 이른바 인도의 석존, 중국의 지자대사, 일본의 전교다. 이 세 사람은 내전의 성인이다. 묻는다. 용수 · 천친 등은 어떠한가. 답한다. 이 성인들은 알면서 이것을 말하지 않은 분들이다. 혹은 적문의 일부분을 펴고 본문과 관심은 말하지 않았다. 혹은 기(機)는 있었으나 때가 없었는가, 혹은 기와 때가 모두 없었는가.

「관심본존초」, 245쪽

앞 장의 천태 인용, 곧 「천친 · 용수는 안으로 비추어 봄이 맑고 분명하였으나 밖으로는 그때의 마땅함에 맞추었다(內鑒泠然 外適時宜)」(244쪽, 20절)가 이 문답의 전제다. 대성인은 앞의 인용에 이어 「천친 · 용수 · 마명 · 견혜 등은 내감냉연하였다. 그러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에 이것을 펴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셨다(244쪽).

이 평가는 사도와 미노부의 어서에 거듭 나타난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줄기는 같다.

  1. 「수호국가론」 57쪽1259法華已前の諸大乗経の意を申べたる論 알았음일부분논이 의지한 경에 따라 권실이 갈림
  2. 「개목초」 189쪽1272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 알았음건져 내지 않음일념삼천은 수량품의 문저에 잠김
  3. 「관심본존초」 244–245쪽1273知つて之を言わざる仁なり 알았음적문의 일부분기는 있고 때가 없음 · 기와 때가 모두 없음
  4. 「법화행자봉난사」 965–966쪽1274法華経をば心に存して口に吐きたまわず 알았음권대승만부처가 주지 않음 · 때와 기가 익지 않음
  5. 「찬시초」 267–268쪽1275いまだ法華開会の三諦をば宣べ給はず 알았음권대승만사교 · 삼제의 법문까지
  6. 「보은초」 327쪽1276而れども此の二人は仏の御使ぞかし 알았음권대승만정법 뒤 오백 년 · 내증은 같음
  7. 「하산어소식」 346쪽1277心には存じて口に宣べ給はず 알았음권대승만때가 오지 않음 · 부탁받지 않은 대법
  8. 「소야입도전답서」 1058쪽1277時なく機なければ弘通し給わざるか 알았음넓히지 않음때도 기도 없음
  9.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 1016쪽1278心の底に知らせ給いしかども色にも出ださせ給はず 알았음드러내지 않음
  10. 「사보살조립초」 988쪽1279口より外へ出させ給はず 알았음입 밖에 내지 않음영산의 금지 — 상행보살의 법
  11. 「삼대비법초」 1022쪽1281題目を唱えさせ給いしかども自行ばかり 알았음자행의 제목화타에 이르지 않음
  12. 「중생심어서」 1591쪽—あやまりなくして而もたらざる 알았음권대승만잘못은 없으나 모자람
금 점 — 알았다 · 점선 점 — 밖으로 말하지 않음(무엇까지 폈는가) · 연도 「—」는 확인 중 · 25절
도표 23 · 어서에 나타난 용수

왜 말하지 않았는가

대성인은 그 까닭을 셋으로 드셨다. 첫째, 부처가 부촉하지 않았다. 둘째, 때와 중생의 근기가 아직 익지 않았다. 「법화행자봉난사」의 말로는 「첫째는 부처가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때와 기가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所詮一には仏・授与したまわざるが故に、二には時機未熟の故なり)」(965쪽). 그리고 셋째, 영산에서의 금지다. 「사보살조립초」는 이렇게 쓴다.

末法に入つて始めの五百年に上行菩薩の出でさせ給いて造り給うべき故に正法・像法の四依の論師・人師は言にも出させ給はず、竜樹・天親こそ知らせ給いたりしかども口より外へ出させ給はず……此等の論師・人師は霊山にして迹化の衆は末法に入らざらんに正像二千年の論師・人師は本門久成の教主釈尊並に久成の脇士・地涌上行等の四菩薩を影ほども申出すべからずと御禁ありし故ぞかし

말법에 들어 처음 오백 년에 상행보살이 나오시어 지으셔야 하므로, 정법 · 상법의 사의의 논사 · 인사는 말로도 꺼내지 않으셨다. 용수 · 천친은 아셨으나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 이 논사 · 인사들에게는, 영산에서 「적화의 무리는 말법에 들지 않은 동안, 정 · 상 이천 년의 논사 · 인사는 본문 구성의 교주 석존과 구성의 협사 · 지용 상행 등 사보살을 그림자만큼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보살조립초」, 988쪽

석존 편 6부 27절에서 본 「관심본존초」의 대목, 곧 지용의 보살들이 「적멸도량에도 오지 않고 사라쌍수의 마지막에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같은 자리에 용수가 선다. 법화경 본문의 가장 깊은 법, 남묘호렌게쿄는 말법의 처음을 위해 상행보살에게 맡겨진 법이었다. 적화(迹化)의 보살인 정법 · 상법의 논사들은 그 법을 알아도 넓힐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용수는 그 법에 전혀 닿지 않았는가. 대성인은 「삼대비법초」에서 뜻밖의 말씀을 남기셨다. 「정법에는 천친보살 · 용수보살이 제목을 부르셨으나 자행(自行)뿐이었고 거기서 그쳤다(正法には天親菩薩・竜樹菩薩・題目を唱えさせ給いしかども自行ばかりにしてさて止ぬ)」(1022쪽). 상법의 남악 · 천태도 남묘호렌게쿄라 불렀으나 자신의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남을 위해 널리 설하지 않았다. 「말법에 들어 지금 니치렌이 부르는 제목은 앞 시대와 달라, 자행과 화타에 걸친 남묘호렌게쿄다」. 용수는 그 법을 알았고, 어쩌면 스스로 불렀다. 다만 그것을 모든 사람의 법으로 펴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법화취요초」는 이 사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여래 멸후 이천여 년 동안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가 남겨 두신 비법은 무엇인가. 본문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다섯 자다」(336쪽). 니치렌 편 21절에서 본 삼대비법의 첫 이름이 여기에 있다. 대성인은 삼대비법을 말씀하실 때 늘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가 남겨 두신」 법이라는 틀로 말씀하셨다. 용수는 그 법이 남겨진 역사의 첫머리에 서 있다.

①仏・授与したまわざるが故부처가 부촉하지 않음「법화행자봉난사」 965쪽
②時機未熟の故때와 기가 익지 않음같은 곳 · 「관심본존초」 245쪽 「機有つて時無きか」
③霊山の御禁적화의 논사는 본문을 그림자만큼도 말하지 않음「사보살조립초」 988쪽
竜樹・天親・天台・伝教の残したまえる所の秘法본문의 본존 · 계단 · 제목의 오자「법화취요초」 336쪽
말법의 처음 · 상행보살
도표 24 · 알면서 말하지 않은 까닭

대약사 — 「난신난해」를 읽은 사람

「제경과 법화경의 난이의 일」 1280 외

용수가 법화경의 뜻을 말하지 않았다면, 대성인은 왜 용수의 한 구절을 그토록 높이 들어 올리셨는가. 17절에서 본 『대지도론』의 「대약사」다. 대성인은 만년의 한 어서에서 이렇게 쓰셨다.

問うて云く法華経の第四法師品に云く難信難解と云云いかなる事ぞや、答えて云く此の経は仏説き給いて後二千余年にまかりなり候、月氏に一千二百余年・漢土に二百余年を経て後に日本国に渡りて・すでに七百余年なり、仏滅後に此の法華経の此の句を読みたる人但三人なり、所謂月氏には竜樹菩薩の大論に云く「譬えば大薬師の能く毒を以て薬と為すが如し」等云云、此れは竜樹菩薩の難信難解の四字を読み給いしなり、漢土には天台智者大師と申せし人読んで云く「已今当説最も為れ難信難解」と云云、日本国には伝教大師読んで云く「已説の四時の経・今説の無量義経・当説の涅槃経は易信易解なり随他意の故に此の法華経は最も為れ難信難解なり随自意の故に」等云云

묻는다. 법화경 제4권 법사품에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難信難解)」고 하였는데 어떤 일인가. 답한다. 이 경은 부처가 설하신 뒤 이천여 년이 지났다. 인도에서 천이백여 년, 중국에서 이백여 년을 지나 일본국에 건너온 지 이미 칠백여 년이다. 불멸 후 이 법화경의 이 구절을 읽은 사람은 오직 세 사람이다. 이른바 인도에서는 용수보살의 『대론』에 「비유하면 뛰어난 의사가 능히 독으로 약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용수보살이 「난신난해」 네 글자를 읽으신 것이다. 중국에서는 천태지자대사라는 사람이 읽어 「이미 설한 것, 지금 설하는 것, 앞으로 설할 것 가운데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본국에서는 전교대사가 읽어 「이미 설한 사시의 경, 지금 설하는 무량의경, 앞으로 설할 열반경은 믿기 쉽고 알기 쉬우니 수타의이기 때문이다. 이 법화경은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수자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제경과 법화경의 난이의 일」, 991쪽

세 나라 이천 년 동안 법화경의 「난신난해」를 참으로 읽은 사람이 셋, 그 첫째가 용수다. 「관심본존초」가 정법을 깨달아 안 세 사람으로 석존 · 천태 · 전교를 들고 용수를 「알면서 말하지 않은 분」으로 둔 것(25절)과 나란히 놓으면, 대성인의 평가가 선명해진다. 용수는 법화경의 뜻을 널리 편 사람은 아니지만, 법화경이 왜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지를 한 구절로 정확히 짚은 사람이었다.

무엇이 믿기 어려운가. 「즉신성불초」가 답한다. 「독이란 고 · 집의 두 진리이며, 생사의 인과는 독 가운데 독이다. 이 독을 생사즉열반 · 번뇌즉보리로 만드는 것을 묘의 극치라 한다. 좋은 약이란 독이 변해 약이 된 것을 말한다」(1006쪽). 그리고 대성인은 이 구절이 「이 (묘의) 한 글자를 깨달으신 것으로 보인다(此の一字を心へさせ給いたりけるかと見へて候へ)」고 하셨다.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뜻을 여러 논사와 인사가 풀었으나 「모두 여러 경의 소견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용수의 이 한 구절만이 「묘」 한 글자를 얻었다는 것이다. 교리 二 12절과 교리 一 22절이 이 대목을 자세히 읽었다.

대성인은 이 구절을 자신의 삶에서도 읽으셨다. 1278년 가을, 오래 앓던 병이 시조 긴고가 보낸 약으로 나았을 때 이렇게 쓰셨다. 「미륵보살의 『유가론』과 용수보살의 『대론』을 보면, 정업(定業)을 지닌 사람은 약이 변해 독이 되지만 법화경은 독이 변해 약이 된다고 보인다(弥勒菩薩の瑜伽論・竜樹菩薩の大論を見候へば定業の者は薬変じて毒となる法華経は毒変じて薬となると見えて候)」(「사조깅고전어반사(석호장군어서)」, 1185쪽).

검은 바탕 위 낡은 나무 탁자에 검은 뿌리와 가시 잎이 담긴 돌그릇, 숯불 위에서 김이 오르는 작은 약탕기, 잎 하나가 뜬 맑은 금빛 약 사발, 절구와 공이가 놓인 금박 정물화
그림 7 · 독을 약으로
인도용수 『대지도론』大藥師能以毒為藥
중국천태 『법화현의』已今當說最為難信難解
일본전교 『법화수구』隨自意の故に
「난신난해」 — 독을 약으로 (「즉신성불초」 1006쪽)
毒고·집 이제, 생사의 인과妙藥생사즉열반 · 번뇌즉보리
仏滅後に此の法華経の此の句を読みたる人但三人なり — 「제경과 법화경의 난이의 일」 991쪽
도표 25 · 세 나라, 세 사람

백론과 흑론 — 경에 의지하라

「개목초」 1272 · 「찬시초」 1275 외

대성인이 용수의 말 가운데 대약사와 함께 가장 자주 인용하신 것은 『십주비바사론』의 한 구절이다. 경(修多羅, sūtra)에 의지한 논은 「흰 논(白論)」이고, 경에 의지하지 않은 논은 「검은 논(黑論)」이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 구절을 늘 네 개의 기준과 함께 나란히 두셨다.

但し我等が慈父・雙林最後の御遺言に云く「法に依つて人に依らざれ」等云云、不依人等とは初依・二依・三依・第四依・普賢・文殊等の等覚の菩薩が法門を説き給うとも経を手ににぎらざらんをば用ゆべからず、「了義経に依つて不了義経に依らざれ」と定めて経の中にも了義・不了義経を糾明して信受すべきこそ候いぬれ、竜樹菩薩の十住毘婆沙論に云く「修多羅黒論に依らずして修多羅白論に依れ」等云云、天台大師云く「修多羅と合う者は録して之を用いよ文無く義無きは信受すべからず」等云云、伝教大師云く「仏説に依憑して口伝を信ずること莫れ」等云云

다만 우리의 자부께서 사라쌍수 아래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에 이르기를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하셨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초의 · 이의 · 삼의 · 제사의, 보현 · 문수 등 등각의 보살이 법문을 설하시더라도 경을 손에 쥐지 않았다면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고 정하셨으니, 경 가운데서도 요의경과 불요의경을 가려 믿고 받아야 한다.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에 이르기를 「경에 의지하지 않은 검은 논에 의지하지 말고 경에 의지한 흰 논에 의지하라」 하였고, 천태대사는 「경과 맞는 것은 기록하여 쓰고, 글도 없고 뜻도 없는 것은 믿고 받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전교대사는 「부처의 말씀에 의지하고 구전을 믿지 말라」 하였다.

「개목초」, 219쪽

석존의 유언(열반경), 인도의 용수, 중국의 천태, 일본의 전교. 세 나라의 스승이 모두 한 가지를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경에 의지하라. 석존 편 5부 24절에서 본 대로, 대성인이 유학 시절부터 삼은 기준이 이것이었다. 대성인은 같은 네 기준을 「찬시초」(282쪽), 「성우문답초」(481–482쪽), 「입정관초」(527–528쪽)에서도 되풀이하셨다. 「성우문답초」는 용수의 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뜻은 경 가운데서도 법화경 이전의 권교를 버리고 이 경을 따르라는 것이다(意は経の中にも法華已前の権教をすてて此の経につけよとなり)」(482쪽).

이 기준은 용수 자신에게도 적용되었다. 19절에서 본 대로, 대성인은 『보리심론』의 「오직 진언에서만」이라는 말을 두고 「어느 경문에 의지해 『오직』 한 글자를 두어 법화경을 깨뜨렸는가, 증문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곧바로 『십주비바사론』의 이 구절을 들어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에 이르기를 『경에 의지하지 않은 법문은 검은 논』이라 하였으니, 스스로의 말이 서로 어긋날 수는 없다(竜樹菩薩の十住毘婆娑論に云く「経に依らざる法門をば黒論」と云云自語相違あるべからず)」고 하셨다(「즉신성불초」, 1007쪽). 용수의 이름을 빌린 논을 용수 자신의 기준으로 가려낸 것이다. 「입정관초」는 이렇게 맺는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용수 · 천태 · 전교는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하신 것이다(依法不依人の故に竜樹・天台・伝教元よりの御約束なるが故なり)」(529쪽).

  1. 석존 열반경依法不依人
  2. 용수 『십주비바사론』依修多羅白論 不依修多羅黑論
  3. 천태 修多羅と合う者は録して之を用いよ
  4. 전교 仏説に依憑して口伝を信ずること莫れ
인용한 어서「개목초」 219쪽「찬시초」 282쪽「성우문답초」 481쪽「입정관초」 527쪽

용수의 기준으로 용수의 이름을 빌린 논을 가린다 — 19절自語相違あるべからず「즉신성불초」 1007쪽

도표 26 · 네 개의 기준

난과 때 — 부처의 사자에서 말법의 행자로

정법에서 말법으로

2부에서 본 용수는 붉은 깃발을 들고 일곱 해를 걸었고, 소승의 사람들에게 밤낮으로 욕을 듣고 몽둥이를 맞았다. 대성인은 용수를 난을 겪은 부처의 사자로 존중하셨다. 「전중경수법문」(1271)에서는 「부법장의 스물다섯 사람은 모두 부처가 미리 예언해 두신 권자(權者)다. 그 가운데 제14 제바보살은 외도에게 죽임을 당했고 제25 사자존자는 단미리왕에게 목이 베였으며, 그 밖에 불타밀다 · 용수보살 등도 많은 난을 만났다」고 쓰셨다(1000쪽).

그러나 대성인은 말법의 난이 그보다 훨씬 크다고 보셨다. 법사품의 「여래가 계신 때에도 원망과 질투가 많은데 하물며 멸도한 뒤이랴(況滅度後)」는 말법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이다.

法華経に云く「而も此の経は如来の現在にすら猶怨嫉多し、況や滅度の後をや」云云、釈迦如来の大難はかずをしらず……此等は如来現在の小難なり、況滅度後の大難は竜樹・天親・天台・伝教いまだ値い給はず・法華経の行者ならずと・いわば・いかでか行者にて・をはせざるべき、又行者といはんとすれば仏のごとく身より血をあやされず、何に況や仏に過ぎたる大難なし経文むなしきがごとし、仏説すでに大虚妄となりぬ

법화경에 이르기를 「이 경은 여래가 계신 때에도 원망과 질투가 많은데 하물며 멸도한 뒤이랴」 하였다. 석가여래의 대난은 헤아릴 수 없다. …… 이것들은 여래 재세의 작은 난이다. 「하물며 멸도한 뒤」의 대난은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가 아직 만나지 않으셨다. 법화경의 행자가 아니라고 하면, 어찌 행자가 아니실 수 있겠는가. 또 행자라고 하려 하면, 부처처럼 몸에서 피를 흘리지 않으셨으니, 하물며 부처를 넘는 대난은 없다. 경문이 헛된 것 같고, 부처의 말씀은 이미 큰 거짓이 되고 말았다.

「성인어난사」, 1189쪽

1279년 10월, 아쓰와라의 농민들이 붙잡혀 있던 때의 어서다(니치렌 편 23·24절).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는 법화경의 행자였다. 그러나 「멸도한 뒤」의 더 큰 난을 몸으로 받아 경문을 참되게 한 이는 없었다. 대성인은 바로 뒤에 「27년 동안 부처의 말씀을 도운 사람은 오직 니치렌 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여설수행초」(1273)도 같은 뜻을 적는다. 두 번의 유배, 다쓰노구치의 목의 자리, 제자들의 투옥과 영지의 몰수. 「이러한 대난에는 용수 · 천태 · 전교도 어찌 미치실 수 있겠는가(是等の大難には竜樹・天台・伝教も争か及び給うべき)」(504쪽).

때가 공덕을 정한다

그렇다면 말법의 행자가 용수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지혜의 차이인가. 대성인은 분명히 아니라고 하셨다.

されば内証は同じけれども法の流布は迦葉・阿難よりも馬鳴・竜樹等はすぐれ馬鳴等よりも天台はすぐれ 天台よりも伝教は超えさせ給いたり、世末になれば人の智はあさく仏教はふかくなる事なり、例せば軽病は凡薬・重病には仙薬・弱人には強きかたうど有りて扶くるこれなり

그러므로 내증은 같지만 법의 유포는 가섭 · 아난보다 마명 · 용수 등이 뛰어나고, 마명 등보다 천태가 뛰어나며, 천태보다 전교가 넘어서셨다. 세상이 말세가 될수록 사람의 지혜는 얕아지고 불교는 깊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가벼운 병에는 보통 약, 무거운 병에는 선약,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편이 있어 돕는 것과 같다.

「보은초」, 328쪽

「내증은 같다」. 가섭 · 아난도, 마명 · 용수도, 천태 · 전교도 안으로 깨달은 것은 같다. 달라지는 것은 법이 퍼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하는 것은 시대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사람의 지혜는 얕아지고, 병이 깊어지듯 더 깊은 약, 더 깊은 불교가 필요해진다. 대성인은 같은 「보은초」에서 남묘호렌게쿄의 공덕이 「전교 · 천태도 넘어서고 용수 · 가섭보다도 뛰어나다(此の功徳は伝教・天台にも超へ竜樹・迦葉にもすぐれたり)」고 하시며, 곧바로 「이것은 오로지 니치렌의 지혜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때가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是れひとへに日蓮が智のかしこきには・あらず時のしからしむる耳)」라고 덧붙이셨다(329쪽). 「현불미래기」도 「시대로써 과보를 논하면 용수 · 천친을 넘어서고 천태 · 전교보다도 뛰어나다(時代を以て果報を論ずれば、竜樹・天親に超過し、天台・伝教にも勝るるなり)」고 했다(505쪽).

「소야입도전답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천태 · 전교도 넓히지 않은 남묘호렌게쿄를 니치렌 같은 법사가 어찌 부를 수 있는가」 하고 의심했다. 대성인은 까마귀와 뱀을 들어 답하셨다. 까마귀는 천한 새지만 독수리도 모르는 한 해의 길흉을 알고, 뱀은 용과 코끼리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레 뒤의 홍수를 안다. 「설령 용수 · 천태가 알지 못하신 법문이라 해도, 경문이 분명하다면 무엇을 의심하겠는가(設い竜樹天台の知り給はざる法門なりとも経文顕然ならばなにをか疑はせ給うべき)」(1058쪽). 그리고 곧바로 「용수 · 천친 등은 이것을 아셨으나 때도 없고 기도 없었으므로 넓히지 않으신 것인가(25절)」라고 이으셨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때의 문제다. 「불법은 때에 따라, 기에 따라 퍼지는 것이니, 말할 가치도 없는 니치렌이 때를 만난 것이리라(仏法は時により機によりて弘まる事なれば云うにかひなき日蓮が時にこそあたりて候らめ)」(1058쪽).

内証は同じけれども
  1. 정법 앞 오백 년가섭 · 아난소승
  2. 정법 뒤 오백 년마명 · 용수권대승 · 법화는 「안으로」
  3. 상법천태 · 전교원정 원혜 · 원돈계
  4. 말법의 처음니치렌삼대비법
時のしからしむる耳「보은초」 329쪽

世末になれば人の智はあさく仏教はふかくなる가벼운 병에는 보통 약, 무거운 병에는 선약 — 「보은초」 328쪽 · 28절

칸 길이는 햇수에 비례하지 않음
도표 27 · 법의 유포와 때

「내증은 같다」는 말은 무겁다. 대성인은 용수를 낮추어 보신 적이 없다. 용수는 법화경의 「난신난해」를 읽은 세 사람의 첫째였고, 경에 의지하라는 기준을 세운 스승이었으며, 붉은 깃발과 몽둥이를 견딘 부처의 사자였다. 다만 그는 정법의 사람이었다. 창가학회는 이 「때」의 법문을 대성인 불법의 중심에 둔다. 석존 편에서 본 「찬시초」의 첫 문장, 「무릇 불법을 배우려면 반드시 먼저 때를 배워야 한다」가 용수의 생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용수가 안으로 알고 밖으로 말하지 않은 법을, 말법의 처음에 대성인이 목소리를 아끼지 않고 부르셨다. 그 법을 오늘 부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대성인의 말씀대로라면 「때」의 덕으로 용수가 이르지 못한 자리에 서 있다.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책임이다. 용수가 일곱 해 붉은 깃발을 든 인내로, 그 법을 전하는 책임이다.

세 층의 용수

이 페이지는 용수를 세 층으로 읽었다.

누구인가
역사의 용수2~3세기 남인도의 브라만 출신 논사, 사타바하나 왕의 벗
동아시아 불교의 용수용궁에서 경을 가져온 팔종의 조사, 천태의 고조
대성인이 본 용수정법 뒤 오백 년의 사의 대보살, 부처가 예언한 사자
무엇을 썼는가
역사의 용수『중론』 · 『회쟁론』 · 『보행왕정론』 등
동아시아 불교의 용수『대지도론』 · 『십주비바사론』 · 『십이문론』(구마라집 역)
대성인이 본 용수「삼십만 게송」 가운데 중국에 건너온 논들
무엇을 설했는가
역사의 용수연기인 것은 공이며, 공이기에 일체가 성립한다
동아시아 불교의 용수공 · 가 · 중, 사실단, 난행과 이행
대성인이 본 용수권대승의 뜻, 「법화 개회 이전의 삼제」 · 「대약사」의 한 구절
법화경과의 관계
역사의 용수『중론』에는 법화경이 나오지 않는다
동아시아 불교의 용수『대지도론』이 법화경을 「비밀」 · 「대약사」라 함
대성인이 본 용수안으로 알고 밖으로 말하지 않음(內鑒泠然) · 「난신난해」를 읽은 첫 사람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의 용수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논리
동아시아 불교의 용수여러 종파가 함께 받드는 뿌리
대성인이 본 용수경에 의지하라는 기준, 그리고 「때」를 배우라는 가르침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용수를 알수록, 짧은 게송집 한 권이 어떻게 동아시아 불교 전체의 뿌리가 되었는지가 놀랍게 보인다. 동아시아의 용수를 알수록, 한 사람의 이름을 두고 여러 종파가 다툰 까닭과, 대성인이 사람이 아니라 경을 기준으로 삼으신 까닭이 보인다. 그리고 대성인이 본 용수를 알수록, 불법이 「때」에 따라 어떻게 깊어져 왔는지가 보인다. 1부에서 본 용궁의 대답, 「경은 한량이 없어 다 볼 수 없다」는 말은 용수의 겸손이었다. 대성인은 그 한량없는 경의 바다에서 한 방울의 짠맛, 곧 법화경의 제목을 가리키셨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1. 2~3세기경—남천축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남전승 · 아르주나 나무 아래
  2. ——은신술과 궁중의 일 · 출가전승 · 『용수보살전』
  3. ——구십 일의 삼장 · 설산의 노비구전승
  4. ——용궁의 구십 일전승 · 대룡보살
  5. ——남천축 왕의 교화 · 붉은 깃발 일곱 해전승 · 보은초 297
  6. ——『중론』 · 『회쟁론』 등 저술학계
  7. ——사타바하나 왕에게 『보행왕정론』 · 『권계왕송』학계 · 의정의 기록
  8. ——제바가 제자가 됨전승 · 물그릇과 바늘(서역기)
  9. ——입멸전승 두 갈래(용수보살전 · 서역기)
  10. 40112월구마라집 장안 도착
  11. 402–405—『대지도론』 한역구마라집
  12. 409—『중론』 · 『십이문론』 한역구마라집
  13. 472—『부법장인연전』 한역길가야 · 담요
  14. 6세기—혜문의 일심삼관『대지도론』 · 『중론』
  15. 6세기—천태 지의의 삼대부용수를 고조로
  16. 646—현장 『대당서역기』「용맹」 · 인정왕 · 흑봉산
  17. 691—의정 『남해기귀내법전』『권계왕송』
  18. 8세기—불공 『보리심론』 한역귀속 논쟁
  19. 1259—「수호국가론」『대론』 · 『십주비바사론』의 권실
  20. 12734.25「관심본존초」「知つて之を言わざる仁」
  21. 12756월「찬시초」「七十家」 · 사구게의 판정
  22. 12767.21「보은초」붉은 깃발 · 「仏の御使」 · 「内証は同じ」
  23. 12805월「제경과 법화경의 난이의 일」난신난해를 읽은 세 사람
참고 문헌
전기

구마라집 역 『용수보살전』 T50 no.2047 · 길가야 · 담요 역 『부법장인연전』 권5 T50 no.2058 · 현장 『대당서역기』 권10 T51 no.2087 · 의정 『남해기귀내법전』 권4 T54 no.2125 · 법장 『화엄경전기』 권1 T51 no.2073 · 지반 『불조통기』 권6 T49 no.2035

용수의 논서

『중론』 청목 석 · 구마라집 역 T30 no.1564 / Mūlamadhyamakakārikā · 『십이문론』 T30 no.1568 · 『회쟁론』 T32 no.1631 / Vigrahavyāvartanī · 『육십송여리론』 T30 no.1575 · 『보행왕정론』 진제 역 T32 no.1656 / Ratnāvalī · 『용수보살권계왕송』 의정 역 T32 no.1674 · 『인연심론송』 T32 no.1654 · 『대지도론』 구마라집 역 T25 no.1509 · 『십주비바사론』 구마라집 역 T26 no.1521 · 『보리심론』 불공 역 T32 no.1665(귀속 논쟁)

경전 · 주석

『대승입능가경』 실차난타 역 T16 no.672 · 『마하마야경』 T12 no.383 · 『반야등론석』 T30 no.1566 · 월칭 『정명구론』(Prasannapadā)

어서

창가학회판 『日蓮大聖人御書全集』(일본어판) 쪽수. 본문에서 인용한 어서: 「관심본존초」 · 「개목초」 · 「찬시초」 · 「보은초」 · 「하산어소식」 · 「수호국가론」 · 「입정안국론」 · 「즉신성불초」 · 「제경과 법화경의 난이의 일」 · 「사조깅고전어반사(석호장군어서)」 · 「법화행자봉난사」 · 「사보살조립초」 ·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 · 「소야입도전답서」 · 「삼대비법초」 · 「법화취요초」 · 「중생심어서」 · 「현방법초」 · 「입정관초」 · 「당체의초」 · 「성우문답초」 · 「본존문답초」 · 「선무외삼장초」 · 「좌도어감기초」 · 「전중경수법문」 · 「성인어난사」 · 「여설수행초」 · 「현불미래기」

교학

창가교학연구실 어서 강의 · 어석 · 창가학회 교학부 『교학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