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박의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벼랑 위에서 바라보는 스님

니치렌 대성인

日蓮大聖人1222 — 1282 · 말법의 어본불

해(日)와 연꽃(蓮)을 이름으로 삼은 니치렌 대성인은 1222년 아와국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1253년 남묘호렌게쿄를 처음 부르며 입종을 선언하셨다. 그로부터 1282년 이케가미에서 입멸하시기까지 29년 동안 세 번의 국주간효와 네 번의 대법난, 두 번의 유배를 지나며, 말법의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는 법을 세우셨다.

창가학회는 대성인을 말법의 어본불로 우러르며, 그 생애를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온갖 박해를 이겨 낸 투쟁의 생애」로 배운다. 아래는 창가학회의 교학을 중심으로, 일련정종과 일련종에 전하는 이야기와 연대를 함께 대조해 엮은 생애다. 교단에 따라 연대나 해석이 다른 대목은 따로 밝혀 두었다.

세 번의 국주간효1260.7.16 「입정안국론」 — 호조 도키요리1271.9.12 다쓰노구치 직전 — 헤이노 사에몬노조1274.4.8 사도에서 돌아와 — 헤이노 사에몬노조
네 번의 대법난1260 마쓰바가야쓰 법난1261 이즈 유배1264 고마쓰바라 법난1271 다쓰노구치 법난 · 사도 유배

바닷가 마을의 아이

1222 — 1253 · 탄생에서 유학까지

대성인은 조큐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인 1222년(정응 원년) 2월 16일, 아와국 나가사군 도조향 가타우미, 지금의 지바현 가모가와시 고미나토 부근에서 태어나셨다. 대성인은 스스로 「센다라의 아들」, 「바닷가의 천한 자의 아들」이라 하셨는데,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서민의 집안이었다. 창가학회는 대성인이 권력자의 집안이 아니라 가장 낮은 민중 속에서 태어나셨다는 이 점을 중시한다. 일련종 쪽 전승은 어린 시절의 이름을 「젠니치마로」라 하고 아버지를 누키나 시게타다로 전하며, 탄생지에는 지금 일련종 탄생사가 서 있다.

12세 되던 해 가까운 세이초지(清澄寺)에 들어가 도젠보(道善房)를 스승으로 공부를 시작하셨다. 이때 허공장보살 앞에서 「일본 제일의 지자가 되게 해 주소서」라고 기원하셨다고 대성인 스스로 회상하신다. 사람들이 왜 괴로워하는가, 수많은 종파 가운데 어느 것이 부처의 참뜻인가 하는 물음이 소년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16세에 출가하여 제쇼보 렌초(是生房蓮長)라는 이름을 받으셨다. 그 뒤 가마쿠라를 시작으로 교토와 나라, 히에이산을 비롯한 여러 대사원을 돌며 십수 년에 걸쳐 일체경과 각 종의 교의를 두루 연구하셨다. 그 결론은 분명했다. 석존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법화경이 최고이며, 말법의 사람들을 구할 법은 법화경의 진수인 남묘호렌게쿄라는 것이었다.

연대 대조 — 창가학회 교학입문은 출가를 「16세 무렵(1238년경)」으로, 일련종 연표는 1233년 5월 12일 세이초지 입산, 1237년 출가 득도로 적는다. 출가 이름도 일련종은 「是聖房蓮長」으로 표기한다.

입종선언

1253년 4월 28일 · 32세

1253년(건장 5년) 4월 28일, 세이초지로 돌아온 대성인은 정오 무렵 여러 사람 앞에서 염불을 비롯한 제종의 교의를 파하고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처음으로 부르셨다. 이것이 입종선언이다. 이때부터 스스로 「니치렌」이라 이름하셨다. 창가학회는 이날을 대성인 불법이 세상에 처음 드러난 날로 기린다.

「니치렌」이라는 이름에 대해 대성인은 법화경 신력품의 「해와 달의 광명이 모든 어둠을 없애듯」, 종지용출품의 「연꽃이 물 속에 있는 것 같이」라는 구절을 들어, 해처럼 세상의 어둠을 비추고 연꽃처럼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삶을 뜻한다고 하셨다.

염불을 굳게 믿던 그 지방의 지두 도조 가게노부(東条景信)는 크게 노해 대성인을 해치려 했다. 스승 도젠보는 가게노부를 두려워해 대성인을 감싸지 못했지만, 옛 선배 조켄보와 기조보가 대성인을 몰래 세이초지 밖으로 피신시켰다. 이때 부모님이 대성인의 가르침에 귀의해 묘니치·묘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전한다.

가마쿠라의 홍교와 「입정안국론」

1253 — 1260

입종 후 대성인은 막부가 있는 가마쿠라의 나고에, 마쓰바가야쓰에 초암을 짓고 본격적인 홍교를 시작하셨다. 이 무렵 시모우사의 도키 조닌, 무사 시조 긴고(요리모토), 이케가미 형제 등이 차례로 문하가 되었다. 훗날 대성인의 법을 이을 닛코 상인도 1258년 무렵 이와모토 짓소지에서 대성인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천재지변이 잇따랐다. 1257년 8월 가마쿠라 일대를 덮친 쇼카의 대지진을 비롯해 가뭄과 폭풍, 기근과 역병이 이어져 길가에 시체가 넘쳐 났다. 대성인은 스루가의 이와모토 짓소지에 머물며 일체경을 다시 읽고, 이 재난의 근본 원인이 사람들이 정법을 버리고 그릇된 가르침에 귀의한 데 있다고 결론 내리셨다.

1260년(문응 원년) 7월 16일,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을 야도야 뉴도를 통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전 집권 호조 도키요리에게 제출하셨다. 이것이 첫 번째 국주간효다. 정법을 세워 나라를 편안케 하라는 이 간효에서 대성인은, 그릇된 가르침을 그대로 두면 경문에 설해진 재난 가운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계반역난(내란)과 타국침핍난(외국의 침략)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경고하셨다.

汝早く信仰の寸心を改めて速に実乗の一善に帰せよ

그대는 빨리 신앙의 작은 마음을 고쳐서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입정안국론」 · 어서 32쪽

법난의 시작 — 마쓰바가야쓰 · 이즈 · 고마쓰바라

1260 — 1264

막부는 간효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키요리의 뜻을 헤아린 염불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입정안국론」 제출 한 달여 뒤인 1260년 8월 27일 밤, 무리를 이룬 염불자들이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을 습격했다. 대성인은 간신히 난을 피해 한동안 도키 조닌이 있는 시모우사로 몸을 옮기셨다. 이것이 마쓰바가야쓰 법난이다.

이듬해 가마쿠라로 돌아와 다시 홍교에 나서자, 막부는 1261년 5월 12일 대성인을 체포해 이즈의 이토로 유배했다. 이즈 유배다. 해변에 내려진 대성인을 어부 후나모리 야사부로 부부가 몰래 보살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263년 2월, 대성인은 유배에서 풀려나 가마쿠라로 돌아오셨다.

1264년 가을, 어머니의 병을 듣고 고향 아와로 돌아가신 대성인은 어머니를 문병하셨다. 그해 11월 11일, 아마쓰의 문하 구도 요시타카의 집으로 향하던 길에 도조의 마쓰바라에서 도조 가게노부의 군세에 습격당하셨다. 제자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두 사람이 크게 다쳤으며, 대성인도 이마에 칼을 맞고 왼손이 부러졌다. 고마쓰바라 법난이다. 일련종 전승은 이때 순교한 제자를 교닌보, 목숨을 잃은 단나를 구도 요시타카라 전한다.

법화경 권지품은 말법에 법화경을 넓히는 자는 칼과 몽둥이로 박해받고 여러 번 쫓겨난다고 설한다. 대성인은 이 법난들을 겪으며 자신이 바로 그 경문을 몸으로 읽는 「법화경의 행자」임을 확신해 가셨다.

몽골의 국서와 십일통어서

1268 — 1271

1268년(문영 5년) 정월, 몽골에서 복속을 요구하는 국서가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입정안국론」이 경고한 타국침핍난이 현실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대성인은 그해 10월, 집권 호조 도키무네와 막부의 요인, 그리고 건장사·극락사 등 가마쿠라의 대사원 등 열한 곳에 편지를 보내 공개 대론을 요구하셨다. 이것을 「십일통어서」라 한다. 그러나 막부와 여러 종파는 이를 묵살했고, 오히려 대성인을 적대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1271년 여름, 큰 가뭄이 들자 막부는 진언율종의 고승 극락사 료칸에게 기우를 명했다. 대성인은 료칸이 일주일 안에 비를 내리면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제안하셨다. 료칸은 두 주에 걸쳐 기도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폭풍이 불었다. 체면을 잃은 료칸은 막부 요인과 그 부인들을 움직여 대성인을 모함했다.

다쓰노구치 법난과 발적현본

1271년 9월 12일 · 50세

1271년 9월 10일, 대성인은 막부에 불려 가 무사들을 지휘하는 실력자 헤이노 사에몬노조 요리쓰나(平左衛門尉頼綱)의 심문을 받으셨다. 대성인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국가를 위한 정법의 도리를 말씀하셨다.

이틀 뒤인 9월 12일, 요리쓰나는 무장한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을 덮쳤다. 요리쓰나의 부하 쇼보는 대성인이 품에 지니던 법화경 제5권을 빼앗아 그것으로 대성인의 얼굴을 때렸다. 대성인은 요리쓰나를 향해 「일본의 기둥을 쓰러뜨리는 것」이라고 외치셨다. 이것이 두 번째 국주간효다.

그날 밤 대성인은 가마쿠라 밖 다쓰노구치의 형장으로 끌려가셨다. 소식을 들은 시조 긴고는 맨발로 달려와 말고삐를 붙잡고 함께 죽겠다며 울며 따랐다. 대성인은 「이토록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웃으시게」라고 긴고를 달래셨다고 한다.

참수의 칼이 내려지려는 바로 그 순간, 에노시마 쪽에서 달처럼 빛나는 물체가 날아와 어둠을 가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칼을 든 무사는 눈이 어두워져 쓰러지고, 병사들은 두려워 흩어졌다. 대성인은 「빨리 목을 베라, 날이 밝으면 보기 흉할 것이다」라고 소리치셨지만, 누구 하나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처형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창가학회는 이 다쓰노구치 법난에서 대성인이 발적현본(発迹顕本)하셨다고 가르친다. 곧 상행보살의 재탄이라는 임시의 모습(적)을 벗고, 말법의 어본불, 구원원초 자수용보신여래라는 본래의 경애(본)를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뒤에 「개목초」에서 이렇게 적으셨다.

日蓮といゐし者は去年九月十二日子丑の時に頸はねられぬ、此れは魂魄・佐土の国にいたりて

니치렌이라 하던 자는 작년 9월 12일 자축 시에 목이 잘렸다. 이것은 혼백이 사도국에 이르러 (쓰는 것이다).

「개목초」 · 어서 223쪽

해석 대조 — 창가학회와 일련정종은 다쓰노구치를 「발적현본」, 곧 대성인이 말법의 본불로서의 본지를 드러낸 순간으로 본다. 일련종은 이 법난을 대성인이 법화경의 행자이자 상행보살로서의 자각을 깊게 한 결정적 체험으로 이해하며, 본불은 어디까지나 구원실성의 석가모니불로 본다.

사도 유배

1271 — 1274 · 50–53세

처형을 면한 대성인은 사가미의 에치, 사도의 수호대리 혼마 로쿠로자에몬의 저택에 한 달가량 머무신 뒤, 10월 10일 에치를 떠나 11월 1일 사도의 쓰카하라에 이르셨다. 그곳은 버려진 묘지 한가운데 있는 삼매당, 지붕은 새고 벽은 허물어진 작은 당이었다. 눈은 쌓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모자랐다. 가마쿠라에서는 문하에게도 박해가 미쳐, 많은 사람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다.

그러나 이 극한의 땅에서 대성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이 태어났다. 1272년(문영 9년) 정월 16일과 17일, 사도와 인근 여러 지방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승려들과 쓰카하라에서 대론을 벌여 모두를 논파하셨다. 이것이 쓰카하라 문답이다. 이 문답을 계기로 염불을 믿던 아부쓰보와 그 아내 센니치니가 대성인께 귀의해, 밤마다 몰래 음식을 날라 대성인을 받들었다.

같은 해 2월에는 「개목초」를 완성하셨다. 인본존 개현의 서라 불리는 이 글에서, 대성인은 자신이 말법의 일체중생에게 주사친의 삼덕을 갖춘 존재임을 밝히셨다. 바로 그 2월, 호조 일문 안에서 내란(이월 소동)이 일어나 「입정안국론」의 자계반역난 예언이 들어맞았다. 4월 무렵 대성인은 이치노사와의 이치노사와 뉴도 집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1273년(문영 10년) 4월 25일에는 「여래멸후 오오백세 시 관심본존초」를 쓰셔서 법본존 개현, 곧 말법의 사람이 받아 지녀야 할 본존을 밝히셨다. 사도 시대에 쓰신 이 두 글을 중심으로, 대성인의 불법은 사람과 법의 양면에서 그 골격을 드러냈다.

されば日蓮が法華経の智解は天台伝教には千万が一分も及ぶ事なけれども難を忍び慈悲のすぐれたる事は・をそれをも・いだきぬべし

그러므로 니치렌의 법화경 지해는 천태·전교에 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난을 참고 자비가 뛰어난 점은 두려움을 품을 만하다.

「개목초」 · 어서 202쪽

1274년 2월, 막부는 마침내 사면을 결정했다. 사면장은 3월 8일 사도에 닿았고, 대성인은 3월 13일 사도를 떠나 26일 가마쿠라로 돌아오셨다.

세 번째 국주간효, 그리고 미노부로

1274년 4월 — 5월

1274년 4월 8일, 대성인은 다시 헤이노 사에몬노조 요리쓰나와 대면하셨다. 요리쓰나는 전과 달리 공손하게 몽골이 언제 쳐들어오겠느냐고 물었고, 대성인은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시며 진언 등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몽골 조복을 기원해서는 안 된다고 간하셨다. 이것이 세 번째 국주간효다. 예언대로 그해 10월, 몽골의 대군이 규슈를 침공했다. 분에이의 역이다.

세 번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산림에 들어간다 — 대성인은 이 옛 성현의 도리를 따라 가마쿠라를 떠나기로 하셨다.

5월 12일 가마쿠라를 떠난 대성인은 5월 17일, 문하 하키리 사네나가가 지두로 있는 가이국 하키리향의 미노부산에 들어가셨다.

미노부 시대 — 저술과 제자 육성

1274 — 1282 · 53–61세

미노부의 초암에서 대성인은 입멸 직전까지 약 9년을 보내셨다. 겉으로는 은둔이었지만, 실제로는 말법 만년을 향한 준비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찬시초」(1275년), 스승 도젠보의 부고를 듣고 쓰신 「보은초」(1276년) 등 중요한 어서를 잇달아 저술하며 삼대비법, 곧 본문의 본존·본문의 계단·본문의 제목을 밝히셨다.

또 법화경을 강의하시며 제자들을 길러 내셨다. 그 강의를 닛코 상인이 받아 적은 것이 「어의구전」이라 전한다. 대성인은 멀리 떨어진 문하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 한 사람 한 사람을 격려하셨다. 병든 이, 남편을 잃은 이, 주군의 압박을 받는 이, 가난한 이에게 보낸 이 편지들이 지금의 어서 대부분을 이룬다.

이 무렵 닛코 상인은 스루가국 후지 방면에서 활발히 홍교해, 아쓰와라 지방의 농민들 사이에 신앙이 넓게 퍼졌다. 이것이 주변 천태종 사원 다키센지의 반발을 불러, 신도들에 대한 압박이 차츰 거세졌다.

아쓰와라 법난과 출세의 본회

1279 · 58세

1279년(홍안 2년) 9월 21일, 아쓰와라의 농민 신도 스무 명이 무고로 체포되어 가마쿠라로 끌려갔다. 헤이노 사에몬노조 요리쓰나는 자기 저택에서 그들을 심문하며 염불을 부르면 풀어 주겠다고 위협하고 고문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며 끝까지 버텼다.

대성인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 10월 1일 「성인어난사」를 쓰셨다. 그 가운데 「부처는 40여 년, 천태대사는 30여 년, 전교대사는 20여 년에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다. 나는 27년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입종 27년째에 대성인이 세상에 나오신 근본 목적(출세의 본회)을 이루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仏は四十余年・天台大師は三十余年・伝教大師は二十余年に出世の本懐を遂げ給う、其中の大難申す計りなし先先に申すがごとし、余は二十七年なり

부처는 40여 년, 천태대사는 30여 년, 전교대사는 20여 년에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으며, 그 사이의 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이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나는 27년이다.

「성인어난사」 · 어서 1189쪽

10월 15일, 농민 신도 가운데 진시로·야고로·야로쿠로의 세 사람이 참수되고, 나머지 열일곱 명은 거주지에서 추방되었다. 이름 없는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관철한 이 일은, 대성인의 불법이 출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굳건히 뿌리내렸음을 보여 주었다.

창가학회는 아쓰와라 법난에서 드러난 민중의 불석신명의 신앙, 곧 민중이 스스로 법을 지켜 내는 「민중 불법」의 확립에서 출세의 본회의 뜻을 읽는다.

1281년(홍안 4년), 몽골은 다시 대군을 보내 규슈를 공격했다. 고안의 역이다. 이로써 「입정안국론」이 경고한 두 난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

이케가미에서의 입멸

1282 · 61세

미노부에서의 오랜 초암 생활로 대성인의 몸은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1282년 9월 8일, 대성인은 히타치의 온천에서 요양한다는 명목으로 9년 가까이 머무신 미노부를 떠나셨다. 도중 무사시국 이케가미에 있는 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집에 머무셨고, 9월 25일에는 병상에서 문하들에게 「입정안국론」을 강의하셨다. 생애 처음의 간효서를 마지막 강의로 삼으신 것이다.

10월 8일, 대성인은 닛쇼·닛로·닛코·닛코·닛초·닛지의 여섯 사람을 본제자로 정하셨다. 이들을 「본제자 육인」, 일련종에서는 「육노승」이라 부른다. 그리고 10월 13일 아침, 문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1세로 입멸하셨다. 전승에 따르면 그때 가을인데도 이케가미의 벚꽃이 피었다고 한다.

표기 주의 — 본제자 여섯 사람 가운데 닛코(日興)와 닛코(日向)는 한국어 표기가 같아지므로, 여기서는 각각 日興·日向으로 구별해 읽어야 한다. 순서는 日昭·日朗·日興·日向·日頂·日持.

그 뒤 — 닛코 상인의 계승

1282 — 1333

대성인 입멸 후 여섯 본제자 가운데 대성인의 가르침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지키려 한 사람이 닛코 상인이었다. 다른 제자들이 권력의 압박 속에서 「천태 사문」을 자칭하거나 신사 참배를 용인하는 등 스승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가운데, 닛코 상인은 대성인을 말법의 어본불로 받들고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근본으로 삼는 정통을 지키셨다.

미노부의 지두 하키리 사네나가가 신사 참배와 불상 조립 등 방법을 거듭하자, 닛코 상인은 1289년 봄 미노부를 떠나셨다. 이것이 미노부 이산이다. 그 뒤 스루가의 후지 지방으로 옮겨 제자 육성에 힘쓰셨다. 일련정종은 이듬해 1290년 대석사 창건을 이 흐름의 중심에 둔다.

창가학회는 닛코 상인이 스승의 가르침을 한 치도 어기지 않고 지킨 「사제불이」의 모범을 오늘의 신앙의 규범으로 삼는다. 대성인의 생애는 박해 속에서도 민중을 위해 싸운 스승의 삶이었고, 그 삶을 그대로 이어 가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이다.

세 교단은 생애를 어떻게 읽는가

비교

세 교단 모두 대성인의 생애와 연대는 대체로 같게 전한다. 차이는 그 생애의 의미, 특히 대성인이 누구이며 출세의 본회가 무엇이었는가를 읽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항목창가학회일련정종일련종
대성인의 위치말법의 어본불. 구원원초 자수용보신여래말법의 어본불(인본존). 법의 근본은 대어본존과 혈맥법화경의 행자, 상행보살의 재탄. 본불은 구원실성의 석존
다쓰노구치발적현본 — 본불의 경애를 드러냄발적현본법화경 행자로서의 자각이 깊어진 체험
출세의 본회아쓰와라 법난에서 드러난 민중의 불석신명 신앙, 민중 불법의 확립1279년 10월 12일 본문 계단의 대어본존 건립특정 본존 건립으로 보지 않음
후계닛코 상인의 정통 계승, 사제불이닛코 상인 이래의 유일한 혈맥상승여섯 노승을 대등하게 보며, 미노부산 구원사를 조산으로 함

이 비교는 각 교단의 공식 누리집에 실린 설명을 요약한 것이다. 창가학회의 관점은 창가학회 교학입문의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 일련정종의 관점은 일련정종 종무원의 「니치렌 대성인」, 일련종의 관점은 일련종 포털의 「니치렌 성인의 생애」를 따랐다.

연표

1222 — 1289
  1. 12222.16탄생아와국 도조향 가타우미(고미나토)
  2. 1233—세이초지 입산도젠보를 스승으로 · 12세
  3. 1237–38—출가제쇼보 렌초 · 16세
  4. 1238–53—유학가마쿠라·교토·나라·히에이산 등
  5. 12534.28입종선언세이초지 · 「니치렌」이라 이름함 · 32세
  6. 12578.23쇼카의 대지진가마쿠라 일대
  7. 1258—닛코 상인 입문이와모토 짓소지
  8. 12607.16「입정안국론」 제출제1차 국주간효 · 호조 도키요리
  9. 12608.27마쓰바가야쓰 법난염불자들의 초암 습격
  10. 12615.12이즈 유배이토 · 후나모리 야사부로 부부
  11. 12632.22이즈 유배 사면
  12. 126411.11고마쓰바라 법난도조 가게노부의 습격 · 이마의 상처
  13. 1268윤1월몽골 국서 도착
  14. 126810.11십일통어서막부 요인·대사원 11곳
  15. 12716–7월료칸의 기우 실패극락사 료칸
  16. 12719.10헤이노 사에몬노조의 심문
  17. 12719.12다쓰노구치 법난제2차 국주간효 · 발적현본 · 50세
  18. 127111.1사도 쓰카하라 도착삼매당
  19. 12721.16–17쓰카하라 문답아부쓰보·센니치니 귀의
  20. 12722월「개목초」 · 이월 소동자계반역난
  21. 12724월경이치노사와로 이거
  22. 12734.25「관심본존초」
  23. 12742.14사도 유배 사면
  24. 12743.26가마쿠라 귀환
  25. 12744.8제3차 국주간효헤이노 사에몬노조와 대면
  26. 12745.17미노부 입산하키리 사네나가의 영지
  27. 127410월분에이의 역몽골 1차 침공
  28. 1275—「찬시초」
  29. 1276—「보은초」스승 도젠보의 부고
  30. 12781.1「어의구전」닛코 상인 필록으로 전함
  31. 12799.21아쓰와라 농민 신도 체포20명
  32. 127910.1「성인어난사」출세의 본회 · 58세
  33. 127910.15세 농민 순교진시로·야고로·야로쿠로
  34. 12815–7월고안의 역몽골 2차 침공
  35. 12829.8미노부 출발
  36. 12829.25「입정안국론」 강의이케가미
  37. 128210.8본제자 육인 선정日昭·日朗·日興·日向·日頂·日持
  38. 128210.13입멸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집 · 61세
  39. 1289봄닛코 상인 미노부 이산

연대는 창가학회 교학입문을 기준으로 하고, 창가학회 자료에 없는 월일은 일련종·일련정종의 공식 연표로 보충했다. 1278년 「어의구전」의 날짜는 문헌 말미의 기록을 따른 전승이다.

그림으로 보는 생애

고조 어일대약도

우타가와 구니요시 1835–36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대영박물관 (퍼블릭 도메인)
구니요시, 료젠가사키의 기우
료젠가사키의 기우1271 · 가마쿠라
구니요시, 다쓰노구치 법난
다쓰노구치 법난1271 · 9월 12일
구니요시, 사도로 건너는 바다
사도로 건너는 바다1271 · 전승
구니요시, 고무로산
고무로산1274 · 전승

참고 — 창가학회 「교학입문 ·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SOKAnet) · 일련정종 종무원 「니치렌 대성인」 · 일련종 포털 「니치렌 성인의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