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아침, 오른쪽 위로 눈 덮인 후지산이 첫 햇빛에 금빛으로 솟고, 가운데 들판에 판자 울타리와 문을 두른 무사 집과 초가집들, 물 고인 작은 논과 매화 핀 나무, 지붕 하나에서 오르는 연기, 앞쪽 돌 사이로 흐르는 맑은 개울과 마른 억새를 그린 금박 수묵화

난조도키미쓰

南條時光1259–1332 · 아쓰와라의 동지를 숨긴 젊은 지도, 오이시가하라를 내놓은 사람

1274년 여름, 미노부 산속에 막 초암을 지으신 대성인께 스루가에서 짐이 하나 올라왔다. 돈 열 꿰미와 민물 김 두 첩, 생강 스무 묶음. 보낸 사람은 열여섯 살의 소년 지도였다. 열 해 전 가마쿠라에서 한 번 뵈었을 뿐인 아버지의 스승을, 소년은 잊지 않고 있었다. 대성인은 곧 붓을 드셨다. 「돌아가신 우에노 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하고 한탄하던 차에, 그 유품으로 그대를 젊은 몸으로 남겨 두셨는가. 모습도 다르지 않은데 마음까지 닮으셨다.」 그로부터 여덟 해 동안, 대성인은 이 소년과 그 집안에 예순 통 가까운 편지를 보내셨다. 소년의 이름은 난조 시치로지로 도키미쓰, 사람들은 그를 「우에노 님」이라 불렀다.

난조도키미쓰는 대성인의 재가 문하 가운데 가장 어린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가마쿠라의 시조깅고, 시모우사의 도키조닌이 대성인과 거의 같은 세대였던 데 비해, 그는 대성인보다 서른일곱 살 아래였다.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신 해에 그는 열여섯이었고, 대성인이 입멸하신 해에 스물넷이었다. 그의 신앙의 시절은 거의 그대로 대성인의 미노부 시절과 겹친다. 그리고 그 아홉 해 동안 그는 스루가에서 미노부로 끊임없이 짐을 올려 보냈다. 토란 한 짐, 소금 한 짐, 흰쌀 한 짐, 보리, 김, 생강, 곶감, 술. 강의는 어서에 남은 그의 공양만 마흔세 번이라고 센다. 문하 가운데 가장 많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공양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열여섯 살 무렵에 형을, 스물두 살에 막내아우를 잃었다. 스물한 살에는 이웃 마을 아쓰와라의 농민 신도 스무 명이 붙잡혀 가마쿠라로 끌려가고 세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도라는 자리를 걸고 쫓기는 신주(神主)와 그 처자를 제 집에 숨겼고, 그 대가로 작은 마을에 감당할 수 없는 부역과 세금을 떠안아 「탈 말도 없고 처자는 입을 옷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대성인은 「우에노 현인 님」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셨다. 그리고 대성인이 입멸하신 뒤, 그는 미노부를 떠나신 닛코상인을 제 땅에 맞아 오이시가하라를 내놓았다. 이 페이지는 그 생애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따라간다.

우에노 현인1279년 아쓰와라 법난 때 쫓기는 동지들을 숨기고 지킨 스물한 살의 지도「우에노전답서(1555)」(1279.4) · 「우에노전답서(1560)」(1279.11 · 「上野賢人殿御返事」) · 「우에노전답서(1564)」(1280.7)
대성인의 한 줄「이 우에노의 시치로지로는 말대의 범부로 무사의 집에 태어나 악인이라 해야 할 것이나 마음은 선인이다」 — 「법화증명초(사활초)」, 1586쪽この上野の七郎次郎は末代の凡夫・武士の家に生れて悪人とは申すべけれども心は善人なり
  1. 이즈 난조본관 · 영지
  2. 1259 · 1332스루가 우에노집 · 출생 · 별세 · 다카쓰치 묘
  3. 1264 무렵 · 1279사가미 가마쿠라대성인과 만남 · 문초
  4. 스루가 마쓰노어머니의 친정
  5. 스루가 가와이닛코상인의 외가
  6. 1274–1282가이 미노부대성인 · 참예
  7. 1279스루가 아쓰와라류센사 · 법난
  8. 1282.10무사시 이케가미입멸 · 장례
  9. 1290우에노 오이시가하라대석사
  10. 1298스루가 오모스이시카와 집안 · 오모스 어영당
  11. 사가미 마이오카영지
  12. 단바 오구라영지 · 교토 서쪽
  13. 스루가 가모하라 세키시마영지
위치는 약도 · 옅은 점은 영지(마이오카 · 단바 오구라 · 가모하라 세키시마) · 점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1 · 도키미쓰의 땅
1부 후지 기슭의 무사 집안

시대 — 집권 정치의 안정에서 동요로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 가마쿠라 막부 중기에서 말기로

난조도키미쓰가 태어난 1259년(쇼겐 원년)은 가마쿠라 막부가 가장 안정되어 보이던 때였다. 집권 호조 도키요리는 3년 전 집권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했으나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고, 막부의 정치는 호조 일문의 집권이 이끄는 체제로 굳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의 일본은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2년 전의 쇼카 대지진 뒤로 큰비와 가뭄, 굶주림과 돌림병이 해마다 이어졌다. 바로 그 재난의 원인을 묻기 위해 대성인이 스루가 이와모토의 짓소사(實相寺) 경장에서 일체경을 읽고 계셨던 것이 이 무렵이고, 그 결론이 이듬해 1260년의 「입정안국론」이었다. 도키미쓰는 그 「입정안국론」이 쓰이기 한 해 전, 짓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후지 기슭에서 태어났다.

강의는 도키미쓰의 일생이 걸친 시대를 이렇게 요약한다. 호조 씨 집권 정치의 안정기에서 시작해, 권력이 집권 집안(득종가)의 가신인 내관령(內管領)에게로 옮겨 가고, 막부를 떠받치던 어가인(御家人) 제도가 무너지고, 몽골 습래 뒤의 경제 파탄이 드러나는 격동의 시대였다. 그는 1274년과 1281년 두 번의 몽골 습래를 겪었고, 1293년 내관령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가 반역의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으며, 1332년 막부가 무너지기 꼭 한 해 전에 일흔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속한 계층도 보아 두어야 한다. 그는 막부의 어가인이었고, 막부가 임명한 작은 마을의 지도였다. 지도는 영지 안의 관리권 · 경찰권 · 징세권을 가졌고, 대개 임지에 살면서 땅을 개간하는 개발 영주이기도 했다. 동국의 어가인은 한두 해에 한 번, 한두 달씩 가마쿠라에 나가 장군의 어소와 막부의 문을 지키는 「가마쿠라 오반야쿠(大番役)」를 맡았다. 평소에는 영지에 살다가 그때만 가마쿠라에 머무는 것이다. 강의는 도키미쓰의 아버지가 대성인을 처음 만난 것도 이 근무 때였으리라고 본다(5절). 그러나 몽골 습래 뒤로 어가인의 부담은 크게 늘었다. 규슈 해안의 경비(이국경고번역)에 동국의 무사들이 끌려갔고, 공사(公事)라 불린 부역과 공납이 작은 영주들을 짓눌렀다. 도키미쓰의 편지들에는 그 무게가 그대로 남아 있다(4부 24절).

종교의 풍경은 시조깅고 편에서 본 가마쿠라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도키미쓰의 무대는 가마쿠라가 아니라 후지 기슭이었다. 스루가 후지군에는 천태종의 큰 절들이 있었다. 이와모토의 짓소사, 가모하라의 시주쿠원(四十九院), 그리고 아쓰와라의 류센사(瀧泉寺)다. 이 절들의 젊은 승려들과 그 주변의 농민들 사이에서 닛코상인의 홍교가 퍼져 나가고, 그것이 1279년의 아쓰와라 법난으로 이어진다. 도키미쓰는 그 지역의 한가운데에 살던 가장 젊은 무사 단나였다.

막부와 세상기근 · 역병1259「입정안국론」1260몽골 국서1268분에이의 역1274.10고안의 역1281도키무네 사망1284헤이노사에몬노조 주살1293막부 멸망1333
대성인과 닛코상인가마쿠라1264 무렵다쓰노구치1271미노부 입산1274.5닛코상인 후지 홍교1275아쓰와라 법난1279입멸1282.10닛코상인 미노부 이산1289대석사1290오모스1298닛코상인 입멸1333.2
난조도키미쓰출생1259아버지 사망1265.3.8첫 공양1274.7닛코상인의 성묘1275.1어본존1275.10아쓰와라 외호1279「우에노 현인」1279.11시치로고로 사망1280.9.5큰 병1282.2대석사 개기 단나1290별세1332.5.1
옅은 띠 — 도키미쓰의 생애 · 세로 점선 — 1279 아쓰와라 법난 · 1290 대석사 · 1절
도표 2 · 세 줄 연표 1259–1333 — 막부와 세상 · 대성인과 닛코상인 · 난조도키미쓰

사료의 층

13세기 ~ 근세 · 어서 · 닛코상인의 기록 · 양도장 · 사찰 전승

난조도키미쓰의 생애를 전하는 자료는 시조깅고의 경우보다 넓다. 대성인의 편지가 많은 것은 같지만, 그 밖에 그 자신이 쓴 문서와, 그를 가까이에서 본 닛코상인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① 대성인의 어서 — 강의는 난조도키미쓰와 그 일족에게 보낸 어서를 쉰아홉 편으로 센다. 도키조닌 부부 앞의 마흔네 편, 시조깅고 부부 앞의 서른세 편을 크게 웃돈다. 강의는 그 까닭을 미노부와 우에노가 가까웠던 데서도 찾지만, 「무엇보다 도키미쓰의 순진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쓴다. 날짜가 분명한 편지는 1274년 7월부터 1282년 3월까지에 몰려 있다. 아버지 앞의 한 편(1264)이 가장 이르다.

② 닛코상인의 기록 — 닛코상인이 제자와 단나에게 어본존을 나누어 준 기록(「제자분 본존 목록」, 강의는 「제자분첩」이라고도 부른다)에 도키미쓰와 그 일족이 여러 번 나온다. 그의 정식 이름 「난조 효에시치로의 아들 시치로지로 다이라노 도키미쓰」가 여기서 확인된다. 대성인의 장례 기록인 「종조어천화기록(宗祖御遷化記錄)」에는 그가 맡은 소임이 적혀 있다(5부 30절).

③ 도키미쓰 자신의 문서 — 1309년(엔쿄 2년) 2월 23일, 그가 아들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준 양도장(讓狀)이 자필로 전한다. 여기에 「사에몬노조 도키미쓰」라는 자서(自署)와 영지의 목록이 있다. 1321년과 1331년의 양도장도 있다. 그의 만년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다.

④ 막부의 기록 — 막부의 공식 기록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난조 성을 가진 무사가 열네 명쯤 나온다. 이 가운데 도키미쓰의 집안과 어떤 관계인지 확인되는 사람은 없다. 강의는 「난조 일족으로서 어떤 연결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고만 쓴다.

⑤ 사찰 전승과 후대의 전기 — 그가 아내를 위해 제 집을 절로 바꾸었다는 묘렌사(妙蓮寺)의 과거장, 대성인의 유골이 그의 집에 하룻밤 머물렀다는 『겐소 화도기(元祖化導記)』(1478), 그리고 근대의 홋리 니치코의 『난조도키미쓰 전전(南條時光全傳)』이 있다. 강의는 이것들을 「전한다」 · 「설」로 구분해 쓴다.

① 어서
본관과 성
간접「なんでうの七郎殿」
아버지
있음
어머니와 형제
있음
출생
확인 중
첫 참예
있음
닛코상인과의 인연
있음
어본존
간접「우에노전어서(1513)」의 마룻대 글만
아쓰와라 외호
있음
공사의 부담
있음
시치로고로
있음
병
있음
장례
확인 중
대석사
확인 중
만년
확인 중
별세
확인 중
자손
확인 중
② 닛코상인의 기록
본관과 성
있음
아버지
확인 중
어머니와 형제
확인 중
출생
확인 중
첫 참예
확인 중
닛코상인과의 인연
있음
어본존
있음
아쓰와라 외호
간접
공사의 부담
확인 중
시치로고로
확인 중
병
확인 중
장례
있음
대석사
있음
만년
확인 중
별세
확인 중
자손
확인 중
③ 도키미쓰의 양도장
본관과 성
있음
아버지
확인 중
어머니와 형제
확인 중
출생
확인 중
첫 참예
확인 중
닛코상인과의 인연
확인 중
어본존
확인 중
아쓰와라 외호
확인 중
공사의 부담
확인 중
시치로고로
확인 중
병
확인 중
장례
확인 중
대석사
확인 중
만년
있음
별세
확인 중
자손
있음
④ 『아즈마카가미』
본관과 성
간접난조 · 호조의 땅 이름
아버지
확인 중
어머니와 형제
확인 중
출생
확인 중
첫 참예
확인 중
닛코상인과의 인연
확인 중
어본존
확인 중
아쓰와라 외호
확인 중
공사의 부담
확인 중
시치로고로
확인 중
병
확인 중
장례
확인 중
대석사
확인 중
만년
확인 중
별세
확인 중
자손
확인 중
⑤ 사찰 전승 · 후대 전기
본관과 성
확인 중
아버지
확인 중
어머니와 형제
있음
출생
있음
첫 참예
확인 중
닛코상인과의 인연
확인 중
어본존
확인 중
아쓰와라 외호
확인 중
공사의 부담
확인 중
시치로고로
확인 중
병
확인 중
장례
있음유골의 하룻밤
대석사
있음
만년
있음
별세
있음
자손
있음
있음 간접 확인 중연대의 갈림은 2절 연구 노트 · 6절 연대 대조
도표 3 · 사료의 층

연구 노트 — 이 페이지는 1274년 7월부터 1282년 3월까지를 어서의 날짜로 세운다. 날짜가 「○월 ○일」만 있고 연도가 없는 편지가 많아, 강의와 화광신문 목록의 연대가 한두 해씩 다른 곳이 있다(예: 「우에노전답서(1511)」는 강의에서 1275년, 다른 설로 1276 · 1277 · 1279년). 이 페이지는 창가교학연구실 강의의 연대를 따르고, 갈리는 곳은 「연대 대조」와 부록 C-4에 적었다. 대성인 입멸 뒤의 생애는 거의 강의(와 그 바탕인 홋리 니치코의 연구)에 기댄다.

이름과 본관 — 난조 · 시치로지로 · 다이라 · 사에몬노조

이름과 관명

닛코상인은 그를 「난조 효에시치로의 아들 시치로지로 다이라노 도키미쓰(南條兵衛七郞子息七郞次郞平時光)」라고 적었다(사료, 강의 인용). 하나씩 풀면 그의 신분이 보인다.

난조(南條) — 성이다. 당시의 무사는 사는 땅의 이름을 성으로 썼다. 호조(北條) 집안이 이즈의 호조를 본거지로 삼아 호조 씨라 부르고, 같은 호조 일족이라도 사는 곳에 따라 나고에 씨 · 가네자와 씨 · 에마 씨라 부른 것과 같다. 난조는 이즈국 다가타군의 땅 이름이다. 가노강을 따라 1킬로미터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호조였다.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내 마사코가 태어난 곳, 대대로 집권을 낸 호조 씨의 본령이다. 『아즈마카가미』의 1189년(분지 5년) 기사는 「이른바 난조 · 호조 · 가미조 · 나카조가 저마다 경계를 나란히 한다」고 적는다(사료, 강의 인용). 도키미쓰가 1309년 아들에게 준 양도장에 「이즈국 난조의 남쪽 다케마사묘(武正名)」가 들어 있어, 그의 집안이 이즈 난조에 뿌리를 둔 것은 분명하다.

늦가을 저물녘, 벼를 거둔 논과 갈대 둑 사이로 넓고 얕은 강이 굽이 흐르고, 강을 따라 북쪽과 남쪽에 초가 마을 두 곳이 떨어져 있으며, 낮은 산줄기 너머 멀리 구름 위로 눈 덮인 후지산이 희미하게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1 · 이즈 난조의 가노강

다이라(平) — 씨(氏)다. 닛코상인의 기록에 「다이라노 도키미쓰」라 있으니 그는 헤이 씨(平氏)의 흐름이다. 호조 씨도 간무 헤이 씨이므로, 강의는 난조 집안이 호조 씨의 동족이나 분가가 아니었을까 짐작하면서도 「확실하지 않다」고 적는다.

시치로지로(七郞次郞) — 통칭이다. 아버지가 「효에 시치로(兵衛七郞)」, 곧 효에부(兵衛府)의 관을 가진 일곱째 아들이었고, 그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다. 형은 「시치로타로」, 아우들은 「시치로사부로」 · 「시치로시로」 · 「시치로고로」였다(6절). 대성인은 그를 「난조 시치로지로 님」이라고도 부르셨다.

사에몬노조(左衛門尉) — 뒤에 받은 관명이다. 1309년의 양도장에 「사에몬노조 도키미쓰」라는 자서가 있다. 시조깅고와 같은 좌위문부의 3등관이지만, 이 시대에는 실제 직무가 따르지 않는 이름뿐인 자리였다. 무사가 조정에 직접 청한 것이 아니라 막부가 어가인들의 몫을 모아 상주해 받는 것이었다.

도키미쓰(時光) — 실명이다.

우에노전(上野殿) — 대성인이 가장 많이 쓰신 호칭이다. 그가 지도로 있던 「우에노 마을」에서 왔다. 대성인은 그 아버지를 「고 우에노 님(故上野殿)」 · 「고 난조 님(故南條殿)」이라 부르셨고, 그를 「우에노 님」 · 「난조 님」이라 부르셨다. 어머니는 「우에노 니고젠(上野尼御前)」이다. 그리고 1279년 11월, 아쓰와라 법난 직후의 편지에 한 번, 대성인은 받는 사람을 「우에노 현인 님(上野賢人殿)」이라 적으셨다(4부 22절).

다이교(大行) — 만년에 출가 입도하고 받은 법명이다. 1316년의 문서에 「입도 다이교」라 적혀 있다고 강의는 전한다.

  1. 南條난조성 · 이즈국 다가타군 난조 · 호조의 남쪽
  2. 七郞次郞시치로지로통칭 · 「효에 시치로」의 둘째 아들
  3. 平다이라씨 · 헤이 씨의 흐름, 닛코상인의 기록
  4. 時光도키미쓰실명
  5. 左衛門尉사에몬노조뒤의 관명 · 1309 양도장 자서
어서 속 호칭
  • 上野殿
  • 南条殿
  • 南条七郎次郎殿
  • 上野賢人殿
  • 時光(자칭, 1539)
  • 「上野の七郎次郎」(1587)
만년의 법명大行다이교(1316 문서)
도표 4 · 이름 풀이

우에노 마을 — 화산재 땅의 작은 영지

스루가국 후지군 가미카타노쇼 우에노고

아버지 난조시치로가 언제 지도로 임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스루가국 후지군 가미카타노쇼 우에노고(上方庄上野鄕)의 지도가 되어 이즈 난조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고, 시모조(下條)에 집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가미조 · 시모조와 쇼진강 일대, 묘렌사가 서 있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동서남북으로 3킬로미터쯤 되는 땅이다.

산속 오두막 툇마루의 널판 위에 쏟아진 짚 꾸러미 속 마른 토란 더미, 그 곁에 굵은 소금이 담긴 짚 자루와 흘린 소금 알갱이, 우엉 다발과 흰 무 두 개, 끈으로 묶은 접은 편지 한 통, 툇마루 너머로 단풍 든 산과 안개 낀 골짜기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4 · 토란 한 짐

강의는 이 땅의 형편을 이렇게 쓴다. 당시 벼농사의 한계선에 걸친 곳이라, 남쪽 낮은 땅에는 논이 있었으나 북쪽은 밭이었고, 결코 기름진 땅이라 할 수 없었다. 「우에노전답서(1511)」 강의는 후지의 화산재 땅이라 쌀농사에 맞는 땅이 적었으리라고 덧붙인다. 그래서 그의 공양에는 쌀보다 토란이 많았다. 「토란 대가리 한 짐」 · 「집의 토란 한 짐」 · 「씻은 토란 한 섬」. 대성인은 미노부의 돌밭에서 그 토란을 받으시며 「스루가의 토란 같은 돌은 하나도 없다」고 웃으셨다(3부 18절).

강의는 도키미쓰를 「배하 스무 호쯤의 우두머리」였으리라고 본다. 작은 마을의 지도였다. 그러나 남은 양도장으로 보면 그의 영지는 네 나라 다섯 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우에노와 마이오카, 단바의 땅은 둘째 아들 도키타다에게, 이즈 난조의 땅은 셋째 아들에게 넘어갔다. 강의는 이 작은 영지의 주인이 대성인께 공양을 이어 가고 오이시가하라를 내놓은 일을 두고 「오로지 도키미쓰의 순진한 신앙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쓴다.

지도: 스루가 우에노, 사가미 마이오카, 이즈 난조 다케마사묘, 단바 오구라 모리토시묘, 스루가 가모하라 세키시마 — 네 나라 다섯 곳의 영지(위치는 약도).스루가 우에노고사가미 마이오카고이즈 다케마사묘단바 모리토시묘스루가 세키시마
땅양도받은 사람날짜사료
스루가국가미카타노쇼 우에노고도키타다1309.2.23
사가미국야마노우치노쇼 마이오카고도키타다1309.2.23
이즈국난조의 남쪽 다케마사묘사에몬사부로1309.2.23
단바국오구라노쇼 모리토시묘도키타다1321.7.25
스루가국가모하라노쇼 세키시마오니쓰루 고젠1331.11.18

우에노동서남북 약 3km · 벼농사의 한계선 · 배하 20호쯤(강의 추정)전승

영지 목록은 양도장(사료, 강의 인용) · 위치는 약도 · 4절
도표 5 · 네 나라 다섯 곳의 영지

아버지 난조시치로 — 「일본 제일의 법화경 행자의 제자라고 이름을 대라」

? — 1265년 3월 8일 · 가마쿠라와 우에노

가마쿠라의 만남

아버지 난조 효에시치로(난조시치로)의 출신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시치로」라는 이름으로 보아 일곱째 아들이었을 것이다. 그가 대성인을 만난 것은 가마쿠라에서였다고 강의는 본다. 동국의 어가인은 한두 해에 한 번 가마쿠라에 나가 오반야쿠를 섰다(1절). 그 근무 때 대성인을 만나 교화를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시기는 대성인이 이즈 유배에서 사면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1263년(고초 3년) 2월부터 고향 아와로 떠나신 1264년 가을 사이로 추정된다. 1260년에서 1261년 사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본래 염불의 신자였다. 집안사람들도 모두 염불을 믿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처음부터 흔들림 속에 있었다. 1264년 가을, 그는 병이 들었다. 아와에 계시던 대성인께 그 소식을 알렸고, 대성인은 그해 12월 13일 긴 편지를 쓰셨다. 「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위로서)」다.

御所労の由承り候はまことにてや候らん、世間の定なき事は病なき人も留りがたき事に候へば・まして病あらん人は申すにおよばず・但心あらん人は 後世をこそ思いさだむべきにて候へ

병환이시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입니까. 세상의 덧없음은 병 없는 사람도 머물기 어려운 것이니, 하물며 병이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마음 있는 사람은 후세를 생각하여 정해 두어야 합니다.

「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위로서)」, 1493쪽

다섯 가지 도리

이 편지에서 대성인은 병든 무사에게 왜 법화경이어야 하는가를 다섯 겹으로 밝히셨다. 가르침(教) · 근기(機) · 때(時) · 나라(國) · 펴는 순서(序)다. 창가학회는 이것을 「종교의 오강(五綱)」이라 부른다. 편지의 각 단락은 「是一」부터 「是五」까지 번호로 끝난다. 첫째, 석존은 우리에게 주인 · 스승 · 어버이의 세 덕을 갖춘 단 한 분의 부처이고, 그 부처가 사십여 년의 가르침을 「방편」이라 하시고 법화경을 진실이라 정하셨으니, 법화경을 쓰지 않는 것은 어버이의 말을 거스르는 불효다. 둘째, 지금 사람들은 근기가 둔하고 죄가 깊으며, 무엇보다 법화경의 적을 꾸짖지 않는다. 셋째, 지금은 말법의 처음이라 염불 같은 작은 가르침은 「겨울에 논을 가는 것」처럼 때가 맞지 않는다. 넷째, 일본은 법화경과 인연 있는 나라다. 다섯째, 이 나라에는 이미 천태 · 진언이 퍼져 모두 법화경의 근기가 되었는데, 법연이 나와 구슬 대신 돌을 쥐게 했다.

그리고 대성인은 병든 무사의 마음을 정면으로 짚으셨다.

但とのはこのぎをきこしめして念仏をすて法華経にならせ給いてはべりしが、定めてかへりて念仏者にぞならせ給いてはべるらん、法華経をすてて念仏者とならせ給はんは峯の石の谷へころび・空の雨の地におつると・おぼせ大阿鼻地獄疑なし

다만 그대는 이 뜻을 들으시고 염불을 버리고 법화경으로 오셨는데, 아마 도로 염불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법화경을 버리고 염불자가 되신다면, 산봉우리의 돌이 골짜기로 굴러떨어지고 하늘의 비가 땅에 떨어지듯 대아비지옥은 의심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위로서)」, 1497쪽

이어서 「집안사람들이 모두 염불자이신 듯하니 반드시 염불을 권하실 것이다(一家の人人・念仏者にてましましげに候いしかばさだめて念仏をぞすすめまいらせ給い候らん)」(1497쪽)라고 하시고, 「아무리 말하더라도 법화경을 버리라고 꾀는 듯한 말은 쓰지 마십시오(いかに申すとも法華経をすてよとたばかりげに候はんをば御用いあるべからず)」(1497쪽)라고 당부하셨다.

편지의 끝에서 대성인은 한 달 전의 일을 적으셨다. 1264년 11월 11일, 아와 도조의 마쓰바라 대로에서 수백 명의 염불자에게 습격당하신 고마쓰바라 법난이다. 「쏘는 화살은 내리는 비 같고 치는 칼은 번개 같았다. 제자 하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둘은 크게 다쳤다. 나도 베이고 맞아 끝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놓쳐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いるやはふるあめのごとし・うつたちはいなづまのごとし、弟子一人は当座にうちとられ・二人は大事のてにて候、自身もきられ打たれ結句にて候いし程に、いかが候いけん・うちもらされて・いままでいきてはべり)」(1498쪽). 그리고 이렇게 맺으셨다.

もし.さきにたたせ給はば梵天・帝釈.四大天王・閻魔大王等にも申させ給うべし、日本第一の法華経の行者・日蓮房の弟子なりとなのらせ給へ、よもはうしんなき事は候はじ、但一度は念仏・一度は法華経となへつ・二心ましまし人の聞にはばかりなんど・だにも候はば・よも日蓮が弟子と申すとも御用ゐ候はじ・後にうらみさせ給うな

만일 먼저 가시게 되면 범천 · 제석 · 사대천왕 · 염마대왕 등에게도 아뢰십시오. 「일본 제일의 법화경 행자 니치렌 스님의 제자다」라고 이름을 대십시오. 설마 소홀히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한 번은 염불, 한 번은 법화경을 부르는 두 마음이 있거나 남의 이목을 꺼리는 일이라도 있다면, 니치렌의 제자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뒤에 원망하지 마십시오.

「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위로서)」, 1498쪽

「먼저 가시게 되면」. 병이 이미 깊었던 것이다. 받는 사람은 「난조의 시치로 님(なんでうの七郎殿)」이었다.

1265년 3월 8일

해가 바뀐 1265년(분에이 2년) 3월 8일, 난조시치로는 세상을 떠났다. 법호는 교조(行增)였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다카쓰치(高土)에 묻혔다. 그때 아내는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막내 시치로고로다(6절). 둘째 아들 도키미쓰는 일곱 살이었다.

이른 봄, 후지산 기슭 마을 곁의 낮은 언덕 위에 흙무덤과 거친 돌 하나, 그 위로 기운 늙은 소나무 두 그루, 마른 풀 사이로 언덕을 오르는 좁은 길, 아래로 물 고인 논과 매화 핀 마을, 멀리 옅은 구름 아래 후지산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2 · 다카쓰치의 무덤

그가 끝내 염불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뒤의 편지들이 전한다. 대성인은 열 해 뒤 아들에게 「돌아가신 아버님은 무사였지만 한결같이 법화경을 존중하셨기에 임종 정념이셨다고 들었다(故親父は武士なりしかども・あなかちに法華経を尊み給いしかば・臨終正念なりけるよしうけ給わりき)」(1508쪽)고 쓰셨고, 아내에게는 「고 성령은 이 경의 행자이니 즉신성불은 의심 없다(故聖霊は此の経の行者なれば即身成仏疑いなし)」(1506쪽)고 쓰셨다.

그리고 대성인은 그의 죽음을 듣고 몸소 가마쿠라에서 우에노까지 내려가 그 무덤에 참배하셨다. 열 해 뒤 대성인은 그 일을 이렇게 회상하셨다.

さては故なんでうどのはひさしき事には候はざりしかども・よろず事にふれて・なつかしき心ありしかば・をろかならずをもひしに・よわひ盛んなりしに・はかなかりし事わかれかなしかりしかば・わざとかまくらより・うちくだかり御はかをば見候いぬ

그런데 돌아가신 난조 님은 오래 사귄 것은 아니었지만 무슨 일에나 정다운 마음이 있어 소홀히 여기지 않았는데, 한창 나이에 덧없이 가셨으니 이별이 슬퍼서 일부러 가마쿠라에서 내려가 무덤을 보았습니다.

「봄의 축하어서」, 1510쪽

강의는 이 성묘가 뒤의 모든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본다. 그날 무덤가에는 일곱 살의 상주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274년, 미노부에 처음 공양을 올린 열여섯의 소년에게 대성인이 「가마쿠라에서 잠깐 뵌 일」(1507쪽)이라고 쓰신 만남도 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라고 강의는 짐작한다(2부 8절).

  1. 是一① 가르침(教)正直に方便を捨て但無上の道を説く석존은 주사친 · 1494
  2. 是二② 근기(機)法華経の敵をだにも・せめざれば得道ありがたし1494
  3. 是三③ 때(時)冬・田を作るが如し말법의 처음 · 1495
  4. 是四④ 나라(國)日本国は純に法華経の機なり1496
  5. 是五⑤ 순서(序)瓦礫を貴んで明珠なり법연 · 1497

「日本第一の法華経の行者・日蓮房の弟子なりとなのらせ給へ」1498

도표 6 · 「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위로서)」의 다섯 가지

어머니와 형제 — 다섯 아들과 네 딸

1265 — 1284 · 난조도키미쓰어머니와 아이들

난조도키미쓰어머니

도키미쓰의 어머니는 스루가국 이하라군 마쓰노의 마쓰노 로쿠로자에몬 입도의 딸이었다. 1281년의 편지에 「니고젠의 아버님, 돌아가신 마쓰노 로쿠로자에몬 입도 님의 기일(尼御前の慈父・故松野六郎左衛門入道殿の忌日)」(1580쪽)이라는 말이 있다. 마쓰노 집안도 대성인의 신도였다. 마쓰노 집안 앞 어서가 열세 편 남아 있고, 육노승의 하나인 렌게아사리 닛지(日持)가 그 집안의 아들이라고 한다. 대성인은 마쓰노 입도에게 「아들이 많으니 효양도 저마다다(子息多ければ孝養まちまちなり)」(1580쪽)라고 쓰셨다.

그녀가 언제 난조시치로에게 시집왔는지는 알 수 없다. 남편을 여읜 뒤 비구니가 되었고, 대성인은 그녀를 「우에노 님 후가니고젠(上野殿後家尼御前)」 · 「우에노 님 하하니고젠(上野殿母尼御前)」 · 「우에노 님 하하고젠(上野殿母御前)」 · 「우에노 니고젠(上野尼御前)」이라 부르셨다. 이 페이지는 화광신문 어서전집 목록의 표기를 따라 그녀를 「난조도키미쓰어머니」라 부른다. 그녀는 남편의 권유로 법화경에 들어왔다. 1274년 7월 대성인은 그녀에게 「이번의 인연이야말로 참된 인연의 남편이다. 그 까닭은 남편의 권유로 법화경의 행자가 되셨기 때문이다(今度のちぎりこそ・まことのちぎりのをとこよ、そのゆへは・をとこのすすめによりて法華経の行者とならせ給へば)」(1504쪽)라고 쓰셨다. 그녀는 1284년(고안 7년) 5월 10일에 세상을 떠나 남편과 같은 다카쓰치에 묻혔다. 법호는 묘호(妙法)였다.

다섯 아들

난조 집안에는 다섯 아들과 네 딸이 있었다고 강의는 쓴다. 홋리 니치코가 엮은 「가미난조 집안 계도」에 따른 것이다.

네 딸

혼인으로 보면 난조 집안은 후지 기슭과 이즈의 작은 무사 집안들, 마쓰노 · 이시카와 · 니타 집안과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집안들이 하나같이 닛코상인의 문하가 되었다. 강의는 닛코상인의 「제자분첩」에 오른 예순다섯 명 가운데 서른일곱 명이 스루가 사람이고, 그 가운데 재가 제자 열일곱 명은 모두 후지군에 살았다고 셈한다. 그 그물의 한가운데에 난조 집안이 있었다.

받는 사람 대조 — 난조 집안 앞으로 전하는 편지 가운데 두 편은 받는 사람이 갈린다. 「약왕품득의초」(1499–1503)는 법화경 약왕품의 열 가지 비유와 여인 성불을 밝힌 글로, 화광신문 목록은 받는 사람을 「난조도키미쓰부인」으로 적는다. 강의는 「본초 후반에 여인 성불이 보이는 점 등으로 보아 1265년(분에이 2년) 난조 효에시치로의 아내에게 준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고, 1280년설 · 겐지 연간설도 있다고 적는다. 1265년이라면 남편을 막 잃은 난조도키미쓰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된다. 「단의초」(1514–1515)는 화광신문 목록이 받는 사람을 「난조도키미쓰어머니」로 적지만, 강의는 「아직 뵙지 못한 사람」이라는 본문과 「도시로 님의 부인과 늘 함께 보라」는 추신으로 보아 가마쿠라에 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으로 본다. 이 페이지는 두 설을 함께 적고, 두 편지의 본문은 인용하지 않는다.

부모마쓰노 로쿠로자에몬 입도 1278.11 사망난조도키미쓰어머니의 아버지난조도키미쓰어머니 묘호 · 1284.5.10 사망난조시치로 효에시치로 · 교조 · 1265.3.8 사망난조도키미쓰어머니와 혼인
다섯 아들시치로타로 전승1274.8.10 수사 · 18시치로지로 도키미쓰 1259–1332오토쓰루 전승묘렌 · 1323.8.13 사망도키미쓰와 혼인시치로사부로 · 시치로시로 전승1280 이전 사망시치로고로 1265 출생 · 1280.9.5 사망 · 16
네 딸렌아니 전승니타 고로 시게쓰나와 혼인 → 니타시로노부쓰나 · 니치모쿠상인 · 요리쓰나묘이치 전승1278.3.24 사망이시카와 신뵤에 요시스케(도넨 · 1287 사망)와 혼인 → 마고사부로 요시타다 · 이시카와의 히메고젠(어서)아하라구치 고젠 전승나카노 고젠 전승묘케 · 1322.3.23
어서로 확인 계도 · 기록만전승 혼인계도는 홋리 니치코 『난조도키미쓰 전전』을 바탕으로 한 강의의 「가미난조 집안 계도」 · 6절
도표 7 · 가미난조 집안

연대 대조 — 출생은 쇼겐 원년(1259, 강의). 별세가 1332년 일흔넷이라는 데서 셈한 해와 맞는다. 형 시치로타로의 수사(1274.8.10)는 계도에만 전하고 어서에 없다. 시치로고로의 나이는 1281년 정월의 편지에 「열여섯(とし十六歳)」(1576쪽)이라 하여, 1265년생의 세는나이와 맞는다. 강의 본문에 1280년 9월의 그를 「16세」라 적은 곳과 「스물에도 미치지 않은 사람」(1570쪽)이라는 어서의 말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창가학회 강의는 난조 집안의 신앙을 「부모를 따라」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곱 살의 아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하고 떠났다. 대성인은 뒤에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가르침도 받지 못했다」(1509쪽)고 그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셨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일본 제일의 법화경 행자의 제자라고 이름을 대라」는 편지 한 통과, 그 편지를 쓴 스승이 일부러 찾아온 무덤 하나였다. 도키미쓰의 신앙은 그 무덤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대성인은 그 무덤을 한 번도 잊지 않으셨다.

2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백의 아홉 해 — 1265–1274

1265 — 1274 · 분에이 2 — 11년

난조시치로가 세상을 떠난 1265년부터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신 1274년까지, 난조 집안에 보낸 편지는 한 통도 남아 있지 않다. 강의는 이 아홉 해를 「도키미쓰 일가의 행적은 알 수 없다」고 솔직하게 쓴다.

그 아홉 해는 대성인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한 시기였다. 1268년 몽골의 국서가 오자 대성인은 집권과 막부 요인, 가마쿠라의 큰 절들에 열한 통의 편지를 보내셨다. 1271년 여름에는 고쿠라쿠사료칸과 기우를 겨루셨고, 9월 12일 다쓰노구치의 형장에 앉으셨으며, 그해 겨울 사도로 유배되셨다. 문하에 대한 박해가 거세져 가마쿠라의 많은 신도가 신앙을 버렸다. 1274년 2월 사면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대성인은 4월 8일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세 번째로 간하셨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5월 12일 가마쿠라를 떠나셨다. 「세 번 간해도 쓰지 않으면 떠나라」는 옛글을 따른 것이었다.

가마쿠라에서 미노부로 가는 길은 바로 후지 기슭을 지났다. 5월 12일 사카와, 13일 다케노시타, 14일 구루마가에시, 15일 오미야, 16일 난부, 17일 미노부(「도키전어서」, 964쪽). 15일에 묵으신 오미야는 후지의 센겐 신사가 있는 곳으로, 우에노에서 멀지 않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곳의 신도들을 만나지 않고 지나가셨다. 이듬해 정월의 편지에 그 일이 적혀 있다. 「이번에 내려갈 때에는 남의 눈을 피해 이리로 왔기에 니시야마의 입도 님에게도 알리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이 지나갔는데, 그것이 마음에 걸려(このたびくだしには人にしのびて・これへきたりしかば・にしやまの入道殿にも・しられ候はざりし上は力をよばず・とをりて候いしが心にかかりて候)」(「봄의 축하어서」, 1510쪽). 대성인의 몸에 여전히 박해의 눈길이 따라다니던 때였다.

그 사이 우에노의 난조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자랐다. 1274년 도키미쓰는 열여섯 살이 되었다. 당시 무사의 성인식은 열다섯에서 열일곱 사이에 치렀다. 그해 8월 10일 맏형 시치로타로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계도는 전한다. 도키미쓰는 이 해 전후로 집안을 이어 가독(惣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성인
  1. 1265가마쿠라
  2. 1268몽골 국서 · 열한 통의 편지
  3. 1271.9.12다쓰노구치
  4. 1271.10사도
  5. 1274.2사면
  6. 4.8세 번째 간효
  7. 5.12가마쿠라 출발
  8. 5.15오미야
  9. 5.17미노부
  10. 5.15 오미야 → 우에노에 들르지 않으심 · 「人にしのびて…とをりて候」1510
우에노의 난조 집안
  1. 1265.3.8아버지 사망
  2. 다카쓰치 묘 · 대성인의 성묘
  3. 막내 시치로고로 출생
  4. 1274.7어머니의 공양
  5. 1274.7도키미쓰의 공양
  6. 1274.8.10형 시치로타로 수사(계도)전승
  7. 1265–1274 · 편지가 남지 않은 아홉 해 〔편지 없음〕
회색 띠 — 편지가 남지 않은 아홉 해 · 점선 — 5.15 오미야를 지나 우에노에 들르지 않으심 · 7절
도표 8 · 공백의 아홉 해 1265–1274

1274년 7월 — 미노부의 첫 편지

1274년 7월 11일 · 26일 · 분에이 11년 · 미노부

대성인이 미노부의 하키리 마을에 드신 것은 1274년 5월 17일, 초암이 완성된 것은 6월 17일이었다. 그 뒤 닛코상인이 가이와 스루가로 홍교를 나가면서, 대성인이 미노부에 계시다는 소식이 후지 기슭에도 전해졌을 것이라고 강의는 본다.

어머니에게 — 「살아서는 생의 부처, 지금은 사의 부처」

7월, 먼저 어머니 난조도키미쓰어머니가 공양을 올렸다. 대성인은 7월 11일 답장을 쓰셨다. 「우에노전미망인답서」다. 남편을 여읜 지 아홉 해가 된 아내에게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抑も上野殿死去の後は・をとづれ冥途より候やらん・きかまほしくをぼへ候、ただしあるべしとも・をぼへず、もし夢にあらずんば・すがたをみる事よもあらじ

대저 우에노 님이 돌아가신 뒤로 저승에서 소식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꿈이 아니라면 모습을 보는 일은 설마 없을 것입니다.

「우에노전미망인답서」, 1504쪽

今度のちぎりこそ・まことのちぎりのをとこよ、そのゆへは・をとこのすすめによりて法華経の行者とならせ給へば仏とをがませ給うべし、いきてをはしき時は生の仏・今は死の仏・生死ともに仏なり、即身成仏と申す大事の法門これなり

이번의 인연이야말로 참된 인연의 남편입니다. 그 까닭은 남편의 권유로 법화경의 행자가 되셨으니 (남편을) 부처로 우러르셔야 합니다. 살아 계셨을 때는 생의 부처, 지금은 사의 부처, 생사 모두 부처입니다. 즉신성불이라는 큰 법문이 이것입니다.

「우에노전미망인답서」, 1504쪽

이어서 대성인은 「정토라 하든 지옥이라 하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가슴속에 있다(夫れ浄土と云うも地獄と云うも外には候はず・ただ我等がむねの間にあり)」(1504쪽)고 하시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법화경이라고 가르치셨다. 「이 글에는 니치렌의 비장의 법문을 적었으니 감추어 두십시오(此の文には日蓮が秘蔵の法門かきて候ぞ、秘しさせ給へ)」(1506쪽). 비구니가 된 시골 무사의 아내에게, 대성인은 비장의 법문을 써 보내셨다.

아들에게 — 「모습도 마음도 닮았다」

그리고 얼마 뒤, 열여섯의 도키미쓰가 공양을 올렸다. 돈 열 꿰미, 민물 김 두 첩, 생강 스무 묶음. 7월 26일, 대성인은 짧은 답장을 쓰셨다. 「우에노전답서(1507)」다.

かまくらにてかりそめの御事とこそ.をもひまいらせ候いしに、をもひわすれさせ給わざりける事申すばかりなし、こうへのどのだにも・をはせしかば・つねに申しうけ給わりなんとなげき・をもひ候いつるに、をんかたみに御みをわかくして・とどめをかれけるか・すがたのたがわせ給わぬに、御心さひにられける事いうばかりなし

가마쿠라에서 잠깐 뵌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잊지 않고 계셨다니 무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우에노 님만 살아 계셨더라면 늘 (법문을) 말씀드리고 (말씀을) 들었을 텐데 하고 한탄하던 차에, 유품으로 그대를 젊은 몸으로 남겨 두셨는가. 모습도 다르지 않은 데다 마음까지 닮으셨으니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에노전답서(1507)」, 1507쪽

「가마쿠라에서 잠깐 뵌 일」. 강의는 이것을 어린 도키미쓰가 아버지를 따라 가마쿠라에서 대성인을 뵌 일로 읽는다. 그것을 잊지 않고 열여섯의 소년이 공양을 올려 온 것이다. 대성인은 이어서 그 아버지의 무덤에 몸소 참배하셨던 일을 적으시고, 미노부의 살림을 이렇게 전하셨다.

今年のけかちにはじめたる山中に木のもとに・このはうちしきたるやうなる・すみか・をもひやらせ給え、このほどよみ候御経の一分をことのへ廻向しまいらし候、あわれ人は よき子はもつべかりけるものかなと、なみだかきあえずこそ候いし

올해의 기근 속에 시작한 산중 살림, 나무 아래에 나뭇잎을 깔아 놓은 듯한 거처를 헤아려 주십시오. 요즘 읽는 경의 공덕 한 몫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회향해 드렸습니다. 아, 사람은 좋은 아들을 두어야 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눈물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우에노전답서(1507)」, 1507쪽

편지는 묘장엄왕이 두 아들에게 이끌려 부처의 길에 든 이야기로 맺는다. 「저 왕은 악인이고 우에노 님은 선인이니 견줄 바가 아니다.」 그리고 추신이 있다.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젊은 분이 계시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人にあながちにかたらせ給うべからず、若き殿が候へば申すべし)」(1507쪽). 젊은 지도가 대성인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에게 해가 될 수 있었다. 대성인은 첫 편지부터 그를 지키려 하셨다.

  1. 17.11「우에노전미망인답서」「いきてをはしき時は生の仏・今は死の仏・生死ともに仏なり」1504 · 「此の文には日蓮が秘蔵の法門かきて候ぞ」1506어머니
  2. 27.26「우에노전답서(1507)」공양 「鵞目十連・かわのり二帖・しやうかう二十束」 · 「すがたのたがわせ給わぬに、御心さひにられける」 · 「若き殿が候へば申すべし」1507도키미쓰 · 16세
  3. 311.11「우에노전답서(1508)」공양 「聖人二管・柑子一篭・蒟蒻十枚・薯蕷一篭・牛房一束」 · 「其の親の跡をつがせ給いて」1508 · 「いきつしまのやうに」1509도키미쓰
도표 9 · 1274년 — 첫해의 세 통

1274년 11월 — 「아버지의 뒤를 이어」

1274년 11월 11일 · 분에이의 역 직후

그해 10월, 몽골과 고려의 군대가 쓰시마와 이키를 치고 하카타만에 상륙했다. 분에이의 역이다. 대성인이 열네 해 전 「입정안국론」에서 「타국침핍난」이라 경고하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소식이 아직 생생하던 11월, 도키미쓰는 다시 공양을 올렸다. 청주 두 통, 감귤 한 바구니, 곤약 열 장, 마 한 바구니, 우엉 한 묶음. 11월 11일, 대성인은 긴 답장을 쓰셨다. 받는 사람은 「난조 시치로지로 님」이었다.

대성인은 먼저 아이들이 모래 떡을 부처께 올리고 아육대왕이 된 이야기와, 법화경 법사품의 경문을 들어, 부처를 일 겁 동안 공양하는 것보다 말법에 사람들이 미워하는 법화경의 행자를 공양하는 공덕이 크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이야기하셨다.

其の上殿はをさなくをはしき、故親父は武士なりしかども・あなかちに法華経を尊み給いしかば・臨終正念なりけるよしうけ給わりき、其の親の跡をつがせ給いて又此の経を御信用あれば・故聖霊いかに草のかげにても喜びおぼすらん、あわれいきてをはせば・いかにうれしかるべき

게다가 그대는 어리셨지요. 돌아가신 아버님은 무사였지만 한결같이 법화경을 존중하셨기에 임종 정념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또 이 경을 믿으시니 고 성령께서 풀 그늘에서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우에노전답서(1508)」, 1508쪽

いかなれば他人は五六十までも親と同じしらがなる人もあり、我がわかき身に親にはやくをくれて教訓をもうけ給はらざるらんと・御心のうちをしはかるこそなみだもとまり候はね

어찌하여 남들은 쉰 예순까지 부모와 함께 백발이 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젊은 몸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어 가르침도 받지 못하는가 하고, 그 마음속을 헤아리니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우에노전답서(1508)」, 1509쪽

그리고 대성인은 이 소년에게 처음으로 시대를 이야기하셨다. 「대몽골국이 쳐들어왔다고 하니, 내가 말한 것을 쓰셨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안타깝다. 모든 사람이 이번의 이키 · 쓰시마처럼 되실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大蒙古国よりよせて候と申せば、申せし事を御用いあらば・いかになんど・あはれなり、皆人の当時のいきつしまのやうにならせ給はん事・おもひやり候へば・なみだもとまらず)」(1509쪽). 이어 염불 · 선 · 진언의 잘못을 차례로 밝히시고, 이렇게 맺으셨다.

今始めて申すにあらず二十余年が間・音もをしまずよばはり候いぬるなり、あなかしこ・あなかしこ、この御文は大事の事どもかきて候、よくよく人によませて・きこしめせ

이제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무 해 남짓 동안 목소리를 아끼지 않고 외쳐 온 것입니다. 삼가고 삼가십시오. 이 편지에는 중대한 일들을 적었으니 잘 남에게 읽혀서 들으십시오.

「우에노전답서(1508)」, 1510쪽

「남에게 읽혀서 들으라」. 열여섯의 무사는 아직 한문 섞인 편지를 혼자 읽기 어려웠을 것이다. 뒤의 편지에도 「호키 님이 읽어 들려 드리라(ははき殿読み聞かせまいらせ給へ)」(1530쪽)는 당부가 있다. 호키 님(伯耆殿)은 호키보 닛코상인이다. 대성인의 편지는 닛코상인의 목소리로 이 젊은 지도에게 전해졌다.

아버지 사후 몇 해

  1. 91274.7「우에노전답서(1507)」「こうへのどのだにも・をはせしかば」1507
  2. 91274.11「우에노전답서(1508)」「故親父は武士なりしかども・あなかちに法華経を尊み給いしかば」1508
  3. 101275.1「봄의 축하어서」「故なんでうどのは…わざとかまくらより・うちくだかり御はかをば見候いぬ」1510
  4. 101275.5「우에노전답서(1511)」「わがをやのわかれをしさに父の御ために」1512
  5. 111276.1「난조전답서(1529)」「慈父過去の聖霊は教主釈尊の御前にわたらせ給い」1530
  6. 111276.윤3「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王の心ざしをば臣のべ・をやの心ざしをば子の申しのぶる」1531
  7. 131278.11「구로타로전답서(1553)」「故上野殿信じ給いしによりて仏に成らせ給いぬ」1554 · 구로타로 앞
옅은 금 — 일족(구로타로) 앞 · 9절
도표 10 · 아버지를 부르는 편지들

1275년 정월 — 닛코상인의 성묘

1275년 정월 · 분에이 12년 · 다카쓰치

해가 바뀌어 1275년 정월, 도키미쓰는 새해 인사를 올렸다. 대성인은 「봄의 축하어서」에서 아버지의 무덤에 참배하셨던 일을 회상하시고(5절), 지난해 미노부로 오실 때 남의 눈을 피해 그대로 지나가신 일이 마음에 걸렸다고 하셨다(7절). 그리고 이렇게 쓰셨다.

その心をとげんがために・此の御房は正月の内につかわして御はかにて自我偈一巻よませんとをもひてまいらせ候、御とのの御かたみもなしなんとなげきて候へば・とのをとどめをかれける事よろこび入つて候

그 마음을 이루려고, 이 스님을 정월 안에 보내어 무덤에서 자아게 한 권을 읽게 하려고 생각하여 보내 드립니다. 고인의 유품도 없다고 한탄했는데 그대를 남겨 두셨으니 몹시 기쁩니다.

「봄의 축하어서」, 1510쪽

「이 스님」이 닛코상인이다. 대성인은 당신 대신 제자를 보내 다카쓰치의 무덤에서 경을 읽게 하셨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돌아가신 분은 나무 아래 풀숲 그늘에 다니는 사람도 없고 불법을 들을 수도 없으니 얼마나 쓸쓸하실까. 헤아려 보면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그대가 법화경의 행자를 데리고 무덤에 가시면 얼마나 기쁘실까, 얼마나 기쁘실까(故殿は木のもと・くさむらのかげ・かよう人もなし、仏法をも聴聞せんず・いかにつれづれなるらん、をもひやり候へばなんだもとどまらず、とのの法華経の行者うちぐして御はかにむかわせ給うには・いかにうれしかるらん・いかにうれしかるらん)」(1510쪽).

닛코상인

닛코상인은 1246년(간겐 4년) 3월 8일 가이국 고마군 오이노쇼 가지카자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가하자 스루가 후지군 가미카타노쇼 가와이의 외조부 유이 입도의 손에 자랐다. 일곱 살에 가모하라의 천태종 시주쿠원에 올라 공부했고, 1258년 대성인이 이와모토 짓소사의 경장에서 일체경을 읽고 계실 때 제자가 되어 「호키보 닛코」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뒤 이즈 유배에도 사도 유배에도 대성인을 곁에서 모셨다. 후지군은 닛코상인이 자란 땅이었다.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신 뒤, 스물아홉 살의 닛코상인은 이 인연을 따라 가이와 스루가에서 홍교를 시작했다. 다카쓰치의 성묘도 그 길 위에 있었다. 강의는 이렇게 쓴다. 도키미쓰가 닛코상인을 만난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그때까지 도키미쓰가 어렸으므로 이 성묘가 이후 평생에 걸친 사제의 「도계(道契)」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도계는 그대로 열여섯 해 뒤 대석사 창건의 연원이 되었다.

닛코상인 쪽의 기록도 이 인연을 전한다. 1275년 10월 도키미쓰에게 수여된 어본존의 곁에 닛코상인은 이렇게 적었다고 강의는 전한다. 「난조 효에시치로의 아들 시치로지로 다이라노 도키미쓰는 닛코 제일의 제자이므로 드리는 것이다(南条兵衛七郎子息七郎次郎平の時光は日興第一の弟子たるに依て与え申す所件の如し)」(사료, 강의 인용).

대성인미노부
1275.1 「此の御房は正月の内につかわして」1510
닛코상인호키보 · 1246 가지카자와 출생 · 가와이의 외가 · 시주쿠원 · 1258 입문
1275.1다카쓰치 성묘 · 자아게1275.8마룻대 글을 가지고 감 · 1513「ははき殿読み聞かせまいらせ給へ」1530
난조도키미쓰우에노 · 1259 출생
1275.10 어본존 수여「日興第一の弟子」사료
16년 뒤 · 1290 대석사
도표 11 · 사제의 도계

새 집과 어본존 — 1275년

1275년 5월 — 10월 · 겐지 원년

1275년(겐지 원년)의 편지들은 젊은 지도가 집안의 주인이 되어 가는 모습을 전한다.

5월 3일, 그는 「토란 대가리를 돌처럼 말린 것」 한 짐을 「후지의 우에노에서 미노부 산으로」 보냈다. 쌀이 떨어지는 늦봄에 저장해 둔 토란을 올린 것이다. 대성인은 「우에노전답서(1511)」에서, 굶주린 해에 피(稗) 밥 한 그릇을 벽지불께 올리고 구십일 겁 동안 복을 받은 아나율의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이 공양이 아버지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효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냐고 물으시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もし此の事まことになり候はば・わが大事とおもはん人人のせいし候、又おほきなる難来るべし、その時すでに此の事かなうべきにやとおぼしめして・いよいよ強盛なるべし

만일 이 일(신앙)이 참되게 되면,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말릴 것이고 또 큰 난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이제 이 일이 이루어지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여 더욱 강성해야 합니다.

「우에노전답서(1511)」, 1512쪽

「거듭거듭, 사람들이 말리거든 마음속으로 기쁘게 여기십시오(かへす・がへす人のせいしあらば心にうれしくおぼすべし)」(1512쪽). 두 해 뒤에 실제로 일어날 일을, 대성인은 이때 이미 일러 두셨다(3부 13절).

7월에는 보리 한 궤, 김 다섯 장, 생강 예순 뿌리를 보냈다. 이때 우에노 근처에서는 후지 오미야(센겐 신사)의 조영이 한창이었다.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세상이 어수선한 데다 오미야를 지으시니, 백성이며 집안사람이며 기근이며 농사며 얼마나 겨를이 없으시겠는가(せけんそうそうなる上ををみやのつくられさせ給へば・百姓と申し我が内の者と申し・けかちと申し・ものつくりと申し・いくそばくいとまなく御わたりにて候らむに)」. 그런 가운데 산속의 살림을 헤아려 「새가 알을 품어 기르듯, 등불에 기름을 붓듯, 마른 풀에 비가 내리듯, 굶주린 아이에게 젖을 주듯 법화경의 목숨을 이어 주신다(鳥のかい子をやしなふが如く・灯に油をそふるがごとく・かれたる草に雨のふるが如く・うへたる子に乳をあたふるが如く・法華経の御命をつがせ給う事)」(「우에노전답서(1512)」, 1512쪽)고 하셨다. 젊은 지도는 신사 조영의 부역을 감당하면서 미노부에도 짐을 보냈다.

새 집

8월, 도키미쓰는 집을 새로 짓는다고 알리고 마룻대에 붙일 글(棟札)을 청했다. 대성인은 기뻐하셨다.

態と御使い有難く候、夫れについては屋形造の由目出度くこそ候へ、何か参り候いて移徙申し候はばや、一つ棟札の事承り候書き候いて此の伯耆公に進せ候

일부러 사람을 보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택을 지으신다니 경사스럽습니다. 언젠가 찾아가 이사를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마룻대 글 하나를 청하신 것은 잘 알았습니다. 써서 이 호키 공 편에 보내 드립니다.

「우에노전어서(1513)」, 1513쪽

대성인은 미노부에 드신 뒤 입멸 직전까지 한 번도 산을 나가지 않으셨다. 그런 대성인이 「언젠가 찾아가 이사를 축하드리고 싶다」고 쓰셨다. 강의는 여기서 대성인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가를 읽는다. 마룻대 글에는 법화경 화성유품의 게송이 적혔다. 수달 장자가 기원정사를 일곱 번 불태운 뒤 부처께 받았다는, 불을 막는 글이다. 이 마룻대 글을 가지고 우에노로 간 사람도 닛코상인이었다. 강의는 형 시치로타로가 세상을 떠나고 도키미쓰가 집안을 이은 일, 혹은 혼인에 따른 새 집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다만 지도라 해도 배하 스무 호쯤의 우두머리였으니 큰 저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1275년 10월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275년 10월, 도키미쓰는 대성인께 어본존을 수여받았다. 수여의 기록에 「다이라노 도키미쓰에게 이것을 수여한다」는 말과 닛코상인의 글(10절)이 적혀 있다고 강의는 전한다. 같은 해 6월부터 아쓰와라의 류센사에서는 닛코상인에게 귀의한 승려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다(3부 15절). 열일곱 살의 지도는 이 해에 집을 짓고, 그 집에 어본존을 모셨다.

연대 대조 — 「우에노전답서(1511)」는 강의가 1275년(겐지 원년) 5월 3일로 보고, 오미야 조영에 관한 언급에 따라 1276 · 1277 · 1279년 설도 있다고 적는다. 「우에노전어서(1513)」는 강의가 1275년 8월 18일로 본다(여러 설). 어본존 수여는 「겐지 원년 10월」(강의의 인용)이다.

효양의 편지들 — 대교태랑의 아들

1276년 정월 — 윤3월 · 겐지 2년

1276년에 들어서자 대성인의 편지는 도키미쓰의 공양을 아버지에 대한 효양으로 읽기 시작한다.

정월 19일의 「난조전답서(1529)」에는 새해의 떡 일흔 장, 술 한 통, 토란 한 짐, 김 한 봉지, 무 두 개, 마 일곱 뿌리가 적혀 있다. 대성인은 법화경 권발품의 「이 세상에서 그 복의 과보를 얻으리라」는 경문을 들어 이렇게 쓰셨다. 「이 세상에서 복보를 얻는다는 칙선, 이 세상에서 현재의 과보를 얻는다는 봉조가 난조의 시치로지로 님에게만 헛되겠는가(しかるに亦於現世得其福報の勅宣・当於現世得現果報の鳳詔・南条の七郎次郎殿にかぎりて、むなしかるべしや)」(1530쪽). 그리고 「자애로운 아버지의 성령은 교주 석존의 앞에 계시고, 단나는 이 세상에서 큰 과보를 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3월 18일의 「난조전답서(1530)」 끝에는 「깃사부로 님 · 다로다유 님」의 이름과 함께 「거듭 호키 님이 읽어 들려 드리십시오」라는 당부가 있다. 우에노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편지를 들었던 것이다.

대교태랑

윤3월 24일, 도키미쓰는 홑옷 한 벌과 소금 한 짐, 기름 다섯 되를 보냈다. 대성인은 이에 대해 긴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다.

규슈의 대명 오하시노 다로(大橋太郞)가 장군 요리토모의 노여움을 사 가마쿠라 유이가하마의 토굴 감옥에 열두 해 동안 갇혔다. 그가 규슈를 떠날 때 아내는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일곱 살에 산사에 올라간 아이는 동무들에게 「아비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받고,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의 일을 듣는다. 어머니는 「너를 산사에 올린 것은 아버지의 효양을 위해서다」라고 했다. 아이는 밤낮으로 법화경을 읽어 외웠고, 열두 살에 머리를 깎지 않은 채 규슈를 빠져나와 가마쿠라로 갔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앞에서 밤새 법화경을 읽는 소리에 사람들이 모였고, 장군의 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장군에게 알렸다. 장군은 아이를 불러 지불당에서 경을 읽게 했다. 이튿날, 그날 죄수 하나의 목을 벤다는 소리를 듣고 아이가 눈물을 짓자 장군이 까닭을 물었다. 아이가 사연을 아뢰자 장군은 서둘러 사람을 보냈고, 오하시노 다로는 유이가하마에서 칼이 막 뽑힌 순간에 살아났다. 장군은 아이에게 「이 줄을 풀어라」 하고, 오하시노 다로에게 본래의 영지를 돌려주었다. 요리토모는 「법화경이란 고마운 것」이라며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대성인은 이야기를 마치고 이렇게 쓰셨다.

今の御心ざしみ候へば故なんでうどのは.ただ子なれば・いとをしとわ.をぼしめしけるらめども・かく法華経をもて我がけうやうをすべしとは・よもをぼしたらじ(中略)かのちごのちちのなわを・ときしと・この御心ざし・かれにたがわず、これはなみだをもちて・かきて候なり

지금의 뜻을 보니, 돌아가신 난조 님은 그저 자식이니 사랑스럽다고는 생각하셨겠지만, 이렇게 법화경으로 자신을 효양하리라고는 설마 생각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중략) 저 아이가 아버지의 줄을 푼 것과 지금 이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눈물로 쓴 것입니다.

「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 1534쪽

편지의 첫머리에서 대성인은 이미 그 뜻을 밝혀 두셨다. 「결국 이것은 고 난조 님의 법화경에 대한 신용이 깊었던 것이 나타난 것인가. 왕의 뜻을 신하가 펴고 어버이의 뜻을 자식이 펴는 것이 이것이다(せんするところは・こなんでうどのの法華経の御しんようのふかかりし事のあらわるるか、王の心ざしをば臣のべ・をやの心ざしをば子の申しのぶるとはこれなり)」(1531쪽). 그리고 편지의 끝에서 대성인은 몽골의 소문과 당신이 받은 박해를 말씀하시며 「저마다의 신심이 두터운가 얇은가에 달렸다(各各の御信心のあつくうすきにて候べし)」(1535쪽)고 하셨다.

  1. ① 아버지 오하시노 다로요리토모의 노여움 · 유이가하마 토굴에 12년
  2. ② 아들 탄생 · 일곱 살에 산사로をやなし
  3. ③ 법화경을 외움仏に花をもまいらせよ・経をも一巻よみて孝養とすべし
  4. ④ 열두 살 · 가마쿠라 하치만구 앞에서 밤새 독경장군 부인이 들음
  5. ⑤ 처형의 날 · 유이가하마いまだ切らずばぐしてまいれ
  6. ⑥ 아이가 줄을 풂 · 본령 안도このちごに・とらせよ
「かのちごのちちのなわを・ときしと・この御心ざし・かれにたがわず」1534아이 = 도키미쓰·아버지 = 고 난조시치로
이야기 출전 1532–1534 · 12절
도표 12 · 대교태랑 이야기
1274.11
편지「우에노전답서(1508)」
도키미쓰의 공양聖人二管・柑子一篭・蒟蒻十枚・薯蕷一篭・牛房一束
대성인이 든 고사득승 · 무승 두 아이의 모래 떡 → 아육대왕
고사의 뜻작은 정성의 큰 과보
1275.5
편지「우에노전답서(1511)」
도키미쓰의 공양いものかしら一駄
대성인이 든 고사아나율의 피 밥
고사의 뜻가진 것을 다 바침
1275.7
편지「난조전답서(1541)」
도키미쓰의 공양白麦一俵・小白麦一俵・河のり五でふ
대성인이 든 고사가섭의 보리밥 → 광명여래
고사의 뜻「麦にはあらず金なり・金にはあらず法華経の文字なり」
1276.윤3
편지「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
도키미쓰의 공양かたびら一つ・しをいちだ・あぶら五そう
대성인이 든 고사상나화수 · 대교태랑
고사의 뜻효양
1280.12
편지「우에노전답서(1574)」
도키미쓰의 공양鵞目一貫文
대성인이 든 고사금색왕 · 수달 장자의 닷 되 쌀
고사의 뜻마지막 것을 내놓음
1281.9
편지「난조전답서(1578)」
도키미쓰의 공양塩一駄・大豆一俵・とつさか一袋・酒一筒
대성인이 든 고사덕승동자의 흙 떡
고사의 뜻말법 행자 공양의 공덕
공양물은 本文 그대로 · 12절
도표 13 · 공양과 고사

창가학회 강의는 도키미쓰와 닛코상인의 만남을 「사제의 도계」라 부르고, 그것이 대석사 창건의 연원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거창한 결의가 아니었다. 열여섯의 소년이 아버지의 스승을 잊지 않았고, 스승은 그 아버지의 무덤을 잊지 않았다. 대성인은 소년의 공양을 받을 때마다 그 아버지를 함께 부르셨다. 「어버이의 뜻을 자식이 편다」. 대성인이 이 집안에 보내신 첫 몇 해의 편지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소년에게 아버지가 걸었던 길이 무엇이었는가를 거듭 들려주는 편지였다. 도키미쓰는 그 길을 「아버지의 뒤를 잇는」 일로 받아들였다.

3부 스루가의 불법

「한편인 척하는 사람」 — 1277년 5월

1277년 5월 15일 · 겐지 3년 · 열아홉 살

도키미쓰에 대한 압박이 처음 편지에 드러나는 것은 1277년 5월이다. 그는 토란 대가리 한 짐과 함께 자신의 신앙을 그만두게 하려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정을 미노부에 알렸다. 5월 15일, 대성인은 긴 답장을 쓰셨다. 「우에노전답서(1537)」다.

대성인은 먼저 계모의 모함에 속아 사랑하는 아들 백기를 죽음으로 몰아간 주나라의 현인 윤길보의 이야기를 하셨다. 현인도 사람의 꾀에는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어서 석존이 제바달다와 아사세왕에게 받은 대난을 적으시고, 말법에 법화경을 경문대로 읽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큰 난이 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도키미쓰가 처한 일을 이렇게 짚으셨다.

さるにては殿は法華経の行者ににさせ給へりと・うけ給はれば・もつてのほかに・人のしたしきも・うときも日蓮房を信じては・よもまどいなん・上の御気色もあしかりなんと・かたうどなるやうにて御けうくむ候なれば・賢人までも人のたばかりは・おそろしき事なれば・一定法華経すて給いなん、なかなか色みへでありせば・よかりなん

그런데 그대가 법화경의 행자를 닮으셨다고 들으니, 가까운 사람도 먼 사람도 「니치렌 스님을 믿어서는 분명 곤란해질 것이다, 윗분의 기색도 나빠질 것이다」라고 한편인 척하며 타이른다 하니, 현인이라도 사람의 꾀는 무서운 것이라 반드시 법화경을 버리실 것입니다. 차라리 (신앙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우에노전답서(1537)」, 1539쪽

「한편인 척하며(かたうどなるやうにて)」. 적은 정면에서 오지 않았다. 그를 걱정하는 얼굴로, 「윗분의 기색」을 들어 그를 타일렀다. 대성인은 이런 사람들이 「한 사람을 타일러 떨어뜨리면 그것을 미끼로 많은 사람을 떨어뜨린다(大魔のつきたる者どもは一人をけうくんしをとしつれば・それをひつかけにして多くの人をせめをとすなり)」(1539쪽)고 하셨다. 그리고 가마쿠라에서 실제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떨어뜨린 쇼보 · 노토보 · 나고에의 비구니를 예로 드시고, 이렇게 쓰셨다.

殿もせめをとされさせ給うならば・するがにせうせう信ずるやうなる者も・又信ぜんと・おもふらん人人も皆法華経をすつべし

그대가 (신앙을) 꺾이게 되시면 스루가에서 조금 믿는 듯한 사람도, 또 믿으려 생각하는 사람들도 모두 법화경을 버릴 것입니다.

「우에노전답서(1537)」, 1539쪽

열아홉 살의 지도는 스루가 신도들의 기둥이 되어 있었다. 강의는 이 대목을 「도키미쓰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 주는 말로 읽는다.

「내 아버지를 위해서」

대성인은 그에게 타이르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셨다.

御信用あつくをはするならば・人ためにあらず我が故父の御ため・人は我がをやの後世には・かはるべからず・子なれば我こそ故をやの後世をばとぶらふべけれ、郷一郷・知るならば半郷は父のため・半郷は妻子・眷属をやしなふべし、我が命は事出できたらば上に・まいらせ候べしと・ひとへにおもひきりて

신앙이 두터우시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위해서다. 남은 내 아버지의 후세를 대신해 주지 못한다. 자식이니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후세를 빌어야 한다. 한 마을을 다스린다면 반은 아버지를 위해, 반은 처자와 권속을 먹이는 데 쓰겠다. 내 목숨은 일이 생기면 윗분께 바치겠다.」 이렇게 오로지 각오하고.

「우에노전답서(1537)」, 1540쪽

신앙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고, 영지의 절반은 아버지의 것이며, 목숨은 주군께 바친다. 대성인은 무사의 충과 효의 말로 그의 신앙을 지키게 하셨다. 그리고 상대가 「윗분」을 들어 위협하는 것을 두고 「윗분이 믿지 않으시는 것은 여기서도 알고 있는데, 윗분을 들어 위협하시다니 우습다(上の御信用なき事は・これにもしりて候を上をもつて・おどさせ給うこそをかしく候へ)」고 받아치라고 하셨다. 마지막 한 마디는 더 매섭다.

閻魔王に我が身と・いとをしとおぼす御めと・子とを・ひつぱられん時は・時光に手をやすらせ給い候はんずらんと・にくげに・うちいひて・おはすべし

「염마왕에게 당신 몸과 사랑하시는 부인과 자식이 끌려갈 때에는 이 도키미쓰에게 손을 비비시겠지요」라고 밉살스럽게 한마디 하고 계십시오.

「우에노전답서(1537)」, 1540쪽

어서 가운데 도키미쓰가 스스로 「도키미쓰」라고 이름을 대는 말은 이것이 유일하다. 대성인이 그의 입에 넣어 주신 말이다.

편지의 끝은 이렇다. 「천 정, 만 정의 땅을 다스리는 사람도 하찮은 일로 목숨을 버리고 영지를 빼앗기는 일이 있다. 이번에 법화경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무엇이 아깝겠는가(千丁・万丁しる人もわづかの事にたちまちに命をすて所領をめさるる人もあり、今度法華経のために命をすつる事ならば・なにはをしかるべき)」(1540쪽). 그리고 「남들이 많이 듣는 데서 남을 타이르기보다 너 자신을 타일러라 하고 벌떡 일어서십시오(人のおほくきかんところにて・人をけうくんせんよりも我が身をけうくんあるべしとて・かつぱとたたせ給へ)」(1540쪽).

대성인은 이 일을 두 해 전에 이미 예고하셨다. 1275년 5월의 「우에노전답서(1511)」에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말릴 것이니 그때는 마음속으로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고(2부 11절), 같은 해 7월의 「난조전답서(1541)」에는 「요즘 세상은 몹시 위태로워 보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탄하지 말라. 딱 잘라 각오하고 영지 같은 것도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더욱 기쁨으로 여기고 휘파람을 불며 이리로 오시라(ふつとおもひきりてそりやうなんども・たがふ事あらば・いよいよ悦びとこそおもひて・うちうそぶきて・これへわたらせ給へ)」(1542쪽)고 쓰셨다. 영지를 잃으면 미노부로 오라는 것이다.

「殿もせめをとされさせ給うならば・するがにせうせう信ずるやうなる者も…皆法華経をすつべし」1539

타이르는 말
  1. 「日蓮房を信じては・よもまどいなん」1539
  2. 「上の御気色もあしかりなん」1539
  3. (결과)「一人をけうくんしをとしつれば・それをひつかけにして多くの人をせめをとす」1539
대성인이 일러 주신 말
  1. 「人ためにあらず我が故父の御ため」1540
  2. 「郷一郷・知るならば半郷は父のため・半郷は妻子・眷属をやしなふべし」1540
  3. 「上をもつて・おどさせ給うこそをかしく候へ」1540
  4. 「時光に手をやすらせ給い候はんずらん」1540
  5. 「人をけうくんせんよりも我が身をけうくんあるべし」1540
앞선 예고1275.5「人のせいしあらば心にうれしくおぼすべし」15121275.7「そりやうなんども・たがふ事あらば・いよいよ悦び」1542
도표 14 · 「한편인 척하는 사람」과 대성인의 처방

「그 나라의 불법은 그대에게」

1275 — 1278 · 겐지 원년 — 고안 원년

강의는 1277년 5월의 편지 뒤에 한 줄을 더 놓는다.

其の国の仏法は貴辺にまかせたてまつり候ぞ

그 나라의 불법은 그대에게 맡깁니다.

「다카하시전답서(미곡어서)」, 1467쪽

이 짧은 편지의 받는 사람은 분명하지 않다. 제목은 「다카하시 님」이고, 화광신문 목록도 받는 사람을 후지군 가시마의 다카하시 입도(닛코상인의 고모부)로 적는다. 강의는 이것을 1278년 6월 「도키미쓰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쓰고, 「아직 스무 살의 젊은 도키미쓰는 난 속에서 이 말에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라고 덧붙인다. 이 페이지는 받는 사람을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 편지가 그리는 형편 — 스루가 후지군의 신도를 맡아 이끌 재가의 중심이 필요했고, 대성인이 그 역할을 한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것 — 은 그대로 이 무렵 도키미쓰의 처지이기도 했다.

같은 편지에는 이런 말도 있다. 「같은 쌀이라도 방법의 사람을 먹이면 불종을 끊는 목숨을 이어 더욱 강성한 적이 된다. …… 법화의 행자를 먹이는 것은 자비 가운데 대자비의 쌀이다(同じ米穀なれども謗法の者をやしなうは仏種をたつ命をついで弥弥強盛の敵人となる……又法華の行者をやしなうは慈悲の中の大慈悲の米穀なるべし)」(1467쪽). 그리고 「석가불과 지용의 보살이 그대 몸에 들어가 바뀌신 것인가(釈迦仏・地涌の菩薩・御身に入りかはらせ給うか)」(1467쪽). 편지는 「지부보 · 시모쓰케보 등이 오거든 서둘러 보내라, 마쓰노 님도 만나거든 자세히 이야기하라」로 끝난다. 시모쓰케보는 아쓰와라 류센사의 승려 닛슈다(15절). 마쓰노 님은 도키미쓰의 외가다.

받는 사람 대조 — 「다카하시전답서(미곡어서)」(1467): 화광신문 목록은 받는 사람을 다카하시 입도로, 쪽 번호를 1467로 적는다. 창가교학연구실 블로그는 이 편지를 1457쪽의 「다카하시전답서」와 한 파일에 묶고, 「上野殿(南条時光)について」 강의는 「1467-01」로 인용하며 1278년 6월 도키미쓰 앞으로 추정한다. 이 페이지는 강의의 추정을 소개하되 받는 사람을 「분명하지 않다」로 둔다(C-4).

이체동심 — 닛코상인의 후지 홍교

1268 — 1278 · 짓소사 · 시주쿠원 · 류센사

도키미쓰가 「스루가의 기둥」이 되어 간 배경에는 닛코상인의 홍교가 있었다. 후지군은 닛코상인이 자란 땅이었고, 그의 홍교는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시기 전부터 이 지역의 천태종 절들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1268년(분에이 5년) 8월, 이와모토 짓소사의 승려들이 주지 지헨의 악행을 쉰한 조목으로 막부에 고발했다. 그 고발장 「짓소사 대중 수장」을 쓴 사람이 닛코상인이었다. 닛코상인은 시주쿠원의 공승(供僧)이기도 했다. 이 두 절을 거점으로 닛코상인은 절 안의 승려들을 교화하고, 이어 주변의 재가 사람들에게 법을 폈다. 절 안의 승려와 신도들이 잇달아 닛코상인의 제자가 되자, 1278년 시주쿠원의 겐요(嚴譽)는 닛코상인과 제자 닛지 · 쇼켄 · 겐슈 등을 절에서 쫓아냈다. 「니치렌의 제자들이 머물고 있다 하니, …… 대중이 평정하여 절 안에 살게 해서는 안 된다(大衆等評定せしめ寺内に住せしむべからざるの由の所に候なり)」(「시주쿠원신장」, 848쪽, 2차 확인). 닛코상인 일행은 그해 3월 이 추방이 부당하다고 막부에 호소했다.

1275년에는 홍교가 아쓰와라의 류센사에 미쳤다. 류센사의 승려 시모쓰케보 닛슈(日秀) · 에치고보 닛벤(日辨) · 쇼보 니치젠(日禪) · 미카와보 라이엔 등이 닛코상인의 제자가 되었다. 류센사의 원주대(院主代)는 호조 일문의 헤이 사콘 입도 교치(行智)였다. 놀란 류센사 쪽은 그해 6월 무렵부터 박해를 시작했다.

대성인은 이 무렵 아쓰와라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쓰셨다.

はわき房さど房等の事あつわらの者どもの御心ざし異体同心なれば万事を成し同体異心なれば諸事叶う事なしと申す事は外典三千余巻に定りて候

호키보 · 사도보 등의 일, 아쓰와라 사람들의 뜻이 이체동심(異體同心)이면 만사를 이루고 동체이심(同體異心)이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외전 삼천여 권에 정해져 있습니다.

「이체동심사」, 1463쪽

日蓮が一類は異体同心なれば人人すくなく候へども大事を成じて・一定法華経ひろまりなんと覚へ候、悪は多けれども一善にかつ事なし

니치렌의 일문은 이체동심이니 사람은 적어도 큰일을 이루어 반드시 법화경이 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악은 많아도 하나의 선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체동심사」, 1463쪽

1276년, 교치는 닛슈 등에게 법화경을 버리고 염불을 부르겠다는 기청문을 쓰라고 다그쳤다. 미카와보 라이엔은 기청문을 쓰고 물러났고, 닛슈 · 닛벤 · 니치젠은 절에서 쫓겨났다. 닛슈와 닛벤은 절 안에 숨어 머물렀고, 니치젠은 고향 가와이로 돌아갔다. 그러나 홍교는 멈추지 않았다. 1278년에는 아쓰와라 마을의 농민 진시로 · 야고로 · 야로쿠로 등이 닛슈 · 닛벤의 교화로 신앙에 들어왔다.

강의는 이 그물에 난조 집안이 어떻게 얽혀 있었는가를 짚는다. 도키미쓰의 일족은 물론, 닛코상인의 외조부 유이 입도, 닛코상인의 고모가 시집간 다카하시 입도, 도키미쓰의 누나가 시집간 이시카와 신뵤에 입도가 모두 닛코상인의 문하였다. 「도키미쓰의 집은 후지 지방 홍교의 거점의 하나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강의는 쓴다.

연대 대조 — 「이체동심사」는 날짜가 「8월 6일」뿐이다. 강의(「이체동심사」)는 1275년(겐지 원년)으로 추정하고 1279 · 1274년 설도 있다고 적는다. 받는 사람도 다카하시 입도로 보는 설, 오타 조묘로 보는 설 등이 있고, 앞뒤 두 편지가 잘못 합쳐졌다는 설도 있다. 이 페이지는 앞부분(이체동심의 대목)만 인용한다.

  1. ① 이와모토 짓소사1258 대성인 일체경 열람 · 닛코상인 입문 · 1268 수장
  2. ② 가모하라 시주쿠원닛코상인 수학 · 1278 추방
  3. ③ 아쓰와라 류센사1275 닛슈 · 닛벤 · 니치젠 귀의 · 1276 기청문 강요
  4. ④ 아쓰와라 마을1278 진시로 등 귀의
  5. ⑤ 가와이유이 입도 · 닛코상인 성장 · 니치젠의 고향
  6. ⑥ 가시마다카하시 입도
  7. ⑦ 오모스이시카와 신뵤에 · 누나 묘이치
  8. ⑧ 우에노난조 집안
  9. ⑨ 마쓰노외가
  10. ⑩ 니시야마니시야마 입도
  11. 가이 미노부북쪽 · 대성인
  12. 경계가미카타노쇼(우에노 · 오모스) / 시모카타노쇼(아쓰와라 · 득종가 영지)
위치는 약도 · 금 점선 — 닛코상인의 홍교망 · 점선 — 가미카타노쇼 / 시모카타노쇼(득종가 영지) 경계 · 15절
도표 15 · 후지 기슭의 문하

미노부의 산과 우에노의 짐

1274 — 1282 · 마흔세 번의 공양

강의는 어서에 남은 도키미쓰의 공양을 마흔세 번으로 센다. 「종문 최고의 횟수」다. 미노부와 우에노가 비교적 가까웠던 덕도 있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흐린 가을, 후지강 골짜기의 바위 많은 급류를 따라 벼랑에 난 좁은 산길, 무너져 내린 돌더미 곁을 짚 꾸러미 둘을 실은 짐말 한 마리와 그 앞을 걷는 작은 뒷모습 하나가 지나가고, 건너편 강가에 초가 마을, 멀리 구름 위로 후지산이 솟은 금박 수묵화
그림 3 · 산을 넘는 짐말

ただなる時だにも・するがと・かいとのさかひは山たかく河ふかく・石おほくみちせばし、いわうや・たうじは・あめはしのをたてて三月におよび・かわはまさりて九十日、やまくづれ・みちふさがり・人もかよはず・かつてもたえて・いのちかうにて候いつるに

평소에도 스루가와 가이의 경계는 산이 높고 강이 깊으며 돌이 많고 길이 좁습니다. 하물며 요즘은 비가 대나무 살을 세운 듯 석 달이나 내리고 강물이 불어난 지 아흔 날, 산이 무너지고 길이 막혀 사람도 다니지 않고 양식도 끊어져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종종물어소식」, 1549쪽 — 받는 사람은 화광신문 목록에 도키미쓰, 강의에 난조 헤이시치로

1278년(고안 원년)은 정월부터 비가 그치지 않았고, 7월부터는 큰비가 이어졌다. 9월 19일의 편지는 미노부의 형편을 이렇게 전한다. 「이곳은 산중인 데다 남쪽은 하키리강, 북쪽은 하야강, 동쪽은 후지강, 서쪽은 깊은 산이라 …… 산이 갈라져 골짜기를 메우고 돌이 흘러 길을 막는다. 7월에는 소금 한 되를 돈 백 문에, 소금 다섯 홉을 보리 한 말에 바꾸었는데 지금은 아예 소금이 없다(七月なんどは・しほ一升を・ぜに百・しほ五合を麦一斗にかへ候しが・今はぜんたい・しほなし)」. 강의는 평소 소금 값의 스무 배쯤이었으리라고 셈한다. 그때 도키미쓰가 소금 한 짐을 보냈다. 대성인은 「그 뜻은 대지보다 두텁고 허공보다 넓다(このしほを一駄給びて候御志・大地よりもあつく虚空よりもひろし)」(「우에노전답서(1551)」, 1551쪽)고 쓰셨다. 강의는 난조 집안이 1276년 3월 · 1279년 8월 · 1281년 9월 · 1282년 정월에도 소금을 보냈으니 해마다 거의 정해 놓고 소금을 올렸던 것 같다고 쓴다.

그해 윤10월의 편지는 다른 재난을 전한다. 「지난해와 올해 큰 역병이 이 나라에 일어나, 사람이 죽는 것이 큰바람에 나무가 쓰러지고 큰눈에 풀이 꺾이는 것 같아 한 사람도 남을 것 같지 않았다(去今年は大えき此の国にをこりて人の死ぬ事大風に木のたうれ大雪に草のおるるがごとし・一人ものこるべしともみへず候いき)」(「우에노전답서(1552)」, 1552쪽). 가을에는 큰비와 큰바람으로 온 나라가 흉작이었다. 대성인은 「이런 세상에 어떤 숙선이 있어 법화경의 행자를 길러 주시는가(かかるよにいかなる宿善にか・法華経の行者をやしなわせ給う事ありがたく候)」(1552쪽)라고 쓰셨다.

그해 5월에는 도키미쓰의 아내가 쌀 두 섬을 보냈다.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산이라 하고 강이라 하고 말이라 하고 하인이라 하고, 이모저모 어려운 가운데 거듭 보내 주신 뜻은 말할 수 없다(山といひ・河といひ・馬といひ・下人といひ・かたがた・かんなんのところに・度度の御志申すばかりなし)」(「난조전부인답서」, 1547쪽). 산과 강을 넘을 말과, 그 짐을 끌고 갈 하인이 있어야 공양이 닿았다. 작은 마을의 지도에게 그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편지 끝에 「병중인 분의 임종 정념, 영산정토는 의심 없다(御所労の人の臨終正念・霊山浄土疑なかるべし)」(1547쪽)는 말이 있다. 그해 봄, 집안에 앓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공양을 받을 때마다 대성인은 그것을 법화경에 대한 공양으로 받으셨다. 「그대가 보내 주신 보리는 보리가 아니라 금이다. 금이 아니라 법화경의 문자다. 우리 눈에는 보리지만 십나찰녀는 이 보리를 부처의 씨앗으로 보실 것이다(御心ざしは麦にはあらず金なり・金にはあらず法華経の文字なり、我等が眼にはむぎなり・十らせつには此のむぎをば仏のたねとこそ御らん候らめ)」(「난조전답서(1541)」, 1542쪽).

분류별 등장 횟수(21통)
  • 곡물10통
  • 토란9통
  • 소금3통
  • 돈3통
  • 옷1통
  • 술5통
  • 해조6통
  • 채소7통
  • 과일4통
  • 그 밖7통
  1. 1274.7「우에노전답서(1507)」도키미쓰鵞目十連・かわのり二帖・しやうかう二十束돈해조채소
  2. 1274.11「우에노전답서(1508)」도키미쓰聖人二管・柑子一篭・蒟蒻十枚・薯蕷一篭・牛房一束술채소과일그 밖
  3. 1275.5「우에노전답서(1511)」도키미쓰いものかしら…一駄토란
  4. 1275.7「우에노전답서(1512)」도키미쓰むぎひとひつ・かわのり五条・はじかみ六十곡물해조채소
  5. 1275.7「난조전답서(1541)」도키미쓰白麦一俵・小白麦一俵・河のり五でふ곡물해조
  6. 1276.1「난조전답서(1529)」도키미쓰もちゐ・七十まい・さけひとつつ・いもいちだ・河のりひとかみぶくろ・だいこんふたつ・やまのいも七ほん곡물토란술해조채소
  7. 1276.3「난조전답서(1530)」도키미쓰いものかしら・河のり・又わさび토란해조채소
  8. 1276.윤3「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도키미쓰かたびら一つ・しをいちだ・あぶら五そう소금옷그 밖
  9. 1277.5「우에노전답서(1537)」도키미쓰いものかしら一駄토란
  10. 1278.4「우에노전답서(1545)」도키미쓰白米一斗・いも一駄・こんにやく五枚곡물토란그 밖
  11. 1278.5「난조전부인답서」아내八木二俵곡물
  12. 1278.9「우에노전답서(1551)」도키미쓰塩一駄はじかみ소금채소
  13. 1278.윤10「우에노전답서(1552)」도키미쓰いゑのいも一駄・かうじ一こ・ぜに六百のかわり御ざのむしろ十枚토란과일그 밖
  14. 1279.12「우에노전답서(1561)」도키미쓰白米一だ곡물
  15. 1280.10「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어머니鵞目両ゆひ・白米一駄・芋一駄・すりだうふ・こんにやく・柿一篭・ゆ五十곡물토란돈과일그 밖
  16. 1280.12「우에노전답서(1574)」도키미쓰鵞目一貫文돈
  17. 1281.1「우에노니부인답서(1575)」어머니聖人ひとつつ・ひさげ十か・十字百・あめひとをけ…柑子ひとこ・串柿十くし술과일그 밖
  18. 1281.9「난조전답서(1578)」도키미쓰塩一駄・大豆一俵・とつさか一袋・酒一筒곡물소금술해조
  19. 1281.9「우에노전답서(1579)」도키미쓰いゑのいも一駄・ごばう一つと・大根六本토란채소
  20. 1281.11「우에노니부인답서(1580)」어머니白牙一駄四斗定あらひいも一俵곡물토란
  21. 1281.12「우에노전모친답서(신병서)」어머니乃米一だ・聖人一つつ・二十ひさげか・かつかう・ひとかうぶくろ곡물술그 밖
本文이 이번 자료에 있는 편지만 — 강의는 공양을 모두 43회로 셈 · 막대는 아래 표의 분류 배지 수 · 16절
도표 16 · 본문에 남은 난조 집안의 공양

이시카와의 히메고젠 — 「다만 남묘호렌게쿄」

1278년 3월 — 4월 · 고안 원년

1278년 3월 24일, 도키미쓰의 누나 묘이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묘이치의 딸, 곧 오모스의 지도 이시카와 신뵤에 입도의 딸 「히메고젠」도 병상에 있었다. 그녀는 여러 번 미노부에 편지를 보냈는데, 3월 14, 15일 무렵 밤에 마지막 편지가 왔다. 「세상을 보니 병 없는 사람도 올해를 넘길 것 같지 않은데, 본래 병약한 몸이 이제 급해졌으니 이것이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도키미쓰는 조카의 죽음을 미노부에 알리며 흰쌀 한 말, 토란 한 짐, 곤약 다섯 장을 올렸다. 4월 1일, 대성인은 답장을 쓰셨다. 「우에노전답서(1545)」다.

されば・つゐに・はかなくならせ給いぬるか

그렇다면 끝내 덧없이 가셨는가.

「우에노전답서(1545)」, 1545쪽

대성인은 그녀가 임종에 남묘호렌게쿄를 부른 것을 두고 「외눈의 거북이 뜬 나무의 구멍에 들어가고, 하늘에서 내린 실이 땅의 바늘구멍에 들어간 것과 같다(臨終に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させ給いける事は・一眼のかめの浮木の穴に入り・天より下いとの大地のはりの穴に入るがごとし)」(1546쪽)고 하셨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말법의 수행이 무엇인가를 가장 짧은 말로 밝히셨다.

南無妙法蓮華経と申すは法華経の中の肝心・人の中の神のごとし、此れにものを・ならぶれば・きさきのならべて二王をおとことし(中略)今末法に入りぬれば余経も法華経もせんなし、但南無妙法蓮華経なるべし

남묘호렌게쿄라는 것은 법화경 가운데 간심이요, 사람 가운데 혼과 같습니다. 이것에 다른 것을 나란히 두면, 왕후가 두 왕을 남편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중략) 이제 말법에 들어서면 다른 경도 법화경도 소용없고, 다만 남묘호렌게쿄뿐입니다.

「우에노전답서(1545)」, 1546쪽

「해가 뜨면 등불은 소용없고, 비가 내리는데 이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갓난아이에게 젖 밖의 것을 먹이겠는가(日出でぬれば・とほしびせんなし・雨のふるに露なにのせんかあるべき、嬰児に乳より外のものをやしなうべきか)」(1546쪽). 그리고 편지는 이렇게 맺는다. 「이 여인은 무엇을 안 것도 아닌데 저절로 이 뜻에 맞아 해내었다. 존귀하다, 존귀하다(此の女人は・なにとなけれども自然に此の義にあたりて・しををせるなり、たうとし・たうとし)」(1546쪽).

같은 편지에는 「니치렌의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법문을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나쁜 것 같다(又日蓮が弟子等の中に・なかなか法門しりたりげに候人人は・あしく候げに候)」(1546쪽)는 말도 있다. 학문 있는 제자들의 잘난 체보다, 병상의 젊은 여인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부른 제목이 법에 맞았다. 대성인은 이 편지를 그 여인의 외삼촌에게 보내셨다.

일족의 사람들 — 구로타로와 헤이시치로

1276 — 1278 · 우에노 주변의 난조 일족

대성인의 편지는 도키미쓰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았다. 우에노 주변에 사는 난조 일족에게도 편지가 갔다.

구로타로(九郞太郞) — 1276년 9월과 1278년 11월, 두 번 편지를 받았다. 1276년에는 「집의 토란 한 짐」을 보냈다. 대성인은 미노부의 땅을 이렇게 그리셨다. 「이 미노부의 골짜기는 가이국 하키리 마을 안의 깊은 산이다. 서쪽은 시치멘의 벼랑, 동쪽은 덴시 산, 남쪽은 다카토리 산, 북쪽은 미노부 산. 네 산 가운데 깊은 골짜기가 있어 상자 밑바닥 같다. …… 그러나 스루가의 토란 같은 돌은 하나도 없다(然れどもするがのいものやうに候石は一も候はず)」(「구로타로전답서(1535)」, 1535쪽). 그리고 「토란이 드물지 않다고 쓰셨는데, 그쪽에는 많은가 보다. 아, 그립다, 그립다」라고 쓰셨다. 1278년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을 보아도 돌아가신 우에노 님의 일이 생각납니다(これにつけても・こうえのどのの事こそをもひいでられ候へ)」(「구로타로전답서(1553)」, 1553쪽). 대성인은 「사람들이 시기하여 쓰지 않던 것을 돌아가신 우에노 님이 믿으셔서 부처가 되셨다. 그대들은 그 일족으로서 그 뜻을 이루시는가(故上野殿信じ給いしによりて仏に成らせ給いぬ、各各は某の末にて此の御志をとげ給うか)」(1554쪽)라고 쓰시고, 「게다가 가난하여 하인도 없고 산과 강이 가로막혀 있다(その上みひんにして・げにんなし、山河わづらひあり)」(1554쪽)며 그의 공양을 기리셨다. 강의는 홋리 니치코의 말을 빌려 구로타로를 아버지 난조시치로의 아우의 아들, 곧 도키미쓰의 사촌으로 짐작한다.

난조 헤이시치로(南條平七郞) — 후지군 가미카타노쇼 나리데고의 급주(給主)였다. 지도가 아니라 막부에게서 작은 급전을 받은 무사다. 1276년 12월 쌀 한 짐과 토란 한 짐을 보내 「본존공양어서」를 받았다. 대성인은 「법화경의 문자는 육만 구천삼백팔십사 자. 하나하나의 문자는 우리 눈에는 검은 글자로 보이지만 부처의 눈에는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다(法華経の文字は六万九千三百八十四字・一一の文字は我等が目には黒き文字と見え候へども仏の御眼には一一に皆御仏なり)」(1536쪽)라고 쓰셨다. 1278년 7월의 「종종물어소식」은 받는 사람이 갈린다. 화광신문 목록은 도키미쓰로 적고, 강의는 이 헤이시치로에게 보낸 것으로 본다. 이 페이지는 두 설을 함께 적는다. 그의 어머니는 닛코상인의 기록에 「에치고보(닛벤)의 제자」로 적혀 있다.

니타 · 이시카와 · 마쓰노 — 1277년 5월의 편지에는 「니타 님의 일은 정말인가. 오키쓰의 일은 들었다(にいた殿の事まことにてや候らん、をきつの事きこへて候)」(1540쪽)라는 짧은 말이 있다. 누나가 시집간 이즈의 니타 집안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오모스의 이시카와 집안에서는 누나와 조카가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17절). 외가 마쓰노 집안의 할아버지는 1278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1277년 12월, 대성인은 도키미쓰에게 짧은 편지 하나를 보내셨다. 「대백우거서」다. 법화경 비유품의 흰 소가 끄는 큰 수레를 들어, 이렇게 쓰셨다.

抑此の車と申すは本迹二門の輪を妙法蓮華経の牛にかけ、三界の火宅を生死生死とぐるり・ぐるりとまはり候ところの車なり、ただ信心のくさびに志のあぶらをささせ給いて霊山浄土へまいり給うべし

대저 이 수레는 본문 · 적문 두 바퀴를 묘법연화경의 소에 걸어, 삼계의 불타는 집을 생사 생사 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수레입니다. 다만 신심의 쐐기를 박고 뜻의 기름을 쳐서 영산정토로 가십시오.

「대백우거서」, 1543쪽

신심은 바퀴가 빠지지 않게 박는 쐐기이고, 뜻은 바퀴가 잘 돌게 치는 기름이다. 짐말과 짐수레로 미노부를 오가던 젊은 지도에게 맞춘 비유였다.

닛코상인↓ 「제자분첩」에 오름 — 아래 모든 집안우에노 난조 집안도키미쓰 · 난조도키미쓰어머니
  • 마쓰노 집안외가 · 마쓰노 로쿠로자에몬 입도 · 닛지
  • 이시카와 집안오모스 지도 · 누나 묘이치 · 히메고젠 · 마고사부로 요시타다
  • 니타 집안이즈 · 누나 렌아니 · 니타시로노부쓰나 · 니치모쿠상인
  • 아하라구치 집안누이
  • 난조 일족구로타로 · 헤이시치로 — 「本尊供養御書」 1536 · 「九郎太郎殿御返事」 1535 · 1553
  • 유이 입도가와이 · 닛코상인의 외조부
  • 다카하시 입도가시마 · 닛코상인의 고모부
혼인 관계는 강의의 계도와 기록에 따름 · 옅은 금선 — 닛코상인의 「제자분첩」에 오름 · 18절
도표 17 · 난조 일족과 혼인의 그물

창가학회 강의는 1277년 5월의 편지를 「난에 지지 않는 신심」의 지도로 읽는다. 그 핵심은 대성인이 젊은 지도에게 맞서 싸우라고만 하지 않으셨다는 데 있다. 그를 타이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는 효의 말로, 「윗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목숨은 윗분께 바친다」는 충의 말로 답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대가 꺾이면 스루가의 신도가 모두 꺾인다」는 말로 그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려 주셨다. 열아홉의 지도는 그 무게를 짊어졌다. 그 짐 위로 짐말이 산을 넘어 갔다. 소금 한 짐, 토란 한 짐. 대성인은 그것을 「법화경의 목숨을 잇는」 일이라 부르셨다.

4부 아쓰와라

1279년 봄 — 「도장(刀杖)」의 편지

1279년 4월 20일 · 고안 2년 · 스물한 살

1279년(고안 2년)에 들어서자 후지 기슭의 박해는 피를 보기 시작했다. 4월 8일, 후지 센겐 신사의 야부사메(流鏑馬) 행사 날, 구경꾼들이 붐비는 가운데 법화경을 믿는 시로(四郎)라는 사내가 칼에 찔렸다. 8월에는 야시로(彌四郎)라는 사내가 누군가에게 목이 잘렸다. 두 사건 모두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뒤에 대성인이 닛슈 · 닛벤의 이름으로 쓰신 「류센사신장」은 이 두 사건이 교치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고발한다. 「시모카타 정소대(政所代)를 부추겨 지난 4월 신사(神事)의 한창때 법화경을 믿는 행인 시로를 칼로 찌르게 하고, 지난 8월 야시로의 목을 베게 했다(下方の政所代に勧め去る四月御神事の最中に法華経信心の行人・四郎男を刄傷せしめ去る八月弥四郎坊男の頸を切らしむ)」(853쪽).

4월 20일, 시로가 찔린 지 열이틀 뒤, 대성인은 도키미쓰에게 긴 편지를 보내셨다. 「우에노전답서(1555)」다. 편지는 대성인 자신이 받은 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抑日蓮・種種の大難の中には竜口の頚の座と・東条の難にはすぎず、其の故は諸難の中には命をすつる程の大難はなきなり、或はのりせめ・或は処をおわれ・無実を云いつけられ・或は面をうたれしなどは・物のかずならず

대저 니치렌이 받은 갖가지 대난 가운데 다쓰노구치의 참수의 자리와 도조의 난을 넘는 것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여러 난 가운데 목숨을 버릴 만한 대난은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욕을 먹고 혹은 쫓겨나고 무고를 당하고 혹은 얼굴을 맞은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에노전답서(1555)」, 1555쪽

대성인은 법화경 권지품의 「칼과 막대를 더하는(及加刀杖)」 난을 두고, 막대(杖)의 난을 받은 사람은 있어도 칼(刀)의 난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하셨다. 불경보살은 막대와 기와 · 돌을 맞았으나 칼의 난은 없었고, 천태 · 묘락 · 전교는 칼도 막대도 받지 않았다. 「니치렌은 칼과 막대 두 글자를 다 만났다(日蓮は刀杖の二字ともに・あひぬ)」(1557쪽). 칼의 난은 도조 마쓰바라와 다쓰노구치, 막대의 난은 1271년 9월 12일 쇼보가 법화경 제5권으로 대성인의 얼굴을 친 일이다. 그런데 대성인은 그 쇼보를 원망하지 않으셨다. 학문하지 않던 아들을 뽕나무 활로 때려 가르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 이렇게 쓰셨다. 「니치렌이 불과를 얻는다면 어찌 쇼보의 은혜를 버리겠는가. 하물며 법화경의 은혜의 막대를(日蓮仏果をえむに争かせうばうが恩をすつべきや、何に況や法華経の御恩の杖をや)」(1557쪽).

이 편지가 이 무렵에 이 젊은 지도에게 보내진 까닭을 강의는 이렇게 읽는다. 1279년은 닛코상인의 지휘 아래 아쓰와라 일대의 홍교가 활발히 펼쳐지고, 그 결과 「삼장사마」가 다투어 일어나던 해였다. 대성인은 난이 무엇인가를, 당신의 몸에 일어난 난으로 먼저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とにかくに法華経に身をまかせ信ぜさせ給へ、殿一人にかぎるべからず・信心をすすめ給いて過去の父母等をすくわせ給へ

어쨌든 법화경에 몸을 맡기고 믿으십시오. 그대 한 사람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신심을 권하여 과거의 부모 등을 구하십시오.

「우에노전답서(1555)」, 1557쪽

日蓮生れし時より・いまに一日片時も・こころやすき事はなし、此の法華経の題目を弘めんと思うばかりなり、相かまへて相かまへて自他の生死はしらねども御臨終のきざみ生死の中間に日蓮かならず・むかいにまいり候べし

니치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루 한때도 마음 편한 적이 없습니다. 이 법화경의 제목을 넓히려고 생각할 뿐입니다. 부디 부디, 나와 그대의 생사는 알 수 없지만 임종 때 생사의 중간에 니치렌이 반드시 마중 나가겠습니다.

「우에노전답서(1555)」, 1558쪽

편지는 이 비유들로 끝난다. 「굶주려 밥을 바라고, 목말라 물을 그리듯, 그리워 사람을 보고 싶어 하듯, 병에 약을 의지하듯, 얼굴 고운 사람이 연지와 분을 바르듯, 법화경에 신심을 다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것입니다(かつへて食をねがひ・渇して水をしたうがごとく・恋いて人を見たきがごとく・病にくすりをたのむがごとく、みめかたちよき人・べにしろいものをつくるがごとく・法華経には信心をいたさせ給へ、さなくしては後悔あるべし)」(1558쪽).

불경보살
칼(刀)의 난없음
막대(杖)의 난「杖木・瓦石」
출전1557
천태 · 묘락 · 전교
칼(刀)의 난없음
막대(杖)의 난없음 「刀杖不加」
출전1557
니치렌
칼(刀)의 난도조 마쓰바라(1264.11.11) · 다쓰노구치(1271.9.12)
막대(杖)의 난쇼보가 법화경 제5권으로 침(1271.9.12)
출전「日蓮は刀杖の二字ともに・あひぬ」(1557)

「日蓮仏果をえむに争かせうばうが恩をすつべきや、何に況や法華経の御恩の杖をや」1557

도표 18 · 칼과 막대

9월 21일 — 벼 베는 날

1279년 9월 21일 — 10월 · 아쓰와라

9월 21일, 아쓰와라 마을에서 신도 농민들이 닛슈의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그때 류센사의 야토지(彌藤次) 일당과 정소의 관리, 교치 쪽 무사들이 무장하고 덮쳐, 진시로를 비롯한 스무 명을 붙잡아 시모카타의 정소로 끌고 갔다. 진시로의 형 야토지는 미리 준비해 둔 고소장을 막부에 냈다. 고소장의 내용은 대성인이 쓰신 「류센사신장」에 인용되어 남아 있다.

흐린 가을날 후지산 남쪽 들판의 논, 반쯤 베어 낸 자리에 볏단이 줄지어 서 있고 나머지 반은 누렇게 익은 벼가 그대로 서 있으며, 벤 그루터기 위에 낫 몇 자루와 엎어진 짚 바구니가 놓이고, 길 건너 삼나무 숲 곁에 오래된 절 지붕,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5 · 가을의 아쓰와라

訴状に云く今月二十一日数多の人勢を催し弓箭を帯し院主分の御坊内に打ち入り下野坊は乗馬相具し熱原の百姓・紀次郎男・点札を立て作毛を苅り取り日秀の住房に取り入れ畢んぬ云云取意

고소장에 이르기를 「이달 21일 많은 사람을 모아 활과 화살을 차고 원주(院主) 몫의 경내에 쳐들어가, 시모쓰케보는 말을 거느리고 아쓰와라의 백성 기지로가 푯말을 세워 벼를 베어 닛슈의 승방에 들였다」고 한다(취의).

「류센사신장」, 852쪽

남의 논의 벼를 함부로 벤 「가리타 낭자(刈田狼藉)」라는 죄목이었다. 고소장은 또 이렇게 적었다. 「닛슈 · 닛벤은 니치렌 스님의 제자라 하며, 법화경 밖의 다른 경이나 진언의 행자는 모두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日秀・日弁・日蓮房の弟子と号し法華経より外の余経或は真言の行人は皆以て今世後世叶う可からざるの由・之を申す云云取意)」(849–850쪽).

「류센사신장」

10월, 대성인은 닛슈 · 닛벤의 이름으로 이 고소에 답하는 진술서를 쓰셨다. 「류센사신장」이다. 本文 머리에 「쉰여덟 살 대작(五十八歳御代作)」이라 적혀 있다. 진장은 먼저 대성인이 어떤 분인지를 밝힌다. 「입정안국론」의 예언이 맞았고, 「본사는 성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법화경을 읽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것이 어찌 충성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어서 벼 베기의 고소에는 이렇게 답한다.

此の条・跡形も無き虚誕なり日秀等は行智に損亡せられ不安堵の上は誰の人か日秀等の点札を叙用せしむ可き

이 조목은 흔적도 없는 거짓입니다. 닛슈 등은 교치에게 손해를 입어 안주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누가 닛슈 등의 푯말을 따르겠습니까.

「류센사신장」, 852쪽

진장은 교치가 1276년에 승려들에게 법화경을 버리겠다는 기청문을 쓰게 하고, 쓰지 않은 사람들의 승방을 빼앗은 일을 적는다. 「라이엔은 지시를 따라 기청문을 쓰고 안주했으나, 니치젠 등은 기청문을 쓰지 않았기에 직책과 승방을 빼앗겼다(頼円は下知に随つて起請を書いて安堵せしむと雖も日禅等は起請を書かざるに依つて所職の住坊を奪い取るの時)」(852–853쪽). 그리고 교치의 소행을 하나하나 고발한다. 법화경을 감물 들인 종이로 만들어 염색 본으로 쓰고, 지붕 재목을 사사로이 쓰고, 4월과 8월의 사건을 일으키고, 절의 백성들을 시켜 사냥한 짐승을 별당의 방에서 먹고, 부처 앞의 못에 독을 풀어 물고기를 잡아 팔았다. 「보고 들은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다. 불법이 파멸하는 바탕이니 슬픔이 그지없다(見聞の人・耳目を驚かさざるは莫し仏法破滅の基悲んで余り有り)」(853쪽).

1279.9.21체포10월신장
① 야토지의 고소장(신장 인용)「日秀・日弁・日蓮房の弟子と号し法華経より外の余経或は真言の行人は皆以て今世後世叶う可からざるの由」849–850① 진장의 반론본사 니치렌 성인의 「입정안국론」 · 「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豈殊忠に非ずや」851
② 야토지의 고소장(신장 인용)「今月二十一日数多の人勢を催し弓箭を帯し…作毛を苅り取り日秀の住房に取り入れ畢んぬ」852② 진장의 반론「此の条・跡形も無き虚誕なり」852
교치의 소행(신장의 고발)
  1. 기청문 강요와 승방 몰수 · 852–853
  2. 지붕 재목 사용
  3. 4월 시로 · 8월 야시로 · 853
  4. 사냥한 짐승을 별당 방에서 먹음
  5. 못에 독을 풀어 물고기를 팖 · 853
도표 19 · 「류센사신장」 — 고소와 반론

가마쿠라의 문초 — 「성인어난사」와 「성인등답서」

1279년 9월 말 — 10월 17일

붙잡힌 스무 명은 9월 하순 가마쿠라로 끌려갔다. 문초는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가 맡았다. 집권 도키무네와 그 아들 사다토키를 섬긴 득종가의 내관령이자 사무라이도코로의 소사(所司)였다. 여덟 해 전 다쓰노구치에서 대성인의 목을 베려 했던 사람이다. 아쓰와라가 있는 시모카타노쇼는 득종가의 영지였으므로 그가 직접 나섰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9월 26일, 대성인은 「호키 님과 여러 사람 가운데(伯耆殿並諸人御中)」 앞으로 짧은 편지를 보내셨다. 「이 일은 이미 범천 · 제석 · 일월 등에게 아뢰어 두었다. 결코 어기지 마라. 저마다 하늘의 헤아림이라 생각하라(此の事はすでに梵天・帝釈・日月等に申し入れて候ぞ。あへてたがえさせ給ふべからず。各各天の御はからいとをぼすべし)」(「호키전등답서」, 1456쪽, 2차 확인).

10월 1일, 대성인은 「성인어난사」를 쓰셨다. 받는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人人御中)」, 곧 문하 전체였다. 대성인은 입종 이래 스물일곱 해의 대난을 돌아보시고 문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各各師子王の心を取り出して・いかに人をどすともをづる事なかれ、師子王は百獣にをぢず・師子の子・又かくのごとし、彼等は野干のほうるなり日蓮が一門は師子の吼るなり

각자 사자왕의 마음을 꺼내어, 사람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겁내지 마라. 사자왕은 온갖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자의 새끼도 그러하다. 저들은 여우가 짖는 것이요, 니치렌의 일문은 사자가 포효하는 것이다.

「성인어난사」, 1190쪽

彼のあつわらの愚癡の者ども・いゐはげまして・をどす事なかれ、彼等にはただ一えんにおもい切れ・よからんは不思議わるからんは一定とをもへ、ひだるしとをもわば餓鬼道ををしへよ、さむしといわば八かん地獄ををしへよ

저 아쓰와라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말로 격려하며 겁주지 마라. 그들에게는 그저 한결같이 각오하라, 잘되면 불가사의요 잘못되면 정해진 것이라 생각하라고 하라. 배고프다 하면 아귀도를 가르치고, 춥다 하면 팔한지옥을 가르치라.

「성인어난사」, 1190–1191쪽

글의 끝에는 「사부로자에몬 님 곁에 두라(さぶらうざへもん殿のもとに・とどめらるべし)」(1191쪽)는 한 줄이 있다. 문하 전체에 보내는 글을 가마쿠라의 시조깅고에게 맡기신 것이다(시조깅고 편 33절). 스루가의 도키미쓰와 가마쿠라의 시조깅고가 이 법난의 앞뒤에서 함께 움직였다.

히키메의 화살

가마쿠라에서의 문초를 홋리 니치코의 『아쓰와라 법난사』는 이렇게 그린다고 강의는 전한다. 헤이노사에몬노조는 스무 명을 뜰에 끌어내 「빨리 법화경 신앙을 그만두고 염불을 불러라. 그러면 죄를 용서하여 고향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다. 진시로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법화경의 신앙을 말했다. 격노한 헤이노사에몬노조는 열세 살의 둘째 아들 이누마 판관에게 히키메(蟇目)의 화살로 그들을 쏘게 했다. 소리 나는 나무 화살촉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화살이었다. 스무 명은 맞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소리 높여 남묘호렌게쿄를 불렀다. 10월 15일, 우두머리로 지목된 진시로 · 야고로 · 야로쿠로 세 사람이 목이 잘렸고, 나머지 열일곱 명은 추방되었다.

그 소식은 곧바로 미노부에 닿았다. 10월 17일 술시, 대성인은 답장을 쓰셨다. 「성인등답서」다.

今月十五日酉時御文同じき十七日酉時到来す、彼等御勘気を蒙るの時・南無妙法蓮華経・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と云云、偏に只事に非ず定めて平金吾の身に十羅刹入り易りて法華経の行者を試みたもうか

이달 15일 유시의 편지가 같은 달 17일 유시에 닿았다. 그들이 처벌을 받을 때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렀다 한다.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헤이 깅고의 몸에 십나찰녀가 들어가 바뀌어 법화경의 행자를 시험하신 것인가.

「성인등답서」, 1455쪽

「헤이 깅고(平金吾)」는 헤이노사에몬노조다. 대성인은 이 법난을 「시험」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닛코상인 등에게 「깊이 이 뜻을 알고 문주(問注)를 다하라(伯耆房等深く此の旨を存じて問注を遂ぐ可し)」(1455쪽)고 하셨다.

닛코상인은 뒤에 이 세 사람을 기록에 이렇게 남겼다. 「이 세 사람은 에치고보 · 시모쓰케보의 제자 스무 명 가운데이다. 고안 원년에 믿기 시작했는데, 형 야토지 입도의 고소로 가마쿠라에 불려 가 끝내 목이 잘렸다. 헤이 사에몬 입도의 처분이다. …… 그 뒤 열네 해가 지나 헤이 입도와 판관 부자가 반역을 일으켜 죽임을 당했다. 부자가 이는 예삿일이 아니다. 법화의 현벌을 받은 것이다」(사료, 강의 인용). 1293년(쇼오 6년) 4월 22일, 헤이노사에몬노조는 반역의 혐의로 둘째 아들 이누마 판관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1. ① 9.21 아쓰와라 벼 베는 날스무 명 체포 · 시모카타 정소로
  2. ② 9월 하순 가마쿠라로야토지의 고소장852
  3. ③ 9.26 호키 님과 여러 사람 가운데伯耆殿並諸人御中 · 各各天の御はからいとをぼすべし1456*
  4. ④ 10.1 「성인어난사」各各師子王の心を取り出して · 彼のあつわらの愚癡の者ども1190 · 1190–1191
  1. ⑤ 10월 「류센사신장」 · 10.15 세 사람 참수 · 열일곱 명 추방849–853
  2. ⑥ 10.17 「성인등답서」南無妙法蓮華経・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と云云1455
  3. ⑦ 11.6 「우에노전답서(1560)」上野賢人殿 · 此れはあつわらの事の・ありがたさに申す御返事なり1561

1293.4.22 헤이노사에몬노조 부자 주살사료

* 강의 인용 원문 · 21절
도표 20 · 1279년 9월 21일부터 11월 6일까지

「우에노 현인」 — 1279년 11월 6일

1279년 11월 6일 · 아쓰와라 법난 직후

세 사람이 처형된 지 스무 날 남짓 뒤, 대성인은 도키미쓰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받는 사람은 「우에노 현인 님(上野賢人殿)」이었다. 추신이 그 까닭을 밝힌다.

此れはあつわらの事の・ありがたさに申す御返事なり

이것은 아쓰와라의 일이 고마워서 드리는 답장입니다.

「우에노전답서(1560)」, 1561쪽

강의는 이 한 줄을 아쓰와라 법난에서 헌신적으로 외호를 다한 도키미쓰에 대한 위로의 말로 읽는다. 강의는 그에게 보낸 편지에 아쓰와라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언급되는 것은 1277년 5월 무렵부터라고 쓴다(3부 13절). 법난이 거세지자 그는 지도라는 자리를 걸고 동지들을 지켰다. 어떻게 지켰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뒤의 편지들이 그 흔적을 전한다(23 · 24절).

용문

편지는 중국의 용문(龍門)이라는 폭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높이가 열 길, 물이 떨어지는 것이 화살보다 빠르다. 많은 붕어가 모여 오르려 하는데, 오르면 용이 된다. 그러나 백에 하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도, 열 해 스무 해에 하나도 오르지 못한다. 빠른 여울에 밀려 돌아가고, 독수리와 매와 솔개와 올빼미에게 먹히고, 폭포 양쪽에 늘어선 어부들에게 그물로, 바구니로, 활로 잡힌다. 대성인은 이어서 헤이 씨 집안이 사다모리 · 마사모리 · 다다모리 · 기요모리로 여러 대를 거쳐서야 비로소 궁전에 오른 이야기를 하시고, 「부처가 되는 길도 이에 못하지 않다(仏になるみち・これにをとるべからず)」(1560쪽)고 하셨다. 그리고 사리불이 육십 겁 동안 보살행을 닦다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난 일, 대통불의 시대에 법화경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마왕이 국주의 몸에 들어가 괴롭히자 버리고 물러나 오랜 겁을 떠돈 일을 들어 이렇게 이으셨다.

깎아지른 바위 벼랑 사이로 거세게 쏟아지는 큰 폭포, 물보라 이는 웅덩이에 모여든 잉어들 가운데 몇 마리가 물살을 거슬러 뛰어오르고 한 마리는 폭포 중턱까지 올랐으며, 오른쪽 벼랑 끝 마른 가지 위에서 매 한 마리가 내려다보는 금박 수묵화
그림 6 · 용문의 폭포

かれは人の上とこそ・みしかども今は我等がみにかかれり、願くは我が弟子等・大願ををこせ、去年去去年のやくびやうに死にし人人の・かずにも入らず、又当時・蒙古のせめに・まぬかるべしともみへず、とにかくに死は一定なり、其の時のなげきは・たうじのごとし、をなじくは・かりにも法華経のゆへに命をすてよ、つゆを大海にあつらへ・ちりを大地にうづむとをもへ

그것은 남의 일이라고만 보았는데 이제는 우리 몸에 걸렸습니다. 바라건대 나의 제자들이여, 대원을 일으켜라. 지난해와 그 전해의 역병에 죽은 사람들의 수에도 들지 않았고, 또 지금 몽골의 공격을 벗어나리라고도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죽음은 정해진 것이다. 그때의 한탄은 지금과 같다. 같은 바에는 차라리 법화경을 위해 목숨을 버려라. 이슬을 큰 바다에 맡기고 티끌을 대지에 묻는다고 생각하라.

「우에노전답서(1560)」, 1561쪽

「바라건대 나의 제자들이여, 대원을 일으켜라.」 대성인은 이 말을 스물한 살의 지도에게 보내셨다. 편지는 법화경 화성유품의 「원컨대 이 공덕으로 널리 일체에 미쳐 나와 중생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로 맺는다.

12월의 쌀

그해 연말, 미노부에 눈이 다섯 자나 쌓였다. 12월 27일, 도키미쓰가 흰쌀 한 짐을 보냈다.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큰눈이 내린 깊은 겨울의 산골짜기, 눈에 덮여 지붕만 드러난 초가 암자에서 가는 연기가 오르고, 눈을 이고 휘어진 삼나무들 사이로 길은 사라졌으며, 눈 덮인 바위 사이로 개울이 흐르고 멀리 금빛 하늘 아래 눈 덮인 산봉우리가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7 · 다섯 자 눈

五尺のゆきふりて本よりも・かよわぬ山道ふさがり・といくる人もなし、衣もうすくて・かんふせぎがたし・食たへて命すでに・をはりなんとす、かかるきざみに・いのちさまたげの御とぶらひ・かつはよろこび・かつはなけかし

다섯 자 눈이 내려 본래도 다니지 않는 산길이 막혀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옷도 얇아 추위를 막기 어렵고 먹을 것이 끊어져 목숨이 이미 다하려 합니다. 이런 때에 목숨을 붙드는 위문을 받으니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우에노전답서(1561)」, 1561쪽

「한 번에 마음먹고 굶어 죽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느다란 등불에 기름을 부어 준 것 같다(一度にをもひ切つて・うへしなんと・あんじ切つて候いつるに・わづかの・ともしびに・あぶらを入そへられたるがごとし)」(1562쪽). 법난을 치른 해의 끝에도 우에노의 짐은 끊기지 않았다.

받는 사람上野賢人殿
  1. ①용문의 폭포붕어가 오르면 용 · 「百に一・千に一・万に一」 · 여울 · 매 · 어부 1560
  2. ②헤이 씨의 승전(昇殿)사다모리 → 마사모리 → 다다모리(처음 허락) → 기요모리 · 「仏になるみち・これにをとるべからず」1560
  3. ③사리불60겁 보살행 · 견디지 못하고 이승으로 1560–1561
  4. ④대통결연의 사람들마왕이 국주의 몸에 들어 괴롭힘 · 버리고 물러나 오랜 겁을 떠돎 1561

「かれは人の上とこそ・みしかども今は我等がみにかかれり、願くは我が弟子等・大願ををこせ」1561

도표 21 · 용문의 네 이야기

신주를 숨긴 집 — 1280년 7월

1280년 6월 15일 — 7월 2일 · 고안 3년

법난은 세 사람의 처형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쓰와라 시모카타 신부쿠치(新福地)의 신주(神主)는 닛슈의 제자로, 닛코상인에게 어본존을 받을 만큼 강신자였다. 강의는 그를 아쓰와라 신도들의 지도자 격이었으리라고 본다. 벼 베던 날 습격 때 현장에 없어 붙잡히지 않았지만, 그 뒤에도 내내 표적이 되었다. 도키미쓰는 그와 그 처자를 제 집에 숨겼다.

1280년 6월 15일, 도키미쓰는 열여섯 살의 아우 시치로고로를 데리고 미노부에 올랐다. 7월 2일, 대성인은 그 만남을 기뻐하시며 이렇게 쓰셨다.

去ぬる六月十五日のけさん悦び入つて候、さては・かうぬし等が事いままでかかへをかせ給いて候事ありがたく・をぼへ候、ただし・ないないは法華経をあだませ給うにては候へども・うへには・たの事によせて事かづけ・にくまるるかのゆへに・あつわらのものに事をよせて・かしこ・ここをもせかれ候こそ候いめれ

지난 6월 15일의 만남은 몹시 기뻤습니다. 그런데 신주 등의 일, 지금까지 데리고 계신 것이 고맙게 생각됩니다. 다만 속으로는 법화경을 미워하시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일을 핑계 대어 미워하시는 까닭에, 아쓰와라 사람들을 핑계로 이곳저곳을 막으시는 것이겠지요.

「우에노전답서(1564)」, 1564쪽

「윗분」은 법화경을 미워한다고 드러내지 않는다. 다른 일을 핑계로 삼는다. 대성인은 그것을 아시고 이렇게 일러 주셨다.

をかせ給いて・あしかりぬべきやうにて候わば・しばらく・かうぬし等をば・これへとをほせ候べし、めこなんどはそれに候とも・よも御たづねは候はじ、事のしづまるまで・それに・をかせ給いて候わば・よろしく候いなんと・をぼへ候

데리고 계시는 것이 나쁘게 될 것 같으면 잠시 신주 등을 이리로 보내라고 하십시오. 처자 같은 이들은 그쪽에 있어도 설마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쪽에 두시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에노전답서(1564)」, 1564쪽

편지의 끝에는 「남에게 알리지 말고 몰래 전하십시오(人にしらせずして、ひそかにをほせ候べし)」(1565쪽)라는 추신이 있다.

강의는 도키미쓰가 신주를 숨길 수 있었던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쓰와라는 시모카타노쇼, 우에노는 가미카타노쇼다. 법난의 근원지인 시모카타 정소의 관할 안에 있으면 위험하므로 관할이 다른 가미카타의 난조 집에 숨긴 것이다. 그리고 교치의 무리도 어가인이자 지도인 도키미쓰를 붙잡거나 직접 박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를 짓눌렀다.

같은 편지에서 대성인은 몽골의 위협에 떠는 세상 사람들을 「뱀 입속의 개구리, 도마 위의 잉어와 붕어」에 견주시고, 이렇게 맺으셨다.

しばらくの苦こそ候とも.ついには・たのしかるべし、国王一人の太子のごとし・いかでか位につかざらんと.おぼしめし候へ

잠시의 괴로움은 있어도 끝내는 즐거울 것입니다. 국왕의 외아들인 태자와 같으니 어찌 왕위에 오르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십시오.

「우에노전답서(1564)」, 1565쪽
약도: 후지산 남쪽에 두 구역. 시모카타노쇼(득종가 영지 · 시모카타 정소 · 아쓰와라 · 류센사 · 신부쿠치)와 가미카타노쇼(우에노 · 난조 집). 신부쿠치의 신주와 처자에서 우에노 난조 집으로 화살표(「かかへをかせ給いて候事ありがたく」 1564). 우에노에서 미노부로 점선 화살표(「しばらく・かうぬし等をば・これへとをほせ候べし」 1564 · 「めこなんどはそれに候とも」).후지강스루가만후지산가미카타노쇼시모카타노쇼시모카타 정소 관할 밖우에노 난조 집신부쿠치신주와 처자류센사아쓰와라가이 미노부
신부쿠치 → 우에노「かかへをかせ給いて候事ありがたく」1564우에노 → 미노부「しばらく・かうぬし等をば・これへとをほせ候べし」1564 · 「めこなんどはそれに候とも」「人にしらせずして、ひそかにをほせ候べし」1565시모카타노쇼 — 득종가 영지 · 시모카타 정소 · 아쓰와라 · 류센사 · 신부쿠치 / 가미카타노쇼 — 우에노 · 난조 집
관할의 차이는 강의의 설명 · 위치는 약도전승 · 23절
도표 22 · 신주를 숨긴 집

공사(公事)의 무게 — 1280년 12월

1280년 12월 27일 · 고안 3년

1280년 12월 27일, 도키미쓰는 돈 한 관을 미노부에 보냈다. 대성인의 답장 「우에노전답서(1574)」는 그해 그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가를 전한다. 그 사이 9월에는 아우 시치로고로가 세상을 떠났다(5부 25절).

貴辺は・すでに法華経の行者に似させ給へる事・さるの人に似・もちゐの月に似たるがごとし、あつはらのものどもの・かくをしませ給へる事は・承平の将門・天喜の貞当のやうに此の国のものどもは・おもひて候ぞ、これひとへに法華経に命をすつるがゆへなり、まつたく主君にそむく人とは天・御覧あらじ

그대는 이미 법화경의 행자를 닮으셨으니, 원숭이가 사람을 닮고 떡이 달을 닮은 것과 같습니다. 아쓰와라 사람들을 그토록 아끼신 일을, 이 나라 사람들은 조헤이의 마사카도, 덴기의 사다토처럼 (반역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법화경에 목숨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코 주군을 등진 사람이라고 하늘은 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에노전답서(1574)」, 1575쪽

「아쓰와라 사람들을 그토록 아끼신 일」. 도키미쓰가 법난의 사람들을 지킨 일이 세상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나 아베노 사다토 같은 반역으로 비쳤다. 대성인은 「하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실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그 대가를 이렇게 적으셨다.

其の上わづかの小郷に・をほくの公事せめあてられて・わが身は・のるべき馬なし・妻子はひきかくべき衣なし

게다가 작은 마을에 많은 공사(公事)를 떠안아, 그대 자신은 탈 말도 없고 처자는 입을 옷도 없습니다.

「우에노전답서(1574)」, 1575쪽

공사는 공적인 사업을 위해 영지에서 노동력과 물자와 돈을 거두는 것이다. 강의는 막부가 지도 도키미쓰에게 그의 영지 규모에 견주어 부당하게 큰 부담을 지웠다고 본다. 직접 붙잡을 수 없는 어가인을 세금과 부역으로 누른 것이다.

그런데 그 처지에서 그는 돈 한 관을 보냈다.

かかる身なれども法華経の行者の山中の雪に・せめられ食ともしかるらんと・おもひやらせ給いて・ぜに一貫をくらせ給へるは・貧女がめおとこ二人して一つの衣をきたりしを乞食にあたへ・りだが合子の中なりし・ひえを辟支仏に・あたへたりしがごとし、たうとし・たうとし

이런 처지인데도 법화경의 행자가 산속 눈에 시달려 먹을 것이 모자라리라 헤아리시어 돈 한 관을 보내 주신 것은, 가난한 여인이 남편과 둘이서 한 벌의 옷을 입던 것을 걸인에게 주고, 이타가 그릇 속에 있던 피를 벽지불께 드린 것과 같습니다. 존귀하다, 존귀하다.

「우에노전답서(1574)」, 1575쪽

편지의 앞부분에서 대성인은 수달 장자의 이야기를 하셨다. 일곱 번 가난해지고 일곱 번 장자가 된 수달이 마지막으로 가난해졌을 때, 부부 둘에게 남은 닷새 치 쌀 다섯 되를 찾아온 가섭 · 사리불 · 아난 · 라후라 · 석가불 다섯 분께 차례로 다 드렸고, 그날부터 오천축 제일의 장자가 되어 기원정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다(1574쪽). 강의는 이 편지의 공양을 「공양 정신의 거울」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놓인 처지
  1. 「あつはらのものどもの・かくをしませ給へる事は・承平の将門・天喜の貞当のやうに此の国のものどもは・おもひて候ぞ」1575
  2. 「わづかの小郷に・をほくの公事せめあてられて」1575
  3. 「わが身は・のるべき馬なし・妻子はひきかくべき衣なし」1575
「まつたく主君にそむく人とは天・御覧あらじ」1575
그대가 한 일
  1. 「法華経の行者の山中の雪に・せめられ食ともしかるらんと・おもひやらせ給いて・ぜに一貫」1575
  2. 비유 — 가난한 부부의 한 벌 옷 · 이타의 피 · 수달 장자의 닷 되 쌀 1574
「우에노전답서(1574)」 · 24절
도표 23 · 1280년 12월의 편지

창가학회 강의는 아쓰와라 법난을 이름 없는 농민 신도들이 권력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불석신명」의 신앙으로 기리고, 그 곁에서 젊은 지도 도키미쓰가 외호의 책임을 다했다고 본다. 그가 한 일은 거창하지 않았다. 쫓기는 사람을 제 집에 숨기고, 그 일로 쏟아진 부역과 세금을 견디고, 그런 가운데서도 미노부의 스승에게 짐을 보냈다. 세상은 그를 반역자처럼 보았다. 대성인은 그를 「현인」이라 부르셨다. 「바라건대 나의 제자들이여, 대원을 일으켜라.」 대성인의 이 말이 스물한 살의 젊은이에게 보내졌다는 것, 그것이 이 부의 결론이다.

5부 시치로고로와 스승의 병

「아, 담력 있는 사나이로다」 — 시치로고로

1265 — 1280년 9월 5일 · 고안 3년

시치로고로는 아버지 난조시치로가 세상을 떠날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아이였다. 어머니는 뒤에 그때의 마음을 대성인께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돌아가신 우에노 님에게 한창 나이에 먼저 떠나보내 한탄이 깊었는데, 이 아이를 배지 않았더라면 불에라도 물에라도 뛰어들려 했다(故上野殿には壮なりし時をくれて歎き浅からざりしに・此の子を懐姙せずば火にも入り水にも入らんと思いしに)」(1572쪽).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 탈 없이 자랐다. 「이 아이가 무사했기에 누구에게 맡기고 몸을 던지겠는가 하고, 이 아이로 마음을 달래며 열네다섯 해를 지냈다.」

초가을 밤, 바람에 휜 어린 나뭇가지에 피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달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아래 어두운 땅에 떨어져 있으며, 오른쪽 늙은 가지에는 활짝 핀 꽃 몇 송이가 남고, 왼쪽 위 흐르는 구름 사이로 둥근 달과 그 아래 물가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8 · 봉오리 진 꽃과 달

1280년(고안 3년) 6월 15일, 열여섯 살이 된 시치로고로는 형 도키미쓰와 함께 미노부에 올라 대성인을 뵈었다. 강의는 이 참예의 목적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아쓰와라 법난의 여파 속에서 동지를 지킬 지도를 받는 것이었고(4부 23절), 또 하나는 성인이 된 아우를 대성인께 소개하는 것이었다. 대성인은 그 소년을 눈여겨보셨다.

그해 8월, 도키미쓰의 집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강의는 8월 26일의 「우에노전답서(자보서)」로 이미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었고,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대성인이 「니치와카고젠(日若御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전한다. 「자식은 보배(子寶)」라는 별칭이 이 편지에 붙었다.

그리고 9월 5일, 시치로고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원인은 알 수 없다. 이튿날 9월 6일, 소식을 들으신 대성인은 곧 붓을 드셨다. 「우에노전어서(1567)」다.

南条七郎五郎殿の御死去の御事、人は生れて死するならいとは智者も愚者も上下一同に知りて候へば・始めてなげくべしをどろくべしとわをぼへぬよし・我も存じ人にもをしへ候へども・時にあたりて・ゆめか・まぼろしか・いまだわきまへがたく候

난조 시치로고로 님이 돌아가신 일. 사람은 태어나 죽는 것이 정해진 이치라는 것은 지혜로운 이도 어리석은 이도 위아래 모두 아는 것이니 새삼 한탄하고 놀랄 일이 아니라고 나도 알고 남에게도 가르쳐 왔지만, 막상 그때를 당하니 꿈인지 환상인지 아직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우에노전어서(1567)」, 1567쪽

まして母のいかんがなげかれ候らむ、父母にも兄弟にも・をくれはてて・いとをしきをとこに・すぎわかれたりしかども・子ども・あまたをはしませば心なぐさみてこそ・をはしつらむ、いとをしき・てこご・しかもをのこご・みめかたちも人にすぐれ心も・かいがいしくみへしかば・よその人人も・すずしくこそみ候いしに・あやなく・つぼめる花の風にしぼみ・満つる月の・にわかに失たるがごとくこそをぼすらめ

하물며 어머니는 얼마나 한탄하시겠습니까. 부모도 형제도 다 먼저 보내고 사랑하는 남편과도 사별했지만 자식이 많으니 마음을 달래며 지내셨을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막내, 게다가 사내아이, 생김새도 남보다 뛰어나고 마음도 씩씩해 보여 남들도 시원스레 보았는데, 덧없이 봉오리 진 꽃이 바람에 시들고 찬 달이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여기실 것입니다.

「우에노전어서(1567)」, 1567쪽

「참말로 여겨지지 않아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まこととも・をぼへ候はねば・かきつくるそらも・をぼへ候はず)」. 그리고 추신이 있다.

此の六月十五日に見奉り候いしに・あはれ肝ある者かな男や男やと見候いしに・又見候はざらん事こそかなしくは候へ、さは候へども釈迦仏・法華経に身を入れて候いしかば臨終・目出たく候いけり、心は父君と一所に霊山浄土に参りて・手をとり頭を合せてこそ悦ばれ候らめ、あはれなり・あはれなり

이 6월 15일에 뵈었을 때 「아, 담력 있는 자로구나, 사나이로다, 사나이로다」 하고 보았는데,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슬픕니다. 그렇지만 석가불과 법화경에 몸을 들였으니 임종이 훌륭했을 것입니다. 마음은 아버님과 한곳의 영산정토에 가서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며 기뻐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엾다, 가엾다.

「우에노전어서(1567)」, 1568쪽

강의는 이렇게 쓴다. 대성인은 이 소년이 형과 함께 닛코상인 아래서 광선유포의 싸움에 활약하리라 기대하셨을 것이다. 시치로고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는 모두 열 편에 이른다. 「수많은 신도 가운데 한 사람의 죽음을, 그것도 열여섯 살 젊은 신도의 죽음을 이토록 마음에 두고 아쉬워하신 것은 시치로고로 한 사람뿐이다.」 그의 무덤은 지금 후지 묘렌사 뒤에 있다고 강의는 전한다.

  1. 11265수태
  2. 21265.3.8아버지 사망「此の子を懐姙せずば火にも入り水にも入らん」1572
  3. 31280.6.15형과 미노부 참예
  4. 41280.8형의 아들 탄생 · 「니치와카고젠」 명명「자보서」 · 강의
  5. 59.5사망(16세)
  6. 69.6「우에노전어서(1567)」「あはれ肝ある者かな男や男や」1568
  7. 710.2449일 「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一つ種は一つ種」1570
  8. 81281.1.13「우에노니부인답서(1575)」「とし十六歳」1576
  9. 91281.11.15「우에노니부인답서(1580)」「故五郎殿と入道殿とは尼御前の父なり子なり」1582
  10. 101281.12.8「우에노전모친답서(신병서)」「二ケ年十六月四百余日」1583–1584
애도의 편지는 모두 10편(강의) — 本文이 이번 자료에 있는 것만 표시 · 25절
도표 24 · 시치로고로

49일의 편지 — 「한 씨앗은 한 씨앗」

1280년 10월 24일 · 중음(中陰)

10월 24일, 시치로고로의 49일에 어머니 난조도키미쓰어머니는 돈 두 꿰미, 흰쌀 한 짐, 토란 한 짐, 간 두부, 곤약, 감 한 바구니, 유자 쉰 개를 미노부에 보냈다. 대성인은 법화경 한 부와 자아게를 여러 번, 제목을 백천 번 부르시고 답장을 쓰셨다. 「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다.

편지는 무량의경의 「사십여 년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경문을 「돌아가신 난조 고로 님이 죽음의 산과 삼도의 강을 건널 때 번뇌의 산적, 죄업의 해적을 잠재우고 무사히 영산정토로 모시고 갈 호위 무사(故南条五郎殿の死出の山・三途の河を越し給わん時・煩悩の山賊・罪業の海賊を静めて・事故なく霊山浄土へ参らせ給うべき御供の兵者)」(1569쪽)라고 부르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소년에 대해 이렇게 쓰셨다.

故七郎五郎殿は当世の日本国の人人には・にさせ給はず、をさなき心なれども賢き父の跡をおひ御年いまだ・はたちにも及ばぬ人が、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させ給いて仏にならせ給いぬ・無一不成仏は是なり

돌아가신 시치로고로 님은 지금 일본 사람들과는 닮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마음이지만 현명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아직 스물에도 이르지 않은 나이에 남묘호렌게쿄를 불러 부처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도 성불하지 않는 이가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 1570쪽

乞い願わくは悲母我が子を恋しく思食し給いなば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させ給いて・故南条殿・故五郎殿と一所に生れんと願はせ給へ、一つ種は一つ種・別の種は別の種・同じ妙法蓮華経の種を心に・はらませ給いなば・同じ妙法蓮華経の国へ生れさせ給うべし、三人面をならべさせ給はん時・御悦びいかが・うれしくおぼしめすべきや

바라건대 어머님, 자식이 그리우시거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시어 돌아가신 난조 님, 돌아가신 고로 님과 한곳에 태어나기를 비십시오. 한 씨앗은 한 씨앗, 다른 씨앗은 다른 씨앗입니다. 같은 묘법연화경의 씨앗을 마음에 품으시면 같은 묘법연화경의 나라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세 사람이 얼굴을 나란히 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 1570쪽

편지의 끝에서 대성인은 다시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셨다. 「두 사내아이에게 (뒤를) 맡기리라 믿었는데, 올해 9월 5일 달을 구름에 감추고 꽃을 바람에 날려, 꿈인가 꿈이 아닌가, 아 긴 꿈이로구나 하고 한탄하는 사이에 현실이 되어 이미 49일이 지났다(二人のをのこごにこそ・になわれめと・たのもしく思ひ候いつるに・今年九月五日・月を雲にかくされ・花を風にふかせて・ゆめか・ゆめならざるか・あわれひさしきゆめかなと・なげきをり候へば・うつつににて・すでに四十九日はせすぎぬ)」(1572쪽).

さける花は・ちらずして・つぼめる花のかれたる、をいたる母は・とどまりて・わかきこは・さりぬ、なさけなかりける無常かな・無常かな

핀 꽃은 지지 않고 봉오리 진 꽃이 시들었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남고 젊은 아들은 떠났습니다. 무정한 무상이여, 무상이여.

「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 1572쪽

그리고 이렇게 맺으셨다. 「아버지는 영산에 계시고 어머니는 사바에 남아 계십니다. 두 분 사이에 계신 고 고로 님의 마음이 헤아려져 가엾습니다(ちちはりやうぜんにまします・母は娑婆にとどまれり、二人の中間に・をはします故五郎殿の心こそ・をもひやられて・あわれに・をぼへ候へ)」(1573쪽).

도식: 위 원 「아버지 · 고 난조 님 — 영산(りやうぜんにまします)」, 아래 원 「어머니 · 난조도키미쓰어머니 — 사바(娑婆にとどまれり)」, 가운데 작은 원 「고 고로 님 — 二人の中間に・をはします」(1573). 세 원을 잇는 금선 곁에 「同じ妙法蓮華経の種」.同じ妙法蓮華経の種아버지고 난조 님영산りやうぜんにまします고 고로 님二人の中間に・をはします1573어머니난조도키미쓰어머니사바娑婆にとどまれり
「一つ種は一つ種・別の種は別の種・同じ妙法蓮華経の種を心に・はらませ給いなば・同じ妙法蓮華経の国へ生れさせ給うべし」1570「三人面をならべさせ給はん時」1570
원과 글자만 · 「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 1570 · 1573 · 26절
도표 25 · 「한 씨앗」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들

1274 — 1281 · 난조도키미쓰어머니

대성인이 난조도키미쓰어머니에게 보내신 편지는 그녀의 생애의 세 고비 — 남편의 죽음, 막내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늙음 — 를 따라간다.

1275년 12월 — 도키미쓰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에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어머님께서 특히 법화경의 신심이 깊으시다니 기쁘다고 전해 주십시오(母尼ごぜんには・ことに法華経の御信心のふかくましまし候なる事・悦び候と申させ給候へ)」(「우에노전모친답서(1515)」, 1515쪽). 흰쌀 한 말을 받으신 대성인은 정월 초하루부터 마카지관 제5권의 강의를 시작하려 하니 「내년은 세상이 어수선할 것」이라 하셨다.

1281년 정월 13일 — 시치로고로가 떠난 뒤 첫 정월이다. 대성인은 「진 꽃도 피려 하고 시든 풀도 싹이 튼다. 고 고로 님도 어찌 돌아오지 않으시겠는가(ちりし花もさかんとす・かれしくさもねぐみぬ、故五郎殿もいかでか・かへらせ給はざるべき)」(1575쪽)라고 쓰셨다. 그리고 「자식은 원수」라는 경문과 「자식은 보배」라는 경문을 나란히 놓고, 아들 정장에게 구원받은 묘장엄왕과 아들 목련에게 구원받은 청제녀를 들어 「자식을 보배라 하는 경문은 틀림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그리셨다.

故五郎殿はとし十六歳.心ね・みめかたち人にすぐれて候いし上.男ののうそなわりて万人に・ほめられ候いしのみならず、をやの心に随うこと・水のうつわものに・したがい・かげの身に・したがうがごとし、いへにては・はしらとたのみ・道にては・つへとをもいき

돌아가신 고로 님은 나이 열여섯, 마음씨와 생김새가 남보다 뛰어난 데다 사내다운 재능을 갖추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았을 뿐 아니라, 어버이의 마음을 따르기를 물이 그릇을 따르고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했습니다. 집에서는 기둥으로 의지하고 길에서는 지팡이로 여겼습니다.

「우에노니부인답서(1575)」, 1576쪽

「만날 곳만 일러 두었다면 날개가 없어도 하늘에 오르고 배가 없어도 당나라에 건너가고, 땅 밑에 있다고 들으면 어찌 땅을 파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실 것이다(ゆきあうべき・ところだにも申しをきたらば・はねなくとも天へものぼりなん、ふねなくとも・もろこしへも・わたりなん、大地のそこに・ありときかば・いかでか地をもほらざるべきと・をぼしめすらむ)」(1576쪽). 그리고 「쉽게 만나실 길이 있다. 석가불을 사자로 삼아 영산정토에 가서 만나십시오. ……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여인이 그리워하는 자식을 만나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설해져 있습니다(南無妙法蓮華経と申す女人の・をもう子に・あわずという事はなしととかれて候ぞ)」(1576쪽).

1281년 11월 15일 — 그녀의 아버지 마쓰노 로쿠로자에몬 입도의 기일이었다. 대성인은 법화경이 연꽃에 비유되는 까닭을 밝히셨다. 다른 꽃은 꽃이 먼저고 열매가 뒤이거나 열매가 먼저고 꽃이 뒤인데, 연꽃만은 꽃과 열매가 같은 때다. 「법화경이라는 것은 손에 들면 그 손이 곧 부처가 되고 입으로 부르면 그 입이 곧 부처다(法華経と申すは手に取れば其の手やがて仏に成り・口に唱ふれば其の口即仏なり)」(1580쪽). 이어서 중국의 명필 오룡(烏龍)과 아들 유룡(遺龍)의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는 법화경을 미워해 「법화경을 쓰지 마라」고 유언하고 죽어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아들은 왕명을 거스르지 못해 법화경 여덟 권의 제목만 썼다. 그 제목 속의 「묘(妙)」 한 글자가 부처가 되어 지옥에 나타나 아버지를 구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너의 손은 나의 손이다. 너의 몸은 나의 몸이다. 네가 쓴 글자는 내가 쓴 글자다(汝が手は我が手なり・汝が身は我が身なり・汝が書きし字は我が書きし字なり)」(1581쪽). 대성인은 편지를 이렇게 맺으셨다. 「돌아가신 고로 님과 입도 님은 니고젠의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니고젠은 저 입도 님의 딸입니다. 이제 입도 님은 도솔천 내원에 가셨을 것입니다. 이 일을 호키 님이 읽어 들려 드리십시오(此の由をはわきどのよみきかせまいらせ給うべし)」(1582쪽).

1281년 12월 8일 — 이 편지는 다음 절에서 본다.

  1. 11274.7.11「우에노전미망인답서」남편 사후 9년 · 「生死ともに仏なり」1504남편
  2. 21275.12.22「우에노전모친답서(1515)」도키미쓰 앞 · 어머니 언급 · 「母尼ごぜんには・ことに法華経の御信心のふかく」1515
  3. 31280.10.24「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막내 49일 · 「一つ種は一つ種」1570막내
  4. 41281.1.13「우에노니부인답서(1575)」「いへにては・はしらとたのみ・道にては・つへとをもいき」1576막내
  5. 51281.11.15「우에노니부인답서(1580)」친정아버지 기일 · 「汝が手は我が手なり」1581친정아버지
  6. 61281.12.8「우에노전모친답서(신병서)」「一定五郎殿にいきあいぬ」1584대성인의 병

1284.5.10 별세(묘호)

도표 26 · 어머니 앞 편지

대성인의 병 — 「여윔병」

1277년 12월 — 1282년 · 미노부

1277년 12월 30일, 대성인께 설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여름 시조깅고의 약으로 한때 나았지만(시조깅고 편 31절), 그 뒤로 대성인의 몸은 해마다 약해졌다. 1281년 5월, 대성인은 이케가미 형제에게 이렇게 쓰셨다. 「이 법문을 말한 지 이미 스물아홉 해다. 날마다의 논쟁, 달마다의 난, 두 번의 유배에 몸이 지치고 마음이 아파서인가, 이 칠팔 년 동안 해마다 병이 났지만 그럭저럭 지냈는데, 올해는 정월부터 그 기운이 일어 이미 한 생이 끝날 것 같다. 게다가 나이도 이미 예순이 찼다(此の法門申し候事すでに廿九年なり、日日の論義・月月の難・両度の流罪に身つかれ心いたみ候いし故にや此の七八年間が間・年年に衰病をこり候いつれどもなのめにて候いつるが、今年は正月より其の気分出来して既に一期をわりになりぬべし、其の上齢既に六十にみちぬ)」(「팔번궁조영사」, 1105쪽, 2차 확인). 10월에는 도키조닌에게 「늙고 병든 데다 식욕도 없어 답장을 못 했다(老病為るの上又不食気に候間未だ返報を奉らず候)」(「도키입도전답서」, 993쪽, 2차 확인)고 쓰셨다.

그해 12월 8일, 난조도키미쓰어머니가 현미 한 짐, 청주 한 통, 술 스무 단지쯤, 그리고 곽향(藿香) 한 봉지를 보냈다. 곽향은 위를 다스리는 약초다.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さては去ぬる文永十一年六月十七日この山に入り候いて今年十二月八日にいたるまで此の山・出ずる事一歩も候はずただし八年が間やせやまいと申しとしと申しとしどしに身ゆわく・心をぼれ候いつるほどに、今年は春より此のやまい・をこりて秋すぎ・冬にいたるまで日日にをとろへ・夜夜にまさり候いつるが・この十余日はすでに食も・ほとをととどまりて候上・ゆきはかさなり・かんはせめ候、身のひゆる事石のごとし・胸のつめたき事氷のごとし

지난 분에이 11년 6월 17일 이 산에 들어와 올해 12월 8일에 이르기까지 이 산을 한 걸음도 나간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여덟 해 동안 여윔병과 나이 탓에 해마다 몸이 약해지고 마음이 흐려졌는데, 올해는 봄부터 이 병이 일어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이르도록 날마다 쇠하고 밤마다 더하여, 요 열흘 남짓은 먹는 것도 거의 멈춘 데다 눈은 쌓이고 추위는 몰아칩니다. 몸이 차기가 돌 같고 가슴이 차기가 얼음 같습니다.

「우에노전모친답서(신병서)」, 1583쪽

しかるに・このさけはたたかに・さしわかして、かつかうを・はたと・くい切りて一度のみて候へば・火を胸に・たくがごとし、ゆに入るににたり、あせに・あかあらい・しづくに足をすすぐ、此の御志は・いかんがせんと・うれしくをもひ候ところに・両眼より・ひとつのなんだを・うかべて候

그런데 이 술을 따뜻하게 데워 곽향을 탁 씹고 한 번 마셨더니 가슴에 불을 지핀 것 같고 목욕을 한 것 같았습니다. 땀으로 때를 씻고 그 방울로 발을 씻었습니다. 이 뜻을 어찌하랴 하고 기뻐하던 차에 두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맺혔습니다.

「우에노전모친답서(신병서)」, 1583쪽

그리고 대성인은 시치로고로를 떠올리셨다. 「참으로, 참으로, 지난해 9월 5일 고 고로 님이 숨은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고 가슴이 뛰어 손가락을 꼽아 보니 이미 두 해, 열여섯 달, 사백여 날이 지났다(まことや.まことや・去年の九月五日こ五郎殿のかくれにしは・いかになりけると・胸うちさわぎて.ゆびををりかずへ候へば・すでに二ケ年十六月四百余日にすぎ候が)」(1583–1584쪽). 「내린 눈도 또 내리고 진 꽃도 또 피었는데, 무상만은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구나.」 「남의 아이로 보아도 좋은 젊은이로구나, 좋은 젊은이로구나, 구슬 같은 사내로구나, 사내로구나, 어버이는 얼마나 기쁠까 하고 보았는데(余所にても・よきくわんざかな・よきくわんざかな・玉のやうなる男かな男かないくせ・をやのうれしく・をぼすらむと見候いしに)」(1584쪽).

日蓮は所らうのゆへに人人の御文の御返事も申さず候いつるが・この事は・あまりになげかしく候へば・ふでをとりて候ぞ、これも・よも・ひさしくも・このよに候はじ、一定五郎殿にいきあいぬと・をぼへ候、母よりさきに・けさんし候わば母のなげき申しつたへ候はん

니치렌은 병 때문에 여러 사람의 편지에 답장도 하지 못했는데, 이 일만은 너무나 슬퍼서 붓을 들었습니다. 나도 이 세상에 오래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고로 님을 만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머님보다 먼저 만나게 되면 어머님의 슬픔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우에노전모친답서(신병서)」, 1584쪽

열 달 뒤, 대성인은 이 말대로 이 세상을 떠나신다.

  1. 1277.12.30설사 시작 (시조깅고 편)
  2. 1278.6시조깅고의 약으로「百分の一」
  3. 1281.5「今年は正月より其の気分出来して既に一期をわりになりぬべし」1105*
  4. 1281.10「老病為るの上又不食気に候間」993*
  5. 1281.12.8「八年が間やせやまい…この十余日はすでに食も・ほとをととどまりて」1583「両眼より・ひとつのなんだ」1583
  6. 1282.3「やせやまいもなをり」「연삼매어서」, 강의 인용*
  7. 1282.9.8미노부 출발
  8. 10.13입멸
띠의 굵기 · 짙기 — 병세의 흐름(모양만) · * 강의 인용 원문 · 28절
도표 27 · 대성인의 병 1277–1282

도키미쓰의 병 — 「법화증명초」

1281년 9월 — 1282년 3월 · 스물셋 — 스물넷

같은 무렵, 도키미쓰도 병들었다. 1281년(고안 4년) 9월, 그는 소금 한 짐, 콩 한 섬, 닭벼슬 해초 한 봉지, 술 한 통을 보내며 병을 알렸다. 9월 11일, 대성인은 답하셨다.

御使の申し候を承り候、是の所労難儀のよし聞え候、いそぎ療治をいたされ候いて御参詣有るべく候

심부름꾼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 병이 어렵다고 들립니다. 서둘러 치료하시어 참예하십시오.

「난조전답서(1578)」, 1578쪽

이 편지에는 「고즈케국에서 돌아오신 뒤로는 아직 뵙지 못했다(上野の国より御帰宅候後は未だ見参に入らず候)」(1578쪽)는 말도 있다. 그해 여름 그는 무슨 일로 멀리 고즈케(지금의 군마현)까지 다녀온 것이다. 그해는 몽골이 두 번째로 쳐들어온 고안의 역이 있던 해였다. 대성인은 이 편지에서 미노부를 이렇게 부르셨다. 「법이 묘하므로 사람이 귀하고, 사람이 귀하므로 곳이 존귀하다(法妙なるが故に人貴し・人貴きが故に所尊し)」(1579쪽). 「저 월지의 영취산은 이 나라의 이 미노부의 봉우리다. 참예가 오래 끊겼으니 서둘러 오시도록 하라.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彼の月氏の霊鷲山は本朝此の身延の嶺なり、参詣遥かに中絶せり急急に来臨を企つべし、是にて待ち入つて候べし)」(1579쪽).

아흐레 뒤 9월 20일, 집의 토란 한 짐과 우엉, 무 여섯 뿌리가 올라왔다. 대성인은 「토란은 돌 같고 우엉은 큰 소의 뿔 같고 무는 대불전의 큰 못 같고 맛은 도리천의 감로 같다(いもは石のごとし.ごばうは大牛の角のごとし・大根は大仏堂の大くぎのごとし・あぢわひは忉利天の甘露のごとし)」(「우에노전답서(1579)」, 1579쪽)고 쓰셨다. 병이 조금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1282년 2월

그러나 해가 바뀐 1282년 2월, 도키미쓰의 병이 다시 깊어졌다. 대성인 자신도 병중이었다. 2월 25일, 대성인은 제자 니치로에게 대필시켜 닛코상인 앞으로 편지를 보내셨다. 어서전집에는 실리지 않은 이 편지를 강의는 전문으로 싣는다. 편지는 법화경 약왕품의 스물여덟 글자를 적어 보내며, 대성인의 유모가 한때 병이 깊어 숨이 끊어졌을 때 이 경문을 써서 맑은 물에 넣어 드리자 곧 되살아났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なんでうの七郎次郎時光は身はちいさきものなれども、日蓮に御こころざしふかきもの也。たとい定業なりとも今度ばかりえんまわうたすけさせ給へと御せいぐわん候

난조의 시치로지로 도키미쓰는 몸은 작은 사람이지만 니치렌에게 뜻이 깊은 사람이다. 설령 정업이라 해도 이번만은 염마왕이여 살려 주라고 (대성인께서) 서원하셨습니다.

「호키공 어방 소식(伯耆公御房消息)」, 니치로 대필, 사료, 강의 인용

「내일 인시 · 묘시 · 진시에 쇼지강의 물을 길어 오게 하여, 이 경문을 재로 태워 물 한 홉에 넣어 드리십시오.」 쇼지강(精進川)은 우에노를 흐르는 강이다.

사흘 뒤인 2월 28일, 대성인은 병을 무릅쓰고 직접 붓을 드셨다. 「법화증명초(사활초)」다. 이 글은 다른 편지와 달리 첫머리에 「법화경의 행자 니치렌(法華経の行者 日蓮)」이라 적고 화압을 한 뒤 본문에 들어간다. 받는 사람은 「호키보에게 내림(下伯耆房)」, 곧 닛코상인을 거쳐 도키미쓰에게 전하는 글이었다.

대성인은 먼저 말법에 법화경을 경문대로 믿는 사람은 과거에 십만억의 부처를 공양한 사람이라는 법사품의 경문을 드셨다. 그리고 도키미쓰를 이렇게 쓰셨다.

しかるにこの上野の七郎次郎は末代の凡夫・武士の家に生れて悪人とは申すべけれども心は善人なり、其の故は日蓮が法門をば上一人より下万民まで信じ給はざる上たまたま信ずる人あれば或は所領・或は田畠等に.わづらひをなし結句は命に及ぶ人人もあり信じがたき上・はは故上野は信じまいらせ候いぬ、又此の者敵子となりて人もすすめぬに心中より信じまいらせて・上下万人にあるいは・いさめ或はをどし候いつるに・ついに捨つる心なくて候へば・すでに仏になるべしと見へ候へば・天魔・外道が病をつけてをどさんと心み候か、命はかぎりある事なり・すこしも・をどろく事なかれ

그런데 이 우에노의 시치로지로는 말대의 범부로 무사의 집에 태어나 악인이라 해야 할 것이나 마음은 선인이다. 그 까닭은, 니치렌의 법문을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까지 믿지 않는 데다 어쩌다 믿는 사람이 있으면 영지나 논밭에 해를 끼치고 끝내 목숨에까지 미치는 사람들도 있어 믿기 어려운데, 어머니와 고 우에노(아버지)는 믿었다. 또 이 자는 그 적자(嫡子)가 되어 아무도 권하지 않는데 마음속으로부터 믿어, 위아래 많은 사람이 혹은 타이르고 혹은 위협했는데도 끝내 버리는 마음이 없으니, 이미 부처가 될 것으로 보이기에 천마 · 외도가 병을 붙여 위협하려 시험하는 것인가. 목숨은 한이 있는 것이니 조금도 놀라지 마라.

「법화증명초(사활초)」, 1586–1587쪽

그리고 대성인은 도키미쓰가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귀신을 꾸짖으셨다.

又鬼神めらめ此の人をなやますは剣をさかさまに・のむか又大火をいだくか、三世十方の仏の大怨敵となるか、あなかしこ・あなかしこ、此の人のやまいを忽になをして・かへりてまほりとなりて道の大苦をぬくべきか、其の義なくして現在には頭破七分の科に行われ・後生には大無間地獄に堕つべきか、永くとどめよ・とどめよ、日蓮が言をいやしみて後悔あるべし・後悔あるべし

또 귀신 놈들아, 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칼을 거꾸로 삼키는 것이냐, 큰 불을 끌어안는 것이냐, 삼세시방 부처의 큰 원적이 되려는 것이냐.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이 사람의 병을 곧 고치고 도리어 수호자가 되어 (귀)도의 큰 괴로움을 벗어날 것인가, 그러지 않고 지금 세상에서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지는 벌을 받고 다음 세상에서 대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인가. 길이 멈추어라, 멈추어라. 니치렌의 말을 업신여기면 후회할 것이다, 후회할 것이다.

「법화증명초(사활초)」, 1587쪽

本文의 「敵子」를 강의의 어석은 「嫡子」, 곧 맏형 시치로타로가 죽은 뒤 가독을 이은 아들의 뜻으로 읽는다. 강의는 이 글을 「도키미쓰를 괴롭히는 귀신에 대한 엄한 질책의 글」이라 부르고, 「그 어떻게든 도키미쓰를 병마에서 구하려는 대성인의 마음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친다」고 쓴다.

3월, 도키미쓰는 거적 세 장과 날미역 한 바구니를 보냈다. 강의가 인용하는 「연삼매어서」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3월 1일부터 4일까지의 놀이에 마음이 위로되어 여윔병도 낫고 범이라도 잡을 듯한 데다, 이 미역을 받으니 사자라도 탈 것 같다(抑三月一日より四日にいたるまでの御あそびに心なぐさみて・やせやまいもなをり・虎とるばかりをぼへ候上・此の御わかめ給びて師子にのりぬべくをぼへ候)」(「연삼매어서」, 1587쪽, 2차 확인). 도키미쓰의 병은 나았고, 대성인도 기운을 되찾으신 듯했다. 강의는 이 편지 뒤로 상승서와 부촉서를 빼면 대성인이 쓰신 글은 「삼대비법품승사」와 「하키리전어보」뿐이라고 쓴다.

  1. ① 1281.9.11是の所労難儀のよし聞え候、いそぎ療治をいたされ候いて御参詣有るべく候 · 是にて待ち入つて候べし1578 · 1579
  2. ② 9.20 · 한때 회복いもは石のごとし1579
  3. ③ 1282.2 병이 다시 깊어짐
  4. 사료④ 2.25 니치로 대필 「호키공 어방 소식」身はちいさきものなれども、日蓮に御こころざしふかきもの也쇼지강의 물
  5. ⑤ 2.28 「법화증명초(사활초)」法華経の行者 日蓮 · 心は善人なり · 鬼神めらめ1586–1587
  6. ⑥ 3월 「연삼매어서」 · 회복やせやまいもなをり・虎とるばかり1587*
* 강의 인용 원문 · 29절
도표 28 · 도키미쓰의 병 1281–1282

이케가미 — 산화(散花)를 든 사람

1282년 9월 — 10월 · 고안 5년

1282년 9월 8일, 대성인은 제자들의 간곡한 권유로 히타치의 온천에서 요양하시려 미노부를 나서셨다. 아홉 해 만이었다. 문하와 하키리 집안의 젊은이들이 대성인을 모셨다. 9월 18일 무사시국 이케가미의 이케가미 무네나카 집에 이르신 대성인은, 이튿날 미노부의 지도 하키리사네나가에게 편지를 쓰셨다. 「하키리전어보」다.

みちの間・山と申しかわと申しそこばく大事にて候いけるを・きうだちにす護せられまいらせ候いて難もなくこれまで・つきて候事をそれ入り候ながら悦び存し候

길에 산이라 하고 강이라 하고 꽤 힘들었는데, 그대의 자제들이 지켜 주어 탈 없이 여기까지 왔으니 송구하면서도 기쁩니다.

「하키리전어보」, 1376쪽

さりながらも日本国にそこばくもてあつかうて候みを九年まで御きえ候いぬる御心ざし申すばかりなく候へばいづくにて死に候ともはかをばみのぶさわにせさせ候べく候

그렇지만 일본국에서 그토록 골칫거리였던 이 몸을 아홉 해 동안이나 귀의해 주신 뜻은 말할 수 없으니, 어디서 죽든 무덤은 미노부의 골짜기에 만들게 하겠습니다.

「하키리전어보」, 1376쪽

편지 끝에는 「병중이라 화압을 하지 못해 송구하다(所らうのあひだはんぎやうをくはへず候事恐れ入り候)」(1376쪽)는 추신이 있다. 그리고 10월 13일 진시, 대성인은 이케가미에서 입멸하셨다. 예순한 살이었다. 강의는 그 사이 대성인이 닛코상인에게 법을 부촉하시고 10월 8일 여섯 제자(육노승)를 정하셨다고 쓴다. 그 부촉에 관해서는 6부 31절에서 본다.

장례 행렬

닛코상인이 10월 16일에 적은 「종조어천화기록」에 따르면 14일 술시에 입관, 자시에 다비를 했다. 그 장례 행렬의 순서가 기록에 남아 있다.

가을밤, 높은 숲 언덕에서 멀리 내려다본 판자 울타리의 무사 집과 꽃 핀 나무들, 그 문에서 나와 흙길을 따라 어두운 숲 쪽으로 천천히 이어지는 아주 작은 횃불 행렬, 공중에 흩날리는 옅은 꽃잎, 그 너머 달빛이 비친 물과 별 뜬 하늘의 보름달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9 · 이케가미의 밤

先火 二郎三郎 鎌倉の住人 / 次大宝花 四朗次郎 駿河国富士上野の住人 / 次幡 左 四条左衛門尉 右 衛門大夫 / 次香 富木五郎入道 / 次鐘 太田左衛門入道 / 次散花 南条七郎次郎 / 次御経 大学亮 / 次文机 富木四朗太郎 / 次仏 大学三郎 / 次御はきもの 源内三郎 御所御中間

맨 앞 횃불 — 지로사부로(가마쿠라 사람) / 다음 큰 보배 꽃 — 시로지로(스루가국 후지 우에노 사람) / 다음 번(幡) — 왼쪽 시조 사에몬노조, 오른쪽 에몬노다이후 / 다음 향 — 도키 고로 입도 / 다음 종 — 오타 사에몬 입도 / 다음 산화(散花) — 난조 시치로지로 / 다음 경 — 다이가쿠노스케 / 다음 문궤(文机) — 도키 시로타로 / 다음 불상 — 다이가쿠사부로 / 다음 신발 — 겐나이사부로(어소의 중간).

「종조어천화기록」, 닛코상인, 사료, 강의 인용

도키미쓰는 시조깅고 · 도키조닌 · 이케가미 무네나카 같은 원로 신도들 사이에서 산화를 맡았다. 산화는 장례 행렬이 나아가는 길에 향나무 꽃이나 연꽃잎, 연꽃잎 모양의 색종이를 뿌리는 소임이다. 「스루가국 후지 우에노 사람 시로지로」도 큰 보배 꽃을 들었다. 강의는 그를 도키미쓰와 함께 온 일족의 한 사람으로 본다.

스루가에 있던 도키미쓰가 어떻게 장례에 닿을 수 있었는가. 강의는 대성인 입멸의 소식이 닿기 전에 그가 이미 우에노를 떠나 있었으리라고 본다. 당시 가마쿠라에서 미노부까지 급사로도 이틀은 걸렸다. 대성인이 미노부를 나서셨다는 소식, 이케가미에서의 병세를 듣고 일족을 데리고 이케가미로 서둘러 갔을 것이다. 육노승 가운데 사도공 니코와 이요공 닛초는 장례 행렬에 이름이 없다.

유골의 하룻밤

대성인의 유언대로 유골은 미노부에 모셔졌다. 초칠일 법요를 마친 뒤 유골은 제자와 단나들에게 지켜져 이케가미를 떠났다. 1478년에 쓰인 『겐소 화도기』는 어떤 기록을 인용해 그 길을 이렇게 적는다. 「10월 21일 이케가미에서 이이다까지, 22일 유모토, 23일 구루마가에시, 24일 우에노 난조 시치로의 숙소, 25일 가이국에 드셨다」(사료, 강의 인용). 이 기록대로라면 대성인의 유골은 우에노의 도키미쓰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강의는 도카이도에서 미노부로 드는 길로서는 조금 돌아가는 이 하룻밤을 「대성인 재세 때의 법연과 닛코상인의 배려」였으리라고 본다.

1282.10.13 진시 입멸·14일 술시 입관 · 자시 다비(10.16 기록)사료

  1. 先火二郎三郎가마쿠라
  2. 次大宝花四朗次郎후지 우에노 · 駿河国富士上野の住人
  3. 次幡左 四条左衛門尉 · 右 衛門大夫
  4. 次香富木五郎入道
  5. 次鐘太田左衛門入道
  6. 次散花南条七郎次郎
  7. 次御経大学亮
  8. 次文机富木四朗太郎
  9. 次仏大学三郎
  10. 次御はきもの源内三郎
「종조어천화기록」(1282.10.16, 닛코상인) 그대로 · 「四朗」은 강의 인용 그대로 · 30절
도표 29 · 장례 행렬
전승
  1. 10.21 이케가미→ 이이다
  2. 10.22 유모토
  3. 10.23 구루마가에시
  4. 10.24 우에노上野南条七郎宿所
  5. 10.25 가이국
  1. 사카와 → 다케노시타 → 구루마가에시 → 오미야 → 난부 → 미노부「도키전어서」 964
위치는 약도 · 경로는 전승 · 우에노: 하룻밤 · 『겐소 화도기』(1478) 인용 「或る記」 · 점선 — 1274.5 대성인 미노부 입산 길(「도키전어서」 964) · 30절
도표 30 · 유골의 길

창가학회 강의는 1282년 2월의 「법화증명초」를 「대성인의 마음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치는 글」이라 부른다. 대성인은 당신의 몸도 가누기 어려운 때에, 스물네 살의 제자를 위해 「법화경의 행자 니치렌」이라고 이름을 걸고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 제자를 「마음은 선인」이라 하셨다. 이 부의 편지들은 슬픔의 편지다. 막내아우가 죽고, 어머니가 울고, 스승이 병들고, 자신이 병들었다. 대성인은 그 슬픔을 깨우친 자리에서 내려다보지 않으셨다. 「꿈인지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함께 우셨고, 「어머님보다 먼저 만나면 그 슬픔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강의는 이것을 「끝없는 따뜻함」이라 부른다.

6부 대석사의 단나

미노부의 별당 — 1282–1285

1282년 9월 — 1285년 · 대성인 입멸 뒤

이 부는 사용자 결정(2026-10-01)에 따라 닛코상인의 미노부 이산과 대석사 창건을 창가교학연구실 강의 「上野殿(南条時光)について」의 서술대로 자세히 쓴다. 강의가 인용한 문서 가운데 어서전집에 실린 것은 쪽수를, 어서전집 밖의 문서(닛코상인의 서장 · 하키리 집안의 서장 · 묘소 당번표)는 「사료, 강의 인용」으로 표시했다.

부촉

강의는 대성인이 1282년 9월 미노부를 떠나시기 전에 닛코상인에게 혈맥을 부촉하여 「본문 홍통의 대도사」로 삼으시고 부촉서를 주셨다고 쓴다(강의는 「일기홍법부촉서」라 부른다). 그 끝에 「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血脈の次第 日蓮日興)」(「미노부상승서」, 1600쪽, 2차 확인)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10월 13일 입멸하시던 날, 닛코상인을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으로 정하는 부촉서를 주셨다고 강의는 쓴다.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身延山久遠寺の別当たるべきなり)」(「미노부상승서」, 1600쪽, 2차 확인). 화광신문 목록은 이 두 문서를 1600쪽의 「미노부상승서(총부촉서)」 한 편으로 묶는다.

하키리사네나가

1282년 10월 말, 닛코상인은 대성인의 유골을 모시고 미노부에 들었다. 미노부의 지도는 하키리사네나가(1222–1297)였다. 가이 겐지의 한 갈래로, 가이국 고마군 남쪽의 하키리 · 미마키 · 이이노 세 마을의 지도였다. 그는 가마쿠라를 오가는 길에 후지강 서쪽의 시주쿠원에서 닛코상인의 교화를 받아 염불을 버렸다고 한다. 1269년 무렵의 일이다.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신 것도 그 인연 때문이었다. 「미노부 지도가 발심한 근원은 닛코의 교화의 힘이다(延山地頭発心の根元は日興教化の力用なり)」(「백육개초」, 869쪽, 2차 확인).

강의는 사네나가의 신앙을 처음부터 그리 깊지 않았다고 본다. 1277년의 한 편지에 대성인은 「하키리 님의 일은 법문은 믿으시는 듯하나 이 소송은 말씀드린 대로 쓰지 않으셨다(はきりどのの事は法門は御信用あるやうに候へども、此の訴訟は申すままには御用いなかりしかば)」(「시조깅고전답서(팔풍초)」, 1151쪽, 2차 확인)고 쓰셨다. 「믿는 듯하면서도 스승의 지도를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교만이 뒤에 네 가지 방법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강의는 쓴다.

묘소의 당번

1283년 정월, 대성인의 백일기에 닛코상인은 여섯 제자와 주요 제자들이 한 달씩 돌아가며 미노부의 묘소를 지키도록 당번표를 정했다(사료, 강의 인용). 정월 벤아사리(닛쇼), 2월 다이코쿠아사리(니치로), 9월 뱌쿠렌아사리(닛코), 11월 사도공(니코), 4월 이요공(닛초), 5월 렌게아사리(닛지)…. 그러나 강의는 「다섯 노승 누구도 이것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고 쓴다. 1284년 10월 대성인의 3회기에도 노승들은 지도의 방법이나 병을 이유로 미노부에 오르지 않았다. 닛코상인은 미마사카보에게 보낸 서장에서 「지도가 불법을 저지를 때는 나도 머물지 않겠다는 유언은 들었지만 불법의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地頭の不法ならん時は我も住むまじき由御遺言には承り候えども不法の色も見えず候)」(사료, 강의 인용)라고 노승들을 나무랐다.

그 무렵 사네나가는 닛코상인에게 서장을 보내 기쁨을 전했다. 1282년 12월에는 「경을 청문하는 것도 그분(닛코상인)이 계시기 때문」이라 했고, 1285년 2월에는 구원사에 법화경 독송과 법문 담의가 성해진 것이 닛코상인 덕분이라며 「대성인이 다시 미노부에 계신 것 같다」고 썼다(사료, 강의 인용).

「墓所可守番帳事」1283.1강의 인용사료

  1. 正月弁阿闍梨
  2. 二月大国阿闍梨
  3. 三月越前公 · 淡路公
  4. 四月伊与公
  5. 五月蓮花闍梨
  6. 六月越後公 · 下野公
  7. 七月伊賀公 · 筑前公
  8. 八月和泉公 · 治部公
  9. 九月白蓮阿闍梨
  10. 十月但馬公 · 卿公
  11. 十一月佐土公
  12. 十二月丹波公 · 寂日房
「右番帳の次第を守り懈怠無く勤仕せしむ可きの状件の如し」사료강의 「五老僧いずれもこれを守ろうとはしなかった」
옅은 금 — 육노승 · 31절
도표 31 · 묘소를 지킬 당번

하키리의 네 가지 방법

1285 — 1288 · 고안 8년 — 쇼오 원년

1285년 봄, 육노승의 하나인 민부아사리 니코가 시모우사에서 미노부에 올라왔다. 다른 노승들이 오지 않는 가운데의 일이라 닛코상인은 기뻐하며 그를 학두(學頭)로 삼았다. 니코는 1253년 아와국 나가사군 오가네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대성인께 귀의했고, 미노부 시절에는 먼 곳의 문하에게 대성인의 편지를 나르는 일을 맡았으며, 1276년 스승 도젠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무덤 앞에서 「보은초」를 읽었고, 1280년 대성인의 법화경 강의를 듣고 「어강문서」로 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의는 니코가 학두가 된 뒤 그의 불법(不法)이 드러났다고 쓴다. 닛코상인은 1288년 12월 하키리 집안의 하라 님에게 보낸 서장(「하라전 답서」)에서 「저 민부아사리는 세간의 욕심이 깊고 아첨하는 승려로, 성인의 법문을 세우기는커녕 크게 깨뜨릴 사람이라고 이 두세 해 지켜보아 왔다(彼の民部阿闍梨世間の欲心深くしてへつらい諂曲したる僧、聖人の御法門を立つるまでは思いも寄らず大いに破らんずる仁よと、此の二三年見つめ候いて)」(사료, 강의 인용)라고 썼다. 그리고 사네나가가 니코에게 넘어가 저지른 방법을 「세 가지 사정」으로 꼽았다. 첫째 「입정안국론」의 정의를 깨뜨렸다. 둘째 구원실성의 석존 목상을 처음으로 깨뜨렸다. 셋째 방법의 보시가 처음으로 베풀어졌다.

닛코상인 문하의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이것을 네 조목으로 적는다.

甲斐の国・波木井郷・身延山の麓に聖人の御廟あり而るに日興彼の御廟に通ぜざる子細は彼の御廟の地頭・南部六郎入道法名日円は日興最初発心の弟子なり、此の因縁に依つて聖人御在所・九箇年の間帰依し奉る滅後其の年月義絶する条条の事

가이국 하키리 마을 미노부산 기슭에 성인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닛코가 그 묘소에 다니지 않는 사정은 이렇다. 그 묘소의 지도 난부 로쿠로 입도, 법명 니치엔은 닛코가 처음 발심시킨 제자다. 이 인연으로 성인께서 계신 아홉 해 동안 귀의했다. (그러나) 입멸 뒤 그 해 그 달에 의절한 조목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2쪽

釈迦如来を造立供養して本尊と為し奉るべし是一。次に聖人御在生九箇年の間・停止せらるる神社参詣其の年に之を始む二所・三島に参詣を致せり是二。次に一門の勧進と号して南部の郷内のフクシの塔を供養奉加・之有り是三。次に一門仏事の助成と号して九品念仏の道場一宇之を造立し荘厳せり、甲斐国其の処なり是四。已上四箇条の謗法を教訓するに日向之を許すと云云

석가여래상을 조립 공양하여 본존으로 삼겠다는 것, 이것이 하나. 다음으로 성인 재세 아홉 해 동안 금하셨던 신사 참배를 그 해에 시작해 니쇼(하코네 · 이즈산)와 미시마에 참배한 것, 이것이 둘. 다음으로 일문의 권진이라 하여 난부 마을 안의 후쿠시 탑을 공양하는 데 보시한 것, 이것이 셋. 다음으로 일문의 불사를 돕는다 하여 구품염불의 도량 한 채를 지어 꾸민 것, 그곳은 가이국이다, 이것이 넷. 이상 네 조목의 방법을 타일렀는데 니코가 이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2–1603쪽

「이 뜻에 따라 지난 그 해 그 달에 저 하키리 입도의 자손과 길이 사제의 의를 끊었다. 그러므로 묘소에 다니지 않는다(此の義に依つて去る其の年月・彼の波木井入道の子孫と永く以て師弟の義絶し畢んぬ、仍つて御廟に相通ぜざるなり)」(1603쪽).

강의는 닛코상인이 사네나가에게 끝까지 「잘못은 그대가 아니라 아첨하는 승려에게 홀린 것」이라며 마음을 돌리기를 바랐다고 쓴다. 그러나 사네나가는 받아들이지 않고 「나는 민부아사리를 스승으로 삼았다(我は民部阿闍梨を師匠にしたる也)」(사료, 강의 인용)는 답을 보냈다.

「하라전 답서」의 세 가지 사정 1288.12사료
  1. ①「安国論の正意を破り候いぬ」
  2. ②「久遠実成の木像最前に破れ候」
  3. ③「謗法の施始めて施され候いぬ」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의 네 조목 1602–1603
  1. 是一「釈迦如来を造立供養して本尊と為し奉るべし」입상 석가불 재건(하라전)
  2. 是二「二所・三島に参詣を致せり」미시마 사참
  3. 是三「南部の郷内のフクシの塔を供養奉加」후쿠시 탑 공양
  4. 是四「九品念仏の道場一宇之を造立し荘厳せり」지재 법사의 공양
「已上四箇条の謗法を教訓するに日向之を許すと云云」1603사네나가의 답「我は民部阿闍梨を師匠にしたる也」사료
대응은 강의의 정리 · 32절
도표 32 · 하키리의 방법

미노부를 떠나 오이시가하라로 — 1289–1290

1289년 봄 — 1290년 10월 12일 · 쇼오 2 — 3년

학두와 지도의 방법으로 대성인이 아홉 해 사신 땅이 「방법의 진흙에 물들었다」고 강의는 쓴다. 닛코상인의 가슴에는 「지도가 불법을 저지를 때는 나도 머물지 않겠다」는 대성인의 유언이 늘 있었다. 그러나 미노부를 떠나는 것은 대성인께서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으로 정하신 땅을 버리는 일이었다. 닛코상인은 그 심정을 「하라전 답서」에 이렇게 썼다.

초겨울, 후지산 서쪽 기슭의 넓게 비탈진 들판에 크고 거친 화산 바위들과 억새 덤불, 외따로 선 소나무가 흩어져 있고, 들판 끝에 초가 몇 채와 새로 닦은 땅에 쌓인 목재 더미, 그 뒤로 금빛 구름 띠를 두른 눈 덮인 후지산이 화면 위 절반을 채운 금박 수묵화
그림 10 · 오이시가하라

身延沢を罷り出で候事面目なさ本意なさ申し尽し難く候えども、打ち還し案じ候えば、いずくにても聖人の御義を相継ぎ進らせて、世に立て候わん事こそ詮にて候え

미노부의 골짜기를 떠나는 일은 면목 없고 뜻에 어긋남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거듭 생각해 보면 어디서든 성인의 뜻을 이어받아 세상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요체입니다.

「하라전 답서」, 닛코상인, 사료, 강의 인용

하키리 일족 가운데서도 닛코상인을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기요나가(淸長)는 1289년 2월 5일 서장을 올려 「미노부 골짜기를 떠나신다 해서 마음이 변하거나 소홀히 여기거나 하신 법문을 한 부분이라도 어긴다면 본존과 성인의 어영의 미움을 기요나가가 몸에 두껍고 깊이 받겠다」고 맹세했다(사료, 강의 인용). 가마쿠라에 있던 사네나가도 일족 에치젠공에게 「이제 만사를 부탁드린다」며 닛코상인을 붙잡아 달라는 서장을 보냈다(사료, 강의 인용). 그러나 닛코상인의 결심은 굳었다.

1289년(쇼오 2년) 봄, 닛코상인은 모든 중보(重寶)를 모시고 미노부를 떠났다. 처음에는 외조부 유이 입도의 집이 있던 가와이에 잠시 머물렀고, 3월에 도키미쓰의 청을 받아 우에노로 옮겼다. 열네 해 전 다카쓰치의 무덤에서 맺은 도계(2부 10절)가 여기서 이어졌다.

도키미쓰는 오이시가하라(大石ヶ原)를 내놓았다. 우에노 마을 안의, 후지산 서쪽 기슭의 넓은 들이었다. 그해 10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니치모쿠상인 · 닛케 · 니치젠 · 닛슈 · 닛센 등의 문하와, 도키미쓰 · 니타시로노부쓰나 등의 단월이 힘을 모아 대방(大坊)을 지었다. 1290년(쇼오 3년) 10월 12일, 사방 열두 칸의 대방이 완성되었다. 불간 · 주지의 거처 · 사무소 · 집회소 · 부엌 등 여섯으로 나뉘어 「여섯 칸 방(六壺)」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니치모쿠상인은 렌조보, 닛케는 자쿠니치보, 닛슈는 리쿄보, 닛센은 조렌보, 니치존은 구조보를 지었다. 강의는 이것이 대석사의 기반이 되었다고 쓴다. 이때 닛코상인은 마흔다섯, 도키미쓰는 서른둘이었다.

그 뒤로도 렌토보 · 조칸보 · 간교보 · 지부보 · 조렌보 등의 방이 잇달아 지어져, 도키미쓰가 살아 있는 동안 대석사의 탑중 방은 열하나에 이르렀다. 강의는 도키미쓰를 「대석사 개기 단나(開基檀那)」라 부른다.

서술 범위 — 이 절은 사용자 결정(2026-10-01)에 따라 강의의 서술을 그대로 따랐다. 대석사의 본존, 계단,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의 본문사 건립 조항, 오늘날 대석사를 둘러싼 교단 사이의 관계는 다루지 않는다(C-1 · C-4).

  1. ① 1282.9–10 부촉血脈の次第 日蓮日興 · 身延山久遠寺の別当たるべきなり1600*
  2. ② 1282.10 말 닛코상인 유골을 모시고 미노부로 · 별당
  3. ③ 1283.1 묘소 당번표
  4. ④ 1285 봄 니코 학두
  1. 사료⑤ 1288.12 「하라전 답서」 세 가지 사정
  2. 사료⑥ 1289.2.5 기요나가의 서장 · 1289 봄 미노부 이산 · 가와이
  3. ⑦ 1289.3 도키미쓰의 청으로 우에노 · 오이시가하라 기진 · 10월 착공
  4. ⑧ 1290.10.12 대방(12칸 사방) 완성닛코상인 45 · 도키미쓰 32

「此の義に依つて…彼の波木井入道の子孫と永く以て師弟の義絶し畢んぬ」1603

* 강의 인용 원문 · 33절
도표 33 · 미노부에서 오이시가하라로 1282–1290

만년 — 입도 다이교

1290 — 1332년 5월 1일

대석사가 세워진 뒤의 도키미쓰에 대해서는 자손에게 영지를 나누어 준 양도장 말고는 문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석사와 오모스가 모두 그의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인지, 혹은 오랜 세월 사이에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닛코상인이 도키미쓰에게 보낸 편지도 거의 전하지 않는다고 강의는 쓴다.

1298년(에이닌 6년), 대석사의 기초가 다져지자 닛코상인은 동쪽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오모스 마을의 지도 이시카와 마고사부로 요시타다(도키미쓰의 조카)의 청으로 오모스에 어영당(御影堂)을 세우고 그곳으로 옮겼다. 그 마룻대 글에 두 대시주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고 강의는 전한다. 「대시주 지도 이시카와 마고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타다 / 합력 고이즈미 법화중 등 / 대시주 난조 시치로지로 다이라노 도키미쓰 / 같은 우에노 강중(講衆中)」(사료, 강의 인용). 닛코상인이 오모스로 옮긴 뒤 대석사는 니치모쿠상인이 이끌었다. 강의는 대석사와 오모스가 「두 절이 한 절」의 관계로 구별이 없었다고 쓴다.

1314년(쇼와 3년)은 대성인의 33회기이자, 도키미쓰에게는 아버지 난조시치로의 50회기였다. 1316년의 문서에 그는 입도하여 「다이교(大行)」라 이름하고 있다. 1323년(겐코 3년) 8월 13일, 아내 오토쓰루(乙鶴, 법호 묘렌)가 세상을 떠났다. 묘렌사의 전승에 따르면, 도키미쓰는 아내의 1주기에 제 집을 절로 삼아 그 명복을 빌고자 닛코상인에게 청했다. 닛코상인은 이를 받아들여 제자 자쿠니치보 닛케를 개기로 하고, 아내의 법호를 그대로 따 「묘렌사(妙蓮寺)」라 이름 지었다. 1324년 3월의 일이다.

1331년(겐코 원년) 10월, 대성인의 50회 원기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대성인의 여섯 고제 가운데 닛쇼 · 니치로 · 니코 · 닛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닛지는 해외 홍교에 나서 소식이 끊겼다. 강의는 닛코상인 한 사람이 원기를 봉행했다고 쓴다. 그 무렵 막부는 몽골과의 싸움 뒤로 지쳐 있었고, 어가인 제도가 무너지고, 조정을 중심으로 한 막부 타도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듬해 1332년(쇼쿄 원년) 5월 1일, 도키미쓰는 일흔넷의 생애를 마쳤다. 유언에 따라 부모가 잠든 우에노 마을 다카쓰치의 무덤에 묻혔다. 닛코상인이 오모스에서 여든여덟으로 입멸한 것은 그로부터 아홉 달 뒤인 1333년 2월 7일이었고,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것은 그해 5월이었다.

연대 대조 — 별세 쇼쿄 원년(1332) 5월 1일 · 74세(강의). 강의의 서론 첫머리는 「닛코상인보다 한 해 먼저」라 적는다. 오토쓰루의 별세는 묘렌사 과거장에 겐코 3년(1323) 8월 13일, 묘렌사 개창은 겐코 4년(1324) 3월(강의 본문에 「3월, 20일」로 적힌 곳이 있어 날짜는 확인 중). 입도 다이교는 쇼와 5년(1316)의 문서(강의).

자손 — 아홉 아들과 네 딸

14세기 · 대석사 · 묘렌사의 초창기

홋리 니치코의 『난조도키미쓰 전전』에 따르면 도키미쓰는 아홉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대성인이 1280년 8월에 이름을 지어 주신 「니치와카고젠」이 그 가운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1333년 2월 7일 닛코상인이 오모스에서 입멸하고 이튿날 장례가 치러졌을 때, 닛코(日鄕)가 엮은 「닛코상인 어천화 차제」에는 도키미쓰의 일족이 여럿 나온다. 사에몬사부로 · 사에몬시로 · 사에몬시치로 · 시치로와카미야가 꽃을 들고, 사에몬고로 도키쓰나가 어영을 받들고, 오토와카마루가 가마를 따랐다(사료, 강의 인용). 쉰한 해 전 이케가미에서 아버지가 산화를 들었던 일(5부 30절)을 아들들이 되풀이한 것이다. 강의는 이렇게 맺는다. 도키미쓰의 자손은 대석사와 후지 묘렌사의 초창기에 단나로서, 또 출가하여 주지로서 도키미쓰의 뜻을 이어 대법 흥륭의 주춧돌이 되었다.

전승
부부시치로지로 도키미쓰 다이교 · 1259–1332오토쓰루 묘렌 · 1323.8.13도키미쓰와 혼인
아홉 아들사에몬타로 전승— 다로 다카미쓰사에몬지로 도키타다 전승가독 · 1326 사망— 후시마루사에몬사부로 전승이즈 난조사에몬시로 전승사에몬고로 도키쓰나 전승가독— 도키나가 · 고오마루 = 묘혼사 닛덴사에몬로쿠로 전승기요토키사에몬시치로 전승오토와카 전승묘렌사 닛소오토쓰구 전승묘렌사 니치겐
네 딸딸 전승니타 고로지로 요리쓰나와 혼인 — 대석사 4세 니치도딸 전승가가노 다로사부로와 혼인 — 대석사 5세 니치교딸 오토마쓰 전승딸 오토이치 전승
강의의 「난조 집안 계도」(홋리 니치코 『난조도키미쓰 전전』 바탕) · 선은 모두 계도 · 기록(점선) · 35절
도표 34 · 도키미쓰의 자손

대성인이 본 난조도키미쓰

어서 속의 난조도키미쓰

대성인은 여덟 해 동안 이 젊은이와 그 집안에 예순 통 가까운 편지를 보내셨다. 그 편지들이 그를 부른 말을 모으면 그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 「모습도 다르지 않은 데다 마음까지 닮으셨다」(1507),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또 이 경을 믿으시니」(1508), 「어버이의 뜻을 자식이 편다」(1531), 「저 아이가 아버지의 줄을 푼 것과 이 뜻은 다르지 않다」(1534). 대성인은 그를 볼 때마다 다카쓰치의 무덤을 떠올리셨다.

젊은 사람. 「젊은 분이 계시니 말씀드리는 것」(1507), 「잘 남에게 읽혀서 들으라」(1510), 「몸은 작은 사람이지만 니치렌에게 뜻이 깊은 사람」(니치로 대필 · 사료). 대성인은 그가 젊다는 것을 한 번도 잊지 않으셨고, 그래서 그를 지키려 하셨다.

스루가의 기둥. 「그대가 꺾이면 스루가에서 조금 믿는 사람도 모두 법화경을 버릴 것」(1539), 「그대 한 사람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신심을 권하여 과거의 부모를 구하라」(1557), 「바라건대 나의 제자들이여, 대원을 일으켜라」(1561).

현인. 「우에노 현인 님」(1560), 「아쓰와라의 일이 고마워서 드리는 답장」(1561), 「결코 주군을 등진 사람이라고 하늘은 보지 않으실 것」(1575), 「이미 법화경의 행자를 닮으셨다」(1575).

마음은 선인. 「말대의 범부로 무사의 집에 태어나 악인이라 해야 할 것이나 마음은 선인이다」(1586), 「아무도 권하지 않는데 마음속으로부터 믿어」(1586–1587), 「끝내 버리는 마음이 없다」(1587).

창가학회 강의는 대성인과 도키미쓰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본다. 하나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젊은이를 「내 아들처럼」 여기신 스승의 자애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1579)는 말이 그 마음을 전한다. 다른 하나는 그 젊은이가 그 자애에 응한 방식이다. 그는 말로 응하지 않았다. 토란 한 짐과 소금 한 짐으로, 숨겨 준 신주 한 사람으로, 내놓은 들판 하나로 응했다. 강의는 그를 「평생 순진한 신앙을 관철한 가마쿠라 무사」라고 요약한다.

①아버지를 닮은 아들
  • 「すがたのたがわせ給わぬに、御心さひにられける事いうばかりなし」「우에노전답서(1507)」 · 1507쪽
  • 「其の親の跡をつがせ給いて又此の経を御信用あれば」「우에노전답서(1508)」 · 1508쪽
  • 「王の心ざしをば臣のべ・をやの心ざしをば子の申しのぶるとはこれなり」「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 · 1531쪽
  • 「かのちごのちちのなわを・ときしと・この御心ざし・かれにたがわず」「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 · 1534쪽
②젊은 사람
  • 「若き殿が候へば申すべし」「우에노전답서(1507)」 · 1507쪽
  • 「よくよく人によませて・きこしめせ」「우에노전답서(1508)」 · 1510쪽
  • 「身はちいさきものなれども、日蓮に御こころざしふかきもの也」니치로 대필 「호키공 어방 소식」사료
③스루가의 기둥
  • 「殿もせめをとされさせ給うならば・するがにせうせう信ずるやうなる者も」「우에노전답서(1537)」 · 1539쪽
  • 「殿一人にかぎるべからず・信心をすすめ給いて過去の父母等をすくわせ給へ」「우에노전답서(1555)」 · 1557쪽
  • 「願くは我が弟子等・大願ををこせ」「우에노전답서(1560)」 · 1561쪽
④현인
  • 「上野賢人殿」「우에노전답서(1560)」 받는 사람 · 1560쪽
  • 「此れはあつわらの事の・ありがたさに申す御返事なり」「우에노전답서(1560)」 · 1561쪽
  • 「まつたく主君にそむく人とは天・御覧あらじ」「우에노전답서(1574)」 · 1575쪽
  • 「貴辺は・すでに法華経の行者に似させ給へる事」「우에노전답서(1574)」 · 1575쪽
⑤마음은 선인
  • 「この上野の七郎次郎は末代の凡夫・武士の家に生れて悪人とは申すべけれども心は善人なり」「법화증명초(사활초)」 · 1586쪽
  • 「人もすすめぬに心中より信じまいらせて」「법화증명초(사활초)」 · 1586–1587쪽
  • 「ついに捨つる心なくて候へば」「법화증명초(사활초)」 · 1587쪽
대성인이 쓰신 호칭들上野殿 · 南条殿 · 南条七郎次郎殿 · 上野賢人殿 · 上野の七郎次郎
도표 35 · 대성인이 도키미쓰를 부르신 말

세 층의 난조도키미쓰

이 페이지는 난조도키미쓰를 세 층으로 읽었다.

누구인가
역사의 난조도키미쓰1259–1332, 이즈 난조에 뿌리를 둔 헤이 씨 계열의 어가인 · 스루가 우에노 마을의 지도 · 뒤에 사에몬노조 · 입도 다이교
문하의 난조도키미쓰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고 열여섯에 미노부를 찾은 젊은 지도 · 스루가 신도의 기둥 · 「우에노 현인」
대석사의 단나닛코상인을 제 땅에 맞아들인 사람 · 대석사 개기 단나
무엇을 했는가
역사의 난조도키미쓰네 나라 다섯 곳의 작은 영지를 지키고 아들들에게 나누어 줌 · 막부의 공사를 견딤
문하의 난조도키미쓰마흔세 번의 공양 · 1279 아쓰와라 법난 때 쫓기는 신주를 숨김 · 장례에서 산화를 듦
대석사의 단나1289 닛코상인을 우에노로 맞음 · 오이시가하라 기진 · 1298 오모스 어영당의 대시주 · 묘렌사
무엇을 받았는가
역사의 난조도키미쓰부역과 세금 · 「탈 말도 없고 처자는 입을 옷도 없는」 처지
문하의 난조도키미쓰예순 통 가까운 편지 · 1275 어본존 · 「법화증명초」
대석사의 단나닛코상인과의 열여섯 해의 도계
무엇을 남겼는가
역사의 난조도키미쓰양도장 · 우에노 다카쓰치의 묘
문하의 난조도키미쓰「우에노 현인」이라는 이름 · 공양의 편지들
대석사의 단나대석사 · 묘렌사의 초창 · 니치도 · 니치교의 외조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의 난조도키미쓰작은 마을의 무사가 권력의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기록
문하의 난조도키미쓰젊은 사람이 스승의 자애에 응한 본보기 · 「대원을 일으켜라」
대석사의 단나스승의 길을 이은 제자를 지킨 단나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난조도키미쓰를 알수록, 그의 공양이 얼마나 작은 땅에서 나왔는지가 보인다. 그는 화산재 땅의 작은 마을을 다스렸고, 신사 조영의 부역과 막부의 공사를 떠안았으며, 해마다 토란과 소금을 산 너머로 보냈다. 문하의 난조도키미쓰를 알수록, 대성인의 편지가 한 젊은이의 고비마다 얼마나 정확하게 닿았는지가 보인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해에, 「한편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해에, 이웃 마을의 동지들이 목숨을 잃은 해에, 막내아우를 잃은 해에, 자신이 병든 해에, 편지는 왔다. 그리고 대석사의 단나를 알수록, 다카쓰치의 무덤에서 시작된 인연이 열여섯 해 뒤 오이시가하라의 들판으로 이어진 까닭이 보인다. 대성인은 그 아버지의 무덤을 잊지 않으셨고, 닛코상인은 대성인을 대신해 그 무덤에서 경을 읽었으며, 도키미쓰는 그 닛코상인을 잊지 않았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1. 1259—출생스루가 우에노 · 둘째 아들
  2. 1263무렵아버지 난조시치로 입신가마쿠라 오반야쿠 때 · 설(1260–1261설도)
  3. 126412.13「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위로서)」아버지 앞 · 「日本第一の法華経の行者・日蓮房の弟子なりとなのらせ給へ」
  4. 12653.8아버지 사망법호 교조 · 다카쓰치 묘 · 대성인 성묘
  5. 1265—막내 시치로고로 출생
  6. 12745.17대성인 미노부 입산5.15 오미야를 지나심
  7. 12747.11「우에노전미망인답서」어머니 앞
  8. 12747.26「우에노전답서(1507)」 · 첫 공양16세 · 「若き殿が候へば」
  9. 12748.10형 시치로타로 수사계도 · 전승
  10. 127410월분에이의 역
  11. 127411.11「우에노전답서(1508)」「其の親の跡をつがせ給いて」
  12. 12751월「봄의 축하어서」 · 닛코상인의 성묘다카쓰치 · 자아게
  13. 12755.3「우에노전답서(1511)」1276 · 1277 · 1279설도
  14. 12756월류센사의 박해 시작
  15. 12757.2「난조전답서(1541)」「そりやうなんども・たがふ事あらば」
  16. 12757.12「우에노전답서(1512)」오미야 조영
  17. 12758.18「우에노전어서(1513)」 · 새 집 마룻대 글여러 설
  18. 127510월어본존 수여「日興第一の弟子」(사료)
  19. 127512.22「우에노전모친답서(1515)」
  20. 12761.19「난조전답서(1529)」「南条の七郎次郎殿にかぎりて」
  21. 12763.18「난조전답서(1530)」「ははき殿読み聞かせ」
  22. 1276윤3.24「난조전답서(대교태랑서)」효양
  23. 12769.15「구로타로전답서(1535)」일족
  24. 127612월「본존공양어서」난조 헤이시치로 앞
  25. 12775.15「우에노전답서(1537)」「한편인 척하는 사람」
  26. 127712.17「대백우거서」
  27. 12783.24누나 묘이치 사망
  28. 12784.1「우에노전답서(1545)」이시카와의 히메고젠
  29. 12785.24「난조전부인답서」아내 앞
  30. 12786월「다카하시전답서(미곡어서)」받는 사람 설 · 강의 추정
  31. 12787.7「종종물어소식」받는 사람 설
  32. 12789.19「우에노전답서(1551)」소금 한 짐
  33. 1278윤10.12「우에노전답서(1552)」역병 · 흉작
  34. 127811.1「구로타로전답서(1553)」
  35. 12794.8시로 칼에 찔림류센사신장
  36. 12794.20「우에노전답서(1555)」칼과 막대
  37. 12798월야시로 피살류센사신장
  38. 12799.21아쓰와라 스무 명 체포
  39. 127910.1「성인어난사」「さぶらうざへもん殿のもとに」
  40. 127910월「류센사신장」대작
  41. 127910.15진시로 · 야고로 · 야로쿠로 참수
  42. 127910.17「성인등답서」
  43. 127911.6「우에노전답서(1560)」 · 「우에노 현인」「願くは我が弟子等・大願ををこせ」
  44. 127912.27「우에노전답서(1561)」다섯 자 눈
  45. 12806.15시치로고로와 미노부 참예
  46. 12807.2「우에노전답서(1564)」신주를 숨김
  47. 12808.26「우에노전답서(자보서)」 · 니치와카고젠강의
  48. 12809.5시치로고로 사망16세
  49. 12809.6「우에노전어서(1567)」「あはれ肝ある者かな」
  50. 128010.24「우에노전모친답서(중음서)」49일
  51. 128012.27「우에노전답서(1574)」공사 · 돈 한 관
  52. 12811.13「우에노니부인답서(1575)」
  53. 12815월고안의 역
  54. 12819.11「난조전답서(1578)」 · 도키미쓰 병「是にて待ち入つて候べし」
  55. 12819.20「우에노전답서(1579)」
  56. 128111.15「우에노니부인답서(1580)」마쓰노 입도 기일
  57. 128112.8「우에노전모친답서(신병서)」대성인의 병
  58. 12822.25니치로 대필 서장사료
  59. 12822.28「법화증명초(사활초)」「心は善人なり」
  60. 12823월「연삼매어서」 · 회복강의 인용
  61. 12829.8대성인 미노부 출발
  62. 12829.19「하키리전어보」「はかをばみのぶさわに」
  63. 128210.13대성인 입멸이케가미
  64. 128210.14장례 · 산화「종조어천화기록」
  65. 128210.24유골이 우에노에 하룻밤『겐소 화도기』 · 전승
  66. 12831월묘소 당번표사료
  67. 12845.10난조도키미쓰어머니 사망법호 묘호
  68. 1285봄니코 미노부 학두
  69. 128812월「하라전 답서」세 가지 사정 · 사료
  70. 1289봄닛코상인 미노부 이산 · 3월 우에노로
  71. 128910월오이시가하라 착공
  72. 129010.12대석사 대방 완성도키미쓰 32
  73. 12934.22헤이노사에몬노조 주살
  74. 1298—오모스 어영당 · 대시주사료
  75. 13092.23양도장「左衛門尉時光」
  76. 1316—입도 다이교문서
  77. 13238.13아내 오토쓰루 사망묘렌사 과거장
  78. 13243월묘렌사전승
  79. 13325.1별세74 · 다카쓰치
  80. 13332.7닛코상인 입멸오모스
참고 문헌
어서

창가학회판 『日蓮大聖人御書全集』(일본어판) 쪽수. 본문에서 인용한 어서: 「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위로서)」 · 「우에노전미망인답서」 · 「우에노전답서」(1507 · 1508 · 1511 · 1512 · 1537 · 1545 · 1551 · 1552 · 1555 · 1560 · 1561 · 1564 · 1574 · 1579) · 「봄의 축하어서」 · 「우에노전어서」(1513 · 1567) · 「우에노전모친답서」(1515 · 중음서 · 신병서) · 「우에노니부인답서」(1575 · 1580) · 「난조전답서」(1529 · 1530 · 대교태랑서 · 1541 · 1578) · 「난조전부인답서」 · 「종종물어소식」 · 「구로타로전답서」(1535 · 1553) · 「본존공양어서」 · 「대백우거서」 · 「법화증명초(사활초)」 · 「연삼매어서」 · 「다카하시전답서(미곡어서)」 · 「이체동심사」 · 「시주쿠원신장」 · 「류센사신장」 · 「호키전등답서」 · 「성인어난사」 · 「성인등답서」 · 「팔번궁조영사」 · 「도키입도전답서」(993) · 「도키전어서」(964) · 「시조깅고전답서(팔풍초)」 · 「백육개초」(869) · 「하키리전어보」 · 「미노부상승서」 / 닛코상인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사료(강의 인용)

닛코상인 「제자분 본존 목록」 · 「종조어천화기록」 · 「묘소를 지킬 당번표」 · 「하라전 답서」 · 미마사카보 앞 서장 / 니치로 대필 「호키공 어방 소식」(1282.2.25) / 하키리사네나가 · 기요나가의 서장 / 난조도키미쓰 양도장(1309 · 1321 · 1331) / 오모스 어영당 마룻대 글(1298) / 『겐소 화도기』(1478) / 묘렌사 과거장

교학

창가교학연구실 어서 강의: 「上野殿(南条時光)について」(서론 1–2) / 같은 블로그의 난조 관련 어서 강의(「우에노전답서」 각 편 · 「법화증명초」 · 「류센사신장」 · 「이체동심사」 · 「성인어난사」 · 「우에노니부인답서」 · 「우에노전모친답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