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천태산, 운해 위 두 절벽 사이에 걸린 돌다리와 그 아래로 떨어지는 흰 폭포, 다리 건너편의 작은 기와 정자, 겹겹의 능선 너머 떠오르는 금빛 해, 오른쪽 아래 산길에 폭포를 바라보고 선 아주 작은 뒷모습을 그린 금박 수묵화

천태대사 지의

天台大師538–597 · 상법의 법화경 행자

538년, 양나라 형주의 한 관리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다. 열일곱 살 되던 해 나라가 무너지고 집안이 흩어졌다. 그는 출가했고, 스물세 살에 북쪽에서 쫓겨 온 한 선사를 찾아 국경의 산으로 들어갔다. 법화경 약왕품의 한 구절을 읽다가 몸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했고,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아니면 증득하지 못했고, 내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그 뒤 그는 남조의 도읍에서 강의하고, 동쪽 바닷가의 산에 들어가 홀로 수행하고, 다시 두 왕조의 황제 앞에 섰다. 예순 해의 생애 끝에 남은 것은 법화경을 읽는 세 권의 책, 『법화현의』 · 『법화문구』 · 『마하지관』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가 머문 산의 이름으로 천태대사(天台大師), 황제가 준 이름으로 지자대사(智者大師)라 불렀다.

천태 이전의 중국 불교는 오백 년 동안 경전을 옮기고 읽어 왔다. 인도에서 온 경전은 수천 권에 이르렀고, 모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했다. 그 가운데 무엇이 부처의 참뜻인가. 남쪽과 북쪽의 학승들은 저마다 답을 내놓았고, 그 답은 열 갈래로 나뉘었다. 대부분은 화엄경을 첫째, 열반경을 둘째, 법화경을 셋째에 두었다. 천태는 이 순서를 뒤집었다. 법화경이 첫째다. 그리고 그 판단을 한 경의 찬탄이 아니라, 석존 일대의 모든 가르침을 하나의 체계 안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논증했다.

천태가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학(敎)과 수행(觀)을 둘로 나누지 않았다. 경을 읽는 이론과 마음을 관하는 실천을 한 몸으로 세운 것, 이것을 뒤의 사람들은 「교관이문(敎觀二門)」, 또는 「교관쌍미(敎觀雙美)」라 불렀다. 그 실천의 정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에 삼천이 갖추어져 있다. 일념삼천이다.

니치렌 대성인은 천태를 누구보다 자주 부르셨다. 「상법 가운데는 천태 한 사람이 법화경과 일체경을 읽었다」(「개목초」, 202쪽). 인도의 석존, 중국의 천태, 일본의 전교, 그리고 말법의 대성인 자신. 대성인은 이 네 사람을 「삼국사사」라 하셨다(「현불미래기」, 509쪽). 그러면서도 대성인은 천태가 편 법을 「이(理)」라 하시고, 자신이 펴는 법을 「사(事)」라 하셨다. 천태는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이 페이지는 그 물음을 따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

세 번의 깨달음, 세 권의 책대소산의 법화삼매(560) · 화정봉의 밤(576) · 옥천사의 여름(594)『법화현의』 · 『법화문구』 · 『마하지관』
대성인의 한 줄「상법 가운데는 천태 한 사람이 법화경과 일체경을 읽었다」 — 「개목초」, 202쪽像法の中には天台一人法華経・一切経をよめり
  1. 538형주 화용출생 — 오늘날 위치는 두 견해
  2. 554강릉서위의 함락
  3. 555상주 과원사출가 · 지금의 창사
  4. 557 무렵대현산형주 · 법화삼부경 (자리는 대략)
  5. 560–567광주 대소산혜사 곁 · 대소개오
  6. 568–575금릉와관사 강의
  7. 575–585천태산화정봉 · 수선사
  8. 577남악 형산혜사 입적 (592 참배)
  9. 585–589금릉태극전 · 광택사
  10. 590 · 592여산진의 멸망 뒤
  11. 591양주진왕 양광에게 보살계 (595 다시)
  12. 593 · 594형주 당양 옥천사『법화현의』 · 『마하지관』
  13. 595–597천태산다시 산으로 · 입멸 뒤 불롱
  14. 597석성사입멸 · 지금의 신창
출생지 화용현의 오늘날 위치는 두 견해가 있다(1부 3절 연구 노트) · 남북조 경계는 시기마다 오르내린 대략선 · 윤곽은 대략이며 측량 지도가 아니다 · 점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1 · 천태 생애의 땅
1부 난세의 소년

시대 — 남조와 북조, 그리고 오백 년의 불교

5~6세기 · 남북조 시대의 중국

천태가 태어난 6세기 전반, 중국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화북에서는 선비족의 북위(北魏)가 439년 북방을 통일했으나, 534년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고, 다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바뀌었다. 장강 남쪽에서는 한족 왕조가 송(宋) · 제(齊) · 양(梁) · 진(陳)으로 이어졌다. 역사가들은 이 두 세기 반을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남쪽의 도읍은 줄곧 건강(建康), 곧 지금의 난징이었고, 어서와 불교 문헌은 이곳을 흔히 금릉(金陵)이라 부른다.

불교는 두 세계에서 서로 다른 얼굴로 자랐다. 북조에서 불교는 국가의 불교였다. 황제가 곧 여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왕권과 가까웠고, 윈강과 룽먼의 거대한 석굴이 그 힘을 보여 준다. 선정과 계율의 실천이 강했다. 그러나 권력과 가까운 만큼 위험도 컸다. 446년 북위의 태무제, 574년 북주의 무제가 불교를 금지하고 사찰과 경전을 없앴다. 두 번째 폐불은 천태가 서른일곱 살 때의 일이다.

남조의 불교는 귀족과 학문의 불교였다. 경전을 강의하고 주석하는 학승들이 존경받았고, 황제와 귀족이 그 강의를 들었다. 그 정점이 양 무제(梁武帝, 재위 502–549)다. 그는 스스로 계를 받아 「황제보살」이라 불렸고, 네 번이나 동태사(同泰寺)에 몸을 바쳐 출가하겠다고 했다가 신하들이 막대한 돈으로 「되사 오는」 일을 겪었다. 도읍 건강에는 오백 개 가까운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제의 치세는 비극으로 끝났다. 548년 북에서 투항해 온 장군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을 포위했고, 무제는 이듬해 유폐된 채 굶주려 죽었다. 이 「후경의 난」이 천태의 집안을 무너뜨리는 연쇄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의 불교 학문은 한 가지 큰 물음을 안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5세기 초 장안에서 『묘법연화경』 · 『대품반야경』 · 『유마경』 · 『중론』 · 『대지도론』을 옮긴 뒤(용수 편 15절), 중국에는 화엄경 · 열반경 · 승만경 · 능가경이 잇달아 옮겨졌다. 경전은 넘쳐 났고, 서로 달랐다. 어떤 경은 모든 것이 공하다고 했고, 어떤 경은 부처의 몸이 영원하다고 했으며, 어떤 경은 이승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했고, 어떤 경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했다. 모두 석존의 말씀이라면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학승들은 경전을 석존의 생애 위에 배열하고 깊이를 가렸다. 이것이 교상판석(敎相判釋), 곧 교판이다(석존 편 21절). 5세기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세운 「오시(五時)」의 교판이 남조의 기본 틀이 되었고, 여기서 여러 갈래가 나왔다. 천태가 태어났을 때 그 갈래는 남쪽에 셋, 북쪽에 일곱, 모두 열이었다(4부 13절).

또 하나, 이 시대 남조에서 법화경 연구의 정점에 선 사람이 광택사(光宅寺)의 법운(法雲, 467–529)이었다. 양 무제가 자신의 옛 집을 절로 바꾸어 그에게 맡긴 것이 광택사다. 법운의 『법화의기(法華義記)』 여덟 권은 오늘날 전하는 중국 최초의 완전한 법화경 주석이다. 그는 법화경을 깊이 풀었지만, 법화경을 열반경 아래에 두었다. 천태는 법운이 세상을 떠나고 아홉 해 뒤에 태어났다.

북조북위~534북위 폐불446동위534–550서위535–557북제550–577북주557–581북주 폐불574–578수581–618
남조송420제479양502–557양 무제502–549후경의 난548–552강릉 함락554진557–589수의 통일589
불교와 인물구마라집 『묘법연화경』406혜관의 오시5세기법운467–529혜문연대 미상혜사515–577지의538–597관정561–632현장 귀국645
주홍 점 — 폐불 · 금선 — 589 수의 통일 · 금 띠 — 지의 · 양 끝을 흐리게 한 막대는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 · 1절
도표 2 · 남북조와 천태 — 북조 · 남조 · 불교와 인물

전기의 층

6세기 말 ~ 13세기 · 전기의 성립

천태의 생애를 전하는 자료는 용수나 천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 제자가 쓴 전기, 제자가 모은 편지와 문서, 그리고 동시대 역사가의 기록이 모두 남아 있다.

① 『수천태지자대사별전(隋天台智者大師別傳)』 한 권 (T50 no.2050) — 천태의 제자 장안대사 관정(章安大師 灌頂, 561–632)이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지었다. 탄생의 상서에서 입멸과 그 뒤의 기이한 일까지 차례로 전한다.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가 쓴 전기이며, 뒤의 모든 전기의 바탕이 되었다. 이 페이지에서 『별전』이라 부른다.

② 『국청백록(國淸百錄)』 네 권 (T46 no.1934) — 역시 관정이 엮었다. 천태가 제정한 교단의 규칙, 수행 의례, 진 · 수의 황제와 왕족이 보낸 편지와 칙서, 천태가 진왕에게 남긴 유서, 입멸 뒤 국청사 창건에 관한 문서 등 백여 편을 모았다. 전기의 사건들을 당시의 문서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드문 자료다.

③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7 「지의전」 (T50 no.2060) — 당의 도선(道宣, 596–667)이 7세기 중엽에 편찬한 고승전 속의 전기. 대체로 『별전』을 따르지만 도선 자신의 평가가 더해져 있다. 대성인이 「찬시초」에서 인용하신 도선의 천태 찬탄이 이 전기와 이어져 있다(6부 28절).

④ 『불조통기(佛祖統紀)』 권6 (T49 no.2035) — 남송의 천태종 승려 지반(志磐)이 1269년에 완성한 불교사. 대성인과 같은 시대의 책이다. 천태를 「동토 제4조」로 세우고, 앞의 전기들을 종합해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① 『별전』관정
탄생의 상서
있음
출가
있음
대소산
있음
와관사
있음
천태산 입산
있음
화정봉
있음
태극전
있음
진왕의 보살계
있음
옥천사 강설
있음
입멸
있음
국청사 창건
있음
② 『국청백록』관정 편
탄생의 상서
확인 중
출가
확인 중
대소산
확인 중
와관사
확인 중
천태산 입산
확인 중
화정봉
확인 중
태극전
확인 중
진왕의 보살계
문서로 확인
옥천사 강설
확인 중
입멸
문서로 확인
국청사 창건
문서로 확인
③ 『속고승전』 권17도선
탄생의 상서
확인 중
출가
확인 중
대소산
확인 중
와관사
확인 중
천태산 입산
확인 중
화정봉
확인 중
태극전
확인 중
진왕의 보살계
확인 중
옥천사 강설
확인 중
입멸
확인 중
국청사 창건
확인 중
④ 『불조통기』 권6지반 1269
탄생의 상서
확인 중
출가
확인 중
대소산
확인 중
와관사
확인 중
천태산 입산
확인 중
화정봉
확인 중
태극전
확인 중
진왕의 보살계
확인 중
옥천사 강설
확인 중
입멸
확인 중
국청사 창건
확인 중
있음 문서로 확인 — 칙서 · 서신 · 유서 확인 중빈 원은 원문 확인 뒤 표기 · 관정의 편집에 관한 연구(2절 연구 노트)
도표 3 · 전기의 층

연구 노트 — 근대의 천태 전기 연구는 『별전』과 『국청백록』을 서로 맞추어 보는 데서 출발했다. 벨기에의 허비츠(L. Hurvitz)는 1962년 천태의 생애와 사상을 서구에 처음 체계적으로 소개했고, 일본의 사토 데쓰에이(佐藤哲英)는 1961년 『천태대사의 연구』에서 천태의 저작 하나하나의 성립을 가렸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천진화(陳金華, Chen Jinhua)는 『별전』과 『국청백록』이 모두 관정의 손을 거쳤다는 점에 주목해, 관정이 천태 사후 국청사의 지위를 지키고 천태 교단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뜻에서 어떤 기록은 다듬고 어떤 문서는 새로 엮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페이지는 전통의 전기를 따라 쓰되, 연구자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곳은 이 상자에 적는다.

형주의 소년 — 이름과 꿈

538 — 553 · 양나라 형주

천태는 538년(양 대동 4년), 형주(荊州) 화용현(華容縣)에서 태어났다. 장강 중류, 동정호의 북쪽이다. 성은 진(陳), 자는 덕안(德安)이다. 『별전』에 따르면 선조는 영천(潁川)의 진씨로, 서진 말의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옮겨 온 북방의 명문이었다. 아버지 진기조(陳起祖)는 학문과 무예를 갖추어 양 무제의 일곱째 아들, 형주를 다스리던 상동왕 소역(蕭繹)을 섬겼다. 어머니는 서(徐)씨다.

전기는 탄생의 상서를 전한다. 어머니가 오색의 향기로운 연기가 품에 드는 꿈을 꾸었고, 아이가 태어난 밤 방 안이 환하게 밝았다. 아이의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었다(重瞳)는 전승도 있다. 옛 중국에서 순임금과 항우에게 붙여진 비범함의 표지다. 집안에서는 아이를 왕도(王道), 또는 광도(光道)라 불렀다.

전기가 전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은 한결같다. 누우면 손을 모으고, 앉으면 반드시 서쪽을 향했다. 불상을 보면 절을 했고, 스님을 만나면 공경했다. 일곱 살 때 한 절에 갔더니 스님들이 아이를 귀여워해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한 번 읽어 주었는데, 아이는 그것을 듣자마자 모두 외웠다고 한다. 부모는 아이가 출가할까 걱정해 다른 경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전기는 열다섯 무렵의 한 꿈을 전한다. 아이는 불상 앞에서 출가를 서원했는데, 그 뒤 꿈에 높은 산이 바다에 닿아 있고 그 꼭대기에서 한 스님이 손짓하여 부르는 것을 보았다. 스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한 절로 이끌어 들이며 말했다. 너는 여기에 살 것이고, 여기서 마칠 것이다. 서른여덟 살의 천태가 처음 천태산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 꿈속의 산을 보았다고 전기는 적는다(3부 10절).

이름
속성陳진
자德安덕안
전승어릴 때 이름王道 · 光道왕도 · 광도
법명智顗지의
호智者大師지자대사591 진왕 양광이 올림
호天台大師천태대사머문 산의 이름
존칭東土小釋迦「동토의 작은 석가」
대성인의 표기
智顗法師智者大師天台智者大師天台大師
始は智顗・後には智者大師「보은초」, 298쪽
도표 4 · 천태의 이름들

연구 노트 — 탄생의 상서와 어린 시절의 일화는 『별전』의 서술로, 고승전의 전형적인 표현을 따르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를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 전기 작가가 스승의 생애 전체를 어떤 뜻으로 보았는지를 보여 주는 서술로 읽는다. 열다섯 무렵의 꿈과 천태산의 일치도 같다. 천태의 출생지 화용현의 오늘날 위치는 후베이성 남부(첸장시 일대)로 보는 견해와 후난성 북부로 보는 견해가 있다(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호남성」으로 적는다).

강릉이 불타던 해 — 출가

554 — 559 · 강릉에서 상주 · 형주로

548년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형주의 상동왕 소역은 군사를 일으켜 552년 난을 평정하고 강릉(江陵)에서 황제에 올랐다. 양 원제(元帝)다. 천태의 아버지는 이 새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두 해 뒤인 554년, 서위의 군대가 강릉을 함락했다. 원제는 죽임을 당했고, 성 안의 관리와 백성 십여만 명이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끌려갔다. 원제는 함락 직전 자신이 모은 책 십사만 권을 스스로 불태웠다고 전한다. 천태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집안은 흩어졌고, 얼마 뒤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 『별전』은 이때의 천태를 「나라가 무너지고 집안이 망하니(國破家亡)」라는 말로 전한다. 다음 해인 555년, 열여덟 살의 천태는 상주(湘州, 지금의 창사) 과원사(果願寺)의 법서(法緖)에게 출가했다. 법서는 그에게 십계를 주고 율의를 가르쳤다. 스무 살 무렵 혜광(慧曠) 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율장과 방등의 경전을 배웠다.

그 뒤 천태는 형주의 대현산(大賢山)에 들어가 법화경과 그 개경 · 결경인 무량의경 · 보현관경, 곧 「법화삼부경」을 외웠다. 전기는 그가 스무날 만에 세 경을 다 외웠고, 이어서 방등참법(方等懺法)을 닦다가 도량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경계를 보았다고 전한다. 스물을 갓 넘긴 천태의 수행은 이미 법화경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누구에게 배워야 할지를 찾고 있었다.

해 질 녘 넓은 장강, 갈대 우거진 강가의 나무 나루에 작은 배들이 매여 있고, 나루 끝에 봇짐을 멘 한 사람이 홀로 서서 강 건너 성곽 위로 오르는 몇 줄기 잿빛 연기를 바라보는 금박 수묵화
그림 1 · 장강의 나루

연대 대조 — 출가 연도는 『별전』의 서술에 따라 555년(18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도 「18세 때 상주 과원사의 법서에게 출가」로 적는다. 구족계를 받은 해(557 무렵, 20세)와 대현산에 들어간 해는 전기에 정확한 연도가 없어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추정한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해도 554~555년 무렵으로만 알려져 있다.

대성인은 어린 시절 세이초지에서 허공장보살에게 「일본 제일의 지자가 되게 해 주소서(日本第一の智者となし給へ)」라고 서원하셨다(「선무외삼장초」, 888쪽 · 니치렌 편 1부). 천태는 나라가 무너지고 부모를 잃은 열여덟 살에 출가했다. 두 사람의 구도는 모두 한 시대의 혼란 한가운데서 시작되었다. 천태가 겪은 강릉의 함락은 단지 한 집안의 불행이 아니었다. 한 왕조가 무너지고, 수십만의 사람이 끌려가고, 학문의 책이 불타는 광경이었다. 창가학회는 불법을 구하는 마음이 평온한 시대의 여유에서가 아니라, 무상(無常)을 몸으로 겪은 자리에서 가장 깊이 일어난다고 본다. 그 자리에서 천태가 처음 붙잡은 경이 법화경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 경을 누구에게 배워야 할지 찾아 나섰다는 것이 다음 부의 시작이다.

2부 대소산의 깨달음

남악 혜사 — 북쪽에서 온 스승

515 — 577 · 북제에서 진으로

천태의 스승 혜사(慧思, 515–577)는 북쪽 사람이었다. 남예주 무진(武津, 지금의 허난성)에서 태어나 열다섯에 출가했고, 날마다 법화경을 읽었다. 스무 살 무렵 『묘승정경(妙勝定經)』을 읽고 선정의 수행에 뜻을 두어 여러 선사를 찾아다니다가, 북제의 혜문(慧文)을 만났다.

혜문은 용수 편 21절에서 본 사람이다. 『대지도론』에서 세 가지 지혜가 「한 마음 가운데서 얻어진다(三智實在一心中得)」는 구절을 읽고, 『중론』의 「인연으로 생겨난 법」의 게송으로 공 · 가 · 중을 한 마음에서 관하는 법을 깨달았다고 전하는 선사다(교리 二 11절). 혜사는 혜문에게서 이 관법을 받았고, 여름 안거 끝에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체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혜사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대승을 강의하며 북쪽 여러 지역을 돌았는데, 그를 시기한 승려들에게 여러 번 독살의 위협을 받았다. 서른넷에는 논쟁한 승려가 음식에 독을 넣어 죽을 뻔했다. 그는 이 박해를 겪으며 오히려 중생을 건지려는 서원을 굳혔다. 금으로 쓴 『대품반야경』과 법화경을 만들고, 558년 「남악사대선사입서원문(南嶽思大禪師立誓願文)」(T46 no.1933)을 지었다.

이 서원문에는 중국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말법」을 자신의 시대로 선언하는 대목이 있다. 혜사는 석존 입멸 뒤를 정법 오백 년 · 상법 천 년 · 말법 만 년으로 나누고, 자신이 「말법에 들어 여든두 해째」에 태어났다고 적었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이것을 「말법 사상을 중국에서 처음 설한 것」이라 평한다. 법이 쇠퇴하는 시대라는 자각이, 그 시대에 법화경으로 중생을 건지겠다는 서원과 함께 있었다.

554년 무렵, 혜사는 북제와 진의 국경에 가까운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에 머물렀다.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의 가르침의 중심은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T46 no.1926)에 담겨 있다. 법화경 안락행품에 근거해 몸 · 입 · 뜻 · 서원의 네 가지 안락행을 닦고, 법화경을 「대승의 단번의 깨달음(大乘頓覺)」, 곧 차례를 밟지 않고 바로 부처의 길에 이르는 가르침으로 보았다.

  1. 龍樹용수고조
  2. 慧文혜문북제 · 일심삼관
  3. 慧思혜사515–577 · 법화삼매 · 「입서원문」 558 말법 · 대소산 · 남악백제의 현광혜사에게 배움 · 4부 17절
  4. 智顗지의538–597고구려의 파야596 천태산 · 4부 17절
  5. 灌頂관정561–632
  6. 지위→혜위→현랑
  7. 湛然담연(묘락)711–782
今家の教門は竜樹を以て始祖と為す『지관대의』 · 「입정관초」 528쪽
용수 편 도표 19 와 같은 순서 · 용수 편 21절
도표 5 · 천태의 계보

연구 노트 — 「입서원문」이 혜사 자신의 글인지, 그 가운데 말법 연대의 계산이 뒤에 덧붙여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 사이에 논의가 있다. 또 혜사가 법화경 제바달다품을 스물여덟 품 속에 넣은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전승도 있다(천태 『법화문구』 권8). 일본에서는 혜사가 쇼토쿠 태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졌고, 대성인도 「화한왕대기(和漢王代記)」에서 남악을 「관음의 화신」으로 적으셨다고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전한다.

「옛날 영산에서 함께 법화를 들었다」

560 · 광주 대소산

560년(진 천가 원년), 스물세 살의 천태는 대소산으로 혜사를 찾아갔다. 대소산은 북제와 진이 맞선 국경 지대에 있었다. 『별전』은 그 길이 전란 속의 위험한 길이었다고 적는다. 혜사는 천태를 처음 보고 이렇게 말했다.

昔日靈山同聽法華 宿緣所追 今復來矣

옛날 영산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었다. 묵은 인연이 뒤따라 이제 다시 왔구나.

『별전』, T50 no.2050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자리에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한 생의 우연이 아니라 법화경의 자리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본 이 말은, 뒤에 천태 교단의 기억 속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혜사는 천태에게 보현도량(普賢道場)을 보이고, 네 가지 안락행을 가르쳤다. 보현도량은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과 보현관경에 따라 도량을 꾸미고, 참회하고, 법화경을 읽으며 삼칠일 동안 수행하는 법이다. 천태는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별전』은 그 무렵 대소산의 사정을 이렇게 전한다. 땔나무가 떨어지면 밤에 솔가지를 태워 불을 밝혔고, 풀잎이 떨어지면 달빛에 기대어 경을 읽었다.

대소개오 — 「이것이 참된 정진」

560 무렵 · 대소산의 보현도량

수행을 시작하고 두 이레(14일)째, 천태는 법화경을 읽어 약왕보살본사품에 이르렀다. 과거에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몸을 태워 부처와 법화경을 공양하자, 여러 부처가 함께 찬탄하는 대목이다.

其中諸佛 同時讚言 善哉善哉 善男子 是眞精進 是名眞法供養如來

그 가운데 여러 부처가 같은 때 찬탄하여 말했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으로 여래를 공양한다고 한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T9 no.262

이 구절에 이르러 천태는 몸과 마음이 활짝 열리며(身心豁然) 고요히 선정에 들었다고 『별전』은 전한다. 그리고 그 선정 속에서 법화경을 비추어 알게 된 모습을 이렇게 적는다. 「법화를 비추어 앎이 높은 빛이 깊은 골짜기를 비추는 것 같고, 모든 법의 모습에 통달함이 긴 바람이 큰 허공을 노니는 것 같았다(照了法華 若高輝之臨幽谷 達諸法相 似長風之遊太虛)」.

천태가 그 경계를 아뢰자 혜사는 이렇게 말했다.

非爾弗證 非我莫識 所入定者 法華三昧前方便也 所發持者 初旋陀羅尼也 縱令文字之師千群萬眾 尋汝之辯不可窮矣 於說法人中最為第一

네가 아니면 증득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든 선정은 법화삼매의 앞의 방편이요, 네가 얻은 지님(持)은 초선다라니다. 설령 글을 아는 스승이 천 무리 만 무리라 해도 너의 변재를 찾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법을 설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별전』, T50 no.2050

이것을 천태 교단은 「대소개오(大蘇開悟)」라 부른다. 천태의 첫째 깨달음이다. 법화삼매는 법화경에 의지해 얻는 삼매이고, 선다라니(旋陀羅尼)는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에 나오는 세 가지 다라니 가운데 하나로, 공에서 가로, 가에서 공으로 자유로이 돌아 드는 지혜의 힘이다. 혜사는 이것이 아직 「앞의 방편」, 곧 법화삼매의 문턱이라고 했다. 깨달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초승달이 뜬 밤 산속, 소나무와 대숲에 둘러싸인 초가 암자의 열린 앞면 안에 등불 곁 낮은 책상 앞에 한 스님이 등을 보이고 고요히 앉아 있고, 돌길 너머 안개 낀 골짜기와 겹겹의 산이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2 · 대소산의 밤

혜사는 곧 천태에게 자신을 대신해 금자 『대품반야경』을 강의하게 했다. 천태는 강의 가운데 삼삼매(三三昧)와 삼관지(三觀智)에 이르러서만 스승에게 물었고,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풀었다고 한다. 앉아 있던 대중이 감탄했고, 혜사는 강석 곁에서 그것을 들으며 기뻐했다.

「글을 아는 스승이 천 무리 만 무리라 해도 너의 변재를 찾아 다할 수 없다」는 혜사의 말은 뒤에 도선의 『속고승전』에 거의 같은 말로 옮겨졌고,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도선의 천태 찬탄으로 이 말을 인용하셨다(270쪽, 6부 28절). 약왕품의 구절에서 깨달았다는 이 일은, 뒤에 천태를 약왕보살의 후신으로 보는 전승과 이어진다(6부 29절).

전승
  1. 560 대소산 도착「옛날 영산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었다」
  2. 보현도량 · 사안락행혜사가 보이고 가르침
  3. 두 이레째 · 약왕품「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으로 여래를 공양한다고 한다」
  4. 신심활연법화삼매의 앞의 방편 · 초선다라니
  1. 혜사의 인가「네가 아니면 증득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2. 금자 대품반야 대강스승을 대신한 강의
  3. 568 헤어짐혜사는 남악으로, 지의는 금릉으로 · 「마지막으로 씨를 끊는 사람이 되지 말라」

금 테두리 — 약왕품의 한 구절 · → 6부 29절 약왕의 화신

『별전』의 서술 · 대소개오의 연대는 『별전』에 명시되지 않아 560년 무렵 · 한문 문구는 원문 확인 뒤 표기 · 7절
도표 6 · 대소산의 수행과 개오

헤어짐 — 「마지막으로 씨를 끊는 사람이 되지 말라」

천태는 대소산에서 일고여덟 해를 혜사 곁에 머물렀다. 568년, 혜사는 제자 사십여 명과 함께 남쪽의 남악(南岳) 형산(衡山)으로 옮겨 가려 했다. 천태도 따르려 하자 혜사는 말렸다. 너는 진나라에 인연이 있으니 가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했다고 『별전』은 전한다.

莫作最後斷種人

마지막으로 씨를 끊는 사람이 되지 말라.

『별전』, T50 no.2050

법의 씨를 이어 가라는 것이다. 받은 법을 자기 안에서 끝내지 말고, 다음 사람에게 전하라. 천태는 스승의 말을 따라 법희(法喜) 등 스물일곱 사람과 함께 진의 도읍 금릉으로 향했다. 스승과 제자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혜사는 577년 남악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구 노트 — 대소개오의 연대는 『별전』에 명시되지 않아 560년 무렵으로 본다. 혜사 곁에 머문 기간(560–567)도 『별전』의 서술에서 추정한 것이다. 「昔日靈山同聽法華」, 「非爾弗證 非我莫識」, 「莫作最後斷種人」 세 구절은 『별전』의 문구로 널리 인용되지만, 한문은 대정장과 대조 중이다. 천태가 법화삼매 속에서 「영산의 한 회좌가 엄연히 아직 흩어지지 않았음(靈山一會儼然未散)」을 보았다는 말도 널리 전하는데, 이 여덟 글자의 출전은 확인이 필요하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수량품의 「時我及衆僧 倶出靈鷲山」을 「영산일회엄연미산의 글」이라 하셨다(756쪽).

「네가 아니면 증득하지 못했고, 내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다.」 혜사의 이 말은 사제(師弟)의 관계를 한 문장에 담았다. 깨달음은 제자의 것이지만,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름 붙이는 것은 스승이다. 그리고 스승은 제자를 곁에 두지 않고 떠나보냈다. 「마지막으로 씨를 끊는 사람이 되지 말라」. 창가학회는 불법이 스승과 제자의 이어짐으로 전해진다고 본다. 스승의 깨달음을 제자가 자기 삶에서 증득하고, 그 법을 다시 다음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천태는 뒤에 스스로 스승이 되어 장안대사 관정에게 법을 맡겼고, 관정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천태의 삼대부는 남지 않았다. 대소산에서 시작된 사제의 이어짐이 천태 교학 전체의 형태를 만들었다.

3부 금릉과 천태산

와관사의 여덟 해

568 — 575 · 진의 도읍 금릉

568년, 서른한 살의 천태는 진의 도읍 금릉에 들어갔다. 진은 557년 진패선(陳霸先)이 양을 이어 세운 나라로, 후경의 난과 강릉의 함락으로 무너진 남조를 다시 추스르고 있었다. 천태는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동진 때 세워진 오래된 절로,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벽에 유마거사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천태가 와관사에서 처음 강의한 것은 법화경의 제목, 곧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뜻이었다. 『별전』에 따르면 진의 선제(宣帝)가 칙명을 내려 조회를 하루 멈추고 신하들이 강의를 듣게 했다. 금릉의 이름난 학승들도 자리를 채웠다. 새로 온 젊은 선사의 강의를 시험하려는 문난이 이어졌고, 천태는 하나하나 답했다. 양 무제 이래 경전 강의의 전통이 깊은 금릉에서, 북쪽 국경의 산에서 온 서른한 살의 승려가 단숨에 이름을 얻었다.

천태는 와관사에서 여덟 해 동안 강의했다. 『대지도론』을 강의하고, 선정 수행의 단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차제선문(次第禪門)」을 강의했다. 뒤의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 열 권(T46 no.1916)이 이 강의를 제자 법신(法愼)이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선정을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차례로 닦아 올라가는 길, 곧 「점차지관(漸次止觀)」을 담고 있다. 천태 교학의 수행론은 여기서 시작되었다(5부 23절).

넓은 강당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 높은 기둥 사이로 수많은 스님과 관리들이 줄지어 앉아 있고, 맨 끝 높은 단 위 책상 곁에 한 스님이 아주 작게 앉은 금박 수묵화
그림 3 · 와관사의 강당

「얻는 이가 점점 적다」 — 천태산으로

575 · 금릉을 떠나다

와관사의 강의는 해마다 사람이 늘었다. 그런데 천태는 여덟 해째에 도읍을 떠나기로 했다. 『별전』은 그 까닭을 천태 자신의 말로 전한다.

初瓦官四十人共坐 二十人得法 次年百餘人共坐 二十人得法 次年二百人共坐 減十人得法 其後徒眾轉多 得法轉少 妨我自行 化道可知

처음 와관사에서는 사십 명이 함께 앉아 스무 명이 법을 얻었다. 다음 해에는 백여 명이 함께 앉아 스무 명이 법을 얻었다. 그다음 해에는 이백 명이 함께 앉아 열 명으로 줄었다. 그 뒤로 무리는 점점 많아지는데 법을 얻는 이는 점점 적다. 나의 자행(自行)을 방해하니, 교화의 길이 어떠한지 알 만하다.

『별전』, T50 no.2050

많은 사람에게 강의할수록 깨닫는 사람은 줄었다. 천태는 이것을 청중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나의 자행을 방해한다」. 스스로의 수행이 깊지 못하면 남을 이끄는 교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575년(진 태건 7년), 선제가 만류했지만 천태는 금릉을 떠나 동쪽 바닷가의 천태산(天台山)으로 향했다. 서른여덟 살이었다.

전승
함께 앉은 사람
40
100여
200
더 많음
법을 얻은 사람
20
20
10
더 적음
첫해다음 해그다음 해그 뒤
得法轉少 妨我自行 化道可知법을 얻는 이는 점점 적다 · 나의 자행을 방해하니 · 교화의 길이 어떠한지 알 만하다
『별전』의 서술 · 9절
도표 7 · 와관사의 네 해

이 짧은 말에는 천태의 생애를 관통하는 한 가지 긴장이 드러나 있다. 자행(自行)과 화타(化他), 곧 스스로 닦는 것과 남을 이끄는 것이다. 천태는 평생 이 둘 사이를 오갔다. 도읍의 강석과 산속의 수행, 황제의 부름과 산으로의 귀환. 대성인은 뒤에 천태의 제목을 「자행을 위한 것」이라 하셨다(6부 30절). 이것은 천태의 인품을 평한 말이 아니라 천태가 서 있던 「때」를 가리킨 말이지만, 천태 자신이 이 긴장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와관사를 떠나는 이 말에서 보인다.

화정봉의 밤 — 두 번째 깨달음

575 — 576 · 천태산

천태산은 지금의 저장성 타이저우 톈타이현에 있는 산이다. 여러 봉우리가 겹겹이 이어지고, 가장 높은 화정봉(華頂峰)은 해발 천 미터를 넘는다. 두 바위 사이에 걸린 돌다리 아래로 폭포가 떨어지는 석량(石梁)은 예부터 신선과 나한이 산다고 전하던 곳이다. 도교의 성지이기도 했던 이 산에는 천태가 오기 전부터 은거하는 수행자들이 있었다.

『별전』에 따르면 천태가 산에 들어서자, 그곳에 삼십여 년 머물던 정광(定光)이라는 선사가 그를 맞았다. 정광은 천태가 열다섯 무렵 꿈에서 본 바로 그 사람이었고, 천태는 이 산이 꿈속의 산임을 알았다고 전한다(1부 3절). 천태는 불롱(佛隴)의 봉우리 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이듬해 홀로 화정봉에 올라 두타(頭陀), 곧 홀로 거친 곳에 머물며 욕심을 떨치는 수행을 했다.

어느 밤, 천태가 홀로 앉아 있을 때 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며 산이 울렸다. 『별전』은 그 밤의 일을 두 겹의 마(魔)로 전한다. 먼저 무서운 형상의 마들이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 위협했다. 천태는 마음을 실상에 두고 그것들이 본래 없는 것임을 꿰뚫어 보았고, 형상들은 사라졌다. 다음에는 부모와 스승의 모습이 나타나 그를 붙잡고 슬피 울며 마음을 흔들었다. 천태는 이것도 실상으로 관하여 물리쳤다. 새벽이 밝아 올 무렵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 「적을 누르고 원수를 이겨야 용맹하다 할 수 있다(制敵勝怨 乃可為勇)」고 말하고, 그에게 「일실제(一實諦)」의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천태 교단은 이것을 「화정강마(華頂降魔)」라 부른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이것을 「새벽의 샛별을 보고 깨달은 두 번째 깨달음」이라 적는다. 대소산의 깨달음이 스승 곁에서 법화경의 구절로 열린 것이었다면, 화정봉의 깨달음은 홀로 마와 맞서 얻은 것이었다. 무서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 밀어내는 힘과 끌어당기는 힘. 뒤에 천태가 『마하지관』에서 「삼장사마(三障四魔)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고 한 말(5부 23절)은 이 밤의 경험과 이어져 있다.

운해 위로 솟은 천태산의 봉우리들, 가는 폭포 곁 돌계단을 봇짐과 지팡이를 든 세 스님이 한 줄로 등을 보이고 오르는 금박 수묵화
그림 4 · 천태산의 폭포와 산길

연구 노트 — 화정봉의 일은 『별전』의 서술이며, 연구자들은 이를 두타 수행 중의 내적 체험을 전기의 언어로 옮긴 것으로 읽는다. 「일실제」는 천태 교학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진리, 곧 원교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선사와 방생 — 산속의 교단

576 — 585 · 천태산 불롱

576년, 천태는 불롱봉 아래에 절을 세웠다. 이듬해 진의 선제가 절 이름을 「수선사(修禪寺)」라 내리고, 시풍현(始豐縣)의 세금 일부를 절의 살림에 쓰도록 했다고 전한다. 도읍을 떠난 천태에게 조정의 후원은 계속되었다. 천태산에서의 약 열 해 동안 천태는 수행하고, 제자를 기르고, 산의 교단을 세웠다.

이 시기의 한 일화가 천태의 자비를 보여 준다. 천태산 가까운 임해(臨海)의 바닷가 사람들은 고기잡이로 살았는데, 천태는 물고기의 목숨을 가엾게 여겨 어장을 사들여 방생지(放生池)로 삼았다. 진 선제는 칙명으로 그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금했다고 전한다. 천태가 이때 방생의 뜻을 설하며 금광명경 유수장자품(流水長者品)을 강의했다는 전승도 있다. 물 마른 못의 물고기 만 마리를 살린 장자의 이야기다.

어스름한 바닷가, 좁은 둑으로 바다와 나뉜 넓고 잔잔한 못에 작은 물고기들이 금빛 선으로 헤엄치고, 둑 너머 모래밭에 그물을 걸어 말린 채 쓰지 않는 고깃배 몇 척이 놓인 금박 수묵화
그림 5 · 임해의 방생지

583년, 스물세 살의 한 청년이 수선사로 천태를 찾아왔다. 임해 장안(章安) 사람 관정(灌頂)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천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천태의 강의를 기록해 뒤의 삼대부를 만들었다(4부 17절). 천태가 혜사에게서 받은 「씨」를 이어받을 사람이 이렇게 산으로 왔다.

천태가 산에서 세운 것은 수행의 규칙이기도 했다. 『국청백록』의 첫머리에는 천태가 제자들을 위해 만든 수행 의례와 교단의 규칙이 실려 있다. 날마다 여섯 때에 예불하고 참회하는 법, 법화삼매를 닦는 도량의 법, 대중이 함께 사는 규칙이다. 천태의 교단은 강의를 듣는 모임이 아니라 함께 수행하는 공동체였다. 형 진침(陳鍼)을 위해 좌선의 요령을 간추려 준 것이 『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T46 no.1915), 흔히 『소지관(小止觀)』이라 부르는 책이라는 전승도 있다.

  1. 전승화정봉華頂峰두타 · 강마
  2. 석량 폭포石梁돌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
  3. 불롱佛隴수선사(576) · 뒤의 진각사 · 지자탑원
  4. 국청사國淸寺산 아래 · 598 창건 · 수탑
  5. 임해臨海동쪽 바닷가 · 방생지
위치는 약도 — 거리와 축척은 넣지 않았다 · 이름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8 · 천태산

연구 노트 — 수선사의 사액(577)과 시풍현 세금 할당, 방생지의 규모와 칙명의 내용은 『별전』과 『국청백록』의 문서에 기댄 것으로, 세부는 원문과 대조 중이다. 『소지관』이 형 진침을 위해 쓴 것이라는 이야기는 후대의 전승이며, 『소지관』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천태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던 때에 도읍을 떠났다. 「무리는 점점 많아지는데 법을 얻는 이는 점점 적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불법의 교화가 사람의 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의 변화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읽는다. 천태는 산에서 스스로의 수행을 깊게 했고, 그 깊이가 뒤의 삼대부를 낳았다. 한편 대성인은 말법의 수행을 두고 천태와는 다른 길을 가리키셨다. 산에 들어가 홀로 관법을 닦는 것이 아니라, 세간 한가운데서 법을 부르고 남에게 전하는 것, 곧 자행과 화타에 걸친 수행이다(6부 30절). 두 길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때」의 차이다. 천태는 상법의 사람으로서 자행을 깊게 하는 길을 걸었고, 그 자행의 깊이로 법화경의 이치를 끝까지 밝혔다. 그 이치 위에서, 말법의 대성인은 모든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

4부 두 왕조의 스승

다시 금릉으로 — 태극전과 광택사

585 — 589 · 진 후주의 금릉

582년 진의 선제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진숙보(陳叔寶)가 뒤를 이었다. 진의 마지막 황제, 후주(後主)다. 후주는 천태를 도읍으로 불렀다. 천태는 여러 번 사양했으나, 『별전』에 따르면 칙사가 일곱 차례나 오고 지방관까지 나서서 권하자 585년(진 지덕 3년) 마침내 산을 내려왔다. 마흔여덟 살이었다.

후주는 궁중의 정전인 태극전(太極殿)에서 천태에게 『대지도론』과 『인왕반야경』을 강의하게 하고, 스스로 자리에 나와 들었다. 『별전』은 이 강석에서 승정 혜훤(慧暅), 승도 혜광(慧曠)을 비롯한 도읍의 대덕들이 칙명을 받들어 어려운 물음을 던졌고, 천태가 그것을 모두 풀었다고 전한다. 후주의 황후 심씨(沈氏)와 황태자가 천태에게서 보살계를 받았다. 천태는 이때 영요사(靈曜寺)를 거쳐 광택사(光宅寺)에 머물렀다.

광택사. 1부 1절에서 본 대로, 양 무제가 법운에게 맡긴 절이다. 남조 법화경 연구의 정점이었던 법운이 법화경을 열반경 아래에 둔 『법화의기』를 강의하던 바로 그 절에서, 587년(정명 원년) 쉰 살의 천태는 법화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했다. 스물일곱 살의 관정이 이 강의를 받아 적었다. 이것이 뒤의 『묘법연화경문구(妙法蓮華經文句)』, 곧 『법화문구』 열 권이다(5부 21절).

진
진 선제재위 569–582와관사 강의 칙명 · 수선사 사액 · 방생 칙명8 · 11절
진 후주582–589태극전 강의 · 황후와 태자의 보살계 · 광택사12절
智顗지의
수
수 문제581–604서신 · 옥천사 사액14 · 15절
진왕 양광 = 수 양제604–618591 보살계 · 「총지」/「지자」 · 595 유마경소 · 국청사14 · 16 · 17절
二代の天子の御師「선무외삼장초」, 882쪽
재위 연도는 원문 대조 중
도표 9 · 진 · 수의 황제들과 천태

남삼북칠 — 열 갈래의 교판

5~6세기 · 남조와 북조의 교판

천태가 금릉에서 맞선 것은 한 사람의 학승이 아니라, 오백 년 동안 쌓인 중국 불교의 경전 읽기 전체였다. 천태는 뒤에 『법화현의』 권10에서 이것을 「남삼북칠(南三北七)」, 곧 장강 남쪽의 세 갈래와 황하 쪽 북쪽의 일곱 갈래로 정리했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을 따라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남북의 학승들은 먼저 석존의 가르침을 설하는 방식에 따라 셋으로 나누었다. 깨달은 그대로를 단번에 설한 돈교(頓敎) — 화엄경.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차례로 이끈 점교(漸敎). 그 어느 쪽에도 들지 않는 부정교(不定敎) — 승만경 · 금광명경. 그리고 점교를 어떻게 나누는지에 따라 갈래가 생겼다.

남쪽의 세 갈래

  1. 호구산(虎丘山)의 급(笈) 법사 — 삼시교(三時敎). 유상교(아함) · 무상교(반야 등) · 상주교(열반).
  2. 종애(宗愛) 법사 — 사시교(四時敎). 위의 셋 사이에 동귀교(同歸敎, 법화)를 넣었다.
  3. 정림사(定林寺)의 승유(僧柔) · 혜차(慧次)와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 — 오시교(五時敎). 유상 · 무상 · 억양(유마 등) · 동귀(법화) · 상주(열반). 광택사 법운이 이 오시교를 이었다.

북쪽의 일곱 갈래

  1. 북지의 어떤 법사 — 오시교. 인천교를 앞에 두었다.
  2. 보리류지(菩提流支) — 반만이교(半滿二敎). 소승은 반쪽 글자, 대승은 온전한 글자.
  3. 광통(光統), 곧 혜광(慧光) — 사종(四宗).
  4. 어떤 법사 — 오종(五宗).
  5. 어떤 법사 — 육종(六宗).
  6. 북지의 선사 — 유상대승과 무상대승의 이종대승(二種大乘).
  7. 북지의 선사 — 일음교(一音敎). 부처는 한 소리로 설했으나 중생이 저마다 달리 들었다.
돈화엄점여기서 갈래가 나뉨부정승만 · 금광명
남쪽의 세 갈래
호구산虎丘山의 급笈 법사삼시교三時敎 — 유상교(아함) · 무상교(반야 등) · 상주교(열반)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종애宗愛 법사사시교四時敎 — 위의 셋 사이에 동귀교를 넣음법화경의 자리동귀교同歸敎
정림사定林寺의 승유僧柔 · 혜차慧次,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오시교五時敎 — 유상 · 무상 · 억양(유마 등) · 동귀(법화) · 상주(열반)법화경의 자리동귀 · 광택사 법운이 이음
북쪽의 일곱 갈래
북지의 어떤 법사오시교 — 인천교를 앞에 둠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보리류지菩提流支반만이교半滿二敎 — 소승은 반쪽 글자, 대승은 온전한 글자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광통光統 · 혜광慧光사종四宗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어떤 법사오종五宗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어떤 법사육종六宗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북지의 선사이종대승二種大乘 — 유상대승과 무상대승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북지의 선사일음교一音敎 — 부처는 한 소리로 설했으나 중생이 저마다 달리 들었다법화경의 자리확인 중

大綱は一同なり … 華厳経第一・涅槃経第二・法華経第三なり「찬시초」, 261쪽

원고 13절의 목록 그대로 · 「법화경의 자리」는 원고에 적힌 곳만 — 인명 · 교판 이름은 『법화현의』 권10상과 원문 확인 뒤 표기
도표 10 · 남삼북칠 — 열 갈래의 교판

열 갈래는 저마다 달랐지만, 대성인이 「찬시초」에서 요약하신 대로 큰 줄기는 같았다.

南三・北七と申して仏法十流にわかれぬ所謂南には三時・四時・五時・北には五時・半満・四宗・五宗・六宗、二宗の大乗・一音等・各各義を立て辺執水火なり、しかれども大綱は一同なり所謂一代聖教の中には華厳経第一・涅槃経第二・法華経第三なり

남삼 · 북칠이라 하여 불법이 열 갈래로 나뉘었다. 이른바 남쪽에는 삼시 · 사시 · 오시, 북쪽에는 오시 · 반만 · 사종 · 오종 · 육종, 이종의 대승 · 일음 등이 저마다 뜻을 세워 한쪽에 집착함이 물과 불 같았다. 그러나 큰 줄기는 하나였다. 이른바 일대 성교 가운데 화엄경이 첫째, 열반경이 둘째, 법화경이 셋째라는 것이다.

「찬시초」, 261쪽

화엄경은 성도 직후 깨달은 그대로를 설한 경이니 가장 높다. 열반경은 입멸하는 날 부처의 몸이 영원하다(常住)고 설한 마지막 경이니 그다음이다. 법화경은 이승도 부처가 된다고 설했으나 부처의 상주를 아직 분명히 설하지 않았으니 셋째다. 법운은 『법화의기』에서 법화경이 설한 부처의 수명도 결국 다함이 있다고 보고, 법화경을 「무상(無常)」의 가르침에 두었다.

천태의 답은 이 순서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첫째, 법화경은 이전의 모든 가르침을 방편으로 열고 하나로 모은(開會) 경이므로 가장 높다. 둘째, 열반경은 법화경에서 거두지 못한 이들을 다시 거두는 「이삭줍기(捃拾)」의 가르침이다. 열반경 자신이 법화경을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는(秋收冬藏)」 큰 결실에 비겼다(열반경 권9). 셋째, 화엄경은 이승을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만든 경이니 법화경에 미치지 못한다. 대성인의 말씀으로 하면 「남북은 일 화엄 · 이 열반 · 삼 법화, 천태대사는 일 법화 · 이 열반 · 삼 화엄(南北は一華厳・二涅槃・三法華・天台大師は一法華・二涅槃・三華厳)」(「보은초」, 301쪽)이다.

남북의 십사
  1. 一화엄
  2. 二열반
  3. 三법화
화엄 = 돈교의 최초
천태
  1. 一법화
  2. 二열반
  3. 三화엄
법화 = 개회 · 열반 = 捃拾
뒤의 화엄종
  1. 一화엄
  2. 二법화
  3. 三열반
화엄 = 근본법륜

南北は一華厳・二涅槃・三法華・天台大師は一法華・二涅槃・三華厳

출전 「보은초」, 301쪽 · 13절
도표 11 · 세 가지 순위

연구 노트 — 천태가 남삼북칠을 깨뜨린 일을 전기는 어떻게 전하는가. 『별전』은 금릉의 여러 강석에서 도읍의 대덕들이 칙명을 받아 천태에게 문난하고, 천태가 그것을 모두 풀었다고 전한다(12절). 법운은 천태가 금릉에 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천태가 직접 맞선 것은 법운의 학통을 이은 사람들이었다. 대성인은 「보은초」와 「중생심어서」에서 이 일을 진주(陳主) 앞에서 남북의 백여 명과 벌인 대론으로 전하셨다(6부 27절). 이 대론의 세부는 일본 천태종의 전승과 이어져 있으며, 『별전』의 태극전 · 광택사 강석 기사와 어떻게 맞는지는 아직 확인 중이다. 남삼북칠의 인명 · 교판 내용도 『법화현의』 권10상의 서술과 대조 중이다.

진의 멸망과 「지자」라는 이름

589 — 591 · 수의 통일과 양주

581년 북주의 외척 양견(楊堅)이 수(隋)를 세웠다. 수 문제(文帝)다. 589년 정월, 수의 군대가 장강을 건너 금릉을 함락했다. 진 후주는 우물에 숨었다가 사로잡혔고, 남조는 끝났다. 거의 삼백 년 만에 중국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천태는 쉰둘이었다.

천태는 금릉을 떠나 형주와 상주 쪽으로 가다가 여산(廬山)에 머물렀다. 수 문제는 590년 무렵 천태에게 글을 보내 불법을 넓혀 줄 것을 청했다고 『국청백록』에 전한다. 그리고 591년, 수 문제의 둘째 아들 진왕(晉王) 양광(楊廣)이 천태를 양주(揚州)로 불렀다. 양광은 금릉 정벌의 총사령관이었고, 이때 양주총관으로 옛 진의 땅을 다스리고 있었다. 무너진 남조의 민심을 얻으려면 남조가 존경하던 고승의 협력이 필요했다. 천태는 이것을 알았다. 『별전』과 『국청백록』은 천태가 부름에 응하기 전에 네 가지 청을 내걸었다고 전한다. 자신에게 학식과 덕행의 완전함을 바라지 말 것, 가르침을 뜻대로 펴게 해 줄 것, 뜻에 따라 오가게 해 줄 것, 인연이 다하면 산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 권력의 부름에 응하되 법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조건이었다.

591년 11월, 양주의 총관부에서 천승재(千僧齋)가 열리고, 천태는 양광에게 보살계를 주었다. 천태는 그에게 「총지(總持)」라는 법명을 주었고, 양광은 천태에게 「지자(智者)」라는 호를 올렸다. 이때부터 천태는 지자대사라 불렸다. 대성인이 「진 · 수 두 대의 천자의 스승(二代の天子の御師)」(「선무외삼장초」, 882쪽)이라 하신 것은 진의 선제 · 후주와 수의 양광을 가리킨다.

양광은 뒤에 형을 밀어내고 태자가 되어 604년 황제에 올랐다. 수 양제(煬帝)다. 대운하를 파고 고구려를 세 번 침공했다가 패하고, 결국 신하에게 살해되어 수나라를 무너뜨린 황제로 역사에 남았다. 천태가 계를 준 사람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양광은 천태가 살아 있는 동안 끝까지 천태를 공경했고, 천태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뜻대로 국청사를 세웠다(17절).

연구 노트 — 천태와 수 왕실, 특히 양광의 관계는 근대 연구에서 많이 논의되었다. 천태가 양광에게 협력한 것을 수의 남방 통치에 이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천태가 네 가지 조건과 거듭된 사양으로 법의 독립을 지키려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천진화는 『국청백록』의 서신 일부가 관정의 편집을 거쳤을 가능성을 들어, 양광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문서들을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고 본다. 네 가지 청의 문구는 원문과 대조 중이다.

옥천사의 두 여름

592 — 594 · 형주 당양 옥천산

보살계를 준 뒤 천태는 양주에 머물지 않았다. 592년 여산을 거쳐 스승 혜사가 입적한 남악에 들러 옛 자취를 참배하고, 고향 형주로 돌아갔다. 강릉이 함락되고 집을 떠난 지 서른여덟 해 만이었다. 형주 당양현(當陽縣)의 옥천산(玉泉山)에 천태는 절을 세웠다. 593년 수 문제가 「옥천사(玉泉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 절에서 천태는 두 번의 여름 안거 동안 두 번의 강의를 했다.

593년 여름 — 『묘법연화경현의(妙法蓮華經玄義)』. 법화경의 제목 「묘법연화경」 다섯 자에 담긴 깊은 뜻을 이름 · 본체 · 종지 · 작용 · 교상의 다섯 겹으로 풀었다(5부 19절). 와관사에서 처음 강의한 것이 법화경의 제목이었는데, 스물다섯 해 뒤 그 강의가 열 권의 체계가 되었다.

594년 4월 26일부터 한 여름 — 『마하지관(摩訶止觀)』. 법화경에 의지한 원돈(圓頓)의 수행을 체계적으로 설했다(5부 23절). 천태의 나이 쉰일곱이었다. 그 제5권에서 천태는 「한 생각의 마음에 삼천이 갖추어져 있다」고 설했다(5부 24절). 대성인은 이 해를 「(천태의) 나이 쉰일곱 여름 4월 무렵 형주 옥천사라는 곳에서(御年五十七の夏四月の比・荊州玉泉寺と申す処にて)」(「일념삼천법문」, 412쪽)라고 적으셨다.

두 강의 모두 관정이 받아 적었다. 『별전』은 형주의 강석에 도와 속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전한다. 천태의 고향 사람들이 쉰일곱의 천태에게서 그의 법의 정수를 들었다.

한여름 산기슭, 맑은 샘물 못 건너편 처마 넓은 목조 강당의 문이 열리고 툇마루와 안쪽에 청중이 줄지어 앉아 깊숙한 자리의 한 사람을 향하며, 못가 돌 틈으로 샘물이 흘러드는 금박 수묵화
그림 6 · 옥천산의 여름
  1. 589금릉 → 여산진의 멸망 뒤 여산에 머묾
  2. 591양주진왕 양광에게 보살계 · 「지자」
  3. 592여산 · 남악스승 혜사가 입적한 남악을 참배
  4. 593형주 옥천사여름 · 『법화현의』 강의
  5. 594형주 옥천사4월 26일부터 · 『마하지관』 강의
  6. 595양주『유마경현소』 · 『유마경문소』를 지어 올림
  7. 595천태산가을 · 열 해 만에 산으로
  8. 597석성사11월 24일 입멸
589 금릉에서 597 석성사까지 · 선 위의 수는 그 길을 간 해 · 옥천사의 금 점 둘은 두 여름의 두 강의 · 점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12 · 만년의 여정

석성사의 가을 — 입멸

595 — 597 · 양주에서 천태산으로

595년 봄 천태는 양광의 청으로 다시 양주에 갔다. 양광은 유마경의 주석을 청했고, 천태는 이 무렵부터 스스로 붓을 들어 『유마경현소(維摩經玄疏)』와 『유마경문소(維摩經文疏)』를 지어 올렸다. 강의를 제자가 받아 적은 삼대부와 달리, 이것은 천태가 손수 쓴 만년의 저작이다. 『사교의(四敎義)』도 이 주석의 일부로 지어진 것으로 본다.

같은 해 가을 천태는 천태산으로 돌아왔다. 열 해 만이었다. 수선사의 교단은 흩어져 있었다. 천태는 제자들을 다시 모으고 교단의 규칙을 새로 정했다. 『국청백록』에 실린 「입제법(立制法)」 열 조가 이것이다. 그리고 산 아래에 새 절을 세울 자리를 정하고 그 도면을 그렸다.

597년 가을, 양광의 사자가 다시 와서 천태를 양주로 청했다. 천태는 산을 내려섰다. 그러나 섬현(剡縣)의 석성사(石城寺)에 이르러 병이 들었다. 석성사는 절벽에 새긴 큰 미륵 석불로 이름난 절이다. 천태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양광에게 유서를 쓰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제자들이 법화경의 제목과 무량수경의 제목을 차례로 읽어 올렸다. 관정이 물었다. 스승께서는 어느 자리에 이르셨으며, 목숨을 마치면 어디에 나시는가. 『별전』은 천태의 답을 이렇게 전한다.

吾不領眾 必淨六根 為他損己 只是五品位耳

내가 무리를 이끌지 않았다면 반드시 육근을 깨끗이 했을 것이다. 남을 위해 나를 덜었으니, 다만 오품의 자리일 뿐이다.

『별전』, T50 no.2050

「오품의 자리」는 천태가 세운 수행의 여섯 단계(六卽) 가운데 셋째, 관행즉(觀行卽)에 해당하는 자리다(5부 25절). 교단을 이끌고 남을 가르치느라 스스로의 수행을 그 이상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와관사를 떠날 때의 말, 「나의 자행을 방해한다」가 메아리친다. 천태는 평생 자행과 화타 사이에서 화타를 택했고, 그 대가를 담담하게 말했다.

597년(수 개황 17년) 11월 24일, 천태는 석성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순 살, 출가한 지 마흔두 해였다. 제자들은 유언대로 스승의 몸을 천태산 불롱으로 모셨다. 지금의 진각사(眞覺寺), 지자탑원(智者塔院)이 그 자리다.

늦가을, 높은 절벽 아래 작은 절, 절벽 위쪽에 안이 어둡게 가려진 큰 감실이 파여 있고, 반쯤 열린 법당 문 안에 등불 하나, 잎 진 나무와 낙엽이 흩어진 빈 마당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7 · 석성사의 가을

연구 노트 — 입멸 날짜(개황 17년 11월 24일)와 나이(60), 법랍은 『별전』을 따른다. 법랍은 출가(555)로부터 셈하면 42년, 구족계로부터 셈하면 40년 안팎이 된다. 유서에는 자신이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여섯 가지 한(六恨)이 적혀 있다고 전하나, 그 문구와 진위는 『국청백록』의 해당 문서와 대조 중이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吾不領眾…」 대목을 「汝等、善根を種うるに懶く、他の功徳を問う … 吾、衆を領せずんば必ず六根を浄めん。他の為に己を損す。只是れ、五品の位のみ」로 옮겨 인용한다.

국청사와 관정, 그리고 바다 건너

598 — 11세기 · 중국 · 한반도 · 일본

천태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양광은 천태가 남긴 도면대로 천태산 기슭에 절을 세웠다. 처음에는 천태사(天台寺)라 불렀고, 605년 양제가 된 양광이 「국청사(國淸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천태가 생전에 「절이 이루어지면 나라가 맑아지리라(寺若成 國即淸)」는 꿈을 꾸었다는 전승에서 온 이름이라 한다. 598년에 세운 벽돌탑, 수탑(隋塔)이 지금도 절 앞에 서 있다.

장안대사 관정

천태의 법을 글로 남긴 사람은 관정이다. 583년 스물셋에 천태에게 온 그는 천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네 해 동안 곁에 있었다. 587년 광택사의 『법화문구』, 593년 옥천사의 『법화현의』, 594년 옥천사의 『마하지관』을 모두 그가 받아 적었고, 천태가 세상을 떠난 뒤 수십 년에 걸쳐 그것을 정리하고 고쳤다. 『별전』과 『국청백록』을 엮은 것도 그다. 뒤의 천태종은 관정을 천태의 법을 이은 제자로 받들고, 그가 태어난 고을의 이름을 따 장안대사라 불렀다. 632년 국청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성인도 장안의 말을 여러 번 인용하셨다. 「관심본존초」는 천태의 가르침이 인도의 논서도 미치지 못한 것이라는 장안의 말을 들고(239쪽), 「형제초」는 『마하지관』 서문의 장안의 말, 「지관의 밝고 고요함은 앞 시대에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다(止観の明静なる前代に未だ聞かず)」를 드신다(1087쪽).

쇠퇴와 중흥

천태가 세상을 떠나고 수가 무너지자, 당나라 초의 불교는 새 흐름에 휩쓸렸다. 645년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와 법상종을 열었고(천친 편 13절), 7세기 말에는 법장이 화엄종을 세웠으며, 8세기에는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이 진언의 법을 가져왔다. 천태의 학통은 관정 → 지위(智威) → 혜위(慧威) → 현랑(玄朗)으로 이어졌으나 조용히 명맥을 이을 뿐이었다. 8세기, 형계(荊溪)의 담연(湛然, 711–782), 곧 묘락대사(妙樂大師)가 나와 삼대부에 주석을 달고 새 종파들을 논파하며 천태종을 다시 일으켰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렇게 쓰셨다.

但し妙楽大師といふ人あり天台大師よりは二百余年の後なれども智慧かしこき人にて天台の所釈を見明めてありしかば

다만 묘락대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천태대사보다 이백여 년 뒤의 사람이지만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어서 천태의 해석을 밝게 보았다.

「보은초」, 302쪽

묘락이 지은 삼대부의 주석, 『법화현의석첨(釋籤)』 · 『법화문구기(疏記)』 · 『지관보행전홍결(弘決)』을 대성인은 「삼십 권의 말문(三十巻の末文)」이라 부르시며, 천태가 살아 있을 때 없던 법상 · 화엄 · 진언을 「한꺼번에 눌러 부순 책」이라 하셨다(같은 곳).

한반도의 천태

천태의 법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이어져 있었다.

일본의 천태

일본에는 754년 감진(鑑眞)이 천태의 삼대부를 가져왔다.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이 책들을 읽은 젊은 승려 최징(最澄)이 804년 당에 건너가 천태산에서 도수(道邃)와 행만(行滿)에게 법을 받고, 806년 일본 천태법화종을 열었다. 전교대사다. 그 이야기는 다음 인물, 전교 편준비 중에서 본다.

  1. 현광 — 백제 웅주6세기 중엽 · 남악 혜사에게 법화안락행을 배우고 돌아감
  2. 파야 — 고구려에서 천태산으로596 · 천태에게 배우고 화정봉에서 수행
  3. 제관 — 고려에서 오월로961 무렵 · 천태의 책을 가지고 건너가 『천태사교의』
  4. 의천 — 고려 개경에서 천태산으로1085 입송 · 지자탑 앞에서 발원 · 1097 개경 국청사
  5. 감진 — 양주에서 일본으로754 · 삼대부를 가져감
  6. 최징 — 일본에서 천태산으로804–806 · 도수 · 행만에게 법을 받음 전교 편준비 중
  7. 장안현장 · 법상 — 당 초의 새 흐름
연대는 전승에 따르며 세부는 확인 중 — 본문 17절· 금 점은 한반도, 금 테두리는 일본 —전교 편준비 중
도표 13 · 천태의 법이 건너간 길
숲이 우거진 산기슭의 큰 절, 앞쪽 맑은 개울 위의 무지개 돌다리와 층층이 오르는 기와 전각들, 오른쪽 언덕 위로 나무들보다 높이 선 여러 층의 벽돌탑과 전각 사이의 안개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8 · 국청사와 수탑

연구 노트 — 현광 · 파야 · 제관의 사적은 『송고승전』 · 『속고승전』 · 『불조통기』 등의 전승에 기댄 것으로, 세부와 연대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특히 제관이 건너간 해(960 · 961)와 『천태사교의』의 성립, 오월의 전적 구입 사정은 확인 중이다. 국청사의 이름에 얽힌 꿈의 이야기도 후대의 전승이다.

대성인은 천태를 받아들인 진의 황제를 현명한 왕의 본보기로 드셨다. 「남삼 · 북칠을 버리고 지의법사를 쓰신 진주, 육종의 석덕을 버리고 최징법사를 쓰신 간무 천황은 지금도 현명한 왕의 이름을 남기고 계신다(南三・北七を捨てて智顗法師を用ひ給いし陳主・六宗の碩徳を捨てて最澄法師を用ひ給いし桓武天皇は今に賢王の名を留め給へり)」(「법화초심성불초」, 551쪽). 국주가 정법을 가려 쓰면 나라가 편안하다는 것, 「입정안국론」의 뜻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4부에서 본 천태의 생애는 권력과 법 사이의 긴장이기도 했다. 천태는 두 왕조의 부름에 응했지만 늘 산으로 돌아갔고,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창가학회는 불법이 권력에 기대어 퍼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도 법의 기준을 굽히지 않는 사람을 통해 퍼진다고 본다. 천태가 남긴 것은 황제의 칙서가 아니라 제자가 받아 적은 세 권의 책이었고, 그 책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고구려, 고려와 일본에 법화경을 전했다.

5부 교관이문천태의 교학

저작 — 강설과 기록

568 — 632 · 강설에서 정리까지

천태의 이름으로 전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천태가 붓을 든 책이 아니다. 천태가 강의하고 제자가 받아 적어 정리한 책이다. 천태의 저작을 읽을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이 구분이다.

강의를 제자가 기록한 것

천태가 손수 쓴 것

강설 · 관정 기록법화삼대부 · 천태오소부
『법화현의』妙法蓮華經玄義확실
권수
10권
T번호
T33 no.1716
해와 곳
593 여름 · 형주 옥천사
『법화문구』妙法蓮華經文句확실
권수
10권
T번호
T34 no.1718
해와 곳
587 · 금릉 광택사
『마하지관』摩訶止觀확실
권수
10권
T번호
T46 no.1911
해와 곳
594 여름 · 형주 옥천사
『관음현의』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T34 no.1726
해와 곳
확인 중
『관음의소』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T34 no.1728
해와 곳
확인 중
『금광명현의』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T39 no.1783
해와 곳
확인 중
『금광명문구』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T39 no.1785
해와 곳
확인 중
『관무량수불경소』귀속 논쟁
권수
확인 중
T번호
T37 no.1750
해와 곳
확인 중
강설 · 다른 제자 기록와관사의 강의 — 법신 기록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확실
권수
10권
T번호
T46 no.1916
해와 곳
568–575 · 금릉 와관사
천태 친찬천태가 손수 쓴 것
『유마경현소』維摩經玄疏확실
권수
6권
T번호
T38 no.1777
해와 곳
595~ · 양주, 진왕 양광에게
『유마경문소』維摩經文疏끝부분 관정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확인 중
해와 곳
595~ · 양주, 진왕 양광에게
『사교의』四敎義확실
권수
12권
T번호
T46 no.1929
해와 곳
『유마경현소』에서 나옴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T46 no.1941
해와 곳
확인 중
『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소지관』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T46 no.1915
해와 곳
확인 중
『육묘법문』六妙法門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T46 no.1917
해와 곳
확인 중
『법계차제초문』확실
권수
확인 중
T번호
확인 중
해와 곳
확인 중
『관음현의』 등 오소부도 관정의 편집이 크다고 본다 · 삼대부의 성립은 18절 연구 노트
도표 14 · 천태의 저작 — 강설과 기록, 손수 쓴 것

삼대부가 강의되고 정리된 과정을 보면 이렇다.

『법화문구』
강의587
곳금릉 광택사
천태의 나이50
기록 · 정리관정 기록, 뒤에 여러 차례 고침(629 무렵 마무리로 전함)
『법화현의』
강의593 여름
곳형주 옥천사
천태의 나이56
기록 · 정리관정 기록 · 정리
『마하지관』
강의594 여름
곳형주 옥천사
천태의 나이57
기록 · 정리관정 기록, 두 차례 고쳐 지금의 열 권
『법화문구』587 · 광택사 · 50세文句十巻 … 四の釈629 무렵 마무리(전승)
『법화현의』593 · 옥천사 · 56세玄義十巻一千枚
『마하지관』594 · 옥천사 · 57세止観十巻 … 十界の依正を三千につづめたり두 차례 고침
580590600610620630640597 입멸632 관정
금 점 = 강의 · 띠 = 관정의 정리(632 입적까지) · 오른쪽 한 줄은 「찬시초」, 269–270쪽
도표 15 · 삼대부의 성립 — 강의에서 관정의 정리까지

연구 노트 — 『마하지관』은 처음 『원돈지관(圓頓止觀)』 스무 권으로 정리되었다가, 관정이 두 차례 고쳐 지금의 열 권 『마하지관』이 되었다는 것이 사토 데쓰에이의 연구 이래의 통설이다. 『법화문구』도 관정이 길장의 『법화의소』 등을 참고해 고친 흔적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이 때문에 삼대부의 어느 부분이 천태의 강의 그대로이고 어느 부분이 관정의 손을 거쳤는지는 오늘날에도 연구 과제다. 오소부 가운데 『관무량수불경소』는 천태의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유력하고, 『관음현의』 등도 관정의 편집이 크다고 본다. 이 페이지는 천태종과 대성인이 삼대부를 천태의 법문으로 읽어 온 전통을 따르되, 성립의 문제는 이 상자에 둔다.

대성인은 삼대부를 이렇게 요약하셨다.

像法一千年の半に天台智者大師・出現して題目の妙法蓮華経の五字を玄義十巻一千枚にかきつくし、文句十巻には始め如是我聞より終り作礼而去にいたるまで一字一句に因縁・約教・本迹・観心の四の釈をならべて又一千枚に尽し給う已上玄義・文句の二十巻には一切経の心を江河として法華経を大海にたとえ十方界の仏法の露一渧も漏さず妙法蓮華経の大海に入れさせ給いぬ、其の上天竺の大論の諸義・一点ももらさず漢土・南北の十師の義破すべきをば・これをはし取るべきをば此れを用う、其の上・止観十巻を注して一代の観門を一念にすべ十界の依正を三千につづめたり

상법 천 년의 한가운데 천태지자대사가 나와, 제목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현의』 열 권 천 장에 다 써 내고, 『문구』 열 권에서는 처음 「여시아문」에서 끝 「작례이거」에 이르기까지 한 글자 한 구절마다 인연 · 약교 · 본적 · 관심의 네 가지 풀이를 나란히 하여 또 천 장에 다하셨다. 이상 『현의』 · 『문구』 스무 권에서는 일체경의 마음을 강과 냇물로 삼고 법화경을 큰 바다에 비겨, 시방세계 불법의 이슬 한 방울도 새지 않게 묘법연화경의 큰 바다에 넣으셨다. 그 위에 인도 대론의 여러 뜻을 한 점도 빠뜨리지 않고, 중국 남북 십사의 뜻 가운데 깨뜨릴 것은 깨뜨리고 취할 것은 취하셨다. 그 위에 『지관』 열 권을 지어 일대의 관문(觀門)을 한 생각으로 거두고 십계의 의보와 정보를 삼천으로 모으셨다.

「찬시초」, 269–270쪽

『현의』는 제목을, 『문구』는 본문을, 『지관』은 그 법을 마음에서 관하는 수행을. 세 책이 한 경을 세 방향에서 읽는다. 그리고 그 셋이 「제목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대성인의 요약의 첫마디다.

검은 바탕 위 낮고 어두운 나무 책상에 끈으로 묶은 두루마리 세 묶음이 나란히 놓이고, 앞쪽에 벼루와 붓걸이 위의 붓, 작은 흙 그릇이 놓인 금박 정물화
그림 9 · 세 묶음의 책

『법화현의』 — 다섯 겹의 깊은 뜻

593 · 옥천사의 첫 여름

『법화현의』는 법화경의 제목 「묘법연화경」을 푼 책이다. 천태는 한 경을 다섯 겹으로 해석하는 틀을 세웠다. 오중현의(五重玄義)다. 교리 三 8절이 이 틀의 「체」를 중심으로 읽었으므로, 여기서는 전체의 모양을 본다.

  1. 명(名) · 이름 — 경의 이름을 푼다. 법화경의 이름은 「묘법연화경」이다.
  2. 체(體) · 본체 — 경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법화경의 체는 「실상(實相)」이다.
  3. 종(宗) · 종지 — 경이 무엇을 요체로 삼는가. 법화경의 종은 「부처가 스스로 행한 인과(佛自行因果)」다.
  4. 용(用) · 작용 — 경이 중생에게 무엇을 하는가. 법화경의 용은 「의심을 끊고 믿음을 낳는 것(斷疑生信)」이다.
  5. 교(敎) · 교상 — 경이 석존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어디에 서는가. 법화경의 교는 「위없는 제호(無上醍醐)」다.
  1. 名이름경의 이름을 푼다妙法蓮華經
  2. 體본체경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實相
  3. 宗종지경이 무엇을 요체로 삼는가佛自行因果
  4. 用작용경이 중생에게 무엇을 하는가斷疑生信
  5. 敎교상경이 석존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어디에 서는가無上醍醐
권1권5권10

名体宗用教の五重玄の五字なり「삼대비법초」, 1022쪽→ 30절

오른쪽 막대는 『현의』 열 권 안의 분량(대략) · 권 배분은 원문 확인 뒤 표기 · 체는 교리 三 8절
도표 16 · 오중현의 — 다섯 겹의 깊은 뜻

『현의』 열 권의 대부분은 첫째 「이름」의 풀이다. 천태는 「묘(妙)」 한 글자를 두 가지로 푼다. 다른 것과 견주어 뛰어나다는 상대묘(相待妙)와, 견줄 것 없이 그 자체로 묘하다는 절대묘(絶待妙)다. 그리고 「법(法)」을 중생법 · 불법 · 심법의 셋으로 풀고, 셋이 차별 없이 모두 묘하다고 한다. 「연화(蓮華)」는 법을 비유한 것이면서, 동시에 법 그 자체의 이름이다. 『현의』 권7의 말이다. 「연꽃은 비유가 아니다. 그 자체로 이름을 얻었다(蓮華非譬 當體得名)」. 대성인은 「당체의초」에서 이 대목을 인용해 당체연화를 논하셨다(513쪽, 천친 편 15절).

「묘」를 푸는 중심에는 적문과 본문의 열 가지 묘가 있다. 법화경 적문(1~14품)이 드러낸 묘를 천태는 열로 헤아렸다. 대상(境) · 지혜(智) · 수행(行) · 자리(位) · 삼법(三法) · 감응(感應) · 신통(神通) · 설법(說法) · 권속(眷屬) · 이익(利益). 그리고 본문(15~28품)이 드러낸 묘를 또 열로 헤아렸다. 본인(本因) · 본과(本果) · 본국토(本國土) · 본감응 · 본신통 · 본설법 · 본권속 · 본열반 · 본수명 · 본이익. 본문의 열 묘는 교리 四가 다룬 구원실성, 곧 부처가 시작 없는 옛날에 이미 부처였다는 법문을 열 방면에서 푼 것이다. 특히 앞의 셋, 본인 · 본과 · 본국토는 뒤에 대성인이 「본인본과(本因本果)」와 「본국토묘」를 말씀하실 때의 바탕이 된다(교리 四 7절).

적문 십묘1~14품이 드러낸 묘
  1. 境대상
  2. 智지혜
  3. 行수행
  4. 位자리
  5. 三法삼법
  6. 感應감응
  7. 神通신통
  8. 說法설법
  9. 眷屬권속
  10. 利益이익
본문 십묘15~28품이 드러낸 묘
  1. 本因본인
  2. 本果본과
  3. 本國土본국토
  4. 本感應본감응
  5. 本神通본신통
  6. 本說法본설법
  7. 本眷屬본권속
  8. 本涅槃본열반
  9. 本壽命본수명
  10. 本利益본이익
금 테두리 — 본인 · 본과 · 본국토 · → 교리 四 7절
도표 17 · 적문 십묘와 본문 십묘

오시팔교 — 일대를 읽는 틀

천태의 교판

오중현의의 다섯째, 「교상」에서 천태는 석존 일대의 가르침 전체 속에 법화경을 자리매김했다. 그 틀이 오시팔교다. 다섯 때(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 · 법화열반), 다섯 가지 맛(우유 · 낙 · 생소 · 숙소 · 제호), 가르침의 내용 넷(화법사교: 장 · 통 · 별 · 원), 가르침의 방식 넷(화의사교: 돈 · 점 · 비밀 · 부정). 그 내용은 석존 편 22절이 대성인의 「일대성교대의」를 따라 자세히 보았다. 여기서는 천태의 교판이 남삼북칠과 무엇이 달랐는지만 본다.

첫째, 시간과 내용을 나누었다. 남북의 교판은 다섯 때를 곧 다섯 단계의 깊이로 보았다. 천태는 때(五時)와 내용(化法)과 방식(化儀)을 서로 다른 축으로 나누었다. 같은 방등의 때에도 장 · 통 · 별 · 원의 네 가르침이 함께 설해졌고, 원교는 화엄에도 방등에도 반야에도 있다. 다만 그 원교는 다른 가르침과 섞여 있었다(兼 · 但 · 對 · 帶). 법화경에 이르러서야 원교만이 순수하게 설해졌다(純圓). 석존 편 도표 19의 격자가 이것이다.

둘째, 다섯 때를 굳은 연대로 보지 않았다. 천태는 다섯 때를 석존의 생애에 차례로 배열하면서도(別五時), 중생의 근기에 따라 어느 때에나 어느 가르침이든 설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通五時). 오시는 달력이 아니라, 중생을 우유에서 제호까지 기르는 과정의 논리적 순서다.

셋째, 법화경을 가장 높은 단계가 아니라 모든 단계를 여는 자리로 보았다. 법화경은 이전의 가르침들보다 한 단계 높은 가르침이 아니다. 이전의 모든 가르침이 법화경을 위한 방편이었다고 밝혀, 그 모두를 하나의 불승으로 열어 모으는(開會) 경이다. 천태 교학의 뒤 사람들은 이것을 「팔교를 넘어선 제호(超八醍醐)」라 불렀다. 법화경은 팔교의 하나가 아니라, 팔교 전체를 열어 드러내는 경이라는 것이다.

남북돈 — 화엄따로 맨 위
  1. 상주(열반)
  2. 동귀(법화)
  3. 억양(유마 등)
  4. 무상(반야 등)
  5. 유상(아함)
↑ 다섯 때 = 다섯 깊이
천태
돈점비밀부정
화의사교 — 설하는 방식
화엄아함방등반야법화열반
장●●●
통●●●
별●●●●
원●●●순원●
開會 · 超八醍醐법화가 여덟 가르침 전체를 열어 모음
「오시팔교」라는 이름과 도식은 제관의 정리(20절 연구 노트) · 격자는 석존 편 22절 도표 19를 줄인 것
도표 18 · 남북의 교판과 천태의 교판

연구 노트 — 「오시팔교」라는 이름과 그 간명한 체계는 천태 자신이 아니라 10세기 고려 제관의 『천태사교의』에서 정리된 것이다(4부 17절). 1960년대 일본의 세키구치 신다이(關口眞大)는 「오시팔교는 천태의 교판이 아니다」라는 논문들로, 천태 자신의 교판은 오시와 사교를 말하되 제관의 체계처럼 고정된 도식이 아니었다고 주장했고, 사토 데쓰에이 등과 논쟁이 이어졌다. 오늘날에는 천태의 저작에 오시 · 화법사교 · 화의사교의 요소가 모두 있으나, 그것을 「오시팔교」라는 하나의 도식으로 묶은 것은 뒤의 정리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천태가 삼십 년의 홍법 가운데 「오시 · 팔교 · 백계천여를 밝혔다(五時・八教・百界千如を明かし)」고 하셨다(239쪽).

『법화문구』 — 네 가지 풀이와 두 개의 문

587 · 광택사의 강의

『법화문구』는 법화경 스물여덟 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구절씩 풀었다. 대성인이 「찬시초」에서 말씀하신 대로(18절), 천태는 한 구절마다 네 가지 방향으로 풀이를 겹쳐 놓았다. 사종석(四種釋)이다.

1 · 인연석因緣— 부처와 중생의 관계 · 사실단용수 편 22절
2 · 약교석約敎— 사교(장 · 통 · 별 · 원)의 깊이
3 · 본적석本迹— 적문의 뜻 / 본문의 뜻
4 · 관심석觀心— 나의 한 생각

一字一句に因縁・約教・本迹・観心の四の釈をならべて「찬시초」, 269쪽

바깥에서 안으로 — 이야기의 맥락 → 가르침의 깊이 → 부처의 본지 → 나의 마음 · 21절
도표 19 · 사종석 — 네 가지 풀이

네 풀이의 순서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야기의 맥락에서 가르침의 깊이로, 가르침의 깊이에서 부처의 본지로, 그리고 마지막에 나의 마음으로. 천태가 「교(敎)」와 「관(觀)」을 떼지 않은 것이 풀이의 형식 자체에 드러나 있다.

적문과 본문 — 이경육단

『법화문구』가 뒤의 법화경 읽기에 남긴 가장 큰 틀은 경을 둘로 나눈 것이다. 서품에서 안락행품까지 앞의 열네 품을 적문(迹門), 종지용출품에서 보현보살권발품까지 뒤의 열네 품을 본문(本門)으로 나누고, 두 문에 각각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의 세 단을 세웠다. 두 경, 여섯 단이라 하여 이경육단(二經六段)이라 한다.

2방편품 = 開三顯一16수량품 = 開近顯遠

적문
서분
서품
정종분
방편품~수학무학인기품(8품)
유통분
법사품~안락행품(5품)
본문
서분
종지용출품 앞 반
정종분
종지용출품 뒤 반 · 여래수량품 · 분별공덕품 앞 반(일품이반)
유통분
분별공덕품 뒤 반~보현보살권발품
無量義経と序品は序分なり方便品より人記品に至るまでの八品は正宗分なり、法師品より安楽行品に至るまでの五品は流通分なり「관심본존초」, 248쪽
28품 띠는 교리 三 도표 13과 같은 모양 · 21절 적문과 본문
도표 20 · 이경육단 — 두 경, 여섯 단

적문의 핵심은 방편품의 「삼승을 열어 일승을 드러냄(開三顯一)」, 곧 이승작불이다. 본문의 핵심은 여래수량품의 「가까운 것을 열어 먼 것을 드러냄(開近顯遠)」, 곧 구원실성이다. 경을 두 문으로 나누는 생각 자체는 법운 등 앞 시대의 학승에게도 있었지만, 두 문이 각각 완결된 설법의 구조를 가진다고 본 것은 천태의 해석이다.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천태의 이 구분을 그대로 쓰셨다(「무량의경과 서품은 서분이다. 방편품에서 인기품에 이르는 팔 품은 정종분이다. 법사품에서 안락행품에 이르는 오 품은 유통분이다(無量義経と序品は序分なり方便品より人記品に至るまでの八品は正宗分なり、法師品より安楽行品に至るまでの五品は流通分なり)」, 248쪽). 그리고 그 위에, 천태가 세우지 않은 또 하나의 구분, 곧 문저(文底)의 삼단을 세우셨다(교리 五 7절 · 6부 31절).

원융삼제와 일심삼관

천태의 관법

천태 교학의 이론과 수행을 잇는 고리는 공 · 가 · 중의 삼제(三諦)다. 교리 二가 이 삼제를 용수의 게송에서 천태의 원융삼제까지 자세히 읽었다(11 · 14 · 15절). 여기서는 천태가 이것을 어떻게 수행의 틀로 세웠는지만 본다.

모든 법은 연기하므로 자성이 없다(공). 그러나 연기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분명히 나타나 있다(가). 그리고 공이면서 가이고, 가이면서 공이다(중). 이 셋을 차례로 관하는 방법이 있었다. 보살영락본업경에 따라 가에서 공으로 들어가고(從假入空), 공에서 가로 나오며(從空出假), 마지막에 둘을 함께 비추는 중도에 이른다. 이것을 차제삼관(次第三觀)이라 하고, 그 삼제를 떨어져 있는 삼제(隔歷三諦)라 한다. 천태는 이것을 별교의 관법이라 했다.

천태가 세운 원교의 관법은 한 생각 안에서 셋을 동시에 관하는 것이다. 공을 관하면 그 공에 가와 중이 함께 있고, 가를 관하면 그 가에 공과 중이 함께 있다. 「곧 공이요 곧 가요 곧 중(卽空卽假卽中)」. 이것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 하고, 그 삼제를 원융삼제(圓融三諦)라 한다. 혜문이 『대지도론』과 『중론』에서 얻고 혜사를 거쳐 천태에게 전해진 관법이, 천태에게서 원교의 수행으로 완성되었다(2부 5절).

別 · 次第三觀 · 隔歷三諦별교 — 셋을 차례로, 떨어진 삼제차제삼관: 가에서 공으로 들어가고(종가입공), 공에서 가로 나오고(종공출가), 마지막에 중도제일의관에 이르는 세 계단. 삼제가 떨어져 있다(격력삼제).空從假入空1假從空出假2中中道第一義觀3
圓 · 一心三觀 · 圓融三諦원교 — 한 생각 안에서 셋을 동시에일심삼관: 한 마음의 큰 원 안에 공 · 가 · 중 세 원이 겹쳐 있고, 가운데에 즉공즉가즉중. 삼제가 원융하다(원융삼제).空假中一心卽空卽假卽中
공 · 가 · 중의 색은 교리 二의 삼제 도표와 같다 · 교리 二 11절 · 14절 · 15절
도표 21 · 차제삼관과 일심삼관

대성인은 뒤에 천태의 일심삼관을 두고, 삼관은 원인이고 묘법은 결과라 하셨다(「입정관초」 · 교리 二 15절). 일심삼관은 묘법을 얻기 위한 수행의 방법이며, 그 수행이 향하는 곳은 묘법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뜻은 6부 30절에서 본다.

『마하지관』 — 원돈의 지관

594 · 옥천사의 둘째 여름

「지관(止觀)」의 지는 마음의 흔들림을 멈추는 것(śamatha), 관은 멈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보는 것(vipaśyanā)이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불교 수행의 기본 틀이다. 관정은 『마하지관』의 서문에서 천태가 혜사에게서 세 가지 지관을 전해 받았다고 적었다.

止觀明靜 前代未聞관정 서說己心中所行法門관정 서
  1. 점차지관漸次止觀얕은 데서 깊은 데로 차례로 닦아 올라간다『석선바라밀차제법문』3부 8절 와관사
  2. 부정지관不定止觀차례를 정하지 않고 근기에 따라 앞뒤를 바꾼다『육묘법문』
  3. 원돈지관圓頓止觀처음부터 실상을 대상으로 — 처음과 끝이 둘이 아니다『마하지관』
관정이 서문에서 전한 세 가지 지관 · 서문의 세 비유는 원문 확인 뒤 표기
도표 22 · 세 가지 지관

관정은 서문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지관의 밝고 고요함은 앞 시대에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다(止觀明靜 前代未聞)」. 그리고 이 책이 설하는 것은 천태가 「자기 마음속에서 행한 법문(說己心中所行法門)」이라 했다. 경을 풀이한 책이 아니라, 천태가 자신의 마음에서 몸소 닦은 것을 설한 책이라는 것이다.

책의 모양 — 오략십광

『마하지관』은 열 장으로 계획되었다. 대의(大意) · 석명(釋名) · 체상(體相) · 섭법(攝法) · 편원(偏圓) · 방편(方便) · 정관(正觀) · 과보(果報) · 기교(起敎) · 지귀(旨歸). 첫째 「대의」는 다시 다섯 가지로 간추려진다. 큰 마음을 일으킴(發大心) · 큰 수행을 닦음(修大行) · 큰 결과를 느낌(感大果) · 큰 그물을 찢음(裂大網) · 큰 곳으로 돌아감(歸大處). 이것을 오략십광(五略十廣)이라 한다.

그런데 강의는 일곱째 「정관」의 중간에서 끝났다. 여름 안거가 끝났기 때문이다. 정관은 열 가지 관의 대상(十境)을 차례로 관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일곱째 「그릇된 견해(諸見境)」까지 설해지고, 증상만 · 이승 · 보살의 세 대상과 뒤의 과보 · 기교 · 지귀 세 장은 설해지지 않았다. 『마하지관』은 미완의 책이다. 그러나 천태 교단은 이 책에서 천태가 설하려던 것의 핵심은 이미 다 설해졌다고 보았다. 그 핵심이 정관의 첫째 대상에서 설해진 일념삼천이기 때문이다(24절).

  1. 권1~2대의 大意오략 — 권2에 사종삼매
  2. 권3석명 · 체상 · 섭법 · 편원석명 · 체상 · 섭법의 권은 확인 중
  3. 권4방편 方便이십오방편
  4. 권5~10정관 正觀권5 첫머리 — 一念三千
  5. 1 음입계2 번뇌3 병환4 업상5 마사6 선정7 제견8 증상만9 이승10 보살
  6. 과보 · 기교 · 지귀 — 설하지 않음 (여름 안거가 끝남)
권 배분은 대략 — 원문 확인 뒤 표기 · 석명 · 체상 · 섭법의 권은 확인 중 · 일념삼천의 자리는 교리 五 4절 · 도표 5 · 6
도표 23 · 『마하지관』의 구성 — 오략십광과 미완의 정관

네 가지 삼매와 스물다섯 방편

『마하지관』 권2는 수행의 형식을 넷으로 나눈다. 사종삼매(四種三昧)다.

그리고 권4는 정관에 들기 전에 갖추어야 할 스물다섯 가지 준비, 이십오방편(二十五方便)을 설한다.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고(具五緣), 다섯 가지 욕망을 꾸짖고(呵五欲), 다섯 가지 덮개를 버리고(棄五蓋), 몸 · 숨 · 마음 · 음식 · 잠의 다섯 가지를 고르고(調五事), 다섯 가지 법을 행한다(行五法).

  1. 상좌삼매常坐三昧
    기간
    구십 일
    몸
    앉음 — 한 부처를 향해 법계를 관함
    근거
    문수설반야경
  2. 상행삼매常行三昧
    기간
    구십 일
    몸
    걸음 — 아미타불을 부르고 생각함
    근거
    반주삼매경
  3.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
    기간
    법화삼매 — 삼칠일(21일)방등삼매 확인 중
    몸
    걷기와 앉기를 겸함
    근거
    확인 중
    法華三昧· 방등삼매→ 2부 6절 대소산의 보현도량
  4.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
    기간
    확인 중
    몸
    형식에 얽매이지 않음 —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마음을 관함
    근거
    확인 중
    수자의삼매 隨自意三昧
각 삼매의 본존에 대해서는 「본존문답초」 365가 논함 · 기간 · 근거 경전은 원문 확인 뒤 표기
도표 24 · 사종삼매 — 『마하지관』 권2

대성인은 「본존문답초」에서 사종삼매 가운데 법화삼매를 들어, 천태가 법화삼매의 행법에서 도량에 「오직 법화경 한 부를 두라」고 한 대목을 인용하셨다(365쪽). 수행의 중심에 경 그 자체를 둔 천태의 법화삼매는, 대성인의 불법에서 법을 근본으로 삼는 뜻과 이어져 있다.

삼장사마 — 「문하의 밝은 거울」

『마하지관』 권5는 정관을 설하기에 앞서,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장애가 일어난다고 경고한다. 대성인은 이 대목을 「형제초」에서 인용하시며, 이것이 대성인 자신에게 해당할 뿐 아니라 문하 전체의 밝은 거울이라 하셨다.

第五の巻に云く「行解既に勤めぬれば三障四魔紛然として競い起る乃至随う可らず畏る可らず之に随えば将に人をして悪道に向わしむ之を畏れば正法を修することを妨ぐ」等云云、此の釈は日蓮が身に当るのみならず門家の明鏡なり謹んで習い伝えて未来の資糧とせよ

제5권에 이르기를 「수행과 이해가 이미 부지런히 이루어지면 삼장사마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 …… 따라서도 안 되고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이것을 따르면 사람을 악도로 향하게 하고, 이것을 두려워하면 정법을 닦는 것을 방해한다」 하였다. 이 해석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할 뿐 아니라 문하의 밝은 거울이다. 삼가 배우고 전하여 미래의 양식으로 삼으라.

「형제초」, 1087–1088쪽

삼장(三障)은 번뇌장 · 업장 · 보장, 사마(四魔)는 번뇌마 · 음마 · 사마(死魔) · 천자마다. 대성인은 이어서 삼장의 모습을 풀이하셨다. 번뇌장은 탐 · 진 · 치로, 업장은 처자로, 보장은 국주와 부모로 인해 일어난다(1088쪽). 천태가 화정봉의 밤에 겪은 무서운 형상과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3부 10절)이 여기서 수행자 모두의 법칙이 된다. 창가학회가 신앙의 시련을 「삼장사마」의 이름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이 『마하지관』의 한 구절과 「형제초」에서 온다.

일념삼천 — 권5의 몇 줄

594 · 『마하지관』 권5상

『마하지관』 권5, 정관의 첫째 대상인 음입계경(陰入界境), 곧 지금 여기의 오음 · 십이입 · 십팔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하는 대목에서 천태는 이렇게 설했다. 대성인이 「관심본존초」의 첫머리에 두신 구절이다.

夫れ一心に十法界を具す一法界に又十法界を具すれば百法界なり一界に三十種の世間を具すれば百法界に即三千種の世間を具す、此の三千・一念の心に在り若し心無んば而已介爾も心有れば即ち三千を具す

무릇 한 마음에 십법계를 갖춘다. 한 법계에 또 십법계를 갖추니 백법계다. 한 계에 삼십 가지 세간을 갖추니 백법계에는 곧 삼천 가지 세간을 갖춘다. 이 삼천이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 마음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곧 삼천을 갖춘다.

「관심본존초」가 인용한 『마하지관』 권5, 238쪽

그 셈과 뜻,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다(非縱非橫)」는 말, 묘락과 산가 · 산외의 논쟁은 교리 五 1~5절이 자세히 읽었다. 여기서는 천태의 생애 속에서 이 몇 줄이 차지하는 자리만 본다.

첫째, 늦게 설해졌다. 천태는 와관사 이래 삼십 년 가까이 강의했지만, 일념삼천은 쉰일곱 살의 마지막 대강의 속에서 처음 설해졌다. 『법화현의』와 『법화문구』에는 백계천여, 곧 십계가 서로 갖추어져 백계가 되고 그것이 십여시를 갖추어 천여가 된다는 법문까지는 있으나 「삼천」은 없다. 묘락은 이것을 두고 「『현의』 · 『문구』에서는 아직 일념삼천을 말하지 않았고, 『지관』에 이르러 바로 관법을 밝힐 때 비로소 삼천으로 지남을 삼았으니, 이것이 궁극의 가르침(終窮究竟の極説)」이라 했다(「관심본존초」, 238–239쪽이 인용). 『마하지관』 권1~4에서도 일념삼천은 설해지지 않았다.

둘째, 몇 줄뿐이다. 열 권의 『마하지관』에서 일념삼천을 직접 설한 대목은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일념삼천」이라는 네 글자의 말 자체가 천태의 글에는 없고, 묘락이 이 대목을 풀며 쓴 말이라고 본다. 천태가 설한 것은 「이 삼천이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는 법이었고, 그 법에 「일념삼천」이라는 이름을 붙여 천태 교학의 중심으로 들어 올린 것은 묘락이었다.

셋째, 관(觀)의 대상으로 설해졌다. 일념삼천은 정관의 첫째 관, 「불가사의한 대상을 관함(觀不思議境)」에서 설해졌다. 지금 일어나는 한 생각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삼천을 갖춘 불가사의한 경계임을 관하는 것이다. 천태에게 일념삼천은 무엇보다 수행의 법이었다.

대성인은 입종 다섯 해 뒤의 초기 어서에서 이 경위를 이렇게 적으셨다.

薬王菩薩・漢土に出世して天台大師と云われ此の法門を覚り給いしかども先ず玄義十巻・文句十巻・覚意三昧・小止観・浄名疏・四念処・次第禅門等の多くの法門を説きしかども此の一念三千の法門をば談じ給はず百界千如の法門計りなり、御年五十七の夏四月の比・荊州玉泉寺と申す処にて御弟子章安大師に教え給ふ止観と申す文十巻あり、上四帖に猶秘し給いて但六即・四種三昧等計りなり、五の巻に至つて十境・十乗・一念三千の法門を立て夫れ一心に具す等と云云

약왕보살이 중국에 나와 천태대사라 불리며 이 법문을 깨달으셨으나, 먼저 『현의』 열 권 · 『문구』 열 권 · 『각의삼매』 · 『소지관』 · 『정명소』 · 『사념처』 · 『차제선문』 등 많은 법문을 설하셨어도 이 일념삼천의 법문은 말씀하지 않으셨고 백계천여의 법문뿐이었다. 나이 쉰일곱 여름 4월 무렵 형주 옥천사라는 곳에서 제자 장안대사에게 가르치신 『지관』이라는 글 열 권이 있다. 위의 네 권에서는 더욱 감추시어 다만 육즉 · 사종삼매 등뿐이었고, 제5권에 이르러 십경 · 십승 · 일념삼천의 법문을 세워 「무릇 한 마음에 갖춘다」 등이라 하셨다.

「일념삼천법문」, 412쪽

「감추시어(秘し給いて)」. 대성인은 천태가 일념삼천을 오랫동안 설하지 않고 마지막에야 설한 것을, 가장 귀한 것을 끝까지 아껴 둔 것으로 읽으셨다. 같은 대목은 「일대성교대의」(402쪽)에도 거의 같은 문장으로 나온다.

  1. 568와관사 「차제선문」금릉
  2. 587『법화문구』광택사
  3. 593『법화현의』옥천사 · 백계천여까지
  4. 594『마하지관』 권1~4육즉 · 사종삼매
  5. 594권5 「一念三千」정관의 첫째 대상 · 관부사의경
  6. 8세기묘락 『홍결』「終窮究竟の極説」
上四帖に猶秘し給いて「일념삼천법문」 412쪽 · 「일대성교대의」 402쪽삼천의 셈과 구조 — 교리 五 1절 · 도표 1
도표 25 · 천태의 설법과 일념삼천이 나온 자리

육즉과 「오품의 자리」

『마하지관』 권1 · 천태의 임종

『마하지관』 권1은 수행의 자리를 여섯으로 나눈다. 육즉(六卽)이다.

  1. 이즉(理卽) — 이치로서는 이미 부처와 같다. 모든 중생의 한 생각에 부처의 성품이 갖추어져 있으나, 스스로 모른다.
  2. 명자즉(名字卽) — 가르침을 듣고, 이름(名字)으로서 모든 것이 부처의 법임을 안다.
  3. 관행즉(觀行卽) — 들은 대로 관하고 행한다. 법화경 분별공덕품이 설하는 멸후의 다섯 단계, 곧 오품(五品: 수희 · 독송 · 설법 · 겸행육도 · 정행육도)이 이 자리다.
  4. 상사즉(相似卽) — 수행이 깊어져 육근이 깨끗해지고, 부처의 지혜와 비슷한 지혜가 일어난다(六根淸淨).
  5. 분진즉(分眞卽) — 무명을 하나씩 끊으며 참된 깨달음을 부분적으로 드러낸다.
  6. 구경즉(究竟卽) — 무명을 다 끊고 깨달음을 완성한다.

여섯의 「즉」은 범부와 부처가 같다는 뜻이고, 여섯의 「육」은 그 사이에 자리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천태는 이 둘을 함께 세워, 범부가 스스로를 부처와 같다고 교만해지는 것(增上慢)도, 부처와 멀다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도 모두 막으려 했다.

  1. 1理이즉
  2. 2名字명자즉말법의 범부 — 대성인의 불법(창가학회 교학)
  3. 3觀行관행즉五品천태의 자리 — 只是五品位耳4부 16절
  4. 4相似상사즉六根淸淨
  5. 5分眞분진즉
  6. 6究竟구경즉
  7. 卽 — 여섯이 모두 같다 · 육 — 자리는 여섯
教弥弥権なれば位弥弥高し教弥弥実なれば位弥弥下し「입정관초」 529쪽
도표 26 · 육즉 — 여섯이면서 같다

4부 16절에서 본 대로, 천태는 임종의 자리에서 자신이 「다만 오품의 자리」, 곧 관행즉에 있다고 했다. 법화경을 누구보다 깊이 안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그렇게 말했다. 천태 교학에서 관행즉의 오품은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니다. 일념삼천을 이해하고 지관을 닦는 사람의 자리다. 대성인은 「창법화제목초」에서 이렇게 쓰셨다. 「일념수희와 오십전전이라 하는 것도 천태 · 묘락의 해석대로라면 모두 관행오품의 초수희의 자리로 정하셨다. 박지의 범부의 일이 아니다(一念随喜・五十展転と申すも天台妙楽の釈のごときは皆観行五品の初随喜の位と定め給へり博地の凡夫の事にはあらず)」(2쪽). 천태의 법은 높은 근기의 수행자를 위한 법이었다.

그렇다면 말법의 범부는 어디에 서는가.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이렇게 정리한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오품의 자리보다 아래인 명자즉의 자리에서, 오십이의 계위를 거치지 않고 성불한다고 설해진다.」 법을 듣고 믿어 부르는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입정관초」에서 천태의 말을 들어 이 뜻을 비추셨다. 「가르침이 더욱 권(權)일수록 자리는 더욱 높고(教弥弥権なれば位弥弥高し)」, 「가르침이 더욱 실(實)일수록 자리는 더욱 낮다(教弥弥実なれば位弥弥下し)」(529쪽). 가르침이 깊을수록 그 가르침으로 성불하는 사람의 자리는 낮아진다. 가장 깊은 법은 가장 낮은 자리의 범부를 부처로 만든다.

천태의 교학은 「교(敎)」와 「관(觀)」의 두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화현의』와 『법화문구』가 경을 읽는 교의 문이고, 『마하지관』이 마음을 관하는 관의 문이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태의 『마하지관』은 「천태 일생의 대사요 일대 성교의 간심」이며, 천태는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곳간 속에서 일념삼천의 여의보주를 꺼내어 세 나라의 일체중생에게 두루 주셨다(妙法蓮華経の五字の蔵の中より一念三千の如意宝珠を取り出して三国の一切衆生に普く与へ給へり)」(「형제초」, 1087쪽). 창가학회는 천태의 교관을 대성인 불법의 이론적 토대로 깊이 배운다. 오중현의 · 사교 · 삼제 · 십여시 · 일념삼천은 대성인의 어서를 읽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말이다. 동시에 창가학회는 그 교관이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곳간」에서 나왔다는 대성인의 말씀에 주목한다. 천태는 곳간에서 보주를 꺼내어 보였다. 대성인은 곳간 그 자체, 곧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명자즉의 범부가 받아 지닐 수 있게 하셨다. 천태가 오품의 자리에서 관한 법을, 말법의 범부는 명자즉의 자리에서 부른다. 그 까닭이 6부의 주제다.

6부 대성인이 본 천태

상법의 한 사람 — 때와 사람

「불멸 후 천오백 년」 · 전통 연대

대성인은 천태를 이야기하실 때, 용수의 경우처럼 언제나 「때」에서 시작하셨다. 「보은초」의 천태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像法に入つて五百年・仏滅後・一千五百年と申せし時漢土に一人の智人あり始は智顗・後には智者大師とがうす、法華経の義をありのままに弘通せんと思い給しに天台已前の百千万の智者しなじなに一代を判ぜしかども詮して十流となりぬ所謂南三北七なり

상법에 들어 오백 년, 불멸 후 천오백 년이라 하던 때, 중국에 한 사람의 지인(智人)이 있었다. 처음에는 지의, 뒤에는 지자대사라 불렀다. 법화경의 뜻을 있는 그대로 넓히려 하셨는데, 천태 이전의 백천만 지자들이 저마다 일대를 판정했으나 요약하면 열 갈래가 되었다. 이른바 남삼북칠이다.

「보은초」, 298쪽

정법 천 년이 지나고 상법 천 년에 들어섰다. 인도에서 법이 쇠하고, 법은 동쪽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 상법의 시대에 법화경을 「있는 그대로」 넓힌 사람이 천태였다. 대성인은 이 시기를 대집경의 다섯 오백 년으로도 설명하셨다. 천태가 남북의 그릇된 뜻을 깨뜨리고 법화경을 첫째에 둔 것은 「상법의 앞 오백 년, 대집경의 독송다문견고의 때에 해당한다(此れ像法の前・五百歳・大集経の読誦多聞堅固の時にあひあたれり)」(「찬시초」, 262쪽). 경을 읽고 많이 듣는 것이 굳건한 때, 곧 경전의 학문이 가장 번성한 때에 천태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본존초」는 불멸 후 천팔백여 년 동안 세 나라에 걸쳐 「이 정법을 깨달아 안」 사람이 오직 셋이라 하며, 그 가운데 「중국의 지자대사(真旦の智者大師)」를 두셨다(245쪽, 용수 편 25절). 인도의 석존, 중국의 천태, 일본의 전교. 대성인이 천태를 「내전의 성인」이라 하신 까닭이다.

  1. 불멸석존기원전 949 — 전통 연대
  2. 0 ~ 1000정법 천 년
  3. 1000 ~ 1500상법 앞 오백 년 — 천태독송다문견고 · 상법 시작은 서력 52 무렵
  4. 1500 ~ 2000상법 뒤 오백 년 — 전교다조탑사견고 · 불멸 후 1500년은 서력 552 무렵
  5. 2000 ~말법 처음 — 니치렌투쟁언송 · 백법은몰
전교 편준비 중
석존 입멸 기원전 949년의 전통 연대 기준(26절 연대 대조) · 점은 칸 안의 자리만 보인다
도표 27 · 정 · 상 · 말과 네 스승

연대 대조 — 대성인이 따르신 전통 연대에서 석존의 입멸은 기원전 949년이다(석존 편 1부 3절). 이에 따르면 상법의 시작은 기원 52년 무렵, 「불멸 후 천오백 년」은 기원 552년 무렵이다. 천태는 560년 대소산에서 깨닫고 568년 금릉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니, 「보은초」의 「상법에 들어 오백 년 · 불멸 후 천오백 년」과 잘 맞는다. 「찬시초」는 천태를 「상법의 앞 오백 년」에, 「관심본존초」는 「상법의 가운데와 끝(像法の中末)」에 두는데, 모두 상법 천 년의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학계의 연대(석존 입멸 기원전 5세기경)와는 직접 맞추지 않는다.

진나라 궁정의 대론 — 공장에서 이기다

「보은초」 1276 · 「중생심어서」

대성인이 천태의 생애 가운데 가장 자세히, 가장 생생하게 전하신 것은 진나라 궁정의 대론이다. 「보은초」는 먼저 천태가 어떻게 법화경 제일의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적는다. 천태는 스승 혜사의 뜻에도 의문을 품고 일체경의 곳간에 들어가 거듭 읽어, 화엄 · 열반 · 법화 세 경으로 좁혔다. 그 가운데 특히 화엄경을 강의하고, 따로 예배의 글을 지어 날마다 닦았다. 사람들이 천태도 화엄경을 첫째로 여긴다고 생각할 만큼이었다. 법운이 화엄을 첫째에 둔 것이 너무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오히려 화엄경을 가장 깊이 읽은 것이다(298–299쪽). 그리고 법화경이 첫째라는 결론에 이르자, 천태는 법운이 방법(謗法)으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남북의 학승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성인은 이어서 쓰셨다.

智顗法師をば頭をわるべきか国ををうべきかなんど申せし程に陳主此れを・きこしめして南北の数人に召し合せて 我と列座してきかせ給いき、法雲法師が弟子等の慧栄.法歳・慧曠.慧恆なんど申せし僧正・僧都.已上の人人.百余人なり各各・悪口を先とし眉をあげ眼をいからし手をあげ柏子をたたく、而れども智顗法師は末座に坐して色を変ぜず言を悞らず威儀しづかにして諸僧の言を一一に牒をとり言ごとに・せめかえす

「지의법사의 머리를 깨야 하는가, 나라에서 쫓아내야 하는가」 하고 말할 무렵, 진주(陳主)가 이를 듣고 남북의 여러 사람을 불러 맞세우고 스스로 자리를 함께하여 들으셨다. 법운법사의 제자인 혜영 · 법세 · 혜광 · 혜항이라는 승정 · 승도 이상의 사람들이 백여 명이었다. 저마다 욕설을 앞세우고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라리며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그러나 지의법사는 끝자리에 앉아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말을 그르치지 않으며, 몸가짐을 고요히 하여 여러 승려의 말을 하나하나 적어 두고 말마다 되받아 공박했다.

「보은초」, 299쪽

천태의 물음은 단순했다. 법운이 화엄을 첫째, 열반을 둘째, 법화를 셋째에 둔 증거의 경문은 무엇인가. 대답이 없었다. 천태는 경문을 차례로 들었다. 무량의경은 「다음에 방등 십이부경 · 마하반야 · 화엄해공을 설했다」고 화엄의 이름을 들어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열반경 권9는 법화경을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는 큰 결실에 비기고, 열반경 자신은 그 뒤의 이삭줍기라 했다. 법화경은 「이미 설한 것, 지금 설하는 것, 앞으로 설할 것」 가운데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했고, 다보여래가 땅에서 솟아 「모두 진실」이라 증명했으며, 시방의 분신불이 혀를 범천에 닿게 했다. 이 증명을 뒤집고 석존이 열반경에서 「열반경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했다면 제자들은 그것을 믿겠는가(299–300쪽).

  1. ①무량의경次說方等十二部經 摩訶般若 華嚴海空 … 未顯眞實화엄은 법화 이전
  2. ②열반경 권9秋收冬藏 · 捃拾열반은 법화 뒤의 이삭줍기
  3. ③법사품已今當說 最爲難信難解
  4. ④견보탑품 · 신력품다보 「皆是眞實」 · 분신불 광장설
  5. 결론一法華・二涅槃・三華厳
「보은초」 299–300쪽 · 27절
도표 28 · 공장에서 내세운 경문

「중생심어서」는 대론의 끝을 이렇게 적는다. 남북의 승려들은 「어떤 이는 입을 다물고, 어떤 이는 욕설을 하고, 어떤 이는 얼굴빛이 변했으나, 진주가 일어나 세 번 절하고 백관이 손을 모으자 힘이 미치지 못해 지고 말았다(或は口をとぢ・或は悪口をはき・或は色をへんじなんど・せしかども、陳主立つて三拝し百官掌をあわせしかば力及ばずまけにき)」(1592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진나라 궁정의 넓은 전당, 맨 안쪽 장막 뒤 빈 자리, 긴 전당 양쪽에 줄지어 앉은 수많은 스님들이 몸을 내밀거나 손을 들고, 맨 아래 끝자리에 한 스님이 책상 곁에 등을 보이고 곧게 앉은 금박 수묵화
그림 10 · 궁정의 끝자리

왜 「공장(公場)」인가

대성인은 이 대론에서 한 가지를 거듭 강조하셨다. 이것이 국주 앞의 공개된 자리, 곧 공장(公場)에서의 대결이었다는 것이다. 천태 뒤에 법상 · 화엄 · 진언이 일어나 법화경을 깎아내렸을 때, 천태종의 학자들은 속으로는 그들의 주장이 근거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천태처럼 공장에서 논하지 않았으므로(天台のごとく公場にして論ぜられざりければ)」 국왕과 대신에서 백성까지 모두 불법에 헤매게 되었다(「찬시초」, 263쪽). 묘락이 천태가 보지 못한 법상 · 화엄 · 진언을 논파했을 때도 「천태대사처럼 공장에서 공박하지 않았으므로 캄캄한 밤의 비단과 같았다(天台大師のごとく公場にてせめ給はざれば・ただ闇夜のにしきのごとし)」(「중생심어서」, 1593쪽).

법의 옳고 그름은 개인의 확신으로 끝나지 않는다. 국주와 사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려져야 한다. 대성인이 「입정안국론」 이래 여러 차례 국주에게 여러 종파와의 공장대결을 요구하신 것은, 천태가 진의 궁정에서 보인 이 본보기를 말법에서 다시 세우려 하신 것이었다.

연구 노트 — 「보은초」와 「중생심어서」가 전하는 진주 앞의 대론은 천태의 전기에 그대로의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 『별전』은 태극전의 강석에서 승정 혜훤 · 승도 혜광 등이 칙명을 받아 문난했다고 전하고(4부 12절), 법운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대성인이 전하신 대론의 모습은 일본 천태종에서 전해 온 천태 전승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인명(혜영 · 법세 · 혜광 · 혜항)도 『별전』의 여러 강석 기사와 겹친다. 이 페이지는 대성인이 이 이야기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를 기준으로 읽는다. 곧 경문을 근거로 한 공개의 대결, 그리고 「끝자리에 앉아 얼굴빛을 바꾸지 않은」 법화경 행자의 모습이다.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 — 찬탄의 목소리들

「보은초」 · 「찬시초」 · 「형제초」

대론이 끝난 뒤의 일을 「보은초」는 이렇게 적는다.

天台大師の御気色は師子王の狐兎の前に吼えたるがごとし鷹鷲の鳩雉をせめたるににたり、かくのごとくありしかば・さては法華経は華厳経・涅槃経にもすぐれてありけりと震旦一国に流布するのみならずかへりて五天竺までも聞へ月氏・大小の諸論も智者大師の御義には勝れず教主釈尊・両度出現しましますか仏教二度あらはれぬとほめられ給いしなり

천태대사의 모습은 사자왕이 여우와 토끼 앞에서 포효하는 것 같았고, 매와 독수리가 비둘기와 꿩을 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되자 「그렇다면 법화경은 화엄경 · 열반경보다도 뛰어났구나」 하고 중국 한 나라에 퍼졌을 뿐 아니라 거꾸로 인도에까지 알려져, 「인도의 대승 · 소승의 여러 논도 지자대사의 뜻보다 뛰어나지 않다. 교주 석존께서 두 번 출현하신 것인가,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고 찬탄받으셨다.

「보은초」, 300쪽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 대성인은 천태에 대한 동시대와 후대의 찬탄을 여러 어서에 모아 두셨다. 「찬시초」는 종파가 다른 네 사람의 말을 차례로 든다(270쪽).

그리고 「보은초」는 길장이 천태를 섬긴 모습을 전한다. 길장은 천태보다 나이 많은 고승이었으나 백여 명의 학승 앞에서 온몸을 땅에 던지고 땀과 붉은 눈물을 흘리며 제자를 두지 않고 법화경을 강의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볼 때 일부러 천태를 업어 강을 건너고, 등에 태워 높은 자리에 올려 드렸으며, 천태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수의 황제에게 나아가 어머니를 잃은 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315쪽, 천친 편 21절).

仏教二度あらはれぬ「보은초」 300쪽
삼론길장千年の興五百の実천태를 업어 건넘전승천친 편 21절
율도선法華を照了すること高輝の幽谷に臨むが若く
화엄법장霊山の聴法憶い今に在り
진언불공 · 함광中国に法を失いて之を四維に求む인도 승려의 청 · 묘락의 탄식
「찬시초」 270쪽 · 「보은초」 315쪽 · 28절
도표 29 · 네 종파 조사들의 찬탄

연구 노트 — 길장이 천태를 청한 글은 『국청백록』에 「길장법사가 법화경 강의를 청하는 글」로 실려 있고, 597년의 일로 본다. 길장이 천태를 업어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전기에 보이지 않으며, 일본 천태종의 전승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길장의 후기 저작에 천태의 영향이 있는지는 연구자 사이에 견해가 갈린다. 함광의 이야기는 『송고승전』 권27 「함광전」에 전한다.

대성인 자신의 찬탄은 「형제초」의 한 문장에 가장 선명하다.

されば天台大師の摩訶止観と申す文は天台一期の大事・一代聖教の肝心ぞかし、仏法漢土に渡つて五百余年・南北の十師・智は日月に斉く徳は四海に響きしかどもいまだ一代聖教の浅深・勝劣・前後・次第には迷惑してこそ候いしが、智者大師再び仏教をあきらめさせ給うのみならず、妙法蓮華経の五字の蔵の中より一念三千の如意宝珠を取り出して三国の一切衆生に普く与へ給へり

그러므로 천태대사의 『마하지관』이라는 글은 천태 일생의 대사요 일대 성교의 간심이다. 불법이 중국에 건너온 지 오백여 년, 남북의 십사는 지혜가 해와 달에 견주고 덕이 사해에 울렸으나 아직 일대 성교의 얕고 깊음 · 뛰어나고 못함 · 앞과 뒤 · 차례에는 헤매고 있었는데, 지자대사가 다시 불교를 밝히셨을 뿐 아니라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곳간 속에서 일념삼천의 여의보주를 꺼내어 세 나라의 일체중생에게 두루 주셨다.

「형제초」, 1087쪽

「상법 가운데는 천태 한 사람이 법화경과 일체경을 읽었다」(「개목초」, 202쪽). 「천태산의 지자대사 한 사람만이 일체경 가운데 법화경이 뛰어나다고 세웠다(天台山の智者大師只一人のみ一切経の中に法華経を勝れたりと立つる)」(「교기시국초」, 440쪽). 「중국에서는 진나라 황제 때 천태대사가 남북을 공박해 이겨 살아 있는 몸으로 대사가 되었다(漢土には陳帝の時・天台大師・南北にせめかちて現身に大師となる)」(「보은초」, 310쪽). 대성인은 천태를 「한 사람(一人)」이라 부르셨다. 오백 년의 중국 불교, 수천의 학승 가운데 법화경을 있는 그대로 읽은 오직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약왕의 화신 — 영산에서 들은 사람

「입정관초」 1274 · 「당체의초」 외

대성인의 시대 일본에는 천태가 법화경의 약왕보살이 중국에 나타난 몸이고, 전교는 다시 천태가 일본에 나타난 몸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성인도 이 전승을 따르셨다. 「입정관초」는 이렇게 쓴다.

夫れ天台大師は昔霊山に在ては薬王と名け・今漢土に在ては天台と名け・日本国の中にては伝教と名く三世の弘通倶に妙法と名く、是くの如く法華経を弘通し給う人は在世の釈尊より外は三国に其の名を聞かず有り難く御坐します大師を

무릇 천태대사는 옛날 영산에 있어서는 약왕이라 이름하고, 지금 중국에 있어서는 천태라 이름하며, 일본국 안에서는 전교라 이름한다. 삼세의 홍통을 모두 묘법이라 이름한다. 이처럼 법화경을 넓히신 사람은 재세의 석존 말고는 세 나라에서 그 이름을 듣지 못했다. 이토록 드문 대사를 ……

「입정관초」, 530쪽

「당체의초」는 「남악대사는 관음의 화신, 천태대사는 약왕의 화신(南岳大師は観音の化身・天台大師は薬王の化身なり)」이라 하고(519쪽), 「일념삼천법문」은 「약왕보살이 중국에 나와 천태대사라 불렸다(薬王菩薩・漢土に出世して天台大師と云われ)」고 한다(412쪽, 5부 24절).

이 전승은 천태의 생애와 겹쳐 있다. 천태가 대소산에서 깨달은 것은 약왕보살본사품의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참된 법으로 여래를 공양한다고 한다」는 구절에서였다(2부 7절). 약왕보살의 전생,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몸을 태워 법을 공양한 이야기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어석은 대소개오가 「뒤에 약왕보살의 후신이라 불리게 된 까닭」이라 적는다. 그리고 혜사가 천태를 처음 보고 한 말, 「옛날 영산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었다」(2부 6절)는 이 전승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 준다. 천태는 영산에서 석존의 법화경을 들은 사람이다.

적화의 보살

그러나 대성인은 약왕보살의 자리를 분명히 하셨다. 약왕은 법화경 적문의 보살, 곧 적화(迹化)의 보살이다. 「관심본존초」는 문수 · 관음 · 약왕 · 보현이 「일단 석존의 교화를 돕기 위해 사바세계에 들어왔으나, 또한 이전 경과 적문의 보살이다. 본법(本法)을 지닌 사람이 아니므로 말법의 홍법에는 부족한 자인가」라고 한다(252쪽). 석존은 여래신력품에서 법화경 본문의 간심을 지용의 보살, 상행보살 등에게 맡겼고, 약왕보살 등에게는 그 뒤 촉루품과 약왕품에서 다시 법화경을 맡겼다. 「하산어소식」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상법 천 년 동안 석존은 약왕보살 등 적화 · 타방의 대보살에게 법화경의 절반인 적문 열네 품을 넓히게 하셨는데, 이것은 말법의 처음에 지용의 대보살이 나와 본문 수량품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를 부르게 하기 위한 서막이었다. 「이른바 적문 홍통의 무리는 남악 · 천태 · 묘락 · 전교 등이다(所謂・迹門弘通の衆は南岳・天台・妙楽・伝教等是なり)」(346쪽).

영산 — 석존의 부촉
적화 · 타방의 보살문수관음약왕보현 등촉루품 · 약왕품 이하의 부촉정 · 상의 홍통남악 = 관음천태 = 약왕전교迹門を以て面と為し
본화 지용의 보살상행 등신력품의 결요부촉말법 처음의 홍통本門の肝心
「관심본존초」 252쪽 · 「하산어소식」 346쪽 · 「입정관초」 530쪽 · 부촉의 관계만 적었다 · 29절
도표 30 · 영산의 두 부촉

이것은 천태를 낮추는 말이 아니다. 천태는 영산에서 석존에게서 직접 법화경을 부촉받은 보살이다. 그가 넓힌 것은 그 부촉의 범위, 곧 상법의 때에 맞는 법화경이었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수량품의 「그때 나와 대중의 승려가 함께 영취산에 나온다(時我及衆僧倶出霊鷲山)」를 「영산의 한 회좌가 엄연히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는 글(霊山一会儼然未散の文なり)」이라 하셨다(756쪽). 혜사와 천태가 영산에서 함께 들었다는 것과, 그 영산의 회좌가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 영산의 법화경은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그 법을 받아 지니는 사람에게서 지금 이어지고 있는 자리다.

안으로 부른 제목 — 내증과 외용

「입정관초」 1274 · 「당체의초」 · 「삼대비법초」 1281

천태는 남묘호렌게쿄를 알았는가. 대성인은 알았다고 하셨다. 「입정관초」는 이렇게 문답한다.

問う天台大師真実に此の一言の妙法を証得したまわざるや、答う内証爾らざるなり、外用に於ては之を弘通したまわざるなり、所謂内証の辺をば秘して外用には三観と号して一念三千の法門を示現し給うなり、問う何が故ぞ知り乍ら弘通し給わざるや、答う時至らざるが故に付属に非ざるが故に迹化なるが故なり

묻는다. 천태대사는 참으로 이 한마디의 묘법을 증득하지 않으셨는가. 답한다. 내증(內證)은 그렇지 않다. 외용(外用)에서는 이것을 넓히지 않으셨다. 이른바 내증의 쪽은 감추시고, 외용으로는 삼관이라 이름하여 일념삼천의 법문을 나타내 보이셨다. 묻는다. 무슨 까닭에 알면서 넓히지 않으셨는가. 답한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부촉이 아니기 때문이며, 적화이기 때문이다.

「입정관초」, 531쪽

안으로 깨달은 것(內證)과 밖으로 펴 보인 것(外用)이 달랐다. 안으로는 한마디의 묘법, 곧 묘법연화경을 증득했다. 밖으로는 그것을 일심삼관과 일념삼천이라는 관법의 형태로 보였다. 까닭은 셋이다. 때가 아니었고, 부촉받은 법이 아니었으며, 천태 자신이 적화의 보살이었다(29절).

「당체의초」는 같은 뜻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남악 · 천태 · 전교는 법화경에 의지해 일승의 가르침을 넓혔으면서 왜 남묘호렌게쿄라 부르지 않았는가. 그 답이다.

答う南岳大師は観音の化身・天台大師は薬王の化身なり等云云、若し爾らば霊山に於て本門寿量の説を聞きし時は之を証得すと雖も在生の時は妙法流布の時に非ず、故に妙法の名字を替えて止観と号し一念三千・一心三観を修し給いしなり、但し此等の大師等も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事を自行真実の内証と思食されしなり

답한다. 남악대사는 관음의 화신, 천태대사는 약왕의 화신이라 한다. 그렇다면 영산에서 본문 수량품의 설법을 들었을 때 이것을 증득했으나, 세상에 계실 때는 묘법이 퍼질 때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묘법이라는 이름을 바꾸어 지관이라 부르고, 일념삼천 · 일심삼관을 닦으셨다. 다만 이 대사들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자행의 진실한 내증으로 여기셨다.

「당체의초」, 519쪽

그리고 그 증거로 천태의 글을 드신다. 「남무평등대혜일승묘법연화경(南無平等大慧一乗妙法蓮華経)」, 「계수묘법연화경(稽首妙法蓮華経)」, 「귀명묘법연화경(帰命妙法蓮華経)」(519쪽). 천태 자신이 묘법연화경에 귀명한다고 불렀다. 대성인은 이렇게 맺으셨다. 두 가지 까닭이 있다. 때가 이르지 않았고, 부촉받은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악 · 천태 · 전교 등은 안으로 비추어 보고, 말법의 도사에게 이것을 물려주어 넓히지 않으셨다(是の故に南岳・天台・伝教等は内に鑑みて末法の導師に之を譲りて弘通し給わざりしなり)」(519쪽).

「입정관초」는 천태의 관법 전체가 대소산에서 시작해 이 한마디의 묘법으로 모인다고 한다.

夫れ天台の観法を尋ぬれば大蘇道場に於て三昧開発せしより已来目を開いて妙法を思えば随縁真如なり目を閉じて妙法を思えば不変真如なり此の両種の真如は只一言の妙法に有り我妙法を唱うる時・万法玆に達し一代の修多羅一言に含す、所詮迹門を尋ぬれば迹広く本門を尋ぬれば本高し如かじ己心の妙法を観ぜんにはと思食されしなり

무릇 천태의 관법을 찾아보면, 대소도량에서 삼매가 열린 이래로, 눈을 뜨고 묘법을 생각하면 수연진여요 눈을 감고 묘법을 생각하면 불변진여다. 이 두 가지 진여는 오직 한마디의 묘법에 있다. 내가 묘법을 부를 때 만법이 여기에 이르고, 일대의 경이 한마디에 담긴다. 결국 적문을 찾으면 적은 넓고, 본문을 찾으면 본은 높다. 자기 마음의 묘법을 관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다.

「입정관초」, 533쪽

대소산의 깨달음(2부 7절)이 여기서 대성인의 말로 다시 선다. 천태의 모든 관법의 출발점은 대소도량의 삼매였고, 그 삼매가 향한 곳은 「한마디의 묘법」이었다. 교리 二 15절에서 본 대로, 대성인은 같은 어서에서 「삼관은 원인이고 묘법은 결과」라 하셨다. 일심삼관은 묘법에 이르는 수행이고, 묘법은 그 수행이 이르는 곳이다.

「삼대비법초」는 이 모든 것을 「제목의 세 시대」로 정리한다.

像法には南岳天台等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給いて自行の為にして広く他の為に説かず是れ理行の題目なり、末法に入て今日蓮が唱る所の題目は前代に異り自行化他に亘りて南無妙法蓮華経なり

상법에는 남악 · 천태 등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셨으나, 자행을 위한 것이었고 널리 남을 위해 설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행(理行)의 제목이다. 말법에 들어 지금 니치렌이 부르는 제목은 앞 시대와 달라, 자행과 화타에 걸친 남묘호렌게쿄다.

「삼대비법초」, 1022쪽
內證안으로 깨달은 것한마디의 묘법「南無平等大慧一乘妙法蓮華經」「稽首妙法蓮華經」「歸命妙法蓮華經」당체의초 519自行真実の内証
時至らざるが故付属に非ざるが故迹化なるが故입정관초 531
外用밖으로 펴 보인 것一心三觀一念三千止觀妙法の名字を替えて
末法の導師に之を譲りて당체의초 519
제목의 세 시대
정법自行ばかり상법理行の題目말법自行化他に亘りて
「입정관초」 531쪽 · 「당체의초」 519쪽 · 「삼대비법초」 1022쪽 · 제목의 세 시대 — 천친 편 22절 · 도표 18
도표 31 · 내증과 외용

3부 9절에서 본 천태의 말, 「나의 자행을 방해한다」와 4부 16절의 말, 「남을 위해 나를 덜었으니 다만 오품의 자리일 뿐」이 여기서 다시 들린다. 천태는 평생 자행과 화타 사이에서 화타를 택했다. 그러나 그가 남에게 편 것은 관법이었고, 그 관법의 끝에 있는 묘법 자체는 안에 두었다. 대성인이 「자행을 위한 것」이라 하신 것은 천태가 남을 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천태가 남을 위해 편 법이 모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형태, 곧 부르는 제목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천태의 한계가 아니라 상법이라는 때의 한계였다.

이에서 사로 — 「원기는 있었으나 원시가 없었다」

「관심본존초」 1273 · 「개목초」 1272

대성인이 천태의 법문 전체에 대해 내리신 판정은 「관심본존초」의 한 대목에 모여 있다. 지용의 보살이 왜 정법 · 상법에 나오지 않았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像法の中末に観音・薬王・南岳・天台等と示現し出現して迹門を以て面と為し本門を以て裏と為して百界千如・一念三千其の義を尽せり、但理具を論じて事行の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並びに本門の本尊未だ広く之を行ぜず所詮円機有つて円時無き故なり

상법의 가운데와 끝에 관음 · 약왕이 남악 · 천태 등으로 나타나 출현하여, 적문을 겉으로 삼고 본문을 속으로 삼아 백계천여 · 일념삼천의 뜻을 다 밝혔다. 다만 이구(理具)를 논했을 뿐, 사행(事行)의 남묘호렌게쿄 다섯 자와 본문의 본존은 아직 널리 행하지 않았다. 결국 원교의 근기(圓機)는 있었으나 원교의 때(圓時)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심본존초」, 253쪽

한 문장 안에 대성인의 천태관이 모두 들어 있다.

迹面本裏 · 其の義を尽せり · 但理具を論じて · 円機有つて円時無き관심본존초 253

근거 경문
이(理)의 일념삼천 — 천태방편품
사(事)의 일념삼천 — 대성인수량품 문저
성격
이(理)의 일념삼천 — 천태이성에 갖춘 가능성
사(事)의 일념삼천 — 대성인구원에 증득한 사실
수행
이(理)의 일념삼천 — 천태지관 관법
사(事)의 일념삼천 — 대성인수지 · 창제
대상
이(理)의 일념삼천 — 천태상근
사(事)의 일념삼천 — 대성인말법의 범부
나타난 형태
이(理)의 일념삼천 — 천태『마하지관』의 관법
사(事)의 일념삼천 — 대성인본존
자리 · 행 · 근기
이(理)의 일념삼천 — 천태관행즉 오품 · 지관 · 상근
사(事)의 일념삼천 — 대성인명자즉 · 수지 · 말법의 범부
표는 교리 五 6절 · 도표 9에 한 행을 더한 것 · 31절
도표 32 · 이의 일념삼천과 사의 일념삼천

「개목초」의 유명한 문장,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글 밑바닥에 잠겨 있다. 용수 · 천친은 알면서도 아직 건져 내지 않았고, 다만 우리 천태 지자만이 이것을 품었다(竜樹・天親・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但我が天台智者のみこれをいだけり)」(189쪽)는 같은 판정의 다른 표현이다. 천태는 문저의 일념삼천을 「품었다」. 그 품은 것을 건져 내어 모든 사람의 손에 쥐여 준 것이 말법의 일이었다. 교리 五 7절이 이 문장의 세 겹(권실 · 본적 · 종탈)을 자세히 읽었다.

「입정관초」는 천태가 교화한 사람들과 말법의 중생을 이렇게 견준다. 천태는 영산의 청중으로서 여래 출세의 본회를 폈지만,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묘법의 이름을 지관으로 바꾸었고, 「정직한 묘법을 지관이라고 설해 흐려 두었으므로 있는 그대로의 묘법이 아니어서 대권(帶權)의 법과 비슷하다(正直の妙法を止観と説きまぎらかす故に有のままの妙法ならざれば帯権の法に似たり)」. 그러므로 「천태가 넓힌 법으로 교화된 근기는 재세의 대권의 원기와 같고, 본화가 넓히는 법으로 교화되는 근기는 법화경 본문의 직기(直機)다(天台弘通の所化の機は在世帯権の円機の如し、本化弘通の所化の機は法華本門の直機なり)」(529–530쪽). 말법의 범부는 관법이라는 우회로 없이, 묘법에 곧바로 닿는 근기라는 것이다.

도둑맞은 보배와 밝은 거울

천태가 세운 일념삼천은 그 뒤 어떻게 되었는가.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이렇게 탄식하셨다.

墓ないかな天台の末学等華厳真言の元祖の盗人に一念三千の重宝を盗み取られて還つて彼等が門家と成りぬ章安大師兼ねて此の事を知つて歎いて言く「斯の言若し墜ちなば将来悲む可し」云云

덧없구나. 천태의 말학들은 화엄 · 진언의 원조라는 도둑에게 일념삼천의 귀한 보배를 도둑맞고, 도리어 그들의 문하가 되고 말았다. 장안대사는 이 일을 미리 알고 탄식하여 「이 말이 만약 땅에 떨어지면 장래가 슬프리라」 하였다.

「관심본존초」, 239쪽

화엄종의 징관과 진언종의 선무외는 천태의 일념삼천을 가져다 자기 종파의 교의로 삼았고(「개목초」 189 · 215–216, 천친 편 16절), 천태종의 후학들은 오히려 진언에 기울었다. 천태가 꺼낸 여의보주는 천태의 문하에서 지켜지지 못했다.

그러나 대성인은 천태의 『마하지관』을 끝까지 「밝은 거울」로 부르셨다. 자기 얼굴은 거울 없이 볼 수 없듯이, 「설령 여러 경 가운데 곳곳에 육도와 사성을 실었다 해도, 법화경과 천태대사가 지은 『마하지관』 등의 밝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기 몸에 갖춘 십계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을 알지 못한다(法華経並びに天台大師所述の摩訶止観等の明鏡を見ざれば自具の十界・百界千如・一念三千を知らざるなり)」(「관심본존초」, 240쪽). 교리 五 8절에서 보았듯, 「관심본존초」는 이 거울에서 시작해, 범부가 묘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곧 관심이라는 「수지즉관심」의 법문으로 나아간다. 천태의 밝은 거울이 있었기에, 대성인은 그 거울이 비추던 것을 범부가 직접 지닐 수 있는 형태로 세우실 수 있었다.

지해와 난 — 「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나」

「개목초」 1272 · 「여설수행초」 1273 · 「찬시초」 1275

사도의 눈 속에서 쓰신 「개목초」에서 대성인은 천태와 자신을 이렇게 견주셨다.

像法の中には天台一人法華経・一切経をよめり、南北これをあだみしかども陳隋・二代の聖主・眼前に是非を明めしかば敵ついに尽きぬ

상법 가운데는 천태 한 사람이 법화경과 일체경을 읽었다. 남북이 이를 원망했으나 진 · 수 두 대의 성주가 눈앞에서 옳고 그름을 밝혔으므로 적은 마침내 다했다.

「개목초」, 202쪽

されば日蓮が法華経の智解は天台・伝教には千万が一分も及ぶ事なけれども難を忍び慈悲のすぐれたる事は・をそれをも・いだきぬべし

그러므로 니치렌의 법화경에 대한 지해(智解)는 천태 · 전교에게 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난을 참고 자비가 뛰어난 것은 두려울 만하다.

같은 곳

지혜와 이해에서는 천태에게 미치지 못한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난을 견딘 것과 자비에서는 다르다. 천태가 겪은 적은 말로 원망하는 남북의 학승이었고, 그 옳고 그름은 황제가 가려 주었다. 말법의 대성인에게는 국주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유배와 죽음으로 답했다. 대성인은 이어서 법화경 권지품의 「자주자주 쫓겨나리라(數數見擯出)」를 드시고, 「이 두 글자는 천태 · 전교도 아직 읽지 않으셨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랴(此の二字は天台・伝教もいまだ・よみ給はず況や余人をや)」라고 하셨다(203쪽).

「여설수행초」는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我等が本師・釈迦如来は在世八年の間折伏し給ひ天台大師は三十余年・伝教大師は二十余年・今日蓮は二十余年の間権理を破す其の間の大難数を知らず、仏の九横の難に及ぶか及ばざるは知らず、恐らくは天台・伝教も法華経の故に日蓮が如く大難に値い給いし事なし、彼は只悪口・怨嫉計りなり

우리의 본사 석가여래는 재세 팔 년 동안 절복하셨고, 천태대사는 삼십여 년, 전교대사는 이십여 년, 지금 니치렌은 이십여 년 동안 권교의 이치를 깨뜨렸다. 그 사이의 대난은 셀 수 없다. 부처의 구횡의 난에 미치는지 미치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천태 · 전교도 법화경 때문에 니치렌처럼 대난을 만나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욕설과 원망과 질투뿐이었다.

「여설수행초」, 504쪽

「천태대사는 삼십여 년」. 568년 금릉에서 강의를 시작해 59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다. 대성인은 천태의 생애를 권교의 이치를 깨뜨린 삼십 년, 곧 절복의 삼십 년으로 읽으셨다. 그 삼십 년 동안 천태가 겪은 것은 「욕설과 원망과 질투」였다.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머리를 깨야 한다는 말까지 들었다(27절). 그러나 두 번의 유배, 다쓰노구치의 목의 자리, 이마의 상처, 제자들의 투옥과 영지의 몰수에는 미치지 않았다.

석존권교를 깨뜨린 기간재세 8년겪은 난구횡의 대난 — 석존 편 도표 15옳고 그름을 가린 이—
천태권교를 깨뜨린 기간30여 년겪은 난悪口・怨嫉彼は只悪口・怨嫉計りなり옳고 그름을 가린 이진 · 수의 성주
전교준비 중권교를 깨뜨린 기간20여 년겪은 난悪口・怨嫉옳고 그름을 가린 이간무 · 사가
니치렌권교를 깨뜨린 기간20여 년겪은 난두 번의 유배 · 다쓰노구치 · 이마의 상처 · 제자의 투옥옳고 그름을 가린 이가려지지 않음
「여설수행초」 504쪽 · 「개목초」 202–203쪽 · 32절
도표 33 · 세 스승과 난

이루지 못한 한 가지 — 원돈의 계단

대성인은 천태가 이루지 못한 일을 하나 더 드셨다. 「찬시초」는 천태가 불멸 후 천사백여 년 동안 어떤 논사도 넓히지 못한 「일대를 넘어선 원정 · 원혜(一代超過の円定・円慧)」를 중국에 넓히고 그 소리가 인도에까지 들렸다고 찬탄한 뒤, 이렇게 이어 가신다.

法華経の広宣流布にはにたれどもいまだ円頓の戒壇を立てられず小乗の威儀をもつて円の慧定に切りつけるはすこし便なきににたり、例せば日輪の蝕するがごとし月輪のかけたるに似たり、何にいわうや天台大師の御時は大集経の読誦多聞堅固の時にあひあたていまだ広宣流布の時にあらず

법화경의 광선유포와 비슷하지만 아직 원돈의 계단을 세우지 못했다. 소승의 위의로 원교의 지혜와 선정에 잇대어 붙인 것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비유하면 해가 이지러진 것 같고 달이 기운 것과 같다. 하물며 천태대사의 때는 대집경의 독송다문견고의 때에 해당하여 아직 광선유포의 때가 아니었다.

「찬시초」, 270–271쪽

계(戒) · 정(定) · 혜(慧)의 삼학 가운데 천태는 원교의 선정과 지혜를 세웠다. 그러나 계율은 여전히 소승의 계를 썼다. 법화경의 계, 원돈계(圓頓戒)의 계단을 세운 것은 전교였다. 「천태대사가 아직 공박하지 않은 소승의 별수계를 공박해 떨어뜨리고 …… 법화경의 원돈의 별수계를 에이잔에 세웠다」(「찬시초」, 264쪽).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내증은 같지만 법의 유포는 …… 마명 등보다 천태가 뛰어나고, 천태보다 전교가 넘어서셨다」고 하셨다(328쪽, 용수 편 28절). 정 · 혜의 천태, 계를 더한 전교, 그리고 본문의 본존 · 계단 · 제목의 삼대비법을 세운 말법의 대성인. 법의 유포는 때를 따라 깊어졌다. 다음 인물 전교 편준비 중이 그 둘째 걸음을 본다.

말법을 그리워한 대사 — 삼국사사

「찬시초」 1275 · 「현불미래기」 1273

천태는 자신의 때가 광선유포의 때가 아님을 알았는가. 대성인은 알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천태가 말법을 그리워했다고 하셨다. 「찬시초」는 천태 · 묘락 · 전교의 말을 차례로 든다. 천태는 『법화문구』에서 「뒤의 오백 년에 멀리 묘한 도에 적시리라(後の五百歳遠く妙道に沾わん)」라고 했고, 묘락은 「말법의 처음에 보이지 않는 이익이 없지 않다」고 했으며, 전교는 「정 · 상이 조금 지나고 말법이 매우 가까이 있다. 법화일승의 근기가 지금 바로 그때다」라고 했다(260쪽). 그리고 대성인은 이렇게 풀이하셨다.

而に天台・妙楽・伝教等は進んでは在世法華経の時にも・もれさせ給いぬ、退いては滅後・末法の時にも生れさせ給はず中間なる事をなげかせ給いて末法の始をこひさせ給う御筆なり

그런데 천태 · 묘락 · 전교 등은 나아가서는 재세의 법화경의 때에도 빠지셨고, 물러서서는 멸후 말법의 때에도 태어나지 못하셨다. 그 중간인 것을 탄식하시며 말법의 처음을 그리워하신 글이다.

「찬시초」, 260쪽

법화경이 널리 퍼지는 때는 두 번이다. 석존 재세의 마지막 팔 년, 그리고 말법의 처음 오백 년(석존 편 도표 21). 천태는 그 사이, 상법에 태어났다. 대성인은 석존의 탄생을 보고 자신이 그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을 슬퍼해 운 아시타 선인을 여기에 견주셨다(석존 편 1부 3절). 천태는 말법의 광선유포를 멀리서 내다보며 그리워한 사람이었다.

대성인은 「종종어진무어서」에서 법화경을 위해 몸을 버린 성인들, 설산동자 · 약왕보살 · 불경보살 · 사자존자를 드신 뒤, 그것이 어떤 때였는가를 묻고 천태의 말로 답하셨다. 「천태대사는 『때에 맞을 뿐』이라 쓰셨고, 장안대사는 『취하고 버림이 알맞아야 하며 한쪽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고 적으셨다(天台大師は「時に適うのみ」とかかれ章安大師は「取捨宜きを得て一向にすべからず」としるされ)」(910쪽). 「좌도어서」는 「석교 가운데 소승 · 대승, 권경 · 실경이 뒤섞여 밝은 구슬과 기와 조각, 소와 나귀의 젖을 가리지 못할 때에는 천태대사 · 전교대사 등처럼 대소 · 권실 · 현밀을 강성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하셨다(957쪽). 무엇을 어떻게 행할지는 때가 정한다. 이 「때」의 법문을 대성인은 천태에게서 배우셨고, 그 법문으로 천태 자신의 자리를 정하셨다.

그리고 대성인은 사도에서 쓰신 「현불미래기」의 끝에서, 천태와 전교를 잇는 자로 자신을 두셨다.

伝教大師云く「浅きは易く深きは難しとは釈迦の所判なり浅きを去つて深きに就くは丈夫の心なり、天台大師は釈迦に信順し法華宗を助けて震旦に敷揚し・叡山の一家は天台に相承し法華宗を助けて日本に弘通す」等云云、安州の日蓮は恐くは三師に相承し法華宗を助けて末法に流通す三に一を加えて三国四師と号く

전교대사가 이르기를 「얕은 것은 쉽고 깊은 것은 어렵다는 것은 석가의 판정이다. 얕은 것을 버리고 깊은 것에 나아가는 것은 장부의 마음이다. 천태대사는 석가를 믿고 따라 법화종을 도와 중국에 널리 폈고, 에이잔의 일가는 천태를 이어받아 법화종을 도와 일본에 넓혔다」 하였다. 아와 지방의 니치렌은 아마도 세 스승을 이어받아 법화종을 도와 말법에 유통한다. 셋에 하나를 더하여 삼국사사라 부른다.

「현불미래기」, 509쪽

浅きを去つて深きに就くは丈夫の心なり

인도석가재세 · 법화경을 설함
중국천태상법釈迦に信順し … 震旦に敷揚し
일본전교준비 중상법의 끝天台に相承し … 日本に弘通す
말법니치렌말법三師に相承し … 末法に流通す
「현불미래기」 509쪽 · 33절
도표 34 · 삼국사사

대성인이 본 천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중국 불교 오백 년의 혼란을 끝내고 법화경을 「있는 그대로」 읽은 오직 한 사람, 진의 궁정 끝자리에서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백여 명을 논파한 법화경의 행자, 일념삼천의 여의보주를 꺼내어 세 나라에 준 스승이다. 또 하나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때」 때문에 안에 두어야 했던 사람, 묘법을 자행의 진실로 부르면서 남에게는 관법의 형태로만 보일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말법의 처음을 그리워한 사람이다. 창가학회는 이 두 얼굴을 함께 본다. 천태를 높이는 것은 대성인의 불법을 이해하는 기초이고, 천태의 한계를 아는 것은 대성인의 불법이 왜 말법의 불법인지를 이해하는 열쇠다. 천태가 삼십 년에 걸쳐 밝힌 이치를, 지금 범부는 한 번의 제목으로 부른다. 대성인의 말씀대로, 그것은 지혜가 천태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때」의 덕이다. 그리고 그 때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천태가 그리워한 광선유포를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다.

세 층의 천태

이 페이지는 천태를 세 층으로 읽었다.

누구인가
역사의 천태538–597, 남조 진과 수에 걸쳐 산 선사 · 두 왕조의 스승
동아시아 불교의 천태천태종의 개조, 「동토의 작은 석가」, 고려 · 일본 천태종의 근원
대성인이 본 천태상법의 법화경 행자, 약왕의 화신, 삼국사사의 한 사람
무엇을 남겼는가
역사의 천태강의와 그 기록, 교단의 규칙, 국청사
동아시아 불교의 천태『법화현의』 · 『법화문구』 · 『마하지관』 · 묘락의 주석
대성인이 본 천태「현의 천 장 · 문구 천 장 · 지관 열 권」 · 밝은 거울
무엇을 설했는가
역사의 천태법화경 제일 · 교와 관의 통일
동아시아 불교의 천태오중현의 · 오시팔교 · 일심삼관 · 일념삼천 · 육즉
대성인이 본 천태일념삼천의 뜻을 다함 · 다만 이구를 논함 · 이행의 제목
법화경과의 관계
역사의 천태남삼북칠을 넘어 법화경을 첫째에 둠
동아시아 불교의 천태적문과 본문의 두 문으로 법화경을 체계화
대성인이 본 천태적문을 겉으로, 본문을 속으로 · 원기는 있었으나 원시가 없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의 천태난세 속에서 법을 구하고 전한 삶
동아시아 불교의 천태대성인 어서를 읽는 교학의 언어
대성인이 본 천태「때」를 아는 눈, 그리고 삼장사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하의 밝은 거울」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천태를 알수록, 나라가 무너진 소년이 국경의 산에서 스승을 만나고 두 왕조의 황제 앞에서 법화경을 설하기까지의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가 보인다. 동아시아의 천태를 알수록, 한 사람의 강의가 제자의 손을 거쳐 어떻게 천사백 년 동안 법화경을 읽는 언어가 되었는지가 보인다. 그리고 대성인이 본 천태를 알수록, 그 모든 것이 말법의 한 법을 향해 놓인 길이었음이 보인다. 천태가 대소산에서 읽은 것은 약왕품의 한 구절,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참된 법으로 여래를 공양한다고 한다」였다. 대성인은 그 「참된 법」이 무엇인지를 말법에 밝히셨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1. 538—형주 화용현에서 태어남양 대동 4년 · 진씨 · 아버지 진기조
  2. 544—보문품을 한 번 듣고 외움전승 · 일곱 살
  3. 548–552—후경의 난양 무제 549 유폐 중 사망
  4. 554—서위가 강릉을 함락양 원제 피살 · 부모 곧 세상을 떠남
  5. 555—상주 과원사 법서에게 출가18세
  6. 557 무렵—혜광 율사에게 구족계 · 대현산에서 법화삼부경20세 전후
  7. 558—혜사 「입서원문」말법 82년
  8. 560—광주 대소산에서 혜사를 만남 · 대소개오23세 · 「昔日靈山同聽法華」
  9. 568—혜사는 남악으로, 지의는 금릉으로31세 · 법희 등 27인
  10. 568–575—금릉 와관사 강의법화경 제목 · 대지도론 · 차제선문
  11. 5759월천태산에 들어감38세
  12. 576—불롱에 절을 세움 · 화정봉 두타 · 강마전승
  13. 577—진 선제가 「수선사」 사액혜사 남악에서 입적
  14. 583—관정이 제자가 됨관정 23세
  15. 585—진 후주의 부름으로 금릉에 돌아옴 · 태극전 강의48세
  16. 587—광택사에서 법화경 강의 → 『법화문구』50세 · 관정 기록
  17. 5891월수가 진을 멸함여산으로
  18. 59111월양주에서 진왕 양광에게 보살계 · 「지자」의 호54세
  19. 592—남악 참배 · 형주로
  20. 593여름옥천사 · 『법화현의』 강의56세 · 수 문제 사액
  21. 5944.26~옥천사 · 『마하지관』 강의57세 · 권5에 「此三千在一念心」
  22. 595—양주 · 『유마경현소』 찬술 · 가을 천태산으로친찬
  23. 59711.24석성사에서 입멸60세 · 「只是五品位耳」
  24. 598—진왕이 천태산에 절을 세움 · 수탑천태가 남긴 도면
  25. 605—「국청사」 사액양제
  26. 632—관정 입적국청사
  27. 754—감진이 삼대부를 일본에 전함
  28. 8세기—묘락 담연 · 『석첨』 · 『소기』 · 『홍결』「三十巻の末文」
  29. 804–806—최징 입당 · 일본 천태법화종→ 전교 편
  30. 961 무렵—고려 제관 『천태사교의』
  31. 1097—의천 고려 천태종 개립개경 국청사
  32. 1258—「일념삼천법문」 · 「일대성교대의」「御年五十七の夏四月」
  33. 12722월「개목초」「天台一人」 · 「千万が一分も及ぶ事なけれども」
  34. 12734.25「관심본존초」「円機有つて円時無き」
  35. 1273윤5.11「현불미래기」삼국사사
  36. 1273—「여설수행초」「天台大師は三十余年」
  37. 1274—「입정관초」내증과 외용 · 약왕 · 천태 · 전교
  38. 1275 무렵—「형제초」삼장사마 · 「一念三千の如意宝珠」
  39. 12756월「찬시초」독송다문견고 · 원돈 계단 · 말법을 그리워함
  40. 12767.21「보은초」공장대결 · 「仏教二度あらはれぬ」
  41. 12814월「삼대비법초」이행의 제목
참고 문헌
전기

관정 『수천태지자대사별전』 T50 no.2050 · 관정 편 『국청백록』 T46 no.1934 · 도선 『속고승전』 권17 「지의전」 T50 no.2060 · 지반 『불조통기』 권6 T49 no.2035 · 찬녕 『송고승전』 권18(현광) · 권27(함광) T50 no.2061

천태의 저작

『묘법연화경현의』 T33 no.1716 · 『묘법연화경문구』 T34 no.1718 · 『마하지관』 T46 no.1911 · 『석선바라밀차제법문』 T46 no.1916 · 『수습지관좌선법요』 T46 no.1915 · 『육묘법문』 T46 no.1917 · 『법화삼매참의』 T46 no.1941 · 『사교의』 T46 no.1929 · 『유마경현소』 T38 no.1777 · 『관음현의』 T34 no.1726 · 『관음의소』 T34 no.1728 · 『금광명현의』 T39 no.1783 · 『금광명문구』 T39 no.1785 · 『관무량수불경소』 T37 no.1750(귀속 논쟁)

관련 문헌

혜사 『남악사대선사입서원문』 T46 no.1933 · 『법화경안락행의』 T46 no.1926 · 법운 『법화의기』 T33 no.1715 · 담연 『법화현의석첨』 T33 no.1717 · 『법화문구기』 T34 no.1719 ·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 『지관대의』 T46 no.1914 · 제관 『천태사교의』 T46 no.1931 · 『묘법연화경』 T9 no.262 · 『대반열반경』 북본 T12 no.374 · 『무량의경』 T9 no.276

어서

창가학회판 『日蓮大聖人御書全集』(일본어판) 쪽수. 본문에서 인용한 어서: 「보은초」 · 「찬시초」 · 「개목초」 · 「관심본존초」 · 「입정관초」 · 「당체의초」 · 「일념삼천법문」 · 「일대성교대의」 · 「형제초」 · 「삼대비법초」 · 「현불미래기」 · 「여설수행초」 · 「선무외삼장초」 · 「중생심어서」 · 「법화초심성불초」 · 「교기시국초」 · 「창법화제목초」 · 「하산어소식」 · 「본존문답초」 · 「종종어진무어서」 · 「좌도어서」 · 『어의구전』

교학

창가교학연구실 어서 강의 · 어석 · 창가학회 교학부 『교학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