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존문답초는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을 본존으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단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한다. 대성인은 이 물음에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을지니라」라고 곧바로 답하시고, 이어 법화경 법사품 · 열반경 여래성품 · 천태대사의 『법화삼매참의』라는 세 경석을 근거로 드신다. 그런 다음 천태의 『마하지관』이 아미타불을, 불공삼장의 『관지의궤』가 석가 · 다보를 본존으로 삼지 않았느냐는 반론을 스스로 세워 하나하나 풀어 가신다. 다섯 편으로 나눈 이 해설에서 제1편은 「본존의 정의」라는 첫 갈래의 앞머리, 곧 본존문답초 전체의 주제가 선언되고 그 문증이 갖추어지는 자리다. 이 편이 묻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법화경의 제목」이 경전의 이름을 넘어 무엇을 가리키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대성인이 「법화경의 교주」가 아니라 「법화경의 행자」의 정의(正意)를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인가이다.
본존(本尊)은 글자 그대로 「근본으로 존숭하는 대상」이다. 대성인 당시 일본의 여러 종파는 저마다 불상이나 불화를 본존으로 모셨고, 사람들은 본존이라 하면 으레 부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한 통념 속에서 「법을 본존으로 삼는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불교의 근본 원리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법사품이 사리 대신 경권을 모시라고 한 것, 열반경이 제불의 스승은 법이라고 한 것, 천태대사가 도량에 법화경 한 부만 두라고 한 것은 모두 「사람보다 법」이라는 한 줄기의 원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대목은 법과 사람의 단순한 우열론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법화경의 제목」은 부문(附文)의 측면에서는 법화경 스물여덟 품의 제호이지만 원의(元意)의 측면에서는 문저의 사(事)의 일념삼천, 곧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이며, 그 법은 사람을 떠나 있지 않다. 니치준 상인과 니치칸 상인의 말을 통해 이 점을 짚는 것이 제1장의 과제이고, 제2장은 세 경석을 본문(本門)의 뜻으로 읽는 방법을, 제3장은 천태 사종삼매(四種三昧)와 불공의 의궤를 가려내면서 「법화경의 행자의 정의」라는 결론에 이르는 길을 따라간다.
이 편의 장
본문
本尊問答抄 弘安元年九月 五十七歳御作 与浄顕房日仲 問うて云く末代悪世の凡夫は何物を以て本尊と定むべきや、 答えて云く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
본존문답초 — 홍안 원년(1278) 9월, 57세 때 저술. 조켄보 닛추에게 주심 묻기를, 말대악세(末代悪世)의 범부는 무엇을 가지고 본존으로 정해야 하느뇨. 답하기를, 법화경의 제목을 가지고 본존으로 삼을지니라.
어구 풀이
- 末代悪世말대악세
- 석존 입멸 후 정법 · 상법을 지나 가르침만 남고 수행과 증득이 사라진 말법의 시대를 가리킨다. 오탁(五濁)이 짙어진 「악세」이며, 법화경 권지품 · 안락행품 등이 부처 입멸 후의 악세에 이 경을 펴는 일을 설한 바로 그 시대다. 대성인은 이 시대의 범부를 위한 본존을 묻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셨다.
- 凡夫범부
- 번뇌를 끊지 못하고 생사에 윤회하는 보통 사람. 이 어서의 물음이 「성인」이나 「보살」이 아니라 「말대악세의 범부」를 주어로 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본존은 수행을 완성한 사람의 관상 대상이 아니라, 악세를 사는 범부가 성불하기 위해 의지할 근본이라는 뜻이 물음 자체에 담겨 있다.
- 本尊본존
- 근본으로 존숭하는 대상. 제4장에서 대성인은 「本尊とは勝れたるを用うべし」라고 그 기준을 밝히시고, 제5장에서 「能生を以て本尊とするなり」라고 그 근거를 드신다. 제1장은 그 결론을 먼저 내세운 표문이다.
- 法華経の題目법화경의 제목
- 부문(附文)의 측면에서는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의 제호다. 원의(元意)의 측면에서는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저에 감추어진 사(事)의 일념삼천의 남묘호렌게쿄, 곧 삼대비법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 장의 해설 전체가 이 이중의 뜻을 푸는 데 바쳐진다.
- 標文표문
- 한 편의 글을 표(標) · 석(釈) · 결(結)의 세 단으로 나눌 때, 전체의 주제를 먼저 내세우는 대목. 니치오 상인은 『변혹관심초』에서 이 장을 본존문답초의 표문으로 보았다. 표문은 간결하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뜻을 뒤의 석(釈)과 결(結)을 통해 넓혀 읽어야 한다.
- 権実相対권실상대
- 법화경 이전의 방편교(권교)와 법화경(실교)을 견주어 법화경이 뛰어남을 밝히는 교판의 한 단계. 니치렌 대성인의 오중상대(내외 · 대소승 · 권실 · 본적 · 종탈) 가운데 셋째 단계다. 니치준 상인은 이 어서가 겉으로는 권실상대의 차원에서 설해진 법문이라고 보았다.
- 無作三身무작삼신
- 조작을 더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법신 · 보신 · 응신. 수행으로 새로 얻은 삼신이 아니라 본래 갖추어진 삼신이다. 니치준 상인이 말한 「무작삼신의 부처」는 사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를 가리킨다. 자세한 개념은 핵심 개념 「삼신」 페이지가 다룬다.
- 事の一念三千사의 일념삼천
- 천태대사가 『마하지관』에서 이론(理)으로 밝힌 일념삼천에 대하여, 대성인이 남묘호렌게쿄로 구체적인 사상(事相)에 나타내신 일념삼천. 니치준 상인은 「사의 일념삼천은 사상에서 성립하므로 반드시 사람의 부처가 계신다」고 하여, 사의 일념삼천이 곧 인법일개임을 밝혔다.
- 人法一箇인법일개
- 사람(人)의 본존과 법(法)의 본존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 사람에 즉해서 법이 있고 법에 즉해서 사람이 있다. 이 장의 「법화경의 제목」은 법의 측면에서 본존을 밝혔지만 그 원의는 사람을 떠나지 않은 법, 곧 인법일개의 본존이다.
- 本因妙の教主본인묘의 교주
- 오백진점겁에 성불한 결과의 부처(본과묘의 교주 석존)에 대하여, 그 성불의 근본 원인인 묘법을 스스로 수행한 구원원초의 부처를 가리킨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니치칸 상인의 해석을 따라 말법의 본인묘 교주를 니치렌 대성인으로 받든다.
- 附文・元意부문 · 원의
- 니치칸 상인이 어서를 풀 때 쓰는 두 겹의 읽기. 「부문」은 글자에 붙은 표면의 뜻, 「원의」는 글을 쓰신 본래의 깊은 뜻이다. 「법화경제목초」의 제호를 풀면서 이 두 뜻을 나란히 제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 信行具足신행구족
- 믿음(信)과 수행(行)을 함께 갖춤. 니치칸 상인은 「문저비침초」에서 본문의 제목은 반드시 신과 행을 갖춘다고 하여, 본존을 믿는 마음 없이 제목만 부르는 것을 본문의 제목이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一大秘法일대비법
- 삼대비법(본문의 본존 · 본문의 계단 · 본문의 제목)을 하나로 합한 것. 니치칸 상인은 「의의판문초」에서 삼대비법을 합하면 본문의 본존 하나가 된다고 하여, 본존이 삼대비법의 근본임을 밝혔다.
한 물음과 한 대답에 담긴 주제
본존문답초의 첫머리는 놀랄 만큼 짧다. 묻는 이는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을 본존으로 정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답하는 이는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고 한 줄로 답한다. 이 한 줄은 본존문답초 전체의 표문, 곧 이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 갈 주제를 내건 대목이다. 뒤에 이어지는 열세 단의 문답은 모두 「왜 말대악세의 범부는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아야 하는가」를 여러 각도에서 밝히는 석(釈)이요, 마지막 단의 「미증유의 대만다라」는 그 결(結)이다.
이 물음이 나온 배경에는 대고중 조켄보의 의문이 있었다. 조켄보는 2년 전 「보은초」를 받았고 같은 무렵 대성인으로부터 본존을 수여받았다. 그 「보은초」의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으라」는 말씀과, 받은 본존의 한가운데 남묘호렌게쿄가 쓰여 있다는 사실 사이에서 의문이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배경은 본존문답초를 펼치며 (서강)가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이 배경을 염두에 두면 제1장의 답이 왜 「사람」이 아니라 「법」의 측면에서 먼저 제시되었는지가 분명해진다. 불상을 본존으로 여기던 통념을 넘어서려면, 무엇보다 먼저 부처를 부처이게 한 법을 본존의 자리에 세워야 했던 것이다.
니치준 상인이 본 이 어서의 자리
이 표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첫 길잡이가 되는 것은 니치준 상인(日淳上人)의 말이다. 니치준 상인은 본존문답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本尊問答抄は猶末だ権実相対の上の御法門でありますが、元意は法本尊を御示し遊ばされたのであります。従ってこの御書によって御本尊の拝し方を会得し奉ることができます。乃ち無作三身の仏を確立して後に人の仏を拝して確立し奉る此れが順序であります
본존문답초는 아직 권실상대 위의 법문이지만, 그 원의는 법본존을 보이신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어서로써 본존을 받드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곧 무작삼신의 부처를 먼저 확립한 뒤에 사람의 부처를 받들어 확립하는 것, 이것이 순서다.
이 말에는 세 가지가 겹쳐 있다. 첫째, 본존문답초의 논의는 겉으로는 법화경과 이전 경전을 견주는 권실상대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 실제로 제2장 이하의 문증은 법화경 적문의 법사품과 열반경, 천태의 저술이며, 제4장 이후의 논쟁 상대도 진언 · 정토 등 권교에 의지한 종파들이다. 둘째, 그럼에도 이 어서의 원의는 법본존을 보이는 데 있다. 셋째, 본존을 받드는 순서는 먼저 법을 세우고 그 다음에 그 법을 갖춘 사람을 받드는 것이다.
여기서 「무작삼신의 부처」는 사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를 가리킨다. 니치준 상인의 뜻을 정리하면, 말법의 법본존으로 제시된 「법화경의 제목」은 일념삼천의 법으로서 받들어야 하며, 그 일념삼천에는 적문 · 본문 · 문저의 세 단계 구분이 있다. 이 법의 구분을 기준으로 교주로서의 사람을 찾으면, 말법에 인연 있는 주 · 사 · 친 삼덕의 본불이 누구인지가 저절로 드러난다. 적문의 일념삼천이라면 그 교주는 시성정각의 석존이요, 본문 문상의 일념삼천이라면 오백진점겁에 성불한 본과묘의 석존이다. 그러나 대성인이 세우신 말법의 본존은 구원원초 본인하종의 사의 일념삼천이므로, 그 교주는 본과묘의 석존이 아니라 본인묘의 교주, 곧 니치렌 대성인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에 따라 대성인을 말법에 인연 있는 주사친 삼덕을 갖춘 인본존으로 받든다.
사람을 떠난 법은 없다 — 「제법실상초」의 체와 용
니치준 상인은 「제법실상초」의 다음 대목을 인용하면서 같은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짚었다.
是れ即本門寿量品の事の一念三千の法門なるが故なり、されば釈迦・多宝の二仏と云うも用の仏なり、妙法蓮華経こそ本仏にては御座候へ、経に云く「如来秘密神通之力」是なり、如来秘密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なり、神通之力は用の三身にして迹仏ぞかし、凡夫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ぞかし、仏は用の三身にして迹仏なり
이는 곧 본문 수량품의 사의 일념삼천의 법문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라 해도 용(用)의 부처이며,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 경에 이르되 「여래비밀신통지력」이 이것이니라. 여래비밀은 체(体)의 삼신으로서 본불이요, 신통지력은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이니라. 범부는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이요, 부처는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이니라.
이 어문은 묘법연화경을 「본불」로, 석가 · 다보를 「용의 부처」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얼핏 법만이 근본이고 사람은 부차적인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실제로 이 어문을 근거로 사람의 본존을 떠나 법의 본존만을 세우고 그것을 대성인의 정의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니치준 상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ここに寿量品の指標し玉ふ御本尊が法の御本尊であられるが故に人御本尊を離れて法御本尊を立て、大聖人の御正意となす者がありますが、これは一往の段階に於て仰せなされる所以を知らないからであります。人を離れた法はないのでありまして若しそれを立てれば理の法相に他ならぬのであります。それはまた天台の理の一念三千であります。事の一念三千は事相に於て成り立つのであります。故に人の仏が必ずあらせられるのであります
수량품이 가리키는 본존이 법의 본존이라 하여 사람의 본존을 떠나 법의 본존을 세우고 이를 대성인의 정의로 삼는 자가 있으나, 이는 일왕(一往)의 단계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떠난 법은 없으며, 만일 그런 것을 세운다면 이치의 법상(法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천태의 이의 일념삼천이다. 사의 일념삼천은 사상(事相)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부처가 반드시 계신다.
요점은 「이(理)」와 「사(事)」의 구별이다. 법을 사람에게서 떼어 내 추상적인 원리로만 세우면, 그것은 아무리 높은 법이라도 이론상의 법상, 곧 천태가 『마하지관』에서 관념으로 밝힌 이의 일념삼천에 머문다. 대성인의 일념삼천이 「사」의 일념삼천인 까닭은 그것이 구체적인 사상(事相) 위에, 곧 그 법을 몸으로 갖추고 나타내신 사람 위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 니치준 상인의 말은 본존문답초의 「법화경의 제목」에도 그대로 들어맞으며, 앞의 말과 아울러 이 장의 요점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근거: 니치준 상인의 두 말, 「제법실상초」(1358쪽)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본존문답초의 「법화경의 제목」은 법본존의 선언이되, 그 원의가 사람을 떠나지 않은 법, 곧 인법일개의 본존에 있다는 점이 제1장의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제목이 근본」이라는 견해의 뒤바뀜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는 말씀은 대성인 입멸 뒤 여러 문류에서 정반대의 방향으로 읽히기도 했다. 일련종의 여러 문류는 이 말씀을 근거로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제목이 근본이며, 그 제목을 부르는 신심의 대상으로서 본존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제목이라는 수행이 먼저 있고 본존은 그 수행을 돕는 부수적 대상이라는 견해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는 본존과 제목의 관계를 거꾸로 파악한 본말전도다. 이렇게 보면 본존은 무엇이어도 상관없는 것이 되고, 결국 본존을 가볍게 여겨 근본의 본존을 두고 헤매는 원인이 된다. 실제로 대성인 입멸 후 많은 문류가 석가 불상을 세우거나 본존을 이것저것으로 바꾸었던 역사는 서강에서 살핀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의 오노승 기록이 잘 보여 준다. 본존과 제목의 관계를 잘못 생각해서는 본존문답초의 원의를 결코 받들 수 없다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같은 이름, 다른 뜻 — 니치칸 상인의 부문과 원의
그러면 「법화경의 제목」은 무엇인가. 법화경의 제목은 법화경의 제호와 이름은 같아도 뜻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니치칸 상인이 「법화경제목초」의 제호를 풀면서 보인 부문 · 원의의 두 뜻이 그 좋은 예다.
부문의 뜻에서 「법화경제목」이라는 제호는 다음과 같이 풀린다.
『法華』の二字は体を挙げ、『題目』の二字は名を挙ぐ。これ即ち名は必ず体ある故なり。謂く、妙法蓮華経とは即ちこれ法華経一部八巻二十八品の題目なり
「법화」 두 글자는 체를 들고 「제목」 두 글자는 이름을 든다. 이름에는 반드시 체가 있기 때문이다. 곧 묘법연화경이란 법화경 한 부 여덟 권 스물여덟 품의 제목이다.
곧 묘법연화경의 제목을 법화경이라는 경전의 제호로 보는 것은 부문의 측면에서 받드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원의의 측면에서 제목은 삼대비법 그 자체다.
『法華』の二字は所信の体、即ちこれ法華経の本門寿量文底下種の本尊なり。『題目』の二字は能唱の行、即ちこれ本門寿量文底下種の題目なり。所住の所は即ちこれ久遠元初の本門の戒壇なり
「법화」 두 글자는 믿는 바의 체이니 곧 법화경 본문 수량 문저 하종의 본존이다. 「제목」 두 글자는 부르는 주체의 수행이니 곧 본문 수량 문저 하종의 제목이다. 머무는 곳은 곧 구원원초의 본문의 계단이다.
- 「법화」 = 믿는 바의 체본문 수량 문저 하종의 본존
- 「제목」 = 부르는 수행본문 수량 문저 하종의 제목
- 머무는 곳구원원초의 본문의 계단
근거: 니치칸 상인의 「법화경제목초」 문단
같은 「법화경의 제목」이라는 말이 부문에서는 경전의 이름이고 원의에서는 본존 · 제목 · 계단의 삼대비법이 된다. 본존문답초의 「법화경의 제목」도 이 원의의 측면에서 받들지 않으면 이 어서 전체의 취지를 그르치게 된다. 「법화경의 제목」이 경의 이름 · 뜻 · 마음 가운데 「마음」에 해당한다는 대성인의 여러 어문과 니치칸 상인의 「문 · 의 · 의(文 · 義 · 意)」 구분은 서강의 「문 · 의 · 의 — 「문저비침초」의 풀이」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이 이중의 읽기가 이 장의 열쇠라는 점만 짚어 둔다.
신행구족의 제목 — 「문저비침초」와 일대비법
본존과 제목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결정적인 근거는 니치칸 상인의 「문저비침초(文底秘沈抄)」다.
夫れ本門の題目とは即ち是れ妙法五字の修行なり。…修行に本有り、所謂信心なり
무릇 본문의 제목이란 곧 묘법 다섯 글자의 수행이다. 수행에는 근본이 있으니 이른바 신심이다.
니치칸 상인은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本門の題目には必ず信行を具す。所謂但本門の本尊を信じ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を本門の題目と名づくるなり、仮令信心有りと雖も、若し修行無くんば末だ可ならず。…仮令修行有りと雖も、若し信心無くんば不可なり。故に宗祖云く『信無くして此の経を行ぜば、手無くして宝山に入るが如し』云云。故に知りぬ。信行具足の方に本門の題目と名づくるなり、何ぞ但唱題と云わんや
본문의 제목에는 반드시 신과 행을 갖춘다. 이른바 오로지 본문의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본문의 제목이라 이름한다. 설령 신심이 있다 해도 수행이 없으면 아직 옳지 않다. 설령 수행이 있다 해도 신심이 없으면 옳지 않다. 그러므로 종조께서 「믿음 없이 이 경을 행하면 손 없이 보배산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알라, 신과 행을 갖춘 것을 비로소 본문의 제목이라 이름하니, 어찌 단지 창제라고만 하겠는가.
본문의 제목은 단순한 창제가 아니라 신행구족의 제목이며, 그 「신」에는 반드시 믿는 대상, 곧 본문의 본존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존을 믿는 데서 창제의 수행이 시작되며, 본존이 근본이고 제목은 그 위에 선다. 앞에서 본 「제목이 근본이고 본존은 그 대상」이라는 견해와 정확히 반대다.
니치칸 상인은 이 관계를 「의의판문초(依義判文抄)」에서 삼대비법의 열고 합함(開合)으로 정리했다.
三大秘法を合する則は但一大秘法の本門の本尊と成るなり。故に本門戒壇の本尊を亦三大秘法惣在の本尊と名づくるなり
삼대비법을 합하면 오직 일대비법인 본문의 본존이 된다. 그러므로 본문 계단의 본존을 또한 삼대비법 총재(惣在)의 본존이라 이름한다.
- 제목(수행)이 근본
- 본존은 창제의 대상
- 본존 경시 · 근본의 본존에 미혹
- 본문의 제목 = 신행구족본문의 제목에는 반드시 신과 행을 갖춘다「本門の題目には必ず信行を具す」
- 믿는 대상인 본문의 본존이 근본
- 삼대비법을 합하면 일대비법인 본문의 본존삼대비법을 합하면 오직 일대비법인 본문의 본존이 된다「三大秘法を合する則は但一大秘法の本門の本尊と成るなり」
근거: 「문저비침초」 · 「의의판문초」
본존을 일대비법이라 이름하고 거기에 삼대비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제1장의 표문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가 「제목을 본존으로」라는 짧은 말 속에 본존 · 제목 · 계단을 아우르는 삼대비법 총재의 본존을 담고 있다고 읽을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대성인이 이 표문을 법의 측면에서 내세우신 것은 사람의 본존을 부정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불상을 본존으로 여기던 시대에 부처를 부처이게 한 근원의 법을 먼저 분명히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법이 누구에게 즉해 있는가는 본존문답초의 뒷부분, 곧 대성인 자신의 사적과 「미증유의 대만다라」의 선언을 통해 서서히 밝혀진다.
본문
問うて云く 何れの経文何れの人師の釈にか出でたるや、 答う法華経の第四法師品に云く「薬王在在処処に若しは説き若しは読み若しは誦し若しは書き若しは経巻所住の処には皆応に七宝の塔を起てて極めて高広厳飾なら令むべし復舎利を安んずることを須いじ所以は何ん此の中には已に如来の全身有す」等云云、
묻기를, 그것은 어느 경문, 어느 인사(人師)의 석에 나와 있느뇨. 답하기를, 법화경 제4권 법사품(法師品)에 이르되 「약왕이여, 어느 곳에서든 혹은 설하고 혹은 읽고 혹은 외우고 혹은 쓰고, 혹은 경권(経巻)이 있는 곳에는 모두 마땅히 칠보의 탑을 세워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지니라. 다시 사리를 안치할 필요가 없느니라. 까닭이 무엇인가.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계시느니라」 등 운운.
涅槃経の第四如来性品に云く「復次に迦葉諸仏の師とする所は所謂法なり是の故に如来恭敬供養す法常なるを以ての故に諸仏も亦常なり」云云、 天台大師の法華三昧に云く「道場の中に於て好き高座を敷き法華経一部を安置し亦必ずしも形像舎利並びに余の経典を安くべからず唯法華経一部を置け」等云云。
열반경 제4권 여래성품(如来性品)에 이르되 「또 다음에 가섭이여, 제불이 스승으로 삼는 바는 이른바 법이니라. 이런 까닭에 여래는 법을 공경하고 공양하느니라. 법이 상주하므로 제불도 또한 상주하느니라」 운운. 천태대사의 『법화삼매』에 이르되 「도량 가운데 좋은 고좌(高座)를 펴고 법화경 한 부를 안치하며, 또한 반드시 형상(形像)과 사리와 다른 경전을 안치하지 말고 오직 법화경 한 부만을 둘지니라」 등 운운.
어구 풀이
- 人師の釈인사의 석
- 부처의 경(経), 보살의 논(論)에 대하여 후대의 스승이 경론을 풀이한 글. 이 장에서는 천태대사의 『법화삼매참의』가 이에 해당한다. 묻는 이는 「경」과 「석」 두 가지 근거를 모두 요구했고, 대성인은 경 둘과 석 하나로 답하셨다.
- 法師品법사품
- 『묘법연화경』 제10품, 제4권에 들어 있다. 부처 입멸 후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는 오종법사의 공덕과,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고 앞으로 설할(已今当)」 모든 경 가운데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는 것을 설한다. 제6장에서 대성인이 드시는 「法華最為第一」의 근거도 이 품이다.
- 薬王약왕
- 약왕보살. 법사품은 부처가 약왕보살을 상대로 팔만의 대사들에게 설하는 형식을 취한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은 이 보살의 과거 고행을 설하며, 천태대사가 그 한 구절에서 법화삼매를 깨달았다고 전하므로 천태를 약왕보살의 후신으로 일컫게 되었다.
- 経巻所住の処경권소주의 처
- 경권이 머물러 있는 곳. 법사품은 이 경이 설해지거나 읽히거나 쓰이는 곳, 그리고 경권이 놓여 있는 곳에 탑을 세워 공양하라고 설한다. 니치칸 상인은 「의의판문초」에서 이 「경권」을 본문의 본존, 「소주의 처에 탑을 세움」을 본문의 계단에 배당했다.
- 七宝の塔칠보의 탑
- 금 · 은 · 유리 등 일곱 가지 보배로 지은 탑. 본래 탑(스투파)은 부처의 유골(사리)을 모시는 건축이었으나, 법사품은 사리가 아닌 경권을 모신 곳에 탑을 세우라고 함으로써 공양의 중심을 부처의 몸에서 법으로 옮겼다.
- 舎利사리
- 범어 샤리라(śarīra)의 음역으로 본래 「몸」 · 「유골」을 뜻한다. 천태대사는 『법화문구』에서 『대지도론』을 인용해, 부서진 뼈는 생신(生身)의 사리, 경권은 법신(法身)의 사리라고 구분했다. 다시 생신 · 법신에 각각 전신과 쇄신의 구별이 있다.
- 如来の全身여래의 전신
- 법사품의 결구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계시느니라」. 법화경에는 석존의 깨달음이 남김없이 설해져 있으므로 거기에 석존의 생명 전체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니치칸 상인은 「문저비침초」에서 이 문을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인법체일을 밝힌 명문으로 보았다.
- 涅槃経열반경
- 『대반열반경』. 석존이 입멸하기 직전 하루 낮 하룻밤에 설했다고 하는 경으로, 천태 교판에서는 법화경에서 빠진 이들을 거두어들이는 군습교(捃拾教)로 자리매김된다. 담무참이 번역한 40권본을 북본, 이를 다시 정리한 36권본을 남본이라 한다. 이 장의 인용은 북본 제4권 여래성품에 나온다.
- 如来性品여래성품
- 열반경의 품 이름. 「여래성」은 여래의 본성, 곧 여래가 여래인 까닭을 가리킨다. 이 품은 여래의 본성이 법에 있으며 그것이 또한 일체중생의 본성이라고 설한다.
- 迦葉가섭
- 열반경에서 부처에게 묻는 가섭보살. 법화경 등의 마하가섭(가섭 존자)과는 다른 인물이다. 열반경의 대부분은 이 가섭보살의 물음에 부처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 法常なるを以ての故に법이 상주하므로
- 법이 상주하기 때문에 그 법을 스승으로 삼아 깨달은 제불도 상주한다는 뜻. 장안대사는 여기의 「상(常)」을 열반의 네 덕인 상락아정(常楽我浄)을 줄여 말한 것으로 풀었다.
- 法華三昧법화삼매
- 천태대사의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를 가리킨다. 법화경과 『관보현보살행법경』에 의지해 도량을 장엄하고 21일 동안 예배 · 참회 · 송경 · 좌선을 닦는 행법을 정한 책이다. 『마하지관』의 사종삼매 가운데 반행반좌삼매의 하나인 법화삼매의 구체적인 행의(行儀)를 담고 있다.
- 高座고좌
- 도량 안에 높게 마련한 자리. 『법화삼매참의』는 이 자리에 법화경 한 부를 안치하도록 하였다.
- 形像형상
- 불상과 불화 등 부처의 모습을 본뜬 것. 『법화삼매참의』는 법화삼매의 도량에 형상과 사리, 다른 경전을 두지 말고 오직 법화경 한 부만을 두라고 하였다.
- 随宜転用수의전용
- 상대와 경우에 맞추어 경문을 본래 자리에서 옮겨 다른 뜻의 증거로 쓰는 것. 니치오 상인은 이 장의 경석 인용을 「문(文)은 적문에 있고 뜻은 본문에 있어, 적문의 문장을 빌려 본문의 실상을 증명한」 수의전용이라고 보았다.
「문은 적문, 뜻은 본문」 — 세 경석을 읽는 방법
제1장의 표문을 받아 제2장에서 석(釈)이 시작된다. 묻는 이는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는 것이 어느 경문, 어느 인사의 석에 나와 있는가」라고 근거를 요구한다. 대성인은 이에 법화경 법사품, 열반경 여래성품, 천태대사의 『법화삼매참의』라는 세 경석을 드신다. 셋은 모두 법과 사람의 관계를 보이는 문증이며, 하나같이 「사람보다 법을 중심에 두라」는 원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세 문증은 문자만 놓고 보면 법화경 적문의 경문이거나 법화경 밖의 경석이다. 법사품은 적문의 품이고, 열반경은 법화경 뒤에 설해진 경이며, 『법화삼매참의』는 상법 시대 천태의 행법서다. 그렇다면 이 문증들로 어떻게 말법의 본존을 증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실마리가 되는 것이 니치오 상인(日応上人)의 『변혹관심초(弁惑観心抄)』다. 이 책은 요보사 쪽에서 본존문답초의 이 대목을 권실상대의 법문일 뿐 법본존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해 반론한 것으로, 그 가운데 이 장의 경석 인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釈文亦所対の人に応じ且つ所問の辺に従いて法師品等を引証し玉ふといへども文在迹門義在本門にして迹の文章を借り本の実相を証す所謂随宣転用之れなり
석문도 상대하는 사람에 응하고 또 묻는 쪽에 따라 법사품 등을 인증하셨으나, 문은 적문에 있고 뜻은 본문에 있어 적문의 문장을 빌려 본문의 실상을 증명하신 것이니, 이른바 수의전용(随宜転用)이 이것이다.
곧 대성인은 본문의 뜻으로 이 경석들을 판별하시고 그것을 문증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문의 뜻」이 본문 수량품의 남묘호렌게쿄를 가리킨다는 점도 니치오 상인은 같은 책에서 분명히 한다.
釈文所引の文は権実相対の依馮といえども已に宗祖の本懐たる本尊の実義を明示せられたる
석문에 인용된 문은 권실상대의 의빙(依憑)이라 하더라도 이미 종조의 본회인 본존의 참뜻을 밝히신 것이다.
이는 제1장에서 본 니치준 상인의 「권실상대 위의 법문이지만 원의는 법본존」이라는 말과 같은 구조다. 겉의 문은 권실상대의 틀을 빌렸지만 속의 뜻은 본문, 나아가 문저의 본존을 가리킨다. 세 경석을 하나씩 읽을 때에도 이 이중의 눈이 필요하다.
사리 대신 경권을 — 법사품의 뜻
첫째 문증인 법사품의 취지는 부처의 사리를 쓰지 말고 경권을 안치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의 사리는 「사람」을, 경권은 「법」을 가리킨다. 이 경문은 부처가 입멸한 뒤 무엇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를 설한 대목이다. 석존이 입멸한 뒤 인도에서는 그 유골을 여덟 나라가 나누어 탑을 세우고 공양했으며, 탑과 사리의 공양은 불교 신앙의 큰 중심이 되어 있었다. 법사품은 그러한 흐름에 대해 경권이 있는 곳에 탑을 세우고 장엄하라고 하면서 「다시 사리를 안치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사리가 필요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권을 본존으로 삼아야 함을 보인 것이다.
이 「경권」은 물론 법화경이지만, 이것은 광(広) · 약(略) · 요(要)의 세 측면에서 받들어야 한다. 「광」은 법화경 한 부 여덟 권 스물여덟 품, 「약」은 방편품과 수량품의 두 품, 「요」는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다. 대성인이 「법화취요초」에서 광과 약을 버리고 요를 취한다고 말씀하신 그 「요」가 바로 이 장에서 경권이라는 말로 가리켜진 법의 핵심이다.
- 광(広)법화경 한 부 여덟 권 스물여덟 품
- 약(略)방편품 · 수량품의 두 품
- 요(要)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
법사품의 「경권」은 이 세 측면에서 받든다
생신의 사리와 법신의 사리
「다시 사리를 안치할 필요가 없다」는 구절의 「사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천태대사의 『법화문구』 제8권 상의 해석에서 알 수 있다. 천태는 『대지도론』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풀었다.
『不復安舎利』とは、釈論に云く、『砕骨は是れ生身の舎利、経巻は是れ法身の舎利なり』と。此の経は是れ法身の舎利なり。更に生身の舎利を安ずるを須たず。生法二身に各々全砕有り
「다시 사리를 안치하지 않는다」란, 『석론』(대지도론)에 이르기를 「부서진 뼈는 생신의 사리요 경권은 법신의 사리다」라고 하였다. 이 경은 법신의 사리다. 그러므로 다시 생신의 사리를 안치할 필요가 없다. 생신과 법신 두 몸에 각각 전신과 쇄신이 있다.
곧 법사품의 「사리」는 생신의 사리, 곧 부처의 몸에서 나온 유골이다. 이에 대해 수량품 자아게의 다음 구절에 나오는 「사리」는 법신의 사리를 뜻하므로, 둘은 구별해야 한다.
衆我が滅度を見て、広く舎利を供養し、咸く皆恋慕を懐いて、渇仰の心を生ず
중생은 내가 멸도하는 것을 보고 널리 사리를 공양하며, 모두 다 연모하는 마음을 품고 우러러 그리는 마음을 일으키느니라.
또 생신 · 법신에는 각각 전신의 사리와 쇄신의 사리의 구별이 있다. 유해를 그대로 묻으면 전신의 사리, 화장하여 유골로 나누면 쇄신의 사리라 부른다. 묘락대사는 『법화문구기』 제8권의 3에서 「생신의 전 · 쇄는 석가와 다보와 같다(生身の全砕は釈迦と多宝との如し)」고 하였다. 석존의 사리는 유골로 나뉘었으므로 쇄신의 사리이고, 다보여래는 몸 그대로 입정했으므로 전신의 사리라는 것이다. 다보여래가 전신의 사리라는 점은 견보탑품에서 석존이 땅에서 솟아오른 보탑을 두고 「이 보탑 가운데에 여래의 전신이 계신다」고 말하고, 다보여래 스스로 그 탑을 「나의 탑묘」라고 부르는 데서 미루어 알 수 있다.
법신의 사리에도 전 · 쇄의 구별이 있다. 법화경은 전신의 사리에 해당하고, 다른 경들은 쇄신의 사리에 해당한다. 다른 경들은 여래의 깨달음을 부분적으로 표현한 데 그치지만 법화경은 그 궁극의 전체를 설했기 때문이다. 법사품이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계신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법화경에는 석존의 깨달음이 남김없이 담겨 있으므로 거기에 석존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여래의 전신이 계신다」고 표현한 것이다. 법화경의 경권에야말로 석존의 생명 전체가 있으므로 따로 생신의 사리를 안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경문의 논리다.

여래의 전신이 깃든 경 — 니치칸 상인의 삼대비법 배당
니치칸 상인은 이 법사품의 경문을 문저의 눈으로 읽어 삼대비법에 배당하였다. 「의의판문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応に知るべし、若しは説き、若しは読み等は、本門の題目なり、若しは経巻とは即ち本門の本尊なり、所住の処皆応に塔を起つべしとは本門の戒壇なり
마땅히 알라. 「혹은 설하고 혹은 읽고」 등은 본문의 제목이요, 「혹은 경권」이란 곧 본문의 본존이요, 「머무는 곳에 모두 마땅히 탑을 세우라」는 본문의 계단이다.
- 「혹은 설하고 혹은 읽고 혹은 외우고 혹은 쓰고」본문의 제목
- 「혹은 경권」본문의 본존
- 「머무는 곳에 모두 마땅히 탑을 세우라」본문의 계단
또 니치칸 상인은 「문저비침초」에서 「혹은 경권이 있는 곳에는 ……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계신다」는 대목을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인법체일(人法体一)을 밝힌 명문으로 보았다. 경권이라는 법 가운데 여래의 전신이라는 사람이 계신다는 이 경문의 구조가 그대로 사람과 법이 하나라는 뜻을 보인다는 것이다. 제1장에서 본 「사람을 떠난 법은 없다」는 요점이 이 법사품의 경문 속에서도 다시 드러나는 셈이다. 법을 본존으로 삼으라는 경문이 동시에 그 법 가운데 계신 여래의 전신을 말한다는 점, 이것이 「문은 적문, 뜻은 본문」이라는 읽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제불의 스승은 법 — 열반경 여래성품
둘째 문증은 북본 열반경 제4권 여래성품 제4의 1에 나오는 문이다. 「여래성」이란 여래의 본성, 곧 여래가 여래인 까닭을 말한다. 이 경은 여래의 본성이 법에 있음을 밝히고, 그것이 또한 일체중생의 본성임을 설한다.
장안대사는 「여래성」을 풀어, 「여래」는 인과의 과(果)에 해당하고 「성」은 인(因)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여래」는 부처의 과덕(果徳)을 높여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것만을 여래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본성도 여래라 이름한다는 것이다. 부처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원인인 중생의 본성 속에도 여래가 있다는 이 해석은, 제1장에서 본 「제법실상초」의 「범부는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이라는 말씀과도 멀지 않다.
장안대사에 따르면 이 문은 또한 소승에서 설한 열반의 뜻과의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소승교에서는 번뇌를 멸하는 곳에 열반이 있다고 하여, 몸과 마음을 재로 만들고 지혜를 없애는 회신멸지(灰身滅智)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열반경은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 자체를 열반으로 자리매김하고, 열반을 이름하여 상주라 하며, 여래도 그와 같아서 상주하는 법으로서 변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리고 제불은 이 상주하는 법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했기 때문에 성도하고 상주를 얻었다는 것이 이 문의 뜻이다. 장안대사는 「법이 상주하므로 제불도 또한 상주한다」는 문의 「상」을 상락아정(常楽我浄)의 네 덕을 줄여 말한 것이라고 풀었다.
어느 쪽이든 열반경의 이 한 구절은 법과 부처를 마주 세워 법이 근본임을 보인 것이며, 그러므로 대성인은 법이 뛰어나고 사람이 못하다는 법승인열(法勝人劣)의 근거로 이 문을 드셨다. 법이 상주하기 때문에 부처가 상주한다는 논리에서, 부처는 법에 의지해서만 부처가 된다. 부처의 상(像)을 모시는 것보다 그 부처를 낳은 법을 모시는 것이 근본이라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이 논리는 제5장의 「능생을 본존으로 삼는다」에서 「법화경은 석존의 부모이며 제불의 안목」이라는 말씀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도량에 법화경 한 부만 — 『법화삼매참의』
셋째 문증은 천태대사의 『법화삼매참의』다. 천태대사는 이 책에서 법화삼매의 행법을 구체적으로 보였는데, 특히 이 장에 인용된 문은 그 행법의 중심을 이루는 정수행(正修行)을 말한 대목이다. 『법화삼매참의』는 도량을 깨끗이 하고 장엄하는 일에서 시작해 공양 · 부처를 청함 · 찬탄 · 예배 · 참회 · 행도 · 송경 · 좌선에 이르는 행법의 순서를 정하는데, 그 도량의 중심에 무엇을 둘 것인가에 대해 「오직 법화경 한 부만을 두라」고 분명히 정했다.
이 가운데 오직 법화경 한 부만을 안치하고 불상이나 사리를 안치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것은, 앞의 법화경 법사품 제10의 문과 같은 취지로 볼 수 있다. 법사품이 사리 대신 경권을 모시라고 한 것을, 천태대사는 실제 수행의 도량에서 「형상 · 사리 · 다른 경전을 두지 말고 법화경 한 부만」이라는 규칙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천태 자신이 스승 남악대사 아래에서 법화삼매를 깨달은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규칙은 그의 수행 체험에서 나온 결론이기도 하다.
다만 천태대사의 『마하지관』은 사종삼매 가운데 셋의 본존을 아미타불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천태대사가 법화경 한 부만을 본존으로 삼았다는 것은 천태의 전체 교설과 어긋나지 않는가. 또 불공삼장의 의궤처럼 법화경에 의지하면서도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를 본존으로 삼은 예도 있다. 이 두 의문이 다음 제3장의 출발점이 된다.
본문
疑つて云く天台大師の摩訶止観の第二の四種三昧の御本尊は阿弥陀仏なり、 不空三蔵の法華経の観智の儀軌は釈迦多宝を以て法華経の本尊とせり、 汝何ぞ此等の義に相違するや、
의심하여 이르기를, 천태대사의 『마하지관』 제2권에 있는 사종삼매(四種三昧)의 본존은 아미타불이니라. 불공삼장(不空三蔵)의 법화경 관지의 의궤(観智儀軌)는 석가 · 다보를 법화경의 본존으로 삼았느니라. 그대는 어찌하여 이들의 뜻과 어긋나느뇨.
答えて云く是れ私の義にあらず上に出だすところの経文並びに天台大師の御釈なり、 但し摩訶止観の四種三昧の本尊は阿弥陀仏とは彼は常坐・常行・非行非坐の三種の本尊は阿弥陀仏なり、 文殊問経・般舟三昧経・請観音経等による、是れ爾前の諸経の内・未顕真実の経なり、 半行半坐三昧には二あり、一には方等経の七仏・八菩薩等を本尊とす彼の経による、 二には法華経の釈迦・多宝等を引き奉れども法華三昧を以て案ずるに法華経を本尊とすべし、
답하여 이르기를, 이는 사사로운 뜻이 아니니라. 위에 낸 경문과 천태대사의 석이니라. 다만 『마하지관』 사종삼매의 본존이 아미타불이라 함은, 그것은 상좌(常坐) · 상행(常行) · 비행비좌(非行非坐)의 세 가지의 본존이 아미타불이라는 것이니, 문수문경 · 반주삼매경 · 청관음경 등에 의한 것이니라. 이는 이전(爾前)의 여러 경 가운데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은 경이니라. 반행반좌(半行半坐)삼매에는 둘이 있으니, 하나는 방등경의 칠불 · 팔보살 등을 본존으로 삼나니 그 경에 의한 것이요, 둘은 법화경의 석가 · 다보 등을 청해 모시지만 『법화삼매』로써 헤아려 보건대 법화경을 본존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不空三蔵の法華儀軌は宝塔品の文によれり、此れは法華経の教主を本尊とす法華経の正意にはあらず、 上に挙ぐる所の本尊は釈迦・多宝・十方の諸仏の御本尊・法華経の行者の正意なり。
불공삼장의 법화의궤는 보탑품의 문에 의한 것이니라. 이는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삼은 것이요, 법화경의 정의(正意)가 아니니라. 위에 든 본존은 석가 · 다보 · 시방제불의 본존이시며 법화경 행자의 정의이니라.
어구 풀이
- 摩訶止観마하지관
- 천태대사가 수나라 개황 14년(594) 형주 옥천사에서 강설하고 제자 장안대사가 기록한 열 권의 책. 법화삼대부의 하나로 관심(観心)의 수행을 설한다. 앞의 네 권은 육즉 · 사종삼매 등의 행위(行位)와 행법을 설하고, 제5권에 이르러 십경 · 십승관법과 일념삼천의 법문을 세운다.
- 四種三昧사종삼매
- 『마하지관』 제2권에서 대행(大行)을 닦는 방법으로 제시한 네 가지 삼매. 몸가짐에 따라 상좌삼매 · 상행삼매 · 반행반좌삼매 · 비행비좌삼매로 나누고, 각각을 몸의 열고 막음(身開遮) · 입의 말하고 침묵함(口説黙) · 뜻의 지관(意止観)의 삼업으로 규정한다. 「삼매」는 마음을 한 곳에 두어 흔들리지 않는 상태다.
- 常坐三昧상좌삼매
- 90일 동안 한 부처의 방향을 향해 단정히 앉아 정관(正観)을 닦는 삼매. 『문수사리문경』 · 『문수설반야경』을 소의경으로 한다.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한다.
- 常行三昧상행삼매
- 90일 동안 도량 안을 쉬지 않고 돌며 입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념하는 삼매. 『반주삼매경』을 소의경으로 하며, 반주삼매 · 불립삼매(仏立三昧)라고도 한다.
- 半行半坐三昧반행반좌삼매
- 행도(걷기)와 좌선을 번갈아 닦는 삼매. 『대방등다라니경』에 의한 방등삼매와 법화경에 의한 법화삼매의 두 가지가 있다.
- 非行非坐三昧비행비좌삼매
- 앞의 세 삼매에 속하지 않는 모든 행법을 거두는 삼매. 행의의 방법이나 기간을 특별히 정하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관한다는 뜻에서 수자의삼매(随自意三昧)라고도 한다. 『마하지관』은 『청관음경』에 의한 행법을 그 예로 든다.
- 文殊問経・般舟三昧経・請観音経문수문경 · 반주삼매경 · 청관음경
- 각각 상좌삼매 · 상행삼매 · 비행비좌삼매의 대표적 소의경. 『문수사리문경』, 아미타불을 눈앞에 보는 삼매를 설하는 『반주삼매경』, 관세음보살을 청하는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을 말한다. 모두 법화경 이전, 또는 법화경에 미치지 못하는 권교의 경이다.
- 爾前・未顕真実이전 · 미현진실
- 「이전」은 법화경 이전에 설해진 여러 경. 「미현진실」은 『무량의경』의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四十余年未顕真実)」에서 나온 말로, 법화경 이전의 경은 아직 부처의 진실을 드러내지 않은 방편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 方等経の七仏・八菩薩방등경의 칠불 · 팔보살
- 방등삼매의 본존. 『대방등다라니경』은 그 신주를 과거 칠불이 설했다고 하며, 『칠불팔보살소설대다라니신주경』은 칠불과 팔보살을 함께 설한다. 대성인은 방등삼매가 이 칠불 · 팔보살을 본존으로 삼는다고 하셨다.
- 不空三蔵불공삼장
- 중국 당나라의 역경승(705~774). 북인도 또는 스리랑카 출신으로 전한다.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우고 스리랑카 등지에서 경전을 구해 돌아와, 현종 · 숙종 · 대종 세 황제의 존숭을 받으며 많은 밀교 경궤를 번역했다. 선무외 · 금강지와 함께 진언의 세 삼장으로 불린다. 대성인은 그의 번역에 잘못이 많다고 거듭 지적하셨다.
- 観智の儀軌관지의 의궤
- 불공이 번역한 『성취묘법연화경왕유가관지의궤』 한 권. 성취법화의궤 · 관지의궤 · 법화의궤라고도 한다. 견보탑품의 석가 · 다보 이불병좌를 중심으로 문수 · 약왕 · 미륵 · 보현 등의 보살을 밀교식으로 배치하고, 이에 의해 수행하면 육근청정을 얻고 법화삼매를 성취한다고 설한다.
- 宝塔品보탑품
- 『묘법연화경』 견보탑품 제11. 땅에서 칠보탑이 솟아오르고 탑 안의 다보여래가 석존의 설법이 진실하다고 증명하며, 석존이 탑 안으로 들어가 다보여래와 나란히 앉는 이불병좌(二仏並坐)와 허공회의 의식이 시작되는 품이다.
- 法華経の教主법화경의 교주
- 법화경을 설한 부처, 곧 문상(文上)의 석존. 불공의 의궤는 보탑품의 석가 · 다보를 본존으로 삼았는데, 대성인은 이를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삼은 것」이며 법화경의 정의가 아니라고 하셨다.
- 十方の諸仏시방의 제불
- 동서남북 · 사유 · 상하의 시방세계에 계신 모든 부처. 견보탑품에서 석존의 분신으로 모여든 부처들도 포함된다. 대성인은 법화경의 제목이 석가 · 다보뿐 아니라 이 시방제불이 본존으로 삼은 것이라고 하셨다.
- 法華経の行者법화경의 행자
- 법화경을 경문대로 몸으로 읽고 실천하는 사람.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법화경에 예언된 난을 받는 자신을 「법화경의 행자」라 부르셨다. 이 장에서 「법화경의 교주」와 나란히 놓여 대비된다.
- 正意정의
- 바른 뜻, 본래의 참뜻. 「법화경의 정의」는 법화경이 설해진 본뜻, 「법화경 행자의 정의」는 법화경을 행하는 사람이 마땅히 받들어야 할 본뜻이다.
두 가지 의심 — 아미타의 상행삼매와 석가 · 다보의 의궤
제3장은 제2장에서 든 경석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의문을 미리 세우고, 그에 답함으로써 법화경 행자의 정의를 밝히는 대목이다. 의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천태대사가 『마하지관』의 사종삼매에서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삼았다는 데서 나오는 의문이다.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세우는 것은 사종삼매 가운데 상행삼매다. 『마하지관』은 사종삼매의 행법을 각각 몸의 열고 막음 · 입의 말하고 침묵함 · 뜻의 지관이라는 몸 · 입 · 뜻의 삼업으로 규정하는데, 상행삼매의 「입의 말하고 침묵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口の説黙とは、九十日、身常に行じて休息すること無く、九十日、口に常に阿弥陀仏の名を唱えて休息すること無く、九十日、心に常に阿弥陀仏を念じて休息すること無し。…但専ら弥陀を以て法門の主と為す
입의 말하고 침묵함이란, 90일 동안 몸은 늘 걸으며 쉬지 않고, 90일 동안 입으로 늘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쉬지 않고, 90일 동안 마음으로 늘 아미타불을 념하며 쉬지 않는 것이다. …… 다만 오로지 아미타를 법문의 주인으로 삼는다.
이처럼 상행삼매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삼아 오로지 아미타여래의 모습을 눈앞에 보기를 념하는 수행을 90일에 걸쳐 행한다. 천태의 교설 안에 아미타 본존이 분명히 있다면, 천태가 법화경 한 부만을 본존으로 했다는 제2장의 말과 어긋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둘째 의문은 불공삼장이 번역한 『관지의궤』가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를 본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궤에는 「그 탑 가운데에 석가모니여래와 다보여래가 같은 자리에 앉아 계심을 그린다(其の塔中に於いて、釈迦牟尼如来、多宝如来の同座して坐するを画けり)」고 되어 있다. 법화경에 의지한 의궤가 법화경의 석가 · 다보를 본존으로 삼았는데, 어찌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 하는가. 아미타불이나 석가 · 다보를 본존으로 삼는 뜻에 어긋나게 어찌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세우는가 하는 것이 묻는 이의 의심이다.
- 아미타는 셋(상좌 · 상행 · 비행비좌)에 한정되며 이전 미현진실의 경에 의한 것
- 방등삼매의 칠불 · 팔보살도 같음
- 법화삼매로 헤아리면 법화경이 본존
불공삼장과 『관지의궤』
불공이 번역했다고 하는 경전은 방대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불공 자신의 저작으로 보아야 할 것도 얼마간 섞여 있다고 한다. 이 『관지의궤』도 그 하나가 아닐까 추정된다. 이 의궤는 법화경을 밀교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인데, 그 해석이 법화경의 참뜻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본래 인도에서 중국으로 경론을 번역해 전한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도 대성인은 불공에 대해 「선시초」에서 특히 엄하게 지적하셨다.
不空三蔵は殊に誤多き上誑惑の心顕なり
불공삼장은 특히 잘못이 많은 데다가 속이려는 마음이 드러나 있느니라.
불공에게 그러한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이 『관지의궤』도 제멋대로의 해석을 섞어 가며 번역한 것인지 모른다. 대성인은 같은 「선시초」에서 『관지의궤』의 구체적인 잘못을 드셨다.
不空三蔵は誤る事かずをほし所謂法華経の観智の儀軌に寿量品を阿弥陀仏とかける眼の前の大僻見・陀羅尼品を神力品の次にをける属累品を経末に下せる此等はいうかひなし
불공삼장은 잘못한 일이 수없이 많으니, 이른바 법화경 관지의궤에 수량품을 아미타불이라 쓴 것은 눈앞의 큰 그릇된 견해요, 다라니품을 신력품 다음에 둔 것, 촉루품을 경의 끝으로 내린 것, 이런 것들은 말할 가치도 없느니라.
수량품의 본불을 아미타불로 쓴 것은 법화경의 근본을 뒤집는 잘못이다. 또 법화경은 신력품 다음에 촉루품을 두어 부촉의 의식을 매듭짓는데, 그 순서를 바꾼 것도 경의 구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대성인은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신 뒤 「다른 사람의 번역이라면 쓸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 번역한 경론은 믿을 수 없다(他人の訳ならば用ゆる事もありなん此の人の訳せる経論は信ぜられず)」(「선시초」, 268쪽)고까지 단언하셨다.
『관지의궤』의 정식 이름은 『성취묘법연화경왕유가관지의궤』다. 「선시초」 제3편 제16장의 어구 풀이에 따르면, 이 의궤는 견보탑품의 이불병좌를 중심으로 여러 보살을 밀교식으로 구성한 만다라를 설하며, 이 만다라에 의해 수행하면 육근청정을 얻고 법화삼매를 성취한다고 한다. 이 의궤는 동밀(東密)에서 법화경을 얕은 가르침(浅略)으로, 대일경을 깊은 가르침(深秘)으로 보는 근거로도 쓰였다. 법화경을 밀교의 틀 속에 넣어 그 아래에 두는 흐름이 이 한 권의 의궤에서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장의 불공 비판은 제6장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진언 비판의 첫머리이기도 하다.
출처: 「선시초」 268쪽
사종삼매와 그 본존 — 아미타는 넷 가운데 셋
대성인은 먼저 이것이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앞에 든 경문과 천태대사의 석에 의한 것이라고 답하신 다음, 첫째 의문을 풀어 가신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하는 것은 사종삼매 가운데 상좌 · 상행 · 비행비좌의 셋이며, 반행반좌삼매에서는 첫째로 방등경의 칠불 · 팔보살 등을, 둘째로 법화경을 본존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하나씩 짚어 본다.
상좌삼매는 『문수사리문경』과 『문수설반야경』의 두 경을 소의경으로 한다. 『마하지관』은 상좌삼매에 대해 「한 부처의 방향을 따라 단정히 앉아 바로 향한다(一仏の方面に随い、端坐して正に向かう)」, 「마땅히 오로지 한 부처의 이름을 부르며 참괴하고 참회하여 목숨을 걸고 스스로 귀의해야 한다. 시방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공덕이 바로 같다(当に専ら一仏の名字を称し、懺愧懺悔して命を以て自ら帰すべし。十方の仏の名字を称うると功徳正しく等し)」라고 하여, 본존에 대해서는 한 부처라고만 할 뿐 특별히 어떤 부처인지를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락대사는 『지관보행전홍결』 제2권의 1에서 「경에는 서방으로만 향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장애가 일어나면 오로지 한 부처를 부르게 한다. 여러 경이 찬탄하는 바가 대부분 아미타에 있다(経には局って西方に向かわ令めずと雖も、障起これば既に専ら一仏を称え令めん。諸経の讃する所、多く弥陀に在り)」고 풀었다. 이 해석에 따라 상좌삼매의 본존도 아미타불로 보게 된 것이다.
『반주삼매경』을 소의경으로 하는 상행삼매는 앞에서 본 대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삼는다.
비행비좌삼매는 여러 경의 행법 가운데 다른 세 삼매에 속하지 않는 것을 모두 거두는 삼매로, 다른 삼매와 달리 행의의 방법이나 기간을 특별히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하지관』은 『청관음경』에 따른 경우의 행법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請観音』に約して其の相を示せば、静處に於いて道場を厳り、旛蓋・香燈をもうけ、弥陀の像・観音・勢至二菩薩の像を請じて、西方に安ず
『청관음경』에 따라 그 모습을 보이면, 고요한 곳에 도량을 꾸미고 번개와 향 · 등을 갖추고, 아미타의 상과 관음 · 세지 두 보살의 상을 청하여 서쪽에 안치한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본존문답초에서 「상좌 · 상행 · 비행비좌의 세 가지 본존은 아미타불이니, 문수문경 · 반주삼매경 · 청관음경 등에 의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경들은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은 이전의 권교이며, 법화경을 가장 뛰어난 경으로 세운 천태대사의 교판에서 보면 거기에 대사의 참뜻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법화경의 극설인 일념삼천의 법문이 『마하지관』에서 밝혀지는 것은 제5권에 이르러서이며, 거기에 이르는 과정으로 여러 방편의 수행이 세워진 것이다. 대성인이 「일념삼천법문」에서 『마하지관』 열 권 가운데 「앞의 네 권에서는 아직 감추시고 다만 육즉 · 사종삼매 등만을 설하셨다(上四帖に猶秘し給いて但六即・四種三昧等計りなり)」(412쪽)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뜻이다. 따라서 사종삼매의 수행이라 해도 그 전체가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한 것이 아니라 넷 가운데 셋에 한정되며, 게다가 그 셋조차 아미타불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상좌삼매의 「한 부처」가 묘락의 해석을 거쳐 아미타로 읽힌 것처럼, 아미타 본존은 천태의 확정된 결론이라기보다 권경에 의지한 방편의 행법에 붙은 것이다.
- 아미타를 본존으로 함은 셋뿐이며 모두 이전 미현진실의 경에 의함
- 일념삼천은 『마하지관』 제5권에서 비로소 밝혀짐
방등삼매의 칠불 · 팔보살
남은 반행반좌삼매에는 『방등다라니경』에 의한 방등삼매와 법화경에 의한 법화삼매의 두 행법이 있다. 대성인은 방등삼매가 방등경의 칠불 · 팔보살을 본존으로 하는 것은 다른 세 삼매와 마찬가지로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은 권경을 의지처로 삼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방등삼매의 본존은 일반적으로 이십사존상(二十四尊像)으로 여겨진다. 『마하지관』이 『방등다라니경』에 기초해 「한적한 곳에 도량을 정하고 도량을 장엄하여 둥근 단을 마련하고 거기에 이십사존상을 청한다」는 취지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십사존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경에도 『마하지관』에도 사실 분명히 적혀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방등삼매의 본존을 이십사존상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대성인이 방등삼매의 본존을 칠불 · 팔보살 등이라고 하신 까닭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방등삼매는 밀교적인 색채가 짙어 밀주(密呪)를 외우는 데 큰 특색이 있는데, 『방등다라니경』은 그 밀주를 과거 칠불이 설한 것이라고 한다. 둘째, 이 경에는 칠불은 설해져 있으나 팔보살은 설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마하지관』 제2권 상에는 「칠불팔보살의 참(懺)」이라는 말이 있고, 묘락대사의 『지관보행전홍결』에 따르면 이는 『칠불팔보살소설대다라니신주경』 제1권에 설해진 칠불 · 팔보살을 가리킨다. 셋째, 『방등다라니경』을 근본 의지처로 하는 방등참법은 방등삼매로 체계화되기 이전, 천태대사가 수학하던 시절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행법이었다. 천태대사의 초기 저작인 『차제선문』에서는 방등참법을 「대승방등다라니행법」 또는 「제대승방등수다라」 등으로 부르며, 그 의지하는 경을 반드시 『방등다라니경』의 교설만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의 방등참법에 『칠불신주경』의 칠불 · 팔보살이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마하지관』의 「칠불팔보살」이라는 말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 점들을 종합하면, 『방등다라니경』에 설해진 칠불을 『칠불신주경』을 바탕으로 칠불 · 팔보살의 한 짝으로 파악하고 이를 방등삼매의 본존으로 자리매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짧은 한 구절 뒤에 천태 행법의 형성사까지 꿰뚫는 정확한 이해가 있다는 것이다.
- ①방등삼매는 밀교적 색채가 짙어 밀주를 외우며, 『방등다라니경』은 그 밀주를 과거 칠불이 설했다고 함
- ②이 경에 팔보살은 없으나 『마하지관』 권2상에 「칠불팔보살의 참」이 있고, 묘락 『지관보행전홍결』은 이를 『칠불팔보살소설대다라니신주경』 권1의 칠불 · 팔보살로 풂
- ③방등참법은 천태 수학 시절부터 널리 행해졌고 『차제선문』은 그 소의경을 『방등다라니경』에 한정하지 않음칠불 · 팔보살이 함께 들어왔을 가능성
일반의 이십사존상 설은 경과 『마하지관』에 구체적 근거가 뚜렷하지 않음
법화삼매 — 부처를 청하되 경을 본존으로
방등삼매에 대해 법화삼매는 법화경의 석존 · 다보여래 등을 본존으로 한다고 대성인은 말씀하셨다. 『마하지관』은 법화삼매의 본존을 특별히 정하지 않았지만, 법화삼매 행법의 중심을 이루는 정수행의 십법(十法)을 든다. 그 넷째가 「부처를 청함(請仏)」의 행법이다. 『법화삼매참의』에 따르면 이는 한마음으로 바르게 념하고 공양하는 마음을 일으켜 법화경에 설해진 불 · 법 · 승 삼보를 청해 모시는 것으로, 「一心奉請南無釈迦牟尼仏」, 「一心奉請南無過去多宝世尊」, 「一心奉請南無釈迦牟尼十方分身諸仏」 등으로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 「한마음으로 석가모니불께 귀명하여 청하옵니다」一心奉請南無釈迦牟尼仏
- 「한마음으로 과거의 다보세존께 귀명하여 청하옵니다」一心奉請南無過去多宝世尊
- 「한마음으로 석가모니의 시방 분신 제불께 귀명하여 청하옵니다」一心奉請南無釈迦牟尼十方分身諸仏
대성인이 본존문답초에서 「법화경의 석가 · 다보 등을 청해 모시지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뜻에서라고도 생각된다. 그리고 『마하지관』은 그 뒤에 「따로 한 권이 있어 『법화삼매』라 이름한다. 이는 천태대사가 지은 것으로 세상에 유포되어 있다. 행자는 이것을 종으로 삼으라(別に一巻ありて法華三昧と名づく、是れ天台大師の著す所にして世に流伝す。行者これを宗とせよ)」고 하여, 법화삼매의 행법에 관해서는 『법화삼매참의』를 근본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 때문에 대성인은 「법화삼매로써 헤아려 보건대 법화경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법화삼매참의』를 중심에 두고 천태대사의 참뜻을 파악하면 당연히 법화경의 경권이 본존이 된다는 것이다. 석가 · 다보 · 시방분신의 부처들은 청해 모시는 대상이지만, 도량의 고좌 위에 홀로 안치되는 것은 법화경 한 부다. 천태대사 자신이 『마하지관』에서 법화삼매의 행자는 이 책을 종으로 삼으라고 했으니, 천태의 행법 체계 전체를 놓고 보아도 아미타가 아니라 법화경이 정점에 있다. 대성인의 답은 천태를 천태 자신의 말로 바로잡은 것이다.
천태대사는 스승 남악대사가 있던 대소산에서 수행하던 중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의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으로 여래를 공양한다고 이름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법화삼매를 깨달았다고 전한다(대소개오). 이 때문에 천태를 약왕보살의 후신이라 일컫게 되었다. 법사품의 상대가 약왕보살이고 천태가 그 후신으로 일컬어졌다는 사실은, 제2장의 첫 문증과 제3장의 법화삼매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교주를 본존으로 삼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둘째 의문에 대해 대성인은 「불공삼장의 법화의궤는 보탑품의 문에 의한 것이니, 이는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삼은 것이요 법화경의 정의가 아니다」라고 답하셨다. 불공은 『관지의궤』에서 견보탑품의 이불병좌를 의지처로 삼아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세웠지만, 그것은 법화경의 정의가 아니라고 단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위에 든 본존은 석가 · 다보 · 시방제불의 본존이며 법화경 행자의 정의」라고 말씀하셨다. 법화경의 제목이야말로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이 본존으로 삼은 것이며, 거기에 법화경을 행하는 사람의 정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답의 무게는 「교주」라는 말에 있다. 불공의 의궤가 그린 것은 보탑 안에 나란히 앉은 석가와 다보, 곧 법화경을 설한 부처와 그 설법을 증명한 부처다. 그런데 그 두 부처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부처가 되었는가. 법사품이 사리보다 경권을 앞세우고 열반경이 제불의 스승은 법이라고 한 앞 장의 논리를 따르면, 부처를 본존으로 삼는 것은 결과를 근원보다 앞세우는 일이 된다. 법화경 안에서도 교주를 본존으로 하는 것은 법화경이 설해진 본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대성인의 판단이다.
이불병좌는 용(用)의 부처 — 「제법실상초」
대성인은 「제법실상초」에서 보탑품의 이불병좌 의식이 지닌 깊은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されば法界のすがた妙法蓮華経の五字にかはる事なし、釈迦多宝の二仏と云うも妙法等の五字より用の利益を施し給ふ時・事相に二仏と顕れて宝塔の中にして・うなづき合い給ふ、かくの如き等の法門・日蓮を除きては申し出す人一人もあるべからず、天台・妙楽・伝教等は心には知り給へども言に出し給ふまではなし・胸の中にしてくらし給へり、其れも道理なり、付嘱なきが故に・時のいまだ・いたらざる故に・仏の久遠の弟子にあらざる故に、地涌の菩薩の中の上首唱導・上行・無辺行等の菩薩より外は、末法の始の五百年に出現して法体の妙法蓮華経の五字を弘め給うのみならず、宝塔の中の二仏並座の儀式を作り顕すべき人なし、是れ即本門寿量品の事の一念三千の法門なるが故なり、されば釈迦・多宝の二仏と云うも用の仏なり、妙法蓮華経こそ本仏にては御座候へ
그러므로 법계의 모습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와 다를 바가 없느니라.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라 해도 묘법 등의 다섯 글자로부터 용(用)의 이익을 베푸실 때 사상(事相)에 두 부처로 나타나 보탑 가운데서 서로 고개를 끄덕이신 것이니라. 이러한 법문은 니치렌을 제외하고는 말해 낼 사람이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느니라. 천태 · 묘락 · 전교 등은 마음으로는 아셨으나 말로 내어 놓기까지는 하지 않으시고 가슴속에 간직한 채 지내셨느니라. 그것도 도리이니, 부촉이 없기 때문이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요, 부처의 구원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지용보살 가운데 상수창도인 상행 · 무변행 등의 보살 외에는, 말법의 처음 오백 년에 출현하여 법체인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를 펴실 뿐 아니라 보탑 안의 이불병좌의 의식을 지어 나타낼 사람이 없느니라. 이는 곧 본문 수량품의 사의 일념삼천의 법문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라 해도 용의 부처요,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
이 어문에서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를 용의 부처라 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묘법연화경이라는 법이 근본이고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는 그 법의 작용을 나타내는 부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공의 의궤는 그 용의 부처를 본존으로 그렸고, 대성인은 그 용을 낳은 체, 곧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를 본존으로 세우셨다. 또한 이 어문이 이불병좌의 의식을 「지어 나타낼」 사람은 상행 등 지용보살의 상수뿐이라고 말씀하신 점도 놓칠 수 없다. 천태 · 묘락 · 전교는 마음으로 알았으나 부촉이 없었고 때가 이르지 않았으며 구원의 제자가 아니었기에 말하지 않았다. 불공은 그 의식을 문자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을 뿐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같은 보탑품의 문에 의지하면서도 「교주를 본존으로 한 것」과 「법체를 본존으로 한 것」은 이렇게 갈린다.
삼세시방의 부처가 종자로 삼은 묘법 — 「아키모토어서」
대성인은 「아키모토어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三世十方の仏は必ず妙法蓮華経の五字を種として仏になり給へり
삼세시방의 부처는 반드시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를 종자로 하여 부처가 되셨느니라.
이처럼 묘법연화경을 근본으로 하여 석가 · 다보의 두 부처와 삼세시방의 제불이 나온다. 이 뜻에서 본존문답초에서도 법화경의 제목, 곧 묘법연화경이야말로 석가 · 다보 · 시방제불의 본존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받들 수 있다. 제불이 스승으로 삼고 종자로 삼아 부처가 된 그 법이 곧 제불의 본존이다. 그 법을 본존으로 삼는 것은 부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받든 것을 함께 받드는 것이다. 이 논리는 제5장에서 「법화경은 석존의 부모이며 제불의 안목」, 「능생을 본존으로 삼는다」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법화경의 교주」와 「법화경의 행자」
마지막으로 이 장의 결구가 「법화경의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화경 행자의 정의」라고 맺어진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성인은 앞 문장에서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삼는 것은 법화경의 정의가 아니다」라고 하시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위에 든 본존은 …… 법화경 행자의 정의」라고 하셨다. 앞 문장은 문상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 잘못을 지적하여 법을 본존으로 세우는 것이 법화경의 정의임을 밝혔고, 뒤 문장은 그 법을 본존으로 삼는 데에 법화경 행자의 정의가 있다고 말한다.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이 「교주」와 「행자」의 대비는, 법화경을 설한 교주와 구별해 말법에 그 법을 행하고 펴는 사람, 곧 대성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으로 읽힌다. 이 해석은 본존문답초를 펼치며 (서강)의 「첫째 — 법의 본존, 그리고 「법화경의 행자」」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여기서는 제1장에서 본 「사람을 떠난 법은 없다」는 요점이 이 결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만 짚어 둔다. 법의 본존은 그 법을 행하는 사람과 함께 비로소 사(事)의 본존이 된다.
- 문상의 석존
-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 불공 『관지의궤』의 본존
- 「제법실상초」에서 「용의 부처」
- 경을 몸으로 읽고 행하는 사람
- 법화경의 제목(묘법연화경)을 본존으로 받듦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제3장의 결구는 「법화경의 제목은 석가 · 다보 · 시방제불이 본존으로 삼은 법」이라는 법본존의 재천명이자, 「법화경의 행자」라는 말로 그 법을 행하고 펴는 말법의 사람을 가리킨 대목이다.
천태의 법화삼매는 대성인 입멸 뒤 오노승의 행법 문제로도 이어졌다. 닛코 상인은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에서 오노승이 여법경을 근행하고 서사 · 공양하며 곳곳에서 법화삼매나 일일경을 행한 데 대해 「이러한 행의는 말법의 수행이 아니요, 또 방법의 시대에는 행해서는 안 된다(此くの如き行儀は是れ末法の修行に非ず、又謗法の代には行ずべからず)」(1601~1602쪽)고 비판하셨다. 대성인이 본존문답초에서 『법화삼매참의』를 드신 것은 천태 자신의 말로 법을 본존으로 삼는 원리를 증명하기 위함이지, 상법의 행법인 법화삼매를 말법에 되살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 편을 맺으며
제1편에서 본 세 장은 본존문답초 전체의 토대다. 제1장은 「말대악세의 범부는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는 표문으로 이 어서의 주제를 내세웠다. 니치준 상인은 이 어서가 겉으로는 권실상대의 법문이지만 원의는 법본존을 보인 데 있으며, 그 법은 사람을 떠나지 않은 사의 일념삼천이라고 보았다. 니치칸 상인은 「법화경의 제목」을 부문과 원의로 나누어, 원의의 측면에서 그것이 본존 · 제목 · 계단의 삼대비법이며 그 근본은 일대비법인 본존이라고 밝혔다. 제목이 근본이고 본존은 그 대상이라는 견해는 이 관계를 뒤집은 것이다.
제2장은 법사품 · 열반경 여래성품 · 『법화삼매참의』라는 세 문증을 들었다. 사리 대신 경권을 모시라는 법사품, 제불의 스승은 법이라는 열반경, 도량에 법화경 한 부만 두라는 천태의 행법서는 모두 「사람보다 법」이라는 원리를 가리키며, 니치오 상인의 말대로 그 문은 적문에 있으나 뜻은 본문에 있다. 법사품의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계신다」는 구절은 법 가운데 사람이 계신다는 인법체일의 명문으로도 읽혔다.
제3장은 천태 사종삼매의 아미타 본존과 불공 『관지의궤』의 석가 · 다보 본존이라는 두 반론을 풀었다. 아미타 본존은 넷 가운데 셋에 한정되며 모두 이전 미현진실의 경에 의한 것이고, 천태 자신이 법화삼매의 행자는 『법화삼매참의』를 종으로 삼으라고 했으므로 천태의 참뜻은 법화경 본존에 있다. 불공의 의궤는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그렸을 뿐 법화경의 정의가 아니며, 법화경의 제목이야말로 석가 · 다보 · 시방제불의 본존이요 법화경 행자의 정의다.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이 결구의 「행자」라는 말에는 말법의 사람을 가리키는 복선이 있다.
다음 제2편 「뛰어난 것 · 능생을 본존으로」에서 대성인은 일본 십종의 본존을 하나하나 들고, 「본존이란 뛰어난 것을 써야 한다」는 기준과 「능생을 본존으로 삼는다」는 근거를 세우신다. 『관보현보살행법경』의 두 문을 들어 「부처는 소생, 법화경은 능생」이라 밝히시고, 목상 · 화상을 대일의 진언으로 개안하는 의식이 뒤집힌 일이라고 지적하시면서, 홍법 · 자각 · 지증 세 대사에 대한 귀의를 꾸짖는 진언 비판의 문을 여신다.
더 읽기
- 본존문답초를 펼치며 (서강) — 저술 연대와 사본, 대고중 조켄보, 보은초 328쪽 「본문의 교주 석존」과의 관계, 「법화경의 제목」의 문 · 의 · 의
- 본존문답초 제2편 뛰어난 것 · 능생을 본존으로 — 십종의 본존, 「本尊とは勝れたるを用うべし」와 능생의 본존
- 관심의 본존초 — 법본존 개현의 서, 사의 일념삼천과 본존의 상모
- 법화취요초 제5편 「광략을 버리고 요를 취하다」 — 법화경의 광 · 약 · 요와 상행보살이 전한 다섯 글자
- 불교 교학 六 「남묘호렌게쿄」 — 제목의 교학적 계보
- 핵심 개념 「삼신」 — 무작삼신과 체 · 용의 삼신
- 인물탐구 「천태대사」 — 대소개오와 『마하지관』 · 법화삼매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본존문답초」 · 「제법실상초」 · 「아키모토어서」 · 「선시초」 · 「일념삼천법문」,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 닛코 상인,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같은 어서전집 수록
- 『묘법연화경』 법사품 제10 · 견보탑품 제11 · 여래수량품 제16 · 약왕보살본사품 제23, T9 no.262
- 『대반열반경』(북본) 여래성품, T12 no.374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천태대사, 『마하지관』, T46 no.1911
- 천태대사, 『법화삼매참의』, T46 no.1941
- 천태대사, 『법화문구』, T34 no.1718
- 『대지도론』, T25 no.1509
- 묘락대사, 『법화문구기』 · 『지관보행전홍결』
- 불공 역, 『성취묘법연화경왕유가관지의궤』
- 니치칸 상인, 「문저비침초」 · 「의의판문초」 · 「법화경제목초」 문단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 니치오 상인, 『변혹관심초』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연구
- 「0365~0374 本尊問答抄」 第一段~第三段 강의
- Daniel B. Stevenson, "The Four Kinds of Samādhi in Early T'ien-t'ai Buddhism," in Peter N. Gregory (ed.), Traditions of Meditation in Chi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6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