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존문답초」는 홍안 원년(1278) 9월, 니치렌 대성인이 57세 때 미노부에서 쓰시어 고향 아와(安房)의 세이초사(清澄寺)에 있던 사형 조켄보(浄顕房)에게 보내신 글이다. 첫머리에서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을 본존으로 정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답하신다. 그 물음의 배경에는 두 해 전 같은 조켄보에게 보내신 「보은초」의 본존 문과 그 무렵 조켄보가 받은 본존의 상모(相貌)가 있다. 그러나 글은 한 사람의 의문에 답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본존의 기준을 「뛰어난 것」과 「능생」으로 세우고, 그 기준으로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삼는 진언종을 끝까지 따져 묻는다. 이어 승구의 난과 평가의 멸망을 현증으로 들고 대성인 자신의 사적을 말씀하신 뒤, 「이천이백삼십여 년」 동안 아무도 넓히지 못한 「이 어본존」을 이제 말법에 넓히신다는 선언으로 맺는다. 열네 장, 아홉 쪽 남짓한 이 글은 니치렌 대성인의 본존론을 가장 정면으로 말씀하신 어서의 하나이며, 닛코 상인이 십대부(十大部)의 하나로 꼽으신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서강은 본존문답초를 읽기 위한 문이다. 먼저 이 글이 언제, 어떤 형태로 전해졌는지를 사본과 옛 목록으로 확인하고, 이 글을 받은 조켄보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대성인과 어떤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는지를 대성인이 그에게 보내신 여섯 편의 어서로 더듬는다. 이어서 이 글이 「보은초」의 어떤 대목에서 생겨난 물음에 답한 것인지, 그리고 몽골의 재침을 앞두고 진언의 조복 기도가 온 나라를 뒤덮던 시대에 왜 이 글의 대부분이 진언 비판으로 채워졌는지를 살핀다.
그 위에서 이 글의 다섯 논지, 맺음말 「이천이백삼십여 년」에 대한 니치칸 상인의 해석, 삼대비법과 본존에 관한 대성인의 정의(正意), 그리고 「법화경의 제목」 · 「보은초」의 「본문의 교주 석존」 · 진언 파절이라는 세 실마리로 본문의 내용을 다시 꿰어 본다. 마지막으로 열네 장 하나하나가 표(標) · 석(釈) · 결(結)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짚어, 다섯 편을 읽어 나갈 길잡이로 삼는다.
본존문답초 해설은 서강과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다. 제1 · 2편은 본존의 정의(법의 본존과 그 근거, 「뛰어난 것」과 「능생」, 세 대사 비판의 시작), 제3편은 진언 비판과 불법의 흐름, 제4편은 법화경의 행자, 제5편은 현증과 본존의 유포를 다룬다.
다섯 편
- 제1편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 법본존과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 · 제1~3장 · 어서 365쪽 —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는 표문(標文)을 세우고, 법사품 · 열반경 · 『법화삼매참의』로 그 근거를 보인 뒤, 「법화경의 교주」가 아니라 「법화경의 행자」의 바른 뜻을 드러낸다.
- 제2편 뛰어난 것 · 능생을 본존으로 — 세 대사에 대한 귀의를 꾸짖다 · 제4~6장 · 어서 366–367쪽 — 십종의 제각각인 본존을 들고, 본존의 기준을 「뛰어난 것」과 「능생」으로 세운 다음, 법화경과 대일여래의 우열을 물어 홍법 · 자각 · 지증 세 대사에 대한 귀의를 꾸짖는다.
- 제3편 세 대사의 사적과 불법의 전래 — 진언의 도법과 원밀일치 · 제7~8장 · 어서 367–370쪽 — 세 대사의 사적을 근거로 한 세간의 반문을 들고, 인도 · 중국 · 일본의 불법 전래를 더듬어 진언이 법화경을 깎아내린 경위와 원밀일치가 굳어진 과정을 밝힌다.
- 제4편 법화경의 행자 없는 나라와 대성인의 사적 · 제9~10장 · 어서 370–371쪽 — 사백여 년 동안 법화경을 삼업으로 「최제일」이라 읽은 행자가 없었음을 밝히고, 아와 출생에서 「입정안국론」 상정에 이르는 대성인의 사적과 십종 판정을 보인다.
- 제5편 망국의 현증과 미증유의 본존 · 제11~14장 · 어서 371–374쪽 — 승구의 난과 평가 멸망을 진언 망국의 현증으로 들어 몽고 조복을 간하고, 조켄보 · 기조보에 대한 보은을 말씀하신 뒤, 「이천이백삼십여 년」 동안 아무도 넓히지 못한 미증유의 본존을 말법에 넓히신다고 맺는다.
홍안 원년 9월, 미노부에서
본존문답초는 홍안(弘安) 원년(1278) 9월, 대성인의 세수 57세 때 미노부(身延)에서 쓰신 글로 전한다. 본문 어디에도 저술 연월이 적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로부터 어서의 여러 목록과 주석서는 한결같이 이 글을 「홍안 원년」의 저술로 다루어 왔고, 그 사이에 다른 설은 보이지 않는다. 어서전집도 제1장 本文 첫머리에 제목과 함께 「홍안 원년 9월 · 57세 저술 · 조켄보 닛추(日仲)에게 주심」이라는 표기를 붙여 이 전승을 따른다.
本尊問答抄 弘安元年九月 五十七歳御作 与浄顕房日仲
본존문답초 — 홍안 원년(1278) 9월, 57세 때 저술. 조켄보 닛추에게 주심
홍안 원년은 대성인이 미노부에 들어가신 지 다섯 해째 되는 해다. 문영(文永) 11년(1274) 10월에 한 차례 쳐들어왔다가 물러간 몽골은 다시 일본을 칠 틈을 엿보고 있었고, 조정과 막부는 진언사(真言師)들을 동원해 적국 조복(調伏)의 기도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 글이 본존을 묻는 문답으로 시작해 진언의 망국을 따지는 데로 나아가는 것은 이런 시대의 공기와 떼어 놓고 읽을 수 없다. 그 사정은 「저술의 유래」에서 다시 살핀다.
친필은 전하지 않으나 — 옛 목록의 증언
본존문답초의 대성인 친필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의 존재와 대성인 저술임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증언이 여럿 남아 있다.
첫째는 닛코 상인의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富士一跡門徒存知事)」다. 닛코 상인은 이 글의 「성인 어서의 일(聖人御書の事)」 항목에서 「입정안국론」을 비롯한 십대부의 다른 어서들과 나란히 「본존문답초 1권(本尊問答抄一巻)」을 적어 두셨다. 다만 거기에는 친필이나 사본이 어디에 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둘째는 도키조닌(富木常忍)의 장서 목록인 「조슈인 본존성교사(常修院本尊聖教事)」다. 도키조닌은 대성인의 친필을 지켜 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제자인데, 그가 남긴 이 목록의 「1. 어서함(御書箱)」 항목에 「본존문답초 1첩(本尊問答抄一帖)」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른 시기에 이미 이 글의 사본이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셋째는 녹내어서(録内御書)다. 녹내어서는 대성인 입멸 뒤 100~140년 무렵에 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어서 모음인데, 중세에 베껴 쓴 녹내어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히라가본(平賀本)과 니치초본(日朝本)에 본존문답초가 실려 있다. 이 글이 일찍부터 대성인 문하의 기본 어서로 읽혀 왔다는 증거다.
현존하는 세 사본
그러나 친필이 없는데도 본존문답초를 의심할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근거는, 제2조 닛코 상인과, 대성인 재세 때부터의 문하인 겐슈코 니치겐(賢秀公日源)이 베껴 쓴 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사본은 다음 세 가지다.
- ①닛코 상인 사본소장처기타야마 혼몬사(北山本門寺) 소장특징완전하지 않음 — 미노부 니치초(日朝) 본으로 모자란 곳을 보충해 대교
- ②겐슈코 니치겐 사본소장처이와모토 짓소사(岩本実相寺) 소장특징쇼오(正応) 3년(1290) 7월 15일 사본제목 「본존문답초(本尊問答抄)」 명기
- ③닛코 상인 사본소장처후큐조사(富久成寺) 소장 · 이바라키현
이 가운데 ①의 닛코 상인 사본은 완전하지 않다. 메이지 시대에 대성인 유문을 대조 · 교정한 이나다 가이소(稲田海素)는 『니치렌 성인 어유문 대조기(日蓮聖人御遺文対照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明治三十五年七月四日岩本実相寺ニ於テ開山源師正応三年七月十五日ノ御写ヲ以テ対校ス復同年十二月十八日北山本門寺ニ於テ対校ス惜哉不足ナリ其不足ヲハ延山朝師ノ御本ヲ以て補校ス
메이지 35년(1902) 7월 4일 이와모토 짓소사에서 개산 니치겐 스님의 쇼오 3년(1290) 7월 15일 사본으로 대교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 18일 기타야마 혼몬사에서 대교하였다. 애석하게도 모자란 데가 있다. 그 모자란 곳은 미노부 니치초 스님의 본으로 보충해 교정하였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니치겐의 사본은 대성인 입멸(1282) 여덟 해 뒤인 쇼오 3년(1290)에 베껴 쓴 것으로, 이 글이 대성인 재세 때의 문하들 사이에서 이미 중시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기타야마 혼몬사의 닛코 상인 사본은 일부가 빠져 있어, 근대의 교정자도 그 결락을 다른 계통의 사본으로 메워야 했다.
「본존문답초」라는 제목
「본존문답초」라는 제목은 예로부터 대성인 자신이 붙이신 것으로 여겨져 왔고, 여기에도 다른 설은 없다. 앞에서 본 것처럼 닛코 상인의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에 「본존문답초 1권」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고, 겐슈코 니치겐의 사본에도 「本尊問答抄」라는 제목이 명기되어 있다. 대성인 재세 때의 문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제목을 전하고 있으므로, 이 제목은 대성인이 친히 정하신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
제목 그대로 이 글은 「본존」을 둘러싼 「문답」이다. 「문(問)」과 「답(答)」이 여러 차례 오가며 논지가 나아가는데, 묻는 쪽은 처음에는 조켄보의 의문을 대변하고, 뒤로 갈수록 당시 일본의 천태 · 진언 승려와 왕신(王臣) · 만민의 통념을 대변한다. 이 문답 형식 덕분에 이 글은 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이면서도, 본존에 관한 시대 전체의 물음에 답하는 논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목 아래 붙은 「与浄顕房日仲」의 「닛추(日仲)」는 조켄보와 함께 적힌 이름으로, 대고중을 가리키는 표기로 전한다. 조켄보에 관한 기록은 대성인의 어서 밖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본문 끝의 「귀변」
본존문답초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이 본문 안에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글 끝 제13장의 한 구절로 보아, 대성인이 세이초사(清澄寺)에서 수학하시던 시절의 사형 조켄보(浄顕房)에게 주신 글로 보아 문제가 없다.
貴辺は地頭のいかりし時・義城房とともに清澄寺を出でておはせし人なれば何となくともこれを法華経の御奉公とおぼしめして生死をはなれさせ給うべし。
귀변(貴辺)은 지두(地頭)가 노하였을 때 기조보와 함께 세이초사를 나서 주신 사람이니, 다른 일이 없더라도 이것을 법화경에 대한 봉공이라 여기시어 생사를 떠나시도록 하시라.
여기서 말하는 「지두」는 아와국(安房国) 나가사군(長狭郡) 도조향(東条郷)의 지두였던 도조 가게노부(東条景信)를 가리킨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조보(義城房)」는 조켄보와 마찬가지로 대성인이 세이초사에서 수학하실 때의 사형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건장(建長) 5년(1253) 입종선언(立宗宣言) 때 지두 도조 가게노부의 노여움을 사 대성인이 세이초사를 떠나시던 날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보은초」가 전하는 두 사형
같은 일을 대성인은 건치(建治) 2년(1276)의 「보은초」에서도 말씀하셨다.
各各・二人は日蓮が幼少の師匠にて・おはします、勤操僧正・行表僧正の伝教大師の御師たりしが・かへりて御弟子とならせ給いしがごとし、日蓮が景信にあだまれて清澄山を出でしにかくしおきてしのび出でられたりしは天下第一の法華経の奉公なり後生は疑いおぼすべからず
두 분은 저 니치렌이 어렸을 때의 스승이시니라. 근조 승정 · 교효 승정이 전교대사의 스승이었다가 도리어 제자가 되신 것과 같으니라. 니치렌이 가게노부에게 원한을 사서 기요스미산을 나설 때 숨겨 두었다가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신 것은 천하제일의 법화경에 대한 봉공이니라. 후생은 의심하지 마시라.
또 「보은초」 끝에는 「갑주 하키리향 미노부산에서 아와국 도조군 기요스미산의 조켄보 · 기조보 앞으로 받들어 보낸다」라는 송부의 말이 있다.
甲州波木井郷身延山より安房の国・東条の郡・清澄山・浄顕房・義成房の許に奉送す
갑주 하키리향 미노부산에서 아와국 도조군 기요스미산의 조켄보 · 기조보 앞으로 받들어 보내노라.
이로써 「보은초」가 조켄보와 기조보 두 사람에게 주어진 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본존문답초 제13장에서 「기조보와 함께」 대성인을 도운 「귀변」이라 부르신 사람은 그 두 사람 가운데 기조보가 아닌 다른 한 사람, 곧 조켄보일 수밖에 없다. 기조보의 이름은 어서에 따라 義城房 · 義成房 · 義浄房으로 달리 적힌다.
세이초사는 거듭된 화재로 사료를 잃어, 조켄보와 기조보에 관한 기록은 절 쪽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조켄보라는 인물의 윤곽을 더듬을 단서는 대성인의 어서밖에 없다.
조켄보에게 주신 어서 여섯 편
대성인이 조켄보에게 주신 어서는 본존문답초를 포함해 여섯 편이다. 네 편은 기조보와 함께 받았거나 세이초사의 대중과 함께 받은 것이고, 조켄보 한 사람에게 주신 것은 「보은초 송문」과 본존문답초 두 편이다.
- 문영 7년(1270)① 선무외삼장초기조보와 연명
- 건치 2년(1276)② 세이초사대중중기조보를 포함한 세이초사 대중
- 건치 2년(1276)③ 보은초기조보와 연명
- 건치 2년(1276)④ 보은초 송문조켄보 개인
- 홍안 원년(1278)⑤ 화과성취어서기조보와 연명
- 홍안 원년(1278)⑥ 본존문답초조켄보 개인
여섯 편을 연대순으로 놓으면 한 흐름이 보인다. 다쓰노구치 법난 한 해 전인 문영 7년의 「선무외삼장초」에서 대성인은 기요스미 시절을 돌아보며 진언 비판의 근거를 펼치셨고, 미노부에 들어가신 뒤 건치 2년에는 스승 도젠보(道善房)의 죽음을 계기로 「보은초」 두 권과 송문을 보내셨으며, 홍안 원년에는 봄에 「화과성취어서」로 두 사람의 정성을 기리시고, 가을에 본존문답초로 본존에 관한 물음에 답하셨다. 십대부 가운데 두 편, 곧 본존론과 삼대비법이라는 깊은 법문을 펼친 「보은초」와 본존문답초가 조켄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대성인의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말해 준다.
기요스미에서 수학하시고 기요스미를 떠나시기까지
대성인은 본존문답초 제10장에서 자신의 출생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日蓮は東海道・十五箇国の内・第十二に相当る安房の国長狭の郡・東条の郷・片海の海人が子なり、生年十二同じき郷の内・清澄寺と申す山にまかり登り住しき
니치렌은 동해도 열다섯 나라 가운데 열둘째에 해당하는 아와국 나가사군 도조향 가타우미의 어부의 아들이니라. 나이 열두 살에 같은 향 안의 세이초사라는 산에 올라가 살았느니라.
대성인은 아와국 나가사군 도조향에서 태어나시어, 덴푸쿠(天福) 원년(1233) 열두 살에 세이초사에 들어가 도젠보를 스승으로 수학하셨다. 조켄보는 이때의 사형이다. 「보은초」에서 「두 분은 저 니치렌이 어렸을 때의 스승」이라 하신 것처럼, 대성인은 입문 초기에 조켄보와 기조보 두 사람에게서 불전을 중심으로 한 읽기 · 쓰기 같은 기본 공부의 손길을 받으셨다.
열여섯 살에 출가 득도하신 대성인은 먼저 가마쿠라에서 약 4년, 이어서 교토 · 나라에서 10여 년 동안 수학하셨다. 그리고 서른두 살에 기요스미산으로 돌아오시어 건장 5년(1253) 4월 28일 입종을 선언하셨다. 이때 격분한 지두 도조 가게노부의 습격을 피하도록, 조켄보는 기조보와 함께 대성인을 영지 밖의 사이조 하나부사(西条花房) 렌게사(蓮華寺)까지 길 안내해 드렸다.

그 뒤 두 사람이 차츰 대성인의 가르침에 기울어 신심의 면에서 제자가 되었음은 「보은초」의 앞 구절 가운데 근조 · 교효의 비유에서 읽어 낼 수 있다. 근조(勤操) 승정은 삼론종의 승려로, 연력(延暦) 21년(802) 다카오산사(高雄山寺)에서 전교대사와 법론을 벌였다가 논파되었다고 전한다. 교효(行表) 승정은 전교대사가 출가할 때 계를 준 스승이다. 두 사람 모두 전교대사의 스승이었으나 도리어 그의 가르침을 받는 자리에 섰다. 대성인은 어린 시절의 스승이었던 조켄보와 기조보가 이제 대성인의 법문에 귀의한 것을 이 고사에 견주셨다.
법문을 묻고 문헌을 빌려 드리다
조켄보는 몸은 세이초사에 있었으나 마음으로는 깊이 대성인에게 귀의해, 자주 법의(法義)에 관해 가르침을 청했다. 그래서 그는 본존론과 삼대비법이라는 깊은 법문을 펼친 「보은초」와 본존문답초를 받았고, 본존문답초를 받기 두 해 전인 건치 2년(1276) 7월에는 대성인으로부터 어본존을 수여받았다.
御本尊図して進候
어본존을 그려 드리옵니다.
기조보도 마찬가지였다. 사도 유배 중인 문영 10년(1273) 5월 28일 기조보에게 주신 「기조보어서」의 첫머리에는 「법문에 관한 일, 자세히 받아 보았노라」라는 말이 있어, 기조보가 대성인에게 법문에 관한 질문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御法門の事委しく承はり候い畢んぬ
법문의 일은 자세히 받아 들었노라.
대성인이 미노부에 계시던 건치 2년(1276)의 「세이초사대중중」에서는, 미노부에 참배할 기회가 있으면 절 안의 이세코(伊勢公)에게서 진언의 논소를 빌려 오고, 『마하지관』과 천태의 주석서도 빌려 달라고 부탁하셨다.
去年来らず如何定めて子細有らんか、抑参詣を企て候わば伊勢公の御房に十住心論・秘蔵宝鑰二教論等の真言の疏を借用候へ、是くの如きは真言師蜂起の故に之を申す、又止観の第一・第二・御随身候へ東春・輔正記なんどや候らん、円智房の御弟子に 観智房の持ちて候なる宗要集かしたび候へ
지난해에는 오지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가, 필시 사정이 있었으리라. 무릇 참배를 꾀한다면 이세코 스님에게서 『십주심론』 · 『비장보약』 · 『이교론』 등 진언의 소를 빌려 오시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진언사들이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니라. 또 『지관』 제1 · 제2권을 지니고 오시라. 『동춘』이나 『보정기』 같은 것도 있으리라. 엔치보의 제자 간치보가 가지고 있다는 『종요집』도 빌려 주시라.
이 부탁에는 사정이 있었다. 그 전해 말에 진언승 고닌(強仁)과의 응수가 있었고, 진언승들이 들고일어나 법론 · 대결이 벌어지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대성인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천태와 진언의 해석문 · 논소를 모으고 계셨던 것이다. 이 글들로 보아 조켄보와 기조보는 사도에 계신 대성인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대성인이 미노부에 들어가신 뒤에도 미노부에 참배하거나 세이초사에 있는 문헌을 빌려 드리는 등 여러 편의를 도모했음이 분명하다.
도젠보의 죽음과 「보은초」의 낭독
대성인과 조켄보의 인연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건치 2년(1276) 3월 스승 도젠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켄보가 맡은 역할이다. 대성인은 「보은초 송문」에서, 자신이 곧장 찾아가고 이 스님도 바로 보내야 하겠으나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남의 눈에는 은둔한 사람처럼 보이는 몸이라 이 산을 나서지 못한다는 심정을 말씀하셨다.
自身早早と参上し此の御房をも・やがてつかはすべきにて候しが自身は内心は存ぜずといへども人目には遁世のやうに見えて候へばなにとなく此の山を出でず候
내 몸이 서둘러 찾아뵙고 이 스님도 곧 보내야 할 것이었으나, 나 자신은 속으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지만 남의 눈에는 세상을 등진 것처럼 보이므로 아무래도 이 산을 나서지 못하고 있노라.
그러면서 대성인은 제자 민부 니코(民部日向)를 읽는 사람으로 삼아, 가사가모리(嵩が森) 꼭대기에서 두세 번, 그리고 돌아가신 도젠보의 묘 앞에서 한 번 「보은초」를 읽게 하라고 조켄보와 기조보에게 지시하셨다.
御まへと義成房と二人・此の御房をよみてとして嵩がもりの頂にて二三遍・又故道善御房の御はかにて一遍よませさせ給いては 此の御房にあづけさせ給いてつねに御聴聞候へ
그대와 기조보 두 사람이 이 스님을 읽는 사람으로 삼아 가사가모리 꼭대기에서 두세 번, 또 돌아가신 도젠 스님의 묘에서 한 번 읽게 하신 뒤에는, 이 스님에게 맡겨 두시고 늘 들으시라.
조켄보와 기조보는 지시대로 「보은초」를 읽어 도젠보를 회향했다. 대성인은 이를 크게 기뻐하시어, 도젠보가 세상을 떠난 지 두 해 뒤인 홍안 원년(1278) 4월의 「화과성취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さては建治の比・故道善房聖人のために二札かきつかはし奉り候を嵩が森にてよませ給いて候よし悦び入つて候
그런데 건치 무렵 돌아가신 도젠보 성인을 위해 두 통의 글을 써서 보내 드린 것을 가사가모리에서 읽으셨다는 소식, 참으로 기쁘게 여기노라.
여기서 「두 통의 글(二札)」은 「보은초」 상 · 하 두 권을 가리킨다.

도젠보가 세상을 떠난 뒤 조켄보는 세이초사에서 중심적인 자리에 선 것으로 보인다. 「보은초 송문」의 받는 이 표기에서 대성인이 그를 「기요스미 스님(清澄御房)」이라 부르셨기 때문이다. 또 「벳토보답서」에서 대성인은 세이초사의 주승으로 보이는 쇼미쓰보(聖密房)에게 보낸 글을 「모여서 함께 들으시라」고 지시하셨다.
よりあいて.きかせ給い候へ
모여 앉아 함께 들으시라.
여기서 「벳토 스님(別当御坊)」은 세이초사의 주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이 조켄보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조켄보가 세이초사의 벳토(別当)였다는 설도 성립한다.
조켄보가 세이초사의 벳토였다는 견해는 「벳토보답서」가 조켄보에게 주어졌다고 볼 때 생겨나는 하나의 설일 뿐, 단정할 수는 없다.
두 해 전의 「보은초」와 수여된 어본존
앞에서 본 것처럼, 본존문답초를 쓰시기 두 해 전인 건치 2년(1276) 7월, 대성인은 돌아가신 도젠보의 추선 공양을 위해 「보은초」를 써서 조켄보와 기조보에게 보내셨다. 그와 함께 조켄보에게는 어본존을 수여하셨다.
본존문답초는 첫머리를 이렇게 연다.
問うて云く末代悪世の凡夫は何物を以て本尊と定むべきや、答えて云く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
물어 이르되,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으로써 본존을 정해야 하는가. 답하여 이르되,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이 문답의 형식으로 보아, 본존문답초는 어본존에 관한 조켄보의 질문에 대성인이 답하시는 뜻으로 쓰인 글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배경에는 「보은초」의 내용이 깊이 얽혀 있다고 보인다.
「보은초」의 본존 문
「보은초」는 정법 · 상법 · 말법에 걸쳐 법이 넓혀지는 차례를 밝히는 가운데 말법의 삼대비법을 드러내는데, 그 첫째인 본문의 본존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다.
日本・乃至一閻浮提・一同に本門の教主釈尊を本尊とすべし、所謂宝塔の内の釈迦多宝・外の諸仏・並に上行等の四菩薩脇士となるべし
일본 내지 일염부제가 한결같이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을지니라.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보탑 밖의 제불, 아울러 상행 등의 사보살은 협사(脇士)가 될지니라.
이 구절에서 「본존으로 삼으라」 하신 「본문의 교주 석존」과, 「협사가 되리라」 하신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가 어떤 관계인가 —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대성인 입멸 뒤 다른 문류(門流)들은 이 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릇된 해석에 빠졌다. 그 혼란은 「교주 석존」이라고 하면 문상(文上)의 석존, 곧 인도에 출현한 석존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
조켄보의 두 가지 물음
그렇다면 조켄보도 「보은초」의 이 가르침과 자신이 수여받은 어본존의 상모를 나란히 놓고 당연히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조켄보의 의문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물음 ①「보은초」에는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으라」고 하셨는데, 왜 수여받은 어본존의 중심은 석존이 아니라 「남묘호렌게쿄」로 쓰여 있는가
- 물음 ②왜 「본문의 교주 석존」과 별도로 협사인 「보탑 안의 석가」가 있는가
예로부터 본존이라고 하면 목상이나 화상이 일반적이었고, 부처, 곧 사람을 본존으로 모시는 것이 통념이었다. 조켄보도 아마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본존관에서는, 남묘호렌게쿄라는 법을 본존으로 삼은 어본존은 붙잡기 어려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남묘호렌게쿄에 대해서도, 법화경 28품의 제호(題號)로서 또는 수행으로 부르는 제목으로서의 이해는 있었겠지만,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라는 이해에는 이르지 못했으리라고 추찰된다.
「본문의 교주 석존」에 대해서도 조켄보는 「사람 = 석존」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였을 것이고, 「본문의 교주 석존 = 남묘호렌게쿄」라는 인법일개(人法一箇)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존문답초는 조켄보의 이 의문들에 답하는 것을 첫째 목적으로 삼은 글이다.
또 하나의 주제 — 몽골의 그림자와 진언의 조복
그러나 본존문답초의 저술 동기를 조켄보의 의문에 대한 답, 곧 어본존을 교리의 면에서 설명하신 글로만 받아들이면 이 글의 후반부를 충분히 읽어 낼 수 없다. 본존문답초가 진언 밀교에 대한 엄한 비판을 또 하나의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문영 11년(1274)에 쳐들어왔다가 물러간 몽골은 다시 일본을 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강한 위기감 속에서 일본은 조정도 막부도 함께 나서서 진언사들에게 적국 조복의 기도를 성대히 행하게 하고 있었다. 본존문답초는 승구의 난과 평가의 멸망이라는 역사의 사실을 현증으로 들어, 진언이 나라를 망치는 그릇된 법임을 지적한다.
이렇게 보면 본존문답초의 두 주제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본존으로 삼는가 하는 물음은, 당시 일본에서 실제로 무엇이 본존으로 모셔지고 어떤 법으로 기도가 행해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곧바로 이어진다. 법을 본존으로 세우는 일은,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세우고 대일여래의 인(印)과 진언으로 불상을 개안하는 당시의 관행을 근본에서 되묻는 일이기도 했다.
본존문답초는 두 겹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보은초」의 본존 문과 수여된 어본존의 상모를 두고 조켄보가 품었을 의문에 대한 답이고, 다른 하나는 몽골의 재침을 앞두고 조정과 막부가 의지하던 진언의 조복 기도에 대한 비판이다. 이 두 겹이 「법을 본존으로 삼는다」는 한 논지로 묶인다.
물음에서 출발해 미증유의 본존으로
본존문답초는 「보은초」에 밝히신 본문의 본존에 관한 조켄보의 질문을 계기로 쓰였다고 생각되지만, 그 내용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성인이 친히 나타내시는 미증유의 대만다라 본존을 말법에 넓히신다는 선언으로 끝맺는다. 이 글의 논지는 크게 다섯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아래에서 이 다섯 논지를 차례로 살핀다.
첫째 — 법의 본존, 그리고 「법화경의 행자」
첫째 논지는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법본존(法本尊)의 제시다. 이것은 일왕(一往)으로는 조켄보의 의문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재왕(再往)으로는 「법」을 본존으로 삼는 것이 불교 본래의 모습임을 보이신 것이며, 이 관점에서 당시 불상을 본존으로 삼던 다른 종파, 그 가운데서도 진언종을 파절하신다.
그런데 본존문답초에서 「법화경의 제목」으로 제시된 이 법본존이 말법의 「인본존(人本尊)」과 깊이 얽혀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대성인은 제3장에서 먼저 문상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 것은 법화경의 바른 뜻이 아니라고 하셨다.
此れは法華経の教主を本尊とす法華経の正意にはあらず
이것은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삼은 것이니 법화경의 바른 뜻이 아니니라.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上に挙ぐる所の本尊は釈迦・多宝・十方の諸仏の御本尊・法華経の行者の正意なり。
위에 든 본존은 석가 · 다보 · 시방 제불의 어본존이요,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이니라.
곧 「법화경의 제목」인 묘법연화경이야말로 석가 · 다보와 시방의 제불이 본존으로 삼은 것이며, 바로 거기에 법화경의 행자가 있다는 말씀이다. 앞 구절은 「법화경의 교주」를 본존으로 삼는 잘못을 지적하고, 법을 본존으로 세우는 것이 법화경의 바른 뜻이라고 하신다. 뒤 구절은 법화경의 제목이야말로 일체의 부처가 본존으로 삼은 것이며, 거기에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이 있다고 하신다. 대성인이 굳이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이라고 하신 데 중요한 시사가 있다.
「법화경의 행자」가 대성인 자신임은 분명하다. 「법화경의 교주」와 구별해 「법화경의 행자」를 말씀하신 것은,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뒤에 말법 하종(下種)의 교주를 밝히시기 위한 복선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는 것이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이라는 말씀에는, 법화경의 행자야말로 말법의 일체중생을 성불의 대도로 이끄는 스승이며 사람의 본존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둘째 — 「뛰어난 것」과 「능생」
둘째로, 말법의 본존을 밝히시면서 대성인은 두 가지 기준을 세우신다.
本尊とは勝れたるを用うべし
본존이란 뛰어난 것을 써야 하느니라.
故に今能生を以て本尊とするなり
그러므로 이제 능생(能生)으로써 본존으로 삼느니라.
「본존이란 뛰어난 것을 써야 한다」는 것은, 「본존」이라는 말 자체가 근본으로 존숭하는 대상을 뜻하므로 더 존귀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의미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존극(尊極)의 중생」인 부처를 낳은 당체, 곧 모든 부처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부처가 된 근원이야말로 지존이라 해야 한다. 그래서 「능생으로써 본존으로 삼는다」고 하시어, 석존을 낳은 제불 능생의 근원인 법화경을 본존으로 삼아야 함을 보이신 것이다.
본래 경권, 곧 법을 중심으로 삼아야 하며 불상 등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석존도 천태대사도 분명히 말한, 불도 수행의 근본 원리였다. 그러나 법 그 자체를 직접 깨닫는 것은 범부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석존 자신도 대승경전에서 대일 · 아미타 같은 부처를 방편으로 설했다. 천태대사 등도 이를 이어받아, 깨달음을 향한 도중의 수행을 돕는 방편으로 아미타불이나 칠불 · 팔보살 등을 썼다. 그러나 성불의 근본으로는 어디까지나 일념삼천의 관념관법(観念観法)을 설했다.
곧 부처를 부처이게 한 것은 언제나 법이다. 이것을 능생 · 소생(所生)의 관계로 말하면 부처는 소생이요 법은 능생이다. 이 대비에서 법이 뛰어나고 부처가 못하므로, 능생인 법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셋째 — 글 전체를 꿰뚫는 진언 파절
셋째 논지인 진언 파절은 본존문답초의 거의 전체를 꿰뚫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성인 본회의 본존을 건립하시는 데 진언종의 파절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대성인은 특히 사도 유배 이후 여러 어서에서 진언종을 파절하셨고, 본존문답초를 쓰실 무렵에는 내용 면에서는 거의 다 말씀하신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 다시 진언을 다루신 까닭은, 이 글의 안목이 말법에 세워야 할 본존의 바른 의의를 밝히는 데 있기 때문이다. 본존의 뜻을 견주는 데서, 특히 본문의 본존을 선언하시는 전제로서, 대일법신여래를 본존으로 세우는 진언종의 그릇된 뜻을 파절하신 것이다.
넷째 — 대성인의 사적과 법화경의 행자
넷째로, 법화경 제목의 어본존을 나타내고 넓히는 사람인 대성인 자신의 사적을 말씀하시고, 승구의 난 등 진언 망국의 현증을 다시 드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성인이야말로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며, 곧 인본존이심을 밝히신다.
이로써, 입종 이래의 염불 · 선 등 당시 일본 여러 종파에 대한 파절이 실은 입종 이전에 이미 법화경의 극의를 체득하신 위에서의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요스미에서 수학하실 때 대성인은 「일본 제일의 지자가 되게 해 주소서」라는 서원을 세우셨다.
日本第一の智者となし給へ
일본 제일의 지자(智者)가 되게 해 주소서.
그 소원을 이루신 위에서 하신 파절이었고, 「입정안국론」의 예언이 적중한 것은 그 바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또 대성인은 여러 종파를 파절하고 국주를 간효하심으로써 삼류의 강적을 불러일으키셨고, 문영 8년(1271) 9월 12일 다쓰노구치(龍口) 참수의 자리에서 발적현본(発迹顕本)하시어 말법 어본불의 내증을 드러내셨다. 본존문답초에서 대성인 자신의 사적을 말씀하신 것은 이런 일들을 밝히시기 위해서라고 읽을 수 있다.
다섯째 — 미증유의 본존을 건립할 때
마지막 다섯째로, 미증유의 대법이므로 그 법을 넓히는 사람도 미증유의 사람임을 다 말씀하신 뒤, 그 미증유의 대법인 어본존을 건립해야 할 때를 보이신다.
此の御本尊は世尊説きおかせ給いて後二千二百三十余年が間・一閻浮提の内にいまだひろめたる人候はず
이 어본존은 세존께서 설해 두신 뒤 이천이백삼십여 년 동안 일염부제 안에 아직 넓힌 사람이 없느니라.
이 「이천이백삼십여 년」이라는 수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니치칸 상인은 해석하셨다. 다음 섹션에서 그 해석을 살핀다.
홍안 원년은 불멸 후 2227년
본존문답초를 쓰신 홍안 원년(1278)은 대성인의 셈으로 불멸 후 2227년에 해당한다. 건치 2년(1276)의 「보은초」에는 「불멸 후 2225년」이라 적으셨고, 홍안 원년의 어서에서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지 이미 2227년」이라 하셨다.
仏滅後・二千二百二十五年
불멸 후 2225년
仏・御入滅ありては既に二千二百二十七年なり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로 이미 2227년이니라.
그런데 본존문답초에서는 「세존께서 설해 두신 뒤 이천이백삼십여 년」이라고 하셨다. 2227년이라면 「이천이백이십여 년」이라 해야 할 것인데, 왜 「삼십여 년」인가. 대성인은 홍안 원년 이후의 여러 어서에서 이처럼 「이천이백삼십여 년」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니치칸 상인의 해석 — 수량품 설법의 해부터
니치칸 상인은 이 물음을 정면으로 다루어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다.
問う、弘安元年は正しく仏滅後二千二百二十七年に当る。蓮祖何ぞ三十余年というや。答う、恐らくは深意あらんか。宗祖云く『今此の御本尊は(乃至)寿量品に説き顕し』等云云。然るに寿量品御説法の年より弘安元年に至るまで、正しく二千二百三十一年に当るなり。
묻는다. 홍안 원년은 바로 불멸 후 2227년에 해당한다. 연조(蓮祖)께서는 어찌 「삼십여 년」이라 하셨는가. 답한다. 아마 깊은 뜻이 있으리라. 종조께서 「지금 이 어본존은 (내지) 수량품에서 설해 드러내고」 등이라 하셨다. 그런데 수량품을 설법하신 해부터 홍안 원년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2231년에 해당하느니라.
니치칸 상인에 따르면 「이천이백삼십여 년」이라는 표시는 불멸의 해부터 센 것이 아니라, 석존 교화의 구경(究竟)에 해당하는 본문 수량품이 설해진 때부터 센 것이다. 그 셈법을 니치칸 상인은 문단(文段)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如来七十二歳より八年間の間に二十八品を説く。故に知らんぬ、一年に三品半を説きたまうことを。故に七十六の御時、正しく寿量品を説くなり。而して七十七の御歳、神力品を説いて本化に付嘱して、四年後の八十歳の御入滅なり。如来の御歳八十歳、御入滅の年より弘安元年に至るまで二千二百二十七年なり。これに七十六・七・八・九の四年を加うる則は二千二百三十一年と成るなり
여래는 72세부터 8년 동안 28품을 설하셨다. 그러므로 한 해에 세 품 반을 설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76세 때 바로 수량품을 설하셨다. 그리고 77세에 신력품을 설하여 본화(本化)에게 부촉하시고, 4년 뒤인 80세에 입멸하셨다. 여래의 나이 80세, 입멸하신 해부터 홍안 원년에 이르기까지가 2227년이다. 여기에 76 · 77 · 78 · 79세의 4년을 더하면 2231년이 되느니라.
- ① 72세여래 72세부터 8년 동안 법화경 28품을 설함→ 한 해에 세 품 반
- ② 76세여래수량품을 설함
- ③ 77세여래신력품을 설해 본화(지용보살)에게 부촉
- ④ 80세입멸
이처럼 불멸보다 4년 거슬러 올라간 수량품 설법 때부터 세면, 홍안 원년의 시점에서 2227년에 4년을 더해 2231년이 되고, 그래서 「이천이백삼십여 년」이라 하신 것이라고 니치칸 상인은 결론지으셨다. 여기서 「삼십여 년」은 단순한 어림수가 아니라, 대성인이 나타내시는 어본존이 석존 일대의 어느 대목에서 비롯되는지를 가리키는 표지가 된다. 곧 이 어본존은 수량품에서 설해 드러나고 신력품에서 상행보살에게 부촉된 법이라는 것이다.
「신니부인답서」의 증문
니치칸 상인은 이 수량품 기산의 근거가 되는 글로, 본존문답초의 앞 구절과 함께 「신니부인답서」의 한 대목을 줄여서 인용하셨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今此の御本尊は教主釈尊・五百塵点劫より心中にをさめさせ給いて世に出現せさせ給いても四十余年・其の後又法華経の中にも迹門はせすぎて宝塔品より事をこりて寿量品に説き顕し神力品・属累に事極りて候いし
지금 이 어본존은 교주 석존께서 오백진점겁 이래 마음속에 간직해 두시고, 세상에 출현하셔서도 사십여 년, 그 뒤 또 법화경 가운데서도 적문은 지나치고 보탑품에서 일이 일어나 수량품에서 설해 드러내고, 신력품 · 촉루품에서 일이 다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석존이 법화경 본문 수량품에서 성불의 근원인 법을 설해 드러내고, 신력품에서 이 법을 지용보살의 상수(上首)인 상행보살에게 부촉했음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본존문답초의 「이 어본존은 세존께서 설해 두신 뒤 이천이백삼십여 년 동안」이라는 구절은 니치칸 상인의 이 설명이 바름을 정확히 뒷받침한다. 「설해 두신(説きおかせ給いて)」이라는 표현 자체가 입멸의 해가 아니라 설법의 때를 기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불멸 연대를 주(周) 목왕(穆王) 52년(기원전 949년)으로 보는 당시의 통설에 따라 셈하셨다. 본존문답초의 「이천이백삼십여 년」, 「보은초」의 「2225년」, 「묘호비구니답서」의 「2227년」은 모두 이 통설 위에서의 셈이다.
본존문답초의 원의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본존문답초의 원의(元意)는 대성인이 친히 나타내신 대만다라 어본존이야말로 말법의 일체중생이 귀의하고 신앙해야 할 본존임을 선언하시는 데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니치렌 대성인이 말법에 출현하신 목적은 일체중생을 성불시키는 데 있으며, 그 근원으로서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건립하셨다. 그런데 이 삼대비법에 대해서는 대성인의 전체 어서 가운데서도 겨우 몇 편에서만 언급하셨고, 그나마 대부분은 명목만 적으셨을 뿐이다.
엄히 비밀로 하라 하신 법문
삼비(三秘) 모두에 걸쳐 내용을 보이신 것은 입멸하신 해인 홍안 5년(1282)의 저술로 여겨지는 「삼대비법품승사」 하나뿐이다. 더구나 그 끝에서 대성인은 이 글을 엄히 비밀로 하라고 훈계하셨다.
予年来己心に秘すと雖も此の法門を書き付て留め置ずんば門家の遺弟等定めて無慈悲の讒言を加う可し、其の後は何と悔ゆとも叶うまじきと存ずる間貴辺に対し書き送り候、一見の後・秘して他見有る可からず口外も詮無し
내가 여러 해 동안 기심(己心)에 감추어 왔으나, 이 법문을 적어 남겨 두지 않으면 문하의 남은 제자들이 반드시 무자비한 참언을 더할 것이다. 그 뒤에는 아무리 뉘우쳐도 소용없으리라 여기므로 귀변에게 적어 보내노라. 한번 본 뒤에는 감추어 남에게 보이지 말라. 입 밖에 내는 것도 소용없느니라.
이것으로 보아도 삼대비법이 대성인 일대의 교화에서 얼마나 큰일 가운데 큰일인 법문인지를 알 수 있다.
조켄보 · 기조보에게 보이신 삼대비법의 일단
그런데 본존문답초를 받은 조켄보에게 대성인은 이미 건치 2년(1276)의 「보은초」에서 삼대비법의 일단을 가르쳐 두셨다.
一には日本・乃至一閻浮提・一同に本門の教主釈尊を本尊とすべし、所謂宝塔の内の釈迦多宝・外の諸仏・並に上行等の四菩薩脇士となるべし、二には本門の戒壇、三には日本・乃至漢土・月氏・一閻浮提に人ごとに有智無智をきらはず一同に他事をすて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べし
첫째는 일본 내지 일염부제가 한결같이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을지니라.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밖의 제불, 아울러 상행 등의 사보살은 협사가 될지니라. 둘째는 본문의 계단이요, 셋째는 일본 내지 한토 · 월지 · 일염부제에 사람마다 지혜가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른 일을 버리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를지니라.
또 이보다 3년 앞선 문영 10년(1273) 5월, 기조보에게 주신 「기조보어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日蓮が己心の仏界を此の文に依つて顕はすなり、其の故は寿量品の事の一念三千の三大秘法を成就せる事・此の経文なり秘す可し秘す可し
니치렌의 기심의 불계를 이 글에 의해 드러내느니라. 그 까닭은 수량품의 사(事)의 일념삼천인 삼대비법을 성취한 것이 이 경문이기 때문이니라. 감추어라, 감추어라.
삼대비법의 명목 하나하나는 이듬해인 문영 11년(1274) 정월의 「법화행자봉난사」에서 「본문의 본존과 사보살과 계단과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라는 표현으로 처음 밝혀진다.
本門の本尊と四菩薩と戒壇と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
본문의 본존과 사보살과 계단과 남묘호렌게쿄의 오자
그리고 삼대비법의 명목이 정식으로 명시되는 것은 미노부에 들어가신 직후의 「법화취요초」가 처음이다.
- 문영 10년(1273) 5월「기조보어서」(892쪽)기요스미「수량품의 사의 일념삼천인 삼대비법」「寿量品の事の一念三千の三大秘法」기조보에게
- 문영 11년(1274) 정월「법화행자봉난사」(965쪽)「본문의 본존과 사보살과 계단과 남묘호렌게쿄의 오자」「本門の本尊と四菩薩と戒壇と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명목이 처음 드러남
- 문영 11년(1274)「법화취요초」삼대비법의 명목을 처음 정식으로 명시
- 건치 2년(1276) 7월「보은초」(328쪽)기요스미본문의 본존 · 본문의 계단 · 제목의 일단을 조켄보 · 기조보에게
- 홍안 원년(1278) 9월「본존문답초」(365쪽)기요스미「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하느니라」「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조켄보에게
- 홍안 5년(1282)「삼대비법품승사」(1023쪽)삼비 모두의 내용을 보이고 엄비를 훈계
이처럼 「보은초」와 「기조보어서」에서 대성인 일생의 큰일인 삼대비법을 언급하셨다는 데서, 세이초사에 있던 대성인 유연(有縁)의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조켄보와 기조보에 대한 대성인의 깊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도키조닌의 질문 — 「어느 때인가」
대성인 문하의 유력자로 여러 중요한 어서를 받은 도키조닌이나 시조깅고 같은 사람들조차, 「본존」이나 「말법의 어본불」 같은 대성인의 내증에 관한 깊은 법문을 반드시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도키조닌은 법본존 개현의 글인 「관심의 본존초」라는 중요한 어서를 받아 그 안에서 말법 어본존의 상모를 읽었을 것이고, 더구나 당시는 이미 대성인이 어본존을 나타내어 제자 문하에게 수여하시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는 홍안 2년(1279)의 시점에서 대성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렸다.
本門久成の教主釈尊を造り奉り脇士には久成地涌の四菩薩を造立し奉るべしと兼て聴聞仕り候いき、然れば聴聞の如くんば何の時かと
본문 구성(久成)의 교주 석존을 조성해 모시고, 협사로는 구성 지용의 사보살을 조립해 모셔야 한다고 일찍이 들었사옵니다. 그렇다면 들은 대로라면 그때는 어느 때이옵니까.
곧 말법에는 본문의 교주와 본화의 사보살을 조립해야 한다고 일찍이 들었는데, 그 조립의 때는 언제냐는 질문이다. 「보은초」의 본존 문을 두고 조켄보가 품었으리라 추정되는 의문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물음이다.
오노승의 석가상 본존과 닛코 상인
이것은 당시 일반 문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대성인 입멸 뒤 닛코 상인을 제외한 다섯 노승(五老僧)도 같은 정도의 이해에 머물렀다. 닛코 상인은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에 오노승의 본존관을 이렇게 적으셨다.
一、五人一同に云く、本尊に於ては釈迦如来を崇め奉る可しとて既に立てたり、随つて弟子檀那等の中にも造立供養の御書之れ在りと云云、而る間・盛に堂舎を造り或は一躰を安置し或は普賢文殊を脇士とす、仍つて聖人御筆本尊に於ては彼の仏像の後面に懸け奉り又は堂舎の廊に之を捨て置く
- 다섯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본존은 석가여래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 하여 이미 세웠다. 그리하여 제자 · 단나 가운데에도 조립 공양의 어서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대히 당사(堂舎)를 짓고, 혹은 불상 한 구를 안치하고, 혹은 보현 · 문수를 협사로 삼는다. 그리하여 성인 친필의 본존은 그 불상의 뒷면에 걸거나 또는 당사의 복도에 버려 둔다.
이 글은 대성인 입멸 뒤 오노승의 행태를 닛코 상인이 기록하신 것으로, 본존의 뜻에 관한 오노승의 미혹을 생생히 보여 준다. 이에 대해 닛코 상인은 바로 이어서 대성인 정의의 본존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日興が云く、聖人御立の法門に於ては全く絵像・木像の仏・菩薩を以て本尊と為さず、唯御書の意に任せて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本尊と為す可しと即ち御自筆の本尊是なり
닛코가 말하기를, 성인께서 세우신 법문에서는 결코 화상 · 목상의 불 · 보살을 본존으로 삼지 않는다. 오직 어서의 뜻에 따라 묘법연화경의 오자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 곧 친필의 본존이 이것이다.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보면, 본존문답초는 이 닛코 상인의 바름을 뒷받침하는 글이다.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첫머리의 답과, 「묘법연화경의 오자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닛코 상인의 말씀은 한 줄로 이어진다.
- 도키조닌의 질문「사보살조립초」, 987쪽「본문 구성의 교주 석존을 조성해 모시고 협사로 구성 지용의 사보살을 조립해야 한다고 들었다 — 그때는 언제인가」「本門久成の教主釈尊を造り奉り脇士には久成地涌の四菩薩を造立し奉るべしと兼て聴聞仕り候いき」
- 오노승「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5쪽「본존은 석가여래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本尊に於ては釈迦如来を崇め奉る可し」불상을 안치하고 친필 본존은 불상 뒤에 걸거나 복도에 둠
- 닛코 상인같은 글, 1606쪽「화상 · 목상의 불 · 보살을 본존으로 삼지 않는다 … 묘법연화경의 오자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全く絵像・木像の仏・菩薩を以て本尊と為さず、唯御書の意に任せて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本尊と為す可し」
- 본존문답초365쪽「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하느니라」「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
상행보살의 재탄
「삼대비법품승사」에서 대성인은 이 법문의 유래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此の三大秘法は二千余年の当初・地涌千界の上首として日蓮慥かに教主大覚世尊より口決相承せしなり
이 삼대비법은 이천여 년 전 그 옛날, 지용천계의 상수로서 니치렌이 분명히 교주 대각세존으로부터 구결로 이어받은 것이니라.
이것은 대성인의 내증에 관한,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법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제자 문하에게도 쉽게 밝히지 않으셨다. 그런 가운데 닛코 상인은 「오인소파초」에서 대성인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어, 대성인 내증의 경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계셨음을 보이셨다.
日蓮聖人は忝くも上行菩薩の再誕にして本門弘経の大権なり
니치렌 성인은 황송하게도 상행보살의 재탄으로서 본문 홍경(弘経)의 대권(大権)이시다.
출세의 본회 — 홍안 2년의 대어본존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니치렌 대성인이 세우신 말법의 대백법(大白法)은 홍안 2년(1279) 10월 12일에 나타내신 본문 계단의 대어본존에 다한다. 대성인 스스로 「출세의 본회」라고 하신 것이 이 대어본존이며, 그 근거로 「성인어난사」의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此の法門申しはじめて今に二十七年・弘安二年太歳己卯なり、仏は四十余年・天台大師は三十余年・伝教大師は二十余年に出世の本懐を遂げ給う、其中の大難申す計りなし先先に申すがごとし、余は二十七年なり其の間の大難は各各かつしろしめせり
이 법문을 말하기 시작한 지 이제 27년, 홍안 2년 기묘(己卯)이니라. 부처님은 사십여 년, 천태대사는 삼십여 년, 전교대사는 이십여 년 만에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다. 그 사이의 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이 앞서 말한 바와 같으니라. 나는 27년이니라. 그동안의 대난은 각각 잘 아시는 바이니라.
대성인은 다쓰노구치 법난 이후 남묘호렌게쿄의 만다라 본존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 어본존들은 「일기일연(一機一縁)」의 어본존이라 불리듯 개개의 문하에게 수여하신 것이며, 아직 말법의 일체중생을 위해 그 신앙의 대상으로 나타내신 것은 아니었다. 홍안 2년의 대어본존이야말로 말법의 일체중생을 위해 나타내신 어본존이다.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보면, 본존문답초는 대성인이 나타내신 대만다라 어본존이야말로 말법의 어본존임을 원의로 보이는 글이며, 닛코 상인이 대성인의 많은 어서 가운데 이 글을 십대부의 하나로 꼽으신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 글로 대성인은 앞에서 본 당시 문하의 본존에 대한 미혹을 깨뜨리시고, 나아가 일체중생이 대성인의 불법을 바르게 받들어 신앙해 갈 수 있는 법문을 보이셨다.
대성인 입멸 뒤 「니치렌종」이라 칭하며 대성인의 이름을 종명으로 삼은 종파가 많이 나타났지만,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오노승의 그릇된 법문 이해를 근본으로 삼아 석존을 본존으로 삼아 왔다. 본존문답초는 대성인의 정의를 밝히신 글이므로, 이 글을 바르게 읽으면 그 본존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가 분명해진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본존문답초의 원의를, 대성인이 친히 나타내신 인법일개의 대만다라 어본존이 말법 일체중생의 본존이라는 선언으로 읽는다. 「보은초」에서 이미 삼대비법의 일단을 받은 조켄보에게 이 글이 주어졌다는 사실, 도키조닌과 오노승의 이해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닛코 상인만이 「묘법연화경의 오자로써 본존으로 삼는다」고 분명히 하셨다는 사실이 이 읽기를 떠받친다.
세 실마리
본존문답초의 원의를 본문의 내용과 맞대어 보기 위해 세 실마리를 세운다. 첫째는 「법화경의 제목」이라는 말의 깊은 뜻, 둘째는 「보은초」의 본존 문과의 관계, 셋째는 진언 파절과의 관계다.
법화경의 제목 — 일체경의 신(神)이요 안목
대성인은 본존문답초에서 말법에는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 「법화경의 제목」의 깊은 뜻은 여러 어서에서도 말씀하셨다. 먼저 홍안 2년(1279)의 「소야전답서」에는 이렇게 쓰셨다.
法華経の題目は一切経の神・一切経の眼目なり、大日経等の一切経をば法華経にてこそ開眼供養すべき処に大日経等を以て一切の木画の仏を開眼し候へば日本国の一切の寺塔の仏像等・形は仏に似れども心は仏にあらず九界の衆生の心なり、愚癡の者を智者とすること是より始まれり
법화경의 제목은 일체경의 신(神)이요 일체경의 안목이니라. 대일경 등 일체경을 법화경으로써 개안 공양해야 할 것인데, 대일경 등으로써 일체의 목상 · 화상의 부처를 개안하므로, 일본국 일체 사탑의 불상 등은 모습은 부처를 닮았으나 마음은 부처가 아니요 구계 중생의 마음이니라. 어리석은 자를 지자로 삼는 일이 여기서 비롯되었느니라.
법화경의 제목이 일체경의 신이요 안목이라는 것은, 여러 어서에서 보이셨듯이 법화경의 제목이야말로 일체경의 간심(肝心) · 간요(肝要)이며, 일체경의 극의가 법화경의 제목에 있음을 보이신 것이다. 이 구절은 뒤에서 볼 진언의 개안 공양 비판과도 그대로 이어진다.
「남묘호렌게쿄가 간심이다」 — 문심(文心)
본존문답초와 깊이 이어진 「보은초」에서는 법화경 28품 가운데 무엇이 간심인가를 묻고 이렇게 답하셨다.
疑つて云く二十八品の中に何か肝心ぞや、答えて云く或は云く品品皆事に随いて肝心なり、或は云く方便品・寿量品肝心なり、或は云く方便品肝心なり、或は云く寿量品肝心なり、或は云く開示悟入肝心なり、或は云く実相肝心なり。問うて云く汝が心如何答う南無妙法蓮華経肝心なり
의심하여 이르되, 28품 가운데 무엇이 간심인가. 답하여 이르되, 혹은 품마다 모두 일에 따라 간심이라 하고, 혹은 방편품 · 수량품이 간심이라 하고, 혹은 방편품이 간심이라 하고, 혹은 수량품이 간심이라 하고, 혹은 개시오입이 간심이라 하고, 혹은 실상이 간심이라 하느니라. 물어 이르되,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답하되, 남묘호렌게쿄가 간심이니라.
법화경 28품에는 저마다 큰일의 법문이 있지만 법화경 전체의 간심은 남묘호렌게쿄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이어서 대성인은 그 근거로 인사(人師) · 논사의 설을 드시는데, 그 가운데 장안대사의 「대개 서왕(序王)은 경의 현의(玄意)를 서술하고, 현의는 문심(文心)을 서술한다」라는 글은 여러 어서에 공통으로 자주 인용된다. 대성인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蓋し序王とは経の玄意を叙し玄意は文心を述す』等云云、 此の釈に文心とは題目は法華経の心なり妙楽大師云く『一代の教法を収むること法華の文心より出ず』等云云
「대개 서왕은 경의 현의를 서술하고 현의는 문심을 서술한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이 해석에서 문심이란, 제목은 법화경의 마음이라는 것이니라. 묘락대사는 「일대의 교법을 거두는 것이 법화의 문심에서 나온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곧 법화경의 제목은 법화경 28품의 「글(文)」도 아니고 「뜻(義)」도 아닌 「마음(心)」이라는 말씀이다. 니치칸 상인은 「보은초」 문단에서 「법화경의 마음」을 이렇게 풀이하셨다.
『法華経の心』とは本因所証の妙法なり
「법화경의 마음」이란 본인(本因)에서 증득한 묘법이니라.
여기서 「본인소증(本因所証)」이란, 구원 오백진점겁에 성도한 석존이 증득한 법을 「본과소증(本果所証)」이라 하는 데 대해,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여래가 증득한 법을 말한다. 본존문답초를 쓰시기 전해인 건치 3년(1277)의 「사신오품초」에서도 대성인은 같은 장안대사의 해석을 인용해 「보은초」와 같은 뜻을 말씀하셨다.
此の釈に文心とは題目は法華経の心なり
이 해석에서 문심이란, 제목은 법화경의 마음이라는 것이니라.
문 · 의 · 의 — 「문저비침초」의 풀이
니치칸 상인은 「문저비침초(文底秘沈抄)」에서 「사신오품초」의 이 구절을 인용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文は即ち一部の始終、能詮の文字なり。義は即ち所詮、迹本二門の所以なり、意は則ち二門の所以皆文底に期す、故に文底下種の妙法を以て一部の意と名づくるなり
문(文)은 곧 한 부 경의 처음과 끝, 능전(能詮)의 문자이다. 의(義)는 곧 소전(所詮)이니 적문 · 본문 두 문의 까닭이다. 의(意)는 곧 두 문의 까닭이 모두 문저(文底)에 기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저 하종의 묘법을 한 부 경의 의(意)라 이름하느니라.
곧 「문」은 법화경 28품의 경문 그 자체이고, 「의(義)」는 그것으로 보이는 본문 · 적문 두 문의 내용이다. 이에 대해 「의(意)」는 문저 하종의 남묘호렌게쿄라는 가르침이다.
- 문(文)한 부 경의 처음과 끝, 능전의 문자법화경 28품의 경문
- 의(義)소전, 적문 · 본문 두 문의 까닭경문이 보이는 본적 두 문의 내용
- 의(意)두 문의 까닭이 모두 문저에 기약함문저 하종의 남묘호렌게쿄「제목은 법화경의 마음」「題目は法華経の心なり」「보은초」 325쪽 · 「사신오품초」 342쪽
대성인은 소야(曾谷) 씨에게 보내신 글에서도 같은 장안대사의 글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所詮妙法蓮華経の五字をば当時の人人は名と計りと思へり、さにては候はず体なり体とは心にて候
결국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지금 사람들은 이름일 뿐이라고 여기느니라. 그렇지 않으니 체(體)이니라. 체란 마음이니라.
이 글들은 모두, 홍안 시기에 들어 대성인이 본회의 법문을 밝히시면서 대성인이 넓히시는 법화경 제목의 깊은 뜻을 보이신 것이다. 대성인이 법화경의 제목으로 보이시는 것을 단순한 법화경의 제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같은 소야 씨에게 보내신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南無妙法蓮華経と申すは一代の肝心たるのみならず法華経の心なり体なり所詮なり
남묘호렌게쿄라 하는 것은 일대의 간심일 뿐 아니라 법화경의 마음이요 체요 소전이니라.
이것은 문 · 의(義)에 대한 의(意)의 중요성을 보이신 것으로, 남묘호렌게쿄야말로 근본의 불의(仏意)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렇게 「문」 · 「의(義)」 · 「의(意)」의 구분에서 법화경 제목의 깊은 뜻을 밝히신 점에 주목하면, 대성인이 넓히시는 법화경의 제목은 「의(意)의 묘법연화경」이며, 바로 법화경의 간요인 문저 하종의 남묘호렌게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상행보살에게 부촉된 법
이 문저 하종의 남묘호렌게쿄를 석존은 법화경 여래신력품 제21에서 지용보살의 상수인 상행보살에게 부촉했다. 이것을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此の妙法蓮華経は釈尊の妙法には非ざるなり既に此の品の時上行菩薩に付属し給う故なり、惣じて妙法蓮華経を上行菩薩に付属し給う事は宝塔品の時事起り・寿量品の時事顕れ・神力属累の時事竟るなり
이 묘법연화경은 석존의 묘법이 아니니라. 이미 이 품에서 상행보살에게 부촉하셨기 때문이니라. 무릇 묘법연화경을 상행보살에게 부촉하신 일은 보탑품 때 일이 일어나고, 수량품 때 일이 드러나고, 신력 · 촉루품 때 일이 다하였느니라.
여기서 묘법연화경이 석존의 묘법이 아니라 상행보살이 지닌 법임이 분명하다. 곧 하종의 묘법은 석존이 지닌 것이 아니라 상행보살이 지닌 법이며, 상행보살의 재탄이신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말법에 이 하종의 묘법을 지니고 넓히신다. 「법화취요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까닭이다.
日蓮は広略を捨てて肝要を好む 所謂上行菩薩所伝の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
니치렌은 광(広) · 약(略)을 버리고 간요를 좋아하느니라. 이른바 상행보살이 전한 묘법연화경의 오자이니라.
앞의 「신니부인답서」의 「보탑품에서 일이 일어나 수량품에서 설해 드러내고 신력품 · 촉루품에서 일이 다하였다」는 구절과 『어의구전』의 이 구절은 같은 차례를 말한다. 「이천이백삼십여 년」이 수량품 설법 때부터 세어진다는 니치칸 상인의 해석은 이 부촉의 차례와 맞물려 있다.
「법화경의 제목」은 곧 대성인 — 인법일개
마지막으로 「법화경의 제목」에 인법일개의 뜻이 담겨 있음을 니치칸 상인의 「법화취요초」 문단으로 확인한다.
問う、本尊問答抄の意は、末大悪世の凡夫は但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為すべし等云云、若し爾らば、蓮祖を造立し仍本尊と為すべきか、如何。
答う、『法華経の題目』とは本地甚深の奥蔵、即ちこれ蓮祖聖人の御事なり。その故は蓮祖大聖人、我が身は即ち法華経の題目なりと知しめし、久遠元初の自受用報身と顕れたまえり、故に知んぬ。法に即して人、人に即して法、人法本これ体一なることを。故に『法華経の題目』とは、またこれ蓮祖聖人の御事なり묻는다. 본존문답초의 뜻은 「말대악세의 범부는 다만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 등이다. 그렇다면 연조를 조립해 모시고 그것을 본존으로 삼아야 하는가, 어떠한가. 답한다. 「법화경의 제목」이란 본지(本地)의 깊고 깊은 오장(奥蔵)이니 곧 연조 성인의 일이다. 그 까닭은 연조 대성인께서 내 몸이 곧 법화경의 제목이라고 아시고 구원원초의 자수용보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법에 즉하여 사람이요 사람에 즉하여 법이니, 사람과 법은 본래 체가 하나임을. 그러므로 「법화경의 제목」이란 또한 연조 성인의 일이니라.
곧 「법화경의 제목」은 부문(附文)의 면에서는 법의 본존을 가리키지만, 원의(元意)의 면에서는 인법일개의 본존을 뜻한다는 가르침이다. 제3장에서 「법화경의 교주」와 구별해 「법화경의 행자」를 말씀하신 복선이 여기서 드러난다.
「보은초」의 「본문의 교주 석존」
앞에서 말했듯이 본존문답초의 내용과 깊이 얽힌 것이 「보은초」의 다음 구절이다.
日本・乃至一閻浮提・一同に本門の教主釈尊を本尊とすべし、所謂宝塔の内の釈迦多宝・外の諸仏・並に上行等の四菩薩脇士となるべし
일본 내지 일염부제가 한결같이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을지니라.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밖의 제불, 아울러 상행 등의 사보살은 협사가 될지니라.
여기서는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으라」 하셨지만, 대성인이 나타내신 어본존의 중앙의 수제(首題)는 남묘호렌게쿄로 쓰여 있다. 그래서 조켄보의 의문이 생겼다고 생각되며, 대성인 입멸 뒤 니치렌종 여러 문류의 미혹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점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보은초」 문단에서 「교주 석존」에 여러 뜻이 있음을 보이신 뒤 대략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①표(標) · 인본존「본문의 교주 석존」은 표(標)의 글이니 인본존을 보인다
- ②석(釈) · 법본존「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등은 석(釈)의 글이니 법본존을 보인다
- ③결론인본존을 먼저 표시하고 법본존으로 이를 풀이하였으므로, 「본문의 교주 석존」은 인법체일(人法体一)의 구원원초 자수용보신 · 본인묘의 교주 석존을 밝힌 것이다
- ④결론본인묘의 교주 석존의 전체가 그대로 일념삼천의 법의 본존이므로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을지니라」 하셨다
- ⑤결론만일 색상장엄(色相荘厳)의 본문 재세의 교주 석존을 「본문의 교주 석존」이라 이름한다면, 인법의 우열은 이미 여러 어서에 보인 대로 분명하므로, 못한 인본존을 뛰어난 일념삼천의 법본존으로 풀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곧 「보은초」의 구절은 사람에 약(約)하여 본존의 체상(體相)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법으로써 사람을 풀이하셨다는 것은,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밖의 제불, 아울러 상행 등의 사보살은 협사가 될지니라」라고 밝히신 법본존의 상(相)이 그대로 「교주 석존」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인즉법의 본존과 법즉인의 본존
한편 본존문답초의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구절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관심의 본존초」 문단에서 요보사(要法寺) 니치신(日辰)의 그릇된 뜻을 파절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当に知るべし、日辰所引の諸抄の意は、並びにこれ人法体一の本尊なり。人法体一なりと雖も、而も人法宛然なり、故に或は人即法の本尊に約し、或は法即人の本尊に約するなり、当文及び本尊問答抄、当抄の下の文の『本門の本尊』、佐渡抄の『本門の本尊』の文は並びにこれ人即法の本尊なり。三大秘法抄、報恩抄等は法即人の本尊なり
마땅히 알라. 니치신이 인용한 여러 어서의 뜻은 모두 인법체일의 본존이다. 인법체일이라 하더라도 사람과 법은 엄연하다. 그러므로 혹은 인즉법(人即法)의 본존에 약하고, 혹은 법즉인(法即人)의 본존에 약한다. 이 글과 본존문답초, 이 어서 아래 글의 「본문의 본존」, 사도초의 「본문의 본존」의 글은 모두 인즉법의 본존이다. 삼대비법초 · 보은초 등은 법즉인의 본존이니라.
곧 본존문답초의 구절은 인법일개의 입장에서 인즉법의 본존을 보이신 것이고, 「보은초」의 구절은 같은 인법일개의 깊은 뜻 위에서 법즉인의 본존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두 어서의 표현은 달라도 그 참뜻은 인법일개의 본존이라는 가르침이다.
본존문답초에서 보이신 「법화경의 제목」은 사(事)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이며,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당체가 그대로 일념삼천의 남묘호렌게쿄임을 보이신 것이다. 또 「보은초」의 「본문의 교주 석존」은 구원원초 자수용신을 말씀하신 것으로, 사의 일념삼천이 곧 자수용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로써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두 어서의 본존에 관한 가르침은 그 원의에서 모두 대성인이 나타내신 인법일개의 대만다라를 밝히신 것이다.
진언 파절과 개안 공양
본존문답초는 진언 파절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글의 중심 과제가 말법에서 본존의 본뜻을 설하시는 데 있음은 이미 본 대로다. 곧 석존을 비롯해 아미타여래 · 대일여래 등 일체의 제불이 본존으로 삼은 「법화경의 제목」이야말로 본존으로 숭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능생인 묘법을 잊고 소생인 불보살을 본존으로 삼고 있었다. 더구나 그 불상에 「신(神)」을 넣는 의식에서 대일 불안(仏眼)의 인과 진언으로 개안 공양을 하고 있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것은 법화경이야말로 능생의 근원이라는 불설을 짓밟은 큰 방법(謗法)이며 본말이 뒤바뀐 일이다. 대성인은 본존문답초 제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此等の経文仏は所生・法華経は能生・仏は身なり法華経は神なり、然れば則ち木像画像の開眼供養は唯法華経にかぎるべし而るに今木画の二像をまうけて大日仏眼の印と真言とを以て開眼供養をなすはもとも逆なり。
이들 경문은 부처는 소생이요 법화경은 능생이며, 부처는 몸이요 법화경은 신(神)이라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목상 · 화상의 개안 공양은 오직 법화경에 한해야 하느니라. 그런데 지금 목상 · 화상 두 상을 만들어 놓고 대일 불안의 인과 진언으로써 개안 공양을 하는 것은 참으로 거꾸로 된 일이니라.
여기서 본존문답초에서의 진언 파절의 원의는,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삼는 뜻과의 대비를 통해 법화경의 제목, 곧 묘법을 본존으로 삼아야 함을 밝히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화경의 제목은 일체경의 신이요 안목」이라는 「소야전답서」의 말씀과 「부처는 몸이요 법화경은 신」이라는 본존문답초의 말씀은 같은 논리 위에 있다.
다섯 편 · 열네 장의 지도
이제 열네 장 하나하나가 전체 논지의 어디에 놓이는지를 짚어 본다. 다섯 편의 본문 · 풀이 · 해설을 읽어 나갈 때 길잡이가 되도록, 각 장의 개요를 차례로 따라간다.
- 제1편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 법본존과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어서 365쪽
- 제1장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정하다365:01
- 제2장경석을 들어 그 근거를 보이다365:01–365:07
- 제3장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을 드러내다365:08–365:15
- 제2편뛰어난 것 · 능생을 본존으로 — 세 대사에 대한 귀의를 꾸짖다어서 366–367쪽
- 제4장뛰어난 것을 본존으로 삼다366:01–366:06
- 제5장능생을 본존으로 삼다366:07–366:15
- 제6장홍법 등 세 대사에 대한 귀의를 꾸짖다366:16–367:13
- 제3편세 대사의 사적과 불법의 전래 — 진언의 도법과 원밀일치어서 367–370쪽
- 제7장세 대사의 사적을 들다367:14–368:13
- 제8장불법의 전래를 간략히 서술하다368:13–370:01
- 제4편법화경의 행자 없는 나라와 대성인의 사적어서 370–371쪽
- 제9장일본에 법화경의 행자가 없음을 밝히다370:02–370:07
- 제10장대성인의 사적을 보이다370:08–371:11
- 제5편망국의 현증과 미증유의 본존어서 371–374쪽
- 제11장망국의 현증을 들다371:12–372:18
- 제12장몽고 조복을 간하다372:18–373:10
- 제13장인연 있는 이들에 대한 보은을 서술하다373:11–373:16
- 제14장미증유의 본존의 말법 유포를 밝히다373:17–374:06
- 표(標)제1장
- 석(釈)제2~13장
- 결(結)제14장
제1장 — 표문(標文)으로서의 첫머리
제1장(365쪽 1행)은 문장을 「표(標)」 · 「석(釈)」 · 「결(結)」의 세 단으로 나누면 「표」에 해당한다. 표 · 석 · 결은 문장의 표현 형식, 논문의 구성법을 말한다. 「표」는 표시 · 표출의 뜻으로 글 전체의 주제를 보이는 것, 「석」은 해석으로 표시된 주제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 「결」은 결론으로 논의 전체를 맺는 것이다.
니치오 상인(日応上人)은 「변혹관심초(弁惑観心抄)」에서 요보사(要法寺)의 전 주지 니치슈(日守)가 지은 「말법관심론(末法観心論)」의 그릇된 본존의(本尊義)를 파절하시고 대성인의 정의를 밝히셨다. 그 책 제1장 「본문의 본존을 논함」의 제19절에서, 니치슈가 본존문답초의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구절을 어디까지나 권실상대(権実相対)의 법문으로 보아 법본존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반론하셨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蓋し現文は当抄、標釈結三段の中には標文なるが故に但末代悪世の凡夫は何物を以って本尊とすべき也との玉うといえども
대개 지금의 글은 이 어서의 표 · 석 · 결 세 단 가운데 표문이므로, 다만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하는가」라고 하셨으나
이 말씀에서 제1장은 「표」에 해당하며, 따라서 본존문답초 전체의 주제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니치오 상인에 따르면 이 구절은 부문의 면에서는 니치슈의 말대로 권실상대의 법문이지만, 원의의 면에서는 본문 수량 문저 독일본문(独一本門)의 사의 일념삼천의 어본존을 밝히신 것이다. 이 글 안에서 「표」의 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며, 「법화경의 제목」은 적문 · 본문 · 관심의 세 단계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화경의 제목」을 주제로 삼아,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또 묻는 바에 따라 종횡으로 풀이하신 것이 이 글 전체를 꿰뚫는 주제다.
대성인이 여기서 말법의 본존을 「법본존」으로서 법의 면에서 밝히신 것은, 대성인이 지니신 법이 석존의 법화경 문상에는 설해져 있지 않음을 보이시는 데 원의가 있다. 이로써 「보은초」에 밝히신 「본문의 교주 석존」을 색상장엄의 석존으로 받아들여 참뜻에 미혹해 있던 조켄보에게, 대성인의 불법이 말법의 유일한 정법이며 그 넓히시는 법체가 법화경의 간심, 곧 문저의 사의 일념삼천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동시에 조켄보는 이미 어본존을 수여받았으므로, 「보은초」의 가르침과 본존문답초의 표문을 아울러 읽으면 대성인 정의의 본존이 이미 수여받은 대성인 소현(所顕)의 만다라 어본존임은 분명해진다.
제2 · 3장 — 경석의 근거와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
제2장(365쪽 1~7행)에서는, 불법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중심으로 삼아야 함을 보이는 경석(経釈)을 들어 제1장의 문증으로 삼으신다. 여기에 인용된 경석은 모두 인법(人法)의 우열을 보여, 「부처보다 법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뒷받침한다. 이것은 일왕으로는 석존의 설시에 따라 불상을 본존으로 삼는 것을 비판하시고, 제1장에서 말씀하신 법본존의 바른 까닭을 보이신 것이다. 인용된 경석은 셋이다. 법화경 법사품의 「부처의 사리를 쓰지 말고 경권을 안치하라」는 글, 열반경의 「법은 제불의 스승이다. 법이 상주하므로 제불도 상주한다」는 글, 그리고 천태대사 『법화삼매참의』의 「법화삼매에서는 법화경을 안치하고 형상 · 사리와 다른 경권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글이다.
제3장(365쪽 8~15행)에서는 앞 장의 경석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의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대성인이 나타내신 본존이 말법 중생의 본존인 동시에 석존을 포함한 일체 제불이 본존으로 삼은 것임을 밝히신다. 「법화경을 중심에 안치하라」는 경석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는 천태대사가 『마하지관』 제2권에 설한 사종삼매(四種三昧)의 본존이 아미타불이라는 것, 둘째는 불공삼장이 번역한 『관지의궤(観智儀軌)』가 석가불 · 다보불을 본존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첫째 의문에 대해서는, 사종삼매 가운데 상좌(常坐) · 상행(常行) · 비행비좌(非行非坐)의 세 수행에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삼은 것은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은(未顕真実)」 권교에 의거한 것이며, 반행반좌(半行半坐) 삼매 가운데 방등삼매가 방등경의 칠불 · 팔보살을 본존으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로 권경을 의처로 삼은 것이라고 답하신다. 그리고 반행반좌 삼매 가운데 법화삼매가 천태대사의 정의이며, 법화경을 본존으로 안치하는 것이 『법화삼매참의』의 참뜻이라고 하신다. 둘째 의문에 대해서는, 불공삼장이 법화경 보탑품에 의거해 석가 · 다보 두 부처를 본존으로 삼은 것은 법화경의 바른 뜻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성인이 가르치시는 「법화경의 제목」인 어본존은 석가 · 다보 · 시방 제불의 본존이며 이것이야말로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이라고 맺으신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여기까지에서 말법의 본존이 대성인이 나타내신 남묘호렌게쿄의 만다라 본존임을 밝히신 것이다.
제4 · 5장 — 본존을 정하는 기준
제4장과 제5장에서는 말대악세에서 본존을 결정하는 기준을 말씀하신다.
제4장(366쪽 1~6행)에서는 먼저 당시 일본에 있던 십종(十宗)의 본존을 들어 저마다 제각각임을 보이신다. 그리고 부처나 경을 본존으로 세우는 가운데 왜 천태종만이 경을 본존으로 삼는가 하는 물음이 나온다. 여기서 「법」이 아니라 「경」이라고 하신 것은 천태대사가 경권으로서의 법화경을 본존으로 삼은 것을 받은 것이다. 또 이 물음 이후로는 「법화경의 제목」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고, 주로 법화경과 제불, 특히 법화경과 대일여래의 대비로 논이 전개된다.
그 물음에 대해 대성인은 「본존이란 뛰어난 것을 써야 한다」는 중요한 뜻을 말씀하시고, 그 예로 유가(儒家)에서는 삼황오제를, 불가에서는 석존을 본존으로 세운다고 하신다. 근본으로 존경한다는 본존의 글자 뜻에 따라 가장 뛰어나다고 여긴 것을 본존으로 삼은 것이며, 이 뜻에서 불법에서는 일왕의 면에서 팔만법장의 교주인 석존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제5장(366쪽 7~15행)에서는 불교에서는 석존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앞 장의 결론을 받아, 그렇다면 왜 대성인은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는가 하는 물음이 나온다. 이에 대해 이것은 대성인의 사견(己義)이 아니라 석존과 천태대사를 따른 것이라고 하시고, 그 근거로 법화경이 석존 이하 시방의 제불을 출생시킨 「능생」의 근원임을 보이신다. 그래서 「능생으로써 본존으로 삼는다」고 하신다. 이어서 보현경을 증문으로 「부처는 소생이요 법화경은 능생이며, 부처는 몸이요 법화경은 신」이라 하시어, 모든 부처가 이 법화경을 깨달아 성도했으며 법화경이 능생이요 혼이라고 단정하신다.
여기까지가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아야 함을 밝히신 대목이다. 제3장에서 말법 중생이 본존으로 삼아야 할 것이 「법화경의 제목」임을 보이시고, 제4 · 5장에서 본존의 의의를 보이심으로써 가장 뛰어난 당체이자 제불 능생의 근원이 「법화경의 제목」임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 진언 파절로 들어가시는데, 그 실마리로 제5장 끝에서 진언의 법 가운데 불법의 본뜻을 가장 거스르는 상징이라 할 개안 공양의 의식을 파절하신다.
대성인이 여기서 능생의 법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신 데에는 겹겹의 뜻이 있다. 니치칸 상인이 「능생은 곧 이것 종자의 덕이다(能生は即ちこれ種子の徳なり)」라고 하셨듯이, 하종의 묘법을 보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치칸 상인은 제5장의 「시방의 제불은 법화경에서 출생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능생으로써 본존으로 삼느니라」라는 구절에 대해 「글 가운데 『법화경에서 출생하셨다』고 한 것은 곧 하종의 법화경 · 묘법연화경의 오자이다(文の中に『法華経より出生し給えり』というのは、即ち是れ下種の法華経・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라고 하셨다.
이 원의에서 증문인 보현경의 두 글을 읽으면, 그 글 자체가 구원원초의 삼덕(三徳)을 갖춘 능생의 덕을 드러내고 있다고 니치칸 상인은 풀이하신다.
此の大乗経典は諸仏の宝蔵なり十方三世の諸仏の眼目なり三世の諸の如来を出生する種なり
이 대승경전은 제불의 보장(宝蔵)이며 시방삼세 제불의 안목이며 삼세의 모든 여래를 출생하는 종자이니라.
니치칸 상인에 따르면 「이 대승경전」은 구원원초의 묘법을 가리킨다. 「제불의 보장」은 주(主)의 덕, 「시방삼세 제불의 안목」은 사(師)의 덕, 「삼세의 모든 여래를 출생하는 종자」는 부모(父母)의 덕을 저마다 드러낸다.
此の方等経は是れ諸仏の眼なり諸仏は是に因つて五眼を具することを得たまえり仏の三種の身は方等より生ず是れ大法印にして涅槃海を印す此くの如き海中より能く三種の仏の清浄の身を生ず
이 방등경은 제불의 눈이니라. 제불은 이로 말미암아 오안(五眼)을 갖추게 되셨느니라. 부처의 세 가지 몸은 방등에서 나느니라. 이는 대법인(大法印)이니 열반의 바다에 찍느니라. 이와 같은 바다 가운데서 능히 세 가지 부처의 청정한 몸을 낳느니라.
이어지는 「방등경」 이하의 글에서는 구원원초의 묘법을 가리켜 「방등경」이라 하였다. 「제불의 눈」은 사의 덕이며, 이 사의 덕에 또 능생의 덕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제불은 이로 말미암아 오안을 갖추게 되셨다」고 설한 것이다. 또 「부처의 세 가지 몸은 방등에서 난다」는 것은 부모 능생의 덕이다. 「대법인」은 주의 덕을 드러내며, 이 주의 덕에 또 능생의 덕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와 같은 바다 가운데서 능히 세 가지 부처의 청정한 몸을 낳는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 글은 일체(一体)의 삼덕을 드러낸다고 니치칸 상인은 보셨다.
제6~8장 — 진언 파절과 불법의 흐름
제6장(366쪽 16행~367쪽 13행)에서 진언 파절로 들어간다. 먼저 「법화경을 본존으로 삼는 것과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삼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뛰어난가」라는 물음을 세우신다. 이에 대해 법화경보다 대일여래 쪽이 뛰어나다고 한 홍법 · 자각 · 지증 세 대사의 뜻을 드신다. 홍법의 「법화경은 대일경보다 세 겹 못하다」는 뜻, 태밀(台密)의 자각 · 지증의 「대일경 제일 · 법화경 제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이어서 대성인 자신의 뜻을 법화경 법사품의 「이금당(已今当)의 일체경 가운데 법화경이 가장 제일이다」라는 글로 보이신다.
다음 문답에서는 당시 세간 사람들의 시각에서 나오는 의문을 제시하신다.
問う今日本国中の天台・真言等の諸僧並びに王臣・万民疑つて云く日蓮法師めは弘法・慈覚・智証大師等に勝るべきか如何
묻는다. 지금 일본국 안의 천태 · 진언 등 여러 승려와 왕신 · 만민이 의심하여 이르되, 니치렌 법사 따위가 홍법 · 자각 · 지증 대사 등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어떠한가.
당시 사람들에게 홍법 등 세 대사는 대성인보다 훨씬 뛰어난 성승(聖僧)이었고, 그래서 세 대사의 말이 옳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대성인은 두 가지로 반론하신다. 첫째, 세 대사는 석존 등의 부처보다 뛰어난가. 둘째, 「법화 제일」은 대성인의 사견이 아니라 석존의 유훈인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法に依つて人に依らざれ)」는 금언에 따라 「법」으로써 세운 것이다. 이어서 세 대사도 일왕은 일체경과 법화경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법화경에 「법화 최제일」이라고 석존이 분명히 정했는데도 홍법은 「법화경 제삼」이라 읽고 자각 · 지증은 「법화경 최제이」라고 읽었다고 하시어 완전한 잘못임을 지적하신다. 그리고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이 설한 바와 세 대사의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고 다그치신다.
제7장(367쪽 14행~368쪽 13행)은 여러 차례의 문답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한다. 앞 장의 대성인의 파절에 대해, 홍법 · 자각 · 지증 세 대사의 사적을 들어 반론을 적으신 것이다. 이것이 세간 사람들의 시각을 보이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세 대사는 저마다 지혜도 뛰어나고 불법을 깊이 궁구한 덕 있는 사람들인데, 이 세 대사에게 귀의하는 것이 어찌 부처를 등지는 일이 되느냐는 소박한 의문이다.
제8장(368쪽 13행~370쪽 1행)에서는 앞 장의 반문에 대해 먼저 인도 · 중국에서의 불법 유포의 경위를 간결히 적으신다. 특히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지 600년 뒤에 선무외삼장 · 금강지삼장 · 불공삼장의 세 삼장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진언종을 세운 뒤로 화엄경 · 법화경이 깎아내려졌다고 하신다. 그 뒤에 나타난 묘락대사도 법화경과 진언의 우열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그 우열을 가릴 사람이 없어졌다고 하신다.
이어서 일본 불법의 역사를 말씀하신다. 전교대사는 법화경과 대일경의 우열을 바르게 가렸고, 『대일경소』에 천태종의 뜻, 곧 일념삼천의 법문이 도용되어 있음도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전교대사 이후 천태좌주인 자각 · 지증이 스승의 가르침을 거슬러 홍법의 그릇된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본 전체에 진언의 그릇된 뜻이 퍼졌다. 그 뒤 일본에는 세 대사를 넘는 석덕(碩徳)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전교대사에서 대성인의 시대에 이르는 사백여 년 동안 일본 전체가 진언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믿게 되었다고 하신다.
제9 · 10장 — 법화경의 행자와 대성인의 사적
제9장(370쪽 2~7행)에서는 진언 파절을 총괄하시고, 당시 「법화경 최제일」의 뜻을 신 · 구 · 의 삼업에 걸쳐 주장한 사람은 오직 대성인 한 분뿐임을 보이시어, 대성인이야말로 말법의 법화경 행자임을 밝히신다.
먼저 일본에 있는 수십만의 사사(寺社)는 모두 진언종이라고 하신다. 히에이산의 좌주를 비롯해 각 절의 최고 지위에 있는 고승들이 한결같이 진언사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국의 승려들이 모두 진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따금 법화경을 나란히 세우거나 법화 · 진언을 함께 배우는 사람도 마음속은 모두 진언사라고 하신다. 그들은 입으로는 「법화경 제일」이라 읽어도 마음은 제이 · 제삼이며, 그 수행은 모두 진언종의 법이다. 신구의 삼업이 상응해 「최제일」이라 읽는 법화경의 행자, 「능지차경(能持此経)」의 행자는 전교대사 이후 사백여 년 동안 한 사람도 없었으며, 법화경 법사품의 「여래가 계신 때에도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이랴(如来現在・猶多怨嫉・況滅度後)」라는 경문대로 일본국의 일체중생이 법화경의 큰 원적이 되었다고 하신다.
이처럼 일본국은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에 이르기까지 진언 제일의 그릇된 뜻에 빠져, 진언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법화경 제일의 뜻을 외치신 대성인에게 거센 반발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대성인 한 분만이 이 뜻을 설하셨고, 그 때문에 대성인은 법화경에 예언된 갖가지 난을 몸으로 받으셨다. 이것을 거꾸로 보면, 대성인은 몸으로 법화경의 예언이 옳았음을 증명하셨다.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법화경을 신구의 삼업에 걸쳐 「최제일」이라 끝까지 읽으신 말법의 법화경 행자는 니치렌 대성인밖에 없다.
제10장(370쪽 8행~371쪽 11행)부터는 니치렌 대성인이 정 · 상 · 말에 없던 본존을 나타내시는 미증유의 사람임을 밝혀 가신다. 먼저 대성인 자신의 출신을 보이시어, 일본국 가운데서도 변두리 나라인 아와에서 태어나셨음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수학의 경위를 말씀하시면서 그 과정에서 십종의 잘못을 어떻게 꿰뚫어 보셨는지를 말씀하신다. 일본의 십종이 대소 · 권실이 뒤섞인 혼란에 빠져 있고, 이 불법의 혼란으로 일본의 왕법도 힘이 다해 마침내 방법의 죄로 타국에 침공당하는 망국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성인이 일찍부터 막부 요인에게 간해 온 일이며, 특히 돌아가신 사이묘사 입도(最明寺入道)에게 「입정안국론」을 올려 간효하셨음을 말씀하신다.
제11 · 12장 — 진언 망국의 현증
제11장(371쪽 12행~372쪽 18행)에서는 망국의 현증으로 「승구의 난」을 드신다. 승구의 난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진언사들이 「십오단(十五壇)의 비법」을 행해 간 모습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세히 대비해 말씀하시어 진언 망국의 현증을 생생하게 그려 내신다. 그리고 진언의 그릇된 법을 믿는 것이 결국 법화경의 원적이 되는 일이므로 망국이라는 현증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결론지으신다.
제12장(372쪽 18행~373쪽 10행)에서는, 망국의 법인 진언이 이제 가마쿠라 막부에 파고들어 몽골 내습이라는 재앙을 불러 일본을 망국의 비운에 빠뜨리려 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앞서 승구의 난으로 무너진 오키(隠岐)의 법황과 똑같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법화경에서 범천 · 제석 등의 제천선신은, 만일 국왕이 법화경의 원적이 되면 그 국왕을 벌하겠다고 맹세했으며, 거기서 망국의 현증이 일어난다.
이 진언 망국의 현증은, 겐페이(源平) 전쟁 때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 일문이 히에이산의 천태 진언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를 조복하려다가 도리어 평가 일문도 안토쿠(安徳) 천황도 멸망한 것을 첫 번째 현증으로 하고, 승구의 난을 두 번째로 하며, 이번 몽골 내습은 세 번째 현증이 될 우려가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만일 대성인의 간언을 쓰지 않고 진언으로 조복을 행한다면,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에 「도리어 본인에게 돌아간다(還著於本人)」고 설해진 대로 도리어 일본 쪽이 조복당해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근심하신다. 이처럼 제11 · 12장에서는 현증으로써 진언의 그릇된 법을 파절하시고 진언 파절의 세목을 말씀하신다.
제13 · 14장 — 보은과 미증유의 본존
제13장(373쪽 11~16행) 첫머리의 「이 도리를 아는 일(此の道理を存ぜる事)」이라는 말씀은, 직접적인 뜻으로는 진언의 악법에 의한 조복은 망국의 원인이 되고 법화경이야말로 성불의 대도라는 것을 대성인 한 분만이 훤히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원의의 면에서 이 말씀을, 말법에 세워야 할 바른 본존을 알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대성인이 말법의 어본불로서 미증유의 본존을 나타내시는 것도 오로지 부모와 스승의 은혜 덕분이라는 깊은 보은의 일념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을 받은 조켄보와 기조보 두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은, 입종 때 지두 도조 가게노부에게 습격당했을 때 두 사람이 대성인을 도운 일을 적으신 데서 분명하다.
제14장(373쪽 17행~374쪽 6행)은 이 글의 결론에 해당하는 장이다. 대성인이 나타내신 어본존이 정 · 상 · 말에 일찍이 없던 미증유의 어본존임을 보이시는 동시에, 대성인이 지용보살의 상수인 상행보살의 재탄으로서 말법에 이 어본존을 넓히신다는 것을 시사하신다. 그리고 첫머리에 표시된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의 어본존이 바로 조켄보에게 수여된 대성인 소현의 어본존에 다름 아님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표」로 시작한 문답이 「결」에서 조켄보 앞에 놓인 한 폭의 어본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他事をすてて此の御本尊の御前にして一向に後世をもいのらせ給い候へ
다른 일을 버리고 이 어본존 앞에서 한결같이 후세를 기원하시라.
이 서강을 맺으며
본존문답초는 친필이 전하지 않는 글이다. 그러나 닛코 상인이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에 「본존문답초 1권」이라 적으시고, 겐슈코 니치겐이 대성인 입멸 여덟 해 뒤에 그 전문을 베껴 남기고, 도키조닌의 장서 목록에 「본존문답초 1첩」이 오르고, 녹내어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이 이 글을 실었다. 대성인 재세 때의 문하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제목, 같은 글을 지켜 전한 것이다.
이 글을 받은 조켄보는 대성인이 열두 살에 세이초사에 오르셨을 때 글을 가르친 사형이며, 입종의 날 지두의 습격을 피해 대성인을 영지 밖으로 모신 사람이고, 스승 도젠보의 묘 앞에서 「보은초」를 읽어 회향한 사람이다. 대성인은 그에게 「보은초」로 삼대비법의 일단을 보이시고 어본존을 수여하셨으며, 그 「보은초」의 「본문의 교주 석존」과 어본존의 상모 사이에서 그가 품었을 물음에 본존문답초로 답하셨다.
그 답은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한 줄에서 시작한다. 이 한 줄은 「표」의 글로서 글 전체를 꿰뚫고, 「뛰어난 것」과 「능생」이라는 기준을 거쳐,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세우고 대일의 인과 진언으로 불상을 개안하는 진언종에 대한 파절로, 승구의 난과 평가 멸망이라는 현증으로, 그리고 법화경을 삼업으로 「최제일」이라 읽은 단 한 사람의 행자인 대성인의 사적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그것은 「이천이백삼십여 년」 동안 아무도 넓히지 못한 「이 어본존」으로, 곧 조켄보 앞에 이미 놓인 어본존으로 돌아온다. 니치칸 상인이 「법화경의 제목」을 「곧 연조 성인의 일」이라 풀이하시고, 「이천이백삼십여 년」을 수량품 설법의 해부터 세어 상행보살에게 부촉된 법의 표지로 읽으신 것은,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한 줄의 원의가 인법일개의 대만다라 어본존에 있음을 보이신 것이다.
이제 제1편에서 그 첫 줄로 들어간다.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으로써 본존을 정해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답, 그리고 그 근거로 드신 법사품 · 열반경 · 『법화삼매참의』의 세 글, 사종삼매의 아미타 본존과 불공의 석가 · 다보 본존에 대한 의문, 「법화경의 교주」와 「법화경의 행자」의 갈림을 차례로 읽는다.
더 읽기
- 본존문답초 제1편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 법본존과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 — 표문과 그 근거, 「법화경 행자의 바른 뜻」
- 관심의 본존초 — 도키조닌에게 주신 법본존 개현의 글
- 법화취요초 — 삼대비법의 명목을 처음 정식으로 밝히신 글과 「광략을 버리고 요를 취하다」
- 불교 교학 六 남묘호렌게쿄 — 「법화경의 제목」의 교학적 계보
- 핵심 개념 삼신 — 여러 종파의 본존과 자수용신
- 인물탐구 닛코상인 —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와 「오인소파초」의 저자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 「본존문답초」(365–374쪽)와 해설에 인용한 여러 어서
- 『묘법연화경』(구마라집 역), T9 no.262 — 법사품 · 여래수량품 · 여래신력품 · 관세음보살보문품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대반열반경』, T12 no.374
- 천태대사, 『법화삼매참의』, T46 no.1941 / 『마하지관』, T46 no.1911
- 니치칸 상인, 「문저비침초」 · 「보은초」 문단 · 「법화취요초」 문단 · 「관심의 본존초」 문단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 니치오 상인, 「변혹관심초」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 이나다 가이소, 『니치렌 성인 어유문 대조기(日蓮聖人御遺文対照記)』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해설 · 연구
- 「本尊問答抄」 강의 — 序講 1 · 2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