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존문답초는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을 본존으로 정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법의 본존을 세우고(제1~5장), 홍법 · 자각 · 지증 세 대사의 진언을 꾸짖고 불법이 흘러온 길을 더듬은 뒤(제6~8장), 법화경의 행자가 없는 일본과 그 속에서 홀로 일어선 대성인의 사적을 보였다(제9~10장). 제10장 끝에서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 자세히 말했으나 어리석은 사람은 알기 어려우니, 결국 현증을 끌어와 말하겠다」고 하셨다. 다섯 편 가운데 마지막인 이 편은 바로 그 「현증」에서 시작한다. 국주가 신하에게 진 승구의 난, 비법을 다한 평가의 멸망, 그리고 지금 눈앞에 닥친 몽골의 재침 — 진언의 기도가 나라를 무너뜨린 두 번의 역사와 세 번째의 위기를 겹쳐 보이신 뒤, 대성인은 붓끝을 돌려 부모 · 스승 · 형제자에 대한 은혜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이 본존은 세존이 설해 두신 뒤 이천이백삼십여 년 동안 아무도 넓히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글을 닫으신다. 진언 비판의 현증과 미증유의 본존이 어떻게 한 줄기로 이어지는가 — 이것이 이 편의 물음이다.
본존문답초의 구조를 서강의 다섯 논지로 보면, 제1~5장은 「본존의 정의」, 제6~8장은 「진언 비판과 불법의 흐름」, 제9~10장은 「법화경의 행자」를 맡고, 이 편의 네 장은 마지막 갈래인 「현증과 본존 유포」를 맡는다. 앞의 논증이 경문과 도리의 논증이었다면, 여기서는 역사가 증언대에 선다. 대성인은 「도리와 증문보다 현증에 더한 것은 없다」(「삼삼장기우사」, 1468쪽)고 하셨는데, 본존문답초에서는 그 현증이 진언 수법(修法)의 결과로 제시된다.
제11장은 승구 3년(1221)의 난을 날짜까지 짚어 가며 다시 그린다. 고토바 상황이 호조 요시토키를 치려다 오히려 패해 세 상황이 섬으로 유배되고, 조정 측이 천태 좌주 · 동사 장자 · 닌나사 오무로 · 원성사 장리를 총동원해 「십오단의 비법」을 닦았는데도 한 달 남짓 만에 무너진 일, 오무로의 어린 제자 세타카마루가 끌려 나가 목숨을 잃은 일까지, 대성인은 「국주가 백성을 치는 것은 매가 꿩을 잡는 것과 같아야 하는데 어찌 반대가 되었는가」라고 묻고 「진언의 그릇된 법 때문」이라고 답하신다. 제12장은 그 진언이 승구의 난 뒤 관동으로 내려가 가마쿠라 막부의 여러 절을 차지한 사실, 평가가 히에이산을 씨사(氏寺)로 삼아 원씨를 조복하다 단노우라에 가라앉은 첫 번째 현증을 들고, 몽골 조복을 진언에 맡기면 「도리어 일본이 조복당할 것」이라고 간하신다.
제13장과 제14장은 결어다. 「이 도리를 아는 것은 부모와 스승의 은혜」라며 염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옛 스승 도젠보의 후생을 걱정하시고, 입종 직후 지두 도조 가게노부의 칼끝에서 자신을 피신시켜 준 조켄보 · 기조보의 공을 「법화경에 대한 봉공」이라 일컬으신다. 그리고 천태 · 전교도 알기만 하고 넓히지 못한 본존, 상행 · 무변행 등 지용보살이 넓혀야 할 본존을 「대략 마음에 얻었으므로」 지금 넓히고 있다고 하시며, 조켄보에게 「다른 일을 버리고 이 본존 앞에서 한결같이 후세를 기원하라」고 당부하신다. 첫 장의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답이 마지막 장의 「이 본존 앞에서」로 돌아와 닫히는 것이다.
이 편의 장
본문
抑人王八十二代・隠岐の法王と申す王有き 去ぬる承久三年太歳辛巳五月十五日伊賀太郎判官光末を打捕まします鎌倉の義時をうち給はむとての門出なり、 やがて五畿七道の兵を召して相州鎌倉の権の太夫義時を打ち給はんとし給うところに還りて義時にまけ給いぬ、 結句・我が身は隠岐の国にながされ太子二人は佐渡の国・阿波の国にながされ給う公卿七人は忽に頚をはねられてき、 これはいかにとしてまけ給いけるぞ 国王の身として民の如くなる義時を打ち給はんは鷹の雉をとり猫の鼠を食むにてこそあるべけれ これは猫のねずみにくらはれ鷹の雉にとられたるやうなり、
대저 인왕(人王) 제82대에 오키의 법왕(隠岐の法王)이라 하는 왕이 계셨느니라. 지난 승구(承久) 3년 태세 신사(1221) 5월 15일, 이가 다로 판관 미쓰스에를 쳐서 잡으셨으니, 이는 가마쿠라의 요시토키를 치시려는 출진의 시작이었느니라. 이윽고 오기칠도(五畿七道)의 군사를 불러 모아 상주(相州) 가마쿠라의 권대부(権大夫) 요시토키를 치시려 하셨으나 도리어 요시토키에게 지고 마셨느니라. 그 결과 당신은 오키국으로 유배되시고, 태자 두 분은 사도국과 아와국으로 유배되셨으며, 공경 일곱 사람은 그 자리에서 목이 베였느니라. 이는 어찌하여 지셨는가. 국왕의 몸으로 백성과 같은 요시토키를 치시는 것은 매가 꿩을 잡고 고양이가 쥐를 먹는 것과 같아야 하거늘, 이 일은 고양이가 쥐에게 먹히고 매가 꿩에게 잡힌 것과 같으니라.
しかのみならず調伏力を尽せり 所謂天台の座主・慈円僧正・真言の長者・仁和寺の御室・園城寺の長吏・総じて七大寺・十五大寺・智慧戒行は日月の如く、 秘法は弘法・慈覚等の三大師の心中の深密の大法・十五壇の秘法なり、 五月十九日より六月の十四日にいたるまであせをながしなづきをくだきて行いき 最後には御室・紫宸殿にして日本国にわたりていまだ三度までも行はぬ大法・六月八日始めて之を行う程に・ 同じき十四日に関東の兵軍・宇治勢多をおしわたして洛陽に打ち入りて三院を生け取り奉りて九重に火を放ちて一時に焼失す、
그뿐 아니라 조복(調伏)의 힘을 다하였느니라. 이른바 천태의 좌주 지엔 승정, 진언의 장자, 닌나사의 오무로, 원성사의 장리, 모두 합하여 칠대사 · 십오대사의 승려들이니, 그 지혜와 계행은 해와 달과 같고, 비법은 홍법 · 자각 등 세 대사가 마음속 깊고 비밀한 대법으로 삼은 십오단(十五壇)의 비법이니라. 5월 19일부터 6월 14일에 이르기까지 땀을 흘리고 뇌를 부수어 행하였느니라. 마지막에는 오무로가 자신전(紫宸殿)에서, 일본국에 건너와 아직 세 번도 행해진 적이 없는 대법을 6월 8일에 처음으로 행하였는데, 같은 달 14일에 관동의 군대가 우지 · 세타를 밀고 건너 낙양에 쳐들어와 세 원(三院)을 사로잡아 모시고 구중(九重)에 불을 놓아 한꺼번에 불타 버렸느니라.
三院をば三国へ流罪し奉りぬ又公卿七人は忽に頚をきる、 しかのみならず御室の御所に押し入りて最愛の弟子の小児勢多伽と申せしをせめいだして終に頚をきりにき 御室思いに堪えずして死に給い畢んぬ母も死す童も死す、 すべて此のいのりをたのみし人いく千万といふ事をしらず死にきたまたまいきたるもかひなし、 御室祈りを始め給いし六月八日より同じき十四日までなかをかぞふれば七日に満じける日なり、
세 원을 세 나라로 유배하여 모셨고, 또 공경 일곱 사람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었느니라. 그뿐 아니라 오무로의 어소에 밀고 들어가 가장 아끼던 제자인 어린아이 세타카(勢多伽)라 하는 이를 끌어내어 마침내 목을 베었느니라. 오무로는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죽고 동자도 죽었느니라. 무릇 이 기도를 의지한 사람은 몇천만인지 헤아릴 수 없이 죽었으며, 어쩌다 살아남은 이도 산 보람이 없었느니라. 오무로가 기도를 시작하신 6월 8일부터 같은 달 14일까지 날을 세어 보면 꼭 이레가 차는 날이었느니라.
此の十五壇の法と申すは一字金輪・四天王・不動・大威徳・転法輪・如意輪・愛染王・仏眼・六字・金剛童子・尊星王・太元守護経等の大法なり 此の法の詮は国敵王敵となる者を降伏して命を召し取りて其の魂を密厳浄土へつかはすと云う法なり、 其の行者の人人も又軽からず天台の座主慈円・東寺・御室・三井の常住院の僧正等の四十一人並びに伴僧等・三百余人なり云云、 法と云ひ行者と云ひ又代も上代なりいかにとしてまけ給いけるぞ たとひかつ事こそなくとも即時にまけおはりてかかるはぢにあひたりける事、いかなるゆへといふ事を余人いまだしらず、 国主として民を討たん事鷹の鳥をとらんがごとし たとひまけ給うとも一年・二年・十年・二十年もささうべきぞかし 五月十五日におこりて六月十四日にまけ給いぬわづかに三十余日なり、 権の大夫殿は此の事を兼てしらねば祈祷もなしかまへもなし。
이 십오단의 법이라 하는 것은 일자금륜 · 사천왕 · 부동 · 대위덕 · 전법륜 · 여의륜 · 애염왕 · 불안 · 육자 · 금강동자 · 존성왕 · 태원 · 수호경 등의 대법이니라. 이 법의 취지는 나라의 적 · 왕의 적이 되는 자를 항복시켜 목숨을 거두고 그 혼을 밀엄정토(密厳浄土)로 보낸다는 법이니라. 그 행자들 또한 가볍지 않으니, 천태의 좌주 지엔, 동사, 오무로, 미이의 조주인 승정 등 41인과 반승(伴僧) 등 300여 인이니라 운운. 법으로 보나 행자로 보나, 또 시대도 상대(上代)이거늘 어찌하여 지셨는가. 설령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곧바로 져 버려 이러한 치욕을 당한 것이 어떠한 까닭인지를 다른 사람은 아직 알지 못하느니라. 국주로서 백성을 치는 것은 매가 새를 잡는 것과 같으니, 설령 지신다 하더라도 1년 · 2년 · 10년 · 20년은 버티셨어야 할 것이니라. 5월 15일에 일어나 6월 14일에 지셨으니 겨우 30여 일이니라. 권대부 님은 이 일을 미리 알지 못하였으므로 기도도 없었고 대비도 없었느니라.
然而日蓮小智を以て勘えたるに其の故あり所謂彼の真言の邪法の故なり 僻事は一人なれども万国のわづらひなり 一人として行ずとも一国二国やぶれぬべし況や三百余人をや 国主とともに法華経の大怨敵となりぬいかでかほろびざらん、
그러나 니치렌이 작은 지혜로 헤아려 보건대 그 까닭이 있느니라. 이른바 저 진언의 사법(邪法) 때문이니라. 그릇된 일은 한 사람의 것이라도 만국의 괴로움이 되느니라. 단 한 사람이 행하더라도 한 나라 두 나라는 무너질 것인데, 하물며 300여 인이랴. 국주와 함께 법화경의 큰 원적(怨敵)이 되었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어구 풀이
- 隠岐の法王오키의 법왕
- 제82대 고토바 천황(後鳥羽). 양위한 뒤 상황으로서 원정(院政)을 폈고, 승구의 난에 패한 뒤 출가하여 오키섬으로 유배되었으므로 「오키의 법황」이라 불린다. 본문은 「法王」과 「法皇」을 섞어 쓴다. 대성인은 그를 진언 조복에 기대어 나라의 주권을 잃은 국주의 본보기로 드신다.
- 伊賀太郎判官光末이가 다로 판관 미쓰스에
- 막부가 교토 수호(京都守護)로 보낸 이가 미쓰스에(伊賀光季). 어서는 「光末」로 적는다. 상황 측 가담을 끝내 거부하여 승구 3년 5월 15일 공격을 받고 죽었으니, 승구의 난의 첫 희생이다.
- 権の太夫義時권대부 요시토키
-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 본문의 「相州」는 가마쿠라가 있는 사가미국(相模)이고, 「권대부」는 그의 관직 이름이다. 대성인은 그를 「백성과 같은」 신분으로 보시어, 국왕이 신하에게 진 전도(顚倒)를 부각하신다.
- 五畿七道오기칠도
- 기나이(畿内)의 다섯 나라와 일곱 도(道). 곧 일본 전국이다. 고토바 상황은 미쓰스에를 친 바로 그날 요시토키 추토의 원선(院宣)을 전국에 내렸다.
- 太子二人태자 두 분
- 고토바 상황의 두 아들인 쓰치미카도 상황(土御門)과 준토쿠 상황(順徳). 전하는 바에 따르면 준토쿠는 사도로, 쓰치미카도는 도사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아와로 옮겨졌다. 아래 第三의 「三院」은 이 세 상황을 함께 이른 말이다.
- 天台の座主・慈円僧正천태의 좌주 지엔 승정
- 히에이산 엔랴쿠사의 수장인 천태 좌주를 지낸 지엔(慈円). 다만 승구 3년 당시 좌주는 지엔이 아니라 그해 4월 26일 임명된 손카이(尊快)였고, 지엔이 승구의 난에 기도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 仁和寺の御室닌나사의 오무로
- 진언종 닌나사(仁和寺)의 문적(門跡). 법친왕이 대대로 이 자리를 맡아 거처를 높여 「오무로(御室)」라 불렀다. 승구의 난 때의 오무로는 고토바 상황의 둘째 아들 도조 법친왕(道助)이다.
- 園城寺の長吏원성사의 장리
- 천태종 사문파(寺門派)의 본산 온조사(園城寺, 미이데라 三井寺)의 수장. 본문 第四의 「三井の常住院の僧正」도 이 절의 고승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장리 가쿠초(覚朝) 등 10인이 각각 반승 6인을 거느리고 「십단 대위덕법」을 닦았다.
- 七大寺・十五大寺칠대사 · 십오대사
- 나라(奈良)의 칠대사를 비롯해 국가가 공인한 큰 절들. 천태 · 진언에 남도의 여러 절까지 더해, 당시의 국가 불교가 한꺼번에 조복에 동원되었음을 말한다.
- 十五壇の秘法십오단의 비법
- 열다섯 개의 단(壇)을 세워 여러 아사리가 동시에 닦는 밀교의 조복 수법. 본문은 그중 열세 가지 이름을 들고, 「기도초」는 수법자와 반승 수, 시주까지 자세히 적는다(아래 도표).
- 紫宸殿자신전
- 궁궐의 정전(正殿). 즉위 등 나라의 큰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이곳에서 오무로가 대법을 닦았다는 것은, 조정이 나라의 운명을 그 수법에 걸었다는 뜻이다.
- 九重구중
- 아홉 겹 문으로 둘러싸인 궁궐, 곧 왕궁. 관동의 군대가 궁궐에 불을 놓았다는 것은 왕법의 권위가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그린 말이다.
- 勢多伽세타카
- 세타카마루(勢多伽丸). 상황 측에 선 무사 사사키 히로쓰나(佐々木広綱)의 아들로, 출가하여 닌나사에 살며 오무로 도조 법친왕의 총애를 받던 열 살 소년이다.
- 密厳浄土밀엄정토
- 진언에서 대일여래가 머문다고 하는 정토. 조복법의 「취지」가 상대의 목숨을 거두어 그 혼을 이곳으로 보내는 데 있다는 본문의 말은, 이 수법이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기도였음을 드러낸다.
- 伴僧반승
- 수법을 주재하는 아사리를 곁에서 돕는 승려. 본문은 주된 행자 41인에 반승 300여 인을 더해, 제5절의 「況や三百余人をや」로 이어 간다.
- 上代상대
- 「천황 · 상황의 권위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시대」를 말한다. 법도 행자도 시대도 모자람이 없었는데 왜 졌는가 하는 물음을 날카롭게 하는 말이다.
승구의 난 — 국주가 백성에게 지다
제10장 끝에서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 자세히 썼으나 어리석은 이는 알기 어렵다며 「所詮現証を引いて申すべし」라고 하셨다. 이 장은 그 약속을 지키는 대목이다. 진언이 나라를 망치는 법이라는 것을 경문과 도리로만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사건으로 보이시려는 것이며, 그 첫째로 드신 것이 승구의 난이다.
대성인은 난의 경과를 발단부터 적으신다. 그 경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승구 3년(1221) 5월 14일, 고토바 상황은 막부가 교토 수호로 보낸 이가 미쓰스에와 오에노 지카히로(大江親広)에게 상황군에 가담하라고 강요했다. 지카히로는 응했으나 미쓰스에는 끝내 거부했고, 이튿날인 15일 상황은 그를 공격해 죽이는 동시에 요시토키 추토의 원선을 오기칠도의 여러 나라에 내렸다. 본문이 「伊賀太郎判官光末を打捕まします鎌倉の義時をうち給はむとての門出なり」라고 하신 것은 이 일이다.
그러나 결과는 상황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겨우 한 달 뒤 호조 야스토키 · 도키후사가 이끈 가마쿠라군이 세타 · 우지의 방어선을 돌파해 교토를 단숨에 점령했다. 막부는 고토바 상황을 오키로, 준토쿠 상황을 사도로, 쓰치미카도 상황을 도사로(뒤에 아와로) 유배하고, 거사를 꾸민 원(院)의 근신 · 중신을 잡아들였다.
- ①4월 19일십오단의 비법 시작「기도초」 · 「신국왕어서」의 날짜. 본존문답초는5월 19일부터五月十九日より
- ②4월 26일손카이(尊快)가 천태 좌주에 임명됨
- ③5월 3일오무로의 여법애염왕법 시작(27일간, 자신전)
- ④5월 14일상황이 교토 수호 이가 미쓰스에 · 오에노 지카히로에게 가담을 강요
- ⑤5월 15일미쓰스에 주살, 요시토키 추토의 원선을 오기칠도에 내림5월 15일에 일어나五月十五日におこりて
- ⑥5월 21일가마쿠라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교토에 닿음 — 존성왕법 · 태원수법 · 오단법 · 수호경법 준비
- ⑦6월 8일오무로 도조 법친왕이 자신전에서 수호경법 시작6월 8일 처음으로 이를 행하다六月八日始めて之を行う
- ⑧6월 13일밤 큰비 · 우레, 세타 전투
- ⑨6월 14일관동군이 우지 · 세타를 건넘6월 14일에 지셨으니 겨우 30여 일이니라六月十四日にまけ給いぬわづかに三十余日なり
- ⑩6월 15일교토 점령
- ⑪그 뒤세 상황 유배, 공경 처형, 세타카마루 참수
「공경 일곱 사람」의 실제
본문은 「公卿七人は忽に頚をはねられてき」라 하시고, 「기도초」에서도 「殿上人七人誅殺せられ畢んぬ」(1354쪽)라고 하신다. 이 숫자를 사서와 옛 주석으로 검토해 보자. 『아즈마카가미(吾妻鏡)』와 『승구기(承久記)』에 따르면 난의 주모자로 잡힌 공경은 전 권중납언 후지와라노 미쓰치카(藤原光親), 같은 미나모토노 아리마사(源有雅), 같은 후지와라노 무네유키(藤原宗行), 참의 후지와라노 노리시게(藤原範茂), 권대납언 후지와라노 다다노부(藤原忠信), 참의 후지와라노 노부요시(藤原信能)의 여섯 사람이다.
안코쿠인 닛코(安国院日講)의 『녹내계몽(録内啓蒙)』은 나머지 한 사람을, 역시 처형될 예정이던 대감물(大監物) 미나모토노 미쓰유키(源光行)로 본다. 대감물은 중무성(中務省)에 속한 관직으로 종5위하이니 엄밀히는 공경이 아니지만 한데 묶어 말한 것이라고 한다. 『녹내계몽』은 또 실제로 목이 베인 이는 이 일곱 가운데 다섯 사람이었고, 다다노부는 사형을 면해 에치고로 유배되었으며, 미쓰유키는 맏아들 미나모토노 지카유키(源親行)의 탄원으로 죽음을 면했다고 적는다. 그런데도 「즉시 목이 베였다」고 하신 것은 일단 모두 사형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풀이다.
- ①고토바 상황(오키의 법황)→오키
- ②준토쿠 상황→사도
- ③쓰치미카도 상황→도사, 뒤에 아와
- ①후지와라노 미쓰치카(전 권중납언)참수
- ②미나모토노 아리마사(전 권중납언)참수
- ③후지와라노 무네유키(전 권중납언)참수
- ④후지와라노 노리시게(참의)참수
- ⑤후지와라노 노부요시(참의)참수— 이상 다섯은 참수
- ⑥후지와라노 다다노부(권대납언)사형 면함— 사형을 면하고 에치고로 유배
- ⑦미나모토노 미쓰유키(대감물, 종5위하)사형 면함— 맏아들 지카유키의 탄원으로 사형을 면함
어느 쪽으로 보든 상황의 유배와 천황의 폐위는 일본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성인은 바로 여기에 물음을 세우신다. 국주의 몸으로 백성과 같은 요시토키를 치는 것은 「鷹の雉をとり猫の鼠を食む」 일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猫のねずみにくらはれ鷹の雉にとられたるやうなり」 — 매와 고양이가 도리어 꿩과 쥐에게 잡아먹힌 꼴이 되었다. 세속의 눈으로는 무사의 실력, 민심의 향배, 시대의 흐름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대성인은 그런 설명에 머물지 않고 「어찌하여 지셨는가」를 끝까지 물으신다. 그 답은 第五에 가서야 주어진다.
같은 승구의 난을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서 염불의 현증으로도 드셨다. 「法然は後鳥羽院の御宇、建仁年中の者なり。彼の院の御事、既に眼前に在り」(「입정안국론」, 31쪽) — 법연이 활동한 고토바 원의 시대에 그 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눈앞에 있다는 말씀이다. 본존문답초는 같은 사건의 원인을 진언의 조복에서 찾는다. 두 어서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염불과 진언이 다 같이 법화경을 버린 방법(謗法)이라는 한 원인을 각기 다른 쪽에서 비춘 것이다.
조복의 힘을 다한 조정
第二에서 대성인은 조정 측이 무력만 일으킨 것이 아니라 「조복의 힘을 다했다」고 하신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토바 상황은 한편으로 군사를 일으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엔랴쿠사 · 닌나사 · 원성사 · 동사 등 천태 · 진언의 고승 41인에게 명해 십오단의 비법을 닦게 했다. 그 비법의 내용과 수법한 승려들은 「기도초」에 낱낱이 적혀 있다.
본문이 기도한 이들로 든 이름 — 천태 좌주, 진언의 장자, 닌나사의 오무로, 원성사의 장리, 칠대사 · 십오대사 — 은 당시 불교계의 꼭대기를 빠짐없이 망라한다. 그들의 「지혜와 계행은 해와 달과 같다」고 하신 것은 비꼼이 아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고승들이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신 뒤에, 그런데도 왜 졌는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들이 쓴 비법은 「홍법 · 자각 등 세 대사의 심중의 깊고 비밀한 대법」이었다. 제6~8장에서 꾸짖은 세 대사의 진언이 여기서 실제 역사의 무대에 오른다.
「5월 19일」인가 「4월 19일」인가
본문은 십오단의 비법을 「五月十九日より六月の十四日にいたるまで」 닦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여러 자료는 시작일을 4월 19일로 적는다. 「기도초」와 「신국왕어서」가 모두 4월 19일이다. 또 이 장 첫머리 「抑人王八十二代・隠岐の法王」부터 제12장의 「安徳は西海に沈み明雲は義仲に殺さる一門・皆一時にほろび畢んぬ」까지의 글은 예전에 『녹외어서(録外御書)』 권6의 「진언종행조복비법환착어본인사(真言宗行調伏秘法還著於本人事)」에 실려 있던 것이다. 오가와 다이도(小川泰道)가 『고조유문록(高祖遺文録)』을 엮을 때, 이 「진언종행비법사」를 「기도초」의 일부로 본 지에이 니치메이(智英日明)의 『신찬조서목록(新撰祖書目録)』을 따라 두 글을 합치면서 본존문답초와 겹치는 부분을 깎아 냈다. 그 깎여 나간 「진언종행비법사」의 글에서도 십오단의 비법은 4월 19일부터 6월 14일까지 닦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녹내계몽』보다 앞선 녹내어서의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닛켄(日健)의 『어서초(御書鈔)』는 본존문답초의 글을 「四月十九日より」로 인용하고 있어, 「이본(異本)」에는 「4월」로 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니치칸 상인도 「보은초 문단」에서 승구의 난의 대강을 적으면서, 거의 본존문답초를 인용한 듯한 대목에서 「そのほか伴僧三百余人、四月十九日より六月十四日に至るまで汗を流し脳を砕き」라고 쓰셨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면 본문의 「5월」이 잘못 전해진 것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세 번도 행하지 않은 대법」
마지막에 오무로가 자신전에서 닦은 대법은 「日本国にわたりていまだ三度までも行はぬ大法」이었다. 이때의 오무로는 고토바 상황의 둘째 아들 도조 법친왕이고, 그가 닦은 법은 「신국왕어서」에 따르면 밀교에서 「세 가지 대법」(三箇の大法)의 하나로 꼽히는 수호경법(守護経法)이다.
그런데 이 횟수도 자료마다 다르다. 「기도초」의 수호경법 주에는 「御室之を行はせらる我朝二度之を行う」(1353쪽)라고 되어 있고, 니치칸 상인의 「보은초 문단」은 「御室紫宸殿にして日本国に渡っていまだ二度とも行ぜざる大秘法」이라 적으며, 안코쿠인 닛코(日講)의 『녹내계몽』과 닛켄의 『어서초』도 「두 번도 행하지 않은 대법」으로 되어 있다. 본존문답초와 「진언종행비법사」만 「세 번」이다. 아마 승구의 난 때를 포함해 일본에서 두 번 행해졌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신국왕어서」의 「四十一人の高僧・十五壇の大法・此の法を行う事は日本に第二度なり」(1520쪽)라는 말씀도, 십오단의 대법이 한꺼번에 갖추어 닦인 것은 승구의 난이 두 번째였다는 뜻이다.
우지강의 큰비
조정 측이 비법의 효험을 얼마나 굳게 믿었는지는 「도키입도전답서」가 생생하게 전한다. 대성인은 6월 13일 밤의 광경을 「同じき六月十三日其の夜の戌亥の時より青天俄に陰りて震動雷電して」라고 쓰시고, 불어난 강물 앞에서 「武士共宇治勢多に打ち寄せて見ければ常には三丁四丁の河なれども既に六丁・七丁・十丁に及ぶ」라고 적으신다. 관동 무사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교토의 고승들은 「爰に叡山・東寺・七寺・園城寺等の高僧等之を聞くことを得て真言の秘法・大法の験とこそ悦び給いける」 — 진언 비법의 효험이라 기뻐했고, 「内裏の紫宸殿には山の座主・東寺・御室・五壇・十五壇の法を弥盛んに行われければ」 — 자신전에서는 더욱 성대하게 수법을 이어 갔다(993쪽). 그러나 그날 늦게 관동군은 강을 건넜고, 그 결말을 대성인은 「四つの王をば四つの島へ放ちまいらせ又高僧・御師・御房達は或は住房を追われ或は恥辱に値い給いて今に六十年の間いまだ・そのはぢをすすがずとこそ見え候」라고 맺으신다. 효험이라 믿은 순간이 패배의 바로 앞이었다는 것 — 이것이 조복의 실상이었다.

이 대목을 요약하면 이렇다. 조정 측은 천태 · 진언의 고승에게 의뢰해 최고의 비법으로 막부를 조복하며 비술을 다했지만 그 효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정 측이 처참하게 패했다. 대성인이 날짜까지 대조해 가며 이 일을 적으신 것은 조복이 「효험이 없었다」는 것을 넘어 「도리어 해가 되었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세타카마루와 오무로 — 기도를 의지한 이들의 끝
第三은 난 뒤의 처분이다. 세 상황의 유배와 공경 일곱 사람의 처형에 더해, 막부의 손은 기도를 주재한 오무로의 어소에까지 미쳤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막부의 고케닌이면서 조정 측에 붙은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 · 고조 아리노리(五条有範) · 사사키 히로쓰나(佐々木広綱) 등 무사들도 다수 참수되었는데, 세타카마루는 그 히로쓰나의 아들로 당시 겨우 열 살이었다. 그는 출가하여 닌나사에 살며 문적 도조 법친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난 뒤의 처분을 지휘한 호조 야스토키는 도조 법친왕과 세타카마루 어머니의 간청에 마음이 흔들려 세타카마루를 베려는 뜻이 약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세타카마루의 숙부로서 우지강 싸움에서 선봉을 맡았던 사사키 노부쓰나(佐々木信綱)가 형 히로쓰나와 사이가 나빠 끝내 참수를 주장했고, 세타카마루는 노부쓰나에게 맡겨져 로쿠조 강변(六条河原)에서 목이 베였다. 『승구기』는 그 모습을 보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적는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슬픔에 뒤따라 가쓰라강에 몸을 던졌으나 죽지 못하고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고, 11년 뒤인 정영 원년(1232) 7월 기요타키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전한다.
- ①사사키 히로쓰나(상황 측 무사)의 아들, 열 살
- ②출가하여 닌나사에 살며 오무로 도조 법친왕의 총애를 받음
- ③난 뒤 막부가 오무로의 어소에 들이닥쳐 끌어냄본문오무로의 어소에 밀고 들어가 가장 아끼던 제자인 어린아이 세타카를 끌어내어御室の御所に押し入りて最愛の弟子の小児勢多伽と申せしをせめいだして
- ④호조 야스토키는 오무로와 어머니의 간청에 마음이 흔들림
- ⑤숙부 사사키 노부쓰나가 형과의 불화로 참수를 주장
- ⑥로쿠조 강변에서 참수 — 『승구기』: 보는 이 모두 눈물을 흘림
- ⑦어머니는 가쓰라강에 몸을 던졌으나 살아나 비구니가 되고, 정영 원년(1232) 7월 기요타키강에 몸을 던짐본문어머니도 죽고 동자도 죽었느니라母も死す童も死す
본문은 오무로 역시 「思いに堪えずして死に給い畢んぬ」라고 하신다. 「시조깅고전답서」에도 「御室は紫宸殿にして六月八日より御調伏ありしに、七日と申せしに同じく十四日に・いくさに・まけ勢多迦が頚きられ御室をもひ死に死しぬ」(1152쪽)라고 같은 취지가 적혀 있다. 그러나 사실 관계는 이렇다. 도조 법친왕은 관희 3년(1231) 닌나사 오무로의 자리를 도진(道深) 법친왕에게 물려준 뒤 고야산에 은거했고, 건장 원년(1249)에 입적했다. 대성인 재세 당시에는 승구의 난의 전말로서 그렇게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성인이 힘주어 그리신 것은 개인의 비극 그 자체가 아니다. 「すべて此のいのりをたのみし人いく千万といふ事をしらず死にき」 — 기도를 의지한 이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오무로가 기도를 시작한 6월 8일부터 패전의 14일까지 꼭 이레가 찼다는 것이다. 밀교의 수법은 흔히 이레를 한 차례로 삼아 닦는다. 대법이 이레를 채우는 날이 바로 패망의 날이었다는 사실이, 조복의 기도가 기도한 쪽에 되돌아왔다는 것을 무엇보다 분명히 보여 준다.
십오단의 비법 — 법도 행자도 시대도 갖추었으나
第四에서 대성인은 십오단 비법의 이름을 하나하나 드신다. 일자금륜 · 사천왕 · 부동 · 대위덕 · 전법륜 · 여의륜 · 애염왕 · 불안 · 육자 · 금강동자 · 존성왕 · 태원 · 수호경, 모두 열세 가지다. 고토바 상황의 선지로 41인의 행자가 닦은 십오단의 내용을 「기도초」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법들의 「취지(詮)」를 대성인은 한 줄로 드러내신다. 「国敵王敵となる者を降伏して命を召し取りて其の魂を密厳浄土へつかはすと云う法なり」. 조복이란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기도이며, 그 혼을 대일여래의 정토로 보낸다는 명분으로 살생을 거룩하게 꾸미는 법이라는 것이다. 수법한 이들도 「가볍지 않아」, 천태 좌주 · 동사 · 오무로 · 미이의 조주인 승정 등 41인과 반승 300여 인이었다.
그런데 이 법은 위에 정리한 기도초의 목록에서 보듯, 천태의 좌주와 원성사의 장리까지 진언의 수법을 닦은 것이다. 천태종이 이미 밀교화되어 진언과 다르지 않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 제8장에서 본 자각 · 지증 이래의 태밀(台密)이 여기서 그 결과를 드러낸다.
대성인은 거듭 물으신다. 「法と云ひ行者と云ひ又代も上代なりいかにとしてまけ給いけるぞ」. 법은 세 대사가 비장한 대법이고, 행자는 당대 최고의 고승이며, 시대는 천황 · 상황의 권위가 아직 살아 있던 때였다. 설령 이기지 못한다 해도 1년 · 2년 · 10년 · 20년은 버텼어야 할 싸움이, 5월 15일에 일어나 6월 14일에 끝났다. 겨우 30여 일이다. 반면 「権の大夫殿は此の事を兼てしらねば祈祷もなしかまへもなし」 — 요시토키 쪽은 미리 알지 못해 기도도 대비도 없었다. 비법을 다한 쪽이 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쪽이 이겼다. 그리고 이 까닭을 「余人いまだしらず」 — 다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당시 불교계의 최고봉으로 여겨진 고승을 총동원해 비법을 닦았는데도 조정 측이 너무나 맥없이 가마쿠라군에 패한 사실이야말로 진언 밀교의 기도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 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한 달 만의 붕괴는 밀교의 기도가 무력했을 뿐 아니라 「얼마나 해로웠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僻事は一人なれども万国のわづらひ」 — 진언의 사법이 망국의 원인
第五에서 마침내 답이 나온다. 「日蓮小智を以て勘えたるに其の故あり所謂彼の真言の邪法の故なり」. 국주가 신하인 막부와 싸워 크게 진 까닭은 진언의 사법으로 기도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무게는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그릇된 법으로 아무리 기도를 거듭해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일은 결코 없으며, 그뿐 아니라 도리어 스스로 망하는 원인이 된다.
이어서 대성인은 원리를 세우신다. 「僻事は一人なれども万国のわづらひなり」 — 도리에 어긋난 그릇된 일은 한 사람이 저지르더라도 만국의 재앙이 된다. 단 한 사람이 방법(謗法)의 악행을 행해도 한 나라 두 나라가 무너질 터인데, 승구의 난에서는 국주의 명으로 300여 인의 고승이 대대적으로 밀교의 수법을 행했으니 망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더욱이 그들은 「国主とともに法華経の大怨敵となりぬ」 — 국주와 함께 법화경의 큰 원적이 되었다. 대일경을 법화경 위에 두는 진언의 교의를 국주가 받들어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는 것은, 나라 전체가 법화경에 칼을 겨눈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민에게 질 리 없는 국주가 지고, 비법을 다한 조정 측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막부 측에 대패했다」는 사실을 들어 진언의 사법이 망국의 악법이라는 현증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근원을 꿰뚫어 보신 이는 대성인 한 분뿐이었다. 「아키모토어서」에서도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世間の人人・此の根源を知る事なし此れ偏に法華経・大日経の勝劣に迷える故なり
세상 사람들은 이 근원을 아는 일이 없느니라. 이는 오로지 법화경과 대일경의 승렬에 미혹한 까닭이니라.
第四의 「余人いまだしらず」와 第五의 「日蓮小智を以て勘えたる」는 짝을 이룬다. 승구의 난은 누구나 아는 사건이지만, 그것을 법화경과 대일경의 승렬이라는 근원에서 읽어 낸 이는 없었다. 제6~8장에서 세 대사가 대일경을 제일, 법화경을 제이 · 제삼으로 끌어내린 일을 꾸짖은 것이, 여기서 나라의 흥망이라는 현실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원리에 비추어 이번에는 가마쿠라 막부가 같은 길을 밟으려 한다는 것을 걱정하시고 새로운 망국의 위기에 경고하신다. 그것이 다음 제12장의 「かかる大悪法としをへて」 이하의 글이다. 승구의 난이 막부의 승리로 끝났다고 해서 진언이 막부 편이었던 것이 아니다. 진언은 이긴 쪽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대성인은 승구의 난이라는 「현증」을 들어 진언의 사법이 망국의 원인임을 밝히셨다. 이는 단지 지난 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원리로 지금 몽골의 침입 앞에서 진언에 조복을 맡긴 막부를 간하시기 위한 것이다.
본문
かかる大悪法としをへてやうやく関東におち下りて諸堂の別当供僧となり連連と行えり 本より辺域の武士なれば教法の邪正をば知らずただ三宝をばあがむべき事とばかり思ふゆへに自然としてこれを用いきたりて やうやく年数を経る程に今他国のせめをかうふりて此の国すでにほろびなんとす、 関東八箇国のみならず叡山・東寺・園城・七寺等の座主・別当・皆関東の御はからひとなりぬるゆへに 隠岐の法皇のごとく大悪法の檀那と成定まり給いぬるなり、
이러한 대악법이 해를 거듭하며 차츰 관동으로 내려와 여러 당(堂)의 별당(別当) · 공승(供僧)이 되어 잇달아 행하고 있느니라. 본디 변방의 무사이므로 교법의 사정(邪正)은 알지 못하고, 다만 삼보는 우러러야 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까닭에 자연히 이를 써 오다가, 차츰 햇수가 지나는 동안 지금 타국의 공격을 받아 이 나라는 이미 망하려 하고 있느니라. 관동 팔개국뿐 아니라 예산 · 동사 · 원성 · 칠사 등의 좌주 · 별당이 모두 관동의 처분에 따르게 되었으므로, 오키의 법황과 같이 대악법의 단나(檀那)로 굳어지시고 말았느니라.
国主となる事は大小皆・梵王・帝釈・日月・四天の御計いなり、 法華経の怨敵となり定まり給はば忽に治罰すべきよしを誓い給へり、 随つて人王八十一代・安徳天皇に太政入道の一門与力して兵衛佐頼朝を調伏せんがために、 叡山を氏寺と定め山王を氏神とたのみしかども 安徳は西海に沈み明雲は義仲に殺さる一門・皆一時にほろび畢んぬ、 第二度なり今度は第三度にあたるなり。 日蓮がいさめを御用いなくて真言の悪法を以て大蒙古を調伏せられば日本国還つて調伏せられなむ還著於本人と説けりと申すなり、 然らば則ち罰を以て利生を思うに法華経にすぎたる仏になる大道はなかるべきなり 現世の祈祷は兵衛佐殿・法華経を読誦する現証なり。
국주가 되는 것은 나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범왕 · 제석 · 일월 · 사천왕의 배려이니라. (이 제천은) 국주가 법화경의 원적으로 굳어지신다면 곧바로 다스려 벌하겠다고 맹세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인왕 제81대 안토쿠 천황에게 태정입도의 일문이 힘을 보태어 병위좌(兵衛佐) 요리토모를 조복하기 위해 예산을 씨사(氏寺)로 정하고 산왕(山王)을 씨신으로 의지하였으나, 안토쿠는 서해에 가라앉고 메이운은 요시나카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일문은 모두 한꺼번에 망하고 말았느니라. (승구의 난은) 두 번째이니, 이번은 세 번째에 해당하느니라. 니치렌의 간언을 쓰지 않으시고 진언의 악법으로 대몽골을 조복하신다면 일본국이 도리어 조복당하고 말 것이니, 「환착어본인(還著於本人)」이라고 설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곧 벌로써 이생(利生)을 생각해 보건대, 법화경보다 나은 성불의 대도는 없을 것이니라. 현세의 기도는 병위좌 님이 법화경을 독송한 것이 그 현증이니라.
어구 풀이
- 別当供僧별당 · 공승
- 별당은 한 절의 사무를 총괄하는 장, 공승은 절에 딸려 공양과 수법을 맡는 승려. 진언사들이 가마쿠라 여러 절의 이 자리를 차지하고 막부를 위한 기도를 「잇달아」 행했다는 것이다.
- 辺域の武士변방의 무사
-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국(東国)의 무사. 대성인은 그들을 낮추어 보신 것이 아니라, 교법의 옳고 그름을 가릴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는 사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 三宝삼보
- 불 · 법 · 승. 관동의 무사들은 「삼보를 우러러야 한다」는 소박한 신심만으로, 진언승이 받드는 법이 바른지 그른지는 묻지 않은 채 받아들였다.
- 関東八箇国관동 팔개국
- 사가미 · 무사시 · 아와 · 가즈사 · 시모사 · 히타치 · 고즈케 · 시모쓰케의 여덟 나라. 막부의 근거지 전체를 이른다.
- 檀那단나
- 시주 · 후원자(산스크리트 dāna에서 온 말). 막부가 오키의 법황처럼 진언이라는 「대악법의 후원자」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 梵王・帝釈・日月・四天범왕 · 제석 · 일월 · 사천
- 불법과 그것을 지키는 나라를 수호한다고 경전에 설해진 제천선신(諸天善神). 대성인은 국주의 자리 자체가 이 제천의 배려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신다.
- 安徳天皇안토쿠 천황
- 제81대 천황.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외손자로, 평가와 함께 서쪽으로 피했다가 단노우라에서 여덟 살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 太政入道태정입도
- 태정대신을 지내고 출가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 인안 3년(1168) 출가할 때 천태 좌주 메이운을 스승으로 삼았다.
- 兵衛佐頼朝병위좌 요리토모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병위좌(兵衛佐)는 그가 젊어서 받은 관직 이름이다. 평가가 조복하려 한 상대이자, 본문 끝에서는 법화경을 독송한 현세 기도의 현증으로 다시 등장한다.
- 氏寺・氏神씨사 · 씨신
- 한 씨족이 자기 집안의 절과 신으로 받드는 사찰과 신사. 후지와라씨에게 흥복사와 가스가 신사가 그러했듯, 평가는 엔랴쿠사와 히요시 산왕(日吉山王) 신사를 그렇게 삼겠다고 서약했다.
- 明雲메이운
- 천태 좌주. 기요모리 출가의 스승이자 평가의 기도를 맡은 인물로, 수영 2년(1183) 기소 요시나카의 군대에 죽었다.
- 義仲요시나카
-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 원씨의 장수로 수영 2년 평가를 몰아내고 교토에 들어왔다.
- 還著於本人환착어본인
-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의 구절. 저주나 독약으로 남을 해치려 하면 그 해가 도리어 본인에게 붙는다는 뜻이다. 대성인은 몽골을 진언으로 조복하면 그 조복이 일본에 되돌아온다는 근거로 이 구절을 드신다.
- 利生이생
- 중생을 이롭게 함, 곧 부처의 이익. 진언의 「벌」의 현증을 뒤집어 보면, 법화경만이 성불의 대도이자 참된 이익의 법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관동으로 내려간 진언
제11장에서 대성인은 진언이 망국의 악법이라는 것이 승구의 난에서 이미 분명해졌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관동의 무사들은, 이 난을 계기로 실권이 완전히 가마쿠라 막부로 옮겨 가자 관동으로 내려와 세력을 넓히려 한 진언사들에게 속아 대악법의 단나가 되고 말았다. 第一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진언사들이 가마쿠라로 내려간 경위는 다른 어서에서도 거듭 말씀하신다. 「묘호비구니답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代東にうつりて 年をふるままに彼の国主を失いし、真言宗等の人人鎌倉に下り相州の足下にくぐり入りて・やうやうにたばかる故に・本は上﨟なればとて・すかされて鎌倉の諸堂の別当となせり
시대가 동쪽으로 옮겨 해가 지나는 동안, 저 국주를 잃게 한 진언종 등의 사람들이 가마쿠라로 내려가 상주(요시토키의 집안)의 발밑으로 기어들어 이리저리 꾀를 부렸으므로, 본디 지체 높은 이들이라 하여 속아서 가마쿠라 여러 당의 별당으로 삼았느니라.
「선시초」에서도 같은 모습을 그리신다.
今はかまくらの世さかんなるゆへに東寺・天台・園城・七寺の真言師等と並びに自立をわすれたる法華宗の謗法の人人・関東にをちくだりて頭をかたぶけひざをかがめやうやうに武士の心をとりて、諸寺・諸山の別当となり長吏となりて王位を失いし悪法をとりいだして国土安穏といのれば
지금은 가마쿠라의 세상이 번성하므로 동사 · 천태 · 원성 · 칠사의 진언사들과, 자기 종지를 잊은 법화종의 방법(謗法)하는 사람들이 관동으로 내려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이리저리 무사의 마음을 사서, 여러 절 · 여러 산의 별당이 되고 장리가 되어, 왕위를 잃게 한 악법을 꺼내 들고 국토 안온을 기원하니
세 어서를 나란히 놓으면 그림이 분명해진다. 승구의 난에서 조정을 망하게 한 법이, 난이 끝나자 이긴 쪽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관동의 무사들은 「본디 변방의 무사라」 교법의 사정을 가릴 줄 몰랐고, 삼보는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더구나 상대가 교토의 지체 높은 승려라는 데 속아 그들을 여러 절의 별당으로 앉혔다. 그 결과 관동 팔개국만이 아니라 예산 · 동사 · 원성사 · 칠사의 좌주와 별당까지 모두 막부의 처분에 따르게 되었다. 대성인은 이로써 막부가 「隠岐の法皇のごとく大悪法の檀那と成定まり給いぬるなり」라고 하신다. 승구의 난에서 이긴 쪽이 진 쪽의 원인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것이다.
내란과 외침의 차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짚어 두어야 한다. 승구의 난은 내전이었으므로 조정 측이 졌어도 가마쿠라 측이 이겨서 나라는 남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몽골이라는 외국이 일본을 공격해 오는 것이다. 여기서 망국의 악법으로 기도한다면 일본 그 자체의 멸망을 부를 우려가 있다. 대성인이 무엇보다 걱정하신 것은 이 점이었고, 그래서 본문에 「今他国のせめをかうふりて此の国すでにほろびなんとす」라고 하신 것이다.
본존문답초가 쓰인 홍안 원년(1278)은 문영 11년(1274)의 첫 내습이 물러간 지 4년째로, 몽골은 다시 일본을 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정도 막부도 그 위기감 속에서 진언사들에게 적국 조복의 기도를 성대하게 맡기고 있었다. 제10장에서 입정안국론의 「타국침핍난」 예언을 상기시키신 대성인은, 그 예언이 실현되어 가는 바로 그 순간에 같은 망국의 법이 다시 쓰이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제천의 치벌과 평가의 멸망
第二에서 대성인은 먼저 원리를 세우신다. 「国主となる事は大小皆・梵王・帝釈・日月・四天の御計いなり」 — 나라가 크든 작든 국주의 자리는 범왕 · 제석 · 일월 · 사천왕의 배려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제천은 국주가 「法華経の怨敵となり定まり給はば忽に治罰すべきよしを誓い給へり」 — 법화경의 원적으로 굳어지면 곧바로 다스려 벌하겠다고 맹세했다. 이 대목은, 국주가 법화경을 등지면 반드시 제천의 치벌을 받아 망한다는 것을 평가 일문의 선례로 다시 보이시고, 진언의 기도로 몽골을 조복하는 것이 나라를 망친다고 거듭 경고하신 것이다.
그 선례가 평가다. 평가가 밀교화한 히에이산 엔랴쿠사를 씨사로 정하고 원씨 조복을 기도하게 한 일은 여러 어서에 나오지만, 「시조깅고전답서」가 가장 자세하다.
源氏の頼朝と平家の清盛との合戦の起りし時・清盛が一類・二十余人・起請をかき連判をして願を立てて平家の氏寺と叡山をたのむべし三千人は父母のごとし・山のなげきは我等がなげき・山の悦びは我等がよろこびと申して、近江の国・二十四郡を一向によせて候しかば
원씨의 요리토모와 평가의 기요모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기요모리의 일족 20여 인이 기청문(起請文)을 쓰고 연판하여 서원을 세우되, 「평가의 씨사로서 예산을 의지하리라. 삼천 대중은 부모와 같다. 산의 탄식은 우리의 탄식이요 산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이다」라고 하며 오미국 24군을 한꺼번에 기진하였으니
당시 엔랴쿠사는 전국에 장원을 가지고 늘 수천의 승병을 거느려 그 용맹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므로 평가도 예산의 세력에 대해서는 회유책을 썼다. 기요모리가 인안 3년(1168) 출가할 때 천태 좌주 메이운을 스승으로 삼은 것도 그 표현일 것이다.
어서와 『평가물어』의 차이
여기서 사서와의 차이를 꼼꼼히 대조해 보자. 『평가물어』가 전하는 바로는, 평가 일문이 공경 10인의 연서로 「평씨는 히에이산 엔랴쿠사를 평씨의 씨사로 삼고 히요시 신사를 씨신으로 삼는다」는 기청문을 엔랴쿠사와 히요시 산왕사에 바친 것은 수영 2년(1183) 7월, 곧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아타카 · 시노하라 등의 싸움에서 평가군을 파죽지세로 깨뜨리고 교토로 쳐들어오던 때였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요시나카가 먼저 산문(山門)에 첩장을 보냈고, 산문의 대중은 평의 끝에 원씨 편에 서기로 막 결정한 뒤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성인은 「신국왕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安徳天皇の御宇には明雲の座主・御師となり・太上入道並びに一門怠状を捧げて云く『彼の興福寺を以て藤氏の氏寺と為し春日の社を以て藤氏の氏神と為すが如く、延暦寺を以て平氏の氏寺と号し日吉の社を以て平氏の氏神と号す』云云、 叡山には明雲座主を始めとして三千人の大衆・五壇の大法を行い、大臣以下は家家に尊勝陀羅尼・不動明王を供養し・諸寺・諸山には奉幣し大法秘法を尽くさずという事なし
안토쿠 천황의 치세에는 메이운 좌주가 스승이 되고, 태상입도와 그 일문이 서약서를 바쳐 말하기를 「저 흥복사를 후지와라씨의 씨사로 삼고 가스가 신사를 후지와라씨의 씨신으로 삼은 것처럼, 엔랴쿠사를 평씨의 씨사라 부르고 히요시 신사를 평씨의 씨신이라 부른다」 운운. 예산에서는 메이운 좌주를 비롯한 삼천 대중이 오단의 대법을 행하고, 대신 이하는 집집마다 존승다라니 · 부동명왕을 공양하며, 여러 절 · 여러 산에는 폐백을 바쳐 대법 · 비법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느니라.
정리하면 어서의 기술은 『평가물어』와 세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평가가 산문에 서약서를 보낸 것이 기요모리가 살아 있을 때였다는 점. 둘째, 기요모리 이하 20여 인이 연판했다는 점. 셋째, 산문이 그 원서를 받아들여 온 산을 들어 평가의 승리를 기원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마나리 겐쇼(今成元昭)는 『평가물어유전고(平家物語流伝考)』에서, 대성인의 산문 연서에 관한 지식이 『평가물어』에서 얻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고 하면서, 당시 평가가 놓인 처지로 보아 예산의 세력을 유일한 의지처로 삼아 끌어들이려는 평가의 원서가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산문에 보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결코 대성인이 사실을 고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마나리 겐쇼 『평가물어유전고』: 대성인은 『평가물어』와 다른 계통의 지식에 근거하셨고, 평가의 원서가 여러 번 산문에 보내졌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 대성인이 사실을 고친 것이 아니다
메이운의 최후 — 「生けると死ぬと二度大難に値えり」
본문의 「明雲は義仲に殺さる」에 대해서도 자료를 대조해 본다. 『평가물어』에 따르면 고시라카와 법황과 결렬한 요시나카가 수영 2년(1183) 법황의 어소 호주지전(法住寺殿)을 불태웠을 때, 메이운은 미이데라 장리 엔케이(円慶) 법친왕과 함께 말을 타고 어소에서 도망치려다가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목이 베였다.
한편 메이운의 최후를 언급한 어서도 적지 않은데, 비교적 자세한 것은 「시조깅고전답서」(팔풍초)다.
大衆と座主と一同に内には真言の大法をつくし・外には悪僧どもを・もつて源氏をいさせしかども義仲が郎等ひぐちと申せしをのこ義仲とただ五六人計り叡山中堂にはせのぼり調伏の壇の上にありしを引き出して・なわをつけ西ざかを大石をまろばすやうに引き下して頚をうち切りたりき
대중과 좌주가 하나가 되어 안으로는 진언의 대법을 다하고 밖으로는 악승들을 시켜 원씨를 쏘게 하였으나, 요시나카의 낭당 히구치라는 사내가 요시나카와 단 대여섯 명만으로 예산 중당에 달려 올라가 조복의 단 위에 있던 (메이운을) 끌어내어 밧줄을 매어 서쪽 비탈을 큰 돌을 굴리듯 끌어내려 목을 베어 버렸느니라.
이 기술도, 이마나리 씨가 지적하듯 대성인이 『평가물어』와는 다른 계통의 사료에 근거해 원평의 싸움을 쓰셨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런데 「류센사신장」에는 「叡山の明雲は流矢に当り」(851쪽)라고 되어 있어, 메이운의 최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설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류센사신장」은 후반을 닛코 상인이 쓰셨으나, 인용한 글은 대성인께서 집필하신 부분에 해당함이 친필로 확인된다. 또 메이운의 최후는 『우관초(愚管抄)』 등 현존하는 사료에도 적혀 있는데, 세부의 차이는 있어도 요시나카의 군대에 공격당해 비명에 죽었다는 점은 공통된다.
대성인은 「지카쿠대사사」에서, 안원 3년(1177) 5월 엔랴쿠사 대중의 봉기에 연루되어 죄를 물어 이즈로의 유배가 정해졌던 이 메이운이 끝내 요시나카에게 죽은 일을 들어 엄하게 탄핵하신다.
此の人生けると死ぬと二度大難に値えり、 生の難は仏法の定例・聖賢の御繁盛の花なり死の後の恥辱は悪人・愚人・誹謗正法の人招くわざわいなり
이 사람은 살아서와 죽을 때 두 번 대난을 만났느니라. 살아서의 난은 불법의 정해진 예이며 성현이 번성하는 꽃이지만, 죽을 때의 치욕은 악인 · 우인 ·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이 부르는 재앙이니라.
또 「요리모토진장」에서는 메이운의 최후를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진다(頭破作七分)」는 경문의 현증으로 드신다. 법화경의 행자가 살아서 당하는 난은 영예이지만, 법화경을 등진 이가 맞는 비명의 죽음은 그 법의 결과라는 것이다.
- ①『평가물어』요시나카가 호주지전을 불태울 때 엔케이 법친왕과 함께 말을 타고 달아나다 화살에 맞아 떨어져 목이 베임
- ②「시조깅고전답서」(1152쪽)조복의 단 위에 있던 것을 끌어내어調伏の壇の上にありしを引き出して— 서쪽 비탈로 끌려 내려가 참수
- ③「류센사신장」(851쪽)예산의 메이운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叡山の明雲は流矢に当り
- ④『우관초』 등세부는 달라도 요시나카 군대에 비명에 죽었다는 점은 공통
단노우라
평가는 기도의 보람 없이 잇달아 싸움에 졌다. 수영 2년(1183) 7월 요시나카가 교토에 들어오자 평가는 안토쿠 천황을 받들고 서쪽으로 달아나 군사를 모아 원씨에 맞섰지만 거듭 패했고, 수영 4년(1185) 3월 24일 마침내 시모노세키 단노우라의 싸움에서 져 멸망했다. 안토쿠 천황은 평가 일문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여덟 해의 생애를 마쳤다. 다이라노 무네모리 · 기요무네 부자는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요시쓰네의 가인(家人)에게 건져져 포로가 되었고, 뒤에 가마쿠라로 보내졌다가 교토로 돌아가는 길에 목이 베였다. 본문의 「安徳は西海に沈み明雲は義仲に殺さる一門・皆一時にほろび畢んぬ」는 이 일을 한 줄로 거둔 것이다.
- ①인안 3년(1168)기요모리 출가 — 천태 좌주 메이운을 스승으로 삼음
- ②안원 3년(1177) 5월메이운, 엔랴쿠사 대중 봉기에 연루되어 이즈 유배가 정해짐
- ③원평의 싸움평가가 예산을 씨사, 산왕을 씨신으로 삼아 요리토모 조복을 기도(어서: 기요모리 생전 · 20여 인 연판)
- ④수영 2년(1183) 7월『평가물어』의 기청문(공경 10인 연서), 요시나카 입경, 평가가 안토쿠 천황을 받들고 서쪽으로
- ⑤수영 2년(1183)요시나카의 호주지전 습격, 메이운 죽음
- ⑥수영 4년(1185) 3월 24일단노우라, 평가 멸망 — 안토쿠 천황 여덟 살로 입수, 무네모리 · 기요무네 부자 포로 뒤 참수
세 번째 현증 — 「日本国還つて調伏せられなむ」
이렇게 평가의 멸망을 첫 번째로 놓으면, 승구의 난은 「第二度なり」, 그리고 지금 몽골에 대한 진언의 조복은 「今度は第三度にあたるなり」. 진언의 기도로 적을 조복하려다 스스로 망한 일이 이미 두 번 있었고, 이번이 세 번째가 되려 한다는 것이다. 서강의 대의에서도 이 세 번을 한 줄로 꿰어 보았다 — 원평의 싸움에서 기요모리가 예산의 천태 진언으로 요리토모를 조복하려다 평가 일문과 안토쿠 천황이 망한 것이 첫 번째 현증, 승구의 난이 두 번째, 그리고 이번 몽골 내습이 세 번째 현증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정면으로 간하신다. 「日蓮がいさめを御用いなくて真言の悪法を以て大蒙古を調伏せられば日本国還つて調伏せられなむ」. 니치렌의 간언을 쓰지 않고 진언의 악법으로 대몽골을 조복한다면 일본국이 도리어 조복당할 것이다. 그 근거가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의 「還著於本人」이다. 남을 해치려고 건 저주가 도리어 건 사람에게 붙는다 — 조정이 요시토키를 조복하려다 스스로 조복당한 승구의 난이 그 실례였다.
이어지는 말씀은 방향을 돌린다. 「然らば則ち罰を以て利生を思うに法華経にすぎたる仏になる大道はなかるべきなり」. 진언의 기도가 낳은 「벌」의 현증을 거꾸로 비추어 보면, 「이생」 곧 부처의 이익을 주는 법은 법화경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벌이 분명한 만큼, 그 반대편의 이익도 분명하다는 논리다. 그리고 「現世の祈祷は兵衛佐殿・法華経を読誦する現証なり」 — 현세의 기도에 대해서도 증거가 있으니, 평가가 조복하려 한 요리토모 쪽이 법화경을 독송했다는 것이다. 곧 병위좌 님이 법화경을 독송하여 얻은 이익이 그 현증이라는 뜻이다. 진언으로 조복한 평가는 망하고, 법화경을 독송한 요리토모는 이겼다. 대성인은 성불이라는 후세의 대도와 현세의 기도 양쪽에서 법화경이 근본임을 보이시고 이 단을 맺으신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국주가 법화경을 등지면 제천의 치벌을 받아 반드시 망한다. 대성인은 평가와 승구의 난이라는 두 선례를 들어, 진언의 기도로 몽골을 조복하는 것이 도리어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고 거듭 경고하셨다. 승구의 난은 내란이어서 나라가 남았지만, 외적 앞에서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 일본 자체가 위태롭다는 것이 대성인의 가장 깊은 걱정이었다.
본문
此の道理を存ぜる事は父母と師匠との御恩なれば父母はすでに過去し給い畢んぬ、 故道善御房は師匠にておはしまししかども法華経の故に地頭におそれ給いて 心中には不便とおぼしつらめども外にはかたきのやうににくみ給いぬ、 後にはすこし信じ給いたるやうにきこへしかども臨終にはいかにやおはしけむおぼつかなし 地獄まではよもおはせじ又生死をはなるる事はあるべしともおぼへず中有にやただよひましますらむとなげかし、 貴辺は地頭のいかりし時・義城房とともに清澄寺を出でておはせし人なれば 何となくともこれを法華経の御奉公とおぼしめして生死をはなれさせ給うべし。
이 도리를 알게 된 것은 부모와 스승의 은혜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느니라. 고(故) 도젠 어방은 스승이셨으나 법화경 때문에 지두(地頭)를 두려워하시어, 마음속으로는 가엾게 여기셨겠으나 겉으로는 원수처럼 미워하셨느니라. 뒤에는 조금 믿으신 것처럼 들렸으나, 임종에는 어떠하셨는지 마음이 놓이지 않노라. 설마 지옥까지야 가셨으랴마는, 그렇다고 생사를 떠나셨으리라고도 생각되지 않으니, 중유(中有)에 떠돌고 계시지나 않을까 하여 탄식하노라. 귀변(貴辺)은 지두가 노하였을 때 기조보와 함께 (니치렌을 데리고) 세이초사를 나와 주신 분이니, 따로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법화경에 대한 봉공(奉公)이라 여기시어 생사를 떠나도록 하시라.
어구 풀이
- 此の道理이 도리
- 직접으로는 앞의 두 장에서 말씀하신, 진언은 나라를 망치는 악법이고 법화경이야말로 성불의 대도라는 도리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그 원의(元意)는 말법에 세워야 할 본존을 대성인만이 알고 계신다는 데 있다.
- 父母부모
- 대성인의 부친은 정가 2년(1258), 모친은 문영 4년(1267)에 세상을 떠났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두 분 모두 입종 직후 정법에 귀의했다.
- 故道善御房고 도젠 어방
- 대성인이 열두 살에 세이초사에 올라 스승으로 섬긴 도젠보(道善房). 건치 2년(1276) 3월에 세상을 떠났고, 대성인은 그 추선을 위해 「보은초」를 써서 세이초사로 보내셨다.
- 地頭지두
- 아와국 나가사군 도조향의 지두 도조 가게노부(東条景信). 열렬한 염불자로서 건장 5년(1253) 대성인의 입종 선언에 격노해 대성인을 해치려 했다.
- 不便불편
- 「가엾다 · 딱하다」는 뜻. 도젠보가 마음속으로는 제자를 딱하게 여겼으리라는 대성인의 헤아림이 담긴 말이다.
- 中有중유
- 죽은 뒤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중간 상태. 중음(中陰)이라고도 한다. 지옥에 떨어지지도, 생사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떠도는 상태를 말한다.
- 生死をはなる생사를 떠나다
-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 성불하는 것. 도젠보에 대해서는 「생사를 떠났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하시고, 조켄보에게는 「생사를 떠나도록 하라」고 당부하시는 대비가 이 단의 축이다.
- 貴辺귀변
- 편지를 받는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 이 어서를 받은 조켄보(浄顕房)를 가리킨다.
- 義城房기조보
- 조켄보와 함께 대성인의 세이초사 시절 형제자(兄弟子)였던 승려. 「義浄房」 · 「義成房」으로도 적는다. 「기조보어서」를 받았고, 조켄보와 연명으로 「보은초」 등을 받았다.
- 清澄寺세이초사
- 아와국 기요스미산의 절. 대성인이 열두 살에 올라 수학하고, 건장 5년 입종을 선언하신 곳이다. 도젠보 · 조켄보 · 기조보가 이 절의 승려였다.
- 法華経の御奉公법화경에 대한 봉공
- 법화경을 위해 몸을 바쳐 섬김. 박해받는 법화경의 행자를 지킨 일 그 자체가 법화경을 섬긴 공덕이라는 뜻이다. 「보은초」에서는 같은 일을 「천하제일의 법화경의 봉공」이라 하셨다.
「이 도리」 — 직접의 뜻과 원의
이 단은 「此の道理を存ぜる事は父母と師匠との御恩なれば」로 시작한다. 「이 도리」는 직접으로는 앞 단에서 말씀하신 것 — 진언의 가르침은 나라를 망치는 악법이고 법화경이야말로 성불의 대도라는 것 — 을 가리킨다. 제11 · 12장에서 대성인은 승구의 난과 평가의 멸망을 들어 그 도리를 현증으로 보이셨고, 그것을 아는 이는 「니치렌 혼자」라고 하셨다. 그 홀로 아는 지혜가 어디서 왔는가 — 대성인은 그것을 부모와 스승의 은혜로 돌리신다.
그러나 그 원의는 한 걸음 더 깊이 읽어야 한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말씀은 말법에 세워야 할 본존을 대성인만이 알고 계신다는 것을 밝히신 것으로 배견된다. 다음의 마지막 단에서 대성인이 나타내시는 본존이 정법 · 상법 시대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正像未顕) 본존임을 말씀하시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서강의 정리를 빌리면, 대성인이 말법의 본불로서 미증유의 본존을 나타내시는 것도 오로지 부모와 스승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깊은 보은의 일념이 이 단에 담겨 있다. 본존문답초 전체가 본존을 묻는 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도리」가 끝내 본존으로 귀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부모의 은혜 — 현세를 기르고 후세를 돕다
대성인이 여기서 부모와 스승의 은혜라고 하신 것은, 자신을 길러 준 부모와 학문의 첫걸음을 이끌어 준 스승이 있었기에 이렇게 불법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깊은 보은 감사의 일념을 나타내신 것이다. 부모의 은혜에 대해 대성인은 「사은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今生の父母は我を生みて法華経を信ずる身となせり、梵天・帝釈・四大天王転輪聖王の家に生まれて三界・四天をゆづられて人天・四衆に恭敬せられんよりも 恩重きは今の某が父母なるか
금생의 부모는 나를 낳아 법화경을 믿는 몸이 되게 하였느니라. 범천 · 제석 · 사대천왕 · 전륜성왕의 집에 태어나 삼계와 사천하를 물려받고 인천과 사중에게 공경받는 것보다, 은혜가 무거운 것은 지금의 나의 부모인가 하노라.
또 「仏教を信ずれば先づ此の父と母との恩を報ずべし、父の恩の高き事・須弥山猶ひきし・母の恩の深き事大海還つて浅し」(「우에노전어소식」, 1527쪽) — 불교를 믿는다면 먼저 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를 갚아야 하니, 아버지 은혜의 높음은 수미산도 오히려 낮고 어머니 은혜의 깊음은 큰 바다도 도리어 얕다고 하셨다.
그러나 불법의 효양관이 유교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대성인은 이 점을 이렇게 지적하신다.
外典三千余巻は他事なし・ただ父母の孝養ばかりなり、しかれども現世をやしなひて後生をたすけず、父母の恩のおもき事は大海のごとし・現世をやしなひ後生をたすけざれば・一渧のごとし
외전 3천여 권은 다른 일이 없고 오직 부모에 대한 효양뿐이니라. 그러나 현세를 봉양할 뿐 후생을 돕지 못하느니라. 부모의 은혜가 무겁기는 큰 바다와 같은데, 현세를 봉양하고 후생을 돕지 못하면 (그 효양은) 한 방울과 같으니라.
외전도 효양의 소중함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부모의 현세를 기르는 데 그칠 뿐 후생을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다음 글에서 대성인은, 석존도 성불의 법인 법화경을 설함으로써 참된 효양을 이루었다고 하시며, 부모를 성불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참된 효양이며 보은이라고 가르치신다. 대성인의 부친은 정가 2년(1258), 모친은 문영 4년(1267)에 세상을 떠났는데, 두 분 모두 입종 직후 정법에 귀의했다. 대성인은 부모를 성불로 이끌어 참된 효양을 다하셨던 것이다. 본문의 「父母はすでに過去し給い畢んぬ」라는 짧은 말씀 뒤에는 이 완수된 효양이 놓여 있다.
스승 도젠보 — 「中有にやただよひましますらむ」
그렇기에 대성인은 이어서, 마음속으로는 법화경을 조금 믿은 듯했으나 끝내 염불을 버리지 못한 스승 도젠보의 후생을 생각하신다. 도젠보는 대성인의 스승이었지만 「法華経の故に地頭におそれ給いて」 — 법화경 때문에 지두 도조 가게노부를 두려워하여, 속으로는 제자를 가엾게 여겼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원수처럼 미워했다. 뒤에 조금 믿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임종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생사를 떠났다고도 생각되지 않으니, 「중유에 떠돌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 대성인은 탄식하신다.
스승의 신심이 끝내 미진했음을 가리지 않고 말씀하시는 엄정함과, 그 후생을 끝까지 걱정하시는 정이 한 문장 안에 함께 있다. 일찍이 「선무외삼장초」에서 대성인은 그 스승을 이끌려 한 뜻을 이렇게 밝히셨다.
亀魚すら恩を報ずる事あり何に況や人倫をや、此の恩を報ぜんが為に清澄山に於て仏法を弘め道善御房を導き奉らんと欲す
거북과 물고기조차 은혜를 갚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이 은혜를 갚기 위해 기요스미산에서 불법을 넓히고 도젠 어방을 이끌어 드리고자 하노라.
같은 어서에서 대성인은 「例せば此の道善御房の法華経を迎へ釈迦仏を造らせ給う事は日蓮が強言より起る」라고 하시어, 도젠보가 법화경을 받아들이고 석가불을 조성하게 된 것도 니치렌의 강한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셨다. 본문의 「後にはすこし信じ給いたるやうにきこへしかども」는 이런 변화를 가리킬 것이다. 대성인이 열두 살에 「日本第一の智者となし給へ」(「선무외삼장초」, 888쪽)라고 서원을 세우신 곳도 바로 이 세이초사였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 도젠보에 대해서도 스승의 은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다. 「화과성취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日蓮・法華経の行者となつて善悪につけて日蓮房・日蓮房とうたはるる此の御恩さながら故師匠道善房の故にあらずや、日蓮は草木の如く師匠は大地の如し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되어 좋든 나쁘든 「니치렌보, 니치렌보」 하고 이름이 불리는 이 은혜는 모두 고 스승 도젠보 덕분이 아니겠는가. 니치렌은 초목과 같고 스승은 대지와 같으니라.
그리고 같은 어서는 「日蓮が法華経を弘むる功徳は必ず道善房の身に帰すべしあらたうとたうと、よき弟子をもつときんば師弟・仏果にいたり・あしき弟子をたくはひぬれば師弟・地獄にをつといへり」 — 니치렌이 법화경을 넓히는 공덕은 반드시 도젠보의 몸에 돌아갈 것이라고 맺는다. 벼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도 그 정기는 반드시 대지로 돌아가 다시 싹을 틔운다는 비유다. 도젠보의 추선을 위해 쓰신 「보은초」의 끝에서도 「されば花は根にかへり真味は土にとどまる、此の功徳は故道善房の聖霊の御身にあつまるべし」(「보은초」, 329쪽)라고 하셨다. 제자가 법화경을 넓히는 공덕이 스승에게 돌아간다 — 이것이 대성인의 사은(師恩)의 길이었다. 본존문답초의 탄식은 이 길을 다 걸으신 뒤에도 남는 스승에 대한 걱정이며, 마지막 단의 「父母と師匠と一切衆生に回向し奉らん」이라는 회향으로 이어진다.
조켄보 · 기조보 — 「法華経の御奉公」
마지막으로 대성인은 이 어서를 받는 조켄보에게 말씀을 돌리신다. 「貴辺は地頭のいかりし時・義城房とともに清澄寺を出でておはせし人なれば」. 건장 5년(1253) 입종 선언에 격노한 지두 도조 가게노부가 대성인을 해치려 했을 때, 조켄보는 기조보와 함께 대성인을 모시고 세이초사를 빠져나와 피신시켰다. 서강에서 보았듯 두 사람은 대성인이 열두 살에 입산하셨을 때 글과 경전의 기초를 가르친 형제자였다. 「보은초」는 같은 일을 「日蓮が景信にあだまれて清澄山を出でしにかくしおきてしのび出でられたりしは天下第一の法華経の奉公なり後生は疑いおぼすべからず」(323–324쪽)라고 기린다.

본존문답초는 이 일을 「何となくともこれを法華経の御奉公とおぼしめして生死をはなれさせ給うべし」라고 말씀하신다. 「何となくとも」 — 따로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박해받는 법화경의 행자를 목숨을 걸고 지킨 그 한 번의 행동이 이미 법화경에 대한 봉공이니, 그것을 확신하고 생사를 떠나라는 것이다. 대성인을 지킨 일을 「법화경의 봉공」이라 여기도록 하신 이 말씀에는 형제자에 대한 보은의 진심이 담겨 있다.
도젠보에 대해서는 「생사를 떠났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하시고, 조켄보에게는 「생사를 떠나도록 하라」고 하신다. 같은 세이초사에서 같은 지두의 노여움 앞에 섰으면서, 한 사람은 두려워 제자를 미워했고 두 사람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행자를 지켰다. 그 갈림이 후생의 갈림이 된다는 것을 대성인은 담담히, 그러나 분명히 보이신다. 그리고 이 은혜는 대성인 쪽에서도 갚아졌다. 이 형제자에게 대성인은 「선무외삼장초」 · 「보은초」 · 「화과성취어서」 등을 보내시고, 본존에 관한 물음에 답하시는 이 본존문답초까지 주셨다. 본존을 묻는 글의 끝자락에 이 보은의 말씀이 놓인 것은, 본존을 받아 지닐 사람이 바로 은혜를 아는 사람이어야 함을 보이시는 것이기도 하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이 도리」는 직접으로는 진언 망국과 법화경 성불의 도리이나, 원의는 말법에 세울 본존을 대성인만이 아신다는 것이다. 그 앎을 부모와 스승의 은혜로 돌리시고, 염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스승의 후생을 걱정하시며, 행자를 지킨 형제자의 행위를 「법화경의 봉공」으로 기리신 데에 대성인의 깊은 보은의 일념이 있다.
본문
此の御本尊は世尊説きおかせ給いて後二千二百三十余年が間・一閻浮提の内にいまだひろめたる人候はず、 漢土の天台日本の伝教ほぼしろしめしていささかひろめさせ給はず 当時こそひろまらせ給うべき時にあたりて候へ 経には上行・無辺行等こそ出でてひろめさせ給うべしと見へて候へどもいまだ見へさせ給はず、 日蓮は其の人に候はねどもほぼこころえて候へば地涌の菩薩の出でさせ給うまでの口ずさみにあらあら申して況滅度後のほこさきに当り候なり、 願わくは此の功徳を以て父母と師匠と一切衆生に回向し奉らんと祈請仕り候、 其の旨をしらせまいらせむがために御不審を書きおくりまいらせ候に 他事をすてて此の御本尊の御前にして一向に後世をもいのらせ給い候へ、 又これより申さんと存じ候、いかにも御房たちはからい申させ給へ。 日蓮花押
이 본존은 세존께서 설해 두신 뒤 이천이백삼십여 년 동안 일염부제(一閻浮提) 안에 아직 넓힌 사람이 없느니라. 한토의 천태, 일본의 전교는 대략 알고 계셨으나 조금도 넓히지 않으셨느니라. 지금이야말로 넓혀질 때에 해당하느니라. 경에는 상행 · 무변행 등이 나와서 넓히시리라고 보이나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느니라. 니치렌은 그 사람은 아니지만 대략 마음에 얻었으므로, 지용보살이 나오실 때까지 입에 오르는 대로 대강 말하여 「況滅度後(하물며 멸도한 뒤에랴)」의 창끝에 섰느니라. 원하건대 이 공덕으로 부모와 스승과 일체중생에게 회향하고자 기청하고 있느니라. 그 뜻을 알려 드리기 위하여 의심하신 바를 적어 보내니, 다른 일을 버리고 이 본존 앞에서 한결같이 후세도 기원하시라. 또 이쪽에서 말씀드리려 하느니라. 아무쪼록 어방(御房)들께서 잘 헤아려 전해 주시라. 니치렌 화압(花押)
어구 풀이
- 此の御本尊이 본존
- 본존문답초 첫머리에서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답하신 그 본존.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를 대성인이 나타내시는 정법 · 상법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증유의 본존으로 배견한다.
- 世尊세존
- 석존. 「설해 두셨다」는 것은 법화경, 특히 본문 수량품에서 그 법체를 설하고 신력품에서 상행보살에게 부촉한 것을 가리킨다.
- 二千二百三十余年이천이백삼십여 년
- 대성인의 산정으로 홍안 원년(1278)은 불멸 후 2227년이다. 니치칸 상인은 「이천이백삼십여 년」을 불멸이 아니라 수량품을 설한 때부터 센 햇수로 풀이했다(서강 「본존문답초를 펼치며」 참조).
- 一閻浮提일염부제
- 수미산 남쪽의 대륙으로, 사람이 사는 온 세계를 이른다. 인도 · 중국 · 일본을 통틀어 아무도 넓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 漢土の天台・日本の伝教한토의 천태 · 일본의 전교
- 상법 시대의 정사(正師)인 천태대사 지의와 전교대사 사이초.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저에 감추어진 말법 홍통의 법체를 마음속으로는 알았으나 넓히지 않았다.
- 上行・無辺行상행 · 무변행
- 종지용출품에서 대지 밑에서 솟아 나온 지용보살의 네 상수(上首) —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 — 가운데 둘. 신력품에서 상행을 비롯한 지용보살에게 법화경의 요법이 부촉되었다.
- 地涌の菩薩지용보살
- 석존이 구원 이래 교화해 온 본화(本化)의 보살들. 말법에 묘법을 넓힐 사명을 받았다.
- 口ずさみ입버릇 · 읊조림
- 입에 오르는 대로 가볍게 읊는 것. 지용보살이 나오실 때까지 대신 대강 말해 둔다는 겸손의 표현이다.
- 況滅度後황멸도후
- 『묘법연화경』 법사품 제10의 구절. 여래가 계신 때에도 원망과 질투가 많은데 하물며 멸도한 뒤에랴 — 말법에 이 경을 넓히는 이는 부처 재세 때보다 더 큰 박해를 받는다는 뜻이다. 「況滅度後のほこさきに当り候」는 것은 그 대난의 맨 앞에 몸소 서셨다는 말씀이다.
- 回向회향
- 자기가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베푸는 것. 앞 단의 부모 · 스승의 은혜가 여기서 일체중생에게까지 넓혀진다.
- 祈請기청
- 부처와 제천에게 빌어 청함.
- 御房たち어방들
- 조켄보를 비롯한 세이초사의 승려들. 이 어서를 조켄보 혼자가 아니라 인연 있는 이들이 함께 읽고 헤아리도록 하신 것이다.
- 花押화압
- 서명 대신 쓰는 도안화된 자필 표지. 어서 끝의 「日蓮花押」은 대성인의 서명이다.
정법 · 상법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본존
본존문답초의 결론에 해당하는 이 단에서 대성인은 두 가지를 보이신다. 첫째, 대성인이 나타내시는 본존이 정법 · 상법 시대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증유의 본존이라는 것, 둘째, 법화경의 회좌에서 석존으로부터 상행보살에게 부촉된 본존을 지금 대성인이 나타내고 넓히고 계시다는 것을 시사하신 것이다.
「此の御本尊は世尊説きおかせ給いて後二千二百三十余年が間・一閻浮提の内にいまだひろめたる人候はず」. 이 한 문장이 본존문답초 전체를 닫는다. 「이 본존」은 첫머리에서 「末代悪世の凡夫は何物を以て本尊と定むべきや」라는 물음에 「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라고 답하신 바로 그 본존이다. 제1~5장에서 법의 본존을 세우고, 제6~12장에서 그것을 가로막는 진언의 본존론과 그 현증을 깨뜨린 끝에, 대성인은 그 본존이 석존 이래 일염부제의 누구도 넓히지 못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천이백삼십여 년」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서강 「본존문답초를 펼치며」의 「이천이백삼십여 년」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대성인 자신의 산정으로 홍안 원년은 불멸 후 2227년인데도 「삼십여 년」이라 하신 데 대해, 니치칸 상인은 이것이 불멸이 아니라 석존 화도의 구경인 본문 수량품을 설한 때부터 센 햇수라고 풀이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기산점이 갖는 뜻이다. 「世尊説きおかせ給いて後」 — 세존이 「설해 두신」 뒤라는 표현 자체가, 이 본존이 수량품에서 설해지고 신력품에서 부촉된 법체임을 가리킨다. 본존의 연원을 석존의 입멸이 아니라 수량품의 설법에 두는 것은, 이 본존이 수량품 문저의 법이라는 것과 표리를 이룬다.
천태 · 전교는 왜 넓히지 않았는가
「漢土の天台日本の伝教ほぼしろしめしていささかひろめさせ給はず」. 이 말씀은, 상법 시대의 정사인 천태대사와 전교대사 두 사람이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저에 감추어진 말법 홍통의 법체를 마음속으로는 알았으나 넓힐 수는 없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 이유는 여러 어서에 밝혀져 있는데, 「제법실상초」의 말씀이 가장 분명하다.
天台・妙楽・伝教等は心には知り給へども言に出し給ふまではなし・胸の中にしてくらし給へり、 其れも道理なり、付嘱なきが故に・時のいまだ・いたらざる故に・仏の久遠の弟子にあらざる故に
천태 · 묘락 · 전교 등은 마음으로는 아셨으나 말로 내놓기까지는 하지 않으시고 가슴속에 품은 채 지내셨느니라. 그것도 도리이니, 부촉이 없는 까닭에,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까닭에, 부처의 구원의 제자가 아닌 까닭에.
세 까닭은 하나로 모인다. 이 법은 부촉받은 사람이, 정해진 때에, 구원의 제자로서 넓혀야 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본존문답초가 천태를 「ほぼしろしめして」 — 「대략 아셨다」고 하신 것은, 제3장에서 천태의 법화삼매를 들어 법을 본존으로 삼는 근거로 삼으신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 천태는 법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도리를 알았고 그것을 수행에서 실천했다. 그러나 말법 일체중생이 받들 본존으로서 그 법체를 드러내 넓히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전교대사가 사이초로서 법화경의 원돈계단을 세우는 데 생애를 바쳤으면서도 본문의 본존 · 본문의 계단 · 본문의 제목은 세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상행 · 무변행 — 그리고 「日蓮は其の人に候はねども」
이어서 대성인은 「当時こそひろまらせ給うべき時にあたりて候へ経には上行・無辺行等こそ出でてひろめさせ給うべしと見へて候へどもいまだ見へさせ給はず」라고 하신다. 지금이야말로 넓혀질 때이고, 경에는 상행 · 무변행 등이 나와서 넓히리라고 보이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법실상초」의 다음 말씀과 똑같은 취지다.
地涌の菩薩の中の上首唱導・上行・無辺行等の菩薩より外は、末法の始の五百年に出現して法体の妙法蓮華経の五字を弘め給うのみならず、宝塔の中の二仏並座の儀式を作り顕すべき人なし
지용보살 가운데 상수 창도인 상행 · 무변행 등의 보살 말고는, 말법의 첫 오백 년에 출현하여 법체인 묘법연화경 다섯 자를 넓힐 뿐 아니라 보탑 안의 두 부처가 나란히 앉은 의식을 만들어 나타낼 사람이 없느니라.
석존으로부터 구원의 제자로서 부촉을 받은 상행보살이야말로 말법에 본존을 나타낼 분이라는 것이다. 「관심의 본존초」도 같은 때와 같은 사람을 이렇게 예고하셨다 — 「此の時地涌千界出現して本門の釈尊を脇士と為す一閻浮提第一の本尊此の国に立つ可し」(254쪽). 지용천계가 출현하는 바로 그때, 일염부제 제일의 본존이 이 나라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본존문답초의 「一閻浮提の内にいまだひろめたる人候はず」는 그 「일염부제 제일의 본존」이 아직 누구에게서도 넓혀지지 않았다는 말씀과 짝을 이룬다.
그러면 대성인 자신은 누구신가. 「日蓮は其の人に候はねどもほぼこころえて候へば地涌の菩薩の出でさせ給うまでの口ずさみにあらあら申して況滅度後のほこさきに当り候なり」. 니치렌은 그 사람이 아니지만 대략 마음에 얻었으므로, 지용보살이 나오실 때까지 입에 오르는 대로 대강 말해 왔고, 그 결과 「況滅度後」의 창끝에 섰다고 하신다.
상행 등 네 보살이 「いまだ見へさせ給はず」라 하시고 「日蓮は其の人に候はねども」라고 하신 것은 겸손의 표현이다. 현실에 경문에 설해진 「況滅度後」의 대난을 만나며 법화경을 넓히는 행자는 대성인 말고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야말로 대성인이 상행보살의 재탄이시라는 엄연한 증거다. 더구나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일체중생이 받들 본존을 도현하셨다는 것은 바로 말법의 본불이시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제10장에서 대성인이 열두 살의 입산과 십종의 승렬 감별, 입정안국론의 상주로 이어진 사적을 스스로 적으셨던 것은, 그 길이 어떻게 이 「況滅度後のほこさき」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준비였다고도 할 수 있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천태 · 전교는 법체를 알았으나 넓히지 않았고, 경문은 상행 · 무변행이 넓힌다고 했다.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겸손이며, 況滅度後의 대난을 몸소 받으며 법화경을 넓히고 본존을 도현하신 사실이 대성인이 상행보살의 재탄이자 말법의 본불이심을 보여 준다.
「他事をすてて此の御本尊の御前にして」
「願わくは此の功徳を以て父母と師匠と一切衆生に回向し奉らんと祈請仕り候」. 況滅度後의 창끝에 선 공덕을 부모와 스승과 일체중생에게 돌리겠다는 기청이다. 앞 단에서 말씀하신 부모와 스승의 은혜가, 여기서 회향의 대상으로 다시 불려 나오며 일체중생에게까지 넓혀진다. 제13장과 제14장은 이렇게 한 줄로 이어진다.
그리고 대성인은 조켄보에게 당부하신다. 「其の旨をしらせまいらせむがために御不審を書きおくりまいらせ候に他事をすてて此の御本尊の御前にして一向に後世をもいのらせ給い候へ」. 그 뜻을 알리기 위해 의심하신 바를 적어 보내니, 다른 일을 버리고 이 본존 앞에서 한결같이 후세를 기원하라는 것이다. 「御不審」 — 조켄보가 품은 의문에 답하는 글이 바로 이 본존문답초였다. 서강에서 보았듯 조켄보는 이 어서를 받기 2년 전인 건치 2년(1276) 「보은초 송문」의 「御本尊図して進候」(330쪽)라는 말씀과 함께 이미 대성인으로부터 본존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본존 앞에서」라는 말씀은 막연한 일반론이 아니라, 조켄보가 받아 모신 바로 그 본존 앞에서라는 뜻이 된다. 서강에서 말했듯, 첫머리에 표시된 「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의 본존이 바로 조켄보에게 수여된 대성인 도현의 본존임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他事をすてて」라는 말씀도 우연이 아니다. 같은 조켄보 · 기조보에게 보낸 「보은초」에서 대성인은 본문의 제목을 밝히시며 「一同に他事をすて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べし」(328쪽)라고 하셨다. 다른 일을 버리고 본존 앞에서 기원하라는 본존문답초의 끝맺음은, 「보은초」에서 밝히신 삼대비법 — 본문의 본존 · 본문의 계단 · 본문의 제목 — 이 한 사람의 신앙 안에서 하나로 모이는 자리를 가리킨다.
- 법의 본존과 그 근거(제1~5장)
- 세 대사의 진언과 불법의 흐름(제6~8장)
- 법화경의 행자와 대성인의 사적(제9~10장)
- 망국의 현증(제11~12장)
- 보은(제13장)
대어본존으로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이 본존은 대성인 일대 화도의 귀결과 이어서 배견된다. 「일기일연(一機一縁)」의 본존에서 홍안 2년(1279) 10월 12일 본문 계단의 대어본존, 곧 출세의 본회에 이르는 흐름은 서강 「본존문답초를 펼치며」의 「출세의 본회 — 홍안 2년의 대어본존」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짚어 둔다. 「미증유의 본존」이라는 마지막 단의 선언은 그 출세의 본회를 꼭 한 해 앞둔 말씀이다.
「御房たちはからい申させ給へ」 — 日蓮花押
「又これより申さんと存じ候、いかにも御房たちはからい申させ給へ」. 또 이쪽에서 말씀드리겠으니, 어방들께서 잘 헤아려 주시라는 말씀으로 본문은 끝나고, 「日蓮花押」이 붙는다. 「御房たち」라는 복수는, 이 어서가 조켄보 한 사람의 의문에 답한 글이면서도 기조보를 비롯한 세이초사의 인연 있는 승려들이 함께 읽어야 할 글이었음을 보여 준다. 도젠보의 추선을 위한 「보은초」를 다카가모리(嵩が森) 정상과 도젠보의 무덤 앞에서 읽게 하셨던 것처럼, 대성인은 고향의 절에 남은 이들 전체를 향해 이 본존의 법문을 맡기신 것이다.
이렇게 본존문답초는 「무엇을 본존으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한 승려의 물음에서 시작해, 진언 비판과 망국의 현증을 거쳐, 「이 본존 앞에서」라는 한 사람의 신앙의 자리로 돌아와 닫힌다. 법의 본존을 묻는 글이 끝내 그 본존을 나타내고 넓히는 사람 — 상행보살의 재탄인 대성인 — 을 드러내는 글이 되었다는 것, 그것이 서강이 말한 「대성인의 정의(正意)」가 이 마지막 단에서 완성되는 모습이다.
이 편을 맺으며
이 편의 네 장은 본존문답초가 경문과 도리의 논증에서 역사의 현증으로, 그리고 다시 한 사람의 신앙의 자리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제11장에서 대성인은 승구의 난을 날짜까지 짚어 다시 그리시며, 법도 행자도 시대도 갖춘 조정이 아무 기도도 하지 않은 요시토키에게 30여 일 만에 무너진 까닭을 「진언의 사법」에서 찾으셨다. 「기도초」 · 「신국왕어서」 · 『녹내계몽』 · 니치칸 상인의 「보은초 문단」 등을 대조하면 날짜와 횟수, 인물의 엇갈림까지 드러나지만, 어느 자료를 따르든 조복의 대법이 결원하는 날이 패망의 날이었다는 골격은 흔들리지 않는다.
제12장은 그 진언이 이긴 쪽인 가마쿠라로 옮겨 가 막부를 「대악법의 단나」로 만든 경과를 보이고, 평가의 멸망을 첫째, 승구의 난을 둘째로 꼽아 몽골 조복이 셋째 현증이 되려 한다고 간하셨다. 내란은 나라를 남겼지만 외침 앞의 조복은 나라 자체를 걸게 된다는 것, 그래서 「日本国還つて調伏せられなむ」라는 경고는 홍안 원년의 일본을 향한 가장 절박한 말씀이었다. 『평가물어』와 어서의 차이를 세밀히 짚으면서도 대성인이 다른 계통의 사료를 근거로 하셨다고 보는 것은, 현증의 논리가 사료의 세부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13 · 14장에서 붓끝은 안으로 돌아온다. 「이 도리」를 아는 지혜를 부모와 스승의 은혜로 돌리고, 염불을 버리지 못한 스승의 후생을 걱정하시며, 입종의 날 행자를 지킨 조켄보 · 기조보의 행동을 「법화경의 봉공」이라 기리신다. 그리고 천태 · 전교도 넓히지 못한 본존, 상행 · 무변행이 넓혀야 할 본존을 「況滅度後」의 창끝에 서서 넓혀 왔다고 하시며, 「이 본존 앞에서」 후세를 기원하라는 당부로 글을 닫으신다. 첫 장의 「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가 이 마지막 말씀에서 완결된다.
이로써 본존문답초 다섯 편이 끝난다. 법을 본존으로 세우는 논증, 그것을 가로막는 진언의 본존론에 대한 비판, 법화경의 행자로서의 대성인의 사적, 망국의 현증과 미증유의 본존 — 이 네 갈래가 하나의 물음, 「말대악세의 범부는 무엇을 본존으로 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었다. 서강 「본존문답초를 펼치며」로 돌아가 전체 구성을 다시 보면, 이 어서가 「관심의 본존초」의 법본존 개현과 이듬해의 출세의 본회 사이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가 한층 분명해질 것이다.
더 읽기
- 본존문답초를 펼치며 — 유래 · 대의 · 대성인의 정의
- 본존문답초 제4편 법화경의 행자 없는 나라와 대성인의 사적
- 본존문답초 제3편 세 대사의 사적과 불법의 전래
- 관심의 본존초
- 불교 교학 六 남묘호렌게쿄
- 인물탐구 니치렌 대성인
참고 문헌
원전
- 「본존문답초」(홍안 원년 1278), 어서 365–374쪽
- 「기도초」 · 「신국왕어서」 · 「시조깅고전답서」 · 「아키모토어서」 · 「묘호비구니답서」 · 「선시초」 · 「류센사신장」 · 「지카쿠대사사」 · 「도키입도전답서」 · 「입정안국론」 · 「삼삼장기우사」 · 「사은초」 · 「우에노전어소식」 · 「우에노전답서」 · 「선무외삼장초」 · 「화과성취어서」 · 「보은초」 · 「보은초 송문」 · 「제법실상초」 · 「관심의 본존초」 · 「요리모토진장」
- 『묘법연화경』 법사품 제10 · 종지용출품 제15 · 여래수량품 제16 · 여래신력품 제21 ·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 T9 no.262
- 니치칸 상인, 「보은초 문단」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 『아즈마카가미(吾妻鏡)』 · 『승구기(承久記)』 · 『평가물어(平家物語)』 · 『우관초(愚管抄)』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 안코쿠인 닛코, 『녹내계몽(録内啓蒙)』 · 닛켄, 『어서초(御書鈔)』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연구
- 「本尊問答抄」 강의 (第十一段~第十四段, 序講)
- 이마나리 겐쇼(今成元昭), 『평가물어유전고(平家物語流伝考)』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