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정안국론」은 문응 원년(1260) 7월 16일, 39세의 니치렌 대성인이 막부의 가신 야도야 입도(宿屋入道)를 통해 당시의 최고 권력자 호조 도키요리(北條時頼, 사이묘지 입도)에게 올리신 글이며, 대성인의 첫 번째 국가 간효다. 정가 원년(1257)의 대지진에서 시작해 큰바람 · 기근 · 역병이 해마다 이어지고 「죽음을 부른 무리가 이미 태반을 넘는」 참상 앞에서, 대성인은 일체경을 펼쳐 그 근본 원인을 찾으셨다. 글은 탄식하며 찾아온 나그네(旅客)와 주인(主人)이 열 번 묻고 아홉 번 답하는 십문구답의 형식을 취한다. 주인은 「세상이 모두 정법에 등지고 사람이 다 악에 돌아갔기에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성인이 떠나, 마와 귀신이 와서 재난이 일어난다」고 답하고, 네 경의 명문으로 이를 증명한 뒤, 그 악의 근원을 법연의 『선택집』으로 짚어 「이 일흉을 금하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두 난, 곧 자계반역난과 타국침핍난을 경고하며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고 맺는다. 이 경고는 문영 5년(1268) 몽골의 국서, 문영 9년의 내란, 문영 11년과 홍안 4년의 몽골 내습으로 현실이 되었다. 한 권의 간언서가 어찌하여 대성인 일대의 근본서가 되었는가 — 서강은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입정안국론」은 어서전집 17쪽부터 33쪽까지 이어지는 한문 훈독체의 글이다. 본문 뒤에는 대성인이 문영 6년(1269)에 손수 옮겨 쓰시며 덧붙이신 「입정안국론오서」(33쪽)가 있고, 이어서 문영 5년에 상주의 경위를 되짚으신 「안국론어감유래」(33–35쪽)와, 본론의 정본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 주는 짧은 「안국론별장」(35쪽)이 실려 있다. 닛코 상인이 특히 중히 여겨 꼽았다고 전하는 십대부의 첫머리이자, 오늘날 「개목초」 · 「관심의 본존초」 · 「선시초」 · 「보은초」와 함께 오대부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사이트에서는 본론을 열 개의 단과 46장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아홉 편으로 묶어 차례로 읽는다.
이 글은 겉으로 보면 한 시대의 재해에 대한 진단서다. 그러나 그 진단은 재해의 원인을 하늘이나 땅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사람의 마음이 의지하는 법(法)의 정사(正邪)에서 찾는다. 「입정(立正)」, 곧 바른 법을 세우는 일이 「안국(安國)」, 곧 나라와 국토를 평안하게 하는 일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열 번의 문답은 재난의 원인을 묻는 데서 시작해, 경문의 증거, 방법(謗法)의 정체, 방법을 다스리는 방법을 차례로 밝히고, 마지막에 객이 스스로 깨달아 방법 대치를 맹세하는 데서 끝난다. 서강에서는 먼저 이 글이 쓰인 사정을 살피고, 다음으로 제호와 십문구답을 통해 본론의 대의를 개관하며, 끝으로 본론에 덧붙은 세 글을 차례로 읽는다.
아홉 편은 네 갈래로 이어진다. 재난의 원인과 그 경증을 밝히는 제1 · 2편, 방법의 정체를 악한 승려와 법연의 『선택집』으로 좁혀 가는 제3~5편, 방법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는 제6~8편, 그리고 정법에 귀의할 것을 권하고 객의 맹세로 맺는 제9편이다.
아홉 편
-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 · 제1단 · 어서 17쪽 — 천변지요 · 기근 · 역병에 온갖 기도가 소용없는 까닭을 객이 묻고, 주인은 「세상이 모두 정에 등지고 사람이 다 악에 돌아갔기에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성인이 떠났다」고 답한다.
- 제2편 재난 유래의 경증 — 네 경의 명문 · 제2단 · 어서 17–20쪽 — 『금광명경』 · 『대집경』 · 『인왕경』 · 『약사경』의 경문을 들어, 정법을 버리면 선신이 떠나고 삼재칠난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한다.
- 제3편 정법 비방의 유래와 망국의 증거 · 제3단 · 어서 20–21쪽 — 절과 탑이 즐비한데 어찌 불법을 버렸다 하느냐는 반문에, 『인왕경』 · 『법화경』 · 『열반경』으로 겉모습만 승려인 악한 승려가 나라를 그르친다는 것을 보인다.
-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 — 법연의 『선택집』 · 제4단 · 어서 21–24쪽 — 악한 승려가 누구인가를 묻는 객에게 법연의 『선택집』과 「사 · 폐 · 각 · 포」를 들어, 「만 가지 기도보다 이 일흉을 금하라」고 결론짓는다.
- 제5편 화한의 예로 보인 염불 망국 · 제5단 · 어서 24–25쪽 — 법연을 성인으로 받드는 객의 노여움에 맞서, 주(周) · 진(晉) · 당(唐)과 일본 승구의 난의 현증으로 염불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을 보인다.
- 제6편 염불 금지 감장의 상주 · 제6단 · 어서 26쪽 — 이름난 고승들도 상주하지 않았다는 반론에, 방법을 꾸짖는 것이 불제자의 의무임을 밝히고, 원인(元仁) 연간에 엔랴쿠사 · 고후쿠사의 상주로 『선택집』의 판목이 불태워지고 법연 문하가 유죄된 일을 든다.
- 제7편 보시를 멈추어 방법을 끊다 · 제7단 · 어서 26–30쪽 — 재난을 다스리는 방책을 묻는 객에게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존중하라」고 답하고, 『열반경』의 선예국왕 · 유덕왕 · 각덕비구의 예로 정법 호지의 뜻을 밝힌다.
- 제8편 방법에 보시를 멈추는 뜻 · 제8단 · 어서 30쪽 — 경문대로 방법자를 처형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석존 이후의 방법 대치는 무력이 아니라 「그 보시를 멈추는 것」임을 밝힌다.
- 제9편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 제9 · 10단 · 어서 31–33쪽 — 입정안국의 결론과 객의 맹세 — 남은 두 난(자계반역 · 타국침핍)을 경고하며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그러면 삼계는 모두 불국이다」라고 맺고, 객이 깨달아 방법 대치를 맹세한다.
- 재난의 원인과 경증제1편제2편
- 방법의 정체 — 악한 승려와 법연제3편제4편제5편
- 방법 대치의 방법제6편제7편제8편
- 정법 귀의와 맹세제9편
- 제3편정법 비방의 유래와 망국의 증거제3단 제1~5장 · 20:14–21:16제3단(20–21쪽)객: 불법이 이토록 흥성한데 무엇을 버렸다 하는가주인: 법사는 아첨하고 왕신은 정사를 가리지 못한다(인왕경 · 법화경 · 열반경)
- 제5편화한의 예로 보인 염불 망국제5단 제1~4장 · 24:05–25:18제5단(24–25쪽)객: 어찌 성인을 헐뜯는가(지팡이를 들고 돌아가려 함)주인: 중국 · 일본의 망국 현증
- 제7편보시를 멈추어 방법을 끊다제7단 제1~10장 · 26:13–30:07제7단(26–30쪽)객: 재난을 그칠 방책은주인: 방법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존중하라(열반경 · 인왕경 · 법화경)
- 제9편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제9단 제1~5장 · 제10단 · 31:01–33:04제9단(31–32쪽)객: 일천제의 보시를 멈추겠다주인: 두 난이 남았다,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제10단(32–33쪽)객: 깨닫고 방법 대치를 맹세
문응 원년 7월 16일 — 야도야 입도를 통해 사이묘지 입도에게
「입정안국론」은 니치렌 대성인이 39세 되시던 문응 원년(1260) 7월 16일, 막부의 가신 야도야 사에몬 입도 미쓰노리(宿屋左衛門入道光則)를 통해 당시의 최고 권력자 호조 도키요리에게 올리신 글이다. 도키요리는 이미 집권직에서 물러나 출가해 사이묘지 입도(最明寺入道)라 불리고 있었으나, 막부의 실권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대성인의 일생에서 첫 번째 국가 간효(國家諫曉)가 바로 이 글이다.
상주의 날짜와 경위는 대성인 자신의 글에 여러 번 적혀 있다. 문영 6년(1269)에 본론을 손수 옮겨 쓰시며 덧붙이신 오서에는 「문응 원년 경신 7월 16일에 야도야 선문을 통하여 고 사이묘지 입도전에게 올렸다」(其の後文応元年太歳庚申七月十六日を以て宿屋禅門に付して故最明寺入道殿に奉れり, 33쪽)고 하셨고, 그보다 한 해 앞선 문영 5년의 「안국론어감유래」에는 시각까지 밝혀 「문응 원년 경신 7월 16일 진시(辰時)에 야도야 입도를 통하여 고 사이묘지 입도전에게 주진(奏進)하였다」(文応元年庚申七月十六日辰時屋戸野入道に付けて古最明寺入道殿に奏進申し了んぬ, 33쪽)고 적으셨다. 진시는 오늘날의 아침 여덟 시 무렵이다.
중개자 야도야 입도는 생몰년이 전하지 않는다. 호조 씨 적류(得宗家)를 가까이서 섬기던 가신, 이른바 미우치비토(御內人)로, 법명은 사이신(最信)이었다고 한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권51에는 홍장 3년(1263) 11월 도키요리가 임종할 때 마지막 간병을 위해 출입이 허락된 일곱 사람 가운데 그의 이름이 보인다. 도키요리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고쿠라쿠사 료칸에게 귀의하여 율과 염불을 믿었으나, 뒤에 대성인의 가르침을 믿게 되었다고 전한다.

정가의 대지진에서 정원의 역병까지
이 글을 쓰게 한 직접의 계기는 정가 원년(1257) 8월 23일 밤의 대지진이었다. 대성인은 오서에서 「지난 정가 원년 정사 8월 23일 술해(戌亥)의 시각의 대지진을 보고 이것을 감(勘)하였다」고 하셨다. 술해의 시각은 밤 아홉 시 무렵이다. 막부의 기록인 『아즈마카가미』는 그날 밤을 이렇게 전한다. 큰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려 신사와 절이 한 채도 온전한 것이 없었고, 산이 무너지고 집이 쓰러졌으며, 흙담이 모두 부서지고 곳곳에서 땅이 갈라져 물이 솟았다. 나카노게바바시(中下馬橋) 근처에서는 갈라진 땅 속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고 한다.
재난은 그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안국론어감유래」는 그 뒤의 일을 해마다 적어 나간다. 정가 2년(1258) 8월 1일의 큰바람, 정가 3년(1259)의 대기근, 정원 원년(1259)의 대역병, 그리고 정원 2년(1260)에는 사계절 내내 역병이 그치지 않아 「만민이 이미 태반을 넘어 죽음을 불렀다」. 정가 3년과 정원 원년은 같은 해로, 재해가 겹치자 그해 3월에 연호를 고친 것이다. 이듬해 다시 문응으로 연호를 고친 것도 같은 사정에서였다. 「입정안국론」 첫머리에서 객이 탄식하는 「소와 말이 거리에 쓰러지고 해골이 길에 가득하다」(牛馬巷に斃れ、骸骨路に充てり, 17쪽)는 광경은 문학적 과장이 아니라 이 몇 해의 가마쿠라 그대로였다.
조정과 막부도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나라의 주인이 이에 놀라 내외전(內外典)에 명하여 갖가지 기도를 올렸다」(33쪽). 본론 첫머리의 객은 염불에서 진언 · 선, 음양도의 제사와 위정자의 덕정에 이르기까지 그 기도들을 열 가지 남짓 늘어놓는다. 그러나 「한 푼의 효험도 없고 도리어 기근과 역병을 더할 뿐」이었다. 왜 기도는 듣지 않는가. 이 물음이 「입정안국론」의 출발점이다. 객이 든 기도 하나하나와 그 시대의 재해 기록은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에서 자세히 읽는다.
- 1257(정가 원년).8.23 밤가마쿠라 대지진(신사 · 절 한 채도 온전하지 못함) → 「이것을 보고 감하였다」
- 1258(정가 2).8.1큰바람
- 1259(정가 3 = 정원 원년)대기근 · 대역병
- 1260(정원 2 = 문응 원년)사계절 내내 역병, 「만민이 이미 태반을 넘어 죽음을 불렀다」
- 1260.7.16 진시야도야 입도를 통해 사이묘지 입도에게 「입정안국론」 상주
- 1260.8.27마쓰바가야쓰 초암 습격
- 1261(홍장 원년).5.12이즈 유배
- 1263.2사면 · 11월 도키요리 사망
일체경을 펼쳐 — 증거를 경문에서 찾다
대성인은 재난의 원인을 막연한 하늘의 뜻이나 운세에서 찾지 않으셨다. 「안국론어감유래」는 그 과정을 이렇게 적는다. 「니치렌이 세간의 모습을 보고 대략 일체경을 감하니, 기도가 효험이 없고 도리어 흉악을 더하는 까닭에 대한 도리와 문증을 얻었다」(33쪽). 「도리(道理)」와 「문증(文證)」, 곧 이치와 경문의 증거 두 가지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글을 쓰셨다는 것이다. 본론에서도 주인은 「곰곰이 좁은 소견을 기울여 얼마간 경문을 펼쳐 보니」(倩ら微管を傾け、聊か経文を披きたるに, 17쪽)라고 말문을 연다. 「입정안국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경문의 인용으로 짜여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서의 첫 줄 「정가부터 이것을 시작하여 문응 원년에 감하기를 마쳤다」(正嘉より之を始め文応元年に勘え畢る, 33쪽)는 이 탐구가 세 해에 걸친 것이었음을 알려 준다. 이 무렵 대성인은 스루가 이와모토의 짓소사(実相寺)에 머물며 그 경장에서 일체경을 열람하셨다고 전한다. 그 사이에 쓰신 글들에 같은 주제가 먼저 나타난다. 정원 원년(1259)의 「수호국가론」은 법연의 『선택집』을 체계적으로 깨뜨린 대작으로, 「입정안국론」 제4 · 5단이 큰 줄기만 들어 논한 『선택집』 비판이 이 글에서는 경문 하나하나에 걸쳐 자세히 논증되어 있다. 또 「재난대치초」 등 재난과 그 대치를 다룬 글들도 이 무렵에 쓰였다고 전한다. 「입정안국론」은 이렇게 쌓인 탐구를 최고 권력자 한 사람 앞에 내놓기 위해 간결한 문답으로 다듬은 글이라 할 수 있다.
「수호국가론」(어서 36–77쪽)과 「재난대치초」(78–86쪽)의 저술 연대, 이와모토 짓소사에서의 일체경 열람은 전기의 전승에 따른 것이다. 본론과 이 글들 사이의 관계는 내용의 겹침으로 미루어 보는 것이다.
객과 주인 — 누가 묻고 누가 답하는가
「입정안국론」은 「나그네가 찾아와 탄식하며 말하기를」(旅客来りて嘆いて曰く, 17쪽)로 시작한다. 그리고 객과 주인이 열 번 묻고 아홉 번 답하는 문답으로 이어진다. 이 두 인물은 누구인가.
객은 종교의 옳고 그름도 모른 채 그릇된 가르침에 집착하여 미혹에 덮여 있는 일체중생을 나타낸다. 별(別)하여 말하면 이 글을 받는 당시의 국가 권력, 곧 호조 도키요리다. 객은 재난을 슬퍼하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법연을 성인으로 받들고 이름난 고승들을 믿으며, 주인의 말에 몇 번이나 얼굴빛을 바꾸고 마침내 지팡이를 들고 돌아가려 한다. 당시 위정자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객의 말에 담겨 있다.
주인은 일왕(一往) 어리석은 객에게 법화의 정법을 설해 보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재왕(再往) 깊이 보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 주인이 곧 대성인이시며, 대성인이 일본국, 나아가 일체중생의 주군이심을 나타낸다고 본다.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日蓮は当帝の父母・念仏者・禅衆・真言師等が師範なり又主君なり
니치렌은 지금 임금의 부모요, 염불자 · 선승 · 진언사 등의 사범이며 또 주군이니라.
글의 형식이 문답인 것은 단지 문장 기교가 아니다. 주인은 객의 반론을 끝까지 듣고 하나하나 경문으로 답하며, 객은 화를 냈다가 누그러지고, 다시 묻고, 마침내 스스로 깨달아 「다만 내가 믿을 뿐 아니라 또 남의 잘못도 깨우치겠다」고 맹세한다. 권력자에게 올리는 간언서가 명령이나 고발이 아니라 대화의 형식을 취했다는 데에, 상대의 마음이 스스로 바뀌기를 바라는 대성인의 뜻이 있다.
간효는 언제나 그 시대의 최고 권력에게
국가 간효는 늘 그 시대의 최고 권력자를 향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천황에게, 때로는 막부에게 행해졌다. 대성인 당시 나라의 실권은 가마쿠라 막부, 그 가운데서도 호조 씨 적류의 도키요리에게 있었으므로 「입정안국론」은 그에게 올려졌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뒤 닛모쿠 상인이 교토의 조정을 향해 천주(天奏)의 길에 오르신 것도 같은 원리에서였다고 전한다. 간효의 상대는 그때그때 나라의 실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객은 넓게는 그릇된 법에 미혹된 일체중생, 좁게는 당시의 최고 권력자이고, 주인은 일왕 정법을 설하는 사람, 재왕 일체중생의 주사친이신 대성인이다. 「입정안국론」은 한 시대 한 권력자에게 보낸 글이면서, 법의 정사가 나라와 국토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원리를 밝힌 글이다.
상주의 대가 — 마쓰바가야쓰와 이즈
도키요리는 「입정안국론」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당시 가마쿠라에서는 염불 · 선 · 율의 승려들이 막부의 실력자들과 깊이 결합해 있었다. 도키요리는 겐초사를 세워 도류(道隆)를 맞아들였고, 그의 종조부인 호조 시게토키(北條重時)는 법연 문하 쇼쿠(證空)의 계통에 귀의하여 고쿠라쿠사 입도라 불렸으며, 이 무렵 무사시의 가네자와에는 호조 사네토키가 쇼묘지(稱名寺)를 세웠다. 이런 때에 『선택집』을 「일흉(一凶)」이라 단정한 글이 올라간 것이다.
막부가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을 안 염불자들은 한 달 남짓 뒤인 8월 27일 밤, 무리를 지어 마쓰바가야쓰(松葉ヶ谷)의 초암을 습격하였다. 대성인은 난을 피해 한때 시모우사의 도키 조닌(富木常忍)의 집에 몸을 의탁하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대성인의 파절은 그치지 않았고, 이듬해 홍장 원년(1261) 5월 12일 대성인은 이즈의 이토로 유배되셨다. 이 습격과 유배의 배후에는 법연을 존숭하던 시게토키가 있었다고 본다. 이후의 고마쓰바라 법난, 다쓰노구치 법난과 사도 유배에 이르는 대난은 모두 「만 가지 기도를 닦기보다 이 일흉을 금하라」는 단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如かず、彼の万祈を修せんよりは、此の一凶を禁ぜんには。
저 만 가지 기도를 닦기보다는 이 하나의 흉을 금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이 말이 얼마나 무거운 말이었는가는, 그 뒤의 일이 증명한다. 국가 간효는 처음부터 목숨을 건 일이었다.
도키요리는 홍장 3년(1263)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즈 유배는 같은 해 2월에 사면되었다.
정필과 사본
「입정안국론」은 상주한 원본 외에, 대성인이 뒤에 손수 여러 번 옮겨 쓰셨다. 그 가운데 문영 6년(1269) 12월 8일에 쓰신 사본에는 저술의 경위와 예언의 적중을 적은 오서가 붙어 있다. 「안국론별장」에는 「입정안국론의 정본은 도키 전에게 있다」는 말씀이 보이는데, 이 정본은 문영 6년의 사본으로 도키 입도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대성인 자필의 「입정안국론」 36장은 오늘날 시모우사의 나카야마 호케쿄사(中山法華經寺)에 전한다고 한다. 또 대성인이 만년에 본문에 손을 더해 늘려 쓰신 본도 전한다고 한다. 대성인이 이 한 편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셨는지는 몇 번이고 다시 쓰신 이 사실이 말해 준다.
대성인 일대의 총체
「입정안국론」은 대성인의 수많은 어서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에 놓이는 글이다. 말법의 민중을 구하는 지남서이며, 미래를 비추어 흐림이 없는 밝은 거울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국가의 근본서라 일컬어진다. 「입정안국」에 맥박 치는 민중 구제의 정신은 대성인 일대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건장 5년(1253) 입종 이래 대성인의 행보는 이 한 편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향해 공식적으로 드러났고, 문영 5년의 「안국론어감유래」, 같은 해의 십일통어서, 문영 8년 다쓰노구치 법난 때의 헤이노사에몬노조에 대한 고명, 문영 11년 사도에서 돌아오신 뒤의 세 번째 고명이 모두 이 글의 경고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대성인의 국가 간효는 「입정안국론」에서 시작하여 「입정안국론」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대성인이 상행보살의 재탄이라는 겉의 자취를 벗고 말법의 어본불,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라는 본지를 드러내신 것을 문영 8년(1271) 9월 12일 다쓰노구치의 경수의 자리로 본다. 「입정안국론」은 그보다 11년 앞선 글이지만, 나라 안의 민중이 방법에 미혹되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슬퍼하고 그 구제의 길을 보이는 이 글의 밑바닥에는 이미 어본불의 대자비가 흐르고 있다고 본다.
제호 — 「입정」과 「안국」
「입정안국(立正安國)」은 「바른 법을 세워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넷 글자는 두 짝으로 나뉜다. 불법과 왕법(세간의 정치 · 사회)에 견주어 말하면 「입정」은 불법이고 「안국」은 왕법이다. 바른 법이 세워지는 것이 원인이고, 나라와 국토가 평안해지는 것이 그 결과다. 본론 제7단에서 주인이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존중하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고 답하는 대목이 바로 이 인과를 그대로 말한 것이다.
謗法の人を禁めて正道の侶を重んぜば国中安穏にして天下泰平ならん。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존중한다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하리라.
그렇다면 세워야 할 「정(正)」이란 무엇인가. 본론의 겉으로 보면 그것은 법연의 『선택집』이 「버리고 · 닫고 · 제쳐 두고 · 내던지라」고 한 법화경을 비롯한 일대의 정법이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 「정」을 문저의 삼대비법으로 본다. 니치칸 상인은 「입정안국론 문단」에서 「다만 정(正)의 글자에 삼개의 비법을 머금고 있다」(但・正の字において三箇の秘法を含むなり)고 풀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정(正)은 묘(妙)이며 묘는 곧 묘법연화경이니 본문의 본존이고, 본존이 묘하므로 믿음도 묘하고 믿음이 묘하므로 행도 묘하니 정의 글자가 곧 제목이며, 정의 글자를 「일(一)」과 「지(止)」로 나누면 하나인 본존이 머무는 곳이니 곧 계단이라는 것이다.
「안국」의 「국」은 어디까지를 가리키는가. 일왕(一往)은 일본국이고, 재왕(再往)은 일염부제, 곧 온 세계다. 니치칸 상인은 같은 「문단」에서 니치가(日我)의 말을 끌어 이렇게 밝혔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安国とは一閻浮提に通ずべし、しかも本門弘通の最初は日本国なるべし、本門日輪の行度これを思え
안국이란 일염부제에 통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 홍통의 처음은 일본국이어야 한다. 본문의 해가 나아가는 길을 생각하라.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을 비추듯, 본문의 불법은 일본에서 시작하여 온 세계로 넓혀진다는 것이다. 니치칸 상인은 본론 끝의 「삼계는 모두 불국이다」에 대해서도 「글은 다만 일본과 현재에 있으나, 뜻은 염부와 미래에 통해야 한다」(文はただ日本および現在にあり、意は閻浮および未来に通ずべし)고 풀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글자로는 가마쿠라 시대 일본의 안국을 말하지만, 그 뜻은 온 세계와 먼 미래의 안국에 통한다는 것이다. 대성인의 마음은 한 나라 한 시대의 안정에 머물지 않는다.
십문구답의 짜임 — 아홉 편 안내
본론은 객이 열 번 말하고 주인이 아홉 번 답하는 십문구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 번째의 객의 말은 물음이 아니라 깨달음과 맹세이므로 주인의 답은 아홉 번이다. 사이트에서는 이를 열 개의 단(段)으로 나누고, 단 안을 다시 장으로 나누어 모두 46장으로 읽는다. 아래에 각 단의 물음과 답을 차례로 짚는다.
제1편 — 재난은 어디에서 오는가
객은 근년의 천변 · 지요 · 기근 · 역병을 탄식하며 온갖 기도가 소용없음을 늘어놓고, 「해와 달은 구슬처럼 빛나고 삼보도 세상에 있으며 백왕의 수도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이 세상이 일찍 쇠하고 법이 무너졌는가」라고 묻는다. 주인은 경문을 펼쳐 본 결과를 이렇게 답한다. 「세상이 모두 정에 등지고 사람이 다 악에 돌아갔다. 그러므로 선신은 나라를 버리고 떠났으며 성인은 그곳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마가 오고 귀신이 와서 재난이 일어나는 것이다」(17쪽). 본론 전체의 결론이 첫 답에 이미 들어 있다. →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
제2편 — 그것은 어느 경에 나오는가
객은 「신과 성인이 떠나 재난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은 어느 경에 나오는가」라고 증거를 구한다. 주인은 『금광명경』 사천왕품, 『대집경』, 『인왕경』, 『약사경』의 네 경을 들고, 다시 『인왕경』의 칠난과 『대집경』의 삼재를 거듭 인용한 뒤 「네 경의 글이 밝으니 만인 누가 의심하겠는가」라고 맺는다. 정법을 버리는 나라에서는 사천왕과 선신이 떠나고 질병 · 성변 · 일월의 이변 · 바람과 비의 이상 · 가뭄, 그리고 타국의 침략과 나라 안의 반역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입정안국론 제2편 「재난 유래의 경증 — 네 경의 명문」
제3편 — 불법이 이토록 흥성한데
객은 얼굴빛을 바꾸며 반문한다. 후한 명제 때 불법이 전해지고 쇼토쿠 태자가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쳐서 절과 탑을 세운 이래, 예산 · 남도 · 온조사 · 도지를 비롯해 온 나라에 불상과 경권이 별처럼 늘어서 있는데 누가 불법을 버렸다는 것인가. 주인은 절과 승려의 수가 많음을 인정하면서도 「법사는 아첨하여 사람을 미혹하고, 왕과 신하는 깨닫지 못하여 정사를 가리지 못한다」고 답하고, 『인왕경』 · 『열반경』 · 『법화경』 권지품의 경문으로 겉모습만 승려인 악한 승려가 나라를 망친다는 것을 증명한다. → 입정안국론 제3편 「정법 비방의 유래와 망국의 증거」
제4편 — 악한 승려는 누구인가
객은 더욱 노하여 「현명한 왕과 성인이 존중하는 승려를 어찌 헐뜯는가, 누구를 악비구라 하는가」라고 따진다. 주인은 비로소 그 이름을 든다. 고토바인 때의 법연과 그의 『선택집』이다. 『선택집』은 담란 · 도작 · 선도의 해석을 끌어 성도문과 정토문, 난행과 이행, 정행과 잡행을 세우고, 법화경 · 진언을 비롯한 일대의 대승경 637부 2,883권과 모든 불보살을 성도 · 난행 · 잡행에 넣어 「혹은 버리고, 혹은 닫고, 혹은 제쳐 두고, 혹은 내던진다」(或は捨て、或は閉じ、或は閣き、或は抛つ, 23쪽). 주인은 이것이 정토 삼부경의 「오직 오역과 정법을 비방하는 자는 제외한다」는 서원에도, 법화경 비유품의 경계에도 어긋난다고 판정하고, 「만 가지 기도를 닦기보다 이 일흉을 금하라」고 결론짓는다. →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 — 법연의 『선택집』」
제5편 — 법연은 성인이 아닌가
객은 크게 노한다. 담란 · 도작 · 선도 · 혜심(겐신)이 모두 염불을 받들었고, 법연은 어려서 히에이잔에 올라 팔종을 꿰뚫고 일체경을 일곱 번 읽은 학승으로 세지보살의 화신, 선도의 재탄이라 우러름을 받는다. 그런 성인을 헐뜯는 죄는 무거우니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두렵다며 지팡이를 들고 돌아가려 한다. 주인은 웃으며 붙잡고, 중국의 세 스승은 방편에 머물러 진실을 잊었고 법연은 그 흐름을 떠서 마시면서 근원을 모른다고 답한 뒤, 주나라 말기와 진(晉)나라 완적의 풍속이 망국의 조짐이 된 예, 당 무종 때 염불을 퍼뜨린 뒤 일어난 전란과 회창의 폐불, 그리고 일본에서 법연이 활동한 고토바인의 몰락을 현증으로 든다. → 입정안국론 제5편 「화한의 예로 보인 염불 망국」
제6편 — 고승들도 상주하지 않았다
객은 조금 누그러져 말한다. 도읍에서 막부까지 불가에는 기둥 같은 고승들이 있는데 아직 그들도 감장을 올리지 않았거늘, 미천한 몸으로 어찌 함부로 말하는가. 주인은 「작은 그릇이나 대승을 배우는 몸으로 불법의 쇠미를 보고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하고, 『열반경』의 「법을 무너뜨리는 자를 보고도 꾸짖지 않으면 불법 가운데의 원수」라는 경문을 들어 방법 가책이 불제자의 의무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미 원인 연간에 엔랴쿠사 · 고후쿠사의 상주로 『선택집』의 판목이 불태워지고 법연 문하가 유죄되었음을 들어, 상주가 없었다는 말을 바로잡는다. → 입정안국론 제6편 「염불 금지 감장의 상주」
제7편 — 재난을 그치게 할 방책
객은 마침내 누그러져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멸하면 부처를 누가 숭상하겠는가. 먼저 국가를 기원하여 불법을 세워야 한다」고 하며, 재난을 없애는 방법을 묻는다. 이것은 객의 말이다. 주인은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존중하라」고 답하고, 『열반경』의 「오직 일천제 한 사람을 빼고 그 밖에 보시하면 모두 찬탄할 만하다」, 선예국왕과 유덕왕 · 각덕비구의 이야기, 『인왕경』의 국왕 부촉, 법화경의 「아비지옥에 들리라」를 차례로 인용하여 「천하의 정밀을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고 맺는다. → 입정안국론 제7편 「보시를 멈추어 방법을 끊다」
제8편 — 처형해야 한다는 뜻인가
객은 경문의 무거움에 놀라 묻는다. 경문대로라면 방법의 무리를 베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살생의 죄를 어찌하는가. 『대집경』에 따르면 계를 지키든 깨뜨리든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이는 공양해야 하고 그를 때리면 부처의 아들을 때리는 것이라 하였다. 주인의 답은 분명하다. 「전혀 불자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방법을 미워하는 것이다. 석존 이전의 불교에서는 그 죄를 베었으나, 능인(석존) 이후의 경설에서는 그 보시를 멈춘다」(30쪽). 말법의 방법 대치는 무력이 아니라 방법에 대한 보시를 멈추는 것이다. → 입정안국론 제8편 「방법에 보시를 멈추는 뜻」
제9편 —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객은 자리를 비켜 옷깃을 여미고, 망집이 이미 뒤집혔다며 「일천제에 대한 보시를 멈추고 여러 승니에게 공양하겠다」고 말한다. 주인은 기뻐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은 때에 따라 바뀐다며 당장의 대치를 재촉하고, 네 경이 말한 재난 가운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두 난, 곧 타국침핍난과 자계반역난을 경고한다. 그리고 『인왕경』 · 법화경 · 『열반경』의 경문으로 방법의 과보를 보인 뒤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그러면 삼계는 모두 불국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제10단에서 객은 「다만 내가 믿을 뿐 아니라 또 남의 잘못도 깨우치겠다」고 맹세한다. → 입정안국론 제9편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 입정안국의 결론과 객의 맹세」
객의 마음이 움직여 가는 길
십문구답을 따라 읽으면, 객의 마음이 움직여 가는 과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첫머리의 객은 「탄식하며」(嘆いて) 찾아온다. 주인의 첫 답을 듣고는 「그 증거를 듣고 싶다」고 차분히 묻지만, 불법을 버렸다는 말에는 「얼굴빛을 바꾸고」(色を作して), 악비구가 누구냐고 「오히려 노하여」(猶憤りて) 따지며, 법연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얼굴빛을 바꾸고」(殊に色を作して) 지팡이를 들고 돌아가려 한다. 주인이 웃으며 붙잡아 현증을 보이자 객은 「조금 누그러지고」(聊か和いで), 이어 「누그러져」(則ち和ぎて) 대치의 방법을 묻고, 처형의 문제를 따져 묻는 고비를 지나, 마침내 「자리를 비켜 옷깃을 여미고」(席を避け襟を刷いて) 깨달음을 말하며, 제10단에서 맹세에 이른다.
이 흐름은 그대로 한 사람이 그릇된 신앙에서 바른 신앙으로 돌아서는 과정이다. 노여움과 반발은 오히려 물음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고, 주인은 그때마다 경문과 현증으로 답한다. 동시에 제9단에서 주인이 「사람의 마음은 때에 따라 바뀌고 사물의 성질은 경계에 따라 바뀐다.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믿는다 하여도 뒤에는 반드시 길이 잊을 것」이라고 경계한 것은, 한때의 납득이 곧 신앙의 완성이 아님을 보여 준다.
- 제1단「탄식하며 말하기를」嘆いて曰く
- 제2단「말하기를」증거를 구함
- 제3단「얼굴빛을 바꾸고」色を作して
- 제4단「오히려 노하여」猶憤りて
- 제5단「더욱 얼굴빛을 바꾸고」殊に色を作して지팡이를 들고 돌아가려 함
- 제6단「조금 누그러져」聊か和いで
- 제7단「누그러져」則ち和ぎて대치의 방책을 물음
- 제8단「말하기를」처형의 문제를 따짐
- 제9단「자리를 비켜 옷깃을 여미고」席を避け襟を刷いて
- 제10단깨닫고 맹세「다만 내가 믿을 뿐 아니라 또 남의 잘못도 깨우치겠다」唯我が信ずるのみに非ず又他の誤りをも誡めんのみ
재난의 근본 원인 — 정에 등진 세상
본론의 뼈대는 제1단 주인의 첫 답에 다 들어 있다.
世皆正に背き、人悉く悪に帰す。故に善神は国を捨てて相去り、聖人は所を辞して還りたまわず。是れを以て魔来り鬼来り、災起り難起る。
세상이 모두 정에 등지고 사람이 다 악에 돌아갔느니라. 그러므로 선신은 나라를 버리고 떠났으며 성인은 그곳을 하직하고 돌아오지 않으시느니라. 이로써 마가 오고 귀신이 와서 재난이 일어나고 난이 일어나느니라.
인과는 네 단계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마음이 정법을 등지고 그릇된 법에 돌아간다. 정법의 법미(法味)를 맛보지 못한 선신은 위광을 잃고 나라를 버리며, 성인은 그 땅을 떠난다. 지키는 이가 떠난 빈자리에 마와 귀신이 들어온다. 그 결과가 재난이다. 재난의 원인을 자연 현상 자체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그 마음이 의지하는 법에서 찾는 것, 이것이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원리, 곧 생명(정보)과 그 생명이 사는 국토(의보)가 둘이 아니라는 원리에 선 진단이다. 「안국론어감유래」에서도 대성인은 같은 인과를 되풀이하신다. 법연 · 대일의 염불과 선이 퍼져 예산에 대한 귀의가 얕아지자 「예산을 수호하는 천조태신 · 정팔번궁 · 산왕칠사와 나라 안을 수호하는 여러 대선신이 법미를 먹지 못하여 위광을 잃고 국토를 버리고 떠났다. 악귀가 틈을 얻어 재난을 일으킨다」(34쪽)는 것이다.
이 진단은 동시에 처방이기도 하다. 원인이 정법에 등진 데 있다면, 다스림은 정법에 돌아가는 데 있다. 객이 늘어놓은 갖가지 기도가 효험이 없는 까닭도 여기서 밝혀진다. 기도 자체가 정법을 버린 위에서 행해지는 한, 그것은 선신을 돌아오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흉악을 더할 뿐이다.
- 세상이 모두 정에 등지고 사람이 다 악에 돌아감世皆正に背き人悉く悪に帰す
-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성인이 떠남善神は国を捨てて相去り聖人は所を辞して還りたまわず
- 마가 오고 귀신이 옴魔来り鬼来り
- 재난이 일어남災起り難起る
- 『약사경』 칠난
- 인중질역일어남
- 타국침핍남음
- 자계반역남음
- 성수변괴일어남
- 일월박식일어남
- 비시풍우일어남
- 과시불우일어남
- 『대집경』 삼재
- 곡귀일어남
- 병혁남음
- 역병일어남
- 『금광명경』 갖가지 재과
- 타방의 원적이 나라 안을 침략함남음
- 『인왕경』 칠난
- 사방의 적이 와서 나라를 침범함남음
「이 일흉을 금하라」 — 방법의 정체
재난의 원인이 정법에 등진 데 있다면, 무엇이 정법이고 무엇이 그것을 등지게 했는가. 본론은 이 물음을 제3단에서 제5단까지 세 단계로 좁혀 간다. 먼저 불법이 겉으로 흥성해도 그 속에 악한 승려가 있다는 것(제3단), 그 악한 승려의 근원이 법연의 『선택집』이라는 것(제4단), 그 해악이 중국과 일본의 망국의 현증으로 이미 드러났다는 것(제5단)이다.
『선택집』에 대한 비판은 「사(捨) · 폐(閉) · 각(閣) · 포(抛)」의 네 글자로 요약된다. 법연은 일대의 정법을 성도문 · 난행도 · 잡행에 넣고 그것을 버리고 닫고 제쳐 두고 내던지라고 하였으며, 그 말을 따른 결과 「경은 정토 삼부 밖에 경이 없고, 부처는 미타 삼존 밖에 부처가 없다」고 여기게 되어, 석존을 잊고 서방의 부처를 귀히 여기고, 약사여래를 제쳐 두고, 일대 오시의 묘전을 내던지게 되었다. 절은 무너지고 승방은 황폐해져, 「머물러 지키던 성승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 수호하던 선신은 떠나서 오지 않는다」. 제1단의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성인이 떠난다」는 일반론이 여기서 구체적인 역사의 사실로 바뀐다. 그래서 주인은 「만 가지 기도를 닦기보다 이 일흉을 금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단언한다.
『선택집』 비판의 세부 — 담란 · 도작 · 선도의 해석, 『선택집』 본문의 인용, 법연이 「삼국의 성승과 시방의 불제자를 모두 군적(群賊)이라 부르게 한」 일 — 은 입정안국론 제4편 · 제5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 보시를 멈춘다 — 말법의 방법 대치
방법을 금하라는 결론은 곧 「어떻게 금하는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제7단에서 주인이 인용하는 『열반경』에는 선예국왕이 대승을 비방하는 바라문의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 유덕왕이 각덕비구를 지키기 위해 악비구와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객이 제8단에서 「그렇다면 경문대로 베어야 한다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주인의 답은 본론의 방법 대치론의 결론이다.
夫れ釈迦の以前仏教は其の罪を斬ると雖も能忍の以後経説は則ち其の施を止む
무릇 석가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능인(能忍)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추느니라.
『열반경』의 이야기들은 석존이 과거세에 보살행을 닦던 때의 일이다. 석존이 출현한 뒤의 경설에서는 방법자를 베는 것이 아니라 그 보시를 멈추는 것이 방법 대치의 길이다. 주인은 「전혀 불자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방법을 미워하는 것」이라 하였고, 「사해 만방의 모든 사중(四衆)이 그 악에 보시하지 않고 모두 이 선에 돌아간다면 어떤 난이 아울러 일어나고 어떤 재앙이 다투어 오겠는가」라고 맺었다. 미워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며, 대치의 수단은 칼이 아니라 보시를 거두는 것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본론의 방법 대치는 「그 보시를 멈춘다」는 한 구절로 귀결한다. 『열반경』의 과거세 이야기는 정법을 지키는 마음의 엄정함을 보이는 예이고, 말법의 실천은 그릇된 법을 떠받치는 공양을 거두고 정법에 돌아가는 것이다.
실승의 일선 — 「정」의 정체
본론의 결론은 제9단 끝에 놓여 있다.
汝早く信仰の寸心を改めて、速かに実乗の一善に帰せよ。然れば則ち三界は皆仏国なり。仏国其れ衰えんや。十方は悉く宝土なり。宝土何ぞ壊れんや。国に衰微無く土に破壊無くんば、身は是れ安全にして、心は是れ禅定ならん。
그대는 어서 신앙의 작은 마음을 고쳐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그러면 곧 삼계는 모두 불국이니라. 불국이 어찌 쇠하겠는가. 시방은 모두 보토이니라. 보토가 어찌 무너지겠는가. 나라에 쇠미함이 없고 국토에 파괴가 없다면 몸은 안전하고 마음은 선정이리라.
「실승(實乘)」은 진실한 가르침, 곧 법화경을 말한다. 그 「일선(一善)」, 하나의 선이란 무엇인가. 아홉 단에 걸쳐 본론은 오로지 염불 등의 방법을 다스리는 데 힘을 쏟았고, 실승의 일선이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법화경 28품, 또는 천태종으로 보는 해석이 널리 행해졌다.
그러나 본론 첫머리에서 객이 늘어놓은 기도 가운데에는 이미 「법화경의 『병즉소멸 불로불사』의 구절을 우러러 법화 진실의 묘문을 숭상한다」는 것이 들어 있었고, 그것 역시 효험이 없다고 탄식되었다. 실승의 일선이 법화경 28품을 읽고 외우는 일이나 당시의 천태종이라면 효험이 없다고 탄식할 까닭이 없다. 실제로 헤이안 말기 이래 공가와 무가 사이에서는 법화경을 서사 · 독송 · 공양하는 일이 성했으나 그들도 쇠망의 길을 걸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실승의 일선을 법화경 본문 문저의 사행(事行)의 일념삼천, 곧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로 본다. 대성인은 건장 5년(1253) 4월 28일에 이 법을 처음 부르시어 홍안 2년(1279) 10월 12일에 일염부제 총여의 대어본존을 건립하시어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으며, 이 대어본존이 말법의 민중이 귀의해야 할 「실승의 일선」이라고 본다.
「삼계는 모두 불국」이라는 결론은 의정불이의 원리를 거꾸로 비춘 것이다. 정법에 등지면 선신이 떠나 국토가 무너지듯, 정법에 돌아가면 그 국토가 그대로 불국 · 보토가 된다. 몸은 안전하고 마음은 선정이라는 말은 개인의 평안과 국토의 평안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인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입정」의 「정」, 「실승의 일선」은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다. 본론은 방법 대치를 앞세워 말하면서, 그 끝에서 정법 귀의에 의한 「삼계는 모두 불국」의 길을 보인다.
남은 두 난 — 자계반역과 타국침핍
제9단에서 주인은 객에게 당장의 대치를 재촉하며 이렇게 경고한다.
薬師経の七難の内五難忽に起り二難猶残れり、所以他国侵逼の難・自界叛逆の難なり
『약사경』의 칠난 가운데 다섯 난은 이미 일어났고 두 난이 아직 남아 있으니, 이른바 타국침핍의 난과 자계반역의 난이니라.
『대집경』의 삼재 가운데서는 병혁(兵革)의 재가, 『금광명경』의 재과 가운데서는 「타방의 원적이 나라 안을 침략하는」 재앙이, 『인왕경』의 칠난 가운데서는 「사방의 적이 와서 나라를 침범하는」 난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주인은 「백귀가 일찍 어지러워 만민이 많이 죽었으니 앞의 난은 분명하다. 뒤의 재앙을 어찌 의심하겠는가」라고 하며, 「그대가 모름지기 한 몸의 안도를 생각한다면 먼저 사방의 정밀(四表の靜謐)을 빌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평안은 사회 전체의 평안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상주로부터 9년 뒤인 문영 5년(1268) 윤정월, 몽골의 국서가 다자이후에 이르렀다. 타국침핍의 난이 문 앞에 온 것이다. 문영 9년(1272) 2월에는 막부의 집권 호조 도키무네의 이복형으로 교토 로쿠하라 단다이였던 호조 도키스케가 주살되는 내란, 이른바 니가쓰 소동이 일어났다. 자계반역의 난이다. 그리고 문영 11년(1274) 10월과 홍안 4년(1281), 두 차례에 걸쳐 몽골군이 규슈에 쳐들어왔다.
세 번의 고명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이 일을 「세 번의 고명(高名)」이라 하셨다.
外典に曰く未萠をしるを聖人という内典に云く三世を知るを聖人という余に三度のかうみようあり一には去し文応元年太歳庚申七月十六日に立正安国論を最明寺殿に奏したてまつりし時宿谷の入道に向つて云く禅宗と念仏宗とを失い給うべしと申させ給へ此の事を御用いなきならば此の一門より事をこりて他国にせめられさせ給うべし
외전에 이르기를 아직 싹트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을 성인이라 하고, 내전에 이르기를 삼세를 아는 것을 성인이라 한다. 나에게는 세 번의 고명이 있느니라. 첫째는 지난 문응 원년 경신 7월 16일에 「입정안국론」을 사이묘지 전에게 아뢰었을 때 야도야 입도를 향하여 「선종과 염불종을 없애시도록 말씀드리시오. 이 일을 쓰지 않으신다면 이 일문에서 일이 일어나 타국에게 공격당하실 것이오」라고 말한 것이니라.
둘째는 문영 8년(1271) 9월 12일, 다쓰노구치 법난 때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를 향해 「니치렌은 일본국의 기둥이다. 나를 잃는 것은 일본국의 기둥을 쓰러뜨리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자계반역 · 타국침핍의 두 난을 거듭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이틀 전인 9월 10일, 평정소에 불려 나가셨을 때에도 대성인은 같은 두 난을 들어 경고하셨다고 「종종어진무어서」(911쪽)는 전한다. 셋째는 문영 11년(1274) 4월 8일, 사도에서 돌아오신 대성인이 헤이노사에몬노조를 만나 「올해 안에 몽골이 반드시 쳐들어온다」고 하신 것이다. 세 번 모두 그대로 적중하였다. 세 번의 고명이 네 경의 경문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입정안국론 제2편 「재난 유래의 경증 — 네 경의 명문」에서 자세히 읽는다.
대성인은 「종종어진무어서」에서 몽골의 국서가 온 일을 들어 「입정안국론」이 「지금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부합하였다. 이 글은 백낙천의 악부보다도 뛰어나고 부처의 미래기에도 뒤지지 않는다」(909쪽)고 하셨다. 오서에서는 「이 글은 징험이 있는 글이다」(此の書は徴有る文なり, 33쪽)라고 하셨다. 그리고 「성인지삼세사」에서는 「니치렌은 일염부제 제일의 성인이다」(日蓮は一閻浮提第一の聖人なり, 974쪽)라고 선언하셨다. 아직 싹트지 않은 일을 미리 알고 그 대처의 길을 아는 사람이 성인이라면, 「입정안국론」의 예언과 그 적중은 대성인이 바로 그 성인이심을 증명한다.
세 번의 고명과 그 전후의 경위는 「보은초」 제5편 「대성인의 국가 간효와 재난의 근원」, 「선시초」에서도 다룬다. 여기서는 「입정안국론」의 경고가 어떻게 이어지고 확인되었는가에 초점을 둔다.
- 예언 · 간효첫 번째 고명1260.7.16「입정안국론」 상주 · 야도야 입도에게 「이 일문에서 일이 일어나 타국에게 공격당할 것」
- 적중1268(문영 5).윤1몽골 국서 도래(타국침핍의 조짐)
- 예언 · 간효12684.5 「안국론어감유래」8.21 야도야 입도에게 어장10.11 십일통어서
- 예언 · 간효1269.12.8오서「이 글은 징험이 있는 글이다」此の書は徴有る文なり
- 예언 · 간효두 번째 고명1271(문영 8).9.10평정소 심문9.12 다쓰노구치 법난 —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두 난을 경고
- 적중1272(문영 9).2니가쓰 소동 — 자계반역 적중
- 예언 · 간효세 번째 고명1274(문영 11).4.8「올해 안에 몽골이 온다」
- 적중1274.10몽골 1차 내습 — 타국침핍 적중
- 적중1281(홍안 4)몽골 2차 내습
13세기 세계 속의 입정안국론
세계사의 눈으로 보아도 13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시기는 거의 모든 면에서 대변동기였다. 대성인의 불법이 출현한 때와 이 대변동기가 겹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할 일이다. 대성인이 입종하신 건장 5년은 서기 1253년, 13세기의 한가운데로, 대륙에서는 몽골군의 원정이 이어졌고 바다에서는 나침반이 널리 쓰이며 동서 교류가 크게 넓어지고 있었다. 기후로 보아도 13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북유럽의 기후가 유난히 혹독했다는 연구가 있으며, 14세기의 어느 겨울에는 이리 떼가 바다의 얼음을 건너 노르웨이에서 덴마크로 옮겨 갔다는 옛 기록도 전한다. 남유럽에도 한파가 자주 닥쳐 흉작과 기근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13세기는 몽골의 시대였다. 동북아시아 초원에서 몽골을 통일한 테무친은 1206년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패배를 모르는 기마 군단으로 사방에 쳐들어갔다. 칭기즈 칸에서 오고타이 · 구유크 · 몽케 · 쿠빌라이에 이르는 불과 너덧 대 사이에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전례 없는 대제국이 세워졌다. 서요를 대신한 나이만 부의 쿠출루크를 멸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무너뜨리고, 서하 · 금 · 남송을 멸하였으며, 고려를 굴복시켰다.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정복하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 결과 일 칸국 · 킵차크 칸국 · 오고타이 칸국 · 차가타이 칸국의 네 칸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쿠빌라이 때 고려를 거쳐 일본을 공략하려 한 것이 문영 · 홍안의 두 전역이다.
대성인의 생애를 이 연표에 겹쳐 보면 놀라운 일치가 드러난다. 대성인이 탄생하신 1222년에 몽골군은 인도 가까이에 이르러 있었고, 인도는 그보다 앞서 이슬람 세력에 의해 무력으로 제압되어 불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대성인이 출가하신 1237년 무렵 몽골군은 멀리 러시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있었으며, 「입정안국론」을 올리신 1260년은 바로 쿠빌라이가 즉위한 해였다. 그러나 그때 일본에서 몽골의 내습을 꿈에라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성인은 몽골의 세계 정복을 일왕 「일염부제의 투쟁」이라 하시고, 「선시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今末法に入つて二百余歳・大集経の於我法中・闘諍言訟・白法隠没の時にあたれり仏語まことならば定んで一閻浮提に闘諍起るべき時節なり
지금 말법에 들어 이백여 년, 『대집경』의 「나의 법 가운데 투쟁언송하여 백법이 은몰한다」는 때에 해당하느니라. 부처님 말씀이 진실이라면 반드시 일염부제에 투쟁이 일어날 시절이니라.
같은 대목에서 대성인은 한토의 삼백육십 나라가 이미 몽골에 무너지고 휘종 · 흠종 두 황제가 북방에 사로잡혔으며 고려와 신라 · 백제의 땅이 모두 몽골 황제에게 공격당한 일을 드시고, 「투쟁견고의 불어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큰 바다의 조수가 때를 어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신 뒤, 「이로써 생각건대 『대집경』의 백법은몰의 때에 이어 법화경의 대백법이 일본국과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할 것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法華経の大白法の日本国並びに一閻浮提に広宣流布せん事も疑うべからざるか, 264쪽)고 맺으셨다. 세계적 투쟁은 석존의 불법이 힘을 잃는 「백법은몰」의 증거이며, 동시에 새로운 대백법이 일어날 때가 왔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 1206세계테무친, 칭기즈 칸을 칭함 · 이 무렵 인도의 불교 자취를 감춤
- 1222세계몽골군 인도에 다가감대성인대성인 탄생
- 1237 무렵세계몽골군 러시아 공략대성인출가
- 1253세계세계는 동서 교류의 확대기대성인입종
- 1260세계쿠빌라이 즉위대성인「입정안국론」 상주
- 1268대성인몽골 국서 도래
- 1274세계문영의 전역
- 1279대성인일염부제 총여의 대어본존 건립
- 1281세계홍안의 전역
불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석존의 「백법은몰」이라는 금언에 어긋나지 않게, 석존의 불법은 말법에 이르러 그 힘을 잃었다. 대성인은 「현불미래기」에서 정법 · 상법의 불법과 말법의 불법의 흐름을 해와 달에 견주셨다.
月は西より出でて東を照し日は東より出でて西を照す仏法も又以て是くの如し正像には西より東に向い末法には東より西に往く
달은 서쪽에서 나와 동쪽을 비추고, 해는 동쪽에서 나와 서쪽을 비춘다. 불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 정법 · 상법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말법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느니라.
같은 글에서 대성인은 「불기에 따라 이를 헤아리면 이미 후오백세의 처음에 해당한다. 불법은 반드시 동쪽 땅 일본에서 나와야 한다」(仏法必ず東土の日本より出づべきなり, 508쪽)고 하시고, 정가 연간 이래의 대지진과 대천변을 「부처가 나고 멸하실 때와 같다. 마땅히 알라, 부처와 같은 성인이 태어나신 것이리라」라고 하셨다. 「입정안국론」의 계기가 된 정가의 대지진이 여기서는 성인 출현의 서상(瑞相)으로 다시 해석된다. 재난은 정법을 버린 결과이면서, 동시에 정법이 일어날 때의 조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일염부제를 향한 뜻은 다른 어서에도 일관한다. 「관심의 본존초」는 「이때 지용천계가 출현하여 본문의 석존을 협사로 하는 일염부제 제일의 본존이 이 나라에 서야 한다」(此の時地涌千界出現して本門の釈尊を脇士と為す一閻浮提第一の本尊此の国に立つ可し, 254쪽)고 하셨고, 「삼대비법품승사」는 본문의 계단을 「삼국과 일염부제의 사람이 참회멸죄하는 계법일 뿐 아니라 대범천왕 · 제석 등도 내려와 밟으실 계단」(三国並に一閻浮提の人・懺悔滅罪の戒法のみならず大梵天王・帝釈等も来下してフミ給うべき戒壇なり, 1022쪽)이라 하셨다. 일염부제란 온 세계라는 뜻이다. 대성인의 불법은 처음부터 나라와 민족을 넘어 온 세계에 광선유포하여 일체중생을 구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한 사람에서 온 세계로
「입정안국론」은 한 사람의 권력자에게 바쳐진 글이었다. 그러나 그 원리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넓어져 가는 것이다. 제10단에서 객이 「다만 내가 믿을 뿐 아니라 또 남의 잘못도 깨우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한 사람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번져 가는 길을 보인다. 대성인은 「제법실상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日蓮一人はじめは南無妙法蓮華経と唱へしが、二人・三人・百人と次第に唱へつたふるなり、未来も又しかるべし、是あに地涌の義に非ずや
니치렌 한 사람이 처음에는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렀으나, 두 사람 · 세 사람 · 백 사람으로 차례로 불러 전하는 것이니라.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지용의 뜻이 아니겠는가.
대성인 재세의 홍통의 방식은 그대로 미래에 전해져 간다. 「입정안국」은 한 시대의 정책론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 바른 법에 돌아가는 데서 시작하여 사회와 국토의 평안으로 넓어지는 변하지 않는 원리로 읽혀야 한다.
본문
立正安国論奥書 文応元年太歳庚申之を勘う正嘉より之を始め文応元年に勘え畢る。 去ぬる正嘉元年太歳丁巳八月二十三日戌亥の尅の大地震を見て之を勘う、其の後文応元年太歳庚申七月十六日を以て宿屋禅門に付して故最明寺入道殿に奉れり、 其の後文永元年太歳甲子七月五日大明星の時弥此の災の根源を知る、 文応元年太歳庚申より文永五年太歳戊辰後の正月十八日に至るまで九ケ年を経て西方大蒙古国自り我が朝を襲う可きの由牒状之を渡す、又同六年重ねて牒状之を渡す、既に勘文之に叶う、之に準じて之を思うに未来亦然る可きか、 此の書は徴有る文なり是れ偏に日蓮が力に非ず法華経の真文の感応の至す所か。 文永六年太歳己巳十二月八日之を写す。
입정안국론 오서 (「입정안국론」은) 문응 원년 경신의 해에 이를 감(勘)하였느니라. 정가 때부터 이를 시작하여 문응 원년에 감하기를 마쳤느니라. 지난 정가 원년 정사 8월 23일 술해(戌亥)의 시각의 대지진을 보고 이를 감하였느니라. 그 뒤 문응 원년 경신 7월 16일에 야도야 선문(禪門)을 통하여 고 사이묘지 입도전에게 올렸느니라. 그 뒤 문영 원년 갑자 7월 5일 큰 혜성이 나타났을 때 더욱 이 재난의 근원을 알았느니라. 문응 원년 경신부터 문영 5년 무진 윤정월 18일에 이르기까지 9년이 지나, 서방의 대몽골국으로부터 우리 나라를 습격하겠다는 뜻의 첩장(牒狀)이 건너왔느니라. 또 같은 6년에 거듭 첩장이 건너왔느니라. 이미 감문(勘文)이 이에 들어맞았느니라. 이에 견주어 생각하건대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라. 이 글은 징험이 있는 글이니라. 이는 오로지 니치렌의 힘이 아니요, 법화경의 진문(眞文)의 감응이 이르게 한 바이니라. 문영 6년 기사 12월 8일 이를 옮겨 쓰노라.
어구 풀이
- 太歳태세
- 해를 나타내는 간지(干支) 앞에 붙이는 말. 중국 전국 시대에 목성(歲星)이 하늘을 한 바퀴 도는 데 12년이 걸린다는 것을 관측하여, 목성이 있는 자리로 해의 이름을 붙이는 세성기년법이 생겼다. 그런데 하늘에는 이미 세성의 운행과 반대 방향으로 십이지가 배당되어 있었기에 혼란이 생겼고, 세성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상의 별을 세워 「태세(太歲)」 또는 「세음(歲陰)」이라 하였다. 이 태세의 자리로 해를 헤아리는 것이 태세기년법이며, 십이지만으로는 12년에 한 바퀴를 돌므로 십간을 짝지어 60년 주기로 해를 나타낸다. 「태세 경신」은 「경신(庚申)의 해」라는 뜻이다.
- 十干십간
- 갑 · 을 · 병 · 정 · 무 · 기 · 경 · 신 · 임 · 계. 은나라 때 한 달을 상 · 중 · 하의 세 순(旬)으로 나누고 한 순 열흘의 날마다 붙인 기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음양오행설의 영향으로 목 · 화 · 토 · 금 · 수의 오행에 형(兄)과 아우(弟)를 붙여 「목의 형(갑) · 목의 아우(을)」 · 「화의 형(병) · 화의 아우(정)」 · 「토의 형(무) · 토의 아우(기)」 · 「금의 형(경) · 금의 아우(신)」 · 「수의 형(임) · 수의 아우(계)」로 부르게 되었다. 십이지에 쥐 · 소 같은 동물을 붙인 것은 전국 시대부터이며, 간지는 은 · 주 때에는 주로 날을 세는 데 쓰였고 해와 달을 세는 데 쓰인 것은 전국 시대부터라고 한다.
- 正嘉元年…大地震정가 원년의 대지진
- 정가 원년(1257) 8월 23일 밤 아홉 시 무렵 가마쿠라 지방을 덮친 대지진. 『아즈마카가미』에 「23일 을사, 맑음. 술의 시각에 대지진. 소리가 있었다. 신사와 불각이 한 채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산악이 무너지고 인가가 넘어지고 흙담이 모두 부서지고, 곳곳에서 땅이 갈라져 물이 솟았다. 나카노게바바시 근처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그 속에서 불꽃이 타올랐는데 빛이 푸르렀다」고 적혀 있다. 이 참상이 「입정안국론」을 쓰시는 계기가 되었다.
- 戌亥の尅술해의 시각
- 술시와 해시의 사이, 오늘날의 밤 아홉 시 무렵.
- 宿屋禅門야도야 선문
- 야도야 사에몬 입도 미쓰노리. 호조 씨 적류를 섬긴 가신(미우치비토)으로 「입정안국론」을 도키요리에게 전한 사람이다. 「선문(禪門)」은 출가한 재속의 남성을 이르는 말로 「입도」와 같다. 법명은 사이신이며, 『아즈마카가미』 권51에는 홍장 3년(1263) 11월 도키요리의 임종 때 마지막 간병을 위해 출입이 허락된 일곱 사람 가운데 그 이름이 보인다. 처음에는 고쿠라쿠사 료칸에게 귀의하여 율과 염불을 믿었으나 뒤에 대성인의 가르침을 믿게 되었다고 전한다.
- 故最明寺入道殿고 사이묘지 입도전
- 호조 도키요리. 집권직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사이묘지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불렸다. 홍장 3년(1263)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문영 6년의 오서에서는 「고(故)」를 붙이셨다.
- 大明星큰 혜성
- 문영 원년(1264) 7월 5일 동쪽 하늘에 나타난 큰 혜성. 「안국론어감유래」에서는 「혜성이 동쪽에 나와 그 남은 빛이 대체로 한 국토에 미쳤다. 이 또한 세상이 시작된 이래 없던 흉서(凶瑞)」라 하셨다.
- 後の正月윤정월
- 정월 다음에 한 번 더 드는 윤달. 문영 5년(1268)에는 정월 뒤에 윤정월이 있었다. 몽골의 국서가 가마쿠라에 이른 것이 이 윤정월이다.
- 牒状첩장
- 관청 사이에 주고받는 공문서. 여기서는 몽골이 고려를 통해 보낸 국서를 말한다.
- 勘文감문
- 일의 길흉 · 연유를 헤아려 조사하여 윗사람에게 올리는 글. 「입정안국론」 자체를 가리킨다.
- 徴有る文징험이 있는 글
- 「징(徵)」은 증험, 현증. 예언한 것이 현실로 나타나 그 진실이 증명된 글이라는 뜻이다.
- 法華経の真文の感応법화경의 진문의 감응
- 「진문(眞文)」은 진실한 경문. 예언의 적중이 대성인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법화경의 경문이 그대로 현실에 감응하여 나타난 것이라는 뜻이다.
문영 6년의 사본 — 손수 옮겨 쓰시며 덧붙인 글
오서(奧書)란 책의 끝에 그 책의 유래나 옮겨 쓴 사정을 적어 넣은 글이다. 이 오서는 문영 6년(1269) 12월 8일, 대성인이 「입정안국론」을 손수 옮겨 쓰실 때 끝에 덧붙이신 것이다. 상주로부터 9년 남짓, 몽골의 첩장이 두 번 건너온 뒤였다.
짧은 글이지만 담긴 사실이 많다. 첫째, 저술의 기간이다. 정가 원년의 대지진을 보고 감하기 시작하여 문응 원년에 마쳤으니, 「입정안국론」은 세 해에 걸친 탐구의 결실이다. 둘째, 상주의 날짜와 경로다. 문응 원년 7월 16일, 야도야 입도를 통해 사이묘지 입도에게 올렸다. 셋째, 그 뒤의 확신이다. 문영 원년 7월의 큰 혜성을 보고 「더욱 이 재난의 근원을 알았다」. 넷째, 예언의 적중이다. 9년 뒤 문영 5년 윤정월 18일과 이듬해 6년에 몽골의 첩장이 왔으니 「이미 감문이 이에 들어맞았다」. 다섯째, 미래에 대한 판단이다. 「이에 견주어 생각하건대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여섯째, 그 모든 것의 귀착이다. 「이 글은 징험이 있는 글이다. 이는 오로지 니치렌의 힘이 아니라 법화경의 진문의 감응이 이르게 한 바이다」.
마지막 구절은 겸손의 말이면서 동시에 확신의 말이다. 예언이 맞은 것은 개인의 예지력 때문이 아니라, 경문에 설해진 인과가 그대로 현실에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입정안국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경문으로 짜여 있다는 사실이 이 말의 무게를 받친다. 대성인은 『금광명경』 · 『대집경』 · 『인왕경』 · 『약사경』이 설한 재난의 차례를 그대로 읽으셨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난이 무엇인지를 경문에서 헤아리셨다.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재난이 일어나는 세 가지 까닭 — 니치칸 상인의 삼의
재난은 왜 일어나는가. 니치칸 상인은 「입정안국론 문단」에서 불가의 입장에 서서 재난이 일어나는 까닭을 세 가지로 나누어 밝혔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첫째는 만민의 업감(業感)에 의한 것이다. 악업을 지은 중생이 같은 때에 함께 태어나, 그 업에 감응하여 재난을 부른다. 이것은 국왕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만민이 스스로 부르는 것이다. 요임금 때 9년 동안의 홍수, 7년 동안의 가뭄 같은 것이 이것이다.
둘째는 국왕이 도리에 어긋난 데 의한 것이다. 국왕이 어리석어 그 명령이 도리에 어긋나므로 하늘이 이를 벌하여 재난이 있다. 이것은 만민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국주가 스스로 부르는 것이다. 효성스러운 며느리를 억울하게 죽이자 가뭄이 들고, 충신을 가두자 여름에 서리가 내렸다는 옛이야기 같은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정법을 비방한 데 의한 것이다. 이 「입정안국론」이 인용한 네 경의 글이 말하는 것이 이것이며, 이는 국왕과 만민, 천하가 함께 부르는 재난이다.
그리고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마땅히 알라, 첫째의 뜻도 멀리 그 근본을 따지면 그것이 무시이래의 정법 비방의 업감이 아니라고 어찌 알겠는가. 둘째의 뜻도, 세간법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곧 불법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불법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곧 방법이다. 깊이 불법을 알면 세간법이 곧 불법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 세 뜻을 깨치면 어디에 가도 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세 가지 까닭은 따로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만민의 업도, 국왕의 실정도, 그 뿌리를 더듬어 가면 모두 정법을 비방하는 데로 돌아간다. 「입정안국론」이 재난의 원인을 오로지 방법 하나로 모아 「이 일흉을 금하라」고 말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 ①만민의 업감악업의 중생이 함께 태어나 업에 감응해 재난을 부름국왕과 관계없이 만민이 스스로 부름요임금 때의 9년 홍수 · 7년 가뭄
- ②국왕이 도리에 어긋남국주의 명령이 도리에 어긋나 하늘이 벌함만민과 관계없이 국주가 스스로 부름효부의 원통한 죽음 · 갇힌 충신의 서리
- ③정법 비방「입정안국론」이 인용한 네 경의 글국왕과 만민, 천하가 함께 부름
몽골의 국서 — 「병을 쓰기에 이르는 것을」
오서보다 한 해 앞선 문영 5년(1268) 정월, 몽골의 사신이 국서를 가지고 왔다. 일본은 온 나라가 들끓었다. 겉으로는 친교를 맺고 싶다는 온화한 문장이었으나, 속뜻은 몽골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라는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그 국서는 이러하다.
上天の眷命せる大蒙古国皇帝、書を日本国王に奉る。朕惟うに、古より小国の君も、境土相接すれば、尚努めて講信修睦す。況んや我が祖宗は天の明命を受けて、区夏を奄有す。遐かなる方の異域にして威を畏れ徳に懐つく者は悉くは数うべからず。
하늘의 돌보심을 받은 대몽골국 황제가 일본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짐이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작은 나라의 임금도 국경이 서로 닿으면 오히려 힘써 믿음을 나누고 화목을 닦았다. 하물며 우리 조종(祖宗)은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중화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먼 곳의 이역으로서 위세를 두려워하고 덕을 그리워하는 자는 다 헤아릴 수 없다.
朕即位の初、高麗の無辜の民、久しく鋒鏑に瘁るるを以って即ち兵を罷ましめ、その疆城を還し、その旄倪を反す。高麗の君臣は感戴して来朝せり。義は君臣と雖も歓は父子の若し。計るに王の君臣またすでに之を知らん。高麗は朕の東藩なり。
짐이 즉위한 처음에 고려의 죄 없는 백성이 오랫동안 창칼에 시달린 것을 불쌍히 여겨 곧 군사를 거두고, 그 강토를 돌려주고, 그 노인과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고려의 군신은 감격하여 내조하였다. 의리로는 군신이지만 기쁨은 부자와 같다. 헤아리건대 왕의 군신도 이미 이를 알 것이다. 고려는 짐의 동쪽 울타리다.
日本は高麗に密邇し、開国以来また時に中国に通ずるも、朕が躬に至って一乗の使もって和好を通ずることなし。尚王の国これを知ること未だ審かならざるを恐る。故に特に使を遣し書を持たしめ朕が志を布告す。冀くば今より以往、通問して好を結び、以って相親睦せんことを。且、聖人は四海を以って家となす。相通好せざるは豈一家の理ならんや。兵を用うるに至る。それ孰んぞ好むところならん。王、それ之を図れ。不宣。
일본은 고려에 가깝고 나라를 연 이래 때때로 중국과 통하였으나, 짐의 대에 이르러서는 한 대의 수레로도 사신을 보내 화친을 통한 일이 없다. 왕의 나라가 아직 이를 자세히 알지 못할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특별히 사신을 보내 글을 가지게 하여 짐의 뜻을 알린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서로 왕래하여 우호를 맺고 서로 친목하기를. 또 성인은 사해를 한 집으로 삼는다. 서로 우호를 통하지 않는 것이 어찌 한 집의 도리이겠는가. 병(兵)을 쓰기에 이르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왕은 이를 헤아리라. 이만 줄인다.
「병을 쓰기에 이른다」는 마지막 구절이 이 글의 본심이다. 지원(至元) 3년은 1266년이다. 국서를 가진 고려 사람 반부(潘阜)가 쓰시마에 닿은 것이 문영 4년(1267) 11월이고, 해를 넘겨 정월에 다자이후에 들어갔다. 국서는 현지의 최고 책임자인 진제이 부교 쇼니 스케요시(少貳資能)가 받아, 40일쯤 뒤인 윤정월 상순에 가마쿠라에 전해졌다. 이때 막부에서는 도키요리와 나가토키가 세상을 떠난 뒤, 도키요리의 적자 도키무네가 자랄 때까지 도키요리의 숙부뻘인 노령의 마사무라가 집권을 맡고 있었다.
조정과 막부의 대응
막부는 이 중대한 사태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2월 7일 교토의 조정에 올렸다. 조정은 연일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일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고 의결하였다. 이는 곧 몽골이 말한 「병을 쓰기에 이르는」 사태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라를 들어 적국 항복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조정은 2월 15일 전국의 여러 큰 신사에 칙을 내려 몽골의 난을 알리고 기도하게 하였고, 막부는 2월 27일 서국의 고케닌들에게 「이적(異敵)」의 내습에 대비하라고 지령하였다. 3월 5일에는 마사무라가 연서(連署)가 되고 18세의 도키무네가 집권이 되었다.
몽골의 사신은 7월까지 다자이후에서 기다렸으나 아무리 청해도 답서를 받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갔다. 고려에서 몽골에는 「애썼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보고되었다. 몽골의 세조 쿠빌라이가 이에 만족할 리 없었다. 문영 6년(1269) 3월, 몽골 사신 8명과 고려 사람 4명, 수행원 70여 명의 사절이 쓰시마에 이르렀고, 실랑이 끝에 도지로(塔二郎)와 야사부로(彌三郎)라는 두 섬사람을 붙잡아 돌아갔다. 두 사람은 몽골의 도읍 연경의 궁전까지 구경하고, 7월 하순 다시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돌려보내졌다. 이 일행이 쓰시마에 닿은 것이 9월 17일이었고, 이윽고 다자이후에 이르렀다. 오서의 「또 같은 6년에 거듭 첩장이 건너왔다」는 이 일을 말한다.
이번에는 조정이 답서를 보내기로 하여 스가와라노 나가나리(菅原長成)가 초고를 지었다. 일본은 신국이므로 위협에 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답서는 막부에서 묵살되었고, 몽골의 첩장이 무례하다는 이유만 전한 채 사신은 돌려보내졌다.
막부의 구체적인 대책으로는 이국경고번역(異國警固番役)이 있었다. 규슈 북부의 지쿠젠 · 히젠 두 나라 연안의 요충지를 한 달씩 돌아가며 지키게 한 것으로, 규슈에 영지를 가진 막부의 무사 전원이 이에 동원되었다. 당시의 고케닌은 본령은 간토에 있어도 여러 나라에 영지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때까지 규슈의 영지에는 일족이나 종자를 대관으로 보내던 이들도 모두 규슈로 내려가라는 명을 받았다. 군비를 위해 일본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영지의 지명 · 넓이 · 영주의 이름을 밝히고 그에 따라 부담을 지우기도 했는데, 그 조사는 지두 · 고케닌만이 아니라 사찰과 신사의 영지, 장원, 국아령에까지 미쳤다. 문영 5년에는 조정에 결정을 청하던 막부가 이제는 전면적으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조정이 지은 답서를 막부가 묵살한 것도 그 변화의 한 단면이었다.
이 사신의 도래가 사람들을 얼마나 동요시켰는가. 문영 5년 사신이 왔을 때 궁중의 불사를 위해 교토에 올라와 있던 도다이사 손쇼인의 승려 소쇼(宗性)는 문제의 국서를 베껴 두었는데, 그 사본의 오서에 「당세 천하에 둘도 없는 대사건」이라 적었다고 한다. 이 한 가지로도 동요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야도야 입도에게 보낸 어장과 십일통어서
나라 안이 폭풍에 휩싸인 듯 불안과 동요에 빠져 있을 때, 대성인은 문영 5년 8월 21일, 앞서 「입정안국론」을 도키요리에게 전한 야도야 입도에게 이렇게 써 보내셨다.
其の後は書・絶えて申さず不審極り無く候、抑去る正嘉元年丁巳八月二十三日戌亥の刻の大地震、日蓮諸経を引いて之を勘えたるに念仏宗と禅宗等とを御帰依有るが故に日本守護の諸大善神瞋恚を作して起す所の災なり、若し此れを対治無くんば他国の為に此の国を破らる可きの由勘文一通之を撰し正元二年庚申七月十六日御辺に付け奉つて故最明寺入道殿へ之を進覧す、其の後九箇年を経て今年大蒙古国より牒状之有る由・風聞す等云云、経文の如くんば彼の国より此の国を責めん事必定なり、而るに日本国の中には日蓮一人当に彼の西戎を調伏するの人たる可しと兼て之を知り論文に之を勘う、君の為・国の為・神の為・仏の為・内奏を経らる可きか、委細の旨は見参を遂げて申す可く候
그 뒤로는 글이 끊겨 말씀드리지 못하여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무릇 지난 정가 원년 정사 8월 23일 술해 시각의 대지진을 니치렌이 여러 경을 끌어 감해 보니, 염불종과 선종 등에 귀의하신 까닭에 일본을 수호하는 여러 대선신이 성을 내어 일으킨 재앙입니다. 만약 이를 대치하지 않는다면 타국에 의해 이 나라가 깨뜨려질 것이라는 뜻의 감문 한 통을 지어, 정원 2년 경신 7월 16일 귀하를 통해 고 사이묘지 입도전께 올렸습니다. 그 뒤 9년이 지나 올해 대몽골국으로부터 첩장이 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경문대로라면 그 나라가 이 나라를 공격할 것은 반드시 정해진 일입니다. 그런데 일본국 가운데 니치렌 한 사람이 저 서쪽 오랑캐를 조복할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논문에 이를 감해 두었습니다. 임금을 위해, 나라를 위해, 신을 위해, 부처를 위해 (윗분께) 은밀히 아뢰어 주시겠습니까. 자세한 뜻은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원 2년」은 그해 4월에 연호가 문응으로 바뀌기 전의 이름으로, 문응 원년과 같은 해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 11일, 대성인은 호조 도키무네 · 야도야 사에몬 미쓰노리 ·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 · 호조 야겐타 · 겐초사 도류 · 고쿠라쿠사 료칸 · 대불전 별당 · 주후쿠사 · 조코묘사 · 다호사 · 조라쿠사의 열한 곳에 글을 보내 공장(公場)에서의 대결을 촉구하셨다. 이른바 「십일통어서」다. 9년 전 「입정안국론」으로 예언한 일이 사실로 나타났으니, 이 미증유의 국난을 구할 사람은 대성인 자신밖에 없다. 그런데도 막부는 여전히 방법에 집착하여 그 방법으로 적국 항복을 기도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공장에서 대성인과 그들의 정사를 가려 방법 집착의 뿌리를 끊어야 한다는 대자대비의 발로였다.
- 1266(지원 3).8몽골 국서 작성
- 1267(문영 4).11고려 사람 반부, 쓰시마 도착
- 1268(문영 5).1다자이후 도착 → 윤1월 상순 가마쿠라에 전달
- 2.7막부, 조정에 상주
- 2.15조정, 여러 큰 신사에 기도의 칙
- 2.19「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의결
- 2.27막부, 서국 고케닌에 대비 지령
- 3.5도키무네 집권
- 4.5대성인「안국론어감유래」
- 7월사신 헛되이 돌아감
- 8.21대성인「야도야입도에의 어장」
- 10.11대성인십일통어서
- 호조 도키무네
- 야도야 입도
- 헤이노사에몬노조
- 호조 야겐타
- 겐초사
- 고쿠라쿠사
- 대불전
- 주후쿠사
- 조코묘사
- 다호사
- 조라쿠사
- 1269(문영 6).3두 번째 사절 쓰시마 도착
- 9.17섬사람을 돌려보내며 다시 옴
- 12.8대성인「입정안국론」 서사 · 오서
「정도의 법」 — 돌아온 것은 악구와 침묵
그러나 대성인에게 돌아온 것은 악구와 침묵과 기만이었다. 대성인은 「종종어진무어서」에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쓰셨다.
設い日蓮が身の事なりとも国主となりまつり事をなさん人人は取りつぎ申したらんには政道の法ぞかし、いわうや・この事は上の御大事いできらむのみならず各各、の身にあたりて・をほいなるなげき出来すべき事ぞかし、而るを用うる事こそなくとも悪口まではあまりなり、此れひとへに日本国の上下万人・一人もなく法華経の強敵となりてとしひさしくなりぬれば大禍のつもり大鬼神の各各の身に入る上へ蒙古国の牒状に正念をぬかれてくるうなり
설령 니치렌 한 몸의 일이라 하더라도, 나라의 주인이 되어 정사를 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전해 아뢰는 것이 정도(政道)의 법이니라. 하물며 이 일은 윗분의 큰일이 일어날 뿐 아니라 각자의 몸에도 닥쳐 큰 탄식이 생길 일이니라. 그런데 쓰지 않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악구까지 하는 것은 너무하다. 이것은 오로지 일본국의 위아래 만인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법화경의 강적이 되어 여러 해가 지났으므로 큰 화가 쌓이고, 큰 귀신이 각자의 몸에 들어간 위에 몽골국의 첩장에 바른 생각을 빼앗겨 미쳐 버린 것이니라.
「정도의 법」이란 막부가 지켜야 할 정치의 법도를 말한다. 막부의 체제는 법도와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에 의한 법치였고, 헤이노사에몬노조가 제멋대로 처리하는 것은 이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무가 정치를 단순한 위에서 아래로의 명령 체계로만 아는 사람에게는 믿기 어렵겠지만, 초창기의 막부는 아래 무사단의 의견을 매우 존중하여 정치에 받아들였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호조 야스토키와 도키요리를 둘러싼 여러 미담이다.
야스토키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어떤 남자가 살림이 어려워 영지를 팔았는데, 그 아들이 이를 되사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영지를 되사 준 형이 아니라 아우에게 영지를 물려주어 형제 사이에 상속 다툼이 일어났다. 이를 재판한 야스토키는 일단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여 아우의 승소로 하고, 형은 자기 집에 거두어 두었다가 얼마 뒤 형의 본국에 아버지의 유령(遺領)보다 큰 몰수지가 생기자 그것을 주었다고 한다.
도키요리에 관해서는 요쿄쿠(謠曲)로 유명한 「하치노키(鉢の木)」 이야기가 있다. 한 나그네 승려가 시나노에서 가마쿠라로 가는 길에 고즈케의 사노 근처에서 큰 눈을 만나 어느 집에 하룻밤 묵기를 청하였다. 주인 부부는 가난하여 조밥으로 승려를 대접하고, 아끼던 매화 · 소나무 · 벚나무 분재를 불태워 승려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주인은 사노 겐자에몬노조 쓰네요(佐野源左衛門尉常世)라 하였는데, 본래 사노 장원 서른여 고을의 영주였으나 일족에게 빼앗겨 이렇게 영락하였다며, 그래도 가마쿠라에 일이 생기면 맨 먼저 달려가 충근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뒤 가마쿠라에서 여러 나라의 군세에 소집령이 내리자 겐자에몬은 여윈 말에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그러자 집권 도키요리가 그때의 나그네 승려가 자신이었다고 밝히고, 말대로 달려온 것을 크게 칭찬하여 본령을 돌려준 위에, 눈 오는 밤의 대접에 대한 답례로 분재의 이름을 따서 가가의 우메다 장원 · 엣추의 사쿠라이 장원 · 고즈케의 마쓰이다 장원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들의 진위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을 것이고, 그 배경으로 막부 내부의 복잡한 사정 때문에 집권과 고케닌의 결속을 긴밀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그러나 막부 자체가 이른바 봉건적인 제도보다도 인간적인 주종 관계의 결합으로 지탱되고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가 생겨날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대성인이 「정도의 법」을 말씀하신 것은 막부가 스스로 세운 이 법도와 전통에 비추어 보더라도, 국가의 존망에 관한 간언을 묵살하고 악구로 답하는 것은 정치의 도리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하물며 이 일은 윗분의 큰일」이라는 말씀은, 대성인 한 몸의 사사로운 일이라도 받아 전해야 하거늘 하물며 이것은 막부와 나라의 존망에 관한 대사이며, 각자에게는 이생에서 몽골군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하고 내생에서는 방법의 큰 벌로 무간지옥에 떨어질 두려운 문제라는 뜻이다.
간효의 정신 — 「외치면 난이 일어날 것을 각오하고」
「내가 지금 정의를 외치지 않으면 일본은 망한다. 외치면 난이 다투어 일어날 것은 처음부터 각오한 바이다.」 이것이 대성인의 간효의 정신이었다. 나라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 의식, 그 운명에 대한 깊은 책임감이다. 이것은 대성인이 말법의 어본불이시라는 논의를 잠시 내려놓고 보더라도 결코 가볍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성인의 정신과 경애를 깊이 우러르고, 그 법리를 겸허히 구해야 할 것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오서의 「이 글은 징험이 있는 글이다. 이는 오로지 니치렌의 힘이 아니라 법화경의 진문의 감응이 이르게 한 바이다」는 예언의 적중을 경문의 진실로 돌리는 말이며, 동시에 그 경문을 몸으로 읽은 법화경의 행자의 확신을 보이는 말이다.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 두 가지 예언
「이에 견주어 생각하건대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之に準じて之を思うに未来亦然る可きか, 33쪽)라는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응 원년에 예언한 것이 이미 사실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인과가 그대로 작용할 것이라는 뜻이다. 정법을 버리고 방법을 거듭하면 같은 결과를 부를 것이다. 이것이 슬퍼해야 할 예언의 면이다.
그러나 「입정안국론」에는 또 하나의 예언이 있다. 본론의 결론, 「그대는 어서 신앙의 작은 마음을 고쳐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그러면 곧 삼계는 모두 불국이니라」라는 말씀도 대성인이 미래에 남기신 예언이다. 방법이 재난을 부른다는 예언이 사실이 되었듯이, 정법에 돌아가면 국토가 불국이 된다는 예언 또한 진실이다. 두 예언은 같은 인과의 앞면과 뒷면이다. 오서의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는 경고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약속으로 읽을 수 있다.
본문
安国論御勘由来 正嘉元年太歳丁巳八月廿三日戌亥の時前代に超え大に地振す・同二年戊午八月一日大風・同三年己未大飢饉・正元元年己未大疫病同二年庚申四季に亘つて大疫已まず万民既に大半に超えて死を招き了んぬ・而る間国主之に驚き内外典に仰せ付けて種種の御祈祷有り、爾りと雖も一分の験も無く還つて飢疫等を増長す。 日蓮世間の体を見て粗一切経を勘うるに御祈請験無く還つて凶悪を増長するの由道理文証之を得了んぬ、終に止むこと無く勘文一通を造り作して其の名を立正安国論と号す、文応元年庚申七月十六日辰時屋戸野入道に付けて古最明寺入道殿に奏進申し了んぬ此れ偏に国土の恩を報ぜんが為なり、 其勘文の意は日本国・天神七代・地神五代百王百代・人王第卅代欽明天皇の御宇に始めて百済国より仏法此の国に渡り桓武天皇の御宇に至つて其の中間五十余代・二百六十余年なり、其の間一切経並びに六宗之れ有りと雖も天台真言の二宗未だ之れ有らず、 桓武の御宇に山階寺の行表僧正の御弟子に最澄と云う小僧有り後に伝教大師と号す、已前に渡る所の六宗並に禅宗之を極むと雖も未だ我が意に叶わず、聖武天皇の御宇に大唐の鑒真和尚渡す所の天台の章疏・四十余年を経て已後始めて最澄之を披見し粗仏法の玄旨を覚り了んぬ、最澄・天長地久の為に延暦四年叡山を建立す桓武皇帝之を崇め天子本命の道場と号し六宗の御帰依を捨て一向に天台円宗に帰伏し給う。
안국론어감유래 정가 원년 정사 8월 23일 술해의 시각에 전대(前代)를 넘어서는 큰 지진이 있었느니라. 같은 2년 무오 8월 1일에는 큰바람, 같은 3년 기미에는 대기근, 정원 원년 기미에는 대역병, 같은 2년 경신에는 사계절에 걸쳐 큰 역병이 그치지 않아, 만민이 이미 태반을 넘어 죽음을 불렀느니라. 그사이 국주가 이에 놀라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에 명하여 갖가지 기도를 올렸느니라. 그러나 한 푼의 효험도 없고 도리어 기근과 역병 등을 더할 뿐이었느니라. 니치렌이 세간의 모습을 보고 대략 일체경을 감하니, 기도에 효험이 없고 도리어 흉악을 더하는 까닭에 대한 도리와 문증을 얻었느니라. 마침내 그만둘 수 없어 감문 한 통을 지어 그 이름을 입정안국론이라 하였느니라. 문응 원년 경신 7월 16일 진시(辰時)에 야도야 입도를 통하여 고 사이묘지 입도전에게 주진(奏進)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국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니라. 그 감문의 뜻은 이러하니라. 일본국은 천신 7대 · 지신 5대 · 백왕 백대 가운데 인왕 제30대 긴메이 천황 때에 처음으로 백제국에서 불법이 이 나라에 건너와, 간무 천황 때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50여 대 · 260여 년이니라. 그동안 일체경과 육종이 있었으나 천태 · 진언의 두 종은 아직 없었느니라. 간무 천황 때에 야마시나데라의 행표(行表) 승정의 제자로 최징(最澄)이라는 젊은 승려가 있었으니, 뒤에 전교대사라 불렸느니라. 이전에 건너온 육종과 선종을 끝까지 배웠으나 아직 자기의 뜻에 맞지 않았느니라. 쇼무 천황 때에 당나라의 감진(鑒眞) 화상이 건너오며 가져온 천태의 장소(章疏)를, 40여 년이 지난 뒤 처음으로 최징이 펼쳐 보고 대략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달았느니라. 최징은 하늘과 땅이 길이 이어지기를 위하여 연력 4년에 예산(叡山)을 세웠고, 간무 황제는 이를 숭상하여 천자 본명(本命)의 도량이라 이름하고, 육종에 대한 귀의를 버리고 오로지 천태 원종에 귀복하셨느니라.
同延暦十三年に長岡の京を遷して平安城を建つ、同延暦廿一年正月十九日高雄寺に於て南都七大寺の六宗の碩学・勤操・長耀等の十四人を召し合せ勝負を決談す、六宗の明匠・一問答にも及ばず口を閉ずること鼻の如し華厳宗の五教・法相宗の三時・三論宗の二蔵・三時の所立を破し了んぬ但自宗を破らるるのみに非ず皆謗法の者為ることを知る、同じき廿九日皇帝勅宣を下して之を詰る、十四人謝表を作つて皇帝に捧げ奉る、 其の後代代の皇帝叡山の御帰依は孝子の父母に仕うるに超え黎民の王威を恐るるに勝れり、或御時は宣明を捧げ或御時は非を以て理に処す等云云、殊に清和天皇は叡山の恵亮和尚の法威に依つて位に即き帝王の外祖父・九条右丞相は誓状を叡山に捧げ、源の右将軍は清和の末葉なり鎌倉の御成敗是非を論ぜず叡山に違背す天命恐れ有る者か。
같은 연력 13년에 나가오카의 도읍을 옮겨 헤이안성을 세웠느니라. 같은 연력 21년 정월 19일, 다카오사(高雄寺)에서 남도 칠대사의 육종의 석학인 근조(勤操) · 장요(長耀) 등 열네 사람을 불러 모아 (최징과) 승부를 가리게 하였느니라. 육종의 명장들은 한 번의 문답에도 미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기가 코와 같았느니라. 화엄종의 오교, 법상종의 삼시, 삼론종의 이장 · 삼시의 주장을 깨뜨렸으니, 다만 자기 종을 깨뜨림당했을 뿐 아니라 모두 방법의 사람임을 알았느니라. 같은 달 29일 황제가 칙선을 내려 이를 꾸짖으시니, 열네 사람은 사표(謝表)를 지어 황제께 바쳤느니라. 그 뒤 대대의 황제의 예산에 대한 귀의는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것을 넘어서고, 백성이 왕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하였느니라. 어느 때는 선명(宣命)을 바치고, 어느 때는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처리하기까지 하였느니라. 특히 세이와 천황은 예산의 에료(恵亮) 화상의 법의 위력으로 즉위하였고, 제왕의 외조부인 구조 우승상은 서장(誓狀)을 예산에 바쳤느니라. 미나모토 우장군은 세이와 천황의 후손이니라. 그런데 가마쿠라의 정사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예산을 거스르고 있으니, 하늘의 명을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然るに後鳥羽院の御宇・建仁年中に法然・大日とて二人の増上慢の者有り悪鬼其の身に入つて国中の上下を誑惑し代を挙げて念仏者と成り人毎に禅宗に趣く、存の外に山門の御帰依浅薄なり国中の法華真言の学者棄て置かれ了んぬ、故に叡山守護の天照太神・正八幡宮・山王七社・国中守護の諸大善神法味を喰わずして威光を失い国土を捨て去り了んぬ、悪鬼便りを得て災難を致し結句他国より此の国を破る可き先相勘うる所なり、 又其の後文永元年甲子七月五日彗星東方に出で余光大体一国土に及ぶ、此れ又世始まりてより已来無き所の凶瑞なり内外典の学者も其の凶瑞の根源を知らず、予弥よ悲歎を増長す、 而るに勘文を捧げて已後九ケ年を経て今年後の正月大蒙古国の国書を見るに日蓮が勘文に相叶うこと宛かも符契の如し、仏記して云く「我が滅度の後一百余年を経て阿育大王出世し我が舎利を弘めん」と、周の第四昭王の御宇・大史蘇由が記に云く「一千年の外・声教此の土に被らしめん」と、聖徳太子の記に云く「我が滅度の後二百余年を経て山城の国に平安城を立つ可し」と、天台大師の記に云く「我が滅後二百余年の已後東国に生れて我が正法を弘めん」等云云、皆果して記文の如し。
그런데 고토바인 때 건인(建仁) 연간에 법연과 대일(大日)이라는 두 증상만의 사람이 있어, 악귀가 그 몸에 들어가 나라 안의 위아래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시켰으니, 온 세상이 염불자가 되고 사람마다 선종으로 향하였느니라. 뜻밖에도 산문(山門, 예산)에 대한 귀의는 얕아지고, 나라 안의 법화 · 진언의 학자들은 버려지고 말았느니라. 그러므로 예산을 수호하는 천조태신 · 정팔번궁 · 산왕칠사와 나라 안을 수호하는 여러 대선신이 법미(法味)를 먹지 못하여 위광을 잃고 국토를 버리고 떠났느니라. 악귀가 틈을 얻어 재난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타국으로부터 이 나라가 깨뜨려질 전조라고 감한 바이니라. 또 그 뒤 문영 원년 갑자 7월 5일, 혜성이 동쪽에 나와 그 남은 빛이 대체로 한 국토에 미쳤느니라. 이 또한 세상이 시작된 이래 없던 흉서(凶瑞)이니, 내전 · 외전의 학자들도 그 흉서의 근원을 알지 못하였느니라. 나는 더욱 슬픔과 탄식을 더하였느니라. 그런데 감문을 바친 뒤 9년이 지나, 올해 윤정월 대몽골국의 국서를 보니 니치렌의 감문과 들어맞기가 마치 부절(符節)을 맞춘 것과 같으니라. 부처가 기(記)하여 이르기를 「내가 멸도한 뒤 백여 년이 지나 아육대왕이 세상에 나와 나의 사리를 넓히리라」 하였고, 주나라 제4대 소왕 때 태사 소유(蘇由)의 기에 이르기를 「천 년 뒤에 성교(聲敎)가 이 땅에 미치리라」 하였고, 쇼토쿠 태자의 기에 이르기를 「내가 멸도한 뒤 이백여 년이 지나 야마시로국에 헤이안성을 세우리라」 하였고, 천태대사의 기에 이르기를 「내가 멸한 뒤 이백여 년 뒤에 동국에 태어나 나의 정법을 넓히리라」 하였으니, 모두 과연 기문(記文)대로 되었느니라.
日蓮正嘉の大地震同じく大風同じく飢饉・正元元年の大疫等を見て記して云く他国より此の国を破る可き先相なりと、自讃に似たりと雖も若し此の国土を毀壊せば復た仏法の破滅疑い無き者なり。 而るに当世の高僧等謗法の者と同意の者なり復た自宗の玄底を知らざる者なり、定めて勅宣御教書を給いて此の凶悪を祈請するか、仏神弥よ瞋恚を作し国土を破壊せん事疑い無き者なり。 日蓮復之を対治するの方之を知る叡山を除いて日本国には但一人なり、譬えば日月の二つ無きが如く聖人肩を並べざるが故なり、若し此の事妄言ならば日蓮が持つ所の法華経守護の十羅刹の治罰之を蒙らん、但偏に国の為法の為人の為にして身の為に之を申さず、復禅門に対面を遂ぐ故に之を告ぐ之を用いざれば定めて後悔有る可し、恐恐謹言。 文永五年太歳戊辰四月五日 法鑒御房 日 蓮 花 押
니치렌은 정가의 대지진, 같은 때의 큰바람, 같은 때의 기근, 정원 원년의 대역병 등을 보고 「타국으로부터 이 나라가 깨뜨려질 전조이다」라고 기하였느니라. 자찬과 같으나, 만약 이 국토가 무너진다면 또한 불법의 파멸도 의심이 없는 것이니라. 그런데 지금 세상의 고승들은 방법의 사람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며, 또 자기 종의 깊은 뜻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니라. 틀림없이 칙선과 어교서를 받아 이 흉악을 (그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니, 부처와 신은 더욱 성을 내어 국토를 파괴할 것이 의심 없느니라. 니치렌은 또 이것을 대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느니라. 예산을 제외하면 일본국에는 다만 한 사람이니라. 비유하면 해와 달이 둘이 없는 것과 같으니, 성인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만약 이 일이 거짓말이라면 니치렌이 지니는 법화경을 수호하는 십나찰녀의 벌을 받으리라. 다만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이지 내 몸을 위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또 선문(禪門)을 대면하였기에 이것을 알리는 것이니, 이것을 쓰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니라. 황공하여 삼가 아뢰노라. 문영 5년 무진 4월 5일 호칸 어방(法鑒御房)께 니치렌 (화압)
어구 풀이
- 内外典に仰せ付けて내외전에 명하여
- 「내전」은 불교의 경론, 「외전」은 유교 · 도교 · 음양도 등 불교 밖의 서적과 그 학자 · 술사. 조정과 막부가 불교의 승려뿐 아니라 음양사 등에게도 기도와 제사를 명했다는 뜻이다.
- 国土の恩국토의 은혜
- 사은 가운데 「국왕의 은혜」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입정안국론」이 방법을 금하여 삼재칠난을 물리치고 정법을 세워 불국토를 건설하는 요술(要術)을 설한 글이므로 특히 「국토」라고 하셨다.
- 欽明天皇の御宇に始めて百済国より仏法此の国に渡り긴메이 천황 때 처음으로 백제에서 불법이 건너와
- 일본의 불교 전래. 백제의 성왕이 불상과 경론을 보낸 것을 말한다.
- 六宗육종
- 나라 시대의 남도 육종. 화엄 · 법상 · 삼론 · 구사 · 성실 · 율의 여섯 종.
- 最澄최징
- 헤이안 초기의 승려로 일본 천태종의 개조. 시호는 전교대사. 오미국 시가 군 사람으로 12세에 오미 국분사의 행표에게 출가하였다. 연력 4년(785) 도다이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히에이잔에 올라 경론을 깊이 배웠다. 연력 21년(802) 와케노 히로요 · 마쓰나 형제의 초청으로 다카오산사에서 천태삼대부를 강하였고, 연력 23년(804) 당에 건너가 도수 · 행만 등에게 배우고 이듬해 돌아와 연력 25년(806)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대승계단의 건립에 힘써 그 사후에 칙허가 내렸다. 정관 8년(866)에 전교대사의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에 『산가학생식』 · 『법화수구』 · 『현계론』 · 『수호국계장』 등이 있다.
- 鑒真和尚감진 화상
- 나라 시대에 당에서 건너온 승려로 일본 율종의 시조. 양주 사람으로 남산율종 도선의 제자 도안에게 보살계를 받고, 장안의 손제자 홍경에게 천태와 율을 배웠다. 천평승보 5년(753) 일본에 건너와 쇼무 상황의 귀의를 받고 도다이사 · 시모쓰케 야쿠시사 · 쓰쿠시 간제온사에 소승의 계단을 세웠다. 건너오는 길에 실명하였다. 그가 가져온 천태의 장소를 최징이 처음 펼쳐 보았다.
- 天子本命の道場천자 본명의 도량
- 천자의 본명성(本命星, 태어난 해에 해당하는 별)을 모셔 국가의 진호를 기원하는 도량. 진호국가의 도량이라고도 한다.
- 高雄寺다카오사
- 다카오산사(高雄山寺). 연력 21년(802) 와케 씨의 당주 와케노 히로요가 백모의 삼주기를 위해 최징을 초청하여 법화회를 강하게 한 곳이다. 뒤에 홍인 3년(812) 구카이가 머물러 진언의 도량이 되었고, 천장 원년(824) 와케 씨의 절과 합쳐 오늘날의 진고사(神護寺)가 되었다.
- 黎民여민
- 서민, 만민. 「여(黎)」는 무리 또는 검다는 뜻으로, 관을 쓰지 않고 검은 머리를 드러낸 사람, 곧 벼슬 없는 백성을 말한다.
- 宣明선명
- 여기서는 선명(宣命)을 말한다. 천황의 명을 국어로 읽어 널리 펴는 공문서. 나라 시대 이후 조칙은 한문이 주였으나 즉위 · 개원 등의 의식에는 국어로 된 선명을 썼고, 헤이안 시대에는 신사 · 능묘 등에 고하는 글에 주로 쓰였다.
- 非を以て理に処す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처리한다
- 예산의 승병들이 도리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여도, 예산을 숭상한 나머지 천황이 이를 받아들였음을 말한다.
- 清和天皇は叡山の恵亮和尚の法威に依つて位に即き세이와 천황은 에료 화상의 법위로 즉위
- 몬토쿠 천황이 황자 고레타카와 고레히토 가운데 누구에게 자리를 물려줄지 망설여 씨름의 승부로 정하였을 때, 에료가 고레히토를 위해 기원하여 그 법력으로 이겼다고 전하는 일을 가리킨다. 고레히토가 세이와 천황이다.
- 九条右丞相구조 우승상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헤이안 전기의 귀족으로 후지와라 씨로서 처음 섭정이 되었고, 세이와 천황의 외조부다.
- 源の右将軍は清和の末葉なり미나모토 우장군은 세이와의 후손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세이와 천황의 후예를 칭하는 세이와 겐지의 자손이다. 요리토모가 연 막부가 여러 종에 기도를 맡기며 예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선조인 세이와 천황의 뜻과 전교대사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 도리에서 보아도 하늘의 명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이다.
- 法然・大日법연 · 대일
- 법연은 정토종의 개조로 『선택집』의 저자, 대일(다이니치보 노닌)은 일본 달마종을 연 선승. 둘 다 고토바인 때 건인 연간 무렵에 활동하였다.
- 山王七社산왕칠사
- 히에이잔 기슭 히에 신사의 일곱 사당. 예산을 수호하는 신으로 모셔졌다.
- 符契の如し부절을 맞춘 듯하다
- 「부계(符契)」는 둘로 나눈 나무쪽이나 대쪽을 맞추어 증표로 삼는 것. 예언과 사실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았다는 뜻이다.
- 阿育大王아육대왕
- 아소카왕.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왕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우고 불법을 넓혔다.
- 大史蘇由태사 소유
- 주나라 소왕 때의 태사. 불타가 탄생한 날 일어난 이상한 조짐을 보고 천 년 뒤에 그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지리라고 점쳤다고 전한다.
- 十羅刹십나찰녀
- 법화경 다라니품에서 법화경을 지니는 사람을 수호할 것을 맹세한 열 나찰녀.
- 法鑒御房호칸 어방
- 이 글을 받은 사람.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끝의 「또 선문을 대면하였기에 이것을 알린다」는 말로 보아 막부의 중심과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 짐작할 뿐이다.
받는 이와 시기 — 국서가 닿은 지 석 달
「안국론어감유래」는 「입정안국론」을 감하신 유래를 밝힌 글이라 이 이름이 붙었다. 받는 이 호칸 어방이 누구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끝에 「또 선문을 대면하였기에 이것을 알린다. 이것을 쓰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막부의 중심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글을 쓰신 것은 문영 5년(1268) 4월 5일, 오서보다 한 해 앞서다. 몽골의 국서가 그해 윤정월에 막 가마쿠라에 닿은 참이었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의 예언이 사실로 나타났음을 지적하시고, 대성인의 가르침을 쓰지 않으면 이 국난을 다스릴 수 없다고 단언하시며 막부의 반성을 촉구하셨다. 글의 짜임은 「입정안국론」 전체의 요약이자 그 뒤 9년의 경과 보고다. 먼저 정가 · 정원의 재난과 그에 대한 기도의 무력함을 들고, 「입정안국론」의 상주를 말씀하신 뒤, 일본 불교의 역사를 더듬어 전교대사와 예산의 정통을 밝히고, 법연 · 대일의 등장으로 선신이 떠났다는 진단을 되풀이하시며, 문영 원년의 혜성과 올해의 국서로 그 진단이 증명되었다고 하신다. 끝으로 지금의 고승들에게 기도를 맡기면 도리어 국토가 무너질 것이며, 대치의 방법을 아는 사람은 오직 대성인 한 사람뿐이라고 맺으신다.
- ①정가 · 정원의 재난(지진 · 큰바람 · 기근 · 역병)과 기도의 무력
- ②일체경을 감하여 도리와 문증을 얻음 · 1260.7.16 「입정안국론」 주진「이는 오로지 국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此れ偏に国土の恩を報ぜんが為なり
- ③불법 전래에서 전교대사 · 예산 건립 · 다카오사의 공장 대결 · 대대 황제의 귀의
- ④법연 · 대일의 출현 → 선신이 법미를 잃고 국토를 떠남 → 악귀가 틈을 얻어 재난 · 타국침핍의 전조
- ⑤1264.7.5 혜성 · 1268 윤1월 몽골 국서「부절을 맞춘 듯」宛かも符契の如し아육대왕 · 소유 · 쇼토쿠 태자 · 천태대사의 기
- ⑥지금의 고승에게 기도를 맡기면 국토가 무너짐
- ⑦대치의 방법을 아는 이는「예산을 제외하면 일본국에 다만 한 사람」叡山を除いて日本国には但一人なり「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国の為法の為人の為にして
국토의 은혜를 갚기 위해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을 지어 도키요리에게 간효하신 까닭을 「이는 오로지 국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此れ偏に国土の恩を報ぜんが為なり, 33쪽)라고 하셨다.
은혜에 대해서는 「보은초」가 부모의 은혜 · 스승의 은혜 · 삼보의 은혜 · 국왕의 은혜를 들고, 「사은초」가 일체중생의 은혜 · 부모의 은혜 · 국왕의 은혜 · 삼보의 은혜를 든다. 여기서 말씀하신 「국토의 은혜」는 이 「국왕의 은혜」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특히 「국토」라고 한정하신 까닭은, 「입정안국론」 자체가 방법을 금하여 삼재칠난을 물리치고 정법을 세워 불국토를 건설하는 요술을 설한 글이기 때문이다. 「사은초」는 국왕의 은혜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三には国王の恩、天の三光に身をあたため地の五穀に神を養ふこと皆是れ国王の恩なり、其の上今度・法華経を信じ今度・生死を離るべき国主に値い奉れり、争か少分の怨に依つておろかに思ひ奉るべきや
셋째는 국왕의 은혜이니, 하늘의 세 빛에 몸을 따뜻이 하고 땅의 오곡으로 정신을 기르는 것이 모두 국왕의 은혜이니라. 게다가 이번에 법화경을 믿고 이번에 생사를 떠날 수 있는 국주를 만났으니, 어찌 조그만 원망 때문에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하늘의 세 빛(三光)이란 해 · 달 · 별이다. 이 셋이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해의 막대한 에너지가 만물을 기르고, 달의 인력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일으킨다. 그 영향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에도 미친다. 그리고 그 작용은 국토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을 띤다. 해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북쪽 나라의 사람들은 잠깐의 틈만 나도 햇빛을 쬐려 하고, 사막의 사람들에게 해는 두려운 불볕이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국토도 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풍부한 자연의 은혜를 입어 입고 먹고 사는 데 갖가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바로 그 국토 덕분이다. 그 국토가 어지러워지고 황폐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 국토의 은혜를 갚는 길이다. 묘법의 유포로 불국토를 건설하는 것은 국토의 은혜를 갚는 궁극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보은초」의 사은과 「사은초」의 사은이 어떻게 다른지는 보은초 첫 페이지의 「본초의 사은과 「사은초」의 사은」에서 자세히 다룬다.
전교대사의 공장 대결 — 다카오사의 법론
「안국론어감유래」의 전반은 일본 불교의 역사, 특히 전교대사가 남도 육종을 굴복시킨 일에 큰 비중을 둔다. 바른 법을 넓히려면 나라에 간하여 방법을 금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공장(公場)에서 대결하여 불법의 정사를 밝혀야 한다. 예로부터 불법의 유포는 늘 국주 앞에서의 공장 대결로 이루어졌다. 대성인이 십일통어서에서 공장 대결을 촉구하신 것도 이 전통 위에 서 있다.
연력 21년(802) 정월 19일, 다카오사에서 열린 법론은 전교대사가 36세 때의 일이다. 남도 칠대사의 석학 열네 사람이 한 번의 문답에도 미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고, 이로써 남도 육종의 일본 불교는 처음으로 하나로 모아져 법화 최승의 뜻이 선양되었으며, 천태대사의 오시팔교의 교판, 이(理)의 일념삼천, 삼제원융의 법문이 최고의 이법으로 인정되었다. 간무 천황은 「상법의 전등은 고금에 아직 듣지 못하였다」는 칙선을 내렸고, 열네 사람은 사표를 지어 천황에게 바쳤다. 그 사표는 이러하다.
竊に天台の玄疏を見れば総じて釈迦一代の教を括って悉く其の趣を顕すに通ぜざる所無く独り諸宗に逾え殊に一道を示す其の中の所説甚深の妙理なり七箇の大寺六宗の学生昔より未だ聞かざる所曾て未だ見ざる所なり三論法相久年の諍い渙焉として氷の如く釈け昭然として既に明かに猶雲霧を披いて三光を見るがごとし
가만히 천태의 현소(玄疏)를 보니, 석가 일대의 가르침을 모두 묶어 그 뜻을 다 드러내되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홀로 여러 종을 넘어 특히 한 길을 보이며, 그 가운데 설하는 바는 매우 깊은 묘리입니다. 칠대사 육종의 학생들이 예로부터 아직 듣지 못한 바요 일찍이 보지 못한 바입니다. 삼론과 법상의 오랜 다툼이 얼음처럼 풀리고 환히 밝아져, 마치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해 · 달 · 별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聖徳の弘化より以降今に二百余年の間講ずる所の経論其の数多く彼此理を争えども疑未だ解けず、而るに此の最妙の円宗未だ闡揚せず蓋し以て此の間の群生未だ円味に応ぜざるか
쇼토쿠 태자가 널리 교화한 이래 지금까지 이백여 년 동안 강해 온 경론은 그 수가 많고 서로 이치를 다투었으나 의심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장 묘한 원종(圓宗)은 아직 드러나 펼쳐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동안의 중생이 아직 원교의 맛에 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표는 이어서, 성스러운 조정이 오래 여래의 부촉을 받아 깊이 순원(純圓)의 근기를 맺었기에 일묘(一妙)의 의리가 비로소 흥하여 드러났고, 육종의 학자들이 처음으로 지극한 곳을 깨달았으니, 이제부터 이 세계의 중생은 모두 묘원(妙圓)의 배에 올라 일찍 저 언덕에 건너갈 수 있으리라고 하고, 삼론의 선의(善議) 등이 이 성대를 만난 것은 깊은 숙연이 아니고서는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맺는다. 성덕태자 이래 화엄 · 법상 · 삼론 · 구사 · 성실 · 율의 육종으로 나뉘어 서로 논란해 왔으나 어느 것이 최고의 법리이며 어느 가르침이 석존의 본의인지 풀리지 않던 의심이, 전교대사에 의해 천태 법화종의 깊은 묘리를 알게 되어 모두 얼음처럼 풀렸다는 것이다.
전교대사는 이로부터 홍인 13년(822) 56세로 입멸할 때까지 20년 동안 『천태법화종 학생식』을 정하고, 『현계론』 · 『수호국계장』 · 『법화수구』 등을 지었으며, 남도 도다이사의 소승 계단을 대신하여 히에이잔에 법화 적문의 대승 원돈계단을 세울 것을 주창하였다. 이 뜻은 입멸 이레 뒤에 칙허가 내려 의진(義眞)의 손으로 세워졌다.
그 뒤 히에이잔은 대대 천황의 두터운 귀의를 받았고, 천태좌주는 국사로서 존경을 한 몸에 모았다. 그러나 전교 · 의진의 법화 최승의 정의는 제2대 좌주 엔초(圓澄) 무렵부터 진언 밀교에 물들기 시작하였고, 제3대 자각(엔닌)에 이르러서는 「이동사승(理同事勝)」의 그릇된 뜻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시대는 상법을 지나 말법에 들어, 천태 법화종은 공력이 없는 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말법의 유일한 정법은 대성인 자신의 법, 곧 사행의 일념삼천인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다.
「예산을 제외하면 다만 한 사람」
「안국론어감유래」의 문면은 일왕 예산 천태종의 정통성을 말하고, 그것을 법연의 염불과 대일의 선종이 가려 버렸기에 갖가지 난이 일어났다고 지적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대치하는 방법을 아는 이는 예산을 제외하면 일본국에는 다만 한 사람」(叡山を除いて日本国には但一人なり, 35쪽)이라고 하여, 마치 예산을 인정하시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진의는 다른 데 있다. 이미 예산의 천태종은 지나간 시대의 불법이며, 대성인께 귀의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산을 제외하면」이라는 말은 전교대사가 세운 본래의 예산, 곧 법화 최승의 정의를 가리키며, 진언에 물든 당시의 예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대치의 방법을 아는 이가 「해와 달이 둘이 없듯이」 한 사람뿐이라는 말씀은, 상법의 전교대사에 견주어 말법에는 대성인 한 분이 그 자리에 서신다는 선언이다.
譬えば日月の二つ無きが如く聖人肩を並べざるが故なり
비유하면 해와 달이 둘이 없는 것과 같으니, 성인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흉서의 근원 — 서상과 의정불이
문영 원년(1264) 7월 5일의 혜성에 대해 대성인은 「내전 · 외전의 학자들도 그 흉서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内外典の学者も其の凶瑞の根源を知らず, 34쪽)고 하셨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 앞선 조짐이 있다. 이를 서상(瑞相)이라 하고, 좋은 일의 서상을 길상, 나쁜 일의 서상을 흉상이라 한다.
어떤 사건은 저마다 홀로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모이고 서로 작용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 요소들이 가장 크게 짝지어져 큰 사건을 부르기 전에는 갖가지 모습으로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전체의 인과를 꿰뚫어 보는 사람은 작은 일로도 뒤에 올 큰일을 헤아릴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아차려도 그 뜻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날씨에 삶이 좌우되는 산골에는 언제 첫눈이 오고 어떤 바람이 불면 큰눈이 되며 어떤 때 눈사태가 나는지를 아는 노인이 있었다. 바다와 강, 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사는 몸에 나타난 체온 · 살빛 · 맥박의 변화를 보고 병의 정체를 알아내고, 기상을 아는 이는 기온과 바람과 기압으로 날씨의 변화를 미리 안다. 그 법칙을 아는 사람에게는 필연의 결론이고, 그것을 미신이라 하는 것은 법칙을 모르는 이의 맹목 때문이다.
경문이 서상으로 드는 것들도 이와 같다. 그것은 생명과 국토, 나아가 천체의 현상까지를 하나로 꿰뚫는 불법의 법리에 서서 말한 것이다. 대성인이 혜성 · 지진 · 기근 · 역병을 타국침핍의 대난의 전조로 보신 것은 의정불이의 법리에 근거한 것이다. 「서상어서」는 그 원리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夫十方は依報なり.衆生は正報なり譬へば依報は影のごとし正報は体のごとし・身なくば影なし正報なくば依報なし・又正報をば依報をもつて此れをつくる
무릇 시방은 의보이고 중생은 정보이니라. 비유하면 의보는 그림자와 같고 정보는 몸과 같으니, 몸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고 정보가 없으면 의보도 없느니라. 또 정보는 의보로써 이것을 만드느니라.
かるがゆへに衆生の五根やぶれんとせば四方中央をどろうべし・されば国土やぶれんと・するしるしには・まづ山くづれ草木かれ江河つくるしるしあり人の眼耳等驚そうすれば天変あり人の心をうごかせば地動す
그러므로 중생의 오근이 무너지려 하면 사방과 중앙이 놀라 움직일 것이니라. 그러므로 국토가 무너지려 하는 조짐으로는 먼저 산이 무너지고 초목이 마르고 강물이 마르는 조짐이 있으며, 사람의 눈과 귀 등이 놀라 소란하면 천변이 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면 땅이 움직이느니라.
중생은 생명이고, 의보는 그 생명이 사는 환경이며 세계다. 생명은 몸이고 환경은 그 그림자이며, 동시에 생명은 또한 환경으로 만들어진다. 마음이 환경을 만든다는 면과 환경이 마음을 만든다는 면, 그 두 면을 함께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으로 감싸는 것이 불법의 의정불이다. 이 법리를 체득하면 모든 현상이 거울에 비추듯 환히 보인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천태대사의 말을 끌어 「『금광명경』에 이르기를, 일체 세간의 모든 선론은 모두 이 경에 말미암는다. 만약 깊이 세법을 알면 곧 이것이 불법이다」(若し深く世法を識れば即ち是れ仏法なり, 187쪽)라고 하셨고, 「관심의 본존초」에서는 「하늘이 개면 땅이 밝다. 법화를 아는 자는 세법을 얻을 것인가」(天晴れぬれば地明かなり法華を識る者は世法を得可きか, 254쪽)라고 하셨다. 「서상어서」에는 또 천태대사의 말로 「세상 사람은 거미가 걸리면 기쁜 일이 오고, 까치가 울면 길손이 이른다고 한다. 작은 일에도 오히려 징조가 있거늘 큰일에 어찌 서상이 없겠는가.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나타낸다」(1140쪽)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후나모리야사부로허어서」는 이 서상을 보는 눈이 어떤 눈인가를 말씀하신다.
雪山童子のまへにきたりし鬼神は帝釈の変作なり、尸毘王の所へにげ入りし鳩は昆首羯摩天ぞかし、班足王の城へ入りし普明王は教主釈尊にてまします、肉眼はしらず仏眼は此れをみる、虚空と大海とには魚鳥の飛行するあとあり此等は経文にみえたり
설산동자 앞에 온 귀신은 제석이 모습을 바꾼 것이요, 시비왕에게 도망쳐 들어온 비둘기는 비수갈마천이니라. 반족왕의 성에 들어간 보명왕은 교주 석존이시니라. 육안은 알지 못하나 불안은 이것을 보느니라. 허공과 큰 바다에는 물고기와 새가 지나간 자취가 있으니, 이것들은 경문에 보이느니라.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인과가 불안(佛眼)에는 보인다. 혜성을 보고도 그 근원을 알지 못한 내외전의 학자들과, 정가의 지진에서 이미 타국침핍의 전조를 읽으신 대성인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예언의 기록들 — 「모두 과연 기문대로」
「안국론어감유래」는 몽골의 국서가 「입정안국론」과 「부절을 맞춘 듯이」 들어맞았다고 하신 뒤, 옛 예언이 적중한 네 가지 예를 드신다. 석존이 멸후 백여 년에 아육대왕이 나와 사리를 넓히리라고 한 기, 주나라 소왕 때 태사 소유가 천 년 뒤에 부처의 가르침이 중국에 이르리라고 한 기, 쇼토쿠 태자가 이백여 년 뒤에 야마시로국에 헤이안성이 서리라고 한 기, 천태대사가 이백여 년 뒤에 동국에 태어나 자신의 정법을 넓히리라고 한 기다. 모두 「과연 기문대로」 되었다.
이 네 예는 하나같이 불법의 유포와 나라의 운명에 관한 예언이다. 마지막 천태대사의 기는 천태대사가 일본의 전교대사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대성인은 이 예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입정안국론」의 예언 역시 성인의 기문의 계보에 선다는 것을 보이신다. 그리고 「자찬과 같으나」라고 하시면서도, 이 국토가 무너지면 불법도 파멸한다는 것을 들어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을 밝히신다.
나라를 위해, 법을 위해, 사람을 위해
「다만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이지 내 몸을 위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但偏に国の為法の為人の為にして身の為に之を申さず, 35쪽). 대성인이 방법을 꾸짖고 정법에 귀의하라고 국가에 간하시는 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이지 결코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말은 누구나 입으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신 데에 대성인의 대성인다움이 있다. 마쓰바가야쓰 초암의 습격, 고마쓰바라 법난, 이즈 유배, 다쓰노구치 법난, 사도 유배 등 대성인이 일생 동안 만나신 박해를 떠올려 보면 분명하다. 거기에는 한 치의 자기 보신의 타협도 없다. 긴장과 고난이 이어진 일생이었다. 사도 유배가 사면되어 가마쿠라에 돌아오셨을 때, 막부는 대성인에게 절을 주고 포교를 허락하겠다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성인의 마음은 그런 데 있지 않았다. 목적은 국가와 민중의 구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 안에 퍼진 염불 등의 방법을 금해야 한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 등 막부의 담당자들이 이를 따를 리 없었다. 대성인은 「세 번 간하여 쓰이지 않으면 성인은 그곳을 떠난다」는 옛 법도를 따라 미노부에 드시어, 그 뒤 9년 동안 유유한 경애 속에서 제자를 기르고 대사의 법문을 쓰셨으며, 그 가운데 홍안 2년(1279) 10월에는 출세의 본회인 일염부제 총여의 대어본존을 건립하셨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를 말법 유포의 대백법, 삼대비법의 법체의 광선유포로 본다. 「입정안국론」에서 시작된 국가 간효는 이렇게 미노부에서의 법체 건립으로 이어졌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예산을 제외하면 일본국에는 다만 한 사람」은 겉으로는 예산의 정통을 인정하는 말이나, 속뜻은 상법의 전교대사에 견주어 말법의 정법을 세우는 이가 대성인 한 분이심을 밝힌 말이다. 「나라를 위해, 법을 위해, 사람을 위해」는 그 간효가 사사로운 이익과 무관함을 보인다.
본문
安国論別状 立正安国論の正本、富木殿に候、かきて給び候はん、ときどのか、又。 五月廿六日 日蓮花 押
안국론별장 「입정안국론」의 정본은 도키 전에게 있습니다. 옮겨 써서 보내 주시겠습니까. 도키 전에게 있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지). 5월 26일 니치렌 (화압)
어구 풀이
- 正本정본
- 사본에 대하여 대성인의 자필을 정본이라 한다. 여기서 말씀하신 도키 전의 처소에 있는 정본은 문영 6년(1269) 12월 8일에 옮겨 쓰시어 도키 입도에게 주신 것으로 본다. 그 끝에 붙은 것이 「입정안국론오서」다.
- 富木殿도키 전
- 도키 조닌(富木常忍). 「도키(富木)」는 「土木」 · 「富城」으로도 적는다. 시모우사국 가쓰시카 군 야와타 장원 와카미야에 살며 지바 씨를 섬긴 무사다. 대성인의 입종 뒤 얼마 되지 않은 건장 6년(1254) 무렵에 입신하였다고 하며, 외호의 소임에 힘써 문하의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관심의 본존초」를 비롯한 중요한 어서를 다수 받았고, 뒤에 출가하여 도키 입도라 불렸다.
- かきて給び候はん옮겨 써서 보내 주시겠습니까
- 「かきて」는 「書きて」, 곧 서사(書寫)하여. 정본을 그대로 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옮겨 써서 보내 달라는 부탁이다.
- ときどのか、又도키 전인가, 또
- 정본이 도키 전에게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문하의 누군가에게 있는지를 확인하시는 말로 읽힌다. 문장이 짧게 끊겨 있어 뒤의 말은 생략되어 있다.
- 五月廿六日5월 26일
- 연도가 적혀 있지 않아 어느 해의 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본을 맡겨 두신 뜻
「안국론별장」이 쓰인 사정은 분명하지 않다. 받는 이도 연도도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서 「입정안국론」의 정본이 도키 전의 처소에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대성인이 그 정본을 몸소 지니지 않으시고 가장 안전한 곳에 두셨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대성인의 생애는 박해의 연속이었다.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은 습격당했고, 이즈와 사도로 두 번 유배되셨으며, 다쓰노구치에서는 목이 베일 뻔하셨다. 문영 8년(1271) 9월 12일의 체포 때에는 헤이노사에몬노조의 가신들이 초암에 난입하여 경전을 흩뜨리고 짓밟았다고 전한다. 그런 처지에서 가장 중요한 글의 정본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시모우사에 자리 잡고 막부에 직접 얽히지 않으며 문하를 든든히 받치던 도키 조닌의 처소는 그 정본을 맡기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마쓰바가야쓰의 습격 뒤 대성인이 한때 몸을 의탁하신 곳도 도키 조닌의 집이었다고 전한다.
정본을 안전한 곳에 두신 것은 오로지 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 곧 멸후의 사람들을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입정안국론」은 한 번 상주하고 끝난 글이 아니었다. 대성인은 몽골의 국서가 오자 이 글을 다시 옮겨 쓰시고 오서를 덧붙이셨으며, 예언의 적중을 기록으로 남기셨다. 그 기록이 흩어지지 않도록 믿을 수 있는 제자의 손에 맡기신 것이다. 이 별장은 그 정본을 다시 옮겨 쓰게 하여 필요한 곳에 보내려 하신 것으로 보인다. 어떤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입정안국론」이 대성인의 생애 동안 몇 번이고 다시 꺼내어 쓰인 글이었다는 사실을 이 짧은 별장이 증언한다.
「옮겨 써서 보내 달라」 — 서사로 이어진 글
별장의 요청은 「정본을 보내라」가 아니라 「옮겨 써서 보내 달라」(かきて給び候はん)이다. 정본은 제자의 손에 그대로 두고, 필요한 만큼 사본을 만들어 쓰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대성인 당시 어서가 전해지고 읽힌 방식이 드러난다. 인쇄가 없던 시대에 글은 손으로 옮겨 써야만 퍼질 수 있었다. 대성인 자신도 「입정안국론」을 문영 6년에 손수 옮겨 쓰셨고, 그 사본에 오서를 붙여 예언의 적중을 기록하셨다. 정본을 맡은 제자에게 다시 서사를 부탁하신 이 별장은, 그 일이 대성인 한 분의 붓에서 문하 전체의 붓으로 이어져 갔음을 보여 준다.
옮겨 쓰는 일은 단지 글자를 베끼는 일이 아니다. 「입정안국론」을 옮겨 쓰는 사람은 객과 주인의 열 번의 문답을 한 글자 한 글자 따라가며, 객의 탄식과 노여움과 깨달음을 스스로 거쳐 가게 된다. 「다만 내가 믿을 뿐 아니라 또 남의 잘못도 깨우치겠다」는 제10단의 맹세가 옮겨 쓰는 사람의 맹세가 되는 것이다. 대성인이 이 글을 문하에 거듭 옮겨 쓰게 하신 데에는, 이 글을 읽고 지니는 일 자체가 정법을 세우는 실천이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도키 조닌 — 정본을 맡은 사람
정본을 맡은 도키 조닌은 시모우사의 무사로, 지바 씨를 섬기며 문서와 실무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대성인의 입종 뒤 일찍 입신하여, 대성인이 마쓰바가야쓰의 습격을 피해 몸을 의탁하신 것도 그의 집이었다고 전한다. 「입정안국론」의 상주와 그로 인한 첫 법난의 때부터, 그는 대성인 곁에서 외호의 소임을 다한 사람이었다.
대성인은 사도 유배 중에 「관심의 본존초」를 지어 그에게 보내셨고, 그 밖에도 여러 중요한 법문의 글을 그에게 맡기셨다. 정본을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심과 성실함을 깊이 믿는다는 뜻이다. 「입정안국론」과 「관심의 본존초」라는, 대성인의 국가 간효와 관심의 법문을 대표하는 두 글이 함께 한 제자의 손에 맡겨졌다는 사실은 대성인과 도키 조닌 사이의 신뢰가 어떠했는지를 말해 준다.
본론에 덧붙은 세 글
어서전집에서 「입정안국론」 뒤에 이어지는 세 글은 저마다 다른 때, 다른 목적으로 쓰였다. 「안국론어감유래」(문영 5년 4월 5일)는 몽골의 국서가 막 닿았을 때 막부 가까운 사람에게 보내 「입정안국론」의 유래와 예언의 적중을 알리고 대치를 재촉한 글이다. 「입정안국론오서」(문영 6년 12월 8일)는 두 번째 첩장이 온 뒤 본론을 손수 옮겨 쓰시며 저술의 경위와 적중을 끝에 적어 넣으신 글이다. 「안국론별장」(연도 미상 5월 26일)은 그 정본이 도키 조닌에게 있음을 밝히고 다시 서사를 부탁하신 글이다.
셋을 나란히 놓으면 한 줄기가 보인다. 예언의 적중을 알리고(어감유래), 그것을 본론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고(오서), 그 기록을 지키고 다시 펴는(별장) 것이다. 「입정안국론」은 문응 원년의 한 번의 상주로 끝난 글이 아니라, 대성인의 생애 동안 거듭 확인되고 기록되고 전해진 글이었다.
정필의 전래
도키 조닌에게 맡겨진 「입정안국론」은 그 뒤 시모우사 땅에서 대대로 지켜져 왔다고 한다. 오늘날 나카야마 호케쿄사(中山法華經寺)에 대성인 자필의 「입정안국론」 36장이 전한다고 하며, 그 끝에 문영 6년 12월 8일의 오서가 붙어 있다고 한다. 「안국론별장」의 「정본은 도키 전에게 있다」는 말씀과 오서의 날짜를 아울러 보면, 이 자필본이 바로 별장이 말하는 정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도키 조닌은 대성인에게서 「관심의 본존초」를 비롯한 법문의 글을 여러 통 받았고, 그 글들을 소중히 간직하였다. 대성인 멸후 그 문하의 사람들이 자필의 글들을 지키고 전해 온 덕분에, 오늘날에도 대성인이 쓰신 그대로의 「입정안국론」을 대할 수 있다. 한 줄의 별장은 단지 정본의 소재를 묻는 글이지만, 그 한 줄 뒤에는 정법의 글을 후세에 남기려는 대성인과 제자의 마음이 놓여 있다.
정필의 장수와 소장처, 오서가 정필 끝에 붙어 있다는 것은 전해 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상주한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입정안국론」의 정본을 믿을 수 있는 제자에게 맡기신 것은 이 글이 한 시대의 간언서에 그치지 않고 멸후의 사람들에게 남겨야 할 글이었음을 보인다. 오서 · 어감유래 · 별장의 세 글은 모두 본론이 몇 번이고 다시 읽혀야 할 글임을 말해 준다.
이 편을 맺으며
서강에서는 「입정안국론」의 저술 유래와 대의, 그리고 본론에 덧붙은 세 글을 차례로 살폈다. 정가 원년(1257)의 대지진에서 시작해 해마다 이어진 큰바람 · 기근 · 역병 앞에서 대성인은 일체경을 펼쳐 재난의 도리와 문증을 얻으시고, 문응 원년(1260) 7월 16일 야도야 입도를 통해 사이묘지 입도에게 이 글을 올리셨다. 돌아온 것은 마쓰바가야쓰의 습격과 이즈 유배였다.
본론은 객과 주인의 십문구답이다. 「세상이 모두 정에 등지고 사람이 다 악에 돌아갔기에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성인이 떠났다」는 첫 답이 네 경의 명문으로 증명되고, 그 악의 근원이 법연의 『선택집』으로 좁혀지며, 「만 가지 기도보다 이 일흉을 금하라」는 결론에 이른다. 방법 대치는 무력이 아니라 「그 보시를 멈추는 것」이며, 그 끝에서 「속히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그러면 삼계는 모두 불국이다」라는 정법 귀의의 길이 보인다. 아직 남은 두 난, 자계반역과 타국침핍의 경고는 몽골의 국서와 니가쓰 소동, 두 차례의 몽골 내습으로 적중하였고, 대성인은 오서에서 「이 글은 징험이 있는 글이다」라고 하셨다. 「안국론어감유래」는 그 적중을 「부절을 맞춘 듯」하다고 하시며 대치의 방법을 아는 이가 「다만 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셨고, 「안국론별장」은 이 글의 정본이 믿을 수 있는 제자에게 맡겨져 있었음을 전한다.
다음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에서는 「나그네가 찾아와 탄식하며 말하기를」로 시작하는 첫 문답을 자세히 읽는다. 객이 늘어놓은 갖가지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주인이 왜 「세상이 모두 정에 등졌다」고 진단하는지를 본문에 따라 살핀다.
더 읽기
-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 — 객의 탄식과 주인의 첫 답, 선신이 나라를 버리는 인과
- 입정안국론 제9편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 — 입정안국의 결론과 객의 맹세」 — 남은 두 난의 경고와 「삼계는 모두 불국」
- 보은초 — 제5편 「대성인의 국가 간효와 재난의 근원」에서 세 번의 고명을 다룸
- 선시초 — 「일염부제의 투쟁」과 세 번의 고명, 말법의 대백법
- 개목초 — 오대부의 하나, 법화경의 행자와 대난
- 남묘호렌게쿄 — 「실승의 일선」의 교학적 배경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입정안국론」(어서전집 17–33쪽) · 「입정안국론오서」(33쪽) · 「안국론어감유래」(33–35쪽) · 「안국론별장」(35쪽)
- 니치렌 대성인, 「야도야입도에의 어장」(169쪽) · 「개목초」(186–237쪽) · 「관심의 본존초」(238–255쪽) · 「선시초」(256–292쪽) · 「현불미래기」(505–509쪽) · 「종종어진무어서」(909–925쪽) · 「사은초」(935–939쪽) · 「성인지삼세사」(974–975쪽) · 「삼대비법품승사」(1021–1023쪽) · 「서상어서」(1140–1142쪽) · 「제법실상초」(1358–1362쪽) · 「후나모리야사부로허어서」(1445–1446쪽)
- 니치칸 상인, 「입정안국론 문단」(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 『아즈마카가미(吾妻鏡)』
연구
- 立正大学日蓮教学研究所 編, 『昭和定本日蓮聖人遺文』, 身延山久遠寺, 1952–1959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On Establishing the Correct Teaching for the Peace of the Land」 수록)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