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사라쌍수 숲 — 흰 꽃이 진 나무들과 그 너머 멀리 흐르는 강, 사람 없음

보시를 멈추어 방법을 끊다

입정안국론 · 제7편 · 제7단 제1~10장

立正安国論 — 布施を止めて謗法断絶を明かす어서 26–30쪽
저술
문응 원년(1260) 7월 16일 · 가마쿠라
단 · 장
제7단 제1~10장
쪽수
어서 26:13–30:07
올린 이
야도야 입도를 통해 호조 도키요리에게

아홉 편 · 입정안국론 10단 구성도

10단 46장 → 아홉 편
  1. 序講17 앞 · 33–35저술의 유래 · 대의 · 예언의 적중 · 오서 · 어감유래 · 별장
  2. 재난의 원인과 경증
  3. 재난의 원인과 경증
  4. 방법의 정체 — 악한 승려와 법연
  5. 방법의 정체 — 악한 승려와 법연
  6. 방법의 정체 — 악한 승려와 법연
  7. 방법 대치의 방법
  8. 방법 대치의 방법
  9. 방법 대치의 방법
  10. 정법 귀의와 맹세

제7편은 입정안국론의 일곱째 문답이다. 주인의 말에 마음이 누그러진 객은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함은 한 사람만이 아니다」라고 아직 반문을 남기면서도,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 먼저 국가를 기원하라. 재앙을 멈출 방책이 있으면 듣고 싶다」고 정면으로 묻는다. 주인은 한마디로 답한다.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긴다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하리라.」 그리고 열반경 · 인왕경 · 법화경의 글을 차례로 들어 그것을 논증한다 — 일천제에게는 보시하지 말라, 정법 비방의 죄는 오역보다 무겁다, 정법을 지키는 일은 국왕과 재가에게 맡겨졌다, 유덕왕은 몸을 바쳐 각덕비구를 지켰다. 열반경의 글은 칼과 활까지 말할 만큼 엄하지만, 그 경 스스로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맺고, 대성인께서는 「오역의 공양은 허락해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로 경증을 모으신다. 아홉 편 가운데 방법 대치의 방법을 다루는 갈래(六 · 七 · 八편)의 한가운데인 이 열 장은,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는 결론과, 그 「끊는다」가 무력이 아니라 「그 보시를 멈추는 것」이라는 다음 편의 대답 사이에 놓인 경증의 집대성이다.

입정안국론 아홉 편은 네 갈래로 이어진다. 재난의 원인과 그 경증을 밝히는 제1 · 2편, 방법의 정체 — 악한 승려와 법연의 『선택집』 — 를 드러내는 제3~5편, 방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묻는 제6~8편, 그리고 정법에 귀의하고 객이 맹세하는 제9편이다. 제6편에서 객은 법연을 감싸다가 엔랴쿠사 · 고후쿠사의 상주와 법연 일문의 유죄라는 역사 사실을 듣고 물러섰다. 이 편에서 객은 이제 법연이 옳은지 그른지 「정하기 어렵다」고 고백하며, 그렇다면 재난을 멈출 방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객의 물음이 「누가 옳은가」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로 옮겨 가는 자리다.

열 장의 짜임은 분명하다. 제1장은 객의 물음, 제2장은 주인의 결론이다. 제3장부터 제8장까지는 경증으로, 열반경이 정의한 일천제와 「일천제를 제외하고 보시하라」(제3장), 선예국왕의 과거세 이야기와 세 가지 살생(제4장), 인왕경의 수호 부촉(제5장), 열반경의 정법 호지의 법도(제6장), 유덕왕 · 각덕비구의 선례(제7장), 법화경 비유품의 「아비지옥에 들어가리라」(제8장)가 이어진다. 제9장은 그 경증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로 모으고, 제10장은 『선택집』이 낳은 파불 · 파법 · 파승을 들어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로 단을 맺는다.

이 편을 읽을 때 반드시 함께 붙들어야 할 실이 하나 있다. 열반경의 글에는 「목숨을 끊었다」 「칼과 활을 지녀라」 같은 엄한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말들은 석존의 과거세 이야기이거나 무력이 횡행하던 시대에 정법과 그 행자를 지키라는 가르침이며, 열반경 자신이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단서를 단다. 그리고 대성인께서는 이 경증 전체를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제9장)로 맺으시고, 다음 단에서 「석존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고 정하신다. 이 편의 엄한 경문들은 모두 그 결론 — 방법에 공양하지 않고 정법에 돌아오는 것 — 을 향해 놓인 계단이다.

이 편의 장

第一章災難対治の方術を問う제7단 제1장 재난을 다스리는 방책을 묻다 — 객이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함은 한 사람만이 아니다」라고 반문하면서도,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 「먼저 국가를 기원하라」며 재난을 멈출 방책을 묻는다.
第二章国家安穏天下泰平の原理を説く제7단 제2장 국가 안온 · 천하 태평의 원리를 설하다 — 주인은 경문에 의지한다고 하며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기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하리라」는 결론의 극리를 먼저 내놓는다.
第三章涅槃経を引き謗法訶責を説く제7단 제3장 열반경을 들어 방법 가책을 설하다 — 열반경으로 「파계란 일천제」임을 밝히고, 일천제를 제외하고 보시하라고 하여 방법을 가려내는 기준을 세운다.
第四章仙予国王の謗法断絶を示す제7단 제4장 선예국왕의 방법 단절을 보이다 — 석존의 과거세 선예국왕 이야기와 세 가지 살생의 등급으로 정법 비방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인다.
第五章守護付属の文を挙ぐ제7단 제5장 수호 부촉의 글을 들다 — 인왕경으로, 정법을 지키는 일은 비구 · 비구니가 아니라 위력을 가진 국왕에게 맡겨졌음을 보인다.
第六章正法護持の方軌を示す제7단 제6장 정법 호지의 법도를 보이다 — 열반경으로, 위없는 정법이 왕 · 대신과 사부의 대중에게 부촉되었으며 정법을 지키는 재가는 오계보다 호법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을 보인다.
第七章有徳王・覚徳比丘の先例제7단 제7장 유덕왕 · 각덕비구의 선례 — 정법이 다하려는 때 몸을 바쳐 각덕비구를 지킨 유덕왕의 이야기와,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경의 단서.
第八章念仏無間の文を挙ぐ제7단 제8장 염불 무간의 글을 들다 — 법화경 비유품 「이 경을 비방하면 불종을 끊고 아비지옥에 들어가리라」를 다시 들어 방법의 과보를 확인한다.
第九章経証により謗法治罰を結す제7단 제9장 경증으로 방법 치벌을 맺다 — 「경문이 뚜렷하니 사사로운 말을 더하지 않는다」며, 「오역의 공양은 허락해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로 경증을 모은다.
第十章国中の謗法を断ずべきを結す제7단 제10장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함을 맺다 — 『선택집』이 낳은 파불 · 파법 · 파승을 들고, 「일찍 천하의 정밀을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로 단을 맺는다.
제7단 제1장 재난을 다스리는 방책을 묻다
어서 26쪽 13~18행 · 第七段 第一章 災難対治の方術を問う

본문

원문 대조어서 26쪽 13~18행
本文 · 어서 원문

客則ち和ぎて曰く、経を下し僧を謗ずること一人には論じ難し、 然れども大乗経六百三十七部二千八百八十三巻並びに一切の諸仏菩薩及び諸の世天等を以て捨閉閣抛の四字に載す其の詞勿論なり、其の文顕然なり、 此の瑕瑾を守つて其の誹謗を成せども迷うて言うか覚りて語るか、賢愚弁ぜず是非定め難し、 但し災難の起りは選択に因るの由、其の詞を盛に弥よ其の旨を談ず、 所詮天下泰平国土安穏は君臣の楽う所土民の思う所なり、 夫れ国は法に依つて昌え法は人に因つて貴し国亡び人滅せば仏を誰か崇む可き法を誰か信ず可きや、 先ず国家を祈りて須く仏法を立つべし若し災を消し難を止むるの術有らば聞かんと欲す。

풀이

객이 곧 누그러져 말하기를,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하는 일은 한 사람만을 두고 논하기 어렵도다(주인 또한 정토의 경을 낮추고 법연을 비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대승경 637부 2,883권과 아울러 일체의 제불 · 보살 및 모든 세천(世天) 등을 사(捨) · 폐(閉) · 각(閣) · 포(抛)의 네 글자에 실은 것은, 그 말이 분명함은 물론이요 그 글도 또한 뚜렷하도다. 주인은 이 작은 흠(瑕瑾)을 붙들어 그 비방을 하고 있으나, 법연이 미혹하여 그렇게 말한 것인지 깨닫고서 말한 것인지, 법연과 주인 가운데 누가 어질고 누가 어리석은지 가릴 수 없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정하기 어렵도다. 다만 재난이 일어나는 것은 『선택집』에 말미암는다는 뜻을 주인은 말을 성대히 하여 더욱 그 취지를 말씀하시는도다. 결국 천하가 태평하고 국토가 안온한 것은 임금과 신하가 즐겨 바라는 바이며 백성이 생각하는 바이니라. 무릇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지느니라.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멸한다면 부처를 누가 숭상하며 법을 누가 믿겠는가. 먼저 국가를 기원하고 그 뒤에 모름지기 불법을 세워야 하리라. 만약 재앙을 없애고 난을 멈추는 방책이 있다면 듣고자 하노라.

어구 풀이

客則ち和ぎて曰く객이 곧 누그러져 말하기를
앞 단에서 얼굴빛을 바꾸고 노여워하던 객이 주인의 도리 바른 말을 듣고 마음이 누그러진 모습이다. 제6단에서 엔랴쿠사 · 고후쿠사의 상주와 법연 일문의 유죄라는 역사 사실을 들은 뒤라, 객은 이제 법연을 그대로 감쌀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아직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어서, 말끝에 반문과 유보가 남아 있다.
経を下し僧を謗ずること一人には論じ難し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함은 한 사람만을 두고 논하기 어렵다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하는 것은 법연 한 사람만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말 밑에는 「주인 당신도 정토의 경을 낮추고 법연을 비방하고 있으니 같은 허물이 아닌가」라는 반문이 깔려 있다. 이 구절을 누구의 일로 읽느냐를 두고 예부터 여러 해석이 있었으며, 니치칸 상인은 이를 객의 반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정했다.
大乗経六百三十七部二千八百八十三巻대승경 637부 2,883권
『정원입장록(貞元入蔵録)』에 실린 현교 · 밀교의 대승경 전체의 수다.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에서 법연이 이 모든 경을 「사폐각포」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이미 밝혀졌다. 객은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世天세천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천(天) · 선신과, 음양도 · 신도에서 모시는 신들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법연은 아미타불 이외의 일체 제불 · 보살뿐 아니라 이 세천들까지 「버리고 닫고 내버려 두고 던지라」고 하였다.
捨閉閣抛사폐각포
『선택집』의 요지를 대성인께서 네 글자로 줄이신 말이다. 성도문의 경을 「버리고(捨)」, 정토문 밖의 문을 「닫고(閉)」, 잡행을 「내버려 두고(閣)」, 정행 밖의 것을 「던지라(抛)」는 것이다.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瑕瑾하근
「하(瑕)」는 옥의 흠, 「근(瑾)」은 아름다운 옥이다. 본래는 「하흔(瑕釁)」이라 써야 하며, 「흔(釁)」은 틈을 뜻하여 옥에 흠이나 틈이 있음을 말한다. 「근」을 쓰는 것은 잘못이지만 관용으로 굳어졌다. 여기서 객은 『선택집』을 감싸며, 사폐각포의 네 글자는 아름다운 옥에 난 작은 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迷うて言うか覚りて語るか미혹하여 말한 것인가, 깨닫고서 말한 것인가
법연이 진리를 모르고 잘못 말한 것인지, 깊은 깨달음이 있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객이 법연에 대해 처음으로 뚜렷한 의심을 품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賢愚弁ぜず是非定め難し어질고 어리석음을 가리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정하기 어렵다
주인과 법연 가운데 누가 어질고 누가 어리석은지,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다음 장 주인의 첫마디 「나는 본디 완고하고 어리석어 감히 어짊을 자처하지 않는다」는 이 말에 대한 응답이다.
選択선택
법연의 『선택본원염불집(選択本願念仏集)』, 곧 『선택집』이다. 객은 「재난이 『선택집』에서 일어난다」는 주인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주인이 그것을 거듭 힘주어 말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天下泰平国土安穏천하태평 · 국토안온
세상이 평화롭고 나라 땅이 편안한 것. 입정안국(立正安国)의 「안국」이 가리키는 바이며, 객과 주인이 처음부터 공유하는 목표다.
君臣の楽う所土民の思う所임금과 신하가 즐겨 바라는 바, 백성이 생각하는 바
위로는 다스리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땅을 갈고 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화를 바란다는 뜻이다. 평화는 신분을 가리지 않는 사람의 본연의 바람이라는 것이다.
国は法に依つて昌え法は人に因つて貴し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
나라의 번영은 그 근저에 있는 법(사상 · 종교)의 높낮이에 달려 있고, 법의 위대함은 그것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에 의해 드러난다는 뜻이다. 객의 말이지만 입정안국론 전체를 꿰는 원리를 담고 있다.
先ず国家を祈りて須く仏法を立つべし먼저 국가를 기원하여 모름지기 불법을 세워야 한다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죽어 버리면 불법을 믿을 수도 없으니, 먼저 나라를 안정시킨 뒤에 불법을 세우라는 객의 주장이다. 정치가 주(主)이고 종교는 종(從)이라는 생각이 그 밑에 있다.
災を消し難を止むるの術재앙을 없애고 난을 멈추는 방책
이 물음이 제7단 전체를 연다. 주인은 다음 장에서 그 방책을 한마디로 답하고, 제3장 이하에서 열반경 · 인왕경 · 법화경의 글로 논증해 간다.

이 단의 자리 — 재난 대치의 방책을 묻다

제7단은 입정안국론 십문구답의 일곱째 문답이다. 이 단은 인생의 불행과 삼재칠난의 근원을 끊고 참된 평화의 국토를 세우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다룬다. 결론은 단의 마지막 줄 「일찍 천하의 정밀(静謐)을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에 모인다. 그리고 그 「끊는다」의 구체적인 뜻은 다음 제8단에서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能忍の以後経説は則ち其の施を止む)」(30쪽)로 밝혀진다. 제7단에 인용되는 열반경의 엄한 글들은 모두 이 결론을 향해 가는 경증이다.

이 장은 그 첫머리로, 객의 물음을 싣는다. 여기서 객이 말하는 내용은 가마쿠라 시대 위정자와 민중의 생각에 그치지 않는다. 「종교의 시비는 가리기 어렵다」 「무엇보다 먼저 나라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시대에나 되풀이되는 종교관 · 정치관이다. 객의 물음이 이토록 보편적이기에 주인의 답 또한 보편적인 원리로 읽힌다.

  1. ① 반문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함은 법연 한 사람만이 아니다(주인도 같지 않은가)
  2. ② 인정과 유보사폐각포의 글은 뚜렷하다.그러나 그것은 옥의 작은 흠이다.법연이 미혹했는지 깨달았는지, 누가 옳은지 정하기 어렵다
  3. ③ 물음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먼저 국가를 기원하라.재앙을 없애고 난을 멈출 방책이 있으면 듣고 싶다
「먼저 국가를 기원하여 모름지기 불법을 세워야 한다」先ず国家を祈りて須く仏法を立つべし
도표 1 · 객의 물음 — 세 겹의 마음

객의 반문 — 「한 사람만이 아니다」

주인의 도리 바른 말에 객은 차츰 납득해 간다. 특히 법연이 사폐각포라 하여 법화경을 비방한 것은 잘못이라고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철저히 나쁜 일이라고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단에 와서 누그러진 말투로 이야기하면서도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하는 일은 한 사람만을 두고 논하기 어렵다」고 여전히 의문을 내비친다.

그 뜻은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하는 것은 반드시 법연 한 사람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 밖에는 「주인 역시 정토의 여러 경을 낮추고 법연을 비방하니 같은 죄가 아닌가」라는 물음이 있다. 그러나 법연의 사폐각포는 불법에 완전히 어긋나는 사견이므로, 그것을 깨뜨리는 주인의 말과 같은 줄에 놓고 논할 수는 없다.

니치칸 상인이 정한 읽기

이 구절은 예부터 읽는 법이 갈렸다. 니치칸 상인은 「입정안국론 문단」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객의 뜻은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하는 일은 한 사람만을 두고 논하기 어렵다. 주인 또한 정토의 경을 낮추고 법연을 비방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예부터의 점(點)은 온당하지 않다. 한 해석은 이 여덟 글자를 모두 주인의 일로 보았고, 다른 해석은 「대승경을 낮추고 여러 승을 비방하는 것은 법연 한 사람으로서는 논판하기 어렵다」고 하여 법연의 일로 보았다. 니치칸 상인은 「두 해석이 모두 아직 아름답지 않다」고 하여 둘을 함께 물리쳤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곧 「한 사람만을 두고 논하기 어렵다」를 온전히 주인의 일로 읽거나 온전히 법연의 일로 읽는 해석이 예부터 있었으나, 둘 다 바르지 않다. 바른 뜻은 객이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하는 일은 법연 한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하기 어렵고, 주인 또한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되묻는 데에 있다.

니치칸 상인은 이어지는 「이 하근을 붙들어 그 비방을 이루지만」 이하의 글도 정밀하게 나누었다. 이 아래 여섯 구 스물네 자를 예부터 여러 스승은 모두 주인의 일로 읽었으나 그것도 온당하지 않다. 니치칸 상인의 판정은 이렇다. 처음 두 구 여덟 자(「이 하근을 붙들어 그 비방을 이루지만」)는 주인에 관한 것이고, 다음 「미혹하여 말한 것인가」 아래 두 구 여덟 자는 법연에 관한 것이며, 「현우를 가리지 못하고」 아래 두 구 여덟 자는 법연과 주인 둘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객의 물음 전체의 뜻은 「경을 낮추고 승을 비방함은 법연 한 사람으로 논하기 어렵다, 주인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경 등을 사폐각포의 네 글자에 실은 것은 『선택집』의 글에 분명하다. 주인은 이 작은 흠을 붙들어 비방하지만, 법연은 미혹하여 말한 것인가 깨닫고서 말한 것인가. 그러니 법연과 주인 사이에서 현우를 가리지 못하고 시비를 정하기 어렵다」가 된다.

구절「이 하근을 붙들어 그 비방을 이루지만」此の瑕瑾を守つて其の誹謗を成せども
누구에 관한 말인가주인에 관한 말
구절「미혹하여 말한 것인가, 깨닫고서 말한 것인가」迷うて言うか覚りて語るか
누구에 관한 말인가법연에 관한 말
구절「현우를 가리지 못하고 시비를 정하기 어렵다」賢愚弁ぜず是非定め難し
누구에 관한 말인가법연과 주인 둘에 관한 말
예부터의 해석은 여섯 구를 모두 주인의 일로 읽었다
도표 2 · 니치칸 상인의 읽기 — 여섯 구 스물네 자의 귀속

이 판정에 따르면 객의 마음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객은 법연이 대승경과 제불 · 보살을 모두 부정해 버린 것은 잘못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사폐각포의 네 글자는 아름다운 옥에 난 작은 흠과 같은 것이니, 주인이 작은 흠에 강한 비방을 퍼붓는 것은 도가 넘는다. 그렇다고 법연의 말이 미혹에서 나왔는지 깨달음에서 나왔는지도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주인과 법연 가운데 누가 어질고 누가 어리석은지,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어느 쪽이든 객은 이제 법연에게 큰 의심을 품게 된 것이다.

「작은 흠」이 아닌 까닭 — 사폐각포의 무게

객은 사폐각포를 「옥의 흠」이라 했다. 그러나 정토 삼부경 이외의 경전을 버리라, 아미타여래 이외의 불보살을 던지라는 가르침은 석존 일대 불교의 어디에도 설해져 있지 않다. 이미 앞의 단들에서 깨뜨린 대로, 이것은 담란 · 도작 · 선도가 제멋대로 세운 그릇된 뜻을 법연이 더욱 키운 것이다. 부처가 설하지 않은 사사로운 뜻을 세우는 것은 불제자의 일이 아니라 부처의 뜻에 맞서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법연이 버리라 · 닫으라 · 내버려 두라 · 던지라고 한 일체경 가운데에는 석존 일대 불교의 간심인 법화경이 들어 있다. 이는 정토종이 「염불하면 극락에 왕생한다」고 하는 유일한 근거, 곧 법장비구의 서원에 붙어 있는 단서 「오직 오역과 정법을 비방하는 자는 제외한다(唯除五逆誹謗正法)」에서조차 벗어나는 일이 된다. 정토종 자신의 근거에 비추어도 정법을 비방하는 자는 왕생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또 법화경은 일체 경전의 구경이며 일체 불보살을 낳는 근원이다. 정토 삼부경은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가장 낮은 단계의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아미타여래는 법화경 적문의 설법에서는 대통지승불의 열여섯 왕자 가운데 하나로서 적문 석존의 형제이며, 석존의 본지를 밝힌 본문의 설법에서는 오백진점겁에 성도한 석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자취를 드리운 부처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아미타를 높이고 석존을 낮추며, 정토 삼부경을 숭상하고 법화경을 버리는 것은, 자식을 높이고 어버이를 천하게 여기며 제자를 받들고 스승을 욕하는 것과 같은 뒤집힘이다. 게다가 대성인께서

仏法は体のごとし世間はかげのごとし

불법은 몸과 같고 세간은 그림자와 같다.

「제경과 법화경과 난이의 사」, 992쪽

라고 하셨듯이, 종교계의 본말전도는 반드시 세간의 법에서도 어지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몸이 굽으면 그림자도 굽는다. 이것이 입정안국론이 처음부터 말해 온 「세상이 모두 정에 등지고 사람이 다 악에 돌아간다」는 재난의 근원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객은 사폐각포를 「옥의 작은 흠」이라 했으나, 그것은 일체경과 제불 · 보살을 버리게 하고 정토종 자신의 근거(唯除五逆誹謗正法)에서조차 벗어나는 근본의 뒤집힘이다. 근본이 뒤집히면 세간도 뒤집힌다.

비방과 가책은 다르다

객은 「그 비방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러나 착한 것을 시기하여 나쁘게 말하는 것이 비방이다. 악을 악이라 판정하고 그 죄를 따지는 일은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앞 단 제3장 「방법을 꾸짖는 정신을 설하다」에서 열반경의 「법을 무너뜨리는 자를 보고도 버려두고 꾸짖지 않으면 불법 가운데의 원수다」라는 뜻이 밝혀진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악을 따지는 일이 금지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세간의 법으로 말하더라도, 악을 다스리는 기관이 일을 멈추고 재판의 문이 닫히면 악인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고 선량한 사람들은 불행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불법의 정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세간의 질서가 무너지면 몸이 다치지만, 불법의 정의가 무너지면 사람의 마음과 생명의 근본이 다친다. 그러므로 어떤 시기 · 박해 · 탄압도 두려워하지 않고 법을 지키고 민중의 행복을 위해 그릇된 뜻을 깨뜨려 가야 한다는 것이 대성인 불법의 입장이다.

「천하태평 · 국토안온」 — 사람이 본디 바라는 것

「결국 천하태평 · 국토안온은 군신이 즐겨 바라는 바요 토민이 생각하는 바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회의 평화와 국토의 안온, 곧 민중이 안심하고 날마다의 생업에 힘쓰며 삶을 즐길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은 다스리는 사람과 민중이 함께 바라는 바이며 정치의 요체다. 이것이 이 구절이 담은 원리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천하태평의 이상 사회를 나타내는 이야기로 다음 일화가 쓰였다. 전설의 성천자(聖天子) 요(堯)의 시대에 한 농가에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흙그릇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해 뜨면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쉰다.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 먹는다.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日出でて作し、日入りて息う。井を鑿ちて飲み、田を耕して食らう。帝力何ぞ我に有らんや)」 이른바 「고복격양(鼓腹撃壌)」이다.

곧 고대 중국에서는 제왕의 힘, 정치권력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만큼 백성이 마음 놓고 생업에 힘쓸 수 있는 것이 천하태평의 이상으로 여겨졌다. 「천자는 바르게 남쪽을 향해 앉아 있을 뿐」이라는 말도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백성이 제왕의 힘을 의식하게 되는 때는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거나, 재해와 도적의 횡행에 괴로워 제왕의 대책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때였다. 정가 · 정원 연간의 일본이 바로 그러한 때였다. 정가 대지진과 큰바람, 기근과 역병이 이어지자 막부와 조정은 온갖 기도를 명했고, 백성은 그 기도가 효험이 없음을 날마다 보았다. 객의 물음 「재앙을 없애고 난을 멈추는 방책」은 이 현실에서 나온다.

또 사람과 사람의 다툼에서 일어나는 재앙뿐 아니라, 이른바 천재지변에서 오는 불행도 사람의 힘만으로는 다 막을 수 없다. 입정안국론이 처음부터 천변지요 · 기근 · 역병을 한데 묶어 그 근원을 물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군신이 즐겨 바라는 바, 토민이 생각하는 바」라는 말은 평화야말로 인간성 본연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다스리는 사람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싸움을 일으키고 민중을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가장 존귀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사람의 목숨이 희생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인간의 자격을 내버리는 것과 같다. 이 생명 존중의 원리는 제4장 「생명의 존엄」에서 다시 깊이 다룬다.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한다」 — 법의 높낮이와 나라의 흥망

「무릇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 나라의 번영과 민족의 흥륭은 반드시 그 근저가 되는 법의 깊고 얕음, 높고 낮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원리다. 객의 말이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

유럽의 역사로 보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의 철학과 이념으로 유지되었다. 아름다움과 철학의 문화로 선 아테네, 엄격한 군사 훈련과 법치를 근간으로 한 스파르타는 각기 그 이념에 맞는 흥륭과 발전을 보였다. 엄격하게 묶인 스파르타의 민중보다 자유롭게 숨 쉬던 아테네의 민중이 더 행복했을 것이고, 후세의 문화에 끼친 영향도 아테네가 더 크다.

눈을 중국으로 돌리면, 유교적 봉건 질서에 의한 주(周), 도가 사상과 법치에 의한 진(秦), 유교의 왕도에 의한 한(漢), 천태의 불법을 근간에 둔 수(隋) · 당(唐) 등, 그 나라가 의지한 법은 왕조의 성격과 문화권의 넓이, 민중의 행 · 불행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니, 오히려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냉엄한 법치에 의한 진은 단명으로 망했고, 예교에 의한 주는 일단 오래 이어졌으나 그 후반은 이름뿐이었다. 진보다 주, 주보다 한, 한보다 불법에 의지한 당이 위대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가졌으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다. 그리고 당조 후반에 무종(武宗)의 불교 탄압(회창 폐불)과 정토교의 유행과 함께 급격히 쇠운을 걸은 것은, 불교의 정사(正邪)가 정치 · 경제 · 문화 · 민족의 생명력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여실히 말해 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 당 말기의 일은 입정안국론 제5편 「화한의 예로 보인 염불 망국」에서 대성인께서 직접 드신 망국의 현증이기도 하다.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 — 불법의 위대함은 사람이 실증한다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는 말은, 어떤 법이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실증 여하에 따라 널리 퍼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뜻이다. 곧 법을 전하여 지니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의 중요성을 말한다. 법을 지닌 사람이 행복해지고 흥륭하며 복운을 쌓아 가면 그 법의 위대함이 증명된다. 반대로 법을 지닌 사람이 흉악해지고 잔인해지며 스스로 비참한 말로를 걷는다면 그 법의 낮음이 증명된다.

인생을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이든 반드시 어떤 법을 지니고 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고 철학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아무 법도 없다는 것은 모든 행동을 동물적 본능에 따라 한다는 것이며, 사람에게 이성이 있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법의 높낮이 · 깊고 얕음 · 바르고 그름이 생활의 하나하나의 행동 방식과 그 결과를 지배하는 이상, 낮은 것보다 높은 것을, 얕은 것보다 깊은 것을 취해야 하며, 그릇된 것을 버리고 바른 것을 지녀야 한다. 여기에 종교를 가려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 있다.

그런데 대성인께서는 「난조전답서」(1578쪽)에서 「법이 묘하기 때문에 사람이 귀하다」는 뜻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와 거꾸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번에는 위대한 법을 지닌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뛰어난 법을 지녔다 해도 아직 충분히 제 몸에 익히지 못하여, 그 법이 그 사람 행동의 일부만을 지배하고 대부분의 행동은 여전히 낡고 낮은 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 불법이라는 가장 높은 법과 어떻게 온전히 하나가 되어 전 인격을 그것으로 채워 가는가, 낮은 법이 남긴 낡은 찌꺼기를 어떻게 몰아내 가는가 — 이것이 불도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이를 성불이라 한다.

그 과정은 노력이며 정진이다. 불법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이 노력과 정진을 쌓아 제 몸에 불법의 위대함을 드러내 가느냐에 따라 법의 흥륭이 정해진다. 법이 묘하기에 사람이 귀해지고, 그렇게 귀해진 사람에 의해 법이 다시 귀하게 드러난다. 두 구절은 서로 맞물려 하나의 원리를 이룬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와 「법이 묘하기 때문에 사람이 귀하다」는 모순이 아니다. 묘법이 사람을 귀하게 하고, 그 사람의 실증이 묘법을 세상에 드러낸다. 불도 수행이란 이 두 방향이 한 몸 안에서 맞물려 가는 과정이다.

「먼저 국가를 기원하라」 — 객의 정치 우선론

「먼저 국가를 기원하여 모름지기 불법을 세워야 한다.」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죽어 버리면 불법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국가와 사회를 안정시키고, 그런 뒤에 불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객의 말이다.

곧 정치가 주이고 종교는 종이라는 생각이 그 밑에 있다. 객은 당시의 위정자, 곧 사이묘지 입도 호조 도키요리에 견주어진다고 풀이되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밑바닥에는 종교를 마음의 위안이나 형식, 정신 수양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종교관이 있다. 「정치가 먼저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묻게 된다. 그렇다면 정치만으로 전란을 없애고 참된 평화를 이룰 확신이 있는가. 역사를 돌아보면 그 확신은 어둡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민중이든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권력자의 야망 앞에 비참하게 굴복하거나, 제 마음에 증오와 공포가 소용돌이쳐 전란 속에 스스로 무너져 갔다.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며, 싸움을 좋아하고 이익과 명예를 바라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광기를 몰아내고 바른 정신으로 돌리며, 반목이 아니라 단결로써 모든 사람의 행복을 얻어 가는 평화로운 세계의 실현은 법에 의해 결정된다. 곧 종교의 정사, 불법의 정사에 의해 국가와 사회, 나아가 세계의 안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인이 이어지는 장들에서 차례로 밝혀 가는 주장이다. 객은 「먼저 나라, 그다음 불법」이라 했지만, 주인은 「바른 법을 세우는 것(입정)이 곧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길(안국)」이라고 답한다. 입정안국론이라는 제목 자체가 객의 순서를 뒤집은 대답이다.

싸움을 좋아하는 마음을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돌리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대성인 불법에서 보면 그것은 생명의 근본을 밝힌 불법, 곧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생명 철학에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근본에서 바꾸어 가는 것, 그 위에 비로소 무너지지 않는 국토의 안온이 선다는 것이 입정안국의 정신이다.

제7단 제2장 국가 안온 · 천하 태평의 원리를 설하다
어서 27쪽 1~3행 · 第七段 第二章 国家安穏天下泰平の原理を説く

본문

원문 대조어서 27쪽 1~3행
本文 · 어서 원문

主人の曰く、余は是れ頑愚にして敢て賢を存せず唯経文に就いて聊か所存を述べん、 抑も治術の旨内外の間其の文幾多ぞや具に挙ぐ可きこと難し、 但し仏道に入つて数ば愚案を廻すに謗法の人を禁めて正道の侶を重んぜば国中安穏にして天下泰平ならん。

풀이

주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완고하고 어리석어 감히 어짊을 자처하지 않노라. 다만 경문에 나아가 조금 생각하는 바를 말하리라. 대저 재난을 다스리는 방법의 취지는 불법의 경전(內典)과 불법 밖의 글(外典)에 그 글이 얼마나 많은지, 낱낱이 들기 어렵도다. 다만 불도에 들어와 자주 어리석은 생각을 돌려 보건대, 방법(謗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正道)의 승려를 중히 여긴다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하리라.

어구 풀이

余は是れ頑愚にして敢て賢を存せず나는 본디 완고하고 어리석어 감히 어짊을 자처하지 않는다
앞 장 객의 「현우를 가리지 못한다」에 대한 응답이다. 「당신과 법연 가운데 누가 어질고 누가 어리석은지 모르겠다」는 객의 말에, 주인은 「나는 조금도 어진 사람이 아니다」라고 겸손하게 답한다. 범부와 같은 모습을 보이시는 입장(示同凡夫)에서 하신 말씀이다.
唯経文に就いて聊か所存を述べん다만 경문에 나아가 조금 생각하는 바를 말하리라
주인의 말은 자신의 재주나 생각이 아니라 부처의 경문에 근거한다는 선언이다. 이어지는 제3장부터 제8장까지가 모두 경문의 인용이며, 제9장의 「경문이 뚜렷하니 사사로운 말을 어찌 더하랴」로 맺어진다.
治術치술
나라를 다스리고 재난을 다스리는 방법. 앞 장 객이 물은 「재앙을 없애고 난을 멈추는 방책」을 받는 말이다.
内外の間其の文幾多ぞや내전 · 외전 사이에 그 글이 얼마나 많은가
내도인 불교에도, 외도의 가르침에도 재난을 다스리는 방법은 헤아릴 수 없이 설해져 있다는 뜻이다. 객이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에서 든 여러 기도(법화경의 「병즉소멸 · 불로불사」를 우러름, 인왕경의 「칠난즉멸 · 칠복즉생」을 믿어 여는 백좌백강, 밀교의 수법, 좌선, 칠귀신의 이름과 오대력의 형상, 사각사경의 제사 등)가 바로 그 「글」의 예다.
仏道に入つて数ば愚案を廻す불도에 들어와 자주 어리석은 생각을 돌린다
출가하여 불도를 배운 뒤 거듭 깊이 생각해 보았다는 겸손의 말이다. 대성인께서 열두 살에 세이초사에 올라 일체경을 두루 배우신 수학의 세월이 이 짧은 말 뒤에 있다.
謗法の人を禁めて방법의 사람을 금하여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이 그 그릇된 가르침을 펴지 못하게 막는 것. 그 구체적인 방법은 이 단과 다음 단에서 밝혀지며, 대성인의 결론은 무력이 아니라 「그 보시를 멈추는 것」이다.
正道の侶を重んぜば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긴다면
「정도(正道)」는 바른 불도, 곧 법화경의 가르침이며, 「려(侶)」는 승려다. 정법을 지니고 넓히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国中安穏にして天下泰平ならん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하리라
객이 바란 「천하태평 · 국토안온」에 대한 정면의 대답이다. 객은 「먼저 국가를 기원하라」고 했으나, 주인은 방법을 금하고 정법을 세우는 것이 곧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길이라고 답한다.
示同凡夫시동범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이끌기 위해 범부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 대성인께서 「나는 완고하고 어리석다」고 하신 것은 이 입장에서의 겸손이다.

결론이 먼저 — 「방법을 금하고 정도를 중히 여기라」

삼재칠난을 없애고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 장 객의 이 물음에 답하여, 이 장부터 그 방법이 설해진다. 이 장에서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긴다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하리라」고 하신 것은 결론의 극리(極理)다. 그런 다음 제3장 이하에서 열반경 · 인왕경 · 법화경의 글을 들어 이것을 논증하신다. 결론을 먼저 한마디로 내놓고, 그 뒤에 경증을 차례로 쌓아 가는 짜임이다.

  1. 물음
    제1장재난을 다스리는 방책을 묻다
  2. 결론
    제2장국가 안온 · 천하 태평의 원리를 설하다(방법을 금하고 정도를 중히 여기라)
  3. 경증
    제3장열반경을 들어 방법 가책을 설하다
    제4장선예국왕의 방법 단절을 보이다
    제5장수호 부촉의 글을 들다
    제6장정법 호지의 법도를 보이다
    제7장유덕왕 · 각덕비구의 선례
    제8장염불 무간의 글을 들다
  4. 맺음
    제9장경증으로 방법 치벌을 맺다
    제10장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함을 맺다
다음 단에서 「그 보시를 멈춘다」(其の施を止む)로 그 방법이 밝혀진다
도표 3 · 제7단 열 장의 짜임

이 결론에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방법의 사람을 금한다」는 소극의 면이고, 다른 하나는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긴다」는 적극의 면이다. 방법을 막는 일만으로는 나라가 편안해지지 않는다. 바른 법을 지니고 넓히는 사람이 존중받아 그 법이 세상에 서야(立正) 비로소 나라가 편안해진다(安国). 제7단의 경증은 주로 앞의 갈래, 곧 방법을 꾸짖고 끊는 일에 무게를 두고, 제9단의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가 뒤의 갈래를 완성한다.

방법의 사람은 정토종만이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방법의 사람은 정토종에 그치지 않는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당시의 선종 · 진언종 · 화엄종 · 법상종 등도 모두 법화경을 낮추고 제 종을 세웠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입정안국론이 법연의 『선택집』만을 방법으로 꾸짖은 것처럼 논하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오해다.

특히 법연의 정토종을 크게 다루신 까닭은 당시의 종교계를 보면 곧 알 수 있다. 법연이 전수염불을 외치기 시작한 것은 대성인 탄생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법연의 묘가 칙명으로 파헤쳐지고 고제들이 유죄된 것(가록의 법난, 1227년)은 대성인께서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수십 년 사이에 전수염불은 전란과 재해에 떠는 민중의 불안과 말법 사상의 유행을 타고, 역병이 번지듯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염불의 슬픈 소리가 나라 안을 뒤덮어, 히에이잔조차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신도의 비호와 기진을 받을 수 없을 만큼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무가의 도읍 가마쿠라에서 호조 시게토키(北條重時)가 정토종을 위해 고쿠라쿠사를 세운 것은 입정안국론을 짓기 바로 전해의 일로 전한다.

이 한 가지 사정만으로도, 나라를 간하는 글인 입정안국론이 방법의 대표로서 법연의 정토종을 들어 이를 남김없이 깨뜨리신 까닭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토종의 파절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문영 5년(1268) 몽골 국서가 온 뒤 가마쿠라의 열한 곳에 보내신 「십일통어서」 가운데 겐초사 도류(建長寺道隆)에게 보내신 어장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夫れ仏閣軒を並べ法門屋に拒る仏法の繁栄は身毒支那に超過し僧宝の形儀は六通の羅漢の如し、然りと雖も一代諸経に於て未だ勝劣・浅深を知らず併がら禽獣に同じ忽ち三徳の釈迦如来を抛つて、他方の仏・菩薩を信ず是豈逆路伽耶陀の者に非ずや、念仏は無間地獄の業・禅宗は天魔の所為・真言は亡国の悪法・律宗は国賊の妄説と云云、爰に日蓮去ぬる文応元年の比勘えたるの書を立正安国論と名け宿屋入道を以て故最明寺殿に奉りぬ、此の書の所詮は念仏・真言・禅・律等の悪法を信ずる故に天下に災難頻りに起り剰え他国より此の国責めらる可きの由之を勘えたり

무릇 불각은 처마를 잇대고 법문은 집집마다 막아설 만큼 불법의 번영은 인도와 중국을 넘어서고, 승보의 모습은 육통을 갖춘 아라한과 같다. 그렇지만 일대의 여러 경에서 아직 승렬과 깊고 얕음을 알지 못하니 모두 짐승과 같다. 문득 주 · 사 · 친 삼덕의 석가여래를 던지고 다른 국토의 불보살을 믿으니, 이 어찌 순세외도(逆路伽耶陀)의 무리가 아니겠는가. 염불은 무간지옥의 업, 선종은 천마의 소행, 진언은 망국의 악법, 율종은 국적의 망설이라 한다. 이에 니치렌이 지난 문응 원년 무렵 생각하여 쓴 글을 입정안국론이라 이름하고 야도야 입도를 통해 고 사이묘지전에게 올렸다. 이 글의 요지는, 염불 · 진언 · 선 · 율 등의 악법을 믿는 까닭에 천하에 재난이 자주 일어나고, 게다가 다른 나라로부터 이 나라가 공격받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밝힌 것이다.

「겐초사도류에의 어장」, 173쪽

입정안국론 스스로는 정토종을 정면에 내세웠으나, 그 요지는 염불 · 진언 · 선 · 율의 악법 전체에 미친다는 것을 대성인께서 직접 밝히신 글이다. 이 사종에 대한 판정을 흔히 「사개격언(四箇格言)」이라 부른다.

「나는 완고하고 어리석다」 — 경문에 의지하는 자세

「나는 본디 완고하고 어리석어 감히 어짊을 자처하지 않는다」는 범부와 같은 모습을 보이시는 입장에서 겸손하게 하신 말씀이며, 앞 장 객의 「현우를 가리지 못한다」에 대한 응답이다. 또한 대성인의 말씀 하나하나는 모두 부처의 경문을 근거로 삼고 뒷받침으로 하여 설해진다. 거기에는 조금도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거나, 객관적인 뒷받침이 없는 무책임한 말이 없다.

불법의 예언 — 계시가 아니라 경문

외도든 불교의 승려든, 흔히 예언자라 하면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꿈에 알림이 있었다고 하면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거기에는 「나만 특별히 계시를 받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과 차별감이 말 밖에 담겨 있다.

이러한 예언자 · 계시자는 바른 불법에서는 쓰지 않는다. 대성인께서도

利根と通力には依るべからず

영리한 근기와 신통력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창법화제목초」, 16쪽

라고 엄히 경계하셨다. 언뜻 보면 그런 예언자가 훌륭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 근저에 객관적 근거와 철학에 뒷받침된 보편타당성이 없다는 증거다.

그에 반해 대성인께서는 이 입정안국론에서 펼쳐 보이시듯, 하나하나 경문을 들어 뒷받침하고 경문을 보여 결론을 내리신다. 곧 여기에 보인 원리는 모두 사실의 증거와 경문에 의한 뒷받침, 그리고 철학적 논리성을 갖추었기에, 어느 시대에나 어느 국토에서나 통하는 대원리다. 칠백여 년 전에 쓰인 이 글이 단순한 역사 문헌이나 문학적 저술이 아니라 오늘에도 읽히는 간효의 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경문은 부처의 설법이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둘러대는 말로 이야기하는 무책임한 말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우주의 본질을 깨닫고 영원한 생명관에 선 부처의 말이기에 그릇됨이 없는 진리라는 것이 대성인 불법의 입장이다. 대성인께서 법을 논하실 때 늘 문증(文證)을 먼저 세우신 것도 이 때문이다.

예언의 적중과 「니치렌에게 귀의하라」

또 대성인께서는 이 입정안국론에서 말씀하고 예언하신 자계반역 · 타국침핍의 두 난이 그대로 나타난 것을 증거로 삼아 「니치렌에게 귀의하라」 「니치렌의 말을 따르라」고 큰 확신으로 정법을 가르치셨다.

문영 5년(1268) 정월, 몽골의 사자가 국서를 가지고 도착했다. 타국침핍난의 예언이 맞았음이 분명해졌을 때, 대성인께서는 열한 곳에 공장 대결을 청하는 글을 보내셨다. 그 가운데 집권 호조 도키무네에게 보내신 어장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抑も正月十八日・西戎大蒙古国の牒状到来すと、日蓮先年諸経の要文を集め之を勘えたること立正安国論の如く少しも違わず普合しぬ、日蓮は聖人の一分に当れり未萠を知るが故なり、然る間重ねて此の由を驚かし奉る急ぎ建長寺・寿福寺・極楽寺・多宝寺・浄光明寺・大仏殿等の御帰依を止めたまえ、然らずんば重ねて又四方より責め来る可きなり、速かに蒙古国の人を調伏して我が国を安泰ならしめ給え、彼を調伏せられん事日蓮に非ざれば叶う可からざるなり、諌臣国に在れば則ち其の国正しく争子家に在れば則ち其の家直し、国家の安危は政道の直否に在り仏法の邪正は経文の明鏡に依る

대저 정월 18일에 서융(西戎) 대몽골국의 국서가 도착했다고 한다. 니치렌이 지난해 여러 경의 요문을 모아 생각하여 밝힌 것이 입정안국론과 같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들어맞았다. 니치렌은 성인의 일분에 해당한다. 아직 싹트지 않은 일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 이 뜻을 아뢰어 깨우쳐 드린다. 서둘러 겐초사 · 주후쿠사 · 고쿠라쿠사 · 다호사 · 조코묘사 · 대불전 등에 대한 귀의를 멈추시라. 그렇지 않으면 거듭 사방에서 공격해 올 것이다. 속히 몽골국 사람을 조복하여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시라. 그들을 조복하는 일은 니치렌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간하는 신하가 나라에 있으면 그 나라가 바르고, 다투어 간하는 자식이 집에 있으면 그 집이 곧다. 국가의 안위는 정도(政道)의 곧고 굽음에 있고, 불법의 사정은 경문의 밝은 거울에 의한다.

「호조도키무네에의 어장」, 169쪽

또 고쿠라쿠사 료칸에게 보내신 어장에는

西戎大蒙古国簡牒の事に就て鎌倉殿其の外へ書状を進ぜしめ候、日蓮去る文応元年の比勘え申せし立正安国論の如く毫末計りも之に相違せず候、此の事如何、長老忍性速かに嘲哢の心を翻えし早く日蓮房に帰せしめ給え

서융 대몽골국의 국서에 관하여 가마쿠라전과 그 밖의 곳에 서장을 올렸습니다. 니치렌이 지난 문응 원년 무렵 생각하여 아뢴 입정안국론과 같이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장로 닌쇼는 속히 비웃는 마음을 돌이켜 어서 니치렌보에게 귀의하십시오.

「고쿠라쿠사료칸에의 어장」, 174쪽

라고 하셨고, 다호사에 보내신 어장에도

若し日蓮が申す事を御用い無くんば今世には国を亡し後世は必ず無間大城に堕す可し

만약 니치렌이 아뢰는 일을 쓰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에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후세에는 반드시 무간대성에 떨어질 것이다.

「다호사에의 어장」, 176쪽

라고 말씀하셨다.

문영 5년(1268) 정월 몽골 국서 도착열한 곳에 공장 대결을 청함
호조도키무네에의 어장(169쪽)「니치렌은 성인의 일분에 해당한다」「그들을 조복하는 일은 니치렌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고쿠라쿠사료칸에의 어장(174쪽)「어서 니치렌보에게 귀의하십시오」
다호사에의 어장(176쪽)「쓰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후세에는 무간대성에 떨어진다」
「니치렌은 성인의 일분에 해당한다」日蓮は聖人の一分に当れり「어서 니치렌보에게 귀의하십시오」早く日蓮房に帰せしめ給え
도표 4 · 몽골 국서 뒤의 세 어장

「니치렌은 성인의 일분에 해당한다」 「그들을 조복하는 일은 니치렌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어서 니치렌보에게 귀의하라」는 말씀은 모두, 몽골 내습을 앞두고 바람 앞의 등불이 된 나라를 구할 이는 자신밖에 없다는 대성인의 확신이다. 나아가 다호사에의 어장처럼 대성인의 가르침을 쓰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내세에는 다스리는 이도 민중도 무간지옥에 떨어지리라고 하신 것은,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말법의 어본불의 경애에서 나온 말씀이다.

그러므로 입정안국론은 국가 간효의 글이며, 어디까지나 방법을 금하는 일을 겉으로 내세워 건언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본의는, 일반의 학자들이 말하듯 단지 법화경 28품을 쓰라는 데 있지 않다. 이 글에서 예언하신 자계반역 · 타국침핍의 두 난이 들어맞은 것을 증거로 삼아, 대성인의 가르침을 받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 번의 고명과 예언 적중의 경위는 보은초 제5편 「대성인의 국가 간효와 재난의 근원」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입정」의 정(正) —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

그렇다면 대성인께서 가르치시는 정법, 곧 「입정(立正)」의 「정」이란 무엇인가.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것을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로 푼다. 대성인께서 출세의 본회로 세우신 본문의 본존에 귀명하고 그 신앙을 온 세계에 광선유포하는 것이 입정안국의 실천이 된다는 것이다. 「삼대비법품승사」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問う所説の要言の法とは何物ぞや、答て云く夫れ釈尊初成道より四味三教乃至法華経の広開三顕一の席を立ちて略開近顕遠を説かせ給いし涌出品まで秘せさせ給いし実相証得の当初修行し給いし処の寿量品の本尊と戒壇と題目の五字なり

묻는다. 말씀하신 요언(要言)의 법이란 무엇인가. 답한다. 석존께서 처음 성도하신 때부터 사미 삼교, 나아가 법화경의 광개삼현일의 자리를 서서 약개근현원을 설하신 종지용출품에 이르기까지 감추어 두셨던, 실상을 증득하신 당초에 수행하신 바의 수량품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오자(五字)이니라.

「삼대비법품승사」, 1021쪽

대성인 설법의 구경은 삼대비법에 있다는 단언이다. 그런데 입정안국론 등에서 법화경을 겉으로 내세우신 데에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하나는 권교인 정토종을 권실상대의 입장에서 깨뜨리기 위해 실교인 법화경을 세우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같은 「삼대비법품승사」에

此の三大秘法は二千余年の当初・地涌千界の上首として日蓮慥かに教主大覚世尊より口決相承せしなり、今日蓮が所行は霊鷲山の禀承に芥爾計りの相違なき色も替らぬ寿量品の事の三大事なり

이 삼대비법은 이천여 년 전 그 옛날, 지용천계의 상수로서 니치렌이 분명히 교주 대각세존으로부터 구결로 상승한 것이다. 지금 니치렌이 행하는 바는 영취산에서의 품승과 티끌만큼도 어긋남이 없는, 빛깔도 바뀌지 않은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사이니라.

「삼대비법품승사」, 1023쪽

라고 하시고, 이어서

法華経を諸仏出世の一大事と説かせ給いて候は 此の三大秘法を含めたる経にて渡らせ給えばなり

법화경을 제불 출세의 일대사라고 설하신 것은 이 삼대비법을 머금은 경이기 때문이다.

「삼대비법품승사」, 1023쪽

라고 말씀하셨듯이, 삼대비법이 이 법화경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법화경, 속으로는 그 법화경에 감추어진 삼대비법 — 이것이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는 입정안국론의 「정」이다. 이 「정」이 입정안국론 제9편 「실승의 일선에 귀의하라」의 「실승의 일선」으로 이어진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방법을 금하고 정도를 중히 여기라」의 「정도」는 겉으로는 법화경이지만, 그 근본은 법화경에 감추어진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다. 권실상대로 정토를 깨뜨리는 표면과, 삼대비법을 세우는 본의가 겹쳐 있다.

「내외의 글」 — 재난을 다스리는 방법의 여러 갈래

「대저 치술의 취지는 내외 사이에 그 글이 얼마나 많은가.」 삼재칠난을 다스리는 방법을 설한 것은 내도, 곧 불법에도 여러 설이 있고, 외도에는 더욱 많은 설이 있다. 객이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에서 든 당시의 기도 — 인왕경의 「칠난즉멸 · 칠복즉생」을 믿어 여는 백좌백강, 밀교의 여러 수법, 좌선입정, 칠귀신의 이름을 써 붙이고 오대력의 형상을 거는 일, 천신지기에 절하여 올리는 사각사경의 제사 — 은 모두 그 「글」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기도가 효험을 보이지 못했다는 데서 입정안국론은 시작되었다.

가뭄이 들면 마을의 늪이나 냇물의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뱀이나 용신에게 비를 비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다. 그 근저에 있는 것은 종교에 대한 무지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그런 불합리한 행위를 배척하는 나머지 생명의 근본을 밝힌 불법까지도 미신이나 무지로 치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역시 종교에 대한 무지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앞의 것은 종교 일반에 대한 무지이고, 뒤의 것은 대성인의 불법에 대한 무지다. 앞의 것은 종교 그 자체를 맹신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종교에 관해 자기가 지어낸 환영을 맹신하는 것이다. 같은 무지와 맹신이 한쪽에서는 긍정으로, 다른 쪽에서는 부정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것은 흔히 민중의 가련한 실태이고, 뒤의 것은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실상이다.

대성인께서 「내외의 글은 낱낱이 들기 어렵다」고 하시고 곧바로 「다만 불도에 들어와 자주 생각해 보건대」라고 말을 돌리신 것은, 이 수많은 방법 가운데 근본의 처방은 하나라는 뜻이다. 그것이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기는 것」이다. 병의 증상에 따라 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병의 뿌리를 뽑는 처방 —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에서 「일흉(一凶)」을 금하라고 하신 것과 같은 논리다.

제7단 제3장 열반경을 들어 방법 가책을 설하다
어서 27쪽 4~12행 · 第七段 第三章 涅槃経を引き謗法訶責を説く

본문

원문 대조어서 27쪽 4~12행
本文 · 어서 원문

即ち涅槃経に云く「仏の言く唯だ一人を除いて余の一切に施さば皆讃歎す可し、 純陀問うて言く云何なるをか名けて唯除一人と為す、仏の言く此の経の中に説く所の如きは破戒なり、 純陀復た言く、我今未だ解せず唯願くば之を説きたまえ、 仏純陀に語つて言く、破戒とは謂く一闡提なり其の余の在所一切に布施すれば皆讃歎すべく大果報を獲ん、 純陀復た問いたてまつる、一闡提とは其の義何ん、 仏言わく、純陀若し比丘及び比丘尼・優婆塞・優婆夷有つて粗悪の言を発し正法を誹謗し是の重業を造つて永く改悔せず心に懺悔無らん、是くの如き等の人を名けて一闡提の道に趣向すと為す、 若し四重を犯し五逆罪を作り自ら定めて 是くの如き重事を犯すと知れども而も心に初めより怖畏懺悔無く肯て発露せず 彼の正法に於て永く護惜建立の心無く毀呰・軽賎して言に過咎多からん、是くの如き等の人を亦た一闡提の道に趣向すと名く、 唯此くの如き一闡提の輩を除いて其の余に施さば一切讃歎せん」と。

풀이

곧 열반경에 이르기를,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에 보시한다면 모두 찬탄할 만하니라. 순타(純陀)가 여쭈기를, 어떠한 이를 이름하여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한다』고 하나이까.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경 가운데 설한 바와 같은 것은 파계이니라. 순타가 다시 여쭈기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하겠사오니 오직 바라건대 설하여 주옵소서. 부처께서 순타에게 말씀하시기를, 파계란 이른바 일천제(一闡提)이니라. 그 밖의 어느 곳에 있는 일체에 보시한다면 모두 찬탄할 만하며 큰 과보를 얻으리라. 순타가 다시 여쭈기를, 일천제란 그 뜻이 무엇이옵니까.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순타여, 만약 비구 및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가 있어 거칠고 악한 말을 내어 정법을 비방하고, 이 무거운 업을 지으면서도 길이 고치지 않고 마음에 참회가 없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을 이름하여 일천제의 길로 나아간다고 하느니라. 또 만약 사중(四重)을 범하고 오역죄를 지으며, 스스로 이와 같은 무거운 일을 범한 줄을 분명히 알면서도 마음에 처음부터 두려워하고 참회함이 없어 굳이 드러내어 고백하지 않고, 저 정법에 대하여 길이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이 없이 헐뜯고 업신여겨 말에 허물이 많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을 또한 일천제의 길로 나아간다고 이름하느니라. 오직 이와 같은 일천제의 무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에 보시한다면 일체가 찬탄하리라」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涅槃経열반경
『대반열반경』(T12 no.374). 석존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숲에서 입멸하시기 직전에 설하셨다는 경으로, 불신상주 · 실유불성과 함께 정법 호지와 방법 가책을 거듭 설한다. 천태대사는 법화경에서 거두지 못한 이들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추설추민(追說追泯)」 · 「군습(捃拾)」의 경으로 보았다. 제7단의 경증은 대부분 이 경에서 나온다.
唯除一人오직 한 사람을 제외한다
보시를 받을 자격에서 제외되는 단 한 부류를 가리킨다. 경은 그것을 「파계」라 하고, 다시 그 파계를 「일천제」라고 밝힌다.
純陀순타
범어 춘다(Cunda)의 음사. 중인도 쿠시나가라 성의 발제하(跋提河) 가 사라쌍수 숲 근처에 살던 대장장이(金工)다. 석존이 입멸하실 때 마지막 공양을 올렸으며, 열반경의 대고중(對告衆)이 되었다.
破戒파계
계를 깨뜨리는 것. 그런데 여기서 부처는 파계를 「일천제」라고 정의한다. 곧 계율 조목의 위반이 아니라 정법을 비방하고 뉘우치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은 파계라는 것이다. 말법의 계가 「수지즉지계」인 까닭과 이어진다.
一闡提일천제
범어 잇찬티카(icchantika)의 음사로, 일천저가(一闡底迦)라고도 쓴다. 본래는 「욕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진리를 믿으려 하지 않는 쾌락주의자 · 현세주의자를 가리켰다. 불법에서는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 성불할 기연을 갖지 못한 중생을 말한다. 부처의 정법을 믿지 않고 오히려 반발하고 비방하며 그 무거운 죄를 뉘우치지 않는 불신 · 방법의 사람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比丘及び比丘尼・優婆塞・優婆夷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출가한 남녀와 재가의 남녀, 곧 사부대중이다. 일천제는 출가 · 재가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粗悪の言거칠고 악한 말
정법과 그것을 지닌 사람을 향한 거친 욕설과 헐뜯음이다.
懺悔참회
지은 죄악을 깨달아 뉘우치고 고치는 것. 「참(懺)」은 범어 크샤마(kṣama)의 음사인 참마(懺摩)의 줄임이고, 「회(悔)」는 참마의 의역이니, 범어와 한어를 합친 말이다. 원시불교에서는 비구가 부처나 장로 비구에게 죄를 고백하고 판정을 받았다. 경전 곳곳에 그 의칙과 공덕이 설해져 중국 · 일본에서 의례로 자리 잡았다. 대성인께서는 「가연정업서」에서 병상의 도키 부인에게 「업에 둘이 있다. 하나는 정업, 둘은 부정업이다. 정업조차 잘 참회하면 반드시 소멸한다. 하물며 부정업이랴」라는 뜻을 말씀하시어, 정업이라 해도 묘법의 힘으로 바꾸어 악업을 소멸하고 수명을 늘일 수 있다고 격려하셨다(985쪽).
四重사중
사중금계(四重禁戒)의 줄임으로, 사바라이계(四波羅夷戒)라고도 한다. 승려가 지켜야 할 구족계 가운데 살생 · 투도 · 사음 · 망어의 네 무거운 죄를 금한 것이다. 이를 범하면 승려의 자격을 잃고 교단에서 쫓겨난다.
五逆罪오역죄
도리를 거스름이 매우 심한 다섯 가지 무거운 죄.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악업이므로 무간업이라고도 한다. 삼승통상의 오역 · 대승별도의 오역 · 동류의 오역 · 제바의 오역 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구사론』 권17에 설하는 삼승통상의 오역으로, 아버지를 죽임 · 어머니를 죽임 · 아라한을 죽임 · 부처의 몸에서 피를 냄 · 화합승을 깨뜨림이다.
発露발로
숨긴 죄를 드러내어 고백하는 것. 참회의 첫걸음이다.
護惜建立の心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
정법을 아끼고 지키며(護惜) 세상에 세우려는(建立) 마음. 일천제는 이 마음이 길이 없다. 거꾸로 말하면 이 마음이 정법을 지니는 사람의 요건이다.
毀呰・軽賎헐뜯고 업신여김
정법을 헐뜯어 깎아내리고 가볍게 여겨 천시하는 것이다.
大果報큰 과보
일천제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보시하면 얻는 큰 복덕의 결과. 경의 본의는 보시를 권하는 데보다 일천제를 가려내는 데 있다.

이 장의 자리 — 일천제란 누구인가

앞 장에서 주인은 천하 안태 · 국토 안온을 이루는 방법이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장은 그것을 밝히기에 앞서, 방법의 사람 곧 일천제란 어떤 사람인가, 또 석존은 일천제를 어떻게 대하라고 가르치셨는가를 열반경을 인용하여 밝힌다.

열반경에 따르면 일천제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승니 · 남녀를 가리지 않고 거칠고 악한 말을 내어 정법을 비방하고, 무간지옥에 떨어질 무거운 죄를 지으면서도 길이 고치지 않고 마음에 참회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사중 · 오역을 범하고 그 죄를 스스로 알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도 참회도 없으며, 정법을 지키려는 마음도 없이 오히려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이다.

첫째 부류
  • 사부대중 누구든
  • 거칠고 악한 말로 정법을 비방
  • 무거운 업을 지음
  • 길이 고치지 않고 마음에 참회가 없음
둘째 부류
  • 사중을 범하고 오역죄를 지음
  • 스스로 알면서도 두려움과 참회가 없고 드러내어 고백하지 않음
  • 정법을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이 없음
  • 헐뜯고 업신여겨 말에 허물이 많음
공통정법을 비방하고 뉘우치지 않음「거칠고 악한 말을 내어 정법을 비방하고 이 무거운 업을 지으면서도 길이 고치지 않고 마음에 참회가 없다」粗悪の言を発し正法を誹謗し是の重業を造つて永く改悔せず心に懺悔無らん
도표 5 · 열반경이 정의한 일천제

두 부류에 공통되는 것은 두 가지다. 정법을 비방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중 · 오역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일천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으며 나아가 정법을 헐뜯을 때 「일천제의 길로 나아간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었어도 정법을 믿고 참회한다면 일천제가 아니다. 이 점이 이 장 뒤에서 다룰 참회의 법문과 이어진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말법의 정법은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다. 그러므로 말법에서 정법을 깨뜨리는 일천제란, 넓게는 이 정법을 믿지 않고 비방하는 사람이며, 그 가운데서도 정법을 계속 헐뜯고 그릇된 뜻에 집착하여 많은 사람을 그릇 이끄는 승려야말로 열반경이 가리키는 일천제에 가장 깊이 해당한다고 본다. 입정안국론이 법연과 그 일문을 문제 삼은 것도 그들이 승려로서 나라 안의 사람들을 법화경에서 떠나게 했기 때문이다.

「파계란 일천제다」 — 경에 따라 다른 계

「파계란 이른바 일천제이니라.」 파계란 계를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계의 내용은 가르침에 따라 다르다. 불교 안에서도 소승교 · 권대승교 · 실대승교로 가르침의 깊고 얕음, 부처의 경애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 계가 뜻하는 실체가 다르다.

계의 뜻 — 방비지악

천태대사는 『보살계의소(菩薩戒義疏)』에서 계의 뜻을 이렇게 풀었다. 범어 시라(尸羅)를 번역하여 계라 한다. 계란 무슨 뜻인가. 그 뜻은 「경계한다(警)」로 새긴다. 몸 · 입 · 뜻의 삼업을 일깨워 채찍질하고, 그릇된 인연을 떠나 그 원인을 밝히기 때문이다. 옛 전승에서는 「그릇됨을 막고 악을 금하는 것(防非禁悪)」으로 계를 풀었다. 그런데 계라는 말은 선에도 악에도 통하며 율의(律儀)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널리 들어 계의 뜻을 풀 수는 없으나, 경론에서는 대개 선한 계를 따라 그 뜻에 맞추어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선악에 통한다」는 것은, 예컨대 어떤 무리에게는 그 무리 나름의 규율이 있다는 뜻이다. 불법에서는 「그릇됨을 막고 악을 멈춘다(防非止悪)」는 본래의 뜻을 취하여 계를 풀이한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 지니면 번뇌 · 업 · 고의 원인을 떠나 맑고 서늘한 결과를 얻으므로 「청량(清涼)」이라 번역하고, 악을 금하고 그릇됨을 막으므로 「금(禁)」이라 풀며, 악을 멈추고 선을 얻으므로 「지득(止得)」이라 옮기고, 즐겨 선한 길을 행하여 스스로 방일에 흐르지 않으므로 「성선(性善)」이라고도 푼다.

소승의 계 · 대승의 계 · 법화경의 계

석존의 가르침 가운데 소승교는 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소승의 계는 가장 수가 많고 번잡하다. 석존이 계를 중시한 배경에는 당시 인도 민중의 풍조가 있었다. 당시 인도에는 향락주의의 경향이 강하여 무엇보다 이 풍조를 깨뜨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재가의 남녀에게 오계 · 팔재계, 출가에게 십계, 또 구족계라 하여 비구에게 250계, 비구니에게 500계, 나아가 3천의 위의와 8만의 세행(細行) 등이다.

이에 대해 대승교에서는 민중을 건지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실천 수행이 중심이 되고, 소승의 계는 이 실천 속에 포함된다고 설한다. 그 내용으로는 『범망경』의 십중금계와 48경계, 열반경의 보살 오종계 · 사리이계 · 경중이종계 · 십종계, 『보살지지경』 등의 구종계, 『대지도론』의 팔율의계와 이종 · 삼종계, 화엄경의 팔종계와 십종계 등이 있다. 또 여러 대승경에 두루 설하는 계로 삼취정계(三聚浄戒)가 있다.

삼취정계의 첫째는 섭율의계(摂律儀戒)로, 일체의 율의를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다. 「율」은 법으로 금하는 것, 「의」는 의례의 규범이다. 소승의 오계 · 팔재계 · 십계 · 250계 · 500계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둘째는 섭선법계(摂善法戒)로, 보살이 행하는 계는 팔만사천의 법문과 일체의 선법을 거두어 모은다는 것이다. 이로써 섭율의계의 몸 · 입 · 뜻의 선한 행위에 더하여 문 · 사 · 수의 삼혜와 육바라밀 등을 모두 무상보리에 회향하게 된다. 셋째는 섭중생계(摂衆生戒)로, 보살의 사홍서원이다. 이로써 보살의 자 · 비 · 희 · 사 등 일체를 거두어들인다.

다음으로 법화경의 계에는 일승계 · 여래의 실 · 옷 · 자리의 계 · 사안락행의 계 · 보현의 사종계의 넷이 있다. 일승계란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이다. 여래의 실 · 옷 · 자리의 계란 법사품에 설한 「대자비를 실로 삼고, 부드럽고 참는 것을 옷으로 삼으며, 제법의 공을 자리로 삼는 것」으로, 의 · 좌 · 실의 삼궤(三軌)라고도 한다. 보현의 사종계란 보현보살권발품에 「첫째는 제불에게 호념받고, 둘째는 여러 덕의 근본을 심고, 셋째는 정정취에 들고, 넷째는 일체중생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라 한 네 가지 법을 이루는 것이다.

  1. 소승의 계오계 · 팔재계 · 십계 · 비구 250계 · 비구니 500계 · 3천 위의 · 8만 세행(가장 많고 번잡)
  2. 대승의 계범망경 십중금계 · 48경계 · 삼취정계(섭율의계 · 섭선법계 · 섭중생계) 등(실천 속에 소승의 계를 포함)
  3. 법화경의 계일승계 · 여래의 실 · 옷 · 자리의 계 · 사안락행의 계 · 보현의 사종계
  4. 말법의 계수지즉지계묘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곧 계를 지니는 것
가르침이 깊을수록 행법은 간략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수행할 수 있다
「이 다섯 글자 안에 어찌 만 가지 계의 공덕을 거두지 않았겠는가」此の五字の内に豈万戒の功徳を納めざらんや(「교행증어서」 1282쪽)
도표 6 · 가르침에 따라 다른 계

이렇게 석존의 불법 각 가르침에 설한 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가르침의 내용이 낮을수록 계가 번다하고 엄하다. 따라서 그 계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신분으로도 특수한 이들에 한정되고, 수에서도 매우 제한된다. 오히려 소승의 250계 · 500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실행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가르침이 뛰어날수록 번잡한 행법은 지엽말절이 되어 비중이 가벼워지고 필요 없게 된다. 도리어 근본을 가리는 해가 되기도 한다. 실천이 간략해지면 그만큼 어떤 처지의 사람이든 수행할 수 있다. 곧 넓은 범위의 중생을 건질 수 있으므로 대승이라 하는 것이다.

말법의 계는 수지즉지계

그렇다면 말법에서는 무엇을 계로 삼는가. 「수지즉지계(受持即持戒)」, 곧 묘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그대로 계를 지니는 것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본문의 본존을 받아 지니는 데 다한다고 푼다. 「교행증어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此の法華経の本門の肝心・妙法蓮華経は三世の諸仏の万行万善の功徳を集めて五字と為せり、 此の五字の内に豈万戒の功徳を納めざらんや、但し此の具足の妙戒は一度持つて後・行者破らんとすれど破れず 是を金剛宝器戒とや申しけんなんど立つ可し、三世の諸仏は此の戒を持つて法身・報身・応身なんど何れも無始無終の仏に成らせ給ふ

이 법화경 본문의 간심인 묘법연화경은 삼세 제불의 만행 만선의 공덕을 모아 다섯 글자로 삼은 것이다. 이 다섯 글자 안에 어찌 만 가지 계의 공덕을 거두지 않았겠는가. 다만 이 모든 것을 갖춘 묘계(妙戒)는 한 번 지닌 뒤에는 행자가 깨뜨리려 해도 깨지지 않는다. 이를 금강보기계(金剛宝器戒)라 하는 것이라고 세울 것이다. 삼세의 제불은 이 계를 지녀서 법신 · 보신 · 응신 등 모두 무시무종의 부처가 되셨다.

「교행증어서」, 1282쪽

『어의구전』에는

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り権教は無得道・法華経は真実と修行する是は戒なり防非止悪の義なり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고, 권교는 득도가 없고 법화경은 진실이라고 수행하는 것, 이것이 계이며 방비지악의 뜻이다.

『어의구전』, 744쪽

라고 하셨고, 「다이가쿠사부로전어서」에는

設い世間の諸戒之を破る者なりとも堅く大小・権実等の経を弁えば世間の破戒は仏法の持戒なり

설령 세간의 여러 계를 깨뜨린 자라 해도 굳게 대소 · 권실 등의 경을 분별한다면 세간의 파계는 불법의 지계이다.

「다이가쿠사부로전어서」, 1205쪽

라고 하셨다. 또 「사신오품초」에는

問うて云く末代初心の行者何物をか制止するや、答えて曰く檀戒等の五度を制止して一向に南無妙法蓮華経と称せしむるを一念信解初随喜の気分と為すなり是れ則ち此の経の本意なり

묻는다. 말대의 초심 행자에게는 무엇을 제지하는가. 답한다. 보시 · 지계 등의 다섯 바라밀을 제지하고 오로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게 하는 것을 일념신해 · 초수희의 기분으로 삼는다. 이것이 곧 이 경의 본의이다.

「사신오품초」, 340쪽

라고 하셨다.

위의 여러 글에서, 말법의 계는 오직 하나, 삼대비법의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임이 분명하다. 초심의 행자에게는 보시 · 지계 등의 다섯 바라밀을 제지한다. 그러므로 『무량의경』에는 「아직 육바라밀을 수행하지 못했다 해도 육바라밀이 자연히 앞에 있다」고 설한다. 여기서 「다섯 바라밀」을 제지한다고 하여 반야바라밀을 빼는 것은, 반야(지혜)는 「믿음으로 지혜를 대신한다(以信代慧)」는 믿음으로서 말법의 수행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말법에서는 같은 「사신오품초」에 전교대사의 말을 인용하여 「말법 가운데 지계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괴이한 일이다. 저잣거리에 범이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누가 믿겠는가」(341쪽)라고 하셨듯이, 지계하는 자는 있을 수 없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 이를 「말법무계(末法無戒)」라 한다.

이 말법무계란 제목만 부르면 나쁜 짓을 해도 좋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남묘호렌게쿄의 수행으로 육바라밀의 덕과 여러 계가 자연히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所詮己心と仏身と一なりと観ずれば速かに仏に成るなり、故に弘決に又云く『一切の諸仏己心は仏心と異ならずと観し給うに由るが故に仏に成ることを得る』と已上、此れを観心と云う実に己心と仏心と一心なりと悟れば臨終を礙わる可き悪業も有らず生死に留まる可き妄念も有らず、一切の法は皆是れ仏法なりと知りぬれば教訓す可き善知識も入る可らず思うと思い言うと言い為すと為し儀いと儀う行住坐臥の四威儀の所作は皆仏の御心と和合して一体なれば過も無く障りも無き自在の身と成る此れを自行と云う

결국 자기 마음과 부처의 몸이 하나라고 관하면 속히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홍결』에 또 「일체의 제불은 자기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관하신 까닭에 부처가 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관심이라 한다. 참으로 자기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한마음이라고 깨달으면 임종을 가로막을 악업도 없고 생사에 머물게 할 망념도 없다. 일체의 법이 모두 불법이라고 알면 가르쳐 줄 선지식도 필요 없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하는 것, 몸가짐, 행 · 주 · 좌 · 와의 네 위의의 모든 행동이 다 부처의 마음과 화합하여 한 몸이 되므로 허물도 없고 장애도 없는 자재한 몸이 된다. 이것을 자행이라 한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9쪽

이 글의 「자기 마음」은 우리의 신심의 일심 일념이며, 「부처의 몸」은 본존이다. 본존을 향해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여 경지명합하는 것이 말법의 관심이다. 수지즉관심이며 또한 수지즉지계가 된다.

이처럼 말법에서는 정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지계이므로, 정법을 받아 지니지 않고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 없이 비방하는 일천제를 파계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파계란 일단은 신심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통하지만, 다시 깊이 보면 일체중생의 선한 마음을 깨뜨리고 불행을 가져오는 그릇된 가르침의 지도자야말로 파계 가운데의 파계라는 것이 대성인 불법의 해석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열반경이 「파계란 일천제다」라고 한 것은 계의 근본이 조목이 아니라 정법에 대한 태도에 있음을 보인다. 말법에서는 묘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곧 지계(수지즉지계)이며, 정법을 비방하고 뉘우치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은 파계다.

「그 나머지에 보시하면」 — 경의 본의

「그 밖의 어느 곳에 있는 일체에 보시한다면 모두 찬탄할 만하며 큰 과보를 얻으리라.」 일천제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보시한다면 모두 그 행위를 찬탄할 것이며, 그 행위로 큰 과보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열반경의 이 글은 보시를 권하는 데 본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천제, 곧 방법을 가려 배제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설한 것이다. 그로써 선량한 사람들이 방법 · 일천제가 되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며, 또 이미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인을 지은 방법 · 일천제의 사람도 뉘우쳐 고치게 하여 그 죄를 가볍게 해 주려는 대자비다. 「일천제를 제외하고 보시하라」는 말은 일천제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보시라는 공양의 길을 통해 일천제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려는 가르침이다. 이 「보시를 멈춘다」는 방법이 제7단 전체의 결론이 되고, 다음 단에서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로 분명히 밝혀진다.

법의 보시와 재물의 보시

본래 보시에는 재물의 보시(財施)와 법의 보시(法施)가 있다. 재물의 보시란 물품을 주는 것이고, 법의 보시란 정법으로 중생을 건지는 행위다.

말법의 중생은 탐 · 진 · 치 삼독이 치성한 중생이라는 것이 부처의 예언이다. 참으로 그대로 욕심 많고 성내기 쉬우며 비뚤어지기 쉽고 어리석다. 만약 이런 중생을 재물의 보시만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큰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의식주를 채워 주면 다음에는 즐길 거리를 바라게 되고, 그것이 채워지면 더 값진 것을 바라, 그 욕망은 끝없이 넓어져 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것과 이웃이 받은 것을 견주어 비뚤어지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은혜를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준 사람을 원망하고 성내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물질의 보시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법의 보시에는 한계가 없다. 정법의 신심을 가르침으로써 병든 사람은 건강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넉넉해지며,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은 바른 마음을 되찾는다. 그것은 본인이 묘법을 부르고 실천함으로써 경지명합하여 큰 생명력과 복운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나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힘과 지혜와 복운이 길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 곧 절복은 가장 위대한 보시행이라 할 수 있다. 그 절복은 삼세 시방의 부처가 모두 찬탄하는 것이며, 행하는 사람 스스로 큰 과보를 얻는 원천이다.

여기서 일천제인 방법의 사람에게 보시를 금하신 것은 물질의 보시이지 법의 보시가 아니다. 오히려 일천제에게는 물질의 보시를 금하는 일이 실은 법의 보시가 된다. 공양이 끊어짐으로써 방법의 사람이 자기 가르침의 잘못을 돌아보게 되고, 그 생명에서 불행의 원인을 끊어 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일천제에게는 그 그릇됨을 굳게 깨뜨려 보이는 것이 가장 높은 법의 보시다.

참회 — 실상을 생각하면 죄는 서리와 이슬처럼

일천제의 조건은 「길이 고치지 않고 마음에 참회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참된 참회, 불법의 참회란 어떤 것인가. 참회라는 말과 그 의례는 본래 불법에 있는 것이다. 불법의 참회는 누가 남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실상을 깨달아 죄업을 스스로 녹여 내는 것이다.

법화경의 결경인 『관보현보살행법경(普賢経)』에 이렇게 설한다.

一切の業障海は、皆妄想より生ず。若し懺悔せんと欲せば、端坐して実相を思え、衆罪は霜露の如し、慧日能く消除す

일체의 업장의 바다는 모두 망상에서 생긴다. 만약 참회하고자 한다면 단정히 앉아 실상을 생각하라. 뭇 죄는 서리와 이슬과 같아서 지혜의 해가 능히 녹여 없앤다.

『관보현보살행법경』

실상이란 생명의 본질, 우주의 극리이며,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남묘호렌게쿄다. 대성인께서는 이 대법을 본존으로 나타내셨다. 곧 경문의 마음은,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든 본존을 향해 단정히 앉아 진지하게 제목을 부른다면 죄는 해가 서리와 이슬을 녹이듯 남김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 대장엄참회(大荘厳懺悔)라 한다.

위의 보현경 글에 대해 『어의구전』에는 이렇게 설해져 있다.

衆罪とは六根に於て業障降り下る事は霜露の如し、然りと雖も慧日を以て能く消除すと云えり、慧日とは末法当今・日蓮所弘の南無妙法蓮華経なり、慧日とは仏に約し法に約するなり、釈尊をば慧日大聖尊と申すなり法華経を又如日天子能除諸闇と説かれたり、末法の導師を如日月光明等と説かれたり

뭇 죄란 육근에 업장이 내려앉는 것이 서리와 이슬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혜의 해로써 능히 녹여 없앤다고 하였다. 지혜의 해란 말법 지금 니치렌이 넓히는 남묘호렌게쿄이다. 지혜의 해란 부처에 맞추고 법에 맞춘 말이다. 석존을 혜일대성존이라 하고, 법화경을 또 「해와 같은 천자가 능히 모든 어둠을 없앤다」고 설하였으며, 말법의 도사를 「해와 달의 광명과 같다」고 설하였다.

『어의구전』, 786쪽

곧 법에 맞추면 남묘호렌게쿄, 사람에 맞추면 대성인이며, 그 인법일개의 본존이야말로 일체중생의 업장을 녹이는 지혜의 해라는 말씀이다.

지도자가 행할 다섯 가지 참회

보현경은 이에 더하여, 찰리(刹利, 왕족)와 거사, 곧 민중의 지도자가 행해야 할 다섯 가지 참회의 법을 설한다.

이 가운데 셋째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그릇되게 굽히지 않는다(正法治国不邪枉人民)」에 대해 『어의구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末法の正法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此の五字は一切衆生をたぼらかさぬ秘法なり、正法を天下一同に信仰せば此の国安穏ならむ、されば玄義に云く『若し此の法に依れば即ち天下泰平』と、此の法とは法華経なり法華経を信仰せば天下安全たらむ事疑有る可からざるなり

말법의 정법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다. 이 다섯 글자는 일체중생을 속이지 않는 비법이다. 정법을 천하가 한결같이 신앙한다면 이 나라는 안온할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현의』에 「만약 이 법에 의지하면 곧 천하가 태평하다」고 하였다. 이 법이란 법화경이다. 법화경을 신앙하면 천하가 안전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의구전』, 786쪽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곧 「천하태평」이라는 이 글은, 제1장 객이 바란 「천하태평 · 국토안온」에 대한 경문의 대답이기도 하다. 참회는 개인의 죄를 녹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도자가 정법을 공경하고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나라 전체의 참회가 되고, 그것이 천하태평의 길이 된다. 대성인 불법의 생명 철학은 이렇게 한 사람의 금생에서 나라와 미래에까지 이어지는 평화의 길을 연다.

제7단 제4장 선예국왕의 방법 단절을 보이다
어서 27쪽 13행~28쪽 3행 · 第七段 第四章 仙予国王の謗法断絶を示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7쪽 13행 ~ 28쪽 3행
本文 · 어서 원문

又云く「我れ往昔を念うに閻浮提に於て大国の王と作れり名を仙予と曰いき、大乗経典を愛念し敬重し其の心純善に粗悪嫉燐有ること無し、善男子我爾の時に於て心に大乗を重んず婆羅門の方等を誹謗するを聞き聞き已つて即時に其の命根を断ず、善男子是の因縁を以て是より已来地獄に堕せず」と、 又云く「如来昔国王と為りて菩薩の道を行ぜし時爾所の婆羅門の命を断絶す」と、 又云く「殺に三有り謂く下中上なり、下とは蟻子乃至一切の畜生なり唯だ菩薩の示現生の者を除く、下殺の因縁を以て地獄・畜生・餓鬼に堕して具に下の苦を受く、何を以ての故に是の諸の畜生に微善根有り是の故に殺す者は具に罪報を受く、中殺とは凡夫の人より阿那含に至るまで是を名けて中と為す、是の業因を以て地獄・畜生・餓鬼に堕して具に中の苦を受く・上殺とは父母乃至阿羅漢・辟支仏・畢定の菩薩なり阿鼻大地獄の中に堕す、善男子若し能く一闡提を殺すこと有らん者は 則ち此の三種の殺の中に堕せず、善男子彼の諸の婆羅門等は一切皆是一闡提なり」已上。

풀이

또 (열반경 성행품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 옛날을 생각하니, 염부제에서 대국의 왕이 되었는데 이름을 선예(仙予)라 하였느니라. 대승경전을 사랑하고 공경하여 그 마음이 순수하고 착하였으며, 거칠고 악하거나 시기하고 인색함이 없었느니라. 선남자여, 나는 그때 마음에 대승을 중히 여겨, 바라문이 방등(대승)을 비방하는 것을 듣고, 듣고 나서 곧바로 그 목숨을 끊었느니라. 선남자여, 이 인연으로 그로부터 지금까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느니라」 하였고, 또 (범행품에) 이르기를, 「여래는 옛날 국왕이 되어 보살의 도를 행할 때 그만큼의 바라문의 목숨을 끊었느니라」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살생에 셋이 있으니 하 · 중 · 상이니라. 하란 개미 새끼로부터 일체의 축생까지이니, 다만 보살이 시현하여 태어난 것은 제외하느니라. 하살(下殺)의 인연으로 지옥 · 축생 · 아귀에 떨어져 하의 괴로움을 갖추어 받느니라. 어찌하여 그런가. 이 모든 축생에게도 작은 선근이 있으므로 죽이는 자는 그 죄보를 갖추어 받느니라. 중살(中殺)이란 범부의 사람으로부터 아나함에 이르기까지를 중이라 이름하느니라. 이 업인으로 지옥 · 축생 · 아귀에 떨어져 중의 괴로움을 갖추어 받느니라. 상살(上殺)이란 부모 내지 아라한 · 벽지불 · 필정(畢定)의 보살이니, 아비대지옥 가운데 떨어지느니라. 선남자여, 만약 일천제를 죽이는 일이 있다면 이 세 가지 살생 가운데 들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저 모든 바라문들은 일체가 다 일천제이니라」 하였느니라.

선예국왕의 이야기는 석존이 과거세에 보살로서 수행하던 때의 일로 열반경에 설해진 것이다. 입정안국론은 다음 단에서 「석존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30쪽)고 하여, 말법의 방법 대치가 무력이 아니라 보시를 멈추는 것임을 밝힌다.

어구 풀이

仙予선예
선예국왕. 석존이 과거세에 보살로서 수행하던 모습의 하나다. 열반경 성행품에 「석존이 옛날 염부제에서 대국의 왕으로 태어나 이름을 선예라 하였다. 그때 바라문이 정법을 비방하는 것을 듣고 즉시 죽였으나, 이 인연으로 그 뒤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설한다. 같은 열반경에는, 어떤 나라에 오직 젖약만 쓰고 병의 본체를 보지 못하는 의사가 있었는데 병의 근원을 잘 아는 새 의사가 나타나자 국왕이 옛 의사를 내쫓고 앞으로 젖약을 먹이지 말라고 엄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개목초」에서는 『마하지관』과 『지관보행전홍결』의 인용을 통해 이 이야기들을 절복을 설하는 글로 들고 있다.
閻浮提염부제
수미산 남쪽 바다에 있다는 대륙으로, 사람이 사는 세계를 가리킨다.
方等방등
여기서는 대승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바라문이 대승의 실리(實理)를 비방한 것을 말한다.
命根を断ず목숨을 끊다
경문 그대로의 말이다. 이 말을 말법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다음 단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가 정하며, 니치칸 상인은 이를 「방법의 마음을 끊고 방법의 행위를 죽이라」는 뜻으로 풀었다.
是より已来地獄に堕せず그로부터 지금까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
정법을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護惜建立)이 그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선근이 되었다는 뜻이다.
菩薩の示現生보살의 시현생
보살이 중생을 건지기 위해 서원하여 축생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사람과 인연을 맺고 그 사람을 건지기 위해 동물의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석존이 옛날 기근의 세상에 눈이 붉은 큰 물고기가 되어 다섯 목수에게 먹혔는데, 그로써 인연을 맺은 이들이 성도 후 처음 교화한 아야교진여 · 알비 · 발제 · 십력가섭 · 마하남구리의 다섯 비구였다고 전한다.
阿那含아나함
범어 아나가민(anāgāmin)의 음사. 성문 수행의 네 계위 가운데 셋째다. 이 성자는 욕계 아홉 품의 미혹을 끊어 다시는 욕계에 돌아와 태어나지 않으므로 「불환(不還)」이라 번역한다.
辟支仏벽지불
십계 가운데 연각. 범어 프라티에카붓다(Pratyeka-buddha)의 음사로, 독각 · 인연각이라고도 하며 「저마다 홀로 깨달은 이」를 뜻한다. 연각은 육도윤회의 원인인 번뇌를 끊어 죽은 뒤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목표로 한다. 대승의 입장에서는 이를 회신멸지(灰身滅智)라 하여 성불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관심의 본존초」에는 「세간의 무상은 눈앞에 있다. 어찌 인계에 이승계가 없겠는가」라 하여, 인계에 갖추어진 성문계 · 연각계가 무상이라는 깨달음의 일부를 알아차리는 데서 엿보인다고 하셨다. 「십법계명인과초」에는 연각에 부행독각(部行獨覺)과 인유독각(麟喩獨覺)의 두 종류가 있다고 설하셨다.
畢定の菩薩필정의 보살
수행을 마쳐 행위불퇴(行位不退)에 안주한 보살이다. 「필정」은 필경결정(畢竟決定)의 뜻으로 불퇴를 말한다. 「십법계명인과초」에는 「범부로서 이 계를 지니는 것을 신위(信位)의 보살이라 한다. 그러나 1겁 · 2겁 내지 10겁 동안은 육도에 빠지고, 10겁을 지나 불퇴의 지위에 들어 길이 육도의 괴로움을 받지 않는 것을 불퇴의 보살이라 한다」는 뜻이 설해져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필정은 어디까지나 행위불퇴이며, 염불퇴(念不退)인 초주 이상의 보살은 제외한다. 초주 이상의 보살은 일분의 부처여서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阿鼻大地獄아비대지옥
팔대지옥 가운데 가장 아래의 무간지옥이다. 제8장의 어구 풀이에서 자세히 다룬다.
一闡提を殺す일천제를 죽이다
경문의 말이다. 일천제는 정법을 비방하고 뉘우치지 않아 선근이 끊어진 자이므로, 경은 그것을 세 가지 살생의 등급 밖에 둔다. 이 경문이 보이려는 것은 살생의 허용이 아니라 정법 비방의 죄가 축생 · 범부 · 성자를 해치는 죄보다도 무겁다는 데 있다.

이 장의 자리 — 경문이 보이는 방법의 무게

이 장은 앞 장에 이어 열반경의 글을 인용한다. 앞 장이 「일천제에게는 보시하지 말라」고 했다면, 이 장은 석존 자신의 과거세 이야기를 들어 정법 비방이 얼마나 무거운 죄인가를 더욱 날카롭게 보인다. 방법의 사람을 다스리라는 결론의 뒷받침으로서, 방법이 축생 · 범부 · 성자를 해치는 일보다 무겁다는 것을 경문으로 증명하신 것이다. 방법이 얼마나 미워해야 할 것이며 그 끼치는 해독이 얼마나 큰지, 이 한 가지로도 분명하다.

이 경문은 불법을 따뜻한 자애의 가르침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에게는 놀라운 설법일 것이다. 「이것이 정말 석존의 말씀인가」 하고 귀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먼저 자기가 지녀 온 불법관이 겉만 본 것이었음을 알고, 부처가 지닌 깊은 철리와 힘찬 지도성을 겸허하게 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장을 읽을 때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선예국왕의 이야기는 석존이 과거세에 보살로서 수행하던 때의 일이며, 열반경 스스로 그것을 「옛날」의 일로 설한다. 둘째, 대성인께서는 이 경문들을 모두 인용하신 뒤 다음 단에서 「석존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고 하여, 말법에서 방법을 다스리는 법도는 무력이 아니라 보시를 멈추는 것이라고 정하셨다. 이 장의 경문은 그 결론에 이르는 길의 한 단계이며, 경문이 보이려는 핵심은 「살생의 허용」이 아니라 「정법 비방의 죄의 무게」다.

재난의 근원으로서의 방법

이미 많은 경문을 들어 거듭 논해 온 대로, 삼재칠난의 근본 원인은 이 사회에 그릇된 법, 그릇된 가르침이 널리 퍼진 데 있다. 기근 · 역병 · 전란 · 수해 · 가뭄 · 냉해 등 천재와 인재로 죽어 간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이 묘사한 정가 · 정원의 참상 — 소와 말이 거리에 쓰러지고 해골이 길에 가득한 모습 — 이 그것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가고 민중의 생명력을 쇠하게 하며 국토를 황폐하게 만든 근원은 정법을 비방하는 승려들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마(魔)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그 마의 작용을 다스려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만드는 것은 다스리는 사람의 책무다. 열반경이 이토록 엄한 말을 쓰는 것은 방법이 끼치는 해독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다.

간효의 엄한 말과 그 본뜻

「호렌초」에는 이 입정안국론의 요점을 대성인께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보이셨다.

彼の状に云く詮取此の大瑞は他国より此の国をほろぼすべき先兆なり、禅宗・念仏宗等が法華経を失う故なり、彼の法師原が頚をきりて鎌倉ゆゐの浜にすてずば国正に亡ぶべし等云云

그 글에 이르기를, 요컨대 이 큰 상서는 다른 나라가 이 나라를 멸망시킬 전조이다. 선종 · 염불종 등이 법화경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저 법사들의 목을 베어 가마쿠라 유이가하마에 버리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호렌초」, 1053쪽

또 「선시초」에는 문영 8년(1271) 9월 12일 다쓰노구치 법난 직전,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를 향해 하신 말씀을 이렇게 회고하셨다.

去し文永八年九月十二日申の時に平左衛門尉に向つて云く日蓮は日本国の棟梁なり予を失なうは日本国の柱橦を倒すなり、只今に自界反逆難とてどしうちして他国侵逼難とて此の国の人人・他国に打ち殺さるのみならず多くいけどりにせらるべし、建長寺・寿福寺・極楽寺・大仏・長楽寺等の一切の念仏者・禅僧等が寺塔をばやきはらいて彼等が頚をゆひのはまにて切らずば日本国必ずほろぶべしと申し候了ぬ

지난 문영 8년 9월 12일 신시(申時)에 헤이노사에몬노조를 향해 말하기를, 니치렌은 일본국의 동량이다. 나를 잃는 것은 일본국의 기둥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머지않아 자계반역난이라 하여 동족끼리 싸우고, 타국침핍난이라 하여 이 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맞아 죽을 뿐 아니라 많이 사로잡힐 것이다. 겐초사 · 주후쿠사 · 고쿠라쿠사 · 대불 · 조라쿠사 등 일체의 염불자 · 선승들의 절과 탑을 불태우고 그들의 목을 유이가하마에서 베지 않으면 일본국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시초」, 287쪽

위의 글에서 보듯이 대성인 자신도 열반경의 글에 의거하여 위정자를 향해 지극히 엄한 말로 간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방법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며, 사람을 죽이는 일을 인정하신 것이 아니다. 대성인께서 실제로 위정자에게 요구하신 것은 방법의 사찰에 대한 귀의와 공양을 멈추는 일이었다. 앞 장에서 본 「호조도키무네에의 어장」의 「서둘러 겐초사 · 주후쿠사 · 고쿠라쿠사 · 다호사 · 조코묘사 · 대불전 등에 대한 귀의를 멈추시라」가 그 구체적인 요구다. 또 대성인 스스로 이 말씀을 하신 뒤 일어난 것은 대성인 자신에 대한 박해, 곧 다쓰노구치 법난과 사도 유배였다. 대성인 당시 실제로 무력을 쥐고 휘두른 쪽은 정법을 박해하는 쪽이었다.

부처의 자비는 어머니의 자애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엄한 사랑에도 비유된다. 일체중생을 자애하기 때문에 악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그러므로 대성인께서는 이 뒤의 글에서 「석존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니치칸 상인은 「목을 베라」는 대치실단(對治悉檀), 「보시를 멈추라」는 위인실단(爲人悉檀)에 맞춘 것이라고 가르쳤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곧 그 뜻은 방법의 마음을 끊어 내고 방법의 행위를 죽이라는 것이다.

  1. 석존 이전(과거세)선예국왕 · 유덕왕의 이야기경문은 「그 죄를 베었다」고 설한다
  2. 석존 이후(능인 이후의 경설)「그 보시를 멈춘다」방법에 공양하지 않는 것
  3. 니치칸 상인의 풀이「목을 베라」는 대치실단 · 「보시를 멈추라」는 위인실단방법의 마음을 끊고 방법의 행위를 죽이라는 뜻
다음 단의 결론「석존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釈迦の以前仏教は其の罪を斬ると雖も能忍の以後経説は則ち其の施を止む(30쪽)
도표 7 · 「죄를 베다」에서 「보시를 멈추다」로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선예국왕의 이야기는 정법 비방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이는 경증이다. 말법에서 방법을 끊는 법도는 무력이 아니라 「그 보시를 멈추는 것」이며, 끊어야 할 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방법의 마음과 행위다.

살생의 세 등급과 방법의 무게

「이 인연으로 그로부터 지금까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 석존이 과거에 선예국왕으로서 보살의 도를 행하던 때, 정법을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이 그 뒤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선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 인용되는 경문은 불법에서 살생의 죄에 세 가지 구별이 있음을 설한다. 하살이란 개미 새끼로부터 소 · 돼지 · 맹수에 이르는 일체의 축생을 죽이는 죄다. 이들에게도 미미하나마 선근이 있으므로 죽인 자는 그 정도에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계의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나 죽인 대상의 선근이 미미하므로 하의 괴로움, 곧 가벼운 괴로움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살이란 범부로부터 소승의 깨달음인 성문 사과 가운데 아나함까지의 사람을 죽이는 죄다. 앞의 축생에 비해 이 사람 · 천 · 성문의 중생은 훨씬 큰 선근을 지녔으므로 더 큰 괴로움을 받는다.

상살은 성문의 가장 높은 깨달음인 아라한, 벽지불(연각), 불퇴위의 보살, 그리고 자기 부모를 죽이는 죄로, 이것은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운 아비지옥에 떨어진다. 그곳에서 1중겁, 곧 20소겁 동안 괴로워해야 한다고 한다. 인수(人壽) 10세에서 백 년에 한 살씩 늘어 8만 세에 이르고 다시 줄어드는 일증일감을 1소겁으로 셈하면, 1소겁만 해도 1,600만 년 가까운 세월이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1. 상살부모 · 아라한 · 벽지불 · 필정의 보살아비대지옥
  2. 중살범부로부터 아나함까지지옥 · 축생 · 아귀에서 중의 괴로움
  3. 하살개미 새끼로부터 일체의 축생(보살의 시현생은 제외)작은 선근이 있으므로 지옥 · 축생 · 아귀에서 하의 괴로움
일천제세 등급 어디에도 들지 않음정법을 비방하여 선근을 끊었기 때문
「일천제를 죽이는 일이 있다면 이 세 가지 살생 가운데 들지 않는다」善男子若し能く一闡提を殺すこと有らん者は則ち此の三種の殺の中に堕せず(정법 비방의 죄가 그만큼 무겁다는 경증)
도표 8 · 열반경의 세 가지 살생

그런데 살생의 과보는 이와 같지만, 정법을 비방하는 자는 이 세 등급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그 까닭을 대성인께서는 「사도어서」에 이렇게 설하셨다.

般泥洹経に云く「当来の世仮りに袈裟を被て我が法の中に於て出家学道し懶惰懈怠にして此れ等の方等契経を誹謗すること有らん当に知るべし此等は皆是今日の諸の異道の輩なり」等云云、此経文を見ん者自身をはづべし今我等が出家して袈裟をかけ懶惰懈怠なるは是仏在世の六師外道が弟子なりと仏記し給へり、法然が一類大日が一類念仏宗禅宗と号して法華経に捨閉閣抛の四字を副へて制止を加て権教の弥陀称名計りを取立教外別伝と号して法華経を月をさす指只文字をかぞふるなんど笑ふ者は六師が末流の仏教の中に出来せるなるべし、うれへなるかなや涅槃経に仏光明を放て地の下一百三十六地獄を照し給に罪人一人もなかるべし法華経の寿量品にして皆成仏せる故なり但し一闡提人と申て謗法の者計り地獄守に留られたりき彼等がうみひろげて今の世の日本国の一切衆生となれるなり

『반니원경』에 「미래의 세상에 거짓으로 가사를 걸치고 나의 법 가운데 출가하여 도를 배우되, 게으르고 나태하여 이러한 방등의 계경을 비방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알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오늘의 여러 외도의 무리이다」라고 하였다. 이 경문을 보는 사람은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출가하여 가사를 걸치고 게으르고 나태한 것은 부처님 재세의 육사외도의 제자라고 부처께서 예언하셨다. 법연의 한 무리, 대일능인의 한 무리가 염불종 · 선종이라 일컬으며 법화경에 사폐각포의 네 글자를 덧붙여 금하고, 권교의 미타 칭명만을 내세우며, 교외별전이라 일컬으며 법화경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저 글자를 세는 것」이라고 비웃는 자는 육사외도의 말류가 불교 가운데 나타난 것이리라. 슬프도다. 열반경에 부처께서 광명을 놓아 땅 밑 136지옥을 비추셨더니 죄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법화경 수량품에서 모두 성불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천제라 하는 방법의 자들만 지옥의 옥졸에게 붙들려 남았다. 그들이 낳아 퍼뜨려 지금 세상 일본국의 일체중생이 되었다.

「사도어서」, 958쪽

곧 정법을 비방하는 무리는 지옥의 중생이라는 단언이다. 그리고 정법 비방으로 지옥에서 받는 괴로움은, 현세에 뉘우친다 해도 천 겁의 오랜 세월에 걸치고, 뉘우치지 않는 자는 무수겁 동안 무간지옥에 잠긴다. 「가책방법멸죄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法華経誹謗の者は心には思はざれども色にも嫉み戯れにも謗る程ならば経にて無けれども法華経に名を寄たる人を軽しめぬれば上の一劫を重ねて無数劫・無間地獄に堕ち候と見えて候、不軽菩薩を罵打し人は始こそ・さありしかども後には信伏随従して不軽菩薩を仰ぎ尊ぶ事・諸天の帝釈を敬ひ我等が日月を畏るるが如くせしかども始め謗りし大重罪消えかねて千劫・大阿鼻地獄に入つて二百億劫・三宝に捨てられ奉りたりき

법화경을 비방하는 자는 마음으로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얼굴빛으로라도 시기하고 장난으로라도 비방하는 정도라면, 경이 아니더라도 법화경에 이름을 건 사람을 업신여기면 위의 1겁을 거듭하여 무수겁 동안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보입니다. 불경보살을 꾸짖고 때린 사람은 처음에는 그러했으나 뒤에는 믿고 굴복하여 따르며 불경보살을 우러러 존경하기를 제천이 제석을 공경하고 우리가 해와 달을 두려워하듯 했지만, 처음에 비방한 큰 중죄가 사라지지 않아 천 겁 동안 대아비지옥에 들어가 2백억 겁 동안 삼보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가책방법멸죄초」, 1125쪽

방법의 중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이 글에 분명하다.

따라서 이처럼 무거운 죄를 짓는 방법을 끊는 일은, 살생의 죄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결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원인을 짓는 일이 된다. 물론 선예국왕의 경우는 바라문을 죽인 것이지만, 석존 이후의 불법에서는 보시를 멈추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또 「죽인다」는 것도 그 육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의 마음을 죽인다는 뜻으로 풀어야 한다. 정법을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으로 방법을 꾸짖고, 방법의 사람이 스스로 그 그릇됨을 깨닫게 하는 것 — 이것이 말법에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선근이 된다.

생명의 존엄 — 불법의 생명관

경문이 「일천제는 세 가지 살생 밖에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의 존엄을 남김없이 설한 것이 불법이다. 이 장의 엄한 경문을 바르게 읽으려면 먼저 불법의 생명관을 알아야 한다.

성선설 · 성악설 · 혼합설

사람은 예부터 저마다의 입장에서 인간 생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겉만 본 것이고 부분만 본 것이어서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크게 나누어 보자.

먼저 성선설에 속하는 것으로 맹자가 있다. 그는 「사람의 본성이 착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사람의 본성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자연히 선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서경』에도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착하다는 것이 성선설의 주장이다.

이와 정반대로 사람은 본래 악한 성품이라는 것이 성악설이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며, 그 착한 것은 꾸민 것(僞)이다. 옛 성왕은 사람의 본성이 악하므로 그 때문에 예의를 일으키고 법도를 만들어 사람의 성정을 바로잡았다」고 했다. 곧 본성이 악하므로 예와 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서로 반대되는 이 두 설의 중간을 취하여, 본래 두 면이 있다고 보는 생각도 예부터 있다. 중국의 양웅(楊雄)이 「사람의 본성은 선악이 섞여 있다. 그 선을 닦으면 선인이 되고 그 악을 닦으면 악인이 된다」고 한 것, 유럽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은 인간을 그 본질이 천사와 짐승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면을 함께 보는 설이 진실에 가깝다. 다만 그것이 왜 그러한가를 생명의 깊은 곳에서부터 밝히려면 불법의 십계론 · 일념삼천론에 구할 수밖에 없다. 「치병대소권실위목」에 대성인께서 이렇게 설하셨다.

善と悪とは無始よりの左右の法なり権教並びに諸宗の心は 善悪は等覚に限る若し爾ば等覚までは互に失有るべし、法華宗の心は一念三千・性悪性善・妙覚の位に猶備われり元品の法性は梵天・帝釈等と顕われ元品の無明は第六天の魔王と顕われたり

선과 악은 무시 이래 좌우의 법이다. 권교와 여러 종의 마음은 선악이 등각에 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등각까지는 서로 허물이 있을 것이다. 법화종의 마음은 일념삼천이며, 성악 · 성선이 묘각의 지위에도 여전히 갖추어져 있다. 원품의 법성은 범천 · 제석 등으로 나타나고, 원품의 무명은 제6천의 마왕으로 나타난다.

「치병대소권실위목」, 997쪽

또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에는

善に背くを悪と云い悪に背くを善と云う、故に心の外に善無く悪無し此の善と悪とを離るるを無記と云うなり、善悪無記・此の外には心無く心の外には法無きなり故に善悪も浄穢も凡夫・聖人も天地も大小も東西も南北も四維も上下も言語道断し心行所滅す

선에 등지는 것을 악이라 하고 악에 등지는 것을 선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이 선과 악을 떠난 것을 무기(無記)라 한다. 선 · 악 · 무기, 이 밖에 마음은 없고 마음 밖에 법은 없다. 그러므로 선악도 정예도, 범부와 성인도, 하늘과 땅도, 크고 작음도, 동서도 남북도 사유도 상하도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사라진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3쪽

라고 하셨다. 여기서 선이라 하고 악이라 하는 것도 생명의 본체와 바깥 세계의 관계의 문제이며, 선악이 하나인 곳이 생명의 실상이라고 밝히셨다. 이 글의 조금 뒤에는

然れば八万四千の法蔵は我身一人の日記文書なり、此の八万法蔵を我が心中に孕み持ち懐き持ちたり我が身中の心を以て仏と法と浄土とを我が身より外に思い願い求むるを迷いとは云うなり此の心が善悪の縁に値うて善悪の法をば造り出せるなり

그러므로 팔만사천의 법장은 내 몸 한 사람의 일기 문서이다. 이 팔만 법장을 내 마음속에 잉태하여 지니고 품어 지니고 있다. 내 몸속의 마음으로 부처와 법과 정토를 내 몸 밖에 있다고 생각하여 바라고 구하는 것을 미혹이라 한다. 이 마음이 선악의 인연을 만나 선악의 법을 지어내는 것이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3쪽

라고 하셨다. 사람의 생명에는 부처의 경애도 지옥의 경애도 다 갖추어져 있으며, 그 어느 것이 나타나는가는 만나는 인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생명을 바른 인연, 곧 정법으로 이끄는 것이 생명을 존중하는 가장 근본의 길이 된다.

생명의 존엄과 인간 존중

생명의 존엄이라 해도 바른 생명관에 선 생명 존중이 아니라면 결국 공허한 이론에 그친다. 성선설에 선 사람도 성악설을 외치는 사람도 생명의 존엄은 반드시 인정한다. 그것은 본능적인 생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럽 철학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이야말로 가치의 실체임을 분명히 말한 것은 독일의 칸트였다. 그는 「인간은 단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세계 안의 일체의 것은 그 자체의 가치를 갖지 않지만, 오직 인간만은 인격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이 인격 안의 인간성을 존중한다는 가치 감정이 존엄이다」라는 뜻을 말했다. 가치 철학의 입장에서 생명이 존엄한 까닭을 설한 말로, 막연한 존엄론보다는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모든 활동은 바꾸어 말하면 그 생명의 작용이다. 그 활동의 성과가 생명의 행복 증진으로 귀착하는 것이 만인 공통의 바람이다. 사람의 생명과 그 활동이 나라를 위해, 기구를 위해, 물질을 위해 희생되는 것은 불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하물며 사람의 지혜와 노력이 사람을 해치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가장 큰 비극이다. 생명의 존엄을 모든 것에 앞세우고 일체의 사상과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야 하며,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사람의 행복도 평화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을 무엇보다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름답다. 그러나 두 사람, 두 무리가 함께 하늘을 일 수 없는 원수가 되었을 때 그 존중이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느냐가 문제다. 무엇으로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다 하는가,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뚜렷한 답이 없다면, 생명 존중은 막연한 마음 위에 놓인 말에 그친다. 그것은 마치 뿌리 없는 나무, 토대 없는 집, 생명 없는 대리석상과 같아서, 보기에는 아름다워도 사람들의 다툼을 풀어 줄 힘이 없고, 일단 큰 싸움이 일어나거나 폭압이 시작되면 곧 날아가 버리는 덧없는 것이다.

대성인의 「백미일표어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いのちと申す物は一切の財の中に第一の財なり、遍満三千界無有直身命ととかれて三千大千世界にみてて候財も.いのちには・かへぬ事に候なり

목숨이라 하는 것은 일체의 재보 가운데 첫째가는 재보이다. 「삼천계에 가득 찬 것도 몸과 목숨의 값이 되지 못한다」고 설하여,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재보도 목숨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백미일표어서」, 1596쪽

삼천대천세계란 고대 인도의 우주관의 하나로, 한량없이 넓은 세계를 가리킨다. 그 세계에 가득 찬 모든 보배와 부라 해도 한 사람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이만큼 인간 생명의 존엄을 남김없이 설한 가르침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존엄을 실증하는 길 — 불도 수행

그러나 이 존엄론에 비해 현실의 사람은 너무도 약하고 너무도 비참하다. 굶주려 죽어 가는 사람, 병으로 쓰러지는 사람, 사소한 실수로 죽는 사람, 미움을 사 죽임을 당하는 사람, 약간의 돈을 빼앗기고 죽는 사람, 재해로 죽어 가는 사람 — 이래서야 불법이 설하는 존엄을 도대체 누가 보장해 주는가. 불법이 설하는 바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부처의 말은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仏語実不虚)」고 부처 스스로 단언하셨다. 그리고 그 존엄을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사실 위에 세워 가는 방법으로 불도 수행을 가르치셨다. 이 불도 수행을 다하여 목적인 불계의 생명을 솟아나게 했을 때 비로소 이 존엄이 머릿속의 그림이나 말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력과 충실감, 바깥 세계에 대처하는 힘과 지혜로 실증된다. 곧 영원한 생명관, 우주와 내가 하나인 경애를 실감하고 일념삼천의 법리를 깨달았을 때, 나의 생명은 상 · 락 · 아 · 정의 인생을 살아 낼 수 있다.

무릇 자기라는 존재를 가치 있는 것으로 높여 가는 책임은 결국 자기 자신이 지고 있다. 세간에서는 타고난 집안과 신분, 주위 사람과의 관계가 좌우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겉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일체의 꾸밈을 벗겨 낸 뒤에 남는 참된 자기는 역시 자기의 책임이다. 학문을 하는 이든 일을 하는 이든, 각자의 길에서 연구와 노력을 거듭하지 않으면 그 길에서 훌륭해질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두에 공통하는 사람으로서의 힘,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을 높이고 단련하는 가장 근본의 길이 불법의 수행, 곧 신 · 행 · 학에 힘쓰는 것이다. 대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자행화타에 걸친 남묘호렌게쿄를 실천하며, 색심불이의 생명 철학을 배워 가는 것이 자기를 완성하고 일생성불을 이루는 큰길이다.

악상보다 두려운 악지식

그렇다면 이 길을 가로막는 것이야말로 불법에서 말하는 마(魔)이며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다. 열반경에 이렇게 설한다.

菩薩摩訶薩、悪象等において心に怖畏すること無く、悪知識においては怖畏の心を生ぜよ、何をもってのゆえに、この悪象等は唯よく身を破りて心を壊る能わず、悪知識は二倶に壊るゆえに、この悪象等は唯一身を壊り、悪知識は無量の善身無量の善心を壊る。この悪象等は唯よく不浄の臭き身を破壊す、悪知識はよく浄身および浄心を壊る。この悪象等はよく肉身を壊り、悪知識は法身を壊る。悪象のために殺されては三趣に至らず、悪友のために殺されては必ず三趣に至る、この悪象等は但身の怨となり、悪知識は善法の怨とならん、このゆえに菩薩、常にもろもろの悪知識を遠離すべし

보살마하살은 사나운 코끼리 등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려워하지 말고, 악지식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라. 어째서인가. 이 사나운 코끼리 등은 오직 몸을 깨뜨릴 뿐 마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하지만, 악지식은 둘을 함께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사나운 코끼리 등은 오직 한 몸을 무너뜨리지만 악지식은 한량없는 선한 몸과 한량없는 선한 마음을 무너뜨린다. 사나운 코끼리 등은 오직 깨끗하지 못한 냄새나는 몸을 깨뜨리지만 악지식은 깨끗한 몸과 깨끗한 마음을 무너뜨린다. 사나운 코끼리 등은 육신을 무너뜨리지만 악지식은 법신을 무너뜨린다. 사나운 코끼리에게 죽임을 당해서는 삼악도에 이르지 않지만 악한 벗에게 죽임을 당하면 반드시 삼악도에 이른다. 사나운 코끼리 등은 다만 몸의 원수가 되지만 악지식은 선법의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늘 모든 악지식을 멀리 떠나야 한다.

『대반열반경』

사나운 코끼리는 흉포하여 다룰 수 없는 힘을 가진 가장 두려운 짐승으로 인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악지식, 곧 그릇된 법과 그릇된 뜻으로 민중을 이끌어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리는 방법의 승려들이다. 사나운 코끼리는 육신만을 해치지만 악지식은 법신, 곧 생명 안의 불성을 해친다.

여기에 이 장의 엄한 경문을 읽는 열쇠가 있다. 경이 일천제를 세 가지 살생 밖에 둔 것은 그가 바로 이 「법신을 무너뜨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은 그 대처로 「악지식을 멀리 떠나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악지식을 멀리하고, 그 가르침에 공양하지 않으며, 선량한 민중을 그릇된 가르침에서 지켜 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가장 깊은 인간 존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대성인께서 말법의 방법 대치를 「그 보시를 멈춘다」로 정하신 뜻과 하나로 이어진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불법은 목숨을 「일체의 재보 가운데 첫째」로 본다. 그렇기에 육신만이 아니라 법신을 무너뜨리는 악지식을 가장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방법 대치란 사람의 몸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 악지식을 멀리하고 그 가르침에 공양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의 불성을 지키는 일이다.

제7단 제5장 수호 부촉의 글을 들다
어서 28쪽 4~5행 · 第七段 第五章 守護付属の文を挙ぐ

본문

원문 대조어서 28쪽 4~5행
本文 · 어서 원문

仁王経に云く「仏波斯匿王に告げたまわく・是の故に諸の国王に付属して比丘・比丘尼に付属せず何を以ての故に王のごとき威力無ければなり」已上。

풀이

인왕경에 이르기를, 「부처께서 바사닉왕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정법을) 모든 국왕에게 부촉하고 비구 · 비구니에게는 부촉하지 않느니라. 어째서인가. (비구 · 비구니에게는) 왕과 같은 위력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仁王経인왕경
『인왕반야바라밀경』. 입정안국론 제2편 「재난 유래의 경증」에서 재난의 경증으로 칠난을 설한 경이며, 여기서는 정법을 지키는 일을 국왕에게 맡기는 수호 부촉의 근거로 인용된다. 이 글은 수지품(受持品)의 글이다.
波斯匿王바사닉왕
범어 프라세나지트(Prasenajit)의 음사. 석존 재세 당시 코살라국(사위국)의 왕으로, 비유리왕(비루다카)의 아버지다. 처음에는 바라문교를 믿어 불교에 반대했으나, 뒤에 왕비의 권유로 석존에게 귀의하여 불교를 보호했다. 인왕경의 대고중이다.
付属부촉
부촉(付嘱)이라고도 쓴다. 가르침을 넓히도록 맡기는 것으로, 촉루(嘱累)라고도 한다. 「부」는 물건을 주는 것, 「촉」은 일을 맡기는 것이다. 부촉에는 ① 총부촉 · 별부촉, ② 홍선부촉 · 전지부촉 · 수호부촉의 구별이 있다. ①은 석존이 법화경의 홍통을 맡기신 데에 총 · 별의 두 뜻이 있다는 것이다. 여래신력품 제21에서 상행보살을 비롯한 지용의 보살에게 석존 멸후 악세에 법화경의 간요의 법을 넓히도록 맡기신 것을 별부촉이라 하고, 그 뒤 촉루품 제22에서 그 밖의 무수한 보살들에게도 멸후에 법화경을 넓히도록 맡기신 것을 총부촉이라 한다. ②는 니치칸 상인이 「선시초 문단」에서 부촉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한 것이다.
諸の国王に付属して모든 국왕에게 부촉하여
정법을 바깥에서 지키는 일을 국왕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국왕은 정법을 스스로 설하고 넓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설하고 넓히는 사람을 지키고 정법이 오래 머물게 하는 사람이다.
比丘・比丘尼に付属せず비구 · 비구니에게는 부촉하지 않는다
출가자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출가자를 낮춘 말이 아니라, 지키는 일과 넓히는 일의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다. 출가자에게는 홍선 · 전지의 부촉이 있다.
王のごとき威力無ければなり왕과 같은 위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법을 박해하는 힘으로부터 정법과 그 행자를 지켜 낼 힘이 출가자에게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법을 지키는 일은 국왕과 같은 힘을 가진 이에게 맡겨진다.

수호 부촉 — 이 장의 자리

이 인왕경 수지품의 글은 수호 부촉의 근거가 되는 글이다. 앞의 두 장에서 열반경으로 방법의 사람이 누구이며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밝힌 뒤, 이 장과 다음 장은 「그렇다면 누가 정법을 지켜야 하는가」를 보인다. 그 대답이 「국왕」이다.

입정안국론이 출가자의 논서이면서도 위정자에게 올린 간효의 글이라는 사실이 이 장과 깊이 이어진다. 대성인께서 이 글을 야도야 입도를 통해 호조 도키요리에게 올리신 것은, 부처가 정법을 지키는 일을 국왕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정법을 넓히는 이가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그릇된 법에 귀의하여 정법을 박해한다면 법은 머물 수 없다. 그러므로 국주가 정법을 지키는 자리에 서도록 간하는 것이 입정안국의 첫걸음이 된다.

홍선 · 전지 · 수호의 세 부촉

수호 부촉이란 무엇인가. 부처가 설한 법을 이어받아 그것을 넓히는 사명은 불제자에게 있다. 여래의 법을 여래의 사자로서 설하고 넓혀 온 세계가 그 법을 믿게 하는 실천이 없다면 제자가 아니며, 거기에 사제상대의 원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부처가 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令法久住) 위해 제자에게 법을 주고 그 광선유포의 사명을 맡기는 것을 부촉이라 한다.

그런데 한마디로 넓힌다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각도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고, 여러 입장에서 작용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시조깅고전답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正法をひろむる事は必ず智人によるべし、故に釈尊は一切経を・とかせ給いて小乗経をば阿難・大乗経をば文殊師利・法華経の肝要をば一切の声聞・文殊等の一切の菩薩をきらひて上行菩薩をめして授けさせ給いき、設い正法を持てる智者ありとも檀那なくんば争か弘まるべき

정법을 넓히는 일은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에 의한다. 그러므로 석존은 일체경을 설하시고, 소승경은 아난에게, 대승경은 문수사리에게, 법화경의 간요는 일체의 성문과 문수 등 일체의 보살을 물리치고 상행보살을 불러 주셨다. 설령 정법을 지닌 지자가 있다 해도 단나가 없다면 어찌 넓혀지겠는가.

「시조깅고전답서」, 1148쪽

또 「법화초심성불초」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末法今の世の番衆は上行・無辺行等にてをはしますなり此等を能能明らめ信じてこそ法の験も仏菩薩の利生も有るべしとは見えたれ、譬えばよき火打とよき石のかどと・よきほくちと此の三寄り合いて火を用ゆるなり、祈も又是くの如しよき師と・よき檀那と・よき法と此の三寄り合いて祈を成就し国土の大難をも払ふべき者なり

말법 지금 세상의 당번은 상행 · 무변행 등이시다. 이것을 잘 밝히고 믿어야만 법의 영험도 불보살의 이익도 있으리라고 보인다. 비유하면 좋은 부시와 좋은 부싯돌의 모서리와 좋은 부싯깃, 이 셋이 모여서 불을 쓰는 것이다. 기도도 또한 이와 같아서, 좋은 스승과 좋은 단나와 좋은 법, 이 셋이 모여서 기도를 이루고 국토의 큰 난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법화초심성불초」, 550쪽

「좋은 스승 · 좋은 단나 · 좋은 법」이 모여 비로소 「국토의 큰 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이 글은 입정안국론의 물음 — 재난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 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정법(좋은 법)과 그것을 넓히는 지자(좋은 스승)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지키는 단나가 있어야 한다. 그 단나의 가장 큰 자리가 국왕이다.

니치칸 상인이 세운 세 부촉

니치칸 상인은 「선시초 문단」에서 홍선 · 전지 · 수호의 세 가지 부촉을 세워 다음과 같이 풀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첫째는 홍선부촉(弘宣付嘱)이다. 사의(四依)의 현성은 석존 일대의 모든 불법을 때에 따르고 근기에 따라 연설하여 유포한다. 촉루품에 「만약 선남자 · 선여인이 있어 여래의 지혜를 믿는 이에게는 마땅히 그를 위해 이 법화경을 연설하여 듣고 알게 해야 한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혜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 만약 중생이 있어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에게는 마땅히 여래의 다른 깊은 법 가운데서 보이고 가르치며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다른 깊은 법」이란 이전의 여러 경이니, 법화경에 대하여 「다른」이라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지부촉(伝持付嘱)이다. 사의의 현성은 여래 일대의 모든 불법을 서로 전하여 받아 지니고 대대로 이어 주지(住持)하기 때문이다. 열반경 제2권에 「내가 지금 지닌 위없는 정법을 모두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 마땅히 너희를 위해 큰 의지처가 되기를 여래와 같이 할 것이다」라고 했다. 『불조통기』는 이 글을 풀어 「가섭이 능히 세상을 이어 전지하기 때문이다」, 또 「가섭이 홀로 주지를 맡았다. 이로써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하여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능엄경소』에는 「깨달음의 성품인 삼덕의 비장에 안주하고 만선의 공덕을 지녀 잃지 않으므로 주지라 한다」고 했다. 지금 절의 주인을 통틀어 주지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뜻에 의한 것이다.

셋째는 수호부촉(守護付嘱)이다. 국왕 · 단월 등이 여래 일대의 모든 불법을 때에 따라 능히 지켜 법이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다. 열반경 제3권에 「여래는 지금 위없는 정법을 모든 왕 · 대신 · 재상 ·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에게 부촉한다. 이 모든 국왕과 사부의 대중은 마땅히 배우는 이들을 힘써 격려하여 계 · 정 · 혜를 더 자라게 해야 한다」고 했다. 또 열반경에 「안으로 지혜 있는 제자가 있어 깊은 뜻을 알고, 밖으로 청정한 단월이 있어 불법이 오래 머문다」고 했다. 이 가운데 계 · 정 · 혜는 일대와 삼시에 통하는 것이지만, 말법에 있어서는 문저에 감추어진 세 가지 비법(삼대비법)이다.

홍선부촉
누가사의의 현성
무엇을석존 일대의 불법을 때와 근기에 따라 연설하여 유포함
근거법화경 촉루품
전지부촉
누가사의의 현성
무엇을불법을 서로 전하여 받아 지니고 대대로 주지함
근거열반경 제2권(가섭에게 부촉)
수호부촉
누가국왕 · 단월 등
무엇을불법을 때에 따라 지켜 오래 머물게 함
근거열반경 제3권 · 인왕경 수지품
「모든 국왕에게 부촉하고 비구 · 비구니에게는 부촉하지 않는다」諸の国王に付属して比丘・比丘尼に付属せず(인왕경 · 28쪽)
도표 9 · 세 가지 부촉

세 부촉을 나란히 놓으면 역할의 구별이 분명하다. 법을 설하고 넓히는 것(홍선), 법을 바르게 이어받아 전하는 것(전지), 법과 그것을 넓히는 사람을 지키는 것(수호)이다. 앞의 둘은 출가의 지혜 있는 이에게, 뒤의 하나는 재가의 국왕 · 단월에게 맡겨진다. 열반경의 「안으로 지혜 있는 제자, 밖으로 청정한 단월」이라는 말이 그 짜임을 잘 보여 준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수호 부촉은 정법을 「지키는」 사명을 재가의 국왕 · 단월에게 맡긴 것이다. 법이 오래 머물려면 좋은 스승 · 좋은 법과 함께 그것을 지키는 좋은 단나가 있어야 한다. 입정안국론이 위정자에게 올린 간효의 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국왕에게 맡긴 까닭 — 「왕과 같은 위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왕경은 국왕에게 부촉하는 까닭을 「비구 · 비구니에게는 왕과 같은 위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위력」은 정법을 박해하는 힘으로부터 정법을 지켜 내는 힘이다. 석존 재세에도 바사닉왕은 처음에는 바라문교를 믿어 불교에 반대했으나, 뒤에 귀의하여 불교를 보호하는 왕이 되었다. 한 사람의 왕이 어느 법에 귀의하느냐가 그 나라의 불법의 운명을 좌우했던 것이다.

대성인 당시의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 앞의 단들에서 본 대로 법연의 일문에 대한 금지와 유죄도 엔랴쿠사 · 고후쿠사의 상주에 따라 조정이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부의 요인들은 염불과 선에 귀의하여 고쿠라쿠사 · 겐초사 같은 큰 절을 세우고 있었다. 국왕의 위력이 방법을 지키는 쪽으로 쓰이는 한, 정법은 넓혀질 수 없다. 대성인께서 이 장에서 수호 부촉의 글을 드신 것은, 위정자에게 「그 위력을 정법을 지키는 데로 돌리라」고 간하시기 위해서다.

이 위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정법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법도를 따라야 하는지가 다음 장에서 열반경의 글로 더 자세히 밝혀진다. 그리고 그 위력이 말법에서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는 제8단 「방법에 보시를 멈추는 뜻」에서 「그 보시를 멈춘다」로 정해진다. 국왕에게 맡겨진 수호의 힘이란, 방법의 사찰에 대한 귀의와 공양을 멈추고 정법의 행자를 박해로부터 지키는 힘이다.

제7단 제6장 정법 호지의 법도를 보이다
어서 28쪽 6~11행 · 第七段 第六章 正法護持の方軌を示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8쪽 6~11행
本文 · 어서 원문

涅槃経に云く「今無上の正法を以て諸王・大臣・宰相・及び四部の衆に付属す、正法を毀る者をば大臣四部の衆当に苦治すべし」と。 又云く「仏の言く、迦葉能く正法を護持する因縁を以ての故に是の金剛身を成就することを得たり善男子正法を護持せん者は五戒を受けず威儀を修せず応に刀剣・弓箭・鉾槊を持すべし」と、 又云く「若し五戒を受持せん者有らば名けて大乗の人と為す事を得ず、五戒を受けざれども正法を護るを為て乃ち大乗と名く、正法を護る者は当に刀剣器仗を執持すべし刀杖を持すと雖も我是等を説きて名けて持戒と曰わん」と。

풀이

열반경에 이르기를, 「이제 위없는 정법을 모든 왕 · 대신 · 재상 및 사부의 대중에게 부촉하노라. 정법을 헐뜯는 자는 대신과 사부의 대중이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하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이르기를,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섭이여, (나는) 능히 정법을 호지한 인연으로써 이 금강신을 성취할 수 있었느니라. 선남자여, 정법을 호지하는 자는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더라도, 마땅히 칼과 활과 화살과 창을 지녀야 하느니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만약 오계를 받아 지니는 자가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대승의 사람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오계를 받지 않더라도 정법을 지키기 때문에 곧 대승이라 이름하느니라. 정법을 지키는 자는 마땅히 칼과 무기를 지녀야 하느니라.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나는 이들을 설하여 지계라 이름하리라」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無上の正法위없는 정법
이보다 위가 없는 가장 높은 정법. 앞 장의 인왕경에서는 무엇을 부촉하는지가 글에 드러나 있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위없는 정법」이라고 밝혀진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를 문저에 깊이 감추어진 대법인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로 푼다.
諸王・大臣・宰相・及び四部の衆모든 왕 · 대신 · 재상 및 사부의 대중
니치칸 상인의 「입정안국론 문단」에는 「모든 왕이란 국왕과 친왕이다」라 하고, 이어서 「이것은 곧 국왕 · 친왕 · 대신 · 재상 · 사부의 순서가 빠짐없는 것인가」라고 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사부의 대중은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이지만, 왕 · 대신 · 재상과 나란히 놓인 것으로 보아 특히 재가의 우바새 · 우바이를 강하게 가리킨다.
苦治고치
엄하게 다스리는 것. 정법을 헐뜯는 자를 그대로 두지 말고 꾸짖고 막으라는 뜻이다. 그 다스림이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님은 다음 장 끝의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와, 다음 단의 「그 보시를 멈춘다」가 분명히 한다.
迦葉가섭
가섭동자, 가섭동자보살이라고도 한다. 열반경 가섭보살품의 대고중으로, 십대제자의 마하가섭과는 다른 사람이다. 열반경에서 부처에게 서른여섯 가지 물음을 올렸으나, 앞의 사십여 년의 회좌에도 참여하지 않고 법화경의 회좌에서도 빠진, 이른바 「주워 거두는(捃拾) 근기」의 사람이다.
金剛身금강신
금강처럼 무너지지 않는 부처의 몸, 곧 법신. 이 인용은 열반경 금강신품의 글로, 부처가 무너지지 않는 몸을 얻은 인연이 「정법을 호지한 것」에 있다고 설한다.
五戒오계
재가 신자가 지키는 다섯 가지 계. 살생 · 도둑질 · 사음 · 거짓말 · 음주를 금한다.
威儀を修せず위의를 닦지 않는다
행 · 주 · 좌 · 와의 몸가짐에 관한 세세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니치칸 상인은 이를 「작은 절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었다.
刀剣・弓箭・鉾槊도검 · 궁전 · 모삭
「궁전」은 활과 화살이다. 「모삭」의 「모(鉾)」는 본래 칼끝을 말하고, 「삭(槊)」은 주척(周尺)으로 한 길 여덟 자의 자루가 달린 창이다. 창에는 가지가 없는 것, 한쪽에 가지가 하나 있는 것, 양쪽에 둘 있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大乗の人대승의 사람
오계를 지닌다는 것만으로 대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지키는 사람이 대승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刀剣器仗도검기장
칼과 여러 무기. 「기장(器仗)」은 병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持戒と曰わん지계라 이름하리라
칼과 지팡이를 지녔더라도 정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 사람을 지계라 부른다는 것이다. 계의 근본이 조목이 아니라 정법을 지키는 데 있다는, 제3장 「파계란 일천제다」와 맞닿는 말이다.

이 장의 자리 — 열반경의 수호 부촉

이 장은 열반경에 설한 수호 부촉의 글을 보이신다. 처음 인용된 글은 앞 장의 인왕경 글과 거의 같다. 다만 인왕경의 글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부촉하는 법」이 여기서는 「위없는 정법」이라고 밝혀져 있다. 「위없다(無上)」는 「위가 있다(有上)」에 대한 말로, 이보다 위가 없는 가장 높은 것이라는 뜻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곧 문저에 깊이 감추어진 대법인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로 푼다.

또 인왕경에서 단지 「왕」이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모든 왕 · 대신 · 재상 및 사부의 대중」으로 넓어져 있다. 니치칸 상인의 「입정안국론 문단」에는 「모든 왕이란 국왕과 친왕이다」라 하고, 나아가 「국왕 · 친왕 · 대신 · 재상 · 사부의 순서가 빠짐없는 것인가」라고 했다. 사부의 대중은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이지만, 특히 재가인 우바새 · 우바이를 강하게 가리킨다는 것은 모든 왕 · 대신 · 재상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왕 · 대신 …」으로 나란히 적힌 것은, 대성인께서 여러 어서에서 「왕과 신하가 한결같이」 「왕과 신하와 만민이 한결같이」라고 하신 것과 같다. 대성인의 불법은 특권 계층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민중이 받들어야 할 신앙이며, 다스리는 이에게는 정치가 의지할 기둥이고 민중에게는 큰 힘의 원천이라는 확신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수호의 사명은 왕 한 사람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정법을 지니는 재가의 모든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다.

「엄히 다스려야 한다」를 읽는 법

「정법을 헐뜯는 자는 대신과 사부의 대중이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한다.」 이 글을 보고, 정법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쥐면 반대하는 이를 탄압하라는 뜻이 아닌가 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입정안국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첫째, 바로 다음 장에 인용되는 열반경의 글은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刀杖を持すと雖も命を断ずべからず)」로 끝난다. 정법을 지키기 위한 힘조차 목숨을 끊는 데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경 자신의 결론이다. 둘째, 대성인께서는 다음 단에서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고 하여, 말법에서 방법을 다스리는 법도를 「보시를 멈추는 것」으로 정하셨다. 「엄히 다스린다」의 구체적인 내용은 방법에 대한 귀의와 공양을 멈추는 것이다. 셋째, 역사를 보면 늘 박해받고 탄압받아 온 것은 오히려 정법의 쪽이었다. 대성인 자신이 마쓰바가야쓰 법난 · 이즈 유배 · 고마쓰바라 법난 · 다쓰노구치 법난 · 사도 유배를 겪으셨다. 이 경문은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정법을 박해하는 권력자에게 깨달음을 촉구하는 글로 읽어야 한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정법을 헐뜯는 일을 그대로 두지 말라는 뜻이며, 그 다스림의 법도는 다음 단에서 「그 보시를 멈춘다」로 정해진다. 열반경 자신도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맺는다.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는다」 — 재가의 호법

「선남자여, 정법을 호지하는 자는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더라도, 마땅히 칼과 활과 화살과 창을 지녀야 한다.」 부처의 정법을 받아 지닌 사람은 오계를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 정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3장에서 「수지즉지계」로 이미 보았다.

니치칸 상인은 「입정안국론 문단」에서 이 글을 이렇게 풀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열반경에 「이른바 정법이란 곧 여래의 미밀(微密)의 장(藏)이다」라 했으니, 정법이란 뜻으로는 실로 문저의 비법을 가리킨다. 지금 글의 「정법을 호지한다」는 바로 재가의 호법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의 장소(章疏)에 「선남자여, 정법을 호지한다는 것은 넓게 답한 것으로 둘이 있다. 첫째는 재가, 둘째는 출가이다. 재가의 호법은 그 근본 마음의 하는 바를 취한다. 사(事)를 버리고 이(理)를 두어 바르게 대교를 넓히므로 정법을 호지한다고 하고, 작은 절도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위의를 닦지 않는다고 한다」고 했다. 「개목초」에 이 소의 글을 인용하여 「출가 · 재가의 호법」이라 한 것은, 「출가」 두 글자가 아마 덧붙은 것이며 이는 과목(科目)의 말이지 풀이의 글이 아니다. 아마 후세 사람이 베껴 쓰다가 잘못한 것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법을 호지하는 자」란 재가의 호법을 밝힌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재가는 어떤 수행과 활동이 바른가 하면, 「칼과 활과 화살과 창을 지녀야 한다」고 설해져 있다. 또 오계를 지닌다는 것만으로는 대승의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정법을 지키는 것이 대승이며, 그 때문에 정법을 지키는 사람은 칼과 지팡이 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칼과 활을 지녀라」 — 그 시대와 그 목적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이 설해진 때, 그리고 대성인의 당시는 무력이 제멋대로 휘둘러지던 시대였다. 나라 안에 악인이 가득해도 그것을 제지할 공적인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방법의 사람이 무력으로 정법을 억압하는 것은 흔한 수단이었고, 그들로부터 정법을 지키려면 몸을 지킬 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경문을 보고 「불교는 무력주의인가」라고 하는 것은 전혀 핵심을 벗어난 말이다. 그런 사람은 굶주린 맹수가 우글거리는 밀림을 아무 대비도 없이 지나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경문의 칼과 활은 정법과 그 행자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남을 해치거나 가르침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성인 자신도 산조 고카지 무네치카(三条小鍛冶宗近)가 만든 명검을 지니셨다고 전한다. 어서에도 호조 야겐타(北條弥源太)가 칼을 공양한 일이 적혀 있다. 그 답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殿の御もちの時は悪の刀・今仏前へまいりぬれば善の刀なるべし、譬えば鬼の道心をおこしたらんが如し、あら不思議や不思議や、後生には此の刀を・つえとたのみ給うべし、法華経は三世の諸仏・発心のつえにて候ぞかし、但し日蓮をつえはしらとも.たのみ給うべし、けはしき山・あしき道.つえを・つきぬれば・たをれず、殊に手を・ひかれぬれば・まろぶ事なし、南無妙法蓮華経は死出の山にては・つえはしらとなり給へ

그대가 지니고 있을 때는 악의 칼이었으나, 이제 부처님 앞에 바쳐졌으니 선의 칼이 될 것입니다. 비유하면 귀신이 도심을 일으킨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합니다. 후생에는 이 칼을 지팡이로 삼아 의지하십시오. 법화경은 삼세 제불이 발심하는 지팡이입니다. 다만 니치렌을 지팡이와 기둥으로 삼아 의지하십시오. 험한 산과 나쁜 길도 지팡이를 짚으면 넘어지지 않고, 더구나 손을 이끌어 주면 구르는 일이 없습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저승길 산에서 지팡이와 기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야겐타전답서」, 1227쪽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칼도 부처 앞에 바쳐지면 「선의 칼」이 되고, 마침내는 생사의 험한 길을 건너는 「지팡이」로 바뀐다. 이 답서는 칼이라는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쥔 마음이 선악을 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닛코 상인도 「닛코유계치문」에

一、刀杖等に於ては仏法守護の為に之を許す

하나, 칼과 지팡이 등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만 이를 허락한다.

「닛코유계치문」, 1618쪽

라고 하셨다. 허락의 조건은 오직 「불법 수호를 위해」다.

이것은 대성인 43세 때인 문영 원년(1264) 11월, 아와의 고마쓰바라에서 지두 도조 가게노부(東条景信)의 무리가 대성인을 해치려고 덮쳤을 때, 구도 사콘노조 요시타카(工藤吉隆)와 교닌보(鏡忍房) 등이 칼을 들고 대성인을 지킨 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법난에서 교닌보와 구도 요시타카는 목숨을 잃었고 대성인도 이마에 상처를 입고 왼손을 다치셨다고 전한다. 칼 없이는 정법과 그 행자를 끝까지 지켜 낼 수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말법의 「칼과 활」 — 말의 힘

그렇다면 말법에서 정법을 지키기 위해 손에 들어야 할 「칼과 활」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말의 힘, 곧 도리와 문증으로 정사를 가리는 힘이다. 대성인께서 평생 손에 드신 것도 칼이 아니라 붓과 말이었다. 입정안국론이라는 한 권의 글로 국주를 간하시고, 「십일통어서」로 공장 대결을 청하시며, 법난 속에서도 수많은 어서로 제자를 격려하셨다. 「개목초」에서 「지자에게 내 뜻이 깨뜨려지지 않는 한 쓰지 않겠다」는 뜻을 말씀하신 것도, 정사(正邪)를 가리는 길이 도리와 문증의 대결에 있다는 확신이다.

불도 수행이라 하면 조용한 산속에 숨어 생각을 모으는 것이나, 다만 경을 읽고 몸가짐을 맑게 하여 선행을 닦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정법을 지키고 광선유포를 이루기 위해 지혜를 다하고 사자왕처럼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이 가장 바른 불도 수행이라고 본다. 열반경이 「오계를 받지 않더라도 정법을 지키는 것이 대승」이라고 한 뜻을 말법에 살린다면, 그것은 말로써 정법을 지키고 넓히는 실천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열반경의 「칼과 활을 지녀라」는 무력이 횡행하던 시대에 정법과 그 행자를 지키라는 뜻이며, 목적은 오직 불법 수호다. 말법에서 정법을 지키는 「칼과 활」은 도리와 문증에 선 말의 힘이다.

제7단 제7장 유덕왕 · 각덕비구의 선례
어서 28쪽 12행~29쪽 11행 · 第七段 第七章 有徳王・覚徳比丘の先例

본문

本文 · 一어서 28쪽 12행 ~ 29쪽 5행
本文 · 어서 원문

又云く「善男子・過去の世に此の拘尸那城に於て仏の世に出でたまうこと有りき歓喜増益如来と号したてまつる、仏涅槃の後正法世に住すること無量億歳なり余の四十年仏法の末、 爾の時に一の持戒の比丘有り名を覚徳と曰う、爾の時に多く破戒の比丘有り是の説を作すを聞きて皆悪心を生じ刀杖を執持し是の法師を逼む、 是の時の国王名けて有徳と曰う是の事を聞き已つて護法の為の故に即便ち説法者の所に往至して是の破戒の諸の悪比丘と極めて共に戦闘す、 爾の時に説法者厄害を免ることを得たり王・爾の時に於て身に刀剣鉾槊の瘡を被り体に完き処は芥子の如き許りも無し、 爾の時に覚徳尋いで王を讃めて言く、善きかな善きかな王今真に是れ正法を護る者なり当来の世に此の身当に無量の法器と為るべし、 王是の時に於て法を聞くことを得已つて心大に歓喜し尋いで即ち命終して阿閦仏の国に生ず而も彼の仏の為に第一の弟子と作る、 其の王の将従・人民・眷属・戦闘有りし者.歓喜有りし者.一切菩提の心を退せず命終して悉く阿閦仏の国に生ず、 覚徳比丘却つて後寿終つて亦阿閦仏の国に往生することを得て彼の仏の為に声聞衆中の第二の弟子と作る、 若し正法尽きんと欲すること有らん時当に是くの如く受持し擁護すべし、

풀이

또 (열반경 금강신품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지난 세상에 이 쿠시나가라 성에 부처가 세상에 나오신 일이 있었으니, 환희증익여래(歓喜増益如来)라 일컬어 받들었느니라. 부처가 열반하신 뒤 정법이 세상에 머문 것이 한량없는 억 년이었느니라. 남은 사십 년, 불법의 끝 무렵이었다. 그때 계를 지니는 한 비구가 있어 이름을 각덕(覚徳)이라 하였느니라. 그때 계를 깨뜨린 비구가 많이 있었는데, (각덕이) 이 설법을 하는 것을 듣고 모두 악한 마음을 내어 칼과 지팡이를 들고 이 법사를 핍박하였느니라. 이때의 국왕은 이름을 유덕(有徳)이라 하였는데, 이 일을 듣고 나서 법을 지키기 위하여 곧바로 설법하는 이가 있는 곳에 가서 이 계를 깨뜨린 여러 악한 비구들과 힘을 다하여 싸웠느니라. 그때 설법하는 이는 재난과 해침을 면할 수 있었느니라. 왕은 그때 몸에 칼과 창의 상처를 입어, 몸에 성한 곳이 겨자씨만큼도 없었느니라. 그때 각덕이 이어서 왕을 기려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왕은 이제 참으로 정법을 지키는 이로다. 오는 세상에 이 몸은 반드시 한량없는 법의 그릇이 되리라』 하였느니라. 왕은 이때 법을 들을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크게 기뻐하였고, 이어 곧 목숨을 마쳐 아촉불(阿閦仏)의 나라에 태어났으며, 게다가 그 부처의 첫째 제자가 되었느니라. 그 왕의 장수와 종자 · 백성 · 권속으로서 함께 싸운 이와 기뻐한 이는 모두 보리의 마음에서 물러나지 않고, 목숨을 마쳐 다 아촉불의 나라에 태어났느니라. 각덕비구도 그 뒤에 수명을 마쳐 또한 아촉불의 나라에 왕생할 수 있었고, 그 부처의 성문 대중 가운데 둘째 제자가 되었느니라. 만약 정법이 다하려 할 때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받아 지니고 옹호해야 하느니라.

本文 · 二어서 29쪽 5~11행
本文 · 어서 원문

迦葉・爾の時の王とは即ち我が身是なり、説法の比丘は迦葉仏是なり、迦葉正法を護る者は是くの如き等の無量の果報を得ん、 是の因縁を以て我今日に於て種種の相を得て以て自ら荘厳し法身不可壊の身を成す、 仏迦葉菩薩に告げたまわく、是の故に法を護らん優婆塞等は応に刀杖を執持して擁護すること是くの如くなるべし、 善男子・我涅槃の後濁悪の世に国土荒乱し互に相抄掠し人民飢餓せん、爾の時に多く飢餓の為の故に発心出家するもの有らん是くの如きの人を名けて禿人と為す、 是の禿人の輩正法を護持するを見て駈逐して出さしめ若くは殺し若くは害せん、 是の故に我今持戒の人・諸の白衣の刀杖を持つ者に依つて以て伴侶と為すことを聴す、 刀杖を持すと雖も我是等を説いて名けて持戒と曰わん、刀杖を持すと雖も命を断ずべからず」と。

풀이

가섭이여, 그때의 왕이란 곧 내 몸이 그이니라. 설법한 비구는 가섭불이 그이니라. 가섭이여, 정법을 지키는 이는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과보를 얻느니라. 이 인연으로 나는 오늘날 갖가지 상호를 얻어 스스로 장엄하고, 법신이 무너지지 않는 몸을 이루었느니라. 부처께서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법을 지키려는 우바새 등은 마땅히 칼과 지팡이를 지니고 이와 같이 옹호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내가 열반한 뒤 흐리고 악한 세상에 국토가 거칠고 어지러워져 서로 빼앗고 노략질하며 백성이 굶주릴 것이니라. 그때 굶주림 때문에 발심하여 출가하는 이가 많을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을 이름하여 독인(禿人)이라 하느니라. 이 독인의 무리는 정법을 호지하는 이를 보면 쫓아내고, 혹은 죽이고 혹은 해칠 것이니라. 그러므로 나는 이제 계를 지니는 사람이 칼과 지팡이를 지닌 여러 재가인(白衣)을 의지하여 벗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노라.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나는 이들을 설하여 지계라 이름하리라.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되느니라」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拘尸那城쿠시나가라 성
구시나게라성(拘尸那掲羅城), 범어 쿠시나가라(Kuśinagara)의 도성이다. 성곽 도시였기에 구시나성이라 불렀다. 석존 재세 당시 십육대국의 하나인 말라(Malla, 末羅)족의 도읍이었다. 이 성 밖 북쪽 발제하(跋提河) 서쪽 기슭에 사라수 숲이 있어, 그 사라쌍수 아래에서 석존이 입멸하셨다고 전한다. 열반경이 설해진 바로 그 땅이다.
歓喜増益如来환희증익여래
과거세에 쿠시나가라 성에 출현했다는 부처. 그 입멸 뒤 정법이 한량없는 억 년 동안 이어졌다.
余の四十年仏法の末남은 사십 년, 불법의 끝
정법이 다하기까지 사십 년만 남은, 불법이 멸하려는 때다. 정법이 무너지려는 때에 정법을 지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법의 정법 호지의 본보기로 읽힌다.
覚徳각덕
각덕비구. 열반경 권3 금강신품 제2에 설하는 정법 호지의 비구다. 각덕은 아홉 갈래의 경전(九部経)을 널리 펴서 설하고, 여러 비구에게 「종과 하녀, 소와 양 등 법답지 않은 물건을 기르고 쌓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제지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비구가 악한 마음을 내어 칼과 지팡이를 들고 각덕을 죽이려 했다.
持戒の比丘계를 지니는 비구
열반경의 문맥에서 정법을 굳게 지니는 비구를 말한다. 제3장 · 제6장에서 본 대로 정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곧 지계다.
破戒の比丘계를 깨뜨린 비구
정법을 설하는 각덕을 미워하여 칼과 지팡이를 든 비구들. 열반경이 「파계란 일천제」라 한 그 파계의 무리다.
有徳유덕
유덕왕. 각덕비구가 핍박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달려가 악한 비구들과 싸워 각덕을 지켜 낸 국왕이다. 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상처를 입고 목숨을 마쳤으나 아촉불의 나라에 태어나 그 부처의 첫째 제자가 되었다. 석존의 과거세의 모습이다.
無量の法器한량없는 법의 그릇
한량없는 법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정법을 지킨 공덕으로 미래세에 그 몸이 불법을 받아 지니고 펴는 그릇이 된다는 각덕의 찬탄이다.
阿閦仏아촉불
사바세계에서 동쪽에 있는 아비라제(阿比羅提) 세계의 교주인 부처. 「아촉」은 범어 아크쇼비야(Akṣobhya)의 음사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래 아비라제 세계를 다스리던 대목여래(大目如来) 아래서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모습이 흔들림 없이 굳었기에 이렇게 불렸다. 보살행을 거쳐 성도하여 대목여래의 뒤를 이었다. 『아촉불국경』 등의 대승경전에 설해진다.
将従・人民・眷属장수와 종자 · 백성 · 권속
왕을 따라 함께 싸운 사람들과, 그 싸움을 보고 기뻐한 사람들이다. 이들도 모두 아촉불의 나라에 태어났다.
迦葉仏가섭불
과거칠불의 여섯째 부처. 석존 바로 앞의 부처다. 여기서는 각덕비구가 뒤에 가섭불이 되었다고 설한다.
迦葉가섭
십대제자의 마하가섭이 아니라 제6장에서 나온 가섭동자보살이다.
法身不可壊の身법신이 무너지지 않는 몸
정법을 지킨 인연으로 얻은 금강불괴의 법신. 제6장의 「금강신」과 같은 뜻이다.
禿人독인
머리만 깎았을 뿐 도심이 없는 사람. 열반경은 석존 멸후 흐리고 악한 세상에 굶주림을 피하려고 출가하는 이가 많을 것이라 하며, 그들을 「독인」이라 부른다. 이들이 정법을 호지하는 이를 쫓아내고 해치리라는 예언이다.
白衣백의
재가인. 인도에서 출가자는 물들인 옷을 입고 재가인은 흰옷을 입었기에 재가인을 백의라 한다.
刀杖を持すと雖も命を断ずべからず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이자 제7단 열반경 인용 전체를 맺는 말이다. 칼과 지팡이는 정법과 그 행자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사람의 목숨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경 자신의 단서다.

이 장의 자리 — 정법 호지의 본보기

이 장은 앞 장의 「정법을 호지하는 자는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더라도 마땅히 칼과 활을 지녀야 한다」는 글을 받아, 정법을 말법에서 호지하는 법도를 하나의 이야기로 보인다. 정법을 넓히는 각덕비구, 그를 칼과 지팡이로 죽이려 다가오는 파계의 비구들, 그 비구들과 싸워 각덕비구를 끝까지 지켜 낸 유덕왕 — 이 세 등장인물을 통해, 정법이 멸하려는 때의 광선유포의 원리를 보이는 장이다.

유덕왕 · 각덕비구의 이야기는 『대반열반경』 금강신품 제2의 글이며, 대성인께서는 「삼대비법품승사」에서도 이 이야기를 인용하셨다.

戒壇とは王法仏法に冥じ仏法王法に合して王臣一同に本門の三秘密の法を持ちて有徳王・覚徳比丘の其の乃往を末法濁悪の未来に移さん時

계단이란, 왕법이 불법에 그윽이 맞고 불법이 왕법에 합하여, 왕과 신하가 한결같이 본문의 세 가지 비밀의 법을 지니고, 유덕왕 · 각덕비구의 그 옛일을 말법 탁악의 미래에 옮길 때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유덕왕과 각덕비구의 옛일이 말법에 다시 나타나는 때를 본문의 계단이 세워질 때와 연결하신 글이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한 일화에 그치지 않고, 말법에서 정법을 지니고 넓히는 사람과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관계를 보이는 본보기로 받아들여진다.

이야기의 줄거리

새벽 안개 속 고대 인도의 성곽 도시 원경 — 흙 성벽과 낮은 지붕들, 그 앞을 천천히 흐르는 강, 사람 없음
그림 · 새벽 안개 속 고대 인도의 성곽 도시 원경 — 흙 성벽과 낮은 지붕들, 그 앞을 천천히 흐르는 강, 사람 없음

지난 세상에 쿠시나가라 성에 환희증익여래라는 부처가 출현한 일이 있었다. 그 부처가 입멸한 뒤 여래의 정법은 한량없는 억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졌다. 그 마지막, 앞으로 사십 년이면 불법이 멸하려 할 때, 정법을 굳게 지닌 오직 한 사람의 비구가 있었으니 이름을 각덕이라 했다. 각덕은 경전을 널리 설하고, 여러 비구에게 법답지 않은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제지했다. 그때 계를 깨뜨린 악한 비구가 많이 있어 이 각덕비구를 죽이려 했다.

이를 안 유덕왕은 칼과 무기를 들고 달려가 이 악한 비구들과 과감히 싸워 각덕비구를 끝까지 지켜 냈다. 그러나 이때 유덕왕은 온몸에 칼과 화살과 창의 상처를 입어 몸에 성한 곳이 조금도 없었다. 각덕은 왕의 목숨을 건 신심의 자세를 「훌륭하도다, 왕은 이제 참으로 정법을 지키는 이로다. 오는 세상에 이 몸은 반드시 한량없는 법의 그릇이 되리라」고 찬탄했다. 왕은 각덕의 이 가르침을 다 듣고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숨을 거두었다.

왕은 그 뒤 호법의 공덕력으로 아촉불의 나라에 태어나 그 부처의 첫째 제자가 되었다. 또 왕과 함께 싸운 장병과 사람들도 같은 아촉불의 나라에 태어났다. 나아가 각덕비구도 그 인연으로 아촉불의 나라에 태어나 그 부처의 성문 대중 가운데 둘째 제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석존은, 유덕왕이란 실은 지금의 자신이며 각덕비구는 가섭불이라고 밝히고, 정법이 멸하려 할 때에는 각덕비구처럼 정법을 받아 지니고 유덕왕처럼 정법을 지켜야 한다고 설했다. 이어서 석존은 자신의 멸후 흐리고 악한 세상에 굶주림을 피해 출가한 「독인」들이 정법을 지니는 이를 쫓아내고 해칠 것이라 예언하고, 그러므로 계를 지니는 사람이 칼과 지팡이를 지닌 재가인을 벗으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단서를 달았다.

  1. ①때환희증익여래 멸후 정법이 다하기 사십 년 전
  2. ②각덕비구홀로 정법을 설하고 비법의 재물을 쌓지 말라고 제지함
  3. ③파계의 비구들악한 마음을 내어 칼과 지팡이로 각덕을 핍박함
  4. ④유덕왕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달려가 싸워 각덕을 지켜 냄온몸에 상처를 입고 목숨을 마침
  5. ⑤과보왕은 아촉불의 첫째 제자함께 싸운 이와 기뻐한 이도 아촉불국에 태어남각덕은 둘째 제자
  6. ⑥밝힘유덕왕은 석존 · 각덕은 가섭불
  7. ⑦말법의 예언과 단서독인이 정법의 행자를 해칠 것재가인을 벗으로 삼는 것을 허락함「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刀杖を持すと雖も命を断ずべからず
도표 10 · 유덕왕 · 각덕비구의 이야기

당파의 싸움이 아니라 법을 지키는 사람의 길

이 이야기는 권력자인 왕이 한 종파를 지키는 당파적인 싸움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각덕비구란 사람으로서 불법의 정신을 몸으로 드러내는 이이며, 그것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이가 유덕왕이다.

유덕왕은 자신은 장막 안에 머물면서 군대에 명하여 싸우게 한 것이 아니다. 왕 자신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숨을 거두었다는 데서 보면, 어디까지나 정법을 아끼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스스로 앞장서 나섰던 것이다. 또 경전에 함께 싸운 「장수와 종자 · 백성 · 권속」이 있다고 설해져 있으나, 그들도 「기뻐한 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명령을 받아 싸움에 끌려 나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유덕왕이 각덕비구를 지킨 것은 안으로는 불법의 정신을 지킨 것에 통한다.

이 이야기에서 눈여겨볼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칼을 먼저 든 것은 파계의 비구들이었다. 유덕왕은 그 칼로부터 정법을 설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정법의 쪽은 핍박받는 쪽이었다. 둘째, 상처를 입고 목숨을 마친 것은 유덕왕 자신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은 남을 해친 일이 아니라 정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일, 곧 불석신명에 있다. 셋째, 경은 마지막에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맺는다. 칼과 지팡이의 쓰임은 지키는 데 그치며, 사람의 목숨을 끊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유덕왕 · 각덕비구의 이야기는 정법을 넓히는 사람과 그것을 몸을 아끼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 하나가 될 때 정법이 머문다는 것을 보인다. 경 자신이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맺듯이, 그 핵심은 남을 해치는 데가 아니라 정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데 있다.

「독인」의 예언과 말법

석존은 이 이야기에 이어 자신의 멸후 흐리고 악한 세상의 모습을 예언했다. 국토가 거칠고 어지러워져 서로 빼앗고 노략질하며 백성이 굶주린다. 그때 굶주림 때문에 출가하는 이가 많을 것인데, 그들은 머리만 깎았을 뿐 도심이 없는 「독인」이다. 이 독인의 무리가 정법을 호지하는 이를 보면 쫓아내고 혹은 죽이고 혹은 해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입정안국론이 쓰인 정가 · 정원 연간의 일본과 겹쳐 읽힌다.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이 그린 대로 기근과 역병이 이어져 굶주린 사람이 길에 넘쳤고, 절과 승려의 수는 늘었으나 법화경을 버리고 염불과 선에 기울었다. 그리고 입정안국론을 올린 지 한 달 남짓 뒤인 문응 원년(1260) 8월, 마쓰바가야쓰의 대성인 초암이 염불자들에게 습격당했다. 이듬해에는 이즈 유배가 이어졌다. 정법을 호지하는 이를 「쫓아내고, 혹은 해친다」는 열반경의 예언이 대성인의 몸 위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이 「계를 지니는 사람이 재가인을 벗으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고 한 것은, 정법을 넓히는 사람과 그것을 지키는 재가의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하나가 되라는 가르침으로 읽을 수 있다. 앞 장에서 본 「좋은 스승 · 좋은 단나 · 좋은 법」이 모여야 국토의 큰 난을 물리친다는 「법화초심성불초」의 뜻과 같다. 그리고 그 결합의 궁극의 모습을 대성인께서는 「삼대비법품승사」에서 「유덕왕 · 각덕비구의 그 옛일을 말법 탁악의 미래에 옮길 때」라고 말씀하셨다.

정법을 지킨 과보 — 금강 같은 법신

「이 인연으로 나는 오늘날 갖가지 상호를 얻어 스스로 장엄하고, 법신이 무너지지 않는 몸을 이루었다.」 석존은 자신이 부처가 된 인연을 과거세에 정법을 지킨 데서 찾는다. 제6장에서도 「능히 정법을 호지한 인연으로 이 금강신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설했다. 열반경은 불신상주(佛身常住), 곧 부처의 몸이 영원하다는 것을 설하는 경인데, 그 영원한 법신의 원인이 「호법」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정법을 지키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인 동시에 자기 생명을 금강처럼 단련하는 일이다. 유덕왕은 몸에 성한 곳이 겨자씨만큼도 없을 만큼 상처를 입었으나, 그 무너진 몸이 도리어 「무너지지 않는 법신」의 원인이 되었다. 육신의 상처와 법신의 금강이 맞물리는 이 역설이 이 이야기의 깊이다. 대성인께서 「사도어서」 등에서 법난을 두고 「과거의 죄업을 녹이는 것」이라 하시며 기뻐하신 것도 같은 생명관에 선 것이다.

그리고 각덕비구 · 유덕왕만이 아니라 「함께 싸운 이와 기뻐한 이」도 모두 같은 국토에 태어났다는 데에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뜻이 있다. 정법을 지키는 사람의 공덕은 그 사람 혼자에게 그치지 않고, 그 마음에 함께한 사람들 모두에게 미친다. 정법을 함께 지키는 이들이 같은 불국토에 모이는 것 — 입정안국이 그리는 「불국」의 한 모습이 여기에 있다.

제7단 제8장 염불 무간의 글을 들다
어서 29쪽 12~13행 · 第七段 第八章 念仏無間の文を挙ぐ

본문

원문 대조어서 29쪽 12~13행
本文 · 어서 원문

法華経に云く「若し人信ぜずして此の経を毀謗せば即ち一切世間の仏種を断ぜん、乃至其の人命終して阿鼻獄に入らん」已上。

풀이

법화경(비유품)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믿지 않고 이 경을 헐뜯고 비방한다면 곧 일체 세간의 불종(佛種)을 끊으리라. (중략) 그 사람은 목숨을 마치고 아비지옥에 들어가리라」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法華経に云く법화경에 이르기를
『묘법연화경』 비유품 제3의 게송이다(T9 no.262). 사리불에게 이 경을 믿지 않는 이에게 함부로 설하지 말라고 경계한 뒤, 이 경을 비방하는 죄보를 길게 설하는 대목의 첫머리와 결론을 이은 것이다.
信ぜずして믿지 않고
법화경을 믿지 않는 불신이 비방의 출발점이다. 열반경이 일천제를 「믿지 않는 이」로 정의한 것과 이어진다.
毀謗훼방
헐뜯고 비방하는 것. 법연이 법화경을 「사폐각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그대로 이 훼방에 해당한다는 것이 대성인의 판정이다.
一切世間の仏種を断ぜん일체 세간의 불종을 끊으리라
「불종」은 부처가 되는 씨앗이다. 법화경은 일체중생이 성불하는 씨앗을 설한 경이므로, 이 경을 비방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세간 모든 사람의 성불의 씨앗을 끊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乃至내지
중간을 생략했다는 표시다. 생략된 부분에는 「혹은 또 얼굴을 찌푸리며 의혹을 품으리라. 너는 이 사람의 죄보를 설하는 것을 들어라. 부처의 재세든 멸도한 뒤든 이와 같은 경전을 비방하는 이가 있어, 경을 읽고 외우며 쓰고 지니는 이를 보고 업신여기고 미워하고 시기하여 원한을 품으리라. 이 사람의 죄보를 너는 지금 다시 들어라」는 뜻이 설해져 있다.
阿鼻獄아비지옥
팔대지옥의 하나. 「아비」는 범어 아비치(Avīci)의 음사로 무간(無間)이라 번역한다. 괴로움을 받는 것이 끊임이 없다는 뜻이다. 둘레가 일곱 겹의 쇠 성벽과 일곱 층의 쇠 그물로 둘러싸여 있어 아비대성 · 무간대성이라고도 한다. 대초열지옥 아래, 욕계의 맨 밑에 있다고 하며, 팔대지옥의 다른 일곱보다 천 배나 괴로움이 크다고 한다. 오역죄와 정법 비방의 사람이 떨어진다고 한다. 대성인께서는 「현방법초」에서, 이 지옥은 세로 · 가로 8만 유순이고 밖에 일곱 겹의 쇠 성이 있으며, 앞의 일곱 대지옥과 별처의 모든 괴로움을 합쳐 1분으로 삼아도 대아비지옥의 괴로움은 그 천 배라는 뜻을 설하셨다. 또 부처가 이 지옥의 괴로움을 낱낱이 설하신다면 듣는 사람이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므로 자세히 설하지 않으셨다는 뜻도 설하셨다.

이 장의 자리 — 거듭 인용된 비유품의 글

이 글은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의 제4단 제3장 「법연의 방법을 단정하다」에서 『선택집』을 깨뜨리실 때 「염불 무간」의 문증으로 이미 인용된 것이다. 대성인께서는 여기서 그 글을 다시 인용하여 방법이 왜 두려운가를 밝히신다.

장 제목이 「염불 무간의 글」인 까닭은, 이 비유품의 글 자체에 염불이라는 말은 없지만 법연이 법화경을 「버리고 닫고 내버려 두고 던지라」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법화경을 비방하면 아비지옥에 떨어진다는 법화경의 글과, 법연이 법화경을 비방했다는 『선택집』의 글을 겹쳐 놓으면 「염불은 무간지옥의 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앞 장까지 열반경 · 인왕경으로 방법의 죄와 그 대처를 보이신 뒤, 이 장에서 다시 법화경의 글로 그 과보를 확인하시는 것이다. 열반경의 증거에 법화경의 증거를 더하여, 다음 장의 「법화경과 같다면 … 열반경과 같다면 …」이라는 맺음이 준비된다.

세 번 인용되는 「염불 무간」의 경증

입정안국론에서 이 비유품의 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4단에서 『선택집』의 방법을 단정할 때 처음 인용되고, 이 제7단에서 방법 대치의 경증을 맺는 자리에서 다시 인용되며, 제9단 제4장 「염불 무간지옥의 경문을 들다」에서 또 한 번 무게를 더한다. 같은 글이 논의의 고비마다 되풀이되는 것은, 입정안국론이 말하는 재난의 근원 — 법화경을 버리게 하는 가르침 — 이 결국 이 한 줄의 경문으로 판정되기 때문이다.

제2장에서 본 「겐초사도류에의 어장」에서 대성인께서는 당세의 사종에 대하여 「염불은 무간지옥의 업」이라 하시고, 입정안국론의 요지가 염불 · 진언 · 선 · 율의 악법에 대한 경계에 있다고 밝히셨다. 그 가운데 「염불 무간」이 맨 앞에 놓인 것은, 염불이 당시 나라 안에 가장 넓게 퍼져 위로는 막부 요인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법화경을 버리게 했기 때문이다. 대성인께서 이 판정을 경문으로 거듭 확인하신 것은 사사로운 미움 때문이 아니라, 그 판정이 부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다. 다음 장 첫머리의 「경문이 뚜렷하니 사사로운 말을 어찌 더하랴」가 그 뜻이다.

「불종을 끊는다」 — 방법의 죄가 무거운 까닭

비유품의 이 글에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일체 세간의 불종을 끊으리라」라는 말이다. 법화경은 일체중생에게 부처의 생명이 갖추어져 있으며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한 경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일체중생의 성불의 씨앗, 곧 불종이다. 이 경을 믿지 않고 비방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불종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며, 나아가 그 비방이 세상에 퍼지면 다른 사람들이 이 경을 만날 길을 막아 그들의 불종까지 끊는 일이 된다.

여기에 방법의 죄가 오역보다도 무거운 까닭이 있다. 오역은 부모나 성자의 몸을 해치는 죄이지만, 방법은 일체중생의 불종을 끊는 죄다. 다음 장에서 대성인께서 「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자는 한량없는 오역보다 무겁다」고 맺으시는 것이 이 뜻이다. 제4장에서 본 열반경의 「악지식은 법신을 무너뜨린다」와도 같은 논리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 생명의 경애

「그 사람은 목숨을 마치고 아비지옥에 들어가리라」고 해도, 사후의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간지옥의 두려움이 실감되지 않을 것이다. 지옥이라 하면 바늘 산과 피 바다가 있고 큰 불길이 소용돌이치는 두루마리 그림의 광경만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이는 지옥의 법문을 옛이야기처럼 전해 온 데에도 그 까닭이 있다.

그러나 불법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무엇보다 우리 생명의 고뇌의 경애다. 십계 가운데 지옥계는 괴로움에 묶여 조금도 자유롭지 못한 생명의 상태를 말한다. 심한 병고에 시달려 괴로워 몸부림치는 사람,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 악의 수렁에 발을 들여 빠져나오려 해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 — 평화로운 사회 안에도 지옥의 괴로움은 엄연히 있다.

사람의 생명을 현세만의 존재로 보더라도, 언제 이러한 불행에 빠질지 모른다. 평생 그런 일을 만나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하물며 부처는 생명이 영원하며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에 걸쳐 이어진다고 설하셨다.

삼세의 생명과 임종의 상

우리의 지금 모습은 과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고, 미래의 원인은 현재에 있다. 그리고 대성인께서는 현세의 끝이자 미래의 첫걸음이라 할 임종의 상(相)이야말로 불법의 큰일이라고 다음과 같이 보이셨다. 「묘호니부인답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大論に云く「臨終の時色黒き者は地獄に堕つ」等云云、守護経に云く「地獄に堕つるに十五の相.餓鬼に八種の相.畜生に五種の相」等云云、天台大師の摩訶止観に云く「身の黒色は地獄の陰に譬う」等云云、夫以みれば日蓮幼少の時より仏法を学び候しが念願すらく人の寿命は無常なり、出る気は入る気を待つ事なし・風の前の露尚譬えにあらず、かしこきもはかなきも老いたるも若きも定め無き習いなり、されば先臨終の事を習うて後に他事を習うべしと

『대지도론』에 「임종 때 빛이 검은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고, 『수호경』에 「지옥에 떨어지는 데 열다섯 가지 상, 아귀에 여덟 가지 상, 축생에 다섯 가지 상」이라 했으며, 천태대사의 『마하지관』에 「몸의 검은빛은 지옥의 그늘에 비유한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니치렌은 어릴 때부터 불법을 배웠는데 바라기를, 사람의 수명은 무상하다. 나가는 숨은 들어오는 숨을 기다리지 않는다. 바람 앞의 이슬도 비유가 되지 못한다. 현명한 이도 어리석은 이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정함이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므로 먼저 임종의 일을 배우고 그 뒤에 다른 일을 배우리라 하였다.

「묘호니부인답서」, 1404쪽

같은 글에 또

大論に云く「赤白端正なる者は天上を得る」云云、天台大師御臨終の記に云く色白し、玄奘三蔵御臨終を記して云く色白し、一代聖教を定むる名目に云く 「黒業は六道にとどまり 白業は四聖となる」

『대지도론』에 「붉고 희며 단정한 자는 천상을 얻는다」고 했다. 천태대사의 임종을 기록하여 빛이 희었다 하고, 현장삼장의 임종을 기록하여 빛이 희었다 한다. 일대 성교를 정한 명목에 「검은 업은 육도에 머물고, 흰 업은 사성이 된다」고 했다.

「묘호니부인답서」, 1404쪽

라고 하셨다. 「센니치니부인답서」에는

人は臨終の時地獄に堕つる者は黒色となる上其の身重き事千引の石の如し善人は設ひ七尺八尺の女人なれども色黒き者なれども臨終に色変じて白色となる又軽き事鵞毛の如しヤワラカなる事兜羅緜の如し

사람은 임종 때 지옥에 떨어지는 자는 검은빛이 될 뿐 아니라 그 몸의 무겁기가 천 사람이 끄는 돌과 같다. 선인은 설령 일곱 자 여덟 자의 여인이라도, 빛이 검은 사람이라도, 임종에 빛이 변하여 흰빛이 되고 또 가볍기가 거위 털과 같으며 부드럽기가 도라솜과 같다.

「센니치니부인답서」, 1316쪽

라고 하셨고, 「교행증어서」에는

一切は現証には如かず善無畏.一行が横難横死・弘法・慈覚が死去の有様.実に正法の行者是くの如くに有るべく候や

일체는 현증만 한 것이 없다. 선무외 · 일행의 횡난 · 횡사, 홍법 · 자각의 죽음의 모습 — 참으로 정법의 행자가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교행증어서」, 1279쪽

라고 하셨다. 니치칸 상인도 『삼중비전초(三重秘伝抄)』에서 「여시상(如是相)이란, 비유하면 임종에 검은빛인 것은 지옥의 상이고 흰빛인 것은 천상의 상인 것과 같다」고 풀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임종의 상을 이렇게 중시하는 것은, 일념삼천의 법리에서 생명의 안(성품)과 밖(상)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십여시의 첫째 「여시상」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라면, 임종의 모습은 한 생애의 생명이 마지막에 드러내는 「상」이다.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에서 본 선도 · 법연과 그 제자들의 임종에 대한 대성인의 지적도 이 법리에 선 것이다.

지옥의 상빛이 검다몸이 무겁기가 천 사람이 끄는 돌과 같다(「센니치니부인답서」 1316쪽 · 『대지도론』 · 『마하지관』)
선인 · 천상의 상빛이 희어진다가볍기가 거위 털과 같고 부드럽기가 도라솜과 같다(「묘호니부인답서」 1404쪽 · 「센니치니부인답서」 1316쪽)
법리
「검은 업은 육도에 머물고 흰 업은 사성이 된다」여시상(니치칸 상인 『삼중비전초』)
「먼저 임종의 일을 배우고 그 뒤에 다른 일을 배우리라」先臨終の事を習うて後に他事を習うべし(1404쪽)
도표 11 · 임종의 상

「우연」으로 정리할 수 없는 생명

불법의 철리 위에서 이렇게 분명한데도, 영원한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삼세의 생명관은 미신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생명이 우연히 생긴 것이라면, 실제로 사람마다 갖가지 능력의 차이, 성격의 다름, 용모의 차이가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유전이나 환경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하필 그런 유전 아래 태어나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야 했는가 하는 물음에는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다.

모르니까 우연으로 정리해 버리는 것은 탐구의 정신을 버리는 일이다. 스스로 모르기에 더욱 그것을 밝힌 철학을 겸허하게 구해야 할 것이다. 그 그칠 줄 모르는 탐구심, 진리를 터득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참된 이성의 정신이다. 적어도 자기의 기존 지식으로 다 감쌀 수 없다고 해서 스스로 탐구하는 노력을 내던지고 우연이나 미신이나 망상이라는 말로 정리해 버리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아니다.

비유품의 「목숨을 마치고 아비지옥에 들어가리라」는 이 삼세의 생명관 위에서 읽어야 한다. 현세에 정법을 비방한 업인은 목숨이 다해도 사라지지 않고 다음 생의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거꾸로 현세에 정법을 지닌 공덕 또한 목숨을 넘어 이어진다. 그러므로 방법을 막는 일은 지금 이 나라의 재난을 멈추는 일인 동시에, 사람들을 삼세에 걸친 괴로움에서 건지는 일이 된다. 이것이 입정안국론이 「방법의 사람을 금하라」고 거듭 말하는 자비의 근거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비유품의 「불종을 끊는다」 「아비지옥에 들어간다」는 삼세의 생명관 위에서 읽힌다. 정법을 비방하는 것은 자기와 세간의 성불의 씨앗을 끊는 일이며, 그 업은 목숨을 넘어 이어진다. 방법을 막는 것은 사람들을 삼세의 괴로움에서 건지는 자비다.

제7단 제9장 경증으로 방법 치벌을 맺다
어서 29쪽 14~17행 · 第七段 第九章 経証により謗法治罰を結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9쪽 14~17행
本文 · 어서 원문

夫れ経文顕然なり私の詞何ぞ加えん、 凡そ法華経の如くんば大乗経典を謗ずる者は無量の五逆に勝れたり、故に阿鼻大城に堕して永く出る期無けん、 涅槃経の如くんば設い五逆の供を許すとも謗法の施を許さず、蟻子を殺す者は必ず三悪道に落つ、謗法を禁ずる者は不退の位に登る、 所謂覚徳とは是れ迦葉仏なり、有徳とは則ち釈迦文なり。

풀이

무릇 경문이 이렇듯 뚜렷하니 사사로운 말을 어찌 더하겠는가. 대저 법화경대로라면 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자는 그 죄가 한량없는 오역보다 무거우니라. 그러므로 아비대성에 떨어져 길이 나올 기약이 없으리라. 열반경대로라면 설령 오역의 죄인에게 공양함은 허락할지라도 방법의 사람에게 보시함은 허락하지 않느니라. 개미 새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지만, 방법을 금하는 자는 불퇴의 지위에 오르느니라. 이른바 각덕이란 곧 가섭불이요, 유덕이란 곧 석가모니불이시니라.

어구 풀이

経文顕然なり경문이 뚜렷하다
제3장부터 제8장까지 인용한 열반경 · 인왕경 · 법화경의 글이 모두 같은 결론을 분명히 가리킨다는 뜻이다.
私の詞何ぞ加えん사사로운 말을 어찌 더하랴
경문이 이토록 분명하니 자기 생각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제2장 첫머리의 「다만 경문에 나아가 조금 생각하는 바를 말하리라」와 짝을 이루어, 주인의 대답 전체가 경문에 근거함을 맺는다.
大乗経典を謗ずる者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자
여기서 대승경전은 무엇보다 법화경을 가리킨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말법에서의 참된 대승경전을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로 본다.
無量の五逆に勝れたり한량없는 오역보다 무겁다
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죄는 오역죄를 한량없이 거듭 지은 것보다도 무겁다는 뜻이다. 오역은 몸을 해치는 죄이지만, 방법은 일체중생의 불종을 끊는 죄이기 때문이다.
阿鼻大城아비대성
아비지옥, 곧 무간지옥이다. 둘레가 일곱 겹의 쇠 성벽과 일곱 층의 쇠 그물로 둘러싸여 있어 아비대성 · 무간대성이라 한다. 오역죄와 정법 비방의 사람이 떨어진다고 한다.
永く出る期無けん길이 나올 기약이 없으리라
법화경 비유품에 「그 사람은 목숨을 마치고 아비지옥에 들어가 1겁을 채우고, 겁이 다하면 다시 태어나며, 이와 같이 거듭 돌아 무수겁에 이른다」는 뜻이 설해져 있다. 「현방법초」에는 무간지옥의 수명을 1중겁이라 하고, 인수가 무량세로부터 백 년에 한 살씩 줄어 10세에 이르는 것을 1감, 10세로부터 백 년에 한 살씩 늘어 8만 세에 이르는 것을 1증이라 하며, 이 1증 1감을 소겁으로 삼아 20증감을 1중겁이라 한다는 설을 들었다. 중겁에 대해서는 경론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五逆の供を許すとも謗法の施を許さず오역에게 공양함은 허락해도 방법에게 보시함은 허락하지 않는다
제3장 열반경의 「오직 일천제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에 보시하라」를 맺은 말이다. 다음 단의 「그 보시를 멈춘다」가 바로 이 구절을 말법의 방법 대치의 법도로 세운 것이다.
蟻子を殺す者は必ず三悪道に落つ개미 새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진다
제4장 열반경의 「하살」을 받는 말이다. 가장 작은 생명을 해쳐도 죄보가 있다는 것으로, 불법이 생명을 얼마나 무겁게 보는지를 보인다.
三悪道삼악도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 갈래 악도다.
謗法を禁ずる者は不退の位に登る방법을 금하는 자는 불퇴의 지위에 오른다
정법을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으로 방법을 막는 사람은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다. 「금한다」의 법도는 다음 단에서 「그 보시를 멈춘다」로 정해진다.
不退の位불퇴의 지위
「불퇴」는 불퇴전의 줄임으로, 범어 아비니바르타니야(avinivartanīya) 또는 아바이바르티카(avaivartika)의 번역이다. 음사하여 아비발치(阿毘跋致) · 아유월치(阿惟越致)라고도 쓴다. 불도 수행에서 어떤 유혹이나 박해가 있어도 육도나 이승으로 물러나는 일이 더는 없는 경지다. 천태대사는 보살 수행의 52위 가운데 제11위인 초주의 지위를 불퇴로 삼았다.
釈迦文석가문
석존이다. 범어 샤키야무니(Śākyamuni)의 음사로, 석가모니와 같은 말의 음사다.

이 장의 자리 — 경증의 맺음

이 장은 지금까지 인용한 열반경 · 인왕경 · 법화경의 글을 모아, 방법의 사람을 반드시 꾸짖고 막아야 한다는 것을 결론짓는다. 장의 짜임은 단순하다. 먼저 「경문이 뚜렷하니 사사로운 말을 더하지 않는다」고 하신 뒤, 법화경에 따른 결론(방법의 죄는 오역보다 무겁다)과 열반경에 따른 결론(방법에는 보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방법을 금하는 자는 불퇴에 오른다)을 나란히 놓고, 마지막에 유덕왕 · 각덕비구의 이야기가 석존과 가섭불의 일임을 다시 확인하신다.

이 장에서 가장 무게를 두어야 할 구절은 「설령 오역의 공양은 허락할지라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이다. 제3장부터 이어진 열반경의 엄한 글들 — 선예국왕의 이야기, 칼과 활을 지니라는 글, 유덕왕의 싸움 — 이 결국 어디로 모이는가를 대성인께서 직접 맺으신 말씀이 「보시를 허락하지 않는다」이기 때문이다. 이 맺음이 다음 단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로 곧바로 이어진다.

「사사로운 말을 어찌 더하랴」 — 경문에 의지하는 전통

이미 말한 대로 대성인의 설법은 모두 부처의 경문을 끝까지 의지처로 삼아 이루어진다. 이것은 용수보살 · 천친보살 · 천태대사 · 전교대사 등 정법을 전한 이들에게 공통된 중대한 일이다.

천태대사는 「경(修多羅)과 맞으면 기록하여 쓰고, 경문이 없는 것은 믿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했다. 전교대사는 「부처의 설에 의지하고 구전을 믿지 말라(仏説に依憑して口伝を信ずること莫れ)」고 했다. 용수보살은 『대지도론』에서 「경에 의지하는 것은 흰 논(白論)이고, 경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검은 논(黒論)이다(修多羅に依るとは白論なり修多羅に依らざるは黒論なり)」라고 했다. 「수다라」는 범어 수트라(sūtra)로 경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이름난 고승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의 말이라도, 부처의 금언인 경문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써서는 안 된다는 경계다. 보은초 제1편 「보은의 도리와 여러 종의 미란」에서 본 열반경의 유계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와 같은 정신이다.

그런데 법연의 『선택집』의 논지를 보더라도 분명하듯, 그 의지처는 담란 · 도작 · 선도라는 인사(人師)의 설이지 부처의 경문이 아니다. 게다가 담란 · 도작 등의 설은 용수보살의 말을 제 생각대로 풀이하고 거기에 자기의 사견을 더해 만든 것이다. 그것을 다시 법연의 사견으로 더욱 그릇되게 했으니, 두 겹 세 겹의 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에서 『선택집』이 담란 · 도작 · 선도의 「그릇된 해석(謬釈)」을 끌어다 썼다고 하신 것이 이것이다. 경문에서 출발하여 경문으로 맺는 주인의 논법과, 인사의 해석에 해석을 덧쌓은 『선택집』의 논법이 여기서 뚜렷이 대비된다.

「대승경전」이란 무엇인가 — 대소승의 상대

「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자는 한량없는 오역보다 무겁다.」 대승 · 소승이란, 더러운 국토인 이쪽 언덕에서 정토인 저쪽 언덕으로 중생을 실어 나르는 수레라는 뜻에서, 많은 중생을 건지는 가르침을 대승, 적은 사람밖에 건지지 못하는 가르침을 소승이라 한다. 보통 오중상대 등에서 삼장교를 소승이라 하는 데 대해 통교 · 별교 · 원교의 세 가르침을 대승이라 하고, 이것을 다시 나누어 통교 · 별교를 권대승, 원교를 실대승이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승경전」이라 하신 것은 통교 · 별교 · 원교 어느 경전을 비방해도 한량없는 오역보다 무겁다는 뜻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말법의 지금에는 오직 문저에 감추어진 대법, 본지난사(本地難思)의 묘법연화경 한 법을 참된 대승경전으로 삼는다. 「소승대승분별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夫れ小大定めなし一寸の物を一尺の物に対しては小と云い五尺の男に対しては六尺七尺の男を大の男と云う、外道の法に対しては一切の大小の仏教を皆大乗と云う

무릇 작고 큼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 한 치의 물건을 한 자의 물건에 견주면 작다 하고, 다섯 자의 남자에 견주어 여섯 자 일곱 자의 남자를 큰 남자라 한다. 외도의 법에 견주면 일체의 대소 불교를 모두 대승이라 한다.

「소승대승분별초」, 520쪽

같은 글은 이어서, 불교 안에서는 녹야원 12년의 설인 사아함경 등 일체의 소승경을 여러 대승경에 견주어 소승경이라 하고, 여러 대승경 안에서도 대승 가운데 떨어지는 가르침을 소승이라 한다는 것, 천태 · 묘락은 아함경뿐 아니라 화엄경의 별교와 방등 · 반야의 통교 · 별교의 대승까지 소승으로 정했다는 것, 그리고 천태대사는 수량품의 「소법을 즐기는 덕이 엷고 때가 무거운 자(楽於小法・徳薄垢重者)」라는 글의 「소법」을 소승경도 여러 대승경도 아니라 구원실성을 설하지 않은 화엄경의 원교 내지 방등 · 반야, 법화경 적문 14품의 원돈의 대법까지라고 풀었다는 것을 차례로 밝히신다.

본래 대승이라 하고 소승이라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바라문교나 유교 · 도교 등의 외도에 견주면 일체의 불교가 대승이다. 다시 석존 일대의 불교 안에서 논하면 삼장교는 소승이고 통교 · 별교 · 원교는 대승이다. 나아가 그 대승 안에서 통교 · 별교의 권교는 소승이고 법화경의 원교가 대승이다. 법화경 28품 안에서는 앞의 14품인 적문이 소승이고 뒤의 14품인 본문이 대승이다. 그리고 석존 일대 불법 가운데 대승 중의 대승인 법화경 본문도, 수량품 문저의 독일본문(獨一本門)에 견주면 소승이 되고, 독일본문이야말로 참된 대승이 된다.

  1. ⑤본문 안
    문상의 본문은 소승
    수량품 문저의 독일본문이 참된 대승
  2. ④법화경 안
    적문 14품은 소승
    본문 14품이 대승
  3. ③대승 안
    통교 · 별교의 권교는 소승
    법화경의 원교가 대승
  4. ②불교 안
    삼장교는 소승
    통교 · 별교 · 원교는 대승
  5. ①
    외도
    불교일체의 불교가 대승
「무릇 작고 큼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夫れ小大定めなし(「소승대승분별초」 520쪽)
도표 12 · 대승과 소승의 상대

「관심의 본존초」에는

一品二半よりの外は小乗教・邪教・未得道教・覆相教と名く

일품이반 밖의 것은 소승교 · 사교 · 미득도교 · 부상교라 이름한다.

「관심의 본존초」, 249쪽

라고 하셨다. 여기서 일품이반이란,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천태가 세운 약개 · 광개의 일품이반이 아니라 대성인의 본의인 말법 유포의 대법을 드러내는 일품이반으로 푼다. 곧 말법에서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 이외는 모두 소승교이며, 사교이며, 미득도교 · 부상교라는 말씀이다.

그 까닭은 「우에노전답서」에 「지금 말법에 들어서는 다른 경도 법화경도 소용이 없다. 다만 남묘호렌게쿄일 것이다(今末法に入りぬれば余経も法華経もせんなし、但南無妙法蓮華経なるべし)」(1546쪽)라 하시고, 「다카하시입도전답서」에도 「법화경은 문자는 있어도 중생의 병의 약은 되지 못할 것이다(法華経は文字はありとも衆生の病の薬とはなるべからず)」(1458쪽)라고 하신 것으로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 본문에서 「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자는 오역죄를 한량없이 지은 죄보다 무겁다」고 하신 것은,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대성인께서 세우신 삼대비법의 본존을 비방하는 자라는 뜻이 된다. 입정안국론의 문상에서는 법연이 법화경을 비방한 것을 가리키지만, 그 법화경의 근본이 문저의 삼대비법이라는 것은 제2장에서 본 「삼대비법품승사」의 뜻과 같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대승 · 소승은 무엇에 견주느냐에 따라 바뀌는 상대적인 이름이다. 외도 → 불교 → 원교 → 본문 → 문저 독일본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말법의 참된 대승경전은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다.

「방법의 보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설령 오역의 공양은 허락할지라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 오역죄를 지은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은 허락해도, 방법의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곧 방법을 굳게 금하는 일의 중대함을 힘주어 말씀하신 것이다. 「교기시국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法華経を謗ぜん者をば正像末の三時に亘りて持戒の者をも無戒の者をも破戒の者をも共に供養すべからず、供養せば必ず国に三災七難起り供養せし者も必ず無間大城に堕すべきなり

법화경을 비방하는 자는 정법 · 상법 · 말법의 삼시에 걸쳐 지계의 자든 무계의 자든 파계의 자든 모두 공양해서는 안 된다. 공양하면 반드시 나라에 삼재칠난이 일어나고, 공양한 자도 반드시 무간대성에 떨어질 것이다.

「교기시국초」, 439쪽

방법에 공양하면 「나라에 삼재칠난이 일어난다」는 이 글은, 입정안국론 전체의 논지 — 재난의 근원은 방법에 있다 — 와 「보시를 멈춘다」는 결론을 하나로 묶는다. 방법에 공양하는 것은 방법을 키우는 일이며, 방법이 자라면 재난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방법에 공양하지 않는 것이 곧 재난을 멈추는 길이 된다.

또 거꾸로, 정법의 승려는 방법의 사람으로부터 공양을 받는 일도 결코 없다. 니치칸 상인은 「입정안국론 문단」에서 이렇게 말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이미 방법의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어찌 방법의 사람의 공양을 받겠는가. 그리고 그 근거로 대성인의 여러 글을 든다. 「주군이입차법문면여동죄사」에

但し法華経の御かたきをば大慈大悲の菩薩も供養すれば必ず無間地獄に堕つ、五逆の罪人も彼を怨とすれば必ず人天に生を受

다만 법화경의 원수에게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라도 공양하면 반드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오역의 죄인이라도 그를 원수로 삼으면 반드시 인 · 천에 태어난다.

「주군이입차법문면여동죄사」, 1133쪽

라고 하셨으니 지금 이 글의 뜻과 같으며, 「교기시국초」도 지금 이 글과 같다. 「조묘성인답서」에

劣る仏を供養する尚九十一劫に金色の身と為りぬ 勝れたる経を供養する施主・一生に仏位に入らざらんや、但真言・禅宗・念仏者等の謗法の供養を除き去るべし、譬えば修羅を崇重しながら帝釈を帰敬するが如きのみ

떨어지는 부처를 공양한 것도 오히려 91겁 동안 금빛 몸이 되었다. 뛰어난 경을 공양하는 시주가 어찌 일생에 부처의 지위에 들지 못하겠는가. 다만 진언 · 선종 · 염불자 등 방법의 공양은 없애 버려야 한다. 비유하면 아수라를 숭상하면서 제석을 귀경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조묘성인답서」, 1012쪽

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방법의 공양을 받지 않는다는 명문이다. 『어의구전』에는 「방법의 공양을 받지 않는 것은 탐욕의 병을 없애는 것이다(謗法の供養を受けざるは貪欲の病を除くなり)」(755쪽)라 하셨고, 닛코 상인의 「닛코유계치문」에는 「방법의 공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일(謗法の供養を請く可からざる事)」(1618쪽)이라고 하셨다.

주지 않는다방법의 사람에게 공양하지 않는다「설령 오역의 공양은 허락할지라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본문 29쪽)「공양하면 반드시 나라에 삼재칠난이 일어난다」(「교기시국초」 439쪽)
받지 않는다정법의 승려는 방법의 공양을 받지 않는다「방법의 공양을 받지 않는 것은 탐욕의 병을 없애는 것」(『어의구전』 755쪽)「방법의 공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일」(「닛코유계치문」 1618쪽)
공양의 흐름을 바꾸어 방법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
「설령 오역의 공양은 허락할지라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設い五逆の供を許すとも謗法の施を許さず(29쪽)
도표 13 · 「보시를 멈춘다」의 두 방향

방법에 「주지 않는 것」과 방법에서 「받지 않는 것」 — 이 두 방향이 갖추어질 때 방법은 그 근거를 잃는다. 무력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공양의 흐름을 바꿈으로써 방법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7단의 엄한 경문들이 말법에서 실제로 뜻하는 바이며, 다음 단에서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 그러면 사해 만방 일체의 사중이 그 악에 보시하지 않고 모두 이 선에 돌아온다면 어떤 난이 아울러 일어나고 어떤 재앙이 다투어 오겠는가」로 결론지어진다.

「개미 새끼를 죽이는 자」와 「방법을 금하는 자」

「개미 새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고, 방법을 금하는 자는 불퇴의 지위에 오른다.」 이 대구는 제4장의 열반경 글을 맺은 것이다. 개미 새끼처럼 가장 작은 생명을 해쳐도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진다 — 불법은 그만큼 생명을 무겁게 본다. 그런데 방법을 금하는 사람은 불퇴의 지위에 오른다 — 정법을 아끼고 지키며 세우려는 마음은 그만큼 큰 선근이 된다.

이 대구를 「방법자의 목숨은 개미보다 가볍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앞 구절은 생명을 해치는 일의 죄를, 뒤 구절은 방법을 막는 일의 공덕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금한다」의 법도는 바로 앞 구절 「방법의 보시를 허락하지 않는다」가 이미 보였다. 생명을 해치는 일은 개미 한 마리라도 죄가 되므로, 방법을 금하는 길은 해침이 아니라 보시를 멈추는 길이어야 한다. 두 구절을 나란히 읽으면 오히려 「보시를 멈춘다」는 결론의 필연성이 드러난다.

「각덕은 가섭불, 유덕은 석가모니불」

「이른바 각덕이란 곧 가섭불이요, 유덕이란 곧 석가모니불이시다.」 제7장의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여 맺으신 말이다. 정법을 넓힌 각덕비구는 뒤에 가섭불이 되었고, 그를 몸 바쳐 지킨 유덕왕은 뒤에 석가모니불이 되었다. 곧 정법을 넓히는 사람도, 정법을 지키는 사람도 함께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이 석존 자신의 과거세를 증거로 드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 객이 정토의 교주로 받드는 아미타불이 아니라, 이 사바세계의 교주인 석가모니불이 정법을 지켜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1장에서 본 대로 법연은 석존을 내버려 두고 아미타를 높였다. 그러나 석존 자신은 방법을 금하고 정법을 지킨 인연으로 금강 같은 법신을 이루었다. 석존의 제자라면 석존이 걸은 그 길 — 정법을 지키고 방법에 보시하지 않는 길 — 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맺음이다.

제7단 제10장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함을 맺다
어서 29쪽 18행~30쪽 7행 · 第七段 第十章 国中の謗法を断ずべきを結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9쪽 18행 ~ 30쪽 7행
本文 · 어서 원문

法華涅槃の経教は一代五時の肝心なり其の禁実に重し誰か帰仰せざらんや、 而るに謗法の族正道の人を忘れ剰え法然の選択に依つて弥よ愚癡の盲瞽を増す、 是を以て或は彼の遺体を忍びて木画の像に露し或は其の妄説を信じて莠言を模に彫り之を海内に弘め之を閣外に翫ぶ、 仰ぐ所は則ち其の家風施す所は則ち其の門弟なり、 然る間或は釈迦の手指を切つて弥陀の印相に結び或は東方如来の鴈宇を改めて西土教主の鵝王を居え、 或は四百余回の如法経を止めて西方浄土の三部経と成し或は天台大師の講を停めて善導講と為す、 此くの如き群類其れ誠に尽くし難し是破仏に非ずや是破法に非ずや是破僧に非ずや、此の邪義則ち選択に依るなり。 嗟呼悲しいかな、如来誠諦の禁言に背くこと、哀なるかな愚侶迷惑の粗語に随うこと、早く天下の静謐を思わば須く国中の謗法を断つべし。

풀이

법화경과 열반경의 가르침은 일대 오시의 간심이니라. 그 금계는 실로 무거우니, 누가 귀의하여 우러르지 않겠는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본디 방법의 무리로서 정도를 잊은 사람들인데, 게다가 법연의 『선택집』에 의해 더욱 어리석음의 눈멂을 더하였도다. 이로써 혹은 그(법연)의 유체를 그리워하여 나무와 그림의 상으로 나타내고, 혹은 그 망설을 믿어 가라지 같은 말을 판목에 새겨 이를 나라 안에 넓히고 이를 성 밖에까지 즐겨 읽는도다. 우러르는 바는 곧 그(법연)의 가풍이요, 보시하는 바는 곧 그의 문제(門弟)이니라. 그러는 사이 혹은 석가상의 손가락을 잘라 아미타의 인상(印相)으로 맺고, 혹은 동방 여래(약사여래)의 가람을 고쳐 서방 교주(아미타불)의 상을 앉히며, 혹은 사백여 회 이어 온 여법경(如法経)을 멈추어 서방정토의 삼부경으로 바꾸고, 혹은 천태대사의 강(講)을 멈추어 선도강(善導講)으로 삼았느니라. 이와 같은 무리는 참으로 다 헤아리기 어렵도다. 이것이 부처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승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그릇된 뜻은 곧 『선택집』에 의한 것이니라. 아아 슬프도다, 여래의 진실한 금언을 등짐이여. 애달프도다, 어리석은 승려의 미혹한 거친 말을 따름이여. 일찍 천하의 정밀(静謐)을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하리라.

어구 풀이

法華涅槃の経教は一代五時の肝心なり법화 · 열반의 경교는 일대 오시의 간심이다
석존 일대의 설법을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 · 법화열반의 다섯 때로 나누는 천태의 오시 교판에서, 마지막 법화열반시가 일대의 간심이라는 것이다. 제7단에서 인용한 경증이 주로 이 두 경에서 나온 까닭이기도 하다.
其の禁実に重し그 금계는 실로 무겁다
법화경과 열반경이 방법을 금한 경계(禁)는 매우 무겁다는 뜻이다. 앞 장에서 맺은 「방법의 죄는 오역보다 무겁다」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를 받는다.
謗法の族正道の人を忘れ방법의 무리, 정도를 잊은 사람
니치칸 상인은 이 두 구를 「여러 종은 본디 방법자이며 정도를 잊은 사람들임을 밝힌 것이다. 게다가 『선택집』에 의해 더욱 어리석음과 눈멂을 더했으므로 『게다가(剰え)』라 한 것이다」라고 풀었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愚癡の盲瞽어리석음의 눈멂
어리석어 눈먼 것과 같은 상태. 법화경의 정도를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遺体を忍びて木画の像に露し유체를 그리워하여 나무와 그림의 상으로 나타내다
법연을 그리워하여 그 모습을 목상으로 새기거나 그림으로 그려 받드는 것이다.
莠言유언
「유(莠)」는 강아지풀. 기장과 비슷하지만 잎만 자라고 열매를 맺지 않는 잡초다. 곧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속이 빈 거짓 말을 뜻하니, 법연의 그릇된 뜻의 말을 가리킨다.
模に彫り판목에 새기다
『선택집』을 판목에 새겨 인쇄하여 퍼뜨린 것을 말한다. 입정안국론 제6편 「염불 금지 감장의 상주」에서 본 대로, 원인(元仁) 연간에 엔랴쿠사 · 고후쿠사가 거듭 상주하여 『선택집』의 판목을 대강당에 거두어 불태웠다.
海内・閣外나라 안 · 성 밖
「해내(海内)」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 안이다. 「閣外」는 「곽외(槨外)」로도 읽힌다. 「곽(槨)」은 「둘레」 「울타리」로, 중국에서는 도성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쌌으므로 성 안을 곽내, 성 밖을 곽외라 했다. 여기서는 염불의 무리가 도읍 밖 시골 구석구석까지 법연의 그릇된 뜻을 넓혀 염불의 슬픈 소리가 온 나라를 뒤덮은 것을 말한다.
家風・門弟가풍 · 문제
법연이 남긴 가르침의 풍조와 그 제자들. 나라의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우러르는 것은 염불이요, 보시라 하면 법연의 문하에만 한다는 세상의 모습이다.
釈迦の手指を切つて弥陀の印相に結び석가의 손가락을 잘라 미타의 인상으로 맺다
중세 초, 염불이 크게 퍼지기 시작했을 때 민중의 뜻에 영합하려고 본래의 석가상의 손가락을 잘라 아미타의 인상으로 바꾸어 아미타상으로 삼는 일이 많이 행해졌다.
鴈宇안우
불교의 가람, 곧 당탑을 말한다. 그 유래로 두 설이 있다. 하나는 『대당서역기』에 전하는,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기러기 공양탑 이야기다. 한 비구가 기러기 떼가 나는 것을 보고 장난삼아 「때를 알라」고 하자 기러기 한 마리가 스스로 떨어져 죽었고, 이 기러기가 계율을 일깨운 것이라 하여 그 자리에 묻고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석씨요람』의 「안당(雁堂)」 설로, 비사리의 대림에서 부처를 위해 지은 당의 모양이 기러기 새끼 같았다는 것이다. 당사의 지붕이 사방으로 드리운 것이 기러기가 날개로 스스로를 덮은 것과 같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니치칸 상인의 「입정안국론 문단」은 이 두 인연을 들어 「안우는 당탑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풀었다.
鵝王아왕
부처의 다른 이름. 부처의 삼십이상 가운데 손발가락 사이에 물갈퀴 같은 막이 있는 수족지만망상(手足指縵網相)이 있는데, 중생을 빠짐없이 건지는 상징이라 하여 부처를 거위의 왕(鵝王)이라 부르게 되었다. 니치칸 상인의 「입정안국론 문단」도 이것을 삼십이상 가운데 망만상에 맞춘 이름이라고 풀었다. 여기서는 서방 교주인 아미타불의 상을 가리킨다.
四百余回の如法経사백여 회의 여법경
여법경은 자각대사(엔닌)가 시작한 법화경 서사의 행이다. 엔닌이 히에이잔 요카와에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육근참회의 삼매 행법을 닦으며 여법한 작법으로 법화경 등을 서사하여 작은 탑에 넣어 여법당에 안치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이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법화 삼부를 서사하여 야마토의 긴푸센에 묻는 등 성행했다. 그런데 정토종의 여법경은 원구 원년(1204) 법연이 정토 삼부경을 서사하여 고시라카와 법황의 13회기 법요에 공양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天台大師の講천태대사의 강
천태대사의 기일인 11월 24일에 해마다 열던 법회로, 천태대사강(天台大師講) · 상월회(霜月会)라 한다.
善導講선도강
정토교의 선도를 기리는 법회. 천태대사의 강을 멈추고 이것으로 바꾼 것은, 법화경을 넓힌 스승 대신 염불의 스승을 받든 것이다.
如来誠諦の禁言여래의 진실한 금언
부처의 거짓 없는 참된 말씀으로 방법을 금한 경문, 곧 제3장부터 인용한 법화경 · 열반경의 글이다.
愚侶迷惑の粗語어리석은 승려의 미혹한 거친 말
법연의 『선택집』의 말을 가리킨다. 부처의 금언과 인사의 거친 말이 대구를 이룬다.
天下の静謐천하의 정밀
세상이 고요하고 편안한 것. 제1장 객의 「천하태평 · 국토안온」에 대한 제7단의 마지막 대답이다.

이 장의 자리 — 제7단의 맺음

이 장은 제7단 전체를 맺는다. 법화경과 열반경이 석존 일대의 간심이며 그 금계가 매우 무겁다는 것을 먼저 확인한 뒤, 당세의 방법의 무리가 석존을 잊고, 또 그 석존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은 천태 · 전교 등 불법의 정통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법연의 그릇된 뜻에 미혹되어 불법을 깨뜨리는 행위가 나라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에 「일찍 천하의 정밀을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신다.

이 결론이 제1장 객의 물음 「재앙을 없애고 난을 멈추는 방책이 있으면 듣고 싶다」에 대한 제7단의 대답이다. 객은 「먼저 국가를 기원하라」고 했으나, 주인은 「나라 안의 방법을 끊으라」고 답했다. 그런데 「끊는다」는 말을 들은 객은 다음 단에서 「방법의 무리를 끊으려면 저 경문대로 참죄에 처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살해가 더해져 그 죄업은 어찌하는가」라고 되묻고, 다시 대집경을 들어 승려를 치고 욕하는 죄를 묻는다. 주인은 그 물음에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고 답하여, 「끊는다」의 법도를 보시를 멈추는 것으로 정한다. 그러므로 이 장의 결론은 다음 단의 대답과 하나로 이어 읽어야 한다.

당세의 방법 — 『선택집』이 낳은 것들

본문은 『선택집』이 세상에 퍼진 뒤의 일본을 생생히 그린다. 법연의 유체를 그리워하여 목상과 화상을 만들고, 『선택집』을 판목에 새겨 찍어 도읍에서 시골 구석구석까지 퍼뜨렸다. 나라의 위아래가 우러르는 것은 법연의 가풍이요, 보시하는 곳은 법연의 문하뿐이 되었다. 앞 장의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러는 사이 네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석가상의 손가락을 잘라 아미타의 인상으로 바꾸었다. 둘째, 동방 약사여래의 가람을 고쳐 서방 아미타불의 상을 앉혔다. 셋째, 자각대사 이래 사백여 년 이어 온 법화경 서사의 여법경을 멈추고 정토 삼부경의 서사로 바꾸었다. 넷째, 해마다 11월 24일에 열던 천태대사강을 멈추고 선도강으로 바꾸었다.

초겨울 저녁의 산사 — 삼나무 숲 속 강당의 닫힌 문과 처마 끝에 남은 등불 하나, 서리 내린 돌계단
그림 · 초겨울 저녁의 산사 — 삼나무 숲 속 강당의 닫힌 문과 처마 끝에 남은 등불 하나, 서리 내린 돌계단

파불 · 파법 · 파승

「이것이 부처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승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씀은, 정토의 무리의 행위가 불 · 법 · 승의 삼보를 정면으로 깨뜨리는 것임을 꾸짖으신 것이다. 네 가지 일을 삼보에 맞추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대성인께서는 이 그릇된 뜻이 모두 「『선택집』에 의한 것」이라고 그 뿌리를 짚으신다. 하나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낳은 한 권의 책, 곧 입정안국론 제1편 「재난 유래의 근본 원인」에서 말한 「일흉(一凶)」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보에 대하여

삼보는 불법에서 매우 중시된다. 쇼토쿠 태자의 십칠조 헌법에 「두텁게 삼보를 공경하라(篤く三宝を敬へ)」고 했다. 법화경 수량품에는 「나의 정토는 무너지지 않는데 중생은 불타 버려 근심과 두려움과 여러 고뇌가 이와 같이 가득하다고 본다. 이 모든 죄의 중생은 악업의 인연으로 아승기겁을 지나도 삼보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삼보를 바르게 세우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종교의 정사가 결정된다. 하물며 불 · 법 · 승의 삼보를 깨뜨리고 부정하거나 그릇된 삼보를 세우는 것은 모두 방법이 된다.

『구경일승보성론』 제3에 「참된 보배는 세상에 드물고, 밝고 깨끗하며 힘이 있고, 능히 세간을 장엄하며, 가장 높고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희유(希有) · 명정(明浄) · 세력(勢力) · 장엄(荘厳) · 최상(最上) · 불변(不変)의 여섯 뜻으로 불 · 법 · 승을 삼보라 한다.

불보란 우주의 실상과 영원한 생명을 끝까지 보고 일체중생에 대하여 주 · 사 · 친의 삼덕을 갖춘 부처다. 법보란 그 부처의 교법이며, 승보란 부처의 교법을 바르게 전하여 지니는 승이다. 이 삼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바른 불도 수행은 할 수 없고, 따라서 성불, 곧 절대적인 행복의 경애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삼보의 은혜를 갚는 일은 모든 보은 가운데서도 특히 중시된다. 「사은초」에는 이렇게 설해져 있다.

法の恩を申さば法は諸仏の師なり諸仏の貴き事は法に依る、されば仏恩を報ぜんと思はん人は法の恩を報ずべし、次に僧の恩をいはば仏宝法宝は必ず僧によりて住す、譬えば薪なければ火無く大地無ければ草木生ずべからず、仏法有りといへども僧有りて習伝へずんば正法・像法・二千年過ぎて末法へも伝はるべからず

법의 은혜를 말하자면, 법은 제불의 스승이다. 제불이 귀한 것은 법에 의한다. 그러므로 부처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사람은 법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다음으로 승의 은혜를 말하자면, 불보와 법보는 반드시 승에 의해 머문다. 비유하면 장작이 없으면 불이 없고 대지가 없으면 초목이 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법이 있다 해도 승이 있어 배워 전하지 않는다면 정법 · 상법 이천 년을 지나 말법까지 전해질 수 없다.

「사은초」, 934쪽

같은 글의 앞부분에는, 석가여래가 한량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 모은 일체의 복덕을 64분으로 나누어 그 가운데 1분만 자신에게 쓰고 63분을 이 세계에 남겨 두어, 오탁이 어지러이 섞이고 비법이 성하며 방법의 사람이 나라에 가득할 때 지혜도 계도 없이 머리만 깎은 비구 · 비구니의 목숨을 지탱하는 것으로 삼겠다고 서원하셨다는 것, 또 백이십 세까지 사실 수 있었던 수명을 팔십에 입멸하여 남은 사십 년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설해져 있다. 그 은혜는 사대해의 물을 벼룻물로, 일체의 초목을 태워 먹으로, 일체 짐승의 털을 붓으로, 시방세계의 대지를 종이로 삼아 적어도 다 갚을 수 없다고 하셨다.

삼시의 삼보

그렇다면 바른 삼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정법 · 상법 · 말법의 삼시에 따라 넓혀지는 법이 다르고, 그에 따라 불보도 승보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법 · 상법 · 말법 삼시의 바른 삼보를 나누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정법 시대
① 소승의 삼보
불장육 열응신의 석존
법사제 · 십이인연의 법문
승성문 사과 · 연각 등의 비구, 가섭 · 아난 등 부법장의 사람들
② 권대승의 삼보
불삼십이상 팔십종호의 승응신
법통교 · 별교의 여러 경
승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 등의 보살, 용수 · 천친 등의 논사
상법 시대
③ 법화 적문의 삼보
불시성정각의 원불
법적문 이(理)의 일념삼천
승법화 회상의 성문 · 연각, 약왕의 후신이라 하는 천태 · 전교
④ 법화 본문의 삼보
불구원 오백진점겁에 성도한 석존
법본문 사(事)의 일념삼천
승상행보살
말법
⑤
불구원원초의 자수용신, 곧 니치렌 대성인
법사행(事行)의 일념삼천 남묘호렌게쿄
승대성인의 법을 바르게 이어 전한 닛코 상인
④는 천태가 적면본리의 입장에서 쓴 문상 탈익의 배치
도표 14 · 삼시의 삼보

다만 ④의 본문의 삼보는 천태대사가 적면본리(迹面本裏)의 입장에서 쓴 것으로, 이른바 문상 탈익의 배치다. 이것을 말법의 문저 하종 사행의 일념삼천에 견주면, 본문 · 적문, 사 · 이의 일념삼천이라 해도 모두 이(理)의 일념삼천이 된다. 또 사도 이전의 대성인께서도 외용(外用)의 면에서 이 본문의 삼보를 세우셨다.

니치칸 상인은 『당류행사초(当流行事抄)』에서 말법의 삼보를 이렇게 밝혔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久遠元初の仏宝、豈異人ならんや即ち是れ蓮祖大聖人なり、五百塵点劫の当初・毎自作是念・以何令衆生・得入無上道・速成就仏身・此の大秘願力を以て即ち末法に出現し自ら身命を惜しまず此の大法を授与す、此の如き大慈悲心・豈末法の仏宝に非ずや

구원원초의 불보는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곧 렌소 대성인이시다. 오백진점겁의 당초 「늘 스스로 이 생각을 하되,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 속히 불신을 성취하게 할까」 하신 이 큰 비원의 힘으로 곧 말법에 출현하시어 스스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이 대법을 주셨다. 이와 같은 대자비심이 어찌 말법의 불보가 아니겠는가.

이어서 니치칸 상인은 구원원초의 법보는 본문의 본존이며, 석존의 인행과 과덕의 두 법이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에 갖추어져 있어 우리가 이 다섯 글자를 받아 지니면 자연히 그 인과의 공덕을 물려받는다고 하고, 구원원초의 승보는 개산 상인(닛코 상인)이니, 부처의 은혜가 깊고 법의 은혜가 한량없어도 이것을 전하지 않는다면 말대의 우리가 어찌 이 대법을 믿고 받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찌 개산 상인이 요법을 맺어 전한 공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말법 출현의 삼보는 그 체가 가장 분명하다고 맺었다.

대성인께서 말법의 어본불이시라는 것은 법화경의 예언과의 부합으로 보아 의심할 바가 없다는 것이 대성인 불법의 입장이다. 대성인 자신의 어서에도 「개목초」의 「니치렌은 일본국 모든 사람에게 주 · 사 · 친이다(日蓮は日本国の諸人にしうし父母なり)」(237쪽), 「선시초」의 「니치렌은 일본 제일의 법화경의 행자임은 결코 의심할 것이 없다. 이로써 미루어 보라. 한토 · 월지에도 일염부제 안에도 어깨를 나란히 할 자는 있을 수 없다(日蓮は日本第一の法華経の行者なる事あえて疑ひなし、これをもつてすいせよ漢土月支にも一閻浮提の内にも肩をならぶる者は有るべからず)」(284쪽) 등으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렇게 보면 본문의 「파불 · 파법 · 파승」은 단지 정토종이 석존 · 법화경 · 천태를 버렸다는 역사적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시대에 맞는 바른 삼보를 세우느냐 버리느냐가 그 나라의 안위를 정한다는 원리가 이 한 줄에 담겨 있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삼보는 시대에 따라 그 체가 달라진다. 정법 · 상법의 삼보를 거쳐, 말법에서는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인 대성인이 불보, 사행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가 법보, 그 법을 바르게 이어 전한 닛코 상인이 승보라고 본다. 「파불 · 파법 · 파승」의 꾸짖음은 시대에 맞는 바른 삼보를 세우라는 요청이다.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

「아아 슬프도다, 여래의 진실한 금언을 등짐이여. 애달프도다, 어리석은 승려의 미혹한 거친 말을 따름이여.」 부처의 금언과 인사의 거친 말이 대구를 이루며, 세상 사람들이 앞의 것을 버리고 뒤의 것을 따르는 전도를 탄식하신다. 이 탄식은 꾸짖음이기 전에 슬픔이다. 대성인께서 방법을 꾸짖으시는 근저에는 그릇된 가르침을 따라 괴로움에 빠지는 사람들에 대한 슬픔이 있다.

「일찍 천하의 정밀을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 불법은 승부라 한다. 정법과 사법 사이에 타협은 없다. 방법을 꾸짖고 또 꾸짖어 그 그릇됨을 밝혀, 사람들이 스스로 방법을 떠나게 될 때 비로소 신심하는 사람도 신심하지 않는 사람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진다. 다만 이것은 나라 전체를 두고 한 말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숙명을 바꾸고 영원한 행복을 세우려면 신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설수행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法華折伏・破権門理の金言なれば終に権教権門の輩を一人もなく・せめをとして法王の家人となし天下万民・諸乗一仏乗と成つて妙法独り繁昌せん時、万民一同に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らば吹く風枝をならさず雨壤を砕かず、代は羲農の世となりて今生には不祥の災難を払ひ長生の術を得、人法共に不老不死の理顕れん時を各各御覧ぜよ現世安穏の証文疑い有る可からざる者なり

「법화는 절복으로 권문의 이치를 깨뜨린다」는 금언이므로, 마침내 권교 · 권문의 무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책하여 떨어뜨려 법왕의 가인(家人)으로 삼고, 천하 만민이 여러 승이 일불승이 되어 묘법만이 홀로 번창할 때, 만민이 한결같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한다면 부는 바람은 가지를 울리지 않고 비는 흙덩이를 부수지 않으며, 세상은 복희 · 신농의 세상이 되어 금생에는 불길한 재난을 물리치고 장생의 방법을 얻으며, 사람과 법이 함께 불로불사의 이치가 나타날 때를 저마다 보시라. 현세안온의 증문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여설수행초」, 502쪽

위의 글은 나라 안의 방법을 끊고 광선유포가 이루어진다면 이와 같은 이상의 세상이 나타나리라는 부처의 약속이다. 여기서 「책하여 떨어뜨린다」는 것은 말과 도리로 그릇된 가르침을 깨뜨려 그 사람을 「법왕의 가인」, 곧 정법의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방법을 끊는다는 것은 방법의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방법의 사람을 정법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며, 그 끝에 「부는 바람이 가지를 울리지 않는」 세상이 있다.

그리고 나라 전체에서 「끊는다」의 구체적인 법도는 다음 편, 제8단에서 밝혀진다. 객은 「저 경문대로 참죄에 처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주인은 「석존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 그러면 사해 만방 일체의 사중이 그 악에 보시하지 않고 모두 이 선에 돌아온다면 어떤 난이 아울러 일어나고 어떤 재앙이 다투어 오겠는가」라고 답한다. 제7단이 쌓아 온 엄한 경증은 모두 이 한 줄 — 방법에 보시하지 않고 정법에 돌아오라 — 에 모인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제7편의 열 장은 하나의 물음과 하나의 대답, 그리고 그 대답을 받치는 경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객은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는 깊은 원리를 스스로 말하면서도, 「먼저 국가를 기원하고 그 뒤에 불법을 세우라」고 순서를 거꾸로 놓았다. 주인은 그 순서를 뒤집어 「방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긴다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하리라」고 답했다. 바른 법을 세우는 것(입정)이 곧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길(안국)이라는 입정안국론의 제목 그대로의 대답이다.

그 대답을 받치는 경증은 엄하다. 열반경은 정법을 비방하고 뉘우치지 않는 일천제를 「파계」라 부르며 그에게는 보시하지 말라 하고, 석존의 과거세 선예국왕의 이야기를 들어 정법 비방의 죄가 세 가지 살생보다 무겁다고 설한다. 인왕경과 열반경은 정법을 지키는 일을 국왕과 재가의 사람들에게 맡기고, 정법을 지키는 이는 칼과 활을 지녀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유덕왕은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각덕비구를 지켜 냈다. 법화경 비유품은 이 경을 비방하는 자가 불종을 끊고 아비지옥에 들어가리라고 설한다.

그러나 이 엄한 경증들이 모이는 곳은 무력이 아니다. 열반경 자신이 「칼과 지팡이를 지닐지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맺었고, 대성인께서는 경증 전체를 「설령 오역의 공양은 허락할지라도 방법의 보시는 허락하지 않는다」로 모으셨다. 방법에 공양하지 않고, 방법에서 공양을 받지 않는 것 — 공양의 흐름을 바꾸어 방법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게 하는 것이 말법의 방법 대치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그릇된 가르침을 따라 괴로움에 빠지는 사람들에 대한 슬픔과 자비가 있다. 「아아 슬프도다, 여래의 진실한 금언을 등짐이여」라는 탄식이 「나라 안의 방법을 끊어야 한다」는 결론보다 앞에 놓인 까닭이다.

또 이 편은 여러 교학을 함께 펼쳤다. 말법의 계는 묘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라는 수지즉지계, 재물의 보시와 법의 보시, 실상을 생각하면 죄가 서리와 이슬처럼 녹는다는 참회의 법문, 목숨을 「일체의 재보 가운데 첫째」로 보는 생명의 존엄과 악지식이 법신을 무너뜨린다는 경계, 홍선 · 전지 · 수호의 세 부촉, 대승 · 소승의 상대, 그리고 정법 · 상법 · 말법에 따라 체가 달라지는 삼보. 이 교학들은 모두 「무엇을 세우고 무엇에 보시할 것인가」라는 이 편의 물음으로 모인다.

다음 제8편 「방법에 보시를 멈추는 뜻」에서 객은 「끊는다」는 말에 놀라, 「그렇다면 경문대로 참죄에 처해야 하는가, 그러면 살해의 죄업은 어찌하는가」라고 묻고 대집경을 들어 승려를 해치는 죄를 따진다. 주인은 「온전히 불자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방법을 미워할 뿐이다」라고 하고, 「석존 이전의 불교는 그 죄를 베었으나 석존 이후의 경설은 곧 그 보시를 멈춘다」고 답한다. 제7편이 쌓아 올린 경증의 계단은 그 한 줄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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