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業

업

석존의 가르침

業『앙굿따라 니까야』 · 『구사론』 업품 · 천태 『마하지관』 · 「전중경수법문」 · 「사도어서」

문영 8년(1271) 10월 5일, 사가미 지방 에치(依智)의 혼마 저택에서 니치렌 대성인은 짧은 편지 한 통을 쓰셨다. 스무사흘 전 한밤에 다쓰노구치의 형장에 앉으셨고, 이제 사도 유배를 기다리는 몸이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오타조묘·소야교신·긴바라 법교, 세 사람이다. 그 편지가 첫째로 든 법문이 「열반경에 전중경수라는 법문이 있느니라」였다. 무거운 업을 돌려 가볍게 받는다 — 불교가 이천 년 가까이 이어 온 업의 사상이 대성인에게서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이 한 줄이 압축하고 있다.

업(業)이라는 말은 흔히 「정해진 운명」으로 들린다. 과거에 지은 대로 지금 받는다면, 지금의 괴로움은 갚아야 할 빚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석존이 업을 말한 까닭은 거꾸로였다. 석존 당시의 인도에는 「모든 것은 전생에 지은 것 때문」이라는 숙명론과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우연히 일어난다」는 우연론이 함께 있었고, 석존은 둘을 똑같이 물리쳤다. 업은 사람이 지금 무엇을 의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그러므로 사람의 손에 맡겨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이 페이지는 업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자라 왔는지를 여섯 부로 나누어 읽는다. 1부는 석존의 업 — 「의도가 업이다」라는 정의와, 같은 악업도 사람에 따라 무겁게도 가볍게도 받는다는 「소금 덩이」의 비유. 2부는 『구사론』이 세운 업의 체계 — 업은 어떻게 남고, 언제 과보를 맺으며, 무엇이 정해져 있고 무엇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3부는 대승이 업에 던진 물음 — 업이 공하다면 업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그리고 참회와 원(願). 4부는 천태가 수행의 장에서 만난 업 — 삼장사마의 업장, 업에서 일어나는 병. 5부는 대성인의 전중경수와 정업을 늘리는 신심. 6부는 숙업을 사명으로 바꾸는 원겸어업(願兼於業)이다.

  1. 베다제사 행위(karman)
  2. 우파니샤드업과 윤회의 결합
  3. 석존「의도를 업이라 한다」
  4. 아비달마『구사론』 업품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
  5. 용수「모든 업은 본래 생겨나지 않는다」
  6. 『열반경』전중경수
  7. 천태삼장사마의 업장 · 업에서 일어나는 병
  8. 니치렌 대성인전중경수 · 정업을 늘림 · 원겸어업
도표 1 · 업 사상의 계보
1부 석존의 업의도의 윤리

행위라는 말이 윤리가 되기까지

업은 산스크리트 카르만(karman), 팔리어 캄마(kamma)의 번역이다. 동사 어근 kṛ(하다, 만들다)에서 온 말로, 본디 뜻은 그저 「행위」 「일」이다. 베다 시대의 바라문교에서 카르만은 무엇보다 제사 행위를 가리켰다. 정해진 절차대로 치른 제사는 반드시 정해진 결과를 낳는다 — 이 기계적인 효력의 관념이 업 사상의 가장 오래된 뿌리다.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이 말은 윤회와 결합한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는 「선한 행위로 선해지고 악한 행위로 악해진다」고 말하며, 사람이 죽은 뒤 어디에 다시 태어나는지를 그의 행위가 정한다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업은 한 생애를 넘어 이어지는 힘이 되었다. 다만 이 업은 여전히 아트만(ātman), 곧 변하지 않는 자아가 짊어지고 옮겨 가는 짐이었다.

석존 당시의 사상계에는 이 업의 관념을 둘러싸고 극단적인 견해들이 있었다. 아지비카교의 막칼리 고살라는 모든 존재가 정해진 운명(niyati)에 따라 정해진 횟수만큼 윤회한 뒤에야 저절로 해탈한다고 했고, 자이나교는 업을 영혼에 들러붙는 미세한 물질로 보아 고행으로 그것을 태워 없애야 한다고 했다. 반대편에는 선악의 행위에 아무 과보도 없다는 유물론자 아지타 케사캄발린이 있었다. 석존은 이 사이에서 업을 전혀 다른 자리로 옮겨 놓는다. 업이 일어나는 자리는 몸 바깥의 제사도, 영혼에 붙는 물질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지향하느냐라는 것이다.

「의도를 나는 업이라 한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꿰뚫음의 경」(Nibbedhika sutta)에서 석존은 업을 이렇게 정의한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이라 한다. 의도한 뒤에 사람은 몸으로, 말로, 뜻으로 업을 짓는다.

『앙굿따라 니까야』 6법집 「꿰뚫음의 경」, AN 6.63

의도(cetanā)는 「마음이 어떤 쪽으로 기우는 움직임」이다. 석존은 행위의 겉모양이 아니라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의 방향을 업의 본체로 삼았다. 같은 칼로 사람을 베어도 살해하려는 의도와 수술하려는 의도는 전혀 다른 업이 된다. 업이 이렇게 「마음의 일」로 정의되자, 업은 바깥에서 사람을 묶는 운명이 아니라 사람이 날마다 스스로 짓고 있는 것이 되었다.

이 정의는 뒤에 두 가지 업으로 정리된다. 마음속의 의도 그 자체를 사업(思業), 의도한 뒤에 몸과 입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사이업(思已業)이라 한다. 한역 『중아함경』의 「달범행경」은 업을 아는 일을 「두 가지 업이 있으니 사업과 사이업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몸·입·뜻의 세 통로를 따라 신업·구업·의업의 삼업이 나뉜다.

의도(cetanā)= 사업(思業)
의도한 뒤의 행위= 사이업(思已業)
몸으로= 신업(身業)
말로= 구업(口業)
뜻으로= 의업(意業)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이라 한다」(AN 6.63)

도표 2 · 의도와 세 가지 업

모든 것이 업 때문은 아니다

업을 의도로 정의한 석존은 동시에, 지금 겪는 모든 일을 업 탓으로 돌리는 견해를 분명히 물리쳤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외도의 근거 경」(Titthāyatana sutta)에서 석존은 세 가지 견해를 「행위하지 않음」으로 이끄는 그릇된 견해라 부른다. 사람이 겪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모두 ① 전생에 지은 것 때문이다(숙작인론), ② 최고신이 만든 것 때문이다(존우화작인론), ③ 원인도 조건도 없다(무인무연론). 셋째뿐 아니라 첫째도 그릇되다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것이 전생 탓」이라면 지금 살생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도 전생 탓이 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 세 견해와 연기의 관계는 계보 一 「십이연기」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상윳따 니까야』의 「시바카 경」(Sīvaka sutta)은 이 논점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유행자 시바카가 「사람이 느끼는 모든 느낌은 전생에 지은 것 때문이라고 하는 사문들이 있다」며 석존의 생각을 묻자, 석존은 느낌이 일어나는 원인을 여덟 가지로 든다. 담즙에서, 점액에서, 바람에서, 이 셋이 겹쳐서, 계절이 바뀌어서, 몸을 잘못 돌보아서, 남의 공격을 받아서, 그리고 업의 과보로. 업은 여덟 가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모든 느낌이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주장은 사람들이 스스로 아는 것도, 세상이 참이라 하는 것도 넘어선 말이라고 석존은 잘라 말한다.

느낌이 일어나는 원인

  1. ①담즙
  2. ②점액
  3. ③바람
  4. ④셋이 겹침
  5. ⑤계절의 변화
  6. ⑥몸을 잘못 돌봄
  7. ⑦남의 공격
  8. ⑧업의 과보

「모든 느낌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주장은 그릇되다(SN 36.21)

도표 3 · 시바카에게 답한 여덟 원인

이 경은 4부에서 천태가 병의 원인을 여섯 가지로 나누고 그 가운데 하나만을 「업에서 일어나는 병」이라 한 대목, 그리고 5부에서 대성인이 병든 도키니부인에게 「설마 업병은 아닐 것이니라」라고 쓰신 대목과 다시 만난다. 업을 말하는 불교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업으로 설명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사실은, 업을 읽을 때 늘 곁에 두어야 할 출발점이다.

태어남이 아니라 행위가

업이 의도의 일이 되자, 업은 바라문교의 신분 질서를 정면으로 겨누는 말이 되었다. 『숫타니파타』의 「천민경」(Vasala sutta)에서 석존은 자신을 천민이라 부르며 내쫓으려는 바라문에게 이렇게 답한다.

Na jaccā vasalo hoti, na jaccā hoti brāhmaṇo; kammunā vasalo hoti, kammunā hoti brāhmaṇo.

태어남으로 천민이 되는 것이 아니요, 태어남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로 천민이 되고, 행위로 바라문이 된다.

『숫타니파타』 「천민경」, Sn 136

바라문교에서 업은 신분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지금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의 업 탓이니 감수하라는 것이다. 석존은 같은 「업」이라는 말로 그 논리를 뒤집었다. 사람의 귀천을 정하는 것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 순서가 아니라, 지금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행하느냐다. 업은 과거를 향해 사람을 묶는 말에서, 현재를 향해 사람을 일으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 대목은 6부에서 대성인이 「이번 생에는 빈궁하천한 자로 태어나 전다라의 집에서 나왔느니라」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자리와 겹쳐 읽을 수 있다. 업이 신분을 정한다는 낡은 논리 앞에서, 대성인은 낮은 태어남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법을 전하는 자리로 바꾸셨다.

소금 한 덩이와 두 그릇의 물

같은 업이면 누구에게나 같은 과보가 오는가. 석존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소금 덩이 경」(Loṇakaphala sutta)은 업에 관한 초기 경전 가운데 가장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사람이 어떤 업을 지으면 꼭 그만큼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청정한 수행도 있을 수 없고 괴로움을 끝낼 길도 없다고 석존은 말한다. 그리고 비유를 든다. 소금 한 덩이를 작은 물그릇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다. 같은 소금 한 덩이를 갠지스강에 넣으면 강물은 조금도 짜지지 않는다. 똑같이 작은 악업을 지어도, 몸과 계와 마음과 지혜를 닦지 않은 좁은 사람에게 그 업은 지옥으로 이끌고, 몸과 계와 마음과 지혜를 닦아 크고 넓어진 사람에게 그 업은 이 생에서 가볍게 드러나고 그칠 뿐 조금도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석존은 같은 뜻의 비유를 더 든다. 같은 적은 돈 때문에도 가난한 사람은 옥에 갇히지만 넉넉한 사람은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벽, 안개 낀 산 사이로 넓고 잔잔한 강이 금빛으로 펼쳐지고, 앞쪽 강가 너럭바위 위에 물을 담은 작은 질그릇 사발과 흰 소금 한 덩이가 나란히 놓인 금박 수묵화
그림 1 · 큰 강물에 녹아드는 소금 한 덩이
같은 소금 한 덩이
작은 물그릇마실 수 없이 짜진다= 닦지 않은 좁은 사람같은 업이 지옥으로 이끈다
갠지스강조금도 짜지지 않는다= 몸·계·마음·지혜를 닦은 넓은 사람같은 업이 이 생에서 가볍게 드러나고 그친다

업의 무게는 업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 그 업을 받는 생명의 크기가 함께 정한다(「소금 덩이 경」, AN 3.100)

도표 4 · 소금 덩이의 비유

이 경이 말하는 것은 업의 과보가 「업 하나」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보는 업과, 그 업을 받는 생명의 상태가 함께 정한다. 여기에는 이미 『열반경』의 전중경수, 곧 「무거운 업을 돌려 가볍게 받는다」는 법문의 원형이 들어 있다. 대성인이 전중경수를 「호법의 공덕력」으로 설명하신 것은, 소금을 녹이는 물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법의 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앙굴리말라 — 지옥의 과보를 지금 여기서

『맛지마 니까야』의 「앙굴리말라 경」은 업의 「전환」을 이야기로 보여 준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는 도적 앙굴리말라는 석존을 만나 출가하고, 마침내 아라한이 된다. 그 뒤 탁발을 나가면 사람들이 던진 흙덩이와 막대기와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고 발우가 부서지고 가사가 찢긴 채 돌아왔다. 그를 본 석존은 이렇게 말한다.

「참아라, 바라문이여, 참아라. 너는 그 업의 과보로 여러 해, 여러 백 년, 여러 천 년을 지옥에서 괴로워해야 했을 것이다. 그 업의 과보를 너는 지금 여기서 받고 있는 것이다(diṭṭheva dhamme paṭisaṃvedesi).」

  1. 지은 업많은 사람을 죽임
  2. 본래 받을 과보여러 천 년의 지옥
  3. 출가하여 법을 닦음
  4. 실제로 받은 과보탁발 길에 돌과 막대기에 맞음「지금 여기서 받고 있다」
(MN 86)
도표 5 · 앙굴리말라의 업

지옥에서 오래 받을 과보를 이 생의 고통으로 앞당겨 받고 끝낸다는 구조는, 『열반경』의 전중경수와 대성인의 「지옥의 괴로움이 퍼뜩 사라져」라는 말씀으로 곧장 이어진다. 앙굴리말라가 받은 돌은 벌이 아니라 끝남의 표시였다. 다만 앙굴리말라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출가와 수행, 곧 업을 받는 생명 자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이것이 「소금 덩이 경」의 물그릇이 강이 된 경우다.

업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다

석존은 업의 이치를 이렇게 분명히 가르치면서도, 개별의 업이 어떤 과보를 언제 맺는지를 하나하나 따지려는 태도는 경계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생각할 수 없는 것 경」(Acinteyya sutta)은 생각해서는 안 될 네 가지를 든다. 부처의 경지, 선정의 경지, 업의 과보, 세계에 관한 사변. 이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미치거나 괴로움에 빠진다는 것이다.

업의 과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들어 있다는 것은, 업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업의 그물이 너무 넓고 깊어서 사람의 계산으로 다 따질 수 없다는 뜻이다. 대성인이 「사도어서」에서 자신의 과거 방법을 여러 가능성으로 헤아리신 끝에 「숙업은 헤아리기 어렵도다」(958쪽)라고 쓰신 것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업은 따지는 대상이 아니라 바꾸는 대상이다. 이 실천적 태도가 석존에서 대성인까지 업론을 꿰는 한 줄기다.

2부 아비달마의 업론『구사론』 업품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

석존 입멸 뒤 수백 년에 걸쳐 부파의 논사들은 경전에 흩어진 업의 가르침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했다. 그 집대성이 세친(천친보살)의 『아비달마구사론』이다. 『구사론』은 아홉 품 가운데 제4품 전체를 업에 바치고(업품), 그 첫 게송을 이렇게 시작한다.

世別由業生 思及思所作 思即是意業 所作謂身語

세간의 갖가지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 업은 의도(思)와 의도가 지은 것이다. 의도는 곧 의업이요, 의도가 지은 것은 신업과 어업이다.

『아비달마구사론』 권13 업품, T29 no.1558

「세간의 차별」이란 중생 하나하나의 몸과 처지가 다르다는 것만이 아니다. 『구사론』은 산과 강과 땅, 곧 중생이 사는 세계(기세간)의 차이까지도 업에서 생긴다고 본다. 세계의 모습을 신의 창조나 우연이 아니라 중생의 행위가 모인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다. 첫 게송의 뒷부분은 석존의 「의도가 업이다」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업과 사이업, 그리고 삼업을 정리하고 있다. 『구사론』의 저자 천친보살에 대해서는 인물탐구 「천친보살」에서 다루었다.

업은 어떻게 남는가

업이 의도라면, 의도는 일어났다가 곧 사라진다. 그렇다면 몇 생 뒤에 과보를 맺게 하는 힘은 그동안 어디에 있는가. 업론에서 가장 오래 다투어진 이 물음에 부파마다 다른 답을 내놓았다.

설일체유부는 「삼세실유(三世實有)」로 답했다. 과거·현재·미래의 법이 모두 실재하므로, 지나간 업도 과거의 법으로서 실재하며 때가 되면 과보를 맺는다는 것이다. 유부는 이와 별도로 무표업(無表業)이라는 개념도 세웠다. 몸과 입의 행위가 끝난 뒤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무표색)이 이어진다는 것으로, 계를 받으면 그 뒤로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계를 지키는 힘이 이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경량부는 과거가 실재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행위가 남기는 것은 마음의 흐름에 심어진 「종자(種子)」이며, 그 종자가 이어지며 변하다가(상속전변차별) 때가 되면 과보를 맺는다고 했다. 『구사론』은 유부의 교의를 서술하면서도 곳곳에서 경량부의 입장에 기울어 있다.

이 종자설은 유식학에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사상으로 완성된다. 모든 업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저장되고(훈습), 아뢰야식은 그 종자를 지닌 채 생을 이어 간다. 업이 「어디에 남는가」라는 물음의 답이 마음의 가장 깊은 층으로 옮겨 간 것이다. 이 흐름은 핵심 개념 「구식」에서 다시 이어진다.

설일체유부삼세실유(三世實有)지나간 업도 과거의 법으로서 실재하여 과보를 맺음따로 무표업: 계를 받은 뒤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힘
경량부종자(種子)마음의 흐름에 심어져 이어지며 변하다가 과보를 맺음
유식아뢰야식의 훈습모든 업의 종자를 저장하고 생을 이어 감
도표 6 · 업은 어디에 남는가

율장과 여러 대승 경전에는 업이 사라지지 않음을 노래한 게송이 거듭 나온다.

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

설령 백천 겁이 지나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과 연이 만나는 때에 그 과보를 도리어 스스로 받는다.

업이 남는 방식을 무엇으로 설명하든, 지은 업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인과 연이 만날 때」 드러난다는 것이 불교 업론의 공통된 바탕이다. 이 「연(緣)」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업은 종자이고, 종자는 연을 만나야 싹튼다. 그렇다면 연을 바꾸는 일, 곧 업이 어떤 조건 아래서 드러나게 하느냐가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정업과 부정업

업이 반드시 과보를 맺는다면 그 과보는 바꿀 수 없는가. 『구사론』은 업을 「정해진 업(정업)」과 「정해지지 않은 업(부정업)」으로 나눈다. 무엇이 정해져 있느냐에 따라 두 가지 기준이 있다. 하나는 과보를 받는 「때」가 정해져 있는가(시정), 또 하나는 과보 「그 자체」를 받는 것이 정해져 있는가(이숙정)다. 이 둘을 엇갈려 맞추면 네 경우가 나온다. 때도 과보도 정해진 업, 과보는 정해졌으나 때는 정해지지 않은 업, 때는 정해졌으나 과보는 정해지지 않은 업, 둘 다 정해지지 않은 업.

받는 때가 ↓
과보를 받는 것이 →
정해짐
정해지지 않음
정해짐
①때도 과보도 정해짐
③때는 정해짐 · 과보는 정해지지 않음
정해지지 않음
②과보는 정해짐 · 때는 정해지지 않음
④둘 다 정해지지 않음

①~③ 가운데 무엇까지를 정업이라 하는지는 논사에 따라 다르다

도표 7 · 정업과 부정업의 네 경우

그렇다면 어떤 업이 정업이 되는가. 「가연정업서」를 해설한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구사론』의 다음 기준을 인용한다.

重惑と浄心とに由るものと、及び是れ恒に造る所なると、功徳田に於て起すと、父母を害するとの業は定なり

무거운 번뇌와 맑은 마음으로 지은 것, 늘 짓는 것, 공덕의 밭에서 일으킨 것, 부모를 해친 것 — 이런 업은 정해져 있다.

『아비달마구사론』 업품, 강의의 일본어 훈독

강의의 풀이에 따르면, 「무거운 번뇌와 맑은 마음으로 지은 것」은 선이든 악이든 강한 일념을 담아 지은 업이고, 「늘 짓는 것」은 습관처럼 되풀이한 업이며, 「공덕의 밭에서 일으킨 것」과 「부모를 해친 것」은 업을 지은 대상이 무거운 경우다. 업의 무게를 정하는 것은 행위의 겉모양만이 아니라 마음의 세기, 되풀이, 그리고 행위가 향한 대상이다. 특히 「공덕의 밭」, 곧 불·법·승과 부모 같은 대상에게 지은 업이 무겁다는 기준은, 5부에서 대성인이 「상(常)의 인과」와 법화경을 비방한 업을 구별하시는 대목의 바탕이 된다.

과보를 받는 세 때

과보를 받는 때에 따라 업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지은 그 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바로 다음 생에 받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 그 다음 생 이후에 받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 여기에 때가 정해지지 않은 부정수업이 더해진다.

이번 생에 지은 업
  1. ①순현법수업이번 생에 받음
  2. ②순차생수업다음 생에 받음
  3. ③순후차수업그 다음 생 이후에 받음
  4. ④부정수업때가 정해지지 않음

앙굴리말라 — 지옥에서 받을 과보를 「지금 여기서」 받았다

도표 8 · 과보를 받는 때

이 분류는 단지 시간표가 아니다. 1부의 앙굴리말라가 보여 주었듯이, 다음 생 이후에 받을 과보가 이번 생으로 옮겨 오는 일이 있다. 『구사론』에서 받는 때가 정해진 업(시정)은 옮겨지지 않으므로, 이것을 『구사론』의 틀에 대어 읽으면 때가 정해지지 않은 업이 이번 생으로 당겨져 드러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대승의 전중경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무거운 업 그 자체를 이번 생으로 돌려 가볍게 받는다고 설한다. 전중경수는 바로 이 「때의 이동」과 「무게의 감소」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 생 이후의 무거운 지옥고가, 이 생의 견딜 수 있는 괴로움으로 바뀌어 끝난다.

함께 짓는 업, 홀로 짓는 업

『구사론』 계통의 업론은 업을 지은 주체에 따라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도 나눈다. 여러 중생이 함께 지어 함께 받는 업이 공업이고, 한 사람이 지어 홀로 받는 업이 불공업이다. 앞서 본 대로 산과 강과 땅 같은 기세간은 중생의 공업이 만든 것이고, 한 사람의 몸과 수명과 처지는 그의 불공업이 만든 것이다.

공업(共業)여러 중생이 함께 지어 함께 받는다기세간: 국토 · 산하 · 시대의 재난
의보(依報)
불공업(不共業)한 사람이 지어 홀로 받는다유정세간: 그 사람의 몸 · 수명 · 처지
정보(正報)
도표 9 · 공업과 불공업

이 구분은 천태와 대성인의 「의정불이(依正不二)」, 곧 중생(정보)과 국토(의보)가 둘이 아니라는 사상으로 이어진다. 「입정안국론」이 재난의 근원을 한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품은 그릇된 법에서 찾은 것은, 공업의 사상을 국토의 차원에서 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제초」에서 몽고 내습 때 이키와 쓰시마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은 일을 들어 「어찌 남의 일이라 생각하시는가(いかに人の上とをぼすか)」(1083쪽)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 있다.

십이연기 안의 업

업은 계보 一 「십이연기」의 열두 마디 안에서도 자리를 갖는다. 과거의 「행(行)」과 현재의 「유(有)」가 업에 해당하고, 무명·애·취의 번뇌(혹)가 업을 일으키며, 업이 괴로움(고)의 과보를 낳는다는 혹·업·고의 순환이 그것이다. 『구사론』은 또 다음 생의 큰 틀(어떤 세계에 태어나는가)을 이끄는 업을 견인업(인업), 그 생의 세부(몸의 모습, 수명, 빈부)를 채우는 업을 원만업(만업)으로 나눈다. 이 두 주제는 「십이연기」 2부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3부 대승의 업공(空)과 참회와 원(願)

업이 공하다면

부파의 업론은 업이 「무엇으로」 남는가를 물었다. 용수는 그 물음 자체를 흔들었다. 『중론』 제17품 「관업품(業과 果를 관찰함)」은 먼저 부파의 업론을 길게 소개한다. 업이 찰나에 사라진다면 과보를 맺을 수 없으니, 업이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중론』은 그것을 「불실법(不失法)」, 곧 빚 문서 같은 것이라 하는 설을 소개한다(후대의 주석은 이를 정량부의 설로 본다). 용수는 이런 설명들이 모두 업에 실체(자성)가 있다는 전제에 서 있다고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諸業本不生 以無定性故 諸業亦不失 以其不生故

모든 업은 본래 생겨나지 않는다. 정해진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업은 또한 잃어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수 『중론』 관업품 제17, 구마라집 역, T30 no.1564

업에 자성이 있다면, 업은 생겨난 뒤 영원히 그대로 있거나(상견) 사라져 버리거나(단견)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영원히 그대로라면 과보를 받아도 업은 끝나지 않고, 사라진다면 과보가 없다. 용수는 업이 자성 없이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끊어지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게」 과보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업이 공하다는 것은 업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업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므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논리는 계보 二 「공 · 중도」에서 다룬 공과 중도의 사상이 업론에 적용된 것이다.

업에 자성이 있다면
영원히 그대로(상견)과보를 받아도 업이 끝나지 않는다
사라져 버린다(단견)과보가 없다
업에 자성이 없다면
인연 따라 일어나 과보로 이어진다끊어지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諸業本不生 以無定性故 諸業亦不失 以其不生故모든 업은 본래 생겨나지 않는다. 정해진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업은 또한 잃어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표 10 · 용수가 본 업

업장의 바다와 지혜의 해

업에 자성이 없다면, 업을 없애는 길은 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업이 공하다는 실상을 보는 것이 된다. 대승의 참회는 이 자리에서 나온다. 법화경의 결경인 『관보현보살행법경』은 이렇게 설한다.

一切業障海 皆從妄想生 若欲懺悔者 端坐念實相 衆罪如霜露 慧日能消除

일체의 업장의 바다는 모두 망상에서 생긴다. 만약 참회하고자 하는 자는 단정히 앉아 실상을 생각하라. 뭇 죄는 서리와 이슬 같아서 지혜의 해가 능히 녹여 없앤다.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업장(業障)이 바다에 비유될 만큼 넓고 깊다 해도, 그것은 「망상」, 곧 실상을 보지 못하는 마음에서 생겼다. 그러므로 실상을 생각하는 지혜가 해처럼 떠오르면 업장은 서리와 이슬처럼 녹는다. 천태는 이것을 이참(理懺)이라 하여, 지은 죄를 하나하나 고백하고 뉘우치는 사참(事懺)과 구별했다. 사참이 업을 하나씩 씻는 일이라면, 이참은 업이 일어나는 바탕 자체를 비추는 일이다.

사참(事懺)지은 죄를 드러내 고백하고 뉘우침 · 예배 · 송경= 업을 하나씩 씻는다
이참(理懺)「단정히 앉아 실상을 생각하라」= 업이 생기는 바탕(망상)을 비춘다
衆罪如霜露 慧日能消除뭇 죄는 서리와 이슬 같아서 지혜의 해가 능히 녹여 없앤다(『관보현경』)
도표 11 · 사참과 이참

「가연정업서」를 해설한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이 게송을 인용하며, 대성인의 불법에서 「실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남묘호렌게쿄를 믿고 부르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5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이 「정업조차 잘 참회하면 반드시 소멸하느니라」라고 하실 때의 참회는 이 실상의 참회다.

『열반경』의 전중경수

「전중경수(轉重輕受)」라는 말은 『대반열반경』에서 나왔다. 북본 『열반경』은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의 힘으로 지옥에서 받을 지극히 무거운 업을 이 생에서 가볍게 받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 생에서 가볍게 받을 업을 지옥에서 무겁게 받는다고 설한다. 같은 경은 몸으로 계를 닦고 마음으로 지혜를 닦는 사람이 지옥의 과보를 이 생에서 가볍게 받는다고도 한다. 1부의 「소금 덩이 경」이 대승의 말로 다시 설해진 셈이다.

여기에 동진의 법현이 옮긴 6권본 『대반니원경』(대성인이 「반니원경」이라 부르신 경)이 결정적인 문장을 더한다. 과거에 지은 무량한 죄와 갖가지 악업의 과보가 이 생에서 여러 괴로움으로 가볍게 나타나는 것은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 까닭」이라는 것이다. 업을 가볍게 하는 힘이 「지혜」와 「계」에서 「법을 지키는 공덕」으로 옮겨 간다. 이 문장을 대성인은 「개목초」와 「사도어서」와 「형제초」에서 거듭 인용하신다. 5부에서 그 원문을 읽는다.

『열반경』은 또 업을 바꾼 사람의 이야기도 전한다.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사세왕은 그 업으로 온몸에 악창이 돋아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석존은 그를 위해 월애삼매(月愛三昧)에 들어 빛을 비추고 법을 설했으며, 아사세왕은 병이 낫고 마음의 죄도 사라졌다고 경은 전한다. 대성인은 「가연정업서」에서 이 이야기를 정업을 늘린 첫 예로 드신다.

업에 끌려 태어나는가, 원에 따라 태어나는가

대승은 업에 관해 또 하나의 새로운 생각을 내놓았다. 중생이 태어나는 방식을 둘로 나눈 것이다. 업에 끌려 태어나는 업생(業生)과, 스스로 세운 원(願)에 따라 태어나는 원생(願生). 범부는 지은 업에 끌려 어딘가에 태어나지만, 보살은 중생을 구하겠다는 원에 따라 스스로 태어날 곳을 고른다.

법화경 법사품은 이 원생의 보살을 이렇게 설한다.

藥王當知 是人自捨清淨業報 於我滅度後 愍衆生故 生於惡世 廣演此經

약왕이여,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스스로 청정한 업보를 버리고, 내가 멸도한 뒤에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악세에 태어나 이 경을 널리 펴느니라.

『묘법연화경』 법사품 제10, T9 no.262

본래라면 청정한 국토에 태어날 업보를 지닌 사람이, 그 업보를 스스로 버리고 악세를 골라 태어난다. 이 사람에게 악세에 태어난 것은 업의 결과가 아니라 원의 결과다. 묘락대사는 이 경문을 풀이하면서 「원이 업을 겸한다(願兼於業)」는 말을 썼다고 전한다. 원으로 태어났으나 겉으로는 업으로 태어난 것과 다름없는 모습을 띤다는 뜻이다. 6부에서 볼 대성인의 원겸어업은 바로 이 법사품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업생(業生)지은 업에 끌려 태어난다태어날 곳을 고르지 못한다= 범부
원생(願生)중생을 구하려는 원에 따라 태어난다스스로 악세를 고른다= 보살
是人自捨清淨業報 … 愍衆生故 生於惡世 廣演此經이 사람은 스스로 청정한 업보를 버리고 …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악세에 태어나 이 경을 널리 펴느니라(법사품)
도표 12 · 업생과 원생
4부 천태수행이 업을 불러낸다

지관을 닦으면 생사의 바퀴가 움직인다

천태대사에게 업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라 수행의 장에서 마주치는 현실이었다. 『마하지관』은 관심(觀心)을 닦는 사람이 맞닥뜨리는 대상을 열 가지 경계(십경)로 정리한다. 오음·십이입·십팔계의 경계, 번뇌의 경계, 병환의 경계, 업상(業相)의 경계, 마사(魔事)의 경계, 선정의 경계, 그릇된 견해의 경계, 증상만의 경계, 이승의 경계, 보살의 경계. 넷째의 업상경은, 지관을 닦아 마음이 고요해질 때 과거에 지은 선악의 업이 갖가지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왜 수행이 업을 불러내는가.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마하지관』 권5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신다.

斯由護法功徳力故等とは摩訶止観の第五に云く「散善微弱なるは動ぜしむること能わず今止観を修して健病虧ざれば生死の輪を動ず」等云云、又云く「三障四魔紛然として競い起る」等云云

「이는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 까닭이라」 등이라 함은, 마하지관 제5에 이르기를 「흩어진 선은 미약하여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제 지관을 닦아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그치지 않으면 생사의 바퀴를 움직인다」 등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삼장사마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개목초」, 232쪽

흩어진 마음으로 짓는 가벼운 선(산선)으로는 생사의 바퀴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바르게 닦으면 그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움직이는 바퀴는 그동안 가라앉아 있던 업을 위로 끌어올린다. 업이 드러나는 것은 수행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수행이 생사의 뿌리에 닿았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반니원경의 「호법의 공덕력」을 바로 이 『마하지관』의 문장으로 풀이하셨다. 법을 지키는 힘이 강해지면 업이 불려 나온다 — 이것이 5부에서 볼 「쇠를 단련하면 흠이 드러난다」는 비유의 천태적 근거다.

삼장 — 번뇌장 · 업장 · 보장

『마하지관』 권5는 수행이 깊어지면 「삼장사마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三障四魔紛然競起)」고 했다. 삼장은 번뇌장·업장·보장이다. 번뇌장은 탐·진·치 같은 번뇌가 수행을 가로막는 것, 업장은 지은 업이 수행을 가로막는 것, 보장은 과보로 받은 몸과 처지가 수행을 가로막는 것이다. 업이 「장애」로 나타난다는 것은, 업이 과거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수행을 막아서는 현재의 힘이라는 뜻이다.

대성인은 「형제초」에서 이 삼장을 문하의 삶에 맞추어 풀어 주신다.

此の釈に三障と申すは煩悩障・業障・報障なり、煩悩障と申すは貪瞋癡等によりて障礙出来すべし、業障と申すは妻子等によりて障礙出来すべし、報障と申すは国主父母等によりて障礙出来すべし

이 해석에서 삼장이라 함은 번뇌장·업장·보장이니라. 번뇌장이라 함은 탐·진·치 등으로 말미암아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요, 업장이라 함은 처자 등으로 말미암아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요, 보장이라 함은 국주·부모 등으로 말미암아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니라.

「형제초」, 1088쪽

업장을 「처자 등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신 것이 눈길을 끈다. 업은 추상적인 힘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이 편지를 받은 이케가미 형제는 아버지의 반대로 신심을 버리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대성인은 그것을 업장과 보장이 나타난 모습으로 보게 하시고, 「이를 따르면 사람을 악도로 향하게 하고, 이를 두려워하면 정법을 닦는 것을 방해한다」는 『마하지관』의 경계를 「문가(門家)의 명경」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번뇌장(煩惱障)탐·진·치 등으로 말미암아
업장(業障)처자 등으로 말미암아
보장(報障)국주·부모 등으로 말미암아
行解既に勤めぬれば三障四魔紛然として競い起る수행과 이해가 이미 부지런해지면 삼장사마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마하지관』 권5, 「형제초」 1087쪽 인용)
도표 13 · 삼장 — 『마하지관』과 「형제초」

업에서 일어나는 병

『마하지관』 권8의 병환경은 병이 일어나는 인연을 여섯 가지로 든다. 사대(지·수·화·풍)가 고르지 못해서, 음식을 절제하지 않아서, 좌선을 고르게 하지 못해서, 귀신이 틈을 얻어서, 마가 하는 일로, 그리고 업이 일어나서. 여섯째의 업병(業病)은 의술로 다스리기 어렵고, 참회와 수행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천태는 말한다.

이 분류를 1부의 「시바카 경」과 나란히 놓아 보면, 천태가 초기 경전의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병의 원인은 여럿이고 업은 그 가운데 하나다. 모든 병을 업으로 돌리지 않되, 의술로 낫지 않는 깊은 병에는 업이라는 뿌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대성인이 「치병대소권실위목」에서 병을 「몸의 병」과 「마음의 병」으로 나누고, 몸의 병은 부처가 아니어도 고칠 수 있으나 마음의 병은 법의 깊이에 따라 고칠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시바카 경」의 여덟 원인『마하지관』의 여섯 원인담즙점액바람셋이 겹침계절몸을 잘못 돌봄남의 공격업의 과보사대가 고르지 못함음식을 절제하지 않음좌선이 고르지 못함귀신마업

공통점: 업은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다

「치병대소권실위목」몸의 병사대의 부조화(404병)
「치병대소권실위목」마음의 병삼독에서 팔만사천의 병
도표 14 · 병의 원인 — 석존과 천태

업이 받은 몸이 그대로 삼신이다

천태의 업론이 부파와 갈라지는 가장 깊은 자리는, 업이 받은 몸 자체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부파의 업론에서 업으로 받은 몸(과보신)은 벗어나야 할 괴로움의 결과다. 천태는 계보 三 「제법실상」에서 본 십여시를 공·가·중의 세 방식으로 읽는 「삼전독문」으로, 업으로 받은 몸이 그대로 부처의 세 몸이라고 보았다. 대성인은 「일념삼천법문」에서 이것을 이렇게 풀이하신다.

所謂諸法如是相如云云と読む時は如は空の義なれば我が身の先業にうくる所の相性体力・其の具する所の八十八使の見惑・八十一品の思惑・其の空は報身如来なり、所謂諸法如是相云云とよめば是れ仮の義なれば我が此の身先業に依つて受けたる相性体力云云其の具したる塵沙の惑悉く即身応身如来なり、所謂諸法如是と読む時は是れ中道の義に順じて業に依つて受くる所の相性等云云、其に随いたる無明皆退いて即身法身の如来と心を開く

이른바 「제법은 이 상(相)이 여(如)하다」고 읽을 때에는 여(如)는 공(空)의 뜻이므로, 내 몸이 선업(先業)으로 받은 상·성·체·력과 그것이 갖춘 팔십팔사의 견혹·팔십일품의 사혹, 그 공한 것이 보신여래이니라. 「제법은 이와 같은(如是) 상」이라고 읽으면 이는 가(假)의 뜻이므로, 내 이 몸이 선업(先業)에 의해 받은 상·성·체·력과 그것이 갖춘 진사의 혹이 모두 그대로 응신여래이니라. 「제법은 상이 여시(如是)하다」고 읽을 때에는 이는 중도의 뜻에 따라, 업에 의해 받은 상 등과 그에 따른 무명이 모두 물러나 그대로 법신여래라고 마음을 여느니라.

「일념삼천법문」, 416쪽

이 대목은 천태의 삼전독문(三轉讀文) — 십여시를 「시상여(是相如)」 「여시상(如是相)」 「상여시(相如是)」의 세 방식으로 읽어 공 · 가 · 중에 맞추는 것 — 을 가리킨다.

「내 몸이 선업(先業)으로 받은 상·성·체·력」 — 업으로 받은 이 몸, 이 성품, 이 힘이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보신·응신·법신의 여래라는 것이다. 업을 벗어나는 길이 업의 몸 바깥에 있지 않고, 업의 몸 그 자체를 비추어 보는 데 있다. 이 생각은 계보 一 「십이연기」의 삼도즉삼덕 — 번뇌·업·고의 세 길이 그대로 법신·반야·해탈의 세 덕이라는 사상 — 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업은 바꾸어야 할 것이면서, 동시에 바꾸어진 뒤에는 부처의 몸이 되는 바로 그 재료다. 삼신에 관해서는 핵심 개념 「삼신」에서 다시 다룬다.

5부 니치렌 대성인의 업전중경수

에치에서 쓴 편지

글머리에서 본 「전중경수법문」으로 돌아가자. 다쓰노구치의 법난 뒤 에치에 머물던 대성인은 오타조묘·소야교신·긴바라 법교의 세 사람에게 이렇게 쓰셨다.

涅槃経に転重軽受と申す法門あり、先業の重き今生につきずして未来に地獄の苦を受くべきが今生にかかる重苦に値い候へば地獄の苦みぱつときへて死に候へば人天・三乗・一乗の益をうる事の候、不軽菩薩の悪口罵詈せられ杖木瓦礫をかほるもゆへなきにはあらず・過去の誹謗正法のゆへかと・みへて其罪畢已と説れて候は不軽菩薩の難に値うゆへに過去の罪の滅するかとみへはんべり是一

열반경에 전중경수(轉重輕受)라는 법문이 있느니라. 선업(先業)이 무거워 이번 생에 다하지 못하고 미래에 지옥의 괴로움을 받아야 할 것이, 이번 생에 이러한 무거운 괴로움을 만나면 지옥의 괴로움이 퍼뜩 사라지고, 죽으면 인·천과 삼승과 일승의 이익을 얻는 일이 있느니라. 불경보살이 악구매리를 당하고 장목와력을 맞은 것도 까닭이 없지 않으니, 과거에 정법을 비방한 까닭인가 보이며, 「그 죄를 다 마치고(其罪畢已)」라고 설해진 것은 불경보살이 난을 만난 까닭에 과거의 죄가 멸한 것인가 보이느니라. 이것이 첫째이니라.

「전중경수법문」, 1000쪽

이 편지의 논리는 2부에서 본 「과보를 받는 때」의 틀로 읽으면 분명해진다. 선업(先業)이 무거워 「이번 생에 다하지 못하고 미래에」 지옥에서 받아야 할 것 — 곧 순차생수나 순후차수의 무거운 업 — 이, 「이번 생에 이러한 무거운 괴로움을 만나면」 지금으로 당겨져 끝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지 지옥을 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천과 삼승과 일승의 이익」, 곧 성불에까지 이른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여기서 두 가지를 짚는다. 첫째, 「이번 생에 이러한 무거운 괴로움」이란 세간의 고생 일반이 아니라 정법을 넓히는 까닭에 받는 대난을 가리킨다는 것. 불경보살이 맞은 막대기와 돌은 이십사 자의 법화경을 외며 모든 사람을 예배한 까닭에 맞은 것이었다. 둘째, 대성인은 이어서 부법장의 사람들 — 외도에게 죽임을 당한 제바보살, 단미리왕에게 목이 잘린 사자존자 — 을 둘째 예로 드시며, 같은 정법을 넓혀도 난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은 나라에 선국과 악국이 있고 법에 섭수와 절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는 변방이요 말법의 시작이니,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은 미리 생각해 정해 두었고 그때를 기다렸느니라」고 맺으신다. 전중경수는 난을 견디는 위로이기 전에, 난을 각오하고 법을 넓히는 사람에게 열리는 법문이다.

본래의 길
  1. 무거운 선업(先業)
  2. 이번 생에 다하지 못함
  3. 미래에 지옥의 괴로움
전환의 길
  1. 무거운 선업(先業)
  2. 정법을 넓혀 이번 생에 무거운 괴로움을 만남
  3. 「지옥의 괴로움이 퍼뜩 사라져」
  4. 인·천·삼승·일승의 이익
地獄の苦みぱつときへて지옥의 괴로움이 퍼뜩 사라져(「전중경수법문」 1000쪽)
도표 15 · 전중경수

여덟 가지 괴로움과 「상(常)의 인과」

사도에 유배된 이듬해, 대성인은 「개목초」와 「사도어서」에서 반니원경의 문장을 자신의 몸에 하나하나 맞추어 보셨다. 「사도어서」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般泥洹経に云く「善男子過去に無量の諸罪・種種の悪業を作らんに是の諸の罪報・或は軽易せられ或は形状醜陋衣服足らず飲食麤疎財を求めて利あらず貧賤の家及び邪見の家に生れ或は王難に遇う」等云云、又云く「及び余の種種の人間の苦報現世に軽く受くるは斯れ護法の功徳力に由る故なり」等云云、此経文は日蓮が身なくば殆ど仏の妄語となりぬべし

반니원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과거에 무량한 죄와 갖가지 악업을 지었다면, 그 죄의 과보로 혹은 업신여김을 당하고, 혹은 형상이 추하고, 의복이 넉넉지 못하고, 음식이 거칠고, 재물을 구해도 이익이 없고, 빈천한 집과 사견의 집에 태어나고, 혹은 왕난을 만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 밖의 갖가지 인간의 고통스러운 과보를 이 생에 가볍게 받는 것은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 까닭이니라」 하였느니라. 이 경문은 니치렌의 몸이 없었다면 거의 부처의 망어가 되었으리라.

「사도어서」, 959쪽

이어서 대성인은 여덟 구절 하나하나에 그 원인이 되는 행위를 짝지어 보이신다.

高山に登る者は必ず下り我人を軽しめば還て我身人に軽易せられん形状端厳をそしれば醜陋の報いを得人の衣服飲食をうばへば必ず餓鬼となる持戒尊貴を笑へば貧賤の家に生ず正法の家をそしれば邪見の家に生ず善戒を笑へば国土の民となり王難に遇ふ是は常の因果の定れる法なり、日蓮は此因果にはあらず法華経の行者を過去に軽易せし故に法華経は月と月とを並べ星と星とをつらね華山に華山をかさね玉と玉とをつらねたるが如くなる御経を或は上げ或は下て嘲弄せし故に此八種の大難に値るなり

높은 산에 오른 자는 반드시 내려오고, 내가 남을 업신여기면 도리어 내 몸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으리라. 단정한 형상을 헐뜯으면 추한 과보를 얻고, 남의 의복과 음식을 빼앗으면 반드시 아귀가 되며, 계를 지키는 존귀한 이를 비웃으면 빈천한 집에 태어나고, 정법의 집을 헐뜯으면 사견의 집에 태어나며, 선한 계를 비웃으면 국토의 백성이 되어 왕난을 만나느니라. 이것은 상(常)의 인과가 정해진 법이니라. 니치렌은 이 인과가 아니니라. 법화경의 행자를 과거에 업신여긴 까닭에, 법화경은 달과 달을 나란히 하고 별과 별을 잇고 화산에 화산을 겹치고 구슬과 구슬을 꿴 것과 같은 경이거늘 이를 혹은 치켜세우고 혹은 깎아내려 조롱한 까닭에 이 여덟 가지 대난을 만난 것이니라.

「사도어서」, 960쪽
① 업신여김을 당함
남을 업신여김
② 형상이 추함
단정한 형상을 헐뜯음
③ 의복이 넉넉지 못함④ 음식이 거칢
남의 의복과 음식을 빼앗음(아귀)
⑤ 재물을 구해도 이익이 없음
(어서에 원인이 따로 적혀 있지 않음)
⑥ 빈천한 집에 태어남
계를 지키는 존귀한 이를 비웃음
⑦ 사견의 집에 태어남
정법의 집을 헐뜯음
⑧ 왕난을 만남
선한 계를 비웃음
「日蓮は此因果にはあらず」니치렌은 이 인과가 아니니라여덟 가지 모두의 원인: 법화경과 그 행자를 과거에 업신여기고 조롱함(「사도어서」 959~960쪽)
도표 16 · 여덟 가지 괴로움과 그 원인

여기서 대성인은 업을 두 층으로 나누신다. 하나는 「상의 인과」, 곧 남을 업신여기면 업신여김을 받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 굶주리는, 하나의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짝지어지는 보통의 인과다. 1부와 2부에서 본 불교 업론의 대부분이 이 층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법화경을 비방한 업」이다. 대성인은 자신이 받는 여덟 가지 괴로움이 하나하나 따로 지은 여덟 가지 업의 과보가 아니라, 법화경과 그 행자를 업신여긴 하나의 업에서 나왔다고 하신다.

강의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한다. 정법은 모든 공덕을 거둔 구족의 법이므로, 정법을 비방하는 것은 여덟 가지로 보인 모든 죄업을 한꺼번에 지은 것과 같다. 2부에서 본 『구사론』의 기준 — 「공덕의 밭에서 일으킨 업은 정해져 있다」 — 을 끝까지 밀고 가면, 모든 공덕의 근원인 법을 향해 지은 업이 가장 깊고 무거운 업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끊는 길도 그 법을 지키는 데 있다.

빚은 떠날 때 한꺼번에 받는다

그렇다면 왜 여덟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났는가. 대성인은 이어서 쓰신다.

此八種は尽未来際が間一づつこそ現ずべかりしを日蓮つよく法華経の敵を責るによて一時に聚り起せるなり譬ば民の郷郡なんどにあるにはいかなる利銭を地頭等におほせたれどもいたくせめず年年にのべゆく其所を出る時に競起が如し斯れ護法の功徳力に由る故なり等は是なり

이 여덟 가지는 미래가 다할 때까지 하나씩 나타났어야 할 것을, 니치렌이 강하게 법화경의 적을 책망하였기 때문에 한꺼번에 모여 일어난 것이니라. 비유하면 백성이 고을에 살 때에는 지토 등에게 아무리 빚을 지고 있어도 심하게 독촉하지 않고 해마다 미루어 가다가, 그곳을 떠날 때에는 다투어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라. 「이는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 까닭이라」 함은 이것이니라.

「사도어서」, 960쪽

이 빚의 비유는 전중경수의 구조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 준다. 고을에 머무는 동안에는 빚 독촉이 느슨해서, 빚은 갚아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은 채 해마다 미루어진다. 그러다 그 고을을 떠나려 하면 빚쟁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생사의 고을을 떠나려는 사람, 곧 성불하려는 사람에게 업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은 그가 떠나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꺼번에 받음」은 「다 갚음」과 같은 말이다.

상(常)의 인과하나의 원인 → 하나의 결과미래가 다할 때까지 하나씩 나타남= 고을에 머무는 백성의 빚: 해마다 미루어짐
대성인법화경을 비방한 하나의 업 → 여덟 가지법화경의 적을 강하게 책망하여 한꺼번에 모여 일어남= 고을을 떠나는 백성의 빚: 다투어 일어나 한꺼번에 갚음
「斯れ護法の功徳力に由る故なり」이는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 까닭이라
도표 17 · 상의 인과와 대성인의 인과

쇠를 단련하면 흠이 드러난다

「개목초」는 같은 법리를 쇠와 삼씨의 비유로 설하신다. 반니원경의 여덟 구절을 「니치렌의 몸에 마치 부절을 맞춘 듯하도다」라고 하신 뒤, 대성인은 자신이 무시이래 악왕으로 태어나 법화경 행자의 의식과 논밭을 빼앗고 그 목을 벤 일이 셀 수 없으리라고 하시고, 이렇게 이으신다.

功徳は浅軽なり此等の罪は深重なり、権経を行ぜしには此の重罪いまだ・をこらず鉄を熱にいたう・きたわざればきず隠れてみえず、度度せむれば・きずあらはる、麻子を・しぼるに・つよくせめざれば油少きがごとし、今ま日蓮・強盛に国土の謗法を責むれば此の大難の来るは過去の重罪の今生の護法に招き出だせるなるべし、鉄は火に値わざれば黒し火と合いぬれば赤し木をもつて急流をかけば波山のごとし睡れる師子に手をつくれば大に吼ゆ。

공덕은 얕고 가벼우며 이러한 죄는 깊고 무거우니라. 권경을 행할 때에는 이 무거운 죄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니라. 쇠를 불에 세게 달구어 단련하지 않으면 흠이 숨어 보이지 않으나 거듭 두드리면 흠이 드러나고, 삼씨를 짤 때 세게 짜지 않으면 기름이 적은 것과 같으니라. 이제 니치렌이 강성하게 국토의 방법(謗法)을 책망하니 이 대난이 오는 것은 과거의 무거운 죄를 이번 생의 호법이 불러낸 것이리라. 쇠는 불을 만나지 않으면 검고 불과 합하면 붉어지며, 나무로 급류를 휘저으면 물결이 산과 같고, 잠자는 사자에게 손을 대면 크게 포효하느니라.

「개목초」, 233쪽

4부에서 본 『마하지관』의 「지관을 닦으면 생사의 바퀴가 움직인다」가 여기서 대장간의 말로 바뀌었다. 흠은 단련하기 전부터 쇠 속에 있었다. 단련이 흠을 만든 것이 아니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드러난 흠은 두드려서 빼낼 수 있다. 「사도어서」는 이것을 더 짧게 말한다.

宿業はかりがたし鉄は炎打てば剣となる賢聖は罵詈して試みるなるべし、我今度の御勘気は世間の失一分もなし偏に先業の重罪を今生に消して後生の三悪を脱れんずるなるべし

숙업은 헤아리기 어렵도다.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칼이 되느니라. 현인과 성인은 매리(罵詈)로써 시험하는 것이리라. 나의 이번 어감기(御勘氣, 막부의 처벌)는 세간의 허물이 조금도 없느니라. 오로지 선업(先業)의 무거운 죄를 이번 생에 지우고 후생의 삼악도를 벗어나려는 것이리라.

「사도어서」, 958쪽

「형제초」는 같은 비유를 금과 돌로 바꾸어, 아버지의 반대에 맞선 이케가미 형제에게 쓰셨다.

各各・随分に法華経を信ぜられつる・ゆへに過去の重罪をせめいだし給いて候、たとへばくろがねをよくよくきたへばきずのあらわるるがごとし、石はやけばはいとなる金は・やけば真金となる

각각 힘껏 법화경을 믿으셨기 때문에 과거의 무거운 죄를 책망하여 불러내신 것이니라. 비유하면 쇠를 잘 단련하면 흠이 드러나는 것과 같으니라. 돌은 태우면 재가 되고 금은 태우면 참된 금이 되느니라.

「형제초」, 1083쪽
  • 쇠세게 단련하지 않으면 흠이 숨어 보이지 않고, 거듭 두드리면 흠이 드러난다(「개목초」 233쪽)
  • 삼씨세게 짜지 않으면 기름이 적다(같은 곳)
  • 쇠불을 만나지 않으면 검고 불과 합하면 붉다(같은 곳)
  • 급류 · 잠자는 사자나무로 휘저으면 물결이 산 같고, 손을 대면 크게 포효한다(같은 곳)
  • 쇠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칼이 된다(「사도어서」 958쪽)
  • 돌과 금돌은 태우면 재가 되고 금은 태우면 참된 금이 된다(「형제초」 1083쪽)
도표 18 · 단련의 비유들

같은 불을 만나도 돌은 재가 되고 금은 참된 금이 된다. 불이 무엇을 만드는지는 불이 아니라 불 속에 들어간 것이 정한다. 1부의 「소금 덩이 경」에서 같은 소금이 물그릇과 강에서 다르게 작용한 것과 같은 이치다. 대성인은 이 비유로, 업이 드러나는 괴로움 앞에서 물러서면 돌이 되고 신심을 지키면 금이 된다고 형제를 격려하셨다.

괴로움이 곧 죄의 표시는 아니다

전중경수는 자칫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그만큼 과거의 죄가 무거운 사람」이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오해될 수 있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이 등식을 스스로 허무셨다. 법화경의 행자에게 왜 제천의 가호가 없느냐는 물음에 답하시면서, 대성인은 먼저 천태의 말과 『심지관경』을 인용하신다.

天台云く「今我が疾苦は皆過去に由る今生の修福は報・将来に在り」等云云、心地観経に曰く「過去の因を知らんと欲せば其の現在の果を見よ未来の果を知らんと欲せば其の現在の因を見よ」等云云

천태가 이르기를 「지금 나의 병고는 모두 과거로 말미암고, 이번 생에 닦은 복은 그 과보가 장래에 있다」 하였고, 심지관경에 이르기를 「과거의 인을 알고자 하면 그 현재의 과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고자 하면 그 현재의 인을 보라」 하였느니라.

「개목초」, 231쪽

그러나 대성인은 곧이어, 다음 생에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자는 무거운 죄를 지어도 「현벌이 없다」고 하신다. 일천제가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괴로움이 없다고 해서 업이 가벼운 것이 아니고, 지금 괴로움이 있다고 해서 업이 더 무거운 것도 아니다. 괴로움이 지금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그 업이 끝나 가는 길에 들어섰다는 표시일 수 있다. 『심지관경』의 「현재의 과를 보라」는 과거를 탓하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인이 미래를 정한다는 말과 한 쌍으로 읽어야 한다.

1부의 「시바카 경」과 4부의 『마하지관』이 모든 괴로움을 업으로 돌리지 않았던 것도 여기서 다시 기억해 둘 일이다. 전중경수는 남의 괴로움을 재는 저울이 아니다. 그것은 정법을 위해 난을 만난 사람이 자신의 괴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법문이다.

정업도 늘린다

전중경수가 법을 넓히는 사람의 대난에 관한 법문이라면, 대성인은 병과 수명이라는 가장 사적인 괴로움 앞에서도 업을 말씀하셨다. 홍안 2년(1279)경, 오래 병을 앓던 도키조닌의 부인에게 보낸 「가연정업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夫れ病に二あり一には軽病二には重病・重病すら善医に値うて急に対治すれば命猶存す何に況や軽病をや、業に二あり一には定業二には不定業、定業すら能く能く懺悔すれば必ず消滅す何に況や不定業をや

무릇 병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가벼운 병이요 둘째는 무거운 병이니라. 무거운 병조차 좋은 의사를 만나 서둘러 다스리면 목숨이 오히려 보존되거늘 하물며 가벼운 병이랴. 업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정업(定業)이요 둘째는 부정업(不定業)이니라. 정업조차 잘 참회하면 반드시 소멸하거늘 하물며 부정업이랴.

「가연정업서」, 985쪽

『구사론』에서 정업은 과보를 받는 것이 정해진 업, 곧 피할 수 없는 업이다. 대성인은 그 정업조차 「잘 참회하면 반드시 소멸한다」고 단언하신다. 강의에 따르면 이 편지에서 정업은 특히 수명에 관한 업, 곧 정해진 수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참회는 3부에서 본 『관보현경』의 「단정히 앉아 실상을 생각하라」,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남묘호렌게쿄를 믿고 부르는 것이라고 강의는 풀이한다.

대성인은 이어서 정업을 늘린 사람들을 드신다. 쉰 살에 악창이 돋아 삼칠일 안에 죽어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던 아사세왕은, 부처가 그를 위해 법화경의 가르침을 다시 설한 열반경을 받고 병이 나았으며 마음의 무거운 죄도 이슬처럼 사라졌다. 천태의 교판에서 열반경은 법화경의 큰 수확 뒤에 남은 이삭을 줍는 「군습(捃拾)」의 경, 곧 법화경의 진실을 거듭 설한 경이다. 대성인이 「법화경을 거듭 연설하여 열반경이라 이름하여」라고 하신 것은, 아사세왕을 살린 힘이 결국 법화경의 힘이었다는 뜻이다. 쉰 살로 수명이 정해져 있던 진신(陳臣)은 천태대사의 형으로, 천태대사가 일러 준 『소지관』대로 수행해 열다섯 해를 늘려 예순다섯까지 살았다고 전한다. 불경보살은 법화경을 행하여 「다시 수명을 늘렸다(更增壽命)」고 설해진다. 그리고 대성인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 기원하여 병을 낫게 하고 네 해의 수명을 늘리셨다. 「시험 삼아 법화경의 신심을 세워 보시라」는 말씀으로 편지는 이어진다.

  • 아사세왕쉰 살에 악창, 삼칠일 안에 죽을 것이었으나병이 낫고 마음의 무거운 죄도 사라짐
  • 진신쉰 살로 정해진 수명천태대사를 만나 열다섯 해를 늘려 예순다섯까지
  • 불경보살법화경을 행하여「다시 수명을 늘렸다(更增壽命)」
  • 대성인의 어머니대성인의 기원으로병이 낫고 네 해의 수명을 늘림
「定業すら能く能く懺悔すれば必ず消滅す」정업조차 잘 참회하면 반드시 소멸하느니라(「가연정업서」 985쪽)
도표 19 · 정업을 늘린 사람들

같은 도키니부인에게 보낸 다른 편지(「도키니부인답서」)에서 대성인은 이렇게도 쓰셨다.

法華経の行者なり非業の死にはあるべからずよも業病にては候はじ、設い業病なりとも法華経の御力たのもし

법화경의 행자이니 비업(非業)의 죽음은 있을 수 없느니라. 설마 업병은 아닐 것이니라. 설령 업병이라 하여도 법화경의 힘이 믿음직하니라.

「도키니부인답서」, 975쪽

「설마 업병은 아닐 것이니라」 — 대성인은 병든 사람에게 먼저 업을 말하지 않으셨다. 4부에서 본 대로 업병은 병의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다. 대성인은 이 편지에서 먼저 몸을 잘 돌보아 치료를 이어 가라고 당부하셨고, 「가연정업서」에서도 시조깅고의 치료를 받도록 권하셨다. 그러고 나서 「설령 업병이라 하여도」라고 덧붙이신다. 업은 사람을 탓하는 말이 아니라, 의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말로 쓰였다.

큰 죄도 참회하면 사라진다

무사였던 아들이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이 어느 곳에 태어났을지 묻는 어머니 고니치니(光日尼)에게,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但し大石も海にうかぶ船の力なり大火も・きゆる事水の用にあらずや、小罪なれども懺悔せざれば悪道をまぬがれず、大逆なれども懺悔すれば罪きへぬ

다만 큰 돌도 바다에 뜨는 것은 배의 힘이요, 큰 불도 꺼지는 것은 물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작은 죄라도 참회하지 않으면 악도를 면하지 못하고, 큰 역죄라도 참회하면 죄가 사라지느니라.

「고니치보어서」, 930쪽

돌은 무겁다. 그러나 돌이 가라앉을지 뜰지는 돌의 무게만이 아니라 그 돌을 실은 배가 정한다. 「소금 덩이 경」의 강물, 「형제초」의 금, 그리고 여기의 배 — 대성인의 업론에서 업의 무게는 언제나 그 업을 싣는 것과 함께 말해진다. 그리고 그 배가 법화경이다.

6부 숙명에서 사명으로원겸어업

문하에게 열린 전중경수

전중경수는 대성인 한 분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형제초」에서 대성인은 반니원경의 같은 문장을 인용하신 뒤, 그 뜻을 이케가미 형제를 비롯한 문하 모두에게 돌려 주신다.

文の心は我等過去に正法を行じける者に・あだをなして・ありけるが今かへりて信受すれば過去に人を障る罪にて未来に大地獄に堕つべきが、今生に正法を行ずる功徳・強盛なれば未来の大苦をまねきこして少苦に値うなり

경문의 뜻은, 우리가 과거에 정법을 행하던 사람에게 원수를 지었던 것을, 이제 도리어 믿고 받아들이니, 과거에 남을 가로막은 죄로 미래에 대지옥에 떨어져야 할 것이, 이번 생에 정법을 행하는 공덕이 강성하므로 미래의 큰 괴로움을 불러 일으켜 작은 괴로움을 만나는 것이니라.

「형제초」, 1083쪽

「미래의 큰 괴로움을 불러 일으켜 작은 괴로움을 만난다」 — 전중경수의 정의가 이보다 간결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힘이 「이번 생에 정법을 행하는 공덕이 강성하므로」라는 데서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성인은 이어서 형제가 받는 두 가지 난, 곧 사견의 집(정법을 비방하는 부모)에 태어나 책망받는 것과 법화경의 행자를 원수로 여기는 국주를 만난 것이 반니원경의 「사견의 집에 태어나고」 「왕난을 만난다」에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하시고, 「내 몸이 과거에 방법의 자였음을 의심하지 마시라」고 당부하신다.

왜 부처가 과거의 방법을 말하는가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창가학회 교학에서 대성인은 겉으로는 본화 지용의 보살이시고 그 내증은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곧 말법의 어본불이시다. 그런 분이 어찌하여 「니치렌도 이렇게 책망받는 것은 선업(先業)이 없지 않으니라」라고 하시며 자신에게 과거의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사도어서」의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해석을 인용해 이것을 「시동범부(示同凡夫)의 측면에 의거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개목초」의 강의도 같은 뜻으로 설명한다. 방법(謗法)으로 괴로워하는 말법의 중생을 구하려면, 부처는 그 중생과 같은 범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어의구전』에 「말법의 부처란 범부이며 범부승이니라」라고 하신 그대로다. 강의는 법화경 곳곳에서 보살들이 부처에게 「병은 적고 괴로움은 적으십니까(少病少惱)」 하고 묻는 장면을 예로 든다. 부처에게 본래 병이 있을 리 없지만, 중생의 병을 자신의 병으로 삼기에 「병이 적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대성인은 중생의 방법을 자신의 방법으로 삼아, 그 업을 한 몸에 받아 넘어서는 길을 몸소 보이셨다는 것이다.

「사도어서」의 다음 대목은 그 범부의 몸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何に況や日蓮今生には貧窮下賤の者と生れ旃陀羅が家より出たり心こそすこし法華経を信じたる様なれども身は人身に似て畜身なり

하물며 니치렌은 이번 생에 빈궁하천한 자로 태어나 전다라의 집에서 나왔느니라. 마음은 조금 법화경을 믿는 듯하나 몸은 사람의 몸 같으면서 축생의 몸이니라.

「사도어서」, 958쪽

그리고 대성인은 자신의 과거를 헤아려, 승의비구의 넋인가, 대천의 혼인가, 불경보살을 업신여긴 무리인가, 수량품의 실심(失心)의 자인가, 방편품의 오천 상만의 권속인가, 대통지승불 때의 셋째 무리의 흐름인가 하고 물으신 끝에 「숙업은 헤아리기 어렵도다」라고 하신다. 1부에서 본 「업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다」는 석존의 말이 여기서 대성인의 입으로 다시 나온다. 그러나 대성인은 헤아릴 수 없는 숙업 앞에 멈추지 않으시고, 곧바로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칼이 되느니라」로 넘어가신다. 과거를 다 알 수는 없어도, 지금 단련하는 일은 할 수 있다.

1부에서 석존이 「태어남이 아니라 행위가 사람을 정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자. 업으로 신분을 정당화하던 사회에서 석존은 행위의 윤리를 세웠다. 대성인은 스스로 「전다라의 집」에서 나왔다고 밝히시고, 그 낮은 자리에서 법화경을 몸으로 읽으셨다. 업이 사람을 낮은 곳에 묶는다는 낡은 논리를, 낮은 곳에서 법을 넓히는 사명의 자리로 뒤집으신 것이다.

원겸어업 — 원이 업을 겸한다

이 뒤집기를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말이 「개목초」의 원겸어업이다. 권지품 이십행게의 「삭삭견빈출(數數見擯出)」을 몸으로 읽은 것은 자신뿐이라고 하신 뒤, 대성인은 이렇게 쓰신다.

経文に我が身・普合せり御勘気をかほれば・いよいよ悦びをますべし、例せば小乗の菩薩の未断惑なるが願兼於業と申して・つくりたくなき罪なれども父母等の地獄に堕ちて大苦を・うくるを見てかたのごとく其の業を造つて願つて地獄に堕ちて苦に同じ苦に代れるを悦びとするがごとし、此れも又かくのごとし当時の責はたうべくも・なけれども未来の悪道を脱すらんと・をもえば悦びなり。

경문에 내 몸이 두루 들어맞았느니라. 어감기(御勘氣, 막부의 처벌)를 입으니 더욱 기쁨이 더해지느니라. 비유하면 소승의 보살로서 아직 미혹을 끊지 못한 이가 원겸어업(願兼於業)이라 하여, 짓고 싶지 않은 죄이지만 부모 등이 지옥에 떨어져 큰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고, 짐짓 그 업을 지어 스스로 원하여 지옥에 떨어져 같은 괴로움을 받고 그 괴로움을 대신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과 같으니라. 이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지금의 책망은 견딜 수 없을 듯하나 미래의 악도를 벗어나리라 생각하면 기쁨이니라.

「개목초」, 203쪽

3부에서 본 업생과 원생의 구분을 여기에 대어 보자. 소승의 보살은 아직 미혹을 끊지 못했으므로(미단혹), 원생의 보살처럼 자유롭게 태어날 곳을 고를 힘이 없다. 그래서 부모가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지옥에 갈 만한 업을 「짐짓」 지어 스스로 지옥에 떨어진다. 겉으로는 업에 끌려 지옥에 간 것과 다름없지만, 그 업을 지은 까닭은 원이었다. 원이 업의 모습을 빌린 것, 이것이 「원이 업을 겸한다」는 뜻이다. 법사품의 「스스로 청정한 업보를 버리고 … 악세에 태어나」가 범부의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라 해도 좋다.

대성인은 자신의 대난을 바로 이 구조로 보셨다. 지금의 유배와 책망은 겉으로는 과거의 방법이 불러낸 업보다. 그러나 그 업보를 받는 까닭, 그리고 그것을 받으며 얻는 것은 「미래의 악도를 벗어나는 것」 — 자신뿐 아니라 법화경을 비방하는 일본의 모든 사람이 악도를 벗어나는 길을 여는 것이다. 업보로 받는 괴로움이 원으로 고른 괴로움이 될 때, 같은 괴로움이 「기쁨」으로 바뀐다. 「어감기를 입으니 더욱 기쁨이 더해지느니라」는 이 전환의 선언이다.

겉모습업에 끌려 지옥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다
속뜻부모 등의 괴로움을 대신하려는 원으로 짐짓 업을 지었다
대성인
겉과거의 방법이 불러낸 유배와 책망
속법화경을 넓혀 일체중생을 악도에서 건지려는 원
「当時の責はたうべくも・なけれども未来の悪道を脱すらんと・をもえば悦びなり」지금의 책망은 견딜 수 없을 듯하나 미래의 악도를 벗어나리라 생각하면 기쁨이니라(「개목초」 203쪽)
도표 20 · 원겸어업의 구조

체념의 불법이 아니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개목초」 57장 강의는 전중경수를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의 삶이 과거세의 죄업과 선근에 따라 정해져 있다는 것은 믿든 믿지 않든 사실이다. 그러나 숙명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체념의 인생이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체념의 불법이다. 대성인은 과거세에 악업을 쌓아 지금 불행한 사람을 어떻게 하면 운명을 전환시켜 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셔서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주셨다. 그러므로 문저비침의 남묘호렌게쿄야말로 숙명전환의 가르침이다 — 이것이 강의의 결론이다.

이 「숙명전환」이라는 말은 어서에 그대로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전중경수와 원겸어업을 하나로 꿰는 창가학회 교학의 용어다. 업을 받아들이는 것(업을 아는 것)에서 업을 바꾸는 것(전중경수)으로, 다시 업을 사명으로 고르는 것(원겸어업)으로. 1부부터 읽어 온 업 사상의 흐름이 여기서 하나의 방향으로 모인다.

「제법실상초」는 법화경의 행자가 된 것 자체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法華経の行者となる事は過去の宿習なり、同じ草木なれども仏とつくらるるは宿縁なるべし、仏なりとも権仏となるは又宿業なるべし。

법화경의 행자가 되는 일은 과거의 숙습(宿習)이니라. 같은 초목이라도 부처로 만들어지는 것은 숙연이요, 부처라 하여도 권불이 되는 것은 또한 숙업이리라.

「제법실상초」, 1361쪽

숙업이라는 같은 말이 여기서는 법화경의 행자가 되는 인연을 가리킨다. 사도에서 대성인께 귀의한 사이렌보에게 대성인은, 지금 이 법을 만나 이 길을 걷는 것 자체가 과거로부터 이어진 인연이라고 하신다. 업은 사람을 과거에 묶는 사슬만이 아니라, 사람을 지금 이 자리로 데려온 길이기도 하다.

「일대성교대의」의 한 구절이 이 전환을 짧게 요약한다.

何にも法華円実の菩提心を発さん人は迷の九界へ業力に引かるる事無きなり。

어떻든 법화경 원교의 참된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미혹의 구계로 업력에 끌려가는 일이 없느니라.

「일대성교대의」, 405쪽

업력에 끌려가는 삶(업생)에서, 보리심에 따라 스스로 가는 삶(원생)으로. 이것이 대성인이 업이라는 오래된 말에 주신 마지막 의미다.

① 업을 안다「의도를 업이라 한다」(석존)정업과 부정업(『구사론』)
② 업을 바꾼다전중경수: 「미래의 큰 괴로움을 불러 일으켜 작은 괴로움을 만난다」(「형제초」)정업도 참회하면 소멸한다(「가연정업서」)
③ 업을 고른다원겸어업: 「지금의 책망은 … 미래의 악도를 벗어나리라 생각하면 기쁨이니라」(「개목초」)

업력에 끌려가는 삶에서 원에 따라 가는 삶으로

도표 21 · 업을 대하는 세 단계
밤의 대장간 안, 모루 위에 가운데가 붉게 달아오른 반쯤 벼린 칼이 놓이고, 왼쪽에는 숯불 화덕과 망치, 오른쪽에는 김이 오르는 물통, 창밖에는 초승달이 걸린 금박 수묵화
그림 2 · 칼이 되어 가는 쇠
맺으며

소금 한 덩이에서 원겸어업까지

석존은 업을 「의도」로 정의함으로써, 업을 바깥의 운명에서 사람의 마음으로 옮겼다. 그리고 같은 업이라도 그것을 받는 생명이 강물처럼 넓으면 가볍게 지나간다고 했다. 『구사론』은 업이 남는 방식과 과보를 받는 때와 정업·부정업을 체계로 세웠고, 용수는 업에 자성이 없기에 업이 이어지고 또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열반경』은 그 바뀜을 전중경수라 불렀고, 반니원경은 그 힘을 호법의 공덕력이라 했다. 천태는 수행이 깊어지면 업이 장애로 드러난다는 것과, 업이 받은 몸이 그대로 삼신이라는 것을 함께 보았다.

대성인은 이 모든 흐름을 말법의 법난 한가운데서 몸으로 읽으셨다. 여덟 가지 대난을 법화경을 비방한 하나의 업의 과보로 보시고, 그것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을 고을을 떠나는 사람의 빚에 비유하셨다. 쇠를 두드리면 흠이 드러나듯 법을 지키면 업이 불려 나오고, 불려 나온 업은 이번 생에 끝난다. 정업조차 참회하면 사라지고, 큰 죄라도 배에 실으면 뜬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성인은 업보로 받는 괴로움을 원으로 고른 괴로움으로 바꾸어, 「더욱 기쁨이 더해진다」고 하셨다.

업은 과거를 향해 사람을 묶는 말로 출발하지 않았다. 석존에게도 대성인에게도 업은 지금 무엇을 의도하느냐를 묻는 말이었다. 이 페이지가 따라온 것은, 그 물음이 「업을 알라」에서 「업을 바꾸라」로, 다시 「업을 사명으로 삼으라」로 깊어져 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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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 「꿰뚫음의 경」 AN 6.63, 「외도의 근거 경」 AN 3.61, 「소금 덩이 경」 AN 3.100, 「생각할 수 없는 것 경」 AN 4.77
  •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 「시바카 경」 SN 36.21
  •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 「앙굴리말라 경」 MN 86
  • 『숫타니파타』(Suttanipāta) — 「천민경」 Sn 136
  • 『중아함경』 T1 no.26 — 「달범행경」
  • 세친 『아비달마구사론』 권13~18 업품, 현장 역, T29 no.1558
  • 용수 『중론』 관업품 제17, 구마라집 역, T30 no.1564
  • 『대반열반경』(북본), 담무참 역, T12 no.374
  • 『대반니원경』 6권, 법현 역, T12 no.376
  • 『묘법연화경』 법사품 제10 · 상불경보살품 제20, 구마라집 역, T9 no.262
  • 『관보현보살행법경』, 담무밀다 역, T9 no.277
  • 천태대사 지의 『마하지관』 권5 · 권8, T46 no.1911
  • 니치렌 대성인 「전중경수법문」 · 「개목초」 · 「사도어서」 · 「형제초」 · 「가연정업서」 · 「도키니부인답서」 · 「고니치보어서」 · 「제법실상초」 · 「일념삼천법문」 · 「일대성교대의」 · 「치병대소권실위목」 (창가학회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강의 · 연구

  • 창가교학연구실, 「転重軽受法門」 · 「開目抄」 · 「佐渡御書」 · 「兄弟抄」 · 「可延定業書」 · 「富木尼御前御返事」 각 장 강의
  • 平川彰, 『インド仏教史』 上, 春秋社, 1974
  • 舟橋一哉, 『業の研究』, 法藏館, 1954
  •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t Eth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계보와의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