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세품은 지옥에서 색구경천까지, 풍륜에서 수미산 꼭대기까지 세계의 모습을 다 그려 놓고 마지막에 물었다. 이 갖가지 차별은 누가 만들었는가. 분별업품의 첫 줄이 그 답이다 — 한 주재자가 먼저 알고서 만든 것이 아니라, 유정의 업이 차별되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 답은 곧바로 더 까다로운 물음을 부른다. 업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손을 들어 올리는 몸짓은 무엇을 체(體)로 하여 「업」이 되는가. 몸짓이 끝난 뒤에도 남아 계를 지키게 하고 복을 자라게 하는 그 무엇은 실재하는가. 분별업품 여섯 권은 이 물음에서 시작해, 계를 받는다는 것, 사람을 죽인다는 것, 승가를 깨뜨린다는 것, 부처가 된다는 것이 업의 언어로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정해 간다.
『구사론』 아홉 품 가운데 분별업품(分別業品)은 권13에서 권18까지 여섯 권, 본송으로 131송을 차지한다. 분별세품이 결과의 세계 — 유정세간과 기세간 — 를 다루었다면, 분별업품은 그 세계를 만든 원인을 다루고, 이어지는 분별수면품은 업을 일으키는 더 깊은 원인인 번뇌를 다룬다. 세품 · 업품 · 수면품의 순서는 고(苦) · 업(業) · 혹(惑)을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이 품의 첫 게송과 사업(思業) · 사이업(思已業)의 구별, 업의 과보가 정해져 있는가 아닌가(정업 · 부정업), 과보를 받는 세 때(순현 · 순차 · 순후), 함께 짓는 업과 홀로 짓는 업은 핵심 개념 「업」 페이지에서 석존의 업론과 함께 이미 읽었다. 이 편은 그 페이지가 지나쳐 간 자리 — 분별업품이 실제로 가장 많은 지면을 들여 다툰 문제들 — 로 들어간다. 몸의 표업은 형색인가 움직임인가. 무표색은 실재하는가. 계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살생은 정확히 어느 찰나에 성립하는가. 승가를 깨뜨리는 일은 왜 가장 무거운 죄인가.
분별업품을 읽는 일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와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의 대론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천친(天親, 세친 世親 Vasubandhu)은 유부의 정설을 게송으로 세우고, 장행(論曰)에서는 거듭 「경부의 스승들은 이렇게 말한다」며 그 정설을 무너뜨린다. 유부가 업의 지속을 「무표색」이라는 실재하는 색법으로 설명하면, 경량부는 그것을 「마음의 흐름이 이어지며 미세하게 바뀌어 가는 것(相續轉變差別)」으로 바꾸어 읽는다. 이 대론은 뒤에 유부의 중현(衆賢, Saṅghabhadra)이 『순정리론』으로 천친을 반박하면서 한 번 더 이어진다. 이 편은 그 세 목소리를 함께 듣는다. 삼세실유 논쟁 그 자체는 「번뇌와 삼세실유」 편에 맡기고, 여기서는 업품 안에서 벌어진 대론만 따라간다.
- 권13업의 체 · 신표업은 형색인가 행동인가 · 무표색의 여덟 증거 · 무표의 대종과 계 · 지 · 네 가지 선과 두 가지 등기
- 권14세 가지 무표와 세 가지 율의 · 별해탈율의 여덟 무리 · 근주율의(팔재계) · 근사(우바새)의 율의 · 삼귀의
- 권15율의를 얻는 곳과 버리는 연 · 불율의와 처중 · 선 · 불선 · 무기, 복 · 비복 · 부동, 순락수 등의 업 · 정업과 부정업 · 곡 · 예 · 탁
- 권16흑흑 등 네 가지 업 · 삼모니 · 삼청정 · 삼악행 · 삼묘행 · 십업도의 체와 가행 · 근본 · 후기 · 살생에서 사견까지 열 업도의 성립 조건
- 권17「업도」라는 이름의 뜻 · 단선근과 속선근 · 십업도의 세 과보 · 업과 다섯 과 · 인업과 만업 · 업장 · 번뇌장 · 이숙장
- 권18오무간업과 파승 · 무간업의 동류 · 보살의 묘상업과 삼아승기겁 · 시 · 계 · 수의 세 복업사 · 업의 경중과 증장
이 편의 장은 다음과 같다.
- 제1장 몸짓은 무엇으로 업이 되는가 — 표업의 정체 — 신표업은 형색인가 움직임인가. 찰나멸 논증과 형색 실재 논쟁, 그리고 「표업의 체는 결국 의도」라는 경량부의 결론
- 제2장 보이지 않는 업 — 무표색의 실재 논쟁 — 유부가 무표색을 세우는 여덟 증거와 경량부의 하나하나의 반론, 무표의 대종 · 계 · 지 · 성질
- 제3장 계를 받는다는 것 — 율의 · 불율의 · 처중 — 세 가지 율의, 별해탈의 여덟 무리, 근주와 근사의 논쟁, 율의를 얻고 버리는 조건
- 제4장 업을 나누는 여러 잣대 — 네 가지 선에서 네 가지 업까지 — 승의선 · 자성선 · 상응선 · 등기선, 복 · 비복 · 부동, 순수업, 흑백의 네 업, 곡 · 예 · 탁과 삼모니
- 제5장 열 가지 업의 길 — 십업도의 성립과 과보 — 가행 · 근본 · 후기, 살생에서 사견까지의 성립 조건, 단선근과 속선근, 세 가지 과보
- 제6장 가장 무거운 업 — 오무간업 · 파승 · 삼장 — 무간의 뜻, 파법륜승과 파갈마승, 역죄의 경계 사례, 무간업의 동류
- 제7장 부처가 되는 업 — 보살의 묘상업과 세 가지 복업사 — 삼아승기겁과 백 겁, 한 상(相)의 복의 양, 시 · 계 · 수, 업의 경중과 증장
- 제8장 업은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 업품 안의 유부 · 경량부 대론 — 무표색과 상속전변차별, 「기쁘게 할 수 있는 종의」
본송
此身語二業,俱表無表性。 身表許別形,非行動為體,以諸有為法,有剎那盡故。應無無因故,生因應能滅,形亦非實有,應二根取故,無別極微故,語表許言聲。
이 몸과 말의 두 업은 모두 표(表)와 무표(無表)를 성품으로 한다. 몸의 표업은 별도의 형(形)이라고 인정한다. 움직임(行動)을 체로 삼지 않는다. 모든 유위법은 찰나가 있어 다하기 때문이다. [멸이 원인을 기다린다면] 원인 없는 [멸]이 하나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고,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곧 멸하게 하는 원인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경량부는 말한다] 형도 실재가 아니다. [실재라면] 두 근으로 취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별도의 극미가 없기 때문이다. 말의 표업은 말소리라고 인정한다.
둘째 게송은 한 게송 안에 세 목소리가 겹쳐 있다. 첫 두 구는 유부의 정설, 「以諸有為法」부터 「生因應能滅」까지는 정량부의 행동설을 깨는 논증, 「形亦非實有」부터 「無別極微故」까지는 경량부가 유부의 형색 실재를 깨는 논증이고, 마지막 구에서 다시 유부의 정설로 돌아온다. 장행이 이 순서대로 풀어 간다.
술어 풀이
- 表業표업
- 「드러내는 업」(vijñapti-karman). 몸짓과 말소리처럼 남이 보고 들을 수 있게 드러나, 그것을 일으킨 마음을 밖으로 알려 주는 업. 유부는 몸의 표업을 형색, 말의 표업을 말소리로 보아 둘 다 색법(色法)에 넣는다.
- 無表業무표업
- 「드러나지 않는 업」(avijñapti-karman). 표업을 계기로 일어나, 표업이 끝난 뒤에도 몸 안에 이어지는 업. 유부는 이것을 법처(法處)에 속하는 실재하는 색법, 곧 무표색으로 본다.
- 形色형색
- 길고 짧음, 모나고 둥긂, 높고 낮음, 바르고 바르지 않음 같은 모양의 색(saṃsthāna). 청 · 황 · 적 · 백 같은 현색(顯色, varṇa)과 함께 색처(色處)를 이룬다. 유부는 형색에 현색과 별도의 극미가 있다고 보았다.
- 行動행동
- 움직여 감(gati). 한 곳에 있던 것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것. 정량부(正量部)는 몸이 움직여 가는 것 자체를 몸의 표업으로 보았다고 주석가들은 전한다.
- 滅不待因멸부대인
- 「멸은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유위법이 사라지는 데는 바깥 원인이 필요 없다는 명제. 업품은 이것으로 찰나멸을 논증하고, 찰나멸로 행동설을 무너뜨린다.
- 等起등기
- 「함께 일으킴」(samutthāna). 어떤 업을 일으키는 마음. 앞에서 이끄는 인등기(因等起)와 업이 일어나는 바로 그 찰나에 함께 있는 찰나등기(剎那等起)가 있다.
- 上座상좌
- 중현의 『순정리론』이 비판 대상으로 거듭 드는 경량부 계통의 논사. 『순정리론』은 신표업에 관한 그의 독자적 이론을 소개하고 반박한다.
세 업을 세우는 기준 — 의지 · 자성 · 등기
첫 게송이 업을 사(思)와 사가 지은 것(思所作)으로 나누고, 사는 의업, 사가 지은 것은 신업 · 어업이라고 했다(이 대목과 사업 · 사이업의 구별은 핵심 개념 「업」 2부에서 읽었다). 그런데 장행은 곧바로 하나의 까다로운 물음을 던진다. 신 · 어 · 의라는 세 업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는가. 의지처(所依)를 기준으로 하는가, 자성(自性)을 기준으로 하는가, 일으키는 마음(等起)을 기준으로 하는가.
若約所依應唯一業,以一切業並依身故。若據自性應唯語是業,以三種中唯語即業故。若就等起亦應唯一業,以一切業皆意等起故。
의지처를 기준으로 한다면 업은 하나뿐이어야 한다. 모든 업이 몸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말만이 업이어야 한다. 셋 가운데 말만이 그 자체로 [말이라는] 업이기 때문이다. 등기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업은 하나뿐이어야 한다. 모든 업은 뜻(意)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기준 하나로는 셋이 나오지 않는다는 반론이다. 비바사사의 답은 기준을 셋에 하나씩 맞추는 것이었다. 신업은 몸에 의지하므로 의지처로, 어업은 말 자체가 업이므로 자성으로, 의업은 뜻이 일으키므로 등기로 세운다(「如其次第由上三因」). 그리고 사(思)가 곧 의업이며, 사가 지은 업이 신 · 어 둘로 나뉘는 것은 그것이 사에 의해 함께 일으켜진 것(思所等起)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이 짧은 문답은 업품 전체의 긴장을 미리 보여 준다. 업의 본질이 사, 곧 의도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문제는 사가 아닌 것 — 몸짓과 말소리 — 이 어떤 자격으로 「업」이라 불리는가이다. 유부는 몸짓과 말소리가 그 자체로 실재하는 색법이며 그것이 업의 체라고 답한다. 경량부는 결국 그것들도 「몸을 움직이는 사」, 「말을 일으키는 사」일 뿐이라고 답하게 된다. 아래에서 그 갈림길까지 원문을 따라간다.
신표업에 관한 세 학설
게송은 「몸의 표업은 별도의 형이다」라고 선언한다. 장행의 첫 문장이 그 뜻을 푼다.
由思力故,別起如是如是身形,名身表業。
사(思)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러저러한 몸의 모양이 별도로 일어나는 것을 몸의 표업이라 한다.
절을 하는 사람의 몸은 굽은 모양을, 주먹을 쥔 사람의 손은 오므린 모양을 띤다. 그 모양은 몸의 본래 모양 위에 「사의 힘으로 별도로 일어난」 것이고, 그 모양이 남에게 「이 사람이 지금 공경하고 있다」, 「이 사람이 지금 때리려 한다」는 것을 알린다. 그러므로 몸의 표업은 형색이다. 『대비바사론』은 색처를 넷으로 나누면서 「모양으로만 알 수 있고 빛깔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몸의 표업의 색(形可了非顯者。謂身表色)」이라고 했다(권122, T27, 635a). 중현은 이를 더 정밀하게 다듬는다. 털과 머리카락 등의 무더기를 통틀어 몸이라 하고, 그 몸 안에서 마음이 일으킨 사대종의 결과인 형색의 차별이 마음을 드러내 보이므로 그것을 몸의 표업이라 한다는 것이다(「髮毛等聚總名為身,於此身中有心所起四大種果形色差別,能表示心,名為身表」, 『순정리론』 권33, T29, 532a).
그런데 왜 빛깔(현색)이나 사대종은 표업이 될 수 없는가. 중현의 답은 표업의 조건을 분명히 한다. 표업은 선 · 불선의 성질을 가져야 하는데, 현색과 대종은 오직 무기(無記)이다. 그것들은 짓는 사람이 바라는 대로 생기지 않고, 마음이 없어도 생긴다. 반면 표업은 반드시 마음을 기다려서야 생긴다(「表必待心方得生故」). 몸의 모양만이 마음을 따라 그때그때 바뀌므로, 마음의 선악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것은 형색뿐이라는 것이다.
이 정설에 맞서는 견해가 둘 있었다. 하나는 「다른 부파」의 행동설이다.
有餘部說:動名身表,以身動時由業動故。
어떤 다른 부파는 말한다. 움직임을 몸의 표업이라 한다. 몸이 움직일 때 업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보광과 법보는 모두 이 「다른 부파」를 정량부라 한다. 법보의 풀이에 따르면 정량부는 몸에 찰나가 없다고 보았고, 사업(思業)이 이 몸을 움직일 때 그 움직이는 몸을 몸의 표업이라 했다. 몸의 표업을 「몸이 저기서 여기로 가는 것」으로 보는 이 견해는 상식에 가장 가깝다. 손을 들어 사람을 때렸다면, 업은 손의 모양이 아니라 손이 날아가 닿은 그 움직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른 하나는 경량부의 견해로, 이것은 장의 뒤쪽에서 본다. 미리 말해 두면, 경량부는 형색도 실재가 아니라고 보고, 몸의 표업은 결국 「몸을 움직이게 하는 사」라고 결론짓는다. 『순정리론』은 여기에 경량부 계통 상좌(上座)의 독특한 이론도 덧붙여 전한다. 다른 연의 힘으로 대종과 소조색의 무더기가 다른 자리에 생길 때, 뒤의 결과가 앞의 원인에 틈 없이 이어지며 남을 이롭게 하거나 해치는데, 바로 그 무더기를 몸의 표업이라 한다는 것이다(「餘緣力故,令大造聚異方生時,後果前因無間而轉,能為攝益或為損害,即如是聚名身表業」, 『순정리론』 권33, T29, 532b). 상좌는 「옮겨 감」을 말하지 않고 「다른 자리에 생김」을 말한다는 점에서 정량부와 다르지만, 형색이라는 별도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부와도 다르다.
찰나멸 논증 — 「멸은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천친은 행동설을 찰나멸 하나로 무너뜨린다. 모든 유위법은 찰나가 있다(有剎那). 찰나란 무엇인가.
剎那何謂?得體無間滅,有此剎那法,名有剎那,如有杖人名為有杖。諸有為法纔得自體,從此無間必滅歸無。若此處生即此處滅,無容從此轉至餘方,故不可言動名身表。
찰나란 무엇인가. 체를 얻자마자 틈 없이 멸하는 것이다. 이 찰나를 가진 법을 「찰나가 있는 것」이라 한다. 지팡이를 가진 사람을 「지팡이가 있는 이」라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유위법은 자체를 얻자마자 그로부터 틈 없이 반드시 멸하여 없어진다. 이곳에서 생겼으면 바로 이곳에서 멸하니,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겨를이 없다. 그러므로 움직임을 몸의 표업이라 할 수 없다.
논증의 뼈대는 간단하다. 움직임이란 같은 것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옮겨 가려면 적어도 두 찰나 동안 같은 것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유위법은 생긴 그 찰나에 그 자리에서 멸한다. 그러므로 옮겨 가는 것은 없다. 우리가 「손이 움직인다」고 보는 것은 손이 찰나마다 조금씩 다른 자리에 새로 생겨나는 것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장행의 비유로는 풀밭을 태우며 번져 가는 불꽃과 같다 — 불꽃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틈 없이 다른 자리에 새 불꽃이 생길 뿐이다(「如燒草焰行,起行增上慢」).
그렇다면 논쟁의 무게는 「모든 유위법은 찰나멸한다」는 전제로 옮겨 간다. 상대가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행동설은 무너지지 않는다. 장행은 그래서 이 전제를 논증하는 데 지면을 들인다. 그 핵심이 「멸은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滅不待因)」이다.
謂有為法滅不待因。所以者何?待因謂果,滅無非果,故不待因。滅既不待因,纔生已即滅。若初不滅,後亦應然,以後與初有性等故。既後有盡,知前有滅。
유위법의 멸은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원인을 기다리는 것은 결과이다. 멸은 없어짐이니 결과가 아니다. 그러므로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멸이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생기자마자 곧 멸한다. 만약 처음에 멸하지 않는다면 뒤에도 그러해야 한다. 뒤와 처음이 「있음」이라는 성질에서 같기 때문이다. 뒤에 다함이 있으니, 앞에도 멸함이 있음을 안다.
이 논증은 세 단계로 짜여 있다. 첫째, 원인이 하는 일은 무언가를 있게 하는 것이다. 멸은 무언가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원인이 만들어 낼 「결과」가 아니다. 그러므로 멸에는 원인이 필요 없다. 둘째, 멸에 원인이 필요 없다면, 멸을 늦출 이유도 없다. 법은 생기자마자 멸한다. 셋째, 만약 처음 찰나에 멸하지 않는다면, 둘째 찰나의 법도 처음 찰나의 법과 「있음」이라는 점에서 아무 차이가 없으므로 역시 멸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영원히 멸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유위법은 결국 다한다. 그러니 처음 찰나에 이미 멸하고 있었다.
셋째 단계에서 상대가 반박할 수 있다. 「뒤의 것은 처음과 달라졌기 때문에 멸한다.」 천친은 이것을 한 문장으로 막는다. 달라졌다면 그것은 이미 처음의 그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면서 「달라진 것」일 수는 없다(「即此相異,理必不然」).
장작과 불 — 현량의 반론
가장 강한 반론은 눈앞의 경험이다.
豈不世間現見薪等,由與火合故致滅無?定無餘量過現量者,故非法滅皆不待因。
세간에서 장작 따위가 불과 만나 멸하여 없어지는 것을 눈앞에 보지 않는가. 현량(現量)보다 앞서는 다른 인식 근거는 결코 없다. 그러므로 법의 멸이 모두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천친은 이 반론이 현량을 잘못 쓰고 있다고 답한다. 우리가 실제로 본 것은 「장작이 불과 만난 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것이 불 때문에 멸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장작이 찰나마다 스스로 멸하다가 불과 만난 뒤로는 더 이상 새로 생기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것인지는 눈으로 판별할 수 없다. 장행은 이것을 등불과 방울 소리로 보인다. 바람이 등불에 닿으면, 손이 방울에 닿으면 불꽃과 소리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과 손이 불꽃과 소리를 「멸한」 것인가, 아니면 찰나마다 스스로 멸하던 불꽃과 소리가 「다시 생기지 못하게」 한 것인가(「如風手合燈焰鈴聲」). 그러므로 이 문제는 현량이 아니라 비량(比量), 곧 추론으로 판정해야 하고, 그 추론이 바로 「멸은 결과가 아니므로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이다.
장행은 대칭의 논증도 든다. 생겨남에 원인이 필요하듯 장작의 멸에 원인이 필요하다면 모든 멸에 원인이 필요해야 하는데, 인식 · 불꽃 · 소리는 다른 원인을 기다리지 않고 찰나에 스스로 멸한다. 여기서 다시 반론이 나온다. 앞의 인식과 소리는 뒤의 인식과 소리에 의해 멸한다고 하면 어떤가. 천친의 답은 짧다. 둘은 함께 있을 수 없다(「二不俱故」). 의심과 확신, 괴로움과 즐거움, 탐욕과 성냄은 서로 어긋나 한 찰나에 함께 있지 못한다. 함께 있지 않은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멸하는가. 게다가 마지막 인식, 마지막 소리는 무엇이 멸하는가. 등불의 불꽃은 「머묾(住)」이 없어서 멸한다거나, 법과 비법(法 · 非法, 공덕과 죄업)의 힘으로 멸한다는 외도의 설도 같은 방식으로 물리친다. 없는 것은 원인이 될 수 없고, 법 · 비법은 찰나마다 순응하고 어긋남이 뒤바뀌어 생멸의 원인으로 일정하지 않다.
장행은 여기에 또 하나의 추론, 곧 「생인(生因)이 멸인(滅因)이 되어 버린다」는 논증을 더하니, 게송의 「生因應能滅」이 이것이다. 불이 장작을 태울 때 장작은 하품(下品)의 익음에서 중품, 중품에서 상품의 익음으로 변해 간다. 이때 중품을 생기게 한 바로 그 불이 하품을 멸한 원인이라면, 하나의 원인이 동시에 생인이자 멸인이 된다. 불의 경우는 불꽃마다 원인을 갈라 볼 여지라도 있지만, 재 · 눈 · 초 · 햇볕 · 물 · 흙이 장작 따위를 익게 하고 변하게 하는 경우에는 무엇이 생인이고 무엇이 멸인인지 가를 수조차 없다.
故無有因令諸法滅,法自然滅,是壞性故。自然滅故,纔生即滅。由纔生即滅,剎那滅義成。有剎那故定無行動,然於無間異方生中,如燒草焰行,起行增上慢。既由斯理行動定無,身表是形理得成立。
그러므로 모든 법을 멸하게 하는 원인은 없다. 법은 저절로 멸한다. 무너지는 것이 그 성품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멸하므로 생기자마자 곧 멸한다. 생기자마자 곧 멸하므로 찰나멸의 뜻이 이루어진다. 찰나가 있으므로 결코 움직임은 없다. 다만 틈 없이 다른 자리에 생기는 가운데, 풀을 태우며 불꽃이 가는 것처럼, 「간다」는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킬 뿐이다. 이 도리로 움직임이 결코 없으니, 몸의 표업이 형이라는 도리가 성립한다.
이 논증이 업품, 그것도 표업의 정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찰나멸은 핵심 개념 「무상」이 다룬 대로 불교의 무상관을 논리로 극한까지 밀고 간 이론이지만, 『구사론』에서 그것이 가장 길게 논증되는 자리는 근품의 유위사상(有爲四相)이 아니라 업품의 표업론이다. 몸짓 하나가 업이 되는 방식을 정하려다 보니, 세계 전체가 찰나마다 생멸한다는 형이상학을 끌어와야 했던 것이다.
중현의 수정 — 「객인(客因)을 기다리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유부의 중현이 행동설을 깨는 결론에는 동의하면서도 천친의 논증 방식에는 반대했다는 점이다. 천친의 「멸은 결과가 아니다」는 경량부의 전제, 곧 멸은 실재하는 법이 아니라 단지 없어짐일 뿐이라는 전제에 서 있다. 유부에게 멸은 생 · 주 · 이와 나란한 유위상(有爲相)이고, 유위상은 실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그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다. 다함이 곧 멸이니, 부처께서 다함과 멸을 유위의 상이라 설하셨다(彼釋非理,盡即是滅,佛說盡滅是有為相)」고 반박한다(권33, T29, 533c). 멸이 원인 없는 것이라면 무위처럼 상주하는 것이 되어, 법은 영원히 생기지 못할 것이라는 반론도 덧붙인다.
중현은 그 대신 원인을 둘로 나누어 같은 결론을 지킨다.
故我此中作如是釋:現有法滅,不待客因。既不待客因,纔生已即滅。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이렇게 해석한다. 현재 있는 법의 멸은 객인(客因)을 기다리지 않는다. 객인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생기자마자 곧 멸한다.
법을 멸하게 하는 것은 법 안에 함께 있는 「주인(主因)」, 곧 멸상(滅相)이고, 불이나 바람 같은 바깥의 「객인」은 멸에 관여하지 않는다. 장작은 주인에 의해 찰나마다 멸하고, 불과 만난 뒤로 다시 생기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하면 「멸에는 원인이 있다」는 유부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찰나멸과 행동설 비판은 그대로 살릴 수 있다. 같은 논증을 놓고 천친과 중현은 결론을 공유하고 전제를 다툰 셈이다. 업품의 대론이 늘 이런 모습이다 — 무엇을 인정하느냐보다 무엇을 실재로 인정하느냐가 갈림길이 된다.
행동설에 대한 비판은 유부와 경량부가 함께 선다. 둘의 차이는 「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다. 천친은 「멸은 결과가 아니므로 원인이 없다」고 하고, 중현은 「멸은 유위상이라는 주인으로 일어나고 바깥의 객인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한다.
형색은 실재하는가 — 경량부의 비판
행동설이 무너지자 「몸의 표업은 형이다」는 유부의 정설이 남는다. 그러나 천친은 곧바로 경량부의 목소리로 그 정설의 바탕을 친다.
然經部說:形非實有,謂顯色聚一面多生即於其中假立長色,待此長色於餘色聚一面少中假立短色,於四方面並多生中假立方色,於一切處遍滿生中假立圓色,所餘形色隨應當知。
그러나 경량부는 말한다. 형은 실재하지 않는다. 현색의 무더기가 한 방향으로 많이 생기면 그 가운데 「길다」는 색을 가립하고, 이 긴 색에 견주어 다른 색의 무더기가 한 방향으로 적게 생기면 「짧다」는 색을 가립하며, 네 방향으로 고르게 많이 생기면 「모나다」는 색을, 모든 곳에 두루 가득히 생기면 「둥글다」는 색을 가립한다. 나머지 형색도 이에 맞추어 알 것이다.
경량부에게 실재하는 색은 현색뿐이다. 형은 현색이 어떻게 늘어서 있느냐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불씨를 한 방향으로 빠르게 휘두르면 긴 선이 보이고, 빙빙 돌리면 둥근 고리가 보이지만, 그 선과 고리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경량부는 이 주장을 두 개의 논거로 받친다. 게송의 「應二根取故」와 「無別極微故」다.
첫째 논거 — 두 근으로 취해지게 된다
若謂實有別類形色,則應一色二根所取,謂於色聚長等差別,眼見身觸俱能了知,由此應成二根取過。理無色處二根所取。
만약 별도의 형색이 실재한다고 하면, 하나의 색이 두 근으로 취해지게 된다. 색의 무더기에서 길고 짧음 등의 차별을 눈으로 보아서도, 몸으로 만져서도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두 근으로 취해진다는 허물이 생긴다. 그러나 색처가 두 근으로 취해진다는 도리는 없다.
어둠 속에서 막대기를 쥐면 그것이 길다는 것을 안다. 길다는 것이 색처에 속한 실재라면, 그것을 눈만이 아니라 몸도 지각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아비달마의 기본 원칙은 색처는 눈만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은 색처의 실재가 아니다.
유부는 이렇게 피할 수 있다. 몸은 길이를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촉(觸)을 지각하고 그 촉과 함께 있는 형을 「떠올려 아는」 것이다. 불의 빛깔을 보고 불의 뜨거움을 떠올리고, 꽃향기를 맡고 꽃의 빛깔을 떠올리는 것과 같다(「如見火色便憶火煖,及嗅花香能念花色」). 천친은 이 변명도 막는다. 불빛과 열기, 꽃향기와 꽃빛은 반드시 함께 있으므로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를 떠올릴 수 있지만, 촉과 형은 반드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촉을 취하면 형을 떠올린다면 현색도 떠올려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촉을 취할 때 형을 알지 못해야 한다.
둘째 논거 — 별도의 극미가 없다
又諸所有有對實色,必應有實別類極微。然無極微名為長等,故即多物如是安布差別相中假立長等。
또 장애를 가진 모든 실재하는 색에는 반드시 별도 종류의 실재하는 극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긴 극미」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많은 것이 이렇게 배열된 차별의 모습에 「길다」 등을 가립할 뿐이다.
청색에는 청색의 극미가 있다. 그렇다면 「길다」에도 「긴 극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극미 하나가 길 수는 없다. 유부가 「형색의 극미가 이렇게 배열된 것을 길다고 한다」고 답하면, 천친은 그것은 자기 편의 주장일 뿐 양쪽이 함께 인정하는 사실이 아니라고 물리친다(「此唯朋黨,非極成故」). 형색에 별도의 극미가 있다는 것이 현색처럼 자명하다면 그것들이 모여 길게 늘어선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모여 늘어선 형색의 극미」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중현의 재반론 — 「길다」와 「희다」는 다르게 알려진다
중현은 이 두 논거를 하나하나 되받는다. 이근취 논거에 대해서는, 몸은 형을 직접 취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다시 세운다. 어둠 속에서 막대기를 쥐었을 때 몸이 아는 것은 단단함이나 차가움 같은 촉뿐이고, 「길다」는 것은 몸의 문으로 촉을 분별한 뒤 의식이 추론하여 아는 것이다. 형을 직접 취하는 것은 분별 없는 안식(眼識)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논점을 내놓는다.
若一方面唯顯多生,了相於中應無差別;既有長白二了相異,故於顯外別有形色。
만약 한 방향으로 현색만이 많이 생긴 것이라면, 그 가운데서 알아차리는 모습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길다」와 「희다」라는 두 앎의 모습이 다르니, 현색 밖에 별도로 형색이 있다.
같은 눈으로 같은 무더기를 보아도 「희다」고 아는 앎과 「길다」고 아는 앎은 그 모습(了相)이 다르다. 앎의 모습이 다르면 대상의 체도 다르다 — 이것은 유부 인식론의 기본 원칙이다. 단단함과 차가움은 똑같이 몸으로 알지만 다르게 알려지므로 다른 체이듯, 흼과 긺도 똑같이 눈으로 알지만 다르게 알려지므로 다른 체라는 것이다. 극미 논거에 대해서는, 색의 무더기를 쪼개고 쪼개 「모양의 앎」이 생기는 마지막 자리까지 가면 거기에 형색의 극미가 있어야 한다고 답한다. 허공의 광명처럼 빛깔만 있고 모양의 앎은 생기지 않는 색도 있으니, 형은 현색과 같지 않다.
경량부의 결론 — 표업의 체는 결국 사(思)이다
행동도 형도 무너졌다면 경량부는 무엇을 몸의 표업이라 하는가. 장행은 유부의 입을 빌려 정면으로 묻는다.
既已遮遣行動及形,汝等經部宗立何為身表?立形為身表,但假而非實。既執但用假為身表,復立何法為身業耶?若業依身立為身業,謂能種種運動身思,依身門行故名身業。
이미 움직임과 형을 다 물리쳤으니, 너희 경량부의 종의는 무엇을 몸의 표업으로 세우는가. 형을 몸의 표업으로 세우되, 가설일 뿐 실재는 아니다. 가설을 몸의 표업으로 삼는다면, 다시 어떤 법을 몸의 업으로 세우는가. 몸에 의지하는 업을 몸의 업이라 세운다면, 그것은 몸을 갖가지로 움직이게 하는 사(思)이다. 몸의 문으로 작용하므로 신업이라 한다.
여기서 「표업」과 「신업」이 갈라진다. 경량부도 몸의 표업이라는 이름은 쓴다. 그러나 그것은 가설된 모양일 뿐이다. 업으로서 실재하는 것은 그 모양을 만들어 내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사(思)이다. 말의 업도, 뜻의 업도 이에 맞추어 이름을 세운다. 그러면 경에서 말한 사업과 사이업은 어떻게 되는가. 경량부는 둘을 모두 사의 단계로 푼다. 먼저 「나는 이러저러한 일을 하리라」고 헤아리는 사가 사업이고, 헤아린 뒤에 실제로 일을 지어 몸을 움직이고 말을 내는 사가 사이업이다(「謂前加行起思惟思,我當應為如是如是所應作事名為思業。既思惟已起作事思,隨前所思作所作事,動身發語名思已業」). 유부에게 사이업은 사가 아닌 것, 곧 색법인 표업과 무표업이었다. 경량부는 사이업마저 사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유부는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반격을 한다. 그렇다면 표업은 결국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표업이 없다면, 표업을 계기로 일어나는 무표업도 없어야 한다. 그것은 「큰 허물(大過)」이다 — 계를 받은 사람이 계를 지키는 힘, 보시한 사람의 복이 자라는 일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경량부는 이 「큰 허물」을 피할 길이 있다고 답한다.
如是大過有理能遮,謂從如前所說二表,殊勝思故起思差別,名為無表。
이런 큰 허물은 이치로 막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두 표[업을 일으키는] 뛰어난 사로 말미암아 사의 차별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무표라 한다.
이 한 문장에 업품 전체의 갈림길이 들어 있다. 경량부에게 무표는 별도의 색법이 아니라 「사의 차별」 — 뛰어난 사가 마음의 흐름에 남긴 변화 — 이다. 무표색의 실재를 둘러싼 논쟁도, 경량부의 「상속전변차별」도 모두 이 문장에서 뻗어 나간다. 유부는 곧바로, 그렇다면 그 무표는 정려율의처럼 마음을 따라 함께 구르는 업(隨心轉業)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 경량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그 사의 차별은 지금 함께 구르는 사가 아니라, 앞서 살펴 결단한 사(審決思)와 몸을 움직이게 한 사(動發思)가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대비바사론』 권122는 표업과 무표업이 모두 실체가 없다고 한 「비유자(譬喻者)」의 주장을 소개하며, 『대비바사론』의 해당 논의가 바로 이 주장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고 밝힌다(「謂譬喻者。說表無表業無實體性」, T27, 634b). 비유자는 경량부의 선구로 여겨지는 논사들이다. 천친의 경량부적 비판은 『대비바사론』이 이미 반박했던 견해를 새로운 논증으로 되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말의 표업 — 말소리
게송의 마지막 구 「語表許言聲」은 말의 표업을 말소리로 정한다. 장행은 이것을 길게 논하지 않는다. 「비바사사는 말한다. 형이 실재이므로 몸의 표업은 형색을 체로 하고, 말의 표업의 체는 곧 말소리이다(毘婆沙師說:形是實故,身表業形色為體,語表業體謂即言聲)」(권13, T29, 68c). 말소리는 성처(聲處)에 속하는 실재하는 색법이므로, 몸의 경우와 같은 다툼이 생기지 않는다. 경량부도 말소리 자체가 실재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정리론』은 여기서도 상좌와 부딪친다. 상좌는 「세속의 사람(補特伽羅)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말의 표업이라 하고, 「승의에서 법에는 주재자가 없으므로 여러 실재 요소가 모인 것에 표업이라는 이름을 세운다」고 했다(『순정리론』 권33, T29, 532b). 하나의 실재가 혼자서 무엇을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현은 바로 그 논리를 돌려 상좌를 친다. 말소리 하나도 혼자서 귀의 인식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말소리는 실재한다. 마찬가지로 표업도 혼자서는 드러내지 못하지만 모여 연을 따라 생기는 실재로서 표업이다. 「모여야 작용한다」는 사실은 실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업을 선악으로 물들이는 방식 — 두 가지 등기
표업이 형색과 말소리라면, 표업 자체는 색법이다. 색법이 어떻게 선이 되고 악이 되는가. 그것을 일으킨 마음 때문이다. 업품은 이것을 「등기(等起)」의 이론으로 정리한다. 이 대목은 뒤에 이어지는 업의 선악 판정의 바탕이 되므로 여기서 짚어 둔다.
等起有二種,因及彼剎那,如次第應知,名轉名隨轉。見斷識唯轉,唯隨轉五識,修斷意通二,無漏異熟非。
등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因)과 그 찰나이니, 차례대로 「전(轉)」과 「수전(隨轉)」이라 한다. 견도에서 끊는 식은 전만 되고, 다섯 식은 수전만 되며, 수도에서 끊는 의식은 둘 다 되고, 무루와 이숙의 [마음은] 둘 다 아니다.
인등기(因等起)는 업을 짓기 전에 그 업을 이끌어 내는 마음이다. 「저 사람을 때리리라」고 마음먹는 것이 그것이고, 이것을 「전(轉)」, 곧 굴려 일으키는 마음이라 한다. 찰나등기(剎那等起)는 업이 실제로 일어나는 찰나에 업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마음이고, 이것을 「수전(隨轉)」, 곧 따라 구르는 마음이라 한다. 장행은 수전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앞의 인이 이끌어 냈더라도 따라 구르는 마음이 없다면 그 업은 죽은 사람의 업처럼 되어야 한다(「若無隨轉者如死業應無」).
그렇다면 업의 선악은 전과 수전 가운데 어느 쪽이 정하는가. 선한 마음으로 마음먹었는데 몸을 움직이는 그 찰나에 무기의 마음이 함께 있다면 그 업은 선인가 무기인가. 장행은 이 물음에 대해 「전」의 마음처럼 표업이 선 · 불선이 된다고 하면서, 다만 견도에서 끊는 마음이 「전」일 때는 수도에서 끊는 「전」의 마음이 사이에 끼어들기 때문에 욕계에 유부무기(有覆無記)의 표업이 생기지 않는다고 정리한다. 마음과 몸짓 사이에 「마음먹음」과 「함께 있음」이라는 두 겹의 관계를 둔 것은, 업의 선악을 표면의 몸짓이 아니라 그것을 이끄는 마음의 결로 판정하려는 아비달마의 정밀함을 보여 준다.
본송
說三無漏色,增非作等故。 此能造大種,異於表所依。欲後念無表,依過大種生。 無表記餘三,不善唯在欲,無表遍欲色,表唯有伺二,欲無有覆表,以無等起故。
[경에서] 세 가지 색과 무루의 색을 설했고, [복이] 늘어난다고 했으며, [스스로] 짓지 않아도 [업도가 이루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등등. 이 [무표를] 짓는 대종은 표업의 의지처인 [대종과] 다르다. 욕계의 뒤 찰나의 무표는 과거의 대종에 의지하여 생긴다. 무표는 [선 · 불선으로] 기별되고, 나머지 [표와 사는] 셋 [모두에 통한다]. 불선은 욕계에만 있다. 무표는 욕계와 색계에 두루 있고, 표는 심(尋) · 사(伺)가 있는 두 [지]에만 있다. 욕계에는 유부무기의 표가 없다. [그것을] 일으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술어 풀이
- 無表色무표색
- 드러나지 않는 색(avijñapti-rūpa). 표업을 계기로 일어나 그 사람의 몸 안에 이어지는, 보이지도 않고 장애도 없는 색법. 유부의 분류에서 색법 열한 가지 가운데 하나이며, 십이처 가운데 법처(法處)에 속한다.
- 法處所攝色법처소섭색
- 법처에 속하는 색. 다른 색들이 안 · 이 · 비 · 설 · 신의 다섯 근과 색 · 성 · 향 · 미 · 촉의 다섯 경, 곧 열 처에 속하는 것과 달리, 무표색만은 의식의 대상인 법처에 속한다.
- 無見無對무견무대
- 볼 수 없고 장애가 없음. 경에 나오는 세 가지 색 분류(유견유대 · 무견유대 · 무견무대) 가운데 셋째. 유부는 이것이 바로 무표색이라고 본다.
- 有依福業事유의복업사
- 의지할 바탕이 있는 복업의 일. 나그네 · 길손 · 병자 · 간병인에게 베풀고, 원림을 보시하고, 늘 걸식하는 이에게 음식을 주고, 때에 맞추어 베푸는 일곱 가지 보시(보광의 풀이). 이것을 행한 사람은 다니든 머물든 자든 깨든 복이 늘어난다고 경은 설한다.
- 執受집수
- 마음과 마음작용이 의지하여 감각이 깃든 것(upātta). 감관을 가진 살아 있는 몸이 그렇다. 무표는 변애(變礙)가 없으므로 집수가 아니다.
- 等流 · 長養등류 · 장양
- 소조색이 생기는 방식의 구분. 등류는 같은 종류의 앞의 원인에서 이어 생긴 것, 장양은 음식 · 수면 · 선정 등으로 길러진 것. 흩어진 마음의 무표는 등류, 선정에서 생긴 무표는 선정이 기른 대종에 의지한다.
- 相續轉變差別상속전변차별
- 경량부의 핵심 개념. 마음의 흐름이 이어지며(상속) 미세하게 바뀌어(전변) 특별한 상태에 이르는 것(차별). 경량부는 무표색 대신 이것으로 업의 지속을 설명한다. 업품 안의 유부 · 경량부 대론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다시 본다.
무표색은 왜 필요했는가
무표의 문제는 이렇게 생긴다. 어떤 사람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계를 받는 그 자리에서 그는 몸으로 절하고 입으로 서원했다. 그것이 표업이다. 그런데 그 의식이 끝나고 그가 잠들었을 때, 혹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여전히 비구인가. 여전히 계를 지닌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의 무엇이 그를 비구로 만드는가. 몸짓은 이미 사라졌고, 계를 받던 때의 마음도 이미 지나갔다.
또 다른 사람이 원림을 보시했다. 경은 그가 다니든 머물든 자든 깨든 그의 복이 늘 이어져 자란다고 한다. 그가 잠든 동안 복을 자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 번째 사람은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 살인을 저질렀다. 그 자신은 아무 몸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살생의 업도가 성립한다면 그 업은 무엇에 실려 있는가.
유부는 이 모든 물음에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 표업이 일어나는 찰나, 그 표업을 짓는 대종과는 다른 대종에 의해, 보이지도 않고 장애도 없는 색법이 생겨 그 사람의 몸 안에 이어진다. 이것이 무표색이다. 계를 받은 사람은 무표색을 「성취」하고 있으므로 잠들어도 비구이고, 보시한 사람의 무표는 이어지며 복을 자라게 하고, 사람을 시킨 사람에게는 상대가 죽는 찰나에 살생의 무표가 생긴다. 핵심 개념 「업」 2부가 한 문단으로 소개한 「계를 받으면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계를 지키는 힘」이 바로 이것이다.
표업의 정체를 다룬 대목 끝에서 비바사사의 정설은 무표를 이렇게 짧게 넘긴다. 「무표업의 모습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無表業相如前已說)」 — 분별계품(권1)에서, 무표색은 「어지러운 마음이나 마음이 없을 때 등에도 따라 흐르는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대종이 만든 성품(亂心無心等,隨流淨不淨,大種所造性)」이라 정의되었다(권1, T29, 3a). 장행은 이 말 바로 뒤에 경량부의 반론을 한 줄 붙인다. 「경부도 말한다. 이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앞서의 서원에 따라 다만 [악을] 짓지 않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經部亦說:此非實有,由先誓限唯不作故)」(권13, T29, 68c). 경량부에게 계란 어떤 실재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짓지 않음」이라는 상태에 붙인 이름이다. 게다가 무표는 과거의 대종에 의지한다는데 과거의 대종은 체가 없고, 무표에는 색의 모습(變礙)이 없다.
비바사사의 대답이 게송 「說三無漏色,增非作等故」이다. 보광은 이 한 구에 여덟 가지 증거가 들어 있다고 정리한다.
於此頌中總有八證,證有無表:一說三色證、二說無漏色證、三說福增長證、四非作成業證、五法處色證、六八道支證、七別解脫證、八戒為堤塘證。前四頌說,後四等收。
이 게송에는 모두 여덟 가지 증거가 있어 무표가 있음을 증명한다. 첫째 세 가지 색을 설한 증거, 둘째 무루색을 설한 증거, 셋째 복이 늘어남을 설한 증거, 넷째 짓지 않아도 업이 이루어지는 증거, 다섯째 법처의 색의 증거, 여섯째 팔도지의 증거, 일곱째 별해탈의 증거, 여덟째 계가 둑이 되는 증거이다. 앞의 넷은 게송에서 설했고, 뒤의 넷은 「등(等)」 자로 거두었다.
여덟 증거와 여덟 반론
『구사론』의 장행은 유부의 여덟 증거를 한꺼번에 늘어놓은 뒤(권13, T29, 69a), 「경부의 스승은 말한다. 이 증거는 여러 가지로 기이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다(經部師說:此證雖多種種希奇,然不應理)」로 시작해 하나하나 되받는다(T29, 69a~70a). 아래에서는 증거와 반론을 짝지어 읽는다.
첫째 — 세 가지 색
유부의 증거. 경은 색을 세 가지로 나누고, 이 셋이 모든 색을 거둔다고 했다. 첫째 「색이면서 볼 수 있고 장애가 있는 것」, 둘째 「색이면서 볼 수 없고 장애가 있는 것」, 셋째 「색이면서 볼 수 없고 장애가 없는 것」. 첫째는 색처, 둘째는 다섯 근과 성 · 향 · 미 · 촉이다. 그렇다면 셋째는 무엇인가. 「무표색을 빼고 어떤 법을 볼 수 없고 장애 없는 색이라 하겠는가(除無表色,何法名為無見無對及無漏色)」.
경량부의 반론. 유가사(瑜伽師), 곧 선정을 닦는 수행자들은 말한다. 정려를 닦을 때 선정의 힘으로 생기는 선정 경계의 색이 있다. 그것은 눈의 대상이 아니므로 볼 수 없고,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므로 장애가 없다. 셋째 색은 이것이다. 그것이 왜 색이냐고 묻는다면, 그 물음은 무표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상좌가 이 경문을 아예 다르게 외웠다고 전한다. 상좌의 송본에서는 첫째가 「무견유대」(촉처), 둘째가 「유견무대」(색처), 셋째가 「무견무대」(나머지 여덟 처)이고, 유견유대의 색은 없다. 중현은 어느 부파의 성전에도 그런 송본은 없다며 이를 「제멋대로 바른 경문을 바꾼 것(率自妄情,改換正文)」이라 비판한다(권35, T29, 540b). 경문의 송본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무표 논쟁이 단지 해석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둘째 — 무루의 색
유부의 증거. 경은 「과거 · 미래 · 현재의 모든 색에 대해 애착과 성냄을 일으키지 않는 것, 나아가 식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것을 무루법이라 한다」고 하여 무루의 색이 있음을 설했다. 무루의 색이란 성자가 성도에 들어 있을 때 갖추는 무루율의, 곧 무표색밖에 없다.
경량부의 반론. 유가사는 말한다. 선정의 힘으로 생긴 색 가운데 무루의 선정에 의지한 것을 무루라 한다. 또 다른 이들은 무학(아라한)의 몸의 색과 바깥의 색은 번뇌가 의지하는 바가 아니므로 무루라 불린다고 한다. 유부는 그렇다면 「유루법이란 모든 눈 …」이라는 경과 어긋나지 않느냐고 묻고, 경량부는 그것은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유루라 한 것이니, 한 법이 어떤 뜻에서는 유루, 다른 뜻에서는 무루라 불려도 서로 섞이는 허물은 없다고 답한다.
셋째 — 복이 늘어남
유부의 증거. 경은 이렇게 설한다. 깨끗한 믿음을 가진 선남자 선여인이 의지할 바탕이 있는 일곱 가지 복업사를 성취하면, 다니든 머물든 자든 깨든 늘 복업이 이어져 점점 늘어나고 이어 일어난다. 의지할 바탕 없는 복업사도 그러하다.
除無表業,若起餘心或無心時,依何法說福業增長?
무표업을 빼고, 다른 마음을 일으켰거나 마음이 없을 때에, 어떤 법에 의지하여 복업이 늘어난다고 설하겠는가.
이것이 유부의 가장 강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보시한 사람이 깊이 잠들어 마음이 없을 때도 복이 자란다면, 그 복은 마음이 아닌 무언가에 실려 있어야 한다.
경량부의 반론. 이 반론에서 경량부의 핵심 개념이 처음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先軌範師作如是釋:由法爾力福業增長,如如施主所施財物。如是如是受者受用,由諸受者受用施物,功德攝益有差別故。於後施主心雖異緣,而前緣施思所熏習,微細相續漸漸轉變差別而生,由此當來能感多果。
선대의 궤범사는 이렇게 풀었다. 법이 본래 그러한 힘(法爾力)으로 복업이 늘어난다. 시주가 베푼 재물을 받는 이들이 이러저러하게 쓰고, 받는 이들이 베푼 물건을 써서 그 공덕과 이익에 차별이 생기므로, 뒤에 시주의 마음이 다른 대상을 반연하더라도, 앞서 보시를 반연했던 사(思)가 훈습한 것이 미세하게 이어지며 점점 바뀌어 특별한 상태로 생겨난다. 이로써 미래에 많은 과보를 부를 수 있다.
보광은 이 「선대의 궤범사」를 경량부의 선대 궤범사라 하고, 「이 다섯 말(훈습 · 미세 · 상속 · 전변 · 차별)은 모두 종자의 다른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복이 자라는 것은 무표색이 이어져서가 아니라, 보시할 때의 사가 마음의 흐름에 남긴 종자가 받는 이들이 그 물건을 쓰며 얻는 공덕에 따라 점점 무르익어 가기 때문이다.
유부는 곧바로 반문할 것이다. 받는 이의 몸에서 일어난 공덕이 어떻게 다른 사람인 시주의 마음의 흐름을 바꾸는가. 경량부는 이 물음을 그대로 돌려준다. 「이 의문을 푸는 것은 무표와 같다(釋此疑難與無表同)」. 받는 이의 공덕이 어떻게 시주의 몸에 실재하는 무표색을 따로 생기게 하는가 하는 물음도 똑같이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의(無依)의 복업사, 곧 베풀 물건 없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공경하는 복에 대해서는 경량부가 오히려 유리하다. 그것은 그 대상을 반연하는 사를 거듭 익혀 꿈속에서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표를 주장하는 이들도 표업이 없는 무의의 복에 무표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넷째 — 스스로 짓지 않아도 업도가 이루어짐
유부의 증거. 스스로 짓지 않고 남을 시켜 짓게 했을 때, 무표업이 없다면 업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시키는 표업은 아직 그 일을 바로 짓지 못했으니 업도에 들지 않고, 시킨 일이 이루어진 뒤에도 시킨 사람의 표업의 성질은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以遣他表非彼業道攝,此業未能正作所作故、使作所作已、此性無異故」). 상대가 죽는 찰나에 시킨 사람에게 무엇인가 새로 생겨야 하고, 그것이 무표다.
경량부의 반론. 이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풀린다.
由本加行,使者依教所作成時,法爾能令教者微細相續轉變差別而生,由此當來能感多果。
본래의 가행으로 말미암아, 심부름하는 이가 가르친 대로 지은 일이 이루어질 때, 법이 본래 그러하여 가르친 이의 미세한 상속이 바뀌어 특별한 상태로 생기게 된다. 이로써 미래에 많은 과보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천친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 미세한 상속의 전변차별을 업도라 한다. 이것은 결과에 원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니, 신 · 어업이 이끌어 낸 결과이기 때문이다(應知即此微細相續轉變差別名為業道,此即於果假立因名,是身語業所引果故)」. 유부가 무표를 신 · 어의 업도라 부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량부는 상속의 변화를 업도라 부른다.
다섯째 — 법처의 색
유부의 증거. 경은 「비구들이여, 법이란 바깥의 처이다. 열한 처에 속하지 않는 법으로, 볼 수 없고 장애가 없다」고 하면서 「색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是十一處所不攝法無見無對,不言無色」). 법처에 색이 들어 있다는 뜻이고, 그 색은 무표색밖에 없다. 법처에 속하는 무표색을 보지 않는다면 이 경의 말은 모자라고 쓸모없게 된다.
경량부의 반론. 「색이 없다」고 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말한 선정 경계의 색 — 볼 수 없고 장애가 없으며 법처에 속하는 색 — 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 팔도지
유부의 증거. 무표가 없다면 선정에 든 성자에게는 여덟 도지가 다 갖추어질 수 없다. 선정 중에는 말도 몸짓도 없으므로 정어 · 정업 · 정명이 표업으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 정견 · 정사유 · 정정진 · 정념 · 정정을 닦아 원만하게 한다. 정어 · 정업 · 정명은 이미 그 전에 청정하게 얻었다」는 경도, 그 전에 얻은 세간의 이염도(離染道)를 두고 한 말이니 어긋나지 않는다.
경량부의 반론. 경량부는 먼저 되묻는다. 성도에 들어 있을 때 바른 말을 내고 바른 행위를 하며 옷을 구하는 일이 있는가. 유부는 없다고 인정하고, 대신 그때 그런 종류의 무루의 무표를 얻으므로 선정에서 나온 뒤 그 힘으로 세 가지 바른 것을 일으키고 세 가지 삿된 것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답한다. 원인인 무표에 결과의 이름을 붙여 정어 · 정업 · 정명이라 한다는 것이다. 경량부는 바로 그 논리를 돌려준다. 그렇다면 무표가 없어도, 성도에 있을 때 「그러한 의요(意樂)와 의지처(依止)」를 얻어 선정에서 나온 뒤 그 힘으로 세 바른 것을 일으킨다고 하면 되지 않는가. 원인에 결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팔도지는 그대로 세울 수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선정 중에 성도의 힘으로 삿된 말 따위를 「결코 짓지 않음」을 얻는데, 이 「결코 짓지 않음」을 도지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이름에 실재하는 별도의 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덟 세간법」 가운데 「얻지 못함」이 별도의 실체가 아닌 것과 같다.
일곱째 — 별해탈율의
유부의 증거. 무표색을 부정하면 별해탈율의도 없어야 한다. 계를 받은 뒤 계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대상을 반연하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그를 비구라 부를 수 없다.
경량부의 반론. 별해탈율의도 같은 방식으로 풀린다. 사(思)의 서원의 힘으로 먼저 기약을 세워 몸과 말의 악업을 확실히 막는 것을 별해탈율의라 한다. 다른 마음을 일으켰을 때 율의가 없어진다는 비판은 맞지 않다. 훈습의 힘으로, 허물을 지으려 할 때 계가 떠올라 곧 멈추기 때문이다(「由熏習力欲起過時憶便止故」).
여덟째 — 계는 둑이다
유부의 증거. 경은 살생 등을 떠나는 계를 둑(隄塘)의 계라 한다. 오래 이어지며 계를 범하는 허물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체가 없는 것을 둑이라 부를 수는 없다.
경량부의 반론. 먼저 서원하여 악을 짓지 않기로 정하고, 뒤에 거듭 떠올려 부끄러움이 일어나 스스로 억제하여 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둑이라는 뜻은 마음이 받아 지니는 데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반문으로 끝맺는다.
若由無表能遮犯戒,應無失念而破戒者。
만약 무표가 계를 범하는 것을 막는다면, 정념을 잃어 계를 깨뜨리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것이다.
무표색이 실재하는 둑이라면, 둑은 사람이 잊든 잊지 않든 물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계를 깨는 사람은 대개 계를 잊은 순간에 깬다. 그렇다면 막는 것은 무표가 아니라 기억과 부끄러움, 곧 마음이다.
① 세 가지 색
② 무루색
③ 복의 증장
④ 짓지 않음
⑤ 법처의 색
⑥ 팔도지
⑦ 별해탈
⑧ 둑
「이 많은 논쟁은 여기서 그친다」
여덟 증거를 다 되받은 뒤, 천친은 놀라운 문장으로 이 대론을 맺는다.
且止此等眾多諍論。毘婆沙師說有實物名無表色,是我所宗。
이런 많은 논쟁은 여기서 그친다. 비바사사는 무표색이라는 실물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종지로 삼는 것이다.
방금 여덟 증거를 하나하나 무너뜨린 저자가, 「그래도 비바사사의 설을 종지로 삼는다」고 선언하고 다음 게송으로 넘어간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구사론』은 유부 아비달마의 강요서라는 틀을 지키며 쓰였다. 게송(本頌)은 유부의 정설을 세우고, 장행은 그 정설을 해설하면서 때로 경량부의 이견을 덧붙인다. 「이것이 우리가 종지로 삼는 것」은 이 책의 틀이 유부의 강요서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말이다. 동시에, 논쟁이 무표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운 채 끝났다는 것은 어느 독자의 눈에도 분명하다. 중현이 『순정리론』에서 천친을 「경주(經主)」라 부르며 하나하나 반박한 것도 이 이중성과 떼어 놓을 수 없다.
무표 논쟁의 핵심은 「업의 지속을 무엇이 실어 나르는가」이다. 유부는 표업과 별도의 대종이 만드는 실재하는 색, 경량부는 사(思)가 마음의 흐름에 남긴 미세한 변화로 답한다. 천친은 경량부의 논리로 여덟 증거를 다 되받고서도 「비바사사의 설이 우리 종지」라고 맺는다.
무표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 대종과 계 · 지
무표를 실재하는 색으로 세웠다면, 색은 모두 대종(大種)이 만드는 것(所造色)이므로 무표를 만드는 대종이 무엇인지 정해야 한다. 게송은 「이 [무표를] 짓는 대종은 표업의 의지처인 [대종과] 다르다」고 한다. 하나의 대종 무더기에서 거친 결과(표)와 미세한 결과(무표)가 함께 나온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從一和合有細麁果,不應理故」).
그리고 시간의 문제가 있다. 계를 받는 첫 찰나에는 표와 무표가 함께 생기고, 무표는 그 찰나의 대종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둘째 찰나부터 계가 이어지는 동안, 매 찰나의 무표는 무엇이 만드는가.
唯欲界繫初剎那後,所有無表從過大生,此為所依無表得起。現身大種但能為依,為轉隨轉因隨其次第,如輪行於地,手地為依。
오직 욕계에 매인 [무표만이], 첫 찰나 뒤의 모든 무표가 과거의 대종에서 생긴다. 이것을 의지처로 하여 무표가 일어날 수 있다. 지금 몸의 대종은 의지처가 될 뿐이다. [과거의 대종과 현재의 대종은] 차례대로 굴리는 원인과 따라 구르게 하는 원인이 되니, 바퀴가 땅 위를 굴러갈 때 손과 땅이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다.

바퀴를 굴리는 것은 처음 민 손이고, 바퀴가 구르는 바탕은 땅이다. 계를 받은 뒤의 무표는 이미 지나간 첫 찰나의 대종이 「굴린」 것이고, 지금 몸의 대종은 그것이 구르는 바탕일 뿐이다. 보광은 이것을 다시 풀어, 과거의 대종이 생 · 의 · 립 · 지 · 양의 다섯 원인이 되는 「친한 의지처」이고 현재 몸의 대종은 「먼 의지처」라 한다. 경량부가 「무표는 과거의 대종에 의지한다는데 과거의 대종은 체가 없다」고 비판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유부에게 과거는 실재하므로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경량부에게 과거는 이미 없으므로 없는 것이 지금의 것을 만든다는 말이 된다. 무표 논쟁이 삼세실유 논쟁과 맞닿는 지점이다.
무표는 선과 불선뿐이다
無表唯通善不善性,無有無記。所以者何?以無記心勢力微劣,不能引發強業令生,可因滅時果仍續起。
무표는 오직 선과 불선의 성질에만 통하고 무기는 없다. 왜 그런가. 무기의 마음은 힘이 약하여, 원인이 멸한 때에도 결과가 여전히 이어 일어날 만한 강한 업을 이끌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표는 원인(표업과 그때의 마음)이 사라진 뒤에도 이어지는 업이다. 그런 힘은 강한 마음만이 남길 수 있다. 무기의 마음은 약해서, 표업은 일으킬 수 있어도 무표를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무표는 선이거나 불선이다. 반면 표업과 사(思)는 선 · 불선 · 무기의 셋에 다 통한다. 불선은 욕계에만 있다. 위의 계에서는 불선의 뿌리와 무참 · 무괴를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
무표와 표업은 어느 세계에 있는가
무표는 욕계와 색계에 두루 있고 무색계에는 없다. 장행은 그 이유를 여럿 든다. 무색계에는 대종이 없으므로 대종이 만드는 무표도 없다. 무색계의 선정에 든 사람은 색을 등지고 들어가며 그 선정에는 색의 생각을 누르는 힘이 있으므로, 그 선정에서 색이 생길 수 없다. 반론이 있다. 그렇다면 욕계 · 색계에 태어난 이가 무색정에 들 때에도, 무루의 마음을 일으키면 무루의 무표가 있듯이 율의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장행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무루의 [무표]는 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색계에 [유루의] 무표가 있다면 대종 없이 생기는 무표가 되어 버리고, 유루의 무표가 다른 계 · 지의 대종에 의지한다고 할 수도 없다.
비바사사는 또 계가 악계를 다스리려고 일어나는데 악계는 욕계에만 있고, 무색계는 욕계로부터 의지처 · 행상 · 소연 · 대치의 네 가지로 멀다고 한다(「無色於欲具四種遠」, 권13, T29, 70c). 표업은 더 좁아서, 표업을 일으키는 심 · 사가 있는 욕계와 초정려에만 있다.
마지막 구 「욕계에는 유부무기의 표가 없다」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붙어 있다. 유부무기(有覆無記), 곧 번뇌에 덮였으나 선악은 아닌 표업은 욕계에는 없고 색계 초정려의 범천 세계에만 있다. 그 근거로 장행은 대범천의 이야기를 든다. 대범천이 자기 무리 가운데서 마승(馬勝) 비구의 물음을 피하려고 거짓으로 꾸며 자기를 추켜세운 일이 있다고 전한다(「曾聞大梵有誑諂言,謂自眾中為避馬勝所徵問故矯自歎等」, 권13, T29, 71a). 욕계에 유부무기의 표업이 없는 까닭은 그것을 일으킬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은 수도에서 끊는 마음이어야 하는데(견도에서 끊는 번뇌는 안으로 향해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욕계에는 수도에서 끊는 유부무기의 번뇌가 없다.
본송
無表三律儀,不律儀非二。 律儀別解脫,靜慮及道生。 初律儀八種,實體唯有四,形轉名異故,各別不相違。 受離五八十,一切所應離,立近事近住,勤策及苾芻。
무표는 셋이니, 율의와 불율의와 둘 다 아닌 것이다. 율의는 별해탈과 정려[에서 생긴 것]과 도에서 생긴 것이다. 첫째 율의는 여덟 가지이나 실체는 넷뿐이다. 형(形)이 바뀌면 이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넷은] 각각 따로이며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다섯 · 여덟 · 열 가지와, 떠나야 할 모든 것을 떠나기로 받아서, 근사 · 근주 · 근책과 필추를 세운다.
술어 풀이
- 律儀율의
- 단속(saṃvara). 「악계의 상속을 막고 멸할 수 있으므로 율의라 한다(能遮能滅惡戒相續故名律儀)」. 계를 받거나 선정 · 성도를 얻을 때 생기는 선의 무표.
- 不律儀불율의
- 단속하지 않음(asaṃvara). 도살자 · 사냥꾼처럼 평생 악업을 짓기로 한 사람에게 생기는 불선의 무표. 악계(惡戒)라고도 한다.
- 處中처중
- 「가운데 머묾」. 율의도 불율의도 아닌 상태(非律儀非不律儀). 대부분의 재가자가 여기에 있다. 이 상태에서 짓는 강한 선 · 악업도 무표를 남길 수 있다.
- 別解脫律儀별해탈율의
- 하나하나의 악을 따로따로 벗어나는 단속(prātimokṣa-saṃvara). 남에게서 계를 받아 얻는 욕계의 계. 여덟 무리가 있다.
- 靜慮律儀정려율의
- 정려(색계의 선정)를 얻을 때 저절로 얻는 단속(dhyāna-saṃvara). 색계의 계라 한다.
- 道生律儀도생율의
- 무루의 성도에서 생기는 단속, 곧 무루율의(anāsrava-saṃvara). 성자만이 지닌다.
- 苾芻 · 勤策 · 近事 · 近住필추 · 근책 · 근사 · 근주
- 비구(bhikṣu), 사미(śrāmaṇera), 우바새(upāsaka), 근주(upavāsa, 팔재계를 받는 이). 현장 역의 술어다. 근책녀는 사미니, 근사녀는 우바이, 정학(正學)은 식차마나(śikṣamāṇā)이다.
- 阿世耶아세야
- 의요(āśaya), 마음의 지향. 불율의를 얻고 버리는 문제에서 결정적인 개념으로 쓰인다.
무표의 세 갈래와 율의의 세 갈래
무표의 실재가 다투어졌다면, 이제 물을 것은 무표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사람의 삶에 들어와 있는가를 다룬다. 게송은 무표를 셋으로 나눈다. 율의, 불율의, 그리고 둘 다 아닌 것(처중). 율의는 다시 셋이다.
律儀差別,略有三種:一別解脫律儀,謂欲纏戒;二靜慮生律儀,謂色纏戒;三道生律儀,謂無漏戒。
율의의 차별은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 별해탈율의이니 욕계에 매인 계이다. 둘째 정려에서 생긴 율의이니 색계에 매인 계이다. 셋째 도에서 생긴 율의이니 무루의 계이다.
세 율의는 얻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별해탈율의는 남에게서 계를 받아 얻는다(「由他教」). 정려율의는 색계의 정려 — 근본정과 근분정 — 의 마음을 얻을 때 그 마음과 함께 저절로 얻는다. 무루율의는 무루의 마음을 얻을 때 함께 얻는다. 무루의 마음이 있는 지는 여섯이다. 미지정, 중간정, 네 근본정려. 정려율의와 무루율의는 마음을 따라 구르므로(隨心轉), 그 마음에서 나오면 현재에는 없다. 별해탈율의는 다른 마음일 때도, 마음이 없을 때도 늘 이어진다(「異心無心亦恒轉故」, 권14, T29, 73b). 계를 받은 비구가 잠들어서도 비구인 것은 이 때문이다.
정려율의와 무루율의 가운데 일부는 「단율의(斷律儀)」라고도 한다. 미지정의 아홉 무간도와 함께 생기는 정려 · 무루율의가 그것이다. 이 율의는 욕계의 악계와 그것을 일으키는 번뇌를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려율의이면서 단율의가 아닌 것, 단율의이면서 정려율의인 것 등 네 경우가 나온다(권14, T29, 73b).
장행은 여기서 「뜻의 율의(意律儀)」와 「근의 율의(根律儀)」를 다룬다. 경은 「몸의 율의는 좋도다, 말의 율의도 좋도다, 뜻의 율의도 좋도다, 모든 율의가 좋도다」라고 하고, 또 「안근의 율의를 잘 지키라」고 한다. 이 두 율의는 무표색이 아니다. 「정지와 정념이 합한 것을 의근율의라 한다(正知正念合,名意根律儀)」 — 둘 다 지혜(정지)와 염(정념)을 체로 한다(권14, T29, 73c). 율의라는 말이 모두 무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이다.
별해탈의 여덟 무리, 실체는 넷
別解脫律儀,相差別有八:一苾芻律儀、二苾芻尼律儀、三正學律儀、四勤策律儀、五勤策女律儀、六近事律儀、七近事女律儀、八近住律儀。
별해탈율의는 모습의 차별로 여덟이 있다. 첫째 필추율의, 둘째 필추니율의, 셋째 정학율의, 넷째 근책율의, 다섯째 근책녀율의, 여섯째 근사율의, 일곱째 근사녀율의, 여덟째 근주율의이다.
여덟이라 했지만 장행은 곧바로 「이름은 여덟이나 실체는 넷뿐」이라고 한다. 필추율의 · 근책율의 · 근사율의 · 근주율의. 필추율의를 떠나 따로 필추니율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근책율의를 떠나 따로 정학 · 근책녀율의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근사율의를 떠나 따로 근사녀율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아는가. 형(形), 곧 남녀의 근(根)이 바뀌는 경우를 보면 된다. 남녀의 근이 바뀌면 율의의 이름은 필추에서 필추니로, 필추니에서 필추로 바뀌지만, 그때 앞서 얻은 율의를 버리거나 아직 얻지 못한 율의를 새로 얻는 인연은 없다(「非轉根位有捨先得得先未得律儀因緣」, 권14, T29, 72c). 몸이 바뀌어도 계는 그대로이니, 계의 실체는 성별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넷의 차이는 무엇을 떠나기로 하느냐에 있다. 게송 「受離五八十,一切所應離」가 그것이다. 다섯을 떠나기로 받으면 근사, 여덟이면 근주, 열이면 근책, 떠나야 할 모든 몸과 말의 업을 떠나기로 받으면 필추다.
다섯 · 여덟 · 열의 내용도 장행이 정확히 나열한다(권14, T29, 72c~73a). 근사의 다섯은 살생 · 불여취 · 욕사행 · 허광어 · 음제주(飲諸酒). 근주의 여덟은 살생 · 불여취 · 비범행 · 허광어 · 음제주 · 도식향만무가관청(塗飾香鬘舞歌觀聽) · 면좌고광엄려상좌(眠坐高廣嚴麗床座) · 식비시식(食非時食). 근책의 열은 근주의 여덟 가운데 「도식향만무가관청」을 둘(향만으로 꾸미는 것 / 춤추고 노래하고 구경하는 것)로 나누고, 「금은 등의 보배를 받아 지니는 것」을 열째로 더한 것이다. 근사의 셋째가 「욕사행」이고 근주의 셋째가 「비범행」이라는 차이에 주목하자. 근사는 삿된 음행만 떠나고, 근주는 하루 동안이나마 모든 음행을 떠난다.
이름과 시간 — 별해탈과 업도, 하루와 평생
별해탈율의에는 여러 이름이 있다. 시라(尸羅), 묘행(妙行), 업(業), 율의(律儀). 그런데 「별해탈」과 「업도」라는 이름은 계를 받는 첫 찰나의 표와 무표에만 쓴다.
依初別捨義,立別解脫名。即於爾時所作究竟,依業暢義立業道名,故初剎那名別解脫,亦得名曰別解律儀,亦得名為根本業道。從第二念乃至未捨,不名別解脫,名別解律儀;不名業道,名為後起。
처음에 따로따로 버린다는 뜻에 의지하여 별해탈이라는 이름을 세운다. 바로 그때 지을 바가 끝나므로, 업이 펼쳐진다는 뜻에 의지하여 업도라는 이름을 세운다. 그러므로 첫 찰나를 별해탈이라 하고, 별해탈율의라고도 하며, 근본업도라고도 한다. 둘째 찰나부터 버리기 전까지는 별해탈이라 하지 않고 별해탈율의라 하며, 업도라 하지 않고 후기(後起)라 한다.
계를 받는 그 찰나는 악을 「따로따로 버리는」 순간이고, 동시에 계를 받는 일이 완성되는 근본업도의 순간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그 결단의 지속이므로 이름이 바뀐다. 십업도에서 가행 · 근본 · 후기를 나누는 틀이 여기 선의 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계를 지니는 기간은 둘로 정해져 있다. 일곱 무리의 계는 평생(盡壽), 근주의 계는 하루 낮밤(一晝夜)이다. 왜 이 둘뿐인가. 계의 시간의 끝은 목숨의 끝과 낮밤의 끝 둘밖에 없고, 반달 따위는 낮밤을 거듭한 것일 뿐이다. 목숨이 끝난 뒤에도 계가 이어지기를 기약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의지하는 몸이 달라지고, 다른 몸에는 가행도 기억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닷새, 열흘 동안 근주계를 한꺼번에 받을 수는 없는가. 이 물음 앞에서 천친은 유부와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다. 부처가 하루 낮밤 뒤에는 이치상 근주율의가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아서 하루로 정한 것인가, 아니면 다스리기 어려운 근기의 사람에게 우선 하루의 계를 주신 것인가. 하루를 넘겨 계가 생기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천친의 생각이다(「過此戒生,不違理故」). 그러나 비바사사는 「하루 낮밤을 넘겨 따로 근주율의를 받아 얻는다는 경은 일찍이 없었으므로, 우리 종은 이 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한다(권14, T29, 74c).
근주율의 — 하루 동안의 출가
近住於晨旦,下座從師受,隨教說具支,離嚴飾晝夜。
근주[율의]는 새벽에, 낮은 자리에서 스승을 따라 받는다. 가르침을 따라 [뒤에서] 말하고, 지분을 다 갖추며, 꾸밈을 떠나고, 낮과 밤 [동안 지닌다].
근주율의를 받는 법은 이렇다. 해가 뜰 때 받는다. 이 계는 하루 낮밤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늘 「매달 8일 등에 이 계를 받으리라」고 기약해 둔 사람은 아침에 장애가 있으면 공양을 마친 뒤에 받아도 된다. 스승 앞에서 낮은 자리에 웅크리거나 무릎 꿇고 몸을 굽혀 합장한다. 공경하지 않으면 율의가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스승에게서 받고 스스로 받을 수는 없다. 뒤에 계를 범할 인연을 만나도 스승을 부끄러워하여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스승의 말을 따라 뒤에서 말하고, 앞서거나 함께 말하지 않는다. 여덟 지분을 다 받아야 근주가 된다. 하나라도 빠지면 근주가 아니다. 그렇게 받지 않으면 묘행은 생기지만 율의는 얻지 못한다.
여덟 지분은 왜 꼭 여덟인가.
戒不逸禁支,四一三如次,為防諸性罪,失念及憍逸。
계의 지분 · 방일하지 않는 지분 · 금약의 지분이 차례대로 넷 · 하나 · 셋이니, 모든 성죄(性罪)와 실념(失念)과 교일(憍逸)을 막기 위함이다.
앞의 넷(살생 · 불여취 · 비범행 · 허광어를 떠남)은 시라의 지분으로, 그 자체로 죄인 성죄를 막는다. 다음 하나(음주를 떠남)는 불방일의 지분으로, 술에 취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잊는 실념을 막는다. 뒤의 셋(꾸밈과 가무, 높고 넓은 자리, 때 아닌 때의 식사를 떠남)은 금약(禁約)의 지분으로, 교만과 들뜸을 막아 싫어하여 떠나는 마음을 따르게 한다. 특히 정해진 때에만 먹는 사람은 늘 먹던 때를 막으므로 스스로 근주율의를 받았음을 떠올리고 세간을 깊이 싫어하게 된다.
근사는 다섯 계를 다 지녀야 하는가 — 「일분 근사」 논쟁
분별업품의 율의론에서 가장 생생한 대론이 이 대목이다. 물음은 단순하다. 삼귀의만 받으면 근사(우바새)가 되는가, 다섯 계를 받아야 되는가. 경의 근거는 『대명경(大名經)』이다.
如契經說:佛告大名:諸有在家白衣男子男根成就,歸佛法僧起殷淨心,發誠諦語自稱我是鄔波索迦,願尊憶持慈悲護念,齊是名曰鄔波索迦。
경에 이렇게 설한다. 부처께서 대명에게 이르셨다. 집에 있는 흰옷 입은 남자로서 남근을 갖춘 이가 불 · 법 · 승에 귀의하고 간절하고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한 말로 「저는 우바새입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기억하여 지니시고 자비로 보살펴 주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여기까지를 우바새라 한다.
경은 귀의와 자칭만 말하고 다섯 계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국의 여러 스승(外國諸師)」은 삼귀의만으로 근사가 된다고 했다. 보광은 이 외국 스승들을 카슈미르 바깥 건타라국의 경량부 스승들이라 하고, 그들의 종의에서는 삼귀의로 「삼귀의 우바새」가 되고 뒤에 계의 내용을 들은 뒤 따로 계를 얻으면 「오계 우바새」가 되며, 다섯 가운데 받는 만큼 계를 얻는다고 풀이한다. 반면 「카슈미르의 여러 논사」는 근사율의를 떠나서는 근사가 아니라고 했다. 경과 어긋나지 않는가.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이미 계가 생겼다고 답한다.
起殷淨心發誠諦語,自稱我是鄔波索迦,願尊憶持慈悲護念。爾時即發近事律儀。
간절하고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한 말로 「저는 우바새입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기억하여 지니시고 자비로 보살펴 주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을 때, 그때 곧 근사율의가 생긴다.
비구가 구족계를 받은 뒤에 무거운 학처를 따로 일러 주듯, 근사도 이미 다섯 계를 얻은 뒤에 지켜야 할 학처를 알게 하려고 다섯 계의 모습을 일러 준다는 것이다. 다른 경에 「나는 지금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생명을 버린다(捨生)」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살생 등을 버린다」를 줄여 말한 것이니 그때 이미 다섯 계를 얻었다고 본다.
그러자 반론이 나온다. 이것이 게송 「若皆具律儀,何言一分等?」이다. 근사가 모두 다섯 계를 갖춘다면, 왜 세존은 근사에 네 종류 — 일분을 배울 수 있는 이, 소분, 다분, 만분을 배울 수 있는 이 — 가 있다고 하셨는가. 카슈미르 논사들의 답은 「지닐 수 있음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謂約能持說」). 받은 것은 다섯 모두이지만, 지킬 수 있는 것이 하나뿐인 사람을 「일분을 배울 수 있는 이」라 했다는 것이다. 「배울 수 있다(能學)」고 했지 「일분을 받는다」고 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천친은 여기서 길게, 그리고 날카롭게 반박한다(권14, T29, 76a~76b). 첫째, 「스스로 우바새라 일컫는 말로 다섯 계가 생긴다」는 경은 없다. 『대명경』만이 근사의 모습을 말하는데, 거기에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생명을 버린다」는 말이 없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생명을 버리고 깨끗함에 귀의한다」는 다른 경의 말은, 진리를 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정법을 아끼는 마음을 보인 것이지 근사의 모습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이런 분명하지 않은 글에 기대어 그때 이미 다섯 계가 생겼다고 누가 믿겠는가. 둘째, 지키고 범하는 것을 기준으로 「일분을 배운다」고 했다면 그것은 물을 필요도 대답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근사율의가 다섯 지분을 반드시 갖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 가운데 하나를 지키고 나머지를 못 지키는 것을 일분이라 하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경에서 대명이 「몇 종류의 우바새가 학처를 배울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부처가 넷이 있다고 답하고, 다시 「일분을 배울 수 있는 이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근사율의를 얼마나 받느냐를 아직 몰랐기 때문이다.
유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버틴다. 율의가 빠져도 근사가 된다면, 필추나 근책도 율의가 빠져도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근사도 마찬가지다. 천친은 같은 논리를 뒤집는다. 근사에서 필추까지 받는 율의의 지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의 힘으로 그렇게 시설되었기 때문이라면, 「율의가 빠져도 근사라 하되 필추 등은 아니다」는 것도 부처의 가르침의 힘으로 시설되었다고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논쟁은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는 율의가 빠지고서 근사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보고로 끝난다. 천친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두 입장을 나란히 둔다.
이 대론에는 실천의 무게가 실려 있다. 삼귀의만으로 불자가 된다면 불교는 계를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도 문을 연다. 다섯 계를 갖추어야 한다면 근사라는 이름은 더 엄격해진다. 율의가 무표라는 실재로 정의되는 유부의 체계에서는, 「몇 개의 무표를 지니느냐」가 신분을 정하므로 「일분 근사」를 인정하기 어렵다. 경량부처럼 율의를 「서원의 사」로 보면, 받는 서원의 범위만큼 율의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율의를 상하품으로 나누는 것도 이와 맞물린다. 율의는 받을 때의 마음에 따라 하 · 중 · 상품이 되므로, 아라한이 하품 율의를 지니고 범부가 상품 율의를 지니는 일도 있다(「諸阿羅漢或有成就下品律儀,然諸異生或成上品」, 권14, T29, 76b).
무엇에 귀의하는가
삼귀의가 율의의 문이므로 장행은 여기서 귀의의 대상을 정한다. 부처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를 이루는 무학의 법(진지 · 무생지와 그것에 따르는 것)에 귀의하는 것이고, 승에 귀의한다는 것은 승을 이루는 유학 · 무학의 법에 귀의하는 것이며,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열반, 곧 택멸에 귀의하는 것이다(권14, T29, 76b~76c). 귀의의 체는 말의 표업이고, 귀의의 뜻은 「구제」이다. 이 대목, 그리고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내는 일이 무간업이 되는 까닭과 귀의 대상의 관계는 핵심 개념 「삼신」이 유부의 불신론으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거기에 잇는 것으로 그친다. 다만 하나만 덧붙이면, 천친은 비바사사가 「무학법만이 부처」라고 했다는 이해를 바로잡는다. 본론(『발지론』)을 찾아보면 「무학법이 곧 부처」라는 말은 없고 「무학법이 부처를 이룬다」고 했을 뿐이며, 부처의 체에 의지하는 몸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재가의 계는 그렇게 정해졌는가
근사의 다섯 계를 두고 장행은 세 가지 물음을 차례로 다룬다(권14, T29, 77a~77c). 셋째 물음, 곧 차죄 가운데 왜 음주만 떠나게 했는가에 대한 답은 「나머지 율의를 지키기 위해서(為護餘律儀)」이다. 이를 두고 율사들은 음주를 성죄라 하고 대법사들은 성죄가 아니라 방일의 의지처라 하여 갈렸다. 앞의 두 물음은 이렇다.
첫째, 다른 율의는 모든 음행(非梵行)을 떠나게 하는데 왜 근사에게는 삿된 음행(欲邪行)만 떠나게 했는가. 게송은 「삿된 음행은 가장 비난받고, 떠나기 쉬우며, 「짓지 않음」을 얻기 때문이다(邪行最可訶,易離得不作)」라고 답한다. 삿된 음행은 남의 아내를 범하고 악취를 부르므로 세상이 가장 비난한다. 재가자는 애욕에 탐착하므로 모든 음행을 떠나는 것은 오래 지니기 어렵다. 또 성자는 삿된 음행에 대해 반드시 「짓지 않는 율의(不作律儀)」를 얻는다 — 다음 생에 태어난 성자도 삿된 음행은 하지 않는다. 이어 미묘한 물음이 따른다. 근사계를 받은 뒤에 아내를 맞으면, 계를 받을 때 그 아내에 대해서도 율의를 얻은 것인가. 얻었다면 뒤에 아내와 함께하는 것은 계를 범하는 것 아닌가. 게송의 답은 「율의는 서원한 대로 얻을 뿐, 상속 전체에 대해 얻는 것이 아니다(得律儀如誓,非總於相續)」이다. 그는 처음부터 삿된 음행을 떠나기로 서원했지, 모든 유정에 대해 음행을 떠나기로 서원하지 않았다.
둘째, 왜 말의 계 가운데 망어만 떠나게 하고 이간어 · 악구 · 기어는 넣지 않았는가. 같은 세 가지 이유에 더해 고유한 이유가 있다. 「망어를 열어 두면 모든 학처를 넘어서게 된다(以開虛誑語,便越諸學處)」. 계를 범하고서 추궁받을 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계가 무너진다. 망어를 막는 것은 계 전체를 지키는 열쇠다.
율의는 누구에게서 얻는가
율의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 얻는다는 것인가. 게송은 둘을 구분한다. 「욕계의 율의(별해탈)는 모든 것, 두 가지, 현재에서 얻고, 정려 · 무루율의는 근본에서, 늘 [삼세에서] 얻는다(從一切二現,得欲界律儀,從根本恒時,得靜慮無漏)」(권15, T29, 77c).
별해탈율의는 근본업도뿐 아니라 가행과 후기에서도 얻고, 유정과 비정(非情) 두 가지에서, 성죄와 차죄 두 가지에서 얻으며, 현재 세의 온 · 처 · 계에서 얻는다. 과거와 미래는 유정이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정려 · 무루율의는 근본업도에서만 얻으며 가행 · 후기나 차죄에서는 얻지 않지만, 과거 · 현재 · 미래의 온 · 처 · 계 모두에서 얻는다.
더 근본적인 원칙은 이것이다. 율의는 반드시 모든 유정에게서 얻는다.
無有不遍於諸有情得律儀者,以於一切諸有情所住善意樂方得律儀,異則不然,以惡意樂不全息故。
모든 유정에게 두루 하지 않고서 율의를 얻는 이는 없다. 모든 유정에 대해 선한 의요에 머물러야 율의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얻지 못하니, 악한 의요가 완전히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를 한정하여 계를 받으면 율의를 얻지 못한다. 유정의 한정(「나는 이런 유정에 대해서만 살생을 떠나리라」), 지분의 한정(「이 지분만 지키리라」), 장소의 한정(「이 지방에 있을 때만」), 시간의 한정(「한 달 동안만」), 조건의 한정(「싸움 같은 경우를 빼고」). 이렇게 받으면 율의와 비슷한 묘행만 얻는다(권15, T29, 78b).
불율의 — 도살자의 목록
율의가 모든 유정에게서 얻는 것이라면, 불율의도 그러한가. 그렇다. 불율의는 반드시 모든 유정과 모든 지분에서 얻는다. 율의와 달리, 지분을 일부만 갖추거나 대상을 일부로 한정한 불율의는 없다(「無少分境及不具支不律儀者」). 그러면 누가 불율의의 사람인가.
此中何名不律儀者,謂諸屠羊屠鷄屠猪捕鳥捕魚、獵獸劫盜魁膾典獄、縛龍煮狗及罝弶等。等言類顯王典刑罰及餘聽察斷罪等人,但恒有害心。名不律儀者,由彼一類住不律儀。
여기서 무엇을 불율의라 하는가. 양을 잡는 이, 닭을 잡는 이, 돼지를 잡는 이, 새를 잡는 이, 물고기를 잡는 이, 짐승을 사냥하는 이, 도적, 사형 집행인(魁膾), 옥을 맡은 이, 용을 묶는 이, 개를 삶는 이, 그물과 덫을 놓는 이 등이다. 「등」이라는 말은 형벌을 맡은 왕과, 그 밖에 듣고 살피며 죄를 판결하는 사람들처럼, 늘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이를 함께 드러낸다. 그들을 불율의라 하는 것은 그 무리가 불율의에 머물기 때문이다.
보광은 이 목록을 「크게 헤아려 모두 열둘」이라 하고, 여기서 「왕」은 이치에 맞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악왕을 가리키며, 「개를 삶는 이(煮狗)」는 서방에서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반드시 늘 개를 삶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풀이한다. 중요한 것은 직업 자체가 아니라 「늘 해치려는 마음(恒有害心)」이다. 보광의 풀이대로, 그 자리에 있어도 자비심이 있어 늘 해치려는 뜻이 없으면 불율의가 아니다. 양을 잡는 이란 「살아가기 위해 평생 늘 양을 해치기로 기약한 사람」이다.
여기서 다시 날카로운 반론이 나온다. 율의는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려는 뛰어난 마음으로 받으니 모든 유정에게서 얻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러나 양을 잡는 사람이 자기 부모를 해칠 마음이 있는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도 죽이지 않을 사람이 있지 않은가. 성자는 양이 될 리가 없는데 성자에 대해서도 불율의를 얻는가. 또 양을 잡는 사람이 평생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아내에게 만족하고, 벙어리라서 말의 네 허물이 없다면, 어떻게 일곱 지분을 갖춘 불율의를 얻는가.
유부의 답은 「선을 해치는 의요가 두루 하기 때문(遍損善阿世耶故)」이다. 가까운 이도 양으로 태어나면 해칠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벙어리도 몸짓으로 말하려는 뜻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답은 반론을 다 막지 못한다. 처음에 두세 가지 학처를 받은 뒤 살생만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 일곱 지분의 악계가 다 생긴다고 할 수 있는가. 비바사사는 「지분이 빠지거나 일부만인 불율의의 사람은 결코 없다」고 고수한다. 경량부는 다르게 말한다.
經部諸師作如是說:隨所期限支具不具及全分一分皆得不律儀。律儀亦然,唯除八戒。
경부의 여러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기약한 바에 따라 지분을 갖추든 갖추지 않든, 전부이든 일부이든 모두 불율의를 얻는다. 율의도 그러하다. 다만 여덟 계(근주율의)는 예외이다.
경량부에게 율의와 불율의는 무표의 수가 아니라 기약(期限)의 범위이므로, 기약한 만큼 생긴다. 근주율의만 예외인 것은, 하루라는 짧은 기한 때문에 지분과 대상을 다 갖추지 않으면 선한 마음이 약해 계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광은 푼다. 경량부는 또, 한 몸에서 선계와 악계는 성질이 서로 어긋나 서로를 막는다고 덧붙인다(「由隨彼量善惡尸羅性相相違互相遮故」).
불율의를 얻는 방식은 둘이다(권15, T29, 79a). 불율의의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처음 살생 등의 가행을 행할 때 얻고, 다른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나는 이런 일을 하여 재물을 구해 살아가리라」고 처음 기약할 때 얻는다. 율의와 달리, 스승 앞에서 「하루 동안 불율의를 받겠다」고 하는 일은 없다. 지혜로운 이가 꾸짖는 업이기 때문이다(「惡戒無晝夜,謂非如善受」). 불율의는 평생을 기약하는 마음, 곧 「선을 끝까지 무너뜨리는 의요(畢竟壞善意樂)」에서 생긴다. 경량부는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한다. 불율의도 실물이 아니라, 악을 지으려는 불선의 의요가 이어져 버려지지 않는 것을 불율의라 할 뿐이다. 그래서 뒤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 그 의요를 버리지 않았으므로 불율의를 성취한다고 한다.
처중(處中)의 무표, 곧 율의도 불율의도 아닌 사람의 무표는 세 가지 원인으로 생긴다(「得所餘無表,由田受重行」). 첫째 밭(田) — 복전에 원림 등을 보시하면 처음 보시할 때 선의 무표가 생긴다. 둘째 받음(受) — 「부처께 예배하기 전에는 먼저 먹지 않으리라」, 「재일마다 음식을 보시하리라」 같은 서원. 셋째 무거운 행(重行) — 은근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선이나 악을 행함.
- 불율의의 집에 태어나 처음 가행을 함
- 다른 집에 태어나 처음 기약함
- 「惡戒無晝夜」하루 동안의 불율의는 없다
율의를 잃는 조건
捨別解調伏,由故捨命終,及二形俱生,斷善根夜盡。有說由犯重,餘說由法滅,迦濕彌羅說,犯二如負財。
별해탈의 조복(율의)을 버리는 것은, 일부러 버림과 목숨이 다함과 두 형이 함께 생김과 선근을 끊음과 밤이 다함으로 말미암는다. 어떤 이는 무거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는다 하고, 다른 이는 법이 멸함으로 말미암는다 하며, 카슈미르는 둘[을 지닌다]고 하니, 재물을 빚진 것과 같다.
근주를 뺀 일곱 무리의 별해탈율의는 네 연으로 버린다. ① 버리려는 뜻으로, 알아듣는 사람을 마주하여 학처를 버린다는 표업을 일으킴. ② 중동분(衆同分)을 버림, 곧 죽음. ③ 남녀의 두 형이 함께 생김. ④ 율의의 원인인 선근이 끊어짐. 근주율의는 여기에 ⑤ 밤이 다함이 더해진다. 그래서 합하여 다섯 연이다. 왜 이 다섯인가. 받은 것과 반대되는 표업이 생기기 때문, 의지처를 버리기 때문, 의지처가 변하기 때문, 원인이 끊어지기 때문, 기한이 지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가지 이설이 있다. 「어떤 부파」는 네 가지 극히 무거운 죄(바라이) 가운데 하나라도 범하면 근책 · 필추율의를 버린다고 했다. 보광은 이것을 경량부의 설이라 한다. 「다른 부파」는 정법이 멸하면 모든 학처와 결계 · 갈마가 그치므로 별해탈율의를 버린다고 했다. 보광은 이것을 법밀부(法密部, 담무덕부)의 설이라 한다.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는 근본죄를 범해도 출가계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한쪽을 범했다고 모든 율의를 다 버려야 할 이유가 없고, 다른 죄를 범했을 때 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계를 지닌 이」이면서 「계를 범한 이」라는 두 이름을 갖는다. 재산 있는 사람이 남에게 빚을 지면 「부자」이면서 「빚진 이」인 것과 같다. 범한 것을 드러내 참회하면 다시 계를 갖춘 이라 하니, 빚을 갚으면 그냥 부자라 하는 것과 같다.
천친은 이 견해를 정면으로 공격한다(권15, T29, 79b~79c). 그렇다면 왜 부처는 네 무거운 죄를 범한 이를 「비구가 아니다, 사문이 아니다, 석가의 아들이 아니다, 비구의 체를 깨뜨리고 사문의 성품을 해쳤다」고 하셨는가. 비바사사는 이것이 「승의의 비구」를 두고 은밀한 뜻으로 하신 말이라고 한다. 천친은 이것을 「흉악하다(兇勃)」고 한다. 세존이 분명한 뜻으로 하신 말씀을 다른 뜻으로 풀어 분명하지 않게 만들어, 번뇌 많은 이에게 무거운 죄를 범할 구실을 준다는 것이다. 율 자체가 네 비구 — 이름뿐인 비구, 스스로 일컫는 비구, 걸식하는 비구, 미혹을 깨뜨린 비구 — 를 말하는데, 여기서 「비구가 아니다」라는 것은 백사갈마로 구족계를 받은 비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부처 자신이 비유를 세우셨다.
大師此中立如是喻,如多羅樹若被斷頭必不復能生長廣大,諸苾芻等犯重亦然。
큰 스승께서 여기에 이런 비유를 세우셨다. 다라수가 머리를 잘리면 다시는 자라 커질 수 없듯이, 비구들이 무거운 죄를 범하는 것도 그러하다.
무거운 죄를 범하는 것은 비구의 근본행을 넘어서는 것이고, 극히 맹렬한 무참 · 무괴와 함께하는 것이다. 행의 뿌리가 끊어졌으니 모든 율의를 두루 버린다고 보아야 한다. 부처는 무거운 죄를 범한 이에게 승가의 음식을 한 덩이도 먹지 못하게 하고 승원의 땅을 한 발꿈치도 밟지 못하게 하셨으며, 「벼 사이의 가라지를 빨리 뽑아라, 썩은 대들보를 빨리 골라 버려라, 씨앗 가운데 쭉정이를 빨리 키질하라」고 하셨다. 비바사사는 「사문에는 넷이 있다 — 승도 · 시도 · 명도 · 오도 사문」이라는 경을 들어 범한 이도 「도를 더럽히는 사문」이라 한다고 버티지만, 천친은 그것은 불에 탄 나무, 그림 속 앵무새, 마른 못, 썩은 씨앗, 불의 고리, 죽은 사람처럼 「남은 모습」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렇게 맺는다. 그런 사람에게 여전히 비구의 성품이 있다면, 그런 무리의 비구에게 스스로 귀의하고 예배하라.
정법이 멸한 때에 관해서는 천친도 결론을 낸다. 정법이 멸하면 결계와 갈마가 없으므로 아직 율의를 얻지 못한 이가 새로 얻을 길은 없지만, 이미 얻은 이가 그것을 버릴 까닭도 없다.
- ① 일부러 버림(故捨)
- ② 목숨이 다함
- ③ 두 형이 함께 생김
- ④ 선근이 끊어짐
- 위의 넷 + ⑤ 밤이 다함
- 무거운 죄를 범하면 버린다(보광: 경량부)
- 법이 멸하면 버린다(보광: 법밀부)
- 카슈미르: 「犯二如負財」 범해도 버리지 않는다, 빚진 부자처럼
- 지(地)가 바뀜
- 물러남
- 과를 얻음
- 근을 단련함
- 물러남
- 죽음
- 율의를 얻음
- 두 형이 생김
- 받은 마음
- 세력
- 작업
- 사물
- 수명
- 선근이 끊어짐
불율의는 세 연으로 버린다. 죽음, 계를 얻음(별해탈율의를 받거나 정려율의를 얻음), 두 형이 함께 생김이다. 불율의의 사람이 「짓지 않으리라」는 사를 일으켜 칼과 그물을 버려도, 선한 율의를 받지 않으면 불율의는 버려지지 않는다. 병의 원인을 피해도 좋은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것과 같다.
율의는 누구에게 있는가
惡戒人除北,二黃門二形,律儀亦在天,唯人具三種。
악계는 사람에게 있으되 북[구로주]과 두 가지 황문과 두 형을 가진 이는 뺀다. 율의는 하늘에도 있으며, 사람만이 세 가지를 갖춘다.
불율의는 사람에게만, 그것도 북구로주를 뺀 세 대주에만 있고, 그 가운데서도 선체(扇搋)와 반택가(半擇迦) 두 가지 황문과 두 형을 가진 이에게는 없다. 율의도 같은 범위의 사람에게 있되 하늘에도 있다. 왜 황문 등에게는 율의가 없는가. 경에서 우바새의 조건으로 「남근을 갖춘 이」를 말했고, 율에서 「이런 무리의 사람은 내보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치로는, 두 의지처에서 일어난 번뇌가 한 상속에서 함께 강하고, 바르게 살펴 가리는 힘이 없으며, 극히 무거운 참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율의는 왜 없는가. 악에 대해서도 마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선한 율의가 있는 곳에만 악한 율의도 있기 때문이다. 북구로주 사람에게는 받음도 선정도 없고, 악을 지으려는 뛰어난 의요도 없으므로 선계도 악계도 없다. 장행은 비유를 든다. 짠 소금밭에는 좋은 싹도 잡초도 자라지 않는다(「如醎鹵田,故不能生善戒惡戒」).
율의를 언제까지 「성취」하는가도 정해져 있다(권14, T29, 73c~74a). 별해탈율의는 버리기 전까지 늘 현재의 것을 성취하고 첫 찰나 뒤로는 과거의 것도 성취하지만, 흩어진 마음의 무표이므로 미래의 것은 성취하지 못한다. 정려율의와 무루율의는 과거와 미래의 것을 늘 성취하되(성자의 무루율의는 첫 찰나에 미래만), 현재의 것은 그 정려와 성도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성취한다.
본송
勝義善解脫,自性慚愧根,相應彼相應,等起色業等,翻此名不善,勝無記二常。 依黑黑等殊,所說四種業,惡色欲界善,能盡彼無漏,應知如次第,名黑白俱非。
승의의 선은 해탈이요, 자성의 선은 참 · 괴와 [세 가지 선]근이요, 상응의 선은 그것과 상응하는 것이요, 등기의 선은 색업 등이다. 이것을 뒤집으면 불선이라 하고, 승의의 무기는 두 가지 상주하는 것이다. 흑흑 등의 차별에 의지하여 설한 네 가지 업은, 악업과 색계의 [선업]과 욕계의 선업과 그것을 다할 수 있는 무루[업]이니, 차례대로 흑 · 백 · [흑백] 함께 · 둘 다 아님이라 이름함을 알아야 한다.
술어 풀이
- 勝義善승의선
- 궁극의 의미에서의 선(paramārtha-kuśala). 진실한 해탈, 곧 열반. 병 없음처럼 가장 안온하다.
- 自性善자성선
- 그 자체로 선인 것(svabhāva-kuśala). 참(慚) · 괴(愧)와 무탐 · 무진 · 무치의 세 선근. 좋은 약처럼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고 선이다.
- 相應善상응선
- 상응함으로써 선인 것. 자성선과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작용. 좋은 약을 탄 물과 같다.
- 等起善등기선
- 일으켜짐으로써 선인 것. 자성선과 상응선이 일으킨 신 · 어업과 심불상응행. 좋은 약즙을 먹고 나온 젖과 같다.
- 不動業부동업
- 흔들리지 않는 업(āniñjya-karman). 색계 · 무색계의 선업. 그 과보가 다른 지(地)로 옮겨 가 익지 않는다.
- 順受業순수업
- 어떤 느낌(受)을 받게 하는 업. 순락수 · 순고수 · 순불고불락수의 세 가지.
- 黑業 · 白業흑업 · 백업
- 검은 업(kṛṣṇa)과 흰 업(śukla). 염오하여 불쾌한 과보를 부르는 업이 흑, 악이 섞이지 않아 쾌한 과보를 부르는 업이 백.
- 牟尼모니
- 적묵(寂默, muni). 번뇌의 말이 영원히 고요해진 이. 『구사론』은 무학의 신 · 어업과 무학의 마음을 삼모니라 한다.
업을 선하게 하는 네 가지 방식
앞에서 무표는 선 · 불선뿐이고 표업과 사(思)는 선 · 불선 · 무기에 다 통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법이 선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장행은 등기만이 선악을 정하는 것은 아니라며, 네 가지 원인으로 선 등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승의 · 자성 · 상응 · 등기이다.
勝義善者,謂真解脫,以涅槃中最極安隱、眾苦永寂猶如無病。自性善者,謂慚愧根,以有為中唯慚與愧及無貪等三種善根,不待相應及餘等起,體性是善猶如良藥。相應善者,謂彼相應,以心心所要與慚愧善根相應方成善性,若不與彼慚等相應,善性不成,如雜藥水。等起善者,謂身語業不相應行,以是自性及相應善所等起故,如良藥汁所引生乳。
승의의 선은 진실한 해탈이다. 열반 가운데서는 가장 안온하고 뭇 괴로움이 영원히 고요하니, 병이 없는 것과 같다. 자성의 선은 참 · 괴와 [세 선]근이다. 유위법 가운데 참과 괴와 무탐 등 세 선근만이, 상응이나 다른 등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체성이 선이니, 좋은 약과 같다. 상응의 선은 그것과 상응하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작용은 참 · 괴 · 선근과 상응해야 선의 성질을 이루고, 상응하지 않으면 선의 성질을 이루지 못하니, 약을 섞은 물과 같다. 등기의 선은 신 · 어업과 불상응행이다. 자성의 선과 상응의 선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니, 좋은 약즙을 먹고 나온 젖과 같다.
이 네 단계의 비유는 잘 짜여 있다. 병 없음(열반)은 약이 필요 없는 상태 자체이다. 좋은 약(참 · 괴 · 세 선근)은 그 자체로 약이다. 약을 섞은 물(상응하는 마음)은 약이 섞여야 약효가 있다. 약즙을 먹은 소의 젖(신 · 어업)은 약이 이끌어 낸 결과로서 약효를 지닌다. 몸짓과 말이 선한 것은 그것을 일으킨 마음 덕분이라는 등기의 원리가, 가장 바깥의 네 번째 자리에 놓인다.
불선은 이것을 뒤집는다. 승의의 불선은 생사의 법 전체이다. 생사의 모든 법은 괴로움을 자성으로 하여 극히 안온하지 못하니, 고질병과 같다. 자성의 불선은 무참 · 무괴와 탐 · 진 · 치의 세 불선근으로 독약과 같고, 상응의 불선은 그것과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작용으로 독을 섞은 물과 같으며, 등기의 불선은 그것이 일으킨 신 · 어업과 불상응행으로 독약즙을 먹고 나온 젖과 같다. 승의의 무기는 두 가지 무위, 곧 허공과 비택멸이다.
경이 설한 업의 여러 짝
권15 후반에서 권16 초반까지, 천친은 「여러 업의 성질과 모습이 같지 않음을 분별한 김에, 경에서 표방한 여러 업을 풀이한다(因辯諸業性相不同,當釋經中所摽諸業)」고 하고, 경에 나오는 업의 분류를 하나씩 정의해 간다(권15, T29, 80c). 업을 보는 잣대가 그만큼 여럿이었다는 것이다.
선 · 불선 · 무기 — 안온함의 기준
첫째는 선 · 불선 · 무기의 세 업이다. 앞에서는 네 가지 원인으로 선을 정했는데, 여기서는 업의 결과를 기준으로 다시 정의한다. 「안온한 업을 선이라 하니, 사랑스러운 이숙과 열반을 얻을 수 있어 잠시 또는 영원히 뭇 괴로움을 건지기 때문이다(謂安隱業說名為善,能得可愛異熟涅槃,暫永二時濟眾苦故)」. 불안온한 업은 불선이다. 둘 다 아닌 업은 선 · 불선으로 기별할 수 없으므로 무기라 한다. 「잠시」는 사랑스러운 이숙으로 잠시 괴로움을 건지는 것이고, 「영원히」는 열반으로 영원히 건지는 것이다.
복 · 비복 · 부동 — 과보가 옮겨 가는가
欲界善業說名為福,招可愛果益有情故。諸不善業說名非福,招非愛果損有情故。上二界善說名不動。
욕계의 선업을 복이라 한다. 사랑스러운 과보를 불러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선업을 비복이라 한다.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를 불러 유정을 해치기 때문이다. 위의 두 계의 선을 부동이라 한다.
반론이 있다. 세존은 아래 세 정려를 「움직임이 있다(有動)」고 하지 않으셨는가. 심 · 사 등이 있어 재앙이 아직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정려의 선업을 부동이라 하는가. 답은, 부동이라는 이름이 선정의 상태가 아니라 업과 과보의 관계를 기준으로 붙었다는 것이다. 욕계에서는 어떤 업이 본래 하늘에서 익어야 할 것이라도, 다른 연의 힘에 이끌려 사람 가운데서 익는 일이 있다. 과보가 다른 취(趣)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러나 색계 · 무색계의 어느 지의 업은 다른 지로 옮겨 가 익는 일이 없다. 업과 과보의 자리가 정해져 있어 흔들리지 않으므로 부동이라 한다(「業果處定立不動名」, 권15, T29, 81a).
순락수 · 순고수 · 순불고불락수 — 어떤 느낌을 받게 하는가
順樂苦非二,善至三順樂,諸不善順苦,上善順非二。
즐거움 · 괴로움 · 둘 다 아님을 따르는 [업이 있으니], 선은 [제]3[정려]까지가 즐거움을 따르고, 모든 불선은 괴로움을 따르며, 위의 선은 둘 다 아님을 따른다.
욕계에서 제3정려까지의 선업은 즐거운 느낌을 받게 하는 순락수업이다. 즐거운 느낌은 거기까지만 있기 때문이다. 불선업은 모두 괴로운 느낌을 받게 하는 순고수업이다. 제4정려 이상의 선업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게 하는 순불고불락수업이다. 이 업들은 느낌만이 아니라 그 느낌의 바탕(資糧)도 부른다.
여기에 이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아래 지에도 순불고불락수업이 있다고 한다. 중간정의 업이 이숙을 부르기 때문이다. 장행은 이 설을 본론(『발지론』)으로 지지한다. 「몸이 아니라 마음의 느낌만을 이숙으로 받게 하는 업이 있는가. 있다, 심(尋)이 없는 선업이다」, 그리고 「세 업이 앞뒤 없이 한꺼번에 이숙을 받는 일이 있는가. 있다, 순락수업의 색, 순고수업의 심 · 심소, 순불고불락수업의 불상응행이다」. 세 업이 한꺼번에 익는 것은 욕계뿐이므로, 아래 지에도 순불고불락수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이되 약한 것」이다.
정업과 부정업 — 다른 페이지에서
세 순수업에는 각각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이 있다. 정업과 부정업의 네 경우, 정업을 이루는 기준, 과보를 받는 세 때는 핵심 개념 「업」에서 정리했다. 여기서는 그 페이지에 없는 것, 곧 반드시 이번 생에 과보를 맺는 업의 조건만 원문으로 덧붙인다.
由田意殊勝,及定招異熟,得永離地業,定招現法果。
밭이 뛰어나거나 뜻이 뛰어남으로 말미암은 [업], 그리고 이숙을 부르는 것이 정해졌으되 [그 지를] 영원히 떠남을 얻은 지의 업은 반드시 현법의 과보를 부른다.
밭이 뛰어난 예로 장행은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든다. 어떤 비구가 승가 가운데서 여자의 말투를 흉내 냈더니 그 생에 여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뜻이 뛰어난 예로는, 어떤 황문이 거세될 소들을 구해 주었더니 그 생에 장부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전해 오는 이야기는 하나가 아니다」라고 장행은 덧붙인다. 또 어떤 지에서 태어나 그 지의 염오를 영원히 떠난 사람은, 그 지에서 지은 선 · 불선업 가운데 이숙은 정해졌으나 때는 정해지지 않은 업의 과보를 반드시 이번 생에 받는다. 다시 그 지에 태어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밭에서 지은 업이 곧바로 과보를 받는가. 게송은 「부처와 부처를 우두머리로 한 승가, 그리고 멸진정 · 무쟁정 · 자정 · 견도 · 수도에서 나온 이에게 해치거나 이롭게 한 업은 곧바로 받는다(於佛上首僧,及滅定無諍,慈見修道出,損益業即受)」고 한다(권15, T29, 82b). 멸진정에서 막 나온 이는 열반에 들었다 돌아온 것과 같고, 무쟁정과 자정에서 나온 이는 한량없는 유정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뜻이 따라붙은 몸으로 나오며, 견도와 수도에서 나온 이는 끊어야 할 미혹을 영원히 끊어 깨끗한 몸이 이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곡 · 예 · 탁의 세 업
說曲穢濁業,依諂瞋貪生。
곡 · 예 · 탁의 업이라 설한 것은, 아첨 · 성냄 · 탐욕에 의지하여 생긴 것이다.
신 · 어 · 의의 세 업에 각각 굽음 · 더러움 · 흐림이 있다. 아첨에서 생긴 업은 아첨이 굽은 것과 같은 부류이므로 곡업, 성냄에서 생긴 업은 성냄이 더러운 것과 같은 부류이므로 예업, 탐욕에서 생긴 업은 탐욕이 흐린 것과 같은 부류이므로 탁업이다. 이 분류는 업을 그것을 일으킨 번뇌의 「결」로 다시 본 것이다. 같은 거짓말이라도 아첨에서 나왔으면 굽고, 성냄에서 나왔으면 더럽고, 탐욕에서 나왔으면 흐리다.
흑흑 · 백백 · 흑백흑백 · 비흑비백 — 네 가지 업
경은 네 가지 업을 설한다. 검고 검은 이숙을 받는 업, 희고 흰 이숙을 받는 업, 검고 희며 검고 흰 이숙을 받는 업, 검지도 희지도 않아 이숙이 없으며 업을 다할 수 있는 업. 장행은 게송의 순서대로 풀이한다.
諸不善業一向名黑,染污性故,異熟亦黑,不可意故。色界善業一向名白,不雜惡故,異熟亦白,是可意故。
모든 불선업은 한결같이 흑이라 한다. 염오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숙도 흑이니,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색계의 선업은 한결같이 백이라 한다. 악이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숙도 백이니,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왜 무색계의 선은 말하지 않는가. 전해 오기로는, 중유와 생유의 두 이숙이 있고 신 · 어 · 의 세 업을 갖춘 곳에 대해서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무색계에는 중유도 몸 · 말의 업도 없다). 그러나 경 가운데 무색계의 선도 백업이라 말한 곳이 있다고 장행은 덧붙인다.
욕계의 선업은 흑백이다. 악이 섞여 있기 때문이고, 그 이숙도 흑백이다.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행은 곧바로 이 이름이 자성이 아니라 상속을 기준으로 붙은 것이라고 못 박는다(「此黑白名依相續立,非據自性」). 하나의 업, 하나의 이숙이 검으면서 동시에 흴 수는 없다.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욕계에서 선업을 짓는 사람의 상속에는 불선업이 함께 있고, 그 선업의 과보는 악업의 과보와 섞여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악업의 과보에도 선업의 과보가 섞이니 악업도 「백흑」이라 해야 하지 않는가. 답은 비대칭이다. 불선업의 과보가 반드시 선업의 과보와 섞이는 것은 아니지만(지옥처럼), 욕계 선업의 과보는 반드시 악업의 과보와 섞인다. 욕계에서는 악이 선보다 강하기 때문이다(「以欲界中惡勝善故」).
무루업은 비흑비백이다. 염오가 아니므로 흑이 아니고, 흰 이숙을 부르지 않으므로 백도 아니다. 그런데 『대공경』에서 부처는 「모든 무학법은 순선 · 순백이며 한결같이 죄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 「백이 아니다」라는 말은 은밀한 뜻으로 한 말이다. 무루업은 이숙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백이 아니고, 그 자체는 가장 흰 것이다.
그러면 무루업이 다른 세 업을 다 끊는가. 게송은 이를 정밀하게 정한다.
四法忍離欲,前八無間俱,十二無漏思,唯盡純黑業,離欲四靜慮,第九無間思,一盡雜純黑,四令純白盡。
네 법인과, 욕[계의 염오]를 떠날 때 앞의 여덟 무간[도]와 함께하는 열두 무루의 사는 오직 순흑업만 다한다. 욕[계]와 네 정려[의 염오]를 떠날 때 아홉째 무간[도]의 사 가운데, 하나는 [흑백이] 섞인 업과 순흑업을 다하고, 넷은 순백업을 다하게 한다.
견도의 네 법지인(法智忍)과 수도에서 욕계의 염오를 떠날 때 앞 여덟 무간도의 사, 합하여 열둘은 순흑업만 끊는다. 욕계의 염오를 떠나는 아홉째 무간도의 사 하나는 흑백업과 순흑업을 함께 끊는다. 이때 욕계의 선을 모두 끊고 아홉째 품의 불선업도 끊기 때문이다. 네 정려의 염오를 하나하나 떠날 때 아홉째 무간도의 사 넷은 순백업을 끊는다.
- 견도의 네 법인 + 욕계 이염의 앞 여덟 무간도 = 열둘:순흑만
- 욕계 이염 아홉째 무간도 하나:흑백과 순흑
- 네 정려 이염 아홉째 무간도 넷:순백
삼모니와 삼청정
無學身語業,即意三牟尼,三清淨應知,即諸三妙行。
무학의 신 · 어업과 바로 그 뜻이 세 모니이다. 세 청정은 바로 세 묘행임을 알아야 한다.
경은 세 가지 모니(적묵)와 세 가지 청정을 설한다. 신모니 · 어모니는 무학의 신 · 어업이다. 그런데 의모니는 무학의 「의업」이 아니라 무학의 「뜻(마음)」 자체이다. 왜인가. 승의의 모니는 마음만을 체로 하며, 신 · 어업으로 그것을 미루어 알 뿐이다. 또 신 · 어업은 떠남(遠離)을 체로 하지만 의업은 그렇지 않다. 의업에는 무표가 없기 때문이다. 모니는 떠남의 뜻으로 세우므로, 몸과 말에서는 떠남 그 자체인 업을 모니라 하고, 뜻에서는 몸과 말의 업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마음 자체를 모니라 한다. 모니가 무학에만 있는 것은 아라한이야말로 참된 모니이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의 말이 영원히 고요해졌으므로.
세 청정은 신 · 어 · 의의 세 묘행이다. 잠시 또는 영원히 모든 악행과 번뇌의 때를 떠났기 때문이다. 장행은 이 둘을 설한 까닭을 짧게 덧붙인다. 「삿된 모니와 삿된 청정을 헤아리는 유정의 생각을 그치게 하려고 설했다(為息有情計邪牟尼,邪清淨故)」. 침묵의 고행을 하는 외도의 모니나 강물에 몸을 씻어 깨끗해진다는 청정에 맞서, 불교가 말하는 고요함과 깨끗함이 무엇인지를 업의 언어로 정의한 것이다.
삼악행과 삼묘행 — 탐 · 진 · 사견은 의업인가
세 악행은 신 · 어 · 의의 모든 불선업이다. 그런데 의악행은 의업(思)만이 아니라 의업이 아닌 탐 · 진 · 사견도 포함한다. 탐 등은 사와 별도의 체를 가진 법이기 때문이다(권16, T29, 84a~84b).
여기서 비유자(譬喻者)가 이견을 낸다. 탐 · 진 · 사견은 바로 의업이다. 『사경(思經)』에서 이 셋을 의업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업과 번뇌가 하나의 체가 되지 않는가. 비유자는 번뇌가 곧 의업이라고 인정하는 것에 무슨 허물이 있느냐고 답한다. 비바사사는 그렇게 인정하면 여러 이치와 가르침과 어긋나 큰 허물이 된다고 반박하고, 경에서 이 셋을 의업이라 한 것은 사(思)가 그것을 문으로 삼아 작용하기 때문이고,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를 부르기 때문이고, 지혜로운 이가 꾸짖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이 대론은 십업도에서 탐 · 진 · 사견이 왜 「업도」인지를 따지는 논의로 이어진다.
세 묘행은 이것을 뒤집은 것으로, 신 · 어 · 의의 모든 선업과, 업이 아닌 무탐 · 무진 · 정견이다. 정견과 사견에는 남을 이롭게 하거나 해치려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선 · 악이 되는가. 남을 이롭게 하고 해치는 일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업의 무게를 정하는 여섯 요소, 업이 「증장」되는 다섯 조건
업품의 맨 끝, 권18에서 천친은 업의 무게를 다시 정리한다. 핵심 개념 「업」이 소개한 정업의 기준(무거운 번뇌 · 깨끗한 마음 · 늘 지음 · 공덕의 밭 · 부모를 해침)과는 다른 각도의 기준이 둘 있어 여기에 모은다.
後起田根本,加行思意樂,由此下上故,業成下上品。
후기 · 밭 · 근본 · 가행 · 사 · 의요가 낮거나 높음으로 말미암아 업이 하품 · 상품을 이룬다.
여섯 요소는 이렇다. 후기 — 지은 뒤에 따라 짓는 것. 밭 — 해치거나 이롭게 하는 대상. 근본 — 근본업도 자체. 가행 — 그 업을 이끄는 신 · 어의 준비 행위. 사 — 업도를 끝맺는 의도. 의요 — 「나는 이러저러하게 지어야 하리라, 지으리라」는 뜻. 어떤 업은 후기만으로도 무거워진다. 후기가 이숙과를 확정짓기 때문이다. 어떤 업은 밭 때문에 무겁고, 어떤 업은 같은 밭이라도 근본의 힘으로 무겁다. 같은 부모라는 밭에서도 살생은 무겁지만 도둑질은 그만큼 무겁지 않은 것이 그 예다. 여섯이 모두 상품이면 가장 무겁고, 모두 하품이면 가장 가볍다.
이어서 「지은 업(造作業)」과 「쌓은 업(增長業)」을 구별한다. 경은 두 가지 업이 있다고 한다. 업이 「증장」되었다고 하는 것은 다섯 조건 때문이다.
由審思圓滿,無惡作對治,有伴異熟故,此業名增長。
살펴 생각함 · 원만함 · 후회와 대치가 없음 · 짝이 있음 · 이숙[이 정해짐]으로 말미암아 이 업을 증장이라 한다.
살펴 생각함 — 전혀 생각하지 않거나 갑작스레 지은 것이 아님. 원만함 — 어떤 이는 악행 하나로 악취에 떨어지고 어떤 이는 셋, 업도 하나에서 열까지에 이르러야 떨어지는데, 그 양에 이른 것. 후회와 대치가 없음 — 뉘우침도 다스리는 업도 없음. 짝이 있음 — 불선업을 지으며 다른 불선업이 함께 도움. 이숙이 정해짐. 이 다섯이 갖추어지지 않은 업은 「지은 업」일 뿐 「쌓은 업」이 아니다. 선업은 이것을 뒤집어 알 것이다.
본송
所說十業道,攝惡妙行中,麁品為其性,如應成善惡。 此中三唯道,七業亦道故。 皆能招異熟,等流增上果,此令他受苦,斷命壞威故。
설한 열 가지 업도는 악행과 묘행 가운데 거두어지니, 거친 것들이 그 성질이 되어 마땅함에 따라 선이 되고 악이 된다. 이 가운데 셋은 오직 길이고, 일곱은 업이면서 또한 길이기 때문이다. 모두 이숙과 등류와 증상의 과보를 부른다. 이것이 남에게 괴로움을 받게 하고, 목숨을 끊고, 위세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술어 풀이
- 十業道십업도
- 열 가지 업의 길(daśa karmapathāḥ). 불선은 살생 · 불여취 · 욕사행 · 허광어 · 이간어 · 추악어 · 잡예어 · 탐 · 진 · 사견, 선은 그것을 떠나는 것.
- 加行 · 根本 · 後起가행 · 근본 · 후기
- 업도의 세 단계(prayoga · maula · pṛṣṭha). 준비 행위, 업도가 완성되는 찰나, 그 뒤에 이어지는 행위.
- 故思고사
- 일부러 하려는 의도. 살생은 「죽이려는 고사」가 먼저 있어야 성립한다.
- 斷善根단선근
- 선근을 끊음(kuśalamūla-samuccheda). 상품의 사견이 욕계의 생득 선근을 끊는 것.
- 續善根속선근
- 끊었던 선근을 다시 이음. 인과에 대한 의심이나 바른 견해가 일어날 때.
- 異熟果 · 等流果 · 增上果이숙과 · 등류과 · 증상과
- 업의 세 과보(vipāka · niṣyanda · adhipati-phala). 십업도는 이 셋을 각각 부른다.
- 見行 · 愛行견행 · 애행
- 견해가 강한 사람과 애착이 강한 사람(dṛṣṭicarita · tṛṣṇācarita). 선근을 끊고 승가를 깨뜨리는 것은 견행의 사람뿐이다.
열 업도는 악행 가운데 거친 것이다
앞에서 본 세 악행과 세 묘행 가운데, 거칠고 뚜렷하여 알기 쉬운 것을 거두어 열 가지 업도로 삼는다(「若麁顯易知,攝為十業道」). 그렇다면 악행 가운데 업도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권16, T29, 84b). 몸의 악행 가운데 가행과 후기, 그리고 음주 · 때림 · 묶음 같은 다른 불선의 몸의 업은 업도가 아니다. 업도가 되는 것은 남의 목숨, 재물, 아내를 잃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멀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말의 악행 가운데 가행 · 후기와 가벼운 것, 뜻의 악행 가운데 악한 사(思)와 가벼운 탐 등은 업도가 아니다. 선의 업도도 마찬가지다. 음주를 떠나는 것, 보시와 공양은 몸의 묘행이지만 업도가 아니고, 부드러운 말(愛語)은 말의 묘행이지만 업도가 아니며, 선한 사는 뜻의 묘행이지만 업도가 아니다.
업도의 체 — 표인가 무표인가
열 업도 가운데 몸과 말의 일곱은 반드시 표와 무표를 다 갖는가. 게송은 「악의 여섯은 반드시 무표가 있고, 그것을 스스로 지으면 [표도 있다]. 음행은 둘이다. 선의 일곱은 받음에서 생기면 둘이고, 선정에서 생기면 무표뿐이다(惡六定無表,彼自作婬二,善七受生二,定生唯無表)」라고 한다(권16, T29, 84c).
불선의 여섯 — 살생 · 불여취 · 허광어 · 이간어 · 추악어 · 잡예어 — 은 반드시 무표가 있다. 남을 시켜 지으면 근본업도가 이루어지는 찰나에 자신의 표업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지었더라도 표업을 일으키는 그 찰나에 상대가 죽으면 표 · 무표를 다 갖지만, 뒤에 죽으면 남을 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이 이루어지는 찰나에 무표만 있다. 욕사행만은 반드시 둘을 갖춘다. 반드시 자신의 몸으로 끝맺어야 하고 남을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이 기뻐하는 것을 대신 느낄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의 일곱은 계를 받음에서 생기면 반드시 표 · 무표를 다 갖춘다. 받음에서 생기는 시라는 반드시 표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정려 · 무루율의는 무표뿐이다. 마음의 힘으로만 생기기 때문이다.
가행과 후기는 근본과 다르다. 「가행은 반드시 표가 있고 무표는 있기도 없기도 하며, 후기는 이와 반대이다(加行定有表,無表或有無,後起此相違)」. 가행에서는 맹렬한 번뇌나 깨끗한 믿음으로 일으키면 무표가 있고 아니면 없다. 후기에는 반드시 무표가 있고, 그 뒤에 앞의 업을 따르는 행위를 하면 표도 있다.
양을 잡는 이의 하루 — 가행 · 근본 · 후기
이 세 단계를 장행은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준다. 업품에서 가장 생생한 대목 가운데 하나다.
如屠羊者將行殺時,先發殺心從床而起,執持價直趣賣羊廛……酬價捉取,牽還養飯將入屠坊,手執杖刀若打若刺,或一或再至命未終,如是皆名殺生加行。隨此表業彼正命終,此剎那頃表無表業,是謂殺生根本業道。
양을 잡는 이가 살생을 하려 할 때, 먼저 죽이려는 마음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 값을 쥐고 양을 파는 시장으로 가서 … 값을 치르고 붙잡아, 끌고 돌아와 먹이고 길러 도살장으로 데려가, 손에 몽둥이나 칼을 쥐고 때리거나 찌르되,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 — 이 모두를 살생의 가행이라 한다. 이 표업에 따라 저것이 바로 목숨을 마치는, 그 찰나의 표와 무표의 업을 살생의 근본업도라 한다.
그리고 그 뒤가 후기이다. 그 찰나 뒤로 살생의 무표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 그리고 뒤에 가죽을 벗기고 살을 썰고 씻고, 달아서 팔고, 삶아 먹고, 그 맛을 칭찬하는 표업의 찰나들도 살생의 후기라 한다. 근본업도는 가행과 과만, 두 연으로 성립한다(「一由加行、二由果滿」). 나머지 여섯 업도도 이에 맞추어 세 단계를 나눈다. 탐 · 진 · 사견은 현재에 일어나자마자 근본업도이므로 가행과 후기의 구별이 없다.
이어서 업도들 사이의 관계가 나온다. 열 업도는 서로의 가행과 후기가 될 수 있다. 원수를 죽이려는 사람이 꾀를 내어 죽일 인연을 모으고(이것은 아직 업도가 아니지만), 중생을 죽여 제사 지내 힘을 빌고(살생), 남의 재물을 훔쳐 살인에 쓰고(투도), 그의 아내와 사통하여 남편을 죽이게 하고(사음), 그의 친구를 떼어 내려고 말의 네 허물을 짓고(망어 · 이간 · 악구 · 기어), 그의 재물을 탐하고(탐), 그에게 성내고(진), 사견을 일으켜 살업을 길러 마침내 죽인다 — 이것이 열 업도를 살생의 가행으로 삼는 것이다. 원수를 죽인 뒤에 그 친족을 죽이고 재물을 거두고 그가 사랑하던 이를 범하며 탐 · 진 · 사견을 차례로 일으키는 것이 열 업도로 된 살생의 후기다(권16, T29, 85a~85b). 다만 탐 등은 가행이 될 수 없다고 장행은 덧붙인다. 마음이 일어난 것만으로는 아직 일을 짓지 않았으니 가행이 성립하지 않는다.
선의 업도에도 세 단계가 있다. 근책이 구족계를 받는 장면이 예다(권16, T29, 86a). 계단에 들어와 비구 대중에게 예배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말하여 친교사를 청하고, 일백이갈마 등을 하는 것이 선의 업도의 가행이다. 셋째 갈마가 끝나는 한 찰나의 표와 무표가 근본업도이다. 그 뒤로 사의(四依)를 일러 주는 것까지, 그리고 앞을 따라 이어지는 표 · 무표가 후기이다.
- 죽이려는 마음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남
- 값을 쥐고 시장으로
- 값을 치르고 붙잡음
- 끌고 와 먹여 기름
- 도살장으로
- 몽둥이나 칼로 때리고 찌름
- 계단에 들어와 예배
- 친교사를 청함
- 백이갈마
살생은 정확히 언제 성립하는가
양을 잡는 이의 장면은 하나의 까다로운 물음을 남긴다. 「그 표업에 따라 저것이 바로 목숨을 마치는 찰나」에 근본업도가 성립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하는 중생이 사유(死有)에 머무는 그 찰나에 성립하는가, 죽은 뒤에 성립하는가.
為所殺生住死有時,能殺生者彼剎那頃表無表業即成業道?為死後耶?若爾何失?二俱有過。
죽임을 당하는 중생이 사유에 머물 때, 죽이는 이의 그 찰나의 표 · 무표업이 곧 업도를 이루는가, 죽은 뒤인가.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는가. 둘 다 허물이 있다.
사유에 머무는 찰나에 업도가 성립한다면, 죽이는 이와 죽임당하는 이가 동시에 죽는 경우에도 업도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유부의 종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뒤에 성립한다면, 「그 표업에 따라 저것이 바로 목숨을 마치는 찰나의 표 · 무표가 근본업도」라는 말과 어긋난다. 또 『발지론』에 「이미 생명을 해쳤는데 살생이 아직 멸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미 생명을 끊었으나 그 가행이 아직 그치지 않은 경우이다」라는 문답이 있는데, 비바사사는 이것을 「후기를 가행이라는 말로 설한 것」이라 풀었는데, 죽은 뒤에 업도가 성립한다고 하면 이 풀이와도 어긋난다. 목숨이 끊긴 뒤에도 근본이 아직 그치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셈이므로, 이 「가행」은 후기가 아니라 근본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친은 「근본에 대해 가행이라는 말을 쓴 것」이라고 보면 허물이 없다고 정리한다. 그러자 반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상대가 죽은] 그때의 표업이 어떻게 근본업도가 되는가. 이미 아무 쓸모가 없지 않은가. 천친은 되묻는다. 쓸모로 따진다면 그때의 무표는 무슨 쓸모가 있는가. 그러므로 업도의 성립은 쓸모 때문이 아니라, 「가행과 과만이 원만할 때 둘(표와 무표)이 함께 근본업도가 된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도 정리된다. 가행을 일으킨 사람이 죽일 중생보다 먼저 죽거나 함께 죽으면 근본업도의 죄를 얻는가.
俱死及前死,無根依別故。
함께 죽거나 먼저 죽으면 근본[업도]가 없다. 의지하는 [몸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죽이는 이가 죽임당하는 이와 동시에, 혹은 먼저 죽으면 근본업도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이는 이가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고 결과도 채웠는데 살생의 죄에 닿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함께 죽거나 먼저 죽은 경우이다」라는 문답이 있다. 죽임당하는 이의 목숨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죽이는 이에게 살생의 죄가 생길 수 없다. 그런데 죽이는 이가 이미 죽었다면 그에게 살생의 죄는 생길 수 없다. 의지하는 몸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살생의 가행을 일으킨 몸은 이미 끊어졌고, 다른 종류의 몸(새 중동분)이 생겼지만 그 몸은 살생의 가행을 일으킨 적이 없다. 업은 그것을 일으킨 몸에 의지해야 성립한다.
군대 안의 살생
여러 사람이 군대를 이루어 원수를 죽이거나 짐승을 사냥할 때,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이면 누가 살생의 업도를 이루는가. 「군대 등에서 같은 일을 하면 모두 짓는 이와 같이 이룬다(軍等若同事,皆成如作者)」. 그들은 함께 하나의 일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서로 가르친 것과 같으니, 한 사람이 죽이면 나머지도 다 죄를 얻는다. 남의 힘에 억지로 끌려 들어왔더라도 같은 마음이 되면 살생의 죄를 이룬다. 다만 「내 목숨을 구하려고도 죽이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맹세한 사람은, 남의 힘에 끌려 그 가운데 있어도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므로 살생의 죄가 없다(권16, T29, 86b).
살생에서 사견까지 — 열 업도의 성립 조건
장행은 이어서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살생이라 하고, …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사견이라 하는가」를 하나하나 정한다(권16, T29, 86b~88b). 앞의 업도에서 정한 조건(일부러 함, 잘못 알지 않음 등)은 뒤의 업도로 「흘러 이른다(流至)」.
살생
殺生由故思,他想不誤殺。
살생은 일부러 하려는 사(思)로 말미암고, 남이라는 생각으로, 잘못 알지 않고 죽이는 것이다.
먼저 죽이려는 고사를 일으키고, 남의 유정에 대해 남의 유정이라 생각하며, 살생의 가행을 지어, 잘못 알지 않고 죽여야 한다. 그것만을 죽이고 다른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업품은 찰나멸의 문제와 다시 만난다. 「찰나마다 멸하는 온(蘊)을 어떻게 죽인다고 하는가(於剎那滅蘊,如何成殺生)」. 저절로 찰나마다 멸하는 것을 죽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은 이렇다. 들숨 날숨의 바람을 생(生)이라 하는데, 그것은 몸과 마음에 의지해 구른다. 그것을 끊어 다시 이어 생기지 않게 하면, 등불의 빛을 끄고 방울 소리를 멈추게 하듯 죽였다고 한다. 혹은 생이란 명근(命根)이니, 그것을 끊어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죽임이다. 나쁜 마음으로 남의 목숨을 끊어, 생겨야 할 한 찰나라도 생기지 못하게 하는 것 — 그것만이 살생의 죄에 닿는다. 앞에서 본 「법은 저절로 멸한다」는 논증과 짝을 이루는 대목이다. 불이 장작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찰나에 장작이 생기지 못하게 하듯이, 살생도 목숨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서 생겨야 할 목숨이 생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끊어지는 그 목숨은 누구의 것인가. 장행은 「목숨이 없으면 그가 죽는다고 할 때 여섯째 격(소유격)을 썼으니, 나[我] 아니고 누구이겠느냐」는 반문을 소개하고, 그것은 파아품에서 자세히 따질 것이라 하며 넘어간다. 그리고 부처의 게송을 인용한다.
壽煖及與識,三法捨身時,所捨身僵仆,如木無思覺。
수명과 체온과 식, 이 세 법이 몸을 버릴 때, 버려진 몸은 쓰러져 나무처럼 생각도 느낌도 없다.
자이나교(離繫者)는 생각 없이 죽여도 살생의 죄를 얻는다고 했다. 불에 닿으면 미리 생각하지 않았어도 데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장행은 이것을 여러 반례로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남의 아내를 보거나 잘못 몸이 닿아도 죄가 있어야 한다. 선한 마음으로 자이나 수행자의 머리털을 뽑아 주는 이(자이나교의 계율), 자비로운 마음으로 고행을 권하는 스승, 먹은 것이 체한 시주도 남을 괴롭힌 죄를 얻어야 한다. 태아와 어머니는 서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니 서로 죄를 얻어야 한다. 죽임당하는 이도 죽임과 닿았으니 불이 제 의지처를 태우듯 죄를 얻어야 한다. 남을 시켜 죽이면 죄가 없어야 한다. 불은 남에게 불을 만지라고 시킨 이를 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집이 무너져 생명을 해쳐도 그 나무가 죄를 얻어야 한다. 업의 본질이 의도라는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논박이다.
불여취
不與取他物,力竊取屬己。
불여취는 남의 물건을 힘으로나 몰래 취하여 자기에게 속하게 하는 것이다.
훔치려는 고사를 일으키고, 남의 물건에 대해 남의 물건이라 생각하며, 힘으로나 몰래 훔치는 가행을 일으켜, 잘못 알지 않고 취해 자기에게 속하게 해야 한다. 이어서 누구에게서 도둑질의 죄를 얻는가가 따져진다. 탑(窣堵波)의 물건을 훔치면 여래에게서 투도의 죄를 얻는다. 부처가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세상을 불쌍히 여겨 모든 보시를 통틀어 받으셨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에게서 얻는다고 한다. 주인 없는 묻힌 보물을 파내면 국왕에게서 얻는다. 승가에 돌려 쓰는 물건(迴轉物)을 훔치면, 갈마를 이미 했으면 그 결계 안의 승가에게서, 갈마를 아직 하지 않았으면 모든 불제자에게서 얻는다(권16, T29, 87a).
욕사행
欲邪行四種,行所不應行。
욕사행은 네 가지이니,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는 것이다.
네 가지는 이렇다. ① 대상이 아닌 이(非境)와 행함 — 남에게 속한 아내나 첩, 그리고 어머니나 아버지나 부모의 친족, 나아가 왕이 지키고 보호하는 이. ② 길이 아닌 곳(非道) — 자기 아내라도 입과 다른 길. ③ 장소가 아닌 곳(非處) — 절 안, 탑, 드러난 곳. ④ 때가 아닌 때(非時) — 임신했을 때, 젖을 먹일 때, 재계를 받았을 때. 자기 아내나 첩이라도 이때는 사행이 된다. 어떤 이들은 남편이 허락하여 재계를 받은 경우에 범해야 「때가 아님」이라고 한다. 「잘못 알지 않음」의 조건도 여기에 흘러 이른다. 남의 아내를 제 아내로 여기거나 제 아내를 남의 아내로 여기는 등 잘못 안 마음이 있으면 행해도 업도가 아니다. 남의 아내를 다른 남의 아내로 여기고 행한 경우는 이설이 있다. 남의 아내에 대해 가행을 일으키고 누렸으니 성립한다는 설과, 살생의 경우처럼 이 사람에게 가행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에게서 끝냈으니 성립하지 않는다는 설이다.
허광어 — 몇째 글자에서 성립하는가
染異想發言,解義虛誑語。
염오한 마음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로 내어, [듣는 이가] 뜻을 알아들으면 허광어이다.
말하는 뜻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면서 말을 내고, 속이려는 상대가 그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 상대가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 말은 무엇인가. 잡예어이다. 여기서 말의 표업에 관한 미묘한 물음이 나온다. 말은 여러 글자로 이루어지는데 언제 업도가 되는가. 마지막 글자와 함께 생긴 표의 소리와 무표가 업도를 이룬다. 혹은 상대가 뜻을 알아듣는 때의 표 · 무표가 업도를 이룬다. 앞의 글자들과 함께한 것은 모두 그 가행이다.
몸으로 하는 망어도 있는가. 있다. 본론에 이런 문답이 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살생의 죄에 닿는 일이 있는가. 있다, 말을 내는 경우이다. 말을 내지 않고 망어의 죄에 닿는 일이 있는가. 있다, 몸을 움직이는 경우이다. 몸도 움직이지 않고 말도 내지 않고 두 죄에 닿는 일이 있는가. 있다, 선인(仙人)이 뜻으로 분노한 경우와 포쇄타(布灑他, 포살) 때이다」(권16, T29, 87c~88a). 보광의 풀이로는, 포살 때 계를 어긴 것이 있는데도 계사의 물음에 침묵하여 청정하다고 답하면 몸도 말도 움직이지 않고 망어가 되고, 선인이 뜻으로 분노하여 중생을 죽였다는 전승이 몸도 말도 없는 살생의 예가 된다. 천친은 여기서 경량부의 눈으로 묻는다. 몸도 움직이지 않고 말도 내지 않는데 표업 없이 무표가 생길 수는 없으니, 이 둘이 어떻게 업도가 되는가.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애써 생각해야 한다(於如是難應設劬勞)」.
이간어 · 추악어 · 잡예어
염오한 마음으로 남을 갈라놓는 말을 내면, 남이 갈라지든 갈라지지 않든 이간어를 이룬다. 염오한 마음으로 사랑스럽지 않은 말을 내어 남을 헐뜯으면 추악어이다. 이때도 꾸짖으려던 그 사람이 말뜻을 알아들어야 업도가 이루어진다. 염오한 마음으로 낸 모든 말은 잡예어이다. 염오한 마음에서 나온 말은 모두 뒤섞여 더럽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앞의 세 말(허광어 · 이간어 · 추악어)과 다른, 염오한 마음으로 낸 모든 말이 잡예어라 하며, 아첨하는 말, 노래, 삿된 논의 등이 그것이라 한다. 비구가 삿된 생활을 품고 아첨하는 말, 염오한 마음으로 읊조리며 서로 희롱하는 것, 광대가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지은 노랫말, 바르지 않은 견해를 널리 늘어놓는 말, 염오한 마음의 슬픈 탄식, 세속의 희론. 그러면 전륜왕이 나타났을 때의 노래도 잡예어인가. 아니다. 그 말은 출리의 마음에서 나와 출리를 이끈다(권16, T29, 88a).
탐 · 진 · 사견
남의 재물을 내 것으로 하려는 나쁜 바람이 탐, 유정을 해치려는 미움이 진에이다. 욕계의 애착이 모두 탐이라 하더라도 거친 것만이 업도이니, 전륜왕의 세상과 북구로주의 욕탐은 업도가 아니다.
惡欲他財貪,憎有情瞋恚,撥善惡等見,名邪見業道。
남의 재물을 나쁘게 바라는 것이 탐이요, 유정을 미워하는 것이 진에요, 선악 등을 부정하는 견해를 사견업도라 한다.
사견의 내용은 경이 이렇게 나열한다. 「보시도 없고, 사랑스러움도 없고, 제사도 없고, 묘행도 없고, 악행도 없고, 묘행과 악행의 업과 이숙도 없고, 이 세간도 저 세간도 없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고, 화생의 유정도 없고, 세간에 아라한인 사문이나 바라문도 없다.」 업을 비방하고, 과를 비방하고, 성자를 비방하는 사견이 다 들어 있다.
몸 셋
말 넷
뜻 셋
업도라는 이름의 뜻
열 업도를 다 정한 뒤, 권17은 「무슨 뜻에서 업도라 하는가」로 시작한다. 게송은 「이 가운데 셋은 오직 길이고, 일곱은 업이면서 또한 길이다」라고 답한다.
十業道中後三唯道,業之道故立業道名。彼相應思說名為業,彼轉故轉、彼行故行,如彼勢力而造作故。前七是業,身語業故,亦業之道,思所遊故。
열 업도 가운데 뒤의 셋은 오직 길이니, 업의 길이므로 업도라 이름한다. 그것과 상응하는 사를 업이라 하는데, [사는] 그것이 구르므로 구르고 그것이 행하므로 행하여, 그 세력대로 짓기 때문이다. 앞의 일곱은 업이니 신 · 어업이기 때문이고, 또한 업의 길이니 사가 노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업의 본질은 사(思)다. 탐 · 진 · 사견은 사가 아니므로 업이 아니지만, 사가 그것을 따라 구르고 그것의 세력대로 짓기 때문에 사의 「길」이 된다. 그래서 「업의 길(業之道)」이다. 앞의 일곱은 신 · 어업이므로 그 자체가 업이고, 동시에 그 업을 일으키는 사가 그것을 대상으로 노니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업이자 업의 길(業業之道)」이다. 하나의 낱말이 두 겹의 뜻을 동시에 갖는 것은 세간의 문헌에서도 흔하다고 장행은 덧붙인다. 그러면 가행과 후기는 왜 업도가 아닌가. 가행과 후기는 근본에 의지해 굴러가기 때문이고, 거친 것만 거두기 때문이며, 근본에 의해서만 안팎의 사물이 줄고 늘기 때문이다. 탐 · 진을 의업이라 보는 비유자에게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의업이면서 악취의 길이므로 업도이거나, 서로 타고 이어지므로 모두 업도라 한다고.
사견이 선근을 끊는다 — 단선근과 속선근
열 악업도는 모두 선법이 현재에 일어나는 것과 어긋난다. 그렇다면 선근을 끊는 것은 어느 업도인가.
唯邪見斷善,所斷欲生得,撥因果一切,漸斷二俱捨。人三洲男女,見行斷非得,續善疑有見,頓現除逆者。
오직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다. 끊는 것은 욕계의 생득[선근]이다.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모든 [사견이 끊으며], 점차로 끊고, [끊을 때] 둘을 함께 버린다. 사람의 세 대주의 남자와 여자로서 견행인 이가 끊고, [그 체는] 비득이다. 선근을 잇는 것은 의심과 「있다」는 견해로 말미암고, 한꺼번에 [잇되] 현생에서는 역죄를 지은 이를 뺀다.
악업도 가운데 상품의 원만한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다. 그런데 본론은 「상품의 불선근이란 선근을 끊을 수 있는 불선근」이라 하지 않았는가. 장행은 불선근이 사견을 이끌어 내므로 사견의 일을 그 뿌리에 미루어 말한 것이라고 푼다. 도적이 불을 질러 마을이 탔을 때 세상이 「도적이 마을을 태웠다」고 하는 것과 같다.
무엇을 끊는가. 욕계의 생득(生得) 선근만이다. 색계 · 무색계의 선근은 원래 성취하지 않았고, 수행으로 얻은 가행 선근은 이미 그 전에 물러났기 때문이다. 어떤 사견이 끊는가. 원인을 부정하는 것(묘행과 악행은 없다)과 결과를 부정하는 것(그 과보인 이숙은 없다)이다. 어떤 이들은 이 두 사견이 무간도와 해탈도처럼 다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선근을 끊는 사견은 유루만 반연하고 자기 계만 반연한다고 했으나, 정설은 모든 것을 반연한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끊는가 점차로 끊는가. 어떤 이들은 견도에서 견혹을 끊듯이 한 찰나의 사견이 아홉 품의 선근을 한꺼번에 끊는다고 했다. 정설은 점차로 끊는다는 것이다.
如是說者漸斷善根,謂九品善根由九品邪見逆順相對漸次而斷。如修道斷修所斷惑,即下下邪見能斷上上善根,乃至下下善根上上邪見所斷。
바른 설은 선근을 점차로 끊는다는 것이다. 아홉 품의 선근을 아홉 품의 사견이 거꾸로와 바로 마주하여 점차로 끊는다. 수도에서 수소단의 미혹을 끊듯이, 하하품의 사견이 상상품의 선근을 끊고, 나아가 하하품의 선근은 상상품의 사견이 끊는다.
가장 약한 사견이 가장 강한 선근을 끊고, 가장 강한 사견이 가장 약한 선근을 끊는다. 이것은 수도에서 하품의 도가 상품의 번뇌를 끊는 것과 같은 구조다. 본론에도 「미세하게 함께하는 선근이란 무엇인가. 선근을 끊을 때 마지막에 버리는 것이니, 그것을 버리므로 선근을 끊었다고 한다」고 했다. 한 품의 선근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을 인연으로 다른 품의 선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끊음이 끝난 때에야 「선근을 끊었다」고 한다. 끊을 때 율의도 함께 버린다(「二俱捨」). 율의가 그 품의 마음이 일으킨 결과라면, 그 품의 마음이 끊어질 때 율의도 버린다.
누가 어디서 끊는가. 사람의 세 대주(북구로주 제외)의 남자와 여자로서, 견행인 사람만이 끊는다. 악취에서는 지혜가 굳세지 않고, 천취에서는 업과를 눈앞에 보며, 애행인 사람의 악한 의요는 들떠 움직이고 견행인 사람의 그것은 굳고 깊기 때문이다(권17, T29, 89a~89b).
선근을 끊음의 체는 무엇인가. 비득(非得)이다. 선근을 끊는 때에 선근의 득(得)이 생기지 않고 비득이 이어 생긴다. 선근의 득을 대신해 비득이 생기는 것을 단선근이라 한다(권17, T29, 89b). 아비달마의 「득 · 비득」 이론이 여기서 업론과 만난다.
끊은 선근은 어떻게 다시 잇는가. 의심과 「있다」는 견해로 말미암는다. 인과에 대해 「혹시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생기거나, 「반드시 있다」는 바른 견해가 생기면 선근의 득이 다시 일어나 선근을 이었다고 한다. 이을 때는 한꺼번에 잇고, 그 뒤에 점차로 현재에 일어난다. 병이 한꺼번에 나아도 기력은 점점 회복되는 것과 같다. 현재의 몸에서 이을 수 있는가. 이을 수 있되 역죄를 지은 이는 뺀다. 경에 그런 사람은 「반드시 현법에서 선근을 잇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지옥에서 죽으려 할 때 혹은 지옥에 태어나려 할 때(중유에서) 선근을 잇는다. 원인의 힘으로 끊은 이는 죽으려 할 때 잇고, 연의 힘으로 끊은 이는 태어나려 할 때 잇는다. 의요만 무너지고 가행은 무너지지 않은 채 선근을 끊은 사람은 현세에 이을 수 있지만, 의요도 가행도 무너진 채 끊은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에야 잇는다.
마지막으로 선근을 끊는 것과 사정취(邪定聚)에 떨어지는 것의 관계를 네 경우로 정리한다.
有斷善根非墮邪定,應作四句。第一句者,謂布剌拏等。第二句者,謂未生怨等。第三句者,謂天授等。第四句者,謂除前相。
선근을 끊었으되 사정에 떨어지지 않은 이가 있으니, 네 경우를 지어야 한다. 첫째는 포랄나 등이다. 둘째는 미생원 등이다. 셋째는 천수 등이다. 넷째는 앞의 모습을 뺀 이들이다.
보광은 이렇게 푼다. 포랄나(布剌拏, 푸라나 카사파)는 사견을 일으켰으므로 선근을 끊었으나 역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사정에 떨어지지 않았다. 미생원(未生怨, 아사세왕)은 역죄를 지었으므로 사정에 떨어졌으나 삼보를 믿었으므로 선근을 끊지 않았다. 천수(天授, 제바달다)는 사견을 일으켜 선근을 끊었고 역죄를 지어 사정에 떨어졌다. 넷째는 그 밖의 사람들이다.
열 업도의 세 과보
謂於十種若習若修若多所作,由此力故,生那落迦是異熟果。從彼出已來生此間,人同分中受等流果。
열 가지를 익히고 닦고 많이 지으면, 그 힘으로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 이숙과이다. 거기서 나와 이 세간에 와서 사람의 동분 가운데 태어나면 등류과를 받는다.
열 악업도는 각각 세 가지 과보를 부른다. 왜 셋인가. 살생할 때 남에게 괴로움을 받게 하므로 이숙과를, 남의 목숨을 끊으므로 등류과를, 남의 위세를 무너뜨리므로 증상과를 받는다(「此令他受苦,斷命壞威故」). 이숙과는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다. 등류과는 그 뒤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그 업과 닮은 결과를 받는 것이다. 살생한 이는 수명이 짧고, 훔친 이는 재물이 모자라고, 삿된 음행을 한 이는 아내가 정숙하지 않고, 망어한 이는 비방을 많이 받고, 이간어를 한 이는 친구와 사이가 벌어지고, 추악어를 한 이는 늘 나쁜 소리를 듣고, 잡예어를 한 이는 말에 위엄이 없다. 탐한 이는 탐이 성하고, 성낸 이는 성냄이 늘고, 사견을 가진 이는 어리석음이 는다.
증상과는 바깥의 살림살이에 미치는 결과이다.
此十所得增上果者,謂外所有諸資生具,由殺生故光澤鮮少,不與取故多遭霜雹,欲邪行故多諸塵埃,虛誑語故多諸臭穢,離間語故所居險曲,麁惡語故田多荊棘磽确醎鹵稼穡匪宜,雜穢語故時候變改。貪故果少、瞋故果辣,由邪見故果少或無。
이 열이 얻는 증상과는 바깥의 모든 살림살이에 있다. 살생 때문에 광택이 적고, 불여취 때문에 서리와 우박을 많이 만나고, 욕사행 때문에 먼지가 많고, 허광어 때문에 악취가 많고, 이간어 때문에 사는 곳이 험하고 굽고, 추악어 때문에 밭에 가시덤불이 많고 메마르고 짜서 곡식이 잘 되지 않고, 잡예어 때문에 계절이 뒤바뀐다. 탐 때문에 열매가 적고, 진 때문에 열매가 맵고, 사견 때문에 열매가 적거나 없다.
핵심 개념 「업」이 공업과 불공업을 다루며 「기세간은 중생의 공업이 만든 것」이라 한 것이, 여기서 업도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목록이 된다. 사람의 삶의 환경 — 날씨, 땅의 기름짐, 열매의 맛 — 이 그 사람과 그 무리가 지은 업의 증상과로 정해진다.
| 이숙과 | 등류과(사람으로 태어나) | 증상과(바깥의 살림살이) | |
|---|---|---|---|
| 살생 | 열 가지를 익히고 닦고 많이 지으면 지옥에 태어남 | 수명이 짧음 | 광택이 적음 |
| 불여취 | 재물이 모자람 | 서리와 우박 | |
| 욕사행 | 아내가 정숙하지 않음 | 먼지 | |
| 허광어 | 비방을 많이 받음 | 악취 | |
| 이간어 | 친구와 사이가 벌어짐 | 사는 곳이 험하고 굽음 | |
| 추악어 | 늘 나쁜 소리를 들음 | 가시덤불과 메마르고 짠 밭 | |
| 잡예어 | 말에 위엄이 없음 | 계절이 뒤바뀜 | |
| 탐 | 탐이 성함 | 열매가 적음 | |
| 진 | 성냄이 늚 | 열매가 매움 | |
| 사견 | 어리석음이 늚 | 열매가 적거나 없음 |
하나의 업이 하나의 생을 이끈다 — 인업과 만업
십업도의 과보를 정한 뒤 장행은 「하나의 업이 하나의 생을 이끌고, 여러 업이 그것을 원만하게 한다(一業引一生,多業能圓滿)」고 정리한다(권17, T29, 92a). 다음 생의 큰 틀을 이끄는 인업과 그 세부를 채우는 만업의 구별은 계보 一 「십이연기」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장행의 비유 하나만 옮긴다. 「화가가 먼저 한 색으로 형상을 그리고 뒤에 여러 색을 채우는 것과 같다(譬如畫師先以一色圖其形狀後填眾彩)」. 같은 사람의 몸을 받아도 사지와 근을 갖추고 모습과 힘이 장엄한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본송
三障無間業,及數行煩惱,并一切惡趣,北洲無想天。 此五無間中,四身一語業,三殺一誑語,一殺生加行。 破僧虛誑語,於罪中最大;感第一有思,世善中大果。
세 가지 장애는 무간업과, 자주 행하는 번뇌와, 모든 악취와 북[구로]주와 무상천이다. 이 다섯 무간 가운데 넷은 몸의 업이고 하나는 말의 업이다. 셋은 살생이고 하나는 거짓말이며 하나는 살생의 가행이다. 승가를 깨뜨리는 거짓말은 죄 가운데 가장 크고, 제일유(第一有)를 부르는 사는 세간의 선 가운데 큰 과보를 [부른다].
술어 풀이
- 三障삼장
- 세 가지 무거운 장애(āvaraṇa). 업장 · 번뇌장 · 이숙장. 성도와 성도의 가행 선근을 가로막는다.
- 無間業무간업
- 틈이 없는 업(ānantarya-karman). 해모 · 해부 · 해아라한 · 파화합승 · 악심출불신혈의 다섯. 오역죄(五逆罪)라고도 한다.
- 破僧파승
- 승가를 깨뜨림(saṃgha-bheda). 승가의 화합을 깨뜨려 두 무리로 나누는 것. 파법륜승과 파갈마승의 두 가지가 있다.
- 破法輪僧파법륜승
- 법륜을 깨뜨리는 파승. 부처와 다른 스승, 팔정도와 다른 도를 세워 승가를 나누는 것.
- 破羯磨僧파갈마승
- 갈마를 깨뜨리는 파승. 한 결계 안에서 승가가 둘로 나뉘어 따로 갈마를 하는 것.
- 恩田 · 德田은전 · 덕전
- 은혜의 밭과 공덕의 밭. 부모는 은전, 아라한 · 부처 · 승가는 덕전. 무간업이 무거운 까닭은 은전을 버리고 덕전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 無間同類무간동류
- 무간업과 같은 부류의 업. 무간업에 가까울 만큼 무거운 다섯 가지 업.
- 天授천수
- 제바달다(Devadatta)의 번역 이름. 파승의 전형으로 주석서에 거듭 등장한다.
세 가지 무거운 장애
인업과 만업을 정한 뒤, 권17의 끝에서 장행은 부처가 설한 「세 가지 무거운 장애」로 넘어간다. 업장 · 번뇌장 · 이숙장이다. 그 체는 무엇인가.
言無間業者,謂五無間業。其五者何?一者害母、二者害父、三者害阿羅漢、四者破和合僧、五者惡心出佛身血。如是五種名為業障。
무간업이란 다섯 무간업을 말한다. 다섯이란 무엇인가. 첫째 어머니를 해침, 둘째 아버지를 해침, 셋째 아라한을 해침, 넷째 화합한 승가를 깨뜨림, 다섯째 나쁜 마음으로 부처의 몸에서 피를 냄이다. 이 다섯을 업장이라 한다.
번뇌장은 번뇌 가운데 「자주 행하는 것(數行)」이다. 번뇌에는 늘 일어나는 것과 맹렬한 것(상품) 두 가지가 있는데, 늘 일어나는 것만 번뇌장이다. 선체 등은 번뇌가 자주 일어나 누르기 어려우므로 장애라 한다. 상품의 번뇌는 맹렬하지만 늘 일어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누르기 쉽다. 하품의 번뇌라도 자주 일어나면 하품을 연으로 중품이 생기고 중품을 연으로 다시 상품이 생겨, 누르는 도가 생길 틈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번뇌의 품이 높든 낮든 자주 행하는 것만을 번뇌장이라 한다(권17, T29, 92c). 이 정의는 실천적으로 의미가 깊다. 수행을 가로막는 것은 가끔 터지는 격렬한 번뇌가 아니라 날마다 되풀이되는 작은 번뇌라는 것이다.
이숙장은 세 악취 전부와, 사람 가운데 북구로주, 하늘 가운데 무상천이다. 이 셋이 장애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도와 성도의 가행 선근이다.
「장애」라는 말은 뒤에 여러 교학에서 넓게 쓰이게 되지만, 『구사론』의 삼장은 그 정의가 좁고 구체적이다. 업장은 오직 다섯 무간업, 번뇌장은 오직 자주 행하는 번뇌, 이숙장은 특정한 태어남의 자리이다.
「무간」이란 무엇인가
此無間名為目何義?約異熟果決定更無餘業餘生能為間隔,故此唯目無間隔義。或造此業補特伽羅,從此命終定墮地獄中無間隔,故名無間。
이 무간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을 가리키는가. 이숙과에 대해 다른 업이나 다른 생이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이 결정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오직 「사이가 막히지 않음」의 뜻을 가리킨다. 혹은 이 업을 지은 사람이 이번 생을 마치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 그 사이에 막힘이 없으므로 무간이라 한다.
「무간」은 무간지옥(아비지옥)의 「무간」과 같은 말이지만, 여기서는 「다음 생에 곧바로, 사이 없이」라는 시간의 뜻이다. 무간업은 반드시 순차생수, 곧 바로 다음 생에 과보를 맺는다. 다른 어떤 업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먼저 익을 수 없다.
무간업은 어디서 누가 짓는가. 사람의 세 대주에서만 짓고, 북구로주나 다른 취, 다른 계에서는 짓지 않는다. 세 대주 안에서도 여자와 남자만 짓고 선체 등은 짓지 못한다. 그 까닭은 앞에서 본 대로, 그들에게 선근을 끊는 일과 불율의가 없는 까닭과 같다. 또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은혜가 적고(몸이 온전하지 못하게 한 증상연이 되고, 덜 사랑하므로), 그들은 부모에게 참괴의 마음이 적다. 무너뜨릴 만한 뚜렷한 참괴가 없으니 무간죄에 닿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귀신과 축생은 어머니를 해쳐도 무간이 아니다.
여기에 대덕의 이설이 있다. 「깨달음이 분명하면 무간이 된다. 영리한 말처럼(若覺分明亦成無間,如聰慧馬)」(권17, T29, 93a). 보광은 『대비바사론』을 인용해 그 이야기를 전한다(원문은 권119). 사람들이 어떤 영리한 말의 씨를 탐하여 그 어미와 교미하게 했는데, 말이 뒤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생식기를 끊고 죽었다는 것이다. 축생이라도 분명히 알고 짓는다면 무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대덕의 생각이다. 사람이 귀신의 부모를 해치는 것은 역죄가 되지 않는다. 마음과 대상이 모두 약하기 때문이다.
다섯 무간업의 체
권18은 다섯 무간업의 체를 정하는 게송으로 시작한다. 넷은 몸의 업이고 하나는 말의 업이다. 셋(해모 · 해부 · 해아라한)은 살생의 근본업도, 하나(파승)는 허광어의 근본업도, 하나(출불신혈)는 살생업도의 가행이다. 여래의 몸은 해칠 수 없으므로,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내는 것은 살생의 가행에 그친다.
파승의 무간이 허광어라면, 왜 「파승」이라 부르는가. 결과의 이름을 원인에 붙인 것이다. 또는 그것이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승가가 깨진 것」 자체의 체는 무엇인가.
僧破體是不和合性,無覆無記心不相應行蘊所攝,豈成無間?如是僧破因誑語生,故說破僧是無間果。非能破者成此僧破,但是所破僧眾所成。
승가가 깨진 것의 체는 화합하지 않은 성질이니, 무부무기의 심불상응행온에 속한다. 어찌 그것이 무간이 되겠는가. 이 승가의 깨짐은 거짓말로 말미암아 생기므로, 승가를 깨뜨림을 무간의 결과라 한다. 깨뜨린 사람이 이 승가의 깨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깨진 승가의 대중이 성취한다.
이 구별은 아비달마다운 정밀함을 보여 준다. 「승가가 깨진 상태」는 선도 악도 아닌 무부무기의 불상응행법이고, 그것을 「가지는(성취하는)」 것은 깨뜨린 사람이 아니라 깨진 쪽의 승가이다. 깨뜨린 사람이 성취하는 것은 그 결과를 낳은 거짓말의 죄, 곧 승가의 깨짐과 함께 생긴 말의 표 · 무표업이다. 이 죄는 반드시 무간대지옥에서 한 중겁 동안 극히 무거운 괴로움을 받는다. 다른 역죄는 반드시 무간지옥에 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역죄를 지었다면 모두 다음 생에 익는데, 어떻게 여러 역죄가 한 생에서 함께 과보를 받는가. 죄가 늘수록 괴로움이 늘어난다(「隨罪增苦增」). 여러 역죄 때문에 지옥에서 크고 부드러운 몸과 많은 맹렬한 고통의 도구를 받아, 두 배 · 세 배 · 네 배 · 다섯 배의 무거운 괴로움을 받는다.
승가는 어떻게 깨지는가 — 파법륜승
苾芻見淨行,破異處愚夫,忍異師道時,名破不經宿。
비구로서 견행이며 청정한 행에 머무는 이가, 다른 곳에서, 어리석은 범부를 깨뜨린다. [그들이] 다른 스승과 다른 도를 인정할 때 깨졌다고 하며, 밤을 넘기지 않는다.
장행은 이 게송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조건으로 풀어 간다(권18, T29, 93b~93c).
깨뜨리는 이는 반드시 대비구여야 한다. 재가자나 비구니 등은 안 된다. 견행인 사람이어야 하고 애행인 사람은 안 된다. 청정한 행에 머무는 사람이어야 하고 계를 범한 사람은 안 된다. 계를 범한 사람의 말에는 위엄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깨뜨려야 하고 큰 스승을 마주해서는 안 된다. 여래는 가볍게 다그칠 수 없고 그 말씀이 위엄 있고 엄숙하여 마주해서는 결코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범부만을 깨뜨리고 성자는 깨뜨리지 못한다. 성자는 법성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인위(忍位)를 얻은 이도 깨뜨릴 수 없다고 한다. 「어리석은 범부」라는 말은 이 두 뜻을 다 머금는다.
언제 깨졌다고 하는가. 깨지는 쪽의 승가가 부처와 다른 스승을 인정하고, 부처가 설한 것과 다른 성도가 있다고 인정할 때이다. 그 승가는 그날 밤 안에 반드시 다시 화합하여 밤을 넘기지 않는다. 이것을 파법륜승이라 한다. 성도의 바퀴를 가로막고 승가의 화합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이 조건들 하나하나에 『대비바사론』 권116을 인용해 살을 붙인다. 견행인 사람만이 깨뜨리는 까닭은 그 의요가 굳고 맹렬하여 물러섬이 없기 때문이다. 여인이 깨뜨리지 못하는 까닭은 법륜을 깨뜨릴 때는 저절로 스스로를 큰 스승으로 세우게 되는데, 여인은 큰 스승의 자리에 맞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다만 파승의 방편을 널리 짓는 일은 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 대해서 보광은, 그곳이 영취산 북쪽 서너 리 떨어진, 같은 결계 안의 상두산(象頭山)이며, 천수가 거기 머물며 승가를 깨뜨렸다고 하고, 옛 번역에서 가야산이라 한 것은 음이 비슷해 잘못 전한 것이라고 바로잡는다(보광 『구사론기』 권18, T41, 278a).
천수, 곧 제바달다가 내세운 「다른 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구사론』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중현의 『순정리론』이 그것을 전한다.
言邪道者,提婆達多妄說五事為出離道:一者不應受用乳等、二者斷肉、三者斷鹽、四者應被不截衣服、五者應居聚落邊寺。
삿된 도라 함은, 제바달다가 다섯 가지 일을 망령되이 출리의 도라고 설한 것이다. 첫째 젖 등을 먹어서는 안 된다, 둘째 고기를 끊는다, 셋째 소금을 끊는다, 넷째 자르지 않은 옷을 입어야 한다, 다섯째 마을 가장자리의 절에 머물러야 한다.
- 깨뜨리는 이「苾芻」대비구 (재가자 · 비구니 아님)「見」견행인 이 (애행 아님)「淨行」계를 지닌 이 (범계자는 말에 위엄이 없음)
- 곳「異處」부처를 마주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보광: 같은 결계 안의 상두산)
- 깨지는 이「愚夫」범부 (성자 · 이설: 인위를 얻은 이도 아님)
- 때「忍異師道時」다른 스승과 다른 도를 인정할 때「不經宿」그날 밤 안에 반드시 다시 화합
- 인원남섬부주에서만 · 적어도 아홉 사람(여덟 비구가 두 무리로, 깨뜨리는 이가 아홉째)
- 젖 등을 먹지 않음
- 고기를 끊음
- 소금을 끊음
- 자르지 않은 옷
- 마을 가장자리의 절
파갈마승, 그리고 법륜이 깨지지 않는 여섯 때
贍部洲九等,方破法輪僧;唯破羯磨僧,通三洲八等。
남섬부주에서 아홉 [사람] 등이어야 비로소 법륜승을 깨뜨리고, 갈마승을 깨뜨리는 것만은 세 대주에 통하며 여덟 [사람] 등이다.
법륜승은 남섬부주에서만 깨진다. 다른 대주에는 부처가 없기 때문이다. 세존이 계신 곳이라야 다른 스승이 있을 수 있다. 여덟 비구가 두 무리로 나뉘어 깨지는 쪽이 되고, 깨뜨리는 이가 아홉째이니 적어도 아홉 사람이 필요하다. 「등」이라는 말은 그 이상은 한이 없다는 뜻이다. 갈마승을 깨뜨리는 것은 세 대주에 다 통한다. 성스러운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한 결계 안에서 승가가 두 무리로 나뉘어 따로 갈마를 해야 하므로 적어도 여덟 사람이 필요하다(한 갈마에 넷이 필요하다).
그리고 법륜승이 결코 깨지지 않는 여섯 때가 있다.
初謂世尊轉法輪未久,後謂善逝將般涅槃時,此二時中僧一味故。於正戒見皰未起時,要二皰生方可破故。未立止觀第一雙時,法爾由彼速還合故。佛滅後時,無真大師為敵對故。未結界時,無一界中分二部故。
처음은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신 지 오래지 않은 때이고, 끝은 선서께서 반열반하시려는 때이다. 이 두 때에는 승가가 한 맛이기 때문이다. 바른 계와 바른 견해에 종기가 아직 생기지 않은 때이다. 두 종기가 생겨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止)와 관(觀)의 첫째 쌍[의 제자]를 아직 세우지 않은 때이다. 법이 본래 그러하여 그들로 말미암아 빨리 다시 화합하기 때문이다. 부처께서 멸하신 뒤이다. 맞설 참된 큰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결계하지 않은 때이다. 한 결계 안에서 두 무리로 나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보광이 인용하는 『대비바사론』 권116은 이 여섯 때를 더 풀어 준다. 「두 종기」란 삿된 계와 삿된 견해로, 보광은 다섯 가지 일을 도라 하는 것이 삿된 계, 부처의 팔정도를 도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삿된 견해라 한다. 「지관의 첫째 쌍」은 모든 부처에게 법이 본래 그러하여 있는 「첫째 쌍의 현성 제자」이다. 법륜승이 깨지면 이 두 제자가 날과 밤을 넘기지 않고 다시 화합시키므로, 그들이 서기 전에는 법륜이 깨지지 않는다. 부처의 열반 뒤에 누가 「내가 큰 스승이다」라고 하면, 대중이 「큰 스승께서 계실 때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을 것이므로 깨지지 않는다. 장행은 이렇게 맺는다. 「법륜을 깨뜨림은 모든 부처에게 다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숙업에 의지해야 이 일이 있다(非破法輪諸佛皆有,必依宿業有此事故)」. 석가모니불 때 제바달다의 파승이 있었던 것은 부처 자신의 숙업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광은 『순정리론』을 인용해, 이 현겁의 가섭파불 때 석가모니가 남의 무리를 깨뜨린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역죄의 경계 사례들
왜 어머니를 해치는 것 등이 무간이 되고 다른 것은 되지 않는가.
棄壞恩德田,轉形亦成逆,母謂因彼血,誤等無或有,打心出佛血,害後無學無。
은혜의 밭을 버리고 공덕의 밭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형이 바뀌어도 역죄를 이룬다. 어머니란 그 피로 말미암은 이이다. 잘못 [죽인] 등은 [역죄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때리려는 마음으로 부처의 피를 내거나, 뒤에 무학이 된 이를 해친 것은 [역죄가] 없다.
부모를 해치는 것은 은혜의 밭을 버리는 것이다. 부모는 몸이 생긴 근본이기 때문이다. 아라한 등을 해치는 것은 공덕의 밭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들은 뛰어난 공덕을 갖추고, 공덕을 낼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 의지처를 무너뜨리므로 역죄가 된다.
장행은 여기서 경계에 놓인 사례들을 하나하나 판정한다(권18, T29, 94a). 아비달마의 법학적 사고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부모의 형이 바뀐 경우. 남녀의 근이 바뀐 부모를 죽여도 역죄가 된다. 의지하는 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도 아라한도 아닌 남자의 명근을 끊고서 무간죄에 닿는 일이 있는가. 있다, 어머니가 형이 바뀐 경우이다」라는 문답이 있다.
태가 옮겨진 경우. 어떤 여인의 갈라람(수태 직후의 태)이 떨어졌는데 다른 여인이 그것을 거두어 산문에 넣어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가 누구를 죽여야 어머니를 해친 역죄가 되는가. 그 피로 말미암은 이, 곧 첫 어머니이다. 몸이 생긴 근본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일은 뒤의 어머니에게 여쭈어야 한다. 먹이고 기르고 키웠기 때문이다.
잘못 죽인 경우. 부모에게 살생의 가행을 일으켰는데 잘못해서 다른 사람을 죽였다면 무간죄가 없다. 부모가 아닌 이에게 가행을 일으켰는데 잘못해서 부모를 죽였어도 역죄가 아니다. 아들이 몽둥이로 아버지 몸의 모기를 치다가 아버지를 죽인 경우, 어머니가 침상에 숨어 있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 알고 죽인 경우가 그 예다.
아라한인 줄 모르고 죽인 경우. 아라한이라는 생각 없이 그 몸에 대해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을 일으켰다면, 가리는 것이 없으므로 역죄가 된다. 아버지가 아라한인데 그를 죽였다면 역죄 하나를 얻는다. 의지하는 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가 시흠지(始欠持)에게 「너는 이미 두 역죄를 지었다. 아버지를 해치고 아라한을 죽였다」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나의 역죄가 두 연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이신 것이거나, 두 문으로 그 죄를 꾸짖으신 것이다. 보광은 시흠지를 남인도의 한 왕에게서 나라를 맡은 태자로 전한다. 부왕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는데, 돌아온 부왕을 태자가 해쳤다는 것이다.
때리려는 마음으로 부처의 피를 낸 경우. 부처에게 나쁜 마음으로 피를 내면 모두 무간죄인가.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이어야 역죄가 된다. 때리려는 마음으로 피를 냈다면 무간이 아니다.
죽는 순간 아라한이 된 경우. 살생의 가행을 일으킬 때는 아라한이 아니었는데 죽으려 할 때 아라한과를 얻었다면, 그를 죽인 이에게 역죄가 있는가. 없다. 무학의 몸에 대해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간업의 가행이 확정되면 그 사이에 이염과 득과가 있을 수 있는가. 「역죄를 짓는 가행이 확정되면 이염도 득과도 없다(造逆定加行,無離染得果)」. 다른 악업도의 가행 중간에 성도가 생기면 그 업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의지처가 그것과 반드시 어긋나기 때문이다.
무간업 가운데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雖了法非法,為欲破僧而起虛誑語顛倒顯示,此無間中為最大罪,由此傷毀佛法身故、障世生天解脫道故。謂僧已破乃至未合,一切世間入聖得果離染盡漏皆悉被遮,習定溫誦思等業息,大千世界法輪不轉,天人龍等身心擾亂,故招無間一劫異熟。由此破僧罪為最重,餘無間罪如其次第,第五三一後後漸輕。第二最輕,恩等少故。
법과 법 아닌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승가를 깨뜨리려고 거짓말을 일으켜 뒤바꾸어 보이는 것, 이것이 무간 가운데 가장 큰 죄이다. 이로써 부처의 법신을 해치고, 세간이 하늘에 태어나고 해탈하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승가가 이미 깨져 다시 화합하기 전까지는, 모든 세간에서 성자의 길에 들고 과를 얻고 염오를 떠나고 번뇌가 다하는 일이 모두 막히고, 선정을 익히고 경을 외우고 사유하는 등의 일이 그치며, 대천세계에 법륜이 구르지 않고, 하늘 · 사람 · 용 등이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므로 무간[지옥]의 한 겁의 이숙을 부른다. 이 때문에 파승의 죄가 가장 무겁다. 나머지 무간의 죄는 차례대로 다섯째, 셋째, 첫째가 뒤로 갈수록 점점 가볍다. 둘째가 가장 가볍다. 은혜 등이 적기 때문이다.
무게의 순서는 이렇다. 파승(넷째)이 가장 무겁고, 다음 출불신혈(다섯째), 해아라한(셋째), 해모(첫째), 그리고 해부(둘째)가 가장 가볍다. 보광은 이 순서를 은전과 덕전으로 설명한다. 덕전은 유정을 생사의 괴로움에서 건질 수 있으므로 은전보다 무겁다. 덕전 가운데서는 파승이 가장 무겁다. 모든 부처의 스승인 법, 곧 법신을 해치기 때문이다. 다음은 부처의 피를 내는 것이니 부처의 공덕이 아라한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은전 가운데서는 어머니가 더 무겁다. 배고 기른 자애의 은혜가 크기 때문이다. 보광은 또 승가가 깨진 동안 막히는 것 — 입성 · 득과 · 이염 · 누진 — 을 「응당 성자의 길에 들 이, 응당 과를 얻을 이 …」로 풀어, 깨진 승가가 그 시간 동안 세계 전체의 해탈을 정지시킨다고 읽는다.
반대쪽 끝에서, 세간의 선 가운데 가장 큰 과보를 부르는 것은 제일유, 곧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게 하는 사이다. 팔만 대겁 동안 극히 고요한 이숙을 받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이숙과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이계과를 기준으로 하면 금강유정과 상응하는 사가 큰 과를 얻는다. 모든 결박을 영원히 끊는 것이 그 과이기 때문이다. 그것과 구별하려고 「세간의 선」이라 했다.
무간업에 가까운 업 — 무간동류
污母無學尼,殺住定菩薩,及有學聖者,奪僧和合緣,破壞窣堵波,是無間同類。
어머니이자 무학인 비구니를 더럽히는 것, 정해진 데 머무는 보살과 유학의 성자를 죽이는 것, 승가가 화합하는 연을 빼앗는 것, 탑을 부수는 것이 무간과 같은 부류이다.
무간업만이 반드시 지옥에 나는가, 무간과 같은 부류도 반드시 거기에 나는가. 어떤 이들은 같은 부류는 무간지옥에 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섯 무간동류는 차례대로 다섯 무간에 대응한다. 어머니이자 아라한인 비구니에게 극히 더러운 일, 곧 비범행을 행하는 것은 해모에, 정해진 데 머무는 보살을 죽이는 것은 해부에, 유학의 성자를 죽이는 것은 해아라한에, 승가가 화합하는 연을 빼앗는 것은 파승에, 탑을 부수는 것은 출불신혈에 대응한다. 「정해진 데 머무는 보살」이 누구인지는 보살의 묘상업을 다루는 자리에서 본다.
또 세 때에는 이숙업이 극히 장애가 된다(「將得忍不還,無學業為障」). 정위(頂位)에서 인위(忍位)를 얻으려 할 때는 악취를 부르는 업이 극히 장애가 된다. 인위는 악취의 이숙지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던 나라를 떠나려 할 때 모든 빚쟁이가 극히 장애가 되는 것과 같다(「如人將離本所居國,一切債主皆極為障」). 불환과를 얻으려 할 때는 욕계에 매인 업이, 무학과를 얻으려 할 때는 색 · 무색계의 업이 극히 장애가 된다. 다만 순현법수업은 예외이다(권18, T29, 94c).
- ④ 파승가장 무거움「傷毀佛法身」무간지옥 한 겁
- ⑤ 출불신혈
- ③ 해아라한
- ① 해모
- ② 해부가장 가벼움「恩等少故」
- 어머니이자 무학인 비구니를 더럽힘
- 주정보살을 죽임
- 유학의 성자를 죽임
- 승가가 화합하는 연을 빼앗음
- 탑을 부숨
본송
從修妙相業,菩薩得定名,生善趣貴家,具男念堅故。 贍部男對佛,佛思思所成,餘百劫方修,各百福嚴飾。 於三無數劫,各供養七萬,又如次供養,五六七千佛。 施戒修三類,各隨其所應,受福業事名,差別如業道。
묘상의 업을 닦을 때부터 보살은 「정해짐」의 이름을 얻는다. 선취와 귀한 집에 태어나고, [근을] 갖추고, 남자이며, [숙명을] 기억하고, 굳세기 때문이다. 남섬부주의 남자로서 부처를 마주하여, 부처를 [반연하는] 사이며 사(思)로 이룬 것이니, 나머지 백 겁에 비로소 닦고, [상] 하나하나를 백 가지 복으로 장엄한다. 세 무수겁에 각각 칠만, 또 차례대로 오천 · 육천 · 칠천의 부처를 공양했다. 보시 · 지계 · 수습의 세 부류는 각각 그 마땅함에 따라 복 · 업 · 사의 이름을 받으니, 그 차별은 업도와 같다.
술어 풀이
- 妙相業묘상업
- 부처의 서른두 가지 대장부상(dvātriṃśan mahāpuruṣa-lakṣaṇāni)을 이숙과로 부르는 업. 보살이 성불 전 마지막 백 겁 동안 닦는다.
- 三無數劫삼무수겁
- 세 아승기겁(asaṃkhyeya-kalpa).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성불하기까지 거치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세 시간.
- 百福백복
- 백 가지 복. 상 하나하나를 장엄하는 복. 『대비바사론』은 이것을 「백 가지 사(思)」로 푼다.
- 福量복량
- 「복 하나의 양」. 상 하나를 장엄하는 백 복 가운데 한 복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여러 설.
- 波羅蜜多바라밀다
- 저 언덕에 이름(pāramitā).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정려 · 반야의 여섯. 『구사론』은 그 원만이 보살의 네 시기에 이루어진다고 본다.
- 福業事복업사
- 복이 되는 일(puṇyakriyāvastu). 보시 · 지계 · 수습의 셋. 하나하나가 「복」 · 「업」 · 「사」의 이름을 어떻게 받는지를 업도처럼 따진다.
- 施시
- 보시(dāna). 『구사론』은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버리는 것」, 곧 신 · 어업과 그것을 일으키는 것을 보시의 체로 본다.
- 順解脫分순해탈분
- 해탈에 따르는 몫의 선(mokṣabhāgīya). 반드시 열반의 과를 부르는 선. 이것이 생기면 그 사람을 「몸에 열반의 법이 있는 이」라 한다.
정해진 데 머무는 보살
무간동류에 「정해진 데 머무는 보살을 죽이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보살은 언제부터 「정해짐」의 이름을 얻으며, 무엇이 정해지는가. 게송은 묘상업을 닦을 때부터라고 답한다. 그때부터 성불할 때까지 늘 선취와 귀한 집 등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生善趣者,謂生人天,趣妙可稱故名善趣。於善趣內常生貴家,謂婆羅門或剎帝利、巨富長者大婆羅家。於貴家中根有具缺,然彼菩薩恒具勝根,恒受男身尚不為女,何況有受扇搋等身。生生常能憶念宿命,所作善事常無退屈。
선취에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과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다. 취가 묘하여 칭찬할 만하므로 선취라 한다. 선취 안에서 늘 귀한 집에 태어나니, 바라문이나 찰제리, 큰 부자인 장자의 큰 집안이다. 귀한 집안에서도 근을 갖춘 이와 모자란 이가 있으나, 저 보살은 늘 뛰어난 근을 갖춘다. 늘 남자의 몸을 받아 여자도 되지 않는데 하물며 선체 등의 몸을 받겠는가. 태어날 때마다 늘 숙명을 기억하고, 짓는 선한 일에 늘 물러섬이 없다.
「굳셈(堅)」의 풀이가 아름답다. 유정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 가운데 뭇 괴로움이 몸을 핍박해도 다 견디고, 남이 갖가지로 거스르는 악행을 해도 마음에 싫어함이 없다. 세간에 전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종」이라는 말이 바로 이 보살을 가리킨다고 장행은 말한다. 보살은 이미 뛰어난 공덕을 다 이루었으면서도, 오래 익힌 무연대비 때문에 저절로 늘 남에게 매여 있다. 모든 유정을 교만 없는 마음으로 자기와 같이 거두거나, 늘 자신을 그들의 종처럼 보므로, 모든 어려운 일과 고된 일을 다 견디고 짊어진다.
경량부의 숙구사(宿舊師)는 이와 다르게, 보살이 첫 무수겁을 벗어날 때부터 이미 네 허물을 떠나고 두 공덕을 얻는다고 했다(「宿舊師說:菩薩出初無數劫來,離四過失、得二功德」, 권18, T29, 95a). 보광은 네 허물을 악취 · 가난한 집 · 사지의 결함 · 여인 등의 몸을 떠남으로, 두 공덕을 숙명념과 물러서지 않음으로 풀이하고, 유부에서는 삼무수겁을 벗어나 묘상업을 닦은 뒤에야 이것들을 얻는다고 대비한다.
묘상업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닦는가
게송 「贍部男對佛,佛思思所成,餘百劫方修,各百福嚴飾」의 한 구 한 구가 조건이다(권18, T29, 95a). 보살은 남섬부주에서만 묘상을 이끄는 업을 짓고 닦는다. 이 대주의 각혜가 가장 밝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남자의 몸이어야 한다. 그때는 이미 여인 등의 자리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부처를 눈앞에 마주하여, 부처를 반연하여 일으키는 사여야 한다. 그것은 사(思)로 이루어진 것이지 문(聞)이나 수(修)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세 무수겁을 지난 뒤 나머지 백 겁 동안만 닦고 더 많이는 닦지 않는다. 모든 부처의 인위(因位)에서 법이 그러하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唯薄伽梵釋迦牟尼,精進熾然能超九劫,九十一劫妙相業成。是故如來告聚落主:我憶九十一劫以來,不見一家因施我食有少傷損,唯成大利。
오직 박가범 석가모니만이 정진이 불타올라 아홉 겁을 뛰어넘어, 아흔한 겁에 묘상업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취락의 주인에게 이르셨다. 「나는 아흔한 겁 이래를 기억하는데, 한 집도 나에게 음식을 보시한 까닭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본 것을 보지 못했고, 오직 큰 이익만 이루었다.」
백 겁 가운데 아홉 겁을 뛰어넘은 이 정진이 무엇이었는지는 뒤에 바라밀의 원만에서 밝혀진다. 그리고 「상 하나하나를 백 복으로 장엄한다」는 구절에 대해, 그 「한 복의 양」은 얼마인가라는 물음이 나온다.
有說:唯除近佛菩薩,所餘一切有情所修富樂果業名一福量。有說:世界將欲成時,一切有情感大千土業增上力為一福量。有說:此量唯佛乃知。
어떤 이는 말한다. 부처에 가까운 보살을 빼고, 나머지 모든 유정이 닦은 부귀와 즐거움의 과보를 부르는 업이 한 복의 양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세계가 이루어지려 할 때 모든 유정이 대천세계를 부르는 업의 증상력이 한 복의 양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이 양은 오직 부처만이 안다.
보광은 『대비바사론』 권177을 인용해 이 세 설을 정리하고, 마지막 설을 바른 것으로 삼는다. 『대비바사론』의 평가는 이렇다. 앞의 여러 설은 모두 깨끗한 의요로 보살의 복의 양을 방편으로 찬미한 것일 뿐 그 실상을 얻지 못했다. 실제의 뜻으로는 보살이 일으킨 한 복 한 복의 양이 한량없고 끝이 없으니, 보살이 세 무수겁에 걸쳐 모든 바라밀다를 쌓아 원만히 한 뒤에 이끌어 낸 사와 원이 극히 넓고 크기 때문이다.
如實義者。菩薩所起一一福量無量無邊。以菩薩三無數劫積集圓滿諸波羅蜜多已。所引思願極廣大故。唯佛能知。非餘所測。
실제의 뜻으로는, 보살이 일으킨 한 복 한 복의 양은 한량없고 끝이 없다. 보살이 세 무수겁에 걸쳐 모든 바라밀다를 쌓아 원만히 한 뒤에 이끌어 낸 사와 원이 극히 넓고 크기 때문이다.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고 다른 이가 헤아릴 수 없다.
「백 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보광은 『대비바사론』을 인용한다. 「백 복」은 「백 가지 사」이다. 보살이 발이 편히 머무는 상(足善住相)의 업을 지어 쌓을 때, 먼저 쉰 가지 사를 일으켜 몸이라는 그릇을 다스려 깨끗하고 부드럽게 하고, 다음에 한 사를 일으켜 바로 그 상을 이끌고, 뒤에 다시 쉰 가지 사를 일으켜 그것을 원만히 한다. 농부가 먼저 밭이랑을 다스리고, 다음에 씨를 뿌리고, 뒤에 거름과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쉰 가지 사란 열 업도 하나하나에 다섯 가지 사 — 그것을 떠나는 사, 남을 그쪽으로 이끄는 사, 찬미하는 사, 따라 기뻐하는 사, 회향하는 사 — 가 있는 것이다(『대비바사론』 권177, T27, 889c).
- 「贍部」남섬부주
- 「男」남자
- 「對佛」부처를 마주하여
- 「佛思」부처를 반연한 사
- 「思所成」사로 이룬 것
- 「餘百劫」삼무수겁 뒤의 백 겁
- 앞의 쉰(그릇을 다스림)
- + 하나(상을 이끎)
- + 뒤의 쉰(원만히 함)
세 무수겁에 만난 부처들
初無數劫中供養七萬五千佛,次無數劫中供養七萬六千佛,後無數劫中供養七萬七千佛。
첫째 무수겁에 칠만 오천의 부처를 공양하고, 다음 무수겁에 칠만 육천의 부처를 공양하고, 마지막 무수겁에 칠만 칠천의 부처를 공양했다.
그리고 각 무수겁이 찰 때와 처음 발심할 때 만난 부처를 게송이 거꾸로 든다. 「세 무수겁이 찰 때 거꾸로 승관 · 연등 · 보계불을 만났고, 처음에 석가모니를 만났다(三無數劫滿,逆次逢勝觀,然燈寶髻佛,初釋迦牟尼)」. 셋째 무수겁이 찰 때 만난 부처가 승관(勝觀, 비바시불), 둘째 무수겁이 찰 때 만난 부처가 연등(然燈), 첫째 무수겁이 찰 때 만난 부처가 보계(寶髻)이다. 그리고 처음 발심할 때 만난 부처의 이름이 석가모니였다.
謂我世尊昔菩薩位最初逢一佛號釋迦牟尼,遂對其前發弘誓願:願我當作佛,一如今世尊。彼佛亦於末劫出世,滅後正法亦住千年。故今如來一一同彼。
우리 세존께서 옛날 보살의 자리에서 맨 처음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한 부처를 만나, 그 앞에서 큰 서원을 일으키셨다. 「원컨대 나도 부처가 되어, 지금의 세존과 하나하나 같아지이다.」 그 부처도 말겁에 세상에 나오셨고, 멸하신 뒤 정법이 천 년 머물렀다. 그러므로 지금의 여래도 하나하나 그와 같다.
여섯 바라밀은 어디서 원만해졌는가
但由悲普施,被析身無忿,讚歎底沙佛,次無上菩提,六波羅蜜多,於如是四位,一二又一二,如次修圓滿。
오직 자비로 널리 베풂, 몸을 잘려도 성내지 않음, 저사불을 찬탄함, 무상보리의 바로 앞 — 여섯 바라밀다는 이 네 자리에서 하나 · 둘 · 또 하나 · 둘이 차례대로 닦아져 원만해졌다.
보시바라밀은 보살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눈과 골수에 이르기까지 베풀되 그것이 오직 자비에서 나오고 뛰어난 태어남을 바라서가 아닐 때 원만해졌다. 계와 인욕의 바라밀은 보살이 몸의 마디마디를 잘리면서도, 아직 욕탐을 떠나지 못했는데도 마음에 조금의 성냄도 없었을 때 원만해졌다. 정진바라밀은 이렇게 원만해졌다.
若時菩薩勇猛精進因行,遇見底沙如來坐寶龕中入火界定威光赫奕特異於常,專誠瞻仰忘下一足,經七晝夜無怠,淨心以妙伽他讚彼佛曰:
보살이 용맹하게 정진하며 행하다가, 저사여래께서 보배 감실에 앉아 화계정에 들어 위엄 있는 빛이 찬란하여 평소와 달리 뛰어나신 것을 보고, 오롯이 우러러보느라 한쪽 발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칠 일 밤낮을 게으름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묘한 게송으로 그 부처를 찬탄했다.
그 게송이 「천지와 이 세계와 다문실, 서궁과 하늘의 처소와 시방에 견줄 이 없도다. 장부 · 우왕 · 대사문이여, 땅과 산과 숲을 다 찾아도 같은 이 없도다(天地此界多聞室,逝宮天處十方無,丈夫牛王大沙門,尋地山林遍無等)」이다. 이렇게 찬탄하고 아홉 겁을 뛰어넘었다. 앞에서 본 「아홉 겁을 뛰어넘어 아흔한 겁에 묘상업을 이루셨다」는 것이 이것이다. 정려와 반야의 바라밀은 보살이 금강좌에 앉아 무상정등보리에 오르려 할 때, 그 바로 앞의 금강유정에 머물 때 원만해졌다. 이 여섯을 바라밀다라 하는 것은 자기가 가야 할 원만한 공덕의 저 언덕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복업사 — 복 · 업 · 사의 이름
경은 세 가지 복업사를 설한다. 보시 부류, 지계 부류, 수습 부류. 무엇을 「복업사」라 하는가. 게송은 「차별이 업도와 같다」고 한다. 업도에 「업이자 길인 것」과 「길이되 업이 아닌 것」이 있었듯이, 여기에도 복이자 업이자 사인 것, 복이자 업이되 사가 아닌 것, 복이자 사이되 업이 아닌 것, 복이되 업도 사도 아닌 것이 있다(권18, T29, 95c).
무엇이 보시인가, 무엇이 보시의 과를 다르게 하는가
雖所捨物亦得施名,而於此中捨具名施,謂由此具捨事得成,故捨所由是真施體。
버리는 물건도 보시라는 이름을 얻지만, 여기서는 버리게 하는 도구를 보시라 한다. 이 도구로 말미암아 버리는 일이 이루어지므로, 버림이 말미암는 것이 참된 보시의 체이다.
보시의 체는 내어 준 물건이 아니라, 내어 주는 일을 이루게 하는 신 · 어업과 그것을 일으키는 것(무탐과 함께하는 마음의 무리)이다. 두려움이나 바람이나 탐 때문에도 버리는 일은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보시가 아니다. 남을 공양하고 이롭게 하려고 버리는 것만이 보시이다. 보시 부류의 복업사는 미래와 현재에 큰 재부를 과로 부른다.
보시의 과가 다른 것은 세 가지 때문이다. 베푸는 주인, 베푸는 재물, 베푸는 밭(「由主財田異,故施果差別」).
주인이 다름. 믿음 · 계 · 들음 등의 공덕을 갖춘 주인이 법답게 공경하는 보시 · 손수 하는 보시 · 때맞추는 보시 · 손해 없는 보시를 행하면, 차례대로 남에게 존중받는 과, 넓고 큰 재물을 즐겨 누리는 과, 필요할 때 때맞추어 오는 재물의 과, 남에게 빼앗기거나 불 등에 무너지지 않는 재물의 과를 얻는다(권18, T29, 96a).
밭이 다름. 취 · 괴로움 · 은혜 · 공덕이 다르다. 취가 다른 예로, 세존은 축생에게 베풀면 백 배의 과, 계를 범한 사람에게 베풀면 천 배의 과를 받는다고 하셨다. 괴로움이 다른 예로, 일곱 가지 유의 복업사 가운데 손님 · 길손 · 병자 · 간병인에게 베푸는 것 등이 있다. 은혜가 다른 예로, 부모와 스승과 은혜 있는 이, 그리고 『본생경』의 곰과 사슴처럼 은혜 있는 무리가 있다. 공덕이 다른 예로, 경은 계를 지닌 이에게 베풀면 억 배의 과를 받는다고 한다(권18, T29, 96b).
경은 예류향에게 베풀면 그 과가 무량하고 예류과에게 베풀면 더 크다고 한다. 성자가 아닌데도 무량한 과를 부르는 밭이 있는가. 「부모 · 병자 · 법사 · 최후생의 보살은 비록 성자를 증득하지 않았더라도 보시의 과가 무량하다(父母病法師,最後生菩薩,設非證聖者,施果亦無量)」. 법사는 은전에 속한다. 세간의 큰 선지식이기 때문이고, 무명에 눈먼 이에게 지혜의 눈을 주기 때문이며, 세간의 안위를 열어 보이기 때문이고, 유정에게 무루의 법신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법을 잘 설하는 법사는 부처가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받는 이 없는 보시와 나쁜 밭의 보시
여기서 하나의 날카로운 논쟁이 있다(권18, T29, 97a~97b). 장행은 보시를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로 넷으로 나누면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못한 이 등 범부가 제다(탑)에 베푸는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는 보시라고 했다(권18, T29, 96a). 그런데 받는 이가 없는데 복이 어떻게 생기는가. 게송은 「제다에는 버림의 부류의 복이 있으니, 자(慈) 등에 받는 이가 없는 것과 같다(制多捨類福,如慈等無受)」고 답한다.
복에는 두 부류가 있다. 버림의 부류(捨類)와 받음의 부류(受類). 버림의 복은 선한 마음으로 재물을 버리기만 하면 생기고, 받음의 복은 받는 밭이 그 물건을 써야 생긴다. 제다에 공양하면 받음의 복은 없어도 버림의 복은 있다. 반론자는 받아 쓰는 이가 없으면 남을 이롭게 함이 없으니 복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장행은 이렇게 답한다. 복이 반드시 남을 이롭게 하여 이루어진다면, 자애 등을 닦는 것과 정견 등도 복을 낳지 못해야 한다. 자애의 선정을 닦는 이는 받는 이도 없고 남을 이롭게 함도 없지만 자기 마음에서 한량없는 복이 생긴다. 공덕 있는 이가 이미 멸하여 지나갔어도 그를 공경하여 공양하면 복은 자기 마음에서 생긴다.
그러면 공양하는 몸과 말의 업은 헛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업을 일으키는 마음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원수를 해치려는 사람은 원수가 이미 죽었는데도 원수라는 생각을 품고 갖가지 나쁜 몸과 말의 업을 일으키면, 그저 마음만 일으킨 것보다 많은 비복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큰 스승이 이미 지나가셨어도 추모하여 공양하며 몸과 말의 업을 일으키면, 그저 마음만 일으킨 것보다 많은 복이 생긴다.
또 다른 물음. 좋은 밭에 보시의 씨를 심으면 사랑스러운 과를 부르지만, 나쁜 밭에 심으면 사랑스럽지 않은 과를 불러야 하지 않는가. 게송은 「나쁜 밭에도 사랑스러운 과가 있으니, 씨와 열매가 뒤바뀌지 않기 때문이다(惡田有愛果,種果無倒故)」라고 답한다. 밭에서 보듯이 단 열매의 씨에서는 단 열매가 나고, 쓴 열매의 씨에서는 쓴 열매가 난다. 밭의 힘으로 씨와 열매가 뒤바뀌지는 않는다. 시주가 나쁜 밭에 베풀더라도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보시의 씨를 심으면 사랑스러운 과만 부른다. 다만 밭의 허물 때문에 그 열매가 적거나 아예 없을 수는 있다.
계와 수습 — 생천과 해탈
離犯戒及遮,名戒各有二,非犯戒因壞,依治滅淨等。
범계와 차[죄]를 떠나는 것을 계라 하니, 각각 둘이 있다. 범계와 [그] 원인에 무너지지 않고, 대치와 멸에 의지하면 청정하다 등.
성죄와, 때 아닌 때 먹음 같은 차를 떠나는 것을 모두 계라 하고, 각각 표와 무표의 둘이 있다. 범계에 무너지지 않음, 범계의 원인인 번뇌에 무너지지 않음, 대치에 의지함, 뛰어난 태어남이 아니라 열반에 회향함의 네 덕을 갖추면 청정한 계라 한다(권18, T29, 97b).
수습은 무엇인가. 「등인의 선을 수습이라 하니, 마음을 극히 잘 훈습하기 때문이다(等引善名修,極能熏心故)」. 삼매와 그것과 함께하는 것이 그 체이다. 정지(定地)의 선은 마음의 상속을 극히 잘 훈습하여 공덕의 부류를 이루게 하니, 꽃이 참깨에 향을 배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것만을 「수습(修)」이라 한다.
세 복업사의 과는 이렇다. 보시는 큰 재부를 부르고, 「계와 수습은 뛰어남이 차례대로 생천과 해탈을 부른다(戒修勝如次,感生天解脫)」. 「뛰어남」이라 한 것은 뛰어난 쪽을 들어 말했다는 뜻이다. 보시도 생천을 부를 수 있지만 뛰어난 쪽을 들어 계를 말했고, 계를 지녀도 이계과를 부를 수 있지만 뛰어난 쪽을 들어 수습을 말했다.
범복, 법시, 그리고 세 가지 몫의 선
경은 네 사람이 범복(梵福)을 낳는다고 한다. ① 여래의 사리를 공양하려고 일찍이 없던 곳에 탑을 세우는 이 ② 사방의 승가를 공양하려고 절을 짓고 동산을 베풀고 네 가지를 공급하는 이 ③ 깨진 부처의 제자들을 화합시키는 이 ④ 유정에게 널리 자애 등을 닦는 이. 범복의 양은 얼마인가. 선대 궤범사는 「한 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 쾌락을 받게 하는 복이 한 복의 양」이라 했다. 그것으로 받는 쾌락의 시간이 범보천의 한 겁의 수명과 같기 때문이다. 비바사사는 묘상업을 분별할 때 말한 복의 양이 바로 이것과 같다고 했다(권18, T29, 97c~98a). 승가가 화합하는 연을 빼앗는 것이 무간동류였다면, 여기서는 깨진 승가를 화합시키는 것이 범복이다. 업품은 파승의 무게를 그 반대편의 복으로도 보여 준다.
법시는 무엇인가. 「법시는 여실하게, 염오 없이 경 등을 풀어 말하는 것(法施謂如實,無染辯經等)」이다. 유정에게 여실하게, 염오 없는 마음으로 경 등을 풀어 바른 이해를 내게 하는 것을 법시라 한다. 그러므로 뒤바뀐 마음이나 염오한 마음으로 이익과 명예와 공경을 구하며 설하는 사람은 자기와 남의 큰 복을 손상시킨다.
마지막으로 경이 설한 세 가지 몫의 선이 있다. 복에 따르는 몫(順福分)은 세간의 사랑스러운 과를 부르는 선이다. 해탈에 따르는 몫(順解脫分)은 반드시 열반의 과를 부르는 선이다. 결택에 따르는 몫(順決擇分)은 가까이 성도의 과를 부르는 선, 곧 난 · 정 · 인 · 세제일법의 넷이다. 순해탈분에 대해 장행은 하나의 정경을 그린다.
若有聞說生死有過、諸法無我、涅槃有德,身毛為竪悲泣墮淚,當知彼已殖順解脫分善。如見得雨場有芽生,知其穴中先有種子。
만약 생사에 허물이 있고, 모든 법에 나가 없으며, 열반에 공덕이 있다는 설법을 듣고 몸의 털이 곤두서고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다면, 그가 이미 순해탈분의 선을 심었음을 알아야 한다. 비를 맞은 마당에 싹이 돋는 것을 보면 그 구멍에 먼저 씨앗이 있었음을 아는 것과 같다.
이 선이 생기면 그 유정을 「몸 안에 열반의 법이 있는 이」라 부른다. 분별업품은 첫 게송에서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업 가운데에는 세간의 차별을 넘어서는 씨앗을 심는 업도 있음을 보인다. 비 갠 마당에 돋아나는 싹이 그 씨앗의 증거다.

본송
然許業道是心種類,由身加行事究竟時,離於心身於能教者身中別有無表法生,如是所宗不令生喜。若由此引彼加行生事究竟時,即此由彼相續轉變差別而生,如是所宗可令生喜。但由心等相續轉變差別,能生未來果故。
[유부는] 업도가 마음의 부류라고 인정하면서도, 몸의 가행으로 일이 끝날 때 마음과 몸을 떠나 가르친 이의 몸에 따로 무표법이 생긴다고 한다. 이런 종의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가르친 이가] 이로써 저 [심부름하는 이]의 가행을 이끌어 일이 끝날 때, 바로 이 [가르친 이]가 저 [일]로 말미암아 상속이 바뀌어 특별한 상태로 생긴다고 하는 종의는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오직 마음 등의 상속전변차별로 말미암아 미래의 과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본송 자리에 게송 대신 장행 한 대목을 둔다. 업품 안에서 유부와 경량부의 대론이 가장 압축되어 드러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는 경량부의 편에 선 천친이다(법보는 이 대목을 「경량부의 종의를 인정하는 까닭을 답한 것」이라 푼다). 천친은 이 직전에 「이 둘은 모두 알기 어렵고, 나는 여기서 미워하는 바가 없다(然此與彼俱難了知,今於此中無所憎嫉)」고 말한다(권13, T29, 69c).
술어 풀이
- 相續상속
- 이어짐(saṃtati). 『구사론』 파집아품의 정의로는 「업이 먼저 있고 뒤에 색과 마음이 일어나 그 사이에 끊어짐이 없는 것」.
- 轉變전변
- 바뀜(pariṇāma). 「그 상속이 뒤 찰나마다 앞 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
- 差別차별
- 특별한 상태(viśeṣa). 「그 전변이 마지막 때에 뛰어난 힘을 가져 틈 없이 과보를 낳는 것」.
- 熏習훈습
- 배어듦(vāsanā). 사(思)가 마음의 흐름에 남기는 영향. 꽃향기가 참깨에 배듯이.
- 種子종자
- 씨앗(bīja). 경량부가 업의 지속을 설명하는 비유이자 개념. 보광은 「훈습 · 미세 · 상속 · 전변 · 차별」을 모두 종자의 다른 이름이라 한다.
- 經主경주
- 『순정리론』에서 중현이 천친을 부르는 이름. 『구사론』이라는 「경」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같은 질문, 두 개의 답
분별업품 여섯 권을 다 읽고 나면, 같은 질문이 업품의 거의 모든 자리에서 되풀이되었음을 알게 된다. 업은 지나간 뒤에 무엇으로 남는가. 계를 받은 사람이 잠들었을 때, 보시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때, 사람을 시킨 이가 그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 다른 곳에 있을 때, 무엇이 그를 그 업의 주인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업품은 그 모든 자리에서 같은 두 개의 답을 나란히 놓았다.
유부의 답은 「무표」이다. 표업이 일어나는 찰나에 별도의 대종으로 만들어진, 보이지도 장애하지도 않는 실재의 색이 생기고, 그 색이 그 사람의 몸에서 이어진다. 계는 그 색을 「성취」하는 것이고, 복의 증장은 그 색이 이어지는 것이며, 시킨 살생의 업도는 상대가 죽는 찰나에 시킨 이의 몸에 그 색이 생기는 것이다. 과거의 업은 과거의 법으로서 실재하며, 무표는 과거의 대종에 의지해서도 생길 수 있다.
경량부의 답은 「상속전변차별」이다. 업을 이루는 것은 사(思)뿐이다. 사가 일어나면 그것이 마음의 흐름에 배어들고(훈습), 그 흐름은 이어지며(상속), 찰나마다 조금씩 달라지고(전변), 마침내 과보를 낳을 특별한 힘을 가진 상태에 이른다(차별). 계는 서원한 사가 남긴 훈습이고, 복의 증장은 받는 이가 그 물건을 쓰며 얻는 공덕에 따라 그 훈습이 무르익는 것이며, 시킨 살생의 업도는 일이 이루어질 때 시킨 이의 흐름이 바뀌는 것이다.
천친의 저울 — 「기쁘게 할 수 있는 종의」
이 두 답 사이에서 천친은 어디에 서 있는가. 업품은 그 자리를 한 번 분명히 보여 준다. 무표의 넷째 증거(시켜서 지은 업도)를 다루는 대목에서, 천친은 대덕(법구)의 설을 소개한 뒤 이렇게 말한다.
若依此說非不應理,何於無表偏懷憎嫉定撥為無,而許所熏微細相續轉變差別?然此與彼俱難了知,今於此中無所憎嫉。
[천친:] 이 설에 의지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 [유부:] 어찌하여 무표에 대해서만 미움을 품어 단호히 없다고 하면서, 훈습된 미세한 상속의 전변차별은 인정하는가. [천친:] 그러나 이것과 저것은 모두 알기 어렵다. 나는 여기서 미워하는 바가 없다.
가운데 문장은 유부가 경량부를 향해 던진 질문이다(법보도 이 대목을 「유부가 경량부의 치우친 마음을 꾸짖은 것」이라 푼다). 무표가 알기 어렵다면 상속전변차별도 알기 어렵지 않은가. 천친은 그 질문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둘 다 알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느 한쪽을 미워해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곧바로 본송 자리에 둔 문장으로 저울을 단다. 유부는 업도가 「마음의 부류」라고 하면서도 일이 끝나는 순간 마음과 몸을 떠나 가르친 이의 몸에 별도의 법이 생긴다고 한다. 이것은 기쁘게 하지 못한다. 가르친 이의 흐름 자체가 그 일로 말미암아 바뀐다고 하는 것은 기쁘게 할 수 있다.
「기쁘게 한다(生喜)」는 말이 눈길을 끈다. 천친은 「참이다」, 「거짓이다」라고 하지 않고 「기쁘게 하지 못한다」,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둘 다 직접 지각할 수 없는 것을 놓고, 어느 쪽이 더 적은 가정으로 더 자연스럽게 설명하는가를 저울질하는 말이다. 무표는 업의 본질이 마음이라고 하면서 마음 밖에 별도의 색법을 세운다. 상속전변차별은 업의 본질이 마음이라는 원칙을 끝까지 지킨다. 천친의 「기쁨」은 이 정합성에서 온다.
그리고 천친은 「또 앞에서 이미 말했다(又先已說)」며 하나의 원칙을 덧붙인다. 표업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무표가 어떻게 있겠는가. 이 원칙은 신표업이 형색인가를 다툰 논쟁과 무표색의 실재를 다툰 논쟁을 하나로 묶는다. 경량부가 형색의 실재를 무너뜨린 순간, 형색에 기대어 생긴다는 무표의 실재도 함께 흔들리게 된 것이다.
중현의 반격 — 「광대가 옷을 바꿔 입듯이」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 저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먼저 「상속 · 전변 · 차별이 각각 무엇이냐」고 묻고 경량부의 답을 전한다. 사업(思業)이 먼저 있고 뒤에 뒤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 상속, 그 상속이 뒤로 갈수록 따로따로 생기는 것이 전변, 그것이 틈 없이 과보를 낳을 때 힘이 앞보다 뛰어난 것이 차별이다(「思業為先,後後心生說名相續。即此相續,於後後時別別而生,說名轉變。即此無間能生果時功力勝前,說名差別」, 『순정리론』 권35, T29, 541c). 그리고 이렇게 평한다.
如是所說,即是前來我所數破舊隨界等,而今但以別異言詞,如倡伎人矯易服飾,方便通釋所引契經。
이렇게 말한 것은 앞에서 내가 여러 번 깨뜨린 「구수계(舊隨界)」 등에 지나지 않는데, 이제 다른 말로 바꾸어, 광대가 옷을 바꿔 입듯이 방편으로 인용한 경을 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상속전변차별의 정의는 업품이 아니라 『구사론』 맨 끝 파집아품에 나온다. 「무엇을 상속전변차별이라 하는가. 업이 먼저 있고 뒤에 색과 마음이 일어나 그 사이에 끊어짐이 없는 것을 상속이라 한다. 이 상속이 뒤 찰나마다 앞 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을 전변이라 한다. 이 전변이 마지막 때에 뛰어난 힘을 가져 틈 없이 과보를 낳아 다른 전변보다 뛰어난 것을 차별이라 한다(何名相續轉變差別?謂業為先,後色心起,中無間斷,名為相續。即此相續,後後剎那異前前生,名為轉變。即此轉變,於最後時有勝功能無間生果,勝餘轉變,故名差別)」(권30 파집아품, T29, 159a). 천친은 업품에서 꺼낸 이 개념을 「나」를 논파하는 마지막 품에서 정식으로 정의한다.
「구수계」는 중현이 상좌의 종자설을 부르는 이름이다. 중현에게 상속전변차별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이미 반박한 종자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는 더 나아가 그것을 「헛된 말이 거짓으로 합해진 것일 뿐, 승론(勝論, Vaiśeṣika)이 집착하는 합 · 덕 · 동이 · 화합처럼 별도의 체가 없다」고 비판한다(권35, T29, 542a). 마음의 흐름이 앞뒤로 다르다는 것은 그저 마음이 앞뒤로 다르다는 것일 뿐인데, 그 다름이 어떻게 갖가지로 다른 과보의 원인이 되는가. 하나의 마음의 체에 갖가지 것이 있을 수는 없다.
시켜서 지은 살생의 경우에 대해서도 중현은 정면으로 묻는다(권35, T29, 542c~543a). 가르친 이가 사람을 보낸 뒤 인과의 이치를 깨달아 깊이 뉘우치고 뛰어난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고 하자. 그런데 바로 그때 심부름하는 이가 살생을 끝냈다. 그 순간 가르친 이의 마음의 흐름에 살생의 업도가 생긴다면, 그 흐름은 사랑스러운 과를 얻는가, 사랑스럽지 않은 과를 얻는가, 둘 다인가. 어느 쪽도 이치에 맞지 않다. 선한 마음이 괴로운 과를 부를 수는 없다. 「가르친 이의 마음이 이미 선하게 이어지는데, 다시 무슨 법을 내세워 미래의 많은 사랑스럽지 않은 과를 부른다고 하겠는가. … 이런 종의는 기쁘게 하지 못한다(如是所立,不令生喜)」. 천친의 「기쁘게 하지 못한다」를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그리고 유부의 설명을 내놓는다. 앞의 표업과 그것을 일으킨 마음이 가행이 되었으므로, 뒤에 가르친 이가 선한 마음을 오래 이어 가더라도 불선의 득(得)은 이어지고, 일이 이루어질 때 그 힘이 그런 종류의 대종과 소조색을 생기게 한다. 그 소조색이 근본업도이다. 「이런 종의라야 기쁘게 할 수 있다(如是所宗,可令生喜)」. 그리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너희 경량부는 업과 과의 이치를 지극히 잘못 세웠다(故汝經部於業果理極為惡立)」(권35, T29, 543a).
무엇이 걸려 있었는가
이 대론은 미세한 형이상학의 다툼처럼 보이지만, 업품이 실제로 다룬 문제들을 따라가 보면 그 차이가 실천의 판단에서 갈라지는 자리가 여럿 있다.
첫째, 계를 범한 비구는 여전히 비구인가. 무표를 실재로 보는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는, 계를 하나 범해도 나머지 율의의 무표는 그대로 있으니 「빚진 부자」처럼 계를 지닌 이이자 범한 이라고 했다. 율의를 서원의 사로 보는 쪽에서는, 비구의 근본행을 어긴 무거운 죄는 그 서원 자체를 무너뜨리므로 다라수의 머리가 잘린 것과 같다고 했다(천친의 반론, 그리고 보광이 경량부의 설이라 한 「犯重捨戒」).
둘째, 계를 일부만 받을 수 있는가. 무표의 수로 신분을 정하는 쪽은 다섯 계를 다 받지 않으면 근사가 아니라 했고, 서원의 범위로 율의를 보는 쪽은 받는 만큼 율의가 생긴다고 했다. 불율의도 마찬가지로, 유부는 반드시 일곱 지분과 모든 유정에 대해 얻는다 했고, 경량부는 기약에 따라 갖추기도 하고 갖추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셋째, 몸도 말도 움직이지 않은 업도는 가능한가. 선인이 뜻으로 분노해 중생을 죽인 경우, 포살 때 침묵으로 거짓말을 한 경우가 본론에 업도로 나오는데, 무표가 표에 의지해야만 생긴다면 표가 없는 이 경우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천친은 「애써 생각해야 한다」며 유부의 체계가 다 풀지 못하는 자리로 남겨 두었다.
넷째, 업은 어떻게 다음 생까지 가는가. 무표의 이론은 계와 복과 업도를 설명하지만, 그 자체로 생을 건너가는 매개는 아니다. 생을 건너가는 업의 지속에 대해 유부는 결국 삼세실유 — 과거의 업이 과거의 법으로서 실재하며 그것이 때가 되면 과를 준다 — 에 기대야 한다. 경량부는 같은 문제를 마음의 상속 하나로 풀어야 한다. 이 문제가 업품을 넘어 수면품의 삼세실유 논쟁과 파집아품의 상속전변차별 정의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그 논쟁 자체는 「번뇌와 삼세실유」 편에서 다룬다.
업품의 대론은 「업의 본질은 사(思)」라는 공통의 출발점에서 갈라진다. 유부는 사가 일으킨 몸짓과 그것이 남긴 무표를 실재하는 색으로 세워 업을 마음 밖에서도 붙잡으려 했고, 경량부는 업을 끝까지 마음의 흐름 안에 두려 했다. 천친은 둘 다 알기 어렵다고 인정하면서도 뒤쪽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종의」라 불렀다.
그 뒤의 갈래
이 대론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이 편의 범위를 넘지만, 방향만 짚어 둔다. 경량부가 업의 지속을 「마음의 흐름에 배어든 종자」로 설명한 것은, 그 종자가 어디에 저장되는가라는 물음을 남겼다. 육식은 끊어지기도 하고(무심정, 기절), 선 · 불선 · 무기로 바뀌기도 하므로, 업의 종자를 끊김 없이 지니려면 더 깊은 층의 마음이 필요하다. 유식학의 아뢰야식이 그 답이었다는 것은 핵심 개념 「업」 2부와 핵심 개념 「구식」에서 보았다. 『구사론』의 업품은 그 길의 출발점에 서 있다. 천친이 뒤에 유식의 논사가 되었다는 전승은 이 맥락에서 읽을 때 자연스럽다.
유부 쪽에서는, 중현이 『순정리론』에서 무표와 형색과 멸의 원인을 하나하나 다시 세워, 유부 교학을 천친 이전보다 더 정밀한 체계로 만들었다. 업품의 대론은 한쪽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두 쪽이 서로를 다듬으며 아비달마의 업론을 마지막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이 편을 맺으며
분별업품은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로 시작하여 「어떤 법도 열반을 이길 수 없다」로 끝난다. 그 사이의 여섯 권에서 천친은 업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몸짓의 체에서 부처의 서른두 상까지 끌고 갔다. 손을 드는 몸짓이 업이 되는 것은 그것이 형색이기 때문인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사이기 때문인가. 그 물음에 답하려고 찰나멸의 형이상학이 동원되었다. 계를 받은 사람이 잠들어서도 비구인 까닭을 설명하려고 무표색이라는 보이지 않는 색이 세워졌고, 경량부는 그것을 여덟 번 되받았다. 율의론은 하루의 근주계에서 평생의 비구계까지, 도살자의 목록에서 짠 소금밭의 비유까지, 계를 받는다는 것이 사람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는지를 법의 언어로 정했다. 십업도는 양을 잡는 이의 하루를 가행 · 근본 · 후기로 나누고, 살생이 정확히 어느 찰나에 성립하는지를 물었다. 오무간업은 은혜의 밭과 공덕의 밭이라는 기준으로 업의 무게를 매겼고, 승가가 깨진 하룻밤 동안 온 세계의 해탈이 멈춘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살은 백 겁 동안 백 가지 사로 하나의 상을 빚는다.
이 모든 자리에서 두 개의 답이 나란히 놓였다. 업을 마음 밖에서도 붙잡을 수 있는 실재로 세우려 한 유부, 업을 끝까지 마음의 흐름 안에 두려 한 경량부. 천친은 「둘 다 알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뒤쪽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종의」라 불렀고, 중현은 그것을 「옷을 바꿔 입은 광대」라 했다. 업품은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그 물음을 다음 품으로 넘긴다. 업을 일으키는 것은 번뇌이고, 업이 생을 건너 이어지는 문제는 과거와 미래가 실재하는가라는 물음과 떼어 놓을 수 없다. 다음 편 「번뇌와 삼세실유 — 분별수면품」은 업의 뿌리인 번뇌의 체계와, 업품이 미루어 둔 삼세실유의 논쟁으로 들어간다.
더 읽기
- 핵심 개념 「업」 — 의도로서의 업에서 정업 · 부정업까지
- 핵심 개념 「무상」 — 찰나멸과 상속
- 핵심 개념 「구식」 — 업의 종자가 머무는 자리
- 계보 一 「십이연기」 — 혹 · 업 · 고와 인업 · 만업
- 『구사론』 제五편 번뇌와 삼세실유 — 분별수면품
- 인물탐구 「천친보살」
참고 문헌
원전
- 천친(세친) 『아비달마구사론』 권13~18 분별업품, 현장 역, T29 no.1558 (권1 분별계품, 권30 파집아품 일부)
- 천친 『아비달마구사석론』, 진제 역, T29 no.1559
- 『아비달마구사론본송』, 현장 역, T29 no.1560
- 중현 『아비달마순정리론』 권33~43(변업품), 현장 역, T29 no.1562
-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116 · 122 · 177, 현장 역, T27 no.1545
- 보광 『구사론기』 권13~18, T41 no.1821
- 법보 『구사론소』 권13, T41 no.1822
연구
- P. Pradhan (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Patna: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67
- Louis de La Vallée Poussin (tr.), L'Abhidharmakośa de Vasubandhu, 6 vols., Paris: Paul Geuthner, 1923–1931
- Leo M. Pruden (tr.), Abhidharmakośabhāṣyam, 4 vols.,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88–1990
- Collett Cox, Disputed Dharmas: Early Buddhist Theories on Existence, Tokyo: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1995
- 舟橋一哉, 『業の研究』, 法藏館, 1954
- 舟橋一哉, 『俱舎論の原典解明 業品』, 法藏館, 1987
- 加藤純章, 『経量部の研究』, 春秋社, 1989
- 권오민 역, 『아비달마구사론』 1~4, 동국역경원, 2002
-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