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아래 낱알로 흩어진 금빛 모래와 저울

법의 분류 — 분별계품

아비달마구사론 · 제1편 · 『구사론』은 세계를 무엇으로 나누는가 — 유위와 무위, 오온 · 십이처 · 십팔계, 그리고 「눈이 보는가」

分別界品분별계품 제1 · 권1~2 (T29, 1a~13b)
품
분별계품(界品) 제1
권
권1~2
게송
44송(귀경게 포함)
핵심 술어
유루 · 무루 · 무위 · 온처계 · 극미 · 유대
관련 계보
一 십이연기 ·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서강과 일곱 편 · 구사론 62장 구성도

아홉 품 → 서강 + 일곱 편

『아비달마구사론』 아홉 품 가운데 첫째인 분별계품(分別界品)은 이 논서의 모든 논의가 딛고 서는 바닥이다. 귀경게와 대법의 정의를 마치자마자 천친은 「모든 법은 대략 두 가지, 유루와 무루다」라고 선언하고, 거기서부터 세계를 남김없이 갈라 나간다. 갈라 놓은 칸은 다섯 무더기(오온), 열두 문(십이처), 열여덟 요소(십팔계)다. 이 품이 묻는 것은 단순하다.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몇 가지이고, 서로 어떻게 겹치고 어떻게 다른가. 그러나 그 단순한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색(色)이란 무엇인가」, 「온은 실재하는가 이름뿐인가」, 「보는 것은 눈인가 식인가」 같은, 부파 불교 전체를 가로지르는 논쟁이 하나씩 터져 나온다. 분별계품은 목록이기 이전에 논쟁의 장이다.

『구사론』의 아홉 품은 크게 둘로 나뉜다. 분별계품과 분별근품(分別根品)이 법 자체의 체계, 곧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다루고, 분별세품 이하가 그 법들이 윤회의 세계와 업과 번뇌와 수행의 길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다룬다. 그 가운데서도 계품은 법의 「자리」를 정하는 품이다. 어떤 법이 유루인지 무루인지, 유위인지 무위인지, 어느 온에 들고 어느 처 · 계에 드는지가 여기서 정해져야, 뒤의 모든 품이 「이 법은 어디에 속한다」는 말을 한마디로 끝낼 수 있다.

이 품은 게송 마흔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구사론본송』은 품 제목 아래 「사십사송」이라 적는다). 권1은 법의 두 갈래와 세 무위에서 시작해 오온 · 십이처 · 십팔계를 하나씩 정의하고, 그 셋이 서로 어떻게 포섭하는지, 왜 셋으로 나누었는지, 경전 곳곳의 다른 분류가 어떻게 이 셋 안에 들어오는지를 따진다. 권2는 완성된 십팔계를 놓고 「몇 개가 보이는 것인가, 몇 개가 막힘이 있는가, 몇 개가 선인가」 하는 물음을 스무 가지 넘게 던진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이것을 「스물두 문의 분별」이라 불렀다. 이 물음들의 한가운데, 「무엇이 보는가」를 묻는 대목에서 이 품의 가장 유명한 논쟁이 벌어진다.

이 편은 그 흐름을 여덟 장으로 따라간다. 삼과를 왜 셋으로 나누었는지, 오위칠십오법이 무엇인지의 개요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 이미 있으므로 짧게만 짚고, 그 아래에서 천친과 비바사사와 경량부와 중현이 실제로 무엇을 두고 다투었는지를 원문으로 재구성한다.

  1. 귀경게 · 대법의 정의권1, 1a~1b
  2. 법의 두 갈래: 유루 · 무루, 세 가지 무위1b~2a
  3. 유위의 다른 이름 · 유루의 다른 이름2a~2b
  4. 색온: 오근 · 오경 · 무표 · 사대종 · 색의 정의2b~3c
  5. 수 · 상 · 행 · 식과 처 · 계의 성립3c~4b
  6. 포섭 · 온처계의 뜻 · 셋으로 나눈 이유 · 차례4b~6a
  7. 경전의 다른 법수 포섭 · 육계6a~6c
  8. 십팔계의 스물두 분별권2, 7a~13b
유견유대삼성계계유루심사소연집수대종적집능소오류성취내외동분삼단견식상무상근

게송 44 · 권1 1a~7a · 권2 7a~13b

도표 1 · 분별계품의 흐름

이 편의 장

제1장 법의 두 갈래유루와 무루, 세 가지 무위

본송

『구사론』 권1 · 분별계품 · T29, 1b~1c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有漏無漏法,除道餘有為,於彼漏隨增,故說名有漏。 無漏謂道諦,及三種無為,謂虛空二滅,此中空無礙。 擇滅謂離繫,隨繫事各別,畢竟礙當生,別得非擇滅。

풀이

법에는 유루와 무루가 있다. 도(道)를 뺀 나머지 유위법은, 그 안에서 번뇌(漏)가 따라 자라므로 유루라 한다. 무루란 도제(道諦)와, 세 가지 무위 — 허공과 두 가지 멸 — 이다. 이 가운데 허공은 걸림 없음이다. 택멸은 얽힘에서 벗어남(離繫)이며, 얽힌 일에 따라 저마다 따로 있다. 앞으로 생겨날 것을 끝내 가로막는 것으로서 따로 얻는 것이 비택멸이다.

술어 풀이

大法 · 對法대법
아비달마(abhidharma)의 번역어. 천친은 「맑은 지혜와 그것을 따르는 것」을 승의(勝義)의 대법, 그 지혜를 얻게 하는 유루의 지혜와 논서를 세속의 대법이라 한다. 대법의 정의와 『구사론』이라는 이름의 뜻은 서강에서 다룬다.
有漏 · 無漏유루 · 무루
루(漏, āsrava)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유루(sāsrava)는 번뇌가 그 법을 대상으로 삼아 「따라 자라는(隨增)」 법, 무루(anāsrava)는 번뇌가 그것을 대상으로 일어나더라도 따라 자라지 못하는 법이다. 「번뇌가 섞여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隨增수증
번뇌가 어떤 법을 대상으로 하거나 그 법과 함께 일어나면서 힘을 얻어 커지는 것. 천친은 이 말의 정밀한 뜻을 「수면품에서 밝힌다」고 미룬다. 수면(anuśaya)의 이론과 직결되는 말이다.
有爲 · 無爲유위 · 무위
유위(saṃskṛta)는 여러 조건이 모여 함께 지어낸 것, 무위(asaṃskṛta)는 조건에 의해 지어지지 않은 것. 유부는 무위를 허공 · 택멸 · 비택멸의 셋으로 헤아린다.
虛空허공
ākāśa. 「걸림 없음(無礙)」을 본성으로 하는 무위. 색이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문이나 창의 빈틈 같은 「공계(空界)」와는 다르다.
擇滅택멸
pratisaṃkhyā-nirodha. 간택(簡擇), 곧 사성제를 하나하나 가려 보는 지혜의 힘으로 얻는 멸. 유루법의 얽힘에서 벗어남(離繫, visaṃyoga)을 본성으로 하며, 열반이 곧 이것이다.
非擇滅비택멸
apratisaṃkhyā-nirodha. 지혜에 의하지 않고, 생겨날 조건이 빠짐(闕緣)으로써 어떤 법이 미래에 영영 생기지 못하게 된 상태. 유부는 이것도 하나의 실재하는 무위로 센다.
世路 · 言依 · 有離 · 有事세로 · 언의 · 유리 · 유사
유위법의 다른 이름들. 세 때를 지나가는 길, 말이 의지하는 것, 떠남(열반)을 가진 것, 원인(事)을 가진 것이라는 뜻이다.
取蘊취온
유루의 오온. 취(取, upādāna)는 번뇌의 이름이며, 번뇌에서 생기거나 번뇌에 속하거나 번뇌를 낳는 온이라는 세 가지 풀이가 있다.

「모든 법은 대략 두 가지」 — 유루와 무루를 가르는 기준

대법을 정의하고 『구사론』이라는 이름을 풀이한 뒤, 천친은 곧바로 묻는다. 부처가 대법을 설한 것은 세간이 법을 가려 보게(擇法)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려 보아야 할 법이란 무엇인가. 그 첫 대답이 「모든 법은 대략 두 가지, 유루와 무루다(說一切法略有二種,謂有漏、無漏)」이다.

이 첫 분류의 기준은 법의 「재질」이 아니라 번뇌와의 관계다. 천친은 유루법이 무엇인지를 「도제를 뺀 나머지 유위법」이라고 외연으로 정한 뒤, 그 까닭을 이렇게 댄다.

所以者何?諸漏於中等隨增故。緣滅道諦,諸漏雖生而不隨增,故非有漏。

어째서인가. 모든 번뇌가 그 안에서 고르게 따라 자라기 때문이다. 멸제와 도제를 대상으로 하여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따라 자라지는 못하므로, 그것은 유루가 아니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1c

이 대목은 유루 · 무루의 개념에 대한 흔한 오해를 미리 막는다. 무루법을 대상으로도 번뇌는 일어날 수 있다. 열반을 두고 잘못된 견해를 품을 수도 있고, 성자의 도를 두고 의심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번뇌는 대상인 열반이나 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반면 고제와 집제에 속하는 법, 곧 오취온은 번뇌가 그것을 대상으로 삼을 때마다 번뇌를 키우는 토양이 된다. 무루란 번뇌가 「없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붙지 못하는」 것이다. 이 「수증」의 정밀한 의미, 곧 소연수증과 상응수증의 구별을 천친은 「수면품에서 스스로 밝힐 것(隨眠品中自當顯說)」이라고 미루어 둔다. 이 상세는 「번뇌와 삼세실유」 편의 몫이다.

그 결과 분류는 비대칭이 된다. 유루는 유위 가운데 도제를 뺀 전부, 곧 고제와 집제다. 무루는 도제(유위이면서 무루)와 세 가지 무위다. 유위 · 무위의 구별과 유루 · 무루의 구별은 겹치지 않고 엇갈린다. 도제는 유위이면서 무루이고, 무위는 셋 모두 무루다. 유루이면서 무위인 법은 없다.

一切法모든 법
有漏유루번뇌가 그 안에서 따라 자란다(諸漏於中等隨增)
  • = 유위 가운데 도제를 뺀 것
  • = 고제 · 집제
  • = 오취온
無漏무루번뇌가 그것을 대상으로 일어나도 따라 자라지 못한다(諸漏雖生而不隨增)
① 도제(유위 · 무루)
  • ② 허공
  • ③ 택멸
  • ④ 비택멸
②~④ 무위 · 무루
유위 = 유루 전부 + 도제무위 = 허공 · 택멸 · 비택멸
「有漏無漏法,除道餘有為」법에는 유루와 무루가 있고, 도를 뺀 나머지 유위가 유루다(『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1b)
도표 2 · 법의 두 갈래

허공 · 택멸 · 비택멸 — 세 가지 무위의 정의

허공 — 걸림 없음

세 무위 가운데 허공의 정의는 짧다. 「허공은 오직 걸림 없음을 본성으로 한다. 막힘이 없기 때문에 색이 그 안에서 움직인다(虛空但以無礙為性,由無障故色於中行)」. 허공은 색이 들어설 자리를 내주는 것이며, 그 자신은 무엇에도 막히지 않고 무엇도 막지 않는다.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것을 「막힘 없음을 모양으로 삼는다. 모든 대종과 소조색의 무더기가 그것을 두루 덮어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넓혀 풀이한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일상에서 「허공」이라 부르는 것, 곧 창문의 틈이나 입과 코의 구멍 같은 빈자리는 무위의 허공이 아니다. 『구사론』은 권1 끝에서 육계(六界)를 다루며 그것을 「공계(空界)」라 부르고, 밝음과 어둠을 본체로 하는 색, 곧 유위의 색으로 분류한다. 『대비바사론』 권75는 둘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虛空非色空界是色。虛空無見空界有見。虛空無對空界有對。虛空無漏空界有漏。虛空無為空界有為。

허공은 색이 아니고 공계는 색이다. 허공은 볼 수 없고 공계는 볼 수 있다. 허공은 막힘이 없고 공계는 막힘이 있다. 허공은 무루이고 공계는 유루다. 허공은 무위이고 공계는 유위다.

『대비바사론』 권75, T27, 388b

경전에서 부처가 「손으로 허공을 어루만졌다」고 할 때 그 허공은 공계라고 『대비바사론』은 해명한다. 손으로 무위를 만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위의 허공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같은 대목에서 세우(世友)는 부처가 곳곳에서 허공을 말했다는 성교의 근거에 더해, 허공이 없다면 존재하는 것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이치의 근거를 든다. 반면 「대덕」은 허공이란 세간이 분별해 임시로 세운 이름일 뿐이라 했고, 『대비바사론』의 평가는 「실제로 허공이 있다」였다.

택멸 — 지혜로 얻는 떠남

택멸은 「얽힘에서 벗어남(離繫)을 본성으로 한다」. 천친의 풀이는 이름의 구조부터 짚는다. 택(擇)은 간택, 곧 사성제를 하나하나 가려 보는 지혜의 한 종류다. 그 간택의 힘으로 얻는 멸이므로 택멸이라 한다. 「소가 끄는 수레를 소수레라 하듯이, 가운데 말을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如牛所駕車名曰牛車,略去中言故作是說)」. 택멸은 지혜 그 자체가 아니라 지혜가 「얻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물음이 하나 나온다. 모든 유루법이 하나의 택멸을 공유하는가. 천친은 아니라고 답한다. 게송의 「얽힌 일에 따라 저마다 따로 있다(隨繫事各別)」가 그 답이다.

若不爾者,於證見苦所斷煩惱滅時,應證一切所斷諸煩惱滅。若如是者,修餘對治則為無用。

그렇지 않다면, 견고소단(見苦所斷)의 번뇌가 멸한 것을 증득할 때 끊어야 할 모든 번뇌의 멸을 함께 증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대치(對治)를 닦는 일은 쓸모없게 된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1c

이 논증은 수행론의 구조와 맞물려 있다. 견도에서 고제를 보아 끊는 번뇌와 집제 · 멸제 · 도제를 보아 끊는 번뇌가 따로 있고, 수도에서 아홉 품으로 끊어 가는 번뇌가 또 있다. 택멸이 하나뿐이라면 첫 번뇌를 끊는 순간 모든 번뇌가 끊어져야 하고, 그 뒤의 수행 단계는 모두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택멸은 얽힌 법의 수만큼 있다. 「멸은 동류가 없다」는 경론의 말은, 택멸이 동류인(同類因)을 갖지도 않고 다른 것의 동류인이 되지도 않는다는 뜻이지, 택멸이 하나뿐이라는 뜻이 아니라고 천친은 덧붙인다.

비택멸 — 조건이 빠져서 생기지 못함

비택멸은 「앞으로 생겨날 것을 영원히 가로막는」 멸이다. 그것은 지혜에 의하지 않고, 오직 조건이 빠져서(但由闕緣) 얻어진다. 천친이 든 예는 일상의 지각이다.

如眼與意專一色時,餘色聲香味觸等謝。緣彼境界五識身等住未來世畢竟不生,由彼不能緣過去境,緣不具故得非擇滅。

눈과 의식이 한 가지 빛깔에 오롯이 쏠려 있을 때, 다른 빛깔 · 소리 · 냄새 · 맛 · 감촉은 지나가 버린다. 그 대상들을 반연했을 오식 등은 미래세에 머문 채 끝내 생기지 못한다. 오식은 과거의 대상을 반연할 수 없으므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비택멸을 얻는 것이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1c

이 예는 유부의 삼세실유설을 전제한다. 미래의 법은 이미 「있다」. 그 가운데 조건을 만나 현재로 나오는 것이 있고, 조건을 끝내 만나지 못해 영영 미래에 머무는 것이 있다. 후자에 대해 「생기지 않음」이라는 하나의 실재가 얻어진다는 것이 비택멸이다. 지금 한 장면에 몰두하느라 지나쳐 버린 소리를 들었을 귀의 의식은, 그 소리가 이미 과거로 떨어졌으므로 다시는 생길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비택멸은 우리가 매 찰나 셀 수 없이 「얻고」 있는 것이다. 중현은 같은 예를 들며, 이 「생기지 않음」은 오식만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반연했을 일부 의식에도 해당한다고 덧붙인다.

두 가지 멸의 네 경우

천친은 두 멸이 어떤 법에서 얻어지는지를 네 경우(四句)로 정리한다. 이 정리는 두 멸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或於諸法唯得擇滅,謂諸有漏過現生法。或於諸法唯非擇滅,謂不生法無漏有為。或於諸法俱得二滅,謂彼不生諸有漏法。或於諸法不得二滅,謂諸無漏過現生法。

어떤 법에 대해서는 택멸만 얻으니, 과거 · 현재에 이미 생긴 유루법이다. 어떤 법에 대해서는 비택멸만 얻으니, 생기지 않을 무루의 유위법이다. 어떤 법에 대해서는 두 멸을 다 얻으니, 생기지 않을 유루법이다. 어떤 법에 대해서는 두 멸을 다 얻지 않으니, 과거 · 현재에 이미 생긴 무루법이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2a

이미 생긴 유루법은 다시 「생기지 않게」 할 수 없으므로 비택멸은 없지만, 그것에 대한 얽힘을 지혜로 끊을 수는 있으므로 택멸은 있다. 무루법은 애초에 끊어야 할 얽힘이 없으므로 택멸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이미 생긴 무루법에는 어느 멸도 없고, 생기지 못하게 된 무루법에는 비택멸만 있다. 생기지 못하게 된 유루법은 그 얽힘이 지혜로 끊기고 생김도 조건이 빠져 막혔으므로 두 멸을 다 얻는다.

虛空허공ākāśa
본성걸림 없음(無礙)작용색이 그 안에서 움직이게 함주의창 · 구멍의 「공계」는 유위의 색이지 무위가 아니다
擇滅택멸열반pratisaṃkhyā-nirodha
본성얽힘에서 벗어남(離繫)얻는 길사성제를 가려 보는 지혜(擇)의 힘수얽힌 일의 수만큼 따로(隨繫事各別)
非擇滅비택멸apratisaṃkhyā-nirodha
본성앞으로 생길 것을 영원히 막음얻는 길지혜가 아니라 조건의 빠짐(闕緣)예한 빛깔에 몰두할 때 지나간 소리를 들었을 귀의 의식
「謂虛空二滅,此中空無礙」허공과 두 가지 멸이며, 이 가운데 허공은 걸림 없음이다(『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1b)
도표 3 · 세 가지 무위
택멸을 얻는다얻지 않는다비택멸을 얻는다
③ 둘 다생기지 않을 유루법(彼不生諸有漏法)
② 비택멸만생기지 않을 무루 유위법(不生法無漏有為)
얻지 않는다
① 택멸만과거 · 현재에 이미 생긴 유루법(諸有漏過現生法)
④ 둘 다 아님과거 · 현재에 이미 생긴 무루법(諸無漏過現生法)
택멸은 「얽힘」을 끊고, 비택멸은 「생김」을 막는다(『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2a)
도표 4 · 두 가지 멸의 네 경우

무위가 「실재하는 법」인가는 유부와 경량부가 가장 날카롭게 갈라선 쟁점 가운데 하나다. 천친은 분별근품(권6)에서 육인을 논하다가 이 문제로 돌아와 「경량부 논사들은 모든 무위가 실유가 아니라고 말한다(經部師說:一切無為皆非實有)」고 소개한다. 경량부에 따르면 허공은 「닿을 것이 없음」을, 택멸은 이미 일어난 수면과 종자가 간택의 힘으로 다시 생기지 않음을, 비택멸은 간택 없이 조건이 빠져 다시 생기지 않음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이 대론의 전개는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서 다룬다. 같은 대목에서 유부는 택멸의 자성을 두고 「이 법의 자성은 실유이면서 말을 떠나 있어 성자만이 저마다 안에서 증득한다」고 마지막으로 답하는데, 계품의 정의가 바로 이 실유를 전제로 쓰였다.

세 무위는 모두 무루이며,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셋의 「얻는 길」은 다르다. 허공은 얻는 것이 아니고, 택멸은 지혜로 얻고, 비택멸은 조건의 빠짐으로 얻는다. 열반은 이 가운데 택멸 하나다.

유위의 다른 이름, 유루의 다른 이름

무위를 다 말한 뒤 천친은 다시 유위로 돌아온다. 「유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게송의 답은 「색 등 오온」이다. 오온이 유위를 남김없이 포섭하는 까닭은 「여러 조건이 모여 함께 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眾緣聚集共所作故)」. 한 조건에서 생기는 법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아직 생기지 않은 미래의 법은 어떻게 「지어진 것」이라 부르는가. 천친은 「그것과 같은 부류이기 때문(是彼類故)」이라 답하고, 아직 짜지 않은 젖을 젖이라 부르고 아직 타지 않은 나무를 땔감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어 게송은 유위의 다른 이름 넷을 든다. 이 이름들은 유위라는 개념이 어떤 측면에서 파악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유위 가운데 유루인 것에도 다른 이름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취온(取蘊)이다. 무루의 행(곧 도제)은 「온이기는 하나 취온은 아니다」. 취(取)는 번뇌의 이름이고, 천친은 이 말을 세 가지로 풀이한다. 번뇌에서 생기므로 취온이니 마른 풀에서 일어난 불을 풀불이라 하는 것과 같고, 번뇌에 속하므로 취온이니 임금에 속한 신하를 임금의 신하라 하는 것과 같고, 번뇌를 낳으므로 취온이니 꽃과 열매를 맺는 나무를 꽃나무 · 열매나무라 하는 것과 같다. 그 밖에 유루법은 다툼(諍)이 따라 자라므로 유쟁(有諍), 성인의 마음에 어긋나므로 고(苦), 괴로움을 부르므로 집(集), 허물어질 수 있고 대치될 수 있으므로 세간(世間), 견해가 그 안에 머물러 따라 자라므로 견처(見處), 세 가지 있음(三有)에 포섭되므로 삼유(三有)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첫 장에서 천친은 법 전체를 두 축으로 나누는 틀을 세웠다. 하나는 번뇌와의 관계(유루 · 무루), 다른 하나는 조건과의 관계(유위 · 무위)다. 그리고 유위의 세계는 오온이라는 다섯 칸에 남김없이 담긴다고 선언했다. 이제 그 다섯 칸을 하나씩 채울 차례다.

제2장 색온열한 가지 색과 「색이란 무엇인가」

본송

『구사론』 권1 · 분별계품 · T29, 2b~3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色者唯五根,五境及無表。 彼識依淨色,名眼等五根。 色二或二十,聲唯有八種,味六香四種,觸十一為性。 大種謂四界,即地水火風,能成持等業,堅濕煖動性。

풀이

색은 오직 다섯 근과 다섯 경, 그리고 무표뿐이다. 그 식들이 의지하는 맑은 색을 눈 등 다섯 근이라 한다. 빛깔은 둘 또는 스물, 소리는 여덟 가지뿐이며, 맛은 여섯, 냄새는 네 가지, 감촉은 열하나를 본성으로 한다. 대종은 네 가지 계, 곧 지 · 수 · 화 · 풍이다. 지님 등의 작용을 이루며, 굳음 · 젖음 · 따뜻함 · 움직임을 본성으로 한다.

술어 풀이

色색
rūpa. 물질 일반. 색온의 색(넓은 뜻)과, 눈의 대상인 빛깔 · 모양으로서의 색처(좁은 뜻)가 있다. 아래에서 넓은 뜻은 「색」, 좁은 뜻은 「빛깔」 또는 「색경」으로 구별해 쓴다.
淨色정색
rūpa-prasāda. 맑은 색. 눈 · 귀 · 코 · 혀 · 몸의 다섯 근의 본체로, 겉으로 보이는 눈알이나 귓바퀴가 아니라 그 안의 투명하고 미세한 물질이다.
顯色 · 形色현색 · 형색
빛깔의 두 갈래. 현색(varṇa)은 청 · 황 · 적 · 백 같은 색채, 형색(saṃsthāna)은 길고 짧고 모나고 둥근 모양이다.
執受집수
upātta. 마음과 마음작용이 붙잡아 의지처로 삼는 것. 살아 있는 몸에 붙은 물질이 그렇다. 소리의 분류와 권2의 분별에서 함께 쓰인다.
無表色무표색
avijñapti-rūpa. 겉으로 드러나 남에게 알리는 것(表)이 아니면서, 표업이나 선정에서 생겨 상속하는 선 · 불선의 색. 상세는 「업의 체계」 편에서.
大種대종
mahābhūta. 지 · 수 · 화 · 풍의 사대. 다른 모든 색이 의지하는 근본 물질이다.
所造色소조색
bhautika. 대종에 의지해 생긴 색. 오근 · 오경(촉경의 일부를 뺀)과 무표색이 여기에 든다.
極微극미
paramāṇu. 더 쪼갤 수 없는 색의 최소 단위. 홀로 머무는 일은 없고 반드시 모여서 머문다.
變壞 · 變礙변괴 · 변애
색의 정의에 쓰인 두 말. 변괴는 「변하고 무너짐」, 곧 손이 닿으면 달라지는 성질이고, 변애는 「변하고 막음」, 곧 같은 자리를 다른 것과 함께 차지하지 못하는 성질이다.

열한 가지 색 — 색온의 범위

「색은 오직 다섯 근과 다섯 경, 그리고 무표뿐이다」. 이 짧은 게송의 「오직(唯)」에 무게가 실려 있다. 보광은 이 게송을 풀며 경량부는 무표를 세우지 않고, 각천(覺天)은 소조색을 세우지 않으며, 대승은 법처에 더 많은 색을 세운다는 점을 대비하고, 「이 종은 오직 열한 가지 색의 수에 따라 색온의 이름을 세운다(此宗唯依十一色量立色蘊名)」고 정리한다. 열하나란 오근 다섯, 오경 다섯, 무표 하나다. 뒤에 「오위칠십오법」의 색법 열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다섯 근 — 맑은 색

근(根, indriya)의 정의는 「그 식들이 의지하는 맑은 색」이다. 천친은 이 게송을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그(彼)」를 앞의 다섯 경으로 보면 「빛깔 등을 아는 식이 의지하는 맑은 색」이 되고, 이는 경전의 「비구들이여, 눈은 안의 처(處)이며 사대로 지어진 맑은 색을 본성으로 한다(苾芻當知,眼謂內處,四大所造淨色為性)」라는 말과 맞는다. 「그」를 다섯 근 자신으로 보면 「안식 등이 의지하는 맑은 색이 안근 등이다」가 되고, 이는 『품류족론』의 「무엇이 안근인가. 안식이 의지하는 맑은 색을 본성으로 한다」와 맞는다.

이 정의가 말하는 근은 해부학적 기관이 아니다. 눈알이나 귓바퀴는 근이 아니라 근이 머무는 자리(依處)다. 근은 그 안에 펼쳐진 투명한 물질이며, 권2는 그것이 어떻게 놓여 있는지까지 묘사한다. 안근의 극미는 눈동자 위에 옆으로 펼쳐져 고수(香荾) 꽃처럼 맑게 덮여 흩어지지 않고, 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자작나무 껍질을 말아 놓은 듯 둥글게 돌아 있으며, 비근의 극미는 콧마루 안에 두 손톱을 맞댄 모양으로 있고,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반달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혀 한가운데 털끝만 한 자리에는 설근 극미가 없다는 전승도 함께 적혀 있다. 신근의 극미는 몸 전체에 몸의 모양대로 퍼져 있다.

이 맑은 색이라는 개념이 왜 필요했는가. 식(識)은 마음이고 물질이 아니다. 그런데 눈을 다치면 보는 것이 흐려지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나는 데 물질이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면, 마음과 물질을 이어 주는 특별한 물질이 있어야 했다. 유부는 그것을 「맑은」 색, 곧 다른 물질보다 미세하고 투명해서 식의 의지처가 될 수 있는 색으로 보았다. 권2는 이 맑음 때문에 근은 도끼에 잘리지도 불에 타지도 않는다고까지 말한다(「구슬의 빛처럼 맑고 묘하기 때문」). 몸을 자르면 잘린 부분에는 근이 없게 될 뿐 근 자체가 둘로 나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섯 경 — 스물의 빛깔, 여덟의 소리, 넷의 냄새, 여섯의 맛, 열하나의 감촉

색경 — 둘 또는 스물

빛깔(색처)은 둘로 나누면 현색과 형색이다. 현색은 청 · 황 · 적 · 백의 넷이고 나머지 색채는 이 넷의 변형이다. 형색은 여덟, 「긴 것」에서 「바르지 않은 것」까지다. 스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謂青、黃、赤、白、長、短、方、圓、高、下、正、不正、雲、煙、塵、霧、影、光、明、闇。

청 · 황 · 적 · 백, 길고 · 짧고 · 모나고 · 둥글고 · 높고 · 낮고 · 바르고 · 바르지 않은 것, 구름 · 연기 · 먼지 · 안개 · 그림자 · 햇빛 · 밝음 · 어둠이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2b

「어떤 논사는 공일현색(空一顯色), 곧 허공의 한 가지 빛깔을 스물한째로 더한다」는 이설도 적혀 있다. 하늘의 푸름을 따로 센 것이다. 천친은 몇 가지 낱말을 풀이한다. 「바름」은 모양이 고른 것, 땅과 물의 기운이 피어오른 것이 안개, 해의 불꽃이 햇빛(光), 달 · 별 · 불 · 약초 · 보주 · 번개의 불꽃이 밝음(明)이다. 빛을 가려 생기되 그 안의 다른 빛깔이 보이는 것이 그림자, 그 반대가 어둠이다.

이 분류에서 바로 철학적 물음이 나온다. 하나의 사물이 현색과 형색을 함께 가질 수 있는가. 유부의 정설은 「어떤 색처는 현색만 있고 형색이 없으니 청 · 황 · 적 · 백 · 그림자 · 햇빛 · 밝음 · 어둠이며, 어떤 색처는 형색만 있고 현색이 없으니 길이 등의 일부와 신표업이며, 나머지는 현색과 형색을 다 가진다」이다. 이에 대해 어떤 논사(有餘師)는 햇빛과 밝음만 현색뿐이라고 반박한다. 세간의 푸른 것 등에도 길이 같은 모양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어떻게 한 사물이 현색과 형색을 함께 가지는가」라는 물음이 나오고, 비바사사는 「다 가진다」는 것은 한 극미에 두 성질이 함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거기서 둘 다를 알 수 있다」는 뜻이라고 답한다(此中有者是有智義,非有境義). 천친은 이 답을 되받는다. 그렇다면 몸의 표업에서도 빛깔을 아는 앎이 생기니, 신표업을 「형색만 있는 것」에 넣을 수 없지 않은가. 보광은 이 마지막 말을 「논주가 비바사사를 논파한 것(論主難破毘婆沙師)」으로 읽는다. 형색이 독립된 실재인가 하는 이 물음은 뒤에 「업의 체계」 편에서 신표업의 실재를 둘러싸고 경량부가 「형색은 가유」라고 비판하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성경 — 여덟

소리는 세 가지 기준을 곱해 여덟이 된다. 첫째, 집수된 대종에서 난 소리인가 아닌가(말소리 · 손뼉 소리 대 바람 · 숲 · 강물 소리). 둘째, 중생을 가리키는 소리(有情名, 곧 언어로서의 어표업)인가 아닌가. 이 둘을 곱하면 넷, 여기에 마음에 드는가 들지 않는가(可意 · 不可意)를 곱하면 여덟이다. 손과 북이 부딪는 소리처럼 집수 대종과 비집수 대종이 함께 내는 소리가 있다는 이설에 대해, 천친은 한 현색 극미가 두 벌의 사대로 지어지는 일이 없듯 소리도 그렇다고 답한다.

미경 · 향경 — 여섯과 넷

맛은 달고 · 시고 · 짜고 · 맵고 · 쓰고 · 담담한 여섯이다. 냄새는 좋은 냄새, 나쁜 냄새, 고른(等) 냄새, 고르지 않은(不等) 냄새의 넷이다. 천친은 「본론(『품류족론』)에서는 좋은 냄새 · 나쁜 냄새 · 평등한 냄새의 셋이라 한다」는 점을 함께 적는다. 고르다 · 고르지 않다는 몸을 키우거나 해치는 정도가 지나친가 아닌가를 가리킨다는 것이 『순정리론』이 든 첫째 풀이다(보광 『구사론기』의 소개).

촉경 — 열하나

觸有十一,謂四大種、滑性、澁性、重性、輕性及冷、飢、渴。

감촉은 열한 가지다. 사대종, 그리고 매끄러움 · 거칢 · 무거움 · 가벼움 및 차가움 · 배고픔 · 목마름이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2c

감촉의 목록에 사대종이 들어 있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사대는 오직 몸이 닿아 느끼는 것, 곧 촉경에만 속한다. 이 점은 권2에서 「대종인가 소조인가」를 따질 때 다시 중요해진다. 나머지 일곱은 소조색이다. 그 가운데 차가움 · 배고픔 · 목마름의 정의가 흥미롭다. 「따뜻함을 바라는 것을 차가움이라 하고, 먹기를 바라는 것을 배고픔이라 하고, 마시기를 바라는 것을 목마름이라 한다(煖欲名冷。食欲名飢。飲欲名渴)」. 배고픔은 마음의 욕구인데 어떻게 감촉인가. 천친은 「원인에 결과의 이름을 붙였다(於因立果名)」고 답한다. 그런 욕구를 일으키는 몸 안의 감촉을 그 결과인 욕구의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이 즐거움이다」라는 게송을 든다. 부처의 출현은 즐거움 그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의 원인인데도 즐거움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색계에는 배고픔과 목마름의 감촉이 없고, 그곳의 옷은 한 벌씩은 무게를 잴 수 없으나 모으면 잴 수 있다는 전승도 덧붙어 있다.

색경(色)2 또는 20
현색 4청 · 황 · 적 · 백
형색 8장 · 단 · 방 · 원 · 고 · 하 · 정 · 부정
나머지 8운 · 연 · 진 · 무 · 영 · 광 · 명 · 암
(이설: 공일현색을 더해 21)
성경(聲)8
집수 대종에서 남 · 비집수 대종에서 남
×
유정명(언어) · 비유정명
×
마음에 듦 · 들지 않음
향경(香)4
호향 · 악향 · 등향 · 부등향
(본론: 호 · 악 · 평등의 3)
미경(味)6
감 · 초 · 함 · 신 · 고 · 담
촉경(觸)11
대종 4지 · 수 · 화 · 풍
+
소조 7활 · 삽 · 중 · 경 · 냉 · 기 · 갈
「色二或二十,聲唯有八種,味六香四種,觸十一為性」(『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2b)
도표 5 · 오경의 분류

한 식은 한 대상만 아는가

오경을 다 늘어놓은 뒤 천친은 짧지만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안식은 한 번에 하나의 빛깔만 아는가. 답은 「어떤 때는 하나를 반연하고 어떤 때는 여럿을 반연한다」이다. 멀리서 군대나 산과 숲, 쌓인 보석 더미를 볼 때처럼 낱낱을 따로 가려 알지 않을 때는 여러 대상을 한꺼번에 반연한다. 그러면 오식이 공상(共相)을 대상으로 삼는 셈이 되지 않는가. 오식은 자상(自相)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유부의 원칙이다. 천친의 답은 「처(處)의 자상으로 말하면 오식은 자상을 취하고, 낱낱 사물(事)의 자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인정하는 데 무슨 잘못이 있는가」이다. 안식이 아는 것은 「빛깔이라는 처」의 자상이지, 그 안의 개별 사물 하나하나의 자상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몸과 혀가 동시에 대상에 닿으면 어느 식이 먼저 일어나는가 하는 물음도 있다. 대상이 강한 쪽이 먼저이고, 대등하면 혀의 식이 먼저다. 먹고 마시는 것이 몸을 이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무표색 — 짧은 소개

열한 가지 색의 마지막이 무표색이다. 게송은 이렇게 정의한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亂心無心等,隨流淨不淨,大種所造性,由此說無表。

풀이

어지러운 마음일 때나 마음이 없을 때에도, 서로 닮게 이어져 흐르는 선 · 불선의 것으로서, 대종으로 지어진 것을 본성으로 하는 것 — 이것을 무표라 한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3a)

계를 받은 사람은 그 뒤 잠들어 있어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도(亂心), 무상정이나 멸진정에 들어 마음이 끊어져 있어도(無心) 여전히 「계를 지닌 사람」이다. 그를 계를 지닌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이 마음이 없는 동안에도 이어지고 있어야 한다. 유부는 그것을 표업(몸과 말의 드러난 행위)이나 선정에서 생겨 상속하는, 「남에게 드러내 알리지 않는(非表示令他了知)」 색이라 보았다. 그것이 「대종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단서는, 「득(得)」처럼 마찬가지로 상속하는 다른 법과 구별하기 위해 붙었다.

천친은 이 정의를 소개하면서 「설한다(說)는 말은 이것이 스승들의 종지의 말임을 드러낸다(說者顯此是師宗言)」고 적는다. 이 한마디는 천친이 이 정의를 자기 견해가 아니라 비바사사의 설로 전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다. 중현은 바로 이 대목을 붙잡아, 천친이 「이런 종류의 무표색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천친의 「상사상속(相似相續)」이라는 풀이로는 첫 찰나의 무표가 정의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등 여러 허물을 들어 공격한 뒤 자신의 게송으로 정의를 고쳐 쓴다. 무표색이 실재하는가, 경량부가 말하는 「사(思)의 종자의 특별한 변화」로 대신할 수 있는가 하는 논쟁은 「업의 체계」 편의 중심 주제다. 여기서는 색온에 이 한 자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자리가 처음부터 논쟁의 표지를 달고 소개되었다는 것만 기억해 두자.

사대종 — 굳음 · 젖음 · 따뜻함 · 움직임

무표가 「대종으로 지어진 것」이라 했으니, 대종이 무엇인지가 이어진다. 대종은 「네 가지 계(界)」다. 지 · 수 · 화 · 풍이 「계」라 불리는 까닭은 「자기의 모습과 소조색을 지니기 때문(能持自相及所造色)」이다. 「대(大)」인 까닭은 세 가지다. 다른 모든 색이 의지하는 것이며 본체가 넓다. 지 등이 우세한 무더기(산이나 바다)에서 그 모습이 크다. 갖가지 큰일의 작용을 일으킨다.

사대는 작용(業)과 본성(性)으로 정의된다. 지는 지니고(持) 굳음(堅)을 본성으로 하며, 수는 거두고(攝) 젖음(濕)을, 화는 익히고(熟) 따뜻함(煖)을, 풍은 키우고(長) 움직임(動)을 본성으로 한다. 풍의 「키움」은 늘어나게 하거나 흘러 옮겨 가게 하는 것이고, 풍의 움직임이란 「대종과 조색을 이끌어 그 상속이 다른 곳에 생기게 하는 것, 마치 등불의 빛을 부는 것과 같다(令其相續生至餘方,如吹燈光)」. 『품류족론』과 경전이 풍계를 「가벼움 등의 움직임」이라 하는데, 가벼움은 소조색으로 따로 세어지므로, 풍의 본성은 움직임이고 가벼움은 「작용을 들어 본체를 드러낸」 표현일 뿐이라고 천친은 정리한다.

여기서 일상 언어와 철학 언어의 간극을 다루는 게송이 이어진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地謂顯形色,隨世想立名;水火亦復然,風即界亦爾。

풀이

「땅」이라 하는 것은 현색과 형색이니, 세간의 생각에 따라 이름을 세운 것이다. 물과 불도 그러하다. 바람은 곧 풍계이며, 또한 그러하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3b)

세간 사람이 「저것이 땅이다」라고 가리킬 때 가리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빛깔과 모양이다. 그러나 철학적 의미의 지계, 곧 굳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몸에 닿아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상어의 「땅 · 물 · 불」은 색경(빛깔)이고, 철학어의 「지계 · 수계 · 화계」는 촉경(감촉)이다. 바람만은 세간도 움직임을 두고 「바람」이라 하므로 일상어의 바람이 곧 풍계다. 다만 세간이 「검은 바람」, 「회오리바람」이라 할 때는 빛깔과 모양으로 바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 경우의 바람 역시 색경이다. 이 구별은 권2에서 각천의 「색처는 모두 대종」이라는 설을 반박할 때 그대로 쓰인다.

地界지계
본성굳음(堅)작용지님(持)
水界수계
본성젖음(濕)작용거둠(攝)
火界화계
본성따뜻함(煖)작용익힘(熟)
風界풍계
본성움직임(動)작용키움(長)
「등불의 빛을 불듯」 상속을 다른 곳으로 옮김
「대종」이라 하는 까닭
  • 모든 색이 의지함
  • 본체가 넓음
  • 우세한 무더기에서 모습이 큼
  • 큰 작용을 일으킴
세간의 「땅 · 물 · 불」은 눈에 보이는 빛깔과 모양(색경)이고, 사대 자체는 몸에 닿아 아는 감촉(촉경)이다「地謂顯形色,隨世想立名」(『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3b)
도표 6 · 사대종

「색」이란 무엇인가 — 변괴와 변애

색온의 열한 가지를 다 늘어놓은 뒤, 천친은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간다. 왜 이 온을 「색」이라 하는가. 무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서도 「색」이라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색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다.

경전의 정의 — 변괴

천친이 먼저 드는 것은 경전의 말이다. 「비구들이여, 변하고 무너지기 때문에 색취온이라 한다(苾芻當知,由變壞故名色取蘊)」. 무엇에 의해 변하고 무너지는가. 「손이 닿으면 곧 변하고 무너진다(謂手觸故即便變壞)」. 천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괴란 곧 괴롭혀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變壞即是可惱壞義)」이라고 풀이하고, 『의품(義品)』의 게송을 든다. 욕망을 좇는 사람이 늘 바라다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살에 맞은 듯 괴로워 무너진다는 게송이다. 색은 그런 욕망에 의해 「괴롭혀지고 무너지는」 것이다.

비바사사 계열의 정의 — 변애와 세 가지 반론

이어 천친은 「어떤 이는 변애(變礙)하므로 색이라 한다고 말한다(有說:變礙故名為色)」고 소개한다. 변애란 변하면서 막는 것, 한 물질이 있는 자리에 다른 물질이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성질이다. 천친은 이 정의에 세 가지 반론을 차례로 제기하고, 이 정의를 지키려는 쪽의 답을 함께 적는다. 이 대목은 「반론 — 답 — 재반론」의 구조가 가장 선명한 곳이다.

첫째 반론은 극미다. 「그렇다면 극미는 색이라 할 수 없어야 한다. 변애가 없기 때문이다(若爾,極微應不名色,無變礙故)」. 더 쪼갤 수 없는 단위인 극미는 막을 것도 막힐 것도 없지 않은가. 답은 이렇다.

此難不然。無一極微各處而住,眾微聚集變礙義成。

이 반론은 옳지 않다. 극미가 하나씩 따로 머무는 일은 없다. 여러 극미가 모여야 변애의 뜻이 이루어진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3c

둘째 반론은 과거 · 미래의 색이다. 지나간 색과 아직 오지 않은 색은 지금 아무것도 막지 않는다. 답은 「그것도 일찍이 변애했거나 앞으로 변애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와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다. 태울 땔감을 땔감이라 하는 것과 같다」이다.

셋째 반론이 가장 어렵다. 무표색은 어떤가. 무표는 처음부터 막는 성질이 없다. 여기에 두 가지 풀이가 나오고, 천친은 둘을 모두 비판한다.

첫째 풀이는 「표색에 변애가 있으므로 무표도 그것을 따라 색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나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다」이다. 천친은 「이 풀이는 옳지 않다. 무표에는 변애가 없기 때문이다. 또 표업이 멸할 때 무표도 멸해야 할 것이다. 나무가 없어지면 그림자도 반드시 따라 없어지듯이」라고 반박한다. 무표의 핵심은 표업이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는 데 있으므로, 이 비유는 오히려 무표를 부정하게 된다.

둘째 풀이는 「의지처인 대종이 변애하므로 무표도 색이라는 이름을 얻는다」이다. 천친은 「그렇다면 의지처에 변애가 있으므로 안식 등 다섯 식도 색이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되묻는다. 안식은 변애하는 안근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같은 경우가 아니다(此難不齊)」라는 답이 나온다. 무표가 대종에 의지하는 방식은 그림자가 나무에, 빛이 보주에 의지하는 것과 같지만, 오식이 근에 의지하는 방식은 그저 생기는 것을 돕는 조건(助生緣)일 뿐이라는 것이다. 천친은 다시 이 답을 꺾는다. 첫째, 그림자가 나무에, 빛이 보주에 의지한다는 말 자체가 비바사의 뜻과 맞지 않는다. 비바사에 따르면 그림자 등의 현색 극미는 저마다 자기의 사대종에 의지하지 나무의 대종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설령 그렇게 의지한다 해도 무표는 그와 다르다. 비바사사 스스로 「의지처인 대종이 멸해도 무표는 따라 멸하지 않는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천친은 「다른 풀이(別釋)」를 하나 더 소개한다. 오식의 의지처는 일정하지 않다. 변애하는 안근 등에 의지하기도 하고, 변애하지 않는 「무간멸의 의근」에 의지하기도 한다. 무표의 의지처(대종)는 언제나 변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경우가 아니다」는 답은 성립하고, 「변애하므로 색이라 한다」는 정의도 이치에 맞게 이루어진다. 천친은 이 풀이로 논의를 마무리하되, 그것을 자기 결론으로 단정하지 않고 「다른 풀이」로 남겨 둔다.

경전「由變壞故名色取蘊」변하고 무너지므로 색취온이라 한다
  • 손이 닿으면 변괴
  • 욕망에 괴롭혀 무너짐(可惱壞)
유설「變礙故名為色」변하고 막으므로 색이라 한다
변애설에 대한 세 반론
반론 ①극미는 막지 않는다
답극미는 홀로 머물지 않고 모여야 변애가 이루어진다(無一極微各處而住)
반론 ②과거 · 미래의 색은 지금 막지 않는다
답일찍이 · 앞으로 변애하며 같은 부류다(태울 땔감)
반론 ③무표는 막지 않는다
풀이 ㉮표색을 따른다(나무와 그림자)
✕표업이 멸하면 무표도 멸해야 함
풀이 ㉯의지처 대종이 변애한다
재반론그러면 오식도 색
답의지 방식이 다르다(그림자 · 빛)
✕비바사의 뜻과 어긋나고 무표는 대종이 멸해도 남음
별석오식의 의지처는 변애하는 근 또는 변애 없는 의근으로 일정하지 않으나 무표의 의지처는 늘 변애하는 대종
천친은 마지막 풀이를 「別釋」으로 남긴다(『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3b~3c)
도표 7 · 색의 정의 논쟁

중현의 반격

『순정리론』 권2는 이 대목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중현은 먼저 극미 문제에서, 홀로 머무는 극미는 없다는 답에 더해 「홀로 머무는 극미가 있더라도 변애는 있으며 다만 식을 일으키지 않을 뿐」이라는 이설을 소개한다. 과거 · 미래의 색에 대해서는 「예전의 불」, 「앞으로의 불」이 지금 마을을 태우지 않아도 불이라 부르는 세간의 말을 들어 변애의 정의를 지킨다.

그리고 무표의 첫째 풀이(나무와 그림자)에 대한 천친의 비판을 정면으로 문제 삼는다.

經主於此誤立前宗,言如樹動影亦隨動,即說過言,如樹滅時影必隨滅,表色滅時無表應滅。然非彼喻,所立異故。

경주(천친)는 여기서 앞의 주장을 잘못 세웠다. 「나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 움직인다」고 하고는 곧 「나무가 없어지면 그림자도 반드시 따라 없어지듯 표색이 멸하면 무표도 멸해야 한다」고 허물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비유가 아니다. 세운 주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순정리론』 권2, T29, 338a

중현에 따르면 이 비유를 쓴 논사가 세운 주장은 「표색을 따른다」가 아니라 「의지처가 변애한다」였고, 비유가 말하는 의지처는 표색이 아니라 사대종이다. 천친은 상대의 주장을 잘못 재구성한 뒤 그것을 논파했다는 것이다. 중현은 또 「이것이 저것에서 생겼다고 저것이 멸할 때 이것도 멸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 장인 · 씨앗이 멸해도 아들 · 전각 · 싹은 멸하지 않듯이」라는 반례를 들어, 천친의 「나무가 멸하면 그림자도 멸한다」는 추론 자체가 부정확(不定)하다고 지적한다. 그림자 · 빛의 의지에 관한 천친의 비판에 대해서도, 그 비유는 「그림자 등의 대종이 나무 등의 대종을 의지처로 삼는다」는 뜻이었으므로 비바사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맞선다.

이 짧은 교전은 『구사론』과 『순정리론』의 관계를 압축해 보여 준다. 천친은 비바사의 정의를 소개하면서 그 약점을 집요하게 드러내고, 중현은 그 비판이 비바사사의 실제 주장을 잘못 짚었다고 되받는다. 색의 정의라는 가장 기초적인 문제에서부터 「경주(經主)」 천친과 「정리(正理)」 중현의 대결이 시작되는 셈이다.

진제 역 『구사석론』은 이 대목을 「변괴(變壞)」와 「대애(對礙)」로 옮겨, 「대애하므로 변괴할 수 있다」는 식으로 두 정의를 잇는다. 범본에서 색(rūpa)의 정의는 rūpaṇa라는 말을 풀이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 현장 역의 「변괴」와 「변애」는 그 말을 「괴롭혀짐」과 「막음」의 두 방향으로 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사론』 계품의 이 대목은 경전 쪽 풀이와 비바사 쪽 풀이가 나란히 놓인 자리다.

『구사론』은 색을 「손이 닿으면 변하는 것」이라는 경전의 정의로 먼저 세우고, 「막는 것」이라는 정의를 「유설」로 소개하며 그 약점을 따진다. 극미 · 과거미래색 · 무표색이라는, 막지 않는데도 색이라 불리는 세 가지가 그 시험대였다.

제3장 마음의 네 온과 처 · 계의 성립

본송

『구사론』 권1 · 분별계품 · T29, 3c~4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受領納隨觸,想取像為體,四餘名行蘊,如是受等三,及無表無為,名法處法界。 識謂各了別,此即名意處,及七界應知,六識轉為意。 由即六識身,無間滅為意。成第六依故,十八界應知。

풀이

수는 촉을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고, 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본체로 하며, 네 온 밖의 나머지를 행온이라 한다. 이렇게 수 등 세 온과 무표와 무위를 법처 · 법계라 한다. 식은 저마다 가려 아는 것이니, 이것을 의처라 하며 또 일곱 계라고 알아야 한다. 여섯 식이 바뀌어 의가 된다. 여섯 식 그 자체가 끊김 없이 멸한 것을 의라 한다. 여섯째 식의 의지처를 이루기 위해서이니, 열여덟 계라고 알아야 한다.

술어 풀이

受수
vedanā. 촉(觸)에 따라 괴로움 · 즐거움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받아들이는(領納) 작용. 여섯 감관의 촉에서 생기므로 육수신(六受身)으로도 나눈다.
想상
saṃjñā. 대상의 모습을 취하는(取像) 작용. 푸름 · 노랑, 길고 짧음, 남자 · 여자, 원수 · 친구 같은 모습을 붙잡는다.
行행
saṃskāra. 색 · 수 · 상 · 식을 뺀 나머지 모든 유위. 경전은 대표로 사(思, 의도)를 들지만, 아비달마는 다른 심소와 심불상응행까지 모두 여기에 넣는다.
識식
vijñāna. 저마다 대상을 가려 아는(各了別) 것. 대상의 「총체적 모습(總相)」을 취한다.
法處 · 法界법처 · 법계
dharmāyatana · dharmadhātu. 의(意)의 대상 가운데 다른 처 · 계에 들지 않는 것들의 묶음. 수 · 상 · 행 세 온, 무표색, 세 무위의 일곱 가지가 여기에 든다.
意處 · 意界의처 · 의계
manāyatana · manodhātu. 처의 문에서는 식온 전체가 의처가 되고, 계의 문에서는 여섯 식계와 의계의 일곱으로 나뉜다. 의계는 막 멸한 식이 다음 식의 의지처가 된 것이다.
無間滅무간멸
samanantara-niruddha. 바로 앞 찰나에 끊김 없이 멸한 것. 의근의 정체를 정의하는 말이다.
攝섭
saṃgraha. 포섭. 한 법이 어떤 온 · 처 · 계에 「든다」는 것. 『구사론』은 승의의 포섭은 자성의 포섭뿐이라고 못 박는다.

수와 상, 그리고 행온 — 「나머지 전부」

수온은 「촉을 따라 받아들이는 것」으로, 즐거움 · 괴로움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셋이다. 이것을 다시 눈의 촉에서 생긴 수부터 의의 촉에서 생긴 수까지 여섯으로 나누어 육수신이라 한다. 상온은 「모습을 취하는 것」으로, 푸르고 노랗고 길고 짧은 모습, 남자 · 여자, 원수 · 친구, 괴로움 · 즐거움 같은 모습을 붙잡는다. 이것도 육상신으로 나뉜다.

행온의 정의는 이 둘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수와 상은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로 정의되지만, 행온은 「무엇이 아닌가」로 정의된다. 「앞뒤의 색 · 수 · 상 · 식을 뺀 나머지 모든 행을 행온이라 한다(除前及後色、受、想、識,餘一切行名為行蘊)」. 행온은 남은 것을 다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부처는 행온을 「여섯 사신(六思身)」, 곧 여섯 감관에 따른 의도라고 설했다. 그렇다면 행온은 사(思)뿐이 아닌가. 천친의 답은 두 단계다.

由最勝故。所以者何?行名造作,思是業性造作義強,故為最勝。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행은 조작(造作)이라는 뜻인데, 사는 업의 본성이어서 조작의 뜻이 강하므로 가장 뛰어나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a

경전이 사만 든 것은 대표를 든 것이다. 그러나 행온이 사뿐이라면 큰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둘째 단계의 논증이다.

若不爾者,餘心所法及不相應,非蘊攝故應非苦集,則不可為應知應斷。

그렇지 않다면 나머지 심소법과 불상응행은 온에 포섭되지 않으므로 고제도 집제도 아니게 되고, 그러면 알아야 할 것도 끊어야 할 것도 될 수 없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a

천친은 경전의 「한 법이라도 통달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나는 그가 괴로움의 끝을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를 근거로 든다. 탐 · 진 같은 번뇌나 득 · 명근 같은 불상응행이 오온 밖에 있다면, 그것들은 사성제 밖에 있게 되고, 수행자는 그것을 알 필요도 끊을 필요도 없게 된다. 이것은 해탈론 전체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네 온을 뺀 나머지 유위의 행은 모두 행온에 포섭된다고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아비달마가 행온을 「나머지 전부」로 만든 이유는 분류의 편의가 아니라 해탈의 완결성이었다.

이렇게 정의된 수 · 상 · 행의 세 온에 무표색과 세 무위를 더한 일곱이 처의 문에서는 법처, 계의 문에서는 법계가 된다. 행온 안에 들어간 심소와 심불상응행의 목록은 이 품에서 다루지 않는다. 천친은 그것을 분별근품으로 미루며, 그 상세는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서 다룬다.

식온과 의계 — 같은 것을 왜 따로 세우는가

식은 「저마다 그 대상을 가려 알며, 대상의 모습을 총체로 취한다(各各了別彼彼境界,總取境相)」. 수 · 상 등 심소가 대상의 특정한 측면(즐거움인지, 어떤 모습인지)을 붙잡는 데 비해, 식은 대상 자체를 통째로 안다. 이 식온은 처의 문에서는 의처 하나가 되고, 계의 문에서는 일곱 계, 곧 안식계에서 의식계까지의 여섯 식계와 의계가 된다.

여기서 의문이 나온다. 식온은 여섯 식뿐인데, 그 밖에 의계라는 것이 따로 있는가. 「다른 법은 없다(更無異法)」. 의계는 여섯 식 자신이다. 다만 시간적 위치가 다를 뿐이다.

即六識身無間滅已,能生後識故名意界,謂如此子即名餘父,又如此果即名餘種。

여섯 식이 끊김 없이 멸하고 나서 뒤의 식을 낳을 수 있으므로 의계라 한다. 이 사람이 아들이면서 다른 이의 아버지라 불리고, 이 열매가 다른 것의 씨앗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b

그렇다면 실제 계는 열일곱이나 열둘뿐이지 않은가. 여섯 식과 의계가 서로를 포섭하므로, 둘 중 하나를 빼면 열둘(여섯 식계를 빼는 경우)이나 열일곱(의계를 빼는 경우)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게송의 답이 「여섯째 식의 의지처를 이루기 위해서이니 열여덟 계라고 알아야 한다」이다.

如五識界別有眼等五界為依,第六意識無別所依,為成此依故說意界。如是所依能依境界,應知各六界成十八。

다섯 식계에는 그 의지처로 안근 등 다섯 계가 따로 있지만, 여섯째 의식에는 따로 의지처가 없다. 이 의지처를 이루기 위해 의계를 말한다. 이렇게 의지처 · 의지하는 것 · 대상이 각각 여섯이어서 열여덟 계가 된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b

십팔계는 「근 여섯 · 경 여섯 · 식 여섯」이라는 대칭 구조를 위해 의계를 따로 세운 것이다. 안식의 의지처는 안근이라는 물질이지만, 의식에는 그런 물질적 의지처가 없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막 멸한 마음」이다. 의근의 정체가 무간멸의 식이라는 이 정의는 아비달마의 가장 독특한 이론 가운데 하나다. 대승 유식은 이와 달리 제7 말나식을 늘 함께하는 의근으로 세운다(핵심 개념 「구식」).

이 정의에 대한 반론이 하나 더 있다. 아라한이 열반에 들기 직전의 마지막 마음(無學最後念心)은 멸한 뒤 다음 식을 낳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의계가 아니어야 하지 않은가. 천친의 답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이미 의(意)의 성질에 머물러 있고, 다른 조건이 빠졌기 때문에 뒤의 식이 생기지 않을 뿐이다」이다. 의계라는 자격은 실제로 다음 식을 낳았느냐가 아니라 다음 식을 낳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느냐로 정해진다.

오온색온무표를 뺀 열 가지
십이처안 · 이 · 비 · 설 · 신처 + 색 · 성 · 향 · 미 · 촉처(10처)
십팔계안 · 이 · 비 · 설 · 신계 + 색 · 성 · 향 · 미 · 촉계(10계)
오온색온의 무표+수온+상온+행온+무위 3
십이처법처
십팔계법계
오온식온
십이처의처
십팔계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계 + 의계(7계)
「六識轉為意」여섯 식이 바뀌어 의가 된다의계는 막 멸한 여섯 식, 의식의 의지처를 이루기 위해 따로 세운다(『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a~4b)
도표 8 · 오온에서 십이처 · 십팔계로

의계는 여섯 식과 다른 법이 아니다. 막 멸해서 다음 식의 의지처가 된 식이 의계다. 십팔계가 열여덟인 것은 근 · 경 · 식이 각각 여섯이라는 대칭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포섭 — 법은 오직 자성만을 포섭한다

오온 · 십이처 · 십팔계가 다 정의되었으니, 이제 그 범위를 견준다. 「온은 모든 유위를 포섭하고, 취온은 모든 유루만을 포섭하며, 처와 계는 모든 법을 남김없이 포섭한다」. 무위는 온에 들지 않으므로 온은 유위만 포섭하고, 처 · 계는 법처 · 법계에 무위를 담으므로 모든 법을 포섭한다.

그러면 「포섭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게송은 「모든 법은 색온 하나, 의처 하나, 법계 하나로 다 포섭된다. 자성을 포섭하고 다른 것은 포섭하지 않으니, 다른 성질과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謂於諸處就勝義說,唯攝自性不攝他性。所以者何?法與他性恒相離故。

모든 곳에서 승의로 말하면 오직 자성만을 포섭하고 다른 성질은 포섭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법은 다른 성질과 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b

예컨대 안근은 색온 · 안처 · 안계 · 고제 · 집제 등에 포섭된다. 그것들이 안근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온 · 처 · 계는 포섭하지 않는다. 경전에서 「사섭사(四攝事)가 대중을 거둔다」고 할 때처럼 한 법이 다른 법을 「거둔다」고 말하는 것은 세속의 말이지 승의의 포섭이 아니다. 이 원칙은 뒤의 모든 분류를 지배한다. 어떤 법이 어떤 범주에 「든다」는 말은 그 범주가 그 법의 자성이라는 뜻이며, 비유적 관계나 기능적 연결은 포섭이 아니다.

색온 · 의처 · 법계라는 세 칸으로 모든 법이 덮인다는 진술은 중요하다. 색온은 열 가지 색처 · 색계와 무표를 덮고, 의처는 일곱 심계를 덮고, 법계는 무표와 수 · 상 · 행과 무위를 덮는다. 무표가 색온과 법계 양쪽에 걸쳐 있으므로 세 칸은 겹치지만 빈틈은 없다.

오온색온
처10처 + 법처 일부(무표)
계10계 + 법계 일부(무표)
오온수온
처법처 일부
계법계 일부
오온상온
처법처 일부
계법계 일부
오온행온
처법처 일부
계법계 일부
오온식온
처의처 전부
계7심계 전부(안식~의식계 + 의계)
오온오온에 들지 않는 것 → 무위 3
처법처 일부
계법계 일부
처 · 계 = 모든 법
온 = 모든 유위
취온 = 모든 유루
「總攝一切法,由一蘊處界」모든 법은 한 온(색온) · 한 처(의처) · 한 계(법계)로 다 포섭된다「唯攝自性不攝他性」오직 자성만 포섭한다(『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b)
도표 9 · 온 · 처 · 계의 상호 포섭

두 눈은 왜 한 계인가

포섭 원리를 세운 직후, 천친은 구체적인 반론 하나를 다룬다. 눈 · 귀 · 코는 둘씩 있다. 그렇다면 계의 수는 열여덟이 아니라 스물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게송의 답은 「종류 · 대상 · 식이 같으므로, 둘이어도 계의 본체는 하나다(類境識同故,雖二界體一)」이다. 두 눈은 같은 안근의 자성이고(종류), 같은 색을 대상으로 하며(대상), 같은 안식의 의지처다(식). 그러므로 하나의 계다.

그러면 왜 둘로 나 있는가. 게송은 「단정하게 하기 위해(為令端嚴)」라고 한다. 여기서 천친은 비바사사의 풀이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몸의 모습을 단정하게 하려고 둘로 났다는 풀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묻는다.

若本來爾,誰言醜陋?又猫鵄等雖生二處,有何端嚴?

본래 그렇게 생겼다면 누가 추하다 하겠는가. 또 고양이나 올빼미 등은 두 곳에 났다 한들 무슨 단정함이 있는가.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4c

천친이 받아들이는 풀이는 「일으키는 식을 밝고 또렷하게(明了) 하기 위해서」다. 한쪽 눈을 감으면 빛깔을 분별하는 것이 또렷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으로 안다. 「단정함」이란 외모가 아니라 작용의 완전함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 해석을 받아들여, 「단정하다는 말은 바로 작용을 늘린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대비바사론』 권13이 「혀가 둘이면 독사 같다고 세상이 비웃는다」며 외모의 단정함을 말한 것과 대조된다. 두 눈이 하나의 식을 일으키는 문제는 권2의 「두 눈으로 보는가」 논의에서 다시 나온다.

제4장 쌓임 · 문 · 종족온 · 처 · 계라는 이름의 뜻

본송

『구사론』 권1 · 분별계품 · T29, 4c~5c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聚生門種族,是蘊處界義。 諍根生死因,及次第因故,於諸心所法,受想別為蘊。 蘊不攝無為,義不相應故。 隨麁染器等,界別次第立。

풀이

쌓임 · 생겨나는 문 · 종족이 온 · 처 · 계의 뜻이다. 다툼의 뿌리이고 생사의 원인이며 차례의 까닭이 되므로, 여러 심소법 가운데 수와 상을 따로 온으로 세웠다. 온은 무위를 포섭하지 않으니, 뜻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거칠음 · 물듦 · 그릇 등과 계의 구별에 따라 차례를 세웠다.

술어 풀이

蘊 · 聚온 · 취
skandha. 무더기, 쌓임. 과거 · 미래 · 현재, 안 · 밖, 거칠고 미세함 등 갖가지 색을 「한 무더기로 묶은 것」이 색온이다.
處 · 生門처 · 생문
āyatana. 심 · 심소가 생겨나 자라는 문. 「생장(生長)」의 뜻이라고 어원적으로 풀이한다.
界 · 種族계 · 종족
dhātu. 한 산에 구리 · 쇠 · 금 · 은의 광맥(族)이 여럿 있듯이, 한 몸에 있는 열여덟 종류의 법의 근원.
假有 · 實有가유 · 실유
prajñapti-sat · dravya-sat. 여러 실재가 모여 이루어진 것에 붙인 이름일 뿐인 존재와, 그 자체로 있는 존재. 「온은 가유인가」가 이 장의 논쟁이다.
諍根쟁근
다툼의 뿌리. 욕망에 대한 집착과 견해에 대한 집착의 둘. 수는 앞의 것, 상은 뒤의 것의 가장 강한 원인이다.
法蘊법온
dharma-skandha. 부처가 설한 가르침의 단위. 「팔만 법온」이라는 말이 경전에 전한다.
六界육계
『다계경』 등이 사람을 이루는 요소로 든 지 · 수 · 화 · 풍 · 공 · 식의 여섯. 십팔계와 다른 분류다.

셋으로 나눈 까닭 — 짧게

왜 같은 법들을 온 · 처 · 계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했는가. 「어리석음 · 근기 · 좋아함이 각각 셋이므로(愚根樂三故)」라는 답과, 마음 쪽을 「나」로 붙잡는 이에게 오온을, 물질 쪽을 붙잡는 이에게 십이처를, 둘 다를 붙잡는 이에게 십팔계를 설했다는 풀이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덧붙인다.

첫째, 천친은 이 풀이 앞에 「전설(傳說)」, 곧 「이렇게 전해 온다」는 말을 붙였다. 『구사론』에서 「전설」은 천친이 비바사사의 설을 자기 판단과 구별해 전할 때 쓰는 표지다. 법보는 『구사론』 서두의 「비바사사가 이렇게 전한다」를 풀이하며 「전설이라 한 것은 자기가 믿지 않음을 드러낸다(言傳說者,顯己不信)」고 했다. 둘째,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 대목에 「경주가 여기서 말한 것은 아직 적다(經主此中所說猶少)」고 하며 셋씩 짝지은 다른 까닭들을 덧붙였다. 수행의 세 단계, 아만 · 아소집 · 식의 의지처에 대한 미혹의 세 허물, 목숨 · 재산 · 가문을 믿는 교만의 세 병이 그것이다. 삼과의 성립 근거를 둘러싸고도 이렇게 해석이 겹겹이 쌓였다.

쌓임 · 생겨나는 문 · 종족

천친이 더 공을 들이는 것은 「온 · 처 · 계라는 이름이 각각 무슨 뜻인가」이다.

온은 「쌓임(聚)」의 뜻이다. 근거는 경전이다. 「모든 색은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안이든 밖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못하든 뛰어나든, 멀든 가깝든, 이 모든 것을 대략 한 무더기로 묶어 색온이라 한다」. 천친은 이 경문의 열한 가지 구분을 하나씩 풀이한다. 과거 · 미래 · 현재는 무상이 이미 멸한 것, 아직 생기지 않은 것, 생겼으나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이다. 안 · 밖은 자기 몸과 그 나머지다. 거칢 · 미세함은 막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고도 하고, 서로 견주어 정한다고도 한다. 견주어 정한다면 거칢과 미세함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반론에, 천친은 「견주는 대상이 다르므로 그렇지 않다. 저것에 견주어 거친 것은 결코 그것에 견주어 미세하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처럼」이라고 답한다. 대덕 법구는 다섯 근이 취하는 것을 거친 색, 나머지를 미세한 색이라 하고,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을 가까운 색,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을 먼 색이라 하는 등 다른 풀이를 낸다.

처는 「생겨나는 문(生門)」의 뜻이다. 「심 · 심소법이 생장하는 문이라는 뜻이 처의 뜻이다(心心所法,生長門義是處義)」. 처(āyatana)라는 말을 「생장하게 하는 것」으로 어원 풀이한 것이다.

계는 「종족(種族)」의 뜻이다.

法種族義是界義,如一山中有多銅鐵金銀等族,說名多界。如是一身或一相續,有十八類諸法種族,名十八界。

법의 종족이라는 뜻이 계의 뜻이다. 한 산에 구리 · 쇠 · 금 · 은 등 여러 광맥이 있는 것을 여러 계라 하듯이, 한 몸 또는 한 상속에 열여덟 종류의 법의 종족이 있는 것을 십팔계라 한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5a
한 산의 여러 광맥
그림 · 한 산의 여러 광맥

여기서 종족은 「생겨나는 근본(生本)」이다. 안근 등은 무엇의 근본인가. 자기와 같은 종류의 법, 곧 동류인(同類因)으로서 뒤의 같은 종류를 낳는 근본이다. 그런데 이렇게 풀면 무위는 계라 할 수 없다. 무위는 아무것도 낳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풀이가 소개된다. 「계라는 말은 종류의 뜻을 나타낸다. 열여덟 법의 종류와 자성이 저마다 다르므로 십팔계라 한다」. 이 풀이라면 무위도 하나의 종류로서 계가 된다.

온은 가유인가 — 온의 실재 논쟁

「쌓임이 온의 뜻」이라는 정의에서 곧바로 논쟁이 터진다. 이 대목은 분별계품에서 천친이 자기 입장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는 곳 가운데 하나다.

첫 반론과 비바사사의 답

반론은 이렇다. 「쌓임의 뜻이 온의 뜻이라면 온은 가유여야 한다. 여러 실재가 모여 함께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무더기나 「나」와 같다(若言聚義是蘊義者,蘊應假有,多實積集共所成故,如聚如我)」. 쌓아 놓은 곡식 더미가 낱알들에 붙인 이름일 뿐이듯, 오온도 낱낱 법에 붙인 이름일 뿐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오온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무아의 논법이 오온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셈이다.

비바사사 쪽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실재하는 극미도 온이라 하기 때문이다(此難不然,一實極微亦名蘊故)」라고 답한다. 온은 낱낱 실재에도 붙는 이름이므로 가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자 반론자는 되묻는다. 그렇다면 「쌓임의 뜻이 온의 뜻」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실재에는 쌓임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어원 풀이들과 천친의 판정

이 궁지를 벗어나려는 다른 풀이가 둘 소개된다. 하나는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다는 뜻이 온의 뜻」이라는 풀이다. 세간에서 어깨를 「온」이라 부르는 것은 물건이 그 위에 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눌 수 있다는 뜻(可分段義)이 온의 뜻」이라는 풀이다. 세간에서 빚을 「세 온(三蘊)으로 갚으면 주겠다」고 하듯, 온은 몫 · 부분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 풀이라면 낱낱 실재도 하나의 몫으로서 온이 될 수 있다.

천친은 이 풀이들을 「경을 넘어선다(此釋越經)」고 물리친다. 경전은 분명히 「쌓임의 뜻」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문은 과거 등의 낱낱 색을 따로 온이라 한 것이다」라는 해석에 대해 결정적인 판정을 내린다.

此執非理,故彼經言:如是一切略為一聚說名蘊故,是故如聚,蘊定假有。

이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 경은 「이 모든 것을 대략 한 무더기로 묶어 온이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더기와 같이, 온은 반드시 가유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5a

경량부의 반격 — 처도 가유인가

그러자 반론이 반대 방향에서 온다. 보광은 이것을 「경량부가 논주를 힐난한다」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색을 가진 처들도 가유라고 인정해야 한다. 안근 등의 극미는 여럿이 모여야 생겨나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온이 쌓임이어서 가유라면, 처도 극미가 모여야 성립하니 가유가 아닌가. 여기서 천친은 처의 실재를 지킨다.

此難非理,多積聚中一一極微有因用故。若不爾者,根境相助共生識等應非別處,是則應無十二處別。

이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다. 여럿이 모인 가운데서도 하나하나의 극미가 원인의 작용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근과 경이 서로 도와 함께 식을 낳는 것은 따로 처가 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열두 처의 구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5a

온은 「묶음」이라는 개념이므로 가유이지만, 처는 「식을 낳는 원인」이라는 개념이므로 낱낱 극미에 그 원인의 작용이 있고, 따라서 실유다. 보광은 이 대목을 두고 「논주의 이 종지는 온을 가유로 인정하는 점에서 비바사를 어겨 깨뜨리고, 처를 실유로 인정하는 점에서 경량부를 깨뜨린다. 이치를 기준으로 삼아 한 종에 집착하지 않고, 어느 쪽이든 뛰어난 것을 따라 자기 입장으로 풀었다」고 평한다(『구사론기』 권1, T41, 29c). 천친의 「이치를 기준으로 삼는(以理為量)」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이다.

『대비바사론』의 말을 어떻게 읽는가

남은 문제는 『대비바사론』이 「극미 하나가 곧 한 계 · 한 처 · 한 온」이라고 한 말이다. 천친은 이것을 이렇게 처리한다. 비바사의 아비달마 논사들은 「가유의 온을 보는 관점에서는 극미를 한 계 · 한 처 · 한 온의 일부라 하고, 그렇게 보지 않을 때는 극미가 곧 한 계 · 한 처 · 한 온이라 한다」. 그리고 「한 온이라 한 것은 부분에 전체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옷의 일부를 태워도 옷을 태웠다고 하듯이(如燒少衣亦說燒衣)」. 비바사의 말조차 온 가유설과 어긋나지 않게 읽어 낸 것이다.

중현의 반론 — 「쌓임의 뜻」은 쌓임 자체가 아니다

『순정리론』 권3은 이 결론을 뒤집는다. 중현의 핵심 논리는 「쌓임의 뜻」이라는 말의 문법에 있다.

此難不然,於聚所依立義言故,非聚即義;義是實物名之差別,聚非實故。

이 힐난은 옳지 않다. 쌓임이 의지하는 것에 대해 「뜻(義)」이라는 말을 세웠기 때문이지, 쌓임 자체가 곧 뜻인 것은 아니다. 뜻이란 실재하는 것의 이름의 구별이고, 쌓임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순정리론』 권3, T29, 343c

경전이 「묶어서 온이라 한다」고 한 것은, 온이 낱낱 실재의 묶음이라는 존재론적 진술이 아니라 교화를 위한 장치라고 중현은 본다. 삼세의 수많은 색이 저마다 온이라면 수행자는 「내가 어찌 이 끝없는 온을 다 알고 끊겠는가」 하며 물러설 것이므로, 같은 모습이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어 말한 것이다. 또 어리석은 이가 여러 온을 하나로 보아 「나」라고 집착하므로, 그 하나라는 생각을 깨려고 한 온 안에 여러 부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又一極微三世等攝,以慧分析略為一聚。蘊雖即聚,而實義成,餘法亦然,故蘊非假。

또 하나의 극미도 삼세 등에 포섭되므로, 지혜로 분석해 대략 한 무더기로 삼는다. 온은 곧 쌓임이지만 실재의 뜻이 이루어지며, 다른 법도 그러하므로 온은 가유가 아니다.

『순정리론』 권3, T29, 344a

중현은 이어 「나눌 수 있다는 뜻」의 풀이를 천친이 「경을 넘어선다」고 물리친 데 대해서도 반박한다. 처와 계의 뜻은 경전 근거 없이 이치로만 풀이해 놓고 온의 뜻에만 경전 근거를 고집하는 것은 「편을 드는 것 같다(似專朋黨)」는 것이다.

  1. ①반론
    「蘊應假有,多實積集共所成故,如聚如我」온은 여러 실재가 모여 이룬 것이니 무더기나 「나」처럼 가유여야 한다
  2. ②비바사사
    극미 하나도 온이라 한다
    재반론
    그러면 하나에는 쌓임의 뜻이 없다
  3. ③다른 어원
    짐을 진다(어깨) · 나눌 수 있다(세 몫)
    천친
    「此釋越經」경을 넘어선다
  4. ④천친의 판정
    「是故如聚,蘊定假有」무더기와 같이 온은 반드시 가유다
  5. ⑤경량부의 반격
    처도 극미가 모여야 문이 되니 가유
    천친
    「多積聚中一一極微有因用故」낱낱 극미에 원인의 작용이 있으니 처는 실유
  6. ⑥비바사
    「극미 하나가 한 온」
    부분에 전체의 이름(옷 일부를 태워도 옷을 태웠다)
  7. ⑦중현의 반론
    (『순정리론』 권3)「於聚所依立義言故,非聚即義」쌓임이 의지하는 실재를 「뜻」이라 한 것
    「故蘊非假」
보광 — 논주는 온 가유에서는 경량부를, 처 실유에서는 유부를 따랐다(『구사론』 권1, T29, 5a · 『구사론기』 권1, T41, 29c)
도표 10 · 「온은 가유인가」 논쟁

이 논쟁은 단순한 어원 다툼이 아니다. 「나」를 오온에 붙인 이름으로 보는 무아의 논법이 오온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 곧 분석이 어디서 멈추는가의 문제다. 천친은 온에서 멈추지 않고 처의 극미까지 내려가 거기서 실재를 인정했다. 이 「어디까지가 가유인가」의 물음은 경량부를 거쳐 대승의 「법도 공하다」로 이어지는 사상사의 한 갈래다(핵심 개념 「무아 · 오온」의 3부).

수와 상은 왜 따로 온이 되었는가

행온은 「나머지 전부」인데, 같은 심소인 수와 상만 따로 온으로 세운 까닭은 무엇인가. 게송은 세 가지를 든다. 다툼의 뿌리, 생사의 원인, 차례의 까닭이다.

諍根有二,謂著諸欲及著諸見。此二受想,如其次第為最勝因,味受力故貪著諸欲,倒想力故貪著諸見。

다툼의 뿌리는 둘이니, 욕망에 대한 집착과 견해에 대한 집착이다. 이 둘에 대해 수와 상이 차례대로 가장 뛰어난 원인이 된다. 수를 맛들이는 힘 때문에 욕망에 탐착하고, 뒤바뀐 상의 힘 때문에 견해에 탐착한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5b

보광은 재가자는 욕망에, 출가자는 견해에 탐착한다고 풀이한다. 수는 앞의 다툼을, 상은 뒤의 다툼을 가장 강하게 일으킨다. 또 생사의 원인으로서도, 「수에 탐착해 뒤바뀐 상을 일으키므로 생사에 윤회한다」. 셋째 까닭인 「차례」는 바로 이어지는 오온의 순서 논의에서 밝혀진다.

무위는 왜 온이 아닌가

세 무위가 온에 들지 않는 까닭은 「뜻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義不相應故)」이다. 천친은 그 뜻을 세 겹으로 풀이한다.

첫째, 무위는 그 본체가 색도 수도 상도 행도 식도 아니므로 다섯 온 어디에도 넣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여섯째 온을 세울 수도 없다. 둘째, 온은 쌓임의 뜻인데, 무위에는 색처럼 과거 · 미래 · 현재 등의 갖가지 품류의 차이가 없으므로 「묶어서 한 무더기」로 삼을 것이 없다. 셋째, 「취온」이라는 말은 물듦의 의지처를, 「온」이라는 말은 물듦과 맑음의 두 의지처를 드러낸다. 무위는 물듦의 의지처도 맑음의 의지처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설이 하나 소개된다. 「깨진 병이 병이 아니듯, 온이 그친 것(열반)은 온이 아니다」. 천친은 이 비유에 대해, 그렇다면 처와 계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어 무위가 처 · 계에도 들 수 없게 되는 허물이 있다고 짧게 지적한다.

오온의 차례 — 거칠음에서 미세함으로

오온은 왜 색 · 수 · 상 · 행 · 식의 순서인가. 게송은 네 가지 원리를 든다. 거칠음, 물듦, 그릇 등의 비유, 계의 구별이다.

첫째, 거칠음의 순서. 색은 막힘이 있으므로 가장 거칠다. 마음 쪽에서는 수가 가장 거칠어서 세간에서도 「내 손이 아프다」고 말한다. 상은 그다음으로 거칠어서 남자 · 여자 같은 모습을 쉽게 안다. 행은 식보다 거칠어서 탐 · 진 같은 작용을 쉽게 안다. 식은 대상의 총체를 취하므로 가장 미세하다.

둘째, 물듦의 순서. 끝없는 생사 동안 남녀는 서로의 색을 사랑해 왔다. 그것은 즐거운 수를 맛들이기 때문이고, 수에 탐착하는 것은 뒤바뀐 상 때문이며, 뒤바뀐 상은 번뇌(행) 때문이고, 번뇌는 식에 의지해 일어난다.

셋째, 그릇 등의 비유. 「색은 그릇 같고, 수는 음식 같고, 상은 양념 같고, 행은 요리사 같고, 식은 먹는 사람 같다(或色如器、受類飲食、想同助味、行似厨人、識喻食者)」.

넷째, 계의 구별. 욕계에는 묘한 욕망의 대상이 있어 색의 모습이 두드러지고, 색계의 정려에는 뛰어난 희열이 있어 수의 모습이 두드러지며, 무색계의 세 처에서는 공 등의 모습을 취하므로 상이 두드러지고, 맨 위의 유정(有頂)에서는 사(思)가 가장 뛰어나 행이 두드러진다. 식은 이 모두에 머무는 것(識住)으로, 밭과 씨앗의 관계처럼 마지막에 놓인다.

천친은 이 차례의 까닭이 곧 수와 상을 따로 세운 셋째 까닭이라고 매듭짓는다. 수와 상은 행 가운데서도 모습이 거칠고, 물듦을 낳고, 음식과 양념에 비유되며, 색계와 무색계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에 따로 온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온에는 늘거나 줄어드는 허물이 없다」.

육근의 차례와 「색처」 · 「법처」라는 이름

처와 계의 순서는 육근의 순서에서 정해진다. 안 · 이 · 비 · 설 · 신 · 의의 순서에 대해 게송은 「앞의 다섯은 현재의 경계만 취하고, 네 경계는 소조색뿐이며, 나머지는 작용이 멀고 빠르고 밝기 때문에, 또는 머무는 자리의 순서에 따라」라고 한다. 다섯 근은 현재의 대상만 취하므로 과거 · 미래 · 무위까지 취하는 의근보다 앞이다. 앞의 네 근의 대상은 소조색뿐이지만 신근의 대상(촉경)에는 대종이 섞이므로 신근이 다섯째다. 눈과 귀는 먼 대상을 취하므로 앞서고, 둘 가운데 눈이 더 멀리 더 빨리 취한다. 멀리 산과 강은 보여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이 종을 치는 것이 먼저 보이고 소리는 나중에 들리기 때문이다. 코가 혀보다 앞서는 것은 음식을 앞에 두면 냄새를 먼저 맡고 맛은 나중에 보기 때문이다. 또는 몸에서 근이 놓인 자리가 위에서 아래로 눈 · 귀 · 코 · 혀 · 몸이고, 의는 자리가 없어 마지막이다.

또 하나의 물음은 이름이다. 열 가지 처가 다 색인데 왜 하나에만 「색처」라는 이름을 붙이고, 열두 처가 다 법인데 왜 하나에만 「법처」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답은 「구별을 위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많은 것과 증상의 법을 포섭하기 때문에」다. 색처는 막힘이 있고(손이 닿으면 변괴함) 볼 수 있어(여기 · 저기 가리킬 수 있음) 색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세간도 이것만을 색이라 부른다. 법처는 수 · 상 등 많은 법을 포섭하고, 증상의 법인 열반이 여기에 들기 때문에 홀로 「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팔만 법온과 경전의 다른 분류 — 모두 이 안에

경전에는 오온 · 십이처 · 십팔계 말고도 갖가지 「온」 · 「처」 · 「계」의 이름이 나온다. 그것들은 이 체계에 들어오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 천친의 답은 「모두 여기에 포섭된다」이며, 그 첫 예가 부처의 가르침 자체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牟尼說法蘊,數有八十千,彼體語或名,此色行蘊攝。

풀이

모니께서 설하신 법온은 그 수가 팔만이다. 그 본체는 말이거나 이름이니, 이 색온과 행온에 포섭된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6a)

부처의 가르침의 본체를 「말소리(語)」로 보는 이에게는 법온이 색온(성경)에 들고, 「이름(名)」으로 보는 이에게는 행온(심불상응행의 명신)에 든다. 이 짧은 게송에 「가르침의 본체는 무엇인가」라는 유부 내부의 논쟁이 압축되어 있다. 명신 · 구신 · 문신이 심불상응행으로 실재한다는 유부의 입장은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서 다룬다.

그러면 팔만 법온의 「한 법온」은 얼마만 한 크기인가.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팔만 법온의 하나하나가 『법온족론』 한 부만 하여 저마다 육천 송이라는 설. 둘째, 온 · 처 · 계 · 연기 · 제 · 식 · 정려 · 무량 · 무색 · 해탈 · 승처 · 변처 · 각품 · 신통 · 무쟁 · 원지 · 무애해 등 가르침의 문 하나하나가 한 법온이라는 설. 셋째, 천친이 「여실하게 말하는 이(如實說者)」라 부르며 받아들이는 설이다.

如實說者,所化有情有貪瞋等八萬行別,為對治彼八萬行故,世尊宣說八萬法蘊。

여실하게 말하는 이는 이렇게 말한다. 교화받는 중생에게 탐 · 진 등 팔만 가지 행의 차별이 있으므로, 그 팔만 가지 행을 대치하기 위해 세존이 팔만 법온을 설하셨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6b

팔만이라는 수는 가르침의 분량이 아니라 중생의 병의 수에 맞춘 약의 수라는 것이다.

이어 천친은 경전의 다른 분류들을 하나씩 포섭해 보인다.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의 「다섯 온」은 계온이 색온(무표)에, 나머지 넷이 행온에 든다. 열 가지 변처(十遍處) 가운데 앞의 여덟은 무탐을 본성으로 하므로 법처에 들고, 함께 일어나는 오온까지 겸하면 의처와 법처에 든다. 팔승처도 그렇다. 공무변처 등 네 무색처는 네 온(수 · 상 · 행 · 식)을 본성으로 하므로 의처와 법처에 든다. 다섯 해탈처는 혜를 본성으로 하므로 법처에 들고, 함께 일어나는 것까지 겸하면 성처 · 의처 · 법처에 든다. 무상유정천처는 열 처에 들고(그곳에는 냄새와 맛이 없으므로), 비상비비상처는 의처와 법처에 든다.

  • 팔만 법온본체가 말이면 색온(성경) · 이름이면 행온(명신 등)
  •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의 다섯 온계온은 색온(무표) · 나머지 넷은 행온
  • 십변처 · 팔승처법처(무탐) · 함께 일어나는 것을 겸하면 의처 · 법처
  • 네 무색처의처 · 법처(네 온이 본성)
  • 다섯 해탈처법처(혜) · 겸하면 성처 · 의처 · 법처
  • 무상유정천처열 처(냄새 · 맛 없음)
  • 비상비비상처의처 · 법처
  • 육계(지 · 수 · 화 · 풍 · 공 · 식)앞의 넷은 촉계 · 공계는 색계 · 식계는 일곱 심계
  • 『다계경』의 62계모두 십팔계에 포섭
「如是餘蘊等,各隨其所應,攝在前說中」이렇게 다른 온 등도 저마다 마땅한 대로 앞에 말한 것 안에 포섭된다(『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6a~6c)
도표 11 · 경전의 다른 분류의 포섭

육계 — 공계와 식계

권1의 마지막은 『다계경(多界經)』이다. 이 경은 계를 예순두 가지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 사람을 이루는 여섯 계, 곧 지 · 수 · 화 · 풍 · 공 · 식이 있다. 앞의 넷은 이미 사대종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면 공계는 무위의 허공이고 식계는 모든 식인가. 천친은 둘 다 아니라고 한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空界謂竅隙,傳說是明闇;識界有漏識,有情生所依。

풀이

공계는 구멍과 틈을 말하니, 밝음과 어둠이라고 전한다. 식계는 유루의 식이니, 중생이 태어나는 의지처이다. (『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6c)

문과 창, 입과 코 같은 안팎의 구멍과 틈이 공계다. 구멍과 틈은 어떻게 아는가. 밝음과 어둠을 떠나 구멍을 취할 수는 없으므로, 공계는 밝음과 어둠을 본체로 한다. 이것을 「인아가색(隣阿伽色)」이라 한다. 아가(agha)는 쌓여 크게 막는 색이고, 공계의 색은 그것과 이웃해 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는 풀이와, 아가가 바로 막힘 없는 공계의 색이고 그것이 다른 막는 색과 이웃해 있어서라는 풀이가 함께 소개된다. 어느 쪽이든 공계는 유위의 색, 곧 색계(色界, 눈의 대상)에 든다. 무위의 허공과 공계를 가른 『대비바사론』 권75의 구별이 바로 이것이다.

식계는 유루의 식만이다. 육계는 중생이 태어나 살아가는 의지처로 설해졌고, 생을 이을 때의 마음(續生心)에서 목숨이 다할 때의 마음까지 늘 그 생을 지탱하는 것은 유루의 식이기 때문이다. 무루의 식은 생을 지탱하지 않는다. 그래서 육계는 십팔계에 이렇게 포섭된다. 앞의 넷은 촉계에, 공계는 색계에, 식계는 일곱 심계에. 「그 경의 나머지 계도 마땅한 대로 모두 이 십팔계에 포섭된다」. 권1은 이 말로 끝난다.

권1의 후반은 하나의 주장을 증명한다. 경전에 흩어진 어떤 분류도 오온 · 십이처 · 십팔계 밖에 있지 않다. 팔만 법온도, 다섯 법신의 온도, 선정의 처도, 육계도 모두 이 틀 안의 어딘가에 자리를 얻는다.

제5장 십팔계를 재는 스물두 개의 자

본송

『구사론』 권2 · 분별계품 · T29, 7a~10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一有見謂色,十有色有對,此除色聲八,無記餘三種。 欲界繫十八,色界繫十四,除香味二識,無色繫後三。 內五有熟養,聲無異熟生,八無礙等流,亦異熟生性,餘三實唯法,剎那唯後三。 十五唯修斷,後三界通三,不染非六生,色定非見斷。

풀이

하나가 볼 수 있으니 색(빛깔)이다. 열이 색을 가지며 막힘이 있다. 이 가운데 색과 소리를 뺀 여덟은 무기이고, 나머지는 세 가지 성질에 통한다. 욕계에 매인 것은 열여덟, 색계에 매인 것은 열넷이니 냄새 · 맛과 두 식을 뺀다. 무색계에 매인 것은 뒤의 셋이다. 안의 다섯은 이숙생과 장양이 있고, 소리에는 이숙생이 없다. 막힘 없는 여덟은 등류이며 이숙생의 성질도 있다. 나머지 넷은 세 가지이고, 실사는 법계뿐이며, 찰나는 뒤의 셋뿐이다. 열다섯은 수도에서만 끊고, 뒤의 세 계는 셋에 통한다. 물들지 않은 것, 여섯째에서 생기지 않은 것, 색은 견도에서 끊는 것이 아니다.

술어 풀이

有見유견
sanidarśana. 「여기 · 저기」로 가리켜 보일 수 있는 것. 십팔계 가운데 색계(빛깔) 하나뿐이다.
有對유대
sapratigha. 막힘(礙)이 있는 것. 장애유대 · 경계유대 · 소연유대의 세 가지로 나뉜다.
無記무기
avyākṛta. 선이라고도 불선이라고도 판정(記)할 수 없는 것.
繫계
매임. 어떤 법이 욕계 · 색계 · 무색계 가운데 어느 세계에 묶여 있는가.
尋 · 伺심 · 사
vitarka · vicāra.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 유심유사 · 무심유사 · 무심무사의 세 지(地)를 가르는 기준이다.
執受집수
upātta. 심 · 심소가 함께 붙잡아 의지처로 삼는 것. 살아 있는 몸의 감각 있는 부분.
異熟生 · 所長養 · 等流이숙생 · 소장양 · 등류
업의 과보로 생긴 것, 음식 · 수면 · 선정 등으로 길러진 것, 같은 종류의 앞선 것에서 흘러나온 것.
同分 · 彼同分동분 · 피동분
sabhāga · tatsabhāga. 자기 작용을 하고 있는(했던, 할) 근 · 경 · 식과, 그러지 않는 근 · 경 · 식.
見所斷 · 修所斷 · 非所斷견소단 · 수소단 · 비소단
견도에서 끊는 것, 수도에서 끊는 것, 끊을 것이 아닌 것(무루).

스물두 문 — 권2의 구성

권2는 「다시, 앞에서 말한 십팔계 가운데 몇이 볼 수 있고 몇이 볼 수 없는가, 몇이 막힘이 있고 몇이 막힘이 없는가, 몇이 선이고 몇이 불선이고 몇이 무기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십팔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재어 둘이나 셋으로 가르는 물음이 권2 끝까지 이어진다. 보광은 이것을 「이 아래가 대문의 셋째, 여러 문의 분별이니 모두 스물두 문으로 십팔계를 분별한다(此下大文第三諸門分別,總有二十二門分別十八界)」고 정리했다. 왜 온이나 처가 아니라 계로 분별하는가. 보광은 중현의 말을 빌려 「계에는 근 · 경 · 식이 갖추어 드러나므로 여러 문의 뜻을 알기 쉽고, 그러면 온과 처의 뜻도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답한다.

  1. ①유견 · 무견
  2. ②유대 · 무대
  3. ③선 · 불선 · 무기
  4. ④삼계의 매임
  5. ⑤유루 · 무루
  6. ⑥유심유사 등
  7. ⑦유소연 · 무소연
  8. ⑧유집수 · 무집수
  9. ⑨대종 · 소조
  10. ⑩적집 · 비적집
  11. ⑪능작 · 소작
  12. ⑫능소 · 소소
  13. ⑬능칭 · 소칭
  14. ⑭다섯 부류(이숙생 · 장양 · 등류 · 실사 · 찰나)
  15. ⑮얻음 · 성취
  16. ⑯내 · 외
  17. ⑰동분 · 피동분
  18. ⑱견소단 · 수소단 · 비소단
  19. ⑲견 · 비견(「눈이 보는가」 논쟁)
  20. ⑳몇 식이 아는가
  21. ㉑상 · 무상
  22. ㉒근 · 비근
「總有二十二門分別十八界」모두 스물두 문으로 십팔계를 분별한다(보광 『구사론기』 권2, T41, 34b)
도표 12 · 십팔계의 스물두 문

아래에서는 유견 · 무견부터 견소단 · 수소단까지를 차례로 보고, 견 · 비견의 문은 「눈이 보는가, 식이 보는가」의 논쟁으로, 마지막 세 문과 그 사이에 끼어든 의지(依) · 근 · 지(地)의 논의는 「의지와 경계」의 논의로 따로 읽는다.

볼 수 있는 것, 막힘이 있는 것

유견 — 「여기 · 저기」로 가리킬 수 있는 것

십팔계 가운데 볼 수 있는(有見) 것은 색계 하나다. 그 까닭은 「여기 · 저기의 차이로 가리켜 보일 수 있기 때문(以可示現此彼差別)」이다. 보광은 『순정리론』과 『대비바사론』이 유견의 뜻을 셋으로 풀이한다고 전한다. 첫째, 이 색은 반드시 봄(眼)과 함께 있으므로 유견이다. 둘째, 이 색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가리킬 수 있으므로 유견이다. 셋째, 이 색은 거울 등에 영상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유견이다. 『구사론』은 그 가운데 둘째만 들었다. 보광은 그 까닭을 「논을 짓는 이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풀이로, 경량부는 눈에 실제의 작용이 없다고 보고 영상도 실재하는 색으로 보지 않는데, 논주의 뜻이 경량부에 기울어 있으므로 「눈이 본다」와 「영상이 나타난다」는 풀이를 피하고 경량부와 어긋나지 않는 「가리켜 보일 수 있음」만 들었다고 해석한다.

유대 — 세 가지 막힘

막힘이 있는(有對) 것은 열 가지 색계, 곧 오근과 오경이다. 그런데 「대(對)는 막힘(礙)의 뜻」이고, 막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장애유대(障礙有對). 「자기가 다른 곳에서 막혀 생기지 못하는 것이다. 손이 손을 막고 돌이 돌을 막는 것과 같다」. 열 가지 색계가 이것이다. 물질이 같은 자리를 함께 차지하지 못하는 성질이며, 색의 정의 논쟁에서 본 「변애」와 같은 뜻이다.

둘째, 경계유대(境界有對). 대상을 가진 법이 자기 대상에 「걸리는」 것이다. 열두 계(오근, 일곱 심계)와 법계의 일부(심소)가 이것이다. 천친은 『시설론』을 인용해 이 막힘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有眼於水有礙非陸,如魚等眼。有眼於陸有礙非水,從多分說,如人等眼。

어떤 눈은 물에서 막히고 뭍에서는 막히지 않으니 물고기 등의 눈이다. 어떤 눈은 뭍에서 막히고 물에서는 막히지 않으니, 대부분으로 말해 사람 등의 눈이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7a

여기서 「막힌다」는 말은 거꾸로 들린다. 물고기의 눈은 물속에서 잘 보는데 왜 「물에서 막힌다」고 하는가. 천친의 풀이가 그 답이다. 「눈 등이 자기 대상에 대해 작용할 때 왜 막힌다고 하는가. 그것을 넘어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유대의 「막힘」은 작용의 한계, 곧 「그 대상에 묶여 있음」이다. 물고기의 눈은 물의 대상에 묶여 있어 그것을 넘지 못한다. 천친은 또 다른 풀이로 「막힘이란 만나 합함(和會)의 뜻」이라고도 한다. 눈이 자기 대상과 만나 작용한다는 뜻이다. 『시설론』은 같은 방식으로 밤에만 보는 눈(박쥐 · 올빼미), 낮에만 보는 눈(사람), 밤낮 다 보는 눈(개 · 승냥이 · 말 · 표범 · 고양이 · 살쾡이) 등을 든다.

셋째, 소연유대(所緣有對). 「심 · 심소가 자기의 소연에 대해」 갖는 막힘이다. 경계와 소연은 어떻게 다른가. 「어떤 법이 저 법에 대해 작용(功能)을 가지면 저 법을 이 법의 경계라 하고, 심 · 심소법이 저 법을 붙잡고 일어나면 저 법을 심 등의 소연이라 한다」. 경계는 작용이 미치는 범위이고, 소연은 마음이 실제로 붙잡는 대상이다. 그래서 오근은 경계유대이지만 소연유대는 아니다. 근은 마음이 아니므로 대상을 「붙잡지」 않는다.

이 셋의 관계를 천친은 네 경우로 정리한다. 경계유대이면서 장애유대가 아닌 것은 일곱 심계와 심소, 장애유대이면서 경계유대가 아닌 것은 오경, 둘 다인 것은 오근, 둘 다 아닌 것은 법계 가운데 심소가 아닌 것(무표 · 불상응 · 무위)이다. 게송이 「열이 막힘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장애유대만을 가리킨다.

이 대목 끝에서 천친은 경량부의 조사 구마라다(鳩摩邏多, Kumāralāta)의 게송을 인용하고 「이것이 인정하는 바다(此是所許)」라고 덧붙인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是處心欲生,他礙令不起,應知是有對,無對此相違。

풀이

어떤 곳에서 마음이 생기려 하는데 다른 것이 막아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 그것을 유대라고 알아야 한다. 무대는 이와 반대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7b)

보광은 이 게송을 두고 「구마라다는 경량부의 조사다. 이 게송의 뜻은 유부와 같지 않다. 논주의 뜻이 경량부에 기울어 있으므로 '이것이 인정하는 바'라고 했다」고 풀이한다. 유부에서 경계유대는 대상에 묶여 있음이지만, 구마라다에게 유대란 마음이 생기는 것을 다른 것이 가로막는 것이다. 막힘의 개념 자체가 「마음의 발생」을 중심으로 재정의된 것이다.

障礙有對장애유대
자기가 다른 곳에서 막혀 생기지 못함손이 손을, 돌이 돌을 막음
해당10색계(오근 · 오경)
境界有對경계유대
대상에 작용이 묶여 그 너머로는 작용하지 못함「有眼於水有礙非陸」물고기의 눈 · 밤의 눈(박쥐 · 올빼미)
해당오근 · 7심계 · 심소
所緣有對소연유대
심 · 심소가 자기 소연을 붙잡음
해당7심계 · 심소
네 경우
  • 경계만=7심계 · 심소
  • 장애만=오경
  • 둘 다=오근
  • 둘 다 아님=법계의 비상응법
구마라다(경량부)「是處心欲生,他礙令不起,應知是有對」— 천친 「此是所許」(『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7a~7b)
도표 13 · 세 가지 유대

선 · 불선 · 무기, 그리고 삼계의 매임

막힘이 있는 열 가지 가운데 색과 소리를 뺀 여덟, 곧 오근과 향 · 미 · 촉은 무기다. 「선이라고도 불선이라고도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숙의 과보를 「기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설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무루는 오직 무기여야 한다고 반박한다. 나머지 열 계는 선 · 불선 · 무기에 다 통한다. 일곱 심계는 무탐 등과 상응하면 선, 탐 등과 상응하면 불선, 나머지는 무기다. 법계는 무탐 등 자체, 그것과 상응하는 것, 그것이 일으킨 것, 그리고 택멸이 선이다. 색계와 성계는 선 · 불선의 마음이 일으킨 신표 · 어표일 때 선 · 불선이다.

삼계의 매임에서는 흥미로운 논쟁이 붙는다. 욕계에는 열여덟 계가 다 있고, 색계에는 열넷, 곧 냄새 · 맛과 비식 · 설식을 뺀 것이 있다. 냄새와 맛은 「덩어리 음식(段食)」의 본성인데, 덩어리 음식에 대한 욕망을 떠나야 색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대상이 없으므로 비식과 설식도 없다.

그러면 촉도 덩어리 음식의 일부인데 왜 색계에 있는가. 답은 「그곳의 촉은 덩어리 음식의 성질이 아니다」. 촉에는 근을 지탱하고 옷이 되는 등 다른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코와 혀도 쓸모가 없으니 없어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논쟁이 깊어진다. 코와 혀는 말을 하고 몸을 꾸미는 데 쓰인다고 답하면, 그것은 근의 자리(依處)만 있으면 되지 근 자체는 필요 없다는 반박이 나온다. 쓸모가 없어도 근은 생길 수 있다(태 안에서 죽을 아이처럼)는 답에는, 그렇다면 남근도 생겨야 한다는 반박이 나온다. 남근은 추하니 생기지 않는다는 답에는, 음장(陰藏)으로 감추어져 있는데 무엇이 추하냐는 반박이 나온다. 그러면 경전의 「그곳 중생은 사지가 빠지지 않고 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과 어긋나게 된다.

천친은 「이와 같이 말하는 이(如是說者)」, 곧 정설로 이렇게 결론짓는다.

鼻舌二根於彼非無,但無香味,以六根愛依內身生,非依境界而得現起。其男根愛依婬觸生,婬觸彼無,男根非有。

코와 혀의 두 근은 그곳에 없지 않고, 다만 냄새와 맛이 없다. 여섯 근에 대한 애착은 안의 몸에 의지해 생기지 대상에 의지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근에 대한 애착은 음욕의 감촉에 의지해 생기는데, 그곳에는 음욕의 감촉이 없으므로 남근은 없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7c

근이 있느냐 없느냐는 쓸모가 아니라 「그 근에 대한 애착」이 그 세계에 남아 있느냐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무색계에 매인 것은 뒤의 셋, 곧 의계 · 법계 · 의식계뿐이다. 색에 대한 욕망을 떠나야 무색계에 태어나므로 열 가지 색계가 없고, 의지처와 대상이 없으므로 오식도 없다.

유루 · 무루, 심사, 소연, 집수

십팔계 가운데 무루일 수 있는 것은 의계 · 법계 · 의식계의 셋뿐이다. 의와 의식은 도제에 속할 때, 법계는 도제나 무위일 때 무루이고, 나머지 열다섯 계는 오직 유루다.

심 · 사의 분별에서는 오식이 「유심유사뿐」이다. 오식은 언제나 심 · 사와 상응하는데, 「작용의 모습이 거칠고 밖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뒤의 세 계(의 · 법 · 의식)는 세 가지에 다 통한다. 욕계와 초정려에서는 유심유사, 정려중간에서는 무심유사, 제2정려 이상은 무심무사다. 여기서 정밀한 논점이 하나 있다. 심 자신은 어디에 드는가. 심은 자기 자신과 상응하지 않으므로, 유심유사지에서 심 자신은 「무심유사」다. 그러면 사 자신은 어떤가. 사는 자기와 상응하지 않고 심과만 상응하므로 세 품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천친은 이것을 「무사유심(無伺唯尋)」이라는 넷째 품으로 부르자고 한다. 그래서 「유심유사지에는 네 품의 법이 있다」.

그러면 오식이 심 · 사를 갖는다면 경전은 왜 오식을 「분별이 없다(無分別)」고 하는가. 게송의 답은 분별의 세 종류다.

傳說,分別略有三種:一自性分別、二計度分別、三隨念分別。由五識身雖有自性而無餘二,說無分別,如一足馬名為無足。

분별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다고 전한다. 자성분별 · 계탁분별 · 수념분별이다. 오식은 자성분별은 있으나 나머지 둘이 없으므로 분별이 없다고 한다. 다리가 하나뿐인 말을 다리 없는 말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8a~8b

자성분별은 심(尋) 자체, 계탁분별은 의식과 상응하는 산란한(정에 들지 않은) 혜, 수념분별은 의식과 상응하는 염(念)이다. 오식은 대상을 「헤아리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지각의 순간에 개념적 판단과 기억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 이론은 뒤에 불교 인식론에서 「현량(現量)은 분별을 떠난다」는 명제로 크게 발전한다.

소연을 가진 것은 일곱 심계와 법계의 심소다. 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집수(執受)에서는, 일곱 심계 · 법계 · 성계의 아홉은 집수가 없고, 나머지 아홉(오근 · 색 · 향 · 미 · 촉)은 집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통한다. 집수란 「심 · 심소가 함께 붙잡아 의지처로 삼는 것이니, 덜고 보탬이 서로 따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오근, 그리고 오근과 떨어지지 않은 현재의 색 · 향 · 미 · 촉이 집수다. 몸 안에 있어도 근과 닿지 않는 머리털 · 털 · 손톱 · 이 · 대소변 · 침 · 피는 집수가 아니다. 세간에서 「느낌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대종과 소조, 적집, 그리고 각천의 설

어느 계가 대종이고 어느 계가 소조색인가. 촉계는 둘 다다. 사대는 대종이고 매끄러움 등 일곱은 소조다. 나머지 아홉 색계(오근과 색 · 성 · 향 · 미)와 법계의 무표색은 소조색뿐이다. 일곱 심계와 무표 이외의 법계는 둘 다 아니다.

여기서 천친은 이설 하나를 소개하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尊者覺天作如是說:十種色處唯大種性。彼說不然,契經唯說堅等四相為大種故。

존자 각천(覺天, Buddhadeva)은 「열 가지 색처는 오직 대종을 본성으로 한다」고 말한다. 그 설은 옳지 않다. 경전은 굳음 등 네 가지 모습만을 대종이라 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8c

각천은 『대비바사론』의 네 큰 논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조색을 대종과 따로 있는 실재로 인정하지 않았다(보광은 「각천은 소조색을 세우지 않는다」고 정리한다). 천친의 반박은 세 겹이다. 첫째, 사대는 촉에만 속하므로 눈 등이 취하는 것이 아니고, 빛깔 등은 신근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둘째, 경전은 안처를 「사대로 지어진 맑은 색」, 색처를 「사대로 지어진 것」이라 하고, 오직 촉처만 「사대와 사대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사대가 촉처에만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셋째, 『입태경』이 사람을 「육계」만으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사람을 이루는 근본을 든 것이지 그것뿐이라는 말이 아니다. 같은 경이 육촉처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논리라면 심소도 없어야 할 것이다. 각천은 심소를 마음과 다른 것으로 세우지 않았지만, 경전은 「상 · 수 등 심소법은 마음에 의지한다」고 하고 「탐이 있는 마음」을 말하므로 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반박은 존재의 기본 단위를 어디서 끊을 것인가에 대한 유부 정통의 입장을 보여 준다. 대종과 소조색은 따로 실재하고, 마음과 심소도 따로 실재한다. 각천처럼 그것들을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경전의 구분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어 쌓일 수 있는(可積集) 것은 오근 · 오경의 열 색계다. 극미가 모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덟은 극미가 아니므로 쌓이지 않는다. 무표색이 색이면서도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자르고 · 태우고 · 다는 것

다음 문들은 일상의 물리적 작용을 어느 계가 하는지를 묻는다. 무엇이 자르고 무엇이 잘리는가. 「오직 밖의 네 계, 곧 색 · 향 · 미 · 촉이 도끼와 땔감 등을 이루니, 이것이 자르는 것이며 잘리는 것이다」. 자름이란 「땔감 등의 색의 무더기가 서로 붙어 이어 생기는데, 도끼 등이 그것을 갈라 따로따로 이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찰나마다 생멸하는 법에서 「자름」은 상속의 분리다.

몸 등의 근은 잘리지 않는다. 「온전히 끊어 둘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몸에서 떨어지면 그 부분에는 근이 없게 될 뿐이다. 근은 자르는 것도 아니다. 「맑고 묘하기 때문이니, 구슬의 빛과 같다(以淨妙故如珠寶光)」. 타는 것과 다는(稱) 것도 밖의 네 계뿐이다. 소리는 이 모두가 아니다.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태우는 것과 달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논쟁이 있다(有異諍論)」. 어떤 이는 이것도 밖의 네 계라 하고, 어떤 이는 태우는 것은 오직 화계, 달아지는 것은 오직 무거움(重)이라 한다. 게송 끝의 「쟁(諍)」 한 글자가 이 이설을 표시한다.

다섯 부류 — 이숙생 · 장양 · 등류 · 실사 · 찰나

이 문은 법이 「어디서 왔는가」에 따라 다섯 부류로 나눈다.

이숙생(異熟生)은 이숙인에서 생긴 것이다. 「소가 끄는 수레를 소수레라 하듯이 가운데 말을 줄였다」. 또는 지은 업이 과보를 맺을 때 「변해서 익으므로」 이숙이라 하고, 그 과보가 업과 다른 부류(선 · 불선의 업에서 무기의 과보)이면서 익은 것이므로 이숙이라 한다. 또는 원인에 결과의 이름을 붙여 부른 것이라고도 한다. 결과에 원인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으니, 경전이 「지금의 육촉처는 옛날에 지은 업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 그 예다.

소장양(所長養)은 「음식의 도움, 잠, 삼매 같은 뛰어난 조건이 보탠 것」이다. 범행(梵行)도 장양한다는 이설에 대해, 범행은 해치지 않을 뿐 따로 보태는 것이 없다고 답한다. 천친은 장양과 이숙의 관계를 성곽에 빗댄다. 「장양의 상속은 늘 이숙의 상속을 지켜 주니, 바깥 성곽이 안의 성을 막아 지키는 것과 같다(長養相續常能護持異熟相續,猶如外郭防援內城)」.

등류(等流)는 동류인과 편행인에서 생긴 것, 곧 같은 부류의 앞선 것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실사(實事)는 무위다. 「견고하고 실하기 때문」이다. 무위는 법계에 속하므로 실사는 법계뿐이다. 찰나(剎那)는 의 · 법 · 의식의 세 계에만 있으니, 「처음 무루의 고법인(苦法忍) 품」이다. 견도의 첫 찰나는 그 앞에 같은 부류(무루)의 것이 없으므로 등류가 아니다. 그래서 「찰나」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 밖의 유위법은 모두 등류다.

이 기준으로 십팔계를 나누면 다음과 같다. 안의 다섯(오근)은 이숙생과 장양이 있고 등류는 없다. 이숙생과 장양을 떠나 따로 등류의 오근이 없기 때문이다. 소리는 등류와 장양이 있고 이숙생은 없다. 소리는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隨欲轉)」 때문이다. 그러면 『시설론』이 「거친 말을 멀리 여의는 것을 잘 닦아 대사의 범음성상(梵音聲相)을 얻는다」고 한 것은 어떤가. 두 가지 답이 소개된다. 소리는 업에서 셋째로 전해져(업 → 대종 → 소리) 생기므로 이숙이 아니라는 설, 다섯째로 전해져(업 → 이숙 대종 → 장양 대종 → 등류 대종 → 소리) 생긴다는 설이다. 천친은 앞의 설(셋째로 전해짐)에 대해, 그렇다면 몸의 수(受)도 업에서 생긴 대종에서 생기므로 이숙이 아니어야 할 것이고, 수가 소리와 같다고 하면 정리(正理)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보광은 이 반박을 「앞의 논사를 깨뜨린 것」으로 읽고, 논주의 뜻은 뒤의 설에 있다고 본다.

막힘 없는 여덟, 곧 일곱 심계와 법계는 등류와 이숙생이 있다. 쌓이지 않으므로 장양은 없다. 나머지 넷(색 · 향 · 미 · 촉)은 이숙생 · 장양 · 등류에 다 통한다. 실사는 법계뿐, 찰나는 뒤의 셋뿐이다.

오근(안의 다섯)
이숙생○
장양○
등류✕
성계
이숙생✕(바라는 대로 일어남)
장양○
등류○
색 · 향 · 미 · 촉
이숙생○
장양○
등류○
7심계 + 법계(막힘 없는 여덟)
이숙생○
장양✕(쌓이지 않음)
등류○
  • 실사법계(무위)만
  • 찰나의 · 법 · 의식계만: 처음 무루의 고법인 품
「長養相續常能護持異熟相續,猶如外郭防援內城」장양의 상속은 이숙의 상속을 지키니 바깥 성곽이 안의 성을 지키는 것과 같다(『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9a~9b)
도표 14 · 다섯 부류로 본 십팔계

얻음과 성취, 안과 밖, 동분과 피동분

얻음과 성취

안계와 안식계는 늘 함께 얻어지는가. 게송은 「홀로 얻음, 함께 얻음, 둘 다 아님이 있고, 성취도 그러하다」고 한다. 욕계에 태어나 차츰 눈을 얻는 경우, 무색계에서 죽어 제2 · 3 · 4정려에 태어나는 경우는 안계만 얻는다. 제2정려 이상에는 안식이 없지만, 그곳 중생이 초정려의 안식을 일으켜 보는 경우가 있고, 그때는 안식만 새로 얻는다. 무색계에서 죽어 욕계나 범천에 태어나면 둘을 함께 얻는다. 이 분별은 「색계 상층에는 안식이 없다」는 세품의 우주론과 맞물려 있으며, 뒤에 나오는 「몸 · 눈 · 빛깔 · 식의 지(地)」 논의를 미리 깔아 둔 것이다.

안과 밖 — 「나」가 없는데 무엇이 안인가

여섯 근과 여섯 식의 열둘이 안(內)이고, 여섯 경이 밖(外)이다. 그런데 천친은 여기서 날카로운 물음을 스스로 던진다.

我依名內,外謂此餘。我體既無,內外何有?

「나」의 의지처를 안이라 하고 그 나머지를 밖이라 한다. 「나」의 본체가 이미 없는데 안과 밖이 어디 있는가.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9c

답은 「나에 대한 집착이 의지하는 것이므로 마음을 임시로 '나'라 한다」이다. 경전은 「나를 잘 다스리면 지혜로운 이는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둘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을 임시로 「나」라 하고, 눈 등은 그 마음의 가까운 의지처이므로 안, 빛깔 등은 그 마음의 먼 소연이므로 밖이다. 무아를 말하는 체계 안에서 「안 · 밖」이라는 구별을 지키는 방식이다.

그러면 여섯 식은 아직 의(意)의 자리에 이르지 않았을 때 마음의 의지처가 아니므로 안이 아니어야 하지 않는가. 천친의 답은 삼세실유를 전제한 정교한 논리다. 의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식계를 잃지 않고,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도 의의 특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의계는 과거에만, 여섯 식은 현재 · 미래에만 있게 되어 「십팔계는 모두 삼세에 통한다」는 자기 종지와 어긋난다.

동분과 피동분

동분 · 피동분은 근 · 경 · 식이 실제로 「제 일을 하고 있느냐」에 따른 구별이다. 법계는 오직 동분이다. 모든 법계에 대해 의식이 이미 · 지금 · 앞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자가 「모든 법은 무아다」라고 관할 때 그 마음은 자기 자신과 함께 일어나는 법을 뺀 모든 법을 소연으로 삼고, 다음 찰나의 마음이 그 남은 것까지 반연하므로 「이 두 찰나의 마음이 모든 대상을 빠짐없이 반연한다」.

나머지 열일곱 계에는 동분과 피동분이 다 있다. 눈이 빛깔을 이미 보았고 지금 보고 앞으로 볼 것이면 동분의 눈이다. 피동분의 눈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는 네 가지(보지 않고 이미 멸한 것 · 지금 멸하는 것 · 앞으로 멸할 것, 그리고 생기지 않을 것)를 들고, 서방(西方)의 논사들은 「생기지 않을 것」을 다시 식에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다섯을 든다.

여기서 천친은 근과 경의 비대칭을 지적한다. 한 눈이 어떤 사람에게 동분이면 모든 사람에게 동분이다. 그러나 빛깔은 보는 사람에게는 동분이고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피동분이다. 「빛깔은 하나를 여럿이 볼 수 있으니 달이나 춤이나 씨름을 보는 것과 같지만, 눈은 하나의 안근으로 두 사람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근은 공유되지 않으므로 한 상속에 기대어 동분을 정하고, 경은 공유되므로 여러 상속에 기대어 정한다. 냄새 · 맛 · 감촉은 근에 닿아야 취해지므로 근처럼 공유되지 않을 것 같지만, 같은 냄새가 여러 사람의 비식을 일으킬 가능성은 있으므로 빛깔처럼 다룬다.

견도에서 끊는가, 수도에서 끊는가

열다섯 계(열 색계와 다섯 식계)는 오직 수도에서 끊는다. 뒤의 세 계(의 · 법 · 의식)는 견도에서 끊는 것, 수도에서 끊는 것, 끊을 것이 아닌 것에 다 통한다. 「88수면과 그것과 함께 있는 법,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득은 모두 견도에서 끊고, 나머지 유루는 모두 수도에서 끊으며, 모든 무루는 끊을 것이 아니다」. 88수면의 내역은 「번뇌와 삼세실유」 편의 몫이다.

여기서 반론이 나온다. 범부성(異生性)이나 악취에 떨어지게 하는 몸 · 말의 업은 성도와 극히 어긋나므로 견도에서 끊어야 하지 않는가. 게송의 셋째 · 넷째 구가 답이다. 「물들지 않은 것, 여섯째에서 생기지 않은 것, 색은 반드시 견도에서 끊는 것이 아니다」. 범부성은 물들지 않은 무기다. 욕망을 떠난 범부나 선근을 끊은 사람도 여전히 범부성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논거가 있다. 「이 범부성이 견도에서 끊는 것이라면 고법인의 자리에서도 범부여야 할 것이다」. 견도의 첫 찰나인 고법인에서 이미 성자가 되는데, 견소단의 법은 그 품의 지가 생겨야 끊어지므로, 범부성을 견소단이라 하면 고법인의 순간에도 범부성이 남아 있게 된다. 오식 등 의처 아닌 것에서 생긴 법, 그리고 모든 몸 · 말의 업은 「사제의 이치에 미혹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도에서 끊지 않는다.

스물두 문의 분별은 십팔계를 여러 각도에서 잰 것이지만, 그 안에는 세계의 구조(삼계의 매임), 인식의 구조(유대 · 소연 · 무분별), 수행의 구조(견소단 · 수소단)가 모두 미리 들어 있다. 뒤의 품들은 이 자리 매김을 전제로 삼는다.

제6장 눈이 보는가, 식이 보는가

본송

『구사론』 권2 · 분별계품 · T29, 10c~11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眼法界一分,八種說名見,五識俱生慧,非見不度故。 眼見色同分,非彼能依識,傳說不能觀,彼障諸色故。 或二眼俱時,見色分明故。 眼耳意根境,不至三相違。

풀이

눈과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를 견(見)이라 한다. 오식과 함께 생긴 혜는 견이 아니니, 헤아려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분의 눈이 빛깔을 보는 것이지, 그것에 의지하는 식이 보는 것이 아니다. 가려진 빛깔들은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때로는 두 눈이 동시에 보니, 빛깔을 또렷하게 보기 때문이다. 눈 · 귀 · 의근은 닿지 않은 대상을 취하고, 나머지 셋은 그 반대다.

술어 풀이

見견
dṛṣṭi / darśana. 봄. 이 문에서는 두 뜻이 겹친다. 「헤아려 판단함(決度)」으로서의 견해(dṛṣṭi)와, 눈의 봄(darśana).
決度결탁
살펴 헤아린 뒤 확정함(審慮為先決度). 견해로서의 견의 본질이다.
同分眼동분안
지금 보는 작용을 하고 있는 눈. 식과 결합해 있는 눈이다.
識合 · 識空식합 · 식공
『대비바사론』의 말. 식과 결합한 눈은 보고, 식이 빈 눈은 보지 못한다.
和合見화합견
근 · 경 · 식(과 심소)이 화합한 것이 본다는 설. 비유자의 설로 전한다.
至境 · 不至境지경 · 부지경
prāpta · aprāpta. 근에 닿은(至) 대상과 닿지 않은 대상. 「닿음」이란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생김(無間生)이다.
世俗 · 勝義세속 · 승의
saṃvṛti · paramārtha. 세간의 말로 하는 진리와 궁극의 진리. 경량부는 「눈이 본다」를 세속의 말로 돌린다.
유리 너머의 빛
그림 · 유리 너머의 빛

여덟 가지 견

권2의 열아홉째 문은 「십팔계 가운데 몇이 견이고 몇이 견이 아닌가」이다. 답은 「눈 전체와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다. 여덟이란 유신견 등 다섯 가지 물든 견해, 세간정견, 유학정견, 무학정견이다. 세간정견은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유루의 혜이고, 유학 · 무학의 정견은 그 몸에 있는 무루의 견이다. 천친은 이것들의 차이를 빛에 빗댄다. 밤과 낮, 구름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물을 보는 밝기가 다르듯, 세간의 견해에는 물듦과 물들지 않음이 있고, 유학과 무학의 견은 법의 모습을 보는 밝기가 다르다.

왜 세간정견은 의식과 상응하는 혜뿐인가. 오식과 함께 생긴 혜는 왜 견이 아닌가. 「먼저 살피고 헤아린 뒤 확정하는 것을 견이라 한다(審慮為先決度名見)」. 오식과 함께 생긴 혜는, 심 · 사의 분별에서 보았듯 계탁분별이 없으므로 이런 능력이 없다. 이 기준으로 보면 견은 판단 작용이다.

그런데 이 기준을 들이대자마자 문제가 생긴다. 눈은 판단하지 않는데 왜 견이라 하는가. 천친의 답은 「빛깔을 밝고 날카롭게 비추어 보기(明利觀照) 때문에 견이라고도 한다」이다. 여기서 「견」이라는 말이 두 겹이 된다. 법계의 여덟 가지는 「판단하는 견」이고, 눈은 「비추어 보는 견」이다. 그리고 이 「비추어 보는 견」의 주체가 무엇인가를 놓고, 분별계품에서 가장 긴 논쟁이 시작된다.

네 가지 이설 — 『대비바사론』이 물리친 것들

이 논쟁의 배경은 『대비바사론』 권13에 있다. 『발지론』의 「한 눈이 빛깔을 보는가, 두 눈이 보는가」라는 물음을 풀이하면서, 『대비바사론』은 왜 이 물음을 세웠는지를 이렇게 밝힌다.

謂或有執眼識見色。如尊者法救。或復有執眼識相應慧見色。如尊者妙音。或復有執和合見色。如譬喻者。或復有執一眼見色。如犢子部。

어떤 이는 안식이 빛깔을 본다고 주장하니 존자 법구(法救)와 같다. 어떤 이는 안식과 상응하는 혜가 빛깔을 본다고 주장하니 존자 묘음(妙音)과 같다. 어떤 이는 화합이 빛깔을 본다고 주장하니 비유자(譬喻者)와 같다. 어떤 이는 한 눈이 빛깔을 본다고 주장하니 독자부와 같다.

『대비바사론』 권13, T27, 61c

『대비바사론』은 이 네 설을 하나씩 물리친다. 안식이 본다면 식에 「보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식은 가려 아는(了別)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안식과 상응하는 혜가 본다면 이식과 상응하는 혜도 들어야 할 것인데, 혜에는 듣는 모습이 없다. 화합이 본다면 언제나 보아야 할 것이다. 화합하지 않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한 눈만 본다면, 몸의 두 팔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동시에 감촉을 느껴 하나의 신식을 일으키는 것과 어긋난다. 그리고 자기 종지로 「눈이 본다」, 「두 눈이 본다」를 세운다. 그러면 눈이 본다면 다른 식이 일어날 때나 식이 없을 때도 보아야 하지 않는가. 『대비바사론』의 답은 이렇다. 「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식과 결합한 것과 식이 빈 것이다. 식과 결합한 눈은 보고, 식이 빈 눈은 보지 못한다(眼有二種。一者識合。二者識空。識合者能見識空者不能見)」.

보광은 『구사론기』에서 이 계보를 다시 정리한다. 「존자 세우는 눈이 본다고 하고, 존자 법구는 안식이 본다고 하고, 존자 묘음은 안식과 상응하는 혜가 본다고 하고, 비유자는 안식과 동시의 심 · 심소법이 화합해 본다고 한다(尊者世友眼見,尊者法救眼識見,尊者妙音眼識相應慧見,譬喻者眼識同時心、心所法和合見)」. 그리고 『구사론』의 게송이 안식설만 깨뜨리는 듯 보이는 까닭에 대해 몇 가지 풀이를 덧붙인다. 논주의 뜻에 따라 깨뜨린 것이라는 풀이, 「오식과 함께 생긴 혜는 견이 아니다」는 구절로 묘음의 설도 이미 깨뜨렸다는 풀이, 그리고 화합견은 「경량부와 뜻이 같은 데가 있어」 논주가 따로 깨뜨리지 않았다는 풀이다.

세우(世友) · 유부 정설
눈(眼根)이 본다식과 결합한 눈(識合)만 본다
법구(法救)
안식이 본다
묘음(妙音)
안식과 상응하는 혜가 본다
비유자(譬喻者)
근 · 경 · 식(심 · 심소)의 화합이 본다
독자부(犢子部)
한 눈이 본다
『대비바사론』의 논파
  • 식은 가려 알 뿐 보는 모습이 없다
  • 혜가 본다면 이식의 혜는 들어야 한다
  • 화합이 본다면 늘 보아야 한다
  • 두 팔이 하나의 신식을 일으키듯 두 눈도 하나의 안식을 일으킨다
「謂或有執眼識見色。如尊者法救」(『대비바사론』 권13, T27, 61c)「尊者世友眼見,尊者法救眼識見」(보광 『구사론기』 권2, T41, 48c)
도표 15 · 「무엇이 보는가」 — 다섯 가지 설

천친이 재구성한 대론

『구사론』은 이 배경 위에서 대론을 문답으로 펼친다. 천친은 먼저 유부의 입장을 세우고, 반론자(식이 본다는 쪽)와 몇 차례 주고받은 뒤, 마지막에 경량부의 말로 판을 뒤집는다. 그 흐름을 원문의 순서대로 따라가 보자.

유부: 동분의 눈이 본다

반론자가 먼저 묻는다. 「눈이 본다면 다른 식이 일어날 때도 보아야 할 것이다」. 유부는 답한다. 「모든 눈이 실제로 보는 것은 아니다. 동분의 눈이 식과 결합한 자리에서만 보고 나머지는 보지 못한다(謂同分眼與識合位能見非餘)」. 반론자가 즉시 되받는다. 「그렇다면 그것에 의지하는 식이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이 식과 결합해야만 본다면, 실제로 보는 것은 식이 아닌가.

유부의 논거: 가려진 빛깔

게송의 셋째 구가 유부의 논거다. 「가려진 빛깔들은 볼 수 없다고 전한다」.

現見壁等所障諸色則不能觀。若識見者,識無對故,壁等不礙應見障色。

벽 등에 가려진 빛깔들은 볼 수 없음을 현재 본다. 만약 식이 본다면, 식은 막힘이 없으므로 벽 등이 막지 못하여 가려진 빛깔도 보아야 할 것이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0c

식은 물질이 아니므로 장애유대가 없다. 벽에 막히는 것은 물질인 눈이다. 그러므로 가려진 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보는 주체가 막힘 있는 눈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게송이 이 논거 앞에 「전설(傳說)」, 곧 「이렇게 전한다」를 붙였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천친은 이 논거를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반론자의 반격: 유리와 운모

반론자는 먼저 이렇게 받는다. 가려진 빛깔에는 안식이 생기지 않는다. 식이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유부가 되묻는다. 그러면 안식은 왜 거기서 생기지 않는가. 눈이 본다고 하는 쪽은 설명할 수 있다. 눈은 막힘이 있어 가려진 빛깔을 볼 힘이 없고, 식은 그 의지처(눈)와 같은 대상에서 작용하므로 거기서 생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식이 본다고 하는 쪽은 무슨 까닭으로 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반론자는 반례로 맞선다.

眼豈如身根境合方取而言有對故不見彼耶?又頗胝迦、瑠璃、雲母、水等所障云何得見?

눈이 몸의 근처럼 대상과 맞닿아야 취하는 것인가. 막힘이 있기 때문에 저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가. 또 수정 · 유리 · 운모 · 물 등에 가려진 것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1a

눈은 대상에 닿지 않고 멀리 있는 것을 보므로, 눈의 「막힘」이 보는 것을 가로막는 원리일 수는 없다. 게다가 투명한 수정이나 물 너머의 것은 가려져 있어도 보인다. 그러므로 「눈이 막힘이 있기 때문에 가려진 빛깔을 보지 못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면 반론자의 설명은 무엇인가. 「빛이 막히지 않은 곳에서는 가려진 빛깔에도 안식이 생기고, 빛이 막힌 곳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식이 생기지 않으므로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원인은 눈의 물질성이 아니라 빛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경전의 「눈이 빛깔을 본다」를 어떻게 읽는가

유부의 가장 강한 근거는 경전이다. 경전은 분명히 「눈이 빛깔을 본다」고 말한다. 반론자는 이것을 「의지처에 의지하는 것의 작용을 붙여 말한 것」으로 읽는다.

然經說眼能見色者,是見所依,故說能見。如彼經言:意能識法。非意能識,以過去故。

경전이 「눈이 빛깔을 본다」고 한 것은 눈이 봄의 의지처이므로 「본다」고 한 것이다. 그 경이 「의가 법을 안다」고 한 것과 같다. 의가 아는 것이 아니다. 의는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1a

이 반론은 정교하다. 의계의 정의에서 보았듯 의근은 무간멸의 식, 곧 이미 지나간 마음이다. 유부도 의근 자체가 지금 법을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경전의 「의가 안다」는 의지처에 의지하는 것(의식)의 작용을 붙여 말한 것이다. 「눈이 본다」도 같다. 반론자는 세간의 말 「평상이 소리를 낸다」(실은 평상 위의 사람이 소리를 낸다)와, 경전의 「눈으로 알아지는 빛깔이 사랑스럽다」(실은 안식이 아는 것)를 덧붙인다. 그리고 결정적인 경문을 든다. 「바라문이여, 눈을 문으로 삼아 오직 빛깔을 볼 뿐이다(以眼為門唯為見色)」. 눈은 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이 눈이라는 문을 통해 본다. 문이 곧 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읽으면 경이 「눈을 봄으로 삼아 빛깔을 본다」고 했어야 할 것이다.

유부의 재반격: 식이 보면 누가 아는가

유부는 묻는다. 「식이 본다면 누가 가려 아는가. 봄과 가려 앎, 두 작용이 어떻게 다른가」. 반론자의 답은 「빛깔을 보는 것이 곧 빛깔을 가려 아는 것」이다. 혜의 일부를 견(見)이라 하면서 또 간택(簡擇)한다고 하듯, 식의 일부를 「본다」고 하면서 또 「가려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눈이 본다면 눈이 보는 자인데, 무엇이 보는 작용인가」라고 힐난한다. 눈이 본다는 쪽은 「힐난이 되지 않는다」고 답한다(보광은 이 답을 「눈이 본다는 집안의 답」으로 읽는다). 「식이 가려 안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지만 가려 아는 자가 따로 있지는 않다. 작용과 그 주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은 양쪽 다 받아들이는 전제다.

「종이 운다」 — 마지막 비유 싸움

또 식이 본다는 쪽의 다른 논사는 경문을 이렇게 푼다. 「안식이 보는 것이지만 눈은 봄의 의지처이므로 눈도 본다고 한다. 우는 것의 의지처이므로 종도 운다고 하는 것과 같다(如鳴所依故,亦說鍾能鳴)」. 눈이 본다는 쪽이 되받는다. 그렇다면 눈은 식의 의지처이므로 「눈이 안다(能識)」고도 해야 할 것이다. 식이 본다는 쪽은 그런 허물이 없다고 답한다. 세간은 안식이 생길 때 「빛깔을 본다」고 하지 「빛깔을 안다」고 하지 않으며, 『대비바사론』도 「눈이 얻는 것, 안식이 받는 것을 보인 것이라 한다(若眼所得、眼識所受說名所見)」고 했다. 그러므로 눈은 「본다」고만 하고 「안다」고는 하지 않는다. 오직 식이 앞에 나타날 때 「빛깔을 안다」고 하니, 해를 두고 낮을 만든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해를 떠나 따로 낮이 있지 않듯 식을 떠나 따로 아는 자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광은 이 두 집안의 다툼을 두고 「글의 흐름을 보면 논주의 뜻은 식이 본다는 쪽에 기운다(看其文勢,論主意朋識見)」고 평한다.

  1. 유부「謂同分眼與識合位能見非餘」식과 결합한 동분의 눈만 본다
    반론그러면 식이 보는 것이다
  2. 유부가려진 빛깔을 보지 못한다 — 식은 막힘이 없으니 식이 본다면 벽 너머도 보아야 한다(전설)
    반론눈은 닿지 않고 본다「頗胝迦、瑠璃、雲母、水等所障云何得見」수정 · 유리 · 운모 · 물 너머는 보인다→ 빛이 막히면 식이 생기지 않을 뿐
  3. 유부경전이 「눈이 본다」고 한다
    반론의지처에 작용을 붙인 말 — 「의가 법을 안다」(의는 과거)「以眼為門唯為見色」눈은 문이다
  4. 유부식이 보면 누가 아는가
    반론보는 것이 곧 가려 아는 것(혜가 견이자 간택이듯)
  5. 반론 쪽 다른 논사종이 운다(鍾能鳴)
    유부그러면 눈이 안다고도 해야 한다
    반론세간도 『비바사』도 눈은 「본다」고만 한다「若眼所得、眼識所受說名所見」
경량부의 판정(다음 도표)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0c~11b)

도표 16 · 「눈이 보는가」 대론의 흐름

경량부의 판정 — 「허공을 움켜쥐는 것」

이렇게 양쪽의 논거가 오간 뒤, 천친은 제3의 목소리를 등장시킨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經部諸師有作是說:如何共聚楂掣虛空?眼色等緣生於眼識,此等於見孰為能所?唯法因果實無作用,為順世情假興言說,眼名能見、識名能了,智者於中不應封著。

풀이

경량부의 논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함께 모여 허공을 움켜쥐고 당기는가. 눈과 빛깔 등의 조건이 안식을 낳을 뿐이니, 이것들 가운데 봄에 대해 무엇이 주체이고 무엇이 대상이겠는가. 오직 법의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 실제로 작용은 없다. 세간의 정에 따르기 위해 임시로 말을 일으켜 눈을 「보는 것」이라 하고 식을 「아는 것」이라 할 뿐이니, 지혜로운 이는 그 말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1b)

이 판정은 논쟁의 틀 자체를 해체한다. 유부와 반론자는 「누가 보는가」를 두고 다투었지만, 경량부는 그 물음이 처음부터 허공을 움켜쥐는 일이라고 한다. 실제로 있는 것은 눈과 빛깔이라는 조건이 모이고 그 결과로 안식이 생기는 인과의 흐름뿐이다. 그 흐름 안에 「보는 자」나 「보는 작용」이라는 별도의 실재는 없다. 「눈이 본다」, 「식이 안다」는 말은 세간의 언어 관습을 따른 가설이다. 경량부는 그 근거로 「지방의 말에 굳게 집착해서는 안 되고, 세속의 이름에 굳이 매달려서는 안 된다(方域言詞不應堅執,世俗名想不應固求)」는 부처의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천친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맺는다. 「그러나 카슈미르의 비바사종은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 맡고, 혀가 맛보고, 몸이 느끼고, 의가 안다고 말한다(然迦濕彌羅國毘婆沙宗,說眼能見…意能了)」. 천친은 경량부의 판정을 마지막에 놓고, 유부의 입장은 「카슈미르의 비바사종은 그렇게 말한다」고 거리를 두어 기록한다. 게송의 「전설(傳說)」 한 글자와 이 맺음말이 천친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말해 준다. 보광은 경량부의 말을 「곁에서 득실을 보며 두 집안을 함께 깨뜨린 것(傍觀德失俱破兩家)」으로 풀이하고, 유부의 맺음말은 「설일체유부가 본래 종지로 돌아가 맺은 것」이라 한다.

경량부의 이 판정은 무아설의 논리를 인식 작용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오온 어디에도 「나」가 없듯이, 근 · 경 · 식의 인과 어디에도 「보는 자」는 없다. 「눈이 본다」는 말과 「식이 본다」는 말은 둘 다 세속의 말이다. 이 논법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서 본 나가세나의 수레와 같은 구조를 지녔지만,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작용」이라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중현의 반론 — 두 진리를 함께 의지하여

중현은 『순정리론』 권7에서 이 판정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는 먼저 「눈이 본다」는 근거를 경(經) · 논(論) · 세간(世) · 이치(理)의 넷으로 정리한다. 경은 「두 눈 두 귀로 많이 보고 듣는다」, 「나의 제자들은 세간의 눈과 같다」 같은 말들이고, 논은 『발지론』의 「두 눈이 빛깔을 본다」와 『품류족론』의 「눈이 이미 보았고 지금 보고 앞으로 볼 것이다」이며, 세간은 안근이 없는 사람을 「눈먼 이」라 부르는 것이고, 이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작용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이들을 「비유부의 논사들(譬喻部師)」이라 부르며 「제멋대로 비난한다(妄興彈斥)」고 규정한 뒤 이렇게 반박한다.

경량부는 법이 모두 조건에서 생긴다는 이유로 작용을 부정하지만, 조건에서 생긴 법도 저마다의 정해진 모습과 작용을 잃지 않는다. 지계는 조건에서 생겼어도 굳음이라는 자기 모습과 지님이라는 정해진 작용이 있다. 마찬가지로 눈 · 빛깔 · 안식도 조건에서 생겼어도 저마다의 정해진 작용이 있어, 눈은 오직 눈이고 빛깔이나 식이 아니다. 부처가 「세속의 이름에 매달리지 말라」고 한 것은 세간이 「보는 것」 전체를 하나의 실체로 붙잡는 총체적 실체(總實相用)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지, 낱낱 법의 실제 작용(別實相用)까지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是故我宗雙依二諦說眼能見,兩俱無失。

그러므로 우리 종은 두 진리를 함께 의지하여 「눈이 본다」고 말하니, 어느 쪽으로도 잘못이 없다.

『순정리론』 권7, T29, 367c

중현은 마지막으로 경량부에게 칼끝을 돌린다. 법에 저마다의 작용이 없다면 원인과 결과의 구별도 없어야 한다. 경량부 자신이 「오직 법의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저마다의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원인과 결과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허공을 움켜쥐고 당기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있다(摣掣虛空定唯在彼)」.

이 대결은 아비달마의 근본 문제를 드러낸다. 법을 「자기 작용을 가진 실재」로 보는가, 「인과의 흐름에 붙인 이름」으로 보는가. 이 물음은 「번뇌와 삼세실유」 편에서 삼세실유 논쟁의 「작용(kāritra)」 개념으로 다시 나타난다.

경량부(『구사론』이 전함)
「唯法因果實無作用」오직 법의 인과뿐 실제 작용은 없다「眼名能見、識名能了」는 세간의 정을 따른 가설「方域言詞不應堅執,世俗名想不應固求」누가 보는가를 묻는 것은 「楂掣虛空」허공을 움켜쥐는 일
중현(『순정리론』 권7)
경 · 논 · 세간 · 이치 모두 「눈이 본다」조건에서 생긴 법도 저마다의 정해진 작용(別實相用)을 가진다버릴 것은 총체적 실체(總實相用)에 대한 집착뿐「雙依二諦說眼能見」두 진리를 함께 의지해 눈이 본다고 한다작용이 없으면 인과도 없다
천친의 맺음「然迦濕彌羅國毘婆沙宗,說眼能見」카슈미르의 비바사종은 눈이 본다고 말한다(『구사론』 권2, T29, 11b · 『순정리론』 권7, T29, 367b~367c)
도표 17 · 경량부와 중현

「눈이 보는가 식이 보는가」 논쟁에서 천친은 유부의 논거를 「전설」로 소개하고, 반론자의 반례(유리 · 운모)와 경문 해석(눈은 문)을 길게 들려준 뒤, 경량부의 「작용은 없고 인과만 있다」로 논의를 끝낸다. 유부의 입장은 「카슈미르의 비바사종은 그렇게 말한다」로 기록될 뿐이다.

두 눈으로 보는가

빛깔을 볼 때 한 눈으로 보는가 두 눈으로 보는가. 게송은 「때로는 두 눈이 동시에 본다」고 한다. 아비달마의 대논사들의 근거는 경험이다. 두 눈을 뜨면 또렷하고 한 눈을 뜨면 또렷하지 않다. 또 한 눈을 뜨고 다른 눈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앞에 달이 둘로 보이지만, 한 눈을 감고 누르면 그런 일이 없다. 그러므로 때로는 두 눈이 함께 본다.

그러면 두 눈에 의지한 하나의 식은 둘로 나뉘는가. 천친은 「의지처가 다르다고 식이 두 부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식은 공간에 머물지 않으므로 막힘 있는 색과 같지 않다(非所依別識成二分,住無方故不同礙色)」고 답한다. 『대비바사론』은 이 문제를 더 극단까지 밀고 간다. 큰 바다의 거대한 중생이나 색구경천의 천인은 두 눈 사이가 백 유선나(踰繕那)까지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안식은 두 개가 동시에 생기는가, 하나가 한 눈에서 다른 눈으로 옮겨 가는가, 둘로 쪼개지는가, 한 물건처럼 가로질러 걸치는가. 넷 다 불가능하다. 『대비바사론』의 답은 「작은 면이 백 개 있는 유리 그릇(迦遮器)에 얼굴 하나를 비추면 백 개의 얼굴이 동시에 나타나듯, 하나의 식이 여러 눈에 의지해 생겨 동시에 본다」는 것이었다.

닿은 것을 취하는가, 닿지 않은 것을 취하는가

근이 대상을 취할 때, 대상은 근에 닿아(至) 있어야 하는가. 게송은 「눈 · 귀 · 의근은 닿지 않은 대상을 취하고, 나머지 셋은 반대다」라고 한다. 눈은 먼 곳의 빛깔을 보지만 눈에 넣은 약은 보지 못하고, 귀는 먼 곳의 소리를 듣지만 귀에 바짝 붙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또 눈과 귀가 닿은 대상만 취한다면, 선정을 닦는 이가 코 등에 대해 그러하듯 천안 · 천이를 닦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닿지 않은 것을 본다면 왜 멀리 가려진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가. 천친은 자석으로 답한다. 「자석이 닿지 않은 쇠를 끌어당기지만 닿지 않은 모든 쇠를 끌어당기지는 않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如何磁石吸不至鐵,非吸一切不至鐵耶)」. 닿은 것을 본다고 주장해도 같은 난점이 있다. 눈에 닿은 약이나 막대기를 다 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코 등도 닿은 대상을 취하지만 근과 함께 있는 모든 냄새를 다 취하지는 않는다. 의근은 색이 아니므로 닿는다는 말이 해당하지 않는다. 귀는 자기 귀 속의 소리도 들으므로 닿은 것과 닿지 않은 것을 다 취한다는 이설도 소개된다. 코가 닿은 냄새만 취한다는 증거는 숨을 멈추면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극미는 서로 닿는가

「닿는다(至)」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순간, 논의는 극미론으로 내려간다. 「닿음이란 사이 없이 생기는 것(無間生)」이다. 그러면 극미들은 서로 닿는가. 이 대목은 『구사론』에서 극미론이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곳이다.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는 「닿지 않는다」고 한다. 극미가 온몸으로 닿으면 두 실재가 섞이는 허물이 있고, 일부로 닿으면 부분을 갖는 허물이 있는데, 극미에는 더 작은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손뼉을 칠 때 어떻게 소리가 나는가. 「극미가 사이 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닿는다면 돌을 치거나 손뼉을 칠 때 몸이 서로 뭉개져야 할 것이다. 닿지 않는다면 모인 색이 부딪쳐도 왜 흩어지지 않는가. 「풍계가 붙잡아 지니기 때문」이다. 겁이 무너질 때처럼 흩어지게 하는 풍계도 있고, 겁이 이루어질 때처럼 모아 붙잡는 풍계도 있다.

또 하나의 해법은 「화합한 색은 부분을 가지므로 서로 닿아도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비바사론』의 문장이 잘 성립한다. 『대비바사론』은 「닿는 것은 닿는 것을 원인으로 생기는가, 닿지 않는 것을 원인으로 생기는가」를 묻고, 화합한 것이 흩어질 때, 흩어진 것이 화합할 때, 화합한 것이 다시 화합할 때, 떠도는 먼지가 같은 부류로 이어질 때의 네 경우로 답한다.

세우는 「극미들이 서로 닿는다면 다음 찰나까지 머물러야 할 것」이라고 한다. 닿은 것이 떨어지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찰나멸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덕의 설이 나온다.

然大德說:一切極微實不相觸,但由無間假立觸名。此大德意應可愛樂。

그러나 대덕은 「모든 극미는 실제로 서로 닿지 않는다. 다만 사이가 없으므로 임시로 닿는다는 이름을 세운다」고 말한다. 이 대덕의 뜻은 마땅히 좋아할 만하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1c

보광은 이 대덕을 「네 큰 논사 가운데 법구이니, 그 덕을 공경해 이름을 많이 쓰지 않고 대덕이라 했다」고 풀이한다. 천친이 이 설을 받아들이는 근거는 둘이다. 첫째, 대덕의 설이 아니라면 극미 사이에 틈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 틈이 비어 있다면 무엇이 극미의 움직임을 막아 「막힘이 있다」고 하겠는가. 둘째, 극미를 떠나 화합한 색이 따로 있지 않으므로 화합한 것이 닿는다면 극미가 닿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미론의 근본 딜레마를 드러내는 문장을 남긴다. 「극미에 방향의 부분(方分)이 있다고 하면 닿든 닿지 않든 부분을 가져야 하고, 방향의 부분이 없다고 하면 닿는다고 해도 이 허물이 없다」. 극미가 동서남북의 방향을 가진다면 이미 부분을 가진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극미가 아니다.

중현은 『순정리론』 권8에서 이 「마땅히 좋아할 만하다」에 대해 「대덕의 뜻은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아니며, 다만 사이가 없으면서 어떻게 닿지 않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응수한다. 그리고 「부분(有分)과 방향의 부분(方分)은 이름만 다르고 뜻이 같다. 방향의 부분이 없다고 이미 말했는데 어떻게 다시 닿는다고 의심하는가」라며 천친의 마지막 문장을 비판한다. 극미에 방향의 부분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이 물음은 뒤에 천친 자신이 『유식이십론』에서 극미의 실재를 부정하는 논거로 다시 쓰게 된다는 것이 근현대 연구의 일반적인 지적이다.

카슈미르 비바사사
닿지 않는다온몸으로 닿으면 섞이고, 일부로 닿으면 부분이 생긴다소리는 사이 없이 생기기 때문흩어지지 않는 것은 풍계가 붙잡기 때문
화합색 해법
화합한 색은 부분이 있으므로 닿아도 허물 없음『대비바사론』의 네 경우(흩어짐 · 모임 · 다시 모임 · 떠도는 먼지)
세우
닿는다면 다음 찰나까지 머물러야 한다
대덕(법구)
「一切極微實不相觸,但由無間假立觸名」실제로 닿지 않고 사이 없음을 임시로 닿음이라 한다천친「此大德意應可愛樂」
천친방향의 부분이 있으면 닿든 안 닿든 부분이 있고, 없으면 닿아도 허물이 없다
↔
중현부분과 방향의 부분은 이름만 다를 뿐

(『구사론』 권2, T29, 11c · 『순정리론』 권8, T29, 373b)

도표 18 · 극미는 서로 닿는가

근은 같은 크기의 대상만 취하는가

마지막으로 근과 대상의 크기다. 「코 · 혀 · 몸의 세 근은 같은 크기의 대상만 취한다」. 근의 극미 수만큼의 대상 극미가 맞붙어 식을 낳기 때문이다. 눈과 귀는 정해져 있지 않다. 털끝처럼 작은 것을 보기도 하고, 눈을 잠깐 떠서 큰 산을 보기도 하고, 포도알처럼 같은 크기를 보기도 한다. 귀도 모기 소리와 우레 소리를 다 듣는다. 의근은 막힘이 없으므로 크기를 따질 수 없다.

이어 색온의 다섯 근을 설명할 때 미리 소개한 근 극미의 배치가 묘사되고, 동분 · 피동분의 문제가 근 극미의 차원에서 다시 다루어진다. 안근 극미는 모두 동분일 때도, 모두 피동분일 때도, 일부만 동분일 때도 있다. 신근 극미는 결코 전부가 동분일 수 없다. 극열지옥에서 맹렬한 불꽃이 온몸을 감싸도 여전히 무수한 신근 극미가 피동분으로 남는다. 「신근이 모두 식을 일으킨다면 몸이 흩어져 무너질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극미론의 마지막 원칙이 나온다. 「오식은 반드시 많은 극미가 쌓여야 의지처와 소연의 성질을 이룬다. 이 이치 때문에 극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극미 하나는 근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극미는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분석으로 추론되는 것이다.

제7장 의지와 경계근이 식의 이름이 되는 까닭

본송

『구사론』 권2 · 분별계품 · T29, 12b~13a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後依唯過去,五識依或俱。 隨根變識異,故眼等名依。彼及不共因,故隨根說識。 五外二所識,常法界無為,法一分是根,并內界十二。

풀이

뒤의 식(의식)의 의지처는 과거뿐이고, 오식의 의지처는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근이 변함에 따라 식이 달라지므로 눈 등을 의지처라 한다. 그것과, 함께하지 않는 원인이기 때문에 근을 따라 식의 이름을 붙인다. 다섯 밖의 계는 두 식이 알고, 상주하는 것은 법계의 무위이며, 법계의 일부가 근이고 안의 열두 계도 그러하다.

술어 풀이

所依소의
āśraya. 식이 의지하는 것. 오식에는 함께 있는 의지처(근)와 과거의 의지처(의근)가 있다.
俱生依구생의
식과 같은 찰나에 함께 있는 의지처. 안식에게 안근이 그렇다.
等無間緣등무간연
samanantara-pratyaya. 앞 찰나의 심 · 심소가 끊김 없이 다음 심 · 심소를 이끄는 조건. 사연의 하나.
不共因불공인
함께하지 않는 원인. 안근은 오직 자기 안식의 의지처이지만, 빛깔은 남의 안식과 의식의 대상도 된다.
地지
bhūmi. 욕계와 사정려 등 존재의 층위. 몸 · 근 · 대상 · 식이 같은 층위에 속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二十二根이십이근
경전이 든 스물두 가지 근. 안 · 이 · 비 · 설 · 신 · 의, 여 · 남 · 명, 다섯 수, 신 · 근 · 염 · 정 · 혜, 그리고 세 무루근.

의식의 의지처는 과거뿐

앞에서 의계를 「막 멸한 여섯 식」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식들은 저마다 어떤 의지처를 갖는가. 오식은 현재의 대상만 반연하고 의식은 삼세와 무위를 다 반연하는데, 의지처도 그렇게 다른가. 게송은 「뒤의 식의 의지처는 과거뿐이고, 오식의 의지처는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한다.

의식은 오직 무간멸의 의(意)에 의지한다. 오식은 함께 있는 의지처에 의지하고, 게송의 「이기도 하다(或)」는 말이 보이듯 과거의 의지처에도 의지한다. 안근은 안식과 함께 생기는 의지처이고, 무간멸의 의는 과거의 의지처다. 그래서 오식의 의지처는 각각 둘이다. 안근 등 다섯은 따로따로의 의지처(別所依)이고, 의근은 다섯에 공통된 의지처(通所依)다.

여기서 천친은 「소의」와 「등무간연」의 관계를 네 경우로 정리한다. 안식의 의지처이면서 등무간연이 아닌 것은 함께 생긴 안근이다. 등무간연이면서 의지처가 아닌 것은 무간멸의 심소법이다. 둘 다인 것은 과거의 의근이다. 둘 다 아닌 것은 그 밖의 법이다. 의식에서는 의지처이면 반드시 등무간연이지만, 등무간연이면서 의지처가 아닌 것(무간멸의 심소)이 있다. 마음만 의지처가 되고 심소는 의지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다음 찰나를 이끄는 조건으로서는 심소도 마음과 똑같이 작용한다는 것이 이 정리의 요점이다. 등무간연의 상세는 사연(四緣)을 다루는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서 본다.

왜 근을 따라 식의 이름을 붙이는가

식이 일어나려면 근과 경의 두 조건이 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의지처」라는 이름은 근에만 붙는가. 게송의 답은 「근이 변함에 따라 식이 달라진다」이다. 근이 늘거나 줄면 식이 밝아지거나 흐려진다. 빛깔이 변한다고 식이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식은 근을 따르지 경을 따르지 않는다(以識隨根不隨境故)」.

또 하나의 물음이 있다. 빛깔이야말로 바로 알아지는 것인데, 왜 「안식」이라 하지 「색식(色識)」이라 하지 않는가. 게송은 두 까닭을 든다. 첫째, 근이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둘째, 근은 「함께하지 않는 원인(不共因)」이기 때문이다. 내 눈은 오직 내 안식의 의지처다. 그러나 빛깔은 남의 안식에도 대상이 되고, 나와 남의 의식에도 대상이 된다. 의지처로서 뛰어나고 함께하지 않는 원인이므로, 식은 경이 아니라 근을 따라 이름을 얻는다. 천친의 비유는 「북소리」와 「보리 싹」이다. 북소리는 북채와 손과 북이 함께 내지만 「북소리」라 하고, 보리 싹은 흙과 물과 씨앗이 함께 키우지만 「보리 싹」이라 한다. 그 결과에 가장 고유한 원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몸 · 눈 · 빛깔 · 식은 같은 층위에 있는가

이어 천친은 세계의 층위(地)라는 변수를 더한다. 욕계에 태어난 사람이 선정에 들어 색계 초정려의 천안을 일으켜 볼 때, 몸과 눈과 빛깔과 식은 각각 어느 층위에 속하는가. 천친은 먼저 사례를 하나하나 따진다. 욕계에 태어나 자기 지의 눈으로 자기 지의 빛깔을 보면 넷이 다 욕계다. 초정려의 눈으로 욕계의 빛깔을 보면 몸과 빛깔은 욕계이고 눈과 식은 초정려다. 제2정려의 눈으로 욕계의 빛깔을 보면 몸 · 빛깔은 욕계, 눈은 제2정려, 식은 초정려다. 제2정려 이상에는 안식이 없으므로, 그 위층의 눈으로 볼 때도 식은 언제나 초정려의 식을 빌려 쓰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을 정리한 것이 다음 게송이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眼不下於身,色識非上眼,色於識一切,二於身亦然。 如眼耳亦然,次三皆自地,身識自下地,意不定應知。

풀이

눈은 몸보다 아래가 아니고, 빛깔과 식은 눈보다 위가 아니다. 빛깔은 식에 대해 모든 경우가 있고, 둘(빛깔 · 식)은 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귀도 눈과 같다. 다음 셋은 모두 자기 지이며, 신식은 자기 지이거나 아래 지이다. 의는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2c~13a)

몸 · 눈 · 빛깔은 욕계와 네 정려의 다섯 지에 통하지만, 안식은 욕계와 초정려에만 있다. 눈은 몸이 태어난 지와 같거나 그보다 위이고 아래일 수 없다. 빛깔과 식은 눈과 같거나 아래이고 위일 수 없다. 아래 지의 눈은 위 지의 빛깔을 볼 수 없고, 위 지의 식은 아래 지의 눈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깔은 식에 대해 같거나 위거나 아래거나 다 가능하다. 귀도 눈과 같다. 코 · 혀 · 몸은 모두 자기 지에 속하고, 신식만은 자기 지이거나 아래 지(제2정려 이상에 태어난 이는 초정려의 신식을 쓴다)이다. 의는 네 가지 모두 정해져 있지 않다. 천친은 「이 상세는 뒤의 정품에서 자세히 분별한다.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지금은 밝히지 않는다」며 곁가지를 접는다. 선정과 천안의 상세는 「성자의 길」 편의 몫이다.

몸눈빛깔안식
제4정려
제3정려
제2정려
초정려
욕계
  1. 규칙 1 — 눈은 몸보다 아래가 아니다(眼不下於身)
  2. 규칙 2 — 빛깔과 식은 눈보다 위가 아니다(色識非上眼)
  3. 규칙 3 — 빛깔은 식에 대해 같음 · 위 · 아래 모두 가능
  4. 규칙 4 — 안식은 욕계와 초정려에만 있다
예: 욕계의 몸 · 제2정려의 눈 · 욕계의 빛깔 · 초정려의 식
  • 귀 = 눈과 같음
  • 코 · 혀 · 몸 = 모두 자기 지
  • 신식 = 자기 지 또는 아래 지
  • 의 = 정해져 있지 않음

(『구사론』 권2 분별계품, T29, 12c~13a)

도표 19 · 몸 · 눈 · 빛깔 · 식의 지(地)

몇 식이 아는가 · 상주와 무상 · 근과 비근

곁가지를 마친 천친은 「곁가지 논의가 끝났으니 본론을 말해야 한다」며 마지막 세 문으로 돌아온다.

첫째, 각 계는 여섯 식 가운데 몇 식이 아는가. 색 · 성 · 향 · 미 · 촉의 다섯 밖의 계는 각각 자기 식 하나와 의식, 곧 두 식이 안다. 나머지 열세 계는 의식만 안다. 오식의 소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근은 안식의 의지처이지 안식의 대상이 아니다. 눈은 눈을 보지 못한다.

둘째, 상주하는 것과 무상한 것. 「십팔계 가운데 전체가 상주하는 계는 하나도 없다. 법계의 일부인 무위만 상주한다」. 나머지는 모두 무상이다.

셋째, 근과 비근. 여기서 천친은 경전의 이십이근을 끌어들인다.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 · 여근 · 남근 · 명근 · 낙근 · 고근 · 희근 · 우근 · 사근 · 신근 · 근근 · 염근 · 정근 · 혜근 · 미지당지근 · 이지근 · 구지근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순서다. 「아비달마의 대논사들은 모두 경전의 육처의 순서를 넘어 명근 다음에 의근을 말한다. 소연을 가지기 때문이다(於命根後方說意根,有所緣故)」. 경전은 안 · 이 · 비 · 설 · 신 · 의의 순서로 늘어놓지만, 아비달마의 논사들은 의근을 명근 뒤로 옮겼다. 대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앞의 물질적 근들(안~신, 여 · 남)이나 명근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이십이근은 십팔계 가운데 안의 열두 계(육근 · 육식)와 법계의 일부에 포섭된다. 안근 등 다섯은 자기 이름의 계에, 의근은 일곱 심계에, 여근 · 남근은 신계의 일부에, 명근과 다섯 수 · 다섯 선근(신 · 근 · 염 · 정 · 혜)의 열한 가지는 법계에, 세 무루근은 의계 · 법계 · 의식계에 걸친다. 색 · 성 · 향 · 미 · 촉의 다섯 계와 법계의 나머지는 근이 아니다. 천친은 「뒤에 밝히겠다」며 이십이근의 상세를 다음 품으로 넘긴다. 실제로 분별근품은 바로 이 이십이근에서 시작하며, 그 내용은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서 다룬다.

분별계품은 「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끝나고, 분별근품은 같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근이 식의 이름이 되는 까닭(불공인)과 근이 지(地)를 넘나드는 규칙을 세운 뒤, 천친은 이십이근의 목록만 남기고 다음 품으로 넘어간다.

제8장 분류의 정리오위칠십오법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본송

『구사론』 권4 · 분별근품 · T29, 18b~2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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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心所且有五,大地法等異。 心不相應行,得非得同分,無想二定命,相名身等類。

풀이

심소는 우선 다섯 부류가 있으니, 대지법 등으로 다르다. 심불상응행은 득 · 비득 · 동분, 무상과 두 정, 명근, 네 상, 명신 등의 부류다.

술어 풀이

五品 · 五位오품 · 오위
모든 법의 다섯 부류. 『구사론』 본문은 「다섯 품(五品)」이라 하고, 후대의 정리는 「다섯 위(五位)」라 한다.
心所심소
caitasika. 마음과 함께 일어나 마음에 속하는 작용. 대지법 · 대선지법 · 대번뇌지법 · 대불선지법 · 소번뇌지법의 다섯 부류와 부정지법으로 나뉜다.
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citta-viprayukta-saṃskāra. 마음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색도 아닌, 행온에 속하는 법. 득(prāpti) 등.
不定부정
다섯 부류의 「지(地)」 어디에도 들지 않는 심소. 惡作 · 睡眠 · 尋 · 伺 등.
七十五法칠십오법
색 11 · 심 1 · 심소 46 · 심불상응행 14 · 무위 3의 합. 주석가들이 『구사론』의 법을 셈하며 쓴 말이다.
和合性화합성
중현이 심불상응행에 더한 법. 『구사론』에는 없다.

분별계품이 남긴 틀

분별계품은 법을 오온 · 십이처 · 십팔계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 세 분류는 모두 「경전의 분류」다. 계품 안에서 행온은 「나머지 전부」로, 법계는 「다른 계에 들지 않는 것들의 묶음」으로 남아 있을 뿐, 그 안에 무엇이 몇 개 들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계품이 세운 것은 다음과 같은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 안을 채우는 일은 분별근품이 한다. 근품의 권4는 법의 「함께 일어남(俱生)」을 논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謂一切法略有五品:一色、二心、三心所、四心不相應行、五無為。無為無生,此中不說。

모든 법은 대략 다섯 부류가 있다. 첫째 색, 둘째 심, 셋째 심소, 넷째 심불상응행, 다섯째 무위다. 무위는 생기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다.

『구사론』 권4 분별근품, T29, 18b

「오위」의 틀 자체는 이렇게 『구사론』 본문에 있다. 이 다섯 부류는 계품의 경계선과 정확히 맞물린다. 색은 색온의 열한 가지, 심은 식온, 심소와 심불상응행은 행온을 둘로 나눈 것, 무위는 세 무위다. 경전의 「온」이라는 분류를 존재의 성질에 따른 「부류」로 다시 짠 것이다.

숫자는 어디서 왔는가

그러나 「일흔다섯」이라는 숫자는 『구사론』 본문에 바로 나오지 않는다. 다섯 부류 가운데 색 열하나, 심 하나, 무위 셋은 계품에서 이미 닫혀 있다. 문제는 심소와 심불상응행이다.

심소에 대해 근품의 게송은 「심소는 우선(且) 다섯 부류가 있다」고 한다. 이어 대지법 열(수 · 상 · 사 · 촉 · 욕 · 혜 · 염 · 작의 · 승해 · 삼마지), 대선지법 열(신 · 불방일 · 경안 · 사 · 참 · 괴 · 두 근 · 불해 · 근), 대번뇌지법 여섯(치 · 방일 · 해태 · 불신 · 혼침 · 도거), 대불선지법 둘(무참 · 무괴)을 정확히 헤아린다. 그런데 소번뇌지법에 대해서는 「분 · 부 · 간 · 질 · 뇌 · 해 · 한 · 첨 · 광 · 교, 이와 같은 부류를 소번뇌지법이라 한다(如是類名為,小煩惱地法)」고 하여 「이와 같은 부류」라는 열린 표현을 쓴다. 그리고 다섯 부류를 다 말한 뒤 「다시 이 밖의 부정 심소, 곧 악작 · 수면 · 심 · 사 등의 법이 있다(復有此餘不定心所,惡作、睡眠、尋、伺等法)」고 하여, 부정 심소를 「등(等)」으로 열어 둔다.

이 「등」을 닫은 것이 주석가들이다. 보광은 『구사론기』에서 「등이라 한 것은 탐 · 진 · 만 · 의를 함께 취한다(等者,等取貪、瞋、慢、疑)」고 풀이하고, 『대비바사론』이 부정에 「두려움(怖)」을 더하는 점을 들어 이 논이 드러난 모습만 들어 여덟을 말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심소의 총수를 이렇게 정리한다.

只依此論顯相廢立,總有四十六種,謂大地法十至不定有八。

다만 이 논이 드러난 모습에 따라 세우고 버린 것에 의하면 모두 마흔여섯 가지이니, 대지법 열에서 부정 여덟까지다.

보광 『구사론기』 권4, T41, 78c

보광은 같은 자리에서 「여러 경론을 살펴보면 심소의 많고 적음은 하나로 정하기 어려워, 모두 긁어모아 세우고 버리면 뒤섞이게 된다」고 덧붙인다. 마흔여섯은 경론 전체에서 확정된 숫자가 아니라, 『구사론』의 드러난 서술을 기준으로 삼아 세운 숫자라는 것이다. 법보도 『구사론소』에서 거의 같은 문장으로 「예부터 서로 전해 온 세우고 버림은 이 논에 의하면 마흔여섯 가지(古來相傳廢立,依此論有四十六種)」라고 한다. 법보의 「예부터 서로 전해 온」이라는 말은 이 숫자가 전승된 정리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심불상응행도 사정이 같다. 근품의 게송은 「득 · 비득 · 동분, 무상과 두 정, 명근, 네 상, 명신 등의 부류(相名身等類)」라고 끝을 연다. 보광은 이 「등」과 「류」를 풀이하며 「이 논을 살펴보면 심불상응행은 열넷뿐이다. 『순정리론』에 따르면 화합성을 더한다(今案此論,心不相應行但有十四;若依《正理》,加和合性)」고 한다. 중현이 「등이라 한 것은 구신 · 문신 및 화합성을 함께 취한다」고 하여 열다섯째 법을 세웠고, 보광은 「구사사(俱舍師)」와 「정리사(正理師)」의 가상 문답을 세워 화합성은 동분에 포섭된다고 결론짓는다. 열넷이라는 숫자는 『구사론』과 『순정리론』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고정된 것이다.

이 숫자들을 합한 「칠십오법」이라는 말도 주석서에 나온다. 보광은 이십이근을 논하며 「이십이근을 칠십오법 등으로 본체를 내면 열셋뿐이다(若約七十五法等出體,但有十三)」라 하고, 이어 「첫째 색 열하나 가운데 … 둘째 심법은 … 셋째 심소유법 가운데 …」라고 다섯 부류를 차례로 짚는다. 법보도 「칠십오법에서 왜 색은 오근만 취하고, 심왕은 전부 취하고 …」라고 같은 문제를 다룬다. 다섯 부류에 각각 11 · 1 · 46 · 14 · 3을 배당하고 그 합을 75로 부르는 정리가 당대(唐代)의 『구사론』 주석 전통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오위칠십오법」이라는 넉 자 성어 자체는 이 주석서들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그보다 뒤의 구사학 강요서들에서 정형화된 표현으로 보인다.

색법(色)11
  • 오근 5(안 · 이 · 비 · 설 · 신)
  • 오경 5(색 · 성 · 향 · 미 · 촉)
  • 무표색 1
출처계품 「色者唯五根,五境及無表」
심법(心)1
  • 심왕(여섯 식을 하나로)
출처계품 식온 · 의계
심소법(心所)46
  • 대지법 10
  • 대선지법 10
  • 대번뇌지법 6
  • 대불선지법 2
  • 소번뇌지법 10
  • 부정지법 8(악작 · 수면 · 심 · 사 · 탐 · 진 · 만 · 의)
출처주석가근품 권4 + 보광 「總有四十六種」
심불상응행법(不相應)14
  • 득 · 비득 · 동분 · 무상과 · 무상정 · 멸진정 · 명근 · 생 · 주 · 이 · 멸 · 명신 · 구신 · 문신
출처주석가근품 권4 + 보광 「心不相應行但有十四」(『순정리론』은 화합성을 더해 15)
무위법(無爲)3
  • 허공 · 택멸 · 비택멸
출처계품 「謂虛空二滅」
다섯 부류의 틀은 『구사론』 본문(「謂一切法略有五品」, 권4, T29, 18b)46과 14로 닫은 것은 주석가(보광 『구사론기』 · 법보 『구사론소』)
합계75
도표 20 · 오위칠십오법

칠십오법과 삼과의 대응

이렇게 정리된 칠십오법을 계품의 삼과에 다시 놓으면, 분별계품이 그린 지도와 분별근품이 채운 내용이 한눈에 겹친다. 색법 열하나 가운데 무표를 뺀 열은 십처 · 십계에 하나씩 대응하고, 무표는 법처 · 법계로 간다. 심법 하나는 식온 전체이자 의처이며, 계의 문에서는 일곱 심계로 펼쳐진다. 심소 마흔여섯 가운데 수와 상은 따로 수온 · 상온이 되고, 나머지 마흔넷은 심불상응행 열넷과 함께 행온을 이룬다(이 쉰여덟 가지 법이 행온의 내용이라는 정리는 원휘(圓暉)의 『구사론송소』에도 보인다). 심소 · 불상응 · 무표 · 무위는 모두 법처 · 법계에 들므로, 법계 하나에 칠십오법 가운데 예순넷이 담긴다. 보광이 십팔계의 삼성 분별을 풀이하며 「법계에는 모두 예순네 법이 있으니, 무표 · 마흔여섯 심소법 · 열넷 불상응 · 셋 무위다」라고 한 것이 이 계산이다.

심소와 심불상응행 하나하나의 정의, 마음과 심소가 함께 일어나는 규칙(오의평등), 득 · 비득과 사상(四相)을 둘러싼 유부와 경량부의 논쟁은 이 편이 다룰 범위를 넘는다. 그것들은 분별근품을 다루는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서 원문으로 읽는다. 칠십오법의 개관 자체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 있다.

오위칠십오법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정답」처럼 소개되곤 하지만, 그 숫자는 문헌마다 흔들린다. 『대비바사론』은 부정에 두려움(怖)을 더하고, 『순정리론』은 불상응행에 화합성을 더하며, 『품류족론』 등은 다른 심소의 목록을 든다. 대승 유식의 오위백법(심소 51, 불상응 24, 무위 6 등)은 이 틀을 이어받아 다시 짠 것이다. 「칠십오」는 『구사론』이라는 한 텍스트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숫자라는 점을, 보광 자신이 「이 논이 드러난 모습에 따라」라는 말로 밝혀 두었다.

다섯 부류의 틀은 『구사론』 본문에 있다. 색 11 · 심 1 · 무위 3은 분별계품에서 닫히고, 심소 46 · 불상응 14는 분별근품의 「등」과 「이와 같은 부류」를 주석가들이 닫은 숫자다. 「오위칠십오법」은 『구사론』을 읽은 사람들이 만든 정리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분별계품은 「모든 법은 대략 두 가지」라는 한 문장에서 출발했다. 천친은 법을 번뇌와의 관계에 따라 유루와 무루로, 조건과의 관계에 따라 유위와 무위로 가르고, 유위를 오온에, 모든 법을 십이처와 십팔계에 남김없이 배치했다. 그리고 완성된 십팔계를 스물두 개의 자로 다시 재어, 어떤 법이 보이고 막히고 선하며, 어느 세계에 매이고, 어디서 와서 어떻게 끊어지는지를 하나하나 정했다. 뒤의 여덟 품이 「이 법은 어디에 속한다」는 말을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것은 이 품이 그 자리를 미리 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품을 목록으로만 읽으면 그 절반을 놓친다. 분류의 칸 하나하나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색은 「변괴」인가 「변애」인가, 무표는 왜 색인가. 온이 쌓임이라면 온은 가유인가, 그렇다면 처도 가유인가. 근은 왜 쓸모없는 세계에도 남는가. 무엇이 보는가 — 눈인가, 식인가, 혜인가, 화합인가. 극미는 서로 닿는가. 천친은 이 물음들 앞에서 비바사사의 설을 「전설」로 전하고, 경량부의 목소리로 판정을 내리며, 때로는 경량부를 물리치고 처의 실재를 지켰다. 보광이 말한 대로 「이치를 기준으로 삼아 한 종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다. 그리고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그 판정 하나하나를 비바사의 이름으로 되받았다. 『구사론』의 첫 품은 이미 이 세 목소리가 겨루는 자리였다.

이 품이 남긴 숙제는 둘이다. 하나는 행온의 내부, 곧 마흔여섯 심소와 열네 불상응행의 정체이고, 다른 하나는 이 법들이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는 방식, 곧 육인 · 사연 · 오과다. 분별계품이 이십이근의 목록으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음 편 「마음과 인과의 체계 — 분별근품」은 바로 그 이십이근에서 시작해, 이 품이 그려 둔 지도 위에서 법들이 움직이는 규칙을 읽는다.

더 읽기

참고 문헌

원전

  • 천친(세친) 『아비달마구사론』 권1~2 분별계품 · 권4 분별근품 · 권6, 현장 역, T29 no.1558
  • 천친(세친) 『아비달마구사석론』 권1~2, 진제 역, T29 no.1559
  • 『아비달마구사론본송』, 현장 역, T29 no.1560
  • 중현 『아비달마순정리론』 권1~3 · 권7~8 · 권12, 현장 역, T29 no.1562
  •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13 · 권73 · 권75, 현장 역, T27 no.1545
  • 보광 『구사론기』 권1~4, T41 no.1821
  • 법보 『구사론소』 권1 · 권3~4, T41 no.1822
  • 원휘 『구사론송소』 권1 · 권4, T41 no.1823

연구

  • P. Pradhan (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Patna: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67
  • Louis de La Vallée Poussin (tr.), L'Abhidharmakośa de Vasubandhu, 6 vols., Paris: Paul Geuthner, 1923–1931
  • Leo M. Pruden (tr.), Abhidharmakośabhāṣyam, 4 vols.,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88–1990
  • Collett Cox, Disputed Dharmas: Early Buddhist Theories on Existence, Tokyo: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1995
  • 櫻部建, 『俱舎論の研究 界・根品』, 法藏館, 1969
  • 櫻部建 · 上山春平, 『存在の分析〈アビダルマ〉』(仏教の思想 2), 角川書店, 1969
  • 加藤純章, 『経量部の研究』, 春秋社, 1989
  • 권오민 역, 『아비달마구사론』 1~4, 동국역경원, 2002
  •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