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에 덮인 오래된 나무와 그 뿌리

번뇌와 삼세실유 — 분별수면품

아비달마구사론 · 제5편 · 업을 자라게 하는 잠든 번뇌,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있는가」

分別隨眠品제5 분별수면품 · 권19~21 (T29, 98b~113b)
품
분별수면품 제5
권
권19~21
게송
본송 69송
핵심 술어
수면 · 98수면 · 편행 · 삼세실유 · 작용
관련 계보
一 십이연기

서강과 일곱 편 · 구사론 62장 구성도

아홉 품 → 서강 + 일곱 편

『구사론』의 업품은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로 시작했다. 그러나 업만으로는 다음 생이 오지 않는다. 같은 선업을 지어도 욕망을 벗어난 사람에게는 그 업이 새로운 생을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천친(天親, 세친 世親 Vasubandhu)은 다섯째 품을 「업은 수면 때문에 자란다」는 말로 연다. 수면(隨眠, anuśaya)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이 품은 번뇌를 여섯에서 일곱, 열, 아흔여덟으로 쪼개어 어느 것이 견해로 끊어지고 어느 것이 오랜 닦음으로 끊어지는지를 가린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번뇌가 과거와 미래의 일을 「묶는다」는 말을 해명하다가 불교 존재론의 가장 큰 논쟁 하나를 불러낸다. 과거와 미래의 법은 지금도 있는가 — 「삼세실유(三世實有)」의 대론이다.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은 『구사론』 아홉 품의 다섯째로, 권19에서 권21까지 세 권을 차지한다. 본송으로는 69송이다. 품의 이름에 쓰인 「수면」은 「잠들어 따라다니는 것」이라는 한자 뜻 그대로, 늘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사람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며 기회가 오면 깨어나는 번뇌를 가리킨다. 진제는 같은 품을 「분별혹품(分別惑品)」이라 옮겼다. 앞의 업품이 「무엇이 과보를 낳는가」를 물었다면, 이 품은 「무엇이 그 업에 과보를 낳는 힘을 주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끊어지는가」를 묻는다. 수면품은 앞의 업품과 뒤의 현성품 사이에서 윤회의 원인론을 해탈의 수행론으로 넘겨주는 다리다.

이 품의 체계는 아비달마의 분류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준다. 탐 · 진 · 만 · 무명 · 견 · 의, 여섯 가지 번뇌가 견해의 다섯 갈래로 나뉘어 열이 되고, 그 열이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세 영역과 「사제를 보아 끊는 네 부류, 닦아서 끊는 한 부류」의 다섯 부류에 배당되어 아흔여덟이 된다. 숫자는 번거로워 보이지만 그 밑에는 분명한 물음이 있다. 어떤 번뇌는 진리를 한 번 보는 순간 사라지고, 어떤 번뇌는 진리를 본 성자에게도 남아 오래 닦아야 사라진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번뇌가 무엇을 대상으로 삼느냐, 무엇에 대해 미혹했느냐가 그것을 정한다는 것이 이 품의 대답이다.

그리고 이 품에는 『구사론』 전체에서 가장 긴 대론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다. 권20에서 「번뇌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어떤 일을 묶는가」를 말하다가 천친은 묻는다. 과거와 미래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묶는다」 「묶임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물음에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그 이름에 걸고 지켜 온 「삼세실유」의 논증, 법구 · 묘음 · 세우 · 각천의 네 가지 설, 그리고 경량부의 입장에 선 천친의 긴 비판이 이어진다. 천친의 비판은 다시 중현(衆賢)의 『순정리론』에서 한 구절 한 구절 반박된다. 이 대론은 뒤에 중관과 유식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어 받는 물음, 곧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편의 장은 다음과 같다.

  1. 제4 분별업품「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
  2. 제5 분별수면품「업은 수면 때문에 자란다」권19~21, 본송 69송
  3. 제6 분별현성품「번뇌를 끊는 길」
수면품의 흐름
  1. ① 수면의 수6 · 7 · 10 · 98
  2. ② 수면의 성질견소단 · 수소단 · 편행 · 수증 · 선악
  3. ③ 수면이 묶는 일과 삼세실유 대론
  4. ④ 번뇌의 여러 이름누 · 폭류 · 액 · 취 · 결 · 박 · 수번뇌 · 전 · 개
  5. ⑤ 끊음네 원인 · 아홉 편지
도표 1 · 분별수면품의 자리
제1장 업을 자라게 하는 것수면과 일곱 수면

본송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98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隨眠諸有本,此差別有六, 謂貪瞋亦慢,無明見及疑。

풀이

수면은 모든 존재(有)의 뿌리다. 그 차별은 여섯이니, 탐(貪) · 진(瞋), 그리고 만(慢), 무명(無明) · 견(見) 및 의(疑)다.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98c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六由貪異七,有貪上二界, 於內門轉故,為遮解脫想。

풀이

여섯은 탐이 둘로 나뉘어 일곱이 된다. 유탐(有貪)은 위의 두 세계(색계 · 무색계)의 것이니, 안쪽 문으로 굴러가기 때문이고, 해탈했다는 생각을 막기 위해서다.

술어 풀이

隨眠수면
범어 anuśaya. 「뒤따라(anu) 누워 있다(√śī)」는 말로, 한역은 「따라다니며 잠들어 있는 것」으로 옮겼다. 유부에서는 번뇌(kleśa)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고, 경량부에서는 번뇌가 드러나지 않고 잠복해 있는 상태(종자)를 가리킨다. 이 차이가 수면의 체를 둘러싼 대론이 된다.
有유
범어 bhava. 존재, 특히 윤회하는 생존을 말한다. 「수면은 모든 존재의 뿌리(諸有本)」라는 말은 수면이 다음 생을 끌어오는 근본 원인이라는 뜻이다. 십이연기의 「유(有)」 지분과 같은 말이다.
煩惱번뇌
범어 kleśa.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惱亂)」 마음 작용. 『구사론』에서 근본 번뇌는 여섯(탐 · 진 · 만 · 무명 · 견 · 의)이며, 이들을 따라 일어나는 것을 수번뇌(upakleśa)라 한다.
感有감유
업이 다음 생(有)을 불러오는 것. 품 첫머리는 「수면을 떠나서는 업에 다음 생을 부르는 힘이 없다(離隨眠業無感有能)」고 한다.
欲貪 · 有貪욕탐 · 유탐
범어 kāmarāga · bhavarāga. 욕계에 속한 탐을 욕탐, 색계 · 무색계에 속한 탐을 유탐이라 한다. 유탐은 바깥 대상이 아니라 선정과 자기 몸(자체)을 맛들여 집착하는 탐이다.
內門轉내문전
「안쪽 문으로 굴러간다」. 바깥의 감각 대상을 향하지 않고 선정 안의 경계와 자기 존재를 향해 일어나는 것. 위 두 세계의 탐이 그러하다고 한다.
微細 · 隨增 · 隨縛미세 · 수증 · 수박
『대비바사론』이 든 「수면」이라는 이름의 세 뜻. 모양이 미세하고, 대상과 상응법 속에서 자라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묶는다는 것이다.
纏전
범어 paryavasthāna. 「휘감는 것」. 번뇌가 마음을 덮어 휘감은 드러난 상태. 경량부는 수면(잠든 것)과 전(깨어난 것)을 구별하고, 유부는 근본 번뇌도 전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업은 수면 때문에 자란다」 — 업품에서 수면품으로

분별수면품은 앞 품과 이어지는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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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前言世別皆由業生,業由隨眠方得生長,離隨眠業無感有能。

풀이

앞에서 「세간의 차별은 모두 업에서 생긴다」고 말했다. 업은 수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라나니, 수면을 떠나서는 업에 존재를 부르는 힘이 없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b)

업품의 첫 게송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는 핵심 개념 「업」 페이지에서 읽었다(→ 업). 수면품은 이 명제에 조건 하나를 단다. 업이 세간의 차별을 낳는 것은 맞지만, 업 혼자서는 다음 생을 불러오지 못한다. 업을 「자라게(生長)」 하는 것, 업에 다음 생을 부르는 힘(感有能)을 주는 것은 수면이다. 업이 씨앗이라면 수면은 그 씨앗을 적시는 물이다.

이 점은 중현의 『순정리론』이 더 분명하게 말한다. 중현은 같은 품 첫머리에서 세간에는 욕망을 떠난 사람이 선한 몸 · 입 · 뜻의 업을 지으면서도 그 업이 다음 생을 부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고, 「업이 혼자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는 바가 아니다(業獨為因非我所許)」, 「반드시 수면의 도움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를 부르는 힘이 있다(要隨眠助方有感能)」고 한다(『순정리론』 권45, T29, 596a). 아라한이 남은 생애 동안 선행을 하더라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업은 같아도 그것을 적시는 수면이 말랐기 때문이다.

이 구도는 십이연기의 혹(惑) · 업(業) · 고(苦)와 맞물린다. 무명 · 애 · 취가 혹이고, 행 · 유가 업이며, 나머지가 고다. 혹이 업을 일으키고, 업이 고를 낳으며, 고 속에서 다시 혹이 일어난다(→ 십이연기). 업품이 이 고리의 가운데 마디를 다루었다면, 수면품은 첫 마디인 혹을 정면에서 다룬다. 그래서 『구사론』의 품 순서는 세품(세계) → 업품(원인으로서의 행위) → 수면품(그 행위에 힘을 주는 것) → 현성품(그것을 끊는 길)으로 이어진다.

존재의 뿌리가 되는 열 가지 일

수면이 어떻게 「모든 존재의 뿌리」가 되는가. 천친은 번뇌가 드러나 일어날 때 하는 열 가지 일을 든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以諸煩惱現起能為十種事故,一堅根本、二立相續、三治自田、四引等流、五發業有、六攝自具、七迷所緣、八導識流、九越善品、十廣縛義,令不能越自界地故。

풀이

모든 번뇌는 드러나 일어날 때 열 가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첫째 뿌리를 굳히고, 둘째 상속을 세우며, 셋째 자기 밭을 다스리고, 넷째 같은 부류의 흐름을 끌어내며, 다섯째 업과 존재를 일으키고, 여섯째 자기의 도구를 거두어들이며, 일곱째 대상에 미혹하고, 여덟째 식의 흐름을 이끌며, 아홉째 선한 부류를 넘어서게(잃게) 하고, 열째 넓게 묶으니, 자기가 속한 세계와 지(地)를 넘어설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b)

열 가지는 번뇌의 작용을 원인 쪽에서 결과 쪽으로 펼쳐 놓은 것이다. 「뿌리를 굳힌다」는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그 번뇌를 지니게 하는 힘(得)이 단단해진다는 뜻이다. 「상속을 세운다」는 번뇌가 거듭 일어나 흐름을 이룬다는 뜻이고, 「자기 밭을 다스린다」는 번뇌가 깃드는 몸과 마음을 번뇌에 맞도록 길들인다는 뜻이다. 「같은 부류의 흐름을 끌어낸다」는 근본 번뇌가 수번뇌를 낳는 것이며, 「업과 존재를 일으킨다」가 바로 업품과의 연결이다. 「자기의 도구를 거둔다」는 바르지 못한 생각(非理作意)을 거듭 불러들이는 것이고, 「대상에 미혹한다」는 바른 앎을 해치는 것이다. 「식의 흐름을 이끈다」는 죽음의 순간에 다음 생의 대상 쪽으로 식을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넓게 묶는다」는 번뇌가 그 사람을 자기가 속한 세계와 지(地)에 묶어 두어 위로 넘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중현은 이것을 열여섯 가지로 늘려 「모든 번뇌가 드러나 일어나면 열여섯 가지 일을 한다(諸煩惱現起,為十六事故)」고 한다(『순정리론』 권45, T29, 596a). 그 가운데에는 「괴로움의 씨앗을 심는다(植眾苦種)」, 「해탈의 길을 막는다(擁解脫路)」 같은 항목이 더해져 있다. 그리고 중현은 수면을 어떤 관점에서 살펴야 하는지를 서른 가지가 넘는 물음으로 늘어놓는다 — 견소단인가 수소단인가, 편행인가 아닌가, 유루를 반연하는가 무루를 반연하는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자라는가, 어떤 원인으로 끊어지는가. 이 목록이 사실상 수면품의 목차다. 『구사론』 수면품은 이 물음들을 하나씩 풀어 가는 품이다.

진제 역은 이 첫 게송을 「隨眠惑有本」으로 시작하고, 「云何為有本?若惑現在正起,能作十種事」라고 풀이한다. 진제가 품의 이름을 「분별혹품」이라 한 것도 수면을 「혹(惑)」으로 이해한 번역 태도를 보여 준다.

근본 수면 여섯 — 「亦」과 「及」

게송은 수면의 차별을 여섯으로 든다. 탐 · 진 · 만 · 무명 · 견 · 의. 여기서 천친은 게송의 두 글자에 주목한다. 「탐 · 진, 그리고(亦) 만」의 「亦」과 「견 및(及) 의」의 「及」이다.

頌說亦言,意顯慢等亦由貪力於境隨增,由貪隨增義如後辯。及聲顯六體各不同。

게송이 「亦」이라고 한 것은, 만 등도 탐의 힘으로 말미암아 대상에서 자라난다는 뜻을 드러낸다. 탐으로 말미암아 자라는 뜻은 뒤에서 밝힌다. 「及」이라는 말은 여섯의 체가 저마다 다름을 드러낸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c

천친의 해석에 따르면 「亦」은 만 이하의 수면도 탐의 힘을 받아 자란다는 것을 드러낸다. 수면품 뒤쪽(권20)에서 열 수면이 일어나는 순서를 말할 때, 자기 견해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貪)에서 교만(慢)이 생기고, 그 교만에서 남의 견해에 대한 성냄(瞋)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이 해석의 근거다. 중현은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이 해석은 이치가 없다. 글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此釋無理,非文意故)」라고 하고, 이 게송은 수와 이름을 늘어놓는 곳이지 어느 것이 어느 것에 기대어 자라는지를 밝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순정리론』 권45, T29, 596c). 「亦」은 구절을 채우는 말이거나, 굳이 뜻을 붙인다면 탐 · 진처럼 여러 종류가 있어도 하나로 묶어 수면이라 부른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게송 한 글자를 두고도 두 사람의 읽기가 갈린다. 수면품 전체에서 되풀이되는 천친과 중현의 긴장이 첫 게송에서 이미 시작된다.

일곱 수면 — 욕탐과 유탐

경전은 수면을 일곱으로 말한다. 『구사론』은 이것을 여섯 수면 가운데 탐을 둘로 나눈 것이라 한다.

一欲貪隨眠、二瞋隨眠、三有貪隨眠、四慢隨眠、五無明隨眠、六見隨眠、七疑隨眠。

첫째 욕탐 수면, 둘째 진 수면, 셋째 유탐 수면, 넷째 만 수면, 다섯째 무명 수면, 여섯째 견 수면, 일곱째 의 수면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c

왜 위의 두 세계의 탐만 따로 「유탐」이라 부르는가. 천친은 두 이유를 든다. 하나는 그 탐이 「안쪽 문으로 구르기(於內門轉)」 때문이다. 색계 · 무색계의 존재는 대부분 선정에 머물고, 선정에 대한 탐은 바깥 대상이 아니라 선정 자체와 자기 존재를 향한다. 또 하나는 「해탈했다는 생각을 막기 위해(為遮解脫想)」서다. 위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해탈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으므로, 그곳의 탐에 「유(존재)」라는 이름을 붙여 그곳도 여전히 윤회하는 존재의 한 자리임을 밝힌 것이다.

彼諸有情多於等至及所依止深生味著,故說彼唯味著自體;非味著境,離欲貪故,由此唯彼立有貪名。

그곳의 유정은 대개 선정(等至)과 그 의지처(몸)에 깊이 맛들여 집착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자체(自體)에 맛들여 집착할 뿐 대상에 맛들여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욕탐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만 유탐이라는 이름을 세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a

이것은 깊은 관찰이다. 감각적 욕망을 떠난 수행자에게도 탐은 남는다. 다만 그 탐은 바깥을 향하지 않고 안을 향한다. 고요한 선정의 맛, 그리고 그 맛을 누리는 「나」의 존재 자체를 놓지 못하는 탐이다. 경전에서 수행자가 선정의 맛(味)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까닭이 여기서 체계 안의 자리를 얻는다. 십이연기의 「애(愛)」를 욕애 · 유애 · 무유애로 나누는 전통과도 이어진다.

근본 수면 여섯
탐진만무명견의
일곱 수면(탐을 둘로)「六由貪異七」
욕탐진유탐만무명견의
열 수면(견을 다섯으로)「六由見異十」
탐진만무명의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
견의 성질인 것 다섯견의 성질이 아닌 것 다섯
도표 2 · 수면의 수 — 여섯 · 일곱 · 열

「수면」이라는 이름 — 『대비바사론』의 세 뜻

왜 번뇌를 굳이 「수면」이라 부르는가. 『대비바사론』은 일곱 수면의 자성을 98사(事)로 정리한 바로 다음에 이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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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問何故名隨眠。隨眠是何義答微細義隨增義隨縛義是隨眠義。

풀이

묻는다. 무엇 때문에 수면이라 이름하는가. 수면은 무슨 뜻인가. 답한다. 미세하다는 뜻, 따라 자란다는 뜻, 따라 묶는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다. (『대비바사론』 권50, T27, 257a)

「미세」는 탐 등의 행상이 일곱 극미가 모여 하나의 미세한 색을 이루듯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수증(隨增)」은 그것들이 미세한 유루법 하나하나, 한 극미 · 한 찰나에서도 자라난다는 것이다. 「수박(隨縛)」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이 인상적인 비유를 든다. 새 한 마리가 날개의 힘으로 큰 바다를 건너려 한다. 물속의 물고기는 그 그림자를 따라간다. 새가 지쳐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가 삼킨다. 수면도 이와 같이 언제나 그 사람을 따라다니다가, 바르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등류과나 이숙과를 받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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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如空行影水行隨故。空行謂鳥。水行謂魚。

풀이

하늘을 가는 것의 그림자를 물을 가는 것이 따라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늘을 가는 것은 새요, 물을 가는 것은 물고기다. (『대비바사론』 권50, T27, 257b)

『구사론』은 품 끝 무렵(권20)에서 이 이름의 뜻을 게송 하나로 정리한다. 「미세하고, 두 가지로 자라며, 따라다니고, 따라 묶는다(微細二隨增,隨逐與隨縛)」. 근본 번뇌는 드러나 있을 때에도 그 모양을 알기 어렵고(微細), 대상과 상응법 두 곳에서 자라며(二隨增), 그것을 지니게 하는 「득(得)」이 늘 그 유정을 따라다니고(隨逐), 막으려 애써도 거듭 일어난다(隨縛)는 것이다(권20, T29, 108a). 이 해석은 유부의 것이다. 「따라다닌다」를 번뇌 자체가 아니라 번뇌의 득이 따라다니는 것으로 풀기 때문이다. 경량부는 같은 말을 전혀 다르게 읽는다. 그 대론이 다음 장의 주제다.

『대비바사론』은 또 질투(嫉)와 인색(慳)은 왜 수면이 되지 못하는가를 묻고, 수면은 미세하나 그 둘은 거칠고, 수면은 근본 번뇌이나 그 둘은 번뇌의 등류이며, 수면은 습기가 단단하다고 답한다. 그 비유가 이렇다. 산의 나무를 태운 땅은 불이 꺼진 지 오래되어도 여전히 뜨겁지만, 풀이나 자작나무 껍질을 태운 땅은 불이 꺼지자마자 식는다.

復次隨眠習氣堅固如於此地燒擔山木火滅雖久其地猶熱。彼二習氣不堅固。如於此地燒草樺皮。火纔滅已其地便冷。

또 수면은 습기가 단단하다. 이 땅에서 산의 나무를 지고 와 태우면 불이 꺼진 지 오래되어도 그 땅이 여전히 뜨거운 것과 같다. 저 둘(질투 · 인색)은 습기가 단단하지 않으니, 이 땅에서 풀과 자작나무 껍질을 태우면 불이 꺼지자마자 땅이 곧 식는 것과 같다.

『대비바사론』 권50, T27, 257c

수면은 불이 꺼진 뒤에도 땅에 남아 있는 열기다. 「잠들어 있다」는 말은 그것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바닥에 남아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는 뜻이다.

수면품은 업품의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에 「업은 수면 때문에 자란다」를 덧붙이며 시작한다. 수면은 다음 생을 부르는 근본 원인이며, 여섯(탐 · 진 · 만 · 무명 · 견 · 의)이 일곱(탐을 욕탐 · 유탐으로), 열(견을 다섯으로)로 나뉜다. 「수면」이라는 이름은 미세하고, 따라 자라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번뇌의 성질을 가리킨다.

제2장 잠든 번뇌수면의 체를 둘러싼 대론

본송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99a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煩惱睡位說名隨眠,於覺位中即名纏故。

풀이

번뇌가 잠든 상태를 수면이라 하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곧 전(纏)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대표 구절은 게송이 아니라 장행이다. 수면의 체를 둘러싼 대론은 일곱 수면의 게송(「六由貪異七」)을 풀이하는 장행 안에서 「곁가지 논의(傍論)」로 벌어지며, 본송에는 이 대론에 해당하는 게송이 없다. 위의 구절은 경량부의 입장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천친의 말이다.

술어 풀이

相應상응
범어 saṃprayukta. 심소가 마음과 같은 의지처 · 대상 · 행상 · 때 · 체로 함께 일어나는 관계(오의평등). 유부는 수면이 심상응법, 곧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심소라고 본다.
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범어 cittaviprayukta-saṃskāra.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유위법. 득(得) · 비득 · 명근 등 14법. 수면을 심불상응행으로 보면 수면은 마음 밖에서 늘 따라다니는 별개의 실체가 된다.
得득
범어 prāpti. 어떤 법을 그 유정의 상속에 「지니게 하는」 심불상응행. 유부는 번뇌가 드러나지 않을 때에도 번뇌의 득이 상속에 남아 있어 그 사람을 「번뇌를 지닌 자」로 만든다고 설명한다.
種子종자
범어 bīja. 경량부의 술어. 「자기 몸(自體) 위의 특별한 능력(差別功能)」으로서, 번뇌에서 생겨나 다시 번뇌를 낳는 힘.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功能공능
범어 śakti 또는 sāmarthya.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힘. 경량부는 종자를 공능으로 정의하고, 유부(중현)는 「작용」과 「공능」을 구별해 삼세론에 쓴다.
睡 · 覺수 · 각
경량부의 비유. 번뇌가 드러나지 않고 종자로 따라다니는 상태가 「잠(睡)」, 번뇌가 드러나 마음을 휘감은 상태가 「깸(覺)」이다.
經部경부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 「경을 기준(量)으로 삼는 부파」. 논장(아비달마)보다 경장을 근거로 삼으며, 과거 · 미래의 실재를 부정하고 종자설을 세운다. 『구사론』에서 천친은 수면의 체 논쟁에서 이 부파의 설을 「가장 좋다(最善)」고 평하고, 다른 곳에서도 「이 설이 좋다(此說為善)」며 경량부의 손을 든다.
上座상좌
중현이 『순정리론』에서 거듭 비판하는 경량부 계통의 논사. 천친(경주)과 함께 중현의 주된 논적이다. 「수계(隨界)」라는 술어를 쓴다.

두 갈래의 물음 — 「욕탐이 곧 수면인가, 욕탐의 수면인가」

일곱 수면 가운데 첫째인 「욕탐 수면(欲貪隨眠)」이라는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천친은 이 복합어를 두 가지로 풀 수 있다고 한다. 욕탐 그 자체가 수면이라는 뜻(欲貪體即是隨眠)인가, 아니면 욕탐에 딸린 수면, 곧 「욕탐의 수면」이라는 뜻(欲貪之隨眠)인가. 그리고 곧바로 두 해석이 다 곤란하다고 한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若欲貪體即是隨眠,便違契經。……若是欲貪之隨眠義,隨眠應是心不相應,便違對法。

풀이

만약 욕탐의 체가 곧 수면이라면 경전에 어긋난다. …… 만약 욕탐의 수면이라는 뜻이라면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하니, 대법(아비달마)에 어긋난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c)

첫째 해석이 어긋난다는 경전은 이렇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욕탐의 전(纏)에 휘감겨 지내지 않는다. 혹 잠깐 욕탐의 전이 일어나더라도 곧 벗어날 방편을 있는 그대로 알아, 욕탐의 전을 바로 없애고 「아울러 수면도 끊는다(并隨眠斷)」. 이 경문은 전과 수면을 나란히 말하므로, 전으로 드러난 욕탐과 그 수면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둘째 해석이 어긋난다는 대법은 『발지론』 계통의 본론이다. 본론은 「욕탐 수면은 세 근(根)과 상응한다(欲貪隨眠三根相應)」고 한다. 상응한다면 수면은 심상응법이어야 한다. 그런데 「욕탐의 수면」이라 하면 욕탐과는 다른 무엇이 되고, 마음과 상응하는 번뇌가 아니라면 남는 자리는 심불상응행뿐이다.

유부의 답 — 「번뇌가 곧 수면이다」

비바사사(毘婆沙師), 곧 카슈미르의 유부 정통파는 첫째 해석을 택한다.

毘婆沙師作如是說:欲貪等體即是隨眠。

비바사사는 이렇게 말한다. 욕탐 등의 체가 곧 수면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c

그러면 「아울러 수면도 끊는다」는 경문은 어떻게 되는가. 유부는 두 가지로 푼다. 하나는 경문의 「수면을 아울러(并隨眠)」가 「따라 묶는 것을 아울러(并隨縛)」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경전이 번뇌의 득(得)을 가리켜 임시로 「수면」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불이 괴로움의 원인이므로 불을 「괴로움」이라 부르는 것처럼, 원인에 결과의 이름을 붙인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달마는 「실상에 따라 말하므로(依實相說)」 번뇌 자체를 수면이라 한다.

이어서 유부는 수면이 반드시 심상응법이어야 하는 이유를 셋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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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以諸隨眠染惱心故、覆障心故、能違善故,謂隨眠力能染惱心。未生善不生、已生善退失,故隨眠體非不相應。

풀이

모든 수면은 마음을 물들이고 괴롭히기 때문이며, 마음을 덮어 가리기 때문이며, 선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면의 힘이 마음을 물들이고 괴롭혀,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지 않게 하고 이미 생긴 선은 물러나 잃게 한다. 그러므로 수면의 체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c)

그리고 결정적인 논거가 따른다. 만약 수면이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별개의 법으로서 마음을 물들이고 선을 막는다면, 그런 수면은 늘 현전해 있으므로 선한 마음은 영영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범부에게도 선한 마음은 일어난다. 그러므로 수면은 마음과 함께 일어났다 사라지는 상응법이어야 한다. 중현의 『순정리론』은 이 세 논거가 「존자 법승(法勝)」의 것이라고 전한다(『순정리론』 권45, T29, 599b).

경량부의 답 — 「잠든 번뇌는 종자다」

천친은 이 세 논거를 한마디로 물리친다.

此皆非證。所以者何?若許隨眠非相應者,不許上三事是隨眠所為。

이것은 모두 증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수면이 상응법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위의 세 가지 일을 수면이 하는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8c

마음을 물들이고 선을 막는 것은 드러난 번뇌, 곧 전(纏)이 하는 일이지 잠든 수면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수면이 그런 일을 한다는 전제 위에 세운 논증은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천친은 이 품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평가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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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然經部師所說最善。

풀이

그러나 경부사가 말한 것이 가장 좋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a)

경량부의 설은 이렇다. 「욕탐 수면」은 「욕탐의 수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수면의 체는 「마음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非心相應非不相應)」. 별개의 실체(別物)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응이냐 불상응이냐는 실체로 있는 법에 대해서나 물을 수 있는 물음인데, 수면은 그런 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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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煩惱睡位說名隨眠,於覺位中即名纏故。何名為睡?謂不現行種子隨逐。何名為覺?謂諸煩惱現起纏心。何等名為煩惱種子?謂自體上差別功能,從煩惱生能生煩惱。

풀이

번뇌가 잠든 상태를 수면이라 하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곧 전이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잠이라 하는가. 드러나 활동하지 않는 종자가 따라다니는 것이다. 무엇을 깸이라 하는가. 모든 번뇌가 드러나 일어나 마음을 휘감는 것이다. 무엇을 번뇌의 종자라 하는가. 자기 몸 위의 특별한 능력으로서, 번뇌에서 생겨나 번뇌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a)

이 짧은 정의 안에 경량부 종자설의 골격이 다 들어 있다. 첫째, 종자는 「자기 몸(自體) 위의」 능력이다. 자체(āśraya)란 다섯 무더기로 이루어진 그 사람의 심신 상속을 말한다. 종자는 그 상속과 따로 있는 물건이 아니라 그 상속이 지닌 성향이다. 둘째, 종자는 「번뇌에서 생겨나 번뇌를 낳는다」. 지난 번뇌가 상속에 남긴 흔적이며, 그 흔적이 조건을 만나면 다시 번뇌로 피어난다. 셋째, 종자는 「잠든 것」이다. 번뇌가 마음을 휘감아 드러난 상태가 전이고, 그 번뇌가 가라앉아 드러나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은 상태가 수면이다.

설일체유부(비바사사)「欲貪等體即是隨眠」욕탐 등의 체가 곧 수면심상응법드러나지 않을 때는 번뇌의 득(得)이 따라다님
경량부천친이 「가장 좋다」고 평함「煩惱睡位說名隨眠」번뇌가 잠든 상태가 수면상응도 불상응도 아님(별개의 실체가 아님)수면 = 종자, 드러난 번뇌 = 전(纏)
분별론자 · 독자부 등수면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별개의 법(심불상응행)
도표 3 · 수면은 무엇인가 — 세 입장

「종자」라는 말의 무게 — 두 가지 비유

천친은 종자를 두 비유로 설명한다. 하나는 기억의 종자다. 무엇을 직접 알아 증득한 지혜(證智)에서 생겨나, 뒷날 그것을 떠올리는 기억(念)을 낳는 능력이 있다. 또 하나는 식물이다. 싹 등이 앞의 열매에서 생겨나 다음 열매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과 같다.

如念種子是證智生,能生當念功能差別。又如芽等有前果生,能生後果功能差別。

기억의 종자가 증득한 지혜에서 생겨나 뒷날의 기억을 낳는 특별한 능력인 것과 같다. 또 싹 등이 앞의 열매에서 생겨나 뒤의 열매를 낳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a

그리고 반대로 논증한다. 번뇌의 종자를 심불상응행이라는 별개의 실체로 세운다면, 기억의 종자도 마찬가지로 별개의 불상응법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억의 경우에는 능력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면서 번뇌의 경우에만 별개의 실체를 요구할 까닭이 없다 — 「차별되는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差別因緣不可得故)」.

이 논증의 무게는 크다. 종자는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상속이 지닌 경향, 곧 기능적 개념이다. 경량부는 이 개념으로 실체를 늘리지 않고도 연속성을 설명하려 한다. 번뇌가 드러나지 않는 동안에도 사람은 번뇌를 지닌 사람이다. 유부는 이것을 「번뇌의 득」이라는 실체로 설명하고, 경량부는 「번뇌의 종자」라는 상속의 성향으로 설명한다. 같은 물음이 업품에서는 「지난 업은 어떻게 과보를 낳는가」로 나타났다. 핵심 개념 「업」 페이지에서 본 대로 경량부는 업이 마음의 흐름에 남긴 종자가 이어지며 변하다가 과보를 맺는다고 답했다. 수면품의 「번뇌 종자」는 같은 이론을 번뇌에 적용한 것이다(→ 업). 그리고 바로 이 이론이, 뒤의 삼세실유 대론에서 보듯 과거와 미래의 실재를 부정할 수 있게 해 주는 근거가 된다. 과거의 업과 번뇌가 지금도 「있지」 않아도, 그것이 남긴 종자가 지금 있기 때문이다.

경량부는 이어서 경전의 문구도 다시 읽는다. 『육육경(六六經)』은 「즐거운 느낌에 탐의 수면이 있다」고 한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수면이 있다면 수면은 드러난 번뇌와 같은 것이 아닌가. 천친은 답한다. 「경전은 다만 '있다'고 했을 뿐, 그때 곧 수면이 있다고 하지 않았다(經但說有,不言爾時即有隨眠)」. 그것이 있는 때는 「잠든 때」이고, 아니면 원인에 임시로 수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권19, T29, 99a). 그러고는 「곁가지 논의는 그만두고 본론을 말하자(傍論且止,應辯正論)」며 일곱 수면의 해설로 돌아간다. 수면의 체라는 근본 문제를 「곁가지」라고 부르는 이 태도 자체가, 이 품에서 천친이 유부의 체계를 서술하면서 그 기초를 경량부의 눈으로 흔드는 방식을 보여 준다.

중현의 반박 — 「종자에는 체가 없다」

중현은 『순정리론』 권45에서 천친의 이 대목을 한 문장씩 끊어 반박한다. 그의 첫 공격은 경량부 정의 안의 모순이다.

今詳彼釋,於理不然,自許隨眠離諸煩惱無別物故。

이제 그 해석을 살펴보면 이치에 맞지 않다. 스스로 수면이 모든 번뇌를 떠나 따로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순정리론』 권45, T29, 597a

수면이 번뇌와 따로 있는 물건이 아니라면 수면은 번뇌여야 한다. 그런데 번뇌는 물든(染汚) 법이고, 잠든 상태의 사람 몸과 마음은 물들지 않은 법일 수 있다. 물들지 않은 법이 번뇌의 체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잠든 수면」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또 경량부는 종자를 「번뇌에서 생겨나 번뇌를 낳는 특별한 능력」이라 했다. 그 능력이 번뇌라면 「번뇌와 따로 있지 않다」는 말과 맞지만 「잠든 번뇌」와 「깬 번뇌」의 구별이 사라지고, 번뇌가 아니라면 그것은 번뇌와 다른 별개의 물건이 된다. 중현은 결론짓는다. 체가 없는 것이 「번뇌에서 생겨나고 번뇌를 낳는다」고 할 수는 없다. 체 없는 것은 원인도 결과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에 대한 반박도 날카롭다. 유부가 말하는 「기억의 종자」는 실제로 있는 기억(念)이 앞뒤로 서로 끌어당기는 것이지, 체 없는 능력이 아니다. 싹과 열매의 비유에서도 싹 속에는 실제 색법이 있다. 그러나 경량부가 말하는 번뇌 종자에는 그런 실체가 없다. 중현은 이런 종자설을 「식미제(食米臍)의 종」 — 승론(勝論, Vaiśeṣika)의 개조 카나다(Kaṇāda)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 의 주장을 끌어와 성인의 뜻에 덧씌운 것이라 하고, 경주의 설은 그보다도 못하다고 깎아내린다. 저쪽은 그래도 「행(行)」이라는 별도의 법을 세워 앎의 결과이자 원인으로 삼지만, 경주에게는 종자라는 실물조차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순정리론』 권45, T29, 597b).

중현은 경량부 계통의 상좌(上座)도 함께 비판한다. 상좌는 수면을 「번뇌의 수계(隨界)」, 곧 상속을 따라다니는 번뇌의 요소라 하고, 그것은 「상응하기도 하고 상응하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중현은 이 말을 「어떤 사람이 반두시바카(槃豆時縛迦) 꽃도 쿠킬라(拘枳羅) 새도 모르면서, 쿠킬라 새의 색이 어떠냐는 물음에 '선명하게 희니 꼭 반두시바카 꽃 같다'고 답하는 것」에 빗대어,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설명하는 말이라고 조롱한다(『순정리론』 권45, T29, 598a~b). 그리고 「불교에서 바른 이해를 구하려는 사람은 이런 논사를 가까이하지 말라(欲於佛教求正解者,不應習近如是論師)」고까지 말한다.

중현 자신의 해석은 이렇다. 경전의 「욕탐 수면」은 욕탐 자체다. 「따라 묶는다」는 것은 욕탐이 아니라 욕탐의 득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강한 원수가 먼 곳에 있으면서 몰래 사람을 보내 틈을 엿보는 것과 같다(如強怨敵雖住遠方,密遣使隨伺求瑕隙). 「아울러 수면도 끊는다」는 경문은 욕탐의 전(纏)이 남김없이 다했다는 뜻이다(『순정리론』 권45, T29, 598c).

부파들의 지형 — 수면은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수면을 마음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느냐 아니냐는 부파들 사이에 오래된 쟁점이었다. 『이부종륜론』은 각 부파의 「본종(本宗)」을 정리하며 이 문제를 거듭 기록한다. 설일체유부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는다.

一切隨眠皆是心所。與心相應有所緣境。

모든 수면은 다 심소이다. 마음과 상응하며 대상을 지닌다.

『이부종륜론』, T49, 16b

반대로 대중부 계통 네 부파의 본종은 「수면은 마음도 아니고 심소법도 아니며, 대상도 없다(隨眠非心。非心所法。亦無所緣)」,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고, 전은 마음과 상응한다」고 한다(『이부종륜론』, T49, 15c). 화지부도 「수면은 마음도 아니고 심소도 아니다」, 「수면과 전은 다르다」고 한다(『이부종륜론』, T49, 16c). 그런데 같은 화지부의 말종 이의(末宗異義), 곧 뒤에 갈라진 주장에서는 본종과 반대로 「과거 · 미래가 실재한다(謂說實有過去未來)」고 하면서 「수면의 자성은 늘 현재에 있다(隨眠自性恒居現在)」고 한다(『이부종륜론』, T49, 17a). 과거 · 미래를 인정하느냐와 수면을 어디에 두느냐가 한 부파 안에서도 함께 움직였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이 지형을 보면 천친이 「경부사가 가장 좋다」고 한 것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유부(수면 = 심상응의 번뇌)와 대중부 · 화지부 · 분별론자(수면 = 심불상응의 별개 법) 사이에서, 경량부는 제3의 길을 냈다.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고 상응하지 않는 별개의 실체도 아니며, 상속의 성향일 뿐이다. 중현은 수면을 불상응행으로 보는 분별론자의 논거를 소개한 뒤, 「이것은 경량부는 깨뜨릴 수 있지만 우리 종과는 관계없다. 우리 종은 과거 · 미래에 실체가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此可破經部,非預我宗,我宗許去來有實體故)」라고 덧붙인다(『순정리론』 권45, T29, 598c). 이 한 구절이 수면론과 삼세실유론을 잇는다. 유부는 지금 드러나 있지 않은 번뇌가 어떻게 그 사람을 묶고 있는지를, 과거와 미래의 번뇌가 실재하고 그 득이 지금 이어진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경량부는 과거 · 미래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지금 이 순간의 상속 안에 무엇인가를 두어야 했고, 그것이 종자다.

부파대중부 · 일설부 · 설출세부 · 계윤부 본종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는가수면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고, 전은 마음과 상응한다
원문「隨眠非心。非心所法。亦無所緣」수면은 마음도 심소도 아니며 대상이 없다
출처T49, 15c
부파설일체유부 본종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는가모든 수면은 심소이며 마음과 상응하고 대상이 있다
원문「一切隨眠皆是心所。與心相應有所緣境」
출처T49, 16b
부파화지부 본종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는가수면과 전은 다르다
원문「隨眠非心亦非心所」
출처T49, 16c
부파경량부(『구사론』이 전하는 설)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는가수면은 상응도 불상응도 아닌 번뇌의 종자
원문—
출처『구사론』 권19, T29, 99a
도표 4 · 『이부종륜론』에 보이는 수면관

「가장 좋다(最善)」는 평은 이 대목의 것이지만, 『구사론』에는 「경부의 여러 스승이 말한 대로 … 이 설이 좋다(此說為善)」처럼 천친이 경량부의 손을 드는 대목이 이 밖에도 있다. 보광은 이 대목을 「논주가 경부를 평하여 취한 것(論主評取經部)」이라 풀고, 중현의 『순정리론』은 이런 태도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천친 개인의 사상적 위치(유부 출신 · 경량부 지향 · 뒤의 유식)에 대해서는 서강과 인물탐구 「천친보살」을 볼 것.

유부는 수면을 마음과 상응하는 번뇌 자체로 보고, 드러나지 않을 때의 연속성을 번뇌의 「득」으로 설명한다. 경량부는 수면을 「잠든 번뇌」, 곧 상속에 남은 종자로 보고, 드러난 번뇌를 전(纏)이라 부른다. 종자는 실체가 아니라 상속이 지닌 능력이다. 이 차이는 과거 · 미래의 실재 여부라는 더 큰 문제와 맞물려 있다.

제3장 아흔여덟 수면견해의 번뇌와 교만

본송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99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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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六由見異十,異謂有身見, 邊執見邪見,見取戒禁取。

풀이

여섯은 견이 나뉘어 열이 된다. 나뉜 것은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다.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9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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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六行部界異,故成九十八, 欲見苦等斷,十七七八四, 謂如次具離,三二見見疑, 色無色除瞋,餘等如欲說。

풀이

여섯은 행상 · 부류 · 세계가 달라서 아흔여덟이 된다. 욕계에서 고제 등을 보아 끊는 것과 닦아서 끊는 것은 열 · 일곱 · 일곱 · 여덟 · 넷이니, 차례대로 (열을) 다 갖추거나, 세 견 · 두 견 · 견 · 견과 의를 뺀 것이다. 색계 · 무색계는 진을 빼고, 나머지는 욕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99c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我我所斷常,撥無劣謂勝, 非因道妄謂,是五見自體。

풀이

나와 내 것, 단과 상, 부정하여 없다고 함, 못한 것을 뛰어나다고 여김, 원인 아닌 것과 길 아닌 것을 원인과 길이라고 잘못 여김 — 이것이 다섯 견의 자체다.

술어 풀이

見所斷 · 修所斷견소단 · 수소단
범어 darśanaheya · bhāvanāheya. 사제의 진리를 보는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번뇌와, 견도 뒤 거듭 닦는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번뇌. 『구사론』은 견소단을 「진리를 보는 순간 끊어지는 것」, 수소단을 「사제를 본 뒤 뒷날 거듭 도를 익혀 끊는 것」이라 정의한다.
五部오부
견고소단 · 견집소단 · 견멸소단 · 견도소단 · 수소단의 다섯 부류. 어느 진리를 보아 끊어지는가에 따른 구분이다.
薩迦耶見살가야견
범어 satkāyadṛṣṭi. 유신견(有身見). 오취온을 나와 내 것으로 집착하는 견해. 「살(sat)」을 천친은 「무너진다(壞)」로, 유부는 「있다(有)」로 풀어 해석이 갈린다.
邊執見변집견
범어 antagrāhadṛṣṭi. 「나」라고 집착한 것에 대해 끊어진다(斷)거나 영원하다(常)고 집착하는 견해. 변견(邊見).
邪見사견
범어 mithyādṛṣṭi. 실제로 있는 사제 · 인과를 부정하여 「없다」고 하는 견해(撥無). 모든 잘못된 견해 가운데 허물이 가장 심해 홀로 「사견」의 이름을 얻는다.
見取견취
범어 dṛṣṭiparāmarśa. 견취견. 못한 것(유루법, 특히 자기의 견해)을 뛰어나다고 집착하는 견해. 본래는 「견 등 취(見等取)」라 해야 한다고 한다.
戒禁取계금취
범어 śīlavrataparāmarśa. 계금취견.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길이 아닌 것을 길로 집착하는 견해. 소의 계 · 사슴의 계, 물과 불에 몸을 던지는 고행을 해탈이나 하늘에 태어나는 길로 여기는 것 등.
顛倒전도
범어 viparyāsa. 무상을 상으로, 고를 낙으로, 부정을 정으로, 무아를 아로 뒤집어 보는 네 가지. 『구사론』은 그 체를 세 견 안에서 찾는다.
慢만
범어 māna. 남과 견주어 마음을 높이 드는(高舉) 번뇌. 일곱 가지와 아홉 가지가 있다.

열에서 아흔여덟로 — 행 · 부 · 계

여섯 수면 가운데 「견」은 다섯 갈래로 나뉜다. 그래서 열 수면 가운데 다섯은 견의 성질(見性)이고, 다섯은 견의 성질이 아니다(탐 · 진 · 만 · 무명 · 의). 이것이 「행상(行)」에 따른 구분이다. 그 열 수면이 다시 「부류(部)」와 「세계(界)」에 따라 나뉘어 아흔여덟이 된다.

六種隨眠由行、部、界有差別,故成九十八。……部謂見四諦、修所斷五部。界謂欲色無色三界。

여섯 수면은 행상 · 부류 · 세계에 차별이 있으므로 아흔여덟이 된다. …… 부류란 사제를 보아 끊는 것과 닦아서 끊는 것의 다섯 부류이고, 세계란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세 세계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b

욕계부터 보자. 고제를 보아 끊는 부류(견고소단)에는 열 수면이 다 있다. 집제와 멸제를 보아 끊는 부류에는 각각 일곱이 있으니, 유신견 · 변집견 · 계금취를 뺀 것이다. 도제를 보아 끊는 부류에는 여덟이 있으니, 유신견과 변집견을 뺀 것이다. 닦아서 끊는 부류에는 넷이 있으니, 다섯 견과 의를 뺀 탐 · 진 · 만 · 무명이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謂見苦諦所斷具十;見集滅諦所斷各七,離有身見、邊見、戒取;見道諦所斷八,離有身見及邊執見。修所斷四,離見及疑,如是合成三十六種。

풀이

고제를 보아 끊는 것은 열을 다 갖추고, 집제와 멸제를 보아 끊는 것은 각각 일곱이니 유신견 · 변견 · 계취를 떠난다. 도제를 보아 끊는 것은 여덟이니 유신견과 변집견을 떠난다. 닦아서 끊는 것은 넷이니 견과 의를 떠난다. 이렇게 합해 서른여섯 가지가 된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b)

10 + 7 + 7 + 8 + 4 = 36. 앞의 서른둘은 「진리를 보는 순간 끊어지므로(纔見諦時彼則斷故)」 견소단이고, 뒤의 넷은 「사제를 본 뒤 뒷날 거듭 도를 익혀야 끊어지므로」 수소단이다. 색계와 무색계에는 성냄(瞋)이 없다. 『구사론』은 이유를 따로 들지 않지만, 중현은 그곳에는 성냄이 따라 자랄 괴로운 느낌이 없고, 지(止)로 상속이 부드러워져 메마른 성냄이 머물 자리가 없으며, 성냄이 부를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도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순정리론』 권46, T29, 602c). 그래서 각 부류에서 진 하나씩, 모두 다섯을 빼어 각각 서른하나가 된다. 36 + 31 + 31 = 98. 이 가운데 견소단이 여든여덟(32 + 28 + 28), 수소단이 열(4 + 3 + 3)이다.

於此所辯九十八中,八十八見所斷,忍所害故。十隨眠修所斷,智所害故。

여기서 밝힌 아흔여덟 가운데 여든여덟은 견소단이니 인(忍)에 의해 해쳐지기 때문이고, 열 수면은 수소단이니 지(智)에 의해 해쳐지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c

『대비바사론』은 같은 숫자를 일곱 수면의 「자성」으로 정리한다. 욕탐 · 진 수면은 각각 욕계 오부의 다섯이니 합해 열 가지, 유탐 수면은 색계 · 무색계 각 오부의 열 가지, 만 · 무명 수면은 각각 삼계 오부의 열다섯이니 합해 서른 가지, 견 수면은 삼계 각 열둘의 서른여섯 가지, 의 수면은 삼계 각 사부의 열두 가지 — 합해서 「구십팔사(九十八事)를 자성으로 삼는다」(『대비바사론』 권50, T27, 257a). 10 + 10 + 30 + 36 + 12 = 98. 계산하는 길은 달라도 같은 체계다.

합계 36 + 31 + 31 = 98견소단 88(「忍所害故」) · 수소단 10(「智所害故」)「欲見苦等斷,十七七八四」권19, T29, 99b
도표 5 · 아흔여덟 수면 — 삼계 · 오부의 배당

무엇이 「진리를 보아」 끊어지는가

왜 유신견은 고제를 볼 때만 끊어지고, 사견은 네 진리 어디서나 끊어지는가. 천친은 그 기준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

若緣見此所斷為境名見此所斷,餘名修所斷。

이 진리를 보아 끊어지는 것(을 일으키는 미혹)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이 진리를 보아 끊는 것이라 하고, 나머지를 닦아서 끊는 것이라 한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c

번뇌가 어느 진리에 대한 미혹이냐가 그 번뇌가 끊어지는 자리를 정한다. 유신견은 오취온을 「나」라고 보는 견해다. 오취온은 고제의 내용이므로 유신견은 고제에 대한 미혹이고, 고제를 바로 보는 순간 끊어진다. 변집견은 유신견이 「나」라고 집착한 것에 대해 단 · 상을 세우는 것이므로 유신견을 따라 고제에만 있다. 사견은 사제 어느 것이든 부정할 수 있다 — 괴로움이 없다, 원인이 없다, 멸이 없다, 길이 없다. 그래서 네 부류 모두에 있다. 견취견과 의도 같은 이유로 네 부류에 걸친다. 탐 · 진 · 만 · 무명은 견도의 네 부류에 더해 수소단에도 있다. 이들은 견해를 따라 일어나는 경우(견소단)와 사물에 부딪쳐 일어나는 경우(수소단)가 다 있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아비달마 수행론 전체의 뼈대다. 견도에서 사제를 한 번 바로 보면 여든여덟 수면이 한꺼번에 끊어진다. 그러나 나머지 열은 남는다. 진리를 안 사람도 여전히 화를 내고, 집착하고, 교만해진다. 이 남은 것을 끊는 긴 과정이 수도(修道)다. 「무아 · 오온」 페이지에서 본 견혹과 사혹의 구별, 그리고 유신견을 끊고도 「나는 있다」는 교만이 남았다는 케마카의 고백이 바로 이 구조다(→ 무아 · 오온). 견도 16심의 차례와 사향사과의 단계는 「성자의 길」 편에서 다룬다(→ 성자의 길).

성자와 범부 — 같은 번뇌, 다른 끊음

그런데 견소단 · 수소단이라는 구분은 누구에게나 똑같은가. 천친은 「인(忍)에 의해 해쳐지는 수면」과 「지(智)에 의해 해쳐지는 수면」을 다시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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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忍所害隨眠,有頂唯見斷, 餘通見修斷,智所害唯修。

풀이

인에 의해 해쳐지는 수면 가운데 유정천의 것은 오직 보아서 끊고, 나머지는 보아서도 닦아서도 끊는다. 지에 의해 해쳐지는 것은 오직 닦아서 끊는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99c)

견소단의 여든여덟 수면도, 성자가 끊을 때는 견도의 인(忍)으로 끊지만, 범부(異生)가 세속의 선정을 닦아 아래 지(地)의 번뇌를 눌러 끊을 때는 거듭 익힌 세속지(世俗智)로 끊는다. 그래서 범부에게는 그것이 「수소단」이 된다. 다만 삼계의 꼭대기인 유정천(有頂天, 비상비비상처)에 속하는 것은 그보다 위의 세속 선정이 없으므로 오직 성자의 견도로만 끊을 수 있다.

여기서 천친은 다른 논사들의 이설을 소개한다. 「외도의 선인들은 견소단의 미혹을 눌러 끊지 못한다」는 설이다. 그 근거로 『대분별제업계경(大分別諸業契經)』과 『범망경』을 든다. 욕망을 떠난 외도도 욕계에 관한 사견을 일으키고, 「과거에 대해 분별하는 자」들이 세계가 전부 영원하다, 일부만 영원하다, 원인 없이 생겼다고 고집하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비바사사는 이것을 「견해를 일으킬 때 잠시 물러난 것이니 제바달다와 같다(起見時暫退,如提婆達多)」고 풀이한다(권19, T29, 99c). 선정을 얻었던 이가 견해를 일으키는 순간에는 이미 그 선정에서 물러나 있다는 것이다.

다섯 견의 정의 — 「나」에서 「길」까지

이어서 천친은 다섯 견 하나하나를 정의한다. 첫째는 유신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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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執我及我所,是薩迦耶見。壞故名薩,聚謂迦耶,即是無常和合蘊義,迦耶即薩名薩迦耶。此薩迦耶即五取蘊,為遮常一想故立此名,要此想為先方執我故。

풀이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것이 살가야견이다. 무너지므로 「살」이라 하고, 모임을 「가야」라 하니, 곧 무상한 것이 화합한 온(蘊)이라는 뜻이다. 가야가 곧 살이므로 살가야라 한다. 이 살가야는 곧 오취온이다. 늘 있고 하나라는 생각을 막기 위해 이 이름을 세웠으니, 이 생각이 앞서야 비로소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a)

「살가야(satkāya)」의 sat를 천친은 「무너지는(壞)」으로 푼다. 범어 어근 √sad(가라앉다, 무너지다)에서 읽은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 이름 자체가 「무너지는 무더기를 '나'로 보는 견해」라는 뜻이 되어, 이름 안에 이미 그 견해의 오류가 들어 있다. 비바사사는 다르게 읽는다. 「있으므로 살이라 한다(有故名薩)」 — sat를 「있다(√as)」로 읽은 것이다. 비바사사가 「있다」고 읽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상 없이 나와 내 것을 헤아리는 일은 없다. 이 견해는 실제로 있는 몸(有身), 곧 오취온을 대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붙잡은 「나」와 「내 것」은 끝내 없다. 그러므로 부처가 이 견해에 「유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견해가 「나」가 아니라 실재하는 오취온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천친은 경문 하나를 증거로 든다.

苾芻當知,世間沙門婆羅門等,諸有執我等,隨觀見一切,唯於五取蘊起。

비구들이여 알라. 세간의 사문 · 바라문 등이 나를 집착하며 따라 보는 것은 모두 오직 오취온에 대해 일어난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a

유신견의 스무 갈래 — 색을 나라고 보고, 내가 색을 가졌다고 보고, 내 안에 색이 있다고 보고, 색 안에 내가 있다고 보는 넷을 오온에 곱한 것 — 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페이지에서 읽었다. 『구사론』의 관심은 그 스무 갈래보다 이 견해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있다. 대상은 실재하는 오취온이고, 행상(보는 방식)만 뒤집혀 있다. 이 구분은 삼세실유의 대론에서 다시 중요해진다. 유부는 「모든 인식에는 실재하는 대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나」라는 허망한 인식조차 실재하는 오온을 대상으로 한다는 이 설명이 그 주장의 한 예가 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네 견은 이렇게 정의된다. 「나」로 집착한 것에 대해 끊어진다거나 영원하다고 집착하는 것이 변집견이다. 실제로 있는 고제 등의 진리를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사견이다. 모든 그릇된 견해가 다 뒤집혀 있으니 다 「사견」이라 불러야 할 것 같지만, 오직 「없다」고 부정하는 것만 사견이라 하는 것은 「허물이 가장 심하기 때문(以過甚故)」이다. 다른 견해는 없는 것을 있다고 덧붙이는(增益) 것이지만, 사견은 있는 것을 덜어 내는(損減) 것이기 때문이다. 못한 것을 뛰어나다고 여기는 것이 견취다. 유루법은 성자가 끊는 것이므로 못한 것이다. 원인이 아닌 것과 길이 아닌 것을 원인과 길이라고 여기는 것이 계금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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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於非因道謂因道見,一切總說名戒禁取。如大自在生主,或餘非世間因,妄起因執。投水火等種種邪行,非生天因,妄起因執,唯受持戒禁,數相應智等,非解脫道妄起道執。

풀이

원인 아닌 것과 길 아닌 것을 원인과 길이라고 보는 것을 모두 통틀어 계금취라 한다. 대자재천 · 생주(生主), 또는 그 밖의 세간의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이라고 잘못 집착하는 것, 물이나 불에 몸을 던지는 등 갖가지 그릇된 행이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 아닌데 원인이라고 잘못 집착하는 것, 오직 계와 금지 조목을 지니는 것이나 수론의 지혜 등 해탈의 길이 아닌 것을 길이라고 잘못 집착하는 것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a)

견취와 계금취에 대해 천친은 이름이 줄었다고 덧붙인다. 본래는 「견 등 취(見等取)」, 「계금 등 취(戒禁等取)」라 해야 하는데 「등」 자를 생략했다는 것이다. 견취는 자기의 견해만이 아니라 그 견해와 함께하는 오온까지 뛰어나다고 집착하고, 계금취는 계와 금지 조목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니는 몸과 마음까지 청정의 원인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1. ①유신견(살가야견)「執我及我所」나와 내 것에 집착대상: 오취온견고소단만
  2. ②변집견나로 집착한 것을 단(斷) 또는 상(常)으로 집착견고소단만
  3. ③사견「於實有體苦等諦中起見撥無」실제로 있는 사제를 없다고 부정허물이 가장 심함(損減)네 부류 모두
  4. ④견취견「於劣謂勝」못한 것을 뛰어나다고 여김네 부류 모두
  5. ⑤계금취견「於非因道謂因道見」원인 · 길 아닌 것을 원인 · 길이라 여김견고소단과 견도소단
권19, T29, 100a
도표 6 · 다섯 견의 정의

계금취는 왜 고제와 도제에서 끊어지는가 — 해결되지 않은 물음

다섯 견 가운데 계금취의 자리가 가장 까다롭다. 계금취는 「원인 아닌 것을 원인으로 보는」 견해다. 원인에 대한 미혹이라면 집제(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미혹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견집소단에는 계금취가 없는가. 천친은 이 물음을 게송으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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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於大自在等,非因妄執因, 從常我倒生,故唯見苦斷。

풀이

대자재천 등을 원인이 아닌데 원인이라고 잘못 집착하는 것은, 상(常)과 아(我)의 전도에서 생기므로 오직 고제를 보아 끊는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a)

대자재천이나 생주를 세계의 원인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먼저 그것이 늘 있고, 하나이며, 「나」이자 만드는 자(作者)라고 헤아린다. 그 상견과 아견이 고제를 보는 순간 끊어지므로, 그 위에 선 원인 집착도 함께 끊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견고소단이다.

그러나 천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물이나 불에 몸을 던지는 것이 하늘에 나는 원인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를 지니는 것만으로 청정해진다고 집착하는 것 — 이런 것들도 본론(『발지론』 계통)은 견고소단의 계금취라고 한다. 본론은 「어떤 외도가 소의 계 · 사슴의 계 · 개의 계를 지니면 청정 · 해탈 · 출리를 얻어 모든 괴로움을 영원히 넘어선다」는 견해를 예로 든다. 그러면 그것은 왜 고제에서 끊어지는가. 천친은 유부의 근거를 하나씩 따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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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此復何因是見苦斷?迷苦諦故有太過失,緣有漏惑皆迷苦故。復有何相別戒禁取,可說彼為見道所斷?

풀이

이것은 또 무슨 까닭으로 고제를 보아 끊는 것인가. 고제에 미혹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허물이 있으니, 유루를 반연하는 미혹은 모두 고제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특징을 지닌 별도의 계금취가 있어 그것을 도제를 보아 끊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b)

「고제에 미혹했기 때문」이라면, 유루법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미혹이 다 고제에 미혹한 것이 되어 모든 것이 견고소단이 되어 버린다. 또 도제에 대한 계금취란 무엇인가. 도제를 대상으로 하는 사견이나 의는 「해탈의 길이 없다」고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것이 영원한 청정을 얻게 한다고 집착하겠는가. 진짜 해탈의 길을 부정하고 다른 청정의 원인을 따로 집착한다면, 그것은 「다른 것」을 집착하는 것이지 사견 등을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또 견집 · 견멸소단의 사견 등을 청정의 원인으로 집착하는 경우는 왜 견집 · 견멸소단이 아닌가. 천친은 결론짓는다.

故所執義應更思擇。

그러므로 (유부가) 주장하는 뜻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b

이것이 『구사론』의 특징적인 서술 방식이다. 천친은 유부의 98수면 체계를 그대로 서술하지만, 그 체계의 한 칸 — 계금취가 견고소단과 견도소단 두 곳에만 있고 견집 · 견멸소단에는 없다는 배당 — 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결론을 열어 둔다. 체계의 숫자는 지키되 그 근거는 묻는다.

네 전도는 세 견 안에 있다

천친은 계금취 논의 끝에 「상과 아의 전도에서 생긴다」는 말을 받아, 전도(顛倒)는 모두 몇 가지이고 그 체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경전은 네 가지 전도를 말한다 — 무상을 상으로, 고를 낙으로, 부정을 정으로, 무아를 아로 보는 것. 『구사론』은 이 넷의 체를 세 견 안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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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四顛倒自體,謂從於三見, 唯倒推增故,想心隨見力。

풀이

네 전도의 자체는 세 견에서 (뽑아 세운) 것이니, 오로지 뒤집혀 있고 헤아리며 덧붙이기 때문이다. 상(想)과 심(心)은 견의 힘을 따른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b)

변집견 가운데 상견만을 뽑아 상전도로, 견취 가운데 낙 · 정으로 헤아리는 것을 낙전도 · 정전도로, 유신견 가운데 아견만을 뽑아 아전도로 삼는다. 왜 이 셋만인가. 전도가 되려면 세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 오로지 뒤집혀 있어야 하고(一向倒), 헤아리는 성질이 있어야 하며(推度性), 없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妄增益).

要具三因,勝者成倒。言三因者,一向倒故、推度性故、妄增益故。

세 원인을 갖추어 뛰어난 것만이 전도가 된다. 세 원인이란 오로지 뒤집혀 있기 때문, 헤아리는 성질이기 때문, 잘못 덧붙이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0c

계금취는 「오로지 뒤집힌 것」이 아니다. 계를 지니는 것에는 조금이나마 청정함이 있기 때문이다. 단견과 사견은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덜어 내는 것이다. 나머지 번뇌는 견해가 아니므로 「헤아리는 성질」이 없다. 그래서 셋을 다 갖춘 세 견의 일부만 전도의 체가 된다. 경전이 「상(想) · 심(心) · 견(見)의 전도」를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견만이 전도이고 상과 심은 견과 상응하여 같은 행상으로 움직이므로 전도라는 이름을 함께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이설이 나온다. 어떤 부파는 전도가 열둘(네 전도 × 상 · 심 · 견)이며, 그 가운데 낙 · 정에 대한 상과 심의 전도 넷은 수소단이라고 한다. 아직 욕망을 떠나지 않은 성자도 탐을 일으키니, 낙과 정에 대한 상 · 심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비바사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면 성자에게 「유정」이라는 상과 심이 있으므로 아전도도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자의 탐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성자도 때로 잠깐 미혹하여 대상에 대해 탐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불을 돌려 생긴 고리(旋火輪)나 그림 속 야차에 잠깐 속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권19, T29, 100c~101a). 그러나 천친은 아난이 바기사(辯自在)에게 한 게송을 들어 이 문제를 열어 둔다.

由有想亂倒,故汝心燋熱,遠離彼想已,貪息心便淨。

생각이 어지러워 뒤집혔기에 그대의 마음이 타들어 간다. 그 생각을 멀리 떠나면 탐이 쉬고 마음이 곧 맑아지리라.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1a

성자인 바기사에게 「생각의 전도」가 있다고 한 이 게송 때문에, 어떤 논사들은 여덟 가지 상 · 심의 전도는 유학(有學)이 아직 다 끊지 못한다고 한다. 『구사론』은 이 설을 소개하는 데서 그친다.

교만의 일곱 가지와 아홉 가지

견에만 여러 갈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慢)도 갈래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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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慢七九從三,皆通見脩斷, 聖如殺纏等,有脩斷不行。

풀이

만은 일곱이고, 아홉은 (그 가운데) 셋에서 나온다. 모두 보아서 끊는 것과 닦아서 끊는 것에 통한다. 성자에게는 살생의 전 등과 같이, 닦아서 끊는 것이지만 (현전해) 행하지 않는 것이 있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1a)

일곱 가지 만은 이렇다. 마음을 높이 드는(高舉) 것을 통틀어 만이라 하되, 그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 일곱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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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於劣於等如其次第謂己為勝、謂己為等,令心高舉總說為慢。於等於勝如其次第謂勝謂等總名過慢。於勝謂勝名慢過慢。於五取蘊執我我所令心高舉名為我慢。於未證得殊勝德中謂已證得名增上慢。於多分勝謂己少劣名為卑慢。於無德中謂己有德名為邪慢。

풀이

못한 이에 대해 자기가 낫다고 여기고, 같은 이에 대해 자기가 같다고 여겨 마음을 높이 드는 것을 통틀어 만이라 한다. 같은 이에 대해 자기가 낫다고 여기고, 나은 이에 대해 자기가 같다고 여기는 것을 통틀어 과만이라 한다. 나은 이에 대해 자기가 낫다고 여기는 것을 만과만이라 한다. 오취온에 대해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하여 마음을 높이 드는 것을 아만이라 한다. 아직 증득하지 못한 뛰어난 덕을 이미 증득했다고 여기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 훨씬 나은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못하다고 여기는 것을 비만이라 한다. 덕이 없는데 자기에게 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을 사만이라 한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1a)

여기서 「비만(卑慢)」이 흥미롭다. 훨씬 나은 이 앞에서 「나는 조금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도 교만이다. 차이를 줄여 잡는 그 마음에 이미 자기를 높이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이를 같다고 여기는 것」도 만에 들어간다. 사실에 맞는 판단이라도 그것이 남과 견주어 마음을 높이 드는 움직임이라면 만이다. 만의 기준은 판단의 참 · 거짓이 아니라 마음의 높이 듦이다.

본론(『발지론』)은 만을 아홉 가지로 센다 — 내가 낫다 · 같다 · 못하다는 만, 나보다 나은 이가 있다 · 같은 이가 있다 · 못한 이가 있다는 만, 나보다 나은 이가 없다 · 같은 이가 없다 · 못한 이가 없다는 만. 이 아홉은 일곱 가운데 만 · 과만 · 비만 셋에서 나온 것이며, 견해에 의지해 일어나는 방식이 달라 셋씩 묶인다. 「나보다 못한 이가 없다는 만(無劣我慢類)」에서 무엇이 높이 드는 것인가. 자기가 좋아하는 뛰어난 무리 가운데에서 자기가 가장 낮은 줄 알면서도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라 한다(권19, T29, 101a~b). 『품류족론』은 같은 아홉을 다른 방식으로 배당한다. 『구사론』은 두 해석을 다 전한다.

①만못한 이에게 「내가 낫다」같은 이에게 「같다」
②과만같은 이에게 「내가 낫다」나은 이에게 「같다」
③만과만나은 이에게 「내가 낫다」
④아만오취온을 나와 내 것으로 집착하여 높이 듦
⑤증상만증득하지 못한 덕을 증득했다고 여김
⑥비만훨씬 나은 이에게 「조금 못할 뿐」
⑦사만덕이 없는데 덕이 있다고 여김
「慢七九從三」아홉 가지 만(『발지론』)은 이 가운데 만 · 과만 · 비만 셋에서 나온다권19, T29, 101a
도표 7 · 일곱 가지 만

성자가 끊지 않았어도 일으키지 않는 것

일곱 만은 모두 견소단과 수소단에 걸친다. 그러면 견도를 지나 아직 수소단의 만을 끊지 못한 성자는 그것을 일으키는가. 천친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답한다. 수소단이면서도 성자가 결코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다. 살생의 전(纏)이 그 예다. 살생을 일으키는 미혹은 수소단이지만, 성자는 결코 그것을 현전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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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慢類等我慢,惡作中不善, 聖有而不起,見疑所增故。

풀이

만류(아홉 만) 등과 아만, 악작 가운데 불선한 것은 성자에게 있지만 일으키지 않으니, 견과 의가 늘린 것이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1b)

까닭은 이것들이 「견과 의가 직접 길러 낸 것」이라는 데 있다. 아홉 만과 아만은 유신견이 길렀고, 살생 등의 전은 사견이 길렀으며, 「무유애(無有愛)」(삼계의 무상함을 보고 아예 없어지기를 바라는 탐)는 단견이, 「유애의 일부」(큰 용왕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는 상견이, 불선한 악작(후회)은 의가 길렀다. 이것들은 수소단이지만 그 뿌리가 견과 의에 있다. 견도에서 견과 의가 꺾였으므로 그 뿌리를 잃은 이것들은 성자의 몸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번뇌의 「끊음」과 「일어나지 않음」이 다른 층위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여섯 수면은 행상(견이 다섯으로) · 부류(오부) · 세계(삼계)에 따라 아흔여덟이 되며, 그 가운데 여든여덟은 견도에서, 열은 수도에서 끊어진다. 번뇌가 끊어지는 자리는 그 번뇌가 어느 진리에 미혹했는가가 정한다. 다섯 견은 「나」(유신견)에서 「길」(계금취)까지 견해의 오류를 나누고, 일곱 만은 마음을 높이 드는 방식을 나눈다. 천친은 이 체계를 서술하면서도 계금취의 배당 같은 곳에서는 근거를 다시 묻는다.

제4장 수면이 자라는 자리편행 · 소연 · 상응

본송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101b~c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見苦集所斷,諸見疑相應, 及不共無明,遍行自界地, 於中除二見,餘九能上緣, 除得餘隨行,亦是遍行攝。

풀이

고제와 집제를 보아 끊는 여러 견과 의,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 및 불공 무명은 자기 세계 · 자기 지(地)에 두루 미친다(편행). 그 가운데 두 견을 뺀 나머지 아홉은 위로 반연할 수 있다. 득을 뺀 나머지 따라 행하는 법도 편행에 포함된다.

『구사론』 권19 · 분별수면품 · T29, 102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未斷遍隨眠,於自地一切, 非遍於自部,所緣故隨增, 非無漏上緣,無攝有違故, 隨於相應法,相應故隨增。

풀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편행 수면은 자기 지의 모든 것에서, 편행이 아닌 것은 자기 부류에서, 대상이 되는 까닭에 따라 자란다. 무루를 반연하는 것과 위를 반연하는 것은 (그 대상에서 자라지) 않으니, 거두어들임이 없고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상응하는 법에서는 상응하는 까닭에 따라 자란다.

술어 풀이

遍行편행
범어 sarvatraga. 「두루 간다」. 자기 세계 · 자기 지의 다섯 부류 모든 법을 대상으로 삼고, 다섯 부류의 물든 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되는 수면. 열하나가 있다. 근품의 육인 가운데 편행인(遍行因)과 짝을 이룬다.
不共無明불공 무명
범어 āveṇikī avidyā. 탐 · 진 등 다른 근본 번뇌와 함께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 무명. 다른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무명은 상응 무명이라 한다.
上緣상연
자기보다 위의 세계 · 지를 대상으로 삼는 것. 욕계의 수면이 색계 · 무색계를 반연하는 경우 등.
有漏緣 · 無漏緣유루연 · 무루연
유루법을 대상으로 하는 수면과 무루법(멸제 · 도제)을 대상으로 하는 수면. 무루를 반연하는 수면은 여섯뿐이다.
所緣隨增소연수증
수면이 그 대상이 되는 법에서 「따라 자라는」 것. 젖은 옷에 먼지가 붙어 머무는 것에 비유된다.
相應隨增상응수증
수면이 자기와 상응하는 마음 · 심소에서 따라 자라는 것.
自相惑 · 共相惑자상혹 · 공상혹
낱낱의 대상(자상)에 대해 일어나는 탐 · 진 · 만과, 여러 법에 공통된 성질(공상)에 대해 일어나는 견 · 의 · 무명. 이 구분이 「어느 때의 어느 일을 묶는가」를 정한다.
無記根무기근
선도 악도 아닌(무기) 법의 뿌리. 카슈미르 비바사사는 무기의 애 · 치 · 혜 셋을, 외방(外方) 논사들은 애 · 견 · 만 · 치 넷을 든다.

편행 수면 열하나

아흔여덟 수면 가운데 특별한 것이 있다. 자기 세계 · 자기 지에 속한 다섯 부류의 법 전부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수면이다. 이것을 편행(遍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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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唯見苦集所斷見疑,及彼相應不共無明,力能遍行自界地五部故,此十一皆得遍行名,謂七見、二疑、二無明十一。

풀이

오직 고제와 집제를 보아 끊는 견과 의, 그리고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 무명만이 자기 세계 · 자기 지의 다섯 부류에 두루 미치는 힘이 있으므로, 이 열하나가 모두 편행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일곱 견 · 두 의 · 두 무명의 열하나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1c)

견고소단에는 다섯 견, 견집소단에는 사견 · 견취 두 견이 있으니 합해 일곱 견이다. 의는 두 부류에 하나씩 둘, 무명도 둘이다. 7 + 2 + 2 = 11. 이 열하나가 편행이라 불리는 데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자기 세계 · 자기 지의 다섯 부류 법을 「두루 반연하고(遍緣)」, 그 다섯 부류 법에서 「따라 자라며(隨眠)」, 「원인이 되어」 다섯 부류의 물든 법을 「두루 낳는다(遍生)」(권19, T29, 101c). 근품의 육인 가운데 편행인이 바로 이것이다. 편행 수면은 다른 부류의 번뇌까지 낳는 원인이 된다. 고제 · 집제에 대한 근본적인 미혹, 곧 「나」와 「원인」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의심과 무명이 다른 모든 번뇌의 바탕에 깔려 있다는 통찰이 이 체계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반론이 나온다. 「두루 반연한다」는 것은 차례로 반연한다는 것인가, 한꺼번에 반연한다는 것인가. 차례로라면 다른 수면도 다 편행이 되고, 한꺼번에라면 누가 욕계의 모든 법을 한꺼번에 「뛰어나다」 「청정의 원인이다」 「세간의 원인이다」라고 헤아리겠는가. 유부의 답은 「한 번에 자기 세계의 모든 것을 반연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섯 부류를 한꺼번에 반연할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시 반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아견이 작용하는 곳에는 반드시 「나」에 대한 애착과 교만이 일어나고, 「청정하다 · 뛰어나다」는 견해가 작용하는 곳에는 반드시 바람과 높이 듦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애(탐)와 만도 편행이어야 하지 않는가. 비바사사는 답한다.

此二煩惱自相非共,無頓緣力,故非遍行。

이 두 번뇌는 자상(낱낱의 대상)에 대한 것이지 공상에 대한 것이 아니어서, 한꺼번에 반연하는 힘이 없다. 그러므로 편행이 아니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1c

탐과 만은 언제나 이것 또는 저것이라는 낱낱의 대상에 붙는다. 견 · 의 · 무명처럼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이나 무지가 될 수 없다. 이 자상혹 · 공상혹의 구분은 권20에서 「어느 때의 어떤 번뇌가 어떤 일을 묶는가」를 말할 때 다시 쓰인다.

견고소단 (7)
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의무명
견집소단 (4)
사견견취견의무명
합계 11: 일곱 견 · 두 의 · 두 무명「此十一皆得遍行名」권19, T29, 101c
위로 반연하는 아홉 = 열하나에서 유신견 · 변집견을 뺀 것
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의무명사견견취견의무명
아래로 반연하는 수면은 없다
편행의 세 뜻
  1. ①다섯 부류를 두루 반연
  2. ②다섯 부류에서 따라 자람
  3. ③다섯 부류의 물든 법을 두루 낳음
도표 8 · 편행 수면 열하나와 위로 반연하는 아홉

위로 반연하는 아홉 — 범천을 「나」로 보지 않는 까닭

편행 열하나 가운데 유신견과 변집견을 뺀 아홉은 자기 세계보다 위의 세계 · 지까지 반연할 수 있다. 욕계에 속한 사견이 색계의 법을 「없다」고 부정하거나, 욕계의 의가 무색계의 일을 의심하는 것이다. 거꾸로 위의 세계에 속한 수면이 아래 세계를 반연하는 일은 없다. 위에 태어난 이는 아래를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계에 사는 사람이 대범천(大梵天)을 「유정」이라 보거나 「영원하다」고 볼 때, 그것은 위를 반연하는 유신견 · 변집견이 아닌가. 천친의 답은 이렇다.

不執彼為我我所故、邊見必由身見起故。

그것을 나와 내 것으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변견은 반드시 유신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1c

유신견은 「나」와 「내 것」에 대한 견해다. 욕계의 사람이 범천을 보고 「저것이 나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변집견은 유신견이 「나」라고 붙잡은 것에 대해서만 일어나므로 역시 위를 반연하지 않는다. 그러면 범천을 「유정이며 영원하다」고 헤아리는 그 판단은 무엇인가. 「아비달마 논사들은 이 둘은 견이 아니고 그릇된 앎(邪智)에 포함된다고 한다(對法者言:此二非見,是邪智攝)」. 왜 같은 대상을 반연하는 다른 판단은 견인데 이것만 견이 아닌가. 비바사사의 답은 짧다. 「종(宗)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以宗為量,故作是說)」(권19, T29, 102a). 보광도 이것을 비바사사의 답으로 읽는다. 이유가 아니라 학파의 정설이 그렇다는 것이다. 천친은 이 답을 그대로 옮겨 적음으로써, 체계를 서술하면서도 그 체계의 한계를 숨기지 않는다.

무루를 반연하는 여섯 — 탐은 왜 열반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가

수면 가운데 무루법(멸제의 열반, 도제의 성도)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여섯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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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唯見滅道所斷邪見、疑,彼相應不共無明,各三成六,能緣無漏。

풀이

오직 멸제와 도제를 보아 끊는 사견과 의,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 무명이 각각 셋씩 여섯이 되어 무루를 반연할 수 있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2a)

열반을 「없다」고 부정하는 사견, 열반이 정말 있는가 의심하는 의, 그리고 그와 함께하거나 홀로 일어나는 무명 — 멸제와 도제 각각에 셋씩이다. 멸제를 반연하는 것은 오직 자기 지의 멸(擇滅)만 반연한다. 멸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자기 지만이 아니라 여러 지의 도를 반연한다. 모든 지의 도는 서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계의 셋은 법지품(法智品)의 도가 속하는 여섯 지를, 색계 · 무색계의 셋은 유지품(類智品)의 도가 속하는 아홉 지를 반연한다.

그러면 탐 · 진 · 만 · 계금취 · 견취는 왜 무루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가. 천친의 답은 이 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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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以貪隨眠應捨離故,若緣無漏便非過失,如善法欲不應捨離。緣怨害事起瞋隨眠,滅道非怨故非瞋境。緣麁動事起慢隨眠,滅道寂靜故非慢境。於非淨法執為淨因名戒禁取,滅道真淨,故不應為戒禁取境。於非勝法執為最勝名為見取,滅道真勝,故亦不應為見取境。

풀이

탐 수면은 버려 떠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무루를 반연한다면 허물이 아닐 것이니, 선법에 대한 바람(善法欲)을 버려 떠나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원수와 해치는 일을 반연하여 진 수면이 일어나는데, 멸과 도는 원수가 아니므로 진의 대상이 아니다. 거칠고 들뜬 일을 반연하여 만 수면이 일어나는데, 멸과 도는 고요하므로 만의 대상이 아니다. 청정하지 않은 법을 청정의 원인으로 집착하는 것을 계금취라 하는데, 멸과 도는 참으로 청정하므로 계금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뛰어나지 않은 법을 가장 뛰어나다고 집착하는 것을 견취라 하는데, 멸과 도는 참으로 뛰어나므로 견취의 대상도 되어서는 안 된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2b)

이 논증은 정의(定義)의 논증이다. 탐은 정의상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열반을 바라는 마음은 버려서는 안 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열반을 바라는 마음은 탐이 아니라 「선법에 대한 바람」이다. 진은 해치는 것에 대한 미움인데 열반은 해치지 않는다. 만은 거칠고 들뜬 것에서 일어나는데 열반은 고요하다. 계금취와 견취는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하다고」 「뛰어나지 않은 것을 뛰어나다고」 하는 오류인데, 열반과 성도는 실제로 청정하고 뛰어나므로 그것을 그렇게 보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대상의 성질이 그것을 향하는 마음의 성질을 정한다. 번뇌는 그 대상에 따라 번뇌가 되기도 하고 번뇌가 아니게 되기도 한다.

무루를 반연하는 여섯
견멸소단의 사견 · 의 · 무명견도소단의 사견 · 의 · 무명
권19, T29, 102a
멸을 반연: 자기 지의 멸만(멸은 서로 인과가 아님)도를 반연: 욕계의 셋은 법지품의 6지, 위 두 세계의 셋은 유지품의 9지(도는 서로 원인이 됨)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것
  • 탐「應捨離故」버려야 할 것인데 열반을 바람은 선법욕
  • 진「滅道非怨」
  • 만「滅道寂靜」
  • 계금취「滅道真淨」
  • 견취「滅道真勝」
권19, T29, 102b
도표 9 · 무루를 반연하는 수면과 반연하지 않는 수면

따라 자라는 두 길 — 대상에서, 상응에서

수면은 어디에서 「따라 자라는가(隨增)」. 『구사론』은 두 길을 든다. 하나는 그것이 반연하는 대상에서 자라는 것(所緣隨增)이고, 또 하나는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 · 심소에서 자라는 것(相應隨增)이다. 편행 수면은 자기 지의 다섯 부류 모든 법에서, 편행이 아닌 수면은 자기 부류의 법에서 대상을 따라 자란다.

그러나 앞에서 본 무루를 반연하는 여섯과 위로 반연하는 아홉은, 그 대상을 반연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에서 자라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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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謂若有法為此地中身見及愛攝為己有,可有為此身見愛地中所有隨眠所緣隨增理,如衣潤濕埃塵隨住。非諸無漏及上地法,為諸下身見愛攝為己有,故緣彼下惑,非所緣隨增。

풀이

만약 어떤 법이 이 지(地)의 유신견과 애에 의해 자기 것으로 거두어진다면, 그 유신견 · 애가 속한 지의 수면이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따라 자랄 이치가 있다. 젖은 옷에 먼지가 따라 머무는 것과 같다. 무루법과 위의 지의 법은 아래 지의 유신견과 애에 의해 자기 것으로 거두어지지 않으므로, 그것을 반연하는 아래의 미혹은 대상에서 따라 자라지 않는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2b)

수면이 대상에서 자라려면 그 대상이 「나」와 「내 것」으로 거두어져 있어야 한다. 젖은 옷에는 먼지가 붙지만 마른 옷에는 붙지 않는다. 자기 지의 법은 그 지의 유신견과 애로 젖어 있어 거기에 수면이 붙어 자란다. 그러나 열반과 성도, 그리고 위의 지의 법은 아래 지의 「나」에 거두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들은 그것을 반연하는 아래의 미혹과 「서로 어긋난다(相違)」.

聖道涅槃及上地法與能緣彼下惑相違故,彼二亦無所緣隨增理,如於炎石足不隨住。

성도 · 열반과 위의 지의 법은 그것을 반연하는 아래의 미혹과 서로 어긋나므로, 그 둘에서도 대상을 따라 자랄 이치가 없다. 달군 돌 위에 발을 디디고 머물 수 없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2c

젖은 옷과 달군 돌, 두 비유가 「수증」의 뜻을 잘 보여 준다. 번뇌는 그것을 받아 주는 자리에서만 자란다. 다른 논사는 「수면」을 「따라 순응한다(隨順)」는 뜻으로 읽어, 무루와 위의 경계는 아래의 수면에 순응하지 않으므로 대상이 되어도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바람병(風病)이 있는 사람이 마르고 떫은 약을 먹어도 그 약이 병을 키우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권19, T29, 102c).

이 「수증」의 이론은 근품의 「마음은 대상과 함께 물든다」는 구도와 이어지면서, 번뇌를 대상과 마음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아비달마의 특징을 보여 준다. 번뇌는 마음속에 고립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 거두어진 대상과 그것을 붙잡는 마음 사이에서 자라난다. 권20은 이 이론을 확장하여 「어떤 법에 어떤 수면이 따라 자라는가」를 16종의 법과 16종의 식으로 계산하는 「간략한 비바사(略毘婆沙)」를 펼친다. 이 계산은 뒤에서 「끊었으나 아직 묶인 경우」를 다룰 때 간단히 본다.

선한가 악한가 — 무기의 수면과 불선근

아흔여덟 수면은 모두 악(불선)인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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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上二界隨眠,及欲身邊見, 彼俱癡無記,此餘皆不善。

풀이

위 두 세계의 수면과, 욕계의 유신견 · 변집견 및 그것과 함께하는 치(무명)는 무기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불선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2c)

색계 · 무색계의 수면이 무기인 까닭은, 불선이라면 괴로운 이숙과를 낳아야 하는데 위 두 세계에는 괴로운 이숙과가 없기 때문이다. 욕계의 유신견과 변집견이 무기인 까닭이 흥미롭다. 이 둘은 보시 등의 선행과 어긋나지 않는다. 「내가 뒤에 즐거움을 누리리라」고 하여 지금 보시와 지계를 부지런히 닦는 것이 바로 이 「나」의 견해 위에서 이루어진다. 또 「나는 없을 것이요, 내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단(斷)의 극단을 집착하는 견해는 오히려 해탈에 순응한다. 그래서 세존은 외도의 여러 견해 가운데 이 견해가 가장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견해는 자기 일에 미혹할 뿐 남을 해치려 하지 않는다.

先軌範師作如是說:俱生身見是無記性,如禽獸等身見現行。若分別生是不善性。

앞의 궤범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타고난(俱生) 유신견은 무기이니, 짐승 등에게 나타나는 유신견과 같다. 분별하여 생긴 것은 불선이다.

『구사론』 권19 분별수면품, T29, 102c

이 「선대 궤범사(先軌範師)」의 설은 뒤에 유식학이 번뇌를 「타고난 것(俱生)」과 「분별로 생긴 것(分別)」으로 나누는 구분과 통한다. 짐승도 자기 몸을 지키려 하는 「나」의 감각은 타고난 것이고, 그것 자체를 악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론으로 다듬어진 「나」의 견해는 다르다.

불선한 미혹 가운데 불선근(不善根)이 되는 것은 욕계의 탐 · 진과 불선한 치, 곧 삼독이다. 무기의 뿌리(無記根)에 대해서는 두 설이 있다.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는 무기의 애 · 치 · 혜 셋을 든다. 의와 만은 뿌리가 될 수 없다. 의는 두 갈래로 흔들리고, 만은 높이 들리는데, 뿌리는 단단히 머물러 아래로 뻗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방(外方)의 논사들은 애 · 견 · 만 · 치 넷을 든다. 어리석은 사람이 위의 선정을 닦는 것은 애 · 견 · 만 셋에 기대며, 그 셋은 모두 무명의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권19, T29, 103a).

「무기근」의 논의 끝에 천친은 경전의 「열넷의 무기사(十四無記)」, 곧 부처가 답하지 않은 물음들은 이 무기와 다른 것이라고 하고, 질문에 답하는 네 방식(사기답 — 일향기 · 분별기 · 반힐기 · 사치기)을 길게 소개한다. 「온과 유정은 같은가 다른가」라는 물음에는 「유정이 실재하지 않으므로 같음과 다름이 성립하지 않는다」며 답을 버려두어야 한다(捨置記)는 것이다. 무기의 문제와 「나」의 문제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서 다룬 바차곳타의 침묵과 이어진다.

고제 · 집제에 대한 견 · 의 · 무명 열하나는 자기 지의 다섯 부류 전부를 반연하고 낳는 편행 수면이다. 무루를 반연하는 수면은 사견 · 의 · 무명 여섯뿐이며, 탐 · 진 · 만 · 견취 · 계금취는 열반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수면은 「나」로 거두어진 대상에서(소연수증), 그리고 함께 일어나는 마음에서(상응수증) 자란다. 젖은 옷에 먼지가 붙듯이.

제5장 「삼세가 있다고 말하는 자」유부의 논증과 네 논사

본송

『구사론』 권20 · 분별수면품 · T29, 10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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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三世有由說,二有境果故, 說三世有故,許說一切有。

풀이

삼세가 있다. (부처가)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식은) 둘(을 연으로 삼아 생긴다고 하셨기) 때문이며, (식에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고, (지난 업에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삼세가 있다고 말하므로 「일체가 있다고 말하는 자(설일체유)」라고 인정한다.

『구사론』 권20 · 분별수면품 · T29, 104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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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此中有四種,類相位待異, 第三約作用,立世最為善。

풀이

이 가운데 네 가지가 있으니, 부류 · 모습 · 위치 · 상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셋째가 작용에 따라 세(世)를 세우니 가장 좋다.

술어 풀이

三世實有삼세실유
과거 · 현재 · 미래의 법이 모두 실재한다는 설일체유부의 근본 주장. 법의 자체(自體)는 삼세에 걸쳐 늘 있다는 「법체항유(法體恒有)」와 짝을 이룬다.
說一切有部설일체유부
범어 Sarvāstivāda. 「일체(sarva)가 있다(asti)고 말하는(vāda) 부파」. 『구사론』은 이 이름을 「삼세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자」로 정의한다.
分別說部분별설부
범어 Vibhajyavāda. 현재와 아직 과보를 내지 않은 과거의 업만 있고, 미래와 이미 과보를 낸 과거의 업은 없다고 하는 부파. 「나누어 말하는 자」.
世세
범어 adhvan. 시간의 길, 곧 과거 · 현재 · 미래. 유부는 세가 법과 따로 있는 그릇이 아니라 법 자체가 처한 상태라고 한다.
類 · 相 · 位 · 待유 · 상 · 위 · 대
삼세의 차이를 설명하는 네 논사의 기준. 법구의 「부류(bhāva)」, 묘음의 「모습(lakṣaṇa)」, 세우의 「위치(avasthā)」, 각천의 「상대(apekṣā)」.
作用작용
범어 kāritra. 세우설의 핵심 개념. 법이 결과를 끌어당기는(取果) 활동. 작용이 아직 없으면 미래, 지금 있으면 현재, 이미 사라졌으면 과거다. 중현은 이것을 「결과를 끌어당기는 공능(引果功能)」이라 정의한다.
取果 · 與果취과 · 여과
원인이 결과를 「붙잡는」 것(결과를 결정하는 활동)과 결과를 「주는」 것(결과를 실제로 일으키는 힘). 유부에서 취과는 현재에만 있고, 여과는 과거의 원인도 할 수 있다.
數論수론
상키야(Sāṃkhya) 학파. 원인 속에 결과가 이미 있으며(인중유과), 근본 물질이 변화(전변)하여 만물이 된다고 한다. 『구사론』은 법구의 설이 이와 같다고 비판한다.

번뇌는 무엇을 묶는가 — 대론의 출발점

권20은 앞 권의 「수증」 논의를 이어받아, 수면이 어떤 「일(事)」을 「묶는가(繫)」를 묻는 데서 시작한다.

諸有情類於此事中隨眠隨增,名繫此事。應說過去現在未來何等隨眠能繫何事?

유정이 어떤 일에 대해 수면이 따라 자라는 것을 「그 일에 묶여 있다」고 한다. 과거 · 현재 · 미래의 어떤 수면이 어떤 일을 묶는지 말해야 한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a

답은 앞에서 본 자상혹 · 공상혹의 구분에 따른다. 탐 · 진 · 만은 낱낱의 대상에 붙는 자상혹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그 일에 대해 일어났고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그 일을 묶고, 현재 일어나 있다면 그 일을 묶는다. 미래의 탐 · 진 · 만은 의식과 상응하는 것이면 삼세의 일을 다 묶고, 다섯 감각식과 상응하는 것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면 미래만, 일어날 수 없는 것이면 삼세를 묶는다. 견 · 의 · 무명은 모든 것에 공통된 성질을 대상으로 하는 공상혹이므로, 과거 · 미래의 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삼세를 두루 묶는다(권20, T29, 104a).

이 설명은 과거의 번뇌와 미래의 번뇌가 지금 무엇인가를 「묶고 있다」고 말한다. 그 순간 천친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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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應辯諸事過去未來,為實有無方可說繫。若實是有,則一切行恒時有故應說為常;若實是無,如何可說有能所繫及離繫耶?

풀이

여러 일의 과거 · 미래가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를 밝혀야 비로소 「묶는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실재한다면 모든 행(行)이 언제나 있는 것이므로 상주한다고 해야 한다. 만약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묶는 것과 묶이는 것, 그리고 묶임에서 벗어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a)

이것이 대론의 문을 연 딜레마다. 과거 · 미래가 실재하면 무상의 가르침과 어긋나고, 실재하지 않으면 과거 · 미래의 번뇌가 지금 무엇을 묶는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이 물음을 「경부사의 물음(經部師問)」이라고 분명히 표시한다(『구사론기』 권20, T41, 310a). 비바사사의 답은 한 문장이다.

毘婆沙師定立實有,然彼諸行不名為常,由與有為諸相合故。

비바사사는 (과거 · 미래가) 실재한다고 확정한다. 그러나 그 행들을 상주한다고 하지는 않으니, 유위의 상(相)들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a~b

과거 · 미래의 법은 실재하지만 상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 · 주 · 이 · 멸이라는 유위의 네 상과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유위상의 실체성에 대한 유부와 경량부의 대립은 핵심 개념 「무상」 페이지에서 읽었다(→ 무상). 그리고 천친은 「이 주장이 더 분명해지도록 그 종지를 간략히 들어 이치를 드러내겠다」며 게송을 낸다. 이 게송이 유부의 삼세실유 논증의 표준 정리가 되었다.

네 가지 증거 — 경전의 증거 둘, 이치의 증거 둘

게송의 첫 구 「三世有由說,二有境果故」는 네 가지 근거를 압축한 것이다. 「說」은 부처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 「二」는 식이 두 연으로 생긴다는 경문, 「有境」은 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는 이치, 「果」는 지난 업에 결과가 있다는 이치다. 앞의 둘이 경전의 증거(敎證), 뒤의 둘이 이치의 증거(理證)다.

첫째, 부처의 말씀. 천친은 경문을 이렇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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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謂世尊說:苾芻當知,若過去色非有,不應多聞聖弟子眾於過去色勤脩厭捨。以過去色是有故,應多聞聖弟子眾於過去色勤脩厭捨。若未來色非有,不應多聞聖弟子眾於未來色勤斷欣求。以未來色是有故,應多聞聖弟子眾於未來色勤斷欣求。

풀이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알라. 만약 과거의 색이 있지 않다면, 많이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이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싫어하여 버림을 닦아서는 안 될 것이다. 과거의 색이 있기 때문에, 많이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싫어하여 버림을 닦아야 한다. 만약 미래의 색이 있지 않다면, 많이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이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기뻐하여 구함을 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의 색이 있기 때문에, 많이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기뻐하여 구함을 끊어야 한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b)

수행은 과거의 경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갈망을 끊는 일이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가 아예 없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끊는가. 없는 것에 대해 수행할 수는 없다. 중현은 이 경문을 더 길게 인용하는데, 앞에 「과거 · 미래의 색도 무상한데 하물며 현재의 색이겠는가」라는 구절이 붙어 있다(『순정리론』 권51, T29, 625c). 이것은 「오온은 삼세에 걸쳐 무상하다」는 초기 경전의 정형구다. 중현은 또 『장계경(杖髻經)』을 덧붙인다. 장계 외도가 「업이 지나가 다하고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부처는 「업은 지나가 다하고 사라졌어도 여전히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식은 두 연으로 생긴다.

又具二緣識方生故,謂契經說:識二緣生。其二者何?謂眼及色。廣說乃至意及諸法。若去來世非實有者,能緣彼識應闕二緣。

또 두 연을 갖추어야 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경전에 「식은 두 연으로 생긴다」고 했다. 그 둘은 무엇인가. 눈과 색, 나아가 의(意)와 법이다. 만약 과거 · 미래의 세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반연하는 식은 두 연 가운데 하나를 빠뜨리게 될 것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b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의식, 미래의 일을 그리는 의식이 있다. 경전에 따르면 의식은 의근과 법경 두 연으로 생긴다. 과거 · 미래의 법이 없다면 그런 의식은 대상의 연을 빠뜨린 채 생겨난 것이 되어 경전과 어긋난다.

셋째, 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 여기서부터 이치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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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已依聖教證去來有,當依正理證有去來,以識起時必有境故。謂必有境,識乃得生,無則不生,其理決定。若去來世境體實無,是則應有無所緣識,所緣無故識亦應無。

풀이

이미 성스러운 가르침에 따라 과거 · 미래가 있음을 증명했으니, 이제 바른 이치에 따라 과거 · 미래가 있음을 증명하겠다. 식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식이 생길 수 있고, 없으면 생기지 않으니, 그 이치는 확정되어 있다. 만약 과거 · 미래 세의 대상의 체가 실제로 없다면 대상 없는 식이 있어야 할 것이고, 대상이 없으므로 식도 없어야 할 것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b)

이것이 유부 인식론의 핵심 원리다. 「인식은 반드시 대상을 갖는다」. 인식이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면 그 무엇은 있어야 한다. 없는 것은 인식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상한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는 있다. 앞에서 본 유신견의 해설 — 「나」라는 허망한 견해도 실재하는 오취온을 대상으로 한다 — 은 이 원리를 「나」의 인식에 적용한 것이었다.

넷째, 지난 업에는 결과가 있다.

又已謝業有當果故,謂若實無過去體者,善惡二業當果應無,非果生時有現因在。

또 이미 사라진 업에 미래의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의 체가 실제로 없다면 선 · 악 두 업의 미래의 결과는 없어야 할 것이다. 결과가 생길 때 현재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b

업과 그 이숙과는 동시에 있지 않다. 업은 이미 지나갔고 결과는 뒤에 온다. 결과가 생기는 그 순간 원인인 업은 현재에 없다. 그런데 과거의 업이 아예 없다면 무엇이 결과를 낳는가. 원인 없이 결과가 생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업은 지금도 있어야 한다. 이 논증은 업품에서 업이 「어떻게 남는가」의 물음과 정확히 겹친다. 핵심 개념 「업」 페이지가 한 문단으로 정리한 「삼세실유 대 종자」의 대립이 여기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대비바사론』은 같은 논증을 더 거칠고 생생하게 한다. 과거 · 미래가 없다고 하는 자에게 묻는다. 지금 이숙인이 있을 때 그 결과는 어느 세에 있는가. 과거라면 과거가 있는 것이고, 미래라면 미래가 있는 것이며, 현재라면 이숙인과 결과가 동시에 있게 되어 「악을 지어도 곧바로 받지 않으니, 젖이 곧 타락이 되는 것과 다르다. 재가 덮인 불과 같아 어리석은 이가 밟으면 한참 뒤에 탄다(作惡不即受非如乳成酪 猶灰覆火上愚蹈久方燒)」는 게송과 어긋난다(『대비바사론』 권76, T27, 393b). 그리고 과거가 없다면 과거불도 없고, 과거불이 없으면 출가와 수계도 없으며, 과거가 없는데 출가한 해수(歲數)를 따지는 것은 날마다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고 몰아붙인다.

게송「三世有由說,二有境果故」
경전의 증거
①說「若過去色非有,不應多聞聖弟子眾於過去色勤脩厭捨」과거의 색이 없다면 그것을 싫어해 버리는 수행이 성립하지 않음
②二「識二緣生」식은 근과 경 두 연으로 생김과거 · 미래를 아는 식도 대상의 연이 있어야 함
이치의 증거
③有境「以識起時必有境故」식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대상이 있음
④果「已謝業有當果故」이미 사라진 업에 미래의 결과가 있음결과가 생길 때 원인은 현재에 없음
권20, T29, 104b
도표 10 · 삼세실유의 네 가지 증거

「설일체유부」라는 이름의 뜻

게송의 뒷구 「說三世有故,許說一切有」는 부파의 이름을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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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自謂是說一切有宗,決定應許實有去來世,以說三世皆定實有故,許是說一切有宗。謂若有人說三世實有,方許彼是說一切有宗。若人唯說有現在世及過去世未與果業,說無未來及過去世已與果業,彼可許為分別說部,非此部攝。

풀이

만약 스스로 설일체유종이라 한다면 반드시 과거 · 미래의 세가 실재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삼세가 모두 확실히 실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설일체유종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삼세가 실재한다고 말해야 비로소 그를 설일체유종이라고 인정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현재 세와 과거 세 가운데 아직 결과를 주지 않은 업만 있다고 말하고, 미래와 과거 세 가운데 이미 결과를 준 업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별설부라고 할 수 있지 이 부파에 속하지 않는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b)

「일체가 있다」의 「일체」는 무엇인가. 『구사론』의 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삼세」다. 현재만 있다는 자도, 현재와 일부의 과거만 있다는 자도 「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 현재 · 미래 모두가 실재한다고 말해야 「설일체유」다. 이 정의는 부파 분류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보광은 분별설부를 「말하는 뜻이 이치를 다하지 못해, 반은 옳고 반은 그르므로 다시 나누어야 하므로 분별설부라 한다(說非盡理,半是半非,更須分別,故名分別說部)」고 풀고, 『이부종륜론』에서 음광부(飮光部)가 「업의 과보가 이미 익었으면 없고, 아직 익지 않았으면 있다」고 한 것이 이와 같은 계열이라고 한다(『구사론기』 권20, T41, 310b).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 구분을 더 넓혀, 삼세와 세 무위를 다 인정해야 「설일체유」라 할 수 있다고 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다섯 부류를 든다 — 실재하는 보특가라(人)까지 더하는 증익론자, 현재와 과거의 일부만 인정하는 분별론자, 현재 한 찰나의 십이처만 인정하는 찰나론자, 현재의 법도 가유(假有)라는 가유론자, 일체가 자성이 없어 허공의 꽃과 같다는 도무론자(『순정리론』 권51, T29, 630c). 마지막 「도무론자(都無論者)」는 중관 계통의 공사상을 겨냥한 표현으로 읽힌다.

네 논사의 설 — 금 그릇 · 여인 · 산가지 · 어머니와 딸

삼세가 실재한다는 데는 유부 안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모두 실재한다면 과거 · 현재 · 미래는 무엇으로 구별되는가」에 대해서는 유부 안에서도 네 가지 설이 있었다. 『대비바사론』은 이것을 「설일체유부에 네 대논사가 있다」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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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說一切有部有四大論師。各別建立二世有異。謂尊者法救說類有異。尊者妙音說相有異。尊者世友說位有異。尊者覺天說待有異。

풀이

설일체유부에 네 대논사가 있어, 각각 (삼)세의 다름을 달리 세운다. 존자 법구는 부류가 다르다고 하고, 존자 묘음은 모습이 다르다고 하며, 존자 세우는 위치가 다르다고 하고, 존자 각천은 상대가 다르다고 한다. (『대비바사론』 권77, T27, 396a)

『구사론』은 이 네 설을 거의 같은 말로 옮긴 뒤 평가를 덧붙인다. 하나씩 보자.

법구(法救, Dharmatrāta) — 부류가 다르다(類異).

尊者法救作如是說:由類不同,三世有異。彼謂諸法行於世時,由類有殊非體有異。如破金器作餘物時,形雖有殊而體無異。又如乳變成於酪時,捨味勢等,非捨顯色。

존자 법구는 이렇게 말한다. 부류가 같지 않으므로 삼세가 다르다. 그는 말한다. 모든 법이 세를 지나갈 때 부류에 차이가 있을 뿐 체가 다른 것은 아니다. 금 그릇을 부수어 다른 물건을 만들 때 모양은 달라도 체는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또 젖이 변해 타락이 될 때 맛과 기운 등은 버리지만 색은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c

법이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갈 때 「미래라는 부류」를 버리고 「현재라는 부류」를 얻을 뿐, 법의 체 자체는 얻거나 버리는 것이 없다. 금은 그대로이고 그릇의 모양만 바뀐다. 보광은 법구의 이름을 「바른 법을 구하거나, 바른 법이 그를 구하거나, 바른 법으로 사람을 구하므로 법구라 한다(能救正法、或正法救彼、或以正法救人,故名法救)」고 풀고, 『대비바사론』에 「대덕(大德)」으로 나오는 이가 이 사람이라고 한다(『구사론기』 권20, T41, 310c).

묘음(妙音, Ghoṣaka) — 모습이 다르다(相異).

尊者妙音作如是說:由相不同,三世有異。彼謂諸法行於世時,過去正與過去相合,而不名為離現未相。……如人正染一妻室時,於餘姬媵不名離染。

존자 묘음은 이렇게 말한다. 모습이 같지 않으므로 삼세가 다르다. 그는 말한다. 모든 법이 세를 지나갈 때 과거의 법은 바로 과거의 모습과 결합해 있지만 현재 · 미래의 모습을 떠났다고 하지는 않는다. …… 사람이 한 아내에게 바로 애착하고 있을 때 다른 여인들에 대해 애착을 떠났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c

하나의 법에는 과거 · 현재 · 미래 세 모습이 다 있다. 어느 세에 있느냐는 그 가운데 어느 모습과 「바로 결합해 있느냐」로 정해진다. 나머지 두 모습은 드러나지 않을 뿐 떠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애착하는 이가 다른 이들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닌 것처럼.

세우(世友, Vasumitra) — 위치가 다르다(位異).

尊者世友作如是說:由位不同,三世有異。彼謂諸法行於世時,至位位中作異異說,由位有別非體有異。如運一籌,置一名一、置百名百、置千名千。

존자 세우는 이렇게 말한다. 위치가 같지 않으므로 삼세가 다르다. 그는 말한다. 모든 법이 세를 지나갈 때 이 위치 저 위치에 이르러 달리 불리는 것이니, 위치에 차이가 있을 뿐 체가 다른 것은 아니다. 산가지 하나를 옮겨 일의 자리에 놓으면 일이라 하고, 백의 자리에 놓으면 백이라 하며, 천의 자리에 놓으면 천이라 하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c

같은 산가지 하나가 놓인 자리에 따라 1이 되고 100이 되고 1000이 된다. 산가지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법도 그것이 처한 「위치(상태)」에 따라 미래 · 현재 · 과거로 불린다.

각천(覺天, Buddhadeva) — 상대가 다르다(待異).

尊者覺天作如是說:由待有別,三世有異。彼謂諸法行於世時,前後相待立名有異,如一女人名母名女。

존자 각천은 이렇게 말한다. 상대함에 차이가 있으므로 삼세가 다르다. 그는 말한다. 모든 법이 세를 지나갈 때 앞뒤를 서로 상대하여 이름을 달리 세우니, 한 여인을 어머니라고도 하고 딸이라고도 하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c

한 여인은 그 딸에 대해서는 어머니이고 그 어머니에 대해서는 딸이다. 법도 그 뒤의 것에 대해서는 과거, 그 앞의 것에 대해서는 미래, 앞뒤 모두에 대해서는 현재라는 이름을 얻는다.

한 산가지가 자리를 옮기는 계산판
그림 · 한 산가지가 자리를 옮기는 계산판

네 설의 평가 — 왜 세우인가

『구사론』은 네 설을 차례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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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此四種說一切有中,第一執法有轉變故,應置數論外道朋中。第二所立世相雜亂,三世皆有三世相故。……第四所立前後相待,一世法中應有三世。……故此四中第三最善,以約作用位有差別,由位不同立世有異。

풀이

이 네 가지 설일체유 가운데 첫째는 법에 전변이 있다고 집착하므로 수론 외도의 무리 속에 두어야 한다. 둘째가 세운 것은 세의 모습이 뒤섞이니, 삼세에 모두 삼세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 넷째가 세운 것은 앞뒤가 서로 상대하는 것이니, 한 세의 법 안에 삼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이 넷 가운데 셋째가 가장 좋다. 작용에 따라 위치에 차이가 있고, 위치가 같지 않음에 따라 세가 다르다고 세우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4c)

법구의 설은 체는 그대로이고 부류만 바뀐다고 하므로, 변하지 않는 근본 물질이 변화(전변)하여 만물이 된다는 수론(상키야)과 같아진다. 묘음의 설은 한 법이 세 모습을 다 지니므로 과거 · 현재 · 미래가 서로 뒤섞인다. 또 그 비유도 맞지 않는다. 한 아내에게 탐이 일어나 있을 때 다른 여인들에 대한 탐은 「성취(得)」되어 있을 뿐 실제로 일어나 있지는 않다. 각천의 설은 앞뒤의 상대로 세를 정하므로, 과거 세 안에서도 앞 찰나와 뒤 찰나에 따라 과거 · 미래가 생기고 가운데가 현재가 되어, 한 세 안에 삼세가 들어서게 된다. 『대비바사론』은 각천과 묘음의 설이 「세가 뒤섞인다」고 하고, 법구의 설에 대해서는 「법의 자성을 떠나 무엇을 부류라 하는가」, 「미래에서 현재로 올 때 앞의 부류가 사라지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때 뒤의 부류가 생긴다면, 과거에 생겨남이 있고 미래에 사라짐이 있게 된다」고 비판한다(『대비바사론』 권77, T27, 396b).

세우의 설만이 이런 혼란이 없다. 『대비바사론』은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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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此師所立世無雜亂。以依作用立三世別。謂有為法未有作用名未來世。正有作用名現在世。作用已滅名過去世。

풀이

이 논사가 세운 것은 세가 뒤섞이지 않는다. 작용에 의지해 삼세의 구별을 세우기 때문이다. 유위법이 아직 작용이 없으면 미래세라 하고, 바로 작용이 있으면 현재세라 하며, 작용이 이미 사라졌으면 과거세라 한다. (『대비바사론』 권77, T27, 396b)

법의 체는 삼세에 걸쳐 똑같이 있다. 다른 것은 그 법이 「작용(kāritra)」을 하고 있느냐다. 작용이 아직 없으면 미래, 지금 작용하고 있으면 현재, 작용이 끝났으면 과거다. 산가지는 그대로인데 놓인 자리가 다르듯이, 법은 그대로인데 작용의 유무라는 「위치」가 다르다. 이것이 유부 정통설이 된다. 『대비바사론』은 이 대목을 「그러므로 오직 셋째가 세를 세움이 좋으니, 모든 행이 작용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故唯第三立世為善。諸行容有作用時故)」로 맺는다(『대비바사론』 권77, T27, 396b).

중현은 법구에 대한 『구사론』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처음 논사는 법의 전변을 집착하므로 수론의 무리에 두어야 한다고들 전하지만(傳說最初執法轉變,故應置在數論朋中), 이제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今謂不然)」고 하고, 법구는 유위법의 체가 상주하여 삼세를 지나며 숨었다 드러났다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체와 모습은 같아도 성류(性類)가 다르다」고 말했을 뿐이므로 세우와 부분적으로 같다고 변호한다(『순정리론』 권52, T29, 631b). 법구가 『대비바사론』에서 「대덕」으로 존중받는 논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중현의 변호에는 정통파 안의 결속을 지키려는 뜻도 읽힌다.

법구類異부류가 다름비유금 그릇을 부수어 다른 물건을 만듦 · 젖이 타락이 됨평가「執法有轉變故,應置數論外道朋中」수론과 같음
묘음相異모습이 다름비유한 아내에게 애착할 때 다른 여인에 대한 애착을 떠난 것이 아님평가「世相雜亂」삼세의 모습이 뒤섞임
세우位異위치가 다름비유산가지 하나를 일 · 백 · 천의 자리에 놓음평가「第三最善」작용에 따라 위치를 세움
각천待異상대가 다름비유한 여인이 어머니이자 딸평가「一世法中應有三世」한 세 안에 삼세가 생김
권20, T29, 104c · 『대비바사론』 권77, T27, 396a~b
도표 11 · 네 논사의 삼세설

「작용」이란 무엇인가 — 첫 번째 시험

세우의 설이 정설이 되자, 곧 「작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시험대에 오른다. 천친은 세우설을 「이미 다 알았다」고 받은 뒤 묻는다. 과거 · 미래의 체도 실재한다면 그것도 현재라고 불러야 할 텐데 왜 과거 · 미래라 하는가. 「작용에 따라 세운다고 하지 않았는가」라는 답이 오자, 천친은 첫 반례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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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爾,現在有眼等根,彼同分攝有何作用?彼豈不能取果與果?是則過去同類因等既能與果,應有作用。有半作用,世相應雜。

풀이

그렇다면 현재에 있는 눈 등의 근 가운데 피동분(彼同分)에 속하는 것은 무슨 작용이 있는가. — 그것이 어찌 결과를 붙잡고 결과를 주지 못하겠는가. — 그렇다면 과거의 동류인 등도 결과를 줄 수 있으므로 작용이 있어야 한다. 작용이 반쯤 있는 것이 되니, 세의 모습이 뒤섞일 것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a)

「피동분」이란 눈이 있으되 지금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상태(예를 들어 잠든 이의 눈)를 말한다. 그 눈은 현재의 법이다. 그러면 그 눈은 무슨 작용을 하고 있는가. 보는 작용은 하지 않는다. 유부는 답한다. 보지 않아도 그 눈은 「결과를 붙잡고(取果) 결과를 준다(與果)」. 곧 그 눈은 다음 찰나의 같은 부류의 눈을 낳는 원인(동류인)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천친은 곧바로 되받는다. 그렇다면 과거의 동류인도 결과를 「주기」는 하니 작용이 있는 셈이다. 결과를 붙잡는 일은 못 하고 주는 일만 하므로 작용이 「반쯤」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 과거의 법이 반쯤 현재가 되어 세가 뒤섞인다.

근품(권6)의 정의와 보광의 풀이를 따라 정리하면 이렇다. 유부는 원인의 활동을 둘로 나눈다 — 결과를 「붙잡는」 것(취과)과 결과를 「주는」 것(여과). 취과는 결과를 결정하는 활동이고 오직 현재에만 있다. 여과는 결과를 실제로 일으키는 힘이고 과거의 원인도 할 수 있다(이숙인처럼). 천친의 반박은 여과도 작용이라면 과거에도 작용이 있게 되므로 세우의 기준이 무너진다는 것이다(보광 『구사론기』 권20, T41, 311b는 이 문답을 경량부의 거듭된 힐난과 유부의 답으로 나누어 읽는다). 중현은 이 반박에 「작용(作用)」과 「공능(功能)」을 구별하여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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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諸法勢力總有二種,一名作用、二謂功能。引果功能名為作用,非唯作用總攝功能,亦有功能異於作用。

풀이

모든 법의 힘은 통틀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작용이라 하고 또 하나는 공능이라 한다. 결과를 끌어당기는 공능을 작용이라 하니, 작용만이 공능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며 작용과 다른 공능도 있다. (『순정리론』 권52, T29, 631c)

작용은 「결과를 끌어당기는(引果)」 공능 하나뿐이다. 그 밖의 힘 — 보는 힘, 과거의 원인이 결과를 주는 힘 — 은 작용이 아니라 공능이다. 중현은 어둠 속의 눈을 예로 든다. 어둠은 눈의 「보는 공능」을 막지만 「결과를 끌어당기는 작용」은 막지 못한다. 그래서 어둠 속의 눈도 결과를 끌어당기므로 현재다. 과거의 원인이 결과를 주는 것은 공능일 뿐 작용이 아니므로, 과거는 여전히 작용이 없는 과거다. 이렇게 하여 중현은 세우의 기준을 지킨다. 그러나 법보는 중현의 이 해석이 「등무간연이 현재에 결과를 붙잡는다」는 점에서 『대비바사론』과 어긋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구사론소』 권20, T41, 704b). 정통파의 방어에도 틈이 남는다.

천친은 「이미 간략히 따져 보았으니, 다음에 자세히 깨뜨리겠다(已略推徵,次當廣破)」고 하며 본격적인 비판으로 넘어간다. 그것이 다음 장이다.

유부는 경전의 증거(과거 · 미래의 색에 대한 수행, 식은 두 연으로 생김)와 이치의 증거(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음, 지난 업에 결과가 있음)로 삼세실유를 논증한다. 「설일체유부」라는 이름은 「삼세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네 논사 가운데 「작용」의 유무로 삼세를 나누는 세우의 위치설이 정설이 되었다. 법의 체는 늘 있고, 작용만이 오고 간다.

제6장 작용은 어디서 오는가천친의 비판과 중현의 응답

본송

『구사론』 권20 · 분별수면품 · T29, 10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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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何礙用云何?無異世便壞, 有誰未生滅?此法性甚深。

풀이

무엇이 (작용을) 막는가. 작용은 어떠한가. (작용이 법과) 다르지 않다면 세가 무너진다. 무엇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무엇이 사라졌다는 것인가. — 이 법성은 매우 깊다.

『구사론』 권20 · 분별수면품 · T29, 105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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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許法體恒有,而說性非常, 性體復無別,此真自在作。

풀이

법의 체는 늘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 성질은 무상하다고 말한다. 성질과 체가 또 다르지 않다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재천의 짓이다.

술어 풀이

法性甚深법성심심
「법의 본성은 매우 깊다」. 본송 넷째 구는 천친이 비바사사의 마지막 대답으로 놓은 말이다. 이치로 해명할 수 없으면 「법성이 깊다」며 물러난다는 뜻으로 쓰였다.
曾有 · 當有증유 · 당유
경량부의 해석. 과거가 「있다」는 것은 「일찍이 있었다」는 뜻이고, 미래가 「있다」는 것은 「장차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현재처럼 실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有聲유성
「있다」라는 말. 경량부는 「있다」는 말이 실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없는 것도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등불이 먼저 없었던 것이 있다」).
勝義空經승의공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눈이 생길 때 어디서 오는 것이 없고, 사라질 때 어디로 쌓이는 것이 없다. 본래 없다가 지금 있고, 있다가 도로 없다」는 경문으로 경량부가 과거 · 미래의 실재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다.
杖髻經장계경
장계(杖髻) 외도에게 부처가 「업은 지나가 사라졌어도 여전히 있다」고 했다는 경. 유부가 과거 업의 실재를 증명하는 근거로 삼는다.
相續轉變差別상속전변차별
경량부의 업 · 과보 이론. 업을 원인으로 하여 이어지는 마음의 흐름(상속)이 찰나마다 달라지고(전변), 마지막에 결과를 낳을 특별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차별). 『구사론』 파집아품에서 자세히 다룬다.
雨眾外道우중외도
상키야 계통의 외도로 전한다. 「있는 것은 늘 있고, 없는 것은 늘 없다. 없는 것은 생기지 않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설을 가진 자로 인용된다.
第十三處제13처
십이처 밖의 「열셋째 처」. 존재하지 않는 것의 대표적인 예. 「열셋째 처는 없다」고 아는 앎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라는 물음에 쓰인다.

첫째 비판 — 무엇이 작용을 막는가

천친의 「자세한 깨뜨림(廣破)」은 본송의 네 구를 따라 진행된다. 첫 물음은 「무엇이 막는가(何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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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應說若法自體恒有,應一切時能起作用,以何礙力令此法體所起作用時有時無?若謂眾緣不和合者,此救非理,許常有故。

풀이

말해 보라. 만약 법의 자체가 늘 있다면 언제나 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무슨 막는 힘이 있어, 이 법체가 일으키는 작용을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게 하는가. 만약 여러 연(緣)이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면, 이 변명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 연들도) 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a)

법의 체가 삼세에 늘 있다면, 그 법이 작용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 조건(연)이 갖추어지지 않아서라고 답할 수는 없다. 유부에 따르면 그 조건들도 삼세에 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늘 있는 체계 안에서는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을 할 자리가 없다.

둘째 물음은 「작용은 어떠한가(用云何)」다. 작용 자체도 과거 · 현재 · 미래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면 작용이 과거 · 미래 · 현재인 것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작용에 또 다른 작용이 있어야 하는가. 그러면 끝없이 이어진다(무궁). 작용이 과거 · 현재 · 미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데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위법이 되어 늘 있어야 하므로 「작용이 이미 사라졌다」 「아직 없다」고 할 수 없다.

유부는 여기서 「작용은 법체와 다르지 않다」고 답한다. 작용이 법과 따로 있다면 위의 허물이 있겠지만, 작용은 법 자체이므로 그런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친은 이것이 딜레마의 다른 뿔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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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爾,所立世義便壞,謂若作用即是法體,體既恒有用亦應然。何得有時名為過未?故彼所立世義不成。

풀이

그렇다면 세운 세의 뜻이 무너진다. 만약 작용이 곧 법체라면, 체가 늘 있으므로 작용도 그래야 한다. 어떻게 어떤 때를 과거 · 미래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세운 세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a)

작용이 법체와 다르면 작용의 삼세를 설명할 수 없고(무궁 또는 무위), 작용이 법체와 같으면 체가 늘 있으므로 작용도 늘 있어 삼세의 구별이 사라진다. 이것이 「작용은 법과 다른가 같은가」의 딜레마다. 보광은 본송의 「用」 자가 앞뒤 두 쪽으로 걸린다 — 「何礙用」과 「用云何」 — 고 풀이하여 이 구조를 정리한다(『구사론기』 권20, T41, 311b).

셋째 물음은 「무엇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무엇이 사라졌는가(有誰未生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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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彼復應說,若如現在法體實有,去來亦然,誰未已生?誰復已滅?……先何所闕?彼未有故,名未已生。後復闕何?彼已無故,名為已滅。故不許法本無今有、有已還無,則三世義應一切種皆不成立。

풀이

그들은 또 말해야 한다. 만약 현재처럼 법체가 실재하고 과거 · 미래도 그렇다면, 무엇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무엇이 이미 사라졌는가. …… 앞서 무엇이 빠져 있었기에 그것이 아직 없다 하여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고 하는가. 뒤에 또 무엇이 빠졌기에 그것이 이미 없다 하여 「이미 사라졌다」고 하는가. 그러므로 법이 본래 없다가 지금 있고, 있다가 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삼세의 뜻은 어떤 방식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a)

「생겨난다」는 것은 없던 것이 있게 되는 것이고, 「사라진다」는 것은 있던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있다면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다. 그런데 무상이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천친은 비바사사가 「유위의 상과 결합하므로 상주가 아니다」라고 한 처음의 대답을 겨냥해, 「이것은 다만 빈말이 있을 뿐이니, 생멸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此但有虛言,生滅理無故)」라고 하고, 그것을 풍자하는 게송을 인용한다. 「법의 체는 늘 있다면서 성질은 무상하다고 하고, 성질과 체가 또 다르지 않다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재천의 짓이다」. 자재천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신이다. 모순된 것을 한꺼번에 주장하는 것은 이치가 아니라 자재천의 마음대로 하는 짓이라는 조롱이다.

유부: 법체는 삼세에 늘 있다 · 작용이 있으면 현재, 없으면 과거 · 미래
물음 ①「何礙」체도 연도 늘 있다면 무엇이 작용을 막아 때로 있고 때로 없게 하는가
물음 ②「用云何」
작용이 법과 다르다면작용의 삼세는 무엇으로 정하는가(무궁)또는 작용은 무위가 되어 늘 있음
작용이 법과 같다면「體既恒有用亦應然」체가 늘 있으므로 작용도 늘 있음「世義便壞」
물음 ③「有誰未生滅」체가 늘 있다면 무엇이 생겨나고 사라지는가
「不許法本無今有、有已還無,則三世義……皆不成立」권20, T29, 105a
도표 12 · 「작용」을 둘러싼 딜레마

「있다」의 두 뜻 — 일찍이 있었음과 장차 있음

이어서 천친은 유부가 든 네 가지 증거를 하나씩 재해석한다. 먼저 경전의 증거, 곧 「과거의 색이 있으므로 그것을 싫어해 버려야 한다」는 경문이다. 천친은 이 경문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경문의 「있다」를 다르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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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我等亦說有去來世。謂過去世曾有名有,未來當有,有果因故。依如是義說有去來,非謂去來如現實有。

풀이

우리도 과거 · 미래의 세가 있다고 말한다. 과거세는 일찍이 있었으므로 「있다」고 하고, 미래세는 장차 있을 것이므로 「있다」고 하니, (지금의) 결과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 따라 과거 · 미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 과거 · 미래가 현재처럼 실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b)

과거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일찍이 있었다(曾有)」는 뜻이고, 미래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장차 있을 것이다(當有)」라는 뜻이다. 지금의 결과가 있으니 그 원인이 일찍이 있었고, 지금의 원인이 있으니 그 결과가 장차 있을 것이다. 부처가 「과거 · 미래가 있다」고 말한 것은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견해(謗因果見)를 막기 위해서였다. 「있다」는 말은 원래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를 드러낼 수 있다.

有聲通顯有無法故。如世間說,有燈先無、有燈後無。

「있다」라는 말은 있는 법과 없는 법을 모두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등불이 먼저 없었던 것이 있다」, 「등불이 뒤에 없게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b

「등불이 켜지기 전에 없었던 상태가 있다」고 말할 때, 「있다」는 그 등불의 없음을 가리킨다. 「있다」는 말이 반드시 실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동사의 의미 분석이다. 경전의 「있다」를 존재론적 실재로 읽느냐, 시간적 관계의 표현으로 읽느냐 — 대론 전체가 이 한 낱말의 해석에 걸려 있다.

경전의 증거를 다시 읽다 — 『장계경』과 『승의공경』

유부는 『장계경』을 든다. 부처는 장계 외도에게 「업은 지나가 다하고 사라지고 무너졌어도 여전히 있다」고 했다. 이것은 과거 업의 실재를 말한 것 아닌가. 천친은 답한다. 장계 외도도 업이 일찍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거듭 「있다」고 한 것은, 그 업이 끌어낸 「지금의 상속 안에 결과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은밀히(密) 있다고 한 것이다(依彼所引現相續中與果功能密說為有). 만약 그렇지 않고 과거의 업이 지금 실재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과거」이겠는가.

그리고 천친은 반대 방향의 경문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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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以薄伽梵於勝義空契經中說:眼根生位無所從來,眼根滅時無所造集。本無今有、有已還無。去來眼根若實有者,經不應說本無等言。

풀이

세존께서 『승의공경』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눈이 생길 때 어디서 오는 것이 없고, 눈이 사라질 때 어디로 쌓이는 것이 없다. 본래 없다가 지금 있고, 있다가 도로 없다.」 만약 과거 · 미래의 눈이 실재한다면 경전이 「본래 없다」 등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b)

「본래 없다가 지금 있다(本無今有)」. 미래의 눈이 실재한다면 「본래 없다」고 할 수 없다. 유부가 「본래 현재로서는 없다가 지금 현재로서 있다는 뜻」이라고 변명한다면, 천친은 「현재라는 성질과 그 눈의 체는 다르지 않다」고 응수한다. 현재성이 체와 다르지 않다면, 현재성이 없다는 것은 곧 그 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경문을 두고 중현은 긴 반론을 편다. 경문의 「어디서 오는 것이 없다」는 눈이 어떤 쌓인 곳(積集處)에서 나온다거나, 근본 자성에서 나와 거기로 돌아간다거나, 자재천이 만든다는 외도의 설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본래 없다가 지금 있다」는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갖추어져 있다」는 견해를 막은 것이다. 무엇보다 중현이 인용하는 경문은 「있다가 도로 없다(有已還無)」가 아니라 「있다가 도로 간다(有已還去)」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작용을 일으켜 자기 결과를 끌어당긴 뒤 작용이 없는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순정리론』 권51, T29, 626a). 같은 경문을 두 사람이 정반대의 증거로 읽고, 심지어 경문의 글자까지 다르게 전한다.

이치의 증거를 다시 읽다 — 대상 없는 인식은 가능한가

다음은 「식은 두 연으로 생긴다」와 「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는 증거다. 천친은 먼저 두 갈래로 묻는다. 의근과 법경이 의식을 낳는 연이라고 할 때, 법경은 의근처럼 의식을 「낳는(能生)」 연인가, 아니면 단지 의식의 대상(所緣)이 될 뿐인가.

낳는 연이라면 곤란하다. 백천 겁 뒤에 있을 법, 또는 장차 생기지도 않을 법이 어떻게 지금의 식을 낳는가. 또 열반은 일체의 생겨남과 어긋나는데 그것을 낳는 연이라 할 수는 없다. 단지 대상이 될 뿐이라면, 경량부도 과거 · 미래가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면 「없는 것이 어떻게 대상이 되는가」. 천친은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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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如何成所緣?謂曾有、當有。非憶過去色受等時,如現分明觀彼為有,但追憶彼曾有之相;逆觀未來當有亦爾。

풀이

어떻게 대상이 되는가. 일찍이 있었던 것, 장차 있을 것으로서다. 과거의 색 · 수 등을 기억할 때 그것을 현재처럼 분명하게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일찍이 있었던 모습을 뒤좇아 기억할 뿐이다. 미래에 장차 있을 것을 미리 보는 것도 그러하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c)

기억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보듯이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일찍이 있었던 것」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만약 과거가 현재처럼 있다면 그것은 현재여야 한다. 현재처럼 있지 않다면 「대상 없는 식」을 인정해야 한다. 천친은 오히려 이 귀결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유부를 그 자리로 몰아넣는 예를 든다.

若體全無是所緣者,第十三處應是所緣,諸有達無第十三處。此能緣識為何所緣?

만약 체가 전혀 없는 것이 대상이라면 열셋째 처도 대상이어야 한다(고 유부가 반문한다면), 「열셋째 처는 없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아는 식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5c

「십이처 밖에 열셋째 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앎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앎이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소리가 나기 전의 「소리 없음」을 아는 앎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소리를 대상으로 한다면, 소리가 없는 것을 찾는 사람은 다시 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소리가 미래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미래가 실재하는데 어떻게 「없다」고 하는가. 그러므로 「식은 있는 대상과 없는 대상을 두루 반연한다(故識通緣有非有境)」(권20, T29, 105c).

유부는 부처의 말을 든다. 보살(성도 전의 석존)이 「세간에 없는 것을 내가 알고 내가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천친은 이것을 「다른 사람은 증상만을 품어 없는 것에 대해서도 모습이 나타나면 있다고 여기지만, 나는 오직 있는 것에 대해서만 있다고 본다」는 뜻으로 푼다. 그리고 반대로 묻는다. 모든 인식에 반드시 실재하는 대상이 있다면, 왜 우리는 대상에 대해 망설이거나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가. 부처는 또 다른 곳에서 「있는 것은 있다고, 없는 것은 없다고 안다(便知有是有、非有是非有)」고 하지 않았는가(권20, T29, 106a).

중현은 이 마지막 경문에서 「유(有)」로 번역된 말이 본래 「묘(妙)」, 곧 훌륭함을 뜻한다고 반박한다. 그 경은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훌륭한 것과 훌륭하지 않은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한 것이므로, 그 뒤에 「위가 있는 것은 위가 있다고, 위가 없는 것은 위가 없다고」가 이어진다는 것이다(『순정리론』 권50, T29, 623a). 그리고 대상 없는 인식이 있다는 경량부의 예 — 불을 돌려 생긴 고리, 「나」라는 인식, 꿈, 눈병 난 이가 보는 두 개의 달 — 를 하나씩 반박한다. 불의 고리를 보는 인식은 빠르게 도는 불꽃의 색을 대상으로 하며 다만 행상이 뒤집혀 있을 뿐이다. 「나」의 인식은 오온을 대상으로 한다. 꿈은 일찍이 경험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 토끼 뿔을 꿈꾸는 것은 다른 곳에서 본 토끼와 뿔을 한데 합쳐 떠올리는 것이다(『순정리론』 권50, T29, 623b~c). 「대상은 실재하고 행상만 뒤집힌다」 — 유부 인식론의 일관된 입장이다.

유부「以識起時必有境故」식이 일어날 때 반드시 대상이 있다과거 · 미래를 아는 식이 있으므로 과거 · 미래는 실재허망한 인식도 대상은 실재
  • 불의 고리도는 불꽃
  • 「나」오온
  • 꿈일찍이 경험한 것
경량부(천친)과거 · 미래는 「曾有 · 當有」로서 대상이 됨「열셋째 처는 없다」 「소리가 아직 없다」를 아는 식의 대상은 무엇인가「故識通緣有非有境」식은 있는 대상과 없는 대상을 두루 반연한다권20, T29, 105c
중현없음을 아는 식은 없음 자체가 아니라 「없다」는 말(能詮)이나 그 소리가 의지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순정리론』 권50
도표 13 · 「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는가」 — 대론의 쟁점

업은 어떻게 결과를 낳는가 — 상속의 전변

마지막은 「지난 업에 결과가 있다」는 증거다. 천친의 답은 경량부 업론의 핵심을 한 문장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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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非經部師作如是說,即過去業能生當果,然業為先所引相續,轉變差別令當果生。彼我品中當廣顯示。

풀이

경부사는 과거의 업이 곧 미래의 결과를 낳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업이 앞서고 그것이 끌어낸 상속이 전변하고 차별되어 미래의 결과를 생기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저 아(我)의 품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6a)

업이 직접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다. 업이 지어지면 그 업에 이끌린 마음의 흐름(상속)이 찰나마다 달라지며(전변) 이어지다가, 결과를 낳을 특별한 힘(차별)을 지니게 되고, 그 힘이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앞에서 수면의 체를 다루며 본 「종자」의 원리를 업에 적용한 것이다. 천친은 「저 아의 품에서」, 곧 『구사론』 마지막의 파집아품에서 이것을 자세히 밝히겠다고 예고한다(→ 「나」의 논파와 『구사론』의 자리). 중현은 이 대목에서 경량부의 씨앗 비유 — 씨앗에서 싹 · 잎 · 꽃이 차례로 생기고 꽃에서 열매가 생기지만 그 열매는 씨앗이 끌어낸 상속의 힘에서 생긴 것이다 — 를 인용하고, 업과 마음은 체도 종류도 원인도 다르므로 「업 다음에 마음이 이어 생기는 것」을 업의 상속이라 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순정리론』 권51, T29, 629b).

그리고 천친은 공세로 돌아선다. 과거 · 미래가 실재한다면 결과는 언제나 이미 있다. 그러면 업이 결과에 대해 무슨 일을 하는가. 결과를 「생기게」 한다면 결과는 본래 없다가 지금 있게 되니 유부의 주장이 무너진다. 결과를 「현재가 되게」 한다면, 결과를 다른 장소로 끌어오는 것인가 — 그러면 결과의 체는 상주하는 것이 되고, 물질이 아닌 결과는 어떻게 끌어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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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又應顯成雨眾外道所黨邪論。彼作是說:有必常有,無必常無。無必不生,有必不滅。

풀이

또 우중 외도가 편드는 그릇된 논을 드러내 이루어 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있는 것은 반드시 늘 있고, 없는 것은 반드시 늘 없다. 없는 것은 반드시 생기지 않고, 있는 것은 반드시 사라지지 않는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6a)

유부가 피하려던 수론(상키야)의 그림자가 다시 나타난다.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없는 것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공식이다. 법구의 설을 「수론의 무리」라고 물리치고 세우의 설을 택했지만, 법체항유라는 기초 자체가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 천친의 지적이다.

「일체가 있다」를 바르게 말하는 법

천친은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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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是故此說一切有部,若說實有過去未來,於聖教中非為善說。若欲善說一切有者,應如契經所說而說。經如何說?如契經言:梵志當知,一切有者,唯十二處或唯三世。如其所有而說有言。

풀이

그러므로 이 설일체유부가 만약 과거 · 미래가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성스러운 가르침 안에서 잘 말한 것이 아니다. 「일체가 있다」를 잘 말하려 한다면 경전이 말한 대로 말해야 한다. 경전은 어떻게 말하는가. 경전에 「바라문이여 알라. 일체가 있다는 것은 오직 십이처, 또는 오직 삼세다」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있는 그대로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6a)

「일체가 있다」는 말 자체는 부처의 말이다. 문제는 「있다」의 뜻이다. 부처는 일체가 「있는 그대로(如其所有)」 있다고 했다. 현재는 현재로서 있고, 과거는 일찍이 있었던 것으로서, 미래는 장차 있을 것으로서 있다. 모든 것을 현재처럼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일체가 있다」를 바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광은 이 「있는 그대로」를 「거짓 있음이든 참 있음이든, 일찍이 있음이든 장차 있음이든, 있는 그대로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 모두 현재처럼 실재한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고, 경량부가 현재의 십이처 가운데서도 일부만 실재하고 일부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고 덧붙인다(『구사론기』 권20, T41, 314a).

그러면 처음의 물음 — 과거 · 미래가 없다면 어떻게 「묶는다」고 하는가 — 은 어떻게 되는가. 천친은 경량부의 답을 준다. 과거의 번뇌가 낳은 수면(종자)이 지금 있으므로 과거의 번뇌가 묶는다고 하고, 미래의 번뇌를 낳을 수면이 지금 있으므로 미래의 번뇌가 묶는다고 하며, 과거 · 미래의 일을 반연하는 번뇌의 수면이 지금 있으므로 그 일이 묶여 있다고 한다. 그 수면이 끊어지면 「묶임에서 벗어났다(離繫)」는 이름을 얻는다(권20, T29, 106a~b).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의 종자로 설명된다. 앞에서 본 「잠든 번뇌」와 「현재만 있다」가 하나로 맞물린다.

「법성은 깊다」 — 유부의 마지막 대답

본송의 넷째 구 「此法性甚深」은 천친이 비바사사의 입에 넣은 마지막 대답이다. 장행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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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毘婆沙師作如是說:如現實有過去未來。所有於中不能通釋,諸自愛者應如是知,法性甚深非尋思境,豈不能釋便撥為無?

풀이

비바사사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처럼 과거 · 미래가 실재한다. 그 안에서 (이치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를 아끼는 이들은 이렇게 알아야 한다. 법성은 매우 깊어 사유로 헤아릴 경계가 아니니, 풀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 곧 없다고 부정하겠는가.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6b)

이치로 다 해명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 깊기 때문이지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 이것이 비바사사의 마지막 자리다. 법보는 이 대목에 「논주(천친)가 먼저 유부를 깨뜨리고 뒤에 (유부의 말을) 남겨 둔 것」이라고 주석한다(『구사론소』 권20, T41, 706b). 천친은 유부를 논파하면서도 마지막 말은 유부에게 남겨 둔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유부의 「다른 문(異門)」 네 가지를 덧붙인다 — 다른 문으로 보면 이 법이 생기고 이 법이 사라지며(색이 생기고 색이 사라짐), 다른 문으로 보면 다른 것이 생기고 다른 것이 사라지며(미래세에 생기고 현재세에 사라짐), 다른 문으로 보면 세 자체가 생기고, 다른 문으로 보면 세 안에 생김이 있다(미래세에는 많은 찰나가 있으므로). 그러고는 「곁가지 논의는 끝났다(傍論已了)」며 수면품의 본론으로 돌아간다.

중현의 반격 — 「경주는 제멋대로 논을 지었다」

천친의 이 「법성은 깊다」라는 서술에 중현은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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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經主於此詭設謗言:毘婆沙師作如是說,如現實有,過去未來所有於中不能通釋。諸自愛者應如是知,法性甚深非尋思境,豈不能釋便撥為無?今定謂仁竊自造論,矯託題以毘婆沙名,真毘婆沙都無此語。

풀이

경주(천친)는 여기서 거짓으로 비방하는 말을 꾸몄다. 「비바사사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처럼 실재한다. 과거 · 미래에 대해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를 아끼는 이들은 법성이 매우 깊어 사유의 경계가 아님을 알아야 하니, 풀지 못한다고 어찌 곧 없다고 부정하겠는가.」 이제 단언하건대 그대는 몰래 스스로 논을 지어 비바사의 이름을 거짓으로 붙였으니, 참된 비바사에는 이런 말이 전혀 없다. (『순정리론』 권52, T29, 634c)

중현에 따르면 유부는 과거 · 미래가 「현재처럼(如現)」 실재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이 그의 반박의 중심이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非我宗言,過去未來如現實有,三世實有性各別故。

풀이

우리 종은 과거 · 미래가 현재처럼 실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삼세가 실재하되 그 성질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순정리론』 권52, T29, 633b)

과거 · 미래 · 현재는 모두 실재하지만 그 「있음의 성질(有性)」이 다르다. 중현은 『순정리론』 권50에서 이것을 더 정밀하게 말한다. 과거 · 미래는 말의 뿔이나 허공의 꽃처럼 「끝내 없는 것」이 아니고, 병 · 옷 · 수레처럼 「가유(假有)」도 아니며, 현재처럼 「실유(實有)」도 아니다. 「원인과 결과, 물듦과 물듦을 떠남의 일이 있어 그 자성이 헛되지 않으므로 실유라고 하지만, 현재처럼 실유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아니다」(『순정리론』 권50, T29, 625a). 법보는 이 입장을 「살바다(설일체유부)가 말하는 과거 · 미래의 체는 현재의 있음과 같지 않고, 그렇다고 토끼 뿔의 없음과 같지도 않다」로 요약한다(『구사론소』 권20, T41, 703b).

중현은 「작용」의 개념도 다시 세운다. 앞에서 본 대로 작용은 「결과를 끌어당기는 공능」이며, 작용과 법체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非異非一)」. 상속이 찰나들과 따로 있는 실체가 아니면서도 찰나 하나와 같지도 않은 것처럼, 작용도 법과 따로 있는 실체가 아니면서 법 자체와 같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게송으로 정리한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相續無異體,許別有所作, 作用理亦然,故世義成立。

풀이

상속은 (찰나들과) 다른 체가 없지만, 따로 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한다. 작용의 이치도 그러하니, 그러므로 세의 뜻이 성립한다. (『순정리론』 권52, T29, 633b)

그리고 천친이 「자재천의 짓」이라고 조롱한 게송에는, 부처도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연기의 법성은 상주한다」고 하면서 「연기는 무상하다」고 했으니, 같은 비난이 부처에게도 돌아가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법체는 늘 있고 법성은 변한다(法體恒存法性變異)」 — 체는 그대로 있으면서 조건을 따라 작용을 일으키고, 그 작용이 곧바로 그치므로, 법체는 늘 있지만 상주는 아니라는 것이다(『순정리론』 권52, T29, 633c). 천친이 「우중 외도와 같다」고 한 비판은 오히려 경량부에게 돌린다. 현재만 있고 과거 · 미래는 없다고 하면 「있음」과 「없음」이 칼로 자른 듯 나뉘는데, 있는 현재가 어떻게 없는 과거로 바뀌고 없는 미래가 어떻게 있는 현재로 바뀌는가. 업이 없던 것을 있게 할 수 있다면, 말(馬)로 태어나게 하는 업은 왜 본래 없던 말의 뿔은 생기게 하지 못하는가(『순정리론』 권52, T29, 634a~b).

중현은 이 대론을 경량부를 향한 엄중한 경고로 맺는다. 「삼세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자는 한없는 허물로 더럽혀져 애써도 벗어나기 어렵고, 삼세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논사는 조금 어긋남이 있어도 벗어나기 쉬우니, 지혜 있는 이는 없다고 비방하지 말라」(『순정리론』 권52, T29, 631b).

  1. 비바사사(『대비바사론』)
    삼세 실유
    법체항유
    작용의 유무로 삼세를 나눔(세우)
    풀지 못하는 것은「法性甚深非尋思境」
  2. 천친(경량부의 입장)
    「何礙用云何」작용의 딜레마
    「有聲通顯有無法故」「있다」의 두 뜻
    과거 = 일찍이 있었음, 미래 = 장차 있음
    「識通緣有非有境」
    업은 상속의 전변으로 결과를 낳음
    「如其所有而說有言」있는 그대로 있다고 말하라
    권20, T29, 105a~106b
  3. 중현(『순정리론』 권50~52)
    「非我宗言,過去未來如現實有」과거 · 미래는 실재하되 현재처럼은 아님
    작용 = 결과를 끌어당기는 공능, 법체와 같지도 다르지도 않음
    「相續無異體,許別有所作」
    경량부야말로 없는 것이 생긴다는 모순에 빠짐
도표 14 · 삼세실유 대론의 세 목소리

대론이 남긴 것 — 중관과 유식으로

이 대론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구사론』은 유부의 체계를 서술하는 논서로 동아시아에 전해졌지만, 그 서술 안에는 천친의 경량부적 비판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중현의 『순정리론』은 유부를 지키기 위해 쓰였지만, 그 방어 과정에서 「현재처럼은 아니다」, 「작용과 공능」,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같은 새 개념을 도입해야 했다. 정통파의 방어 자체가 정통파를 바꾸었다.

이 대론이 남긴 근본 물음 —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법에 그 자체의 본성(자성)이 있는가 — 은 이후 대승의 두 흐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용수의 중관이다. 『중론』은 과거 · 현재 · 미래가 서로 기대어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들어, 삼세 어느 것에도 자성이 없다고 논한다. 유부가 삼세에 걸쳐 「늘 있다」고 한 법체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식이다. 경량부의 「종자」는 유식에서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로 다시 세워지고, 「현재만 있다」는 경량부의 시간론은 「찰나의 식과 그 종자」의 체계 안에서 재구성된다. 『구사론』의 저자 천친이 뒤에 유식의 논서를 지었다고 전하는 것도 이 흐름을 상징한다. 이 물음이 중관 · 삼론과 유식 · 법상에서 각각 어떻게 다시 다루어지는지는 「논서 연구」의 뒤이은 갈래에서 본다.

천친은 「무엇이 작용을 막는가」, 「작용은 법과 같은가 다른가」, 「무엇이 생겨나고 사라지는가」를 물어 법체항유와 무상이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과거 · 미래의 「있음」을 「일찍이 있었음 · 장차 있음」으로 재해석한다. 업과 번뇌의 연속성은 현재 상속의 종자로 설명된다. 비바사사는 「법성은 깊다」로 물러서고, 중현은 「현재처럼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와 「작용과 공능」의 구별로 유부를 다시 세운다. 이 대론의 물음은 중관과 유식으로 이어진다.

제7장 번뇌가 일어나고 흐르는 방식누에서 개까지

본송

『구사론』 권20 · 분별수면품 · T29, 10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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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由未斷隨眠,及隨應境現, 非理作意起,說惑具因緣。

풀이

아직 끊지 않은 수면이 있고, 그에 맞는 대상이 나타나며,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非理作意)가 일어나는 것 — 이것을 미혹이 일어나는 인연을 갖춘 것이라 한다.

『구사론』 권20 · 분별수면품 · T29, 10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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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微細二隨增,隨逐與隨縛, 住流漂合執,是隨眠等義。

풀이

미세함, 두 가지 따라 자람, 따라다님과 따라 묶음, 그리고 머물게 함 · 흐름 · 떠내려 보냄 · 합침 · 붙잡음 — 이것이 수면 등(수면 · 누 · 폭류 · 액 · 취)의 뜻이다.

술어 풀이

漏누
범어 āsrava. 「새어 나오는 것」. 욕루 · 유루 · 무명루의 셋. 『구사론』은 유정을 생사에 머물게 하고(稽留), 여섯 상처의 문(六瘡門)으로 허물을 끝없이 새어 나오게 한다고 풀이한다.
瀑流폭류
범어 ogha. 「거센 물살」. 욕폭류 · 유폭류 · 견폭류 · 무명폭류의 넷. 선한 부류를 휩쓸어 떠내려 보낸다.
軛액
범어 yoga. 「멍에」. 넷이며 체는 폭류와 같다. 유정을 갖가지 괴로움과 합쳐 묶는다.
取취
범어 upādāna. 「붙잡음」. 욕취 · 견취 · 계금취 · 아어취의 넷. 십이연기의 「취」 지분이다.
結결
범어 saṃyojana. 「얽어 묶는 것」. 애 · 에 · 만 · 무명 · 견 · 취 · 의 · 질 · 간의 아홉 결. 또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이 있다.
縛박
범어 bandhana. 탐박 · 진박 · 치박의 셋. 세 가지 느낌(락 · 고 · 사)에 각각 대응한다.
隨煩惱수번뇌
범어 upakleśa. 근본 번뇌를 따라 일어나는 물든 심소. 근본 번뇌 자체도 「마음을 따라 괴롭히므로」 수번뇌라 불릴 수 있다.
纏 · 垢전 · 구
수번뇌 가운데 열(또는 여덟)을 전, 여섯을 번뇌구(煩惱垢)라 한다. 구는 「더럽혀진 모습이 거친 것」이다.
蓋개
범어 nīvaraṇa. 「덮개」. 욕탐개 · 진에개 · 혼면개 · 도회개 · 의개의 다섯. 계 · 정 · 혜 등 다섯 온(오분법신)을 가린다.

끊었으나 아직 묶인 경우

삼세실유의 대론을 「곁가지」로 마무리한 뒤 천친은 다시 묶임의 문제로 돌아온다. 어떤 일(법)에 대한 번뇌를 끊으면 그 일은 묶임에서 벗어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묶임에서 벗어났다면 반드시 끊은 것이지만, 끊었는데도 아직 묶여 있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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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於見苦已斷,餘遍行隨眠, 及前品已斷,餘緣此猶繫。

풀이

고제를 보아 이미 끊었어도 다른 (부류의) 편행 수면이, 그리고 앞의 품을 이미 끊었어도 나머지 (품의 수면이) 이것을 반연하면 여전히 묶인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6b)

견도에서 고제를 본 지혜(고지)는 이미 생겼지만 집제를 본 지혜(집지)는 아직 생기지 않은 순간을 생각해 보자. 견고소단의 일은 이미 끊었다. 그러나 견집소단의 편행 수면은 아직 남아 있고, 그것은 자기 지의 다섯 부류 전부를 반연하므로 이미 끊은 견고소단의 일도 여전히 반연하여 묶는다. 수도에서도 같다. 아홉 품 가운데 앞의 품을 끊었어도, 아직 끊지 않은 뒤의 품의 수면이 앞의 품을 반연하면 그것은 여전히 묶여 있다. 「끊음(斷)」과 「묶임에서 벗어남(離繫)」은 다르다. 끊음은 그 번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고, 묶임에서 벗어남은 그 일을 반연하는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어서 천친은 「어떤 일에 어떤 수면이 따라 자라는가」를 일일이 답하면 말이 너무 많아지므로 「간략한 비바사(略毘婆沙)」를 짓겠다고 한다. 모든 법을 삼계 × 오부 + 무루의 열여섯 가지로 묶고, 그것을 반연하는 식도 같은 열여섯 가지로 묶어, 어느 법이 어느 식의 대상이 되는지를 표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욕계의 견고 · 견집 · 수소단의 법은 다섯 식의 대상이 되고, 색계의 그것은 여덟 식, 무색계의 그것은 열 식의 대상이 되며, 무루법은 열 식의 대상이 된다(권20, T29, 106c). 「약간의 수고로 큰 물음의 흐름을 건너게 한다(雖勞少少功力,而能越渡大大問流)」는 것이 천친의 말이다. 아비달마가 왜 분류에 그토록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분류는 무한히 많은 개별 물음을 유한한 규칙으로 답하게 해 준다.

열 수면이 일어나는 순서

열 수면은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가. 천친은 한 게송으로 그 연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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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無明疑邪身,邊見戒見取, 貪慢瞋如次,由前引後生。

풀이

무명 · 의 · 사견 · 유신견, 변견 · 계금취 · 견취, 탐 · 만 · 진이 차례대로,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끌어내어 생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7a)

장행이 이 연쇄를 풀어 준다. 먼저 무명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모르고, 고제에서 도제까지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모르니 두 갈래 말을 들으면 의심한다 — 이것이 괴로움인가 아닌가. 의심에서 그릇된 들음과 생각으로 그릇된 결정이 생겨 고제를 부정한다(사견). 오취온에서 괴로움의 이치를 부정하니 그것을 「나」라고 확정한다(유신견). 「나」에 대한 집착에서 단 · 상의 극단을 집착한다(변견). 「나」에 대해 한 극단을 따라 집착하고는 그 집착이 청정하게 한다고 헤아린다(계금취). 청정하게 한다고 헤아리고는 반드시 그것이 뛰어나다고 집착한다(견취). 자기 견해를 깊이 사랑한다(탐). 사랑하여 그것을 믿고 높이 들어 남을 업신여긴다(만). 남이 자기와 다른 견해를 일으키면 참지 못하고 미워한다(진).

從此見取次引貪生,謂自見中情深愛故。從此貪後次引慢生,謂自見中深愛著已,恃生高舉U+238CB蔑他故。從此慢後次引生瞋,謂自見中深愛恃已,於他所起違己見中,情不能忍必憎嫌故。

이 견취에서 다음으로 탐을 끌어내니, 자기 견해를 마음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탐 뒤에 다음으로 만을 끌어내니, 자기 견해를 깊이 사랑하고 집착한 뒤 그것을 믿고 높이 들어 남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이 만 뒤에 다음으로 진을 끌어내니, 자기 견해를 깊이 사랑하고 믿은 뒤, 남이 일으킨 자기 견해와 어긋나는 견해에 대해 마음이 참지 못하여 반드시 미워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7b

이 연쇄는 견해의 번뇌가 어떻게 정서의 번뇌로 번지는지를 보여 준다. 모르는 데서 시작하여, 의심을 거쳐 그릇된 확신이 되고, 그 확신이 「나」를 세우며, 「나」의 견해를 사랑하고 높이며, 끝내 다른 견해를 가진 이를 미워하게 된다. 품 첫 게송에서 본 천친의 해석 — 게송의 「亦」은 만 등이 탐의 힘으로 자란다는 뜻 — 이 이 연쇄에서 근거를 얻는다. 다만 천친은 이것이 「차례대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 것이며, 차례를 건너뛰어 일어나는 경우는 앞뒤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덧붙인다.

  1. 1무명진리를 모름
  2. 2의두 갈래 말에 망설임
  3. 3사견그릇된 결정으로 고제를 부정
  4. 4유신견오취온을 「나」로 확정
  5. 5변집견「나」를 단 · 상으로 집착
  1. 6계금취그 집착이 청정하게 한다고 헤아림
  2. 7견취그것이 뛰어나다고 집착
  3. 8탐자기 견해를 깊이 사랑
  4. 9만믿고 높이 들어 남을 업신여김
  5. 10진다른 견해를 참지 못해 미워함
견의 성질
「無明疑邪身,邊見戒見取,貪慢瞋如次,由前引後生」권20, T29, 107a~b
이것은 차례대로 일어날 때이며, 건너뛰어 일어날 때는 앞뒤가 정해져 있지 않다
도표 15 · 열 수면이 일어나는 연쇄

번뇌가 일어나는 세 조건

번뇌는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는가. 본송의 답은 셋이다. 끊지 않은 수면, 그에 맞는 대상의 출현,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 장행은 욕탐의 예를 든다.

且如將起欲貪纏時,未斷未遍知欲貪隨眠故,順欲貪境現在前故,緣彼非理作意起故,由此力故便起欲貪。此三因緣如其次第,即因境界加行三力。

예를 들어 욕탐의 전이 일어나려 할 때, 욕탐 수면을 아직 끊지 않고 두루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욕탐에 맞는 대상이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며, 그것을 반연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니, 이 힘으로 말미암아 욕탐이 일어난다. 이 세 인연은 차례대로 원인 · 대상 · 가행의 세 힘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7b

원인의 힘(수면), 대상의 힘(경계), 가행의 힘(작의). 이 세 조건 분석은 그대로 수행의 처방이 된다. 수면을 끊거나, 대상을 피하거나, 주의를 바르게 하면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천친은 이것이 「인연을 다 갖춘 경우」를 말한 것이며, 때로는 대상의 힘만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라한의 지위에서 물러날 수 있는 근기(退法)의 아라한이 그 예다. 수면을 이미 끊었는데도 강한 대상을 만나 번뇌가 일어나 아라한의 지위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누 · 폭류 · 액 · 취

경전은 같은 번뇌를 다른 이름으로도 부른다. 누(漏) · 폭류(瀑流) · 액(軛) · 취(取)다. 『구사론』은 이것들의 체를 정확히 셈한다.

세 누(三漏). 욕계의 번뇌와 전에서 무명(치)을 뺀 것이 욕루다. 그 수는 마흔하나다 — 욕계의 근본 번뇌 서른여섯에서 무명 다섯을 뺀 서른하나에 열 전을 더한 것이다. 색계 · 무색계의 근본 번뇌에서 무명을 뺀 것이 유루다. 그 수는 쉰둘이다 — 위 두 세계 각각 서른하나에서 무명 다섯을 뺀 스물여섯씩이다. 삼계의 무명 열다섯이 무명루다.

欲界煩惱并纏,除癡,四十一物總名欲漏,謂欲界繫根本煩惱三十一并十纏。色無色界煩惱除癡,五十二物總名有漏,謂上二界根本煩惱各二十六。

욕계의 번뇌와 전에서 치를 뺀 마흔한 가지를 통틀어 욕루라 하니, 욕계에 매인 근본 번뇌 서른하나와 열 전이다. 색계 · 무색계의 번뇌에서 치를 뺀 쉰두 가지를 통틀어 유루라 하니, 위 두 세계의 근본 번뇌 각각 스물여섯이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7c

왜 위 두 세계를 합쳐 하나의 「유루」로 삼는가. 둘 다 무기이고, 안쪽 문으로 구르며, 선정의 지(地)에 의지해 일어나는 세 가지가 같기 때문이다. 왜 무명만 따로 하나의 누로 세우는가. 「무명이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無明能為諸有本故)」.

네 폭류 · 네 액(四瀑流 · 四軛). 체는 누와 같으나 견을 따로 떼어 견폭류 · 견액으로 세운다. 견은 날카롭고 맹렬하여(猛利) 「머물게 하는」 누의 뜻과는 맞지 않지만, 휩쓸어 떠내려 보내는 폭류의 뜻에는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폭류는 스물아홉(탐 · 진 · 만 각 다섯, 의 넷, 전 열), 유폭류는 스물여덟(탐 · 만 각 열, 의 여덟), 견폭류는 서른여섯(삼계 각 열둘의 견), 무명폭류는 열다섯이다(권20, T29, 107c). 네 액은 네 폭류와 같다.

네 취(四取). 욕취 · 견취 · 계금취 · 아어취(我語取)다. 액에서 무명을 각각 욕취와 아어취에 합치고, 견을 계금취와 나머지(견취)로 나눈다. 욕취는 서른넷, 아어취(위 두 세계의 유)는 서른여덟, 견취는 서른, 계금취는 여섯이다. 왜 계금취만 따로 세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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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由此獨為聖道怨故,雙誑在家出家眾故。謂在家眾由此誑惑,計自餓等為天道故。諸出家眾由此誑惑,計捨可愛境為清淨道故。

풀이

이것만이 홀로 성도의 원수이기 때문이고, 재가와 출가의 무리를 함께 속이기 때문이다. 재가의 무리는 이것에 속아 스스로 굶는 것 등을 하늘에 나는 길이라 헤아리고, 출가의 무리는 이것에 속아 좋아하는 대상을 버리는 것(만)을 청정의 길이라 헤아린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8a)

재가자의 고행과 출가자의 금욕주의 — 둘 다 「길 아닌 것을 길로 보는」 계금취의 함정이다. 금욕 자체가 해탈의 길이라 여기는 것은 출가 수행자가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다. 무명은 왜 따로 취가 되지 않는가. 「취」는 존재를 붙잡는 것인데, 무명은 모양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날카롭지 않아 붙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네 이름의 뜻은 본송이 「머물게 함(住) · 흐름(流) · 떠내려 보냄(漂) · 합침(合) · 붙잡음(執)」으로 정리한다. 누는 유정을 생사에 오래 머물게 하거나 유정천에서 무간지옥까지 흘러 다니게 하며, 여섯 감각의 상처 문으로 허물을 끝없이 새어 나오게 한다. 폭류는 선한 부류를 휩쓸어 떠내려 보낸다. 액은 유정을 갖가지 괴로움과 합친다. 취는 의지하여 붙잡는다. 천친은 「잘 풀이하려면」 누를 이렇게 풀어야 한다며 경전의 비유를 든다.

譬如挽船逆流而上,設大功用行尚為難。若放此船順流而去,雖捨功用行不為難。起善染心應知亦爾。

비유하면 배를 끌고 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큰 힘을 들여도 나아가기 어렵지만, 이 배를 놓아 물결을 따라가게 하면 힘을 버려도 나아가기 어렵지 않은 것과 같다. 선한 마음과 물든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구사론』 권20 분별수면품, T29, 108b

번뇌는 물결을 따라 흐르는 배처럼 저절로 흘러간다. 선한 마음은 물결을 거슬러 배를 끄는 것처럼 힘이 든다. 대상을 만나면 번뇌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누라 하고, 그 기세가 거세어지면 폭류라 한다. 폭류에 빠진 이는 거스르지 못하고 따라갈 뿐이다.

세 누
  • 욕루41욕계 근본 번뇌 31 + 전 10, 무명 제외
  • 유루52위 두 세계 근본 번뇌 각 26, 무명 제외
  • 무명루15삼계의 무명
네 폭류 · 네 액
  • 욕29
  • 유28
  • 견36견을 따로 세움: 「猛利故」
  • 무명15
네 취
  • 욕취34무명 포함
  • 아어취38무명 포함
  • 견취30
  • 계금취6「獨為聖道怨故,雙誑在家出家眾故」
무명은 따로 취가 되지 않음(「非能取故」)
다섯 이름의 뜻「住流漂合執」
  • 수면미세 · 수증 · 수축 · 수박
  • 누머물게 함
  • 폭류떠내려 보냄
  • 액합침
  • 취붙잡음
권20, T29, 107b~108b
도표 16 · 누 · 폭류 · 액 · 취의 체

결 — 아홉 결, 오하분결, 오상분결

권21은 「번뇌에는 다시 결 · 박 · 수면 · 수번뇌 · 전의 다섯 이름이 있다」로 시작한다. 먼저 결(結)이다. 결은 아홉이다 — 애결 · 에결 · 만결 · 무명결 · 견결 · 취결 · 의결 · 질결 · 간결. 견을 둘로 나누어 세 견(유신견 · 변집견 · 사견)을 견결, 두 취(견취 · 계금취)를 취결로 삼은 것은 「물건의 수가 같고 취하는 것이 같기 때문(物取等)」이다. 세 견과 두 취는 각각 열여덟 가지로 수가 같고, 세 견은 취해지는 것이며 두 취는 취하는 것이다. 왜 수번뇌 가운데 질투와 인색만 결이 되는가. 오직 이 둘만이 순전히 불선이며 홀로 일어나기(自在起) 때문이다. 천친은 여기에 이견을 붙인다. 전이 여덟이라면 이 해석이 맞지만, 전을 열로 세우는 비바사사의 설을 따르면 분노(忿)와 숨김(覆)도 같은 두 조건을 갖추므로 이 해석은 맞지 않다. 그러니 차라리 질투와 인색이 「자주 일어나고, 천함과 가난의 원인이 되며, 출가자와 재가자를 함께 괴롭히기 때문에」 허물이 특히 무겁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권21, T29, 108c).

부처는 다른 곳에서 결을 다섯으로 말한다. 오하분결(五順下分結)이다.

謂有身見、戒禁取、疑、欲貪、瞋恚。何緣此五名順下分?此五順益下分界故。謂唯欲界得下分名,此五於彼能為順益。由後二種不能超欲界,設有能超由前三還下,如守獄卒防邏人故。

유신견 · 계금취 · 의 · 욕탐 · 진에다. 무슨 까닭으로 이 다섯을 순하분이라 하는가. 이 다섯은 아래 부분의 세계를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욕계가 아래 부분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이 다섯은 그곳을 이롭게 한다. 뒤의 둘 때문에 욕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혹 넘어서더라도 앞의 셋 때문에 아래로 돌아온다. 감옥을 지키는 옥졸과 순찰하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08c~109a

욕탐과 진에는 옥졸처럼 욕계라는 감옥 안에 가두고, 유신견 · 계금취 · 의는 순찰하는 사람처럼 혹 빠져나가도 다시 붙잡아 온다. 예류과를 얻은 이는 여섯 번뇌(유신견 · 변집견 · 계금취 · 견취 · 사견 · 의)를 끊는데 왜 경전은 「세 결을 끊는다」고만 하는가. 끊는 것의 세 문(한 부류에만 있는 것, 두 부류에 걸친 것, 네 부류에 걸친 것)을 각각 대표하기 때문이고, 변집견은 유신견을, 견취는 계금취를, 사견은 의를 따르므로 그 뿌리 셋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 먼 곳으로 가려는 사람에게 세 장애 — 떠나려 하지 않음, 길을 잘못 듦, 길을 의심함 — 가 있듯이, 해탈로 가는 이에게도 유신견(해탈을 두려워해 떠나려 하지 않음), 계금취(그릇된 길에 의지함), 의(길을 의심함)의 세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권21, T29, 109a).

오상분결(五順上分結)은 색탐 · 무색탐 · 도거 · 만 · 무명이다. 이 다섯이 끊어지지 않으면 위의 세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박 · 수번뇌 · 전 · 구

세 박(三縛). 탐박 · 진박 · 치박이다. 셋인 까닭은 세 느낌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에서는 탐박이, 괴로운 느낌에서는 진박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는 치박이 대상과 상응 두 곳에서 따라 자란다.

수번뇌(隨煩惱). 본송은 짧게 「수번뇌는 이것 밖의 물든 마음의 행온(隨煩惱此餘,染心所行蘊)」이라 한다. 근본 번뇌도 「마음을 따라 괴롭히므로」 수번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 밖에, 근본 번뇌와 다르면서 물든 심소로서 행온에 속하는 것이 근본 번뇌를 따라 일어나므로 수번뇌라 불린다. 이것들은 근본이 아니므로 번뇌라고는 하지 않는다. 『구사론』은 「그 모습을 자세히 늘어놓는 것은 「잡사(雜事)」에서와 같다(廣列彼相如雜事中)」고 하고, 여기서는 전과 구만 간략히 다룬다(권21, T29, 109b). 보광과 법보는 이 「잡사」가 『법온족론』 제9권 「잡사품」이라고 주석한다(『구사론기』 권21, T41, 321a). 『구사론』 근품에서 이미 수번뇌에 해당하는 심소들을 대번뇌지법 · 대불선지법 · 소번뇌지법 · 부정지법으로 나누어 열거했다(→ 마음과 인과의 체계). 수면품은 그 가운데 전과 구에 들어가는 열여섯을 다시 정리한다.

전 여덟 · 열(八纏 · 十纏).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纏八無慚愧,嫉慳并悔眠, 及掉舉惛沈,或十加忿覆。

풀이

전은 여덟이니 무참 · 무괴 · 질 · 간과 회 · 면, 그리고 도거 · 혼침이다. 혹은 열이니 분 · 부를 더한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09b)

『품류족론』은 전을 여덟으로, 비바사종은 열로 센다. 그리고 각각이 어느 근본 번뇌의 등류(같은 부류의 결과)인지를 밝힌다 — 무참 · 간 · 도거는 탐의 등류, 무괴 · 면 · 혼침은 무명의 등류, 질 · 분은 진의 등류, 회는 의의 등류다. 부(숨김)는 탐의 등류라는 설, 무명의 등류라는 설, 둘 다라는 설이 있다. 아는 이가 숨기는 것은 탐 때문이고 모르는 이가 숨기는 것은 무명 때문이라는 것이다.

번뇌구 여섯(六垢). 뇌(惱) · 해(害) · 한(恨) · 첨(諂) · 광(誑) · 교(憍)다. 뇌는 허물 있는 일을 굳게 고집하여 이치에 맞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해는 남을 핍박하는 것, 한은 분노의 대상을 거듭 생각해 원한을 맺고 놓지 않는 것, 첨은 마음이 굽어 자기를 사실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 광은 남을 속이는 것, 교는 자기를 뽐내는 것이다. 광 · 교는 탐의, 해 · 한은 진의, 뇌는 견취의, 첨은 모든 견해의 등류다. 왜 첨이 견해의 등류인가. 경전에 「무엇이 굽은 것인가. 모든 그릇된 견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중현은 분노와 원한의 차이를 이렇게 그린다. 분노는 자작나무 껍질에 붙은 불처럼 그 모습은 맹렬하지만 남은 기세는 약하고, 원한은 겨울 방의 온기처럼 그 모습은 가볍지만 남은 기세는 강하다(『순정리론』 권54, T29, 646c).

이 전과 구는 어디에 속하는가. 무참 · 무괴 · 면 · 혼침 · 도거의 다섯 전은 견소단 · 수소단에 걸치고, 나머지 전과 구는 홀로 일어나므로 수소단뿐이다. 욕계의 면 · 혼침 · 도거는 불선 · 무기에 걸치고 나머지는 불선이며, 위 두 세계의 것은 모두 무기다. 첨 · 광은 욕계와 초선에만 있다. 그 근거로 『구사론』은 대범천왕이 자기 사정을 숨기고 모습을 꾸며 마승(馬勝) 비구를 속인 일을 든다. 혼침 · 도거 · 교는 삼계에 걸치고, 나머지 열하나는 욕계에만 있다(권21, T29, 109c~110a).

  • 전무참간도거
    탐의 등류
    구광교
  • 전질분
    진의 등류
    구해한
  • 전무괴면혼침
    무명의 등류
    구
  • 전회
    의의 등류
    구
  • 전부
    탐 또는 무명 또는 둘의 등류
    구
  • 전
    견취의 등류
    구뇌
  • 전
    모든 견해의 등류
    구첨
소단: 무참 · 무괴 · 면 · 혼침 · 도거는 견소단 · 수소단, 나머지는 「自在故唯修」 수소단만계: 첨 · 광은 욕계와 초선, 혼침 · 도거 · 교는 삼계, 나머지 열하나는 욕계만
권21, T29, 109b~110a
도표 17 · 수번뇌 — 전 열과 구 여섯

「수번뇌 19」라는 헤아림에 대해: 『구사론』 근품의 심소 분류에서 근본 번뇌 밖의 물든 심소를 모으면, 대번뇌지법 가운데 무명을 뺀 다섯(방일 · 해태 · 불신 · 혼침 · 도거), 대불선지법 둘(무참 · 무괴), 소번뇌지법 열(분 · 부 · 간 · 질 · 뇌 · 해 · 한 · 첨 · 광 · 교), 부정지법 가운데 둘(악작 · 수면)로 열아홉이 된다(권4, T29, 19c~20a). 수면품 자체는 이 목록을 다시 늘어놓지 않고 「잡사」로 넘기며, 그 가운데 전과 구에 들어가는 열여섯만 다룬다. 보광은 불신 · 해태 · 방일 셋이 전 · 구에 들지 않는 까닭을 「허물이 가볍고 없애기 쉽기 때문」이라는 『입아비달마론』의 말로 설명한다(『구사론기』 권21, T41, 321b). 중현은 경전이 「스물한 가지 수번뇌」를 말한다고 전한다(『순정리론』 권54, T29, 645c).

번뇌와 느낌, 그리고 의식

수면품은 이어서 각 번뇌가 어느 식에 의지하고 어느 느낌(受)과 상응하는지를 정리한다. 견소단의 번뇌, 만, 면, 홀로 일어나는 수번뇌는 모두 의식에서만 일어나고, 나머지는 여섯 식 모두에서 일어난다. 욕계의 번뇌 가운데 탐은 기쁨 · 즐거움과, 진은 근심 · 괴로움과, 무명은 넷 모두와, 사견은 근심 · 기쁨과, 의는 근심과, 나머지 넷(네 견과 만)은 기쁨과 상응한다. 그리고 모든 번뇌는 버림(捨受)과 상응한다. 「모든 수면은 상속이 끊어지는 자리에서 세력이 다하여 반드시 버림의 느낌에 머물기 때문이다(以諸隨眠相續斷位勢力衰歇必住捨受)」(권21, T29, 110b).

사견은 왜 기쁨과 근심 두 쪽에 다 상응하는가. 앞서 죄를 지은 이는 「인과가 없다」는 사견에 기뻐하고, 앞서 복을 지은 이는 같은 사견에 근심하기 때문이다. 의는 왜 근심과만 상응하는가. 망설이는 사람은 확실히 알고자 하여 마음이 근심스럽기 때문이다. 아비달마의 분류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다섯 덮개 — 오개

마지막으로 부처가 「덮개(蓋)」라고 부른 다섯이 있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蓋五唯在欲,食治用同故, 雖二立一蓋,障蘊故唯五。

풀이

덮개는 다섯이며 오직 욕계에 있다. 먹이 · 다스림 · 작용이 같으므로 둘이지만 하나의 덮개로 세운다. 온(蘊)을 가리므로 다섯뿐이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0c)

욕탐개 · 진에개 · 혼면개(혼침과 수면) · 도회개(도거와 악작) · 의개다. 혼침 · 도거 · 의는 삼계에 걸치는데 왜 덮개는 욕계에만 있는가. 경전이 이 다섯을 「순전히 원만한 불선의 덩어리」라 했고, 위 두 세계에는 불선이 없기 때문이다. 혼침과 수면, 도거와 악작은 각각 둘인데 왜 하나의 덮개로 묶는가. 「먹이(食) · 다스림(治) · 작용(用)이 같기 때문」이다. 혼면개의 먹이는 흐릿함 · 즐겁지 않음 · 기지개 · 음식의 불균형 · 마음의 가라앉음의 다섯이고, 다스림은 「빛의 생각(光明想)」이며, 작용은 둘 다 마음을 가라앉혀 어둡게 하는 것이다. 도회개의 먹이는 친척 생각 · 나라 생각 · 죽지 않음에 대한 생각 · 옛날 즐겁게 놀던 일의 회상의 넷이고, 다스림은 사마타(止)이며, 작용은 둘 다 마음을 고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가 덮는 성질이 있는데 왜 이 다섯만 덮개라 하는가.

唯此於五蘊能為勝障故。謂貪恚蓋能障戒蘊,惛沈睡眠能障慧蘊,掉舉惡作能障定蘊,定慧無故於四諦疑,疑故能令乃至解脫解脫智見皆不得起,故唯此五建立為蓋。

오직 이것들이 다섯 온에 대해 뛰어난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탐 · 에의 덮개는 계온을 가리고, 혼침 · 수면은 혜온을 가리며, 도거 · 악작은 정온을 가린다. 정과 혜가 없으므로 사제에 대해 의심하고, 의심 때문에 해탈과 해탈지견까지 모두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다섯만 덮개로 세운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0c

여기서 「다섯 온」은 색 · 수 · 상 · 행 · 식이 아니라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의 다섯, 곧 무학의 다섯 법온(오분법신)이다. 천친은 이 해석에도 의문을 단다. 정이 있어야 혜가 생기므로 정을 가리는 도회개가 혜를 가리는 혼면개보다 먼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논사는 혼면개가 정을, 도회개가 혜를 가린다고 하고, 경전의 「등지를 닦는 이는 혼면을 두려워하고, 택법을 닦는 이는 도회를 두려워한다」를 근거로 든다. 또 다른 논사는 수행의 단계로 다섯을 설명한다. 행위의 자리에서 좋고 싫은 모습을 취하면 머무는 자리에서 탐 · 에가 일어나 선정에 들려는 마음을 막고, 선정에 들어서는 혼면 · 도회가 지(止)와 관(觀)을 막으며, 선정에서 나와 법을 살필 때는 의가 막는다는 것이다(권21, T29, 111a).

결
아홉 결애 · 에 · 만 · 무명 · 견(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취(견취 · 계금취) · 의 · 질 · 간
오하분결유신견 · 계금취 · 의 · 욕탐 · 진에「如守獄卒防邏人故」옥졸(욕탐 · 진에)과 순찰자(나머지 셋)
오상분결색탐 · 무색탐 · 도거 · 만 · 무명
박세 박
  • 탐박(즐거운 느낌)
  • 진박(괴로운 느낌)
  • 치박(버림의 느낌)
개다섯 덮개(욕계에만)
  • 욕탐개 · 진에개계온을 가림
  • 혼면개먹이: 흐릿함 등 다섯다스림: 빛의 생각혜온을 가림
  • 도회개먹이: 친척 생각 등 넷다스림: 사마타정온을 가림
  • 의개해탈 · 해탈지견을 막음
권21, T29, 108c~110c
도표 18 · 결 · 박 · 개 — 요점

번뇌는 끊지 않은 수면 · 대상 ·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의 세 조건으로 일어나며, 무명에서 진에 이르는 연쇄로 번진다. 같은 번뇌가 그 작용에 따라 누(머물게 함) · 폭류(떠내려 보냄) · 액(합침) · 취(붙잡음) · 결(얽어맴) · 박(느낌에 묶음) · 개(덮음)로 불린다. 근본 번뇌를 따라 일어나는 수번뇌 가운데 열은 전, 여섯은 구다. 이 이름들의 체를 하나하나 셈하는 것은, 번뇌를 그 작용의 측면에서 빠짐없이 알아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8장 끊는다는 것네 가지 원인과 아홉 편지

본송

『구사론』 권21 · 분별수면품 · T29, 11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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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遍知所緣故,斷彼能緣故, 斷彼所緣故,對治起故斷。

풀이

대상을 두루 알기 때문에, 그것을 반연하는 것을 끊기 때문에, 그것의 대상을 끊기 때문에, 대치가 일어나기 때문에 끊어진다.

『구사론』 권21 · 분별수면품 · T29, 112a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斷遍知有九,欲初二斷一, 二各一合三,上界三亦爾, 餘五順下分,色一切斷三。

풀이

끊음의 편지(遍知)는 아홉이다. 욕계의 처음 두 (부류의) 끊음이 하나, (다음) 둘이 각각 하나이니 합해 셋이고, 위의 세계의 셋도 그러하다. 나머지는 오하분 · 색(애) · 일체(결)의 끊음의 셋이다.

술어 풀이

斷단
범어 prahāṇa. 번뇌를 끊음. 유부에서 끊음이란 번뇌의 득(得)이 끊어지고 그 번뇌에서 떠난 상태의 득, 곧 이계득이 생기는 것이다.
對治대치
범어 pratipakṣa. 번뇌를 다스리는 도. 단대치 · 지대치 · 원분대치 · 염환대치의 네 가지가 있다.
無間道 · 解脫道무간도 · 해탈도
번뇌를 바로 끊는 찰나의 도(무간도)와, 끊은 직후 그 끊음을 확인하여 이계득과 함께 일어나는 도(해탈도).
離繫得이계득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택멸)를 그 사람의 상속에 「지니게 하는」 득. 같은 이계가 더 뛰어난 득으로 거듭 얻어질 수 있다.
遍知편지
범어 parijñā. 「두루 앎」. 무루의 지혜인 지편지(智遍知)와, 그 지혜의 결과인 끊음 자체를 원인의 이름으로 부른 단편지(斷遍知)의 둘이 있다. 단편지는 아홉 가지로 세운다.
滅雙因멸쌍인
두 원인을 없앰. 어떤 부류의 번뇌를 끊을 때, 그 부류 자체의 번뇌와 그것을 낳는 다른 부류의 편행인을 함께 없애는 것.
越界월계
한 세계의 번뇌를 남김없이 떠나 그 세계를 넘어서는 것.
九品구품
수도에서 끊는 번뇌를 강약에 따라 상상품에서 하하품까지 아홉으로 나눈 것. 약한 도가 강한 번뇌를, 강한 도가 약한 번뇌를 끊는다.

대상을 알지 못해도 끊어지는 번뇌

수면품의 마지막 주제는 끊음이다. 천친은 문제를 이렇게 세운다.

今應思擇,他界遍行及見滅道斷有漏緣,諸惑於彼斷位不知彼所緣,知彼所緣時而彼不斷。如是諸惑斷由何因?非要遍知所緣故斷。

이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편행과, 견멸 · 견도소단 가운데 유루를 반연하는 미혹들은, 그것이 끊어지는 자리에서 그 대상을 알지 못하고, 그 대상을 알 때에는 그것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런 미혹들은 무엇 때문에 끊어지는가. 반드시 대상을 두루 알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1a

보통 번뇌는 그 번뇌가 미혹한 대상을 바로 알면 끊어진다. 고제에 대한 미혹은 고제를 알면 끊어진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욕계에 속하면서 색계를 반연하는 편행 수면은, 그것이 끊어지는 욕계의 견도 자리에서 그 대상인 색계를 아직 보지 않는다. 또 견멸 · 견도소단 가운데 유루법(예를 들어 다른 견해)을 반연하는 미혹은, 그것이 끊어지는 멸제 · 도제의 견도 자리에서 그 유루 대상을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무엇 때문에 끊어지는가. 천친의 답은 끊음의 원인이 넷이라는 것이다.

네 가지 끊음의 원인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且見所斷惑,斷由前三因:一由遍知所緣故斷,謂見苦集斷自界緣,及見滅道斷無漏緣。二由斷彼能緣故斷,謂見苦集斷他界緣,以自界緣能緣於彼,能緣若斷彼隨斷故。三由斷彼所緣故斷,謂見滅道斷有漏緣,以無漏緣能為彼境,所緣若斷彼隨斷故。若修所斷惑,斷由後一因,謂但由第四對治起故斷。

풀이

견소단의 미혹은 앞의 세 원인으로 끊어진다. 첫째, 대상을 두루 알기 때문에 끊어지니, 견고 · 견집소단 가운데 자기 세계를 반연하는 것과 견멸 · 견도소단 가운데 무루를 반연하는 것이다. 둘째, 그것을 반연하는 것을 끊기 때문에 끊어지니, 견고 · 견집소단 가운데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자기 세계를 반연하는 것이 그것을 반연할 수 있으므로, 반연하는 것이 끊어지면 그것도 따라 끊어지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의 대상을 끊기 때문에 끊어지니, 견멸 · 견도소단 가운데 유루를 반연하는 것이다. 무루를 반연하는 것이 그것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대상이 끊어지면 그것도 따라 끊어지기 때문이다. 수소단의 미혹은 뒤의 한 원인으로 끊어지니, 오직 넷째 대치가 일어나기 때문에 끊어진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1a)

네 원인을 하나씩 보자. 첫째는 가장 기본적인 경우로, 미혹이 반연하는 대상을 지혜로 두루 알면 그 미혹이 끊어진다. 둘째는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편행 수면의 경우다. 그것은 자기 세계를 반연하는 편행 수면에 기대어 일어나므로, 그 기대는 쪽(능연)이 끊어지면 함께 끊어진다. 셋째는 견멸 · 견도소단 가운데 유루를 반연하는 미혹이다. 예를 들어 「멸은 없다」는 사견(무루 반연)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집착하는 견취(유루 반연)는, 그 대상인 사견이 끊어지면 함께 끊어진다. 넷째는 수소단의 미혹이다. 이것은 견도의 지혜가 아니라 수도의 대치도가 일어날 때 그 품의 미혹이 한꺼번에 끊어진다. 상상품의 미혹은 하하품의 도가, 하하품의 미혹은 상상품의 도가 끊는다. 거친 번뇌는 약한 도로도 끊어지고, 미세한 번뇌는 가장 강한 도가 있어야 끊어진다.

중현은 품 첫머리에서 수면을 살필 관점들을 늘어놓으면서 이 네 원인을 「대상을 두루 알아서 끊는 것, 대상을 끊어 없애서 끊는 것, 도와주는 것을 영원히 해쳐서 끊는 것, 상속을 청정하게 하여 끊는 것」으로 표현한다(『순정리론』 권45, T29, 596b). 이름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네 문이다.

①「遍知所緣故」대상을 두루 앎
견고 · 견집소단 가운데 자기 세계를 반연하는 것견멸 · 견도소단 가운데 무루를 반연하는 것
②「斷彼能緣故」그것을 반연하는 것을 끊음
견고 · 견집소단 가운데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것
자기 세계를 반연하는 편행이 끊어지면 따라 끊어짐
③「斷彼所緣故」그것의 대상을 끊음
견멸 · 견도소단 가운데 유루를 반연하는 것
그 대상인 무루 반연의 미혹이 끊어지면 따라 끊어짐
④「對治起故」대치가 일어남
수소단의 미혹
아홉 품: 하하품의 도가 상상품의 미혹을, 상상품의 도가 하하품의 미혹을 끊음
견소단은 ①~③수소단은 ④
권21, T29, 111a
도표 19 · 번뇌가 끊어지는 네 가지 원인

네 가지 대치

대치는 몇 가지인가. 『구사론』은 넷을 든다 — 끊는 대치(斷對治, 무간도), 지니는 대치(持對治, 무간도 뒤의 해탈도, 그 끊음의 득을 지니게 함), 멀어지게 하는 대치(遠分對治, 해탈도 뒤의 도, 끊은 미혹을 더 멀어지게 함), 싫어하는 대치(厭患對治, 이 세계의 허물을 보고 깊이 싫어하는 도). 그리고 천친은 「잘 말하려면」 순서를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수행의 실제 순서는 먼저 고제 · 집제를 반연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가행도(염환대치), 다음에 끊는 무간도(단대치), 다음에 지니는 해탈도(지대치), 마지막으로 더 나아가는 승진도(원분대치)라는 것이다(권21, T29, 111b).

「멀다」는 것의 네 가지 뜻 — 다시 삼세로

「멀어지게 하는 대치」를 말하다가 천친은 「멀다(遠)」는 것에 몇 가지 뜻이 있는지를 묻는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遠性有四種,謂相治處時, 如大種尸羅,異方二世等。

풀이

멂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모습 · 다스림 · 장소 · 때의 멂이다. 대종, 계(尸羅), 다른 방향, 두 세 등과 같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1b)

넷 대종은 한 덩어리 안에 함께 있어도 모습이 달라 서로 「멀다」. 계를 지킴과 어김은 한 몸에 있어도 서로 다스리므로 「멀다」.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는 한 세계 안에 있어도 장소가 떨어져 「멀다」. 과거와 미래는 한 법 위에 함께 세워져 있어도 때가 떨어져 「멀다」.

이 넷째 「때의 멂」에서 천친은 다시 삼세 문제를 건드린다. 과거와 미래는 무엇을 기준으로 멀다고 하는가.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막 사라진 과거와 막 생기려는 미래는 현재와 바로 붙어 있는데 어떻게 멀다고 하는가. 세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면, 현재도 과거 · 미래와 세의 성질이 다르니 멀다고 해야 한다. 과거 · 미래에는 작용이 없어서 멀다고 하면, 무위법도 작용이 없는데 무위법은 가깝다고 하지 않는가. 천친은 결론짓는다.

若依正理,應說去來離法自相故名為遠,未來未得法自相故、過去已捨法自相故。

바른 이치에 따른다면, 과거 · 미래는 법의 자상(自相)을 떠났기 때문에 멀다고 해야 한다. 미래는 아직 법의 자상을 얻지 못했고, 과거는 이미 법의 자상을 버렸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1c

이것은 은근한 경량부의 결론이다. 과거와 미래가 「먼」 것은 그것이 법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직 그 모습을 얻지 못했고 과거는 이미 버렸다. 법의 자상은 오직 현재에만 있다. 삼세실유 대론이 「곁가지」로 마무리된 지 한 권 뒤, 수행론의 한구석에서 같은 물음이 다시 고개를 든다. 『구사론』이라는 논서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다시 끊는 일은 없고, 다시 얻는 일은 있다

도가 점점 뛰어나지면 이미 끊은 미혹을 다시 끊는가. 얻은 이계를 다시 얻는가.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諸惑無再斷,離繫有重得, 謂治生得果,練根六時中。

풀이

미혹은 다시 끊는 일이 없지만, 이계는 거듭 얻는 일이 있다. 대치가 생길 때, 과를 얻을 때, 근을 단련할 때의 여섯 때에.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1c)

미혹은 그것을 끊는 도가 일어나면 그 도로 한꺼번에 끊어지고, 뒤에 다시 끊는 일은 없다. 그러나 끊어서 얻은 이계(택멸)는, 도가 나아갈 때마다 더 뛰어난 득으로 거듭 얻어질 수 있다. 그 때는 여섯이다 — 대치도(해탈도)가 일어날 때, 예류 · 일래 · 불환 · 아라한의 네 과를 얻을 때, 근기를 단련해 바꿀 때(練根). 같은 열반이라도 그것을 지니는 득이 점점 뛰어나진다. 유부의 「득」 개념이 수행의 진전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구사론』은 이어서 어느 부류의 이계가 몇 번의 때에 거듭 얻어지는지를 일일이 센다 — 욕계 견사제소단과 위 두 세계 견삼제소단의 이계는 여섯 때 모두, 위 두 세계의 견도소단은 다섯 때, 욕계 수소단의 처음 다섯 품은 다섯 때 하는 식이다(권21, T29, 112a).

아홉 편지 — 끊음에 이름을 붙이는 법

끊음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다. 견도 · 수도의 삼계 아흔여덟 수면, 수도의 아홉 지 각 아홉 품. 그 모든 끊음 하나하나를 「편지(遍知)」라 부르지는 않는다. 편지에는 둘이 있다. 무루의 지혜 자체인 지편지와, 그 지혜의 결과인 끊음을 원인의 이름으로 부른 단편지다. 단편지는 아홉으로 세운다.

諸斷總立九種遍知,謂三界繫見諦所斷煩惱等斷立六遍知,所餘三界修道所斷煩惱等斷立三遍知。

모든 끊음에 통틀어 아홉 가지 편지를 세운다. 삼계에 매인 견제소단 번뇌 등의 끊음에 여섯 편지를 세우고, 나머지 삼계의 수도소단 번뇌 등의 끊음에 세 편지를 세운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2a

견도의 여섯은 이렇다. 욕계의 견고 · 견집소단의 끊음이 하나, 견멸소단의 끊음이 하나, 견도소단의 끊음이 하나 — 욕계에 셋. 위 두 세계를 합쳐 같은 방식으로 셋. 수도의 셋은 욕계 수소단의 끊음(오하분결이 다한 편지), 색계 수소단의 끊음(색애가 다한 편지), 무색계 수소단의 끊음(모든 결이 영원히 다한 편지)이다.

왜 모든 끊음마다 편지를 세우지 않고 이 아홉 자리에만 세우는가. 네 가지 조건 때문이다.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得無漏斷得,及缺第一有, 滅雙因越界,故立九遍知。

풀이

무루의 끊음의 득을 얻고, 제일유(유정천)를 결함케 하며, 두 원인을 없애고, 세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아홉 편지를 세운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2c)

견도의 여섯 편지는 앞의 셋을 갖추어야 한다. 무루의 이계득을 얻어야 하고(그래서 범부가 세속도로 끊은 것은 편지가 아니다), 유정천의 번뇌 일부라도 끊어야 하며(욕계의 것만 끊은 단계는 아니다), 그 부류 자체의 번뇌와 그것을 낳는 다른 부류의 편행인 두 원인을 다 없애야 한다. 그래서 고제를 본 단계에서는 아직 견집소단의 편행 수면이 남아 견고소단의 끊음도 편지가 되지 못하고, 집제를 다 본 단계에서야 견고 · 견집소단의 끊음이 함께 하나의 편지가 된다. 욕계의 견고 · 견집 두 부류를 하나의 편지로 묶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도의 세 편지는 넷째 조건, 곧 「세계를 넘어섬」을 더 갖추어야 한다.

어느 수행자가 몇 개의 편지를 지니는가도 정해진다. 범부는 하나도 없다. 견도에서는 집법지가 일어날 때 처음 하나를 얻고, 멸 · 도의 지혜가 차례로 일어나며 다섯까지 늘어난다. 수도에 들어서면 여섯을 지니다가, 욕계를 다 떠나면 그 여섯이 「오하분결이 다한 편지」 하나로 모인다. 아라한은 오직 하나, 「모든 결이 영원히 다한 편지」만을 지닌다.

住無學位唯成就一,謂一切結永盡遍知。

무학의 지위에 머무는 이는 오직 하나를 성취하니, 모든 결이 영원히 다한 편지다.

『구사론』 권21 분별수면품, T29, 113b

왜 불환과와 아라한과에서는 앞의 편지들이 하나로 모이는가. 「세계를 넘어서고, 과를 얻는」 두 조건을 함께 갖추기 때문이다(越界得果故,二處集遍知). 끊음의 단계마다 붙였던 이름들이 마지막에는 「모든 결이 다했다」는 하나의 이름으로 모인다. 수면품은 이 아홉 편지의 얻음과 버림을 셈한 뒤 「수면을 분별함에 따라 끊음을 분별하는 일을 마친다(因辯隨眠,分別斷竟)」는 말로 끝난다.

견도의 여섯(인忍의 결과)
  1. ①욕계견고 · 견집소단의 끊음
  2. ②욕계견멸소단의 끊음
  3. ③욕계견도소단의 끊음
  4. ④색계 · 무색계견고 · 견집
  5. ⑤색계 · 무색계견멸
  6. ⑥색계 · 무색계견도
수도의 셋(지智의 결과)
  1. ⑦욕계 수소단 = 오하분결이 다한 편지
  2. ⑧색계 수소단 = 색애가 다한 편지
  3. ⑨무색계 수소단 = 모든 결이 영원히 다한 편지
세우는 조건「得無漏斷得,及缺第一有,滅雙因越界」무루 이계득 · 유정천을 결함 · 두 원인을 없앰(이상 견도 여섯) + 세계를 넘어섬(수도 셋)권21, T29, 112a~c
지니는 수
  1. 범부 0
  2. 견도 1~5
  3. 수도 6 → 1 → 2
  4. 아라한「唯成就一,謂一切結永盡遍知」
도표 20 · 아홉 편지
뿌리째 뽑혀 강가에 놓인 덩굴과 새벽 강
그림 · 뿌리째 뽑혀 강가에 놓인 덩굴과 새벽 강

번뇌는 대상을 두루 앎, 그것을 반연하는 것을 끊음, 그것의 대상을 끊음, 대치가 일어남의 네 원인으로 끊어진다. 견소단은 앞의 셋, 수소단은 넷째로 끊어진다. 끊은 미혹을 다시 끊는 일은 없지만, 이계는 도가 나아갈 때마다 더 뛰어난 득으로 거듭 얻어진다. 수많은 끊음은 네 조건을 갖춘 아홉 자리에서만 「편지」라 불리며, 아라한에게는 「모든 결이 영원히 다한 편지」 하나만 남는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분별수면품은 업품의 「세간의 차별은 업에서 생긴다」를 이어받아, 그 업에 다음 생을 부르는 힘을 주는 것이 수면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여섯 수면은 행상 · 부류 · 세계에 따라 아흔여덟으로 나뉘었고, 그 나뉨은 「어느 진리에 미혹했는가」라는 하나의 원리 위에 서 있었다. 견해의 번뇌는 진리를 보는 순간 끊어지고, 정서의 번뇌는 오래 닦아야 끊어진다. 편행 수면은 「나」와 「원인」에 대한 근본 미혹이 다른 모든 번뇌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 주었고, 「수증」의 이론은 번뇌가 「나」로 거두어진 대상에서만 자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번뇌의 여러 이름 — 누 · 폭류 · 액 · 취 · 결 · 박 · 전 · 구 · 개 — 은 같은 번뇌를 그 작용의 여러 면에서 본 것이었고, 끊음의 네 원인과 아홉 편지는 그 번뇌가 사라지는 방식을 정확히 셈했다.

그리고 이 품의 한가운데에서, 번뇌가 과거와 미래의 일을 「묶는다」는 말 하나가 불교 존재론의 큰 대론을 불러냈다. 유부는 경전과 이치로 삼세가 실재한다고 논증하고, 그 이름 자체를 「삼세가 있다고 말하는 자」로 정의했으며, 네 논사 가운데 「작용」의 유무로 삼세를 나누는 세우의 설을 정설로 삼았다. 천친은 「무엇이 작용을 막는가」, 「작용은 법과 같은가 다른가」를 물어 그 체계를 흔들고, 과거 · 미래의 「있음」을 「일찍이 있었음 · 장차 있음」으로 다시 읽었다. 그 대안은 앞서 수면의 체를 다투며 본 「잠든 번뇌」, 곧 현재 상속 안의 종자였다. 중현은 「현재처럼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와 「작용과 공능」의 구별로 유부를 다시 세웠다. 수면의 체를 둘러싼 대론과 삼세실유의 대론은 결국 같은 물음 — 지금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은 어떻게 「있는가」 — 의 두 얼굴이었다.

『구사론』의 다음 품들은 이 번뇌를 실제로 끊어 가는 길을 그린다. 견도의 열여섯 마음, 수도의 아홉 품, 사향사과와 성자의 단계, 그 길에서 쓰이는 지혜와 선정은 「성자의 길」 편에서 읽는다. 그리고 천친이 「저 아의 품에서 자세히 밝히겠다」고 예고한 상속전변의 이론과 「나」의 논파, 그리고 『구사론』이 천태와 니치렌 대성인의 교학에서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는 마지막 편 「「나」의 논파와 『구사론』의 자리」에서 다룬다.

더 읽기

참고 문헌

원전

  • 천친 『아비달마구사론』 권19~21 분별수면품 · 권4 분별근품, 현장 역, T29 no.1558
  • 천친 『아비달마구사석론』 분별혹품, 진제 역, T29 no.1559
  • 천친 『아비달마구사론본송』 분별수면품, 현장 역, T29 no.1560
  • 중현 『아비달마순정리론』 권45 · 권50~52 · 권54, 현장 역, T29 no.1562
  •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50 · 권76 · 권77, 현장 역, T27 no.1545
  • 세우 『이부종륜론』, 현장 역, T49 no.2031
  • 보광 『구사론기』 권20 · 권21, T41 no.1821
  • 법보 『구사론소』 권20 · 권21, T41 no.1822
  • 용수 『중론』 관시품, 구마라집 역, T30 no.1564

연구

  • P. Pradhan (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Patna: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67
  • Louis de La Vallée Poussin (tr.), L'Abhidharmakośa de Vasubandhu, 6 vols., Paris: Paul Geuthner, 1923–1931
  • Leo M. Pruden (tr.), Abhidharmakośabhāṣyam, 4 vols.,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88–1990
  • Collett Cox, Disputed Dharmas: Early Buddhist Theories on Existence, Tokyo: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1995
  • 小谷信千代 · 本庄良文, 『俱舎論の原典研究 随眠品』, 大蔵出版, 2007
  • 加藤純章, 『経量部の研究』, 春秋社, 1989
  • 櫻部建 · 上山春平, 『存在の分析〈アビダルマ〉』(仏教の思想 2), 角川書店, 1969
  • 권오민 역, 『아비달마구사론』 1~4, 동국역경원, 2002
  •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