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론』의 앞 두 품은 존재를 법(dharma)으로 쪼개고, 그 법들이 어떤 원인과 조건으로 함께 일어나는지를 따졌다. 셋째 품 분별세품은 물음을 바꾼다. 그렇게 분석된 법들이 모여 이루는 「세계」는 어떤 모습이며, 그 안에서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품은 생명들이 사는 자리인 유정세간에서 시작해, 죽음과 태어남 사이의 중유를 논증하고, 연기의 열두 마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시 읽은 뒤, 생명이 무엇으로 머물고 어떻게 죽는지를 묻는다. 그다음 시선은 바깥으로 돌아 바람 · 물 · 금의 세 바퀴와 수미산, 네 대륙과 지옥, 해와 달과 하늘들의 치수를 재고, 마지막에는 극미와 찰나에서 시작해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겁의 시간까지 이른다. 본송 아흔아홉 게송, 『구사론』 서른 권 가운데 다섯 권을 차지하는 이 품은 아비달마가 그린 생명과 우주의 지도다.
분별세품을 읽는 사람은 두 가지 인상을 함께 받는다. 하나는 숫자의 홍수다. 바람의 바퀴는 두께가 160만 유순, 수미산은 물 위로 8만 유순, 섬부주 사람의 키는 3주 반, 등활지옥의 하루는 사대왕중천의 오백 년이다. 다른 하나는 그 숫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날카로운 논쟁이다. 죽은 자리와 태어날 자리 사이에 몸이 있는가, 거울 속의 상은 실재하는가, 연기는 무위법인가, 무명은 「밝음이 없음」인가 「밝음과 맞서는 것」인가. 천친(天親, 세친 世親 Vasubandhu)은 우주의 치수를 옮겨 적는 동안에도 유부 비바사사의 설을 「전하기를(傳說)」이라고 거리를 두어 옮기고, 경량부의 해석을 슬며시 덧붙인다.
이 두 얼굴은 하나의 물음에서 나온다. 「나」라는 실체 없이 어떻게 윤회가 성립하는가. 분별세품은 이 물음에 세계 전체의 구조로 답한다. 생명은 업과 번뇌로 이어지는 오온의 흐름이고, 세계는 그 생명들의 업이 함께 불러일으킨 그릇이다. 그릇의 치수가 정밀할수록, 그 그릇을 만든 것이 생명들의 업이라는 주장도 무게를 얻는다. 그래서 품 한가운데에 놓인 게송 「나는 없고 오직 온들뿐, 번뇌와 업이 만든 것」은 앞의 유정세간과 뒤의 기세간을 잇는 경첩이 된다.
품의 차례는 원문을 따른다. 『구사론』 권8이 삼계 · 오취 · 칠식주 · 사생과 중유의 존재 논증을, 권9가 중유의 모습과 입태 · 연기의 열두 마디와 그 해석 논쟁을, 권10이 무명 · 명색 · 촉 · 수의 정의와 사식 · 죽음 · 삼취를, 권11이 기세간의 치수와 몸 크기 · 수명을, 권12가 단위와 겁 · 부처와 전륜왕의 출현 · 겁초의 인간과 삼재를 다룬다. 열두 마디 연기의 기본 체계 — 각 지분의 뜻, 혹 · 업 · 고, 견인업 · 원만업, 삼세양중인과 — 는 계보 一 십이연기에서 이미 읽었으므로, 이 편은 『구사론』이 연기를 「어떻게 읽느냐」를 둘러싼 논쟁에 집중한다.
이 편의 장
- 제1장 삼계와 다섯 갈래 — 유정이 사는 자리 — 욕계 스무 곳 · 색계 열일곱 하늘 · 처가 없는 무색계, 오취 · 칠식주 · 구유정거 · 사생
- 제2장 죽음과 태어남 사이 — 중유의 논증 — 곡식의 상속, 거울 속 달의 상, 건달바와 중반열반, 중유를 부정하는 부파와의 대론
- 제3장 중유의 몸과 입태 — 사유의 순환 — 향을 먹는 몸, 머무는 기간의 이설, 전도된 마음으로 들어가는 모태, 등불처럼 이어지는 온
- 제4장 연기를 어떻게 읽는가 — 네 가지 연기와 해석의 대론 — 찰나 · 연박 · 분위 · 원속, 「전하기를」의 거리, 연기와 연이생, 두 구절의 해석들
- 제5장 무명은 무엇인가 — 지분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 — 밝음과 맞서는 실법, 명색 · 촉 · 수의 정의, 경량부의 반론, 번뇌 · 업 · 사의 비유
- 제6장 유정은 무엇으로 머무는가 — 사식과 죽음 — 단식 · 촉식 · 의사식 · 식식, 재 주머니의 이야기, 발 · 배꼽 · 가슴에서 멎는 의식, 단말마와 천인오쇠
- 제7장 그릇 세간 — 삼륜에서 하늘까지 — 바람 · 물 · 금의 바퀴, 구산팔해와 사대주, 지옥의 배치, 해와 달, 하늘의 처소와 몸 크기 · 수명
- 제8장 세계를 재는 단위와 겁 — 성주괴공과 부처의 출현 — 극미에서 유순, 찰나에서 해, 네 가지 겁, 부처 · 독각 · 전륜왕, 땅의 맛과 왕의 기원, 소삼재와 대삼재
본송
地獄傍生鬼,人及六欲天,名欲界二十,由地獄洲異。 此上十七處,名色界於中,三靜慮各三,第四靜慮八。 無色界無處,由生有四種,依同分及命,令心等相續。
지옥 · 방생 · 귀신과 사람, 그리고 여섯 욕계 하늘을 욕계라 하니, 지옥과 대륙이 다르기 때문에 스무 곳이 된다. 그 위의 열일곱 곳을 색계라 하니, 그 가운데 앞의 세 정려에 각각 셋, 제4정려에 여덟이 있다. 무색계에는 처소가 없고, 태어남에 따라 네 가지가 있으며, 중동분과 명근에 의지해 마음 등이 이어진다.
於中地獄等,自名說五趣,唯無覆無記,有情非中有。
그 가운데 지옥 등을 제 이름대로 다섯 갈래라 한다. 갈래는 오직 무부무기이며, 유정의 것이고, 중유는 아니다.
술어 풀이
- 三界삼계
- 욕계(kāmadhātu) · 색계(rūpadhātu) · 무색계(ārūpyadhātu). 「계(dhātu)」는 「제 모습을 지니는 것」 또는 「종족」의 뜻이라고 논은 설명한다. 욕계는 음욕과 단식(段食)에 대한 탐이 미치는 세계, 색계는 그것을 떠났으나 물질이 남은 세계, 무색계는 물질이 없는 세계다.
- 處처
- 각 계 안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곳(sthāna)」. 욕계는 스무 곳, 색계는 열일곱 곳으로 센다. 무색계에는 장소로서의 처가 없다는 것이 이 품의 주장이다.
- 器世間기세간
-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세계(bhājanaloka). 유정세간(sattvaloka)과 짝을 이룬다. 욕계에는 아래로 풍륜까지의 그릇이 모두 속한다.
- 趣취
- 생명이 「가서 이르는 곳(gati)」. 지옥 · 방생 · 아귀 · 인 · 천의 다섯 갈래(오취). 유부는 갈래의 체를 무부무기의 이숙과로 본다.
- 中有중유
- 죽음과 태어남 사이의 존재(antarābhava). 갈래에 들지 않는다. 그 존재 논증과 모습은 이 편의 중유 논의에서 자세히 다룬다.
- 識住식주
- 식이 머무는 자리(vijñānasthiti). 경에 일곱 가지와 네 가지가 설해진다.
- 有情居유정거
- 유정이 즐겨 머무는 곳(sattvāvāsa). 아홉 가지.
- 四生사생
- 태어나는 방식의 네 가지(yoni): 난생 · 태생 · 습생 · 화생.
- 眾同分 · 命根중동분 · 명근
- 심불상응행법. 같은 부류의 생명을 같게 하는 힘(nikāyasabhāga)과 수명을 유지하는 힘(jīvitendriya). 유부는 몸이 없는 무색계의 마음이 이 둘에 의지해 이어진다고 한다.
욕계 스무 곳과 여섯 하늘
품은 앞 품의 말미를 받아 시작한다. 근품까지 마음과 심소를 삼계에 따라 나누어 보았으니, 이제 그 삼계가 무엇이고 각각에 처소가 몇인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게송이 셈을 내놓는다. 욕계는 지옥 · 방생 · 아귀 · 사람 · 여섯 욕계 하늘로 이루어지는데, 지옥과 대륙이 여럿이기 때문에 처소는 스물이 된다.
장행이 셈을 풀어 준다. 지옥은 여덟 대지옥 — 등활 · 흑승 · 중합 · 호규 · 대규 · 염열 · 대열 · 무간 — 이 각각 한 곳이고, 사람의 세계는 네 대륙 — 남섬부주 · 동승신주 · 서우화주 · 북구로주 — 이 각각 한 곳이다. 이 열둘에 여섯 욕계 하늘(사대왕중천 · 삼십삼천 · 야마천 · 도사다천 · 낙변화천 · 타화자재천)과 방생 · 아귀를 더하면 스물이다. 방생과 아귀는 장소가 흩어져 있어 각각 한 곳으로 센다.
여기서 하나 덧붙는 조건이 있다. 욕계란 생명만이 아니라 그 생명을 담는 그릇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若有情界從自在天至無間獄,若器世界乃至風輪,皆欲界攝。
유정의 세계로는 타화자재천에서 무간지옥까지, 그릇의 세계로는 아래로 풍륜에 이르기까지, 모두 욕계에 속한다.
이 한 줄은 분별세품 전체의 설계도다. 「세간」은 처음부터 유정과 그릇의 두 겹으로 짜여 있고, 권11에서 그릇을 따로 다룰 때까지 이 두 겹은 함께 간다.
색계 열여섯인가 열일곱인가
색계는 네 정려(dhyāna)의 하늘로 나뉜다. 초정려에 범중천 · 범보천 · 대범천, 제2정려에 소광천 · 무량광천 · 극광정천, 제3정려에 소정천 · 무량정천 · 변정천, 제4정려에 무운천 · 복생천 · 광과천과 정거천 다섯(무번 · 무열 · 선현 · 선견 · 색구경)이 있다. 3 · 3 · 3 · 8, 합해서 열일곱이다.
그러나 천친은 곧바로 다른 셈을 적는다.
迦濕彌羅國諸大論師皆言:色界處但有十六。彼謂:即於梵輔天處有高臺閣,名大梵天,一主所居非有別地,如尊處座四眾圍繞。
카슈미르의 대논사들은 모두 「색계의 처소는 열여섯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한다. 범보천의 처소 안에 높은 누각이 있어 이를 대범천이라 할 뿐, 한 주인이 사는 곳일 뿐 따로 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귀한 이가 자리에 앉고 사부대중이 둘러싼 것과 같다.
본송이 「열일곱」을 세우고 장행이 카슈미르 정통의 「열여섯」을 덧붙인 셈이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이 차이를 『대비바사론』으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한다. 『대비바사론』 권98은 「서방의 논사들」이 초정려에 범중 · 범보 · 대범의 세 처소를 세우는 데 반해, 「카슈미르의 논사들은 초정려에 처소가 둘뿐」이라 하여 대범천을 범보천 안의 높은 곳으로 본다고 전한다. 『구사론』 본송은 서방의 셈을, 장행은 카슈미르의 셈을 함께 실은 것이다.
『순정리론』 권21은 셈이 더 갈린다고 전한다. 어떤 이들은 초정려를 둘로 세우는 대신 제4정려의 무상천(無想天)을 따로 세워 다시 열일곱을 만들고(「有餘別說十七處名,初靜慮中總立二處,第四靜慮別說無想」), 경량부의 상좌는 대범천과 무상천을 모두 따로 세워 열여덟 하늘을 말한다(「上座色界立十八天」). 『구사론』의 무상천은 광과천 안의 한 자리로 처리된다.
처소가 없는 무색계
게송의 셋째 줄은 짧고 단호하다. 「무색계에는 처소가 없다(無色界無處)」. 장행은 이유를 이렇게 댄다.
無色界中都無有處,以無色法無有方所,過去未來無表無色不住方所,理決然故。
무색계에는 처소가 전혀 없다. 물질이 아닌 법에는 방위와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 미래의 법, 무표색, 무색의 법이 장소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이치로 분명하다.
무색계의 네 하늘 —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 — 은 위아래로 놓인 층이 아니라, 오직 「태어남에 의해(由生)」 우열이 갈릴 뿐이다. 그렇다면 무색계에 장소가 없음을 어떻게 아는가. 논의 증거는 경험적이다. 어떤 곳에서 무색정을 얻은 사람이 목숨을 마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무색계에 태어나고, 무색계에서 죽어 욕계 · 색계에 다시 태어날 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중유가 일어난다. 무색계가 어딘가 높은 곳에 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몸이 없는 무색계의 마음은 무엇에 의지해 이어지는가. 색계까지의 생명은 몸에 의지해 마음이 이어지지만, 무색계에는 몸이 없다. 여기서 세 가지 답이 나온다.
- 대법의 논사들(유부)은 중동분과 명근에 의지한다고 답한다. 그러자 질문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몸이 있는 생명은 왜 이 둘에만 의지하지 않는가 — 욕계 · 색계에서는 이 둘이 약하기 때문이다. 무색계에서는 왜 강한가 — 뛰어난 선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냥 선정에 의지한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따로 의지처를 세우는가. 또 이 중동분과 명근은 다시 무엇에 의지하는가 — 서로 의지한다. 그렇다면 욕계 · 색계에서도 서로 의지하면 될 것 아닌가. 질문은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 경량부는 이 순환을 끊는다. 무색계의 마음은 따로 의지처가 없다. 원인이 된 마음이 아직 물질에 대한 애착을 떠나지 못했으면 거기서 이끌린 마음은 몸과 함께 생기고, 이미 물질에 대한 애착을 떠났으면 몸 없이 생긴다는 것이다.
故經部師說無色界心等相續無別有依。
그러므로 경량부의 논사는, 무색계의 마음 등이 이어지는 데에 따로 의지처가 없다고 한다.
이 짧은 문답은 분별세품 전체에서 반복될 천친의 방식을 처음 보여 준다. 유부의 정설을 먼저 세우고, 질문을 거듭해 그 설의 무게중심을 흔든 다음, 경량부의 간결한 해석을 마지막에 놓는다. 판정은 독자에게 맡긴다.
무색계는 「장소」가 아니라 「태어남의 방식」이다. 유부는 몸 없는 마음의 지탱을 중동분 · 명근이라는 실법에 맡기고, 경량부는 앞 마음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욕이란 무엇인가 — 사리불의 반문
삼계라는 이름의 「욕(kāma)」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논은 「간략히 말하면 단식과 음욕에서 일어나는 탐」이라 하고, 경의 게송 하나를 인용한다.
世諸妙境非真欲,真欲謂人分別貪,妙境如本住世間,智者於中已除欲。
세상의 아름다운 대상이 참된 욕이 아니다. 참된 욕은 사람의 분별하는 탐이다. 아름다운 대상은 본래대로 세간에 머물고, 지혜로운 이는 그 가운데서 욕을 이미 덜어 낸다. (『구사론』 권8 분별세품, T29, 41c)
사명외도가 사리불을 몰아세운다. 대상이 욕이 아니고 분별하는 탐이 욕이라면, 비구야말로 나쁜 분별을 일으키니 욕을 누리는 자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리불이 되묻는다. 대상이 참된 욕이라면, 늘 마음에 드는 빛깔을 보는 그대의 스승이야말로 욕을 누리는 자가 아니겠는가. 욕은 바깥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것, 이것이 삼계를 가르는 첫 기준이다.
여기에 한 가지 정밀한 구분이 이어진다. 어떤 법이 어떤 계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그 계에 매인(繫)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계의 탐이 「따라 늘어나는(隨增)」 법이 그 계에 매인 법이다. 논은 이 정의가 「말을 묶는 사람이 누구냐, 말의 주인이다. 말의 주인은 누구냐, 묶는 사람이다」 식의 순환 답이 아님을 굳이 밝힌다. 욕계의 처소에서 아직 탐을 떠나지 못한 이의 탐을 욕탐이라 하고, 그것이 따라 늘어나는 법을 욕계계(欲界繫)라 한다. 장소의 정의가 먼저 서 있으므로 순환이 아니라는 것이다.
끝없는 세계들
삼계는 하나뿐인가. 논의 답은 「삼계는 허공처럼 끝이 없다(三界無邊如虛空量)」이다. 그래서 처음 생겨난 유정이 따로 없고, 무량한 부처가 세상에 나와 무수한 유정을 무여열반으로 이끌어도 유정은 다하지 않는다. 세계들은 「옆으로(傍)」 놓여 있다. 경은 하늘에서 수레바퀴 굴대만 한 빗방울이 끊임없이 쏟아지듯, 동방에 끊임없이 무량한 세계가 무너지고 이루어진다고 하고, 남 · 서 · 북도 그렇다고 하면서 위아래는 말하지 않는다. 다른 부파의 경은 시방을 말하므로 위아래에도 세계가 있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 설에 따르면 색구경천 위에 다시 어떤 세계의 욕계가 있고, 욕계 아래에 다른 세계의 색구경천이 있다.
다섯 갈래 — 갈래의 체는 무엇인가
삼계 안에 다섯 갈래가 있다. 욕계에는 네 갈래(지옥 · 방생 · 아귀 · 인)가 온전히 있고, 천취는 삼계에 걸쳐 일부씩 있다. 그런데 삼계에 속하면서도 갈래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 선 · 염오의 법, 바깥 그릇, 그리고 중유다. 왜 그런가. 갈래의 체는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이기 때문이다.
五趣體唯無覆無記,若異此者趣應相雜,於一趣中具有五趣業煩惱故。
다섯 갈래의 체는 오직 무부무기다. 그렇지 않다면 갈래들이 뒤섞일 것이다. 한 갈래 안에 다섯 갈래로 가는 업과 번뇌가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갈래 안에서도 지옥에 갈 업, 하늘에 날 업이 다 지어진다. 갈래를 선악의 업까지 포함해 정의하면 사람 안에 이미 지옥이 섞이게 된다. 그래서 갈래는 업의 결과로 받은 몸과 마음(이숙과), 곧 선악이 아닌 무기의 법만을 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논은 이 주장을 논서와 경으로 받친다. 『시설족론』은 「사생이 오취를 포섭하지만 오취가 사생을 포섭하지는 못한다. 포섭되지 않는 것은 중유다」라고 하고, 『법온족론』도 다섯 갈래와 「수행으로 이룬 것」 「중유」를 따로 나열한다. 결정적인 것은 『칠유경(七有經)』이다. 경은 일곱 가지 존재를 든다.
地獄有、傍生有、餓鬼有、天有、人有、業有、中有。
지옥의 존재, 방생의 존재, 아귀의 존재, 하늘의 존재, 사람의 존재, 업의 존재, 중유.
다섯 갈래와 나란히 「업유」와 「중유」가 따로 나온다. 갈래의 원인인 업과 갈래로 가는 방편인 중유를 갈래와 구별해 세웠으니, 갈래는 무기뿐이라는 것이 경에서도 확인된다. 카슈미르에서 외우는 경에서는 사리불이 「지옥의 오온 이숙이 일어나면 이를 지옥이라 하며, 오온을 떠나 지옥은 따로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 해석도 있다. 「갈래의 체는 선 · 염오에도 통한다」는 설이다. 이들은 『칠유경』이 업유를 따로 든 것이 업유가 갈래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다섯 가지 탁(濁) 가운데 번뇌탁과 견탁을 따로 들었다고 해서 견이 번뇌가 아닌 것이 아니듯, 갈래의 원인을 드러내려고 따로 말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 중유도 갈래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이 지점에서 논은 「갈래」의 말뜻을 꺼낸다.
趣謂所往,不可說言中有是所往,即死處生故。
갈래란 「가서 이르는 곳」이다. 중유를 가서 이르는 곳이라 할 수는 없다.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곧바로 반론이 붙는다. 무색계도 죽은 그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색계도 갈래가 아니어야 한다. 논은 이 반론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이름으로 돌아간다. 중유는 「두 갈래의 중간(二趣中)」이기에 중유라 부른다. 갈래에 들어간다면 중간이 아니게 되니, 중유라는 이름 자체가 갈래가 아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논은 끝에 갈래의 체에 관한 세 설을 나란히 적는다. 비바사사는 갈래가 오직 무부무기라 하고, 어떤 이는 오직 이숙생이라 하며, 다른 논사는 장양(長養)에도 통한다고 한다.
일곱 가지 식주와 아홉 가지 유정거
다섯 갈래에 이어 논은 경이 설한 「식이 머무는 자리」 일곱 가지를 푼다. 기준은 몸(身)과 생각(想)이 같은가 다른가다.
身異及想異,身異同一想,翻此身想一,并無色下三,故識住有七,餘非有損壞。
몸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것, 몸은 다르나 생각은 하나인 것, 이를 뒤집은 것, 몸과 생각이 모두 하나인 것, 그리고 무색계의 아래 셋. 그래서 식주는 일곱이며, 나머지는 식을 허무는 것이 있어 식주가 아니다. (『구사론』 권8 분별세품, T29, 42c)
첫째, 몸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은 사람과 욕계의 하늘, 그리고 겁초가 아닌 때의 초정려 하늘이다. 생김새가 저마다 다르고,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생각이 저마다 다르다.
둘째, 몸은 다르나 생각이 하나인 것은 겁초의 범중천이다. 여기에 『구사론』은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붙인다. 세계가 처음 이루어질 때 범중천의 하늘들은 「우리는 모두 대범천이 낳았다」고 생각하고, 대범천도 「이들은 모두 내가 낳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하나다. 그러나 대범천의 몸은 크고 위덕과 광명이 범중들과 다르니 몸은 다르다. 경에 따르면 범중들은 「우리는 일찍이 이처럼 오래 사는 유정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대범천을 어디서 보았는가. 어떤 이는 극광정천에 있을 때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제2정려를 얻지 못한 이가 그 지위의 지난 일을 어떻게 기억하며, 이미 얻었다면 왜 대범천을 창조주로 여기는 계금취견을 일으키는가. 어떤 이는 중유에 있을 때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유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논의 결론은, 범중들이 자기 하늘에 태어난 뒤 먼저 대범천이 오래 머무는 것을 보고, 나중에 다시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창조주 신앙의 기원을 착각된 기억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셋째, 몸은 하나이나 생각이 다른 것은 극광정천을 대표로 한 제2정려 전체다. 유부는 그 하늘들이 근본정의 기쁨(喜根)에 싫증 나면 근분정의 평정(捨根)으로 가고, 평정에 싫증 나면 다시 기쁨으로 간다고 전한다. 부유한 이가 욕락에 싫증 나면 법락을 누리고 법락에 싫증 나면 다시 욕락을 누리듯. 경량부는 다른 경을 들어 다르게 푼다. 극광정천에 갓 태어난 하늘이 아래 세계를 태우는 겁화의 불길을 보고 「저 불이 범천의 궁전을 다 태우고 우리에게까지 올라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면, 오래 산 하늘이 「깨끗한 신선이여, 두려워 마라. 전에도 저 불은 범궁을 태우고 거기서 꺼졌다」고 달랜다. 불이 올라온다 / 오지 않는다는 생각, 두렵다 /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엇갈리니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넷째, 몸도 하나 생각도 하나인 것은 변정천이다. 오직 즐거움(樂)의 생각만 있다. 그리고 무색계의 아래 셋(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을 더해 일곱이 된다.
나머지는 왜 식주가 아닌가. 그곳에는 「식을 허무는 법(損壞識法)」이 있기 때문이다. 악취에는 식을 해치는 무거운 고통이 있고, 제4정려에는 무상정과 무상천이 있으며, 유정천(비상비비상처)에는 멸진정이 있어 식의 흐름을 끊는다. 또 다른 설명도 있다. 식주란 유정의 마음이 즐겨 와서 머물고 다시 떠나기를 구하지 않는 곳인데, 악취는 둘 다 아니고, 제4정려에서는 범부는 무상천을, 성자는 정거천이나 무색계를, 정거천의 하늘은 적멸을 구하니 늘 떠나기를 구하며, 유정천은 마음이 어둡고 약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유정천과 무상천을 더하면 「아홉 가지 유정거」가 된다. 생명이 즐겨 머무는 곳은 이 아홉뿐이다. 악취는 즐겨 머무는 곳이 아니다. 악업이라는 나찰이 몰아넣어 머물게 할 뿐이니 감옥과 같다.
- ①몸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사람 · 욕계 하늘 · 초정려(겁초 제외)
- ②몸이 다르고 생각이 하나겁초의 범중천
- ③몸이 하나 생각이 다르다제2정려
- ④몸도 생각도 하나제3정려(변정천)
- ⑤공무변처
- ⑥식무변처
- ⑦무소유처
여기에⑧무상천⑨유정천(비상비비상처)을 더하면 구유정거
경에는 「네 가지 식주」도 있다. 「식은 색에 따라 머물고, 수 · 상 · 행에 따라 머문다」. 유루의 색 · 수 · 상 · 행 네 온이 식주다. 왜 식은 식주가 아닌가. 비바사사는 머무는 것(能住)과 머무는 곳(所住)이 같을 수 없다고 한다. 왕이 곧 왕좌가 아니고, 사람이 배를 타듯 식이 타는 것이 식주다. 천친은 여기서 경을 들어 반문한다. 다른 경은 「식이라는 먹이(識食)에 기쁨과 물듦이 있어 식이 그 가운데 머문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부처님의 뜻은, 네 식주는 좋은 밭과 같고 집착을 지닌 모든 식은 씨앗과 같으니, 씨앗을 밭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으로 「우러러 헤아린다(仰測世尊教意如是)」. 일곱 식주와 네 식주의 관계는 사구(四句)로 정리된다.
네 가지 태어남 — 가장 뛰어난 것과 가장 많은 것
於中有四生,有情謂卵等,人傍生具四,地獄及諸天,中有唯化生,鬼通胎化二。
그 가운데 네 가지 태어남이 있으니, 유정의 난생 등이다. 사람과 방생은 넷을 다 갖추고, 지옥과 여러 하늘과 중유는 오직 화생이며, 아귀는 태생과 화생 둘에 통한다. (『구사론』 권8 분별세품, T29, 43c)
난생은 알에서 나는 것(거위 · 공작 · 앵무), 태생은 태에서 나는 것(코끼리 · 말 · 소), 습생은 습기에서 나는 것(벌레 · 나방 · 모기), 화생은 의탁하는 것 없이 「없다가 문득 있게 되는(無而欻有)」 것이다. 화생은 감관을 다 갖추고 팔다리가 한꺼번에 생긴다.
사람에게도 네 가지가 다 있다는 대목은 『구사론』이 전승된 이야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정리했는지 보여 준다. 사람의 난생은 학의 알에서 났다는 세라 · 오파세라, 녹모(鹿母)가 낳은 서른두 아들, 반차라왕의 오백 아들. 사람의 습생은 만타다(曼馱多), 차로 · 오파차로, 합만(鴿鬘), 암라위(菴羅衛) 등. 사람의 화생은 겁초의 사람뿐이다. 아귀의 태생은 아귀 여인이 목련에게 한 말로 증명된다. 「나는 밤에 다섯 아이를 낳아 낳는 대로 다 먹고, 낮에도 다섯을 낳아 그러하나, 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뛰어난가. 화생이다. 그렇다면 태어남을 자유로이 고를 수 있는 최후신의 보살은 왜 태생을 택했는가. 논은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석가족 친족을 정법으로 이끌기 위해, 전륜왕의 혈통임을 알려 공경을 일으키기 위해, 「그도 사람이었는데 큰 뜻을 이루었으니 우리도 못 할 것 없다」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 그리고 혈통을 알 수 없으면 하늘이나 귀신의 환술로 의심받기 때문이다. 외도의 논서가 「백 겁 뒤에 큰 환술사가 나타나 세간을 먹어 치운다」고 비방한 일까지 든다. 다른 논사는 유골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화생의 몸은 바깥 종자가 없어 죽으면 꺼진 등불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사리를 남겨 무수한 이들이 공양하고 하늘에 나고 해탈하게 하려고 태생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 설에서 파생된 질문 — 화생의 몸이 죽으면 남지 않는다면 금시조는 왜 화생의 용을 잡아먹는가 — 에도 논은 답한다. 모르고 잡는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잠시 허기를 채울 수는 있다.
그리고 어느 것이 가장 많은가. 이번에도 화생이다.
於四生內何者最多?唯化生。何以故?三趣少分及二趣全、一切中有皆化生故。
네 가지 태어남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많은가. 화생이다. 무슨 까닭인가. 세 갈래의 일부와 두 갈래의 전부, 그리고 모든 중유가 다 화생이기 때문이다.
지옥과 하늘이 모두 화생이고, 사람 · 방생 · 아귀의 일부가 화생이며, 무엇보다 모든 생명이 죽을 때마다 거치는 중유가 화생이다. 이 답이 그대로 다음 물음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무엇을 중유라 하는가」.
유정세간의 분류는 장소(삼계 · 처), 결과로서의 몸(오취), 식이 머무는 방식(칠식주 · 구유정거), 태어나는 방식(사생)의 네 겹으로 짜인다. 중유는 이 가운데 오직 사생에만 들어가고, 갈래에는 들지 않는다.
본송
死生二有中,五蘊名中有,未至應至處,故中有非生。
죽음의 존재와 태어남의 존재 사이의 오온을 중유라 한다. 아직 이르러야 할 곳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중유는 태어남이 아니다.
如穀等相續,處無間續生,像實有不成,不等故非譬。 一處無二並,非相續二生,說有健達縛,及五七經故。
곡식 등의 상속처럼, 장소의 틈 없이 이어 태어난다. 거울 속 상은 실재함이 성립하지 않고, 같지 않으므로 비유가 되지 않는다. 한 곳에 두 가지가 나란히 있을 수 없고, 상은 하나의 상속도 아니며 두 연으로 생긴다. 경에 건달바가 있다고 설하고, 다섯 불환과 일곱 선사취의 경이 있기 때문이다.
술어 풀이
- 中有중유
- 죽음의 찰나(사유) 뒤, 태어남의 찰나(생유) 앞에 일어나는 오온(antarābhava). 「두 갈래의 중간」이라서 중유라 한다. 「이르러야 할 곳」에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태어남(生)이라 부르지 않는다.
- 應至處응지처
- 이르러야 할 곳. 논은 「이끌린 이숙이 끝내 분명해지는 곳」이라 정의한다. 업이 이끈 결과가 완전히 나타나는 자리가 곧 태어남이다.
- 處無間처무간
- 장소에 틈이 없음. 상속하는 법은 앞 찰나와 뒤 찰나가 공간적으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원칙.
- 本質 · 像본질 · 상
- 거울에 비치는 원래의 사물과 그 상(pratibimba). 반대자는 사물과 상 사이에 거리가 있어도 상이 생기듯 죽음과 태어남 사이에 거리가 있어도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 健達縛건달바
- 범어 gandharva의 음사. 경에서 입태의 셋째 조건으로 나온다. 유부는 이것을 중유로 읽는다. 향(gandha)을 먹는다는 풀이는 중유의 성질을 다룰 때 본다.
- 中般중반
- 다섯 불환(不還) 가운데 첫째인 중반열반(antarāparinirvāyin). 색계에 태어나기 전 중유에서 열반에 드는 성자.
- 七善士趣칠선사취
- 일곱 가지 선한 사람의 갈래. 중반을 셋으로 나누고 생반 · 무행반 · 유행반 · 상류를 더한 것. 쇳불의 불티 비유로 설해진다.
- 分別論者분별론자
- 『대비바사론』이 중유를 부정하는 쪽으로 부르는 이름. 『구사론』은 「다른 부파(有餘部)」라고만 한다.
중유는 왜 「태어남」이 아닌가
화생이 가장 많다는 답은 곧 중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부른다. 게송은 정의와 이름의 이유를 함께 준다. 죽음의 존재 뒤, 태어남의 존재 앞, 그 중간에 하나의 자체(自體)가 일어난다. 태어날 곳에 이르기 위해 일으키는 몸이다. 이것은 이미 일어났는데 왜 「태어남」이라 하지 않는가. 태어남이란 「앞으로 이르러야 할 곳」에 붙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生謂當來所應至處,依所至義建立生名。此中有身其體雖起而未至彼,故不名生。
태어남이란 앞으로 이르러야 할 곳을 말한다. 「이른다」는 뜻에 의지해 태어남이라는 이름을 세운다. 이 중유의 몸은 체는 비록 일어났으나 아직 거기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태어남이라 하지 않는다.
이 정의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중유는 갈래도 아니고 태어남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깨비가 아니다. 오온을 갖춘 실재하는 존재이며, 사생으로는 화생에 든다. 유부의 존재론에서 중유는 「다음 생의 몸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로, 앞 생과 뒤 생을 공간적으로 잇는 실체의 다리다.
「다른 부파」의 부정
논은 곧바로 반대자를 등장시킨다.
有餘部說:從死至生處容間絕,故無中有。此不應許。所以者何?依理教故。
다른 부파는 말한다. 「죽음에서 태어남에 이르는 사이에는 장소가 끊어져도 괜찮다. 그러므로 중유는 없다.」 이것은 허락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치와 가르침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다른 부파」는 누구인가. 『구사론』은 이름을 대지 않는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이부종륜론』에 따라 대중부 등이 중유를 부정한다고 주석한다. 실제로 『이부종륜론』은 대중부 · 일설부 · 설출세부 · 계윤부의 「본종동의(本宗同義)」에 「도무중유(都無中有)」를, 화지부의 본종동의에 「정무중유(定無中有)」를 적고, 설일체유부의 본종동의에는 「오직 욕계와 색계에만 반드시 중유가 있다(唯欲色界定有中有)」를 적는다. 『대비바사론』 권69는 이 논쟁을 「분별론자」와 「응리론자」의 대립으로 정리한다.
『대비바사론』 권69는 부정하는 쪽(분별론자)이 경증과 이증을 함께 든다고 전한다. 경증은 「오무간업을 지은 자는 무간에 반드시 지옥에 난다」는 경과 「중간에 머물 곳이 없다」는 게송이고, 이증은 「그림자와 빛 사이에 틈이 없듯 사유와 생유도 그러하다」는 비유다. 『구사론』은 이 경증들을 논의 뒷부분에서 하나씩 풀어 준다.
이치의 증명 ① — 곡식의 상속
이치에 의한 첫 증명은 세간의 관찰에서 출발한다.
現見世間相續轉法,要處無間剎那續生。且如世間穀等相續,有情相續理亦應然,剎那續生處必無間。
세간에서 상속하며 굴러가는 법은 반드시 장소의 틈 없이 찰나찰나 이어 생기는 것을 본다. 곡식 등의 상속처럼, 유정의 상속도 이치가 그러해야 한다. 찰나찰나 이어 생기되 장소에 반드시 틈이 없다.
볍씨는 땅속에서 싹이 되고 줄기가 되어 이삭이 된다. 볍씨가 이 마을에 있고 싹이 저 마을에서 돋는 일은 없다. 법이 찰나마다 생멸하면서도 「같은 흐름」을 이루려면 앞 찰나와 뒤 찰나가 공간적으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 사람이 이 마을에서 죽고 먼 곳의 모태에 태어난다면, 그 사이를 잇는 무언가가 장소를 옮겨 가야 한다. 그것이 중유다.
이 논증의 무게는 「상속」이라는 개념에 실려 있다. 앞 편들에서 보았듯 유부의 세계에서 모든 유위법은 찰나멸이며, 「나」라는 실체 없이 흐름의 동일성만 있다. 그 흐름이 흐름이려면 시간의 틈도 공간의 틈도 없어야 한다. 중유 논증은 무아설이 공간 속에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치의 증명 ② — 거울 속 상은 비유가 되지 못한다

반대자의 반격이 곧 나온다. 장소에 틈이 있는데도 이어 생기는 법을 보지 않았는가. 거울 등에 의지해 본래 사물(質)에서 상(像)이 생긴다. 사물과 거울 사이에는 거리가 있지만 상은 생긴다. 죽음과 태어남도 장소에 틈이 있지만 이어 생길 수 있지 않은가.
천친의 답은 두 단계다. 첫째, 상이 실재한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像實有不成). 둘째, 설령 성립하더라도 같은 경우가 아니다(不等).
첫째 답의 근거가 「한 곳에 두 가지가 나란히 있을 수 없다(一處無二並)」이다. 거울 면에 거울의 빛깔과 상이 함께 보이는데, 두 가지 물질이 한 자리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대종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논은 세 가지 관찰을 연달아 든다.
- 좁은 물 위에 양쪽 언덕의 모습이 한 자리에 동시에 비친다. 그런데 양쪽 언덕에 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상을 보며, 한 자리에서 두 빛깔을 함께 보는 이는 없다.
- 그림자와 빛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늘 속에 걸어 둔 거울에 빛의 상이 또렷이 나타난다.
- 그리고 가장 유명한 관찰.
或言一處無二並者,鏡面月像謂之為二,近遠別見如觀井水,若有並生如何別見?故知諸像於理實無。
또 「한 곳에 두 가지가 나란히 없다」는 것은 이러하다. 거울 면과 달의 상을 둘이라 하는데, 우물물을 들여다볼 때처럼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따로 보인다. 만약 나란히 생긴 것이라면 어떻게 따로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상은 이치로 보아 실재하지 않는다.
거울 면은 손 닿는 곳에 있는데, 거울 속 달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물을 들여다보면 물 표면은 가깝고 물에 비친 달은 깊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울 면과 달의 상이 정말 같은 자리에 생긴 두 물질이라면 같은 거리에 보여야 한다. 거리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상이 그 자리에 실재하는 물질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상은 무엇인가. 논은 「여러 인연이 화합한 힘이 그렇게 보이게 한다. 모든 법의 성품과 공능의 차별은 헤아리기 어렵다」고 답한다.
거울 속 달은 멀리 보인다. 그러므로 상은 거울 면에 생긴 실재의 물질이 아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실재하는 상속의 비유가 될 수 없다.
둘째 답 — 같지 않으므로 비유가 아니다 — 은 상속의 구조를 비교한다.
如死生有是一相續前後無間餘處續生,質像相望無此相續,以不相似故不成喻。
사유와 생유는 하나의 상속이 앞뒤로 틈 없이 다른 곳으로 이어 생기는 것이다. 본래 사물과 상은 서로 이런 상속이 아니다. 서로 비슷하지 않으므로 비유가 되지 못한다.
사물과 상은 동시에 있다. 앞이 사라지고 뒤가 생기는 관계가 아니다. 또 상은 두 연(본래 사물과 거울)이 함께 있어야 생기는데, 생유는 사유라는 하나의 앞선 것에서 이어질 뿐 거울 같은 「더 뛰어난 의지처」가 따로 없다. 부모의 정혈이 거울 구실을 한다고 할 수도 없다. 화생은 허공에서 문득 생기니 거기에는 의지처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 좁은 물에 비친 두 언덕
- 그늘 속 거울의 빛
- 「鏡面月像謂之為二,近遠別見如觀井水」거울 면과 달의 상이 가깝고 멀게 따로 보인다
- 사물과 상은 동시에 있다 — 사유와 생유는 앞뒤로 이어진다
- 상은 두 연으로 생긴다 — 생유는 사유 하나에서 이어진다
가르침의 증명 — 다섯 가지 경
이치로 반대자를 깨뜨린 뒤 논은 경으로 간다. 게송의 「건달바를 설하고, 다섯과 일곱의 경이 있기 때문」이 그 요약이다. 논은 상대가 어떤 경을 「외우지 않는다(不誦)」고 할 때마다 다음 경을 꺼내는 방식으로 몰아간다.
첫째, 『칠유경』. 일곱 가지 존재 가운데 중유가 있다. 갈래의 체를 따질 때 본 그 경이다.
둘째, 『건달바경』. 그 경을 외우지 않는다 해도 이 경은 외울 것이다.
入母胎者要由三事俱現在前,一者母身是時調適、二者父母交愛和合、三健達縛正現在前。
모태에 드는 데는 반드시 세 가지가 함께 앞에 나타나야 한다. 첫째, 어머니의 몸이 그때 알맞고, 둘째, 부모가 사랑으로 화합하며, 셋째, 건달바가 바로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논은 짧게 묻는다. 「중유의 몸을 빼고 무엇이 건달바인가. 앞의 온은 이미 무너졌는데 무엇이 앞에 나타나는가.」
셋째, 『장마족경(掌馬族經)』. 경은 「지금 나타난 이 건달바는 바라문인가, 찰제리인가, 폐사인가, 수드라인가. 동방에서 왔는가, 남 · 서 · 북에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앞의 온은 무너졌으니 「온다」고 할 수 없다. 「온다」고 하는 것은 오직 중유다.
넷째, 『오불환경(五不還經)』. 다섯 불환 가운데 첫째가 중반(中般)이다. 중유가 없다면 「중간에서 열반에 드는 이」란 무엇인가. 반대자는 「중(中)이라는 이름의 하늘이 있어 거기서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생반에 대응하는 「생(生)이라는 하늘」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하늘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섯째, 『칠선사취경(七善士趣經)』. 이 경이 결정적이다. 중반을 다시 셋으로 나누는데, 그 기준이 장소와 시간의 가깝고 멂이다.
譬如札火小星迸時,纔起近即滅,初善士亦爾。譬如鐵火小星迸時,起至中乃滅,二善士亦爾。譬如鐵火大星迸時,遠未墮而滅,三善士亦爾。
달군 쇠를 두드려 작은 불티가 튈 때 일어나자마자 가까이서 꺼지듯, 첫째 선사가 그러하다. 쇳불의 작은 불티가 튀어 중간쯤 가서 꺼지듯, 둘째 선사가 그러하다. 쇳불의 큰 불티가 튀어 멀리 가서 떨어지기 전에 꺼지듯, 셋째 선사가 그러하다.
불티가 튀어 날아가다 꺼지는 위치가 다르듯, 중유가 생처를 향해 가다가 열반에 드는 거리가 다르다. 반대자가 말하는 「중천」이라는 하늘에는 이런 장소와 시간의 세 등급이 있을 수 없다. 다른 반대자는 「수명의 중간이나 하늘에 가까운 중간에 번뇌를 끊어 아라한이 되는 것」이 중반이고, 세 등급은 색계의 중동분을 얻자마자, 하늘의 즐거움을 누린 뒤, 하늘의 법회에 든 뒤라고 푼다. 논은 이 해석이 불티 비유와 맞지 않는다고 한다. 장소와 움직임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명 중간에 열반하는 것이 중반이라면 무색계에도 중반이 있어야 하는데, 경의 요약 게송은 「네 정려에 각각 열, 세 무색에 각각 일곱, 비상처는 여섯」이라 하여 무색계에 중반을 두지 않는다.
「애달프다, 그대들」 — 부파 분열에 대한 탄식
경을 다섯 개 늘어놓은 뒤 천친은 드물게 감정이 실린 말을 남긴다.
若復不誦如是等經,無上法王久已滅度,諸大法將亦般涅槃,聖教支離已成多部,其於文義異執交馳,取捨任情于今轉盛。哀哉汝等固守愚迷違理拒教,可傷之甚。
만약 이러한 경들까지 외우지 않는다면 — 위없는 법왕께서 멸도하신 지 오래고, 큰 법장들도 반열반에 들었으며, 거룩한 가르침은 갈라져 이미 여러 부파가 되었고, 글과 뜻에 대한 다른 집착이 엇갈려 내달리며, 마음대로 취하고 버리는 일이 지금 더욱 성하다. 애달프다, 그대들은 어리석음을 굳게 지켜 이치를 어기고 가르침을 거부하니, 몹시 가슴 아프다.
이 탄식은 『구사론』이 쓰인 시대의 공기를 전한다. 각 부파가 저마다 다른 경을 외우고, 불리한 경은 「우리 부파는 그 경을 외우지 않는다」고 물리치던 상황이다. 경을 공유하지 않으면 논쟁은 성립하지 않는다. 천친이 경증을 「이 경을 외우지 않는다면 저 경은」의 사슬로 엮은 것은 그 상황을 의식한 것이다. 「경을 기준으로 삼는다(經量)」는 태도를 지닌 천친이 경을 거부하는 부파 앞에서 느낀 답답함이 이 몇 줄에 담겨 있다.
반대자의 경증을 푼다
그러면 중유를 부정하는 쪽이 드는 경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논은 세 가지를 하나씩 푼다.
첫째, 극악한 업을 지은 도사마라(度使魔羅)가 「현재의 몸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는 경. 이 경의 뜻은, 그가 목숨을 아직 버리기 전에 지옥의 맹렬한 불길이 이미 몸을 태웠고, 그로 인해 목숨을 마치고 중유를 받아 무간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악업의 힘이 강해서 죽기 전에 고통의 모습이 먼저 왔을 뿐이다.
둘째, 「오무간업을 지은 자는 무간에 반드시 나락가에 난다」는 경. 「무간(無間)」은 다른 갈래로 가는 것을 막고, 그 업이 다음 생에 반드시 받는 업(순생수업)임을 드러낼 뿐이다. 글자에 매이면 다섯 가지를 다 갖추어야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되고, 「짓자마자 몸이 무너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태어난다」는 말이 되니 큰 잘못이다. 게다가 「나락가」라는 이름은 지옥으로 가는 중유에도 통한다. 사유 바로 뒤에 중유가 일어나는 것도 태어남의 방편이므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경의 게송이다.
再生汝今過盛位,至衰將近琰魔王,欲往前路無資糧,求住中間無所止。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제 한창때를 지나 쇠함에 이르러 염마왕이 가까웠다. 앞길을 가려 해도 양식이 없고, 중간에 머물려 해도 머물 곳이 없다. (『구사론』 권8 분별세품, T29, 45b)
「중간에 머물 곳이 없다」면 중유는 없는 것 아닌가. 논의 해석은 두 가지다. 이 게송은 사람 가운데서 빨리 사라져 잠시도 머물지 못함을 말한 것이거나, 중유도 생처에 이르기 위해 막힘없이 가므로 잠시도 머물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반대자가 「그 경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따지자, 천친은 같은 질문을 되돌린다. 「그대는 그 뜻이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두 질문이 같은데 왜 한쪽만 따지는가. 두 해석이 모두 경에 어긋나지 않는데, 어찌 한쪽만으로 중유가 없음을 증명하겠는가.」 해석이 갈리는 경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권8의 마지막 말이다.
『순정리론』 권24는 경량부의 상좌가 「목숨을 마친 그 자리에서 바로 태어난다면 중유는 없다」고 했다고 전하고, 이를 비판한다(「然上座言:若命終處即受生者,中有便無」). 중현은 중유를 부르는 업이 이미 앞서 지어져 있으므로, 죽은 자리에서 태어나더라도 중유의 과보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것이 없다고 답한다. 『구사론』의 천친은 중유를 부정하지 않지만, 경량부 안에서도 중유의 필연성에 대해 유부와 다른 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유 논증의 뼈대는 둘이다. 이치로는 「상속은 장소의 틈 없이 이어진다」, 경으로는 「건달바 · 중반 · 불티의 세 등급」. 그리고 반대자의 경증은 모두 해석의 여지가 있는 말이라 증거가 되지 못한다.
본송
此一業引故,如當本有形,本有謂死前,居生剎那後。 同淨天眼見,業通疾具根,無對不可轉,食香非久住。 倒心趣欲境,濕化染香處,天首上三橫,地獄頭歸下。
중유는 다음 생과 같은 하나의 업이 이끄는 것이므로, 앞으로 받을 본유의 모습과 같다. 본유란 죽음 앞, 태어남의 찰나 뒤에 있는 것이다. 같은 부류와 맑은 천안으로만 보이고, 업의 신통이 빠르며, 감관을 갖추고, 막히지 않으며, 바뀌지 않고, 향을 먹으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전도된 마음으로 욕의 대상에 달려가고, 습생은 향에, 화생은 처소에 물든다. 하늘로 가는 이는 머리가 위로, 셋은 옆으로, 지옥으로 가는 이는 머리가 아래로 간다.
無我唯諸蘊,煩惱業所為,由中有相續,入胎如燈焰, 如引次第增,相續由惑業,更趣於餘世,故有輪無初。
나는 없고 오직 온들뿐이니, 번뇌와 업이 지어낸 것이다. 중유로 이어져 모태에 드는 것이 등불의 불꽃과 같다. 이끌린 대로 차례로 자라고, 혹과 업으로 이어져 다시 다른 세상으로 간다. 그러므로 윤회의 바퀴에는 처음이 없다.
술어 풀이
- 本有본유
- 태어남의 찰나 뒤, 죽음의 찰나 앞까지의 한 생애(pūrvakālabhava). 중유는 다음 생의 본유와 모습이 같다.
- 四有사유
- 중유 · 생유 · 본유 · 사유의 네 가지 존재. 한 생명의 흐름을 네 국면으로 나눈 것이다. 무색계에는 중유가 없어 셋뿐이다.
- 業通업통
- 업에서 얻은 신통(karmarddhi). 허공을 자유로이 가는 힘으로, 모든 신통 가운데 가장 빠르다고 한다.
- 健達縛건달바
- gandharva. 『구사론』은 「향을 먹는다(gandha + √arv)」는 풀이를 소개하며 중유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쓴다.
- 倒心도심
- 전도된 마음. 중유가 생처에서 부모의 교합을 보고 일으키는 애착과 미움.
- 羯剌藍갈랄람
- kalala. 태내 다섯 단계의 첫째. 이어 알부담(arbuda) · 폐시(peśī) · 건남(ghana) · 발라사거(praśākhā)로 자란다.
- 正知入胎정지입태
- 바른 앎을 지닌 채 모태에 듦. 전륜왕 · 독각 · 부처의 세 등급이 있다.
- 法假법가
- 법에 의지한 거짓 이름. 업을 짓는 자와 받는 자는 「법가」를 빼고는 없다고 한다. 연기의 법칙만이 행위자 대신 남는다.
중유의 모습과 크기
중유는 어떤 모습인가. 게송의 첫 구가 원칙을 준다. 중유를 이끄는 업과 다음 생을 이끄는 업은 하나다. 그러므로 중유는 앞으로 갈 갈래의 본유와 같은 모습이다. 사람으로 갈 중유는 사람 모습, 개로 갈 중유는 개 모습이다.
곧 기묘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한 마리 개의 배 안에 다섯 갈래의 중유가 한꺼번에 있을 수 있다. 개의 태에서 태어날 생명들 가운데 지옥에서 오는 이도 있을 테니, 지옥으로 갈 업을 지닌 중유가 개의 배 속에 있게 된다. 지옥의 중유라면 어미의 배를 태워야 하지 않는가. 답은 둘이다. 지옥의 생명도 늘 타지는 않는다 — 잠시 동산에 노니는 때가 있다. 하물며 중유이랴. 또 중유의 몸은 아주 미세해서 보이지도 닿지도 않으니 태울 수 없고, 여러 갈래의 중유가 한 배 안에 있어도 업이 막아 서로 닿아 태우지 않는다.
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欲中有量雖如小兒年五六歲而根明利;菩薩中有如盛年時形量周圓具諸相好,故住中有將入胎時照百俱胝四大洲等。
욕계의 중유는 크기가 대여섯 살 아이만 하지만 감관은 밝고 날카롭다. 보살의 중유는 한창때의 몸처럼 모습과 크기가 원만하고 상호를 갖추었으므로, 중유에 머물다 모태에 들려 할 때 백 구지의 사대주를 비춘다.
그렇다면 보살의 어머니가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꾼 것은 무엇인가. 논은 그것이 길한 징조일 뿐 중유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보살은 오래전에 방생의 갈래를 버렸기 때문이다. 흘률지왕이 꿈에서 본 열 가지 일이 앞으로 올 일의 징조였을 뿐 본 그대로가 아니었던 것과 같다. 또 중유는 태어나는 문으로 들어가지 어머니의 배를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쌍둥이는 「먼저 나온 이가 작고(동생), 나중 나온 이가 크다(형)」. 「흰 코끼리가 여섯 상아로 어머니 배에 들어갔다」는 법선현의 게송은 어떻게 하는가. 논은 「삼장이 아니니 꼭 맞출 필요가 없다. 찬탄의 노래는 사실을 넘기도 한다」고 잘라 말한다.
색계의 중유는 본유처럼 원만하고 옷과 함께 생긴다. 부끄러움(慚愧)이 많기 때문이다. 보살의 중유도 옷을 입는다. 선백(鮮白) 비구니는 본원력으로 세세생생 저절로 생긴 옷이 몸을 떠나지 않고 때에 따라 변해, 마지막 반열반 때 그 옷으로 시신을 싸서 화장했다고 한다. 나머지 욕계 중유는 옷이 없다. 부끄러움 없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유 — 생명의 네 국면
중유가 「본유의 모습과 같다」고 했으니, 본유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여기서 사유(四有)가 세워진다.
總說有體是五取蘊。於中位別分析為四:一者中有,義如前說。二者生有,謂於諸趣結生剎那。三者本有,除生剎那死前餘位。四者死有,謂最後念。
총괄해 말하면 존재(有)의 체는 오취온이다. 그 가운데 국면에 따라 넷으로 나눈다. 첫째 중유는 앞에서 말한 대로다. 둘째 생유는 여러 갈래에 생을 잇는 찰나다. 셋째 본유는 태어나는 찰나를 빼고 죽기 전까지의 나머지 국면이다. 넷째 사유는 마지막 한 생각이다.
몸을 지닌 생명은 사유를 다 갖추고, 무색계에서는 중유가 빠져 셋이다. 이 네 국면은 순환한다. 사유 다음에 중유, 중유 다음에 생유, 생유 다음에 본유, 본유의 끝에 다시 사유. 권10에서 논은 이 넷의 성질을 다시 정리한다.
於四種有中,生有唯染污,由自地煩惱,餘三無色三。
네 가지 존재 가운데 생유는 오직 염오이니, 제 지위의 번뇌 때문이다. 나머지 셋은 세 가지 성질에 다 통하며, 무색계에는 셋이 있다.
생을 잇는 찰나는 반드시 번뇌에 물들어 있다. 「모든 번뇌 가운데 생을 이을 때 적시는 공능이 없는 번뇌는 하나도 없다」고 대법의 논사들은 말한다. 생을 잇는 것은 오직 번뇌의 힘이다. 그 찰나에 몸과 마음이 어둡고 약하더라도, 거듭 일으켜 왔거나 최근에 일어났던 번뇌의 힘이 끌어내어 번뇌가 일어난다. 중유가 처음 이어지는 찰나도 생유와 같이 반드시 염오다. 나머지 본유 · 사유 · 중유는 선 · 염오 · 무기에 다 통한다.
- 사유(死有)마지막 한 생각 「謂最後念」선 · 염오 · 무기
- 중유(中有)죽음과 태어남 사이의 오온첫 찰나는 염오, 그 뒤는 셋에 통함
- 생유(生有)갈래에 생을 잇는 한 찰나 「結生剎那」오직 염오「生有唯染污」
- 본유(本有)태어난 뒤 죽기 전까지셋에 통함
중유의 일곱 가지 성질
둘째 게송은 중유의 성질을 압축해 나열한다. 장행을 따라 하나씩 풀면 이렇다.
- 누가 보는가(同淨天眼見). 같은 부류의 중유끼리 서로 보고, 수행으로 얻은 아주 맑은 천안이 있으면 볼 수 있다. 태어나면서 얻은 눈으로는 볼 수 없다. 너무 미세하기 때문이다. 다른 설로는 하늘의 중유는 다섯 갈래의 중유를 다 보고, 아래로 갈수록 자기와 아래만 본다고 한다.
- 업의 신통이 빠르다(業通疾). 허공을 자유로이 가는 힘을 업으로 얻었으니 업통이라 하고, 모든 신통 가운데 가장 빠르다. 위로 세존조차 막을 수 없다. 업의 힘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 감관을 갖춘다(具根). 모든 중유는 다섯 감관을 갖춘다.
- 막히지 않는다(無對). 금강 같은 것도 막지 못한다. 논은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든다.
曾聞析破炎赤鐵團,見於其中有蟲生故。
일찍이 들으니, 벌겋게 달군 쇳덩이를 쪼개어 보았더니 그 안에 벌레가 생겨 있었다고 한다.
쇳덩이 속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막힘 없는 중유뿐이다.
- 바뀌지 않는다(不可轉). 어떤 갈래로 갈 중유가 일단 생기면 어떤 힘으로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의 중유가 사라지고 다른 갈래의 중유가 일어나는 일은 없다.
- 향을 먹는다(食香). 건달바라는 이름과 함께 아래에서 따로 본다.
- 오래 머물지 않는다(非久住). 이 대목에서 논사들의 설이 크게 갈린다.
향을 먹는 건달바
욕계의 중유도 단식(段食)을 먹는가. 먹기는 하지만 거친 것이 아니라 미세한 것을 먹는다.
雖資段食,然細非麁。其細者何?謂唯香氣,由斯故得健達縛名。
단식으로 몸을 지탱하기는 하나 미세한 것이지 거친 것이 아니다. 그 미세한 것이란 무엇인가. 오직 향기다. 이 때문에 건달바라는 이름을 얻는다.
논은 이 이름의 어원도 짚는다. 범어의 여러 동사 어근은 뜻이 하나가 아니고, 소리가 짧은 것(건달바 gandharva의 「a」)은 다른 낱말들처럼 줄여 쓴 것이니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복이 적은 중유는 나쁜 향만 먹고, 복이 많은 중유는 좋은 향을 먹는다. 경이 입태의 셋째 조건으로 든 「건달바」가 중유라는 경증이 여기서 이름의 풀이와 맞물린다. 사식을 다룰 때 논은 다시 중유를 「향을 먹는 이(食香)」라는 다섯 이름의 하나로 든다.
얼마나 머무는가 — 이레, 칠칠일, 잠시
중유는 얼마 동안 머무는가. 논은 네 설을 차례로 든다.
첫째, 대덕(大德)의 설. 정해진 한계가 없다. 생의 연이 아직 화합하지 않으면 중유는 늘 머문다. 중유의 명근은 따로 업이 이끈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갈 생과 같은 중동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중유의 명근이 마지막으로 멸할 때를 「죽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논은 하나의 사고 실험을 한다. 수미산만 한 고깃덩어리가 있다가 여름 비가 오자 벌레 무더기로 변했다고 하자. 그 많은 중유가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한꺼번에 왔는가. 경론에 분명한 글은 없지만 이치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냄새와 맛에 탐착하고 수명이 짧은 잡다한 생명들이 그 냄새를 맡고 함께 죽어, 벌레의 몸을 받을 업이 같은 때에 익어 한꺼번에 벌레로 태어났다. 또는 많은 생명이 연을 만나지 못해 중유에 머물다 지금 연을 만나 한꺼번에 태어났다. 전륜왕을 부르는 업이 사람의 수명이 팔만 세 이상일 때에만 결과를 주는 것과 같다. 「모든 유정의 업과 그 과보의 차별은 헤아릴 수 없다.」
둘째, 존자 세우(世友)의 설. 「많아야 이레(此極多七日)」. 이레 안에 생의 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거듭 죽고 거듭 태어난다.
셋째, 다른 논사의 설. 「많아야 칠칠일(極七七日)」, 곧 마흔아흐레다.
넷째, 비바사사의 설. 잠시만 머문다. 중유는 태어남을 즐겨 구하므로 오래 머물지 않고 빨리 가서 생을 잇는다. 생의 연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이곳 이 부류로 태어날 업이라면 업의 힘이 연을 화합시킨다. 반드시 이 연에 의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곳 다른 부류에 태어난다. 비슷한 부류로 옮겨 태어난다는 설도 있다. 집소 · 개 · 곰 · 말은 욕정이 각각 여름 · 가을 · 겨울 · 봄에 일어나는데, 그때를 만나지 못하면 들소 · 들개 · 큰곰 · 나귀처럼 때가 정해지지 않은 비슷한 부류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은 곧 이 설에 의문을 단다. 중유와 생은 같은 업이 이끄니 중동분이 다를 수 없는데, 어떻게 비슷한 부류로 바꾸어 받는다 하겠는가.
『대비바사론』 권70은 이 이설을 이름과 함께 전한다. 「존자 설마달다는 말한다. 중유는 많아야 칠칠일 머문다. 마흔아흐레에는 반드시 생을 잇기 때문이다(尊者設摩達多說曰。中有極多住七七日。四十九日定結生故)」, 「존자 세우는 말한다. 중유는 많아야 이레 머문다. 그 몸이 약해 오래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尊者世友作如是說。中有極多住經七日。彼身羸劣不久住故)」. 『구사론』이 「다른 논사(有餘師)」라고만 한 칠칠일설의 주인이 여기서 드러난다.
전도된 마음 — 입태의 순간
중유는 어떻게 모태에 드는가. 『구사론』의 서술은 아비달마 문헌 가운데서도 드물게 생생하다.
如是中有為至所生,先起倒心馳趣欲境,彼由業力所起眼根雖住遠方,能見生處父母交會而起倒心,若男緣母起於男欲、若女緣父起於女欲,翻此緣二俱起瞋心。
이 중유는 태어날 곳에 이르기 위해 먼저 전도된 마음을 일으켜 욕의 대상으로 달려간다. 업의 힘으로 생긴 눈은 먼 곳에 있어도 태어날 곳의 부모가 교합하는 것을 보고 전도된 마음을 일으킨다. 남자라면 어머니를 대상으로 남자의 욕정을, 여자라면 아버지를 대상으로 여자의 욕정을 일으키고, 반대로 다른 쪽에는 성냄을 일으킨다.
『시설론』도 「그때 건달바는 두 마음 가운데 하나를 일으키니 애착이거나 성냄이다」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전도된 마음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가.
彼由起此二種倒心,便謂己身與所愛合。所憎不淨泄至胎時,謂是己有便生喜慰,從茲蘊厚中有便沒,生有起已名已結生。
이 두 가지 전도된 마음을 일으켜, 자기 몸이 사랑하는 이와 합한다고 여긴다. 미워하는 이의 정이 태에 이를 때 그것을 자기 것이라 여겨 기뻐하니, 이로부터 온이 두터워져 중유는 사라지고 생유가 일어나 생을 이었다고 한다.
태어남의 첫 찰나가 애착과 미움이라는 번뇌의 한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 — 「생유는 오직 염오」라는 원칙의 구체적인 그림이다. 남자로 태어날 이는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 기대어 등을 향해 쪼그려 앉고, 여자로 태어날 이는 왼쪽 옆구리에 기대어 배를 향해 머문다. 중유는 반드시 감관을 갖추므로 남녀가 아닌 중유는 없다.
이어 논은 한 가지 문제를 따진다. 태의 첫 단계에서 부모의 정혈 자체가 업의 힘으로 감관의 의지처가 되는가, 아니면 업이 따로 대종을 내어 정혈에 머물게 하는가. 앞의 설은 감관 없는 중유가 함께 멸하고 감관 있는 것이 이어 생긴다고 하며 씨앗과 싹의 멸 · 생에 비유한다. 그래서 첫 단계를 갈랄람이라 하고, 경의 「부모의 부정이 갈랄람을 낳는다」와 맞는다고 한다. 뒤의 설은 잎이나 거름에서 벌레가 따로 생기듯, 부정한 덩어리 안에 갈랄람이 따로 생긴다고 한다. 논은 둘 다 적고 판정하지 않는다.
습생과 화생도 다르지 않다. 습생은 「향에 물들어」 태어난다. 멀리서 태어날 곳의 냄새를 맡고 애착을 일으켜 간다. 화생은 「처소에 물들어」 태어난다. 멀리서 태어날 곳을 보고 애착을 일으켜 간다. 그렇다면 지옥에도 애착을 일으켜 가는가. 그렇다. 마음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謂彼中有,或見自身冷雨寒風之所逼切,見熱地獄火焰熾然,情欣煖觸投身於彼。或見自身熱風盛火之所逼害,見寒地獄,心欲清涼投身於彼。
그 중유는 자기 몸이 찬비와 찬 바람에 시달린다고 보고는, 뜨거운 지옥의 불꽃이 활활 타는 것을 보고 따뜻함을 반겨 그곳에 몸을 던진다. 또 자기 몸이 뜨거운 바람과 성한 불에 시달린다고 보고는, 차가운 지옥을 보고 시원함을 바라 그곳에 몸을 던진다.
옛 논사들은 또, 그 업을 지을 때 함께했던 동료들이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따라간다고 한다. 가는 모습도 다르다. 하늘로 가는 중유는 자리에서 일어서듯 머리를 위로 하고 오르며, 사람 · 아귀 · 방생으로 가는 중유는 사람처럼 옆으로 가고, 지옥으로 가는 중유는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하여 거꾸로 떨어진다.
바른 앎으로 드는 세 사람
모든 중유가 전도된 마음으로 드는가. 그렇지 않다. 경은 입태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一於入正知,二三兼住出,四於一切位,及卵恒無知。前三種入胎,謂輪王二佛,業智俱勝故,如次四餘生。
첫째는 들 때만 바로 알고, 둘째와 셋째는 머물 때와 나올 때까지 겸해 안다. 넷째는 모든 때에 모르며, 난생은 늘 모른다. 앞의 세 입태는 전륜왕과 두 부처(독각과 부처)이니, 업과 지혜와 둘 다가 차례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넷째는 나머지 생명이다. (『구사론』 권9 분별세품, T29, 47a)
복이 적은 이는 들 때 전도된 생각을 일으켜, 큰비와 바람, 혹독한 더위와 추위, 군대의 소란에 쫓겨 우거진 풀숲이나 잎 굴, 띠집, 나무 아래로 숨어든다고 본다. 복이 많은 이는 아름다운 동산에 들고 꽃의 누대에 올라 좋은 자리에 앉는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반면 바른 앎으로 드는 이는 「내가 지금 모태에 든다」 「머문다」 「나온다」를 안다.
세 등급은 이렇다. 전륜왕은 들 때만 바로 안다. 지난 세상에 큰 복을 닦아 업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독각은 들 때와 머물 때를 바로 안다. 오래 많이 듣고 사유를 익혀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부처는 들 때 · 머물 때 · 나올 때를 다 바로 안다. 오랜 겁 동안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았기 때문이다. 게송이 「넷째」부터 거꾸로 센 것은 게송의 운율 때문이며, 「겸한다」는 말은 뒤의 것이 반드시 앞의 것을 동반함을 드러낸다.
입태의 순간은 번뇌의 순간이다. 다만 복과 지혜가 그 번뇌의 어둠을 얼마나 밝히느냐에 따라 입태 · 주태 · 출태의 앎이 달라진다.
나는 없고 오직 온들뿐 — 등불의 상속
중유와 입태를 이렇게 자세히 말하면 외도는 반가워한다. 유정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 간다면 자기들이 말하는 「아(我)」가 증명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논은 여기에 이 품의 중심 게송을 놓는다.
외도가 말하는 아는 「이 온을 버리고 다른 온을 잇는 내적 주체(內用士夫)」다. 그런 것은 없다. 눈이나 빛깔처럼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존도 말했다.
有業有異熟,作者不可得。
업이 있고 이숙이 있으나, 짓는 자는 얻을 수 없다.
이 온을 버리고 저 온을 잇는 자는 없다. 「법가(法假)」를 빼고는. 법가란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다. 그렇다면 어떤 아는 부정하지 않는가. 오직 온들에 거짓으로 붙인 이름으로서의 아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온들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 간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온은 찰나마다 멸하므로 옮겨 갈 힘이 없다. 그러나 거듭 익힌 번뇌와 업이 지어낸 힘으로 중유의 온이 상속해 모태에 든다.
譬如燈焰雖剎那滅,而能相續轉至餘方。諸蘊亦然,名轉無失,故雖無我而由惑業諸蘊相續入胎義成。
등불의 불꽃이 찰나마다 멸하면서도 상속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듯, 온들도 그러하니 「옮겨 간다」고 해도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아가 없어도 혹과 업으로 말미암아 온들이 상속해 모태에 든다는 뜻이 성립한다.
이 등불의 비유는 중유 논증의 곡식 비유와 짝을 이룬다. 곡식은 「장소의 틈 없이」를, 등불은 「찰나멸하면서도 옮겨 간다」를 보여 준다. 중유는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다리다. 무아의 오온 분석과 「나」의 논파 자체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과 이 연재의 마지막 편에서 깊이 다루므로, 여기서는 이 게송이 분별세품 안에서 맡은 구실 — 중유와 입태의 서술이 아(我)의 증명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막는 구실 — 만 짚어 둔다.
태 안의 다섯 단계와 출산
게송의 「이끌린 대로 차례로 자란다」는 태내의 성장을 말한다. 모든 상속이 같은 길이로 자라지 않는 것은 수명을 이끄는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논은 성자의 게송을 인용한다.
最初羯剌藍,次生頞部曇,從此生閉尸,閉尸生鍵南,次鉢羅奢佉,後髮毛爪等,及色根形相,漸次而轉增。
처음에 갈랄람, 다음에 알부담이 생기고, 여기서 폐시가, 폐시에서 건남이 생기며, 다음에 발라사거, 그 뒤에 머리카락 · 털 · 손톱 등과 감관과 몸의 모양이 차츰 자란다. (『구사론』 권9 분별세품, T29, 47c)
감관과 모양이 다 갖추어지면 업에서 생긴 이숙의 바람이 태아를 돌려 산문으로 향하게 한다. 『구사론』은 이어 산모와 태아가 겪는 위험, 태중에서 죽은 아이를 산파나 의사가 꺼내는 장면, 무사히 태어난 아기가 「새 상처처럼」 연약해 거친 손에 씻기고 젖을 먹는 장면을 숨김없이 적는다. 그리고 결론으로 간다. 감관이 익으면 다시 번뇌를 일으켜 업을 쌓고, 몸이 무너지면 다시 중유가 이어져 다른 세상으로 간다.
如是惑業為因故生,生復為因起於惑業,從此惑業更復有生,故知有輪旋環無始。
이처럼 혹과 업을 원인으로 태어나고, 태어남이 다시 원인이 되어 혹과 업을 일으키며, 이 혹과 업에서 다시 태어남이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 바퀴는 돌고 돌아 처음이 없음을 안다.
처음이 있다고 하면 그 처음은 원인이 없어야 하고, 원인 없는 처음이 있다면 다른 것도 저절로 일어나야 한다. 싹은 씨앗에서, 익음은 불에서 생기니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생사에는 처음이 없다. 그러나 끝은 있다. 원인이 다하면 결과도 사라진다. 씨앗이 무너지면 싹이 나지 않듯이. 그리고 이 「온의 상속」을 세 생에 걸쳐 나누어 세운 것이 십이연기다 — 이렇게 논은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본송
如是諸緣起,十二支三際,前後際各二,中八據圓滿。
이와 같은 여러 연기는 열두 지분이 세 때에 걸친다. 앞때와 뒤때에 각각 둘, 가운데 여덟은 원만한 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傳許約位說,從勝立支名。
전하기를, 국면에 따라 설한 것이며, 뛰어난 것을 따라 지분의 이름을 세웠다고 한다.
此中意正說,因起果已生。
여기서 경의 뜻은 바로, 원인을 「연기」라 하고 결과를 「연이생」이라 설한 것이다.
술어 풀이
- 緣起연기
- pratītyasamutpāda. 『구사론』은 이 말의 범어 분석(pratītya + sam + ut + √pad)을 두고 성론사(문법가)와 논쟁한다.
- 緣已生法연이생법
- 연에서 이미 생긴 법(pratītyasamutpanna dharma). 경은 「연기법」과 「연이생법」을 나누어 설한다.
- 剎那緣起찰나연기
- 한 찰나 안에 열두 지분이 다 갖추어지는 연기(kṣaṇika). 탐으로 살생하는 한 찰나를 예로 든다.
- 連縛緣起연박연기
- 같은 부류 · 다른 부류의 원인과 결과가 틈 없이 이어 일어나는 연기(sāṃbandhika).
- 分位緣起분위연기
- 세 생에 걸친 열두 국면의 오온이 이어지는 연기(āvasthika). 유부가 경의 십이연기로 보는 것.
- 遠續緣起원속연기
- 여러 생에 걸쳐 멀리 이어지는 연기(prākarṣika).
- 傳許전허
- 「전하기를 허락한다」. 천친이 유부의 설을 거리를 두고 옮길 때 쓰는 말. 중현은 이것을 「경주(천친)가 믿지 않아서 쓴 말」이라고 지적한다.
- 上座상좌
- 『순정리론』이 경량부의 대표 논사를 부르는 이름. 보광은 이를 슈리라타(室利羅多, Śrīlāta)라 한다.
- 軌範師궤범사
- 천친이 따른 경량부의 스승들. 보광은 「논주가 이어받은 경량부의 궤범사」라고 주석한다.
십이연기의 자리 — 기본은 계보 一에서
열두 지분이 무엇이고 그것이 과거 · 현재 · 미래의 세 때에 어떻게 배당되는지, 혹 · 업 · 고(사)의 셋으로 어떻게 묶이는지, 앞때의 원인 둘(무명 · 행)과 지금의 결과 다섯(식~수), 지금의 원인 셋(애 · 취 · 유)과 뒤때의 결과 둘(생 · 노사)이 어떻게 두 겹의 인과를 이루는지는 계보 一 십이연기에서 『구사론』의 열두 마디 표와 함께 읽었다. 여기서는 그 체계를 되풀이하지 않고, 『구사론』이 이 체계를 세우면서 무엇을 문제 삼았는지를 따라간다.
먼저 두 가지만 짚어 둔다. 첫째, 「가운데 여덟은 원만한 이를 기준으로 한다(中八據圓滿)」. 지금 생의 여덟 지분이 모든 생명에게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요절한 이나 색계 · 무색계의 생명에게는 다 갖추어지지 않는다. 열두 지분은 모든 국면을 다 겪는 욕계의 사람을 기준으로 세운 것이다. 근거는 『대연기경』에서 붓다가 아난에게 「식이 모태에 들지 않아도 자랄 수 있느냐」고 묻는 대목이다. 둘째, 경은 때로 연기를 두 부분으로만 나누기도 한다. 무명에서 수까지 일곱은 앞때, 애에서 노사까지 다섯은 뒤때. 앞부분은 결과, 뒷부분은 원인이다.
『구사론』은 권9 둘째 본송의 열두 구절로 각 지분의 체를 이렇게 정의한다. 무명은 지난 생의 번뇌의 국면(宿惑位), 행은 지난 생의 업의 국면, 식은 바로 생을 잇는 찰나의 오온(正結生蘊), 명색은 결생 뒤 육처가 생기기 전, 육처는 눈 등이 생긴 뒤 감관 · 대상 · 식이 아직 만나기 전, 촉은 셋이 만났으나 세 가지 느낌의 원인을 아직 가리지 못하는 국면, 수는 그 원인을 가리게 되었으나 아직 음욕이 일어나기 전, 애는 좋은 것과 음욕을 탐하나 아직 널리 구하지 않는 국면, 취는 경계를 얻으려 두루 내달리는 국면, 유는 다음 생의 결과를 부를 업을 바로 짓는 국면, 생은 다음 생을 잇는 것, 노사는 다음 생의 수에 이르기까지다.
이 정의에서 주목할 것은 그 방식이다. 『구사론』은 각 지분을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느 국면이냐」로 정의한다. 무명은 무명이라는 심소 하나가 아니라 「지난 생의 번뇌의 국면」 전체이고, 수는 느낌이라는 심소 하나가 아니라 「느낌의 원인을 가리게 되었으나 아직 음욕이 일어나지 않은 국면」의 오온 전체다. 이것이 유부의 「분위연기」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경량부의 표적이 된다.
연기의 네 가지 — 찰나 · 연박 · 분위 · 원속
열두 지분의 체를 국면으로 정의한 직후, 논은 연기를 네 가지로 나눈다.
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
또 여러 연기를 구별해 넷으로 설한다. 첫째 찰나, 둘째 연박, 셋째 분위, 넷째 원속이다.
찰나연기는 한 찰나 안에 열두 지분이 다 갖추어지는 것이다. 논의 예는 탐으로 살생하는 한 찰나다.
謂剎那頃由貪行殺具十二支,癡謂無明,思即是行,於諸境事了別名識,識俱三蘊總稱名色,住名色根說為六處,六處對餘和合有觸,領觸名受,貪即是愛,與此相應諸纏名取,所起身語二業名有,如是諸法起即名生,熟變名老滅壞名死。
한 찰나에 탐으로 살생을 하면 열두 지분이 갖추어진다. 어리석음이 무명이고, 의도가 곧 행이며, 대상을 분별하는 것을 식이라 하고, 식과 함께하는 세 온을 통틀어 명색이라 하며, 명색에 머무는 감관을 육처라 하고, 육처가 다른 것과 만나 촉이 있으며, 촉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이고, 탐이 곧 애이며, 이와 상응하는 여러 얽매임을 취라 하고, 일으킨 몸과 말의 두 업을 유라 하며, 이러한 법들이 일어나는 것을 생, 익어 변하는 것을 노, 멸하여 무너지는 것을 사라 한다.
이어 논은 다른 설명을 붙인다. 찰나연기와 연박연기는 『품류족론』의 연기처럼 모든 유위법에 두루 통하고, 열두 지분 국면의 모든 오온은 분위연기에 들며, 그것이 아득히 이어져 처음이 없는 것을 원속연기라 한다.
이 넷은 『구사론』이 처음 세운 것이 아니다. 『대비바사론』 권23은 『품류족론』이 「연기법이란 모든 유위법」이라고 한 것과 경이 열두 지분을 설한 것의 차이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復次緣起有四種。一剎那。二連縛。三分位。四遠續。此說分位遠續。彼說剎那連縛。
또 연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찰나 · 연박 · 분위 · 원속이다. 이것(경)은 분위와 원속을 설하고, 저것(『품류족론』)은 찰나와 연박을 설한다.
곧 네 가지 연기는 「경의 연기」와 「논의 연기」를 화해시키려는 장치다. 경은 유정의 생사를 세 생에 걸쳐 설하고(분위 · 원속), 논은 모든 유위법의 인과를 찰나 단위로 분석한다(찰나 · 연박). 둘은 다른 것을 설한 것이 아니라 같은 연기를 다른 축척으로 본 것이다.
『순정리론』 권27은 넷의 순서를 「찰나 · 원속 · 연박 · 분위」로 두고 각각을 다시 정의한다. 찰나연기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함께 행하는 것(「眼及色為緣生於眼識」처럼), 원속연기는 순후수업과 부정수업 · 번뇌 때문에 처음 없이 윤회하는 것, 연박연기는 같은 부류 · 다른 부류의 원인과 결과가 틈 없이 이어 일어나는 것, 분위연기는 세 생 가운데 열두 국면의 오온이 틈 없이 상속하는 것이다. 중현은 또 상좌가 「한 찰나에는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이유로 찰나연기를 부정했다고 전한다.
「전하기를」 — 천친이 거리를 둔 정설
그러면 세존이 경에서 설한 십이연기는 넷 가운데 어느 것인가. 게송은 「전하기를, 국면에 따라 설한 것(傳許約位說)」이라고 답한다.
傳許世尊唯約分位說諸緣起有十二支。若支支中皆具五蘊,何緣但立無明等名?以諸位中無明等勝故。
전하기를, 세존은 오직 국면에 따라 여러 연기에 열두 지분이 있다고 설했다고 한다. 지분마다 오온이 다 갖추어져 있다면 왜 무명 등의 이름만 세웠는가. 여러 국면 가운데 무명 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왕이 행차할 때 수행원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왕이 뛰어나므로 「왕의 행차」라 하듯, 무명이 가장 두드러진 국면의 오온 전체를 무명이라 부른다. 체는 오온 전체이지만 이름이 다르니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하기를(傳許)」이라는 말이다. 본송에서 천친이 자기 주장을 할 때는 이런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 말은 유부의 설을 「그렇다고들 한다」고 옮기는 표지다. 이 표지를 가장 예민하게 읽은 것은 유부의 옹호자 중현이었다.
對法諸師咸作是說,佛依分位說諸緣起。經主不信說傳許言。
대법의 논사들은 모두 「부처님은 국면에 의지해 여러 연기를 설했다」고 한다. 경주(천친)는 이를 믿지 않아서 「전하기를 허락한다」는 말을 썼다.
천친이 이 게송에서 이미 유부의 분위연기설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반대편이 확인해 준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장행은 몇 쪽 뒤에서 경량부의 정면 비판을 싣는다.
경량부의 비판 — 「무명이란 앞때의 무지」
經部諸師作如是白:此中所說為述己情、為是經義?若是經義,經義不然。
경량부의 논사들이 이렇게 아뢴다. 「여기서 말한 것은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인가, 경의 뜻인가. 경의 뜻이라면, 경의 뜻은 그렇지 않다.」
경량부의 논거는 경의 정의다. 경은 「무엇이 무명인가. 앞때(전제)에 대한 무지 …」라고 각 지분을 분명히 정의했다. 이것은 뜻이 다 드러난 요의(了義)의 설이니, 억지로 불요의로 만들 수 없다. 열두 지분을 열두 국면의 오온이라고 하면 경의 정의와 어긋난다.
유부는 반박한다. 모든 경이 요의는 아니다. 뛰어난 것을 따라 설한 경도 있다. 『상적유경(象迹喻經)』은 「무엇이 몸 안의 지계인가. 머리카락 · 털 · 손톱 등」이라 하는데, 머리카락 등에 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색 등 다른 법도 있지만 두드러진 것을 따라 설한 것이다. 무명도 마찬가지다.
경량부는 그 비유를 뒤집는다. 『상적유경』은 머리카락 등으로 지계를 「분별」한 것이지, 지계가 머리카락 등을 넘어서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경은 다 갖추어 설한 경이다. 콧물 · 눈물 같은 것에도 지계가 있지만, 경은 「몸 안의 다른 것들」이라고 그것까지 다 말했다. 그러니 무명 등의 지분도 경이 말한 것이 전부다. 그것 말고 다른 무명이 있다면 보여 달라. 다른 부류의 법을 무명 안에 끌어넣어 무슨 이익이 있는가. 모든 국면에 오온이 있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저것이 반드시 있고 없는 것」만을 저것의 지분으로 세울 수 있다. 오온이 있어도 행(복행 · 비복행 · 부동행)이 없거나, 식에서 애까지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경의 뜻은 경이 말한 그대로다.
보광은 이 대목을 「경량부가 분위연기의 오온체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석한다(「此即述經部難分位緣起五蘊為體」). 유부의 분위연기는 지분마다 오온 전체를 담아 체계를 포괄적으로 만들었지만, 경량부는 그 포괄성이 오히려 각 지분의 고유한 인과적 구실을 흐린다고 본 것이다.
중현「經主不信說傳許言」 경주는 믿지 않아서 「전하기를」이라 했다
경은 왜 유정의 연기만 설했는가
『품류족론』은 연기를 모든 유위법이라 했는데, 경은 왜 유정의 십이연기만 설했는가. 논의 답은 「앞때 · 뒤때 · 가운데때에 대한 남의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앞때에 대해 「나는 과거세에 있었는가 없었는가, 무엇이었는가, 어떠했는가」 의심하고, 뒤때에 대해 「나는 미래세에 있을 것인가 …」 의심하며, 가운데때에 대해 「무엇이 나인가, 이 나는 어떠한가, 나는 누구의 것이며 누가 나의 것인가」 의심한다. 이 세 의혹을 없애려고 무명 · 행(앞때), 생 · 노사(뒤때), 식에서 유까지(가운데때)를 설했다. 경은 「연기와 연이생법을 바른 지혜로 보는 이는 세 때에 대해 어리석지 않다」고 한다. 연기의 교설은 우주론이 아니라 「나」에 대한 의혹을 푸는 치료라는 것이다.
이어 논은 열두 지분으로 충분한가를 따진다. 노사 뒤의 결과와 무명 앞의 원인을 설하지 않았으니 생사에 끝과 처음이 있게 되지 않는가. 아니면 지분을 더 세워야 하고, 그러면 끝없이 이어지지 않는가. 답은 「혹에서 혹과 업이 생기고, 업에서 사가 생기며, 사에서 사와 혹이 생긴다」는 게송이다. 노사는 사이므로 다시 혹을 낳고, 무명은 혹이므로 사와 혹에서 생긴다. 지분을 더 세울 필요가 없다. 경이 「이와 같이 순전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고 한 것이 이 순환을 가리킨다.
이 대목에도 경량부의 해석이 들어온다. 어떤 이는 다른 경에 「비리작의가 무명의 원인이고 무명이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고 했으니 무명의 원인이 설해져 있다고 한다. 보광은 이 해석을 상좌의 것으로 보고, 『순정리론』 권28도 「여기서 상좌는 이렇게 해석한다(此中上座作是釋言)」며 같은 설을 소개한다. 상좌는 비리작의가 촉의 때에 있다고 하고, 「눈과 빛깔을 연해 어리석음에서 생긴 물든 작의가 생긴다」는 경을 근거로 든다. 천친은 이 해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렇다면 「이치로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경이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는 지나친 결론이 나온다고 지적하고, 결국 경의 뜻은 세 때의 의혹을 없애는 데 있으므로 처음과 끝을 따로 설하지 않아도 이치가 원만하다고 정리한다.
연기와 연이생 — 같은가 다른가
세존은 「내가 너희에게 연기법과 연이생법을 설하겠다」고 했다. 둘은 무엇이 다른가. 논은 먼저 본론(『품류족론』)에서는 둘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둘 다 모든 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질문이 생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법을 어떻게 과거 · 현재처럼 「이미 생긴 법(已生)」이라 하는가. 논은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비춘다. 미래의 아직 지어지지 않은 법을 어떻게 과거 · 현재처럼 「유위(有爲, 지어진 것)」라 하는가. 짓는 의도의 힘이 이미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루법은 어떻게 유위인가. 그것도 선한 의도의 힘이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반을 얻는 것도 그래야 한다. 결국 논은 「같은 부류에 의지해 말한 것」이라 한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도 「색(변하고 무너지는 것)」이라 부르듯, 같은 부류이므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천친은 경의 바른 뜻을 게송으로 세운다. 「원인을 연기라 하고, 결과를 연이생이라 한다.」
諸支因分說名緣起,由此為緣能起果故。諸支果分說緣已生,由此皆從緣所生故。如是一切二義俱成,諸支皆有因果性故。
여러 지분의 원인 부분을 연기라 한다. 이것을 연으로 결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지분의 결과 부분을 연이생이라 한다. 이것은 모두 연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지분에 두 뜻이 다 성립한다. 모든 지분이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지분이 연기이기도 하고 연이생이기도 해서 정의가 흔들리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원인과 결과처럼, 한 사람이 아버지이면서 아들이듯 관계에 따라 이름이 다를 뿐이다.
여기서 존자 망만(望滿)이 사구를 세운다. 연기이지만 연이생이 아닌 것은 미래의 법이다. 연이생이지만 연기가 아닌 것은 아라한의 마지막 마음의 국면에 있는 과거 · 현재의 법이다(다음 결과를 낳지 않으므로). 둘 다인 것은 나머지 과거 · 현재의 법이다. 둘 다 아닌 것은 무위법이다. 경량부는 이 사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래의 법이 연이생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이 연이생법인가. 무명 · 행에서 생 · 노사까지」라고 한 경과 어긋난다. 생과 노사는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두 지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앞에서 세운 세 때의 체계가 무너진다.
연기는 무위법인가
또 어떤 이는 연기가 무위법이라고 한다.
有說:緣起是無為法,以契經言:如來出世若不出世,如是緣起法性常住。
어떤 이는 연기가 무위법이라고 한다. 경에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이와 같은 연기의 법성은 늘 머문다」고 했기 때문이다.
보광은 이것을 대중부 등의 설로 보고, 『대비바사론』 권23은 「분별론자」의 설이라 부른다. 『대비바사론』은 유부가 이 설을 막기 위해 「연기는 유위법이며 삼세에 떨어진다」는 정의를 세웠다고 한다.
천친의 판정은 미묘하다. 그 뜻이 무엇이냐에 따라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여래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행은 늘 무명을 연해 일어나지 다른 것을 연하거나 연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맞다. 법칙으로서의 연기가 늘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라는 별도의 법체가 맑고 늘 머문다」는 뜻이라면 틀리다. 왜냐하면 일어남(起)은 유위의 특징인데 상주하는 별도의 법이 무상한 것의 특징이 될 수는 없고, 일어남은 일어나는 것에 의지해 세워지는데 이 상주하는 법이 무명 등과 무슨 관계가 있어 그것들의 연기가 되겠으며, 「연해 일어난다」는 말이 상주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은 낱말 뜻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는 「늘 그러한 법칙」이지 「늘 있는 실체」가 아니다. 천친은 연기의 상주성을 법칙의 차원에서 인정하고 실체의 차원에서 부정한다.
「연기」라는 말의 문법 — 성론사와의 논쟁
이어 논은 「연기」라는 낱말의 뜻을 따진다. 이 대목은 『구사론』이 인도 문법학(성론)의 방법과 정면으로 맞서는 곳이다.
鉢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
「프라티(prati)」는 「이른다」는 뜻이고, 어근 「이(√i)」는 「간다」는 뜻이다. 접두사의 도움으로 어근의 뜻이 바뀌므로 「간다」가 「이른다」로 바뀌어 「연(緣)」이 된다. 「삼(sam)」은 「화합」의 뜻, 「우드(ud)」는 「위로 오름」의 뜻, 어근 「파드(√pad)」는 「있음」의 뜻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연기란 「어떤 것이 연에 이른 뒤(pratītya) 화합해 위로 일어나는 것(samutpāda)」이다. 문제는 범어 문법에서 「-tya」로 끝나는 연속분사가 「~한 뒤에」라는 앞선 동작을 나타낸다는 데 있다. 「목욕한 뒤에 먹는다」처럼, 한 행위자가 두 동작을 하는데 앞의 동작에 「이미」를 붙인다. 그렇다면 어떤 법이 먼저 연에 「이르고」 나중에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은 없는 것이니 연에 이를 수 없고, 동시라면 「~한 뒤에」가 맞지 않는다. 행위자 없이 행위가 있을 수도 없다. 반대자는 이를 게송으로 요약한다.
至緣若起先,非有不應理,若俱便壞已,彼應先說故。
연에 이르는 것이 일어남보다 앞이라면, 없는 것이 이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동시라면 「~한 뒤에」가 무너진다. 그것이 먼저 설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9 분별세품, T29, 50b)
천친은 성론사들에게 되묻는다. 법은 언제 일어나는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현재라면 이미 생긴 것이 어떻게 또 일어나는가. 미래라면 그때는 아직 없으니 어떻게 행위자가 되는가. 행위자가 없으면 행위도 없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국면 — 미래의 행이 바로 일어나는 국면 — 에서 연에 이른다고도 말한다. 또 성론사가 세운 행위자와 행위라는 구분 자체가 실재가 아니다. 「있음」이 행위자이고 「일어남」이 행위라 하지만, 일어남과 다른 행위자를 실제로 볼 수는 없다. 이런 말은 세속의 표현으로서 잘못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연기의 뜻은 결국 경이 말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긴다」로 풀어야 한다.
천친은 반박의 게송을 덧붙인다. 「어둠이 이른 뒤 등불이 꺼진다」 「입을 벌린 뒤 잔다」처럼, 「~한 뒤」의 형태가 동시의 일에도 쓰이는 말의 관례를 들어, 문법의 형식이 사태의 시간 순서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프라티」는 「여러 가지」, 「이」는 「머물지 않음」, 「삼」은 「모임」, 「우드」는 「오름」, 「파드」는 「행함」의 뜻이니, 「여러 연이 화합해 행법들을 모아 일으키는 것」이 연기라는 것이다. 천친은 여기에는 맞지만, 눈과 빛깔이 각각 연이 되어 안식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가 모인다」는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두 구절의 해석들 —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경은 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依此有彼有)」와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긴다(此生故彼生)」 두 구절을 함께 설했는가. 『구사론』은 이 물음에 대한 해석을 여섯 가지쯤 나열하는데, 보광의 주석을 함께 보면 그 상당수가 경량부 내부의 해석임이 드러난다.
- 유부의 해석: 연기를 결정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다. 「무명에 의지해 행이 있지, 무명을 떠나 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지분과 지분이 이어 생기고, 세 때가 이어 생기며, 직접의 연(무명 바로 다음에 행)과 간접의 연(전전하는 힘으로 행이 생김)을 보이기 위해서다.
- 어떤 논사의 해석: 무인론과 상인론(常因論)을 깨기 위해서다. 원인 없이 행이 있지 않고, 상주하는 자성이나 아 같은 생겨나지 않는 원인으로 행이 생기지 않는다. 보광은 이를 「경량부의 다른 논사 존자 세조(世曹)」의 설이라 하고, 『순정리론』은 이를 「상좌의 무리」의 설로 묶는다. 천친은 그렇다면 둘째 구절만으로 둘을 다 깨니 첫째 구절이 쓸모없다고 반박한다.
- 궤범사들의 해석: 원인과 결과가 끊어지지 않음과 생김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무명이 끊어지지 않음에 의지해 행이 끊어지지 않고, 무명이 생겨서 행이 생긴다.」 보광은 이것을 「논주가 이어받은 경량부의 궤범사」의 설이라 한다. 천친은 이 해석에는 반박을 달지 않는다.
- 어떤 이의 해석: 원인과 결과의 머묾과 생김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보광은 상좌와 함께 배운 이의 설이라 한다. 천친은 생김을 말하려는데 왜 머묾을 말하며, 왜 순서를 거꾸로 했느냐고 반박한다.
- 또 다른 해석: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는 결과가 있음에 의지해 원인이 사라짐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긴다」는 결과가 원인 없이 생긴다는 의심을 막는 말이라는 것이다.
復有釋言:依此有彼有者,依果有因有滅。此生故彼生者,恐疑果無因生,是故復言由因生故果方得起,非謂無因。
또 어떤 이는 해석한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는 결과가 있음에 의지해 원인이 사라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긴다」는, 결과가 원인 없이 생긴다고 의심할까 봐 「원인이 생겨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다시 말한 것이다.
보광은 이것을 「경량부의 슈리라타(室利羅多)의 해석이며, 『순정리론』은 그를 상좌라 부른다」고 주석한다. 『순정리론』 권25도 「상좌가 다시 말한다(上座復言)」며 같은 문장을 옮긴다. 천친은 이 해석을 물리친다. 경의 뜻이 그렇다면 「이것이 있어 저것이 사라진다」고 해야 하고, 순서도 원인의 생김을 먼저 말한 뒤 결과가 있음에 의지한 원인의 사라짐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현은 이 대목에서 천친보다 더 세게 상좌를 공격하면서 「상좌의 말은 그 친교 문인과 같은 견해를 지닌 이들조차 믿지 않는다」고 쓴다.
보광 『구사론기』 권9의 주석: 「復有釋言至非謂無因」 대목은 「경량부 가운데 슈리라타의 해석(經部中室利羅多解)」, 「有餘師釋至諸行得生」은 「경량부의 다른 논사 존자 세조(經部異師尊者世曹)」, 「軌範諸師」는 「논주가 이어받은 경량부의 궤범사(論主承習經部軌範諸師)」. 같은 경량부 안에서도 천친이 따르는 계보(궤범사)와 상좌 슈리라타의 계보가 구별되었음을 보여 준다.
천친 자신의 읽기 — 「오직 행이 있을 뿐」
논사들의 해석을 다 검토한 뒤, 천친은 「내가 이제 경의 뜻에 맞게 간략히 드러내겠다(我今略顯符順經義)」며 열두 지분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앞의 분위연기 정의와 달리, 이 읽기는 각 지분을 경이 말한 그대로의 법으로 푼다.
어리석은 이들은 연에서 생긴 법이 오직 행(行, saṃskāra)일 뿐임을 알지 못하고 아견과 아만을 일으키며, 자기가 즐거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으려고 몸 · 말 · 뜻의 업을 짓는다. 다음 생의 즐거움을 위해 복업을, 그 위의 느낌을 위해 부동업을, 지금의 즐거움을 위해 비복업을 짓는다. 이것이 무명이 행을 연하는 것이다. 업이 이끄는 힘으로 식의 흐름이 불꽃처럼 이어져 중유에 기대 생처로 달려가 생을 잇는다. 이것이 행이 식을 연하는 것이다. 이렇게 풀면 식 지분이 결생의 한 찰나가 아니라 여섯 식 모두에 통한다는 경의 설명과도 맞는다고 천친은 덧붙인다.
수에서 애가 생기는 대목은 특히 정교하다. 괴로움에 시달려 즐거운 느낌에 대해 욕애가 생기고, 즐거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색애가 생기며,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색애가 생긴다. 취(取)는 욕취 · 견취 · 계금취 · 아어취의 넷이고, 여기서 「취」란 그 넷에 대한 욕탐이다. 유(有)는 「다음 생을 부르는 업」이다. 세존이 아난에게 「다음 생을 부르는 업을 유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의 맺음말 「이와 같이 순전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의 「순전함」은 오직 행만 있고 나와 내 것이 없음을, 「큰 괴로움의 무더기」는 괴로움이 처음도 끝도 없이 쌓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권9는 마지막 한 줄로 끝난다. 「비바사종은 앞에서 말한 대로다(毘婆沙宗如前已說).」 유부의 분위연기를 먼저 정설로 세우고, 경량부의 비판과 여러 해석을 거친 뒤, 경에 맞춘 자기의 읽기를 마지막에 두고, 유부의 설은 「앞에서 말한 대로」라고 돌려 놓는다. 천친이 『구사론』 전체에서 쓰는 서술 전략이 이 한 권 안에 다 들어 있다.
분별세품의 연기론은 두 겹이다. 겉은 유부의 분위연기(국면의 오온), 속은 경량부에 가까운 천친의 읽기(경이 정의한 그대로의 법, 「오직 행이 있을 뿐」). 그 사이를 「전하기를」이라는 한마디가 가른다.
본송
明所治無明,如非親實等。 說為結等故,非惡慧見故,與見相應故,說能染慧故。
밝음이 다스리는 것이 무명이니, 「친하지 않은 이」 「진실하지 않은 것」 등과 같다. 결 등이라 설하기 때문이고, 나쁜 지혜는 견이기 때문이며, 견과 상응하기 때문이고, 지혜를 물들인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此中說煩惱,如種復如龍,如草根樹莖,及如糠裹米;業如有糠米,如草藥如花;諸異熟果事,如成熟飲食。
여기서 번뇌는 씨앗과 같고 용과 같으며, 풀뿌리 · 나무줄기와 같고 쌀을 싼 겨와 같다고 설한다. 업은 겨 있는 쌀과 같고, 약초와 같고 꽃과 같다. 여러 이숙과의 사(事)는 다 익은 음식과 같다.
술어 풀이
- 無明무명
- avidyā. 유부는 밝음(明, vidyā)이 다스리는 별개의 실법으로 본다. 단순한 밝음의 부재나 나쁜 지혜가 아니다.
- 明所治명소치
- 밝음이 다스리는 것. 「친하지 않은 이(非親)」가 친구의 부재가 아니라 원수이듯, 무명은 밝음의 반대 실체라는 정의.
- 惡慧악혜
- 염오된 지혜. 그 가운데 견(見)의 성질을 지닌 것이 있어 무명일 수 없다고 한다.
- 類性유성
- 대덕 법구가 무명을 「유정들이 아를 믿는 류의 성품」이라 정의할 때 쓴 말. 아만과 다르다고 한다.
- 名명
- 명색의 「명」. 무색의 네 온(수 · 상 · 행 · 식). 이름에 따라 대상으로 향하므로 「명」이라 한다.
- 觸촉
- 감관 · 대상 · 식의 세 가지가 화합해 생기는 것(sparśa). 유부는 별개의 심소, 경량부는 세 가지의 화합 자체라고 본다.
- 增語觸증어촉
- 의식과 상응하는 촉(adhivacanasaṃsparśa). 「증어」는 이름(名)을 뜻한다.
- 意近行의근행
- 뜻이 대상에 거듭 다가가게 하는 기쁨 · 근심 · 평정의 느낌(manopavicāra). 여섯 대상마다 셋이라 열여덟.
무명은 「밝음이 없음」인가
권10은 단도직입으로 시작한다.
無明何義?謂體非明。若爾,無明應是眼等。既爾,此義應謂明無。若爾,無明體應非有。
무명은 무슨 뜻인가. 체가 밝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 등도 밝음이 아니니 무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밝음이 없음」이라는 뜻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명의 체는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무명(a-vidyā)의 접두사 「a-」는 무엇을 뜻하는가. 「밝음이 아닌 것」이라면 눈이나 귀도 밝음이 아니니 무명이 되어 버린다. 「밝음의 없음」이라면 무명은 실체가 없는 부재가 되고, 그러면 행의 연이 될 수 없다. 두 길 모두 막힌다. 그래서 게송이 셋째 길을 낸다. 무명은 「밝음이 다스리는 것(明所治)」이다.
如諸親友所對怨敵,親友相違名非親友,非異親友、非親友無。
친구들이 맞서는 원수를, 친구와 어긋나므로 「친구 아닌 이」라 한다. 친구와 다른 아무나도 아니고, 친구가 없음도 아니다.
참말(實)이 다스리는 거짓말을 「참이 아닌 것(非實)」이라 하는 것도 같다. 참말과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참말의 없음도 아니다. 무명도 그렇다. 밝음과 다른 아무 법(눈 등)도 아니고 밝음의 없음도 아니며, 밝음이 맞서 다스리는 별개의 실체다.
어떻게 아는가. 「행의 연이 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은 연이 될 수 없다. 게송의 둘째 줄은 증거를 더한다. 경은 무명을 결(結) · 박(縛) · 수면(隨眠) · 누(漏) · 액(軛) · 폭류(瀑流)라고 설한다. 눈 같은 것이나 아무것도 없음을 결박이라 할 수는 없다.
무명은 「나쁜 지혜」인가
다음 후보는 「나쁜 지혜」다. 나쁜 아내와 자식을 가진 사람을 「아내와 자식이 없다」고 하듯, 나쁜 지혜를 무명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유부의 답은 네 단계로 이어진다.
첫째, 나쁜 지혜, 곧 염오된 지혜 가운데는 견(見)이 있다. 견은 무명일 수 없다. 둘째, 그렇다면 견이 아닌 염오의 지혜는 무명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무명은 견과 상응하는데, 무명이 지혜라면 견과 상응할 수 없다. 두 지혜가 한 마음에서 함께 상응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셋째, 경은 「탐욕이 마음을 물들여 해탈하지 못하게 하고, 무명이 지혜를 물들여 청정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지혜가 지혜를 물들일 수는 없다. 탐이 마음과 다른 것이면서 마음을 물들이듯, 무명도 지혜와 다른 것이면서 지혜를 물들인다.
천친은 셋째 증거에 이의를 단다. 탐이 마음을 물들이는 것도 반드시 탐이 마음과 상응해 현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탐의 힘이 마음을 손상해 해탈하지 못하게 하다가, 탐의 훈습이 사라지면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도 염오의 지혜가 선한 지혜 사이에 끼어들어 그것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친은 이 반론을 끝까지 밀지 않는다. 「누가 자기가 분별한 것을 막겠는가. 그러나 지혜와 다른 부류로 무명이 따로 있다는 것, 탐이 마음과 다르듯이 — 이것이 좋은 설명이다(此說為善)」라고 받아들인다.
넷째, 모든 번뇌가 다 무명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결 등에서 무명을 따로 설할 수 없고, 견 등과 상응한다고 할 수도 없다(견이 자기와 상응할 수는 없으니). 이 설도 같은 이치로 물리친다.
- ①「體非明」밝음이 아닌 것✕→눈 등도 무명이 된다
- ②「明無」밝음의 없음✕→체가 없으니 행의 연이 될 수 없다
- ③나쁜 지혜✕→견은 무명이 아니다 · 견과 상응하니 지혜일 수 없다「無明染慧令不清淨」지혜를 물들인다
- ④모든 번뇌✕→결 등에서 따로 설할 수 없다
- ⑤유부의 정설「明所治無明,如非親實等」밝음이 다스리는 별개의 실법— 「친구 아닌 이」는 원수이지 친구의 부재가 아니다
무명의 상은 무엇인가
별개의 법이라면 그 상(相)은 무엇인가. 논은 「사제의 진실과 업과 그 과보를 알지 못하는 것(謂不了知諦實業果)」이라 한다. 질문이 이어진다. 「알지 못함」은 무엇인가. 앎과 다른 것인가, 앎의 없음인가. 그렇다면 무명에서 겪은 난점이 그대로 되풀이된다. 「앎이 다스리는 별개의 법」이라 하면, 그것은 다시 어떤 상인가.
여기서 유부는 한 걸음 물러선다. 「이 부류의 법은 본래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此類法爾應如是說)」. 「무엇이 눈인가. 안식이 의지하는 맑은 색이다」라고 하듯, 무명도 그 작용으로만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 법의 정의는 결국 기능적 정의일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이어 대덕 법구(法救)의 정의가 소개된다. 무명은 「유정들이 아를 믿는 류의 성품(恃我類性)」이며 아만과 다르다. 근거는 경에 「모든 애, 모든 견, 모든 류성, 모든 아와 아소의 집착, 아만의 집착, 수면을 끊어 두루 알기에 그림자 없이 적멸한다」고 하여 류성과 아만을 따로 든 것이다. 류성이 무명인지 어떻게 아는가. 다른 번뇌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만(慢)일 수는 없는가. 논은 「더 따지면 말이 번잡해지니 그만둔다」며 끊는다.
상좌의 무명론 — 『순정리론』이 전하는 것
『구사론』 본문은 무명의 정의를 둘러싼 경량부의 설을 상좌의 이름으로 직접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순정리론』 권28은 상좌가 무명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세 가지로 전하고 하나하나 반박한다. 『구사론』에서 「밝음의 없음」과 「나쁜 지혜」를 물리친 논의의 맞은편에 누가 서 있었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첫째 정의.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밝음이 있지 못하게 되는 것, 이것을 무명이라 한다.」
且上座言:由有此故令明非有,是謂無明。不可無因而有是事,彼說非理。
먼저 상좌는 말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밝음이 있지 않게 되니, 이것을 무명이라 한다. 원인 없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중현은 반박한다. 밝음이 현행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면 모든 번뇌가 무명이 된다. 어떤 번뇌가 있어도 밝음은 없기 때문이다. 또 경은 있음이 없음의 원인이 된다고 설하지 않으며, 없음은 결과일 수 없다.
둘째 정의. 「이러한 부류의 마음과 심소를 통틀어 무명이라 한다.」 중현은 그렇다면 무명은 마음 등에 의지해 거짓으로 세운 것이 되어 실재하지 않고, 모든 마음과 심소가 무명이어야 한다고 반박하며, 「그 마음은 여래의 가르침 밖을 노닌다(詳彼心遊如來教外)」고까지 쓴다.
셋째 정의. 「뒤바뀐 밝음이 곧 무명이다.」 세존이 사견에 대해 「사견을 익히고 닦고 많이 닦으면 어리석음이 맹렬해진다」고 했으니, 무명에는 「삿된 지혜」와 「캄캄함」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중현은 견행자(見行者)와 치행자(癡行者)가 감로의 문에 드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들어 반박한다.
『구사론』이 「나쁜 지혜를 무명이라 한다」는 설과 「밝음의 없음」을 물리칠 때, 그 표적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순정리론』이 상좌의 세 정의를 전하는 것으로 보아, 경량부 안에 무명을 독립된 실법으로 보지 않는 흐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천친 자신은 이 대목에서 유부의 실법설을 「좋은 설명」으로 받아들였다.
무명은 「없음」도 「나쁜 앎」도 아니고, 앎과 맞서는 하나의 힘이다. 이 정의는 무명을 생사의 근본으로 세우는 유부의 체계에 필요한 실재성을 준다. 그러나 그 상을 묻자 유부도 「작용으로만 말할 수 있다」고 물러선다.
명색의 「명」
명색의 「색」은 앞 품에서 다 설명했으니 「명」만 정의한다. 게송은 「명은 무색의 네 온」이라고만 한다. 왜 무색의 네 온을 「이름」이라 부르는가. 논은 세 가지 설명을 준다.
첫째, 세간이 함께 세운 이름 — 소 · 말 · 빛깔 · 맛 같은 낱말 — 이 그 뜻을 바꾸어 드러내듯, 네 온은 이름과 감관과 대상의 힘에 따라 대상으로 향해 바뀐다. 둘째, 네 온은 이름과 비슷해서 이름을 통해 드러난다. 셋째, 다른 논사의 설로, 네 무색의 온은 이 몸을 버린 뒤 다른 생으로 옮겨 가 바뀌는 것이 이름과 같다(몸 없이 이름만으로 옮겨 간다는 뜻)고 한다.
촉 — 세 가지의 화합인가, 별개의 법인가
「촉은 여섯이고, 셋의 화합에서 생긴다(觸六三和生)」. 다섯 감관의 촉은 감관 · 대상 · 식이 동시에 일어나니 화합이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의촉은 문제다. 의근은 과거(바로 앞 찰나의 마음), 법은 미래일 수도 있고, 의식은 현재다. 셋이 어떻게 화합하는가. 답은 「인과의 뜻이 성립함」 또는 「같은 하나의 결과(촉)를 낳음」을 화합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논사들이 정면으로 갈린다.
- 어떤 이(경량부)는 「셋의 화합이 곧 촉」이라 한다. 경에 「이 세 가지 법이 모여 화합하는 것을 촉이라 한다」고 했다.
- 어떤 이(유부)는 「셋의 화합에서 생긴, 마음과 상응하는 별개의 법이 촉」이라 한다. 경의 「여섯 가지 여섯 법문」 — 여섯 내처 · 여섯 외처 · 여섯 식신 · 여섯 촉신 · 여섯 수신 · 여섯 애신 — 이 감관 · 대상 · 식과 따로 여섯 촉을 설했기 때문이다.
경량부는 「따로 설했다고 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수와 애도 따로 설했지만 법처에 들지 않는가」라고 답하고, 유부는 「그대의 종에서는 촉을 떠나 셋이 따로 없는데, 셋을 이미 말했다면 촉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되묻는다. 경량부의 다른 논사는 「모든 눈과 빛깔이 안식의 원인은 아니고 모든 안식이 그 결과도 아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든 것만 통틀어 촉이라 한다」고 보완한다. 유부는 「우리 부파가 외우는 경문은 다르다」며 경전 자체의 차이를 든다. 논은 「서로 따지고 푸는 말이 번잡하니 그만둔다」며 끊는다.
이어 촉의 분류가 나온다. 다섯 감관의 촉은 「유대촉(有對觸)」, 의촉은 「증어촉」이다. 증어란 이름이고, 이름은 의촉의 뛰어난 대상이기 때문이다. 안식은 푸름만 알고 「이것은 푸르다」는 것은 모르지만, 의식은 푸름도 「이것은 푸르다」도 안다. 그리고 상응에 따라 명촉 · 무명촉 · 비명비무명촉, 애촉 · 에촉, 순락수촉 · 순고수촉 · 순불고불락수촉으로 나누어 모두 열여섯 촉이 된다.
수 — 촉과 동시인가, 뒤인가
여섯 촉에서 여섯 수가 생긴다. 앞의 다섯은 몸에 의지하니 신수(身受), 의촉에서 생긴 것은 마음에만 의지하니 심수(心受)다. 그런데 수는 촉과 동시에 생기는가, 뒤에 생기는가.
비바사사는 동시라고 한다. 촉과 수는 서로 구유인이 된다. 반론이 나온다. 동시에 생긴 두 법이 어떻게 낳는 것과 낳아지는 것이 되는가. 이미 생긴 법에 다른 법은 아무 힘이 없다. 유부는 서로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고 답한다. 반대자는 경이 「안촉을 연해 안촉소생수가 생긴다」고만 했지 그 반대를 말한 적이 없고, 씨앗과 싹, 젖과 낙, 침과 소리처럼 원인은 앞, 결과는 뒤가 분명하다고 한다.
이어 경량부의 상좌의 설이 등장한다. 보광은 「경량부 가운데 상좌의 해석」이라고 주석한다.
有說:觸後方有受生,根境為先,次有識起,此三合故即名為觸,第三剎那緣觸生受。
어떤 이는 말한다. 촉 뒤에야 수가 생긴다. 감관과 대상이 먼저 있고, 다음에 식이 일어나며, 이 셋이 화합하므로 곧 촉이라 한다. 셋째 찰나에 촉을 연해 수가 생긴다.
이 설은 아비달마의 「대지법(大地法)」 이론을 흔든다. 유부는 수 · 상 · 사 · 촉 등 열 가지 심소가 모든 마음과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고 한다. 촉 뒤에 수가 생긴다면 수 없는 촉, 촉 없는 수가 있게 되고, 대지법의 원칙이 무너진다. 이 지적에 대한 반대자의 대답은 아비달마 전통에 대한 경량부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낸다.
彼定恒俱依何教立?依本論立。我等但以契經為量,本論非量,壞之何咎?故世尊言:當依經量。
그것들이 반드시 늘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가르침에 의지해 세웠는가. 본론에 의지해 세웠다. 우리는 오직 경을 기준으로 삼는다. 본론은 기준이 아니니, 그것을 무너뜨린들 무슨 허물인가. 그래서 세존은 「경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라는 이름이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다. 그들은 대지법을 「모든 마음에 반드시 함께하는 법」이 아니라 「여러 지위(유심유사지 등, 선 · 불선 · 무기지, 학 · 무학지)에 두루 있는 법」으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대불선지법은 외우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것이지 본래 외우던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천친은 이 논쟁을 어떻게 맺는가. 이번에는 경량부 쪽에 서지 않는다. 경에 「이 수 · 상 · 사 · 식은 서로 섞여 떨어지지 않는다」 「받는 것이 곧 의도하는 것이고, 의도하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라고 했고, 같은 경에서 수명과 체온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같은 「섞임」이라는 말로 설했으니, 이 섞임은 찰나의 동시성을 말한 것이다. 또 경이 「셋이 화합한 촉」이라고 했는데, 셋이 화합하지 않은 식이 어디 있으며 셋이 화합했는데 촉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식에는 촉이 있고, 모든 촉은 수 등과 함께 생긴다고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곁가지 논의는 끝났다.」
열여덟 의근행
수 지분의 마지막 논의는 「의근행(意近行)」이다. 마음의 느낌은 기쁨 · 근심 · 평정의 셋이 여섯 대상(색 · 성 · 향 · 미 · 촉 · 법)에 각각 다가가므로 열여덟이 된다. 「의근행」이라는 이름은 기쁨 등이 뜻을 가까운 연으로 삼아 대상 가운데 자주 노닐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기쁨 등이 가까운 연이 되어 뜻을 대상 가운데 자주 노닐게 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몸의 느낌은 오직 뜻에 의지하지 않으니 「가깝다」 하지 않고, 분별이 없으니 「행」이라 하지 않는다. 제3정려의 즐거움도 들지 않는다.
논은 이어 삼계의 각 지위에 의근행이 몇이 있고 어느 지위를 대상으로 하는지 세밀하게 센다. 욕계는 열여덟을 다 갖추고 욕계를 대상으로도 열여덟, 색계를 대상으로는 향 · 미를 뺀 열둘, 무색계를 대상으로는 법에 대한 셋뿐이다. 초 · 제2정려에는 근심이 없어 열둘, 제3 · 제4정려에는 평정만 있어 여섯, 공무변처의 근분에는 넷, 무색계의 근본과 위의 세 근분에는 하나뿐이다. 그리고 「열여덟은 오직 유루」.
이 정밀한 셈 뒤에 천친은 다시 경량부의 목소리로 이의를 단다. 「비바사사는 뜻에 따라 세웠지만, 내가 보는 경의 뜻은 다르다(然我所見經義有殊).」 어떤 지위에서 이미 염을 떠난 이가 그 대상을 연하는 것까지 의근행이라 할 수는 없다. 의근행이란 오직 잡염의 것, 곧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가리지 않고 버려두며 뜻과 서로 끌어 자주 대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경은 「여섯 가지 늘 머묾(六恒住)」 — 빛깔을 보고 기뻐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으며, 늘 평정에 머물러 정념과 정지를 갖춤 — 을 설했다는 것이다. 또 기쁨 등은 탐착에 의지하는 것과 벗어남에 의지하는 것으로 나뉘어 서른여섯 「사구(師句)」가 된다.
번뇌 · 업 · 사 — 씨앗과 용과 겨
나머지 지분은 이미 말했거나 뒤에 말한다. 식 · 육처는 계품에서, 행 · 유는 업품에서, 애 · 취는 수면품에서. 그러고 나서 논은 연기를 번뇌 · 업 · 이숙의 사(事) 셋으로 묶고, 각각의 공능을 바깥 사물에 비유하는 게송을 놓는다. 혹 · 업 · 고의 기본 구조는 계보 一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이 비유들이 각각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장행에 따라 정리한다.
번뇌는 넷에 비유된다. 씨앗이 싹 · 잎을 내듯 번뇌에서 번뇌 · 업 · 사가 생긴다. 용이 연못을 지키면 물이 마르지 않듯, 번뇌가 업을 지키면 생이 끝없이 이어진다. 풀뿌리를 뽑지 않으면 싹을 잘라도 다시 나듯, 번뇌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갈래가 멸해도 다시 일어난다. 나무줄기에서 가지 · 꽃 · 열매가 자주 나듯, 번뇌에서 혹 · 업 · 사가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겨가 쌀을 싸야 싹을 낼 수 있고 쌀만으로는 안 되듯, 번뇌가 업을 싸야 다른 생을 부를 수 있다.
업은 셋에 비유된다. 겨가 있는 쌀이 싹을 내듯, 번뇌가 있는 업이 이숙을 부른다. 약초는 열매가 익으면 그것으로 끝나듯, 업은 과보가 익으면 다시 이숙을 부르지 않는다. 꽃이 열매의 가까운 원인이듯, 업은 이숙의 가까운 원인이다.
사(事)는 하나에 비유된다. 익은 음식은 먹을 수 있을 뿐 다시 다른 음식으로 바뀌지 않듯, 이숙과는 익은 뒤 다시 다른 생의 이숙을 부르지 않는다. 이 비유는 결정적이다.
若諸異熟復感餘生,餘復感餘應無解脫。
만약 이숙이 다시 다른 생을 부른다면, 그것이 다시 다른 것을 불러 해탈이 없을 것이다.
과보로 받은 몸과 처지 자체는 다음 생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다음 생을 부르는 것은 그 처지에서 새로 일으키는 번뇌와 업이다. 이것이 해탈이 가능한 근거다. 업과 과보의 관계 자체는 핵심 개념 업에서 더 자세히 읽을 수 있다.
본송
有情由食住,段欲體唯三,非色不能益,自根解脫故。 觸思識三食,有漏通三界,意成及求生,食香中有起。 前二益此世,所依及能依,後二於當有,引及起如次。
유정은 먹이로 머문다. 단식은 욕계에만 있고 체는 셋뿐이다. 색은 먹이가 아니니, 제 감관에 이익을 주지 못하고 해탈한 이에게도 그렇기 때문이다. 촉 · 사 · 식의 세 먹이는 유루이며 삼계에 통한다. 의성 · 구생 · 식향 · 중유 · 기는 중유의 이름이다. 앞의 둘은 이 세상의 의지처와 의지하는 것에 이익을 주고, 뒤의 둘은 다음 존재를 차례로 이끌고 일으킨다.
斷善根與續,離染退死生,許唯意識中,死生唯捨受, 非定無心二,二無記涅槃。漸死足臍心,最後意識滅, 下人天不生,斷末摩水等。
선근을 끊고 잇는 것, 염을 떠나고 물러나는 것, 죽음과 태어남은 오직 의식에서만 일어난다고 인정한다. 죽음과 태어남은 오직 평정의 느낌과 함께한다. 정심도 무심도 아니며, 열반에 드는 것은 두 무기의 마음이다. 점차 죽는 이는 발 · 배꼽 · 가슴에서 마지막으로 의식이 멸하니, 아래로 가는 이, 사람, 하늘,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의 차례다. 단말마는 물 등으로 일어난다.
술어 풀이
- 四食사식
- 네 가지 먹이(āhāra): 단식(段食, kavaḍīkāra) · 촉식(觸食, sparśa) · 의사식(意思食, manaḥsaṃcetanā) · 식식(識食, vijñāna). 「먹이」란 존재를 지탱하고 늘리는 것이다.
- 段食단식
- 덩어리로 나누어 입과 코로 먹는 먹이. 체는 향 · 미 · 촉의 셋뿐이고 욕계에만 있다. 빛깔(色)은 먹이가 아니다.
- 部多 · 求生부다 · 구생
- 경의 「먹이는 이미 생긴 유정(부다, bhūta)을 머물게 하고, 생을 구하는 이(구생, saṃbhavaiṣin)를 돕는다」에서. 구생은 중유를 가리킨다.
- 意成의성
- 뜻에서 생긴 몸(manomaya). 중유의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 정혈 같은 바깥 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
- 捨受사수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죽음과 태어남의 찰나는 이 느낌과만 상응한다.
- 末摩말마
- 범어 marman의 음사. 몸에서 건드리면 죽음에 이르는 급소. 단말마(斷末摩)는 그 급소가 끊어지는 고통이다.
- 五衰相오쇠상
- 하늘 사람이 죽을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쇠퇴의 모습. 『구사론』은 작은 쇠상 다섯과 큰 쇠상 다섯을 나눈다.
- 三聚삼취
- 정성정취(正性定聚) · 사성정취(邪性定聚) · 부정성취(不定性聚). 유정을 열반과 지옥에 대한 결정 여부로 나눈 셋.
「한 법」 — 모든 유정은 먹이로 머문다
유정세간의 연기를 다 말한 뒤 논은 묻는다. 이 유정들은 무엇으로 머무는가.
經說:世尊自悟一法正覺正說,謂諸有情一切無非由食而住。
경에 이르기를, 세존이 스스로 깨달은 한 법을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설하셨으니, 모든 유정은 하나도 빠짐없이 먹이로 머문다는 것이다.
연기의 열두 지분이 생명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설명한다면, 사식은 생명이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먹이의 범위는 입으로 먹는 음식을 훨씬 넘는다.
단식 — 향 · 미 · 촉의 셋
단식에는 미세한 것과 거친 것이 있다. 미세한 단식은 중유의 먹이(향을 먹으므로)와 겁초의 하늘 사람의 먹이다. 겁초의 먹이는 배설할 찌꺼기가 없어 「모래에 기름을 붓듯」 팔다리에 스며든다. 또는 작은 벌레나 갓난아기의 먹이를 미세하다 하기도 한다.
단식은 오직 욕계에만 있다. 단식에 대한 탐을 떠나야 위의 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단식의 체는 향 · 미 · 촉의 셋이다. 이 셋은 덩어리로 나누어 입과 코로 차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빛과 그늘, 불꽃과 서늘함은 어떻게 먹이인가. 많은 경우를 따라 말한 것이고, 마시고 먹지 않더라도 몸을 지탱하는 것 — 바르고 씻는 것 — 도 미세한 먹이에 든다.
그러면 빛깔(色)도 덩어리로 나누어 먹을 수 있는데 왜 먹이가 아닌가. 게송의 답이 「제 감관에 이익을 주지 못하고, 해탈한 이에게도 그렇기 때문」이다.
夫名食者,必先資益自根大種,後乃及餘。飲噉色時,於自根大尚不為益,況能及餘。
먹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먼저 제 감관(먹이를 받아들이는 감관)과 대종을 이롭게 하고, 그 뒤에 다른 것에 미친다. 빛깔을 먹을 때는 제 감관(눈)과 대종에도 이익을 주지 못하니, 하물며 다른 것에 미치겠는가.
먹을 때 눈은 빛깔을 보지만, 음식의 빛깔이 눈을 키우지는 않는다. 혀와 코와 몸은 맛과 향과 감촉으로 이익을 받는다. 빛깔을 보고 기쁨이 생기는 것은 빛깔을 연한 촉이 먹이가 된 것이지 빛깔이 먹이인 것이 아니다. 또 불환과와 아라한은 먹이에 대한 탐을 벗어났으니, 아무리 훌륭한 음식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촉식 · 의사식 · 식식 — 재 주머니의 이야기
촉은 셋의 화합에서 생긴 촉, 사(思)는 의업(의도), 식은 식온이다. 이 셋은 유루이며 삼계에 다 있다. 왜 무루는 먹이가 아닌가. 비바사사는 먹이란 「존재를 돕는 것」인데 무루는 존재를 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은 먹이가 「이미 생긴 이(부다)를 머물게 하고, 생을 구하는 이(구생)를 돕는다」고 한다. 이 「구생」이 중유다. 여기서 논은 중유의 다섯 이름을 정리한다.
一者意成,從意生故,非精血等所有外緣合所成故。二者求生,常喜尋察當生處故。三者食香,身資香食往生處故。四者中有,二趣中間所有蘊故。五者名起,對向當生暫時起故。
첫째 의성(意成)이니, 뜻에서 생겼고 정혈 같은 바깥 연이 합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구생(求生)이니, 늘 태어날 곳을 즐겨 찾기 때문이다. 셋째 식향(食香)이니, 몸이 향의 먹이로 지탱하며 생처로 가기 때문이다. 넷째 중유(中有)이니, 두 갈래 중간의 온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기(起)이니, 태어날 곳을 향해 잠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起)」라는 이름에는 경증이 붙는다. 경에 「기결(起結)은 끊었으나 생결(生結)은 끊지 못한 보특가라」를 들어 사구를 설한다. 두 계의 탐을 떠난 상류는 기결도 생결도 끊었다(첫째 구 — 무색계에 바로 태어나니 중유가 없다), 중반열반은 생결은 끊었으나 기결은 남았다(둘째 구 — 중유에서 열반하므로)는 식이다. 이 사구는 중유의 존재 논증을 다른 각도에서 받쳐 준다.
그러면 몇 가지 먹이가 이미 생긴 이를 머물게 하고, 몇 가지가 생을 구하는 이를 돕는가. 비바사사는 넷 모두 둘 다라고 한다. 단식도 애착 있는 이에게는 다음 생을 부르는 연이 된다. 세존이 네 먹이를 모두 「병 · 종기 · 화살의 뿌리, 노사의 연」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식이 지금의 몸을 머물게 하는 예로, 논은 세간에 전하는 두 이야기를 든다.
世傳有言:昔有一父,時遭飢饉,欲造他方。自既飢羸,二子嬰稚,意欲攜去力所不任,以囊盛灰挂於壁上,慰喻二子云是……二子希望多時延命,後有人至取囊為開,子見是灰望絕便死。
세간에 전하는 말이 있다. 옛날 어떤 아버지가 기근을 만나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자신도 굶주려 지쳤고 두 아들은 어려서 데리고 가기에는 힘이 부쳤다. 자루에 재를 담아 벽에 걸고, 두 아들을 달래 「이것은 볶은 보릿가루 자루다」라고 했다. 두 아들은 그것을 바라며 오래 목숨을 이었다.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자루를 내려 열었고, 아들들은 그것이 재인 것을 보고 바람이 끊겨 곧 죽었다.
바다에서 배가 부서진 상인들이 멀리 쌓인 물거품을 해안으로 여기고 곧 닿으리라 바라며 목숨을 이었다가, 닿아 보고 아닌 줄 알자 바람이 끊겨 죽었다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바람(希望), 곧 의도가 몸을 지탱하는 먹이라는 것이다. 『집이문족론』은 바다의 큰 생물이 해안에 알을 묻고 바다로 돌아가는데, 어미가 늘 생각하면 알이 썩지 않고 잊으면 알이 망가진다고 한다. 천친은 이 설명을 바로잡는다. 남의 의사식이 어떻게 자기 몸을 지탱하겠는가. 이치로는 알이 늘 어미를 생각해 썩지 않고, 잊으면 목숨을 마친다고 해야 한다.
왜 넷뿐인가 — 기르는 어머니와 낳는 어머니
모든 유루법이 존재를 늘린다면 왜 먹이를 넷만 드는가. 뛰어난 것을 따라 말했기 때문이다.
謂初二食能益此身所依能依,後之二食能引當有能起當有。
처음 두 먹이는 이 몸의 의지처와 의지하는 것을 이롭게 하고, 뒤의 두 먹이는 다음 존재를 이끌고 다음 존재를 일으킨다.
단식은 의지처, 곧 감관 있는 몸을 기르고, 촉식은 의지하는 것, 곧 마음과 심소를 기른다. 이 둘은 이미 생긴 존재를 기르는 데 가장 뛰어나다. 의사식은 다음 생을 이끌고(引), 의사식이 이끈 뒤에는 업이 훈습한 식의 종자의 힘으로 다음 존재가 일어난다(起). 이 둘은 아직 생기지 않은 존재를 이끌고 일으키는 데 가장 뛰어나다. 논은 이를 두 어머니로 요약한다.
前二如養母,養已生故;後二如生母,生未生故。
앞의 둘은 기르는 어머니와 같으니 이미 난 것을 기르기 때문이다. 뒤의 둘은 낳는 어머니와 같으니 아직 나지 않은 것을 낳기 때문이다.
식식의 설명에 「업이 훈습한 식의 종자의 힘(業所熏識種子力)」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훈습」과 「종자」는 경량부의 업 상속 이론의 핵심 개념이다. 『구사론』의 유부 체계 서술 안에 경량부의 술어가 스며든 예로 자주 지적되는 곳이다. 종자설 자체는 핵심 개념 「업」과 이 연재의 「업의 체계」 편에서 다룬다.
먹이에 관한 세부 논의가 이어진다. 모든 덩어리가 먹이인가. 사구가 된다. 먹었으나 감관과 대종을 해치는 것은 덩어리이되 먹이가 아니다. 나머지 세 먹이는 먹이이되 덩어리가 아니다. 먹어서 감관과 대종을 돕는 것은 둘 다다. 다른 지위의 무루의 촉 등은 몸을 도와도 먹이가 아니다. 먹이는 언제 먹이가 되는가. 비바사사는 두 때라고 한다. 처음 먹을 때 배고픔과 목마름을 없애고, 소화된 뒤 감관과 대종을 돕는다.
다섯 갈래 · 네 가지 생에 다 네 먹이가 있다. 지옥에 어떻게 단식이 있는가. 뜨거운 쇠구슬과 녹은 구리가 단식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해를 주지 않는가. 해를 주어도 잠시 배고픔과 목마름을 덜어 주니 먹이의 상을 얻는다. 또 고독지옥의 단식은 사람과 같다.
죽음의 마음 — 오직 의식, 오직 평정
먹이로 머무는 유정은 어떻게 죽는가. 앞에서 「수명이 다해 죽는다」고 했으니 이제 바로 밝힐 차례다. 어떤 식이 앞에 나타나고 어떤 느낌과 상응해 죽고 태어나는가.
게송의 첫째 원칙은 여섯 사건 — 선근을 끊음, 선근을 다시 이음, 계 · 지의 염을 떠남, 떠난 염에서 물러남, 목숨을 마침, 태어남 — 이 「법이 본래 그러하여」 오직 의식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섯 감관의 식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어남」에는 처음 생을 잇는 중유도 포함된다.
둘째 원칙은 죽음과 태어남은 오직 평정의 느낌(捨受)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평정과 상응하는 마음은 밝고 날카롭지 않아 죽음과 태어남에 순하고, 다른 느낌은 밝고 날카로워 순하지 않다.
셋째, 죽음과 태어남은 산란한 마음에서이지 선정의 마음에서가 아니며,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이지 무심(무상정 · 멸진정)에서가 아니다. 선정의 마음은 계 · 지가 다르고, 노력해서 일으키는 것이며, 몸을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심의 상태에서는 목숨이 손상되지 않는다. 몸이 무너지려 하면 반드시 몸에 속한 마음을 다시 일으킨 뒤 목숨을 마친다.
넷째, 죽는 마음(사유)은 선 · 불선 · 무기에 다 통하지만, 열반에 드는 마음은 두 가지 무기 — 위의로(威儀路) 무기와 이숙생 무기 — 뿐이다. 무기의 힘은 미약해서 마음이 끊어지는 데 순하기 때문이다.
발 · 배꼽 · 가슴 — 의식이 멎는 자리
갑자기 죽는 이는 의식과 몸의 감관이 한꺼번에 멸한다. 점차 죽는 이는 몸의 어느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식이 멸하는가.
若漸死者往下人天,於足齊心如次識滅,謂墮惡趣說名往下,彼識最後於足處滅;若往人趣識滅於臍,若往生天識滅心處。諸阿羅漢說名不生,彼最後心亦心處滅。
점차 죽는 이가 아래로 가거나 사람으로 가거나 하늘로 갈 때, 발 · 배꼽 · 가슴에서 차례로 식이 멸한다. 악취에 떨어지는 것을 「아래로 간다」고 하니 그 식은 마지막에 발에서 멸하고, 사람의 갈래로 가면 식이 배꼽에서 멸하며, 하늘에 태어나면 식이 가슴에서 멸한다.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라 하니, 그 마지막 마음도 가슴에서 멸한다.
다른 논사는 아라한의 마지막 마음이 정수리에서 멸한다고 한다. 정확히는 의식이 그 자리에서 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관이 점차 멸해 발 등의 자리에 이르러 한꺼번에 다 멸하고 의식이 그에 따라 멸한다는 것이다. 논의 비유가 이 과정을 그린다. 「달군 돌 위에 물을 조금 놓으면 점점 줄어들다 한 곳에서 다 마르는 것과 같다(如以少水置炎石上,漸減漸消一處都盡).」
단말마 — 급소가 끊어지는 고통
점차 죽는 이는 임종 때 대개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린다. 말마란 무엇인가.
無有別物名為末摩,然於身中有異支節觸便致死,是謂末摩。若水火風隨一增盛,如利刀刃觸彼末摩,因此便生增上苦受,從斯不久遂致命終。
말마라는 별개의 물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몸 안의 특별한 마디로서 건드리면 곧 죽음에 이르는 곳을 말마라 한다. 물 · 불 · 바람 가운데 하나가 지나치게 성해져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 말마를 건드리면, 이로 인해 심한 괴로운 느낌이 생기고, 오래지 않아 목숨을 마친다.
「끊는다(斷)」는 것은 땔나무를 베듯 정말 자르는 것이 아니다. 끊어 버린 것처럼 감각이 없어지므로 끊는다고 한다. 왜 지대(地大)는 이런 작용을 하지 않는가. 넷째 내재의 재앙이 없기 때문이다. 몸 안의 세 재앙은 바람 · 열 · 담이니 각각 풍대 · 화대 · 수대가 성해진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바깥 세계의 삼재(화재 · 수재 · 풍재)와 비슷하다고 한다 — 기세간이 무너지는 대삼재에 지재(地災)가 없는 것과 짝을 이루는 셈이다.
하늘 사람의 다섯 쇠상
단말마는 하늘에는 없다. 그러나 하늘 사람에게도 죽음의 징조가 있다. 논은 쇠상을 둘로 나눈다.
작은 쇠상 다섯. 첫째, 옷과 장신구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난다. 둘째, 자기 몸의 광명이 갑자기 흐려진다. 셋째, 목욕할 때 물방울이 몸에 붙는다. 넷째, 본래 걸림 없이 내닫던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문다. 다섯째, 본래 고요하던 눈이 자주 깜박인다. 이 다섯이 나타나도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큰 쇠상 다섯. 첫째, 옷이 때에 물든다. 둘째, 꽃다발이 시든다. 셋째, 두 겨드랑이에서 땀이 난다. 넷째, 냄새가 몸에 밴다. 다섯째, 본래의 자리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 다섯이 나타나면 반드시 죽는다.
세 무리 — 유정세간의 맺음
유정세간의 논의는 삼취로 맺는다. 세존은 유정의 생 · 주 · 몰 가운데 세 무리를 세웠다.
正邪不定聚,聖造無間餘。
정정취 · 사정취 · 부정취는 성자, 무간업을 지은 이, 그 나머지다.
정성(正性)이란 경에 「탐이 남김없이 끊어지고, 진이 남김없이 끊어지고, 치가 남김없이 끊어진 것」이라 한 열반이고, 「정해진(定)」 이는 성자다. 무루도가 생긴 성자는 반드시 번뇌를 다 끊으므로 정정취라 한다. 순해탈분을 얻은 이도 결국 열반을 얻을 텐데 왜 정정취가 아닌가. 뒤에 사정취에 떨어질 수 있고, 열반을 얻을 때가 정해지지 않았으며(예류자의 「극칠반유」처럼), 사성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성(邪性)이란 지옥 · 방생 · 아귀이고, 「정해진」 이는 무간업을 지은 이다. 무간업을 지은 이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므로 사정취라 한다. 나머지가 부정취다. 두 연을 기다려 어느 쪽으로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정세간의 논의는 「어떻게 태어나는가(사생 · 중유)」, 「어떻게 이어지는가(연기)」, 「무엇으로 머무는가(사식)」, 「어떻게 죽는가」를 거쳐 「어디로 정해져 있는가(삼취)」로 끝난다. 생명의 한 주기를 원인과 조건으로만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시도다.
본송
安立器世間,風輪最居下,其量廣無數,厚十六洛叉, 次上水輪深,十一億二萬,下八洛叉水,餘凝結成金, 此水金輪廣,徑十二洛叉,三千四百半,周圍此三倍。
그릇 세간이 세워진 모습은, 풍륜이 맨 아래에 있으니 넓이는 셀 수 없고 두께는 16낙차다. 그 위의 수륜은 깊이가 112만이니, 아래 80만은 물이고 나머지는 엉겨 금이 된다. 이 수륜과 금륜의 지름은 120만 3450이며, 둘레는 그 세 배다.
蘇迷盧處中,次踰健達羅,伊沙馱羅山,朅地洛迦山, 蘇達梨舍那,頞濕縛羯拏,毘那怛迦山,尼民達羅山, 於大洲等外,有鐵輪圍山,前七金所成,蘇迷盧四寶, 入水皆八萬,妙高出亦然,餘八半半下,廣皆等高量。
수미산이 한가운데 있고, 다음에 지쌍산 · 지축산 · 첨목산 · 선견산 · 마이산 · 상비산 · 지변산이 있으며, 큰 대륙들 바깥에 철륜위산이 있다. 앞의 일곱은 금으로 이루어졌고 수미산은 네 보배로 이루어졌다. 물에 잠긴 깊이는 모두 8만이고, 묘고산은 물 위로도 그만큼 솟았다. 나머지 여덟은 반씩 반씩 낮아지며, 너비는 모두 높이와 같다.
술어 풀이
- 踰繕那유선나 · 유순
- 거리의 단위(yojana). 8구로사. 구체적인 길이는 극미에서 유순에 이르는 단위 체계에서 본다.
- 洛叉낙차
- 수의 단위(lakṣa). 10만. 장행은 이 낙차를 「억(億)」으로 옮겨 쓴다 — 풍륜의 두께를 게송은 「十六洛叉」, 장행은 「十六億」이라 한다. 이 편에서는 혼동을 피해 아라비아 숫자로 적는다.
- 三輪삼륜
- 풍륜(vāyumaṇḍala) · 수륜(abmaṇḍala) · 금륜(kāñcanamaṇḍala). 기세간의 토대.
- 蘇迷盧소미로 · 수미산
- Sumeru. 묘고산(妙高山)이라고도 옮긴다. 세계의 중심 산.
- 九山八海구산팔해
- 수미산과 일곱 금산, 철륜위산의 아홉 산과 그 사이의 여덟 바다.
- 四大洲사대주
- 남섬부주(Jambudvīpa) · 동승신주(Pūrvavideha) · 서우화주(Avaragodānīya) · 북구로주(Uttarakuru).
- 八功德水팔공덕수
- 안쪽 일곱 바다를 채운 물의 여덟 가지 덕.
- 臘縛납박
- 시간 단위(lava). 낮과 밤이 하루에 늘고 주는 양.
- 小千 · 中千 · 大千소천 · 중천 · 대천 세계
- 사대주 · 해 · 달 · 수미산 · 욕계 하늘 · 범세 하나씩을 천 개 모은 것이 소천, 그것의 천 배가 중천, 다시 천 배가 대천. 대천세계가 함께 이루어지고 함께 무너진다.
업이 세운 그릇
권11은 「유정세간은 다 말했으니 이제 기세간을 말한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장행의 첫 문장이 이 장 전체의 원리를 정한다.
謂諸有情業增上力,先於最下依止虛空有風輪生,廣無數、厚十六億踰繕那。
모든 유정의 업의 증상력으로, 먼저 맨 아래에 허공에 의지해 풍륜이 생기니, 넓이는 셀 수 없고 두께는 16낙차 유순이다.
수륜도 금륜도, 수미산의 보배도, 해와 달을 떠받치는 바람도 모두 「유정들의 업의 증상력」으로 생긴다. 이 그릇 세간을 불러일으키는 업 — 많은 유정이 함께 짓는 공업(共業) — 의 이론은 핵심 개념 업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그 업이 세운 그릇의 치수를 원문의 숫자 그대로 따라간다.
풍륜 · 수륜 · 금륜
풍륜은 그 체가 단단하고 빽빽하다. 논은 극단적인 상상을 든다. 큰 힘을 지닌 낙건나(諾健那)가 금강 바퀴로 온 힘을 다해 내리쳐도 「금강은 부서져도 풍륜은 상하지 않는다(金剛有碎風輪無損)」.
그 위에 유정들의 업의 힘으로 큰 구름이 일어 풍륜 위에 비를 쏟는다. 빗방울은 수레바퀴 굴대만 하다. 물이 쌓여 수륜이 된다. 아직 엉기지 않았을 때 수륜의 깊이는 112만 유순이다. 이 물은 왜 옆으로 흘러 흩어지지 않는가. 어떤 논사는 유정들의 업력이 붙들기 때문이라 한다. 먹은 음식이 소화되기 전에는 숙장(熟藏)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부파는 바람이 붙들기 때문이라 한다. 곡식을 담는 둥근 통이 곡식을 붙들듯이.
다시 유정들의 업력으로 다른 바람이 일어 이 물을 쳐서 위가 엉겨 금이 된다. 끓인 우유가 식으면 위에 막이 엉기는 것과 같다(如熟乳停上凝成膜). 그래서 수륜은 두께가 80만으로 줄고, 나머지는 금으로 바뀌어 금륜의 두께는 32만이 된다. 수륜과 금륜의 지름은 같아서 120만 3450유순, 둘레는 그 세 배로 361만 350유순이다.
주: 게송의 「낙차」를 장행은 「억」이라 쓴다(1낙차 = 10만)
수미산과 아홉 산
금륜 위에 아홉 큰 산이 있다. 수미산(묘고산)이 한가운데, 나머지 여덟이 그것을 둘러싼다. 안쪽 일곱은 금으로, 수미산은 네 보배로 이루어졌다.
妙高山王四寶為體,謂如次四面北、東、南、西,金、銀、吠琉璃、頗胝迦寶。隨寶威德色顯於空,故贍部洲空似吠琉璃色。
묘고산왕은 네 보배를 체로 하니, 차례로 북 · 동 · 남 · 서의 네 면이 금 · 은 · 폐유리 · 파지가 보배다. 보배의 위덕에 따라 빛깔이 허공에 드러나므로, 섬부주의 하늘은 폐유리 빛깔을 띤다.
우리가 사는 남섬부주의 하늘이 푸른 것은 수미산 남면의 폐유리 보배가 비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보배들은 어디서 생겼는가. 이것도 유정의 업력이다. 다시 큰 구름이 일어 금륜 위에 비가 내리면, 그 물이 여러 보배의 종자 창고가 되고, 위덕 있는 사나운 바람이 그것을 쳐서 보배가 생긴다.
여기서 논은 상키아(數論)와의 짧은 논쟁을 끼워 넣는다. 물이 바뀌어 보배가 되는 것은 「원인이 멸하고 결과가 생기는 것이지, 체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론이 말하는 전변(轉變)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因滅果生,體不俱有,非如數論轉變所成)」. 상키아는 상주하는 「법의 소유자(有法)」가 있고 그 위에서 어떤 속성은 생기고 어떤 속성은 멸한다고 한다. 천친은 상주하는 것 위에 다른 법이 생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상키아가 「법 밖에 따로 유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법이 바뀔 때 다른 모습의 의지처를 유법이라 한다」고 물러서자, 천친은 「바로 이 물건인데 이와 같지 않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끝낸다. 찰나멸의 존재론이 세계의 생성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관철된다.
아홉 산이 금륜 위에 놓인 모습은 이렇다. 모든 산이 물에 8만 유순씩 잠겨 있고, 수미산은 물 위로도 8만 유순 솟았다. 나머지 여덟은 물 위로 솟은 높이가 반씩 반씩 낮아져, 첫째 지쌍산이 4만, 마지막 철륜위산이 312.5유순이다. 그리고 아홉 산의 너비는 각각 물 위로 솟은 높이와 같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산 이름들을 이렇게 풀이한다. 지쌍(踰健達羅)은 산꼭대기에 수레바퀴 자국 같은 두 길이 있어서, 지축(伊沙馱羅)은 봉우리가 수레 굴대처럼 솟아서, 첨목(朅地洛迦)은 인도의 나무 이름으로 산 위의 보배 나무가 그 나무를 닮아서, 선견(蘇達梨舍那)은 장엄이 뛰어나 보는 이가 좋다고 해서, 마이(頞濕縛羯拏)는 봉우리가 말의 귀를 닮아서, 상비(毘那怛迦)는 산 모양이 코끼리 코를 닮아서, 지변(尼民達羅)은 물고기 이름으로 봉우리가 그 물고기의 뾰족한 주둥이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여덟 바다
산과 산 사이에 여덟 바다가 있다. 안쪽 일곱 바다에는 여덟 공덕의 물이 가득하다.
七中皆具八功德水:一甘、二冷、三軟、四輕、五清淨、六不臭、七飲時不損喉、八飲已不傷腹。
일곱 바다에는 모두 여덟 공덕의 물이 있다. 첫째 달고, 둘째 차고, 셋째 부드럽고, 넷째 가볍고, 다섯째 맑고, 여섯째 냄새가 없고, 일곱째 마실 때 목을 상하지 않고, 여덟째 마신 뒤 배를 상하지 않는다.
첫째 바다(수미산과 지쌍산 사이)의 너비는 8만 유순이고, 지쌍산 안쪽 가장자리의 둘레로 재면 네 면이 각각 그 세 배인 24만 유순이다. 나머지 여섯 바다는 반씩 좁아져 둘째가 4만, 일곱째가 1250유순이다. 이 바다들의 둘레는 번거로워 말하지 않는다고 논은 덧붙인다. 여덟째 바다는 바깥 바다로, 짠물이 가득하고 너비는 32만 2천 유순이다. 사대주는 이 바깥 바다에 떠 있다.
수미산(묘고) — 물 위 8만 · 너비 8만 · 북 금 · 동 은 · 남 폐유리 · 서 파지가
- 수미산(묘고)물 위 8만 · 너비 8만북 금 · 동 은 · 남 폐유리 · 서 파지가
- 첫째 바다너비 8만
- 지쌍산4만
- 둘째 바다4만
- 지축산2만
- 셋째 바다2만
- 첨목산1만
- 넷째 바다1만
- 선견산5천
- 다섯째 바다5천
- 마이산2500
- 여섯째 바다2500
- 상비산1250
- 일곱째 바다1250
- 지변산625
- 바깥 바다(짠물)32만 2천사대주
- 철륜위산312.5
모든 산은 물속 8만 · 산의 너비 = 물 위 높이 (단위: 유순)
네 대륙과 여덟 중주
바깥 바다에 네 대륙이 수미산의 네 면을 마주하고 있다.
남섬부주는 북쪽이 넓고 남쪽이 좁아 수레 모양이다. 세 변이 각각 2천 유순이고, 남쪽 변만 3.5유순이다. 이 대륙에만 금강좌(金剛座)가 있다.
唯此洲中有金剛座,上窮地際下據金輪,一切菩薩將登正覺皆坐此座上起金剛喻定。
오직 이 대륙에만 금강좌가 있으니, 위로는 땅의 끝까지 닿고 아래로는 금륜에 의거한다. 모든 보살이 정각에 오르려 할 때 다 이 자리에 앉아 금강유정을 일으킨다.
왜 이 자리여야 하는가. 다른 어떤 의지처나 다른 어떤 곳도 금강유정을 떠받칠 견고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자리가 금륜까지 뿌리를 내린 기세간의 한 지점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구사론』의 우주론이 수행론과 맞물린 한 예다.
동승신주는 동쪽이 좁고 서쪽이 넓어 반달 모양이다. 세 변은 각각 2천, 동쪽 변은 350유순이다. 서우화주는 보름달처럼 둥글어 지름이 2500, 둘레는 7500유순이다. 북구로주는 네모난 자리 모양으로, 네 변이 각각 2천 유순이며 조금도 더하고 덜함이 없다. 그리고 「대륙의 모양에 따라 사람의 얼굴도 그러하다」. 섬부주 사람의 얼굴은 수레 모양(위가 넓고 아래가 좁음), 동승신주 사람은 반달 모양, 서우화주 사람은 둥글고, 북구로주 사람은 네모나다는 것이다.
또 여덟 중주가 있어 대륙마다 곁에 둘씩 있다. 섬부주 곁에 차말라주와 벌라차말라주, 승신주 곁에 제하주와 비제하주, 우화주 곁에 사체주와 올달라만달리나주, 구로주 곁에 구랍바주와 교랍바주. 모두 사람이 산다. 어떤 이는 차말라주에는 나찰만 산다고 한다.
섬부주의 지형 — 무열뇌지와 네 큰 강
此北九黑山,雪香醉山內,無熱池縱廣,五十踰繕那。
이 대륙의 북쪽에 아홉 검은 산이 있고, 설산과 향취산 사이에 무열뇌지가 있으니, 가로세로 50유순이다. (『구사론』 권11 분별세품, T29, 58a)
섬부주의 가운데에서 북쪽으로 세 곳에 각각 세 겹의 검은 산이 있다. 검은 산 북쪽에 대설산이, 대설산 북쪽에 향취산이 있다. 설산 북쪽, 향취산 남쪽에 큰 못이 있으니 이름이 무열뇌(無熱惱)다. 여기서 네 큰 강 — 긍가하 · 신도하 · 사다하 · 박추하 — 가 흘러나온다. 못은 가로세로 똑같이 50유순이고 여덟 공덕의 물이 가득한데, 신통을 얻은 이가 아니면 이를 수 없다. 못 곁에 섬부(jambu)의 숲이 있다. 나무가 높고 크며 열매가 달다. 이 숲 때문에, 또는 이 열매 때문에 섬부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긍가하 · 신도하 · 사다하 · 박추하는 각각 갠지스 · 인더스 · 타림(또는 야르칸드) · 옥수스(아무다리야)에 비정되곤 한다. 히말라야 북쪽의 성스러운 호수에서 네 강이 사방으로 흐른다는 그림은 인도의 고전 지리관과 공유하는 것이다. 다만 『구사론』 원문은 강 이름만 들 뿐 이러한 비정을 하지 않는다.
지옥의 배치
謂煻煨屍糞,鋒刃烈河增,各住彼四方,餘八寒地獄。
(섬부주 아래 2만을 지나 무간지옥이 있으니 깊이와 너비가 같고, 위의 일곱 지옥과 함께 여덟 지옥에 각각 열여섯 증이 있다.) 당외 · 시분 · 봉인 · 열하의 증이 각각 그 네 방위에 있고, 나머지 여덟은 한지옥이다. (『구사론』 권11 분별세품, T29, 58a~b)
장행에 따르면 섬부주 아래로 2만 유순을 지나 무간지옥(阿鼻旨)이 있다. 깊이와 너비가 모두 2만이므로, 그 바닥은 이곳에서 4만 유순 아래에 있다(彼底去此四萬踰繕那). 그 안에서 받는 괴로움에 틈이 없어, 다른 일곱 대지옥처럼 괴로움이 끊길 때가 있는 것과 다르므로 「무간」이라 한다. 예를 들어 등활지옥의 유정은 갖가지로 베이고 찔리고 갈리고 찧여도 서늘한 바람이 한 번 불면 본래대로 살아나므로 「등활(等活)」이라 하는데, 무간지옥에는 그런 일이 없다. 다른 논사는, 무간지옥에는 괴로움 사이에 끼어드는 즐거움이 없고, 다른 지옥에는 이숙의 즐거움은 없어도 등류의 즐거움이 끼어든다고 한다.
나머지 일곱 대지옥 — 극열 · 염열 · 대규 · 호규 · 중합 · 흑승 · 등활 — 은 무간지옥 위에 겹쳐 있다. 어떤 이는 무간지옥 곁에 있다고 한다. 여덟 대지옥에는 각각 열여섯 「증(增)」이 있다. 대지옥의 네 문 밖에 각각 네 곳이 있기 때문이다.
- 당외증(煻煨增): 뜨거운 잿불이 무릎까지 차 있어, 발을 디디면 살갗과 살과 피가 타서 떨어지고 발을 들면 다시 생긴다.
- 시분증(屍糞增): 시체와 똥의 진창에 바늘처럼 날카로운 입을 지닌 벌레가 가득해 살을 뚫고 뼈를 깨 골수를 먹는다.
- 봉인증(鋒刃增): 셋이 있다. 칼날을 위로 향해 깐 큰길(도인로), 칼날을 잎으로 한 숲(검엽림 — 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져 몸을 벤다), 열여섯 손가락 길이의 쇠가시가 돋은 숲(철자림 — 나무를 오르내릴 때 찔리고, 쇠부리 새가 눈과 심장과 간을 쪼아 먹는다). 셋은 다르지만 쇠칼이라는 점이 같아 하나의 증으로 묶는다.
- 열하증(烈河增): 뜨거운 짠물이 가득한 강. 큰 솥에 잿물을 채우고 깨와 쌀을 넣어 끓이듯, 유정이 위아래로 뒤집히며 삶아진다. 양쪽 언덕에서 옥졸이 칼과 창으로 막아 나갈 수 없다.
이 강은 해자와 같고 앞의 셋은 동산과 같다. 「증」이라 하는 까닭은 본 지옥에서 해를 입고 다시 거듭 해를 입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지옥에서 나온 유정이 다시 이 괴로움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논은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나온다(因論生論)」며 한 문제를 따진다. 지옥의 옥졸은 유정인가. 어떤 이는 유정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움직이는가. 유정들의 업력으로 움직인다. 세계가 이루어질 때의 바람처럼. 그러면 법선현의 게송 「마음에 늘 성냄과 독을 품고, 악업 짓기를 좋아하며, 남의 괴로움을 보고 기뻐하면, 죽어 염마의 옥졸이 된다」는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염마왕의 심부름꾼으로 유정을 지옥에 던져 넣는 나찰을 말한 것이지, 지옥 안에서 유정을 해치는 옥졸을 말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옥졸이 유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악업의 과보는 어디서 받는가. 지옥 안에서 받는다. 무간업의 이숙도 받는 곳이니 막을 이치가 없다. 그렇다면 불은 왜 그들을 태우지 않는가. 업력이 막기 때문이거나, 다른 대종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이다.
여덟 한지옥이 있다. 알부타 · 니랄부타 · 알철타 · 확확바 · 호호바 · 올발라 · 발특마 · 마하발특마. 극심한 추위에 시달려 몸과 소리가 변하는 것으로 이름을 세웠다. 보광의 『구사론기』에 따르면 앞의 둘은 추위에 몸에 물집이 생기고 그 물집이 터지는 모습, 가운데 셋은 추위에 입에서 나오는 기이한 소리이며, 뒤의 셋은 혹독한 추위에 몸이 변해 갈라 터진 모양이 푸른 연꽃 · 붉은 연꽃 · 큰 붉은 연꽃과 같다는 이름이다. 이 여덟도 섬부주 아래, 대지옥 곁에 있다.
그런데 섬부주는 넓이가 얼마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아래에 무간지옥 등을 담는가.
洲如穀聚,上尖下闊,是故大海漸陿漸深。
대륙은 곡식 더미처럼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넓다. 그래서 큰 바다는 점점 좁아지며 점점 깊어진다.
이 열여섯 지옥(여덟 열지옥 · 여덟 한지옥)은 모든 유정의 증상업이 부른 것이다. 그 밖에 고독지옥(孤地獄)이 있다. 각자의 개별 업이 부르며, 여럿 · 둘 · 하나가 머물고, 종류가 많고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다. 강가나 산기슭, 넓은 들, 땅 밑, 허공 등에 있다. 지옥의 본처는 아래에 있고, 가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방생의 본처는 큰 바다이고 뒤에 물 · 뭍 · 허공으로 퍼졌다. 아귀의 본처는 염마왕국이다. 섬부주 아래 500유순에 있고 가로세로도 그만하며, 거기서 여기저기로 흩어져 산다. 아귀 가운데는 위덕을 갖추어 하늘처럼 부귀를 누리는 이도 있고, 굶주리고 여위어 얼굴이 추한 이도 있다.
- 등활
- 흑승
- 중합
- 호규
- 대규
- 염열
- 극열
해와 달 — 높이 · 크기 · 낮과 밤
日月迷盧半,五十一五十,夜半日沒中,日出四洲等。 雨際第二月,後九夜漸增,寒第四亦然,夜減晝翻此。 晝夜增臘縛,行南北路時,近日自影覆,故見月輪缺。
해와 달은 수미산의 절반 높이에 있고, 크기는 51과 50이다. 한밤 · 해 짐 · 한낮 · 해 뜸이 네 대륙에서 동시다. 우기의 둘째 달 후반 아흐레부터 밤이 점점 늘고, 한기의 넷째 달도 그러하여 밤이 줄며, 낮은 이와 반대다. 낮과 밤은 1납박씩 늘고 주니, 해가 남쪽 · 북쪽 길을 갈 때다. 해에 가까워지면 제 그림자가 덮으므로 달이 이지러져 보인다. (『구사론』 권11 분별세품, T29, 59a)
해 · 달 · 별은 무엇에 의지해 머무는가. 바람에 의지한다. 유정들의 업력이 함께 바람을 일으켜, 그 바람이 수미산을 돌며 허공을 선회하면서 해 등을 실어 날라 멈추거나 떨어지지 않게 한다. 높이는 지쌍산의 꼭대기와 같으니 수미산의 절반, 곧 물 위 4만 유순이다. 해의 지름은 51유순, 달은 50유순이다. 가장 작은 별은 1구로사, 가장 큰 별은 16유순이다.
日輪下面頗胝迦寶火珠所成,能熱能照;月輪下面頗胝迦寶水珠所成,能冷能照。
해의 바퀴 아랫면은 파지가 보배의 불 구슬로 이루어져 뜨겁게 하고 비출 수 있다. 달의 바퀴 아랫면은 파지가 보배의 물 구슬로 이루어져 차게 하고 비출 수 있다.
해와 달은 하나뿐인데 네 대륙에 같은 때에 같은 일을 하는가. 그렇지 않다. 북구로주가 한밤일 때 동승신주는 해가 지고, 남섬부주는 한낮이며, 서우화주는 해가 뜬다. 해가 수미산 둘레를 돌기 때문에 네 대륙의 시각이 90도씩 어긋난다는 그림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바뀌는 것은 해가 이 대륙을 지나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기의 둘째 달 후반 아흐렛날부터 밤이 점점 늘고, 한기의 넷째 달 후반 아흐렛날부터 밤이 점점 준다. 낮은 그 반대다. 하루에 1납박씩 늘고 준다. 해가 이 대륙에서 남쪽 길로 가면 밤이 늘고, 북쪽 길로 가면 낮이 는다.
달은 왜 하현의 끝과 상현의 처음에 이지러져 보이는가. 논은 두 설을 든다.
世施設中作如是釋:以月宮殿行近日輪,月被日輪光所侵照,餘邊發影自覆月輪,令於爾時見不圓滿。先舊師釋:由日月輪行度不同現有圓缺。
『세시설』은 이렇게 해석한다. 달의 궁전이 해의 바퀴 가까이 가면 달이 햇빛에 침범당해, 다른 가장자리에 그림자가 생겨 스스로 달의 바퀴를 덮으므로 그때 둥글지 않게 보인다. 옛 논사들은 해석한다. 해와 달의 바퀴가 가는 도수가 같지 않아 둥글고 이지러짐이 나타난다.
수미산의 층과 삼십삼천
해와 달의 궁전에는 누가 사는가. 사대왕의 권속인 하늘들이다. 하늘은 허공에 사는 하늘(공거천)과 땅에 의지해 사는 하늘(지거천)로 나뉜다. 수미산에는 네 층이 있다. 물가에서 첫째 층까지 1만 유순, 둘째 · 셋째 · 넷째 층까지 각각 1만 유순씩 올라가니, 네 층이 수미산의 아래 절반을 차지한다. 층은 산에서 옆으로 튀어나와 둘러싸는데, 첫째 층이 1만 6천, 둘째 8천, 셋째 4천, 넷째 2천 유순 튀어나왔다. 첫째 층에는 견수(堅手)라는 야차가, 둘째 층에는 지만(持鬘)이, 셋째 층에는 항교(恒憍)가 산다. 셋 다 사대왕의 권속이다. 넷째 층에는 사대왕과 그 권속이 산다. 일곱 금산 위에도 하늘이 사니, 사대왕의 봉읍이다. 이것을 통틀어 사대왕중천이라 하며, 욕계의 하늘 가운데 이 하늘이 가장 넓다.
삼십삼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산다.
妙高頂八萬,三十三天居,四角有四峯,金剛手所住。 中宮名善見,周萬踰繕那,高一半金城,雜飾地柔軟。 中有殊勝殿,周千踰繕那,外四苑莊嚴,眾車麁雜喜。 妙池居四方,相去各二十,東北圓生樹,西南善法堂。
묘고산 꼭대기 8만에 삼십삼천이 사니, 네 모서리에 네 봉우리가 있어 금강수가 머문다. 가운데 궁성은 선견이라 하니 둘레가 1만 유순이고, 높이 1유순 반의 금성이며, 갖가지로 꾸며지고 땅이 부드럽다. 그 가운데 수승전이 있으니 둘레가 1천 유순이다. 바깥은 네 동산으로 꾸며지니 중거 · 추악 · 잡림 · 희림이다. 아름다운 못이 사방에 있어 서로 20유순 떨어져 있다. 동북에 원생수, 서남에 선법당이 있다. (『구사론』 권11 분별세품, T29, 59c)
장행이 숫자를 채운다. 수미산 꼭대기는 네 면이 각각 8만 유순으로 아래와 같다. 다른 논사는 둘레가 8만이니 한 면은 2만뿐이라고 한다. 네 모서리의 봉우리는 높이와 너비가 각각 500유순이다. 선견성은 한 면이 2500, 둘레가 1만 유순이고, 금성의 높이는 1유순 반이며, 땅은 진금으로 되어 101가지 보배로 꾸며졌고, 감촉은 도라솜처럼 부드러워 밟을 때마다 발을 따라 오르내린다. 제석천의 도성이다. 수승전은 한 면이 250, 둘레가 1천 유순이다.
성 밖 동북쪽의 원생수(圓生樹)는 삼십삼천이 욕락을 누리는 가장 뛰어난 곳이다. 뿌리가 깊고 넓기 50유순, 줄기와 가지의 높이와 너비가 100유순이며, 꽃향기가 바람을 따라 100유순, 바람을 거슬러도 50유순까지 퍼진다. 향기가 어떻게 바람을 거스르는가. 어떤 이는 향은 거스를 수 없고 나무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논은 원생수에는 실제로 그런 덕이 있어, 하늘의 바람에 막히면서도 이어 흘러 점점 약해져 가까운 곳에서 그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존의 게송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풍기지 못하나, 착한 사람의 공덕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사방에 퍼진다」는 어떻게 하는가. 인간의 향을 두고 한 말이다. 서남쪽의 선법당에서는 삼십삼천이 때때로 모여 법다운 일과 법답지 않은 일을 논의한다.
허공의 하늘들 — 욕락의 방식과 하늘의 높이
삼십삼천 위의 하늘 — 야마천 · 도사다천 · 낙변화천 · 타화자재천과 색계 열여섯 처 — 은 허공의 궁전에 의지해 산다. 앞의 사대왕중천 · 삼십삼천을 합해 스물두 하늘이 모두 바깥 그릇에 의지한다.
여섯 욕계 하늘이 욕락을 누리는 방식은 이렇게 요약된다.
六受欲交抱,執手笑視婬。
여섯 하늘은 욕락을 누리니, 몸을 섞고, 껴안고, 손을 잡고, 웃고, 바라보는 것으로 음사를 이룬다. (『구사론』 권11 분별세품, T29, 60b)
땅에 사는 앞의 두 하늘은 사람과 같이 몸을 섞되 바람 기운이 나와 열뇌가 사라질 뿐 부정한 것이 없다. 야마천은 껴안기만 해도, 도사다천은 손을 잡기만 해도, 낙변화천은 마주 웃기만 해도, 타화자재천은 마주 보기만 해도 음사를 이룬다. 그러나 비바사사는 여섯 하늘이 모두 몸을 섞는다고 하고, 『세시설』의 껴안음 등은 그 시간의 길이가 다름을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한다. 위의 하늘일수록 욕의 대상이 묘하고 탐심이 빨라 그렇다는 것이다. 하늘의 남녀 무릎 위에 아이가 문득 화생하면 그들의 아들딸이라 한다. 욕계 하늘은 처음 태어날 때 차례로 인간의 다섯 살에서 열 살 아이만 하고 금세 자란다. 색계 하늘은 처음부터 몸이 다 자라 옷을 입고 있다. 모든 하늘은 거룩한 말을 쓰니 중인도의 말과 같다.
욕계의 태어남에는 세 가지가 있다. 눈앞의 욕경을 누리는 이(사람 전체와 아래 네 하늘), 스스로 변화시킨 욕경을 누리는 이(낙변화천), 남이 변화시킨 욕경을 누리는 이(타화자재천). 색계의 즐거운 태어남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앞의 세 정려의 아홉 하늘이 이생희락 · 정생희락 · 이희락에 오래 머문다.
하늘들의 높이는 하나의 원칙으로 주어진다.
隨從何天去下海量,彼上所至與去下同。
어떤 하늘이 아래로 바다까지 떨어진 거리만큼, 그 위로 다음 하늘까지의 거리도 같다.
사대왕이 사는 넷째 층은 바다에서 4만 유순이니, 거기서 삼십삼천까지도 4만이다(삼십삼천은 바다에서 8만). 삼십삼천이 바다에서 떨어진 만큼(8만) 위로 야마천이 있다(바다에서 16만). 이렇게 거리가 배씩 늘어 선견천이 바다에서 떨어진 만큼 위에 색구경천이 있다. 그 위에는 사는 곳이 없으니 가장 높아 「색구경(色究竟)」이라 한다. 다른 논사는 「애구경(礙究竟)」이라 부른다. 쌓인 물질(礙)이 거기서 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래 하늘에 사는 이는 위 하늘을 볼 수 있는가. 신통이 있거나 남의 도움이 아니면 올라가 볼 수 없다. 위의 하늘이 아래로 올 때는 아래 지위의 몸을 변화로 지어서 온다. 위 지위의 몸은 아래 지위의 눈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천 · 중천 · 대천
四大洲日月,蘇迷盧欲天,梵世各一千,名一小千界;此小千千倍,說名一中千;此千倍大千,皆同一成壞。
사대주 · 해와 달 · 수미산 · 욕계 하늘 · 범세가 각각 천 개씩인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라 한다. 이 소천의 천 배를 하나의 중천이라 하고, 그 천 배를 대천이라 하니, 모두 함께 이루어지고 함께 무너진다.
한 대천세계 안에는 사대주와 수미산과 해와 달이 10억(천의 세제곱) 벌 있다. 그리고 이 대천세계가 겁의 단위로 함께 이루어지고 함께 무너지는 하나의 단위다.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은 천을 세 번 곱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야마천 이상의 궁전과 색계의 궁전은 얼마나 큰가. 논은 이설을 넷 든다. 위의 네 욕계 하늘은 수미산 꼭대기와 같다, 위로 배씩 늘어난다, 초정려는 한 사대주, 제2정려는 소천, 제3정려는 중천, 제4정려는 대천만 하다, 아래 세 정려가 차례로 소 · 중 · 대천만 하고 제4정려는 끝이 없다.
몸의 크기와 수명
그릇의 크기가 다르듯 몸의 크기도 다르다.
贍部洲人量,三肘半四肘;東西北洲人,倍倍增如次。 欲天俱盧舍,四分一一增;色天踰繕那,初四增半半;此上增倍倍,唯無雲減三。
섬부주 사람의 키는 3주 반이나 4주이고, 동 · 서 · 북 대륙의 사람은 차례로 배씩 늘어난다. 욕계 하늘은 구로사의 4분의 1씩 늘고, 색계 하늘은 유순으로 재니 처음 넷은 반씩 늘며, 그 위로는 배씩 늘되 무운천만 3을 줄인다. (『구사론』 권11 분별세품, T29, 61a)
섬부주 사람은 대개 3주 반이고 소수가 4주다. 동승신주는 8주, 서우화주는 16주, 북구로주는 32주. 욕계 하늘은 사대왕중천이 4분의 1구로사, 하나 오를 때마다 4분의 1씩 늘어 타화자재천은 1구로사 반이다. 색계는 범중천이 반 유순, 범보천 1, 대범천 1.5, 소광천 2이고, 그 위로 배씩 늘되 무운천에서만 3을 줄여, 마지막 색구경천은 1만 6천 유순이다.
수명은 이렇다.
北洲定千年,西東半半減,此洲壽不定,後十初叵量。 人間五十年,下天一晝夜,乘斯壽五百,上五倍倍增。 色無晝夜殊,劫數等身量,無色初二萬,後後二二增,少光上下天,大全半為劫。
북구로주 사람은 반드시 천 년을 산다. 서우화주는 500년, 동승신주는 250년이다. 섬부주 사람의 수명은 정해지지 않았다. 겁이 줄어드는 마지막에는 겨우 10년, 겁초에는 백천 등의 수로도 헤아릴 수 없다.
하늘의 수명은 하늘의 낮과 밤을 먼저 세워야 셀 수 있다. 사람의 50년이 사대왕중천의 하루다. 이 하루로 30일이 한 달, 열두 달이 한 해, 그 해로 500년을 산다. 위의 다섯 하늘은 하루도 수명도 배씩 늘어, 삼십삼천은 사람의 100년이 하루이고 1천 년을 살며, 타화자재천은 사람의 1600년이 하루이고 1만 6천 년을 산다. 해와 달이 없는 지쌍산 이상의 하늘은 어떻게 낮과 밤을 세우는가. 꽃이 피고 닫힘, 새가 울고 그침, 하늘 사람이 깨고 잠듦으로 세우고, 빛은 제 몸의 광명으로 얻는다.
색계에는 낮과 밤이 없어 겁의 수로 수명을 센다. 그 수는 몸의 크기와 같다. 몸이 반 유순이면 반 겁, 1유순이면 1겁, 1만 6천 유순이면 1만 6천 겁. 무색계는 아래부터 차례로 2만 · 4만 · 6만 · 8만 겁이다. 여기서 「겁」은 어떤 겁인가. 소광천 이상은 대겁 전체를, 그 아래 세 하늘은 대겁의 반(40중겁)을 한 겁으로 삼는다. 그래서 대범천의 수명 1겁 반은 60중겁이다.
악취의 수명은 욕계 하늘의 수명에 맞물려 있다. 사대왕중천의 수명 500년이 등활지옥의 하루이고, 그 하루로 500년을 산다. 이렇게 여섯 욕계 하늘의 수명이 차례로 등활 · 흑승 · 중합 · 호규 · 대규 · 염열의 하루가 되고, 수명도 같은 수다. 극열지옥은 반 중겁, 무간지옥은 1중겁이다. 방생은 대개 정해지지 않았으나 길면 1중겁이니, 난타 같은 큰 용왕이다. 아귀는 사람의 한 달이 하루이고 500년을 산다.
한지옥의 수명은 세존이 비유로 보였다.
如此人間佉梨二十成摩揭陀國一麻婆訶量,有置巨勝平滿其中,設復有能百年除一。如是巨勝易有盡期,生頞部陀壽量難盡。
이 인간의 거리(佉梨) 스무 개가 마갈타국의 마바하(麻婆訶) 하나의 양이 되니, 거기에 참깨를 평평하게 가득 채우고, 백 년에 한 알씩 덜어 낸다고 하자. 이 참깨는 다할 때가 오기 쉬워도, 알부타에 태어난 이의 수명은 다하기 어렵다.
그 스무 배가 둘째 한지옥의 수명이고, 이렇게 스무 배씩 늘어난다.
이 수명들에 중도의 요절(中夭)이 있는가. 북구로주만 빼고 모든 곳에 있다. 다만 장소가 아니라 개인으로 보면 요절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도사다천에서 한 생만 남은 보살, 최후신의 보살, 부처가 수기한 이, 부처가 보낸 사자, 수신행 · 수법행의 성자, 그리고 보살과 전륜왕을 잉태한 어머니다.
기세간의 치수는 두 개의 규칙으로 짜여 있다. 공간은 「반씩 줄고 배씩 는다」(아홉 산 · 여덟 바다 · 하늘의 높이), 시간과 몸은 「아래의 일생이 위의 하루」(욕계 하늘과 지옥)와 「몸의 유순 수 = 수명의 겁 수」(색계). 세계 전체가 업의 우열을 수의 비례로 옮겨 놓은 표다.
본송
極微字剎那,色名時極少。
극미 · 글자 · 찰나가 각각 색 · 이름 · 시간의 가장 작은 것이다.
應知有四劫,謂壞成中大,壞從獄不生,至外器都盡, 成劫從風起,至地獄初生,中劫從無量,減至壽唯十, 次增減十八,後增至八萬,如是成已住,名中二十劫, 成壞壞已空,時皆等住劫,八十中大劫,大劫三無數。
네 가지 겁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괴겁 · 성겁 · 중겁 · 대겁이다. 괴겁은 지옥에 더 태어나지 않는 때부터 바깥 그릇이 다 없어질 때까지다. 성겁은 바람이 일어날 때부터 지옥에 처음 태어날 때까지다. 중겁은 헤아릴 수 없는 수명에서 줄어 겨우 10세에 이르는 것이며, 다음에 늘고 줄기를 열여덟 번, 마지막에 늘어 8만에 이른다. 이렇게 이루어진 뒤 머무는 것을 중겁 스물이라 한다. 성겁 · 괴겁 · 괴한 뒤의 공겁도 시간은 모두 주겁과 같고, 여든 중겁이 대겁이며, (보살의 수행은) 대겁으로 세 무수를 헤아린다.
減八萬至百,諸佛現世間,獨覺增減時,麟角喻百劫。
8만에서 줄어 100에 이르는 사이에 부처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독각은 늘 때와 줄 때에 다 나타나며, 인각유 독각은 백 겁을 닦는다.
술어 풀이
- 極微극미
- 색을 나누어 이르는 가장 작은 것(paramāṇu). 길이 단위의 출발점. 극미 자체의 존재론은 「법의 분류」 편에서 다룬다.
- 剎那찰나
- 시간의 가장 작은 것(kṣaṇa). 「법이 자체를 얻는 순간」, 또는 움직이는 법이 극미 하나를 지나는 시간.
- 踰繕那유선나 · 유순
- yojana. 8구로사. 구로사(krośa)는 마을에서 아란야(수행처)까지의 거리.
- 牟呼栗多모호율다 · 수유
- muhūrta. 30납박. 하루는 30모호율다.
- 劫겁
- kalpa. 괴겁 · 성겁 · 중겁 · 대겁의 네 가지. 「겁의 체는 무엇인가. 오직 오온이다.」
- 阿僧企耶아승기야
- asaṃkhyeya. 「셀 수 없음」이지만 『해탈경』의 60가지 수의 단위 가운데 하나(마지막)의 이름이다.
- 五濁오탁
- 수탁 · 겁탁 · 번뇌탁 · 견탁 · 유정탁. 겁이 줄어드는 끝에 수명 등이 앙금처럼 비천해지는 것.
- 麟角喻인각유
- 기린의 뿔처럼 홀로 사는 독각(khaḍgaviṣāṇakalpa). 무리 지어 수행하는 부행 독각과 대비된다.
- 轉輪王전륜왕
- 바퀴(cakra)를 굴려 천하를 다스리는 왕. 금 · 은 · 동 · 철의 네 가지.
- 三災삼재
- 소삼재(도병 · 질역 · 기근)와 대삼재(화재 · 수재 · 풍재).
세 가지 가장 작은 것
권11까지 기세간의 크기는 유순으로, 수명은 해로 쟀다. 권12는 그 단위들 자체를 세운다. 두 단위는 모두 「이름(名)」에 의지하므로, 먼저 색 · 이름 · 시간의 가장 작은 것을 정한다.
색을 나누고 나누어 하나의 극미에 이르면 그것이 색의 가장 작은 것이다. 이름과 시간을 나누면 한 글자와 한 찰나에 이른다. 한 글자의 이름이란 「구(瞿, go)」 같은 것이다. 찰나의 정의는 두 가지다.
眾緣和合法得自體頃,或有動法行度一極微。對法諸師說:如壯士一疾彈指頃六十五剎那,如是名為一剎那量。
여러 연이 화합해 법이 자체를 얻는 순간, 또는 움직이는 법이 극미 하나를 지나가는 시간이다. 대법의 논사들은, 건장한 사내가 한 번 빠르게 손가락을 튕기는 사이에 65찰나가 있으니 이만한 것을 한 찰나의 양이라 한다고 말한다.
찰나의 첫 정의는 존재론적이고(법이 생기는 순간), 둘째는 운동학적이며(극미 하나를 지나는 시간), 셋째는 경험적이다(손가락 튕김의 65분의 1). 이 셋이 하나의 단위로 겹친다는 것은 찰나멸의 존재론이 공간과 시간을 최소 단위로 묶어 둔 방식을 보여 준다.
극미에서 유순까지
極微微金水,兔羊牛隙塵,蟣虱麥指節,後後增七倍, 二十四指肘,四肘為弓量,五百俱盧舍,此八踰繕那。
극미 · 미 · 금진 · 수진 · 토모진 · 양모진 · 우모진 · 극유진 · 기 · 슬 · 맥 · 지절은 뒤로 갈수록 일곱 배씩 늘어난다. 24지가 1주, 4주가 1궁, 500궁이 1구로사, 그 8이 1유순이다. (『구사론』 권12 분별세품, T29, 62a)
장행은 순서를 하나하나 풀어 준다. 극미 7이 1미(微), 미 7이 1금진(金塵), 금진 7이 1수진(水塵), 수진 7이 1토모진(兔毛塵), 토모진 7이 1양모진(羊毛塵), 양모진 7이 1우모진(牛毛塵), 우모진 7이 1극유진(隙遊塵 — 문틈으로 든 햇살에 떠다니는 먼지), 극유진 7이 1기(蟣 — 서캐), 기 7이 1슬(虱 — 이), 슬 7이 1맥(麥 — 보리알), 맥 7이 1지절(指節 — 손가락 마디). 지절 3이 1지(指)인 것은 세간에 다 아는 것이라 게송에서 따로 말하지 않았다. 24지를 옆으로 놓으면 1주(肘 — 팔꿈치에서 손끝), 4주를 세로로 쌓으면 1궁(弓 — 한 길), 500궁이 1구로사, 8구로사가 1유순이다. 1구로사는 「마을에서 아란야까지의 거리」라고 논은 덧붙인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금진을 금(금 · 은 · 동 · 철을 통틀어) 속의 틈을 지나다닐 만한 먼지, 수진을 물속의 틈을 지나다닐 만한 먼지, 토모진을 토끼털 끝만 한 먼지라고 풀이한다. 사물의 틈새와 털끝이라는, 눈으로 상상할 수 있는 크기로 극미에서 일상의 크기로 올라오는 사다리다.
이 체계로 계산하면 1유순은 극미의 몇 배인가. 극미에서 지절까지 7의 11제곱, 지절에서 유순까지 3 × 24 × 4 × 500 × 8 = 115만 2천이다.
- 극미極微
- ×7미微
- ×7금진金塵
- ×7수진水塵
- ×7토모진兔毛塵
- ×7양모진羊毛塵
- ×7우모진牛毛塵
- ×7극유진隙遊塵
- ×7기蟣
- ×7슬虱
- ×7맥麥
- ×7지절指節
- ×3지指
- ×24주肘
- ×4궁弓
- ×500구로사俱盧舍
- ×8유순踰繕那
찰나에서 해까지
百二十剎那,為怛剎那量,臘縛此六十,此三十須臾,此三十晝夜,三十晝夜月,十二月為年,於中半減夜。
120찰나가 1달찰나의 양이고, 그 60이 1납박, 그 30이 1수유, 그 30이 1주야, 30주야가 1월, 12월이 1년이며, 그 가운데 반은 밤을 줄인다. (『구사론』 권12 분별세품, T29, 62b)
장행은 「수유」를 「모호율다(牟呼栗多)」로 쓴다. 찰나 120이 1달찰나(怛剎那), 달찰나 60이 1납박(臘縛), 납박 30이 1모호율다, 모호율다 30이 1주야다. 주야는 길 때도 짧을 때도 같을 때도 있다. 30주야가 1월, 12월이 1년이며, 1년은 한기 · 열기 · 우기의 세 때로 나뉘어 각 넉 달이다. 열두 달 가운데 여섯 달은 밤을 하루 줄인다. 한 해에 모두 여섯 밤이 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옛 게송이 답한다. 「한기 · 열기 · 우기 가운데 한 달 반이 지나면, 나머지 보름에서 지혜로운 이는 밤이 줄었음을 안다.」 음력의 큰달과 작은달을 설명하는 장치다.
이 체계로 계산하면 하루는 120 × 60 × 30 × 30 = 648만 찰나다. 앞에서 본 손가락 튕김 한 번이 65찰나이니, 하루는 약 10만 번의 손가락 튕김이다.
- 찰나剎那
- ×120달찰나怛剎那
- ×60납박臘縛
- ×30모호율다牟呼栗多 · 수유
- ×30주야晝夜
- ×30월月
- ×12년年
1년 = 한기 · 열기 · 우기 각 넉 달 · 여섯 달은 밤을 하나 줄인다 「於中半減夜」
찰나의 정의네 가지 겁 — 괴겁
해 다음은 겁이다. 게송이 네 가지를 든다. 괴겁 · 성겁 · 중겁 · 대겁. 논은 무너지는 겁부터 설명한다.
괴겁은 지옥의 유정이 더 태어나지 않는 때부터 바깥 그릇이 다 없어질 때까지다. 무너짐에는 갈래의 무너짐과 계의 무너짐, 유정의 무너짐과 그릇의 무너짐이 있다. 세계가 20중겁 머문 뒤, 다시 같은 길이의 20중겁이 지나는 동안 괴겁이 진행된다.
지옥의 유정이 죽고 새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괴겁의 시작이다. 지옥에 유정이 하나도 없게 되면 지옥이 무너졌다고 한다. 지옥에서 반드시 받아야 할 업이 남은 이는 업력이 다른 세계의 지옥으로 옮겨 놓는다. 방생과 아귀도 그렇게 본다. 그리고 사람의 갈래가 무너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若時人趣此洲一人,無師法然得初靜慮,從靜慮起唱如是言:離生喜樂,甚樂甚靜。餘人聞已皆入靜慮,命終並得生梵世中。
그때 사람의 갈래에서 이 대륙의 한 사람이 스승 없이 저절로 초정려를 얻어, 정려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친다. 「떠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여, 참으로 즐겁고 참으로 고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듣고 모두 정려에 들어, 목숨을 마치고 함께 범세에 태어난다.
동 · 서 두 대륙도 그렇다. 북구로주 사람은 선정에 들어 욕을 떠날 수 없으므로 욕계 하늘에 태어난다(거기서 다시 같은 길을 밟는다). 사람이 다 없어지면 하늘 차례다. 사대왕중천의 한 하늘이 저절로 초정려를 얻어 모두 범세로 가고, 다른 욕계 하늘도 그렇다. 욕계에 유정이 하나도 없게 되면, 범세의 한 유정이 스승 없이 제2정려를 얻어 「선정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여, 참으로 즐겁고 참으로 고요하다」고 외치고, 모두 극광정천에 태어난다.
유정세간이 다 비면 그릇만 텅 빈 채 남는다. 그때 이 삼천세계를 부르는 업이 다하니, 일곱 개의 해가 차례로 나타나 바다가 마르고 산들이 타며, 대륙과 세 바퀴가 다 타고, 바람이 불꽃을 날려 하늘의 궁전을 태워 범천의 궁전까지 재도 남지 않는다. 논은 여기서 하나를 정밀하게 고친다.
自地火焰燒自地宮,非他地災能壞他地,由相引起故作是言。下火風飄焚燒上地。
제 지위의 불꽃이 제 지위의 궁전을 태우지, 다른 지위의 재앙이 다른 지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서로 끌어 일으키므로 「아래의 불이 바람에 날려 위의 지위를 태운다」고 말할 뿐이다.
욕계의 불꽃이 위로 올라가 연이 되어 색계의 불꽃을 끌어 일으킨다는 것이다. 각 지위는 제 업으로 생기고 제 재앙으로 무너진다는 원칙이 지켜진다.
성겁 · 주겁 · 공겁
성겁은 바람이 일어날 때부터 지옥에 처음 유정이 태어날 때까지다. 재앙으로 무너진 뒤 20중겁 동안 허공만 있다(공겁). 그 뒤 성겁이 온다. 모든 유정의 업의 증상력으로 허공에 미세한 바람이 생기기 시작하니, 이것이 그릇 세간이 이루어지려는 첫 모습이다. 바람이 차츰 세져 앞에서 본 풍륜 · 수륜 · 금륜이 이루어진다. 그릇은 위에서부터 이루어진다. 먼저 대범천의 궁전에서 야마천의 궁전까지, 그 뒤 풍륜 등.
그다음 유정이 내려온다.
初一有情極光淨歿,生大梵處為大梵王。後諸有情亦從彼歿,有生梵輔、有生梵眾、有生他化自在天宮。漸漸下生,乃至人趣俱盧、牛貨、勝身、贍部,後生餓鬼、傍生、地獄。法爾後壞,必最初成。
처음 한 유정이 극광정천에서 죽어 대범천의 자리에 태어나 대범왕이 된다. 뒤에 여러 유정이 역시 거기서 죽어 범보천에, 범중천에, 타화자재천의 궁전에 태어난다. 점점 아래로 태어나 사람의 갈래 — 구로주 · 우화주 · 승신주 · 섬부주 — 에 이르고, 그 뒤에 아귀 · 방생 · 지옥에 태어난다. 법이 본래 그러하여, 나중에 무너지는 것이 반드시 처음 이루어진다.
칠식주에서 본 범중천 하늘들의 착각 — 「우리는 대범천이 낳았다」 — 이 바로 이 장면에서 생긴다. 대범천이 먼저 홀로 있다가 뒤에 다른 유정들이 와서 태어나니, 대범천도 범중들도 대범천이 낳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처음 한 유정이 무간지옥에 태어나면 20중겁의 성겁이 다 찼다. 그 뒤 20중겁이 「이루어진 뒤 머무는 겁(成已住劫)」, 곧 주겁이다. 섬부주 사람의 수명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지나 주겁 첫머리에 비로소 줄기 시작한다. 헤아릴 수 없는 수명에서 10세까지 줄어드는 것이 첫째 중겁이다. 다음 열여덟 중겁은 늘었다 줄었다 한다. 10세에서 8만 세로 늘었다가 8만 세에서 10세로 주는 것이 둘째 중겁이고, 셋째부터 열아홉째까지도 그렇다. 스무째 중겁은 10세에서 8만 세로 늘기만 한다.
一切劫增無過八萬,一切劫減唯極十年。
모든 겁의 늘어남은 8만을 넘지 않고, 모든 겁의 줄어듦은 10년에서 그친다.
열여덟 중겁의 「한 번 늘고 한 번 줆」과 첫째의 「줆」, 스무째의 「늚」이 시간의 양으로는 같으므로 스무 중겁이 모두 같은 길이다. 성겁 · 괴겁 · 공겁에는 수명의 늘고 줆이 없지만 시간의 양이 주겁과 같아 각각 20중겁으로 친다. 성겁의 첫 중겁에 그릇이 이루어지고 나머지 열아홉 중겁에 유정이 차츰 머문다. 괴겁의 마지막 중겁에 그릇이 무너지고 앞의 열아홉 중겁에 유정이 차츰 떠난다. 성 · 주 · 괴 · 공이 각각 20중겁, 합해 80중겁이 1대겁이다.
劫性是何?謂唯五蘊。
겁의 체는 무엇인가. 오직 오온이다.
시간은 그것을 채운 법들과 따로 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이 한 줄은, 유부가 시간을 법의 바깥에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겁의 차원에서 확인한다.
삼아승기겁과 60가지 수
경은 「삼겁 아승기 동안 정진하고 수행해야 부처가 된다」고 한다. 네 가지 겁 가운데 어떤 것을 쌓아 삼아승기겁이 되는가. 대겁을 열 · 백 · 천으로 쌓아 아승기에 이르기까지 쌓고, 그것을 셋 쌓는다. 그런데 「셀 수 없다」면서 어떻게 「셋」이라 하는가. 논의 답은 놀랍다. 「셀 수 없음」은 정말 셀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解脫經》說六十數中,阿僧企耶是其一數。
『해탈경』이 설한 60가지 수 가운데 아승기야가 그 하나다.
경은 1에서 시작해 열 배씩 올라간다. 1 · 10 · 100 · 1천 · 1만 · 낙차(10만) · 도락차(100만) · 구지(1천만) · 말타 · 아유다 · 대아유다 · 나유다 · 대나유다 · 발라유다 · 대발라유다 · 긍갈라 · 대긍갈라 · 빈발라 · 대빈발라 · 아추바 · 대아추바 · 비바하 · 대비바하 · 올층가 · 대올층가 · 바갈나 · 대바갈나 · 지치바 · 대지치바 · 혜도 · 대혜도 · 갈랍바 · 대갈랍바 · 인달라 · 대인달라 · 삼마발탐 · 대삼마발탐 · 게저 · 대게저 · 염벌라사 · 대염벌라사 · 모달라 · 대모달라 · 발람 · 대발람 · 산야 · 대산야 · 비보다 · 대비보다 · 발라참 · 대발라참 · 아승기야. 그리고 논은 「이 수 가운데 나머지 여덟은 잊어버렸다(於此數中忘失餘八)」고 덧붙인다. 경이 「60」이라 했는데 전하는 이름은 52뿐이라는 것이다. 아승기야는 1 뒤에 0이 51개 붙는 수가 된다.
대겁을 이 아승기야까지 세면 「1겁 무수」이고, 그것을 셋 쌓은 것이 「삼겁 무수」다. 계산으로 셀 수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살은 왜 그토록 오래 닦는가
수의 단위에 이어 논은 뜻밖의 문답을 놓는다. 보살은 왜 그토록 긴 시간을 정진하기로 원을 세우는가. 위없는 깨달음은 지극히 얻기 어려워 많은 원과 행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 다른 방편으로도 열반을 얻을 수 있는데 왜 깨달음을 위해 오래 고행하는가. 모든 유정을 이롭고 즐겁게 하려고, 괴로움의 폭류에서 중생을 건지려고 열반의 길을 버리고 위없는 깨달음을 구한다.
남을 건지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이익인가. 보살은 남을 건짐으로써 자기의 자비심을 이루니, 남을 건지는 것이 곧 자기의 이익이다. 누가 그런 일을 믿겠는가. 자기만 적시고 큰 자비가 없는 이에게는 믿기 어렵지만, 자기를 적실 마음이 없고 큰 자비가 있는 이에게는 어렵지 않다. 오래 익힌 잔인한 이가 자기에게 이익이 없어도 남을 해치기를 즐기는 것을 세상이 다 알듯, 오래 자비를 익힌 보살이 자기에게 이익이 없어도 남을 이롭게 하기를 즐기는 것을 왜 믿지 못하는가. 또 유정이 거듭 익힌 힘으로 실체 없는 행들을 「나」로 여겨 애착하고 그것 때문에 온갖 괴로움을 달게 지듯, 보살은 거듭 익힌 힘으로 자기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남에 대한 애착을 키워 온갖 괴로움을 달게 진다. 논은 옛 게송으로 맺는다.
下士勤方便,恒求自身樂,中士求滅苦,非樂苦依故,上士恒勤求,自苦他安樂,及他苦永滅,以他為己故。
낮은 사람은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늘 자기 몸의 즐거움을 구한다. 가운데 사람은 괴로움의 소멸을 구하니, 즐거움은 괴로움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높은 사람은 늘 부지런히 자기의 괴로움으로 남의 안락과 남의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을 구하니, 남을 자기로 삼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12 분별세품, T29, 64a)
우주론의 한가운데에 놓인 이 문답은, 겁이라는 시간 단위가 결국 보살의 수행 기간을 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부처는 언제 나오는가 — 줄어드는 겁에만
부처와 독각은 겁이 늘어날 때 나오는가, 줄어들 때 나오는가. 게송의 답은 이 대륙 사람의 수명이 8만 세에서 줄어 100세에 이르는 사이에 부처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何緣增位無佛出耶?有情樂增難教厭故。何緣減百無佛出耶?五濁極增難可化故。
왜 늘어나는 때에는 부처가 나오지 않는가. 유정의 즐거움이 늘어 싫어하는 마음을 가르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100세 아래로 줄어든 때에는 부처가 나오지 않는가. 오탁이 극도로 늘어 교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처의 출현은 시간의 「기울기」에 묶여 있다. 수명이 늘어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즐거움에 빠져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너무 줄어든 시대에는 다섯 탁이 가득하다. 그 다섯은 수탁 · 겁탁 · 번뇌탁 · 견탁 · 유정탁이다. 겁이 줄어드는 끝에 수명 등이 앙금처럼 비천해지므로 탁이라 한다. 수탁과 겁탁은 차례로 수명과 살림살이를 해치고, 번뇌탁과 견탁은 선한 것을 해치니 욕락에 빠지거나 스스로 고행하기 때문이며(또는 재가와 출가의 선을 해치기 때문이며), 유정탁은 자기 몸 — 몸의 크기 · 빛깔 · 힘 · 기억 · 지혜 · 근면 · 건강 — 을 해친다.
독각은 늘어나는 때와 줄어드는 때에 다 나온다. 독각에는 두 종류가 있다. 부행(部行) 독각은 본래 성문이었다가 뛰어난 과를 얻을 때 독승(獨勝)으로 이름이 바뀐다. 다른 설로는 본래 범부로서 성문의 순결택분을 닦았다가 이번 생에 스스로 도를 증득했다고 한다. 근거로 드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산에 고행하는 외도 선인 오백이 있었다. 독각 곁에 살던 원숭이 한 마리가 그 위의를 보았다가 선인들 처소로 가서 흉내 내자, 선인들이 보고 공경하여 순식간에 모두 독각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이 본래 성자였다면 고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본래 범부였다는 것이다. 인각유(麟角喻) 독각은 반드시 홀로 산다. 백 대겁 동안 깨달음의 자량을 닦아야 인각유 독각이 된다.
독각은 왜 남을 가르치지 않는가. 설할 능력이 없는 것도, 자비가 없는 것도, 법을 받을 근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때도 세간의 이욕도를 일으킬 수 있는 유정이 있다. 다만 지난 습관으로 설하고 싶은 마음이 적고, 유정이 오래 흐름을 따라왔으니 거스르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며, 무리를 거느리는 시끄러움을 꺼리기 때문이다.
한 세계에 한 부처인가
부처는 한 세계에 동시에 둘이 나오지 않는다. 경에 「어떤 곳 어떤 때에도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두 여래가 함께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다. 어떤 곳 어떤 때에 오직 한 여래가 있을 뿐」이라 했다. 전륜왕도 그렇다. 그런데 이 「하나」는 한 삼천대천세계를 말하는가, 모든 세계를 말하는가.
한쪽은 다른 세계에도 부처가 없다고 한다. 세존의 공능에 막힘이 없어 한 분이 시방을 다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도 「지금 우리 세존과 같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사문 바라문은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 『범왕경』이 「나는 이 삼천대천세계에서 자재하다」고 한 것은 어떻게 하는가. 세존이 따로 힘쓰지 않으면 삼천대천만 보지만, 힘을 쓰면 끝없는 세계가 다 부처의 눈의 대상이라는 숨은 뜻이 있다고 한다.
有餘部師說:餘世界亦別有佛出現世間。所以者何?有多菩薩現俱修習菩提資糧,一界一時可無多佛,多界多佛何理能遮?
다른 부파의 논사는 말한다. 다른 세계에도 따로 부처가 세상에 나타난다. 무슨 까닭인가. 많은 보살이 지금 함께 깨달음의 자량을 닦고 있다. 한 세계 한 때에 여러 부처가 없을 수는 있지만, 여러 세계에 여러 부처가 있는 것을 무슨 이치로 막겠는가.
이 논사들은 이어 말한다. 한 부처가 한 겁을 산다 해도 한 세계의 불사도 다 하지 못할 텐데, 하물며 사람의 수명으로 끝없는 세계를 이롭게 하겠는가. 유정은 끝없는 세계에 살고 때 · 곳 · 근성이 끝없이 다르니 부처가 근기에 맞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같은 때에 반드시 여러 부처가 있다. 경의 「두 여래가 함께 나오지 않는다」는 한 세계를 말한 것이다. 여러 세계를 말한 것이라면 다른 세계에 전륜왕도 없어야 하는데, 전륜왕은 다른 세계에 있다고 허락하면서 부처는 왜 허락하지 않는가.
그러면 왜 한 세계에는 두 여래가 동시에 나오지 않는가. 논은 네 가지 이유를 든다.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 한 세계에 한 부처로 모두를 이롭게 하기에 충분하다. 원력 때문이다 — 여래들은 보살일 때 「구원도 의지도 없는 눈먼 어둠의 세계에서 정각을 이루겠다」고 원을 세웠다.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다 — 한 세계에 한 여래만 있어야 깊이 공경한다. 빨리 행하게 하기 위해서다 — 일체지의 존귀한 이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반열반에 들거나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서둘러 닦을 것이다.
『구사론』은 이 대목에서 「다른 부파의 논사」의 다세계 다불설을 길고 공감적으로 서술하고, 「한 세계에 왜 둘이 없는가」라는 물음으로 마무리한다. 어느 쪽을 정설로 삼는지 본문에 판정이 없다. 법보의 『구사론소』 권12는 이 「다른 부파의 논사」를 「대중부 등의 논사」라고 주석한다.
전륜왕 — 금 · 은 · 동 · 철의 바퀴
輪王八萬上,金銀銅鐵輪,一二三四洲,逆次獨如佛。 他迎自往伏,諍陣勝無害,相不正圓明,故與佛非等。
전륜왕은 8만 이상의 때에 나오니, 금 · 은 · 동 · 철의 바퀴가 있어 거꾸로 차례로 한 · 두 · 세 · 네 대륙을 다스리며, 부처처럼 홀로 나온다. 남이 맞이하고, 스스로 가고, 다투고, 진을 쳐서 이기되 해치지 않는다. 상호가 바르고 원만하고 밝지 않으므로 부처와 같지 않다. (『구사론』 권12 분별세품, T29, 64b)
전륜왕은 사람의 수명이 헤아릴 수 없을 때부터 8만 세까지 사이에 나온다. 8만 아래로 줄면 유정의 부와 즐거움, 수명이 줄고 악이 늘어 큰 사람의 그릇이 아니게 된다. 『시설족론』은 네 가지를 든다. 금륜왕은 네 대륙, 은륜왕은 세 대륙, 동륜왕은 두 대륙, 철륜왕은 한 대륙을 다스린다. 경은 가장 뛰어난 것을 따라 금륜만 말한다. 찰제리 종족으로 관정을 받은 왕이 보름날 재계하고 높은 누대에 오르면 동방에 금바퀴 보배가 나타나니, 바퀴살이 천 개이고 바퀴통과 테가 갖추어져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듯하다.
네 왕이 사방을 평정하는 방식도 다르다. 금륜왕에게는 작은 나라의 왕들이 스스로 와서 맞이하며 「우리 국토는 넓고 풍요로우니 천존께서 친히 가르쳐 주소서」라고 청한다. 은륜왕은 스스로 그 땅에 가면 위엄이 가까이 이르러 신하로 복종한다. 동륜왕은 그 나라에 가서 위엄을 펴고 덕을 겨루어 이긴다. 철륜왕은 그 나라에 가서 위세를 보이며 진을 치면 이기고 그친다.
一切輪王皆無傷害,令伏得勝已,各安其所居,勸化令修十善業道,故輪王死定得生天。
모든 전륜왕은 해치는 일이 없다. 굴복시켜 이긴 뒤에는 각자 그 사는 곳에 편안히 있게 하고, 열 가지 선업도를 닦도록 권하고 교화한다. 그래서 전륜왕은 죽으면 반드시 하늘에 태어난다.
전륜왕이 나오면 일곱 보배 — 바퀴 · 코끼리 · 말 · 구슬 · 여인 · 주장신(재정을 맡은 신하) · 주병신(군대를 맡은 신하) — 가 함께 나타난다. 코끼리 등 다섯은 유정인데, 어떻게 남의 업이 다른 유정을 생기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앞서 서로 속하는 업을 지었으므로, 하나가 자기 업으로 태어나면 나머지도 같은 때에 각자의 업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전륜왕에게는 서른두 가지 대인상도 있다. 그러면 부처와 무엇이 다른가. 부처의 대인상은 자리가 바르고 밝고 원만하지만 전륜왕의 상은 그렇지 않다.
겁초의 인간 — 땅의 맛과 빛의 상실
겁초의 사람들에게 왕이 있었는가.
劫初如色天,後漸增貪味,由墮貯賊起,為防雇守田。
겁초에는 색계의 하늘과 같았으나, 뒤에 점점 맛에 대한 탐이 늘었다. 게으름으로 쌓아 두기가 생기고 도둑이 일어나, 그것을 막으려고 품삯을 주어 밭을 지키게 했다. (『구사론』 권12 분별세품, T29, 65b)
경에 따르면 겁초의 사람들은 형색이 있고 뜻으로 이루어졌으며(有色意成), 팔다리가 원만하고 감관에 모자람이 없으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몸에서 빛이 나며, 허공을 자유로이 날고, 기쁨을 먹으며 오래 산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 땅의 맛(地味)이 점점 생겨났다. 맛이 달고 향기가 짙었다.
時有一人稟性耽味,嗅香起愛取甞便食,餘人隨學競取食之。爾時方名初受段食。資段食故身漸堅重,光明隱沒黑闇便生,日月眾星從茲出現。
그때 맛을 즐기는 성품을 타고난 한 사람이 향기를 맡고 애착을 일으켜 집어 맛보고 먹었다. 다른 사람들이 따라 배워 다투어 집어 먹었다. 그때 비로소 처음 단식을 받았다고 한다. 단식으로 몸을 기르자 몸이 점점 단단하고 무거워지고, 빛이 숨어 어둠이 생겼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이때부터 나타났다.
해와 달이 「나타났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몸의 빛이 사라지자 바깥의 빛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맛을 탐하자 땅의 맛이 숨고 땅의 떡(地皮餅)이 생겼고, 그것도 다투어 먹자 숨고 숲의 덩굴(林藤)이 생겼으며, 그것도 숨자 갈지 않아도 저절로 나는 향기로운 벼(香稻)가 생겼다. 이 먹이는 거칠어 찌꺼기가 몸에 남았고, 그것을 내보내려고 두 길이 생겼으며, 그로 인해 남녀의 근이 생겼다. 근이 다르니 모습도 달라지고, 지난 습관의 힘으로 서로 바라보다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일으켜, 욕탐의 귀신에 홀린 듯 음행을 했다. 사람 가운데 욕의 귀신이 처음 이때 일어났다.
왕의 기원과 악의 시작
그때 사람들은 먹을 때마다 향기로운 벼를 거두고 쌓아 두지 않았다. 뒤에 게으른 성품의 한 사람이 벼를 넉넉히 거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먹으려 했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 배워 점점 쌓아 두었다. 그러자 벼에 「내 것」이라는 마음이 생기고, 탐을 부려 많이 거두니 거둔 곳에서 다시 나지 않았다. 다 없어질까 염려해 밭을 나누었다. 자기 밭은 아끼고 남의 밭은 빼앗을 마음을 품으니, 도둑질의 허물이 이때 처음 일어났다.
為欲遮防共聚詳議,銓量眾內一有德人,各以所收六分之一,雇令防護封為田主,因斯故立剎帝利名。大眾欽承恩流率土,故復名大三末多王,自後諸王此王為首。
이를 막으려고 함께 모여 의논해, 무리 가운데 덕 있는 한 사람을 골라 각자 거둔 것의 6분의 1을 주고 품을 사서 지키게 하고 밭의 주인으로 봉했다. 이로 인해 찰제리(크샤트리야)라는 이름이 섰다. 대중이 공경하여 받들고 은혜가 온 땅에 흘렀으므로 다시 「대삼말다왕(大三末多王, 대중이 함께 세운 왕)」이라 하니, 뒤의 모든 왕은 이 왕을 시작으로 한다.
왕은 신이 내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합의해 품삯을 주고 고용한 「밭의 관리인」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어 집에 사는 것을 싫어해 한적한 곳에서 계행을 닦은 이들이 바라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뒤에 어떤 왕이 재물을 아껴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 주지 못하자 가난한 이들이 도둑질을 많이 했고, 왕이 막으려고 가볍고 무거운 벌을 주니 죽이는 업이 이때 시작되었다. 그때 죄지은 이가 벌이 두려워 허물을 감추고 다른 생각으로 말을 하니 거짓말이 이때 처음 생겼다.
소삼재 — 칼 · 질병 · 굶주림
業道增壽減,至十三災現,刀疾飢如次,七日月年止。
악업도가 늘어 수명이 줄어 10세에 이르면 세 가지 재앙이 나타나니, 칼 · 질병 · 굶주림이 차례로 이레 · 일곱 달 · 일곱 해 만에 그친다. (『구사론』 권12 분별세품, T29, 65c)
거짓말이 생긴 뒤 여러 악업도가 점점 늘어 이 대륙 사람의 수명이 줄어 10세에 이르면 작은 세 재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모든 재앙에는 두 가지 근본이 있다.
故諸災患二法為本:一耽美食、二性嬾惰。
그러므로 모든 재앙은 두 법을 근본으로 한다. 하나는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 둘은 게으른 성품이다.
겁초 이야기의 두 전환점 — 땅의 맛을 탐한 것과 게을러 쌓아 둔 것 — 이 그대로 재앙의 근본이 된다. 소삼재는 중겁의 끝, 수명이 10세일 때 일어난다.
도병재(刀兵災): 10세 때의 사람들은 그릇된 법의 탐에 물들고 고르지 못한 애착에 마음이 가려 사나운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 지금의 사냥꾼이 들짐승을 보듯, 손에 잡히는 것이 다 날카로운 칼이 되어 서로 죽인다.
질역재(疾疫災): 같은 허물 때문에 비인이 독을 뿜어 역병이 돌고, 걸리면 곧 목숨을 마치니 고치기 어렵다.
기근재(飢饉災): 같은 허물 때문에 하늘과 용이 노하여 단비를 내리지 않아 오래 굶주린다. 그래서 기근을 「모임 · 흰 뼈 · 산가지가 있는 때」라 한다. 사람들이 굶주려 한데 모여 죽고, 뒷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덜어 작은 상자에 씨앗으로 모아 둔다(모임). 몸이 말라 죽자마자 흰 뼈가 드러나고, 흰 뼈를 모아 끓여 그 물을 마신다(흰 뼈). 양식이 적어 산가지를 돌려 차례가 온 날에만 조금 먹고, 산가지로 옛 타작마당을 뒤져 낟알 몇 개를 얻어 물에 끓여 나누어 마신다(산가지).
이를 막는 길도 가르침에 있다. 하루 낮 하룻밤 불살생계를 지키면 다음 생에 도병재를 만나지 않는다. 가리륵 열매 하나를 맑은 마음으로 승가에 보시하면 질역재를 만나지 않는다. 한 덩이의 밥을 맑은 마음으로 승가에 보시하면 기근재를 만나지 않는다. 세 재앙의 기간은 정해져 있다.
刀兵災起極唯七日,疾疫災起七月七日,飢饉七年七月七日,度此便止。
도병재는 길어야 이레, 질역재는 일곱 달 이레, 기근재는 일곱 해 일곱 달 이레이니, 이것을 지나면 그친다.
그 뒤 사람의 수명이 점점 늘어난다. 동 · 서 두 대륙에는 재앙과 비슷한 것 — 성냄이 늘고 몸의 힘이 약해지며 자주 굶주리고 목마른 것 — 이 있고, 북구로주에는 전혀 없다.
대삼재 — 불 · 물 · 바람이 미치는 곳
三災火水風,上三定為頂,如次內災等,四無不動故, 然彼器非常,情俱生滅故,要七火一水,七水火後風。
세 재앙은 불 · 물 · 바람이니, 위의 세 정려가 그 꼭대기다. 차례로 안의 재앙과 같기 때문이며, 제4정려에는 없으니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그릇도 항상하지는 않으니, 유정과 함께 생멸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일곱 번의 불 뒤에 한 번의 물이 오고, 일곱 번의 물 뒤에 불이 있고 그 뒤에 바람이 온다. (『구사론』 권12 분별세품, T29, 66a~b)
대삼재는 유정을 아래 지위에서 몰아내 위의 하늘에 모으고, 그릇 세간을 극미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뜨린다. 불의 재앙은 일곱 해가 나타나서, 물의 재앙은 장맛비가 쏟아져서, 바람의 재앙은 바람이 서로 부딪쳐서 일어난다.
여기서 논은 「극미 하나 남지 않는다」는 말을 두고 바이셰시카(勝論)와 논쟁한다. 어떤 외도는 극미가 상주하므로 그때도 극미가 남는다고 한다. 뒤에 거친 사물이 생길 때 씨앗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천친은 앞에서 말했듯 유정의 업이 낳은 바람이 씨앗이 된다고 답하고, 바이셰시카의 「전체(有分)」 개념 — 실이 모여 옷이라는 별개의 실체가 생긴다는 설 — 을 길게 반박한다. 실 하나에는 옷이 없고, 실들이 모여 배열된 것을 옷이라 할 뿐, 실과 다른 「전체로서의 옷」은 없다. 극미 하나하나는 감관의 대상을 넘어 있어도 모이면 지각된다. 눈병 난 사람이 흩어진 머리카락을 볼 때 여럿이 붙어 있으면 보이고 하나씩 떨어져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논은 「누가 어리석은 무리의 미친 말을 받아 적겠는가」라며 논쟁을 끊는다.
세 재앙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제2정려가 화재의 꼭대기다. 그 아래가 불에 탄다. 제3정려가 수재의 꼭대기다. 그 아래가 물에 잠겨 문드러진다. 제4정려가 풍재의 꼭대기다. 그 아래가 바람에 흩어진다. 왜 아래 세 정려가 각각 불 · 물 · 바람의 재앙을 만나는가. 그 정려 안에 그와 같은 「안의 재앙」이 있기 때문이다.
謂初靜慮尋伺為內災,能燒惱心等,外火災故。第二靜慮喜受為內災,與輕安俱潤,身如水故,遍身麁重由此皆除故,經說苦根第二靜慮滅。第三靜慮動息為內災,息亦是風等,外風災故。
초정려는 심 · 사가 안의 재앙이니, 마음 등을 태우고 괴롭히는 것이 바깥의 화재와 같기 때문이다. 제2정려는 기쁨의 느낌이 안의 재앙이니, 경안과 함께 몸을 물처럼 적시기 때문이다. 온몸의 거칠고 무거움이 이로써 다 없어지므로, 경은 괴로움의 근이 제2정려에서 멸한다고 한다. 제3정려는 움직이는 숨이 안의 재앙이니, 숨도 바람이라 바깥의 풍재와 같기 때문이다.
선정 안의 심리적 동요와 세계를 무너뜨리는 물리적 재앙이 하나의 구조로 겹친다. 이 정려에 들면 이런 안의 재앙이 있고, 이 정려에 태어나면 이런 바깥의 재앙을 만나 무너진다. 왜 땅은 재앙이 되지 않는가. 그릇 세간이 바로 땅이기 때문이다. 불 등은 땅과 어긋날 수 있지만, 땅이 땅과 어긋난다고 할 수는 없다. 앞에서 본 단말마에 지대(地大)가 관여하지 않는 것과 짝을 이룬다.
제4정려에는 왜 바깥의 재앙이 없는가. 안의 재앙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는 제4정려를 「움직이지 않음(不動)」이라 했다. 어떤 이는 거기에 정거천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거천의 성자는 무색계에 태어날 수 없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4정려의 그릇은 항상한가. 그렇지 않다.
謂彼天處無總地形,但如眾星居處各別。有情於彼生時死時,所住天宮隨起隨滅,是故彼器體亦非常。
그 하늘에는 전체로서의 땅이 없고, 별들처럼 사는 곳이 각각 따로 있다. 유정이 거기에 태어나고 죽을 때 사는 하늘 궁전이 따라 일어나고 따라 멸하니, 그 그릇의 체도 항상하지 않다.
일곱 불과 한 물 — 64겁의 주기
세 재앙의 차례는 이렇다. 먼저 일곱 번의 화재가 이어 일어나고, 그다음에 반드시 한 번의 수재가 온다. 그 뒤 다시 일곱 번의 화재, 다시 한 번의 수재 — 이렇게 수재가 일곱 번 찰 때까지 간다. 그다음 다시 일곱 번의 화재가 있고 그 뒤에 풍재가 일어난다.
如是總有八七火災、一七水災,一風災起。
이렇게 모두 여덟 번의 일곱 화재, 한 번의 일곱 수재가 있고, 한 번의 풍재가 일어난다.
화재 56번, 수재 7번, 풍재 1번, 합해 64번의 괴겁이 한 주기다. 왜 이런 순서인가. 유정이 닦은 선정의 원인이 위로 갈수록 뛰어나 몸과 수명이 길어지고, 그래서 사는 곳도 점점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화재는 제2정려 아래를 태우므로 극광정천은 살아남지만, 수재가 오면 제2정려까지 잠긴다. 수재가 일곱 번 올 동안 제3정려는 살아남지만, 풍재가 오면 제3정려까지 흩어진다. 그래서 제3정려의 꼭대기인 변정천은 64대겁 동안 무너지지 않는다.
由此善釋《施設足》文遍淨天壽六十四劫。
이로써 『시설족론』이 「변정천의 수명은 64겁」이라 한 글이 잘 풀린다.
하늘의 몸 크기와 수명에서 변정천은 몸이 64유순, 수명이 64겁이었다. 그 수명이 정확히 풍재 한 주기와 같다는 것을 보이며, 분별세품 다섯 권은 끝난다. 생명의 수명과 그릇의 수명이 같은 수로 맞물린다는 이 마지막 문장은, 세계가 유정과 함께 생멸한다는 품 전체의 원리를 하나의 숫자로 봉인한다.
땅은 재앙이 아니다 — 그릇 세간이 곧 땅
화×7 → 수×1 → … (일곱 번 반복) → 화×7 → 풍×1 「八七火災、一七水災,一風災起」 = 64괴겁

겁론은 세 겹의 비례로 짜여 있다. 수명의 늘고 줆이 부처 · 전륜왕 · 재앙의 때를 정하고, 선정의 지위가 대삼재의 범위를 정하며, 그 범위가 다시 하늘의 수명과 맞물린다. 시간은 오온과 따로 있지 않고, 세계의 성괴는 유정의 업과 선정과 함께 간다.
이 편을 맺으며
분별세품은 「세계」를 두 겹으로 그렸다. 하나는 생명의 겹이다. 삼계의 처소와 다섯 갈래, 식이 머무는 일곱 자리, 네 가지 태어남이 생명의 자리를 나누고, 죽음과 태어남 사이의 중유가 그 자리들을 잇는다. 생명은 전도된 마음으로 모태에 들어 다섯 단계로 자라고, 네 가지 먹이로 머물다가, 평정의 느낌 속에서 발이나 배꼽이나 가슴에서 마지막 의식을 놓는다. 다른 하나는 그릇의 겹이다. 바람 · 물 · 금의 세 바퀴 위에 수미산과 아홉 산 · 여덟 바다가 서고, 네 대륙과 그 아래의 지옥, 해와 달과 하늘들이 정해진 비례로 놓인다. 그리고 그 그릇 전체가 성 · 주 · 괴 · 공의 80중겁을 돌며, 수명이 늘고 주는 기울기에 따라 부처와 전륜왕과 재앙이 오간다.
두 겹을 잇는 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다. 그릇은 유정들의 업의 증상력으로 생기고, 유정과 함께 생멸한다. 제4정려의 궁전조차 그곳에 태어나는 유정을 따라 일어나고 멸한다. 그래서 천친은 중유와 입태를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바로 그 자리에 「나는 없고 오직 온들뿐, 번뇌와 업이 지은 것」이라는 게송을 놓았다. 세계의 정밀한 치수는 실체로서의 「나」나 창조주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만으로 생명과 세계가 얼마나 남김없이 설명되는지를 보이려는 것이다. 겁초의 범중천 하늘들이 대범천을 창조주로 여긴 것은 순서의 착각이었고, 왕은 사람들이 품삯을 주고 고용한 밭의 관리인이었다.
동시에 이 품은 『구사론』이 어떤 책인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품이기도 하다. 천친은 색계의 처소를 카슈미르의 셈과 서방의 셈으로 함께 적고, 무색계의 마음이 의지하는 곳에서는 경량부의 간결한 답을 마지막에 두었다. 중유를 부정하는 부파 앞에서는 경을 거부하는 시대를 탄식했고, 연기에서는 유부의 분위연기를 「전하기를」이라는 말로 옮긴 뒤 경량부의 비판과 궤범사의 해석을 이어 실었으며, 촉과 수의 선후에서는 「본론은 기준이 아니다」라는 경량부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면서도 결론은 경에 맞추어 동시설로 냈다. 『순정리론』의 중현이 「경주는 믿지 않았다」고 쓴 것은 이 품의 서술 방식을 정확히 읽은 것이다. 분별세품은 유부의 세계상을 충실히 전하면서, 그 세계상의 해석 권한을 경으로 되돌리려는 긴장 속에 쓰였다.
다음 편 「업의 체계 — 분별업품」은 이 품이 거듭 「업의 증상력」이라고만 말하고 넘어간 그 업을 정면으로 다룬다. 세간의 차별이 업에서 생긴다면 업은 무엇이며, 몸과 말의 업은 어떻게 남고, 어떤 업이 어떤 과보를 언제 맺는가. 그릇 세간의 치수에서 업의 체계로, 『구사론』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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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천친 『아비달마구사론』 권8~12 분별세품, 현장 역, T29 no.1558
- 천친 『아비달마구사석론』, 진제 역, T29 no.1559
- 『아비달마구사론본송』, 현장 역, T29 no.1560
- 중현 『아비달마순정리론』 권21~32 변연기품, 현장 역, T29 no.1562
-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23 · 권69 · 권70 · 권98, 현장 역, T27 no.1545
- 보광 『구사론기』 권8~12, T41 no.1821
- 법보 『구사론소』 권12, T41 no.1822
- 세우 『이부종륜론』, 현장 역, T49 no.2031
연구
- P. Pradhan (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Patna: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67
- Louis de La Vallée Poussin (tr.), L'Abhidharmakośa de Vasubandhu, 6 vols., Paris: Paul Geuthner, 1923–1931
- Leo M. Pruden (tr.), Abhidharmakośabhāṣyam, 4 vols.,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88–1990
- 山口益 · 舟橋一哉, 『俱舎論の原典解明 世間品』, 法藏館, 1955
- 加藤純章, 『経量部の研究』, 春秋社, 1989
- 櫻部建 · 上山春平, 『存在の分析〈アビダルマ〉』(仏教の思想 2), 角川書店, 1969
- 권오민 역, 『아비달마구사론』 1~4, 동국역경원, 2002
-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