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론』은 아홉 품 가운데 앞의 다섯 품에서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마음과 인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명이 어디를 떠도는지, 무엇이 그 떠돎을 일으키는지를 차례로 밝혔다. 업이 윤회를 일으키고 번뇌가 업을 일으킨다는 데까지 오면, 남는 물음은 하나다. 번뇌는 무엇으로 끊어지는가. 분별현성품은 그 물음에 「견도와 수도로 끊는다」는 한 줄로 들어선다. 이어지는 분별지품은 그 길의 본체인 지혜를 열 가지로 나누어 따지고, 분별정품은 지혜와 공덕이 기대는 선정을 분석한다. 세 품은 『구사론』 서른 권 가운데 여덟 권을 차지하며, 앞의 품들이 그린 「물든 세계」의 지도를 「맑아지는 길」의 지도로 뒤집는다. 이 편은 그 길을 원문의 순서대로 걷는다.
『구사론』의 앞 다섯 품을 유루(有漏)의 분석이라 한다면, 뒤의 세 품은 무루(無漏)의 분석이다. 다만 아비달마의 「길」은 수행의 권유가 아니다. 현성품의 문장은 수행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기보다, 이미 그 길을 걸은 성자들의 마음이 어떤 찰나들로 이어졌는지를 해부한다. 어느 단계에서 어떤 지혜가 몇 가지 행상으로 어느 진리를 보는가, 그 지혜는 어느 선정에 기대는가, 그 단계에서는 물러남이 있는가 없는가, 그 단계에 있는 성자는 몇 번 더 태어나는가. 질문은 끝없이 세분되고, 『구사론』은 거기에 숫자로 답한다. 불환자는 2,592가지, 다섯 종류를 다 합치면 12,960가지, 수신행(隨信行) 하나만 해도 근기 · 종성 · 찰나 · 끊은 번뇌 · 의지하는 몸을 곱하면 147,825가지로 나뉜다는 계산까지 나온다. 이 집요함이 아비달마가 수행도를 「법의 분류」로 다루는 방식이다.
그 분석의 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제(四諦)를 현관(現觀)하는 차례, 곧 어느 진리를 어느 행상으로 먼저 보느냐는 순서다. 다른 하나는 번뇌를 끊는 두 단계, 곧 견도(見道)에서 진리를 보는 순간 한꺼번에 끊는 번뇌와 수도(修道)에서 아홉 품으로 나누어 오래 끊어 가는 번뇌의 구별이다. 이 두 축이 엇갈리는 자리마다 성자의 이름이 하나씩 생긴다. 사향사과, 칠성자, 아라한의 여섯 종성이 모두 그렇게 세워진다. 번뇌와 삼세실유 편에서 본 98수면 가운데 88이 견도에서, 10이 수도에서 끊어진다는 구분이 여기서 실제의 길이 된다.
이 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논쟁이다. 견도는 한 찰나에 진리를 다 보는가, 열다섯 찰나에 걸쳐 차례로 보는가. 아라한은 아라한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는가. 즐거운 느낌은 실제로 있는가, 모든 느낌은 괴로움인가. 초선과 제2선의 「즐거움」은 느낌인가, 몸과 마음의 가벼움인가. 무색계에는 정말 색(色)이 없는가. 이 물음들에서 천친(天親, 세친 世親 Vasubandhu)은 카슈미르 비바사사의 정설을 소개하면서도 여러 번 경량부의 편에 서서 「그 말이 이치에 맞다」고 적는다. 『구사론』의 수행도론은 정설의 요약이면서, 동시에 그 정설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하다.
이 편의 장
- 제1장 수행의 그릇과 들어가는 두 문 — 견도 · 수도의 구도, 신기청정과 사성종, 부정관 · 지식념 · 사념처
- 제2장 순결택분의 네 선근 — 난 · 정 · 인 · 세제일법, 그리고 순해탈분
- 제3장 열여섯 찰나의 현관 — 십육행상, 견도 십육심, 인과 지, 점관과 돈관
- 제4장 아홉 품을 끊어 가는 길 — 수도와 사향사과, 가가 · 일간, 불환의 갈래
- 제5장 아라한의 종성과 칠성자 — 퇴법 논쟁, 혜해탈 · 구해탈, 삼십칠보리분법
- 제6장 열 가지 지혜와 부처의 공덕 — 십지의 구조, 십팔불공법, 공통되는 공덕
- 제7장 정려와 무색정 — 정의 본체, 18지분, 등지의 세 종류와 근분 · 중간정
- 제8장 정에서 일어나는 공덕 — 사무량 · 팔해탈 · 팔승처 · 십변처, 그리고 정법이 머무는 때
- 순해탈분(順解脫分)해탈의 씨앗을 심음
- 신기청정(身器清淨)몸과 마음의 멀리 떠남 · 희족 · 소욕 · 사성종
- 들어가는 두 문부정관(不淨觀)지식념(持息念)
- 사념처별상념처(넷을 하나씩)총상념처(넷을 함께)
- 순결택분(順決擇分)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여기까지 범부(異生)
- 견도(見道)고법지인에서 도류지인까지 열다섯 찰나예류향 · 일래향 · 불환향
- 수도(修道)제16 도류지부터 · 아홉 품씩 수혹을 끊음예류과 → 일래 → 불환 → 아라한향
- 금강유정(金剛喻定)
- 진지(盡智)무학도(無學道) · 아라한과
본송
已說煩惱斷,由見諦修故, 見道唯無漏,修道通二種。
번뇌가 끊어짐은 이미 말했으니, 진리를 보는 것(견도)과 닦는 것(수도)으로 말미암는다. 견도는 오직 무루이고, 수도는 두 가지(유루 · 무루)에 통한다.
具身心遠離,無不足大欲, 謂已得未得,多求名所無。
몸과 마음의 멀리 떠남을 갖추고, 만족하지 못함과 큰 욕심이 없어야 한다. 이미 얻은 것을 더 구하는 것(만족하지 못함)과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많이 구하는 것(큰 욕심), 이 둘이 없는 것을 말한다.
入修要二門,不淨觀息念, 貪尋增上者,如次第應修。
닦음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은 둘이니, 부정관과 지식념이다. 탐욕이 치성한 이와 생각이 많은 이가 차례대로 닦아야 한다.
술어 풀이
- 見道 · 修道견도 · 수도
- 견도(darśanamārga)는 사제를 처음으로 무루의 지혜로 보는 단계, 수도(bhāvanāmārga)는 본 진리를 거듭 닦아 남은 번뇌를 끊는 단계다. 견도에서 끊는 번뇌를 견소단(見所斷), 수도에서 끊는 번뇌를 수소단(修所斷)이라 한다. 견도는 오직 무루이고, 수도는 유루의 세속도와 무루의 출세도를 함께 쓴다.
- 現觀현관
- 범어 abhisamaya. 『구사론』은 「현등각(現等覺)」의 뜻이라 풀이한다. 열반을 향해 진리를 바로 마주하여 깨닫는 것이므로 오직 무루다. 사제를 보는 순서는 이 현관의 순서를 따른다.
- 身器清淨신기청정
- 수행의 그릇이 되는 몸을 맑게 하는 일. 『구사론』은 그 원인을 셋으로 든다 — 몸과 마음의 멀리 떠남, 희족(喜足)과 소욕(少欲), 그리고 사성종(四聖種)에 머무는 것.
- 四聖種사성종
- 범어 ārya-vaṃśa. 성자를 낳는 네 가지 씨앗. 입을 것 · 먹을 것 · 누울 것에 대해 얻는 대로 만족하는 셋과, 끊음과 닦음을 즐기는 하나. 체는 모두 무탐(無貪)이다.
- 不淨觀부정관
- 범어 aśubhā. 몸이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여 탐욕을 누르는 관법. 『구사론』은 백골을 관하는 골쇄관(骨鎖觀)을 대표로 들고, 그 수습을 초습업 · 이숙수 · 초작의의 세 단계로 나눈다.
- 持息念지식념
- 범어 ānāpānasmṛti. 경전의 「아나아파나념」. 들숨과 날숨을 대상으로 하는 관법이며, 체는 혜(慧)다. 수(數) · 수(隨) · 지(止) · 관(觀) · 전(轉) · 정(淨)의 여섯으로 완성된다. 흔히 「수식관」이라고도 부른다.
- 勝解作意 · 真實作意승해작의 · 진실작의
- 승해작의(adhimukti-manaskāra)는 대상을 실제와 다르게 「그렇다고 믿고 그려 내는」 작의, 진실작의(tattva-manaskāra)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작의다. 부정관은 앞의 것이라 번뇌를 끊지 못하고 누르기만 하며, 지식념은 뒤의 것이다.
- 自相 · 共相자상 · 공상
- 자상(svalakṣaṇa)은 각 법만의 특성(몸은 대종과 소조색), 공상(sāmānyalakṣaṇa)은 여러 법에 공통된 특성(유위는 무상, 유루는 고, 일체법은 공 · 비아)이다. 사념처는 이 둘로 몸 · 느낌 · 마음 · 법을 관한다.
- 雜緣 · 不雜緣잡연 · 불잡연
- 네 대상 가운데 하나만 따로 관하는 것이 불잡연, 둘 이상을 아울러 관하는 것이 잡연이다. 잡연은 법념처에만 있다. 잡연의 법념처에서 넷을 함께 비상 · 고 · 공 · 비아로 관하는 단계가 뒤에 「총상념처」라 불린다.
견도는 왜 무루뿐인가 — 두 길의 구도
현성품의 첫 문장은 앞 품을 받는다. 수면품은 번뇌를 아홉 가지 「뛰어난 자리」에서 끊었을 때 변지(遍知)라는 이름을 얻는다고 했다. 그런데 끊어짐은 반드시 「길(道)의 힘」으로 얻어진다. 그 길은 어떤 모습인가. 본송의 답은 견도와 수도 두 길이며, 장행은 곧바로 「견도는 오직 무루이고 수도는 둘에 통한다」는 구별의 이유를 묻는다.
見道速能治三界故。頓斷九品見所斷故,非世間道有此堪能,故見位中道唯無漏。
견도는 삼계를 빠르게 다스리기 때문이다. 아홉 품의 견소단을 한꺼번에 끊기 때문이며, 세간의 길에는 이런 힘이 없으므로 견도의 자리에서 길은 오직 무루다.
세속의 선정(유루도)은 한 번에 한 지(地)만 다스린다. 아래 지를 「거칠다 · 괴롭다 · 막혀 있다」고 싫어하고 위 지를 「고요하다 · 묘하다 · 벗어났다」고 기뻐하는 방식으로, 아래에서 위로 한 층씩 올라간다. 그래서 세속도는 욕계부터 무소유처까지의 번뇌는 끊을 수 있어도 그 위의 유정천(有頂天, 비상비비상처)의 번뇌는 끊지 못한다. 그 위에 더 높은 세속의 선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견도는 사제의 이치를 직접 보는 지혜이므로, 삼계의 견소단 번뇌를 그 이치를 보는 순간 삼계에 걸쳐 한꺼번에 끊는다. 「아홉 품을 한꺼번에 끊는다」는 말은, 수도처럼 상상품에서 하하품까지 차례로 끊는 것이 아니라 아홉 품의 견혹을 한 번의 통찰로 끊는다는 뜻이다. 수면품에서 본 98수면 가운데 88이 견소단, 10이 수소단이라는 구분이 바로 이 두 길의 경계선이다.
이 구도는 뒤에서 세 가지 결과를 낳는다. 첫째, 범부도 세속의 선정으로 욕계의 수혹을 미리 끊을 수 있으므로, 견도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미 끊어 둔 번뇌의 양에 따라 다른 이름을 얻는다. 둘째, 유정천의 번뇌는 무루도로만 끊기므로 아라한과는 세속도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셋째, 수도에서 세속도와 무루도가 함께 쓰이므로, 하나의 번뇌가 끊어진 상태(擇滅)에 유루 · 무루 두 가지 「얻음(得)」이 함께 생기는 복잡한 문제가 따라 나온다. 이 셋이 현성품 전체의 뼈대가 된다.
현관의 순서와 「고」의 범위
이어 『구사론』은 견도가 보는 진리를 다시 묻는다. 네 진리의 이름과 체는 이미 계품에서 유루 · 무루의 분류로 말했다(무루는 도제, 택멸은 멸제, 유루는 고제 · 집제). 그런데 그 순서가 왜 고 · 집 · 멸 · 도인가. 원인이 먼저이고 결과가 뒤라면 집이 고보다 앞서야 하지 않는가. 『구사론』의 답은 순서가 인과가 아니라 「현관의 차례」를 따른다는 것이다.
隨瑜伽師現觀位中先後次第。何緣現觀次第必然?加行位中如是觀故。
유가사가 현관하는 자리에서의 앞뒤 차례를 따른 것이다. 왜 현관의 차례가 반드시 그러한가. 가행의 자리에서 그렇게 관하기 때문이다.
애착의 대상이면서 핍박하는 것을 먼저 살피고, 그 원인을, 그 사라짐을, 그 사라짐에 이르는 길을 차례로 찾는다. 경전은 이를 『양의경(良醫經)』의 비유로 말한다 — 병의 모습을 알고, 병의 원인을 알고, 병이 나음을 알고, 좋은 약을 안다. 『구사론』은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 가행에서 이 순서로 익혔기 때문에 현관의 순간에도 같은 순서로 지혜가 일어나며, 그것은 「이미 살펴본 땅에서 말을 마음껏 달리게 하는 것(如已觀地縱馬奔馳)」과 같다는 것이다. 현관은 즉흥이 아니라 가행이 미리 닦아 놓은 길 위의 질주다. 이 비유가 뒤의 사선근에서 견도로 넘어가는 구조 전체를 예고한다.
이어 장행은 「고」가 어디까지인가를 따진다. 느낌 가운데 괴로운 느낌만이 괴로움이라면, 어떻게 모든 유루행을 고제라 할 수 있는가. 답은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다. 마음에 드는 유루법은 무너질 때 괴로우므로 괴고(壞苦), 마음에 들지 않는 유루법은 그 자체가 괴로우므로 고고(苦苦), 그 나머지는 지어진 것이므로 행고(行苦)와 합해진다. 그리고 행고는 오직 성자만이 본다. 이 대목에서 『구사론』이 인용하는 게송은 아비달마 수행론의 감각을 잘 보여 준다.
如以一睫毛,置掌人不覺, 若置眼睛上,為損及不安。 愚夫如手掌,不覺行苦睫, 智者如眼睛,緣極生厭怖。
속눈썹 한 올을 손바닥에 올려 두면 사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눈동자 위에 올려 두면 아프고 불안하다. 어리석은 이는 손바닥 같아서 행고라는 속눈썹을 느끼지 못하고, 지혜로운 이는 눈동자 같아서 그것을 대상으로 지극히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범부가 무간지옥에서 받는 극심한 고통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보다, 성자가 삼계의 맨 꼭대기인 유정천의 오온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이 더 크다고 『구사론』은 말한다. 고제는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지어진 것은 성자의 마음을 거스른다(違逆聖心)」는 통찰의 문제다. 그러면 도제도 유위이니 행고에 들어가는가. 아니다. 성도는 일어나도 성자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을 다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의 「유위」라는 말은 여기서 유루만을 가리킨다고 풀이된다.
즐거운 느낌은 실재하는가 — 대법 논사와 「다른 부파」
여기서 현성품의 첫 대론이 벌어진다. 「다른 부파의 논사(有餘部師)」는 실제의 즐거움은 결코 없고 느낌은 오직 괴로움뿐이라고 주장한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이들을 경량부 · 대중부 등으로 본다. 그들의 근거는 교(敎)와 이(理) 두 가지다. 교증은 세 경문이다 — 「있는 모든 느낌은 괴로움 아닌 것이 없다」, 「즐거운 느낌을 괴로움으로 관하라」, 「괴로움을 즐거움이라 하는 것이 전도다」. 이증은 즐거움의 원인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옷 · 음식 · 따뜻함과 시원함은 때를 놓치거나 지나치면 곧 괴로움을 낳는다. 그러니 본래 괴로움의 원인인데, 괴로움이 커질 때에야 그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무거운 짐을 이 어깨에서 저 어깨로 옮길 때 잠시 즐겁다고 느끼는 것처럼, 즐거움이란 큰 괴로움이 잠깐 바뀌는 순간의 착각이라는 것이다.
『구사론』은 「대법의 여러 논사는 즐거움이 실재한다고 말하니, 이 말이 이치에 맞다(對法諸師言樂實有,此言應理)」고 판정하고 반박을 차례로 편다. 먼저 반문한다. 괴로움을 「핍박」이라 정의한다면 그 반대인 「적열(適悅)」이 있으니 즐거움이 있다. 「손해」라 한다면 「이익」이 있으니 즐거움이 있다. 경문은 부처가 스스로 풀이했다 — 아난이 묻자 부처는 「모든 행이 무상하고 모든 유위가 변하여 무너지는 것에 의거하여 은밀한 뜻으로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다』라고 말했다」고 답했다. 만일 느낌이 자상(自相)으로 모두 괴로움이라면, 아난은 「부처는 왜 세 가지 느낌을 말했는가」라고 물었어야 했고 부처는 「은밀한 뜻으로 세 느낌을 말했다」고 답했어야 한다. 경에 그런 문답이 없으니 세 느낌은 자상으로 실재한다.
이증에 대한 반박은 더 기술적이다. 즐거움의 원인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은 원인의 뜻을 잘못 안 것이다. 바깥 대상만이 원인이 아니라, 그것이 닿는 몸의 상태(所依分位)와 함께 원인이 된다. 불이 익힐 것의 상태에 따라 맛있게 익히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지만, 「이 불이 이 상태의 이것에 닿을 때」는 언제나 맛있게 익히는 원인이듯, 즐거움의 원인도 결정되어 있다. 더구나 제3선의 즐거움은 괴로움을 낳는 때가 없으니 원인이 일정하지 않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논쟁은 단순한 심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유부에게 즐거운 느낌은 자상으로 실재하는 법이고, 성자는 그것을 「다른 문(異門)」으로 — 무상하고 변하여 무너지는 것으로 — 관하여 싫어한다. 수행이란 실재하는 즐거움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실재하는 즐거움을 다른 행상으로 보는 일이다. 이 감각이 뒤의 십육행상, 「고」의 행상을 「성자의 마음을 거스른다(違聖心)」로 정의하는 대목까지 이어진다.
수행의 그릇 — 계와 세 가지 지혜, 그리고 사성종
진리를 보는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구사론』의 답은 짧다. 먼저 청정한 계(尸羅)에 머물고, 그다음 문소성혜 · 사소성혜 · 수소성혜를 부지런히 닦는다.
將趣見諦道,應住戒勤修, 聞思修所成,謂名俱義境。
진리를 보는 길로 나아가려는 이는 계에 머물며 부지런히 닦아야 하니, 들음 · 생각함 · 닦음으로 이루어진 지혜다. 그 대상은 이름 · 둘 다 · 뜻이다.
비바사사는 세 지혜를 대상으로 가른다. 문소성혜는 이름(名)만을, 사소성혜는 이름과 뜻을 함께, 수소성혜는 뜻만을 대상으로 한다. 그 비유가 깊고 빠른 물을 건너는 사람이다 — 헤엄을 배운 적 없는 이는 붙잡을 것을 놓지 못하고, 배우다 만 이는 놓았다 잡았다 하며, 잘 배운 이는 의지할 것 없이 제 힘으로 건넌다. 그러나 천친은 이 정의에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소성혜가 이름과 뜻을 둘 다 대상으로 한다면, 이름을 대상으로 할 때는 문소성혜가 되고 뜻을 대상으로 할 때는 수소성혜가 되어, 사소성혜라는 독자의 자리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는 대상이 아니라 원인으로 정의한다 — 지극한 가르침을 들어서 생긴 지혜, 바른 이치를 생각해서 생긴 지혜, 등지(等持)를 닦아서 생긴 지혜. 「~에서 이루어진(所成)」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목숨은 음식으로 이루어진다」 「소는 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과 같은 용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닦으려는 사람이 「몸이라는 그릇」을 어떻게 맑게 하여 닦음을 빨리 이루는가. 본송이 세 원인을 든다.
몸의 멀리 떠남은 섞여 사는 것을 떠나는 것이고, 마음의 멀리 떠남은 착하지 않은 생각을 떠나는 것이다. 이 둘은 희족과 소욕이 있으면 쉽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만족하지 못함」과 「큰 욕심」은 어떻게 다른가. 대법의 논사들은 이미 얻은 좋은 옷 등을 더 구하는 것이 만족하지 못함,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많이 바라는 것이 큰 욕심이라 했다. 천친은 여기에 반문한다. 「더 구한다」는 것도 결국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하니 둘의 차이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다시 정의한다 — 이미 얻은 것이 좋지 않거나 많지 않다고 서운해하며 기뻐하지 않는 것이 만족하지 못함,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좋은 것으로 많이 구하는 것이 큰 욕심이다. 앞의 것은 과거를 향한 불만, 뒤의 것은 미래를 향한 갈망이다.
사성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넷 가운데 앞의 셋은 의복 · 음식 · 와구에 대해 얻는 대로 만족하는 것이니 체가 희족이다. 넷째 「끊음과 닦음을 즐기는 것(樂斷修)」은 어떻게 무탐을 체로 하는가. 유(有)와 욕탐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사성종을 세운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제자들은 세속의 살림살이(生具)와 세속의 일(事業)을 버리고 해탈을 구하러 출가했다. 그래서 법의 주인인 세존이 그들을 가엾이 여겨 도를 돕는 두 가지를 세웠다 — 살림살이(앞의 셋)와 일(넷째). 「너희가 앞의 살림살이에 기대어 뒤의 일을 할 수 있다면 해탈은 멀지 않다.」
같은 내용을 다른 문으로도 설명한다. 경전은 비구에게 애(愛)가 의복 · 음식 · 와구 · 유와 무유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했다. 사성종은 이 네 가지 애를 다스린다. 또 부처는 「나의 것(我所)」과 「나(我)」에 대한 욕심을 잠시 쉬게 하고 영원히 없애려고 사성종을 설했다. 앞의 셋은 나의 것인 의복 등에 대한 탐을 잠시 쉬게 하고, 넷째는 나 자신에 대한 탐까지 포함한 네 가지 탐을 영원히 없앤다. 수행은 이렇게, 살림살이에 대한 태도라는 가장 일상적인 자리에서 시작한다.
들어가는 두 문 — 부정관
그릇이 맑아지면 무엇으로 닦음에 들어가는가. 「요긴한 문은 둘이니, 부정관과 지식념」이다. 탐욕이 치성하여 자주 일어나는 이(탐행자)는 부정관으로, 생각이 많아 마음이 어지러운 이(심행자)는 지식념으로 들어간다. 왜 생각이 많은 이에게 부정관이 맞지 않는가. 어떤 논사는 지식념은 대상이 많지 않아 어지러운 생각을 멈추지만, 부정관은 색깔 · 모양 등 대상이 많아 오히려 생각을 늘린다고 한다. 다른 논사는 지식념은 안쪽으로 향하고 부정관은 눈의 앎처럼 바깥으로 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정관이 다스리는 탐은 넷이다. 색깔에 대한 탐(顯色貪)은 시신이 푸르게 멍드는 모습 등을 관하여 다스리고, 모양에 대한 탐(形色貪)은 시신이 짐승에게 먹히는 모습 등을, 감촉에 대한 탐(妙觸貪)은 벌레가 생기는 모습 등을, 몸가짐과 시중에 대한 탐(供奉貪)은 움직이지 않는 시신을 관하여 다스린다. 그런데 백골(骨鎖)을 관하면 네 가지 탐을 한꺼번에 다스린다. 뼈 사슬에는 네 탐의 대상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사론』은 백골관을 대표로 설명한다.
為通治四貪,且辯觀骨鎖, 廣至海復略,名初習業位, 除足至頭半,名為已熟修, 繫心在眉間,名超作意位。
네 가지 탐을 함께 다스리기 위해 우선 백골관을 설명한다. 넓혀 바다에 이르렀다가 다시 줄이는 것을 초습업위라 하고, 발에서부터 머리의 반까지 덜어 내는 것을 이숙수위라 하며, 마음을 미간에 매어 두는 것을 초작의위라 한다.
초습업위의 수행자는 먼저 마음을 자기 몸의 한 곳 — 발가락이나 이마나 좋아하는 곳 — 에 매어 둔다. 마음이 머물면 승해(勝解)의 힘으로 그곳의 살과 피부가 문드러져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는 모습을 그려, 마침내 온몸의 뼈 사슬을 본다. 한 구를 보면 둘째 구를, 이렇게 한 방 · 한 절 · 한 동산 · 한 마을 · 한 나라로 넓혀 바다를 끝으로 하는 온 땅에 백골이 가득 찬 모습에 이른다. 그다음 거꾸로 줄여 한 구의 백골만 남긴다. 이숙수위에서는 그 한 구에서도 발뼈부터 덜어 내 머리뼈의 반만 남기고, 초작의위에서는 그 반마저 덜어 내 미간에 마음을 매어 하나의 대상에 맑게 머문다. 넓히는 것은 승해를 키우기 위해서이고, 줄이는 것은 그 승해를 자유롭게 다루기 위해서다.
이 관법의 성격을 『구사론』은 여덟 물음으로 정리한다. 체는 무탐이고, 의지하는 지(地)는 열 곳(사정려와 그 근분 넷, 중간정, 욕계), 대상은 욕계의 눈에 보이는 색(색깔과 모양)이며, 사람의 몸에서만 — 그것도 북구로주를 뺀 세 주에서만 — 일어난다. 행상은 부정(不淨)이고, 대상의 시간은 자기의 시간과 같다. 승해작의에 속하므로 오직 유루이며, 이전에 얻은 적이 있으면 이염(離染)으로도 얻고 처음이면 가행(加行)으로 얻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此唯勝解作意攝故、少分緣故,不斷煩惱,唯能制伏令不現行。
이것은 오직 승해작의에 속하고 대상의 일부만 반연하므로 번뇌를 끊지 못하며, 다만 눌러서 나타나지 않게 할 뿐이다.
부정관은 몸이 「실제로」 깨끗하지 않다고 아는 지혜가 아니라, 그렇다고 그려 내는 상상의 힘이다. 산 사람의 몸을 백골로 보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그것은 탐을 누를 수는 있어도 뿌리째 끊지는 못한다. 끊는 것은 뒤에 올 사제의 지혜다. 아비달마가 부정관을 「들어가는 문」이라 부를 뿐 「길」이라 부르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구사론』은 또한 대상의 크기와 작의의 숙련이 따로 움직인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대상은 작은데 작의는 자재하지 못한 경우, 대상은 큰데 작의는 숙련된 경우 등 네 경우(四句)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들어가는 두 문 — 지식념의 여섯 단계
지식념은 부정관과 거의 모든 점에서 대조된다. 체가 무탐이 아니라 혜(慧)이고, 승해작의가 아니라 진실작의다.
息念慧五地,緣風依欲身, 二得實外無,有六謂數等。
지식념은 혜이며 다섯 지에 있고, 바람을 대상으로 하며 욕계의 몸에 의지한다. 두 가지로 얻으며, 진실작의이고, 외도에게는 없다. 여섯이 있으니 수(數) 등이다.
혜를 체로 하면서 「념(念)」이라 부르는 것은 염의 힘이 붙들어 주어야 대상에 분명히 머물러 할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지는 다섯 — 초선 · 제2선 · 제3선의 근분, 중간정, 욕계 — 뿐이다. 이 관법은 오직 사수(捨受)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은 생각(尋)을 이끄는데 지식념은 그 생각을 다스리고, 기쁨과 즐거움은 한 대상에 마음을 모으는 것을 거스르는데 지식념은 대상에 모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어떤 논사는 아래 세 정려의 근본정에도 사수가 있다고 하여 여덟 지를 인정한다. 제4선 위에서는 숨이 없으므로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바른 법이 있는 곳의 유정만 닦을 수 있다. 외도에게는 이를 설하는 이가 없고, 스스로는 이렇게 미세한 법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섯 단계는 다음과 같다.
- 초습업(넓혀 바다까지, 다시 한 구로)
- 이숙수(발에서 머리 반까지 덜어 냄)
- 초작의(미간에 마음을 맴)
- ① 수(數)하나에서 열까지 셈 · 세 허물(줄여 셈 · 늘려 셈 · 섞어 셈)을 떠남
- ② 수(隨)숨이 들고 나는 곳을 따라감
- ③ 지(止)코끝 · 미간 · 발가락 등에 마음을 머물게 함
- ④ 관(觀)숨과 함께하는 대종 · 소조색과 심 · 심소, 곧 오온을 관함
- ⑤ 전(轉)숨을 반연하던 앎을 옮겨 사선근에서 세제일법까지
- ⑥ 정(淨)견도 등으로 올라감
첫째 수(數)는 마음을 들숨 날숨에 매어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것이다. 열을 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세는 까닭은 마음이 지나치게 모이거나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세 허물이 있다 — 둘을 하나라 하는 「줄여 셈」, 하나를 둘이라 하는 「늘려 셈」, 들숨을 날숨이라 하는 「섞어 셈」. 이 셋을 떠나야 바른 셈이며, 중간에 마음이 흩어지면 다시 하나부터 센다. 둘째 수(隨)는 숨이 들어갈 때 목구멍 · 심장 · 배꼽 · 엉덩이 · 넓적다리 · 정강이를 거쳐 발가락까지 가는지, 나올 때 한 뼘이나 한 길까지 가는지를 생각이 따라가는 것이다. 어떤 논사는 날숨이 멀리 풍륜이나 비람바풍까지 간다고 하지만, 『구사론』은 이 관법이 진실작의이므로 그럴 수 없다고 물리친다. 셋째 지(止)는 생각을 코끝이나 미간이나 발가락 등 좋아하는 곳에 머물게 하여, 숨이 몸에 머무는 것이 구슬 속의 실과 같음을 보며 차가운지 따뜻한지, 해로운지 이로운지를 관하는 것이다. 넷째 관(觀)은 숨뿐 아니라 숨과 함께하는 대종 · 소조색, 거기에 의지하는 심 · 심소까지, 곧 오온 전체를 대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다섯째 전(轉)은 숨을 반연하던 앎을 옮겨 더 뛰어난 선근 — 난법에서 세제일법까지 — 에 두는 것이고, 여섯째 정(淨)은 견도 등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다른 논사는 염처를 처음으로 금강유정까지를 「전」, 진지 이후를 「정」이라 한다.
이 여섯 단계는 지식념이 단지 「호흡을 세는 기술」이 아니라 견도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완결된 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셈에서 시작해 오온의 관찰로, 다시 사선근으로 옮겨 가는 구조는, 부정관이 「누르는 문」에 그치는 것과 대조된다.
사념처 — 자상과 공상, 세 가지 체
두 문으로 마음이 정(定)을 얻으면 그다음은 무엇을 닦는가. 지(止, śamatha)가 이루어졌으면 관(觀, vipaśyanā)을 위해 사념처를 닦는다.
依已修成止,為觀修念住, 以自相共相,觀身受心法。 自性聞等慧,餘相雜所緣, 說次第隨生,治倒故唯四。
이미 닦아 이룬 지(止)에 의지하여, 관(觀)을 위해 염처를 닦는다. 자상과 공상으로 몸 · 느낌 · 마음 · 법을 관한다. 자성은 들음 등으로 이루어진 혜이고, 나머지는 상잡과 소연이다. 차례는 생기는 순서를 따라 설했고, 전도를 다스리므로 오직 넷이다.
사념처가 네 가지 전도 — 깨끗하다(淨) · 즐겁다(樂) · 항상하다(常) · 나다(我) — 를 차례로 다스린다는 것은 이미 무상 페이지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구사론』이 그 위에 쌓은 기술적 분석을 본다.
첫째, 관하는 방식이 둘이다. 자상으로 관한다는 것은 몸은 대종과 소조색, 느낌은 느낌, 마음은 마음, 법은 그 셋을 뺀 나머지라는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관하는 것이다. 공상으로 관한다는 것은 「모든 유위는 무상하고, 모든 유루는 괴롭고, 모든 법은 공하고 내가 아니다」라는 공통의 성질로 관하는 것이다. 신념처가 완성된 모습을 『구사론』은 「정에 들어 극미와 찰나 단위로 몸을 하나하나 관하는 것」이라고 전한다(傳說). 몸을 더 쪼갤 수 없는 물질의 단위와 더 쪼갤 수 없는 시간의 단위까지 분해해 보는 것이다.
둘째, 염처의 체는 셋으로 나뉜다.
- 자성염처(自性念住) — 혜(慧)가 체다. 들음 · 생각함 · 닦음으로 이루어진 세 가지 혜가 있으므로 이것도 세 가지다.
- 상잡염처(相雜念住) — 혜와 그와 함께하는 나머지 법들(俱有)이 체다.
- 소연염처(所緣念住) — 혜가 대상으로 하는 모든 법이 체다.
왜 자성이 혜인가. 경전은 「몸에 대해 몸을 따라 관하며 머무는 것(於身住循身觀)을 신념처라 한다」고 했고, 「따라 관함(循觀)」은 혜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혜를 「념의 머묾(念住)」이라 부르는가. 여기서 비바사사와 천친의 해석이 갈린다.
毘婆沙師說:此品念增故。是念力持慧得轉義,如斧破木由楔力持。理實應言慧令念住,是故於慧立念住名,隨慧所觀能明記故。
비바사사는 이 무리에서 념이 늘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념의 힘이 붙들어 주어 혜가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니, 도끼가 나무를 쪼갤 때 쐐기의 힘이 붙들어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 이치로는 혜가 념을 머물게 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혜에 념주라는 이름을 세운다. 혜가 관하는 대로 분명히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바사사에게 념은 혜를 떠받치는 쐐기다. 천친에게는 거꾸로 혜가 념을 대상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사람이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해석의 차이는 뒤의 삼십칠보리분법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
셋째, 순서는 생기는 차례를 따른다. 거친 대상을 먼저 관하므로 몸이 처음이다. 또는 욕탐이 주로 몸에서 일어나므로 몸을 먼저 관한다. 몸을 탐하는 것은 즐거운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느낌을 좋아하는 것은 마음이 조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마음이 조복되지 않은 것은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 → 느낌 → 마음 → 법의 순서가 된다.
넷째, 앞의 세 염처는 오직 하나의 대상만 따로 관하지만(不雜緣), 법념처는 법만 관하는 경우와 몸 · 느낌 · 마음 가운데 둘 · 셋 또는 넷을 아울러 관하는 경우(雜緣)가 모두 있다. 수행은 바로 이 잡연의 법념처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彼居法念住,總觀四所緣, 修非常及苦,空非我行相。
그는 법념처에 머물며 네 대상을 통틀어 관하여, 비상 · 고 · 공 · 비아의 행상을 닦는다.
넷을 하나하나 자상과 공상으로 관하는 단계를 주석가들은 별상념처(別相念住), 넷을 함께 네 행상으로 관하는 이 단계를 총상념처(總相念住)라 부른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이 두 단계를 앞의 오정심(五停心) 단계와 함께 견도 이전의 일곱 가행(七加行) 가운데 처음 셋으로 묶는다 — 오정심 · 별상념처 · 총상념처, 그리고 뒤의 난 · 정 · 인 · 세제일법이다. 『구사론』 본문에는 「오정심」이나 「일곱 가행」이라는 말이 없고 「들어가는 두 문」만 있지만, 후대의 수행도 정리는 이 틀을 따랐다.
- 별상념처넷을 하나씩(법념처만 잡연 가능)
- 총상념처잡연의 법념처에서 넷을 함께 비상 · 고 · 공 · 비아로
- 난법이 일어남
이렇게 총상의 법념처가 차츰 익어 상상품에 이르면, 그 뒤에 「결택에 따르는 부분」의 첫 선근이 생긴다. 그것이 난법이다.
본송
從此生煖法,具觀四聖諦, 修十六行相,次生頂亦然, 如是二善根,皆初法後四。 次忍唯法念,下中品同頂, 上唯觀欲苦,一行一剎那, 世第一亦然,皆慧五除得。
이로부터 난법이 생기니, 네 성제를 모두 관하여 열여섯 행상을 닦는다. 다음에 정법이 생기는 것도 그와 같다. 이 두 선근은 모두 처음에는 법념처, 뒤에는 넷이다. 다음 인법은 오직 법념처이고, 하품 · 중품은 정법과 같으며, 상품은 오직 욕계의 고만을 관하여 한 행상 · 한 찰나다. 세제일법도 그러하다. 모두 혜이고, (함께하는 것까지 치면) 오온이되 득은 뺀다.
煖必至涅槃,頂終不斷善, 忍不墮惡趣,第一入離生。
난법을 얻으면 반드시 열반에 이르고, 정법을 얻으면 끝내 선근을 끊지 않으며, 인법을 얻으면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세제일법을 얻으면 정성이생에 들어간다.
술어 풀이
- 順決擇分순결택분
- 범어 nirvedhabhāgīya. 「결택」은 의심을 끊고(決斷) 사제의 모습을 가려내는(簡擇) 성도, 특히 견도이며, 「분」은 그 한 부분이다. 견도라는 결택의 한 부분에 따르고 그것을 이롭게 하므로 순결택분이라 한다. 난 · 정 · 인 · 세제일법 네 선근을 가리킨다.
- 煖난법
- 범어 ūṣmagata. 번뇌라는 땔감을 태울 성도의 불이 일어나기 전의 앞 모습, 곧 따뜻함. 사제를 모두 관하고 십육행상을 모두 닦는다.
- 頂정법
- 범어 mūrdhan. 흔들릴 수 있는 선근 가운데 가장 뛰어나 사람의 정수리 같다. 또는 나아감과 물러남의 두 경계라서 산꼭대기 같다.
- 忍인법
- 범어 kṣānti. 사제의 이치를 「참아 받아들이는(忍可)」 데 가장 뛰어나고, 이 자리에서는 물러나 떨어짐이 없다.
- 世第一法세제일법
- 범어 laukikāgradharma. 유루이므로 「세간」, 가장 뛰어나므로 「제일」. 동류인 없이 사용(士用)의 힘으로 성도를 이끌어 낸다. 한 찰나뿐이다.
- 行相행상
- 범어 ākāra. 마음이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 비상 · 고 · 공 · 비아 등 십육행상이 있고, 지품에서 그 체가 혜임을 따진다.
- 順解脫分순해탈분
- 범어 mokṣabhāgīya. 해탈에 따르는 부분. 해탈을 깊이 바라는 마음으로 심은 선근이며, 문소성 · 사소성이고 몸 · 입 · 뜻의 세 업에 통한다. 순결택분보다 앞선 생에 반드시 심어져 있어야 한다.
- 種性종성
- 범어 gotra. 성문 · 독각 · 부처의 어느 깨달음으로 나아갈 바탕. 선근을 일으킨 종성이 다른 승(乘)으로 옮겨 갈 수 있는가가 물어진다.
- 正性離生정성이생
- 범어 samyaktva-niyāma. 「정성」은 열반 또는 성도, 「생」은 번뇌 또는 근기가 익지 않음이다. 성도가 이를 뛰어넘으므로 「이생」이다. 견도의 첫 찰나에 「들어간다」고 하며, 「정성결정」이라고도 한다.
따뜻함 · 정수리 · 참음 · 세간의 으뜸
총상의 법념처가 상상품까지 익으면 그 뒤에 처음 생기는 선근을 난법이라 한다. 『구사론』의 정의는 비유 그대로다.
此法如煖立煖法名,是能燒惑薪聖道火前相,如火前相故名為煖。
이 법은 따뜻함과 같아서 난법이라는 이름을 세운다. 번뇌의 땔감을 태울 수 있는 성도라는 불의 앞 모습이니, 불의 앞 모습과 같으므로 따뜻함이라 한다.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킬 때 불꽃보다 먼저 따뜻함이 온다. 난법은 아직 불이 아니다. 그러나 불이 반드시 올 것을 알리는 징후다. 이 선근은 머무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네 성제를 모두 관하고 십육행상을 모두 닦을 수 있다. 고제를 비상 · 고 · 공 · 비아로, 집제를 인 · 집 · 생 · 연으로, 멸제를 멸 · 정 · 묘 · 리로, 도제를 도 · 여 · 행 · 출로 관한다. 각 행상의 뜻은 지품에서 따로 논한다.
난법이 하품 · 중품 · 상품으로 자라 원만해지면 정법이 생긴다. 이름은 두 가지로 풀린다. 「움직이는 선근(動善根)」 — 물러날 수 있는 선근 — 가운데 가장 뛰어나 사람의 정수리 같다는 것, 또는 여기가 나아감과 물러남의 두 경계여서 산꼭대기 같다는 것이다. 산꼭대기에 선 사람은 넘어가거나 굴러떨어진다. 그 사이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정법도 사제를 모두 관하고 십육행상을 모두 닦는다.
정법이 원만해지면 인법이 생긴다. 사제의 이치를 「인가(忍可)」하는 데 가장 뛰어나고, 이 자리에서는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 인법은 하 · 중 · 상의 셋이 있는데, 하품과 중품은 정법처럼 사제와 십육행상을 모두 관한다. 그러나 상품은 다르다. 오직 욕계의 고제만을 관한다. 세제일법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축소의 과정을 『구사론』은 이렇게 그린다.
謂瑜伽師於色無色對治道等一一聖諦行相所緣漸減漸略,乃至但有二念作意思惟欲界苦聖諦境,齊此以前名中忍位。
유가사가 색계 · 무색계의 대치도 등 하나하나의 성제의 행상과 대상을 차츰 줄이고 차츰 간략히 하여, 마침내 두 찰나의 작의로 욕계의 고성제만을 사유하는 데 이르니, 여기까지를 중인위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밝혀진다. 대상을 「줄여 간다」는 말은, 처음의 난 · 정 · 인이 욕계뿐 아니라 삼계 전체의 고제 등을 대상으로 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줄일 것이 없다. 줄이고 줄여 두 찰나의 작의로 욕계의 고제를 사유하는 데 이르면 중인이 끝나고, 그 바로 뒤에 한 행상 · 한 찰나의 상품인(上品忍)이 일어난다. 이 선근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상품인 바로 뒤에 세제일법이 생긴다.
此有漏法世間中勝,是故名為世第一法。有士用力,離同類因,引聖道生,故名最勝。
이 유루법은 세간에서 가장 뛰어나므로 세제일법이라 한다. 사용(士用)의 힘이 있어, 동류인 없이 성도를 이끌어 내므로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동류인 없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무루법은 그 이전에 같은 종류의 무루법이 없으면 동류인을 가질 수 없다. 견도의 첫 찰나인 고법지인(苦法智忍)은 처음 일어나는 무루이므로 동류인이 없다. 그것을 이끌어 내는 것은 바로 앞 찰나의 세제일법이 사람의 손이 일을 하듯 직접 끌어내는 힘(士用果)이다.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서 본 육인 · 오과의 틀이 여기서 범부와 성자의 경계를 설명하는 장치가 된다.
무엇을 관하는가 — 법념처와 네 염처의 자리
네 선근은 모두 염처의 성질을 갖는다. 그래서 체는 혜이고, 함께하는 법(助伴)까지 치면 오온이다. 다만 득(得)은 뺀다. 득까지 포함하면, 이미 성자가 된 사람이 난 등의 선근을 다시 일으키는 것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본송의 「처음에는 법, 뒤에는 넷(初法後四)」은 난과 정의 두 선근이 처음 발을 들일 때(初安足)는 오직 법념처이고, 그 뒤 더 나아갈 때(後增進)는 네 염처를 모두 갖춘다는 뜻이다. 왜 처음에는 법념처뿐인가. 「처음 발을 들인다」는 것은 십육행상으로 사제의 자취를 처음 밟는다는 뜻이고, 그 직전의 총상념처가 법념처였기 때문이다. 반면 인법은 처음에도 뒤에도 법념처뿐이다.
『구사론』은 여기서 더 세밀하게, 각 선근이 처음 발을 들일 때와 나아갈 때에 현재에 닦는 염처 · 행상과 미래에 함께 닦아지는(未來修) 염처 · 행상의 수를 하나하나 센다. 수가 달라지는 까닭은, 처음 얻는 종성은 같은 부류(同分)만 닦을 수 있고 이미 얻은 종성은 다른 부류도 닦을 수 있다는 원칙 때문이다. 「현재에 하나를 닦으면 미래의 여럿이 함께 닦아진다」는 이 사고는 지품의 「수(修)」의 이론에서 다시 크게 펼쳐진다.
물러남 · 버림 · 얻음
네 선근의 차이는 무엇보다 「물러남」의 유무에 있다. 본송은 이렇게 정리한다.
此順決擇分,四皆修所成, 六地二或七,依欲界身九, 三女男得二,第四女亦爾。 聖由失地捨,異生由命終, 初二亦退捨,依本必見諦, 捨已得非先,二捨性非得。
이 순결택분 넷은 모두 수소성이다. 여섯 지에 의지하고, 둘은 일곱 지라는 설도 있다. 욕계의 몸 아홉 곳에 의지한다. 앞의 셋은 여자 · 남자가 둘(남녀의 선근)을 얻고, 넷째는 여자도 그러하다. 성자는 지를 잃음으로 버리고, 범부는 목숨이 다함으로 버리며, 처음 둘은 물러남으로도 버린다. 근본정에 의지한 이는 반드시 진리를 본다. 버린 뒤 다시 얻는 것은 앞의 것이 아니며, 두 가지 버림은 비득(非得)을 성품으로 한다.
네 선근은 모두 수소성(修所成)이다. 등인지(等引地), 곧 선정의 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지는 여섯 — 사정려 · 미지정 · 중간정 — 이다. 욕계는 등인이 없으므로 제외되고, 그 위의 무색은 이 선근이 견도의 권속이므로 제외된다. 견도가 없는 곳에 그 권속도 없고, 또 무색계의 마음은 욕계를 반연하지 못하는데 먼저 두루 알고 끊어야 할 것은 욕계이기 때문이다. 다만 묘음(妙音)은 난 · 정 둘은 욕계를 더하여 일곱 지에 의지한다고 했다. 몸으로는 욕계의 사람과 하늘 아홉 곳(북구로주를 뺀 세 주와 여섯 욕천)에 의지한다. 이 선근들은 색계 오온의 이숙을 원만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는 있어도 생을 끌어오지는(牽引) 못한다. 존재 자체를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버림에는 두 길이 있다. 성자는 지(地)를 잃음으로 버린다. 곧 위의 지에 태어나면 아래 지에 의지한 선근을 버린다. 범부는 지를 잃든 잃지 않든 중동분(衆同分)을 잃으면, 곧 목숨이 다하면 반드시 이 선근을 버린다. 그리고 난과 정은 물러남으로도 버린다. 인과 세제일법은 범부라도 물러남이 없다. 물러남은 반드시 허물을 일으키지만 잃음은 그렇지 않다. 두 버림의 체는 모두 비득(非得)이다.
버렸다가 다시 얻을 때, 다시 얻은 선근은 앞서 버린 그것이 아니다. 별해탈율의를 버렸다가 다시 받는 것과 같다. 오래 익혀 큰 공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 생에 난 등을 얻었다가 생을 바꾸며 버린 사람은, 그 단계를 잘 설명하는 법사를 만나면 바로 정 등을 일으키지만, 만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닦는다. 한편 근본정에 의지해 난 등의 선근을 일으킨 사람은 그 생에 반드시 진리를 본다.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이 지극히 맹렬하기 때문이다.
네 선근을 얻은 이익
네 선근을 얻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둘째 본송이 답한다. 난법을 얻은 사람은 비록 물러나 선근을 끊고 무간업을 지어 악취에 떨어지더라도 오래 떠돌지 않고 반드시 열반에 이른다. 그러면 난법은 순해탈분과 무엇이 다른가. 『구사론』의 답은 이렇다 — 장애가 없다면 진리를 보는 데 가깝고, 그 행상이 견도의 행상과 같다는 점이다. 정법을 얻은 사람은 물러나는 일은 있어도 끝내 선근을 끊지 않는다. 인법을 얻은 사람은 목숨이 다해 이 선근을 버리고 범부의 자리에 머물더라도 물러남이 없고, 무간업을 짓지 않으며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
인법의 이익은 더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인의 자리에 이르면 여섯 가지에 대해 「태어나지 않는 법(不生法)」을 얻는다.
趣謂諸惡趣。生謂卵濕生。處謂無想、北俱盧、大梵處。身謂扇搋、半擇迦、二形身。有謂第八等有。惑謂見所斷惑。
취는 여러 악취를 말한다. 생은 난생 · 습생을 말한다. 처는 무상천 · 북구로주 · 대범천을 말한다. 몸은 선체 · 반택가 · 이형의 몸을 말한다. 유는 여덟째 이후의 생을 말한다. 혹은 견소단의 번뇌를 말한다.
하인(下忍)에서 악취의 불생을 얻고, 나머지 불생은 상인에서 얻는다. 무상천 · 북구로주 · 대범천이 들어간 것이 흥미롭다. 무상천은 마음이 없어 법을 들을 수 없고, 북구로주는 즐거움이 너무 커서 도를 닦지 않으며, 대범천은 스스로를 창조주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僻見)의 자리다. 「여덟째 이후의 생」은 뒤에서 볼 예류자의 「극칠반생」과 이어진다. 인법에 이른 사람은 이미 여덟 번째 생을 받지 않는 길 위에 있다.
세제일법을 얻은 사람은 범부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바로 다음 찰나에 정성이생에 들어간다. 목숨이 다해 버리는 일이 없는 것은, 바로 이어서 견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이 선근만이 이생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미 범부성(異生性)에 대한 비택멸을 얻었고, 무간도처럼 범부성을 버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성은 옮겨 갈 수 있는가
네 선근에는 각각 세 품이 있다. 성문 · 독각 · 부처라는 종성의 차이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종성으로 선근을 일으킨 사람이 다른 승으로 옮겨 갈 수 있는가.
轉聲聞種性,二成佛三餘, 麟角佛無轉,一坐成覺故。
성문의 종성을 옮기는 것은, 둘(난 · 정)은 부처를 이룰 수 있고 셋(난 · 정 · 인)은 나머지(독각)가 될 수 있다. 인각유독각과 부처는 옮김이 없으니, 한자리에서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성문 종성으로 난 · 정을 일으킨 사람은 위없는 깨달음으로 옮겨 갈 수 있다. 그러나 인법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 인법을 얻은 이는 이미 악취를 넘어섰는데,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반드시 악취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짧지만 강하다.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인법의 이익이, 보살의 길에서는 오히려 제약이 된다. 독각으로는 난 · 정 · 인 셋 모두 옮겨 갈 수 있다. 부처의 승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인각유독각(麟角喩獨覺)과 부처는 선근을 일으킨 뒤 다른 승으로 옮기는 일이 없다. 둘 다 제4정려에 의지하여 난법에서 깨달음까지 한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이루기 때문이다. 제4정려는 흔들리지 않고 가장 밝고 날카로운 삼매다. 여기서 「깨달음(覺)」은 진지와 무생지를 가리킨다. 다른 논사는 부정관부터 깨달음까지 한자리에서 이룬다고도 한다. 인각유가 아닌 무리를 지어 사는 독각은 처음 두 선근에서 다른 승으로 옮겨 갈 수 있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 한자리에서 난법부터 진지 · 무생지까지 이루었다는 이 설은, 부처의 깨달음을 「선근 → 견도 → 수도 → 무학」이라는 성문의 계위와 같은 구조로 설명하는 유부의 방식이다. 보살로서의 긴 수행(삼아승기겁)은 그 이전에 있고, 마지막 생의 한자리에서 견도와 수도가 한꺼번에 지나간다. 이 계위가 뒤에 천태 교학에서 어떻게 정리되는지는 마지막 편 「나」의 논파와 『구사론』의 자리에서 살핀다.
순해탈분 — 씨앗 · 싹 · 열매의 세 생
이번 생에 처음 수행을 시작해 이번 생에 순결택분까지 일으킬 수 있는가. 없다.
前順解脫分,速三生解脫, 聞思成三業,殖在人三洲。
(순결택분보다) 앞서 순해탈분이 있으니, 가장 빨라도 세 생에 해탈한다. 문 · 사로 이루어지고 세 업이며, 사람의 세 주에서 심는다.
이번 생에 순결택분을 일으킨 사람은 반드시 앞 생에 순해탈분을 일으켰다. 순해탈분을 처음 심은 사람은 가장 빨라도 세 생 만에 해탈한다 — 첫 생에 순해탈분을, 둘째 생에 순결택분을, 셋째 생에 성자의 자리에 들어 해탈을 얻는다. 『구사론』은 이를 씨를 뿌리고 · 싹이 자라고 · 열매를 맺는 세 단계에 비유하여, 몸이 법성에 들어가고 · 성숙하고 · 해탈하는 것도 그렇다고 말한다.
순해탈분은 문소성 · 사소성이며 몸 · 입 · 뜻의 세 업을 체로 한다고 전한다(傳說). 가장 뛰어난 것으로 말하면 의업이지만, 그 의도와 서원이 일으키는 몸과 입의 행위도 순해탈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끼의 보시, 하나의 계를 지키는 일이라도 해탈을 깊이 바라는 서원의 힘이 붙들고 있으면 「순해탈분을 심었다」고 한다. 이 선근은 사람의 세 주에서만 심는다. 다른 곳에는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厭離)이나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가 세상에 나왔을 때 심는다고 하며, 어떤 논사는 독각을 만나도 심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세 생」의 틀은 수행도의 시간 감각을 보여 준다. 견도의 열다섯 찰나는 한순간이지만, 그 한순간 앞에는 적어도 두 생의 준비가 놓여 있다. 이제 그 한순간, 세제일법 바로 다음 찰나로 들어간다.
본송
世第一無間,即緣欲界苦, 生無漏法忍,忍次生法智, 次緣餘界苦,生類忍類智, 緣集滅道諦,各生四亦然, 如是十六心,名聖諦現觀, 此總有三種,謂見緣事別。
세제일법 바로 뒤에 욕계의 고를 반연하여 무루의 법인이 생기고, 인 다음에 법지가 생긴다. 다음에 나머지 계의 고를 반연하여 유인과 유지가 생긴다. 집 · 멸 · 도의 진리를 반연하여 각각 넷이 생기는 것도 그러하다. 이 열여섯 마음을 성제현관이라 한다. 현관은 모두 세 가지이니, 견 · 연 · 사의 구별이다.
忍智如次第,無間解脫道。 前十五見道,見未曾見故。
인과 지는 차례대로 무간도와 해탈도다. 앞의 열다섯이 견도이니,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을 보기 때문이다.
술어 풀이
- 十六行相십육행상
- 사제 각각을 네 가지 방식으로 파악하는 열여섯 행상. 고(비상 · 고 · 공 · 비아), 집(인 · 집 · 생 · 연), 멸(멸 · 정 · 묘 · 리), 도(도 · 여 · 행 · 출). 사선근부터 닦고 견도에서 무루로 일어난다.
- 法智 · 類智법지 · 유지
- 법지(dharmajñāna)는 욕계의 사제를 처음으로 증지하는 무루지, 유지(anvayajñāna)는 그 뒤 색계 · 무색계의 사제를 앞의 법지와 「비슷하게(類)」 아는 무루지다.
- 忍 · 智인 · 지
- 인(kṣānti)은 아직 그 진리에 대한 의심을 다 끊지 못하고 「인가하는」 단계, 지(jñāna)는 의심을 끊고 확정한 단계. 견도의 인은 무간도로서 번뇌를 끊고, 지는 해탈도로서 끊어진 상태(이계)를 얻는다.
- 苦法智忍고법지인
- 견도의 첫 찰나. 욕계의 고제를 반연하는 무루의 인. 법지를 낳는 원인이므로 「법지의 인」이라 한다. 이 찰나에 정성이생에 들어간다.
- 無間道 · 解脫道무간도 · 해탈도
- 무간도(ānantaryamārga)는 번뇌의 득을 끊되 그 사이를 가로막을 것이 없는 길, 해탈도(vimuktimārga)는 번뇌에서 벗어남(이계득)과 함께 일어나는 길. 모든 끊음은 이 두 길의 짝으로 이루어진다.
- 見 · 緣 · 事現觀견 · 연 · 사현관
- 견현관은 무루혜가 진리를 직접 보는 것, 연현관은 그 혜와 함께하는 심 · 심소가 같은 대상을 반연하는 것, 사현관은 그와 함께하는 계 · 생상 등 불상응법까지 같은 일을 하는 것.
- 隨信行 · 隨法行수신행 · 수법행
- 견도의 성자 둘. 근기가 둔하여 남을 믿고 따르는 이가 수신행(śraddhānusārin), 근기가 날카로워 스스로 경전을 살펴 법을 따르는 이가 수법행(dharmānusārin)이다.
- 異生性이생성
- 범부를 범부이게 하는 성질. 심불상응행의 비득(非得)으로 설명된다. 고법지인이 미래에서 생겨날 때(生相) 이를 버린다.
열여섯 행상 — 사제를 보는 열여섯 방식
난법에서 이미 등장한 십육행상의 뜻을 『구사론』은 지품에서 따로 풀이한다. 그러나 이 행상들은 현관의 내용 그 자체이므로 견도를 보기 전에 먼저 읽는다. 지품은 먼저 실체(實事)의 수를 묻는다. 어떤 논사는 이름은 열여섯이지만 실제로는 일곱이라고 한다. 고제의 네 행상은 이름도 실체도 넷이지만, 집 · 멸 · 도는 이름만 넷이고 실체는 하나씩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사론』은 「이렇게 말하는 이(如是說者)」의 정설로 「실체도 열여섯」이라 하고, 각 행상을 정의한다.
待緣故非常,逼迫性故苦,違我所見故空,違我見故非我。 如種理故因,等現理故集,相續理故生,成辦理故緣。 諸蘊盡故滅,三火息故靜,無眾患故妙,脫眾災故離。 通行義故道,契正理故如,正趣向故行,能永超故出。
조건에 기대므로 비상, 핍박하는 성질이므로 고, 「나의 것」이라는 견해에 어긋나므로 공, 「나」라는 견해에 어긋나므로 비아다. 씨앗의 이치이므로 인, 고르게 나타나는 이치이므로 집, 이어지는 이치이므로 생, 이루어 내는 이치이므로 연이다. 오온이 다하므로 멸, 세 불이 꺼지므로 정, 여러 근심이 없으므로 묘, 여러 재앙을 벗어나므로 리다. 통하여 가는 뜻이므로 도, 바른 이치에 맞으므로 여, 바르게 나아가므로 행, 영원히 뛰어넘으므로 출이다.
집제의 네 행상에는 비유가 붙는다. 진흙 덩이 · 물레 · 끈 · 물 등 여러 조건이 모여 병(瓶)을 만드는 것처럼, 씨앗(인) · 고르게 나타남(집) · 이어짐(생) · 이루어 냄(연)의 네 측면이 함께 괴로움을 만든다. 그리고 「옛 풀이가 한 문만이 아니므로(古釋既非一門)」 좋아하는 대로 다시 풀이한다며 천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생멸하므로 비상, 성자의 마음을 거스르므로 고, 여기에 내가 없으므로 공, 스스로 내가 아니므로 비아다.
집제에 대한 천친의 해석은 특히 주목된다. 그는 경전의 「오취온은 욕(欲)을 뿌리로, 욕을 집으로, 욕을 류(類)로, 욕을 생으로 한다」를 끌어와, 욕이 자리에 따라 네 가지로 다르다고 본다. 지금의 총체적인 나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총체적 자체욕」, 미래의 총체적인 나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총체적 후유욕」, 미래의 개별적인 나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개별적 후유욕」,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나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결생의 욕」이다. 첫째는 씨앗처럼 괴로움의 처음 원인이므로 인, 둘째는 싹처럼 괴로움을 불러 모으므로 집, 셋째는 밭 · 물 · 거름처럼 괴로움의 열매를 따로 맺게 하므로 연, 넷째는 꽃술이 열매에 가까운 것처럼 괴로움을 가까이 낳으므로 생이다. 경전의 순서와 논서의 순서(인 · 집 · 생 · 연)가 다르다는 것도 그는 놓치지 않고 지적한다.
그리고 열여섯 행상이 각각 무엇을 다스리는가가 정리된다.
又為治常樂我所我見故修非常苦空非我行相,為治無因一因變因知先因見,故修因、集、生、緣行相。
또 상 · 낙 · 아소 · 아의 견해를 다스리기 위해 비상 · 고 · 공 · 비아의 행상을 닦고, 원인이 없다는 견해 · 하나의 원인이라는 견해 · 변하는 원인이라는 견해 · 앎이 먼저인 원인이라는 견해를 다스리기 위해 인 · 집 · 생 · 연의 행상을 닦는다.
멸제의 네 행상은 해탈이 없다는 견해(멸), 해탈이 괴로움이라는 견해(정), 선정의 즐거움이 묘하다는 견해(묘), 해탈은 자꾸 물러나 영원하지 않다는 견해(리)를 다스리고, 도제의 네 행상은 도가 없다 · 그릇된 도가 도다 · 다른 도가 있다 · 도에서 물러난다는 견해를 다스린다. 십육행상은 단순한 진리의 속성 목록이 아니라, 각각이 특정한 그릇된 견해의 해독제다.
행상의 체는 혜인가 — 「행상 · 능행 · 소행」
행상의 체는 무엇인가. 비바사사는 혜라고 한다. 그러면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혜는 다른 혜와 상응하지 않으므로, 혜 자신에는 행상이 없게 된다. 혜가 행상이라면 혜는 행상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구사론』은 세 개념을 갈라 정리한다.
由此應言諸心心所取境類別皆名行相,慧及諸餘心心所法有所緣故皆是能行,一切有法皆是所行。
그러므로 모든 심 · 심소가 대상을 취하는 부류의 차이를 다 행상이라 해야 한다. 혜와 나머지 심 · 심소법은 대상이 있으므로 모두 능행이며, 모든 존재하는 법은 소행이다.
혜는 행상이면서 능행이며 소행이다. 나머지 심 · 심소는 능행이며 소행이고, 그 밖의 법은 소행일 뿐이다. 이 정리는 단순한 용어 정리를 넘어, 「본다」는 작용이 혜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혜를 중심으로 함께 움직이는 마음 전체의 일이라는 관점을 보여 준다. 이것이 뒤에 보는 「연현관」의 근거가 된다.
견도의 열여섯 마음
이제 세제일법의 바로 다음 찰나다. 상품인과 세제일법은 욕계의 고제를 한 행상으로 반연했다. 그 바로 뒤에 같은 욕계의 고제를 반연하여 처음으로 무루의 「법지인」이 생긴다. 이것을 고법지인이라 한다.
此忍名為苦法智忍,為顯此忍是無漏故,舉後等流以為標別。此能生法智,是法智因,得法智忍名,如花果樹。
이 인을 고법지인이라 한다. 이 인이 무루임을 드러내기 위해 뒤의 등류(법지)를 들어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법지를 낳을 수 있어 법지의 원인이므로 법지인이라는 이름을 얻으니, 꽃나무 · 열매나무라 하는 것과 같다.
열매를 맺을 나무를 「열매나무」라 부르듯, 법지를 낳을 인이기에 「법지의 인」이다. 이 찰나가 정성이생에 「들어가는」 찰나이고, 이 인이 생기면 성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구사론』은 이 인이 미래에서 생겨나는 바로 그때 범부성을 버린다고 한다. 등불이 어둠을 없애는 것, 생상(生相)이 법을 일으키는 것처럼, 미래에서 생겨나는 순간에 그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고법지인 바로 뒤에 같은 욕계의 고제를 반연하여 고법지가 생긴다. 이어서 법지 바로 뒤에 색계 · 무색계의 고제를 통틀어 반연하여 고류지인이, 그다음 고류지가 생긴다. 왜 「유(類)」라 부르는가.
最初證知諸法真理故名法智,此後境智與前相似故得類名,以後隨前而證境故。
처음으로 모든 법의 참된 이치를 증지하므로 법지라 하고, 그 뒤의 대상과 지혜는 앞의 것과 비슷하므로 유라는 이름을 얻는다.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따라 대상을 증지하기 때문이다.
욕계의 사제를 처음 보는 지혜가 법지이고,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위의 두 계를 보는 지혜가 유지다. 같은 방식으로 집 · 멸 · 도의 각 진리에 대해서도 법지인 · 법지 · 유지인 · 유지의 넷이 일어나, 모두 열여섯 마음이 된다. 『구사론』은 열여섯 하나하나를 이름까지 빠짐없이 나열한다. 이 나열의 반복 자체가 견도가 「차례로(漸)」 진행된다는 유부의 입장을 문장으로 보여 준다.
열여섯 마음은 모두 세제일법과 같은 지(地)에 의지한다. 세제일법이 여섯 지에 의지하므로 견도도 그 여섯 가운데 하나에 의지한다.
인은 끊고 지는 증득한다 — 도둑을 쫓고 문을 닫다
왜 반드시 인과 지가 번갈아 일어나야 하는가. 『구사론』의 답은 비유 하나로 압축된다.
十六心中忍是無間道,約斷惑得,無能隔礙故。智是解脫道,已解脫惑得,與離繫得俱時起故。具二次第理定應然,猶如世間驅賊閉戶。
열여섯 마음 가운데 인은 무간도이니, 번뇌의 득을 끊는 데 있어 가로막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는 해탈도이니, 이미 번뇌의 득에서 벗어나 이계득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차례대로 갖추는 것은 이치상 반드시 그러하니, 세간에서 도둑을 쫓아내고 문을 닫는 것과 같다.
번뇌는 「득(得)」이라는 끈으로 마음의 흐름에 매여 있다. 인은 그 끈을 끊는다 — 도둑을 내쫓는 일이다. 지는 끈이 끊어진 상태, 곧 택멸에 대한 이계득(離繫得)과 함께 일어나 그 상태를 붙든다 — 문을 닫아 도둑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법보의 『구사론소』는 이 비유를 「도둑을 쫓음은 무간도가 번뇌를 끊어 몸에서 나가게 함을 비유하고, 문을 닫음은 해탈도가 택멸의 득을 붙들어 번뇌가 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함을 비유한다」고 풀이한다. 끊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른 일이며, 끊은 뒤에 지키지 않으면 끊음은 완성되지 않는다.
여기에 두 가지 반론이 따라온다. 첫째, 만일 둘째 찰나(지)도 무간도라서 이계득과 함께 생긴다면 어떤가. 그러면 그 자리에서 각 진리에 대한 의심을 이미 끊은 지혜가 결코 일어나지 않게 된다. 둘째, 견도에서 번뇌를 끊는 것이 인뿐이라면, 본론(『발지론』)이 「아홉 결의 무리(九結聚)를 지가 끊는다」고 한 것과 어긋나지 않는가. 『구사론』은 이렇게 답한다.
此難不然,諸忍皆是智眷屬故,如王眷屬所作事業名王所作。
이 비난은 옳지 않다. 모든 인은 지의 권속이기 때문이니, 왕의 권속이 한 일을 왕이 한 일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인은 지의 신하다. 신하가 한 일을 왕의 업적이라 부르듯, 인이 끊은 번뇌를 지가 끊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 답은 지품의 첫 게송 — 「성스러운 혜에서 인은 지가 아니다(聖慧忍非智)」 — 과 짝을 이룬다. 인은 「봄(見)」이기는 하지만 「앎(智)」은 아니다. 스스로 끊어야 할 의심을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지품에서 다시 정리한다.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 — 견도의 범위
열여섯 마음은 모두 진리의 이치를 본다. 그러면 모두 견도인가. 아니다. 고법지인에서 도류지인까지의 열다섯 찰나가 견도이고, 열여섯째 도류지는 수도에 속한다.
至第十六道類智時,無一諦理未見今見,如習曾見,故修道攝。
열여섯째 도류지에 이르면 아직 보지 못했다가 지금 보는 진리의 이치가 하나도 없고, 일찍이 본 것을 익히는 것과 같으므로 수도에 속한다.
반론이 있다. 도류지인이 본 것은 도제의 이치를 「처음으로 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류지도 같은 도제를 보는 것이지만, 도류지인의 찰나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니 「처음 봄」이 아닌가. 『구사론』의 답은 「여기서는 진리를 기준으로 하지 찰나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此中約諦不約剎那)」는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비유가 이어진다.

非一剎那未見今見可名今見未見諦理,如刈畦稻唯餘一科,不可名為此畦未刈。
한 찰나가 아직 보지 못했다가 지금 본다고 해서, 아직 보지 못한 진리의 이치를 지금 본다고 할 수는 없다. 논의 벼를 베는데 한 포기만 남았을 때, 이 논을 아직 베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도류지인의 찰나에 이미 네 진리가 모두 「보였다」. 도류지는 남은 한 포기를 베는 것에 불과하다. 『구사론』은 도류지가 수도에 속하는 다른 근거들도 든다. 그것은 과(果)에 속하고, 여덟 지와 열여섯 행상을 한꺼번에 닦으며, 앞의 길(향의 길)을 버리고, 이어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다른 수도와 같다. 그러면 도류지는 견도에서 끊은 것을 붙들어 물러나지 않게 하므로 견도에 넣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하면 지나침의 허물이 있다(太過). 그러면 고법지 등 일곱 지는 왜 견도에 넣는가. 아직 진리의 이치를 두루 보지 못한 중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 찰나에 보는가 — 돈현관과 점현관
견도가 열다섯 찰나에 걸쳐 차례로 진행된다는 유부의 설은 당시에 유일한 설이 아니었다. 『구사론』은 「다른 부파(餘部)」가 「여러 진리를 오직 한꺼번에 현관한다(於諸諦中唯頓現觀)」고 한다는 것을 소개한다. 보광은 이들을 대중부 등으로 본다. 『이부종륜론』은 대중부 계통이 보살에 대해 「한 찰나의 현관변지(現觀邊智)로 사제의 모든 모습의 차이를 두루 안다」는 것을, 설일체유부의 설로 「네 성제를 차례로 현관한다(四聖諦漸現觀)」는 것을, 그리고 화지부의 설로 「네 성제를 한꺼번에 현관한다(四聖諦一時現觀)」는 것을 전한다.
『구사론』은 이 이설을 즉시 배척하지 않는다. 먼저 「그들의 뜻을 더 찾아보아야 한다. 현관이라는 말에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현관을 셋으로 나눈다.
唯無漏慧於諸諦境現見分明名見現觀,此無漏慧并餘相應同一所緣名緣現觀,此諸能緣并餘俱有戒生相等不相應法同一事業名事現觀。
오직 무루혜가 여러 진리의 대상을 눈앞에 분명히 보는 것을 견현관이라 하고, 이 무루혜와 그와 상응하는 나머지가 같은 대상을 반연하는 것을 연현관이라 하며, 이 여러 능연과 그와 함께하는 계 · 생상 등의 불상응법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을 사현관이라 한다.
고제를 볼 때 고제에 대해서는 세 현관이 모두 있지만, 나머지 세 진리에 대해서는 사현관만 있다. 곧 고제를 보는 그 찰나에 집을 끊고 멸을 증득하고 도를 닦는 「일」은 이미 함께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돈현관」이 어떤 뜻이냐에 따라 판정이 달라진다.
- 견현관으로 말한다면 돈현관은 틀렸다. 진리마다 행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비아 행상으로 모든 진리를 한꺼번에 본다고 하면, 경전의 「성제자는 고의 행상으로 고를, 집의 행상으로 집을 사유한다」는 말과 어긋난다. 이 경문이 수도의 일을 말한 것이라고 해도 소용없다. 견도와 수도는 같은 방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 한 진리를 볼 때 나머지 진리에 대해 자재를 얻는다는 뜻이라면 허물이 없다. 다만 그 사이에 자재가 일어나는지 아닌지는 따로 따져야 한다.
- 고를 볼 때 집을 끊고 멸을 증득하고 도를 닦는다는 뜻이라면 역시 허물이 없다. 앞에서 말한 사현관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경증이 있다. 경전에서 부처는 장자에게 「네 성제는 한꺼번에 현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차례로 현관한다」고 했고, 이런 경이 셋이며 경마다 비유가 다르다고 한다. 돈현관 쪽이 내세우는 「고제에 의혹이 없으면 부처에 대해서도 의혹이 없다」는 경문은, 선정에 들어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하거나 「반드시 끊어질 것」을 은밀한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견도의 찰나 수에 관해서는 다른 부파의 설도 전한다. 『이부종륜론』은 독자부의 설로 「인 · 명 · 상 · 세제일법이 정성이생에 들어가며, 들어가면 열두 마음 동안을 향이라 하고 열셋째 마음을 주과라 한다」는 것을 적는다(현행 대정장 본문은 「十二心須說名行向」으로 되어 있다). 유부는 「열다섯 마음 동안을 향, 열여섯째 마음을 주과」라 하므로, 두 설은 견도와 수도의 경계를 어디에 두느냐에서 갈린다.
견도의 두 성자 — 수신행과 수법행
견도의 열다섯 찰나에 있는 성자는 둘이다.
名隨信法行,由根鈍利別, 具修惑斷一,至五向初果, 斷次三向二,離八地向三。
수신행 · 수법행이라 이름하니, 근기가 둔하고 날카로움의 차이 때문이다. 수혹을 다 갖추었거나 한 품에서 다섯 품까지 끊었으면 초과(예류)의 향이고, 그다음 세 품을 끊었으면 둘째 과의 향이며, 여덟 지를 떠났으면 셋째 과의 향이다.
둔근은 수신행, 이근은 수법행이다. 수신행은 믿음으로 따라가는 행, 곧 남을 믿고 그 뜻을 따라가는 사람이고, 수법행은 이전에 스스로 경전 등을 펼쳐 읽어 그 뜻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구사론』은 「이 행이 오래 익어 그 성품이 된 이」라는 뜻으로 「~하는 자(者)」를 붙인다고 덧붙인다.
이 두 성자는 견도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도로 수혹을 얼마나 끊었는가에 따라 다시 세 향으로 나뉜다. 견도는 견혹만 끊고 수혹은 끊지 않으므로, 이미 끊어 둔 수혹의 양이 견도 직후의 과를 결정한다.
- 수혹을 하나도 끊지 않았거나(具縛) 욕계 수혹을 한 품에서 다섯 품까지 끊고 견도에 들어가면 — 예류향(預流向). 사문과 가운데 반드시 처음 얻는 과이므로 「초과」다.
- 욕계 수혹을 여섯 · 일곱 · 여덟 품까지 끊고 들어가면 — 일래향(一來向). 이 사람을 배리욕자(倍離欲者)라 부른다.
- 욕계의 아홉 품을 다 끊었거나, 초선의 한 품에서 무소유처까지 떠나고 들어가면 — 불환향(不還向). 이 사람을 전리욕자(全離欲者)라 부른다.
아라한향은 견도에서는 없다. 견도는 수혹을 끊지 못하고, 세속도는 유정천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열여섯째 도류지에 이르면 이름이 바뀐다.
至第十六心,隨三向住果, 名信解見至,亦由鈍利別。
열여섯째 마음에 이르면 세 향을 따라 과에 머무니, 신해 · 견지라 이름하고, 이 또한 둔 · 이의 차이 때문이다.
둔근의 수신행은 신해(信解, śraddhādhimukta)가 되고, 이근의 수법행은 견지(見至, dṛṣṭiprāpta)가 된다. 신해는 믿음이 더 강하고 견지는 지혜가 더 강하다. 견도에서 수도로 넘어가는 한 찰나에, 「무엇에 의지해 행하는가(가행)」라는 기준의 이름이 「무엇이 강한가(근)」라는 기준의 이름으로 바뀐다.
그런데 왜 이미 욕계 수혹 한 품에서 다섯 품까지 끊은 사람이 도류지에 이르러 「예류과」라고만 불리고 「일래향」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과를 얻는 때에는 더 뛰어난 과로 나아가는 길(勝果道)을 아직 얻지 못했고, 그 길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과에 머무는 이」일 뿐 다음 「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뒤의 사향사과를 세는 방식 전체를 결정한다.
본송
地地失德九,下中上各三。 未斷修斷失,住果極七返。
지(地)마다 허물과 공덕이 아홉이니, 하 · 중 · 상이 각각 셋이다. 수소단의 허물을 아직 끊지 않고 과에 머무는 이는 많아야 일곱 번 오간다.
斷欲三四品,三二生家家, 斷至五二向,斷六一來果。 斷七或八品,一生名一間, 此即第三向,斷九不還果。
욕계의 셋 · 넷째 품을 끊고 세 생 · 두 생이 남은 이를 가가라 하고, 다섯 품까지 끊은 이는 둘째 향이며, 여섯 품을 끊으면 일래과다. 일곱 · 여덟 품을 끊고 한 생이 남은 이를 일간이라 하니, 이것이 셋째 향이며, 아홉 품을 끊으면 불환과다.
술어 풀이
- 九品아홉 품
- 각 지(욕계 · 사정려 · 사무색)의 수소단 번뇌(失)와 그것을 다스리는 길(德)을 각각 하 · 중 · 상으로 나누고 다시 셋으로 나눈 것. 하하품의 길이 상상품의 번뇌를 끊고, 상상품의 길이 하하품의 번뇌를 끊는다.
- 預流예류
- 범어 srotaāpanna. 「흐름(流)」은 무루도 전체, 「예」는 처음으로 거기에 이르는 것. 모든 과를 차례로 얻는 이가 처음 얻는 과다. 많아야 인간과 하늘에 일곱 번씩 오간다(極七返).
- 家家가가
- 범어 kulaṃkula. 예류자 가운데 욕계 수혹의 셋 · 넷째 품을 끊고 그 무루근을 얻어 세 생이나 두 생만 더 받는 이. 하늘에서 오가는 천가가와 인간에서 오가는 인가가가 있다.
- 一來일래
- 범어 sakṛdāgāmin. 욕계 수혹의 여섯째 품까지 끊어, 하늘에 한 번 갔다가 인간에 한 번 와서 열반하는 이. 「탐 · 진 · 치가 엷어진 이(薄貪瞋癡)」라고도 한다.
- 一間일간
- 범어 ekavīcika. 일래자 가운데 일곱 · 여덟 품을 끊어 욕계의 생이 하나만 남은 이. 남은 한 생, 또는 남은 한 품의 번뇌가 「사이(間)」가 되어 막고 있다.
- 不還불환
- 범어 anāgāmin. 욕계 수혹의 아홉 품을 다 끊어 다시는 욕계에 돌아와 나지 않는 이. 오하분결을 끊은 이라고도 한다.
- 中般 · 生般 · 有行般 · 無行般 · 上流중반 · 생반 · 유행반 · 무행반 · 상류
- 색계로 가는 불환자의 다섯 갈래. 중유에서, 태어나 곧, 애써서 오래, 애쓰지 않고 오래 지나, 위로 올라가서 열반한다.
- 身證신증
- 범어 kāyasākṣin. 멸진정을 얻은 불환자. 열반과 비슷한 법을 몸으로 증득한 이.
- 金剛喻定금강유정
- 범어 vajropamasamādhi. 유정천 수혹의 아홉째 품을 끊는 무간도. 모든 수면을 깨뜨릴 수 있어 금강에 비유한다. 바로 뒤에 진지가 일어나 아라한이 된다.
- 世俗道 · 出世道세속도 · 출세도
- 유루의 선정에 의지해 아래 지를 「거칠다 · 괴롭다 · 막힌다」고 싫어하고 위 지를 「고요하다 · 묘하다 · 벗어났다」고 기뻐하는 길이 세속도, 사제의 열여섯 행상으로 끊는 무루의 길이 출세도다.
아홉 품 — 거친 때를 먼저, 미세한 때를 나중에
견도가 끝나면 수도가 시작된다. 수도의 단위는 「품(品)」이다. 수면품에서 욕계의 수소단 번뇌를 아홉 품으로 나누었듯, 위의 각 지(사정려 · 사무색)의 수혹도 아홉 품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것을 끊는 길도 아홉 품이다. 하 · 중 · 상의 근본 품을 다시 하 · 중 · 상으로 나누어 하하 · 하중 · 하상 · 중하 · 중중 · 중상 · 상하 · 상중 · 상상의 아홉이 된다.
그런데 대응 관계가 거꾸로다. 하하품의 길이 상상품의 번뇌를 끊고, 상상품의 길이 하하품의 번뇌를 끊는다. 왜 그런가. 처음에는 상상품 등의 다스리는 공덕이 아직 없고, 그 공덕이 생길 때에는 상상품 등의 허물은 이미 없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두 비유를 든다.
如浣衣位麁垢先除,於後後時漸除細垢。又如麁闇小明能滅,要以大明方滅細闇。
옷을 빨 때 거친 때를 먼저 없애고 뒤로 갈수록 차츰 미세한 때를 없애는 것과 같다. 또 거친 어둠은 작은 빛으로도 없앨 수 있지만 미세한 어둠은 큰 빛이라야 없앨 수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무시이래 쌓여 온 상상품의 번뇌를 어떻게 한 찰나의 하하품의 길이 단번에 끊는가. 『구사론』의 답은 흰 법(白法)과 검은 법(黑法)의 힘의 차이다. 흰 법은 힘이 세고 검은 법은 약하다. 오래 쌓인 병도 좋은 약 조금으로 단번에 낫고, 오래 쌓인 어둠도 작은 등불 하나가 한 찰나에 없앤다.
예류 — 흐름에 처음 든 이와 일곱 번의 오감
수혹을 하나도 끊지 않은 채 과에 머무는 이가 예류다. 「예류」라는 이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모든 무루도를 「흐름(流)」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원인이기 때문이고, 「예(預)」는 처음 거기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런데 처음 도를 얻는 것을 예류라 한다면, 견도의 첫 찰나인 여덟째 성자(예류향)가 예류여야 한다. 처음 과를 얻는 것을 예류라 한다면, 이미 수혹을 많이 끊고 견도에 든 배리욕자 · 전리욕자도 도류지에서 예류여야 한다. 『구사론』은 이렇게 정한다. 예류는 모든 과를 차례로 얻는 이(漸次者)가 처음 얻는 과의 이름이다. 일래 · 불환은 반드시 처음 얻는 과가 아니지만 예류는 반드시 처음 얻는다. 왜 견도의 첫 찰나를 가리키지 않는가. 도류지에 이르러야 향과 과의 무루도, 견도와 수도의 무루도를 모두 얻기 때문이다.
예류의 특징은 「많아야 일곱 번 오간다(極七返)」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하늘에 각각 일곱 번 태어난다는 뜻이다.
彼從此後別於人中,極多結七中有生有,天中亦然,總二十八,皆七等故說極七生,如七處善及七葉樹。
그는 이후 인간 가운데에서 많아야 일곱 번 중유와 생유를 맺고, 하늘에서도 그러하니, 모두 스물여덟이다. 모두 일곱씩이므로 극칠생이라 하니, 칠처선이나 칠엽수와 같다.
일곱 잎이 모인 잎을 「일곱 잎」이라 부르듯, 일곱씩 모인 생을 「일곱 생」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전의 「견해를 원만히 한 이에게는 여덟째 생을 받을 곳도 여지도 없다」는 말과 어떻게 맞추는가. 이것은 하나의 취(趣)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글자 그대로 따르면 중유도 없어야 한다. 근거로는 경전의 「하늘에서 일곱, 인간에서 일곱」이라는 말과, 음광부(飲光部)의 경이 인간과 하늘에 각각 일곱 생을 받는다고 분명히 따로 말한다는 것을 든다.
왜 여덟째 생은 없는가. 상속이 이 정도면 반드시 성숙하기 때문이며, 성도의 종류가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일곱 걸음을 가면 죽게 하는 독사(七步蛇)나 나흘째에 발작하는 학질(第四日瘧)처럼 정해진 수가 있다.
예류자는 「물러나 떨어지지 않는 법(無退墮法)」이라고 불린다. 퇴타의 업을 키우지 않고, 그 업과 과가 생기는 것을 막으며, 강한 선근이 몸을 누르고, 가행과 의요가 모두 청정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악취에 떨어질 업이 있는 이는 인법조차 일으키지 못하는데 하물며 예류를 얻겠는가. 여기서 『구사론』이 인용하는 게송은 수행도론 전체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愚作罪小亦墮惡,智為罪大亦脫苦, 如團鐵小亦沈水,為鉢鐵大亦能浮。
어리석은 이는 지은 죄가 작아도 악취에 떨어지고, 지혜로운 이는 죄가 커도 괴로움을 벗어난다. 뭉친 쇠는 작아도 물에 가라앉지만, 발우로 만든 쇠는 커도 물에 뜰 수 있는 것과 같다.
가가 · 일래 · 일간 · 불환
예류자가 수혹을 끊어 나가면서 이름이 바뀐다. 첫째, 가가(家家)다. 세 조건을 갖추면 그렇게 부른다 — 욕계 수혹의 셋째나 넷째 품을 끊었을 것(斷惑), 그것을 다스리는 무루근을 얻었을 것(成根), 욕계의 생을 세 번이나 두 번 더 받을 것(受生). 세 생 · 두 생이라고 굳이 말하는 것은 더 나아가면 받을 생이 줄거나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오가는 천가가(天家家)와 인간에서 오가는 인가가(人家家)가 있다.
왜 다섯째 품을 끊은 가가는 없는가. 다섯째를 끊으면 반드시 여섯째도 끊는다. 한 품의 번뇌가 과를 얻는 것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경계를 넘지 않은 「일간」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예류자가 한 품에서 다섯 품까지 끊으면 일래향이라 하고, 여섯째 품을 끊으면 일래과가 된다.
若斷第六成一來果,彼往天上一來人間而般涅槃名一來果,過此以後更無生故。此或名曰薄貪瞋癡,唯餘下品貪瞋癡故。
여섯째를 끊으면 일래과를 이룬다. 그는 하늘에 갔다가 한 번 인간에 와서 열반하므로 일래과라 하니, 이 뒤로는 더 이상 생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박탐진치라고도 하니, 하품의 탐 · 진 · 치만 남았기 때문이다.
일래자가 일곱째나 여덟째 품을 끊고 그 무루근을 얻어 욕계의 생이 하나만 남으면 일간(一間)이라 한다. 여기서는 반대로 「한 품의 번뇌가 어떻게 불환과를 막는가」가 물어진다. 답은 그 한 품을 끊으면 경계(欲界)를 넘기 때문이다. 업이 세 때(三時)에 걸쳐 가장 큰 장애가 되듯 번뇌도 그렇다. 「간(間)」이란 사이를 막는 것이니, 남은 한 생이 사이를 막아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게 하거나, 남은 한 품의 욕계 수혹이 사이를 막아 불환과를 얻지 못하게 한다. 일간은 곧 불환향이다.
아홉째 품을 끊으면 불환과다. 다시는 욕계에 돌아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오하분결을 끊은 이」라고도 하는데, 오하분결 가운데 유신견 · 계금취 · 의는 견도에서 이미 끊었고, 탐욕 · 진에는 이 자리에서 끊으므로, 「이때 모두 모아 끊었다(此時總集斷)」고 하는 것이다.
견도에 들기 전에 이미 셋 · 넷째 품이나 일곱 · 여덟째 품을 끊고 견도에 든 사람은, 과를 얻은 뒤에도 더 뛰어난 과로 나아가는 길을 닦기 전까지는 가가나 일간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수혹을 다스리는 「무루근」을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속도로 끊은 것만으로는 가가 · 일간의 조건인 「成根」이 채워지지 않는다.
- 예류향(預流向)견도 15찰나 · 욕계 수혹 0~5품을 끊고 견도에 듦
- 예류과(預流果)도류지 · 「極七返」 인간과 하늘에 각각 일곱 번(중유 · 생유 합쳐 28)
- (가가 家家: 욕계 3 · 4품을 끊고 무루근을 얻음 · 남은 생 3 · 2)
- 일래향(一來向)1~5품배리욕자(6~8품을 끊고 견도) → 견도에서 일래향
- 일래과(一來果)6품 · 「往天上一來人間」 하늘에 갔다가 한 번 인간에 옴 · 박탐진치
- (일간 一間: 7 · 8품 · 남은 생 1)
- 불환향(不還向)7 · 8품전리욕자(9품 이상을 끊고 견도) → 견도에서 불환향
- 불환과(不還果)9품 · 욕계에 다시 나지 않음 · 오하분결을 끊음
- 아라한향(阿羅漢向)초선 1품부터 유정천 8품까지
- 금강유정(金剛喻定)유정천 9품의 무간도
- 아라한과(阿羅漢果)진지 · 무학
불환자의 갈래 — 다섯 · 일곱 · 아홉
불환자는 경전에서 여러 방식으로 나뉜다. 먼저 색계로 가는 다섯 갈래다.
此中生有行,無行般涅槃, 上流若雜修,能往色究竟, 超半超遍歿,餘能往有頂, 行無色有四,住此般涅槃。
이 가운데 중 · 생 · 유행 · 무행으로 열반에 드는 이와 상류가 있다. 상류가 잡수를 했으면 색구경천에 갈 수 있으니 전초 · 반초 · 변몰이 있고, 나머지는 유정천에 갈 수 있다. 무색계로 가는 이는 넷이 있고, 여기에 머물러 열반에 드는 이가 있다.
- 중반열반(中般涅槃) — 색계로 가는 중유(中有)의 자리에서 열반한다.
- 생반열반(生般涅槃) — 색계에 태어나 오래지 않아 열반한다. 부지런히 닦는 것과 빠르게 나아가는 길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 — 색계에 태어나 오래도록 가행을 쉬지 않고 많은 공력을 들여 열반한다.
-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 — 색계에 태어나 오래 지나, 가행을 게을리하여 많은 공력 없이 열반한다.
- 상류(上流) — 색계에 태어나 거기서 바로 열반하지 못하고 더 위로 올라가 태어나서 열반한다.
여기서 「열반」은 유여의열반을 말한다.
상류는 다시 원인과 결과로 나뉜다. 원인은 정려를 「잡수(雜修)」했느냐 아니냐, 결과는 색구경천에 이르느냐 유정천에 이르느냐다. 잡수한 이는 색구경천까지 가서 열반하는데, 이것이 다시 셋이다. 전초(全超)는 욕계에서 네 정려를 잡수했다가 인연을 만나 위의 세 정려에서 물러나 초선에 대한 애착으로 범중천에 태어나고, 거기서 다시 제4정려를 잡수하여 범중천에서 죽자마자 색구경천에 나는 이다. 맨 처음 하늘에서 맨 마지막 하늘로 중간을 다 뛰어넘는다. 반초(半超)는 차례로 정거천의 아래쪽에 태어나다가 중간의 한 곳 이상을 뛰어넘어 색구경천에 나는 이, 변몰(遍歿)은 모든 곳에 차례로 다 태어난 뒤 색구경천에 나는 이다. 다만 성자는 대범천에는 나지 않는다. 그곳은 그릇된 견해의 자리이고 한 세계에 인도자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불환자는 이미 태어난 곳에 두 번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날 때마다 더 뛰어난 곳을 구하지, 같거나 못한 곳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름은 욕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하늘에 대해서도 그렇게 완성된다.
잡수하지 않은 상류는 색계 여러 하늘을 두루 태어나되 정거천에는 가지 못하고, 색계에서 죽어 무색계의 세 곳에 차례로 나고 마지막에 유정천에서 열반한다. 앞의 상류는 관(觀)을 즐기는 이, 뒤의 상류는 지(止)를 즐기는 이다.
무색계로 가는 불환자(行無色)는 욕계에서 색계의 탐을 떠나 죽어서 바로 무색계에 나는 이로, 생반 · 유행반 · 무행반과 상류의 넷이 있다(무색계에는 중유가 없으므로 중반이 없다). 이렇게 색계로 가는 다섯, 무색계로 가는 하나(넷을 하나로 묶어)가 여섯이고, 색계에도 무색계에도 가지 않고 이 생에서 열반하는 현반열반(現般涅槃)을 더하면 일곱이 된다.
이어서 색계로 가는 다섯은 다시 아홉으로 나뉜다. 중반 · 생반 · 상류를 셋으로 묶고 각각을 다시 셋으로 나눈 것이다. 중반은 빠르게 · 빠르지 않게 · 오래 지나 열반하는 셋이 있으며, 경전은 이를 「세 불티의 비유(三火星喩)」로 보인다. 생반에는 생반 · 유행반 · 무행반의 셋이, 상류에는 전초 · 반초 · 변몰의 셋이 있다. 이 아홉의 차이는 업 · 혹 · 근의 차이에서 온다. 후생에 일어나게 하는 업(順後受業)의 차이, 하 · 중 · 상 번뇌의 현행의 차이, 상 · 중 · 하 근기의 차이다.
일곱 선사취 — 왜 일곱만을 「선한 사람의 길」이라 하는가
그러면 경전은 왜 불환자를 일곱 선사취(七善士趣)라고만 하는가. 중반 셋, 생반 셋, 상류 하나로 일곱을 세운 것이다(상류는 「위로 흐르는 법」이 같으므로 하나로 묶는다). 왜 다른 유학이 아니라 이들에게만 「선한 사람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立七善士趣,由上流無別, 善惡行不行,有往無還故。
일곱 선사취를 세우니, 상류는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선은 행하고 악은 행하지 않으며, 감은 있고 돌아옴은 없기 때문이다.
이 일곱만이 선업을 행하고 악업을 행하지 않으며, 위의 계로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머지 유학은 선업을 행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악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다시 돌아온다.
『구사론』은 불환자를 얼마나 세밀하게 나눌 수 있는지 계산까지 보여 준다. 중반 하나만 해도 근(하 · 중 · 상)으로 셋, 지(초선 등으로 가는 곳)로 넷, 종성(퇴법 등)으로 여섯, 처(범중천 등 열여섯 하늘)로 열여섯, 지를 떠난 정도로 서른여섯이 된다. 처 · 종성 · 이염 · 근을 곱하면 16 × 6 × 9 × 3 = 2,592가지이며, 다섯 종류를 모두 합하면 12,960가지가 된다. 「거칠게 말하면 이렇지만 자세히 나누면 수천이 된다(若細分析數成多千)」는 것이다.
잡수정려와 다섯 정거천
상류 가운데 색구경천에 이르는 이는 정려를 잡수한 이였다. 잡수란 무엇인가.
先雜修第四,成由一念雜, 為受生現樂,及遮煩惱退。
먼저 제4정려를 잡수하니, 한 찰나가 섞임으로 이루어진다. 생을 받기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고 번뇌로 물러남을 막기 위해서다.
잡수하는 이는 아라한이나 불환자다. 먼저 제4정려에 들어가 여러 찰나의 무루를 이어서 일으키고, 거기서 여러 찰나의 유루를, 다시 여러 찰나의 무루를 일으키며, 이렇게 되풀이하며 차츰 줄여 마침내 두 찰나 무루 · 두 찰나 유루 · 두 찰나 무루가 되면 잡수의 가행이 찬다. 그다음 한 찰나 무루에서 한 찰나 유루를, 바로 이어 한 찰나 무루를 일으키면 — 유루의 한 찰나가 앞뒤의 무루 찰나에 섞이므로 — 잡수정의 근본이 이루어진다. 앞의 두 찰나는 무간도와 비슷하고 셋째 찰나는 해탈도와 비슷하다. 제4정려를 먼저 하는 것은 그 삼매가 가장 감당할 힘이 있고 즐거운 통행(樂通行)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잡수의 목적은 셋이다. 이근의 불환자는 현법락과 정거천에 나기 위해, 둔근의 불환자는 거기에 더해 물러남을 막기 위해 잡수한다. 잡수하면 애착과 함께하는 삼매(味定)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이근이면 현법락을 위해, 둔근이면 번뇌가 일어나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잡수한다.
그리고 정거천이 왜 다섯뿐인가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
由雜熏修第四靜慮有五品故,淨居唯五。
제4정려를 섞어 훈습하여 닦는 데 다섯 품이 있으므로 정거천은 다섯뿐이다.
하품은 무루 · 유루 · 무루의 세 찰나로 이루어지고, 중품은 여섯, 상품은 아홉, 상승품은 열둘, 상극품은 열다섯 찰나로 이루어진다. 이 다섯 품이 차례로 무번 · 무열 · 선현 · 선견 · 색구경의 다섯 정거천을 불러온다. 무루의 힘이 유루를 훈습하여 정거천의 과를 맺게 하는 것이다. 다른 논사는 신 등 다섯 근이 차례로 증상하여 다섯 정거천을 불러온다고 한다.
신증 — 몸으로 증득한 불환자
경전은 불환자 가운데 「신증(身證)」이 있다고 한다. 멸진정을 얻은 불환자다. 몸으로 열반과 비슷한 법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왜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증득했다고 하는가. 멸진정에는 마음이 없고 몸에 의지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친은 다르게 풀이한다.
理實應言,彼從滅定起,得先未得,有識身寂靜,便作是思:此滅盡定最為寂靜、極似涅槃。如是證得身之寂靜,故名身證。
실제 이치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가 멸진정에서 일어나 일찍이 얻지 못했던 식이 있는 몸의 고요함을 얻고, 「이 멸진정은 가장 고요하여 열반과 지극히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몸의 고요함을 증득하므로 신증이라 한다.
멸진정 그 자체가 아니라, 멸진정에서 나온 뒤에 알게 된 몸의 고요함이 「증득」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멸진정의 자세한 분석은 구식 페이지와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의 심불상응행 부분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수행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만 본다. 그런데 경전의 「열여덟 유학」에는 신증이 들어 있지 않다. 왜인가. 유학은 무루의 삼학(계 · 정 · 혜)과 그 과의 차이로 세우는데, 멸진정은 학도 아니고 학의 과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라한향과 금강유정
불환자가 색계와 무색계의 수혹을 끊어 나가면, 초선의 한 품을 끊는 데서 유정천의 여덟째 품을 끊는 데까지가 아라한향이다.
上界修惑中,斷初定一品, 至有頂八品,皆阿羅漢向。 第九無間道,名金剛喻定, 盡得俱盡智,成無學應果。
위의 계의 수혹 가운데 초정려의 한 품을 끊는 데서 유정천의 여덟 품까지는 모두 아라한향이다. 아홉째의 무간도를 금강유정이라 하니, 다함의 득과 함께하는 진지로 무학의 응과를 이룬다.
유정천의 아홉째 품을 끊는 무간도가 금강유정이다. 모든 수면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수면은 대부분 이미 끊어졌다. 그래서 『구사론』은 정확히 말한다 — 「실제로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이다(不破一切實有,能破一切功能)」. 번뇌를 끊는 무간도 가운데 이 삼매와 상응하는 것이 가장 뛰어나다.
금강유정 바로 뒤에 진지(盡智)가 일어난다. 번뇌를 끊는 최후의 해탈도이며, 모든 누(漏)가 다한 득과 처음으로 함께 생기므로 진지라 한다. 진지가 일어나면 무학의 아라한과를 이룬다. 더 얻을 과를 위해 배울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고, 오직 남을 위한 일만 하고 물든 이들에게 공양받아야 하므로 아라한(應)이다.
유학 · 무학, 그리고 「여덟이지만 다섯」
앞의 네 향과 세 과를 유학(有學)이라 한다. 누가 다하기를 위해 늘 배우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배움은 계 · 정 · 혜의 증상학 셋이다. 그러면 범부도 계 · 정 · 혜를 닦으니 유학이 아닌가. 아니다. 진리를 여실히 보지 못했고, 뒤에 바른 배움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가 「배울 것을 배운다, 배울 것을 배운다」고 두 번 말한 것은, 바르게 배우고 물러남이 없어야 유학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유학의 법은 유학이 지닌 무루 유위법, 무학의 법은 무학이 지닌 무루 유위법이다. 열반은 유학의 법도 무학의 법도 아니다. 범부도 (비택멸 등으로) 그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학과 무학은 「행하는 향(行向)」과 「머무는 과(住果)」가 각각 넷이어서 여덟 성자가 된다. 그러나 실체로는 다섯뿐이다.
名雖有八事唯有五,謂住四果及初果向,以後三果向不離前果故。
이름은 여덟이지만 실체는 다섯뿐이니, 네 과에 머무는 이와 첫 과의 향이다. 뒤의 세 과의 향은 앞의 과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래향은 예류과에 머물면서 나아가는 이, 불환향은 일래과에 머물면서 나아가는 이, 아라한향은 불환과에 머물면서 나아가는 이다. 다만 이것은 차례로 과를 얻는 이에 대한 말이고, 배리욕자 · 전리욕자가 견도에 있으면서 일래향 · 불환향이라 불리는 경우는 앞의 과에 속하지 않는다.
어떤 길로 어느 지를 떠나는가
수도는 세속도와 무루도 두 가지에 통한다고 했다. 그러면 어떤 길로 어느 지의 염오를 떠나는가.
有頂由無漏,餘由二離染。
유정천은 무루로 염오를 떠나고, 나머지는 두 가지로 떠난다.
유정천의 염오는 오직 무루도로만 떠난다. 그 위에 세속도가 없고, 자기 지의 길은 자기 지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지의 번뇌는 자기 지의 길 안에서 「따라 늘어나므로(隨增)」, 그 길이 그 번뇌를 다스릴 힘이 있다면 번뇌가 그 길 안에서 늘어날 수 없다. 나머지 여덟 지는 세속도와 무루도 모두로 떠날 수 있다.
어느 지의 길로 어느 지를 떠나는가. 미지정에 속하는 무루도는 욕계부터 유정천까지 모든 지를 떠날 수 있다. 중간정 · 사정려 · 세 무색에 속하는 무루도는 자기 지와 그 위의 지를 떠나지만 아래 지는 떠나지 않는다(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유루도는 오직 바로 아래의 지만 떠난다.
세속도의 무간도와 해탈도는 어떤 행상을 짓는가.
世無間解脫,如次緣下上, 作麁苦障行,及靜妙離三。
세속의 무간도와 해탈도는 차례로 아래와 위를 반연하여, 거칠다 · 괴롭다 · 막혔다는 행상과 고요하다 · 묘하다 · 벗어났다는 세 행상을 짓는다.
아래 지는 고요하지 않으므로 거칠고(麁), 무거움이 많아 해치므로 괴롭고(苦), 감옥의 두꺼운 벽처럼 자기 지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므로 막혀 있다(障). 위 지는 그 반대다. 이 「육행관(六行觀)」이라 불리는 세속도의 방식은 사제의 십육행상으로 끊는 무루도와 짝을 이루며, 범부가 선정으로 번뇌를 누르고 위로 올라가는 길의 문법이다.
사문과 — 여든아홉 가운데 넷만을 세운 까닭
예류 · 일래 · 불환 · 아라한은 「사문과(沙門果)」다. 사문의 본성은 무엇인가.
淨道沙門性,有為無為果, 此有八十九,解脫道及滅。 五因立四果,捨曾得勝道, 集斷得八智,頓修十六行。
맑은 길(무루도)이 사문성이고, 유위와 무위가 그 과다. 이것이 여든아홉이니, 해탈도와 택멸이다. 다섯 원인으로 네 과를 세우니, 일찍이 얻은 길을 버리고, 뛰어난 길을 얻으며, 끊음을 모아 얻고, 여덟 지를 얻고, 열여섯 행상을 한꺼번에 닦는 것이다.
무루도를 지닌 이가 사문이다. 부지런히 애써 번뇌를 쉬게 하기 때문이다. 범부는 다름없이 끝까지 열반으로 향하지 못하므로 참 사문이 아니다. 사문과는 실제로는 여든아홉이다. 견소단을 끊는 여덟 무간도 · 여덟 해탈도, 수소단을 끊는 여든하나의 무간도 · 여든하나의 해탈도가 있는데, 해탈도 하나하나가 유위의 사문과이고 각각의 택멸이 무위의 사문과다. 8 + 81 = 89다.
그런데 경전은 왜 넷만 말하는가. 다섯 원인을 다 갖춘 자리만 과로 세웠기 때문이다. 일찍이 얻은 향의 길을 버리고, 과에 속하는 뛰어난 길을 얻으며, 하나의 득으로 여러 끊음을 모아 얻고, 네 법지 · 네 유지의 여덟 지를 얻으며, 비상 등 열여섯 행상을 한꺼번에 닦는다. 네 과의 자리에서만 이 다섯이 모두 갖추어진다.
세속도로 얻은 일래 · 불환도 사문과인가. 그렇다. 그 과는 세속도로 얻은 택멸만이 아니라 견도로 얻은 택멸이 섞여 하나의 과를 이루고, 세속도로 얻은 택멸도 무루의 끊음의 득이 붙들어 주기 때문이다.
본송
阿羅漢有六,謂退至不動, 前五信解生,總名時解脫, 後不時解脫,從前見至生。
아라한에는 여섯이 있으니, 퇴법에서 부동법까지다. 앞의 다섯은 신해에서 생기며 통틀어 시해탈이라 하고, 뒤의 것은 불시해탈이니 앞의 견지에서 생긴다.
加行根滅定,解脫故成七, 此事別唯六,三道各二故。
가행 · 근 · 멸정 · 해탈 때문에 일곱이 되지만, 실체로 다른 것은 여섯뿐이니, 세 도에 각각 둘이기 때문이다.
술어 풀이
- 退法 · 思法 · 護法 · 安住法 · 堪達法 · 不動法퇴법 · 사법 · 호법 · 안주법 · 감달법 · 부동법
- 아라한의 여섯 종성(gotra). 작은 인연에도 물러나는 이, 물러날까 두려워 늘 스스로 해치기를 생각하는 이, 얻은 것을 기꺼이 지키는 이, 지키지 않아도 물러나지 않지만 더 나아가지도 않는 이, 근기를 단련해 부동에 빨리 이를 수 있는 이, 결코 물러나지 않는 이.
- 時解脫 · 不時解脫시해탈 · 불시해탈
- 시해탈(samayavimukta)은 좋은 조건이 모이는 때를 기다려야 선정에 들 수 있는 아라한, 불시해탈(asamayavimukta)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삼매가 나타나는 아라한. 앞의 다섯 종성과 부동법이다.
- 練根연근
- 범어 indriyasaṃcāra. 둔한 근기를 단련하여 더 뛰어난 종성으로 옮기는 것. 무학위에서는 아홉 무간도 · 아홉 해탈도, 유학위에서는 한 무간도 · 한 해탈도로 한다.
- 慧解脫 · 俱解脫혜해탈 · 구해탈
- 지혜의 힘으로만 번뇌장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혜해탈(prajñāvimukta), 멸진정을 얻어 지혜와 선정의 힘으로 번뇌장과 해탈장에서 함께 벗어난 아라한이 구해탈(ubhayatobhāgavimukta)이다.
- 七聖칠성자
- 수신행 · 수법행 · 신해 · 견지 · 신증 · 혜해탈 · 구해탈. 모든 성자가 여기에 포섭된다.
- 四道네 가지 길
- 가행도 · 무간도 · 해탈도 · 승진도. 모든 길을 간략히 이 넷으로 포섭한다.
- 菩提分法보리분법
- 범어 bodhipakṣya dharma. 진지 · 무생지라는 깨달음(覺)에 따르는 서른일곱 법. 사념주 · 사정단 · 사신족 · 오근 · 오력 · 칠각지 · 팔성도지.
- 證淨증정
- 범어 avetyaprasāda. 사제를 여실히 깨달아(證) 얻는 깨끗함(淨). 불 · 법 · 승에 대한 믿음과 성자가 아끼는 계의 넷이다.
여섯 종성 — 물러날 수 있는 아라한
부동법의 아라한은 진지 바로 뒤에 무생지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면 아라한도 예류 등처럼 차이가 있는가. 있다. 경전은 종성의 차이로 여섯 아라한을 든다. 앞의 다섯은 유학 시절 신해(둔근)였던 이에게서 생기며, 「때에 맞는 사랑스러운 심해탈(時愛心解脫)」이라 부른다. 늘 사랑하여 지키는 마음의 해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줄여 시해탈이라고도 한다. 우유 병을 「병」이라고 줄이는 것과 같다. 이 아라한들은 자구 · 병이 없음 · 장소 등 뛰어난 조건이 모이는 때를 기다려야 선정에 들 수 있다. 부동법은 유학 시절 견지(이근)였던 이에게서 생기며, 「부동심해탈」 「불시해탈」이라 부른다. 물러남이나 흔들림이 없고, 원하는 대로 삼매가 나타나 때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잠시의 해탈과 끝까지의 해탈로 나누어, 물러날 수 있는 때가 있는 것과 물러날 때가 없는 것으로 시해탈 · 불시해탈이라 한다는 해석도 함께 실려 있다.
여섯의 정의는 이렇다.
言退法者,謂遇少緣便退所得,非思法等。言思法者,謂懼退失恒思自害。言護法者,謂於所得喜自防護。安住法者,離勝退緣雖不自防亦能不退,離勝加行亦不增進。堪達法者,彼性堪能好修練根速達不動。不動法者,彼必無退。
퇴법은 작은 인연을 만나면 곧 얻은 것에서 물러나는 이이니, 사법 등과 같지 않다. 사법은 물러나 잃을까 두려워 늘 스스로 해치기를 생각하는 이다. 호법은 얻은 것을 기꺼이 스스로 지키는 이다. 안주법은 물러나게 하는 강한 인연을 떠나 있으면 스스로 지키지 않아도 물러나지 않지만, 뛰어난 가행을 떠나 있으면 더 나아가지도 않는 이다. 감달법은 그 성품이 근기를 잘 단련하여 부동에 빨리 이를 수 있는 이다. 부동법은 결코 물러남이 없는 이다.
『구사론』은 이 차이를 유학 시절의 두 가지 가행 — 늘 닦음(恒時加行)과 공경하여 닦음(尊重加行) — 으로 설명한다. 처음 둘(퇴법 · 사법)은 둘 다 없고, 셋째(호법)는 늘 닦음만, 넷째(안주법)는 공경하여 닦음만 있으며, 다섯째(감달법)는 둘을 갖추었으나 둔근이고, 여섯째(부동법)는 이근으로 둘을 갖추었다. 다만 「퇴법」이라 해서 반드시 물러나는 것이 아니고 「감달법」이라 해서 반드시 이르는 것도 아니다. 가능성으로 이름을 세웠을 뿐이다. 그래서 여섯 아라한이 삼계에 모두 있다. 반드시 물러나고 반드시 이른다고 보는 이는, 색계 · 무색계에는 물러남 · 자해 · 자방 · 연근이 없으므로 거기에는 안주법과 부동법 둘뿐이라고 할 것이다.
이 종성은 처음부터 가진 것인가, 뒤에 얻는 것인가. 퇴법은 반드시 처음부터 가진 것이고, 나머지 다섯은 처음부터 가졌을 수도 있고 뒤에 근기를 단련하여 얻었을 수도 있다.
무엇에서 물러나는가 — 종성에서, 과에서
四從種性退,五從果非先。
넷은 종성에서 물러나고, 다섯은 과에서 물러나되 먼저의 것에서는 아니다.
부동법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앞의 다섯은 모두 물러남이 있다. 그 가운데 뒤의 넷(사법 · 호법 · 안주법 · 감달법)은 종성에서 물러날 수 있다. 퇴법은 가장 아래 종성이라 종성에서 물러날 곳이 없다. 다섯 모두 과에서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먼저의 것(先)」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학위에서 가졌던 종성은 학도와 무학도로 굳어졌으므로 무학이 거기서 물러나는 일은 없고, 범부 시절의 종성도 세간도 · 출세간도로 굳어졌으므로 유학이 거기서 물러나는 일은 없다. 물러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뒤에 근기를 단련해 얻은 종성뿐이다. 과도 마찬가지로, 먼저 얻은 과에서는 물러나지 않고 뒤에 얻은 과에서만 물러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류과에서 물러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면 왜 먼저 얻은 과 — 특히 견도로 얻은 예류과 — 에서는 물러나지 않는가. 이것이 퇴법 논쟁의 출발점이다.
「견혹은 근거 없는 것에 기댄다」 — 예류는 물러나지 않는다
『구사론』의 답은 번뇌가 기대는 「일(事)」의 유무다.
以見所斷依無事故。謂有身見依我處轉,見所斷惑此見為根,我體既無名依無事,以無事故必無退理。
견소단은 근거 없는 일에 기대기 때문이다. 유신견은 나라는 자리에 기대어 일어나고, 견소단의 번뇌는 이 견해를 뿌리로 하는데, 나의 체가 본래 없으므로 근거 없는 일에 기댄다고 한다. 근거 없는 일이므로 결코 물러날 이치가 없다.
반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견혹은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견혹도 사제를 대상으로 한다. 다만 사제의 대상을 여실하지 않게 반연한다. 그런 것은 모든 번뇌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차이가 있다. 수소단의 번뇌는 각각 따로 기대는 일이 있다 —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등이며, 그 대상에 그런 모습이 없지 않다. 색 등은 실제로 좋고 나쁜 차이가 조금은 있다. 그러나 견소단의 번뇌는 나 등이 있다고 헤아리는데, 사제의 대상에는 나라는 모습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인 대조가 이어진다.
聖不審慮於麁事中失念或生,審慮不爾,如於繩等率爾謂蛇。故修斷惑聖有退起,非由率爾可起見惑。
성자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거친 일 가운데 생각을 놓치면 (번뇌가) 생길 수 있지만, 깊이 생각할 때는 그렇지 않으니, 새끼줄 등을 문득 뱀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수소단의 번뇌는 성자에게도 물러나 일어날 수 있지만, 견혹은 문득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견혹은 진리를 미혹하여 「따져 헤아림(推度)」으로 일어난다. 성자가 따져 헤아리면 그 즉시 진리를 본다. 그러므로 견혹은 성자에게 다시 일어날 수 없다. 수혹은 거친 일에 대해 「어둡고 둔한 성질(昧鈍性)」로 일어난다. 따져 헤아려서가 아니라 문득 일어나므로, 성자도 생각을 놓치면 수혹이 일어날 수 있다. 어두운 길에서 새끼줄을 보고 뱀인가 하고 놀라는 것은, 뱀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반응이다. 진리를 본 이도 몸에 밴 반응에서는 아직 자유롭지 않다.
아라한은 물러나는가 — 경량부와 유부의 대론
여기서 『구사론』은 분명히 편을 든다.
經部師說:從阿羅漢亦無退義。彼說應理。云何知然?由教理故。
경량부 논사는 아라한에서도 물러날 뜻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이 이치에 맞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교와 이 때문이다.
천친이 드는 교증은 다섯 갈래다.
- 경에 「비구여, 성스러운 지혜로 번뇌를 끊는 것을 참된 끊음이라 한다」고 했다. 참된 끊음이라면 되돌아갈 수 없다.
- 경에 「나는 유학에게는 방일하지 말라고 하지만 아라한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 경에 부처가 아난에게 「이익과 공양 등이 아라한에게도 장애가 된다」고 했지만, 아라한과에서 물러난다고 하지 않고 다만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물러난다고 했다.
- 경에 「부동심해탈을 몸으로 증득하면, 나는 결코 그로부터 물러날 인연이 없다고 말한다」고 했다.
- 『증십경(增十經)』에 「한 법을 일으켜야 하니 시애심해탈이요, 한 법을 증득해야 하니 부동심해탈이다」라고 했다. 시애심해탈이 아라한의 과성(果性)이라면 왜 여기서 아라한을 두 번 말하는가. 또 아라한과를 「일으켜야 할 것」이라 한 곳은 없고 「증득해야 할 것」이라고만 했다. 그러므로 시해탈은 아라한의 과성이 아니라, 근기가 둔하여 때를 기다려 나타나는 선정이다.
그렇다면 「시애해탈」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천친에 따르면 그것은 근본정려 등의 등지(等持)다. 때를 기다려 나타나므로 「때」이고, 현법락주를 얻으려고 자주 나타나기를 바라므로 「사랑」이다. 아라한의 과성인 해탈은 늘 따라다니므로 「때」라 할 수 없고, 더 구하지 않으므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라한이 물러나는 것은 과가 아니라 현법락주에 대한 자재(自在)일 뿐이다. 둔근은 이익 등의 어지러움 때문에 거기서 물러나기도 하고, 이근은 물러나지 않는다. 「퇴법 · 불퇴법」이라는 이름은 이 의미로 세운 것이다.
이증은 짧고 날카롭다.
若阿羅漢有令煩惱畢竟不起治道已生,是則不應退起煩惱。若阿羅漢此道未生,未能永拔煩惱種故,應非漏盡。
만일 아라한에게 번뇌를 끝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다스림의 길이 이미 생겼다면, 물러나 번뇌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일 아라한에게 이 길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번뇌의 종자를 영원히 뽑지 못했으므로 누가 다한 이가 아니어야 한다.
양도논법이다. 아라한이 번뇌를 끝까지 막는 길을 얻었다면 물러날 수 없고, 얻지 못했다면 처음부터 아라한이 아니다. 여기서 「종자」라는 경량부의 개념이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경량부에게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마음의 흐름에 남은 번뇌의 종자를 뽑는 것이고, 종자가 뽑혔다면 번뇌는 다시 날 수 없다.
천친은 유부 쪽의 대표적인 경증 두 가지도 풀이한다. 하나는 고디카(喬底迦)의 이야기다. 경전에 따르면 고디카는 여러 번 물러나 스스로 칼로 목숨을 끊었다. 유부는 이것을 아라한이 물러난 예로 든다. 천친은 이렇게 읽는다.
然喬底迦昔在學位,於時解脫極噉味故,又鈍根故數數退失,深自厭責執刀自害。由於身命無所戀惜,臨命終時得阿羅漢便般涅槃,故喬底迦亦非退失阿羅漢果。
고디카는 예전에 유학의 자리에 있으면서 시해탈을 지나치게 맛보아 즐겼고, 또 둔근이었으므로 여러 번 물러나 잃었다. 깊이 스스로를 꾸짖어 칼을 잡고 스스로를 해쳤는데, 몸과 목숨에 아무 미련이 없었으므로 목숨이 다할 때 아라한을 얻고 곧 열반했다. 그러므로 고디카도 아라한과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숯불의 비유 경(炭喩契經)」이다. 경에 「많이 들은 성제자도 가거나 머물 때 어떤 곳 어떤 때에 생각을 놓쳐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 경은 아라한을 말한다는 것이 유부의 주장이다. 같은 경이 그 제자가 「오랜 밤 동안 멀리 떠남을 따르고 … 열반에 들려 한다」고 하고, 「누를 따르는 모든 것을 이미 영원히 토해 내 청량함을 얻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천친은 경의 뒷부분이 아라한을 말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앞부분의 「생각을 놓쳐 착하지 않은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가 아직 유학이었을 때의 일이라고 풀이한다. 유학은 생각을 놓쳐 번뇌를 일으킬 수 있지만 무학이 되면 그런 일이 없다.
그러나 이 대론의 결론은 천친의 판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행의 마지막 문장은 「비바사사는 반드시 『아라한과에도 물러남이 있다』고 말한다(毘婆沙師定作是說:阿羅漢果亦有退義)」이다. 『구사론』은 정설을 소개하는 책이므로 정설의 입장을 마지막에 다시 적어 둔다.
중현의 반론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 대목의 천친을 「경주(經主)」라 부르며 길게 반박한다. 그 요지는 이렇다. 첫째, 경에 「부동심해탈을 몸으로 증득하면 그로부터 물러날 인연이 없다」고 말한 것은, 거꾸로 말하면 부동이 아닌 나머지 해탈에는 물러날 이치가 있다는 뜻이다. 둘째, 경에는 시애해탈에 대해서도 「몸으로 증득했다(身作證)」는 말이 있으므로, 부동해탈과 마찬가지로 시애해탈도 아라한의 과성이다. 셋째, 「시애해탈이 곧 현법락주」라는 주장은 어떤 경에도 없는 말이니 「어린아이가 제 방 안에서 하는 말(童竪居自室言)」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 고디카에 대한 천친의 해석도 성교와 맞지 않는다. 유학의 자리에서 시해탈을 맛본다면 유학을 시해탈이라 불러야 하는데, 그런 성교는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무학의 몸에는 번뇌의 종자가 없으므로 물러날 이치가 없다」는 주장은, 유루와 무루가 서로 인(因)이 될 수 있다는 경량부 자신의 주장과 맞물려 결국 무너진다고 중현은 논한다.
『이부종륜론』에 따르면 이 문제는 부파 분열의 주요 쟁점이었다. 설일체유부는 「예류자에게는 물러남이 없고 아라한에게는 물러남이 있다(預流者無退義。阿羅漢有退義)」고 했고, 대중부 계통은 반대로 「예류자에게는 물러남이 있고 아라한에게는 물러남이 없다(預流者有退義。阿羅漢無退義)」고 했다. 『구사론』의 경량부는 예류에도 아라한에도 물러남이 없다는 쪽에 서고, 유부는 「아라한의 물러남」을 끝까지 지킨다.
물러나도 다시 얻는다 — 세 가지 물러남
유부의 입장에서 아라한이 물러난다면, 물러난 아라한은 어떻게 되는가. 『구사론』은 이렇게 답한다.
一切從果退,必得不命終, 住果所不為,慚增故不作。
과에서 물러난 모든 이는 반드시 (다시) 얻으며, (그 사이에) 목숨을 마치지 않는다. 과에 머물 때 하지 않던 일은, 부끄러움이 커서 (물러났을 때도) 하지 않는다.
과에서 물러났다가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는 일은 없다. 물러난 뒤 잠깐 사이에 반드시 다시 얻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범행을 닦은 과보가 안온하게 믿을 곳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과에 머물 때 하지 않던 일, 과에 어긋나는 일은 잠시 물러났을 때에도 부끄러움이 커서 결코 하지 않는다. 『구사론』은 이를 「힘센 장사는 비틀거려도 넘어지지 않는다(譬如壯士雖蹶不仆)」는 비유로 말한다.
그리고 물러남은 세 가지로 나뉜다.
- 이미 얻은 것에서 물러남(已得退) — 이미 얻은 뛰어난 공덕을 잃음.
- 아직 얻지 못한 것에서 물러남(未得退) — 뛰어난 공덕을 아직 얻지 못함.
- 누림에서 물러남(受用退) — 이미 얻은 뛰어난 공덕이 지금 나타나 있지 않음.
부처에게는 세 번째 누림의 물러남만 있다. 온갖 공덕을 갖추었으나 한꺼번에 모두 나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동법의 아라한에게는 누림의 물러남과 아직 얻지 못함의 물러남이 있다. 자기보다 뛰어난 이의 공덕을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섯 종성에게는 셋이 모두 있다. 경전의 「부동법도 현법락에서 물러난다」는 말은 누림의 물러남을 말한 것이다. 물러남이 없다고 보는 이들(無退論者, 보광은 경량부로 본다)은 「모든 무루의 해탈은 다 부동이다」라고 말하고, 그런데도 따로 여섯째 「부동법」을 세우는 것은 유루의 현법락주에 대해서라고 풀이한다.
근기를 단련하다 — 연근
종성을 뒤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근기를 단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학과 범부에게도 여섯 종성이 있다. 여섯 아라한은 그들이 앞선 단계에서 지닌 종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다만 견도의 자리에서는 연근을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는 가행을 일으킬 틈이 없기 때문이다.
練根無學位,九無間解脫, 久習故學一,無漏依人三, 無學依九地,有學但依六, 捨果勝果道,唯得果道故。
무학의 자리에서 근기를 단련하는 것은 아홉 무간도와 아홉 해탈도로 하니, 오래 익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하나씩이다. 무루이며 사람의 세 주에 의지한다. 무학은 아홉 지에 의지하고, 유학은 여섯에만 의지하니, 과와 뛰어난 과의 길을 버리고 오직 과의 길을 얻기 때문이다.
무학의 자리에서 종성 하나를 옮기는 데 아홉 무간도와 아홉 해탈도가 필요하다. 아라한과를 얻을 때와 같다. 둔근의 성품은 오래 익어 굳었기 때문에 작은 힘으로는 옮길 수 없다. 학도와 무학도로 이루어져 견고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자리에서는 무간도와 해탈도 하나씩이면 된다. 처음 과를 얻을 때와 같다. 연근은 모두 무루도로만 하며, 사람의 세 주에서만 한다. 다른 곳에는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 무학과 칠성자
무학의 자리에 있는 성자는 몇 가지인가.
七聲聞二佛,差別由九根。
일곱 성문과 두 부처(독각과 부처)이니, 아홉 근의 차이 때문이다.
퇴법에서 감달법까지의 다섯, 그리고 부동법을 처음부터 부동인 이와 뒤에 단련해 부동이 된 이로 나누어 일곱 성문이 된다. 여기에 독각과 대각(부처)의 두 깨달은 이를 더해 아홉이다. 하하에서 상상까지 아홉 품의 근기 차이에 따른다.
그리고 유학과 무학을 통틀어 모든 성자를 일곱으로 포섭한다. 수신행 · 수법행 · 신해 · 견지 · 신증 · 혜해탈 · 구해탈이다. 그 기준은 네 가지다.
- 가행의 차이 — 수신행 · 수법행. 이전에 남(의 가르침)을 따르는가, 법을 따르는가로 가행을 닦았기 때문이다.
- 근의 차이 — 신해 · 견지. 둔근 · 이근에 따라 신근 · 혜근이 더 강하다.
- 멸진정의 유무 — 신증. 멸진정을 몸으로 증득했기 때문이다.
- 해탈의 차이 — 혜해탈 · 구해탈. 오직 지혜로 번뇌장에서 벗어난 이와, 선정을 함께 얻어 해탈장에서도 벗어난 이다.
이름은 일곱이지만 실체로 다른 것은 여섯이다. 견도의 두 성자(수신행 · 수법행)가 수도에 이르러 신해 · 견지라는 두 이름을 얻고, 무학에 이르러 시해탈 · 불시해탈이라는 두 이름을 얻으므로, 세 도에 각각 둘씩 여섯이다. 신증과 구해탈은 이 여섯 가운데 멸진정을 얻은 이에게 붙는 이름이다.
그리고 『구사론』은 여기서도 숫자를 놓치지 않는다. 수신행 하나만 해도 근으로 셋(하 · 중 · 상), 종성으로 다섯(퇴법 등), 견도의 찰나로 열다섯(여덟 인과 일곱 지), 이염의 정도로 일흔셋(구박에서 여덟 지의 염오를 떠난 것까지), 의지하는 몸으로 아홉(세 주와 여섯 욕천)이 되며, 이를 곱하면 147,825가지가 된다.
네 가지 길과 네 가지 통행
길의 차이는 끝이 없지만 간략히 말하면 넷으로 모두 포섭된다.
應知一切道,略說唯有四, 謂加行無間,解脫勝進道。
모든 길은 간략히 말하면 오직 넷뿐이니, 가행도 · 무간도 · 해탈도 · 승진도다.
가행도는 그 뒤에 무간도가 생기게 하는 길, 무간도는 끊어야 할 장애를 끊는 길, 해탈도는 끊어야 할 장애에서 벗어난 뒤 처음 생기는 길, 승진도는 그 나머지 세 길 이후의 길이다. 길(道)이란 무슨 뜻인가.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이것을 타고 열반의 성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구함의 의지처다. 이에 의지해 열반의 과를 찾기 때문이다. 해탈도와 승진도가 어떻게 길인가. 길과 같은 부류이고, 위의 품으로 나아가며, 앞의 힘이 뒤에 이르고, 무여의열반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같은 길을 다른 곳에서는 「통행(通行)」이라 한다. 열반으로 통하여 가기 때문이다. 통행에는 넷이 있다 — 괴롭고 느린 통행, 괴롭고 빠른 통행, 즐겁고 느린 통행, 즐겁고 빠른 통행. 네 근본정려에 의지한 길은 즐거운 통행이다. 지분을 거두어들이고 지(止)와 관(觀)이 고르게 저절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무색정 · 미지정 · 중간정에 의지한 길은 괴로운 통행이다. 지분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지와 관이 고르지 않아 힘들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무색정은 관이 줄고 지가 늘며, 미지정 · 중간정은 관이 늘고 지가 준다. 이 둘 안에서 다시 둔근은 느리고 이근은 빠르다. 「선정에 의지하는 지혜」라는 이 장의 주제가, 뒤의 정품이 왜 정려를 그토록 세밀하게 분석하는지를 미리 설명해 준다.
서른일곱 보리분법 — 열 가지 실체로
길은 「보리분법」이라고도 한다. 서른일곱이다.
覺分三十七,謂四念住等, 覺謂盡無生,順此故名分。 此實事唯十,謂慧勤定信, 念喜捨輕安,及戒尋為體。
깨달음의 부분은 서른일곱이니, 사념주 등이다. 깨달음은 진지와 무생지를 말하고, 이에 따르므로 부분이라 한다. 이 실체는 오직 열이니, 혜 · 근 · 정 · 신 · 념 · 희 · 사 · 경안, 그리고 계와 심을 체로 한다.
진지와 무생지가 「깨달음(覺)」이다. 무명의 잠이 영원히 끊어졌고, 할 일을 다 해 다시 할 일이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 깨달은 이의 차이에 따라 성문 · 독각 · 위없는 깨달음의 세 보리가 있다. 서른일곱 법은 이 깨달음에 따르므로 「보리분」이다.
서른일곱은 이름일 뿐, 실체는 열이다. 『구사론』의 배당은 이렇다.
- 혜(慧) — 사념주 · 혜근 · 혜력 · 택법각지 · 정견 (8)
- 근(勤, 정진) — 사정단 · 정진근 · 정진력 · 정진각지 · 정정진 (8)
- 정(定) — 사신족 · 정근 · 정력 · 정각지 · 정정 (8)
- 신(信) — 신근 · 신력 (2)
- 념(念) — 염근 · 염력 · 염각지 · 정념 (4)
- 희(喜) — 희각지 (1)
- 사(捨, 행사) — 사각지 (1)
- 경안(輕安) — 경안각지 (1)
- 계(戒) — 정어 · 정업 · 정명 (3)
- 심(尋) — 정사유 (1)
곧 신 · 근 · 념 · 정 · 혜의 다섯 근 · 력 위에 희 · 사 · 경안 · 계 · 심을 더한 열이다. 비바사사는 몸의 업과 말의 업이 섞이지 않으므로 계를 둘로 나누어 열하나라 한다. 그러면 사념주 · 사정단 · 사신족은 왜 혜 · 근 · 정으로만 말하는가. 실제로는 이 셋이 모든 가행의 선법을 포섭하지만, 같은 무리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을 따라 혜 · 근 · 정이라 한다. 「념주」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사념처에서 본 비바사사와 천친의 해석 차이가 여기서 되풀이된다. 「정단」은 바르게 끊음을 닦는 자리에서 정진의 힘이 게으름을 끊기 때문이며, 「정승(正勝)」이라고도 하는 것은 몸 · 말 · 뜻을 바르게 지니는 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신족」은 신통한 덕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신 등 다섯이 먼저 「근」이 되고 뒤에 「력」이 되는가. 하품과 상품으로 나뉘고, 눌릴 수 있는 것과 눌릴 수 없는 것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의 차례는 이렇다 — 인과를 믿고, 과를 위해 원인을 닦으려 정진하며, 정진하므로 념이 대상에 머물고, 념이 붙드니 마음이 정을 얻으며, 마음이 정을 얻으니 여실히 안다.
어느 것이 유루이고 어느 것이 무루인가. 칠각지와 팔성도지는 오직 무루다. 견도 · 수도에서만 세우기 때문이다. 세간에도 바른 견해 등이 있지만 성도지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 나머지는 유루 · 무루에 통한다.
네 증정과 무학의 열 지분
보리분법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증정(證淨)」을 얻는다. 불 · 법 · 승에 대한 증정과 성계(聖戒)에 대한 증정의 넷이다. 견도에서 고 · 집 · 멸 세 진리를 볼 때는 법과 계에 대한 증정만 얻고, 도제를 볼 때 부처와 승가에 대한 증정을 함께 얻는다. 부처를 이루는 무학의 법과 성문의 승가를 이루는 유학 · 무학의 법이 도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체로는 둘뿐이다. 불 · 법 · 승에 대한 증정은 믿음(信)이 체이고, 성계의 증정은 계가 체다. 사제의 이치를 여실히 깨달으므로 「증」이고, 믿지 않음의 때와 계를 깨뜨림의 때를 떠났으므로 「정」이다.
경전은 유학이 여덟 지분을, 무학이 열 지분을 성취한다고 한다. 왜 유학에게는 바른 해탈과 바른 지혜가 없는가. 아직 남은 속박이 있어서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탈에는 유위와 무위가 있는데, 유위해탈은 무학의 승해(勝解)이고 무위해탈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것이다. 지분은 유위에 대해 세우므로 무학의 지분이 되는 것은 유위해탈이다. 바른 지혜는 앞의 깨달음, 곧 진지와 무생지다.
현성품의 마지막 문답은 「싫어함(厭)」과 「떠남(離)」의 관계다. 고 · 집을 반연하는 인과 지만을 「싫어함」이라 하고, 네 진리 가운데 무엇이든 반연하여 번뇌를 끊는 인과 지를 「떠남」이라 한다. 둘은 넓고 좁음이 엇갈려 네 경우가 된다. 고 · 집을 반연하되 번뇌를 끊지 않는 인 · 지는 싫어함이지만 떠남이 아니고, 멸 · 도를 반연하여 번뇌를 끊는 인 · 지는 떠남이지만 싫어함이 아니며, 고 · 집을 반연하여 번뇌를 끊는 것은 둘 다이고, 멸 · 도를 반연하되 끊지 않는 것은 둘 다 아니다. 싫어하는 것과 벗어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벗어남은 싫어하는 마음에서만이 아니라, 열반과 도를 기뻐하는 마음에서도 온다. 이 마지막 문답으로 현성품은 끝나고, 『구사론』은 길의 본체인 지혜를 따로 분석하는 지품으로 넘어간다.
본송
聖慧忍非智,盡無生非見, 餘二有漏慧,皆智六見性。
성스러운 혜 가운데 인은 지가 아니고, 진지 · 무생지는 견이 아니며, 나머지는 둘(지 · 견)이다. 유루의 혜는 모두 지이고, 여섯은 견의 성품이다.
智十總有二,有漏無漏別, 有漏稱世俗,無漏名法類。
지는 열이지만 모두 둘이니 유루와 무루의 구별이다. 유루는 세속이라 하고, 무루는 법 · 유라 한다.
十八不共法,謂佛十力等。
열여덟 불공법은 부처의 십력 등이다.
술어 풀이
- 智 · 見 · 忍지 · 견 · 인
- 혜(prajñā) 가운데 의심을 끊어 확정한 것이 지(jñāna), 따져 헤아리는(推度) 성질이 있는 것이 견(dṛṣṭi), 아직 스스로 끊을 의심을 끊지 못한 것이 인(kṣānti)이다.
- 十智십지
- 세속지 · 법지 · 유지 · 고지 · 집지 · 멸지 · 도지 · 타심지 · 진지 · 무생지. 유루의 세속지 하나와 무루의 법지 · 유지 둘이 근본이고, 나머지는 대상 · 행상 · 가행 등으로 나눈 것이다.
- 盡智 · 無生智진지 · 무생지
- 진지(kṣayajñāna)는 「나는 이미 고를 알았고 집을 끊었고 멸을 증득했고 도를 닦았다」고 아는 무학의 지혜, 무생지(anutpādajñāna)는 거기에 「다시 알 필요가 없다 … 다시 닦을 필요가 없다」를 더해 아는 지혜. 무생지는 부동법의 아라한에게만 있다.
- 他心智타심지
- 범어 paracittajñāna. 남의 현재의 마음 · 심소를 아는 지혜. 유루라면 세속지, 무루라면 법지 · 유지 · 도지에 속한다. 자기보다 뛰어난 지 · 근 · 위의 마음은 알지 못한다.
- 十八不共法십팔불공법
- 범어 āveṇika buddhadharma. 부처에게만 있고 다른 성자에게 없는 열여덟 공덕. 『구사론』에서는 십력 · 사무외 · 삼념주 · 대비다. 부처가 진지를 얻을 때 닦는다.
- 十力십력
- 범어 daśa balāni. 처비처지력 등 열 가지 지혜의 힘. 모든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해 지혜가 걸림 없이 움직이므로 「힘」이라 한다.
- 無諍 · 願智 · 無礙解무쟁 · 원지 · 무애해
- 무쟁(araṇā)은 남의 번뇌가 자기를 대상으로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 원지(praṇidhijñāna)는 서원을 앞세워 원하는 대상을 아는 지혜, 무애해(pratisaṃvid)는 법 · 의 · 사 · 변의 네 가지 걸림 없는 앎. 부처와 다른 성자에게 공통된다.
- 六通 · 三明 · 三示導육통 · 삼명 · 삼시도
- 신경 · 천안 · 천이 · 타심 · 숙주 · 누진의 여섯 신통 가운데, 숙주 · 천안(사생) · 누진을 무학의 몸에서 삼명이라 하고, 신경 · 타심 · 누진을 신변 · 기심 · 교계의 세 시도라 한다.
인 · 지 · 견 — 세 개념의 교차
지품은 현성품의 처음과 끝을 받는다. 현성품 첫머리에서 「여러 인과 여러 지」를 말했고, 끝에서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지혜(正智)」를 말했다. 그렇다면 인이면서 지가 아닌 것이 있는가. 지이면서 견이 아닌 것이 있는가.
혜에는 유루와 무루가 있고, 무루의 혜만을 「성(聖)」이라 한다. 성스러운 혜 가운데 견도의 여덟 인은 지의 성품이 아니다. 스스로 끊어야 할 의심을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의 성품에는 들어간다. 따져 헤아리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진지와 무생지는 견의 성품이 아니다. 구하는 마음을 이미 쉬어 더 따져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 무루혜는 지이면서 견이다. 이미 의심을 끊었고 따져 헤아리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유루의 혜는 모두 지이며, 그 가운데 다섯 가지 염오의 견해(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견 · 계금취견)와 세간의 바른 견해(世正見)의 여섯만이 견이다.
견도에서 본 「인은 끊고 지는 증득한다」는 구도가 여기서 개념의 정의로 정리된다. 인은 보지만(見) 아직 알지(智) 못한다. 진지 · 무생지는 알지만 더 이상 「보려고」 따지지 않는다. 그 사이의 모든 무루혜는 보면서 안다.
열 가지 지혜 — 둘에서 열로
지혜는 열 가지로 모든 지혜를 포섭한다. 그러나 근본은 유루와 무루의 둘이며, 모양으로 나누면 셋이다. 유루의 지는 모두 세속지다. 대부분 병(瓶) 등 세속의 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무루의 지는 법지와 유지로 나뉜다. 세속지는 유위 · 무위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법지는 욕계의 사제를, 유지는 색계 · 무색계의 사제를 대상으로 한다.
법지와 유지는 대상의 차이로 다시 고 · 집 · 멸 · 도의 네 지로 나뉜다. 이 여섯(법 · 유 · 고 · 집 · 멸 · 도) 가운데 무학에 속하고 견의 성품이 아닌 것이 진지와 무생지다. 진지 · 무생지가 처음 생길 때는 오직 고류지 · 집류지다. 유정천의 오온을 고 · 집의 여섯 행상(고 · 집 각 넷 가운데 공 · 비아를 뺀 것)으로 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심지는 법지 · 유지 · 도지 · 세속지에서 이루어진다.
진지와 무생지의 정의는 본론에서 인용된다.
云何盡智?謂無學位若正自知:我已知苦、我已斷集、我已證滅、我已修道,由此所有智、見、明、覺、解、慧、光、觀,是名盡智。
진지란 무엇인가. 무학의 자리에서 스스로 바르게 「나는 이미 고를 알았고, 이미 집을 끊었고, 이미 멸을 증득했고, 이미 도를 닦았다」고 아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은 모든 지 · 견 · 명 · 각 · 해 · 혜 · 광 · 관을 진지라 한다.
무생지는 여기에 「다시 알 필요가 없다, … 다시 닦을 필요가 없다」를 더한 것이다. 그런데 무루의 지혜가 「나는 이미 알았다」는 식으로 자기를 의식할 수 있는가. 카슈미르의 논사들은 두 지혜에서 나온 뒤에 얻는 지혜(後得智)가 그렇게 아는 것이며, 그 차이로 앞의 관 속에 있던 두 지혜의 차이를 드러낸다고 한다. 다른 논사는 무루지도 그렇게 안다고 한다. 진지 · 무생지는 공 · 비아를 뺀 열네 행상을 가진다. 승의에 속하면서도 세속에 관여하여 「나의 생은 다했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다 했고,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왜 열인가 — 일곱 인연
근본이 둘인 지혜를 왜 열로 세우는가. 『구사론』은 일곱 인연을 든다.
由自性對治,行相行相境, 加行辦因圓,故建立十智。
자성 · 대치 · 행상 · 행상과 대상 · 가행 · 일을 마침 · 원인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열 지를 세운다.
- 자성 때문에 세속지를 세운다. 승의의 지혜가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 대치 때문에 법지 · 유지를 세운다. 욕계와 상계를 온전히 다스리기 때문이다.
- 행상 때문에 고지 · 집지를 세운다. 이 둘은 대상의 체가 같고(유루의 오온) 행상만 다르기 때문이다.
- 행상과 대상 때문에 멸지 · 도지를 세운다. 행상도 대상도 다르기 때문이다.
- 가행 때문에 타심지를 세운다. 남의 마음을 알려고 가행을 닦았기 때문이다(완성되면 심소도 알지만 가행을 따라 「타심」이라 한다).
- 일을 마침 때문에 진지를 세운다. 일을 마친 몸에서 처음 생기기 때문이다.
- 원인이 원만함 때문에 무생지를 세운다. 모든 성도를 원인으로 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열 지혜의 서로 포섭함
열 지혜는 서로 겹친다. 『구사론』은 그 포섭 관계를 「하나는 온전히, 몇은 일부분」의 형식으로 정리한다.
이 표가 보여 주는 것은, 열 지혜가 서로 다른 열 개의 실체가 아니라 같은 무루혜를 여러 각도에서 잘라 본 이름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견도의 고법지는 법지이면서 고지다. 무학의 첫 찰나 고류지는 유지이면서 고지이면서 진지다. 멸지만이 지혜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택멸, 곧 열반만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타심지의 한계
타심지에는 정해진 한계가 있다. 자기보다 뛰어난 마음은 알지 못한다. 뛰어남에는 셋이 있다 — 지(아래 지의 지혜는 위 지의 마음을 모름), 근(신해 · 시해탈의 근기로는 견지 · 불시해탈의 마음을 모름), 위(불환의 성문 · 아라한 · 독각 · 부처로 갈수록 앞의 위는 뒤의 위의 마음을 모름). 과거와 미래의 마음도 알지 못한다. 현재 남의 상속에 있는 심 · 심소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법지에 속한 타심지는 유지 쪽 마음을, 유지에 속한 타심지는 법지 쪽 마음을 서로 알지 못한다.
견도의 마음은 어떻게 아는가. 견도 안에는 타심지가 없다. 사제를 통틀어 관하며 지극히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도의 마음이 타심지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성문이 법지 쪽의 가행을 채우면 남의 견도의 처음 두 찰나(고법지인 · 고법지)를 알 수 있다. 유지 쪽을 알려고 따로 가행을 닦아 채우면 그 사람은 이미 열여섯째 마음으로 넘어가 있어, 그 마음을 알아도 견도를 아는 것은 아니다. 인각유독각은 같은 방식으로 처음 두 찰나와, 따로 가행을 닦으면 여덟째 집류지까지 안다. 세존은 가행을 닦지 않아도 남의 견도 모든 찰나를 안다. 견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이 대목만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곳은 없다.
타심지와 관련해 경전의 「탐이 있는 마음 · 탐을 떠난 마음, 모인 마음 · 흩어진 마음 …」을 어떻게 풀이하느냐를 두고 긴 대론이 붙어 있다. 비바사사는 「모인 마음(聚心)」은 선한 마음, 「흩어진 마음」은 염오의 마음이라 하고, 「서방의 논사」는 혼침과 함께하는 마음을 모인 마음이라 한다. 『구사론』의 문답은 비바사사의 풀이가 경에 맞지 않는다며, 경에 「내면으로 모인 마음은 혼침과 함께하는 마음이요, 바깥으로 흩어진 마음은 다섯 욕망의 대상을 따라 흩어지는 마음」이라 했으니 둘 다 염오의 마음이라고 반박한다. 보광은 이 반박을 경량부 논사의 말로 풀이한다. 본론과 어긋난다는 비바사사의 힐난에 대한 「차라리 논의 글을 어길지언정 경의 말씀은 어기지 말라(寧違論文,勿違經說)」는 응답은 경량부라는 이름의 뜻을 잘 보여 준다.
수(修)의 네 가지 — 얻음 · 익힘 · 다스림 · 버림
지품의 중반은 어느 자리에서 몇 가지 지혜를 「닦는가」를 하나하나 센다. 견도의 각 찰나, 수도의 각 무간도 · 해탈도, 연근 · 잡수 · 신통을 닦을 때 현재에 닦는 지혜와 미래에 닦아지는 지혜의 수를 모두 헤아린다. 예컨대 견도의 첫 찰나에는 세속지 하나를 성취하고, 찰나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더해 수도에서는 일곱, 시해탈은 아홉, 불시해탈은 열을 성취한다.
이 계산의 바탕에는 「수」에 대한 독특한 이론이 있다. 지금 하나의 지혜를 일으키면 그와 같은 종류의 미래의 지혜들이 함께 「닦아진다」.
그리고 진지가 처음 일어나는 순간에 대해 『구사론』은 인상적인 비유를 든다.
又彼自心今登王位,一切善法起得來朝。譬如大王登祚灑頂,一切境土皆來朝貢。
또 그 자신의 마음이 이제 왕위에 오르니, 모든 선법이 득을 일으켜 와서 조회한다. 큰 왕이 즉위하여 정수리에 물을 부을 때 모든 땅이 와서 조공하는 것과 같다.
처음 진지가 일어날 때에만 아홉 지의 유루 공덕 — 부정관 등 한량없는 공덕 — 을 두루 닦는다. 이는 모든 번뇌를 묶고 끊어 남김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위의 지에 태어나서는 아래 지를 닦지 않으며, 일찍이 얻었다가 버린 것을 다시 얻는 것은 「닦음」이 아니다. 애써서 증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수」는 단순히 「현재 수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구사론』은 수를 넷으로 나눈다.
- 득수(得修) — 미래의 선법을 얻음.
- 습수(習修) — 현재의 선법을 익힘.
- 대치수(對治修) — 유루법을 다스림.
- 제견수(除遣修) — 유루법을 없애 버림.
득수 · 습수는 유위의 선법에 대해, 대치수 · 제견수는 유루법에 대해 세운다. 그래서 유루의 선법은 네 수를 다 갖추고, 무루의 유위법은 앞의 둘, 나머지 유루법(염오 · 무기)은 뒤의 둘을 갖춘다. 외국의 논사들은 여섯 근을 막는 방수(防修)와 몸을 관하는 관수(觀修)를 더해 여섯이라 하지만, 카슈미르의 논사들은 그것이 대치수 · 제견수에 포섭된다고 한다.
십팔불공법 — 십력 · 사무외 · 삼념주 · 대비
지품의 후반은 「지혜로 이루어진 공덕」이다. 그 첫째가 부처에게만 있는 열여덟 불공법이다. 부처가 처음 진지를 얻을 때 닦으며, 다른 성자에게는 없으므로 「불공」이다. 『구사론』이 드는 열여덟은 십력 · 사무외 · 삼념주 · 대비다.
십력
力處非處十,業八除滅道, 定根解界九,遍趣九或十, 宿住死生俗,盡六或十智。
힘 가운데 처비처는 열 지혜이고, 업은 여덟이니 멸 · 도를 뺀다. 정 · 근 · 승해 · 계는 아홉이고, 변취는 아홉 또는 열이다. 숙주 · 사생은 세속지이고, 누진은 여섯 또는 열 지혜다.
열 가지 힘과 그 체가 되는 지혜는 다음과 같다.
-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 이치에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아는 힘. 열 지혜 모두가 체다.
-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 업과 그 이숙을 아는 힘. 멸지 · 도지를 뺀 여덟 지혜.
-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 선정 · 해탈 · 삼매를 아는 힘.
-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 중생의 근기의 높고 낮음을 아는 힘.
-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 중생의 여러 가지 이해와 바람을 아는 힘.
-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 중생의 여러 가지 성향을 아는 힘. 이 넷은 멸지를 뺀 아홉 지혜.
-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 모든 곳으로 가는 길을 아는 힘. 가는 길만 대상으로 하면 멸지를 뺀 아홉, 가는 곳(열반 포함)까지 대상으로 하면 열.
-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 과거의 생을 기억하는 힘.
- 사생지력(死生智力) — 중생이 죽고 나는 것을 아는 힘. 이 둘은 세속지.
- 누진지력(漏盡智力) — 누가 다함을 아는 힘. 누가 다한 것만을 대상으로 하면 도 · 고 · 집 · 타심을 뺀 여섯, 누가 다한 몸에서 얻은 것이면 열.
숙주와 사생의 두 힘은 네 정려에 의지하고, 나머지 여덟은 열한 지(욕계 · 사정려 · 미지 · 중간 · 사무색)에 의지한다. 모두 섬부주에 태어난 남자인 부처의 몸에 의지한다.
왜 「힘」이라 하는가. 모든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해 지혜가 걸림 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부처만이 번뇌의 습기까지 없애 모든 대상을 원하는 대로 알 수 있다. 다른 성자는 그렇지 않다. 『구사론』은 그 예로 사리불을 든다. 사리불은 출가를 구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사람에게 과거에 심은 해탈의 씨앗이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가 앞뒤로 몇 생을 지나왔고 몇 생을 지날지를 관하여 알지 못했다. 부처의 지혜는 알아야 할 모든 것에 두루하여 마음의 힘이 끝이 없다.
사무외 · 삼념주 · 대비
四無畏如次,初十二七力。 三念住念慧,緣順違俱境。
네 무외는 차례로 첫째 · 열째 · 둘째 · 일곱째 힘과 같다. 세 염주는 념과 혜이니, 따르는 이 · 거스르는 이 · 둘이 함께인 대상을 반연한다.
네 무외는 정등각무외(첫째 힘처럼 열 지혜), 누영진무외(열째 힘처럼 여섯 또는 열 지혜), 설장법무외(둘째 힘처럼 여덟 지혜), 설출도무외(일곱째 힘처럼 아홉 또는 열 지혜)다. 왜 지혜를 「두려움 없음」이라 하는가. 지혜가 있으므로 남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천친은 「실제로는 무외는 지혜로 이루어진 것이지 체가 곧 지혜라고 해서는 안 된다(理實無畏是智所成,不應說言體即是智)」고 덧붙인다.
세 염주는 이렇다. 제자들이 한결같이 공경하여 바르게 받아 행해도 여래는 기뻐하지 않고 평정하게 바른 념과 바른 앎에 머문다. 한결같이 공경하지 않고 받아 행하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고 그렇게 머문다. 한 무리는 공경하고 한 무리는 공경하지 않아도 기뻐하지도 근심하지도 않고 그렇게 머문다. 체는 념과 혜다. 큰 성문들도 제자들의 따름과 거스름에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데 왜 이것이 불공법인가. 부처만이 그 습기까지 끊었기 때문이다. 또는 제자들이 부처에게 딸려 있으니 따르고 거스름에 크게 기뻐하거나 근심할 만한데 부처가 그러지 않는 것이 놀라운 일이며, 성문에게 딸린 이들에 대해 성문이 그러지 않는 것은 놀랍지 않기 때문이다.
大悲唯俗智,資糧行相境, 平等上品故,異悲由八因。
대비는 오직 세속지이니, 자량 · 행상 · 대상 · 평등 · 상품이기 때문이다. (공통의) 비와 다른 것은 여덟 원인 때문이다.
여래의 대비는 세속지를 체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유정을 반연할 수 없고, 세 괴로움의 행상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大)」라는 이름은 다섯 뜻으로 세운다 — 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세 괴로움을 행상으로 하므로, 삼계의 유정을 통틀어 대상으로 하므로, 모든 유정을 평등하게 이롭게 하므로, 이보다 위의 비가 없으므로. 그리고 사무량심의 「비(悲)」와 여덟 가지로 다르다 — 자성(무치 대 무진), 행상(세 괴로움 대 한 괴로움), 대상(삼계 대 욕계), 의지하는 지(제4정려 대 여러 지), 의지하는 몸(부처 대 여러 몸), 증득(유정천의 염오를 떠나 얻음 대 욕계의 염오를 떠나 얻음), 구제(일을 이룸 대 바람에 그침), 애민(평등 대 불평등).
- ① 처비처지력10지
- ② 업이숙지력8지(멸 · 도 제외)
-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9지(멸 제외)
- ④ 근상하지력9지(멸 제외)
- ⑤ 종종승해지력9지(멸 제외)
- ⑥ 종종계지력9지(멸 제외)
- ⑦ 변취행지력9 또는 10지
- ⑧ 숙주수념지력세속지 · 네 정려에 의지
- ⑨ 사생지력세속지 · 네 정려에 의지
- ⑩ 누진지력6 또는 10지
- 정등각무외① 힘과 같음
- 누영진무외⑩
- 설장법무외②
- 설출도무외⑦
- 공경하는 제자에게 기뻐하지 않음
- 공경하지 않는 제자에게 근심하지 않음
- 둘이 섞인 무리에 기뻐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음
부처들은 같은가 다른가 — 세 가지 같음과 세 가지 원만한 덕
부처의 덕은 다른 유정과 다르다. 그러면 부처들끼리는 모두 같은가.
由資糧法身,利他佛相似, 壽種姓量等,諸佛有差別。
자량 · 법신 · 이타로 말미암아 부처들은 서로 같고, 수명 · 종족 · 성씨 · 몸의 크기 등으로 부처들에게 차이가 있다.
세 가지 일로 모든 부처는 같다. 자량을 똑같이 원만하게 갖추었고, 법신을 똑같이 이루었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똑같이 끝까지 다했다. 반면 수명 · 종족 · 성씨 · 몸의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수명에는 길고 짧음이, 종족에는 찰제리 · 바라문의 차이가, 성씨에는 구담 · 가섭 등의 차이가, 몸에는 크고 작음이 있다. 「등(等)」이라는 말은 부처들의 법이 머무는 기간이 길고 짧음 등을 포함한다. 이런 차이는 세상에 나올 때 교화할 유정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법신」은 대승의 법신이 아니라, 부처를 부처로 만드는 무학의 공덕의 모음이다. 유부의 불신론은 삼신 페이지가 다루었다.
그리고 지혜로운 이는 여래의 세 가지 원만한 덕을 생각하여 깊이 사랑하고 공경한다.
- 원인의 원만한 덕(因圓德) — 남김없이 닦음(복덕과 지혜의 두 자량을 빠짐없이), 오래 닦음(세 대아승기겁 동안 지치지 않고), 쉼 없이 닦음(찰나찰나 부지런히), 공경하여 닦음(배우는 것을 공경하고 아끼는 것 없이).
- 결과의 원만한 덕(果圓德) — 지혜의 원만함(스승 없는 지혜 · 일체지 · 일체종지 · 공력 없는 지혜), 끊음의 원만함(모든 번뇌 · 모든 정장(定障)을 끊음 · 끝까지 끊음 · 습기까지 끊음), 위세의 원만함, 색신의 원만함(서른두 상 · 여든 가지 좋은 모습 · 큰 힘 · 금강보다 단단한 뼈와 백천의 해를 넘는 빛).
- 은혜의 원만한 덕(恩圓德) — 삼악취와 생사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고, 선취와 삼승에 편안히 두는 것.
이 공덕을 들은 지혜로운 이가 뼛속까지 사무치는 믿음을 일으키면, 그 한 생각의 지극한 믿음으로 끝없는 부정업을 없애고 뛰어난 인천의 과와 열반을 얻는다. 그래서 여래는 지혜로운 이에게 위없는 복전이다. 『구사론』은 부처 자신의 게송으로 이 대목을 맺는다.
若於佛福田,能殖少分善, 初獲勝善趣,後必得涅槃。
부처라는 복전에 조그마한 선이라도 심으면, 처음에는 뛰어난 선취를 얻고, 뒤에는 반드시 열반을 얻는다.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공덕
부처에게는 다른 성자나 범부와 공통되는 공덕도 한량없다. 무쟁 · 원지 · 무애해 · 신통 · 정려 · 무색 · 등지 · 무량 · 해탈 · 승처 · 변처 등이다. 앞의 셋(무쟁 · 원지 · 무애해)은 다른 성자와만 공통되고, 신통과 정려 등은 범부와도 공통된다.
무쟁과 원지
무쟁(無諍)은 아라한이 유정의 괴로움이 번뇌에서 생기는 것을 보고, 자기 몸이 복전 가운데 뛰어난 것을 알기에 다른 이의 번뇌가 다시 자기를 대상으로 일어날까 두려워 일으키는 지혜다. 이 방편으로 다른 유정이 자기 몸을 대상으로 탐 · 진 등을 일으키지 않게 한다. 다툼(諍), 곧 번뇌를 쉬게 하므로 무쟁이다. 세속지가 체이고, 제4정려에 의지하며, 부동법의 아라한만 일으킨다. 다른 아라한은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는 것도 막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의 번뇌를 막겠는가. 세 주의 사람 몸에 의지하고, 욕계의 미래의 「유사(有事)의 번뇌」를 대상으로 한다. 근거 없는 일에 기대는 견혹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지(願智)는 서원을 앞세워 묘한 지혜를 일으켜 원하는 대로 아는 것이다. 자성 · 지 · 종성 · 몸은 무쟁과 같고, 대상만 모든 법으로 넓다. 원지를 일으키려는 이는 먼저 그 대상을 알기를 진실하게 원하고, 변제(邊際)의 제4정려에 들어 가행으로 삼으며, 그 직후 선정의 힘에 따라 원했던 대로 바른 지혜를 일으켜 구하는 대상을 여실히 안다. 비바사사는 원지가 무색계는 직접 알지 못하고, 그 원인이 된 행과 그 등류의 차이를 보고 추리해 아는 것이 농부가 씨앗과 싹을 보고 아는 것과 같다고 한다.
네 무애해
無礙解有四,謂法義詞辯, 名義言說道,無退智為性。
무애해에는 넷이 있으니 법 · 의 · 사 · 변이다. 이름 · 뜻 · 말 · 설함과 길에 대한 물러남 없는 지혜를 성품으로 한다.
법무애해는 뜻을 나타내는 이름 · 구 · 문을, 의무애해는 나타내지는 뜻을, 사무애해는 지방의 말을, 변무애해는 이치에 맞게 막힘없이 설하는 것과 자재한 정 · 혜의 두 길을 대상으로 하는, 물러남 없는 지혜다. 법 · 사 두 무애해는 세속지에 속하고, 법무애해는 다섯 지(욕계 · 사정려)에, 사무애해는 두 지(욕계 · 초정려)에 의지한다. 위의 지에는 이름 등이나 심 · 사가 없기 때문이다. 의무애해는 모든 법을 뜻으로 하면 열 지혜에, 열반만을 뜻으로 하면 여섯 지혜에 속하고, 변무애해는 멸지를 뺀 아홉 지혜에 속한다. 이 둘은 모든 지에 의지한다. 넷 가운데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넷을 다 얻는다.
무쟁 · 원지 · 네 무애해의 여섯은 모두 「변제정(邊際定)」에 의지해 얻는다. 변제정이란 욕계에서 초정려로, 차례로 올라가 유정천까지 갔다가 다시 차례로 내려와 욕계까지 오고, 다시 올라가 제4정려에 이르는 것을 거듭하여 모든 지에 두루 따르며(遍所隨順), 제4정려를 하품에서 상상품까지 아홉 품으로 끌어올려 끝에 이른(增至究竟) 정려다. 부처를 뺀 성자들은 이 여섯을 가행으로만 얻고, 부처는 처음 진지를 얻을 때 이염으로 한꺼번에 얻어 뒤에 원하는 대로 일으킨다.
육통 · 삼명 · 삼시도
通六謂神境,天眼耳他心, 宿住漏盡通,解脫道慧攝。
신통은 여섯이니 신경 · 천안 · 천이 · 타심 · 숙주 · 누진통이다. 해탈도이며 혜에 속한다.
여섯 신통 가운데 누진통은 성자만 얻지만, 앞의 다섯은 범부도 얻는다. 모두 해탈도에 속하며 혜가 체다. 신경 · 천안 · 천이 · 숙주의 넷은 세속지, 타심통은 다섯 지혜(법 · 유 · 도 · 세속 · 타심), 누진통은 누진지력처럼 여섯 또는 열 지혜다. 앞의 다섯은 네 정려에 의지하고 자기 지와 아래 지만을 대상으로 한다.
여섯 가운데 셋을 「명(明)」이라 한다.
第五二六明,治三際愚故, 後真二假說,學有闇非明。
다섯째 · 둘째 · 여섯째가 명이니, 세 때의 어리석음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참이고 둘은 빌려 말한 것이다. 유학에게는 어둠이 있어 명이 아니다.
숙주지통은 과거의 어리석음을, 사생지통(천안)은 미래의 어리석음을, 누진지통은 현재의 어리석음을 다스린다. 셋 모두 무학의 몸에서 일어나므로 「무학의 명」이다. 그러나 누진만이 무루일 수 있어 참된 무학의 명이고, 나머지 둘은 유루라서 학도 무학도 아니므로 빌려 말한 것이다. 유학에게도 앞의 둘이 있지만 아직 어리석음의 어둠이 있어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셋을 「시도(示導)」라 한다. 신변시도(첫째 신경통) · 기심시도(넷째 타심통) · 교계시도(여섯째 누진통)다. 이 셋이 교화받을 이를 이끌어 처음 마음을 내게 하는 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교계시도가 가장 높다. 앞의 둘은 주술로도 할 수 있다 — 건타리(健馱梨)라는 주술을 지니면 하늘을 마음대로 날고, 이찰니(伊剎尼)라는 주술을 지니면 남의 마음을 안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누진통이 아니면 할 수 없고, 반드시 남에게 이익과 안락의 과를 이끌어 낸다. 여실한 방편으로 설하기 때문이다.
본송
靜慮四各二,於中生已說, 定謂善一境,并伴五蘊性, 初具伺喜樂,後漸離前支。
정려는 넷이고 각각 둘이니, 그 가운데 (태어남의) 생정려는 이미 말했다. 정(定)정려는 선한 마음의 한 대상에 머무는 성질이며, 함께하는 것까지 치면 오온을 성품으로 한다. 처음 것은 사 · 희 · 락을 갖추고, 뒤의 것은 차츰 앞의 지분을 떠난다.
靜慮初五支,尋伺喜樂定; 第二有四支,內淨喜樂定; 第三具五支,捨念慧樂定; 第四有四支,捨念中受定。
초정려는 다섯 지분이니 심 · 사 · 희 · 락 · 정이다. 제2정려는 네 지분이니 내정 · 희 · 락 · 정이다. 제3정려는 다섯 지분을 갖추니 사 · 념 · 혜 · 락 · 정이다. 제4정려는 네 지분이니 사 · 념 · 중수(불고불락수) · 정이다.
술어 풀이
- 靜慮정려
- 범어 dhyāna. 고요함(寂靜)으로 말미암아 살필 수 있으므로(審慮) 정려라 한다. 「살핌」은 여실히 아는 것이며 혜가 그 체다. 정(定)으로서의 정려와 그 과보로 태어나는 생(生)으로서의 정려가 있다.
- 心一境性심일경성
- 범어 cittaikāgratā.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오롯이 머무는 성질. 유부는 이것이 등지(三摩地)라는 별도의 심소라 하고, 경량부 계통은 마음 자체가 한 대상에 이어 머무는 상태라 한다.
- 無色定무색정
- 범어 ārūpya-samāpatti.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의 네 정. 색온이 따르지 않으므로 사온이 체다.
- 等至등지
- 범어 samāpatti. 정려와 무색정의 근본 여덟을 「근본등지」라 한다. 맛들임(味) · 맑음(淨) · 무루의 세 종류가 있다.
- 十八支18지분
- 네 정려의 지분을 모두 더한 수(5 · 4 · 5 · 4). 실체로는 열하나다.
- 內等淨내등정
- 범어 adhyātmasaṃprasāda. 제2정려의 지분. 유부는 그 체를 신근(信根)이라 하고, 경량부 계통은 심 · 사의 흔들림을 떠나 마음이 맑게 이어지는 상태 자체라 한다.
- 近分 · 中間定근분 · 중간정
- 근분(sāmantaka)은 각 근본정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예비 단계. 여덟이 있고, 초정려의 근분을 특히 미지정(未至定)이라 한다. 중간정(dhyānāntara)은 초정려와 제2정려 사이에서 심은 없고 사만 있는 정이다.
- 八災患여덟 재환
- 심 · 사 · 네 가지 느낌(고 · 낙 · 우 · 희) · 들숨 · 날숨. 제4정려에는 이 여덟이 없어 「부동」이라 한다.
- 三三摩地세 삼마지
- 공 · 무원 · 무상의 세 등지. 무루인 것을 세 해탈문이라 한다.
정려란 무엇인가 — 등지와 마음
지품이 지혜로 이루어진 공덕을 말했다면, 정품은 「그 밖의 성질의 공덕」을 말한다. 그 첫째가 공덕이 의지하는 정(定)이다. 『구사론』은 모든 공덕이 대부분 정려에 의지하므로 먼저 정려의 차이를 밝힌다고 한다. 정려는 넷이고, 각각 정(定)으로서의 정려와 생(生)으로서의 정려가 있다. 생정려, 곧 정려를 닦아 태어나는 색계의 하늘(초정려 셋, 제2 · 제3정려 각 셋, 제4정려 여덟)은 세품에서 이미 말했다(세계와 윤회 편).
정정려의 체는 무엇인가. 통틀어 말하면 선한 성질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이며, 선한 등지(等持, samādhi)를 자성으로 한다. 함께하는 것까지 치면 오온이 체다. 「일경성」이란 오롯이 하나의 대상을 반연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론이 시작된다.
若爾,即心專一境位,依之建立三摩地名,不應別有餘心所法。
그렇다면 바로 마음이 한 대상에 오롯한 상태에 의지하여 삼마지라는 이름을 세울 것이지, 따로 다른 심소법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유부의 답은 마음을 한 대상에 머물게 하는 별도의 법이 있고, 그것이 삼마지라는 것이다. 마음이 곧 삼마지가 아니다. 그러자 반론이 이어진다. 모든 마음은 찰나에 사라지므로 어차피 한 찰나에는 한 대상에만 머문다. 무엇 때문에 등지가 필요한가. 둘째 찰나에도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함께 상응하는 그 찰나의 등지는 쓸모가 없다. 또 삼마지는 대지법이므로 모든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물러야 하지 않는가. 유부는 「다른 품의 등지는 열등하다」고만 답한다. 그리고 「다른 논사(有餘師)」 — 보광은 경량부로 본다 — 의 설이 함께 실린다. 마음이 한 대상에 이어서 머무는 것을 삼마지라 하며 마음 밖에 따로 체가 없다. 경전이 정을 「증상심학」이라 하고, 「마음이 맑아 가장 뛰어난 것이 네 정려」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려(靜慮)」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
由此寂靜能審慮故。審慮即是實了知義,如說心在定,能如實了知。
이것으로 고요하여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살핌은 곧 여실히 앎이라는 뜻이니, 「마음이 정에 있으면 여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유부는 살핌(審慮)의 체를 혜라 한다. 그러면 모든 등지가 정려라 불려야 하지 않는가. 아니다. 뛰어난 것에만 이 이름을 세운다. 세상에서 「빛을 내는 것을 해라 한다」고 하지만 반딧불이나 촛불을 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정려가 뛰어난 까닭은 여러 등지 가운데 이것만 지분을 거두어들이고, 지 · 관이 고르게 움직여 가장 잘 살피며, 현법락주와 즐거운 통행이라는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면 염오의 정려는 왜 정려라 하는가. 그것도 그릇되게나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나침의 허물이 있지 않은가. 없다. 비슷한 것 가운데서 이름을 세우는 것이니 썩은 씨앗을 「씨앗」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세존도 「나쁜 정려」가 있다고 했다.
넷으로 나누는 기준 — 지분을 떠남
심일경성이 정려의 체라면 무엇으로 넷을 나누는가. 사(伺) · 희(喜) · 락(樂)을 갖춘 것을 첫째로 세운다. 사가 있으면 심(尋)도 있음이 이미 밝혀진다. 반드시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니, 연기와 불처럼 사와 희락이 있으면서 심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다음 앞의 지분을 차츰 떠나 둘째 · 셋째 · 넷째를 세운다. 사를 떠나면 둘째(희 · 락이 있음), 둘을 떠나면 셋째(락이 있음), 셋을 모두 떠나면 넷째다.
무색정 — 색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無色亦如是,四蘊離下地, 并上三近分,總名除色想, 無色謂無色,後色起從心。 空無邊等三,名從加行立, 非想非非想,昧劣故立名。
무색도 이와 같으니(태어남과 정의 두 가지가 있다), (정의 무색은) 사온을 성품으로 하고 아래 지를 떠남으로 이루어진다. 위의 세 근분과 함께 통틀어 「색의 생각을 없앰」이라 한다. 무색이란 색이 없다는 것이며, 뒤에 색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에서다. 공무변 등 셋은 이름을 가행에서 세우고, 비상비비상은 (생각이) 흐리고 약하므로 이름을 세운다.
무색정도 수와 자성이 정려와 같다. 넷이고 각각 정과 생이 있으며, 체는 선한 심일경성이다. 다만 함께하는 것에서 색온을 뺀다. 무색에는 따라 움직이는 색이 없기 때문이다. 심일경성의 체에는 차이가 없지만 아래 지를 떠나 생기므로 넷으로 나뉜다. 제4정려를 떠나 생기면 공무변처, 무소유처를 떠나 생기면 비상비비상처다. 넷의 근본정과 위의 세 근분을 통틀어 「색의 생각을 없앰(除色想)」이라 한다. 공무변처의 근분은 아직 이 이름을 얻지 못한다. 아래 지의 색을 반연해 색의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품의 첫 대론이 벌어진다. 「모두 색이 없으므로 무색이라 한다」는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반론이다. 보광은 반론자를 대중부 · 화지부 등으로 본다. 그들은 무색계에도 색이 있다고 인정하며, 「색이 미세하므로 무색이라 한다. 조금 노란 물건을 『노랗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유부는 묻는다. 그 계의 색은 어떤 모양인가. 몸과 말의 율의만 있다고 한다면, 몸과 말이 없는데 율의가 어디 있는가. 대종이 없는데 소조색이 어디 있는가. 색근의 몸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세하다 하는가. 몸의 크기가 작아서라면 물속의 미세한 벌레도 무색이라 해야 한다. 몸이 맑고 묘해서라면 중유와 색계도 무색이라 해야 한다.
반론자는 경증을 든다 — 「수명과 체온이 합한다」, 「명색과 식이 두 다발의 갈대처럼 서로 의지한다」, 「명색은 식을 연한다」, 「색을 떠나서는 식이 오고 가지 못한다」. 유부의 답은 이 경문들이 모든 계를 두고 한 말인지 욕계 · 색계를 두고 한 말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별 없이 받아들이면, 바깥의 따뜻함도 수명과 합해야 하고, 사식(四食)이 네 식주처럼 말해졌으니 색계 · 무색계에도 단식(段食)이 있어야 한다. 단식이 없는 하늘이 있다는 경문으로 그 허물을 피한다면, 무색계가 「색에서 벗어났다」는 경문으로 무색계에는 색이 없다고 해야 한다. 부처는 정려에 대해서는 「색의 부류에서 식의 부류까지」가 있다고 하고, 무색에 대해서는 「느낌의 부류에서 식의 부류까지」가 있다고만 했다.
그러면 무색계에서 여러 겁 동안 색의 상속이 끊어졌다가 아래 지에 다시 태어날 때 색은 어디서 생기는가.
此從心生,非從色起。謂昔所起色異熟因熏習在心,功能今熟,是故今色從彼心生。
이것은 마음에서 생기지 색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예전에 일으킨 색의 이숙인이 마음에 훈습되어 있다가 그 공능이 이제 익으므로, 지금의 색이 그 마음에서 생긴다.
마음에 「훈습(熏習)」된 공능이 익어 색을 낳는다는 이 설명을 보광은 「논주가 경량부의 뜻으로 답한 것」이라 풀이한다. 마음속의 종자가 색을 낳는다는 생각은 경량부의 종자설 그대로다. 몸이 없는 무색계의 마음이 무엇에 의지해 움직이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고만 하는데, 보광은 그 의지처를 명근과 중동분으로 풀이한다.
무색정의 이름은 어디서 오는가. 아래 셋은 가행 때 각각 「끝없는 허공」 「끝없는 식」 「아무것도 없음」을 사유하므로 그 이름을 얻는다. 넷째는 생각(想)이 흐리고 약하므로(昧劣) 이름을 얻는다. 밝고 뛰어난 생각이 없으므로 「비상」이고, 흐리고 약한 생각은 있으므로 「비비상」이다. 가행 때 「생각은 병과 같고 화살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생각이 아주 없으면 어리석음의 어둠과 같다. 오직 비상비비상만이 고요하고 묘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가행으로 이름을 세우지 않는 것은 그런 가행을 하는 까닭이 바로 그곳의 생각이 흐리고 약하기 때문이다.
등지의 세 종류 — 맛들임 · 맑음 · 무루
此本等至八,前七各有三, 謂味淨無漏,後味淨二種, 味謂愛相應,淨謂世間善, 此即所味著,無漏謂出世。
이 근본등지는 여덟이니, 앞의 일곱은 각각 셋이 있다. 맛들임 · 맑음 · 무루다. 뒤의 것은 맛들임과 맑음의 둘이다. 맛들임은 애와 상응하는 것이고, 맑음은 세간의 선이니 이것이 곧 맛들여지는 대상이다. 무루는 출세간을 말한다.
네 정려와 네 무색정의 근본등지 여덟 가운데 앞의 일곱에는 세 종류가 있고, 유정천에는 무루가 없어 둘뿐이다. 그 지는 생각이 흐리고 약하여 무루의 성도가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미등지(味等至) — 애(愛)와 상응하는 등지. 애는 맛들여 집착하므로 「맛」이라 하고, 그와 상응하므로 이 등지도 맛이라 한다.
- 정등지(淨等至) — 세간의 선한 등지. 무탐 등 맑은 법과 상응하여 일어나므로 「맑음」이라 한다. 이것이 맛들여지는 대상이다. 정등지가 사라진 바로 뒤에 미등지가 생겨 지나간 정등지를 반연해 깊이 집착한다.
- 무루등지(無漏等至) — 출세간의 등지. 애가 반연하지 않으므로 맛들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이 구분은 수행의 함정을 드러낸다. 맑은 선정이 바로 맛들임의 대상이 된다. 선정의 즐거움에 대한 집착은 선정이 깊을수록 커진다. 뒤에 「순퇴분」이라는 개념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열여덟 지분과 열한 가지 실체
여덟 등지 가운데 지분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정려뿐이고 무색정은 아니다. 그리고 지분은 맑음과 무루의 정려에만 있다. 본송에 따라 네 정려의 지분은 다음과 같다.
- 초정려 — 심(尋) · 사(伺) · 희(喜) · 락(樂) · 등지(等持) (5)
- 제2정려 — 내등정(內等淨) · 희 · 락 · 등지 (4)
- 제3정려 — 행사(行捨) · 정념(正念) · 정혜(正慧) · 수락(受樂) · 등지 (5)
- 제4정려 — 행사청정(行捨清淨) · 염청정(念清淨) · 비고락수(非苦樂受) · 등지 (4)
이름으로는 열여덟이지만 실체는 몇인가.
此實事十一,初二樂輕安, 內淨即信根,喜即是喜受。
이 실체는 열하나이니, 처음 둘의 락은 경안이고, 내정은 곧 신근이며, 희는 곧 희수다.
초정려의 다섯이 다섯 실체다. 제2정려에서는 내등정이 더해져 여섯이 된다(희 · 락 · 등지는 앞과 같다). 제3정려에서는 행사 · 정념 · 정혜 · 수락이 더해져 열이 된다. 제3정려의 락은 앞의 두 정려의 락과 실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제4정려에서는 비고락수가 더해져 열하나가 된다. 그래서 「초정려의 지분이면서 제2정려의 지분이 아닌 것」 등 네 경우를 지을 수 있다 — 심 · 사(초선에만), 내등정(제2선에만), 희 · 락 · 등지(둘 다), 그 밖의 법(둘 다 아님).
정려 자체와 지분의 관계에 대해서는, 「등지만이 정려이면서 정려의 지분이고, 나머지 넷은 정려의 지분이지만 정려가 아니다」라는 전설에 대해, 「여실한 뜻으로는 네 부대로 이루어진 군대(四支軍)와 같다」는 해석이 덧붙는다. 코끼리 · 말 · 수레 · 보병이 모여 군대를 이루듯 지분이 모여 정려를 이룬다는 것이다.
- 심(尋)
- 사(伺)
- 희(喜)
- 락(樂)= 경안
- 등지(等持)
- 내등정(內等淨)= 신근
- 희
- 락= 경안
- 등지
- 행사(行捨)
- 정념(正念)
- 정혜(正慧)
- 수락(受樂)= 즐거운 느낌
- 등지
- 행사청정
- 염청정
- 비고락수(非苦樂受)
- 등지
초 · 제2정려의 「락」은 경안인가 — 경량부의 반론
왜 제3정려에서만 수락(즐거운 느낌)이 실체로 더해지는가. 유부는 초 · 제2정려의 「락」은 느낌이 아니라 경안(輕安), 곧 몸과 마음의 가볍고 편안함이라 한다. 근거는 이렇다. 초 · 제2정려에는 락근(樂根)이 없다. 몸의 즐거운 느낌은 정에 들어 있을 때 다섯 식이 없으므로 있을 수 없다. 마음의 즐거운 느낌도 없다. 희가 있다고 했고 희는 희수인데, 한 마음에 두 느낌이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희와 락이 번갈아 나타난다고 할 수도 없다. 초선에 다섯 지분, 제2선에 네 지분을 「갖춘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어떤 이(有說)」 — 보광은 경량부로 본다 — 가 정반대로 주장한다. 마음의 즐거운 느낌이라는 락근은 아예 없고, 앞의 세 정려에서 말하는 락은 모두 몸의 즐거운 느낌이라는 것이다. 유부는 경전의 「락근이란 순락촉의 힘으로 생긴 몸과 마음의 즐거운 느낌」이라는 말을 들어 반박한다. 경량부는 응수한다. 「어떤 이가 이 경에 『마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러 부파의 경에는 『몸』이라고만 되어 있다.」 또 제3정려의 락은 경전 스스로 「몸으로 받는 즐거움」이라 했다. 또 제4정려는 경안이 두 배로 늘어나는데 락의 지분이 없다. 경안이 락이라면 제4정려에도 락의 지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전에 「성제자가 이생희를 몸으로 증득하여 머물 때 다섯 법을 닦아 원만히 하니, 기쁨 · 희 · 경안 · 락 · 삼마지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경안과 락이 따로 말해졌으니 초 · 제2정려의 락은 경안이 아니다.
그러면 정에 들어 있는데 어떻게 몸의 식이 있는가. 경량부의 답은 이렇다. 정 안에서도 뛰어난 정이 일으키는 「경안의 바람(輕安風)」이 있어 즐거운 느낌을 따라 일으키며 온몸에 두루 닿는다. 이 바람은 정에서 생겼으므로 오히려 삼마지를 따라 일으키며, 흩어지게 하지 않는다.
천친은 여기서 판정을 내리지 않고 두 설을 끝까지 나란히 놓는다. 다만 이 대론에서 그는 유부의 정설을 기술하면서도 반론자의 논증을 훨씬 길고 자세하게 적는다.
내등정과 희 — 별도의 심소인가
제2정려의 내등정은 무엇인가. 한 설은 「심 · 사의 흔들림을 떠나 상속이 맑게 움직이는 것」이라 한다. 심 · 사가 있으면 강물에 물결이 이는 것처럼 상속이 맑지 않다. 보광은 이것을 경량부의 설로 본다. 그러면 내등정에는 별도의 체가 없게 되어 열한 실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부는 그것이 신근(信根)이라 한다. 제2정려를 증득하면 정의 지(定地)에 대해서도 떠날 수 있다는 깊은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맑음의 모습이므로 「정(淨)」이고, 바깥으로 고르게 흐름을 떠났으므로 「내등(內等)」이다. 다른 논사는 내등정 · 등지 · 심 · 사가 모두 별도의 체가 없고 마음의 분위의 차이라고 하지만, 『구사론』은 「이런 이치가 있더라도 우리 종의 설은 아니다(雖有此理,非我所宗)」라고 정설의 입장을 적는다.
「희는 곧 희수」라는 것에도 이설이 있다. 「다른 부파(餘部)」 — 보광은 상좌부로 본다 — 는 희가 희수와 다른 별도의 심소이고, 앞의 세 정려의 락은 모두 희수라 한다. 유부는 두 아함의 경문으로 반박한다. 「전도를 가리는 경」에 「제3정려에서 희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제4정려에서 락이 남김없이 사라진다」고 했고, 다른 경에 「제4정려는 락을 끊고 고를 끊으며 앞서 희 · 우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제3정려에는 희근이 없고, 희수는 희이지 락이 아니다.
염오의 정려와 「부동」의 제4정려
열여덟 지분이 염오의 정려에도 모두 있는가. 아니다. 한 설은 이렇다 — 초정려의 염오에는 「떠남에서 생긴(離生)」 희 · 락이 없고, 제2정려의 염오에는 번뇌에 흐려지므로 내등정이 없으며, 제3정려의 염오에는 물든 즐거움에 미혹되므로 정념 · 정혜가 없고, 제4정려의 염오에는 번뇌에 물들므로 사청정 · 념청정이 없다. 다른 설은 처음 두 정려의 염오에는 경안만, 뒤의 두 정려의 염오에는 행사만 없다고 한다. 둘 다 대선지법이기 때문이다.
경전은 아래 세 정려를 「흔들림이 있다(有動)」, 제4정려를 「흔들림이 없다(不動)」고 한다. 여덟 재환 — 심 · 사 · 네 느낌 · 들숨 · 날숨 — 이 제4정려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논사는 제4정려가 「바람 없는 밀실의 등불이 비추되 흔들리지 않는 것(如密室燈照而無動)」과 같기 때문이라 한다. 제4정려가 무쟁 · 원지 · 신통 · 불공법의 의지처가 되는 까닭이 이 「부동」에 있다.

등지를 얻는 두 방식과 서로 이어 생기는 관계
등지는 어떻게 처음 얻는가.
全不成而得,淨由離染生, 無漏由離染,染由生及退。
전혀 성취하지 않았다가 얻는 것은, 맑음은 염오를 떠남과 태어남으로 말미암고, 무루는 염오를 떠남으로 말미암으며, 염오는 태어남과 물러남으로 말미암는다.
맑은 등지는 아래 지에서 아래 지의 염오를 떠날 때, 그리고 위의 지에서 그 지로 태어날 때 얻는다. 유정천은 염오를 떠날 때만 얻는다. 그 위에서 내려와 태어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무루등지는 오직 염오를 떠날 때 얻는다. 성자가 아래 지의 염오를 떠나 위의 지의 무루를 얻는다. 염오의 등지는 위의 지에서 죽어 아래 지에 태어날 때, 그리고 그 지의 염오를 떠났다가 물러날 때 얻는다. 「전혀 성취하지 않았다가」라는 조건은, 이미 일부를 성취한 상태에서 가행으로 순결택분 등을 얻거나 물러나서 순퇴분을 얻는 경우를 빼기 위해서다. 이처럼 『구사론』은 등지를 얻는 길을 「이염(離染)」과 「수생(受生)」, 그리고 그 밖의 「가행」 「물러남」으로 나누어, 정을 얻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둘 — 아래 지의 염오를 떠나서, 또는 태어나서 — 임을 보인다.
어느 등지 뒤에 어느 등지가 생기는가. 무루등지 바로 뒤에는 자기 지와 위아래 지의 선(맑음과 무루)이 생기되, 위아래 각각 셋째 지까지만 생긴다. 넷째는 너무 멀어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맑음 바로 뒤에도 같지만 자기 지의 염오가 더해진다. 염오 바로 뒤에는 자기 지의 맑음 · 염오와 바로 아래 한 지의 맑음이 생긴다. 자기 지의 번뇌에 시달려 아래의 맑은 정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염오의 마음이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하는가. 「먼저 세운 서원의 힘(先願力故)」이다. 「차라리 아래의 맑음을 얻지 위의 염오는 바라지 않는다」고 미리 서원해 두면, 그 힘이 상속을 따라 움직여 뒤에 염오에서 아래의 맑음이 생긴다. 잠들기 전에 서원을 세우면 정한 때에 깨어나는 것과 같다.
맑은 등지는 다시 넷으로 나뉜다.
- 순퇴분(順退分) — 번뇌를 따름.
- 순주분(順住分) — 자기 지를 따름.
- 순승진분(順勝進分) — 위의 지를 따름.
- 순결택분(順決擇分) — 무루를 따름.
무루는 오직 순결택분에서만 생긴다. 서로 이어 생기는 관계는 순퇴분이 둘(순퇴 · 순주)을, 순주분이 셋(순결택 제외)을, 순승진분이 셋(순퇴 제외)을, 순결택분이 하나(자기)를 낳는다. 맑은 선정이라도 번뇌를 따르는 것이 있다는 이 분류는, 선정의 맑음과 해탈의 무루를 분명히 갈라놓는다.
근분정과 중간정
무루등지는 모두 번뇌를 끊는다. 근본의 맑은 등지는 번뇌를 끊지 못한다. 아래 지는 이미 떠났고, 자기 지는 자기에게 묶여 있으며, 위 지는 자기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은 근분정은 번뇌를 끊는다. 모두 바로 아래 지를 끊을 수 있다.
近分八捨淨,初亦聖或三。 中靜慮無尋,具三唯捨受。
근분은 여덟이고 사수이며 맑음이다. 처음 것은 성(무루)이기도 하고, 혹은 셋이라고도 한다. 중간정려는 심이 없고, 셋을 갖추며 오직 사수다.
근분정은 여덟 근본정에 들어가는 문이므로 여덟이다. 모두 사수와만 상응한다. 공력을 들여 움직이고, 아직 아래 지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덟 근분은 모두 맑은 등지에 속하고, 초정려의 근분(미지정)만 무루에도 통한다. 근분은 염오를 떠나는 길이므로 맛들임이 없다. 다만 어떤 이는 미지정에도 맛들임이 있다고 하여 미지정이 셋을 다 갖춘다고 한다. 아직 근본정을 일으키지 못했을 때 이것에도 탐착하기 때문이다.
중간정려는 근분과 무엇이 다른가. 근분은 아래 지의 염오를 떠나기 위한 것으로 근본정에 들어가는 원인이지만, 중간정은 그렇지 않다. 또 초정려의 근본과 근분은 심 · 사와 상응하고 위의 일곱 정은 모두 심 · 사가 없는데, 중간정려만 사는 있고 심은 없다. 그래서 초정려보다 뛰어나되 제2정려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중간」이라 한다. 위의 지에는 중간정이 없다. 한 지 안에서 이런 오르내림이 없기 때문이다. 중간정은 뛰어난 덕이 있어 맛들일 만하므로 맛들임 · 맑음 · 무루의 셋을 다 갖춘다. 근분처럼 사수와만 상응하며 괴로운 통행에 속한다. 많이 닦으면 대범천의 과를 부른다. 대범천이 되려는 이가 이것을 닦기 때문이다.
- 욕계(欲界) — 산지(散地)
- 미지정(未至定 = 초정려 근분)맑음무루(맛들임은 이설)사수 · 심 · 사 있음
- 초정려 근본맛들임맑음무루심 · 사 있음중간정려(中間靜慮)맛들임맑음무루심 없고 사만 · 사수 · 대범천의 과
- 제2정려 근분
- 제2정려 근본
- 제3정려 근분
- 제3정려 근본
- 제4정려 근분
- 제4정려 근본(부동)
- 공무변처 근분
- 공무변처
- 식무변처 근분
- 식무변처
- 무소유처 근분
-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 근분
- 비상비비상처(유정천)맛들임 · 맑음뿐무루 없음
세 가지 등지와 「중첩의 삼매」
경전은 등지(等持)를 여러 방식으로 셋씩 나눈다. 첫째는 심 · 사의 유무에 따른 것이다. 유심유사 삼마지는 초정려와 미지정, 무심유사 삼마지는 중간정, 무심무사 삼마지는 제2정려의 근분부터 유정천까지다.
둘째는 공 · 무원 · 무상의 세 삼마지다.
空謂空非我,無相謂滅四, 無願謂餘十,諦行相相應, 此通淨無漏,無漏三脫門。
공은 공 · 비아(의 행상)이고, 무상은 멸의 네 (행상)이며, 무원은 나머지 열 (행상)이니, 진리의 행상과 상응한다. 이것은 맑음과 무루에 통하고, 무루인 것이 세 해탈문이다.
공삼마지는 공 · 비아의 두 행상과 상응하는 등지다. 무상삼마지는 멸제의 네 행상과 상응하는 등지다. 열반은 열 가지 상(相) — 색 · 성 · 향 · 미 · 촉의 다섯, 남녀의 둘, 생 · 주 · 멸의 세 유위상 — 을 떠났으므로 「무상」이며, 그것을 반연하는 삼마지가 그 이름을 얻는다. 무원삼마지는 나머지 열 행상(비상 · 고, 집의 넷, 도의 넷)과 상응하는 등지다. 비상 · 고 · 원인은 싫어할 만하고, 도는 뗏목처럼 반드시 버려야 하므로, 눈앞의 것을 넘어서기 위해 「바라지 않음」이다. 공 · 비아는 열반의 모습과 비슷하므로 싫어해 버릴 대상이 아니다. 이 셋은 맑음과 무루에 통하며, 무루인 것을 세 해탈문이라 한다. 열반의 들어가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 셋이 겹친 「중첩의 삼매(重三摩地)」다. 공공(空空)은 무학의 공삼마지를 반연하여 공의 행상을 취하고, 무원무원은 무학의 무원삼마지를 반연하여 비상의 행상을 취하며, 무상무상은 무학의 무상삼마지의 비택멸을 반연하여 고요함(靜)의 행상을 취한다. 성도를 싫어하므로 이 셋은 오직 유루이며, 세 주의 사람 가운데 불시해탈만 일으킨다. 성도마저 싫어하여 놓아 버리는 이 삼매는, 아라한이 마지막에 도까지 뗏목처럼 버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본송
無量有四種,對治瞋等故, 慈悲無瞋性,喜喜捨無貪。 此行相如次,與樂及拔苦, 欣慰有情等,緣欲界有情。
무량은 네 가지이니, 진 등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자와 비는 무진을 성품으로 하고, 희는 희(수)이며, 사는 무탐이다. 그 행상은 차례로 즐거움을 줌 · 괴로움을 뽑음 · 유정을 기뻐함 · 평등이며, 욕계의 유정을 반연한다.
解脫有八種,前三無貪性, 二二一一定,四無色定善, 滅受想解脫,微微無間生。
해탈은 여덟 가지이니, 앞의 셋은 무탐을 성품으로 하고, 둘 · 둘 · 하나 · 하나의 정에 의지한다. 넷은 무색정의 선이고, 멸수상해탈은 미미한 마음 바로 뒤에 생긴다.
佛正法有二,謂教證為體, 有持說行者,此便住世間。
부처의 정법은 둘이니 교와 증을 체로 한다. 지니고 설하고 행하는 이가 있으면 정법이 세간에 머문다.
술어 풀이
- 四無量사무량
- 범어 apramāṇa. 자 · 비 · 희 · 사. 한량없는 유정을 대상으로 하고, 한량없는 복을 이끌며, 한량없는 과를 부르므로 「무량」이다.
- 勝解作意승해작의
- 실제와 다르게 그려 내는 작의. 사무량은 남이 실제로 즐거움을 얻게 하지 못하고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 내므로 이 작의와 상응한다.
- 八解脫팔해탈
- 범어 vimokṣa. 내유색상관외색 · 내무색상관외색 · 정해탈신작증구족주 · 네 무색정 · 멸수상정. 아래의 탐을 등지고(背) 버리는(捨) 수행이라 「배사(背捨)」라고도 한다.
- 八勝處팔승처
- 범어 abhibhvāyatana. 대상을 「이기는(勝)」 여덟 관법. 해탈이 대상을 등지기만 하는 데 비해, 승처는 대상을 제압하여 원하는 대로 관해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 十遍處십변처
- 범어 kṛtsnāyatana. 지 · 수 · 화 · 풍 · 청 · 황 · 적 · 백 · 공 · 식의 열 가지를 온 세상에 빈틈없이 두루 관하는 것.
- 微微心미미심
- 멸진정에 들기 직전의, 미세한 마음보다 더 미세한 마음.
- 教法 · 證法교법 · 증법
- 정법의 두 체. 교법은 경 · 율 · 논의 삼장, 증법은 삼승의 보리분법이다.
사무량 — 무엇을 다스리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정에 의지해 일어나는 공덕 가운데 첫째가 사무량이다. 왜 넷인가. 수행을 많이 가로막는 네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해치려는 성냄(瞋), 해침(害), 기뻐하지 않음(不欣慰), 그리고 욕탐 · 성냄이다. 자는 성냄을, 비는 해침을, 희는 기뻐하지 않음을, 사는 욕탐과 성냄을 다스린다.
그러면 부정관과 사(捨)는 둘 다 욕탐을 다스리는데 무엇이 다른가. 비바사사는 욕탐에 색탐과 음탐이 있어 부정관은 앞의 것을, 사는 뒤의 것을 다스린다고 한다. 천친은 「실제로는 부정관이 음탐을 다스리고, 그 밖의 친한 이에 대한 탐을 사가 다스린다」고 고쳐 말한다.
체는 이렇다. 자와 비는 무진(無瞋)이다. 그러나 천친은 다시 「실제 이치로는 비는 불해(不害)라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희는 희수, 사는 무탐이다. 함께하는 것까지 치면 오온이다. 그런데 사가 무탐이라면 어떻게 성냄을 다스리는가. 여기서 다스리는 성냄은 탐에서 이끌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친은 「실제 이치로는 사는 무탐 · 무진 두 법을 체로 해야 한다」고 한다.
네 무량의 행상은 각각 이렇게 사유하는 것이다.
云何當令諸有情類得如是樂?如是思惟入慈等至。云何當令諸有情類離如是苦?如是思惟入悲等至。諸有情類得樂離苦豈不快哉!如是思惟入喜等至。諸有情類平等平等無有親怨。如是思惟入捨等至。
「어떻게 하면 모든 유정이 이러한 즐거움을 얻게 할까」 하고 사유하여 자의 등지에 든다. 「어떻게 하면 모든 유정이 이러한 괴로움을 떠나게 할까」 하고 사유하여 비의 등지에 든다. 「모든 유정이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을 떠나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하고 사유하여 희의 등지에 든다. 「모든 유정은 평등하고 평등하여 친한 이도 원수도 없다」 하고 사유하여 사의 등지에 든다.
실제로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데 전도가 아닌가
여기서 날카로운 물음이 나온다. 사무량은 남이 실제로 즐거움을 얻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즐거움을 얻는다」고 그려 내니 전도가 아닌가. 『구사론』의 답은 세 가지다. 남이 즐거움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고, 의도(阿世耶)에 전도가 없기 때문이며, 승해작의의 생각(勝解想)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문한다. 설령 전도라 해도 무슨 허물이 있는가. 선이 아니게 된다면 그렇지 않다. 선근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악을 이끈다면 그렇지도 않다. 이 힘으로 성냄 등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사무량은 욕계의 모든 유정을 반연한다. 그들을 반연하는 성냄 등의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경전이 「한 방향의 모든 세계를 사유한다」고 한 것은 그릇(器世間)을 들어 그 안의 유정을 보인 것이다. 희는 희수에 속하므로 초 · 제2정려에만 의지한다. 나머지 셋은 여섯 지(네 정려 · 미지 · 중간)에 의지한다. 다른 설은 미지정을 빼고 다섯 지라 하고(이미 욕계를 떠난 이만 일으키는 여유로운 덕이므로), 또 다른 설은 정지 · 부정지, 근본 · 가행을 모두 무량으로 쳐서 열 지라 한다.
사무량은 번뇌를 끊지 못한다. 유루의 근본정려에 속하고, 승해작의와 상응하며, 모든 유정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다. 가행의 자리에서 성냄 등을 누르거나, 이미 끊은 것을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다만 욕계와 미지정에도 근본무량과 비슷한 자 등이 있어, 이것으로 성냄 등을 누른 뒤 끊는 길을 이끌어 번뇌를 끊으며, 그 뒤 염오를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근본의 네 무량을 얻는다고 한다. 그 뒤에는 강한 인연을 만나도 성냄 등에 가려지지 않는다.
원수에게까지 — 일곱 품으로 넓혀 가는 자
처음 수행하는 이는 자를 어떻게 닦는가. 먼저 자기가 받은 즐거움이나, 부처 · 보살 · 성문 · 독각이 받는 즐거움을 듣고 생각하여, 「모든 유정이 이와 같은 즐거움을 똑같이 받기를」 하고 원한다. 번뇌가 강해 이렇게 평등하게 마음을 쓰지 못하면, 유정을 세 무리로 나눈다 — 친한 이 · 중간의 이 · 원수. 친한 이를 상 · 중 · 하로, 원수를 하 · 중 · 상으로 나누어 모두 일곱 품이 된다. 먼저 가장 친한 이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려는 승해를 일으키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중간 · 낮은 친함으로, 다시 중간의 이에게, 그다음 낮은 원수 · 중간 원수 · 가장 큰 원수에게로 넓혀 간다. 거듭 익힌 힘으로 가장 큰 원수에게도 가장 친한 이와 같은 즐거움을 주려는 바람을 일으키게 되면, 다음은 대상을 넓혀 한 고을 · 한 나라 · 한 방향 · 모든 세계로 즐거움을 주는 행상을 두루 채운다. 그러면 자무량이 이루어진다.
비와 희도 이렇게 닦는다. 사는 처음에 중간의 이에서 시작해, 차츰 가장 친한 이에게도 중간의 이와 같은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는 데 이른다. 사무량은 사람만 일으키며,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셋을 함께 성취한다. 제3정려 이상에 태어난 이는 희를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팔해탈
팔해탈은 다음과 같다.
- 제1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 안에 색의 생각이 있으면서 바깥의 색을 (부정으로) 관한다.
- 제2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 안에 색의 생각이 없으면서 바깥의 색을 (부정으로) 관한다.
- 제3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 — 깨끗한 모습을 관하는 해탈을 몸으로 증득하여 갖추어 머문다.
- 제4~제7 — 네 무색정(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의 선.
- 제8 멸수상해탈(滅受想解脫) — 멸진정.
앞의 셋은 무탐이 체다. 탐을 가까이에서 다스리기 때문이다. 경전이 「생각(想)」과 「관(觀)」이라 한 것은 생각과 관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처음 둘은 부정(不淨)의 모습으로 움직인다. 푸르게 멍든 모습 등을 행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깨끗한 모습으로 움직인다. 맑고 빛나고 선명한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 처음 둘은 초 · 제2정려에 의지하여 욕계와 초정려의 색깔에 대한 탐을 다스리고, 셋째는 제4정려에 의지한다. 여덟 재환을 떠나 마음이 맑기 때문이다. 넷째부터 일곱째는 네 무색정의 선을 체로 한다. 무기나 염오는 해탈이 아니고, 산선(散善)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근분의 해탈도도 해탈이라 할 수 있지만 무간도는 그렇지 않다. 무간도는 아래 지를 반연하는데, 해탈은 반드시 아래 지를 등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멸진정이다. 그 자성 등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느낌과 생각을 싫어하여 등지고 일으키기 때문에, 또는 대상이 있는 모든 것을 통틀어 싫어하여 등지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 어떤 이는 선정의 장애에서 해탈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멸진정에 드는 것은 「미미한 마음」 바로 뒤다. 앞의 비상비비상처의 마음이 이미 미세한데 그보다 더 미세하므로 「미미(微微)」다. 멸진정에서 나올 때는 유정천의 맑은 정이나 무소유처의 무루심이 일어난다. 멸진정 자체의 분석은 구식 페이지와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해탈의 순서에서 차지하는 자리만 본다.
대상은 이렇다. 앞의 셋은 욕계의 보이는 색만을 대상으로 하되, 처음 둘은 싫어할 만한 대상을, 셋째는 사랑할 만한 대상을 반연한다. 넷째부터 일곱째는 각각 자기 지와 위 지의 고 · 집 · 멸, 모든 지의 유지 쪽 도, 그리고 비택멸과 허공을 대상으로 한다.
왜 제3정려에는 해탈이 없는가. 제3정려에는 색에 대한 탐이 없고, 그 지 자체의 묘한 즐거움에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왜 깨끗한 해탈(제3해탈)을 닦는가. 앞의 부정관으로 가라앉은 마음을 잠시 기쁘게 하려는 것이고, 또는 앞의 부정해탈이 이루어졌는지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깨끗한 모습을 관해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부정해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為欲令心暫欣悅故。前不淨觀令心沈慼,今修淨觀策發令欣。
마음을 잠시 기쁘게 하려는 것이다. 앞의 부정관이 마음을 가라앉고 시름겹게 했으므로, 이제 깨끗함의 관을 닦아 북돋아 기쁘게 한다.
수행자가 해탈 등을 닦는 데는 두 인연이 있다. 이미 끊은 번뇌를 더 멀어지게 하려는 것과, 정에 대해 뛰어난 자재를 얻으려는 것이다. 정에 자재하므로 무쟁 등의 덕과 성자의 신통을 일으키고, 일을 바꾸거나 수명을 머물게 하고 버리는 등 여러 작용을 할 수 있다. 경전이 여덟 가운데 셋째와 여덟째에만 「몸으로 증득한다」고 한 것은, 이 둘이 여덟 가운데 뛰어나고 각각 색계와 무색계의 끝에 있기 때문이다.
팔승처 — 등지기에서 이기기로
勝處有八種,二如初解脫, 次二如第二,後四如第三。
승처는 여덟 가지이니, 둘은 첫째 해탈과 같고, 다음 둘은 둘째 해탈과 같으며, 뒤의 넷은 셋째 해탈과 같다.
여덟 승처는 이렇다. 안에 색의 생각이 있으면서 바깥의 적은 색을 관함, 안에 색의 생각이 있으면서 바깥의 많은 색을 관함, 안에 색의 생각이 없으면서 바깥의 적은 색을 관함, 안에 색의 생각이 없으면서 바깥의 많은 색을 관함, 그리고 안에 색의 생각이 없으면서 바깥의 푸름 · 노랑 · 빨강 · 흼을 관하는 넷이다. 처음 둘은 첫째 해탈과, 다음 둘은 둘째 해탈과, 뒤의 넷은 셋째 해탈과 자성 · 지 · 대상이 같다.
그러면 여덟 승처는 세 해탈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 순서의 핵심이 있다.
前修解脫唯能棄背,後修勝處能制所緣,隨所樂觀惑終不起。
앞에서 닦은 해탈은 오직 (대상을) 버리고 등질 수 있을 뿐이고, 뒤에 닦는 승처는 대상을 제압할 수 있어, 좋아하는 대로 관해도 번뇌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해탈은 대상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고, 승처는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위에 서는 것이다. 많고 적은 색, 아름다운 색과 추한 색을 마음대로 관해도 탐이 일어나지 않을 때 비로소 대상을 「이긴다」.
십변처 — 온 세상을 하나의 색으로
遍處有十種,八如淨解脫, 後二淨無色,緣自地四蘊。
변처는 열 가지이니, 여덟은 깨끗한 해탈과 같고, 뒤의 둘은 맑은 무색이며 자기 지의 사온을 반연한다.
열 변처는 지 · 수 · 화 · 풍 · 청 · 황 · 적 · 백, 그리고 공무변처 · 식무변처다. 모든 곳에 빈틈없이 두루 관찰하므로 변처라 한다. 앞의 여덟은 깨끗한 해탈(제3해탈)과 같다. 자성은 무탐이고, 함께하는 것까지 치면 오온이며, 제4정려에 의지하고, 욕계의 보이는 색을 반연한다. 다른 논사는 풍변처만은 감촉되는 것 가운데 풍계를 대상으로 한다고 한다. 뒤의 둘은 공무변처 · 식무변처의 맑은 무색정을 자성으로 하고, 각각 자기 지의 사온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세 무리의 순서가 하나의 원칙으로 정리된다.
應知此中修觀行者,從諸解脫入諸勝處,從諸勝處入諸遍處,以後後起勝前前故。
이 가운데 관행을 닦는 이는 여러 해탈에서 여러 승처로 들어가고, 여러 승처에서 여러 변처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뛰어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해탈은 등지고, 승처는 이기며, 변처는 두루 채운다. 등을 돌리는 데서 시작해, 정면으로 이기고, 마침내 하나의 색으로 온 세상을 빈틈없이 덮는다. 대상에 대한 마음의 자재가 세 단계로 깊어지는 것이다.
멸수상해탈은 앞에서 말한 대로다. 나머지 해탈 · 승처 · 변처는 이염과 가행의 두 방식으로 모두 얻는다. 일찍이 익힌 것이 있고 익히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네 무색해탈과 두 무색변처는 삼계의 몸에서 모두 일으킬 수 있고, 나머지는 사람의 몸에서만 일으킨다. 가르침의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계에서 정을 일으키는 세 힘
二界由因業,能起無色定, 色界起靜慮,亦由法爾力。
두 계에서는 인과 업으로 무색정을 일으킬 수 있고, 색계에서 정려를 일으키는 것은 법이의 힘으로도 그러하다.
위의 두 계에 태어난 이는 세 인연으로 색계 · 무색계의 정을 일으킨다. 인의 힘 — 이전에 가까이서 자주 닦은 것이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업의 힘 — 위의 지에 태어나게 하는 순후수업을 먼저 지었고, 그 이숙이 나타나려 할 때 그 힘이 정을 일으키게 한다. 아래 지의 번뇌를 떠나지 않으면 위의 지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이(法爾)의 힘 — 기세간이 무너지려 할 때 아래 지의 유정이 저절로 위의 지의 정려를 일으킨다. 그때에는 모든 선법이 법이의 힘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무색정은 인과 업의 힘으로만 일으킨다. 무운천 등은 삼재로 무너지지 않으므로 법이의 힘이 없다. 욕계에서 위의 정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가르침의 힘이다. 「세계와 윤회」 편에서 본 괴겁의 장면 — 세계가 무너질 때 중생이 저절로 정려를 얻어 위로 올라가는 모습 — 이 정품의 이 짧은 문장과 맞물린다.
정법은 무엇이며 얼마나 머무는가
정품의 마지막 질문은 갑자기 시야를 넓힌다. 앞에서 갖가지 법문을 분별한 것은 모두 세존의 정법을 널리 지니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정법이란 무엇이며, 얼마나 머무는가.
世尊正法體有二種,一教、二證。教謂契經、調伏、對法,證謂三乘菩提分法。有能受持及正說者,佛正教法便住世間。有能依教正修行者,佛正證法便住世間。
세존의 정법은 체가 두 가지이니, 하나는 교요 둘은 증이다. 교는 경 · 율 · 논이고, 증은 삼승의 보리분법이다. 받아 지니는 이와 바르게 설하는 이가 있으면 부처의 바른 교법이 세간에 머물고, 가르침에 의지해 바르게 수행하는 이가 있으면 부처의 바른 증법이 세간에 머문다.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세 사람 — 지니는 이, 설하는 이, 행하는 이 —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과 같다. 그리고 『구사론』은 기간에 대한 두 설을 적는다.
聖教總言唯住千載,有釋證法唯住千年,教法住時復過於此。
성교는 통틀어 천 년만 머문다고 하고, 어떤 풀이는 증법만 천 년 머물고 교법이 머무는 때는 그보다 더 길다고 한다.
정법의 「천 년」은 『대비바사론』에도 보인다. 『대비바사론』은 부처가 「여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나의 정법은 천 년 또는 그 이상 머물렀을 것인데, 여인의 출가를 허락했으므로 오백 년이 줄었다」고 한 경을 두고, 「정법이 여전히 천 년을 다 채운다면 왜 이렇게 말했는가」라고 물은 뒤 이것을 「해탈견고(解脫堅固)」에 대한 은밀한 뜻으로 풀이한다. 곧 뒤의 오백 년에는 해탈이 굳건한 이가 없고 계 · 들음 · 등지가 굳건한 이만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사성종의 힘으로 정법이 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며, 그것을 서까래와 들보가 집을 떠받치는 것에 비유한다. 보광의 『구사론기』는 『대비바사론』이 정법 천 년을 말한다고 적으면서, 앞의 설을 따르면 「계와 갈마가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당시가 아직 천 년이 차지 않았다고 풀이한다.
이 짧은 대목이 정품의 끝, 그리고 『구사론』의 수행도 논의의 끝에 놓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선근에서 아라한까지, 십지에서 십팔불공법까지, 정려에서 팔해탈까지 — 이 모든 정교한 분석은 결국 「가르침을 지니고 설하는 이」와 「그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이」가 있을 때에만 세상에 머문다. 수행도의 기술(記述)은 그것을 실제로 걷는 사람이 있어야 살아 있는 법이 된다. 『구사론』은 이 물음 뒤에 자신의 해석 원칙을 밝히는 게송을 두고, 이어 파집아품으로 넘어간다. 그 게송과 『구사론』 전체를 맺는 의미는 서강과 마지막 편에서 다룬다.
이 편을 맺으며
현성품 · 지품 · 정품의 세 품은 하나의 물음에서 출발했다. 번뇌는 무엇으로 끊어지는가. 『구사론』의 답은 「견도와 수도로」라는 한 줄이었지만, 그 한 줄을 풀어내는 데 여덟 권이 들었다.
그 길은 살림살이에 만족하는 데서 시작했다. 사성종은 옷 · 음식 · 잠자리에 대한 태도를 수행의 그릇으로 삼았다. 부정관과 지식념의 두 문은 탐욕과 어지러운 생각을 누르고, 사념처는 자상과 공상으로 몸 · 느낌 · 마음 · 법을 관하여 마침내 넷을 하나로 아우르는 법념처에 이르렀다. 거기서 생긴 난 · 정 · 인 · 세제일법의 네 선근은 사제의 관찰을 차츰 줄여 욕계의 고제 하나, 한 행상, 한 찰나에 모았다. 그 바로 다음 찰나에 고법지인이 일어나 범부성을 버리고, 열다섯 찰나의 견도가 인과 지를 번갈아 일으키며 88의 견혹을 끊었다 — 도둑을 쫓고 문을 닫듯이. 열여섯째 도류지에서 수도가 시작되어, 아홉 지 각각의 아홉 품, 여든하나의 수혹을 거친 때부터 미세한 때까지 차례로 끊어 나갔다. 그 길 위의 자리마다 예류 · 일래 · 불환 · 아라한, 가가 · 일간, 중반 · 생반 · 상류, 신해 · 견지 · 신증, 혜해탈 · 구해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품은 그 길의 본체를 지혜로 다시 읽었다. 인은 보지만 아직 알지 못하고, 진지 · 무생지는 알지만 더 따지지 않는다. 둘에서 열로 나뉜 지혜는 서로를 포섭하며, 부처에게서는 십력 · 사무외 · 삼념주 · 대비의 열여덟 불공법으로 완성된다. 정품은 그 지혜가 기대는 선정을 분석했다. 정려는 고요하여 살피는 것이고, 네 정려는 지분을 하나씩 떠나며, 무색정은 아래 지를 떠남으로 나뉜다. 맑은 선정도 맛들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근분과 중간정은 근본정 사이의 문과 계단이 된다. 그 선정 위에서 사무량 · 팔해탈 · 팔승처 · 십변처의 공덕이 등지기에서 이기기로, 다시 두루 채우기로 깊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분석의 곳곳에서 천친은 비바사사의 정설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판했다. 즐거운 느낌은 실재하는가, 견도는 한 찰나인가, 아라한은 물러나는가, 정려의 락은 느낌인가 경안인가, 무색계에 색이 있는가. 특히 아라한의 퇴법 문제에서 「경량부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한 그의 판정은 중현의 긴 반박을 불러왔다. 『구사론』의 수행도론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논쟁의 장이다.
정품은 정법의 두 체 — 교법과 증법 — 와 그것이 머무는 기간을 묻는 것으로 끝난다. 이 길을 설하는 이와 걷는 이가 있을 때에만 정법은 세상에 머문다. 다음 편은 『구사론』의 마지막 품, 이 모든 길을 걷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파집아품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 편에서 본 수행 계위가 뒤에 천태 교학에서 어떻게 정리되는지도 그 편에서 살핀다.
더 읽기
- 『구사론』을 펼치며 — 성립 · 구조 · 전승
- 번뇌와 삼세실유 — 분별수면품
- 「나」의 논파와 『구사론』의 자리 — 파집아품, 천태와 니치렌 대성인
- 무상 — 사념처와 네 가지 전도
- 구식 — 멸진정과 무상정
- 천친보살 — 인물탐구
참고 문헌
원전
- 세친(천친) 『아비달마구사론』 권22~29 분별현성품 · 분별지품 · 분별정품, 현장 역, T29 no.1558
- 세친 『아비달마구사석론』 분별성도과인품 · 분별혜품 · 분별삼마발제품, 진제 역, T29 no.1559
- 세친 『아비달마구사론본송』, 현장 역, T29 no.1560
- 중현 『아비달마순정리론』 권68, 현장 역, T29 no.1562
-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181 · 183, 현장 역, T27 no.1545
- 보광 『구사론기』 권22~29, T41 no.1821
- 법보 『구사론소』 권23, T41 no.1822
- 세우 『이부종륜론』, 현장 역, T49 no.2031
연구
- P. Pradhan (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Patna: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67
- Louis de La Vallée Poussin (tr.), L'Abhidharmakośa de Vasubandhu, 6 vols., Paris: Paul Geuthner, 1923–1931
- Leo M. Pruden (tr.), Abhidharmakośabhāṣyam, 4 vols.,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88–1990
- 櫻部建 · 小谷信千代, 『俱舎論の原典解明 賢聖品』, 法藏館, 1999
- 加藤純章, 『経量部の研究』, 春秋社, 1989
- 권오민 역, 『아비달마구사론』 1~4, 동국역경원, 2002
-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