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나라 태청 2년(548), 서인도 출신의 학승 진제(眞諦, 파라마르타)가 남조의 도읍 건강에 이르렀다. 황제 무제는 그를 극진히 맞았지만, 그해 가을 후경의 반란이 일어나 도읍이 포위되었고 이듬해 무제는 굶주림 속에 세상을 떠났다. 진제는 그 뒤 스무 해 동안 전란을 피해 남쪽 땅을 떠돌며 경론을 옮겼다. 그가 옮긴 책들에는 낯선 이름이 하나 있었다. 아마라식(阿摩羅識), 「때 묻지 않은 식」이다.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모든 업과 번뇌의 씨앗을 간직한 여덟째 식보다 더 깊은 곳에, 처음부터 물들지 않은 아홉째 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백 년 뒤 인도에서 열일곱 해를 배우고 돌아온 현장(玄奘)은 그 책의 원전을 다시 옮겼다. 진제가 「아마라식」이라 옮긴 자리에, 현장은 「전의(轉依)」라고 적었다. 그의 번역에 아홉째 식은 없었다.
불교는 처음부터 마음의 종교였다. 석존은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선다」고 했고, 괴로움의 원인도 해탈의 자리도 마음에서 찾았다. 그런데 마음이란 무엇인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는 마음, 곧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마음이 마음의 전부인가. 깊이 잠들어 꿈도 꾸지 않을 때 마음은 사라졌다가 깨어날 때 다시 생기는가. 어제 지은 업은 오늘 어디에 남아 있는가. 죽음을 넘어 무엇이 이어지는가. 이 물음들을 끝까지 따라간 사람들이 「마음에는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보다 깊은 층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이 유가행파, 곧 유식학파다.
유식학은 마음을 여덟 겹으로 보았다. 눈 · 귀 · 코 · 혀 · 몸의 다섯 감각 의식과 그것을 아우르는 의식(제6식), 그 밑에서 끊임없이 「나」를 붙잡는 말나식(제7식),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경험의 씨앗을 간직하고 생을 이어 가는 아뢰야식(제8식)이다. 이 구조는 인도 불교가 마음에 대해 내놓은 가장 정교한 이론이었고, 동아시아 불교의 사상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 구조는 하나의 커다란 물음을 남겼다. 아뢰야식은 깨끗한가 더러운가. 그것이 업과 번뇌의 씨앗을 간직한 곳이라면 미혹의 뿌리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씨앗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이 미혹이라면 사람은 어떻게 부처가 되는가. 중국 불교는 이 물음을 두고 한 세기 넘게 다투었다. 어떤 이는 아뢰야식 자체가 참된 마음이라 했고, 어떤 이는 거짓된 마음이라 했으며, 진제는 그 아래에 아홉째 식을 두었고, 현장은 그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 논쟁은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맞물려 있었다. 현장의 법상종은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 페이지는 구식(九識)이라는 개념이 걸어온 길을 일곱 부로 나누어 읽는다. 1부는 석존의 식 — 여섯 감각과 여섯 식, 그리고 「빛나는 마음」. 2부는 부파의 물음 — 끊어진 마음은 어디서 다시 일어나는가. 3부는 유식의 팔식 — 아뢰야식과 종자 · 훈습, 세 가지로 변하는 식, 식을 뒤집어 지혜를 얻는 전의, 그리고 다섯 가지 종성. 4부는 중국의 논쟁 — 아뢰야식은 참인가 거짓인가, 『대승기신론』의 일심과 진제의 아마라식, 현장의 팔식. 5부는 천태와 전교 — 「한 생각」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리고 오성각별을 깨뜨린 삼일권실 논쟁. 6부는 대성인의 유식 비판 — 「무성유정과 결정성의 이승은 영원히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법상종의 주장과 「섭론의 식의 여덟과 아홉」. 7부는 「구식심왕 진여의 도읍」 — 「묘법연화경은 구식이요 십계는 팔식 이하」라는 『어의구전』의 법문과, 「마음의 바탕은 구식에 두고 수행은 육식으로 하라」는 가르침이다.
- 석존「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눈과 형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pabhassaramidaṃ cittaṃ」이 마음은 빛난다
- 부파끊어진 마음을 잇는 것 — 유분식 · 근본식 · 궁생사온
- 유식팔식「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이숙과 사량과 경계를 요별하는 식아뢰야식과 종자
- 중국「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爲阿黎耶識」불생불멸과 생멸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리야식이라 한다(『대승기신론』)진제의 제9 아마라식현장의 팔식
- 천태「豈留黎耶菴摩羅爲依止」어찌 아리야 · 암마라를 남겨 의지처로 삼겠는가「祇心是一切法 一切法是心」다만 마음이 일체법이요 일체법이 마음
- 니치렌 대성인「妙法蓮華経は九識なり十界は八識已下なり」묘법연화경은 구식이요 십계는 팔식 이하「心地を九識にもち修行をば六識にせよ」마음의 바탕은 구식에 두고 수행은 육식으로 하라
식이란 무엇인가
식(識)은 팔리어 윈냐나(viññāṇa), 산스크리트 비즈냐나(vijñāna)의 번역이다. 「알다(jñā)」에 「나누어(vi)」가 붙은 말로, 대상을 하나하나 갈라 아는 작용을 뜻한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서 보았듯이 석존은 사람을 다섯 무더기(오온)로 나누었고, 그 다섯째가 식이었다. 물질(색) · 느낌(수) · 지각(상) · 의지 작용(행)과 나란히 놓인, 알아 가르는 마음이다. 계보 一 「십이연기」에서 보았듯이 식은 열두 고리의 셋째 고리이기도 하다. 무명과 행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고, 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명색)이 일어난다.
식을 오온과 십이연기의 한 자리에 두었다는 것은, 식이 다른 무엇과 떨어져 홀로 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식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아는 식이고, 무엇인가에 기대어 일어나는 식이다.
눈과 형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석존은 식이 일어나는 방식을 이렇게 설했다. 『맛지마 니까야』의 「마두삔디까 경(꿀 덩어리 경)」에서 마하깟짜나 존자가 석존의 짧은 말씀을 풀이하는 대목이다.
Cakkhuñcāvuso,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takketi, yaṃ vitakketi taṃ papañceti.
벗들이여, 눈과 형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셋의 만남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끼는 것을 지각하고, 지각하는 것을 사유하고, 사유하는 것을 부풀려 희론한다.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빛깔이 있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눈(감각 기관)과 빛깔(대상)이 만날 때 「본다」는 의식이 생긴다. 귀와 소리에서 귀의 의식이, 코와 냄새에서 코의 의식이, 혀와 맛에서 혀의 의식이, 몸과 닿음에서 몸의 의식이, 그리고 뜻(意)과 법(생각의 대상)에서 의식(意識)이 생긴다. 이것이 여섯 감각 기관(육근) · 여섯 대상(육경) · 여섯 식(육식)이고,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2부에서 본 십팔계다. 경은 이어서, 그렇게 생긴 식에서 느낌과 지각과 사유가 일어나고, 마침내 그것이 「희론(papañca)」으로 부풀어 사람을 휘감는다고 한다. 괴로움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만난 마음이 부풀어 가는 데서 생긴다.
석존은 다른 경에서, 「바로 이 식이 윤회하며 옮겨 간다」고 고집한 비구 사띠를 꾸짖으며 「조건이 없으면 식의 생겨남은 없다(aññatra paccayā natthi viññāṇassa sambhavo)」고 했다(「갈애 멸진 대경」, MN 38). 장작을 연하여 타는 불은 장작불이라 하고 짚을 연하여 타는 불은 짚불이라 하듯이, 눈을 연하여 생긴 식은 안식이라 하고 귀를 연하여 생긴 식은 이식이라 한다. 식은 연기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계보 一 「십이연기」의 「갈대 두 묶음 — 식과 명색」에서 자세히 읽었다.
- 눈(眼)형색(色)안식(眼識)
- 귀(耳)소리(聲)이식(耳識)
- 코(鼻)냄새(香)비식(鼻識)
- 혀(舌)맛(味)설식(舌識)
- 몸(身)닿음(觸)신식(身識)
- 뜻(意)법(法)의식(意識)
(「마두삔디까 경」, MN 18)
마음 · 뜻 · 식 — 세 이름
초기 경전은 마음을 가리키는 말로 셋을 섞어 썼다. 마음(citta, 心) · 뜻(mano, 意) · 식(viññāṇa, 識)이다. 『상윳따 니까야』의 「배우지 못한 자 경」은 이렇게 말한다.
Yañca kho etaṃ, bhikkhave, vuccati cittaṃ itipi, mano itipi, viññāṇaṃ itipi, taṃ rattiyā ca divasassa ca aññadeva uppajjati aññaṃ nirujjhati.
비구들이여, 마음이라고도 하고 뜻이라고도 하고 식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밤낮으로 하나가 생겨나면 다른 하나가 사라진다.
경은 이어서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한다. 숲속을 돌아다니는 원숭이가 한 가지를 잡았다가 놓고 다른 가지를 잡듯이, 마음도 쉼 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차라리 몸을 「나」라고 여길지언정 이 마음을 「나」라고 붙잡아서는 안 된다. 몸은 한 해, 열 해, 백 년을 이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밤낮으로 생겨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초기 경전에서 이 세 이름은 거의 같은 뜻이었다. 그러나 뒤에 유식학은 이 세 이름에 서로 다른 층을 배당한다. 『성유식론』은 「쌓아 일으키는 것을 마음이라 하고, 헤아리는 것을 뜻이라 하고, 알아 가르는 것을 식이라 한다(集起名心 思量名意 了別名識)」고 하여, 마음(心)을 제8 아뢰야식에, 뜻(意)을 제7 말나식에, 식(識)을 앞의 여섯 식에 짝지었다. 석존이 섞어 쓴 세 이름이 천 년 뒤 마음의 세 층이 된 것이다.
- 마음(心)= 제8 아뢰야식
- 뜻(意)= 제7 말나식
- 식(識)= 앞의 여섯 식
빛나는 마음
초기 경전에는 뒷날의 논쟁을 미리 내다본 듯한 짧은 말씀이 하나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첫 권에 실린 두 구절이다.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ṃ. …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ṃ.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은 밖에서 온 번뇌들에 물들어 있다. …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리고 그것은 밖에서 온 번뇌들에서 벗어나 있다.
마음은 본래 빛나고, 번뇌는 「밖에서 온 손님(āgantuka)」이다. 이 구절은 한역에서 「마음의 본성은 깨끗하나 객진번뇌에 물든다(心性本淨 客塵所染)」는 말로 자리 잡았고, 대승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먼 뿌리가 되었다. 상좌부의 주석서는 이 「빛나는 마음」을 2부에서 볼 유분심(바왕가)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같은 초기 경전은 마음을 원숭이처럼 쉼 없이 생멸하는 것으로도 그렸다. 마음은 본래 빛나는가, 아니면 찰나마다 생멸하는 흐름일 뿐인가. 빛나는 마음이 번뇌에 물든 것이 범부라면, 그 빛나는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이 4부에서 볼 「아뢰야식은 참인가 거짓인가」, 그리고 「아홉째 식」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끊어지는 의식
석존의 식은 언제나 감각 기관과 대상을 연하여 일어나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대상이 없을 때 식은 어떻게 되는가. 꿈 없이 깊이 잠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수행자가 마음의 작용을 모두 멈춘 선정 —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 에 들었을 때, 여섯 식은 멈춘다. 그런데 사람은 다시 깨어나고, 선정에서 나온다. 멈추었던 의식은 무엇에서 다시 일어나는가. 잠들기 전의 나와 깨어난 뒤의 나를 잇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죽음과 다시 태어남의 물음과 이어져 있었다. 무아라면 윤회하는 「나」는 없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서 본 대로, 독자부는 이 물음에 답하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보특가라)」을 세웠다가 비판을 받았다. 핵심 개념 「업」에서 본 대로, 설일체유부는 과거가 실재한다는 삼세실유로, 경량부는 마음의 흐름에 심어진 종자(種子)로 업의 상속을 설명했다. 핵심 개념 「무상」에서 본 대로, 모든 것이 찰나마다 생멸한다면 연속성은 더욱 큰 문제가 된다. 경량부의 종자는 마음의 흐름에 심어져 있다고 했지만, 그 흐름이 깊은 잠에서 끊어진다면 종자는 어디에 머무는가.
여섯 식 아래를 흐르는 것
부파의 논사들은 저마다 여섯 식 아래를 흐르는 무엇인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뒤에 유식학은 이것들을 아뢰야식을 다른 이름으로 은밀히 가리킨 것(異門)이라고 정리했다. 『성유식론』은 대중부의 근본식, 상좌부의 유분식, 화지부의 궁생사온을 들었고, 그 주석서는 경량부의 일미온을 덧붙였다.
상좌부(분별설부)는 그것을 유분식(有分識, bhavaṅga)이라 했다. 「존재의 갈래」라는 뜻이다. 사람이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할 때는 그 대상을 아는 의식의 과정이 일어나지만, 그런 과정이 없을 때에도 마음은 끊어지지 않고 유분심으로 흐른다. 깊은 잠을 잘 때의 마음이 이것이다. 한 생의 첫 순간(재생연결식)과 마지막 순간(죽음의 마음)도 같은 성질의 마음으로, 한 생을 꿰는 바탕의 흐름이다. 1부에서 본 「빛나는 마음」을 상좌부 주석서가 유분심으로 읽은 것은 이 때문이다.
대중부는 그것을 근본식(根本識, mūlavijñāna)이라 불렀다. 여섯 식이 의지하는 뿌리가 되는 식이라는 뜻이다. 화지부는 궁생사온(窮生死蘊), 곧 「생사가 다할 때까지 이어지는 무더기」를 세웠다. 다른 무더기들은 끊어졌다 이어지지만, 이것만은 해탈하여 생사가 다할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량부의 일부는 일미온(一味蘊), 곧 처음부터 한 맛으로 이어지는 미세한 의식을 말했다.
이름은 달랐지만 물음은 하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여섯 식은 끊어졌다 이어진다. 그것을 잇는 무엇인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어야 한다. 이 물음에 체계적으로 답한 것이 유식학의 아뢰야식이었다.
- 상좌부유분식(有分識, bhavaṅga)존재의 갈래대상 없이도 흐르는 바탕의 마음
- 대중부근본식(根本識, mūlavijñāna)여섯 식이 의지하는 뿌리
- 화지부궁생사온(窮生死蘊)생사가 다할 때까지 이어지는 무더기
- 경량부일미온(一味蘊)한 맛으로 이어지는 미세한 의식
마음의 왕과 마음의 작용
부파의 아비달마는 마음을 또 하나의 방식으로 나누었다. 마음의 왕(心王)과 마음의 작용(心所, 心數)이다. 마음의 왕은 대상을 전체로 아는 마음 그 자체이고, 마음의 작용은 그 마음에 딸려 함께 일어나는 느낌 · 지각 · 의도 · 탐욕 · 믿음 같은 갖가지 작용이다. 설일체유부는 마음의 작용을 마흔여섯 가지로 헤아렸고, 뒤에 유식학은 쉰한 가지로 헤아렸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4부에서 보았듯이, 마음의 왕과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는가 차례로 일어나는가를 두고도 부파마다 견해가 달랐다.
이 「마음의 왕」이라는 말은 뒤에 중요한 뜻을 얻는다. 유식학은 여덟 식 하나하나를 마음의 왕이라 하고, 거기에 쉰한 가지 작용이 딸린다고 했다. 법상종은 제8식을 근본의 마음의 왕으로 보았다. 그리고 천태와 대성인의 전통에서는 아홉째 식을 「마음의 왕(心王)」이라 부르게 된다. 7부에서 볼 「구식심왕(九識心王)」이라는 말이 여기서 시작된다.
요가 수행자들이 본 것
4세기 무렵 북인도에서, 선정 수행(요가)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수행자들이 새로운 불교 사상을 세웠다. 그들을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라 하고, 그 사상을 유식(唯識, vijñaptimātra), 곧 「오직 식뿐」이라 한다. 전승은 미륵(마이트레야)이 그 가르침을 펴고(『유가사지론』은 한역 전통에서 미륵의 설로 전한다) 무착(아상가)이 받아 『섭대승론』 등을 지었으며, 그 아우 천친(세친, 바수반두)이 『유식이십론』 · 『유식삼십송』으로 이론을 다듬었다고 전한다. 천친의 생애와 저술은 인물탐구 「천친보살」에서 다루었다.
유식의 출발점은 선정의 체험이었다. 『해심밀경』 분별유가품에서 미륵보살은 부처에게 묻는다. 선정 속에서 관찰하는 영상(影像)은 마음과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까. 부처는 답한다.
當言無異 何以故 由彼影像唯是識故 善男子 我說識所緣 唯識所現故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오직 식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나는 식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식이 나타낸 것이라고 설한다.
선정 속에서 떠오르는 영상이 마음이 지어 낸 것이라면, 선정 밖에서 보는 세계는 어떠한가. 유식학은 거기까지 밀고 나갔다. 우리가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대상도, 실은 식이 스스로 나타낸 모습이다.
오직 식뿐 — 꿈과 아귀의 강
천친은 『유식이십론』에서 「바깥 대상이 없다면 왜 특정한 장소와 때에만 그것이 보이고, 여러 사람에게 함께 보이며, 실제로 작용하는가」라는 반론에 이렇게 답한다.
處時定如夢 身不定如鬼 同見膿河等 如夢損有用
장소와 때가 정해져 있는 것은 꿈과 같고, 여러 몸에 정해져 있지 않음은 아귀와 같으니 함께 고름의 강 등을 보며, 작용이 있는 것은 꿈에서 몸이 상하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도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때에 특정한 것이 보인다. 같은 업을 지은 아귀들은 함께 같은 강을 고름이 흐르는 강으로 본다. 꿈속의 일도 몸에 실제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니 장소 · 때의 일정함, 여럿이 함께 봄, 실제의 작용은 바깥 대상이 실재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뒤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같은 물을 넷이 달리 본다(一水四見)」는 비유로 정리했다. 같은 강물을 하늘 사람은 유리로, 사람은 물로, 물고기는 사는 집으로, 아귀는 고름이나 불로 본다. 무엇을 보느냐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이의 업과 마음이 정한다.
유식은 바깥 세계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허무론이 아니다. 유식이 부정하는 것은 마음과 떨어져 그 자체로 있는 대상이다. 세계는 마음이 업에 따라 나타낸 것이고, 그렇기에 마음이 바뀌면 세계도 바뀐다. 이것이 3부 끝에서 볼 「식을 뒤집어 지혜를 얻는다」로 이어진다.
- 하늘 사람유리
- 사람물
- 물고기사는 집
- 아귀고름(불)
저장하는 식 — 아뢰야식
그렇다면 대상을 나타내는 그 식은 어디서 오는가. 2부에서 남은 물음 — 끊어진 의식은 무엇에서 다시 일어나는가 — 에, 유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으로 답한다. 알라야(ālaya)는 「집」, 「저장소」를 뜻한다. 히말라야(himālaya)가 「눈(hima)의 저장소」이듯이, 아뢰야식은 모든 경험의 씨앗,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는 식이다.
천친의 『유식삼십송』은 먼저 식이 세 가지로 변한다고 하고, 그 첫째를 이렇게 노래한다.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不可知執受 處了 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첫째는 아뢰야식이니, 이숙(異熟)이요 일체종자다. 그 집지하는 것과 머무는 곳과 아는 작용은 알 수 없고, 늘 촉 · 작의 · 수 · 상 · 사와 함께하며,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한다. 이것은 덮임이 없는 무기(無覆無記)이며 촉 등도 그러하다. 늘 폭류처럼 굴러가다가 아라한의 자리에서 버려진다.
한 구절씩 풀면 아뢰야식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숙(異熟)」 — 선악의 업이 원인이 되어, 그와는 성질이 다른(선도 악도 아닌) 결과로 무르익은 식이다. 지난 업의 과보로서의 이 몸과 이 생이 아뢰야식이다. 「일체종자(一切種)」 — 모든 경험의 종자를 간직한다. 「알 수 없다(不可知)」 — 그 작용이 너무 미세하여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아뢰야식은 몸(집지하는 것)과 세계(머무는 곳)를 끊임없이 붙들고 나타낸다. 「무부무기(無覆無記)」 —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고, 번뇌에 덮여 있지도 않다. 그래야 선의 종자도 악의 종자도 함께 담을 수 있다. 그리고 「늘 폭류처럼 굴러간다(恒轉如瀑流)」 —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되 같은 물이 머무르지 않는 거센 물살처럼, 찰나마다 생멸하며 이어진다. 2부의 부파들이 찾던 「끊어지지 않는 흐름」이 이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상을 어기지 않는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3부에서 본 『해심밀경』의 「아다나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여 모든 종자가 폭류처럼 흐른다」가 이 게송의 앞자리다.
『성유식론』은 아뢰야식이라는 이름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풀이한다. 종자를 간직하는 「능장(能藏)」, 앞의 일곱 식(전칠식)의 경험이 종자로 배어드는 곳인 「소장(所藏)」, 그리고 말나식이 「나」라고 붙잡는 대상인 「집장(執藏)」이다(此識具有能藏所藏執藏義故). 저장하고, 저장되고, 붙잡힌다. 아뢰야식은 업의 창고이자 「나」라는 착각의 뿌리다.

아뢰야식이 있어야 하는 까닭
유가행파는 아뢰야식이 단지 상상이 아님을 논증하려 했다. 『유가사지론』 섭결택분은 아뢰야식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여덟 가지 일을 든다. 첫째, 몸을 붙들어 유지하는 것(집수) — 여섯 식은 대상에 따라 끊어지므로 몸을 끊임없이 붙들 수 없다. 둘째, 여러 식이 한꺼번에 처음 일어나는 것(최초생기). 셋째, 의식이 또렷하게 일어나는 것(명료). 넷째, 서로 종자가 되는 것(종자) — 끊어진 식이 다시 일어나려면 종자가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한다. 다섯째, 업의 작용. 여섯째, 몸의 감각. 일곱째, 마음이 없는 선정(무심정)에 든 사람이 죽은 사람과 다른 까닭. 여덟째, 죽을 때 몸의 위아래에서 차례로 체온이 식어 가는 것(명종). 핵심은 2부의 물음 그대로다. 멸진정에 든 사람은 여섯 식이 다 멈추었는데도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를 살아 있게 하고, 선정에서 나올 때 의식이 다시 일어나게 하는 식이 있어야 한다.
종자와 훈습
아뢰야식이 간직하는 종자는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유식은 이것을 훈습(熏習, vāsanā)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섭대승론』은 참깨에 꽃향기가 배는 것에 비유한다. 참깨를 꽃과 함께 두면, 꽃은 시들어 사라져도 참깨에는 꽃의 향기가 남는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행할 때, 그 경험은 사라져도 그 향기, 곧 종자가 아뢰야식에 밴다.
그리고 그 종자는 때가 되면 다시 경험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현행(現行)이라 한다. 종자가 현행을 낳고, 현행이 다시 종자를 훈습한다. 『성유식론』은 이 관계를 심지와 불꽃에 비유한다. 심지가 불꽃을 낳고 불꽃이 심지를 태우듯이, 또 갈대 묶음들이 서로 기대어 서 있듯이, 종자와 현행은 서로를 낳으며 같은 때에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 이것이 유식이 설명하는 업의 상속이다. 핵심 개념 「업」 2부에서 본 경량부의 종자설이 아뢰야식이라는 저장소를 얻어 완성된 것이다.
『섭대승론』은 종자가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조건을 든다. 찰나마다 생멸한다(찰나멸). 결과와 같은 때에 있다(과구유).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항수전). 선악의 성질이 정해져 있다(성결정).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야 열매를 맺는다(대중연). 자기와 같은 종류의 결과를 낳는다(인자과). 이 여섯 조건이 뜻하는 것은, 종자가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찰나마다 생멸하며 이어지는 힘이라는 것, 그리고 조건(연)을 만나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핵심 개념 「업」에서 본 「인과 연이 만나는 때에 그 과보를 받는다」가 여기서 이론이 된다.
그러면 종자는 모두 경험으로 생긴 것인가. 호법의 해석을 따르는 『성유식론』은 종자를 둘로 나누었다. 경험의 훈습으로 새로 생긴 신훈종자(新熏種子)와, 처음부터 본래 있는 본유종자(本有種子), 곧 법이종자(法爾種子)다. 이 구분이 3부 끝에서 볼 「다섯 가지 종성」, 그리고 6부의 대성인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세 가지로 변하는 식 — 팔식의 구조
천친의 『유식삼십송』은 첫머리에서 유식의 전체 구조를 이렇게 선언한다.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거짓으로 「나」와 「법」을 말하므로 갖가지 모습이 굴러 일어나지만, 그것은 식이 변해 나타난 것에 의지한다. 이 변하는 식은 오직 셋이니, 이숙과 사량과 경계를 요별하는 식이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도, 「세계」라고 부르는 것도 식이 변해 나타난 것이다. 그 변하는 식은 세 겹이다. 첫째 능변이 이숙식, 곧 앞에서 본 제8 아뢰야식이다. 둘째 능변이 사량식, 곧 제7 말나식(末那識)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나」라고 헤아리고 붙잡는다. 아치 · 아견 · 아만 · 아애의 네 번뇌가 늘 함께한다. 이것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3부에서 자세히 읽었다. 셋째 능변이 경계를 요별하는 식, 곧 앞의 여섯 식이다. 『유식삼십송』 제8송은 「셋째 능변은 그 차별이 여섯 가지이니, 경계를 요별하는 것을 성품과 모습으로 삼으며, 선과 불선과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이다(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은 여덟 겹이 된다. 맨 위에서 대상을 만나는 다섯 감각 의식과 의식, 그 아래에서 쉼 없이 「나」를 붙잡는 말나식,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종자를 간직하고 폭류처럼 흐르는 아뢰야식. 1부에서 석존이 섞어 썼던 마음 · 뜻 · 식의 세 이름이 이 세 층이다.
세 가지 성품 — 새끼줄과 뱀
식이 나타낸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유식은 존재가 보이는 방식을 셋으로 나누었다. 이것을 삼성(三性)이라 한다. 흔히 드는 비유가 어스름 속의 새끼줄이다. 해 질 녘 길에 놓인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보고 놀란다. 그 「뱀」은 마음이 덧씌운 허상이다. 이것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곧 두루 헤아려 집착된 모습이다. 그러나 새끼줄은 실제로 거기 있다. 새끼줄은 삼(麻)과 꼬는 손길이라는 여러 조건에 기대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 곧 다른 것에 기대어 일어난 모습이다. 그리고 새끼줄의 본성을 꿰뚫어 보면 거기에는 실체로서의 새끼줄도 없고 다만 조건의 모임이 있을 뿐이다.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원성실성(圓成實性), 곧 원만히 이루어진 참된 모습이다.
삼성은 수행의 길이기도 하다. 식이 나타낸 세계(의타기)를 실체로 붙잡는 것(변계소집)이 미혹이고, 그 붙잡음을 떠나 의타기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원성실)이 깨달음이다. 세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을 바꾸는 것이다.
-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두루 헤아려 집착된 모습새끼줄을 뱀으로 본다= 미혹
- 의타기성(依他起性)다른 것에 기대어 일어난 모습삼과 꼬는 손길에 기대어 생긴 새끼줄= 식이 나타낸 세계
- 원성실성(圓成實性)원만히 이루어진 참된 모습새끼줄의 실체 없는 본성= 깨달음
세계를 버리지 않고, 세계를 보는 눈을 바꾼다
식을 뒤집어 지혜로 — 전의
그렇다면 깨달음은 마음의 구조에서 무엇이 바뀌는 것인가. 유식은 그것을 「의지처를 뒤집는다」는 뜻의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라 불렀다. 아뢰야식에 간직된 번뇌의 종자가 다 없어지고 깨끗한 종자만 남을 때, 여덟 식은 네 가지 지혜로 바뀐다. 『성유식론』 권10은 이렇게 정리한다. 제8식이 바뀌어 모든 것을 거울처럼 비추는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고, 제7식이 바뀌어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되며, 제6식이 바뀌어 모든 것을 묘하게 살피는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되고, 앞의 다섯 식이 바뀌어 할 일을 이루는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된다.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 곧 식을 바꾸어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네 지혜와 부처의 세 몸의 관계는 핵심 개념 「삼신」 3부에서 보았다.
그러면 깨달은 뒤의 제8식은 무엇이라 부르는가. 『성유식론』은 이렇게 말한다.
或名無垢識 最極淸淨 諸無漏法所依止故 此名唯在如來地有
혹은 무구식(無垢識)이라 이름하니, 지극히 청정하여 모든 무루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오직 여래의 자리에만 있다.
무구식(無垢識), 곧 「때 없는 식」. 산스크리트로 하면 아말라(amala)다. 4부에서 보듯이 진제는 이 「때 없는 식」 — 아마라식 — 을 여덟째 식과 다른 아홉째 식으로 세웠다. 현장과 법상종은 그것을 아홉째 식이 아니라, 성불하여 완전히 깨끗해진 제8식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했다. 아홉째 식이 따로 있는가, 여덟째 식이 깨끗해진 것인가. 이것이 「식의 여덟과 아홉」 논쟁의 핵심이다. 6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이 전의의 대목을 묻는 이의 말로 인용하신다.
- 제8 아뢰야식대원경지(大圓鏡智)거울처럼 모든 것을 비춘다
- 제7 말나식평등성지(平等性智)나와 남을 평등하게 본다
- 제6 의식묘관찰지(妙觀察智)모든 것을 묘하게 살핀다
- 전오식성소작지(成所作智)할 일을 이룬다
(『성유식론』 권10)
다섯 가지 종성
전의가 깨끗한 종자만 남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깨끗한 종자 —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무루종자(無漏種子) — 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앞에서 본 「본유종자」의 구분이 여기서 결정적인 뜻을 갖는다. 유식학, 특히 현장이 전한 법상종은 중생이 본래 지닌 무루종자에 따라 다섯 가지 종성(種性)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이것을 오성각별(五性各別)이라 한다.
성문의 깨달음에 이르는 종자만 가진 성문정성(聲聞定性), 연각의 종자만 가진 연각정성(緣覺定性), 부처의 종자를 가진 보살정성(菩薩定性), 여럿 가운데 어느 것으로 될지 정해지지 않은 부정성(不定性), 그리고 어떤 무루종자도 없는 무성(無性)이다. 성문정성과 연각정성은 아라한과 벽지불이 되어 그치고 끝내 부처가 되지 못한다. 이들을 결정성(決定性)의 이승이라 한다. 무성의 중생은 영원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을 무성유정(無性有情)이라 한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보살정성과, 부정성 가운데 보살로 나아가는 이들뿐이다.
오성각별은 유식의 정교한 체계가 이끌어 낸 냉정한 결론이었다. 무루종자는 경험으로 새로 만들 수 없고 본래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라면, 본래 없는 사람은 아무리 닦아도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법화경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설한 것은, 부정성의 중생을 이끌기 위한 방편의 말이 된다. 법상종은 이것을 「삼승이 진실이요 일승은 방편(三乘眞實 一乘方便)」이라 했다. 5부와 6부에서 보듯이, 천태 · 전교와 대성인의 유식 비판은 이 오성각별을 정면으로 겨눈다.
- 성문정성(聲聞定性)아라한에서 그친다 · 부처가 되지 못한다×
- 연각정성(緣覺定性)벽지불에서 그친다 · 부처가 되지 못한다×
- 보살정성(菩薩定性)부처가 된다○
- 부정성(不定性)정해지지 않음 · 보살로 나아가면 부처가 된다조건부
- 무성(無性)어떤 무루종자도 없다 · 영원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 무성유정×
여래장과 장식
유식학이 인도에서 꽃피던 무렵, 다른 한 흐름이 있었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3부에서 본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모든 중생 안에 여래가 감추어져 있다는 이 사상은, 1부에서 본 「빛나는 마음」을 이어받아 마음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다고 보았다. 『승만경』은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 물들어 있다는 것은 알기 어렵다(自性淸淨心而有染者 難可了知)」고 했다. 본래 깨끗한 마음이 어떻게 물들어 있는가 — 이것은 오직 부처만이 안다.
유식의 아뢰야식은 업과 번뇌의 종자를 간직한 식이었고, 여래장은 본래 깨끗한 부처의 성품이었다. 둘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나왔지만, 둘 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하고 있었다. 『능가경』은 이 둘을 하나로 묶었다. 경은 「여래장은 선과 불선의 원인이 되어 모든 갈래의 생을 지어 낸다」고 하고, 여래장을 장식(藏識), 곧 아뢰야식과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깨끗한 여래장이 그대로 업을 간직하는 아뢰야식이라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깨끗한가 더러운가. 이 긴장을 안은 채 두 흐름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대승기신론』 — 한마음의 두 문
동아시아 불교에서 이 물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대승기신론』이다. 마명의 저술로 전하고 진제가 옮겼다고 하는 이 짧은 논서는(저자와 성립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다른 견해가 있다), 모든 것을 「한마음(一心)」으로 거두고, 그 한마음에 두 문이 있다고 한다.
依一心法 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한마음의 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마음의 진여문이요, 둘째는 마음의 생멸문이다.
진여문은 마음의 변하지 않는 본성이고, 생멸문은 그 마음이 미혹 속에서 생멸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기신론은 생멸문 안에서 아뢰야식을 이렇게 정의한다.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爲阿黎耶識
마음의 생멸이란, 여래장에 의지하므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불생불멸하는 것과 생멸하는 것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리야식이라 한다.
기신론의 아리야식(아뢰야식)은 순수한 미혹의 식이 아니다.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진여(여래장)와, 생겨나고 사라지는 망념이 「화합」한 식이다. 기신론은 이것을 바다와 바람에 비유한다. 큰 바닷물이 바람으로 물결치니, 물의 모습과 바람의 모습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물은 본래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어서, 바람이 그치면 물결은 사라지지만 물의 젖는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바닷물은 진여의 마음이고, 바람은 무명이며, 물결은 생멸하는 마음이다.
기신론의 이 구조는 유식의 아뢰야식과 여래장을 한 체계 안에 녹여 낸 것이었고, 뒤의 화엄종과 선종, 그리고 신라의 원효를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 사상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지론종 — 남도와 북도
중국에서 이 물음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다툰 것은 지론종(地論宗)이었다. 6세기 초 북위에서 보리류지와 늑나마제가 천친의 『십지경론』을 옮겼는데, 이 논서를 근거로 삼은 학파가 둘로 갈라졌다. 늑나마제의 제자 혜광을 잇는 남도파(相州南道)와, 보리류지의 제자 도총을 잇는 북도파(相州北道)다.
두 파가 갈라진 핵심이 아리야식(아뢰야식)의 성격이었다. 남도파는 아리야식을 참된 마음, 곧 법성 · 진여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모든 미혹과 깨달음은 이 참된 마음에 의지한다. 그렇다면 불성은 모든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다(본유). 북도파는 아리야식을 거짓된 마음, 곧 미혹의 식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부처의 성품은 처음부터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시유 · 당상).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성불의 근거가 「본래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앞으로 이룰 것」이 되기도 했다. 5부에서 보듯이 천태는 이 두 파의 논쟁을 「저마다 한쪽에 의거했다」고 평한다.
진제와 아마라식
이 논쟁 한가운데로 진제가 들어왔다. 글머리에서 본 대로 전란 속을 떠돌던 진제는 무착의 『섭대승론』과 천친의 『섭대승론석』을 옮겼고, 그의 제자들은 이 논서를 중심으로 섭론종(攝論宗)을 이루었다. 진제의 독특한 점은, 아뢰야식 아래에 아홉째 식을 따로 세웠다는 것이다. 진제가 옮긴 『결정장론』은 이렇게 말한다.
阿羅耶識是無常 是有漏法 阿摩羅識是常 是無漏法 得眞如境道故 證阿摩羅識
아라야식은 무상하고 유루의 법이다. 아마라식은 항상하고 무루의 법이다. 진여를 대상으로 하는 도를 얻기 때문에 아마라식을 증득한다.
아마라식(阿摩羅識, amala-vijñāna)의 아마라는 「때 없음(無垢)」이라는 뜻이다. 3부에서 본 『성유식론』의 「무구식」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진제에게 아마라식은 깨달은 뒤에 깨끗해진 제8식의 이름이 아니라, 처음부터 따로 있는 아홉째 식이다. 진제가 옮긴 『삼무성론』은 「오직 아마라식만이 뒤바뀜이 없고 변이가 없는 진여」라고 했다. 아뢰야식은 무상하고 번뇌가 있는 식이어서, 수행은 아뢰야식을 끊어 버리고(對治) 그 아래의 아마라식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진제의 구식설은 이렇게 정리된다. 앞의 여섯 식, 집착하는 제7식(진제는 이것을 아타나식이라 불렀다), 무상하고 유루인 제8 아리야식, 그리고 순수하게 깨끗한 제9 아마라식이다. 지론종 남도와 북도의 대립 —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이 참인가 거짓인가 — 을, 진제는 「제8식은 거짓, 그 아래 제9식은 참」으로 나누어 답한 셈이다.
수행 = 아리야식을 끊고 아마라식을 드러낸다
현장과 법상종 — 여덟인가 아홉인가
진제가 세상을 떠나고 약 80년 뒤,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왔다. 현장은 나란다 사원에서 계현(시라바드라)에게 『유가사지론』과 호법 계통의 유식을 배웠고, 645년 장안에 돌아와 방대한 번역을 시작했다. 그는 『섭대승론』을 다시 옮겼고, 천친의 『유식삼십송』에 대한 열 논사의 주석을 호법의 해석을 중심으로 엮어 『성유식론』을 펴냈다. 그 제자 규기(자은대사)가 이것을 바탕으로 법상종(法相宗)을 세웠다.
현장의 번역에 아홉째 식은 없다. 3부에서 본 대로 법상종은 「무구식」을 성불한 자리에서 완전히 깨끗해진 제8식의 이름으로 보았다. 마음은 여덟 겹이고, 깨달음은 따로 있는 아홉째 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제8식이 뒤집혀(전의) 대원경지가 되는 것이다. 진제가 『결정장론』에서 「아마라식」이라 옮긴 자리를, 현장은 같은 원전인 『유가사지론』 「섭결택분」을 옮기며 「전의(轉依)」, 곧 「의지처가 뒤바뀜」이라 했다. 진제의 계통과 현장의 계통은 이렇게 식을 「아홉」으로 세우느냐 「여덟」로 세우느냐에서 갈라졌고, 이 차이는 전통적으로 『섭대승론』의 두 번역의 차이로도 이해되어 왔다. 6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이것을 「섭론의 식의 여덟과 아홉(攝論の識の八九)」이라 하여, 역자와 인사의 잘못으로 경론이 뒤섞인 예의 하나로 드신다.
그리고 현장과 법상종은 3부에서 본 오성각별을 굳게 세웠다. 아홉째 식을 세우지 않는 것과 오성각별은 같은 사상의 두 면이었다. 모든 중생의 마음 밑바닥에 깨끗한 아마라식이 있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밑바닥이 업의 종자를 간직한 제8식이고, 깨달음의 종자(무루종자)는 본래 가진 이도 있고 갖지 못한 이도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없는 중생이 있게 된다.
- 지론종 남도(혜광)아리야식 = 참된 마음(진여 · 법성)불성은 본래 있다가장 깊은 곳= 참
- 지론종 북도(도총)아리야식 = 거짓된 마음불성은 수행으로 이루어진다가장 깊은 곳= 거짓
- 『대승기신론』「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진여와 생멸의 화합 = 아리야식가장 깊은 곳= 화합
- 섭론종(진제)제8 아리야식은 거짓, 그 아래 제9 아마라식이 참「阿摩羅識是常 是無漏法」아마라식은 항상하고 무루의 법가장 깊은 곳= 아홉째가 참
- 법상종(현장 · 규기)팔식「무구식」은 깨끗해진 제8식의 이름오성각별가장 깊은 곳= 여덟에서 그침
한국 불교도 이 논쟁에 깊이 참여했다. 현장의 제자였던 신라의 원측(圓測)은 『해심밀경소』에서 진제의 구식설과 현장의 팔식설을 함께 검토했다. 같은 시대의 원효(元曉)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을 중심으로 여러 학파의 대립을 화해시키려 했고(화쟁), 『금강삼매경론』에서는 경의 「모든 부처는 늘 한 깨달음으로 모든 식을 굴려 암마라에 들어간다(諸佛如來 常以一覺 而轉諸識 入菴摩羅)」를 풀이하며 아홉째 식을 말했다.
지론의 스승과 섭론의 스승
천태대사 지의(538~597)는 바로 이 논쟁의 시대를 살았다. 지의가 젊은 시절 수행하던 무렵, 북에서는 지론종이, 남에서는 진제의 섭론학이 퍼지고 있었다. 지의는 『마하지관』에서 「이 삼천이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고 밝힌 바로 뒤에, 마음과 일체법의 관계를 이렇게 맺는다.
若從一心生一切法者 此則是縱 若心一時含一切法者 此卽是橫 縱亦不可 橫亦不可 祇心是一切法 一切法是心故 非縱非橫 非一非異 玄妙深絶 非識所識 非言所言 所以稱爲不可思議境
만약 한마음에서 일체법이 생긴다고 하면 이것은 세로(縱)요, 만약 마음이 한꺼번에 일체법을 품는다고 하면 이것은 가로(橫)다. 세로도 옳지 않고 가로도 옳지 않다. 다만 마음이 일체법이요 일체법이 마음이므로,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현묘하고 깊고 끊어져 식으로 알 바가 아니요 말로 말할 바가 아니니, 그러므로 불가사의한 경계라 한다.
이 대목은 계보 五 「일념삼천」에서 본 「이 삼천이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의 결론이다. 깊은 곳의 마음이 모든 것을 「낳는다」고 하면, 마음과 세계 사이에 시간의 앞뒤(세로)가 생긴다. 마음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하면, 마음이 세계를 담는 그릇(가로)이 된다. 지의는 둘 다 거부한다. 마음과 세계는 낳고 낳아지는 관계도, 담고 담기는 관계도 아니다. 「다만 마음이 일체법이요 일체법이 마음」이다.
이어서 물음이 나온다. 마음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연에 기대야 하는데, 그렇다면 삼천은 마음에 갖추어진 것인가, 연에 갖추어진 것인가. 지의는 여기서 당시의 두 학파를 불러낸다.
地人云 一切解惑眞妄 依持法性 法性持眞妄 眞妄依法性也 攝大乘云 法性不爲惑所染 不爲眞所淨 故法性非依持 言依持者 阿黎耶是也 … 若從地師 則心具一切法 若從攝師 則緣具一切法 此兩師各據一邊
지론의 사람들은 말한다. 모든 깨달음과 미혹, 참과 거짓은 법성에 의지한다. 법성이 참과 거짓을 지니고, 참과 거짓은 법성에 의지한다. 섭대승론(의 사람들)은 말한다. 법성은 미혹에 물들지도 않고 참에 의해 깨끗해지지도 않으므로 법성은 의지처가 아니다. 의지처라고 하는 것은 아리야식이다. … 지론의 스승을 따르면 마음이 일체법을 갖춘 것이 되고, 섭론의 스승을 따르면 연(緣)이 일체법을 갖춘 것이 된다. 이 두 스승은 저마다 한쪽에 의거했다.
지론종(남도)은 모든 것이 참된 마음(법성)에 의지한다고 했다. 섭론종은 모든 것이 아리야식, 곧 업의 종자를 간직한 식이 인연을 만나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지의는 둘 다 「한쪽」이라고 한다. 마음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갖춘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에서 생긴다(自生)」는 주장이고, 연이 모든 것을 갖춘다고 하면 그것은 「다른 것에서 생긴다(他生)」는 주장이다. 지의는 『중론』의 방식을 따라, 마음은 스스로 생기지도 않고 다른 것에서 생기지도 않으며 둘이 합쳐 생기지도 않고 원인 없이 생기지도 않는다는 네 구절(四句)로 두 학파의 집착을 깨뜨린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의지처를 세우면, 그것이 참된 마음이든 아리야식이든, 앞에서 본 「세로」나 「가로」의 어느 한쪽에 떨어진다.
「아리야와 암마라를 의지처로 남기지 않는다」
지의는 『법화현의』에서 진제의 아홉째 식까지 겨냥한다. 『섭대승론』은 대승의 뛰어남을 열 가지로 들었는데(十勝相), 그 첫째가 모든 것의 의지처(依止)로서의 아뢰야식이었다. 지의는 이것을 자신이 세운 법화경의 열 가지 묘함(十妙)과 견주며, 그 가운데 경계의 묘함(境妙)으로 의지처의 뛰어남에 맞선다. 법화경은 「불가사의한 인연」을 밝혀 네 구절로 집착을 깨뜨리니, 「어찌 아리야와 암마라를 남겨 두고 그것을 의지처로 삼겠는가(豈留黎耶菴摩羅爲依止)」라는 것이다.
묘락대사 담연은 『법화현의석첨』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지금 법화경이 말하는 「불가사의한 인연」이 어찌 논서에서 말하는 아리야 · 암마라의 「자기에서 생김 · 다른 것에서 생김」의 인연과 같겠는가. 논서의 글은 둘을 나란히 들었지만, 그 해석은 반드시 한쪽에 치우쳐 집착한다. 새 번역과 옛 번역의 차이가 그러하고, 지론의 남도 · 북도가 저마다 다르게 헤아린 것도 그러하다. 법화경의 불가사의한 인연은 이 네 가지 헤아림(四性計)을 떠난다. 「일대성교대의」에 대한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이 『법화현의』와 『석첨』의 대목을 들어, 천태가 유식 계통이 말하는 아리야를 네 구절의 분별로 깨뜨렸다고 풀이한다.
「새 번역과 옛 번역」 — 현장의 신역과 진제의 구역 — 이 여덟과 아홉으로 갈라진 것도, 지론의 남도와 북도가 참과 거짓으로 갈라진 것도, 모두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의지처」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천태는 의지처를 하나 더 세우는 대신, 의지처를 세우려는 생각 자체를 깨뜨렸다.
세 식과 세 궤
그렇다면 천태는 아홉째 식이라는 생각을 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지의는 『법화현의』에서 법화경의 세 가지 법(三軌)을 풀이하며 세 식을 이렇게 배당한다.
若分別說三識者 菴摩羅識卽是眞性軌 阿黎耶識卽是觀照軌 阿陀那識卽是資成軌
만약 세 식을 나누어 말한다면, 암마라식은 곧 진성궤(眞性軌)요, 아리야식은 곧 관조궤(觀照軌)요, 아타나식은 곧 자성궤(資成軌)다.
삼궤(三軌)란 법화경이 설하는 묘법의 세 가지 길(軌範)이다. 진성궤는 있는 그대로의 참된 본성, 관조궤는 그것을 비추어 보는 지혜, 자성궤는 지혜를 도와 이루는 작용(만행)이다. 핵심 개념 「삼신」에서 본 법신 · 반야 · 해탈, 중 · 공 · 가와 같은 짝이다. 지의는 진제가 세운 아홉째 식(암마라식)을 진성에, 여덟째 식(아리야식)을 관조에, 일곱째 식(아타나식)을 자성에 배당했다. 진제에게 아리야식은 끊어 버려야 할 거짓 식이었지만, 지의에게는 지혜(관조)의 자리가 된다. 세 식은 위아래로 쌓인 층이 아니라, 한마음의 세 면이다. 핵심 개념 「삼신」 4부의 「한 몸이 곧 세 몸」이 여기서 「한마음이 곧 세 식」이 된다.
「우에노전미망인답서」에 대한 창가교학연구실의 어구 풀이는 이 전통을 이렇게 정리한다. 법상종은 여덟 식을 세워 제8식을 마음의 왕으로 하고, 천태종에서는 그 밑바닥의 제9 아마라식을 청정하고 물들지 않은 근본의 식으로 하여 제9식을 마음의 왕으로 한다. 7부에서 볼 대성인의 「구식심왕(九識心王)」은 이 천태의 전통 위에 서 있다.
(『법화현의』 권5하)
한 생각의 마음
지의의 관심은 마음의 층을 하나 더 찾는 데 있지 않았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4부에서 보았듯이, 『마하지관』은 관찰의 대상을 좁혀 「색 등 네 음은 두고 다만 식음을 관하라. 식음이란 마음이다」라고 했다. 관하는 것은 마음의 가장 깊은 층(아뢰야식이나 아마라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한 생각(一念), 그것도 범부의 미혹한 한 생각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한 생각에 삼천이 갖추어져 있다.
유식은 마음을 여덟 겹, 아홉 겹으로 해부하여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깨끗한 마음은 깊은 곳에 숨어 있고, 수행은 겉의 더러운 층을 걷어 내고 깊은 곳에 이르는 일이었다. 천태는 방향을 바꾸었다. 깨끗한 마음이 깊은 곳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난 미혹한 한 생각이 그대로 삼천을 갖춘 불가사의한 경계다. 7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의 구식론도 이 「한 생각」의 자리에 선다.
전교와 덕일 — 오성각별을 깨뜨리다
현장의 법상종은 7세기 중엽부터 일본에 전해져 나라 불교의 가장 큰 학파가 되었다. 전교는 간무 천황의 시대에 이미 나라의 학승들과 맞서 천태법화종을 세웠고(6부의 「선시초」 대목), 그 뒤 9세기 초에는 핵심 개념 「삼신」 4부에서 본 법상종의 덕일(德一)과 천태종의 전교대사 사이초 사이에 긴 논쟁이 벌어졌다. 「보신은 상주하는가」와 함께 그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오성각별이었다. 이 논쟁을 삼일권실(三一權實) 논쟁이라 한다. 삼승과 일승 가운데 어느 것이 방편(權)이고 어느 것이 진실(實)인가를 다툰 것이다.
덕일은 법상종의 입장에서,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이 진실이고 법화경의 일승은 부정성의 중생을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결정성의 이승과 무성유정은 성불하지 못한다. 전교는 『수호국계장』 · 『법화수구』 등에서 이에 맞서, 법화경의 일승이 진실이고 삼승이 방편이며,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을 지녀 성불할 수 있다(一切皆成)고 했다. 6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이 논쟁을 거듭 회고하시며 법상종을 정면으로 비판하신다.
삼국 제일의 종
대성인은 법상종을 가볍게 보지 않으셨다. 「개목초」는 법상종의 내력을 이렇게 소개하신다. 불멸 9백 년에 무착보살이 밤에는 도솔천의 내원에 올라 미륵보살에게 일대성교의 의문을 풀고 낮에는 법상의 법문을 넓혔으며, 그 제자로 세친 · 호법 · 난타 · 계현 같은 대논사가 있었고, 계일대왕이 귀의했다. 중국의 현장삼장은 인도에서 열일곱 해 동안 백삼십여 나라를 보고 들은 끝에 다른 종을 다 버리고 이 종을 중국에 전했으며, 태종 황제가 받아들였다. 일본에도 전해져 야마시나데라(지금의 고후쿠사)에서 받들었다. 「삼국 제일의 종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 종의 주장을 이렇게 전하신다.
此の宗の云く始め華厳経より終り法華・涅槃経にいたるまで無性有情と決定性の二乗は永く仏になるべからず、仏語に二言なし一度・永不成仏と定め給いぬる上は日月は地に落ち給うとも大地は反覆すとも永く変改有べからず、されば法華経・涅槃経の中にも爾前の経経に嫌いし無性有情・決定性を正くついさして成仏すとは・とかれず
이 종에서 이르기를, 처음 화엄경부터 끝 법화경 · 열반경에 이르기까지 무성유정과 결정성의 이승은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다. 부처의 말씀에 두 말이 없으니, 한 번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정하신 이상, 해와 달이 땅에 떨어지고 대지가 뒤집힐지라도 영원히 바뀔 수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 · 열반경 가운데서도 이전경에서 싫어한 무성유정 · 결정성을 바로 가리켜 성불한다고는 설하지 않았다 — 고 하느니라.
3부에서 본 오성각별이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법상종은 묻는다. 법화경과 열반경에서 결정성과 무성유정이 정말 부처가 된다면, 무착 · 세친 같은 대논사와 현장 · 자은 같은 삼장이 그것을 보지 못했겠는가, 싣지 않았겠는가, 미륵보살에게 묻지 않았겠는가. 너는 천태 · 묘락 · 전교의 치우친 견해를 믿고 그 눈으로 경문을 보기 때문에 이전경과 법화경이 물과 불처럼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개목초」에서 이 대목은 법화경이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難信難解)」는 것을 보이는 자리에 놓여 있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법상종이 삼국에 널리 퍼졌기에 오히려 그것이 가장 뛰어난 가르침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는 것을 보이시어 법화경의 믿기 어려움을 맺으신 대목이라고 풀이한다. 대성인은 법상종의 논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정면으로 인정하신다. 그 강력함이 바로 법화경을 믿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법화경을 뒤집어」
그러나 대성인의 판정은 분명했다. 「보은초」는 현장이 『해심밀경』 · 『유가사지론』 · 『성유식론』을 전하여 「법화경은 일체경보다 뛰어나지만 『해심밀경』보다는 못하다」고 한 일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又太宗は賢王なり玄奘の御帰依あさからず、いうべき事ありしかども・いつもの事なれば時の威をおそれて申す人なし、法華経を打ちかへして三乗真実・一乗方便・五性各別と申せし事は心うかりし事なり
또 태종은 어진 임금이어서 현장에게 귀의함이 얕지 않았느니라. 말해야 할 일이 있었으나 늘 그렇듯 그때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느니라. 법화경을 뒤집어 「삼승이 진실이요 일승은 방편이며 오성은 각각 다르다」고 한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느니라.
「법화경을 뒤집어(打ちかへして)」. 법화경은 「모든 중생을 나와 같이 다름이 없게 하리라」고 설하고, 삼승을 열어 일승으로 돌아가게 했다. 법상종은 그것을 거꾸로 세웠다. 대성인은 「중생신심어서」에서도 같은 일을 들어, 「오성은 각각 다르니 결정성과 무성의 유정은 영원히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이 종의 주장은 「천태종과 물과 불처럼 다르다」고 하신다(1592쪽).
그리고 「선시초」는 일본에서 이 논쟁이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를 전하신다.
されば日本国に法相宗のはやりたりしを伝教大師責めさせ給いしには羅什三蔵は舌焼けず玄奘・慈恩は舌焼けぬとせめさせ給いしかば桓武天王は道理とをぼして天台法華宗へはうつらせ給いしなり
그러므로 일본국에 법상종이 성행하던 것을 전교대사가 꾸짖으실 때, 「구마라집 삼장은 혀가 타지 않았으나 현장 · 자은은 혀가 탔다」고 꾸짖으시니, 간무 천황은 도리라 여겨 천태법화종으로 옮기셨느니라.
구마라집은 「내가 옮긴 경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뒤에도 내 혀는 타지 않으리라」고 했고, 실제로 다비한 뒤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았다고 전한다. 구마라집의 법화경 번역이 바르다는 증거로 대성인이 거듭 드시는 이야기다. 전교는 이것으로 현장 · 자은의 번역과 해석이 법화경의 뜻을 그르쳤다고 꾸짖었다. 간무 천황의 시대에 나라의 법상종 학승들을 상대로 한 이 논파는, 뒤에 5부에서 본 덕일과의 삼일권실 논쟁으로 이어진다.
「섭론의 식의 여덟과 아홉」
대성인은 「수호국가론」에서,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지는 동안 역자와 인사의 손을 거치며 잘못이 덧붙었다는 것을 여러 예로 드신다. 그 가운데 4부에서 본 진제와 현장의 차이가 나온다.
浅事すら展転多き時は虚は多く実は少し況や仏法の深義に於てをや、如来の滅後二千余年の間・仏法に邪義を副え来り万に一も正義無きか一代の聖教多分は誤り有るか、所以に心地観経の法爾無漏の種子・正法華経の属累の経末・婆沙論の一十六字・摂論の識の八九・法華論と妙法華経との相違・涅槃論の法華煩悩所汚の文・法相宗の定性無性の不成仏・摂論宗の法華経の一称南無の別時意趣・此等は皆訳者人師の誤りなり
얕은 일조차 여러 번 거쳐 전해지면 거짓은 많고 참은 적어지거늘, 하물며 불법의 깊은 뜻에서랴. 여래 멸후 이천여 년 동안 불법에 그릇된 뜻이 덧붙어 와서, 만에 하나도 바른 뜻이 없는 것인가, 일대성교의 많은 부분에 잘못이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심지관경』의 「법이무루의 종자」, 『정법화경』에서 촉루품을 경 끝에 둔 것, 『바사론』의 열여섯 글자, 『섭론』의 식의 여덟과 아홉, 『법화론』과 『묘법화경』의 서로 다름, 『열반론』의 「법화경은 번뇌에 더럽혀진다」는 글, 법상종의 정성 · 무성의 불성불, 섭론종이 법화경의 「한 번 나무불이라 부른다」를 별시의취라 한 것 — 이것들은 모두 역자와 인사의 잘못이니라.
강의는 「섭론의 식의 여덟과 아홉」을, 『섭대승론』을 한역할 때 유식이 세우는 식의 구성 가운데 제8 아뢰야식까지를 세운 번역(현장)과 제9 아마라식까지를 세운 번역(진제)이 있다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첫머리의 「법이무루의 종자」에 대해, 「법이」란 본래 그러하여 다른 것이 손대지 않았다는 뜻이고 「무루의 종자」란 성불의 원인으로, 법상종은 이 종자를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와 정해지지 않은 이로 중생을 차별했다고 설명한다. 강의에 따르면 에신승도 겐신은 『일승요결』에서, 『심지관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은 이가 본래 법상 유식을 배운 사람이어서 범본에 없는 「법이무루의 종자」라는 말을 끼워 넣었다고 논했다.
이 목록 가운데 유식과 관련된 항목들이 겨누는 것은 하나다. 3부에서 본 「본래 있는 무루종자」,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한 「정성 · 무성의 불성불」. 같은 목록에 「섭론의 식의 여덟과 아홉」이 나란히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4부에서 보았듯이 아홉째 식을 세우느냐 여덟째 식에서 멈추느냐는, 모든 중생의 마음 밑바닥에 깨끗한 성품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와 이어져 있었다. 대성인에게 이 모두는 경론 자체의 진실이 아니라, 경론이 전해지며 덧붙은 해석의 문제였다.
「지극히 원만하고 밝으며 순수하고 깨끗한 본식」
유식에 대한 대성인의 가장 깊은 응답은 「관심의 본존초」에 있다. 이 글에서 묻는 이는 십계호구와 일념삼천을 의심하며, 이전의 경론이 부처의 경지를 오직 깨끗한 것으로만 설했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화엄경 · 인왕경 · 금강반야경 · 『대승기신론』과 함께, 3부에서 본 『성유식론』의 전의 대목이 인용된다.
天親菩薩の唯識論に云く「謂く余の有漏と劣の無漏と種は金剛喩定が現在前する時極円明純浄の本識を引く彼の依に非ざるが故に皆永く棄捨す」等云云
천친보살의 『유식론』에 이르기를 「이르자면, 그 밖의 유루의 종자와 열등한 무루의 종자는, 금강유정이 앞에 나타날 때 지극히 원만하고 밝으며 순수하고 깨끗한 본식을 이끌어 내니, (그 본식이) 그것들의 의지처가 아니므로 모두 영원히 버린다」 하였느니라.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금강유정에 이르면, 번뇌가 있는 종자는 물론 열등한 깨끗한 종자까지 모두 영원히 버려지고, 지극히 순수하고 깨끗한 본식(제8식이 뒤집힌 무구식)만 남는다. 묻는 이는 말한다. 부처의 경지에는 오직 깨끗한 것만 있고 구계의 성품은 남김없이 버려진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의 마음에 지옥에서 보살까지의 구계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가. 천친은 천 부의 논사요 네 의지할 큰 보살인데, 천태대사는 변방의 작은 승려로 논서 하나 짓지 않았다. 누가 그를 믿겠는가.
대성인은 이 물음을 「이 비난이 가장 심하고 가장 심하다」고 받으신 뒤 이렇게 답하신다.
天台大師云く「天親竜樹・内鑒泠然たり外には時の宜きに適い各権に拠る所あり、而るに人師偏に解し学者苟も執し遂に矢石を興し各一辺を保ちて大に聖道に乖けり」等云云……天親・竜樹・馬鳴・堅慧等は内鑒泠然なり然りと雖も時未だ至らざるが故に之を宣べざるか……天台此の経文を承けて云く「若し衆生に仏の知見無んば何ぞ開を論ずる所あらん当に知るべし仏の知見衆生に蘊在することを」云云
천태대사가 이르기를 「천친과 용수는 안으로는 맑게 비추어 알았으나 밖으로는 그때의 형편에 맞추어 저마다 권교에 의거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인사들은 치우치게 이해하고 학자들은 함부로 집착하여, 마침내 화살과 돌을 주고받듯 다투며 저마다 한쪽을 지켜 성도에 크게 어긋났다」 하였느니라. …… 천친 · 용수 · 마명 · 견혜 등은 안으로 맑게 비추어 알았으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펴지 않았던 것인가. …… 천태가 이 경문을 받아 이르기를 「만약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이 없다면 무엇을 연다고 하겠는가. 마땅히 알라, 부처의 지견이 중생에게 간직되어 있음을」 하였느니라.
천친은 안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권교의 입장에서 말했다. 그것을 뒤의 인사들이 치우치게 붙잡아 다툰 것이다. 5부에서 본 지론과 섭론의 다툼, 그리고 「저마다 한쪽에 의거했다」는 천태의 평이 여기서 다시 울린다. 그리고 대성인은 법화경 방편품의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려 한다(欲令衆生開佛知見)」를 들어, 이 경문이 분명히 십계호구를 설한다고 하신다.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이 없다면 「연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부처의 지견은 중생 안에 이미 간직되어 있다.
이 응답은 유식의 전의와 법화경의 십계호구가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보여 준다. 유식에서 성불은 구계의 종자를 「모두 영원히 버리고」 순수한 본식만 남기는 것이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5부에서 본 「구계의 색심을 끊어 없애고 불계의 한 이치로 나아간다」는 권대승의 길이 이것이다. 법화경에서 성불은 구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계의 중생 안에 이미 있는 부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마음의 밑바닥을 깨끗이 비워 순수한 본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미혹한 마음에 갖추어진 불계를 여는 것이다.
- 「天親竜樹・内鑒泠然たり」천친과 용수는 안으로 맑게 비추어 알았다
- 「各一辺を保ちて」인사들이 저마다 한쪽을 지켰다
「묘법연화경은 구식이요, 십계는 팔식 이하」
그렇다면 대성인 자신은 마음의 겹을 어떻게 보셨는가. 『어의구전』은 법화경 방편품의 「방편」이라는 두 글자를 풀이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신다.
故に知ぬ南無妙法蓮華経は一心の方便なり妙法蓮華経は九識なり十界は八識已下なり心を留めて之を案ず可し
그러므로 알라, 남묘호렌게쿄는 한마음의 방편이요, 묘법연화경은 구식이요, 십계는 팔식 이하이니라. 마음을 머물러 이를 생각할지어다.
「묘법연화경은 구식이요, 십계는 팔식 이하.」 이 짧은 말씀은 4부와 5부의 논쟁 전체를 한자리에 모은다. 진제는 아홉째 식을 진여로, 여덟째 식을 거짓으로 나누었다. 천태는 아홉째 식을 진성으로 하되 세 식을 한마음의 세 면으로 보았다. 대성인은 아홉째 식이 곧 「묘법연화경」이라고 하신다. 아홉째 식은 텅 빈 순수한 진여가 아니라 묘법이고, 지옥에서 불계까지의 십계는 그 묘법이 팔식 이하에서 갖가지로 나타난 모습이다. 그리고 그 묘법에 들어가는 「한마음의 문(방편)」이 남묘호렌게쿄다.
같은 대목은 앞에서 이 「방편」을 「십계의 일이요 무명이니, 묘법연화경은 십계의 꼭대기요 법성이니, 번뇌즉보리 · 생사즉열반이 이것」이라 하신다. 구식(법성)과 팔식 이하(십계 · 무명)는 위아래로 떨어진 두 층이 아니라, 번뇌가 곧 보리이고 생사가 곧 열반인 관계다. 「마음을 머물러 이를 생각하라」는 당부는, 이 말씀이 단순한 배당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구식에서 내려가는 길, 돌아가는 길
방편품의 다섯째 장에서 대성인은, 석존이 법화경을 설하려 할 때 오천 명의 증상만이 자리를 떠난 장면(礼仏而退)을 이렇게 읽으신다.
五千の上慢の外全く法華経之れ無し五千の慢人とは我等が五大なり五大即妙法蓮華経なり、五千の上慢は元品の無明なり故に礼仏而退なり此れは九識八識六識と下る分なり流転門の談道なり、仏威徳故去とは還滅門なり然らば威徳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本迷本悟の全体なり
오천의 증상만 밖에 따로 법화경은 없느니라. 오천의 교만한 사람이란 우리의 오대이니, 오대가 곧 묘법연화경이니라. 오천의 증상만은 원품의 무명이니, 그러므로 「부처께 예배하고 물러갔다」 하느니라. 이것은 구식 · 팔식 · 육식으로 내려가는 부분이니, 유전문(流轉門)의 이야기이니라. 「부처의 위덕 때문에 떠났다」는 것은 환멸문(還滅門)이니라. 그렇다면 위덕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니, 본래의 미혹과 본래의 깨달음의 전체이니라.
「구식 · 팔식 · 육식으로 내려가는 것」이 유전문, 곧 생사에 흘러 구르는 길이다. 마음의 근본(구식)에서 업의 종자를 간직한 팔식을 지나 바깥 대상을 쫓는 여섯 식으로 내려가는 것, 원품의 무명에 이끌려 부처를 떠나는 것이 미혹의 모습이다. 그 반대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환멸문이다. 그런데 대성인은 그 돌아가는 힘인 「부처의 위덕」을 남묘호렌게쿄라 하시고, 그것이 「본래의 미혹과 본래의 깨달음의 전체」라고 하신다. 3부의 유식에서 수행은 더러운 층을 걷어 내고 깨끗한 층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대성인에게 미혹과 깨달음은 둘 다 「본래」의 것이며, 그 전체가 남묘호렌게쿄다. 오천의 증상만조차 「우리의 오대」요 「묘법연화경」이다.
- 구식
- 팔식
- 육식
「나는 일체를 평등하게 본다」는 구식의 수행
『어의구전』 약초유품은 경문의 한 구절을 아홉째 식부터 다섯 감각 의식까지로 펼쳐 읽으신다. 약초유품에서 석존은 비가 모든 풀과 나무를 고루 적시듯 법을 설한다고 하며 「나는 일체를 보되 두루 다 평등하여, 이것저것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나는 탐착함이 없고 또한 걸림이 없다(我觀一切 普皆平等 無有彼此 愛憎之心 我無貪著 亦無限礙)」고 했다.
御義口伝に云く此の六句の文は五識なり我観一切普皆平等とは九識なり無有彼此とは八識なり愛憎之心とは七識なり我無貪著とは六識なり亦無限礙とは五識なり我等衆生の観法の大体なり、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は豈我観一切普皆平等の九識の修行に非ずや爾らば無有彼此に非ずや愛憎之心に非ずや我無貪著に非ずや亦無限礙に非ずや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이 여섯 구의 글은 다섯 식이니라. 「나는 일체를 보되 두루 다 평등하다」는 구식이요, 「이것저것이 없다」는 팔식이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칠식이요, 「나는 탐착함이 없다」는 육식이요, 「또한 걸림이 없다」는 오식이니라. 우리 중생이 관법하는 대체(大體)이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부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 「나는 일체를 보되 두루 다 평등하다」는 구식의 수행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것저것이 없음」이 아니겠는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탐착함이 없음」이 아니겠는가, 「또한 걸림이 없음」이 아니겠는가.
이 배당은 3부에서 본 유식의 층과 겹치는 데가 있다. 「이것저것이 없다」 — 이것과 저것을 가르기 이전, 모든 종자를 하나로 간직한 제8식의 자리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 — 「나」를 붙잡아 사랑과 미움을 일으키는 것은 제7 말나식이다. 「나는 탐착함이 없다」 — 대상을 쫓아 탐착하는 것은 제6 의식이다. 「걸림이 없다」 — 감각의 문인 다섯 식이 대상에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두의 근원에 「일체를 두루 평등하게 보는」 구식이 있다.
물론 이것은 유식의 체계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유식에서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지혜(평등성지)는 제7식이 뒤집혀 얻는 것이었다. 3부에서 유식은 전식득지 — 제7식이 평등성지로, 제6식이 묘관찰지로 바뀌는 것 — 를 오랜 수행 끝의 전의로 설명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것이 그대로 「일체를 평등하게 보는 구식의 수행」이고, 그것이 그대로 여덟째에서 다섯째까지의 식을 바르게 하는 수행이라고 하신다. 깊은 층에 이르기 위해 겉의 층을 하나씩 걷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근원(구식)에서 시작하는 수행이 모든 층을 함께 바꾼다.
- 「我観一切普皆平等とは九識なり」나는 일체를 보되 두루 다 평등하다= 구식
- 「無有彼此とは八識なり」이것저것이 없다= 팔식
- 「愛憎之心とは七識なり」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칠식
- 「我無貪著とは六識なり」나는 탐착함이 없다= 육식
- 「亦無限礙とは五識なり」또한 걸림이 없다= 오식
「대통은 마음의 왕, 지승은 마음의 작용」
『어의구전』 화성유품은 2부에서 본 「마음의 왕(心王)」과 「마음의 작용(心數)」을 법화경의 부처 이름으로 읽으신다. 화성유품은 아득한 옛날의 부처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과 그 열여섯 왕자의 이야기를 설한다.
御義口伝に云く大通は心王なり智勝は心数なり大通は迹門智勝は本門なり大通智勝は我等が一身なり、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は大通なり題目を唱うるは智勝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대통(大通)은 마음의 왕이요 지승(智勝)은 마음의 작용이니라. 대통은 적문이요 지승은 본문이니라. 대통지승은 우리의 한 몸이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부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대통이요, 제목을 부르는 것은 지승이니라.
같은 대목은 이어서 「대(大)는 색법이요 통(通)은 심법이니, 우리의 생사를 대통이라 하고, 이 생사의 몸과 마음에 움직이는 일어나는 생각을 지승이라 한다」고 하시고, 같은 품 제5 「16왕자의 일」에서는 열여섯 왕자의 「왕」을 마음의 왕으로, 「자」를 마음의 작용으로 읽으신다(733쪽). 부파와 유식이 정교하게 헤아린 마음의 왕과 그 작용들이, 여기서는 제목을 부르는 우리 한 몸의 움직임이 된다. 마음의 왕은 깊은 곳에 숨은 무엇이 아니라 제목을 부르는 「사람」이고, 마음의 작용은 제목을 부르는 그 「일」이다.
「마음의 바탕은 구식에, 수행은 육식으로」
이 모든 것이 실천의 말씀으로 모인 자리가 있다. 핵심 개념 「삼신」 5부에서 본 「우에노전미망인답서」의 끝머리다. 남편을 여읜 우에노 부인에게 지옥이 그대로 적광토라는 법문을 적어 보내신 대성인은, 편지를 이렇게 맺으신다.
いかにも・いかにも追善供養を心のをよぶほどはげみ給うべし、古徳のことばにも心地を九識にもち修行をば六識にせよと・をしへ給う・ことわりにもや候らん、此の文には日蓮が秘蔵の法門かきて候ぞ、秘しさせ給へ・秘しさせ給へ
부디부디 추선공양을 마음이 미치는 데까지 힘쓰시옵소서. 옛 덕 높은 이의 말에도 「마음의 바탕은 구식에 두고, 수행은 육식으로 하라」고 가르치셨으니, 그 이치가 이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이 글에는 니치렌의 비장의 법문을 적었사오니 감추어 두시옵소서, 감추어 두시옵소서.
「심지(心地)」, 곧 마음의 바탕은 창가교학연구실의 어구 풀이대로 마음을 대지에 비유한 말이다. 대지에서 오곡과 열매가 자라듯 중생의 마음에서 선악의 갖가지 세계가 생긴다. 그리고 이 대목의 「구식」은 아홉 식 전체가 아니라 아홉째 식, 곧 아마라식을 가리킨다고 어구 풀이는 설명한다. 강의는 이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한다. 「마음의 바탕을 구식에 둔다」는 것은 생명의 궁극의 근거를 「구식심왕」에 굳게 두는 것, 곧 신(信)의 일념을 묘법에 정하는 것이다. 「수행은 육식으로 하라」는 것은 바깥을 향하는 여섯 식의 모든 기능을 다하여 자행화타의 정진에 힘쓰는 것이다. 눈으로 본존을 우러르고, 입으로 제목을 부르고, 귀로 법문을 듣고, 마음으로 늘 불법을 생각하며 현실 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 짧은 말씀은 유식의 오랜 물음에 대한 대성인의 답이라 할 수 있다. 3부의 유식은 깊은 곳(아뢰야식)의 종자를 바꾸려면 겉(여섯 식)의 행위가 거듭 훈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4부의 진제는 깊은 곳의 아홉째 식만이 참이라 보았다. 대성인은 둘을 함께 쥐신다. 근본은 가장 깊은 곳(구식)에 두되, 수행은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섯 식으로 한다. 근본만 말하고 실천이 없으면 공허하고, 실천만 있고 근본이 없으면 흔들린다. 마음의 바탕이 구식에 있기에 여섯 식의 하루하루가 흔들리지 않고, 여섯 식의 하루하루가 있기에 구식의 바탕이 이 생에서 빛난다.
구식심왕 진여의 도읍
그렇다면 그 아홉째 식, 「마음의 왕」은 어디에 있는가. 대성인은 「니치뇨부인답서」에서 본존을 밝히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어본존을 결코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라. 다만 우리 중생이 법화경을 지니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가슴속의 육단(肉團)에 계시니라. 이것을 「구식심왕 진여의 도읍(九識心王眞如の都)」이라 하느니라(1244쪽).
「구식심왕」은 2부에서 본 「마음의 왕」이 아홉째 식에 이른 것이고, 「진여의 도읍」은 4부에서 진제가 말한 아마라식 — 진여 — 이 머무는 자리다. 그런데 대성인은 그 자리를 마음 밑바닥의 아득히 깊은 층에 두지 않으시고, 「법화경을 지니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가슴속의 육단」, 곧 지금 살아 숨 쉬는 이 몸의 가슴에 두신다. 진제의 아마라식은 아뢰야식을 끊어 버리고 이르는 저편이었다. 대성인의 구식심왕은 제목을 부르는 이 몸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본존이다.
「우에노전미망인답서」에 대한 강의는 이 말씀을 들어, 「구식심왕 진여의 도읍」은 본존을 신수하는 중생의 가슴속 육단에 나타나는 불계를 뜻한다고 풀이한다. 앞에서 본 『어의구전』의 「묘법연화경은 구식」과 이 「구식심왕 진여의 도읍」은 같은 것을 가리킨다. 아홉째 식은 묘법이고, 묘법은 본존이며, 본존은 제목을 부르는 이의 가슴속에 있다.
창가학회 교학에서 「구식심왕 진여의 도읍」은 마음의 가장 깊은 층에 따로 숨어 있는 순수한 식이 아니라,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이의 생명에 나타나는 불계다. 구식은 묘법연화경이요, 팔식 이하는 그 묘법이 십계로 나타난 작용이다. 「마음의 바탕은 구식에, 수행은 육식으로」 — 신의 일념을 묘법에 두고, 여섯 식의 실천으로 자행화타에 힘쓰는 것이 구식을 여는 길이다.
- 구식(九識)마음의 가장 깊은 곳
- 심왕(心王)마음의 작용(心數)을 거느리는 마음의 왕
- 진여의 도읍진여가 머무는 자리
진제의 아마라식 — 아리야식을 끊어 버리고 이르는 저편
마음을 보는 다섯 눈
석존 이래 불교가 마음을 본 방식을 돌아보면, 다섯 번 눈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석존은 마음을 감각 기관과 대상을 연하여 일어나는 여섯 식으로 보았고, 동시에 「이 마음은 빛난다」고 했다. 다음에 부파는 끊어진 마음을 잇는 깊은 흐름을 찾았다. 셋째로 유식은 그 흐름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하고 마음을 여덟 겹으로 해부했으며, 깊은 곳의 종자를 바꾸어 식을 지혜로 뒤집는 길을 보였다. 넷째로 중국의 사상가들은 그 깊은 곳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투었고, 진제는 아홉째 식을 세웠다. 다섯째로 천태와 대성인은 마음의 층을 하나 더 쌓는 대신, 지금 이 한 생각, 지금 제목을 부르는 이 가슴에서 가장 깊은 근원을 보셨다.
- ①석존여섯 식「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눈과 형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pabhassaramidaṃ cittaṃ」이 마음은 빛난다
- ②부파끊어진 마음을 잇는 흐름유분식 · 근본식 · 궁생사온
- ③유식팔식「恒轉如瀑流」늘 폭류처럼 굴러간다종자와 훈습 · 전식득지
- ④중국참인가 거짓인가「不生不滅與生滅和合」불생불멸과 생멸의 화합(기신론)아마라식(진제) ↔ 팔식(현장)
- ⑤천태 · 니치렌 대성인「祇心是一切法」다만 마음이 일체법(천태)「妙法蓮華経は九識なり」묘법연화경은 구식「心地を九識にもち修行をば六識にせよ」마음의 바탕은 구식에, 수행은 육식으로
마음의 도읍
진제는 전란의 남쪽 땅을 스무 해 넘게 떠돌며 아마라식을 옮겼고, 현장은 같은 원전을 다시 옮기며 그 자리에 「전의」라고 적었다. 두 번역의 차이는 낱말 하나의 차이가 아니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 불교가 천 년 넘게 물어 온 두 물음이 그 한 낱말에 걸려 있었다.
석존은 식을 눈과 형색, 귀와 소리가 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식은 조건 없이 홀로 있는 실체가 아니라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석존은 「이 마음은 빛난다, 번뇌는 밖에서 온 손님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부파의 논사들은 깊은 잠과 선정에서 끊어진 마음이 어디서 다시 일어나는지를 물었고, 여섯 식 아래를 흐르는 무엇인가에 유분식 · 근본식 · 궁생사온 같은 이름을 붙였다. 유식학은 그것을 아뢰야식이라 부르고, 마음을 여덟 겹으로 그렸다. 모든 경험은 씨앗(종자)이 되어 깊은 곳에 간직되고, 씨앗은 다시 경험을 낳는다. 아뢰야식은 폭류처럼 쉼 없이 흐르고, 말나식은 그 흐름을 「나」라고 붙잡으며, 여섯 식은 바깥의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수행은 그 깊은 곳의 씨앗을 바꾸어 식을 지혜로 뒤집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정교한 구조의 밑바닥에는 업과 번뇌의 씨앗이 있었다. 법상종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의 씨앗을 처음부터 지니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중국의 사상가들은 이 밑바닥을 두고 다투었다. 『대승기신론』은 바닷물과 물결처럼 진여와 생멸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고 했고, 지론의 남도와 북도는 아뢰야식이 참인지 거짓인지로 갈라졌으며, 진제는 거짓된 아뢰야식 아래에 참된 아홉째 식을 두었다. 천태는 의지처를 하나 더 세우는 대신, 의지처를 세우려는 생각 자체를 깨뜨렸다. 마음이 일체법을 낳는 것도 아니고 일체법을 품는 것도 아니며, 지금 일어난 범부의 한 생각이 그대로 삼천이다. 그리고 세 식을 위아래로 쌓인 층이 아니라 한마음의 세 면으로 읽었다.
대성인은 이 모든 논쟁을 받아, 법상종이 「법화경을 뒤집어」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을 세운 것을 꾸짖으시고, 천친과 용수가 「안으로는 맑게 비추어 알았다」고 하시며 부처의 지견은 중생 안에 이미 간직되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묘법연화경은 구식이요, 십계는 팔식 이하」라고 하셨다. 아홉째 식은 아무것도 없는 맑은 바닥이 아니라 묘법이고, 지옥에서 불계까지의 십계는 그 묘법이 갖가지로 나타난 모습이다. 구식에서 팔식과 육식으로 내려가는 것이 미혹이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이지만, 미혹도 깨달음도 「본래」의 것이며 그 전체가 남묘호렌게쿄다. 제목을 부르는 것은 「일체를 두루 평등하게 보는」 구식의 수행이고, 그 수행이 여덟째에서 다섯째까지의 식을 함께 바꾼다.
『대승기신론』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바람이 불면 바다에 물결이 인다. 유식의 수행은 물결을 하나하나 가라앉혀 고요한 바닥에 이르려는 일이었고, 진제는 그 바닥 아래에 또 하나의 맑은 바다를 두었다. 그러나 물결은 바다 밖에 있지 않다. 물결 하나하나가 그대로 바닷물이다. 「마음의 바탕은 구식에 두고, 수행은 육식으로 하라」는 말씀은, 물결을 없애고 바다에 이르라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뿌리를 두고 물결로 살라는 것이다. 신의 일념은 묘법에 두고,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섯 식의 하루하루는 그대로 수행이 된다.
마음의 바탕(心地)은 대지에 비유된다. 대지에서 오곡이 자라듯 마음에서 갖가지 세계가 생긴다. 진제가 그린 아홉째 식은 아뢰야식을 끊어 버리고서야 이르는 먼 저편이었다. 대성인의 구식심왕은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법화경을 지니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이의 가슴속에 있다. 진여의 도읍은 마음의 가장 깊은 층 어딘가에 숨은 성이 아니라, 지금 이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생명에 세워진다. 마음은 몇 겹인가 하는 긴 물음은, 그 가장 깊은 곳이 바로 여기 있다는 데서 끝난다.

더 읽기
- 一 십이연기 — 갈대 두 묶음, 식과 명색
- 五 일념삼천 — 한 생각에 갖추어진 삼천
- 六 남묘호렌게쿄 — 묘법연화경은 구식
- 핵심 개념 · 업 — 종자와 업의 상속
- 핵심 개념 · 무상 — 찰나에 생멸하는 것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 핵심 개념 · 무아 · 오온 — 말나식과 「나」라는 집착
- 핵심 개념 · 삼신 — 네 지혜와 자수용신
- 천친보살 — 인물탐구
- 천태대사 — 인물탐구
참고 문헌
원전
-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 「마두삔디까 경」 MN 18, 「갈애 멸진 대경」 MN 38
-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 「배우지 못한 자 경」 SN 12.61
-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 AN 1.49 · 1.50
- 『해심밀경』, 현장 역, T16 no.676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승만경』), 구나발타라 역, T12 no.353
- 『능가아발다라보경』, 구나발타라 역, T16 no.670
- 『유가사지론』, 현장 역, T30 no.1579
- 무착 『섭대승론』, 진제 역 T31 no.1593 · 현장 역 T31 no.1594
- 세친 『유식이십론』, 현장 역, T31 no.1590
- 세친 『유식삼십송』, 현장 역, T31 no.1586
- 호법 등 『성유식론』, 현장 역, T31 no.1585
- 『대승기신론』, 진제 역, T32 no.1666
- 『결정장론』, 진제 역, T30 no.1584
- 『삼무성론』, 진제 역, T31 no.1617
- 『금강삼매경』, T9 no.273 · 원효 『금강삼매경론』, T34 no.1730
- 원측 『해심밀경소』
- 『묘법연화경』 방편품 · 약초유품 · 화성유품, 구마라집 역, T9 no.262
- 천태대사 지의 『마하지관』 권5상, T46 no.1911 · 『법화현의』 권2하 · 권5하, T33 no.1716
- 묘락대사 담연 『법화현의석첨』, T33 no.1717
- 전교대사 사이초 『수호국계장』 · 『법화수구』
- 겐신 『일승요결』
- 니치렌 대성인 「개목초」 · 「보은초」 · 「선시초」 · 「중생신심어서」 · 「수호국가론」 · 「관심의 본존초」 · 「일대성교대의」 · 「우에노전미망인답서」 · 「니치뇨부인답서」 · 『어의구전』 (창가학회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강의 · 연구
- 창가교학연구실, 「開目抄」 · 「守護国家論」 · 「一代聖教大意」 · 「上野殿御家尼御返事」 각 장 강의와 語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