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구사론』의 둘째 품은 「근(根)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첫째 품인 분별계품이 존재를 오온 · 십이처 · 십팔계로 나누어 그 하나하나가 「무엇인가」를 밝혔다면, 분별근품은 그렇게 나뉜 법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묻는다. 눈은 무엇에 대해 힘을 갖는가, 마음은 홀로 일어나는가, 한 번 얻은 것은 무엇이 붙들고 있는가, 그리고 한 법은 몇 가지 원인과 조건에서 생겨나는가. 보광은 이 품의 자리를 「계품은 법의 바탕을, 근품은 법의 작용을 밝힌다(界品明諸法體,根品明諸法用)」는 짧은 말로 요약했다. 『구사론』 서른 권 가운데 다섯 권, 본송으로 일흔네 게송이 이 물음에 바쳐진다. 그리고 그 끝에 놓인 육인 · 사연 · 오과의 체계는 아비달마가 세운 인과론의 완성형이며, 뒤의 세품 · 업품 · 수면품이 모두 이 말로 쓰인다.
분별근품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품이 아니다. 이십이근에서 시작해 극미의 구생, 마흔여섯 심소, 열네 가지 심불상응행, 여섯 원인과 다섯 결과, 네 가지 조건, 그리고 열두 마음 · 스무 마음의 계열까지, 얼핏 서로 다른 주제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품을 꿰는 실은 분명하다. 앞 품에서 법의 목록이 다 갖추어졌으니, 이제 그 법들이 어떻게 「함께」 일어나고 어떻게 「잇따라」 일어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십이근은 법들 사이의 힘의 관계(증상)를 다루고, 구생의 규칙은 한 찰나 안의 동시 관계를 다루며, 인과 연은 찰나와 찰나 사이의 관계까지 포함해 모든 관계를 체계로 묶는다. 불상응행은 이 관계들을 실체로 세우려는 설일체유부의 사유가 가장 대담하게 드러난 자리다.
이 품은 또한 『구사론』에서 유부와 경량부의 대론이 가장 치열한 곳이다. 천친(天親, 세친 世親 Vasubandhu)은 품의 첫 게송과 대지법 열 가지에 「전하는 말로는(傳說)」이라는 말을 붙여 거리를 두고, 득 · 동분 · 사상 · 명신에 이르면 경량부의 입을 빌려 유부의 실체론을 하나하나 비판한 뒤, 「이것은 좋은 설이 아니다, 우리 종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此非善說,違我宗故)」라는 말로 유부의 자리를 형식적으로 지킨다. 이 짧은 맺음말과 「두 길이 모두 좋은 설이다(如是二途皆為善說)」라는 기묘한 판정 속에, 『구사론』이라는 책의 이중성 — 유부의 체계를 서술하면서 경량부의 비판을 담는 — 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현의 『순정리론』이 『구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가장 많은 지면을 쓴 곳도 이 품이다.
이 편은 품의 논의를 원문의 순서대로 여덟 장으로 나누어 읽는다. 사상의 실유 논쟁 가운데 기본 구도는 핵심 개념 무상 페이지에, 무상정 · 멸진정에서 끊어진 마음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는가의 문제와 심소 46 · 51의 대비는 핵심 개념 구식 페이지에 있다. 여기서는 그 페이지들이 다루지 않은 논증, 곧 사상의 무한소급 문제, 두 무심정을 불상응행으로 정의하는 방식, 그리고 득과 종자의 논쟁을 깊게 다룬다.
- 권3이십이근근은 무엇에 증상하는가
- 권4 앞법의 구생극미와 심 · 심소는 반드시 함께 생긴다
- 권4심소여섯 무리와 마음의 품마다 함께하는 심소의 수
- 권4 끝~권5심불상응행득 · 비득 · 동분 · 무상 · 두 정 · 명근 · 사상 · 명신
- 권6육인 · 오과원인과 결과의 대응
- 권7사연 · 마음의 계열몇 연으로 생기는가 · 열두 마음의 상생
이 편의 장
- 제1장 스물두 가지 근 — 「증상」이라는 힘의 지도 — 근은 무엇에 대해 가장 뛰어난 힘을 갖는가, 그리고 근으로 본 한 생애와 성자의 길
- 제2장 함께 일어나는 법 — 극미의 구생과 마음작용의 여섯 무리 — 욕계 극미는 여덟 가지가 함께 생기고, 마음은 마음작용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 제3장 마음의 품과 마음작용의 수 — 선심 스물둘에서 심 · 의 · 식까지 — 어떤 마음에 몇 가지 심소가 함께하며, 비슷한 심소들은 어떻게 다른가
- 제4장 득과 비득 — 「가짐」은 실재하는가 — 유부의 득, 경량부의 종자, 중현의 재반박
- 제5장 나머지 불상응행 — 동분 · 무심의 두 정 · 명근 · 사상 · 명신 — 보이지 않는 힘들을 실체로 세울 수 있는가
- 제6장 여섯 가지 원인 — 능작인에서 이숙인까지 — 동시 인과를 둘러싼 등불과 세 막대의 논쟁
- 제7장 다섯 가지 결과와 네 가지 조건 — 인과 체계의 완성 — 과를 취하는 때와 주는 때, 몇 연으로 생기는가, 하나의 원인에서 세상이 생기지 않는다
- 제8장 마음이 마음을 잇는 길 — 열두 마음과 스무 마음 — 어떤 마음 바로 뒤에 어떤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가
본송
傳說五於四,四根於二種,五八染淨中,各別為增上。
전하는 말로는, 다섯 근은 네 가지 일에, 네 근은 두 가지 일에, 다섯 근과 여덟 근은 물듦과 깨끗함에 대하여 각각 증상(增上)이 된다.
了自境增上,總立於六根,從身立二根,女男性增上,於同住雜染,清淨增上故。應知命五受,信等立為根,未當知已知,具知根亦爾,於得後後道,涅槃等增上。
제 대상을 아는 일에 증상이 되므로 여섯 근을 모두 세우고, 몸에서 두 근을 따로 세우니 여성 · 남성의 성질에 증상이 되기 때문이다. 중동분의 머묾과 물듦과 깨끗함에 증상이 되므로, 명근과 다섯 가지 느낌과 믿음 등을 근으로 세운다고 알아야 한다. 미지당지 · 이지 · 구지의 근도 그러하니, 뒤의 뒤의 도와 열반 등을 얻는 데 증상이 된다.
心所依此別,此住此雜染,此資糧此淨,由此量立根。
마음이 의지하는 것, 이것의 구별, 이것의 머묾, 이것의 물듦, 이것의 자량, 이것의 깨끗함 — 이 헤아림에 따라 근을 세운다.
술어 풀이
- 根근
- 범어 indriya. 「제석천(Indra)의 힘」과 어원이 이어지는 말로, 어떤 일에 대해 주인처럼 가장 뛰어난 힘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 『구사론』은 근을 「가장 뛰어나고 자재하며 빛나 드러나는 것(最勝自在光顯)」이라 정의하고, 그 뜻을 한마디로 증상이라 한다. 눈 · 귀 같은 감각 기관만이 아니라 생명 · 느낌 · 믿음 · 무루의 지혜까지 스물두 가지가 근이다.
- 增上증상
- 범어 adhipati. 「위에서 다스리는 힘」, 곧 어떤 결과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 근의 본질 규정이며, 뒤의 육인 · 사연에서 능작인 · 증상연 · 증상과라는 말로 다시 나타난다. 근품은 「증상」으로 시작해 「증상」으로 끝나는 품이라 할 수 있다.
- 命根명근
- 범어 jīvitendriya. 한 생의 중동분이 머물러 이어지게 하는 힘. 유부는 이것을 색도 마음도 아닌 심불상응행의 실체로 세운다. 이십이근 가운데 유일하게 「오직 이숙」인 근이다.
- 五受根오수근
- 고(苦) · 낙(樂) · 희(喜) · 우(憂) · 사(捨)의 다섯 가지 느낌.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을 나누어, 몸의 괴로움을 고근, 마음의 괴로움을 우근이라 한다. 물듦(잡염)에 대해 증상이 된다.
- 信等五根신 등 오근
- 신(信) · 근(勤) · 염(念) · 정(定) · 혜(慧). 범어 śraddhā · vīrya · smṛti · samādhi · prajñā. 번뇌를 누르고 성도를 이끄는 힘이어서 깨끗함의 자량이 된다. 유루에도 무루에도 통한다.
- 三無漏根세 무루근
-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 anājñātamājñāsyāmīndriya) · 이지근(已知根, ājñendriya) · 구지근(具知根, ājñātāvīndriya). 별도의 법이 아니라 의근 · 낙 · 희 · 사 · 신 등 오근의 아홉 가지가 견도 · 수도 · 무학도에 있을 때 붙는 이름이다.
- 異熟이숙
- 범어 vipāka. 선 · 불선의 업이 원인이 되어 무기의 결과로 「다르게 익은」 것. 근품은 이십이근 가운데 어느 것이 이숙인가를 따지면서 이숙과의 개념을 처음 본격적으로 다루고, 권6의 이숙인 · 이숙과에서 완성한다.
- 邊際定변제정
- 제4정려 가운데 가장 극한까지 닦은 선정. 아라한이 이 선정의 힘으로 수명을 늘리거나 줄이는(유수행 · 사수행) 대목이 명근의 이숙성 논의에서 나온다.
「최승 · 자재 · 광현」 — 근이라는 말이 품의 이름이 된 까닭
분별계품은 십팔계를 스물두 가지 문(門)으로 나누어 살피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몇 계가 근인가」를 물었다. 근품은 그 물음을 이어받아 시작한다. 「이와 같이 계로 말미암아 이미 여러 근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근이란 무슨 뜻인가(如是因界已列諸根,即於此中根是何義)」. 답은 짧다. 「가장 뛰어나고 자재하며 빛나 드러나는 것을 근이라 하니, 이로써 모두 근의 증상이라는 뜻을 이룬다(最勝自在光顯名根,由此總成根增上義)」(권3, T29, 13b).
보광은 이 정의를 범어의 어근 풀이로 설명한다. 『순정리론』 권9를 끌어와, 근을 뜻하는 말에는 「최승 · 자재」를 뜻하는 어근(伊地)과 「빛나 밝음」을 뜻하는 어근(忍地)의 두 갈래 풀이가 있다고 하고, 『구사론』은 앞의 어근을 따라 「최승 · 자재」를 어근의 뜻(字界)으로, 「광현」을 거기에 붙는 접사의 뜻(字緣)으로 풀었다는 것이다. 보광은 다시 「근의 바탕이 뛰어나므로 최승이요, 근의 작용이 뛰어나므로 자재요, 바탕과 작용이 함께 뛰어나므로 광현이다」라는 풀이도 덧붙인다. 어느 풀이든 핵심은 하나다. 근이란 존재의 목록 속에서 어떤 결과에 대해 다른 것보다 두드러진 힘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품 전체의 성격이 드러난다. 보광은 왜 이 품을 「근품」이라 부르는지를 묻는다. 『잡아비담심론』은 같은 내용을 「행품(行品)」이라 했고, 『순정리론』은 「변차별품(辯差別品)」이라 했다. 보광의 답은, 이 품의 중심이 법의 「작용」을 밝히는 데 있고, 그 작용을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품은 이십이근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구생 · 심소 · 불상응행 · 인연의 논의도 모두 「법이 무엇을 하는가」라는 같은 물음 아래 있다. 근은 그 물음을 여는 열쇠말이다.
품의 이름에 관한 보광의 설명은 『구사론기』 권3 첫머리(T41, 55c~56a)에 있다. 『잡아비담심론』의 「행품」, 『순정리론』의 「변차별품」이라는 이름의 대비는 『구사론』이 앞 시대 논서의 구성을 이어받으면서도 주제를 「근」으로 다시 묶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비바사사의 네 가지 · 두 가지 증상과 그 이설
첫 게송은 「전하는 말로는(傳說)」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구사론』에서 이 말은 천친이 유부 비바사사의 설을 소개하되 자신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쓰는 표지다. 첫 게송부터 이 표지가 붙는다는 것은, 이 품 전체가 유부의 체계를 서술하면서도 비판의 눈을 거두지 않으리라는 예고다.
비바사사의 설에 따르면 눈 · 귀 · 코 · 혀 · 몸의 다섯 근은 각각 네 가지 일에 증상이 된다. 「첫째는 몸을 꾸밈, 둘째는 몸을 이끌고 기름, 셋째는 식 등을 일으킴, 넷째는 함께하지 않는 일(一莊嚴身、二導養身、三生識等、四不共事)」(권3, T29, 13b). 눈과 귀가 없으면 몸이 추해 보이고(꾸밈), 보고 들어 험난을 피하며(이끌고 기름), 안식 · 이식과 그에 상응하는 심소를 일으키고(식을 일으킴), 형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일은 다른 근이 대신할 수 없다(함께하지 않는 일). 코 · 혀 · 몸은 「이끌고 기름」에서 눈 · 귀와 다르다. 이 셋은 단식(段食), 곧 덩어리 음식을 받아 쓰는 일을 맡는다. 음식의 바탕이 향 · 맛 · 감촉이기 때문이다.
여근 · 남근 · 명근 · 의근은 두 가지 일에 증상이 된다. 여근과 남근은 유정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고(유정의 다름), 형상 · 음성 · 젖가슴 같은 차이를 만든다(분별의 다름). 다른 설로는 이 두 근이 물듦과 깨끗함에 증상이 된다고도 한다. 근이 손상된 사람(扇搋 · 半擇)이나 두 근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율의 · 무간업 · 단선근 같은 물든 법도, 율의 · 득과 · 이염 같은 깨끗한 법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근은 중동분을 「잇고 붙든다」. 의근은 「뒤의 생을 잇고(能續後有)」, 「자재하게 따라 움직이게 한다(自在隨行)」. 앞의 것은 중유의 건달바가 애착이나 성냄 가운데 하나의 마음으로 다음 생에 들어간다는 경설로, 뒤의 것은 「마음이 세간을 이끌고, 마음이 두루 거두어들이니, 이와 같이 마음이라는 한 법에 모두가 자재하게 따른다(心能導世間,心能遍攝受,如是心一法,皆自在隨行)」는 게송으로 뒷받침된다.
마지막으로 낙 등 다섯 느낌은 물듦(잡염)에, 신 등 여덟 근 — 신 · 근 · 염 · 정 · 혜와 세 무루근 — 은 깨끗함(청정)에 증상이 된다. 느낌에는 탐 · 진 같은 수면이 따라 자라나고, 신 등에는 깨끗한 법들이 따라 자라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설 둘이 소개된다. 하나는 느낌도 깨끗함에 증상이 된다는 설이다. 경에 「즐거우므로 마음이 정(定)에 든다(樂故心定)」, 「괴로움은 믿음의 의지처가 된다(苦為信依)」, 그리고 출리는 희 · 우 · 사에 의지한다고 했으니, 느낌이 물듦에만 증상이 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 근본적인 비판이다. 몸을 이끌고 기르는 것은 눈 등의 작용이 아니라 식의 작용이다. 식이 알아야 험난을 피하고 음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형색을 보는 것도 식과 다른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께하지 않는 일」을 근의 독자적 증상으로 세울 수 없다. 보광은 이 둘째 이설을 식이 본다고 주장하는 계열(識見家)의 설로 읽는다.
이 비판을 받아 천친은 둘째 게송에서 근을 세우는 기준을 다시 쓴다. 눈 등의 여섯 근은 「제 대상을 아는 일(了自境)」, 곧 여섯 식에 대해 증상이 된다. 눈은 안식에서 「가장 뛰어나고 자재하다」. 형색 일반에 대해 공통 원인이 되고, 식이 눈의 밝고 어두움을 따라 밝아지고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형색(색경)도 안식을 일으키니 근이 아닌가. 장행은 이렇게 답한다.
境於識中無增上用。
대상은 식에 대하여 증상의 작용이 없다.
대상은 식이 일어나는 조건이기는 하지만, 식의 성질을 좌우하는 주인은 아니다. 식의 밝음과 어두움이 근을 따르지 대상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 관찰은, 뒤에 사연의 체계에서 근이 증상연으로, 대상이 소연연으로 나뉘는 구분과 맞물린다.
여근과 남근은 몸의 근(신근)과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여근 · 남근의 바탕은 신근을 떠나지 않으니, 몸의 한 부분에 이 이름을 세운 것이다(女男根體不離身根,身一分中立此名故)」. 몸의 한 부분이 여성 · 남성의 성질에 대해 다른 부분과 다른 증상의 힘을 가지므로 따로 근으로 세웠을 뿐이다. 세 무루근은 각각 다음 단계의 도에 증상이 된다. 미지당지근은 이지근의 도를 얻는 데, 이지근은 구지근의 도를 얻는 데, 구지근은 열반을 얻는 데. 「마음이 해탈하지 않고서는 반열반할 수 없기 때문이다(非心未解脫能般涅槃故)」. 다른 갈래의 설명(異門)으로는, 미지당지근은 견도에서 끊을 번뇌의 소멸에, 이지근은 수도에서 끊을 번뇌의 소멸에, 구지근은 현법락주(現法樂住)에 증상이 된다.
왜 스물둘인가 — 무명과 손발은 왜 근이 아닌가
증상이 근의 기준이라면 곧바로 반론이 나온다. 무명은 행에 대해, 행은 식에 대해 각각 증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십이연기의 지분들도 근이 되어야 한다. 또 말하는 기관(입) · 손 · 발 · 대소변의 기관(語具手足大小便處)은 말하기 · 붙잡고 다니기 · 내보내기 · 즐거움에 대해 증상이 아닌가. 천친은 이 반론에 셋째 게송으로 답한다. 근은 아무 증상이나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유정의 존재 구조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하는 증상만을 가리킨다.
心所依者,眼等六根。此內六處是有情本,此相差別由女男根,復由命根此一期住。此成雜染由五受根,此淨資糧由信等五,此成清淨由後三根,由此立根事皆究竟。
마음이 의지하는 것은 눈 등 여섯 근이다. 이 안의 육처가 유정의 근본이다. 이것의 모습이 구별되는 것은 여근 · 남근에 말미암고, 다시 명근에 말미암아 이것이 한 생 동안 머문다. 이것이 물듦을 이루는 것은 다섯 느낌의 근에 말미암고, 이것의 깨끗함의 자량은 신 등 다섯에 말미암으며, 이것이 깨끗함을 이루는 것은 뒤의 세 근에 말미암는다. 이로써 근을 세우는 일이 모두 끝난다.
이 대목에서 이십이근은 하나의 질서를 드러낸다. 여섯 근은 유정의 「근본」(마음이 의지하는 것), 두 근은 그 구별, 한 근은 그 지속, 다섯 근은 그 물듦, 다섯 근은 깨끗함의 준비, 세 근은 깨끗함의 완성이다. 6 + 2 + 1 + 5 + 5 + 3 = 22. 근의 목록은 감각 기관의 나열이 아니라, 한 유정이 존재하고 물들고 깨끗해지기까지의 구조도다.
이어 「다른 스승」의 설이 소개된다. 근은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의 두 방향으로 세워진다. 유전의 쪽에서는 의지처(눈 등 여섯), 생겨남(여 · 남 — 그로부터 태어나므로), 머묾(명근), 받아 씀(다섯 느낌)의 네 뜻으로 앞의 열네 근을 세운다. 환멸의 쪽에서도 같은 네 뜻으로 뒤의 여덟 근을 세운다. 환멸의 의지처는 신 등 다섯이고, 세 무루근이 차례로 그 생겨남 · 머묾 · 받아 씀이다. 「근의 수가 이로써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根量由此無減無增)」.
- ① 마음의 의지처 — 안 · 이 · 비 · 설 · 신 · 의6
- ② 구별 — 여 · 남2
- ③ 머묾 — 명1
- ④ 물듦 — 고 · 낙 · 희 · 우 · 사5
- ⑤ 깨끗함의 자량 — 신 · 근 · 염 · 정 · 혜5
- ⑥ 깨끗함 — 미지당지 · 이지 · 구지3
- = 22
그러면 말하는 기관 등은 왜 근이 아닌가. 장행의 논증은 짧지만 날카롭다. 입은 말에 대해 근이 아니다. 말은 배워야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손발은 붙잡고 다니는 일에 따로 근이 되지 않는다. 손발이 다른 곳에 다른 모습으로 생겨나는 것을 「붙잡고 다닌다」고 부를 뿐 별다른 성질이 없고, 또 배로 기어가는 동물처럼 손발 없이도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대변의 기관도 내보내는 일에 근이 아니다. 무거운 것은 허공에서 저절로 떨어지고, 바람의 힘이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소변의 기관이 즐거움을 낳는다는 것도, 그 즐거움은 이미 남근 · 여근이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것들을 근으로 세운다면, 목구멍 · 이 · 눈꺼풀 · 마디도 삼키고 씹고 여닫고 굽히는 일에 힘이 있으니 근이 되어야 하고, 마침내 모든 원인이 근이 되어야 한다. 장행의 결론은 「저것들은 작용이 있기는 하나 증상이 아니다(彼雖有用非增上故)」이다.
근의 기준은 「힘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에서 가장 뛰어나고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느냐」이다. 무명 · 손발 · 목구멍도 힘은 있다. 그러나 유정의 의지처 · 구별 · 머묾 · 물듦 · 깨끗함이라는 구조의 마디를 차지하지 않으므로 근이 아니다. 이 구분은 뒤에 능작인(넓은 원인)과 증상연(넓은 조건)이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는 논리와 대조를 이룬다.
다섯 가지 느낌의 근과 세 무루근
이십이근 가운데 눈 등은 계품에서, 명근은 불상응행에서, 신 등은 심소에서 다룰 것이므로, 근품은 여기서 다섯 느낌과 세 무루근만 따로 풀이한다. 게송은 이렇다.
身不悅名苦,即此悅名樂,及三定心悅,餘處此名喜,心不悅名憂,中捨二無別,見修無學道,依九立三根。
몸의 기쁘지 않음을 고라 하고, 바로 이것의 기쁨을 낙이라 하며, 제3정의 마음의 기쁨도 그러하다. 다른 곳에서는 이것을 희라 한다. 마음의 기쁘지 않음을 우라 하고, 가운데를 사라 하니 둘(몸 · 마음)에 구별이 없다. 견도 · 수도 · 무학도에서 아홉에 의지하여 세 근을 세운다.
「몸」의 느낌이란 오식과 상응하는 느낌이다. 몸의 느낌 가운데 해치는 것이 고근, 이롭게 하는 것이 낙근이다. 마음의 느낌 가운데 이롭게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희근이지만, 제3정려에서는 예외로 낙근이라 부른다. 제3정려에는 오식이 없어 몸의 느낌이 없고, 그 마음의 기쁨은 「희에 대한 탐착을 떠나 고요하므로(離喜貪故)」 낙이라 한다. 아래 세 지(地)의 마음의 기쁨은 거칠게 움직여 희에 대한 탐착이 있으므로 희근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근(捨根)의 취급이다. 고 · 낙은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넷(고 · 낙 · 희 · 우)이 되는데, 왜 사(捨)는 몸의 것과 마음의 것을 합쳐 하나의 근으로 세우는가. 첫째 답은 분별의 유무다. 마음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대부분 분별에서 생기지만 몸의 것은 대상의 힘을 따른다. 아라한에게도 몸의 고락은 그대로 생긴다. 그러나 사(捨)는 몸에서든 마음에서든 분별 없이 저절로 생긴다. 둘째 답은 손익의 유무다. 고락은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해치거나 이롭게 하는 모습이 각각 다르지만, 사는 해치지도 이롭게 하지도 않아 몸과 마음에서 모습이 다르지 않다.
세 무루근은 새로운 법이 아니다. 의근 · 낙 · 희 · 사 · 신 등 다섯, 이 아홉 가지가 견도에 있으면 미지당지근, 수도에 있으면 이지근, 무학도에 있으면 구지근이다. 이름의 뜻도 단계를 따른다. 견도에서는 「아직 알지 못한 것을 이제 알리라」는 마음으로 나아가므로 미지당지다. 수도에서는 이미 안 대상을 남은 수면을 끊기 위해 거듭 아는 것이므로 이지다. 무학도에서는 「나는 이미 괴로움을 두루 알았으니 다시 두루 알 것이 없다」고 진실하게 스스로 아는 진지 · 무생지를 얻었으므로, 앎을 갖춘 이, 곧 구지다.
근의 여러 분별 — 유루 · 이숙 · 선악 · 계 · 끊음
근의 바탕을 밝힌 뒤 『구사론』은 아비달마의 전형적인 방법, 곧 여러 문(門)으로 나누어 살피기(門分別)에 들어간다. 스물두 근 가운데 몇이 유루이고 몇이 무루인가, 몇이 이숙이고 몇이 이숙을 갖는가, 몇이 선 · 불선 · 무기인가, 몇이 어느 계에 매이는가, 몇이 견도 · 수도에서 끊기는가. 결과는 도표로 정리하고, 원문이 논쟁을 담은 두 대목만 따로 본다.
명근은 오직 이숙인가 — 수명을 늘리는 아라한
「명근은 오직 이숙이다(命唯是異熟)」라는 게송에 곧바로 반문이 붙는다. 아라한이 수명을 늘리는(留多壽行) 경우, 늘어난 그 명근은 무슨 업의 이숙인가. 『구사론』은 본론(『발지론』 계통의 논서)을 인용해 그 절차를 전한다. 신통을 이루어 마음이 자재한 아라한이 승가나 개인에게 옷 · 발우 같은 생명의 도구를 보시하고, 원을 세운 뒤 제4정려의 변제정에 들었다가 나와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한다.
諸我能感富異熟業,願皆轉招壽異熟果。
나의 부(富)를 가져올 이숙업이 모두 바뀌어 수명의 이숙과를 불러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부를 가져올 업이 바뀌어 수명의 과를 불러온다. 거꾸로 수명을 버릴 때(捨多壽行)는 수명의 업을 부의 과로 돌린다. 이 설명대로라면 늘어난 수명도 업의 이숙이니 「명근은 오직 이숙」이라는 원칙이 지켜진다. 다른 설은 지난 생에 받다 남은 업의 이숙을 지금 변제정의 힘으로 끌어와 받는다고 했고, 묘음은 변제정의 힘이 색계의 대종을 몸에 나타나게 하고, 그 대종이 수명을 따르거나 거스른다고 했다.
그러나 『구사론』은 마지막에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應如是說)」며 다른 결론을 낸다. 아라한은 자재한 삼매의 힘으로, 지난 업에서 생긴 근과 대종이 머무는 시간의 기세를 버리고, 일찍이 없던 선정의 힘에서 일어난 근과 대종이 머무는 시간의 기세를 끌어온다. 「그러므로 이 명근은 이숙이 아니다(故此命根非是異熟)」. 원칙에 예외가 생긴 것이다. 이 결론은 업만이 생명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선정의 힘도 생명의 지속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뒤에 명근을 실체로 세울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복선이 된다.
이 대목은 다시 세존이 「목숨의 행(命行)은 남기고 수명의 행(壽行)은 버리셨다」는 경설로 이어진다. 목숨과 수명은 어떻게 다른가. 본론은 「명근이란 삼계의 수명이다」라고 해 둘을 같은 것으로 보았고, 다른 설들은 지난 업의 과와 지금 업의 과, 중동분의 머묾과 잠시의 머묾으로 나누었다. 세존이 석 달만을 남긴 까닭은 「죽음에 자재함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수명의 행을 버리고, 삶에 자재함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목숨의 행을 남기셨다(為顯於死得自在故捨多壽行,為顯於活得自在故留多命行)」는 것이고, 비바사사는 여기에 온마(蘊魔)와 사마(死魔)를 이 자리에서 항복시킨 것이라는 해석을 더했다.
우근은 왜 이숙이 아닌가
또 하나의 논쟁은 우근(憂根)이다. 비바사사는 우근이 결코 이숙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경에 「희수를 따르는 업, 우수를 따르는 업, 사수를 따르는 업」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우수를 「따르는(順)」 업이란 우수를 과보로 받는 업이 아니라 우수와 상응하는 업이라는 뜻이라고 유부는 회통한다. 반론자는 그렇다면 희수 · 사수를 따르는 업도 상응의 뜻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유부는 「원하는 대로 하라, 우리에게 어긋남이 없다」고 받아넘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장행은 이렇게 답한다. 「우근은 이숙이 아니니, 우근은 분별의 차별에서 생기고 그치는 것도 그러하나, 이숙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憂非異熟,以憂分別差別所生,止息亦然;異熟不爾)」. 우울은 생각이 만든다. 이숙은 업이 정한다. 반론자는 희근도 분별로 생기고 그치니 이숙이 아니어야 한다고 다시 묻고, 또 무간업을 지은 뒤 곧바로 우울이 생기면 그 업의 과가 이미 익었다고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비바사사의 마지막 근거는 이것이다. 「이미 욕계의 탐을 떠난 이에게는 우근이 없다. 이숙은 그렇지 않다」. 이숙이라면 이욕한 이에게도 남아 있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우근은 이욕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근의 이숙 여부는 이숙과의 조건 — 무기여야 하고, 업이 끝난 뒤 시간을 두고 익어야 하며, 분별로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 을 시험하는 사례로 쓰인다. 『구사론』은 결론에서 우근은 강한 생각(思)으로 일어나 무기가 아니고, 산란한 지에만 있어 무루도 아니므로 「반드시 이숙을 갖는(有異熟)」 근이라고 한다(권3, T29, 16b). 이숙이 아니면서 이숙을 낳는 근이라는 것이다.
근으로 본 한 생애와 성자의 길
근품 권3의 마지막 부분은 근을 「얻고 잃는」 시점으로 살핀다. 이 부분은 이십이근이 단지 법의 분류가 아니라 한 유정의 생애를 계량하는 도구임을 보여 준다.
태어날 때 처음 얻는 이숙의 근은 생의 방식(사생)과 계에 따라 다르다. 「욕계의 태생 · 난생 · 습생은 처음에 두 이숙근을 얻는다(欲胎卵濕生,初得二異熟)」 — 신근과 명근. 이 세 생은 근이 점차 생겨나기 때문이다. 의근과 사근은 왜 얻지 않는가. 생을 이을 때의 마음은 반드시 물들어 있어서 이숙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생은 처음부터 근을 갖추어 태어나므로 여섯(성이 없는 경우: 안 · 이 · 비 · 설 · 신 · 명) · 일곱(한 성) · 여덟(두 성 — 악취에 있을 수 있다)을 얻는다. 색계는 여섯, 무색계는 명근 하나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소멸하는 근은 이렇다. 「무색계는 셋, 색계는 여덟, 욕계는 단번이면 열 · 아홉 · 여덟, 점차이면 넷(無色三色八,欲頓十九八,漸四)」. 무색계에서는 명 · 의 · 사가, 색계에서는 거기에 다섯 근을 더한 여덟이 끝에 멸한다. 욕계에서 단번에 죽으면 성(性)의 근의 유무에 따라 열 · 아홉 · 여덟이, 점차 죽으면 신 · 명 · 의 · 사 넷이 끝에 멸한다. 이것은 물든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으로 죽을 때의 계산이고, 선한 마음으로 죽으면 신 등 다섯 근이 반드시 함께 있으므로 모든 경우에 다섯을 더한다(善增五).
사문과를 얻는 근은 더 정밀하다. 예류과와 아라한과(처음과 끝의 과)는 아홉 근으로 얻고, 일래과 · 불환과는 증득의 방식에 따라 일곱 · 여덟 · 아홉 근으로 얻는다. 예류과의 아홉은 의 · 사 · 신 등 다섯 · 미지당지근 · 이지근이다. 미지당지근이 무간도에, 이지근이 해탈도에 있으면서 서로 도와 첫 과를 얻는다. 그런데 본론은 아라한과를 「열한 근」으로 얻는다고 했다. 『구사론』은 이것을 「한 몸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에 의지해 말한 것(依一身中容有故說)」이라 해명한다. 무학위에서 여러 번 물러났다가 낙 · 희 · 사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나타난 상태로 거듭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보면 세 느낌이 모두 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의 증득에서 세 느낌이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으므로, 실제로는 아홉 근이다.
마지막으로 성취의 수. 명 · 의 · 사 가운데 하나를 성취하면 반드시 이 셋을 성취하고, 낙근이나 신근을 성취하면 넷을, 안근 등이나 희근이면 다섯을, 고근이면 일곱을, 여 · 남 · 우 · 신 등이면 여덟을, 이지 · 구지근이면 열하나를, 미지당지근이면 열셋을 반드시 성취한다. 가장 적게 성취하는 이는 선근을 끊은 이(다섯 느낌과 신 · 명 · 의의 여덟)와 무색계에 태어난 범부(신 등 다섯 · 명 · 의 · 사의 여덟)이고, 가장 많이 성취하는 이는 두 성을 가진 욕계의 범부와 이욕하지 않은 유학의 성자로 각각 열아홉이다.
본론의 11은 「依一身中容有故說」
이렇게 이십이근의 장은 끝난다. 장행은 이 논의를 「계와 근 · 비근의 차별을 분별한 것을 계기로 이십이근을 자세히 논했다(因分別界根非根差別,乘茲廣辯二十二根竟)」고 맺는다. 근은 결국 유정이라는 존재를 증상의 관계로 다시 그린 지도였다. 무엇이 무엇에 대해 힘을 갖는가. 이 물음은 이제 「무엇이 무엇과 함께 일어나는가」라는 물음으로 넘어간다.
본송
欲微聚無聲,無根有八事,有身根九事,十事有餘根。
욕계의 미취(微聚)는 소리가 없고 근이 없으면 여덟 가지가 있고, 신근이 있으면 아홉 가지, 다른 근이 있으면 열 가지가 있다.
心心所必俱,諸行相或得。
심과 심소는 반드시 함께하고, 모든 행은 상(相)과 함께하며, 혹은 득(得)과 함께한다.
受想思觸欲,慧念與作意,勝解三摩地,遍於一切心。
수 · 상 · 사 · 촉 · 욕, 혜 · 염과 작의, 승해 · 삼마지는 모든 마음에 두루 있다.
술어 풀이
- 俱生구생
- 범어 sahaja / sahabhū. 「함께 생김」. 같은 찰나에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법들의 관계. 근품 권4는 「모든 유위법은 모습도 다르고 생겨남도 각각 다른데, 반드시 함께 생기는 법들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 주제를 연다.
- 微聚미취
- 「극미의 모임」. 극미(極微, paramāṇu)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여러 가지가 모여 일어나며, 그 가장 작은 모임을 미취라 한다. 「이보다 더 작은 것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 事사
- 미취를 이루는 「가지」. 대종 넷과 소조색 넷이면 여덟 가지(八事)다. 이 「사」가 실체(體)를 세는 것인가 처(處)를 세는 것인가가 장행의 논점이 된다.
- 心所심소
- 범어 caitta / caitasika. 「마음에 속한 것」. 마음(심왕)과 함께 일어나 같은 대상을 같은 방식으로 붙드는 작용들. 『구사론』은 다섯 무리(대지법 · 대선지법 · 대번뇌지법 · 대불선지법 · 소번뇌지법)를 세우고 나머지를 「부정(不定)」으로 덧붙인다.
- 大地法대지법
- 범어 mahābhūmika. 모든 마음에 반드시 함께하는 열 가지 심소. 「지(地)는 행처(行處)다」 — 마음이라는 큰 땅에 늘 있는 법이라는 뜻이다.
- 大善地法대선지법
- 범어 kuśalamahābhūmika. 모든 선한 마음에 반드시 함께하는 열 가지.
- 大煩惱地法대번뇌지법
- 범어 kleśamahābhūmika. 모든 물든 마음에 반드시 함께하는 여섯 가지.
- 大不善地法대불선지법
- 범어 akuśalamahābhūmika. 모든 불선한 마음에 반드시 함께하는 두 가지 — 무참 · 무괴.
- 小煩惱地法소번뇌지법
- 범어 parīttakleśabhūmika. 물든 마음의 일부에만, 하나씩 따로 일어나는 열 가지.
- 不定부정
- 범어 aniyata. 다섯 무리 어디에도 넣을 수 없는 심소. 『구사론』 본문은 「악작 · 수면 · 심 · 사 등」이라 하고, 주석가들이 탐 · 진 · 만 · 의를 더해 여덟로 헤아린다.
극미는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 팔사구생
근품 권4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든 유위법은 그 모습이 같지 않고 생겨남도 각각 다른데, 반드시 함께 생기는 법들이 있는가(一切有為如相不同,生亦各異,為有諸法決定俱生)」. 법은 다섯 무리 — 색 · 심 · 심소 · 심불상응행 · 무위 — 로 나뉘고, 무위는 생겨남이 없으므로 제외된다. 먼저 색이다.
욕계에서 소리도 근도 없는 가장 작은 미취(예컨대 흙덩이의 한 미취)에는 여덟 가지가 반드시 함께 생기며 「하나도 모자라지 않는다(隨一不減)」. 사대종 — 지 · 수 · 화 · 풍 — 과 네 가지 소조색 — 색 · 향 · 미 · 촉 — 이다. 신근이 있는 미취는 여기에 신근을 더해 아홉, 눈 등 다른 근이 있는 미취는 다시 그 근을 더해 열이다. 눈 · 귀 · 코 · 혀의 근은 반드시 몸을 떠나지 않지만, 서로는 자리가 따로 있다. 소리가 함께 생기면 각각 하나씩 더해져 아홉 · 열 · 열하나가 된다. 소리는 근을 떠나지 않고 생기는데, 집수된 대종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색계에는 향과 미가 없으므로 같은 계산에서 둘씩 빠진다.
소리가 있으면 각각 +1 → 9 · 10 · 11
소리 없으면 6 · 7 · 8, 소리 있으면 7 · 8 · 9
여기서 두 가지 반론이 나온다. 첫째, 사대종이 서로 떠나지 않고 함께 생긴다면, 왜 어떤 덩어리에서는 단단함만, 어떤 덩어리에서는 축축함만 느껴지는가. 답은 「그 모임 속에서 세력이 더한 것이 또렷이 알려질 뿐, 나머지의 바탕이 없는 것이 아니다(於彼聚中勢用增者明了可得,餘體非無)」이다. 바늘 끝과 산가지를 함께 만지면 바늘 끝만 느껴지고, 소금과 보릿가루를 함께 맛보면 소금 맛만 느껴지는 것과 같다. 나머지가 있는 줄은 어떻게 아는가. 단단한 것이 거두어 모으고(攝), 익히고(熟), 자라게 하고(長), 붙드는(持) 작용을 보면 그 안에 수 · 화 · 풍이 함께 있음을 안다. 다른 설은 그 미취 속에 나머지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종자(種子)로서」 있다고 한다. 경에 「나무 덩이 안에 갖가지 계(界)가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계란 종자라는 것이다. 근품에서 「종자」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자리다.
둘째, 여기서 「사(事)」는 실체(體)를 세는 것인가 처(處)를 세는 것인가. 실체로 세면 여덟은 너무 적다. 모든 미취에는 형색도 있고, 무거움 · 가벼움, 매끄러움 · 껄끄러움 가운데 하나씩도 있으며, 차가움 · 배고픔 · 목마름이 있는 곳도 있다. 처로 세면 여덟은 너무 많다. 사대종은 모두 촉처에 속하니 하나로 세어야 한다. 장행의 답은 절충이다. 「한쪽은 실체에 의지해 말했으니 의지처인 대종이고, 한쪽은 처에 의지해 말했으니 의지하는 소조색이다(一分依體說,謂所依大種;一分依處說,謂能依造色)」. 그러면 소조색마다 따로 사대종에 의지하니 대종의 수가 많아지지 않는가 하는 재반론에는 「대종은 종류로 말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장행은 이 논쟁을 이렇게 끊는다. 「이런 말을 분별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말은 바라는 대로 생기는 것이니, 뜻을 생각해야 한다(何用分別如是語為?語隨欲生,義應思擇)」. 숫자 놀음에 빠지지 말라는, 천친다운 한마디다.
『순정리론』 권10은 같은 게송을 해설하면서 극미를 「유대색 가운데 마지막 미세한 부분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 정의하고, 한 찰나가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인 것과 같다고 한다. 또 대종을 따로 세어 말한 까닭을 「대종과 소조색이 따로 없다」는 등의 여러 비방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T29, 383c~384a). 극미론 자체는 「법의 분류」 편과 「세계와 윤회」 편의 주제다.
심과 심소는 반드시 함께한다
둘째 본송은 짧다. 「심과 심소는 반드시 함께하고, 모든 행은 상과 함께하며, 혹은 득과 함께한다」. 장행은 각 구절을 이렇게 푼다. 심과 심소는 반드시 함께 생기며, 「하나라도 빠지면 나머지도 일어나지 않는다(隨闕一時餘則不起)」. 앞 구절의 「반드시 함께」는 다음 구절까지 이어져, 색 · 심 · 심소 · 불상응행의 모든 유위법은 생겨날 때 반드시 유위의 네 상(생 · 주 · 이 · 멸)과 함께 일어난다. 「혹은 득과 함께」라 한 것은, 모든 행 가운데 유정에 속한 법만이 득과 함께 생기고 비정(非情)의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짧은 게송은 근품의 나머지 부분 전체를 미리 보여 준다. 심 · 심소의 구생은 바로 이어지는 심소론과 뒤의 상응인으로, 상(相)과의 구생은 불상응행의 사상론으로, 득과의 구생은 불상응행의 득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반드시 함께 생긴다」는 사실은 뒤에 구유인이라는 동시 인과의 근거가 된다.
여기서 유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마음은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마음의 찰나에는 적어도 열 가지 심소가 함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전제가 아니었다. 『순정리론』은 같은 자리에서 경량부 계열의 상좌(上座) 슈리라타가 대지법의 일부를 부정했다고 전한다. 예컨대 「상좌는, 혜(慧)는 무명이나 의(疑)와 함께하는 마음에서는 모습과 작용이 없으므로 대지법이 아니라고 한다(然上座說:慧於無明疑俱心品,相用無故,非大地法)」(『순정리론』 권10, T29, 389b). 심소가 몇 개인가, 그것들이 정말 실체로서 동시에 있는가는 부파 사이의 쟁점이었다. 『구사론』 자신도 다음 대목에서 그 거리를 드러낸다.
「전하는 말로는」 — 대지법 열 가지
심소는 다섯 무리로 나뉜다. 「지(地)란 행처(行處)이니, 이것이 저것의 행처이면 이것을 저것의 법지(法地)라 한다(地謂行處,若此是彼所行處,即說此為彼法地)」. 대지(大地)란 「큰 법의 땅」, 곧 모든 마음이다. 그 땅에 늘 있는 법이 대지법이니, 「법이 늘 모든 마음에 있다(法恒於一切心有)」는 뜻이다. 대선지법은 「모든 선한 마음」이라는 땅에, 대번뇌지법은 「모든 물든 마음」이라는 땅에 늘 있는 법이다. 이름 하나에 그 무리의 범위가 정의되어 있다.
대지법 열 가지의 정의를 장행은 이렇게 전한다.
傳說:如是所列十法,諸心剎那和合遍有。此中受謂三種領納:苦、樂、俱非,有差別故。想謂於境取差別相。思謂能令心有造作。觸謂根境識和合生,能有觸對。欲謂希求所作事業。慧謂於法能有簡擇。念謂於緣明記不忘。作意謂能令心警覺。勝解謂能於境印可。三摩地謂心一境性。
전하는 말로는, 이렇게 늘어놓은 열 법은 모든 마음의 찰나에 화합하여 두루 있다. 이 가운데 수(受)란 세 가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괴로움 · 즐거움 · 둘 다 아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상(想)이란 대상에서 차별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사(思)란 마음으로 하여금 지어 감이 있게 하는 것이다. 촉(觸)이란 근 · 경 · 식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으로, 부딪쳐 마주함이 있는 것이다. 욕(欲)이란 하려는 일을 바라 구하는 것이다. 혜(慧)란 법을 가려 고르는 것이다. 염(念)이란 대상을 또렷이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작의(作意)란 마음으로 하여금 깨어 일깨우는 것이다. 승해(勝解)란 대상을 인가하는 것이다. 삼마지(三摩地)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머무는 성질이다.
여기서도 「전하는 말로는」이 붙어 있다. 보광은 이 말에 대해 「논주의 뜻이 경량부 편에 있어, 열 법이 모두 별도의 바탕을 가진다고 믿지 않으므로 전하는 말이라 했다(論主意朋經部,非信十法皆有別體,故言傳說)」고 주석한다(『구사론기』 권4, T41, 74a). 천친은 열 가지 작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각각 별개의 실체로서 한 찰나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유부의 주장에는 판단을 유보한다.
장행은 그 유보의 이유를 바로 덧붙인다. 「모든 심 · 심소의 다른 모습은 미세하여, 하나하나를 상속 속에서 분별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한 찰나에 동시에 있는 것이랴(諸心心所異相微細,一一相續分別尚難,況一剎那俱時而有)」. 색이 있는 약재들은 색근으로 지각되는데도 그 맛의 차이를 알기 어렵다. 색이 없는 법은 오직 지혜로만 알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유부의 심소론은 관찰의 보고가 아니라 분석의 산물이라는 것을 천친은 숨기지 않는다.
- 受수「三種領納」세 가지로 받아들임
- 想상「於境取差別相」대상의 차별상을 취함
- 思사「能令心有造作」마음이 지어 가게 함
- 觸촉「根境識和合生」근 · 경 · 식의 화합
- 欲욕「希求所作事業」할 일을 바람
- 慧혜「於法能有簡擇」법을 가려 고름
- 念염「於緣明記不忘」또렷이 기억함
- 作意작의「能令心警覺」마음을 일깨움
- 勝解승해「能於境印可」대상을 인가함
- 三摩地삼마지「心一境性」한 대상에 머묾
열 가지 정의는 뒤에 오래 쓰이게 될 표준 정의다. 몇 가지는 눈여겨볼 만하다. 사(思)는 「마음으로 하여금 지어 감이 있게 하는 것」이니, 핵심 개념 업 페이지에서 본 「의도로서의 업」이 바로 이 심소다. 대지법에 있으므로, 어떤 마음도 의도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촉(觸)은 근 · 경 · 식 셋의 화합에서 생기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이 정의가 뒤에 멸진정에 「미세한 마음」이 남는다는 설을 묘음이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혜(慧)가 모든 마음에 있다는 것은, 물든 마음에도 가려 고르는 작용은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 혜가 물들면 「부정지(不正知)」라 불릴 뿐이다.
대선지법 — 신에서 근까지, 그리고 「깨어 있음과 깨어 있지 않음」
모든 선한 마음에 두루 있는 열 가지는 「신(信) · 불방일(不放逸) · 경안(輕安) · 사(捨) · 참(慚) · 괴(愧) · 두 근(無貪 · 無瞋) · 불해(不害) · 근(勤)」이다. 정의는 이렇다. 신은 「마음을 맑게 하는 것(令心澄淨)」, 다른 설로는 사제 · 삼보 · 업과에 대해 눈앞에서 인정하는 것. 불방일은 선법을 닦고 불선법을 떠나는 것, 곧 「선에 오롯이 기울이는 것(於善專注為性)」이며, 다른 부파의 경에서는 「마음을 지켜 보호하는 것」이라 풀었다. 경안은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心堪任性)」. 사(捨)는 「마음의 평등한 성질, 일깨우지 않는 성질(心平等性、無警覺性)」. 불해는 해치지 않음, 근은 「마음을 용맹하게 하는 것(令心勇悍)」. 참 · 괴는 뒤에서 따로 정의한다. 무치(無癡)는 왜 없는가. 무치라는 선근은 혜를 바탕으로 하는데 혜는 이미 대지법에 있으므로 거듭 세우지 않는다.
여기서 두 문답이 붙는다. 첫째, 경에는 「몸의 경안」도 설해져 있다. 경안이 심소라면 몸의 경안은 무엇인가. 이것은 몸의 느낌(신수)이 실은 오식과 상응하는 느낌인 것과 같은 말법이다. 그러면 몸의 감당성이 어떻게 칠각지의 하나인 경안각지가 되는가. 각지를 「따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는다. 경에 「희와 희를 따르는 법을 희각지라 한다」, 「정견 · 정사유 · 정정진을 혜온이라 한다」고 하듯, 따르는 것에 이름을 빌려준 것이다.
둘째 문답은 이 품 전체에서 가장 섬세한 대목의 하나다. 작의(作意)는 대지법이어서 모든 마음에 있고, 그 정의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런데 사(捨)는 선한 마음에 있고 그 정의는 「일깨우지 않는 성질」이다. 그렇다면 선한 마음 하나에 일깨움과 일깨우지 않음이 함께 있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장행은 이렇게 답한다.
此最難知,謂相違背而不乖反。此有警覺於餘則無,二既懸殊有何乖反?
이것이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니, 서로 등지면서도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작의)은 일깨움이 있으나 나머지에는 없으니, 둘이 이미 아주 다른데 무슨 어그러짐이 있겠는가.
작의는 마음을 대상으로 향하게 하고, 사는 마음을 치우침 없이 평평하게 한다. 둘은 서로 다른 일을 하므로 한 마음에 함께 있어도 모순이 아니다. 반론자는 그렇다면 둘이 같은 대상을 반연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모든 법이 서로 상응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지만, 장행은 「이와 같은 종류의 나머지 법들도 여기서 구해야 하니, 저 이치처럼 여기서도 그러하다」고 짧게 넘긴다. 한 찰나의 마음이 서로 반대 방향의 작용들을 동시에 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유부 심소론의 핵심 직관이다.
대번뇌지법 · 대불선지법 · 소번뇌지법
모든 물든 마음에 두루 있는 대번뇌지법은 여섯이다. 「치(癡) · 일(逸) · 태(怠) · 불신(不信) · 혼(惛) · 도(掉)는 늘 물든 마음에만 있다(癡逸怠不信,惛掉恒唯染)」. 치는 우치, 곧 「무명 · 무지 · 무현(無明無智無顯)」이다. 방일은 선을 닦지 않는 것이니 불방일의 대치, 해태는 마음이 용맹하지 않은 것이니 근의 대치, 불신은 마음이 맑지 않은 것이니 신의 대치다. 혼침은 대법(對法)의 정의를 그대로 인용한다. 「몸의 무거움, 마음의 무거움, 몸의 감당하지 못함, 마음의 감당하지 못함, 몸의 혼침, 마음의 혼침」. 도거는 「마음을 고요하지 않게 하는 것(令心不靜)」이다.
여기서 반론이 나온다. 근본 아비달마(『품류족론』 계통)에는 대번뇌지법이 열 가지라고 했다. 불신 · 해태 · 실념 · 심란 · 무명 · 부정지 · 비리작의 · 사승해 · 도거 · 방일. 게다가 혼침은 들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한 『구사론』의 응답은 이 품에서 드물게 날카로운 어조를 띤다.
天愛!汝今但知言,至不閑意旨。
천애(天愛)여, 그대는 말만 알 뿐 뜻을 익히지 못했다.
「천애」는 인도 논서에서 상대를 어리석다고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뜻은 이렇다. 실념 · 심란 · 부정지 · 비리작의 · 사승해의 다섯은 이미 대지법에 들어 있다. 물든 염(念)이 실념, 물든 정(定)이 심란, 물든 혜가 부정지, 물든 작의와 승해가 비리작의와 사승해다. 무치가 혜를 바탕으로 하므로 대선지법에 거듭 세우지 않았듯이, 이 다섯도 거듭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대지법과 대번뇌지법의 관계는 네 구(四句)로 정리된다. 대지법이면서 대번뇌지법이 아닌 것(수 · 상 · 사 · 촉 · 욕), 대번뇌지법이면서 대지법이 아닌 것(불신 · 해태 · 무명 · 도거 · 방일), 둘 다인 것(염 등 다섯), 둘 다 아닌 것. 혼침은 왜 근본 논서에서 빠졌는가. 어떤 이는 혼침이 정(定)에 순하므로 일부러 넣지 않았다고 했지만, 『구사론』은 혼침과 도거는 늘 함께 다니고 다만 어느 쪽이 더 강하게 작용하느냐로 「혼침형 · 도거형」을 말할 뿐이며, 지법은 바탕이 있느냐에 따라 세우므로 여섯이 옳다고 한다.
모든 불선한 마음에 두루 있는 대불선지법은 무참(無慚) · 무괴(無愧) 둘뿐이다. 모든 불선심에 있고 오직 불선심에만 있는 심소는 이 둘밖에 없다. 보광은 이 기준 하나로 다른 심소들을 모두 걸러 낸다. 대지법 · 대번뇌지법 · 심 · 사의 열여덟은 모든 불선심에 있지만 불선심에만 있지 않고, 분 · 부 · 간 · 질 · 뇌 · 해 · 한 · 진의 여덟은 불선에만 있지만 모든 불선심에 있지 않다.
소번뇌지법은 「분(忿) · 부(覆) · 간(慳) · 질(嫉) · 뇌(惱) · 해(害) · 한(恨) · 첨(諂) · 광(誑) · 교(憍)」의 열이다. 이 무리를 묶는 조건은 넷이다. 「오직 수도에서 끊기고, 의식의 지에서만 일어나며, 무명과 상응하고, 각각 따로 나타난다(唯修所斷,意識地起、無明相應、各別現行)」. 「소(小)」라는 이름은 물든 마음의 일부에만, 그것도 하나씩 일어나기 때문이다. 각 심소의 정의는 수면품의 수번뇌에서 다룬다고 미룬다.
마지막으로 다섯 무리 어디에도 들지 않는 심소가 있다. 장행은 「또 이 밖의 부정(不定) 심소가 있으니, 악작 · 수면 · 심 · 사 등의 법이다(復有此餘不定心所,惡作、睡眠、尋、伺等法)」라고만 한다. 「등」이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본문에 없다. 보광은 「등이란 탐 · 진 · 만 · 의를 함께 취한 것(等者,等取貪、瞋、慢、疑)」이라 풀고(『구사론기』 권4, T41, 78b), 이렇게 해서 「이 논서에 의지해 드러난 모습으로 세우면 모두 마흔여섯 가지이니, 대지법 열에서 부정 여덟까지다(只依此論顯相廢立,總有四十六種,謂大地法十至不定有八)」라고 정리한다(같은 곳, 78c). 『대비바사론』은 부정에 「두려움(怖)」을 더 넣기도 했으나, 보광은 이 논서가 드러난 것만 말했으므로 여덟으로 한다고 해명한다.
- ① 대지법10모든 마음에수상사촉욕혜염작의승해삼마지
- ② 대선지법10모든 선한 마음에신불방일경안사참괴무탐무진불해근
- ③ 대번뇌지법6모든 물든 마음에치방일해태불신혼침도거
- ④ 대불선지법2모든 불선한 마음에무참무괴
- ⑤ 소번뇌지법10물든 마음의 일부에 하나씩분부간질뇌해한첨광교
- ⑥ 부정8악작수면심사(본문)+탐진만의(보광의 「等取」)
「오위칠십오법」의 심소 46은 이 주석가들의 정리다
「심소 46」, 나아가 「오위칠십오법(색 11 · 심 1 · 심소 46 · 불상응행 14 · 무위 3)」은 『구사론』 본문에 하나의 목록으로 나오지 않는다. 본문은 다섯 무리와 「악작 · 수면 · 심 · 사 등」만 말하고, 부정 여덟과 총수 마흔여섯은 보광 등 중국 주석가의 정리다. 유식학의 심소 51과의 대비는 핵심 개념 구식 페이지에 있다.
보광은 여기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정리를 덧붙인다. 왜 어떤 번뇌는 짝이 되는 선법을 가지고 어떤 번뇌는 갖지 않는가. 그의 답은, 물든 법 가운데 다섯 부의 끊음에 모두 통하고 여섯 식에 두루 있는 것만이 「바로 뒤집혀(正翻)」 선법 쪽에 짝을 세운다는 것이다. 치의 짝이 무치(곧 혜), 방일의 짝이 불방일, 해태의 짝이 근, 불신의 짝이 신, 혼침의 짝이 경안, 도거의 짝이 사, 무참 · 무괴의 짝이 참 · 괴, 탐 · 진의 짝이 무탐 · 무진이다. 소번뇌지법의 해(害)만은 이 조건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불해라는 짝을 가지는데, 해치는 마음의 허물이 무거워 보살의 길을 막기 때문에 따로 세웠다는 것이다. 마흔여섯이라는 숫자는 이렇게 선과 염의 대칭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본송
欲有尋伺故,於善心品中,二十二心所,有時增惡作。於不善不共,見俱唯二十,四煩惱忿等,惡作二十一,有覆有十八,無覆許十二,睡眠遍不違,若有皆增一。
욕계에는 심 · 사가 있으므로, 선한 마음의 품에는 스물두 심소가 있고 때로는 악작이 더해진다. 불선의 불공(不共)과 견(見)과 함께하는 품에는 스물뿐이고, 네 번뇌 · 분 등 · 악작과 함께하면 스물하나다. 유부무기는 열여덟, 무부무기는 열둘이라 인정한다. 수면은 어디에도 어긋나지 않으니, 있으면 모두 하나를 더한다.
心意識體一,心心所有依,有緣有行相,相應義有五。
심 · 의 · 식은 바탕이 하나다. 심과 심소는 의지처가 있고, 대상이 있고, 행상이 있으며, 상응이라 하니 그 뜻에 다섯 가지가 있다.
술어 풀이
- 心品심품
- 마음과 그에 함께하는 심소들의 한 묶음. 「품」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찰나의 마음이 어떤 심소들을 거느리는가를 하나의 단위로 본다.
- 不共無明불공무명
- 탐 · 진 등 다른 번뇌 없이 무명만 홀로 있는 마음. 「불공(不共)」은 다른 근본번뇌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有覆無記 · 無覆無記유부무기 · 무부무기
-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 가운데, 성도를 덮어 가리는 번뇌가 있으면 유부, 없으면 무부. 욕계의 유부무기는 유신견 · 변집견과 함께하는 마음이다.
- 惡作악작
- 범어 kaukṛtya. 뉘우침(追悔). 「잘못 지은 일을 반연하는 마음의 뉘우침」. 선한 악작과 불선한 악작이 있다.
- 尋 · 伺심 · 사
- 범어 vitarka · vicāra. 마음의 거친 성질과 미세한 성질. 욕계와 초정려에는 둘 다, 중간정려에는 사만, 제2정려 이상에는 둘 다 없다.
- 慚 · 愧참 · 괴
- 범어 hrī · apatrāpya. 공덕 있는 이에 대한 공경과, 허물에 대한 두려움. 그 반대가 무참 · 무괴다.
- 相應상응
- 범어 saṃprayukta. 심과 심소가 「같게 화합하는」 관계. 다섯 가지가 같아야 상응이라 한다(오의평등).
- 行相행상
- 범어 ākāra. 마음이 대상을 붙드는 방식, 대상의 모습이 마음에 나타나는 꼴. 심과 그 심소들은 같은 행상으로 대상을 붙든다.
어느 마음에 몇 심소가 함께하는가 — 욕계의 다섯 품
심소의 목록을 세운 뒤 『구사론』은 묻는다. 「어느 마음의 품에 몇 심소가 반드시 함께 생기는가(於何心品有幾心所決定俱生)」. 목록이 정적인 분류라면 이 물음은 마음의 실제 찰나를 단면으로 잘라 보는 것이다.
먼저 욕계에는 다섯 가지 마음의 품이 있다. 선은 하나, 불선은 둘(불공무명과 상응하는 것, 그 밖의 번뇌와 상응하는 것), 무기는 둘(유부무기, 무부무기)이다. 욕계의 마음에는 반드시 심 · 사가 있다. 그러므로 계산은 이렇게 된다.
선한 마음에는 대지법 10 + 대선지법 10 + 부정의 심 · 사 2 = 스물둘. 모든 선한 마음에 악작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악작이 있으면 스물셋이 된다. 악작이란 「잘못 지은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반연하여 뉘우치는 마음의 성질이다. 장행은 왜 결과(뉘우침)에 원인의 이름(잘못 지음)을 붙였는가를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한다. 공해탈문을 반연하는 것을 「공」이라 하고, 부정(不淨)을 반연하는 무탐을 「부정관」이라 하듯 대상의 이름을 빌렸다는 것, 「온 고을이 다 모였다」고 할 때 의지처(고을)로 그 위의 사람들을 가리키듯 의지처의 이름을 빌렸다는 것, 「여섯 촉처를 지난 업이라 한다」고 할 때 결과에 원인의 이름을 붙이듯 했다는 것이다. 아직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나의 잘못이다」라고 뉘우치므로 악작이라 할 수 있다. 선한 일을 하지 않았거나 악한 일을 한 것을 뉘우치면 선한 악작, 그 반대이면 불선한 악작이다.
불선의 불공 품(무명만 있는 마음)에는 대지법 10 + 대번뇌지법 6 + 대불선지법 2 + 심 · 사 2 = 스물이다. 사견 · 견취 · 계금취와 상응하는 불선 품도 스물이다. 견(見)이 더해지는데 왜 스물하나가 되지 않는가. 견은 대지법 가운데 혜의 작용이 특별한 것일 뿐 별개의 심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탐 · 진 · 만 · 의의 네 번뇌 가운데 하나와 상응하면 스물하나, 분 등 수번뇌의 하나와 상응해도 스물하나, 불선한 악작과 함께하면 역시 스물하나다.
유부무기 품은 대지법 10 + 대번뇌지법 6 + 심 · 사 2 = 열여덟이다. 무참 · 무괴가 빠지는 것은 이 마음이 불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욕계의 유부무기는 유신견 · 변집견과 상응하는 마음인데, 이 두 견은 욕계에서 불선이 아니라 무기로 판정된다. 무부무기 품은 대지법 10 + 심 · 사 2 = 열둘이다. 「외방의 스승들」은 악작이 무기에도 통한다고 보아 열셋을 인정한다. 마지막으로 수면(睡眠)은 선 · 불선 · 무기에 모두 통하므로 어느 품과도 어긋나지 않으며, 있으면 하나씩 더한다. 스물둘은 스물셋으로, 스물셋은 스물넷으로.
「見」은 혜의 작용이 특별한 것이므로 따로 세지 않는다 (권4, T29, 20b)
위의 계로 올라가면 — 초정려 · 중간정려 · 제2정려 이상
初定除不善,及惡作睡眠,中定又除尋,上兼除伺等。
초정려에서는 불선과 악작 · 수면을 빼고, 중간정려에서는 다시 심을 빼며, 그 위에서는 사 등을 함께 뺀다.
초정려에서는 오직 불선인 법 — 진(瞋), 첨 · 광 · 교를 뺀 분 등의 수번뇌, 무참 · 무괴 — 과 악작 · 수면이 빠진다. 중간정려에서는 다시 심이 빠지고, 제2정려 이상 무색계까지는 사가 빠지며 「등」이 가리키는 첨 · 광도 빠진다. 교(憍)는 남는다.
왜 첨(諂) · 광(誑)은 초정려까지는 있다가 그 위로는 없는가. 장행은 경을 인용한다. 「첨 · 광은 범천까지 이르니, 무리가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초정려의 범천에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범천왕이 첨광을 보인 일화가 이어진다.
以大梵王處自梵眾,忽被馬勝苾芻問言:此四大種當於何位盡滅無餘?梵王不知無餘滅位,便矯亂答:我於此梵眾是大梵,自在作者、化者、生者、養者,是一切父。
대범천왕이 자기 범중 가운데 있을 때, 갑자기 마승(馬勝) 비구가 「이 사대종은 어느 자리에서 남김없이 다하여 멸합니까」 하고 물었다. 범천왕은 남김없이 멸하는 자리를 알지 못하여 얼버무려 대답했다. 「나는 이 범중에서 대범이니, 자재한 작자요, 화작자요, 생겨나게 하는 이요, 기르는 이요, 모든 것의 아버지다.」
그리고 범천왕은 마승을 무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 사실은 모른다고 사과하며 부처님께 가서 물으라고 했다. 대중 앞에서 체면을 지키려 얼버무린 것이 광(誑)이고, 몰래 사과한 것이 첨(諂)이다. 아비달마의 심소 분석이 경의 이야기를 계(界)의 경계를 정하는 증거로 쓰는 전형적인 예다. 그리고 이 일화의 「자재한 작자요 … 모든 것의 아버지」라는 말은, 근품의 끝에서 「세상은 자재천 같은 하나의 원인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논증으로 다시 돌아온다.
비슷한 심소는 어떻게 다른가 — 무참 · 무괴, 애 · 경
심소의 수를 정한 뒤 『구사론』은 서로 비슷해 보이는 심소들의 차이를 묻는다. 먼저 무참과 무괴다.
無慚愧不重,於罪不見怖,愛敬謂信慚,唯於欲色有。
무참은 공경하지 않음이고, 무괴는 허물에서 두려움을 보지 않음이다. 애(愛)와 경(敬)은 신(信)과 참(慚)이니, 오직 욕계와 색계에만 있다.
무참은 「모든 공덕과 공덕 있는 이에 대해 공경도 숭상도 없고, 꺼림도 없으며, 따르는 바도 없는 것」이니 공경의 반대다. 무괴는 선한 이들이 꾸짖고 싫어하는 법, 곧 허물(罪)에 대해 「두려움을 보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장행은 하나의 해석 문제를 붙든다. 「두려움을 보지 않음」이란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는 뜻인가. 앞의 것이면 무괴는 지혜(본다)가 되고, 뒤의 것이면 무명(보지 못한다)이 된다. 장행의 답은 둘 다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보거나 보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음」과 「두려워하지 않음」의 원인이 되는 별도의 수번뇌가 있다는 것, 그것을 무괴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른 스승은 다르게 나눈다. 지은 허물에 대해 자기를 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면 무참, 남을 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면 무괴라는 것이다. 반론: 그러면 둘이 보는 쪽이 달라 한 찰나에 함께 일어날 수 없지 않은가. 답: 한때에 자기와 남을 따로 보며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없음이 자기를 볼 때 강하게 나타나면 무참, 남을 볼 때 강하게 나타나면 무괴라 할 뿐이다. 참 · 괴는 이를 뒤집으면 된다. 앞의 정의로는 공경 · 숭상이 있는 것이 참, 허물에서 두려움을 보는 것이 괴이고, 뒤의 정의로는 자기를 보아 부끄러워하면 참, 남을 보아 부끄러워하면 괴다.
다음은 애(愛)와 경(敬)이다. 애는 애락(愛樂)이니 그 바탕은 신(信)이다. 그러나 애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물든 애는 탐(貪)이니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은 것이고, 물들지 않은 애는 신이니 스승을 사랑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신과 애는 네 구로 나뉜다. 신이면서 애가 아닌 것은 고 · 집을 반연하는 신(괴로움과 그 원인을 믿되 사랑하지는 않는다), 애이면서 신이 아닌 것은 물든 애, 둘 다인 것은 멸 · 도를 반연하는 신, 둘 다 아닌 것은 나머지다. 경은 공경이니 그 바탕은 참(慚)이다. 마찬가지로 고 · 집을 반연하는 참은 경이 아니고, 멸 · 도를 반연하는 참은 참이면서 경이다.
그리고 「사람」을 반연하는 애 · 경은 네 구로 이렇게 그려진다.
有愛無敬,謂於妻子共住門人等。有敬無愛,謂於他師有德貴人等。有愛有敬,謂於自師父母伯叔等。無愛無敬,謂除前三相。
애는 있고 경은 없는 것은 아내와 자식, 함께 사는 제자 등에 대한 것이다. 경은 있고 애는 없는 것은 남의 스승, 덕 있는 이, 귀한 이 등에 대한 것이다. 애도 있고 경도 있는 것은 자기 스승, 부모, 백부 · 숙부 등에 대한 것이다. 애도 경도 없는 것은 앞의 셋을 뺀 것이다.
그러면 신과 참은 대선지법이니 무색계에도 있는데, 왜 애 · 경은 욕계 · 색계에만 있다고 하는가. 애 · 경에는 법을 반연하는 것과 사람(보특가라)을 반연하는 것이 있다. 법을 반연하는 애 · 경은 삼계에 다 있다. 게송이 말한 것은 사람을 반연하는 애 · 경이고, 무색계에는 몸이 없어 사람을 반연할 일이 없으므로 욕 · 색계에만 있다는 것이다.
심과 사는 한 마음에 함께 있을 수 있는가
尋伺心麁細,慢對他心舉,憍由染自法,心高無所顧。
심(尋) · 사(伺)는 마음의 거칢과 미세함이다. 만(慢)은 남에 대하여 마음이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고, 교(憍)는 제 법에 물들어 마음이 높아져 돌아보는 바가 없는 것이다.
심은 「마음의 거친 성질」, 사는 「마음의 미세한 성질」이다. 그런데 욕계와 초정려의 마음에는 심과 사가 함께 있다고 했다. 거칢과 미세함이 어떻게 한 마음에 함께 있는가. 이것은 앞에서 본 작의와 사(捨)의 문제보다 더 날카롭다. 작의와 사는 하는 일이 달랐지만, 거칢과 미세함은 같은 축 위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첫째 해석은 비유를 든다. 「찬물 위에 익힌 소(酥)를 띄우고, 위에서 뜨거운 햇빛이 비추면, 소는 물과 해 때문에 녹지도 굳지도 않는다(如冷水上浮以熟酥,上烈日光之所照觸,酥因水日非釋非凝)」. 마음도 심과 사 때문에 온전히 거칠지도 온전히 미세하지도 않으니, 둘이 한 마음에서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다. 장행은 이것을 곧바로 깨뜨린다. 그렇다면 심 · 사는 거칢과 미세함의 「원인」이지 거칢과 미세함 「자체」가 아니다. 물과 햇빛이 굳음과 녹음의 원인일 뿐 해의 바탕이 굳음이나 녹음이 아닌 것처럼. 또 거칢과 미세함은 서로 견주어 세워지는 상대적 성질이니, 위아래 지를 견주면 유정천(有頂)까지 거칢과 미세함이 있게 된다. 또 거칢과 미세함은 별도의 종류(體類)가 아니니 이것으로 심 · 사를 구별할 수 없다.
둘째 해석은 경을 끌어온다. 「반드시 심 · 사가 있어야 말이 있다」고 했으니 심 · 사는 말을 일으키는 작용(語言行)이고, 그 가운데 거친 것이 심, 미세한 것이 사라는 것이다. 한 마음 안에서 한 법은 거칠고 한 법은 미세한 것이 무슨 모순인가. 장행의 응답은 이렇다. 별도의 종류라면 모순이 없겠지만 별도의 종류가 아니니 모순이다. 한 종류 안에서 위와 아래가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다. 종류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말해 보라. 그러나 둘의 차이는 위아래로만 드러날 뿐 따로 말할 수 없고, 위아래로는 차이를 드러낼 수 없다. 한 종류마다 위아래가 다 있기 때문이다.
由是應知,尋伺二法定不可執一心相應。
이로 말미암아 알아야 한다. 심과 사의 두 법이 한 마음에 상응한다고 결코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경에서 「초정려는 다섯 지분을 갖춘다」고 하여 심과 사를 함께 든 것은 무엇인가. 장행은 「다섯 지분을 갖춘다는 말은 한 지(地)를 두고 한 말이지 한 찰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具五支言就一地說,非一剎那)」라고 답한다. 초정려라는 지에는 심도 사도 있지만, 한 찰나에 둘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천친의 결론은 유부의 정설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유부는 앞의 계산에서 보았듯이 욕계의 모든 마음에 심과 사가 「함께」 있다고 하여 선심 스물둘을 헤아렸다. 같은 권 안에서 천친은 그 스물둘의 계산을 서술한 뒤, 몇 쪽 뒤에 그 전제(심 · 사의 동시 상응)를 논파한다. 『구사론』이 「유부의 체계를 서술하면서 경량부의 눈으로 비판한다」는 말이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대목의 하나다. 『순정리론』은 당연히 이 결론을 반박한다.
만과 교의 구별은 짧다. 만(慢)은 「남에 대하여 마음이 스스로 높아지는 성질」이니, 자기와 남의 덕을 견주어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교(憍)는 「제 법에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 앞서서, 마음을 오만하게 하여 돌아보는 바가 없게 하는 성질」이다. 만은 비교가 있고 교는 비교가 없다. 다른 스승은 「술로 인해 기뻐 들뜨는 것을 취함이라 하듯, 탐으로 인해 기뻐 들뜨는 것을 교라 한다」고 했다.
심 · 의 · 식은 이름만 다른 하나 — 그리고 상응의 다섯 가지 같음
심소의 논의를 마무리하며 『구사론』은 경에서 마음을 부르는 여러 이름의 관계를 정리한다. 경은 같은 마음을 때로는 심(心), 때로는 의(意), 때로는 식(識)이라 부른다. 셋은 다른 것인가.
集起故名心,思量故名意,了別故名識。復有釋言:淨不淨界種種差別故名為心,即此為他作所依止故名為意,作能依止故名為識。故心、意、識三名所詮,義雖有異而體是一。
모아 일으키므로 심이라 하고, 헤아리므로 의라 하며, 분별해 알므로 식이라 한다. 다른 풀이로는,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은 계(界)로 갖가지로 다르므로 심이라 하고, 바로 이것이 다른 것의 의지처가 되므로 의라 하며, 의지하는 것이 되므로 식이라 한다. 그러므로 심 · 의 · 식 세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뜻은 다르지만 바탕은 하나다.
유부에게 심 · 의 · 식은 한 법의 세 이름이다. 핵심 개념 구식 페이지에서 본 대로, 뒤에 유식학은 이 셋을 각각 제8식 · 제7식 · 전육식에 배당하여 다른 법으로 나눈다. 『구사론』의 이 짧은 정의는 그 분화가 시작되기 전의 출발점이다. 특히 「다른 것의 의지처가 되므로 의」라는 둘째 풀이는, 뒤에 마음의 계열을 다루면서 「아라한의 마지막 마음도 의(意)라고 부를 수는 있다」는 논의로 다시 나타난다.
같은 방식으로 심 · 심소를 부르는 네 이름도 뜻은 다르지만 바탕은 하나다. 「의지처가 있는 것(有所依)」은 근에 의탁하기 때문이고, 「대상이 있는 것(有所緣)」은 대상을 붙들기 때문이며, 「행상이 있는 것(有行相)」은 대상의 종류에 따라 행상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상응하는 것(相應)」은 같게 화합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같은가.
有五義故,謂心心所五義平等故說相應,所依所緣行相時事皆平等故。事平等者,一相應中如心體一,諸心所法各各亦爾。
다섯 뜻이 있기 때문이니, 심과 심소가 다섯 뜻에서 평등하므로 상응이라 한다. 의지처 · 대상 · 행상 · 때 · 바탕이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바탕이 평등하다는 것은, 하나의 상응 안에서 심의 바탕이 하나이듯 심소들도 각각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의평등(五義平等)이다. 심과 심소는 ① 같은 근에 의지하고(所依), ② 같은 대상을 반연하며(所緣), ③ 같은 행상으로 붙들고(行相), ④ 같은 찰나에 일어나며(時), ⑤ 한 찰나의 마음 하나에 각 심소도 하나씩만 있다(事). 다섯째 조건은 중요하다. 한 찰나의 마음에 수(受)가 둘 있거나 상(想)이 둘 있을 수는 없다. 이 조건이 앞에서 본 「심과 사는 한 마음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논증과 「한때에 세 느낌이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는 논증의 바탕이다.
- ① 소의(所依) 같은 근에 의지예: 안식과 그 수 · 상은 같은 찰나의 안근에
- ② 소연(所緣) 같은 대상
- ③ 행상(行相) 같은 방식으로 붙듦
- ④ 시(時) 같은 찰나
- ⑤ 사(事) 한 마음에 각 심소도 하나씩
권4 전반부의 심소론은 세 겹으로 읽힌다. 겉으로는 유부의 표준 체계(46 심소, 품별 22 · 20 · 21 · 18 · 12)를 서술한다. 그 아래에서 천친은 「전하는 말로는」, 「알기 어렵다」, 심 · 사의 상응 부정으로 그 체계의 실체성에 거리를 둔다. 그리고 오의평등의 다섯째 조건(한 마음에 같은 심소는 하나)은 유부와 비판자가 함께 받아들이는 공통 기반으로 남는다.
본송
心不相應行,得非得同分,無想二定命,相名身等類。
심불상응행은 득 · 비득 · 동분, 무상과 두 정 · 명근, 상(相)과 명신 등의 무리다.
得謂獲成就,非得此相違,得非得唯於,自相續二滅。
득은 획득과 성취를 말하고, 비득은 이와 반대다. 득과 비득은 오직 자기 상속과 두 가지 멸에만 있다.
非得淨無記,去來世各三,三界不繫三,許聖道非得,說名異生性,得法易地捨。
비득은 오직 깨끗한(무부) 무기이고, 과거 · 미래의 법에 각각 세 가지가 있으며, 삼계 · 불계의 법에 각각 세 가지가 있다. 성도의 비득을 이생성이라 한다고 인정한다. 그 법을 얻을 때나 지(地)를 바꿀 때 버린다.
술어 풀이
- 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 범어 cittaviprayukta saṃskāra.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 색도 아니고 심 · 심소도 아니면서 행온에 속하는 유위법. 장행의 정의는 「이 법들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고, 색 등의 성질도 아니며, 행온에 속하므로 심불상응행이라 한다」이다.
- 得득
- 범어 prāpti. 어떤 법을 한 유정의 상속에 「속하게」 하는 힘. 두 가지가 있다 — 아직 얻지 못했거나 잃었다가 지금 얻는 것(獲), 얻은 뒤 잃지 않는 것(成就).
- 非得비득
- 범어 aprāpti. 득의 반대. 어떤 법이 한 유정의 상속에 속하지 않게 하는 힘. 성도(聖道)의 비득이 곧 이생성이다.
- 自相續자상속
- 자기의 상속, 곧 한 유정을 이루는 법들의 흐름. 득과 비득은 남의 상속이나 비정(非情)의 법에는 없다.
- 二滅두 가지 멸
-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 무위법 가운데 이 둘만 득 · 비득의 대상이 되고, 허공은 얻는 일이 없으므로 득도 비득도 없다.
- 異生性이생성
- 범어 pṛthagjanatva. 범부(異生)를 범부이게 하는 성질. 유부는 이것을 성도의 비득이라는 실체로 세우고, 경량부는 아직 성법이 생겨나지 않은 상속의 상태라고 한다.
- 種子종자
- 범어 bīja. 경량부가 득 대신 세운 개념. 「명색이 제 결과를 낳는 데 대해 갖는, 잇따라 가까워지는 공능」. 상속의 전변 · 차별로 설명된다.
- 相續轉變差別상속 · 전변 · 차별
- 범어 saṃtati-pariṇāma-viśeṣa. 종자가 결과를 낳는 과정의 세 마디. 상속은 삼세에 걸친 인과의 흐름, 전변은 그 흐름이 앞뒤로 달라짐, 차별은 곧바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공능의 상태.
- 得得득득
- 득의 득. 득도 유위법이므로 그것을 상속에 속하게 하는 또 하나의 득이 필요하다. 무한소급의 문제가 여기서 생긴다.
심불상응행이라는 범주
마음과 마음작용을 다룬 뒤, 『구사론』은 오위 가운데 넷째 무리로 넘어간다. 「심불상응행이란 어떤 것인가」. 게송은 득 · 비득 · 동분 · 무상 · 두 정(무상정 · 멸진정) · 명근 · 상(생 · 주 · 이 · 멸) · 명신 등(명신 · 구신 · 문신)을 든다. 합하면 열넷이다. 장행의 정의는 부정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으며, 색 등의 성질도 아니면서, 행온에 속하는 것.
이 범주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색은 감관으로 지각되고, 심 · 심소는 마음의 작용으로 체험된다. 그러나 불상응행은 어느 쪽으로도 직접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유부가 존재의 여러 사실 — 어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 같은 종류의 유정이 서로 닮았다는 것, 생명이 이어진다는 것, 모든 것이 생멸한다는 것, 말이 뜻을 전한다는 것 — 을 설명하기 위해 그 사실 뒤에 별도의 실체를 세운 결과다. 그래서 불상응행은 유부의 실재론이 가장 대담하게 드러나는 자리이자, 경량부의 비판이 가장 집중된 자리가 되었다. 『대비바사론』은 비유자(譬喻者)의 설을 이렇게 전한다.
謂或有執。諸有為相非實有體。如譬喻者彼作是說諸有為相是不相應行蘊所攝。不相應行蘊無有實體。故諸有為相非實有體。
어떤 이는 유위의 상이 실체가 없다고 고집한다. 비유자가 그러하니,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위의 상은 불상응행온에 속한다. 불상응행온에는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유위의 상은 실체가 없다.」
비유자, 곧 경량부의 선구들은 불상응행이라는 범주 전체를 실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구사론』은 이 범주의 법을 하나씩 다루면서, 매번 유부의 설을 먼저 세우고 경량부의 비판을 길게 붙인 뒤, 짧은 한마디로 유부의 자리에 돌아오는 방식을 되풀이한다. 그 첫째이자 가장 길고 중요한 것이 득과 비득이다.
- 득
- 비득
- 동분
- 무상과
- 무상정
- 멸진정
- 명근
- 생
- 주
- 이
- 멸
- 명신
- 구신
- 문신
득과 비득은 어디에 있는가
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직 얻지 못했거나 이미 잃었다가 지금 얻는 것, 둘은 얻은 뒤 잃지 않고 성취하고 있는 것(一者未得已失今獲、二者得已不失成就)」. 앞의 것을 획(獲), 뒤의 것을 성취(成就)라 한다. 비득은 그 반대다.
득과 비득은 어떤 법에 있는가. 유위법은 「자기 상속」에 속한 것에만 득 · 비득이 있다. 남의 상속의 법을 내가 성취할 수 없고, 비정(非情)의 법, 곧 유정에 속하지 않는 바깥 사물도 성취할 수 없다. 무위법 가운데서는 택멸과 비택멸에만 득 · 비득이 있다. 여기서 장행은 대법의 흥미로운 말을 인용한다. 「누가 무루법을 성취하는가. 모든 유정이다. 다만 첫 찰나의 구박(具縛) 성자와 그 밖의 모든 구박 범부를 뺀 나머지 유정은 모두 택멸을 성취한다」. 그리고 비택멸은 「성취하지 않는 유정이 없다」. 비택멸이란 조건이 모자라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된 법의 멸이니, 어떤 유정이든 조건이 모자라 생겨나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모두 비택멸을 성취한다. 허공은 아무도 성취하지 않으므로 득도 비득도 없다.
이 범위 규정은 득이 무엇을 위한 개념인지를 보여 준다. 득은 존재 일반의 속성이 아니라, 「한 유정에게 무엇이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원리다. 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실재한다는 것이 유부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탐욕이나 미래의 지혜가 지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법들은 모두 각자의 자성으로 존재하는데, 어떤 법은 이 사람의 것이고 어떤 법은 저 사람의 것이라는 귀속을 무엇이 정하는가. 득은 바로 이 귀속의 원리다.
무엇으로 득이 있음을 아는가 — 경증과 경량부의 비판
「무엇으로 득이라는 별도의 법이 있음을 아는가(何緣知有別物名得)」. 유부의 첫째 근거는 경이다. 「성자는 저 열 가지 무학법을 생하고 얻고 성취하므로 다섯 지분을 이미 끊었다」. 경이 「성취한다」는 말을 쓰니 성취라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경량부는 같은 방식으로 되묻는다. 경에는 「전륜왕이 칠보를 성취한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비정의 법(윤보 · 주보)과 남의 상속(여보 · 신하)도 성취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경에서 「성취」란 왕이 칠보에 대해 자재한 힘을 가져 뜻대로 쓸 수 있다는 뜻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경의 성취도 그런 말법일 수 있지 않은가. 무엇으로 별도의 법을 아는가.
유부가 「별도의 법을 인정하는 것이 무슨 이치에 어긋나는가」라고 되묻자, 경량부는 원리적 비판을 내놓는다.
如是非理,謂所執得無體可知,如色聲等或貪瞋等;無用可知,如眼耳等,故無容有別物名得。執有別物,是為非理。
이와 같이 이치에 어긋나니, 고집하는 득은 색 · 성 등이나 탐 · 진 등처럼 알 수 있는 바탕이 없고, 눈 · 귀 등처럼 알 수 있는 작용도 없다. 그러므로 득이라는 별도의 법이 있을 수 없다. 별도의 법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 이것이 이치에 어긋난다.
이것은 경량부의 존재 판정 기준을 드러낸다. 어떤 법이 실재한다고 말하려면, 그것은 직접 지각되는 바탕(색 · 성처럼 감관으로, 탐 · 진처럼 마음으로)이 있거나, 직접 지각되지는 않더라도 그 작용으로 추론되어야 한다(눈 · 귀는 보이지 않지만 보고 듣는 작용으로 그 존재를 안다). 득은 어느 쪽도 아니다.
유부는 득에도 작용이 있다고 답한다. 득은 얻어지는 법의 「생인(生因)」, 곧 그 법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량부는 이것을 네 겹으로 깨뜨린다. 첫째, 그렇다면 무위법(택멸 · 비택멸)은 생겨나지 않으니 득이 있을 수 없어야 한다. 둘째, 아직 얻지 못했거나 이미 버린 법, 계지를 바꾸거나 이염하여 지금 득이 없는 법은 무엇에서 생기는가. 셋째, 함께 생기는 득(俱生得)이 생인이라면, 생상(生相)과 생생(生生)은 무엇을 하는가. 넷째, 비정의 법은 득이 없으니 결코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섯째, 구박의 범부에게 하품 · 중품 · 상품 번뇌가 일어나는 차이는 무엇으로 설명하는가. 득은 다르지 않은데. 만약 다른 원인으로 차이가 생긴다면, 법은 그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고 득은 무슨 소용인가.
「차별을 세우는 원인」 — 유부의 후퇴와 경량부의 종자
이 비판 앞에서 유부는 한 걸음 물러선다. 「누가 득이 법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라 했는가(誰言此得作法生因)」. 그러면 득의 작용은 무엇인가. 「차별을 세우는 원인이다(謂於差別為建立因)」. 만약 득이 없다면, 범부와 성자가 똑같이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고 있을 때 범부와 성자를 구별할 근거가 없다. 지금 이 찰나에 둘의 마음은 같다. 그런데도 한 사람은 성자이고 한 사람은 범부다. 그것은 성자에게 무루법의 득이 있고 범부에게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량부는 묻는다. 번뇌를 이미 끊었느냐 끊지 않았느냐로 구별하면 되지 않는가. 유부는 되묻는다. 득이 없다면 「번뇌를 끊었다 · 끊지 않았다」를 무엇으로 말하는가. 득이 있다고 인정하면 번뇌의 득을 떠났느냐 떠나지 않았느냐로 끊음과 끊지 않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경량부는 결정적인 대안을 내놓는다.
此由所依有差別故,煩惱已斷未斷義成。謂諸聖者見修道力,令所依身轉變異本,於彼二道所斷惑中無復功能令其現起。猶如種子火所焚燒,轉變異前無能生用。如是聖者所依身中無生惑能名煩惱斷。
이것은 의지처에 차별이 있으므로 번뇌를 이미 끊었느냐 끊지 않았느냐의 뜻이 성립한다. 성자들은 견도 · 수도의 힘으로 의지처인 몸을 본래와 달리 바꾸어, 그 두 도에서 끊을 번뇌에 대해 다시는 그것을 나타나게 할 공능이 없다. 마치 종자가 불에 타면 앞과 달리 바뀌어 싹을 낼 작용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성자의 의지처인 몸 안에 번뇌를 낳을 능력이 없는 것을 번뇌가 끊어졌다고 한다.
득이라는 별도의 법을 세울 필요가 없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의지처(所依)」, 곧 몸과 마음의 흐름 자체가 바뀌었느냐에 있다. 불에 탄 씨앗이 겉보기에는 씨앗이지만 싹을 낼 수 없듯이, 성자의 몸은 겉보기에 범부와 같지만 번뇌를 낳을 능력이 이미 타 버렸다. 세간도(유루의 선정)로 번뇌를 누른 경우는 「의지처 안의 번뇌의 종자를 손상한 것」을 끊음이라 한다. 그리고 이 의지처 안에 종자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성취」, 손상된 것을 「불성취」라 부른다. 「이 두 가지는 다만 가명이요 실체가 아니다(如是二種但假非實)」.
선법의 경우는 두 갈래로 정리된다. 노력 없이 얻는 생득선(生得善)은 의지처 안의 종자가 손상되지 않았으면 성취, 손상되었으면 불성취다. 선근을 끊는다는 것은 사견의 힘이 의지처 안의 선근 종자를 손상한 것이지, 선근 종자가 「완전히 해쳐진 것(畢竟被害)」이 아니다. 노력으로 얻는 가행득선(加行得善)은 그 법이 한 번 일어나 그것을 다시 낳을 힘이 자재하고 손상되지 않았으면 성취다. 결론은 이것이다. 「의지처 안에 오직 종자가 뽑히지도 손상되지도 않고 자라나 자재한 것이 있을 뿐이니, 이 자리에 성취라는 이름을 세운다. 별도의 법은 없다(故所依中唯有種子未拔未損增長自在,於如是位立成就名,無有別物)」.

종자란 무엇인가 — 상속 · 전변 · 차별
여기서 『구사론』은 「종자」라는 말에 정의를 준다. 아비달마 문헌에서 종자 개념이 이렇게 명시적으로 정의된 가장 이른 자리의 하나다.
此中何法名為種子?謂名與色於生自果所有展轉隣近功能,此由相續轉變差別。何名轉變?謂相續中前後異性。何名相續?謂因果性三世諸行。何名差別?謂有無間生果功能。
여기서 어떤 법을 종자라 하는가. 명(名)과 색(色)이 제 결과를 낳는 데 대해 갖는, 잇따라 가까워지는 공능을 말한다. 이것은 상속 · 전변 · 차별에 말미암는다. 무엇을 전변이라 하는가. 상속 안에서 앞뒤가 다른 성질이다. 무엇을 상속이라 하는가. 인과의 성질을 가진 삼세의 행들이다. 무엇을 차별이라 하는가. 바로 다음에 결과를 낳는 공능이 있는 것이다.
종자는 별도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명색, 곧 오온 자체가 가진 「공능」이다. 오온의 흐름(상속)은 찰나마다 앞뒤가 다르게 바뀌어 가고(전변), 그 바뀜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곧바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특별한 상태(차별)가 된다. 씨앗이 싹 · 줄기 · 잎을 거쳐 열매를 맺듯이, 오온의 흐름이 바뀌어 가는 과정 자체가 결과를 품고 있다. 「잇따라 가까워진다(展轉隣近)」는 말은, 종자가 결과를 직접 낳는 것이 아니라 흐름의 찰나들이 한 단계씩 결과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이 정의는 경량부가 유부의 삼세실유를 버리고도 인과의 연속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다. 유부는 과거의 업이 과거에 「실재」하므로 미래에 과보를 낼 수 있다고 했다(핵심 개념 업 페이지가 다룬 쟁점). 경량부는 과거는 이미 없고 현재만 있다고 보므로, 과거의 업이 남긴 영향은 현재의 흐름 속에 「종자」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종자를 품은 흐름이 끊어지는 무심정 같은 경우에 종자가 어디에 머무는가라는 물음이, 핵심 개념 구식 페이지에서 본 대로 유식학의 아뢰야식으로 이어진다. 『구사론』의 득 논쟁은 그 긴 사상사의 첫 마디다.
- 실체로서의 득이 법을 상속에 묶는다
- 성자: 무루법의 득이 있음 · 범부: 성도의 비득(= 이생성)
- 번뇌를 끊음 = 번뇌의 득이 끊어지고 비득이 생김
- 「謂於差別為建立因」차별을 세우는 원인
- 실체는 없고 의지처(몸 · 마음의 흐름)가 바뀐다
- 성자: 번뇌를 낳을 공능이 타 버린 의지처 「猶如種子火所焚燒」
- 범부: 종자가 손상되지 않은 의지처
- 성취 · 불성취 = 「但假非實」
- 「謂名與色於生自果所有展轉隣近功能」명과 색이 제 결과를 낳는 공능
- 상속(삼세의 인과의 흐름)
- 전변(앞뒤가 달라짐)
- 차별(곧바로 결과를 낼 수 있음)
장행은 경량부의 입장에서 한 가지 경설도 해명한다. 경에 「탐을 성취하면 사념주를 닦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성취」는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에 탐닉하여 버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탐욕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사념주를 닦을 수 없다는 것이지, 성취라는 별도의 실체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보광은 여기서 뒤에 유식학이 정리한 세 가지 성취 — 종자 성취 · 자재 성취 · 현행 성취 — 를 들어, 경량부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주석한다.
「두 길이 모두 좋은 설이다」
이렇게 긴 경량부의 논증 뒤에, 장행은 단 두 문장으로 유부의 입장을 놓는다. 「비바사사는 이 둘(득과 비득)이 모두 별도의 법으로서 실체요 가명이 아니라고 한다(毘婆沙師說:此二種皆有別物實而非假)」. 그리고 천친의 판정이 이어진다.
如是二途皆為善說。所以者何?不違理故、我所宗故。
이와 같은 두 길이 모두 좋은 설이다. 왜 그런가. (경량부의 설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고, (유부의 설은) 우리가 종으로 삼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 판정은 『구사론』 전체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의 하나다. 보광은 이렇게 풀이한다. 「이치에 두 가지 옳음은 없고 반드시 하나는 그르다. 어떻게 둘 다 좋은 설이라 하는가」라는 물음에, 「경량부가 가명이라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고, 설일체유부가 실체라 하는 것은 내가 종으로 삼는 바이기 때문이다. 논주의 뜻이 경량부 편에 있으므로 이렇게 풀었다」. 경량부의 설에는 「이치」라는 근거가, 유부의 설에는 「종의」라는 근거가 주어졌다. 이치와 소속이 갈린 것이다. 천친은 유부의 논서를 쓰는 사람으로서 유부의 자리를 지키지만, 이치의 판단은 경량부에 준다.
『구사론』의 마지막 게송에서 천친은 「가습미라의 의리로 이루어진 것에 나는 대체로 의지하여 대법을 풀었으니, 조금 깎아 헤아린 것은 나의 허물이다」라고 한다(『구사론본송』, T29, 324c). 「두 길이 모두 좋은 설」이라는 판정은 이 「조금 깎아 헤아린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예다. 이 자리에서의 판정이 천친의 진의를 숨긴 것인지, 아니면 두 체계를 함께 보여 주려는 교육적 의도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해석이 갈린다.
득의 여러 분별과 「이생성」 논쟁
자성을 밝힌 뒤 『구사론』은 득의 여러 분별로 넘어간다. 삼세의 법에는 각각 세 가지 득이 있다. 과거의 법에는 과거 · 미래 · 현재의 득이 있다. 선 · 불선 · 무기의 법의 득은 각각 선 · 불선 · 무기다. 삼계에 매인 법의 득은 제 계에 매이고, 매이지 않은 무루법의 득은 네 가지(삼계의 득과 무루의 득)에 통한다. 예컨대 비택멸의 득은 삼계에 매이고, 택멸의 득은 색 · 무색계와 무루에, 도제의 득은 오직 무루에 속한다.
득에는 법보다 앞서는 것(前得), 법과 함께하는 것(俱得), 법보다 뒤에 오는 것(後得)이 있다. 그러나 「무부무기의 득은 오직 함께 일어난다(無記得俱起)」. 세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무부무기 법의 득은 과거에만, 현재의 것은 현재에만 있다. 예외는 천안 · 천이통과 변화심으로, 이것들은 세력이 강하고 가행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앞 · 뒤 · 함께의 득이 다 있다. 극히 숙련된 공교처 · 위의로도 그렇다고 인정한다. 『순정리론』은 이 예외를 「모든 부처님과 마승 비구, 그리고 위의를 잘 익힌 이」와 「비수갈마 천신과 공교를 잘 익힌 이」라는 구체적인 예로 보충한다.
비득은 모두 무부무기다. 현재의 법에는 현재의 비득이 없고, 과거 · 미래의 비득만 있다. 그리고 「무루인 비득은 결코 없다(定無非得是無漏者)」. 그 근거가 이생성이다. 본론은 「이생성이란 무엇인가. 성법을 얻지 못한 것(不獲聖法)이다」라고 했고, 「얻지 못함」은 비득의 다른 이름이다. 이생성이 무루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비득은 무루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성법을 얻지 못한 것이 이생성인가. 첫째 설은 「모든 성법을 얻지 못한 것」이라 한다. 반론: 그렇다면 부처님도 성문 · 독각 종성의 성법은 성취하지 않으니 범부여야 하는가. 답: 「얻지 못함」이라는 말은 「얻음을 떠난」 상태를 가리킨다. 본론은 「순전히(純)」라는 말을 넣어야 했겠지만, 「이 무리는 물을 먹고 바람을 먹는다」고 할 때 「순전히」가 생략되어도 뜻이 통하듯 생략한 것이다. 둘째 설은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그 함께 생기는 법을 얻지 못한 것」이라 한다. 고법지인은 견도의 첫 찰나이고, 이것을 얻으면 성자가 된다. 반론: 도류지에 이르면 고법지인을 버리니 다시 범부가 되어야 하는가. 답: 그 비득은 이미 영원히 해쳐졌으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다시 반론: 고법지인은 삼승에 통하는데, 어느 승의 고법지인인가. 결국 「모든 것을 얻지 못함」이라 해야 하니 첫째 설의 난점으로 돌아간다.
이 순환 앞에서 천친은 말한다.
如經部師,所說為善。經部所說其義云何?謂曾未生聖法相續分位差別名異生性。
경량부 스승들이 말한 것이 좋다. 경량부가 말한 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성법이 생겨난 적이 없는 상속의 분위(分位)의 차별을 이생성이라 한다.
여기서는 「두 길이 모두 좋다」는 유보조차 없다. 보광은 이 문장을 짧게 「논주가 경량부의 설을 인가한 것(論主印經部說)」이라 주석한다(『구사론기』 권4, T41, 91c). 이생성은 실체가 아니라, 성법이 아직 한 번도 생겨나지 않은 흐름의 한 「상태(分位)」다. 『순정리론』은 이 대목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경량부의 정의대로라면 이생성은 「눈 · 귀 등의 상속의 분위」가 되는데, 한 찰나의 눈 등은 이생성이 아니고 상속이어야 이생성이라면, 한 찰나는 상속이 아니므로 이생성은 실체가 없게 된다. 또 경에 「수신행자는 정성이생에 들어 이생지(異生地)를 넘어선다」고 했는데, 견도에 들어도 눈 · 귀 등은 그대로 있으니 무엇을 넘어선다는 것인가. 이생성이 별도의 법이어야 「넘어섬(超越)」이 성립한다는 것이 중현의 논지다.
득의 득 — 무한소급과 「허공도 담지 못할」 득
비득은 언제 버려지는가. 그 법을 얻을 때나 지(地)를 바꿀 때다. 성도의 비득(이생성)은 성도를 얻거나 지를 바꿀 때 버린다. 그런데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득의 득이 끊어지고 비득의 비득이 생기는 것(非得得斷,非得非得生)」이다. 여기서 문제가 드러난다. 득과 비득도 유위법이므로, 그것에도 또 득과 비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무한소급(無窮過)이 아닌가.
유부의 답은 「득이 서로를 이루어 준다(許得展轉更相成故)」는 것이다.
以法生時并其自體三法俱起,第一本法、第二法得、第三得得。謂相續中法得起故成就本法及與得得,得得起故成就法得,是故此中無無窮過。
법이 생길 때 그 자체와 함께 세 법이 함께 일어나니, 첫째는 본법, 둘째는 법의 득, 셋째는 득의 득이다. 상속 안에서 법의 득이 일어나므로 본법과 득득을 성취하고, 득득이 일어나므로 법의 득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한의 허물이 없다.
법의 득(得)은 본법과 득득을 함께 붙들고, 득득은 다시 법의 득을 붙든다. 둘이 서로를 붙들어 고리가 닫히므로 셋째 득이 필요 없다. 이것은 뒤에 사상의 「본상 · 수상」에서 쓰이는 것과 같은 해법이다.
그러나 장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해법이 낳는 결과를 끝까지 계산해 보인다. 선법이나 염오법이 처음 일어나는 찰나에는 본법 · 법득 · 득득 세 법이 함께 일어난다. 둘째 찰나에는 앞 찰나의 세 법 각각에 대해 법득과 득득이 일어나므로 여섯 법이 함께 일어난다. 셋째 찰나에는 첫째와 둘째 찰나에 생긴 아홉 법에 대해 아홉 법득과 아홉 득득, 곧 열여덟 법이 일어난다. 득은 찰나마다 늘어난다. 과거 · 미래의 모든 번뇌 · 수번뇌 · 생득선이 찰나마다 이렇게 득을 낳으므로, 한 유정의 생사의 상속에서 찰나마다 끝없는 득이 일어나고, 모든 유정에게 그러하다.
如是諸得極多集會,無對礙故互相容受。若不爾者,一有情得虛空不容,況第二等。
이와 같은 모든 득이 지극히 많이 모이지만, 대애(對礙)가 없으므로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다면 한 유정의 득만으로도 허공이 다 담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둘째 유정 이하이랴.
이 문장으로 권4는 끝난다. 겉으로는 유부의 체계를 끝까지 서술한 것이다. 득은 색이 아니어서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므로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 유정의 득만으로도 허공이 담지 못할 것이라는 표현은, 득을 실체로 세우는 체계가 어디까지 부풀어 오르는지를 독자 앞에 그대로 펼쳐 보인다. 천친은 비판의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계산 자체가 비판이 된다.
중현의 재반박 — 「득은 잃지 않음의 원인이요 앎의 표지」
『순정리론』 권12는 『구사론』의 이 대목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반박한다. 중현의 논지는 세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득에는 분명한 작용이 있다. 경량부는 득이 「알 수 있는 작용이 없다」고 했지만, 중현은 이렇게 답한다.
由所許得是已得法,不失因故。又是知此繫屬於彼,智幖幟故。
인정하는 득은 이미 얻은 법을 잃지 않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저것에 매여 속한다는 것을 아는 앎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득은 법을 생기게 하는 원인(생인)이 아니라, 이미 얻은 법이 그 유정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원인(不失因)이다. 그리고 「이 법은 이 사람의 것」이라는 앎이 성립하는 근거(智幖幟)다. 중현은 「이보다 더 큰 작용이 무엇이 있기에 이것을 없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둘째, 경량부의 종자는 이치가 서지 않는다. 중현은 종자가 오온의 「총체」인지 「개별」인지를 묻는다. 총체라면 종자는 가명인데, 가명이 실재하는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개별이라면 무기의 색의 종자가 어떻게 선 · 불선의 법을 낳는가. 경량부 쪽에서는 선한 마음 안에 불선이 끌어 놓은 공능이 있다고 답하는데, 중현은 이를 이렇게 몰아붙인다. 그 공능이 마음과 별개의 바탕이 아니라면, 선한 마음이 곧 불선의 종자라는 말이 된다. 「마음 있는 자라면 누가 따뜻함과 불이 별개의 바탕이 없다고 하면서 따뜻함만 태우고 불은 태우지 못한다고 하겠는가(誰有心者執煖與火無有別體,而復執言唯煖能燒、火不能燒)」(『순정리론』 권12, T29, 397c). 나아가 무루의 마음 안에도 번뇌의 종자를 둔다면 무루의 마음이 번뇌를 낳는 원인이 되고, 물러나는 아라한의 무학심 안에도 삼계 번뇌의 종자가 있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이다.
셋째, 세간도로 번뇌를 「끊는다」는 경량부의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경량부는 성자의 번뇌 끊음을 불에 탄 씨앗에, 세간도의 번뇌 끊음을 「종자를 손상한 것」에 비유했다. 중현은 묻는다. 무루도로 끊는 것과 세간도로 끊는 것이 둘 다 「불에 탄 씨앗」이라면 무엇이 다른가. 세간도로 누른 번뇌는 뒤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씨앗이 손상되었다면 싹이 나지 않아야 하고, 싹이 난다면 손상된 것이 아니다. 손상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끊었다고 하는가. 게다가 「한 마음 안에 끊는 것과 끊기는 것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又一心中,能斷所斷理不俱有)」(같은 곳, 398b).
그리고 중현은 이 논쟁의 배경을 이렇게 진단한다. 대법의 논사들이 의논하는 자리마다 비유자들이 종자설을 끌어들여 바른 뜻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어떤 스승들은 이 종자에 갖가지 다른 이름을 붙인다.
或名隨界、或名熏習、或名功能、或名不失、或名增長。
혹은 수계(隨界)라 하고, 혹은 훈습(熏習)이라 하고, 혹은 공능(功能)이라 하고, 혹은 불실(不失)이라 하고, 혹은 증장(增長)이라 한다.
이 목록은 사상사적으로 귀중하다. 중현의 시대에 이미 「종자」에 해당하는 개념이 여러 계통에서 여러 이름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수계는 상좌 슈리라타의 용어로 알려져 있고, 훈습은 뒤에 유식학의 핵심 술어가 되며, 불실은 정량부 계통의 「불실법(avipraṇāśa)」을 떠올리게 한다. 득과 비득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업과 번뇌의 영향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둘러싼 부파 전체의 논쟁의 한 단면이었다. 중현은 「그러므로 인정하는 득은 바탕과 작용이 지극히 성립한다(故所許得,體用極成)」고 맺는다.
득 논쟁의 핵심은 「귀속」의 문제다. 유부는 법이 삼세에 실재하므로 「누구의 것인가」를 정하는 별도의 원리(득)가 필요했다. 경량부는 현재의 흐름만 실재하므로 귀속은 흐름 자체의 상태(종자의 유무 · 손상)로 충분했다. 천친은 이치의 판정을 경량부에 주었고, 중현은 득이 「잃지 않음의 원인이요 앎의 표지」라는 작용을 들어 반박했다. 그리고 종자의 정의 — 명색의 공능, 상속 · 전변 · 차별 — 는 이 논쟁에서 처음으로 또렷한 모습을 얻어 유식학으로 넘어간다.
본송
滅盡定亦然,為靜住有頂,善二受不定,聖由加行得,成佛得非前,三十四念故。
멸진정도 그러하다. 고요히 머물기 위한 것이고 유정(有頂)에 있으며, 선이고, 두 가지 받음과 정해지지 않은 받음이 있다. 성자가 가행으로 얻으며, 부처는 성불할 때 얻고 그 전에 얻지 않으니, 서른네 찰나이기 때문이다.
命根體即壽,能持煖及識。
명근의 바탕은 곧 수명이니, 따뜻함과 식을 붙든다.
此有生生等,於八一有能。
이것(본상)에는 생생 등이 있으니, (본상은) 여덟에, (수상은) 하나에 작용이 있다.
술어 풀이
- 眾同分중동분
- 범어 nikāyasabhāga. 유정들이 서로 같은 종류가 되게 하는 실체. 무차별(모든 유정에 공통)과 유차별(계 · 지 · 취 · 생 · 종성 · 남녀 · 비구 등)이 있고, 온 · 처 · 계에 따른 법동분도 있다.
- 無想무상(과)
- 범어 āsaṃjñika. 무상유정천에 태어난 이의 마음 · 심소를 소멸시키는 법. 무상정의 이숙과다.
- 無想定 · 滅盡定무상정 · 멸진정
- 범어 asaṃjñisamāpatti · nirodhasamāpatti. 마음 · 심소를 소멸시키는 두 선정. 불상응행으로서의 정의는 「마음 · 심소를 멸하게 하는 별도의 법」이다.
- 止息想作意지식상작의
- 「그치고 쉰다는 생각」을 앞세운 작의. 멸진정의 가행이다. 무상정은 「벗어난다는 생각(出離想)」을 앞세운다.
- 命根 · 壽명근 · 수
- 범어 jīvitendriya · āyus. 『구사론』은 「명근의 바탕은 곧 수명이다」라고 하여 둘을 같은 것으로 정의한다. 수명은 따뜻함(煖, ūṣman)과 식(識)을 붙드는 법이다.
- 本相 · 隨相본상 · 수상
- 생 · 주 · 이 · 멸의 네 상이 본상이고, 본상을 생 · 주 · 이 · 멸하게 하는 생생 · 주주 · 이이 · 멸멸이 수상이다.
- 名身 · 句身 · 文身명신 · 구신 · 문신
- 범어 nāmakāya · padakāya · vyañjanakāya. 낱말(名, 개념을 짓는 것) · 문장(句, 뜻을 끝까지 드러내는 것) · 음절(文, 글자)의 모임. 「신(身)」은 모임이라는 뜻이다. 유부는 이것을 음성과 다른 별도의 실체로 세운다.
동분 — 「같은 종류」라는 앎은 무엇에서 오는가
同分有情等。
동분은 유정들이 같아지게 하는 것이다.
게송은 다섯 자뿐이다. 장행은 이렇게 정의한다. 「별도의 실체가 있어 동분이라 하니, 모든 유정이 서로 같은 종류가 되는 것이다. 본론은 이것을 중동분이라 한다」. 동분에는 차별 없는 것과 차별 있는 것이 있다. 차별 없는 것은 모든 유정에게 똑같이 있는 「유정 동분」이다. 차별 있는 것은 계 · 지 · 취 · 생 · 종성 · 남녀 · 근사 · 비구 · 유학 · 무학 등에 따른 동분으로, 한 무리의 유정에게 같게 있다. 또 온 · 처 · 계에 따른 「법 동분」도 있다.
왜 실체가 필요한가. 「실체가 없다면, 서로 다른 유정들 사이에서 『유정이다, 유정이다』라는 차별 없는 앎과 이름 붙임이 있을 수 없다(若無實物無差別相名同分者,展轉差別諸有情中,有情有情等無差別,覺及施設不應得有)」. 사람과 사람은 생김새도 성질도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모두 「사람」이라 부르고 같은 종류로 안다. 그 같음의 앎에는 대응하는 실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분의 득과 버림은 네 구로 정리된다. 죽고 태어나면서 동분을 버리지도 얻지도 않는 경우는 같은 취(趣)에서 죽어 같은 취에 태어나는 것이다. 죽고 태어나지 않으면서 버리고 얻는 경우는 정성이생에 들어 이생 동분을 버리고 성자 동분을 얻는 것이다. 버리고 얻으며 죽고 태어나는 경우는 다른 취에 태어나는 것이고, 나머지가 넷째 구다.
경량부의 비판은 다섯 갈래다. 첫째, 이생 동분이 별도의 실체라면 이생성은 왜 따로 세우는가. 사람의 동분 말고 「사람의 성질」을 따로 세우지는 않지 않는가. 둘째, 동분은 색이 아니어서 보이지 않고, 별다른 작용도 없어 지혜로 알 수도 없다. 세상 사람들은 동분을 모르면서도 유정을 같은 종류로 안다. 실체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셋째, 왜 비정(非情)의 동분은 인정하지 않는가. 곡식 · 보리 · 콩, 금 · 쇠, 암라 · 바나사 열매도 제 종류끼리 서로 닮았다. 넷째, 동분들도 서로 다른데 그 동분들 위에 또 동분이 있지 않으면서 어떻게 「동분이다」라는 같은 앎이 생기는가. 다섯째, 결정적으로 이것은 승론(勝論, Vaiśeṣika)의 주장을 드러내 이루어 주는 것이 된다.
又應顯成勝論所執,彼宗執有總同句義,於一切法總同言智由此發生。彼復執有同異句義,於異品類同異言智由此發生。
또 승론이 고집하는 것을 드러내 이루어 주게 된다. 그 종은 총동구의(總同句義)가 있다고 고집하여, 모든 법에 대한 「같다」는 말과 앎이 이로부터 생긴다고 한다. 또 동이구의(同異句義)가 있다고 고집하여, 다른 무리에 대한 「같다 · 다르다」는 말과 앎이 이로부터 생긴다고 한다.
승론의 여섯 범주(句義) 가운데 「같음(sāmānya)」과 「같음 · 다름(viśeṣa)」은 사물들의 공통성을 별도의 실재로 세운 것이다. 유부의 동분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비바사사는 「저들은 하나의 실체가 여러 것에 두루 있다고 하므로 우리와 다르다」고 답하고, 경에 「다시 여기 와서 사람의 동분을 얻으면」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경량부는 경에 그 말이 있어도 별도의 실체라고는 하지 않았다며, 이런 종류의 행들이 생길 때 그 위에 「사람의 동분」이라는 이름을 임시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곡식 · 보리 · 콩의 동분처럼. 그리고 장행은 맺는다. 「이것은 좋은 설이 아니다. 우리 종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此非善說,違我宗故)」.
『순정리론』 권12는 왜 동분이 유정에만 있고 초목에는 없는가를 이렇게 답한다. 초목에는 서로 닮은 업용 · 욕구가 없고, 초목은 유정을 말미암아서만 생기며, 앞의 업과 지금의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나무 · 진흙 · 칠로 만든 조각상과 그 실물은 모양이 닮았지만 실물만을 「실(實)」이라 부르니, 닮았다는 것만으로 같은 종류라 하지 않는다는 점이 동분이 별도의 실체라는 증거라 한다(T29, 400a~b). 「같음」의 실재성 문제는 인도 철학 전체의 보편 논쟁과 이어진다.
무심의 두 정 — 불상응행으로서의 정의와 여섯 가지 다름
무상정 · 멸진정에서 여섯 식이 멈추고, 멈춘 마음이 무엇에서 다시 일어나는가 하는 물음은 핵심 개념 구식 페이지가 다루었다. 여기서는 근품이 이 두 정을 「불상응행」으로 정의하는 방식과, 두 정을 가르는 기준에 집중한다.
근품의 정의는 일관된다. 무상(과)은 「무상유정천에 태어난 이에게 마음 · 심소를 멸하게 하는 법이 있으니, 이를 무상이라 한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법으로, 미래의 마음 · 심소를 막아 잠시 일어나지 않게 하니, 강물을 막는 둑과 같다(能遮未來心心所法令暫不起,如堰江河)」. 무상정도, 멸진정도 「마음 · 심소를 멸하게 하는 별도의 법」이다. 핵심은 「별도의 법」이라는 말이다. 유부에게 무심의 상태는 마음이 그냥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을 막는 어떤 실체가 그 사람의 상속에 있는 상태다. 마음이 없는데 무엇이 그 사람을 「정에 든 사람」으로 만드는가. 마음을 막고 있는 불상응행의 실체가 그 근거가 된다.
무상과는 무상정의 이숙이다. 무상유정천은 색계 제4정려의 광과천 가운데 높은 곳에 있다(중간정려가 초정려 안에 있듯이). 무상천의 유정에게도 태어날 때와 죽을 때는 생각이 있다. 「무상」이라 한 것은 그 사이 긴 시간 동안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잔 뒤 깨어나듯 다시 생각을 일으켜 그곳에서 죽고, 죽은 뒤에는 반드시 욕계에 태어난다. 허공에 쏜 화살이 힘이 다하면 떨어지듯이(如箭射空力盡便墮)」.
두 정의 차이는 근품이 직접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땅이 다르고(제4정려 · 유정), 가행이 다르고(출리상 · 지식상 작의), 상속이 다르고(범부 · 성자), 이숙이 다르고(무상천 · 유정의 이숙), 순수(順受)가 다르고(순생수 · 순생 · 순후 · 부정수), 처음 일어나는 곳이 다르다(욕 · 색 두 계 · 인간 가운데)」(권5, T29, 25c). 그 가운데 몇 가지가 논증을 담고 있다.
무상정은 범부만 얻는다. 무상을 참된 해탈이라 고집해 출리의 생각으로 닦기 때문이다. 성자는 이 정을 「깊은 구덩이를 보듯(如見深坑)」 여겨 들어가기를 즐기지 않는다. 유루를 참된 해탈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을 얻은 이는 반드시 무상천에 태어나므로 정성이생에 들 수 없다. 멸진정은 성자만 얻는다. 범부는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 정은 성도의 힘으로만 일어나며, 「현법열반」이라는 승해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멸진정은 언제 얻는가 — 부처의 서른네 찰나
멸진정은 가행으로 얻는다. 그런데 부처도 가행으로 얻는가. 『구사론』은 아니라고 한다. 「부처는 진지(盡智)를 얻을 때 얻으니, 부처의 공덕은 하나도 가행으로 얻은 것이 없다(佛無一德由加行得)」. 잠깐 바라는 마음만 일으켜도 모든 원만한 공덕이 뜻대로 일어나므로, 부처의 공덕은 모두 이염(離染)으로 얻은 것이다. 그러면 부처는 멸진정에 든 적이 없는데 어떻게 진지를 얻을 때 「구분해탈」(혜해탈과 정해탈을 함께 갖춤)을 이루는가. 멸진정에 자재하게 들 수 있는 능력을 얻었으므로, 이미 들어 본 것과 같이 구분해탈이 된다.
여기서 부파 사이의 논쟁이 소개된다. 서방의 스승들(西方師)은 보살이 유학위에서 먼저 멸진정을 일으킨 뒤 보리를 얻는다고 했고, 우바국다의 『이목족론』도 「여래는 먼저 멸정을 일으키고 뒤에 진지를 낸다」고 했다. 가습미라의 비바사사는 이를 부정한다.
所以者何?傳說菩薩三十四念得菩提故。諦現觀中有十六念,離有頂貪有十八念,謂斷有頂九品煩惱起九無間九解脫道,如是十八足前十六成三十四。
왜 그런가. 전하는 말로는 보살은 서른네 찰나에 보리를 얻기 때문이다. 제현관(諦現觀)에 열여섯 찰나가 있고, 유정의 탐을 떠나는 데 열여덟 찰나가 있으니, 유정의 아홉 품 번뇌를 끊으며 아홉 무간도와 아홉 해탈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열여덟에 앞의 열여섯을 더해 서른넷을 이룬다.
보살은 견도에 들기 전에 이미 무소유처까지의 탐을 떠났으므로 아래 지의 번뇌를 따로 끊을 필요가 없다. 견도 열여섯 찰나와 유정의 번뇌를 끊는 열여덟 찰나가 끊김 없이 이어지므로, 그 사이에 다른 종류의 마음(멸진정)을 일으킬 틈이 없다. 「외국의 스승들」은 그 사이에 다른 종류의 마음을 일으키면 무슨 허물이 있느냐고 묻는다. 비바사사의 답은 「기약한 마음(期心)을 넘는 허물」이다. 보살은 「모든 번뇌를 다 끊기 전에는 이 결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고 기약했고, 한자리에서 모든 일을 마쳤다. 천친은 이 논쟁 끝에 다시 「앞의 설이 좋다, 우리 종의이기 때문이다(前說為善,我所宗故)」라고 짧게 맺는다. 여기서도 「전하는 말로는」이 서른네 찰나 앞에 붙어 있다.
「별도의 법」인가 「분위」인가
멸진정도 물러남이 있는가. 『우다이경』에 멸수상정에 자주 드나들던 비구가 색계의 의성천에 태어나 다시 멸정에 든다는 말이 있으므로, 물러남이 있어야 한다. 멸정은 유정(무색계)에만 있는데 색계에 태어났으니 물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파는 제4정려에도 멸정이 있다고 하여 물러남 없이 이 경을 해석하지만, 경에 「구차제정」이라 했으므로 멸정은 유정 위에만 있다.
그리고 두 정이 실체인가 가립인가의 논쟁이 이어진다. 유부는 「마땅히 실체라고 말해야 한다. 마음을 막아 생기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른 설(경량부)은 이렇게 반박한다. 마음을 막는 것은 앞의 정에 드는 마음(定心)이다. 앞의 정심이 다른 마음과 서로 어긋나게 일어나므로, 그것이 일어난 결과 다른 마음이 잠시 구르지 않게 된다. 「오직 구르지 않는 분위에 임시로 정을 세운 것이니, 별도의 실체가 없다(唯不轉位假立為定,無別實體)」. 이 분위는 들기 전에도 나온 뒤에도 없으므로 임시로 유위에 넣을 뿐이다. 무상과도 마찬가지다. 장행은 다시 「이것은 좋은 설이 아니다. 우리 종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로 맺는다.
두 정 가운데 마음이 끊어진 뒤 무엇에서 다시 일어나는가 — 비바사사의 「과거의 앞 마음이 등무간연」, 선대 궤범사들의 「마음과 유근신이 서로 종자가 된다(二法互為種子)」, 세우의 「미세한 마음이 남는다」, 묘음의 반박 — 의 대론은 권5(T29, 25c~26a)에 있고, 그 사상사적 귀결은 핵심 개념 구식 페이지에서 다루었다. 등무간연과 두 정의 관계는 이 편의 사연 부분에서 다시 본다.
명근 — 수명 · 따뜻함 · 식의 순환
명근은 무엇인가. 게송은 「명근의 바탕은 곧 수명이니, 따뜻함과 식을 붙든다」고 한다. 대법은 「명근이란 무엇인가. 삼계의 수명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수명이란 무엇인가. 「따뜻함과 식을 붙드는 별도의 법을 수명이라 한다」. 경의 게송이 근거다.
壽煖及與識,三法捨身時,所捨身僵仆,如木無思覺。
수명과 따뜻함과 식, 이 세 법이 몸을 버릴 때, 버려진 몸은 쓰러져 나무처럼 생각도 느낌도 없다.
경량부는 여기서 순환 논증을 짚는다. 수명이 따뜻함과 식을 붙든다면, 수명은 무엇이 붙드는가. 유부는 「따뜻함과 식이 다시 수명을 붙든다」고 답한다. 그러면 세 법이 서로를 붙드니, 어느 것이 먼저 멸하는가. 하나가 멸해야 나머지가 따라 멸할 터인데, 서로 붙들고 있으니 영원히 멸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수명은 업이 붙든다고 해야 한다. 업이 끌어온 대로 상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업이 직접 따뜻함과 식을 붙든다고 하지 않고 수명을 따로 세우는가. 유부의 답은 「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늘 이숙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勿一切識從始至終恒異熟故)」. 업이 식을 직접 붙든다면 식은 업의 결과, 곧 이숙이어야 한다. 그러나 식에는 선 · 불선의 식도 있어 늘 이숙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업과 식 사이에 이숙인 수명이 끼어 있어야 한다. 경량부는 업이 따뜻함을 붙들고 따뜻함이 식을 붙든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유부는 무색계에는 따뜻함(물질)이 없으니 식을 붙들 것이 없다고 답한다. 경량부가 무색계에서는 업이 식을 붙든다고 하자, 유부는 「어찌 그때그때 마음대로 계산을 바꾸는가」라고 꾸짖는다.
경량부의 최종 입장은 수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謂三界業所引同分住時勢分說為壽體。
삼계의 업이 끌어온 동분이 머무는 시간의 기세(勢分)를 수명의 바탕이라 한다.
볍씨가 익을 때까지 이어지는 기세, 쏜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날아가는 기세처럼, 업이 끌어온 한 생의 흐름이 정해진 시간만큼 머무는 힘이 수명이다. 여기서 장행은 승론의 「행(行, saṃskāra)」이라는 덕(德)을 비판한다. 승론은 화살에 「행」이라는 하나의 덕이 생겨 그 힘으로 떨어질 때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 덕이 하나이고 장애가 없다면 빠르고 느리게 날아가는 차이도, 결국 떨어지는 일도 없어야 한다. 바람이 막는다고 하면 처음부터 떨어지거나 영원히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바람은 똑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론이 다르다. 장행은 경량부의 설을 소개한 뒤 「따뜻함과 식을 붙드는 별도의 실체를 수명의 바탕이라 하는 것, 이것이 좋은 설이다(有別實物能持煖識名為壽體,是說為善)」(권5, T29, 26b)라고 맺는다. 「우리 종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소속의 근거가 아니라 「좋은 설」이라는 평가가 유부 쪽에 주어진 드문 예다. 보광도 이 맺음말을 「논주가 설일체유부를 인가한 것(論主印取說一切有部)」이라 주석한다(『구사론기』 권5, T41, 102a).
이어 죽음의 원인이 논의된다. 『시설론』은 수명이 다해 죽는 것, 복이 다해 죽는 것, 둘 다 다해 죽는 것,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횡액(抂橫緣)」으로 죽는 것의 넷을 들었다. 『발지론』은 수명이 「상속을 따라 구르는」 경우와 「한 번 일어나면 머무는」 경우를 나누었는데, 가습미라 비바사사는 앞의 것이 장애가 있고 뒤의 것이 장애가 없다는 뜻이라 하여, 「때 아닌 죽음(非時死)」이 결정코 있다고 한다. 그 근거로 경의 「네 가지 몸을 얻음(四得自體)」이 인용된다. 스스로만 해칠 수 있는 몸(욕계의 희망념천 · 의분에천, 그리고 스스로 반열반하는 부처), 남만 해칠 수 있는 몸(태 · 알 속의 유정), 둘 다 해칠 수 있는 몸(대부분의 욕계 유정), 둘 다 해칠 수 없는 몸(중유, 색 · 무색계의 유정, 지옥, 북구로주, 견도에 있는 이, 자정 · 멸정 · 무상정에 든 이, 부처의 사자, 수기 받은 이들, 최후신 보살과 그 어머니, 전륜왕과 그 어머니).
사상과 수상 — 「무한소급」을 막는 아홉 법
유위의 네 상 — 생 · 주 · 이 · 멸 — 이 실체인가 가명인가의 기본 구도는 핵심 개념 무상 페이지의 「유위의 네 모습」에 있다. 여기서는 그 페이지가 다루지 않은 세 가지 논점 — 경에는 왜 세 상만 있는가, 상의 상은 무한히 이어지지 않는가, 그리고 한 찰나에 네 상이 함께 작용하는가 — 를 원문의 순서대로 본다.
경의 「세 상」과 숲 속의 세 원수
경에는 「유위의 유위상이 셋 있다」고 하여 생 · 이 · 멸만 말했다. 유부는 넷을 세우는데, 경은 왜 주(住)를 말하지 않는가. 비바사사의 답은 이렇다. 경이 말하는 유위상은 「행을 삼세에 흐르게 하는 것」이고, 유정이 그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다. 생은 행을 미래에서 현재로 끌어내고, 이와 멸은 현재에서 과거로 밀어낸다. 그런데 주는 행을 붙들어 편히 서게 하고 늘 함께 떠나지 않으려 하므로, 싫어할 것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傳說如有人處稠林,有三怨敵欲為損害,一從稠林牽之令出、一衰其力、一壞命根。
전하는 말로는, 어떤 사람이 빽빽한 숲에 있는데 세 원수가 해치려 한다. 하나는 숲에서 그를 끌어내고, 하나는 그의 힘을 쇠하게 하며, 하나는 그의 목숨을 무너뜨린다.
생 · 이 · 멸이 그 세 원수다. 또 무위법에도 「제 모습으로 머무는(自相住)」 것이 있어, 주상(住相)을 말하면 무위와 혼동되므로 경이 말하지 않았다는 설명도 있다. 다른 설은 경의 「주이(住異)」가 주와 이를 합친 말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애착하는 주를 싫어하게 하려고 이와 함께 말했으니, 「흑이(黑耳, 불운의 여신)를 길상(吉祥, 행운의 여신)과 함께 보이는 것과 같다(如示黑耳與吉祥俱)」. 행운의 여신에게는 늘 불운의 여신이 따라다닌다는 인도의 이야기다.
생생 · 주주 — 여덟에 작용하는 본상, 하나에 작용하는 수상
생 등의 상도 유위법이다. 그렇다면 생 자체도 생겨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멸해야 하니, 생에도 또 생 · 주 · 이 · 멸의 상이 있어야 하고, 그 상에도 또 상이 있어야 한다. 무한소급이다. 유부는 상의 상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무한소급은 없다고 답한다. 그 장치가 「본상 넷과 수상 넷」이다.
謂法生時并其自體九法俱起,自體為一相隨相八。本相中生除其自性生餘八法,隨相生生於九法內唯生本生。謂如雌雞,有生多子有唯生一。
법이 생길 때 그 자체와 함께 아홉 법이 함께 일어나니, 자체가 하나이고 상과 수상이 여덟이다. 본상 가운데 생은 자기 자신을 빼고 나머지 여덟 법을 생기게 하고, 수상인 생생은 아홉 법 안에서 오직 본생(本生)만을 생기게 한다. 암탉이 여러 새끼를 낳기도 하고 하나만 낳기도 하는 것과 같다.
한 법(예컨대 한 찰나의 안식)이 생길 때 함께 일어나는 것은 아홉이다. 그 법 자체, 본상 넷(생 · 주 · 이 · 멸), 수상 넷(생생 · 주주 · 이이 · 멸멸). 본상의 생은 자기를 뺀 여덟 — 법 자체, 다른 본상 셋, 수상 넷 — 을 생기게 한다. 수상의 생생은 아홉 가운데 오직 본생 하나만 생기게 한다. 그러면 본생은 생생을 생기게 하고 생생은 본생을 생기게 하니, 고리가 닫혀 셋째 단계의 상이 필요 없다. 주 · 이 · 멸도 마찬가지다. 득의 「법득 · 득득」과 똑같은 구조다. 유부는 상호 의존의 고리로 무한소급을 끊는다.
같은 구조 — 법득 ⇄ 득득
경량부의 비판 — 「허공을 쪼개는가」
경량부는 이 정교한 체계 전체를 한마디로 받는다. 「경부의 스승은 말한다. 무슨 까닭에 이렇게 허공을 쪼개는가(經部師說何緣如是分析虛空)」. 생 등의 상은 색 등처럼 현량 · 비량 · 성교량 어느 것으로도 실체임이 증명되지 않는다. 경에 「유위의 일어남도 알 수 있고, 다함과 머묾 · 달라짐도 알 수 있다」고 한 것은, 한 찰나에 세 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한 찰나의 생 · 멸은 알 수 없는데, 경은 「알 수 있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상속, 곧 흐름 전체의 일어남 · 끝남 · 지속 · 변화를 말한 것이다. 또 경이 거듭 「유위」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 상들이 유위의 「표지」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백로가 앉아 있는 것이 그곳에 물이 있다는 표지인 것처럼(如居白鷺表水非無), 또 소녀의 생김새가 길흉을 나타내는 것처럼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량부는 상이 상이 되는 대상(所相法)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대사(大士)의 상호가 대사와 별개가 아니고, 뿔 · 혹 · 굽 · 꼬리가 소와 별개가 아니며, 멀리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연기임을 아는 그 모습이 연기와 별개가 아니듯이. 그러면서 한 찰나의 생 · 주 · 이 · 멸을 이렇게 다시 정의한다. 「본래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이 생, 있다가 다시 없는 것이 멸, 뒤의 찰나가 앞의 찰나를 이어 일어나는 것이 주, 그 앞뒤가 다른 것이 주이」.
그리고 유부의 「작용의 시차」 해법을 공격한다. 유부는 네 상이 한 찰나에 함께 있어도 작용하는 때가 다르므로 모순이 없다고 했다. 생의 작용은 미래에서, 주 · 이 · 멸의 작용은 현재에서 일어난다. 경량부는 묻는다. 그러면 주 · 이 · 멸 셋의 작용은 함께 현재에 있으니, 한 찰나에 그 법이 머물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가. 그때 그 법을 「머문다」고 하는가, 「쇠한다」고 하는가, 「무너진다」고 하는가. 주가 먼저 작용한다면 왜 나중에는 약해져 이 · 멸에 무너지는가. 「이(異)」는 앞뒤가 달라지는 것인데, 한 법이 어떻게 그 자신과 다를 수 있는가.
即前異不成,異前非一法,是故於一法,立異終不成。
바로 앞의 것이라면 다름이 성립하지 않고, 앞과 다르다면 한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법에서 다름을 세우는 것은 끝내 성립하지 않는다.
멸상(滅相)도 마찬가지다. 다른 부파는 멸의 인연을 만나야 멸상이 소멸시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설사약을 먹었을 때 하늘 신이 와서 설사하게 한다(服瀉藥時天來令利)」고 말하는 것과 같다. 멸의 인연이 소멸시키는 것이지 멸상이 따로 필요 없다. 게다가 심 · 심소는 찰나멸이어서 멸의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게송 「생은 생겨나는 것을 생기게 하나, 인연의 화합을 떠나지 않는다(生能生所生,非離因緣合)」를 두고, 경량부는 결정적인 물음을 던진다.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연에만 생겨나게 하는 힘이 있음을 볼 뿐이다. 생상은 무슨 소용인가. 유부는 두 가지로 답한다. 「법의 성질은 그윽하고 미세해 알기 매우 어렵다(法性幽微甚難知故)」. 그리고 생상이 없다면 「생겨남」이라는 앎도, 「색의 생」이라는 소유격 표현도 성립하지 않는다. 경량부는 문법에서 실체를 끌어내는 이 논리를 그대로 되돌린다. 그렇다면 공 · 무아라는 앎을 위해 법 밖에 「공성」 · 「무아성」을 세워야 하고, 하나 · 둘 · 크고 작음 · 합하고 떨어짐을 위해 외도처럼 수(數) · 양(量) 같은 별도의 성질을 세워야 한다. 「색의 자성」이라는 말에도 소유격이 있는데, 색과 별개의 자성이 있는가. 「전단의 향기」, 「돌의 몸체」라고 할 때처럼, 소유격은 여러 법 가운데 어느 것의 생인지를 가려 보이려는 말법일 뿐이다.
긴 비판이 끝난 뒤, 유부 쪽의 맺음말은 이 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 된다.
毘婆沙師說生等相別有實物,其理應成。所以者何?豈容多有設難者故便棄所宗?非恐有鹿而不種麥,懼多蠅附不食美團。
비바사사는 생 등의 상이 별도의 실체라고 하니, 그 이치는 성립해야 한다. 왜 그런가. 어찌 반론하는 자가 많다고 해서 종의를 버리겠는가. 사슴이 있을까 두려워 보리를 심지 않는 일은 없고, 파리가 많이 붙을까 두려워 맛있는 떡을 먹지 않는 일은 없다.
반론이 많다고 종의를 버리지 않는다. 반론에는 부지런히 답하고, 종의는 따라 닦아야 한다. 이 말은 유부의 신념 선언처럼 읽히지만, 앞의 긴 논파 뒤에 놓여 있어 그 신념이 논증이 아니라 결단에 기대고 있음을 드러낸다.
『순정리론』 권14는 「그때 이 법을 머문다 하는가, 쇠한다 하는가, 무너진다 하는가」라는 천친의 물음에 대해, 이미 생긴 자리에서 주 · 이 · 멸 셋이 각각 다르게 작용하여 그 법이 한때에 세 가지 측면을 갖는다고 답한다. 또 「작용(作用)」과 「공능(功能)」을 구별하여, 제 결과를 이끄는 것은 작용, 다른 종류를 돕는 것은 공능이라 하고, 생상이 미래에서 「작용한다」는 본론의 말은 공능을 작용이라 부른 것이라고 해명한다(「天愛!作用非汝所知,此是功能非關作用」, T29, 409c). 작용과 공능의 구별은 삼세실유론의 핵심 장치로, 「번뇌와 삼세실유」 편에서 다룬다.
명신 · 구신 · 문신 — 말은 소리인가
名身等所謂,想章字總說。
명신 등이란 상(想) · 장(章) · 자(字)를 모아 말한 것이다.
명(名)은 「상(想)을 짓는 것」, 곧 개념을 일으키는 낱말이니 「색 · 성 · 향 · 미」 같은 것이다. 구(句)는 장(章), 곧 「뜻을 끝까지 드러내는 것」이니 「제행무상」 같은 문장이다. 문(文)은 자(字), 곧 음절이니 「아 · 이」 같은 것이다. 신(身)은 「모아 말함」이니, 명신은 여러 낱말, 구신은 「제행무상 · 일체법무아 · 열반적정」 같은 여러 문장, 문신은 「가 · 카 · 가(迦佉伽)」 같은 여러 음절이다. 장행은 여기서 「자(字)는 글씨(書分)의 이름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글씨를 드러내려고 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를 드러내려고 글씨를 만들었다고 답한다. 듣지 않고도 알게 하려고 글씨를 만들었으니, 문(文)은 소리의 단위이지 글씨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 셋은 말(語)을 본성으로 하고, 말은 음성이니 색법에 속하지 않는가. 왜 심불상응행인가. 유부의 답은 이렇다. 말은 음성이지만 음성만으로 뜻을 알게 하지는 않는다. 「말이 명(名)을 일으키고, 명이 뜻을 드러내야 비로소 알게 한다(謂語發名,名能顯義,乃能令了)」. 음성과 뜻 사이에 명이라는 별도의 실재가 매개한다는 것이다.
경량부는 반대한다. 어떤 음성이 뜻을 알게 하는가. 말하는 이들이 그 뜻에 대해 함께 정해 둔 음성이다. 예컨대 옛사람들은 아홉 가지 뜻에 대해 「구(瞿, go)」라는 소리를 함께 정했다.
方獸地光言,金剛眼天水,於斯九種義,智者立瞿聲。
방위 · 짐승 · 땅 · 빛 · 말, 금강 · 눈 · 하늘 · 물, 이 아홉 가지 뜻에 지혜로운 이가 「구」라는 소리를 세웠다.
범어 go는 소 · 땅 · 빛 · 말 · 하늘 · 물 등 여러 뜻을 가진 말이다. 같은 소리가 아홉 뜻을 가리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이 뜻을 드러낸다고 하는 사람도, 명이 그 뜻에 대해 약속된 것이라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리만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따로 명이라는 실체를 세우는가.
경량부는 다시 명이 말에서 「생겨나는가」, 「드러나는가」를 묻는다. 생겨난다면 모든 소리가 명을 낳아야 하고, 특별한 소리만 낳는다면 그 특별한 소리로 이미 뜻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드러나는 것이라도 같은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소리는 찰나마다 사라져 모을 수 없는데, 여러 음절로 된 명이 어떻게 말에서 생기는가. 마지막 음절의 소리가 명을 낳는다면 마지막 소리만 듣고도 뜻을 알아야 한다. 또 명이 생상처럼 뜻과 함께 생긴다면, 현재의 명이 과거 · 미래의 뜻을 가리킬 수 없고, 부모가 마음대로 자식의 이름을 지을 수도 없으며, 무위법에는 이름이 없어야 한다. 경에 「게송은 명과 문에 의지해 생긴다」고 한 것은, 명이라는 소리를 배열한 것이 게송이라는 뜻이다. 나무의 줄이나 마음의 차례처럼 배열에 이름을 붙인 것일 뿐 실체가 아니다.
비바사사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명신 등에는 별도의 실체가 있어 심불상응행온에 속하니 실체요 가명이 아니다. 왜 그런가. 모든 법이 다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非一切法皆是尋思所能了故)」. 생상에서 「법의 성질은 그윽하고 미세하다」고 했던 것과 같은 논리다.
명신 등의 분별도 덧붙여진다. 명신 등은 욕계 · 색계에만 매이고(무색계에도 있다는 설이 있으나 말로 할 수 없다), 유정수(有情數)에 속하며 — 말하는 이가 성취하는 것이지 드러나는 뜻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 , 등류이고, 무부무기다. 동분도 이와 같되 무색계에도 있고 이숙이기도 하다. 득과 상은 등류 · 이숙 · 찰나의 셋에 통하고, 비득과 두 정은 등류뿐이다.
근품의 불상응행 논쟁은 같은 문형으로 되풀이된다. 유부는 「같다는 앎」 · 「생겨남이라는 앎」 · 「말이 뜻을 전한다는 사실」 뒤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실체를 세운다. 경량부는 그 실체가 현량 · 비량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흐름(상속) · 약속 · 말법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반박한다. 천친은 대개 경량부의 논증을 길게 쓰고 유부의 소속을 짧게 지킨다. 다만 명근에서만은 실체설을 「좋은 설」이라 했다.
본송
能作及俱有,同類與相應,遍行并異熟,許因唯六種。
능작 · 구유, 동류와 상응, 편행과 이숙 — 원인은 오직 이 여섯 가지라고 인정한다.
俱有互為果,如大相所相,心於心隨轉。
구유인은 서로 결과가 되는 것이니, 대종들처럼, 상(相)과 상이 되는 법처럼, 마음과 마음을 따라 구르는 법처럼.
同類因相似,自部地前生,道展轉九地,唯等勝為果。
동류인은 서로 닮은 것이니, 같은 부(部) · 같은 지(地)에서 앞에 생긴 것이다. 도(道)는 아홉 지에서 서로 원인이 되며, 오직 같거나 뛰어난 것을 결과로 한다.
술어 풀이
- 六因육인
- 범어 ṣaḍ hetavaḥ. 능작인 · 구유인 · 동류인 · 상응인 · 편행인 · 이숙인. 『발지론』에서 처음 체계화되었다고 전하며, 「대법의 논사들이 인정하는(對法諸師許)」 원인의 분류다.
- 能作因능작인
- 범어 kāraṇahetu. 자기를 뺀 모든 법이 어떤 유위법의 능작인이다. 생겨날 때 장애하지 않고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가장 넓은 원인.
- 俱有因구유인
- 범어 sahabhūhetu. 동시에 서로 결과가 되는 원인. 사대종, 상과 상의 대상, 마음과 마음을 따라 구르는 법이 서로 구유인이다.
- 同類因동류인
- 범어 sabhāgahetu. 같은 성질(선은 선, 염오는 염오)의 앞의 법이 뒤의 법의 원인이 되는 것. 같은 부 · 같은 지에 한한다.
- 相應因상응인
- 범어 saṃprayuktakahetu. 심과 심소가 같은 의지처에 의지하여 서로 원인이 되는 것. 바탕은 구유인과 같다.
- 遍行因편행인
- 범어 sarvatragahetu. 앞에 생긴 편행 번뇌가 뒤의 같은 지의 모든 물든 법의 원인이 되는 것.
- 異熟因이숙인
- 범어 vipākahetu. 불선과 유루의 선이 무기의 이숙과를 낳는 원인. 업의 인과의 핵심.
- 心隨轉法심수전법
- 마음을 따라 구르는 법. 심소 · 정려율의 · 무루율의, 그리고 이것들과 마음의 생 등의 상. 때 · 결과 · 선악의 세 가지에서 마음과 함께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 士用果사용과
- 범어 puruṣakāraphala. 「사람의 힘으로 얻은 결과」처럼, 어떤 법의 작용으로 생긴 결과. 구유인 · 상응인의 결과다.
「대법의 논사들이 인정하는」 여섯 원인
앞에서 생상(生相)은 「인연의 화합을 떠나지 않고」 생겨나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 인연이란 무엇인가. 근품 권6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원인은 여섯 가지다」. 여기서 게송의 끝 「인정한다(許)」에 주의해야 한다. 장행은 이것을 「대법의 논사들이 원인은 오직 이 여섯 가지라고 인정한다(對法諸師許因唯有如是六種)」고 푼다. 경에 설해진 것은 뒤의 사연이고, 육인은 아비달마 논사들이 세운 것이다. 이 구별은 뒤에 사연을 다룰 때 「어디에 설했는가. 경 가운데다」라는 문답으로 다시 확인된다.
여섯 원인은 하나의 기준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능작인은 「장애하지 않음」, 구유인은 「동시에 서로 결과가 됨」, 동류인은 「같은 성질의 앞뒤」, 상응인은 「심 · 심소의 같은 의지처」, 편행인은 「모든 물든 법에 두루 미침」, 이숙인은 「다른 성질로 익음」이라는 서로 다른 관점이다. 그래서 한 법이 동시에 여러 원인일 수 있다. 상응인은 모두 구유인이고, 편행인은 모두 동류인이며, 모든 원인은 능작인이기도 하다. 육인은 원인의 「종류」라기보다 인과 관계를 보는 여섯 개의 「렌즈」에 가깝다.
포함 관계: 상응인 ⊂ 구유인 · 편행인 ⊂ 동류인 · 모든 인 ⊂ 능작인
능작인 — 「장애하지 않음」도 원인인가
除自餘能作。
자기를 뺀 나머지가 능작인이다.
모든 유위법은 자기 자신을 뺀 모든 법을 능작인으로 한다. 「그것이 생길 때 장애하지 않고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由彼生時無障住故)」. 다른 원인들도 능작인의 성질을 갖지만, 능작인만은 다른 특별한 이름이 없으므로 이 일반적인 이름을 갖는다. 「색처」가 색 일반의 이름을 갖는 것과 같다.
반론이 셋 나온다. 첫째, 번뇌가 일어나려 할 때 지혜가 그것을 막는 경우가 있고, 햇빛은 별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장애하는 것도 있는데 어찌 모든 법이 능작인인가. 답: 이 법이 생길 때 그것들이 실제로 장애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능작인이다. 장애할 수 있는데 장애하지 않으면 원인이 된다. 나라 사람들이 왕이 해치지 않으므로 「우리는 왕 덕분에 편안하다」고 하듯이.
둘째, 장애할 힘이 전혀 없는 것은 어떤가. 열반이나 영원히 생기지 않을 법은 모든 유위의 생에 대해, 지옥 유정의 상속은 무색계의 생에 대해 아무 장애의 힘이 없다. 그래도 원인인가. 답: 장애의 작용이 없어도 원인이니, 「힘없는 국왕(如無力國王)」에게도 같은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능작인을 넓게 말한 것이고, 뛰어난 것으로 말하면 생겨나게 하는 힘도 있다. 눈과 색은 안식에, 음식은 몸에, 씨앗은 싹에.
셋째, 모든 법이 장애하지 않으므로 능작인이라면, 왜 모든 법이 한꺼번에 생기지 않는가. 또 한 사람이 살생할 때 모든 사람이 살생자처럼 살생업을 짓는 것이 아닌가. 답: 장애하지 않음만으로 능작인이라 인정했을 뿐, 생겨남에 대해 직접 짓는 힘(親作力)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다. 「다른 스승」은 모든 능작인이 생겨남에 대해 지어 내는 힘이 있다고 한다. 열반도 안식의 생에 힘이 있다. 의식이 열반을 반연하여 선 · 악의 마음으로 일어나고, 그 의식 다음에 안식이 차례로 생기므로, 이렇게 「돌고 돌아(展轉)」 힘이 미친다는 것이다.
능작인의 범위는 놀랍도록 넓다. 이 원인 개념 아래에서는 우주의 모든 법이 지금 이 찰나의 안식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넓음이 뒤에 사연에서 「증상연은 바탕이 넓다(此緣體廣)」는 말로 이어지고, 근품 끝에서는 「한 원인에서 생기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결론의 토대가 된다. 모든 법이 모든 법의 조건이라는 이 관점은 아비달마 인과론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전체론적 요소다.
구유인 — 동시 인과는 가능한가
구유인은 육인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원인이다. 「어떤 법들이 서로 사용과(士用果)가 되면, 그 법들은 서로 구유인이다(若法更互為士用果,彼法更互為俱有因)」. 예는 셋이다. 사대종은 서로 구유인이다. 생 등의 상과 그 상의 대상(所相法)도 서로 구유인이다. 마음과 마음을 따라 구르는 법(심수전법)도 서로 구유인이다. 이렇게 구유인은 「서로 결과가 됨」을 통해 유위법 전체에 미친다.
다만 예외가 있다. 법과 수상(隨相)은 서로 결과가 되지 않는다. 법은 수상의 구유인이지만, 수상은 법의 구유인이 아니다. 앞에서 본 대로 수상(생생 등)은 본상 하나에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따라 구르는 법과 「쉰여덟 법」
心所二律儀,彼及心諸相,是心隨轉法。
심소와 두 율의, 그것들과 마음의 모든 상, 이것이 마음을 따라 구르는 법이다.
심수전법은 모든 심상응법(심소), 정려율의와 무루율의(선정에 들 때 마음과 함께 생기는 율의), 그리고 이 법들과 마음 자체의 생 등의 상이다. 왜 「마음을 따라 구른다」고 하는가. 게송은 「때 · 결과 · 선 등에 의해(由時果善等)」라고 한다. 장행은 이것을 열 가지 이유로 풀어낸다. 때로는 마음과 하나의 생 · 주 · 멸을 함께하고 같은 세(世)에 떨어진다(4). 결과로는 마음과 같은 사용과 · 이숙과 · 등류과를 갖는다(3). 선 등으로는 마음과 같이 선 · 불선 · 무기다(3). 이렇게 열 가지 이유로 마음을 따른다.
그리고 한 찰나의 마음이 몇 법과 구유인이 되는가가 계산된다. 「심왕은 가장 적어도 쉰여덟 법과 구유인이 된다(此中心王極少猶與五十八法為俱有因)」. 대지법 열과 그 본상 마흔(10 × 4), 그리고 마음 자신의 본상 넷과 수상 넷. 10 + 40 + 8 = 58. 이 가운데 마음 자신의 수상 넷을 뺀 쉰넷이 마음의 구유인이다. 수상은 마음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설은 마음의 원인이 되는 것은 열넷뿐이라고 했다. 대지법 열과 마음의 본상 넷. 대지법의 상(四十本相)은 마음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사론』은 이것이 『품류족론』에 어긋난다고 하여 물리친다. 『품류족론』은 「미래의 유신견과 그와 상응하는 법의 생 · 노 · 주 · 무상을 뺀 나머지 물든 고제」를 말하는데, 이 문장은 유신견과 상응하는 법(심소)의 상도 유신견(심소)의 구유인이 아님을 전제로 하므로, 거꾸로 다른 경우에는 심소의 상이 마음의 구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설은 「그와 상응하는 법」이라는 구절을 외우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가습미라 비바사사는 그 구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응수한다. 하나의 숫자를 두고 논서의 판본까지 따지는 아비달마의 정밀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여기서 장행은 함께 있으면서도 구유인이 아닌 것들을 열거한다. 수상과 그 본법, 수상끼리, 심수전법의 수상과 마음, 함께 생기는 유대(有對)의 소조색끼리, 함께 생기는 일부 무대(無對)의 소조색끼리, 소조색과 대종, 득과 그 대상. 이것들은 같은 결과 · 같은 이숙 · 같은 등류를 갖지 않으므로 구유인이 아니다. 득이 대상과 구유인이 아닌 것은, 득이 대상보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함께하여 반드시 함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량부의 물음 — 「세간에 동시의 인과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경량부의 근본적인 반론이 나온다.
而諸世間種等芽等極成因果相生事中,未見如斯同時因果,故今應說。云何俱起諸法聚中有因果義?
세간에서 씨앗과 싹처럼 인과가 서로 생겨나는 것이 지극히 성립된 일들 가운데, 이처럼 동시의 인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말해야 한다. 함께 일어나는 법들의 모임 안에 어떻게 인과의 뜻이 있는가.
원인은 결과보다 앞선다는 것이 상식이다. 씨앗이 먼저 있고 싹이 나중에 난다. 같은 찰나에 함께 있는 것들 사이에 어떻게 「이것이 저것을 낳았다」고 할 수 있는가. 동시라면 둘 다 이미 있는데, 무엇이 무엇을 생기게 하는가.
유부의 답은 두 가지 비유다. 「등불의 불꽃과 등불의 빛, 싹과 그림자가 동시에 인과가 되는 것을 눈앞에 보지 않는가(豈不現見燈焰燈明芽影同時亦為因果)」. 불꽃이 있는 그 순간 빛이 있고, 싹이 있는 그 순간 그림자가 있다. 불꽃이 빛의 원인이고 싹이 그림자의 원인이지만, 둘은 동시다.
경량부는 그 비유를 다시 읽는다. 「이것은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한다. 등불의 불꽃이 빛의 원인인가, 아니면 앞에 생긴 인연의 화합으로 불꽃과 빛이 함께 일어나는가」. 보광은 경량부의 뜻을 이렇게 푼다. 앞 찰나의 사람의 공력 · 등잔 · 기름 · 심지라는 인연이 화합하여, 뒤 찰나에 불꽃과 빛이 함께 일어난다. 불꽃이 빛을 낳은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은 앞의 원인에서 함께 나왔다. 그림자는 더 분명하다. 다른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림자가 생기는데, 어떻게 그림자가 싹을 원인으로 한다고 하는가.
유부는 인과의 정의 자체로 답한다.
善因明者說因果相,言若此有無,彼隨有無者,此定為因,彼定為果。俱有法中一有一切有、一無一切無,理成因果。
인명(因明)에 능한 이는 인과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저것이 있고 없으면, 이것은 반드시 원인이고 저것은 반드시 결과다.」 구유법 안에서는 하나가 있으면 모두 있고 하나가 없으면 모두 없으니, 이치상 인과가 성립한다.
인과는 시간의 앞뒤가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공변(共變)」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면, 둘 사이에 인과가 있다. 구유법은 하나가 있으면 다 있고 하나가 없으면 다 없으므로 인과다. 이것은 경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연기의 정형구를 동시 인과의 근거로 읽는 해석과도 이어진다.
경량부는 다시 묻는다. 동시의 인과는 그렇다 쳐도, 「서로」 원인이고 결과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유부는 같은 원리, 하나가 있으면 다 있고 하나가 없으면 다 없다는 것으로 답한다. 그러면 경량부는 이 원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소조색들도 서로 떠나지 않고, 소조색과 대종, 마음의 수상과 마음도 서로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들도 모두 서로 원인이어야 하지 않는가. 유부 스스로 이것들은 구유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세 막대의 비유
유부의 다음 비유가 「세 막대」다.
若謂如三杖互相依住,如是俱有法因果義成。此應思惟,如是三杖為由俱起相依力住?為由前生因緣合力令彼三杖俱起住耶?又於彼中亦有別物繩鉤地等連持令住,此亦有餘同類因等,是故俱有因義得成。
만약 세 막대가 서로 의지해 서 있는 것처럼 구유법의 인과의 뜻이 성립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세 막대는 함께 일어나 서로 의지하는 힘으로 서 있는가, 아니면 앞에 생긴 인연이 화합한 힘이 그 세 막대를 함께 일으켜 서 있게 하는가. 또 거기에는 끈 · 갈고리 · 땅 같은 별도의 것이 이어 붙들어 서게 한다. (답한다.) 여기에도 동류인 등 다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구유인의 뜻은 성립한다.
세 막대를 서로 기대어 세우면, 어느 하나를 빼도 나머지가 쓰러진다. 세 막대는 동시에 서로를 받친다. 보광은 이 비유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방의 외도는 세 막대를 지니고 다니며, 끈으로 잇고 갈고리로 걸어 땅 위에 엇갈려 놓고 그 위에 몸에 지닌 물건을 얹는다. 그러므로 세 막대를 비유로 끌어왔다(西方外道持三杖行,繩連鉤繼,交差置地上,安隨身等物。故引彼三杖為喻)」(『구사론기』 권6, T41, 117c). 인도의 고행자들이 들고 다니던 삼각대다.
경량부의 반박은 두 겹이다. 세 막대가 서 있는 것은 동시에 서로 기댄 힘 때문인가, 아니면 앞서 사람이 그렇게 세워 놓은 인연의 힘 때문인가. 경량부의 뜻은 뒤의 것이다. 보광의 표현으로는 「세 막대가 서 있는 것은 앞 찰나의 인연의 힘으로 서 있는 것이지 동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저들은 앞의 원인과 뒤의 결과로 본다」. 그리고 세 막대만 서로 기대는 것이 아니라 끈과 갈고리가 잇고 땅이 받쳐 준다. 무엇을 「세 막대가 서로 의지한다」고 하는가.
유부의 마지막 답은 짧다. 「여기에도 동류인 등 다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구유인의 뜻은 성립한다」. 구유법이 생길 때 동시에 서로 힘이 있어 구유인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앞 찰나의 동류인 같은 다른 원인도 함께 작용한다. 끈과 갈고리와 땅이 있다고 세 막대가 서로 받치는 것이 부정되지 않듯이, 앞의 원인이 있다고 동시의 원인이 부정되지 않는다. 『구사론』은 여기서 「이와 같이 구유인의 모습을 설했다」고 맺고 더 이상 논평하지 않는다.

중현의 반론 — 「불꽃 없는 빛은 없다」
『순정리론』 권15는 이 논쟁을 길게 이어 간다. 경량부(상좌 슈리라타)는 「등불은 빛의 원인이지만 함께 일어나는 등불이 원인은 아니다. 앞에 생긴 등불이 연이 되어 바로 다음 찰나에 빛이 생긴다」고 했다. 중현은 이것을 경험으로 반박한다.
此亦非理,燈初起時,有燈無明不可得故。
이것도 이치가 아니다. 등불이 처음 일어날 때, 등불은 있는데 빛이 없는 것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량부의 설대로라면 등불의 첫 찰나에는 빛이 없어야 한다. 빛은 다음 찰나에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 없는 등불을 본 사람은 없다. 「시간이 짧아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빛 없는 등불이 조금이라도 세간에 확인된 뒤에야 할 수 있는 말이다. 또 불꽃과 빛이 같은 원인(기름 · 심지)에서 함께 생긴다는 경량부의 다른 설명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등불을 가리면 빛도 끊기니 둘은 같은 원인에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등불에 빛이 매여 있다고 반박한다. 참깨 속의 껍질 · 알맹이 · 기름은 같은 원인에서 함께 생기지만 서로 원인이 되지 않아서, 하나가 막혀도 나머지는 생긴다. 등불과 빛은 그렇지 않다.
중현은 또 다른 증거도 든다. 멸진정에 드는 이는 수(受)와 상(想)만을 싫어하여 들어가는데, 사(思) 등 다른 심소도 함께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사 등이 수 · 상에 매여 함께 생긴다는 증거이니,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앞에 생긴 원인 밖에 함께 생기는 원인이 있음을 안다(故知諸法前生因外有俱生因)」(같은 곳, 420b). 그리고 경의 「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는 말도 동시 인과의 증거로 든다. 안식이 생길 때 눈과 색이 이미 사라졌다면, 안식은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을 반연하는가. 또 「셋이 화합하여 촉이 된다」고 했는데, 안식이 생길 때 눈과 색이 이미 없다면 무엇과 화합하는가. 중현은 이렇게 맺는다. 「이로 말미암아 결정코 함께 생기는 원인이 있으니, 구유인의 이치가 지극히 성립한다(由此決定有俱生因,故俱有因理極成立)」(같은 곳, 421c).
동시 인과를 둘러싼 이 논쟁은 단순한 원인론의 세부가 아니다. 유부는 삼세실유이므로 미래의 법도 실재하여, 생기려는 순간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될 수 있다. 경량부는 현재만 실재하므로 원인은 반드시 앞 찰나에 있고, 결과가 생길 때 원인은 이미 사라져 있다. 중현이 「안식이 생길 때 눈과 색이 이미 사라졌다면」이라고 묻는 것은 경량부의 시간론 자체를 겨눈 것이다. 이 시간론의 대립은 「번뇌와 삼세실유」 편의 주제다.
동류인 — 같은 성질의 앞뒤, 그리고 「같거나 뛰어난 것」
동류인은 「서로 닮은 법이 서로 닮은 법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선한 오온은 선한 오온에, 물든 오온은 물든 오온에, 무기의 오온은 무기의 오온에 동류인이 된다. 무기의 오온에 대해서는 네 가지 설이 있다. 서로 원인이 된다는 설, 색은 나머지 넷의 원인이지만 넷은 색의 원인이 아니라는 설, 그 반대의 설, 색과 넷은 서로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설. 보광은 마지막 설을 바른 것으로 보고 『대비바사론』 권131을 근거로 든다.
한 몸 안에서 태아의 첫 단계(갈라람위)는 열 단계(태내 다섯: 갈라람 · 알부담 · 폐시 · 건남 · 발라사거 / 태외 다섯: 영아 · 동자 · 소년 · 성년 · 노년) 모두의 동류인이 된다. 알부담 이하의 아홉 단계는 각각 앞의 단계를 뺀 나머지의 원인이 된다. 다른 몸의 같은 종류의 열 단계에 대해서는 열 단계 모두가 원인이 된다. 바깥의 보리 · 벼도 이렇게 제 종류끼리 생각할 수 있다.
닮았다고 다 동류인은 아니다. 「같은 부(部) · 같은 지(地)」에 한한다. 부는 다섯 — 견고소단 · 견집소단 · 견멸소단 · 견도소단 · 수소단 — 이고, 지는 아홉 — 욕계 하나, 사정려, 사무색. 견고소단의 법은 견고소단의 법에만, 욕계의 법은 욕계의 법에만 동류인이 된다. 그리고 「앞에 생긴 것」만 원인이 된다. 『발지론』은 「앞에 생긴 선근이 뒤에 생긴 같은 계의 선근과 그 상응법에 동류인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의 논쟁이 붙는다. 『발지론』은 「어떤 법이 저 법의 원인이 될 때, 이 법이 저 법의 원인이 아닌 때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원인이 아닌 때가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도 동류인이 되는가. 『구사론』은 이것이 구유 · 상응 · 이숙 세 원인을 은밀히 염두에 두고 한 답(密說)이라고 해석한다. 다른 설은 미래의 법이 「막 생기려는 자리(正生位)」에 이르면 동류인이 된다고 보아, 그 마지막 자리를 두고 한 답이라 했다. 『구사론』은 이 해석을 물리치며 「이렇게 글을 지어 무슨 공덕이 있는가. 논주가 글에 능하지 못함을 드러낼 뿐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동류인은 미래에 없다는 이유를 이렇게 든다. 동류인은 결과와 닮았으므로 앞뒤가 없으면 서로 원인이 되고, 서로 원인이면 서로 결과가 되어 이치에 어긋난다. 미래의 법은 앞뒤 없이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동류인은 「자리에 따라 세운 것(就位建立)」이어서 미래에 없다. 이숙인은 결과와 닮지 않았으므로 앞뒤 없이도 이런 허물이 없어 「모습에 따라 세운 것(就相建立)」이고, 미래에도 있다.
무루의 도는 예외다. 도는 아홉 지 — 미지정 · 정려중간 · 사본정려 · 아래 세 무색 — 에서 지가 달라도 서로 동류인이 된다. 「모든 지에 손님처럼 머물러 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어느 지의 애착도 제 것으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此於諸地皆如客住不墮界攝)」. 다만 도는 「같거나 뛰어난 것」에만 원인이 되고 열등한 것에는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미 생긴 고법지인은 미래의 고법지인에(같음), 고법지에서 무생지까지에(뛰어남) 원인이 된다. 무생지는 더 뛰어난 것이 없으므로 같은 무생지에만 원인이 된다. 견도 · 수도 · 무학도는 차례로 셋 · 둘 · 하나에 원인이 되고, 둔근의 도는 둔근과 이근에, 이근의 도는 이근에만 원인이 된다.
세간의 법도 가행으로 생긴 것 — 문소성 · 사소성 · 수소성의 공덕 — 은 같거나 뛰어난 것에만 원인이 된다. 욕계의 문소성은 문 · 사소성에, 사소성은 사소성에만(문소성은 열등하므로). 색계에는 사소성이 없다.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정에 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계의 문소성은 문 · 수소성에, 수소성은 수소성에만. 『구사론』은 이 원리를 농사에 비유한다. 「부지런히 공을 들이고도 거둔 것이 없는 일은 없어야 한다(勿設劬勞而無所獲)」. 공을 들여 닦은 법이 열등한 결과를 낳는다면, 애써 벼와 보리를 심고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는 것과 같다.
상응인 — 「같은 의지처」라는 한마디
相應因決定,心心所同依。
상응인은 결정코 심과 심소가 같은 의지처에 의지하는 것이다.
상응인은 오직 심 · 심소다. 그런데 장행은 이 정의를 질문으로 좁혀 간다. 심 · 심소라면 대상과 행상이 다른 것도 서로 상응인인가. 아니다, 대상과 행상이 같아야 상응이다. 그러면 시간이 달라도 대상과 행상이 같으면 상응인인가. 아니다, 대상 · 행상 · 때가 같아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몸에서 대상 · 행상 · 때가 같으면 — 여러 사람이 함께 초승달을 볼 때처럼 — 상응인가. 이 모든 반론을 한마디로 막기 위해 게송은 「같은 의지처」라 했다. 안식이 이 찰나의 안근에 의지하면, 그와 상응하는 수 등도 같은 안근에 의지한다. 의식과 그 상응법은 같은 의근에 의지한다.
상응인의 바탕은 구유인과 같다. 그러면 둘은 무엇이 다른가. 비유가 이 차이를 보여 준다.
由互為果義立俱有因,如商侶相依共遊險道。由五平等共相應義立相應因,即如商侶同受同作食等事業,其中闕一皆不相應,是故極成互為因義。
서로 결과가 되는 뜻으로 구유인을 세우니, 상인 무리가 서로 의지하여 함께 험한 길을 가는 것과 같다. 다섯 가지 평등으로 함께 상응하는 뜻으로 상응인을 세우니, 상인 무리가 같이 받고 같이 먹는 등의 일을 함께하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상응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서로 원인이 되는 뜻이 지극히 성립한다.
구유인은 「함께 길을 가는 것」, 상응인은 「같은 밥을 함께 먹는 것」이다. 구유인은 서로 없으면 안 되는 관계라는 데 초점이 있고, 상응인은 다섯 가지가 같다는 데 초점이 있다. 『대비바사론』은 이 차이를 「지팡이를 잡는 것(상응인)과 지팡이를 잡고 무언가를 하는 것(구유인)」, 「손을 잡는 것과 손을 잡고 거센 강을 건너는 것」 같은 비유로도 설명한다(T27, 81b).
편행인 — 번뇌의 「통인」
遍行謂前遍,為同地染因。
편행인은 앞의 편행(번뇌)이 같은 지의 물든 법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편행 번뇌가 무엇인지는 수면품에서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동류인과 따로 세우는가다. 동류인은 같은 부(部)에 한한다. 그런데 편행 번뇌는 「물든 법의 공통 원인(通因)이 되므로」, 그리고 「다른 부의 물든 법의 원인도 되므로」 따로 세운다. 이것의 세력으로 다른 부의 번뇌와 그 권속도 생겨 자란다. 예컨대 견고소단의 편행 번뇌가 견집 · 견멸 · 견도 · 수소단의 번뇌까지 자라게 한다.
그러면 성자의 몸에 있는 물든 법(수소단의 번뇌)도 편행인을 원인으로 하는가. 성자는 견소단의 번뇌를 이미 끊었는데. 가습미라 비바사사는 「모든 물든 법은 견소단을 원인으로 한다」는 『품류족론』의 문장을 들어,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시설족론』의 「불선이면서 불선만을 원인으로 하는 법이 있는가. 있다. 성자가 이욕에서 물러나 처음 일으킨 물든 사(思)다」라는 문장은 어떻게 회통하는가. 견소단의 법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이미 끊어졌으므로 그것을 빼고 말한 것(依未斷因密作是說)이라 한다.
이숙인 — 「다르게 익는다」는 것
異熟因不善,及善唯有漏。
이숙인은 불선과, 선 가운데 오직 유루다.
불선과 유루의 선만이 이숙인이다. 무기는 왜 이숙을 낳지 못하는가. 「힘이 약하기 때문이니, 썩은 씨앗과 같다(由力劣故,如朽敗種)」. 무루는 왜 이숙을 낳지 못하는가. 「애착의 적심이 없기 때문이니, 튼실한 씨앗이라도 물에 적시지 않은 것과 같다(無愛潤故,如貞實種無水潤沃)」. 또 무루는 어느 계에도 매이지 않는데 어떻게 계에 매인 이숙을 낳겠는가. 나머지(불선 · 유루선)는 두 가지(힘과 애착의 적심)를 갖추었으므로 이숙을 낳으니, 튼실한 씨앗이 물에 적셔진 것과 같다.
「이숙」이라는 말의 뜻을 두고 비바사사는 「다른 종류로 익는 것(異類而熟)」이라 풀었다. 이숙인만 다른 종류(선 · 불선 → 무기)로 익고, 구유인 등은 같은 종류로 익으며, 능작인만 같은 종류와 다른 종류에 다 통한다는 것이다. 『구사론』은 이 풀이를 고쳐 「변하여 달라지며 익는 것(變異而熟)」이라 해야 한다고 한다. 결과가 「익었다」고 하려면 두 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상속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거쳐 생겨야 하고, 다른 하나는 원인의 세력에 따라 일정한 시간의 한계가 있어야 한다. 구유인 · 상응인의 결과는 원인과 동시에 생기므로 상속의 변화를 거치지 않고, 능작인 · 동류인 · 편행인의 결과는 생사가 다할 때까지 끝없이 생기므로 시간의 한계가 없다. 이숙인의 결과만 두 조건을 갖춘다. 여기서 「상속의 전변 · 차별」이라는, 경량부의 종자 정의와 같은 말이 다시 나타난다.
이숙인과 그 결과의 관계에는 비대칭이 있다. 「한 세(世)의 업이 삼세의 이숙을 낳을 수는 있어도, 삼세의 업이 한 세의 이숙을 낳지는 않는다(有一世業三世異熟,無三世業一世異熟)」. 「한 찰나의 업이 여러 찰나의 이숙을 낳을 수는 있어도, 여러 찰나의 업이 한 찰나의 이숙을 낳지는 않는다」. 이유는 같다. 「부지런히 공을 들였는데 결과가 원인보다 줄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씨앗과 열매처럼, 곡식 · 보리는 씨앗 하나에 열매가 적고, 연꽃 · 석류 · 니구다(諾瞿陀, 반얀 나무)는 씨앗 하나에 열매가 많다. 업의 이숙도 어떤 업은 법처 하나만 낳고(명근 등), 어떤 업은 다섯에서 열하나의 처를 낳는다. 그리고 이숙과는 업과 동시에 있지도 않고, 바로 다음 찰나에 있지도 않다. 다음 찰나는 등무간연의 힘이 끌어오는 것이고, 다른 종류의 결과는 반드시 상속을 거쳐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숙인이 어느 계에서 몇 온을 함께 이숙인으로 하여 하나의 결과를 낳는가(욕계 1 · 2 · 4온, 색계 1 · 2 · 4 · 5온, 무색계 1 · 4온)와 어떤 업이 몇 처의 이숙을 낳는가의 세부는 권6(T29, 33a~b)에 있다. 업의 이숙의 상세 — 순현 · 순차 · 순후, 정업 · 부정업 — 는 「업의 체계」 편(/doctrine/treatises/kosha/4)과 핵심 개념 업 페이지의 몫이다.
육인은 어느 세에 있는가
遍行與同類,二世三世三。
편행인과 동류인은 두 세에, 세 가지(상응 · 구유 · 이숙)는 삼세에 있다.
편행인 · 동류인은 과거와 현재에만 있고 미래에는 없다. 앞에서 본 대로 「앞에 생긴」 것이어야 하고 미래는 앞뒤가 없기 때문이다. 상응인 · 구유인 · 이숙인은 삼세에 다 있다. 게송이 말하지 않은 능작인은 삼세와 「세가 아닌 것(非世)」, 곧 무위에 통한다. 이 짧은 규정은 육인론이 삼세실유를 전제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미래의 법이 실재해야 미래의 구유인 · 상응인 · 이숙인이 있을 수 있다.
본송
後因果異熟,前因增上果,同類遍等流,俱相應士用。
뒤의 원인(이숙인)의 결과는 이숙과이고, 앞의 원인(능작인)의 결과는 증상과다. 동류인과 편행인의 결과는 등류과이고, 구유인과 상응인의 결과는 사용과다.
說有四種緣,因緣五因性,等無間非後,心心所已生,所緣一切法,增上即能作。
네 가지 연이 있다고 설한다. 인연은 다섯 원인의 성질이고, 등무간연은 마지막이 아닌, 이미 생긴 심 · 심소다. 소연연은 모든 법이고, 증상연은 곧 능작인이다.
心心所由四,二定但由三,餘由二緣生,非天次等故。
심 · 심소는 네 연으로, 두 정은 세 연으로 생기고, 나머지는 두 연으로 생긴다. (세상은) 자재천(하나의 원인)에서 생기지 않으니, 차례로 생기는 것 등이기 때문이다.
술어 풀이
- 五果오과
- 범어 pañca phalāni. 이숙과(vipākaphala) · 등류과(niṣyandaphala) · 이계과(visaṃyogaphala) · 사용과(puruṣakāraphala) · 증상과(adhipatiphala). 이계과만 원인(육인)의 결과가 아니라 도(道)의 힘으로 「증득하는」 결과다.
- 離繫果이계과
- 「지혜로 다함」, 곧 택멸. 무위이므로 원인에서 생기지는 않지만 도의 결과라 부른다.
- 取果 · 與果취과 · 여과
- 원인이 결과를 「취하는」 때와 「주는」 때. 취과는 결과의 씨앗이 되는 것, 여과는 결과에 실제로 힘을 주는 것이다.
- 四緣사연
- 범어 catvāraḥ pratyayāḥ. 인연(hetupratyaya) · 등무간연(samanantarapratyaya) · 소연연(ālambanapratyaya) · 증상연(adhipatipratyaya). 경에 설해진 조건의 분류다.
- 等無間緣등무간연
- 앞 찰나의 심 · 심소가 뒤 찰나의 심 · 심소를 「같게, 사이 없이」 일으키는 조건. 아라한의 마지막 마음은 뒤에 마음이 없으므로 등무간연이 아니다.
- 所緣緣소연연
- 마음이 반연하는 대상으로서의 조건. 모든 법이 어떤 마음의 소연연이 될 수 있다.
- 增上緣증상연
- 곧 능작인. 자기를 뺀 모든 법이 증상연이다. 「바탕이 넓다」.
- 自在天자재천
- 범어 Īśvara. 세계를 홀로 창조했다는 신. 근품은 세상이 자재천 · 아(我) · 승성(勝性, prakṛti) 같은 하나의 원인에서 생긴다는 설을 논파한다.
육인과 오과 — 어느 원인이 어느 결과를 얻는가
여섯 원인을 다 설한 뒤 『구사론』은 묻는다. 「어떤 결과가 저것들에 대해 원인이 되는가」. 그 전에 하나의 원칙이 놓인다. 「결과는 유위와 이계이고, 무위에는 원인도 결과도 없다(果有為離繫,無為無因果)」. 본론은 「결과인 법이란 무엇인가. 모든 유위와 택멸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택멸이 결과라면 원인이 있어야 하고, 무위가 능작인이라면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구사론』의 답은 이렇다. 유위법만 원인도 있고 결과도 있으며, 무위는 육인도 오과도 없다. 그러면 택멸은 누구의 결과인가. 도(道)의 결과다. 도의 힘으로 얻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의 결과는 택멸의 「득」이어야 하지 않는가. 득에 대해서는 도가 「낳는」 공능이 있고, 택멸에 대해서는 도가 「증득하는」 공능이 있다. 「도는 택멸의 원인이 아니지만, 택멸을 도의 결과라 할 수 있다(道雖非滅因,而可得說擇滅為道果)」.
경량부의 무위론 — 「허공은 닿을 것이 없음」
이 대목에서 『구사론』은 무위의 실유를 둘러싼 긴 논쟁을 삽입한다. 경량부는 무위가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 경에 「모든 원인 · 모든 연으로서 색을 낳는 것은 다 무상하다」고 했으니 원인은 유위뿐이다. 유부가 「그러면 무위가 소연연도 될 수 없지 않느냐」고 묻자, 경량부는 경이 「낳는」 원인과 연이 무상하다고 했을 뿐 모든 연이 무상하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소연연은 될 수 있다고 답한다. 유부는 같은 논리로 무위도 「장애하지 않음」만으로 능작인이 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더 근본적인 것은 무위의 실체성이다. 경량부는 「모든 무위는 실체가 아니다(一切無為皆非實有)」라고 한다.
唯無所觸說名虛空,謂於闇中無所觸對,便作是說此是虛空。
오직 닿을 것이 없는 것을 허공이라 한다. 어둠 속에서 부딪히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허공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택멸은 이미 일어난 수면과 생겨날 종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간택의 힘으로 나머지가 다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비택멸은 간택의 힘 없이 연이 모자라 나머지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모두 「생겨나지 않음」이라는 부재에 붙인 이름이다. 경에 「불꽃이 꺼지듯 마음이 해탈한다」고 했는데, 등불의 열반이 오직 불꽃이 사라진 것일 뿐 별도의 무엇이 없듯이, 세존의 해탈도 오직 온이 멸한 것일 뿐 다른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
유부는 반문한다. 그렇다면 경에 「유위든 무위든 모든 법 가운데 이염(離染)이 가장 으뜸」이라 했는데, 없는 것이 어떻게 으뜸인가. 경량부는 「없음」도 칭찬할 수 있다고 답한다. 모든 재앙이 끝내 없는 것을 이염이라 하고, 그것이 있음과 없음 가운데 가장 뛰어나므로 교화받는 이들이 기뻐하도록 으뜸이라 칭찬했다는 것이다. 무위가 실체라고 인정하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 장행은 이렇게 답한다.
許便擁護毘婆沙宗是名為德,若有可護,天神定知自當擁護。然許實有,明虛妄計是名為失。
인정하면 비바사의 종의를 옹호하게 되니 이것이 좋은 점이다 — 만약 옹호할 만한 것이 있다면 천신이 반드시 알아서 스스로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실체라 인정하면 허망한 계탁을 드러내게 되니 이것이 나쁜 점이다.
이 대목에서 천친의 어조는 근품 전체에서 가장 날카롭다. 「옹호할 만한 것이 있다면 천신이 알아서 옹호할 것」이라는 말은, 유부의 종의를 지키는 일 자체를 비꼬는 것으로 읽힌다. 비바사사는 물론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법의 「무사(無事)의 법이란 무엇인가. 모든 무위법이다」라는 문장의 「사(事)」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여기서는 「원인」의 뜻이니 무위는 원인이 없다는 말일 뿐 바탕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무위는 실체이지만 늘 작용이 없으므로 원인도 결과도 없다(無為雖實有物,常無用故無因無果)」.
다섯 결과의 정의
본송은 육인과 오과를 이렇게 대응시킨다. 이숙인 → 이숙과, 능작인 → 증상과, 동류인 · 편행인 → 등류과, 구유인 · 상응인 → 사용과. 이계과는 원인이 아니라 도의 힘으로 증득한다.
異熟無記法,有情有記生,等流似自因,離繫由慧盡。若因彼力生,是果名士用,除前有為法,有為增上果。
이숙과는 무기의 법으로, 유정에 속하며, 유기(有記)에서 생긴다. 등류과는 제 원인과 닮은 것이다. 이계과는 지혜로 다한 것이다. 저것의 힘으로 생긴 결과를 사용과라 한다. 앞의 것을 뺀 유위법은 유위의 증상과다.
이숙과는 무부무기이고, 유정에 속하며, 「유기에서 생긴다」. 유기란 불선과 유루선, 곧 이숙을 「기록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원인과 동시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생긴다. 그러면 비정(산 · 강 같은 기세간)도 업에서 생기는데 왜 이숙과가 아닌가. 「함께 쓰기 때문이다(以共有故)」. 이숙과는 반드시 지은 사람만 받고 다른 이가 함께 쓸 수 없다. 기세간은 함께 지은 업(공업)에서 생긴 증상과다.
등류과는 「제 원인을 닮은 것」이다. 동류인의 결과와 편행인의 결과가 둘 다 등류과인데, 그러면 편행인도 동류인이라 하면 되지 않는가. 편행인의 결과는 지(地)가 같고 물들었다는 점에서만 원인과 닮았지 종류(部)까지 닮지는 않는다. 종류까지 닮았으면 동류인이다.
이계과는 「지혜로 다한 것」, 곧 택멸이다. 「다함(盡)」은 멸이고, 「지혜(慧)」는 간택이다. 사용과는 「저것의 힘으로 생긴」 결과다. 아래 지의 가행심의 힘으로 위 지의 정이 생기는 것, 청정한 정려의 힘으로 변화심이 생기는 것이 예다. 증상과는 그 결과 자신보다 앞서 생긴 것을 뺀 모든 유위법이다.
사용과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사람(士)」과 별개의 「사람의 작용(士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의 작용이 사람의 작용과 같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세간에서 까마귀발 약초, 취한 코끼리 장군이라 하듯이(如世間說鴉足藥草醉象將軍)」. 약초의 잎이 까마귀 발을 닮아서, 장군이 취한 코끼리처럼 용맹해서 그런 이름을 붙이듯이. 사용과와 증상과의 차이는 이렇다. 「장인이 만든 것은, 그것을 만든 장인에 대해서는 사용과이면서 증상과이고, 장인이 아닌 다른 이에 대해서는 증상과일 뿐이다(如匠所成,對能成匠,具得士用、增上果名;對餘非匠,唯增上果)」.
- 능작인증상과「除前有為法」앞의 것을 뺀 모든 유위
- 구유인상응인사용과「若因彼力生」그것의 힘으로 생김
- 동류인편행인등류과「似自因」제 원인을 닮음
- 이숙인이숙과「無記法,有情有記生」무기 · 유정 · 유기에서 생김
- (원인 없음) 도의 힘이계과「由慧盡」지혜로 다함 = 택멸
원인이 결과를 「취하는」 때와 「주는」 때
五取果唯現,二與果亦然,過現與二因,一與唯過去。
다섯 원인은 오직 현재에 결과를 취하고, 두 원인은 결과를 주는 것도 그러하다. 과거와 현재에 결과를 주는 것은 두 원인이고, 하나는 오직 과거에 결과를 준다.
이것은 육인론에서 가장 정교한 대목이다. 원인이 결과에 관여하는 방식을 두 단계로 나눈다. 「저것의 씨앗이 되므로 결과를 취한다 하고, 바로 저것에 힘을 주므로 결과를 준다 한다(能為彼種故名取果,正與彼力故名與果)」. 취과는 원인이 결과를 「예약」하는 것, 여과는 실제로 「넘겨주는」 것이다.
다섯 원인(능작인을 뺀 다섯)은 오직 현재에 결과를 취한다. 과거에는 이미 취했고, 미래에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능작인은 결과가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말하지 않았다. 결과를 주는 때는 원인마다 다르다. 구유인 · 상응인은 현재에 취하고 현재에 준다. 결과와 동시이기 때문이다. 동류인 · 편행인은 과거와 현재에 준다. 등류과는 바로 다음 찰나에 생기므로, 원인이 현재에 있을 때 주고 과거가 되어서도 준다. 이숙인은 오직 과거에 준다. 이숙과는 원인과 동시에도 바로 다음 찰나에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별은 득 · 비득과 엮이면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선한 동류인에 취과와 여과의 네 구가 있다. 취하되 주지 않는 것은 선근을 끊을 때 마지막으로 버리는 득이다. 그 득은 다음 찰나의 선한 득을 취했지만 선근이 끊어져 주지 못한다. 주되 취하지 않는 것은 선근을 다시 이을 때 처음 얻는 득이다 — 정확히는 그때 잇는 이의 앞의 득이, 끊어진 동안 취해 두었던 결과를 이제 준다. 둘 다 하는 것은 선근을 끊지 않은 나머지 자리, 둘 다 하지 않는 것은 나머지다. 불선의 동류인에도 이욕 · 퇴실을 두고 같은 네 구가 있다. 무부무기에는 결과를 줄 때 반드시 취하는 순서만 있고, 아라한의 마지막 오온은 취하되 주지 않는다. 다음 찰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인과가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경우를 설명한다. 선근을 끊은 사람도 그 선한 동류인이 과거에 「취해 둔」 결과가 있으므로, 선근을 다시 잇는 순간 그 과거의 원인이 결과를 「준다」. 삼세실유의 체계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실재하므로 과거에서 결과를 줄 수 있다. 경량부가 이 구조를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른 스승의 네 결과, 그리고 「한 원인으로 생기는 법은 없다」
다른 스승은 다섯 결과 밖에 네 결과를 더 세웠다. 안립과(물의 바퀴가 바람의 바퀴의 결과, 풀이 대지의 결과인 것처럼 받쳐 주어 세워진 것), 가행과(무생지 등이 멀리 부정관 등의 결과인 것처럼 수행으로 이른 것), 화합과(안식이 안근 등의 결과인 것처럼 모여서 생긴 것), 수습과(변화심이 정려의 결과인 것처럼 닦아서 생긴 것). 『구사론』은 이 넷이 모두 사용과 · 증상과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법이 몇 원인으로 생기는가. 법을 넷으로 나누면 이렇다. 물든 법은 이숙인을 뺀 다섯 원인으로 생긴다(물든 법은 이숙과가 아니다). 이숙으로 생긴 법은 편행인을 뺀 다섯 원인으로 생긴다(이숙은 물들지 않았다). 나머지 법(이숙이 아닌 무기, 처음 무루가 아닌 선)은 이숙 · 편행 둘을 뺀 네 원인으로 생긴다. 처음 생긴 무루법(견도의 첫 찰나 고법지인)은 다시 동류인도 빼고 세 원인으로 생긴다. 앞에 같은 무루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 · 심소의 경우다. 불상응행과 색은 여기서 상응인을 다시 빼니, 넷 · 셋 · 둘의 원인으로 생긴다. 그리고 장행은 이렇게 맺는다.
一因生法,決定無有。
한 원인으로 생기는 법은 결코 없다.
가장 적은 경우에도 처음 무루의 불상응행(예컨대 고법지인의 생상)은 능작인과 구유인 두 원인으로 생긴다. 어떤 법도 하나의 원인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이 원칙은 권7 끝에서 세계 창조론을 논파하는 근거가 된다.
네 가지 조건 — 「경에 설한 것」
권7은 「원인을 자세히 설했으니, 연은 어떠한가」로 시작한다. 육인이 「대법의 논사들이 인정한」 것이었다면, 사연은 「경 가운데」 설해진 것이다. 「경 가운데 네 가지 연의 성질을 설했으니, 인연의 성질 · 등무간연의 성질 · 소연연의 성질 · 증상연의 성질이다」. 여기서 「성질(性)」은 연의 종류를 말한다.
인연은 능작인을 뺀 다섯 원인이다. 증상연은 곧 능작인이다. 그러므로 육인은 사연 가운데 인연과 증상연에 다 들어간다. 등무간연과 소연연은 육인에 대응하는 것이 없는 새로운 관점이다. 등무간연은 마음의 시간적 연속을, 소연연은 마음과 대상의 관계를 다룬다.
- 사연(경에 설함)인연(因緣)「因緣五因性」육인(대법의 논사들이 인정함)구유 · 동류 · 상응 · 편행 · 이숙의 다섯 원인
- 사연(경에 설함)등무간연(等無間緣)「等無間非後,心心所已生」마지막이 아닌, 이미 생긴 심 · 심소육인(대법의 논사들이 인정함)대응하는 원인 없음
- 사연(경에 설함)소연연(所緣緣)「所緣一切法」모든 법육인(대법의 논사들이 인정함)대응하는 원인 없음
- 사연(경에 설함)증상연(增上緣)「增上即能作」육인(대법의 논사들이 인정함)능작인
어떤 법이 다른 법에 대해 네 연이 다 아닌 경우 — 자기에 대한 자기, 유위에 대한 무위, 무위에 대한 무위 (권7, T29, 37b)
- 심 · 심소4연인연(다섯 원인)등무간연(바로 앞의 심 · 심소)소연연(색 등 다섯 또는 모든 법)증상연(자기를 뺀 모든 법)
- 멸진정 · 무상정3연인연(구유인 = 생 등의 상 · 동류인 = 앞의 같은 지의 선법)등무간연(정에 드는 마음과 그 상응법)소연연 없음「非能緣故」반연하는 것이 아니므로증상연
- 나머지 불상응행 · 색2연인연등무간연소연연증상연
등무간연 — 왜 색은 등무간연이 아닌가
등무간연은 아라한이 열반에 들 때의 마지막 심 · 심소를 뺀, 이미 생긴 모든 심 · 심소다. 「이 연이 낳는 법이 같고(等) 사이가 없으므로(無間)」 등무간이라 한다. 그러면 색은 왜 등무간연이 아닌가. 「같게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不等生故)」. 욕계의 색 바로 다음에 욕계와 색계 두 무표색이 생기기도 하고, 욕계와 무루 두 무표색이 생기기도 하여, 색은 뒤섞여 나타난다. 등무간연이 낳는 것은 뒤섞이지 않는다.
세우(世友)는 이렇게 말했다. 한 몸 안에서 하나의 장양색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중에 두 번째 장양색이 생겨도 서로 해치지 않으므로, 색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대덕(大德)은 이렇게 말했다. 색은 바로 다음에 생길 때 적게도 많게도 생긴다. 「큰 볏짚 더미를 태우면 재가 되듯이(如燒稻稈大聚為灰)」 많은 데서 적은 것이 생기기도 하고, 작은 씨앗에서 니구다 나무가 뿌리 · 줄기 · 가지 · 잎을 점점 키워 높이 솟고 가지를 드리워 넓게 그늘을 드리우듯이 적은 데서 많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선 · 불선 · 무기의 마음 사이에도 심 · 사, 삼마지 등의 수가 다르지 않은가. 『구사론』의 답은, 다른 종류 사이에는 많고 적음이 있지만 같은 종류 안에는 같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한 수(受)가 바로 다음에 여러 수를 낳거나, 여러 수가 하나를 낳는 일은 없다. 다만 등무간연은 같은 종류끼리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앞 마음의 품 전체가 뒤 마음의 품 전체의 등무간연이 된다. 같은 종류끼리만 등무간연이 된다고 하는 설은, 물들지 않은 마음 바로 다음에 물든 마음이 생길 때 그 번뇌가 앞서 사라진 번뇌를 등무간연으로 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처음 생긴 무루의 마음은 등무간연 없이 생겨야 하므로 옳지 않다.
미래에는 왜 등무간연이 없는가. 미래의 법은 앞뒤 없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존은 미래에 어떤 법이 바로 다음에 생길지를 어떻게 아는가. 여기서 세 가지 설이 나온다. 유부는 과거 · 현재의 인과를 견주어 미래를 현량으로 안다고 하고, 다른 설은 유정의 몸 안에 미래의 결과의 조짐인 불상응행이 있어 그것을 보고 안다고 한다. 『구사론』은 셋째 설을 좋다고 한다. 「경량부의 스승들이 말하듯, 세존은 마음을 들기만 하면 모든 법을 두루 아시니, 추론도 아니고 점(占)도 아니다(故如經部諸師所言,世尊舉意遍知諸法非比非占)」. 부처의 공덕과 경계는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아라한의 마지막 마음은 왜 등무간연이 아닌가. 그 뒤에 이어 일어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반론: 바로 앞에 사라진 마음을 의(意)라 하는데, 마지막 마음 다음에 식이 생기지 않으니 의라 할 수 없지 않은가. 답: 「의는 의지처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지 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意是依所顯非作用所顯)」. 마지막 마음도 의지처가 될 자격은 있지만 다른 연이 모자라 뒤의 식이 생기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등무간연은 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법이 이 연으로서 결과를 취하면, 어떤 법이나 유정도 그 결과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에서 본 「심 · 의 · 식은 바탕이 하나」라는 정의가 여기서 이렇게 쓰인다.
무심정과 등무간연의 관계는 네 구로 정리된다. 마음에 대해 등무간연이 되는 법과 마음 바로 다음의 법은 같은가. 무심정에서 나오는 마음은 앞의 정에 드는 마음과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 등무간연이 되는가. 「사이에 심 · 심소가 끼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中間不隔心心所故)」. 정에 든 동안 불상응행(멸진정)만 있었고 마음은 없었으므로, 정에 들기 전의 마음이 정에서 나올 때의 마음의 등무간연이 된다.
소연연과 증상연
소연연은 모든 법이 심 · 심소에 대해 그러하다. 안식과 그 상응법은 모든 색을, 이식은 모든 소리를, 의식은 모든 법을 소연연으로 한다. 그리고 「어떤 법이 저 법의 소연이라면, 이것이 저것의 소연이 아닌 때는 없다」. 지금 반연되지 않고 있어도 소연이다. 「장작이 타지 않을 때도 탈 것이라 부르듯이(譬如薪等,於不燒時亦名所燒)」. 소연의 모습은 반연될 때나 아닐 때나 같기 때문이다.
증상연은 곧 능작인이다. 그런데 모든 법이 소연연도 되는데, 왜 증상연만 「바탕이 넓다(體廣)」고 하는가. 함께 있는 법들(구유법)은 결코 서로의 소연이 되지 않지만 증상은 된다. 마음은 함께 있는 심소를 반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증상연만 바탕이 넓다. 또는 작용이 넓다. 모든 법이 자기를 뺀 모든 유위에 대해 증상연이 되기 때문이다.
연은 언제 작용하는가
二因於正滅,三因於正生,餘二緣相違,而興於作用。
두 원인은 바로 멸할 때, 세 원인은 바로 생길 때 작용하고, 나머지 두 연은 이와 반대로 작용을 일으킨다.
인연이 되는 다섯 원인 가운데 구유인 · 상응인은 「바로 멸할 때」, 곧 현재에 작용한다. 함께 생긴 결과에 작용을 주기 때문이다. 동류인 · 편행인 · 이숙인은 「바로 생길 때」, 곧 결과가 미래에서 현재로 막 생겨나려 할 때 작용한다. 나머지 두 연은 반대다. 등무간연은 결과가 생길 때 작용한다. 앞의 심 · 심소가 「자리를 내주기(與其處)」 때문이다. 소연연은 반연하는 마음이 「멸할 때」, 곧 현재에 작용한다. 마음은 현재에서만 대상을 붙들기 때문이다. 증상연은 모든 자리에서 장애하지 않고 있으므로 작용에 제한이 없다.
어떤 법은 몇 연으로 생기는가
이제 사연의 체계가 모든 유위법에 적용된다.
心心所法由四緣生,此中因緣,謂五因性。等無間緣,謂前無間已生,非後心心所法。所緣緣者,謂隨所應,或色等五或一切法。增上緣者,謂隨所應,各除自性,餘一切法。滅盡、無想二定由三,除所緣緣,非能緣故。
심 · 심소법은 네 연으로 생긴다. 인연은 다섯 원인의 성질이고, 등무간연은 바로 앞에 이미 생긴, 마지막이 아닌 심 · 심소법이며, 소연연은 경우에 따라 색 등 다섯이나 모든 법이고, 증상연은 경우에 따라 각각 자기를 뺀 모든 법이다. 멸진정과 무상정의 두 정은 세 연으로 생기니, 소연연을 뺀다. 반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정의 경우는 자세히 풀이된다. 인연은 두 원인이다. 구유인은 그 정의 생 등의 상이고, 동류인은 앞에 생긴 같은 지의 선법이다. 등무간연은 정에 드는 마음과 그 상응법이다. 두 정은 마음이 이끌어 생기게 하므로 마음을 등무간연으로 한다. 그러나 두 정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므로, 정이 마음에 대해 등무간(사이 없음)이 될 수는 있어도 등무간연이 되지는 않는다. 두 정을 「마음을 막는 별도의 법」으로 세운 불상응행의 정의가 여기서 연의 체계에 자리를 얻는다. 두 정은 대상을 반연하지 않는 실체이므로 소연연이 없고, 마음이 끌어 생긴 것이므로 등무간연은 있다.
나머지 불상응행과 모든 색법은 인연과 증상연, 두 연으로 생긴다. 이렇게 심 · 심소 4, 두 정 3, 나머지 2라는 구조가 완성된다.
세상은 하나의 원인에서 생기지 않는다 — 자재천 논파
여기서 근품은 사연의 체계를 내부에서 바깥으로 돌린다. 「모든 세간은 오직 위에서 설한 여러 원인 · 여러 연에서 일어나지, 자재천이나 아(我) · 승성(勝性) 같은 하나의 원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一切世間唯從如上所說諸因諸緣所起,非自在天我勝性等一因所起)」. 자재천(Īśvara)은 세계를 창조한 신, 아(puruṣa)는 상키야의 정신 원리, 승성(pradhāna, prakṛti)은 상키야의 근본 물질이다.
논증은 단계적이다. 첫째, 「차례로 생기기 때문이다(次第等故)」. 세간이 자재천 하나의 원인에서 생긴다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생겨야 한다. 그러나 법들은 차례로 생긴다.
둘째, 자재천이 「바라는 대로」 이것은 지금 생기게 하고 저것은 뒤에 생기게 한다고 하면, 법들은 자재천만이 아니라 자재천의 「서로 다른 바람」이라는 여러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원인이 아니다. 또 그 서로 다른 바람이 한꺼번에 생겨야 한다. 바람을 일으키는 자재천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차례로 생기려면 다른 원인을 기다려야 하고, 그 원인도 다른 원인을 기다려야 하니 끝이 없다. 끝없는 원인의 연쇄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석가의 문의 인연의 바른 이치를 넘지 못한다(不越釋門因緣正理)」.
셋째, 자재천이 바람은 한꺼번에 일으켰는데 세간이 그 바람을 따라 차례로 생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바람은 앞뒤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넷째, 자재천은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 큰 공력을 들여 세간을 만드는가. 기쁨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기쁨은 다른 방편 없이는 일어나지 않으니, 기쁨을 일으키는 데 다른 것에 의지하는 자를 자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자재천이 지옥 등 끝없는 고통의 도구를 만들어 유정을 핍박하고 그것을 보고 기뻐한다면,
咄哉!何用此自在為?
아아, 이런 자재천을 무엇에 쓰겠는가.
장행은 자재천의 다른 이름인 루드라(魯達羅, Rudra)를 풀이하는 저들의 게송을 인용한다. 「험하고 날카로워 능히 태우고, 두렵고 늘 핍박하며, 피와 살과 골수 먹기를 즐기므로, 루드라라 한다(由險利能燒,可畏恒逼害,樂食血肉髓,故名魯達羅)」. 저들 스스로 이 신을 이렇게 찬양하니, 참으로 잘 말한 것이라고 비꼰다.
다섯째, 세간이 자재천 하나에서 생긴다고 믿으면, 사람의 노력 같은 눈앞에 보이는 다른 원인들을 부정하게 된다. 자재천이 다른 인연의 도움을 받아야 원인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자재천을 받드는 말일 뿐이다. 다른 인연을 떠나 자재천만의 작용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일어난 것만 자재천이 원인이고 나머지는 다른 원인을 기다린다고 하면, 처음 일어난 것은 다른 원인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자재천처럼 시작 없이 있어야 한다. 아와 승성도 같은 방식으로 깨뜨린다.
그리고 결론은 탄식으로 끝난다.
奇哉世間不修勝慧,如愚禽獸,良足可悲。彼彼生中別別造業,自受異熟及士用果,而妄計有自在等因。
기이하도다, 세간은 뛰어난 지혜를 닦지 않아 어리석은 짐승과 같으니 참으로 슬퍼할 만하다. 이 생 저 생에서 각각 업을 지어 스스로 이숙과와 사용과를 받으면서도, 망령되이 자재천 같은 원인이 있다고 헤아린다.
근품의 인과론은 여기서 하나의 세계관 선언이 된다. 세계를 만든 하나의 주인은 없다. 있는 것은 저마다 업을 짓고 그 결과를 받는 유정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무수한 원인과 연의 그물이다. 「한 원인으로 생기는 법은 결코 없다」는 앞의 원칙이, 창조신을 부정하는 논증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앞에서 본, 마승 비구의 물음 앞에서 「나는 자재한 작자요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 얼버무리던 범천왕의 일화는, 이 결론을 미리 비추는 거울이었다.
『순정리론』 권10은 근품의 구생 논의를 시작하며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무엇 때문에 모든 행의 구생을 생각하는가. 그릇된 종의를 물리치고 바른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어떤 이는 모든 행이 원인 없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하나의 원인으로 생긴다고 하며, 어떤 이는 자성 같은 평등하지 않은 원인으로 생긴다고 하고, 어떤 이는 앞에 생긴 원인만으로 생긴다고 한다」(T29, 383b~c). 근품 전체가 무인론 · 일인론 · 경량부의 전생인론(前生因論)을 함께 겨냥한 인과론이라는 것이다. 「세계와 윤회」 편이 다루는 기세간의 성립도 이 다원적 인과의 틀 위에 서 있다.
대종과 소조색은 서로 몇 원인이 되는가
「삿됨을 깨뜨리는 일은 그치고 바른 뜻을 밝혀야 한다」. 앞에서 나머지 법은 두 연으로 생긴다고 했다. 그러면 색법 가운데 대종과 소조색은 서로 어떻게 원인이 되는가.
大為大二因,為所造五種,造為造三種,為大唯一因。
대종은 대종에 대해 두 원인이고, 소조색에 대해 다섯 가지다. 소조색은 소조색에 대해 세 가지이고, 대종에 대해서는 오직 한 원인이다.
대종끼리는 구유인과 동류인이다.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다섯 원인이 되는데, 이 다섯은 육인의 다섯이 아니라 능작인을 다섯으로 나눈 것이다. 생인(그로부터 일어나므로), 의인(생긴 뒤 대종을 따라 구르므로, 스승에게 의지하듯), 입인(능히 붙들어 지니므로, 벽이 그림을 붙들듯), 지인(끊어지지 않게 하므로), 양인(자라게 하므로). 곧 대종은 소조색이 「일어나고 · 변하고 · 붙들리고 · 머물고 · 자라는」 원인이다.
소조색끼리는 구유 · 동류 · 이숙의 세 원인이 될 수 있다. 구유인은 마음을 따라 구르는 몸 · 말의 두 업(무표)에 한하고, 동류인은 앞에 생긴 것이 뒤의 같은 종류에, 이숙인은 몸 · 말의 업이 눈 등의 이숙을 낳는 것이다. 소조색은 대종에 대해 오직 이숙인 하나다. 몸 · 말의 업이 이숙으로 대종을 낳기 때문이다.
본송
欲界有四心,善惡覆無覆,色無色除惡,無漏有二心。
욕계에는 네 마음이 있으니, 선 · 악(불선) · 유부무기 · 무부무기다. 색계 · 무색계에는 악을 뺀다. 무루에는 두 마음이 있다.
欲界善生九,此復從八生;染從十生四,餘從五生七;色善生十一,此復從九生;有覆從八生,此復生於六;無覆從三生,此復能生六;無色善生九,此復從六生;有覆生從七,無覆如色辨;學從四生五,餘從五生四。
욕계의 선심은 아홉을 낳고 여덟에서 생긴다. 물든 마음은 열에서 생겨 넷을 낳고, 나머지(무부무기)는 다섯에서 생겨 일곱을 낳는다. 색계의 선심은 열하나를 낳고 아홉에서 생긴다. 유부무기는 여덟에서 생기고 여섯을 낳는다. 무부무기는 셋에서 생기고 여섯을 낳는다. 무색계의 선심은 아홉을 낳고 여섯에서 생긴다. 유부무기는 일곱을 낳고 일곱에서 생기며, 무부무기는 색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유학심은 넷에서 생겨 다섯을 낳고, 나머지(무학심)는 다섯에서 생겨 넷을 낳는다.
술어 풀이
- 十二心열두 마음
- 욕계 4(선 · 불선 · 유부무기 · 무부무기), 색계 3(선 · 유부 · 무부), 무색계 3, 무루 2(유학 · 무학). 유루 10 + 무루 2.
- 二十心스무 마음
- 열두 마음을 더 나눈 것. 삼계의 선심을 가행득 · 생득으로 나누고(6), 욕계의 무부무기를 이숙생 · 위의로 · 공교처 · 통과의 넷으로, 색계의 무부무기를 셋으로(공교처 없음) 나눈다.
- 加行得 · 生得가행득 · 생득
- 노력으로 얻는 선(문 · 사 · 수소성)과 태어나면서 갖추는 선.
- 威儀路 · 工巧處 · 通果위의로 · 공교처 · 통과
-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몸가짐의 마음, 기술 · 공예의 마음, 신통의 결과로 생긴 변화심. 모두 무부무기다.
- 續生속생
- 죽은 뒤 다음 생에 마음이 이어지는 것. 생을 이을 때의 마음은 반드시 물들어 있다.
- 得心득심
- 어떤 마음이 일어날 때, 그 전에 성취하지 않았던 다른 마음을 새로 「얻는」 것. 득의 이론이 마음의 계열에 적용된 것이다.
열두 마음의 상생 — 어떤 마음 바로 뒤에 어떤 마음이 오는가
등무간연을 다루며 『구사론』은 「앞의 심 · 심소가 뒤의 것의 등무간연이 된다」고만 했다. 「어떤 마음 바로 다음에 몇 마음이 생기고, 몇 마음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근품의 마지막 부분은 이 물음에 답한다. 이것은 근품이 다룬 모든 것 — 마음의 품, 계와 지, 무루의 도, 등무간연 — 을 하나의 지도 위에 올리는 작업이다.
먼저 마음을 열두 가지로 나눈다. 욕계 넷, 색계 셋, 무색계 셋, 무루 둘. 그리고 각 마음이 바로 다음에 몇 마음을 낳고(生), 몇 마음 바로 다음에 생기는가(從)를 센다. 본송의 숫자를 장행은 하나하나 풀이한다. 그 핵심은 세 가지 상황이다. 선정에 들고 나는 것(入定 · 出定), 생을 잇는 것(續生), 성도에 들고 나는 것(入觀 · 出觀).
욕계의 선심은 아홉을 낳는다. 자기 계의 넷, 색계의 둘(정에 들 때 색계 선심, 생을 이을 때 색계 염심), 무색계의 하나(생을 이을 때 무색계 염심), 그리고 유학 · 무학심(성도에 들 때). 욕계 선심이 무색계 선심을 직접 낳지 못하는 것은 「극히 멀기 때문」이다. 무색계는 욕계에서 네 가지로 멀다. 「의지처가 멀고, 행상이 멀고, 대상이 멀고, 대치가 멀다(一所依遠、二行相遠、三所緣遠、四對治遠)」. 욕계 선심은 여덟에서 생긴다. 자기 계의 넷, 색계의 둘(정에서 나올 때 색계 선심에서, 그리고 색계의 물든 정에 시달릴 때 그 염심에서 아래 선심으로 내려와 물러남을 막는다), 유학 · 무학심(성도에서 나올 때).
욕계의 물든 마음(불선 · 유부무기)은 열에서 생긴다. 유학 · 무학을 뺀 모든 유루의 마음이다. 생을 이을 때 삼계의 어떤 마음 다음에도 욕계의 물든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든 마음은 자기 계의 넷만 낳는다. 욕계의 무부무기는 다섯(자기 계 넷과 색계 선심 — 욕계의 변화심이 색계 정에서 생기므로)에서 생기고, 일곱(자기 계 넷, 색계 선 · 염, 무색계 염)을 낳는다.
유학심은 넷(유학심과 삼계의 선심)에서 생겨 다섯(그 넷과 무학심)을 낳는다. 무학심은 다섯(삼계의 선심, 유학 · 무학)에서 생겨 넷(삼계의 선심과 무학심)을 낳는다. 무루의 마음은 삼계의 물든 마음과 직접 이어지지 않는다.
세 가지 계기 — 정에 들고 남 · 생을 이음 · 성도에 들고 남
이 표를 보면 몇 가지가 드러난다. 생을 이을 때(續生)는 반드시 물든 마음으로 이어지므로, 물든 마음은 「어디서나 생겨날 수 있는」 마음이다. 그래서 욕계의 물든 마음은 유루의 모든 마음에서 생긴다. 반면 무부무기의 마음은 거의 자기 계 안에서만 이어진다. 그리고 무루의 마음은 오직 선한 마음과만 이어진다. 성도에 들 때는 선한 마음에서 들어가고, 성도에서 나올 때도 선한 마음으로 나온다.
열두 마음을 스물로 — 가행득과 생득
十二為二十,謂三界善心,分加行生得。欲無覆分四,異熟威儀路,工巧處通果。色界除工巧,餘數如前說。
열둘을 스물로 하니, 삼계의 선심을 가행득과 생득으로 나눈다. 욕계의 무부무기를 넷으로 나누니 이숙 · 위의로 · 공교처 · 통과다. 색계는 공교처를 빼고 나머지 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삼계의 선심 셋이 여섯이 되고, 욕계 무부무기가 넷, 색계 무부무기가 셋(공교처 없음 — 「위의 계에서는 갖가지 공교의 일을 짓지 않기 때문」), 무색계 무부무기는 이숙생 하나. 여기에 욕 · 색 · 무색의 유부무기와 욕계 불선, 유학 · 무학을 더하면 스물이다. 위의로 · 공교처 · 통과의 세 마음은 오직 의식이다. 위의로와 공교처를 위한 가행은 넷 또는 다섯 식에도 통한다.
장행은 스무 마음의 상생도 하나하나 센다. 그 세부는 열두 마음의 경우를 더 잘게 나눈 것이지만, 원리를 드러내는 대목이 있다. 「가행 선심 바로 다음에 이숙 · 공교 · 위의의 마음은 생길 수 있지만, 그것들 바로 다음에 가행 선심은 생기지 않는다」. 왜인가. 그 마음들은 「세력이 약하고, 공들여 이끌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勢力劣故,非作功用所引發故)」. 공교 · 위의를 즐겨 짓는 마음은 가행 선심을 순하게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면 물든 마음 바로 다음에도 가행 선심이 생겨서는 안 되지 않는가. 둘은 서로 순하지 않으므로. 장행의 답은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짚는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에 지치고 싫증 나서, 그것을 알고자 가행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욕계의 생득 선심은 「밝고 날카롭기 때문에(以明利故)」 유학 · 무학심 다음에 일어날 수 있다.
세 가지 작의와 성도
여기서 『구사론』은 성도에 드는 마음의 조건을 따로 논한다. 작의에는 셋이 있다. 「자상작의(自相作意)」는 색은 변하고 막히는 것, 식은 분별하는 것처럼 각 법의 고유한 모습을 관하는 것, 「공상작의(共相作意)」는 무상 · 고 · 공 · 무아 등 사제의 열여섯 행상을 관하는 것, 「승해작의(勝解作意)」는 부정관 · 사무량 · 해탈 · 승처 · 변처처럼 대상을 마음으로 지어 관하는 것이다.
이 셋 가운데 무엇 바로 다음에 성도가 나타나는가. 첫째 설은 세 가지 작의 모두 바로 다음에 성도가 나타날 수 있고, 성도 다음에도 세 가지가 다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보아야 경의 「부정관과 함께 염각분을 닦는다」는 말에 맞는다. 다른 설은 공상작의 다음에만 성도가 나타나고, 부정관은 마음을 조복해 공상작의를 이끄는 앞 단계일 뿐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성도의 앞뒤 모두 공상작의뿐이라고 하는데, 『구사론』은 이 셋째 설에 난점을 제기한다. 제2 · 3 · 4정려에 의지해 견도에 든 이는 성도 다음에 어떤 공상작의를 일으키는가. 욕계의 것은 너무 멀고, 그 지의 공상작의(순결택분, 곧 난 · 정 · 인 · 세제일법)는 과를 얻은 뒤에 다시 일어날 수 없다. 비바사사는 이 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계마다 작의의 종류도 다르다. 욕계에는 문소성 · 사소성 · 생득의 세 작의, 색계에는 문소성 · 수소성 · 생득의 세 작의(「사소성은 없으니, 생각을 일으키면 곧 정에 들기 때문이다」), 무색계에는 수소성 · 생득의 두 작의. 이 가운데 생득을 뺀 다섯 작의 다음에 성도가 나타난다. 성도는 가행의 마음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 다음에는 욕계의 생득 작의도 일어날 수 있다. 밝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이 일어날 때 몇 마음을 얻는가
근품의 마지막 물음은 득의 이론으로 돌아온다. 열두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지금 일어날 때, 그 전에 성취하지 않았던 몇 마음을 새로 「얻는가」.
三界染心中,得六六二種,色善三學四,餘皆自可得。
삼계의 물든 마음에서는 여섯 · 여섯 · 두 가지를 얻고, 색계의 선심에서는 셋, 유학심에서는 넷을 얻는다. 나머지는 모두 자기만 얻을 수 있다.
욕계의 물든 마음이 일어날 때는 여섯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의(疑)로 선근을 다시 잇거나 위의 계에서 물러나 내려오면 욕계 선심을 얻고,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거나 계에서 물러나면 욕계의 불선 · 유부무기와 색계의 유부무기를 얻으며, 번뇌로 물러나면 무색계의 유부무기와 유학심도 다시 얻는다. 유학심을 「얻는다」는 것은, 과에서 물러난 성자가 그 과의 유학심의 득을 새로 얻는 것이다. 색계의 물든 마음에서도 여섯, 무색계의 물든 마음에서는 둘(무색계 염심과 유학심)을 얻는다. 색계의 선심이 일어날 때는 셋(그 선심과 욕 · 색계의 무부무기 — 위로 올라가므로), 유학심이 일어날 때는 넷(유학심, 욕 · 색계 무부무기, 무색계 선심 — 처음 정성이생에 들고 성도로 욕 · 색의 염을 떠나므로)을 얻는다. 나머지 마음은 일어날 때 자기만 얻을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이것을 「지혜로운 이는 말한다. 물든 마음이 나타나 일어날 때 아홉을 얻고, 선심에서는 여섯, 무기에서는 오직 무기를 얻는다」라는 게송으로 정리했다(권7, T29, 40c). 『구사론』은 선심에서는 일곱이라 해야 한다고 고친다. 정견으로 선근을 이을 때 욕계 선심을, 욕계 염을 떠나는 마지막 자리에서 욕 · 색계 무부무기를, 색 · 무색계 삼마지를 얻을 때 그 두 선심을, 처음 이생을 떠나 아라한을 증득할 때 유학 · 무학심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품은 이 한 게송으로 끝난다.
由託生入定,及離染退時,續善位得心,非先所成故。
생에 의탁할 때, 정에 들 때, 염을 떠날 때와 물러날 때, 선근을 이을 때에 마음을 얻으니, 먼저 성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마음을 얻는 다섯 계기 — 태어남, 선정, 이염, 퇴실, 선근을 다시 이음. 이것은 한 유정의 마음이 계와 지를 오르내리며 물들고 깨끗해지는 생애 전체의 마디들이다. 이십이근에서 「근으로 본 한 생애」로 시작한 근품은, 「마음으로 본 한 생애」로 끝난다.
근품의 끝은 처음과 맞물린다. 처음의 이십이근은 「무엇이 무엇에 힘을 갖는가」를 물었고, 가운데의 구생 · 심소 · 불상응행은 「무엇이 무엇과 함께 있는가」를, 육인 · 사연은 「무엇이 무엇을 낳는가」를 물었다. 마지막의 열두 마음은 그 모든 관계를 시간 위에 펼쳐, 「무엇 다음에 무엇이 올 수 있는가」를 묻는다. 법의 「작용」을 밝힌다는 이 품의 과제는 여기서 마음의 계열의 지도로 완성된다.
이 편을 맺으며
분별근품은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해 하나의 세계관으로 끝난다. 물음은 「근이란 무엇인가」였다. 그 답 — 가장 뛰어나고 자재하며 빛나 드러나는 것, 곧 증상 — 은 법들 사이의 「힘의 관계」를 존재론의 중심에 놓았다. 계품이 법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그 자성을 확정했다면, 근품은 그 분리된 법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체계로 묶었다. 그 체계의 마지막 말은 「한 원인으로 생기는 법은 결코 없다」였고, 그 귀결은 「세상은 자재천 같은 하나의 원인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이 품은 동시에 『구사론』이라는 책의 이중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천친은 대지법 열 가지에 「전하는 말로는」을 붙이고, 심과 사의 한 마음 상응을 부정하며, 득에 대해서는 경량부의 종자설을 길게 쓴 뒤 「두 길이 모두 좋은 설」이라 했고, 이생성에 대해서는 「경량부의 설이 좋다」고 했다. 동분 · 두 정 · 사상 · 명신에서도 경량부의 비판을 충실히 쓴 뒤 「우리 종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소속의 근거로 유부의 자리를 지켰다. 다만 명근에서만은 실체설을 「좋은 설」이라 했다. 이 미묘한 판정의 차이를 따라 읽는 일은 『구사론』을 읽는 즐거움의 하나다. 그리고 중현의 『순정리론』이 이 판정들에 맞서 득은 「잃지 않음의 원인이요 앎의 표지」라 하고, 「불꽃 없는 빛은 없다」고 하여 동시 인과를 지킨 것은, 유부 아비달마가 마지막까지 자기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은 기록이다.
사상사의 눈으로 보면 이 품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개념은 「종자」다. 경량부가 득을 대신해 세운 「명색이 제 결과를 낳는 공능, 상속 · 전변 · 차별」이라는 정의는, 현재만 실재한다는 시간론 위에서 업과 번뇌의 연속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 종자가 무심의 자리에서 어디에 머무는가라는 물음은 유식학의 아뢰야식으로 이어졌고, 중현이 전하는 수계 · 훈습 · 공능 · 불실 · 증장이라는 이름들은 그 흐름이 이미 여러 갈래로 자라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근품이 세운 육인 · 사연 · 오과의 말은 『구사론』의 나머지 품들이 쓰는 공용어가 된다. 다음 편 「세계와 윤회」는 이 인과의 틀 위에서 유정세간과 기세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중유와 십이연기를 따라 어떻게 윤회하는가를 다룬다. 기세간이 이숙과가 아니라 공업의 증상과라는 근품의 한 문장은, 그 편에서 수미산과 네 대륙, 풍륜 · 수륜 · 금륜의 우주론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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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천친 조, 현장 역, 『아비달마구사론』 권3~7, T29 no.1558
- 천친 조, 진제 역, 『아비달마구사석론』, T29 no.1559
- 천친 조, 현장 역, 『아비달마구사론본송』, T29 no.1560
- 중현 조, 현장 역, 『아비달마순정리론』 권10~15, T29 no.1562
- 오백대아라한 등 조, 현장 역, 『아비달마대비바사론』, T27 no.1545
- 보광 술, 『구사론기』 권3~7, T41 no.1821
- 법보 찬, 『구사론소』, T41 no.1822
연구
- P. Pradhan (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Patna: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67
- Louis de La Vallée Poussin (tr.), L'Abhidharmakośa de Vasubandhu, 6 vols., Paris: Paul Geuthner, 1923–1931
- Leo M. Pruden (tr.), Abhidharmakośabhāṣyam, 4 vols.,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88–1990
- Collett Cox, Disputed Dharmas: Early Buddhist Theories on Existence, Tokyo: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1995
- 櫻部建, 『俱舎論の研究 界・根品』, 法藏館, 1969
- 櫻部建 · 上山春平, 『存在の分析〈アビダルマ〉』(仏教の思想 2), 角川書店, 1969
- 加藤純章, 『経量部の研究』, 春秋社, 1989
- 권오민 역, 『아비달마구사론』 1~4, 동국역경원, 2002
-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