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十二縁起)는 무명에서 시작해 노사로 끝나는 열두 마디다. 처음 들으면 외울 것이 많아 보여 여기서 멈추는 사람이 많지만, 이 열둘은 외우라고 세운 목록이 아니다. 석존께서 괴로움의 원인을 끝까지 따져 올라가신 차례이고, 그 차례 전체가 경전의 한마디에 담겨 있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보리수 아래에서 관하신 것
십이연기는 석존께서 깨달으신 직후에 관하신 것으로 전해진다. 우다나(Udāna, 자설경)의 첫머리가 그 장면이다.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가, 보리수 아래에서 이레 동안 앉아 계시던 석존은 선정에서 나와 밤의 초분에 열두 마디를 차례대로 관하셨다. 무명이 있어 행이 있고, 행이 있어 식이 있다는 차례다.
이어지는 경에서는 밤의 중분에 그 차례를 거꾸로 관하신다. 무명이 없어지면 행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면 식이 없어진다는 차례다. 그리고 밤의 말분에는 두 방향을 함께 관하셨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십이연기는 여러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깨달음의 내용 그 자체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불교의 어느 갈래로 가도 이 열두 마디가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초기 경전에는 석존께서 이 차례를 찾아낸 일을 옛 성의 비유로 말씀하신 대목도 전한다. 숲속을 헤매던 사람이 옛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따라가 풀에 덮인 옛 도성을 발견하는 것처럼, 당신께서도 옛 부처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찾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십이연기는 석존께서 지어낸 이론이 아니라, 본래 있던 이치를 발견한 것이라는 뜻이 이 비유에 담겨 있다.
왜 하필 열둘인가. 늙고 죽는 괴로움에서 출발해 ‘무엇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가’를 거듭 물으며 거슬러 올라가 보니, 열두 번 만에 더 거슬러 갈 데가 없는 자리에 닿았다. 그것이 무명(無明)이었다.
사제 안의 자리
석존의 가르침을 가장 짧게 줄이면 사제, 곧 네 가지 진리가 된다. 괴로움이 있다는 고제, 그 괴로움에 원인이 있다는 집제, 원인이 없어지면 괴로움이 멈춘다는 멸제, 그리고 멈추는 길이 있다는 도제다. 도제를 여덟 가지로 밝힌 것이 팔정도다.
십이연기는 이 넷 가운데 둘째, 집제를 자세히 펼친 것이다. 괴로움에 원인이 있다는 한마디를 열둘로 나누어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 십이연기는 따로 떨어진 법문이 아니라 사제라는 네 마디 안에 들어 있는 한 부분이다. 이 자리에서 되풀이할 한마디가 여기서 나온다. 원인을 알아야 멈출 수 있다.
열두 마디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하나씩 뜻을 새겨 보면 다음과 같다.
네 묶음으로 보기 — 삼세양중인과
열둘을 외울 필요는 없다. 넷으로 묶어서 보면 훨씬 쉽다. 이 넷을 과거·현재·미래의 세 세상에 나누어 놓은 해석을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 한다. 지난 생에 원인이 둘, 이번 생에 결과가 다섯, 이번 생에 원인이 셋, 다음 생에 결과가 둘이다. 원인과 결과가 두 번 겹치므로 ‘두 겹’이라 부른다.
첫째 묶음 무명과 행은 지난 생에서 넘어온 원인이다. 둘째 묶음 식에서 수까지 다섯은 그 원인이 낳은 결과로, 이미 받은 것이라 사람이 손댈 것이 없다. 셋째 묶음 애·취·유는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짓는 것이다. 넷째 묶음 생과 노사는 그렇게 지은 것이 불러올 결과이고, 거기서 다시 무명이 일어나 같은 차례가 되풀이된다. 전통 교학은 이 가운데 무명·애·취를 번뇌인 혹(惑), 행·유를 행위인 업(業), 나머지 일곱을 괴로움인 고(苦)로 묶기도 한다.
눈여겨볼 것은 이번 생이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이라는 점이다. 받고 있는 것과 짓고 있는 것이 한 생 안에 함께 있다.
삼세양중인과는 여러 해석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인 것일 뿐이다. 아비달마의 논사들은 열두 마디가 한 찰나의 마음 안에서도 함께 일어난다는 찰나연기(刹那緣起)의 해석도 남겼다. 세 생에 걸친 긴 인과를 한 순간의 마음에서 본다는 이 시선은, 훗날 한 찰나의 마음에 삼천 세간이 갖추어졌다고 보는 五 일념삼천의 자리와 멀리서 이어진다.
정해진 것도, 우연도 아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드는 마음이 하나 있다. 지난 생이 이번 생을 정했다면 팔자와 무엇이 다른가, 애써도 소용없다는 말이 아닌가. 이 물음은 지금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석존 당시에도 같은 생각들이 있었고, 앙굿따라 니까야의 티타야타나 숫따가 그 셋을 그대로 전한다.
첫째는 모든 것이 지난 생에 지은 행위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둘째는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정해진다는 생각이다. 셋째는 아무 원인도 조건도 없이 그냥 일어난다는 생각이다. 석존께서는 이 셋을 하나씩 따져 물으신 뒤, 끝까지 밀고 가면 같은 데에 이른다고 하셨다. 어느 것을 잡아도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하려는 마음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피하려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정해져 있거나 아무 까닭이 없다면 애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십이연기는 이 셋과 다르다. 열두 마디는 조건으로 이어져 있다. 앞의 것이 있어야 뒤의 것이 선다. 조건으로 선 것이니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조건으로 선 것이니 우연도 아니다. 정해진 것과 우연 사이에 조건이 있다. 조건이 바뀌면 결과가 바뀐다. 벗어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바꿀 수 있는 자리
그러면 조건을 어디서 바꾸는가. 셋째 묶음, 바라고 붙잡고 짓는 그 셋이다. 지난 것은 이미 지나갔고 올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무엇에 마음을 두는가만 내가 정할 수 있다.
일상의 한 장면으로 옮겨 보면 이렇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귀에 닿는다. 이것이 촉이다. 그 말이 서운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수다. 여기까지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 서운함을 곱씹으며 상대를 밀어내고, 내 생각을 움켜쥐고, 끝내 말과 행동으로 쌓아 가는 것은 애와 취와 유의 차례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디에 마음을 두느냐에 따라 다음 장면이 달라진다. 십이연기가 먼 생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오늘 하루의 이야기이기도 한 까닭이다.
도표에서 수(受)와 애(愛) 사이에 점선을 그어 둔 것도 그 때문이다. 즐겁고 괴로운 느낌은 몸을 가진 이상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느낌이 곧바로 목마름으로 넘어가 움켜쥐고 쌓아 가느냐는, 받은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의 영역이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서는 무명 자체를 밝히는 일, 곧 지혜가 고리 전체를 멈추게 한다.
유전과 환멸
열둘에는 반대 방향이 있다. 무명이 없어지면 행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면 식이 없어지며, 그렇게 마지막까지 차례로 없어진다. 처음 방향을 유전(流轉), 흘러서 굴러간다고 하고, 반대 방향을 환멸(還滅), 돌아가서 없어진다고 한다. 우다나의 세 경이 초분과 중분과 말분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두 방향이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십이연기는 괴로움이 어떻게 생기는지만 밝힌 법문이 아니다. 조건으로 선 것이니 조건이 없어지면 그것도 없어진다. 그것을 보이려고 열둘로 나누어 놓으신 것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보신 것은 괴로움의 차례만이 아니라, 그 괴로움이 어떻게 멈추는가였다.
다음 자리로
십이연기는 뒤의 가르침에서 여러 번 다시 읽힌다. 법화경 서품은 성문을 구하는 이에게는 사제를, 벽지불을 구하는 이에게는 십이인연을, 보살에게는 육바라밀을 설했다고 전한다. 십이인연을 관해 홀로 깨닫는 이가 연각, 곧 벽지불이다.
爲求聲聞者 說應四諦法
爲求辟支佛者 說應十二因緣法
爲諸菩薩 說應六波羅蜜성문을 구하는 이에게는 사제의 법을, 벽지불을 구하는 이에게는 십이인연의 법을, 모든 보살에게는 육바라밀을 설하셨다.
그 연각과 성문은 한때 성불하지 못한다고 여겨졌으나, 법화경은 방편품에서 그들에게도 성불의 길을 연다. 그 이야기는 三 제법실상의 자리에서 이어진다.
한편 용수는 연기하는 것에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데서 공을 읽어 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면, 저것은 저것 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가 곧 공이라는 이 통찰이 二 공·중도의 자리다.
그리고 이 흐름의 끝에서 대성인은 열두 고리를 끊고 떠나는 길과는 다른 길을 보이신다. 초기 불교의 환멸문이 번뇌를 없애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면,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번뇌와 생사를 버리지 않은 채 그대로 깨달음의 자리로 연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다. 무명에서 노사까지 이어지는 범부의 생명이 곧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당체가 된다는 것, 그 이야기는 六 남묘호렌게쿄의 자리에서 맺어진다.
십이연기에서 출발하는 이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의 한마디가 끝까지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뒤집으면, 이것이 바뀌면 저것도 바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