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구름 사이로 수평선에 떠오르는 해가 고요한 바다에 길게 비치고, 오른쪽 벼랑에 소나무가 선 금박 수묵화

남묘호렌게쿄

南無妙法蓮華經니치렌 대성인 · 삼대비법

건장 5년(1253) 4월 28일. 아와국 기요스미사에서 서른둘의 니치렌은 처음으로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며 법을 펴기 시작했다. 입종(立宗)이다.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향해 불렀다고 전한다.

대성인은 뒷날 이 날짜를 스스로 가리켰다. 『어의구전』은 방편품의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今者已滿足)」에서 「이미(已)」 한 글자를 이렇게 푼다.

已とは建長五年四月廿八日に初めて唱え出す処の題目を指して已と意得可きなり

「이미」란 건장 5년 4월 28일에 처음으로 불러 낸 제목을 가리켜 「이미」라고 알아야 한다.

『어의구전』, 720쪽

같은 책의 다른 대목에서는 「니치렌은 나이 서른둘부터 남묘호렌게쿄를 호념해 왔다(日蓮は生年卅二より南無妙法蓮華経を護念するなり)」라고 했다(711쪽). 23년 뒤의 「보은초」는 그 첫 목소리를 이렇게 돌아본다.

此の事いまだ・ひろまらず一閻浮提の内に仏滅後・二千二百二十五年が間一人も唱えず日蓮一人・南無妙法蓮華経・南無妙法蓮華経等と声もをしまず唱うるなり

이 일은 아직 퍼지지 않았다. 일염부제 안에서 불멸 후 2225년 동안 한 사람도 부르지 않았다. 니치렌 혼자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 하고 목소리를 아끼지 않고 부르는 것이다.

「보은초」, 328쪽

그리고 사도에서 쓴 「제법실상초」는 그 한 목소리가 어떻게 번져 가는지를 적었다.

日蓮一人はじめは南無妙法蓮華経と唱へしが、二人・三人・百人と次第に唱へつたふるなり、未来も又しかるべし

니치렌 한 사람이 처음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렀지만, 두 사람, 세 사람, 백 사람으로 차례로 불러 전해 간다.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제법실상초」, 1360쪽

일곱 글자는 짧다. 그러나 이 사이트가 다섯 자리에 걸쳐 걸어온 길이 모두 이 일곱 글자로 들어온다. 一 십이연기에서는 모든 것이 조건에 의지해 일어나는 세계를 보았다. 二 공·중도에서는 그 세계가 공이면서 가이며 둘이 하나인 중도임을, 三 제법실상에서는 모든 법이 갖춘 참모습을 보았다. 四 구원실성에서는 그 참모습이 시작 없는 부처의 생명이라는 것을, 五 일념삼천에서는 그 전부가 지금 이 한 생각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읽었다. 五의 끝에서 「관심본존초」는 부처가 일념삼천이라는 구슬을 다섯 글자에 싸서 말대의 어린아이들 목에 걸어 주었다고 했다.

여섯째 자리는 그 싸개를 푸는 자리다. 남묘호렌게쿄는 무엇인가. 경의 제목인가, 부처의 이름인가, 수행인가, 본존인가. 이 글은 대성인의 어서를 따라 다섯 부분으로 그 물음을 읽는다.

새벽, 운해 위로 솟은 산마루 끝에 한 스님이 등을 보이고 작게 서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금빛 해를 바라보고, 뒤편 솔숲 속에 절 지붕이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1 · 입종의 새벽
1부 이름

경의 이름, 경의 마음 — 제목이란 무엇인가

여시아문 위의 다섯 글자

모든 경전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如是)」의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대성인은 건치 3년(1277)의 「소야입도전답서」에서 이렇게 답한다.

一切経の如是は何なる如是ぞやと尋ぬれば上の題目を指して如是とは申すなり、仏何の経にても・とかせ給いし其の所詮の理をさして題目とはせさせ給いしを、阿難・文殊・金剛手等・滅後に結集し給いし時題目をうちをいて如是我聞と申せしなり、一経の内の肝心は題目におさまれり

일체경의 「이와 같이」는 어떤 「이와 같이」인가 하고 물으면, 위의 제목을 가리켜 「이와 같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가 어느 경을 설하시든 그 경이 말하려는 궁극의 이치를 가리켜 제목으로 삼으셨는데, 아난·문수·금강수 등이 부처 입멸 후 경을 결집할 때 제목을 먼저 두고 「여시아문」이라고 한 것이다. 한 경 안의 간심은 제목에 거두어져 있다.

「소야입도전답서」, 1057쪽

제목은 경의 앞에 붙은 표지가 아니라 경이 말하려는 전부를 담은 이름이다. 대성인은 이것을 나라 이름에 빗댄다. 인도에는 칠십 나라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짐승·풀·산·강이 있지만 그 전부가 「월지(月氏)」라는 두 글자 안에 뚜렷이 들어 있다. 사천하의 온갖 것이 하늘의 달 하나에 비치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보은초」(건치 2년, 1276)는 같은 이치를 일체경에 적용한다.

かくのごとくの一切経は皆如是我聞の上の題目・其の経の肝心なり、大は大につけ小は小につけて題目をもつて肝心とす

이와 같은 일체경은 모두 여시아문 위의 제목이 그 경의 간심이다. 큰 경은 큰 대로, 작은 경은 작은 대로 제목을 간심으로 삼는다.

「보은초」, 324쪽

부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대일여래·일월등명불·연등불·대통불·운뢰음왕불 같은 부처들은 「이름 속에 그 부처의 갖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여시아문 위의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는 곧 한 부 여덟 권의 간심이요, 또한 일체경의 간심이며, 일체의 제불·보살·이승·천인·수라·용신 등의 머리 위의 정법(頂上の正法)」이다(324쪽).

妙法蓮華經如是我聞한 부 여덟 권 · 스물여덟 품
一經の內の肝心한 경의 간심
큰 원 하나 「제목」 — 둘레에 금점과 산 · 강을 뜻하는 작은 표시들이 모두 원 안에 들어 있다題目
月氏二字に七十箇國「월지」 두 글자에 일흔 나라 · 사람 · 산 · 강이 모두
一經の內の肝心は題目におさまれり「소야입도전답서」 1057쪽
도표 1 · 여시아문 위의 제목 — 한 이름에 거두어진 한 경

얼굴과 눈, 두 글자의 나라 이름

홍안 원년(1278)의 「묘호니고젠답서」는 이 비유를 몸으로 옮긴다. 편지를 받은 묘법니는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人の身の五尺・六尺のたましひも一尺の面にあらはれ・一尺のかほのたましひも一寸の眼の内におさまり候、又日本と申す二の文字に六十六箇国の人畜・田畠・上下・貴賎・七珍万宝・一もかくる事候はず収めて候、其のごとく南無妙法蓮華経の題目の内には一部八巻・二十八品・六万九千三百八十四の文字・一字ももれず・かけずおさめて候

사람 몸 대여섯 자의 혼도 한 자의 얼굴에 나타나고, 한 자 얼굴의 혼도 한 치의 눈 안에 거두어진다. 또 「일본」이라는 두 글자에 예순여섯 나라의 사람과 짐승, 논밭, 위아래와 귀천, 칠진만보가 하나도 빠짐없이 거두어져 있다. 그와 같이 남묘호렌게쿄라는 제목 안에는 한 부 여덟 권, 스물여덟 품, 6만 9384자가 한 자도 새지 않고 빠지지 않고 거두어져 있다.

「묘호니고젠답서」, 1402쪽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法華経一部の肝心は南無妙法蓮華経の題目にて候、朝夕御唱え候はば正く法華経一部を真読にあそばすにて候、二返唱うるは二部乃至百返は百部・千返は千部・加様に不退に御唱え候はば不退に法華経を読む人にて候べく候

법화경 한 부의 간심은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이다. 아침저녁으로 부르시면 바로 법화경 한 부를 참되게 읽으시는 것이다. 두 번 부르면 두 부, 나아가 백 번은 백 부, 천 번은 천 부. 이와 같이 물러남 없이 부르시면 물러남 없이 법화경을 읽는 사람이 된다.

「묘호니고젠답서」, 1402쪽

이 생각은 대성인의 초기 어서에 이미 있었다. 서른일곱의 「십여시사」(1258)는 「이것을 믿고 한 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라고 하면 법화경을 깨달아 여법하게 한 부를 읽는 것(是を信じて一遍も南無妙法蓮華経と申せば法華経を覚て如法に一部をよみ奉るにてあるなり)」이라고 했다(411쪽). 20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

이름이 아니라 몸이며 마음

그렇다면 제목은 결국 「요약」인가. 긴 책을 짧게 줄여 부르는 이름인가. 대성인은 이 오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所詮妙法蓮華経の五字をば当時の人人は名と計りと思へり、さにては候はず体なり体とは心にて候

요컨대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지금 사람들은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몸(體)이다. 몸이란 마음이다.

「소야입도전답서」, 1059쪽

대성인은 여기서 천태의 제자 장안(章安)의 말을 끌어온다. 『법화현의』의 서문은 경의 깊은 뜻을 서술하고, 그 깊은 뜻은 경문의 마음을 서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묘법연화경은 글자도 아니고 뜻도 아니며 한 경의 마음(一経の心)이다」로 푼다. 그러니 「제목을 떠나 법화경의 마음을 찾는 사람은, 원숭이를 떠나 원숭이의 간을 찾은 덧없는 거북」과 같다(1059쪽).

같은 편지의 앞 장에서 대성인은 제목을 법화경의 마음이며, 몸이며, 궁극의 뜻이라고 세 겹으로 말했다.

南無妙法蓮華経と申すは一代の肝心たるのみならず法華経の心なり体なり所詮なり

남묘호렌게쿄라고 하는 것은 석존 일대 가르침의 간심일 뿐 아니라 법화경의 마음이며, 몸이며, 궁극의 뜻이다.

「소야입도전답서」, 1058쪽

블로그 강의는 이 두 대목을 이렇게 잇는다.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법화경의 이름으로만 여기는 것은 「법화경의 까닭(謂れ)」을 모르는 사람의 이해다. 다섯 글자의 제목은 법화경의 간심일 뿐 아니라 일대성교 전체의 마음이며 몸이며 궁극의 이치다.

뜻을 몰라도 — 태자와 젖먹이

이름이 곧 몸이라면, 그 뜻을 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불러도 되는가. 대성인은 두 비유로 답한다.

今妙法蓮華経と申す人人はその心をしらざれども法華経の心をうるのみならず一代の大綱を覚り給へり、例せば一二三歳の太子・位につき給いぬれば国は我が所領なり摂政・関白已下は我が所従なりとはしらせ給はねども、なにも此の太子の物なり、譬えば小児は分別の心なけれども悲母の乳を口にのみぬれば自然に生長する

지금 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지 못해도 법화경의 마음을 얻을 뿐 아니라 일대의 큰 벼리를 깨닫는다. 예컨대 한두세 살의 태자가 왕위에 오르면, 나라가 자기 영토이고 섭정·관백 이하가 자기 신하라는 것을 알지 못해도 무엇이든 이 태자의 것이다. 또 어린아이는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도 어머니의 젖을 입에 머금으면 저절로 자란다.

「소야입도전답서」, 1058쪽

「보은초」도 같은 물음을 다룬다. 뜻을 모르는 사람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과 「남무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같으냐는 물음에 대성인은 얕고 깊음이 있다고 답한다. 작은 강은 이슬·물방울·우물·도랑을 거두지만 큰 강을 거두지 못하고, 큰 강은 작은 강들을 거두지만 큰 바다를 거두지 못한다. 법화경은 「한 방울도 새지 않게 모든 물을 거두는 큰 바다」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譬へば薬はしらねども服すれば病やみぬ食は服すれども病やまず

비유하면 약은 그 성분을 몰라도 먹으면 병이 낫지만, 음식은 먹어도 병이 낫지 않는 것과 같다.

「보은초」, 324쪽

블로그의 『어의구전』 강의는 같은 뜻을 「사신오품초」의 한 구절로 보인다.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는 경문도 아니고 그 뜻도 아니며 오직 한 부의 마음일 뿐이다. 초심의 수행자는 그 마음을 알지 못해도 그것을 행하면 저절로 뜻에 맞는다」(「사신오품초」, 342쪽. 2차 확인). 흐린 물은 마음이 없어도 달을 얻으면 저절로 맑아지고, 풀과 나무는 깨달음이 없어도 비를 얻으면 꽃이 핀다는 비유가 함께 나온다.

이것은 앎을 가볍게 여기는 말이 아니다. 5부에서 보겠지만 대성인은 「행과 학의 두 길」을 함께 힘쓰라고 했다. 다만 들어가는 문이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이 곧 몸이므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몸 전체를 부르는 일이다.

세 겹 동심원 — 바깥 원 이름(名), 가운데 원 몸(體), 안쪽 원 마음(心)名이름體몸心마음 — 한 경의 마음
名と計りと思へり、さにては候はず體なり體とは心にて候「소야입도전답서」 1059쪽法華經の心なり體なり所詮なり1058쪽이름일 뿐이라는 생각을 부정한다 — 이름이 곧 몸이며, 몸이 곧 마음이다.
도표 2 · 이름·몸·마음 — 제목의 세 겹

푸는 제목에서 부르는 제목으로

천태의 『법화현의』 — 열 권으로 푼 다섯 글자

제목을 가장 깊이 푼 사람은 천태 지의였다. 그는 『법화현의』 열 권을 거의 제목 풀이에 바쳤다. 대성인은 문응 원년(1260)의 「창법화제목초」에서 그 구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天台大師・玄義十巻を造り給う第一の巻には略して妙法蓮華経の五字の意を宣べ給う、第二の巻より七の巻に至るまでは又広く妙の一字を宣べ八の巻より九の巻に至るまでは法蓮華の三字を釈し第十の巻には経の一字を宣べ給へり

천태대사는 『현의』 열 권을 지으셨는데, 제1권에서는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의 뜻을 간략히 펴셨고, 제2권부터 제7권까지는 다시 묘 한 글자를 널리 펴셨으며, 제8권부터 제9권까지는 법·연·화 세 글자를 풀이하시고, 제10권에서는 경 한 글자를 펴셨다.

「창법화제목초」, 13쪽
  1. 五字の略釋다섯 글자를 간략히권1
  2. 妙묘 한 글자권2 ~ 7
  3. 法 · 蓮 · 華법 · 연 · 화권8 ~ 9
  4. 經경 한 글자권10
열 권 가운데 여섯 권이 묘 한 글자 — 「창법화제목초」 13쪽
도표 3 · 『법화현의』 열 권과 다섯 글자

열 권 가운데 여섯 권이 「묘」 한 글자에 바쳐졌다. 三에서 본 적문십묘·본문십묘가 이 여섯 권의 내용이다. 천태는 제목을 명(名)·체(體)·종(宗)·용(用)·교(敎) 의 다섯 겹, 곧 오중현의로 풀었다. 이름(名)은 본체(體, 제법실상)를 드러낸다. 본체는 다시 근본 취지(宗, 부처의 인과), 작용(用, 의심을 끊고 믿음을 일으킴), 가르침의 자리(敎)로 펼쳐진다.

같은 어서는 이어서 제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말한다.

其の上法華経の肝心たる方便・寿量の一念三千・久遠実成の法門は妙法の二字におさまれり

그뿐 아니라 법화경의 간심인 방편품·수량품의 일념삼천과 구원실성의 법문은 묘법 두 글자에 거두어져 있다.

「창법화제목초」, 13쪽

셋째 자리(방편품의 제법실상), 넷째 자리(수량품의 구원실성), 그리고 그 둘로 이루어진 다섯째 자리(일념삼천)가 모두 「묘법」 두 글자에 들어 있다. 대성인은 이어서 다른 경의 제목과 법화경의 제목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한다. 소승경의 제목은 대승경의 공덕을 거두지 못하고, 왕생을 설하는 경의 제목은 성불의 공덕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법화경은 사십여 년의 모든 경을 한 경에 거두고, 시방세계의 부처들을 석가 한 부처의 분신으로 모은다.

故に妙法蓮華経の五字を唱うる功徳莫大なり諸仏・諸経の題目は法華経の所開なり妙法は能開なりとしりて法華経の題目を唱うべし

그러므로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부르는 공덕은 막대하다. 여러 부처와 여러 경의 제목은 법화경이 여는 대상(所開)이고 묘법은 여는 주체(能開)임을 알고 법화경의 제목을 불러야 한다.

「창법화제목초」, 13쪽

능개(能開)와 소개(所開). 다른 경의 제목은 그 경 하나의 이름이다. 묘법은 그 모든 경을 열어 제자리에 놓는 이름이다. 四에서 구원의 석존이 모든 부처를 분신으로 거두었듯, 묘법이라는 이름이 모든 경의 이름을 거둔다.

먼저 부르고, 뜻이 있으면 배워서 관한다

같은 「창법화제목초」의 한 문답은 법화경을 믿는 사람의 본존과 행의와 평소의 수행을 묻는다. 서른아홉의 대성인은 이렇게 답했다.

常の所行は題目を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べし、たへたらん人は一偈・一句をも読み奉る可し … 愚者多き世となれば一念三千の観を先とせず其の志あらん人は必ず習学して之を観ずべし

평소의 수행은 제목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한 게송 한 구절이라도 읽을 것이다. … 어리석은 이가 많은 세상이 되었으므로 일념삼천의 관을 먼저 하지 않는다. 그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 이것을 관할 것이다.

「창법화제목초」, 12쪽

관(觀)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순서가 바뀐다. 천태에게 제목은 먼저 풀어야 할 대상이었고, 수행은 『마하지관』의 관법이었다. 대성인에게 제목은 먼저 불러야 할 대상이 되었다. 뜻이 있는 사람은 부른 뒤에 배워서 관한다.

이 전환은 2년 전(1258)의 「일념삼천법문」에 이미 뚜렷했다. 五에서 읽은 「일념삼천의 관념도 일심삼관의 관법도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에 들어 있다」 뒤에 대성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智者は読誦に観念をも並ぶべし愚者は題目計りを唱ふとも此の理に会う可し

지혜로운 사람은 독송에 관념을 아울러도 좋다. 어리석은 사람은 제목만 불러도 이 이치에 들어맞는다.

「일념삼천법문」, 415쪽

그리고 선종이 관심만을 본뜻이라 하는 것을 이렇게 반박한다. 일념삼천·일심삼관 같은 관심만이 법화경의 간심이라면 제목에 「십여시」를 두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목에 묘법연화경을 두었으니 따질 것이 없다(415쪽). 경의 이름 자리에 무엇이 놓였는지가 곧 경의 뜻이라는 논리다.

天台천태 — 먼저 푼다
  1. 題目
  2. 解오중현의 — 名 · 體 · 宗 · 用 · 敎로 푼다
  3. 觀일념삼천을 관한다
  4. 수행『마하지관』의 관법
大聖人대성인 — 먼저 부른다
  1. 題目
  2. 唱南無妙法蓮華經
  3. 習學 · 觀뜻이 있는 이는 배워서 관한다
一念三千の觀を先とせず「창법화제목초」 1260智者は讀誦に觀念をも並ぶべし愚者は題目計りを唱ふとも此の理に會う可し「일념삼천법문」 1258
도표 4 · 푸는 제목에서 부르는 제목으로

천태도 불렀다 —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그런데 제목을 부르는 일은 대성인이 처음 한 것인가. 대성인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당체의초」는 이렇게 묻는다. 남악·천태·전교는 아직 남묘호렌게쿄를 부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당체연화를 몰랐는가.

但し此等の大師等も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事を自行真実の内証と思食されしなり、南岳大師の法華懺法に云く「南無妙法蓮華経」文、天台大師の云く「南無平等大慧一乗妙法蓮華経」文、又云く「稽首妙法蓮華経」云云、又「帰命妙法蓮華経」云云、伝教大師の最後臨終の十生願の記に云く「南無妙法蓮華経」云云

다만 이 대사들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일을 자기 수행의 참된 내증으로 여기셨다. 남악대사의 『법화참법』에 「남묘호렌게쿄」라 했고, 천태대사는 「남무평등대혜일승묘법연화경」이라 했으며, 또 「계수묘법연화경」, 「귀명묘법연화경」이라 했다. 전교대사의 임종의 「십생원기」에 「남묘호렌게쿄」라 했다.

「당체의초」, 519쪽

그들은 알았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널리 펴지 않았다. 대성인은 그 까닭을 둘로 든다. 「첫째는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부촉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한다. 「무릇 묘법 다섯 글자는 말법에 유포될 크고 흰 법(大白法)이며 지용천계 대사의 부촉이다. 그러므로 남악·천태·전교 등은 안으로 헤아려 알면서 말법의 도사에게 이것을 양보하고 펴지 않았다」(519쪽).

말년의 「삼대비법품승사」는 이 차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題目とは二の意有り所謂正像と末法となり、正法には天親菩薩・竜樹菩薩・題目を唱えさせ給いしかども自行ばかりにしてさて止ぬ、像法には南岳天台等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給いて自行の為にして広く他の為に説かず是れ理行の題目なり、末法に入て今日蓮が唱る所の題目は前代に異り自行化他に亘りて南無妙法蓮華経なり名体宗用教の五重玄の五字なり

제목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정법·상법 시대의 제목과 말법 시대의 제목이다. 정법 시대에는 천친보살·용수보살이 제목을 부르셨지만 자기 수행만으로 그쳤다. 상법 시대에는 남악·천태 등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셨지만 자기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널리 남을 위해 설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理)를 행하는 제목(理行の題目)이다. 말법에 들어와 지금 니치렌이 부르는 제목은 앞 시대와 달라 자행과 화타에 걸친 남묘호렌게쿄이며, 명·체·종·용·교 오중현의 다섯 글자다.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블로그 강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정법·상법의 논사와 인사들은 불법을 끝까지 닦아 마지막에 이른 경지로서 제목을 불렀다. 그것은 수행이라기보다 깨달은 경지에서의 불사(佛事)였다. 남에게 배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증득할 것이었으므로 남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말법의 제목은 다르다. 마지막에 이르는 경지가 아니라 말법 중생의 생명에 내리는 부처의 씨앗(仏種) 이며, 그래서 자행과 화타에 걸친다. 강의는 또 「명체종용교 오중현의 다섯 글자」라는 말에 주목한다. 천태에게 오중현의는 제목을 푸는 다섯 관점이었다. 대성인에게 남묘호렌게쿄는 이름(名)이면서 동시에 사의 일념삼천을 본체(體)로 하고, 부처의 인과를 근본(宗)으로 하며, 중생의 불인을 열고 불과를 무르익게 하는 작용(用)을 갖추고, 일체경의 요체 중 요체(敎)인 법체 그 자체다. 강의가 인용하는 「십팔원만초」는 이것을 한 자씩 배당한다. 「묘는 명, 법은 체, 연은 종, 화는 용, 경은 교다」(1364쪽. 2차 확인).

정법 · 용수 · 천친正法自行ばかり부르셨지만 자기 수행만으로 그쳤다
상법 · 남악 · 천태像法自行の爲 · 理行の題目자기 수행을 위해 부르고 널리 남을 위해 설하지 않았다
말법 · 니치렌末法自行化他자행과 화타에 걸친 남묘호렌게쿄名體宗用敎の五重玄の五字「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妙は名・法は體・蓮は宗・華は用・經は敎「십팔원만초」 1364쪽 · 2차 확인
도표 5 · 이행의 제목과 자행화타의 제목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 하나의 묘법

그러면 부르는 것과 관하는 것은 정말 하나인가. 「일념삼천법문」은 『마하지관』 권2의 「설(說)에서도 묵(黙)에서도(而於説黙)」를 끌어와, 설은 경이고 묵은 관념이라고 풀었다(414쪽). 말하는 수행과 침묵하는 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二 15절에서 읽은 「입정관초」는 이것을 전교대사가 전했다는 한 구절로 더 깊이 보여 준다.

夫れ一言の妙法とは両眼を開いて五塵の境を見る時は随縁真如なるべし両眼を閉じて無念に住する時は不変真如なるべし、故に此の一言を聞くに万法玆に達し一代の修多羅一言に含す

무릇 한마디의 묘법이란, 두 눈을 뜨고 오진의 경계를 볼 때는 수연진여요, 두 눈을 감고 무념에 머물 때는 불변진여다. 그러므로 이 한마디를 들으면 만법이 여기에 이르고 일대의 경전이 한마디에 담긴다.

「입정관초」, 531쪽

그리고 대성인은 이 구절을 받아 스스로 이렇게 맺는다.

目を開いて妙法を思えば随縁真如なり目を閉じて妙法を思えば不変真如なり此の両種の真如は只一言の妙法に有り我妙法を唱うる時・万法玆に達し一代の修多羅一言に含す

눈을 뜨고 묘법을 생각하면 수연진여요, 눈을 감고 묘법을 생각하면 불변진여다. 이 두 가지 진여는 오직 한마디의 묘법에 있다. 내가 묘법을 부를 때 만법이 여기에 이르고 일대의 경전이 한마디에 담긴다.

「입정관초」, 533쪽

눈을 뜨고 세상의 일에 응하는 지혜(수연진여)와 눈을 감고 변하지 않는 진리에 머무는 것(불변진여). 二 공·중도에서 가(假)와 공(空)으로 보았던 두 면이 한마디 묘법에서 만난다. 부르는 한마디가 곧 관이다. 이 두 진여는 다음 절 『어의구전』의 「남무」 풀이에서 다시 나온다.

『어의구전』 「남묘호렌게쿄의 일」 — 일곱 글자를 한 자씩

『어의구전』이라는 책

『어의구전(御義口傳)』은 대성인이 미노부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의 요문을 강의한 것을 닛코 상인이 받아 적은 것으로 전해진다. 28품 각 품의 요문을 「몇 가지 대사(箇の大事)」로 나누어 먼저 천태·묘락의 해석을 들고, 이어 「어의구전에 이르기를(御義口伝に云く)」로 대성인의 풀이를 적는 형식이다. 그 풀이마다 거의 빠짐없이 한 구절이 들어간다.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은(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は)」. 법화경의 모든 대목을, 지금 제목을 부르는 사람의 자리에서 다시 읽는다는 뜻이다.

그 책의 맨 앞, 28품 강의보다 먼저 놓인 것이 「남묘호렌게쿄의 일」 이다. 경 전체의 제목부터 푼 것이다. 블로그 강의는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남묘호렌게쿄야말로 일체경의 근본이고 법화경의 간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의구전』의 다른 대목(793쪽)을 든다. 「지금 니치렌 등이 펴는 남묘호렌게쿄는 체(體)요 마음이며, 이십팔품은 용(用)이다. 이십팔품은 조행이요 제목은 정행이다. 정행에 조행을 거두어야 한다」(2차 확인).

여기서는 그 첫 강의 전문을 차례로 읽는다. 짧은 글이지만, 이 사이트의 여섯 자리가 모두 이 안에 접혀 있다.

남무 — 목숨으로 돌아감, 사람과 법

御義口伝に云く南無とは梵語なり此には帰命と云う、人法之れ有り人とは釈尊に帰命し奉るなり法とは法華経に帰命し奉る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남무란 범어다. 여기서는 귀명이라 한다. 사람과 법이 있다. 사람이란 석존에게 귀명하는 것이요, 법이란 법화경에 귀명하는 것이다.

『어의구전』, 708쪽

남무(南無) 는 산스크리트 namas(namo)의 소리를 옮긴 말이다. 뜻으로 옮기면 귀명(歸命), 곧 「목숨을 바쳐 돌아간다」. 블로그의 어석은 「남무(나무)」는 소리를 옮긴 것(음역)이고 「귀명」은 뜻을 옮긴 것(의역)이라고 설명한다.

귀명이라는 말의 무게를 대성인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풀었다.

南無と申すは天竺のことばにて候、漢土・日本には帰命と申す帰命と申すは我が命を仏に奉ると申す事なり、我が身には分に随いて妻子・眷属・所領・金銀等をもてる人人もあり・又財なき人人もあり、財あるも財なきも命と申す財にすぎて候財は候はず、されば・いにしへの聖人・賢人と申すは命を仏にまいらせて・仏にはなり候なり

남무라는 것은 천축의 말이다. 한토와 일본에서는 귀명이라 한다. 귀명이란 내 목숨을 부처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사람에 따라 처자·권속·영지·금은을 가진 이도 있고 재물이 없는 이도 있다. 그러나 재물이 있든 없든 목숨이라는 재물보다 더한 재물은 없다. 그러므로 옛 성인·현인은 목숨을 부처에게 바쳐 부처가 되셨다.

「백미일표어서」, 1596쪽

그러나 같은 편지는 곧바로 덧붙인다. 설산동자처럼 몸을 귀신에게 던지고 약왕보살처럼 팔을 태우는 것은 성인·현인의 일이라 우리는 하기 어렵다. 범부는 「뜻(志)」이라는 글자를 알아서 부처가 된다. 단 한 벌 입은 옷을 법화경에 바치는 것이 몸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고, 굶주리는 세상에 오늘 목숨을 이을 단 하나의 먹을 것을 부처에게 바치는 것이 곧 목숨을 부처에게 바치는 것이다(1596~1597쪽). 귀명은 영웅적인 희생이 아니라, 지금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법에 바치는 범부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흰쌀은 흰쌀이 아니라 곧 목숨이다(白米は白米にはあらずすなはち命なり)」라는 한 줄이 있다(1597쪽).

『어의구전』은 귀명의 대상을 사람(人) 과 법(法) 둘로 나눈다. 블로그 강의는 이것을 이렇게 읽는다. 무엇에 목숨을 바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이 정해진다. 옛 가신은 주군에게, 연구자는 연구에, 등산가는 산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행복으로 이어지는 귀명은 아니다. 강의는 가장 근원적인 귀명을 「니치렌 대성인에게 귀명하고 남묘호렌게쿄에 귀명하는 것」이라 하고, 「관심본존초」의 수지즉관심을 들어 이것이 바른 귀명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사람과 법」은 3부의 인법일개(人法一箇)로 이어진다.

귀와 명 — 변하지 않는 이치로 돌아가, 인연 따라 움직이는 지혜에 바친다

又帰と云うは迹門不変真如の理に帰するなり命とは本門随縁真如の智に命くなり帰命とは南無妙法蓮華経是なり、釈に云く随縁不変一念寂照と

또 귀라고 하는 것은 적문의 불변진여의 이(理)에 돌아가는 것이다. 명이란 본문의 수연진여의 지(智)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귀명이란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다. 해석에 이르기를 「수연과 불변, 한 생각에 고요하면서 비춘다(随縁不変一念寂照)」라 했다.

『어의구전』, 708쪽

블로그의 어석은 두 진여를 이렇게 정리한다. 불변진여의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법화경 적문이 제법실상에 맞추어 십계호구·백계천여·일념삼천의 이치를 설한 것이 이것이다. 수연진여의 지는 인연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일에 응해 행복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활동이며, 불계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실제 행동을 근본으로 삼아 인·과·국토에 맞추어 일념삼천을 설한 본문이 수연진여의 지가 된다.

강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석존의 법화경은 본문과 적문 모두 「불변진여의 이」가 되고, 지금 제목을 부르는 생명이 「수연진여의 지」가 된다. 그리고 강의는 이 관계를 물과 물결에 비유한다. 불변진여는 큰 바다와 같고 수연진여는 물결과 같다. H₂O라는 변하지 않는 성질이 인연에 따라 찬물·더운물·수증기·얼음이 되는 것과도 같다. 어떤 사람 A는 밥을 먹을 때도, 전철을 탈 때도, 웃을 때도, 화낼 때도 늘 A다. 수연을 떠나 불변이 있지 않고 불변 없이 수연이 있지 않다. 「수연불변 일념적조」란 이 둘이 한 생각(一念) 안에 동시에 있는 모습이다.

「적조(寂照)」라는 말도 새겨 둘 만하다. 강의는 이것을 소승의 「적멸(寂滅)」과 대비한다. 소승은 번뇌를 끊어 없애고 생사를 떠난 곳에 깨달음이 있다고 했다. 「생멸이 다하여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대승의 「적조」는 고요하면서(寂) 비추는(照) 것이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이 세상을 떠나 깨달음이 없고, 이 몸이 그대로 상락아정이다. 앞 절에서 본 「입정관초」의 두 진여, 곧 눈을 뜨고 부르는 묘법과 눈을 감고 부르는 묘법이 여기서 「귀」와 「명」 두 글자가 된다.

歸귀 — 돌아감迹門不變眞如の理色法 · 몸눈을 감고 — 무념에 머물 때三 제법실상
命명 — 목숨을 바침本門隨緣眞如の智心法 · 마음눈을 뜨고 — 오진의 경계를 볼 때四 구원실성
隨緣不變一念寂照 — 色心不二なるを一極と云う『어의구전』 708쪽
강의의 비유 — 큰 바다(불변진여)와 그 위의 물결(수연진여)물결 — 수연 (인연 따라 움직임)큰 바다 — 불변 (변하지 않음)
도표 6 · 귀명의 두 글자 — 불변진여와 수연진여

색법과 심법 —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곳

又帰とは我等が色法なり命とは我等が心法なり色心不二なるを一極と云うなり、釈に云く一極に帰せしむ故に仏乗と云うと

또 귀란 우리의 색법(몸)이요, 명이란 우리의 심법(마음)이다. 색과 심이 둘이 아닌 것을 일극(一極)이라 한다. 해석에 이르기를 「일극에 돌아가게 하므로 불승이라 한다」라 했다.

『어의구전』, 708쪽

귀는 몸이고 명은 마음이다. 강의는 「귀」를 늘 신진대사하며 우주로 돌아가는 몸으로, 「명」을 늘 우주의 리듬에 어울리려는 마음의 작용으로 풀었다. 그리고 유물론과 유심론을 모두 부분적인 시각이라 비판하며, 생명은 색심불이(色心不二) 라고 말한다. 남무는 머리로 하는 동의가 아니다. 몸과 마음 전체로 돌아가는 일이다. 입으로 부르는 목소리(색법)와 믿는 마음(심법)이 하나일 때 그것이 귀명이다.

이 대목은 三의 「색과 심」, 四의 「신토(身土)」, 五의 「삼세간 — 오음세간」과 겹친다. 법은 마음속의 관념이 아니고 몸 밖의 물질도 아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이 생명의 한가운데에 있다.

범어와 한어 — 두 문명이 만나는 이름

又云く南無妙法蓮華経の南無とは梵語妙法蓮華経は漢語なり梵漢共時に南無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

또 이르기를, 남묘호렌게쿄의 남무는 범어요 묘법연화경은 한어다. 범어와 한어를 함께 써서 남묘호렌게쿄라 한다.

『어의구전』, 708쪽

「남무」는 인도의 말이고 「묘법연화경」은 중국의 말이다. 한 이름 안에서 두 문명의 말이 만난다. 三에서 본 구마라집의 번역이 원문의 가능성을 새 언어로 열었듯, 이 이름은 불교가 건너온 길 전체를 품는다. 블로그 강의는 이 구절을 「동양의 광선유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예언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하고, 대성인의 불법에 치우침이 없다는 증거라고 했다. 한 나라의 말로만 된 이름이 아니라는 데에 이미 세계의 법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 뜻은 5부의 광선유포에서 다시 읽는다.

아홉 글자와 아홉 존 — 구계가 곧 불계

又云く梵語には薩達磨芬陀梨伽蘇多覧と云う此には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薩は妙なり、達磨は法なり、芬陀梨伽は蓮華なり蘇多覧は経なり、九字は九尊の仏体なり九界即仏界の表示なり

또 이르기를, 범어로는 살달마분다리가소다람(薩達磨芬陀梨伽蘇多覧)이라 한다. 여기서는 묘법연화경이라 한다. 살은 묘요, 달마는 법이요, 분다리가는 연화요, 소다람은 경이다. 아홉 글자는 아홉 존의 부처의 몸이며, 구계가 곧 불계임을 나타낸다.

『어의구전』, 708쪽

여기서 「아홉 글자(九字)」는 바로 앞에 나온 범어 제목의 음사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 제목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를 소리로 옮긴 글자들이다. 블로그의 어석은 아홉 글자에 대해 두 가지 설을 든다. 하나는 천태의 『법화현의』가 이 제목을 「살달마·분다리·소다람(薩達磨・芬陀梨・蘇多覧)」의 아홉 자로 옮긴 데 따른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범어로 쓰면 아홉 음절이 된다는 설이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도 같은 제목을 「살달마분타리가소다람(薩達磨分陀利伽蘇多攬)」으로 적고, 선무외가 전한 법화경 간심의 진언 속 「살리달마(薩哩達磨)」를 들어 「살은 바름(正)이요, 바름은 묘요, 묘는 바름이다」라고 했다(「개목초」, 209쪽).

「아홉 존(九尊)」은 진언종이 말하는 태장계 만다라의 가운데, 여덟 잎 연꽃 모양의 중대팔엽원을 가리킨다. 가운데에 대일여래가 앉고 둘레 여덟 잎에 네 부처와 네 보살이 앉아 모두 아홉 존이 된다. 블로그 어석에 따르면 대성인은 이것을 의의판문(依義判文), 곧 법화경의 뜻에 비추어 다시 읽어, 아홉 존 전체를 「구계가 곧 불계임을 나타낸 것」 으로 풀었다. 강의는 이것을 인과구시와 잇는다. 구계는 원인이고 불계는 결과다. 구계즉불계이면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있다. 이것이 곧 연화의 법이다.

묘와 법 — 법성과 무명이 한 몸

妙とは法性なり法とは無明なり無明法性一体なるを妙法と云うなり

묘란 법성이요 법이란 무명이다. 무명과 법성이 한 몸인 것을 묘법이라 한다.

『어의구전』, 708쪽

묘(妙) 는 깨달음의 본성(法性)이고 법(法) 은 미혹(無明)이다. 둘이 한 몸인 것이 묘법이다. 二의 번뇌즉보리, 三의 「지옥은 지옥의 모습 그대로」, 五의 「삼천은 한 생각의 무명을 벗어나지 않는다」가 여기서 이름 하나로 모인다. 묘법은 미혹을 떠난 저편의 깨끗한 진리가 아니다. 미혹과 깨달음이 한 몸인 지금 이 생명의 이름이다.

『어의구전』은 오백제자수기품의 「술에 취해 누움(酔酒而臥)」을 풀며 이것을 더 선명하게 말한다. 술은 무명이고 깨어남은 법성이다. 그런데 「술과 깨어남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酒は無明なり醒むるは法性なり法は酒なり妙は醒めたり妙法と唱うれば無明法性体一なり

술은 무명이요 깨어남은 법성이다. 법은 술이요 묘는 깨어남이다. 묘법이라고 부르면 무명과 법성이 한 몸이다.

『어의구전』, 734쪽

부르면 한 몸이 된다. 무명을 먼저 없애고 나서 법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술 취한 그 몸이 「묘법」이라고 부르는 순간, 취함과 깨어남이 한 몸임이 드러난다.

연화 — 원인과 결과가 한 몸

蓮華とは因果の二法なり是又因果一体なり

연화란 인과의 두 법이다. 이것 또한 인과가 한 몸이다.

『어의구전』, 708쪽

연꽃은 꽃이 필 때 이미 그 안에 열매(연밥)가 들어 있다. 다른 꽃은 꽃이 지고 나서 열매가 맺지만, 연꽃은 꽃(원인)과 열매(결과)가 동시에 있다. 이것을 인과구시(因果俱時) 라 한다. 이 한 줄은 2부 6절에서 「당체의초」와 함께 자세히 읽는다.

경 — 모든 중생의 목소리

経とは一切衆生の言語音声を経と云うなり、釈に云く声仏事を為す之を名けて経と為すと、或は三世常恒なるを経と云うなり

경이란 일체중생의 언어와 음성을 경이라 한다. 해석에 이르기를 「소리가 불사를 짓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경이라 한다」라 했다. 혹은 삼세에 늘 한결같은 것을 경이라 한다.

『어의구전』, 708쪽

경은 책에 적힌 문자만이 아니다. 모든 중생의 말과 목소리가 경이다. 三에서 본 묘락의 「의보와 정보가 늘 묘한 경을 편다」, 五에서 본 「이 사바는 귀로 도를 얻는 나라」가 여기서 이어진다. 「소리가 불사를 짓는다(聲爲佛事)」는 천태의 말이다. 대성인은 「일념삼천법문」에서 천태가 다섯 글자를 푼 말을 인용하며, 이 구절을 「경」 풀이로 삼았다(「일념삼천법문」, 414쪽).

블로그 강의는 이 대목을 대담하게 읽는다. 우주의 모든 말과 동작이 경이다. 현철의 말도 경이고 평범한 사람의 외침도 경이다. 생선 가게 주인은 생선 가게 주인의 경을, 목수는 목수의 경을 날마다 읽는다. 다만 그 경의 높낮이가 있을 뿐이다. 강의는 묘법연화경의 경이 가장 높은 까닭을, 묘법이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생명이고 연화가 그 생명을 품은 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은 또한 삼세에 늘 한결같은 것(三世常恒), 과거·현재·미래를 꿰뚫어 이어지는 것이다. 「경(經)」 자의 본뜻이 베틀의 날실, 곧 세로로 꿰는 실이라는 것과도 통한다.

법계는 묘법이다

法界は妙法なり法界は蓮華なり法界は経なり蓮華とは八葉九尊の仏体なり能く能く之を思う可し已上。

법계는 묘법이요, 법계는 연화요, 법계는 경이다. 연화란 팔엽구존의 부처의 몸이다. 잘 잘 생각하라. 이상.

『어의구전』, 708쪽

이 대목의 결론이다. 묘법·연화·경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법계 그 자체다. 세계 전체가 묘법이고, 연화이고, 경이다. 五의 일념삼천이 한 생각에 법계를 거두었다면, 여기서는 법계가 곧 이 일곱 글자다.

마지막의 「팔엽구존」에 대해 블로그 강의는 흥미로운 풀이를 덧붙인다. 일관(日寬)의 「당체의초 문단」과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해설을 따라, 옛 불교가 말한 「가슴 속의 팔엽 연화(胸間の八葉の蓮華)」는 우리 생명 자체가 묘법연화경이라는 것을, 우리 몸 안에서 찾아낸 이름이라고 한다. 연꽃은 멀리 있는 상징이 아니라 이 몸의 가슴 한가운데에 있다. 이 생각은 뒤의 본존 절에서 「가슴 속의 육단(胸中の肉團)」으로 다시 나온다.

梵 범어漢 한어
南無妙法蓮華經

梵漢共時に南無妙法蓮華經と云うなり

南無= 歸命人 · 法歸 · 命
妙法= 無明法性一體妙 = 法性法 = 無明
蓮華= 因果一體因果俱時
經= 一切衆生の言語音聲聲爲佛事三世常恒
法界は妙法 · 法界は蓮華 · 法界は經

薩達磨 · 芬陀梨伽 · 蘇多覽 — 九字 = 九尊 = 九界卽佛界 · 『어의구전』 708쪽

도표 7 · 일곱 글자의 해부 — 남무·묘법·연화·경

여섯 자리가 접혀 있는 한 쪽

이 한 쪽 남짓한 강의를 이 사이트의 계보에 겹쳐 보면 이렇다.

『어의구전』의 구절계보의 자리
귀 — 적문 불변진여의 이三제법실상
명 — 본문 수연진여의 지四구원실성
수연불변 일념적조五일념삼천 — 한 생각에
색심불이五삼세간四신토
무명법성 일체 = 묘법二번뇌즉보리, 공·가·중
인과 일체 = 연화四본인본과
일체중생의 언어음성 = 경一연기 — 모든 것이 서로 울림
법계는 묘법·연화·경여섯 자리 전체
도표 8 · 한 쪽에 접힌 여섯 자리

몸과 목소리의 경 — 『어의구전』의 다른 대목들

「남묘호렌게쿄의 일」은 첫 강의일 뿐이다. 『어의구전』은 28품의 요문 곳곳에서 일곱 글자를 다시, 새롭게 푼다. 블로그 강의가 남아 있는 서품부터 오백제자수기품까지, 그리고 수량품에서 몇 대목을 골라 읽는다.

이 다섯 자의 몸이 곧 다섯 글자

방편품의 「오직 일대사인연으로(唯以一大事因縁)」를 풀며 대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又云く我等が頭は妙なり喉は法なり胸は蓮なり胎は華なり足は経なり此の五尺の身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

또 이르기를, 우리의 머리는 묘요, 목은 법이요, 가슴은 연이요, 배는 화요, 발은 경이다. 이 다섯 자의 몸이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다.

『어의구전』, 716쪽

머리에서 발까지, 이 몸이 그대로 다섯 글자다. 같은 대목은 곧이어 개시오입(開示悟入)을 제목을 부르는 사람의 신심으로 다시 푼다.

我等が一身の妙法五字なりと開仏知見する時即身成仏するなり、開とは信心の異名なり信心を以て妙法を唱え奉らば軈て開仏知見するなり

우리 한 몸이 묘법 다섯 글자라고 부처의 지견을 열 때 즉신성불한다. 연다(開)는 것은 신심의 다른 이름이다. 신심으로 묘법을 부르면 곧 부처의 지견을 연다.

『어의구전』, 716쪽

부처가 세상에 나온 「일대사」는 결국 우리 한 몸이 묘법 다섯 글자임을 여는 것이고, 그 여는 힘이 신심이다. 같은 대목은 「일대사(一大事)」의 세 글자를 삼제로도 푼다. 「일은 중제, 대는 공제, 사는 가제다. 이 원융의 삼제는 무엇인가. 이른바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다. 이 다섯 글자는 니치렌 출세의 본회다」(716쪽). 二의 원융삼제가 여기서 일곱 글자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리고 끝에 이렇게 적는다. 「사(事)의 일념삼천은 니치렌의 몸에 닿은 대사다」. 일념삼천이 한 사람의 몸 위에서 사실이 된다는 것, 이것이 五에서 본 사(事)의 일념삼천이다.

다섯 개의 거울

비유품의 「비유로써 이해함(以譬喩得解)」을 풀며 대성인은 거울을 말한다.

惣じて鏡に付て重重の相伝之有り所詮鏡の能徳とは万像を浮ぶるを本とせり妙法蓮華経の五字は万像を浮べて一法も残る物之無し、又云く鏡に於て五鏡之れ有り妙の鏡には法界の不思議を浮べ・法の鏡には法界の体を浮べ.蓮の鏡には法界の果を浮べ.華の鏡には法界の因を浮べ・経の鏡には万法の言語を浮べたり

무릇 거울에 대해서는 겹겹의 상전이 있다. 요컨대 거울의 덕은 만상을 비추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는 만상을 비추어 한 법도 남기지 않는다. 또 이르기를, 거울에 다섯 거울이 있다. 묘의 거울에는 법계의 불가사의를 비추고, 법의 거울에는 법계의 체를 비추며, 연의 거울에는 법계의 과를 비추고, 화의 거울에는 법계의 인을 비추며, 경의 거울에는 만법의 언어를 비춘다.

『어의구전』, 723쪽

그리고 결론한다. 「스스로 떠오르고 스스로 비추는 거울(自浮自影の鏡)이란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다」. 五 8절에서 「관심본존초」의 거울 비유를 읽었다. 여기서는 일곱 글자 자체가 법계 전체를 남김없이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믿음과 비방이 어떻게 비추어지는지(信謗の浮び様) 잘 생각하라」고 했다. 같은 거울이라도 무엇을 품고 서느냐에 따라 비치는 것이 다르다.

  • 妙法界の不思議법계의 불가사의
  • 法法界の體법계의 체
  • 蓮法界の果법계의 과
  • 華法界の因법계의 인
  • 經萬法の言語만법의 언어
自浮自影の鏡とは南無妙法蓮華經是なり『어의구전』 723쪽
도표 9 · 다섯 거울 — 묘·법·연·화·경

숨이 곧 목소리, 목소리가 곧 제목

비유품의 첫머리를 풀며 대성인은 묘락의 「긴 바람은 쉬지 않고 빈 하늘의 달은 늘 걸려 있다(長風息むこと靡く空月常に懸れり)」를 들고 이렇게 풀었다.

長風とは我等が息なり空月とは心月なり法華の生死とは三世常恒にして隠顕之無し我等が息風とは吐く処の言語なり是南無妙法蓮華経なり

긴 바람이란 우리의 숨이요, 빈 하늘의 달이란 마음의 달이다. 법화경의 생사는 삼세에 늘 한결같아 숨고 드러남이 없다. 우리의 숨바람이란 내뱉는 말이다. 이것이 남묘호렌게쿄다.

『어의구전』, 721쪽

숨은 목소리가 되고, 목소리는 말이 되며, 그 말이 남묘호렌게쿄다. 화성유품의 「그 조상은 전륜성왕(其祖転輪聖王)」을 풀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의 윤보(輪寶)란 우리가 내뱉는 언어음성이다. 이 음성의 윤보란 남묘호렌게쿄다」(733쪽). 세계를 굴리는 수레바퀴가 목소리다.

서품의 「하늘 북이 저절로 울린다(天鼓自然鳴)」에서는 더 분명하다.

天鼓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自然とは無障碍なり鳴とは唱うる所の音声なり

하늘 북이란 남묘호렌게쿄요, 저절로란 걸림이 없음이요, 울림이란 부르는 음성이다.

『어의구전』, 713쪽

같은 대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옥의 옥졸이 죄인을 꾸짖는 소리, 굶주린 아귀의 소리, 일체중생의 탐·진·치의 생각들까지 「이 음성의 체는 남묘호렌게쿄다」 라고 한다. 비유품의 「일시에 함께 짓는다(一時倶作)」에서는 「십계의 언어는 한 번의 제목을 함께 짓는다(十界の語言は一返の題目を倶作したり)」고 했다(723쪽). 법계의 모든 소리가 제목을 함께 부르고 있다. 앞 절의 「경이란 일체중생의 언어음성」이 여기서 구체적인 장면이 된다.

합장 — 두 손바닥이 만날 때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기뻐하며 일어나 합장하는 장면(即起合掌)을 두고 대성인은 이렇게 풀었다.

合掌とは法華経の異名なり向仏とは法華経に値い奉ると云うなり合掌は色法なり向仏は心法なり、色心の二法を妙法と開悟するを歓喜踊躍と説くなり

합장이란 법화경의 다른 이름이다. 부처를 향함이란 법화경을 만난다는 것이다. 합장은 색법이요 부처를 향함은 심법이다. 색심의 두 법을 묘법이라고 깨닫는 것을 「환희용약」이라 설한다.

『어의구전』, 722쪽

그리고 두 손바닥을 이렇게 나눈다. 「합은 불계요 장은 구계다. 구계는 권(權)이요 불계는 실(實)이다」. 십계가 모두 합장 두 글자에 들어가고, 지옥·아귀의 저마다의 당체가 그대로 합장하여 부처를 향한다. 블로그 강의는 이 대목에서 「남묘호렌게쿄라는 하나의 대비법을 열면 삼대비법이 되고, 다시 열면 육대비법, 다시 열면 이십팔품, 팔만법장이 된다」는 도식을 제시한다. 4부에서 이 도식을 다시 본다.

약초유품 — 한 땅, 한 비

약초유품의 「한 땅에서 나고 한 비에 적셔진다(一地所生一雨所潤)」는 이 사이트의 이름과 가장 가까운 비유다. 같은 땅에서 나고 같은 비를 맞지만, 풀과 나무는 저마다 다르게 자란다. 대성인은 이렇게 풀었다.

一地所生一雨所潤は無差別譬・而諸草木各有差別は有差別譬なり無差別譬の故に妙なり有差別譬の故に法なり云云、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は有差を置くなり廿八品は有差別なり、妙法の五字は無差別なり

한 땅에서 나고 한 비에 적셔진다는 것은 차별 없음의 비유요, 그런데도 모든 풀과 나무가 저마다 차별이 있다는 것은 차별 있음의 비유다. 차별 없음의 비유이므로 묘요, 차별 있음의 비유이므로 법이다.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은 차별을 두는 것이다. 이십팔품은 차별이 있고 묘법 다섯 글자는 차별이 없다.

『어의구전』, 729쪽

그리고 말법에 펴는 것은 「과(果)로부터 인(因)을 향하는 한 비(従果向因の一雨)」이며, 「한 비란 제목에 다른 수행을 섞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비(妙) 가 내리고, 풀과 나무는 저마다(法) 자란다. 벚꽃은 벚꽃대로, 매화는 매화대로. 이 사이트의 맺음에서 이 비유를 다시 만난다.

고르게 내리는 비 속의 들판 — 앞쪽에는 빗방울 맺힌 풀과 작은 들꽃, 가운데에는 꽃 핀 관목과 어린 나무들, 뒤에는 한 그루 큰 나무가 선 금박 수묵화
그림 2 · 한 비에 젖는 풀과 나무
2부 법체이름이 가리키는 것

1부에서 제목은 「이름이면서 몸이며 마음」이라고 했다. 2부는 그 몸, 곧 법체(法體) 를 읽는다. 묘(妙)는 무엇이고, 연화(蓮華)는 왜 비유가 아니며, 그 법체는 결국 어디에 있는가.

묘 — 열다, 갖추다, 되살리다

한 생각의 불가사의

대성인이 서른넷에 쓴 「일생성불초」(1255)는 묘를 이렇게 정의한다.

抑妙とは何と云う心ぞや只我が一念の心・不思議なる処を妙とは云うなり不思議とは心も及ばず語も及ばずと云う事なり

대저 묘란 어떤 뜻인가. 다만 나의 한 생각의 마음이 불가사의한 곳을 묘라 한다. 불가사의란 마음도 미치지 못하고 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생성불초」, 384쪽

그리고 곧이어 二 13절에서 중도의 핵심으로 읽었던 문장이 온다.

然れば・すなはち起るところの一念の心を尋ね見れば有りと云はんとすれば色も質もなし又無しと云はんとすれば様様に心起る有と思ふべきに非ず無と思ふべきにも非ず、有無の二の語も及ばず有無の二の心も及ばず有無に非ずして而も有無に徧して中道一実の妙体にして不思議なるを妙とは名くるなり

그렇다면 일어나는 한 생각의 마음을 찾아보면, 있다고 하려니 빛깔도 바탕도 없고, 없다고 하려니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난다. 있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없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있음과 없음의 두 말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과 없음의 두 마음도 미치지 못한다. 있음과 없음이 아니면서 있음과 없음에 두루하여 중도일실의 묘체로서 불가사의한 것을 묘라 이름한다.

「일생성불초」, 384쪽

이어서 「이 묘한 마음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이 법문의 불가사의를 나타내기 위해 비유를 사물에 본떠 연화라 이름한다. 한 마음을 묘라고 알면 다른 마음도 묘법이라 아는 곳을 묘경이라 한다」고 했다(384쪽). 二의 공·가·중이 곧 묘의 뜻이다. 그리고 묘·법·연화·경이 모두 한 생각의 마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일생성불초」는 이것을 수행으로 곧장 잇는다. 첫머리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夫れ無始の生死を留めて此の度決定して無上菩提を証せんと思はばすべからく衆生本有の妙理を観ずべし、衆生本有の妙理とは・妙法蓮華経是なり故に妙法蓮華経と唱へたてまつれば衆生本有の妙理を観ずるにてあるなり

무릇 시작 없는 생사를 멈추고 이번에 반드시 무상보리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중생에게 본래 있는 묘한 이치를 관해야 한다. 중생에게 본래 있는 묘한 이치란 묘법연화경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면 중생에게 본래 있는 묘한 이치를 관하는 것이 된다.

「일생성불초」, 383쪽

부르는 것이 곧 관하는 것이다. 1부 2절에서 본 전환이 대성인의 가장 이른 어서 가운데 하나에 이미 이렇게 적혀 있다.

묘의 세 뜻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묘를 여러 각도로 풀었다. 창가학회 교학은 그 가운데 세 가지를 모아 묘의 삼의(三義) 라 부른다. 개(開)·구족원만(具足圓滿)·소생(蘇生)이다. 셋 모두 「법화경제목초」(1266)에 나온다. 여기서는 블로그 本文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어서들과 함께 읽는다.

① 열다(開). 천태는 『법화현의』에서 다섯 글자를 이렇게 풀었고, 대성인은 「일념삼천법문」에서 그 풀이를 인용했다.

天台の御釈に「秘密の奥蔵を発く之を称して妙と為す・権実の正軌を示す故に号して法と為す、久遠の本果を指す之を喩うるに蓮を以てす、不二の円道に会す之を譬うるに華を以てす、声仏事を為す之を称して経と為す」と釈し給う、又「妙とは不可思議の法を褒美するなり又妙とは十界・十如・権実の法なり」と云云

천태의 해석에 「비밀의 깊은 곳간을 여는 것을 일컬어 묘라 하고, 권과 실의 바른 궤도를 보이므로 법이라 부르며, 구원의 본과를 가리키는 것을 연에 비유하고, 둘이 아닌 원만한 길에 맞는 것을 화에 비유하며, 소리가 불사를 짓는 것을 일컬어 경이라 한다」라 하셨다. 또 「묘란 불가사의한 법을 칭찬하는 것이다. 또 묘란 십계·십여·권실의 법이다」라 했다.

「일념삼천법문」, 414쪽

비밀의 곳간을 여는 것이 묘다. 법화경이 다른 모든 경전의 곳간을 열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보배, 곧 모든 중생의 성불을 드러낸다. 三의 개삼현일(開三顯一),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어의구전』은 이 「열다」를 사람 쪽에서 말했다. 앞에서 본 대로 「연다는 것은 신심의 다른 이름이다」(716쪽). 경이 곳간을 여는 것과, 믿는 사람이 자기 안의 부처의 지견을 여는 것이 같은 한 글자다.

② 갖추다(具足). 「개목초」는 이렇게 말한다.

妙とは具足・六とは六度万行、諸の菩薩の六度万行を具足するやうを・きかんとをもう、具とは十界互具・足と申すは一界に十界あれば当位に余界あり満足の義なり、此の経一部八巻・二十八品・六万九千三百八十四字・一一に皆妙の一字を備えて三十二相・八十種好の仏陀なり、十界に皆己界の仏界を顕す

묘란 구족이요, 육이란 육도만행이다. 모든 보살의 육도만행을 구족하는 모습을 듣고자 한다. 구(具)란 십계호구요, 족(足)이란 한 세계에 십계가 있으므로 그 자리에 다른 세계들이 있어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이 경 한 부 여덟 권, 스물여덟 품, 6만 9384자가 하나하나 모두 묘 한 글자를 갖추어 삼십이상·팔십종호의 부처다. 십계가 모두 자기 세계의 불계를 드러낸다.

「개목초」, 209쪽

이 대목은 「관심본존초」의 수지즉관심 논증과 같은 뿌리를 가진다. 「관심본존초」는 『무량의경』·법화경·『열반경』·용수·길장·천태의 말을 차례로 들어, 범어 「살(薩)」이 「구족」이며 「묘」로 옮겨진다는 것을 보였다(246쪽). 묘가 곧 구족이므로, 다섯 글자를 받아 지니면 석존의 인행과덕이 저절로 갖추어진다. 五의 일념삼천, 한 생각에 삼천을 갖춤이다.

③ 되살리다(蘇生). 「법화경제목초」는 여인성불을 말하며 이렇게 썼다. 블로그의 「여인성불초」 해설이 이 대목을 인용한다.

妙とは蘇生の義なり蘇生と申すはよみがへる義なり … 爾前の経経にて仏種をいりて死せる二乗・闡提・女人等・妙の一字を持ちぬれば・いれる仏種も還つて生ずるが如し

묘란 소생의 뜻이다. 소생이란 되살아난다는 뜻이다. … 이전의 경들에서 불종을 볶아 죽어 버린 이승·천제·여인 등이 묘 한 글자를 지니면, 볶인 불종도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다.

「법화경제목초」, 947쪽. 2차 확인

이전 경전들은 이승을 「볶은 씨앗(焦種)」, 곧 다시는 싹이 트지 않는 씨앗이라 했다. 악인과 여인도 성불할 수 없다고 했다. 법화경에서 그들이 되살아나 부처가 될 수 있게 된다. 대성인은 이것을 묘 한 글자의 덕이라 했다. 三의 이승작불, 四의 무시의 십계호구다. 블로그의 「보은초」 강의는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뒤 「묘란 소생의 뜻」이라는 말씀대로 서로 격려하며 불사조처럼 일어선 동지들을 이야기한다. 되살림은 교리이기 전에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연다開秘密の奧藏を發く개삼현일 — 삼승을 열어 일승을 드러냄三「일념삼천법문」 414
갖춘다具足具とは十界互具 · 足とは滿足일념삼천 — 한 생각에 모든 것을五「개목초」 209
되살린다蘇生焦種も還つて生ず이승작불 — 탄 씨앗도 다시 싹튼다三四「법화경제목초」 947 · 2차
도표 10 · 묘의 세 뜻 — 개·구족·소생과 계보

세 뜻은 이 사이트의 계보와 이렇게 겹친다. 개는 적문의 개삼현일(三), 구족은 일념삼천(五), 소생은 이승작불과 무시의 십계호구(三·四)다. 묘 한 글자가 이미 계보 전체다.

묘와 즉(即)은 같은 것

『어의구전』의 방편품 첫 강의는 천태의 「방편」 풀이에 기대어 묘를 또 한 번 푼다. 천태는 「방(方)은 비(秘)요, 편(便)은 묘(妙)다」라 했고, 묘락은 이 「즉(即)」을 「원(圓)으로 즉을 삼는다(以円為即)」로 풀었다. 대성인은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即は円なれば法華経の別名なり即とは凡夫即極諸法実相の仏なり、円とは一念三千なり即と円と言は替れども妙の別名なり、一切衆生実相の仏なれば妙なり不思議なり

즉은 원이므로 법화경의 다른 이름이다. 즉이란 범부가 곧 궁극인 제법실상의 부처라는 것이다. 원이란 일념삼천이다. 즉과 원은 말은 다르지만 묘의 다른 이름이다. 일체중생이 실상의 부처이므로 묘요 불가사의다.

『어의구전』, 713쪽

그리고 「묘와 즉은 같은 것이다(妙と即とは同じ物なり)」라고 못박는다. 二에서 「즉(即)」 한 글자가 공과 가를 하나로 묶는다고 했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그 「즉」이 곧 묘다. 같은 대목은 「비(秘)」를 이렇게 풀었다. 「비란 엄격한 것이다. 삼천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秘とはきびしきなり三千羅列なり)」. 감추어진 신비가 아니라, 삼천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엄연히 늘어서 있음이 비밀이다.

「화성유품」의 「화성」 강의에서는 이 「즉」을 더 짧게 말한다.

化城即宝処とは即の一字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念念の化城念念の宝処なり

화성이 곧 보처라는 것은, 즉 한 글자가 남묘호렌게쿄라는 것이다. 생각마다 화성이요 생각마다 보처다.

『어의구전』, 732쪽

도사가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하려고 신통으로 만든 성(化城)과, 그들이 끝내 이르러야 할 보배의 땅(寶處). 이전의 가르침은 화성을 떠나 보처에 가라고 했다. 『어의구전』은 화성과 보처를 잇는 「즉」 한 글자가 남묘호렌게쿄라고 한다. 지친 이 자리가 그대로 보배의 땅이 되는 한 글자다.

연화 —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인과구시

1부에서 『어의구전』은 「연화란 인과의 두 법이요, 이것 또한 인과가 한 몸이다」라 했다. 연꽃은 꽃이 필 때 이미 그 안에 연밥이 있다. 원인(꽃)과 결과(열매)가 같은 때에 함께(俱時) 있다. 이것이 인과구시(因果俱時) 다. 三의 첫머리 그림(lineage-3)에 꽃과 연밥을 한 줄기에 함께 그린 까닭이 이것이다.

인과구시는 四의 본인본과와 정확히 겹친다. 「개목초」는 본문에 이르러 이전 가르침의 인과가 깨어지고 본인과 본과가 드러난다고 했다(四 7절). 수행을 쌓은 끝에 먼 훗날 부처가 되는 것(因果異時)이 아니다. 부처의 원인을 행하는 그 순간 이미 부처의 결과가 함께 있다.

여아석소원은 본인묘, 여아등무이는 본과묘

『어의구전』은 방편품의 한 구절로 이것을 보여 준다. 석존은 「나는 본래 서원을 세워, 모든 중생이 나와 같아 다름이 없게 하고자 했다(如我等無異). 내가 옛날 원한 바(如我昔所願)가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고 했다.

如我昔所願は本因妙如我等無異は本果妙なり妙覚の釈尊は我等が血肉なり因果の功徳骨髄に非ずや

「내가 옛날 원한 바와 같이」는 본인묘요, 「나와 같아 다름이 없게」는 본과묘다.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이다. 인과의 공덕이 뼈와 골수가 아니겠는가.

『어의구전』, 720쪽

그리고 이 「이미(已)」가 건장 5년 4월 28일에 처음 부른 제목을 가리킨다고 했다(글머리). 대성인이 부른 제목은 「말법 일만 년의 중생까지 성불시킨다. 어찌 이제 이미 만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원인(서원)과 결과(만족)가 부르는 그 제목 안에서 함께 있다.

「관심본존초」의 수지즉관심은 같은 구조다.

私に会通を加えば本文を黷が如し爾りと雖も文の心は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

내가 사사로이 풀이를 덧붙이면 본문을 더럽히는 것 같지만, 글의 마음은 이렇다. 석존의 인행과 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에 갖추어져 있다. 우리가 이 다섯 글자를 받아 지니면 저절로 그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

「관심본존초」, 246쪽

석존이 한량없는 겁에 걸쳐 쌓은 수행(因行)과 그 결과로 얻은 덕(果德)이 둘 다 다섯 글자에 있다. 받아 지니는 순간 원인과 결과가 함께 온다.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1278)는 이것을 五의 구슬 비유로 다시 말한다.

此の一念三千の宝珠をば妙法五字の金剛不壊の袋に入れて末代貧窮の我等衆生の為に残し置かせ給いしなり

이 일념삼천의 보주를 묘법 다섯 글자라는 금강불괴의 주머니에 넣어 말대의 가난한 우리 중생을 위해 남겨 두셨다.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 1016쪽

신심은 창제의 원인, 창제는 신심의 결과

블로그 강의는 인과구시를 일관(日寬)의 「당체의초 문단」으로 더 구체적으로 푼다(2차 인용). 일관은 「인과구시 불가사의의 일법」을 두 겹으로 읽었다.

강의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인다. 겉으로 보는 세상의 인과는 인과이시(因果異時)다. 몸이 아플 때 약을 먹어도 약이 들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생명 깊은 곳의 인과는 인과구시다. 석존의 불법은 오랜 수행 끝에 부처가 되는 「본과묘」의 가르침이었고, 대성인의 불법은 부르는 순간 불계가 함께 있는 「본인묘」의 가르침이다.

인과구시는 게으름의 허락이 아니다. 원인을 짓는 그 순간에 결과가 함께 있다는 것은, 지금 이 한 번의 부름에 전부가 걸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因果異時인과이시 — 다른 꽃
因수행歷劫꽃이 진 뒤에 열매果성불
因果俱時인과구시 — 연꽃
한 점에 겹친 원인과 결과因果꽃이 필 때 이미 연밥이 들어 있다
信心は唱題の因 · 唱題は信心の果일관 · 2차 확인如我昔所願=本因妙 · 如我等無異=本果妙『어의구전』 720쪽
도표 11 · 인과이시와 인과구시

「당체의초」 — 연꽃은 비유가 아니다

「당체의초(當體義抄)」는 사도 유배 중인 문영 10년(1273)에 쓴 것으로 알려진다(블로그 서강은 다른 설도 있음을 적는다). 이 어서가 묻는 것은 하나다. 묘법연화의 「연화」는 비유인가, 실체인가.

대성인은 천태의 『법화현의』 권7을 인용한다. 「연화는 비유가 아니라 당체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비유하면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 만물에 이름이 없었는데, 성인이 이치를 관하고 그에 따라 이름을 지은 것과 같다」. 그리고 이렇게 풀이한다.

此の釈の意は至理は名無し聖人理を観じて万物に名を付くる時・因果倶時・不思議の一法之れ有り之を名けて妙法蓮華と為す此の妙法蓮華の一法に十界三千の諸法を具足して闕減無し之を修行する者は仏因・仏果・同時に之を得るなり

이 해석의 뜻은 이렇다. 지극한 이치에는 이름이 없다. 성인이 이치를 관하여 만물에 이름을 붙일 때, 인과구시의 불가사의한 한 법이 있어 이것을 이름하여 묘법연화라 한다. 이 묘법연화의 한 법에 십계 삼천의 모든 법을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부처의 원인과 부처의 결과를 동시에 얻는다.

「당체의초」, 513쪽

그리고 순서를 뒤집는다.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 꽃풀이 있었는데, 성인이 이치를 보고 「이 꽃풀의 인과구시가 묘법연화와 닮았다」 하여 이 풀에도 같은 이름 「연화」를 붙였다. 물에서 나는 붉은 연꽃, 흰 연꽃이 그것이다. 그러니 식물 연꽃이 먼저 있고 법을 거기에 빗댄 것이 아니다. 법이 본래 연화이고, 식물 연꽃은 오히려 그 법의 이름을 빌려 받은 것이다.

천태가 「묘법은 이해하기 어려우니 비유를 빌려 드러내기 쉽게 한다」고 한 것은 비유연화 쪽의 풀이다(513쪽).

二에서 공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三에서 대성인은 그 실상에 처음으로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을 주었다(「실상이란 묘법연화경의 다른 이름」). 「당체의초」는 그 이름 붙임의 순간을 묘사한다. 이치 자체에는 이름이 없다. 그러나 성인이 그것을 관하고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이 묘법연화다. 이름이 붙었기 때문에, 범부는 그것을 부를 수 있다.

법과 비유는 한 몸

「당체의초」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경의 제목에 붙은 「연화」는 당체와 비유를 함께 설한 것(合說) 이라고 한다. 천태는 『법화론』의 두 뜻(물에서 나옴·꽃이 핌)을 풀며 「의보와 정보, 원인과 결과가 모두 연화의 법이다. 어찌 비유로 드러낼 필요가 있겠는가. 둔한 사람이 법성의 연화를 알지 못하므로 세상의 꽃을 들어 비유로 삼는다」고 했다. 대성인은 전교대사의 말을 끌어와 맺는다.

凡そ法華経の意は譬喩即法体・法体即譬喩なり、故に伝教大師釈して云く「今経は譬喩多しと雖も大喩は是れ七喩なり此の七喩は即ち法体・法体は即ち譬喩なり、故に譬喩の外に法体無く法体の外に譬喩無し、但し法体とは法性の理体なり譬喩とは即ち妙法の事相の体なり事相即理体なり理体即事相なり故に法譬一体とは云うなり

무릇 법화경의 뜻은 비유가 곧 법체요 법체가 곧 비유다. 그러므로 전교대사가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 경에는 비유가 많지만 큰 비유는 일곱 비유다. 이 일곱 비유는 곧 법체요 법체는 곧 비유다. 그러므로 비유 밖에 법체가 없고 법체 밖에 비유가 없다. 다만 법체란 법성의 이체요, 비유란 곧 묘법의 사상(事相)의 체다. 사상이 곧 이체요 이체가 곧 사상이다. 그러므로 법과 비유가 한 몸이라 한다」라 했다.

「당체의초」, 516쪽

사상(事相)이 곧 이체(理體) 다. 눈에 보이는 일의 모습과 그 속의 이치가 둘이 아니다. 三의 「제법이 곧 실상」이 여기서 「비유가 곧 법체」가 된다. 전교대사는 같은 곳에서 「한마음의 묘법연화는 원인의 꽃과 결과의 꽃받침이 함께 자란다(一心の妙法蓮華は因華・果台・倶時に増長す)」고도 했다(516쪽).

블로그 강의가 소개하는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말은 이 대목을 오늘의 말로 옮긴다. 석존의 법화경 스물여덟 품은 집의 설계도이고, 대성인의 남묘호렌게쿄는 집 그 자체다. 설계도는 집을 설명하는 비유연화요, 집은 당체연화다.

譬喩蓮華 · 비유연화
빌려 비유함法
식물 연꽃을 빌려 알기 어려운 법을 드러낸다
至理は名無し … 之を名けて妙法蓮華と爲す「당체의초」 513쪽
當體蓮華 · 당체연화
法 = 蓮華이름을 받은 것
법 그 자체가 연화다
譬喩卽法體 · 法體卽譬喩 — 事相卽理體516쪽설계도(비유연화) · 집(당체연화)
도표 12 · 당체연화와 비유연화

당체 — 부모가 낳아 준 이 몸

십계의 의보와 정보가 곧 묘법연화의 당체

「당체의초」는 첫 문답부터 곧장 핵심을 말한다.

問う妙法蓮華経とは其の体何物ぞや、答う十界の依正即ち妙法蓮華の当体なり、問う若爾れば我等が如き一切衆生も妙法の全体なりと云わる可きか、答う勿論なり

묻는다. 묘법연화경이란 그 체가 무엇인가. 답한다. 십계의 의보와 정보가 곧 묘법연화의 당체다.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일체중생도 묘법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가. 답한다. 물론이다.

「당체의초」, 510쪽

당체(當體) 란 「그것 자체」다. 묘법연화경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지옥에서 부처까지 열 세계의 생명(正報)과 그 생명이 사는 환경(依報)이 모두 그것 자체라는 것이다. 五의 삼세간과 의정불이가 여기서 한 문장이 된다.

그러면 지옥의 업인과 업과도 묘법의 체인가. 대성인은 법성의 묘리에 물듦과 깨끗함(染淨)의 두 법이 있다고 답한다. 물듦이 배면 미혹이 되고 깨끗함이 배면 깨달음이 된다. 비유가 두 가지 나온다.

한 마음은 법성진여의 한 이치이고, 꿈의 선과 악은 미혹과 깨달음, 무명과 법성이다(510~511쪽). 『어의구전』의 「무명과 법성이 한 몸인 것을 묘법이라 한다」가 여기서 논증된다.

그러나 누구의 몸이 당체인가

그렇다면 모든 중생이 이미 묘법의 당체이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가. 「당체의초」의 셋째 문답은 여기서 방향을 튼다.

当世の諸人之れ多しと雖も二人を出でず謂ゆる権教の人・実教の人なり而も権教方便の念仏等を信ずる人は妙法蓮華の当体と云わる可からず実教の法華経を信ずる人は即ち当体の蓮華・真如の妙体是なり

지금 세상 사람은 많지만 두 부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권교의 사람과 실교의 사람이다. 권교 방편의 염불 등을 믿는 사람은 묘법연화의 당체라 할 수 없다. 실교인 법화경을 믿는 사람이 곧 당체의 연화요 진여의 묘체다.

「당체의초」, 511쪽

블로그 강의는 이 대목을 양중(兩重)의 총별(總別) 로 읽는다. 첫 장의 「일체중생이 모두 묘법연화경의 당체」는 총(總) 이다. 법체에 맞추어 이치로 말하면 틀림없이 그렇다. 그러나 믿음에 맞추어 사실로 말하면 차이가 엄연하다. 「법화경을 믿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가 낳아 준 육신」은 별(別) 이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당체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 가운데의 일이다」는 별 가운데의 별이다. 강의는 일관이 이 「가운데(中)」 한 글자를 「바른 믿음에 해당한다」고 풀었음을 들며, 대성인의 말씀대로 실천한 사람이 참된 묘법연화경의 당체라고 했다.

이치로는 모두가 부처다. 그러나 그 이치가 사실이 되는 것은 믿고 부르는 한 사람의 몸 위에서다. 五에서 본 이(理)의 일념삼천과 사(事)의 일념삼천의 구별이 여기서 한 사람의 몸의 일로 내려온다.

부모가 낳아 준 육신

所詮妙法蓮華の当体とは法華経を信ずる日蓮が弟子檀那等の父母所生の肉身是なり、正直に方便を捨て但法華経を信じ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人は煩悩・業・苦の三道・法身・般若・解脱の三徳と転じて三観・三諦・即一心に顕われ其の人の所住の処は常寂光土なり、能居所居・身土・色心・倶体倶用・無作三身の本門寿量の当体蓮華の仏とは日蓮が弟子檀那等の中の事なり

요컨대 묘법연화의 당체란 법화경을 믿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가 낳아 준 육신이 이것이다.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다만 법화경을 믿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업·고의 삼도가 법신·반야·해탈의 삼덕으로 바뀌고, 삼관·삼제가 곧 한마음에 드러나며, 그 사람이 머무는 곳은 상적광토다. 머무는 이와 머무는 곳, 몸과 국토, 색과 심이 체도 함께 용도 함께인 무작삼신의 본문수량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 가운데의 일이다.

「당체의초」, 512쪽

부모가 낳아 준 이 몸. 다섯 자리 동안 걸어온 길의 가장 구체적인 도착점이다. 연기하는 세계도, 공·가·중도, 제법실상도, 구원의 부처도, 일념삼천도 결국 어디에 있는가. 법화경을 믿는 이 사람의 이 몸에 있다.

블로그 강의는 「일념삼천법문」의 한 구절을 들어 이 말의 무게를 설명한다. 「무명의 구름이 걷혀 법성의 달이 밝고, 망상의 꿈이 깨어 본각의 달이 맑으며, 부모가 낳아 준 육신, 번뇌에 묶인 몸이 곧 본유상주의 여래가 된다」(413~414쪽). 부모가 낳은 몸을 번뇌와 악업의 뿌리로 여겨 멀리하는 가르침이 적지 않은 가운데, 범부가 그 몸 그대로 존귀한 부처라고 설한 것은 큰 뜻이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같은 초기의 「십여시사」는 이것을 더 가까이에서 말했다.

妙法蓮華経の体のいみじくおはしますは何様なる体にておはしますぞと尋ね出してみれば我が心性の八葉の白蓮華にてありける事なり、されば我が身の体性を妙法蓮華経とは申しける事なれば経の名にてはあらずして・はや我が身の体にてありけると知りぬれば我が身頓て法華経にて法華経は我が身の体をよび顕し給いける仏の御言にてこそありければやがて我が身三身即一の本覚の如来にてあるものなり

묘법연화경의 체가 훌륭하시다 하니 어떤 체이신가 찾아보았더니, 내 마음 바탕의 여덟 잎 흰 연꽃이었다. 그렇다면 내 몸의 체성을 묘법연화경이라 한 것이니, 경의 이름이 아니라 벌써 내 몸의 체였다고 알면, 내 몸이 곧 법화경이요, 법화경은 내 몸의 체를 불러 드러내신 부처의 말씀이었으므로, 곧 내 몸이 삼신즉일의 본각의 여래인 것이다.

「십여시사」, 411쪽

법화경은 내 몸의 체를 불러 드러내신 부처의 말씀. 제목을 부르는 것은 먼 곳의 무엇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어둠 속, 오른쪽에서 소매와 함께 들어온 어른의 손가락 하나를 왼쪽 강보에서 나온 아기의 작은 손이 꼭 쥐고, 뒤로 연꽃 봉오리 하나가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3 · 부모가 낳아 준 손

삼도가 삼덕으로 — 한 문장에 겹친 계보

「당체의초」의 이 한 문장에 계보가 겹겹이 들어 있다.

「당체의초」의 구절계보
번뇌·업·고의 삼도一 십이연기 — 열두 고리는 번뇌(무명·애·취)·업(행·유)·고(나머지)의 세 길로 묶인다
법신·반야·해탈의 삼덕으로 바뀜二 삼제와 삼덕, 번뇌즉보리
삼관·삼제가 곧 한마음에 드러남二·五 일심삼관, 원융삼제
그 사람이 머무는 곳은 상적광토四 사바즉적광, 본국토묘
무작삼신의 당체연화의 부처四 무작삼신, 본인본과
三道 一三德
煩惱번뇌般若반야
業업轉解脫해탈
苦고法身법신

南無妙法蓮華經と唱うる人

三觀 · 三諦 卽一心に顯われ二五其の人の所住の處は常寂光土四「당체의초」 512쪽
도표 13 · 삼도에서 삼덕으로 — 「당체의초」 한 문장의 계보

창가학회 교학은 흔히 이 전환을 번뇌는 반야로, 업은 해탈로, 고는 법신으로 바뀐다고 배당한다. 블로그 강의는 이 전환을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이라고 풀며 이렇게 말한다. 석존의 불법은 삼혹을 끊고 번뇌를 끊어야 비로소 행복한 경지를 얻는다고 했다. 대성인의 불법은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번뇌 그대로 분명히 보면서 믿음의 공덕으로 그것이 그대로 깨달음의 경지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환 전체를 「신심창제라는 묘한 원인으로 드러난 묘한 결과」, 곧 본과묘로 읽었다.

一 십이연기에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사슬로 보았던 것이, 여섯째 자리에서 바뀌어(轉) 부처의 덕이 된다. 끊어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 뒤집힌다. 이것이 「바뀐다(轉)」는 한 글자의 무게다. 대성인은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에서 십이인연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몸은 모든 괴로움을 체로 삼는다. 전생에 업을 지었기에 괴로움을 받고, 전생의 번뇌가 괴로움을 불러 모은다」(1014쪽). 그리고 같은 편지에서 「법화경이라는 경은 몸과 마음의 모든 병의 양약이다」라고 했다(1015쪽). 첫째 자리의 병과 여섯째 자리의 약이 한 편지 안에 있다.

풀과 나무의 당체 — 묘법은 유정, 연화는 비정

당체는 사람의 몸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도의 최련방에게 보낸 「초목성불구결」(1272)은 이렇게 답한다.

問うて云く証文如何、答えて云く妙法蓮華経是なり・妙法とは有情の成仏なり蓮華とは非情の成仏なり、有情は生の成仏・非情は死の成仏・生死の成仏と云うが有情非情の成仏の事なり

묻는다. 증문은 무엇인가. 답한다. 묘법연화경이 이것이다. 묘법이란 유정의 성불이요 연화란 비정의 성불이다. 유정은 삶의 성불이요 비정은 죽음의 성불이다. 삶과 죽음의 성불이라 하는 것이 유정·비정의 성불이다.

「초목성불구결」, 1338쪽

그리고 우리 한 몸 안에도 유정과 비정이 함께 있다고 한다. 손톱과 머리카락은 비정이라 잘라도 아프지 않고, 그 밖은 유정이라 자르면 아프다(1339쪽). 묘법과 연화, 네 글자가 삶과 죽음, 마음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모두 거둔다. 五에서 본 「한 풀 한 나무에 각각 한 불성」이 여기서 제목의 네 글자에 배당된다. 이 논리는 4부의 본존 절에서 「종이와 먹에 쓴 본존」의 근거로 다시 나온다.

결요부촉의 당체 — 방편품과 신력품

「당체의초」는 마지막으로 이 당체연화의 증거가 경의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대성인의 답은 방편품의 「제법실상」과 신력품의 결요부촉 경문이다. 신력품에 집착하는 까닭을 묻자 이렇게 답한다.

答う此の文は釈尊・本眷属地涌の菩薩に結要の五字の当体を付属すと説きたまえる文なる故なり

답한다. 이 경문은 석존이 본래의 권속인 지용보살에게 결요의 다섯 글자의 당체를 부촉했다고 설한 경문이기 때문이다.

「당체의초」, 514쪽

석존은 「내가 옛날 원한 바와 같이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며 서원을 채우고, 입멸 뒤 후오백세의 광선유포를 부촉하기 위해 지용보살을 불러내어 본문의 당체연화를 요점으로 부촉했다. 그래서 이 경문은 「석존 출세의 본회요, 도량에서 얻은 비법이요, 말법의 우리가 현세와 내세를 성취하는 당체연화의 참된 증거」다(514~515쪽). 법체는 여기서 누구에게 맡겨졌는가의 물음으로 넘어간다. 3부의 주제다.

그리고 「당체의초」는 말법에 누가 당체연화를 증득하는지를 묻고 이렇게 답한다.

然るに日蓮が一門は正直に権教の邪法・邪師の邪義を捨てて正直に正法・正師の正義を信ずる故に当体蓮華を証得して常寂光の当体の妙理を顕す事は本門寿量の教主の金言を信じ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が故なり

그런데 니치렌의 일문은 정직하게 권교의 사법·사사의 사의를 버리고 정직하게 정법·정사의 정의를 믿기 때문에 당체연화를 증득하여 상적광의 당체의 묘리를 드러낸다. 이것은 본문수량의 교주의 금언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당체의초」, 518쪽
3부 사람법의 이름이 부처의 이름이다

2부는 법을 읽었다. 그런데 대성인의 어서에서 남묘호렌게쿄는 법의 이름으로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부처의 이름(寶號) 이기도 하고, 그 법을 맡은 사람의 혼이기도 하다. 3부는 법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 곧 인법일개(人法一箇) 를 읽는다.

무작삼신의 보호 — 부르는 이가 곧 부처

여래란 일체중생이다

四 8절에서 『어의구전』 수량품의 첫 강의를 짧게 읽었다. 여기서 그 전문을 읽는다. 강의의 제목 자체가 「남묘호렌게쿄 여래수량품 제십육의 일」이다. 수량품의 이름 위에 일곱 글자가 얹혀 있다.

御義口伝に云く此の品の題目は日蓮が身に当る大事なり神力品の付属是なり、如来とは釈尊・惣じては十方三世の諸仏なり別しては本地無作の三身なり、今日蓮等の類いの意は惣じては如来とは一切衆生なり別しては日蓮の弟子檀那なり、されば無作の三身とは末法の法華経の行者なり無作の三身の宝号を南無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寿量品の事の三大事とは是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이 품의 제목은 니치렌의 몸에 닿는 대사다. 신력품의 부촉이 이것이다. 여래란 석존이요, 총해서는 시방삼세의 제불이며, 별해서는 본지무작의 삼신이다.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의 뜻으로는, 총해서는 여래란 일체중생이요, 별해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다. 그러므로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며, 무작 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 한다.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사란 이것이다.

『어의구전』, 752쪽

여래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세 겹으로 옮겨 간다. 천태의 『법화문구』는 「여래란 시방삼세의 제불·이불·삼불·본불·적불의 통호」라 했다. 『어의구전』은 이것을 먼저 석존과 시방의 부처로 읽고, 다시 일체중생으로, 그리고 제목을 부르는 제자 단나로 읽는다. 무작삼신, 곧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삼신을 갖춘 부처는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고, 그 부처의 보호(寶號), 곧 존귀한 이름이 남묘호렌게쿄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이가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듯, 무작삼신의 부처를 부르는 이름이 남묘호렌게쿄다. 그런데 그 부처는 저 먼 서방에 있지 않다.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 자신이다. 부르는 이와 불리는 이가 하나다.

육즉 — 이름을 머리에 이는 때

같은 강의는 천태가 세운 수행의 여섯 자리, 곧 육즉(六卽)을 제목으로 다시 배열한다.

六即の配立の時は此の品の如来は理即の凡夫なり頭に南無妙法蓮華経を頂戴し奉る時名字即なり、其の故は始めて聞く所の題目なるが故なり聞き奉りて修行するは観行即なり此の観行即とは事の一念三千の本尊を観ずるなり、さて惑障を伏するを相似即と云うなり化他に出づるを分真即と云うなり無作の三身の仏なりと究竟したるを究竟即の仏とは云うなり、惣じて伏惑を以て寿量品の極とせず唯凡夫の当体本有の侭を此の品の極理と心得可きなり、無作の三身の所作は何物ぞと云う時南無妙法蓮華経なり

육즉으로 배열할 때, 이 품의 여래는 이즉의 범부다. 머리에 남묘호렌게쿄를 받들어 이는 때가 명자즉이다. 처음으로 듣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듣고 수행하는 것은 관행즉이다. 이 관행즉이란 사(事)의 일념삼천의 본존을 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혹과 장애를 누르는 것을 상사즉이라 하고, 화타로 나아가는 것을 분진즉이라 하며, 무작삼신의 부처라고 끝까지 깨달은 것을 구경즉의 부처라 한다. 무릇 미혹을 누르는 것을 수량품의 궁극으로 삼지 않는다. 오직 범부의 당체 본래 그대로를 이 품의 궁극의 이치로 알아야 한다. 무작삼신이 짓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남묘호렌게쿄다.

『어의구전』, 752쪽
이즉(理卽)
천태의 뜻이치로는 부처와 같으나 아직 법을 듣지 못한 범부
『어의구전』의 배열이 품의 여래 = 이즉의 범부
명자즉(名字卽)
천태의 뜻법의 이름을 듣고 모든 것이 불법임을 앎
『어의구전』의 배열머리에 남묘호렌게쿄를 받들어 이는 때
관행즉(觀行卽)
천태의 뜻관법을 닦아 이치와 지혜가 맞음
『어의구전』의 배열듣고 수행함 — 사의 일념삼천의 본존을 관함
상사즉(相似卽)
천태의 뜻견사·진사혹을 끊어 부처와 비슷해짐
『어의구전』의 배열미혹과 장애를 누름
분진즉(分眞卽)
천태의 뜻무명을 조금씩 끊어 불성이 부분적으로 드러남
『어의구전』의 배열화타로 나아감
구경즉(究竟卽)
천태의 뜻무명을 다 끊은 묘각
『어의구전』의 배열무작삼신의 부처라고 끝까지 깨달음
여섯 칸 계단 — 이즉에서 구경즉까지 모든 칸에서 가운데 원 「범부의 당체 그대로」로 가는 가는 선. 명자즉 칸만 금 테두리: 머리에 남묘호렌게쿄를 받들어 이는 때.理卽이즉名字卽명자즉觀行卽관행즉相似卽상사즉分眞卽분진즉究竟卽구경즉頭に南無妙法蓮華經を頂戴し奉る時명자즉 — 『어의구전』 752쪽凡夫の當體本有の侭범부의 당체 본래 있는 그대로
도표 14 · 육즉과 제목 — 이름을 이는 때부터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명자즉이 제목을 처음 듣는 순간이다. 이름(名字)을 듣는 것이 곧 불도의 시작이다. 1부에서 본 「이름이 곧 몸」이 여기서 수행의 첫 자리가 된다. 블로그 강의는 「소야입도전답서」를 풀며 이 배열을 그대로 인용하고,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제목 수행이 곧 관행즉이 된다고 했다. 다른 경의 부처와 보살은 법화경의 명자즉에도 미치지 못하고, 제목을 부르지 않으니 관행즉에 이를 수도 없다는 대성인의 말이 그 앞에 있다(1057~1058쪽).

둘째, 마지막 문장이다. 미혹을 누르는 것을 궁극으로 삼지 않는다. 궁극은 「범부의 당체 본래 그대로」다. 육즉은 올라가야 할 계단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인 범부의 몸이 스스로를 여는 여섯 겹의 자각이다. 블로그의 「소야입도전답서」 어석은 이것을 한 줄로 적는다. 대성인의 불법에는 수행의 단계가 없다. 즉신성불이므로 명자묘각(名字妙覺) 이라 한다. 명자즉의 범부가 본존을 향해 부처의 생명을 느끼는 그때가 묘각의 부처다.

이 삼신은 나의 한 몸

같은 수량품 강의의 넷째 대목은 경의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如来如実知見三界之相)」를 이렇게 풀었다.

無死退滅は空なり有生出在は仮なり如来如実は中道なり、無死退滅は無作の報身なり有生出在は無作の応身なり如来如実は無作の法身なり、此の三身は我が一身なり、一身即三身名為秘とは是なり、三身即一身名為密も此の意なり、然らば無作の三身の当体の蓮華の仏とは日蓮が弟子檀那等なり南無妙法蓮華経の宝号を持ち奉る故なり

죽음 없고 물러남 없고 멸함 없음은 공이요, 태어남 있고 나옴 있고 머묾 있음은 가요, 여래가 있는 그대로 앎은 중도다. 죽음 없고 물러남 없고 멸함 없음은 무작의 보신이요, 태어남 있고 나옴 있고 머묾 있음은 무작의 응신이며, 여래가 있는 그대로 앎은 무작의 법신이다. 이 삼신은 나의 한 몸이다. 「한 몸이 곧 세 몸인 것을 비(秘)라 한다」는 이것이요, 「세 몸이 곧 한 몸인 것을 밀(密)이라 한다」도 이 뜻이다. 그렇다면 무작삼신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이다. 남묘호렌게쿄의 보호를 지니기 때문이다.

『어의구전』, 753쪽

二의 공·가·중이 여기서 四의 삼신에 겹치고, 그 전부가 「나의 한 몸」 이 된다. 그리고 그 까닭이 「보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름을 지니는 것이 곧 그 이름의 부처가 되는 일이다.

「묘호니고젠답서」는 같은 것을 편지의 말로 풀었다.

此の法華経には我等が身をば法身如来・我等が心をば報身如来・我等がふるまひをば応身如来と説かれて候へば、此の経の一句一偈を持ち信ずる人は皆此の功徳をそなへ候、南無妙法蓮華経と申すは是れ一句一偈にて候

이 법화경에는 우리의 몸을 법신여래, 우리의 마음을 보신여래, 우리의 행동(ふるまひ)을 응신여래라고 설하셨으니, 이 경의 한 구절 한 게송을 지니고 믿는 사람은 모두 이 공덕을 갖춘다. 남묘호렌게쿄라는 것은 바로 한 구절 한 게송이다.

「묘호니고젠답서」, 1402쪽

몸이 법신, 마음이 보신, 행동이 응신이다. 같은 편지의 뒤쪽은 이렇게 맺는다. 「우리 중생의 악업·번뇌·생사에 묶인 몸이 정인·요인·연인의 세 불성을 원인으로 하여 곧 법신·보신·응신의 삼신으로 드러날 것은 의심할 바 없다」(1403쪽). 三 13절에서 「제법실상초」가 「범부는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이라 한 것(1358쪽)이 여기서 한 사람의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매자작시념 — 부르는 한 생각은 대자비의 생각

수량품 자아게의 마지막 구절 「늘 스스로 이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중생을 위없는 도에 들게 하여 속히 부처의 몸을 이루게 할까(毎自作是念)」에 대해 『어의구전』은 이렇게 말한다.

是念とは無作本有の南無妙法蓮華経の一念なり、作とは此の作は有作の作に非ず無作本有の作なり云云 … 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念は大慈悲の念なり

이 생각이란 무작본유의 남묘호렌게쿄의 한 생각이다. 짓는다(作)는 것은 유작의 지음이 아니라 무작본유의 지음이다. …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생각은 대자비의 생각이다.

『어의구전』, 758쪽

부처가 늘 품는 한 생각,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고자 하는 그 생각이 남묘호렌게쿄의 한 생각이다. 그리고 제목을 부르는 우리의 생각이 곧 그 대자비의 생각이다. 부르는 일은 나 하나를 위한 기도에 그치지 않는다. 부처의 자비를 이 몸으로 되풀이하는 일이다. 5부에서 볼 자행화타의 뿌리가 여기 있다.

인법일개 — 사람과 법이 하나

이렇게 법(法) 과 사람(人) 이 하나인 것을 인법일개(人法一箇) 라 한다. 1부 3절의 「귀명에 사람과 법이 있다」가 여기서 하나로 모인다. 무작삼신의 부처(사람)와 그 이름 남묘호렌게쿄(법)는 둘이 아니다.

블로그의 「삼대비법품승사」 강의는 이 관계를 본존론의 중심에 둔다. 말법의 만인을 성불시키는 본존은 석존을 부처로 만든 불종(仏種)인 영원한 묘법이어야 하고, 사람으로 찾으면 그 영원한 묘법과 한 몸인 영원한 부처의 생명 자체여야 한다. 곧 인법일개의 부처의 생명이어야 한다. 강의는 일관의 「관심본존초 문단」을 인용해, 「관심본존초」의 본존 대목을 「사람이 곧 법(人即法)」과 「법이 곧 사람(法即人)」의 두 면으로 읽은 뒤 「궁극적으로 그 체를 논하면 사람과 법은 한 몸(人法體一)」이라 결론한 것을 소개한다.

두 원의 겹침 — 왼쪽 사람(人), 오른쪽 법(法), 겹친 곳이 인법일개人法人法一箇
人 · 사람無作三身末法の法華經の行者日蓮がたましひ몸 = 법신 · 마음 = 보신 · 행동 = 응신
法 · 법南無妙法蓮華經無作三身の寶號무작삼신의 부처를 부르는 이름
無作の三身の寶號を南無妙法蓮華經と云うなり『어의구전』 752쪽日蓮が・たましひは南無妙法蓮華經に・すぎたるはなし「교오전답서」 1124쪽
도표 15 · 인법일개 — 사람과 법, 보호와 행자

니치렌이라는 이름, 니치렌의 혼

이름을 붙인다는 것

인법일개를 대성인 자신의 삶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니치렌(日蓮)」이라는 이름이다. 홍안 2년(1279)의 「자쿠니치보어서」는 이렇게 말한다.

一切の物にわたりて名の大切なるなり、さてこそ天台大師・五重玄義の初めに名玄義と釈し給へり。

모든 것에 걸쳐 이름이 중요하다. 그래서 천태대사도 오중현의의 처음에 명현의를 풀이하셨다.

「자쿠니치보어서」, 902쪽

日蓮となのる事自解仏乗とも云いつべし、かやうに申せば利口げに聞えたれども道理のさすところさもやあらん、経に云く「日月の光明の能く諸の幽冥を除くが如く斯の人世間に行じて能く衆生の闇を滅す」と此の文の心よくよく案じさせ給へ、斯人行世間の五の文字は上行菩薩・末法の始の五百年に出現して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の光明をさしいだして無明煩悩の闇をてらすべしと云う事なり

니치렌이라고 이름한 것은 스스로 불승을 깨달았다(自解佛乘)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도리가 가리키는 바가 그러할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해와 달의 빛이 모든 어둠을 없애듯, 이 사람은 세간에 다니며 중생의 어둠을 멸한다」 하였다. 이 경문의 뜻을 잘 생각해 보라. 「이 사람은 세간에 다닌다(斯人行世間)」의 다섯 글자는, 상행보살이 말법의 처음 오백 년에 나타나 남묘호렌게쿄 다섯 글자의 빛을 비추어 무명번뇌의 어둠을 밝힐 것이라는 뜻이다.

「자쿠니치보어서」, 902쪽

해(日) 와 연꽃(蓮). 신력품의 「해와 달의 빛」과 종지용출품의 「세상의 법에 물들지 않음이 연꽃이 물에 있는 것과 같다(如蓮華在水)」가 한 이름에 겹친다. 대성인은 이 이름을 스스로 지었고, 그 이름이 곧 법의 작용(어둠을 비추는 빛)을 가리킨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2부의 「당체의초」가 말한 「성인이 이치를 관하여 이름을 붙인다」를 대성인은 자기 이름으로 실천했다.

발적현본 — 니치렌이라 하던 자는 목이 잘렸다

문영 8년(1271) 9월 12일 밤, 대성인은 다쓰노쿠치에서 목이 베일 뻔했다. 이듬해 2월 사도에서 쓴 「개목초」는 그 밤을 이렇게 적는다.

日蓮といゐし者は去年九月十二日子丑の時に頸はねられぬ、此れは魂魄・佐土の国にいたりて返年の二月・雪中にしるして有縁の弟子へをくれば

니치렌이라 하던 자는 지난해 9월 12일 자시와 축시 사이에 목이 잘렸다. 이것은 혼백이 사도국에 이르러 이듬해 2월 눈 속에서 적어 인연 있는 제자에게 보내는 것이다.

「개목초」, 223쪽

창가학회 교학은 이것을 대성인의 발적현본(發迹顯本) 이라 부른다(블로그의 「여설수행초」 강의도 「다쓰노쿠치의 발적현본」이라 적는다). 적(迹), 곧 이제까지의 범부 승려 니치렌의 모습을 벗고, 본(本), 곧 본래의 경지를 드러냈다는 뜻이다. 四에서 석존이 수량품에서 가야성의 부처라는 모습을 벗고 구원의 부처를 드러낸 것을 발적현본이라 했다. 창가학회 교학은 대성인이 다쓰노쿠치를 지나며 범부의 몸 그대로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라는 본래의 경지를 드러냈다고 풀이하며, 그 뒤 대성인이 본존을 써서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이 흐름에서 읽는다. 이 사이트는 그 해석을 교단의 교학으로 소개하고, 어서의 말 그대로를 함께 적어 둔다.

니치렌의 혼을 먹물에 적셔

그 본존에 대해 대성인은 가장 개인적인 말을 남겼다. 문영 10년(1273) 8월, 사도의 이치노사와에서 쓴 편지다. 가마쿠라의 시조깅고 부부가 어린 딸 교오(經王)의 병을 알려 오자, 대성인은 교오를 위해 본존을 써서 보냈다. 수신인은 「교오고젠」이지만, 블로그 강의가 말하듯 실제로는 부모에게 준 편지다.

日蓮がたましひをすみにそめながして・かきて候ぞ信じさせ給へ、仏の御意は法華経なり日蓮が・たましひは南無妙法蓮華経に・すぎたるはなし

니치렌의 혼을 먹물에 적셔 흘려 쓴 것이니 믿으시라. 부처의 마음은 법화경이다. 니치렌의 혼은 남묘호렌게쿄보다 더한 것이 없다.

「교오전답서」, 1124쪽

부처의 마음이 법화경이듯, 니치렌의 혼은 남묘호렌게쿄다. 사람의 혼이 곧 법이고, 법이 곧 사람의 혼이다. 그리고 그것이 먹물에 흘려져 종이 위에 쓰였다. 2부에서 본 「묘법은 유정, 연화는 비정」, 풀과 나무와 종이와 먹도 묘법의 당체가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여기서 실천이 된다.

같은 편지는 본존을 쓰는 마음을 사자왕에 빗댔다. 사자왕은 개미 새끼를 잡을 때나 사나운 짐승을 잡을 때나 똑같이 온 힘을 낸다. 「니치렌이 수호하는 어본존을 써 드리는 것도 사자왕에 뒤지지 않는다」(1124쪽). 그리고 이어 이렇게 쓴다.

又此の曼荼羅能く能く信ぜさせ給うべし、南無妙法蓮華経は師子吼の如し・いかなる病さはりをなすべきや

또 이 만다라를 잘 믿으시라. 남묘호렌게쿄는 사자후와 같다. 어떤 병이 장애가 되겠는가.

「교오전답서」, 1124쪽

블로그 강의는 「니치렌의 혼」을 「니치렌 대성인의 근본의 당체가 남묘호렌게쿄라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 인용된 묘락의 「본문의 먼 수명을 드러내는 것을 그 목숨으로 삼는다(顕本遠寿を以て其の命と為す)」를 인법일개의 본존과 잇는다.

새벽빛이 드는 장지문 곁 책상 위에 갓 간 먹이 담긴 벼루와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흰 종이가 놓인 금박 수묵화
그림 4 · 먹물에 스민 혼

말할 가치도 없는 니치렌이 때를 만났다

그러나 대성인은 자신을 높이지 않았다. 「소야입도전답서」는 사람들의 의심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존귀한 법문을 인도의 부법장 스물네 사람도, 중국의 천태·묘락도, 일본의 쇼토쿠 태자·전교대사도 펴지 않았는데, 「니치렌 같은 보잘것없는 법사가 어찌 부르겠느냐」고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은 「첫째가는 도리」라고 했다(1058쪽). 그리고 까마귀는 천한 새지만 독수리도 모르는 한 해의 길흉을 알고, 뱀은 용과 코끼리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레 뒤의 홍수를 안다는 비유를 든 뒤 이렇게 맺는다.

仏法は時により機によりて弘まる事なれば云うにかひなき日蓮が時にこそあたりて候らめ

불법은 때에 따라, 근기에 따라 퍼지는 것이므로, 말할 가치도 없는 니치렌이 그 때를 만난 것이리라.

「소야입도전답서」, 1058쪽

「현불미래기」(1273)는 스스로를 「명자의 범부(名字の凡夫)」라고 불렀다(507쪽). 앞 절에서 본 명자즉, 곧 이름을 듣고 믿는 가장 처음 자리의 범부다. 대성인이 가리키는 부처는 신통을 부리는 초인이 아니라, 이름을 믿고 부르는 범부의 몸 그대로의 부처다. 그래서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지용보살에게 맡겨진 다섯 글자 — 결요부촉

문수에게도 약왕에게도 맡기지 않은 것

남묘호렌게쿄는 왜 천태·전교가 아니라 말법의 대성인에 의해 펴졌는가. 1부에서 「당체의초」는 「때가 이르지 않았고, 부촉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 부촉이 무엇인지를 「관심본존초」가 밝힌다.

此の本門の肝心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に於ては仏猶文殊薬王等にも之を付属し給わず何に況や其の已外をや但地涌千界を召して八品を説いて之を付属し給う

이 본문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 다섯 글자는, 부처가 문수·약왕 등에게도 부촉하지 않으셨다. 하물며 그 밖의 이들에게랴. 다만 지용천계를 불러 여덟 품을 설하여 이것을 부촉하셨다.

「관심본존초」, 247쪽

법화경 종지용출품에서 대지를 가르고 솟아난 무수한 보살들, 그들을 지용보살(地涌菩薩) 이라 한다. 그 우두머리가 상행·무변행·정행·안립행의 네 보살이다. 석존은 여래신력품에서 열 가지 신통력을 나타낸 뒤 그들에게 법을 맡겼다. 이것을 결요부촉(結要付囑), 곧 요점을 묶어 맡김이라 한다.

此の十神力は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上行・安立行・浄行・無辺行等の四大菩薩に授与し給うなり前の五神力は在世の為後の五神力は滅後の為なり、爾りと雖も再往之を論ずれば一向に滅後の為なり

이 열 가지 신통력은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상행·안립행·정행·무변행 등 네 대보살에게 주시기 위한 것이다. 앞의 다섯 신통력은 부처 재세 때를 위한 것이고 뒤의 다섯은 입멸 뒤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따져 보면 온통 입멸 뒤를 위한 것이다.

「관심본존초」, 252쪽

신력품의 네 구절 「여래의 모든 법, 여래의 모든 자재한 신통력, 여래의 모든 비밀한 곳간, 여래의 모든 매우 깊은 일이 모두 이 경에서 펼쳐 보이고 드러내어 설해졌다」가 바로 그 부촉의 말씀이다. 천태는 이것을 「제삼 결요부촉」이라 했고, 도섬은 「법이 구원의 법이기에 구원의 사람에게 맡긴다」고 풀었다(251~252쪽).

저것은 탈익, 이것은 하종 — 다만 제목의 다섯 글자

왜 입멸 뒤, 그것도 말법인가. 「관심본존초」는 부처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을 이렇게 대비한다.

在世の本門と末法の始は一同に純円なり但し彼は脱此れは種なり彼は一品二半此れは但題目の五字なり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똑같이 순수하고 원만한 가르침이다. 다만 저것은 탈(脫, 거둠)이고 이것은 종(種, 씨 뿌림)이다. 저것은 한 품 두 반쪽(一品二半)이고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글자다.

「관심본존초」, 249쪽

四와 五에서 본 종탈상대(種脫相對) 다. 석존 재세의 중생은 먼 과거에 이미 씨를 받았고, 법화경 본문(수량품을 가운데 둔 한 품과 앞뒤 반 품씩)을 들어 그 열매를 거두었다(탈익). 말법의 중생은 아직 씨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말법에 필요한 것은 거둠이 아니라 처음 씨를 뿌리는 일(하종) 이고, 그 씨가 제목의 다섯 글자다. 『어의구전』도 같은 말을 한다. 「이 품은 재세의 탈익이요, 제목의 다섯 글자만이 지금의 하종이다. 그러므로 재세는 탈익, 멸후는 하종이다. 하종을 말법의 요체로 삼는다」(753쪽).

「관심본존초」는 수량품의 양의(良醫) 비유도 이렇게 푼다.

是好良薬とは寿量品の肝要たる名体宗用教の南無妙法蓮華経是なり此の良薬をば仏猶迹化に授与し給わず何に況や他方をや

「이 좋은 약」이란 수량품의 간요인 명·체·종·용·교의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다. 이 좋은 약을 부처는 적화의 보살에게도 주지 않으셨다. 하물며 다른 세계에서 온 보살에게랴.

「관심본존초」, 251쪽

『어의구전』의 풀이는 더 구체적이다. 「이 좋은 약」은 말법에서는 남묘호렌게쿄요, 「지금 남겨 여기에 둔다」의 「지금」은 말법이요, 「너」는 말법의 일체중생이요, 「취한다」는 법화경을 받아 지니는 의식이요, 「먹는다」는 부르는 것이다(756쪽). 약은 받아 지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먹어야, 곧 불러야 병이 낫는다.

정법·상법에 나오지 않은 까닭

그렇다면 지용보살은 왜 정법·상법 이천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는가. 「관심본존초」는 세 번 묻고 세 번 답을 미룬 끝에 이렇게 말한다. 상법의 중·말에 관음·약왕이 남악·천태로 나타나 적문을 겉으로, 본문을 속으로 삼아 백계천여·일념삼천의 뜻을 다했다.

但理具を論じて事行の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並びに本門の本尊未だ広く之を行ぜず所詮円機有つて円時無き故なり

다만 이구(理具)를 논했을 뿐, 사행(事行)의 남묘호렌게쿄 다섯 글자와 본문의 본존은 아직 널리 행하지 않았다. 요컨대 원교의 근기는 있었으나 원교의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심본존초」, 253쪽

이구와 사행. 이치로 갖추어져 있음을 논하는 것(理具)과,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事行). 五에서 본 이(理)의 일념삼천과 사(事)의 일념삼천의 구별이 여기서 「사행의 남묘호렌게쿄」 라는 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말법에 대해 이렇게 이어진다.

此の時地涌の菩薩始めて世に出現し但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幼稚に服せしむ

이때 지용보살이 비로소 세상에 나타나 다만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로써 어린아이들에게 먹게 한다.

「관심본존초」, 253쪽

五의 끝에서 본 「어린아이 목에 거는 구슬」과 여기서의 「어린아이에게 먹이는 약」은 같은 다섯 글자다.

  1. 보탑 안의 두 부처釋迦多寶
  2. 十神力여래신력품
  3. 妙法蓮華經の五字
  4. 上行無邊行淨行安立行지용의 네 보살
文殊 · 藥王 等적화 · 타방의 보살付屬し給わず
在世 · 재세脫 · 一品二半
末法 · 말법種 · 但題目の五字

理具事行の南無妙法蓮華經「관심본존초」 249 · 253쪽

도표 16 · 결요부촉 — 적화에게 주지 않은 다섯 글자

경지의 두 법 — 지혜의 물을 흘려보내다

「소야전답서」(건치 2년, 1276)는 이 부촉을 경(境)과 지(智)로 설명한다. 천태의 「경계의 못이 끝이 없기에 매우 깊다 하고, 지혜의 물을 헤아리기 어렵기에 한량없다 한다」를 들고 이렇게 풀었다. 경이란 만법의 체요, 지란 스스로를 비추어 드러내는 모습이다. 경의 못이 가없이 깊을 때 지혜의 물은 거침없이 흐른다. 이 경과 지가 합하면 즉신성불한다(1055쪽).

此の境智の二法は何物ぞ但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此の五字を地涌の大士を召し出して結要付属せしめ給う是を本化付属の法門とは云うなり

이 경과 지의 두 법은 무엇인가. 다만 남묘호렌게쿄 다섯 글자다. 이 다섯 글자를 지용의 대사를 불러내어 결요부촉하셨다. 이것을 본화부촉의 법문이라 한다.

「소야전답서」, 1055쪽

그리고 「상행보살이 석가여래에게서 묘법의 지혜의 물을 받아, 말대 악세의 메마른 중생에게 흘려보내신다. 이것이 지혜의 뜻이다」라고 했다(1055쪽). 같은 편지의 끝은 이렇게 맺는다. 「법화경은 씨앗과 같고, 부처는 심는 이와 같으며, 중생은 밭과 같다(法華経は種の如く仏はうへての如く衆生は田の如くなり)」(1056쪽). 하종의 구도가 한 문장에 있다.

법체의 다섯 글자를 펴고, 이불병좌를 짓는다

三 12절에서 「제법실상초」의 한 대목을 읽었다. 천태·묘락·전교는 마음으로는 알았으나 말로 내지 않았다. 부촉이 없었고, 때가 이르지 않았으며, 부처의 구원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地涌の菩薩の中の上首唱導・上行・無辺行等の菩薩より外は、末法の始の五百年に出現して法体の妙法蓮華経の五字を弘め給うのみならず、宝塔の中の二仏並座の儀式を作り顕すべき人なし、是れ即本門寿量品の事の一念三千の法門なるが故なり

지용보살 가운데 우두머리인 상행·무변행 등의 보살 말고는, 말법의 처음 오백 년에 나타나 법체인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펴실 뿐 아니라 보탑 안의 두 부처가 나란히 앉은 의식을 지어 드러낼 사람이 없다. 이것은 곧 본문수량품의 사(事)의 일념삼천의 법문이기 때문이다.

「제법실상초」, 1358쪽

지용보살의 일은 두 가지다. 법체의 다섯 글자를 펴는 것, 그리고 이불병좌의 의식을 지어 드러내는 것. 뒤의 것이 4부에서 볼 본존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 지용의 뜻

그러면 지용보살은 대성인 한 사람인가. 「제법실상초」는 곧이어 이렇게 말한다.

末法にして妙法蓮華経の五字を弘めん者は男女はきらふべからず、皆地涌の菩薩の出現に非ずんば唱へがたき題目なり

말법에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펴는 사람은 남녀를 가려서는 안 된다. 모두 지용보살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부르기 어려운 제목이다.

「제법실상초」, 1360쪽

그리고 글머리에서 읽은 「니치렌 한 사람이 처음 불렀지만 두 사람, 세 사람, 백 사람으로 차례로 불러 전해 간다」로 이어지며, 「이것이 어찌 지용의 뜻이 아니겠는가(是あに地涌の義に非ずや)」라고 한다. 같은 어서는 앞쪽에서 이렇게도 말했다. 「지용보살의 선구는 니치렌 한 사람이다. … 만약 니치렌이 지용보살의 수에 든다면, 어찌 니치렌의 제자 단나가 지용의 무리가 아니겠는가」(1359쪽).

「시조깅고전답서」(1272)도 같다. 「다보탑 안에서 두 부처가 나란히 앉았을 때 상행보살에게 물려주신 제목의 다섯 글자를 니치렌이 대강 펴고 있다. 이것이 곧 상행보살의 심부름꾼이 아니겠는가. 그대 또한 니치렌을 따라 법화경의 행자로서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하니, 이것이 어찌 유통이 아니겠는가」(1117쪽).

대성인은 여러 편지에서 자신이 상행보살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소야전답서」에서는 「니치렌은 그 사람도 아니고 그 심부름꾼도 아니지만 먼저 서분(序分)으로 대강 펴고 있다」고 했고(1055쪽), 「생사일대사혈맥초」에서는 「상행보살이 나타났다고 할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까. 니치렌이 먼저 대강 펴고 있다」고 했다(1338쪽). 그러면서 「우에노전답서」에서는 「종지용출품은 니치렌에게는 조금 인연이 있는 품」이라며 「먼저 니치렌 한 사람이 나왔다. 육만 항하사의 보살들에게서 반드시 상을 받으리라 생각하니 믿음직하다」고 했다(1557~1558쪽). 겸손한 말 속에 분명한 자각이 있고, 그 자각은 제자들에게로 열려 있다. 제목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지용의 무리다.

생사일대사의 혈맥 — 불은 태우고, 물은 씻는다

사도의 최련방은 「생사일대사의 혈맥」, 곧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큰 일을 꿰뚫는 법의 핏줄을 물었다. 대성인의 답은 이렇다.

只南無妙法蓮華経釈迦多宝上行菩薩血脈相承と修行し給へ、火は焼照を以て行と為し・水は垢穢を浄るを以て行と為し・風は塵埃を払ふを以て行と為し・又人畜草木の為に魂となるを以て行と為し・大地は草木を生ずるを以て行と為し・天は潤すを以て行と為す・妙法蓮華経の五字も又是くの如し・本化地涌の利益是なり

다만 「남묘호렌게쿄, 석가·다보·상행보살의 혈맥상승」이라 여기고 수행하라. 불은 태우고 비추는 것을 행으로 삼고, 물은 때를 씻는 것을 행으로 삼으며, 바람은 먼지를 털고 또 사람과 짐승과 풀과 나무의 혼이 되는 것을 행으로 삼고, 대지는 풀과 나무를 낳는 것을 행으로 삼으며, 하늘은 적시는 것을 행으로 삼는다.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도 이와 같다. 본화지용의 이익이 이것이다.

「생사일대사혈맥초」, 1338쪽

불이 태우고, 물이 씻고, 땅이 낳듯이, 다섯 글자는 그것이 하는 일로 존재한다. 지용보살의 이익이란 특별한 신통이 아니라, 이 다섯 글자가 세상에서 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 편지는 5부에서 이체동심과 함께 다시 읽는다.

4부 세우다삼대비법

3부 끝에서 「제법실상초」는 지용보살의 일이 둘이라고 했다. 법체인 다섯 글자를 펴는 것, 그리고 이불병좌의 의식을 지어 드러내는 것. 대성인은 이 일을 본존·제목·계단의 셋으로 정리했다. 이것을 삼대비법(三大祕法) 이라 한다.

삼대비법 — 이름이 처음 나오기까지

처음 이름이 적힌 편지

삼대비법이라는 이름이 어서에 처음 나오는 것은 사도 유배가 끝나 가던 문영 11년(1274) 정월, 도키 조닌 등 제자들에게 보낸 「법화행자봉난사」의 추신이다.

追て申す、竜樹・天親は共に千部の論師なり、但権大乗を申べて法華経をば心に存して口に吐きたまわず此に口伝有り、天台伝教は之を宣べて本門の本尊と四菩薩と戒壇と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と之を残したもう、所詮一には仏・授与したまわざるが故に、二には時機未熟の故なり、今既に時来れり四菩薩出現したまわんか日蓮此の事先ず之を知りぬ

덧붙여 말한다. 용수·천친은 모두 천 부의 논을 지은 논사다. 다만 권대승을 펴고 법화경은 마음에 두었을 뿐 입으로 토하지 않으셨다. 여기에 구전이 있다. 천태·전교는 이것을 폈으나 본문의 본존과 네 보살과 계단과 남묘호렌게쿄 다섯 글자는 남겨 두셨다. 요컨대 첫째는 부처가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요, 둘째는 때와 근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 때가 왔다. 네 보살이 나타나실 것이다. 니치렌은 이 일을 먼저 알았다.

「법화행자봉난사」, 965쪽

본문의 본존, 네 보살, 계단, 남묘호렌게쿄 다섯 글자. 넉 달 뒤 5월, 미노부에 들어간 직후에 쓴 「법화취요초」는 이것을 문답으로 세운다.

問うて云く如来滅後二千余年・竜樹・天親・天台・伝教の残したまえる所の秘法は何物ぞや、答えて云く本門の本尊と戒壇と題目の五字となり

묻는다. 여래 입멸 후 이천여 년, 용수·천친·천태·전교가 남겨 두신 비법은 무엇인가. 답한다. 본문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다섯 글자다.

「법화취요초」, 336쪽

같은 대목은 이어서 왜 정법·상법에 펴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답한다. 정법·상법에 이것을 펴면 소승·권대승·적문의 법문이 한꺼번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말법에는 대승도 소승도 「가르침만 있고 도를 얻는 이가 없다(教のみ有つて得道無し)」. 그래서 「역연(逆緣)을 위해서는 다만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에 한한다. 상불경품과 같다」(336쪽). 그리고 다음 장에서 넓음(廣)과 간략함(略)과 요점(要)을 이렇게 가른다.

日蓮は広略を捨てて肝要を好む所謂上行菩薩所伝の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

니치렌은 넓음과 간략함을 버리고 간요를 좋아한다. 이른바 상행보살이 전한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다.

「법화취요초」, 336쪽

현장은 간략함을 버리고 넓음을 좋아하여 사십 권의 『대품경』을 육백 권으로 만들었다. 구마라집은 넓음을 버리고 간략함을 좋아하여 천 권의 『대론』을 백 권으로 만들었다. 대성인은 넓음도 간략함도 버리고 간요를 취한다. 블로그의 「법화취요초」 해설은 「법화경제목초」의 말로 이 셋을 수행에 배당한다. 「한 부 여덟 권 스물여덟 품을 수지독송하는 것은 넓음이요, 방편품·수량품 등을 수지하는 것은 간략함이요, 다만 사구게 하나나 제목만을 부르는 이를 호지하는 것은 요점이다」(「법화경제목초」, 2차 확인).

그리고 「법화취요초」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끝난다. 「이렇게 국토가 어지러워진 뒤에 상행 등의 성인이 나타나 본문의 세 가지 법문을 세우고, 일사천하·사해가 한결같이 묘법연화경이 광선유포될 것은 의심할 바 없다」(338쪽).

「보은초」 — 그 모습

건치 2년(1276) 7월, 옛 스승 도젠보의 죽음을 듣고 쓴 「보은초」는 이 셋의 모습(形貌) 을 처음으로 풀어 적는다.

問うて云く天台伝教の弘通し給わざる正法ありや、答えて云く有り求めて云く何物ぞや、答えて云く三あり、末法のために仏留め置き給う迦葉.阿難等・馬鳴・竜樹等.天台・伝教等の弘通せさせ給はざる正法なり、求めて云く其の形貌如何、答えて云く一には日本・乃至一閻浮提・一同に本門の教主釈尊を本尊とすべし、所謂宝塔の内の釈迦多宝・外の諸仏・並に上行等の四菩薩脇士となるべし、二には本門の戒壇、三には日本・乃至漢土・月氏・一閻浮提に人ごとに有智無智をきらはず一同に他事をすて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べし

묻는다. 천태·전교가 펴지 않으신 정법이 있는가. 답한다. 있다. 구한다. 무엇인가. 답한다. 셋이 있다. 말법을 위해 부처가 남겨 두신 것으로, 가섭·아난 등, 마명·용수 등, 천태·전교 등이 펴지 않으신 정법이다. 구한다. 그 모습은 어떠한가. 답한다. 첫째는 일본 나아가 일염부제가 한결같이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다보, 밖의 제불, 그리고 상행 등의 네 보살이 협사가 될 것이다. 둘째는 본문의 계단. 셋째는 일본 나아가 한토·월지·일염부제에 사람마다 지혜가 있든 없든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른 일을 버리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러야 한다.

「보은초」, 328쪽

그리고 글머리에서 읽은 「니치렌 혼자 … 목소리를 아끼지 않고 부른다」가 바로 이어진다.

「삼대비법품승사」 — 구원에 수행한 법

대성인 만년의 「삼대비법품승사」는 신력품의 결요부촉 경문을 들고, 그 「요점의 법」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問う所説の要言の法とは何物ぞや、答て云く夫れ釈尊初成道より四味三教乃至法華経の広開三顕一の席を立ちて略開近顕遠を説かせ給いし涌出品まで秘せさせ給いし実相証得の当初修行し給いし処の寿量品の本尊と戒壇と題目の五字なり

묻는다. 설하신 요언의 법이란 무엇인가. 답한다. 무릇 석존이 처음 성도한 때부터 사미삼교, 나아가 법화경의 광개삼현일의 자리를 떠나 약개근현원을 설하신 종지용출품까지 감추어 두셨던 것, 곧 실상을 증득하신 당초에 수행하신 바의 수량품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다섯 글자다.

「삼대비법품승사」, 1021쪽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단, 본문의 제목 — 이것이 삼대비법이다. 「비(祕)」는 석존이 종지용출품까지 감추어 두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석존이 구원에 실상을 증득할 때 수행한 법이다. 四 8절의 문저, 곧 구원의 부처를 부처로 만든 근원의 법이 이 삼대비법이다.

이 법을 부촉한 자리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었다.

所居の土は寂光本有の国土なり能居の教主は本有無作の三身なり所化以て同体なり

머무는 국토는 적광본유의 국토요, 머무는 교주는 본유무작의 삼신이며, 교화받는 이들도 똑같은 체다.

「삼대비법품승사」, 1021쪽

국토도, 부처도, 교화받는 이도 모두 본래 그대로(本有)다. 四의 본국토묘·무작삼신이 이 한 문장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대성인은 자신의 일을 이렇게 밝힌다.

此の三大秘法は二千余年の当初・地涌千界の上首として日蓮慥かに教主大覚世尊より口決相承せしなり、今日蓮が所行は霊鷲山の禀承に介爾計りの相違なき色も替らぬ寿量品の事の三大事なり

이 삼대비법은 이천여 년 전 당초에 지용천계의 우두머리로서 니치렌이 틀림없이 교주 대각세존으로부터 구결로 상승한 것이다. 지금 니치렌이 행하는 것은 영취산에서 받은 것과 털끝만큼도 다름없는, 빛깔도 바뀌지 않은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사다.

「삼대비법품승사」, 1023쪽

이 어서는 머리에 「홍안 4년 4월」, 서명에 「홍안 5년 4월 8일」로 날짜가 두 가지 적혀 있다. 이 사이트는 둘을 함께 적는다(부록 C).

이의 일념삼천, 사의 일념삼천

「삼대비법품승사」는 마지막 장에서 일념삼천의 증문을 둘로 나눈다. 五 6절에서 짧게 본 대목이다.

方便品に云く「諸法実相・所謂諸法・如是相・乃至欲令衆生開仏知見」等云云、底下の凡夫・理性所具の一念三千か、寿量品に云く「然我実成仏已来・無量無辺」等云云、大覚世尊・久遠実成の当初証得の一念三千なり

방편품에 「제법실상, 이른바 제법의 여시상, 나아가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열게 하고자」라 했다. 이것은 가장 낮은 범부의 이성(理性)에 갖추어진 일념삼천일 것이다. 수량품에 「그런데 내가 실로 성불한 지 한량없고 가없다」라 했다. 이것은 대각세존이 구원실성의 당초에 증득한 일념삼천이다.

「삼대비법품승사」, 1023쪽

방편품의 일념삼천은 범부의 성품에 이치로 갖추어진 일념삼천이다(三). 수량품의 일념삼천은 부처가 구원에 증득한 일념삼천이다(四). 삼대비법은 그 증득의 일념삼천을 범부가 받아 지닐 수 있는 형태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대성인은 이 법문 전체를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사」라 불렀다.

하나를 열면 셋, 셋을 열면 여섯

삼대비법은 결국 하나다. 블로그 강의가 인용하는 「소야입도전허어서」는 이렇게 말한다. 「대각세존이 부처의 눈으로 말법을 내다보시고, 역죄와 비방의 두 죄를 다스리기 위해 하나의 대비법(一大秘法) 을 남겨 두셨다. … 그 부촉하신 법은 무엇인가. 법화경 가운데서도 넓음을 버리고 간략함을 취하며, 간략함을 버리고 요점을 취한 것, 이른바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 명·체·종·용·교의 오중현이다」(1030쪽. 2차 확인).

창가학회 교학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남묘호렌게쿄라는 일대비법을 열면 본존·제목·계단의 삼대비법이 된다. 삼대비법을 다시 열면 본존은 인본존(人本尊) 과 법본존(法本尊) 으로, 계단은 사(事)의 계단과 의(義)의 계단으로, 제목은 신(信)의 제목과 행(行)의 제목으로 나뉘어 육대비법이 된다. 1부 4절에서 본 『어의구전』 강의가 「일대비법을 열어 삼대비법, 다시 열어 육대비법, 다시 열어 이십팔품, 팔만법장이 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일대비법南無妙法蓮華經
本門の本尊본존人本尊인본존法本尊법본존
本門の題目제목信の題目신의 제목行の題目행의 제목
本門の戒壇계단事の戒壇사의 계단義の戒壇의의 계단
열면 삼대비법, 다시 열면 육대비법, 다시 열면 이십팔품 · 팔만법장 — 『어의구전』 강의
도표 17 · 일대비법·삼대비법·육대비법

『어의구전』은 삼대비법을 불교의 오랜 틀인 계·정·혜 삼학(三學) 과도 겹쳐 놓았다. 수량품의 「찧고 체로 쳐서 섞어 자식에게 먹게 한다(擣簁和合与子令服)」를 「공·가·중의 삼제, 계·정·혜의 삼학」이라 풀었고(755쪽), 「본존을 세우는 일」을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御義口伝に云く此の本尊の依文とは如来秘密神通之力の文なり、戒定慧の三学は寿量品の事の三大秘法是れなり、日蓮慥に霊山に於て面授口決せしなり、本尊とは法華経の行者の一身の当体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이 본존의 근거가 되는 경문은 「여래의 비밀 신통의 힘」이라는 경문이다. 계·정·혜의 삼학은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비법이 이것이다. 니치렌이 틀림없이 영취산에서 마주하여 구결로 받았다. 본존이란 법화경 행자의 한 몸의 당체다.

『어의구전』, 760쪽

창가학회 교학은 흔히 본존을 정(定), 제목을 혜(慧), 계단을 계(戒) 에 배당한다. 석존 이래 불교의 모든 수행이 계·정·혜로 요약되었다면, 말법의 수행은 그 셋이 삼대비법으로, 다시 일곱 글자로 요약된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본존이란 법화경 행자의 한 몸의 당체」. 2부의 「부모가 낳아 준 육신」이 여기서 본존과 맞닿는다.

본문의 본존
삼학정(定)
무엇인가믿고 향하는 근본 — 인법일개
주요 어서「관심본존초」 「삼대비법품승사」 「교오전답서」
본문의 제목
삼학혜(慧)
무엇인가믿고 부르는 실천 — 자행화타
주요 어서「삼대비법품승사」 「보은초」 「지묘법화문답초」
본문의 계단
삼학계(戒)
무엇인가본존을 모시고 부르는 자리
주요 어서「삼대비법품승사」 『어의구전』
도표 18 · 삼대비법과 삼학

본문의 본존

본존이란

본존(本尊) 은 「근본으로 존경하는 대상」, 곧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 향하는 것이다. 「개목초」는 세상의 종파들이 모두 본존을 잘못 알고 있다며, 수량품의 부처를 모르는 것은 자기 아버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215쪽). 무엇을 향해 서는가가 곧 그 사람의 길을 정한다.

본존에 관한 대성인의 생각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문응 원년(1260)의 「창법화제목초」는 법화경을 믿는 사람의 본존을 이렇게 답했다. 「첫째로 본존은 법화경 여덟 권, 한 권, 한 품, 혹은 제목을 써서 본존으로 정해야 한다. 법사품과 신력품에 보인다」(12쪽). 경전 자체, 또는 제목을 쓴 것이 본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뒤 다쓰노쿠치와 사도를 지나며 대성인은 본존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스스로 써서 드러내기 시작한다.

「관심본존초」가 적은 본존의 모습

문영 10년(1273) 4월, 사도의 이치노사와에서 쓴 「관심본존초」는 본문의 본존을 이렇게 적었다. 이 사이트는 본존을 그림으로 싣지 않는다. 대성인이 말로 적은 모습만 옮긴다.

其の本尊の為体本師の娑婆の上に宝塔空に居し塔中の妙法蓮華経の左右に釈迦牟尼仏・多宝仏・釈尊の脇士上行等の四菩薩・文殊弥勒等は四菩薩の眷属として末座に居し迹化他方の大小の諸菩薩は万民の大地に処して雲閣月卿を見るが如く十方の諸仏は大地の上に処し給う迹仏迹土を表する故なり、是くの如き本尊は在世五十余年に之れ無し八年の間にも但八品に限る

그 본존의 모습은 이렇다. 본사의 사바세계 위에 보탑이 허공에 머물고, 탑 안의 묘법연화경 좌우에 석가모니불·다보불, 석존의 협사인 상행 등의 네 보살이 있다. 문수·미륵 등은 네 보살의 권속으로 말석에 있고, 적화·타방의 크고 작은 보살들은 만민이 대지에 있으면서 구름 위의 궁궐과 공경을 우러러보는 것처럼 있으며, 시방의 제불은 대지 위에 계신다. 적불·적토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본존은 재세 오십여 년에 없었고, 법화경 팔 년 동안에도 다만 여덟 품에 한한다.

「관심본존초」, 247~248쪽

가운데에 묘법연화경이 있다. 석가와 다보는 그 좌우에 있다. 법이 가운데이고 부처는 그 곁이다. 三 13절에서 「제법실상초」가 「석가·다보 두 부처도 작용의 부처이며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라 한 것(1358쪽)이 여기서 배치가 된다. 그리고 「관심본존초」는 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지용천계가 나타나 본문의 석존을 협사로 하는 일염부제 제일의 본존이 이 나라에 세워질 것이다. 월지와 진단에도 아직 이 본존은 없었다」(254쪽).

개념도 — 겹 동심원. 가운데 원에 묘법연화경(법), 그 바깥 고리에 석가 · 다보와 상행 등 네 보살이 고르게 놓이고, 다음 고리에 문수 · 미륵 등, 가장 바깥 고리에 적화 · 타방의 보살과 시방의 부처. 본존을 그린 것이 아니다.妙法蓮華經법釋迦多寶上行無邊行淨行安立行文殊 · 彌勒 等네 보살의 권속迹化他方の諸菩薩 · 十方の諸佛대지 위
「관심본존초」(247~248쪽)가 말로 적은 본존의 구성을 관계로만 나타낸 개념도. 본존을 그린 것이 아니다.
妙法蓮華經こそ本佛「제법실상초」 1358쪽
도표 19 · 법이 가운데, 부처는 곁에 — 「관심본존초」 본존 서술의 개념도

인법일개의 본존

「삼대비법품승사」는 본문의 본존을 이렇게 말한다.

寿量品に建立する所の本尊は五百塵点の当初より以来此土有縁深厚本有無作三身の教主釈尊是れなり

수량품에 세운 본존은 오백진점겁의 당초부터 이 국토와 인연이 깊고 두터운 본유무작 삼신의 교주 석존이 이것이다.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블로그 강의는 이 「교주 석존」이 법화경 문상의 석존, 곧 오백진점겁에 성불한 결과의 부처(本果)가 아니라고 풀이한다. 「오백진점의 당초(當初)」라고 굳이 「당초」를 붙인 것은, 그 석존을 부처로 만든 원인의 법, 곧 불종인 묘법과 한 몸인 부처를 가리키기 위해서다. 강의는 이것을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라 부르고, 인법일개의 본존이라 한다. 그리고 앞에서 본 『어의구전』의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요, 무작 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 한다」와 「교오전답서」의 「니치렌의 혼은 남묘호렌게쿄」를 근거로, 창가학회 교학은 대성인이 이 인법일개의 생명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문자로 쓴 만다라 본존이라고 풀이한다. 강의는 본존에 적힌 「남묘호렌게쿄」가 무작삼신의 보호, 곧 법본존을, 「니치렌」이라는 이름이 인본존을 나타낸다고 풀이한다.

이 문을 드러내어 — 십계가 그대로 모인 자리

『어의구전』은 본존이 무엇을 드러낸 것인지를 수량품의 한 구절에서 찾는다. 「그때 나와 대중이 함께 영취산에 나온다(時我及衆僧倶出霊鷲山)」.

御義口伝に云く霊山一会儼然未散の文なり、時とは感応末法の時なり我とは釈尊・及とは菩薩・聖衆を衆僧と説かれたり倶とは十界なり霊鷲山とは寂光土なり、時に我も及も衆僧も倶に霊鷲山に出ずるなり秘す可し秘す可し、本門事の一念三千の明文なり御本尊は此の文を顕し出だし給う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영산의 한 법회가 엄연히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는 경문이다. 때란 감응하는 말법의 때요, 나란 석존이요, 및(及)이란 보살이며, 성중을 대중이라 설하셨다. 함께(倶)란 십계요, 영취산이란 적광토다. 그때 나도, 보살도, 대중도 함께 영취산에 나온다. 비밀히 하라, 비밀히 하라. 본문의 사(事)의 일념삼천을 밝힌 경문이다. 어본존은 이 경문을 드러내신 것이다.

『어의구전』, 756쪽

같은 대목은 「또 이르기를」로 한 번 더 푼다. 「때」는 말법 제오시의 때요, 「나」는 석존, 「및」은 보살, 「대중」은 이승, 「함께」는 육도, 「나온다」는 영산정토에 늘어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십계가 뚜렷이 갖추어진 만다라(十界宛然の曼陀羅)를 드러내는 경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맺는다.

霊山とは御本尊並びに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の住所を説くなり

영산이란 어본존과 니치렌 등의 무리로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이 머무는 곳을 설한 것이다.

『어의구전』, 756쪽

영취산은 인도의 산이 아니다. 본존이 있고, 그 앞에서 제목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 곳이 영취산이다. 五에서 본 「본존은 일념삼천을 그린 거울」이 여기서 「십계가 모두 모인 영산의 법회가 아직 흩어지지 않은 자리」가 된다.

일념삼천을 헹구어 세운 것

「초목성불구결」은 본존을 일념삼천의 법문과 이렇게 잇는다.

一念三千の法門をふりすすぎたてたるは大曼荼羅なり、当世の習いそこないの学者ゆめにもしらざる法門なり、天台・妙楽・伝教・内にはかがみさせ給へどもひろめ給はず、一色一香とののしり惑耳驚心とささやき給いて・妙法蓮華と云うべきを円頓止観と・かへさせ給いき

일념삼천의 법문을 흔들어 헹구어 세운 것이 대만다라다. 지금 세상의 잘못 배운 학자들은 꿈에도 모르는 법문이다. 천태·묘락·전교는 속으로는 비추어 아셨으나 펴지 않으셨다. 「한 빛깔 한 향기」라고 외치고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을 놀라게 한다」고 속삭이시면서, 묘법연화라고 해야 할 것을 원돈지관으로 바꾸어 부르셨다.

「초목성불구결」, 1339쪽

五의 일념삼천이, 헹구어지고 걸러져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한 폭으로 세워진(たてたる) 것이 본존이다. 천태는 「묘법연화」라 불러야 할 것을 「원돈지관」이라 바꾸어 불렀다. 대성인은 그것을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부르고, 그 이름을 가운데에 세웠다.

종이와 먹이 어떻게 부처가 되는가

그렇다면 종이와 먹으로 쓴 것이 어떻게 본존이 되는가. 여기서 2부의 「비정의 성불」이 근거가 된다. 「관심본존초」는 「나무와 그림의 두 상을 본존으로 삼는 것은 외전과 내전이 모두 인정하지만, 그 뜻은 천태 일가에서 나왔다. 풀과 나무 위에 색과 심의 인과를 두지 않는다면, 나무와 그림의 상을 본존으로 믿는 것은 소용없다」고 했다(239쪽).

문영 원년(1264)의 「목회이상개안지사」는 이것을 더 자세히 말한다. 나무와 그림의 불상은 서른두 가지 상호 가운데 서른한 가지를 갖추었으나, 보이지 않는 범음성(梵音聲) 과 마음이 빠져 있다. 무엇을 그 앞에 두느냐에 따라 불상은 전륜왕도, 제석도, 성문도, 보살도 된다. 법화경을 두어야 비로소 원만한 부처가 된다. 그 까닭은 이렇다.

法華経の文字は仏の梵音声の不可見無対色を可見有対色のかたちと・あらはしぬれば顕形の二色となれるなり、滅せる梵音声かへつて形をあらはして文字と成つて衆生を利益するなり

법화경의 문자는 부처의 범음성이라는 보이지 않고 마주할 수 없는 색을, 보이고 마주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낸 것이므로 드러난 색과 형태의 두 색이 되었다. 사라진 범음성이 도리어 형태를 드러내 문자가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목회이상개안지사」, 469쪽

부처의 목소리가 문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읽으시는 분은 문자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곧 부처의 마음이다」(469쪽). 1부에서 「경이란 일체중생의 언어음성」이라 했다. 그 목소리가 문자로 굳어 종이 위에 머물 때, 종이와 먹은 부처의 마음을 담는다. 「법화경을 심법으로 정하여 서른한 가지 상호의 나무와 그림의 상에 새기면, 나무와 그림의 두 상 전체가 생신의 부처다. 초목성불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469쪽). 「교오전답서」의 「니치렌의 혼을 먹물에 적셔 흘려 썼다」는 이 논리의 가장 짙은 실천이다.

가슴 속의 본존 — 경지명합

그러나 본존은 벽에 걸린 대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성인은 건치 3년(1277)의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블로그의 여러 강의가 이 구절을 인용한다.

此の御本尊全く余所に求る事なかれ・只我れ等衆生の法華経を持ち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胸中の肉団におはしますなり、是を九識心王真如の都とは申すなり … 此の御本尊も只信心の二字にをさまれり

이 어본존을 결코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라. 다만 우리 중생이 법화경을 지니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가슴 속의 육단(肉團)에 계신다. 이것을 구식심왕진여의 도읍이라 한다. … 이 어본존도 다만 신심의 두 글자에 거두어져 있다.

「니치뇨고젠답서」, 1244쪽. 2차 확인

구식(九識) 은 유식학이 말하는 여덟 가지 식(안·이·비·설·신·의·말나·아뢰야) 너머의 아홉째 식, 곧 오염되지 않은 근원의 마음이다. 『어의구전』은 「묘법연화경은 구식이요, 십계는 팔식 이하다」라 했다(713쪽). 대성인은 그 가장 깊은 마음을 「진여의 도읍」, 본존이 계신 서울이라 불렀다.

본존은 밖에 모신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향해 부르는 사람의 가슴 속에 있다. 거울 앞에 선 사람은 거울 속에서 자기 생명의 불계를 본다. 밖의 본존과 안의 본존은 둘이 아니다. 이것을 경지명합(境智冥合) 이라 한다. 「시조깅고전답서」(번뇌즉보리어서)는 이불병좌를 이렇게 풀었다. 「제법은 다보에, 실상은 석가에 맞춘다. 이것 또한 경과 지의 두 법이다. 다보는 경이요 석가는 지다. 경과 지가 둘이면서 경과 지가 둘이 아닌 내증이다」(1116쪽). 三 12절에서 탑 안에 나란히 앉은 다보(경)와 석가(지)의 모습이 여기서 본존(경) 과 부르는 이의 신심(지) 이 하나가 되는 모습으로 되풀이된다. 「당체의초」는 이 경지를 「개근현원·본지난사·경지명합·본유무작의 당체연화」라 불렀다(517쪽).

두 원의 겹침 — 왼쪽 경(境): 밖의 본존, 오른쪽 지(智): 신심, 가슴 속의 육단. 두 원 사이에 거울 기호, 겹친 곳이 경지명합.境본존 — 밖多寶智신심 — 가슴 속胸中の肉團釋迦境智冥合境智而二 · 境智不二 → 境智冥合
此の御本尊全く餘所に求る事なかれ「니치뇨고젠답서」 1244쪽 · 2차 확인多寶は境なり釋迦は智なり「시조깅고전답서」 1116쪽
三 도표 14 「이불병좌와 경지명합」과 짝 — 諸法 · 多寶 · 境 / 實相 · 釋迦 · 智
관계를 나타낸 개념도 — 본존을 그린 것이 아니다
도표 20 · 경지명합 — 밖의 본존과 가슴 속의 본존

일염부제 제일의 본존을 믿으라

「제법실상초」의 맺음은 짧다. 「이 글에는 니치렌의 큰일인 법문들을 적었다. 잘 보고 풀어 뜻을 얻으시라. 일염부제 제일의 어본존을 믿으시라(一閻浮提第一の御本尊を信じさせ給へ)」(1361쪽). 「자쿠니치보어서」는 「이 어본존이야말로 저승길의 옷이다. 잘 믿으시라(此の御本尊こそ冥途のいしやうなれ・よくよく信じ給うべし)」라 했다(903쪽). 이생의 부끄러움도 저승의 부끄러움도 가려 주는 옷이라는 것이다. 본존에 대한 대성인의 말은 결국 「믿으라」 로 모인다. 그 믿음이 5부의 첫 주제다.

본문의 제목 — 자행과 화타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한다

1부에서 「삼대비법품승사」의 제목론을 읽었다. 정법·상법의 제목은 자기 수행에 그쳤고(理行의 제목), 말법의 제목은 자행과 화타에 걸친다. 이 「화타」가 무엇인지를 가장 짧게 말한 것은 「지묘법화문답초」의 맺음이다.

須く心を一にして南無妙法蓮華経と我も唱へ他をも勧んのみこそ今生人界の思出なるべき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하는 것만이 이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추억이 될 것이다.

「지묘법화문답초」, 467~468쪽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한다. 제목은 부르는 것이면서 전하는 것이다. 블로그의 「삼대비법품승사」 계단 강의는 본존과 제목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본존을 믿고 향하여 부르는 것이 본문의 제목의 자행 면이고, 본존을 찬탄하고 그 믿음을 권해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이 제목을 부르게 해 가는 것이 화타 면이다.

가려 설할 것인가, 억지로라도 들려줄 것인가

그런데 근기를 살피지 않고 법을 설하면, 듣는 이가 비방하여 죄를 짓지 않는가. 「창법화제목초」는 이 물음을 정면으로 다룬다. 방편품은 근기를 살펴 설하라 하고, 상불경품은 비방해도 억지로 설하라 한다. 한 경 안에서 앞뒤가 물과 불 같다. 대성인은 천태의 말로 이것을 푼다. 「본래 선근이 있는 이는 석가가 소승으로 보호하고, 본래 선근이 없는 이는 불경이 대승으로 억지로 독을 준다(強毒)」. 그리고 묘락의 말을 든다.

仏世は当機の故に簡ぶ末代は結縁の故に聞かしむ

부처 재세에는 그 자리의 근기를 위하므로 가리고, 말대에는 인연을 맺게 하려고 들려준다.

「창법화제목초」, 14~15쪽

부처 재세에는 많은 이들이 그 생에 깨달을 수 있었으므로 근기를 살폈다. 입멸 뒤에는 그 자리에서 깨달을 이가 적고 인연을 맺을 이가 많으므로, 가리지 않고 법화경을 들려준다. 비방하더라도 그 비방이 인연(逆緣)이 된다. 독을 바른 북은 듣고 싶지 않은 이에게도 그 소리가 닿아 효력을 내듯, 한 번 들은 법은 비방한 이에게도 반드시 성불의 인연으로 남는다. 이것을 독고(毒鼓)의 인연이라 한다. 「법화취요초」가 「역연을 위해서는 다만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에 한한다. 상불경품과 같다. 나의 문도는 순연이요 일본국은 역연이다」라 한 것(336쪽)이 이 뜻이다.

불경보살의 스물네 글자와 이 다섯 글자

「현불미래기」는 이 연결을 더 분명히 한다. 여러 하늘과 지용보살이 법화경의 행자를 수호하면,

此の人は守護の力を得て本門の本尊・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閻浮提に広宣流布せしめんか、例せば威音王仏の像法の時・不軽菩薩・我深敬等の二十四字を以て彼の土に広宣流布し一国の杖木等の大難を招きしが如し、彼の二十四字と此の五字と其の語殊なりと雖も其の意是れ同じ彼の像法の末と是の末法の初と全く同じ彼の不軽菩薩は初随喜の人・日蓮は名字の凡夫なり

이 사람은 수호의 힘을 얻어 본문의 본존과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로써 염부제에 광선유포하게 할 것이다. 예컨대 위음왕불의 상법 때 불경보살이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한다」 등의 스물네 글자로 그 땅에 광선유포하여 온 나라의 막대기와 기와 등의 대난을 부른 것과 같다. 저 스물네 글자와 이 다섯 글자는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저 상법의 끝과 이 말법의 처음이 완전히 같다. 저 불경보살은 초수희의 사람이요, 니치렌은 명자의 범부다.

「현불미래기」, 507쪽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절하며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합니다. 감히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한역으로 스물네 글자다. 사람들은 그를 막대기로 때리고 돌을 던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대성인은 그 스물네 글자와 이 다섯 글자가 뜻이 같다고 했다. 제목을 전한다는 것은 상대를 설득해 이기는 일이 아니다. 상대 안의 불성을 공경하는 일이다.

「마쓰노전답서」는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옮긴다. 불경보살은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법화경을 지니면 반드시 성불한다. 그를 가벼이 여기면 부처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 된다」며 예배의 행을 세웠다. 법화경을 지니지 않은 사람조차 그렇게 예배했으니, 하물며 지니는 사람끼리랴. 「법화경을 지니는 이는 반드시 모두 부처다. 부처를 헐뜯으면 죄를 얻는다」(1382쪽).

해 질 녘 마을 길에서 한 스님이 두 손을 모으고 깊이 절하고, 그 앞을 지나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막대기를 치켜든 금박 수묵화
그림 5 · 불경보살의 절

성인의 제목과 우리의 제목

같은 「마쓰노전답서」(건치 2년, 1276)에는 한 재가 신도의 소박한 물음이 적혀 있다. 성인(대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가 부르는 제목의 공덕은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更に勝劣あるべからず候、其の故は愚者の持ちたる金も智者の持ちたる金も・愚者の然せる火も智者の然せる火も其の差別なきなり、但し此の経の心に背いて唱へば其の差別有るべきなり

결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어리석은 이가 가진 금도 지혜로운 이가 가진 금도, 어리석은 이가 피운 불도 지혜로운 이가 피운 불도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의 마음을 거슬러 부른다면 차별이 있을 것이다.

「마쓰노전답서」, 1381~1382쪽

그리고 그 「경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사비방(十四誹謗) 으로 든다. 교만·게으름·아집·얕은 앎·욕망에 집착함·이해하지 못함·믿지 않음·찡그림·의심·비방·선을 가벼이 여김·선을 미워함·선을 시기함·선을 원망함. 이 열네 가지는 재가와 출가 모두에 걸친다. 그리고 결론한다. 「이렇게 마음먹고 부르는 제목의 공덕은 석존의 공덕과 같을 것이다」(1382쪽).

제목의 공덕에 위아래가 없다. 부르는 이가 누구든, 금은 금이고 불은 불이다. 다만 그 제목을 부르는 마음, 곧 함께 부르는 이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느냐가 물음이 된다. 5부의 이체동심이 여기서 준비된다.

뜻을 몰라도 큰 선근

「묘호니고젠답서」는 제목의 공덕을 이렇게 맺었다.

さて此の経の題目は習い読む事なくして大なる善根にて候、悪人も女人も畜生も地獄の衆生も十界ともに即身成仏と説かれて候は、水の底なる石に火のあるが如く百千万年くらき所にも燈を入れぬればあかくなる

그런데 이 경의 제목은 배우고 읽는 일 없이도 큰 선근이다. 악인도 여인도 축생도 지옥의 중생도 십계가 모두 즉신성불한다고 설한 것은, 물 밑의 돌에 불이 있는 것과 같고, 백천만 년 어두운 곳에도 등불을 들이면 밝아지는 것과 같다.

「묘호니고젠답서」, 1403쪽

「월수어서」(1264)는 한 번의 제목을 부르는 공덕이 얼마나 큰지를 이렇게 적었다. 한 부를, 한 품을, 한 게송을, 혹은 제목만을 단 한 번 부르거나, 평생에 단 한 번 부르는 것을 듣고 기뻐하거나, 그 기뻐하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일이 쉰 번 전해져 마지막에는 두세 살 아이처럼 마음이 약해지더라도, 그 공덕은 사리불·목련·문수·미륵 같은 이들이 다른 경을 가슴에 품은 공덕보다 백천만억 배 뛰어나다. 부처의 지혜로도 그 공덕은 다 헤아리지 못한다(1199쪽).

「성우문답초」의 한 구절은 블로그 강의들이 거듭 인용한다.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만 불러도 멸하지 않을 죄가 있겠는가, 오지 않을 복이 있겠는가. 진실이며 매우 깊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只南無妙法蓮華経とだにも唱へ奉らば滅せぬ罪やあるべき来らぬ福や有るべき、真実なり甚深なり是を信受すべし)」(「성우문답초」, 497쪽. 2차 확인).

본문의 계단 — 부르는 이의 자리

계단이란

계단(戒壇) 은 본래 출가자가 계율을 받는 단(壇)이다. 일본에서는 나라 동대사 등의 세 계단이 있었고, 전교대사는 평생의 소원으로 히에이산에 법화경에 따른 대승 원돈계단을 세우려 했다. 남도의 반대로 생전에는 허락이 나지 않았고, 입멸 이레 뒤에 칙허가 내렸다. 「보은초」는 그 싸움을 자세히 적고 「그러나 경문이 분명했으므로 히에이산의 대승계단이 이미 세워졌다」고 했다(328쪽).

「삼대비법품승사」의 계단

대성인이 삼대비법 가운데 계단의 조건과 뜻을 밝힌 것은 「삼대비법품승사」 한 곳뿐이다.

戒壇とは王法仏法に冥じ仏法王法に合して王臣一同に本門の三秘密の法を持ちて有徳王・覚徳比丘の其の乃往を末法濁悪の未来に移さん時勅宣並に御教書を申し下して霊山浄土に似たらん最勝の地を尋ねて戒壇を建立す可き者か時を待つ可きのみ事の戒法と申すは是なり、三国並に一閻浮提の人・懺悔滅罪の戒法のみならず大梵天王・帝釈等も来下して蹋給うべき戒壇なり

계단이란, 왕법이 불법에 그윽이 맞고 불법이 왕법에 합하여, 왕과 신하가 한결같이 본문의 세 비밀한 법을 지니고, 유덕왕과 각덕비구의 옛일을 말법 탁악의 미래로 옮길 때, 칙선과 미교서를 받아 영산정토와 닮은 가장 뛰어난 땅을 찾아 계단을 세워야 할 것이다. 때를 기다려야 할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란 이것이다. 삼국과 일염부제 사람들이 참회하고 죄를 멸하는 계법일 뿐 아니라, 대범천왕·제석 등도 내려와 밟으실 계단이다.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블로그 강의는 이 대목을 조건과 뜻으로 나누어 읽는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삼국과 일염부제 사람들이 참회하고 죄를 멸하는 계법」에 대해, 이 계단은 한 나라의 것이 아니라 세계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세계 사람들이 모여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라는 데에 계단의 본뜻이 있다고 했다.

이계(理戒)와 사계(事戒) — 받아 지니는 것이 곧 계

바로 다음 장에서 대성인은 이 계법이 서면 히에이산의 계단은 「적문의 이계(迹門の理戒)」이므로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1022~1023쪽). 블로그 강의는 이렇게 풀이한다. 이계란 법화경 적문, 곧 이(理)의 일념삼천에 근거해 세운 계다. 사계(事戒), 곧 사의 계법은 말법에 본문 문저의 사의 일념삼천의 당체인 본존을 곧바로 받아 지니는 것을 계를 받고 지니는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을 수지즉지계(受持卽持戒) 라 한다.

강의가 인용하는 「교행증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법화경 본문의 간심인 묘법연화경은 삼세 제불의 만행만선의 공덕을 모아 다섯 글자로 삼았다. 이 다섯 글자 안에 어찌 만 가지 계의 공덕을 담지 않았겠는가. 다만 이 구족한 묘계는 한 번 지닌 뒤에는 행자가 깨뜨리려 해도 깨뜨려지지 않는다. 이것을 금강보기계(金剛寶器戒)라 했을까」(1282쪽. 2차 확인). 무엇을 금하는 계율이 아니라, 이 법을 지니는 것이 곧 모든 선을 지키고 악을 멈추는 계가 된다.

『어의구전』은 방편품의 「계에 흠과 샘이 있다(於戒有欠漏)」를 풀며 이것을 뒤집어 보였다. 소승·권교의 계는 온갖 병을 다스리는 계법이지만, 법화경의 계는 「이것을 계를 지님이라 한다(是名持戒)」의 묘법이다. 「그러므로 흠과 샘의 당체가 그대로 계를 지님의 체다(故に欠漏の当体其の侭是名持戒の体なり)」(718쪽). 계를 어긴 이 몸이 그대로 묘법을 지니는 몸이 된다.

사의 계단과 의의 계단

블로그 강의는 일관의 구분을 소개한다. 사(事)의 계단은 「삼대비법품승사」가 말한, 광선유포의 때에 세워져 일염부제 사람들이 참회멸죄하는 계단이다. 의(義)의 계단은 「본문의 본존이 머무는 곳」이다. 광선유포에 이르지 않았어도 본존이 있는 곳에는 계단의 뜻이 있으며, 그 뜻은 사의 계단과 같다. 그 계법이 사의 계법이기 때문이다. 강의는 이렇게 요약한다. 본문의 계단이란 본문의 본존을 모시고 본문의 제목을 부르는 곳이며, 어본존을 모신 모든 곳이 의의 계단에 해당한다.

앞 절의 『어의구전』이 이미 같은 말을 했다. 「영산이란 어본존과 니치렌 등의 무리로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이 머무는 곳」(756쪽). 2부의 「당체의초」가 「그 사람이 머무는 곳은 상적광토」라 했다(512쪽). 四 6절에서 본 「수호국가론」의 「법화경을 수행하는 이가 머무는 곳을 정토라고 생각하라」(72쪽)도 같은 뜻이다. 계단은 멀리 있는 특별한 건물이기 전에, 본존을 향해 부르는 이의 자리다. 그 자리가 넓어지고 이어져 사회 전체에 퍼진 모습이 사의 계단이다.

迹門の理戒延曆寺 · 傳敎
事の戒壇광선유포의 때一閻浮提の人懺悔滅罪の處
義の戒壇本尊所住の處부르는 이의 자리
理戒本門の事戒 — 受持卽持戒
王法佛法に冥じ佛法王法に合して「삼대비법품승사」 1022쪽생명의 존엄이 사회의 바탕에 · 불법이 사회에서 실증 (강의 요지)
도표 21 · 계단 — 이계에서 사계로, 의의 계단에서 사의 계단으로
5부 부르다신·행·학, 그리고 함께

4부까지 법과 사람과 그 세움을 읽었다. 5부는 그 법을 부르는 삶을 읽는다. 「제법실상초」의 맺음이 길잡이다.

一閻浮提第一の御本尊を信じさせ給へ、あひかまへて・あひかまへて・信心つよく候て三仏の守護をかうむらせ給うべし、行学の二道をはげみ候べし、行学たへなば仏法はあるべからず、我もいたし人をも教化候へ、行学は信心よりをこるべく候、力あらば一文一句なりともかたらせ給うべし

일염부제 제일의 어본존을 믿으시라. 부디 부디 신심을 강하게 하여 세 부처의 수호를 받으시라. 행과 학의 두 길을 힘쓰시라. 행과 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있을 수 없다. 나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시라. 행과 학은 신심에서 일어날 것이다. 힘이 있다면 한 글, 한 구절이라도 이야기하시라.

「제법실상초」, 1361쪽

신(信), 행(行), 학(學). 三 15절에서 이 구절을 이미 읽었다. 여기서는 그것을 삼대비법과 겹쳐 읽는다.

신 — 믿음으로써 들어간다

문은 신심이다

법화경 비유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 사리불도 이 경에서는 믿음으로써 들어갈 수 있었다(以信得入)」. 지혜제일의 사리불조차 법화경에는 지혜가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갔다. 『어의구전』은 방편품의 「그 지혜의 문(其智慧門)」을 풀며 이 구절을 끌어온다.

三智の体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門とは信心の事なり、爰を以て第二の巻に以信得入と云う入と門とは之れ同じきなり、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を智慧とは云うなり

세 지혜의 체란 남묘호렌게쿄다. 문이란 신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제2권에 「믿음으로써 들어간다」라 했다. 들어감과 문은 같은 것이다.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지혜라 한다.

『어의구전』, 714쪽

부처의 지혜로 들어가는 문이 신심이다. 그리고 그 지혜 자체가 남묘호렌게쿄다. 지혜를 얻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부르는 것이 곧 지혜다.

신은 값, 해는 보배

신해품의 첫 강의는 이것을 더 분명히 한다.

一念三千も信の一字より起り三世の諸仏の成道も信の一字より起るなり、此の信の字元品の無明を切る利剣なり其の故は信は無疑曰信とて疑惑を断破する利剣なり解とは智慧の異名なり信は価の如く解は宝の如し三世の諸仏の智慧をかうは信の一字なり智慧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信は智慧の因にして名字即なり信の外に解無く解の外に信無し信の一字を以て妙覚の種子と定めたり

일념삼천도 믿을 신(信) 한 글자에서 일어나고, 삼세 제불의 성도도 신 한 글자에서 일어난다. 이 신이라는 글자는 근본 무명(元品の無明)을 베는 날카로운 칼이다. 신이란 의심 없음을 신이라 하는 것이어서 의혹을 끊어 부수는 칼이기 때문이다. 해(解)란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신은 값과 같고 해는 보배와 같다. 삼세 제불의 지혜를 사는 것은 신 한 글자다. 지혜란 남묘호렌게쿄다. 신은 지혜의 원인이며 명자즉이다. 신 밖에 해가 없고 해 밖에 신이 없다. 신 한 글자를 묘각의 씨앗으로 정했다.

『어의구전』, 725쪽

신은 값이고 해는 보배다. 보배를 사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삼세 제불의 지혜라는 보배를 사는 값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근본 무명을 베는 칼」이다. 二에서 「무명」은 가장 깊은 미혹이었고, 五에서 「삼천은 한 생각의 무명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무명을 베는 것은 수행의 공덕을 쌓아서가 아니라 의심 없는 한 생각이다. 3부 8절의 육즉에서 명자즉이 제목을 처음 듣는 때였다. 여기서 신은 곧 명자즉이며 묘각의 씨앗이다. 처음과 끝이 한 글자에 들어 있다.

같은 품의 「위없는 보배 무더기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었다(無上宝聚不求自得)」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보배 무더기란 삼세 제불의 만행만선, 모든 바라밀의 보배를 모은 남묘호렌게쿄다. 이 위없는 보배 무더기를 수고도 없고 수행의 공도 없이 한마디로 받아 가지는 신심이다.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는다는 것이 이것이다」(727쪽).

나의 한 생각을 묘법연화경이라 부른다고 믿으라

그러면 무엇을 믿는가. 「일생성불초」는 믿음의 방향을 분명히 한다.

但し妙法蓮華経と唱へ持つと云うとも若し己心の外に法ありと思はば全く妙法にあらず麤法なり … 故に妙法と唱へ蓮華と読まん時は我が一念を指して妙法蓮華経と名くるぞと深く信心を発すべきなり

다만 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고 지닌다 해도, 만약 자기 마음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이 아니라 거친 법(麤法)이다. … 그러므로 묘법이라고 부르고 연화라고 읽을 때는, 나의 한 생각을 가리켜 묘법연화경이라 이름하는 것이라고 깊이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

「일생성불초」, 383쪽

믿음은 저 멀리 있는 무엇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다. 부르는 이름이 곧 나의 한 생각의 이름이라고 믿는 것이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경을 읽고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는 것까지 모두 나의 한 생각에 담긴 공덕이라고 신심을 가져야 한다」(383쪽). 4부에서 본 「이 어본존을 결코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라」와 같은 말이다.

아내가 남편을 아끼듯

블로그의 「소야입도전답서」 강의는 신심이 무엇인지를 「묘이치니고젠답서」의 한 구절로 보여 준다.

夫信心と申すは別にはこれなく候、妻のをとこをおしむが如くをとこの妻に命をすつるが如く、親の子をすてざるが如く・子の母にはなれざるが如くに、法華経釈迦多宝・十方の諸仏菩薩・諸天善神等に信を入れ奉り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へたてまつるを信心とは申し候なり

무릇 신심이라 하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아끼듯,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듯,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않듯, 자식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듯, 법화경과 석가·다보, 시방의 제불보살, 제천선신 등에게 믿음을 두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신심이라 한다.

「묘이치니고젠답서」, 1255쪽. 2차 확인

신심은 특별한 초월의 경험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그 마음의 모양 그대로다. 「교오전답서」는 이렇게 말했다. 「다만 신심에 달려 있다. 칼도 나아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다. 법화경의 칼은 신심이 굳센 사람이라야 쓸 수 있으니, 도깨비에게 쇠방망이다」(1124쪽).

信값 · 價無疑曰信元品の無明を切る利劍명자즉 — 들어가는 문
信の外に解無く
解の外に信無し
解보배 · 寶解とは智慧の異名なり지혜 = 南無妙法蓮華經
以信得入 — 門とは信心の事なり『어의구전』 714쪽
도표 22 · 신은 값, 해는 보배 — 신심과 지혜

행 — 부른다는 것

어두운 거울을 닦는다

부르는 것은 무엇을 하는 일인가. 「일생성불초」는 거울의 비유로 답한다.

譬えば闇鏡も磨きぬれば玉と見ゆるが如し、只今も一念無明の迷心は磨かざる鏡なり是を磨かば必ず法性真如の明鏡と成るべし、深く信心を発して日夜朝暮に又懈らず磨くべし何様にしてか磨くべき只南無妙法蓮華経と唱へたてまつるを是をみがくとは云うなり

비유하면 어두운 거울도 닦으면 구슬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의 한 생각 무명의 미혹한 마음은 닦지 않은 거울이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밝은 거울이 될 것이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밤낮으로,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없이 닦아야 한다. 어떻게 닦는가.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일생성불초」, 384쪽

二 15절에서 이미 이 거울을 읽었다. 같은 거울이다. 어두운 거울과 밝은 거울은 두 개가 아니다. 무명과 법성이 한 몸이라는 1부의 말이 여기서 닦는다는 동작이 된다. 그리고 그 닦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밤낮으로, 아침저녁으로」. 부르는 일은 매일의 일이다.

비추고 태우는 불

『어의구전』의 서품 강의는 제자 교진여의 이름 「불을 섬기는 그릇(火器)」을 두고 불의 두 작용, 비춤(照)과 태움(焼)을 이렇게 풀었다.

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は生死の闇を照し晴して涅槃の智火明了なり生死即涅槃と開覚するを照則闇不生とは云うなり、煩悩の薪を焼いて菩提の慧火現前するなり煩悩即菩提と開覚するを焼則物不生とは云うなり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은 생사의 어둠을 비추어 걷어 내고 열반의 지혜의 불이 밝은 것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깨닫는 것을 「비추면 어둠이 생기지 않는다」라 한다. 번뇌의 장작을 태워 보리의 지혜의 불이 드러나는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고 깨닫는 것을 「태우면 물건이 생기지 않는다」라 한다.

『어의구전』, 710쪽

번뇌라는 장작이 있어야 지혜의 불이 탄다. 번뇌를 없애고 나서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다. 번뇌가 그대로 불의 연료가 된다. 「시조깅고전답서」(번뇌즉보리어서)는 방편품의 「제불의 지혜는 매우 깊고 한량없다」에서 「이 지혜란 무엇인가. 제법실상·십여과성의 법체다. 그 법체란 또 무엇인가.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다」라 하고, 「생사의 당체가 불생불멸이라고 깨닫는 것 말고는 생사즉열반이 없다」고 했다(1116쪽).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그렇다면 부르는 사람의 삶은 괴로움이 없는 삶인가. 건치 2년(1276) 6월, 주군과의 갈등으로 곤경에 처한 시조깅고에게 대성인은 이렇게 썼다.

一切衆生・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より外の遊楽なきなり経に云く「衆生所遊楽」云云、此の文・あに自受法楽にあらずや、衆生のうちに貴殿もれ給うべきや、所とは一閻浮提なり日本国は閻浮提の内なり、遊楽とは我等が色心依正ともに一念三千・自受用身の仏にあらずや

일체중생에게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 말고 다른 즐거움은 없다. 경에 「중생이 즐겁게 노니는 곳」이라 했다. 이 경문이 어찌 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생 가운데 그대가 빠지겠는가. 「곳」이란 일염부제요, 일본국은 염부제 안에 있다. 「즐거움」이란 우리의 색심과 의정이 모두 일념삼천이요 자수용신의 부처가 아니겠는가.

「시조깅고전답서」, 1143쪽

ただ世間の留難来るとも・とりあへ給うべからず、賢人・聖人も此の事はのがれず、ただ女房と酒うちのみて南無妙法蓮華経と・となへ給へ、苦をば苦とさとり楽をば楽とひらき苦楽ともに思い合せて南無妙法蓮華経とうちとなへゐさせ給へ、これあに自受法楽にあらずや

다만 세간의 어려움이 오더라도 상대하지 마시라. 현인·성인도 이 일은 피하지 못한다. 그저 아내와 술 한잔 나누며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라.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깨닫고,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열어,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생각하며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계시라. 이것이 어찌 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조깅고전답서」, 1143쪽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괴로움을 없는 척하지 않는다. 즐거움에 빠지지도 않는다. 둘을 함께 안고 부른다. 二의 공·가·중에서, 가(假)는 「분명히 있는 것」이었다. 병은 지금 아프고 빚은 지금 갚아야 한다(五 10절). 부르는 삶은 그 가를 지우지 않는다. 그 가 한가운데에서 자수법락(自受法樂), 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받는 부처의 생명을 연다. 「아내와 술 한잔 나누며」라는 말 속에 이 가르침의 체온이 있다.

같은 해 12월의 「마쓰노전답서」도 같다. 「세상이 괴로울 때도 이생의 괴로움조차 슬픈데 내생의 괴로움은 어떻겠느냐 생각하며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기쁠 때도 이생의 기쁨은 꿈속의 꿈이요 영산정토의 기쁨이야말로 참된 기쁨이라 생각하며 또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라」(1386쪽).

밤, 옛집 툇마루에 부부가 등을 보이고 나란히 앉아 있고, 곁에 종이 등 하나가 켜져 있으며 뜰 너머 산 위로 구름에 걸린 달이 뜬 금박 수묵화
그림 6 ·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안고

삼장사마 — 현자는 기뻐하고 어리석은 이는 물러난다

부르는 길에 장애가 없다는 약속은 없다. 오히려 반대다. 건치 원년(1275), 아버지에게 신앙을 버리라는 압박을 받던 이케가미 형제의 동생에게 대성인은 이렇게 썼다.

しをのひると・みつと月の出づると・いると・夏と秋と冬と春とのさかひには必ず相違する事あり凡夫の仏になる又かくのごとし、必ず三障四魔と申す障いできたれば賢者はよろこび愚者は退くこれなり

조수가 빠질 때와 찰 때, 달이 뜰 때와 질 때, 여름과 가을과 겨울과 봄의 경계에는 반드시 어긋나는 일이 있다. 범부가 부처가 되는 것도 이와 같다. 반드시 삼장사마라는 장애가 나타나니, 현명한 이는 기뻐하고 어리석은 이는 물러난다는 것이 이것이다.

「효에노사칸전답서」, 1091쪽

계절이 바뀌는 경계에 거친 날씨가 오듯, 생명이 바뀌는 경계에는 장애가 온다. 장애는 길을 잘못 든 증거가 아니라 바뀌는 경계에 이르렀다는 신호다. 「교오전답서」는 병든 딸을 둔 부모에게 이렇게 썼다. 「교오고젠에게는 재앙도 바뀌어 복이 될 것이다. 부디 신심을 내어 이 어본존에 기원하시라.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는가」(1124쪽). 2부의 「삼도가 삼덕으로 바뀐다(轉)」가 여기서 한 가정의 기도가 된다.

「가연정업서」는 병을 앓는 도키 조닌의 아내에게 「하루의 목숨은 삼천대천세계의 재물보다도 귀하다(一日の命は三千界の財にもすぎて候なり)」라 했다(985~986쪽). 1부 3절에서 「목숨이라는 재물보다 더한 재물은 없다」고 한 「백미일표어서」와 같은 말이다. 귀명은 목숨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이 귀한 목숨을 법과 함께 가장 잘 사는 일이다.

부르며 죽는다면

그리고 끝까지 부른다. 사도의 「여설수행초」(1273)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一期を過ぐる事程も無ければいかに強敵重なるとも・ゆめゆめ退する心なかれ恐るる心なかれ、縦ひ頚をば鋸にて引き切り・どうをばひしほこを以て・つつき・足にはほだしを打つてきりを以てもむとも、命のかよはんほどは南無妙法蓮華経・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て唱へ死に死るならば釈迦・多宝・十方の諸仏・霊山会上にして御契約なれば須臾の程に飛び来りて手をとり肩に引懸けて霊山へ・はしり給はば

한평생이 지나는 것은 머지않으니, 아무리 강한 적이 겹쳐도 결코 물러나는 마음을 갖지 말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설령 목을 톱으로 켜고, 몸통을 창으로 찌르고, 발에 족쇄를 채우고 송곳으로 비비더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 하고 부르고 부르다 죽는다면, 석가·다보·시방 제불이 영산회상에서 약속하셨으니 잠깐 사이에 날아와 손을 잡고 어깨에 걸쳐 영산으로 달려가실 것이다.

「여설수행초」, 504~505쪽

학 — 한 글, 한 구절이라도

행과 학은 신심에서 일어난다

「제법실상초」는 「행과 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행과 학은 신심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학(學)은 신심 밖의 교양이 아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알고 싶어지고, 알면 믿음이 깊어진다. 1부에서 「창법화제목초」가 「그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 이것을 관하라」고 한 것도 같은 순서다.

信신
삼대비법본존
실천믿음으로써 들어간다 — 신은 값, 해는 보배
어서『어의구전』 714·725, 「니치뇨고젠답서」
行행
삼대비법제목
실천스스로 부르고(자행), 남에게 권한다(화타)
어서「삼대비법품승사」, 「지묘법화문답초」
學학
삼대비법계단을 넓히는 힘
실천배우고 이야기한다 — 「한 글, 한 구절이라도」
어서「제법실상초」 1361
도표 23 · 신·행·학과 삼대비법

이 사이트가 「깊이 읽기」를 하는 자리가 학이다. 학은 신에서 일어나고, 다시 신을 깊게 하며, 행을 넓힌다.

세간의 법이 불법의 전체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경전 속에만 있지 않다. 「백미일표어서」는 흰쌀 한 섬을 보낸 이에게 이렇게 썼다.

まことの・みちは世間の事法にて候

참된 길은 세간의 일(事法)이다.

「백미일표어서」, 1597쪽

이전의 경들은 세간의 법을 불법에 빗대어 알렸다. 법화경은 그렇지 않다. 「세간의 법이 그대로 불법의 전체라고 해석하셨다(やがて世間の法が仏法の全体と釈せられて候)」(1597쪽). 이전의 경들은 마음이 대지와 같고 만법은 풀과 나무와 같다고 했지만, 법화경은 마음이 곧 대지이고 대지가 곧 풀과 나무다. 이전의 경들은 마음이 맑은 것이 달과 같고 깨끗한 것이 꽃과 같다고 했지만, 법화경은 「달이야말로 마음이고 꽃이야말로 마음이다」 라고 한다(1597쪽). 이 사이트의 이름에 꽃이 있는 까닭이 여기서 한 번 더 확인된다.

생사일대사의 혈맥 — 함께 부르는 법

묘는 죽음, 법은 삶

사도의 최련방은 「생사일대사의 혈맥」을 물었다. 문영 9년(1272) 2월, 대성인의 답은 이렇게 시작한다.

夫れ生死一大事血脈とは所謂妙法蓮華経是なり、其の故は釈迦多宝の二仏宝塔の中にして上行菩薩に譲り給いて此の妙法蓮華経の五字過去遠遠劫より已来寸時も離れざる血脈なり、妙は死法は生なり此の生死の二法が十界の当体なり又此れを当体蓮華とも云うなり

무릇 생사일대사의 혈맥이란 이른바 묘법연화경이 이것이다. 그 까닭은 석가·다보 두 부처가 보탑 안에서 상행보살에게 물려주신 이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잠시도 떨어지지 않은 혈맥이기 때문이다. 묘는 죽음이요 법은 삶이다. 이 삶과 죽음의 두 법이 십계의 당체다. 또 이것을 당체연화라고도 한다.

「생사일대사혈맥초」, 1336쪽

묘는 죽음, 법은 삶. 1부에서 묘는 법성, 법은 무명이었다. 여기서는 죽음과 삶이다. 전교대사의 말이 이어진다. 「삶과 죽음의 두 법은 한마음의 묘한 작용이요, 있음과 없음의 두 길은 본각의 참된 덕이다」. 천지·음양·해와 달·지옥에서 부처까지 삶과 죽음의 두 법 아닌 것이 없다. 「이처럼 삶과 죽음도 오직 묘법연화경의 삶과 죽음이다」(1336쪽). 『어의구전』은 수량품의 「삼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를 풀며 「생사를 보고 싫어하여 떠나는 것을 미혹이라 하고 시각(始覺)이라 한다. 본래 있는 생사라고 알고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본각이라 한다」고 했다(753쪽). 삶도 죽음도 묘법의 두 모습이다.

세 가지가 전혀 차별이 없다

然れば久遠実成の釈尊と皆成仏道の法華経と我等衆生との三つ全く差別無しと解りて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処を生死一大事の血脈とは云うなり

그러므로 구원실성의 석존과 모두 불도를 이루게 하는 법화경과 우리 중생의 세 가지가 전혀 차별이 없다고 깨닫고 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는 곳을 생사일대사의 혈맥이라 한다.

「생사일대사혈맥초」, 1337쪽

부처(四)와 법(三·五)과 우리 중생이 전혀 차별이 없다. 블로그 강의는 이 셋을 앞 장과 이렇게 잇는다. 「석가·다보 두 부처도 삶과 죽음의 두 법」이 구원실성의 석존에, 「두 부처가 상행보살에게 물려준 것」이 모두 불도를 이루게 하는 법화경에, 「이 삶과 죽음의 두 법이 십계의 당체」가 우리 중생에 해당한다. 부처의 깨달음의 당체도, 법화경이 설한 성불의 법체도, 우리 중생의 체도 모두 묘법연화경이므로 셋이 전혀 차별이 없다. 인법일개(3부)와 당체(2부)가 여기서 한 사람의 부름으로 모인다.

이어서 「임종이 바로 지금이라고 알고 신심을 다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천 부처가 손을 내밀어 맞이한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 장은 혈맥을 시간 위에 놓는다. 「과거의 생사, 현재의 생사, 미래의 생사, 삼세의 생사에 법화경을 떠나지 않는 것을 법화의 혈맥상승이라 한다」(1337쪽).

이체동심

그리고 넷째 장이다.

総じて日蓮が弟子檀那等・自他彼此の心なく水魚の思を成して異体同心にして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処を生死一大事の血脈とは云うなり、然も今日蓮が弘通する処の所詮是なり、若し然らば広宣流布の大願も叶うべき者か

무릇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이 나와 남,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마음 없이, 물과 물고기처럼 여기며 이체동심으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곳을 생사일대사의 혈맥이라 한다. 게다가 지금 니치렌이 펴는 것의 궁극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광선유포의 대원도 이루어질 것이다.

「생사일대사혈맥초」, 1337쪽

이체동심(異體同心) — 몸은 다르되 마음은 하나. 대성인은 이어서 「니치렌의 제자 가운데 이체이심(異體異心)의 사람이 있으면, 예컨대 성 안의 사람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고 경계했다(1337쪽).

혈맥(血脈) 은 스승에서 제자로 법이 이어지는 핏줄이다. 대성인은 그것을 특별한 사람만의 비밀한 전승으로 말하지 않았다. 함께 부르는 곳에 흐르는 것으로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이렇게 맺는다.

相構え相構えて強盛の大信力を致して南無妙法蓮華経・臨終正念と祈念し給へ、生死一大事の血脈此れより外に全く求むることなかれ、煩悩即菩提・生死即涅槃とは是なり、信心の血脈なくんば法華経を持つとも無益なり

부디 부디 강한 큰 신력을 일으켜 남묘호렌게쿄, 임종정념이라고 기원하시라. 생사일대사의 혈맥을 이것 밖에서 결코 구하지 말라.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이란 이것이다. 신심의 혈맥이 없으면 법화경을 지녀도 소용이 없다.

「생사일대사혈맥초」, 1338쪽
위 삼각형의 세 꼭짓점 — 구원실성의 석존, 모두 불도를 이루게 하는 법화경, 우리 중생. 가운데 「셋이 전혀 차별이 없다」. 아래 원형으로 서로 다른 꽃(벚꽃 · 매화 · 복숭아 · 자두) 열여섯 송이, 가운데 이체동심. 둘을 잇는 금선이 생사일대사의 혈맥.久遠實成の釋尊부처皆成佛道の法華經법我等衆生우리 중생三つ全く差別無し「생사일대사혈맥초」 1337쪽生死一大事の血脈異體同心櫻 · 梅 · 桃 · 李
信心の血脈なくんば法華經を持つとも無益なり「생사일대사혈맥초」 1338쪽
도표 24 · 생사일대사의 혈맥 — 셋이 하나, 여럿이 한 마음

저마다 다른 꽃이, 한 마음으로

三과 五에서 이 사이트의 이름 「앵매도리」는 저마다 다른 꽃이 고치지 않은 그대로 부처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그 다른 꽃들이 한 마음으로 같은 이름을 부른다. 벚꽃은 벚꽃인 채로, 매화는 매화인 채로. 다름을 지우는 하나가 아니라, 다름을 그대로 둔 채의 하나. 이것이 이체동심이다.

『어의구전』의 화성유품 마지막 강의는 「모두 함께 보배의 곳에 이른다(皆共至宝処)」를 이렇게 풀었다.

御義口伝に云く皆とは十界なり共とは如我等無異なり至とは極果の住処なり宝処とは霊山な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は一同に皆共至宝処なり、共の一字は日蓮に共する時は宝処に至る可し不共ならば阿鼻大城に堕つ可し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모두」란 십계요, 「함께」란 「나와 같아 다름이 없게」요, 「이른다」란 궁극의 결과가 머무는 곳이요, 「보배의 곳」이란 영산이다. 니치렌 등의 무리로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결같이 「모두 함께 보배의 곳에 이른다」. 「함께(共)」 한 글자는, 니치렌과 함께할 때는 보배의 곳에 이르고, 함께하지 않으면 아비대성에 떨어진다.

『어의구전』, 734쪽

「모두」는 십계, 곧 지옥에서 부처까지 모든 생명이다. 저마다 다른 생명들이 「함께」 이른다. 그 「함께」의 중심에 스승이 있다. 「소야전답서」가 「법화경이라는 큰 바다의 지혜의 물을 받은 근원의 스승을 잊고 다른 데로 마음을 옮기면 반드시 윤회생사의 재앙이 된다」고 한 것(1055쪽), 그리고 「어느 부처의 나라에서나 늘 스승과 함께 태어난다(在在諸仏土常与師倶生)」는 법화경의 구절을 든 것(1056쪽)도 같은 뜻이다.

한 씨앗은 한 씨앗

「우에노전모고젠답서」(1280)는 열여섯에 세상을 떠난 아들 시치로고로를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썼다.

乞い願わくは悲母我が子を恋しく思食し給いなば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させ給いて・故南条殿・故五郎殿と一所に生れんと願はせ給へ、一つ種は一つ種・別の種は別の種・同じ妙法蓮華経の種を心に・はらませ給いなば・同じ妙法蓮華経の国へ生れさせ給うべし、三人面をならべさせ給はん時・御悦びいかが・うれしくおぼしめすべきや

부디 어머님께서 아들이 그리우시거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며 돌아가신 남조 님, 돌아가신 고로 님과 한곳에 태어나기를 원하시라. 한 씨앗은 한 씨앗이요, 다른 씨앗은 다른 씨앗이다. 같은 묘법연화경의 씨앗을 마음에 품으시면 같은 묘법연화경의 나라에 태어나실 것이다. 세 사람이 얼굴을 나란히 하실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우에노전모고젠답서」, 1570쪽

같은 씨앗을 품으면 같은 나라에 난다. 생사를 넘어 함께 부르는 이들이 이어진다. 「대백우거어소식」은 「나보다 뒤에 오실 사람들은 이 수레를 타고 영산으로 오시라. 니치렌도 같은 수레를 타고 마중하러 가겠다」고 끝난다(1584쪽). 「센니치니고젠답서」는 아버지 아부쓰보의 뒤를 이어 법화경의 행자가 된 아들을 두고 「자식보다 나은 보배는 없다(子にすぎたる財なし)」를 두 번 되풀이했다(1322쪽). 혈맥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앞서 간 이와 남은 이 사이에도 흐른다.

광선유포 — 만년 너머까지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다

「보은초」는 「니치렌 혼자 목소리를 아끼지 않고 부른다」에 이어 이렇게 쓴다.

例せば風に随つて波の大小あり薪によつて火の高下あり池に随つて蓮の大小あり雨の大小は竜による根ふかければ枝しげし源遠ければ流ながしと・いうこれなり … 日蓮が慈悲曠大ならば南無妙法蓮華経は万年の外・未来までもながるべし、日本国の一切衆生の盲目をひらける功徳あり、無間地獄の道をふさぎぬ

예컨대 바람에 따라 물결의 크고 작음이 있고, 장작에 따라 불의 높고 낮음이 있으며, 못에 따라 연꽃의 크고 작음이 있고, 비의 크고 작음은 용에 달렸다.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길다는 것이 이것이다. … 니치렌의 자비가 넓고 크다면 남묘호렌게쿄는 만년 너머 미래까지 흘러갈 것이다. 일본국 일체중생의 먼 눈을 뜨게 하는 공덕이 있고, 무간지옥의 길을 막았다.

「보은초」, 328~329쪽

그리고 이 공덕이 전교·천태를 넘고 용수·가섭보다 뛰어난 것은 「오로지 니치렌의 지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때가 그렇게 한 것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맺으며, 여름은 따뜻하고 겨울은 차가운 것이 때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329쪽). 같은 장은 약왕품의 「내가 입멸한 뒤 후오백세 가운데 광선유포하여 염부제에서 끊어짐이 없게 하라」를 들고, 이 경문이 헛되다면 사리불의 수기도, 오백진점겁도 모두 거짓말이 된다며 「그런 일이 없다면 일본국은 한결같이 남묘호렌게쿄일 것이다(其の義なくば日本国は一同の南無妙法蓮華経なり)」라고 맺는다(329쪽).

광선유포(廣宣流布) 란 이 법을 넓게 펴 흐르게 하는 일이다. 대성인은 그것을 「흐름」으로 말했다. 근원이 멀면 흐름이 길다. 건장 5년의 한 목소리가 근원이다.

새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강 — 왼쪽 위 산골의 가는 물줄기가 골짜기와 마을과 들을 지나며 넓어져 오른쪽 아래 금빛 바다에 이르는 금박 수묵화
그림 7 · 만년의 강

대지를 과녁으로

「제법실상초」는 이것을 가장 단호하게 말했다.

剰へ広宣流布の時は日本一同に南無妙法蓮華経と唱へん事は大地を的とするなるべし

더구나 광선유포의 때에는 일본이 한결같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를 것은 대지를 과녁으로 삼는 것과 같다(빗나갈 수 없다).

「제법실상초」, 1360쪽

「우에노전답서」(1546쪽)의 한 구절은 블로그의 여러 강의가 되풀이해 인용한다. 「지금 말법에 들어왔으니 다른 경도 법화경도 소용없다. 다만 남묘호렌게쿄여야 한다. 이렇게 말을 꺼낸 것도 나의 사사로운 계산이 아니다. 석가·다보·시방의 제불, 지용천계의 헤아림이다. 이 남묘호렌게쿄에 다른 일을 섞으면 큰 잘못이다. 해가 뜨면 등불은 소용없고, 비가 오는데 이슬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갓난아이에게 젖 말고 다른 것을 먹이겠는가」(「우에노전답서」, 1546쪽. 2차 확인).

「법화경도 소용없다」는 말은 법화경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3부에서 본 대로 법화경의 경문은 재세의 탈익을 위한 것이었고, 그 밑바닥에 잠긴 씨, 남묘호렌게쿄가 말법의 하종이다(四 8절, 五 7절의 종탈상대). 광선유포는 그 씨를 온 세상에 뿌리는 일이다.

부는 바람은 가지를 울리지 않고

그렇다면 광선유포가 이루어진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여설수행초」는 이렇게 그렸다.

天下万民・諸乗一仏乗と成つて妙法独り繁昌せん時、万民一同に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らば吹く風枝をならさず雨壤を砕かず、代は羲農の世となりて今生には不祥の災難を払ひ長生の術を得、人法共に不老不死の理顕れん時を各各御覧ぜよ現世安穏の証文疑い有る可からざる者なり

천하 만민이 여러 가르침을 하나의 불승으로 삼아 묘법이 홀로 번성할 때, 만민이 한결같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른다면, 부는 바람은 가지를 울리지 않고 비는 흙덩이를 부수지 않으며, 세상은 복희·신농의 시대처럼 되어 이생에는 상서롭지 못한 재난을 물리치고 오래 사는 법을 얻어, 사람과 법이 함께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이치가 드러날 때를 각자 보라. 현세안온의 증문은 의심할 수 없다.

「여설수행초」, 502쪽

부는 바람이 가지를 울리지 않고, 비가 흙덩이를 부수지 않는다. 자연과 사회와 사람이 서로를 해치지 않는 세상이다. 四에서 본 본국토묘, 국토세간의 상주가 여기서 역사의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블로그 강의들이 거듭 인용하는 「입정안국론」의 한 구절도 같은 풍경이다. 「그대는 빨리 신앙의 작은 마음을 고쳐 속히 실승의 한 선으로 돌아오라. 그러면 삼계는 모두 부처의 나라다. 부처의 나라가 어찌 쇠하겠는가. 시방은 모두 보배의 땅이다. 보배의 땅이 어찌 무너지겠는가」(「입정안국론」, 32쪽. 2차 확인). 한 사람의 생명이 바뀌는 일(인간혁명)과 국토가 편안해지는 일(입정안국)이 같은 법으로 이어진다.

범어와 한어 — 세계의 법

1부에서 「범어와 한어를 함께 써서 남묘호렌게쿄라 한다」를 읽었다. 블로그 강의는 이 구절을 동양의 광선유포에 대한 예언으로 읽었다. 『어의구전』의 방편품 강의는 삼세간을 제목에 배당하며 이렇게 끝났다. 「국토세간의 인연이란, 남염부제는 묘법연화경을 펼 본래의 인연이 있는 나라다. 경에 『염부제 안에 널리 유포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 한 것이 이것이다」(716쪽). 염부제는 인도 신화에서 사람이 사는 세계 전체다.

「현불미래기」는 「본문의 본존과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로써 염부제에 광선유포하게 할 것이다」라 했고(507쪽), 끝에서 인도의 석존, 중국의 천태, 일본의 전교에 스스로를 더해 「삼국사사(三國四師)」라 불렀다(509쪽). 법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대성인은 그것이 다시 온 세계로 흘러가리라 했다. 이 사이트가 한국어로 이 계보를 읽는 것도 그 흐름의 한 물줄기다.

일본국의 모든 중생을 도우려는 마음

『어의구전』의 신해품 마지막 강의는 「세존의 큰 은혜(世尊大恩)」를 이렇게 풀었다.

御義口伝に云く世尊とは釈尊大恩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釈尊の大恩を報ぜんと思わば法華経を受持す可き者なり是れ即ち釈尊の御恩を奉じ奉るなり … 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りて日本国の一切衆生を助けんと思うは豈世尊の大恩に非ずや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세존이란 석존이요 큰 은혜란 남묘호렌게쿄다. 석존의 큰 은혜를 갚으려면 법화경을 받아 지녀야 한다. 이것이 곧 석존의 은혜를 받드는 것이다. …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일본국 일체중생을 도우려 하는 것이 어찌 세존의 큰 은혜가 아니겠는가.

『어의구전』, 727쪽

부처의 큰 은혜가 곧 남묘호렌게쿄이고, 그 은혜를 갚는 길이 그것을 받아 지니고 남을 돕는 것이다. 3부에서 「매자작시념」의 한 생각이 대자비의 생각이라 했다. 광선유포는 그 자비가 한 사람에서 두 사람, 세 사람, 백 사람으로 번져 가는 일이다.

根ふかければ枝しげし源遠ければ流ながし「보은초」 328~329쪽

  1. 日蓮一人1253 입종 — 한 사람
  2. 二人·三人·百人と次第に「제법실상초」 1360쪽
  3. 自行化他넓어지는 강
  4. 萬年の外·未來までも「보은초」 329쪽
  5. 梵漢共時 · 閻浮提
在世脫益末法下種種脫相對
도표 25 · 하종에서 광선유포로 — 만년의 흐름

여섯 자리를 거슬러 — 계보의 회향

여섯 자리의 계보는 앞 자리의 교리가 다음 자리에서 다시 읽힌다는 원칙으로 짜였다. 여섯째 자리에서 그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면, 앞의 다섯 자리가 모두 남묘호렌게쿄의 한 면으로 다시 읽힌다.

一십이연기
그 자리의 교리괴로움이 일어나는 열두 고리
남묘호렌게쿄에서 다시 읽으면번뇌·업·고의 삼도가 법신·반야·해탈의 삼덕으로 바뀜(轉). 모든 목소리가 서로 울려 제목을 함께 부름
어서「당체의초」 512, 『어의구전』 723
二공·중도
그 자리의 교리공·가·중, 유무를 떠난 중도
남묘호렌게쿄에서 다시 읽으면무명과 법성이 한 몸인 묘법. 삼관·삼제가 곧 한마음에. 「있음과 없음에 두루한 중도일실의 묘체」가 곧 묘
어서『어의구전』 708, 「일생성불초」 384
三제법실상
그 자리의 교리모든 법의 참모습, 십여시
남묘호렌게쿄에서 다시 읽으면「귀(歸)」 — 적문 불변진여의 이. 「법계는 묘법·연화·경」. 실상의 이름이 묘법연화경
어서『어의구전』 708, 「제법실상초」 1358
四구원실성
그 자리의 교리시작 없는 부처, 본인본과
남묘호렌게쿄에서 다시 읽으면「명(命)」 — 본문 수연진여의 지. 연화의 인과구시, 무작삼신의 보호
어서『어의구전』 708·752
五일념삼천
그 자리의 교리한 생각에 삼천
남묘호렌게쿄에서 다시 읽으면구슬을 싼 다섯 글자, 일념삼천을 헹구어 세운 본존, 사행의 남묘호렌게쿄
어서「관심본존초」 253·255, 「초목성불구결」 1339
六남묘호렌게쿄
그 자리의 교리—
남묘호렌게쿄에서 다시 읽으면부르는 이의 부모가 낳아 준 육신이 그 전부의 당체
어서「당체의초」 512
  1. 一십이연기삼도가 삼덕으로 바뀜(轉)
  2. 二공 · 중도무명과 법성이 한 몸인 묘법
  3. 三제법실상귀(歸) — 적문 불변진여의 이
  4. 四구원실성명(命) — 연화의 인과구시
  5. 五일념삼천구슬을 싼 다섯 글자, 본존
  6. 六남묘호렌게쿄부모가 낳아 준 육신이 당체
  7. 六 一 · 계보의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도표 26 · 여섯 자리의 회향 — 거슬러 읽는 계보

계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원이 된다. 첫째 자리 십이연기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했다.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한 사람의 생명이 바뀌면, 그와 조건으로 이어진 모든 것이 바뀐다. 연기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법칙이었다. 같은 법칙이 이제 바뀜이 퍼져 가는 법칙이 된다.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가 한 편지 안에서 십이인연의 괴로움(1014쪽)과 법화경이라는 양약(1015쪽)을 함께 말했듯, 계보의 끝에서 다시 처음을 읽으면 처음의 뜻이 달라져 있다.

맺음 — 櫻梅桃李

이 사이트의 이름은 『어의구전』의 한 구절에서 왔다. 수량품 제목의 「량(量)」 한 글자를 푼 대목이다. 여섯 자리를 걸어 온 끝에서 그 구절을 온전히 읽는다.

森羅万法を自受用身の自体顕照と談ずる故に迹門にして不変真如の理円を明かす処を改めずして己が当体無作三身と沙汰するが本門事円三千の意なり、是れ即ち桜梅桃李の己己の当体を改めずして無作三身と開見すれば是れ即ち量の義なり

삼라만법을 자수용신이 스스로 드러내어 비추는 것이라고 말하므로, 적문에서 불변진여의 이치의 원만함을 밝힌 것을 고치지 않고 자기의 당체를 무작삼신이라고 가리는 것이 본문의 사(事)의 원만한 삼천의 뜻이다. 이것이 곧 벚꽃·매화·복숭아·자두 저마다의 당체를 고치지 않고 무작삼신으로 열어 본다면, 이것이 곧 「헤아림(量)」의 뜻이다.

『어의구전』, 784쪽. 2차 확인

한 줄씩 읽으면 여섯 자리가 다시 보인다.

블로그의 「초목성불구결」 어석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었다. 마음 없는 풀과 나무이지만 그 체는 본각의 법신이요, 때를 어기지 않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지혜는 본각의 보신이며, 유정을 기르는 것은 본각의 응신이다.

1부 4절에서 『어의구전』의 약초유품 강의를 읽었다. 한 땅에서 나고 한 비(妙) 에 젖지만, 풀과 나무는 저마다(法) 다르게 자란다. 그리고 말법의 한 비는 「제목에 다른 수행을 섞지 않는 것」이라 했다. 같은 비가 내린다. 벚꽃은 벚꽃으로 피고, 매화는 매화로 핀다. 복숭아는 복숭아로, 자두는 자두로.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한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이 곧 저마다의 이름이다. 이 사이트가 여섯 자리에 걸쳐 읽어 온 불교 이천오백 년의 사유는, 결국 이 한 장면을 위한 것이었다.

새벽, 바다로 흘러가는 맑은 계곡물 위에 벚꽃·매화·복숭아·자두 꽃잎이 함께 떠 흐르고, 수평선에 금빛 해가 떠오르는 금박 수묵화
그림 8 · 앵매도리 — 함께 흐르는 꽃잎

참고 문헌

원전

  • 『묘법연화경』 방편품 · 비유품 · 약초유품 · 종지용출품 · 여래수량품 · 상불경보살품 · 여래신력품, T9 no.262
  • 천태 지의,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마하지관』 T46 no.1911
  • 묘락 담연, 『법화문구기』 T34 no.1719 / 『금강비』 T46 no.1932
  • 니치렌 대성인, 『어의구전』 · 「일생성불초」 · 「십여시사」 · 「일념삼천법문」 · 「창법화제목초」 · 「목회이상개안지사」 · 「월수어서」 · 「지묘법화문답초」 · 「법화경제목초」 · 「개목초」 · 「생사일대사혈맥초」 · 「초목성불구결」 · 「시조깅고전답서」 · 「관심본존초」 · 「여설수행초」 · 「제법실상초」 · 「현불미래기」 · 「교오전답서」 · 「당체의초」 · 「법화행자봉난사」 · 「법화취요초」 · 「효에노사칸전답서」 · 「보은초」 · 「마쓰노전답서」 · 「소야전답서」 · 「소야입도전답서」 · 「오타사에몬노조전답서」 · 「묘호니고젠답서」 · 「자쿠니치보어서」 · 「가연정업서」 · 「우에노전답서」 · 「우에노전모고젠답서」 · 「대백우거어소식」 · 「센니치니고젠답서」 · 「백미일표어서」 · 「삼대비법품승사」 · 「입정안국론」 · 「사신오품초」 · 「성우문답초」 · 「소야입도전허어서」 · 「니치뇨고젠답서」 · 「묘이치니고젠답서」 · 「교행증어서」 · 「십팔원만초」
  • 창가학회 편,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연구

  • 池田大作, 『「御義口伝」講義』, 聖教新聞社
  • 創価学会教学部 編, 『教学入門』, 聖教新聞社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Jacqueline I. Stone, "Chanting the August Title of the Lotus Sutra: Daimoku Practices in Classical and Medieval Japan", in Richard K. Payne (ed.), Re-Visioning "Kamakura"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