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오른쪽 위로 눈 덮인 후지산이 첫 햇빛에 금빛으로 솟고, 안개 띠가 걸친 넓은 들판 가운데 삼나무에 둘러싸인 낮고 긴 불당 하나와 작은 초가들이 서 있으며, 앞쪽 억새 사이로 오솔길이 이어지는 금박 수묵화

닛코상인

日興上人1246–1333 · 혈맥을 이어 후지에 법을 세운 제2조

1289년 봄, 한 승려가 미노부의 골짜기를 내려왔다. 마흔네 살이었다. 일곱 해 전 스승이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고 써 주신 그 산을, 그는 스스로 떠나고 있었다. 지도가 석가상을 세우고 신사에 참배하고 염불의 탑에 보시하는 것을, 그는 더는 막을 수 없었다. 「미노부의 골짜기를 떠나는 일은 면목 없고 뜻에 어긋남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거듭 생각해 보면 어디서든 성인의 뜻을 이어받아 세상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요체입니다.」 그가 모시고 내려온 것은 스승의 유골과, 스승이 출세의 본회로 남기신 대어본존이었다. 이듬해 가을, 후지산 서쪽 기슭의 들판에 작은 대방이 섰다. 대석사의 시작이다. 그의 이름은 닛코(日興), 스승은 그를 호키보라 부르셨다.

닛코상인은 대성인보다 스물네 살 아래였다. 열세 살에 제자가 되어 서른일곱 살에 스승을 여의었으니, 대성인의 생애 가운데 마지막 스물다섯 해를 곁에서 함께했다. 이즈 유배에도, 다쓰노구치와 사도 유배에도, 미노부의 아홉 해에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대성인이 입멸하신 뒤 다시 쉰한 해를 살았다. 그 쉰한 해는 스승의 법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를 두고 여섯 본제자가 갈라진 세월이었다.

대성인 입멸 뒤 다섯 노승은 막부에 올린 글에 스스로를 「천태 사문」이라 적었고, 석가상을 본존으로 세웠으며, 신사 참배를 허락했고, 대성인의 가나 편지를 부끄러운 것이라며 불살랐다. 닛코상인은 홀로 「니치렌 성인의 제자」라 적었고, 대성인이 쓰신 어본존만을 본존으로 삼았으며, 신사 참배를 막았고, 흩어진 편지를 모아 베끼고 중요한 열 편을 골랐다. 이 갈라짐을 닛코 문류는 「오일상대(五一相對)」라 부른다. 다섯 사람과 한 사람의 대비라는 뜻이다. 닛코 문류가 대성인의 법을 다른 문류와 어떻게 다르게 이어받았는가는, 이 갈라짐을 보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 페이지는 닛코상인의 생애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따라가며, 그 갈림이 어디서 시작되어 무엇을 남겼는가를 함께 본다.

본문 홍통의 대도사1282년 9월 「니치렌 일기의 홍법을 뱌쿠렌아사리 닛코에게 부촉한다」, 10월 13일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미노부상승서」(1600 · 2차 확인) ·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 「닛코유계치문」
닛코상인의 한 줄「후지의 입의는 조금도 선사의 홍통에 어긋나지 않는다」 — 「닛코유계치문」, 1617쪽富士の立義聊も先師の御弘通に違せざる事
  1. 1246가이 가지카자와출생
  2. 스루가 가와이외가 · 유이 입도
  3. 1252경 · 1278스루가 가모하라 시주쿠원수학 · 추방
  4. 1258 · 1268스루가 이와모토 짓소사입문 · 수장
  5. 1261–1263이즈 이토유배
  6. 1271사가미 가마쿠라다쓰노구치
  7. 1271–1274사도유배
  8. 1274–1282 · 1282–1289가이 미노부별당
  9. 1279스루가 아쓰와라법난
  10. 1282.10무사시 이케가미입멸
  11. 1289미노부 → 가와이 → 우에노미노부 이산
  12. 1290스루가 우에노 오이시가하라대석사
  13. 1298 · 1333스루가 오모스담소 · 입멸
위치는 약도 · 금 실선 — 1289 미노부 → 가와이 → 우에노 · 점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1 · 닛코상인의 길
1부 가지카자와에서 이와모토로

시대 — 가마쿠라 막부와 함께한 여든여덟 해

1246 — 1333 · 간겐 4년 — 쇼쿄 2년

닛코상인이 태어난 1246년(간겐 4년) 봄, 가마쿠라에서는 젊은 호조 도키요리가 형의 뒤를 이어 집권(執權)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닛코상인이 오모스에서 입멸한 1333년 2월로부터 석 달 남짓 뒤,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졌다. 닛코상인의 여든여덟 해는 호조 집권 정치가 안정에서 동요로, 동요에서 붕괴로 나아간 시대와 거의 그대로 겹친다.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 대성인의 생애가 있었다. 1253년 입종, 1260년 「입정안국론」, 1261년 이즈 유배, 1271년 다쓰노구치와 사도 유배, 1274년 몽골의 첫 내습과 미노부 입산, 1279년 아쓰와라 법난, 1281년 몽골의 두 번째 내습, 1282년 입멸. 닛코상인은 열세 살부터 이 모든 고비를 대성인 곁에서 겪었다. 그리고 대성인 입멸 뒤의 쉰한 해, 막부가 몽골의 세 번째 내습을 두려워하며 여러 절에 이국 항복의 기도를 명하고, 그 명을 따르지 않는 니치렌 문하의 거처를 부수겠다고 위협하던 시대를 살았다. 그 위협 앞에서 본제자들이 어떤 길을 골랐는가가 이 페이지 6부의 주제다.

닛코상인의 생애는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입문에서 대성인의 미노부 입산까지의 「상수급사(常隨給仕)」의 시기(1258–1274), 후지 기슭에서 법을 펴고 아쓰와라 법난을 겪은 시기(1274–1282),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으로서 묘소를 지킨 시기(1282–1289), 그리고 대석사와 오모스에서 문하를 기르고 오노승의 잘못을 바로잡은 시기(1289–1333)다.

막부와 세상도키요리 집권1246몽골 국서 · 도키무네 집권1268분에이의 역1274고안의 역1281시모쓰키 소동1285헤이노사에몬노조 주살1293막부 멸망1333.5
대성인입종1253「입정안국론」1260이즈1261다쓰노구치 · 사도1271미노부1274본문계단의 대어본존1279.10.12입멸1282.10.13
닛코상인출생1246.3.8입문1258짓소사 수장1268시주쿠원 추방1278아쓰와라1279상승 · 별당1282미노부 이산1289대석사1290오모스1298닛코적조조사1332유계치문 · 입멸1333.1.13 · 2.7
옅은 띠 — 닛코상인의 생애 · 세로 점선 — 1279(대어본존) · 1282(상승 · 입멸) · 1절
도표 2 · 세 줄 연표 1246–1333

사료의 층

닛코상인의 생애를 전하는 자료는 다섯 겹이다.

첫째는 어서다. 대성인이 닛코상인 앞으로 보내신 「호키전등답서」, 닛코상인에게 상전하신 「백육개초」 · 「본인묘초」, 닛코상인에게 주신 「미노부상승서」가 있고, 닛코상인을 「호키보」 · 「호키공」이라 부르며 언급하신 편지들(「봄의 축하어서」 · 「다카하시입도전답서」 · 「이체동심사」 · 「성인등답서」 · 「난조전답서(1530)」 등)이 있다. 닛코상인이 대성인의 강의를 필록한 「어의구전」도 여기에 든다.

둘째는 닛코상인 자신의 문서다. 대성인이 고쳐 주신 「시주쿠원신장」과 「류센사신장」, 대성인의 장례를 기록한 「종조어천화기록」, 묘소를 지킬 당번을 정한 「묘소를 지킬 당번표」, 하키리 집안에 보낸 「하라전 답서」, 어본존을 준 제자의 이름을 적은 「제자분 본존 목록」, 국주에게 올린 여러 통의 신장, 니치모쿠상인에게 뒤를 맡긴 「닛코적조조사」, 그리고 입멸 스무닷새 전의 「닛코유계치문」이다.

셋째는 닛코 문하가 닛코상인의 뜻을 받아 쓴 문서다. 오노승의 잘못을 조목조목 적은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와 「오인소파초」가 그것이다. 두 글은 어서전집 끝에 실려 있다.

넷째는 후지 문류의 전기다. 닛코상인의 제자 니치도의 「어전토대(御傳土代)」, 대석사 제17세 니치세이의 『부시문가중견문(富士門家中見聞)』(『가중초』)이 대표적이다.

다섯째는 근대의 연구다. 대석사 제59세 홋리 니치코(堀日亨)의 『부사일흥상인상전(富士日興上人詳傳)』이 닛코상인 연구의 기준이 되었다.

이 페이지는 첫째와 둘째, 셋째 층을 뼈대로 삼는다. 넷째와 다섯째에만 기대는 서술은 「전승」으로 표시한다.

① 어서
출생과 외가
확인 중
시주쿠원
확인 중
입문
간접
이즈 · 사도
확인 중
하키리의 귀의
있음「백육개초」 869*
후지 홍교
있음
아쓰와라
있음
어의구전
있음
대어본존
있음「성인어난사」
상승
있음1600*
별당 · 이산
확인 중
대석사
확인 중
오모스 · 오일상대
확인 중
입멸
확인 중
② 닛코상인의 문서사료
출생과 외가
확인 중
시주쿠원
확인 중
입문
확인 중
이즈 · 사도
확인 중
하키리의 귀의
확인 중
후지 홍교
확인 중
아쓰와라
있음신장 · 제자분 본존 목록
어의구전
확인 중
대어본존
확인 중
상승
확인 중
별당 · 이산
있음「하라전 답서」
대석사
있음
오모스 · 오일상대
있음
입멸
있음유계치문 · 적조조사
③ 문하의 문서「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 「오인소파초」
출생과 외가
확인 중
시주쿠원
확인 중
입문
확인 중
이즈 · 사도
간접
하키리의 귀의
있음
후지 홍교
확인 중
아쓰와라
확인 중
어의구전
확인 중
대어본존
확인 중
상승
확인 중
별당 · 이산
있음
대석사
확인 중
오모스 · 오일상대
있음
입멸
확인 중
④ 후지 문류의 전기「어전토대」 · 『가중초』
출생과 외가
있음
시주쿠원
있음
입문
있음
이즈 · 사도
있음
하키리의 귀의
확인 중
후지 홍교
확인 중
아쓰와라
확인 중
어의구전
확인 중
대어본존
확인 중
상승
확인 중
별당 · 이산
확인 중
대석사
있음
오모스 · 오일상대
확인 중
입멸
있음
⑤ 근대 연구『부사일흥상인상전』
출생과 외가
있음
시주쿠원
있음
입문
있음
이즈 · 사도
있음
하키리의 귀의
있음
후지 홍교
있음
아쓰와라
있음
어의구전
있음
대어본존
있음
상승
있음
별당 · 이산
있음
대석사
있음
오모스 · 오일상대
있음
입멸
있음
있음 간접 확인 중* 강의 인용 원문 · ② 열의 문서는 사료 사료 · 2절
도표 3 · 사료의 층

출생과 외가 — 가지카자와와 가와이

1246년 3월 8일 · 간겐 4년 · 가이국 고마군 오이노쇼 가지카자와

닛코상인은 1246년(간겐 4년) 3월 8일, 가이국 고마군 오이노쇼 가지카자와에서 태어났다. 후지강의 상류, 고후 분지의 물이 모여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어귀의 마을이다. 아버지는 도토미의 기(紀) 씨 계열이라는 오이 기쓰로쿠(大井橘六), 어머니는 스루가 후지의 유이(由井) 씨의 딸 묘후쿠(妙福)였다.

이른 봄, 넓은 분지가 산골짜기로 좁아지는 곳에서 여러 갈래 물줄기가 모인 후지강이 남쪽 산 사이로 굽어 들고, 강 위 좁은 단구에 연기 오르는 초가 몇 채와 옅게 핀 매화, 먼 산줄기 너머로 후지산 꼭대기가 작게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1 · 가지카자와

닛코상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가 쓰나시마(綱島) 집안으로 재가하자, 아이는 스루가국 후지군 가미카타노쇼 가와이에 사는 외조부 유이 입도의 손에 맡겨졌다. 가와이는 시바강이 후지강에 합류하는 곳이다. 이 외가의 인연이 뒷날 닛코상인의 홍교 지도가 된다. 외조부 유이 입도, 닛코상인의 고모가 시집간 가시마의 다카하시 입도, 그리고 우에노의 난조 집안과 오모스의 이시카와 집안이 모두 닛코상인의 문하가 되었다. 「선시초」를 받은 니시야마의 유이 아무개도 같은 유이 일족이다. 닛코상인에게 후지 기슭은 낯선 포교지가 아니라, 자란 땅이었다.

전승
부모와 외가아버지 오이 기쓰로쿠 도토미 기 씨 계열 · 일찍 사망어머니 묘후쿠 유이 씨의 딸쓰나시마 집안으로 재가외조부 유이 입도 가와이닛코상인을 양육닛코상인 1246 · 가지카자와
인척 · 인연 — 모두 뒷날 닛코상인의 문하다카하시 입도 가시마 · 고모의 남편니시야마의 유이 아무개 「선시초」를 받음 · 유이 일족난조 집안 우에노이시카와 집안 오모스
혈연 인척 · 인연 혼인관계는 후지 문류 전승과 연구에 따름 · 인물 그림 없음 · 3절
도표 4 · 닛코상인의 외가와 인척

시주쿠원 — 일곱 살의 공부

1252경 — 1258 · 스루가 가모하라 시주쿠원

일곱 살이 된 닛코상인은 스루가국 가모하라노쇼의 시주쿠원(四十九院)에 올라갔다. 히에이산 요카와(橫川) 계열의 천태종 절이다. 요카와는 히에이산 연력사의 북쪽 탑으로, 연력사 제3대 좌주 자각이 수릉엄원을 연 데서 시작된 곳이다. 닛코상인은 이곳에서 천태의 법문을 배우는 한편 한문학 · 와카의 길 · 일본의 고전 · 서도를 익혔다. 닛코상인이 남긴 신장과 서장의 단정한 한문, 스승의 편지를 옮겨 쓴 정확한 필사, 그리고 만년의 「닛코유계치문」이 제자들에게 바깥 책과 와카의 길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한 조목(6부 36절)은 모두 이 시절의 공부와 이어져 있다. 그것을 깊이 익힌 사람이었기에 경계할 수 있었다.

늦가을, 흰 돌 사이로 넓고 빠르게 흐르는 후지강 — 건너편 낮은 숲 언덕 위 삼나무 사이에 여러 채의 오래된 절, 이쪽 강가 소나무 사이에 작은 절, 돌밭에 끌어 올린 빈 나룻배 한 척, 멀리 구름 위로 후지산이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2 · 강을 사이에 둔 두 절

요카와를 연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은 당나라에서 밀교를 들여와 히에이산의 천태종을 진언 쪽으로 기울게 한 사람이었다. 대성인은 뒷날 자각이 진언을 법화경 위에 둔 것을 법화경을 비방한 큰 허물로 거듭 꾸짖으셨다(「지카쿠대사사」 등). 닛코상인은 바로 그 자각의 흐름에 선 절에서 자랐다. 천태종이 무엇이며 그 안에서 법화경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닛코상인은 안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대성인 입멸 뒤 다섯 노승이 「천태 사문」이라 이름했을 때 닛코상인이 그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은 것(6부 31절)은 이 출신과 무관하지 않다. 천태종 안에서 자란 사람이 천태와 대성인의 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가장 분명히 알았다.

시주쿠원은 후지강을 사이에 두고 이와모토의 짓소사와 마주 보고 있었다. 같은 천태종 절로 두 절은 한 절처럼 오갔다. 시주쿠원에서 공부하던 소년이 강 건너 짓소사에 머무시던 대성인을 만나게 된 것은 이 지리 때문이었다.

1258년 — 짓소사의 경장에서

1258년 · 쇼카 2년 · 스루가 이와모토 짓소사

이와모토의 짓소사는 지인(智印)이 규안 연간(1145–1151)에 연, 요카와 계열의 큰 천태종 절이었다. 지인의 제자 마쓰다이(末代)가 전국에서 모은 일체경의 사경이 경장에 있었다. 1257년 가마쿠라를 덮친 큰 지진과 잇단 재난의 근원을 경문에서 찾고자, 대성인은 1258년(쇼카 2년) 이 경장에 들어 일체경을 읽으셨다. 그 결실이 두 해 뒤의 「입정안국론」이다. 스물한 해 뒤 닛코상인이 초안을 쓰고 대성인이 앞부분을 손수 쓰신 「류센사신장」(3부 15절)은 이 일을 이렇게 적는다.

此の条は日弁等の本師日蓮聖人・去る正嘉以来の大仏星大地動等を観見し一切経を勘えて云く当時日本国の体たらく権小に執著し実経を失没せるの故に当に前代未有の二難を起すべし所謂自界叛逆難・他国侵逼難なり

이 조목은 이렇습니다. 닛벤 등의 본사 니치렌 성인께서 지난 쇼카 이래의 큰 혜성과 큰 지진 등을 보시고 일체경을 살펴 말씀하시기를, 지금 일본국의 형편은 권교와 소승에 집착하여 실경을 잃었으므로 반드시 전대에 없던 두 가지 난을 일으킬 것이니, 이른바 자계반역난과 타국침핍난이라 하셨습니다.

「류센사신장」, 849쪽

그때 열세 살의 소년이 대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대성인은 그에게 「호키보(伯耆房)」라는 이름을 주셨다. 「닛코(日興)」라는 이름도 이 무렵 받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로부터 대성인 입멸까지 스물다섯 해, 닛코상인은 스승의 곁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닛코 문류는 이 만남에서 이미 뒷날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대성인이 「입정안국론」을 준비하시던 경장에서 제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곳이 닛코상인이 자란 후지 기슭이었다는 것이다. 1278년 3월, 시주쿠원에서 쫓겨난 닛코상인이 막부에 올린 신장의 끝에는 「입정안국론」이 다시 나온다(3부 14절).

연대 대조 — 닛코상인의 입문 해는 1258년(쇼카 2년), 나이는 열세 살로 후지 문류의 전승이 일치한다. 대성인이 짓소사에서 일체경을 읽으신 기간과 「닛코」라는 법명을 받은 때는 전기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 페이지는 1258년 입문 · 「호키보」의 이름을 받은 것만 사실로 쓴다.

  1. 이와모토 짓소사후지강 동쪽천태 요카와 계열 · 규안 연간 지인 개창 · 일체경 경장 · 1258 대성인 열람 · 닛코상인 입문
  2. 가모하라 시주쿠원후지강 서쪽천태 요카와 계열 · 1252경 닛코상인 수학 · 1278 추방
위치는 약도 · 5절
도표 5 · 시주쿠원과 짓소사

닛코 문류는 닛코상인의 출발을 두 가지로 기억한다. 하나는 그가 스승의 「입정안국론」이 준비되던 경장 앞에서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란 후지 기슭의 인연이 그대로 스승의 법을 펴는 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주쿠원의 소년이 짓소사의 강을 건넌 일은, 서른두 해 뒤 같은 후지 기슭의 들판에 대석사가 서는 일로 이어진다.

2부 곁에서 모신 세월

이즈 유배 — 열여섯 살의 급사

1261년 5월 — 1263년 2월 · 고초 원년 — 3년 · 이즈 이토

1260년 7월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을 호조 도키요리에게 올리셨다. 그해 8월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이 습격을 받았고, 이듬해 1261년(고초 원년) 5월 12일 대성인은 이즈 이토로 유배되셨다. 후지 문류의 전기는 열여섯 살의 닛코상인이 이 유배에 따라가 곁에서 모셨다고 전한다. 「항상 곁에서 모셨다(常隨給仕)」는 말은 이때부터 닛코상인의 이름 앞에 붙는다.

이즈에서 대성인은 「사은초」 · 「교기시국초」 · 「현방법초」를 쓰셨다. 닛코상인이 대성인의 글을 곁에서 처음 지켜본 것이 이 두 해였다. 유배는 1263년 2월에 풀렸다. 대성인은 가마쿠라로 돌아오셨고, 이듬해 고향 아와로 가셨다가 고마쓰바라에서 도조 가게노부의 습격을 받으셨다(1264). 닛코상인의 행적은 이 무렵 다시 후지와 가마쿠라 사이에 보인다.

1268년 — 짓소사 대중 수장

1268년 8월 · 분에이 5년 · 이와모토 짓소사

1268년(분에이 5년) 8월, 이와모토 짓소사의 승려들이 막부에 수장(愁狀)을 올렸다. 그 글을 쓴 사람이 스물세 살의 닛코상인이었다. 「짓소사 대중 수장(實相寺大衆愁狀)」이라 불리는 이 문서는 닛코상인의 친필이 지금도 전한다. 당시의 공문 한문체로 오천 자가 넘는다.

짓소사는 그 무렵 무너지고 있었다. 제3대 원주 도교(道曉)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우 아노 젠조의 아들로, 권세를 믿고 난행을 일삼다가 절을 제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다. 승려들의 소송 끝에 그가 물러나자, 막부는 다른 곳의 사람을 제4대 원주로 내려보냈다(지헨 慈遍이라 한다). 새 원주는 더했다. 수장은 그 악행을 쉰한 조목으로 적었다. 본당 · 경장 · 종루 · 욕실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고, 불전의 등명과 향을 끊었으며, 불사에 술자리를 벌이고, 절 마당을 토란밭으로, 연못을 논으로 바꾸었다. 원주의 방에 유녀를 불러 생선과 새고기를 먹고, 승려들의 방과 땅을 빼앗아 속인에게 빌려주고, 절의 일꾼과 마을 사람을 괴롭혀 죽게까지 했다. 수장은 이 원주를 물리고 절 안에서 원주를 뽑게 해 달라고 청했다.

수장의 결과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서는 두 가지를 보여 준다. 하나는 스물세 살의 닛코상인이 이미 짓소사 대중이 붓을 맡길 만한 학식과 신망을 가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닛코상인이 대성인을 가마쿠라에서 모시는 한편으로 시주쿠원과 짓소사를 자주 오가며 그 절의 승려들과 깊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열 해 뒤 이 두 절에서 닛코상인의 제자들이 쫓겨나는 일(3부 14절)은 이 인연의 다른 얼굴이었다.

1268.8 · 닛코상인 집필 · 한문 오천여 자 · 쉰한 조목 · 친필 현존

  1. ①당우를 고치지 않음(본당 · 경장 · 종루 · 욕실)
  2. ②불전의 등명 · 향을 끊음
  3. ③불사에 술자리
  4. ④절 마당을 토란밭으로 · 연못을 논으로
  5. ⑤승려의 방과 땅을 빼앗아 속인에게
  6. ⑥일꾼 · 마을 사람을 괴롭혀 죽게 함

청원: 원주를 물리고 절 안에서 원주를 뽑게 해 달라 · 결과는 전하지 않음

조목의 갈래는 요약 · 7절
도표 6 · 짓소사 대중 수장 1268

하키리사네나가의 귀의 — 「닛코 교화의 힘」

1269경 · 분에이 6년 · 시주쿠원

가이국 고마군 남쪽의 하키리 · 미마키 · 이이노 세 마을의 지도 하키리사네나가(난부 로쿠로 사네나가, 1222–1297)는 가이 겐지의 한 갈래인 난부 집안의 사람이었다. 막부의 어가인으로 가마쿠라를 자주 오갔는데, 그 길이 후지강 서쪽의 시주쿠원 앞을 지났다. 사네나가는 그곳에서 닛코상인의 교화를 받아 염불을 버리고 법화경에 귀의했다. 1269년 무렵의 일로 전한다. 사네나가는 닛코상인보다 스물네 살 위였다.

대성인은 뒷날 이 인연을 「백육개초」 끝에 이렇게 적으셨다고 닛코 문류는 전한다.

延山地頭発心の根元は日興教化の力用なり、遁世の事甲斐の国三牧は日興懇志の故なり

미노부산 지도가 발심한 근원은 닛코가 교화한 힘이다. 둔세(遁世)하는 일로 가이국 미마키(세 마을)에 든 것은 닛코의 간절한 뜻 때문이다.

「백육개초」, 869쪽, 2차 확인

미노부 입산 이전, 대성인의 편지는 이 지도의 집안에도 닿았다. 1273년(분에이 10년) 8월, 사도에서 대성인은 하키리 집안 사람에게 긴 편지를 보내셨다(「하키리사부로전답서」). 편지 끝에 이렇게 쓰셨다.

但し日蓮法師に度度之を聞きける人人猶此の大難に値つての後之を捨つるか、貴辺は之を聞きたもうこと一両度・一時二時か然りと雖も未だ捨てたまわず御信心の由之を聞く偏えに今生の事に非じ

니치렌 법사에게 이 법을 여러 번 들은 사람들도 이 큰 난을 만난 뒤에는 버리는데, 그대는 이 법을 한두 번, 한두 시간 들었을 뿐인데도 아직 버리지 않고 신심을 지킨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금생만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키리사부로전답서」, 1372쪽

대성인이 직접 법을 들려주신 것은 한두 번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집안이 대성인의 유배 중에 신앙을 지킨 것은, 그 신앙을 심은 사람이 닛코상인이었기 때문이다. 닛코상인이 만년에 남긴 「제자분 본존 목록」에는 하키리 일족의 이름이 열한 명 적혀 있다(사료, 강의 인용).

연대 대조 — 사네나가의 귀의를 1269년(분에이 6년) 무렵으로 보는 것은 후지 문류의 전승이다. 「하키리사부로전답서」의 本文 머리에는 「与南部六郎三郎」라 적혀 있고, 화광신문 목록은 받는 사람을 하키리사네나가로 적는다. 이 페이지는 「하키리 집안」으로 쓴다.

다쓰노구치와 사도 — 「지금 사도에 있으니」

1271년 9월 — 1274년 3월 · 분에이 8 — 11년 · 사도

1271년(분에이 8년) 9월 12일, 대성인은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붙잡혀 그날 밤 다쓰노구치의 형장에 끌려가셨다. 참수를 면하신 뒤 사가미 에치에 머무시다가 10월 사도로 유배되셨다. 후지 문류의 전기는 닛코상인이 이 유배에도 따라가 사도의 쓰카하라와 이치노사와에서 스승을 모셨다고 전한다. 1272년 정월 쓰카하라의 문답 때 닛코상인이 니코와 함께 사도 염불종의 중심 인쇼보 벤조를 몰아세웠다는 기록도 있다(전승). 대성인은 그날의 모습을 뒷날 이렇게 적으셨다.

해 질 녘 넓은 눈벌판에 지붕이 해어진 작은 나무 불당 하나가 홀로 서 있고, 벽에 눈이 쌓였으며 눈에 반쯤 묻힌 묘석들과 앙상한 나무, 문으로 이어진 발자국, 멀리 무거운 구름 아래 잿빛 겨울 바다가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3 · 쓰카하라의 겨울

佐渡の国のみならず越後・越中・出羽・奥州・信濃等の国国より集れる法師等なれば塚原の堂の大庭・山野に数百人・六郎左衛門尉・兄弟一家さならぬもの百姓の入道等かずをしらず集りたり

사도국뿐 아니라 에치고 · 엣추 · 데와 · 오슈 · 시나노 등 여러 나라에서 모인 법사들이라, 쓰카하라 불당의 넓은 마당과 산과 들에 수백 명이 모였고, 로쿠로자에몬노조와 그 형제 일가, 그 밖의 백성 입도들까지 셀 수 없이 모였다.

「종종어진무어서」, 917–918쪽

눈 덮인 쓰카하라의 삼매당에서 겨울을 나신 대성인은 이 문답에서 염불 · 진언 · 천태의 승려들을 한두 마디로 꺾으셨다. 유배된 스승 곁에 있던 젊은 제자에게, 이 겨울은 스승이 홀로 온 나라의 불교와 마주 서는 모습을 지켜본 시간이었다.

사도의 대성인 곁에 닛코상인이 있었다는 것은 대성인의 편지에서도 엿보인다. 앞에서 본 1273년 8월의 「하키리사부로전답서」 첫머리에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鎌倉に筑後房・弁阿闍梨・大進阿闍梨と申す小僧等之有り之を召して御尊び有る可し御談義有る可し大事の法門等粗ぼ申す

가마쿠라에 지쿠고보 · 벤아사리 · 다이신아사리라는 젊은 승려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불러 존중하시고 함께 법을 담론하십시오. 중요한 법문은 대략 말해 두었습니다.

「하키리사부로전답서」, 1369쪽

하키리 집안에 법을 전한 닛코상인은 이때 사도에서 스승을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대성인은 가마쿠라에 남은 제자들 — 니치로 · 닛쇼 · 다이신아사리 — 를 하키리 집안에 소개하셨다. 사도의 대성인 곁에서 「개목초」(1272)와 「관심의 본존초」(1273)가 쓰였다. 닛코상인은 「관심의 본존초」를 베껴 쓴 사본을 남겼고, 「개목초」도 사본으로 지녔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개목초」에 대해 「닛코가 가진 본은 두 번째 옮겨 쓴 것으로, 아직 정본과 맞추어 보지 못했다(日興所持の本は第二転なり、未だ正本を以て之を校えず)」(1604쪽)고 적는다.

1274년(분에이 11년) 2월 사면장이 내려졌다. 대성인은 3월 사도를 떠나 가마쿠라로 돌아오셨고, 4월 8일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세 번째 국가 간효를 하셨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성인은 가마쿠라를 떠나기로 하셨다.

미노부로 — 1274년 5월

1274년 5월 12일 — 6월 17일 · 분에이 11년 · 가마쿠라에서 미노부로

「세 번 간하여 쓰이지 않으면 떠난다」는 옛 법도대로, 대성인은 1274년 5월 12일 가마쿠라를 떠나셨다. 그리고 닷새 뒤인 5월 17일 가이국 하키리에 닿으셨다. 6월 17일, 미노부 골짜기에 세 칸 사방의 작은 초암이 섰다.

초여름, 짙은 삼나무와 활엽수 숲이 양쪽으로 가파르게 솟은 깊고 좁은 골짜기,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내 곁 평평한 자리에 작은 초가 암자 하나가 있고 위쪽 비탈에 안개가 걸린 금박 수묵화
그림 4 · 미노부의 초암

왜 미노부였는가. 그 땅의 지도가 닛코상인이 교화한 하키리사네나가였기 때문이다. 앞의 「백육개초」의 글처럼, 미노부 입산은 「닛코의 간절한 뜻」이 낳은 것이었다. 대성인은 이 산에서 아홉 해를 사셨다. 1282년 9월 미노부를 떠나 이케가미에 닿으신 뒤 대성인이 사네나가에게 보내신 마지막 편지에는 「아홉 해까지 귀의하신 뜻(九年まで御きえ候いぬる御心ざし)」(「하키리전어보」, 1376쪽)이라는 말이 있다.

미노부의 아홉 해 동안 닛코상인은 스승 곁의 일과 후지 · 가이의 홍교를 오갔다. 대성인이 문하에게 보내신 편지를 들고 가 읽어 드리고, 문하의 공양을 미노부로 올리고, 새로 귀의한 사람을 데리고 미노부에 올랐다. 3부는 그 홍교의 이야기다.

  1. ① 1271.9.12 다쓰노구치
  2. 전승② 1271.10 사도 유배쓰카하라 · 이치노사와 · 닛코상인 급사
  3. ③ 1272–1273 「개목초」 · 「관심의 본존초」닛코상인 사본 · 소지본
  4. ④ 1273.8 「하키리사부로전답서」鎌倉に筑後房・弁阿闍梨・大進阿闍梨と申す小僧等之有り1369가마쿠라에 지쿠고보 · 벤아사리 · 다이신아사리라는 젊은 승려들이 있습니다
  5. ⑤ 1274.3 사면 · 4.8 세 번째 국가 간효
  6. ⑥ 1274.5.12 가마쿠라 출발 · 5.17 하키리 · 6.17 미노부 초암

「延山地頭発心の根元は日興教化の力用なり」869*미노부산 지도가 발심한 근원은 닛코가 교화한 힘이다

* 강의 인용 원문 · 9절 · 10절
도표 7 · 다쓰노구치에서 미노부로 1271–1274

닛코 문류는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신 것을 닛코상인의 홍교가 맺은 열매로 본다. 미노부의 지도를 발심시킨 사람이 닛코상인이었고, 대성인의 아홉 해가 그 땅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뒷날 그 지도가 방법을 저질렀을 때, 그를 타일러야 할 사람도, 끝내 그 땅을 떠나야 할 사람도 닛코상인이었다(5부).

3부 후지 기슭의 홍교

스물아홉의 홍교 — 편지를 읽어 주는 사람

1274 — 1282 · 분에이 11년 — 고안 5년 · 가이와 스루가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신 해, 닛코상인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는 자란 땅의 인연을 따라 가이와 스루가에 법을 펴기 시작했다. 외조부 유이 입도의 가와이, 고모부 다카하시 입도의 가시마, 난조 집안의 우에노, 마쓰노 집안의 마쓰노, 이시카와 집안의 오모스. 그리고 자신이 공부한 시주쿠원과 짓소사, 그 남쪽 아쓰와라의 류센사.

닛코상인이 만년에 어본존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제자분 본존 목록」(1298)에는 예순다섯 명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서른일곱 명이 스루가 사람이고, 재가 제자 열일곱 명은 모두 후지군 사람이다. 「닛코의 제자」라는 주가 붙은 사람은 서른 명 남짓으로, 대부분이 가이와 스루가 사람이다(사료, 강의 인용). 후지 기슭의 문하는 거의 그대로 닛코상인이 기른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닛코상인의 모습은 대성인의 편지 끝에 여러 번 나온다. 대성인은 후지의 문하에게 편지를 보내시며 닛코상인에게 그 편지를 읽어 드리라고 이르셨다.

대성인의 말씀은 닛코상인의 목소리로 후지의 문하에게 닿았다. 문하는 닛코상인을 통해 대성인을 알았고, 대성인은 닛코상인을 통해 문하를 기르셨다. 닛코 문류가 닛코상인을 「대성인의 법을 그대로 전한 사람」으로 받드는 것은 이 시기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미노부 · 대성인닛코상인
  1. 1275.1「봄의 축하어서」 · 성묘「此の御房は正月の内につかわして」1510이 스님을 정월 안에 보내어
  2. 1275.7「다카하시입도전답서」 · 다카하시 입도「覚乗房はわき房に度度よませてきこしめせ」1463가쿠조보와 호키보에게 여러 번 읽게 하여 들으십시오
  3. 1275.8「우에노전어서(1513)」 · 마룻대 글「此の伯耆公に進せ候」1513이 호키공에게 보냅니다
  4. 1276.3「난조전답서(1530)」「ははき殿読み聞かせまいらせ給へ」1530호키 님이 읽어 들려 드리십시오
  5. 1281.11「우에노니부인답서(1580)」「此の由をはわきどのよみきかせまいらせ給うべし」1582이 뜻을 호키 님이 읽어 들려 드리도록 하십시오
  6. 1282.2「법화증명초」「下伯耆房」1587호키보에게 내림
후지의 문하
도표 8 · 「호키보에게 읽혀 들으시라」

다카하시 입도 — 「호키보에게 여러 번 읽게 하여 들으시라」

1275년 7월 12일 · 겐지 원년 · 스루가 가시마

스루가국 후지군 가시마의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는 닛코상인의 고모부였다. 닛코상인의 교화로 신앙에 들어, 아내와 함께 후지 문하의 중심이 되었다. 1275년(겐지 원년) 7월, 그는 큰 병에 걸려 있었다. 대성인은 긴 편지를 보내셨다. 편지는 석존이 법화경의 안목인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가섭에게도 문수에게도 주지 않고 상행보살에게만 부촉하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다섯 자를 지금 대성인이 넓히고 있다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고 병든 입도를 이렇게 격려하며 끝난다.

여름 저녁, 후지산 남쪽 들판의 푸른 논 사이로 좁은 둑길이 깊은 초가지붕의 농가로 이어지고, 그 길 멀리 아주 작은 스님의 뒷모습 하나가 집 쪽으로 걸어가며, 뒤로 저녁 하늘에 후지산이 옅게 솟은 금박 수묵화
그림 5 · 가시마로 가는 길

而も法華経は閻浮提人病之良薬とこそとかれて候へ、閻浮の内の人は病の身なり法華経の薬あり、三事すでに相応しぬ一身いかでかたすからざるべき、但し御疑のわたり候はんをば力をよばず、南無妙法蓮華経・南無妙法蓮華経。覚乗房はわき房に度度よませてきこしめせ・きこしめせ

게다가 법화경은 「염부제 사람의 병의 양약」이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염부제 안의 사람은 병든 몸이고, 법화경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세 가지가 이미 들어맞았으니 이 한 몸이 어찌 낫지 않겠습니까. 다만 의심이 있으시다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 가쿠조보와 호키보에게 여러 번 읽게 하여 들으십시오, 들으십시오.

「다카하시입도전답서」, 1463쪽

긴 편지의 마지막 한 줄이 닛코상인을 부른다. 상행보살에게 부촉된 다섯 자의 이야기는, 병상의 입도 곁에서 닛코상인의 목소리로 여러 번 읽혔다. 같은 달 대성인은 다카하시 입도의 아내에게도 공양의 답장을 보내셨다(「다카하시전답서」, 1457쪽).

1275.7.12 · 다카하시 입도 · 닛코상인의 고모부 · 병중

  1. ① 석존은 다섯 자를 가섭 · 문수에게 주지 않고 상행보살에게만 부촉하셨다1458
  2. ② 말법에 그 다섯 자를 넓히는 사람1458–1462
  3. ③閻浮の内の人は病の身なり法華経の薬あり、三事すでに相応しぬ1463염부제 안의 사람은 병든 몸이고 법화경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세 가지가 이미 들어맞았습니다
  4. ④覚乗房はわき房に度度よませてきこしめせ1463가쿠조보와 호키보에게 여러 번 읽게 하여 들으십시오
도표 9 · 「다카하시입도전답서」의 흐름

니치모쿠상인 — 열다섯 살의 귀의

1274 — 1282 · 이즈 소토산에서 미노부로

1274년, 이즈의 소토산(走湯山, 이즈산)에서 한 문답이 있었다. 소토산 장방(藏坊)의 학승 시키부 승도와 닛코상인의 문답이었다. 그 자리에서 듣고 있던 열다섯 살의 소년이 곧바로 닛코상인에게 귀의했다. 소년의 아명은 도라오마루(虎王丸). 이즈국 니타군 하타케에서 1260년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니타 고로 시게쓰나, 어머니는 난조도키미쓰의 누나 렌아니였다. 열세 살에 소토산에 올라 공부하던 중이었다. 그가 뒷날의 니치모쿠상인(日目上人)이다.

1276년(겐지 2년) 11월 24일, 열일곱 살의 소년은 미노부에 올라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대성인은 그에게 「렌조보 니치모쿠」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로부터 대성인 입멸까지 여섯 해 동안 니치모쿠상인은 미노부에서 스승을 모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골짜기 시내로 내려가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올랐으므로 정수리가 우묵하게 들어갔다고 전한다. 1282년 이케가미에서는 대성인의 명대로 천태의 학승 니카이도 이세 법인과 문답하여 열 번의 문답을 모두 이겼다(전승).

니치모쿠상인의 형 니타시로노부쓰나도 닛코상인의 문하였다. 대성인은 노부쓰나 부부의 공양에 이렇게 답하셨다.

経は法華経・顕密第一の大法なり、仏は釈迦仏・諸仏第一の上仏なり、行者は法華経の行者に相似たり、三事既に相応せり檀那の一願必ず成就せんか

경은 법화경, 현밀 제일의 큰 법이다. 부처는 석가불, 여러 부처 가운데 첫째인 부처다. 행자는 법화경의 행자를 닮았다. 세 가지가 이미 들어맞았으니 단나의 한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니타전어서」, 1452쪽

닛코상인의 「제자분 본존 목록」은 노부쓰나를 「닛코 제일의 제자(日興第一の弟子)」라 적었다(사료, 강의 인용).

쉰여덟 해 뒤, 닛코상인은 니치모쿠상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글(「닛코적조조사」)에 이렇게 썼다.

右日目は十五の歳日興に値いて法華を信じて以来七十三歳の老体に至るまで敢て違失の義なし、十七の歳日蓮聖人の所甲州身延山に詣りて御在生七年の間常随給仕し

위 니치모쿠는 열다섯 살에 닛코를 만나 법화를 믿은 뒤로 일흔세 살의 노구에 이르기까지 감히 어긋남이 없었다. 열일곱 살에 니치렌 성인이 계신 가이 미노부산에 올라 재세하신 일곱 해 동안 늘 곁에서 모셨다.

「닛코적조조사」, 닛코상인, 사료, 강의 인용

열다섯 살의 소토산에서 시작된 사제의 길은 6부 37절에서 다시 만난다.

  1. 1260이즈 하타케 출생아명 도라오마루 · 어머니 렌아니 = 난조도키미쓰의 누나
  2. 1272소토산 수학
  3. 1274소토산 문답 · 닛코상인에게 귀의(15)
  4. 1276.11.24미노부 · 렌조보 니치모쿠(17)
  5. 1282이케가미 문답전승
  6. 1290대석사 렌조보
  7. 1332「닛코적조조사」사료
  8. 1333천주(天奏) 길에 미노 다루이에서 입멸(74)
도표 10 · 니치모쿠상인 1260–1333

짓소사와 시주쿠원 — 「외도의 큰 사교」라는 이름

1276 — 1278 · 겐지 2년 — 고안 원년

닛코상인의 홍교는 먼저 자신이 공부한 천태종 절 안에서 열매를 맺었다. 시주쿠원에서는 공승(供僧) 쇼켄 · 겐슈와 니치지가, 짓소사에서는 지쿠젠보 · 부젠보 · 히고보 · 엔조보가, 아쓰와라의 류센사에서는 닛슈 · 닛벤 · 니치젠이 닛코상인의 제자가 되었다. 대부분 젊은 승려였다. 공승은 본존을 모시며 절의 잔일을 맡는 자리여서 늘 절 아래 농민과 닿아 있었다. 그들의 홍교는 자연히 절 밖의 마을로 번졌다.

절의 윗사람들은 이것을 두려워했다. 짓소사의 오와리아사리는 「천태의 『법화현의』가 소승으로 대승을 깨뜨리고 대승으로 소승을 깨뜨리는 것은 눈이 머는 원인이라 했다」며 대성인 문하의 절복을 비난했다. 1278년(겐지 4년) 정월, 대성인은 짓소사의 부젠공에게 답장을 보내 그 해석의 잘못을 바로잡으시고, 끝에 이렇게 쓰셨다.

四十九院等の事、彼の別当等は無智の者たる間日蓮に向つて之を恐る小田一房等怨を為すか弥彼等が邪法滅す可き先兆なり

시주쿠원 등의 일은, 그 별당들이 지혜 없는 자들이라 니치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다 이치보 등이 원한을 품는 것은 더욱더 저들의 사법이 멸할 징조입니다.

「짓소사어서」, 1453쪽

두 달 뒤 그 일이 일어났다. 시주쿠원의 사무(寺務) 니이 율사 겐요(嚴譽)가 닛코상인과 니치지 · 쇼켄 · 겐슈를 절에서 쫓아낸 것이다. 1278년(고안 원년) 3월, 네 사람은 막부에 신장을 올렸다.

寺務・二位律師厳誉の為に日興並に日持・承賢・賢秀等・所学の法華宗を以て外道大邪教と称し往古の住坊並に田畠を奪い取り寺内を追い出さしむる謂れ無き子細の事

사무 니이 율사 겐요가 닛코와 니치지 · 쇼켄 · 겐슈 등이 배우는 법화종을 외도의 큰 사교라 일컬어, 예부터 살던 방과 밭을 빼앗고 절 안에서 쫓아낸 까닭 없는 사정의 일.

「시주쿠원신장」, 848쪽

신장은 먼저 천태종 절인 시주쿠원이 법화경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며 법화경을 외도라 부를 경문은 어디에도 없다고 따지고, 겐요와 공개 대결을 시켜 참과 거짓을 가려 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且去る文応年中・師匠日蓮聖人・仏法の廃れたるを見・未来の災を鑒み諸経の文を勘え一巻の書を造る立正安国論と号す、異国の来難果して以て符合し畢んぬ未萠を知るを聖と謂つ可きか

또한 지난 분오 연간에 스승 니치렌 성인께서 불법이 쇠한 것을 보시고 앞날의 재앙을 헤아리시어 여러 경문을 살펴 한 권의 글을 지으시니 「입정안국론」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국이 쳐들어오는 난이 과연 들어맞았습니다. 아직 싹트지 않은 것을 아는 이를 성인이라 할 것입니다.

「시주쿠원신장」, 849쪽

한 절의 추방을 호소하는 글이, 막부를 향한 국가 간효의 글로 바뀐다. 신장의 이 끝부분은 대성인이 손수 더하신 것이라 전한다. 신장에 이름을 올린 네 사람은 승려로서의 거처와 생계를 잃었다. 그러나 닛코상인은 스스로를 「니치렌 성인의 제자」라 적었다. 이 이름이 대성인 입멸 뒤 오노승과 닛코상인을 가르는 첫째 조목이 된다(6부 31절).

이와모토 짓소사종파천태 요카와 계열닛코상인과의 인연1258 입문 · 1268 수장귀의한 사람지쿠젠보 · 부젠보 · 히고보 · 엔조보박해오와리아사리의 비난 · 「짓소사어서」(1453)닛코상인의 문서「짓소사 대중 수장」
가모하라 시주쿠원종파천태 요카와 계열닛코상인과의 인연1252경 수학 · 공승귀의한 사람니치지 · 쇼켄 · 겐슈박해1278.3 겐요의 추방 · 「시주쿠원신장」(848)닛코상인의 문서「시주쿠원신장」
아쓰와라 류센사종파천태닛코상인과의 인연1275 홍교귀의한 사람닛슈 · 닛벤 · 니치젠(라이엔은 뒤에 물러남)박해1276 교치의 기청문 강요 · 1279 법난닛코상인의 문서「류센사신장」(공동)
도표 11 · 후지의 세 절 1268–1279

1279년 가을 — 「니치렌의 문가가 아니다」

1279년 9월 21일 — 10월 17일 · 고안 2년 · 아쓰와라와 가마쿠라

아쓰와라의 류센사에서는 1275년부터 닛슈 · 닛벤 · 니치젠이 닛코상인의 제자가 되었다. 원주대 교치는 1276년 그들에게 법화경을 버리고 염불을 부르겠다는 기청문을 쓰라고 다그쳤다. 니치젠은 절을 떠났고, 닛슈와 닛벤은 절 안에 숨어 머물며 법을 폈다. 1278년에는 아쓰와라 마을의 농민 진시로 · 야고로 · 야로쿠로 등이 신앙에 들었다.

9월 말 후지산 남쪽 넓은 들판, 반쯤 거둔 논에 볏단이 나무 걸대에 줄지어 마르고 나머지 논은 누렇게 익은 벼가 그대로 서 있으며, 들 끝에 작은 농가 몇 채,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고 위로 후지산이 솟은 금박 수묵화
그림 6 · 아쓰와라의 들

1279년(고안 2년) 9월 21일, 교치의 꾐을 받은 무리가 벼 베기를 하던 농민 신도 스무 명을 「남의 논의 벼를 베어 간 죄」로 붙잡아 가마쿠라로 보냈다. 닛코상인은 곧 가마쿠라로 가서 막부에 그 부당함을 호소할 글의 초안을 써 미노부의 대성인께 보냈다. 대성인은 앞부분을 손수 새로 쓰시고 뒷부분은 닛코상인의 초안을 그대로 살려 「류센사신장」을 완성하셨다. 정본이 지금도 전하는데, 첫머리부터 「이런 사정을 의심하시면(此等の子細御不審を相貽さば)」까지가 대성인의 필적이고, 「고승들을 불러(高僧等を召され)」부터 끝까지가 닛코상인의 필적이다.

닛코상인이 쓴 뒷부분은 원주대 교치의 죄상을 하나하나 들어 그를 물리고 닛슈 · 닛벤을 절에 돌려보내 달라고 청한다. 그 가운데 법난의 앞선 피해가 이렇게 적혀 있다.

下方の政所代に勧め去る四月御神事の最中に法華経信心の行人・四郎男を刄傷せしめ去る八月弥四郎坊男の頸を切らしむ、日秀等頸を刎ぬと擬する事を此の中に書き入れよ

(교치는) 시모카타의 정소대(政所代)를 부추겨 지난 4월 신사(神事)가 한창일 때 법화경을 믿는 행인 시로를 칼로 상하게 하고, 지난 8월에는 야시로보의 목을 베게 했다. 「닛슈 등의 목을 베려 한 일을 이 가운데 써 넣으라.」

「류센사신장」, 853쪽

닛코상인의 초안 한가운데에 대성인의 지시 한 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닛슈 등의 목을 베려 한 일을 이 가운데 써 넣으라.」 스승은 제자의 글을 읽으며 빠진 사실을 짚어 주셨고, 제자는 그 지시를 받아 신장을 마무리했다. 「류센사신장」은 대성인과 닛코상인이 한 장의 종이 위에서 함께 싸운 문서다. 신장은 끝에서 행실이 나쁜 원주대 교치를 갈아 치워 달라고 청하며 「어찌 짓소사의 예에 견주지 않겠는가(何ぞ実相寺に例如せん)」(853쪽)라고 적는다. 짓소사에서 승려들의 소송으로 원주가 물러난 일(2부 7절)을 선례로 든 것이다. 그 절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이 대목을 썼다.

10월 1일, 대성인은 문하에게 「성인어난사」를 보내셨다(4부 18절). 그리고 10월 12일, 완성한 신장에 다음 지시를 붙여 가마쿠라의 닛코상인과 닛슈 · 닛벤에게 보내셨다.

此の旨を存じ問注の時・強強と之を申さば定めて上聞に及ぶ可きか

이 뜻을 알고 문초를 받을 때 굳세게 이를 말하면 반드시 위에까지 들릴 것입니다.

「호키전등답서」, 1456쪽

事事証人の起請文を用ゆべからず、但し現証の殺害刄傷而已、若し其の義に背く者は日蓮の門家に非ず日蓮の門家に非ず候

일마다 증인의 기청문을 쓰지 말고, 다만 눈앞의 증거인 살해와 상해만 말하십시오. 만일 이 뜻을 어기는 자는 니치렌의 문가가 아닙니다, 니치렌의 문가가 아닙니다.

「호키전등답서」, 1456쪽

받는 사람은 「호키 님(伯耆殿)」이었다. 화광신문 목록은 이 편지의 받는 사람을 닛코상인으로 적는다. 붙잡힌 이들은 「염불을 부르겠다는 기청문을 쓰면 풀어 주겠다」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 대성인은 「사람에게 죽고 다친 위에 거듭 기청문을 써서 잘못을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없던 처사」라며 결코 쓰지 말라고 하셨다.

10월 15일, 헤이노사에몬노조는 스무 명을 제 집 뜰에 끌어내어 염불을 부르라고 다그쳤다. 농민들은 제목을 불렀다. 진시로 · 야고로 · 야로쿠로 세 사람이 목이 베였고, 나머지 열일곱 명은 마을에서 쫓겨났다. 이틀 뒤 대성인은 이 소식에 답하셨다.

伯耆房等深く此の旨を存じて問注を遂ぐ可し、平金吾に申す可き様は文永の御勘気の時聖人の仰せ忘れ給うか、其の殃未だ畢らず重ねて十羅刹の罰を招き取るか、最後に申し付けよ

호키보 등은 깊이 이 뜻을 알고 문주를 끝까지 치르십시오. 헤이 깅고에게 말할 것은 이렇습니다. 「분에이의 감기(勘氣) 때 성인의 말씀을 잊으셨는가. 그 재앙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거듭 십나찰의 벌을 불러들이려는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해 두십시오.

「성인등답서」, 1455쪽

아쓰와라 법난은 닛코상인의 홍교가 낳은 법난이었고, 닛코상인이 그 한가운데에서 대성인의 지시를 받아 막부와 맞선 법난이었다.

  1. 9.21벼 베는 날 · 스무 명 체포 · 가마쿠라로
  2. 9월 말닛코상인 가마쿠라 · 신장 초안
  3. 10.1「성인어난사」「余は二十七年なり」1189나는 스물일곱 해다
  4. 10월「류센사신장」 완성앞 대성인 · 뒤 닛코상인 필적
  5. 10.12「호키전등답서」「日蓮の門家に非ず」1456니치렌의 문가가 아니다
  6. 10.12본문계단의 대어본존4부 18절
  7. 10.15세 사람 참수 · 열일곱 명 추방
  8. 10.17「성인등답서」「伯耆房等深く此の旨を存じて問注を遂ぐ可し」1455호키보 등은 깊이 이 뜻을 알고 문주를 끝까지 치르십시오
도표 12 · 1279년 가을의 스무닷새

「목이 베이고 죽은 사람들」 — 제자분 본존 목록

1279 — 1298 · 아쓰와라에서 대석사로

닛코상인은 아쓰와라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열아홉 해 뒤인 1298년(에이닌 6년), 닛코상인은 어본존을 준 제자들의 이름을 한 권에 적었다. 「제자분 본존 목록」이다. 그 목록에는 아쓰와라 법난으로 죽음에 처해지거나 쫓겨난 문하의 이름도 적혀 있다(사료, 강의 인용). 닛코 문하가 닛코상인의 뜻을 받아 적은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의 본존 조목은 이 목록을 가리키는 한 줄로 끝난다.

本尊人数等又追放人等、頚切られ、死を致す人等

본존을 받은 사람 수 등. 또 쫓겨난 사람들, 목이 베인 사람들, 죽음에 이른 사람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6쪽

같은 조목은 닛코상인이 어떤 사람에게 어본존을 써서 주었는가를 이렇게 적는다.

日興の弟子分に於ては在家出家の中に或は身命を捨て或は疵を被り若は又在所を追放せられ一分信心の有る輩に忝くも書写し奉り之を授与する者なり

닛코의 제자에게는 재가 · 출가 가운데 혹은 목숨을 버리고, 혹은 상처를 입고, 혹은 사는 곳에서 쫓겨나는 등 한 조각이라도 신심이 있는 사람에게 송구하게도 베껴 써서 드리는 것이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6쪽

닛코상인의 어본존 서사와 수여는 이렇게 엄격했다. 목숨을 버린 사람, 상처 입은 사람, 쫓겨난 사람. 아쓰와라의 사람들이 그 기준이었다. 닛코상인은 또 대성인이 쓰신 어본존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한 폭 한 폭 곁에 적어 두었다. 부모가 강성한 신심으로 받았어도 자손이 버리고, 스승이 급사의 공으로 받았어도 제자가 버려 사고팔리거나 도둑맞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6쪽). 닛코 문류에서 어본존은 처음부터 신심과 함께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오노승 쪽 (닛코 문류의 기록)「御筆の本尊を以て形木に彫み不信の輩に授与して軽賎する由・諸方に其の聞え有り所謂日向・日頂・日春等なり」1606친필 본존을 형목에 새겨 믿지 않는 이들에게 주며 가볍게 여긴다는 소문이 여러 곳에 있다. 이른바 니코 · 닛초 · 닛슌 등이다
닛코상인「身命を捨て或は疵を被り若は又在所を追放せられ一分信心の有る輩に忝くも書写し奉り之を授与する」1606목숨을 버리고, 상처를 입고, 사는 곳에서 쫓겨나는 등 한 조각이라도 신심이 있는 사람에게 송구하게도 베껴 써서 드린다

「本尊人数等又追放人等、頚切られ、死を致す人等」1606본존을 받은 사람 수 등. 또 쫓겨난 사람들, 목이 베인 사람들, 죽음에 이른 사람들· 1298 「제자분 본존 목록」사료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6장 셋째 · 넷째 조목 · 16절
도표 13 · 어본존을 받는 사람

닛코 문류는 아쓰와라 법난을 닛코상인의 홍교와 떼어 볼 수 없다고 본다. 법난의 사람들은 닛코상인이 기른 제자의 제자였고, 닛코상인은 가마쿠라에서 대성인의 지시를 받아 그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름은 열아홉 해 뒤 닛코상인의 손으로 「목이 베인 사람들」이라 적혔다. 이 법난의 한가운데에서 대성인은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다. 4부는 그 이야기다.

4부 출세의 본회와 혈맥

「어의구전」의 필록

1278년 · 고안 원년 · 미노부

미노부의 대성인은 제자들의 청을 받아 법화경을 강의하셨다. 닛코상인은 그 강의를 거듭 듣고 기록하여 한 권으로 엮었다. 「어의구전(御義口傳)」이다. 화광신문 어서전집 목록은 「어의구전」을 1278년(고안 원년), 닛코상인 앞으로 적는다. 대석사의 옛 연보는 이렇게 전한다. 「미노부에 칩거하신 뒤 제자들의 청에 따라 법화경을 강석하셨다. 닛코가 거듭 들은 것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어의구전이라 이름하였다. 또 닛코기(日興記)라고도 한다(延山蟄居の後御弟子衆の請により法華経の御講釈あり、日興度々聞を集め部帙を成して御義口伝と名づく、亦日興記と号するなり)」(『니치렌 대성인 연보』, 사료, 강의 인용).

「어의구전」은 법화경 28품과 개결 2경의 요문 하나하나에 대하여 「어의구전에 이르기를(御義口傳に云く)」로 시작하는 대성인의 해석을 적었다. 그 해석은 경문의 표면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 남묘호렌게쿄를 읽어 낸다. 수량품의 첫 조목은 이렇다.

御義口伝に云く此の品の題目は日蓮が身に当る大事なり神力品の付属是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이 품의 제목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대사(大事)다. 신력품의 부촉이 바로 이것이다.

「어의구전」, 752쪽

수량품의 제목 「묘법연화경 여래수량품」이 대성인 자신의 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같은 조목은 「여래」를 「총괄해서는 일체중생이요, 따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라 하고, 「무작삼신의 보호(寶號)를 남묘호렌게쿄라 한다」고 맺는다. 「어의구전」 맨 앞의 조목은 「남묘호렌게쿄」 일곱 자를 한 자씩 풀이하는 데서 시작한다.

御義口伝に云く南無とは梵語なり此には帰命と云う、人法之れ有り人とは釈尊に帰命し奉るなり法とは法華経に帰命し奉るなり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나무(南無)는 범어다. 이것을 귀명이라 한다. 귀명에는 사람과 법이 있다. 사람이란 석존께 귀명하는 것이고, 법이란 법화경에 귀명하는 것이다.

「어의구전」, 708쪽

닛코 문류는 이 「사람과 법」의 귀명을 문저에서 읽는다. 말법에 귀명할 사람은 구원원초의 본불인 대성인이고, 귀명할 법은 남묘호렌게쿄의 대어본존이며, 두 가지는 하나(人法一箇)라는 것이다. 닛코상인이 필록한 이 강의는 닛코 문류 교학의 가장 깊은 근거가 되었다.

같은 무렵 니코도 대성인의 법화경 강의를 기록했다. 1280년에 엮은 「어강문서(御講聞書)」다(화광신문 목록 · 니코 필록). 같은 스승의 강의를 두 제자가 적었으나, 뒷날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정반대였다(5부 26절).

「어의구전」은 대성인의 법화경 해석이 닛코상인에게 직접 전해졌다는 증거로 닛코 문류에서 중히 여겨진다. 닛코상인의 호 「뱌쿠렌아사리(白蓮阿闍梨)」는 그 이름대로 흰 연꽃(白蓮華)을 뜻한다고 닛코 문류는 풀이한다. 이름은 그 몸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연대 대조 — 「어의구전」이 엮인 해는 1278년(고안 원년) 정월로 전하며, 화광신문 목록도 1278년으로 적는다. 대성인의 법화경 강의가 이어진 기간(미노부 입산 뒤 몇 해)과 필록이 정리된 때는 구별된다. 「어강문서」는 1280년까지의 강의를 니코가 적은 것으로, 화광신문 목록은 1280년으로 적는다.

「나는 스물일곱 해다」 —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1279년 10월 1일 · 10월 12일 · 고안 2년 · 미노부

아쓰와라의 스무 명이 가마쿠라에 끌려가 있던 1279년 10월 1일, 대성인은 문하 전체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성인어난사」다. 편지는 입종의 날짜로 시작하여 이렇게 이어진다.

가을 밤, 단풍 든 미노부 골짜기의 검은 삼나무 비탈 위로 밝은 둥근 달이 뜨고, 달빛을 받은 시냇가에 작은 암자 하나가 멀리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7 · 미노부의 가을 밤

仏は四十余年・天台大師は三十余年・伝教大師は二十余年に出世の本懐を遂げ給う、其中の大難申す計りなし先先に申すがごとし、余は二十七年なり其の間の大難は各各かつしろしめせり

부처는 사십여 년, 천태대사는 삼십여 년, 전교대사는 이십여 년에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다. 그 사이의 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이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나는 스물일곱 해다. 그 사이의 대난은 각자가 대강 알고 있을 것이다.

「성인어난사」, 1189쪽

석존은 성도 뒤 사십여 년에 법화경을 설하셨고, 천태는 삼십여 년에 『마하지관』을, 전교는 이십여 년에 히에이산의 원돈계단을 세웠다. 그리고 대성인은 1253년 입종에서 스물일곱 해째인 1279년에 이르셨다. 「나는 스물일곱 해다」라는 말은 그 해에 대성인이 출세의 본회를 이루신다는 선언이다.

그로부터 열하루 뒤인 1279년(고안 2년) 10월 12일, 대성인은 본문계단의 대어본존(本門戒壇の大御本尊)을 세우셨다. 닛코 문류는 이것을 대성인 출세의 본회로 받든다. 그때까지 대성인이 쓰신 어본존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문하에게 주신 것이었다. 이 대어본존은 일염부제(一閻浮提) 곧 온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일염부제 총여(一閻浮提總與)」의 본존이며, 말법 만년의 모든 사람을 위해 세우신 본존이다. 사도에서 쓰신 「관심의 본존초」는 이 본존을 미리 이렇게 예고하셨다.

此の時地涌千界出現して本門の釈尊を脇士と為す一閻浮提第一の本尊此の国に立つ可し

이때 지용천계(地涌千界)가 출현하여 본문의 석존을 협사로 삼는 일염부제 제일의 본존이 이 나라에 세워질 것이다.

「관심의 본존초」, 254쪽

왜 10월 12일의 대어본존보다 열하루 앞선 10월 1일에 이미 「나는 스물일곱 해다」라고 하셨는가. 닛코 문류는 출세의 본회가 본존을 어떻게 쓰시느냐는 대성인 쪽의 일만이 아니라, 그 법을 받을 사람들이 준비되었느냐는 중생 쪽의 일이기도 했다고 본다. 아쓰와라의 농민들은 「염불을 부르면 풀어 주겠다」는 위협 앞에서 제목을 불렀다. 출가도 무사도 아닌 이름 없는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법을 지켰을 때, 대성인은 말법의 중생이 법을 받을 때가 왔음을 보셨다. 그래서 10월 1일에 이미 본회를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 법난을 기른 사람이 닛코상인이었다.

대성인이 남기신 법은 세 가지 비법(三大祕法)으로 정리된다. 본문의 본존 · 본문의 계단 · 본문의 제목이다. 1281년 오타조묘에게 주신 「삼대비법품승사」는 그 가운데 계단을 이렇게 적으셨다.

戒壇とは王法仏法に冥じ仏法王法に合して王臣一同に本門の三秘密の法を持ちて有徳王・覚徳比丘の其の乃往を末法濁悪の未来に移さん時勅宣並に御教書を申し下して霊山浄土に似たらん最勝の地を尋ねて戒壇を建立す可き者か時を待つ可きのみ事の戒法と申すは是なり

계단이란, 왕법이 불법에 그윽이 합하고 불법이 왕법에 합하여 왕과 신하가 한결같이 본문의 세 비밀의 법을 지니고, 유덕왕과 각덕비구의 옛일을 말법 탁악의 미래로 옮길 때, 칙선과 어교서를 받들어 영산정토와 닮은 가장 뛰어난 땅을 찾아 계단을 세워야 할 것이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다.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본문의 본존은 이 대어본존이고, 본문의 계단은 이 대어본존을 모시는 곳이며, 본문의 제목은 이 대어본존을 믿고 부르는 남묘호렌게쿄다. 광선유포의 때에 「사(事)의 계단」이 세워질 때까지, 대어본존이 계신 곳이 그대로 계단의 뜻을 지닌다. 닛코 문류의 교의에서 세 가지 비법은 모두 이 한 본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대어본존과 함께 본문계단 건립의 유명(遺命)을 닛코상인 한 사람에게 맡기셨다(21절). 닛코상인은 1289년 미노부를 떠날 때 이 대어본존을 모시고 내려와 대석사에 모셨고(5부 28절), 입멸을 앞두고 니치모쿠상인에게 전했다(6부 37절).

해석의 갈림 — 「余は二十七年なり」를 닛코 문류는 「입종 뒤 스물일곱 해에 출세의 본회를 이룬다」로 읽고, 그 본회를 1279년 10월 12일의 본문계단 대어본존으로 받든다. 오노승의 흐름을 잇는 여러 문류는 이 구절을 「스물일곱 해 동안 대난을 겪었다」는 뜻으로 읽고, 출세의 본회를 특정한 본존으로 보지 않는다. 오노승이 석가상을 본존으로 세운 것(6부 32절)도 이 갈림과 이어져 있다.

「仏は四十余年・天台大師は三十余年・伝教大師は二十余年に出世の本懐を遂げ給う…余は二十七年なり」1189부처는 사십여 년, 천태대사는 삼십여 년, 전교대사는 이십여 년에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다 … 나는 스물일곱 해다

  1. 석존성도 뒤 사십여 년법화경
  2. 천태대사삼십여 년『마하지관』
  3. 전교대사이십여 년히에이산 원돈계단
  4. 니치렌 대성인입종 1253 → 27년1279.10.12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본존 그림 · 글자 배치 없음 · 18절
도표 14 · 출세의 본회
본문의 계단대어본존을 모시는 곳 · 광선유포 때 사(事)의 계단「時を待つ可きのみ事の戒法と申すは是なり」1022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다
본문의 본존본문계단의 대어본존1279.10.12
본문의 제목대어본존을 믿고 부르는 남묘호렌게쿄

세 가지 비법은 한 본존으로 돌아간다 — 닛코 문류의 교의

글자만 — 본존의 모양 · 글자 배치를 그리지 않는다 · 18절
도표 15 · 세 가지 비법

두 권의 상전서 — 「백육개초」와 「본인묘초」

1280년 정월 · 1282년 10월 · 고안 3 · 5년

대어본존을 세우신 이듬해 정월, 대성인은 닛코상인에게 한 권의 글을 주셨다. 「백육개초(百六箇抄)」다. 첫머리에 이렇게 적혀 있다.

具騰本種・正法の実義本迹勝劣正伝、本因妙の教主本門の大師日蓮謹んで之を結要す。万年救護写瓶の弟子日興に之を授与す云云、脱種合して一百六箇之れ在り

구등본종(具騰本種) · 정법의 실의 · 본적승렬의 바른 전승을, 본인묘의 교주 본문의 대사 니치렌이 삼가 맺어 요약한다. 만년 구호를 위하여 병의 물을 옮겨 담은 제자 닛코에게 이것을 준다. 탈(脫)과 종(種)을 합하여 백여섯 개가 있다.

「백육개초」, 854쪽

「사병(寫甁)」은 한 병의 물을 남김없이 다른 병에 옮겨 담는다는 말이다. 스승의 법을 한 방울도 더하거나 덜지 않고 그대로 받은 제자를 뜻한다. 「백육개초」는 법화경의 본문과 적문을, 석존이 중생을 해탈시키는 「탈익(脫益)」의 쉰 조목과 대성인이 중생에게 성불의 씨앗을 심는 「하종(下種)」의 쉰여섯 조목으로 가른다. 이 종탈상대(種脫相對)가 대성인 법문의 가장 깊은 곳이며, 그것을 닛코상인 한 사람에게 입으로 전하셨다는 것이 닛코 문류의 전승이다. 그 가운데 한 조목은 이렇다.

今日蓮が修行は久遠名字の振舞に芥爾計も違わざるなり

지금 니치렌의 수행은 구원 명자(名字)의 행동에 겨자씨만큼도 어긋나지 않는다.

「백육개초」, 863쪽

久遠元始の天上天下・唯我独尊は日蓮是なり

구원원시(久遠元始)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니치렌이 바로 그다.

「백육개초」, 863쪽

석존은 오백진점겁이라는 아득한 옛날에 처음 성불했다고 법화경 수량품에서 밝혔다. 그 성불에는 다시 그 원인이 된 수행이 있다. 「백육개초」는 그 가장 처음, 구원원초에 명자즉(名字即)의 범부로서 남묘호렌게쿄를 깨달은 부처가 있고, 말법의 대성인이 그 부처와 같다고 한다. 석존은 그 법을 받아 성불한 부처이고, 대성인은 그 법 자체를 몸으로 드러낸 본불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이 닛코 문류가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로 우러르는 근거이며, 석가상을 본존으로 세운 오노승과 갈라지는 뿌리가 된다(6부 35절).

「본인묘초(本因妙抄)」는 1282년 10월, 입멸을 앞둔 대성인이 닛코상인에게 주신 상전서로 전한다. 같은 뜻을 이렇게 적는다. 「석존의 구원 명자즉 지위의 수행을 말법의 지금 니치렌의 명자즉의 몸에 옮겼다(釈尊・久遠名字即の位の御身の修行を末法今時・日蓮が名字即の身に移せり)」(「본인묘초」, 877쪽, 2차 확인).

닛코 문류는 이 두 권을 「양권초(兩卷抄)」 또는 「혈맥초(血脈抄)」라 부르며, 대어본존을 세우신 뒤 유수일인(唯授一人)의 구전상승으로 닛코상인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상전서로 받든다. 「백육개초」의 끝에는 미노부 지도의 발심이 「닛코 교화의 힘」이라는 대목(2부 8절)도 있다. 대성인은 자신의 법을 이을 사람과, 그 사람이 대성인을 미노부에 모신 인연을 함께 적어 두셨다.

연대 대조 — 「백육개초」는 본문 머리에 「弘安三年 · 五十九歳 · 与日興」라 적혀 있다. 날짜는 1280년 정월 초하루와 정월 11일의 두 전승이 있다. 「본인묘초」는 1282년 10월 11일로 전하나, 화광신문 목록은 연대 칸에 「53세(1274년) · 弘安五」를 함께 적는다. 두 권 모두 정본은 전하지 않고 사본으로 전한다.

백육개초(혈맥초)1280 정월 · 854–869
  • 「万年救護写瓶の弟子日興に之を授与す」854만년 구호를 위하여 병의 물을 옮겨 담은 제자 닛코에게 이것을 준다
  • 탈익 50 · 하종 56 = 106조목
  • 「今日蓮が修行は久遠名字の振舞に芥爾計も違わざるなり」863지금 니치렌의 수행은 구원 명자의 행동에 겨자씨만큼도 어긋나지 않는다
  • 끝「延山地頭発心の根元は日興教化の力用なり」869*미노부산 지도가 발심한 근원은 닛코가 교화한 힘이다
본인묘초1282.10 · 870–877「釈尊・久遠名字即の位の御身の修行を末法今時・日蓮が名字即の身に移せり」877*석존의 구원 명자즉 지위의 수행을 말법의 지금 니치렌의 명자즉의 몸에 옮겼다

양권초 · 유수일인의 구전상승 — 닛코 문류의 전승

* 강의 인용 원문 · 19절
도표 16 · 두 권의 상전서

미노부의 마지막 해

1281년 11월 — 1282년 9월 · 고안 4 — 5년

1281년(고안 4년) 가을, 하키리사네나가는 일족을 동원하여 미노부의 초암 자리에 큰 방을 지었다. 열 칸 사방에 처마를 단 대방이었다. 대성인은 11월 25일 사네나가에게 그 낙성을 알리셨다.

坊は十間四面にまたひさしさしてつくりあげ・二十四日に大師講並びに延年心のごとくつかまつりて

방은 열 칸 사방에 다시 처마를 달아 지어 올리고, 24일에 대사강(大師講)과 연년(延年)의 잔치를 뜻대로 치렀습니다.

「정지어서」, 1375쪽

사네나가는 대성인을 위해 이만큼의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같은 편지에서 대성인은 사네나가가 바란 일일경(一日經)의 서사를 도중에서 멈추게 하셨다. 일일경은 많은 사람이 모여 법화경 한 부를 하루에 베껴 쓰는 공양이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때 공양을 마치겠다」며 미래로 미루셨다. 의례와 옛 관습을 좋아하는 지도의 신앙을 대성인은 알고 계셨다. 닛코상인이 뒷날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에 오노승이 「여법경(如法經) · 일일경을 행한다」는 것을 나무란 것(6부 31절)은 이 일과 이어져 있다.

이 무렵 대성인의 몸은 이미 쇠약해 있었다. 1282년 2월, 대성인은 병든 난조도키미쓰를 위해 「법화증명초」를 쓰시고 닛코상인 앞으로 보내셨다(3부 11절). 그해 9월 8일, 제자들의 강한 권유로 대성인은 히타치의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시기로 하고 아홉 해 사신 미노부를 나서셨다.

「미노부상승서」 — 본문 홍통의 대도사

1282년 9월 · 고안 5년 · 미노부

미노부를 떠나시기에 앞서, 대성인은 닛코상인에게 한 장의 부촉서를 주셨다. 닛코 문류는 이것을 「니치렌 일기 홍법 부촉서(日蓮一期弘法付囑書)」라 부른다.

日蓮一期の弘法、白蓮阿闍梨日興に之を付嘱す、本門弘通の大導師たるべきなり、国主此の法を立てらるれば富士山に本門寺の戒壇を建立せらるべきなり、時を待つべきのみ、事の戒法と云うは是なり、就中我が門弟等此の状を守るべきなり。
弘安五年壬午九 日  日蓮在御判
血脈の次第 日蓮日興

니치렌 한평생의 홍법을 뱌쿠렌아사리 닛코에게 부촉한다. 본문 홍통의 대도사가 되어야 한다. 국주가 이 법을 세우면 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건립해야 한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다. 무엇보다 나의 문제자들은 이 글을 지켜야 한다. 고안 5년 임오 9월 일, 니치렌 재어판. 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

「미노부상승서」, 1600쪽, 2차 확인

이 짧은 글에 닛코 문류의 모든 근거가 들어 있다.

첫째, 「니치렌 일기의 홍법」을 닛코상인에게 부촉하셨다. 한평생 넓히신 법 전체, 곧 세 가지 비법과 그 근본인 대어본존을 닛코상인 한 사람에게 맡기셨다.

둘째, 「본문 홍통의 대도사」로 정하셨다. 본제자 여섯 사람을 정하신 것은 이 뒤의 일이다(22절). 여섯 사람은 함께 법을 넓힐 제자였지만, 법 전체를 맡아 문하를 이끌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셋째, 본문계단의 건립 장소를 후지산으로 정하셨다. 「삼대비법품승사」의 「영산정토와 닮은 가장 뛰어난 땅」이 여기서 「후지산」으로 구체적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두 글은 똑같이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다」로 맺어진다.

넷째, 「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라 적으셨다. 대성인에게서 닛코상인으로 이어지는 혈맥, 곧 유수일인의 상승이다. 닛코 문류의 법통은 이 한 줄에서 시작된다. 닛코상인은 이 혈맥을 1332년 니치모쿠상인에게 전했다(6부 37절).

「사(事)의 계법」이라는 말에도 무게가 있다. 전교대사가 히에이산에 세운 원돈계단은 법화경 적문에 기댄 계단이었고, 이치(理)의 위에서 일념삼천을 보는 상법 시대의 계였다. 대성인의 계단은 본문의 대어본존을 모시고 그 앞에서 남묘호렌게쿄를 받아 지니는 것이 곧 계를 지키는 것이 되는 계단, 현실의 일(事)로 세워지는 말법의 계단이다. 닛코상인이 뒷날 오노승이 히에이산의 계를 받는 것을 「상법 때의 계」라며 물리친 것(6부 31절)은 이 한 줄을 지킨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문제자들은 이 글을 지켜야 한다」는 끝의 말은, 이 부촉이 닛코상인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문하에게 내려진 명이라는 것을 보인다. 이 글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대성인 입멸 뒤의 문하를 가르게 된다.

  1. ① 법 전체의 부촉日蓮一期の弘法、白蓮阿闍梨日興に之を付嘱す1600*니치렌 한평생의 홍법을 뱌쿠렌아사리 닛코에게 부촉한다
  2. ② 문하를 이끌 한 사람本門弘通の大導師たるべきなり1600*본문 홍통의 대도사가 되어야 한다
  3. ③ 계단 건립의 장소 · 때国主此の法を立てらるれば富士山に本門寺の戒壇を建立せらるべきなり、時を待つべきのみ、事の戒法と云うは是なり1600*국주가 이 법을 세우면 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건립해야 한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다
  4. ④ 유수일인의 혈맥血脈の次第 日蓮日興1600*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
「삼대비법품승사」「霊山浄土に似たらん最勝の地を尋ねて戒壇を建立す可き者か時を待つ可きのみ事の戒法と申すは是なり」1022영산정토와 닮은 가장 뛰어난 땅을 찾아 계단을 세워야 할 것이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다「미노부상승서」「富士山に本門寺の戒壇を建立せらるべきなり、時を待つべきのみ、事の戒法と云うは是なり」1600*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건립해야 한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다
* 강의 인용 원문 · 21절
도표 17 · 「미노부상승서」의 네 구절

본제자 여섯 사람 — 1282년 10월 8일

1282년 10월 8일 · 고안 5년 · 무사시 이케가미

9월 18일, 대성인은 무사시국 이케가미의 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집에 닿으셨다. 병은 깊어 더 나아가실 수 없었다. 10월 8일, 대성인은 주요 제자들을 모으시고 본제자(本弟子) 여섯 사람을 정하셨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그 이름을 이렇게 적는다.

一、聖人御在生の時・弟子六人を定むる事、弘安五年十月 日 之を定む
一 日昭 弁阿闍梨 二 日朗 大国阿闍梨 三 日興 白蓮阿闍梨 四 日向 佐渡阿闍梨 五 日頂 伊予阿闍梨 六 日持 蓮華阿闍梨
此の六人の内五人と日興一人と和合せざる由緒条条の事。

하나, 성인께서 살아 계실 때 제자 여섯 사람을 정하신 일. 고안 5년 10월 일에 정하셨다. 첫째 닛쇼 벤아사리, 둘째 니치로 다이코쿠아사리, 셋째 닛코 뱌쿠렌아사리, 넷째 니코 사도아사리, 다섯째 닛초 이요아사리, 여섯째 니치지 렌게아사리. 이 여섯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과 닛코 한 사람이 화합하지 못한 까닭의 조목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1쪽

차례는 입문 순서다. 닛쇼는 1253년 입종 직후에 입문한 가장 오랜 제자였고, 니치로는 1254년, 닛코상인은 1258년, 니코는 1265년 무렵, 닛초는 1267년, 니치지는 1270년에 입문했다. 니치지는 닛코상인의 교화로 입문한 시주쿠원의 후배였다(3부 14절).

닛코 문류는 이 여섯 사람과 한 달 앞의 부촉서를 구별한다. 여섯 본제자는 대성인의 법을 각지에 넓힐 제자로 정해진 것이고, 법 전체와 혈맥을 이을 사람은 「미노부상승서」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여섯 이름을 적자마자 「이 여섯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과 닛코 한 사람이 화합하지 못한 까닭」으로 넘어간다. 그 까닭이 6부의 주제다.

「弘安五年十月 日 之を定む」1601고안 5년 10월 일에 정하셨다

  1. 1日昭닛쇼弁阿闍梨벤아사리입문1253근거가마쿠라입멸1323
  2. 2日朗니치로大国阿闍梨다이코쿠아사리입문1254근거가마쿠라입멸1320
  3. 3日興닛코白蓮阿闍梨뱌쿠렌아사리입문1258근거후지 · 미노부입멸1333
  4. 4日向니코佐渡阿闍梨사도아사리입문1265경근거아와 · 가즈사입멸1314
  5. 5日頂닛초伊予阿闍梨이요아사리입문1267근거시모우사 마마입멸1317경
  6. 6日持니치지蓮華阿闍梨렌게아사리입문1270근거스루가 마쓰노입멸1295 해외로

「此の六人の内五人と日興一人と和合せざる由緒条条の事」1601이 여섯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과 닛코 한 사람이 화합하지 못한 까닭의 조목들

입문 순 · 근거지는 대성인 재세 중 · 22절
도표 18 · 본제자 여섯 사람

이케가미의 10월 13일 —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

1282년 10월 13일 · 고안 5년 · 진시(오전 8시 무렵) · 이케가미

10월 13일, 대성인은 다시 한 장의 부촉서를 쓰셨다. 닛코 문류는 이것을 「미노부산 부촉서(身延山付囑書)」라 부른다. 9월의 부촉서가 법 전체의 부촉(총부촉)이라면, 이것은 미노부산 구원사를 닛코상인에게 맡기는 별부촉이다. 그 글은 석존 오십 년의 설법을 뱌쿠렌아사리 닛코에게 상승한다고 적고, 이렇게 정한다.

10월 중순 아침, 무사시 들판의 낮은 숲 언덕에 판자 울타리와 문을 두른 무사 집이 키 큰 나무 사이로 반쯤 숨어 있고, 아래로 볏단이 선 거둔 논과 느린 강, 들판 서쪽 지평선 위로 후지산이 작고 옅게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8 · 이케가미의 언덕

身延山久遠寺の別当たるべきなり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

「미노부상승서」, 1600쪽, 2차 확인

그리고 이 뜻을 어기는 재가 · 출가의 무리는 법이 아닌 무리(非法の衆)라고 굳게 경계하셨다. 9월의 부촉서와 이 10월의 부촉서를 합쳐 닛코 문류는 「이개상승(二箇相承)」이라 부르며, 화광신문 목록은 1600쪽의 「미노부상승서(총부촉서)」 한 편으로 묶는다.

그날 진시(辰時), 대성인은 이케가미에서 입멸하셨다. 예순한 살이었다. 닛코상인은 사흘 뒤인 10월 16일, 그날의 일을 「종조어천화기록(宗祖御遷化記錄)」에 적었다. 입멸 때 땅이 흔들렸고, 14일 술시에 입관하고 자시에 장례를 치렀다. 장례 행렬에서 이케가미 무네나카는 시조깅고와 함께 깃발을 들었고, 아우 무네나가는 큰칼을 들었으며, 난조도키미쓰는 산화(散花)를 들었다(사료, 강의 인용). 기록에는 여섯 본제자 가운데 니코와 닛초의 이름이 없다. 두 사람은 다른 지방에 가 있어 장례에 오지 못한 듯하다.

두 상승서는 그 뒤 닛코상인의 문류에 전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순푸 시절을 적은 『순푸기(駿府記)』의 1611년 12월 15일 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오늘 밤, 후지 본문사가 지닌 두 상승을 고토 쇼사부로가 보여 드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석존 오십 년의 불법을 니치렌 아사리가 닛코에게 부촉한다 운운(今晩、富士本門寺校割の二箇の相承、後藤少三郎御覧に備う。其の詞に云う。釈尊五十年の仏法、日蓮阿闍梨日興に之を付嘱す云云)」(『순푸기』, 사료, 강의 인용). 두 상승서의 정본은 지금 전하지 않고 사본으로 전한다.

연대 대조 — 「미노부상승서」의 9월 부촉서는 날짜가 「고안 5년 임오 9월 일」로 날이 비어 있다. 대성인이 미노부를 떠나신 9월 8일 무렵으로 본다. 10월의 부촉서는 입멸 당일인 10월 13일로 전한다. 화광신문 목록은 두 글을 「미노부상승서(총부촉서)」 · 61세 · 1282년 · 받는 사람 닛코상인의 한 편으로 적는다.

① 무엇을
일기홍법부촉서 — 총부촉 · 1282.9 · 미노부「日蓮一期の弘法」*니치렌 한평생의 홍법
미노부산부촉서 — 별부촉 · 1282.10.13 · 이케가미석존 오십 년의 설법 · 미노부산
② 누구에게
일기홍법부촉서 — 총부촉 · 1282.9 · 미노부「白蓮阿闍梨日興」*뱌쿠렌아사리 닛코
미노부산부촉서 — 별부촉 · 1282.10.13 · 이케가미뱌쿠렌아사리 닛코
③ 무엇이 되라
일기홍법부촉서 — 총부촉 · 1282.9 · 미노부「本門弘通の大導師たるべきなり」*본문 홍통의 대도사가 되어야 한다
미노부산부촉서 — 별부촉 · 1282.10.13 · 이케가미「身延山久遠寺の別当たるべきなり」*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
④ 무엇을 남기라
일기홍법부촉서 — 총부촉 · 1282.9 · 미노부「富士山に本門寺の戒壇を建立せらるべきなり」*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건립해야 한다
미노부산부촉서 — 별부촉 · 1282.10.13 · 이케가미어기는 자는 「非法の衆」*법이 아닌 무리
⑤ 끝
일기홍법부촉서 — 총부촉 · 1282.9 · 미노부「血脈の次第 日蓮日興」*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
미노부산부촉서 — 별부촉 · 1282.10.13 · 이케가미그날 진시 입멸

두 글을 합쳐 이개상승 · 화광 목록 1600 「미노부상승서(총부촉서)」

* 강의 인용 원문 · 23절
도표 19 · 두 상승서

닛코 문류의 근거는 이 4부에 모인다. 대성인은 1279년 10월 12일 출세의 본회로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을 세우셨고, 두 권의 상전서로 법의 가장 깊은 곳을 닛코상인에게 입으로 전하셨으며, 1282년 9월과 10월 두 장의 부촉서로 법 전체와 미노부산을 닛코상인에게 맡기셨다. 「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 그러므로 닛코 문류는 닛코상인을 대성인의 법을 이은 제2조, 불 · 법 · 승 삼보 가운데 승보(僧寶)로 받든다.

5부 구원사 별당에서 대석사로

유골과 미노부 — 1282년 10월

1282년 10월 말 — 1283년 정월 · 고안 5 — 6년 · 미노부

미노부를 떠나 이케가미에 닿으신 날, 대성인은 하키리사네나가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셨다. 길을 지켜 준 하키리의 젊은이들에게 감사하시고, 병이 깊어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하시며 이렇게 쓰셨다.

日本国にそこばくもてあつかうて候みを九年まで御きえ候いぬる御心ざし申すばかりなく候へばいづくにて死に候ともはかをばみのぶさわにせさせ候べく候

일본국이 그토록 골치 아파하던 이 몸을 아홉 해나 귀의해 주신 뜻은 말로 다할 수 없으니, 어디서 죽든 무덤은 미노부 골짜기에 만들게 하겠습니다.

「하키리전어보」, 1376쪽

그 말씀대로, 10월 말 닛코상인은 대성인의 유골을 모시고 미노부에 들었다. 이케가미에서 도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온 유골 행렬은 미노부로 바로 들지 않고 우에노의 난조도키미쓰 집에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난조도키미쓰 편 5부 30절 · 전승). 대성인 재세 때의 인연을 생각한 닛코상인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으로서 미노부에 머물며 묘소를 지키고 문하를 이끌었다. 일문의 총관수(總貫首)로서였다.

1283년 정월, 대성인의 백일기에 닛코상인은 묘소를 지킬 당번을 정했다. 여섯 본제자와 주요 제자들이 한 달씩 돌아가며 미노부에 올라 묘소를 지키는 「묘소를 지킬 당번표」다(사료, 강의 인용 · 표는 난조도키미쓰 편 도표 31). 정월 닛쇼, 2월 니치로, 9월 닛코, 11월 니코, 4월 닛초, 5월 니치지. 스승의 묘소를 지키는 일은 여섯 사람의 공동의 일로 정해졌다.

오노승의 불참 — 「불법의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1283 — 1285 · 고안 6 — 8년

그러나 당번표는 지켜지지 않았다. 다섯 노승 누구도 제 달에 미노부에 오르지 않았다. 1284년 10월, 대성인의 3회기에도 노승들은 지도의 방법이나 병을 이유로 오지 않았다.

닛코상인은 미마사카보에게 보낸 서장에서 노승들의 핑계를 이렇게 나무랐다.

地頭の不法ならん時は我も住むまじき由御遺言には承り候えども不法の色も見えず候

「지도가 불법을 저지를 때는 나도 머물지 않겠다」는 유언은 들었지만, 지금은 불법의 기색도 보이지 않습니다.

미마사카보 앞 서장, 닛코상인, 사료, 강의 인용

이 서장은 두 가지를 보여 준다. 하나는 대성인이 「지도가 불법을 저지르면 나도 이 산에 머물지 않겠다」는 뜻을 남기셨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때(1284–1285) 하키리사네나가가 아직 닛코상인을 따르며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네나가는 1282년 12월 닛코상인에게 서장을 보내 「경을 청문하는 것도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라 했고, 1285년 2월에는 구원사에 법화경 독송과 법문 담의가 성해진 것을 기뻐하며 「대성인이 다시 미노부에 계신 것 같다」고 썼다(사료, 강의 인용).

다섯 노승이 미노부에 오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대성인 입멸 뒤 막부는 몽골의 세 번째 내습을 두려워하여 여러 절에 이국 항복의 기도를 명했고, 니치렌 문하에게는 명을 따르지 않으면 거처를 부수겠다고 위협했다. 노승들은 이 위협 앞에서 막부에 글을 올려 스스로를 「천태 사문(天台沙門)」이라 적었다(6부 31절). 각자의 근거지를 지키는 일이 미노부의 묘소보다 앞섰다.

니코와 하키리의 네 가지 방법

1285 — 1288 · 고안 8년 — 쇼오 원년

1285년 봄, 여섯 본제자의 하나인 사도아사리 니코가 미노부에 올라왔다. 다른 노승들이 오지 않는 가운데의 일이라 닛코상인은 기뻐하며 그를 학두(學頭)로 삼았다. 니코는 1253년 아와국 나가사군 오가네에서 태어나 열세 살 무렵 대성인의 제자가 되었고, 1276년 스승 도젠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대성인의 명대로 그 무덤 앞에서 「보은초」를 읽었으며, 1280년 대성인의 법화경 강의를 「어강문서」로 엮은 사람이었다(17절).

그러나 학두가 된 니코는 이듬해 1286년 무렵부터 하키리사네나가에게 방법을 너그러이 보는 생각을 불어넣었다. 사네나가는 잇달아 방법을 저질렀다. 닛코 문하의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그것을 네 조목으로 적는다(조목의 원문은 난조도키미쓰 편 6부 32절). 첫째, 석가여래상을 조립 공양하여 본존으로 삼았다. 둘째, 대성인이 아홉 해 동안 금하셨던 신사 참배를 시작하여 니쇼(하코네 · 이즈산)와 미시마에 참배했다. 셋째, 일문의 권진이라 하여 난부 마을 안의 염불 후쿠시 탑을 공양하는 데 보시했다. 넷째, 일문의 불사를 돕는다며 가이국에 구품염불의 도량을 지었다.

네 조목은 모두 대성인이 재세 중에 금하신 것이었다. 니쇼와 미시마는 가마쿠라의 무사들이 해마다 참배하던 하코네 · 이즈산 · 미시마의 신사로, 어가인인 사네나가에게는 무사의 관례였다. 후쿠시 탑과 구품염불의 도량은 일족이 함께하는 불사였다. 사네나가에게 그것은 지도로서, 일족의 우두머리로서 피하기 어려운 의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성인은 신이 떠난 방법의 나라에서 신사에 참배하는 것, 염불의 탑과 도량에 보시하는 것을 방법이라 하셨다. 닛코상인은 그것을 타일렀고, 니코는 허락했다. 지도의 사정을 헤아려 법을 굽힐 것인가, 법을 지켜 지도를 꾸짖을 것인가. 미노부의 갈림은 대성인 입멸 뒤 문하 전체가 막부의 위협 앞에서 겪은 갈림의 축소판이었다.

已上四箇条の謗法を教訓するに日向之を許すと云云、此の義に依つて去る其の年月・彼の波木井入道の子孫と永く以て師弟の義絶し畢んぬ、仍つて御廟に相通ぜざるなり

이상 네 조목의 방법을 타일렀는데, 니코가 이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 까닭으로 지난 그 해 그 달에 저 하키리 입도의 자손과 길이 사제의 의를 끊었다. 그러므로 묘소에 다니지 않는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3쪽

같은 조목의 첫머리는 사네나가를 이렇게 부른다. 「그 묘소의 지도 난부 로쿠로 입도, 법명 니치엔은 닛코가 처음 발심시킨 제자다(彼の御廟の地頭・南部六郎入道法名日円は日興最初発心の弟子なり)」(1602쪽). 닛코상인이 처음 법을 심은 사람이 스승의 묘소의 땅에서 방법을 저질렀다. 첫째 조목, 석가상을 본존으로 세운 일은 다섯 노승 공통의 입장(6부 32절)이 미노부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1. ① 1282.10 말 유골을 모시고 미노부 · 별당身延山久遠寺の別当たるべきなり1600*미노부산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
  2. 사료② 1283.1 묘소 당번표
  3. 사료③ 1284.10 3회기 · 노승 불참 · 미마사카보 앞 서장不法の色も見えず候불법의 기색도 보이지 않습니다
  4. ④ 1285 봄 니코 학두
  1. ⑤ 1286경 네 가지 방법1602–1603
  2. 사료⑥ 1288.12 「하라전 답서」 세 가지 사정
  3. ⑦ 1289 봄 미노부 이산

「已上四箇条の謗法を教訓するに日向之を許すと云云」1603이상 네 조목의 방법을 타일렀는데, 니코가 이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 강의 인용 원문 · 26절
도표 20 · 미노부의 일곱 해 1282–1289

「하라전 답서」와 미노부 이산

1288년 12월 — 1289년 봄 · 쇼오 원 — 2년

닛코상인은 사네나가를 거듭 타일렀다. 1288년 12월, 닛코상인은 하키리 집안의 하라 님에게 긴 서장을 보냈다. 「하라전 답서(原殿御返事)」다. 그 서장에서 닛코상인은 니코를 이렇게 평했다. 「저 민부아사리는 세간의 욕심이 깊고 아첨하는 승려로, 성인의 법문을 세우기는커녕 크게 깨뜨릴 사람이라고 이 두세 해 지켜보아 왔다(彼の民部阿闍梨世間の欲心深くしてへつらい諂曲したる僧、聖人の御法門を立つるまでは思いも寄らず大いに破らんずる仁よと、此の二三年見つめ候いて)」(사료, 강의 인용). 그리고 사네나가의 방법을 「입정안국론」의 정의를 깨뜨린 것, 석존 목상을 처음으로 세운 것, 방법의 보시를 처음으로 베푼 것의 세 가지로 꼽고, 잘못은 그대가 아니라 아첨하는 승려에게 홀린 데 있으니 마음을 돌리라고 간곡히 썼다.

이른 봄, 늦은 눈이 남은 가이의 가파른 산속 — 희게 부서지며 흐르는 후지강 골짜기를 따라 산길이 내려가고, 그 길 위에 아주 작은 뒷모습의 일행이 남쪽으로 줄지어 가며, 골짜기가 열리는 먼 남쪽에 흰 후지산이 보이는 금박 수묵화
그림 9 · 미노부를 내려가는 길

사네나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나는 민부아사리를 스승으로 삼았다(我は民部阿闍梨を師匠にしたる也)」는 답을 보냈다(사료, 강의 인용).

이제 남은 길은 하나였다. 「지도가 불법을 저지를 때는 나도 머물지 않겠다」는 스승의 유언이다. 그러나 미노부는 스승이 「구원사의 별당이 되어야 한다」고 맡기신 땅이었고, 스승의 묘소가 있는 땅이었다. 닛코상인은 그 마음을 「하라전 답서」에 이렇게 적었다.

身延沢を罷り出で候事面目なさ本意なさ申し尽し難く候えども、打ち還し案じ候えば、いずくにても聖人の御義を相継ぎ進らせて、世に立て候わん事こそ詮にて候え

미노부의 골짜기를 떠나는 일은 면목 없고 뜻에 어긋남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거듭 생각해 보면 어디서든 성인의 뜻을 이어받아 세상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요체입니다.

「하라전 답서」, 닛코상인, 사료, 강의 인용

하키리 일족 가운데서도 기요나가(淸長)는 1289년 2월 5일 서장을 올려, 닛코상인이 미노부를 떠나신다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고 맹세했다(사료, 강의 인용). 가마쿠라의 사네나가도 일족 에치젠공에게 닛코상인을 붙잡아 달라는 서장을 보냈다. 그러나 닛코상인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1289년(쇼오 2년) 봄, 닛코상인은 미노부를 떠났다. 마흔네 살이었다. 대성인의 유골, 그리고 대성인이 출세의 본회로 세우신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을 비롯한 모든 중보(重寶)를 모시고서였다. 닛코 문류는 이 이산으로 대성인의 법의 근본이 미노부를 떠나 후지로 옮겨졌다고 본다. 남은 미노부는 니코가 이끌었다. 그 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닛코 문하가 「미노부의 묘소」에 다니지 않는 까닭을 위의 네 조목으로 적었다. 대성인의 유골은 닛코상인이 모시고 나왔으므로, 그 「묘소」는 이름만 남은 것이었다.

오이시가하라 — 1290년 10월 12일

1289년 3월 — 1290년 10월 12일 · 쇼오 2 — 3년 · 우에노

미노부를 내려온 닛코상인은 먼저 외조부 유이 입도가 살던 가와이에 잠시 머물렀다. 그해 3월, 우에노의 지도 난조도키미쓰의 청을 받아 우에노로 옮겼다. 열네 해 전 다카쓰치의 무덤에서 맺은 인연이 여기서 이어졌다(난조도키미쓰 편 6부 33절).

10월 중순, 후지산 서쪽 기슭의 금빛 풀밭 가운데 새로 지은 길고 낮은 불당과 그 둘레의 작은 초가들, 새로 심은 어린 삼나무들, 뒤로 화면을 채우듯 크게 솟은 후지산을 문을 닫은 바깥에서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10 · 오이시가하라의 대방

도키미쓰는 우에노 마을 안의 넓은 들 오이시가하라(大石ヶ原)를 내놓았다. 그해 10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니치모쿠상인 · 닛케 · 닛슈 · 니치젠 · 닛센 등의 문하와, 도키미쓰 · 니타시로노부쓰나 등의 단월이 힘을 모았다. 1290년(쇼오 3년) 10월 12일, 사방 열두 칸의 대방(大坊)이 완성되었다. 불간 · 주지의 거처 · 사무소 · 집회소 · 부엌 등 여섯으로 나뉘어 「여섯 칸 방(六壺)」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니치모쿠상인은 그 동쪽에 렌조보를, 닛케는 자쿠니치보를, 닛슈는 리쿄보를, 닛센은 조렌보를, 니치존은 구조보를 지었다. 이것이 대석사(大石寺)의 시작이다. 땅 이름 오이시가하라에서 절 이름이 나왔다.

대어본존이 세워진 1279년 10월 12일로부터 꼭 열한 해 뒤였다. 닛코 문류는 이날 대석사에 대어본존이 모셔졌다고 전한다. 「미노부상승서」가 「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세우라」고 정한 그 후지산의 서쪽 기슭이었다. 대성인이 「때를 기다릴 뿐」이라 하신 본문계단 건립의 날까지, 닛코 문류는 이곳에서 대어본존을 지키게 되었다.

이때 닛코상인은 마흔다섯 살이었다. 그 뒤로 대석사에는 방이 잇달아 지어져, 도키미쓰가 살아 있는 동안 탑중의 방이 열하나에 이르렀다. 닛코 문류는 닛코상인을 대석사의 「개산(開山)」, 난조도키미쓰를 「개기 단나(開基檀那)」라 부른다.

  1. 1289 봄가이 미노부후지강을 따라 남쪽으로
  2. 스루가 가와이외가 · 잠시 머묾
  3. 1289.3우에노난조도키미쓰의 청
  4. 1289.10 · 1290.10.12오이시가하라착공 · 대방 완성

전승모시고 내려온 것: 대성인의 유골 ·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을 비롯한 중보 — 닛코 문류의 전승

위치는 약도 · 본존 그림 없음 · 28절
도표 21 · 미노부에서 오이시가하라로

닛코 문류는 미노부 이산을 스승의 땅을 버린 일이 아니라 스승의 법을 지킨 일로 본다. 지도가 방법을 저지르면 머물지 않겠다는 것은 대성인의 유언이었고, 「어디서든 성인의 뜻을 이어받아 세상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요체」라는 것이 닛코상인의 결단이었다. 닛코상인이 모시고 내려온 것은 대성인의 유골과 대어본존이었다. 법의 근본은 땅이 아니라 그 법을 바르게 지키는 사람과 함께 움직였다고, 닛코 문류는 이 일을 기억한다.

6부 오모스와 유계

국주 간효 — 「니치렌 성인의 제자 닛코」

1289 — 1330 · 쇼오 2년 — 겐토쿠 2년

대석사를 세운 뒤에도 닛코상인은 스승이 「입정안국론」으로 시작하신 일을 이었다. 국주에게 바른 법을 세우라고 간하는 일, 국주 간효(國主諫曉)다. 닛코상인이 막부와 조정에 올린 신장 가운데 1289년(쇼오 2년) · 1327년(가레키 2년) · 1330년(겐토쿠 2년)의 세 통이 지금 전한다. 신장에서 닛코상인은 스스로를 언제나 「니치렌 성인의 제자」라 적었다. 다섯 노승이 「천태 사문」이라 적은 것과 정반대였다(31절).

닛코상인은 신장에 스승의 글과 몇 가지 자료를 함께 붙였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그 목록을 이렇게 적는다.

一、奏聞状の事。一先師聖人文永五年申状一通。一同八年申状一通。一日興其の年より申状一通。一漢土の仏法先ず以て沙汰の次第之を図す一通。一本朝仏法先ず以て沙汰の次第之を図す一通。一三時弘経の次第並びに本門寺を建つ可き事。一先師の書釈要文一通。

하나, 상주장(上奏狀)의 일. 선사 성인의 분에이 5년 신장 한 통. 같은 분에이 8년 신장 한 통. 닛코가 그 해부터 올린 신장 한 통. 중국의 불법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그린 것 한 통. 일본의 불법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그린 것 한 통. 삼시 홍경의 차례와 본문사를 세워야 할 일. 선사의 글과 해석의 요문 한 통.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8쪽

분에이 5년(1268)의 신장은 몽골 국서가 왔을 때 대성인이 야도야 입도를 통해 호조 도키무네에게 올리신 글이고, 분에이 8년(1271)의 신장은 다쓰노구치 법난의 날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올리신 글이다. 「삼시 홍경의 차례」는 정법 · 상법 · 말법의 세 시대에 각각 어떤 법이 넓혀지는가를 밝힌 것으로, 말법에는 대성인의 독일본문(獨一本門)의 법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보인다. 닛코상인의 간효는 언제나 「본문사를 세워야 할 일」로 끝났다.

닛코상인을 대신하여 실제로 가마쿠라와 교토를 오가며 간효한 사람은 니치모쿠상인이었다. 닛코상인은 「닛코적조조사」에서 니치모쿠상인이 대성인 입멸 뒤 고안 8년(1285)부터 겐토쿠 2년(1330)까지 쉰 해 가깝게 간효한 공을 들어, 「상주(上奏)의 공이 다른 이와 달랐으므로 이렇게 적어 둔다(奏聞の功他に異なるに依って、此くの如く書き置く所なり)」(사료, 강의 인용)고 썼다. 니치모쿠상인의 간효는 수십 번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1. ①선사 성인 분에이 5년 신장1268 · 도키무네
  2. ②분에이 8년 신장1271.9.12 · 헤이노사에몬노조
  3. ③닛코의 신장현존 1289 · 1327 · 1330
  4. ④중국 불법의 차례 그림
  5. ⑤일본 불법의 차례 그림
  6. ⑥「三時弘経の次第並びに本門寺を建つ可き事」삼시 홍경의 차례와 본문사를 세워야 할 일
  7. ⑦선사의 글 · 해석 요문

간효의 사자 니치모쿠상인— 1285–1330 ·「奏聞の功他に異なるに依って」사료상주의 공이 다른 이와 달랐으므로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8쪽 본문 순서 · 29절
도표 22 · 상주장 일곱 가지

오모스 담소 — 1298년

1298 — 1333 · 에이닌 6년 — 쇼쿄 2년 · 스루가 오모스

1298년(에이닌 6년), 닛코상인은 대석사를 니치모쿠상인 등에게 맡기고, 같은 후지 서쪽 기슭의 멀지 않은 마을 오모스로 옮겼다. 오모스의 지도 이시카와 마고사부로 요시타다가 땅을 내어 닛코상인을 맞았다. 요시타다의 어머니는 난조도키미쓰의 누나 묘이치로, 대성인께 정월 공양을 올려 「십자어서」를 받은 「오모스 님의 아내(をもんすどのの女房)」(「십자어서」, 1492쪽)였다. 닛코상인은 오모스에 담소(談所)를 열었다. 문하가 모여 어서와 법문을 배우고 토론하는 학당이다. 닛코상인은 이곳에서 입멸까지 서른다섯 해를 지냈다.

겨울 아침, 후지산 남서쪽 완만한 비탈 마을에 늙은 삼나무와 매화 사이로 나무껍질 지붕의 작은 절 몇 채와 낮은 흙담이 있고, 곁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며 지붕과 들에 눈이 얇게 덮이고 뒤로 희고 큰 후지산이 솟은 금박 수묵화
그림 11 · 오모스의 겨울

같은 해 닛코상인은 대성인이 본제자 여섯 사람을 정하신 예를 따라, 자신의 본제자 여섯 사람을 정했다.

一、聖人の御例に順じ日興六人の弟子を定むる事。……已上の五人は詮ずるに聖人給仕の輩なり、一味和合して異義有るべからざるの旨・議定する所なり。

하나, 성인의 예를 따라 닛코가 여섯 제자를 정한 일. (첫째 니치모쿠, 둘째 닛케, 셋째 닛슈, 넷째 니치젠, 다섯째 닛센 — 성인을 늘 곁에서 모셨다. 여섯째 니치조 — 성인을 뵙지 못했다.) …… 위의 다섯 사람은 결국 성인을 모신 이들이다. 한맛으로 화합하여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의논하여 정한 바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3쪽

「본육(本六)」이라 불리는 이 여섯 사람은 대석사의 대어본존을 모시고 지키는 제자로 정해졌다. 그 맨 앞이 니치모쿠상인이었다. 「한맛으로 화합하여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는, 스승의 여섯 본제자가 갈라진 일을 겪은 닛코상인의 바람이 담겨 있다.

오모스 담소에는 다른 문류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도키조닌의 아들 자쿠센보 닛초(寂仙房日澄)는 처음 니코의 제자였으나, 1300년 니코와 결별하고 닛코상인에게 귀복했다. 니코가 미노부 근처 시모야마의 새 불당에 석가상 한 체를 모셔 개안 공양하는 것을 보고서였다. 닛코상인은 그를 오모스 담소의 첫 학두로 삼았다. 그의 형인 여섯 본제자의 하나 닛초(日頂)도 1302년 시모우사 마마의 홍법사를 떠나 오모스로 와서 닛코상인에게 귀복했다. 니치준은 뒷날 스승 자쿠센보 닛초를 이렇게 기렸다. 「닛초 화상은 곧 닛코상인의 제자로, 모아 상승한 큰 덕이다. 지혜의 눈이 밝아 오천여 권을 두루 알고,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열 종파의 법수를 모두 헤아렸다(日澄和尚は・即日興上人の弟子・類聚相承の大徳なり、慧眼明了にして普く五千余巻を知見し・広学多聞にして悉く十宗の法水を斟酌す)」(「니치준아사리혈맥」, 사료, 강의 인용). 오모스 담소는 이런 학승들이 닛코상인 곁에서 대성인의 어서를 정리하고 다른 문류의 잘못을 따지는 곳이었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1309)와 「오인소파초」(1328)가 모두 이 담소에서 나왔다. 자쿠센보 닛초가 1310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 산미 니치준(三位日順)이 둘째 학두가 되었다. 닛코상인은 1332년, 뒤의 홍통을 맡을 여섯 사람 「신육(新六)」 — 니치다이(日代) · 닛초(日澄) · 니치도(日道) · 니치묘(日妙) · 닛고(日鄕) · 니치조(日助) — 도 오모스에서 정했다(전승).

닛코상인은 이곳에서 대성인의 영상(影像)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여러 문류가 저마다 대성인의 그림과 목상을 만들었으나 얼굴이 모두 달랐다. 닛코상인은 「어영을 그리는 까닭은 뒷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니, 옳든 그르든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御影を図する所詮は後代に知らしめん為なり是に付け非に付け・有りの侭に図し奉る可きなり)」(「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3쪽)고 하였다. 그리고 1313년 니치준이 그린 영상이 다른 것보다 조금 면영이 있으나 닮지는 않았으므로 그 뒷면에 「닮지 않음(不似)」이라 적어 두었다(1604쪽). 대성인을 직접 뵌 사람의 엄밀함이었다.

대석사 — 본육(1298)니치모쿠(상수) · 닛케 · 닛슈 · 니치젠 · 닛센 · 니치조「一味和合して異義有るべからざる」1603한맛으로 화합하여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닛코상인오모스 담소 · 1298–1333
오모스 담소 — 학두자쿠센보 닛초(1302–1310) 산미 니치준
다른 문류에서 귀복자쿠센보 닛초(1300 · 니코 문하에서)닛초(1302 · 마마 홍법사에서)
신육(1332 · 오모스)전승니치다이 · 닛초(日澄) · 니치도 · 니치묘 · 닛고 · 니치조(日助)

단나: 이시카와 마고사부로 요시타다(오모스) · 난조도키미쓰(우에노)

인물 그림 없음 · 30절
도표 23 · 오모스의 문하

연대 대조 — 본육을 정한 해를 1298년(에이닌 6년)으로 보는 것은 후지 문류의 전승이다. 자쿠센보 닛초의 귀복은 1300년(쇼안 2년), 학두 취임은 1302년(겐겐 원년)으로 전한다. 신육은 1332년(겐코 2년)에 정해졌다고 전한다. 신육의 「닛초(日澄)」와 1310년에 세상을 떠난 자쿠센보 닛초의 관계는 C-4에서 확인한다.

오일상대 ① — 「천태 사문」과 「니치렌 성인의 제자」

1285 이후 ·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2장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1309년(엔쿄 2년) 닛코상인의 명을 받아 자쿠센보 닛초가 초안을 잡고, 뒤에 닛코상인이 조목을 더한 글로 전한다. 첫머리는 이렇다.

先ず日蓮聖人の本意は法華本門に於ては曾つて異義有るべからざるの処、其の整足の弟子等忽に異趣を起して法門改変す況や末学等に於ては面面異轍を生ぜり、故に日興の門葉に於ては此の旨を守つて一同に興行せしむべきの状・仍つて之を録す

먼저, 니치렌 성인의 본의가 법화의 본문에 있다는 데에는 일찍이 다른 뜻이 있을 수 없었는데, 그 뛰어난 제자들이 갑자기 다른 뜻을 일으켜 법문을 바꾸었다. 하물며 말학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냈다. 그러므로 닛코의 문하는 이 뜻을 지켜 한결같이 일으켜야 하므로 이를 적는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1쪽

그리고 「다섯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기를(五人一同に云く)」과 「닛코가 말하기를(日興が云く)」을 나란히 놓아 갈림을 조목조목 적는다. 첫째 조목이 가장 근본적인 갈림이다.

一、五人一同に云く、日蓮聖人の法門は天台宗なり、仍つて公所に捧ぐる状に云く天台沙門と云云

하나, 다섯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니치렌 성인의 법문은 천태종이다. 그래서 관청에 올리는 글에 「천태 사문」이라 적었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1쪽

같은 조목은 다섯 노승이 막부에 올린 글의 구절을 두 가지 더 옮긴다. 「또 말하기를, 선사 니치렌 성인은 천태의 남은 흐름을 길어 올렸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간무 성대의 옛 풍속을 부채질하여 전교대사의 남은 흐름을 길어 법화종을 넓히고자 한다고 한다(又云く先師日蓮聖人・天台の余流を汲むと云云、又云く桓武聖代の古風を扇いで伝教大師の余流を汲み法華宗を弘めんと欲す云云)」(1601쪽). 닛쇼는 대성인을 천태대사의 남은 흐름으로, 니코와 닛초는 전교대사의 남은 흐름으로 자리매김했다. 모두 대성인을 히에이산 천태종의 끝자락에 두는 말이었다.

日興が云く、彼の天台・伝教所弘の法華は迹門なり今日蓮聖人の弘宣し給う法華は本門なり、此の旨具に状に載せ畢んぬ、此の相違に依つて五人と日興と堅く以て義絶し畢んぬ

닛코가 말하기를, 저 천태 · 전교가 넓힌 법화는 적문이고, 지금 니치렌 성인이 넓히신 법화는 본문이다. 이 뜻을 상세히 신장에 실었다. 이 차이 때문에 다섯 사람과 닛코는 굳게 의절했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1–1602쪽

다섯 노승은 대성인의 법을 천태종의 한 갈래로 보았다. 막부가 이국 항복의 기도를 명하며 따르지 않으면 거처를 부수겠다고 위협하던 때, 그들은 「천태 사문」이라 적어 기존 불교 안에 몸을 두고 기도에 응했다. 닛코상인은 대성인의 법이 천태의 적문과 전혀 다른 본문의 법이라고 보았다. 대성인의 제자가 천태 사문이라 이름하는 것은 스승을 등지는 일이었다.

같은 장의 나머지 세 조목도 이 뿌리에서 나온다. 다섯 노승은 이세 신궁과 니쇼 · 구마노에 참배했고, 닛코상인은 「방법의 나라는 천신지기와 나라를 지키는 선신이 버리고 떠나 머물지 않으므로 악귀신이 그 국토에 들어와 재난을 일으킨다(謗法の国をば天神地祇並びに其の国を守護するの善神捨離して留らず、故に悪鬼神・其の国土に乱入して災難を致す)」(1602쪽)며 신사 참배를 막았다. 「입정안국론」의 신천상(神天上)의 법문 그대로다. 다섯 노승은 여법경 · 일일경 같은 서사 공양을 행했고, 닛코상인은 「이런 행의는 말법의 수행이 아니다(此くの如き行儀は是れ末法の修行に非ず)」(1602쪽)라고 했다. 다섯 노승은 대성인이 히에이산에서 출가 수계하셨으니 제자들도 히에이산의 계를 받는다고 했고, 닛코상인은 「저 히에이산의 계는 적문이며 상법 때의 계다. 니치렌 성인의 수계는 법화 본문의 계이며 지금 말법의 바른 계다(彼の比叡山の戒は是は迹門なり像法所持の戒なり、日蓮聖人の受戒は法華本門の戒なり今末法所持の正戒なり)」(1602쪽)라고 했다.

① 이름다섯 사람「五人一同に云く、日蓮聖人の法門は天台宗なり…天台沙門」다섯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니치렌 성인의 법문은 천태종이다 … 천태 사문닛코「日興が云く、彼の天台・伝教所弘の法華は迹門なり今日蓮聖人の弘宣し給う法華は本門なり」닛코가 말하기를, 저 천태 · 전교가 넓힌 법화는 적문이고, 지금 니치렌 성인이 넓히신 법화는 본문이다
② 신사다섯 사람「伊勢太神宮と二所と熊野と在在所所に参詣を企て」이세 신궁과 니쇼와 구마노 등 곳곳에 참배하고닛코「謗法の国をば天神地祇並びに其の国を守護するの善神捨離して留らず」방법의 나라는 천신지기와 나라를 지키는 선신이 버리고 떠나 머물지 않는다
③ 수행다섯 사람「如法経を勤行し之を書写し供養す」여법경을 근행하고 이를 베껴 써서 공양한다닛코「此くの如き行儀は是れ末法の修行に非ず」이런 행의는 말법의 수행이 아니다
④ 계다섯 사람「比叡山に於て出家授戒し畢んぬ」히에이산에서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닛코「日蓮聖人の受戒は法華本門の戒なり今末法所持の正戒なり」니치렌 성인의 수계는 법화 본문의 계이며 지금 말법의 바른 계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2장 · 쪽: 1601–1602 · 31절
도표 24 · 오일상대 ① 네 조목

오일상대 ② — 본존과 어서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5 · 6장

갈림은 무엇을 본존으로 삼는가에서 가장 뚜렷했다.

一、五人一同に云く、本尊に於ては釈迦如来を崇め奉る可しとて既に立てたり、随つて弟子檀那等の中にも造立供養の御書之れ在りと云云、而る間・盛に堂舎を造り或は一躰を安置し或は普賢文殊を脇士とす、仍つて聖人御筆本尊に於ては彼の仏像の後面に懸け奉り又は堂舎の廊に之を捨て置く

하나, 다섯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본존은 석가여래를 받들어야 한다며 이미 세웠다. 제자 · 단나에게 불상을 조립 공양한 것을 칭찬하신 어서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투어 불당을 짓고 혹은 석가상 한 체를 모시고, 혹은 보현 · 문수를 협사로 둔다. 그리고 성인이 친필로 쓰신 본존은 그 불상 뒤에 걸거나 불당의 복도에 버려 둔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5쪽

日興が云く、聖人御立の法門に於ては全く絵像・木像の仏・菩薩を以て本尊と為さず、唯御書の意に任せて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本尊と為す可しと即ち御自筆の本尊是なり

닛코가 말하기를, 성인께서 세우신 법문에서는 결코 그림이나 나무로 만든 불 · 보살을 본존으로 삼지 않는다. 오직 어서의 뜻대로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 곧 손수 쓰신 본존이 이것이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6쪽

닛코상인은 대성인이 손수 쓰신 어본존을 「일염부제에 아직 유포되지 않고 정 · 상 · 말에 아직 홍통되지 않은 본존」이라 하여, 자손에게 함부로 물려주지 말고 한곳에 모셔 여섯 사람이 함께 지키며 광선유포의 때까지 깊이 공경하라고 정했다(1606쪽). 다섯 노승 쪽에서는 어본존을 죽은 사람을 덮어 장사 지내는 데 쓰거나 팔아 버리는 자도 있었고,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사이에 많은 어본존이 사라졌다고 이 글은 적는다(1606쪽). 오노승이 석가상을 본존으로 세운 것은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로 우러르지 못하고 석존을 본불로 집착한 데서 나왔다고 닛코 문류는 본다. 하키리사네나가가 미노부에서 석가상을 세운 것(5부 26절)도 같은 뿌리였다.

어서를 대하는 태도도 갈렸다.

彼の五人一同の義に云く、聖人御作の御書釈は之無き者なり、縦令少少之有りと雖も或は在家の人の為に仮字を以て仏法の因縁を粗之を示し、若は俗男俗女の一毫の供養を捧ぐる消息の返札に施主分を書いて愚癡の者を引摂したまえり、而るに日興、聖人の御書と号して之を談じ之を読む、是れ先師の恥辱を顕す云云、故に諸方に散在する処の御筆を或はスキカエシに成し或は火に焼き畢んぬ

저 다섯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성인이 지으신 논서나 주석은 없다. 설령 조금 있다 해도 재가 사람을 위해 가나로 불법의 인연을 대강 보이신 것이거나, 속인 남녀가 터럭만 한 공양을 올린 데 대한 답장에 시주의 몫을 적어 어리석은 이를 이끄신 것이다. 그런데 닛코는 이것을 성인의 어서라 일컬어 강의하고 읽으니 이는 선사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여러 곳에 흩어진 친필을 다시 떠서 종이로 만들거나 불에 태워 버렸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4쪽

닛코상인은 반대로 흩어진 어서를 모으고 베꼈다. 어떤 정본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이 가진 것이 정본인지 사본인지도 하나하나 적었다. 「선시초」에 대해서는 「스루가국 니시야마의 유이 아무개에게 주셨다. 정본은 닛코에게 상 · 중 두 권이 있고 …… 하권은 닛쇼에게 있다(駿河国西山由井某に賜る正本日興に上中二巻之れ在り……下巻に於いては日昭が許に之れ在り)」(1604–1605쪽)고 적었다. 그리고 옮겨 쓴 어서의 제목 위에 「법화본문(法華本門)」 네 자를 얹었다.

一、御筆抄に法華本門の四字を加う、故に御書に之無しと雖も日興今義に従つて之を置く、先例無きに非ざるか

하나, 친필의 글에 「법화본문」 네 자를 더한다. 어서에는 이 네 자가 없지만 닛코가 지금 뜻에 따라 이것을 둔다. 선례가 없지 않을 것이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5쪽

경전의 제목 앞에 「불설(佛說)」 두 자를 얹듯이, 대성인의 글이 천태의 적문이 아니라 본문의 법이라는 것을 제목에서부터 밝힌 것이다. 지금 전하는 「시모야마어소식」의 옛 사본 제목이 「法華本門下山抄」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입정안국론」 · 「개목초」 · 「보은초」 · 「선시초」 · 「시모야마어소식」 · 「관심의 본존초」 · 「법화취요초」 · 「사신오품초」 · 「본존문답초」 · 「창법화제목초」의 열 편을 중요한 글로 골라 그 정본의 소재까지 적었다(1604–1605쪽). 오늘날 「십대부(十大部)」라 불리는 목록은 여기서 나왔다. 대성인의 편지가 칠백 년 넘게 이만큼 남은 데에는 닛코상인의 이 일이 컸다.

① 본존다섯 사람「本尊に於ては釈迦如来を崇め奉る可し」본존은 석가여래를 받들어야 한다· 불상 뒤에 어본존을 걺(1605)닛코「唯御書の意に任せて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本尊と為す可しと即ち御自筆の本尊是なり」(1606)오직 어서의 뜻대로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 곧 손수 쓰신 본존이 이것이다
② 어본존의 취급다섯 사람장사에 덮음 · 팔아 버림 · 형목으로 찍어 줌(1606)닛코「同一所に安置し奉り六人一同に守護し奉る可し」(1606)한곳에 모셔 여섯 사람이 함께 지켜야 한다
③ 어서다섯 사람「スキカエシに成し或は火に焼き畢んぬ」(1604)다시 떠서 종이로 만들거나 불에 태워 버렸다닛코모아 베끼고 열 편을 고름(1604–1605)
닛코상인이 고른 열 편
  1. 1입정안국론
  2. 2개목초
  3. 3보은초
  4. 4선시초
  5. 5시모야마어소식
  6. 6관심의 본존초
  7. 7법화취요초
  8. 8사신오품초
  9. 9본존문답초
  10. 10창법화제목초
본존 그림 · 불상 그림 없음 · 32절
도표 25 · 오일상대 ② — 본존과 어서

오일상대 ③ — 본문사와 계단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7장

마지막 갈림은 대성인이 남기신 본문사(本門寺)와 계단을 어디에 세우느냐였다.

五人一同に云く、彼の天台・伝教は存生に之を用いらるるの間・直に寺塔を立てたもう、所謂大唐の天台山・本朝の比叡山是なり而るに彼の本門寺に於ては先師・何の国・何の所とも之を定め置かれずと

다섯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저 천태 · 전교는 살아서 그 법이 쓰였으므로 곧바로 절과 탑을 세웠다. 이른바 당나라의 천태산과 일본의 히에이산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본문사에 대해서는 선사께서 어느 나라 어느 곳이라고도 정해 두지 않으셨다고 한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7쪽

爰に日興云く、凡そ勝地を撰んで伽藍を建立するは仏法の通例なり、然れば駿河国・富士山は是れ日本第一の名山なり、最も此の砌に於て本門寺を建立すべき由・奏聞し畢んぬ、仍つて広宣流布の時至り国主此の法門を用いらるるの時は必ず富士山に立てらるべきなり

이에 닛코가 말하기를, 무릇 뛰어난 땅을 골라 가람을 세우는 것은 불법의 통례다. 그러므로 스루가국 후지산은 일본 제일의 명산이니, 바로 이곳에 본문사를 세워야 한다고 상주했다. 그러므로 광선유포의 때가 이르러 국주가 이 법문을 쓰실 때는 반드시 후지산에 세워야 한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1607쪽

다섯 노승은 대성인이 장소를 정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닛코상인은 후지산이라 했다. 그 근거는 「미노부상승서」의 「국주가 이 법을 세우면 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건립해야 한다」(4부 21절)였다. 다섯 노승이 이 부촉서를 받지 않았으니 장소를 몰랐던 것이고, 닛코상인은 그것을 받았으니 후지산이라 상주할 수 있었다고 닛코 문류는 본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이어서 왕성(王城)도 후지산에 있어야 한다며 그 까닭으로 「불법은 왕법과 그 근원이 한 몸(仏法は王法と本源躰一なり)」(1607쪽)임을 들고, 「본문사와 왕성이 한곳에 있어야 함은 니치렌 대성인의 본원의 자리(本門寺と王城と一所なるべき由…日蓮大聖人の本願の所なり)」(1607쪽)라고 맺는다. 「삼대비법품승사」의 「왕법이 불법에 그윽이 합하고 불법이 왕법에 합하여」(4부 18절)와 같은 뜻이다.

대석사와 오모스는 모두 후지산의 서쪽 기슭에 있다. 닛코상인은 그 땅에서 「때를 기다릴 뿐」이라는 스승의 말씀대로 대어본존을 지키며 본문사 건립의 날을 기다렸다.

「삼대비법품승사」 1281「霊山浄土に似たらん最勝の地を尋ねて戒壇を建立す可き者か時を待つ可きのみ」1022영산정토와 닮은 가장 뛰어난 땅을 찾아 계단을 세워야 할 것이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미노부상승서」 1282.9「国主此の法を立てらるれば富士山に本門寺の戒壇を建立せらるべきなり」1600*국주가 이 법을 세우면 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건립해야 한다
다섯 노승「先師・何の国・何の所とも之を定め置かれず」1607선사께서 어느 나라 어느 곳이라고도 정해 두지 않으셨다
닛코상인「広宣流布の時至り国主此の法門を用いらるるの時は必ず富士山に立てらるべきなり」1607광선유포의 때가 이르러 국주가 이 법문을 쓰실 때는 반드시 후지산에 세워야 한다

후지산 · 대석사 · 오모스

* 강의 인용 원문 · 위치는 약도 · 33절
도표 26 · 본문사는 어디에

「오인소파초」 — 묘소의 물과 법의 물

1328년 7월 · 가레키 3년 · 오모스

성립

닛코상인이 미노부를 떠난 뒤, 미노부의 니코 문하를 비롯한 다른 문류는 닛코상인을 비난했다. 스승의 묘소를 버리고 떠났으며, 묘소에 참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비난에 답하고 오일상대를 다시 정리한 글이 「오인소파초(五人所破抄)」다. 닛코상인의 명으로 자쿠센보 닛초가 초안을 잡다가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산미 니치준이 완성하여 닛코상인의 인가를 받았다고 전한다. 글 끝에는 「가력삼 무진년 칠월 초안함 니치준」이라 적혀 있다(「오인소파초」, 한국어판). 화광신문 목록은 그 다른 이름을 「육인입의초안(六人立義草案)」이라 적는다. 여섯 본제자의 입의를 견주어 적은 초안이라는 뜻이다.

글은 먼저 대성인이 입멸하실 때 「오자를 소계하기 위하여 육인의 유제를 정하시었다」고 하고 여섯 사람의 이름을 든 다음, 다섯 노승이 막부에 올린 신장과 닛코상인이 조정과 막부에 올린 신장을 나란히 옮긴다. 그리고 다섯 노승의 주장 하나하나에 「닛코 가로되」로 답한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가 갈림의 목록이라면, 「오인소파초」는 갈림의 논증이다.

신장과 신장 — 「천태의 사문」과 「상행보살의 재탄」

다섯 노승의 신장은 하나같이 스스로를 천태종의 사문이라 적었다.

천태의 사문 닛쇼 삼가 진언함. 선사니치렌은 황송하게도 법화의 행자로 되어 오로지 불과의 직도를 나타내고, 천태의 여류를 취하여 지려의 연정을 다하였다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니치로는 「천태사문 니치로 삼가 진언함」이라 적고 「그 일승묘전을 상전하여 영구히 국가를 기원해 드림」이라 했고, 니코와 닛초는 「천태법화종의 사문 니코 · 닛초 삼가 진언함」이라 적고 「간무성대의 고풍을 일으키고 전교대사의 여류를 취하여」라 했다(「오인소파초」, 한국어판). 대성인을 천태의 남은 흐름에 두고, 그 법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것이다.

닛코상인의 신장은 첫 줄부터 달랐다.

日蓮聖人は忝くも上行菩薩の再誕にして本門弘経の大権なり

니치렌성인은 황공하게도 상행보살의 재탄으로서 본문홍경의 대권이니라.

「오인소파초」, 1611쪽, 2차 확인 · 풀이는 한국어판

신장은 정법 · 상법 · 말법의 세 시대에 각각 넓혀진 법을 차례로 들고, 「지금 말법에 들어와서는 상행출세의 경 본문유포의 시이니라」라 한 뒤, 천태 · 전교는 약왕의 후신이고 대성인은 상행의 재탄이라고 맺는다. 그리고 다섯 노승을 이렇게 꾸짖는다.

본과 적은 이미 수화와 같은 차별이 있고 시와 기는 또한 천지와 같은데, 어찌 지용의 보살을 가리켜 일시라도 천태의 말제라고 칭하겠느뇨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다섯 노승이 신장에서 약속한 나라를 위한 기도에 대해서도 닛코상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찌 참성 도문의 원적과 함께 앉아서, 영원히 천장지구의 소원을 기도하랴, 황차 삼재는 더욱더 일어나고 일분도 증험이 없으며, 다만 조사의 본회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면목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느니라」(「오인소파초」, 한국어판). 막부의 이국 항복 기도에 응하는 것(5부 25절)은 방법의 승려들과 한자리에 앉는 일이었다.

가나 편지와 후지산

다섯 노승은 닛코상인이 대성인의 가나 편지를 어서로 받드는 것과 후지에 머무는 것을 함께 비웃었다.

졸렬하도다. 존고한 태령을 깔보고 벽촌의 부산을 숭상하며 명정한 지관을 제쳐 놓고 가나문자의 소식을 고집하다니, 참으로 이는 우치를 일신에 초래하고 치욕을 선사에게 미치게 하는 자로다 …… 만약 성인의 제작이라 칭하며 후대에 전하려고 원하면 마땅히 비천한 왜언을 고쳐서 한자를 사용할지어다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히에이산을 「존고한 태령」이라 받들고 후지를 「벽촌」이라 낮춘 것이다. 닛코상인은 먼저 후지라는 땅의 이름으로 답했다. 「후지는 군의 이름이고 즉 다이니치렌게산이라고 칭함이니 이로써 아느니라, 선사와 자연의 명호와 묘호렌게의 경제와 산주가 공히 상응하니 홍통은 이 땅에 있도다」(「오인소파초」, 한국어판). 천태가 천태산을 골라 적문을 세웠듯이, 대성인은 「염부제일의 부산」을 골라 본문을 넓히려 하셨다는 것이다(6부 33절의 본문사와 같은 뜻).

가나 편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본조의 성어도 광선의 날에는 또한 가나문자를 역해서 범진에 통할 것이라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인도의 범어 경전이 한문으로 옮겨져 중국과 일본에 전해졌듯이, 광선유포의 날에는 대성인이 일본의 가나로 쓰신 말씀이 거꾸로 인도와 중국의 말로 옮겨져 퍼질 것이라는 것이다. 대성인이 가나로 쓰신 것은 말법의 범부를 이끄시는 뛰어난 방편이었고, 그것을 한문으로 고치라는 것은 스승의 뜻을 바꾸는 일이었다. 닛코상인이 흩어진 가나 편지를 모으고 베낀 일(6부 32절)의 근거가 여기 있다.

석가상과 대만다라

다섯 노승은 석가상을 본존으로 세우는 근거로 대성인이 몸에 지니셨던 석가상을 들었다. 「선사가 소지한 석존은 황송하게도 홍장유배의 옛날 이를 새기어 홍안 귀적하시던 날도 수신하셨으니 어찌 경솔히 말할 수 있으리요」(「오인소파초」, 한국어판). 이즈 유배 때 얻으신 석가상을 입멸하실 때까지 곁에 두셨다는 것이다.

닛코상인은 이렇게 답했다.

一躰の形像豈頭陀の応身に非ずや

이밖의 일체의 형상은 어찌 두타의 응신이 아니겠느뇨.

「오인소파초」, 1614쪽, 2차 확인 · 풀이는 한국어판

도현하신 바의 본존은 또한 정상이천년동안 일염부제내에 미증유의 대만다라이니라, 지금에 있어서는 적화의 교주는 이미 익이 없으니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부처의 모습은 거느린 협사로 가려진다. 가섭 · 아난을 거느린 부처는 소승의 교주이고, 보현 · 문수를 거느린 부처는 가야에서 처음 성불한 적문의 부처다. 협사 없는 석가상 한 체는 고행하던 응신의 석존일 뿐이다. 대성인이 「그려 나타내신」 본존은 정법 · 상법 이천 년 동안 일찍이 없던 대만다라이고, 말법에는 적문의 교주로는 이익이 없다. 닛코상인은 끝으로 「집착하는 자들 또한 굳이 귀의하려고 원한다면, 모름지기 사보살을 가할 것이며 결코 일불을 쓰지 말지어다」(「오인소파초」, 한국어판)라고 덧붙였다. 대성인이 몸에 지니신 석가상은 한때의 일이었다는 것이다(「계자일단의 총애 · 달을 기다리는 편시의 형광」).

신사 · 수행 · 계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어찌 선신 · 성인의 서원에 배반하여 새삼스러이 악귀난입의 사단에 참예하겠느뇨」(「오인소파초」, 한국어판)라고 했다. 여법경 · 일일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었다.

如法・一日の両経は法華の真文為りと雖も正像転時の往古・平等摂受の修行なり、今末法の代を迎えて折伏の相を論ずれば一部読誦を専とせず但五字の題目を唱え三類の強敵を受くと雖も諸師の邪義を責む可き者か

여법 · 일일의 양경은 법화의 진문이라 할지라도, 정상전시의 왕고 · 평등섭수의 수행이니라, 지금 말법의 대를 맞아 절복의 상을 논하면 일부독송을 주로 하지 않고, 다만 오자의 제목을 불러 삼류의 강적을 받을지라도, 제사의 사의를 책해야 하는 것이니라.

「오인소파초」, 1614쪽, 2차 확인 · 풀이는 한국어판

대성인이 하키리사네나가의 일일경을 도중에 멈추게 하신 일(4부 20절)이 여기서 원리로 정리된다. 계에 대해서는 「이전적문의 시라를 논한다면 오로지 제금할지어다. 법화본문의 대계에 있어서는 어찌 또 의용하지 않겠느뇨」(「오인소파초」, 한국어판)라고 했다. 히에이산의 적문의 계는 막고, 본문의 대계를 쓴다는 것이다(4부 21절).

묘소의 물과 법의 물

미노부의 무리는 이렇게 비난했다. 「후지의 중과는 오로지 당소의 이산에 있으니, 설령 지두 비례를 할지라도 선사의 유적을 소중히 해야 하느니라, 이미 묘소에는 참예치 않으니, 어찌하여 향배의 죄과를 벗어날 수 있겠느뇨」(「오인소파초」, 한국어판). 지도가 잘못을 저질러도 스승의 자취가 있는 땅을 지켜야 했다는 것이다.

닛코상인은 이것을 「전도의 지극」이라 하며 먼저 미노부의 내력을 되짚었다.

대저 미노부흥륭의 원유는 성인어좌의 존귀에 의하고 지두발심의 근원은 닛코교화의 역용이 아니겠느뇨, 그러함을 지금 하종결연의 최초를 잊고 열위승견의 벽안을 일으켜 사제유무의 신의를 세워 이비현연의 쟁론을 함이라, 실로 이는 잎을 따서 그 뿌리를 마르게 하고, 흐름을 취하면서 아직 그 근원을 모르는 까닭이니라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백육개초」 끝의 「延山地頭発心の根元は日興教化の力用なり」(2부 8절)와 같은 말이다. 미노부가 귀한 것은 대성인이 계셨기 때문이고, 그 지도가 발심한 것은 닛코상인의 교화 때문이었다. 그 근원을 잊고 지도 편에 서서 닛코상인을 탓하는 것은 잎을 따면서 뿌리를 말리는 일이었다. 닛코상인은 이어서 대성인이 스승 전교의 뜻을 어긴 자각을 꾸짖으신 일, 하치만 대보살이 방법의 나라를 버리겠다고 서원한 일을 들어, 사람이나 땅이 아니라 법이 기준임을 보이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日興が云く、……身延一沢の余流未だ法水の清濁を分たず強いて御廟の参否を論ぜば汝等将に砕身の舎利を信ぜんとす何ぞ法華の持者と号せんや

대저 미노부이치노사와의 여류는 아직 법수의 청탁을 가리지 않고 굳이 묘의 참부를 논한다면 그대들은 바야흐로 쇄신의 사리를 믿으려 함이니 어찌 법화의 지자라 하겠느뇨.

「오인소파초」, 1615쪽, 2차 확인 · 풀이는 한국어판

그 바로 앞에는 「선신성인의 거처는 즉 정직정법의 정상이니라」(「오인소파초」, 한국어판)라는 말이 있다. 선신과 성인은 정직한 사람, 바른 법을 지니는 사람의 정수리에 머문다. 묘소의 땅이 아니라 법의 물이 맑은가 흐린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대성인의 유골은 닛코상인이 모시고 나왔으니(5부 27절) 미노부의 묘소는 이름뿐이었고,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방법에 물든 땅에서 대성인의 법이 흘러갈 수 없었다. 닛코 문류는 이 「법수의 청탁」이라는 말로 미노부 이산의 뜻을 요약한다.

닛코상인은 이 답을 이렇게 맺었다. 천태대사에게 삼천여 제자가 있었으나 장안 한 사람만 그 법을 통달했고, 전교대사에게 삼천 무리가 있었으나 기신 뒤로는 없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지금 니치렌성인은 만년구호를 위해 육인의 상수를 정했다고 하나 법문은 이미 이도로 나뉘어지고 문도 역시 일준치 못함이라」(「오인소파초」, 한국어판). 여섯 사람이 정해졌어도 법을 바르게 전지한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닛코 문류의 결론이다.

덴모쿠와 방편품

글의 끝에는 다섯 노승과 다른 갈래의 비난도 실려 있다. 한때 닛코상인과 문답하여 굴복했던 덴모쿠(天目)가, 적문을 깨뜨리면서 법화경 적문의 방편품을 읽는 것은 제 말을 어기는 것이라고 따진 것이다. 닛코상인은 방편품을 읽는 뜻을 두 가지로 밝혔다.

一에는 소파를 위함이요, 二에는 문증을 빌린 것이니라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하나는 적문을 깨뜨리기 위해 읽는 것(소파 所破)이고, 다른 하나는 적문의 글을 빌려 본문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차문 借文)이다. 닛코 문류의 근행에서 방편품과 수량품을 읽는 뜻이 여기서 정해졌다. 닛코상인은 「이러한 심의는 성인의 높은 뜻으로서 천지의 미치는 바가 아니로다」라고 맺었다(「오인소파초」, 한국어판).

사료 노트 — 「오인소파초」의 일본어 원문은 이번에도 本文 자료가 없어, 다른 어서의 강의에 인용된 네 구절(1611 · 1614 · 1615쪽)만 일본어로 싣고 2차 확인으로 표시했다. 나머지 인용은 사용자가 첨부한 한국어판(어서 1610쪽~)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한자 병기는 덜어냄). 한국어판 끝의 「가력삼 무진년 칠월 초안함 니치준」으로 성립 연대와 지은이(니치준 · 1328년 7월)를 확인했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강의 첫머리는 같은 경위를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에 대해 적고 있으나, 이것은 「오인소파초」의 경위다.

가력 3년(1328) 7월 · 니치준 초안 · 다른 이름 「육인입의초안」

① 신장의 이름다섯 사람 · 미노부의 무리「천태의 사문 닛쇼」 · 「천태사문 니치로」 · 「천태법화종의 사문 니코 · 닛초」닛코 가로되「日蓮聖人は忝くも上行菩薩の再誕にして本門弘経の大権なり」1611*니치렌성인은 황공하게도 상행보살의 재탄으로서 본문홍경의 대권이니라
② 기도다섯 사람 · 미노부의 무리국가를 기원해 드림닛코 가로되「어찌 참성 도문의 원적과 함께 앉아서」
③ 문자다섯 사람 · 미노부의 무리「비천한 왜언을 고쳐서 한자를 사용할지어다」닛코 가로되「광선의 날에는 또한 가나문자를 역해서 범진에 통할 것이라」
④ 땅다섯 사람 · 미노부의 무리「벽촌의 부산」닛코 가로되「후지는 … 다이니치렌게산」
⑤ 본존다섯 사람 · 미노부의 무리「선사가 소지한 석존」닛코 가로되「一躰の形像豈頭陀の応身に非ずや」1614*일체의 형상은 어찌 두타의 응신이 아니겠느뇨 · 「미증유의 대만다라」
⑥ 수행다섯 사람 · 미노부의 무리여법경 · 일일경닛코 가로되「但五字の題目を唱え」1614*다만 오자의 제목을 불러
⑦ 묘소다섯 사람 · 미노부의 무리「이미 묘소에는 참예치 않으니」닛코 가로되「身延一沢の余流未だ法水の清濁を分たず」1615*미노부이치노사와의 여류는 아직 법수의 청탁을 가리지 않고

「법문은 이미 이도로 나뉘어지고 문도 역시 일준치 못함이라」

* 강의 인용 원문 · 한국어 문장은 「오인소파초」 한국어판 · 34절
도표 27 · 「오인소파초」의 갈림

닛코 문류와 다섯 문류

1282 이후 · 여섯 본제자의 그 뒤

대성인 입멸 뒤 여섯 본제자는 저마다 근거지에서 문류를 이루었다. 닛코 문하의 기록이 전하는 그 뒤의 모습은 이렇다.

여섯 본제자는 아니지만 시모우사의 도키조닌은 자신의 집을 절로 바꾸고 스스로 본존을 써서 주며 닛코상인에게서 떨어져, 뒷날의 나카야마 문류의 바탕을 이루었다.

닛코 문류와 다른 문류의 갈림을 한 줄로 줄이면, 대성인을 누구로 보느냐의 차이다. 다른 문류는 대성인을 석존의 법화경을 넓힌 상행보살의 재래 · 법화경의 행자로 보았고, 그래서 석존을 본존으로 세우고, 법화경의 본문과 적문을 하나로 보며(본적일치 本迹一致), 천태의 흐름 안에 대성인을 두었다. 닛코 문류는 대성인을 외용(外用)으로는 상행보살이시되 내증(內證)으로는 구원원초의 자수용보신, 곧 말법의 본불(本佛)로 우러렀고, 그래서 대성인이 쓰신 어본존을 본존으로 세우고, 본문과 적문의 승렬을 가르며(본적승렬 本迹勝劣) 다시 그 본문의 문상과 문저를 가려 문저의 하종의 법을 근본으로 삼았다(종탈상대, 4부 19절). 「닛코유계치문」은 이 갈림을 이렇게 적는다. 「거짓 글을 만들어 어서라 일컬으며 본적일치의 수행을 하는 자는 사자 몸속의 벌레라고 알아야 한다(偽書を造つて御書と号し本迹一致の修行を致す者は師子身中の虫と心得可き事)」(「닛코유계치문」, 1617쪽).

오노승의 흐름을 잇는 여러 문류는 그 뒤 여러 갈래로 나뉘고 합치기를 거듭했으며, 근대에 들어 그 많은 절이 니치렌종(일련종)이라는 하나의 종단으로 묶였다. 후지산 기슭의 닛코 문류는 대석사를 중심으로 그와 다른 길을 걸었다.

닛쇼
근거지가마쿠라 묘호케사
그 뒤(닛코 문류의 기록)「천태 사문」
입멸1323
니치로
근거지가마쿠라 히키가야쓰 · 이케가미
그 뒤(닛코 문류의 기록)「천태 사문」 · 문하 니치조(日像) 교토로
입멸1320
닛코
근거지미노부 → 대석사 → 오모스
그 뒤(닛코 문류의 기록)「니치렌 성인의 제자」 · 본육 · 신육
입멸1333
니코
근거지미노부
그 뒤(닛코 문류의 기록)하키리의 방법을 허락 · 1313 니치신에게
입멸1314
닛초(日頂)
근거지시모우사 마마
그 뒤(닛코 문류의 기록)1302 오모스로 귀복
입멸1317경
니치지
근거지스루가 마쓰노
그 뒤(닛코 문류의 기록)1295 해외로
입멸미상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강의 등 닛코 문류 쪽 기록에 따름 · 35절
도표 28 · 여섯 본제자의 그 뒤
① 대성인은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상행보살의 재래 · 법화경의 행자
닛코 문류외용 상행보살 · 내증 구원원초 자수용보신 = 말법의 본불
② 본존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석가여래상(협사 보현 · 문수)
닛코 문류대성인 친필의 어본존 ·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③ 법화경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본적일치
닛코 문류본적승렬 · 종탈상대
④ 천태와의 관계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천태 사문」
닛코 문류「니치렌 성인의 제자」
⑤ 신사 참배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허락
닛코 문류금함
⑥ 어서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가나 편지를 낮춤 · 떠서 다시 씀
닛코 문류모아 베낌 · 십대부
⑦ 본문사 · 계단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장소를 정하지 않으셨다
닛코 문류후지산
⑧ 가나 편지
다섯 문류 — 닛코 문류의 기록에 따른 정리「비천한 왜언을 고쳐서 한자를 사용할지어다」
닛코 문류「광선의 날에는 또한 가나문자를 역해서 범진에 통할 것이라」

「偽書を造つて御書と号し本迹一致の修行を致す者は師子身中の虫と心得可き事」1617거짓 글을 만들어 어서라 일컬으며 본적일치의 수행을 하는 자는 사자 몸속의 벌레라고 알아야 한다

불상 그림 없음 · 35절
도표 29 · 두 갈래의 대성인관

「닛코유계치문」 — 스물여섯 조목

1333년 정월 13일 · 겐코 3년 · 오모스

입멸 스무닷새 전인 1333년(겐코 3년) 정월 13일, 여든여덟 살의 닛코상인은 문하가 지켜야 할 스물여섯 조목을 적었다. 「닛코유계치문(日興遺誡置文)」이다. 정본은 전하지 않고 몇 개의 사본으로 전한다.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夫れ以みれば末法弘通の恵日は極悪謗法の闇を照し久遠寿量の妙風は伽耶始成の権門を吹き払う

생각건대, 말법에 넓혀지는 지혜의 해는 극악한 방법의 어둠을 비추고, 구원 수량의 묘한 바람은 가야에서 비로소 성불했다고 하는 권교의 문을 불어 흩는다.

「닛코유계치문」, 1617쪽

그리고 「후학을 위하여 조목을 붓끝에 물들이는 것은 오로지 광선유포의 금언을 우러르기 위함(後学の為に条目を筆端に染むる事、偏に広宣流布の金言を仰がんが為なり)」(1617쪽)이라고 그 뜻을 밝힌다. 스물여섯 조목 가운데 열 조목을 원문으로 싣고, 나머지는 아래 요약표에 둔다.

一、富士の立義聊も先師の御弘通に違せざる事。一、五人の立義一一に先師の御弘通に違する事。

하나, 후지의 입의는 조금도 선사의 홍통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나, 다섯 사람의 입의는 하나하나 선사의 홍통에 어긋난다.

「닛코유계치문」, 1617쪽

첫 두 조목이 스물여섯 조목 전체의 바탕이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와 「오인소파초」가 적은 오일상대를 닛코상인은 마지막에 이 두 줄로 맺었다.

一、偽書を造つて御書と号し本迹一致の修行を致す者は師子身中の虫と心得可き事。

하나, 거짓 글을 만들어 어서라 일컬으며 본적일치의 수행을 하는 자는 사자 몸속의 벌레라고 알아야 한다.

「닛코유계치문」, 1617쪽

一、檀那の社参物詣を禁ず可し、何に況んや其の器にして一見と称して謗法を致せる悪鬼乱入の寺社に詣ず可けんや、返す返すも口惜しき次第なり、是れ全く己義に非ず経文御抄等に任す云云。

하나, 단나의 신사 참배와 절 참배를 금해야 한다. 하물며 승려의 몸으로 구경이라 하며 방법을 저지른, 악귀가 들어간 절과 신사에 가서야 되겠는가. 거듭거듭 원통한 일이다. 이것은 결코 내 생각이 아니라 경문과 어서에 따른 것이다.

「닛코유계치문」, 1617쪽

이 조목에는 하키리사네나가의 신사 참배(5부 26절)가 비친다. 「거듭거듭 원통한 일」이라는 말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기에 나온 말이다.

一、当門流に於ては御書を心肝に染め極理を師伝して若し間有らば台家を聞く可き事。

하나, 이 문류에서는 어서를 마음에 깊이 물들이고 지극한 이치를 스승에게서 전해 받은 뒤에, 만일 틈이 있으면 천태의 법문을 들어야 한다.

「닛코유계치문」, 1618쪽

천태는 여기서 대성인의 법을 다 배운 뒤의 일로 놓인다. 「천태 사문」이라 이름한 다섯 노승과의 차이가 공부의 순서로 정해졌다.

一、未だ広宣流布せざる間は身命を捨て随力弘通を致す可き事。

하나, 아직 광선유포되지 않은 동안에는 목숨을 버리고 힘닿는 대로 홍통해야 한다.

「닛코유계치문」, 1618쪽

一、身軽法重の行者に於ては下劣の法師為りと雖も当如敬仏の道理に任せて信敬を致す可き事。

하나, 몸은 가볍고 법은 무겁다고 여기는 행자는 비록 낮은 법사라도 「마땅히 부처를 공경하듯 하라」는 도리대로 믿고 공경해야 한다.

「닛코유계치문」, 1618쪽

一、時の貫首為りと雖も仏法に相違して己義を構えば之を用う可からざる事。一、衆議為りと雖も仏法に相違有らば貫首之を摧く可き事。

하나, 그때의 관수라 하더라도 불법에 어긋나 제멋대로의 뜻을 세우면 이를 쓰지 말아야 한다. 하나, 대중의 의논이라 하더라도 불법에 어긋남이 있으면 관수가 이를 꺾어야 한다.

「닛코유계치문」, 1618쪽

두 조목은 한 쌍이다. 한 사람의 판단이든 여럿의 판단이든, 그 판단이 불법에 맞는가가 기준이다. 사람이 아니라 법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이 원칙은 대성인 입멸 뒤 본제자들이 갈라지는 것을 지켜본 닛코상인이 남긴 것이다.

一、謗法と同座す可からず与同罪を恐る可き事。

하나, 방법과 자리를 함께하지 말고, 같은 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닛코유계치문」, 1618–1619쪽

맺음말은 엄하다.

右の条目大略此くの如し、万年救護の為に二十六箇条を置く後代の学侶敢て疑惑を生ずる事勿れ、此の内一箇条に於ても犯す者は日興が末流に有る可からず

위의 조목은 대략 이와 같다. 만년 구호를 위하여 스물여섯 조목을 둔다. 후대의 학승은 감히 의혹을 내지 말라. 이 가운데 한 조목이라도 어기는 자는 닛코의 말류가 아니다.

「닛코유계치문」, 1619쪽

「만년 구호(萬年救護)」. 「백육개초」에서 대성인이 닛코상인을 「만년 구호를 위하여 병의 물을 옮겨 담은 제자」라 부르신 바로 그 말이다(4부 19절). 스승에게서 받은 말을, 닛코상인은 마지막 글에서 제자들에게 돌려주었다.

번호요지원문
1후지의 입의는 선사에 어긋나지 않음이 페이지에 원문
2다섯 사람의 입의는 선사에 어긋남이 페이지에 원문
3어서를 거짓 글이라 하는 악승을 가까이하지 말 것
4거짓 어서로 본적일치를 행하는 자는 사자 몸속의 벌레이 페이지에 원문
5방법을 꾸짖지 않고 놀이 · 잡담 · 바깥 책 · 와카에 빠지지 말 것
6단나의 신사 · 절 참배를 금함이 페이지에 원문
7재능 있는 제자는 잡무를 면하고 어서 등을 배우게 할 것
8학문이 덜 되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자는 말류가 아님
9권실을 모르는 동안은 본사에 와서 배울 것
10대성인의 의도(義道)를 익히기 전에 천태를 배우지 말 것
11어서를 마음에 물들이고 극리를 사전한 뒤 틈이 있으면 천태이 페이지에 원문
12논의 · 강설을 좋아하고 다른 것을 섞지 말 것
13광선유포 전까지 목숨을 버리고 힘닿는 대로 홍통이 페이지에 원문
14신경법중의 행자는 낮은 법사라도 부처처럼 공경이 페이지에 원문
15홍통하는 법사는 아랫사람이라도 노승처럼 여길 것
16나보다 지혜가 나은 이는 스승으로 우러를 것
17관수라도 불법에 어긋난 기의는 쓰지 말 것이 페이지에 원문
18대중의 의논이라도 불법에 어긋나면 관수가 꺾을 것이 페이지에 원문
19법의를 검게 물들이지 말 것
20직철(直綴)을 입지 말 것
21방법과 자리를 함께하지 말 것이 페이지에 원문
22방법의 공양을 받지 말 것
23불법 수호를 위한 칼과 몽둥이는 허락(출사 때는 차지 않음)
24젊은 승려라도 지위 높은 단나보다 아랫자리에 앉지 말 것
25선사처럼 성승(聖僧)의 행의를 지킬 것(단서 조항 있음)
26어려운 문답에 능한 행자를 선사처럼 칭찬할 것

「此の内一箇条に於ても犯す者は日興が末流に有る可からず」1619이 가운데 한 조목이라도 어기는 자는 닛코의 말류가 아니다1333.1.13

니치모쿠상인에게 — 그리고 1333년 2월 7일

1332년 11월 — 1333년 2월 7일 · 겐코 2 — 3년 · 오모스

1332년(겐코 2년) 11월, 닛코상인은 자신의 뒤를 니치모쿠상인에게 맡기는 글을 썼다. 「닛코적조조사(日興跡條條事)」다. 3부 13절에서 본 니치모쿠상인에 대한 찬사가 이 글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日興が身に充て給わる所の弘安二年の大御本尊弘安五年御下文、日目に之を授与す

닛코의 몸에 주어진 고안 2년의 대어본존과 고안 5년의 하문(御下文)을 니치모쿠에게 준다.

「닛코적조조사」, 닛코상인, 사료, 강의 인용

「고안 2년의 대어본존」은 1279년 10월 12일의 본문계단 대어본존이고, 닛코 문류는 「고안 5년의 하문(御下文)」을 1282년 대성인이 닛코상인에게 내리신 상승의 글로 받든다. 대성인에게서 닛코상인이 받은 두 가지, 법의 근본인 대어본존과 혈맥의 증표인 상승서가 이 글로 니치모쿠상인에게 넘어갔다. 「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는 여기서 「닛코 · 니치모쿠」로 이어졌다. 닛코 문류는 니치모쿠상인을 제3조로 받든다.

이듬해 정월 13일 「닛코유계치문」을 남기고, 1333년(쇼쿄 2년 · 겐코 3년) 2월 7일, 닛코상인은 오모스에서 입멸했다. 여든여덟 살이었다. 열세 살에 짓소사에서 대성인의 제자가 된 지 일흔다섯 해, 대성인을 여읜 지 쉰한 해째였다.

같은 해 가을, 일흔네 살의 니치모쿠상인은 니치존 · 닛고와 함께 천황에게 간효하러 교토로 길을 떠났다가, 미노국 다루이에서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1333년 11월 · 전승). 대석사는 니치도상인이 이었다. 그해 5월에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졌다. 닛코상인이 태어난 해에 집권이 된 호조 도키요리의 막부는, 닛코상인과 니치모쿠상인이 세상을 떠난 해에 끝났다.

  1. 니치렌 대성인1279.10.12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 1282.9「血脈の次第 日蓮日興」1600*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
  2. 제2조 닛코상인1282 상승 · 1290 대석사 · 1333.2.7 입멸(88)
  3. 제3조 니치모쿠상인1332.11 「닛코적조조사」「弘安二年の大御本尊弘安五年御下文、日目に之を授与す」사료고안 2년의 대어본존과 고안 5년의 하문(御下文)을 니치모쿠에게 준다1333 다루이 입멸(74)
* 강의 인용 원문 · 본존 그림 없음 · 37절
도표 30 · 혈맥의 차례

연대 대조 — 닛코상인의 입멸은 1333년 2월 7일로 후지 문류의 전승이 일치한다. 같은 해는 연호가 둘이다(조정 쪽 겐코 3년 · 막부 쪽 쇼쿄 2년). 「닛코적조조사」는 1332년 11월 10일로 전한다. 니치모쿠상인의 입멸은 1333년 11월 15일로 전한다.

대성인이 본 닛코상인

대성인이 닛코상인을 직접 평한 글은 많지 않다. 그러나 대성인이 닛코상인을 어떻게 부르셨고 무엇을 맡기셨는가를 차례로 놓으면, 스승이 이 제자를 어떻게 보셨는지가 드러난다.

첫째, 「호키보」 — 말씀을 전하는 사람. 1275년부터 1282년까지 대성인은 후지의 문하에게 보내는 편지 끝에 거듭 「호키보에게 읽게 하여 들으시라」고 쓰셨다(3부 11 · 12절). 대성인의 말씀은 닛코상인의 목소리로 문하에게 닿았다. 스승은 제자의 입을 믿으셨다.

둘째, 「호키 님 등」 — 함께 싸우는 사람. 아쓰와라 법난 때 대성인은 「류센사신장」의 앞부분을 손수 쓰시고 뒷부분은 닛코상인의 초안을 그대로 살리셨으며, 「호키전등답서」와 「성인등답서」로 문초의 방법을 하나하나 이르셨다. 「이 뜻을 어기는 자는 니치렌의 문가가 아니다」라는 엄한 말도 닛코상인 앞으로 보내셨다(3부 15절). 스승은 법난의 한가운데를 제자에게 맡기셨다.

셋째, 「사병의 제자」 — 법을 그대로 받은 사람. 「백육개초」에서 대성인은 닛코상인을 「만년 구호를 위하여 병의 물을 옮겨 담은 제자」라 부르셨다(4부 19절). 한 방울도 더하거나 덜지 않고 스승의 법을 받은 제자라는 뜻이다.

넷째, 「본문 홍통의 대도사」 — 법을 이을 사람. 「미노부상승서」에서 대성인은 한평생의 홍법을 닛코상인에게 부촉하시고 「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라 적으셨다(4부 21 · 23절).

다섯째, 「닛코 교화의 힘」 — 스승을 모신 사람. 「백육개초」 끝에 대성인은 미노부의 지도가 발심한 근원이 닛코의 교화에 있고, 미노부에 드신 것이 닛코의 간절한 뜻 때문이라고 적으셨다(2부 8 · 10절).

불 · 법 · 승의 삼보 가운데 승보(僧寶)는 부처의 법을 바르게 받아 전하는 사람이다. 대성인은 이즈의 니타시로노부쓰나에게 「경은 법화경, 부처는 석가불, 행자는 법화경의 행자를 닮았다」고 쓰셨다(3부 13절). 그 편지에서 대성인은 겉으로는 스스로를 행자, 곧 승보의 자리에 두셨다. 닛코 문류는 이것을 문상(文上)의 삼보로 보고, 문저(文底)의 삼보를 따로 세운다. 불보는 구원원초의 본불이신 니치렌 대성인, 법보는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승보는 그 법을 바르게 이어받은 제2조 닛코상인을 으뜸으로 하는 것이다. 대성인이 닛코상인을 부르신 다섯 가지 이름은 모두 이 승보의 자리를 가리킨다.

  1. ①말씀을 전하는 사람「はわき房に度度よませてきこしめせ」1463호키보에게 여러 번 읽게 하여 들으십시오
  2. ②함께 싸우는 사람「伯耆殿」1456호키 님「伯耆房等深く此の旨を存じて」1455호키보 등은 깊이 이 뜻을 알고
  3. ③법을 그대로 받은 사람「万年救護写瓶の弟子日興」854만년 구호를 위하여 병의 물을 옮겨 담은 제자 닛코
  4. ④법을 이을 사람「本門弘通の大導師」본문 홍통의 대도사「血脈の次第 日蓮日興」1600*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
  5. ⑤스승을 모신 사람「延山地頭発心の根元は日興教化の力用なり」869*미노부산 지도가 발심한 근원은 닛코가 교화한 힘이다

문저의 삼보 — 불보 니치렌 대성인 · 법보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 승보 닛코상인(닛코 문류의 교의)

* 강의 인용 원문 · 38절
도표 31 · 대성인이 부르신 다섯 이름

세 층의 닛코상인

이 페이지는 닛코상인을 세 층으로 읽었다.

누구인가
역사의 닛코상인1246–1333, 가이 가지카자와 출생 · 후지 기슭에서 자란 천태종 시주쿠원 출신의 학승
대성인의 제자 닛코상인열세 살에 입문한 호키보 · 이즈 · 사도 · 미노부를 곁에서 모신 제자
혈맥의 닛코상인「본문 홍통의 대도사」 · 미노부산 구원사 별당 · 대석사 개산 · 제2조 · 승보
무엇을 했는가
역사의 닛코상인짓소사 대중 수장 · 막부와 조정에 올린 신장 · 오모스 담소
대성인의 제자 닛코상인후지 · 가이의 홍교 · 하키리의 귀의 · 아쓰와라 법난 때 가마쿠라에서 싸움 · 「어의구전」 필록
혈맥의 닛코상인미노부를 지킴 · 방법 앞에서 이산 · 대어본존을 모시고 대석사를 세움 · 오일상대를 밝힘
무엇을 받았는가
역사의 닛코상인시주쿠원 추방 · 하키리의 의절
대성인의 제자 닛코상인「호키보에게 읽혀 들으시라」 · 「호키전등답서」 · 「백육개초」 · 「본인묘초」
혈맥의 닛코상인「미노부상승서」 — 「血脈の次第 日蓮日興」혈맥의 차례, 니치렌 · 닛코·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무엇을 남겼는가
역사의 닛코상인「짓소사 대중 수장」 · 「종조어천화기록」 · 「제자분 본존 목록」 · 사본들
대성인의 제자 닛코상인십대부의 선정 · 어서의 수집과 서사
혈맥의 닛코상인「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 「닛코유계치문」 · 「닛코적조조사」 — 니치모쿠상인에게 이어진 혈맥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의 닛코상인한 학승이 스승의 법을 위해 거처와 생계를 잃고도 붓을 놓지 않은 기록
대성인의 제자 닛코상인스승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제자의 본보기
혈맥의 닛코상인스승의 법을 한 방울도 바꾸지 않고 전한 「사병(寫甁)」의 제자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닛코상인을 알수록,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쓰고 베끼고 모은 사람인지가 보인다. 그는 스물셋에 오천 자의 수장을 썼고, 스승의 장례를 사흘 만에 기록했으며, 흩어진 편지를 모아 열 편을 골랐고, 여든여덟에 스물여섯 조목을 적었다. 대성인의 제자 닛코상인을 알수록, 대성인의 말씀이 그의 목소리로 후지의 문하에게 닿았다는 것이 보인다. 「호키보에게 여러 번 읽게 하여 들으시라.」 그리고 혈맥의 닛코상인을 알수록, 대성인 입멸 뒤의 쉰한 해가 무엇을 위한 세월이었는지가 보인다. 다섯 노승이 「천태 사문」이라 적었을 때 그는 「니치렌 성인의 제자」라 적었고, 미노부가 방법에 물들었을 때 그는 대어본존을 모시고 산을 내려왔다. 「후지의 입의는 조금도 선사의 홍통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 한 줄이 닛코상인의 생애 전체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1. 12463.8가이 가지카자와 출생 · 외조부 유이 입도 밑에서 자람전승
  2. 1252경—가모하라 시주쿠원 수학전승
  3. 1258—이와모토 짓소사에서 대성인의 제자 · 호키보13세
  4. 12607.16대성인 「입정안국론」
  5. 12615.12대성인 이즈 유배 · 곁에서 모심전승
  6. 12632.22이즈 유배 사면
  7. 12688월「짓소사 대중 수장」 집필사료 · 친필 현존
  8. 1269경—하키리사네나가 귀의전승
  9. 12719.12다쓰노구치 법난
  10. 127110월대성인 사도 유배 · 곁에서 모심전승
  11. 12721.16쓰카하라 문답「종종어진무어서」
  12. 12738월「하키리사부로전답서」「筑後房・弁阿闍梨」
  13. 12742–3월사면 · 가마쿠라로
  14. 1274—소토산 문답 · 니치모쿠 귀의전승
  15. 12745.17대성인 하키리 도착 · 6.17 미노부 초암
  16. 12751월다카쓰치 성묘「봄의 축하어서」
  17. 12757.12「다카하시입도전답서」「はわき房に度度よませて」
  18. 1275—류센사 닛슈 · 닛벤 · 니치젠 귀의
  19. 1276—교치의 기청문 강요
  20. 127611.24니치모쿠 미노부 출가
  21. 12781.16「짓소사어서」
  22. 12783월「시주쿠원신장」 · 시주쿠원 추방
  23. 1278—「어의구전」 필록화광 목록 1278
  24. 12799.21아쓰와라 스무 명 체포
  25. 127910.1「성인어난사」「余は二十七年なり」
  26. 127910월「류센사신장」대성인 · 닛코상인 필적
  27. 127910.12본문계단의 대어본존출세의 본회
  28. 127910.12「호키전등답서」받는 사람 닛코상인
  29. 127910.15세 사람 참수 · 열일곱 명 추방
  30. 127910.17「성인등답서」「伯耆房等深く」
  31. 12801월「백육개초」1.1 · 1.11 두 전승
  32. 128111.25「정지어서」 · 미노부 대방
  33. 12822.28「법화증명초」 · 「下伯耆房」
  34. 12829월「미노부상승서」 일기홍법부촉서2차
  35. 12829.8대성인 미노부 출발
  36. 12829.18이케가미 도착
  37. 128210.8본제자 여섯 사람
  38. 128210.11「본인묘초」전승
  39. 128210.13미노부산부촉서 · 대성인 입멸2차
  40. 128210.16「종조어천화기록」사료
  41. 128210월 말유골을 모시고 미노부 · 별당
  42. 12831월「묘소를 지킬 당번표」사료
  43. 128410월3회기 · 노승 불참
  44. 1285봄니코 학두
  45. 1286경—하키리의 네 가지 방법
  46. 128812월「하라전 답서」사료
  47. 1289봄미노부 이산 · 가와이
  48. 12893월우에노로 · 오이시가하라
  49. 1289—신장사료 · 현존
  50. 129010.12대석사 대방 완성45세
  51. 1298—오모스 담소 · 본육 · 「제자분 본존 목록」전승 · 사료
  52. 1300—자쿠센보 닛초 귀복
  53. 1302—닛초(日頂) 귀복 · 자쿠센보 닛초 학두전승
  54. 1309—「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1310 추가 조목
  55. 13103.14자쿠센보 닛초 사망
  56. 1327—신장사료 · 현존
  57. 13287월「오인소파초」 초안 완성(니치준)한국어판 끝 「가력삼 무진년 칠월」
  58. 1330—신장사료 · 현존
  59. 1332—신육전승
  60. 133211월「닛코적조조사」사료
  61. 13331.13「닛코유계치문」
  62. 13332.7오모스에서 입멸88세
  63. 13335월가마쿠라 막부 멸망
  64. 133311월니치모쿠상인 다루이에서 입멸전승 · 74세
참고 문헌
어서

『日蓮大聖人御書全集』(일본어판) 쪽수. 본문에서 인용한 어서: 「어의구전」 · 「시주쿠원신장」 · 「류센사신장」 · 「백육개초」 · 「본인묘초」 · 「관심의 본존초」 · 「삼대비법품승사」 · 「성인어난사」 · 「하키리사부로전답서」 · 「정지어서」 · 「하키리전어보」 · 「니타전어서」 · 「짓소사어서」 · 「성인등답서」 · 「호키전등답서」 · 「다카하시입도전답서」 · 「다카하시전답서」(1457) · 「십자어서」 · 「봄의 축하어서」 · 「우에노전어서(1513)」 · 「난조전답서(1530)」 · 「우에노니부인답서(1580)」 · 「법화증명초(사활초)」 · 「미노부상승서」 / 닛코상인 · 닛코 문하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 · 「오인소파초」 · 「닛코유계치문」

사료

닛코상인 「짓소사 대중 수장」 · 「종조어천화기록」 · 「묘소를 지킬 당번표」 · 미마사카보 앞 서장 · 「하라전 답서」 · 「제자분 본존 목록」 · 신장(1289 · 1327 · 1330) · 「닛코적조조사」 / 하키리사네나가 · 기요나가의 서장 / 『니치렌 대성인 연보』 / 『순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