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7년, 비와호 서쪽 기슭 오미의 한 마을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열두 살에 절에 들어가 열아홉에 나라의 도다이지 계단에서 계를 받았다. 국가가 인정한 승려의 길이 그 앞에 열려 있었다. 그러나 석 달 뒤 그는 도읍의 절을 떠나 고향 뒷산 히에이산에 풀집을 짓고 들어갔다. 「어리석은 자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자, 미친 자 가운데 가장 미친 자, 티끌 같은 까까머리, 밑바닥의 사이초」. 그가 그때 쓴 서원문의 한 구절이다. 그 산에서 그는 천태대사의 책을 만났고, 바다를 건너 천태산에 가서 법을 받아 왔고, 남도의 여섯 종과 겨루어 법화경을 일본 불교의 한가운데 세웠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다섯 해를, 법화경의 계단을 세우는 일에 바쳤다. 그 허가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이레 뒤에 내려왔다. 사람들은 그를 그가 연 산의 이름으로 예산대사(叡山大師), 조정이 내린 이름으로 전교대사(傳教大師)라 불렀다.
전교가 태어났을 때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지 이백 년이 넘었다. 도읍 나라에는 도다이지의 대불이 서 있었고, 삼론 · 성실 · 법상 · 구사 · 화엄 · 율의 여섯 학파가 저마다 경론을 강의했다. 나라마다 국분사가 있었고, 승려는 국가의 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승려가 될 수 있었다. 불교는 나라를 지키는 법이었고, 승려는 나라의 관리에 가까웠다. 전교는 이 불교 한가운데서 자라 그 가장 높은 문을 통과한 뒤, 그 문을 등졌다.
전교가 한 일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천태대사의 교학으로 남도 육종의 교판을 깨뜨리고 법화경을 일본 불교의 가장 높은 자리에 두었다. 둘째, 천태법화종을 조정이 인정하는 종으로 세웠다. 셋째, 소승의 계를 버리고 법화경과 범망경에 근거한 대승의 계단을 에이잔에 세웠다. 첫째와 둘째는 천태가 중국에서 한 일을 일본에서 되풀이한 것이지만, 셋째는 천태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니치렌 대성인은 전교를 누구보다 가깝게 느끼셨다. 「일본국에 이 법이 나타난 것은 두 번이다. 전교대사와 니치렌이다(日本国に此の法顕るること二度なり伝教大師と日蓮となり)」(「개목초」, 218쪽). 대성인은 에이잔에서 배우셨고, 천태 · 전교의 가르침을 「손에 쥐고」 여러 종을 파하셨다. 그러면서도 대성인은 전교가 세운 계단을 「적문」의 것이라 하시고, 자신이 펴는 법을 「천태 · 전교가 넓히지 않으신 정법」이라 하셨다. 전교는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남겼는가. 그리고 그가 세운 산은 왜 그의 뜻을 잃었는가. 이 페이지는 그 물음을 따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
- 1부 나라의 소년 — 불교 전래 이백 년과 남도 육종, 전기의 층, 오미의 소년 히로노, 도다이지 계단과 히에이산의 「원문」.
- 2부 에이잔의 열두 해 — 일승지관원, 『기신론소』의 한 줄과 감진의 책, 내공봉과 법화십강, 다카오의 강회.
- 3부 입당구법 — 환학생의 바닷길, 천태산의 도수 · 행만, 월주의 순효, 원 · 밀 · 선 · 계의 네 가지 상승.
- 4부 천태법화종 — 연분도자 두 사람, 구카이와의 교류와 결별, 규슈와 동국의 순화, 도쿠이치와의 삼일권실 논쟁.
- 5부 대승계단 — 『산가학생식』, 남도의 반론과 『현계론』, 입멸과 이레 뒤의 칙허, 원돈계, 저작, 에이잔 이후.
- 6부 대성인이 본 전교 — 상법의 끝, 공장의 승리, 「일염부제 제일의 기사」, 『의빙집』과 진언, 적문의 이계, 난과 이십여 년, 천태의 후신, 안으로 부른 제목, 말법을 그리워한 대사, 사자 몸속의 벌레, 삼국사사.
- 767오미 시가군 · 사카모토출생
- 778 · 780오미 국분사교효에게 입문 · 득도
- 785나라 도다이지계단원에서 수계
- 785 · 788 · 822히에이산입산 · 일승지관원 · 입멸
- 794~헤이안쿄새 도읍
- 802 · 805 · 812다카오산사강회 · 관정 · 결연관정
- 803나니와견당사의 배가 떠난 곳
- 803–804쓰쿠시 다자이후이듬해의 출발을 기다림
- 804.7.6히젠 다우라출항
- 804.9.1명주당 · 도착 (805.5.18 출항)
- 804.9.26~태주 용흥사당 · 필사 · 805.3.2 보살계
- 804.10천태산당 · 국청사 · 불롱사 · 선림사
- 805.4.18월주 용흥사 · 봉산도량당 · 관정
- 805.6.5쓰시마귀착
- 814우사 · 가와라규슈 순화
- 817고즈케 미도노데라 · 시모쓰케 대자사동국 순화
- 아이즈 · 쓰쿠바도쿠이치가 교화한 곳
- 장안당의 도읍 · 구카이 · 엔닌
시대 — 불교 전래 이백 년과 남도 육종
일본에 불교가 공식으로 전해진 것은 6세기 중엽이다. 백제의 성왕이 긴메이 천황에게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 『일본서기』는 이 일을 552년의 일로, 『원흥사연기』 등 다른 기록은 538년의 일로 전한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긴메이 천황 치세 13년 임신(552) 10월 13일, 백제국에서 일체경과 석가불의 상을 보냈다」고 쓰셨다(302쪽).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소가 씨와 모노노베 씨가 다투었고, 587년 소가 씨가 이기면서 불교는 왕권과 호족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다. 그는 법화경 · 승만경 · 유마경을 강의하고 그 주석서 『삼경의소』를 지었다고 전하며, 시텐노지와 호류지를 세웠다. 대성인은 쇼토쿠 태자가 「불법을 처음 읽기 시작하셨다」고 하시고, 그가 사신을 중국에 보내 「전생에 지니던 한 권의 법화경」을 가져오게 해 지경(持經)으로 삼았다는 전승을 전하셨다(「보은초」, 302쪽). 일본 불교는 처음부터 법화경과 인연이 깊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에 걸쳐 중국의 불교 학문이 차례로 들어왔다. 삼론 · 성실 · 법상 · 구사 · 화엄 · 율, 이 여섯을 남도 육종(南都六宗)이라 한다. 「남도」는 헤이안 천도 뒤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이때의 「종」은 뒤의 종파와 달리, 한 경론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학문의 모임에 가까웠다. 도다이지 · 다이안지 같은 큰 절에는 여러 종의 학승이 함께 살았고, 한 승려가 여러 종을 겸해 배우는 것도 흔했다. 대성인은 이 여섯 종이 고토쿠 천황과 쇼무 천황의 치세에 전해졌고, 「고토쿠 천황부터 간무 천황까지 열네 대, 백이십여 년 동안 천태 · 진언의 두 종은 없었다」고 하셨다(「보은초」, 302쪽).
8세기의 나라 불교는 국가의 불교였다. 쇼무 천황은 741년 나라마다 국분사와 국분니사를 세우라는 조칙을 내렸고, 752년 도다이지의 노사나대불이 개안되었다. 금광명경과 인왕경을 읽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승려의 가장 큰 임무였다. 승려가 되려면 국가가 해마다 정한 인원(연분도자, 年分度者) 안에서 득도하고, 국가가 세운 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했다. 그 계단을 세운 사람이 당의 감진(鑑眞, 688–763)이다. 다섯 번 바다를 건너려다 실패하고 눈이 먼 끝에 754년 나라에 들어온 감진은, 도다이지에 계단을 세워 쇼무 상황 이하 사백여 명에게 계를 주었다. 761년에는 동쪽의 시모쓰케 야쿠시지와 서쪽의 쓰쿠시 간제온지에도 계단이 세워졌다. 이 셋을 「천하의 세 계단」이라 불렀다. 전교가 뒤에 「소승의 계단」이라 부르며 넘어서려 한 것이 바로 이 셋이다.
국가와 가까운 불교는 그만큼 권력의 다툼에 휘말렸다. 764년부터 770년까지, 승려 도쿄(道鏡)는 쇼토쿠 여제의 총애를 받아 태정대신선사 · 법왕의 자리에 올랐고, 우사 하치만의 신탁을 내세워 황위까지 넘보았다. 이를 막은 사람이 와케노 기요마로(和氣淸麻呂)다. 그는 우사에 가서 「황위는 반드시 황족이 이어야 한다」는 신탁을 받아 와 도쿄의 뜻을 꺾었고, 그 때문에 오스미로 유배되었다. 대성인도 이 일을 기억하셨다. 다쓰노구치로 끌려가던 밤, 대성인은 하치만 대보살을 향해 「와케노 기요마로가 목을 베이려 할 때는 길이 한 길의 달로 나타나셨다」고 외치셨다(「종종어진무어서」, 913쪽). 기요마로의 아들들이 뒤에 전교를 다카오로 부른다(8절).
781년 즉위한 간무 천황(桓武天皇, 재위 781–806)은 이 불교와 거리를 두려 했다. 그는 784년 나라를 떠나 나가오카쿄로, 794년 다시 헤이안쿄(지금의 교토)로 도읍을 옮겼다. 나라의 큰 절들은 새 도읍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간무는 승려의 득도와 수계를 엄하게 관리하고, 경론을 제대로 배운 승려만 득도하게 하는 쪽으로 제도를 고쳤다. 정치에 깊이 들어온 남도 불교를 멀리하고, 학문과 수행을 갖춘 새로운 불교를 찾고 있었다. 전교는 바로 이 간무의 시대에 나타났다.
연대 대조 — 불교 공전(公傳)의 해는 552년(『일본서기』)과 538년(『원흥사연기』 · 『상궁성덕법왕제설』)의 두 설이 있고, 오늘날 연구에서는 538년설이 유력하다. 어서도 두 가지로 전한다. 「보은초」는 「긴메이 천황 치세 13년 임신」(552)이라 하시고(302쪽), 「중생심어서」는 「긴메이 천황 6년」이라 하신다(1593쪽). 이 페이지는 어느 한쪽으로 정하지 않고 두 해를 함께 적는다.
전기의 층
전교의 생애를 전하는 자료는 천태보다도 풍부하다. 제자가 쓴 전기 외에, 그가 살아 있던 때의 관청 문서가 원본이나 그에 가까운 사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① 『예산대사전(叡山大師傳)』 한 권 — 전교가 세상을 떠난 뒤 가까운 제자가 지은 전기다. 책에는 「일승충(一乘忠)」이라 서명되어 있어, 제자 닌추(仁忠)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탄생에서 입멸, 대승계단의 칙허까지를 차례로 적고, 전교가 쓴 「원문」과 여러 상표문, 유언을 그대로 싣고 있다. 이 페이지에서 『대사전』이라 부른다.
② 관청 문서 — 전교가 출가하고 계를 받은 과정을 증명하는 세 문서가 교토 오하라의 라이고인(來迎院)에 전한다. 780년 오미 국부가 득도를 승인한 문서(국부첩), 783년의 득도 증명서(도연), 785년 도다이지에서 계를 받은 것을 증명하는 계첩(戒牒)이다. 모두 국보다. 당에 건너갔을 때 명주와 태주의 관청이 발급한 통행 문서(「전교대사입당첩」)는 엔랴쿠지에 전한다. 이 문서들 덕분에 전교의 출가 연령과 입당 경로를 날짜까지 확인할 수 있다.
③ 전교 자신의 글 — 입산 직후의 「원문(願文)」, 당에서 가져온 책의 목록(『태주록』 · 『월주록』), 조정에 올린 상표문, 『산가학생식』, 『현계론』과 그 증빙 문서를 모은 『현계론연기』, 자신이 받은 법의 계보를 적은 『내증불법상승혈맥보』, 도쿠이치와의 논쟁서들, 그리고 여러 통의 편지가 전한다. 813년 제자 다이한(泰範)에게 보낸 친필 편지 「구격첩(久隔帖)」은 국보다.
④ 제자들의 기록 — 제자 고조(光定, 779–858)가 대승계단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적은 『전술일심계문(傳述一心戒文)』이 있다. 고조는 스승을 대신해 조정과 남도를 오가며 계단 허가를 위해 뛰어다닌 사람이다.
⑤ 뒤의 전기 — 12세기의 역사서 『부상약기(扶桑略記)』, 1322년 고칸 시렌(虎關師錬)의 『원형석서(元亨釋書)』 등이 앞의 자료를 바탕으로 전교의 생애를 다시 적었다. 『원형석서』는 대성인이 세상을 떠나고 사십 년 뒤의 책이다.
| 항목 | ① 『대사전』제자 닌추로 봄 | ② 관청 문서라이고인 3통 · 입당첩 | ③ 전교 자신의 글원문 · 상표문 · 논쟁서 · 편지 | ④ 『전술일심계문』고조 | ⑤ 『원형석서』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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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노트 — 근대의 전교 연구는 1912년 에이잔에서 간행된 『전교대사전집』 다섯 권에서 출발했다. 전기 연구에서는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가 『대사전』과 관청 문서를 하나하나 맞추어 연대를 가렸고(『전교대사전의 연구』, 1992), 사상 연구에서는 소노다 고유(薗田香融)와 다무라 고유(田村晃祐)의 연구가 기초가 되었다. 영어권에서는 폴 그로너(Paul Groner)의 『Saichō』(1984)가 생애와 대승계단 운동을 가장 자세히 다룬 책이다.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대표적인 문제는 출생 연도(3절), 다카오 강회의 성격(8절), 구카이와의 결별의 원인(14절), 「일우를 비춘다」의 읽기(17절), 『말법등명기』의 진위(21절)다. 이 페이지는 전통의 전기를 따라 쓰되, 견해가 갈리는 곳은 이 상자에 적는다.
오미의 소년 — 미쓰노오비토 히로노
전교는 767년(진고케이운 원년), 오미국 시가군(滋賀郡)에서 태어났다. 비와호의 서쪽 기슭, 히에이산의 동쪽 자락이다. 지금의 오쓰시 사카모토 부근으로, 사카모토의 쇼겐지(生源寺)가 탄생지로 전한다. 속성은 미쓰노오비토(三津首), 어릴 때 이름은 히로노(廣野)다. 아버지는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다.
『대사전』은 이 집안의 선조가 후한 효헌제의 후손인 도만귀왕(登萬貴王)으로, 오진 천황 때 일본에 건너와 오미의 시가에 자리 잡고 미쓰노오비토라는 성을 받았다고 전한다. 한반도나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계(渡來系) 씨족이라는 뜻이다. 오미의 비와호 서안에는 이런 도래계 씨족이 많이 살았고, 이들은 문자와 기술, 그리고 불교를 가까이하는 집안이 많았다.
아버지 모모에는 불교를 깊이 믿어 집을 절로 삼았다고 한다. 『대사전』에 따르면 그는 아들이 없어 히에이산 기슭 신궁(神宮) 곁에 풀집을 짓고 이레 동안 참회하며 아들을 빌었고, 나흘째 되는 날 좋은 꿈을 꾸고 아이를 얻었다. 아이는 일곱 살 때 이미 배움이 또래를 넘어서, 마을의 작은 서당에서 그를 스승처럼 여겼다고 전한다.
778년, 열두 살의 히로노는 오미 국분사의 교효(行表, 722–797)에게 들어갔다. 교효는 오미의 대국사(大國師), 곧 한 나라의 승려를 감독하는 직에 있던 사람이다. 그의 스승은 당에서 건너온 도선(道璿, 702–760)이었다. 도선은 736년 일본에 와서 북종선과 화엄과 계율, 그리고 범망경의 보살계를 전한 승려로, 천태의 교학에도 밝았다고 보는 연구자가 있다. 전교는 뒤에 자신이 받은 선(禪)의 계보를 달마 → … → 도선 → 교효 → 사이초로 적었고, 교효가 자신에게 「마음을 일승에 돌려라(心を一乘に歸すべし)」라고 가르쳤다고 썼다(『내증불법상승혈맥보』). 소년이 처음 받은 가르침이 「일승」이었다.
780년(호키 11년) 11월 12일, 히로노는 오미 국분사에서 득도했다. 국분사 승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 빈자리가 생긴 것을 채우는 형식이었다. 이때 받은 법명이 사이초(最澄)다. 국부첩에 적힌 나이는 열다섯이다.
대성인은 전교의 스승을 「야마시나데라(山階寺)의 교효 승정」이라 하시고(「보은초」, 302쪽), 「처음에는 삼론 · 법상 · 화엄 · 구사 · 성실 · 율의 여섯 종과 선종을 교효 승정 등에게 배우셨다」고 하셨다(「찬시초」, 263쪽). 전교는 남도 불교의 모든 학문을 그 안에서 배운 사람이었다.
연구 노트 — 출생 연도는 두 설이 있다. 『대사전』은 입멸(822) 때의 나이를 쉰여섯으로 적어 767년 출생이 되고, 에이잔의 전통과 이 페이지는 이를 따른다. 그런데 780년의 국부첩은 그를 열다섯 살, 785년의 계첩은 스무 살로 적고 있어 이대로 셈하면 766년 출생이 된다. 문서가 전기보다 오래되었으므로 766년설을 따르는 연구자도 많다. 한편 도래계라는 전승은 『대사전』의 서술이며, 도만귀왕이라는 조상의 이름은 다른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미쓰노오비토 씨를 오미의 도래계 씨족으로 보는 데는 동의한다.
도다이지 계단과 히에이산 — 「원문」
785년(엔랴쿠 4년) 4월 6일, 열아홉 살의 사이초는 나라 도다이지의 계단원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백오십 계를 받은 정식 비구가 된 것이다. 감진이 세운 바로 그 계단이다. 이로써 그는 국가가 인정하는 승려가 되었고, 오미 국분사로 돌아가면 국사의 뒤를 이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석 달 뒤인 그해 7월, 사이초는 국분사에도 도읍의 큰 절에도 머물지 않고, 고향 뒷산 히에이산에 들어가 작은 풀집을 지었다. 왜 산에 들어갔는지 『대사전』은 짧게만 적는다. 세상의 덧없음을 보고, 몸을 산에 숨겨 수행하려 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몇 가지를 덧붙인다. 도쿄 사건 뒤 드러난 남도 불교의 세속화에 대한 실망, 산림에서 수행하는 전통(산림수행)을 높이 사던 교효 · 도선 계통의 영향, 그리고 이해 오미 국분사가 불탔다는 기록이다. 어느 하나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가 국가가 열어 준 길을 스스로 떠났다는 사실이다.
산에 들어간 사이초는 한 편의 서원문을 지었다. 「원문(願文)」이다. 『대사전』에 실려 전한다. 그 첫머리는 이렇다.
悠悠三界 純苦無安也 擾擾四生 唯患不樂也
아득한 삼계는 오로지 괴로움뿐 편안함이 없고, 어지러운 사생은 오직 근심뿐 즐거움이 없다.
이어서 그는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덧없는지, 부처를 만나기 어렵고 사람 몸을 얻기 어려운데도 그것을 헛되이 보내는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적는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부른다.
愚中極愚 狂中極狂 塵禿有情 底下最澄
어리석은 자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자, 미친 자 가운데 가장 미친 자, 티끌 같은 까까머리 중생, 밑바닥의 사이초.
국가의 계단에서 막 계를 받은 열아홉 살의 비구가 자신을 「밑바닥」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섯 가지 서원을 세운다.
- 육근상사(六根相似)의 자리를 얻기 전에는 산을 나가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
- 이치를 비추는 마음을 얻기 전에는 재주와 기예를 부리지 않겠다.
- 깨끗한 계를 온전히 갖추기 전에는 시주가 여는 법회에 나가지 않겠다.
- 반야의 마음을 얻기 전에는 세간의 일과 인연에 얽매이지 않겠다(다만 상사의 자리를 얻은 뒤는 예외로 한다).
-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쳐 닦은 공덕을 나 홀로 받지 않고, 널리 모든 중생에게 돌려 다 함께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
이 다섯 서원에는 뒤의 전교가 다 들어 있다. 첫째 서원의 「육근상사의 자리」는 천태가 세운 육즉(六卽) 가운데 넷째 자리, 상사즉(相似卽)의 다른 이름이다(천태 편 25절). 천태가 임종 때 「나는 다만 오품의 자리일 뿐」이라 한 그 오품제자위의 바로 위다. 산에 들어간 첫해의 사이초가 이미 천태의 수행 단계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서원의 「깨끗한 계」는 그가 방금 받은 이백오십 계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었다. 서른세 해 뒤 그는 그 계를 스스로 버린다(17절). 다섯째 서원은 자신만의 해탈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성불을 향한 대승 보살의 서원이다. 뒤의 『산가학생식』이 「일우(一隅)를 비추는 사람」을 기르겠다고 한 것도 이 서원에서 이어진다.

연구 노트 — 「원문」의 「육근상사위」라는 말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사이초가 천태의 책을 본격적으로 필사한 것은 입산 뒤의 일로 전하는데(6절), 입산 직후의 글에 이미 천태의 용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스승 교효와 그 스승 도선을 통해, 또는 감진 문하에서 읽히던 천태의 책을 통해 입산 전부터 천태의 가르침을 접했으리라는 견해가 있고, 「원문」이 입산 직후가 아니라 몇 해 뒤에 지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오미 국분사가 불탄 해에 대해서도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성인은 열두 살에 고향 아와의 세이초지에 올라 공부를 시작하셨고, 어린 시절부터 「일본 제일의 지자가 되게 해 주소서」라고 서원하셨다(「선무외삼장초」, 888쪽 · 니치렌 편 1부). 사이초는 열두 살에 오미의 국분사에 들어갔고, 열아홉에 고향 뒷산에 들어가 「밑바닥의 사이초」라 스스로를 부르며 서원을 세웠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 인연을 자신의 스승에게 겹쳐 보셨다. 세이초지의 옛 스승들을 두고 「곤조 승정 · 교효 승정이 전교대사의 스승이었으나 도리어 제자가 되셨던 것과 같다(勤操僧正・行表僧正の伝教大師の御師たりしが・かへりて御弟子とならせ給いしがごとし)」(324쪽)라고 하신 것이다. 처음 법을 가르쳐 준 스승이 뒤에 그 제자의 법을 따른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고정된 위아래가 아니라, 법을 중심으로 서로를 높여 가는 관계라는 것을 읽는다. 그리고 국가가 열어 준 길을 버리고 산에 들어간 열아홉 살의 결단에서, 제도가 보증하는 신분보다 스스로 세운 서원을 앞에 두는 구도의 모습을 본다.
일승지관원 — 「내가 선 숲에」
히에이산은 교토 분지와 비와호 사이에 솟은 해발 팔백여 미터의 산이다. 동쪽으로는 비와호가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몇 해 뒤 헤이안쿄가 들어설 분지가 펼쳐진다. 산에는 예부터 산의 신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 사이초가 풀집을 지은 곳은 지금의 도토(東塔) 부근, 산 동쪽의 깊은 삼나무 숲이었다.
788년(엔랴쿠 7년), 사이초는 이 자리에 작은 불당을 세우고 스스로 새겼다고 전하는 약사여래상을 모셨다. 일승지관원(一乘止觀院)이다. 「일승」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지관」은 천태의 수행을 가리킨다. 이 이름이 처음부터 붙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뒤에 이 불당은 에이잔의 중심 근본중당(根本中堂)이 되었다. 전교가 이때 부처 앞에 밝힌 등불이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불멸의 법등」 전승이 있다. 불당을 세울 때 그가 읊었다고 전하는 노래가 『신고금와카집』에 실려 있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の仏たち わが立つ杣に冥加あらせたま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부처님들이시여, 제가 서 있는 이 숲에 보이지 않는 가호를 내려 주소서.
「내가 선 숲(杣)」은 절을 지을 나무를 베어 내는 산을 말한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승려가 이 산을 부처의 도량으로 삼겠다는 뜻을 부처들 앞에 고한 것이다.
그 뒤 십여 년 동안 전교는 거의 산을 나오지 않았다. 『대사전』은 그가 이 무렵 경 · 율 · 논을 두루 읽고 좌선했다고 적는다. 대성인은 이 시기를 「십오 년 동안 천태 · 진언 등을 스스로 보셨다(十五年が間・天台真言等を自見せさせ給う)」(「찬시초」, 280쪽), 「입당 이전에 육종을 다 배우신 위에, 십오 년 동안 천태 · 진언 두 종을 산에 틀어박혀 보셨다」(「중생심어서」, 1593쪽)고 하셨다. 스승 없이 책으로 배운 시간이었다.
이 무렵 전교는 에이잔에 일체경을 갖추는 일을 시작했다. 797년 일체경 서사를 발원하고 남도의 여러 절에 도움을 청했다. 가장 크게 응한 사람이 동국의 도추(道忠)였다. 감진의 제자로, 동국에서 「보살」이라 불리며 교화하던 도추는 대소승의 경 · 율 · 논 이천여 권을 베껴 보내왔다고 『대사전』은 전한다. 이 인연으로 도추의 문하가 뒤에 대거 에이잔에 들어온다. 에이잔의 제2대 좌주 엔초(圓澄)와, 제3대 좌주 엔닌(圓仁, 자각대사)의 스승 고치(廣智)가 모두 도추 문하였다(15절).
『기신론소』의 한 줄 — 천태를 만나다
전교가 천태를 어떻게 만났는지, 『대사전』은 이렇게 전한다. 그는 화엄종의 법장(法藏)이 지은 『대승기신론의기』와 『화엄오교장』 등을 읽다가, 그 안에 천태의 글이 인용된 것을 보고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천태의 책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 천태의 책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을 만나, 『원돈지관(마하지관)』 · 『법화현의』 · 『법화문구소』 · 『사교의』 · 『유마소』 등을 베껴 올 수 있었다.
이 책들은 반세기 전 감진이 가져온 것이었다. 감진의 제자가 남긴 『당대화상동정전』은 감진이 가지고 온 물건 가운데 천태의 『지관법문』 · 『현의』 · 『문구』 각 열 권, 『사교의』 열두 권, 『차제선문』 열한 권, 『법화참법』 · 『소지관』 · 『육묘문』 각 한 권이 있었다고 적는다. 천태의 삼대부와 그 주요 저작이 754년에 이미 일본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진은 계율을 전하는 데 힘을 쏟았고, 이 책들을 널리 강의하지 않았다. 감진 문하의 일부에서 읽히기는 했지만, 남도 불교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대성인은 이 만남을 「보은초」에서 자세히 그리셨다. 이 대목은 전교 생애의 출발점에 대한 대성인의 이해를 보여 준다.
華厳宗の法蔵法師が造りたる起信論の疏を見給うに天台大師の釈を引きのせたり此の疏こそ子細ありげなれ……其の書を見んと申されしかば取り出だして見せまいらせしかば一返御らんありて生死の酔をさましつ此の書をもつて六宗の心を尋ねあきらめしかば一一に邪見なる事あらはれぬ
화엄종의 법장법사가 지은 『기신론』의 소를 보시니 천태대사의 해석을 끌어다 실어 놓았다. 이 소에는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하다 …… 그 책을 보고 싶다고 하시자 꺼내어 보여 드렸는데, 한 번 보시고 생사의 취기에서 깨어나셨다. 이 책으로 육종의 마음을 찾아 밝히시니 하나하나가 삿된 견해임이 드러났다.
「……」로 줄인 곳에서 대성인은 감진의 일을 전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물으니, 당 양주 용흥사의 감진 화상이 천태의 가르침을 이은 도섬(道暹) 율사의 제자로서 일본에 건너와 소승의 계를 넓혔으나, 「천태의 해석을 가지고 오셨으면서도 넓히지 않으셨다(天台の御釈持ち来りながらひろめ給はず)」는 것이다(303쪽). 「하산어소식」은 감진이 「원기가 아직 익지 않았다고 여기셨는지 이 법문을 자기 마음에 거두고 입에도 내지 않으셨다」고 하시고, 감진이 세운 소승의 계단을 「오로지 법화종이 퍼지기 위한 방편」이라 하셨다(344–345쪽).
전교가 천태의 책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성인은 「찬시초」에서 그것을 이렇게 요약하셨다. 전교는 스스로 세운 절에서 「육종의 본경 · 본론과 각 종 인사(人師)의 해석을 맞대어 보셨는데, 그 종들의 인사의 해석이 의지하는 경론과 어긋나는 일이 많았다」(263쪽). 각 종은 인도의 경과 논을 근거로 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중국 조사의 해석을 따르고 있었고, 그 해석은 경론 자체와 맞지 않았다. 천태는 석존 일대의 모든 경을 하나의 체계 안에 놓고 법화경을 그 정점에 두었다. 그 눈으로 보면 남도 육종의 교판은 모두 한 부분을 전체로 착각한 것이었다.
가운데 화살표 — 754 → 790년대

연구 노트 — 법장의 어느 책에서 천태를 보았는지는 『대사전』의 표현에 따라 『대승기신론의기』(「기신론소」)와 『화엄오교장』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보은초」도 「법장법사가 지은 『기신론』의 소」라 하신다. 천태의 책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감진이 머물던 도쇼다이지나 도다이지로 보는 견해, 감진의 제자 법진(法進) · 사탁(思託)의 문하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사탁은 감진과 함께 건너온 승려로 천태에도 밝았다고 전한다. 「보은초」가 감진을 「천태의 말학 도섬 율사의 제자」라 하신 것은 감진의 스승 가운데 천태의 법을 이은 사람이 있었다는 전승을 따른 것이며, 감진이 천태의 교학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은 연구에서도 인정된다.
내공봉과 법화십강
797년(엔랴쿠 16년), 서른한 살의 사이초는 내공봉십선사(內供奉十禪師)에 임명되었다. 궁중의 도량에서 천황의 몸과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열 명의 선사로, 학문과 계행이 뛰어난 승려에게 주어지는 자리였다. 산에 틀어박힌 무명의 승려가 궁중의 기도승이 된 것이다. 산의 경비는 오미국의 정세(正稅)로 충당되었다. 간무 천황과의 인연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듬해 798년 11월, 사이초는 에이잔에서 법화십강(法華十講)을 열었다. 법화경 여덟 권과 그 개경 · 결경인 무량의경 · 관보현경을 합한 열 권을 열 번에 나누어 강의하는 법회다. 11월을 고른 것은 천태대사의 기일(11월 24일)에 맞춘 것이다. 에이잔의 가장 중요한 법회인 상월회(霜月會)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801년 11월의 법화십강에는 남도의 이름난 학승 열 사람을 초청해 강사로 세웠다. 남도의 학승들이 천태의 법화경 해석을 처음으로 공식 자리에서 접한 것이 이때다.
이 무렵 사이초에게 힘을 보탠 이들이 와케 씨 형제였다. 도쿄를 막은 와케노 기요마로는 헤이안쿄 조영을 맡은 간무의 측근이었고, 79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와케노 히로요(和氣弘世)와 와케노 마쓰나(和氣眞綱)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불교의 새 흐름을 후원했다. 와케 씨의 절이 교토 서북쪽 다카오산의 다카오산사(高雄山寺), 지금의 진고지(神護寺)다.
다카오의 강회 — 802년 정월
802년(엔랴쿠 21년) 정월, 와케노 히로요 · 마쓰나 형제는 다카오산사에서 천태의 법문을 강의하는 법회를 열었다. 『대사전』에 따르면 사이초가 강사로 초청되었고, 남도 여러 큰 절의 학승 열네 사람이 이를 들었다. 젠기(善議) · 쇼유(勝猷) · 호키(奉基) · 조닌(寵忍) · 겐교쿠(賢玉) · 안푸쿠(安福) · 곤조(勤操) · 슈엔(修圓) · 지코(慈誥) · 겐요(玄耀) · 사이코(歲光) · 도쇼(道證) · 고쇼(光證) · 간빈(觀敏)이다. 삼론의 젠기와 곤조, 법상의 슈엔 등 당대 남도를 대표하는 학승들이었다. 곤조는 뒤에 구카이의 스승으로 알려지는 사람이다.
강회가 끝나자 간무 천황은 와케노 히로요를 칙사로 보내 대덕들의 뜻을 물었다. 대덕들은 천황에게 감사의 표(謝表)를 올렸다. 그 표는 『대사전』에 실려 전하고, 대성인도 「찬시초」와 「보은초」에서 그 글을 길게 인용하셨다. 남도의 학승들이 스스로 쓴 이 글은, 전교가 남도 불교에 무엇을 보여 주었는지를 가장 잘 말해 준다.
竊に天台の玄疏を見れば総じて釈迦一代の教を括つて悉く其の趣を顕すに通ぜざる所無く独り諸宗に逾え殊に一道を示す其の中の所説甚深の妙理なり七箇の大寺六宗の学生昔より未だ聞かざる所曾て未だ見ざる所なり……聖徳の弘化より以降今に二百余年の間講ずる所の経論其の数多く彼此理を争えども其の疑未だ解けず、而るに此の最妙の円宗未だ闡揚せず
가만히 천태의 『현의』와 소를 보니, 석가 일대의 가르침을 모두 묶어 그 뜻을 다 드러내어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홀로 여러 종을 넘어서 특별히 하나의 길을 보인다. 그 가운데 설한 것은 매우 깊은 묘한 이치다. 일곱 큰 절과 여섯 종의 학승이 예로부터 아직 듣지 못한 것이요,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다 …… 쇼토쿠 태자가 불법을 편 이래 지금까지 이백여 년 동안 강의한 경론은 그 수가 많고 서로 이치를 다투었으나 그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가장 묘한 원종(圓宗)은 아직 드러내어 펴지지 않았다.
그리고 표는 이렇게 맺는다. 「성조(聖朝)께서 오랫동안 여래의 부촉을 받아 순원(純圓)의 근기를 깊이 맺으시어, 한 묘법의 이치가 비로소 일어나 드러나고 육종의 학자가 처음으로 지극한 곳을 깨달았다. 이 세계의 중생은 이제부터 모두 묘원(妙圓)의 배에 올라 속히 저 언덕에 건너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찬시초」, 272쪽 · 「하산어소식」, 345쪽). 남도의 학승들이 천태의 원교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넘어선다는 것을 천황 앞에 글로 인정한 것이다.
이해 9월, 사이초는 당에 건너가 천태의 법을 직접 받아 오겠다는 표를 올렸다. 책으로만 배운 천태를 스승에게서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천태의 책이 베껴 오는 사이 글자가 틀리고 빠진 곳이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간무는 곧 허락했다. 그는 짧은 기간 다녀오는 환학생(還學生)으로, 제자 기신(義眞)은 통역을 맡는 역어승(譯語僧)으로 정해졌다.
- 정월 · 다카오산사와케노 히로요 · 마쓰나 형제의 법회
- 사이초가 강사남도 14대덕이 청강
- 간무가 칙사를 보냄와케노 히로요
- 14대덕의 사표「六宗の学者初めて至極を悟る」
- 9월 입당 청원환학생 · 역어 기신
- 정월 · 다카오산사와케노 히로요 · 마쓰나 형제의 법회
- 사이초가 강사남도 14대덕이 청강
- 간무가 칙사를 보냄와케노 히로요
- 14대덕의 사표「六宗の学者初めて至極を悟る」
- 9월 입당 청원환학생 · 역어 기신

연구 노트 — 다카오의 모임은 『대사전』에는 와케 씨가 연 강회로, 어서에는 간무 천황이 다카오산사에 행행하여 열네 사람을 사이초와 「맞붙이신」 대론으로 전한다(「보은초」 302–303쪽 · 「찬시초」 263 · 271쪽 · 「하산어소식」 345쪽). 강회에서 누가 무엇을 강의했는지도 기록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사이초가 강사였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남도의 대덕들이 천태의 삼대부를 나누어 강의하고 사이초가 이를 이끌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간무가 다카오에 행행했다는 기록은 『대사전』 등 당시의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사표의 문장과 칙사의 이름, 열네 사람의 이름은 어서와 『대사전』이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이 페이지는 2부에서 사료의 서술을 따르고, 대성인이 이 일을 어떻게 보셨는지는 6부 24절에서 읽는다.
남도의 대덕들은 저마다 인도의 경론과 중국 조사의 권위를 등에 지고 있었다. 사이초는 그 권위 앞에서 경론 자체로 돌아가 물었다. 조사의 해석이 경론과 맞는가. 대성인은 전교의 이 태도를 전교 자신의 말로 전하셨다. 「부처의 말씀에 의지하고 구전을 믿지 말라(仏説に依憑して口伝を信ずること莫れ)」(「개목초」, 219쪽 · 「찬시초」, 282쪽 · 「입정관초」, 528쪽). 석존이 열반경에서 남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용수의 「경에 의지하는 것은 흰 논이다」, 천태의 「경과 맞는 것은 기록하여 쓰라」와 나란히 놓으신 말이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신앙의 기준이 권위 있는 사람이나 오래된 전통이 아니라 경문과 도리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전교가 그 기준을 혼자 산속에서 지킨 것이 아니라, 남도의 대덕들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내어 겨루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법의 옳고 그름을 공개된 자리에서 가리는 것, 대성인이 평생 구하신 「공장대결」의 본보기가 여기 있다.
환학생 — 바다를 건너다
8세기와 9세기 초, 일본에서 당에 가는 길은 견당사(遣唐使)의 배뿐이었다. 수십 년에 한 번 조정이 사절단을 꾸리면, 네 척의 배에 대사 이하 관인과 유학생 · 유학승이 나누어 탔다. 배는 크지 않았고 항해술은 거칠었다. 네 척이 모두 무사히 돌아온 일은 드물었다.
유학승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이십 년 가까이 당에 머물며 배우는 유학생(留學生)과, 사절단과 함께 가서 사절단과 함께 돌아오는 환학생(還學生)이다. 사이초는 이미 궁중의 내공봉이었고 서른여섯 살이었다. 그는 환학생으로, 이미 공부한 것을 확인하고 빠진 책을 구해 오는 일을 맡았다. 통역은 제자 기신(義眞, 781–833)이 맡았다. 사가미 출신으로 한어에 능했던 기신은 뒤에 에이잔의 첫 좌주가 된다.
803년(엔랴쿠 22년) 4월, 사절단은 나니와를 떠났으나 곧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되돌아왔다. 사이초는 규슈의 쓰쿠시에 머물며 이듬해의 출발을 기다렸다. 이때 그는 다자이후 가까운 가마도산의 절에서 바다를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고 빌며 약사불을 조성하고 법화경을 강의했다고 전한다. 이 서원을 갚으러 그는 십 년 뒤 다시 규슈를 찾는다(15절).
804년(엔랴쿠 23년) 7월 6일, 사절단은 히젠국 마쓰라군 다우라(田浦)를 떠났다. 대사는 후지와라노 가도노마로(藤原葛野麻呂)였다. 첫째 배에는 대사와 함께 유학승 구카이(空海)와 유학생 다치바나노 하야나리(橘逸勢)가 탔다. 사이초와 기신은 판관 스가와라노 기요키미(菅原淸公)가 이끄는 둘째 배에 탔다. 출항 이튿날 폭풍이 일어 네 척은 흩어졌다. 첫째 배는 한 달 넘게 표류한 끝에 8월 남쪽 복주(福州)의 해안에 닿았고, 셋째 배와 넷째 배는 가라앉거나 되돌아갔다. 사이초가 탄 둘째 배는 9월 1일 명주(明州, 지금의 닝보)에 닿았다.
대성인은 대승의 구도를 이야기하실 때 이 바닷길을 떠올리셨다. 가마쿠라에서 사도까지 먼 길을 찾아온 한 여성 신도에게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현장은 서천에서 법을 구하기를 십칠 년, 십만 리에 이르렀다. 전교의 입당은 겨우 두 해였으나 파도 삼천 리를 사이에 두었다(伝教御入唐但二年なり波濤三千里をへだてたり)」(「일묘성인어서」, 1216쪽).
- 803.4나니와출발 · 폭풍으로 되돌아옴
- 803–804쓰쿠시대기
- 804.7.6히젠 다우라출항 · 둘째 배
- 804.9.1명주도착
- 804.9.26태주자사 육순 · 도수
- 804.10천태산국청사 · 불롱사 · 선림사
- 805.3.2태주 용흥사필사 · 보살계
- 명주되돌아옴
- 805.4.18월주 용흥사 · 봉산도량관정
- 805.5.18명주출항
- 805.6.5쓰시마귀착
- 7월헤이안쿄복명
- 구카이의 길복주 → 장안 → 명주 806

천태산 — 도수와 행만
명주에 닿은 사이초는 곧 태주(台州)로 향했다. 천태산이 있는 곳이다. 9월 하순 태주에 이른 그는 자사(刺史) 육순(陸淳)을 찾았다. 육순은 『춘추』를 연구한 이름난 학자로, 마침 천태산의 고승 도수(道邃)를 태주 용흥사에 청해 『마하지관』 강의를 듣고 있었다. 사이초가 천태의 책을 베끼고 싶다며 가져온 금을 내놓자, 육순은 금을 받지 않고 종이를 대주며 필사할 사람을 모아 주었다고 전한다.
도수(道邃)는 묘락대사 담연의 제자로, 천태산 수선사의 좌주였다. 천태 편 17절에서 본 것처럼 천태의 교학은 천태 사후 한 세기 넘게 가라앉았다가 묘락에 의해 다시 일어났다. 도수는 그 묘락의 법을 이은 사람이다. 일본 천태에서는 천태 → 장안 → 지위 → 혜위 → 현랑 → 묘락 → 도수로 이어 도수를 천태의 제7조로 세운다. 사이초는 도수에게 『마하지관』의 강의를 듣고, 그가 가진 천태의 책을 빌려 베꼈다.
10월, 사이초는 천태산에 올랐다. 천태가 머물던 산이다. 산 아래에는 천태가 남긴 도면대로 세운 국청사가 있었고, 산속 불롱(佛隴)에는 천태가 처음 절을 세운 수선사, 곧 불롱사가 있었다(천태 편 11 · 17절). 불롱사의 좌주 행만(行滿) 역시 묘락의 제자였다. 행만은 멀리서 온 이 승려를 반겨, 자신이 간직한 천태의 책 여든두 권을 주었다. 사이초는 천태의 무덤과 영당에 참배했다. 산속 선림사(禪林寺)에서는 소연(翛然)에게 우두선(牛頭禪)을 받았다.
805년(정원 21년) 3월 2일, 사이초와 기신은 태주 용흥사의 극락정토원에서 도수에게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범망경에 근거한 보살계, 천태가 진왕 양광에게 주었던 그 계다(천태 편 14절). 사이초는 이미 도다이지에서 이백오십 계를 받은 비구였다. 그러나 그가 「원문」에서 구한 「깨끗한 계」, 그리고 뒤에 에이잔에 세우려 한 계는 이 대승의 계였다.
태주에서 베낀 책의 목록이 『태주록(台州錄)』이다. 백이십여 부 삼백사십여 권에 이르는 천태 계통의 책으로, 목록 끝에는 자사 육순의 확인 문구와 도장이 남아 있다. 명주 · 태주가 발급한 통행 문서와 함께, 이 목록은 사이초가 무엇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를 지금도 보여 준다.
「일대성교대의」는 이 무렵의 일에 대한 한 전승을 전한다. 전교가 에이잔의 근본중당 터를 닦을 때 땅속에서 혀가 여덟 개 달린 열쇠가 나왔다. 전교는 이 열쇠를 지니고 당에 건너갔다. 도수는 전교가 뛰어난 근기임을 기뻐하여 천태가 남긴 열다섯 경장(經藏)을 열어 보였는데, 열넷은 열었으나 하나는 열 열쇠가 없어 「천태대사가 스스로 세상에 나와 여실 것」이라 했다. 전교가 일본에서 가져간 열쇠로 열자 그 경장이 열렸고, 안에서 빛이 방에 가득했다. 그 빛은 「일념삼천」의 글에서 나오고 있었다. 도수는 도리어 전교에게 절하며 「천태대사의 후신」이라 했다(402쪽). 대성인은 이 이야기 끝에 「천태대사 자필의 관음경과 장안대사 자필의 『지관』이 지금 히에이산의 근본중당에 거두어져 있다」고 덧붙이셨다. 대성인이 에이잔에서 배우실 때 산에 전하던 이야기다.

연대 대조 — 어서는 당의 스승들이 머문 절을 사료와 다르게 전한다. 「보은초」는 「서명사의 도수 화상 · 불롱사의 행만」과 「영감사의 순효 화상」이라 하시고(304쪽), 「본존문답초」는 「묘락대사의 제자 도수 · 행만을 만나 법화종의 정 · 혜를 전하고, 도선 율사에게 보살계를 전하고, 순효 화상에게 진언의 비교를 배웠다(道宣律師に菩薩戒を伝え)」고 하신다(369쪽). 사료에서 사이초가 보살계를 받은 스승은 도수이며, 도선(道宣, 596–667)은 그보다 백여 년 앞의 남산율종 조사다. 대성인 당시 일본에 전하던 전기의 여러 전승을 따르신 것으로 보인다. 이 페이지는 사료의 기록에 따라 쓴다. 「일대성교대의」의 열쇠와 경장 이야기는 『대사전』 등의 사료에는 없는 에이잔의 전승이다.
월주의 관정 — 순효
805년 3월, 사이초는 태주를 떠나 명주로 돌아왔다. 귀국하는 사절단의 배를 기다리는 사이, 그는 가까운 월주(越州, 지금의 사오싱)로 갔다. 월주 용흥사에는 순효(順曉)라는 밀교승이 있었다. 순효는 인도에서 온 선무외 삼장의 계통을 이은 사람이었다.
4월 18일, 사이초는 월주 봉산도량(峯山道場)에서 순효에게 삼부삼매야(三部三昧耶)의 관정을 받았다. 관정(灌頂)은 밀교에서 스승이 제자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 법을 전하는 의식이다. 사이초는 또 월주에서 밀교의 경전과 만다라, 법구를 모았다. 그 목록이 『월주록(越州錄)』이다. 태주와 월주를 합해 사이초가 가져온 책은 이백삼십 부 사백육십 권에 이른다.
5월 18일, 사이초는 명주에서 귀국선에 올라 6월 5일 쓰시마에 닿았다. 7월에 도읍에 돌아와 복명하고, 가져온 책의 목록을 올렸다. 떠난 지 열한 달, 당에 머문 것은 여덟 달 반이었다. 같은 사절단의 구카이는 아직 장안에 있었다. 구카이는 장안 청룡사의 혜과(惠果)에게 밀교의 두 계통을 모두 받고, 이듬해 가을에야 돌아온다.
이 짧은 밀교 수학은 뒤의 전교에게 큰 무게가 된다. 귀국한 사이초를 조정은 밀교의 전수자로 맞았고, 그는 곧 궁중과 다카오산사에서 관정을 행해야 했다(13절). 그러나 그가 받은 밀교는 월주에서 한 달 남짓 받은 것이었다. 이 틈이 뒤에 구카이와의 관계를 낳고(14절), 에이잔 안에서 밀교의 비중이 커지는 흐름의 씨앗이 된다(22절).
네 가지 상승 — 원 · 밀 · 선 · 계
사이초가 당에서 받아 온 것을 에이잔에서는 네 가지 상승(四種相承), 곧 원(圓) · 밀(密) · 선(禪) · 계(戒)라 부른다.
- 원 — 천태의 법화원교. 도수 · 행만에게 받았다.
- 밀 — 밀교. 월주의 순효에게 받았다.
- 선 — 달마 계통의 선. 일본에서 교효에게 북종선을 받았고, 당에서 소연에게 우두선을 받았다.
- 계 — 대승보살계(원교의 보살계). 도수에게 받았다.
사이초는 뒤에 남도의 반론에 답하며, 자신이 받은 법이 어디서 왔는지를 계보로 적어 조정에 올렸다.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다(819년 무렵). 이 책에는 선 · 천태법화종 · 천태원교보살계 · 태장금강 양만다라 · 잡만다라의 다섯 계보가 실려 있다. 남도의 승강이 사이초의 법에 근거가 없다고 공격하자, 그는 스승에서 스승으로 이어진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보인 것이다.
네 가지를 한 사람이 받아 한 산에 모은 것은 일본 천태종의 큰 특징이 되었다. 에이잔은 법화경을 중심에 두면서도 밀교와 선과 계율을 함께 배우는 산이 되었고, 뒤에 여기서 정토와 선과 법화의 새 불교가 모두 나왔다. 연구자들은 이를 「종합 불교」로서의 에이잔이라 부른다. 그러나 대성인이 보신 전교는 네 가지를 나란히 놓은 사람이 아니었다. 대성인은 전교가 당에서 진언을 배워 오셨으나 「대일경은 법화경에 못하다고 아시어 팔종으로 하지 않으시고, 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법화종 안에 넣어 칠종으로 하셨다」고 하셨다(「보은초」, 304쪽 · 6부 26절).
그렇다면 전교는 무엇을 위해 바다를 건넜는가. 대성인은 이렇게 보셨다.
伝教大師は日本国にして十五年が間・天台真言等を自見せさせ給う生知の妙悟にて師なくしてさとらせ給いしかども、世間の不審をはらさんがために漢土に亘りて天台真言の二宗を伝へ給いし時漢土の人人はやうやうの義ありしかども我が心には法華は真言にすぐれたりとをぼしめししゆへに真言宗の宗の名字をば削らせ給いて天台宗の止観・真言等かかせ給う
전교대사는 일본국에서 십오 년 동안 천태 · 진언 등을 스스로 보셨다. 나면서부터 아는 묘한 깨달음으로 스승 없이 깨달으셨으나, 세간의 의심을 풀기 위해 중국에 건너가 천태 · 진언의 두 종을 전하셨다. 그때 중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뜻을 말했으나, 자신의 마음으로는 법화가 진언보다 뛰어나다고 여기셨으므로, 진언종의 「종」이라는 이름을 깎으시고 「천태종의 지관 · 진언」 등으로 쓰셨다.
대성인이 보신 입당은 깨닫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전교는 이미 에이잔의 십오 년 동안 경과 논을 스스로 읽고 법화경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입당은 그 깨달음이 중국 천태의 정통과 같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한 것, 곧 「세간의 의심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하산어소식」도 같은 뜻으로, 전교가 법화와 진언의 우열을 이미 마음속에 정하셨으나 「세간의 의심을 풀기 어려웠으므로」 입당하셨고, 중국 사람들도 두 종의 우열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고 하신다(352쪽).
연구 노트 — 사이초의 입당을 두고 근대의 연구는 두 가지 평가를 함께 내린다. 하나는 여덟 달 반의 짧은 기간에 천태의 정통 계승자들에게 직접 법을 받고, 이백삼십 부의 책을 가져와 일본 천태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다. 다른 하나는 특히 밀교에서 그 수학이 짧고 부분적이었으며, 이것이 뒤에 에이잔이 밀교를 보강하려 엔닌 · 엔친을 당에 보내는 흐름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22절). 『내증불법상승혈맥보』의 선의 계보에 대해서는, 사이초가 남도에 맞서 자신의 법이 여러 방면에서 정통임을 보이려 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있다.
대성인은 가마쿠라에서 사도까지 천 리 길을 걸어 찾아온 여성 신도 오토고제의 어머니, 곧 일묘(日妙)에게 현장과 전교의 구도를 들어 말씀하셨다. 현장과 전교는 남자이고, 옛사람이고, 현인이며 성인이다. 그러나 여인이 법을 구해 천 리 길을 헤쳐 왔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고 하신 것이다(「일묘성인어서」, 1216쪽). 파도 삼천 리를 건넌 전교의 구도는 대성인에게 구도의 본보기였고, 그 본보기는 이름 없는 재가의 여성에게서 다시 살아났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구도의 마음이 성별이나 신분, 학문의 크기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세간의 의심을 풀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는 대성인의 해석에서, 자신이 깨달은 법을 세상이 납득할 수 있는 근거로 보여 주려는 노력, 곧 법을 넓히는 사람의 책임을 읽는다.
연분도자 두 사람 — 806년 1월 26일
805년 7월, 사이초가 돌아왔을 때 간무 천황은 병상에 있었다. 조정이 가장 먼저 기대한 것은 천태가 아니라, 당에서 새로 들어온 밀교의 힘이었다. 9월, 칙명으로 다카오산사에 관정의 단이 세워졌고, 사이초는 남도의 고승들에게 관정을 주었다. 일본에서 공식으로 행해진 첫 관정이다. 궁중에서도 천황의 쾌유를 비는 밀교의 수법이 행해졌다.
그러나 사이초가 조정에 청한 것은 따로 있었다. 806년(엔랴쿠 25년) 정월, 그는 해마다 득도하는 승려의 제도를 고쳐 천태법화종을 더해 달라는 표를 올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물눈 하나로는 새를 잡을 수 없고, 한두 종으로 어찌 널리 길어 올리겠는가(一目之羅 不能得鳥 一兩之宗 何足普汲)」. 여러 종이 함께 있어야 불법이 온전하다는 논리였다. 남도의 여섯 종을 부정하지 않고, 그 곁에 천태를 세워 달라는 것이다.
1월 26일, 태정관부(太政官符)가 내려졌다. 해마다 득도하는 승려 열두 사람을 종별로 나누어, 화엄 두 사람, 천태법화 두 사람, 율 두 사람, 삼론 세 사람(성실 한 사람 포함), 법상 세 사람(구사 한 사람 포함)으로 정한 것이다. 천태법화종의 두 사람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마하지관』을 읽는 지관업(止觀業) 한 사람, 『대비로자나경(대일경)』을 읽는 차나업(遮那業) 한 사람이다. 천태법화종이 조정이 인정하는 종이 된 날이다. 에이잔은 지금도 이날을 천태종이 열린 날로 기념한다. 석 달 뒤인 3월 17일, 간무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대성인은 이 제도를 전교의 뜻에서 읽으셨다. 전교는 진언을 따로 한 종으로 세우지 않고 「천태종의 지관 · 진언」으로 두었으며, 「십이 년의 연분득도자 두 사람을 두시고, 거듭 지관원에 법화경 · 금광명경 · 인왕경의 세 부를 진호국가의 세 부로 정해 선지를 받아 내리시어, 길이 일본국 제일의 보배인 신새 · 보검 · 내시소처럼 받드셨다(永代・日本国の第一の重宝・神璽・宝剣・内侍所とあがめさせ給いき)」(「찬시초」, 280쪽). 법화경이 나라를 지키는 경의 첫자리에 놓인 것이다.
806.1.26 태정관부— 에이잔의 개종일
그러나 이 제도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 천태의 연분도자도 득도한 뒤에는 남도의 계단, 곧 도다이지에서 소승의 이백오십 계를 받아야 정식 승려가 되었다. 계를 받으러 나라에 간 젊은 승려 가운데 많은 이가 에이잔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이초가 뒤에 정리한 명단에 따르면, 807년부터 818년까지 천태의 연분도자로 득도한 스물네 사람 가운데 산에 남아 수행한 사람은 열 사람 남짓이었고, 나머지는 법상종으로 옮겨 가거나 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산을 떠났다. 천태의 학생을 천태의 산에서 끝까지 기르려면 계를 주는 자리부터 에이잔에 있어야 했다. 대승계단의 운동은 이 현실에서 시작되었다(17절).
구카이 — 교류와 결별
806년 10월, 구카이(空海, 774–835)가 당에서 돌아왔다. 같은 사절단의 첫째 배로 건너간 그는 장안 청룡사의 혜과(惠果)에게서 금강계와 태장계, 밀교의 두 계통을 모두 받고 두 해 만에 돌아왔다. 스무 해를 머물기로 한 유학생이 기한을 어긴 것이어서 한동안 다자이후에 머물러야 했고, 809년에야 도읍에 들어와 다카오산사에 자리 잡았다.
사이초는 구카이보다 일곱 살 위였고, 이미 조정이 인정하는 천태법화종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구카이가 훨씬 깊이 배웠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차나업의 학생을 가르치려면 밀교의 경전과 법이 더 필요했다. 809년부터 사이초는 구카이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가져온 밀교의 경전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구카이는 여러 차례 경전을 빌려주었다.
812년 겨울, 사이초는 다카오산사에서 구카이에게 관정을 받았다. 11월 15일에는 금강계, 12월 14일에는 태장계의 결연관정(結緣灌頂)이었다. 결연관정은 밀교와 인연을 맺는 입문의 관정이다. 제자 엔초 · 고조 · 다이한 등도 함께 받았다. 천태법화종의 지도자가 일곱 살 아래의 승려에게 제자의 예를 갖춘 것이다. 사이초는 이어서 법을 전할 수 있는 아사리의 관정(전법관정)을 청했으나, 구카이는 그러려면 몇 해 동안 수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813년 무렵부터 멀어졌다. 그해 11월 사이초가 『이취석경(理趣釋經)』을 빌려 달라고 하자, 구카이는 긴 편지로 거절했다. 밀교의 깊은 뜻은 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며, 수행 없이 글만 빌려 읽는 것은 법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는 취지였다. 책으로 배우고 책으로 전하려는 사이초와, 스승과 제자가 몸으로 전하는 밀교의 전수를 고집한 구카이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결별을 굳힌 것은 제자 다이한(泰範)의 일이었다. 사이초가 아끼던 제자 다이한은 812년 무렵부터 구카이 곁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다. 사이초는 여러 차례 편지로 돌아오라고 청했다. 816년 사이초의 편지에 대해 구카이가 다이한을 대신해 쓴 답장은, 법화의 일승과 진언의 일승은 깊이가 다르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다이한은 끝내 에이잔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두 사람의 교류는 끊긴다.
바로 그해, 사이초는 한 권의 책에 서문을 붙였다. 『의빙천태집(依憑天台集)』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여러 종의 조사들이 천태의 교학에 의지했다는 증거를 모은 책으로, 813년에 엮고 816년에 서문을 썼다. 그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새로 온 진언가는 필수(筆授)의 상승을 없애고, 예전에 온 화엄가는 영향의 규범을 감춘다(新来の真言家は則ち筆授の相承を泯し旧到の華厳家は則ち影響の軌範を隠し)」. 「새로 온 진언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했다. 대성인은 이 책을 「대사 제일의 비서(大師第一の秘書)」라 하시고, 그 서문을 길게 인용하셨다(「보은초」, 307–308쪽 · 6부 26절).
| 항목 | 사이초 最澄 | 구카이 空海 |
|---|---|---|
| 생몰 | 767–822 | 774–835 |
| 입당 | 804 둘째 배 · 환학생 | 첫째 배 · 유학생 |
| 당에 머문 기간 | 8개월 반 | 약 2년 |
| 주요 스승 | 도수 · 행만 · 순효 | 혜과 |
| 본거지 | 에이잔 | 다카오산사 → 고야산 · 도지 |
| 세운 종 | 천태법화종 806 | 진언종 · 도지 823 |
| 주요 저작 | 『수호국계장』 · 『현계론』 · 『법화수구』 | 『변현밀이교론』 · 『십주심론』 · 『비장보약』 |
| 시호 | 전교대사 866 | 홍법대사 921 |
| 대성인의 평가 | 삼국사사「日本の始第一の根本大師」 보은초 310 | 「天下第一の自讃毀他の大妄語の人」 하산어소식 353 |
- 생몰
- 사이초767–822구카이774–835
- 입당
- 사이초804 둘째 배 · 환학생구카이첫째 배 · 유학생
- 당에 머문 기간
- 사이초8개월 반구카이약 2년
- 주요 스승
- 사이초도수 · 행만 · 순효구카이혜과
- 본거지
- 사이초에이잔구카이다카오산사 → 고야산 · 도지
- 세운 종
- 사이초천태법화종 806구카이진언종 · 도지 823
- 주요 저작
- 사이초『수호국계장』 · 『현계론』 · 『법화수구』구카이『변현밀이교론』 · 『십주심론』 · 『비장보약』
- 시호
- 사이초전교대사 866구카이홍법대사 921
- 대성인의 평가
- 사이초삼국사사「日本の始第一の根本大師」 보은초 310구카이「天下第一の自讃毀他の大妄語の人」 하산어소식 353
- 806.10구카이 귀국혜과에게 두 계통
- 809입경 · 경전 차람 시작다카오산사
- 812.11.15금강계 결연관정다카오산사
- 812.12.14태장계 결연관정엔초 · 고조 · 다이한 등
- 813.11『이취석경』 거절구카이의 긴 편지
- 813『의빙집』 편찬813 엮음
- 816다이한의 답장 · 『의빙집』 서문「새로 온 진언가」
- 결별이 무렵부터 교류가 끊김
연구 노트 — 사이초와 구카이의 결별은 근대 이후 많은 연구와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두 사람의 밀교관의 차이, 곧 경전을 읽어 이해하는 것을 중시한 사이초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수행과 전수를 중시한 구카이의 차이를 원인으로 든다. 다이한의 일을 두고는 다이한이 스스로 구카이의 밀교에 끌렸다는 견해와, 에이잔 안의 사정 때문에 떠났다는 견해가 있다. 『이취석경』을 거절한 구카이의 편지는 구카이의 문집 『성령집(性靈集)』에 실려 전한다. 한편 대성인은 구카이를 「천하 제일의 자찬훼타의 대망어인」이라 하시고(「하산어소식」, 353쪽), 그가 법화경을 화엄경보다도 아래에 둔 「십주심」의 교판을 엄하게 깨뜨리셨다(「보은초」, 305쪽). 대성인은 두 사람의 결별을 따로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전교대사가 살아 계셨다면 한마디 하셨을 일이다(伝教大師・御存生ならば一言は出されべかりける事なり)」라고 하셨다(「보은초」, 305쪽).
규슈와 동국 — 순화의 길
814년(고닌 5년) 봄, 사이초는 규슈로 내려갔다. 열 해 전 바다를 건너기 전에 세운 서원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젠의 우사 하치만궁과 가와라(香春)의 신궁사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다. 『대사전』은 우사에서 법화경을 강의하자 하치만 대보살이 크게 기뻐하며 자줏빛 가사를 내려 주었다고 전한다. 대성인도 이 이야기를 여러 번 드셨다. 「전교대사가 이것(법화경)을 강의하시니 하치만 대보살이 자줏빛 가사를 보시하셨다」(「지묘법화문답초」, 467쪽). 다쓰노구치로 끌려가던 밤, 대성인은 하치만 대보살에게 이렇게 따지셨다. 「전교대사가 법화경을 강의하실 때는 자줏빛 가사를 보시로 주셨다. 지금 니치렌은 일본 제일의 법화경의 행자다」(「종종어진무어서」, 913쪽).
817년(고닌 8년) 봄, 사이초는 동국으로 떠났다. 고즈케(지금의 군마현)의 미도노데라(綠野寺)와 시모쓰케(지금의 도치기현)의 대자사(大慈寺)가 그 거점이었다. 모두 감진의 제자 도추의 문하가 지키던 절이다. 스무 해 전 일체경 서사에 이천 권을 보태 주었던 그 도추의 제자들이, 이제 사이초를 스승으로 맞았다. 사이초는 이곳에서 법화경을 강의하고, 많은 사람에게 보살계와 관정을 주었다. 『대사전』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이 수만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도추 문하에서 에이잔에 들어온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뒤에 에이잔을 이끈다. 무사시 출신의 엔초(圓澄, 772–837)는 제2대 좌주가 되었다. 시모쓰케 대자사의 고치(廣智)에게 배우던 소년 엔닌(圓仁, 794–864)은 808년 열다섯 살에 에이잔에 올라 사이초의 제자가 되었고(「본존문답초」, 368쪽), 이 동국 순화에 스승을 따라 고향에 돌아왔다. 그가 뒤의 자각대사, 에이잔의 제3대 좌주다(22 · 32절).
이 무렵 사이초는 일본 여섯 곳에 탑을 세우고 탑마다 법화경 천 부를 모시겠다는 원을 세웠다. 동쪽은 고즈케, 북쪽은 시모쓰케, 서쪽과 남쪽은 규슈의 지쿠젠과 부젠, 가운데는 에이잔이다. 여섯 곳의 보탑(六所寶塔)으로 나라 전체를 법화경으로 지키려는 구상이었다. 모두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법화경으로 나라를 덮으려는 그의 뜻을 보여 준다.
대성인은 전교가 법화경으로 비를 빈 일도 드셨다. 「천태대사가 법화경을 읽어 『잠깐 사이에 단비를 내려라』 하시고, 전교대사가 사흘 안에 감로의 비를 내리셨던 것도, 그것으로 부처의 뜻에 맞는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보은초」, 319쪽). 기도의 영험은 법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기준이 아니라는 가르침 가운데 나온 말이다.
- 814규슈 순화 — 에이잔에서우사 하치만궁 · 가와라 신궁사 · 가마도산
- 817동국 순화 — 에이잔에서고즈케 미도노데라 · 시모쓰케 대자사
- 전승여섯 보탑의 자리고즈케 · 시모쓰케 · 지쿠젠 · 부젠 · 에이잔 두 곳 — 위치 확인 중

연구 노트 — 동국 순화의 연대는 『대사전』을 따라 817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섯 보탑을 세우려는 원문(「육소조보탑원문」)은 818년의 것으로 전하며, 여섯 곳의 이름과 위치는 전하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전교의 기우(祈雨)는 『대사전』 등에 818년 무렵의 가뭄 때 일로 전하는 기록이 있으나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우사의 자줏빛 가사 이야기는 『대사전』에 실린 전승이며, 에이잔에 그 가사로 전하는 유물이 있었다고 한다.
삼일권실 — 도쿠이치와의 논쟁
동국에는 또 한 사람의 이름난 승려가 있었다. 법상종의 도쿠이치(得一, 德一이라고도 쓴다)다. 나라의 고후쿠지 · 도다이지에서 배운 뒤 젊어서 동국으로 내려가, 무쓰의 아이즈(會津)와 히타치의 쓰쿠바 일대에 절을 세우고 교화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살」이라 불렀다. 그는 구카이에게도 진언의 교리에 대한 의문 열한 조를 적어 보낸 학승이었다.
817년 무렵, 도쿠이치는 『불성초(佛性抄)』를 지어 천태의 법화경 해석을 비판했다. 사이초는 동국에 머물던 그해 『조권실경(照權實鏡)』으로 답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논쟁은 사이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다섯 해 동안 이어졌다. 도쿠이치가 한 권을 쓰면 사이초가 그것을 인용해 반박하는 식이었다. 사이초의 『수호국계장(守護國界章)』 아홉 권(818), 『결권실론(決權實論)』, 『통육구증파비량문(通六九證破比量文)』, 그리고 마지막 『법화수구(法華秀句)』 세 권(821)이 이 논쟁에서 나왔다. 일본 불교사에서 가장 크고 깊은 교리 논쟁이다.
쟁점은 법화경이 말하는 「일승」이 진실인가 방편인가였다. 이를 「삼일권실(三一權實)」의 논쟁이라 한다.
- 법상종 도쿠이치의 입장 —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이 진실이고, 법화경의 일승은 방편이다. 중생의 근기는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어(오성각별, 五性各別), 성문이 될 사람 · 연각이 될 사람은 끝내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불성의 씨앗이 없는 사람(무성유정)도 있다. 법화경이 모든 이의 성불을 말한 것은 성문 · 연각 가운데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을 대승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해심밀경』이 말하는 유(有) · 공(空) · 중도(中道)의 세 시기로 나뉘며, 법화경은 그 가운데 하나다.
- 천태법화종 사이초의 입장 — 일승이 진실이고 삼승은 방편이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어 누구나 부처가 된다(실유불성). 법화경은 석존이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未顯眞實)」고 스스로 밝힌 뒤에 설한 진실의 경이다. 법화경의 성불은 오랜 겁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이 몸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能化所化倶に歴劫無し妙法経力・即身成仏す「여인성불초」 472–473쪽
논쟁은 날카로웠다. 도쿠이치는 천태를 향해 이렇게 썼다. 「쯧쯧, 지공(智公, 천태)이여, 그대는 누구의 제자인가. 세 치도 안 되는 혀로 얼굴을 덮는 혀(부처)가 설한 교시를 비방하는가(咄いかな智公汝は是れ誰が弟子ぞ、三寸に足らざる舌根を以て覆面舌の所説の教時を謗ず)」(「관심본존초」, 244쪽 · 「개목초」, 201쪽). 천태를 두고 「미친 사람이 아닌가(豈是れ顚狂の人に不ずや)」라고도 했다(「법화행자봉난사」, 966쪽). 사이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도쿠이치를 「지금의 거친 음식을 먹는 자(麤食者)」라 부르며 「거짓된 글 몇 권을 지어 법을 비방하고 사람을 비방한다(偽章数巻を作りて、法を謗じ人を謗ず)」고 했다(「지묘법화문답초」, 463쪽).
대성인은 이 논쟁의 한 장면을 이렇게 전하셨다. 도쿠이치가 「천태대사는 『해심밀경』의 삼시교를 깨뜨렸다. 세 치의 혀로 다섯 자의 몸을 끊어야 한다」고 욕하자, 전교는 이렇게 바로잡았다. 「『해심밀경』은 당나라 초에 현장이 옮긴 것이다. 천태는 진 · 수의 사람이다. 천태가 입멸하고 몇 해가 지나서야 『해심밀경』이 건너왔다. 죽은 뒤에 건너온 경을 어떻게 깨뜨리겠는가」(「찬시초」, 277–278쪽). 도쿠이치의 비판이 연대조차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이초가 마지막으로 쓴 『법화수구』는 법화경이 다른 모든 경보다 뛰어난 까닭을 열 가지로 모았다(법화십승, 法華十勝). 대성인은 그 가운데 하나를 특히 드셨다. 「전교대사는 법화경이 일체경을 넘어 뛰어난 것을 열 가지 모으신 가운데 즉신성불화도승(即身成佛化導勝)이 이것이다」(「상야전어반사(도장난사)」, 1556쪽). 여덟 살의 용녀가 법화경을 듣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된 제바달다품의 이야기다. 사이초는 이렇게 풀었다. 「교화하는 용녀도 겁을 거치는 수행이 없고, 교화받는 중생도 겁을 거치는 수행이 없다. 교화하는 이와 교화받는 이 모두 겁을 거침이 없이, 묘법의 경의 힘으로 이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能化の竜女歴劫の行無く所化の衆生も歴劫の行無し能化所化倶に歴劫無し妙法経力・即身成仏す)」(「여인성불초」, 472–473쪽 · 「성우문답초」, 499쪽). 법상종이 성불을 끝없는 겁의 저편에 두었다면, 사이초는 그것을 법화경의 힘으로 지금 이 몸에 두었다.
그리고 『법화수구』에서 사이초는 법화경과 그 경을 지니는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이 논쟁 전체의 매듭이라 할 만한 글이다.
当に知るべし他宗所依の経は未だ最為第一ならず其の能く経を持つ者も亦未だ第一ならず天台法華宗は所持の経最為第一なるが故に能く法華を持つ者も亦衆生の中に第一なり、已に仏説に拠る豈自歎ならんや
마땅히 알라. 다른 종이 의지하는 경은 아직 가장 제일이 아니므로, 그 경을 지니는 사람도 아직 제일이 아니다. 천태법화종이 지니는 경은 가장 제일이므로, 법화경을 지니는 사람도 중생 가운데 제일이다. 이미 부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니, 어찌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겠는가.
연구 노트 — 도쿠이치의 저작은 대부분 전하지 않고, 사이초가 반박하며 인용한 대목으로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근대의 연구는 사이초의 저작 속 인용을 모아 도쿠이치의 논지를 복원하는 데서 출발했다. 도쿠이치가 법상종의 입장만 대변한 것이 아니라, 천태 교학의 약점을 날카롭게 짚은 뛰어난 학승이었다는 평가도 많다. 이 논쟁은 사이초의 입멸로 끝나지 않고, 963년 궁중에서 열린 천태와 법상의 대론(오와의 종론) 등으로 이어졌다. 어서는 도쿠이치가 전교에게 책망받고 「혀가 여덟으로 찢어져 죽었다(舌八にさけて死し候いぬ)」고 전한다(「찬시초」, 277–278쪽 · 「지묘법화문답초」, 463쪽 · 「법화초심성불초」, 540쪽). 법화경을 비방한 과보를 말하는 에이잔의 전승으로 보이며, 도쿠이치의 만년을 전하는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법화수구』의 이 글을 인용한 뒤 대성인은 이렇게 이어 가셨다. 「『어찌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겠는가』라는 해석을 마음에 새기는가. 그렇다면 법화경을 경대로 지니는 사람은 범천보다도 뛰어나고 제석보다도 넘어선다」(「찬시초」, 290–291쪽). 전교에게 법화경의 우위는 책상 위의 교판이 아니었다. 경이 제일이면 그 경을 지니는 사람이 제일이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고 누구나 이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주장은, 도쿠이치와의 논쟁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에 대한 주장이 되었다. 창가학회는 이 「능지차경(能持此經)」의 자각을 신앙의 기초로 삼는다. 묘법을 지니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출 까닭이 없다. 그것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각은, 남을 「성불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믿음과 한 몸이다.
「국보란 무엇인가」 — 『산가학생식』
818년(고닌 9년) 봄, 쉰둘의 사이초는 대중 앞에서 스스로 서원하여, 서른세 해 전 도다이지에서 받은 이백오십 계를 버렸다. 대성인은 이 일을 전교 자신의 말로 전하셨다. 「이백오십 계를 문득 버려 마쳤다(二百五十戒忽ちに捨て畢んぬ)」(「하산어소식」, 345쪽). 국가가 인정한 비구의 자격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계를 버린 승려는 남도의 눈으로 보면 더 이상 승려가 아니었다. 사이초는 그 자리에 대승의 계, 곧 범망경의 보살계만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세우려 했다.
그해 5월 13일, 사이초는 천황에게 『천태법화종연분학생식(天台法華宗年分學生式)』을 올렸다. 여섯 조로 되어 있어 「육조식(六條式)」이라 부른다. 그 첫머리는 일본 불교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글 가운데 하나다.
國寶何物 寶道心也 有道心人 名爲國寶 故古人言 徑寸十枚 非是國寶 照千一隅 此則國寶
나라의 보배란 무엇인가. 보배란 도심(道心)이다. 도심이 있는 사람을 나라의 보배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말했다. 지름 한 치의 구슬 열 개가 나라의 보배가 아니다. 천 리를 비추고 한 모퉁이를 지키는 사람, 이것이 곧 나라의 보배다.
이어서 사이초는 옛 현인의 말을 빌려 사람을 셋으로 나눈다. 「말할 수 있으나 행하지 못하는 이는 나라의 스승(國師)이요, 행할 수 있으나 말하지 못하는 이는 나라의 쓰임(國用)이며,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이는 나라의 보배(國寶)다」. 말도 행도 못 하는 이는 「나라의 도적」이다. 그리고 도심이 있는 불자를 「서쪽(인도)에서는 보살이라 부르고, 동쪽(중국)에서는 군자라 부른다」 하고, 그 마음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쁜 일은 자신에게 돌리고 좋은 일은 남에게 주며, 자신을 잊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비의 극치다(忘己利他 慈悲之極)」.
육조식이 정한 것은 이렇다. 천태법화종의 연분도자 두 사람은 득도한 해에 대승의 계를 받아 보살승이 된다. 계를 받은 뒤 열두 해 동안 산문을 나가지 않고(십이년 농산, 十二年籠山), 지관업은 『마하지관』의 네 가지 삼매를 닦으며 법화경 · 금광명경 · 인왕경을 늘 읽고 강의하고, 차나업은 밀교의 경을 늘 염송한다. 열두 해가 지나면 능력에 따라 나라의 보배는 산에 남아 대중을 이끌고, 나라의 스승과 나라의 쓰임은 여러 지방의 강사가 된다. 지방에 나간 이들은 받은 녹봉으로 못과 도랑을 고치고, 거친 땅을 일구고, 다리와 배를 만들고, 나무와 삼을 심고, 우물을 파서 물을 끌어오는 등 나라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에 쓴다.
8월 27일에는 「팔조식(八條式)」을, 이듬해 819년 3월 15일에는 「사조식(四條式)」을 올렸다. 사조식은 대승계단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정면으로 밝혔다. 인도에는 대승만 배우는 절(一向大乘寺), 소승만 배우는 절(一向小乘寺), 대소승을 함께 배우는 절(大小兼行寺)이 있다. 대승의 절에서는 문수보살을 상좌로 모시고, 대승의 계만으로 승려가 된다. 에이잔은 일향대승사이므로 소승의 계단이 아니라 대승의 계단에서 계를 주어야 한다. 대승의 계는 관보현경에 따라 석가모니불을 계화상(戒和上)으로, 문수보살을 갈마사로, 미륵보살을 교수사로, 시방의 부처를 증명사로, 시방의 보살을 함께 배우는 벗으로 모시고, 눈앞에서는 계를 전하는 스승 한 사람이 계를 준다. 남도의 계단이 열 사람의 승려(삼사칠증)를 필요로 한 것과 달리, 대승의 계는 부처와 보살을 스승으로 삼는다.
대성인은 뒤에 이 「세 가지 절」의 구분을 그대로 쓰셨다. 「천축의 관습에는 일향 소승의 절에 있는 이는 왕의 길을 걷지 않고, 일향 대승의 승려는 좌우의 길을 밟는 일이 없다 …… 대소를 겸해 행하는 절은 후심의 보살이다」(「하산어소식」, 344쪽). 일향 대승의 나라 일본에서 소승의 계를 강요하는 것은 「보배 그릇에 더러운 음식을 담는 것과 같다(宝器に穢食を入れたるが如し)」고 하시고, 「보배 그릇의 비유는 전교대사의 『수호장(수호국계장)』에 있다」고 밝히셨다(「교기시국초」, 441쪽).
나라의 보배란 무엇인가 — 보배란 도심이다
말도 행도 못 하는 이 = 국적 — 나라의 도적
자신을 잊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비의 극치다
연구 노트 — 「照千一隅」는 오랫동안 「一隅を照らす(한 모퉁이를 비춘다)」로 읽혀 왔고, 천태종은 지금도 「일우를 비추는 운동」을 펴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소노다 고유가 사이초의 친필본에 「千」으로 적혀 있음을 들어, 이 구절이 『사기』의 고사(위나라 왕이 수레 열둘을 비추는 구슬을 자랑하자, 제나라 위왕이 「나의 보배는 천 리를 비추는 신하들이다」라고 답한 이야기)를 따른 「천 리를 비추고 한 모퉁이를 지킨다」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지름 한 치의 구슬 열 개」가 바로 그 고사의 구슬이다. 이 읽기는 지금 많은 연구자가 따르지만, 「千」을 「于」의 이체로 보아 전통의 읽기를 지키는 견해도 있다. 이 페이지는 원문의 글자대로 「照千一隅」로 쓰고, 두 읽기를 함께 적는다.
남도의 반론과 『현계론』
조정은 사조식을 승강(僧綱)에 보내 의견을 물었다. 승강은 나라 전체의 승려를 감독하는 기구로, 그 우두머리는 법상종의 대승도 고묘(護命, 750–834)였다. 819년 5월, 승강은 반대하는 표를 올렸다. 인도에도 중국에도 대승의 계만으로 비구가 된 예는 없다. 문수를 상좌로 모신 절도 없다. 사이초는 당에 갔으나 도읍 장안을 보지 못하고 변두리 고을에만 머물렀으니, 그가 전한 것은 당의 정통이 아니다. 그리고 표는 사이초를 이렇게 불렀다. 인도에는 귀신의 힘으로 변론하던 바라문이 있었고, 동쪽 나라에는 교묘한 말을 내뱉는 까까머리 사문이 있다.
사이초는 이듬해 820년(고닌 11년) 2월 29일, 『현계론(顯戒論)』 세 권을 지어 천황에게 올렸다. 승강의 표를 한 구절씩 인용하고, 그 하나하나에 경 · 율 · 논과 중국의 문헌에서 근거를 들어 답한 책이다. 인도와 중국에도 대승만 배우는 절이 있었고, 문수를 상좌로 모신 예가 있으며, 대승의 계만으로 승려가 되는 것은 경전에 근거가 있다. 사이초는 입당 때의 통행 문서와 스승들에게서 받은 증명서를 모아 『현계론연기(顯戒論緣起)』 두 권을 만들고, 앞서 본 『내증불법상승혈맥보』를 함께 올렸다. 당의 도읍을 보지 않았다는 비난에는, 법은 도읍이 아니라 스승에게서 받는 것이라 답했다.
대성인은 『현계론』의 이 대목을 「개목초」에서 인용하셨다. 법화경의 행자가 받는 난을 경문으로 증명하시는 자리다.
顕戒論に云く「僧統奏して曰く西夏に鬼弁婆羅門有り東土に巧言を吐く禿頭沙門あり、此れ乃ち物類冥召して世間を誑惑す」等云云、論じて曰く「昔斉朝の光統に聞き今は本朝の六統に見る、実なるかな法華に何況するをや」等云云
『현계론』에 이르기를 「승통이 아뢰어 말하기를, 서쪽 나라에는 귀신의 힘으로 변론하는 바라문이 있었고 동쪽 나라에는 교묘한 말을 내뱉는 까까머리 사문이 있다. 이는 같은 무리가 은밀히 서로 불러 세간을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이를 논하여 이르기를 「옛날에는 제나라의 광통에게서 들었고, 지금은 이 나라의 여섯 승통에게서 본다. 참되도다, 법화경이 『하물며』라고 하신 말씀이여」 하였다.
「법화경이 『하물며』라고 하신 말씀」은 법사품의 「여래가 계신 때에도 오히려 원망과 시기가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이겠는가(如來現在猶多怨嫉 況滅度後)」다. 사이초는 승강의 비난을 받으며 자신이 바로 이 경문을 몸으로 읽고 있다고 답한 것이다. 「법화행자봉난사」는 이때 전교를 비난한 사람들을 「남도 칠대사의 고덕 · 고묘 승도 · 게이신 율사 등 삼백여 인」이라 전한다(966쪽).
그러나 조정은 결정을 미루었다. 사가 천황(嵯峨天皇, 재위 809–823)은 사이초를 존중했으나, 남도의 승강 전체를 거스르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이 사이 조정과 에이잔을 오가며 허가를 위해 힘쓴 사람이 제자 고조다. 조정 안에서는 우대신 후지와라노 후유쓰구(藤原冬嗣), 요시미네노 야스요(良岑安世), 오토모노 구니미치(大伴國道) 등이 사이초를 도왔다. 구니미치는 어서가 802년 다카오의 일에서 칙사로 전하는 「구니미치」와 이름이 같다(「찬시초」, 272쪽).
| 승강의 반론 819.5 | 『현계론』의 답 820.2.29 |
|---|---|
| 대승의 계만으로 승려가 된 예가 없다 | 인도와 중국에도 대승만 배우는 절이 있었다 · 대승의 계만으로 승려가 되는 것은 경전에 근거가 있다원문 확인 중 |
| 문수를 상좌로 모신 절은 없다 | 문수를 상좌로 모신 예가 있다원문 확인 중 |
| 사이초는 당의 도읍을 보지 못했다 | 법은 도읍이 아니라 스승에게서 받는다 — 『현계론연기』 · 『혈맥보』를 함께 올림원문 확인 중 |
| 「西夏に鬼弁婆羅門有り東土に巧言を吐く禿頭沙門あり」 | 「昔斉朝の光統に聞き今は本朝の六統に見る」 |
況滅度後법사품「개목초」 201쪽 · 「법화행자봉난사」 966쪽

연구 노트 — 『현계론』은 승강의 반론을 한 조씩 인용하고 「논하여 말한다(論じて曰く)」로 답하는 형식이다. 그 안에 인용된 승강의 표 덕분에 남도의 반론도 오늘날 알 수 있다. 「광통」은 북제의 율사 혜광(慧光)을 가리키며, 새로운 가르침을 편 이를 박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인물이다. 사이초가 그 이야기의 어느 대목을 염두에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주석가마다 설명이 조금씩 다르다. 「게이신 율사」는 남도의 율사로, 「법화행자봉난사」가 전하는 이름이다.
입멸과 칙허 — 822년 6월
821년 사이초는 도쿠이치와의 논쟁을 매듭짓는 『법화수구』를 썼다. 이듬해 봄, 그는 다시 대승계단을 청하는 표를 올렸다. 그리고 4월, 병이 깊어졌다. 『대사전』은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말을 전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이 구절이다.
爲我莫作佛 爲我莫寫經 述我志
나를 위해 불상을 만들지 말라. 나를 위해 경을 베끼지 말라. 나의 뜻을 펴라.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불상을 조성하고 경을 베껴 공덕을 돌리는 것이 관례였다. 사이초는 그것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바란 것은 추선이 아니라, 대승의 계단을 세우고 법화경을 이 나라에 넓히려던 자신의 뜻을 잇는 것이었다. 『대사전』은 또 「원한으로 원한을 갚으면 원한이 그치지 않고,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원한이 곧 다한다」는 말을 그의 가르침으로 전한다. 남도와 다섯 해를 다툰 사람의 마지막 당부였다. 그는 제자 기신에게 에이잔의 일을 맡겼다.
822년(고닌 13년) 6월 4일 아침, 사이초는 에이잔의 중도원(中道院)에서 세상을 떠났다. 쉰여섯 살이었다. 대성인도 「전교대사는 사가 천황의 고닌 13년 6월 4일에 입멸하셨다」고 날짜를 적으셨다(「보은초」, 305쪽).
이레 뒤인 6월 11일, 조정은 에이잔에 대승계단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는 태정관부를 내렸다. 천태법화종의 연분도자는 에이잔에서 대승의 계를 받고, 열두 해 동안 산에서 수행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이초가 살아서 끝내 받지 못한 허가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내려진 것이다. 후지와라노 후유쓰구와 요시미네노 야스요가 이 허가에 힘을 썼다고 전한다.
이듬해 823년 2월, 조정은 에이잔의 절에 엔랴쿠지(延曆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간무 천황의 연호 「엔랴쿠」를 딴 이름이다. 그해 봄, 기신을 계를 전하는 스승으로 하여 에이잔에서 처음으로 대승계의 수계가 행해졌다. 824년 기신은 초대 천태좌주가 되었고, 827년 무렵 계단원이 세워졌다. 그리고 866년(조간 8년) 7월, 조정은 사이초에게 전교대사(傳敎大師), 그의 제자 엔닌에게 자각대사(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본에서 처음 내려진 대사의 호다.
- 818 봄이백오십 계를 버림
- 818.5.13육조식
- 818.8.27팔조식
- 819.3.15사조식
- 819 5월승강의 반론
- 820.2.29『현계론』 · 『혈맥보』
- 821『법화수구』
- 822 4월병 · 유언
- 822.6.4입멸
- 822.6.11대승계단 칙허입멸 7일 뒤
- 823 2월엔랴쿠지 사액
- 823 봄첫 수계(기신)
- 824기신 초대 좌주
- 827 무렵계단원
- ⋯끊긴 축 — 827 무렵에서 866으로
- 866 7월전교대사 시호

원돈계 — 무엇이 달랐는가
에이잔에 세워진 대승계단은 무엇이 달랐는가. 남도의 계와 나란히 놓아 보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남도의 계는 사분율(四分律)에 근거한 구족계다. 비구는 이백오십 계, 비구니는 삼백사십팔 계를 받는다. 열 사람의 비구(계화상 · 갈마사 · 교수사의 삼사와 증명하는 칠증)가 계단에 올라 계를 주어야 한다. 받는 사람은 성문의 비구가 된다. 이 계는 석존이 교단을 운영하며 하나하나 정한 생활의 규범으로, 부처의 가르침 가운데서는 소승의 계로 분류된다.
에이잔의 계는 범망경(梵網經)의 대승보살계다. 살생 · 도둑질 · 음행 · 거짓말 · 술을 파는 일 ·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는 일 · 자기를 높이고 남을 헐뜯는 일 · 인색 · 성냄 · 삼보를 비방하는 일, 이 열 가지 무거운 금계(十重禁戒)와 마흔여덟 가지 가벼운 계(四十八輕戒)로 이루어진다. 계를 주는 스승은 부처와 보살이고, 눈앞에서는 계를 전하는 스승 한 사람이 계를 준다. 받는 사람은 보살의 승려가 된다. 범망경의 계는 본래 출가와 재가가 함께 받는 계이지만, 사이초는 이것을 출가 보살의 수계로 삼았다.
그리고 에이잔의 계는 법화경의 원교에 근거를 두었다. 사이초는 이 계를 원교의 보살계, 곧 원돈계(圓頓戒)라 불렀다. 계율은 몸과 입의 허물을 막는 조목에 그치지 않고, 법화경의 일승에 의해 모든 중생의 성불과 이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계(戒) · 정(定) · 혜(慧)의 삼학 가운데 천태는 원교의 선정과 지혜를 세웠으나 계는 여전히 소승의 계를 썼다(천태 편 32절). 사이초는 그 빈자리를 채웠다.
대성인은 전교가 한 일을 두 단계로 보셨다. 전교는 「천태대사가 아직 공격하지 않으신 소승의 별수계를 공격해 떨어뜨리고, 육종의 여덟 대덕에게 범망경의 대승 별수계를 주셨을 뿐 아니라, 법화경의 원돈의 별수계를 에이잔에 세우셨다(法華経の円頓の別受戒を叡山に建立せしかば)」(「찬시초」, 264쪽). 「하산어소식」은 전교가 「일본 세 곳의 소승계와 화엄 · 삼론 · 법상의 세 대승계를 깨뜨렸다」고 하신다(352쪽). 소승의 계만이 아니라 권대승의 계도 넘어선, 법화경의 계라는 것이다.
| 삼학 | 천태 찬시초 270–271 | 전교 적문찬시초 264 · 하산어소식 346–347 | 대성인 본문법화취요초 336 · 보은초 328–329 |
|---|---|---|---|
| 계 | 소승의 계 | 원돈계 | 본문의 계단 |
| 정 | 원정 | 원정 | 본문의 본존 |
| 혜 | 원혜 | 원혜 | 본문의 제목 |
- 계
- 소승의 계
- 정
- 원정
- 혜
- 원혜
- 계
- 원돈계
-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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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
- 원혜
-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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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 본문의 본존
- 혜
- 본문의 제목

연구 노트 — 에이잔의 대승계는 뒤에 일본 불교의 계율관을 크게 바꾸었다. 계를 한 번 받으면 잃지 않는다는 「일득영불실(一得永不失)」의 사상, 마음의 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에이잔에서 자라났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계율을 사람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는 평가와, 반대로 계율의 실천을 느슨하게 했다는 평가를 함께 내린다. 헤이안 후기 이후 에이잔 안에서 계율의 해이가 문제가 되었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계율을 다시 세우려는 운동이 남도와 에이잔 양쪽에서 일어났다. 대성인이 「하산어소식」에서 엄하게 비판하신 가마쿠라 극락사의 료칸(良觀)은 이 계율 부흥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하산어소식」, 347–349쪽).
저작 — 논쟁의 책들
전교의 저작은 대부분 논쟁 속에서 쓰였다. 천태가 강의를 하고 그것을 제자가 기록해 체계적인 주석서를 남긴 것과 달리, 전교는 남도의 승강과 법상종의 도쿠이치, 그리고 진언의 구카이를 상대로 한 권씩 반론을 쓰고, 조정에 표를 올렸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체계서라기보다 논증의 기록이다. 경 · 율 · 논과 중국 조사의 글을 빽빽이 인용하고, 그 위에 짧은 판단을 얹는 것이 그의 문체다.
| 이름 | 권수 | 지은 해 |
|---|---|---|
| 논쟁서도쿠이치 · 진언과의 논쟁 | ||
| 『조권실경』照權實鏡 | 1권 | 817 |
| 『수호국계장』守護國界章 | 9권 | 818 |
| 『결권실론』決權實論 | 1권 | 820 무렵 |
| 『통육구증파비량문』通六九證破比量文 | 1권 | 820 무렵 |
| 『법화수구』法華秀句 | 3권 | 821 |
| 『의빙천태집』依憑天台集 | 1권 | 813 · 서 816 |
| 제도 · 상표문조정에 올린 글 | ||
| 『산가학생식』 | 확인 중 | 육조식 818 · 팔조식 818 · 사조식 819 |
| 『현계론』顯戒論 | 3권 | 820 |
| 『현계론연기』顯戒論緣起 | 2권 | 820 |
|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 | 1권 | 819 무렵 |
| 『태주록』 · 『월주록』台州錄 · 越州錄 | 확인 중 | 805 |
| 여러 상표문 | 확인 중 | 확인 중 |
| 교학 · 기타서원 · 주석 · 편지 | ||
| 「원문」願文 | 확인 중 | 785 |
| 『주무량의경』 | 3권 | 확인 중 |
| 『법화거혹』 | 확인 중 | 확인 중 |
| 편지 「구격첩」久隔帖 | 확인 중 | 813 |
| 「육소조보탑원문」 | 확인 중 | 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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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
- 지은 해
- 821
- 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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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 해
- 813 · 서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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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록 밖에, 전교의 이름으로 전해 온 책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말법등명기(末法燈明記)』다. 801년 사이초가 지었다고 전하는 이 짧은 책은, 석존 입멸 뒤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셈하여 「지금은 상법의 끝이고 말법이 가까우니, 계를 지키는 승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름뿐인 승려라도 세상의 보배로 존중해야 한다」고 논한다. 호넨과 신란이 이 책을 인용했고, 대성인도 「수호국가론」에서 논적의 말 속에 인용하셨다. 「전교대사의 『말법등명기』를 펴 보니, 우리 엔랴쿠 20년 신사는 (불멸 후) 천칠백오십 년이다」(46쪽).
또 중세 에이잔에서는 전교가 당에서 받은 비밀의 가르침을 적었다는 여러 구전법문(口傳法門)의 책이 전교의 이름으로 퍼졌다. 이 책들은 「본각(本覺) 사상」, 곧 중생이 본래 깨달아 있다는 사상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것이 많다. 대성인이 인용하신 전교의 글 가운데에도 이런 계통의 책에서 온 것이 있다.
연구 노트 — 『말법등명기』의 진위는 근대 이래 논쟁이 되어 왔다. 문체와 내용이 사이초의 다른 저작과 다르다는 점, 헤이안 후기 이전의 인용이 드물다는 점을 들어 뒤 시대의 가탁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사이초의 초기 저작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또 「생사일대사혈맥초」가 인용하신 「생사의 두 법은 한 마음의 묘한 작용이요, 있음과 없음의 두 길은 본각의 참된 덕이다(生死の二法は一心の妙用・有無の二道は本覚の真徳)」(1336쪽) 같은 글은, 오늘날 연구에서는 사이초 이후 에이잔에서 전교의 이름으로 엮인 문헌에서 온 것으로 본다. 대성인 당시 에이잔에서는 이 문헌들이 모두 전교의 글로 읽혔다. 이 페이지는 천태 편과 같이, 대성인이 그 글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를 기준으로 읽는다.
에이잔 이후 — 기신에서 메이운까지
전교가 세상을 떠난 뒤 에이잔은 제자들에게 맡겨졌다. 초대 좌주는 입당 때의 통역 기신(義眞, 781–833)이었고, 제2대는 동국 출신의 엔초(圓澄, 772–837)였다. 대성인은 이 두 사람까지는 전교의 뜻이 지켜졌다고 보셨다. 「에이잔 제1의 좌주 기신 화상, 제2의 좌주 엔초 대사까지는 이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此の義相違なし)」(「찬시초」, 280쪽).
흐름이 바뀐 것은 제3대 좌주 엔닌(圓仁, 794–864) 때부터다. 전교의 제자로 동국 순화에 따랐던 그 소년이다. 엔닌은 838년 마지막 견당사를 따라 당에 건너가 십 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는 당의 밀교를 깊이 배웠고, 무종의 회창 폐불(845)을 몸으로 겪었다. 그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오늘날 당나라 연구의 귀중한 사료다. 847년 돌아온 엔닌은 에이잔에 총지원(總持院)을 세우고, 『금강정경소』 일곱 권과 『소실지경소』 일곱 권을 지어 법화경과 대일경은 「이치는 같고 사상(事相)에서는 진언이 뛰어나다(理同事勝)」는 해석을 세웠다. 854년 제3대 좌주가 되었다. 또 당의 오대산에서 배운 염불 수행을 에이잔에 들여와 상행삼매당을 세웠다.
제5대 좌주 엔친(圓珍, 814–891)은 기신의 제자다. 853년 당에 건너가 다섯 해 동안 밀교와 천태를 배우고 돌아와, 868년 좌주가 되었다. 그는 오미의 온조지(園城寺, 미이데라)를 다시 일으켰다. 866년 엔친은 조정에 청하여, 진언과 지관 두 교에 모두 통한 사람을 엔랴쿠지의 좌주로 삼으라는 선지를 받아 냈다(「보은초」, 307쪽).
9세기 말의 안넨(安然)은 에이잔의 밀교, 곧 태밀(台密)을 완성한 학승이다. 그는 『교시쟁론(敎時諍論)』에서 여러 종의 순위를 정해 진언을 첫째, 선을 둘째, 천태법화를 셋째에 두었다(「찬시초」, 280쪽). 10세기에는 제18대 좌주 료겐(良源, 912–985)이 에이잔을 중흥했고, 그의 제자 겐신(源信, 942–1017)은 985년 『왕생요집』을 지어 염불을 널리 퍼뜨렸다. 료겐의 문하는 교학을 중시한 단나류와 관법을 중시한 에신류로 나뉘었다(「사조깅고전어반사(번뇌즉보리어서)」, 1116쪽). 993년에는 엔닌의 문도와 엔친의 문도가 크게 다투어, 엔친의 문도가 산을 내려가 온조지로 옮겼다. 에이잔을 산문(山門), 온조지를 사문(寺門)이라 부르게 된 것이 이때부터다.
에이잔은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넓은 장원을 거느리고, 무장한 승려(승병)를 앞세워 조정에 요구를 들이밀었다. 1184년, 두 번이나 천태좌주를 지낸 메이운(明雲)이 기소 요시나카의 군대에 죽임을 당했다. 대성인은 이 일을 에이잔이 「전교대사의 지관원의 법화경의 세 부를 버리고 자각대사의 총지원의 대일경의 세 부에 붙은」 결과로 보셨다(「하산어소식」, 354쪽).
그러나 에이잔은 동시에 일본 불교의 어머니 산이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새 불교를 연 호넨 · 에이사이 · 신란 · 도겐, 그리고 니치렌 대성인이 모두 에이잔에서 배웠다. 대성인은 스스로 「가마쿠라 · 교토 · 에이잔 · 온조지 · 고야산 · 덴노지 등 여러 나라의 여러 절을 대강 배우며 돌아다녔다」고 회상하셨다(「묘법비구니어반사」, 1407쪽). 대성인이 에이잔에서 찾은 것은 그 산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산을 연 사람의 뜻이었다.
- 最澄사이초767–822
- 此の義相違なし찬시초 280 — 기신 · 엔초까지
- 義眞기신1대 · 824
- 圓澄엔초2대
- 本師伝教・義真に背きて삼대비법초 1023 — 엔닌 · 엔친부터
- 圓仁엔닌3대 · 854 · 자각대사 · 입당 838–847 · 소 14권 · 총지원
- 안에4대
- 圓珍엔친5대 · 868 · 지증대사 · 입당 853–858 · 온조지
- 安然안넨『교시쟁론』
- 良源료겐18대
- 源信겐신 · 가쿠운『왕생요집』 985
- 993 산문 · 사문 분열
- 明雲메이운1184 피살
- 此の義相違なし찬시초 280 — 기신 · 엔초까지
- 本師伝教・義真に背きて삼대비법초 1023 — 엔닌 · 엔친부터
연구 노트 — 근대의 불교사 연구는 엔닌 · 엔친 · 안넨의 작업을 「태밀의 형성과 완성」으로 부르며, 일본 천태가 법화와 밀교를 하나로 통합한 독자적인 교학을 세운 과정으로 본다. 엔닌의 입당과 엔친의 입당은 전교의 짧은 밀교 수학을 보강하려는 에이잔의 오랜 과제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대성인은 같은 사실을 전혀 다르게 보셨다. 엔닌 · 엔친이 한 일은 전교의 뜻을 보강한 것이 아니라 전교의 뜻을 뒤집은 것이며, 그로써 에이잔은 이름만 천태이고 주인은 진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6부 32절). 연대의 차이 하나를 적어 둔다. 엔닌이 당에서 돌아온 해를 「보은초」는 조와 13년(846)으로, 「중생심어서」는 조와 14년(847)으로 전하며, 사료는 847년이다.
전교의 마지막 말은 「나의 뜻을 펴라」였다. 불상도 경도 필요 없으니 뜻을 이으라는 것이다. 대승계단의 허가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이레 뒤에 내려왔다. 스승의 뜻은 스승의 생애 안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제자들이 그것을 이루었다. 창가학회는 여기서 사제의 길을 본다. 스승이 세운 뜻을 제자가 이어 실현할 때 스승의 승리가 완성된다. 그러나 에이잔의 역사는 그 반대의 길도 보여 준다. 「전교대사의 제자」라는 이름을 지니고, 전교가 세운 산의 좌주 자리에 앉은 이들이 스승이 이름을 깎아 버린 진언을 법화경 위에 올려놓았다. 이름과 자리는 이어졌으나 뜻은 끊어졌다. 대성인은 이것을 에이잔 역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보셨고,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 「스승의 뜻」을 직접 묻고 지키는 것임을 보이셨다. 6부는 대성인이 본 전교를 차례로 읽고, 32절에서 이 이야기로 돌아온다.
상법의 끝 — 다조탑사견고
대성인이 전교를 이야기하실 때 가장 먼저 물으신 것은 「때」였다. 전교는 어느 때에 태어났는가. 「찬시초」는 전교의 등장을 이렇게 적는다. 「그 뒤 인왕 제50대, 상법 팔백 년에 해당하여 간무 천황의 치세에 사이초라는 소승이 나왔다. 뒤에 전교대사라 불러 드렸다(像法八百年に相当つて桓武天王の御宇に最澄と申す小僧出来せり)」(263쪽). 그리고 전교가 이룬 일을 차례로 말씀하신 끝에 이렇게 매듭지으셨다.
此の伝教の御時は像法の末大集経の多造塔寺堅固の時なり、いまだ於我法中・闘諍言訟・白法隠没の時にはあたらず
이 전교의 때는 상법의 끝, 대집경이 말하는 다조탑사견고(多造塔寺堅固)의 때다. 아직 「나의 법 가운데 투쟁하고 다투어 백법이 숨어 없어지는」 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대집경은 석존 입멸 뒤 이천오백 년을 다섯 오백 년으로 나누었다. 해탈견고 · 선정견고의 정법 천 년, 독송다문견고 · 다조탑사견고의 상법 천 년, 그리고 투쟁언송 · 백법은몰의 말법의 처음이다(천태 편 26절). 천태는 상법의 앞 오백 년 「독송다문견고」에, 전교는 상법의 뒤 오백 년 「다조탑사견고」에 태어났다. 경을 읽고 많이 듣는 것이 굳건한 시대를 지나, 절과 탑을 많이 세우는 것이 굳건한 시대였다.
이 말은 전교의 생애와 묘하게 겹친다. 전교는 일승지관원을 세우고, 동서남북 여섯 곳에 법화경의 보탑을 세우려 했으며(15절), 에이잔에 계단을 세웠다. 나라에는 국분사와 대불이 있었다. 「다조탑사」의 시대에 전교가 세운 것 가운데 대성인이 가장 높이 보신 것은 탑이 아니라 계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조차 대성인은 「아직 백법은몰의 때가 아닌」 때의 일로 보셨다. 법화경이 참으로 넓혀질 때는 그 뒤, 모든 불법이 힘을 잃는 말법의 처음이라는 것이다.
전교 자신도 자신의 때를 알았다. 『법화수구』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때를 말하면 상법의 끝, 말법의 처음이요, 땅을 찾으면 당의 동쪽, 갈(羯)의 서쪽이요, 사람을 살피면 오탁의 삶, 투쟁의 때다(代を語れば像の終り末の初・地を尋れば唐の東・羯の西・人を原れば則ち五濁の生・闘諍の時なり)」(「관심본존초」, 254쪽). 「상법의 끝, 말법의 처음」, 그것이 전교가 본 자신의 자리였다. 이 말을 대성인이 어떻게 읽으셨는지는 31절에서 본다.
- 불멸석존기원전 949 — 전통 연대
- 0 ~ 1000정법 천 년
- 1000 ~ 1500상법 앞 오백 년 — 천태독송다문견고 · 상법 시작은 서력 52 무렵
- 1500 ~ 2000상법 뒤 오백 년 — 전교다조탑사견고 · 서력 552–1052 무렵 · 전교 767–822
- 2000 ~말법 처음 — 니치렌투쟁언송 · 백법은몰
연대 대조 — 대성인이 따르신 전통 연대에서 석존의 입멸은 기원전 949년이다(석존 편 1부 3절). 이에 따르면 상법은 기원 52년 무렵부터 1052년 무렵까지이고, 그 뒤 오백 년 「다조탑사견고」는 552년 무렵부터 1052년 무렵까지다. 전교의 생애(767–822)는 불멸 후 천칠백십육 년에서 천칠백칠십일 년에 걸친다. 「찬시초」의 「상법 팔백 년」, 「보은초」의 「불멸 후 천팔백 년에 해당하여」(327쪽)는 이 무렵을 어림한 표현이다. 『말법등명기』가 「엔랴쿠 20년(801)은 천칠백오십 년」이라 한 것도 같은 연대에 따른 것이다(「수호국가론」, 46쪽). 이 연대에서 말법은 전교 입멸 뒤 이백삼십 년 무렵에 시작되고, 대성인이 태어나신 1222년은 말법에 들어 백칠십 년 무렵이다. 학계의 연대(석존 입멸 기원전 5세기경)와는 직접 맞추지 않는다.
공장의 승리 — 「병은 달라도 물은 하나」
2부 8절에서 본 다카오의 모임을, 대성인은 천황 앞에서 벌어진 공개의 법론, 곧 공장(公場)의 대결로 전하셨다. 그리고 그 앞에서 전교가 겪었을 망설임까지 그리셨다.
此れを申すならば喧嘩出来すべしもだして申さずば仏誓にそむきなんとをもひわづらはせ給いしかども終に仏の誡ををそれて桓武皇帝に奏し給いしかば帝・此の事ををどろかせ給いて六宗の碩学に召し合させ給う、彼の学者等・始めは慢幢・山のごとし悪心・毒蛇のやうなりしかども終に王の前にしてせめをとされて六宗・七寺・一同に御弟子となりぬ
이것을 말하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고,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부처의 서원을 어기게 된다고 고민하셨으나, 마침내 부처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간무 황제에게 아뢰셨다. 황제는 이 일에 놀라시어 육종의 석학들과 맞붙이셨다. 그 학자들은 처음에는 교만의 깃발이 산과 같고 악한 마음이 독사 같았으나, 마침내 왕 앞에서 논파되어 육종 · 칠사가 한결같이 (전교의) 제자가 되었다.
말하면 다툼이 일어나고, 말하지 않으면 부처의 서원을 어긴다. 이것은 대성인 자신이 입종 전에 겪으신 망설임과 같다. 「개목초」에서 대성인은 이 법문을 한마디라도 말하면 부모 · 형제 · 스승에게까지 국주의 난이 반드시 오고, 말하지 않으면 자비가 없는 것과 같다고 고민하신 끝에 「두 길 가운데서는 말해야 한다(二辺の中には・いうべし)」고 정하셨다(200쪽 · 니치렌 편). 대성인은 전교에게서 같은 결단을 보셨다.
대론의 모습을 「찬시초」는 이렇게 전한다. 열네 사람이 사이초와 맞붙었으나 「혹은 한마디에 혀를 말아 두세 마디에 이르지 못하고, 모두 한결같이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았다(或は一言に舌を巻いて二言三言に及ばず)」. 삼론의 이장 · 삼시 · 삼전법륜, 법상의 삼시 · 오성, 화엄의 사교 · 오교 · 근본지말 · 육상 · 십현이 「모두 그 큰 줄기를 깨뜨렸다」. 「큰 집의 대들보가 부러진 것과 같아, 열 대덕의 교만의 깃발도 쓰러졌다」(271–272쪽). 「하산어소식」은 더 짧게 쓴다. 「육종의 석학이 종마다 자기 종은 일대를 넘어선다고 각각 내세웠으나, 전교대사의 한마디에 만사가 깨어졌다(教大師の一言に万事破れ畢んぬ)」(345쪽).
대성인이 이 대결에서 가장 무겁게 보신 것은, 열네 사람이 무엇을 대표하고 있었는가였다.
此の十四人は華厳宗の法蔵・審祥・三論宗の嘉祥・観勒・法相宗の慈恩・道昭・律宗の道宣・鑒真等の漢土・日本元祖等の法門・瓶はかはれども水は一なり、而るに十四人・彼の邪義をすてて伝教の法華経に帰伏しぬる上は誰の末代の人か華厳・般若・深密経等は法華経に超過せりと申すべきや
이 열네 사람은 화엄종의 법장 · 심상, 삼론종의 가상 · 관륵, 법상종의 자은 · 도쇼, 율종의 도선 · 감진 등 중국과 일본의 원조들의 법문이다. 병은 바뀌었어도 물은 하나다. 그런데 열네 사람이 그 삿된 뜻을 버리고 전교의 법화경에 귀복한 이상, 말대의 누가 화엄 · 반야 · 심밀경 등이 법화경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열네 사람은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각 종을 세운 조사들의 법문을 담은 병이었다. 병은 달라도 그 안의 물, 곧 법문은 같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교의 법화경에 귀복했다는 것은 각 종의 조사들 자신이 법화경 앞에 굴복한 것과 같다. 대성인은 이렇게 해서 다카오의 하루를 일본 불교 전체의 판정으로 보셨다. 「개목초」는 그 결과를 이렇게 적는다. 「육종의 고덕 여덟 사람 · 열두 사람 · 열네 사람 · 삼백여 사람과 홍법대사 등이 논파되어 일본국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태종에 귀복하고, 남도 · 도지 · 일본 전국의 산사가 모두 에이잔의 말사가 되었다」(190쪽).
「찬시초」는 이것을 천태의 공장과 나란히 놓으셨다. 「중국의 가상 등은 백여 사람을 모아 천태대사를 성인으로 정했고, 지금 일본의 칠사 이백여 사람은 전교대사를 성인이라 불러 드렸다. 불멸 후 이천여 년에 이르러 두 나라에 성인 두 사람이 나타났다(両国に聖人二人・出現せり)」(272쪽). 그리고 이 두 대결을 판정한 두 왕을 현명한 왕의 본보기로 드셨다. 「남삼 · 북칠을 버리고 지의법사를 쓰신 진주, 육종의 석덕을 버리고 사이초법사를 쓰신 간무 천황은 지금도 현명한 왕의 이름을 남기셨다」(「법화초심성불초」, 550쪽).
대성인이 평생 구하신 것이 이 공장이었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을 올린 뒤 줄곧, 여러 종의 고승들과 국주 앞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자고 청하셨다. 그러나 그 청은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산어소식」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따지셨다. 「무슨 일이든 양쪽을 불러 맞대어 보고서야 승부를 정하고 판결하는 사람이, 어째서 니치렌 한 사람에 한해서는 여러 승려와 맞대지도 않고 큰 죄로 다스리는가(何事も両方を召し合せてこそ勝負を決し)」(356쪽). 천태와 전교에게는 그들의 옳음을 가려 준 왕이 있었다. 말법의 대성인에게는 없었다. 이 차이가 28절의 주제다.
연구 노트 — 2부 8절의 연구 노트에서 본 것처럼, 다카오의 모임을 천황이 행행한 대론으로 전하는 것은 어서와 에이잔의 전승이며, 『대사전』은 와케 씨의 강회와 칙사의 문의, 대덕들의 사표를 전한다. 어서가 전하는 사표의 문장과 열네 사람의 이름은 『대사전』과 일치한다. 이 페이지는 천태 편 27절과 같이, 대성인이 이 이야기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를 기준으로 읽는다. 곧 경론을 근거로 한 공개의 대결, 그리고 그 대결이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법의 판정이라는 것이다.
「일염부제 제일의 기사」 — 원돈의 계단
다카오의 승리는 천태가 중국에서 이룬 일을 일본에서 되풀이한 것이었다. 대성인은 전교가 천태를 넘어선 일을 따로 드셨다. 에이잔의 대승계단이다.
伝教大師は日本国の士なり桓武の御宇に出世して欽明より二百余年が間の邪義をなんじやぶり天台大師の円慧・円定をせんじ給うのみならず、鑒真和尚の弘通せし日本小乗の三処の戒壇をなんじやぶり叡山に円頓の大乗別受戒を建立せり、此の大事は仏滅後一千八百年が間の身毒・尸那・扶桑乃至一閻浮提第一の奇事なり、内証は竜樹・天台等には或は劣るにもや或は同じくもやあるらん、仏法の人をすべて一法となせる事は竜樹・天親にもこえ南岳・天台にもすぐれて見えさせ給うなり
전교대사는 일본국의 선비다. 간무의 치세에 세상에 나와 긴메이 이래 이백여 년 동안의 삿된 뜻을 따져 깨뜨리고, 천태대사의 원혜 · 원정을 널리 펴셨을 뿐 아니라, 감진 화상이 넓힌 일본 소승의 세 곳의 계단을 따져 깨뜨리고 에이잔에 원돈의 대승별수계를 세웠다. 이 큰일은 불멸 후 천팔백 년 동안 인도 · 중국 · 일본, 나아가 일염부제에서 제일가는 기이한 일이다. 내증은 용수 · 천태 등보다 혹은 못하기도 하고 혹은 같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불법의 사람을 모두 하나의 법으로 만든 일은 용수 · 천친보다 넘어서고 남악 · 천태보다 뛰어나 보이신다.
「불법의 사람을 모두 하나의 법으로 만든 일」. 대성인이 전교에게서 본 것은 깨달음의 깊이가 아니라 법을 넓힌 방식이었다. 천태는 중국에서 법화경의 선정과 지혜를 넓혔으나, 중국의 승려들은 여전히 소승의 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교리에서는 천태의 제자가 되어도, 승려가 되는 문은 소승의 것이었다. 전교는 그 문을 바꾸었다. 에이잔에서 계를 받는 승려는 처음부터 법화경의 계로 승려가 된다. 「찬시초」는 이 뜻을 이렇게 말한다. 「중국 아홉 나라의 여러 승려는 원정 · 원혜에서는 천태의 제자와 같으나, 원돈이 하나인 계장이 중국에는 없으므로 계에서는 제자가 되지 않은 자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일본국은 전교대사의 제자가 아닌 자는 외도요 악인이다(この日本国は伝教大師の御弟子にあらざる者は外道なり悪人なり)」(264쪽).
그러므로 대성인은 이렇게 평가하셨다. 「연랴쿠의 원돈 별수계는 일본 제일일 뿐 아니라, 불멸 후 천팔백여 년 동안 인도 · 중국 · 일염부제에 아직 없던 영산의 대계가 일본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전교대사는 그 공을 논하면 용수 · 천친보다 넘어서고 천태 · 묘락보다 뛰어나신 성인이다」(「찬시초」, 264쪽).
「보은초」는 그 계단이 어떤 반대를 뚫고 세워졌는지를 그리신다. 남도의 승려들은 전교를 「재세의 외도, 중국의 도사가 일본에 나타났다」고 헐뜯었다. 그리고 전교가 세 계단을 두고 한 말이 그들을 더욱 격분시켰다.
西国の観音寺の戒壇・東国下野の小野寺の戒壇・中国大和の国・東大寺の戒壇は同く小乗臭糞の戒なり瓦石のごとし、其を持つ法師等は野干・猿猴等のごとしとありしかば……されども経文分明にありしかば叡山の大乗戒壇すでに立てさせ給いぬ、されば内証は同じけれども法の流布は迦葉・阿難よりも馬鳴・竜樹等はすぐれ馬鳴等よりも天台はすぐれ 天台よりも伝教は超えさせ給いたり、世末になれば人の智はあさく仏教はふかくなる事なり
서쪽 나라 간제온지의 계단, 동쪽 나라 시모쓰케의 계단, 가운데 나라 야마토의 도다이지 계단은 모두 같은 소승의 냄새나는 똥 같은 계이며 기와와 돌 같다, 그것을 지니는 법사들은 여우와 원숭이 같다고 하셨으므로 …… 그러나 경문이 분명하였으므로 에이잔의 대승계단이 마침내 세워졌다. 그러므로 내증은 같지만 법의 유포는 가섭 · 아난보다 마명 · 용수 등이 뛰어나고, 마명 등보다 천태가 뛰어나며, 천태보다 전교가 넘어서셨다. 세상이 말세가 되면 사람의 지혜는 얕아지고 불교는 깊어지는 것이다.
「……」로 줄인 곳에서 대성인은 남도의 반응을 전하신다. 「법사를 닮은 큰 메뚜기가 나라에 나타났다. 불교의 싹이 한꺼번에 없어질 것이다. 은의 주왕 · 하의 걸왕이 법사가 되어 일본에 태어났다 …… 다른 종에는 등을 돌리더라도, 우리 스승 천태대사도 세우지 않으신 원돈의 계단을 세우겠다니 기이하다. 아아, 두렵다, 두렵다」고 여러 사람이 손뼉을 치고 혀를 떨었다는 것이다(328쪽). 남도의 승려들이 전교를 두고 「천태도 하지 않은 일」이라 한 바로 그것이, 대성인이 전교를 천태보다 높이 보신 까닭이었다.
「내증은 같지만 법의 유포는」. 이 한 구절에 대성인의 전교관이 모여 있다. 깨달은 법은 같다. 그러나 그 법을 세상에 넓히는 방식은 시대를 따라 깊어진다. 가섭 · 아난은 소승을, 마명 · 용수는 대승을, 천태는 법화경의 선정과 지혜를, 전교는 거기에 법화경의 계를 더했다. 그리고 대성인은 역설을 덧붙이셨다. 세상이 말세가 되어 사람의 지혜가 얕아질수록, 불교는 도리어 깊어진다. 가벼운 병에는 보통의 약으로 되지만 무거운 병에는 선약이 필요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328쪽). 이 흐름의 끝에 말법이 있다(용수 편 28절 · 천태 편 32절).
- 1단가섭 · 아난소승
- 2단마명 · 용수권대승
- 3단천태원정 · 원혜 · 계는 소승
- 4단전교+ 원돈계 · 적문의 계단
- 5단 · 말법본문의 삼대비법본문의 본존 · 본문의 계단 · 본문의 제목
世末になれば人の智はあさく仏教はふかくなる가벼운 병에는 보통 약, 무거운 병에는 선약 — 「보은초」 328쪽
그러나 대성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다. 「찬시초」의 문답은 이렇게 이어진다. 전교가 천태도 넓히지 않은 원돈의 대계를 세웠다면, 이것이야말로 「상법의 끝에 법화경이 광선유포한 것이 아닌가」. 대성인은 답하셨다. 천태가 넓히지 않은 원돈의 대계를 전교가 세운 것은 분명하다. 「다만 참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부처는 다 설하셨으나 불멸 뒤 가섭 · 아난 · 마명 · 용수 · 무착 · 천친, 나아가 천태 · 전교가 아직 넓히지 않으신 가장 크고 깊고 비밀한 정법이 경문의 표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天台・伝教のいまだ弘通しましまさぬ最大の深密の正法経文の面に現前なり)」(272쪽). 전교의 계단은 「일염부제 제일의 기사」였으나, 아직 광선유포는 아니었다. 그 까닭을 26절부터 차례로 본다.
연구 노트 — 「보은초」가 전하는 「시모쓰케의 오노데라(小野寺)의 계단」은 사료에서는 시모쓰케 야쿠시지(藥師寺)의 계단이다. 쓰쿠시 간제온지 · 시모쓰케 야쿠시지 · 도다이지가 「천하의 세 계단」이었다(1절). 전교가 남도의 계를 「냄새나는 똥 같은 계」라 한 표현은 『현계론』 등 전교의 글에 보이는 소승계 비판의 격한 표현과 이어진다. 남도가 전교를 「메뚜기」 · 「걸주」에 견준 말은 「보은초」가 전하는 것이며, 승강의 표에 실린 비난(18절)과 같은 계열이다.
『의빙집』과 진언 — 「제자에게도 분명히 가르치지 않으셨다」
전교는 당에서 천태와 함께 진언도 가져왔고, 천태법화종 안에 차나업을 두었다. 구카이에게 관정을 받기도 했다(14절). 오늘날의 연구는 이것을 두고 전교를 법화와 밀교를 하나로 보는 「원밀일치(圓密一致)」의 선구로 보는 경우가 많다. 대성인은 같은 사실을 전혀 다르게 읽으셨다.
伝教大師は善無畏三蔵のあやまりなり、大日経は法華経には劣りたりと知しめして八宗とはせさせ給はず真言宗の名をけづりて法華宗の内に入れ七宗となし大日経をば法華天台宗の傍依経となして華厳・大品・般若・涅槃等の例とせり、而れども大事の円頓の大乗別受戒の大戒壇を我が国に立う立じの諍論がわずらはしきに依りてや真言・天台の二宗の勝劣は弟子にも分明にをしえ給わざりけるか、但依憑集と申す文に正しく真言宗は法華天台宗の正義を偸みとりて大日経に入れて理同とせり、されば彼の宗は天台宗に落ちたる宗なり
전교대사는 (「이는 같고 사는 뛰어나다」는 해석이) 선무외 삼장의 잘못이며 대일경은 법화경보다 못하다고 아시어, 팔종으로 하지 않으시고 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법화종 안에 넣어 칠종으로 하시고, 대일경을 법화천태종의 곁에서 의지하는 경(방의경)으로 삼아 화엄 · 대품 · 반야 · 열반 등과 같은 예로 하셨다. 그러나 중대한 원돈의 대승별수계의 대계단을 우리나라에 세우느냐 마느냐의 논쟁이 번거로웠기 때문인지, 진언 · 천태 두 종의 우열은 제자에게도 분명히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인가. 다만 『의빙집』이라는 글에 진언종은 법화천태종의 바른 뜻을 훔쳐 대일경에 넣어 「이는 같다」고 하였다고 바로 적으셨다. 그러므로 저 종은 천태종에 떨어진 종이다.
대성인의 읽기에서 전교의 조치는 세 겹이다. 첫째, 진언을 독립된 종으로 세우지 않았다. 남도 여섯 종에 천태를 더하면 일곱 종이다. 진언을 여덟째 종으로 세우지 않고 천태법화종 안에 넣었다. 둘째, 대일경을 법화경과 나란히 두지 않고 「곁에서 의지하는 경(傍依經)」으로 삼았다. 천태가 화엄경 · 반야경 · 열반경을 법화경을 돕는 경으로 본 것과 같은 자리다. 셋째, 두 종의 우열을 공개된 자리에서 다투지 않고, 『의빙집』에 적어 두었다.
왜 공개적으로 다투지 않았는가. 대성인은 두 가지 까닭을 헤아리셨다. 「찬시초」는 이렇게 말한다. 입당 이후에는 원돈의 계장을 세우느냐 마느냐의 논쟁뿐이었으므로 「적이 많아서는 계장의 일 하나를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하셨는가, 또는 말법에 (진언을) 책망하게 하려고 생각하셨는가(又末法にせめさせんとやをぼしけん)」, 황제 앞에서도 논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뚜렷이 말하지 않으셨다(276쪽). 하나는 계단을 이루기 위한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말법에 맡긴 것이다. 「중생심어서」도 「다만 우열의 일은 마음속에 두시고 사람을 향해 설하지 않으셨던 것인가(内心に此れを存じて人に向つてとかざるか)」라 하신다(1593쪽).
그 대신 전교가 남긴 것이 『의빙천태집』이었다. 대성인은 이 책을 「대사 제일의 비서(秘書)」라 부르셨다(「보은초」, 307쪽). 그 서문은 네 종을 한 줄씩 꾸짖는다. 「새로 온 진언가는 필수의 상승을 없애고, 예전에 온 화엄가는 영향의 규범을 감추며, 공에 빠진 삼론종은 꾸지람을 받은 부끄러움을 잊고 제 마음에 맞는 취기를 덮고, 유에 집착하는 법상은 박양의 귀의를 그르다 하고 청룡의 판경을 물리친다」(307–308쪽). 대성인은 이 서문의 첫 줄을 이렇게 풀이하셨다. 선무외 삼장이 중국에 와서 천태의 『지관』을 보고 지혜를 얻어, 대일경의 해석에 천태의 일념삼천을 몰래 넣고, 그 위에 인과 진언을 꾸며 「이는 같고 사는 뛰어나다」고 했다. 그 해석을 받아 적은(筆受) 사람이 일행이다. 「새로 온 진언가」는 그 받아 적은 상승을 감춘다는 것이다(「개목초」, 215–216쪽).
그리고 『의빙집』의 본문은 인도에서 온 소식을 싣는다. 불공 삼장이 인도에 갔을 때 용지보살이 말하기를, 인도에는 부처의 뜻을 밝힌 논석이 없고 중국에 천태라는 사람의 해석이 삿됨과 바름을 가리니 꼭 인도로 보내 달라고 청했다. 불공의 제자 함광이 이 말을 묘락대사에게 전했고, 묘락은 이것을 기록했다. 전교는 이 기록을 『의빙집』에 싣고 이렇게 적었다. 「어찌 중국에서 법을 잃고 사방의 변두리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쪽(중국)에서 이를 아는 사람이 적어 노나라 사람과 같다(豈中国に法を失つて之を四維に求むるに非ずや而かも此の方に識ること有る者少し魯人の如きのみ)」(「보은초」, 308쪽). 대성인은 이렇게 결론지으셨다. 「이 글은 법상 · 삼론 · 화엄 · 진언의 네 종을 꾸짖은 글이다. 천태와 진언의 두 종이 같은 맛이라면 어찌 꾸짖겠는가」(308쪽).
전교가 남긴 이 「비서」와 그가 공개하지 않은 우열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두 방향으로 읽혔다. 대성인은 『의빙집』을 전교의 참뜻으로 읽으셨다. 그러나 전교의 제자들 가운데 엔닌 · 엔친은 전교가 둔 차나업과 구카이에게 받은 관정을 전교의 뜻으로 읽었고, 「두 종이 같다는 것이 선사(先師) 전교대사의 뜻」이라며 조정의 선지를 받아 냈다. 대성인은 이렇게 물으셨다. 「도대체 전교대사가 어느 책에 쓰셨는가. 이 일을 잘 물어야 한다(抑も伝教大師いづれの書にかかれて候ぞや此の事よくよく尋ぬべし)」(「보은초」, 307쪽). 스승의 뜻은 스승이 남긴 글로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이 32절로 이어진다.
연구 노트 — 전교의 밀교관은 연구자 사이에서도 평가가 갈린다. 전교가 천태법화종에 차나업을 두고 구카이에게 밀교를 배우려 한 사실을 들어, 그가 법화와 밀교를 대등하게 보았다는 해석이 있다. 반면 『의빙집』과 『수호국계장』 등에서 전교가 진언을 천태의 교학 안에 두고 그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엔닌 · 엔친 이후의 태밀은 전자의 해석 위에 섰다. 대성인은 『의빙집』과 연분도자의 명칭(「천태종의 지관 · 진언」)을 근거로 후자로 읽으셨고, 전교가 우열을 공개하지 않은 것을 전교의 한계라기보다 「때」와 계단을 위한 판단으로 보셨다.
적문의 이계 — 「청정무염의 중도의 묘계」
전교가 세운 계단은 어떤 계단이었는가. 대성인은 전교를 「적문」의 홍통자로 보셨다. 석존은 법화경 신력품에서 본화의 지용보살에게 법화경의 요체를 부촉하시고, 그 앞뒤로 약왕보살 등 적화 · 타방의 보살들에게도 법화경을 부촉하셨다. 「하산어소식」은 이렇게 풀이하신다. 상법 천 년에 들어 세존은 「약왕보살 등 적화 · 타방의 대보살에게 법화경의 절반, 적문 십사품을 양보하셨다. 이것은 또 지용의 대보살이 말법의 처음에 나타나 본문 수량품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를 일염부제의 일체중생에게 부르게 할 서막을 위해서다. 이른바 적문을 넓힌 이들은 남악 · 천태 · 묘락 · 전교 등이 그들이다(迹門弘通の衆は南岳・天台・妙楽・伝教等是なり)」(346쪽).
그리고 같은 어서에서 대성인은 전교의 계단을 이렇게 자리매김하셨다.
故に教大師・像法の末に出現して法華経の迹門の戒定慧の三が内・其の中・円頓の戒壇を叡山に建立し給いし時二百五十戒忽に捨て畢んぬ、随つて又鑑真の末の南都七大寺の一十四人・三百余人も加判して大乗の人となり一国挙つて小律儀を捨て畢んぬ
그러므로 전교대사는 상법의 끝에 나타나 법화경 적문의 계 · 정 · 혜 세 가지 가운데 그 계에 해당하는 원돈의 계단을 에이잔에 세우셨다. 그때 이백오십 계를 문득 버리셨다. 따라서 또 감진의 후예인 남도 칠대사의 열네 사람, 삼백여 사람도 도장을 찍어 대승의 사람이 되고, 한 나라가 모두 소승의 율의를 버렸다.
「법화경 적문의 계 · 정 · 혜」. 천태가 세운 원정 · 원혜도, 전교가 세운 원돈계도 적문의 것이다. 적문은 법화경 앞 열네 품으로, 이승작불과 제법실상을 통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이치를 밝힌다. 그러나 그 부처가 실제로 언제부터 부처였는가, 곧 구원실성은 본문 수량품에 가서야 밝혀진다(교리 四). 적문은 성불의 이치(理)를, 본문은 그 사실(事)을 밝힌다. 그래서 대성인은 천태 · 전교의 일념삼천을 「적문의 이의 일념삼천」이라 하셨다. 「천태 · 전교 등은 적문의 이의 일념삼천의 법문을 넓히신 것만으로도 오히려 원질의 난을 만나셨다」(「사조깅고전어반사(번뇌즉보리어서)」, 1116쪽). 그리고 자신이 넓히는 법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천태 · 전교 등이 넓힌 법보다 한 겹 더 들어간 까닭이다. 본문 수량품의 세 큰일이 이것이다(本門寿量品の三大事とは是なり)」(같은 곳).
계단도 같다. 「삼대비법초」는 본문의 계단을 말씀하신 뒤, 전교의 계단을 이렇게 평하신다.
此の戒法立ちて後・延暦寺の戒壇は迹門の理戒なれば益あるまじき処に、叡山に座主始まつて第三・第四の慈覚・智証・存の外に本師伝教・義真に背きて理同事勝の狂言を本として我が山の戒法をあなづり戯論とわらいし故に、存の外に延暦寺の戒・清浄無染の中道の妙戒なりしが徒に土泥となりぬる事云うても余りあり歎きても何かはせん
이 계법이 선 뒤에는 엔랴쿠지의 계단은 적문의 이계(理戒)이므로 이익이 없을 것인데, 에이잔에 좌주가 시작되어 제3 · 제4의 자각 · 지증이 뜻밖에도 본사 전교 · 기신을 배반하고 「이는 같고 사는 뛰어나다」는 미친 말을 근본으로 삼아 자기 산의 계법을 업신여기고 희론이라 비웃었기 때문에, 뜻밖에도 엔랴쿠지의 계, 청정무염의 중도의 묘계였던 것이 헛되이 흙탕이 되어 버렸다. 말해도 다함이 없고 탄식해도 어찌할 수 없다.
이 대목에는 두 개의 평가가 겹쳐 있다. 하나는 때에 따른 평가다. 본문의 계법이 세워지면 적문의 계단은 그 역할을 다한다. 상법에 맞던 약은 말법에 맞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전교의 계 자체에 대한 평가다. 엔랴쿠지의 계는 본래 「청정무염의 중도의 묘계」, 곧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중도의 묘한 계였다. 그것을 흙탕으로 만든 것은 때가 아니라 전교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었다. 대성인은 전교의 계를 낮추지 않으셨다. 다만 그것이 적문의 것이며 상법의 것이라는 자리를 분명히 하셨고, 그 계를 더럽힌 이들을 꾸짖으셨다.
「하산어소식」은 같은 논리로 가마쿠라의 율종을 비판하셨다. 전교가 소승의 계를 버린 뒤 일본은 「일향 대승의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소승의 이백오십 계를 다시 꺼내 들고 대승의 계를 받은 이들을 「파계 · 무계」라 업신여기는 것은, 전교가 이미 넘어선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347쪽).
연구 노트 — 「삼대비법초」의 「제3 · 제4의 자각 · 지증」은 어서의 문장 그대로이며, 사료에서 엔닌은 제3대, 엔친은 제5대 좌주다. 「이 계법이 선 뒤」의 「이 계법」은 앞 장에서 말씀하신 본문의 계단을 가리킨다. 본문의 계단의 뜻과 실현에 관해서는 교단마다 이해가 다르므로, 이 페이지는 어서의 문장과 삼대비법의 이름까지만 쓰고 니치렌 편 21절과 교리 페이지에 맡긴다.
난과 이십여 년 — 「그는 다만 악구 · 원질뿐」
대성인은 전교를 법화경의 행자로 보셨다. 법화경의 행자는 난을 만난다. 법사품의 「여래가 계신 때에도 오히려 원망과 시기가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이겠는가」다. 전교는 남도의 승강에게 「교묘한 말을 내뱉는 까까머리 사문」이라 비난받았고, 스스로 그것을 법화경의 「하물며」의 증거라 했다(18절). 대성인은 이렇게 보셨다.
像法の中には天台一人法華経・一切経をよめり、南北これをあだみしかども陳隋・二代の聖主・眼前に是非を明めしかば敵ついに尽きぬ、像の末に伝教一人・法華経一切経を仏説のごとく読み給へり、南都・七大寺蜂起せしかども桓武・乃至嵯峨等の賢主・我と明らめ給いしかば又事なし
상법 가운데는 천태 한 사람이 법화경과 일체경을 읽었다. 남북이 이를 원망했으나 진 · 수 두 대의 성주가 눈앞에서 옳고 그름을 밝혔으므로 적이 마침내 다했다. 상법의 끝에는 전교 한 사람이 법화경과 일체경을 부처의 말씀대로 읽으셨다. 남도 칠대사가 벌 떼처럼 일어났으나 간무 · 사가 등의 현명한 왕이 스스로 밝히셨으므로 또 일이 없었다.
「또 일이 없었다」. 전교가 만난 난은 비난과 반대였으나, 그 옳고 그름은 왕이 가려 주었다. 대성인은 이어서 「지금 말법의 처음 이백여 년 …… 이치에 어긋난 것을 앞세워 탁세의 표시로 대결시키지도 않고 유배, 나아가 목숨에까지 미치려 한다」고 하셨다(같은 곳). 천태 · 전교와 대성인의 차이는 법이 아니라 그 법을 가려 줄 왕이 있었는가에 있었다.
「여설수행초」는 네 사람을 나란히 놓는다. 「우리의 본사 석가여래는 재세 팔 년 동안 절복하셨고, 천태대사는 삼십여 년, 전교대사는 이십여 년, 지금 니치렌은 이십여 년 동안 권교의 이치를 깨뜨렸다 …… 아마 천태 · 전교도 법화경 때문에 니치렌처럼 대난을 만나신 일은 없다. 그는 다만 악구 · 원질뿐이었다(彼は只悪口・怨嫉計りなり)」(504쪽). 「성인어난사」는 같은 숫자로 다른 것을 말한다. 「부처는 사십여 년, 천태대사는 삼십여 년, 전교대사는 이십여 년에 출세의 본회를 이루셨다(伝教大師は二十余年に出世の本懐を遂げ給う)」(1189쪽). 전교의 「이십여 년」은 대체로 802년 다카오의 공장에서 822년 대승계단의 칙허까지로 헤아린다. 창가학회의 교학은 전교의 출세의 본회를 적문의 원돈계단 건립으로 이해한다.
전교가 만나지 않은 난도 있다. 「상야전어반사(도장난사)」는 권지품의 「칼과 막대기로 치는 자가 있으리라(及加刀杖)」를 두고 「천태 · 묘락 · 전교 등은 칼과 막대기가 더해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빠졌다(天台・妙楽・伝教等は刀杖不加と見えたれば是又かけたり)」고 하신다(1557쪽). 「개목초」는 「자주자주 쫓겨나리라(數數見擯出)」의 「자주자주」 두 글자를 「천태 · 전교도 아직 읽지 못하셨다」고 하신다(202–203쪽). 「국부니어전어반사」는 이렇게 쓰신다. 「전교대사가 칠대사에게 원망받은 것 …… 그들도 아직 일본 전국의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의 사중에게 미움받지는 않았다」(1324쪽). 전교를 미워한 것은 남도의 승려들이었다. 대성인을 미워한 것은 온 나라였다.
그래서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니치렌의 법화경에 대한 지해는 천태 · 전교에게 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난을 참고 자비가 뛰어난 것은 두려울 만하다」(「개목초」, 202쪽 · 천태 편 32절). 지혜에서는 천태 · 전교를 높이시고, 난과 자비에서는 자신을 앞에 두셨다.
| 스승 | 권교를 깨뜨린 기간 | 겪은 난 | 옳고 그름을 가린 이 | 읽지 못한 경문 |
|---|---|---|---|---|
| 석존 | 재세 8년 | 구횡의 대난 — 석존 편 도표 15 | — | — |
| 천태 | 30여 년 | 悪口・怨嫉彼は只悪口・怨嫉計りなり | 진 · 수의 성주 | 刀杖不加 · 数数見擯出 |
| 전교 | 二十余年여설수행초 504 · 성인어난사 1189 | 六宗ににくまれ給へり여설수행초 501七寺にあだまれし국부니어전어반사 1324 | 桓武・乃至嵯峨等の賢主개목초 202 | 刀杖不加상야전어반사 1557数数見擯出개목초 202–203 |
| 니치렌 | 20여 년 | 두 번의 유배 · 다쓰노구치 · 이마의 상처 · 제자의 투옥日本一州の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の四衆국부니어전어반사 1324 | 가려지지 않음 | 刀杖の二字ともに・あひぬ상야전어반사 1557 |
천태의 후신 — 영산에서 에이잔으로
대성인의 시대에 에이잔에는 전교가 천태의 후신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천태는 영산에서 법화경을 들은 약왕보살이 중국에 나타난 몸이고, 전교는 다시 천태가 일본에 나타난 몸이라는 것이다. 3부 10절에서 본 「일대성교대의」의 이야기도 도수가 전교에게 절하며 「천태대사의 후신」이라 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대성인도 이 전승을 따르셨다. 「천태대사는 옛날 영산에 있어서는 약왕이라 이름하고, 지금 중국에 있어서는 천태라 이름하며, 일본국 안에서는 전교라 이름한다. 삼세의 홍통을 모두 묘법이라 이름한다(日本国の中にては伝教と名く三世の弘通倶に妙法と名く)」(「입정관초」, 530쪽 · 천태 편 29절).
「관심본존초」는 이 세 사람을 「내전의 성인」이라 하신다. 「불멸 후 천팔백여 년에 이르러 세 나라를 거쳐 오직 세 사람만이 비로소 이 정법을 깨달아 알았다. 이른바 인도의 석존, 중국의 지자대사, 일본의 전교다. 이 세 사람은 내전의 성인이다(日域の伝教此の三人は内典の聖人なり)」(245쪽). 용수 · 천친은 알고도 말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천태 · 전교 이후에는 두 성인의 지혜를 빌려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신다(같은 곳).
그러나 같은 「관심본존초」에서 대성인은 전교의 한계를 분명히 하셨다. 에이잔의 중심 근본중당에 전교가 모신 본존은 약사여래였다. 동방 정유리세계의 부처다.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伝教大師粗法華経の実義を顕示す然りと雖も時未だ来らざるの故に東方の鵝王を建立して本門の四菩薩を顕わさず、所詮地涌千界の為に此れを譲り与え給う故なり
전교대사는 법화경의 실의를 대강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동방의 아왕(약사여래)을 세우고 본문의 네 보살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결국 지용천계의 보살을 위해 이것을 물려주셨기 때문이다.
「아왕(鵝王)」은 부처의 다른 이름이다. 부처의 서른두 가지 상 가운데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거위의 물갈퀴 같은 막이 있다는 상에서 왔다. 「동방의 아왕」은 동방의 부처, 곧 약사여래다. 대성인은 전교가 「법화경의 실의를 대강(粗) 드러내 보이셨다」고 인정하시면서, 그가 에이잔의 중심에 세운 것이 법화경 본문의 것이 아니었던 까닭을 「때」와 「부촉」으로 설명하셨다. 전교는 몰라서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용의 보살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사보살조립초」도 에이잔의 근본중당을 들어 같은 뜻을 말씀하신다(987쪽).
천태 편 29절에서 본 것처럼, 약왕보살은 적화의 보살이다. 약왕의 후신인 천태, 천태의 후신인 전교는 모두 적문을 넓히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세운 것은 모두 적문의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모자람이 아니라 부촉의 차이였다.
연구 노트 — 근본중당의 본존 약사여래는 전교가 스스로 새겼다고 전하며, 비불(秘佛)로 전해 온다. 전교가 왜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삼았는지에 대해 연구자들은 당시 약사 신앙이 병을 고치고 나라를 지키는 신앙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 간무 천황의 치세와 약사 신앙의 관계 등을 든다. 대성인은 이 사실을 「때」의 관점에서 읽으셨다. 천태가 약왕의 후신이고 전교가 천태의 후신이라는 이야기는 헤이안 시대 이래 에이잔과 일본 불교에 널리 퍼진 전승이며, 『대사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안으로 부른 제목 — 「십생원의 기」
천태 편 30절은 천태가 안으로 묘법을 불렀다는 대성인의 말씀을 보았다. 대성인은 전교에게서도 같은 것을 보셨다.
伝教大師の最後臨終の十生願の記に云く「南無妙法蓮華経」云云、問う文証分明なり何ぞ是くの如く弘通したまわざるや、答う此れに於て二意有り一には時の至らざるが故に二には付属に非ざるが故なり、凡そ妙法の五字は末法流布の大白法なり地涌千界の大士の付属なり是の故に南岳・天台・伝教等は内に鑑みて末法の導師に之を譲りて弘通し給わざりしなり
전교대사의 마지막 임종의 「십생원의 기」에 이르기를 「남묘호렌게쿄」라 하였다. 묻는다. 문증은 분명하다. 어째서 이처럼 넓히지 않으셨는가. 답한다.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촉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묘법의 오자는 말법에 유포할 대백법이요, 지용천계의 대사가 부촉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악 · 천태 · 전교 등은 안으로 헤아리시어 말법의 도사에게 이를 물려주고 넓히지 않으셨다.
임종의 기록에 전교가 「남묘호렌게쿄」라 적었다는 것이다. 남악은 『법화참법』에서, 천태는 「남무평등대혜일승묘법연화경」 · 「계수묘법연화경」 · 「귀명묘법연화경」으로, 전교는 임종의 「십생원의 기」에서 묘법에 귀명했다. 대성인은 이것을 세 사람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자행의 진실한 내증으로 여기셨다」는 증거로 드셨다(같은 곳 · 천태 편 30절). 전교도 안으로는 묘법을 알고 불렀다. 그러나 밖으로는 넓히지 않았다.
왜 넓히지 않았는가.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그 까닭을 말씀하셨다. 「당체의초」는 두 가지를 드신다. 때가 이르지 않았고, 부촉이 아니었다. 「법화행자봉난사」도 두 가지를 드신다. 용수 · 천친은 법화경을 마음에 두고 입에 내지 않았고, 「천태 · 전교는 이것을 펴셨으나 본문의 본존과 사보살과 계단과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는 남겨 두셨다. 결국 첫째는 부처가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때와 근기가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965쪽). 그리고 「제법실상초」는 세 가지를 드신다.
天台・妙楽・伝教等は心には知り給へども言に出し給ふまではなし・胸の中にしてくらし給へり、其れも道理なり、付嘱なきが故に・時のいまだ・いたらざる故に・仏の久遠の弟子にあらざる故に
천태 · 묘락 · 전교 등은 마음으로는 아셨으나 말로 내시기까지는 하지 않으시고 가슴속에 두고 지내셨다. 그것도 도리다. 부촉이 없기 때문이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요, 부처의 구원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 어서 | 때 | 부촉 | 사람 — 적화 · 구원의 제자 |
|---|---|---|---|
| 「당체의초」519쪽 | 「時の至らざるが故」 | 「付属に非ざるが故」 | — |
| 「법화행자봉난사」965쪽 | 「時機未熟の故」 | 「仏・授与したまわざるが故」 | — |
| 「제법실상초」1358쪽 | 「時のいまだ・いたらざる故」 | 「付嘱なきが故」 | 「仏の久遠の弟子にあらざる故」 |
| 「입정관초」531쪽 · 천태에 대해 | 「時至らざるが故」 | 「付属に非ざるが故」 | 「迹化なるが故」 |
- 때
- 「時の至らざるが故」
- 부촉
- 「付属に非ざるが故」
- 사람
- —
- 때
- 「時機未熟の故」
- 부촉
- 「仏・授与したまわざるが故」
- 사람
- —
- 때
- 「時のいまだ・いたらざる故」
- 부촉
- 「付嘱なきが故」
- 사람
- 「仏の久遠の弟子にあらざる故」
- 때
- 「時至らざるが故」
- 부촉
- 「付属に非ざるが故」
- 사람
- 「迹化なるが故」
세 가지는 결국 하나로 모인다. 묘법의 오자는 석존이 구원의 제자인 지용의 보살에게 부촉하신 법이며, 그 법이 넓혀질 때는 말법의 처음이다. 전교는 지용의 보살이 아니었고, 그의 때는 상법이었다. 그래서 전교는 묘법을 「마음으로는 알았으나」 「가슴속에 두고 지냈다」. 「초목성불구결」은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천태 · 묘락 · 전교는 안으로는 헤아리셨으나 넓히지 않으셨다. 『한 빛깔 한 향기』라 말하고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을 놀라게 한다』고 속삭이시며, 『묘법연화』라 해야 할 것을 『원돈지관』으로 바꾸셨다」(1339쪽). 「증곡입도전어반사」는 「일본국에서는 쇼토쿠 태자 · 전교대사도 펴 설하지 않으셨다」고 하신다(1058쪽).
대성인은 이것을 「물려주었다(譲りて)」고 표현하셨다. 전교가 넓히지 않은 것은 모자람이 아니라 사양이었다. 말법의 도사를 위해 남겨 둔 것이다. 「법화취요초」는 이렇게 문답한다. 「여래 멸후 이천여 년,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가 남겨 두신 비법은 무엇인가. 답한다. 본문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오자다」(336쪽).
연구 노트 — 「십생원의 기(十生願の記)」라는 이름의 글은 오늘날 전하는 전교의 저작 목록에서 찾기 어렵다. 대성인 당시 에이잔에 전교의 임종과 관련해 전하던 문헌으로 보인다. 천태의 「남무평등대혜일승묘법연화경」 등이 천태의 참법(懺法)과 관련된 글에서 온 것처럼(천태 편 30절), 전교의 이 글도 에이잔의 의례 문헌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말법을 그리워한 대사 — 「말법이 매우 가깝다」
전교는 자신의 때를 두 문장으로 남겼다. 하나는 『수호국계장』의 글이다.
「정법과 상법이 조금 지나고 말법이 매우 가까이 있다. 법화일승의 근기가 지금 바로 그때다.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안락행품에 『말세 법이 멸할 때』라 하였다(正像稍過ぎ已つて末法太だ近きに有り法華一乗の機今正しく是れ其の時なり、何を以て知ることを得る、安楽行品に云く末世法滅の時なり)」(「찬시초」, 260쪽).
다른 하나는 23절에서 본 『법화수구』의 글이다. 「때를 말하면 상법의 끝, 말법의 처음이요 …… 오탁의 삶, 투쟁의 때다. 경에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이겠는가』라 한 이 말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전교는 자신의 시대가 「법화일승의 근기가 지금 바로 그때」라고 말하고 있다. 말법이 가까운 지금이야말로 법화경을 펼 때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 문장을 다르게 읽으셨다. 「관심본존초」는 이렇게 푸신다. 「『말법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해석은 나의 때는 바른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末法太有近の釈は我が時は正時に非ずと云う意なり)」(254쪽). 「법화취요초」도 같다. 「『말법태유근』의 다섯 자는 나의 세상은 법화경이 유포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해석이다」(336쪽). 가깝다는 것은 아직 아니라는 뜻이다. 전교는 말법이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의 때가 그때가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대성인은 전교의 두 번째 문장, 「오탁의 삶, 투쟁의 때」를 이렇게 읽으셨다.
伝教大師云く「代を語れば則ち像の終り末の始・地を尋れば唐の東・羯の西・人を原れば則ち五濁の生・闘諍の時なり、経に云く猶多怨嫉・況滅度後と此の言良に以有るなり」等云云、此の伝教大師の筆跡は其の時に当るに似たれども意は当時を指すなり正像稍過ぎ已つて末法太だ近きに有りの釈は心有るかな
전교대사가 이르기를 「때를 말하면 상법의 끝, 말법의 처음이요, 땅을 찾으면 당의 동쪽 갈의 서쪽이요, 사람을 살피면 오탁의 삶, 투쟁의 때다. 경에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이겠는가』라 한 이 말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하였다. 이 전교대사의 글은 그 (전교 자신의) 때에 해당하는 듯하지만 뜻은 지금을 가리킨다. 「정법과 상법이 조금 지나고 말법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해석은 뜻이 깊도다.
「그 때에 해당하는 듯하지만 뜻은 지금을 가리킨다」. 전교의 글은 전교 자신의 때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전교가 겪은 남도와의 다툼은 「투쟁의 때」라는 말에 어울렸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 뜻이 말법, 곧 대성인의 「지금」을 가리킨다고 하셨다. 「관심본존초」는 더 구체적이다. 「이 해석에 『투쟁의 때』라 한 것은 지금의 자계반역 · 서해침핍의 두 난을 가리킨다」(254쪽). 전교의 글은 말법에 대한 예언, 곧 미래기로 읽혔다.
대성인은 이 글들을 「그리움」의 글로 보셨다. 「현불미래기」는 전교의 「말법이 매우 가깝다」를 「말법의 처음을 바라고 즐기는 말(末法の始めを願楽するの言なり)」이라 하셨다(505쪽). 「찬시초」는 천태 · 묘락 · 전교가 「재세의 법화경의 때에도 빠지셨고, 멸후 말법의 때에도 태어나지 못하셨다. 그 중간인 것을 탄식하시며 말법의 처음을 그리워하신 글」이라 하셨다(260쪽 · 천태 편 33절). 「사보살조립초」는 전교의 이 글을 인용하고 「그리워하셨다(恋いさせ給う)」고 적으셨다(988쪽).
그리고 그 그리움에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시대로 과보를 논하면 용수 · 천친을 넘어서고 천태 · 전교보다도 뛰어나다(時代を以て果報を論ずれば、竜樹・天親に超過し、天台・伝教にも勝るるなり)」(「현불미래기」, 505–506쪽). 지혜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전교가 그리워한 때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현불미래기」의 첫머리에서 대성인은 한 번은 탄식하셨다. 어떤 죄업으로 부처의 재세에 태어나지 못하고 「상법 가운데의 천태 · 전교 등도 만나지 못했는가」. 그리고 한 번은 기뻐하셨다. 어떤 행복으로 후오백세에 태어나 이 경문을 보는가(505쪽).
- 正像稍過已
- 末法太有近
- 法華一乗機
- 今正是其時
- 「我が時は正時に非ず」관심본존초 254
- 「我が世は法華経流布の世に非ず」법화취요초 336
- 「末法の始めを願楽するの言」현불미래기 505
- 「意は当時を指すなり」현불미래기 506
- 「恋いさせ給う」사보살조립초 988
연구 노트 — 전교 당시의 일본 불교에서 말법은 아직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전교가 「말법이 매우 가깝다」, 「상법의 끝, 말법의 처음」이라 쓴 것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아 왔으며, 전교의 대승계단 운동의 절박함을 이 시대 인식과 연결해 읽는 연구가 있다. 『말법등명기』의 진위 문제(21절)도 이 시대 인식과 관련해 논의된다. 한편 전교의 「법화일승의 근기가 지금 바로 그때」라는 구절은 도쿠이치의 오성각별설에 맞서 지금의 중생이 모두 일승의 근기라고 주장한 논쟁의 맥락 속에 있다. 대성인은 이 구절을 「때」의 관점에서 읽으셨다.
자각 · 지증 — 사자 몸속의 벌레
대성인이 전교를 이야기하실 때 가장 많은 말을 쓰신 것은 전교 자신이 아니라 전교의 뒤를 이은 두 사람, 자각대사 엔닌과 지증대사 엔친이었다. 22절에서 본 것처럼 엔닌은 당에서 돌아와 『금강정경소』 · 『소실지경소』 열네 권을 지어 법화경과 대일경은 「이는 같고, 인과 진언의 사에서는 진언이 뛰어나다」고 했다. 대성인은 「찬시초」와 「보은초」에서 그 뒤의 일을 그리신다. 엔닌은 이 소가 부처의 뜻에 맞는지 불안하여 본존 앞에 소를 두고 이레 동안 기도했다. 닷새째 새벽 꿈에 한낮의 해를 활로 쏘자 화살이 해에 맞아 해가 흔들렸다. 엔닌은 깨어나 이것을 좋은 꿈이라 여기고 선지를 받아 소를 퍼뜨렸다(「찬시초」, 281쪽 · 「보은초」, 306쪽). 대성인은 해를 쏘는 꿈이 길몽이라는 증거가 불교와 외전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고, 이 꿈은 「천조태신 · 전교대사 · 석가불 · 법화경을 쏜 화살」이라 하셨다(「찬시초」, 282쪽).
엔친은 866년 조정에 청하여 「진언과 지관 두 교는 같이 제호라 불리고 함께 심비(深秘)라 한다」, 그리고 「선사(先師)가 이미 두 업을 열어 나의 도로 삼았다 …… 지금부터 두 교에 통달한 사람을 엔랴쿠지의 좌주로 삼아 상례로 하라」는 선지를 받아 냈다(「보은초」, 307쪽). 전교를 「선사」로 내세워, 전교가 둔 지관업과 차나업을 두 종이 같다는 증거로 삼은 것이다.
대성인은 이것을 전교에 대한 배반으로 보셨다.
慈覚・智証の二人は言は伝教大師の御弟子とは・なのらせ給ども心は御弟子にあらず、其の故は此の書に云く「謹で依憑集一巻を著わして 同我の後哲に贈る」等云云、同我の二字は真言宗は天台宗に劣るとならひてこそ同我にてはあるべけれ……されば叡山の仏法は但だ伝教大師・義真和尚・円澄大師の三代計りにてやありけん、天台座主すでに真言の座主にうつりぬ名と所領とは天台山其の主は真言師なり
자각 · 지증 두 사람은 말로는 전교대사의 제자라 이름하시지만 마음은 제자가 아니다. 그 까닭은 이 책(『의빙집』)에 「삼가 『의빙집』 한 권을 지어 나와 같은(同我) 뒤의 철인에게 준다」고 하였다. 「나와 같은」 두 글자는 진언종이 천태종보다 못하다고 배워야 「나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에이잔의 불법은 다만 전교대사 · 기신 화상 · 엔초 대사의 삼대뿐이었던 것인가. 천태좌주는 이미 진언의 좌주로 옮겨 갔다. 이름과 영지는 천태산이지만 그 주인은 진언사다.
「동아(同我)」, 나와 같은. 전교는 『의빙집』을 「나와 같은 뒤의 철인」에게 준다고 했다. 대성인은 이 두 글자에서 전교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으셨다. 전교와 같은 법을 배우는 사람, 곧 진언이 천태보다 못하다는 것을 배운 사람만이 「나와 같은」 제자다. 엔닌과 엔친이 스스로 받아 낸 선지에는 「오로지 선사의 뜻을 어기고 편집하는 마음을 이룬다」, 「스승과 제자의 도는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문구가 있었다. 대성인은 이렇게 되물으셨다. 「이 선지대로라면 자각 · 지증이야말로 오로지 선사를 배반하는 사람이다」(「보은초」, 308쪽).
그리고 대성인은 이 배반을 홍법대사의 잘못보다 더 무겁게 보셨다. 홍법의 교판은 법화경을 화엄경보다도 아래에 둘 만큼 지나쳐서 그의 제자들조차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각 · 지증이 「진언과 천태는 이가 같다」고 하면 누구나 그럴듯하다고 여긴다. 「법사와 비구니, 검은색과 푸른색」처럼 비슷하여, 「지혜로운 사람도 헤매고 어리석은 사람도 잘못하여 이 사백여 년 동안 에이잔 · 온조지 · 도지 · 나라 · 오기칠도 · 일본 전국이 모두 방법의 자가 되었다」(「보은초」, 309쪽).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너뜨리는 것이 가장 무섭다. 「찬시초」는 이것을 부처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伝教大師は三論・法相・華厳等の日本の碩徳等を六虫とかかせ給へり、日蓮は真言・禅宗・浄土等の元祖を三虫となづく、又天台宗の慈覚・安然・慧心等は法華経・伝教大師の師子の身の中の三虫なり
전교대사는 삼론 · 법상 · 화엄 등 일본의 석덕들을 여섯 벌레라 쓰셨다. 니치렌은 진언 · 선종 · 정토 등의 원조를 세 벌레라 이름한다. 또 천태종의 자각 · 안넨 · 에신 등은 법화경과 전교대사라는 사자의 몸속의 세 벌레다.
「연화면경」은 사자가 죽으면 다른 짐승은 그 살을 먹지 못하지만 사자의 몸속에서 생긴 벌레가 사자의 살을 먹는다고 하고, 부처의 법도 밖에서가 아니라 법 안의 악한 비구가 무너뜨린다고 설한다(「찬시초」, 285–286쪽). 전교는 남도 육종의 학승들을 「여섯 벌레」라 했다. 대성인은 전교가 세운 산 안에서 전교의 법을 먹은 이들을 「세 벌레」라 하셨다. 자각 · 안넨 · 에신, 곧 에이잔을 진언으로 기울게 한 엔닌, 태밀을 완성해 진언을 첫째에 둔 안넨, 『왕생요집』으로 염불의 길을 연 겐신이다.
대성인은 이 흐름의 끝을 「하산어소식」에서 그리셨다. 천태좌주 메이운이 「전교대사의 지관원의 법화경의 세 부를 버리고 자각대사의 총지원의 대일경의 세 부에 붙었다」. 「천태산은 이름뿐이고 진언의 산이 되었으며, 법화경의 영지는 대일경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메이운은 요시나카에게 죽임을 당했다(354쪽). 대성인은 이것을 왕법이 신하에게 눌리는 하극상, 곧 뒤의 조큐의 난으로 이어지는 나라의 어지러움의 시작으로 보셨다.

- ①전교칠종 · 방의경『의빙집』 816「同我の後哲」
- ②기신 · 엔초「此の義相違なし」「찬시초」 280쪽
- ③자각소 14권 · 해를 쏘는 꿈「天台の止観と真言の法義とは理冥に符えり」선지 · 「보은초」 306쪽
- ④지증「両教に通達するの人を以て延暦寺の座主と為し」866 선지 · 「보은초」 307쪽
- ⑤안넨 … 메이운『교시쟁론』 진언 1 · 선 2 · 천태 3 — 「찬시초」 280쪽… 메이운 1184 — 「하산어소식」 354쪽
연구 노트 — 엔닌의 꿈 이야기는 엔닌의 전기(『자각대사전』)에 실린 것이며, 대성인은 이 전기를 인용하셨다(「찬시초」, 281쪽). 엔친의 선지 두 통(866년 4월 · 6월)의 문구도 대성인이 인용하신 그대로다. 오늘날의 연구에서 엔닌 · 엔친 · 안넨은 일본 천태의 교학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들로 평가되며, 특히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엔친의 입당 문서는 역사 사료로서 높이 평가된다. 대성인이 문제 삼으신 것은 그들의 학문이나 공적이 아니라, 법화경과 대일경의 우열이라는 한 가지 점이었다. 겐신에 대해서도 대성인은 「수호국가론」에서 그가 『왕생요집』 안에서도 법화경의 일념신해의 공덕이 염불보다 뛰어나다고 한 것을 들어, 그의 본뜻을 따로 가리셨다(49–50쪽).
「이름과 영지는 천태산이지만 그 주인은 진언사다」. 대성인의 이 말씀은 에이잔의 역사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스승의 이름을 걸고, 스승이 세운 곳에 앉아, 스승의 글을 읽으면서도, 스승의 뜻과 반대로 갈 수 있다. 엔닌과 엔친은 전교를 「선사」라 부르며 그 이름으로 선지를 받았다. 대성인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전교대사가 어느 책에 그렇게 쓰셨는가. 창가학회는 이 물음을 사제의 길의 핵심으로 받아들인다. 스승의 뜻을 스승이 남긴 말과 행동으로 거듭 확인하는 것, 그리고 스승의 이름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 쓰지 않는 것이다. 「동아(同我)」, 나와 같은 사람. 전교가 뒤의 사람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자리를 잇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법을 지니는 사람이었다.
삼국사사 — 「일본국에 이 법이 나타난 것은 두 번」
대성인은 사도에서 쓰신 「개목초」에서, 법화경 견보탑품의 육난구이(六難九易)를 인용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日本国に此の法顕るること二度なり伝教大師と日蓮となりとしれ、無眼のものは疑うべし力及ぶべからず
일본국에 이 법이 나타난 것은 두 번이다. 전교대사와 니치렌이라고 알라. 눈이 없는 자는 의심할 것이다. 힘이 미치지 않는다.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지 칠백 년. 그 사이 법화경을 부처의 말씀대로 읽은 사람은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개목초」의 다른 곳에서도 대성인은 「일본에 불법이 전해진 지 이미 칠백여 년, 다만 전교대사 한 사람만이 법화경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但伝教大師・一人計り法華経をよめり)」고 하셨다(195쪽). 「찬시초」는 더 분명하다. 「만약 경문대로라면 일본국에 불법이 전해진 지 칠백여 년, 전교대사와 니치렌 말고는 한 사람도 법화경의 행자는 없다」(266쪽).
「보은초」는 이 두 사람을 세 나라의 흐름 속에 두셨다.
日本国には伝教大師・六宗にせめかちて日本の始第一の根本大師となり給う・月氏・漢土・日本に但三人計りこそ於一切衆生中亦為第一にては候へ、されば秀句に云く「浅きは易く深きは難しとは釈迦の所判なり浅きを去つて深きに就くは丈夫の心なり天台大師は釈迦に信順して法華宗を助けて震旦に敷揚し叡山の一家は天台に相承して法華宗を助けて日本に弘通す」等云云、仏滅後・一千八百余年が間に法華経の行者・漢土に一人・日本に一人・已上二人釈尊を加へ奉りて已上三人なり
일본국에서는 전교대사가 육종을 꾸짖어 이기시고 일본의 처음이자 제일가는 근본대사가 되셨다. 인도 · 중국 · 일본에 다만 세 사람만이 「일체중생 가운데 또한 제일」이다. 그러므로 『법화수구』에 이르기를 「얕은 것은 쉽고 깊은 것은 어렵다는 것은 석가의 판정이다. 얕은 것을 버리고 깊은 것에 나아가는 것은 장부의 마음이다. 천태대사는 석가를 믿고 따라 법화종을 도와 중국에 널리 폈고, 에이잔의 일가는 천태를 이어받아 법화종을 도와 일본에 넓혔다」 하였다. 불멸 후 천팔백여 년 동안 법화경의 행자는 중국에 한 사람, 일본에 한 사람, 모두 두 사람이며, 석존을 더하여 모두 세 사람이다.
「석가 · 천태 · 전교」의 세 사람, 곧 삼국삼사(三國三師)는 전교 자신의 말에서 나왔다. 『법화수구』에서 전교는 석가가 판정하고, 천태가 중국에 펴고, 「에이잔의 일가」가 일본에 넓혔다고 썼다. 「에이잔의 일가」, 전교는 자신을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에이잔이라는 한 집안으로 불렀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이 글에 한 사람을 더하셨다. 「아와 지방의 니치렌은 아마도 세 스승을 이어받아 법화종을 도와 말법에 유통한다. 셋에 하나를 더하여 삼국사사라 부른다(三に一を加えて三国四師と号く)」(「현불미래기」, 509쪽 · 천태 편 33절).
대성인은 에이잔의 법을 이으셨다. 그러나 에이잔의 좌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교를 통해서 이으셨다. 「니치렌은 여러 경의 우열을 아는 것이 화엄의 징관 · 삼론의 가상 · 법상의 자은 · 진언의 홍법보다 뛰어나다. 천태 · 전교의 자취를 따르기 때문이다(天台・伝教の跡をしのぶゆへなり)」(「개목초」, 223쪽). 「경문을 거울로 삼고 천태 · 전교의 지남(指南)을 손에 쥐고」 염불을 꾸짖으셨다(「선무외삼장초」, 883쪽). 대성인에게 전교는 스승이 사라진 산에 남은 스승의 글, 곧 「지남」이었다.
그리고 대성인은 제자들에게 그 스승들을 넘어서라고 하셨다. 다쓰노구치의 법난을 앞두고 대성인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섭 · 아난 등, 마명 · 용수 등, 남악 · 천태 등, 묘락 · 전교 등도 아직 넓히지 않으신 법화경의 간심, 모든 부처의 눈인 묘법연화경의 오자가 말법의 처음에 일염부제에 넓혀질 서상으로 니치렌이 앞장섰다. 제자들은 이진 · 삼진으로 이어서 가섭 · 아난보다 뛰어나고 천태 · 전교도 넘어서라(わたうども二陣三陣つづきて迦葉・阿難にも勝ぐれ天台・伝教にもこへよかし)」(「종종어진무어서」, 910–911쪽).
浅きを去つて深きに就くは丈夫の心なり
天台・伝教にもこへよかし「종종어진무어서」 910–911쪽
대성인이 본 전교는 세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남도 육종과 공장에서 겨루어 법화경을 일본 불교의 한가운데 세우고, 천태도 하지 못한 원돈의 계단을 세워 「불법의 사람을 모두 하나의 법으로 만든」 법화경의 행자, 「일본국에 이 법이 나타난」 첫 사람이다. 또 하나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때」와 「부촉」 때문에 묘법을 가슴속에 두고, 동방의 아왕을 세우고, 진언과의 우열을 공개하지 않고, 말법의 도사에게 「물려준」 사람, 말법이 매우 가깝다며 그때를 그리워한 사람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가 세운 산에서 그의 이름을 지닌 이들에게 그 뜻을 잃은 스승이다. 창가학회는 이 세 얼굴을 함께 본다. 전교를 높이는 것은 법화경을 일본에 세운 공을 아는 것이고, 전교의 한계를 아는 것은 말법의 불법이 왜 본문의 불법인지를 아는 것이며, 에이잔의 역사를 아는 것은 스승의 뜻을 잇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대성인은 제자들에게 「천태 · 전교도 넘어서라」고 하셨다. 전교가 그리워한 때에 태어나 전교가 물려준 법을 받은 사람에게,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책임이다.
세 층의 전교
이 페이지는 전교를 세 층으로 읽었다.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전교를 알수록, 열아홉 살에 국가의 계단에서 받은 신분을 버리고 산에 들어간 젊은 승려가 쉰여섯의 마지막 날까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가 보인다. 그가 끝내 보지 못한 대승계단의 칙허는 그가 떠나고 이레 뒤에 내려왔다. 일본 불교의 전교를 알수록, 한 산이 네 세기 동안 일본 불교의 거의 모든 새 흐름을 낳았다는 사실과, 그 산이 그를 연 사람의 뜻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가 함께 보인다. 그리고 대성인이 본 전교를 알수록, 그 모든 것이 말법의 한 법을 향해 놓인 길이었음이 보인다. 전교는 「원문」에서, 닦은 공덕을 홀로 받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 돌려 함께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고 서원했다. 대성인은 그 서원이 이루어질 때를 말법에 여셨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 538 · 552—불교 공전두 설 · 보은초 302 「欽明天皇の御宇十三年壬申」
- 741—국분사 · 국분니사 조칙쇼무 천황
- 752—도다이지 대불 개안
- 754—감진 나라에 들어옴 · 도다이지 계단천태의 책을 가져옴
- 761—시모쓰케 야쿠시지 · 쓰쿠시 간제온지 계단천하의 세 계단
- 764–770—도쿄 사건와케노 기요마로
- 767—오미국 시가군에서 태어남『대사전』 · 766년설도 있음
- 778—오미 국분사 교효에게 들어감12세
- 78011.12오미 국분사에서 득도 · 법명 사이초국부첩
- 781—간무 천황 즉위
- 784—나가오카쿄 천도
- 7854.6도다이지 계단원에서 구족계계첩 · 19세
- 7857월히에이산에 들어감 · 「원문」五願
- 788—일승지관원 창건약사여래 · 전승 「불멸의 법등」
- 794—헤이안쿄 천도
- 797—내공봉십선사 · 일체경 서사 발원도추의 조력
- 79811월법화십강 시작상월회의 기원
- 80111월남도 십대덕을 청한 법화십강
- 802정월다카오산사 강회 · 14대덕의 사표어서: 1.19 행행 · 1.29 칙사
- 8029월입당 청원 · 환학생역어 기신
- 8034월나니와 출발 · 폭풍으로 되돌아옴쓰쿠시 대기
- 8047.6히젠 다우라 출항둘째 배
- 8049.1명주 도착
- 8049–10월태주 · 천태산 · 도수 · 행만 · 소연『태주록』
- 8053.2도수에게 대승보살계태주 용흥사
- 8054.18월주 순효에게 관정『월주록』
- 8056.5쓰시마 귀착 · 7월 복명보은초 304 「延暦二十四年六月に帰朝」
- 8059월다카오산사 관정칙명
- 8061.26연분도자 두 사람 · 천태법화종 공인지관업 · 차나업
- 8063.17간무 천황 붕어
- 80610월구카이 귀국보은초 305 「大同二年」 · 중생심어서 1593 「大同三年」
- 808—엔닌 15세 에이잔에 오름본존문답초 368
- 81211.15 · 12.14다카오산사에서 구카이에게 결연관정금강계 · 태장계
- 81311월구카이가 『이취석경』 차람을 거절
- 814—규슈 순화 · 우사 · 가와라자줏빛 가사 · 전승
- 816—『의빙천태집』 서문 · 구카이와 결별보은초 308 「弘仁の七丙申の歳」
- 817—동국 순화 · 『조권실경』도쿠이치 논쟁 시작
- 818봄이백오십 계를 버림하산어소식 345
- 8185.13 · 8.27육조식 · 팔조식「國寶何物」
- 818—『수호국계장』 · 「육소조보탑원문」
- 8193.15사조식일향대승사
- 8195월승강의 반론고묘 등
- 8202.29『현계론』 · 『내증불법상승혈맥보』 상표
- 821—『법화수구』법화십승
- 8226.4에이잔 중도원에서 입멸56세 · 보은초 305
- 8226.11대승계단 칙허입멸 7일 뒤
- 8232월엔랴쿠지 사액 · 봄 첫 대승계 수계전계사 기신
- 824—기신 초대 천태좌주
- 827 무렵—계단원
- 838–847—엔닌 입당보은초 305 · 중생심어서 1594
- 853–858—엔친 입당
- 854—엔닌 제3대 좌주
- 8667월전교대사 · 자각대사 시호첫 대사호
- 8664 · 6월엔친의 선지 「両教に通達するの人」보은초 307
- 868—엔친 제5대 좌주
- 985—겐신 『왕생요집』
- 993—산문 · 사문 분열
- 1184—천태좌주 메이운 피살하산어소식 354
- 12722월「개목초」「伝教大師と日蓮となり」
- 12734.25「관심본존초」「東方の鵝王」 · 「末法太有近」
- 1273윤5.11「현불미래기」삼국사사
- 12741.14 · 5.24「법화행자봉난사」 · 「법화취요초」남겨 둔 비법
- 12756월「찬시초」「一閻浮提第一の奇事」
- 12767.21「보은초」「天台よりも伝教は超えさせ給いたり」
- 1277—「하산어소식」적문의 계정혜
- 12814월「삼대비법초」적문의 이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