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다를 건너 동쪽 섬으로 향하는 옛 견당선 한 척

세 대사의 사적과 불법의 전래 — 진언의 도법과 원밀일치

본존문답초 · 제3편 · 제7~8장

本尊問答抄 — 三大師の事歴と仏法の伝来어서 367–370쪽
저술
홍안 원년(1278) 9월 · 미노부
대고중
조켄보 닛추(浄顕房日仲)
장
제7~8장
쪽수
어서 367:14–370:01

다섯 편 · 본존문답초 14장 구성도

14장 → 다섯 편
  1. 序講365 앞유래 · 대의 · 대성인의 정의
  2. 본존의 정의
  3. 본존의 정의
  4. 진언 비판과 불법의 흐름
    제3편세 대사의 사적과 불법의 전래 — 진언의 도법과 원밀일치지금 읽는 편
    7~8장0367:14~0370:01
  5. 법화경의 행자
  6. 현증과 본존 유포

「본존문답초」는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으라」는 한 줄의 결론에서 출발해, 그 근거를 경문과 도리로 세우고(제1~5장), 이어 그 결론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인 홍법 · 자각 · 지증 세 대사에 대한 귀의를 꾸짖는다(제6장). 이 셋째 편은 다섯 편 가운데 「진언 비판과 불법의 흐름」이라는 갈래를 홀로 맡는다. 제7장에서 문자는 세 대사가 얼마나 정통한 스승에게 배웠고 얼마나 많은 천황의 스승이 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토록 존귀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어찌 부처를 등지는 일이냐」고 되묻는다. 제8장에서 대성인은 그 물음에 인물의 덕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인도 · 중국 · 일본으로 이어진 불법 전래의 역사 전체를 펼쳐 진언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법화경 위에 올라섰는지를 밝히신다. 사람의 권위와 법의 기준 가운데 무엇이 근본이냐 —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열반경의 유계가 이 편 전체를 꿰뚫는 물음이다.

두 장은 하나의 문답이다. 문자의 반론은 사실의 나열로 되어 있다. 구카이(空海)는 근조(勤操)에게서 남도 육종을 배우고 당의 청룡사에서 혜과(慧果)에게 진언의 대법을 받아 대일여래로부터 이어진 「병의 물」을 그대로 옮겨 왔다. 엔닌(円仁)은 전교대사의 제자로서 당에서 십 년 가까이 현밀을 배워 천태 좌주가 되었다. 엔친(円珍)은 구카이의 혈연이자 의진(義真)의 제자로서 다시 당에 건너가 칠 년을 배우고 천황들의 스승이 되었다. 문자는 이것을 「달과 같고 해와 같다」고 찬탄한다. 이 찬탄은 문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가마쿠라 시대 일본 사회 전체의 상식이었다.

대성인의 답은 그 상식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거꾸로 더듬어 간다. 인도에서는 정법 천 년 동안 현교와 밀교의 구별조차 없었다. 중국에 불법이 전해지고 육백 년이 지나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이 진언을 세우자 법화경이 처음으로 그 아래로 끌어내려졌고, 묘락대사도 그 잘못을 끝까지 따지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감진이 천태의 전적을 가져오고도 율만 펼쳤고, 전교대사가 비로소 법화경과 대일경을 나란히 놓고 대조해 대일경이 법화경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대일경소』가 천태의 법문을 훔쳐 들였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런데 그 뒤 홍법이 법화경을 화엄경보다도 낮추었고, 전교대사의 제자인 자각 · 지증이 법화와 진언의 승렬에 관해서는 홍법에게 동조해 버렸다. 그로부터 사백여 년, 천태 좌주와 오무로(御室)의 권위 앞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편은 단순한 불교사 개관이 아니다. 대성인이 삼국 전래의 역사를 더듬으신 까닭은 「진언 밀교가 퍼지기에 이른 역사적 경과를 밝히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경과의 끝에서, 세 대사의 잘못이 오래 바로잡히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 세 대사를 넘어설 지혜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 지혜가 있더라도 권위를 두려워해 꾸짖을 용기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다음 제4편 「법화경의 행자 없는 나라와 대성인의 사적」(제9 · 10장)에서 「법화경의 행자 없는 나라」와 그 나라에 홀로 나타난 대성인의 사적으로 이어진다.

이 편의 장

第七段三大師の事歴を挙げる제7장 세 대사의 사적을 들다 — 문자가 홍법 · 자각 · 지증의 사승 · 입당 · 귀국 후의 영예를 들어 「세 대사에 의지하는 것이 어찌 부처를 등지는 일이냐」고 반론한다.
第八段仏法の伝来を略述する제8장 불법의 전래를 간략히 서술하다 — 대성인이 인도 · 중국 · 일본의 불법 전래사를 더듬어, 진언이 법화경 위에 서게 된 경위와 전교대사를 등진 자각 · 지증, 원밀일치의 정착을 밝히신다.
제7장 세 대사의 사적을 들다
어서 367쪽 14행 – 368쪽 13행 · 第七段 三大師の事歴を挙げる

본문

本文 · 第一어서 367쪽 14행 ~ 368쪽 2행
本文 · 어서 원문

問う弘法大師は讃岐の国の人勤操僧正の弟子なり、 三論・法相の六宗を極む、 去る延暦二十三年五月桓武天皇の勅宣を帯びて漢土に入り順宗皇帝の勅に依りて青竜寺に入りて慧果和尚に真言の大法を相承し給へり 慧果和尚は大日如来よりは七代になり給う人はかはれども法門はをなじ譬えば瓶の水を猶瓶にうつすがごとし、 大日如来と金剛薩埵・竜猛・竜智・金剛智・不空・慧果・弘法との瓶は異なれども所伝の智水は同じ真言なり 此の大師・彼の真言を習いて三千の波涛をわたりて日本国に付き給うに平城・嵯峨・淳和の三帝にさづけ奉る、 去る弘仁十四年正月十九日に東寺を建立すべき勅を給いて真言の秘法を弘通し給う 然らば五畿・七道・六十六箇国・二の島にいたるまでも鈴をとり杵をにぎる人たれかこの末流にあらざるや。

풀이

묻기를, 홍법대사는 사누키국(讃岐国) 사람으로 근조 승정(勤操僧正)의 제자이니라. 삼론 · 법상 등 육종을 궁구하였느니라. 지난 연력(延暦) 23년 5월, 간무 천황의 칙선을 받들어 한토에 들어가 순종 황제의 칙명에 의하여 청룡사에 들어가서 혜과 화상에게서 진언의 대법을 상승하셨느니라. 혜과 화상은 대일여래로부터 일곱째 대가 되시는 분이니, 사람은 바뀌어도 법문은 같으니라. 비유하면 병의 물을 다시 병에 옮기는 것과 같으니라. 대일여래와 금강살타 · 용맹 · 용지 · 금강지 · 불공 · 혜과 · 홍법이라는 병은 다르나 전한 바 지혜의 물은 같은 진언이니라. 이 대사가 그 진언을 배워 삼천 리 파도를 건너 일본국에 돌아오시어 헤이제이 · 사가 · 준나의 세 천황께 전해 드렸느니라. 지난 홍인(弘仁) 14년 정월 19일에 동사(東寺)를 건립하라는 칙명을 받아 진언의 비법을 홍통하셨느니라. 그러하니 오기(五畿) · 칠도(七道) · 육십육 개국 · 두 섬에 이르기까지, 방울을 들고 금강저를 쥔 사람 가운데 누가 이 대사의 말류가 아니겠느냐.

本文 · 第二어서 368쪽 3~7행
本文 · 어서 원문

又慈覚大師は下野の国の人・広智菩薩の弟子なり、 大同三年・御歳十五にして伝教大師の御弟子となりて叡山に登りて十五年の間・六宗を習い法華真言の二宗を習い伝え 承和五年御入唐・漢土の会昌天子の御宇なり、 法全・元政・義真・法月・宗叡・志遠等の天台・真言の碩学に値い奉りて顕密の二道を習い極め給う、 其の上殊に真言の秘教は十年の間功を尽し給う大日如来よりは九代なり 嘉祥元年・仁明天皇の御師なり、 仁寿・斉衡に金剛頂経・蘇悉地経の二経の疏を造り叡山に総持院を建立して第三の座主となり給う 天台の真言これよりはじまる。

풀이

또 자각대사는 시모쓰케국(下野国) 사람으로 광지보살(広智菩薩)의 제자이니라. 대동(大同) 3년 열다섯 살에 전교대사의 제자가 되어 예산(叡山)에 올라 십오 년 동안 육종을 배우고 법화 · 진언의 두 종을 배워 전하였느니라. 승화(承和) 5년에 당에 들어가시니 한토의 회창 천자(会昌天子)의 치세이니라. 법전 · 원정 · 의진 · 법월 · 종예 · 지원 등 천태 · 진언의 석학을 만나 뵙고 현밀의 두 길을 배워 궁구하셨느니라. 그 위에 특히 진언의 비교(秘教)에는 십 년 동안 공을 다하셨으니, 대일여래로부터는 아홉째 대이니라. 가상(嘉祥) 원년에 닌묘 천황의 스승이 되셨느니라. 인수(仁寿) · 제형(斉衡) 연간에 금강정경 · 소실지경 두 경의 소를 짓고, 예산에 총지원을 건립하여 제3대 좌주가 되셨느니라. 천태의 진언은 이로부터 시작되느니라.

本文 · 第三어서 368쪽 8~13행
本文 · 어서 원문

又智証大師は讃岐の国の人・天長四年・御年十四・叡山に登り義真和尚の御弟子となり給う、 日本国にては義真・慈覚・円澄・別当等の諸徳に八宗を習い伝え 去る仁寿元年に文徳天皇の勅を給いて漢土に入り宣宗皇帝の大中年中に法全良諝和尚等の諸大師に七年の間・顕密の二教習い極め給いて 去る天安二年に御帰朝・文徳・清和等の皇帝の御師なり、 何れも現の為当の為月の如く日の如く代代の明主・時時の臣民・信仰余り有り帰依怠り無し 故に愚癡の一切偏に信ずるばかりなり 誠に法に依つて人に依らざれの金言を背かざるの外は争か仏によらずして弘法等の人によるべきや、 所詮其の心如何、

풀이

또 지증대사는 사누키국 사람이니라. 덴초(天長) 4년 열네 살에 예산에 올라 의진 화상(義真和尚)의 제자가 되셨느니라. 일본국에서는 의진 · 자각 · 원징 · 별당 등 여러 덕 있는 이에게서 팔종을 배워 전하고, 지난 인수 원년에 몬토쿠 천황의 칙명을 받아 한토에 들어가, 선종 황제의 대중(大中) 연간에 법전 · 양서 화상 등 여러 대사에게서 칠 년 동안 현밀의 두 교를 배워 궁구하시고, 지난 덴안(天安) 2년에 귀조하시어 몬토쿠 · 세이와 등 황제의 스승이 되셨느니라. 이 세 대사는 모두 현세를 위하여도 내세를 위하여도 달과 같고 해와 같아서, 대대의 명군과 때때의 신민이 신앙함에 남음이 있고 귀의함에 게으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모든 이는 오로지 믿을 따름이니라. 참으로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금언을 등지지 않는 한, 어찌 부처에 의지하지 않고 홍법 등의 사람에게 의지한다 하겠느냐. 결국 그 뜻은 어떠하냐.

어구 풀이

勤操僧正근조 승정
나라 다이안사(大安寺)에 머물던 남도 삼론종의 대표적 학승. 구카이가 남긴 것으로 전하는 「이십오개조 유고(遺告)」 등에 따르면 구카이는 처음 근조에게 배우고 그를 따라 이즈미(和泉)의 마키노오산사(槇尾山寺)에 들어가 그곳에서 득도 · 수계했다고 한다. 本文이 「삼론 · 법상의 육종을 궁구했다」고 하는 것은 구카이의 출발이 남도 교학에 있었음을 말한다.
青竜寺청룡사
당의 수도 장안에 있던 밀교 사원. 혜과가 머물며 태장 · 금강 양부의 밀교를 전한 곳으로, 구카이는 장안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던 중 이곳으로 혜과를 찾아갔다. 뒤에 엔닌은 이 절의 의진(義真)에게서, 엔친은 이 절의 법전(法全)에게서 각각 밀교의 대법을 받았다. 세 대사의 밀교가 모두 이 한 절에 닿아 있다.
慧果和尚혜과 화상
불공의 제자로, 진언에서 부법(付法)의 제7조로 꼽는 당의 밀교승. 구카이에게 태장 · 금강 양부의 관정과 전법아사리위 관정을 주었다. 本文의 「대일여래로부터 칠대」는 이 부법의 차례에 따른 셈이다.
瓶の水を猶瓶にうつす병의 물을 다시 병에 옮김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남김없이 전함을 이르는 비유(사병 瀉瓶). 문자는 이 비유로, 사람은 대일여래에서 구카이까지 여덟 번 바뀌었어도 전해진 「지혜의 물」은 한 방울도 변하지 않은 같은 진언이라고 주장한다. 진언 상승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핵심 논리다.
三千の波涛삼천 리 파도
당과 일본 사이의 험한 바닷길. 구카이가 탄 견당사 제1선은 폭풍을 만나 남쪽 복주 쪽에 표착했다. 문자는 목숨을 건 구법의 고난을 들어 구카이의 공덕을 높인다.
平城・嵯峨・淳和の三帝헤이제이 · 사가 · 준나의 세 천황
구카이가 귀국한 대동 원년(806)부터 동사를 받은 홍인 14년(823) 무렵까지 차례로 재위한 천황들. 특히 사가 천황은 시문과 서도를 매개로 구카이를 중용했고, 헤이제이 상황은 동대사 진언원에서 관정을 받았다.
東寺동사
헤이안쿄의 정문 라쇼몬 동쪽에 국가가 세운 관사. 홍인 14년(823) 정월 19일 사가 천황이 구카이에게 내렸고, 구카이는 이곳을 진호국가의 도량으로 삼으며 다른 종의 승려가 머무는 것을 금하도록 청해 허락받았다. 이로써 일사일종(一寺一宗)의 형식이 처음 생겼고, 뒤에 「동밀(東密)」이라는 이름의 근거가 되었다.
五畿・七道・六十六箇国・二の島오기 · 칠도 · 육십육 개국 · 두 섬
고대 일본의 행정 구분 전체. 기나이 다섯 나라와 일곱 도(道)에 속한 66개국, 그리고 이키(壱岐) · 쓰시마(対馬) 두 섬을 아울러 일본 전국을 가리킨다.
鈴をとり杵をにぎる방울을 들고 금강저를 쥠
진언의 수법(修法)에서 쓰는 법구인 금강령(金剛鈴)과 금강저(金剛杵)를 잡는다는 뜻으로, 진언의 가지기도를 하는 승려 일반을 가리킨다. 문자는 일본 전국의 기도승이 모두 구카이의 말류라고 말한다.
広智菩薩광지보살
시모쓰케국 오노데라(小野寺)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며 동국에 천태종을 펼친 승려. 그 덕을 기려 사람들이 「보살」이라 불렀다. 엔닌은 아홉 살에 그를 스승으로 출가했고, 열다섯 살에 그를 따라 히에이산에 올라 전교대사의 문하에 들어갔다.
会昌天子회창 천자
회창(会昌)은 당 무종(武宗)의 연호(841~846). 엔닌이 입당한 승화 5년(838)은 문종(文宗)의 개성(開成) 3년이었으나, 오대산에 들어가 본격적인 구법을 시작한 뒤 무종이 즉위했으므로 本文은 「회창 천자의 치세」라고 한다. 엔닌은 귀국 직전 무종의 「회창의 폐불」을 겪었다.
総持院총지원
엔닌이 히에이산 동탑(東塔)의 서쪽에 세운 진언 수법의 도량. 황제의 본명(本命)을 위한 밀교 기도의 장으로 삼았다. 천태종 안에 진언 수법의 거점이 생긴 상징적 사건이다.
天台の真言천태의 진언
천태종 안에서 행해진 밀교, 곧 태밀(台密)을 가리킨다. 구카이의 동사 계통 밀교를 동밀이라 하는 것과 짝을 이룬다. 本文은 「천태의 진언은 이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엔닌을 태밀의 출발점으로 지목한다.
義真和尚의진 화상
전교대사의 입당 때 역어승(통역)으로 동행한 제자로, 천태종 초대 좌주. 엔친의 스승이다. 엔닌이 장안 청룡사에서 태장계 대법을 받은 당의 의진(義真)과는 다른 사람이다.
円澄・別当원징 · 별당
원징(円澄)은 전교대사의 제자로 천태종 제2대 좌주. 「별당」은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는 직명으로, 여기서는 그 직에 있던 승려를 가리킨다. 엔친은 의진 · 엔닌 · 원징 등에게서 남도 육종과 천태 · 진언의 팔종을 배웠다.
法に依つて人に依らざれ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대반열반경』에 설해진 「법의 사의(四依)」 가운데 첫째인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부처가 설한 경전을 기준으로 삼고 사람의 말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석존의 유계다. 문자는 이 금언을 거꾸로 들어, 세 대사에게 의지하는 것도 결국 부처의 법에 의지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문자의 반론 — 대사호의 무게를 앞세우다

제7장에서 문자의 반론이 시작된다. 앞의 제6장에서 대성인은 「석가 · 시방의 제불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느냐, 세 대사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느냐」고 되물으시고, 「다만 일을 니치렌에게 핑계 대어 석가 · 시방의 제불을 영원히 등지고 세 대사를 근본으로 삼으려 하느냐」고 꾸짖으셨다. 문자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세 대사의 사적을 하나씩 들어, 그 공적과 인덕이 얼마나 크고 뛰어났는지를 강조한다. 그러니 국왕부터 만민까지 세 대사에게 귀의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먼저 「대사(大師)」라는 칭호의 무게에 주목해야 한다. 홍법 · 자각 · 지증의 대사호는 조정이 이름 높은 고승으로 인정한 이에게만 내리는 시호다. 세 사람 모두 조정에게서 이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사람들이 세 대사에게 품은 존숭의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문자의 반론은 개인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국가가 공인한 권위를 등에 업고 있다.

문자가 든 영예 (本文 제7장 정리)
①홍법대사 구카이(空海)
출신
사누키국
스승
근조 승정, 남도 육종
입당
연력 23년(804) 5월
당의 스승
청룡사 혜과
귀국 후
헤이제이 · 사가 · 준나 세 천황께 전수, 홍인 14년(823) 동사를 받음
本文의 찬사
「대일여래로부터 칠대」 혜과의 법을 「병의 물」처럼 이어받음
②자각대사 엔닌(円仁)
출신
시모쓰케국
스승
광지보살 → 전교대사
입당
승화 5년(838)
당의 스승
법전 · 원정 · 의진 · 법월 · 종예 · 지원
귀국 후
닌묘 천황의 스승, 금강정경소 · 소실지경소, 총지원 건립, 제3대 천태 좌주
本文의 찬사
「대일여래로부터는 구대」 「천태의 진언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③지증대사 엔친(円珍)
출신
사누키국
스승
의진 화상
입당
인수 원년(851) 칙허, 인수 3년(853) 출발
당의 스승
법전 · 양서 등
귀국 후
덴안 2년(858) 귀조, 몬토쿠 · 세이와 천황의 스승, 제5대 천태 좌주
本文의 찬사
「칠 년 동안 현밀의 이교를 궁구함」
모두 현세를 위하여도 내세를 위하여도 달과 같고 해와 같다(문자의 말)何れも現の為当の為月の如く日の如く
도표 1 · 세 대사의 사적

구카이 — 사누키의 호족 집안에서 입당 구법으로

일본 진언종의 개조 홍법대사 구카이는 나라 시대 말 보귀(宝亀) 5년(774), 사누키국의 지방 호족 사에키노아타이(佐伯直)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가 연력 10년(791)에 대학(大学)에 들어갔으나 곧 그만두고 산림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제자들에게 남겼다는 「이십오개조 유고」 등에 따르면 처음에는 다이안사의 근조에게서 남도 삼론을 배우고, 그를 따라 이즈미의 마키노오산사에서 득도하고 계를 받았다고 한다.

연력 23년(804) 5월 12일, 구카이는 견당대사 후지와라노 가도노마로(藤原葛野麻呂)가 탄 제1선에 올라 당으로 향했다. 이때 제2선에는 전교대사 사이초(最澄)가 타고 있었다. 같은 해의 같은 견당사 선단에 일본 진언과 일본 천태의 두 개조가 나란히 타고 있었던 것이다. 가도노마로 일행이 장안에 닿은 것은 그해 12월 하순이고, 25일에 덕종 황제를 알현했다. 그러나 덕종은 이듬해 정월에 붕어하고 순종이 즉위했다.

구카이의 『청래목록(請来目録)』에 따르면 이듬해(805) 봄 가도노마로가 귀국하자 그는 홀로 당에 남아 칙명에 따라 장안 서명사에 머물렀고, 그 사이 청룡사를 찾아가 혜과를 만났다. 서명사로 옮긴 것은 그해 2월이고, 혜과를 찾은 것은 6월 초 무렵이라고 한다. 本文의 「순종 황제의 칙에 의하여 청룡사에 들어가」는 바로 이 무렵의 경과를 말한 것으로 읽힌다. 구카이는 혜과에게서 태장 · 금강 양부의 관정과 함께 전법아사리위 관정을 받아, 대일여래로부터 헤아려 진언 밀교 부법(付法)의 제8조가 되었다.

「병의 물을 병에 옮기듯」 — 진언 상승의 계보

문자가 구카이를 높이는 가장 큰 근거는 상승(相承)이다. 사람은 바뀌어도 법문은 같고, 병은 달라도 그 안의 지혜의 물은 같다는 것이다. 진언 밀교의 부법에 관해서는 구카이의 『비밀만다라교부법전(秘密曼荼羅教付法伝)』 2권과 『진언부법전(真言付法伝)』 1권에 자세하다. 대일여래를 제1조로, 제2조 금강살타 · 제3조 용맹 · 제4조 용지 · 제5조 금강지 · 제6조 불공을 거쳐 제7조 혜과에 이르기까지 진언 밀교가 적적상승(嫡嫡相承)되었다고 하고, 여기에 제8조 구카이를 더해 「부법의 팔조」라 한다. 이와 별도로 대일여래와 금강살타 대신 선무외와 일행을 넣은 계열을 「전지(伝持)의 팔조」라 부른다.

진언종이 세운 계보(사실 서술)
부법의 팔조(付法の八祖)
  1. 대일여래
  2. 금강살타
  3. 용맹
  4. 용지
  5. 금강지
  6. 불공
  7. 혜과
  8. 구카이
전지의 팔조(伝持の八祖)
  1. 용맹
  2. 용지
  3. 금강지
  4. 불공
  5. 선무외
  6. 일행
  7. 혜과
  8. 구카이
本文혜과 화상은 대일여래로부터 일곱째 대가 되신다慧果和尚は大日如来よりは七代になり給う병은 다르나 전한 지혜의 물은 같은 진언이다(문자의 말)瓶は異なれども所伝の智水は同じ真言なり
부법의 계보 첫머리 두 자리(대일여래 · 금강살타)는 역사상의 인물이 아니다.
도표 2 · 진언 상승의 두 계보

다만 이 계보는 진언종이 스스로 세운 것이다. 부법 계보의 첫머리에 놓인 대일여래와 금강살타는 역사 속에 태어나 법을 설한 인물이 아니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진언종이 「석존을 낮추고 대일을 본존으로 정했다」 하시며 이를 「천자인 아버지를 낮추고 종성(種姓)도 없는 자를 법왕처럼 받드는」 일에 견주셨다(215쪽). 출발점이 불분명한 물을 아무리 정성껏 병에서 병으로 옮겨도, 그 물이 석존의 법이라는 보증은 되지 않는다. 대성인이 제8장에서 이 계보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대신 불법 전래의 역사 전체를 펼치신 까닭이 여기 있다. 진언이 언제, 누구에 의해, 무엇을 끌어들여 만들어졌는지를 밝히면 「병의 물」의 정체는 저절로 드러난다.

귀국 이후 — 다카오산 · 고야산 · 동대사 진언원 · 동사

구카이는 대동 원년(806) 10월 규슈 다자이후에 돌아왔다. 방대한 신역 밀교 경전과 만다라 등의 청래품을 『청래목록』과 함께 헤이제이 천황에게 바쳤으나 곧바로 입경은 허락되지 않았다. 칙명에 따라 쓰쿠시의 관세음사(観世音寺)에 머물던 중 이듬해 당에서 가져온 경론장소를 가지고 상경하라는 명이 내려 수도에 들어갔다. 진언종에서는 이때 헤이제이 천황에게서 진언 밀교 홍통의 칙허를 받았다 하여 대동 2년(807)을 개종의 해로 삼는다. 다만 실제로 입경과 수도 체재가 허락된 것은 사가 천황이 즉위한 대동 4년(809) 7월이며, 이때 마키노오산사에서 수도 북쪽의 다카오산(高雄山)으로 옮겼다고 일반적으로 본다.

헤이제이 천황의 양위로 즉위한 사가 천황은 시문과 서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군주였다. 그는 문인으로서 구카이의 재능을 높이 사 중용했고, 구카이는 이 관계를 통해 궁정과 이어져 천황의 외호를 힘으로 밀교의 융성을 꾀했다. 홍인 원년(810) 9월, 나라 천도와 헤이제이 상황의 복위를 노린 후지와라노 구스코(藤原薬子)와 나카나리(仲成)의 정변, 곧 「구스코의 난」이 일어났다. 그 직후 구카이는 다카오산에서 진호국가의 수법을 행하고 싶다고 상주해 칙허를 얻었고, 이것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밀교 수법이 되었다. 국가의 위기와 밀교 기도가 처음 손을 맞잡은 순간이다.

홍인 7년(816)에는 기이국(紀伊国)의 고야산을 밀교 수행의 도량으로 내려 달라고 상주해 곧 허락을 얻고, 7월에 고야산 금강봉사(金剛峯寺)를 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홍인 13년(822) 동대사 안에 관정 도량으로 진언원(真言院)이 세워진 일이다. 동대사는 남도 칠대사의 하나로 육종을 아울러 배우는 도량이었는데, 여기에 진언 밀교의 관정 도량이 들어서자 전통적인 호국 수법이 점차 밀교화되어 갔다. 헤이제이 상황의 수계 관정이 곧바로 행해진 곳도 이 도량이었다.

그리고 本文의 말대로 이듬해 홍인 14년(823) 정월 19일, 사가 천황이 동사를 내린다는 명이 칙사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를 통해 전해졌다. 구카이는 동사를 진호국가의 도량으로 삼을 것을 선언하고 다른 종의 승도가 머무는 것을 금해 달라고 청했으며, 이 청은 그해 즉위한 준나 천황에게 받아들여졌다. 여러 종을 아울러 닦던 종래의 사원 형식과 달리 한 절이 한 종에 속하는 방식이 처음 생겼고, 이것이 진언 밀교가 일본에서 크게 일어나는 실마리가 되었다.

구카이의 밀교가 일본에 뿌리내린 과정은 궁정과의 결합을 따라가면 잘 보인다. 사가 천황과의 시문 · 서도를 통한 교류, 구스코의 난 직후의 진호국가 수법, 동대사 진언원과 동사의 하사 — 진언은 「국가를 지키는 기도」로서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자각 — 예산을 밀교화한 사람

자각대사 엔닌은 연력 13년(794) 시모쓰케국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 자랐으며, 아홉 살에 시모쓰케국 오노데라 대자사의 광지를 스승으로 출가했다. 대동 3년(808) 열다섯 살 때 광지를 따라 히에이산에 올라 전교대사의 문하에 들었다. 本文의 「십오 년 동안」은 스승 전교대사가 홍인 13년(822)에 입멸하기까지 햇수로 15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승화 5년(838) 6월 하순 일본을 떠나 7월 초 양주(揚州)에 상륙했다. 당시는 당 문종의 개성 3년이었으나, 그 2년 뒤 무종이 즉위했고 본격적인 구법이 오대산에 들어간 뒤 시작되었으므로 本文은 「회창 천자의 치세」라고 한다. 양주 개원사(開元寺)에 약 7개월 머무는 동안 장안 서명사의 종예(宗叡)에게 실담(悉曇)을 배웠고, 숭산원(崇山院)의 전아(全雅)에게서 밀교의 법문과 양부 만다라 등을 배웠다. 그러나 천태산 순례의 허가가 끝내 내려지지 않아, 승화 6년(839) 2월 귀국하는 견당사 일행과 함께 양주를 떠났다. 배가 산둥 반도의 등주(登州)에 닿자 그는 그곳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머물러 당에 남았고, 승화 7년(840) 2월 적산을 떠나 4월 하순 오대산에 이르렀다.

오대산에서 지원(志遠) 등에게서 천태의 법문을 받은 뒤 8월에 장안에 들어갔다. 장안에는 승화 12년(845) 5월까지 약 4년 9개월 머물렀다. 대흥선사 번경원의 원정(元政)에게서 금강계 대법을 받고 전법관정을 받았으며, 청룡사의 의진(義真)에게서 태장계 대법과 소실지법을 받았다. 또 현법사의 법전(法全)에게서 태장 의궤를 배우고, 남인도에서 온 보월(宝月)에게 실담의 발음을 배우는 등, 햇수로 십 년에 걸친 재당 생활 동안 천태 · 진언의 석학을 찾아다니며 현밀 두 길을 궁구하는 데 힘썼다. 本文의 「대일여래로부터는 구대」는 진언종이 말하는 부법의 차례가 아니라, 구카이에 이어 당의 석학에게서 금강 · 태장 양부의 대법을 받았다 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리라.

  1. ①838승화 5년 6월 출발 → 7월 양주 상륙개원사 약 7개월(종예에게 실담)
  2. ②839승화 6년 2월 양주 출발천태산행 불허, 귀국선에 오름
  3. ③839등주 적산법화원에 머물러 당에 남음
  4. ④840승화 7년 4월 오대산지원 등에게서 천태의 법문
  5. ⑤8408월 장안원정(금강계 대법 · 전법관정), 의진(태장계 · 소실지법), 법전(태장 의궤)
  6. ⑥845회창 5년 5월 장안을 떠남회창의 폐불
  7. ⑦847승화 14년 9월 다자이후 도착, 848 가상 원년 3월 히에이산 귀환
기록 —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 4권
도표 3 · 엔닌의 입당 구법 행로 (838~847)

귀국을 앞두고 엔닌은 무종의 「회창의 폐불」을 겪었다. 그 험난한 여정은 그가 남긴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 4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승화 14년(847) 9월 다자이후에 닿았고, 이듬해 가상 원년(848) 3월 히에이산으로 돌아왔다. 조정이 그의 유학 성과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는, 그해 승려의 최고위인 법등법사위(法燈法師位)를 주고 내공봉십선사(内供奉十禅師)에 임명해 닌묘 천황의 호지승으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다.

가상 3년(850) 엔닌은 엔랴쿠사 동탑의 서쪽에 진언 비법을 닦는 총지원을 세워 황제 본명의 밀교 수법 도량으로 삼았다. 인수 4년(854) 4월에는 칙명으로 엔랴쿠사 제3대 좌주가 되었고, 제형 2년(855)에는 몬토쿠 천황에게 관정을 주는 등 천황을 비롯한 많은 궁정인의 존숭을 모았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인수 원년(851)의 『금강정경소』 7권과 제형 연간의 『소실지경소』 7권이 있다.

밀교 경전의 주석을 지은 데서도 드러나듯, 엔닌은 당에서 얻은 밀교의 지식과 권위를 바탕으로 구카이가 일으킨 밀교 융성의 바람을 교묘히 붙잡았다. 전교대사 입멸 뒤 진언 밀교에 밀리던 천태종을 다시 일으키려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엔닌은 천태종 밀교화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대성인이 「천태의 진언은 이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신 까닭이다.

지증 — 칠 년의 재당과 천황들의 스승

지증대사 엔친은 홍인 5년(814) 사누키국 나카군(那珂郡) 가나쿠라고(金倉郷)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에키 씨 출신으로 구카이의 조카딸이다. 덴초 4년(827) 열네 살에 상경해, 이듬해 숙부인 승려 인덕(仁徳)을 따라 히에이산에 올라 천태종 초대 좌주 의진의 제자가 되었다.

일찍부터 입당의 뜻을 품었던 엔친은 인수 원년(851) 조정에 입당 유학을 청해 몬토쿠 천황의 칙허를 받았다. 곧 수도를 떠나 다자이후로 향했으나 당시 견당사가 중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2년 뒤인 인수 3년(853) 7월에야 당의 상선에 편승해 일본을 떠났다. 당에 닿은 것은 선종 황제의 대중 7년(853) 8월 15일이다. 처음 닿은 복주(福州)에서 개원사에 머물며 인도 승려 반야달라(般若怛羅) 삼장을 만나 범어를 배웠다. 한 달 뒤 복주를 떠나 온주 · 태주를 거쳐 12월 중순 천태산 국청사에 이르렀다. 이듬해 대중 8년(854) 9월 국청사를 떠나 월주로 가서 개원사의 양서(良諝)에게서 천태종의 깊은 뜻을 배웠다.

다시 이듬해(855) 5월 낙양을 거쳐 장안에 들어가 청룡사의 법전 문하에서 금강계 · 태장계 · 소실지법의 삼부 대법을 받고 전법관정을 받았다. 7개월을 머문 뒤 11월 하순 장안을 떠나 대중 11년(857) 6월 다시 천태산 국청사로 돌아왔고, 이듬해 대중 12년(858) 6월 태주로 떠날 때까지 국청사에서 성교류를 정리하고 목록을 만들었다.

  1. ①851인수 원년 몬토쿠 천황의 입당 칙허
  2. ②853인수 3년 7월 당의 상선으로 출발 → 대중 7년 8월 복주 개원사(반야달라 삼장에게 범어)
  3. ③85312월 천태산 국청사
  4. ④854월주 개원사양서에게서 천태의 깊은 뜻
  5. ⑤855장안 청룡사법전에게서 삼부 대법 · 전법관정
  6. ⑥857~858국청사로 돌아와 성교 정리 · 목록 작성
  7. ⑦858덴안 2년 6월 규슈 도착 → 연말 입경, 이듬해 세이와 천황 알현
도표 4 · 엔친의 입당 구법 행로 (851~858)

수도를 떠난 지 7년째인 덴안 2년(858) 6월 규슈에 닿았고, 그해 연말 입경했다. 이듬해 정월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세이와 천황을 알현해 당에서 가져온 경론 전적을 보고했다. 당시 정계에서는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 모토쓰네 부자가 권세를 누렸는데, 이들도 엔친을 후대했다. 정관(貞観) 원년(859) 오미국의 원성사(園城寺)에 당방(唐房)을 지어 가져온 경전을 거두었고, 정관 6년(864) 6월에는 칙명으로 궁중 인수전(仁寿殿)에 단을 설치해 세이와 천황과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등 30여 명에게 태장계 관정을 주었다. 이처럼 조정과 깊이 맺어져 자주 수법을 행했고, 정관 10년(868) 제5대 천태 좌주가 되었다.

「달과 같고 해와 같다」 — 사백 년의 존숭

이렇게 세 대사는 대대의 천황이 귀의했을 만큼 덕이 뛰어났으니,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존숭한 것이라고 문자는 힘주어 말한다. 이 존숭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은 대성인 자신의 말씀에서도 확인된다. 「소야지로입도전답서」에서 대성인은 세 대사가 세상에서 어떻게 우러러졌는지를 이렇게 그려 내신다.

此の三大師は大小乗持戒の人・面には八万の威儀を備え或は三千等之を具す顕密兼学の智者なり、然れば則ち日本国四百余年の間・上一人より下万民に至るまで之を仰ぐこと日月の如く之を尊むこと世尊の如し、猶徳の高きこと須弥にも超え智慧の深きことは蒼海にも過ぎたるが如し

이 세 대사는 대소승의 계를 지닌 사람으로, 겉으로는 팔만의 위의를 갖추고 혹은 삼천 등을 갖추었으며, 현밀을 아울러 배운 지자이니라. 그러므로 일본국 사백여 년 동안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우러르기를 해와 달같이 하고 존숭하기를 세존같이 하였으니, 덕의 높음은 수미산을 넘고 지혜의 깊음은 푸른 바다보다 더한 듯하였느니라.

「소야지로입도전답서」, 1067쪽

문자는 이렇게 세 대사의 높은 덕을 기린 뒤 「참으로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금언을 등지지 않는 한, 어찌 부처에 의지하지 않고 홍법 등의 사람에게 의지한다 하겠느냐. 결국 그 뜻은 어떠하냐」고 묻는다. 앞 장에서 대성인이 「석가 · 시방의 제불을 영원히 등지고 세 대사를 근본으로 삼으려 하느냐」고 하신 데 대해, 세 대사를 의지처로 삼는 것이 어째서 부처를 등지는 일이 되느냐고 반론한 것이다. 세 대사는 부처의 법을 전한 사람이니,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곧 법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의법불의인 — 법의 사의와 이 물음의 핵심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열반경에 설해진 「법의 사의」의 하나로, 불가의 규범이라 할 석존의 유계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 경문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셨다.

涅槃経と申す経に云く「法に依つて人に依らざれ」等云云、依法と申すは一切経・不依人と申すは仏を除き奉りて外の普賢菩薩・文殊師利菩薩乃至上にあぐるところの諸の人師なり

열반경이라는 경에 이르되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운운. 의법이라 함은 일체경이요, 불의인이라 함은 부처를 제외해 드린 그 밖의 보현보살 · 문수사리보살 내지 위에 든 여러 인사(人師)이니라.

「보은초」, 294쪽

곧 어디까지나 부처가 설한 일체경이 근본의 기준이며, 보현보살이나 문수보살처럼 뛰어난 지혜를 지닌 인사 · 논사라 해도 그 말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자는 세 대사의 권위가 곧 부처의 권위라고 주장하지만, 의법불의인의 본뜻에 따르면 세 대사의 말도 부처의 경문 앞에서 시험받아야 할 「사람」의 말이다. 이 의미에서 대성인은 다음 장에서, 세 대사 특히 홍법대사가 세운 밀교가 부처의 설을 의지처로 삼지 않은 그릇된 법이라는 것을 불교의 역사를 통해 밝히신다.

문자의 반론과 대성인의 답은 같은 경문을 서로 반대로 쓴다. 문자에게 「의법」은 세 대사가 전한 진언이고, 대성인에게 「의법」은 부처가 직접 「법화최제일」이라 설한 경문이다. 제8장은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부처의 법인지를 역사로 가리는 장이다.

제8장 불법의 전래를 간략히 서술하다
어서 368쪽 13행 – 370쪽 1행 · 第八段 仏法の伝来を略述する

본문

本文 · 第一어서 368쪽 13행 ~ 369쪽 2행
本文 · 어서 원문

答う夫れ教主釈尊の御入滅一千年の間・月氏に仏法の弘通せし次第は先五百年は小乗・後の五百年は大乗・小大・権実の諍はありしかども顕密の定めはかすかなりき、 像法に入りて十五年と申せしに漢土に仏法渡る始は儒道と釈教と諍論して定めがたかりきされども仏法やうやく弘通せしかば小大・権実の諍論いできたる、 されどもいたくの相違もなかりしに、 漢土に仏法渡りて六百年・玄宗皇帝の御宇善無畏・金剛智・不空の三三蔵・月氏より入り給いて後・真言宗を立てしかば、 華厳・法華等の諸宗は以ての外にくだされき上一人自り下万民に至るまで真言には法華経は雲泥なりと思いしなり、 其の後・徳宗皇帝の御宇に妙楽大師と申す人真言は法華経にあながちにをとりたりとおぼしめししかども、 いたく立てる事もなかりしかば法華・真言の勝劣を弁える人なし。

풀이

답하기를, 무릇 교주 석존께서 입멸하신 뒤 일천 년 동안 월지(月氏)에 불법이 홍통된 차례는, 먼저 오백 년은 소승, 뒤의 오백 년은 대승이니라. 소승과 대승, 권교와 실교의 다툼은 있었으나 현교와 밀교의 구별은 희미하였느니라. 상법에 들어 십오 년이라 하는 때에 한토에 불법이 건너가니, 처음에는 유교 · 도교와 석존의 가르침이 서로 논쟁하여 그 우열을 정하기 어려웠느니라. 그러나 불법이 점차 홍통되자 소대 · 권실의 논쟁이 일어났느니라. 그래도 그리 큰 어긋남은 없었는데, 한토에 불법이 건너간 지 육백 년, 현종 황제의 치세에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의 세 삼장이 월지로부터 들어와 진언종을 세우자, 화엄 · 법화 등 여러 종은 터무니없이 낮추어졌고,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에 이르기까지 진언에 비하면 법화경은 구름과 진흙만큼 다르다고 생각하였느니라. 그 뒤 덕종 황제의 치세에 묘락대사라는 사람이 진언은 법화경에 훨씬 못하다고 생각하셨으나, 그 뜻을 굳이 세우는 일이 없었으므로 법화 · 진언의 승렬을 분별하는 사람이 없었느니라.

本文 · 第二어서 369쪽 3~7행
本文 · 어서 원문

日本国は人王三十代・欽明の御時・百済国より仏法始めて渡りたりしかども始は神と仏との諍論こわくして三十余年はすぎにき、 三十四代推古天皇の御宇に聖徳太子始めて仏法を弘通し給う 慧観・観勒の二の上人・百済国よりわたりて三論宗を弘め、 孝徳の御宇に道昭・禅宗をわたす 文武の御宇に新羅国の智鳳・法相宗をわたす 第四十四代元正天皇の御宇に善無畏三蔵・大日経をわたす然而弘まらず、 聖武の御宇に審祥大徳・朗弁僧正等・華厳宗をわたす 人王四十六代・孝謙天皇の御宇に唐代の鑒真和尚・律宗と法華経をわたす律をばひろめ法華をば弘めず、

풀이

일본국은 인왕 제30대 긴메이(欽明) 천황 때 백제국으로부터 불법이 처음 건너왔으나, 처음에는 신과 부처의 논쟁이 거세어 삼십여 년이 지나 버렸느니라. 제34대 스이코(推古) 천황의 치세에 쇼토쿠 태자가 처음으로 불법을 홍통하셨느니라. 혜관 · 관륵 두 상인이 백제국에서 건너와 삼론종을 펼치고, 고토쿠(孝徳) 천황의 치세에 도쇼(道昭)가 선종을 건너오고, 몬무(文武) 천황의 치세에 신라국의 지봉(智鳳)이 법상종을 건너왔느니라. 제44대 겐쇼(元正) 천황의 치세에 선무외 삼장이 대일경을 건너왔으나 펼쳐지지 않았느니라. 쇼무(聖武) 천황의 치세에 심상(審祥) 대덕 · 낭변(朗弁) 승정 등이 화엄종을 건너왔느니라. 인왕 제46대 고켄(孝謙) 천황의 치세에 당의 감진 화상이 율종과 법화경을 건너왔으나, 율은 펼치고 법화는 펼치지 않았느니라.

本文 · 第三어서 369쪽 7~12행
本文 · 어서 원문

第五十代桓武天皇の御宇に延暦二十三年七月・伝教大師勅宣を給いて漢土に渡り 妙楽大師の御弟子・道邃・行満に値い奉りて法華宗の定慧を伝え道宣律師に菩薩戒を伝え順暁和尚と申せし人に真言の秘教を習い伝えて日本国に帰り給いて、 真言・法華の勝劣は漢土の師のおしへに依りては定め難しと思食しければ ここにして大日経と法華経と彼の釈と此の釈とを引き並べて勝劣を判じ給いしに 大日経は法華経に劣りたるのみならず大日経の疏は天台の心をとりて我が宗に入れたりけりと勘え給へり。

풀이

제50대 간무 천황의 치세, 연력 23년 7월에 전교대사가 칙선을 받아 한토에 건너가, 묘락대사의 제자 도수(道邃) · 행만(行満)을 만나 뵙고 법화종의 정(定)과 혜(慧)를 전해 받고, 도선 율사에게서 보살계를 전해 받고, 순효(順暁) 화상이라는 사람에게서 진언의 비교를 배워 전하여 일본국에 돌아오셨느니라. 진언 · 법화의 승렬은 한토 스승들의 가르침에 의해서는 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셨으므로, 이 나라에서 대일경과 법화경, 저 해석과 이 해석을 나란히 놓고 승렬을 판단하셨는데, 대일경은 법화경에 못할 뿐 아니라, 대일경의 소(疏)는 천태의 마음을 취하여 자기 종에 넣은 것이라고 헤아리셨느니라.

本文 · 第四어서 369쪽 13~16행
本文 · 어서 원문

其の後・弘法大師・真言経を下されける事を遺恨とや思食しけむ 真言宗を立てんとたばかりて法華経は大日経に劣るのみならず華厳経に劣れりと云云、 あはれ慈覚・智証・叡山・園城にこの義をゆるさずば弘法大師の僻見は日本国にひろまらざらまし、 彼の両大師・華厳・法華の勝劣をばゆるさねど法華・真言の勝劣をば永く弘法大師に同心せしかば 存外に本の伝教大師の大怨敵となる、

풀이

그 뒤 홍법대사는 진언의 경이 낮추어진 것을 원한으로 여기셨던가, 진언종을 세우려고 꾀하여 법화경은 대일경에 못할 뿐 아니라 화엄경에도 못하다고 하였느니라. 아아, 자각 · 지증이 예산과 원성사에서 이 뜻을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홍법대사의 그릇된 견해는 일본국에 퍼지지 않았을 것을. 저 두 대사는 화엄 · 법화의 승렬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법화 · 진언의 승렬은 오래도록 홍법대사와 마음을 같이하였으므로, 뜻밖에도 본사(本師)인 전교대사의 큰 원적(怨敵)이 되었느니라.

本文 · 第五어서 369쪽 16행 ~ 370쪽 1행
本文 · 어서 원문

其の後日本国の諸碩徳等各智慧高く有るなれども彼の三大師にこえざれば今四百余年の間・日本一同に真言は法華経に勝れけりと定め畢んぬ たまたま天台宗を習へる人人も真言は法華に及ばざるの由存ぜども天台の座主御室等の高貴におそれて申す事なし あるは又其の義をもわきまへぬかのゆへにからくして同の義をいへば一向真言師はさる事おもひもよらずとわらふなり。

풀이

그 뒤 일본국의 여러 석덕(碩徳)들은 저마다 지혜가 높았으나 저 세 대사를 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사백여 년 동안 일본이 한결같이 진언은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정해 버렸느니라. 어쩌다 천태종을 배운 사람들도 진언은 법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태의 좌주와 오무로(御室) 등의 고귀함을 두려워하여 말하는 일이 없느니라. 혹은 또 그 뜻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까닭에 간신히 같다는 뜻을 말하면, 진언사들은 한결같이 그런 일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라며 웃느니라.

어구 풀이

月氏월지
본디 중앙아시아의 민족 · 나라 이름이었으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인도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였다. 어서에서 「월지 · 한토 · 일본」은 불법이 전해진 세 나라, 곧 삼국을 가리킨다.
顕密の定め현밀의 구별
현교(顕教)와 밀교(密教)를 나누는 판정. 여기서의 현밀은 진언가가 말하는 현교 · 밀교의 뜻으로, 정법 시대에는 현교에 맞서는 「밀교」라는 것이 세워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도 진언 밀교는 인도에서 정법 천 년이 지난 뒤에 나타났다.
像法に入りて十五年상법에 들어 십오 년
석존 입멸 뒤 정법 천 년을 지나 상법 시대에 들어 15년째라는 뜻. 대성인은 후한 명제 영평 10년(67)의 불법 전래를 이 시점으로 보셨다.
善無畏・金剛智・不空の三三蔵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의 세 삼장
당 현종 때 인도 · 남해에서 와서 밀교 경전을 번역하고 진언종을 세운 세 승려. 선무외는 개원 4년(716) 장안에 와서 『대일경』을 번역했고, 금강지는 개원 8년(720) 남해를 거쳐 낙양에 들어와 밀교 경전을 많이 번역했으며, 그 제자 불공은 현종 · 숙종 · 대종 세 황제를 섬기며 장안 불교계에 약 30년 군림했다.
妙楽大師묘락대사
당의 담연(湛然, 711~782). 천태대사로부터 6세의 법손으로 대종 · 덕종의 치세에 나와 천태의 법화 최승의 뜻으로 여러 종을 비판했다. 천태 삼대부를 주석한 『지관보행전홍결』 · 『법화현의석첨』 · 『법화문구기』를 지었다.
神と仏との諍論신과 부처의 논쟁
불교 전래 직후 고래의 신기(神祇) 신앙을 지키려는 배불파(모노노베 씨)와 불교 수용을 주장한 숭불파(소가 씨)의 대립. 「삼십여 년」은 불교 전래부터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멸망(587)까지로 보인다.
聖徳太子쇼토쿠 태자
스이코 천황의 섭정. 소가노 우마코가 불교를 외래 문화로서 자기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본 데 비해, 태자는 불교의 종교적 내용에 일찍 주목해 그 정신을 정치에 들이고 불법의 흥륭을 꾀했다. 그래서 本文은 태자가 「처음으로 불법을 홍통하셨다」고 한다.
慧観・観勒혜관 · 관륵
일본에 삼론을 전한 두 승려. 관륵은 백제의 승려로 스이코 천황 10년(602) 10월에 와서 원흥사(元興寺)에 머물렀다. 혜관(慧灌으로도 씀)은 고구려 사람으로 스이코 천황 33년(625)에 와서 원흥사에 머물며 삼론을 펼쳤다.
審祥大徳・朗弁僧正심상 대덕 · 낭변 승정
쇼무 천황 때 화엄종을 일으킨 두 사람. 심상은 신라에서 배운 승려로 일본에서 처음 『화엄경』을 강설했고, 낭변은 동대사 개산 로벤(良弁)을 가리킨다. 「선시초」에도 심상이 화엄을 건너오고 로벤이 쇼무 천황에게 전했다고 하셨다.
鑒真和尚감진 화상
당 양주(揚州) 사람으로 남산율종의 계맥을 이은 율승. 여러 차례의 도항 실패 끝에 일본에 와서 동대사에 계단을 세웠다. 「시모야마어소식」은 그를 「당의 양주 용흥사의 감진 화상」이라 부르신다. 「鑑真」으로도 쓴다.
道邃・行満도수 · 행만
묘락대사의 고제로, 전교대사에게 천태의 법을 전한 두 사람. 도수는 천태산 수선사 좌주로 태주 용흥사에서 『마하지관』을 강의하고 있었고 전교대사에게 천태의 부법과 보살의 삼취계를 주었다. 행만은 천태산 불롱사(仏隴寺) 좌주로 천태의 법문을 전수했다.
道宣律師도선 율사
중국 남산율종의 개조(596~667). 7세기 사람이므로 9세기 초에 입당한 전교대사가 그에게서 계를 받을 수는 없다. 本文의 「도선 율사」는 「도수(道邃)」의 전사 오류로 보인다.
順暁和尚순효 화상
월주(越州) 용흥사에 머물던 밀교승. 전교대사는 귀국을 앞두고 그에게서 삼부삼매야 관정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 천태에 밀교가 들어온 첫 통로였다.
大日経の疏대일경의 소
『대일경소』 20권(T39 no.1796). 선무외가 강설하고 일행(一行)이 기록한 『대일경』의 주석으로, 이를 다듬은 것을 『대일경의석』이라 한다. 「이동사승(理同事勝)」의 설, 곧 법화경과 대일경은 이(理)에서 같고 인(印)과 진언의 사(事)에서 대일경이 뛰어나다는 설이 여기서 나왔다.
叡山・園城예산 · 원성사
엔랴쿠사(延暦寺)가 있는 히에이산과 오미의 원성사(園城寺, 미이데라). 자각의 문류는 예산에, 지증의 문류는 원성사에 자리 잡아 뒤에 산문(山門) · 사문(寺門)으로 갈라졌다.
天台の座主・御室천태의 좌주 · 오무로
좌주는 엔랴쿠사의 최고 책임자로 천태종 전체의 장. 오무로(御室)는 우다(宇多) 법황이 출가해 머문 닌나사(仁和寺)를 가리키며, 대대로 법친왕이 주지가 된 진언종의 최고 문적(門跡)이다. 천태와 진언 양쪽의 가장 높은 권위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사람이 아닌 역사로 답하시다

이 장은 앞 장에서 문자가 던진 반문 — 세 대사에게 귀의하는 것이 어째서 부처를 등지는 일이냐 — 에 대해, 불법 유전의 역사를 통해 답하시는 대목이다. 먼저 인도에서 불교가 홍통된 모습을 말씀하시고, 이어 중국 · 일본으로의 전래를, 끝으로 일본 진언이 대두한 경위를 밝히신다. 대성인이 여기서 불법의 삼국 전래사를 더듬으신 것은, 진언 밀교라는 그릇된 법이 널리 퍼지기에 이른 역사적 경과를 밝히시기 위해서다.

문자는 세 대사의 덕과 사승과 영예를 들었다. 그것은 모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대성인은 그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깎아내리지 않으신다. 대신 그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 곧 진언이라는 가르침이 불법의 역사 속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를 보이신다. 의법불의인의 정신에 따라 사람의 덕이 아니라 법의 내력을 묻는 방식이다.

인도 · 중국 — 진언이 법화경 위에 서기까지

인도 — 정법 천 년에 「밀교」는 없었다

석존 입멸 뒤 인도의 불교 홍통에 대해, 대성인은 처음 오백 년에는 소승교가, 다음 오백 년에는 대승교가 퍼졌고, 그 사이 소승과 대승, 권교와 실교의 우열을 둘러싼 논쟁은 있었지만 현교와 밀교 사이의 분명한 판별은 거의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소승에서 대승으로, 권교에서 실교로 — 이것이 정법 천 년 동안의 큰 줄기였다.

여기서의 「현밀」은 진언가가 말하는 현교 · 밀교의 뜻으로 읽힌다. 정법 시대에는 현교에 맞서는 「밀교」라는 것 자체가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진언 밀교가 나타나는 것은 인도에서도 정법 천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리고 이 인도 불교 말기에 나타난 밀교를 중국에 전한 사람이 바로 本文이 지적하는 선무외 등 세 삼장이었다. 진언이 스스로를 대일여래로부터 이어진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법이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것이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 시점 사이에는 이만큼의 거리가 있다.

중국 — 영평 10년의 전래와 유 · 불 · 도의 다툼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후한 명제(明帝) 영평 10년(67)이라고 한다. 대성인은 그 경위를 「시조깅고전답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漢土には後漢の第二の明帝・永平七年に金神の夢を見て博士蔡イン・王遵等の十八人を月氏につかはして仏法を尋ねさせ給いしかば・中天竺の聖人摩騰迦・竺法蘭と申せし二人の聖人を同永平十年丁卯の歳迎へ取りて崇重ありし

한토에서는 후한의 제2대 명제가 영평 7년에 금빛 신인의 꿈을 꾸고, 박사 채음 · 왕준 등 열여덟 사람을 월지에 보내 불법을 찾게 하시니, 중천축의 성인 가섭마등 · 축법란이라는 두 성인을 같은 영평 10년 정묘년에 맞아들여 받들었느니라.

「시조깅고전답서」, 1167쪽

중국 불법 전래의 연대에는 예로부터 여러 설이 있으나 대성인은 이 명제 구법설을 채택하셨다. 이는 중국에서도 통설이었으며, 전교대사도 『현계론』 상권에서 당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과 원조(円照)의 『정원신정석교목록』에 따라 이 설을 썼다.

불교가 중국에 퍼져 가는 과정에서 중국 고래의 토착 신앙인 도교와 여러 갈등이 생겼다. 그 때문에 불교가 노장 사상에 기대어 해석되는 일면도 있었다. 도교는 중국에 예부터 전해 온 여러 민간 신앙을 노장 사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후한의 장릉(張陵)에 의해 종교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교는 오히려 불교에 자극받아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고도 할 수 있고, 그만큼 둘 사이의 대립은 자주 깊어졌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 도교는 교단을 조직하고 불교를 본떠 경전을 만드는 등 불교 교단과의 대항 자세를 강화했다.

이 다툼에는 유교도 가세했다. 동진 시대가 되자 유교 쪽의 불교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부모를 떠나고 가족을 버리고 승려의 길로 들어가는 출가가 유교 실천 윤리의 근본인 「효(孝)」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거셌다. 本文의 「처음에는 유교 · 도교와 석교가 논쟁하여 정하기 어려웠다」는 이 시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역대 왕조가 모두 불교를 보호한 덕에 뛰어난 역경승 · 학승이 잇달아 나왔고, 중국 불교는 동진 · 남북조를 거쳐 수 · 당 시대에 최성기를 맞았다. 천태종 · 삼론종 · 율종 · 법상종 · 화엄종 등 각 종파의 교리 연구는 눈부셨다. 本文의 「불법이 점차 홍통되자 소대 · 권실의 논쟁이 일어났다」는 이 교판 논쟁의 시대다.

현종 시대의 세 삼장 — 법화경이 처음 진언 아래로

그 가운데 진언종은 선무외 삼장이 당 현종의 개원 4년(716) 인도에서 장안에 와서 『대일경』을 번역한 데서 시작된다. 이어 금강지 삼장이 개원 8년(720) 남해를 거쳐 낙양에 들어와 밀교 경전을 많이 번역했다. 금강지의 제자 불공은 수도 장안의 불교계에 약 30년 동안 군림하며 현종 · 숙종 · 대종 세 황제를 섬겼고, 그 홍통의 발자취는 장안 · 낙양 같은 도시뿐 아니라 여러 지방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문하도 많아 대력 9년(774) 그가 죽은 뒤에도 제자들이 활약하며 밀교를 펼쳤다. 일본에서 유학한 구카이가 사사한 혜과도 그 한 사람이며, 구카이에 이어 엔닌 · 엔친이 당에 들어가 진언 밀교를 배웠다. 앞 장의 세 대사가 모두 이 흐름의 끝자락에 닿아 있는 것이다.

本文은 이 시점을 「한토에 불법이 건너간 지 육백 년」이라 하고, 세 삼장이 진언종을 세운 뒤로 「화엄 · 법화 등 여러 종은 터무니없이 낮추어졌고,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에 이르기까지 진언에 비하면 법화경은 구름과 진흙만큼 다르다고 생각했다」고 하신다. 진언의 권위는 교리의 대결에서 이겨서 얻은 것이 아니라, 황제의 귀의와 함께 위에서부터 사회 전체로 번진 것이었다.

한편 천태종은 천태대사 입멸 뒤 제자 장안대사에 의해 확립되었으나, 그 뒤 법상종 · 화엄종 · 진언종의 흥성에 밀려 「천태 암흑시대」라 불릴 만큼 쇠미해 갔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장안대사 이후의 제자들이 법화경을 해심밀경보다 못하다고 주장하는 법상종의 대두를 허용한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天台の末学等は智慧の薄きかのゆへに・さもやとおもう、又太宗は賢王なり玄奘の御帰依あさからず、いうべき事ありしかども・いつもの事なれば時の威をおそれて申す人なし

천태의 말학들은 지혜가 얕은 까닭인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느니라. 또 태종은 현명한 왕이요 현장에 대한 귀의가 얕지 않았으니, 말해야 할 일이 있었으나 늘 있는 일이라 때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느니라.

「보은초」, 301쪽

「때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 구절은 이 장 마지막 절의 「천태의 좌주 · 오무로 등의 고귀함을 두려워하여 말하는 일이 없다」와 정확히 겹친다.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 일본에서 되풀이된 것이다.

묘락대사 — 삼대부를 바로 세우고도 진언은 남겨 두다

그러나 천태대사로부터 6세의 법손인 묘락대사가 대종 · 덕종의 치세에 나타나, 천태대사가 세운 법화 최승의 뜻으로 여러 종의 교학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법화경의 정의를 선양했다. 특히 천태 삼대부를 주석한 『지관보행전홍결』 · 『법화현의석첨』 · 『법화문구기』는 저마다 법화경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는 천태대사의 진의를 밝힌 저술이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렇게 평가하셨다.

此の三十巻の文は本書の重なれるをけづりよわきをたすくるのみならず天台大師の御時なかりしかば御責にものがれてあるやうなる法相宗と華厳宗と真言宗とを 一時にとりひしがれたる書なり

이 삼십 권의 글은 본서의 중복된 곳을 깎고 약한 곳을 도왔을 뿐 아니라, 천태대사 때에는 없었기에 그 꾸짖음을 벗어난 듯한 법상종과 화엄종과 진언종을 한꺼번에 눌러 부순 글이니라.

「보은초」, 302쪽

곧 묘락대사의 소석은 천태대사 삼대부의 중복을 덜고 부족한 곳을 보태 완전하게 했을 뿐 아니라, 천태대사 재세 때에는 아직 성립하지 않아 그 파척을 면했던 법상 · 화엄 · 진언의 그릇된 뜻을 한꺼번에 깨뜨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本文은 묘락대사가 「진언은 법화경에 훨씬 못하다고 생각하셨으나 그 뜻을 굳이 세우는 일이 없었으므로 법화 · 진언의 승렬을 분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신다. 당시 융성을 다하던 진언종의 그릇된 뜻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하게 파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화경과 진언의 승렬은 그다지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았다는 것이다. 묘락대사가 끝까지 매듭짓지 않은 이 한 가지가 일본에서 전교대사에게 넘어가고, 다시 대성인에게 넘어온다.

  1. ①인도 · 정법 전 오백 년소승 홍통
  2. ②인도 · 정법 후 오백 년대승 홍통소대 · 권실의 다툼은 있었으나 현밀의 구별은 희미하였다小大・権実の諍はありしかども顕密の定めはかすかなりき
  3. ③상법 15년 · 후한 명제 영평 10년(67)중국 전래유교 · 도교와 석교가 논쟁하여 정하기 어려웠다儒道と釈教と諍論して定めがたかりき
  4. ④동진 · 남북조 → 수 · 당교판 논쟁, 천태 · 삼론 · 율 · 법상 · 화엄의 교리 연구
  5. ⑤전래 600년 · 당 현종(716~)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이 진언종을 세움진언에 비하면 법화경은 구름과 진흙만큼 다르다고 생각했다真言には法華経は雲泥なりと思いしなり
  6. ⑥대종 · 덕종 · 묘락대사(711~782)삼대부 주석으로 법상 · 화엄 · 진언을 깨뜨렸으나 진언과의 승렬은 강하게 세우지 않음법화 · 진언의 승렬을 분별하는 사람이 없었다法華・真言の勝劣を弁える人なし
도표 5 · 인도 · 중국의 불법 홍통과 진언의 등장 (本文 제8장 第一)

일본의 초전과 남도 제종

일본 초전 — 신과 부처의 다툼 삼십여 년

이어 일본에서 불법이 처음 전해진 때부터 전교대사가 나타나기까지의 역사가 개관된다. 일본 불교 전래의 연대에는 552년설과 538년설이 있으나, 대성인은 『일본서기』에 따라 긴메이 천황 13년(552)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야마토 조정에 불상 · 경전 등을 바친 일을 불교의 첫 전래로 삼으셨다.

불교가 전해졌을 때 일본에는 이미 고대의 신기 신앙을 중심으로 한 제관 조직이 성립해 있었고, 그 조직을 이루는 씨족들의 반발은 당연히 예상되었다. 그래서 천황은 불교 수용을 주장한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에게 불상을 모시게 했으나 곧 배불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배불파의 중심은 모노노베 씨로, 숭불파인 소가 씨와 격렬히 대립했다. 이 대립은 새로 온 불교와 옛 신기 신앙의 종교적 대립만이 아니었다. 두 씨족은 원래 권력의 장악을 둘러싸고 적대해 왔고, 불교 수용 문제는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두 세력의 대립은 요메이 천황 때 한층 깊어졌고, 천황이 붕어한 뒤에는 황위 계승 다툼까지 겹쳐 무력 충돌로 번졌다. 587년 소가노 우마코가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멸하자, 섭정 쇼토쿠 태자에 의해 불교 국가로 가는 길이 열렸다. 本文의 「신과 부처의 논쟁이 거세어 삼십여 년이 지나 버렸다」는 불교 전래부터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멸망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本文이 쇼토쿠 태자가 「처음으로」 불법을 홍통했다고 하신 데에도 까닭이 있다. 소가노 우마코는 숭불파의 중심이었으나 불교를 외국 문화로 받아들여 자기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만 보았다. 이에 비해 쇼토쿠 태자는 불교의 종교로서의 뛰어난 내용에 일찍부터 주목해 그 정신을 정치에 들이고 불법의 흥륭을 꾀했다. 불교를 「들여온」 사람과 「펼친」 사람을 대성인은 구별하신 것이다.

남도 제종의 전래 — 삼론 · 선 · 법상 · 대일경 · 화엄

이어 本文은 여러 종의 일본 전래를 차례로 들며 전래한 시기와 승려를 적으신다. 처음은 삼론종이다. 남도 육종의 하나인 삼론종은 백제 승려 관륵이 스이코 천황 10년(602) 10월에 와서 전했다. 『본조고승전』 권1에 따르면 관륵은 칙명에 따라 원흥사에 머물며 뽑힌 뛰어난 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혜관은 고구려 사람으로 스이코 천황 33년(625)에 와서 원흥사에 머물며 삼론을 펼쳤다.

다음으로 고토쿠 천황 때 도쇼가 선종을 전했다는 것은, 도쇼가 하쿠치(白雉) 4년(653) 당에 건너가 현장 삼장에게서 법상을 배우는 한편 상주(相州) 융화사(隆化寺)의 혜만(慧満) 선사에게서 선을 전해 받은 일을 가리킨다. 도쇼는 귀국 뒤 주로 법상종을 펼쳐 이것이 법상종의 일본 첫 전래로 꼽히지만, 덴지 천황 원년(662) 3월 원흥사 동남쪽 구석에 선원을 짓고 종일 좌선했다고 한다.

셋째는 법상종의 전래다. 本文의 지봉은 법상종 네 차례 전래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신라 승려 지봉이 일본에 와서, 몬무 천황 다이호(大宝) 3년(703)에 지란(智鸞) · 지웅(智雄)과 함께 당에 들어가 자은대사 규기(窺基)의 법손인 지주(智周)에게서 법상을 받은 것이다.

넷째로 本文은 진언종의 의경인 『대일경』의 전래를 언급하신다. 겐쇼 천황 때 인도의 선무외 삼장이 일본에 와서 『대일경』을 가져왔으나 펼쳐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史実)로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세상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로, 『본조고승전』 권1에 그 기사가 있다. 그에 따르면 선무외는 겐쇼 천황 때 와서 처음 나라 고후쿠사(興福寺) 동남쪽에 머물렀고, 뒤에 다지마(但馬)에 가람을 세워 진언교를 설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근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아 진언의 가르침이 알려지지 않자, 『대비로자나경』을 야마토국 다카이치군 구메(久米)의 도량에 넣어 두고 당으로 돌아가 서명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밖에 『부상략기』 권6, 『원형석서』 권1, 『삼국불법전통연기』에도 선무외 내조설이 실려 있어 이 설은 널리 믿어졌던 듯하다. 선무외가 전한 『대일경』이 구메사 동탑에 있다는 꿈의 계시를 구카이가 얻었다는 전설도 잘 알려져 있다.

다음은 화엄종이 쇼무 천황 때 심상과 로벤 등에 의해 들어왔다는 대목이다. 화엄종의 장소(章疏)가 일본에 처음 전해진 것은 천평(天平) 8년(736)에 온 도선(道璿)에 의해서이고, 그래서 도선을 화엄종의 초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도선은 경전을 가져왔을 뿐 강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성인은 「선시초」에서도 이 장과 같이 심상을 화엄의 전법자로 드셨는데, 니치칸 상인은 「선시초우기(撰時抄愚記)」에서 이 점을 이렇게 풀이했다.

実には道璿律師、華厳の章疏を渡すなり。而るに『審祥』最初講演の師なり。故に功を推して『審祥渡す』というなり

실제로는 도선 율사가 화엄의 장소를 건너왔느니라. 그러나 심상이 최초로 강연한 스승이니라. 그러므로 그 공을 미루어 「심상이 건너왔다」고 하는 것이니라.

니치칸 상인, 「선시초우기」

本文의 차례는 삼론 · 선 · 법상 · 대일경 · 화엄 · 율로 이어진다. 이는 전래한 연차와 승려를 기록하신 것으로 보인다. 「선시초」(263쪽)에도 거의 같은 전래사가 실려 있으나, 그곳에서는 삼론 · 성실을 관륵이 고토쿠 천황 때 건너왔다고 하고 도쇼가 법상 · 구사를 건너왔다고 하는 등 세부가 조금 다르다. 두 어서 모두 전래의 정확한 연차보다 「어떤 종이 어떤 차례로 들어와 무엇이 펼쳐지고 무엇이 펼쳐지지 않았는가」를 보이는 데 뜻이 있다.

本文의 차례 (本文 제8장 第二)
천황①스이코 천황
전래자관륵(백제) · 혜관(고구려)
종삼론종
밝혀진 사실602년 관륵, 625년 혜관 — 원흥사
천황②고토쿠 천황
전래자도쇼
종선종
밝혀진 사실653년 입당, 현장에게 법상 · 혜만에게 선, 662년 원흥사 선원
천황③몬무 천황
전래자신라의 지봉
종법상종
밝혀진 사실703년 입당, 지주에게 법상 — 법상 넷째 전래 가운데 셋째
천황④겐쇼 천황
전래자선무외 삼장
종대일경
밝혀진 사실그러나 펼쳐지지 않았다然而弘まらず— 내조설은 전승
천황⑤쇼무 천황
전래자심상 대덕 · 낭변(로벤) 승정
종화엄종
밝혀진 사실장소는 736년 도선이 가져옴, 최초 강연은 심상
천황⑥고켄 천황
전래자감진 화상
종율종과 법화경
밝혀진 사실율은 펼치고 법화는 펼치지 않았다律をばひろめ法華をば弘めず
도표 6 · 일본 제종의 전래

오로지 계율을 펼친 감진

천태의 전적을 가져오고 율만 펼치다

끝으로 本文은 감진이 고켄 천황 때 율종과 법화경을 일본에 가져왔다고 하신다. 감진은 당 양주 사람으로, 일본에서 온 유학승 요에이(栄叡) · 후쇼(普照)의 간청을 받아 일본에 계율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도항은 거듭 실패했고, 그 사이 감진은 시력을 잃었다고 전한다. 천평승보(天平勝宝) 5년(753) 말 마침내 견당사의 귀국선으로 사쓰마에 닿았고, 이듬해 수도 나라에 들어갔다.

교넨(凝然)의 『삼국불법전통연기(三国仏法伝通縁起)』 하권은 감진이 가져온 성교가 넓고 많았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율종의 여러 전적과 천태의 여러 글이 많았다고 하고, 다시 「天平勝宝六年」에 감진이 가져온 천태의 장소를 이렇게 적는다.

謂く摩訶止観・法華玄義・法華文句・小止観・六妙門等也

이르되 마하지관 · 법화현의 · 법화문구 · 소지관 · 육묘문 등이니라.

『삼국불법전통연기』 하권

그러나 같은 책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鑑真和尚は、既に台宗を此の国に伝えて而も未だ広く講敷せず、先ず戒律を弘む

감진 화상은 이미 천태종을 이 나라에 전하였으나 아직 널리 강설하지 않고 먼저 계율을 펼쳤느니라.

『삼국불법전통연기』 하권

감진은 오로지 계율을 펼쳐 중국의 남산율종을 일본에 전했을 뿐, 천태 법화종은 펼치지 않았다. 本文의 「율은 펼치고 법화는 펼치지 않았다」가 바로 이것이다. 천태종이 일본에서 꽃피는 것은 전교대사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감진이 가져온 천태의 장소는 사십여 년 뒤 젊은 사이초가 히에이산에서 펼쳐 읽고 천태의 뜻에 눈뜨는 계기가 된다. 대성인은 「안국론어감유래」에서도 쇼무 천황 때 감진 화상이 건너온 천태의 장소를 사십여 년이 지난 뒤 처음으로 사이초가 펼쳐 보고 불법의 깊은 뜻을 대강 깨달았다고 말씀하셨다.

대성인은 감진이 법화를 펼치지 않은 까닭을 「시모야마어소식」에서 이렇게 해석하셨다.

人王四十五代聖武天皇の御宇に唐の揚州竜興寺の鑑真和尚と申せし人漢土より我が朝に法華経天台宗を渡し給いて有りしが円機未熟とやおぼしけん此の法門をば已心に収めて口にも出だし給はず、大唐の終南山の豊徳寺の道宣律師の小乗戒を日本国の三所に建立せり此れ偏に法華宗の流布すべき方便なり

인왕 제45대 쇼무 천황의 치세에 당의 양주 용흥사의 감진 화상이라는 사람이 한토에서 우리 나라에 법화경 천태종을 건너오셨으나, 원교의 근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하셨는지 이 법문은 자기 마음에 거두고 입 밖에도 내지 않으셨느니라. 대당 종남산 풍덕사의 도선 율사의 소승계를 일본국의 세 곳에 건립하였으니, 이것은 오로지 법화종이 유포되기 위한 방편이니라.

「시모야마어소식」, 344쪽

감진의 율은 법화를 위한 준비였다는 것이다. 같은 어서에서 대성인은 이를 「해가 뜨려 할 때 샛별이 먼저 서고, 비가 내리려 할 때 구름이 먼저 이는 것」에 견주시며, 해가 뜨고 비가 내린 뒤에는 별과 구름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셨다(346쪽). 감진은 「대승의 손습(手習)」이었다고도 하셨다(347쪽).

삼계단 — 남산율의 소승 계단

감진의 가장 큰 사적은 일본에 정식 수계 제도를 세운 일이다. 그는 동대사에 계단을 세워 쇼무 상황 등에게 계를 주었고, 뒤에 시모쓰케의 약사사(薬師寺)와 쓰쿠시의 관세음사(観世音寺)에도 계단이 세워져, 이른바 「천하의 삼계단」이 갖추어졌다. 이후 일본에서 정식 승려가 되려는 이는 반드시 이 세 곳 가운데 한 곳에서 남산율종의 이백오십계를 받아야 했다. 제7장에서 구카이가 귀국 직후 칙명을 기다리며 머문 쓰쿠시의 관세음사가 바로 이 서국(西国)의 계단이었다.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감진의 사적을 이렇게 요약하셨다.

同御代に大唐の鑒真和尚・天台宗と律宗をわたす、其の中に律宗をば弘通し小乗の戒場を東大寺に建立せしかども法華宗の事をば名字をも申し出させ給はずして入滅し了んぬ

같은 치세에 대당의 감진 화상이 천태종과 율종을 건너왔으니, 그 가운데 율종은 홍통하여 소승의 계장을 동대사에 건립하였으나 법화종의 일은 이름조차 꺼내지 않으시고 입멸하고 말았느니라.

「선시초」, 263쪽

동대사의 계단은 「소승의 계장」이었다. 이 「소승」이라는 규정이, 다음 절에서 전교대사가 히에이산에 세우려 한 「대승」 계단과 맞서는 축이 된다.

늦가을 나라 분지, 큰 절의 지붕들과 그 곁의 낮은 계단원 원경
그림 · 늦가을 나라 분지, 큰 절의 지붕들과 그 곁의 낮은 계단원 원경

전교대사의 입당

도수 · 행만 · 순효

천태 법화종은 전교대사 사이초의 입당으로 일본에 들어왔다. 사이초는 연력 21년(802) 간무 천황에게서 「천태법화종 환학생(還学生)」으로 임명한다는 칙선을 받았다. 연력 23년(804) 7월 6일, 제자 의진을 역어승(통역)으로 데리고 견당사 제2선에 올라 히젠국 마쓰라군 다노우라를 떠났고, 9월 1일 명주(明州)에 닿았다.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명주에서 잠시 쉰 뒤 태주(台州)로 향했다. 앞 장에서 본 대로 같은 선단의 제1선에는 구카이가 타고 있었다.

태주에서는 천태산 수선사 좌주 도수가 자사(刺史) 육순(陸淳)의 초청으로 용흥사에서 『마하지관』을 강의하고 있었다. 9월 26일 용흥사로 도수를 찾아간 사이초는 그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10월에 천태산에 올라 행만 좌주를 만나 불롱사에서 천태의 법문을 전수받았고, 행만과 함께 다시 용흥사로 가서 도수에게서 천태의 부법과 보살의 삼취계(三聚戒)를 받았다.

이렇게 묘락대사의 고제인 도수 · 행만 두 사람에게서 정통 천태종의 부법과 보살계를 받은 사이초는 입당의 본래 목적을 이루고, 당의 정원 21년(805) 3월 초 태주를 떠나 명주로 돌아왔다. 귀국까지 여유가 있었으므로 명주에서 다시 월주로 가서, 그곳 용흥사에 머물던 순효에게서 삼부삼매야 관정을 받았다. 本文이 「법화종의 정혜를 전하고 …… 순효 화상이라는 사람에게서 진언의 비교를 배워 전했다」고 하신 것이 이 경과다.

  1. ①802연력 21년 「천태법화종 환학생」 칙선
  2. ②804연력 23년 7월 6일 견당사 제2선으로 출발(역어승 의진 동행) → 9월 1일 명주
  3. ③9월 26일 태주 용흥사도수의 『마하지관』 강의
  4. ④10월 천태산 불롱사행만에게서 천태의 법문 → 용흥사에서 도수에게 천태 부법 · 보살 삼취계
  5. ⑤8053월 월주 용흥사순효에게서 삼부삼매야 관정
  6. ⑥귀국 → 806 연력 25년 정월 천태법화종 연분도자 2인 공인
本文도수 · 행만을 만나 뵙고 법화종의 정혜를 전함道邃・行満に値い奉りて法華宗の定慧を伝え순효 화상이라는 사람에게서 진언의 비교를 배워 전함順暁和尚と申せし人に真言の秘教を習い伝えて
도표 7 · 전교대사의 입당과 사승 (804~805)

「도선 율사」라는 이름 — 도수의 전사 오류

本文에는 전교대사가 「도선 율사에게 보살계를 전했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전기의 기록은 모두 그 스승을 도수로 일치시킨다. 전교대사 자신의 『현계론』 상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和上慈悲にして、一心三観を一言に伝え、菩薩の円戒を至信に授く

화상께서 자비로써 일심삼관을 한마디에 전하시고, 보살의 원계(円戒)를 지극한 믿음에 주셨느니라.

전교대사, 『현계론』 상권

또 『현계론연기』에도 「전보살계사 천태사문 도수(伝菩薩戒師天台沙門道邃)」라고 적혀 있으므로, 전교대사에게 보살계를 준 사람이 도수였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대성인도 「보은초」에서 「지난 연력 23년 7월 입당하시어 서명사의 도수 화상 · 불롱사의 행만 등을 만나 지관 원돈의 대계를 전수받으셨다(去る延暦二十三年七月御入唐・西明寺の道邃和尚・仏滝寺の行満等に値い奉りて止観円頓の大戒を伝受し)」(304쪽)고 하셨다.

중국 남산율종의 개조인 도선 율사는 7세기 사람이므로 전교대사가 그에게서 계를 받을 도리가 없다. 「도선 율사」 또는 「도선」이라는 이름은 이 어서 말고도 십여 편의 어서에 보이는데, 모두 남산율종의 도선을 가리킨다. 이름이 비슷한 도섬(道暹)은 당대 천태종의 승려로,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를 주석한 『법화문구보정기』를 지었고 대성인도 여러 어서에서 「도섬 율사」 등으로 인용하셨다. 그러나 도섬은 생몰년이 분명하지 않고 『불조통기』 권22에 대력 연간의 사람으로 나오므로 전교대사와 접점은 없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本文의 「도선 율사」는 「도수」의 전사 과정에서 생긴 잘못으로 보인다.

천태의 법문을 훔친 『대일경소』

대일경과 법화경을 나란히 놓고 — 연분도자와 정의 · 방의

本文은 이어서 전교대사가 대일경과 법화경의 승렬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밝히신다. 진언 · 법화의 승렬은 한토 스승들의 가르침으로는 정하기 어렵다고 여긴 전교대사는, 일본에 돌아와 두 경과 그 해석을 나란히 놓고 스스로 판단했다. 그 결과 대일경은 법화경에 못할 뿐 아니라, 선무외의 시사를 받아 일행이 지은 『대일경소』가 천태의 법문을 훔쳐 넣은 것임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다.

연력 25년(806) 정월 태정관부가 내려, 여러 종에 이어 천태법화종에도 해마다 득도시킬 두 사람을 더해 달라는 전교대사의 청이 받아들여졌다. 연분도자(年分度者)란 국가가 득도를 허가한 한 해의 정원을 말한다. 이로써 일본 천태종의 개종이 공인되었는데, 이때 천태법화종의 학업으로 한 사람은 『대비로자나경』(대일경)을, 한 사람은 『마하지관』을 읽도록 정해졌다. 곧 천태법화종은 진언 밀교를 더한 새 종파로 공인된 셈이다. 이 때문에 전교대사가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대일경을 받아들여 「원밀일치」를 과제로 삼았다고들 말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이 점에 대해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大日経の義釈には理同事勝とかきたれども伝教大師は善無畏三蔵のあやまりなり、大日経は法華経には劣りたりと知しめして八宗とはせさせ給はず真言宗の名をけづりて法華宗の内に入れ七宗となし 大日経をば法華天台宗の傍依経となして華厳・大品・般若・涅槃等の例とせり

대일경의 의석에는 이동사승이라 썼으나, 전교대사는 그것이 선무외 삼장의 잘못이요 대일경은 법화경에 못하다고 아시어, 팔종으로 하지 않으시고 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법화종 안에 넣어 칠종으로 하시고, 대일경을 법화천태종의 방의경(傍依経)으로 삼아 화엄 · 대품 · 반야 · 열반 등의 예로 하셨느니라.

「보은초」, 304쪽

여기서 대성인은 전교대사가 선무외 삼장의 속임을 간파하고 법화경과 대일경의 승렬을 분명히 분별하고 있었다고 하시며, 그 근거로 전교대사가 각 종의 연분도자를 청원할 때 기존의 남도 육종에 법화천태종을 더해 칠종으로 하고 진언종을 세우지 않은 사실을 드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화경을 정(正)으로, 대일경을 방(傍)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므로, 전교대사에게 두 경의 승렬은 분명했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전교대사의 『수호국계장(守護国界章)』 권상지중의 글로 뒷받침된다.

山家伝うる所の円教宗の依経は、正しくは法華経及び無量義経に依り

산가(山家)가 전하는 바 원교종의 의경은, 바르게는 법화경과 무량의경에 의지하고,

『수호국계장』 권상지중

이어지는 글은 열반 · 화엄 · 유마 · 방등반야 등 깊은 대승 경전에 설해진 원교와, 문수문반야 · 반주 · 대방등 · 청관음 · 허공장 · 관보현 · 「차나(遮那)」 등 원(円)을 설하는 모든 경론에는 「곁으로」 의지한다고 한다. 여기서 「차나」가 바로 대일경이다. 대일경은 화엄 · 열반과 나란히 방의(傍依)의 자리에 놓여 있다.

정의 — 바르게 의지함법화경 · 무량의경
방의 — 곁으로 의지함
  • 열반 · 화엄 · 유마 · 방등반야 등의 원교
  • 문수문반야
  • 반주
  • 대방등
  • 청관음
  • 허공장
  • 관보현
  • 차나(遮那 = 대일경)
출처: 『수호국계장』 권상지중
①연력 25년(806) 천태법화종 연분도자 2인지관업(止観業, 『마하지관』)·차나업(遮那業, 『대비로자나경』)
②「보은초」 304쪽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법화종 안에 넣어 칠종으로 하셨다真言宗の名をけづりて法華宗の内に入れ七宗となし
도표 8 · 전교대사가 세운 정의(正依)와 방의(傍依)

『대일경소』는 천태를 훔쳤다 — 『의빙집』의 고발

선무외 · 일행의 『대일경소』가 천태대사의 법문을 도용한 것이라는 사실은 전교대사의 『의빙집』에 밝혀져 있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但依憑集と申す文に正しく真言宗は法華天台宗の正義を偸みとりて大日経に入れて理同とせり、されば彼の宗は天台宗に落ちたる宗なり

다만 의빙집이라는 글에 바로 진언종은 법화천태종의 정의를 훔쳐 대일경에 넣어 이동(理同)이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저 종은 천태종에 떨어진 종이라 하였느니라.

「보은초」, 304쪽

「선시초」에서도 「의빙집이라는 한 권의 비서가 있으니 칠종의 사람들이 천태에 떨어진 모양을 쓰신 글이니라. 그 글의 서문에 진언종의 속임이 한 붓으로 보이느니라(依憑集と申す一巻の秘書あり七宗の人人の天台に落ちたるやうをかかれて候文なり、かの文の序に真言宗の誑惑一筆みへて候)」(276쪽)고 하셨다.

이 『의빙집』은 자세히는 『대당신라제종의장의빙천태의집(大唐新羅諸宗義匠依憑天台義集)』이라 한다. 대당과 신라의 여러 종이 천태종의 뜻에 의빙(依憑)하여 자기 종의 교의를 세웠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천태종이 다른 종보다 뛰어남을 밝힌 저술이다. 전교대사는 그 서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新来の真言家は則ち筆授の相承を泯じ、旧到の華厳家は則ち影響の軌模を隠す

새로 온 진언가는 붓으로 받은 상승을 지워 버리고, 먼저 온 화엄가는 그 영향을 받은 본보기를 감추었느니라.

전교대사, 『의빙집』 서

진언가가 지워 버린 「붓으로 받은 상승」이란, 일행이 『대일경소』를 쓸 때 천태의 법문을 받아 적었다는 사실이다. 니치칸 상인은 『의빙집』의 이 서분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且く文相に准ずるに、但元祖の依憑を挙げて、以て末弟の偏執を破するなり。往いて義意に准ずるに、彼の元祖の依憑は即ち盗台に当るなり。その故は天台法華の義に依憑して、宗々の依経を誇耀する故なり

우선 글의 모양에 따르면, 다만 원조의 의빙을 들어 말제자의 편집(偏執)을 깨뜨린 것이니라. 나아가 뜻에 따르면, 저 원조의 의빙은 곧 천태를 훔친 것에 해당하느니라. 그 까닭은 천태 법화의 뜻에 의빙하여 각 종의 의경을 뽐내기 때문이니라.

니치칸 상인

곧 글의 표면에서 전교대사는 여러 종의 원조가 천태종의 법문에 의빙하고 있음을 보였고, 그 속뜻에서는 여러 종의 원조가 천태종의 뜻을 훔쳐 자기 종의 의경을 교묘하게 해석하고 부당하게 높였음을 밝힌 것이다. 『수호국계장』 권중지중에서도 여러 종 인사의 소석을 들고 「이와 같은 종들은 천태에 의빙한다. 『의빙집』에 설한 바와 같다」고 분명히 지적했다. 本文의 「대일경의 소는 천태의 마음을 취하여 자기 종에 넣은 것이라고 헤아리셨다」는 이 뜻이다.

그 「훔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생생하게 그려 내셨다. 선무외는 대일경을 그대로 드러내 말하면 화엄 · 법상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천태종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천태종 안의 일행을 끌어들여 한토의 법문을 듣고, 천태종이 「신묘한 종」임을 알자 이렇게 꾀했다는 것이다.

善無畏三蔵一行にかたて云く、天台大師の法華経に疏をつくらせ給へるごとく大日経の疏を造りて真言を弘通せんとをもう汝かきなんやといゐければ……されば汝がかくべきやうは大日経と法華経とをば水と乳とのやうに一味となすべし……さて印と真言とは心法の一念三千に荘厳するならば三密相応の秘法なるべし

선무외 삼장이 일행에게 말하기를, 「천태대사가 법화경에 소를 지으신 것처럼 대일경의 소를 지어 진언을 홍통하려 하니, 그대가 써 주겠느냐」 하였으니 …… 「그러므로 그대가 쓸 방식은 대일경과 법화경을 물과 젖처럼 한맛으로 만드는 것이다 …… 그리고 인과 진언으로 심법의 일념삼천을 장엄한다면 삼밀상응의 비법이 될 것이다」.

「선시초」, 275쪽

일념삼천이라는 천태의 이(理)를 그대로 가져다 대일경에 넣고(이동), 거기에 인과 진언이라는 사(事)를 덧붙여 대일경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사승). 이것이 「이동사승」의 정체이며, 『대일경소』를 「천태의 법문을 훔친 대일경의 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 전교대사는 대일경을 받아들였으되 방의로만 받아들였고, 『대일경소』의 이동사승이 천태에서 훔친 것임을 『의빙집』으로 고발했다. 그러므로 「원밀일치는 전교대사에서 비롯되었다」는 통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소승 계단을 넘어 — 히에이산의 대승 원돈 계단

이 절의 本文에는 직접 나오지 않으나, 전교대사가 「법화종의 정혜」와 함께 도수에게서 받은 「보살계」는 그의 생애 마지막 과업으로 이어진다. 감진이 세운 삼계단에서 받는 것은 남산율의 소승계였다. 전교대사는 천태 법화종의 승려는 소승계가 아니라 법화경에 근거한 대승의 원돈계(円頓戒)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 만년에 『산가학생식』을 조정에 올려 히에이산에 대승 계단을 세우게 해 달라고 청했다. 남도 승강(僧綱)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현계론』을 지어 반박했고, 그 칙허는 홍인 13년(822) 전교대사가 입멸한 직후에야 내렸다.

대성인은 이 일을 전교대사 최대의 공적으로 높이 평가하셨다. 「선시초」에서는 문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정리하신다.

鑒真和尚の弘通せし日本小乗の三処の戒壇をなんじやぶり叡山に円頓の大乗別受戒を建立せり、此の大事は仏滅後一千八百年が間の身毒・尸那・扶桑乃至一閻浮提第一の奇事なり

감진 화상이 홍통한 일본 소승의 세 곳 계단을 꾸짖어 깨뜨리고 예산에 원돈의 대승 별수계를 건립하셨으니, 이 대사(大事)는 불멸 후 일천팔백 년 동안 인도 · 중국 · 일본 내지 일염부제 제일의 기이한 일이니라.

「선시초」, 271쪽

「시모야마어소식」에서도 「전교대사가 상법의 끝에 출현하여 법화경 적문의 계 · 정 · 혜 셋 가운데 그 원돈의 계단을 예산에 건립하신 때에 이백오십계를 홀연히 버렸느니라. 따라서 또 감진의 말류인 남도 칠대사의 열네 사람 · 삼백여 사람도 서명하여 대승의 사람이 되어, 한 나라가 모두 소율의(小律儀)를 버렸느니라(教大師・像法の末に出現して法華経の迹門の戒定慧の三が内・其の中・円頓の戒壇を叡山に建立し給いし時二百五十戒忽に捨て畢んぬ、随つて又鑑真の末の南都七大寺の一十四人・三百余人も加判して大乗の人となり一国挙つて小律儀を捨て畢んぬ)」(346쪽)고 하셨다.

그런데 대성인은 이 계단을 어디까지나 「법화경 적문의 계」로 규정하신다. 그리고 「삼대비법품승사」에서는 그 적문의 계단마저 자각 · 지증에 의해 무너졌다고 하신다. 이 대목은 다음 절의 주제, 곧 전교대사를 등진 두 대사와 바로 이어진다.

감진의 삼계단 — 소승계
장소동대사(나라) · 시모쓰케 약사사 · 쓰쿠시 관세음사
계남산율종의 이백오십계
어서 구절「선시초」 263쪽소승의 계장을 동대사에 건립하였으나小乗の戒場を東大寺に建立せしかども「시모야마어소식」 344쪽이것은 오로지 법화종이 유포되기 위한 방편이다此れ偏に法華宗の流布すべき方便なり
소승 → 대승
전교대사의 대승 계단 — 원돈계
장소히에이산
계법화경에 근거한 대승 원돈계
경과『산가학생식』 · 『현계론』으로 청원, 홍인 13년(822) 입멸 직후 칙허
어서 구절「선시초」 271쪽예산에 원돈의 대승 별수계를 건립하셨다叡山に円頓の大乗別受戒を建立せり「시모야마어소식」 346쪽법화경 적문의 계정혜 셋 가운데 원돈의 계단法華経の迹門の戒定慧の三が内・其の中・円頓の戒壇
도표 9 · 감진의 삼계단과 전교대사의 대승 계단
이른 아침 비와호 너머 안개 속 히에이산의 능선과 산중의 절 지붕들 원경
그림 · 이른 아침 비와호 너머 안개 속 히에이산의 능선과 산중의 절 지붕들 원경

전교대사를 등진 자각 · 지증

홍법의 원한 — 십주심 교판은 언제 공표되었나

이어지는 本文에서 대성인은 홍법대사의 그릇된 뜻을 자각 · 지증이 천태종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그릇된 견해가 일본국 안에 퍼졌다고 지적하신다. 먼저 홍법대사가 진언경이 낮추어진 것을 원한으로 여겼던 것인가 하신 것은, 앞서 본 대로 전교대사가 『의빙집』 서분에서 진언의 도용을 지적한 일을 말씀하신 것으로 읽힌다.

시기를 따져 보면 이 말씀의 무게가 드러난다. 전교대사가 『의빙천태집』을 지은 것은 홍인 7년(816)의 일로 본다. 이에 비해 구카이가 「대일경 제일 · 화엄경 제이 · 법화경 제삼」이라는 진언 밀교의 교판을 체계화한 것은 『비밀만다라십주심론』과 『비장보약』에서이며, 이는 대략 덴초 7년(830)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해 준나 천황이 여러 종에 각 종의 종의를 제출하라는 칙선을 내렸고, 이때 구카이가 낸 것이 『십주심론』 10권과 그 요약인 『비장보약』 3권이었다. 따라서 두 책은 적어도 전교대사가 홍인 13년(822)에 입멸한 뒤에 성립했다. 전교대사는 현밀 두 교의 승렬을 분명히 말했으나, 구카이는 전교대사 생전에는 십주심에 의한 교판을 드러내 놓고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구카이는 『평성천황관정문(平城天皇灌頂文)』에서도 십주심의 교판과 마찬가지로 첫째 율종 · 둘째 구사종 · 셋째 성실종 · 넷째 법상종 · 다섯째 삼론종 · 여섯째 천태종 · 일곱째 화엄 · 여덟째 진언으로 팔종을 배열했으나, 여기서는 아직 십주심과의 대응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도 다음의 『삼매야계서(三昧耶戒序)』와 함께 전교대사가 입멸한 해에 성립했다. 『삼매야계서』에는 십주심론의 싹이라 할 내용이 있고, 천태종을 제8 「여실일도심(如実一道心)」에 배당했음이 다음 글에서 분명하다.

自心を妙蓮に観じ、境智を照潤に喩う。三諦俱に融し、六即位を表す、これすなわち如実一道心の針灸なり

자기 마음을 묘련(妙蓮)으로 관하고, 경(境)과 지(智)를 비춤과 적심에 비유한다. 삼제가 함께 융합하고 육즉의 지위를 나타내니, 이것이 곧 여실일도심의 침과 뜸이니라.

구카이, 『삼매야계서』

구카이가 십주심 교판에서 법화경을 제8주심에, 화엄경을 제9주심에 배당해 법화경을 화엄경보다 못하다고 한 것도 전교대사를 의식한 결과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미야사카 유쇼(宮坂宥勝)도, 구카이가 십주심 체계를 짤 때 가장 고심한 것이 천태종의 위치였다고 추론한다. 그 근거로 천태종에 배당된 제8주심의 이름이 『십주심론』과 『비장보약』 안에서조차 여러 별명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제8주심을 「일도여실심」이라는 이름으로 천태에 배당한 『삼매야계서』의 성립이 공교롭게도 사이초가 입멸한 해에 해당한다는 점을 든다. 곧 『삼매야계서』에서는 제8주심이 「일도여실심」인데, 『십주심론』 · 『비장보약』에서는 모두 「일도무위심(一道無為心)」이며 그 별명으로 「여실지자심(如実知自心)」 · 「공성무경심(空性無境心)」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홍법 교판은 언제 나왔나 (774~891)
  • 전교대사
  • 구카이
  • 엔닌
  • 엔친
  1. 774구카이 탄생
  2. 794엔닌 탄생
  3. 804전교대사 · 구카이 같은 견당사 선단으로 입당
  4. 805전교대사 귀국
  5. 806천태법화종 연분도자 2인(지관업 · 차나업)구카이 귀국
  6. 808엔닌 히에이산 입문
  7. 814엔친 탄생
  1. 816전교대사 『의빙천태집』구카이 고야산 개창
  2. 822전교대사 입멸 · 대승 계단 칙허구카이 『평성천황관정문』 · 『삼매야계서』(천태 = 「여실일도심」) · 동대사 진언원
  3. 823구카이 동사를 받음
  4. 830 무렵『십주심론』 · 『비장보약』(제8 법화 · 제9 화엄 · 제10 진언)
전교대사의 입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공표된 교판
  1. 835구카이 입적
  2. 838~847엔닌 입당
  3. 854엔닌 제3대 좌주
  4. 853~858엔친 입당
  5. 864엔닌 입적
  6. 868엔친 제5대 좌주
  7. 891엔친 입적
도표 10 · 세 대사와 전교대사의 연표

이처럼 법화경을 낮추는 구카이의 교판이 전교대사의 입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공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성인도 「선시초」에서 구카이가 당에서는 진언의 사상(事相)인 인과 진언만 배웠을 뿐 그 의리를 깊이 살피지 못했는데, 일본에 돌아와 보니 천태종이 크게 성해 있었으므로 이렇게 했다고 하신다.

我が重ずる真言宗ひろめがたかりけるかのゆへに本日本国にして習いたりし華厳宗をとりいだして法華経にまされるよしを申しけり

자기가 중히 여기는 진언종을 펼치기 어려웠던 까닭인지, 본디 일본국에서 배웠던 화엄종을 끄집어내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말하였느니라.

「선시초」, 277쪽

本文의 「진언경이 낮추어진 것을 원한으로 여기셨던가, 진언종을 세우려고 꾀하여」는 이 사정을 가리킨다.

화엄은 거부하고 진언은 따르다 — 「본사 전교대사의 큰 원적」

이러한 구카이의 그릇된 견해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진언 밀교에 휩쓸려 이동사승의 뜻을 주창하며 태밀에 떨어진 이가 자각 · 지증 두 사람이다. 두 사람도 법화경을 화엄경보다 못하다고 한 구카이의 교판에는 차마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언과 법화경의 승렬에 대해서는 완전히 구카이의 그릇된 뜻에 동조해, 개조인 전교대사의 가르침을 등지고 말았다. 대성인이 本文에서 「본사 전교대사의 큰 원적」이라고 꾸짖으신 까닭이다.

本文의 「아아, 자각 · 지증이 예산과 원성사에서 이 뜻을 허락하지 않았더라면」에는 깊은 탄식이 담겨 있다. 구카이의 교판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홀로는 퍼지기 어려웠다. 그것을 전교대사의 정통 후계자들이 법화의 본산에서 받아들였기에 일본 전체로 퍼진 것이다. 대성인은 「삼대비법품승사」에서 그 결과를 계단의 무너짐으로 그리셨다.

叡山に座主始まつて第三・第四の慈覚・智証・存の外に本師伝教・義真に背きて理同事勝の狂言を本として我が山の戒法をあなづり戯論とわらいし故に、存の外に延暦寺の戒・清浄無染の中道の妙戒なりしが徒に土泥となりぬる事云うても余りあり歎きても何かはせん

예산에 좌주가 시작되어 제3 · 제4의 자각 · 지증이 뜻밖에도 본사 전교 · 의진을 등지고 이동사승의 광언을 근본으로 삼아 자기 산의 계법을 업신여기고 희론이라 비웃었기 때문에, 뜻밖에도 엔랴쿠사의 계, 청정무염한 중도의 묘계였던 것이 헛되이 진흙이 되어 버린 일은 말해도 다함이 없고 탄식한들 무엇하겠느냐.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원밀일치는 전교대사에서 비롯되었는가

이 장 마지막 本文은 세 대사의 권위가 너무 높았기에, 세 대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들이 정한 법화경과 진언의 승렬에 관한 잘못을 대성인이 출현하시기까지 아무도 바로잡지 못했음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한 가지 통설을 정면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자각 · 지증에 의한 천태의 밀교화가 개조 전교대사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천태 밀교는 전교대사에서 시작되었고, 법화경과 진언 밀교를 같다고 보는 원밀일치의 사상을 이어받아 더 깊게 한 것이 자각 · 지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견해는 잘못이다. 대성인은 늘 자각 · 지증을 「본사 전교대사의 큰 원적」이라고 단정하셨다.

물론 그런 견해가 생길 만한 까닭은 있다. 대성인 자신도 「중생신심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桓武の御代に最澄法師・後には伝教大師とがうす、入唐已前に六宗を習いきわむる上・十五年が間・天台・真言の二宗を山にこもり給いて御覧ありき、入唐已前に天台宗をもつて六宗をせめしかば七大寺皆せめられて最澄の弟子となりぬ、六宗の義やぶれぬ、後延暦廿三年に御入唐・同じき廿四年御帰朝・天台・真言の宗を日本国にひろめたり、但し勝劣の事は内心に此れを存じて人に向つてとかざるか

간무 천황의 치세에 최징 법사, 뒤에 전교대사라 호하는 분이 입당 이전에 육종을 배워 궁구하신 위에 십오 년 동안 천태 · 진언 두 종을 산에 들어앉아 보셨느니라. 입당 이전에 천태종으로 육종을 꾸짖으시니 칠대사가 모두 꾸짖음을 받아 최징의 제자가 되었고 육종의 뜻은 깨졌느니라. 뒤에 연력 23년에 입당하시어 같은 24년에 귀조하시고 천태 · 진언의 종을 일본국에 펼치셨느니라. 다만 승렬의 일은 속마음에 이를 간직하시고 사람을 향해서는 설하지 않으셨던가.

「중생신심어서」, 1593쪽

전교대사는 법화경과 진언의 승렬을 스스로는 분별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에게 분명히 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밀이 생겼다는 견해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 견해의 근거는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교대사가 입당해 천태 · 밀교 · 선 · 계의 네 종을 상승한 것(사종상승 四種相承). 둘째, 히에이산에 법화 지관업과 진언 차나업의 두 업을 둔 것. 셋째, 구카이에게서 진언 밀교를 배우려고 힘쓴 것. 넷째, 구카이에게 간 제자 다이한(泰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법화일승과 진언일승에 무슨 승렬이 있으랴」라고 한 것.

이에 대해 대성인은 어디까지나 전교대사의 본의가 원승밀렬(円勝密劣), 곧 법화가 뛰어나고 진언이 못하다는 데 있었다고 지적하신다. 그 근거는 앞서 본 세 가지다. ① 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천태법화종이라 이름했다. ② 『수호국계장』에서 대일경을 방의로 자리매김했다. ③ 『의빙집』에서 진언을 파척했다.

통설 — 태밀은 전교대사에서 비롯되었다(네 근거)
  1. ①입당하여 천태 · 밀교 · 선 · 계의 사종을 상승
  2. ②히에이산에 지관업 · 차나업의 두 업을 둠
  3. ③구카이에게서 진언 밀교를 배우려 힘씀
  4. ④제자 다이한에게 보낸 편지법화일승과 진언일승에 무슨 승렬이 있으랴法華一乗・真言一乗、何の勝劣有らん
대성인의 지적 — 전교대사의 본의는 원승밀렬(세 근거)
  1. ①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천태법화종이라 함(「보은초」 304쪽)
  2. ②『수호국계장』에서 대일경을 방의로 둠
  3. ③『의빙집』에서 진언의 도용을 파척
니치칸 상인 「보은초문단」이종제등(二宗斉等)의 문은 약교(約教)의 일왕 방의이고 약부(約部)의 재왕 정의가 아니다
도표 11 · 원밀일치의 기원을 둘러싼 두 견해

입당의 목적 — 천태 교관의 상승

이 점들을 하나씩 짚어 보면 전교대사의 정의가 드러나고, 자각 이후 천태의 밀교화가 개조를 얼마나 등진 것이었는지가 보인다. 먼저 사종상승의 문제다. 이 의문에 답하려면 전교대사가 입당 구법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伝教大師は日本国にして十五年が間・天台真言等を自見せさせ給う生知の妙悟にて師なくしてさとらせ給いしかども、世間の不審をはらさんがために漢土に亘りて天台真言の二宗を伝へ給いし

전교대사는 일본국에서 십오 년 동안 천태 · 진언 등을 스스로 보셨으니, 날 때부터 아는 묘오(妙悟)로 스승 없이 깨달으셨으나, 세간의 의심을 풀기 위해 한토에 건너가 천태 · 진언 두 종을 전하셨느니라.

「선시초」, 280쪽

전교대사는 스승 없이 스스로 법화경의 묘리를 깨닫고 법화경이 가장 뛰어남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세상을 납득시키기 위해 입당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교대사가 당에 닿자 곧장 천태산으로 향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 말씀을 뒷받침하는 것이 입당을 청원한 상표문이다.

最澄早く玄門に預り、幸いに昌運に遇い、聞を至道に希い、心に法筵に遊ばしむ。毎に恨むらくは、法華の深旨尚未だ詳釈あらざることを、幸いに天台の妙記を求め得て披閲すること数年、字謬り行脱して未だ細き趣きを顕さず。若し師伝を受けざれば、得たりと雖も信ぜられず

최징은 일찍이 현묘한 문에 들고 다행히 융성한 운을 만나 지극한 도를 듣기를 바라며 마음을 법연에 노닐게 하였나이다. 늘 한스러운 것은 법화의 깊은 뜻이 아직 자세히 풀이되지 않은 것이옵니다. 다행히 천태의 묘한 기록을 구하여 몇 해 펼쳐 읽었으나 글자가 틀리고 줄이 빠져 아직 섬세한 뜻을 드러내지 못하였나이다. 만일 스승의 전함을 받지 못하면 얻었다 해도 믿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전교대사, 입당 청원 상표문

여기서 입당 구법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로지 천태 교관의 상승에 있었고, 진언 밀교 등 나머지 세 종의 수법은 부수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교대사의 청래목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태주록』 · 『월주록』을 합쳐 총 234부 460권이라는 방대한 수 가운데 법화 · 천태 관계의 경소가 압도적으로 많고, 진언 밀교 관계는 겨우 38부에 지나지 않는다.

「선시초」는 전교대사가 왜 그 승렬을 끝까지 드러내 논하지 않았는지도 짐작하신다. 입당 뒤에는 원돈의 계장을 세우느냐 마느냐의 논쟁에 온 힘을 쏟아야 했으므로 「적이 많아서는 계장 하나의 일도 이루기 어렵다고 여기셨던가, 또 말법에 꾸짖게 하려 하셨던가, 황제 앞에서도 논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도 시원히 말씀하지 않으셨다(敵多くしては戒場の一事成りがたしとやをぼしめしけん、又末法にせめさせんとやをぼしけん皇帝の御前にしても論ぜさせ給はず弟子等にもはかばかしくかたらせ給はず)」(276쪽)는 것이다. 대승 계단의 건립과 진언 파척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었고, 진언과의 승렬을 분명히 하는 일은 말법에 맡겨졌다는 뜻이 이 말씀에 담겨 있다.

약교와 약부 — 「이종제등」의 문은 일왕의 방의

그렇다면 전교대사는 왜 재당 중에도 귀국 뒤에도 진언 밀교를 익히려 애썼는가. 이것은 전교대사가 진언 밀교를 어떻게 자리매김했느냐는 문제와 떼어 놓을 수 없다. 니치칸 상인은 「보은초문단」에서 전교대사의 저서에 이종제등(二宗斉等), 곧 법화와 진언 두 종이 같다고 한 글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모두 약교(約教) 일왕(一往)의 방의(傍義)이지 결코 약부(約部) 재왕(再往)의 정의(正意)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곧 전교대사의 이종제등의 글은 교(教)에 약하여, 대일경 속의 원교적 요소를 원교에 거두어들인 것이지, 부(部)에 약하여 대일경이라는 경 전체를 법화경과 같다고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이한에게 보낸 편지의 「법화일승과 진언일승에 우열이 없다」는 글도, 지관업과 차나업의 병립도, 모두 약교의 판단에서 대일경 가운데 원교를 들어 올린 위의 일왕의 방의이며, 법화경과 진언이 같은 격이라는 뜻이 아니다. 약교판으로 대일경의 원교를 끄집어낸다 해도 그것은 「여(与)」, 곧 너그럽게 허용해 준 판단일 뿐이다. 오미(五味)에 약하여 거칠고 묘함을 판단하는 약부판에 따르면 대일경은 방등부에 속하는 이전(爾前)의 권경이며 법화경에 미칠 까닭이 없다.

전교대사가 진언 밀교를 구한 것도 이 약교판의 입장에서였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법화경을 정의의 경으로, 대일경을 방의의 경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각 · 지증 등 제자들은 이러한 전교대사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조의 정의를 등졌다. 그 결과 예산은 밀교화했고, 나아가 거기서 선종과 정토종이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오미 · 교판의 구조에 대해서는 핵심 개념 「오시팔교」에서 따로 다룬다.

이동사승의 함정 — 홍법보다 무거운 허물

「보은초」에서 대성인은 이동사승의 뜻을 주창한 자각 · 지증의 방법(謗法)이 오히려 홍법을 넘어서며 석가 · 다보 · 시방 삼불의 원적(怨敵)이라고 하시고, 그 까닭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弘法大師こそ第一の謗法の人とおもうに、これは・それには・にるべくもなき僻事なり、其の故は水火・天地なる事は僻事なれども人用ゆる事なければ其の僻事成ずる事なし、弘法大師の御義はあまり僻事なれば弟子等も用ゆる事なし事相計りは其の門家なれども其の教相の法門は弘法の義いゐにくきゆへに善無畏・金剛智・不空・慈覚・智証の義にてあるなり、慈覚・智証の義こそ真言と天台とは理同なりなんど申せば皆人さもやと・をもう、かう・をもうゆへに事勝の印と真言とにつひて天台宗の人人・画像・木像の開眼の仏事を・ねらはんがために日本・一同に真言宗におちて天台宗は一人もなきなり

홍법대사야말로 제일의 방법(謗法)의 사람이라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그것과는 비할 수도 없는 잘못이니라. 그 까닭은, 물과 불 · 하늘과 땅처럼 동떨어진 일은 잘못이기는 하나 사람이 쓰지 않으니 그 잘못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느니라. 홍법대사의 뜻은 너무나 잘못이므로 제자들도 쓰지 않느니라. 사상(事相)만은 그 문가이지만 교상의 법문은 홍법의 뜻을 말하기 어려우므로 선무외 · 금강지 · 불공 · 자각 · 지증의 뜻을 따르느니라. 자각 · 지증의 뜻이야말로 진언과 천태는 이(理)가 같다 등이라 말하니 모든 사람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에 사(事)가 뛰어나다는 인과 진언에 붙어서, 천태종 사람들이 화상 · 목상의 개안 불사를 노리기 위하여 일본이 한결같이 진언종에 떨어져 천태종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느니라.

「보은초」, 308쪽

법화경을 화엄경보다 못하다고 한 홍법의 교판은 그 잘못이 쉽게 보인다. 그러나 자각 · 지증이 세운 이동사승의 뜻은 헷갈리기 쉬워 지혜 있는 사람도 미혹되었고, 그 잘못을 꿰뚫어 보지 못한 채 그 그릇된 뜻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理)는 같다」는 말이 법화경을 존중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이 사람들을 진언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 「개안 불사」의 문제는 다음 편 이후에서 진언의 기도와 망국의 현증으로 이어진다.

원밀일치의 정착과 사백 년의 침묵

안연 · 양원 · 태밀 13류

자각 · 지증 뒤에도 그 흐름은 더 깊어졌다. 예산에는 지증과 거의 같은 시대인 9세기 말, 제4대 좌주 안혜(安慧)의 제자인 고다이인(五大院) 안연이 나왔다. 안연은 자각의 이동사승 · 사리구밀(事理俱密)의 교판을 이어받으면서, 천태대사가 세운 화법사교(化法四教), 곧 장 · 통 · 별 · 원 사교 가운데 원교를 수자타의(随自他意)의 원교라고 하여 자각 · 지증의 원밀일치를 더 밀고 나가 원렬밀승(円劣密勝)을 설했다. 또 그의 구종판(九宗判)에서는 진언종을 제일로, 선종을 제이로 두고 법화종을 제삼의 자리로 떨어뜨렸으며, 스스로 천태종이라는 이름을 고쳐 진언종이라 일컬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성인이 「보은초」에서 말씀하신 「일본이 한결같이 진언종에 떨어져 천태종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는 상태에까지 떨어졌고, 진언 밀교에 의한 기도는 시대의 풍조가 되었다.

안연 이후의 천태종에서는 예산의 교학이 떨치지 못하고 승풍도 흐트러져 마침내 퇴폐의 극에 이르렀다. 이때 제18대 좌주 자혜대사(慈慧大師) 양원(良源)이 예산을 재흥해 중흥의 조(祖)로 불렸다. 그러나 전교대사 · 자각 · 지증 · 안연과 함께 「삼성이사(三聖二師)」로 칭송된 양원도 이동사승을 말한 자각의 흐름을 잇고 있었으며, 오히려 밀교화에 더욱 박차를 가한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도 예산에서 밀교의 교상 연구는 안연에 의해 대성되었고 그 뒤는 그것을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양원의 중흥 이후로는 오로지 진언 밀교의 실천문인 사상(事相)의 연구와 전수에 힘이 쏟아져 여러 분파가 생겼다. 이른바 「태밀 13류」가 그것이다. 그러나 분파에 분파를 거듭한 사상의 발전과 융성은, 동사와 경쟁하듯 가지기도에 몰두하는 풍조를 가져왔을 뿐이다.

  1. ①전교대사법화 정의 · 대일경 방의, 『의빙집』으로 『대일경소』의 도용 고발(약교의 이종제등은 일왕의 방의)
  2. ②구카이『십주심론』 · 『비장보약』(830 무렵): 제8 법화 · 제9 화엄 · 제10 진언
  3. ③자각 · 지증화엄과의 승렬은 거부, 진언과의 승렬은 구카이에 동조: 이동사승本文뜻밖에도 본사 전교대사의 큰 원적이 되었다存外に本の伝教大師の大怨敵となる
  4. ④안연(9세기 말)사리구밀 계승, 원렬밀승 · 구종판(1 진언 · 2 선 · 3 법화), 천태종을 진언종이라 칭함
  5. ⑤양원(제18대 좌주)예산 중흥, 「삼성이사」, 자각의 흐름 계승
  6. ⑥태밀 13류사상(事相)의 분파, 동사와 겨루는 가지기도
「보은초」 308쪽일본이 한결같이 진언종에 떨어져 천태종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日本・一同に真言宗におちて天台宗は一人もなきなり
도표 12 · 원밀일치의 형성과 정착

사백 년의 침묵 — 지혜와 용기

本文은 끝으로, 이런 진언 밀교의 융성 속에서 어쩌다 천태종을 배워 진언 밀교는 법화경에 미치지 못하고 법화경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경이라는 전교대사의 본의를 깨달은 사람이 있어도, 천태 좌주와 오무로의 권위를 두려워해 입 밖에 내지 못했다고 하신다. 구카이 · 엔닌 · 엔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들의 권위는 더욱 선전되어 갔으므로 그것을 깨뜨리려는 사람이 없었고, 간신히 법화경과 진언은 같다고 말해 보아도 진언사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는 것이다.

「사백여 년」은 구카이가 동사를 받은 9세기 초부터 이 어서를 쓰신 홍안 원년(1278)까지의 세월이다. 그 사이 「법화와 진언은 같다」는 주장조차 웃음거리가 될 만큼, 진언 우위는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 되어 있었다. 제7장에서 문자가 세 대사를 「달과 같고 해와 같다」고 찬탄한 것은 바로 이 상식의 목소리였다.

대성인이 여기서 지적하신 것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세 대사의 그릇된 뜻이 그토록 오래 횡행하도록 허용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는 세 대사를 넘어서는 지혜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 또 하나는 지혜가 뛰어나더라도 권위를 두려워해 세 대사를 파척할 용기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로 다 설명된다.

①지혜저 세 대사를 넘지 못하였으므로彼の三大師にこえざれば세 대사를 넘어서는 지혜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②용기천태의 좌주와 오무로 등의 고귀함을 두려워하여 말하는 일이 없다天台の座主御室等の高貴におそれて申す事なし지혜가 있어도 권위를 두려워해 파척할 용기 있는 사람이 없었다
「선시초」 277쪽천태종 사람들은 그다지 꾸짖어 말하는 일이 없었다天台宗の人人いたうとがめ申す事なし
도표 13 · 세 대사의 잘못이 사백여 년 바로잡히지 못한 두 이유 (本文 제8장 第五)

이 두 이유 — 지혜와 용기의 부재 — 는 그대로 다음 편의 물음이 된다. 세 대사를 넘는 지혜로 그 잘못을 꿰뚫고, 좌주와 오무로의 권위 앞에서도 그것을 말할 용기를 지닌 사람이 이 나라에 있었는가. 제9장은 「법화경의 행자는 사백여 년 동안 한 사람도 없다」고 답하고, 제10장은 그 침묵을 깨뜨린 대성인 자신의 사적을 보이신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제7장에서 문자는 세 대사의 사적을 차례로 들었다. 구카이는 혜과에게서 「병의 물」을 그대로 이어받아 동사를 받았고, 엔닌은 십 년 가까운 재당 끝에 총지원을 세워 천태의 진언을 시작했으며, 엔친은 칠 년의 구법 끝에 천황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 영예는 모두 사실이었고, 대성인 자신도 세 대사가 일본국 사백여 년 동안 해와 달처럼 우러러졌음을 인정하셨다. 문자는 이 사실들을 근거로, 세 대사에 의지하는 것이 곧 법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8장에서 대성인은 그 주장에 사람의 덕으로 맞서지 않으셨다. 인도에서는 정법 천 년 동안 「밀교」라는 구별조차 없었고, 중국에서는 불법 전래 육백 년 뒤 현종 시대의 세 삼장이 진언을 세우면서 처음으로 법화경을 그 아래로 끌어내렸다. 묘락대사는 그 잘못을 알면서도 끝까지 세우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감진이 천태의 전적을 가져오고도 율만 펼쳤고, 전교대사가 비로소 두 경을 나란히 놓고 대일경을 방의로 두었으며, 『대일경소』의 이동사승이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친 것임을 『의빙집』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구카이는 전교대사가 입멸하자 법화경을 화엄경 아래로까지 낮춘 교판을 공표했고, 전교대사의 제자인 자각 · 지증이 진언과의 승렬에서 그에게 동조함으로써 그 그릇된 견해는 예산과 원성사를 통해 일본 전체로 퍼졌다. 안연과 양원을 거치며 원밀일치는 천태종의 정설이 되었고, 진언의 기도는 시대의 풍조가 되었다.

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병의 물」이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석존의 경문에서 흘러나온 물이 아니라, 천태의 이(理)를 몰래 퍼 담고 인과 진언이라는 겉옷을 입힌 물이었다. 의법불의인의 「법」은 사람이 전한 상승이 아니라 부처가 「법화최제일」이라고 설한 경문 그 자체다. 그러므로 세 대사에게 의지하는 것은 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 편의 결론은 두 가지 부재로 요약된다. 세 대사를 넘어서는 지혜가 없었고,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없었다. 다음 제4편 「법화경의 행자 없는 나라와 대성인의 사적」은 바로 이 두 부재에서 출발한다. 제9장은 사백여 년 동안 일본에 법화경을 「최제일」로 읽은 행자가 한 사람도 없었음을 밝히고, 제10장은 세이초사에서의 출발과 입종, 거듭된 법난 속에서 그 침묵을 홀로 깨뜨린 대성인의 사적을 보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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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본존문답초」 · 「보은초」 · 「선시초」 · 「시모야마어소식」 · 「소야지로입도전답서」 · 「시조깅고전답서」 · 「중생신심어서」 · 「삼대비법품승사」 · 「안국론어감유래」 · 「개목초」 — 『니치렌대성인어서전집』
  • 『대일경소』(선무외 · 일행), T39 no.1796
  • 『대반열반경』, T12 no.374
  • 전교대사, 『의빙천태집』 · 『수호국계장』 · 『현계론』 · 『산가학생식』
  • 구카이, 『비밀만다라십주심론』 · 『비장보약』 · 『청래목록』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 교넨, 『삼국불법전통연기』 / 시반, 『본조고승전』 / 고칸 시렌, 『원형석서』 / 『부상략기』 / 『일본서기』
  • 니치칸 상인, 「선시초우기」 · 「보은초문단」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연구

  • 「0365~0374 本尊問答抄」 강의(第七段 · 第八段)
  • Ryūichi Abé, The Weaving of Mantra: Kūkai and the Construction of Esoteric Buddhist Discours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 Paul Groner, Saichō: The Establishment of the Japanese Tendai School, Berkeley Buddhist Studies Series, 1984
  • Edwin O. Reischauer (tr.), Ennin's Diary: The Record of a Pilgrimage to China in Search of the Law, Ronald Press, 1955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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