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초 여섯 편 가운데 제2편은 「불법은 시에 의한다」는 제1편의 총론을,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이천 년의 역사에 대어 증명하는 자리다. 대성인은 「용수 · 천친도 이 뜻을 말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정법 천 년의 인도, 상법 천 년의 중국과 일본에서 누가 어떤 법을 넓혔는지를 대집경의 오오백세에 하나하나 맞추어 보이신다. 가섭 · 아난은 소승을, 마명 · 용수는 권대승을, 천태대사는 법화경 적문을, 전교대사는 원돈의 대계를 넓혔으나, 그 누구도 법화경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를 넓히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기와 시와 부촉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나간 이천 년이 예언대로 흘러왔다면, 다섯째 오백 세 「투쟁견고 · 백법은몰」의 때에 법화경의 대백법이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하는 것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편은 역사의 서술을 거쳐 이 필연을 밝히고, 그 법을 넓히는 사람의 덕을 드러내며, 「기에 따라 법을 설한다」는 통념을 다시 문답으로 깨뜨리는 데까지 이어진다.
선시초의 여섯 편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뉜다. 제1편이 시를 밝히는 총론과 경문 · 석의 증거라면, 제2편과 제3편은 정법 · 상법 · 말법에 걸친 홍교의 역사이고, 제4편은 정토 · 선 · 진언의 그릇됨을 가리며, 제5편과 제6편은 말법의 법화경 행자를 밝힌다. 그 가운데 이 편은 역사 갈래의 앞쪽 절반이다. 제7장부터 제12장까지 여섯 장은 시간의 순서를 따라 인도 · 중국 · 일본의 불교사를 차례로 훑고, 제13장에서 말법의 지금으로 돌아와 「묘법 유포의 필연」을 선언하며, 제14장에서 그 법을 넓히는 사람의 덕을, 제15장에서 다시 문답으로 앞의 논의를 다진다.
이 편을 읽는 열쇠는 대집경의 오오백세다. 부처님 입멸 뒤 이천오백 년을 다섯으로 나누어, 해탈견고 · 선정견고(정법 천 년), 독송다문견고 · 다조탑사견고(상법 천 년), 투쟁견고(말법의 처음)라 한 이 예언을, 대성인은 삼국의 불교사와 하나하나 맞대어 보이신다. 첫째 오백 년에는 부법장의 가섭 · 아난이 소승을 넓혔고, 둘째 오백 년에는 마명 · 용수 · 제바가 대승으로 소승을 깨뜨렸다. 셋째 오백 년에는 불법이 중국으로 건너가 남삼북칠의 논쟁 끝에 천태대사가 법화경 제일을 세웠고, 넷째 오백 년에는 법상 · 화엄 · 진언이 일어나 천태의 정의를 덮었으며 일본에서는 전교대사가 원돈의 계단을 세웠다. 그리고 다섯째 오백 년, 말법에 들어 이백여 년이 된 대성인의 시대는 몽골의 침공으로 동아시아가 뒤흔들리는 「투쟁견고」의 한가운데였다.
이렇게 역사를 길게 펼치시는 뜻은 단순한 불교사 강의가 아니다. 과거 이천 년이 예언과 어긋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앞으로 올 광선유포의 예언 또한 어긋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대지는 뒤집혀도, 해가 동쪽으로 되돌아가도 이 일은 틀림없다」는 제13장의 선언은 이 역사 서술 위에 서 있다. 동시에 정법 · 상법의 성인들이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까닭을 하나하나 밝히는 과정은, 말법의 법이 그 누구도 아직 넓히지 않은 법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편의 장
본문
問うて云く竜樹・天親等の論師の中に此の義ありや、答えて云く竜樹・天親等は内心には存ぜさせ給うといえども言には此の義を宣べ給はず、求めて云くいかなる故にか宣給ざるや、答えて云く多くの故あり一には彼の時には機なし・二には時なし・三には迹化なれば付嘱せられ給はず、
묻기를, 용수(竜樹) · 천친(天親) 등의 논사(論師) 가운데 이 뜻을 말한 이가 있느냐. 답하기를, 용수 · 천친 등은 내심으로는 알고 계셨으나 말로는 이 뜻을 펴지 아니하셨느니라. 구하기를, 어떠한 까닭으로 펴지 아니하셨느냐. 답하기를, 많은 까닭이 있느니라. 첫째는 그때에는 기(機)가 없었고, 둘째는 시(時)가 없었으며, 셋째는 적화(迹化)이므로 부촉(付嘱)을 받지 못하셨느니라.
求めて云く願くは此の事よくよくきかんとをもう、答えて云く夫仏の滅後二月十六日よりは正法の始なり迦葉尊者仏の付嘱をうけて二十年、次に阿難尊者二十年・次に商那和修二十年・次に優婆崛多二十年・次に提多迦二十年、已上一百年が間は但小乗経の法門をのみ弘通して諸大乗経は名字もなし何に況や法華経をひろむべしや、 次には弥遮迦・仏陀難提・仏駄密多・脇比丘・富那奢等の四五人、前の五百余年が間は大乗経の法門少少・出来せしかども・とりたてて弘通し給はず、但小乗経を面としてやみぬ、已上大集経の先五百年解脱堅固の時なり、
구하기를, 원컨대 이 일을 자세히 듣고자 하노라. 답하기를, 무릇 부처님 멸후 2월 16일부터가 정법(正法)의 시작이니라.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부처님의 부촉을 받아 20년, 다음에 아난존자(阿難尊者) 20년, 다음에 상나화수(商那和修) 20년, 다음에 우바국다(優婆崛多) 20년, 다음에 제다가(提多迦) 20년, 이상 백 년 동안은 다만 소승경의 법문만을 홍통하여 여러 대승경은 그 이름조차 없었느니라. 하물며 법화경을 넓힐 수 있었겠느냐. 다음에는 미차가(弥遮迦) · 불타난제(仏陀難提) · 불타밀다(仏駄密多) · 협비구(脇比丘) · 부나사(富那奢) 등 너덧 사람이니, 앞의 오백여 년 동안은 대승경의 법문이 조금씩 나오기는 하였으나 내세워 홍통하지는 아니하시고, 다만 소승경을 앞세운 채 그쳤느니라. 이상이 대집경(大集経)의 첫 오백 년, 해탈견고(解脱堅固)의 때이니라.
어구 풀이
- 竜樹・天親용수 · 천친
- 정법 뒤 오백 년에 인도에서 대승을 크게 넓힌 두 논사. 용수(나가르주나)는 2~3세기 남인도의 논사로 『중론』 등을 지어 공(空)의 사상을 세웠고, 천친(세친, 바수반두)은 4~5세기 북인도 간다라 출신으로 처음 소승의 『구사론』을 지었다가 형 무착(無著)의 인도로 대승에 돌아섰다고 전한다. 둘 다 「천 부의 논사(千部の論師)」로 불렸으며, 대성인은 이 두 사람을 정법 시대 후반의 정사(正師)로 자리매김하셨다.
- 此の義이 뜻
- 제6장까지 밝힌 「말법의 처음 오백 년에 법화경의 간심이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한다」는 뜻. 제6장에서 천태 · 묘락 · 전교의 미래기(未來記)를 확인한 데 이어, 그보다 앞선 인도의 논사들에게도 이 뜻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 内心には存ぜさせ給う내심으로는 알고 계셨다
- 천태대사가 『마하지관』 권5에서 용수 · 천친을 두고 말한 「내감냉연 외적시의(内鑑冷然・外適時宜)」와 같은 뜻. 안으로는 거울처럼 밝게 일념삼천의 법리를 비추어 알았으나, 밖으로는 그 시대에 맞는 가르침을 폈다는 것이다.
- 機・時기 · 시
- 기는 가르침을 받는 중생의 근기(根機), 시는 그 법이 넓혀질 때. 「관심의 본존초」는 용수 · 천친이 말하지 않은 까닭을 「기는 있어도 시가 없었던가, 기와 시가 함께 없었던가」라고 두 가지로 헤아리셨다.
- 迹化적화
- 적불(迹佛)인 석존에게 교화받은 보살. 문수 · 미륵 · 관음 · 약왕 등이 이에 든다. 이에 대해 구원의 본불에게 교화받은 지용(地涌)의 보살을 본화(本化)라 한다. 법화경 신력품에서 말법 홍통의 부촉은 본화의 상행보살에게 맡겨졌다.
- 付嘱부촉
- 부처가 법을 제자에게 맡겨 넓히게 하는 것. 신력품의 결요부촉(별부촉)은 상행보살 등 본화의 보살에게, 촉루품의 총부촉은 모든 보살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부촉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법에 넓힐 법화경의 간심을 맡지 못했다는 뜻이다.
- 二月十六日2월 16일
- 석존은 2월 15일에 입멸하셨다고 전하므로, 그 다음 날부터가 정법 천 년의 시작이 된다. 「교기시국초」의 「부처님 멸후 다음 날부터 정법 일천 년」과 같은 셈법이다.
- 迦葉尊者가섭존자
- 마하가섭. 석존의 십대 제자 가운데 두타(頭陀) 제일. 부법장(付法蔵)의 첫째로, 석존 입멸 뒤 왕사성 밖에서 제1회 결집을 주재하고 20년 동안 소승교를 넓힌 뒤 아난에게 법을 넘겼다고 전한다.
- 阿難尊者아난존자
- 석존의 사촌으로 오랫동안 곁에서 시봉하여 다문(多聞) 제일이라 불렸다. 제1회 결집에서 경장(經藏)을 송출했다고 전하며, 부법장의 둘째로 20년 동안 법을 넓혔다.
- 商那和修・優婆崛多・提多迦상나화수 · 우바국다 · 제다가
- 부법장의 셋째부터 다섯째. 상나화수는 아난의 제자이고, 우바국다는 아소카왕과 이어진 전승으로 알려진 고승이다. 本文은 가섭부터 제다가까지 다섯 사람이 각각 20년씩, 모두 백 년 동안 소승만을 넓혔다고 하신다.
- 弥遮迦・仏陀難提・仏駄密多・脇比丘・富那奢미차가 · 불타난제 · 불타밀다 · 협비구 · 부나사
- 부법장의 여섯째부터 열째. 협비구(협존자)는 카니슈카왕의 외호 아래 제4회 결집을 주재했다고 전하고, 부나사는 마명을 논파하여 불교로 이끈 사람으로 전한다. 本文은 이들의 시대에 대승의 법문이 조금 나왔으나 내세워 넓히지는 않았다고 하신다.
- 大集経대집경
- 『대방등대집경』. 그 월장분에서 부처님은 월장보살에게 멸후 이천오백 년을 다섯 오백 년으로 나누어 해탈 · 선정 · 독송다문 · 다조탑사 · 투쟁견고라 예언하셨다고 한다(대집경 오오백세).
- 解脱堅固해탈견고
- 오오백세의 첫째. 부처님 멸후 첫 오백 년 동안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이 계율을 지키고 소승의 해탈을 얻는 일이 굳건한 때.
「이 뜻」은 인도의 논사에게도 있었는가
제7장은 제6장의 결론을 이어받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제6장에서 대성인은 천태대사의 「후오백세에 멀리 묘도에 젖으리라」, 묘락대사의 「말법의 처음에 명리가 없지 않다」, 전교대사의 「정상은 거의 지나고 말법이 매우 가깝다」를 인용하여, 부처님 멸후 법화경이 유포할 때는 「재세의 팔 년」과 「멸후의 말법 처음 오백 년」 두 번뿐이며 천태 · 전교는 그 사이에 태어나 말법을 그리워했다고 밝히셨다. 묻는 이는 여기서 시선을 더 앞으로 돌린다. 천태 · 전교보다 앞서 정법 시대 인도에 출현한 용수 · 천친 같은 대논사들은 이 뜻을 말하지 않았는가.
대성인의 답은 간명하다. 「내심으로는 알고 계셨으나 말로는 펴지 않으셨다.」 이 한 줄에는 두 가지 주장이 함께 들어 있다. 첫째, 용수 · 천친은 결코 법화경의 깊은 뜻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다. 둘째, 그런데도 그들이 그것을 말하지 않은 데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선시초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이 편의 마지막 장까지 이어지는 정법 · 상법 이천 년의 역사는 결국 「누구도 이 법을 넓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그 출발점이 바로 인도 대승의 정점에 선 두 논사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 판정이기 때문이다.
내감냉연 외적시의 — 알고도 말하지 않은 논사들
용수 · 천친이 「내심으로는 알았다」는 판단은 대성인이 여러 어서에서 거듭 밝히신 것이다. 「개목초」는 일념삼천의 법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一念三千の法門は但法華経の本門・寿量品の文の底にしづめたり、竜樹・天親・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但我が天台智者のみこれをいだけり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글 밑바닥에 잠겨 있느니라. 용수 · 천친은 알면서도 아직 건져 내지 아니하였고, 다만 우리 천태지자만이 이것을 품었느니라.
「관심의 본존초」에서는 더 분명하게 그 까닭까지 헤아리신다.
問うて曰く竜樹天親等は如何、答えて曰く此等の聖人は知つて之を言わざる仁なり、或は迹門の一分之を宣べて本門と観心とを云わず或は機有つて時無きか或は機と時と共に之れ無きか
묻기를, 용수 · 천친 등은 어떠한가. 답하기를, 이들 성인은 알면서도 이것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니라. 혹은 적문의 일부는 폈으나 본문과 관심은 말하지 않았으니, 혹은 기는 있어도 시가 없었던가, 혹은 기와 시가 함께 없었던가.
이 판정의 근거가 된 것이 천태대사가 『마하지관』 권5에서 용수 · 천친에 대해 쓴 「내감냉연 외적시의」다. 안으로는 거울(鑑)에 비추듯 맑고 서늘하게(冷然) 진리를 깨닫고 있었으나, 밖으로는 그때그때의 형편(時宜)에 맞추었다는 말이다. 대성인은 사도에 도착하신 직후인 문영 8년(1271) 11월, 쓰카하라에서 쓰신 「도키입도전답서」에서 이 말을 그대로 들어 「天親・竜樹内鑑泠然外適時宜」라 하시고, 이어서 천태 · 전교도 대강 풀이했을 뿐 넓히지 못하고 남긴 「일대사의 비법」을 이 나라에 처음 넓히는 사람이 바로 니치렌이라고 선언하셨다. 정법의 논사가 안으로 알았던 것, 상법의 천태 · 전교가 대강만 풀었던 것, 그리고 말법에 처음 넓혀지는 것이 하나의 선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 · 천친이 「안으로 알았다」는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그 예로, 용수가 『대지도론』 권100에서 반야바라밀은 비밀의 법이 아니나 법화경에서는 아라한이 수기를 받아 성불한다고 설한다고 말한 대목, 그리고 천친이 『법화론』에서 「종자무상(種子無上)」을 세운 일을 들 수 있다. 「개목초」가 「법화경의 종자에 의하여 천친보살은 종자무상(種子無上)을 세웠으니…」(法華経の種に依つて天親菩薩は種子無上を立てたり, 215쪽)라고 하신 것이 이것이다. 이 흔적들은 그들이 법화경의 우위를 알았다는 증거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디까지나 「한 귀퉁이」에 그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니치칸 상인은 「삼중비전초(三重秘伝抄)」에서 「관심의 본존초」의 이 대목을 풀이하여, 용수 · 천친은 적문 · 본문 · 관심의 세 가지 일념삼천을 모두 넓히지 않았으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고, 다만 적문에서 일념삼천 외의 다른 법문은 폈으므로 「일부를 폈다」고 하신 것이며, 본문과 관심은 전혀 펴지 않았으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라고 보았다.
말하지 않은 세 가지 까닭
本文은 그 까닭을 「많다」고 하시면서 세 가지를 드신다. 첫째는 「그때에는 기가 없었다」, 둘째는 「시가 없었다」, 셋째는 「적화이므로 부촉받지 못했다」. 이 세 가지는 선시초 전체의 논지, 곧 「불법은 시에 의한다」와 그대로 이어진다.
첫째와 둘째, 기와 시가 없었다는 것은 「관심의 본존초」의 「혹은 기는 있어도 시가 없었던가, 혹은 기와 시가 함께 없었던가」와 겹친다. 정법 시대의 중생은 소승과 권대승으로 충분히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시대의 과제는 외도를 깨뜨리고 소승을 넘어서 대승을 세우는 데 있었다. 그런 때에 법화경의 깊은 뜻을 앞세우면 오히려 불법의 유통을 가로막게 된다. 제8장 해설에서 「소대(所對)에 따라 설하는 법문이 달라진다」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셋째의 「적화이므로 부촉받지 못했다」는 가장 근본적인 까닭이다. 용수 · 천친은 부처님 멸후에 법을 이은 보살이지만, 법화경 종지용출품 · 여래신력품에서 말법 홍통을 맡은 것은 대지에서 솟아난 본화의 지용보살이었다. 「관심의 본존초」는 「迹化の大衆は釈尊初発心の弟子等に非ざる故なり」(250쪽)라 하여, 적화의 보살들은 구원의 석존이 처음 발심시킨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촉에서 제외되었다고 밝히신다. 아무리 지혜와 덕이 높아도, 맡지 않은 법을 넓힐 수는 없다.
대성인은 다른 어서에서도 같은 까닭을 조금씩 다른 틀로 말씀하셨다. 「법화행자봉난사」는 용수 · 천친이 「다만 권대승을 펴고 법화경은 마음에 두고 입으로 토하지 않았다」고 하신 뒤, 천태 · 전교도 본문의 본존과 사보살과 계단과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를 남겨 두었으니 그 까닭은 「첫째는 부처님이 수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요, 둘째는 시기가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셨다. 또 「소야입도전허어서」는 가섭 · 아난이 대승을 넓히지 않은 까닭을 「첫째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 둘째는 받을 기가 없기 때문, 셋째는 부처님께서 물려주지 않으셨기 때문, 넷째는 시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시고, 용수 · 천친이 일승경을 넓히지 않은 까닭도 「네 가지 뜻이 앞과 같다」고 하셨다. 이것을 「정상의 네 까닭(正像の四故)」이라 부르며, 말법에는 이것이 뒤집혀 「자신이 감당하고, 받을 기가 있고, 부처님께 물려받고, 시가 왔다」는 네 까닭이 된다.
- 시
- 기
- 부촉
- 자신
- ①그때에는 기가 없었다「彼の時には機なし」
- ②시가 없었다「時なし」
- ③적화이므로 부촉받지 못했다「迹化なれば付嘱せられ給はず」
- ①부처님이 수여하지 않으셨다「仏・授与したまわざるが故に」
- ②시기가 아직 익지 않았다「時機未熟の故なり」
- ①자신이 감당하지 못한다「自身堪えざるが故に」
- ②받을 기가 없다「所被の機無きが故に」
- ③부처님께서 물려주지 않으셨다「仏より譲り与えられざるが故に」
- ④시가 오지 않았다「時来らざるが故なり」
세 어서를 견주어 보면 공통된 축이 뚜렷하다. 시가 오지 않았다는 것과 부촉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의 유무는 시에 딸린 조건이고,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촉을 받지 않은 이의 한계다. 선시초가 「시」를 제목으로 삼으면서도 여기서 굳이 「부촉」을 셋째로 덧붙이신 것은, 시가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시에 맞는 법을 맡은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는 뜻을 미리 비추어 두시려는 것으로 읽힌다. 이 실마리는 제13장에서 「상행보살에게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지니게 하여」라는 말씀으로 다시 돌아온다.
부법장의 계보와 정법 처음 오백 년
「이 일을 자세히 듣고자 한다」는 청에 답하여, 대성인은 정법 천 년의 역사를 처음부터 풀어 가신다. 기준점은 「부처님 멸후 2월 16일」이다. 석존이 2월 15일에 입멸하셨으니 그 다음 날부터가 정법의 첫날이다. 「교기시국초」가 「부처님 멸후 다음 날부터 정법 일천 년은 지계하는 자가 많고 파계하는 자는 적다」(439쪽)라 하신 셈법과 같다.
정법 천 년을 이끈 이들은 이른바 부법장(付法蔵)의 사람들이다. 『부법장인연전』은 석존의 법이 가섭에서 아난으로, 아난에서 상나화수로 차례로 맡겨져 마지막 사자존자에 이르기까지 스물네 사람(헤아리는 법에 따라 스물셋)에게 이어졌다고 전한다. 本文은 그 가운데 앞의 열 사람을 정법 처음 오백 년에 배당하신다. 가섭 · 아난 · 상나화수 · 우바국다 · 제다가 다섯 사람이 각각 20년씩 백 년 동안 소승만을 넓혔고, 그동안 대승경은 「이름조차 없었다」. 이어 미차가 · 불타난제 · 불타밀다 · 협비구 · 부나사의 「너덧 사람」이 남은 사백여 년을 맡았는데, 이때에는 대승의 법문이 「조금씩 나왔으나」 내세워 넓히지 않고 소승을 앞세운 채 끝났다.
서강은 이 시대를 대집경의 첫째 오백 년 「해탈견고」의 때라 하여, 중생이 소승경을 닦고 계율을 지켜 해탈을 구하던 시대라고 풀이한다. 또 이 시기에 아사세왕 · 아소카왕 · 카니슈카왕 같은 국왕의 외호 아래 네 차례의 경전 결집이 있었고, 그 가운데 제4회 결집은 협비구(협존자)가 주재했다고 전한다. 서강은 나아가 근대 학자들이 상좌부 · 대중부의 분열에서 대승의 발생을 찾는 견해가 있음을 소개하면서도, 대성인이 本文에서 밝히신 대로 소승과 대승은 해탈견고 · 선정견고의 「때」를 따라 넓혀진 것이라고 본다.
해탈견고 — 소승을 앞세운 것이 그릇이 아닌 까닭
정법 처음 오백 년이 소승의 시대였다는 것은 불법이 쇠퇴했다는 뜻이 아니다. 「중생신심어서」는 정법 천 년을 둘로 나누어 「앞의 오백 년 동안은 소승경이 넓혀졌고, 넓힌 사람들은 가섭 · 아난 등이며, 뒤의 오백 년은 마명 · 용수 · 무착 · 천친 등이 권대승경을 홍통하셨다」고 하신 뒤, 그 뒤에 나온 논사들은 조금은 불설과 비슷하나 많은 부분이 그릇되었지만 「あやまりなくして而もたらざるは迦葉・阿難・馬鳴・竜樹・無著・天親等なり」(1591쪽)라고 판정하신다. 그릇됨은 없으나 모자란 사람들, 이것이 정법의 성인들에 대한 대성인의 평가다.
「관심의 본존초」의 사의(四依)에 관한 말씀도 같은 구도를 보인다.
四依に四類有り、小乗の四依は多分は正法の前の五百年に出現す、大乗の四依は多分は正法の後の五百年に出現す
사의에 네 부류가 있느니라. 소승의 사의는 대부분 정법 앞 오백 년에 출현하고, 대승의 사의는 대부분 정법 뒤 오백 년에 출현하느니라.
이 문장은 이어서 적문의 사의는 상법 천 년과 말법의 처음 일부에, 본문의 사의인 지용천계는 말법의 처음에 반드시 출현한다고 말씀하신다. 곧 정법 처음 오백 년의 가섭 · 아난은 그 시대를 맡은 「소승의 사의」로서 소임을 다한 사람들이다. 때에 맞는 법을 넓혔으므로 그들의 홍교는 바른 것이었고, 때가 아니었으므로 법화경을 넓히지 않은 것은 허물이 아니다. 이 논리는 그대로 말법으로 이어진다. 때에 맞는 법을 넓히는 것이 바른 홍교라면, 말법의 처음에는 그때에 맞는 법, 곧 앞의 누구도 넓히지 않은 법이 넓혀져야 한다.
정법 · 상법의 성인들이 법화경의 극리를 알면서도 넓히지 않은 것은 「내감냉연 외적시의」이며, 그 까닭은 기 · 시 · 부촉에 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그 끝에 말법의 처음 지용보살이 출현하여 삼대비법을 넓힌다고 본다.
제7장은 짧지만 이 편 전체의 틀을 세운다. 정법 처음 오백 년의 가섭 · 아난은 소승을, 다음 장의 마명 · 용수는 권대승을, 그 뒤 천태와 전교는 법화경 적문과 원돈의 계를 넓힌다. 각 시대는 각자의 소임을 다했지만, 「이 뜻」, 곧 말법에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할 법화경의 간심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대성인은 이 사실을 시대마다 하나씩 확인해 가심으로써, 그것이 말법의 처음에 처음으로 넓혀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독자를 이끄신다.
본문
正法の後六百年・已後一千年が前・其の中間に馬鳴菩薩・毘羅尊者・竜樹菩薩・提婆菩薩・羅睺尊者・僧佉難提・僧伽耶奢・鳩摩羅駄・闍夜那・盤陀・摩奴羅・鶴勒夜那・師子等の十余人の人人始には外道の家に入り次には小乗経をきわめ後には諸大乗経をもて諸小乗経をさんざんに破し失ひ給いき 此等の大士等は諸大乗経をもつて諸小乗経をば破せさせ給いしかども諸大乗経と法華経の勝劣をば分明にかかせ給はず、設い勝劣をすこしかかせ給いたるやうなれども本迹の十妙・二乗作仏・久遠実成・已今当の妙・百界千如・一念三千の肝要の法門は分明ならず、 但或は指をもつて月をさすがごとくし或は文にあたりてひとはし計りかかせ給いて化導の始終・師弟の遠近・得道の有無はすべて一分もみへず、此等は正法の後の五百年・大集経の禅定堅固の時にあたれり、
정법(正法) 뒤 육백 년 이후, 천 년이 되기 전, 그 중간에 마명보살(馬鳴菩薩) · 비라존자(毘羅尊者) · 용수보살(竜樹菩薩) · 제바보살(提婆菩薩) · 라후존자(羅睺尊者) · 승가난제(僧佉難提) · 승가야사(僧伽耶奢) · 구마라타(鳩摩羅駄) · 사야나(闍夜那) · 반타(盤陀) · 마노라(摩奴羅) · 학륵야나(鶴勒夜那) · 사자(師子) 등 십여 인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외도(外道)의 집에 들고, 다음에는 소승경을 궁구하고, 뒤에는 여러 대승경으로써 여러 소승경을 남김없이 깨뜨려 없애셨느니라. 이 대사(大士)들은 여러 대승경으로써 여러 소승경을 깨뜨리기는 하셨으나, 여러 대승경과 법화경의 승렬(勝劣)은 분명하게 쓰지 아니하셨느니라. 설령 승렬을 조금 쓰신 듯하여도, 본적(本迹)의 십묘(十妙) · 이승작불(二乗作仏) · 구원실성(久遠実成) · 이금당(已今当)의 묘(妙) · 백계천여(百界千如) ·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간요(肝要)의 법문은 분명하지 아니하니라. 다만 혹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듯 하고, 혹은 글에 닿아 한 끝만을 쓰셨을 뿐, 화도(化導)의 시종(始終) · 사제(師弟)의 원근(遠近) · 득도(得道)의 유무(有無)는 모두 조금도 보이지 아니하느니라. 이들은 정법 뒤 오백 년, 대집경의 선정견고(禅定堅固)의 때에 해당하느니라.
어구 풀이
- 馬鳴菩薩마명보살
- 아슈바고샤. 2~3세기 무렵 인도의 불교 사상가이자 시인으로, 부법장의 열한째(열둘째라고도 한다). 본래 바라문의 학자로서 불교를 비난하며 「지면 혀를 잘라 사죄하겠다」고 자부했으나, 부법장 열째 부나사에게 논파되어 불교에 귀의했다. 중인도 화씨성에서 교화하던 중 북인도의 카니슈카왕이 쳐들어와 배상금을 요구하자, 화씨왕은 마명과 부처님의 발우와 자심계(慈心鷄) 한 마리를 각각 삼억으로 쳐서 바쳤고, 이로써 마명은 북인도로 가 왕의 보호 아래 법을 크게 넓혔다고 전한다. 석존의 일생을 노래한 『불소행찬』 등이 그의 저술로 전한다.
- 毘羅尊者비라존자
- 카피마라. 가비마라라고도 한다. 부법장의 열두째. 본래 외도로서 삼천 제자를 거느리고 신통으로 마명을 해치려다 오히려 논파되어 제자가 되었다. 남인도 · 서인도를 교화하고 법을 용수에게 전했다. 『무아론』 백 게를 지어 외도를 깨뜨린 모습이 금강석이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것 같았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 竜樹菩薩용수보살
- 나가르주나. 150~250년 무렵 남인도에 출현해 대승을 크게 넓힌 대논사. 부법장의 열셋째(열넷째라고도). 신역 경전에서는 용맹(竜猛)이라 번역한다. 처음 소승을 배웠으나 히말라야 지방에서 한 늙은 비구에게 대승경전을 받은 뒤 대승의 선양에 힘썼다. 『중론』 등에서 공의 사상으로 실재론을 비판하여 뒷날 불교 · 인도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팔종의 조사」로 일컬어진다. 다만 같은 이름의 여러 인물의 전승이 섞여 전한다는 지적도 있다.
- 提婆菩薩제바보살
- 아리야데바. 3세기 무렵 남인도 사람으로 용수의 제자. 성제바 · 가나제바라고도 한다. 부법장의 열넷째. 주저 『백론』은 삼론종의 근거가 되었다.
- 羅睺尊者라후존자
- 라훌라바드라. 부법장의 열다섯째. 석존의 십대 제자인 라후라와는 다른 사람이다. 제바보살을 스승으로 삼아 여러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승가난제에게 법을 전했다.
- 僧佉難提・僧伽耶奢・鳩摩羅駄승가난제 · 승가야사 · 구마라타
- 부법장의 열여섯째 · 열일곱째 · 열여덟째. 승가난제는 사위성 보장엄왕의 아들로 라후존자에게서 법을 받았고, 승가야사는 마갈타국 사람으로 지혜와 변설이 뛰어났으며, 구마라타(동수)는 3세기 말 북인도 탁샤실라 사람으로 학도에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고 전한다.
- 闍夜那・盤陀・摩奴羅・鶴勒夜那사야나 · 반타 · 마노라 · 학륵야나
- 부법장의 열아홉째부터 스물두째. 사야나는 처음 외도를 배우고 소승을 궁구한 뒤 대승으로 소승을 깨뜨렸다고 하며, 반타(바수반다)는 『구사론』을 지은 세친과 같은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마노라는 나제국의 왕자로 남인도를 중심으로 외도를 논파했고, 학륵야나는 월지국 바라문 출신으로 중인도에서 홍교한 뒤 사자존자에게 법을 전했다.
- 師子사자존자
- 아리야심하. 부법장의 마지막 전등자로 스물셋째(스물넷째라는 설도 있다). 계빈국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으나, 삿된 견해에 빠진 국왕 미라굴(『마하지관』에서는 단미라왕)이 탑사를 부수고 승려를 죽인 끝에 칼로 존자의 목을 베었다. 그때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흰 젖만 솟았다고 하며, 이것은 존자가 백법(白法)을 지녔음과 성불을 나타낸다고 한다. 『경덕전등록』은 왕의 오른손이 땅에 떨어지고 이레 안에 왕도 죽었다고 전한다.
- 本迹の十妙본적의 십묘
- 천태대사가 『법화현의』에서 「묘법연화경」의 「묘」를 적문 · 본문 각각 열 가지로 논한 것. 적문의 십묘는 경묘 · 지묘 · 행묘 · 위묘 · 삼법묘 · 감응묘 · 신통묘 · 설법묘 · 권속묘 · 이익묘, 본문의 십묘는 본인묘 · 본과묘 · 본국토묘 · 본감응묘 · 본신통묘 · 본설법묘 · 본권속묘 · 본열반묘 · 본수명묘 · 본이익묘다.
- 二乗作仏・久遠実成이승작불 · 구원실성
- 이승작불은 성불할 수 없다고 했던 성문 · 연각이 법화경 적문에서 수기를 받아 성불하는 것. 구원실성은 석존이 금생에 처음 성불한 것이 아니라 오백진점겁이라는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했다는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법문. 법화경이 다른 경보다 뛰어난 두 가지 큰 법문으로 꼽힌다.
- 已今当の妙이금당의 묘
- 법사품의 「이미 설하고, 지금 설하고, 앞으로 설할 것이니, 그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는 경문. 무량의경 이전의 이전설(已說), 무량의경의 금설(今說), 열반경의 당설(當說)을 모두 넘어선다는 뜻에서 법화경이 최제일임을 보인다.
- 百界千如・一念三千백계천여 · 일념삼천
- 십계가 서로 갖추어 백계, 그 하나하나에 십여시를 갖추어 천여가 된다. 여기에 삼세간을 곱하면 삼천이 되어, 범부의 한 생각에 삼천의 제법이 갖추어진다는 일념삼천이 된다. 백계천여는 적문을, 일념삼천은 본문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 化導の始終・師弟の遠近화도의 시종 · 사제의 원근
- 천태대사가 『법화현의』에 세운 세 가지 교상(근성의 융 · 부융, 화도의 시 · 종 · 부시종, 사제의 원 · 근 · 불원근) 가운데 둘째와 셋째. 화도의 시종은 화성유품에 의해 삼천진점겁 이래 부처와 중생의 인연과 종 · 숙 · 탈의 삼익을 밝힌 것으로 권실상대에 해당하고, 사제의 원근은 수량품에 의해 오백진점겁 이래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밝힌 것으로 본적상대에 해당한다.
- 禅定堅固선정견고
- 대집경 오오백세의 둘째. 정법 뒤 오백 년 동안 대승을 닦아 깊이 삼매에 들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사유하는 선정의 수행이 굳건한 때.
선정견고의 오백 년과 열세 논사
이 장은 대집경의 둘째 오백 년, 선정견고의 시대를 밝힌다. 本文은 「정법 뒤 육백 년 이후, 천 년이 되기 전」이라는 시간의 틀 안에 마명에서 사자존자에 이르는 열세 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늘어놓으신다. 제7장에서 본 부법장의 앞 열 사람이 소승을 앞세웠던 데 비해, 이 열세 사람은 대승을 앞세운 이들이다. 서강은 이 시대를 「중생이 대승을 닦아 깊이 삼매에 들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사유의 행을 하던 때」라고 풀이하고, 부법장 열한째 마명부터 스물넷째 사자존자까지가 대승을 넓혔으며 그 가운데 특히 소승을 깨뜨리고 대승을 선양한 논사로 마명 · 용수 · 무착 · 천친을 든다.
열세 사람 하나하나의 행적은 이렇게 전한다. 마명은 본래 불교를 비난하던 바라문 학자였다가 부나사에게 논파되어 귀의했고, 비라존자는 신통으로 마명을 해치려다 오히려 제자가 되었으며, 용수는 처음 소승을 배우다가 한 늙은 비구에게서 대승경전을 받고 대승으로 돌아섰다. 사야나는 「처음 외도를 배우고, 다음에 소승을 궁구하고, 뒤에 대승으로 소승을 깨뜨렸다」고 전한다. 本文의 「처음에는 외도의 집에 들고, 다음에는 소승경을 궁구하고, 뒤에는 여러 대승경으로써 여러 소승경을 깨뜨렸다」는 말씀은 바로 이 논사들의 공통된 이력을 요약한 것이다. 외도에서 소승으로, 소승에서 대승으로, 그들의 생애 자체가 가르침이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서강은 이 시대의 대표적 저술로, 마명이 불멸 600년 무렵 『대승기신론』을 지었고, 불멸 700년 무렵의 용수가 『대지도론』 100권 · 『중론』 4권 · 『십이문론』 1권 등을, 그 제자 제바가 『백론』 2권을 지었으며, 불멸 900년 무렵의 무착 · 천친 형제 가운데 무착은 『섭대승론』 3권 · 『유가사지론』 100권을, 천친은 「천 부의 논사」로서 소승 오백 부 · 대승 오백 부를 지어 대승을 크게 선양했다고 정리한다. 本文의 열세 사람에는 무착 · 천친의 이름이 없지만, 제7장과 제15장에서 대성인이 용수와 나란히 천친을 드신 것을 보면, 정법 뒤 오백 년의 대승 홍통은 이 계보 바깥의 대논사들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대소상대에 그친 까닭 — 소대에 따라 법문이 다르다
이 논사들은 대승으로 소승을 철저히 깨뜨렸다. 그러나 「여러 대승경과 법화경의 승렬은 분명하게 쓰지 않았다」. 풀어 말하면, 그들은 대소상대(大小相対)를 세웠을 뿐 권실상대(権実相対)는 세우지 않았다.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판단이었다. 이 시기의 논사들은 내외상대 · 대소상대를 세워 외도를 깨뜨리고 소승경을 깨뜨리며 권대승경을 넓혔다. 권대승을 넓혀야 할 시대에 권실상대나 본적상대를 세울 필요는 없고, 오히려 필요 없는 논의를 일으키면 불법 홍통의 방해가 된다. 이를 오늘의 절복에 비추어 보면, 불교 밖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을 깨우칠 때에는 권실상대나 본적상대가 필요 없고, 권실상대의 단계에 있는 염불자를 깨우칠 때에는 본적상대나 종탈상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설명은 오히려 상대가 법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된다. 불법에서는 상대하는 바(所對)에 따라 설하는 법문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 원리는 제7장의 「기가 없었다 · 시가 없었다」를 구체적으로 풀어 준다. 시대가 아직 소승을 넘어서는 일을 과제로 삼고 있을 때, 그 너머의 권실 · 본적을 말하는 것은 시에 맞지 않는다. 대성인이 이 대사들을 비판하지 않고 다만 「분명하지 않다」 「한 끝만 썼다」고만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내심에 지닌 일념삼천 —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다
그렇다고 이 대사들이 법화경의 실의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대보살들은 권대승을 넓히면서도 내심에는 법화경의 실의인 일념삼천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 증거가 제7장에서도 본 「개목초」의 「용수 · 천친은 알면서도 아직 건져 내지 않았다」(189쪽)이다.
本文의 「혹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듯 하고, 혹은 글에 닿아 한 끝만을 썼다」는 표현은 이 미묘한 자리를 정확히 그린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지만 손가락이 곧 달은 아니다. 그들은 법화경의 깊은 뜻을 가리키는 말을 남겼으나 그 뜻 자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한 끝(ひとはし)」만 썼다는 것은 「중생신심어서」의 「법화경을 한 귀퉁이만 쓴 논사도 있고, 전혀 말을 꺼내지 않은 사람도 있다」(1591쪽)와 같은 말이다.
네 가지 상대와 본적의 간요 법문
「처음에는 외도의 집에 들고」 이하의 本文에는 내외 · 대소 · 권실 · 본적의 네 가지 상대가 차례로 담겨 있다. 외도에서 소승으로 나아간 것이 내외상대, 대승으로 소승을 깨뜨린 것이 대소상대, 「여러 대승경과 법화경의 승렬」이 권실상대, 그리고 「본적의 십묘」 이하가 본적상대다. 니치렌 불법이 세우는 오중상대(내외 · 대소 · 권실 · 본적 · 종탈) 가운데 네 단계가 이 짧은 本文 안에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 내외상대처음에는 외도의 집에 들고「始には外道の家に入り」다음에는 소승경을 궁구함「次には小乗経をきわめ」
- 대소상대뒤에는 여러 대승경으로 여러 소승경을 깨뜨림「後には諸大乗経をもて諸小乗経をさんざんに破し失ひ給いき」정법의 논사들이 여기까지 세웠다
- 권실상대여러 대승경과 법화경의 승렬은 분명히 쓰지 않음「諸大乗経と法華経の勝劣をば分明にかかせ給はず」이승작불 · 백계천여 · 화도의 시종
- 본적상대분명하지 않음구원실성 · 일념삼천 · 사제의 원근본적을 함께 나타내는 것본적의 십묘 · 이금당의 묘
本文에 나열된 간요의 법문들이 각각 본적을 어떻게 나타내는지도 하나하나 짚어 보자. 「본적의 십묘」는 한 구절로 본문과 적문을 함께 나타낸다. 「이승작불」은 적문, 「구원실성」은 본문이니 두 구절로 본적을 나타낸다. 「이금당의 묘」는 다시 한 구절로 본적을 나타낸다. 보통은 법사품의 「이미 설하고, 지금 설하고, 앞으로 설할 것이니, 그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에 따라 법화경 전체를 이금당 · 최위난신난해로 보지만, 본문과 적문을 상대할 때에는 적문이 쉽게 믿고 쉽게 알 수 있는 쪽, 본문이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쪽이 된다. 「관심의 본존초」의 다음 말씀이 이 뜻이다.
迹門並びに前四味・無量義経・涅槃経等の三説は悉く随他意の易信易解・本門は三説の外の難信難解・随自意なり
적문과 앞의 사미(四味) · 무량의경 · 열반경 등의 삼설은 모두 수타의(随他意)의 이신이해(易信易解)이고, 본문은 삼설 밖의 난신난해(難信難解) · 수자의(随自意)이니라.
마지막으로 「백계천여」는 적문을, 「일념삼천」은 본문을 나타낸다. 「관심의 본존초」의 적문 삼단 · 본문 삼단에 이 뜻이 분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문도 너그럽게 보아 「이(理)의 일념삼천」이라 이름한다. 정법의 논사들이 이 법문들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대소상대에서 멈추어 권실 · 본적의 두 단계를 공공연히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화도의 시종 · 사제의 원근 · 득도의 유무
本文은 끝으로 「화도의 시종 · 사제의 원근 · 득도의 유무는 모두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신다. 앞의 둘은 천태대사가 『법화현의』에서 법화경이 다른 경보다 뛰어난 까닭으로 세운 세 가지 교상의 둘째와 셋째다. 『법화현의』는 「교상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근성의 융 · 부융의 상, 둘째는 화도의 시종 · 부시종의 상, 셋째는 사제의 원근 · 불원근의 상」이라고 한다.
첫째 「근성의 융」은 방편품 · 비유품에 의해 세운 것으로, 법화경에서는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을 열어 일승의 기에 녹여 합치므로 「융」이고, 이전의 권경은 삼승이 각각 따로여서 「부융」이다. 둘째 「화도의 시종」은 화성유품에 의해 세운 것으로, 법화경은 삼천진점겁 이래 부처와 중생의 인연을 설하고 종(種) · 숙(熟) · 탈(脫)의 삼익을 밝히므로 「시종」이고, 권경은 하종도 득탈도 밝히지 않으므로 「부시종」이다. 이 둘은 권실상대다. 셋째 「사제의 원근」은 수량품에 의해 세운 것으로, 본문은 오백진점겁의 구원실성을 드러내어 그 이래 중생을 교화해 왔음을 밝히므로 「원근」이고, 적문의 석존은 금생에 처음 성불한 부처(시성정각)로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도 이 세상의 결연에 그치므로 「불원근」이다. 이것은 본적상대다.
本文이 근성의 융을 빼고 화도의 시종 · 사제의 원근만 드신 것은, 앞의 「본적의 십묘 · 이승작불 · 구원실성」과 짝을 맞추어 권실과 본적의 두 상대를 드러내시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득도의 유무」를 덧붙이신 것은 「법화경의 즉신성불, 이전 경의 무득도」라는 결정적 차이를 가리킨다. 정법의 논사들은 이 차이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대승으로 소승을 깨뜨렸지만, 대승 안에서 무엇이 성불의 법이고 무엇이 아닌지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사자존자의 최후와 정법의 끝
열세 사람의 마지막은 사자존자다. 그 최후는 이렇게 전한다. 사자존자는 계빈국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으나, 국왕 미라굴은 삿된 견해가 강하여 믿지 않고 탑사를 부수고 승려들을 죽인 끝에 칼로 존자의 목을 베었다. 그때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흰 젖만 솟았다. 『마하지관』 권1은 이 왕을 단미라왕이라 부르고, 『경덕전등록』 권2는 존자를 벤 뒤 왕의 오른손이 땅에 떨어지고 이레 안에 왕도 죽었다고 전한다. 제14장의 어구 풀이는 또 다른 전승으로, 그 나라의 외도가 존자를 시기하여 불제자로 변장해 왕궁에 들어가 화를 일으키고 달아났기 때문에 왕이 분노했다고 전한다.
부법장의 법맥은 이렇게 한 사람의 순교로 끊긴다. 정법 천 년의 끝을 알리는 이 사건은 제14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대성인은 「단미라왕은 사자존자의 목을 베자 오른손이 칼과 함께 떨어졌다」고 하시며, 법을 넓히는 사람을 해치는 자가 받는 현벌의 예로 이를 드신다. 정법의 마지막 전등자가 흘린 흰 젖은, 말법의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을 미리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부법장의 사람 수는 『부법장인연전』의 헤아림에 따라 스물셋 또는 스물넷으로 전하며, 그에 따라 마명 · 용수 · 사자존자의 순번도 하나씩 달라진다. 그래서 「열한째(열둘째라고도)」 「열셋째(열넷째라고도)」처럼 두 셈법을 함께 적기도 한다.
본문
正法一千年の後は月氏に仏法充満せしかども或は小をもて大を破し或は権経をもつて実経を隠没し仏法さまざまに乱れしかば得道の人やふやくすくなく仏法につけて悪道に堕る者かずをしらず、 正法一千年の後・像法に入つて一十五年と申せしに仏法東に流れて漢土に入りにき、像法の前五百年の内・始の一百余年が間は漢土の道士と月氏の仏法と諍論していまだ事さだまらず設い定まりたりしかども仏法を信ずる人の心いまだふかからず、 而るに仏法の中に大小・権実・顕密をわかつならば聖教一同ならざる故・疑をこりてかへりて外典とともなう者もありぬべし、これらのをそれ・あるかのゆへに摩騰・竺蘭は自は知つて而も大小を分けず権実をいはずしてやみぬ、
정법 일천 년 뒤에는 월지(月氏)에 불법이 가득하였으나, 혹은 소승으로써 대승을 깨뜨리고 혹은 권경으로써 실경을 숨겨 없애어, 불법이 갖가지로 어지러워졌으므로 득도하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불법으로 말미암아 악도에 떨어지는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었느니라. 정법 일천 년 뒤, 상법(像法)에 들어 십오 년이 되었을 때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 한토(漢土)에 들어갔느니라. 상법 앞 오백 년 가운데 처음 백여 년 동안은 한토의 도사(道士)와 월지의 불법이 다투어 아직 일이 결정되지 아니하였고, 설령 결정되었다 하여도 불법을 믿는 사람의 마음은 아직 깊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불법 가운데 대소 · 권실 · 현밀(顕密)을 가른다면, 성교(聖教)가 하나같지 않은 까닭에 의심을 일으켜 도리어 외전(外典)을 따르는 자도 있었을 것이니라. 이러한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마등(摩騰) · 축란(竺蘭)은 스스로는 알면서도 대소를 가르지 아니하고 권실을 말하지 아니한 채 그쳤느니라.
其の後・魏・晋・宋・斉・梁の五代が間・仏法の内に大小・権実・顕密をあらそひし程にいづれこそ道理ともきこえずして上み一人より下も万民にいたるまで不審すくなからず南三・北七と申して仏法十流にわかれぬ所謂南には三時・四時・五時・北には五時・半満・四宗・五宗・六宗、二宗の大乗・一音等・各各義を立て辺執水火なり、 しかれども大綱は一同なり所謂一代聖教の中には華厳経第一・涅槃経第二・法華経第三なり法華経は阿含・般若・浄名・思益等の経経に対すれば真実なり了義経・正見なりしかりといへども涅槃経に対すれば無常教・不了義経・邪見の経等云云、
그 뒤 위(魏) · 진(晋) · 송(宋) · 제(斉) · 양(梁)의 다섯 대 동안, 불법 안에서 대소 · 권실 · 현밀을 다투었으나 어느 것이 도리인지 분명하지 아니하여,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에 이르기까지 의심이 적지 아니하였느니라. 남삼(南三) · 북칠(北七)이라 하여 불법이 열 갈래로 나뉘었으니, 이른바 남에는 삼시(三時) · 사시(四時) · 오시(五時), 북에는 오시 · 반만(半満) · 사종(四宗) · 오종(五宗) · 육종(六宗) · 이종(二宗)의 대승 · 일음(一音) 등이 각각 뜻을 세워 한쪽에 집착함이 물과 불 같았느니라. 그러나 대강(大綱)은 하나같았으니, 이른바 일대성교 가운데 화엄경이 제일, 열반경이 제이, 법화경이 제삼이니라. 법화경은 아함 · 반야 · 정명(浄名) · 사익(思益) 등의 경들에 비하면 진실이요 요의경(了義経)이요 정견이나, 열반경에 비하면 무상교(無常教) · 불요의경(不了義経) · 사견(邪見)의 경이라 하였느니라.
漢より四百余年の末へ五百年に入つて陳隋二代に智顗と申す小僧一人あり後には天台智者大師と号したてまつる、南北の邪義をやぶりて一代聖教の中には法華経第一・涅槃経第二・華厳経第三なり等云云、此れ像法の前・五百歳・大集経の読誦多聞堅固の時にあひあたれり、
한(漢)으로부터 사백여 년의 끝, 오백 년에 들어 진(陳) · 수(隋) 두 대에 지의(智顗)라 하는 소승(小僧) 한 사람이 있었으니, 뒤에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라 일컬어 받들었느니라. 남북의 그릇된 뜻을 깨뜨리고 일대성교 가운데 법화경이 제일, 열반경이 제이, 화엄경이 제삼이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상법 앞 오백 세, 대집경의 독송다문견고(読誦多聞堅固)의 때에 해당하느니라.
어구 풀이
- 月氏월지
- 본래 중앙아시아의 민족 이름이나, 불전과 어서에서는 인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像法に入つて一十五年상법에 들어 십오 년
- 부처님 멸후 1015년. 이때 불교가 중국에 전래했다고 하며, 후한 명제 영평 10년(67)의 일로 전한다.
- 道士도사
- 중국 도교의 수행자.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도사들과 불교 사이에 우열을 다투는 논쟁이 벌어졌다고 전한다.
- 顕密현밀
- 현교와 밀교. 진언종은 석존이 드러내어 설한 가르침을 현교, 대일여래가 설한 비밀의 가르침을 밀교라 하여 밀교가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제10장의 진언종의 입의에서 다시 나온다.
- 摩騰・竺蘭마등 · 축란
-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둘 다 중인도 사람으로, 후한 명제의 명을 받아 중국에 불전을 가져와 크게 존중받았다. 중국 불교 전래의 첫 전도자로 전한다.
- 魏・晋・宋・斉・梁の五代위 · 진 · 송 · 제 · 양의 오대
- 위(220~265), 서진(265~316) · 동진(317~420), 송(420~479), 제(479~502), 양(502~557)의 중국 왕조. 동진에서 양까지는 모두 화남의 왕조(남조)로, 문학과 불교가 크게 번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꽃피었다.
- 南三・北七남삼북칠
- 중국 남북조 시대(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부터 수가 전국을 통일한 589년까지)에 있었던 열 가지 교판(敎判). 남삼은 강남의 세 가지 견해 — 호구산 급사의 삼시교, 종애의 사시교, 정림사 승유 · 혜차와 도량사 혜관의 오시교. 북칠은 하북의 일곱 가지 견해 — 오시교, 보리유지의 반만이교, 광통(혜광)의 사종교, 오종교, 육종교, 북지 선사의 이종대승, 북지 선사의 일음교.
- 辺執水火변집수화
- 한쪽 견해에 치우쳐 집착하여, 서로의 주장이 물과 불처럼 용납되지 않는 것.
- 浄名・思益정명 · 사익
- 정명은 유마힐(維摩詰)의 한역 이름으로 『유마경』을 가리키고, 사익은 『사익범천소문경』을 가리킨다. 둘 다 방등부의 경전이다.
- 不了義経불요의경
- 뜻을 끝까지 다 밝히지 않은 경. 뜻을 다 밝힌 요의경(了義経)과 대비된다. 남북의 학자들은 법화경이 부처의 상주(常住)를 밝히지 않았다 하여 열반경에 비하면 무상교 · 불요의경이라 했다.
- 智顗지의
- 538~597. 중국 천태종의 개조. 혜문 · 혜사(남악)로부터의 상승 관계로 셋째 조사로 치기도 한다. 천태산에 머물러 천태대사라 불리고, 수의 진왕(뒤의 양제)에게 지자대사의 호를 받았다. 자는 덕안, 성은 진씨. 형주 화용현에서 태어났다. 법화경의 원리에 근거해 일념삼천 · 일심삼관의 법문을 설한 상법 시대의 정사로, 오시팔교의 교판을 세워 남삼북칠의 여러 스승을 깨뜨리고 믿고 따르게 했다. 『법화문구』 · 『법화현의』 · 『마하지관』 각 10권 등이 있다.
- 陳隋二代진수 이대
- 진(557~589)과 수(581~618). 진은 남조의 마지막 왕조로 천태대사는 진의 선제와 후주 숙보의 귀의를 받았다. 수는 남북으로 나뉜 중국을 다시 통일한 왕조로, 문제는 북주의 폐불 뒤 불교 부흥을 꾀했고 천태대사는 문제와 양제의 귀의를 받았다. 같은 시대의 길장(가상)이 삼론의 교학을 대성했다.
- 読誦多聞堅固독송다문견고
- 대집경 오오백세의 셋째. 상법 앞 오백 년 동안 경전을 읽고 외우며 많이 듣는 일이 굳건한 때.
정법 뒤의 인도 — 불법은 가득했으나 어지러웠다
이 장은 상법 처음 오백 년의 홍교를 밝힌다. 그 첫머리에서 대성인은 정법 천 년이 끝난 뒤의 인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신다. 「월지에 불법이 가득했으나, 혹은 소승으로써 대승을 깨뜨리고 혹은 권경으로써 실경을 숨겨 없애어 불법이 갖가지로 어지러워졌다.」 불법이 가득하다는 것과 불법이 어지럽다는 것이 한 문장 안에 함께 있다. 경전과 논서는 넘쳐 났지만, 소승이 대승을 누르고 권경이 실경을 가리는 전도가 일어났다. 그 결과는 「득도하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불법으로 말미암아 악도에 떨어지는 자는 셀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묘사는 뒤에 「관심의 본존초」가 말법의 처음을 두고 「소를 가지고 대를 치고 권을 가지고 실을 깨뜨려 동서가 함께 이것을 잃고 천지가 전도되었다」(253쪽)고 하신 말씀과 닮아 있다. 불법이 성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가르침의 우열이 뒤집히면 불법 자체가 사람을 악도로 이끄는 원인이 된다. 선시초가 줄곧 강조하는 「시를 아는 것」의 중요성은, 이처럼 같은 불법도 때와 순서를 잃으면 독이 된다는 데 있다.
상법 십오 년, 불법이 동쪽으로 흐르다
「상법에 들어 십오 년이 되었을 때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 한토에 들어갔다.」 부처님 멸후 1015년, 후한 명제 때의 일이다. 이 오백 년 동안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고, 많은 명승이 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여행하며, 또 인도에서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와 활발히 번역했다. 그 상당수가 당시 국왕의 후원을 받아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서강은 이 시대를 「독송다문견고」라는 이름 그대로 경전의 번역 · 강설 · 해석이 빈번했던 때라고 풀이하며 그 사람들을 차례로 든다. 파르티아의 태자였던 안세고, 월지국의 지루가참, 강승개, 지겸 등이 번역에 종사했고, 돈황 출신의 축법호는 뛰어난 조력자들과 함께 『정법화경』 등 154부 309권의 경전을 번역했다. 이렇게 성해진 번역 사업은 구마라집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구마라집은 그때까지 오역 · 초역이 많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번역을 많이 남겼고, 그 가운데 주옥같은 명역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묘법연화경』이다. 구마라집 뒤로도 법현 · 불타발타라 · 담무참 · 현장 등이 이어졌고, 불도징 · 도안 · 구마라집 등에 의해 불교 강설도 크게 행해졌다.
- 상법 15년(불멸 1015년) · 후한 명제 영평 10년(67)가섭마등 · 축법란이 불전을 가져옴, 대소 · 권실을 말하지 않음
- 처음 백여 년도사와 불법의 논쟁
- 번역의 시대안세고 · 지루가참 · 강승개 · 지겸축법호(『정법화경』 등 154부 309권)구마라집(『묘법연화경』)법현 · 불타발타라 · 담무참
- 위 · 진 · 송 · 제 · 양(220~557)남삼북칠 열 갈래, 대강은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
- 진 · 수(557~618)독송다문견고천태대사 지의(538~597), 오시팔교, 법화 제일 · 열반 제이 · 화엄 제삼
- 이어서 당다조탑사견고태종 · 현장(법상)고종 · 측천황후 · 법장(화엄)현종 개원 4 · 8년(716 · 720) ·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진언)
마등 · 축란은 왜 대소를 가르지 않았는가
불법이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의 사정을 대성인은 세심하게 그리신다. 처음 백여 년 동안은 중국 고유의 도사들과 인도에서 온 불법 사이에 다툼이 이어져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고, 설령 결판이 났다 해도 불법을 믿는 사람의 마음은 아직 깊지 않았다. 이런 때에 불법 안에서도 대소 · 권실 · 현밀이 다르다고 가르면, 「성교가 하나같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을 일으켜 도리어 불교를 버리고 외전, 곧 도교 · 유교 쪽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처음 불법을 전한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스스로는 알면서도 대소를 가르지 않고 권실을 말하지 않은 채 그쳤다」.
이 대목은 이렇게 풀 수 있다.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간 당시 인도에서는 이미 소승을 깨뜨리고 대승을 세웠으며, 실교인 법화경을 근본으로 한 용수 · 천친 등의 홍교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 중국에 가서 넓힐 때에는 대소 · 권실을 가르지 않았다. 마등 · 축란은 스스로는 알았으나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제7장의 용수 · 천친이 「내심으로는 알았으나 말하지 않았다」고 한 것과 같은 구조가 여기서도 되풀이된다.
여기서 홍교의 방법에 관한 원리를 끌어낼 수 있다. 불법이 처음 전해지는 곳에서는, 비록 말법이라 하더라도 섭수(摂受)를 앞세워 행하는 경우가 있다. 마등 · 축란이 대소상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일은 그 참고가 된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했을 때에도 비슷한 예가 많으니, 감진이 법화경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소승의 계단을 세우고 소승의 수계로 일생을 마친 일이 그 하나다. 이 예는 제11장에서 다시 다룬다. 이처럼 가르침은 받아들이는 땅과 사람과 때의 형편에 따라 드러내는 순서가 달라진다. 이것은 불법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뿌리내릴 수 있는 길을 고르는 일이다.
위 · 진 · 송 · 제 · 양 — 남삼북칠의 열 갈래
불법이 뿌리를 내리자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일어났다. 위 · 진 · 송 · 제 · 양의 다섯 대 동안, 불법 안에서 대소 · 권실 · 현밀을 서로 다투었으나 어느 쪽이 도리인지 분명하지 않았고, 위로 황제부터 아래로 만민까지 의심이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가 남삼북칠, 곧 열 갈래의 교판이다.
열 갈래로 나뉜 까닭은 「교판의 차이」에 있다. 석존 일대의 가르침이 설해진 순서와 내용을 분류하려 하면 거기서 여러 이견이 생긴다. 정리하면 이렇다. 남쪽의 세 파는 모두 돈(頓) · 점(漸) · 부정(不定)의 삼교를 세운다. 돈은 화엄경, 점은 사아함에서 열반경까지, 부정은 승만경 · 금광명경 등이다. 그 가운데 점교를 다시 나누는 방식이 달라서, 삼시교는 유상교(아함 12년) · 무상교(12년 뒤 법화경까지) · 상주교(열반경)를 세우고, 사시교는 무상교와 상주교 사이에 법화경을 넣어 동귀교라 하며, 오시교는 무상교와 동귀교 사이에 정명 · 사익 등을 넣어 억양교라 한다.
북쪽의 일곱 파는 이렇다. 첫째 오시교는 인천교 · 유상교 · 무상교 · 동귀교 · 상주교의 다섯을 세운다. 남쪽의 오시교와 견주면 억양교 자리에 인천교를 둔 셈이다. 둘째 반만이교는 초전법륜에서 12년까지를 반자교, 12년 이후를 만자교로 하여 대승과 소승을 가를 뿐이다. 셋째 사종은 인연종(비담) · 가명종(성실) · 광상종(대품) · 상종(열반 · 화엄 등)이다. 넷째 오종은 사종에 법계종(화엄경)을 더한다. 다섯째 육종은 사종에 진종(법화경)과 원종(대집경)을 더한다. 여섯째 이종대승은 대승을 유상(대품 · 화엄 · 영락 등)과 무상(능가 · 사익 등)으로 나눈다. 일곱째 일음교는 다만 일불승만을 세운다.
- ①호구산 급사삼시교유상교(아함 12년) · 무상교(12년 뒤 법화까지) · 상주교(열반)
- ②종애사시교무상교와 상주교 사이에 법화경을 동귀교로
- ③정림사 승유 · 혜차, 도량사 혜관오시교무상교와 동귀교 사이에 정명 · 사익 등을 억양교로
- ①오시교인천교 · 유상교 · 무상교 · 동귀교 · 상주교
- ②보리유지반만이교12년까지 반자교, 이후 만자교
- ③광통(혜광)사종인연종(비담) · 가명종(성실) · 광상종(대품) · 상종(열반 · 화엄)
- ④오종사종 + 법계종(화엄)
- ⑤육종사종 + 진종(법화) · 원종(대집)
- ⑥북지 선사이종대승유상(대품 · 화엄 · 영락) · 무상(능가 · 사익)
- ⑦북지 선사일음교다만 일불승
이 열 가지 견해가 서로 물과 불처럼 맞섰다는 것이 本文의 「변집수화」다. 남삼북칠 각각의 내용과 천태대사가 이를 깨뜨린 교판 체계 전체는 오시팔교 페이지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여기서는 선시초가 이 열 갈래를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집중한다.
대강은 하나 —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
열 갈래가 서로 다투었지만 대성인은 「대강은 하나같았다」고 꿰뚫으신다. 그 대강이란 「일대성교 가운데 화엄경이 제일, 열반경이 제이, 법화경이 제삼」이라는 서열이다. 남북의 학자들은 법화경이 아함 · 반야 · 정명 · 사익 등에 비하면 진실이고 요의경이며 정견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열반경에 비하면 법화경은 부처의 상주를 밝히지 않은 무상교이고, 뜻을 다 밝히지 않은 불요의경이며, 사견의 경이라고 했다. 나아가 열반보다도 화엄이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이 대강을 꿰뚫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표면의 열 가지 차이에 휘둘리지 않고 그 밑바닥에 공통된 오류 — 법화경을 셋째에 두는 것 — 를 보아야 그것을 한꺼번에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천태대사는 바로 그 대강을 뒤집었다.
진 · 수의 소승 지의 — 천태대사와 독송다문견고
「한으로부터 사백여 년의 끝, 오백 년에 들어 진 · 수 두 대에 지의라 하는 소승 한 사람이 있었다.」 대성인은 천태대사를 굳이 「소승(小僧)」이라 부르신다. 남북의 이름 높은 학장들에 비하면 이름 없는 한 승려가, 그 모든 학설을 깨뜨리고 「법화경 제일 · 열반경 제이 · 화엄경 제삼」을 세웠다. 남북의 서열을 정확히 뒤집은 것이다.
이러한 논쟁 끝에 출현한 천태대사는 이 모든 교판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깨뜨리고, 바르게 오시 · 팔교를 세웠다. 오시는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 · 법화이고, 팔교는 화의의 사교인 돈 · 점 · 비밀 · 부정과 화법의 사교인 장 · 통 · 별 · 원이다. 천태대사는 이로써 「석가불 출세의 본회인 법화경을 광선유포했다」.
천태대사는 진의 선제와 후주 숙보, 그리고 수의 문제와 양제의 귀의를 받았다. 서강은 538년 형주에서 태어난 천태대사가 남악대사에게 사사하여 법화의 오의를 깨닫고, 와관사에 8년 동안 머물며 『대지도론』 등을 강의했으며, 그 뒤 『법화문구』 · 『법화현의』 · 『마하지관』을 강술하여 이(理)의 일념삼천의 법문을 세웠다고 정리한다. 그리하여 독송다문견고의 시대는 수많은 경전 번역과 천태대사의 출현으로 대표된다.
「이것이 상법 앞 오백 세, 대집경의 독송다문견고의 때에 해당한다.」 경을 많이 읽고 많이 듣는 시대에, 그 많은 경 가운데 무엇이 제일인지를 가려낸 사람이 나왔다. 제12장에서 대성인은 이 일을 다시 떠올려, 남북의 여러 스승이 「진의 궁전에서 천태대사에게 꺾여 제자가 된」 일과 일본의 육종이 전교대사에게 귀복한 일을 나란히 놓으신다. 천태대사의 홍통 자체는 선시초 제3편 「용수 · 천태 · 전교의 홍통과 말법의 비법」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진다.
불법이 처음 전해질 때 마등 · 축란이 대소 · 권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는 땅의 형편에 따라 섭수를 앞세우는 홍교의 원리로 읽을 수 있다. 남삼북칠의 혼란을 깨뜨린 천태대사의 오시팔교는 상법 홍통의 정점이다.
본문
像法の後五百歳は唐の始・太宗皇帝の御宇に玄奘三蔵・月支に入つて十九年が間、百三十箇国の寺塔を見聞して多くの論師に値いたてまつりて八万聖教・十二部経の淵底を習いきわめしに其の中に二宗あり所謂法相宗・三論宗なり、 此の二宗の中に法相大乗は遠くは弥勒・無著近くは戒賢論師に伝えて漢土にかへりて太宗皇帝にさづけさせ給う、此の宗の心は仏教は機に随うべし一乗の機のためには三乗方便・一乗真実なり所謂法華経等なり、三乗の機のためには三乗真実・一乗方便・所謂深密経・勝鬘経等此れなり、天台智者等は此の旨を弁えず等云云、
상법 뒤 오백 세는 당(唐)의 처음, 태종(太宗) 황제의 치세에 현장삼장(玄奘三蔵)이 월지에 들어가 십구 년 동안 백삼십 나라의 사탑을 보고 들으며 많은 논사를 만나 뵙고 팔만성교 · 십이부경의 깊은 밑바닥까지 배워 궁구하였는데, 그 가운데 두 종이 있었으니 이른바 법상종(法相宗) · 삼론종(三論宗)이니라. 이 두 종 가운데 법상대승은 멀리는 미륵(弥勒) · 무착(無著), 가까이는 계현논사(戒賢論師)에게서 전해 받아 한토로 돌아와 태종 황제에게 주셨느니라. 이 종의 뜻은, 불교는 기에 따라야 하니, 일승의 기를 위해서는 삼승이 방편이고 일승이 진실이니 이른바 법화경 등이요, 삼승의 기를 위해서는 삼승이 진실이고 일승이 방편이니 이른바 심밀경(深密経) · 승만경(勝鬘経) 등이 이것이니라. 천태지자 등은 이 뜻을 분별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느니라.
而も太宗は賢王なり当時名を一天にひびかすのみならず三皇にもこえ五帝にも勝れたるよし四海にひびき漢土を手ににぎるのみならず高昌・高麗等の一千八百余国をなびかし内外を極めたる王ときこへし賢王の第一の御帰依の僧なり、天台宗の学者の中にも頭をさしいだす人一人もなし、而れば法華経の実義すでに一国に隠没しぬ、 同じき太宗の太子高宗・高宗の継母則天皇后の御宇に法蔵法師といふ者あり法相宗に天台宗のをそわるるところを見て前に天台の御時せめられし華厳経を取出して一代の中には華厳第一・法華第二・涅槃第三と立てけり、
게다가 태종은 현왕이니라. 당시 이름을 온 천하에 울렸을 뿐 아니라 삼황(三皇)보다 넘어서고 오제(五帝)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이 사해에 울렸으며, 한토를 손에 쥐었을 뿐 아니라 고창(高昌) · 고려(高麗) 등 일천팔백여 나라를 복종시켜 안팎을 다 갖춘 왕이라 일컬어진 현왕이 가장 귀의한 승려이니라. 천태종의 학자 가운데에서도 머리를 내미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법화경의 실의는 이미 한 나라에 숨어 없어졌느니라. 같은 태종의 태자 고종(高宗), 고종의 계모 측천황후(則天皇后)의 치세에 법장법사(法蔵法師)라는 자가 있었느니라. 천태종이 법상종에 눌리는 것을 보고, 앞서 천태의 때에 꺾였던 화엄경을 꺼내어 일대 가운데 화엄이 제일, 법화가 제이, 열반이 제삼이라 세웠느니라.
太宗第四代・玄宗皇帝の御宇・開元四年・同八年に西天印度より善無畏三蔵・金剛智三蔵・不空三蔵・大日経・金剛頂経・蘇悉地経を持て渡り真言宗を立つ、此の宗の立義に云く教に二種あり一には釈迦の顕教・所謂華厳・法華等、二には大日の密教・所謂大日経等なり、法華経は顕教の第一なり此の経は大日の密教に対すれば極理は少し同じけれども事相の印契と真言とはたえてみへず三密相応せざれば不了義経等云云、 已上法相・華厳・真言の三宗一同に天台法華宗をやぶれども天台大師程の智人・法華宗の中になかりけるかの間内内はゆはれなき由は存じけれども天台のごとく公場にして論ぜられざりければ上国王大臣・下一切の人民にいたるまで皆仏法に迷いて衆生の得道みなとどまりけり、此等は像法の後の五百年の前二百余年が内なり、
태종의 제4대 현종(玄宗) 황제의 치세, 개원(開元) 4년과 같은 8년에 서천 인도에서 선무외삼장(善無畏三蔵) · 금강지삼장(金剛智三蔵) · 불공삼장(不空三蔵)이 대일경(大日経) · 금강정경(金剛頂経) · 소실지경(蘇悉地経)을 가지고 건너와 진언종(真言宗)을 세웠느니라. 이 종의 입의(立義)에 이르기를, 가르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석가의 현교(顕教)로 이른바 화엄 · 법화 등이요, 둘째는 대일의 밀교(密教)로 이른바 대일경 등이니라. 법화경은 현교의 제일이나, 이 경은 대일의 밀교에 비하면 극리(極理)는 조금 같으나 사상(事相)의 인계(印契)와 진언(真言)은 전혀 보이지 아니하니, 삼밀(三密)이 상응하지 아니하므로 불요의경이라 하였느니라. 이상 법상 · 화엄 · 진언의 삼종이 한결같이 천태법화종을 깨뜨렸으나, 천태대사만 한 지인(智人)이 법화종 안에 없었던 탓인지, 속으로는 근거 없는 말임을 알았으나 천태처럼 공장(公場)에서 논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위로 국왕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모든 인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법에 미혹하여 중생의 득도가 다 그쳤느니라. 이들은 상법 뒤 오백 년 가운데 앞 이백여 년 안의 일이니라.
어구 풀이
- 太宗皇帝태종 황제
- 598~649. 이세민. 당의 제2대 황제. 수 말의 대란 때 아버지 이연과 함께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했고, 고조에게서 제위를 이었다. 방현령 · 두여회 · 위징 등 명신을 써서 「정관의 치」를 이루었으나, 좋은 후계자를 얻지 못해 죽은 뒤 측천무후의 전제와 무주(武周)의 건국을 허락하게 되었다.
- 玄奘현장
- 602~664(600년 설 등도 있다). 당 초기의 승려. 낙주 구씨현 출생, 성은 진씨, 속명은 위. 13세에 출가하여 율 · 성실 · 구사 등을 배우고, 유식을 궁구하려 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떠나 많은 경전을 전하고 번역을 일신했다. 그 뒤의 한역을 신역이라 하여 그 이전의 구역과 구별한다. 태종의 칙명으로 17년에 걸친 여행을 기록한 것이 『대당서역기』다. 제자 기(자은)가 세운 법상종에서 조사로 받든다.
- 法相宗법상종
- 남도 육종의 하나. 『해심밀경』 · 『유가사지론』 · 『성유식론』 등 육경십일론을 의지한다. 현장이 인도에서 유가유식의 학문을 전하고 규기(자은)가 대성했다. 오위백법을 세워 모든 법의 성상을 분별하고, 모든 법은 중생 마음속 근본식인 아뢰야식에 함장된 종자에서 변해 나온 것이라는 유심론을 설한다.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유 · 공 · 중도의 삼시교로 나누어 법상종을 셋째 중도교라 했다. 또 오성각별을 설하여 삼승진실 · 일승방편을 세웠다. 일본 전래는 넷이 있으며, 도쇼가 653년 입당하여 현장에게 배우고 660년 돌아와 원흥사에서 넓힌 것을 첫 전래로 한다.
- 戒賢論師계현논사
- 529~645. 시라바드라. 유식학파의 논사. 동인도 출신으로 나란다사에서 유식 십대 논사의 하나인 호법(다르마팔라)을 스승으로 출가했고, 호법의 뒤를 이어 그 절의 학두가 되었다. 현장을 맞아 유식설을 전했다.
- 弥勒・無著미륵 · 무착
- 법상종은 멀리 미륵보살이 내려와 설한 법을 무착(아상가)이 넓혔다고 전한다. 무착은 천친의 형으로 『섭대승론』 · 『유가사지론』 등이 그의 저술로 전한다.
- 深密経심밀경
- 『해심밀경』. 현장 역, 5권. 모든 사물 · 현상은 마음에 나타난 것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유식설을 체계적으로 설하여, 법상종의 근본 경전이 되었다.
- 高昌고창
- 5~7세기에 중앙아시아 투르판(신장 위구르 동부) 지역을 다스린 왕국의 총칭. 천산산맥 남쪽 기슭에 있다. 지배층은 한족이었으나 이란계 소그드인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문화가 번성했고, 서역 가운데서도 특히 불교가 성했다. 당 태종이 정관 14년(640)에 고창을 쳐서 그 땅에 서주(西州)를 두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했다.
- 高麗고려
- 918년 왕건이 세워 936년 한반도를 통일하고 1392년까지 이어진 고려를 말한다. 대성인 당시 1231년부터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1270년 원의 속국이 되었고, 원의 일본 원정(문영 · 홍안의 역)에서 선도를 맡았다.
- 則天皇后측천황후
- 623~705. 측천무후, 무측천이라고도 한다. 태종 · 고종의 후궁에 들어 655년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고종이 병들자 스스로 정무를 맡고, 고종 사후 친아들 중종 · 예종을 잇달아 세웠다가 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쳤다. 밀고 제도 등 공포 정치를 폈으나, 문벌에 의하지 않는 정치의 길을 열고 학예를 일으키기도 했다.
- 法蔵法師법장법사
- 643~712. 당대의 승려로 중국 화엄종의 셋째 조사. 화엄화상 · 현수대사 · 향상대사라고도 한다. 재속 때 낙양 운화사의 지엄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측천무후의 귀의를 받아 670년 칙명으로 출가했다. 실차난타가 화엄경 80권을 번역하는 것을 돕고, 장안 · 낙양 등지에 화엄사를 세워 화엄종을 유포했다. 『화엄경탐현기』 · 『화엄오교장』 등을 지었다.
- 玄宗皇帝현종 황제
- 685~761. 당의 제6대 황제. 예종의 셋째 아들. 치세 초에는 송경 · 요숭을 써서 민생을 안정시켜 「개원의 치」라 불렸으나, 재위가 길어지며 정치를 게을리하여 내란이 일어났고 만년에는 불우하게 죽었다. 本文의 「태종 제4대」는 태종으로부터 세어 넷째 대의 황제라는 뜻으로 읽힌다.
- 善無畏三蔵선무외삼장
- 637~735. 수바카라심하. 송고승전에 따르면 동인도 오다국의 왕자로 태어나 13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형의 시기를 받아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했다. 나란다사에서 달마국다에게 밀교를 배우고, 개원 4년(716) 중국에 건너와 현종에게 국사로 맞아들여졌다. 『대일경』 · 『소바호동자경』 · 『소실지갈라경』 등을 번역하고 『대일경소』 20권을 편찬하여 중국에 처음 밀교를 전했다. 그는 『대일경소』에서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의 뜻을 몰래 끌어들여 이동사승(理同事勝)의 그릇된 뜻을 세웠다고 풀이된다.
- 金剛智三蔵금강지삼장
- 671~741. 바즈라보디. 인도의 왕족 또는 바라문 출신이라 한다. 열 살에 나란다사에서 출가했고, 31세에 용수의 제자 용지에게 7년 동안 밀교를 배웠다. 개원 8년(720) 낙양에 들어와 현종에게 맞아들여졌고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 등 많은 밀교 경론을 번역했다. 제자에 불공이 있다.
- 不空三蔵불공삼장
- 705~774. 아모가바즈라. 15세에 장안에 들어가 금강지를 따라 출가했다. 741년 금강지가 죽은 뒤 남천축으로 가 사자국(스리랑카)에 이르러 밀장과 경론을 얻고(그곳에서 용지를 만났다고도 전한다) 6년 뒤 다시 당에 돌아왔다. 현종의 귀의를 받았고 『금강정경』 3권 등 많은 밀교 경전을 번역하여 구마라집 · 현장 · 진제와 함께 중국 사대 번역가로 꼽힌다.
- 印契・三密인계 · 삼밀
- 인계는 손가락으로 맺는 여러 모양(인상), 진언은 입으로 외우는 주문. 진언종은 몸으로 인계를 맺고 입으로 진언을 외우며 마음으로 본존을 관하는 신 · 구 · 의의 삼밀이 상응해야 성불한다고 하며, 법화경에는 인계 · 진언이 없으므로 불요의경이라 했다.
- 公場공장
- 국왕 앞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종의 정사를 겨루어 판가름하는 대론의 자리.
다조탑사견고 — 세 황제와 세 종파
이 장은 상법 뒤 오백 년, 대집경의 넷째 오백 년인 다조탑사견고의 시대를 밝힌다. 이 장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에서는 당 태종 때 현장이 법상종을 넓히고, 다음 고종과 측천황후 때 법장이 화엄종을 넓히고, 현종 때에는 선무외삼장이 인도에서 와서 진언종을 넓혔다. 이들은 모두 법화경의 진의를 깨뜨리고 그릇된 뜻을 넓혔으므로 불교 안에서 득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오시팔교를 세우고 법화경을 가장 제일로 세운 천태의 정의도 순식간에 이 그릇된 뜻들에 휩쓸려 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는 것이다.
제9장이 「누구도 법화경을 제일로 세우지 못하던 혼란을 천태가 바로잡은 시대」였다면, 제10장은 「천태가 바로잡은 것이 다시 뒤집힌 시대」다. 서강은 이 시대를 두고, 당대에 들어 현장이 인도에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한 뒤 법상 · 삼론 · 화엄 · 진언이 중국 전역에 퍼지고 많은 사탑이 세워졌으나, 이 상법 시대는 겉모습만 정법 시대와 닮았을 뿐 내용은 불법의 타락이었다고 평한다. 탑과 절이 많이 세워지는 것은 불법이 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득도는 그쳤다. 대집경이 이 시대를 「다조탑사」, 곧 겉모습의 번성으로 이름 지은 것이 의미심장하다.
현장의 구법과 법상종 — 기에 따른다는 주장
첫째는 현장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현장은 정관 3년에 길을 떠나 19년(17년이라는 설도 있다) 동안 130개국의 사탑을 보고 들으며 많은 논사를 만나, 「팔만성교 · 십이부경」이라 불리는 일대 불교의 깊은 밑바닥을 배웠다. 그 가운데 대승의 두 종, 법상종과 삼론종이 있었고, 현장은 그 가운데 법상종을 나란다사의 계현논사에게서 배워 중국에 돌아와 태종에게 전했다.
법상종의 핵심은 「불교는 기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승의 기를 지닌 중생에게는 삼승이 방편이고 일승이 진실이니 법화경이 그것이고, 삼승의 기를 지닌 중생에게는 삼승이 진실이고 일승이 방편이니 『해심밀경』 · 『승만경』이 그것이다. 그러니 「법화경만이 진실한 성불의 경」이라 한 천태는 이 뜻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바탕에는 중생의 본성이 다섯으로 정해져 있어 성문 · 연각으로 정해진 자나 성불할 성품이 없는 자는 끝내 성불하지 못한다는 오성각별(五性各別)의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선시초의 주제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선시초는 처음부터 「불법은 기가 아니라 시에 의한다」고 말해 왔다. 법상종의 「기에 따른다」는 원리는 겉으로는 중생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일부 중생의 성불을 영원히 닫아 버리고 법화경의 일승을 방편으로 끌어내린다. 이 문제는 제15장에서 「기에 따라 법을 설한다는 것은 큰 잘못된 견해」라는 결론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인도 대승의 두 흐름 — 공의 삼론, 유의 법상
本文은 현장이 인도에서 만난 것이 「법상종 · 삼론종」의 두 종이라 하신다. 여기서 인도 대승의 두 계통을 정리해 두자.
하나는 불멸 700년에 나온 용수가 넓힌 대승의 공종(空宗)이다. 중관종으로서 남방에서 제창되었고, 중국에 전해져 삼론종이 되었다. 용수가 공을 설한 대표작이 『중론』 4권 · 『십이문론』 1권이고, 이를 이은 가나제바(제바)의 대표작이 『백론』 2권이다. 다른 하나는 불멸 900년에 나온 무착 · 세친 형제가 대승의 유상(有相)으로서 북인도에서 제창한 유가종이다. 이것이 중국에 전해져 법상종이 되었다. 무착의 대표적 저술로 『섭대승론』 3권 · 『유가사지론』 100권 등이 있다.
대성인은 「쇼미쓰보어서」에서 이 두 종의 핵심을 한마디로 가르셨다.
法相宗は唯心有境・大乗宗・無量の宗ありとも所詮は唯心有境とだにいはば但一宗なり・三論宗は唯心無境・無量の宗ありとも所詮・唯心無境ならば但一宗なり
법상종은 유심유경(唯心有境)의 대승종이니, 한없이 많은 종이 있어도 결국 유심유경이라고만 하면 다만 한 종이니라. 삼론종은 유심무경(唯心無境)이니, 한없이 많은 종이 있어도 결국 유심무경이라면 다만 한 종이니라.
법상은 마음에 비친 대상(境)이 있다고 보고, 삼론은 마음도 대상도 공하다고 본다. 인도에서 시작된 공과 유의 대립은 중국을 거쳐 일본에까지 이어졌다.
태종의 위세와 침묵한 천태의 학자들
현장의 법상종이 단숨에 천태의 정의를 덮어 버린 데에는 그 뒤에 선 황제의 권위가 있었다. 本文은 태종을 이렇게 그리신다. 이름을 온 천하에 울리고, 전설 속 삼황 · 오제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이 사해에 퍼졌으며, 중국을 손에 쥐었을 뿐 아니라 서쪽으로 고창, 동쪽으로 고려에 이르는 일천팔백여 나라를 복종시켜 안팎을 다 갖춘 현왕이었다. 태종은 방현령 · 두여회 · 위징 등의 명신을 써서 「정관의 치」를 이루었다. 현장은 바로 이 현왕이 「가장 귀의한 승려」였다.
그 결과 「천태종의 학자 가운데 머리를 내미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법화경의 실의는 이미 한 나라에 숨어 없어졌다」. 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권력의 무게가 사상의 흐름을 결정한 것이다. 대성인이 굳이 태종의 위세를 길게 묘사하신 것은, 그 위세 앞에서 천태의 학자들이 침묵했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침묵은 곧 정법의 은몰로 이어졌다.
本文이 태종의 위세를 말하며 든 「고려」는 당 태종이 원정한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대성인 당시의 고려 왕조에 대해서는 어구 풀이에서 함께 설명한다.
법장과 화엄종 — 다시 꺼내진 화엄 제일
둘째는 법장이다. 태종의 아들 고종과, 고종의 계모 측천황후의 시대에 법장법사가 나타났다. 그는 천태종이 법상종에 눌리는 것을 보고, 앞서 천태대사 때 꺾였던 화엄경을 다시 꺼내 「화엄 제일 · 법화 제이 · 열반 제삼」을 세웠다. 남삼북칠이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이라 했던 것에 비하면 법화와 열반의 자리를 바꾸었을 뿐, 화엄을 법화 위에 두는 근본은 같다. 법장은 측천무후의 귀의를 받아 칙명으로 출가하고, 실차난타의 80권 화엄경 번역을 도우며 화엄교학을 강설하고, 장안 · 낙양 등에 화엄사를 세웠다.
本文의 「천태종이 법상종에 눌리는 것을 보고」라는 말에는 날카로운 관찰이 담겨 있다. 법장은 천태가 약해진 틈을 타서, 이미 한 번 패한 화엄을 다시 일으켰다. 사상의 우열이 논리로 결판나지 않고 형세에 따라 오르내리는 모습이다.
선무외 · 금강지 · 불공과 진언종
셋째는 진언이다. 태종으로부터 넷째 대인 현종의 치세, 개원 4년(716)과 8년(720)에 서천 인도에서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의 이른바 세 삼장이 『대일경』 · 『금강정경』 · 『소실지경』을 가지고 건너와 진언종을 세웠다. 그 입의는 이렇다. 가르침에는 석가의 현교와 대일의 밀교 두 가지가 있다. 법화경은 현교 가운데에서는 제일이지만, 대일의 밀교에 비하면 「극리는 조금 같으나, 사상의 인계와 진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 · 구 · 의의 삼밀이 상응하지 않아 불요의경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이동사승(理同事勝), 곧 이치는 같으나 사상(事相)에서는 밀교가 뛰어나다는 설이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선무외는 『대일경소』에서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의 뜻을 몰래 끌어들여 이 그릇된 뜻을 세운 것이다. 진언종에 대한 대성인의 본격적인 파척은 선시초 제4편 「정토 · 선 · 진언을 파하다」에서 선무외 · 홍법 · 자각의 순서로 이어지고, 세 대사의 행적과 진언 비판은 본존문답초 제3편 「세 대사의 사적과 불법의 전래」에서도 자세히 다루어진다.
공장에서 논하지 않은 결과 — 득도가 그치다
「이상 법상 · 화엄 · 진언의 삼종이 한결같이 천태법화종을 깨뜨렸다.」 그런데도 법화종 안에는 천태대사만 한 지인이 없었다. 천태종의 사람들은 속으로는 그 주장들이 근거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천태가 남북의 학자들을 진의 궁전에서 꺾었듯이 공장에서 논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위로 국왕 대신부터 아래로 모든 인민까지 불법에 미혹하여 「중생의 득도가 다 그쳤다」.
이 대목은 선시초 전체에 걸친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준다. 정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알면서도 공적인 자리에서 그릇된 것을 그릇되다고 밝히지 않으면, 그 결과는 정법의 은몰과 중생의 미혹이다. 제7장의 용수 · 천친, 제9장의 마등 · 축란이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은 시에 맞는 판단이었지만, 여기서 천태종의 학자들이 침묵한 것은 시와 상관없이 다만 지혜와 용기가 모자란 것이었다. 같은 침묵이라도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제12장에서 대성인은 전교대사조차 진언과의 승렬을 「공장에서 결판 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뒤 일본 전체가 진언이 천태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하신다. 공장 대결의 유무가 한 나라의 불법의 운명을 가른다는 시각이 이 편 전체에 흐르고 있다.
「이들은 상법 뒤 오백 년 가운데 앞 이백여 년 안의 일이다.」 부처님 멸후 1600~1700년 무렵이다. 천태대사가 법화경 제일을 세운 지 고작 백 년 남짓 만에, 그 정의가 세 종파에 의해 덮여 버렸다.
삼론과 법상의 오랜 다툼이 풀린 자리
이 장을 맺으며 선시초의 뒤쪽 한 대목을 끌어와 보자. 제18장(272쪽)에서 대성인은 나라 칠대사의 대덕들이 전교대사에게 올린 귀복장을 인용하시는데, 거기에 「三論法相久年の諍い渙焉として氷の如く釈け」, 곧 「삼론과 법상의 오랜 다툼이 환히 얼음처럼 풀렸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인도에서 대승 공종인 삼론과 대승 유종인 법상 사이에 시작된 다툼이 일본에까지 이어졌다가 전교대사에 의해 비로소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용수의 공과 무착 · 세친의 유, 인도에서 수백 년, 중국에서 다시 수백 년을 이어 온 대립이 법화경의 일승 위에서 비로소 녹아내렸다. 이로써 보더라도 불교는 석존의 본회인 법화경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귀복의 장면은 제12장과 선시초 제3편에서 다시 펼쳐진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상법 뒤 오백 년은 법상 · 화엄 · 진언의 세 종파가 권력의 후원 아래 천태의 정의를 덮어 득도가 그친 시대이며, 공장에서 정사를 밝히지 않은 침묵이 정법 은몰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
像法に入つて四百余年と申しけるに百済国より一切経並びに教主釈尊の木像・僧尼等・日本国にわたる、漢土の梁の末・陳の始にあひあたる、日本には神武天王よりは第三十代・欽明天王の御宇なり、欽明の御子・用明の太子に上宮王子・仏法を弘通し給うのみならず並びに法華経・浄名経・勝鬘経を鎮護国家の法と定めさせ給いぬ、
상법에 들어 사백여 년이 되었을 때, 백제국(百済国)으로부터 일체경과 교주 석존의 목상(木像)과 승니(僧尼) 등이 일본국에 건너왔느니라. 한토의 양(梁) 말, 진(陳) 초에 해당하며, 일본에서는 진무(神武) 천황으로부터 제30대 긴메이(欽明) 천황의 치세이니라. 긴메이 천황의 아들 요메이(用明) 천황의 태자인 상궁왕자(上宮王子)가 불법을 홍통하셨을 뿐 아니라, 아울러 법화경 · 정명경 · 승만경을 진호국가(鎮護国家)의 법으로 정하셨느니라.
其の後・人王第三十七代に孝徳天王の御宇に三論宗・成実宗を観勒僧正・百済国よりわたす、同御代に道昭法師・漢土より法相宗・倶舎宗をわたす、人王第四十四代・元正天王の御宇に天竺より大日経をわたして有りしかども而も弘通せずして漢土へかへる此の僧をば善無畏三蔵という、 人王第四十五代に聖武天皇の御宇に審祥大徳・新羅国より華厳宗をわたして良弁僧正・聖武天王にさづけたてまつりて東大寺の大仏を立てさせ給えり同御代に大唐の鑒真和尚・天台宗と律宗をわたす、其の中に律宗をば弘通し小乗の戒場を東大寺に建立せしかども法華宗の事をば名字をも申し出させ給はずして入滅し了んぬ、
그 뒤 인왕 제37대 고토쿠(孝徳) 천황의 치세에 삼론종(三論宗) · 성실종(成実宗)을 관륵승정(観勒僧正)이 백제국으로부터 건너오게 하였고, 같은 치세에 도쇼법사(道昭法師)가 한토로부터 법상종 · 구사종(倶舎宗)을 건너오게 하였느니라. 인왕 제44대 겐쇼(元正) 천황의 치세에 천축으로부터 대일경을 가지고 건너왔으나 홍통하지 아니하고 한토로 돌아간 승려가 있었으니, 이 승려를 선무외삼장이라 하느니라. 인왕 제45대 쇼무(聖武) 천황의 치세에 심상대덕(審祥大徳)이 신라국으로부터 화엄종을 건너오게 하여 로벤승정(良弁僧正)과 쇼무 천황에게 전해 드려 도다이사(東大寺)의 대불을 세우게 하셨느니라. 같은 치세에 대당의 감진화상(鑒真和尚)이 천태종과 율종(律宗)을 건너오게 하였으나, 그 가운데 율종만을 홍통하여 소승의 계장(戒場)을 도다이사에 건립하였을 뿐, 법화종의 일은 그 이름조차 꺼내지 아니하시고 입멸하고 말았느니라.
어구 풀이
- 百済国백제국
- 한반도 서남부의 고대 왕국. 일본에 불교를 공식으로 전한 나라다. 긴메이 천황 13년(552) 백제의 성명왕이 불상과 경권 등을 바친 것을 공식 전래의 처음으로 든다.
- 欽明天王긴메이 천황
- 일본의 제29대(本文은 진무 천황으로부터 제30대로 셈한다) 천황. 그 치세에 백제로부터 불교가 공식으로 전래되었다.
- 上宮王子상궁왕자
-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우마야도 황자). 요메이 천황의 아들. 스이코 천황의 태자로서 헌법 17조를 제정하고 불법을 두텁게 공경하여, 승만경 · 법화경 · 유마경의 의소(義疏)를 짓고 이 경들을 강하여 진호국가와 문화 향상에 힘썼다.
- 鎮護国家진호국가
- 불법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평안하게 하는 것. 나라 시대 불교의 큰 목적이었다.
- 観勒僧正관륵승정
- 생몰년 미상. 7세기 무렵의 백제 출신 승려. 602년 일본에 와서 원흥사에 머물며 삼론종 · 성실종을 전했다. 나라가 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임명한 승관을 승강(僧綱)이라 하는데, 624년 일본 최초의 승강으로서 승정에 임명되었다.
- 道昭法師도쇼법사
- 629~700. 일본 법상종의 개조. 당에 건너가 현장에게 사사하여 법상의 교학(또는 섭론)을 배웠고, 경론을 가지고 돌아와 원흥사에서 법상종을 넓혔다. 제자에 교키가 있다.
- 善無畏三蔵선무외삼장
- 제10장에서 본 중국 진언종의 개조. 本文은 그가 겐쇼 천황 때 대일경을 가지고 일본에 왔으나 넓히지 않고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 審祥大徳심상대덕
- ?~742(?). 나라 시대의 학승으로 일본 화엄종의 초조로 받든다. 「신라 학생」으로 기록되어 신라에 유학한 일본 승려로 추측된다. 당의 법장에게 화엄교학을 배우고 일본에 와서 대안사에 머물렀다. 740년 로벤의 청으로 금종사(도다이사의 전신)에서 화엄경을 강의하고, 쇼무 천황의 외호를 받아 화엄종을 넓혔다.
- 良弁僧正로벤승정
- 나라 시대의 승려. 심상을 청해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쇼무 천황과 함께 도다이사 대불 건립을 이끌었다.
- 東大寺の大仏도다이사의 대불
- 쇼무 천황의 발원으로 나라 도다이사에 세운 노사나불(비로자나불) 대불. 화엄경의 교주를 본뜬 것이다. 도다이사는 여러 나라의 국분사를 거느린 총국분사였다.
- 鑒真和尚감진화상
- 688~763. 나라 시대의 도래승으로 일본 율종의 조사. 당 양주 사람. 14세에 출가하여 남산율종 도선의 제자 도안에게 보살계를 받고, 장안대사의 손제자 홍경에게 천태와 율을 배웠다. 753년 일본에 와서 쇼무 상황의 귀의를 받고 나라 도다이사 · 시모쓰케 야쿠시사 · 쓰쿠시 간제온사에 소승의 계단을 세웠다. 일본에 오는 도중 눈이 멀었으나 일체경을 교정하고 율본을 간행했다.
- 小乗の戒場소승의 계장
- 소승의 구족계(비구 250계, 비구니 500계)를 주는 계단. 감진이 도다이사 등 세 곳에 세운 계단을 가리킨다.
상법 사백여 년 — 백제에서 온 일체경
이 장은 긴메이 천황 때 일본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고, 이어서 나라의 여섯 종파가 건너온 경과를 서술한다. 「상법에 들어 사백여 년」, 곧 부처님 멸후 1400여 년, 중국에서는 양 말 · 진 초로 바로 천태대사가 활동하던 시대에, 백제로부터 일체경과 석존의 목상과 승니가 일본에 건너왔다.
일본에 불교가 공식으로 전래된 것은 긴메이 천황 13년(552), 백제의 성명왕이 불상과 경권 등을 바친 때로 본다. 굳이 「공식 전래」라고 하는 까닭은,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는 예로부터 왕래가 활발했으므로 민간인이 불상이나 경권의 일부를 가져오고 가르침의 일부가 전해진 일은 그 이전에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게이타이 천황 16년(522)에 남량의 사마달등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와서 야마토의 사카타하라에 초당을 짓고 불상을 모셔 예배했다는 전설이 있다.
사마달등이 온 해를 「게이타이 천황 16년(0512)」으로 적은 자료도 있으나, 게이타이 천황 16년은 서기 522년에 해당한다. 서강은 불교 공전을 「欽明天皇13年(0552)」로 적는다.
일본과 대승의 깊은 인연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대승불교와 인연이 깊고, 특히 법화경이 널리 유포되어 말법의 본불 니치렌 대성인이 삼대비법을 건립하시는 서막이 되었다. 그 근거로 먼저 『어의구전』의 다음 말씀을 든다.
殊には此の八歳の竜女の成仏は帝王持経の先祖たり、人王の始は神武天皇なり神武天皇は地神五代の第五の鵜萱葺不合尊の御子なり此の葺不合尊は豊玉姫の子なり此の豊玉姫は沙竭羅竜王の女なり八歳の竜女の姉なり、然る間先祖法華経の行者なり甚深甚深
특히 이 여덟 살 용녀의 성불은 제왕이 경을 지니는 선조이니라. 인왕의 처음은 진무 천황이니, 진무 천황은 지신 오대의 다섯째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의 아들이요, 이 후키아에즈노미코토는 도요타마히메의 아들이며, 이 도요타마히메는 사갈라용왕의 딸로 여덟 살 용녀의 언니이니라. 그러므로 선조가 법화경의 행자이니, 매우 깊고 깊으니라.
이어서 일본을 대승과 인연 있는 나라, 법화경이 유포할 나라로 가리킨 여러 글을 모아 보자. 미륵보살의 『유가론』에 「동방에 작은 나라가 있으니, 그 가운데에는 오직 대승의 종성만 있다」고 했다. 승조의 「번경기」에는, 구마라집의 스승 수리야소마가 왼손에 법화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구마라집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불일이 서쪽으로 들어 남은 빛이 장차 동쪽에 미치려 한다. 이 경전은 동북에 인연이 있으니 너는 삼가 전하여 넓혀라」라고 주었다고 한다. 준식의 글에는 「처음 서쪽에서 전해짐은 달이 생겨나는 것과 같고, 이제 다시 동쪽에서 돌아감은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전교대사는 법화경이 유포할 땅을 「地を尋ぬれば唐の東・羯の西」, 곧 「땅을 찾으면 당의 동쪽, 말갈의 서쪽」이라 했다. 이 마지막 글은 선시초 제6장에서 대성인이 직접 인용하신 것이기도 하다.
달이 서쪽 하늘에 처음 떠서 동쪽으로 가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을 비춘다. 인도에서 일어난 불법이 동쪽 끝 일본에 이르고, 다시 일본에서 일어난 불법이 서쪽으로 돌아간다는 이 비유는, 대성인이 「간효팔번초」 등에서 말씀하신 불법서환(仏法西還)의 사상과 이어진다. 일본에 불법이 전래된 경과를 서술하는 이 장은, 그 끝에서 말법의 대법이 일어날 땅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숭불과 배불의 다툼, 그리고 쇼토쿠 태자
백제왕이 바친 불교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나라 안은 두 파로 갈라져 다투었다. 소가노 이나메는 예배를 주장했고, 모노노베노 오코시와 나카토미노 가마코는 이에 반대했다. 수십 년에 걸친 다툼 끝에 숭불파가 이기고 배불파는 패했다. 특히 스이코 천황의 태자 우마야도 황자, 곧 쇼토쿠 태자는 헌법 17조를 제정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는 한편 불법을 두텁게 공경하여, 승만경 · 법화경 · 유마경의 의소를 짓고 이 경들을 강하여 진호국가와 문화 향상에 힘썼다. 本文이 「법화경 · 정명경 · 승만경을 진호국가의 법으로 정하셨다」고 하신 것이 이것이다. 서강은 이 무렵부터 조사 · 조불이 성해져 아스카사 · 시텐노사 · 호류사 등이 세워졌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 두자. 쇼토쿠 태자는 법화경을 강했지만 다른 경들을 깨뜨리는 일은 없었다. 이것 역시 시의 그러함이다. 불교가 처음 뿌리내리는 땅에서 경들 사이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제9장의 마등 · 축란과 마찬가지로 아직 때가 아니었다.
여섯 종파의 전래
本文은 이어서 여섯 종파가 건너온 순서를 천황의 대수와 함께 적어 나가신다. 고토쿠 천황 때 백제의 관륵승정이 삼론종과 성실종을, 같은 때 도쇼법사가 당에서 법상종과 구사종을 전했다. 쇼무 천황 때 심상대덕이 신라에서 화엄종을 전하고 로벤승정과 쇼무 천황에게 주어 도다이사 대불을 세우게 했으며, 같은 때 당의 감진화상이 천태종과 율종을 전했다. 이렇게 삼론 · 성실 · 법상 · 구사 · 화엄 · 율의 여섯 종이 나라에 갖추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남도 육종이다.
- 긴메이 천황(本文의 셈으로 제30대 · 상법 400여 년)백제에서 일체경 · 석존 목상 · 승니
- 쇼토쿠 태자법화경 · 정명경 · 승만경을 진호국가의 법으로
- 고토쿠 천황(제37대)관륵승정 — 삼론종 · 성실종(백제)도쇼법사 — 법상종 · 구사종(당)
- 겐쇼 천황(제44대)本文이 전하는 이야기선무외삼장이 대일경을 가져왔으나 넓히지 않고 돌아감
- 쇼무 천황(제45대)심상대덕 — 화엄종(신라) → 로벤승정 · 도다이사 대불감진화상 — 천태종 · 율종(당) → 율종만 넓혀 도다이사에 소승 계단법화종은 이름조차 꺼내지 않음「法華宗の事をば名字をも申し出させ給はずして入滅し了んぬ」
- 남도 육종삼론성실법상구사화엄율
本文의 천황 대수와 배당은 대성인 당시의 전승을 따른 것이다. 역사서의 연대로는 관륵의 도래가 스이코 천황 10년(602), 도쇼의 입당이 고토쿠 천황 백치 4년(653), 심상의 화엄경 강의가 쇼무 천황 덴표 12년(740), 감진의 도래가 덴표쇼호 5년(753)이다. 감진이 왔을 때 쇼무 천황은 이미 양위한 상황(上皇)이었으며, 감진은 그에게 보살계를 주었다고 전한다.
本文은 그 사이에 한 가지 이야기를 끼워 넣으신다. 겐쇼 천황 때 천축에서 대일경을 가지고 왔으나 넓히지 않고 중국으로 돌아간 승려가 있었으니, 그가 선무외삼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무외가 일본에 왔다는 중세 일본의 전승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육종이 갖추어지는 동안 진언의 경전은 이미 일본 땅을 밟았으나 뿌리내리지 않았다. 진언이 일본에서 일어나는 것은 홍법대사 구카이의 때를 기다려야 했다.
감진과 소승의 계단 — 법화를 가지고 와서도 말하지 않다
本文이 가장 무게를 두는 것은 마지막의 감진이다. 감진은 천태종과 율종을 함께 가지고 왔다. 그는 장안대사의 손제자 홍경에게 천태와 율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율종만을 넓혀 도다이사에 소승의 계단을 세웠을 뿐, 「법화종의 일은 그 이름조차 꺼내지 않고」 입멸했다. 이것은 「시가 그렇게 시킨 것」으로, 제9장에서 말한 「불법이 처음 전해지는 곳에서의 섭수」의 예다. 법화경을 품고 와서도 그것을 말하지 않은 감진은, 법화경의 극리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정법의 논사들, 중국에 처음 불법을 전한 마등 · 축란과 같은 줄에 선다.
그런데 감진의 계단을 두고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승 계단의 계장은 삼중의 단으로 되어 있어 대승 보살의 삼취정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다이사의 계단도 대승의 계단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여러 사례를 들어 그것이 소승의 계단임을 밝히셨다. 첫째, 전교대사는 『현계론』에서 「삼거(三車)」와 「제분(除糞)」이라는 말로 도다이사의 계단을 깨뜨렸다. 삼거는 양 · 사슴 · 소의 세 수레로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을 가리키고, 제분은 가업을 잇기 전에 먼저 똥을 치우는 일꾼으로 고용되었다는 신해품의 비유를 가리킨다. 그 밖에도 자각 · 지증, 미이데라의 명존, 그리고 법연의 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것을 소승의 계라고 깨뜨린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한 계단의 형식 문제가 아니다. 다음 장에서 전교대사가 이 소승의 계를 깨뜨리고 히에이산에 원돈의 대승계단을 세우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공적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감진이 세운 소승의 계단은, 전교대사가 넘어서야 할 마지막 벽이었다.
일본은 대승 · 법화경과 깊은 인연이 있는 나라다. 쇼토쿠 태자가 법화경을 강하면서도 다른 경을 깨뜨리지 않고 감진이 천태를 가지고 와서도 소승의 수계로 일생을 마친 것은 모두 「시가 그렇게 시킨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본문
其後・人王第五十代・像法八百年に相当つて桓武天王の御宇に最澄と申す小僧出来せり後には伝教大師と号したてまつる、始には三論・法相・華厳・倶舎・成実・律の六宗並びに禅宗等を行表僧正等に習学せさせ給いし程に我と立て給える国昌寺・後には比叡山と号す、此にして六宗の本経・本論と宗宗の人師の釈とを引き合せて御らむありしかば彼の宗宗の人師の釈・所依の経論に相違せる事多き上僻見多多にして信受せん人皆悪道に堕ちぬべしとかんがへさせ給う 其の上法華経の実義は宗宗の人人・我も得たり我も得たりと自讃ありしかども其の義なし、此れを申すならば喧嘩出来すべしもだして申さずば仏誓にそむきなんとをもひわづらはせ給いしかども終に仏の誡ををそれて桓武皇帝に奏し給いしかば帝・此の事ををどろかせ給いて六宗の碩学に召し合させ給う、彼の学者等・始めは慢幢・山のごとし悪心・毒蛇のやうなりしかども終に王の前にしてせめをとされて六宗・七寺・一同に御弟子となりぬ、
그 뒤 인왕 제50대, 상법 팔백 년에 해당하여 간무(桓武) 천황의 치세에 최징(最澄)이라 하는 소승(小僧)이 나왔으니, 뒤에 전교대사(伝教大師)라 일컬어 받들었느니라. 처음에는 삼론 · 법상 · 화엄 · 구사 · 성실 · 율의 육종과 선종 등을 교효승정(行表僧正) 등에게 배우셨는데, 스스로 세우신 고쇼사(国昌寺) — 뒤에 히에이산(比叡山)이라 이름함 — 에서 육종의 본경 · 본론과 종마다의 인사(人師)의 해석을 맞대어 보셨더니, 그 종들의 인사의 해석이 의지하는 경론과 어긋나는 일이 많을 뿐 아니라 치우친 견해가 많아, 이를 믿고 받는 사람은 모두 악도에 떨어지리라고 생각하셨느니라. 게다가 법화경의 실의는 종마다의 사람들이 「나도 얻었다, 나도 얻었다」고 스스로 자랑하였으나 그 뜻이 없었느니라. 이것을 말하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요, 잠자코 말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서원을 어기리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하셨으나, 마침내 부처님의 훈계를 두려워하여 간무 황제에게 아뢰셨느니라. 황제는 이 일에 놀라시어 육종의 석학들과 맞대어 논하게 하셨느니라. 그 학자들은 처음에는 교만의 깃발이 산과 같고 악심이 독사 같았으나, 마침내 왕 앞에서 꺾이어 육종 · 칠사(七寺)가 한결같이 제자가 되었느니라.
例せば漢土の南北の諸師・陳殿にして天台大師にせめおとされて御弟子となりしがごとし、此れはこれ円定・円慧計りなり其の上天台大師のいまだせめ給はざりし小乗の別受戒をせめをとし六宗の八大徳に梵網経の大乗別受戒をさづけ給うのみならず法華経の円頓の別受戒を叡山に建立せしかば延暦円頓の別受戒は日本第一たるのみならず仏の滅後一千八百余年が間身毒尸那一閻浮提にいまだなかりし霊山の大戒日本国に始まる、されば伝教大師は其の功を論ずれば竜樹天親にもこえ天台・妙楽にも勝れてをはします聖人なり、
비유하면 한토의 남북의 여러 스승이 진(陳)의 궁전에서 천태대사에게 꺾이어 제자가 된 것과 같으니라. 이것은 다만 원정(円定) · 원혜(円慧)뿐이었느니라. 그런데 그 위에 천태대사가 아직 꺾지 아니하셨던 소승의 별수계(別受戒)를 꺾고, 육종의 여덟 대덕에게 범망경(梵網経)의 대승 별수계를 주셨을 뿐 아니라, 법화경의 원돈(円頓)의 별수계를 히에이산(叡山)에 건립하셨으므로, 엔랴쿠(延暦)의 원돈 별수계는 일본 제일일 뿐 아니라, 부처님 멸후 일천팔백여 년 동안 신독(身毒) · 시나(尸那)와 일염부제에 아직 없었던 영산(霊山)의 대계가 일본국에서 시작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전교대사는 그 공을 논하면 용수 · 천친보다도 넘어서고 천태 · 묘락보다도 뛰어나신 성인이니라.
されば日本国の当世の東寺・園城・七大寺・諸国の八宗・浄土・禅宗・律宗等の諸僧等誰人か伝教大師の円戒をそむくべき、かの漢土九国の諸僧等は円定・円慧は天台の弟子ににたれども円頓一同の戒場は漢土になければ戒にをいては弟子とならぬ者もありけん、この日本国は伝教大師の御弟子にあらざる者は外道なり悪人なり、 而れども漢土日本の天台宗と真言の勝劣は大師心中には存知せさせ給いけれども六宗と天台宗とのごとく公場にして勝負なかりけるゆへにや、伝教大師已後には東寺・七寺・園城の諸寺日本一州一同に真言宗は天台宗に勝れたりと上一人より下万人にいたるまでをぼしめしをもえり、しかれば天台法華宗は伝教大師の御時計りにぞありける此の伝教の御時は像法の末大集経の多造塔寺堅固の時なり、いまだ於我法中・闘諍言訟・白法隠没の時にはあたらず。
그러므로 일본국 지금 세상의 동사(東寺) · 온조사(園城) · 칠대사(七大寺)와 여러 나라의 팔종 · 정토 · 선종 · 율종 등의 여러 승려 가운데 누가 전교대사의 원계(円戒)를 등질 수 있겠느냐. 저 한토 아홉 나라의 여러 승려들은 원정 · 원혜에서는 천태의 제자와 같으나, 원돈 한결같은 계장이 한토에는 없으므로 계에 있어서는 제자가 되지 않은 자도 있었을 것이니라. 이 일본국에서는 전교대사의 제자가 아닌 자는 외도요 악인이니라. 그러나 한토와 일본의 천태종과 진언의 승렬은 대사께서 마음속으로는 아셨으나, 육종과 천태종의 경우처럼 공장에서 승부를 가리지 아니하셨기 때문인지, 전교대사 이후에는 동사 · 칠사 · 온조사의 여러 절과 일본 한 나라가 한결같이 진언종이 천태종보다 뛰어나다고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인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고 있느니라. 그러므로 천태법화종은 전교대사의 때에만 있었던 것이니라. 이 전교의 때는 상법의 끝, 대집경의 다조탑사견고(多造塔寺堅固)의 때이니, 아직 「나의 법 가운데에서 투쟁언송하여 백법이 은몰하리라(於我法中・闘諍言訟・白法隠没)」는 때에는 해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어구 풀이
- 桓武天王간무 천황
- 737~806. 제50대 천황. 고닌 천황의 첫째 황자. 율령 정치를 다시 세우기 위해 나가오카쿄 · 헤이안쿄로 천도했다. 전교대사 최징을 중히 여겨 일본 천태종의 성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 最澄최징
- 767~822. 헤이안 초기의 승려로 일본 천태종의 개조. 시호는 전교대사, 예산대사 · 근본대사 · 산가대사라고도 한다. 속성은 미쓰노오비토, 어릴 적 이름은 히로노. 오미국 시가군 출생. 12세에 오미 국분사의 교효를 따라 출가하고, 785년 도다이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히에이산에 올라 경론을 궁구했다. 802년 와케노 히로요 · 마쓰나의 초청으로 다카오산사(뒤의 진고사)에서 천태 삼대부를 강했다. 804년 단기 유학생으로 의진(義真)을 데리고 입당하여 도수 · 행만(천태) · 소연(선) · 순효(밀교) 등에게 배우고 이듬해 돌아와 806년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사가 천황의 호지승이 되어 대승계단 실현에 힘썼고, 사후 칙허를 얻어 대승계단이 세워졌다. 866년 전교대사의 시호를 받았다. 『산가학생식』 · 『법화수구』 · 『현계론』 · 『수호국계장』 등을 지었다.
- 行表僧正교효승정
- 724~797. 나라 말기의 학승. 고후쿠사에서 수계하고 화엄 · 법상 · 율 등을 배웠으며, 뒤에 오미국의 승니를 감독하는 국사(國師)를 지냈다. 최징이 오미 국분사에서 출가할 때의 스승이다.
- 国昌寺고쇼사
- 최징이 출가 · 득도하여 소속했던 절로, 오미 국분사로 본다. 本文에 「뒤에는 히에이산이라 이름한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대성인 당시에는 이것이 최징이 히에이산에 세운 초암, 곧 엔랴쿠사의 전신인 히에이산사라는 전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小乗の別受戒소승의 별수계
- 수계에는 통수와 별수가 있다. 대승 보살계인 섭율의계 · 섭선법계 · 섭중생계의 삼취정계를 한꺼번에 받는 것을 통수, 섭율의계만 받는 것을 별수라 한다. 소승의 별수계는 율장에 정해진 비구의 250계를 받는 것이다.
- 梵網経の大乗別受戒범망경의 대승 별수계
- 『범망경』에 설한 십중금계 · 사십팔경계의 대승 보살계. 전교대사는 이것을 섭율의계로 삼아 소승의 250계를 대신하게 했다.
- 円頓の別受戒원돈의 별수계
- 법화경의 원교의 가르침에 따른 대승계. 전교대사가 히에이산에 세운 계단에서 주는 계로, 법화경 적문의 계이다.
- 身毒尸那신독 · 시나
- 인도와 중국. 신독은 범어 신두(인더스 강 지방)의 음사로, 『사기』 대완열전에 「대하의 동남에 신독국이 있다」고 한 데서 전한(前漢) 이후 중국에서 인도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고, 당대 이후 「천축」, 더 뒤에는 「인도」가 일반화했다. 시나는 범어 치나 스타나의 음사로 진단 · 진단(真旦 · 真丹)이라고도 쓴다. 치나는 진(秦)의 음사이며, 고대 인도인이 중국을 부른 이름이다.
- 叡山예산
- 히에이산 엔랴쿠사. 시가현 오쓰시에 있는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 산문(山門) 또는 북령(北嶺)이라고도 한다. 785년 최징이 산에 들어가 초암을 맺은 데서 비롯하고, 788년 일승지관원(뒤의 근본중당)을 세웠다. 806년 연분도자 두 명이 내려져 천태종이 공인되었다. 최징 사후 7일째인 822년 대승계단 건립의 칙허가 내리고, 이듬해 823년 엔랴쿠사라는 절 이름이 내려져 대승계에 의한 수계가 행해졌다.
- 東寺동사
- 교토 미나미구의 절. 교왕호국사라고도 한다. 796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 진호를 위해 나성문 좌우에 세운 좌대사 · 우대사 가운데 좌대사로, 823년 사가 천황이 구카이(홍법)에게 내려 주어 진언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 園城온조사
- 시가현 오쓰시에 있는 천태사문종의 총본산. 미이데라라고도 한다. 히에이산의 엔친(지증)이 859년 재흥하여 864년 엔랴쿠사의 별원으로 삼았다. 뒤에 엔닌(자각) 문도와 엔친 문도가 대립하여, 993년 엔친 문도 천여 명이 온조사로 옮겨 간 뒤로 산문(엔닌파)과 사문(엔친파)의 다툼이 이어졌다.
- 七大寺칠대사
- 남도(나라)의 일곱 큰 절. 도다이사 · 고후쿠사 · 간고사(원흥사) · 다이안사 · 야쿠시사 · 사이다이사 · 호류사.
- 多造塔寺堅固다조탑사견고
- 대집경 오오백세의 넷째. 상법 뒤 오백 년 동안 탑과 절을 많이 세우는 일이 굳건한 때.
간무 천황과 최징 — 상법 팔백 년의 소승
이 장은 일본에 불교가 넓혀진 경과를 서술하는 가운데, 나라 육종이 건너온 뒤에 전교대사가 출현하여 원돈의 계단을 히에이산에 세운 경과와 의의를 밝힌다.
「인왕 제50대, 상법 팔백 년에 해당하여 간무 천황의 치세에 최징이라 하는 소승이 나왔다.」 부처님 멸후 1800년, 상법 천 년의 끝자락이다. 제9장에서 천태대사를 「지의라 하는 소승」이라 부르셨듯이, 대성인은 여기서도 전교대사를 「최징이라 하는 소승」으로 등장시키신다. 이름 높은 학장들 사이에 홀로 나타난 젊은 승려가 시대의 판도를 바꾼다는 구도가 두 장에 걸쳐 되풀이된다.
최징의 생애는 이렇게 전한다. 12세에 오미 국분사의 교효를 따라 출가하고, 785년 도다이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히에이산에 올라 경론을 궁구했다. 802년 다카오산사에서 천태 삼대부를 강했고, 804년 입당하여 천태 · 선 · 밀교를 배우고 이듬해 돌아와 806년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그 뒤 대승계단의 실현에 힘을 쏟았으나 생전에는 이루지 못하고, 입멸 7일째에 칙허가 내렸다.
말하면 다툼, 침묵하면 불서를 어긴다
本文은 최징이 육종을 깨뜨리기에 이르는 마음의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신다. 그는 처음 교효 등에게서 육종과 선종을 배웠다. 그러다가 스스로 세운 히에이산에서 육종의 본경 · 본론과 각 종의 인사들의 해석을 맞대어 보았더니, 인사들의 해석이 정작 의지하는 경론과 어긋나는 일이 많았고 치우친 견해가 많아, 이를 믿는 사람은 모두 악도에 떨어지리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각 종의 사람들은 「나도 법화경의 실의를 얻었다」고 저마다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그 뜻이 없었다.
여기서 최징은 갈림길에 선다. 「이것을 말하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요, 잠자코 말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서원을 어길 것이다.」 곧 「부처님 멸후에 정법을 홍통한다는 서원」에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고뇌는 「개목초」에서 대성인 자신이 「これを一言も申し出すならば父母・兄弟・師匠に国主の王難必ず来るべし、いはずば・慈悲なきに・にたり」(200쪽), 곧 「이것을 한마디라도 말하면 부모 · 형제 · 스승에게서, 나아가 국주의 왕난이 반드시 닥칠 것이요, 말하지 않으면 자비가 없는 것과 같다」고 깊이 생각하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최징은 「마침내 부처님의 훈계를 두려워하여」 간무 천황에게 아뢰었다. 제10장에서 천태종의 학자들이 「속으로는 알았으나 공장에서 논하지 않아」 정법이 은몰했던 것과 정반대의 길이다.
공장 대결과 육종 칠사의 귀복
천황은 놀라 육종의 석학들과 최징을 맞대어 논하게 했다. 학자들은 「처음에는 교만의 깃발이 산과 같고 악심이 독사 같았으나」, 마침내 왕 앞에서 꺾여 「육종 · 칠사가 한결같이 제자가 되었다」. 대성인은 이것을 「한토의 남북의 여러 스승이 진의 궁전에서 천태대사에게 꺾여 제자가 된 것」과 같다고 하신다. 중국에서 천태대사가 남삼북칠을 깨뜨린 일과 일본에서 전교대사가 남도 육종을 깨뜨린 일이 나란히 놓인다.
이 공장 대결의 구체적 장면은 선시초 제18장(271~272쪽)에서 다시 자세히 그려진다. 연력 21년(802) 정월 다카오산사에서 육종 칠사의 고승 십여 인이 최징과 맞대어 논했으나 한두 마디에 말문이 막혔고, 이어 천황의 물음에 답하여 그들이 올린 귀복장에는 제10장에서 본 「삼론 · 법상의 오랜 다툼이 얼음처럼 풀렸다」는 말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은 선시초 제3편 「용수 · 천태 · 전교의 홍통과 말법의 비법」에서 다룬다.
원정 · 원혜에서 원계로 — 소승 별수계를 꺾다
대성인은 전교대사의 공적이 천태대사를 넘어서는 지점을 정확히 짚으신다. 천태대사가 남북을 깨뜨린 것은 「다만 원정 · 원혜뿐이었다」. 불도 수행의 계 · 정 · 혜 삼학 가운데, 천태는 정(지관의 수행)과 혜(교판과 교리)를 원교로 세웠지만, 계는 여전히 소승의 것을 썼다. 전교대사는 그 위에 「천태대사가 아직 꺾지 않았던 소승의 별수계를 꺾고」, 육종의 여덟 대덕에게 범망경의 대승 별수계를 주었으며, 나아가 법화경의 원돈 별수계를 히에이산에 건립했다.
계의 종류를 정리하면 이렇다. 소승의 계에는 오계 · 팔계 · 십계 · 구족계 등이 있고, 구족계란 비구의 250계와 비구니의 500계를 말한다. 대승의 계에는 범망경에 설한 십중금계 · 사십팔경계 등이 있다. 감진이 도다이사에 세운 계단은 소승의 계로서 「삼사칠증 백사갈마」의 작법을 따른다. 삼사는 계를 주는 계화상 · 갈마아사리 · 교수아사리이고, 칠증은 수계의 자리에서 증언하는 일곱 사람의 증명역이며, 백사갈마는 수계할 때 그 뜻을 한 번 아뢴 뒤 세 번 가부를 물어 결정하는 것(일백삼갈마)이다.
중국의 천태대사는 남삼북칠을 깨뜨려 불교계를 통일했으나 계단 건립을 실현하지 못했으므로, 법화경을 배우고 일념삼천의 관을 행하여 원정 · 원혜의 수행은 하면서도 계만은 소승의 계를 쓰고 소승의 수계를 받았다. 일본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대성인은 「쇼미쓰보어서」에서 이를 이렇게 지적하신다.
宗と申すは戒・定・慧の三学を備へたる物なり、其の中に定・慧はさてをきぬ、戒をもて大・小のばうじ(榜示)をうちわかつものなり、東寺の真言・法相・三論・華厳等は戒壇なきゆへに東大寺に入りて小乗律宗の驢乳・臭糞の戒を持つ、戒を用つて論ぜば此等の宗は小乗の宗なるべし
종이라 하는 것은 계 · 정 · 혜의 삼학을 갖춘 것이니라. 그 가운데 정 · 혜는 잠시 두고, 계로써 대승과 소승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니라. 동사의 진언 · 법상 · 삼론 · 화엄 등은 계단이 없기 때문에 도다이사에 들어가 소승 율종의 나귀 젖 · 썩은 똥 같은 계를 지니니, 계로써 논한다면 이 종들은 소승의 종이니라.
전교대사는 원정 · 원혜를 넓히려면 계에서도 반드시 원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산가학생식』에서 정 · 혜는 보살이면서 계는 성문이라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리고 삼취정계의 첫째인 섭율의계를 소승 성문의 계가 아니라, 바로는 법화경에 의하고 곁으로는 범망경의 십중사십팔경계로 삼았다. 곧 섭율의계는 보살의 행의를 바로잡는 계, 섭선법계는 보살의 자행, 섭중생계는 보살의 화타로 하여, 셋 모두 보살의 대승계가 되었다.
두 계단의 차이는 그 위에 모신 상(像)에서도 드러난다. 도다이사의 계단은 삼중의 단 위에 석가 · 다보 두 부처를 모시고 사방에 사천왕을 두었고, 히에이산의 계단은 단 위에 석가를 모시고 그 협사를 문수 · 미륵 두 보살로 했다. 이에 대해 전교대사는 『산가학생식』에서 「보현경에 의하여 삼사와 증명을 청한다」고 하여, 석가모니불을 보살계의 화상으로, 문수사리보살을 갈마아사리로, 미륵보살을 교수아사리로, 시방의 모든 부처를 증사로, 시방의 모든 보살을 동학의 벗으로 청하고, 눈앞의 한 사람의 전계사를 현전의 스승으로 삼는다고 했다. 여기서 보현경은 법화경의 결경인 『관보현보살행법경』으로, 그 경에도 행자가 보살계를 갖추고자 하면 석가모니불께 「나의 화상이 되어 주소서」, 문수사리께 「지혜로써 청정한 보살의 법을 주소서」, 미륵보살께 「나의 보살법 받음을 허락하소서」, 시방의 부처님께 「나의 증명이 되어 주소서」라고 청하라고 설해져 있다. 소승의 계가 눈앞의 열 사람(삼사칠증)에게 받는 것이라면, 원돈의 계는 부처와 대보살을 스승과 증인으로 모시고 받는 계였다.
- 소승의 계오계 · 팔계 · 십계 · 구족계(비구 250 · 비구니 500)감진이 도다이사 등에 세운 계단, 삼사칠증 · 백사갈마깨지면 다시 쓸 수 없는 질그릇에 비유
- 권대승의 계범망경의 십중금계 · 사십팔경계전교대사가 육종의 여덟 대덕에게 준 대승 별수계이승 · 칠역을 허락하지 않고 불과를 갖추지 않는 역겁수행의 계
- 법화 적문의 계원돈 별수계히에이산 계단(822 칙허)인도 · 중국에 없던 영산의 대계「霊山の大戒日本国に始まる」
- 법화 본문의 계수지즉지계 · 금강보기계한 번 지니면 깨려 해도 깨지지 않는다「此の具足の妙戒は一度持つて後・行者破らんとすれど破れず」본문의 계단은 때를 기다린다「時を待つ可きのみ」
「영산의 대계」 — 전교대사의 공
이렇게 세워진 엔랴쿠의 원돈 별수계를 대성인은 「일본 제일일 뿐 아니라, 부처님 멸후 일천팔백여 년 동안 인도 · 중국과 일염부제에 아직 없었던 영산의 대계」라고 평가하신다. 영산, 곧 석존이 법화경을 설한 영취산의 계가 처음으로 땅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교대사는 그 공을 논하면 용수 · 천친보다도 넘어서고 천태 · 묘락보다도 뛰어나신 성인」이 된다.
이 평가에서 대성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지금 일본의 동사 · 온조사 · 칠대사, 여러 나라의 팔종 · 정토 · 선 · 율의 승려들 가운데 누가 전교대사의 원계를 등질 수 있는가. 중국의 승려들은 원정 · 원혜에서는 천태의 제자라 해도, 중국에는 원돈의 계장이 없었으므로 계에서는 제자가 아닌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모든 승려가 전교대사의 계를 받은 이상, 「전교대사의 제자가 아닌 자는 외도요 악인이다」. 이 날카로운 말은, 전교대사의 계를 받고서 그 스승을 등지고 진언 · 정토 · 선을 따르는 당시 일본 불교계의 모순을 정면으로 겨눈다. 선시초 제4편에서 자각대사가 「본사를 어긴 허물」을 묻는 것도 이 논리의 연장이다.
대소권실의 계, 그 공덕의 차이
같은 계라도 대 · 소, 권 · 실에 따라 그 공덕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십법계명인과초」에 밝혀져 있다. 먼저 대승과 소승의 차이다.
問うて云く二乗所持の不殺生戒と菩薩所持の不殺生戒と差別如何、答えて云く所持の戒の名は同じと雖も持する様並に心念永く異るなり、故に戒の功徳も亦浅深あり
묻기를, 이승이 지니는 불살생계와 보살이 지니는 불살생계는 어떻게 다르냐. 답하기를, 지니는 계의 이름은 같으나 지니는 모양과 마음가짐이 아주 다르니라. 그러므로 계의 공덕에도 얕고 깊음이 있느니라.
이 어서는 이어서, 이승의 불살생계는 다시는 육도에 돌아오지 않으려 하여 남을 교화하는 마음이 없고 부처 · 보살이 되려 하지도 않으며 다만 몸을 재로 만들고 지혜를 없애려(회신멸지) 할 뿐이니, 이 계를 깨지면 다시 쓸 수 없는 질그릇에 비유한다고 하신다. 이에 비해 보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요익유정계를 일으켜 이 계를 지니므로, 때로 근기를 보아 오역 · 십악을 짓는 것처럼 범해도 이 계는 깨지지 않고 도리어 계체가 더욱 온전해진다고 하신다.
다음은 권과 실의 차이다. 같은 어서는 「범망경 등 권대승의 계와 법화경의 계에는 많은 차별이 있느니라」(梵網経等の権大乗の戒と法華経の戒とに多くの差別有り, 437쪽)라 하시고, 범망경 등의 계는 첫째 이승과 칠역의 죄인을 허락하지 않고, 둘째 계의 공덕에 불과(佛果)를 갖추지 않으며, 셋째 역겁수행의 계라는 허물이 있으나, 법화경에서는 이승과 칠역의 죄인도 허락할 뿐 아니라 박지의 범부가 한평생 안에 부처의 지위에 들어 묘각에 이르러 인과의 공덕을 갖춘다고 하신다. 전교대사의 원돈계가 범망경의 대승계를 넘어선 것은 바로 이 차이에 있다.
말법에는 법화 본문의 계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교대사의 히에이산의 계는 법화경 가운데에서도 적문의 이계(理戒)이므로, 말법에는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된다. 말법에 니치렌 대성인이 건립하시는 계는 법화 본문의 대계로서, 「수지즉지계(受持即持戒)」라고도 「금강보기계(金剛宝器戒)」라고도 한다. 이에 관한 어서를 차례로 보자.
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갖추어져 있느니라.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저절로 그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
此の法華経の本門の肝心・妙法蓮華経は三世の諸仏の万行万善の功徳を集めて五字と為せり、此の五字の内に豈万戒の功徳を納めざらんや、但し此の具足の妙戒は一度持つて後・行者破らんとすれど破れず是を金剛宝器戒とや申しけんなんど立つ可し
이 법화경 본문의 간심인 묘법연화경은 삼세 제불의 만행만선의 공덕을 모아 오자로 삼았느니라. 이 오자 안에 어찌 만 가지 계의 공덕을 거두지 않겠느냐. 다만 이 구족한 묘계는 한 번 지닌 뒤에는 행자가 깨뜨리려 해도 깨지지 아니하니, 이것을 금강보기계라 한다고 세워야 하느니라.
그리고 본문의 계단에 대해서는 「삼대비법품승사」의 말씀이 있다.
戒壇とは王法仏法に冥じ仏法王法に合して王臣一同に本門の三秘密の法を持ちて有徳王・覚徳比丘の其の乃往を末法濁悪の未来に移さん時勅宣並に御教書を申し下して霊山浄土に似たらん最勝の地を尋ねて戒壇を建立す可き者か時を待つ可きのみ事の戒法と申すは是なり
계단이란, 왕법이 불법에 명합하고 불법이 왕법에 합하여, 왕과 신하가 한결같이 본문의 삼비밀의 법을 지니고, 유덕왕 · 각덕비구의 그 옛일을 말법 탁악의 미래에 옮길 때, 칙선과 어교서를 받아 내어 영산정토와 닮은 가장 뛰어난 땅을 찾아 계단을 건립해야 할 것이니라. 때를 기다릴 뿐이니라. 사(事)의 계법이라 함은 이것이니라.
전교대사가 세운 「영산의 대계」는 상법의 끝에 법화경 적문의 이로써 세운 계단이었다. 그것을 넘어서는 본문의 사의 계단은 「때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신 말법의 과제로 남는다. 이렇게 계의 역사 역시 「시」의 흐름 위에 놓인다.
천태와 진언의 승렬 — 공장 결판이 없었던 결과
그런데 本文의 마지막 단락은 전교대사에게조차 남은 한계를 지적하신다. 천태종과 진언의 승렬을 대사는 마음속으로는 아셨다. 그러나 육종과 천태종의 경우처럼 공장에서 승부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인지, 전교대사 이후에는 동사 · 칠사 · 온조사의 여러 절과 일본 전체가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인까지 「진언종이 천태종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태법화종은 전교대사의 때에만 있었다」.
여기서 다시 제10장의 교훈이 되풀이된다. 알면서도 공장에서 밝히지 않으면 정법은 은몰한다. 전교대사의 육종 대결은 그 반대의 길을 보여 주었지만, 진언과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틈으로 진언이 일본 불교 전체를 덮었다. 동사는 구카이에게 내려져 진언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고, 히에이산에서 갈라진 온조사의 엔친 문도와 엔닌 문도가 대립을 거듭했다. 이 진언화의 과정과 그 주역인 홍법 · 자각 · 지증에 대한 비판은 선시초 제4편 「정토 · 선 · 진언을 파하다」의 주제다.
다조탑사견고 — 아직 백법은몰의 때는 아니다
「이 전교의 때는 상법의 끝, 대집경의 다조탑사견고의 때이니, 아직 『나의 법 가운데에서 투쟁언송하여 백법이 은몰하리라』는 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문이다.
서강은 전교대사가 『수호국계장』에서 「정상은 거의 지나고 말법이 매우 가깝다」고 하고, 「말법등명기」에서 자신의 시대를 「상법의 가장 끝」이라 한 것을 들어, 전교대사가 부처님 멸후 1800년, 상법의 끝에 해당한다고 정리한다. 전교대사가 그토록 큰 공을 세우고도 법화경의 간심을 넓히지 않은 것은, 그의 때가 아직 백법은몰의 때, 곧 말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법 · 상법 이천 년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고, 다음 장에서 대성인은 「지금 말법에 들어 이백여 년」의 현재로 돌아오신다.
전교대사가 소승의 별수계를 꺾고 히에이산에 원돈의 대계를 세운 것은 용수 · 천친 · 천태 · 묘락을 넘어서는 공이다. 그러나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법화경 적문의 이계에 머문 상법의 계였으므로 말법에는 본문의 사의 계단이 세워져야 한다.
본문
今末法に入つて二百余歳・大集経の於我法中・闘諍言訟・白法隠没の時にあたれり仏語まことならば定んで一閻浮提に闘諍起るべき時節なり、 伝え聞く漢土は三百六十箇国・二百六十余州はすでに蒙古国に打ちやぶられぬ華洛すでにやぶられて徽宗・欽宗の両帝・北蕃にいけどりにせられて韃靼にして終にかくれさせ給いぬ、徽宗の孫高宗皇帝は長安をせめをとされて田舎の臨安行在府に落ちさせ給いて今に数年が間京を見ず、高麗六百余国も新羅百済等の諸国等も皆大蒙古国の皇帝にせめられぬ、今の日本国の壱岐・対馬並びに九国のごとし闘諍堅固の仏語地に堕ちず、あたかもこれ大海のしをの時をたがへざるがごとし、
지금 말법에 들어 이백여 년, 대집경의 「나의 법 가운데에서 투쟁언송(闘諍言訟)하여 백법(白法)이 은몰(隠没)하리라」는 때에 해당하느니라. 부처님 말씀이 참되다면 반드시 일염부제(一閻浮提)에 투쟁이 일어날 시절이니라. 전해 듣건대, 한토의 삼백육십 나라 · 이백육십여 주는 이미 몽골국(蒙古国)에 쳐부수어졌다고 하느니라. 서울(華洛)은 이미 무너져 휘종(徽宗) · 흠종(欽宗) 두 황제는 북방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달단(韃靼)에서 끝내 돌아가셨고, 휘종의 손자 고종(高宗) 황제는 장안을 빼앗기고 시골인 임안행재부(臨安行在府)로 피하시어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서울을 보지 못하느니라. 고려 육백여 나라도, 신라 · 백제 등의 여러 나라도 모두 대몽골국의 황제에게 공격받았느니라. 지금 일본국의 이키(壱岐) · 쓰시마(対馬)와 규슈(九国)와 같으니라. 투쟁견고(闘諍堅固)의 부처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마치 큰 바다의 조수가 때를 어기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是をもつて案ずるに大集経の白法隠没の時に次いで法華経の大白法の日本国並びに一閻浮提に広宣流布せん事も疑うべからざるか、彼の大集経は仏説の中の権大乗ぞかし、生死をはなるる道には法華経の結縁なき者のためには未顕真実なれども六道・四生・三世の事を記し給いけるは寸分もたがはざりけるにや、 何に況や法華経は釈尊・要当説真実となのらせ給い多宝仏は真実なりと御判をそへ十方の諸仏は広長舌を梵天につけて誠諦と指し示し、釈尊は重ねて無虚妄の舌を色究竟に付けさせ給いて後五百歳に一切の仏法の滅せん時上行菩薩に妙法蓮華経の五字をもたしめて謗法一闡提の白癩病の輩の良薬とせんと梵帝・日月・四天・竜神等に仰せつけられし金言虚妄なるべしや、大地は反覆すとも高山は頽落すとも春の後に夏は来らずとも日は東へかへるとも月は地に落つるとも此の事は一定なるべし、
이로써 헤아려 보건대, 대집경의 백법은몰의 때에 이어 법화경의 대백법(大白法)이 일본국과 일염부제에 광선유포(広宣流布)하는 일도 의심할 수 없지 않겠느냐. 저 대집경은 불설 가운데 권대승(権大乗)이니라. 생사를 떠나는 길에 있어서는 법화경에 결연(結縁)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는 미현진실(未顕真実)이나, 육도(六道) · 사생(四生) · 삼세(三世)의 일을 적어 두신 것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느니라. 하물며 법화경은, 석존께서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要当説真実)」고 이름하시고, 다보불은 「모두 진실이니라」고 증명의 판을 더하시고, 시방의 제불은 광장설(広長舌)을 범천에 대어 「참되고 진실하다」고 가리켜 보이셨으며, 석존은 거듭 허망하지 않은 혀를 색구경천(色究竟)에 대시어, 후오백세(後五百歳)에 일체의 불법이 멸할 때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지니게 하여 비방하는 일천제(一闡提)와 무거운 병에 걸린 무리의 양약으로 삼으리라고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왕 · 용신 등에게 분부하신 금언이 어찌 허망하겠느냐. 대지는 뒤집혀도, 높은 산은 무너져도, 봄 뒤에 여름이 오지 않아도, 해가 동쪽으로 되돌아가도, 달이 땅에 떨어져도, 이 일은 틀림없느니라.
本文의 「白癩病」은 중세의 병명을 비유로 쓴 시대어다. 풀이에서는 「무거운 병」으로 옮겼다.
어구 풀이
- 末法に入つて二百余歳말법에 들어 이백여 년
- 부처님 멸후 2000년을 지나 말법에 들어간 해를 일본에서는 흔히 1052년으로 셈했고, 서강도 이 셈법을 따른다. 선시초를 쓰신 건치 원년(1275)은 그로부터 이백이십여 년이 된다.
- 於我法中・闘諍言訟・白法隠没어아법중 · 투쟁언송 · 백법은몰
- 대집경 월장분의 오오백세 가운데 다섯째 오백 년에 관한 예언. 「나의 법 가운데에서 다투고 송사하여 백법(정법)이 숨어 없어지리라」는 뜻이다. 이 때를 「투쟁견고」라 한다.
- 一閻浮提일염부제
- 수미산 남쪽 바다에 있다는 대륙으로,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를 뜻한다. 「일염부제 광선유포」는 온 세계에 널리 법을 펴는 것이다.
- 蒙古国몽골국
- 13세기 초 칭기즈 칸이 세운 몽골 제국. 금 · 서하를 멸하고 고려를 굴복시켰으며, 쿠빌라이가 국호를 원(元)이라 했다. 선시초를 쓰기 전해인 문영 11년(1274) 일본을 침공했다(문영의 역).
- 徽宗휘종
- 1082~1135. 북송 제8대 황제. 정치에 관심이 적고 원체화에 재능을 보이는 등 문화 면에 뛰어났으나, 친정에 들어서는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도교를 보호하여 1119년 조서를 내려 부처를 대각금선, 보살을 대사, 승려를 덕사, 비구니를 여덕이라 부르게 하는 등 불교의 칭호를 없애고 도교식으로 고쳤다. 이때 법도삼장이 글을 올려 간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그 얼굴에 불도장을 찍어 강남 도주로 유배했다. 뒤에 여진족의 금과 분쟁을 일으켜 공격을 받자 제위를 흠종에게 물려주었으나, 곧 도읍 개봉이 함락되어 1127년 흠종과 함께 금의 포로가 되었고 북송은 끊어졌다.
- 欽宗흠종
- 1100~1161. 북송 제9대 황제. 휘종의 맏아들. 금군에 도읍이 포위되었을 때 휘종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1126년 금의 두 번째 공격으로 개봉이 함락되어 상황 휘종을 비롯한 황족과 함께 금으로 끌려갔다. 금과 남송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진 뒤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30년 유배 끝에 죽었다.
- 高宗皇帝고종 황제
- 1107~1187. 남송의 초대 황제. 휘종의 아홉째 아들. 휘종 · 흠종이 개봉에서 금군에게 사로잡히자 남경에서 즉위했다. 1132년 임안(지금의 항저우)을 도읍으로 정하고 1138년 금과 화의를 맺어 남송의 기초를 닦았다.
- 臨安行在府임안행재부
- 송나라 사람들이 「임시 수도」라는 뜻으로 임안을 행재(行在)라 불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서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옛 도읍 개봉을 지금까지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성인 당시 개봉이 금에 빼앗긴 지 백수십 년이 지났으며, 임안은 1276년 원군에게 점령되어 남송은 멸망했다.
- 色究竟색구경
- 색구경천. 색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하늘. 아가니타천 · 유정천이라고도 한다. 색계 사선천의 꼭대기에 있으며 마혜수라천(대자재천)의 거처라고 한다.
- 要当説真実요당설진실
- 법화경 방편품의 「세존은 법이 오랜 뒤에 반드시 진실을 설하시리라」는 경문. 석존 스스로 법화경이 진실임을 밝힌 말이다.
- 広長舌광장설
- 넓고 긴 혀. 부처의 32상의 하나로, 거짓이 없음을 나타낸다. 법화경 신력품에서 시방의 분신불이 광장설을 범천에 대어 법화경이 진실함을 증명했다.
- 上行菩薩상행보살
- 법화경 종지용출품에서 대지에서 솟아 나온 지용보살의 상수(上首). 신력품에서 석존에게서 말법에 묘법연화경을 넓히라는 결요부촉을 받았다.
- 一闡提일천제
- 범어 잇찬티카의 음사. 불법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성불의 인연이 없는 자.
말법 이백여 년 — 투쟁언송 · 백법은몰의 때
이 장부터는 말법의 처음을 밝히는 단락이며, 먼저 이 장에서 부처님의 예언이 허망하지 않음을 보이시어 묘법연화경이 말법에 반드시 광선유포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제7장부터 제12장까지 정법 · 상법 이천 년의 역사를 하나하나 짚어 온 것은, 바로 이 장의 결론을 위한 준비였다.
「지금 말법에 들어 이백여 년.」 제12장의 끝에서 「전교의 때는 아직 백법은몰의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신 그 백법은몰의 때가 바로 지금이다. 서강은 말법의 처음을 1052년으로 보고, 이 무렵부터 일본에서는 섭관 정치가 쇠하고 무사가 일어나며, 불교도 퇴폐하여 히에이산의 승려들이 승병이 되어 도다이사 · 고후쿠사의 승병들과 서로 싸우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정리한다. 서강이 인용한 『중우기』의 장치 원년(1104) 기록은 「요즈음 예산의 대중이 서로 어지럽다. 동탑과 서탑의 승려가 합전한다. 혹은 불을 놓아 방사를 태우고 혹은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수학의 자리가 도리어 합전의 마당이 되었다」고 탄식한다. 그 뒤로 보원의 난 · 평치의 난, 승구의 난이 잇따랐다. 「나의 법 가운데에서 다투고 송사한다」는 경문은 말 그대로 불법의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가리킨다.
대성인은 이 경문을 두고 「부처님 말씀이 참되다면 반드시 일염부제에 투쟁이 일어날 시절」이라고 단언하신다. 투쟁견고의 예언은 불교계 안의 다툼에 그치지 않고 온 세계의 전란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전해 듣건대」 — 몽골과 동아시아

그리고 그 증거로 대성인은 바다 건너 대륙에서 전해 오는 소식을 드신다. 중국의 삼백육십 나라 · 이백육십여 주가 이미 몽골에 쳐부수어졌다. 도읍은 무너져 휘종 · 흠종 두 황제가 북방에 사로잡혀 달단에서 죽었고, 휘종의 손자 고종 황제는 장안을 빼앗기고 시골인 임안으로 피하여 지금까지 서울을 보지 못한다. 고려와 신라 · 백제의 땅도 모두 대몽골국의 황제에게 공격받았다. 그리고 지금 일본의 이키 · 쓰시마와 규슈도 그와 같다.
이 사건들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이렇다. 휘종 · 흠종이 사로잡힌 것은 1127년 여진족의 금에 의한 것이었고, 고종은 남경에서 즉위한 뒤 1132년 임안을 도읍으로 정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서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옛 도읍 개봉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며, 대성인 당시 개봉을 빼앗긴 지 이미 백수십 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임안도 선시초를 쓰신 이듬해인 1276년 원군에게 점령되어 남송은 멸망했다. 고려는 1231년부터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짓밟힌 끝에 1270년 원의 속국이 되었고, 문영 · 홍안의 역에서는 원의 일본 원정에 앞장서야 했다.
本文은 북송의 멸망(1127, 금)과 몽골에 의한 금 · 남송 · 고려의 정복을 「전해 듣건대」로 한데 묶어 북방 세력에 의한 중국의 붕괴로 서술하신다. 휘종 · 흠종을 사로잡은 것은 금이고, 고종은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며, 빼앗긴 옛 도읍은 개봉이다.
선시초가 쓰인 건치 원년(1275)은 바로 전해 10월 몽골군이 쓰시마 · 이키를 거쳐 규슈 하카타에 상륙한 문영의 역 직후였다. 本文의 「지금 일본국의 이키 · 쓰시마와 규슈와 같다」는 말씀은, 대륙의 나라들이 겪은 일이 이제 일본의 문 앞에 와 있다는 생생한 현실 인식이다. 당시의 세계를 그려 보면 이렇다. 일본에서는 승구의 난으로 세 상황이 유배되고 천황이 폐위된 이듬해에 대성인이 탄생하셨고, 그 뒤로도 나라 안에는 내분과 모반이 잇따랐다. 나라 밖에서는 몽골의 흥기로 나라들이 차례로 정복되어 일본에도 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몽골은 홍안 2년(1279) 남송을 멸했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동쪽으로는 한반도까지 모두 몽골에 무너져 섬나라 일본만이 남아 있었다. 서양에서는 제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라틴 제국을 세운 지 이십 년이 채 되지 않아 대성인이 탄생하셨고, 그 뒤로도 제5차 · 제6차 · 제7차 십자군이 잇따라 파견되어 격렬한 종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투쟁견고의 부처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큰 바다의 조수가 때를 어기지 않는 것과 같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정해진 때를 어기는 일이 없다. 부처님이 이천여 년 전에 「다섯째 오백 년에는 투쟁이 굳건하리라」고 하신 예언이 꼭 그대로 지금 눈앞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선시초의 주제인 「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때는 사람의 뜻으로 앞당기거나 늦출 수 없는 것이며, 불법을 배우는 자는 그 때를 읽어야 한다.
오오백세가 모두 맞았다면
이 장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하다. 대집경의 오오백세 가운데 다섯째 「투쟁견고」가 지금 눈앞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편에서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첫째 해탈견고(가섭 · 아난의 소승), 둘째 선정견고(마명 · 용수의 대승), 셋째 독송다문견고(중국 전래와 천태), 넷째 다조탑사견고(법상 · 화엄 · 진언과 전교) 역시 모두 예언대로였다. 다섯 가운데 다섯이 맞았다.
그렇다면 대집경이 「백법은몰」을 말한 바로 그 다음에 오는 일, 곧 「법화경의 대백법이 일본국과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하는 일」도 의심할 수 없다. 「이로써 헤아려 보건대」라는 本文의 첫머리는, 제7장부터 쌓아 온 역사의 증거 전체를 이 한 점으로 모으는 말이다. 대성인은 선시초 앞부분(258쪽)에서 이 광선유포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셨다.
彼の大集経の白法隠没の時は第五の五百歳当世なる事は疑ひなし、但し彼の白法隠没の次には法華経の肝心たる南無妙法蓮華経の大白法の一閻浮提の内・八万の国あり其の国国に八万の王あり王王ごとに臣下並びに万民までも今日本国に弥陀称名を四衆の口口に唱うるがごとく広宣流布せさせ給うべきなり
저 대집경의 백법은몰의 때는 다섯째 오백 세인 지금 세상임이 의심 없느니라. 다만 그 백법은몰 다음에는 법화경의 간심인 남무묘법연화경의 대백법이, 일염부제 안에 팔만의 나라가 있고 그 나라마다 팔만의 왕이 있는데 왕마다 신하와 만민에 이르기까지, 지금 일본국에서 아미타의 이름을 사중의 입마다 외우듯이 광선유포하실 것이니라.
「백법은몰」과 「대백법」은 하나의 예언의 두 얼굴이다. 석존의 가르침이 힘을 잃는 때가 곧 새로운 대법이 일어날 때다. 법화경 약왕품의 「후오백세 가운데 염부제에 광선유포하여 끊어짐이 없게 하라」는 경문은, 바로 이 다섯째 오백 년을 광선유포의 때로 지정한 것이다.
권대승의 대집경도 어긋나지 않았다
대성인은 여기서 논증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신다. 대집경은 불설 가운데 권대승의 경이다. 생사를 떠나 성불하는 길에 관해서는 「법화경에 결연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는 미현진실」이다. 그런데도 그 대집경이 육도 · 사생 · 삼세의 일, 곧 세간의 일과 미래의 일을 적어 둔 것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권경의 예언조차 이렇게 정확하다면, 하물며 실경인 법화경의 예언은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의 뜻은 이렇다. 대집경은 권대승의 가르침이어서 성불 득도는 할 수 없는 가르침이지만, 육도사생과 삼세의 일을 설한 점에서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법화경에 결연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는 미현진실」이라 하셨으므로, 「그렇다면 법화경에 결연한 자에게는 권경도 진실한 가르침이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정상과 말법의 차이로 풀 수 있다. 정상 이천 년에는 법화경에 결연한 중생이 태어났으므로 권교를 인연으로 삼아 법화의 하종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말법에는 결연이 없는 중생뿐이므로, 권교로는 아무리 수행해도 익히고 벗어날(熟脫) 수 없다. 수량품 문저에 감추어진 하종의 불법이 아니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 대성인은 「현방법초」에서 「무량의경의 『사십여 년 미현진실』의 글은 사십여 년의 모든 경과 글 · 구절을 다 미현진실이라 하신 것이 아니다」라는 어떤 사람의 해석을 들고, 「此の料簡は東土の得一が料簡に似たり」(449쪽)라 하여 그것을 법상종 득일의 해석과 같은 것으로 깨뜨리셨다. 이 글에 따르면 이전 경의 글과 구절이 모두 미현진실이 되는데, 그렇다면 「육도 · 사생 · 삼세의 일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는 선시초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는가. 니치칸 상인은 이에 대해, 득일은 이전 경에도 성불 · 왕생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전 경에는 성불이 없으므로 그 점에서 글과 구절이 모두 미현진실이 되는 것이고, 성불 이외의 일이라면 이전 경도 진실이라고 한 지금의 글과 일치한다고 풀이하셨다. 성불의 길에 관해서는 미현진실, 세간과 삼세의 일에 관해서는 진실, 이 구별이 두 어서를 하나로 잇는다.
하물며 법화경 — 세 부처의 증명과 상행보살의 부촉
「하물며 법화경은.」 대성인은 법화경의 진실함을 보증하는 증명들을 한꺼번에 늘어놓으신다. 석존 스스로 방편품에서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고 하셨다. 견보탑품에서 다보불은 「모두 진실이다」라고 증명의 판을 찍었다. 신력품에서 시방의 분신 제불은 광장설을 범천에 대어 「참되고 진실하다」고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석존은 거듭 허망하지 않은 혀를 색계의 꼭대기 색구경천에까지 대시고, 「후오백세에 일체의 불법이 멸할 때, 상행보살에게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지니게 하여 비방하는 일천제의 양약으로 삼으리라」고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왕 · 용신에게 분부하셨다. 석가 · 다보 · 시방제불의 세 부처가 함께 보증하고, 하늘의 신들에게까지 분부해 둔 이 금언이 어찌 허망할 수 있겠느냐.
여기서 제7장의 실마리가 돌아온다. 제7장에서 용수 · 천친이 「적화이므로 부촉받지 못했다」고 하신 그 부촉이, 바로 여기서 「상행보살에게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지니게 하여」라는 말씀으로 그 받는 이를 드러낸다. 정법 · 상법의 성인들이 알면서도 넓히지 않은 것은 그 부촉이 이 상행보살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을 받을 사람은 「비방하는 일천제와 무거운 병에 걸린 무리」, 곧 선근이 없는 말법의 중생이다. 양약은 병이 깊은 사람을 위해 있다.
니치칸 상인의 세 가지 뜻 — 문저 하종의 불법이 유포하는 까닭
「후오백세에 일체의 불법이 멸할 때」라는 말씀은 니치칸 상인의 풀이에 따라 읽을 수 있다. 니치칸 상인은 세 가지 뜻을 들어 문저 하종의 불법의 광선유포를 단언하셨다. 첫째, 일체의 불법이 은몰해 버리기 때문이다. 석존이 설한 가르침이 모두 힘을 잃으니, 그 자리를 채울 법이 필요하다. 둘째, 지용의 보살이 후오백세 광선유포의 부촉을 받았기 때문이다. 셋째, 비방하는 일천제, 곧 본래 선근이 없는 본미유선(本未有善)의 중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석존이 설한 숙(熟) · 탈(脫)의 불법이 아니라 본문 수량품 문저에 감추어진 하종의 불법이 광선유포한다는 것이 니치칸 상인의 뜻이다.
「후오백세에 일체의 불법이 멸할 때」라는 말씀대로라면 석가의 불법은 말법에 모두 멸한다.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그런데도 염불 · 진언 · 선 등이 지금도 불교인 양 존재하는 것은 석존의 진의에도 크게 어긋난다.
「이 일은 틀림없다」 — 예언과 유명
이 장은 선시초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확신의 말씀으로 끝난다. 「대지는 뒤집혀도, 높은 산은 무너져도, 봄 뒤에 여름이 오지 않아도, 해가 동쪽으로 되돌아가도, 달이 땅에 떨어져도, 이 일은 틀림없다.」 자연의 질서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들을 하나하나 들어 그것이 모두 무너진다 해도, 말법에 대백법이 광선유포한다는 이 일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이 대성인의 확신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한다.
나아가 대성인의 예언은 동시에 뒤의 제자들에게 남기신 위대한 유명(遺命)으로 받들어야 한다. 선시초 뒤쪽에서 대성인은 「외전에 이르기를 「아직 싹트지 않은 일을 아는 것을 성인이라 한다」, 내전에 이르기를 「삼세를 아는 것을 성인이라 한다」. 나에게 세 번의 고명(高名)이 있느니라」(外典に曰く未萠をしるを聖人という内典に云く三世を知るを聖人という余に三度のかうみようあり, 287쪽)라고 하셨다. 또 「사도어서」에서는 「現世に云をく言の違はざらんをもて後生の疑をなすべからず」(957쪽), 곧 현세에 말해 둔 말이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고 후생의 일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과거의 예언이 맞았다는 사실이 미래의 예언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된다는 구조는, 바로 이 장에서 오오백세의 역사를 들어 대백법의 유포를 논증하신 구조와 같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허망하게 하지 않도록 절대의 확신으로 그 유명을 이루어 가야 한다.
이 장은 말법의 처음을 밝히는 단락의 시작이다. 오오백세의 예언이 정상 이천 년의 역사와 몽골의 침공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을 근거로, 백법은몰 다음에 문저 하종의 대백법이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하는 것은 틀림없다는 대성인의 확신과 유명을 읽을 수 있다.
본문
此の事一定ならば闘諍堅固の時・日本国の王臣と並びに万民等が仏の御使として南無妙法蓮華経を流布せんとするを或は罵詈し或は悪口し或は流罪し或は打擲し弟子眷属等を種種の難にあわする人人いかでか安穏にては候べき、これをば愚癡の者は咒詛すとをもひぬべし、 法華経をひろむる者は日本国の一切衆生の父母なり章安大師云く「彼が為に悪を除くは即ち是れ彼が親なり」等云云、されば日蓮は当帝の父母、念仏者・禅衆・真言師等が師範なり又主君なり、 而るを上一人より下万民にいたるまであだをなすをば日月いかでか彼等が頂を照し給うべき地神いかでか彼等の足を戴き給うべき、提婆達多は仏を打ちたてまつりしかば大地揺動して火炎いでにき、檀弥羅王は師子尊者の頸を切りしかば右の手刀とともに落ちぬ、徽宗皇帝は法道が面にかなやきをやきて江南にながせしかば半年が内にゑびすの手にかかり給いき、蒙古のせめも又かくのごとくなるべし、設い五天のつわものをあつめて鉄囲山を城とせりともかなふべからず必ず日本国の一切衆生・兵難に値うべし、
이 일이 틀림없다면, 투쟁견고의 때에 일본국의 왕과 신하와 만민 등이, 부처님의 사자(使者)로서 남무묘법연화경을 유포하려 하는 자를 혹은 꾸짖고 혹은 욕하고 혹은 유배하고 혹은 때리며, 제자와 권속들을 갖가지 난에 처하게 하는 사람들이 어찌 안온할 수 있겠느냐. 이것을 어리석은 자는 저주한다고 생각할 것이니라. 법화경을 넓히는 자는 일본국 일체중생의 부모이니라. 장안대사(章安大師)가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니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니치렌은 지금 천황의 부모요, 염불자 · 선중(禅衆) · 진언사 등의 사범(師範)이요, 또한 주군이니라. 그런데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에 이르기까지 원수로 대하니, 해와 달이 어찌 그들의 정수리를 비추시겠으며 지신(地神)이 어찌 그들의 발을 떠받치시겠느냐. 제바달다(提婆達多)는 부처님을 때려 드렸으므로 대지가 흔들리고 불꽃이 솟았고, 단미라왕(檀弥羅王)은 사자존자의 목을 베었으므로 오른손이 칼과 함께 떨어졌으며, 휘종 황제는 법도(法道)의 얼굴에 불도장을 찍어 강남으로 유배하였으므로 반년 안에 오랑캐의 손에 걸리셨느니라. 몽골의 공격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니라. 설령 오천축(五天)의 군사를 모아 철위산(鉄囲山)을 성으로 삼는다 해도 막을 수 없으니, 반드시 일본국의 일체중생이 병난(兵難)을 만날 것이니라.
されば日蓮が法華経の行者にてあるなきかはこれにても見るべし、教主釈尊記して云く末代悪世に法華経を弘通するものを悪口罵詈等せん人は我を一劫が間あだせん者の罪にも百千万億倍すぎたるべしと・とかせ給へり、 而るを今の日本国の国主・万民等・雅意にまかせて父母・宿世の敵よりもいたくにくみ謀反・殺害の者よりも・つよくせめぬるは現身にも大地われて入り天雷も身をさかざるは不審なり、日蓮が法華経の行者にてあらざるか・もししからばををきになげかし、今生には万人にせめられて片時もやすからず後生には悪道に堕ん事あさましとも申すばかりなし、 又日蓮法華経の行者ならずばいかなる者の一乗の持者にてはあるべきぞ、法然が法華経をなげすてよ善導が千中無一・道綽が未有一人得者と申すが法華経の行者にて候か、又弘法大師の云く法華経を行ずるは戯論なりとかかれたるが法華経の行者なるべきか、 経文には能持是経能説此経なんどこそとかれて候へよくとくと申すはいかなるぞと申すに於諸経中最在其上と申して大日経・華厳経・涅槃経・般若経等に法華経はすぐれて候なりと申す者をこそ経文には法華経の行者とはとかれて候へ、もし経文のごとくならば日本国に仏法わたて七百余年、伝教大師と日蓮とが外は一人も法華経の行者はなきぞかし、
그러므로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인지 아닌지는 이것으로도 보아야 하느니라. 교주 석존께서 기별하여 이르시기를, 말대 악세에 법화경을 홍통하는 자를 욕하고 꾸짖는 사람은 나를 일 겁 동안 원수로 대하는 자의 죄보다도 백천만억 배나 더하리라고 설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일본국의 국주와 만민 등이 제멋대로 부모나 숙세의 원수보다도 심하게 미워하고, 모반이나 살해를 저지른 자보다도 세게 공격하는데, 현세에 대지가 갈라져 빠져 들어가지도 않고 하늘의 벼락이 몸을 찢지도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니라.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닌 것이냐. 만일 그렇다면 크게 한탄스러운 일이니라. 금생에는 만인에게 공격받아 잠시도 편안하지 못하고, 후생에는 악도에 떨어진다면 기막히다는 말로도 다할 수 없느니라. 또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니라면 어떤 자가 일승의 지자(持者)이겠느냐. 법연(法然)이 「법화경을 내던져라」, 선도(善導)가 「천 명 가운데 하나도 없다(千中無一)」, 도작(道綽)이 「아직 한 사람도 얻은 자가 없다(未有一人得者)」고 한 것이 법화경의 행자이겠느냐. 또 홍법대사(弘法大師)가 「법화경을 행하는 것은 희론(戯論)이다」라고 쓴 것이 법화경의 행자이겠느냐. 경문에는 「능히 이 경을 지니고(能持是経)」 「능히 이 경을 설한다(能説此経)」고 설해져 있느니라. 「능히 설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경 가운데 가장 그 위에 있다(於諸経中最在其上)」고 하여 대일경 · 화엄경 · 열반경 · 반야경 등보다 법화경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자를 경문에서는 법화경의 행자라고 설하셨느니라. 만일 경문대로라면 일본국에 불법이 건너온 지 칠백여 년, 전교대사와 니치렌 외에는 한 사람도 법화경의 행자가 없느니라.
いかにいかにとをもうところに頭破作七分・口則閉塞のなかりけるは道理にて候いけるなり、此等は浅き罰なり但一人二人等のことなり、日蓮は閻浮第一の法華経の行者なり此れをそしり此れをあだむ人を結構せん人は閻浮第一の大難にあうべし、 これは日本国をふりゆるがす正嘉の大地震一天を罰する文永の大彗星等なり、此等をみよ仏滅後の後仏法を行ずる者にあだをなすといへども今のごとくの大難は一度もなきなり、南無妙法蓮華経と一切衆生にすすめたる人一人もなし、此の徳はたれか一天に眼を合せ四海に肩をならぶべきや。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해 보니,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지고(頭破作七分) 입이 막히는(口則閉塞) 일이 없었던 것은 도리였느니라. 이것들은 얕은 벌이니, 다만 한두 사람의 일이니라. 니치렌은 염부제 제일의 법화경 행자이니라. 이를 비방하고 이를 원수로 대하는 사람의 편을 드는 사람은 염부제 제일의 대난을 만날 것이니라. 이것이 일본국을 뒤흔든 정가(正嘉)의 대지진이요, 온 하늘을 벌하는 문영(文永)의 대혜성 등이니라. 이것들을 보라. 부처님 멸후에 불법을 행하는 자를 원수로 대한 일이 있었으나 지금과 같은 대난은 한 번도 없었느니라. 남무묘법연화경을 일체중생에게 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느니라. 이 덕은 누가 온 하늘 아래 눈을 마주하고 사해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느냐.
어구 풀이
- 仏の御使부처님의 사자
-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법을 전하는 사람. 법화경 법사품의 「여래의 사자로서 여래가 보내어 여래의 일을 행한다」는 경문에 근거한다.
- 章安大師장안대사
- 561~632. 관정(灌頂). 천태대사의 제자로 스승의 강설을 모두 듣고 결집했다. 절강성 임해현 장안 사람. 25세에 천태대사를 뵙고 늘 곁에서 시봉하여 그 법문을 모두 깨달았다. 그가 결집한 것이 천태 삼대부(『법화문구』 · 『법화현의』 · 『마하지관』)를 비롯해 백여 권에 이른다. 스승이 입적한 뒤 『열반현의』 · 『열반경소』를 지었다. 632년 천태산 국청사에서 72세로 입적했다.
- 当帝당제
- 지금의 천황. 선시초를 쓰신 1275년 당시의 천황을 가리킨다.
- 提婆達多제바달다
- 석존의 사촌으로 출가했으나 석존을 시기하여 교단을 분열시키고 석존을 해치려 했다. 기사굴산에서 큰 돌을 굴려 석존의 발가락에서 피를 내게 하는 등 삼역죄를 저질러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한다.
- 檀弥羅王단미라왕
- 계빈국의 왕.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법장의 마지막 전등자인 사자존자가 계빈국에서 홍법하자 그 나라의 외도가 이를 시기하여 불제자로 변장해 왕궁에 들어가 화를 일으키고 달아났다. 왕은 분노하여 사자존자의 목을 베었으나 피가 나지 않고 흰 젖이 솟았으며, 왕의 오른팔이 칼을 쥔 채 땅에 떨어지고 이레 뒤에 목숨이 다했다고 한다.
- 法道법도
- 송대의 승려. 본래 영도(永道)라 했다. 1119년 휘종이 조서를 내려 불승의 칭호를 없애고 도교식으로 고치려 하자 글을 올려 간했다. 휘종은 노하여 그 얼굴에 불도장을 찍어 강남의 도주로 내쫓았다. 이듬해 불교의 칭호가 다시 허락되어 영도도 용서받아 돌아와 이름을 법도로 고쳤다. 1126년 휘종은 금에 공격받아 포로가 되어 북쪽 이역에서 쓸쓸히 죽었다.
- 五天오천
- 오천축. 인도를 동 · 서 · 남 · 북 · 중의 다섯으로 나눈 것으로, 인도 전체를 가리킨다.
- 鉄囲山철위산
- 한 소세계를 둘러싼 쇠로 된 산.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구산팔해의 가장 바깥에 있는 산이다. 삼천대천세계를 둘러싼 철산을 가리키기도 하여, 이때 앞의 것을 소철위산, 뒤의 것을 대철위산이라 한다. 『구사론』 권11 등에 보인다.
- 弘法大師홍법대사
- 774~835. 구카이(空海). 일본 진언종의 개조. 사누키국 다도군 출생. 793년 득도하고 804년 유학생으로 입당하여 불공의 제자인 청룡사 혜과에게 밀교의 관정을 받고 변조금강의 호를 받았다. 806년 귀국하여 816년 고야산을 받아 금강봉사를 세우기 시작했고, 823년 동사를 받아 진언종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불교를 현밀 이교로 나누어 대일경을 제일, 화엄경을 제이, 법화경을 제삼의 열등한 경이라 했다. 『삼교지귀』 · 『변현밀이교론』 · 『십주심론』 · 『비장보약』 등을 지었다.
- 能持是経・能説此経능지시경 · 능설차경
- 「능히 이 경을 지닌다」 「능히 이 경을 설한다」. 법화경의 행자를 가리키는 경문의 말.
- 於諸経中最在其上어제경중최재기상
- 「모든 경 가운데 가장 그 위에 있다」. 법화경 안락행품의 경문으로, 법화경이 모든 경 가운데 최상임을 밝힌다.
- 頭破作七分두파작칠분
- 법화경 행자를 비방하는 자가 받는 벌. 다라니품에서 십나찰녀가 법화경을 지니는 자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만일 나의 주문을 따르지 않고 설법하는 자를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일곱 조각이 되어 아리수의 가지와 같으리라」고 했다.
- 口則閉塞구즉폐색
- 법화경 행자를 비방하는 자가 받는 벌. 안락행품의 「만일 사람이 미워하여 꾸짖으면 입이 곧 막히리라」를 가리킨다.
- 正嘉の大地震정가의 대지진
- 정가 원년(1257) 8월 23일 술해시, 곧 밤 9시 무렵 가마쿠라 지방을 덮친 큰 지진. 이때의 참상이 「입정안국론」을 쓰시는 계기가 되었다.
- 文永の大彗星문영의 대혜성
- 문영 원년(1264) 7월 5일에 나타난 큰 혜성. 대성인 당시 혜성은 시대와 사회를 쓸어버리는 변혁의 조짐으로 여겨졌다. 대성인은 정가의 대지진과 함께 이 대혜성을 말법에 지용보살이 출현하는 전조로 보셨다.
부처님의 사자 — 외용과 내증
이 장의 요지는 이렇다. 앞 장에서 반드시 광선유포한다는 것을 밝히시고, 이 장에서는 법화경의 행자 니치렌 대성인을 비방하는 자가 큰 벌을 받는 것을 통해 대성인의 덕이 얼마나 숭고하신지를 밝히신다. 법화경에는 비방의 벌로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진다」 「입이 막힌다」고 설해져 있지만, 그것은 한두 사람이 받는 얕은 벌이다. 대성인을 원수로 대하는 죄는 세계 제일의 큰 죄로서, 일찍이 세계에 없었던 큰 벌을 받는다. 이 큰 벌의 현증으로써 대성인의 덕의 위대함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장 제목의 「능홍의 사덕(能弘の師徳)」은 법을 능히 넓히는 스승의 덕을 뜻한다.
「이 일이 틀림없다면」 — 앞 장에서 「이 일은 틀림없다」고 맺으신 그 말을 그대로 받아, 대성인은 이제 그 법을 넓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신다. 투쟁견고의 때에 「부처님의 사자로서 남무묘법연화경을 유포하려 하는」 사람을 욕하고 유배하고 때리며 제자들까지 갖가지 난에 처하게 하는 사람들이 어찌 안온할 수 있겠느냐.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부처님의 사자로서 남무묘법연화경을 유포한다」는 것은 외용천근(外用浅近)의 면이고, 「니치렌은 지금 천황의 부모요, 염불자 · 선중 · 진언사 등의 사범이요, 또한 주군이다」는 것은 내증심비(内証深秘)의 면이다. 곧 이 말씀은 니치렌 대성인이 말법의 주사친 삼덕을 갖춘 어본불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대성인이 「부처님의 사자」라 하시고 「상행보살의 재탄」이라 하셨어도, 그 내증은 주사친 삼덕의 말법의 어본불이시다.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는 이 글을 바로 읽지 못하고 대성인을 「니치렌 대보살」로 부르며 보살로만 보는 해석을, 스승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본다.
「일본국 일체중생의 부모」 — 주사친 삼덕
「법화경을 넓히는 자는 일본국 일체중생의 부모이다.」 그 근거로 대성인은 장안대사의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다」를 드신다. 「상대를 위해 악을 없애 주는 것이 상대에게는 어버이의 덕」이라는 뜻이다. 일본 전체의 방법(謗法)을 없애려 하시는 대성인은 그러므로 「지금 천황의 부모」이며, 염불자 · 선중 · 진언사의 「사범」이고, 또 「주군」이다. 부(親) · 사(師) · 주(主)의 세 덕이 여기에 함께 선언되어 있다.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같은 뜻을 밝히셨다. 차례로 보자.
日蓮は日本国の諸人にしうし父母なり
니치렌은 일본국 모든 사람의 주사부모(主師父母)이니라.
日蓮は此関東の御一門の棟梁なり・日月なり・亀鏡なり・眼目なり・日蓮捨て去る時・七難必ず起るべしと
니치렌은 이 관동 일문의 동량이요, 일월이요, 귀경(亀鏡)이요, 안목이니라. 니치렌을 버리는 때에 칠난이 반드시 일어나리라.
日蓮が慈悲曠大ならば南無妙法蓮華経は万年の外・未来までもながるべし、日本国の一切衆生の盲目をひらける功徳あり、無間地獄の道をふさぎぬ
니치렌의 자비가 넓고 크다면 남무묘법연화경은 만년을 넘어 미래까지도 흐를 것이니라. 일본국 일체중생의 눈먼 것을 여는 공덕이 있고, 무간지옥의 길을 막았느니라.
이 「보은초」의 말씀에서 「자비가 넓고 크다」는 어버이의 덕, 「일체중생의 눈먼 것을 연다」는 스승의 덕, 「무간지옥의 길을 막는다」는 주군의 덕이니,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것이 곧 주사친 삼덕의 선언이다.
다시 『어의구전』과 「제법실상초」는 말법의 부처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밝힌다.
末法の仏とは凡夫なり凡夫僧なり、法とは題目なり僧とは我等行者なり、仏とも云われ又凡夫僧とも云わるるなり
말법의 부처란 범부이며 범부승이니라. 법이란 제목이요, 승이란 우리 행자이니라. 부처라고도 불리고 또 범부승이라고도 불리느니라.
されば釈迦・多宝の二仏と云うも用の仏なり、妙法蓮華経こそ本仏にては御座候へ
그러므로 석가 · 다보 두 부처라 하는 것도 용(用)의 부처이고,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
「제법실상초」는 이어서 「여래비밀 신통지력」의 경문을 들어, 여래비밀은 체(體)의 삼신으로서 본불이고 신통지력은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이며, 범부는 체의 삼신이니 본불이요 부처는 용의 삼신이니 적불이라고 하신다. 「부처님의 사자」라는 외용의 겉모습 아래에,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범부의 몸 그대로 묘법을 체현한 본불의 내증이 있다.
저주가 아니라 자비다
本文은 비방하는 자들이 안온할 수 없다고 하신 바로 뒤에 「이것을 어리석은 자는 저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덧붙이신다. 여기에는 「결코 저주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대성인이 박해자들의 앞날을 경고하시는 것은 그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장안대사의 말대로, 상대의 악을 없애 주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꾸짖는 것을 저주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주사친 삼덕의 선언이 이 경고 바로 사이에 놓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법의 행자를 해친 자들 — 세 가지 예
「해와 달이 어찌 그들의 정수리를 비추겠으며, 지신이 어찌 그들의 발을 떠받치겠느냐.」 하늘과 땅의 신들이 법을 넓히는 사람을 해치는 자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그 예로 세 가지 역사를 드신다.
첫째는 제바달다다. 그는 부처님을 때렸으므로 대지가 흔들리고 불꽃이 솟았다. 곧 「지옥의 상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둘째는 단미라왕이다. 그는 사자존자의 목을 베었으므로 오른손이 칼과 함께 떨어졌다. 제8장에서 본 정법의 마지막 전등자의 순교가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왕은 그 뒤 이레 만에 죽었다고 전한다. 셋째는 송의 휘종이다. 그는 불교의 칭호를 없애고 도교식으로 고치려 했고, 이를 간한 법도삼장의 얼굴에 불도장을 찍어 강남으로 유배했다. 그러자 반년 안에 오랑캐, 곧 북방의 금에게 사로잡혔다. 제13장에서 「투쟁견고」의 현증으로 드신 휘종의 포로 됨이, 여기서는 정법을 박해한 과보로 다시 읽힌다.
인도 · 인도(계빈국) · 중국의 세 예는 시대도 나라도 다르지만 하나의 원리를 보여 준다. 법을 넓히는 사람을 해치는 자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원리를 지금의 일본에 대신다. 「몽골의 공격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설령 오천축의 군사를 모아 철위산을 성으로 삼는다 해도 막을 수 없으니, 반드시 일본국의 일체중생이 병난을 만날 것이다.」 그 까닭은 「법화경의 행자를 박해하는 방법의 죄로 말미암아 몽골에게 공격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몽골의 공격 — 대자비의 간언
「몽골의 공격 내지 병난을 만나리라」는 말씀에 대해 보면, 정법의 행자를 박해하고 그릇된 법과 그릇된 스승을 중히 여기면 그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입정안국론」의 예언이다. 여기에 니치칸 상인의 풀이가 있다. 니치칸 상인의 시대(에도 시대)에는 아직 망국의 현상이 없었지만, 니치칸 상인은 이 글을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풀이하셨다.
물음: 『태평기』에 따르면 일본은 원군을 깨뜨려 이기지 않았느냐. 나라가 망한다는 대성인의 예언은 맞지 않은 것 아니냐. 답: 이 글에는 많은 뜻이 있으나 잠시 두세 가지를 보이겠다. 첫째, 이것은 대자비의 충간의 말씀이다. 아버지가 자식의 잘못을 꾸짖을 때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몸을 망치고 집을 망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몸을 온전히 하고 집을 온전히 하려는 어버이의 친절에서 나온 것이다. 대성인 또한 방법의 허물을 꾸짖어 몽골의 공격을 말씀하시지만, 그 뜻은 몸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려는 대비의 마음이다.
물음: 또 『태평기』에 따르면 원군을 깨뜨린 것은 일본의 무용 때문이 아니라 크고 작은 신들이 남몰래 도운 신력으로 이긴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제천선신이 이 나라를 버리고 떠났다는 주장과 어긋나지 않느냐. 답: 신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비방하는 자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믿는 자에 대해서라면 믿는 자의 정수리에는 늘 신이 있다. 비유하면 흐린 물에는 달그림자가 비치지 않으나 맑은 물에는 곧 비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나라의 신들이 남몰래 도운 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가마쿠라 막부가 뉘우쳤기 때문이다. 대성인을 사도로 유배했으나 마침내 사면하여 대성인의 홍통을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 둘째는 니치렌 대성인이 나라를 지키셨기 때문이다. 곧 「종종어진무어서」의 다음 말씀이다.
かかる日蓮を用いぬるともあしくうやまはば国亡ぶべし、何に況や数百人ににくませ二度まで流しぬ、此の国の亡びん事疑いなかるべけれども且く禁をなして国をたすけ給へと日蓮がひかうればこそ今までは安穏にありつれども・はうに過ぐれば罰あたりぬるなり
이러한 니치렌을 쓴다 해도 잘못 공경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니라. 하물며 수백 명에게 미움받게 하고 두 번이나 유배하였느니라. 이 나라가 망할 것은 의심할 바 없으나, 잠시 금하여 나라를 도와주소서 하고 니치렌이 붙들고 있기에 지금까지는 안온하였으나, 법도를 넘으면 벌이 닥치느니라.
이 문답은 예언과 그 실현을 기계적으로 대응시키지 않는다. 대성인의 경고는 먼저 대자비의 간언이고, 그 간언이 받아들여진 만큼 재앙은 늦추어지며, 법을 넓히는 사람 자신이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된다. 그러면서도 「법도를 넘으면 벌이 닥친다」는 원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것은 한 나라에 대한 상벌의 원리이지만 개인에게도, 한 집안에도, 한 회사에도 같이 말할 수 있다. 집안에 신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신심이 순수하고 깊을수록 그 집안이 이상하게 잘 지켜지는 예가 많으나, 그래도 방법이 너무 심하면 「법도를 넘으면 벌이 닥친다」는 대로 집안이 무너지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의 악구가 일 겁의 훼매보다 무겁다
「그러므로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인지 아닌지는 이것으로도 보아야 한다.」 대성인은 이어서 석존의 기별을 드신다. 말대 악세에 법화경을 홍통하는 자를 욕하고 꾸짖는 사람의 죄는 석존을 일 겁 동안 원수로 대한 자의 죄보다 백천만억 배나 무겁다. 이것은 법화경 법사품의 경문, 곧 「약왕이여, 만일 악인이 있어 선하지 않은 마음으로 일 겁 동안 부처님 앞에서 늘 부처님을 헐뜯고 꾸짖어도 그 죄는 오히려 가볍다. 만일 사람이 한마디 악한 말로 재가 · 출가의 법화경을 독송하는 자를 헐뜯으면 그 죄는 매우 무겁다」를 가리킨다.
또 보현보살권발품의 경문도 있다. 이 경전을 수지하는 자를 보고 그 허물을 들추어내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 사람은 현세에 무거운 병을 얻고, 그를 가볍게 비웃으면 대대로 이가 빠지고 입술이 추하며 코가 납작하고 손발이 뒤틀리며 눈이 비뚤어지고 몸에서 악취가 나며 고름과 피가 흐르는 악창과 배에 물이 차고 숨이 가쁜 여러 중병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법을 지니는 사람의 허물을 들추거나 가볍게 비웃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벌을 받는다는 경계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국주와 만민은 니치렌을 부모나 숙세의 원수보다 더 미워하고, 모반이나 살해를 저지른 자보다 더 세게 공격한다. 그런데도 현세에 대지가 갈라져 그들을 삼키지도 않고 벼락이 그들을 찢지도 않는다. 대성인은 여기서 스스로 물으신다.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닌 것이냐.」 만일 그렇다면 금생에는 만인에게 공격받아 잠시도 편안하지 못하고 후생에는 악도에 떨어질 것이니 이보다 기막힌 일이 없다. 이 자문은 「개목초」에서 대성인이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닌가」를 거듭 물으신 것과 같은 결의 물음이다.
누가 법화경의 행자인가
그러나 대성인은 곧 그 물음을 뒤집으신다.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니라면, 어떤 자가 일승의 지자이겠느냐.」 법연은 「법화경을 내던져라(捨閉閣抛)」 하고, 선도는 염불 외의 길로는 「천 명 가운데 하나도 얻지 못한다」 하고, 도작은 「아직 한 사람도 얻은 자가 없다」 했다. 홍법대사는 「법화경을 행하는 것은 희론이다」라고 썼다. 이런 사람들이 법화경의 행자일 수는 없다.
경문은 법화경의 행자를 「능히 이 경을 지니고, 능히 이 경을 설하는」 사람이라 한다. 「능히 설한다」는 것은 「모든 경 가운데 가장 그 위에 있다」는 안락행품의 경문대로, 대일경 · 화엄경 · 열반경 · 반야경 등보다 법화경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일본에 불법이 건너온 지 칠백여 년 동안 「전교대사와 니치렌 외에는 한 사람도 법화경의 행자가 없다」. 제12장에서 본 전교대사의 공장 대결은 바로 이 「능설」의 실천이었고, 그 뒤 진언과 정면으로 겨루지 않은 일본 불교 안에서는 법화경의 행자가 끊겼다. 그리고 대성인이 다시 그것을 이으셨다.
두파작칠분이 없는 도리 — 정가의 대지진 · 문영의 대혜성
그렇다면 비방하는 자들에게 왜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지고 입이 막히는」 벌이 나타나지 않는가. 대성인은 그것이 「도리」라고 하신다. 그것들은 얕은 벌이요, 한두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풀이하셨다. 비방하는 자가 한두 사람이라면 두파 · 구색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까지 일본 전체가 비방하는 자다. 비유하면 머리카락이 모두 희어지면 흰 머리를 뽑아 버리기 어려워지는 것과 같으니, 두파 · 구색이 없는 것은 도리다.
그 대신 니치렌은 「염부제 제일의 법화경 행자」이므로, 그를 비방하고 원수로 대하는 사람의 편을 드는 사람은 「염부제 제일의 대난」을 만난다. 그것이 일본국을 뒤흔든 정가의 대지진이요, 온 하늘을 벌하는 문영의 대혜성이다. 니치칸 상인은 이것이 비방하는 자의 벌이 큰 것에 기대어 능홍의 사덕이 큰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다. 정가의 대지진은 「입정안국론」을 쓰시는 계기가 되었고, 대성인은 이 대지진과 문영의 대혜성을 말법에 지용보살이 출현하는 전조로 보셨다. 벌의 크기가 곧 덕의 크기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 덕은 누가」 — 능홍의 사덕
「부처님 멸후에 불법을 행하는 자를 원수로 대한 일이 있었으나 지금과 같은 대난은 한 번도 없었다. 남무묘법연화경을 일체중생에게 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두 문장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진다. 지금과 같은 대난이 일찍이 없었던 것은, 남무묘법연화경을 일체중생에게 권한 사람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7장부터 제12장까지 확인해 온 것, 곧 가섭 · 아난도, 마명 · 용수도, 천태도, 전교도 넓히지 않은 그 법을 처음으로 넓힌 사람이기에, 그 사람을 박해한 죄도 일찍이 없을 만큼 크고, 그 죄를 드러내는 현상도 일찍이 없을 만큼 크다.
「이 덕은 누가 온 하늘 아래 눈을 마주하고 사해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느냐.」 장을 맺는 이 물음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법 · 상법 이천 년의 어떤 성인도 이 덕에 견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이 편 전체로써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선시초 제5편에서 이 덕을 「염부제일의 지인 · 성인 · 대인」으로 다시 펼쳐 보이신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부처님의 사자」를 외용, 「당제의 부모 · 사범 · 주군」을 내증으로 읽어, 이 장을 대성인이 말법의 주사친 삼덕을 갖춘 어본불이심을 밝히는 장으로 본다. 정가의 대지진 · 문영의 대혜성 같은 큰 현상은 능홍의 사덕의 크기를 드러내는 현증이다.
본문
疑つて云く設い正法の時は仏の在世に対すれば根機劣なりとも像末に対すれば最上の上機なり、いかでか正法の始に法華経をば用いざるべき随つて馬鳴・竜樹・提婆・無著等も正法一千年の内にこそ出現せさせ給へ、天親菩薩は千部の論師・法華論を造りて諸経の中第一の義を存す真諦三蔵の相伝に云く月支に法華経を弘通せる家・五十余家・天親は其の一也と已上正法なり、 像法に入つては天台大師・像法の半に漢土に出現して玄と文と止との三十巻を造りて法華経の淵底を極めたり、像法の末に伝教大師・日本に出現して天台大師の円慧・円定の二法を我が朝に弘通せしむるのみならず円頓の大戒場を叡山に建立して日本一州皆同じく円戒の地になして上一人より下万民まで延暦寺を師範と仰がせ給う豈に像法の時法華経の広宣流布にあらずや、
의심하여 이르기를, 설령 정법의 때는 부처님 재세에 비하면 근기가 열등하다 하여도 상법 · 말법에 비하면 가장 뛰어난 상기(上機)이니라. 어찌 정법의 처음에 법화경을 쓰지 않았다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명 · 용수 · 제바 · 무착 등도 정법 일천 년 안에 출현하셨느니라. 천친보살은 천 부의 논사로서 『법화론(法華論)』을 지어 모든 경 가운데 제일이라는 뜻을 지녔고, 진제삼장(真諦三蔵)의 상전(相伝)에 이르기를 「월지에서 법화경을 홍통한 집안이 오십여 집이요, 천친은 그 하나이니라」고 하였느니라. 이상은 정법이니라. 상법에 들어서는 천태대사가 상법의 중간에 한토에 출현하여 『현의』와 『문구』와 『지관』의 삼십 권을 지어 법화경의 깊은 밑바닥을 다하였느니라. 상법의 끝에는 전교대사가 일본에 출현하여 천태대사의 원혜 · 원정 두 법을 우리나라에 홍통하였을 뿐 아니라, 원돈의 대계장을 히에이산에 건립하여 일본 한 나라를 모두 같이 원계의 땅으로 만들어,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까지 엔랴쿠사를 사범으로 우러르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어찌 상법의 때에 법화경이 광선유포한 것이 아니겠느냐.
答えて云く如来の教法は必ず機に随うという事は世間の学者の存知なり、しかれども仏教はしからず上根上智の人のために必ず大法を説くならば初成道の時なんぞ法華経をとき給はざる正法の先五百年に大乗経を弘通すべし、 有縁の人に大法を説かせ給うならば浄飯大王・摩耶夫人に観仏三昧経・摩耶経をとくべからず、無縁の悪人謗法の者に秘法をあたえずば覚徳比丘は無量の破戒の者に涅槃経をさづくべからず、不軽菩薩は誹謗の四衆に向つていかに法華経をば弘通せさせ給いしぞ、されば機に随つて法を説くと申すは大なる僻見なり。
답하여 이르기를, 여래의 교법은 반드시 기에 따른다는 것은 세간 학자의 생각이니라.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상근 · 상지의 사람을 위해 반드시 대법을 설한다면, 처음 성도하셨을 때 어찌하여 법화경을 설하지 아니하셨느냐. 정법의 앞 오백 년에 대승경을 홍통하였어야 하느니라. 인연 있는 사람에게 대법을 설하신다면 정반대왕(浄飯大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에게 『관불삼매경』 · 『마야경』을 설하지 않으셨어야 하느니라. 인연 없는 악인과 비방하는 자에게 비법을 주지 않는다면 각덕비구(覚徳比丘)는 한량없는 파계한 자들에게 『열반경』을 주지 않았어야 하느니라. 불경보살(不軽菩薩)은 비방하는 사중을 향하여 어찌하여 법화경을 홍통하셨느냐. 그러므로 기에 따라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은 큰 잘못된 견해(僻見)이니라.
어구 풀이
- 上機상기
-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힘이 뛰어난 근기. 질문자는 정법의 중생이 부처님 재세에 비하면 열등하지만 상법 · 말법에 비하면 가장 뛰어난 근기라고 주장한다.
- 無著무착
- 아상가. 천친의 형. 불멸 900년 무렵 북인도에서 유가유식의 대승을 제창했다고 하며, 『섭대승론』 · 『유가사지론』 등이 그의 저술로 전한다.
- 法華論법화론
- 천친이 지은 법화경의 주석서 『묘법연화경우바제사』. 「개목초」는 천친이 법화경의 종자에 의해 「종자무상(種子無上)」을 세웠다고 하신다.
- 真諦三蔵진제삼장
- 서인도 출신으로 6세기에 중국 양 · 진에 와서 『섭대승론』 등 유식의 논서를 많이 번역한 삼장. 구마라집 · 현장 · 불공과 함께 사대 번역가로 꼽힌다.
- 玄と文と止との三十巻현 · 문 · 지 삼십 권
- 천태대사의 『법화현의』 · 『법화문구』 · 『마하지관』 각 10권, 이른바 천태 삼대부.
- 浄飯大王・摩耶夫人정반대왕 · 마야부인
- 석존의 아버지와 생모. 정반대왕(슈도다나)은 가비라위국(카필라바스투)의 왕이고, 마야부인은 그 왕비로서 석존을 낳고 이레 뒤에 죽어 도리천에 태어났으며, 대신 그 동생 마하파사파제가 석존을 길렀다고 전한다.
- 観仏三昧経・摩耶経관불삼매경 · 마야경
- 『관불삼매경』은 『불설관불삼매해경』의 약칭으로, 석존이 아버지 정반왕과 이모 마하파사파제 등을 위해 관불삼매(부처를 마음에 관찰하는 명상)에 머물러 해탈을 얻는 법을 설한 경이다. 『마야경』은 『마하마야경』 또는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이라고도 하며,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의 은혜를 갚으려 도리천에 올라가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90일 동안 설법하여 초과(初果)의 이익을 얻게 했다는 경이다. 부처님이 입멸하자 마야부인이 도리천에서 급히 내려와 부처님의 발우와 석장을 안고 울었고,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금관의 뚜껑을 열고 몸을 일으켜 모공에서 광명을 놓아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만났다고 설한다.
- 覚徳比丘각덕비구
- 『열반경』 권3 금강신품에 설해진, 정법을 지킨 비구. 과거 환희증익여래의 멸후, 정법이 사라지기 40년 전에 각덕은 구부의 경전을 널리 설하고 비구들에게 「노비 · 소 · 양 등 법답지 않은 것을 기르지 말라」고 제지했다. 이를 들은 많은 파계 비구들이 악심을 일으켜 칼과 막대기로 그를 해치려 하자, 국왕 유덕왕이 그들과 싸워 각덕을 지켰으나 왕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죽었다. 유덕왕은 아촉불국에 태어나 그 부처의 첫째 제자가 되고, 각덕비구도 목숨을 마친 뒤 그 나라에 태어나 둘째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 不軽菩薩불경보살
- 법화경 상불경보살품에 설해진 상불경보살. 위음왕불의 상법 시대에 출현하여 증상만의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사중에게 욕설과 매도, 막대기와 기와 · 돌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 하여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하여 감히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외며 일체중생을 예배했다. 석존의 과거세의 모습의 하나로 설해진다. 불경보살을 박해한 이들은 뒤에 뉘우쳤으나 다 소멸하지 못한 죄로 천 겁 동안 아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은 뒤, 다시 불경보살의 교화를 만나 불도에 머물 수 있었다고 한다.
- 僻見벽견
- 치우치고 그릇된 견해.
다시 일으킨 의문 — 정법은 최상의 상기가 아닌가
제13장에서 묘법 유포의 필연을, 제14장에서 그 법을 넓히는 사람의 덕을 밝히신 대성인은, 이 장에서 다시 한 번 문답을 세워 앞의 논의 전체를 다지신다. 이 물음은 「백법이 은몰하는 말법에 들어 법화경의 간심인 남무묘법연화경이 광선유포한다고 설한 데 대하여」 일어난 의심이다.
질문자의 논리는 이렇다. 정법 시대의 중생은 부처님 재세에 비하면 근기가 열등하겠지만, 상법 · 말법의 중생에 비하면 가장 뛰어난 상기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법의 처음에 법화경이 넓혀졌어야 하지 않는가. 실제로 마명 · 용수 · 제바 · 무착 같은 대논사들은 모두 정법 천 년 안에 나왔다. 천친보살은 「천 부의 논사」로서 『법화론』을 지어 법화경이 모든 경 가운데 제일이라는 뜻을 밝혔고, 진제삼장의 상전에 따르면 인도에서 법화경을 홍통한 집안이 오십여 집이었으며 천친은 그 하나였다. 이것이 정법이다. 상법에 들어서는 천태대사가 중국에서 삼대부 삼십 권을 지어 법화경의 밑바닥을 다했고, 상법의 끝에는 전교대사가 일본에서 원정 · 원혜뿐 아니라 원돈의 대계장까지 세워 일본 전체를 원계의 땅으로 만들고 위아래가 모두 엔랴쿠사를 사범으로 우러르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상법에 법화경이 광선유포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하여 법화경의 유포가 말법에 한정된다고 하느냐.
이 질문을 정리하면 이렇다. 정법 시대는 상법 · 말법에 비하면 최상의 상기이니 정법의 처음에 법화경이 넓혀졌어야 하지 않는가. 하물며 상법에는 천태도 전교도 법화경을 광선유포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법화경의 유포가 말법에 한정되느냐는 물음이다.
이 의문은 이 편에서 제7장부터 제12장까지 확인해 온 사실들을 질문자의 입장에서 다시 늘어놓은 것이다. 용수 · 천친이 법화경을 알았다는 것(제7장), 천태가 법화경 제일을 세웠다는 것(제9장), 전교가 원돈의 대계를 세웠다는 것(제12장) — 대성인 자신이 인정하신 이 사실들이, 질문자의 손에서는 「그러니 정법 · 상법에도 법화경은 유포했다」는 반론의 근거로 바뀐다. 선시초는 이렇게 상대의 가장 강한 논거를 정면에 세운 뒤에 답한다.
처음에는 재세에 맞추어, 지금은 멸후에 맞추어
그런데 선시초는 이미 처음부터 「불교는 기에 의하지 않고 오직 시에 의한다」는 것을 밝혀 왔다. 그런데 왜 여기서 또 이런 의문을 세우는가.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풀이한다. 「이 글의 처음에는 재세에 맞추어 그 모습을 밝혔으므로, 지금은 멸후에 맞추어 이를 의심하는 것이다.」
선시초 제1편은 석존 재세의 일을 들어, 부처님이 성도 후 사십여 년 동안 법화경을 설하지 않으신 것은 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설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説時未至故)」이라고 논증했다. 그것은 재세의 이야기였다. 이제 이 편에서 멸후 이천 년의 역사를 훑었으니, 같은 원리가 멸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지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질문자는 멸후의 사실, 곧 정법의 논사와 상법의 천태 · 전교를 들어 다시 「기」의 논리로 반론하는 것이다. 니치칸 상인의 풀이는 이 장이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논증의 범위를 재세에서 멸후로 넓히는 자리임을 보여 준다.
「기에 따른다」는 통념과 네 가지 반례
대성인의 답은 먼저 질문자의 전제를 짚는 데서 시작한다. 「여래의 교법은 반드시 기에 따른다는 것은 세간 학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질문자의 반론 밑바닥에는 「뛰어난 근기의 사람에게는 뛰어난 법을, 인연 있는 사람에게는 큰 법을, 인연 없는 악인에게는 비법을 주지 않는다」는 통념이 깔려 있다. 제10장에서 본 법상종의 「불교는 기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통념 위에 서 있다. 대성인은 이 통념을 네 가지 반례로 하나하나 무너뜨리신다.
첫째, 상근 · 상지의 사람에게 반드시 대법을 설한다면, 석존은 처음 성도하셨을 때 어찌하여 법화경을 설하지 않으셨는가. 초성도의 화엄 설법 때에는 법혜 · 공덕림 · 금강당 · 금강장 · 문수 · 보현 같은 대보살들이 모였다는 것은 선시초 제1편에서 보았다. 그런 상근의 대중이 있었는데도 법화경은 설해지지 않았다. 또 정법이 가장 뛰어난 상기의 시대라면, 정법의 앞 오백 년에 대승경을 넓혔어야 한다. 그러나 제7장에서 본 대로 가섭 · 아난은 소승만을 넓혔다.
둘째, 인연 있는 사람에게 대법을 설한다면, 석존에게 가장 인연 깊은 사람은 부모다. 그런데 석존은 아버지 정반대왕에게는 『관불삼매경』을, 어머니 마야부인에게는 『마야경』을 설하셨다. 『관불삼매경』은 부처를 마음에 관찰하는 명상으로 해탈을 얻는 법을, 『마야경』은 도리천에 올라 어머니를 위해 90일 동안 설법하여 초과의 이익을 얻게 한 일을 설한 경이다. 둘 다 법화경이 아닌 권교다. 가장 인연 깊은 부모에게조차 법화경을 설하지 않으셨다면, 「인연 있는 사람에게 대법을」이라는 원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인연 없는 악인과 비방하는 자에게 비법을 주지 않는다면, 각덕비구는 한량없는 파계한 자들에게 『열반경』을 주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각덕비구가 살던 나라에는 파계한 악비구가 가득했는데도 그는 법을 설했고, 바로 그 때문에 칼과 막대기의 난을 만났다. 이 이야기는 「삼대비법품승사」에서 대성인이 「유덕왕 · 각덕비구의 그 옛일을 말법 탁악의 미래에 옮길 때」라고 하시며 본문의 계단 건립의 때와 이으신 바로 그 이야기이기도 하다.
넷째, 불경보살은 자신을 비방하는 사중을 향해 어찌하여 법화경을 홍통했는가. 그는 욕설과 매도, 막대기와 기와 · 돌의 박해 속에서도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한다」며 모든 사람을 예배했고, 박해한 이들은 그 죄로 천 겁 동안 아비지옥의 고통을 받은 뒤 다시 불경보살의 교화를 만나 불도에 머물 수 있었다고 전한다. 불경보살은 역연(逆縁)의 무리 한가운데에서 법을 넓혔다.
- ①상근 · 상지에게 반드시 대법을?초성도에 법화경을 설하지 않으셨고, 정법 앞 오백 년에는 소승을 넓혔다
- ②인연 있는 이에게 대법을?아버지 정반대왕에게 『관불삼매경』,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마야경』
- ③인연 없는 악인 · 비방자에게는 비법을 주지 않는다?각덕비구는 한량없는 파계한 자들에게 『열반경』을 주었다
- ④불경보살은 비방하는 사중을 향해 법화경을 홍통했다
네 반례는 모두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한 것이 아닌 예증」이라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상근의 대중에게도 대법을 설하지 않은 때가 있었고, 가장 인연 깊은 부모에게도 권교를 설했으며, 반대로 파계한 악인과 비방하는 자에게도 대법을 설했다. 무엇을 설하느냐를 정한 것은 듣는 사람의 근기나 인연이 아니었다.
대법은 시에 의해 넓혀진다
「그러므로 기에 따라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은 큰 잘못된 견해이다.」 곧 「불법은 시에 의해 홍통되는 것이지 기에 의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이다. 이것이 선시초 제1편의 「불법은 시에 의한다」를 멸후의 역사에 대어 다시 확인한 결론이다.
이 결론에 비추어 질문자의 반론을 다시 보면, 정법의 중생이 아무리 상기였다 해도 정법은 법화경이 넓혀질 때가 아니었고, 상법에 천태 · 전교가 법화경을 넓혔다 해도 그것은 적문의 이에 머문 것이었으며, 법화경의 간심인 남무묘법연화경은 아직 넓혀지지 않았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이어진다. 선시초 제16장은 「용수 · 세친 등은 법화경의 실의를 펴지 않았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용수 · 천태 · 전교의 홍통을 차례로 검토하고, 그들이 넓히지 못하고 남긴 「최대의 심밀한 정법」이 말법의 처음에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한다는 데로 나아간다. 이 흐름은 선시초 제3편 「용수 · 천태 · 전교의 홍통과 말법의 비법」에서 다룬다.
네 반례 가운데 불경보살의 예는 특히 말법과 깊이 이어진다. 서강이 인용하는 「소야입도전허어서」는 「今は既に末法に入つて在世の結縁の者は漸漸に衰微して権実の二機皆悉く尽きぬ彼の不軽菩薩末世に出現して毒鼓を撃たしむるの時なり」(1027쪽)라 하신다. 지금은 이미 말법에 들어 재세에 결연한 자들이 점점 쇠하여 권 · 실의 두 기가 모두 다했으니, 저 불경보살이 말세에 출현하여 독고(毒鼓)를 치게 하는 때라는 것이다. 제13장에서 본 「법화경에 결연이 없는 자」, 니치칸 상인이 말한 「본미유선」의 중생에게는 그 근기에 맞추어 법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비방을 무릅쓰고 최고의 법을 들려주어 그것을 인연으로 삼게 하는 길밖에 없다. 기에 따르지 않고 시에 따른다는 이 장의 결론은, 말법의 홍교가 왜 박해를 피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니치칸 상인의 풀이에 따르면 이 장은, 선시초 처음에 재세에 맞추어 밝힌 「불법은 기가 아니라 시에 의한다」는 원리를 멸후에 맞추어 다시 확인하는 문답이며, 「기에 따라 법을 설한다」는 세간의 통념을 큰 잘못된 견해로 깨뜨린 것이다.
이 편을 맺으며
제2편은 「용수 · 천친도 이 뜻을 말했는가」라는 한 물음에서 시작하여, 정법 · 상법 이천 년의 불교사를 대집경의 오오백세에 하나하나 맞추어 걸어왔다. 정법 처음 오백 년, 해탈견고의 때에는 가섭 · 아난 등 부법장의 앞 사람들이 소승을 넓혔다. 정법 뒤 오백 년, 선정견고의 때에는 마명 · 용수 · 제바 등이 대승으로 소승을 깨뜨렸으나 대승과 법화경의 승렬은 분명히 하지 않았다. 상법 처음 오백 년, 독송다문견고의 때에는 불법이 중국으로 건너가 남삼북칠의 혼란을 거쳐 천태대사가 법화경 제일을 세웠다. 상법 뒤 오백 년, 다조탑사견고의 때에는 법상 · 화엄 · 진언이 권력의 후원을 받아 천태의 정의를 덮었고, 일본에서는 육종이 전래된 뒤 전교대사가 육종을 꺾고 원돈의 대계를 세웠으나 진언과는 공장에서 겨루지 않았다.
이 역사를 관통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각 시대의 성인들이 저마다 때에 맞는 법을 넓혔다는 것이다. 그들이 법화경의 극리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감냉연 외적시의」의 지혜였고, 그 까닭은 기와 시와 부촉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이 뜻」, 곧 법화경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를 일체중생에게 권한 사람은 이천 년 동안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두 사실이 겹치는 자리에서 제13장의 결론이 나온다. 오오백세의 예언이 정상 이천 년의 역사에서, 그리고 몽골의 침공이라는 눈앞의 「투쟁견고」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면, 백법은몰 다음에 법화경의 대백법이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하는 것도 틀림없다. 「대지는 뒤집혀도 이 일은 틀림없다」는 선언은 이 역사의 무게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제14장은 그 법을 넓히는 사람에게로 눈을 돌려, 「일본국 일체중생의 부모」 「당제의 부모, 염불자 · 선중 · 진언사의 사범이요 주군」이라는 주사친 삼덕의 선언과, 그를 박해한 죄가 정가의 대지진 · 문영의 대혜성이라는 「염부제 제일의 대난」으로 나타난다는 현증을 보였다. 제15장은 「정법은 최상의 상기이니 법화경이 넓혀졌어야 한다」는 반론을 네 가지 반례로 깨뜨려, 「기에 따라 법을 설한다는 것은 큰 잘못된 견해」라는 선시초의 근본 원리를 멸후의 역사 위에서 다시 확인했다.
다음 편, 선시초 제3편 「용수 · 천태 · 전교의 홍통과 말법의 비법」은 이 편에서 한 줄씩 지나간 세 성인 — 용수보살 · 천태대사 · 전교대사 — 의 홍통을 다시 하나하나 자세히 검토한다. 그들은 무엇을 넓혔고 무엇을 넓히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이 「아직 홍통하지 않은 최대의 심밀한 정법」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말법의 처음에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해야 하는가. 이 편에서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 그 「말하지 않은 것」의 정체가 다음 편에서 드러난다.
더 읽기
- 선시초 제1편 「불법을 배우려면 먼저 시를 익혀라」 — 「불법은 시에 의한다」는 총론과 대집경 오오백세의 경문 · 석의 증거
- 선시초 제3편 「용수 · 천태 · 전교의 홍통과 말법의 비법」 — 이 편에서 지나간 세 성인의 홍통과 그들이 남긴 비법
- 오시팔교 — 남삼북칠의 교판과 천태대사의 오시팔교, 진언의 교판 비판
- 본존문답초 제3편 「세 대사의 사적과 불법의 전래」 — 선무외 · 홍법 · 자각 · 지증과 진언의 일본 전래
- 용수 · 천태대사 · 전교대사 — 정법 · 상법의 세 성인의 생애
- 관심의 본존초 —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사람」과 사의의 네 부류, 지용보살의 출현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선시초」(撰時抄), 건치 원년(1275). 일본어 어서전집 256–293쪽.
- 니치렌 대성인, 「개목초」 · 「관심의 본존초」 · 「보은초」 · 「십법계명인과초」 · 「현방법초」 · 「쇼미쓰보어서」 · 「종종어진무어서」 · 「도키입도전답서」 · 「사도어서」 · 「법화행자봉난사」 · 「삼대비법품승사」 · 「소야입도전허어서」 · 「교행증어서」 · 「제법실상초」 · 「중생신심어서」, 『어의구전』. 일본어 어서전집.
- 『묘법연화경』, 구마라집 역, T9 no.262 (방편품 · 법사품 · 견보탑품 · 안락행품 · 상불경보살품 · 여래신력품 · 약왕보살본사품 · 다라니품 · 보현보살권발품).
- 『대방등대집경』(대집경), T13 no.397.
- 『대반열반경』, T12 no.374 (금강신품의 각덕비구 · 유덕왕).
- 『관보현보살행법경』(보현경).
- 『부법장인연전』.
- 천태대사 지의, 『법화현의』 T33 no.1716, 『마하지관』 T46 no.1911.
- 『대일경』 T18 no.848, 『대일경소』 T39 no.1796.
- 현장, 『대당서역기』.
- 『송고승전』 · 『경덕전등록』.
- 전교대사 최징, 『산가학생식』 · 『현계론』 · 『수호국계장』 · 『법화수구』.
- 니치칸 상인, 「선시초 문단」(撰時抄文段)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연구
- 『선시초 강의』 — 서강 및 제8~15장의 장별 게시(本文 · 現代語訳 · 語釈 · 講義).
- Jan Nattier, Once Upon a Future Time: Studies in a Buddhist Prophecy of Decline, Asian Humanities Press, 1991.
- Paul Groner, Saichō: The Establishment of the Japanese Tendai School, Berkeley Buddhist Studies Series, 1984.
- Ryūichi Abé, The Weaving of Mantra: Kūkai and the Construction of Esoteric Buddhist Discours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The Selection of the Time」 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