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양쯔강) 가의 진나라 도읍 금릉 — 궁성 지붕들의 원경과 강 위의 안개

천태 · 전교의 홍통

보은초 · 제3편 · 제8~12장

報恩抄 — 天台・伝教の弘通어서 298–305쪽
저술
건치 2년(1276) 7월 21일 · 미노부
장
제8~12장
쪽수
어서 298:02–305:04
받는 이
아와 세이초사의 조켄보 · 기조보

여덟 편 · 보은초 37장 구성도

37장 + 송문 → 여덟 편
  1. 序講293 앞저술의 유래 · 대의 · 원의
  2. 보은의 도리와 불법을 배우는 길
  3. 정법 · 상법의 홍통과 진언의 미란
  4. 정법 · 상법의 홍통과 진언의 미란
  5. 정법 · 상법의 홍통과 진언의 미란
  6. 대성인의 간효와 진언 파절
  7. 대성인의 간효와 진언 파절
  8. 지은보은과 삼대비법
  9. 지은보은과 삼대비법

「보은초」 여덟 편 가운데 제3편은 정법 · 상법의 홍통과 진언의 미란을 더듬는 둘째 갈래(제2~4편)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제2편이 석존 재세와 정법 일천 년의 법난으로 「여래의 재세에도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에랴」라는 경문을 증명했다면, 이 편은 같은 경문이 상법 시대 중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다시 증명되었는가를 묻는다. 천태대사는 광택사 법운이 세운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의 서열을 홀로 뒤집었다가 「머리를 깨뜨려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진(陳)나라 황제 앞의 공장 대결에서 경문 하나로 백여 명의 고승을 침묵시켰다. 그러나 천태가 세상을 떠나자 법상 · 화엄 · 진언 세 종이 들어와 법화경은 다시 둘째 · 셋째 자리로 밀려났고, 묘락대사의 삼십 권이 이를 다시 꺾었다. 일본에서는 전교대사가 남도 육종의 학장 열네 명을 간무 천황 앞에서 굴복시키고, 진언종의 이름을 지워 대일경을 법화천태종의 방의경(傍依經)으로 삼았다. 그런데 왜 전교대사는 진언과 천태의 승렬을 제자들에게조차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는가 — 이 물음이 다음 편, 예산이 진언으로 기울어 가는 이야기의 문을 연다.

이 편의 다섯 장은 「사람」과 「법」이 엇갈리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법운은 하늘에서 꽃이 내리고 비가 내리는 영험을 보였고 황제가 몸소 섬긴 고승이었지만, 그의 소(疏)는 법화경을 「아직 석연하지 않은 경」이라 했다. 현장은 열일곱 해 동안 인도를 다녀온 대역경가였고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은 인도의 고귀한 혈통에 인(印)과 진언이라는 새 법을 갖추어 왔지만, 그들의 판정은 법화경의 경문과 어긋났다. 이에 맞선 천태 · 묘락 · 전교는 언제나 「증문(證文)을 내라」는 한 가지 물음으로 맞섰다. 제1편에서 대성인이 세우신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원칙이 이 편에서 역사 속의 실례로 펼쳐지는 셈이다.

또 하나의 축은 공장(公場) 대결이다. 천태대사는 진나라 황제 앞에서, 전교대사는 간무 천황의 다카오사(高雄寺) 행차 자리에서 여러 종의 학장들과 대론했다. 국주가 몸소 법의 사정(邪正)을 가리는 이 형식은 대성인이 「입정안국론」 이래 막부에 거듭 요구하신 것이기도 하다. 대성인이 이 두 대사의 공장 대결을 자세히 그리신 뜻을, 대성인 자신의 국가 간효와 겹쳐 읽을 때 이 편의 무게가 드러난다.

마지막 제12장은 이 편의 경첩이다. 니치칸 상인은 「보은초 문단」에서 제7장부터 이어진 「황멸도후」의 증명이 정법 시대 사의(四依)의 논사들, 상법 시대의 세 대사(천태 · 묘락 · 전교)로 끝나고, 여기서부터 말법을 밝히는 단락이 시작된다고 나누었다. 전교대사가 『의빙집』에서 진언의 근원을 짚어 두기만 하고 대파절을 하지 않은 일은, 진언의 미란을 끝까지 따지는 일이 말법의 대성인에게 남겨졌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편의 장

第八章漢土天台大師の弘通제8장 한토 천태대사의 홍통 — 남삼북칠의 열 갈래 교판, 그 으뜸이던 광택사 법운의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과 그 영험, 이를 의심해 일체경을 다시 읽은 천태대사가 「법운은 방법으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외치자 남북의 승려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第九章天台大師の公場対決제9장 천태대사의 공장 대결 — 진나라 황제 앞에서 무량의경 「미현진실」, 열반경 제9권 「추수동장 · 군습」, 법화경 「이금당」과 다보 · 분신의 증명으로 남북의 승려 백여 명을 침묵시키니, 「교주 석존이 두 번 출현하셨는가」라는 찬탄이 인도에까지 들렸다.
第十章天台滅後、三宗の迷乱제10장 천태 멸후 세 종의 미란 — 현장의 법상종(삼승진실 · 일승방편 · 오성각별), 법장의 화엄종(근본법륜 · 지말법륜),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의 진언종(「민의 만언 · 천자의 일언」)이 들어와 법화경을 다시 낮추었고, 묘락대사가 삼십 권의 주석으로 세 종을 한꺼번에 꺾었다.
第十一章日本伝教大師の弘通제11장 일본 전교대사의 홍통 — 긴메이 천황 때의 불교 전래와 쇼토쿠 태자, 남도 육종의 성립, 법장의 『기신론소』에서 천태의 글을 발견한 최징이 연력 21년 다카오사에서 육종의 학장 열네 명을 굴복시킨 일과 그들의 사표(謝表).
第十二章伝教大師の真言破折제12장 전교대사의 진언 파절 — 대일경의 전래와 전교대사의 입당 상승, 진언종의 이름을 지워 칠종으로 둔 판단, 대승 계단을 둘러싼 쟁론 속에서 승렬을 분명히 가르치지 않은 사정, 『의빙집』에 실린 용지보살의 부탁과 불공의 『보리심론』 문제.
제8장 한토 천태대사의 홍통
어서 298쪽 2행 ~ 299쪽 9행 · 第八章 漢土天台大師の弘通

본문

本文 · 一어서 298쪽 2~13행
本文 · 어서 원문

像法に入つて五百年・仏滅後・一千五百年と申せし時漢土に一人の智人あり始は智顗・後には智者大師とがうす、法華経の義をありのままに弘通せんと思い給しに天台已前の百千万の智者しなじなに一代を判ぜしかども詮して十流となりぬ所謂南三北七なり十流ありしかども一流をもて最とせり、所謂南三の中の第三の光宅寺の法雲法師これなり、此の人は一代の仏教を五にわかつ其の五の中に三経をえらびいだす、所謂華厳経・涅槃経・法華経なり一切経の中には華厳経第一・大王のごとし涅槃経第二・摂政関白のごとし第三法華経は公卿等のごとし此れより已下は万民のごとし、此の人は本より智慧かしこき上慧観・慧厳・僧柔・慧次なんど申せし大智者より習ひ伝え給るのみならず南北の諸師の義をせめやぶり山林にまじわりて法華経・涅槃経・華厳経の功をつもりし上梁の武帝召し出して内裏の内に寺を立て光宅寺となづけて此の法師をあがめ給う、法華経をかうぜしかば天より花ふること在世のごとし、天鑒五年に大旱魃ありしかば此の法雲法師を請じ奉りて法華経を講ぜさせまいらせしに薬草喩品の其雨普等・四方倶下と申す二句を講ぜさせ給いし時・天より甘雨下たりしかば天子御感のあまりに現に僧正になしまいらせて諸天の帝釈につかえ万民の国王ををそるるがごとく我とつかへ給いし上或人夢く此人は過去の灯明仏の時より法華経をかうぜる人なり、

풀이

상법(像法)에 들어 오백 년, 불멸후 일천오백 년이라 하던 때에 한토(漢土)에 한 사람의 지인(智人)이 있었으니, 처음에는 지의(智顗)라 하고 뒤에는 지자대사(智者大師)라 칭하였느니라. 법화경의 뜻을 있는 그대로 홍통하고자 생각하셨는데, 천태 이전의 백천만 지자들이 갖가지로 일대(一代)의 가르침을 판별하였으나 간추리면 열 갈래가 되었으니 이른바 남삼북칠(南三北七)이니라. 열 갈래가 있었으나 그 가운데 한 갈래를 가장 으뜸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남삼 가운데 셋째인 광택사(光宅寺)의 법운(法雲) 법사가 이것이니라. 이 사람은 일대의 불교를 다섯으로 나누고 그 다섯 가운데서 세 경을 가려 내었으니, 이른바 화엄경 · 열반경 · 법화경이니라. 「일체경 가운데 화엄경이 제일로서 대왕과 같고, 열반경은 제이로서 섭정 · 관백과 같으며, 제삼인 법화경은 공경(公卿) 등과 같고, 이보다 아래는 만민과 같다」 하였느니라. 이 사람은 본디 지혜가 뛰어난 데다 혜관(慧觀) · 혜엄(慧嚴) · 승유(僧柔) · 혜차(慧次) 등이라 하는 큰 지자들에게서 배워 전해 받았을 뿐 아니라, 남북 여러 스승의 뜻을 쳐부수고 산림에 섞여 들어가 법화경 · 열반경 · 화엄경의 공을 쌓았으므로, 양(梁)의 무제(武帝)가 불러내어 궁궐 안에 절을 세워 광택사라 이름하고 이 법사를 받드셨느니라. 법화경을 강하니 하늘에서 꽃이 내리기를 재세 때와 같았느니라. 천감(天監) 5년에 큰 가뭄이 들자 이 법운 법사를 청하여 법화경을 강하게 하였는데, 약초유품의 「그 비는 두루 평등하여 사방에 함께 내린다(其雨普等 · 四方倶下)」라는 두 구를 강하실 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니, 천자는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승정(僧正)으로 삼고, 제천이 제석을 섬기고 만민이 국왕을 두려워하듯 몸소 섬기셨으며, 또 어떤 사람의 꿈에 「이 사람은 과거 등명불(燈明佛) 때부터 법화경을 강해 온 사람이다」라고 나타났느니라.

本文 · 二어서 298쪽 13행 ~ 299쪽 3행
本文 · 어서 원문

法華経の疏四巻あり此の疏に云く「此経未だ碩然ならず」亦云く「異の方便」等云云、正く法華経はいまだ仏理をきわめざる経と書かれて候、此の人の御義・仏意に相ひ叶ひ給いければこそ 天より花も下り雨もふり候けらめ、かかるいみじき事にて候しかば漢土の人人さては法華経は華厳経・涅槃経には劣にてこそあるなれと思いし上新羅・百済・高麗・日本まで此の疏ひろまりて大体一同の義にて候しに法雲法師・御死去ありていくばくならざるに梁の末・陳の始に智顗法師と申す小僧出来せり、南岳大師と申せし人の御弟子なりしかども師の義も不審にありけるかのゆへに一切経蔵に入つて度度御らんありしに華厳経・涅槃経・法華経の三経に詮じいだし此の三経の中に殊に華厳経を講じ給いき、別して礼文を造りて日日に功をなし給いしかば世間の人おもわく此人も華厳経を第一とおぼすかと見えしほどに法雲法師が一切経の中に華厳第一・涅槃第二・法華第三と立てたるがあまりに不審なりける故に・ことに華厳経を御らんありけるなり、

풀이

법화경의 소(疏) 4권이 있으니, 이 소에 이르기를 「이 경은 아직 석연(碩然)하지 않다」 하고, 또 이르기를 「다른 방편(異の方便)」 등이라 하였으니, 바로 법화경은 아직 부처의 이치를 다하지 못한 경이라고 쓰여 있느니라. 이 사람의 뜻이 부처의 뜻에 맞았기에 하늘에서 꽃도 내리고 비도 내렸으리라. 이토록 훌륭한 일이었으므로 한토의 사람들은 「그렇다면 법화경은 화엄경 · 열반경보다 못한 것이로구나」 생각하였고, 게다가 신라 · 백제 · 고려 · 일본에까지 이 소가 퍼져 대체로 한결같은 뜻이 되었는데, 법운 법사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나라 말 · 진(陳)나라 초에 지의 법사라 하는 젊은 승(小僧)이 나왔느니라. 남악대사(南岳大師)라 하던 사람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뜻에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던 까닭인지 일체경장(一切經藏)에 들어가 여러 차례 보셨는데, 화엄경 · 열반경 · 법화경의 세 경을 가려 내고, 이 세 경 가운데 특히 화엄경을 강하셨느니라. 따로 예문(禮文)을 지어 날마다 공을 들이셨으므로 세간 사람들은 「이 사람도 화엄경을 제일로 여기는가」 하고 보았는데, 이는 법운 법사가 일체경 가운데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이라 세운 것이 너무도 미심쩍었던 까닭에 특히 화엄경을 살펴보신 것이니라.

本文 · 三어서 299쪽 3~9행
本文 · 어서 원문

かくて一切経の中に法華第一・涅槃第二・華厳第三と見定めさせ給いてなげき給うやうは如来の聖教は漢土にわたれども人を利益することなしかへりて一切衆生を悪道に導びくこと人師のあやまりによれり、例せば国の長とある人・東を西といゐ天を地といゐいだしぬれば万民は・かくのごとくに心うべし、後にいやしき者出来して汝等が西は東・汝等が天は地なりといはば・もちうることなき上我が長の心に叶わんがために今の人を・のりうちなんどすべしいかんがせんとは・おぼせしかども・さてもだすべきにあらねば 光宅寺の法雲法師は謗法によつて地獄に堕ちぬとののしられ給う、其の時・南北の諸師はちのごとく蜂起しからすのごとく烏合せり、

풀이

이리하여 일체경 가운데 법화 제일 · 열반 제이 · 화엄 제삼이라 판정하시고 탄식하시기를, 「여래의 성교(聖敎)는 한토에 건너왔으나 사람을 이익함이 없고, 도리어 일체중생을 악도로 이끄는 것은 인사(人師)의 잘못 때문이다. 예컨대 나라의 우두머리인 사람이 동을 서라 하고 하늘을 땅이라 말하기 시작하면 만민은 그대로 알아들을 것이다. 뒤에 천한 자가 나와서 『너희의 서는 동이고 너희의 하늘은 땅이다』라고 하면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우두머리의 마음에 들고자 지금 이 사람을 꾸짖고 때리기도 할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셨으나,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일이 아니었으므로 「광택사의 법운 법사는 방법(謗法)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졌다」고 소리 높여 꾸짖으셨느니라. 그때 남북의 여러 스승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나고 까마귀처럼 모여들었느니라.

어구 풀이

像法に入つて五百年・仏滅後・一千五百年상법에 들어 오백 년 · 불멸후 일천오백 년
정법 일천 년 · 상법 일천 년 · 말법 만 년의 삼시설에 따라, 불멸후 1001년부터가 상법이고 그 오백 년째, 곧 불멸후 1500년 무렵이 천태대사의 출현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대성인은 석존 입멸을 주(周)의 목왕(穆王) 52년(기원전 949)으로 보는 당시의 통설에 따라 연대를 헤아리셨다. 『대집경』의 오오백세로 말하면 셋째 오백 년, 「독송다문견고」의 시대다.
智顗・智者大師지의 · 지자대사
지의(538~597)는 중국 천태종의 개조로, 천태대사 · 지자대사라 부른다. 지의는 휘, 자는 덕안(德安), 속성은 진(陳)씨. 형주 화용현(지금의 후난성)에서 태어나 18세에 상주 과원사에서 출가하고 율과 방등의 여러 경을 배웠다. 진의 천가 원년(560) 광주 대소산으로 남악대사를 찾아가 수행 끝에 법화삼매를 체득했고, 법화 제일의 뜻을 펴 『법화현의』 · 『법화문구』 · 『마하지관』의 법화 삼대부를 남겼다. 『마하지관』에서 관심(觀心)의 법문을 설해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법리와 실천 수행의 궤범을 밝혔다. 「지자대사」는 수(隋)의 진왕 양광(뒤의 양제)이 보살계를 받고 올린 호다.
南三北七남삼북칠
남북조 시대 중국 불교계의 교판이 양쯔강 남쪽에 셋, 북쪽에 일곱, 모두 열 갈래로 나뉘어 있던 것을 천태대사가 정리해 부른 이름이다(『법화현의』 권10). 남삼은 호구산의 급사(笈師) · 종애(宗愛) 법사 · 도량사의 관(觀) 법사(혜관), 북칠은 북지사 · 보리유지 · 불타삼장 · 어떤 스승(오종) · 어떤 스승(육종) · 북지 선사(이종 대승) · 북지 선사(일음교)로 열거된다. 대성인은 이 열 갈래가 대체로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으로 기울어 있었고 천태대사에게 깨뜨려졌다고 보신다.
光宅寺の法雲法師광택사의 법운 법사
법운(467~529)은 남조 양나라의 고승이다. 개선사 지장(智藏) · 장엄사 승민(僧旻)과 함께 「양의 삼대 법사」로 일컬어졌고, 성실론 · 열반경의 학장으로 이름 높았다. 지금의 장쑤성 이싱 사람으로 속성은 주(周)씨, 일곱 살에 출가해 서른에 법화경 · 정명경(유마경)을 강했다. 천감 7년(508) 칙명으로 광택사의 주지가 되었고, 천감 10년(511) 화림원에서 법화경을 강설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리는 기서가 있었다고 전한다. 보통 6년(525) 대승정에 올랐다. 도량사 혜관 · 정림사 승유 · 혜차가 세운 오시교(유상교 · 무상교 · 억양교 · 동귀교 · 상주교)를 받아, 열반경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慧観・慧厳・僧柔・慧次혜관 · 혜엄 · 승유 · 혜차
모두 남북조 시대에 활약한 승려다. 혜관은 청하 사람으로 속성은 최(崔)씨, 오시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혜엄(363~443)은 예주 사람으로 속성은 범(范)씨. 승유(431~494)는 선 · 율을 배우고 방등의 여러 경에 통했다. 혜차(434~490)는 속성이 윤(尹)씨다. 법운은 이들의 교판을 이어받아 남삼의 셋째인 오시교의 대표가 되었다.
梁の武帝양의 무제
남조 양나라를 세운 황제 소연(蕭衍, 재위 502~549)이다. 불법에 대한 귀의가 두터워 스스로 경을 강하고 사신(捨身)을 거듭했다. 그 발원은 「제바달다는 지옥에 떨어졌어도 마침내 성불했지만, 울두람불(鬱頭羅弗)은 천계에 났다가 뒤에 불법을 등져 지옥에 떨어졌다. 그러니 나는 제바가 되어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울두람불이 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天鑒五年に大旱魃천감 5년의 큰 가뭄
천감은 양 무제의 연호로, 5년은 506년이다. 本文은 이때 법운이 법화경을 강해 비를 내리게 하고 그 자리에서 승정이 되었다고 전한다. 승전류에는 법운이 대승정에 오른 해를 보통 6년(525)으로 적는 것도 있다.
其雨普等・四方倶下그 비는 두루 평등하여 사방에 함께 내린다
법화경 약초유품 제5의 게송 「그 비는 두루 평등하여 사방에 함께 내리고, 흘러 적심이 한량없어 온 땅이 흡족하다」의 앞 두 구다. 천태대사는 『법화문구』에서 이를 「비를 쏟는 비유」로 풀어, 부처가 팔음(八音) · 사변(四辯)으로 법의 비를 쏟으니 사방에 함께 내려 한때에 함께 듣게 되며, 사등(四等)이란 뿌리 · 줄기 · 가지 · 잎, 곧 신(信) · 계(戒) · 정(定) · 혜(慧)를 가리키고, 무릇 마음 있는 자는 모두 그 은택을 입으므로 「온 땅이 흡족하다」고 한다고 했다.
灯明仏등명불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의 약칭이다. 법화경 서품에서 석존이 무량의처삼매에 들고 꽃비가 내리며 땅이 육종으로 진동하고 미간 백호에서 빛을 놓아 동방 만팔천 세계를 비추자, 미륵보살이 대중을 대신해 그 까닭을 묻고 문수사리보살이 답한다. 과거에 일월등명불이 있어 성문에게는 사제, 연각에게는 십이인연, 보살에게는 육바라밀을 설했고, 같은 이름의 부처가 이만 분 이어 나왔으며, 그 마지막 일월등명불이 무량의경을 설하고 무량의처삼매에 든 뒤 지금과 같은 상서를 보이고 묘광보살에게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묘광보살이 곧 문수 자신이었다. 법운이 「등명불 때부터 법화경을 강해 온 사람」이라는 꿈은 그를 묘광보살에 견준 찬탄이다.
法華経の疏四巻법화경의 소 4권
법운의 법화경 주석으로는 『법화의기(法華義記)』 8권이 전한다. 쇼토쿠 태자가 이 『의기』를 참고해 『법화의소』를 지었다고 하며, 本文의 「일본까지 이 소가 퍼졌다」는 이를 가리킨다. 다만 本文이 인용하는 「이 경은 아직 석연하지 않다」 · 「다른 방편」의 문구는 현존 『법화의기』에서 그대로는 찾아지지 않는다.
此経未だ碩然ならず・異の方便이 경은 아직 석연하지 않다 · 다른 방편
법화경이 아직 부처의 이치를 남김없이 드러낸 크고 분명한 가르침이 아니며, 상주불성을 설하는 열반경에 견주면 아직 방편의 한 형태라는 뜻이다. 대성인은 「바로 법화경은 아직 불리(佛理)를 다하지 못한 경이라고 쓰여 있다」고 요약하셨다.
新羅・百済・高麗신라 · 백제 · 고려
신라는 한반도 남동부의 왕조(전57~935)로 뒤에 삼국을 통일했다. 백제는 한반도 남서부의 왕국으로 『삼국지』 동이전 마한 54국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전신이라 하며, 일찍부터 중국 문화를 받아 불교가 번성했고 일본에 대륙 문화를 전하는 데 큰 몫을 했다가 660년 당 · 신라 연합군에 멸망했다. 本文의 「고려(高麗)」는 시대로 보아 고구려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고마(高麗)」라 불렀다.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918~1392)는 법운보다 훨씬 뒤의 나라로, 뒤에 몽골의 속국이 되어 문영의 역 때 몽골군의 선도를 맡았다.
梁の末・陳の始양나라 말 · 진나라 초
천태대사(538~597)가 살던 시대다. 양은 557년 진(陳)에 의해 망했다.
南岳大師남악대사
혜사(慧思, 515~577). 남북조 말기의 승려로, 북제의 혜문(慧文)에게서 법화삼매를 체득했다. 광주 대소산(지금의 허난성)에 머물 때 지의에게 법화경과 반야경을 강했고, 만년에 남악 형산(후난성)에서 좌선과 강설에 힘써 남악대사라 불렸다.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남악 혜사의 후신이라는 설이 생겼다.
礼文예문
장안대사(관정)가 엮은 『국청백록』 4권에 천태대사의 「경례법(敬禮法)」이 실려 있는데, 밤낮으로 노사나불과 삼세 시방의 여러 부처에게 예배하는 법을 보인다. 노사나불은 화엄경의 교주이므로, 세간이 「천태도 화엄을 제일로 삼는가」 하고 본 것이다.
南北の諸師はちのごとく蜂起しからすのごとく烏合せり남북의 여러 스승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나고 까마귀처럼 모여들었다
「봉기(蜂起)」와 「오합(烏合)」이라는 두 낱말을 본뜻 그대로 살려, 벌집을 건드린 듯 들끓고 까마귀 떼처럼 무리 지어 천태대사를 공격한 모양을 그리셨다.

상법의 한가운데에 선 한 사람

제7장까지 대성인은 석존 재세와 정법 일천 년 동안 불법, 그 가운데서도 법화경을 넓힌 사람들이 큰 난을 만난 사실을 밝히셨다. 이 장은 그 증명을 상법 시대의 중국으로 옮긴다. 한토의 천태대사가 법화경을 넓히고 그 때문에 박해를 받은 일이다. 「여래의 재세에도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에랴」라는 법사품의 경문은 한 시대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예언이 아니다. 시대와 땅을 바꾸어 가며 법화경을 바르게 넓히는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다시 증명된다 — 이것이 제7장부터 제12장까지를 꿰는 논리다.

本文은 천태대사의 출현을 「상법에 들어 오백 년 · 불멸후 일천오백 년」이라는 시간의 좌표로 시작한다. 이 좌표는 단순한 연대 표기가 아니다. 대성인은 정법 · 상법 · 말법의 삼시(三時)와 『대집경』의 오오백세(五五百歲)라는 틀 위에서 불교사를 읽으셨고, 천태대사의 출현을 그 틀 안의 정해진 자리에 놓으신 것이다.

정상말 삼시의 길이에 대해서는 경마다 여러 설이 있다. 정법 일천 년 · 상법 일천 년 · 말법 만 년이라는 설, 정법 오백 년 · 상법 일천 년이라는 설, 정법 일천 년 · 상법 오백 년이라는 설 등이다. 그러나 천태대사 · 전교대사, 그리고 니치렌 대성인은 모두 정법 일천 년 · 상법 일천 년 · 말법 만 년, 나아가 미래가 다할 때까지라는 설을 쓰셨다.

『대집경』은 불멸후를 오백 년씩 다섯으로 나눈다. 첫째 오백 년은 해탈견고(解脫堅固), 둘째 오백 년은 선정견고(禪定堅固)로 이것이 정법 일천 년이다. 셋째 오백 년은 독송다문견고(讀誦多聞堅固), 넷째 오백 년은 다조탑사견고(多造塔寺堅固)로 이것이 상법 일천 년이다. 「견고」란 그것이 왕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섯째 오백 년은 투쟁언송(鬪諍言訟) · 백법은몰(白法隱沒)의 시대, 곧 말법이다.

이 틀에 홍통의 역사를 겹치면 다음과 같다. 정법 일천 년 동안 인도에서는 첫째 오백 년에 소승교가, 둘째 오백 년에 권대승교가 넓혀졌다. 상법에 들어 셋째 오백 년에는 중국에 법화경 적문이 넓혀졌고, 넷째 오백 년에는 일본에 역시 법화경 적문이 유포되었다. 말법에 들어서는 백법이 은몰하여 석존의 불법이 모두 공력을 잃고,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가 광선유포된다. 이 편이 다루는 천태 · 전교의 홍통은 바로 셋째 · 넷째 오백 년, 곧 상법의 일이다.

첫째 오백 년정법 일천 년해탈견고인도소승교가섭 · 아난 등
둘째 오백 년정법 일천 년선정견고인도권대승교마명 · 용수 · 천친 등
셋째 오백 년상법 일천 년독송다문견고중국법화경 적문천태대사
넷째 오백 년상법 일천 년다조탑사견고일본법화경 적문전교대사
다섯째 오백 년말법투쟁언송 · 백법은몰말법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
도표 1 · 오오백세와 삼국의 홍통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천태 · 전교의 홍통은 상법이라는 「때」에 맞추어 법화경 적문이 넓혀진 것이며, 그 「때」의 틀 위에서 보면 말법에는 다시 다른 법, 곧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가 넓혀질 차례가 정해져 있다.

중국 불교의 전래와 교판의 시대

천태대사가 무엇을 바로잡았는지를 알려면 그 이전 중국 불교의 흐름을 짚어야 한다. 상법이라는 이름의 「상(像)」은 「닮았다」는 뜻이다. 불법이 형식으로 흐르고 내용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시대라는 함의가 있다.

중국에 불 · 법 · 승 삼보가 갖추어져 전해진 것은 후한 명제 영평 10년(67),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승려가 흰 말에 불상과 경권을 싣고 낙양에 이르렀을 때라고 한다. 대성인 당시의 연대 계산으로는 불멸후 1015년, 곧 상법에 들어 15년째에 해당한다. 그 뒤 경전 번역이 차근차근 진행되어 구마라집(鳩摩羅什)의 구역(舊譯)과 현장(玄奘)의 신역(新譯)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중국 사람들은 이론과 체계를 세우는 데 뛰어나, 번역된 수많은 경전을 정리하는 일에 솜씨를 발휘했다. 그것이 교판(敎判), 곧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석존 일대에 설해진 많은 경전을 설한 때와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경전을 가려 내는 작업이다. 경전이 인도에서 성립 순서와 상관없이 한꺼번에 들어왔기 때문에, 어느 경이 먼저이고 어느 경이 깊은지를 정하지 않고는 불교 전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남북조 시대에는 열 갈래의 교판, 곧 남삼북칠이 생겨났다.

남삼북칠의 내용은 「선시초」에도 보이고, 천태대사의 『법화현의』 권10에 자세히 논해져 있다. 남쪽의 세 갈래는 모두 돈(頓) · 점(漸) · 부정(不定)의 세 가르침을 세운다. 돈교는 화엄경, 점교는 녹야원에서 열반경까지, 부정교는 승만경 · 금광명경 등이다. 남삼의 차이는 이 가운데 점교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있다.

북쪽의 일곱 갈래는 오시 · 반만 · 사종 · 오종 · 육종 · 이종의 대승 · 일음교다.

남삼(양쯔강 남쪽)
공통: 돈(화엄) · 점(녹야원~열반) · 부정(승만 · 금광명)
  1. ①삼시교유상(아함) · 무상(반야 · 방등 · 법화) · 상주(열반)
  2. ②사시교무상에서 법화를 떼어 「만선동귀교」
  3. ③오시교가장 으뜸다시 방등을 떼어 「억양교」광택사 법운이 이은 갈래
북칠(양쯔강 북쪽)
  1. ①오시인천교(제위파리) · 무상교(정명 + 반야) · 나머지는 남과 같음
  2. ②반만반자교(아함) · 만자교(그 밖)
  3. ③사종인연 · 가명 · 광상 · 상
  4. ④오종사종 + 법계(화엄)
  5. ⑤육종진종(법화) · 원종(대집) + 사종
  6. ⑥이종의 대승유상(화엄 · 영락 · 대품) · 무상(능가 · 사익)
  7. ⑦일음교오직 일불승
대체로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천태대사가 오시팔교로 통일
도표 2 · 남삼북칠 — 열 갈래의 교판

남삼북칠 가운데 어떤 갈래는 법화경을 「진종」으로 높이기도 했다(북칠의 육종). 그러나 대성인은 열 갈래 전체가 대체로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의 틀 안에 있었다고 보시며, 그 대표로 가장 세력이 컸던 광택사 법운을 드신다. 남삼북칠 각 갈래의 이름과 배당은 『법화현의』 권10의 서술을 따른 것이다.

이렇게 열 갈래로 나뉜 교판의 혼란을 하나로 정리한 사람이 천태대사였다. 천태대사는 오시팔교(五時八敎) · 세 가지 교상(三種敎相) 등 가장 높은 교판을 보여 열 갈래를 통일했다. 법화경이야말로 석존 출세의 본회(本懷)인 경전임을 밝히고, 이(理)의 일념삼천 · 삼제원융(三諦圓融) 등의 법문을 설했다. 삼대부 가운데서도 『마하지관』은 「상법의 법화경」이라 불린다. 이로써 셋째 오백 년, 독송다문견고의 시대가 완성되었다. 천태대사가 형주 옥천사에서 『마하지관』을 강설한 것은 개황 14년(594)이다. 상법의 초기에 중국에 법화경 적문이 석존의 예언대로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택사 법운 — 영험과 권위를 갖춘 으뜸

열 갈래 가운데 가장 유력한 한 갈래가 광택사 법운이었다. 법운은 남삼 가운데 셋째, 곧 오시교를 잇는 사람으로, 화엄경을 제일로 세운 모양은 本文에 보인 그대로다. 『법화현의』에는 「예나 지금의 여러 해석은 대대로 광택을 으뜸으로 삼아 왔다. 이제 광택을 논란하니, 나머지는 바람결만 바라볼 뿐이다」(古今の諸釈世々光宅を以て長と為す。今光宅を難ず、余は風を望むのみ)라고 했다. 으뜸을 꺾으면 나머지는 바람에 쓰러지는 풀처럼 저절로 따라온다는 뜻이다. 천태대사가 남삼북칠 전체를 상대하면서 법운 한 사람을 겨냥한 까닭이 여기 있다.

本文이 그리는 법운의 모습은 인간이 갖출 수 있는 권위를 거의 모두 갖추고 있다. 타고난 지혜가 뛰어났고, 혜관 · 혜엄 · 승유 · 혜차라는 당대의 대학장에게서 법을 이어받았다. 남북 여러 스승의 뜻을 논파했을 뿐 아니라 산림에 들어 법화 · 열반 · 화엄 세 경을 깊이 닦았다. 양 무제는 그를 궁궐 안에 지은 광택사에 머물게 하고 몸소 섬겼다. 법화경을 강하면 하늘에서 꽃이 내렸고, 천감 5년의 큰 가뭄에 약초유품의 「그 비는 두루 평등하여 사방에 함께 내린다」를 강하자 단비가 쏟아졌다. 천자는 그를 그 자리에서 승정으로 삼았고, 어떤 사람의 꿈에는 「이 사람은 과거 등명불 때부터 법화경을 강해 온 사람」이라는 계시까지 나타났다. 학통 · 수행 · 국가의 후원 · 영험 · 꿈의 계시 — 그 어느 것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은 법화경 주석에는 「이 경은 아직 석연하지 않다」 · 「다른 방편」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성인은 이를 「바로 법화경은 아직 불리(佛理)를 다하지 못한 경이라고 쓰여 있다」고 요약하시고, 이어서 「이 사람의 뜻이 부처의 뜻에 맞았기에 하늘에서 꽃도 내리고 비도 내렸으리라」라고 덧붙이신다. 이 문장은 겉으로는 세간의 판단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앞뒤 문맥에서 보면 날카로운 반어다. 사람들은 영험을 보고 「그렇다면 법화경은 화엄 · 열반보다 못한 것이로구나」라고 결론지었다. 영험이 교리의 진위를 보증한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은 제4장에서 대성인이 『열반경』의 유계로 세우신 원칙 —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 — 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판단이다. 법운에게는 사람으로서의 덕과 영험이 넘쳤지만, 그의 판정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경문이 없었다. 이 점은 다음 장에서 천태대사가 「증문은 어느 경인가」라고 물었을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험과 권위를 갖춘 사람이 그릇된 법을 세우면 그 해는 더욱 커진다. 법운의 소가 신라 · 백제 · 고구려 · 일본에까지 퍼져 「대체로 한결같은 뜻」이 되었다는 本文의 말은, 그 해가 한 나라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에 미쳤음을 보여 준다. 일본의 쇼토쿠 태자가 지은 『법화의소』가 법운의 『법화의기』를 참고했다는 사실은 제11장에서 다시 이어진다.

本文이 인용하는 법운의 소 「이 경은 아직 석연하지 않다」 · 「다른 방편」의 문구는 현존 『법화의기』 8권에서 그대로는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법운이 열반경의 상주(常住) 사상을 기준으로 법화경을 「아직 상주를 밝히지 않은 경」으로 본 것은 『법화의기』 전체의 기조이며, 대성인은 그 판정의 요지를 이 두 구로 드신 것으로 보인다.

일체경을 다시 읽은 젊은 승

법운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나라 말 · 진나라 초에 지의라는 「젊은 승(小僧)」이 나왔다. 대성인이 굳이 「소승(小僧)」이라는 말을 쓰신 것은, 천하의 대승정이던 법운과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지위도 명성도 없는 한 사람이 천하의 통설에 맞섰다는 구도다.

지의는 남악대사 혜사의 제자였으나, 本文은 「스승의 뜻에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던 까닭인지」 일체경장에 들어가 몇 번이고 경을 읽었다고 전한다. 스승의 권위조차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문 자체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세 경을 가려 낸 뒤 특히 화엄경을 강하고, 따로 예문을 지어 날마다 노사나불에 예배하는 공을 들였다. 세간 사람들이 「이 사람도 화엄경을 제일로 여기는가」 하고 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 속뜻을 이렇게 밝히신다. 법운이 일체경 가운데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이라 세운 것이 너무도 미심쩍었기 때문에, 특히 화엄경을 철저히 살펴본 것이라고. 상대의 주장을 깨뜨리려면 상대가 가장 높이는 경을 누구보다 깊이 알아야 한다. 천태대사의 화엄 연구는 법운의 서열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였던 것이다. 그 끝에 천태대사는 「법화 제일 · 열반 제이 · 화엄 제삼」이라고 판정했다. 법운의 서열을 꼭 뒤집은 결론이다.

동을 서라 하는 나라 — 인사의 잘못이 낳는 해

판정을 내린 천태대사의 탄식은 이렇다. 여래의 성교는 한토에 건너왔으나 사람을 이익하지 못하고 도리어 일체중생을 악도로 이끌고 있다. 그것은 경의 잘못이 아니라 경을 해석한 인사(人師)들의 잘못 때문이다.

이어지는 비유는 그 구조를 정확히 짚는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가 동을 서라 하고 하늘을 땅이라 말하기 시작하면, 만민은 그대로 알아듣는다. 뒤에 신분이 낮은 사람이 나와 「너희가 서라고 아는 것은 실은 동이고, 하늘이라고 아는 것은 실은 땅이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 말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우두머리의 마음에 들고자 그 사람을 꾸짖고 때리기까지 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박해를 받는 까닭은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미 권위 있는 자의 그릇된 말이 세상의 상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태대사는 어찌할까 망설였으나 결국 「잠자코 있을 일이 아니다」라고 결단하고, 「광택사의 법운 법사는 방법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졌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남삼북칠 열 갈래를 강하게 꺾은 것이다. 그러자 남북의 여러 스승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까마귀처럼 모여들어 천태대사를 공격했다. 정법이 유포될 때 반드시 일어나는 정해진 법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 장면은 대성인의 입종과 겹쳐 읽힌다. 대성인 역시 건장 5년(1253) 세이초사에서 「염불은 무간지옥의 업」이라고 외치신 순간부터 지두 도조 가게노부와 세상 전체의 적의를 받으셨다. 대성인이 이 대목에서 천태대사의 망설임과 결단을 그토록 자세히 그리신 것은, 「말하면 박해를 받고 말하지 않으면 자비가 없다」는 갈림길이 대성인 자신의 갈림길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목초」에서 대성인은 같은 갈림길을 「말하지 않으면 금생에는 일이 없더라도 후생에는 반드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말한다면 삼장사마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날 것」(いはずば今生は事なくとも後生は必ず無間地獄に堕べし、いうならば三障四魔必ず競い起るべし, 200쪽)이라고 회고하셨다.

세 나라에 이어지는 난의 계보

천태대사가 받은 박해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석존은 아흔다섯 갈래의 바라문 철학을 깨뜨리고 구횡(九橫)의 대난을 만나셨다 — 이것은 앞 장들에서 이미 밝힌 바다. 일본의 전교대사는 남도 육종을 강하게 꺾고 법화 적문의 계단을 히에이산에 세웠으며, 그 사정은 제11장 이하에 나온다. 그리고 니치렌 대성인은 「황멸도후」의 대난을 만나시며 말법의 어본불로서 일체중생을 구하셨다. 이 계보는 여러 어서에 분명하다.

이 장은 그 계보의 상법 시대 첫 고리다. 천태대사가 외친 「법운은 지옥에 떨어졌다」는 말은 개인을 저주한 말이 아니라, 경문에 어긋난 판정이 중생을 악도로 이끈다는 사실을 직시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일으킨 「벌떼와 까마귀」의 소란이야말로, 그가 법화경을 바르게 읽었다는 경문상의 증거가 된다.

  1. 538형주 화용현 출생(속성 진씨)
  2. 555 무렵18세에 상주 과원사에서 출가, 율과 방등을 배움
  3. 557양이 진에 망함
  4. 560대소산에서 남악대사 혜사를 만나 법화삼매를 체득
  5. 567 무렵진의 도읍 금릉으로 나와 와관사 등에서 강설
  6. 575천태산에 들어감
  7. 585진의 후주의 청으로 다시 금릉에 나옴(本文의 공장 대결은 진주 앞의 대론으로 전함)
  8. 587금릉 광택사에서 『법화문구』 강설
  9. 589진이 수에 망함
  10. 591진왕 양광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자대사」 호를 받음
  11. 593형주 옥천사에서 『법화현의』 강설
  12. 594같은 곳에서 『마하지관』 강설
  13. 597입적(60세)
도표 3 · 천태대사의 생애

시대를 연 정법 — 천태 출현의 사회적 배경

천태대사가 출현한 사회적 배경도 짚어 둘 만하다. 후한 말기에 한나라 황실이 쇠하자 중국은 위 · 촉 · 오의 삼국 시대로 들어갔다. 조조 · 유비 · 손권이 제갈공명 등과 함께 활약한 시대다. 그 뒤 위의 사마의가 권력을 쥐고, 그 아들 사마소를 거쳐 사마염에 이르러 국호를 진(晉)이라 하고 삼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진은 겨우 이십여 년 만에 분열하고, 317년 강남으로 옮겨 가 4세기 중국은 남북 두 세력으로 갈라졌으며 정변이 잇달았다.

강북에서는 오호십육국에서 북위 · 북제 · 북주의 여러 왕조가 바뀌며 북조를 이루었고, 강남에서는 오 · 동진 · 송 · 제 · 양 · 진의 육조(六朝)가 이어졌다. 천태대사는 이 진나라 때에 출현해, 진의 후주에게 초청받아 금릉의 광택사에서 『법화문구』를 강설했다. 법운이 머물던 바로 그 광택사에서 법화경의 참뜻이 강설된 것이다. 뒤에 수(隋)가 천하를 통일하자 진왕 양광(뒤의 양제)에게 보살계를 주었고, 양광은 천태대사에게 「지자대사」라는 호를 올렸다. 그 뒤 형주 당양의 옥천산에서 『법화현의』 · 『마하지관』을 강설하여 출세의 본회를 이루었다.

천태대사가 출현한 육조 말기, 진나라 시대는 불사의 건축과 조각 · 회화 등 불교 예술이 크게 융성한 시대였고, 교학 연구도 매우 활발했다. 그리고 천태종의 유포와 함께 수 · 당 시대의 화려한 문화가 열려 갔다. 이 흐름은 다음 장의 끝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상법 시대의 중국에서도, 때에 응하고 국토에 맞는 정법이 사람을 얻어 반드시 흥륭한다는 모습이 분명히 드러났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듯,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바뀌듯, 해와 달이 운행하듯, 말법의 정법 역시 반드시 넓혀질 것이라는 확신이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후오백세 광선유포」라는 경문이 약속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천태대사의 홍통은 「사람」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경문」으로 돌아가 판정한 데서 시작되었고, 그 판정을 말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대성인은 이 모습을 「황멸도후」의 경문이 상법에 증명된 첫 예로 드시고, 같은 길을 말법에 걸으신다.

제9장 천태대사의 공장 대결
어서 299쪽 9행 ~ 300쪽 17행 · 第九章 天台大師の公場対決

본문

本文 · 一어서 299쪽 9~15행
本文 · 어서 원문

智顗法師をば頭をわるべきか国ををうべきかなんど申せし程に陳主此れを・きこしめして南北の数人に召し合せて 我と列座してきかせ給いき、法雲法師が弟子等の慧栄.法歳・慧曠.慧恆なんど申せし僧正・僧都.已上の人人.百余人なり各各・悪口を先とし眉をあげ眼をいからし手をあげ柏子をたたく、而れども智顗法師は末座に坐して色を変ぜず言を悞らず威儀しづかにして諸僧の言を一一に牒をとり言ごとに・せめかえす、をしかへして難じて云く抑も法雲法師の御義に第一華厳・第二涅槃・第三法華と立させ給いける証文は何れの経ぞ慥かに明かなる証文を出ださせ給えとせめしかば各各頭をうつぶせ色を失いて一言の返事なし。

풀이

「지의 법사의 머리를 깨뜨려야 하는가, 나라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가」 하고 떠들어 대니, 진주(陳主)가 이를 들으시고 남북의 몇 사람을 불러 대결시키고 몸소 자리를 같이하여 들으셨느니라. 법운 법사의 제자 등 혜영(慧榮) · 법세(法歲) · 혜광(慧曠) · 혜항(慧恆) 등이라 하는 승정 · 승도 이상의 사람들이 백여 명이었느니라. 저마다 악구를 앞세우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부릅뜨며 손을 들어 박자를 쳤느니라. 그러나 지의 법사는 말석에 앉아 안색을 바꾸지 않고 말을 그르치지 않으며 위의를 고요히 하여, 여러 승려의 말을 하나하나 적어 두었다가 말마다 되받아 책하셨느니라. 도리어 힐난하여 이르기를 「대저 법운 법사의 뜻에서 제일 화엄 · 제이 열반 · 제삼 법화라 세우신 증문(證文)은 어느 경인가. 확실하고 분명한 증문을 내놓으시라」 하고 책하니,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안색을 잃어 한마디 대답도 없었느니라.

本文 · 二어서 299쪽 15행 ~ 300쪽 1행
本文 · 어서 원문

重ねてせめて云く無量義経に正しく次説方等十二部経・摩訶般若・華厳海空等云云、仏我と華厳経の名をよびあげて無量義経に対して未顕真実と打ち消し給う法華経に劣りて候・無量義経に華厳経はせめられて候ぬいかに心えさせ給いて華厳経をば一代第一とは候けるぞ各各・御師の御かたうどせんとをぼさば此の経文をやぶりて此れに勝れたる経文を取り出だして御師の御義を助け給えとせめたり。

풀이

거듭 책하여 이르기를 「무량의경에 바로 『다음에 방등 십이부경 · 마하반야 · 화엄해공을 설한다』 등이라 하여, 부처님 스스로 화엄경의 이름을 불러 들어 무량의경에 대하여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未顯眞實)』고 지워 버리셨느니라. 법화경보다 못한 무량의경에게조차 화엄경은 책망을 받은 것이니라. 어떻게 생각하시어 화엄경을 일대 제일이라 하셨는가. 각자 스승의 편을 들고자 생각하신다면 이 경문을 깨뜨리고 이보다 뛰어난 경문을 꺼내어 스승의 뜻을 도우시라」 하고 책하셨느니라.

本文 · 三어서 300쪽 1~17행
本文 · 어서 원문

又涅槃経を法華経に勝るると候けるは・いかなる経文ぞ涅槃経の第十四には華厳・阿含・方等・般若をあげて涅槃経に対して勝劣は説れて候へどもまつたく法華経と涅槃経との勝劣はみへず、次上の第九の巻に法華経と涅槃経との勝劣分明なり、所謂経文に云く「是の経の出世は乃至法華の中の八千の声聞・記莂を受くることを得て大菓実を成ずるが如き秋収冬蔵して更に所作無きが如し」等云云、経文明に諸経をば春夏と説かせ給い涅槃経と法華経とをば菓実の位とは説かれて候へども法華経をば秋収冬蔵の大菓実の位・涅槃経をば秋の末・冬の始捃拾の位と定め給いぬ、此の経文正く法華経には我が身劣ると承伏し給いぬ、法華経の文には已説・今説・当説と申して此の法華経は前と並との経経に勝れたるのみならず後に説かん経経にも勝るべしと仏定め給う、すでに教主釈尊かく定め給いぬれば疑うべきにあらねども我が滅後はいかんかと疑いおぼして東方・宝浄世界の多宝仏を証人に立て給いしかば多宝仏・大地よりをどり出でて妙法華経・皆是真実と証し十方分身の諸仏重ねてあつまらせ給い広長舌を大梵天に付け又教主釈尊も付け給う、然して後・多宝仏は宝浄世界えかへり十方の諸仏各各本土にかへらせ給いて後多宝分身の仏もおはせざらんに教主釈尊・涅槃経をといて法華経に勝ると仰せあらば御弟子等は信ぜさせ給うべしやとせめしかば日月の大光明の修羅の眼を照らすがごとく漢王の剣の諸侯の頚にかかりしがごとく両眼をとぢ一頭を低れたり、天台大師の御気色は師子王の狐兎の前に吼えたるがごとし鷹鷲の鳩雉をせめたるににたり、かくのごとくありしかば・さては法華経は華厳経・涅槃経にもすぐれてありけりと震旦一国に流布するのみならずかへりて五天竺までも聞へ月氏・大小の諸論も智者大師の御義には勝れず教主釈尊・両度出現しましますか仏教二度あらはれぬとほめられ給いしなり。

풀이

「또 열반경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하신 것은 어떠한 경문인가. 열반경 제14권에는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를 들어 열반경과 대비하여 승렬을 설하였으나, 법화경과 열반경의 승렬은 전혀 보이지 않느니라. 바로 앞의 제9권에 법화경과 열반경의 승렬이 분명하니, 이른바 경문에 이르기를 『이 경이 세상에 나옴은 …… 법화경 가운데 팔천 성문이 수기를 받아 큰 열매를 이룬 것과 같아서,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여 다시 할 일이 없는 것과 같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경문은 분명히 여러 경을 봄 · 여름이라 설하시고 열반경과 법화경을 열매의 지위라 설하셨으나, 법화경은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는(秋收冬藏) 큰 열매의 지위, 열반경은 가을의 끝 · 겨울의 처음에 이삭을 줍는(捃拾) 지위라 정하셨느니라. 이 경문은 바로 『법화경에는 내 몸이 못하다』고 승복하신 것이니라. 법화경의 글에는 이설(已說) · 금설(今說) · 당설(當說)이라 하여, 이 법화경은 앞의 경과 나란한 경들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뒤에 설할 경들보다도 뛰어나다고 부처님이 정하셨느니라. 이미 교주 석존께서 이렇게 정하셨으니 의심할 일이 아니건만, 『나의 멸후에는 어찌 될까』 하고 염려하시어 동방 보정세계(寶淨世界)의 다보불을 증인으로 세우셨으므로, 다보불이 대지에서 솟아나와 『묘법화경은 모두 진실이다(皆是眞實)』라고 증명하시고, 시방 분신의 여러 부처님이 거듭 모이시어 넓고 긴 혀를 대범천에 대시고 또 교주 석존도 대셨느니라. 그런 뒤에 다보불은 보정세계로 돌아가시고 시방의 여러 부처님도 각각 본토로 돌아가신 다음, 다보불도 분신불도 계시지 않는 데서 교주 석존께서 열반경을 설하시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말씀하신들 제자들은 이를 믿으시겠는가」 하고 책하니, 해와 달의 큰 광명이 수라(修羅)의 눈을 비추는 것처럼, 한왕(漢王)의 칼이 제후의 목에 걸린 것처럼 두 눈을 감고 머리를 떨구었느니라. 천태대사의 기색은 사자왕이 여우와 토끼 앞에서 포효하는 것과 같고, 매와 독수리가 비둘기와 꿩을 덮치는 것과 비슷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었으므로 「그렇다면 법화경은 화엄경 · 열반경보다도 뛰어난 것이로구나」 하는 뜻이 진단(震旦) 한 나라에 유포되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다섯 천축에까지 들려, 월지의 대소승 여러 논도 지자대사의 뜻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고 「교주 석존께서 두 번 출현하셨는가,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고 칭찬받으셨느니라.

어구 풀이

頭をわるべきか国ををうべきか머리를 깨뜨려야 하는가, 나라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가
「법운은 지옥에 떨어졌다」는 천태대사의 말에 격분한 남삼북칠의 승려들이 「지의를 죽여라」 · 「유배하라」고 떠든 말이다. 제8장 끝의 「벌떼와 까마귀」가 구체적인 위협으로 바뀐 장면이다.
陳主진주
진(陳)나라의 제5대 황제인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 553~604)다. 제4대 선제의 아들로 582년에 즉위했다. 이때 진의 국력은 이미 기울어 있었고, 시문경(施文慶) 등을 중용해 멸망을 재촉했다. 589년 수에 망했다. 천태대사를 제사(帝師)로 숭앙해, 585년 그를 금릉으로 맞아들였다.
慧栄・法歳・慧曠・慧恆혜영 · 법세 · 혜광 · 혜항
本文은 이들을 법운의 제자들로 든다. 혜광(534~623)은 남북조에서 수대에 걸친 승려로, 천태대사에게 율장과 대승을 가르친 율사이기도 했으나 남삼북칠의 여러 스승과 함께 천태대사에게 그 그릇된 뜻을 논파당했다고 한다. 혜항(515~589)은 진의 영정 3년(559) 백마사에서 열반경 · 성실론을 강했고, 지덕 3년(585) 칙명으로 천태대사와 법론하여 패했으며, 지덕 4년(586) 대승정이 되었다고 전한다.
牒をとり첩을 취하여
상대의 주장을 하나하나 문서로 적어 확인해 두는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상대의 말을 정확히 붙잡아 조목조목 반박하는 대론의 법도를 보인다. 제11장의 전교대사도 「하나하나 첩을 취하여」(一一に牒を取りて) 육종의 주장을 책했다.
方等十二部経방등 십이부경
방등부의 여러 경을 가리킨다. 대승교 전체를 뜻하는 경우도 있다. 십이부경은 경전을 서술 형식에 따라 열두 가지로 나눈 것이다.
摩訶般若마하반야
『마하반야바라밀경』, 곧 『대품반야경』이다. 27권, 구마라집 번역.
華厳海空화엄해공
화엄경의 법문을 「바다와 허공」의 비유로 나타낸 말이다. 해공은 해인삼매(海印三昧)를 가리키는데, 모든 사물의 모습이 바다에 비치듯 부처의 지혜 바다에 일체법이 또렷이 비쳐 깨달아 알 수 있음을 뜻한다.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일체중생의 마음의 움직임을 자기 마음에 비출 수 있다고 한다. 화엄경이 부처의 해인삼매의 경지에서 설해진 경임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화엄경 그 자체를 가리킨다.
涅槃経の第十四열반경 제14권
성행품의 오미(五味) 비유다. 「선남자여, 부처도 이와 같다. 부처에게서 십이부경이 나오고, 십이부경에서 수다라가 나오고, 수다라에서 방등경이 나오고, 방등경에서 반야바라밀이 나오고, 반야바라밀에서 대열반이 나온다. 마치 제호(醍醐)와 같다」는 대목으로, 다섯 단계의 승렬을 설한다. 여기에 법화경의 이름은 없다.
捃拾군습
이삭줍기다. 큰 열매의 지위인 법화경에서 크게 거두어들인 뒤에 설해진 열반경을, 추수가 끝난 밭에 남은 이삭을 줍는 일에 견준 말이다. 열반경 스스로 법화경에서 빠진 이를 거두는 경이라고 자리매김한 것이다.
已説・今説・当説이설 · 금설 · 당설
법화경 법사품 제10의 「내가 설한 경전이 한량없는 천만억이니,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고 앞으로 설할 것이지만 그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경문의 이금당 삼설이다. 이설은 사십여 년의 이전 경, 금설은 무량의경, 당설은 열반경에 해당한다고 풀이된다.
宝浄世界보정세계
다보여래가 사는 국토다. 견보탑품에 「과거에 동방으로 한량없는 천만억 아승기의 세계를 지나 보정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에 부처가 계시니 이름이 다보였다」고 한다. 생명의 면에서 보면 어머니의 태내를 가리킨다고 한다. 『어의구전』에 「보정세계의 부처란, 사상(事相)의 뜻은 잠시 두고 증도관심(證道觀心)의 때에는 어머니의 태내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보탑을 짓는 목수다」(其の宝浄世界の仏とは事相の義をば且らく之を置く、証道観心の時は母の胎内是なり故に父母は宝塔造作の番匠なり, 797쪽)라고 했다. 보정세계에서 다보탑이 솟아나오는 것을 생명이 태어나는 일로 읽은 것이다.
皆是真実모두 진실이다
견보탑품에서 다보여래가 보탑 안에서 큰 소리로 「석가모니 세존께서 설하신 바는 모두 진실이다」라고 증명한 말이다.
広長舌を大梵天に付け넓고 긴 혀를 대범천에 대다
여래신력품에서 석존과 시방 분신의 여러 부처가 넓고 긴 혀를 범천에 이르도록 내보인 것을 말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의 혀는 길다는 인도의 관념에 따른 것으로, 법화경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日月の大光明の修羅の眼を照らす해와 달의 큰 광명이 수라의 눈을 비춘다
『정법염처경』의 이야기다. 라후 아수라왕은 큰 바다 밑 이만 일천 유순의 광명성에 살며 몸이 수미산처럼 크다. 크게 교만해져 천녀를 보려고 허공에 올랐으나 햇빛이 눈을 가리자 오른손으로 햇빛을 막고 제천이 노니는 것을 보며 질투했다고 한다. 이것이 일식이다. 또 달의 궁전에 이르러 손으로 달빛을 가린 것이 월식이라 한다. 그 거대한 아수라도 해와 달의 빛 앞에서는 눈을 뜨지 못한다.
漢王の剣한왕의 칼
한왕은 한나라 고조 유방(재위 전202~전195)이다. 패(沛)에서 군사를 일으켜 제후들과 함께 진(秦)을 쳐 패공이라 칭했고, 관중을 점령한 뒤 한왕에 봉해졌다. 뒤에 천하를 통일해 국호를 한이라 하고 황제가 되었다. 고조가 석 자의 칼로 앉은 자리에서 제후들을 제압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震旦진단
인도에서 중국을 부르던 이름의 음사다. 진(秦)나라의 위세가 외국에까지 울려 인도에서 「치나스타나(Cīnasthāna)」라 불렀다는 설이 있고, 「지나(支那)」도 같은 말의 음사라 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해가 동쪽 모퉁이에서 나와 그 빛이 붉으므로 진단(震丹)이라 한다」고 했다. 인도에서 보면 중국은 해 뜨는 곳이다.
仏教二度あらはれぬ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
석존 재세와 천태대사의 시대를 가리킨다. 천태대사가 「동토의 소석가(小釋迦)」라 불린 것과 같은 뜻의 찬탄이다.

진나라 궁전의 대론

이 장은 앞 장에 이어 천태대사의 홍통 가운데 진나라 궁전에서 열린 대론, 곧 공장(公場) 대결을 그린다. 「법운은 지옥에 떨어졌다」는 천태대사의 외침에 남북의 승려들은 「머리를 깨뜨려야 하는가, 나라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가」 하고 들끓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의 국주는 남북의 학장들을 불러 천태대사와 대결시키고 몸소 자리를 같이하여 양쪽의 주장을 들었다.

本文이 그리는 대론의 장면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한쪽에는 법운의 제자 혜영 · 법세 · 혜광 · 혜항 등 승정 · 승도 이상의 고승 백여 명이 있다. 그들은 저마다 악구를 앞세우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부릅뜨며 손을 들어 박자를 쳤다. 수의 위세와 소리의 크기로 상대를 누르려는 것이다. 다른 쪽에는 관직이 없어 말석에 앉은 천태대사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안색을 바꾸지 않고 말을 그르치지 않으며 위의를 고요히 한 채, 여러 승려의 말을 하나하나 적어 두었다가 말마다 되받아 책했다.

그리고 천태대사는 공세를 뒤집어 단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법운 법사가 제일 화엄 · 제이 열반 · 제삼 법화라고 세운 증문은 어느 경인가. 확실하고 분명한 증문을 내놓으라.」 백여 명의 고승은 고개를 숙이고 안색을 잃은 채 한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앞 장에서 본 법운의 권위 — 학통 · 국가의 후원 · 꽃비와 단비의 영험 — 는 이 물음 앞에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불법의 승렬을 판정하는 근거는 경문뿐이라는 것, 이것이 대론 전체를 꿰는 원칙이다.

세 겹의 증문 — 무량의경 · 열반경 · 법화경

증문을 내지 못하는 상대에게 천태대사는 이번에는 스스로 증문을 들어 세 겹으로 책했다.

첫째는 화엄 제일에 대한 반증이다. 무량의경에 「다음에 방등 십이부경 · 마하반야 · 화엄해공을 설한다」고 하여, 부처가 몸소 화엄경의 이름을 불러 들고 그것을 포함한 사십여 년의 가르침을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未顯眞實)」고 지워 버렸다. 무량의경은 법화경의 개경(開經)으로 법화경보다 낮은 경이다. 그 낮은 경에게조차 화엄경은 이름이 불려 「미현진실」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화엄경을 일대 제일이라 하는가. 스승의 편을 들고 싶다면 이 경문을 깨뜨릴 더 뛰어난 경문을 내놓으라 — 천태대사는 이렇게 책했다.

둘째는 열반 제이에 대한 반증이다. 법운은 열반경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했는데, 그 경문은 어디 있는가. 열반경 제14권 성행품에는 십이부경 · 수다라 · 방등 · 반야 · 대열반의 오미를 들어 열반경과의 승렬을 설하지만, 거기에 법화경과 열반경의 승렬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앞의 제9권에 법화경과 열반경의 승렬이 분명히 설해져 있다. 「이 경이 세상에 나옴은 …… 법화경 가운데 팔천 성문이 수기를 받아 큰 열매를 이룬 것과 같아서,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여 다시 할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여러 경을 봄 · 여름에 견주고 법화경과 열반경을 열매의 지위에 두되, 법화경은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는 큰 열매, 열반경은 가을 끝 · 겨울 초입에 이삭을 줍는 지위라고 정했다. 열반경 스스로가 「법화경에는 내 몸이 못하다」고 승복한 경문이다.

셋째는 법화경 자신의 증문이다. 법사품에는 이설 · 금설 · 당설의 삼설이 있어, 법화경은 그 이전의 경과 나란히 설해진 경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뒤에 설해질 경보다도 뛰어나다고 부처가 정했다. 열반경은 바로 그 「당설」에 해당한다. 교주 석존이 이미 이렇게 정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석존은 멸후를 염려해 동방 보정세계의 다보불을 증인으로 세웠다. 다보불은 대지에서 솟아나와 「묘법화경은 모두 진실이다」라고 증명했고, 시방 분신의 여러 부처가 모여 넓고 긴 혀를 대범천에 대었으며 교주 석존도 그리했다. 그 뒤 다보불은 보정세계로, 분신의 부처들은 각자의 본토로 돌아갔다. 증인이 하나도 없는 자리에서 석존 혼자 열반경을 설하며 「이것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말한들, 제자들이 그것을 믿겠는가.

이 셋째 논증은 특히 날카롭다. 법화경의 진실은 석존 한 분의 말이 아니라 과거불(다보)과 시방의 분신불이 함께 증명한 것이다. 열반경이 법화경을 넘어선다고 하려면 그 증명을 뒤집을 만한 증명이 있어야 하는데, 열반경에는 그런 증인이 없다. 오히려 열반경 자신이 「군습」이라 하여 법화경 아래 자리를 스스로 밝혔다.

  1. ①증문 요구「법운의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의 증문은 어느 경인가」→ 백여 명 무답
  2. ②화엄 제일 반증무량의경 「다음에 방등 십이부경 · 마하반야 · 화엄해공을 설한다」+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未顕真実법화경보다 낮은 개경에게조차 지워짐
  3. ③열반 제이 반증 ①열반경 제14권 오미(십이부경 → 수다라 → 방등 → 반야 → 대열반)법화경과의 승렬은 없음
  4. ④열반 제이 반증 ②열반경 제9권「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한다」秋収冬蔵법화경은 큰 열매, 열반경은 이삭줍기捃拾
  5. ⑤법화경의 증문이설 · 금설 · 당설+ 다보불 「모두 진실이다」皆是真実+ 분신불의 넓고 긴 혀
결과「교주 석존이 두 번 출현하셨는가,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
도표 4 · 진나라 궁전 대론의 논증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천태대사의 승리는 웅변이나 위세의 승리가 아니라 경문의 승리였다. 「증문을 내라」는 한 물음은 대성인이 여러 종에 거듭 던지신 물음이기도 하며, 오시의 순서와 「이금당」 · 다보의 증명이라는 법화경 자신의 증문 위에서만 일대 성교의 승렬이 정해진다.

사자왕의 포효 — 비유가 그리는 대론의 끝

대성인은 대론의 결말을 네 겹의 비유로 그리셨다. 남북의 승려들은 해와 달의 큰 광명이 수라의 눈을 비추듯, 한왕의 칼이 제후의 목에 걸린 듯 두 눈을 감고 머리를 떨구었다. 『정법염처경』의 라후 아수라왕은 수미산만 한 몸을 가졌지만 해와 달의 빛을 손으로 가려야만 했다. 아무리 큰 세력도 진실의 빛 앞에서는 눈을 뜰 수 없다는 뜻이다. 한 고조 유방이 칼 한 자루로 앉은 자리에서 제후들을 제압했듯, 천태대사의 경문 한 구절이 백여 명의 고승을 그 자리에 굳게 만들었다.

반면 천태대사의 기색은 사자왕이 여우와 토끼 앞에서 포효하는 것과 같았고, 매와 독수리가 비둘기와 꿩을 덮치는 것과 같았다. 말석에 앉은 무관의 젊은 승이 실은 사자왕이었다는 역전이다. 대성인은 다른 어서에서도 정법을 펴는 이의 확신을 「사자왕」에 견주셨는데, 이 장면은 그 원형 가운데 하나다.

그 결과 「법화경은 화엄경 · 열반경보다 뛰어나다」는 뜻이 중국 전역에 퍼졌을 뿐 아니라 인도에까지 들렸고, 인도의 대소승 여러 논사들도 지자대사의 뜻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교주 석존이 두 번 출현하셨는가,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고 찬탄했다. 本文의 이 말은 다음 장 끝과 제12장에서 다시 이어진다. 불공삼장이 인도에서 용지보살을 만났을 때 용지가 「한토에 천태라는 사람의 해석이야말로 사정(邪正)을 가리고 편원(偏圓)을 밝힌 글이니 부디 인도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공장 대결의 뜻 — 국주가 법의 사정을 가린다

「보은초」는 천태대사에 대해 「진주가 이를 들으시고 남북의 몇 사람을 불러 대결시키고 몸소 자리를 같이하여 들으셨다」고 하고, 전교대사에 대해서는 「연력 21년 정월 19일에 천황이 다카오사에 행차하시어 칠대사의 석덕 열네 명을 …… 불러 대결시키셨다」(제11장)고 서술하신다. 두 대사의 홍통에서 모두 그 시대의 국주가 몸소 불법의 정사를 가렸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그 까닭은 「입정안국론」에 분명하다. 「결국 천하태평 · 국토안온은 군신이 바라는 바요 토민이 생각하는 바이다. 무릇 나라는 법에 의해 번창하고 법은 사람에 의해 귀해진다.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멸하면 부처를 누가 숭상하며 법을 누가 믿겠는가. 먼저 국가를 기원하고 모름지기 불법을 세워야 한다」(所詮天下泰平国土安穏は君臣の楽う所土民の思う所なり、夫れ国は法に依って昌え法は人に因って貴し国亡び人滅せば仏を誰か崇む可き法を誰か信ず可きや、先ず国家を祈りて須く仏法を立つべし, 26쪽). 또 「방법(謗法)의 사람을 금하고 정도의 승려를 중히 여기면 나라 안이 안온하고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謗法の人を禁めて正道の侶を重んぜば国中安穏にして天下泰平ならん, 27쪽)라고 하셨다.

정법을 세우면 나라가 편안하고, 사법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주권자가 법의 사정을 밝히는 일은 정치의 가장 긴요한 일이 된다. 「입정안국」이라는 말 자체가 「바른 법을 세워 나라를 편안히 한다」는 뜻이다.

대성인이 요구하신 공장 대결

니치렌 대성인은 문응 원년(1260) 「입정안국론」으로 막부에 간하셨고, 문영 5년(1268) 몽골의 국서가 오자 열한 통의 서장으로 다시 나라에 간하셨다. 그리고 문영 8년(1271), 교빈(行敏)이라는 승려가 사개격언(四箇格言)을 논란하며 문답 대결을 요구해 오자 이렇게 답하셨다. 「여러 가지 의심하시는 일은 사사로운 문답으로는 일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상주(上奏)를 거쳐 내려오는 분부의 뜻에 따라 시비를 규명하셔야 할 것입니다」(条条御不審の事・私の問答は事行き難く候か、然れば上奏を経られ仰せ下さるるの趣に随って是非を糾明せらる可く候か, 「교빈답서」, 179쪽).

또 건치 원년(1275)에는 고닌(強仁)이 같은 식으로 문답을 요구해 오자, 「고닌장답서」에서 이렇게 답하셨다. 「시골에서 사정을 결정한다면 어둠 속에서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요, 골짜기 밑의 큰 소나무가 목수를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바탕이 된다. 귀방(貴坊)이 본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조정과 막부에 아뢰어 허가를 받아 시비를 규명한다면, 위로는 한 사람(천황)이 웃음을 머금고 아래로는 만민이 의심을 풀 것이다」(田舎に於て邪正を決せば暗中に錦を服して遊行し澗底の長松・匠を知らざるか、兼ねて又定めて喧嘩出来の基なり、貴坊本意を遂げんと欲せば公家と関東とに奏聞を経て露点を申し下し是非を糾明せば上一人咲を含み下万民疑を散ぜんか, 184쪽).

요컨대 사사로운 문답은 싸움의 원인이 되기 쉬우므로, 불법의 정사를 논하는 문답은 공적인 자리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빈이든 고닌이든 대성인과의 문답을 바란다면 막부와 조정에 호소해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대론하라는 뜻이다. 진주 때의 천태대사처럼, 간무 천황 때의 전교대사처럼, 양쪽을 불러 대결시키고 국주가 몸소 판가름할 때 정법이 넓혀지고 천하가 태평해진다.

대성인 재세 중에는 공장 대결이 열릴 듯한 풍문이 돈 적도 있었다. 홍안 원년(1278)의 「제인답서」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국 진언 · 선종 등 방법의 여러 사람들을 불러 대결시켜 시비를 결정하게 한다면, 일본국이 일제히 니치렌의 제자 · 단나가 되고, 나의 제자들 가운데 출가는 주상 · 상황의 스승이 될 것이요, 재가는 좌우의 신하에 줄지을 것이다」(所詮真言・禅宗等の謗法の諸人等を召し合せ是非を決せしめば日本国一同に日蓮が弟子檀那と為り、我が弟子等の出家は主上・上皇の師と為らん、在家は左右の臣下に列ならん, 1284쪽). 그리고 공장 대결만 열린다면 「니치렌이 일생 동안 기원해 온 것과 소원이 곧바로 이루어지겠는가」(日蓮一生の間の祈請並びに所願忽ちに成就せしむるか, 1284쪽)라고 하시어, 정법의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대성인의 거듭된 국가 간효에도 불구하고 공장 대결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박해와 탄압이 가해졌고, 대성인은 이즈 · 사도의 두 차례 유죄와 다쓰노구치의 법난을 비롯해 법화경 권지품이 예언한 「자주 쫓겨남(數數見擯出)」의 대난을 만나셨다. 천태 · 전교는 국주가 공장을 열어 주었기에 정법을 넓힐 수 있었지만, 말법의 대성인에게는 그 문조차 열리지 않았다. 이 대비가 「황멸도후」 — 멸후, 특히 말법의 원질이 재세보다 훨씬 크다 — 는 경문의 무게를 말해 준다.

천태대사
때
진(陳)의 지덕 연간(585 무렵으로 전함)
국주
진의 후주
상대
법운의 제자 혜영 · 법세 · 혜광 · 혜항 등 백여 명
쟁점
화엄 제일 · 열반 제이 · 법화 제삼
결과
무답 →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
전교대사
때
연력 21년(802) 정월 19일
국주
간무 천황(다카오사 행차)
상대
칠대사 · 육종의 석덕 열네 명
쟁점
육종의 교의와 법화 원종
결과
승복의 사표
니치렌 대성인
요구
「입정안국론」(1260)열한 통의 서장(1268)「교빈답서」(1271)「고닌장답서」(1275)「제인답서」(1278)
국주
가마쿠라 막부
상대
진언 · 선 · 염불 등
결과
대결은 열리지 않고 유죄 · 다쓰노구치의 법난
도표 5 · 세 번의 공장 대결

정법이 연 수 · 당의 문화

「교주 석존이 두 번 출현하셨는가,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는 찬탄에는 한 나라의 문화사적 의미도 담겨 있다. 정법이 넓혀지는 곳에서 문화가 흥하고 사회가 번영한다는 것은, 인도에서 아사세왕 · 아소카 대왕 · 카니시카 왕의 시대가 보여 주었고, 실론(스리랑카) · 인도네시아 · 버마 등 불교가 뿌리내린 지역의 역사도 그 예가 된다.

천태대사에 의해 법화경 적문이 광선유포된 중국에서는 수 · 당 시대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다. 당나라 초기 장안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태평의 축도처럼 밝은 기운에 싸여 있었다. 당의 국위와 문화를 흠모해 찾아오는 외국인, 교역을 위해 몰려드는 외국인이 많아 국제도시로서 마치 세계의 중심과 같은 성황을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견수사에 이어 견당사가 잇달아 파견되어 당의 문화를 흡수했다. 오늘날 쇼소인(正倉院)의 보물 대부분이 당대의 공예 미술품이라고 할 정도이며, 불교를 비롯한 온갖 문화가 이때 일본에 전해졌다.

당 초기의 정치는 『정관정요(貞觀政要)』로 알려진 「정관의 치」라는 성세를 이루었고, 이어 「개원의 치」라는 흥륭기를 맞았다. 한족의 세력이 크게 떨쳤고, 국제적인 문화가 유럽 · 아라비아 · 페르시아 · 인도 · 동남아시아 · 일본 · 한반도 등에 널리 퍼졌다. 고대의 제도를 집대성하고 제도와 군사를 정비해 중앙집권을 확립하는 등 눈부신 정치적 발전도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평화의 시대로 일컬어지며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황하 유역의 화북에서는 조와 보리의 윤작으로 3년 4작 · 2년 3작이 보급되어 주식이 크게 늘었다. 그 밖에 설탕 · 쌀 · 차 · 삼 등의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면포 · 칠기 · 양잠 · 금속 공업 · 상업 · 교통이 번성했으며 유럽 · 아라비아와의 무역도 크게 발전했다. 미술 · 공예 · 음악 등의 예술은 외국에서도 전해져 불교를 중심으로 발달하며 주변 여러 민족에게 퍼져 갔다. 문학에서는 문어체 소설이 완성되었고, 시에서는 이백 · 두보의 두 시성을 비롯해 백거이 · 왕유 등이 배출되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수 · 당의 흥륭은 천태대사의 정의가 넓혀져 사람들 속에 스며든 시기와 겹쳐 있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보듯 법상종의 현장, 진언종의 선무외 등이 당나라 중기에 활약하면서 천태의 정의는 가려지고, 당 왕조도 이윽고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법의 흥망과 나라의 흥망을 겹쳐 보는 「입정안국」의 시각이 이 역사 서술 밑에 놓여 있다.

「법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는 서술은 「입정안국론」의 원리에 따른 역사 읽기다. 수 · 당 문화의 융성에는 정치 · 경제 · 국제 교류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으며, 당의 쇠퇴는 안사의 난(755~763) 이후 뚜렷해졌다.

제10장 천태 멸후 세 종의 미란
어서 300쪽 18행 ~ 302쪽 10행 · 第十章 天台滅後、三宗の迷乱

본문

本文 · 一어서 300쪽 18행 ~ 301쪽 8행
本文 · 어서 원문

其の後天台大師も御入滅なりぬ陳隋の世も代わりて唐の世となりぬ章安大師も御入滅なりぬ、天台の仏法よやく習い失せし程に唐の太宗の御宇に玄奘三蔵といゐし人・貞観三年に始めて月氏に入りて同十九年にかへりしが月氏の仏法尋ね尽くして法相宗と申す宗をわたす、此の宗は天台宗と水火なり而るに天台の御覧なかりし深密経・瑜伽論・唯識論等をわたして法華経は一切経には勝れたれども深密には劣るという、而るを天台は御覧なかりしかば天台の末学等は智慧の薄きかのゆへに・さもやとおもう、又太宗は賢王なり玄奘の御帰依あさからず、いうべき事ありしかども・いつもの事なれば時の威をおそれて申す人なし、法華経を打ちかへして三乗真実・一乗方便・五性各別と申せし事は心うかりし事なり、天竺よりは・わたれども月氏の外道が漢土にわたれるか法華経は方便・深密経は真実といゐしかば釈迦・多宝・十方の諸仏の誠言もかへりて虚くなり玄奘・慈恩こそ時の生身の仏にてはありしか。

풀이

그 뒤 천태대사도 입멸하시고, 진(陳) · 수(隋)의 세상도 바뀌어 당(唐)의 세상이 되었느니라. 장안대사(章安大師)도 입멸하시니 천태의 불법은 차츰 배우는 이가 사라져 갔는데, 당 태종(太宗) 치세에 현장삼장(玄奘三藏)이라 하는 사람이 정관(貞觀) 3년에 처음으로 월지(月氏)에 들어가 같은 19년에 돌아왔느니라. 월지의 불법을 끝까지 찾아 법상종(法相宗)이라 하는 종을 전하였으니, 이 종은 천태종과 물과 불이니라. 그런데 천태께서 보지 못하셨던 심밀경(深密經) · 유가론(瑜伽論) · 유식론(唯識論) 등을 전하여 「법화경은 일체경보다는 뛰어나지만 심밀경보다는 못하다」고 하였느니라. 천태께서는 보지 못하셨으므로, 천태의 말학들은 지혜가 얕은 까닭인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느니라. 또 태종은 현명한 왕이요 현장에게 귀의함이 얕지 않았으니, 말해야 할 일이 있었으나 늘 그렇듯 그 시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느니라. 법화경을 뒤집어 「삼승은 진실, 일승은 방편, 오성은 각각 다르다(三乘眞實 · 一乘方便 · 五性各別)」고 한 일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느니라. 천축에서 건너왔다고는 하나 월지의 외도가 한토에 건너온 것인가. 「법화경은 방편이요 심밀경은 진실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석가 · 다보 · 시방 여러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도 도리어 헛것이 되고, 현장 · 자은(慈恩)이야말로 그 시대의 생신불(生身佛)이 되었더니라.

本文 · 二어서 301쪽 8~12행
本文 · 어서 원문

其後則天皇后の御宇に天台大師にせめられし華厳経に又重ねて新訳の華厳経わたりしかば、さきのいきどをりを・はたさんがために新訳の華厳をもつて天台にせめられし旧訳の華厳経を扶けて華厳宗と申す宗を法蔵法師と申す人立てぬ、此の宗は華厳経をば根本法輪・法華経をば枝末法輪と申すなり、南北は一華厳・二涅槃・三法華・天台大師は一法華・二涅槃・三華厳・今の華厳宗は一華厳・二法華・三涅槃等云云。

풀이

그 뒤 측천황후(則天皇后) 치세에, 천태대사에게 책망받은 화엄경에 또다시 신역의 화엄경이 건너오니, 지난날의 분을 풀고자 신역의 화엄으로써 천태에게 책망받은 구역의 화엄경을 도와 화엄종이라 하는 종을 법장(法藏) 법사라 하는 사람이 세웠느니라. 이 종은 화엄경을 근본법륜(根本法輪), 법화경을 지말법륜(枝末法輪)이라 하느니라. 남북은 첫째 화엄 · 둘째 열반 · 셋째 법화, 천태대사는 첫째 법화 · 둘째 열반 · 셋째 화엄, 지금의 화엄종은 첫째 화엄 · 둘째 법화 · 셋째 열반 등이라 하느니라.

本文 · 三어서 301쪽 12행 ~ 302쪽 10행
本文 · 어서 원문

其の後玄宗皇帝の御宇に 天竺より善無畏三蔵は大日経・蘇悉地経をわたす、金剛智三蔵は金剛頂経をわたす、又金剛智三蔵の弟子あり不空三蔵なり、此の三人は月氏の人・種姓も高貴なる上・人がらも漢土の僧ににず法門もなにとはしらず後漢より今にいたるまで・なかりし印と真言という事をあひそいて・ゆゆしかりしかば天子かうべをかたぶけ万民掌をあわす、此の人人の義にいわく華厳・深密・般若・涅槃・法華経等の勝劣は顕教の内・釈迦如来の説の分なり、今の大日経等は大日法王の勅言なり彼の経経は民の万言此経は天子の一言なり、華厳経・涅槃経等は大日経には梯を立ても及ばず但法華経計りこそ大日経には相似の経なれ、されども彼の経は釈迦如来の説・民の正言・此の経は天子の正言なり言は似れども人がら雲泥なり、譬へば濁水の月と清水の月のごとし月の影は同じけれども 水に清濁ありなんど申しければ、此の由尋ね顕す人もなし諸宗皆落ち伏して真言宗にかたぶきぬ、善無畏・金剛智・死去の後・不空三蔵又月氏にかへりて菩提心論と申す論をわたしいよいよ真言宗盛りなりけり、但し妙楽大師といふ人あり天台大師よりは二百余年の後なれども智慧かしこき人にて天台の所釈を見明めてありしかば天台の釈の心は後にわたれる深密経・法相宗又始めて漢土に立てたる華厳宗・大日経真言宗にも法華経は勝れさせ給いたりけるを、或は智のをよばざるか或は人に畏るるか或は時の王威をおづるかの故にいはざりけるかかくて・あるならば天台の正義すでに失なん、又陳隋已前の南北が邪義にも勝れたりとおぼして三十巻の末文を造り給う所謂弘決・釈籤・疏記これなり、此の三十巻の文は本書の重なれるをけづりよわきをたすくるのみならず天台大師の御時なかりしかば 御責にものがれてあるやうなる法相宗と華厳宗と真言宗とを一時にとりひしがれたる書なり。

풀이

그 뒤 현종(玄宗) 황제 치세에 천축에서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은 대일경 · 소실지경을 전하고, 금강지삼장(金剛智三藏)은 금강정경을 전하였으며, 또 금강지삼장의 제자가 있으니 불공삼장(不空三藏)이니라. 이 세 사람은 월지 사람으로 혈통도 고귀한 데다 인품도 한토의 승려와 달랐고, 법문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후한(後漢)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없었던 인(印)과 진언(眞言)이라는 것을 곁들여 매우 훌륭해 보였으므로, 천자는 고개를 숙이고 만민은 합장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의 뜻에 이르기를 「화엄 · 심밀 · 반야 · 열반 · 법화경 등의 승렬은 현교(顯敎) 안의 일로서 석가여래가 설하신 범위이다. 지금의 대일경 등은 대일법왕(大日法王)의 칙언(勅言)이니, 저 경들은 백성의 만 마디 말이고 이 경은 천자의 한 마디 말이다. 화엄경 · 열반경 등은 대일경에는 사다리를 세워도 미치지 못하고, 다만 법화경만이 대일경과 비슷한 경이다. 그러나 저 경은 석가여래의 설로서 백성의 바른 말이고, 이 경은 천자의 바른 말이니, 말은 비슷하나 인품은 구름과 진흙의 차이다. 비유하면 흐린 물에 비친 달과 맑은 물에 비친 달과 같으니, 달그림자는 같으나 물에 맑고 흐림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까닭을 따져 밝히는 사람도 없이 여러 종이 모두 굴복하여 진언종으로 기울었느니라. 선무외 · 금강지가 죽은 뒤 불공삼장이 다시 월지에 돌아가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 하는 논을 전하니 진언종은 더욱 번성하였느니라. 다만 묘락대사(妙樂大師)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태대사보다 이백여 년 뒤였으나 지혜가 뛰어난 사람으로 천태의 해석을 꿰뚫어 보았으므로, 「천태 해석의 마음은 뒤에 건너온 심밀경 · 법상종, 또 처음으로 한토에 세운 화엄종, 대일경 · 진언종보다도 법화경이 뛰어나신 것인데, 혹은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인가, 혹은 사람을 두려워해서인가, 혹은 그 시대 왕의 위세를 겁내서인가 말하지 않았도다. 이대로 둔다면 천태의 정의는 이미 사라지리라. 또 진 · 수 이전 남북의 그릇된 뜻보다도 더하다」고 생각하시어 삼십 권의 말문(末文)을 지으셨으니, 이른바 『홍결(弘決)』 · 『석첨(釋籤)』 · 『소기(疏記)』가 이것이니라. 이 삼십 권의 글은 본서의 거듭된 곳을 깎고 약한 곳을 도왔을 뿐 아니라, 천태대사 때에 없었으므로 책망을 면한 듯이 보이던 법상종과 화엄종과 진언종을 한꺼번에 꺾어 버린 글이니라.

어구 풀이

章安大師장안대사
관정(灌頂, 561~632). 중국 천태종 제4조(① 북제의 혜문 · ② 남악 혜사 · ③ 천태 지의 · ④ 장안 관정)로, 천태대사의 제자다. 지금의 저장성 임해현 장안 사람으로, 일곱 살에 섭정사에 들어가 25세에 천태대사를 만난 뒤 늘 곁에서 모시며 설해진 법문을 모두 받아 적었다. 그가 기록해 엮은 천태 삼대부를 비롯해 대소부 백여 권이 있고, 스승이 입적한 뒤 『열반현의』 2권 · 『열반경소』 20권을 지었다. 삼론의 가상대사 길장이 장안의 『의기(義記)』를 빌려 보고 천태에게 귀복했다고 한다. 정관 6년(632) 천태산 국청사에서 72세로 입적하고 제자 지위(智威)에게 법등을 전했다.
唐の太宗당 태종
이세민(598~649), 당의 제2대 황제(재위 626~649). 수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울 때 아버지 이연과 함께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했다. 이연이 제위에 오르자 진왕(秦王)이 되었고 황태자를 거쳐 제위를 이었다. 방현령 · 두여회 · 위징 등 명신을 써서 「정관의 치」를 이루었다. 그러나 좋은 후계자를 얻지 못해, 죽은 뒤 측천무후의 전제와 무주(武周)의 건국을 허용하게 되었다.
玄奘三蔵현장삼장
602~664. 당대의 승려로 중국 법상종의 개조다. 낙주 구씨현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진(陳)씨, 속명은 위(褘)다. 13세에 출가해 율부 · 성실 · 구사 등을 배웠고, 뒤에 인도 각지를 순례하며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대반야경』 600권을 비롯해 75부 1,335권의 경전을 번역했다고 한다. 태종의 칙명을 받들어 열일곱 해에 걸친 여행을 적은 책이 『대당서역기』다.
法相宗법상종
남도 육종의 하나. 『해심밀경』 · 『유가사지론』 · 『성유식론』 등 육경십일론을 의지하는 종파다. 당대에 현장이 인도에서 유가 유식의 학문을 전하고, 규기(자은)가 대성했다.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세워 일체 제법의 성(性)과 상(相)을 분별해 체계화하고, 일체법은 중생의 마음속 근본식인 아뢰야식에 갈무리된 종자가 전변한 것이라는 유심론을 설한다. 석존 일대의 교설을 유(有) · 공(空) · 중도(中道)의 삼시교로 나누고 법상종을 셋째 중도교라 했다. 또 오성각별을 설해 삼승진실 · 일승방편을 세운다. 일본 전래에는 네 번이 있으며, 도소(道昭)가 고토쿠 천황 백치 4년(653)에 입당해 현장에게 배우고 사이메이 천황 6년(660)에 돌아와 간고사(元興寺)에서 넓힌 것을 첫 전래로 본다.
深密経・瑜伽論・唯識論심밀경 · 유가론 · 유식론
『해심밀경』은 법상종이 바로 의지하는 경으로 5권이며, 두 번역이 있으나 현장 번역이 주로 쓰인다. 유식설의 중심 사상이 설해져 있다. 『유가론』은 『유가사지론』 100권으로, 미륵보살 또는 무착의 저술이라 하며 현장이 번역했다. 『유식론』은 세친의 『유식이십론』(1권, 보리유지 등의 세 번역이 있다) 또는 『성유식론』을 가리킨다.
三乗真実・一乗方便・五性各別삼승진실 · 일승방편 · 오성각별
여러 부처가 일불승을 말한 것은 방편이고,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으로 저마다의 종성(種性)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법상종의 주장이다. 중생의 다섯 종성은 처음부터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의 차별이라는 면만을 근거로 법을 설한 것으로, 법화경이 일체중생 모두의 성불을 설하는 것과 정반대의 가르침이다.
慈恩자은
규기(窺基, 632~682). 당대의 승려로 중국 법상종의 사실상의 개조다. 정관 6년 장안에서 태어나,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오자 17세에 제자가 되어 그 아래에서 대소승 경론의 번역에 종사했다. 장안 자은사에서 법상종을 넓혔으므로 자은대사라 불린다. 영순 원년(682)에 죽었다. 저서로 『법화현찬』 10권 · 『성유식론술기』 20권 · 『성유식론추요』 4권 등이 있다.
則天皇后측천황후
측천무후(624~705), 무측천이라고도 한다. 당 태종 · 고종의 후궁에 들어가 영휘 6년(655)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고종이 병으로 쓰러진 뒤 몸소 정무를 보았고, 고종이 죽은 뒤에는 친아들 중종 · 예종을 잇달아 제위에 앉혔다가, 천수 원년(690)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고쳤다. 밀고 제도 등 공포 정치를 폈으나, 한편으로 문벌에 기대지 않는 정치의 길을 열고 학예에 힘을 기울이는 등 문화를 일으켰다.
華厳宗화엄종
남도 육종의 하나. 화엄경을 의지하는 종파로 원명구덕종 · 법계종이라고도 하며, 대성자의 이름을 따서 현수종(賢首宗)이라고도 한다. 동진 때 화엄경이 한역되고 두순 · 지엄을 거쳐 현수(법장)가 교의를 대성했다. 일체 만법은 융통무애하여 일체를 하나에 거두고 하나는 일체에 두루 한다는 법계연기를 세우고, 이를 깨달으면 빨리 불과를 이룬다고 설한다.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을 세워 화엄경을 가장 높은 가르침으로 삼았다. 일본에는 천평 8년(736) 당나라 승려 도선(道璿)이 화엄종의 장소(章疏)를 전했고, 천평 12년(740) 신라에서 배운 심상(審祥)이 도다이사(東大寺)에서 화엄경을 강해 일본 화엄종의 조사가 되었다. 제2조 양변(良辨)이 도다이사를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法蔵法師・新訳の華厳経법장 법사 · 신역의 화엄경
643~712. 지엄의 제자로 화엄종 제3조다. 화엄화상 · 현수대사 · 향상대사(香象大師)라고도 한다. 지엄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실차난타의 화엄경 신역에도 참여했다. 측천무후의 칙명으로 궁중에 들어갔을 때 곁에 있던 금사자상을 비유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하며(『화엄금사자장』), 무후가 세운 태원사에 머물며 크게 넓혔다. 법화경에 의거한 천태대사에게 맞서 화엄경을 근거로 하는 오교십종의 교판을 세웠다. 저서로 『화엄경탐현기』 20권 · 『화엄오교장』 3권 · 『망진환원관』 1권 · 『화엄경전기』 5권 등이 있다. 신역의 화엄경은 측천무후 때(695~699) 우전국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본, 이른바 『팔십화엄』이다.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본(『육십화엄』)이 천태대사가 본 구역이다. 법장은 이 신역 사업에 참여했다.
華厳経をば根本法輪・法華経をば枝末法輪화엄경을 근본법륜, 법화경을 지말법륜
화엄경은 부처가 성도한 뒤 처음 자기의 깨달음을 그대로 설한 근본의 가르침이고, 그 뒤의 가르침은 근기에 따라 근본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와 끝이라는 견해다. 화엄종은 이에 따라 법화경도 화엄의 근본에서 갈라진 가르침으로 보았다. 本文은 그 결과를 「첫째 화엄 · 둘째 법화 · 셋째 열반」의 서열로 요약하신다.
玄宗皇帝현종 황제
685~762. 당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이름은 이융기. 예종의 셋째 아들로, 중종의 황후 위씨의 난을 평정하고 예종을 세운 뒤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다. 즉위 뒤 외정을 억제하고 민정에 힘써 「개원의 치」라 불리는 안정된 세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만년에 양귀비를 총애하고 정치를 게을리하며 간신을 써서 정국이 혼란해졌고, 마침내 안사의 난을 불렀다. 만년에는 양위한 숙종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불우하게 생을 마쳤다.
善無畏三蔵선무외삼장
637~735. 범어 이름 슈바카라싱하. 중국에 밀교를 처음 전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송고승전』 권2에 따르면 인도의 왕자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으나 곧 형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했으며, 마가다국 나란다사에서 달마국다(達摩掬多)에게 밀교를 배웠다. 개원 4년(716) 중국에 와 현종에게 국사로 맞아들여졌고, 『대일경』 7권 등을 번역하고 『대일경소』 20권을 엮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특히 『대일경소』에서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의 뜻을 훔쳐 넣어 대일경이 법화경보다 「이동사승(理同事勝)」이라는 그릇된 뜻을 세웠다고 본다. 금강지 · 불공과 함께 삼삼장이라 불린다.
金剛智三蔵・不空三蔵금강지삼장 · 불공삼장
금강지(671~741)는 인도의 왕족 출신이라고도 바라문 출신이라고도 한다. 열 살 때 나란다사에서 출가해 적정지에게 배웠고, 31세에 용수의 제자 용지(龍智)에게 가 7년 동안 모시며 밀교를 배웠다고 전한다. 뒤에 당으로 향해 개원 8년(720) 낙양에 들어갔다. 제자로 불공 등이 있다. 불공(705~774)은 불공금강(不空金剛)이다. 북인도 출신이라 전하며, 어려서 당에 들어가 금강지를 따라 출가했다. 개원 29년(741) 금강지가 죽은 뒤 인도 방면으로 떠나 사자국(스리랑카)에 이르러 밀장과 여러 경론을 얻고, 몇 해 뒤 다시 당으로 돌아왔다. 현종 · 숙종 · 대종의 귀의를 받았다. 구마라집 · 현장 · 진제와 함께 중국 4대 역경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금강정경』 등 많은 밀교 경전을 번역했다.
真言宗진언종
『대일경』 · 『금강정경』 · 『소실지경』 등을 의지하고 대일여래를 교주로 하는 종파다. 현밀(顯密) 이교판을 세워, 대일경 등은 법신 대일여래가 스스로 법락을 누리기 위해(自受法樂) 내증 비밀의 경계를 설한 밀교이고, 다른 종의 가르침은 응신 석가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드러내 설한 현교라고 낮춘다. 일본에서는 구카이가 입당해 전하고 개종했다. 구카이의 진언종을 동사(東寺)의 밀교라 하여 동밀(東密), 자각(엔닌, 圓仁) · 지증(엔친, 圓珍)이 천태종에 들인 밀교를 태밀(台密)이라 한다.
菩提心論보리심론
『금강정유가중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론』의 약칭이다. 용수보살 지음 · 불공삼장 번역으로 전한다. 마음을 집중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함을 설하고 이를 즉신성불의 유일한 방법으로 강조하며, 현밀 이교의 승렬을 설하므로 진언종에서 의지하는 논으로 삼는다.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이를 불공이 지은 것으로 보신다.
妙楽大師묘락대사
담연(湛然, 711~782). 당대의 사람으로 천태종 제9조다. 천태대사로부터 6대째의 법손으로, 중흥의 조사로서 천태의 교의를 크게 선양하고 실천 수행에 힘썼다. 상주 진릉현 형계(장쑤성) 사람으로 속성은 척(戚)씨,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업으로 삼았다. 처음 난릉의 묘락사에 머물러 묘락대사라 불렸고 출신지에 따라 형계존자라고도 한다. 개원 18년(730) 좌계 현랑에게 천태 교학을 배우고, 천보 7년(748) 38세에 의흥 정락사(淨樂寺)에서 출가했다. 당시 선 · 화엄 · 진언 · 법상 등이 번성하고 천태종은 쇠퇴해 있었으나, 법화 일승 진실의 입장에서 각 종을 논파하고 천태 삼대부의 주석서를 지어 천태학을 크게 일으켰다. 현종 · 숙종 · 대종이 궁정으로 불렀으나 병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고, 만년에 천태산 국청사에 들어가 불롱 도량에서 입적했다. 저서로 『법화현의석첨』 10권 · 『법화문구기』 10권 · 『지관보행전홍결』 10권 · 『오백문론』 3권 등 다수가 있다.
弘決・釈籤・疏記홍결 · 석첨 · 소기
묘락대사의 천태 삼대부 주석 삼십 권이다. 『지관보행전홍결』 10권은 『마하지관』의 주석, 『법화현의석첨』 10권은 『법화현의』의 주석, 『법화문구기』 10권(本文의 「소기」)은 『법화문구』의 주석이다.

두 대만에 흐트러진 정법

이 장은 천태대사가 세상을 떠난 뒤 불법이 다시 미란(迷亂)에 빠진 사정을 밝힌다. 천태대사가 공장 대결로 열 갈래의 쟁론을 꺾어 통일하고 제경중왕(諸經中王)인 법화경을 광선유포했는데, 그 정의는 겨우 천태 · 장안 두 대만 온전히 이어지고, 뒤에 들어온 법상종 · 화엄종 · 진언종에 의해 다시 흐트러지고 말았다. 정법이 바르게 후세로 전해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보면 3천 년 전 인도에서 일어난 불법이 동양 전역에 퍼지고, 그 진수가 시대를 넘어 사람들의 괴로움을 구해 왔다는 사실, 나아가 7백여 년 전 니치렌 대성인의 어서가 이토록 많이 오늘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대성인은 「현불미래기」에서 「전해 지니는 사람이 없으면 나무나 돌이 가사와 발우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伝持の人無れば猶木石の衣鉢を帯持せるが如し, 508쪽)고 하셨고, 「일대성교대의」에서는 「이 경은 상전(相傳)이 아니면 알기 어렵다」(此の経は相伝に有らざれば知り難し, 398쪽)고 하셨다. 법은 그것을 바르게 받아 지니고 전하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후세에 살아 있는 법으로 전해진다.

천태종은 本文에 보이듯 천태대사 멸후 이백여 년, 천태로부터 6대째에 묘락대사가 나와 다시 천태의 정의를 선양했지만, 묘락대사 뒤에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법등은 일본으로 건너왔다. 전교대사가 당에 건너가 일심삼관(一心三觀) · 일념삼천의 깊은 뜻을 배워 받은 상대가 바로 묘락대사의 제자인 행만(行滿) 좌주와 도수(道邃) 화상이었다. 이 장의 묘락대사와 다음 장 · 제12장의 전교대사는 이렇게 한 줄기로 이어진다.

첫째 미란 — 현장과 법상종

해 질 녘 당나라 장안 — 성벽 너머 높이 솟은 네모난 벽돌탑과 낮은 지붕들
그림 · 해 질 녘 당나라 장안 — 성벽 너머 높이 솟은 네모난 벽돌탑과 낮은 지붕들

첫째 미란은 법상종이다. 당 태종 치세, 현장삼장은 정관 3년(629)에 인도로 떠나 정관 19년(645)에 돌아왔다. 열일곱 해에 걸친 대여행 끝에 인도의 불법을 끝까지 찾아 법상종을 전했다. 本文은 이 종을 「천태종과 물과 불」이라고 단언하신다. 법상종의 근본 주장이 법화경의 일불승과 정면으로 부딪치기 때문이다.

현장은 천태대사가 보지 못한 『해심밀경』 · 『유가사지론』 · 『유식론』 등을 가지고 와서, 「법화경은 일체경보다는 뛰어나지만 『해심밀경』보다는 못하다」고 주장했다. 천태대사가 보지 못한 경론이라는 사실 자체가 무기가 되었다. 천태의 말학들은 지혜가 얕아 천태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태대사는 보지 못하셨으니 그럴지도 모른다」며 그대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태종은 현명한 왕으로 이름 높았고 현장에 대한 귀의가 각별했으므로, 할 말이 있는 사람들도 세상의 습관대로 황제의 권세를 두려워해 입을 열지 않았다.

本文의 「석가 · 다보 · 시방 여러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도 도리어 헛것이 되고, 현장 · 자은이야말로 그 시대의 생신불이 되었다」는 말은 날카로운 반어다. 제9장에서 천태대사가 들었던 다보 · 분신의 증명이 현장 한 사람의 권위 앞에서 무력해졌다는 것이다. 「천축에서 건너왔다고는 하나 월지의 외도가 한토에 건너온 것인가」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이 진실을 보증하지 않는다. 경문과 어긋나면 인도에서 온 것이라도 외도와 다름없다.

법상종이 현장에 의해 열리고, 현장이 열일곱 해의 대여행 끝에 인도에서 가져와 당 태종에게 바치고 황제를 비롯한 온 나라의 귀의를 받은 일은 「보은초」를 비롯해 「개목초」 · 「선시초」에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오성각별 — 성불의 문을 닫는 가르침

법상종의 교의를 요약하는 말이 「삼승진실 · 일승방편 · 오성각별」이다. 오성(五性)이란 다음 다섯이다.

이 가운데 성문성 · 벽지불성 · 여래성의 세 종성을 위해 부처는 성문승 · 연각승 · 보살승의 삼승을 설했다. 어느 쪽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부정종성의 이승을 위해서는 법화경(일승)을 설해 성불하게 했다. 삼승의 종성이 없는 무성유정을 위해서는 인천승을 설했다. 그러니 법화경의 일승은 부정종성이라는 일부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종성에 따라 셋으로 나누어 설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이를 이렇게 정리하셨다. 「이 종의 마음은, 불교는 근기에 따라야 한다. 일승의 근기를 위해서는 삼승이 방편이고 일승이 진실이니 이른바 법화경 등이다. 삼승의 근기를 위해서는 삼승이 진실이고 일승이 방편이다」(此の宗の心は仏教は機に随うべし一乗の機のためには三乗方便・一乗真実なり所謂法華経等なり、三乗の機のためには三乗真実・一乗方便, 262쪽). 또 「개목초」에서는 「이 종이 이르기를, 처음 화엄경부터 끝의 법화 · 열반경에 이르기까지 무성유정과 결정성의 이승은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다」(此の宗の云く始め華厳経より終り法華・涅槃経にいたるまで無性有情と決定性の二乗は永く仏になるべからず, 198쪽)고 하시고, 「그러니 법화경 · 열반경 가운데서도 이전의 경들에서 싫어한 무성유정 · 결정성을 바로 가리켜 성불한다고는 설해지지 않았다」(されば法華経・涅槃経の中にも爾前の経経に嫌いし無性有情・決定性を正くついさして成仏すとは・とかれず, 198쪽)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라고 소개하셨다.

무성유정이란 오성 가운데 다섯째인 무성의 사람으로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는 존재다. 결정성의 이승이란 이승으로 정해져 영원히 이승에 머무는 자로, 역시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한다. 요컨대 법상종은 일불승을 설한 법화경을 방편이라 하고, 성문 · 연각 · 보살의 근기에 따라 설한 삼승의 설법을 진실이라 하여 법화경과 정반대의 말을 한 것이다.

법상종의 오성각별
  • 성문승성성문승
  • 벽지불승성연각승
  • 여래승성보살승
  • 부정승성법화경의 일승으로 성불(방편)
  • 무성(일천제)인천승, 영원히 성불 못함
삼승진실 · 일승방편
물과 불
법화경
「여래는 다만 일불승으로써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다른 승은 둘도 셋도 없다」방편품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무량의경
십계호구 · 일념삼천일체중생 개성불
도표 6 · 오성각별과 법화경의 일불승

그러나 무량의경에는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설하고, 법화경 방편품에는 「세존은 법을 오래 설한 뒤에 반드시 진실을 설하신다」, 「부처는 방편의 힘으로 삼승의 가르침을 보인다」고 하며, 또 「여래는 다만 일불승으로써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다른 승은 둘이든 셋이든 없다」고 했다. 그리고 법화경이 진실하다는 것은 다보불도 분신의 여러 부처도 모여서 증명했다. 이토록 분명한 경문을 두고 「삼승진실」이라는 터무니없는 설을 세운 것이다.

이전의 경들(爾前經)은 방편의 가르침이기에 삼승을 따로따로 설했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십계호구 · 일념삼천을 설해, 일체 만법이 모두 묘법연화경의 당체가 된다. 그들의 말처럼 삼승이니 오성이니 하는 결정적인 차별이 있을 리가 없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일념삼천은 십계호구에서 비롯되었다. 법상과 삼론은 팔계를 세우고 십계를 알지 못한다. 하물며 호구를 알겠는가」(一念三千は十界互具よりことはじまれり、法相と三論とは八界を立てて十界をしらず況や互具をしるべしや, 198쪽)라고 단언하셨다. 오성각별은 중생의 생명에 처음부터 넘을 수 없는 칸막이를 세우는 가르침이며, 일념삼천은 그 칸막이를 생명의 내부에서 허무는 법리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법상종과 천태종이 「물과 불」인 까닭은 성불의 범위에 있다. 오성각별은 처음부터 성불하지 못하는 중생을 정해 두지만, 법화경은 십계호구 · 일념삼천에 의해 일체중생의 성불을 밝힌다. 사람의 차이를 고정된 본성으로 보느냐, 생명에 갖추어진 가능성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둘째 미란 — 측천무후와 법장의 화엄종

둘째 미란은 화엄종이다. 측천무후 치세에 천태대사에게 책망받았던 화엄경에 새로 번역된 화엄경(『팔십화엄』)이 더해졌다. 법장은 이 신역 화엄경을 내세워, 천태에게 책망받은 구역 화엄경을 도와 화엄종을 세웠다. 대성인은 그 동기를 「지난날의 분을 풀고자」라고 짚으신다. 남삼북칠의 화엄 제일이 천태에게 꺾인 데 대한 설욕이라는 것이다.

화엄종은 화엄경을 근본법륜, 법화경을 지말법륜이라 했다. 화엄경은 부처가 성도 직후 처음 설한 가르침이니 근본이고, 법화경은 마지막에 설한 가르침이니 근본에서 갈라져 나온 끝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한 순서만 보고 가르침의 내용을 보지 않은 판정이다. 무량의경의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경문에 따르면 화엄경은 바로 그 「사십여 년」 안의 첫 가르침이다.

本文은 여기서 세 서열을 나란히 놓으신다. 남북의 여러 스승은 첫째 화엄 · 둘째 열반 · 셋째 법화, 천태대사는 첫째 법화 · 둘째 열반 · 셋째 화엄, 그리고 지금의 화엄종은 첫째 화엄 · 둘째 법화 · 셋째 열반이다. 법장의 서열은 남북의 서열과 달리 법화를 열반보다 위에 두었다. 천태대사의 논파를 일부 받아들이면서 화엄의 자리만은 지키려 한 절충으로 읽을 수도 있다.

남북(광택사 법운)
  1. 첫째화엄
  2. 둘째열반
  3. 셋째법화
오시교 · 「이 경은 아직 석연하지 않다」一華厳・二涅槃・三法華
천태대사
  1. 첫째법화
  2. 둘째열반
  3. 셋째화엄
무량의경 「미현진실」 · 열반경 「군습」 · 법화경 「이금당」一法華・二涅槃・三華厳
화엄종(법장)
  1. 첫째화엄
  2. 둘째법화
  3. 셋째열반
「근본법륜 · 지말법륜」一華厳・二法華・三涅槃
도표 7 · 세 가지 서열

셋째 미란 — 선무외 · 금강지 · 불공과 진언종

셋째, 그리고 가장 무거운 미란이 진언종이다. 현종 황제 치세에 인도에서 선무외삼장이 『대일경』 · 『소실지경』을 전하고, 금강지삼장이 『금강정경』을 전했으며, 금강지의 제자 불공삼장이 이를 이었다. 대일경 · 금강정경 · 소실지경은 뒤에 진언 삼부경이라 불린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도 사람으로 혈통이 고귀했고 인품도 중국 승려들과 달랐다. 그 법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후한 때 불교가 처음 전해진 뒤로 한 번도 없었던 인(印)과 진언(眞言)이라는 새로운 것을 곁들였으므로 매우 훌륭해 보였다. 위로는 현종 황제부터 아래로 만민까지 모두 머리를 숙이고 합장해 귀의했다. 혈통 · 인품 · 새로움 · 의례의 장엄 — 이번에도 사람과 형식의 권위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화엄 · 심밀 · 반야 · 열반 · 법화경 등의 승렬은 현교 안의 일이며, 석가여래가 설한 범위의 일이다. 지금의 대일경은 대일법왕의 칙언이다. 저 경들은 백성의 만 마디 말이고 이 경은 천자의 한 마디 말이다. 화엄경 · 열반경 등은 대일경에 사다리를 놓아도 닿지 못한다. 다만 법화경만은 대일경과 비슷한 경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석가여래의 설이니 백성의 바른 말이요, 대일경은 천자의 바른 말이다. 말은 비슷해도 말한 이의 품격은 구름과 진흙의 차이다. 비유하자면 흐린 물에 비친 달과 맑은 물에 비친 달 같아서, 달그림자는 같아도 물에 맑음과 흐림이 있다.

이 주장의 교묘함은 법화경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법화경의 이치가 대일경과 「비슷하다」고 인정하면서, 설한 부처의 격(석가와 대일)과 형식(인 · 진언의 유무)으로 차이를 만든다. 이것이 뒤에 「이동사승(理同事勝)」 — 이치는 같고 사상(事相)에서 뛰어나다 — 이라는 말로 정식화되며, 제12장과 다음 편에서 대성인이 가장 집요하게 파하시는 대상이 된다. 그런데도 이 까닭을 따져 밝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여러 종이 모두 굴복해 진언종으로 기울었다.

선무외 · 금강지가 죽은 뒤 불공삼장은 다시 인도로 가서 『보리심론』을 가지고 왔고, 진언종은 더욱 번성했다. 이 『보리심론』이 용수의 저술인지 불공의 저술인지는 제12장에서 다시 문제가 된다.

종법상종
사람현장 · 자은(규기)
황제당 태종
시기정관 3년(629) 출발 ~ 19년(645) 귀국
가지고 온 것『해심밀경』 · 『유가사지론』 · 『유식론』
법화경에 대한 판정「법화경은 일체경보다 뛰어나나 심밀경보다 못하다」 — 삼승진실 · 일승방편 · 오성각별
종화엄종
사람법장
황제측천무후
시기7세기 말
가지고 온 것신역 『팔십화엄』
법화경에 대한 판정「화엄은 근본법륜, 법화는 지말법륜」 — 첫째 화엄 · 둘째 법화 · 셋째 열반
종진언종
사람선무외 · 금강지 · 불공
황제현종
시기개원 4년(716) · 8년(720) 이후
가지고 온 것『대일경』 · 『소실지경』 · 『금강정경』 · 뒤에 『보리심론』
법화경에 대한 판정「현교의 법화는 백성의 바른 말, 대일경은 천자의 바른 말」 — 흐린 물의 달 · 맑은 물의 달
「묘락대사의 삼십 권(『홍결』 · 『석첨』 · 『소기』)이 세 종을 한꺼번에 꺾다」
도표 8 · 천태 멸후 세 종의 전래

묘락대사의 삼십 권 — 세 종을 한꺼번에 꺾다

그러나 천태의 진영에도 묘락대사가 나왔다. 천태대사보다 이백여 년 뒤의 사람이지만 지혜가 뛰어나 천태대사의 해석을 깊이 꿰뚫었다. 그는 천태 해석의 참뜻에 비추어 보면, 그 뒤에 건너온 『해심밀경』 · 법상종, 처음으로 중국에 세워진 화엄종, 새로 전해진 대일경 · 진언종 그 어느 것보다도 법화경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천태의 말학들은 지혜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서인지, 현장 · 법장 · 선무외 등을 두려워해서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귀의한 그 시대 황제의 위세가 두려워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둔다면 천태의 정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외치는 그릇된 뜻은 진 · 수 이전 남삼북칠의 그릇된 뜻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本文이 드는 세 가지 까닭 — 지혜가 미치지 못함, 사람을 두려워함, 왕의 위세를 겁냄 — 은 정법이 쇠퇴하는 원인을 정확히 짚는다. 지혜의 부족, 권위에 대한 두려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다. 묘락대사는 이 셋을 모두 넘어 「이것은 결코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굳게 결심하고, 천태대사의 본소에 대한 주석서 삼십 권을 지었다. 『마하지관』의 주석인 『지관보행전홍결』, 『법화현의』의 주석인 『법화현의석첨』, 『법화문구』의 주석인 『법화문구기』다.

이 삼십 권은 본서에서 거듭된 곳은 한쪽을 깎고 뜻이 분명하지 않은 곳은 또렷이 했을 뿐 아니라, 천태대사 시대에는 없었기에 천태의 파절을 피해 있던 법상종 · 화엄종 · 진언종을 한꺼번에 논파한 위대한 책이었다. 천태대사가 남삼북칠을 꺾었듯, 묘락대사는 천태 멸후에 일어난 세 종을 꺾었다. 대성인이 「보은초」 제7장 이후 「황멸도후」의 법난을 입은 상법 시대의 대사로 천태 · 전교와 함께 묘락을 드시는 까닭이 여기 있다.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 권10 끝에는, 불공의 제자 함광(含光)이 묘락대사에게 「인도의 용지보살이 천태의 해석을 인도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교대사가 이 대목을 『의빙집』에 옮겨 실었으며, 대성인은 제12장에서 이를 인용하신다.

제11장 일본 전교대사의 홍통
어서 302쪽 11행 ~ 304쪽 4행 · 第十一章 日本伝教大師の弘通

본문

本文 · 一어서 302쪽 11~15행
本文 · 어서 원문

又日本国には人王第三十代・欽明天皇の御宇十三年壬申十月十三日に百済国より一切経・釈迦仏の像をわたす、又用明天皇の御宇に聖徳太子仏法をよみはじめ和気の妹子と申す臣下を漢土につかはして先生所持の一巻の法華経をとりよせ給いて持経と定め、其の後人王第三十七代・孝徳天王の御宇に三論宗・華厳宗・法相宗・倶舎宗・成実宗わたる、人王第四十五代に聖武天王の御宇に律宗わたる已上六宗なり、孝徳より人王五十代の桓武天皇にいたるまでは十四代・一百二十余年が間は天台真言の二宗なし、

풀이

또 일본국에는 인왕(人王) 제30대 긴메이(欽明) 천황 치세 13년 임신(壬申) 10월 13일에 백제국에서 일체경과 석가불의 상(像)을 전하였느니라. 또 요메이(用明) 천황 치세에 쇼토쿠(聖德) 태자가 불법을 읽기 시작하시어, 와케노 이모코(和氣妹子)라 하는 신하를 한토에 보내 전생에 지니셨던 한 권의 법화경을 가져오게 하여 지경(持經)으로 정하셨느니라. 그 뒤 인왕 제37대 고토쿠(孝德) 천황 치세에 삼론종 · 화엄종 · 법상종 · 구사종 · 성실종이 건너오고, 인왕 제45대 쇼무(聖武) 천황 치세에 율종이 건너왔으니, 이상이 육종이니라. 고토쿠부터 인왕 제50대 간무(桓武) 천황에 이르기까지 14대 · 120여 년 동안은 천태 · 진언의 두 종이 없었느니라.

本文 · 二어서 302쪽 15행 ~ 303쪽 10행
本文 · 어서 원문

桓武の御宇に最澄と申す小僧あり山階寺の行表僧正の御弟子なり、法相宗を始めとして六宗を習いきわめぬ而れども仏法いまだ極めたりとも・おぼえざりしに華厳宗の法蔵法師が造りたる起信論の疏を見給うに天台大師の釈を引きのせたり此の疏こそ子細ありげなれ此の国に渡りたるか又いまだ・わたらざるかと不審ありしほどに有人にとひしかば其の人の云く大唐の揚州竜興寺の僧鑒真和尚は天台の末学・道暹律師の弟子天宝の末に日本国にわたり給いて小乗の戒を弘通せさせ給いしかども天台の御釈持ち来りながらひろめ給はず人王第四十五代聖武天王の御宇なりとかたる、其の書を見んと申されしかば取り出だして見せまいらせしかば一返御らんありて生死の酔をさましつ此の書をもつて六宗の心を尋ねあきらめしかば一一に邪見なる事あらはれぬ、忽に願を発て云く日本国の人皆・謗法の者の檀越たるが天下一定乱れなんずとおぼして六宗を難ぜられしかば七大寺・六宗の碩学蜂起して京中烏合し天下みなさわぐ、七大寺六宗の諸人等悪心強盛なり、而るを去ぬる延暦二十一年正月十九日に天王高雄寺に行幸あつて七寺の碩徳十四人・善議・勝猷・奉基・寵忍・賢玉・安福・勤操・修円・慈誥・玄耀・歳光・道証・光証・観敏等の十有余人を召し合わす、華厳・三論・法相等の人人・各各・我宗の元祖が義にたがはず最澄上人は六宗の人人の所立・一一に牒を取りて本経・本論・並に諸経・諸論に指し合わせてせめしかば一言も答えず口をして鼻のごとくになりぬ、天皇をどろき給いて委細に御たづねありて重ねて勅宣を下して十四人をせめ給いしかば承伏の謝表を奉りたり、

풀이

간무 천황 치세에 최징(最澄)이라 하는 젊은 승이 있었으니, 야마시나데라(山階寺)의 행표(行表) 승정의 제자이니라. 법상종을 비롯하여 육종을 끝까지 배웠으나 불법을 아직 다 깨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화엄종의 법장 법사가 지은 『기신론』의 소(疏)를 보시니 천태대사의 해석을 끌어다 실어 놓았느니라. 「이 소야말로 사연이 있을 듯하다. 이 나라에 건너왔는가, 아직 건너오지 않았는가」 하고 미심쩍어하시던 차에 어떤 사람에게 물으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대당 양주 용흥사(龍興寺)의 승 감진(鑒眞) 화상은 천태의 말학이요 도섬(道暹) 율사의 제자로, 천보(天寶) 말년에 일본국에 건너오시어 소승의 계를 홍통하셨으나, 천태의 해석을 가지고 오셨으면서도 넓히지 않으셨다. 인왕 제45대 쇼무 천황 치세의 일이다」라고 하였느니라. 「그 글을 보고 싶다」 하시니 꺼내어 보여 드렸는데, 한 번 보시고 생사의 취기를 깨셨느니라. 이 글로써 육종의 마음을 찾아 밝히시니 하나하나 사견(邪見)임이 드러났느니라. 곧바로 원(願)을 세우시어 「일본국 사람이 모두 방법(謗法)하는 자의 단월(檀越)이 되어 있으니 천하는 반드시 어지러워지리라」 생각하시고 육종을 논란하시니, 칠대사(七大寺) · 육종의 석학들이 들고일어나 서울 안에 까마귀처럼 모여들고 온 천하가 떠들썩하였느니라. 칠대사 · 육종의 여러 사람들은 악심이 매우 강성하였느니라. 그런데 지난 연력(延曆) 21년 정월 19일에 천황이 다카오사(高雄寺)에 행차하시어 칠대사의 석덕 열네 명, 선의(善議) · 승유(勝猷) · 봉기(奉基) · 총인(寵忍) · 현옥(賢玉) · 안복(安福) · 근조(勤操) · 수원(修圓) · 자고(慈誥) · 현요(玄耀) · 세광(歲光) · 도증(道證) · 광증(光證) · 관민(觀敏) 등 십여 명을 불러 대결시키셨느니라. 화엄 · 삼론 · 법상 등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종 원조(元祖)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주장하였으나, 최징 상인은 육종 사람들이 세운 바를 하나하나 첩(牒)을 취하여 본경 · 본론 및 여러 경 · 여러 논에 맞대어 책하시니, 한마디도 답하지 못하고 입이 코처럼 다물어졌느니라. 천황이 놀라시어 자세히 물으시고 거듭 칙선(勅宣)을 내려 열네 명을 책하시니, 승복의 사표(謝表)를 올렸느니라.

本文 · 三어서 303쪽 10행 ~ 304쪽 4행
本文 · 어서 원문

其書に云く「七箇の大寺六宗の学匠乃至初て至極を悟る」等云云又云く「聖徳の弘化より以降今に二百余年の間講ずる所の経論其数多し、彼此理を争うて其の疑未だ解けず而も此の最妙の円宗猶未だ闡揚せず」等云云、又云く「三論法相・久年の諍渙焉として氷の如く解け照然として既に明かに猶雲霧を披いて三光を見るがごとし」云云、最澄和尚十四人が義を判じて云く「各一軸を講ずるに法鼓を深壑に振い賓主三乗の路に徘徊し義旗を高峰に飛す長幼三有の結を摧破して猶未だ歴劫の轍を改めず白牛を門外に混ず、豈善く初発の位に昇り阿荼を宅内に悟らんや」等云云、弘世真綱二人の臣下云く「霊山の妙法を南岳に聞き総持の妙悟を天台に闢く一乗の権滞を慨き三諦の未顕を悲しむ」等云云、又十四人の云く「善議等牽れて休運に逢て乃ち奇詞を閲す深期に非るよりは何ぞ聖世に託せんや」等云云、此の十四人は華厳宗の法蔵・審祥・三論宗の嘉祥・観勒・法相宗の慈恩・道昭・律宗の道宣・鑒真等の漢土・日本元祖等の法門・瓶はかはれども水は一なり、而るに十四人・彼の邪義をすてて伝教の法華経に帰伏しぬる上は誰の末代の人か華厳・般若・深密経等は法華経に超過せりと申すべきや、小乗の三宗は又彼の人人の所学なり大乗の三宗破れぬる上は沙汰のかぎりにあらず、而るを今に子細を知らざる者・六宗はいまだ破られずとをもへり、譬へば盲目が天の日月を見ず聾人が雷の音をきかざるゆへに天には日月なし空に声なしと・をもうがごとし。

풀이

그 글에 이르기를 「일곱 대사(大寺) · 육종의 학장들이 …… 처음으로 지극한 법을 깨달았다」 등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쇼토쿠 태자가 넓혀 교화하신 이래 지금까지 이백여 년 동안 강해 온 경론은 그 수가 많으나, 이것저것 이치를 다투어 그 의심이 아직 풀리지 않았고, 게다가 이 가장 묘한 원종(圓宗)은 아직 드러나 선양되지 않았다」 등이라 하며, 또 이르기를 「삼론과 법상의 오랜 쟁론이 얼음 녹듯 환하게 풀리고 밝게 이미 분명해졌으니,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삼광(三光)을 보는 것과 같다」 하였느니라. 최징 화상이 열네 명의 뜻을 판정하여 이르기를 「저마다 한 축(軸)을 강하나 법고(法鼓)를 깊은 골짜기에 울리고, 손님과 주인이 삼승의 길을 헤매며, 의기(義旗)를 높은 봉우리에 날리고, 어른과 아이가 삼유(三有)의 결박을 깨뜨려도 아직 역겁(歷劫)의 바퀴 자국을 고치지 않아 흰 소를 문밖에 섞어 두었으니, 어찌 능히 초발(初發)의 지위에 올라 아(阿) · 다(荼)를 집 안에서 깨달을 수 있겠는가」 등이라 하였느니라. 히로요(弘世) · 마쓰나(眞綱) 두 신하가 이르기를 「영산의 묘법을 남악에게 듣고 총지(總持)의 묘한 깨달음을 천태에게서 열었으나, 일승이 권교에 막혀 있음을 개탄하고 삼제(三諦)가 아직 드러나지 않음을 슬퍼한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또 열네 명이 이르기를 「선의 등은 이끌려 좋은 운을 만나 이에 기이한 말씀을 보았으니, 깊은 숙연이 아니라면 어찌 성스러운 세상에 태어났겠는가」 등이라 하였느니라. 이 열네 명은 화엄종의 법장 · 심상(審祥), 삼론종의 가상(嘉祥) · 관륵(觀勒), 법상종의 자은 · 도소(道昭), 율종의 도선(道宣) · 감진 등 한토 · 일본 원조들의 법문을 이은 이들로, 병은 바뀌었어도 물은 하나이니라. 그런데 열네 명이 그 그릇된 뜻을 버리고 전교의 법화경에 귀복한 이상, 말대의 그 누가 「화엄 · 반야 · 심밀경 등이 법화경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소승의 세 종은 또 저 사람들이 배운 바이니, 대승의 세 종이 깨진 이상 따질 거리도 되지 않느니라. 그런데 지금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자는 「육종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니라. 비유하면 장님이 하늘의 해와 달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가 우레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하늘에는 해와 달이 없고 허공에는 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라.

어구 풀이

欽明天皇긴메이 천황
게이타이 천황의 셋째 황자로 태어나, 형 센카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긴메이 13년(552) 10월 백제 성명왕이 석가불상과 번개(幡蓋) · 경론을 보내 불법의 공덕을 아뢰었다. 천황이 예불의 가부를 군신에게 묻자 소가노 이나메는 받들어야 한다 하고 모노노베노 오코시 · 나카토미노 가마코는 반대했다. 천황은 불상을 이나메에게 주었고 이나메는 무쿠하라의 집을 절로 삼아 모셨다. 그러나 곧 역병이 돌자 오코시 등은 나라 신의 노여움이라 아뢰어 불상을 나니와의 호리에에 던지고 절을 불태웠다. 일본 불교 유포의 출발점이 이때다. 本文의 「제30대」와 「제29대」라는 두 계산이 있는 것은 진구 황후를 따로 한 대로 세느냐에 따른 차이다.
和気の妹子・先生所持の一巻の法華経와케노 이모코 · 전생에 지니셨던 한 권의 법화경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를 가리킨다. 스이코 조의 관인으로, 스이코 15년(607) 견수사로 수에 건너가 국서를 올리고 이듬해 수의 사신 배세청과 함께 돌아왔다. 같은 해 다시 유학생들을 데리고 수에 건너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本文은 「와케(和氣)」라 적으셨다. 「전생에 지니셨던 법화경」은 쇼토쿠 태자가 남악 혜사의 후신이라는 전승에 따른 이야기다. 태자가 전생에 형산에서 수행할 때 지니던 법화경을 이모코를 보내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남악혜사 후신설은 나라 시대 이래 일본에서 널리 퍼졌다.
孝徳天王の御宇に三論宗・華厳宗・法相宗・倶舎宗・成実宗わたる고토쿠 천황 치세의 다섯 종 전래
本文은 다섯 종이 고토쿠 천황 무렵에 건너왔다고 요약하신다. 실제 전래는 시기가 나뉘어, 삼론은 스이코 조의 고구려 승 혜관(慧灌), 법상은 백치 4년(653)에 입당한 도소, 화엄은 천평 8년(736) 도선(道璿)과 천평 12년(740) 심상의 강설로 전한다. 구사 · 성실은 각각 법상 · 삼론에 딸린 학파(寓宗)로 함께 전해졌다.
最澄최징
767~822. 일본 천태종의 개조로, 시호는 전교대사(傳敎大師)다. 근본대사 · 산가대사라고도 한다. 속명은 미쓰노오비토 히로노(三津首廣野), 아버지는 미쓰노오비토 모모에. 선조는 후한 효헌제의 후손으로 오진 천황 때 일본에 귀화했다고 전한다. 진호경운 원년(767) 오미(시가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열두 살에 오미 고쿠분사의 행표에게 출가했다. 연력 4년(785) 도다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나 곧 히에이산에 초암을 맺고 경론을 연구했다. 연력 23년(804) 천태법화종 환학생으로 의진(義眞)을 통역으로 데리고 입당해 도수 · 행만 등에게 천태의 깊은 뜻을 배우고 이듬해 돌아와, 연력 25년(806)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옛 불교계의 반대 속에서 새로운 대승계를 세우려 애썼고, 입멸 뒤 대승 계단이 칙허되어 결실을 맺었다. 저서로 『법화수구』 3권 · 『현계론』 3권 · 『수호국계장』 9권 · 『산가학생식』 등이 있다.
山階寺の行表僧正야마시나데라의 행표 승정
행표(722~797)는 전교대사를 득도시킨 스승이다. 오미의 고쿠분사 등에 머물렀다. 야마시나데라는 고후쿠사(興福寺)의 옛 이름으로, 행표가 구족계를 받은 곳이라 한다.
起信論の疏기신론의 소
마명보살 지음으로 전하는 『대승기신론』의 주석서로, 법장 법사가 지은 『대승기신론의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 소에 천태대사의 해석이 인용되어 있었던 것이 최징이 천태의 글을 찾게 된 실마리였다.
鑒真和尚감진 화상
688~763. 나라 시대의 도래승으로 일본 율종의 조사다. 당 양주(장쑤성) 사람으로, 열네 살에 출가해 남산율종 개조 도선의 제자 도안(道岸)에게 보살계를 받고, 장안대사의 손제자 홍경(弘景)에게 천태와 율을 배웠다고 한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천평승보 5년(753) 일본에 왔다. 쇼무 상황의 귀의를 받아 도다이사 · 시모쓰케 야쿠시사 · 쓰쿠시 간제온사에 계단을 세웠다. 도항 도중 시력을 잃었으나 일체경을 교정하고 율본을 간행했다. 그가 가져온 물품 가운데 천태 삼대부 등 천태의 전적이 있었다.
道暹律師도섬 율사
생몰년 미상. 당대 천태종의 승려로 천태현(저장성) 사람이다. 대력 연간(766~779) 장안에 와서 활발히 저술했다고 하며,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를 주석한 『법화문구보정기』 10권 등을 지었다. 本文은 감진을 그의 제자라 하셨으나 연대상 감진이 앞선 사람이어서, 감진의 계보에 대해서는 다른 전승도 있다.
七大寺・碩学・碩徳칠대사 · 석학 · 석덕
남도(나라)의 일곱 대사, 곧 도다이사 · 고후쿠사 · 간고사 · 다이안사 · 야쿠시사 · 사이다이사 · 호류사를 말한다. 석학은 큰 학자, 석덕은 덕망이 높은 고승을 뜻한다.
善議선의
729~812. 다카오사에서 전교대사와 대론한 남도 칠대사의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이안사의 도자(道慈)에게 삼론을 배우고 당에 건너갔으며, 돌아와 다이안사의 승려로서 삼론종을 넓혀 「법장(法將)」이라 불렸다. 가와치 출신으로 홍인 3년(812) 84세로 입적했다.
三論法相・久年の諍・三光삼론 · 법상의 오랜 쟁론 · 삼광
삼론종은 용수가 일으킨 중관파에서 비롯되어, 용수의 『중론』 4권 · 『십이문론』 1권과 제자 제바의 『백론』 2권에 의지해 반야경의 「일체개공」을 요체로 하므로 공종(空宗)이라고도 한다. 법상종은 무착 · 세친 형제가 이끈 유식파에서 비롯되어, 미륵의 『유가사지론』 100권 · 무착의 『섭대승론』 3권 · 세친의 『유식이십론』 1권에 의지해 『해심밀경』의 「유식실유」를 요체로 한다. 인도에서는 중관파와 유식파가 뜻을 다투었고, 중국에서는 가상 등이 삼론종을, 자은 등이 법상종을 세워 서로 다투었으며, 일본에서도 간고사 등은 삼론을, 고후쿠사 등은 법상을 강해 공(空)과 유(有)를 다투었다. 전교대사가 법화 진실의 법문을 선양하자 남도의 석덕 열네 명은 공유의 논쟁이 권교 방편의 설임을 알고 최징에게 귀복했다. 삼광은 해 · 달 · 별의 세 빛이다.
法鼓を深壑に振い・賓主三乗の路に徘徊し・義旗を高峰に飛す・長幼三有の結を摧破し법고를 깊은 골짜기에 울리고 · 손님과 주인이 삼승의 길을 헤매다 · 의기를 높은 봉우리에 날리고 · 어른과 아이가 삼유의 결박을 깨뜨리다
열네 석덕이 법문의 북을 깊은 골짜기에 울리듯 활발히 논하지만 아직 삼승의 길에서 헤매며 일불승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깊은 골짜기」는 뒤의 「높은 봉우리」와 짝을 이룬다. 손님(賓)은 묻는 쪽, 주인(主)은 답하는 쪽으로, 묻는 이도 답하는 이도 모두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 사이에서 헤맨다는 것이다. 「의기를 높은 봉우리에 날린다」는 불교의 깊은 뜻을 깃발처럼 높은 봉우리에 휘날리는 것이다. 장유는 앞의 손님 · 주인과 같은 뜻이다. 삼유는 욕유 · 색유 · 무색유, 곧 삼계 육도이고, 결(結)은 번뇌, 최파는 깨뜨리는 것이다.
歴劫の轍を改めず・白牛を門外に混ず역겁의 바퀴 자국을 고치지 않고 · 흰 소를 문밖에 섞어 두다
이전 경들이 설하는 역겁수행의 자취를 그대로 밟는다는 것이다. 법화경 비유품에는 양의 수레 · 사슴의 수레 · 소의 수레의 삼거와 대백우거가 나오는데, 천태대사는 대백우거를 일불승의 진실한 가르침으로, 삼거를 삼승 방편의 가르침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종은 삼거 가운데 소의 수레를 대백우거라 하여 둘을 섞었다. 문밖에 둔 방편의 수레와 집 안에서 주는 흰 소의 수레를 혼동한 것이다.
豈善く初発の位に昇り阿荼を宅内に悟らんや어찌 능히 초발의 지위에 올라 아 · 다를 집 안에서 깨닫겠는가
초발은 초주(初住), 곧 보살 52위 가운데 십주의 첫 지위에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다(阿荼)는 반야경에서 수행의 단계를 마흔두 자문(字門)으로 정한 것의 첫 「아」 자문과 마흔두째 「다」 자문으로, 원교의 마흔두 지위에 대어 보면 초주에서 묘각까지가 된다. 집 안(宅內)은 화택의 안, 곧 사바세계다. 권교에 머물러서는 초발심의 지위에서 곧바로 묘각에 이르는 즉신성불을 이 세계 안에서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弘世・真綱히로요 · 마쓰나
와케노 히로요(和氣廣世)와 와케노 마쓰나(和氣眞綱, 783~846) 형제로, 와케노 기요마로의 아들들이다. 히로요는 의학에 통해 전약두가 되었고 대학별당을 지냈으며 대학료 남쪽에 홍문원을 두어 교육에 힘썼다. 마쓰나는 사전(史傳)에 밝았고 참의 종4위상에 올랐다. 형제는 다카오산사(뒤의 진고사)를 세우고, 남도 육종의 고승 열네 명을 모아 전교대사를 강사로 하는 법화회를 열어 천태종 개창을 도왔다.
霊山の妙法を南岳に聞き・総持の妙悟を天台に闢く・一乗の権滞を慨き・三諦の未顕を悲しむ영산의 묘법을 남악에게 듣고 · 총지의 묘한 깨달음을 천태에게서 열다 · 일승이 권교에 막혀 있음을 개탄하고 · 삼제가 아직 드러나지 않음을 슬퍼한다
남악대사를 통해 영산회상에서 설해진 법문을 들을 수 있었고, 천태대사가 대소산의 보현도량에서 법화삼매를 깨달아 총지(다라니)를 얻은 그 깨달음을 열어 보였다는 뜻이다. 뒤의 두 구는 법화경을 권교의 뜻을 섞어 해석해 온 것을 개탄하고, 삼제원융상즉의 뜻이 알려지지 않았음을 슬퍼한다는 것이다.
牽れて休運に逢て・奇詞を閲す・深期に非るよりは何ぞ聖世に託せんや이끌려 좋은 운을 만나 · 기이한 말씀을 보다 · 깊은 숙연이 아니면 어찌 성세에 태어났으랴
숙연에 이끌려 좋은 인연을 만났고, 일찍이 들어 본 적 없는 천태의 깊은 뜻을 접했으며, 깊은 숙연이 없었다면 참된 불법이 넓혀지는 이 세상에 어찌 태어날 수 있었겠느냐는 열네 명의 감회다.
審祥・観勒・道昭・道宣심상 · 관륵 · 도소 · 도선
심상은 신라 사람으로 당에 건너가 현수대사 법장에게 화엄을 배우고 천평 무렵 일본에 와서 양변 등과 함께 화엄종을 넓혔다. 관륵은 백제의 승려로 스이코 10년(602) 일본에 와 역본 · 천문지리서 등을 전했고, 스이코 32년(624) 일본 최초의 승정이 되어 간고사에서 불법을 넓혔으며 삼론 · 성실에 통했다. 도소(629~700)는 일본 법상종의 개조로, 백치 4년(653) 입당해 현장에게 배우고 규기와도 사귀었으며 사이메이 천황 6년(660) 돌아와 간고사에 선원을 세우고 법상종을 넓혔다. 그의 유해를 다비한 것이 일본 화장의 시초라 한다. 도선(596~667)은 당대의 승려로 종남산에 머물며 사분율을 연구해 남산율종을 열었고, 『사분율행사초』 · 『대당내전록』 등을 지었다.

일본과 법화경의 인연

이 장은 일본에서 전교대사가 법화경을 광선유포한 일을 밝힌다. 그에 앞서 일본이라는 땅과 법화경 · 대승불교의 인연을 전하는 옛 기록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몇을 들어 본다.

미륵보살의 『유가사지론』에 「동방에 작은 나라가 있으니 그 안에는 오직 대승의 종성만 있다」(東方に小国有り、其の中に唯大乗の種姓のみ有り)고 했다고 한다. 승조(僧肇)의 『번경기(翻經記)』에는 구마라집의 스승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가 왼손에 법화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구마라집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경을 주면서 「이 경전은 동북에 인연이 있으니 너는 삼가 전해 넓혀라」(此の経典、東北に縁有り汝慎んで伝弘せよ)라고 했다고 전한다. 전교대사의 글에는 「시대를 말하면 상법의 끝, 말법의 처음이요, 땅을 찾으면 당의 동쪽, 갈(羯)의 서쪽이다」(代を語れば則ち像の終り末の初め、地を尋ぬれば唐の東、羯の西)라는 말이 있다. 「당의 동쪽, 갈의 서쪽」이란 바로 일본을 가리킨다.

『어의구전』은 제바달다품의 용녀 성불을 풀면서 「특히 이 여덟 살 용녀의 성불은 제왕이 경을 지니는 선조가 된다」(殊には此の八歳の竜女の成仏は帝王持経の先祖たり, 746쪽)고 하고, 일본 신화의 계보 — 진무 천황의 어머니 쪽 선조인 도요타마히메가 사갈라 용왕의 딸로 여덟 살 용녀의 언니라는 전승 — 를 들어 「그러므로 선조가 법화경의 행자다」(然る間先祖法華経の行者なり, 746쪽)라고 풀었다. 중세 일본의 신화 해석을 법화경의 용녀 성불과 이은 것으로, 일본과 법화경의 인연을 말하는 상징적인 해석이다.

불법의 일본 전래 — 긴메이 13년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제30대 긴메이 천황 13년(552)이다. 백제 성명왕의 사자가 경론과 석존의 상을 바쳤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성명왕은 그해 겨울 10월, 신하인 서부(西部) 희씨(姬氏)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등을 시켜 석가불 금동상 한 구와 번개 약간, 경론 약간을 바치게 했다.

이때 따로 표문을 올려 불법을 유통하고 예배하는 공덕을 이렇게 찬탄했다고 한다.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며,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워 주공 · 공자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법은 한량없고 끝없는 복덕과 과보를 낳고, 나아가 위없는 보리를 이룹니다. 비유하면 사람이 뜻대로 되는 보배를 품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쓰는 것과 같으니, 이 묘법의 보배도 그러하여 기원하는 마음에 따라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 멀리 천축에서 이곳 삼한에 이르기까지 가르침대로 받들어 지니며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에 백제왕인 신하 명(明)은 삼가 배신(陪臣) 노리사치계를 보내 제국(帝國)에 받들어 전하여 기내(畿內)에 유통하게 하오니, 부처가 기록한 바 『나의 법은 동쪽으로 흐를 것이다』를 이루려는 것입니다.」(是法、於諸法中最爲殊勝、難解難入、周公・孔子尚不能知。……果佛所記我法東流)

국왕이 국왕에게 공식적으로 불 · 법 · 승 삼보를 바친 기록이다. 이 표문에 대해서는 후대의 윤색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이미 「나의 법은 동쪽으로 흐를 것이다」라는 큰 사상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대성인은 「신국왕어서」에서 『일본서기』와 다른 표문을 인용하셨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만법 가운데 불법이 가장 뛰어나고 세간의 도에서도 불법이 가장 위입니다. 천황 폐하께서도 수행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불상 · 경교(經敎) · 법사를 받들어 사신에게 딸려 바치오니, 마땅히 믿고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其の表の文に云く臣聞く万法の中には仏法最善し世間の道にも仏法最上なり天皇陛下亦修行あるべし、故に敬って仏像経教法師を捧げて使に附して貢献す宜く信行あるべき者なり已上, 1516쪽). 당시 일본에 있던 다른 옛 기록에 실린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그 출전을 알 수 없다.

불교 공전(公傳)의 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의 긴메이 13년(552)설과, 『원흥사가람연기』 · 『상궁성덕법왕제설』 등에 근거한 무오년(538)설이 있다. 本文은 『일본서기』의 연대를 따르신다.

그 무렵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 신라 · 백제 세 나라가 반도의 패권을 두고 격렬히 다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 문화적으로 크게 도약하고 있었다. 불교도 4세기에 고구려 · 백제에 전해졌고 이어 신라에도 전해졌다. 특히 백제에서는 중국 고전의 학습, 불서의 연구, 사탑의 건립이 활발했으며, 그것이 긴메이 천황 때 처음으로 일본에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이다.

물론 대륙과의 교통이 시작된 이래 민간에서는 불교 신앙이 차츰 전해져 있었을 것이다. 제27대 게이타이 천황 때 남조 양나라의 시바 닷토(司馬達等)가 건너와 야마토의 사카타하라에 초당을 짓고 불상을 모셔 예배했다는 전승도 그 한 예다.

  1. 게이타이 천황 때(522로 전함)시바 닷토가 사카타하라에 초당
  2. 긴메이 13년(552)백제 성명왕이 석가불 금동상 · 번개 · 경론을 바침「나의 법은 동쪽으로 흐를 것이다」
  3. 요메이 천황 · 스이코 천황 때쇼토쿠 태자『삼경의소』 · 17조 헌법(604) · 견수사 오노노 이모코(607)
  4. 고토쿠 천황 무렵삼론 · 화엄 · 법상 · 구사 · 성실의 다섯 종(本文)법상 첫 전래 도소(653 입당, 660 귀국) · 화엄 도선(736) · 심상(740)
  5. 쇼무 천황 때율종감진(753 도래, 도다이사 계단)
고토쿠 ~ 간무14대 · 120여 년「천태 · 진언의 두 종이 없었다」
  1. 간무 천황 연력 21년(802)다카오사의 대론 → 육종 승복
  2. 연력 25년(806)일본 천태종 개창
육종
대승
  • 화엄
  • 법상
  • 삼론
소승
  • 구사
  • 성실
  • 율
도표 9 · 일본의 불교 전래와 남도 육종

쇼토쿠 태자의 불법 흥륭

긴메이 천황의 손자이자 요메이 천황의 황자인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의 섭정이 되어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몸소 경을 강하고 승만경 · 유마경 · 법화경의 의소(義疏)를 지었으며, 불교의 정신을 근본으로 한 17조 헌법을 제정해 국가 통일의 지도 원리로 삼았다.

本文은 태자가 「전생에 지니셨던 한 권의 법화경」을 한토에서 가져오게 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생명이 삼세에 걸친다는 불법의 생명관에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태자가 대륙에서 건너온 노인들을 과거세의 제자로 알아본 일을 이렇게 적으셨다.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인왕 제32대 요메이 천황의 아드님이다. 여섯 살 때 백제 · 고려 · 당토에서 노인들이 건너온 것을 보고 여섯 살 태자가 『나의 제자다』라고 말씀하시니, 그 노인들도 합장하며 『나의 스승이시다』라고 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日本の聖徳太子は人王第三十二代・用明天皇の御子なり、御年六歳の時・百済・高麗・唐土より老人どものわたりたりしを六歳の太子・我が弟子なりと・をほせありしかば彼の老人ども又合掌して我が師なり等云云、不思議なりし事なり, 212쪽).

태자는 스이코 14년(606) 오카모토궁에서 법화경을 강했다고 전하며, 615년 무렵 『법화의소』 4권을 완성했다고 한다. 황실 소장품(御物)으로 전하는 『법화의소』 4권은 태자의 친필로 전해지며,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저작이자 필적으로 일컬어진다. 이 『법화의소』는 일단 광택사 법운의 『법화의기』를 참고로 했지만, 『의기』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견해를 담아 쓰였다. 그러나 일념삼천의 법문 등 법화경의 참된 해석은 천태대사 · 전교대사, 그리고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에게 맡겨졌다고 할 수 있다. 대성인이 쇼토쿠 태자의 『법화의소』를 쓰지 않으신 것도 이 때문이다. 제8장에서 본 법운의 소가 「일본에까지 퍼졌다」는 本文의 말이 여기서 이어진다.

태자가 세운 절은 시텐노사 · 호류사를 비롯해 일곱 곳이라 전한다. 17조 헌법의 제2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삼보를 독실히 공경하라. 삼보란 불 · 법 · 승이다. 곧 사생(四生)이 마지막에 돌아갈 곳이요 만국의 지극한 근본이다. 어느 세상 어느 사람이 이 법을 귀히 여기지 않겠는가. 사람은 지극히 악한 이가 드물어 잘 가르치면 따른다. 삼보에 귀의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굽은 것을 바로잡겠는가.」 또 오노노 이모코를 비롯한 견수사를 중국에 보내 불법과 함께 많은 대륙 문화를 일본에 들여왔다.

이리하여 쇼토쿠 태자는 그때까지 소가 · 모노노베 두 씨족의 다툼을 불러 불안정하던 불법을 훌륭히 일으키고, 외교 · 문화 · 사회 · 경제에도 뚜렷한 업적을 남겨 그 뒤 수백 년 일본의 기초를 닦았다.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에 이르는 일본 문화의 꽃은 그 위에서 피었다. 그리고 불교 전래에서 법화경 적문의 광선유포에 이르는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육종의 성립과 「천태 · 진언 없는 120년」

本文은 이어서 고토쿠 천황 치세에 삼론 · 화엄 · 법상 · 구사 · 성실의 다섯 종이, 쇼무 천황 치세에 율종이 건너와 육종이 갖추어졌다고 하신다. 이것이 이른바 남도 육종이다. 그리고 고토쿠 천황부터 제50대 간무 천황까지 14대 · 120여 년 동안은 천태 · 진언의 두 종이 일본에 없었다고 짚으신다.

이 육종 가운데 구사 · 성실 · 율종은 소승 불법이므로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화엄종 · 법상종 · 삼론종은 상당히 유력한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예컨대 화엄종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仏及衆生是三無差別)는 법문을 설하며, 화엄경에는 광대한 우주관이 펼쳐져 있다. 또 법상 · 삼론의 두 종은 앞의 어구 풀이에서 보았듯 인도 이래 유식과 중관, 곧 「유(有)」와 「공(空)」의 대립을 이어 와 일본에서도 간고사와 고후쿠사를 중심으로 오랜 논쟁을 거듭했다.

유식이란 간단히 말하면 「오직 식(識)뿐」이라는 뜻으로, 일체 제법은 모두 마음과 식의 전변이며 실재하는 것은 마음과 식뿐이라는 철학이다. 그 정교함은 뛰어나지만, 천태대사의 일념삼천 · 삼제원융의 법문에서 보면 아직 부분적인 관점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해졌다. 물론 절대묘(絶待妙)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화엄의 법문도 유식 철학도 개회(開會)한 위에서 쓰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니치렌 대성인이 『어의구전』 등에서 오식 · 육식 · 팔식, 나아가 「구식심왕진여의 도읍」을 설하신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구식 참조).

공 — 삼론
인도용수 『중론』 · 『십이문론』 · 제바 『백론』(중관파, 「일체개공」)
중국가상대사 길장(삼론종)
일본간고사 등(삼론)
유 — 법상
인도미륵 『유가사지론』 · 무착 『섭대승론』 · 세친 『유식이십론』(유식파, 「유식실유」)
중국현장 · 자은(법상종)
일본도소 · 고후쿠사 등(법상)
연력 21년(802) 다카오사「삼론과 법상의 오랜 쟁론이 얼음 녹듯 풀렸다」三論法相・久年の諍渙焉として氷の如く解け천태의 일념삼천 · 삼제원융
도표 10 · 공(空)과 유(有)의 오랜 쟁론

최징의 발심 — 『기신론소』 속의 천태

간무 천황 치세에 최징이라는 「젊은 승」이 있었다. 대성인은 천태대사를 「소승(小僧)」이라 하셨듯 최징에게도 같은 말을 쓰신다. 남도 칠대사의 석학들에 비하면 이름 없는 한 승려였다는 것이다. 그는 야마시나데라(고후쿠사)와 인연이 있는 행표 승정의 제자로, 법상종을 비롯해 육종을 끝까지 배웠다. 그러나 불법을 다 깨쳤다는 확신은 얻지 못했다.

그때 화엄종 법장이 지은 『기신론』 주석에 천태대사의 해석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화엄종의 대성자가 천태를 인용했다는 사실에서 최징은 「이 소야말로 사연이 있을 듯하다」고 느꼈다. 천태의 글이 이 나라에 와 있는지 수소문하자, 어떤 사람이 감진 화상이 천태의 전적을 가져왔으나 소승의 계율만 넓히고 천태의 글은 넓히지 않았다고 알려 주었다. 최징은 그 책을 꺼내어 한 번 읽고 「생사의 취기를 깨었다」. 그리고 그 글로 육종의 뜻을 살피니 하나하나 사견임이 드러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법장의 글이 실마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제10장에서 대성인은 법장을 천태에게 설욕하려고 화엄종을 세운 사람으로 그리셨다. 그런 법장조차 천태의 해석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천태의 교학이 적대하는 종파의 학장들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였음을 보여 준다. 감진이 천태의 글을 가져오고도 넓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법은 있어도 그것을 넓힐 사람과 때를 얻지 못하면 상자 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제10장에서 본 「전해 지니는 사람이 없으면 나무나 돌이 가사와 발우를 지닌 것과 같다」는 말 그대로다.

전교대사의 국가 간효와 다카오사의 대론

늦가을 교토 북서쪽 다카오산 — 골짜기 건너 숲속의 작은 산사와 돌계단 길
그림 · 늦가을 교토 북서쪽 다카오산 — 골짜기 건너 숲속의 작은 산사와 돌계단 길

최징은 곧 원을 세웠다. 「일본국 사람이 모두 방법하는 자의 단월이 되어 있으니 천하는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육종을 논란하자 칠대사 · 육종의 석학들이 들고일어나 서울에 까마귀처럼 모여들고 천하가 떠들썩해졌다. 제8장에서 천태대사가 법운을 꺾었을 때 「남북의 여러 스승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나고 까마귀처럼 모여들었다」는 장면이 일본에서 되풀이된 것이다. 本文의 「일본국 사람이 모두 방법하는 자의 단월」이라는 진단은 대성인 자신의 「입정안국론」의 진단과 같은 구조다.

불법을 넓히는 데 국가 간효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국왕이 몸소 법의 사정을 가리기 위해 공장 대결이 필요하다는 것은 앞 장에서 본 그대로다. 전교대사 시대에는 간무 천황이 불법의 사정을 잘 분별하고 법화경의 광선유포에 힘썼으므로, 헤이안 시대 초기의 안정과 문화의 뚜렷한 발전이 있었다.

本文에 따르면 연력 21년(802) 정월 19일, 간무 천황이 다카오사에 행차해 칠대사의 석덕 열네 명 — 선의 · 승유 · 봉기 · 총인 · 현옥 · 안복 · 근조 · 수원 · 자고 · 현요 · 세광 · 도증 · 광증 · 관민 — 과 최징을 불러 대결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전교대사의 공장 대결이다. 이때 대사는 36세의 장년이었다. 화엄 · 삼론 · 법상의 학자들은 저마다 자기 종 원조의 뜻에 충실하게 주장했지만, 최징은 육종이 세운 바를 하나하나 첩을 취해 본경 · 본론과 여러 경론에 맞대어 책했다. 그들은 한마디도 답하지 못하고 「입이 코처럼 다물어졌다」. 천황은 놀라 자세히 묻고 거듭 칙선을 내려 열네 명을 책했고, 그들은 승복의 사표를 올렸다.

다카오산사의 강회는 와케노 히로요 · 마쓰나 형제가 마련하고 최징을 강사로 남도의 고승들을 초청한 법화회였다고 전기 자료(『예산대사전』 등)는 전하며, 열네 명의 사표도 그 기록에 남아 있다. 本文은 이를 천황 앞의 공장 대결로 서술하신다.

열네 석덕의 사표와 최징의 판정

本文이 인용하는 사표의 세 구절은 남도 불교의 자기 고백이라 할 만하다.

첫째, 「일곱 대사 · 육종의 학장들이 …… 처음으로 지극한 법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배워 온 것이 지극한 법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말이다.

둘째, 「쇼토쿠 태자가 넓혀 교화하신 이래 이백여 년 동안 강해 온 경론은 많으나, 이것저것 이치를 다투어 의심이 풀리지 않았고, 이 가장 묘한 원종은 아직 드러나 선양되지 않았다.」 쇼토쿠 태자 이래 두 세기의 일본 불교사 전체가 「원종(圓宗)」, 곧 법화의 원교가 드러나지 않은 역사였다는 것이다.

셋째, 「삼론과 법상의 오랜 쟁론이 얼음 녹듯 환하게 풀리고 밝게 이미 분명해졌으니,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해 · 달 · 별을 보는 것과 같다.」 인도 이래 이어진 공과 유의 대립이 법화 원교 앞에서 비로소 해소되었다는 고백이다.

이에 대한 최징의 판정은 비유로 가득하다. 그들은 저마다 법화경 한 축을 강하면서도 자기 종의 뜻에 따라 강한다. 법고를 깊은 골짜기에 울려 활발히 법문을 논하지만, 손님도 주인도 모두 삼승의 길을 헤맬 뿐 성불의 길을 걷지 못한다. 의기를 높은 봉우리에 세워 사람을 모으고, 어른 학자와 젊은 학자가 삼유의 번뇌를 깨뜨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오랜 겁에 걸친 역겁수행을 해야 한다는 권교의 바퀴 자국을 고치지 못한다. 대백우거인 법화경을 문밖의 방편의 수레와 섞어 놓았다. 이런 가르침으로 어찌 초발심의 지위에서 곧바로 성불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와케노 히로요 · 마쓰나 형제도 탄식했다. 영취산 석존의 묘법을 남악대사를 통해 들을 수 있었고 총지의 묘한 깨달음을 천태대사를 통해 열 수 있었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 묘법이 권교에 막혀 있고 삼제원융의 뜻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음을 슬퍼한다고. 그리고 열네 석덕은 말했다. 선의 등은 다행히 좋은 인연에 이끌려 오늘의 기이한 강설을 들을 수 있었으니, 숙세의 깊은 인연이 아니라면 어찌 이 성스러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①열네 석덕
  • 선의
  • 승유
  • 봉기
  • 총인
  • 현옥
  • 안복
  • 근조
  • 수원
  • 자고
  • 현요
  • 세광
  • 도증
  • 광증
  • 관민
②사표 세 구
  • 「처음으로 지극한 법을 깨달았다」初て至極を悟る
  • 「이 가장 묘한 원종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此の最妙の円宗猶未だ闡揚せず
  • 「삼론과 법상의 오랜 쟁론이 얼음 녹듯 풀렸다」三論法相・久年の諍渙焉として氷の如く解け
③최징의 판정
  • 「손님과 주인이 삼승의 길을 헤매고」賓主三乗の路に徘徊し
  • 「흰 소를 문밖에 섞어 두었다」白牛を門外に混ず
④와케 형제와 열네 명의 감회
  • 「일승이 권교에 막혀 있음을 개탄하고 삼제가 아직 드러나지 않음을 슬퍼한다」一乗の権滞を慨き三諦の未顕を悲しむ
  • 「깊은 숙연이 아니면 어찌 성세에 태어났으랴」深期に非るよりは何ぞ聖世に託せんや
도표 11 · 다카오사 대론의 기록

병은 바뀌어도 물은 하나 — 육종 전체의 굴복

대성인은 이 열네 명이 개인으로서 진 것이 아니라 육종 전체가 진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열네 명은 화엄종의 법장 · 심상, 삼론종의 가상 · 관륵, 법상종의 자은 · 도소, 율종의 도선 · 감진 등 중국과 일본 각 종 원조들의 법문을 차례로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병은 바뀌었어도 그 안의 물은 하나다. 그러므로 열네 명이 그릇된 뜻을 버리고 전교대사의 법화경에 귀복한 이상, 말대의 누구도 화엄 · 반야 · 심밀경이 법화경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 없다.

소승의 세 종(구사 · 성실 · 율)은 이 열네 명이 당연히 함께 배운 것이므로, 대승의 세 종이 깨진 이상 따질 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육종은 아직 법화경에 깨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장님이 해와 달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가 우레를 듣지 못한다고 해서 「하늘에 해와 달이 없고 허공에 소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 비유는 대성인 당시의 남도 불교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가마쿠라 시대에도 남도의 여러 종은 여전히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성인은 이미 연력 21년에 역사적 결판이 났다는 사실을 들어, 오늘 다시 육종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난 역사를 보지 못하는 일이라고 지적하신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전교대사의 승리는 천태대사의 승리와 같은 구조다. 국주 앞의 공장에서 경문을 맞대어 여러 종의 학장을 굴복시켰다. 이로써 상법의 넷째 오백 년, 일본에도 법화경 적문이 광선유포되었다. 다만 이 승리에서 빠진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다음 장의 진언이다.

제12장 전교대사의 진언 파절
어서 304쪽 5행 ~ 305쪽 4행 · 第十二章 伝教大師の真言破折

본문

원문 대조어서 304쪽 5행 ~ 305쪽 4행
本文 · 어서 원문

真言宗と申すは日本人王・第四十四代と申せし元正天皇の御宇に善無畏三蔵・大日経をわたして弘通せずして漢土へかへる、又玄昉等・大日経の義釈十四巻をわたす又東大寺の得清大徳わたす、此等を伝教大師御らんありてありしかども大日経・法華経の勝劣いかんがと・おぼしけるほどにかたがた不審ありし故に去る延暦二十三年七月御入唐・西明寺の道邃和尚・仏滝寺の行満等に値い奉りて止観円頓の大戒を伝受し霊感寺の順暁和尚に値い奉りて真言を相伝し同延暦二十四年六月に帰朝して桓武天王に御対面・宣旨を下して六宗の学生に止観真言を習はしめ同七大寺にをかれぬ、真言・止観の二宗の勝劣は漢土に多く子細あれども又大日経の義釈には理同事勝とかきたれども伝教大師は善無畏三蔵のあやまりなり、大日経は法華経には劣りたりと知しめして八宗とはせさせ給はず真言宗の名をけづりて法華宗の内に入れ七宗となし大日経をば法華天台宗の傍依経となして華厳・大品・般若・涅槃等の例とせり、而れども大事の円頓の大乗別受戒の大戒壇を我が国に立う立じの諍論がわずらはしきに依りてや真言・天台の二宗の勝劣は弟子にも分明にをしえ給わざりけるか、但依憑集と申す文に正しく真言宗は法華天台宗の正義を偸みとりて大日経に入れて理同とせり、されば彼の宗は天台宗に落ちたる宗なり、いわうや不空三蔵は善無畏・金剛智・入滅の後・月氏に入りてありしに竜智菩薩に値い奉りし時・月氏には仏意をあきらめたる論釈なし、漢土に天台という人の釈こそ邪正をえらび偏円をあきらめたる文にては候なれ、あなかしこ・あなかしこ月氏へ渡し給えとねんごろにあつらへし事を不空の弟子含光といゐし者が妙楽大師にかたれるを記の十の末に引き載せられて候をこの依憑集に取り載せて候、法華経に大日経は劣るとしろしめす事・伝教大師の御心顕然なり、されば釈迦如来・天台大師・妙楽大師・伝教大師の御心は一同に大日経等の一切経の中には法華経はすぐれたりという事は分明なり、又真言宗の元祖という竜樹菩薩の御心もかくのごとし、大智度論を能く能く尋ぬるならば此の事分明なるべきを不空があやまれる菩提心論に皆人ばかされて此の事に迷惑せるか。

풀이

진언종이라 하는 것은 일본 인왕 제44대라 하던 겐쇼(元正) 천황 치세에 선무외삼장이 대일경을 가져왔으나 홍통하지 않고 한토로 돌아갔고, 또 현방(玄昉) 등이 대일경의 『의석(義釋)』 14권을 전하였으며, 또 도다이사의 득청(得淸) 대덕이 전하였느니라. 전교대사께서 이것들을 보셨으나 대일경과 법화경의 승렬이 어떠한가 하고 생각하시던 차에 여러 가지 미심쩍은 데가 있었던 까닭에, 지난 연력 23년 7월 입당하시어 서명사(西明寺)의 도수(道邃) 화상, 불롱사(佛瀧寺)의 행만(行滿) 등을 만나 지관(止觀)과 원돈(圓頓)의 대계(大戒)를 전해 받으시고, 영감사(靈感寺)의 순효(順曉) 화상을 만나 진언을 상전(相傳)하시어, 같은 연력 24년 6월에 귀조하시어 간무 천황과 대면하셨느니라. 선지(宣旨)를 내려 육종의 학생들에게 지관과 진언을 배우게 하고, 이를 칠대사에도 두셨느니라. 진언 · 지관 두 종의 승렬은 한토에 많은 사정이 있고, 또 대일경의 『의석』에는 이동사승(理同事勝)이라 썼으나, 전교대사는 「이는 선무외삼장의 잘못이다. 대일경은 법화경보다 못하다」고 아시어 팔종으로 하지 않으시고, 진언종이라는 이름을 깎아 법화종 안에 넣어 칠종으로 하시며, 대일경을 법화천태종의 방의경(傍依經)으로 삼아 화엄 · 대품 · 반야 · 열반 등과 같은 예로 두셨느니라. 그러나 중대한 일인 원돈의 대승 별수계(別受戒)의 대계단을 우리나라에 세우느냐 세우지 않느냐 하는 쟁론이 번거로웠던 까닭인지, 진언 · 천태 두 종의 승렬은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 같으니라. 다만 『의빙집(依憑集)』이라 하는 글에는, 바로 진언종이 법화천태종의 정의를 훔쳐 대일경에 넣고 「이동(理同)」이라 하였다는 뜻이 있으니, 그러므로 저 종은 천태종에 굴복한 종이니라. 하물며 불공삼장은 선무외 · 금강지가 입멸한 뒤 월지에 들어갔을 때 용지보살(龍智菩薩)을 만났는데, 용지가 「월지에는 불의(佛意)를 밝힌 논석이 없다. 한토에 천태라는 사람의 해석이야말로 사정(邪正)을 가리고 편원(偏圓)을 밝힌 글이라 한다. 부디 부디 월지에 전해 주시오」 하고 간곡히 부탁한 일을, 불공의 제자 함광(含光)이라는 자가 묘락대사에게 이야기하였고, 이를 『기(記)』 제10권 끝에 실어 두셨는데, 그것을 이 『의빙집』에 옮겨 실으셨느니라. 대일경이 법화경보다 못하다고 아신 것이 전교대사의 마음임은 분명하니라. 그러므로 석가여래 · 천태대사 · 묘락대사 · 전교대사의 마음은 한결같이 대일경 등 일체경 가운데 법화경이 뛰어나다는 것이 분명하니라. 또 진언종의 원조라는 용수보살의 마음도 이와 같으니라. 『대지도론』을 잘 잘 찾아본다면 이 일은 분명할 것을, 불공이 그르친 『보리심론』에 모든 사람이 속아 이 일에 미혹한 것인가.

어구 풀이

元正天皇の御宇に善無畏三蔵・大日経をわたして겐쇼 천황 치세에 선무외삼장이 대일경을 가져오다
겐쇼 천황(재위 715~724) 때 선무외가 일본에 와서 대일경을 전했으나 넓히지 않고 돌아갔다는 전승이다. 선무외의 일본 도래를 전하는 기록은 후대의 것으로,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本文은 이 전승을 일본 진언 전래의 첫머리로 드신다.
善無畏三蔵선무외삼장
637~735. 범어 이름 슈바카라싱하(Śubhakarasiṃha), 수바가라(輸波迦羅)로 음사하며 선무외는 그 의역이다. 동인도 오다국(烏荼國)의 왕자로 태어나 13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형의 시기를 받아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했다고 한다. 마가다국 나란다사에서 달마국다에게 밀교를 배우고, 개원 4년(716) 중국에 와 현종에게 국사로 맞아들여졌다. 『대일경』 · 『소바호동자경』 · 『소실지갈라경』 등을 번역하고 『대일경소』를 엮어 중국에 처음으로 밀교를 전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대일경소』에서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의 뜻을 훔쳐 넣어 이동사승의 그릇된 뜻을 세웠다고 본다.
玄昉현방
?~746. 나라 시대의 승려로 의연(義淵)에게 배웠다. 양로 원년(717) 견당사를 따라 입당해 지주(智周)에게 법상을 배우고, 경론 5,000여 권과 불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법상종의 넷째 전래에 해당한다. 조정에서 권세를 누렸으나 만년에 쓰쿠시의 간제온사로 물러났다.
得清大徳득청 대덕
당에서 『대일경의석』을 가지고 온 도다이사의 승려라 전한다.
大日経の義釈十四巻대일경의 의석 14권
선무외가 강설하고 일행이 받아 적은 『대일경소』 20권을 일행이 죽은 뒤 지엄(智儼) · 온고(溫古) 등이 고쳐 엮은 것이 『대일경의석』 14권이라 한다. 천태 교학의 용어로 대일경을 풀이하며, 이동사승의 근거가 된 문헌이다.
西明寺の道邃和尚서명사의 도수 화상
서명사는 장안 서쪽 연강방에 있던 당 고종의 칙건사로, 인도의 기원정사를 본떠 매우 장려했다고 전한다. 다만 서명사는 현장삼장과 인연 깊은 절이고 도수가 머문 곳은 아니어서, 용흥사 또는 국청사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도수는 당대 천태종의 승려로 생몰년 미상, 시호는 흥도존자(興道尊者)다. 묘락대사 담연에게 배웠고, 정원 20년(804) 태주 용흥사(저장성 임해)에 머물며 그해부터 이듬해에 걸쳐 최징과 통역승 의진에게 천태 법문을 전했다. 도수가 최징을 만났을 때의 흥미로운 일화가 「일대성교대의」에 보인다. 천태산 국청사에서 입적했다.
仏滝寺の行満불롱사의 행만
불롱사(仏隴寺)는 천태산의 불롱봉 북쪽 은지(銀地)에 있던 절로, 국청사보다 위쪽에 자리했다. 행만은 당대 천태종의 승려로 생몰년 미상, 묘락대사 담연에게 배웠다. 전교대사가 입당했을 때 도수는 국청사를, 행만은 불롱사를 맡고 있었다. 연력 23년(804) 9월부터 이듬달에 걸쳐 전교대사에게 많은 천태 전적을 주고 천태 법문을 전수했다. 저서로 『육즉의』 1권 등이 있다.
止観円頓の大戒지관 · 원돈의 대계
지관은 『마하지관』, 곧 천태의 관법을 말하고, 원돈은 원만하고 단박에 극치에 이르는 가르침, 즉신성불의 가르침을 말한다. 도수 · 행만에게서 천태의 지관과 원돈계를 함께 받은 것이다.
霊感寺の順暁和尚영감사의 순효 화상
영감사는 태산의 영암사(靈巖寺, 산둥성)를 가리킨다고 한다. 순효는 당대 진언의 승려로 생몰년 미상, 선무외삼장의 제자 의림(義林)에게 배웠다고 하며, 영암사에 머물다 뒤에 월주(저장성 소흥)의 용흥사로 옮겼다. 그동안 불공삼장에게서도 밀교를 배웠다고 한다. 전교대사에게 진언의 법을 주었는데, 연대는 귀국 직전인 805년의 일로 본다.
理同事勝이동사승
선무외가 세운 뜻이다. 법화경과 대일경을 견주면 이치(理)의 면에서는 석존도 대일여래도 일념삼천에 다름없으므로 같지만, 사(事)의 면, 곧 그 교리를 형태로 나타내는 인(印)과 진언의 작법은 법화경에 없으므로 대일경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주장이다.
八宗・七宗팔종 · 칠종
남도 육종에 천태법화종을 더하면 칠종, 다시 진언종을 더하면 팔종이 된다. 전교대사는 진언을 독립된 종으로 세우지 않고 법화종 안에 넣어 칠종으로 하셨다는 것이 本文의 뜻이다. 일본에서 진언종이 따로 한 종으로 공인되는 것은 홍법(구카이, 空海)에 이르러서다.
傍依経방의경
한 종이 바로 의지하는 경(正依經)에 대해, 곁에서 보조로 의지하는 경을 말한다. 전교대사는 대일경을 화엄 · 대품반야 · 열반경 등과 같은 반열에 두셨다.
大乗別受戒대승 별수계
천태법화종에서는 일반의 대승계가 삼취정계를 통해 받는 통수계(通受戒)인 데 대해, 따로 범망경의 십중금계 · 48경계를 받는 것을 대승 별수계라 한다. 전교대사는 이 원돈의 대승계를 주는 계단을 히에이산에 세우려 하여 남도와 오랜 쟁론을 벌였다.
依憑集의빙집
전교대사의 저술로 1권, 자세히는 『의빙천태집(依憑天台集)』이다. 여러 종의 스승들이 천태대사의 해석에 의지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진언 · 화엄 · 법상 · 삼론 등의 학장들도 천태에 의빙했음을 보인다.
竜智菩薩용지보살
진언종이 세우는 조사의 계보에서 제4조로 꼽히며, 용수보살의 제자이자 금강지의 스승이라 한다.
記の十の末기 제10권 끝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 권10 끝을 말한다. 함광이 묘락대사에게 전한 용지보살의 부탁이 여기에 실려 있다.
大智度論대지도론
약칭 『대론』 · 『지론』, 100권. 용수 지음으로 전하며 구마라집이 번역했다. 「지도(智度)」는 반야바라밀의 의역으로, 『마하반야바라밀경』의 주석서이기에 「마하반야바라밀경석론」이라고도 한다. 서품을 34권으로 풀고 이후 한 품마다 1~3권씩 풀었다. 법화경 등 여러 대승경의 사상을 받아들여 해석하고 있어 한 경의 주석에 그치지 않고 대승 사상 전체의 모체가 되었다. 대성인은 이 논에 「반야경은 비밀이 아니고 법화경은 비밀이다」라는 취지가 있음을 들어 용수의 본뜻이 법화경에 있다고 보신다.
不空があやまれる菩提心論불공이 그르친 보리심론
『보리심론』은 용수 지음 · 불공 번역으로 전하지만, 대성인은 불공이 사사로이 짓고 용수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 보신다. 진언종이 즉신성불의 근거로 삼는 「오직 진언법 가운데서만 즉신성불한다」는 구절이 이 논에 있다.

상법을 맺고 말법을 여는 장

이 장부터는 말법에 니치렌 대성인이 일본에 출현하시어 법화경을 넓히고 원질을 받으며 대난을 만나신 일을 밝히는 단락으로 들어간다. 그 첫머리가 앞 시대에 유포된 진언을 파절하는 단락이며, 이 장은 일본에서 전교대사가 진언을 파절하신 일을 밝힌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제11장의 「또 일본국에는 인왕 ……」부터는 일본에 불법이 전래된 일을 밝히는 것으로, 처음에는 육종의 전래를, 다음에는 천태 · 진언 두 종의 전래 모습을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이 장을 「앞 시대에 유포된 진언을 파절한다」고 하는가. 이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보은초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보였다(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제7장부터는 재세와 정법 시대의 법난을 서술해, 「여래의 재세에도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에랴」라는 부처의 예언을 증명하셨다. 「하물며 멸도한 뒤에랴」를 풀면서 처음에는 정법 시대의 사의(四依)를 들어, 제바보살 · 사자존자 · 불타밀다 · 용수보살 · 마명보살 · 여의논사 등이 정법을 넓혔기 때문에 대난을 만난 일을 밝히셨다. 다음에는 상법 시대의 세 대사를 들어, 천태대사 · 묘락대사 · 전교대사가 저마다 법화경 때문에 대난을 만난 일을 밝히셨다. 이로써 정법 · 상법 두 시대의 풀이를 마치고, 이 本文부터는 말법을 푸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앞 시대의 진언」만을 들고 염불 · 선의 혼미는 들지 않는가. 그것은 이 어서에서 니치렌 대성인이 파절하시는 바른 뜻이 진언종에 있기 때문이다. 「세이초사대중중」에서 대성인은 「진언종은 법화경을 잃는 종이다. 이것은 큰일이다. 먼저 서분(序分)에 선종과 염불종의 그릇된 견해를 책해 보려고 생각한다」(真言宗は法華経を失う宗なり、是は大事なり先ず序分に禅宗と念仏宗の僻見を責めて見んと思ふ, 893쪽)고 하시고, 이어 「일본국이 법화경의 정의를 잃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악도에 떨어지는 것은 진언종 때문」이라는 취지를 밝히셨다. 염불 · 선의 파절은 서분이고, 진언의 파절이 정종(正宗)이라는 것이다. 「보은초」가 제12장부터 제29장까지 진언 파절에 긴 지면을 쓰는 까닭이 여기 있다.

중국 진언의 개조와 이동사승

진언종은 「세이초사대중중」의 말씀대로 법화경을 잃게 하는 법이다. 그 개요를 「선시초」의 말씀에 따라 짚어 보자.

당 현종 시대에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의 세 삼장에 의해 인도에서 대일경 · 금강정경 · 소실지경이 중국에 전해졌다. 선무외는 중국에 와서 보니 이제 와서 대일경을 넓혀도 화엄종이나 천태종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천태종의 학승 가운데 일행(一行) 아사리라는 사람을 붙잡아 다음과 같은 설을 세워 쓰게 했다고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서술하신다.

爾の時に善無畏三蔵大に巧んで云く大日経に住心品という品あり無量義経の四十余年の経経を打ちはらうがごとし、大日経の入漫陀羅已下の諸品は漢土にては法華経・大日経とて二本なれども天竺にては一経のごとし、釈迦仏は舎利弗・弥勒に向って大日経を法華経となづけて印と真言とをすてて但理計りをとけるを羅什三蔵此れをわたす天台大師此れをみる、大日如来は法華経を大日経となづけて金剛薩埵に向ってとかせ給う此れを大日経となづく我まのあたり天竺にしてこれを見る

그때 선무외삼장이 크게 꾀를 내어 말하기를, 「대일경에 주심품이라는 품이 있으니, 무량의경이 사십여 년의 경들을 떨쳐 버리는 것과 같다. 대일경의 입만다라품 이하의 여러 품은 한토에서는 법화경 · 대일경이라 하여 두 본이지만 천축에서는 한 경과 같다. 석가불은 사리불 · 미륵을 향해 대일경을 법화경이라 이름하여 인과 진언을 버리고 다만 이치만을 설했으니, 이것을 나집삼장이 전하고 천태대사가 보았다. 대일여래는 법화경을 대일경이라 이름하여 금강살타를 향해 설하셨으니 이것을 대일경이라 한다. 나는 천축에서 이것을 눈앞에 보았다」

「선시초」, 276쪽

されば汝がかくべきやうは大日経と法華経とをば水と乳とのやうに一味となすべし、もししからば大日経は已今当の三説をば皆法華経のごとくうちをとすべし、さて印と真言とは心法の一念三千に荘厳するならば三密相応の秘法なるべし、三密相応する程ならば天台宗は意密なり真言は甲なる将軍の甲鎧を帯して弓箭を横たへ太刀を腰にはけるがごとし、天台宗は意密計りなれば甲なる将軍の赤裸なるがごとくならんといゐければ、一行阿闍梨は此のやうにかきけり

「그러니 네가 쓸 방법은, 대일경과 법화경을 물과 젖처럼 한맛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대일경은 이금당의 삼설을 모두 법화경처럼 쳐서 떨어뜨릴 것이다. 그리고 인과 진언을 심법의 일념삼천에 장엄한다면 삼밀상응의 비법이 될 것이다. 삼밀이 상응하는 정도라면 천태종은 의밀(意密)일 뿐이니, 진언은 용맹한 장군이 갑옷을 입고 활과 화살을 메고 큰 칼을 허리에 찬 것과 같고, 천태종은 의밀뿐이니 용맹한 장군이 벌거벗은 것과 같으리라」 하고 말하니, 일행 아사리는 이렇게 썼다.

「선시초」, 276쪽

이것이 이른바 이동사승이다. 대일경과 법화경은 이치가 같고, 대일경에는 인과 진언이 있으므로 사(事)에서 뛰어나다는 주장이다. 「물과 젖처럼 한맛으로」 만든다는 말이 그 수법을 정확히 보여 준다. 법화경의 이치(일념삼천)를 대일경 안에 섞어 넣어 둘을 같게 만든 뒤, 인과 진언이라는 형식을 덧붙여 대일경을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법화경의 「이금당」이 대일경을 쳐서 떨어뜨리는 경문이기는커녕, 대일경이 「이금당」의 힘을 빌려 다른 모든 경을 떨어뜨리게 된다.

일행 아사리는 천태의 학승이면서 이런 설을 받아 적어 세상에 전했다. 또 천태종 안에도 천태대사 같은 지자가 없었고, 선무외 등은 왕족 출신의 존귀한 신분이었으므로, 진언의 설은 세상에 퍼지고 천태종의 정의는 도리어 엷어지고 말았다.

전교대사의 판단 — 진언을 칠종 안에 거두다

일본의 진언 전래는 本文에 따르면 겐쇼 천황 때 선무외가 대일경을 가져왔으나 넓히지 않고 돌아간 데서 시작하고, 이어 현방 등이 『대일경의석』 14권을, 도다이사의 득청 대덕이 다시 그것을 전했다. 전교대사는 이것들을 보았으나 대일경과 법화경의 승렬에 대해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그래서 연력 23년(804) 7월 입당해 도수 · 행만에게 천태의 지관과 원돈의 대계를 전해 받고, 순효에게서 진언을 상전한 뒤, 연력 24년(805) 6월 돌아와 간무 천황을 뵈었다. 천황은 선지를 내려 육종의 학생들에게 지관과 진언을 배우게 하고 이를 칠대사에도 두게 했다.

전교대사가 진언까지 배워 온 것은 진언에 기울어서가 아니라 승렬을 몸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本文의 흐름이다. 진언 · 지관 두 종의 승렬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도 갖가지 주장이 있었고, 『대일경의석』에는 법화의 이치와 대일경의 이치는 모두 제법실상이니 같지만 대일경에는 인과 진언이 있으므로 사상에서 뛰어나다는 이동사승의 그릇된 논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전교대사는 「그것은 모두 선무외의 잘못이다. 대일경은 법화경보다 못하다」고 알았다.

그래서 전교대사는 나라의 육종 위에 천태종을 더해 칠종으로 하되, 진언종을 넣어 팔종으로 하지는 않았다. 진언종이라는 종명마저 깎아 법화종 안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대일경을 법화천태종의 방의경으로 삼아 화엄 · 대품반야 · 열반경 등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대일경은 법화경 아래, 여러 이전 경들과 같은 자리라는 판정이다.

  1. 767오미에서 출생
  2. 778 무렵행표에게 출가
  3. 785도다이사에서 구족계, 곧 히에이산에 초암
  4. 788 무렵히에이산에 일승지관원(뒤의 엔랴쿠사) 창건으로 전함
  5. 802다카오산사 강회 — 남도 열네 석덕 승복
  6. 8047월 입당(의진 동행)태주 · 천태산에서 도수 · 행만에게 천태 지관과 원돈계월주에서 순효에게 진언(805)
  7. 8056월 귀국, 간무 천황 대면
  8. 806연분도자 승인으로 일본 천태종 개창
  9. 818~819『산가학생식』 · 대승 계단 청원
  10. 820『현계론』
  11. 821『법화수구』
  12. 8226월 입멸(56세), 이레 뒤 대승 계단 칙허
「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칠종으로 — 대일경은 법화천태종의 방의경」
도표 12 · 전교대사의 생애와 입당 상승

왜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전교대사는 진언과 천태 두 종의 승렬을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다. 本文은 그 까닭을 「중대한 일인 원돈의 대승 별수계의 대계단을 우리나라에 세우느냐 세우지 않느냐 하는 쟁론이 번거로웠던 까닭인지」라고 추량하신다.

당시는 대승 별수계의 대계단을 일본에 세우는 문제를 두고 남도 여러 종과의 쟁론이 격렬하던 때였다. 그런 때 진언과의 다툼까지 벌이면 대승 계단 건립이라는 큰 목적에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되도록 적을 줄여 계단을 세우기 위해 진언에 대한 파절을 더하지 않았던 것인가 — 이것이 첫째 추측이다. 아니면 진언의 파절을 말법에 맡기기 위해 남겨 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이것이 둘째 추측이다.

이 침묵은 다음 편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전교대사의 제자인 자각(엔닌) · 지증(엔친)은 천태좌주이면서 스승이 분명히 가르치지 않은 틈을 타 진언을 법화경 위에 올려놓았다. 전교대사가 「분명히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 같다」는 대성인의 말씀은, 예산(比叡山)이 진언으로 기울어 가는 출발점을 짚은 말이다.

『의빙집』 — 진언은 천태에 굴복한 종

다만 전교대사에게는 『의빙집』이라는 글이 있어, 여기서는 진언을 분명히 파절했다. 그 서문에는 「새로 건너온 진언가는 붓으로 받아 적은 상승(相承)을 감춘다」(新来の真言家は則ち筆授の相承を愍じ)고 했다. 선무외의 설을 일행이 받아 적은 『대일경소』가 천태의 교학을 빌려 쓴 것인데도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지적이다. 『의빙집』의 이 대목은 다음 편 「진언으로 기운 예산」에서 자세히 다룬다.

本文이 짚는 『의빙집』의 요지는 이렇다. 진언종은 법화천태종의 정의를 훔쳐 대일경에 넣고 「이동」이라 했다. 그러므로 진언종은 천태종에 굴복한 종이다. 이동사승의 「이동」 — 이치가 같다 — 이라는 말 자체가, 진언이 천태의 일념삼천을 빌려 오지 않고는 대일경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자백이라는 것이다.

『의빙집』에는 또 하나의 증거가 실려 있다. 불공삼장은 선무외 · 금강지가 입멸한 뒤 인도로 가서 용지보살을 만났다. 그때 용지는 「인도에는 부처의 본뜻을 밝힌 논석이 없다. 중국에 천태라는 사람이 있어 그 해석이야말로 사정을 가리고 편원을 밝힌 글이라 한다. 부디 그것을 인도로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 이야기를 불공의 제자 함광이 묘락대사에게 전했고, 묘락대사는 이를 『법화문구기』 권10 끝에 적었으며, 전교대사는 그 글을 『의빙집』에 옮겨 실었다.

이 이야기의 무게는 말한 사람과 전한 사람에 있다. 용지는 진언종이 스스로 조사로 받드는 사람이고, 불공은 진언의 삼삼장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함광은 불공의 제자다. 진언의 계보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이 천태의 해석을 인도에도 없는 최고의 해석으로 인정한 것이다. 제9장에서 인도의 논사들이 「불교가 두 번 나타났다」고 찬탄했다는 本文의 말이 여기서 구체적인 증언으로 뒷받침된다. 이로 보아도 진언보다 천태가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석가여래 · 천태대사 · 묘락대사 · 전교대사는 모두 한결같이 대일경 등 일체경 가운데 법화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보았다. 대성인은 여기에 진언종이 원조로 받드는 용수보살도 덧붙이신다. 『대지도론』을 잘 살펴보면 용수의 본뜻도 법화경에 있음이 분명한데, 불공이 그르친 『보리심론』에 모든 사람이 속아 이 일에 미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공의 『보리심론』

『보리심론』에 대해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자세히 논하셨다.

唐の末に不空三蔵一巻の論をわたす其の名を菩提心論となづく

당나라 말에 불공삼장이 한 권의 논을 전하니 그 이름을 보리심론이라 한다.

「선시초」, 268쪽

竜猛の言ならぬ事処処に多し故に目録にも或は竜猛或は不空と両方にいまだ事定まらず、其上・此の論文は一代を括れる論にもあらず荒量なる事此れ多し、先ず唯真言法中の肝心の文あやまりなり其の故は文証現証ある法華経の即身成仏をばなきになして文証も現証もあとかたもなき真言経に即身成仏を立て候又唯という唯の一字は第一のあやまりなり

용맹(용수)의 말이 아닌 데가 곳곳에 많다. 그러므로 경록에도 용맹이라고도 하고 불공이라고도 하여 양쪽으로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논문은 일대를 아우른 논도 아니고 엉성한 데가 많다. 우선 「오직 진언법 가운데서만」이라는 간심의 글이 잘못이다. 그 까닭은 문증과 현증이 있는 법화경의 즉신성불은 없는 것으로 하고, 문증도 현증도 흔적조차 없는 진언경에 즉신성불을 세웠기 때문이다. 또 「오직」이라는 「유(唯)」 한 글자는 첫째가는 잘못이다.

「선시초」, 268쪽

대성인은 이어서, 일의 모양을 보건대 불공삼장이 사사로이 지은 것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무겁게 여기게 하려고 용맹(용수)에게 핑계 댄 것이 아닌가, 게다가 불공삼장은 잘못한 일이 많다고 하셨다(「선시초」, 268쪽).

대성인의 논점은 세 가지다. 첫째, 저자가 용수인지 불공인지 경록에서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둘째, 「오직 진언법 가운데서만 즉신성불한다」는 이 논의 간심 구절은, 문증(제바달다품의 용녀 성불)과 현증이 있는 법화경의 즉신성불을 없는 것으로 하고 문증도 현증도 없는 진언경에 즉신성불을 세웠다. 셋째, 「오직(唯)」이라는 한 글자가 가장 큰 잘못이다. 그래서 대성인은 불공이 사사로이 지어 용수의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닌가 하고 판단하신다.

『보리심론』의 저자 문제는 근대 불교학에서도 논의되어 왔으며, 용수의 저술로 보지 않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대일경소』 · 『대일경의석』의 성립과 천태 교학의 영향에 대해서도 여러 연구가 있다.

일본 진언의 그릇된 뜻과 「진언 망국」

진언의 그릇된 뜻은 일본에 와서 홍법(구카이) · 자각(엔닌) 등에 의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다음 편의 주제이지만, 대성인 불법의 관점에서 그 요점을 미리 짚어 둔다.

홍법(구카이)은 『십주심론』 · 『비장보약』 · 『변현밀이교론』에서 법화경을 「희론(戱論)」이라 하고, 「무명의 변두리일 뿐 밝음의 자리가 아니다」라 하며, 「진단의 인사들이 다투어 제호를 훔쳐 저마다 자기 종에 이름 붙였다」고 했다. 대일경에 견주면 법화경은 「희롱의 논」이고, 대일여래에 견주면 석가는 무명의 변두리에 있으며, 나아가 천태대사가 진언의 제호를 훔쳐 천태종을 제호라 정했다는 정반대의 말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쳐 「이동」이라 한 것은 진언의 개조들 쪽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훔친 쪽이 훔침을 당한 쪽을 가리켜 도둑이라 부른 셈이다.

또 홍법의 법손 쇼카쿠보(正覺房) 각반(覺鑁)의 『사리강식』에는 법화 · 화엄 등의 부처는 쇼카쿠보나 홍법에 견주면 소치는 사람이나 신발 드는 사람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취지의 말까지 있다. 나아가 자각대사 · 지증대사는 몸은 천태좌주이면서 진언을 제일로 하고 이동사승을 세웠다. 천태종 안에도 이 그릇된 견해를 파절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일본 전체에 나라를 망치고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악법이 퍼지고 말았다는 것이 대성인의 진단이다.

「보은초」 뒷부분에도 인용되듯, 대성인은 진언 망국의 첫째 현증으로 승구의 난(1221)을 드신다.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려 꾀해 진언의 온갖 비법을 다해 기도했으나, 군사를 일으킨 지 겨우 한 달 만에 막부군에게 패해 세 상황이 섬으로 유배된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보은초 제6편 「진언의 악한 현증과 홍법의 광혹」에서 다시 다룬다.

법화경과 대일경 — 단법신과 삼신상주

법화경과 대일경의 사상을 견주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대일경은 법화경에 비해 여러 겹으로 낮은 경이다.

진언종이 세우는 대일여래는 높이 쳐 주어도 법신만의 여래(單法身)에 지나지 않는다. 또 구원을 밝히지 않으므로 수적(垂迹)의 부처다. 천태가 세우는 법화경 본문의 구원실성의 부처는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이 상주하므로, 단법신의 대일여래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 진언이 「석가는 응신, 대일은 법신」이라 하여 대일을 높이는 것은, 여래수량품이 밝힌 삼신상주의 석존을 보지 못한 판정이다(삼신 · 구원실성 참조).

이처럼 진언종은 방등부에 속하는 대일 삼부경을 세우고, 제경의 왕인 법화경을 셋째로 낮추어 희론의 법이라 하며, 본문의 석가불을 현교의 교주라 하여 낮추고, 이동사승을 주장하며 일념삼천을 훔쳤다. 그리고 석존이 아닌 부동명왕 등을 본존으로 세웠다. 대성인은 이를 「진언 망국」이라 하셨다.

진언의 주장
  • 교주대일여래(법신) · 법화경은 응신 석가의 현교
  • 이동사승이치는 같고 인 · 진언이 있어 사(事)에서 뛰어남
  • 「민의 만언 · 천자의 일언」 · 「흐린 물의 달 · 맑은 물의 달」
  • 근거『대일경의석』 · 『보리심론』 「오직 진언법 가운데서만 즉신성불」
대성인 불법의 판정
  • 교주본문 구원실성의 석존, 삼신상주
  • 대일여래단법신 · 구원을 밝히지 않은 수적의 부처
  • 「이동」은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친 것 — 『의빙집』 「진언은 천태에 굴복한 종」
  • 용지보살의 부탁(『법화문구기』 권10 → 『의빙집』)
  • 즉신성불의 문증 · 현증은 법화경(용녀 성불)에
전교대사진언종의 이름을 깎아 칠종으로, 대일경은 방의경
도표 13 · 법화경과 대일경

대파절은 말법의 대성인에게

전교대사는 『의빙집』에서 일단 진언을 깨뜨렸지만, 대파절은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출현을 기다렸다고 해야 한다. 대성인은 입종 초기에는 정토 염불을 철저히 파절하셨지만, 사도 유배 이후에는 특히 진언을 남김없이 분쇄하셨다. 「보은초」는 그 진언 파절이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된 어서 가운데 하나다. 이 장에서 전교대사의 「분명히 가르치지 않음」을 짚으신 것은 그 침묵을 메우는 일이 말법의 대성인에게 맡겨졌음을 밝히신 것이기도 하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전교대사는 진언을 칠종 안에 거두어 대일경을 법화경 아래에 두었고 『의빙집』에서 그 근원을 짚었지만, 대계단 쟁론 속에서 승렬을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다. 그 틈에서 자각 · 지증의 진언화가 일어났으며, 진언의 대파절은 말법의 대성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경 · 논 · 석 — 이 편을 읽는 잣대

이 편에는 많은 경과 논과 석이 등장했다. 불교의 문헌에는 경(經) · 논(論) · 석(釋)의 구별이 있다. 경은 부처가 설한 가르침의 근본 전적이다. 논은 인도 등의 보살 · 논사가 부처의 교의와 경설을 널리 풀어 전한 것이다. 석은 중국 · 일본 등의 인사(人師)가 경을 주석해 지은 책이다.

예컨대 용수보살의 『대지도론』 · 『중론』 · 『십이문론』, 제바보살의 『백론』, 천친보살의 『유식론』 등은 「논」에 해당한다. 법화경 28품을 주석한 천태대사의 『법화문구』 · 『법화현의』 · 『마하지관』과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 · 『법화현의석첨』 · 『지관보행전홍결』 등은 「석」에 해당한다.

이 구별은 이 편 전체를 읽는 잣대가 된다. 법운의 소, 현장의 『유식론』, 법장의 화엄 교판, 선무외의 『대일경소』, 불공의 『보리심론』은 모두 논이나 석이다. 천태대사가 진나라 궁전에서 요구한 것도, 전교대사가 다카오사에서 맞댄 것도 「본경 · 본론」이었다. 논과 석은 경에 맞을 때에만 의지할 수 있다. 제1편에서 대성인이 세우신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원칙은 곧 「경에 의지하고 논 · 석에 의지하지 말라」는 원칙이기도 하다.

경부처가 설한 가르침의 근본 전적
  • 법화경
  • 무량의경
  • 열반경
  • 화엄경
  • 대일경
  • 해심밀경
논인도의 보살 · 논사가 경을 풀어 전한 것
  • 용수 『대지도론』 · 『중론』 · 『십이문론』
  • 제바 『백론』
  • 천친 『유식론』
  • (용수 지음으로 전하는) 『보리심론』
석중국 · 일본의 인사가 경을 주석한 것
  • 천태 『법화문구』 · 『법화현의』 · 『마하지관』
  • 묘락 『법화문구기』 · 『법화현의석첨』 · 『지관보행전홍결』
  • 법운 『법화의기』
  • 선무외 · 일행 『대일경소』
  • 전교 『의빙집』
「본경 · 본론에 맞대어 책하다」本経・本論・並に諸経・諸論に指し合わせてせめしかば
도표 14 · 경 · 논 · 석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제3편의 다섯 장은 하나의 물음을 되풀이했다. 「증문은 어느 경인가.」 광택사 법운에게는 학통과 황제의 후원과 꽃비 · 단비의 영험이 있었고, 현장에게는 열일곱 해의 대여행과 태종의 귀의가 있었으며,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에게는 고귀한 혈통과 인 · 진언의 새로움이 있었다. 남도의 열네 석덕에게는 쇼토쿠 태자 이래 이백 년의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천태대사와 묘락대사와 전교대사는 그 모든 권위 앞에서 오직 경문으로 맞섰다. 무량의경의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열반경의 「군습」, 법화경의 「이금당」과 다보 · 분신의 증명이 그 무기였다.

그리고 그 물음을 던진 사람은 반드시 박해를 받았다. 천태대사에게는 「머리를 깨뜨려야 한다」는 소리가, 전교대사에게는 칠대사 · 육종의 「까마귀 떼」가 몰려왔다. 대성인은 이를 「여래의 재세에도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에랴」라는 법사품의 경문이 상법 시대에 증명된 모습으로 드셨다. 다만 천태 · 전교에게는 국주가 공장을 열어 주었고, 그 자리에서 정법이 승리를 거두었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 이래 같은 공장을 거듭 요구하셨으나 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상법과 말법의 이 차이가 「황멸도후」의 무게다.

이 편의 끝에서 대성인은 한 가지 빈자리를 짚으셨다. 전교대사는 진언의 이름을 깎아 칠종 안에 두고 『의빙집』에서 그 근원을 밝혔지만, 대승 계단을 둘러싼 쟁론 속에서 진언과 천태의 승렬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다. 니치칸 상인이 「보은초 문단」에서 정리했듯, 제12장은 정법 · 상법의 풀이를 마치고 말법을 여는 자리이며, 그 첫 과제가 「앞 시대에 유포된 진언」의 파절이다.

다음 보은초 제4편 「진언으로 기운 예산 — 홍법 · 자각 · 지증」은 바로 그 빈자리에서 시작한다. 근조의 제자 구카이(홍법)는 연력 23년 전교대사와 같은 해에 입당해 혜과에게서 진언을 받아 오고 「제일 진언 · 제이 화엄 · 제삼 법화」를 세운다. 그리고 전교대사의 제자인 자각(엔닌) · 지증(엔친)은 천태좌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동사승으로 진언에 기운다. 스승의 침묵이 제자들의 전락으로 이어지는 과정, 그리고 대성인이 그것을 어떻게 파하시는가를 다음 편에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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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묘법연화경』 구마라집 역, T9 no.262 (약초유품 · 법사품 · 견보탑품 · 제바달다품 · 여래신력품)
  • 『무량의경』 담마가타야사 역, T9 no.276
  • 『대반열반경』 담무참 역, T12 no.374 (권9 · 권14)
  •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대일경)』 선무외 · 일행 역, T18 no.848
  • 『대비로자나성불경소(대일경소)』 일행 기, T39 no.1796
  • 천태대사 『묘법연화경현의』 T33 no.1716 · 『묘법연화경문구』 T34 no.1718 · 『마하지관』 T46 no.1911
  • 묘락대사 『법화현의석첨』 · 『법화문구기』 · 『지관보행전홍결』
  • 전교대사 『의빙천태집』 · 『현계론』 · 『법화수구』 · 『수호국계장』
  •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 13년 조
  • 니치칸 상인 「보은초 문단(報恩抄文段)」

연구

  • Paul Groner, Saichō: The Establishment of the Japanese Tendai School, Berkeley Buddhist Studies Series, 1984
  • Ryūichi Abé, The Weaving of Mantra: Kūkai and the Construction of Esoteric Buddhist Discours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On Repaying Debts of Gratitude」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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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에 인용된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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