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갈라진 땅 너머 교토 신센엔의 줄어든 연못과 메마른 하늘

진언의 악한 현증과 홍법의 광혹

보은초 · 제6편 · 제25~29장

報恩抄 — 真言の悪現証と弘法の誑惑어서 317–321쪽
저술
건치 2년(1276) 7월 21일 · 미노부
장
제25~29장
쪽수
어서 317:03–321:14
받는 이
아와 세이초사의 조켄보 · 기조보

여덟 편 · 보은초 37장 구성도

37장 + 송문 → 여덟 편
  1. 序講293 앞저술의 유래 · 대의 · 원의
  2. 보은의 도리와 불법을 배우는 길
  3. 정법 · 상법의 홍통과 진언의 미란
  4. 정법 · 상법의 홍통과 진언의 미란
  5. 정법 · 상법의 홍통과 진언의 미란
  6. 대성인의 간효와 진언 파절
  7. 대성인의 간효와 진언 파절
  8. 지은보은과 삼대비법
  9. 지은보은과 삼대비법

「보은초」 여덟 편 가운데 제6편은 대성인의 간효와 진언 파절을 다루는 갈래의 둘째 편으로, 제5편에서 중국 진언의 세 조사를 파하신 붓끝이 마침내 일본의 홍법(구카이) · 자각(엔닌)에 이르는 자리다. 여기서 대성인은 교리의 승렬을 다시 따지기보다, 진언을 떠받쳐 온 「증거」 그 자체를 문제 삼으신다. 스무하루를 빌어도 내리지 않은 비를 제 것으로 삼은 「홍법의 비」, 한밤에 해가 떴다는 이야기, 해를 쏘아 맞힌 꿈을 길몽이라 한 자각의 해석, 입을 벌리자 금빛 비로자나가 되었다는 기적, 바다 너머에서 던진 삼고가 고야산에 떨어졌다는 전설 — 이 모든 것이 과연 법의 바름을 증명하는가. 대성인의 대답은 「불법의 사정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모인다. 그리고 그 증거들을 하나하나 기록 · 연대 · 경문에 비추어 무너뜨린 뒤, 승구의 난(1221)에서 진언의 조복이 도리어 조복한 쪽에 돌아온 「환착어본인」의 현증으로 진언 파절을 맺으신다. 영험과 꿈은 무엇을 증명하고 무엇을 증명하지 못하는가 — 이 물음이 제6편 전체를 꿰뚫는다.

제6편은 어서전집 317쪽 3행부터 321쪽 14행까지,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다. 분량으로 보면 제28장 한 장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앞의 제25장에서 홍법 · 자각의 「악한 현증」을 간략히 제시하고, 제26장에서는 정토교의 선도가 꿈에서 아미타의 증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같은 유형의 예로 들어 「꿈은 불법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원리를 세운다. 이어 제27장에서 가상의 질문자가 홍법의 영험을 늘어놓으며 「이런 대덕을 어찌 지옥에 떨어졌다 하는가」 하고 묻고, 대성인은 먼저 원리로 답하신 뒤 제28장에서 그 영험담 하나하나의 허점을 짚어 「광혹(誑惑)」임을 드러내신다. 제29장은 승구의 난을 들어 진언 · 선 · 염불이 겹겹이 쌓인 나라의 결말을 보이고, 「이것은 작은 일이다」 하시며 다른 나라에게 공격당하는 더 큰 일을 경고하신다.

이 편의 논증은 오늘날 읽어도 날카롭다. 대성인은 「밤중에 해가 떴다」는 주장에 대해 그해의 몇 월 며칠 몇 시였는가, 조정의 사관 기록에 실려 있는가, 성겁 이래 이십구 겁 동안 그런 일이 있었는가, 남쪽 세계에 밤 해가 뜨면 동 · 서 · 북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를 차례로 물으신다. 홍법이 여러 종의 학승을 불러 귀복시켰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왜 연호 · 왕 · 날짜가 없는지, 왜 천태종의 개조 전교대사와 제1대 좌주 의진을 부르지 않고 반쯤 홍법의 제자였던 원징을 불렀는지를 따지신다. 전설을 전설 안에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과 연대와 우주관의 일관성으로 검증하는 방식이다. 그러면서도 대성인은 결코 영험이나 신통 그 자체를 판정의 근거로 삼지 않으신다. 천태대사와 전교대사가 비를 내린 일조차 「그것으로 불의에 맞았다고는 하지 않으셨다」고 하시는 데서, 이 편의 저울이 오직 경문, 곧 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은 「선시초」 제4편 「정토 · 선 · 진언을 파하다」에서 자각의 「해를 쏘는 꿈」을 다룬 대목, 「본존문답초」에서 세 대사의 행적과 승구의 난의 조복을 다룬 대목과 맞물려 있다. 같은 사실을 「보은초」는 「보은」의 맥락 — 은혜를 갚으려면 먼저 법의 정사를 가려야 한다 — 에서 다시 꺼내신다. 진언의 그릇됨을 밝히는 일이 나라와 스승과 부모의 은혜를 갚는 일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 「보은초」 전체의 구도다.

이 편의 장

第25章弘法慈覚の悪現証제25장 홍법 · 자각의 악한 현증 — 천장 원년의 기우에서 남이 내린 비를 「홍법의 비」로 삼은 일, 홍인 9년 밤중에 해가 떴다는 큰 망어, 자각의 「해를 쏘는 꿈」이 길몽일 수 없는 까닭(317쪽)
第26章善導の悪夢の例を挙ぐ제26장 선도의 악몽을 예로 들다 — 법화경을 버리고 「천중무일」을 세운 선도가 꿈에서 아미타의 증명을 받았다는 주장을 경문으로 파하고, 자각의 꿈도 재앙임을 맺음(317–318쪽)
第27章弘法の霊験を破す제27장 홍법의 영험을 파하다 — 『반야심경비건』 · 『공작경음의』 · 홍법의 전기에 실린 영험을 든 질문에, 불법의 사정은 신통 · 영험에 의하지 않는다고 답함(318–319쪽)
第28章弘法の誑惑を責む제28장 홍법의 광혹을 꾸짖다 — 「천하대역」 · 「밤중의 해」 · 「영취산 청문」 · 「면문이 열려 비로자나가 되다」 · 「여러 종의 귀복」 · 「삼고」의 의문을 하나하나 짚고, 열반경의 「마가 불신을 나타내 정법을 무너뜨린다」에 비추어 꾸짖음(319–321쪽)
第29章真言破折を結す제29장 진언 파절을 맺다 — 승구의 난에서 진언의 조복이 「환착어본인」이 된 현증을 들고, 다른 나라에게 공격당할 더 큰 일을 경고함(321쪽)
다섯 장의 논증 단계
  1. 제25장홍법 · 자각의 악한 현증(남의 비를 빼앗음 · 밤중의 해 · 해를 쏘는 꿈)
  2. 제26장선도의 악몽을 예로 들다(꿈은 증거가 아니다)
  3. 제27장홍법의 영험을 파하다문: 영험 네 가지답: 「불법의 사정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
  4. 제28장홍법의 광혹을 꾸짖다(기록 · 연대 · 경문의 검증, 「마가 불신을 나타낸다」)
  5. 제29장진언 파절을 맺다(승구의 난 · 환착어본인 · 타국 침핍의 경고)
도표 1 · 제6편의 흐름
제25장 홍법 · 자각의 악한 현증
어서 317쪽 3~16행 · 第25章 弘法慈覚の悪現証

본문

원문 대조어서 317쪽 3~16행
本文 · 어서 원문

弘法大師は 去ぬる天長元年の二月大旱魃のありしに先には守敏・祈雨して七日が内に雨を下す但京中にふりて田舎にそそがず、次に弘法承取て一七日に雨気なし二七日に雲なし三七日と申せしに天子より和気の真綱を使者として御幣を神泉苑にまいらせたりしかば天雨下事三日、 此れをば弘法大師並に弟子等此の雨をうばひとり我が雨として今に四百余年・弘法の雨という、慈覚大師の夢に日輪をいしと弘法大師の大妄語に云く弘仁九年の春・大疫をいのりしかば夜中に大日輪出現せりと云云、 成劫より已来・住劫の第九の減・已上二十九劫が間に日輪夜中に出でしという事なし、慈覚大師は夢に日輪をいるという内典五千七千・外典三千余巻に日輪をいると・ゆめにみるは吉夢という事有りやいなや、 修羅は帝釈をあだみて日天を・いたてまつる其の矢かへりて我が眼にたつ、殷の紂王は日天を的にいて身を亡す、日本の神武天皇の御時度美長と五瀬命と合戦ありしに命の手に矢たつ、 命の云く我はこれ日天の子孫なり日に向い奉りて弓をひくゆへに日天のせめを・かをほれりと云云、阿闍世王は邪見をひるがえして仏に帰しまいらせて内裏に返りて・ぎよしんなりしが、 おどろいて諸臣に向て云く日輪・天より地に落つと・ゆめにみる諸臣の云く仏の御入滅か云云、須跋陀羅がゆめ又かくのごとし、我国は殊にいむべきゆめなり神をば天照という国をば日本という、 又教主釈尊をば日種と申す摩耶夫人・日をはらむと・ゆめにみて・まうけ給える太子なり、慈覚大師は大日如来を叡山に立て釈迦仏をすて真言の三部経をあがめて法華経の三部の敵となせしゆへに此の夢出現せり。

풀이

홍법대사는 지난 천장(天長) 원년 2월에 큰 가뭄이 있었을 때, 먼저 수민(守敏)이 비를 빌어 이레 안에 비를 내렸으나 다만 도성 안에만 내리고 시골에는 적시지 않았느니라. 다음에 홍법이 이어받아 빌었으나 첫 이레에 비 기운이 없고, 두 이레에 구름이 없으며, 세 이레라 할 즈음에 천자께서 와케노 마쓰나(和気真綱)를 사자로 삼아 어폐(御幣)를 신센엔(神泉苑)에 바치셨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를 사흘이었느니라. 이것을 홍법대사와 그 제자들이 이 비를 빼앗아 자기의 비로 삼아, 지금까지 사백여 년 동안 「홍법의 비」라 일컫느니라. 자각대사는 꿈에 해를 쏘았다 하고, 홍법대사의 큰 망어에 이르기를 「홍인(弘仁) 9년 봄에 큰 역병을 빌었더니 한밤중에 큰 해가 나타났다」 하였느니라. 성겁(成劫) 이래 주겁(住劫)의 제9감(第九減)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십구 겁 동안 해가 한밤중에 나왔다는 일은 없느니라. 자각대사는 꿈에 해를 쏘았다 하나, 내전 오천 · 칠천 권과 외전 삼천여 권 가운데 해를 쏘는 꿈을 길몽이라 한 일이 있는가 없는가. 수라(修羅)는 제석을 원망하여 일천(日天)을 쏘았으나 그 화살이 되돌아와 제 눈에 꽂혔고, 은(殷)의 주왕(紂王)은 일천을 과녁 삼아 쏘아 몸을 망쳤느니라. 일본의 진무(神武) 천황 때에 도미나가(度美長)와 이쓰세노미코토(五瀬命)가 싸웠을 때 미코토의 손에 화살이 꽂혔느니라. 미코토가 말하기를 「나는 일천의 자손이다. 해를 향하여 활을 당긴 까닭에 일천의 꾸짖음을 입었다」 하였느니라. 아사세왕(阿闍世王)은 사견을 뒤집어 부처님께 귀의하고 궁궐에 돌아와 잠들었는데, 놀라 깨어 여러 신하에게 「해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하니, 신하들이 「부처님의 입멸이신가」 하였느니라. 수발타라(須跋陀羅)의 꿈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우리 나라는 특히 꺼려야 할 꿈이니라. 신을 천조(天照)라 하고 나라를 일본(日本)이라 하느니라. 또 교주 석존을 일종(日種)이라 하나니, 마야부인이 해를 잉태하는 꿈을 꾸고 낳으신 태자이시니라. 자각대사는 대일여래를 예산(叡山)에 세우고 석가불을 버리며 진언의 삼부경을 받들어 법화경 삼부의 적으로 삼은 까닭에 이 꿈이 나타났느니라.

어구 풀이

天長元年の二月大旱魃천장 원년 2월의 큰 가뭄
천장 원년은 824년, 준나(淳和) 천황 때다. 이해 봄 도성 일대에 가뭄이 들어 조정이 승려들에게 비를 빌게 했다. 이 기우가 뒷날 「신센엔 기우」 전승의 출발점이 된다.
守敏수민
생몰년 미상. 헤이안 초기의 진언승. 어려서 나라에서 유학하며 근조(勤操) 등에게서 삼론 · 법상과 밀교를 익혔다. 홍인 14년(823) 사가 천황에게서 사이지(西寺)를 받았는데, 이때 홍법은 동사(東寺)를 받았다. 천장 원년의 가뭄에 홍법과 기우를 겨루어 이레 만에 비를 내렸으나 도성 안에만 내렸다고 전한다.
和気の真綱와케노 마쓰나
783~846. 헤이안 초기의 귀족으로 와케노 기요마로의 다섯째 아들. 사서에 밝았고 참의 종4위상에 올랐다.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형 히로요(広世)와 함께 다카오산사(高雄山寺)에 남도 육종의 고승 14명을 모아 전교대사를 강사로 법화회를 여는 등 천태종 개창을 도왔다. 비를 부른 어폐의 사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神泉苑신센엔
헤이안경을 지을 때 대내리(大内裏) 남쪽에 붙여 만든 천황의 정원. 남북 4정 · 동서 2정에 이르는 땅에 샘에서 솟은 큰 연못이 있고 숲과 누각이 있었다. 연력 19년(800) 간무 천황의 행차 이래 역대 천황의 놀이터가 되었고, 천장 원년의 기우 이후 선녀용왕(善女竜王)을 모시는 기우의 장소가 되었다.
弘法の雨홍법의 비
천장 원년의 비를 홍법이 빌어 내린 비라고 일컫는 말. 대성인은 이 비가 천자의 어폐 뒤에 내린 비이며 홍법의 문도가 이를 「빼앗아」 스승의 비라 퍼뜨렸다고 하신다. 「보은초」를 쓰신 건치 2년(1276)까지 약 450년이 지났으므로 「지금 사백여 년」이라 하셨다.
弘仁九年の春・大疫홍인 9년 봄의 큰 역병
홍인 9년은 818년, 사가 천황 때다. 홍법의 『반야심경비건』 끝 글에 이해 봄 큰 역병이 돌아 천황이 금니로 반야심경을 베껴 쓰고 홍법이 그 뜻을 강했더니 역병이 그치고 밤이 변하여 해가 밝게 빛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27 · 28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成劫より已来・住劫の第九の減성겁 이래 주겁의 제9감
세계는 성(成) · 주(住) · 괴(壞) · 공(空)의 네 겁을 되풀이하며 각 겁은 이십 소겁으로 이루어진다. 주겁에서는 사람의 수명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데, 석존이 나신 때를 그 아홉째 감(減)의 시기로 본다. 성겁 이십 겁에 주겁 아홉 겁을 더해 「이십구 겁」이다.
内典五千七千・外典三千余巻내전 오천 · 칠천 권, 외전 삼천여 권
내전은 불교 경론, 외전은 유교 · 도교 등 불교 밖의 책. 한역 경론의 총수를 오천여 권, 또는 칠천여 권으로 헤아리던 당시의 말이다. 그 모든 문헌을 통틀어 해를 쏘는 꿈을 길몽이라 한 곳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修羅は帝釈をあだみて日天を・いたてまつる수라는 제석을 원망하여 일천을 쏘다
라후라 아수라왕이 해와 달을 가린다는 이야기는 『법화문구』 권2하에 나온다. 화살이 되돌아와 제 눈에 꽂혔다는 대목의 출전은 분명하지 않으며, 여기서는 「환착어본인」의 도리를 아수라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다.
殷の紂王は日天を的にいて身を亡す은의 주왕은 일천을 과녁 삼아 쏘아 몸을 망쳤다
주왕은 은 왕조 마지막 왕(기원전 12세기 무렵, 제신(帝辛)이라고도 한다). 달기(妲己)에 빠져 주지육림의 잔치를 벌여 민심을 잃고, 주(周) 무왕에게 쳐들어오자 녹대(鹿台)에 올라 불타 죽었다고 전한다. 「해를 과녁 삼아 쏘았다」는 대목의 출전은 분명하지 않다.
度美長と五瀬命도미나가와 이쓰세노미코토
도미나가는 나가스네히코(長髄彦)를 가리킨다. 진무 천황의 동정을 막은 토호의 우두머리로, 구사에자카(孔舎衛坂) 싸움에서 진무 천황의 형 이쓰세노미코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일본서기』가 전한다.
阿闍世王아사세왕
중인도 마가다국의 왕. 제바달다에게 넘어가 아버지 빈바사라왕을 가두어 죽였으나, 뒤에 몸에 악창이 나 괴로워하다 기바(耆婆)의 권유로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보은초」는 그가 해가 떨어지는 꿈으로 부처님의 입멸을 알았다고 하신다.
須跋陀羅がゆめ수발타라의 꿈
수발타라는 범어 수바드라의 음사로, 부처님 입멸 때 교화를 받은 마지막 제자다. 『대지도론』 권3에, 어느 밤 모든 사람이 눈을 잃고 벌거벗은 채 어둠 속에 서 있으며 해가 떨어지고 대지가 갈라지며 큰 바다가 마르고 큰 바람이 수미산을 날려 흩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부처님이 이 밤중에 열반에 드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출가하여 그 밤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日種일종
석가족이 태양의 계보를 이었다 하여 부처님을 「해의 종족」이라 부르는 이름. 대성인은 마야부인이 해를 잉태하는 꿈을 꾸고 태자를 낳으셨다는 전승과 함께 드신다.
真言の三部経・法華経の三部진언의 삼부경 · 법화경의 삼부
진언의 삼부경은 『대일경』 · 『금강정경』 · 『소실지경』, 법화의 삼부경은 『무량의경』 · 『묘법연화경』 · 『관보현보살행법경』이다. 전교대사는 예산 지관원에 법화경 · 금광명경 · 인왕경을 「진호국가의 삼부」로 정하셨는데, 자각은 진언의 삼부경을 받들어 이 자리를 바꾸었다.

진언 파절의 마무리로 들어가는 자리

이 장은 진언을 별도로 파하는 긴 흐름 가운데, 일본의 홍법과 자각을 파하는 단의 첫머리다. 바로 앞의 제24장에서 대성인은 중국 진언의 세 조사를 차례로 드셨다. 선무외는 기우에 비를 내렸으나 큰 바람이 불어 나라를 무너뜨렸고, 금강지는 이레 만에 비를 내렸으나 큰 바람이 불어 쫓겨날 뻔했으며, 불공은 사흘 만에 비를 내렸으나 큰 바람이 여러 날 그치지 않아 궁궐까지 부수었다. 그리고 장의 끝에서 대성인은 문영 11년(1274) 4월 12일의 큰 바람이 아미타당의 가가 법인(加賀法印)의 기우에 불어 닥친 역풍이었다고 하시며 「선무외 · 금강지 · 불공의 악법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전했는가」 하고 비꼬셨다(316쪽).

이렇게 제24장이 「진언의 기우는 바람을 부른다」는 현증으로 끝났기에, 제25장은 자연스럽게 일본 진언의 개조 홍법의 기우로 이어진다. 이 장의 주제는 「악한 현증(悪現証)」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법의 정사를 가릴 때 문증(文證) · 이증(理證) · 현증(現證)의 세 증거를 세우는데, 그 가운데 현증을 가장 중시하신다. 「삼삼장기우사」에서 「니치렌이 불법을 시험해 보건대 도리와 증문보다 나은 것이 없고, 또 도리와 증문보다 현증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 그 뜻이다.

日蓮仏法をこころみるに道理と証文とにはすぎず、又道理証文よりも現証にはすぎず

니치렌이 불법을 시험해 보건대 도리와 증문에 지나는 것이 없고, 또 도리와 증문보다도 현증에 지나는 것이 없느니라

「삼삼장기우사」, 1468쪽

그런데 이 현증은 양날의 칼이다. 진언가들은 기우의 비, 밤중의 해, 해를 쏘는 꿈을 자기네 교의가 부처님의 뜻에 맞았다는 「좋은 현증」으로 내세웠다. 대성인은 그 같은 사건들을 그대로 받아, 실은 그것들이 「악한 현증」, 곧 법의 그릇됨이 겉으로 드러난 증거임을 보이신다. 같은 사실을 두고 해석의 방향을 뒤집으시는 것이다. 진언 쪽의 현증이 거짓이거나(남의 비를 빼앗음, 밤중의 해) 흉조(해를 쏘는 꿈)라면, 그 현증은 그대로 진언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났다는 증거가 된다.

천장 원년의 기우와 「홍법의 비」

천장 원년(824) 2월, 큰 가뭄이 들자 조정은 먼저 수민에게 비를 빌게 했다. 수민은 이레 안에 비를 내렸으나 그 비는 도성 안에만 내리고 시골의 논밭은 적시지 못했다. 이어서 홍법이 기우를 맡았는데, 첫 이레가 지나도 비 기운이 없고, 두 이레가 지나도 구름 한 점 없었으며, 세 이레째가 되었다. 이때 천자가 와케노 마쓰나를 사자로 삼아 신센엔에 어폐를 바치게 하자 그제야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대성인은 이 비를 「홍법대사와 제자들이 빼앗아 자기의 비로 삼았다」고 하신다. 같은 사실을 「삼삼장기우사」에서도 이렇게 적으셨다.

弘法にをほせつけられてありしかば七日にふらず二七日にふらず三七日にふらざりしかば、天子我といのりて雨をふらせ給いき、而るを東寺の門人等我が師の雨とがうす

홍법에게 분부하셨더니 이레에 내리지 않고 두 이레에 내리지 않고 세 이레에 내리지 않았으므로, 천자께서 몸소 빌어 비를 내리셨느니라. 그런데 동사의 문인들이 우리 스승의 비라고 일컫느니라

「삼삼장기우사」, 1469쪽

이어서 대성인은 「자세한 것은 일기를 끌어와 배워야 한다」고 덧붙이셨다(1469쪽). 이 판정이 막연한 비방이 아니라 당시 조정 기록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신 말씀이다.

이 기우에는 뒷날 여러 겹의 전승이 덧붙었다. 『원형석서(元亨釈書)』 「공해전」에는 신센엔의 못에 선녀(善女)라는 용이 있어 그 모습을 드러내면 기우가 이루어진다고 하였고, 그 사실을 천황에게 아뢰자 천황이 와케노 마쓰나를 사자로 하여 신룡에게 어폐를 바쳤더니 사흘 동안 비가 쏟아져 천하가 윤택해졌다고 전한다. 여기서도 비가 내린 결정적 계기는 천황의 사자가 바친 어폐였다. 전승이 홍법을 높이려 할수록 오히려 대성인이 말씀하신 경위 — 비는 홍법의 수법이 아니라 천자의 기원 뒤에 내렸다 — 가 그 안에 남아 있는 셈이다. 『태평기』에 이르면 이야기는 더 크게 부풀어, 수민이 홍법과의 겨룸에 진 것을 원망하여 용신들을 물병에 가두어 가뭄을 일으켰고, 홍법이 이를 꿰뚫어 보고 선녀용왕을 불러 비를 내렸다는 설화가 된다. 신센엔이 선녀용왕을 모시는 기우의 장소가 된 것도 이 전승의 흐름 위에 있다.

이 사건에서 더욱 날카로운 대목은 비를 부른 어폐의 사자가 와케노 마쓰나였다는 점이다. 와케노 마쓰나는 형 히로요와 함께 다카오산사에서 전교대사를 강사로 법화회를 열어 천태종 개창을 도운, 법화경의 외호자였다. 법화경을 외호한 사람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바친 기원 뒤에 비가 내렸는데, 그것을 진언의 개조가 제 공으로 가져간 것이다. 대성인이 「빼앗았다(うばひとり)」는 강한 말을 쓰신 까닭이 여기 있다.

기우의 겨룸을 법의 승렬과 결부하는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홍인 9년(818)에는 전교대사와 법상종의 호명(護命)이 기우를 겨루었는데, 전교대사는 법화경 · 금광명경 · 인왕경으로 빌어 사흘 만에 가는 비를 고요히 내렸고, 남도 제일의 고승 호명은 제자 마흔 명을 거느리고 인왕경으로 빌어 닷새 만에 비를 내렸으나 비가 거칠어 진 것으로 되었다고 「삼삼장기우사」는 전한다(1470쪽). 대성인도 「시모야마어소식」에서 비로 득실을 드러낸 옛 예로 「전교대사와 호명과 수민과 홍법」을 드셨다(349쪽). 사흘과 닷새를 겨루던 시대에, 세 이레를 빌고도 비 기운조차 없었던 홍법의 기우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였는지는 분명하다.

천태대사
시대진
의지한 법법화경
걸린 날「잠깐 사이」
결과단비, 바람 없음
전교대사
시대홍인 9년 818
의지한 법법화경 · 금광명경 · 인왕경
걸린 날사흘
결과가는 비
호명
시대같은 해
의지한 법인왕경
걸린 날닷새
결과거친 비로 짐
수민
시대천장 원년 824
의지한 법—
걸린 날이레
결과도성 안에만
홍법
시대같은 해
의지한 법—
걸린 날세 이레에도 비 기운 없음
결과천자의 어폐 뒤 사흘 비→ 「홍법의 비」라 일컬음
선무외 · 금강지 · 불공
시대당
의지한 법—
걸린 날—
결과비는 내렸으나 큰 바람
도표 2 · 기우의 비교

한밤중의 해 — 이십구 겁의 우주관

둘째 악한 현증은 홍법 자신의 글에 나온다. 홍인 9년 봄 큰 역병이 돌았을 때 『반야심경』으로 빌었더니 「한밤중에 큰 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것을 「큰 망어(大妄語)」라고 단정하신다. 그 근거로 먼저 드시는 것이 불교의 시간관이다. 세계는 이루어지는 성겁, 머무는 주겁, 무너지는 괴겁, 비어 있는 공겁을 되풀이한다. 성겁 이십 소겁이 지나고 주겁에 들어 지금은 그 아홉째 감겁에 이르렀으니, 성겁부터 헤아려 모두 이십구 겁이다. 그 긴 세월 동안 해가 밤중에 뜬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상식의 지적이 아니다. 홍법이 내세운 사건은 그 자체로 우주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면 그것은 길조가 아니라 천지의 큰 변괴일 것이다. 불경에서도 해가 여럿 뜨는 것은 세계가 무너지는 괴겁의 징조로 설해진다. 대성인은 이 문제를 제28장에서 다시 꺼내어 「사관의 기록에 실렸는가」 「동 · 서 · 북 세 방향의 세계는 어찌 되는가」 하고 낱낱이 따지신다. 여기서는 먼저 그것이 전례 없는 망어라는 점만 짚어 두셨다.

자각의 「해를 쏘는 꿈」

셋째는 자각의 꿈이다. 자각은 『금강정경소』 7권과 『소실지경소』 7권을 지어, 법화경과 진언은 이치로는 똑같이 일념삼천을 말하나 밀인(密印)과 진언은 법화경에 없으니 「일(事)」에서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고 썼다. 이것이 「이동사승(理同事勝)」의 설이다. 그리고 이 소가 부처님의 뜻에 통하는지 알고자 불상 앞에 두고 이레 밤낮을 빌었는데, 닷새째 오경(새벽)에 해를 활로 쏘아 맞히는 꿈을 꾸었다. 대성인은 이 이야기를 「선시초」에서 자각의 전기를 그대로 인용해 보이셨다.

大師二経の疏を造り功を成し已畢つて心中独り謂らく此の疏仏意に通ずるや否や若し仏意に通ぜざれば世に流伝せじ仍つて仏像の前に安置し七日七夜深誠を翹企し祈請を勤修す五日の五更に至つて夢らく正午に当つて日輪を仰ぎ見弓を以て之を射る其の箭日輪に当つて日輪即転動す夢覚めての後深く仏意に通達せりと悟り後世に伝うべし

대사가 두 경의 소를 짓고 일을 마친 뒤 마음속으로 홀로 생각하기를, 이 소가 부처님 뜻에 통하는가 통하지 않는가, 만일 부처님 뜻에 통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퍼뜨리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래서 불상 앞에 두고 이레 밤낮 깊은 정성을 다해 기원하였다. 닷새째 오경에 이르러 꿈을 꾸니, 정오의 해를 우러러보고 활로 이것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해에 맞아 해가 곧 흔들렸다. 꿈에서 깬 뒤 깊이 부처님 뜻에 통달하였다고 깨닫고 후세에 전하기로 하였다

「선시초」에 인용된 자각의 전기, 281쪽

자각은 이 꿈을 「지혜의 화살이 중도의 해에 맞았다」고 풀어 크게 기뻐하였고, 닌묘(仁明) 천황에게 선지를 청해 천태좌주를 진언의 관주(官主)로 삼았다고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이어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여 예산은 진언의 산이 되었고, 간무 천황과 전교대사가 세운 절과 탑이 모두 진언의 절이 되었다. 한 번의 꿈풀이가 일본 천태종 전체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대성인의 물음은 단순하다. 내전 오천 · 칠천 권, 외전 삼천여 권 가운데 해를 쏘는 꿈을 길몽이라 한 곳이 하나라도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대성인은 경전과 외전에서 해를 쏘거나 해가 떨어지는 예들을 차례로 드신다.

경 · 외전에 비친 해를 쏘는 자들

첫째는 아수라다. 아수라는 제석천과 늘 싸우는 존재인데, 제석을 원망하여 일천을 쏘았으나 그 화살이 되돌아와 제 눈에 꽂혔다고 하신다. 아수라가 해와 달을 가린다는 이야기는 『법화문구』 권2하에 라후라 아수라왕의 일로 나온다. 라후라는 「해와 달을 가로막아 붙든다」는 뜻이며, 해와 달을 두려워할 때면 몸을 배로 키워 기운으로 해와 달을 꾸짖으니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부처님께 호소하였고, 부처님이 「해와 달을 삼키지 말라」 하시자 라후라는 팔다리가 떨리고 몸에 흰 땀을 흘리며 곧 해와 달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화살이 되돌아와 제 눈에 꽂혔다는 대목의 직접 출전은 분명하지 않으나, 여기서 대성인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해를 해치려는 자의 화가 제 몸으로 돌아온다는 「환착어본인」의 도리다. 이 도리는 제29장의 결론에서 다시 나타난다.

둘째는 은의 주왕이다. 주왕은 은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지혜와 힘이 뛰어났으나 달기에 빠진 뒤 주지육림의 잔치를 벌이고 충신을 멀리하여 끝내 주 무왕에게 쳐들어와 녹대에서 불타 죽었다. 「선시초」에서는 하(夏)의 걸왕과 은의 주왕을 함께 들어 「늘 해를 쏘아 몸을 멸하고 나라를 깨뜨렸다」고 하셨다.

『사기』 은본기에는 주왕보다 앞선 은의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매달고 쏘며 「하늘을 쏜다(射天)」고 했다가 사냥 중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를 · 하늘을 쏘는 악왕의 전승은 이처럼 중국 고대 왕조의 멸망담과 이어져 전해졌다.

셋째는 일본의 예다. 『일본서기』는 진무 천황이 동쪽으로 정벌해 갈 때 나가스네히코(본문의 도미나가)의 군대와 구사에자카에서 싸우다가 형 이쓰세노미코토가 손에 화살을 맞았다고 전한다. 미코토는 「나는 일신(日神)의 자손인데 해를 향하여 적을 쳤으니 이는 하늘의 도리를 거스른 것이다」 하고, 뒤에 길을 돌아 해를 등지고 싸워 이겼다고 한다. 대성인은 이 고사를 「해를 향해 활을 당긴 까닭에 일천의 꾸짖음을 입었다」는 말로 요약하셨다. 일본의 시조 신화 안에서도 해를 향해 활을 겨누는 일은 패배의 원인으로 이야기된 것이다.

넷째와 다섯째는 해가 떨어지는 꿈이다. 아사세왕은 사견을 뒤집어 부처님께 귀의한 뒤 궁에 돌아와 잠들었다가, 해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놀라 깨었다. 신하들은 「부처님의 입멸이신가」 하였다. 수발타라도 해가 떨어지고 대지가 갈라지며 바다가 마르는 꿈을 꾸고 이튿날 부처님의 열반이 가까웠음을 알아 찾아가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대지도론』 권3). 경전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은 세상의 빛이신 부처님이 사라지는 흉한 징조다. 하물며 스스로 해를 쏘아 떨어뜨리는 꿈이 길몽일 수 있겠는가.

「선시초」의 같은 대목에서는 아사세왕이 「하늘에서 달이 떨어지는」 꿈을 꾸고 기바 대신이 이를 부처님의 입멸이라 풀었다 하고, 수발타라가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고 하신다(282쪽). 「보은초」에서는 아사세왕의 꿈도 해로 말씀하셨다. 어느 쪽이든 해 · 달이 떨어지는 꿈이 부처님 입멸의 징조였다는 점은 같다.

경 · 외전의 예와 그 결말
해를 쏜 자
아수라제석을 원망해 일천을 쏨화살이 되돌아와 제 눈에
은의 주왕일천을 과녁 삼아 쏨몸을 망침
이쓰세노미코토해를 향해 활을 당김손에 화살, 「일천의 꾸짖음」
해가 떨어지는 꿈
아사세왕의 꿈해가 땅에 떨어짐부처님의 입멸
수발타라의 꿈해가 떨어지고 대지가 갈라짐부처님의 입멸
자각의 꿈정오의 해를 쏘아 맞힘
자각의 풀이「부처님 뜻에 통달」로 풂
대성인의 판정법화경 삼부의 적이 된 증거
도표 3 · 해를 쏘는 자, 해가 떨어지는 꿈

일본 · 천조 · 일종 — 왜 「특히 꺼려야 할 꿈」인가

대성인은 이어서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해를 쏘는 꿈이 특히 꺼려야 할 꿈이라고 하신다. 나라의 신을 천조(天照, 하늘을 비춤)라 하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 해의 근본)이라 한다. 더구나 교주 석존을 일종(日種)이라 부르니, 석가족은 태양의 계보를 잇는 종족으로 일컬어졌고, 마야부인은 해를 잉태하는 꿈을 꾸고 태자를 낳으셨다는 전승이 있다. 그러므로 해를 쏘는 것은 일본의 신을 쏘고, 나라를 쏘고, 교주 석존을 쏘는 것과 같다.

「선시초」에서는 이 뜻을 더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꿈은 「천조태신 · 전교대사 · 석가불 · 법화경을 쏜 화살」이며, 그것이 곧 자각의 두 소라는 것이다.

されば此のゆめは天照太神・伝教大師・釈迦仏・法華経をいたてまつれる矢にてこそ二部の疏は候なれ

그러므로 이 꿈은 천조태신 · 전교대사 · 석가불 · 법화경을 쏜 화살이야말로 두 부의 소이니라

「선시초」, 282쪽

꿈의 원인을 대성인은 자각의 행적에서 찾으신다. 자각은 예산에 총지원(総持院)을 세우고 금강계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모셨다. 석가불을 버리고 대일여래를 세운 것이다. 또 전교대사가 진호국가의 삼부로 정하신 법화 계열의 경 대신 진언의 삼부경(『대일경』 · 『금강정경』 · 『소실지경』)을 받들어 법화경 삼부(『무량의경』 · 『묘법연화경』 · 『관보현경』)를 적으로 삼았다. 스승 전교대사의 법화 일승의 산을 진언의 산으로 바꾼 사람이, 스스로 지은 소가 옳은지를 물어 해를 쏘는 꿈을 받은 것이다. 신하가 군주를, 제자가 스승을 거스르는 하극상의 형상이 꿈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진언가가 내세운 비 · 해 · 꿈은 진언이 옳다는 증거가 아니라 진언이 법화경과 교주 석존을 거스른 「악한 현증」이다. 현증은 문증 · 이증과 맞을 때에만 증거가 되며, 경문과 어긋난 사람의 기이한 일은 오히려 그 어긋남을 드러낸다.

꿈과 영험을 판정하는 잣대

자각은 해를 쏘아 맞힌 꿈을 자기 소가 부처님의 뜻에 맞았다는 증거로 삼았다. 이 장에서 대성인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꿈 해석의 옳고 그름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꿈이 법의 정사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선시초」에서 대성인은 법화경과 진언의 승렬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부처님은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하셨고, 용수보살은 「경에 의지하는 것은 흰 논이요, 경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검은 논이다」 하였으며, 천태대사는 「경과 맞으면 기록하여 쓰고, 문도 없고 뜻도 없는 것은 믿고 받지 말라」 하셨고, 전교대사는 「불설에 의지하고 구전을 믿지 말라」 하셨다. 그러므로 「꿈을 근본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다만 법화경과 대일경의 승렬을 분명히 설한 경론의 글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것이다(「선시초」, 282쪽).

此等の経論釈のごときんば夢を本にはすべからずただついさして法華経と大日経との勝劣を分明に説きたらん経論の文こそたいせちに候はめ

이러한 경 · 논 · 석과 같다면 꿈을 근본으로 삼아서는 안 되느니라. 다만 곧바로 법화경과 대일경의 승렬을 분명히 설한 경론의 글이야말로 소중하니라

「선시초」, 282쪽

곧 대성인이 이 장에서 자각의 꿈을 「흉몽」이라 판정하신 것은, 꿈풀이의 기술로 자각과 겨루려는 것이 아니다. 설령 꿈을 증거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 꿈은 흉조일 수밖에 없다는 「여탈(與奪)」의 논법이며, 본래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경문이다. 이 원리가 다음 제26장에서 선도의 꿈을 예로 들어 한층 분명하게 세워진다.

제26장 선도의 악몽을 예로 들다
어서 317쪽 17행~318쪽 6행 · 第26章 善導の悪夢の例を挙ぐ

본문

원문 대조어서 317쪽 17행 ~ 318쪽 6행
本文 · 어서 원문

例せば漢土の善導が始は密州の明勝といゐし者に値うて法華経をよみたりしが後には道綽に値うて法華経をすて観経に依りて疏をつくり法華経をば千中無一・念仏をば十即十生・百即百生と定めて此の義を成ぜんがために阿弥陀仏の御前にして祈誓をなす、 仏意に叶うやいなや毎夜夢の中に常に一りの僧有りて来て指授すと云云、乃至一経法の如くせよ乃至観念法門経等云云、法華経には「若し法を聞く者有れば一として成仏せざる無し」と善導は「千の中に一も無し」等云云、 法華経と善導とは水火なり善導は観経をば十即十生・百即百生・無量義経に云く「観経は未だ真実を顕さず」等云云、無量義経と楊柳房とは天地なり此れを阿弥陀仏の僧と成りて来つて汝が疏は真なりと証し給わんはあに真事ならんや、 抑阿弥陀は法華経の座に来りて舌をば出だし給はざりけるか、観音勢至は法華経の座にはなかりけるか、此れをもつてをもへ慈覚大師の御夢はわざわひなり。

풀이

예를 들면 한토의 선도(善導)가 처음에는 밀주(密州)의 명승(明勝)이라는 자를 만나 법화경을 읽었으나, 뒤에는 도작(道綽)을 만나 법화경을 버리고 『관경(観経)』에 의지하여 소(疏)를 짓고, 법화경은 「천중무일(千中無一)」, 염불은 「십즉십생(十即十生) · 백즉백생(百即百生)」이라 정하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아미타불 앞에서 기원을 세웠느니라. 「부처님 뜻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물었더니, 밤마다 꿈속에 늘 한 스님이 와서 가르쳐 주었다」 하고, 「……한결같이 경법(經法)과 같이 하라」 「……『관념법문경』」 등이라 하였느니라. 법화경에는 「만일 법을 듣는 자가 있으면 한 사람도 성불하지 않는 이가 없다」 하셨는데 선도는 「천 가운데 하나도 없다」 하였으니, 법화경과 선도는 물과 불이니라. 선도는 『관경』을 십즉십생 · 백즉백생이라 하였으나 『무량의경』에 이르기를 「『관경』은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였으니, 『무량의경』과 양류방(楊柳房)은 하늘과 땅이니라. 이런 사람에게 아미타불이 스님이 되어 와서 「너의 소는 참되다」고 증명하셨다는 것이 어찌 참된 일이겠는가. 도대체 아미타불은 법화경의 자리에 와서 혀를 내밀지 않으셨는가. 관음 · 세지는 법화경의 자리에 없었는가. 이것으로 생각하라, 자각대사의 꿈은 재앙이니라.

어구 풀이

善導선도
613~681. 중국 초당(初唐)의 승려로 중국 정토교 선도류의 대성자. 산둥성 임치(臨淄) 사람이라고도 하고 사주(泗州, 안후이성)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출가하여 경장을 뒤지다 『관무량수경』을 보고 서방 정토 왕생에 뜻을 두었고, 정관 연간에 석벽 현중사(玄中寺)의 도작에게서 『관경』을 배웠다. 스승이 죽은 뒤 장안 광명사(光明寺) 등에서 칭명염불을 넓혔다. 저서에 『관경소』 4권, 『왕생예찬』 1권 등이 있다.
密州の明勝밀주의 명승
『관경현의분전통기』에 따르면 삼론종 가상대사 길장과 같은 문하에 명승이라는 이가 있었고, 선도가 그에게서 법을 받았다고 한다. 밀주는 지금의 산둥반도 일대다. 선도가 처음에는 법화경을 배운 사람이었음을 보이는 대목이다.
道綽도작
562~645. 수 · 당 시대 정토교의 조사. 병주 문수(并州汶水, 산시성 태원) 사람으로 성은 위(衛)씨. 열네 살에 출가하여 열반경을 배웠으나 현중사에서 담란(曇鸞)의 비문을 보고 감동하여 정토교에 귀의하였다.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성도문(聖道門) · 정토문(淨土門)으로 나누고, 법화경을 포함한 성도문을 「아직 한 사람도 얻은 이가 없다(未有一人得者)」는 가르침이라 하여 물리쳤다. 저서에 『안락집』 2권이 있다.
観経に依りて疏をつくり『관경』에 의지하여 소를 짓다
『관무량수경』을 주석한 선도의 『관무량수경소』 4권(『관경소』 · 『관경사첩소』)을 말한다. 현의분 · 서분의 · 정선의 · 산선의의 네 첩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법연은 이 『관경소』를 보고 오로지 정토의 한 문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千中無一천중무일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는 뜻. 선도가 『왕생예찬』에서 세운 말로, 정토 삼부경 밖의 여러 경을 「잡행(雜行)」이라 하여 아무리 독송해도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성불하지 못하며, 아미타불 밖의 여러 부처 · 보살을 아무리 예배해도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득도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법연은 이를 넓혀 법화경까지 포함해 비방하였다.
十即十生・百即百生십즉십생 · 백즉백생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이 모두 왕생한다는 뜻. 염불을 끊임없이 이어 가는 전수(專修)의 사람은 반드시 왕생한다고 선도가 말한 것이다.
毎夜夢の中に常に一りの僧有りて来て指授す밤마다 꿈속에 늘 한 스님이 와서 가르쳐 주었다
선도가 『관경소』 끝에 스스로 적은 말. 소를 지으며 아미타불 앞에 증명을 빌었더니 밤마다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현의(玄義)의 과문(科文)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정토가에서는 이를 들어 『관경소』를 부처님이 증명한 글로 받든다.
一経法の如くせよ한결같이 경법과 같이 하라
『관경소』 끝 글에서 선도가 「이 뜻은 이미 증명을 받았으니 한 구절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 베껴 쓰려는 자는 한결같이 경법과 같이 하라」고 한 말. 자기 소를 경전과 같은 무게로 대하라는 뜻이다.
観念法門『관념법문』
선도의 저서 『관념아미타불상해삼매공덕법문』 1권. 본문은 이를 「관념법문경」이라 일컬어, 정토가가 인사(人師)의 글을 경처럼 높인 것을 가리키신다.
若し法を聞く者有れば一として成仏せざる無し만일 법을 듣는 자가 있으면 한 사람도 성불하지 않는 이가 없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2의 게송. 법화경을 듣는 사람은 남김없이 성불한다는 뜻으로, 선도의 「천중무일」과 정면으로 맞선다.
観経は未だ真実を顕さず『관경』은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량의경』 설법품의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四十余年未顕真実)」를 『관경』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 법화경 이전 사십여 년의 경에 속하는 『관경』은 방편의 경이라는 판정이다.
楊柳房양류방
선도를 가리킨다. 자기가 머물던 절 문 앞의 버드나무에 올라 몸을 던졌다는 전승에서 이렇게 부른다.
舌をば出だし給はざりけるか혀를 내밀지 않으셨는가
법화경 여래신력품 제21에서 석존과 시방의 분신 제불이 넓고 긴 혀(廣長舌)를 내밀어 범천에 이르게 하여 법화경이 진실함을 증명하신 일을 말한다. 아미타불도 시방의 부처로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는 물음이다.
観音관음
관세음보살. 광세음 · 관세자재 · 시무외자라고도 하고 구세보살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큰 자비를 행하며 서른세 가지 몸으로 나타난다고 설해진다. 『관무량수경』에서는 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여래의 협시로 되어 있다.
勢至세지
대세지보살. 아미타불의 협시로서 지혜를 나타낸다. 법화경 서품에는 「득대세보살」이라는 이름으로 관세음보살과 나란히 법회에 모인 보살 가운데 열거된다.

「예를 들면」 — 같은 꿈을 다른 곳에서 비추어 보다

이 장은 중국 염불의 개조인 선도를 들어, 선도가 꿈에서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주장을 파하신 대목이다. 첫머리의 「예를 들면(例せば)」이라는 말이 장의 성격을 정해 준다. 대성인은 앞 장에서 자각이 「해를 쏘는 꿈」으로 자기 소가 부처님 뜻에 맞았다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으셨다. 이 장에서는 그와 똑같은 구조의 일이 이미 중국 정토교에 있었음을 보이고, 그 예가 경문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임으로써 자각의 꿈도 같은 운명임을 밝히신다.

두 사람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같다. 둘 다 처음에는 법화경을 배운 사람이었다(선도는 명승에게서, 자각은 전교대사에게서). 둘 다 뒤에 다른 스승을 만나 법화경을 낮추는 쪽으로 돌아섰다(선도는 도작을 만나, 자각은 당에서 진언을 배워). 둘 다 그 새로운 판정을 담은 소를 지었다(선도는 『관경소』, 자각은 『금강정경소』 · 『소실지경소』). 둘 다 그 소가 부처님 뜻에 맞는지 부처님 앞에서 빌었고, 꿈으로 그 증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소는 뒤에 일본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선도의 소는 법연을 통해, 자각의 소는 예산의 진언화를 통해).

그러나 불법의 정사를 판정하는 것은 도리와 증문과 현증이며,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유계다. 곧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설한 경전을 기준으로 해야 하며, 한 종 한 파의 개조가 꾼 꿈이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설령 선도나 자각이 실제로 그런 꿈을 꾸었다 해도 그 꿈이 경문과 어긋난다면 그 꿈은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그릇됨을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대성인이 「예를 들면」으로 시작하신 것은, 이미 정토교의 사례에서 그 결말이 분명해진 논리를 자각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시려는 것이다.

선도와 도작 — 중국 정토교의 흐름

선도가 몸담은 중국 정토교의 흐름은 담란(曇鸞) · 도작 · 선도로 이어진다. 담란은 세친의 『정토론』에 주석을 달아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는 「타력」의 길을 강조했다. 도작은 처음에 열반경을 배웠으나 현중사에서 담란의 비문을 보고 정토교에 귀의하여, 『안락집』에서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성도문과 정토문으로 나누었다. 성도문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이고, 정토문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길이다. 도작은 말법의 지금 성도문은 「아직 한 사람도 얻은 이가 없다」고 하여 법화경을 포함한 성도문 전체를 물리쳤다.

선도는 이 도작의 문하에 들어가 『관경』을 배우고, 스승이 죽은 뒤 장안에서 칭명염불을 크게 넓혔다. 그의 『관경소』는 『관무량수경』의 이전 주석들을 바로잡는다는 자부를 담고 있었으며, 특히 마지막 산선의(散善義)에서 「한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정토 왕생의 바른 업(正定業)으로 세웠다. 본문이 「처음에는 밀주의 명승을 만나 법화경을 읽었다」고 하신 것은, 이런 선도도 출발점에서는 법화경을 배웠다는 사실을 짚으신 것이다. 명승은 삼론종 가상대사와 같은 문하였다고 전하는데, 보은초 제5편 「대성인의 국가 간효와 재난의 근원」에서 다룬 가상대사가 천태대사에게 귀복하여 참회한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언저리에서 법화경을 배운 선도가 도작을 만나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 일은 더욱 뚜렷하게 대비된다.

  1. 담란『정토론주』타력 본원 강조
  2. 도작(562~645)『안락집』성도문 · 정토문성도문은 「아직 한 사람도 얻은 이가 없다」
  3. 선도(613~681)『관경소』 · 『왕생예찬』「천중무일」 · 「십즉십생 · 백즉백생」꿈속의 스님이 증명했다고 함
  4. 법연(일본)『관경소』를 보고 정토종을 세움법화경까지 「천중무일」에 넣어 버리게 함
도표 4 · 정토교의 계보와 법화경에 대한 태도

「천중무일」과 「일불성불」 — 물과 불

선도의 판정은 두 마디로 요약된다. 법화경은 「천중무일」, 염불은 「십즉십생 · 백즉백생」. 선도 자신이 『왕생예찬』에서 세운 「천중무일」은 정토 삼부경 밖의 여러 경을 잡행이라 하여, 그것을 아무리 독송해도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성불하지 못하고, 아미타불 밖의 부처 · 보살을 아무리 예배해도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득도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일본의 법연은 이를 더 넓혀 법화경까지 분명히 그 안에 넣었다. 대성인은 이 판정의 근원을 선도에게서 찾으시고, 법화경 방편품의 한 구절을 맞세우신다.

若し法を聞く者有れば一として成仏せざる無し

만일 법을 듣는 자가 있으면 한 사람도 성불하지 않는 이가 없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2, T9 no.262

부처님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불한다」 하시고, 선도는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 한다. 대성인은 이를 「물과 불」이라 하셨다. 둘 중 하나가 옳다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그르다. 부처님의 말씀과 인사(人師)의 말이 이렇게 정면으로 맞설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는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유계가 이미 정해 두었다.

다음으로 선도는 『관경』을 「십즉십생 · 백즉백생」의 경이라 하였다. 그러나 법화경의 개경인 『무량의경』에서 부처님은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셨다. 『관경』은 그 사십여 년 동안 설해진 방편의 경이다. 그러니 『관경』을 의지해 「백이면 백이 왕생한다」고 단언하는 선도의 말은 부처님이 친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과 하늘과 땅만큼 떨어져 있다. 대성인은 이를 「『무량의경』과 양류방은 하늘과 땅」이라 하셨다. 경의 이름과 선도의 별명을 나란히 세워, 부처님의 금언과 한 인사의 말이 견줄 수조차 없음을 보이신 표현이다.

꿈속의 스님 — 『관경소』의 증명담과 「신통」의 문제

선도는 『관경소』 끝에 이렇게 적었다. 자기가 이 소를 지으며 아미타불 앞에서 「이 뜻이 부처님 뜻에 맞는지 증명해 주소서」 하고 빌었더니, 밤마다 꿈속에 한 스님이 와서 현의의 짜임새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이 소는 이미 증명을 받았으니 한 구절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지 말고, 베껴 쓰려는 자는 「한결같이 경법과 같이 하라」. 그리고 그의 『관념법문』도 정토가에서는 「관념법문경」이라 하여 경처럼 높여졌다. 대성인이 본문에서 「乃至」를 끼워 가며 이 말들을 끌어오신 것은, 인사의 글이 꿈의 증명을 내세워 스스로 경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정토가는 선도를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도 일컬었다. 「창법화제목초」에서 대성인은 「선도 화상은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하여 입에서 부처를 내었다」는 질문을 받으신다. 이 질문은 「보은초」 제27장의 질문과 같은 형태다. 인사의 신통과 영험을 들어 「그러니 그 사람의 법이 옳지 않은가」 하고 묻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성인의 답은 이러하였다. 아갈다 선인 외도는 열두 해 동안 귀 속에 항하의 물을 담아 두었고, 바수 선인은 자재천이 되어 세 눈을 나타냈으며, 당토의 도사 가운데에도 장해(張階)는 안개를 내고 난파(鸞巴)는 구름을 토하였다. 제육천의 마왕은 부처님 멸후에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 아라한 · 벽지불의 모습을 나타내 사십여 년의 경을 설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신통으로 지자와 우자를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맺으셨다.

但し法門をもて邪正をただすべし利根と通力とにはよるべからず

다만 법문으로 사정을 바로잡아야 하며 영리한 근기와 신통력에 의해서는 안 되느니라

「창법화제목초」, 16쪽

이 한 구절이 제26장부터 제28장까지 이어지는 논증 전체의 원리다. 꿈의 증명, 화신이라는 칭호, 입에서 부처를 냈다는 이야기, 밤중에 해가 떴다는 이야기, 입이 열려 비로자나가 되었다는 이야기 — 이것들은 모두 「통력」의 범주에 든다. 그것이 아무리 기이해도 법문의 정사를 대신할 수 없다.

아미타는 법화경의 자리에서 혀를 내밀지 않았는가

본문의 마지막 물음은 날카롭다. 「도대체 아미타불은 법화경의 자리에 와서 혀를 내밀지 않으셨는가. 관음 · 세지는 법화경의 자리에 없었는가.」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다보여래는 「석가모니세존이 설하신 것은 모두 진실이다」라고 증명하셨고, 여래신력품에서는 석존과 시방에서 모여 온 분신 제불이 넓고 긴 혀를 내밀어 법화경이 진실함을 증명하셨다. 아미타불은 시방의 부처 가운데 서방의 부처다. 법화경 화성유품에는 대통지승불의 열여섯 왕자 가운데 서방에서 성불한 이로 아미타가 이름을 올리며, 아미타는 법화경의 인연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다. 또 관세음보살과 득대세보살(세지)은 법화경 서품에서 법회에 모인 보살 가운데 열거되며, 관세음보살은 보문품에서 법화경의 공덕을 드러내는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은 법화경의 자리에서 「법화경은 모두 진실이다」라고 혀를 내밀어 증명한 부처다. 같은 아미타불이 수백 년 뒤 선도의 꿈에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법화경은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성불하지 못한다는 너의 소가 참되다」고 증명했다면, 아미타불은 스스로 한 증명을 스스로 뒤집은 셈이 된다. 부처님은 두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도의 꿈에 나타난 스님이 아미타불일 수는 없다. 그 꿈은 아미타불의 증명이 아니라 경문과 어긋난 망상이거나, 「창법화제목초」의 말씀대로 「마에게 홀려 신통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관음 · 세지가 법화경의 자리에 있었다면, 정토가가 아미타의 협시로 받드는 이 두 보살 또한 법화경을 증명한 쪽에 서 있는 것이다.

경문과 선도의 판정
법화경 방편품「만일 법을 듣는 자가 있으면 한 사람도 성불하지 않는 이가 없다」若し法を聞く者有れば一として成仏せざる無し
↔「물과 불」水火
선도「천 가운데 하나도 없다」千の中に一も無し
『무량의경』「『관경』은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観経は未だ真実を顕さず
↔「하늘과 땅」天地
선도「십즉십생 · 백즉백생」十即十生・百即百生
법화경 자리의 증명과 선도의 꿈
법화경의 자리
  • 다보여래 「모두 진실이다」
  • 시방 분신 제불의 광장설
  • 아미타는 화성유품 열여섯 왕자 가운데 서방의 부처
  • 관음 · 세지는 서품의 법회 대중
「법화경은 진실」
판정같은 부처가 두 말을 할 수 없다「어찌 참된 일이겠는가」あに真事ならんや
선도의 꿈밤마다 한 스님이 와서 가르침「천중무일의 소는 참되다」
도표 5 · 경문과 선도의 꿈

양류방 — 선도의 최후와 니치칸 상인의 고증

대성인은 선도를 「양류방(楊柳房)」이라 부르셨다. 그 까닭을 「시모야마어소식」에서 이렇게 밝히셨다.

されば念仏者が本師の導公は其中衆生の外か唯我一人の経文を破りて千中無一といいし故に現身に狂人と成りて楊柳に登りて身を投げ堅土に落ちて死にかねて十四日より二十七日まで十四日が間・顛倒狂死し畢んぬ

그러므로 염불자의 본사인 도공(선도)은 「그 안의 중생」 밖에 있는가. 「오직 나 한 사람」이라는 경문을 깨뜨리고 「천중무일」이라 한 까닭에, 현신에 미친 사람이 되어 버드나무에 올라 몸을 던졌으나 굳은 땅에 떨어져 죽지도 못하고, 14일부터 27일까지 열나흘 동안 뒤집혀 미쳐 죽고 말았느니라

「시모야마어소식」, 361쪽

「그 안의 중생(其中衆生)」과 「오직 나 한 사람(唯我一人)」은 법화경 비유품의 「지금 이 삼계는 모두 나의 것이요, 그 안의 중생은 모두 나의 자식이다. …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능히 구호한다」는 경문이다. 석존이 삼계 중생의 주 · 사 · 친이심을 밝힌 이 경문을 깨뜨리고 다른 부처의 정토만을 구하게 한 것이 선도의 근본 허물이라는 판정이다.

이 「14일부터 27일까지」에 관해 니치칸 상인은 「보은초 문단」에서 정토가 자신의 기록으로 고증하였다.

浄家良忠伝通記に云く、善導入寂の日を明して云く、新修伝に云く、春秋六十有九、永隆二年三月十四日入滅す、帝王年代銀に云く高宗皇帝永隆二年三月二十七日、善導和尚亡す等云云、吾祖深く此の両説を探り、十四日間顛狂死云云、豈明察に非ずや

정토가 양충(良忠)의 『전통기』에, 선도가 입적한 날을 밝혀 이르기를, 「『신수전』에 이르기를 나이 예순아홉, 영륭 2년 3월 14일에 입멸하였다 하고, 『제왕연대록』에 이르기를 고종 황제 영륭 2년 3월 27일에 선도 화상이 죽었다」고 하였다. 우리 조사(대성인)께서 깊이 이 두 설을 살피시어 「열나흘 동안 뒤집혀 미쳐 죽었다」 하셨으니 어찌 밝은 살핌이 아니겠는가

니치칸 상인 「보은초 문단」 —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곧 선도의 입적일에 관해 정토가의 기록 안에서도 3월 14일 설과 3월 27일 설이 엇갈리는데, 대성인은 그 두 날짜를 이어 「14일부터 27일까지 열나흘 동안」이라 하셨다는 것이다. 니치칸 상인은 이것을 대성인이 두 전승을 깊이 살피신 「밝은 살핌」이라고 풀었다.

선도의 최후에 관해서는 전기마다 전승이 엇갈린다고 전한다. 버드나무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선도 자신의 일로 전하는 기록도 있고, 선도의 염불에 감화된 다른 사람의 일로 전하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대성인은 당시 전해지던 전승을 따라 말씀하셨으며, 니치칸 상인은 그 날짜를 정토가의 기록으로 뒷받침하였다.

염불 비판의 뜻 — 선도에서 법연으로

대성인이 일본 진언을 파하는 대목에 중국 정토교의 선도를 끌어오신 데에는 당시 일본의 사정이 있었다. 법연은 『관경소』를 읽고 정토의 한 문에 귀의하여 정토종을 열었으며, 『선택본원염불집』(『선택집』)에서 「오로지 선도 한 스승에 의지한다」는 태도로 법화경을 포함한 모든 경을 「버리고 · 닫고 · 놓아두고 · 던져 버리라」고 가르쳤다. 대성인이 「입정안국론」에서 이 법연의 「사 · 폐 · 각 · 포(捨閉閣抛)」를 재난의 근원으로 지목하신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선도의 「천중무일」은 법연을 거쳐 대성인 당시 일본 전역을 휩쓴 염불의 뿌리였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타력에만 의지하는 염불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법을 행하고 생명을 닦아 가는 노력을 내려놓게 하고, 오직 죽은 뒤의 서방 정토만을 바라게 한다. 법화경이 설하는 일체중생의 성불, 이 사바세계를 그대로 불국토로 하는 길과는 반대 방향이다. 그 가르침이 중국과 일본의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대성인은 무겁게 보셨다.

그러나 이 장에서 대성인이 선도를 드신 직접적인 목적은 염불 그 자체를 길게 논하는 데 있지 않다. 「선도의 꿈이 경문 앞에서 무너졌듯이, 자각의 꿈도 무너진다」는 한 점에 있다. 그래서 장의 마지막 문장은 선도가 아니라 자각으로 돌아온다.

「자각대사의 꿈은 재앙이다」 — 이 장의 맺음

「이것으로 생각하라, 자각대사의 꿈은 재앙이니라(此れをもつてをもへ慈覚大師の御夢はわざわひなり).」 선도의 꿈이 아미타불의 증명이 아니었다면, 자각의 꿈 또한 부처님의 증명이 아니다. 더구나 선도의 꿈은 적어도 겉으로는 「스님이 와서 가르쳐 주었다」는 좋은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자각의 꿈은 해를 쏘아 맞히는 흉한 모양이었다. 겉모양이 좋은 꿈조차 경문과 어긋나면 증거가 되지 못하는데, 겉모양부터 흉한 꿈이 무슨 증거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자각의 꿈은 「길몽」이 아니라 「재앙(わざわひ)」이다.

이 판정은 꿈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법의 정사를 판정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근본 문제다. 꿈과 영험을 기준으로 삼으면 누구든 자기에게 유리한 꿈을 내세울 수 있고, 불법은 끝없는 주장의 다툼이 된다. 부처님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고 유계하신 것은, 멸후의 제자들이 바로 이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은초 제1편 「보은의 도리와 여러 종의 미란」에서 대성인이 열반경의 유계를 거울로 삼으신 까닭이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불법의 정사는 도리 · 증문 · 현증으로, 무엇보다 부처님의 경문으로 판정한다. 한 종의 개조가 꾼 꿈은 기준이 될 수 없으며, 경문과 어긋나는 꿈은 증거가 아니라 그 사람의 그릇됨을 드러내는 「재앙」이다.

제27장 홍법의 영험을 파하다
어서 318쪽 7행~319쪽 7행 · 第27章 弘法の霊験を破す

본문

本文 · 一어서 318쪽 7~18행
本文 · 어서 원문

問うて云く弘法大師の心経の秘鍵に云く「時に弘仁九年の春天下大疫す、爰に皇帝自ら黄金を筆端に染め紺紙を爪掌に握りて般若心経一巻を書写し奉り給う予講読の撰に範りて経旨の宗を綴る未だ結願の詞を吐かざるに蘇生の族途に彳ずむ、 夜変じて而も日光赫赫たり是れ愚身の戒徳に非ず金輪御信力の所為なり、但し神舎に詣でん輩は此の秘鍵を誦し奉れ、昔予鷲峰説法の筵に陪して親り其の深文を聞きたてまつる豈其の義に 達せざらんや」等云云、 又孔雀経の音義に云く「弘法大師帰朝の後真言宗を立てんと欲し諸宗を朝廷に群集す即身成仏の義を疑う、大師智拳の印を結びて南方に向うに面門俄に開いて金色の毘盧遮那と成り 即便本体に還帰す、 入我・我入の事・即身頓証の疑い此の日釈然たり、然るに真言・瑜伽の宗・秘密曼荼羅の道彼の時より建立しぬ」、又云く「此の時に諸宗の学徒大師に帰して始めて真言を得て請益し習学す三論の道昌・法相の源仁・華厳の道雄・天台の円澄等皆其の類なり」、 弘法大師の伝に云く「帰朝泛舟の日発願して云く我が所学の教法若し感応の地有らば此三鈷其の処に到るべし仍て日本の方に向て三鈷を抛げ上ぐ遥かに飛んで雲に入る十月に帰朝す」云云、 又云く「高野山の下に入定の所を占む乃至彼の海上の三鈷今新たに此に在り」等云云、此の大師の徳無量なり其の両三を示す・かくのごとくの大徳ありいかんが此の人を信ぜずして・かへりて阿鼻地獄に堕といはんや、

풀이

묻기를, 홍법대사의 『심경비건(心経秘鍵)』에 이르기를 「때에 홍인 9년 봄, 천하에 큰 역병이 돌았다. 이에 황제께서 몸소 황금을 붓끝에 물들이고 감지(紺紙)를 손에 쥐시어 반야심경 한 권을 베껴 쓰셨다. 나는 강독하는 자로 뽑힌 바에 따라 경의 종지를 엮었는데, 아직 결원(結願)의 말을 토하기도 전에 소생한 무리가 길에 서 있었고, 밤이 변하여 햇빛이 환히 빛났다. 이것은 어리석은 이 몸의 계덕(戒德)이 아니라 금륜(金輪)께서 믿으신 힘이 한 바이다. 다만 신사에 참배하는 무리는 이 비건을 외우라. 옛날 내가 영취산 설법의 자리에 함께 앉아 친히 그 깊은 글을 들었으니 어찌 그 뜻에 통달하지 못하겠는가」 등이라 하였느니라. 또 『공작경음의(孔雀経音義)』에 이르기를 「홍법대사가 귀국한 뒤 진언종을 세우고자 여러 종을 조정에 모았는데, 그들이 즉신성불의 뜻을 의심하였다. 대사가 지권인(智拳印)을 맺고 남쪽을 향하니 면문(面門)이 홀연히 열려 금색의 비로자나가 되었다가 곧 본체로 돌아왔다. 입아 · 아입(入我我入)의 일과 즉신돈증(即身頓證)에 대한 의심이 이날 환히 풀렸다. 그리하여 진언 · 유가(瑜伽)의 종과 비밀 만다라의 도가 그때부터 건립되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때에 여러 종의 학도가 대사에게 귀의하여 비로소 진언을 얻고 가르침을 청하여 배웠다. 삼론의 도창(道昌), 법상의 원인(源仁), 화엄의 도웅(道雄), 천태의 원징(円澄) 등이 모두 그 무리이다」 하였느니라. 홍법대사의 전기에 이르기를 「귀국하려 배를 띄우던 날 발원하여 말하기를, 『내가 배운 교법이 만일 감응할 땅이 있다면 이 삼고(三鈷)가 그곳에 이를 것이다』 하고 일본 쪽을 향하여 삼고를 던져 올리니 멀리 날아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10월에 귀국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고야산 아래에 입정(入定)할 곳을 정하였다. ……저 바다 위의 삼고가 지금 새로이 여기에 있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이 대사의 덕은 한량없으니 그 가운데 두세 가지를 보인 것이니라. 이와 같은 큰 덕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 사람을 믿지 않고 도리어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하는가.

本文 · 二어서 318쪽 18행 ~ 319쪽 7행
本文 · 어서 원문

答えて云く予も仰いで信じ奉る事かくのごとし但古の人人も不可思議の徳ありしかども仏法の邪正は其にはよらず、外道が或は恒河を耳に十二年留め或は大海をすひほし或は日月を手ににぎり或は釈子を牛羊となしなんど・せしかども・いよいよ大慢を・をこして生死の業とこそなりしか、 此れをば天台云く「名利を邀め見愛を増す」とこそ釈せられて候へ、光宅が忽に雨を下し須臾に花をさかせしをも妙楽は「感応此の如くなれども猶理に称わず」とこそかかれて候へ、 されば天台大師の法華経をよみて「須臾に甘雨を下せ」伝教大師の三日が内に甘露の雨をふらしておはせしも其をもつて仏意に叶うとは・をほせられず、弘法大師いかなる徳ましますとも法華経を戯論の法と定め釈迦仏を無明の辺域とかかせ給へる御ふでは智慧かしこからん人は用ゆべからず、

풀이

답하기를, 나도 우러러 믿기를 이와 같이 하느니라. 다만 옛사람들에게도 불가사의한 덕이 있었으나 불법의 사정(邪正)은 그것에 의하지 않느니라. 외도가 혹은 항하(恒河)를 귀에 열두 해 머물게 하고, 혹은 큰 바다를 빨아 말리고, 혹은 해와 달을 손에 쥐고, 혹은 석가의 제자를 소와 양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더욱더 큰 교만을 일으켜 생사의 업이 되었을 뿐이니라. 이것을 천태는 「명리를 구하여 견애(見愛)를 더한다」고 풀이하셨느니라. 광택(光宅)이 홀연히 비를 내리고 잠깐 사이에 꽃을 피운 것도 묘락은 「감응은 이와 같으나 오히려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쓰셨느니라. 그러므로 천태대사가 법화경을 읽어 「잠깐 사이에 단비를 내리고」, 전교대사가 사흘 안에 감로의 비를 내리셨어도, 그것으로써 부처님 뜻에 맞았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느니라. 홍법대사가 어떤 덕이 있으시든, 법화경을 희론(戲論)의 법이라 정하고 석가불을 무명의 변역(邊域)이라 쓰신 붓은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면 써서는 안 되느니라.

어구 풀이

弘法大師홍법대사
774~835. 헤이안 초기 일본 진언종의 개조. 이름은 구카이(空海), 홍법대사는 시호. 성은 사에키(佐伯)씨, 어릴 적 이름은 마오(真魚). 사누키국 다도군 출신. 연력 12년(793) 근조 아래에서 출가하였다고 하며, 연력 23년(804) 유학승으로 당에 들어가 불공의 제자인 청룡사 혜과에게서 밀교의 관정을 받고 변조금강(遍照金剛)의 호를 받았다. 대동 원년(806) 귀국하였다. 홍인 7년(816) 고야산을 하사받아 금강봉사 창건에 착수하고, 홍인 14년(823) 동사를 받아 진언종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불교를 현교 · 밀교로 나누어 대일경을 제일, 화엄경을 제이, 법화경을 제삼으로 하였다. 저서에 『삼교지귀』 3권, 『변현밀이교론』 2권, 『십주심론』 10권, 『비장보약』 3권 등이 있다.
心経の秘鍵『심경비건』
「심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 『반야심경비건』 1권은 홍법이 이를 주석한 책이다. 본문이 인용한 것은 그 끝에 붙은 글로, 역병 · 밤의 햇빛 · 영취산 청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結願の詞결원의 말
기도를 마칠 때 올리는 말. 결원하기도 전에 역병이 그쳤다는 것은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영험이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金輪금륜
금륜성왕. 전하여 덕 있는 제왕을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사가 천황을 가리킨다. 홍법은 영험이 자기 계덕이 아니라 천황의 신력 덕분이라고 겸양하는 모양을 취하였다.
鷲峰説法の筵취봉 설법의 자리
영취산에서의 법화경 설법의 자리. 홍법이 「옛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한 것은 자기가 석존의 설법을 친히 들은 사람이라는 주장이 된다.
孔雀経の音義『공작경음의』
『공작경』은 공작명왕의 신주(神呪)와 수법, 그 공덕을 설한 경. 음의(音義)는 한적이나 불전의 자구를 뽑아 그 발음과 뜻을 주석한 것으로, 진언종에서는 진언 · 다라니의 뜻과 읽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대성인은 제28장에서 이것을 홍법의 제자 진제가 스스로 기록한 것이라 하신다.
智拳の印지권인
금강계 대일여래의 인(印). 양손 모두 새끼손가락 · 약손가락 · 가운뎃손가락을 굽히고 엄지를 조금 앞으로 내어 굽힌 뒤 집게손가락을 굽혀 엄지 첫마디를 누르는데 이를 금강권이라 한다. 다시 왼손 금강권을 아래에, 오른손을 위에 두고 오른 주먹으로 왼 주먹의 집게손가락 끝을 쥐는 것을 지권인이라 한다.
面門・金色の毘盧遮那と成り면문 · 금색의 비로자나가 되다
면문은 입이다. 홍법이 귀국하여 조정에서 여러 종의 고승과 대론할 때 손에 인을 맺고 대일여래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는 이야기로, 홍법의 제자 진제(800~860)가 전한 것이다. 「본체로 돌아왔다」는 본체인 비로자나의 모습을 보였다는 뜻이다.
入我・我入입아 · 아입
『비장기』에 「진언과 인계 등으로 인해 여러 부처를 내 몸 안으로 끌어들이니 이를 입아라 하고, 내 몸을 여러 부처에게 끌어들이니 이를 아입이라 한다. 입아아입으로 인해 여러 부처가 무수한 겁 동안 닦은 공덕이 내 몸에 갖추어진다」고 한다. 진언의 법을 닦으면 부처의 삼밀(三密)과 중생의 삼업이 서로 들어가 부처의 덕을 제 몸에 갖춘다는 뜻이다.
真言・瑜伽の宗・秘密曼荼羅の道진언 · 유가의 종, 비밀 만다라의 도
진언종을 말한다. 유가는 상응(相應)이라는 뜻으로, 대일여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종, 곧 삼밀의 유가를 종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진언은 현교에 대해 밀교를 표방하고, 그 수행의 법을 만다라로 나타낸다.
請益청익
가르침에 의해 이익을 받고자 청하는 것. 여러 종의 학승이 홍법에게 가르침을 청했다는 뜻이다.
三論の道昌・法相の源仁・華厳の道雄삼론의 도창 · 법상의 원인 · 화엄의 도웅
도창(798~875)은 처음 삼론을 배우고 천장 5년(828) 구카이에게서 관정을 받았으며, 고류사 등의 별당을 지내고 사가의 법륜사를 다시 일으켰다. 원인(818~887)은 원흥사의 호명에게서 법상을, 동사의 실혜에게서 진언을 배우고 동사 이장자에 올랐다. 도웅(?~851)은 구카이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같은 사에키씨 출신이며 해인사를 열었다. 세 사람 모두 처음 다른 종을 배우고 뒤에 진언으로 들어간 승려다.
天台の円澄천태의 원징
771~836. 히에이산 엔랴쿠사 제2대 좌주, 시호는 적광대사(寂光大師). 무사시 출신으로 처음 도충(道忠)에게 배우고 뒤에 전교대사를 스승으로 섬겼다. 대성인은 「제이의 원징은 반은 전교의 제자요 반은 홍법의 제자이다」(310쪽), 「원징은 천태 제이의 좌주로서 전교대사의 제자이지만 또 홍법대사의 제자이다」(320쪽)라고 하시어, 원징이 마음으로는 홍법 쪽을 향하고 있었다고 하셨다.
帰朝泛舟の日・三鈷귀국하려 배를 띄운 날 · 삼고
삼고는 진언 밀교의 기도에 쓰는 법구로, 끝이 셋으로 갈라진 금강저다. 홍법이 귀국할 때 중국 명주(明州)의 바닷가에서 삼고를 바다 쪽으로 던졌더니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졌고, 뒷날 고야산에서 발견되어 그곳을 감응의 땅으로 삼아 절을 세우고 진언의 도량으로 삼았다는 전설이다.
外道が或は恒河を耳に十二年留め외도가 혹은 항하를 귀에 열두 해 머물게 하다
「창법화제목초」에 「아갈다 선인 외도는 열두 해 동안 귀 속에 항하의 물을 머물게 하였다」(16쪽)고 하신 이야기다. 바다를 빨아 말리고 해와 달을 손에 쥐고 석가의 제자를 소와 양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모두 인도 외도의 신통 전승이다.
見愛견애
견사(見思)의 번뇌, 곧 견혹과 사혹. 견혹은 이치에 미혹한 번뇌로 진리를 잘못 아는 것이며 아견 · 변견 등 오견을 말한다. 사혹은 일에 미혹한 번뇌로 타고난 번뇌인 탐 · 진 · 치 · 만 · 의를 말한다.
光宅が忽に雨を下し須臾に花をさかせし광택이 홀연히 비를 내리고 잠깐 사이에 꽃을 피우다
광택사 법운(467~529). 남북조 양(梁)의 승려로 개선사 지장 · 장엄사 승민과 함께 「양의 삼대 법사」로 불렸고 성실 · 열반의 학장으로 이름 높았다. 천감 7년(508) 칙명으로 광택사의 주지가 되었다. 화림원에서 법화경을 강설할 때 하늘 꽃이 내리고, 약초유품의 「그 비가 고루 사방에 함께 내린다」는 구절에 이르자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伝教大師の三日が内に甘露の雨をふらし전교대사가 사흘 안에 감로의 비를 내리다
홍인 9년(818) 전교대사와 법상종의 호명이 기우를 겨룬 일. 호명은 미노 출신으로 원흥사에서 배운 남도의 고승이다. 전교대사는 사흘 만에 단비를 내렸고 호명은 닷새가 걸려 진 것으로 되었다. 세 이레를 빌고도 비를 내리지 못한 홍법의 실패가 얼마나 참담했는지가 이로써 분명해진다.

질문자가 내세운 「대덕」 — 문답의 짜임

이 장은 다음 제28장과 함께 홍법의 영험이라 일컬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를 파하신 대목이다. 형식은 문답이다. 앞의 제25장에서 대성인이 「홍법의 비」와 「밤중의 해」를 큰 망어라 하시자, 가상의 질문자가 나서서 홍법의 문헌과 전기에서 영험담을 모아 들이밀며 「이처럼 큰 덕이 있는 사람을 어찌 믿지 말라 하고 도리어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하는가」 하고 따진다. 장의 앞부분(本文 · 一)은 모두 이 질문자의 말이며, 그가 인용하는 『심경비건』 · 『공작경음의』 · 홍법의 전기의 글이다. 대성인의 목소리는 「답하기를」 이후(本文 · 二)에서야 나온다. 이 구분을 놓치면, 질문자가 늘어놓은 영험을 대성인이 인정하신 것처럼 읽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질문자가 든 영험은 넷이다. 첫째는 『반야심경비건』의 끝 글에 실린 홍인 9년 역병의 영험, 둘째는 『공작경음의』의 「면문이 열려 금색 비로자나가 되었다」는 즉신성불의 영험, 셋째는 같은 책의 「여러 종의 학도가 귀의했다」는 기록, 넷째는 홍법의 전기에 실린 삼고 전설이다. 질문자는 「그 두세 가지를 보인 것」이라며 이 밖에도 덕이 한량없다고 한다. 이것은 대성인 당시 홍법이 어떻게 받들어지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홍법은 개조이자 영험의 성자, 고야산에 입정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신앙되고 있었다.

  1. ①『반야심경비건』 끝 글질문자의 말
    내용홍인 9년 봄 큰 역병천황의 금니 사경결원 전에 역병이 그치고 밤에 해가 빛남「옛날 영취산 설법의 자리에 있었다」
    질문자의 주장홍법은 반야의 깊은 뜻에 통달한 사람
  2. ②『공작경음의』질문자의 말
    내용여러 종이 즉신성불을 의심하자 지권인을 맺고 남쪽을 향해 면문이 열려 금색 비로자나가 됨
    질문자의 주장즉신성불의 증명, 진언종의 건립
  3. ③『공작경음의』질문자의 말
    내용삼론의 도창 · 법상의 원인 · 화엄의 도웅 · 천태의 원징이 귀의
    질문자의 주장여러 종의 귀복
  4. ④홍법의 전기질문자의 말
    내용명주에서 던진 삼고가 고야산에서 발견됨
    질문자의 주장고야산은 감응의 땅
도표 6 · 질문자가 든 홍법의 영험

『반야심경비건』의 끝 글

『반야심경비건』은 홍법이 『반야심경』을 밀교의 입장에서 풀이한 1권의 책이다. 질문자가 인용한 것은 그 끝에 붙은 글로, 대강은 이러하다. 홍인 9년(818) 봄 천하에 큰 역병이 돌자 사가 천황이 몸소 금니로 감지에 『반야심경』 한 권을 베껴 썼다. 홍법은 그 경을 강독하는 자로 뽑혀 경의 종지를 엮었는데, 결원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죽어 가던 사람들이 살아나 길에 서 있었고, 밤이 변하여 햇빛이 환히 빛났다. 홍법은 이것을 자기 계덕이 아니라 금륜, 곧 천황의 신앙의 힘이 한 일이라 하고, 앞으로 신사에 참배하는 사람들은 이 비건을 외우라고 권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옛날 내가 영취산 설법의 자리에 함께 앉아 친히 그 깊은 글을 들었으니 어찌 그 뜻에 통달하지 못하겠는가」 하고 맺는다.

이 짧은 글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주장이 겹쳐 있다. 역병이 그쳤다는 것은 기도의 영험이고, 밤에 해가 빛났다는 것은 천지의 이변이며, 영취산에서 친히 들었다는 것은 홍법 자신의 숙세에 대한 주장이다. 홍법은 영험을 천황의 공으로 돌리는 겸양의 모양을 취하면서도, 맨 끝에서 자기가 석존의 설법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큰 주장을 덧붙였다. 대성인은 제28장에서 바로 이 끝 구절을 「사람에게 믿게 하려고 꾸며 낸 큰 망어」라고 짚으신다.

『반야심경비건』 끝의 이 글(역병 · 사경 · 밤의 햇빛 · 영취산 청문)이 홍법 자신의 글인지 후대에 덧붙은 글인지를 두고는 일찍부터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고 전한다. 대성인은 당시 이 글이 홍법의 글로 받들어지던 상황을 그대로 받아 그 내용을 따지셨다.

『공작경음의』 — 「면문이 열려 비로자나가 되다」

둘째와 셋째 영험은 『공작경음의』에서 나온다. 『공작경』은 공작명왕의 신주와 수법을 설한 경이며, 음의는 경의 자구를 뽑아 그 발음과 뜻을 주석한 책이다. 진언종에서는 진언과 다라니를 바르게 읽고 그 뜻을 아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었으므로 이런 음의서가 중시되었다. 그런데 이 음의서의 머리에 홍법의 즉신성불 영험담이 실려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홍법이 당에서 돌아와 진언종을 세우려고 여러 종의 학승을 조정에 모았다. 그들은 진언종이 내세우는 「즉신성불」, 곧 이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뜻을 의심하였다. 그러자 홍법이 금강계 대일여래의 인인 지권인을 맺고 남쪽을 향하였더니 면문이 홀연히 열려 금색의 비로자나(대일여래)가 되었고, 곧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입아 · 아입」, 곧 진언과 인계로 부처를 내 몸에 끌어들이고 내 몸을 부처에게 끌어들이는 일과 즉신돈증의 뜻에 대한 의심이 환히 풀렸고, 진언 · 유가의 종과 비밀 만다라의 도가 그때부터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홍법의 제자 진제가 전한 것으로, 홍법이 조정에서 여러 종의 고승과 대론할 때 대일여래의 모습을 나타냈다는 지어낸 이야기다. 대성인은 이 이야기의 「면문」이라는 한 글자를 붙잡아 제28장에서 날카롭게 따지신다. 면문은 입이다. 입이 벌어져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마 부처의 상호인 미간백호를 염두에 두고 「미간이 열렸다」고 쓰려다 「면문」이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닌가. 꾸며 낸 글이기에 이런 실수가 생긴다는 지적이다.

셋째 영험은 이때 여러 종의 학도가 홍법에게 귀의했다는 기록이다. 삼론의 도창, 법상의 원인, 화엄의 도웅, 천태의 원징이 그 무리로 이름을 올린다. 그런데 이 이름들은 이 이야기의 연대에 관해 스스로 의문을 드러낸다. 대성인이 문제 삼으신 원징의 일은 제28장에서 다루거니와, 원인의 생몰년(818~887)을 따르면 홍법이 귀국하여 진언을 넓히기 시작한 대동 · 홍인 초년에 원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어린아이였다. 도창이 홍법에게서 관정을 받은 것도 천장 5년(828)의 일이다. 홍법이 「귀국한 뒤」 여러 종을 모아 즉신성불을 보였다는 장면에 이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연대상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생몰년의 문제는 대성인이 직접 드신 것은 아니지만, 제28장에서 「이것은 어느 왕 · 어느 해 · 어느 때의 일인가」 하고 연대를 물으신 의문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삼고 전설과 고야산

안개 낀 깊은 삼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고야산의 산마루와 작은 절 지붕들
그림 · 안개 낀 깊은 삼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고야산의 산마루와 작은 절 지붕들

넷째 영험은 홍법의 전기에 실린 삼고 전설이다. 삼고는 진언 밀교의 기도에 쓰는 금강저의 하나로, 손잡이 양 끝이 각각 세 갈래로 갈라진 법구다. 금강저는 본래 고대 인도의 무기였는데 불교에서는 번뇌를 깨뜨리는 법구가 되었다. 전기에 따르면 홍법은 당에서 귀국하려고 배를 띄우던 날, 「내가 배운 교법이 만일 감응할 땅이 있다면 이 삼고가 그곳에 이를 것이다」 하고 발원하며 일본 쪽을 향해 삼고를 던져 올렸다. 삼고는 멀리 날아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 홍법이 고야산 아래에 입정할 곳을 정하러 갔더니, 바다 위에서 던진 그 삼고가 새로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야산이야말로 진언의 감응의 땅이라 하여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고야산은 홍인 7년(816) 홍법이 조정에 청하여 하사받은 산으로, 뒷날 금강봉사가 세워져 진언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홍법이 승화 2년(835) 그 산에서 세상을 떠난 뒤로는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선정에 들어 지금도 살아 있다는 「입정」 신앙이 퍼졌다. 질문자가 인용한 전기의 「고야산 아래에 입정할 곳을 정하였다」는 말은 바로 이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대성인 당시 홍법은 이처럼 바다 건너에서 던진 법구가 산에 떨어지고, 죽어서도 선정에 머문다는, 사람의 범위를 넘어선 성자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나도 우러러 믿는다」 — 답의 첫머리

대성인의 답은 뜻밖에도 「나도 우러러 믿기를 이와 같이 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질문자가 든 영험을 처음부터 모두 부정하지 않고, 일단 그런 덕이 있었다고 받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여(與)」의 단계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다만 옛사람들에게도 불가사의한 덕이 있었으나 불법의 사정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고 기준을 바꾸신다. 이것이 「탈(奪)」의 단계다. 설령 홍법에게 질문자가 말한 그대로의 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홍법의 법이 옳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법의 사정은 법문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영리한 근기나 신통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창법화제목초」의 「다만 법문으로 사정을 바로잡아야 하며 영리한 근기와 신통력에 의해서는 안 된다」(16쪽)는 원칙이 이 답의 바탕이다. 대성인은 이 원칙을 세 단계의 예로 뒷받침하신다. 불법 밖의 외도, 불법 안이면서 교판을 그르친 인사(광택), 그리고 바른 법을 넓힌 천태 · 전교다. 셋째 예가 특히 중요하다. 바른 법을 지닌 사람의 영험조차 법의 정사를 증명하는 근거로 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외도의 신통 — 큰 교만과 생사의 업

첫째 예는 인도의 외도다. 어떤 외도는 항하의 물을 귀 속에 열두 해 동안 머물게 했고, 어떤 외도는 큰 바다를 빨아 말렸으며, 어떤 외도는 해와 달을 손에 쥐었고, 어떤 외도는 석가의 제자를 소나 양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창법화제목초」에서는 아갈다 선인이 열두 해 귀에 항하를 담아 두었고, 바수 선인은 자재천이 되어 세 눈을 나타냈으며, 당토의 도사 장해는 안개를 내고 난파는 구름을 토했다고 하셨다(16쪽). 이 정도의 신통은 홍법의 영험담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대성인은 「더욱더 큰 교만을 일으켜 생사의 업이 되었을 뿐」이라 하신다. 신통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지닌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교만에 빠지고, 그 교만이 다시 생사윤회의 업이 된다. 천태대사는 이를 「명리를 구하여 견애를 더한다」고 풀이하셨다. 신통을 나타내는 것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일이 되기 쉽고, 그것은 견혹(이치에 대한 미혹, 아견 · 변견 등)과 사혹(일에 대한 미혹, 탐 · 진 · 치 · 만 · 의)을 오히려 더할 뿐이라는 것이다. 신통은 번뇌를 끊는 지혜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번뇌를 키우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광택의 비와 꽃 — 묘락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둘째 예는 광택사 법운이다. 법운은 양 무제 때의 고승으로 개선사 지장 · 장엄사 승민과 함께 양의 삼대 법사로 불렸다. 화림원에서 법화경을 강설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리고, 약초유품의 「그 비가 고루 사방에 함께 내린다」는 구절에 이르자 실제로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법화경을 강설하다가 그 경문 그대로의 감응이 일어났으니, 영험으로 치면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묘락대사는 이를 두고 「감응은 이와 같으나 오히려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쓰셨다. 법운은 보은초 제3편 「천태 · 전교의 홍통」에서 보았듯이 남삼북칠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학장으로, 법화경을 열반경보다 낮추고 법화경에도 아직 상주의 뜻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천태대사에게 깨뜨려진 사람이다. 법화경을 강설하며 비와 꽃의 감응을 얻은 사람조차 그 교판이 경문의 이치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감응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법문이 옳다는 사실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천태 · 전교의 비 — 그것으로 불의를 삼지 않으셨다

셋째 예가 이 장의 결정적인 대목이다. 천태대사는 법화경을 읽어 잠깐 사이에 단비를 내렸고, 전교대사는 사흘 안에 감로의 비를 내렸다. 두 대사는 바른 법을 넓힌 분들이며, 그 비도 홍법의 비처럼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삼삼장기우사」에서 대성인은 천태대사의 기우를 이렇게 적으셨다.

天台大師は陳の世に大旱魃あり法華経をよみて・須臾に雨下り王臣かうべをかたぶけ万民たなごころをあはせたり、しかも大雨にもあらず風もふかず甘雨にてありしかば、陳王大師の御前にをはしまして内裏へかへらんことをわすれ給いき、此の時三度の礼拝はありしなり

천태대사는 진(陳)나라 때에 큰 가뭄이 있자 법화경을 읽어 잠깐 사이에 비가 내리니, 왕과 신하는 머리를 숙이고 만민은 손바닥을 합하였느니라. 더구나 큰비도 아니요 바람도 불지 않는 단비였으므로 진나라 왕은 대사 앞에 계시며 궁궐로 돌아가기를 잊으셨으니, 이때 세 번의 예배가 있었느니라

「삼삼장기우사」, 1469쪽

또 전교대사와 호명의 겨룸에 대해서도 이렇게 적으셨다.

去る弘仁九年の春・大旱魃ありき・嵯峨の天王真綱と申す臣下をもつて冬嗣のとり申されしかば・法華経・金光明経・仁王経をもつて伝教大師祈雨ありき、三日と申せし日ほそきくもほそきあめしづしづと下りしかば・天子あまりによろこばせ給いて、日本第一のかたことたりし大乗の戒壇はゆるされしなり

지난 홍인 9년 봄에 큰 가뭄이 있었느니라. 사가 천황께 마쓰나라는 신하를 통하여 후유쓰구가 주선하여 아뢰었으므로 법화경 · 금광명경 · 인왕경으로 전교대사가 비를 비셨느니라. 사흘이라 하던 날 가는 구름 가는 비가 고요히 내리니, 천자께서 너무나 기뻐하시어 일본 제일의 어려운 일이었던 대승의 계단을 허락하셨느니라

「삼삼장기우사」, 1470쪽

여기서도 천자의 뜻을 전한 신하가 와케노 마쓰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제25장의 홍법의 기우에서 어폐를 바친 사자도 마쓰나였다. 법화경의 외호자 마쓰나가 함께한 두 번의 기우에서, 전교대사의 비는 사흘 만에 고요히 내렸고, 홍법의 기우는 세 이레를 넘기고서야 천자의 어폐 뒤에 비가 왔다.

그러나 대성인이 강조하시는 것은 그 대비가 아니다. 천태대사도 전교대사도 「그것으로써 부처님 뜻에 맞았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바른 법을 지닌 분들조차 비를 내린 영험을 법이 옳다는 증거로 내세우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남의 비를 빼앗은 홍법이 비와 밤의 해와 면문의 기적을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외도
영험항하를 귀에, 바다를 말림, 해와 달을 쥠
판정「큰 교만을 일으켜 생사의 업」천태 「명리를 구하여 견애를 더한다」
사람광택사 법운
영험법화경 강설 중 꽃 · 비
판정묘락 「감응은 이와 같으나 오히려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천태대사 · 전교대사
영험법화경으로 단비
판정「그것으로 부처님 뜻에 맞았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람홍법
영험남의 비 · 밤의 해 · 면문 · 삼고
판정「법화경을 희론이라 한 붓은 쓰지 말아야 한다」
기준「불법의 사정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仏法の邪正は其にはよらず
도표 7 · 신통 · 영험과 법의 정사

판정은 「붓」에 있다 — 희론과 무명의 변역

답의 마지막 문장에서 대성인은 판정의 근거를 분명히 하신다. 「홍법대사가 어떤 덕이 있으시든, 법화경을 희론의 법이라 정하고 석가불을 무명의 변역이라 쓰신 붓은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면 써서는 안 된다.」 영험의 진위를 따지기 전에, 홍법 자신이 써 남긴 글이 이미 경문에 어긋나 있다는 것이다. 덕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글이 부처님의 경을 깎아내리고 교주를 낮춘다면, 그 글을 따르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람에 의지하는 일이 된다.

이 「희론」과 「무명의 변역」은 「보은초」 제13장에서 대성인이 홍법의 판정을 요약하신 말이다.

法華経は阿含・方等・般若等に対すれば真実の経なれども華厳経・大日経に望むれば戯論の法なり、教主釈尊は仏なれども大日如来に向うれば無明の辺域と申して皇帝と俘囚との如し

법화경은 아함 · 방등 · 반야 등에 견주면 진실의 경이지만 화엄경 · 대일경에 비하면 희론의 법이다. 교주 석존은 부처이지만 대일여래를 향하면 무명의 변역이라 하여 황제와 포로와 같다

「보은초」 제13장에서 대성인이 요약하신 홍법의 판정, 305쪽

법화경은 석존이 「모두 진실」이라 하시고 다보여래와 시방 제불이 증명한 경이다. 그것을 「희론」, 곧 쓸모없는 말장난이라 하고, 교주 석존을 「무명의 변두리」에 있는 존재라 한 글은, 쓴 사람이 누구이든 어떤 영험을 지녔든 받아들일 수 없다. 이 판정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다음 제28장에서 『십주심론』의 체계와 함께 다시 살핀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밤중에 해가 떴다거나 바다 건너에서 던진 삼고가 고야산에서 나왔다는 홍법의 허언은 불법을 그르칠 뿐 아니라, 그것을 믿는 나라와 집과 사람을 망하게 하는 법이 된다. 「진언 망국」이라는 대성인의 경고가 바로 이것이다. 영험을 믿고 그릇된 법을 받드는 일은 개인의 신앙 문제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기도와 정치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29장의 승구의 난이 그 실례로 제시된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영험과 신통은 법의 정사를 증명하지 못한다. 바른 법을 넓힌 천태 · 전교조차 기우의 영험을 증거로 삼지 않으셨다. 판정의 기준은 그 사람이 남긴 법문이며, 법화경을 「희론」이라 한 홍법의 붓은 어떤 덕으로도 덮을 수 없다.

제28장 홍법의 광혹을 꾸짖다
어서 319쪽 7행~321쪽 6행 · 第28章 弘法の誑惑を責む

본문

本文 · 一어서 319쪽 7~18행
本文 · 어서 원문

いかにいわうや上にあげられて候徳どもは不審ある事なり、「弘仁九年の春・天下大疫」等云云、春は九十日・何の月・何の日ぞ是一、又弘仁九年には大疫ありけるか是二、 又「夜変じて日光赫赫たり」と云云、此の事第一の大事なり弘仁九年は 嵯峨天皇の御宇なり左史右史の記に載せたりや是三、 設い載せたりとも信じがたき事なり成劫二十劫・住劫九劫・已上二十九劫が間に・いまだ無き天変なり、 夜中に日輪の出現せる事如何・又如来一代の聖教にもみへず未来に夜中に日輪出ずべしとは三皇五帝の三墳・五典にも載せず 仏経のごときんば壊劫にこそ二の日・三の日・乃至七の日は出ずべしとは見えたれども・かれは昼のことぞかし・夜日出現せば東西北の三方は如何、 設い内外の典に記せずとも現に弘仁九年の春・何れの月・何れの日・何れの夜の何れの時に日出ずるという・公家・諸家・叡山等の日記あるならば・すこし信ずるへんもや、 次ぎ下に「昔予鷲峰説法の筵に陪して 親り其の深文を聞く」等云云、此の筆を人に信ぜさせしめんがためにかまへ出だす大妄語か、されば霊山にして法華は戯論・大日経は真実と仏の説き給けるを阿難・文殊が悞りて妙法華経をば真実とかけるか.いかん、 いうにかいなき婬女・破戒の法師等が歌をよみて雨す雨を三七日まで下さざりし人は・かかる徳あるべしや是四、

풀이

하물며 위에 드신 덕들은 의심스러운 일이니라. 「홍인 9년 봄, 천하에 큰 역병」 등이라 하였으나, 봄은 구십 일이니 어느 달 어느 날인가, 이것이 하나이니라. 또 홍인 9년에 큰 역병이 있었는가, 이것이 둘이니라. 또 「밤이 변하여 햇빛이 환히 빛났다」 하였으니, 이 일은 제일의 큰일이니라. 홍인 9년은 사가 천황의 치세이니라. 좌사 · 우사의 기록에 실렸는가, 이것이 셋이니라. 설령 실렸다 하더라도 믿기 어려운 일이니라. 성겁 이십 겁 · 주겁 구 겁, 모두 이십구 겁 동안 아직 없었던 천변이니라. 밤중에 해가 나타난 일은 어찌된 일인가. 또 여래 일대의 성교에도 보이지 않느니라. 미래에 밤중에 해가 뜨리라는 것은 삼황오제의 삼분(三墳) · 오전(五典)에도 실려 있지 않느니라. 불경에 따르면 괴겁(壞劫)에는 두 해, 세 해, 내지 일곱 해가 뜨리라고 보이지만 그것은 낮의 일이니라. 밤에 해가 나타난다면 동 · 서 · 북의 세 방위는 어찌 되는가. 설령 내전 · 외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실제로 홍인 9년 봄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밤 어느 때에 해가 떴다고 하는 공가(公家) · 제가(諸家) · 예산 등의 일기가 있다면 조금은 믿을 여지도 있으리라. 다음 아래에 「옛날 내가 취봉 설법의 자리에 함께 앉아 친히 그 깊은 글을 들었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 붓은 사람에게 믿게 하려고 꾸며 낸 큰 망어인가. 그렇다면 영산에서 「법화는 희론이요 대일경은 진실」이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아난 · 문수가 잘못하여 「묘법화경은 진실」이라고 쓴 것인가, 어떠한가. 말할 가치도 없는 음녀(婬女) · 파계의 법사 등이 노래를 지어 비를 내렸는데, 그 비를 세 이레까지 내리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덕이 있겠는가, 이것이 넷이니라.

本文 · 二어서 320쪽 1~12행
本文 · 어서 원문

孔雀経の音義に云く「大師智拳の印を結んで南方に向うに面門俄かに開いて金色の毘盧遮那と成る」等云云、此れ又何れの王・何れの年時ぞ漢土には建元を初とし日本には大宝を初として緇素の日記・大事には必ず年号のあるが、 これほどの大事に・いかでか王も臣も年号も日時もなきや、又次ぎに云く「三論の道昌・法相の源仁・華厳の道雄・天台の円澄」等云云、抑も円澄は寂光大師・天台第二の座主なり、 其の時何ぞ第一の座主義真・根本の伝教大師をば召さざりけるや、円澄は天台第二の座主・伝教大師の御弟子なれども又弘法大師の弟子なり、弟子を召さんよりは三論・法相・華厳よりは天台の伝教・義真の二人を召すべかりけるか、 而も此の日記に云く「真言瑜伽の宗・秘密曼荼羅彼の時よりして建立す」等云云、此の筆は伝教・義真の御存生かとみゆ、弘法は平城天皇・大同二年より弘仁十三年までは盛に真言をひろめし人なり、 其の時は此の二人現におはします又義真は天長十年までおはせしかば其の時まで弘法の真言は・ひろまらざりけるか・かたがた不審あり、孔雀経の疏は弘法の弟子・真済が自記なり信じがたし、 又邪見者が公家・諸家・円澄の記をひかるべきか、又道昌・源仁・道雄の記を尋ぬべし、「面門俄かに開いて金色の毘盧遮那と成る」等云云、面門とは口なり口の開けたりけるか眉間開くとかかんとしけるが悞りて面門とかけるか、 ぼう書をつくるゆへに・かかるあやまりあるか、

풀이

『공작경음의』에 이르기를 「대사가 지권인을 맺고 남쪽을 향하니 면문이 홀연히 열려 금색의 비로자나가 되었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것 또한 어느 왕 · 어느 해 어느 때인가. 한토에서는 건원(建元)을 처음으로 하고 일본에서는 대보(大宝)를 처음으로 하여, 승속(緇素)의 일기에는 큰일에 반드시 연호가 있는데, 이만한 큰일에 어찌 왕도 신하도 연호도 날짜도 없는가. 또 다음에 이르기를 「삼론의 도창 · 법상의 원인 · 화엄의 도웅 · 천태의 원징」 등이라 하였느니라. 도대체 원징은 적광대사로서 천태 제이의 좌주이니라. 그때 어찌하여 제일의 좌주 의진과 근본인 전교대사를 부르지 않았는가. 원징은 천태 제이의 좌주로서 전교대사의 제자이지만 또 홍법대사의 제자이니라. 제자를 부르기보다는, 또 삼론 · 법상 · 화엄보다는 천태의 전교 · 의진 두 사람을 불렀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일기에 이르기를 「진언 유가의 종, 비밀 만다라가 그때부터 건립되었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 붓은 전교 · 의진이 살아 계실 때의 일로 보이느니라. 홍법은 헤이제이 천황 대동 2년부터 홍인 13년까지 성대히 진언을 넓힌 사람이니라. 그때는 이 두 분이 실제로 계셨느니라. 또 의진은 천장 10년까지 계셨으니 그때까지 홍법의 진언은 넓혀지지 않았던 것인가. 여러모로 의심스러우니라. 공작경의 소는 홍법의 제자 진제(真済)가 스스로 기록한 것이니 믿기 어려우니라. 또 사견의 사람이 공가 · 제가 · 원징의 기록을 끌어올 수 있겠는가. 또 도창 · 원인 · 도웅의 기록을 찾아보아야 하리라. 「면문이 홀연히 열려 금색의 비로자나가 되었다」 등이라 하였으니, 면문이란 입이니라. 입이 열렸다는 것인가. 미간이 열렸다고 쓰려다가 잘못하여 면문이라고 쓴 것인가. 거짓 글(謀書)을 지은 까닭에 이러한 잘못이 있는 것인가.

本文 · 三어서 320쪽 12행 ~ 321쪽 6행
本文 · 어서 원문

「大師智拳の印を結んで南方に向うに 面門俄かに開いて金色の毘盧遮那と成る」等云云、涅槃経の五に云く「迦葉仏に白して言さく世尊我今是の四種の人に依らず何を以ての故に瞿師羅経の中の如き仏瞿師羅が為に説きたまわく若し天魔梵破壊せんと欲するが為に変じて仏の像と為り三十二相・八十種好を具足し荘厳し円光一尋面部円満なること猶月の盛 明なるが如く眉間の毫相白きこと珂雪に踰え乃至左の脇より水を出し右の脇より火を出す」等云云、 又六の巻に云く「仏迦葉に告げたまわく我般涅槃して乃至後是の魔波旬漸く 当に我が正法を沮壊す乃至化して阿羅漢の身及仏の色身と作り魔王此の有漏の形を以て無漏の身と作り我が正法を壊らん」等云云、 弘法大師は法華経を華厳経・大日経に対して戯論等云云、而も仏身を現ず此れ涅槃経には魔・有漏の形をもつて仏となつて 我が正法をやぶらんと記し給う、 涅槃経の正法は法華経なり故に経の次ぎ下の文に云く「久く已に成仏す」、又云く「法華の中の如し」等云云、釈迦・多宝・十方の諸仏は一切経に対して「法華経は真実・大日経等の一切経不真実」等云云、 弘法大師は仏身を現じて華厳経・大日経に対して「法華経は戯論」等云云、仏説まことならば弘法は天魔にあらずや、又三鈷の事・殊に不審なり漢土の人の日本に来りてほりいだすとも信じがたし、 已前に人をや・つかわして・うづみけん、いわうや弘法は日本の人かかる誑乱其の数多し此等をもつて仏意に叶う人の証拠とはしりがたし。

풀이

「대사가 지권인을 맺고 남쪽을 향하니 면문이 홀연히 열려 금색의 비로자나가 되었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열반경 제5권에 이르기를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이 네 종류의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사라경(瞿師羅経)』 가운데에서 부처님이 구사라를 위하여 설하시기를, 만일 천마나 범천이 깨뜨리고자 하여 변하여 부처의 모습이 되어 삼십이상 · 팔십종호를 갖추어 장엄하고, 원광이 한 길이며, 얼굴의 원만함이 마치 보름달이 밝게 빛나는 것과 같고, 미간의 백호상이 희기가 가설(珂雪)보다 더하며, ……왼쪽 옆구리에서 물을 내고 오른쪽 옆구리에서 불을 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였고, 또 제6권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열반한 뒤 ……그 뒤에 이 마왕 파순이 차츰 나의 정법을 막고 무너뜨리리라. ……변하여 아라한의 몸과 부처의 색신을 짓고, 마왕이 이 유루(有漏)의 형상으로 무루(無漏)의 몸을 지어 나의 정법을 깨뜨리리라」 하였느니라. 홍법대사는 법화경을 화엄경 · 대일경에 견주어 희론 등이라 하였느니라. 더구나 불신을 나타냈다 하니, 이것은 열반경에서 마가 유루의 형상으로 부처가 되어 나의 정법을 깨뜨리리라고 기록하신 것이니라. 열반경의 정법은 법화경이니라. 그러므로 경의 다음 아래 글에 이르기를 「오래전에 이미 성불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법화 가운데와 같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은 일체경에 견주어 「법화경은 진실이요 대일경 등 일체경은 진실이 아니다」 등이라 하셨느니라. 홍법대사는 불신을 나타내어 화엄경 · 대일경에 견주어 「법화경은 희론」 등이라 하였느니라. 불설이 참되다면 홍법은 천마가 아니겠는가. 또 삼고의 일은 특히 의심스러우니라. 한토의 사람이 일본에 와서 파냈다 하더라도 믿기 어렵거늘, 이전에 사람을 보내어 묻어 두었던 것인가. 하물며 홍법은 일본 사람이니라. 이러한 광란(誑亂)이 그 수가 많으니라. 이것들로써 부처님 뜻에 맞는 사람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는 알기 어려우니라.

어구 풀이

左史右史の記좌사 · 우사의 기록
역사의 기록이라는 뜻. 옛 중국에서 좌사와 우사는 임금 곁에서 일과 말을 나누어 기록하던 사관이며, 일본 율령제의 태정관에도 좌 · 우의 대사 · 소사가 있어 공문서와 기록을 맡았다. 좌사는 천하의 일을, 우사는 천자의 말을 적는다고 하였다.
三皇五帝삼황오제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 여러 설이 있으나 대성인은 유학자 공안국이 『상서』 서문 등에서 세운 설을 따르셨다. 삼황은 복희 · 신농 · 황제, 오제는 소호 · 전욱 · 고신 · 당요 · 우순이다.
三墳五典삼분 · 오전
삼황 · 오제가 지었다는 책. 『상서』 서문에 「삼황의 글을 삼분이라 하고 오제의 글을 오전이라 한다」 하였다. 분(墳)은 큰 도, 전(典)은 떳떳한 도라는 뜻이다. 모두 지금은 전하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다.
壊劫にこそ二の日・三の日・乃至七の日괴겁에는 두 해, 세 해, 내지 일곱 해
세계가 무너지는 괴겁의 끝에 해가 차례로 둘, 셋 … 일곱까지 나타나 세계를 태운다는 불교의 우주관. 『구사론』 등이 이를 설한다. 대성인은 그것도 낮의 일이지 밤의 일이 아니라고 하신다.
東西北の三方は如何동 · 서 · 북의 세 방위는 어찌 되는가
수미산을 둘러싼 네 대주(동승신주 · 남섬부주 · 서우화주 · 북구로주)의 우주관에서, 남주가 한밤중일 때 북주는 한낮이고, 동주에서 해가 뜰 때 서주에서는 해가 진다고 보았다. 남주의 밤에 해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나머지 세 주는 어찌 되느냐는 물음이다.
婬女・破戒の法師음녀 · 파계의 법사
음녀는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파계의 법사는 노인(能因) 법사를 가리킨다. 이즈미 시키부는 헤이안 시대의 여류 가인으로, 정열적이고 자유분방한 노래로 이름 높았으며 노래를 읊어 비를 내렸다고 전한다. 노인 법사는 속명 다치바나노 나가야스(橘永愷)로, 출가한 가승(歌僧)이다. 이요국의 큰 가뭄에 노래를 지어 미시마 신사에 바치자 곧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漢土には建元を初とし한토에서는 건원을 처음으로 하다
중국에서는 전한 무제가 즉위한 건원 원년(기원전 140)을 연호의 시작으로 한다.
日本には大宝を初とし일본에서는 대보를 처음으로 하다
일본 최초의 연호는 대화(645)이나 그 뒤 연호가 끊긴 시기가 있었고, 몬무 천황 대보 원년(701)부터 연호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성인은 이 대보를 연호의 시작으로 드셨다.
緇素치소
승려와 속인. 치(緇)는 검은색, 소(素)는 흰색이다. 승려는 검은 옷을, 속인은 흰 옷을 입은 데서 나온 말이다.
義真의진
781~833. 전교대사의 제자로 입당할 때 통역으로 동행하였고, 대사 입멸 뒤 엔랴쿠사를 이끌어 천장 원년(824) 초대 천태좌주가 되었다. 대성인은 「제일의 의진만이 전교대사를 닮았다」(310쪽)고 하셨다.
真済진제
800~860. 헤이안 전기의 진언승. 야마시로의 진고사(神護寺) 제2대. 속성은 기(紀)씨. 어려서 출가하여 홍법을 따라 태장 · 금강 양부의 대법을 받았고, 스물다섯에 전법아사리가 되었으며 제형 3년(856) 승정에 올랐다. 다카오 승정 · 가키노모토 승정이라고도 한다.
ぼう書모서
거짓으로 꾸며 만든 문서. 면문과 미간을 혼동한 것은 사실을 적은 글이 아니라 꾸며 낸 글이기 때문에 생긴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四種の人네 종류의 사람
사의(四依)의 사람과 같다. 부처님 멸후에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 의지처가 될 네 종류의 사람이다. 열반경 사의품에서 가섭은 이 사람들에게조차 그대로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며, 이 품에서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법의 사의가 설해진다.
瞿師羅経『구사라경』
구사라는 범어 고시라의 음사로 미음(美音) 등으로 한역된다. 중인도 교상미국의 장자로 미음정사를 지어 부처님을 모시고 설법을 청하였다. 이 경에는 불도를 깨뜨리기 위해 마가 부처의 모습이 되어 신통력을 나타내 구사라를 미혹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나, 지금의 대장경 안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三十二相八十種好삼십이상 · 팔십종호
삼십이상은 응화의 부처가 갖춘 특별한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이를 나타내어 중생에게 우러르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팔십종호는 여든 가지의 좋은 모습으로 팔십수형호 · 팔십소상이라고도 한다. 삼십이상에 팔십종호가 갖추어져 원만해진다.
珂雪가설
가(珂)는 마노의 일종이라고도 하고 바다에서 나는 흰 조개라고도 한다. 흰 눈처럼 흰 빛깔에 견준 말이다.
有漏の形をもつて無漏の身유루의 형상으로 무루의 몸을 짓다
유루는 번뇌가 새어 나오는 범부의 몸, 무루는 번뇌가 다한 성자 · 부처의 몸이다. 마왕이 번뇌의 몸을 가지고 부처의 몸인 양 꾸며 정법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三鈷삼고
삼고저라고도 한다. 진언 밀교의 기도에 쓰는 법구. 고(鈷)는 본래 고대 인도의 무기였는데 불교에서는 법구가 되어 번뇌를 깨뜨린다는 뜻을 가진다. 금강저의 한 가지로 손에 쥐는 절굿공이 모양이며, 양 끝이 각각 세 갈래인 것을 삼고라 한다.

「광혹」을 꾸짖는 방법 — 기록 · 연대 · 경문의 검증

이 장은 앞 장에 이어 홍법의 갖가지 광혹을 파하신 대목이다. 제27장에서 대성인은 「설령 그런 덕이 있었다 해도 불법의 사정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는 원리로 답하셨다. 그런데 이 장 첫머리에서 대성인은 「하물며 위에 드신 덕들은 의심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신다. 영험을 일단 인정하고 원리로 답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영험담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데까지 파고드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물며(いかにいわうや)」라는 말의 뜻이다.

대성인의 검증은 세 겹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기록의 검증이다. 그런 큰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연월일과 조정 · 공가 · 사찰의 일기가 남아 있어야 한다. 둘째는 연대의 검증이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그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가,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없는가. 셋째는 경문의 검증이다. 설령 부처의 모습을 나타냈다 해도 그것이 경문에 비추어 무엇에 해당하는가. 이 세 겹의 검증은 모두 「불법의 사정은 법문으로 바로잡는다」는 원칙 위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전승을 대하는 엄밀한 태도를 보여 준다.

대성인이 짚으신 의문
『반야심경비건』
  1. ①봄 구십 일 가운데 어느 달 어느 날인가
  2. ②홍인 9년에 큰 역병이 있었는가
  3. ③밤의 해가 좌사 · 우사의 기록에 실렸는가(이십구 겁 동안 없던 일, 내외전에 예언도 없음, 괴겁의 여러 해도 낮의 일, 동 · 서 · 북 세 주는 어찌 되는가, 공가 · 제가 · 예산의 일기는 있는가)
  4. ④「영취산에서 친히 들었다」는 큰 망어(그렇다면 아난 · 문수가 잘못 썼는가, 음녀 · 파계 법사도 내린 비를 세 이레에 못 내린 사람)
『공작경음의』
  1. ⑤왕 · 신하 · 연호 · 날짜가 없음
  2. ⑥왜 원징을 부르고 전교 · 의진을 부르지 않았는가
  3. ⑦전교 · 의진 생존 때 진언이 건립되었다는 모순
  4. ⑧제자 진제의 자기 기록
  5. ⑨「면문」은 입 — 미간의 오기, 거짓 글의 표지
경문
  1. ⑩열반경 「마가 불신을 나타내 정법을 깨뜨린다」
삼고
  1. ⑪미리 묻어 둔 것인가, 홍법은 일본 사람
도표 8 · 제28장 홍법의 광혹

첫째 · 둘째 의문 — 「봄은 구십 일」, 그해에 역병은 있었는가

대성인은 『반야심경비건』의 글을 첫 구절부터 따지신다. 「홍인 9년 봄 천하에 큰 역병」이라 하는데, 봄은 정월부터 3월까지 구십 일이다. 그 가운데 어느 달 어느 날의 일인가. 이것이 첫째 의문이다. 천하에 큰 역병이 돌고, 천황이 몸소 금니로 사경하고,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살아났다면, 그것은 나라의 큰 사건이다. 그런 사건에 날짜가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심스럽다.

둘째로, 홍인 9년에 정말 큰 역병이 있었는가. 역병의 유행 자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다면, 하물며 밤중의 해에 대한 기록이 있을 리 없다. 대성인이 사건의 전제부터 물으시는 것은, 영험담이 흔히 사실의 뼈대 위에 기적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뼈대가 흔들리면 그 위에 얹힌 기적도 함께 무너진다.

셋째 의문 — 사관의 기록과 이십구 겁의 천변

셋째 의문이 가장 크다. 대성인은 「이 일은 제일의 큰일이다」라고 하신다. 홍인 9년은 사가 천황의 치세다. 밤이 변하여 해가 빛났다면 그것이 좌사 · 우사, 곧 조정의 사관 기록에 실렸는가.

이어서 대성인은 「설령 실렸다 하더라도 믿기 어렵다」고 하시며 그 까닭을 둘로 드신다. 하나는 과거에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성겁 이십 겁과 주겁 구 겁, 모두 이십구 겁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천변이다.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예언도 없다는 것이다. 여래 일대의 성교에도 「미래에 밤중에 해가 뜨리라」는 말이 없고, 중국 고대 성왕들의 글이라는 삼분 · 오전에도 실려 있지 않다. 불경에는 괴겁 때 해가 둘, 셋, 내지 일곱이 뜬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낮에 여러 해가 뜬다는 것이지 밤에 해가 뜬다는 것이 아니다. 내전 · 외전 어디에도 과거의 선례도 미래의 예언도 없는 일이니, 설령 기록에 실렸다 해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다음 물음이 독특하다. 「밤에 해가 나타난다면 동 · 서 · 북의 세 방위는 어찌 되는가.」 당시의 불교 우주관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그 사방에 네 대주가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남쪽의 남섬부주다. 해는 수미산 둘레를 돌기 때문에 남섬부주가 한밤중일 때 북쪽의 북구로주는 한낮이고, 동쪽의 동승신주에서 해가 뜰 때 서쪽의 서우화주에서는 해가 진다. 그런데 남섬부주의 밤중에 갑자기 해가 나타났다면, 그때 북주의 한낮을 비추던 해는 어디로 갔으며 동 · 서의 해돋이와 해넘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의 해가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으니, 이 주장은 당시의 우주관 안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성인은 상대가 받아들이는 세계상 안에서 그 주장의 모순을 짚으신 것이다.

북구로주한낮
서우화주해넘이
동승신주해돋이
남섬부주한밤중
수미산
물음「남주의 밤에 해가 나타나면 동 · 서 · 북 세 주는 어찌 되는가」東西北の三方は如何
덧붙임괴겁에 여러 해가 뜨는 것도 낮의 일かれは昼のことぞかし
도표 9 · 수미산 사주와 해의 운행

수미산과 사대주의 우주관, 성 · 주 · 괴 · 공 사겁의 시간관은 『구사론』 세간품에 자세히 설해진다. 대성인의 논증은 당시의 불교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던 이 틀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대성인은 한 걸음 물러서신다. 「설령 내전 · 외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실제로 홍인 9년 봄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밤 어느 때에 해가 떴다고 하는 공가 · 제가 · 예산 등의 일기가 있다면 조금은 믿을 여지도 있으리라.」 경전의 근거가 없어도, 그날 그 시각의 목격 기록이 조정과 귀족과 사찰에 남아 있다면 고려해 볼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밤의 해는 홍법의 글 하나에만 있는 이야기다.

넷째 의문 — 「영취산에서 친히 들었다」는 망어

넷째로 대성인은 『비건』 끝의 「옛날 내가 취봉 설법의 자리에 함께 앉아 친히 그 깊은 글을 들었다」는 구절을 문제 삼으신다. 이것은 사람에게 이 글을 믿게 하려고 꾸며 낸 큰 망어가 아닌가. 역병이 그치고 밤에 해가 떴다는 이야기 자체도, 「나는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친히 들은 사람이다」라는 주장을 믿게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일 홍법이 정말 영취산의 설법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영취산은 법화경이 설해진 곳이다. 거기서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들었다면, 홍법은 부처님이 「법화경은 진실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어야 한다. 그런데 홍법은 법화경을 「희론」이라 하고 석가불을 「무명의 변역」이라 하였다. 대성인은 이 모순을 반어로 찌르신다. 「그렇다면 영산에서 『법화는 희론이요 대일경은 진실』이라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아난과 문수가 잘못하여 『묘법화경은 진실』이라고 쓴 것인가.」 경전을 결집한 아난과 문수가 부처님의 말씀을 거꾸로 적었다고 하지 않는 한, 홍법의 영산 청문은 성립할 수 없다. 법화경을 정말 들었다면 법화경을 희론이라 할 수 없고, 법화경을 희론이라 했다면 영산에서 들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마지막으로 대성인은 기우의 일을 다시 꺼내신다. 이즈미 시키부는 「이치에 맞도다, 해의 나라이니 해가 비치는 것이지만, 하늘 아래라면 비가 내리지 않을 리 있으랴」는 뜻의 노래를 읊어 비를 내렸다고 하고, 노인 법사는 이요국의 큰 가뭄에 「은하수의 물을 못자리에 흘려 내리소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이라면」 하는 노래를 미시마 신사에 바쳐 곧 비가 내렸다고 한다. 대성인은 「시모야마어소식」에서도 같은 두 사람을 들어, 고쿠라쿠사 료칸(良観) — 대성인이 「양화방(両火房)」이라 부르신 이 — 의 기우가 실패한 일을 꾸짖으셨다.

和泉式部と云いし色好み能因法師と申せし無戒の者此は彼の両火房がいむところの三十一字ぞかし

이즈미 시키부라 하던 색을 좋아하는 이와 노인 법사라 하던 계율 없는 자 — 이들이 (비를 내린 것은) 저 양화방이 꺼리는 서른한 글자(와카)였느니라

「시모야마어소식」, 350쪽

음녀와 파계의 법사조차 노래 한 수로 비를 내렸다고 전하는데, 세 이레를 빌고도 비를 내리지 못한 홍법에게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들은 사람의 덕이 있겠는가. 영산 청문의 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노래 한 수만큼의 감응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어다.

『공작경음의』의 의문 — 연호 없는 「큰일」

다음으로 대성인은 『공작경음의』의 「면문이 열려 금색 비로자나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옮기신다. 첫 물음은 「이것은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때의 일인가」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무제의 건원(기원전 140)부터, 일본에서는 대보(701)부터 연호가 이어져 왔고, 승려든 속인이든 큰일을 기록할 때에는 반드시 연호를 적는 것이 관례다. 한 사람의 승려가 조정에서 몸을 부처로 바꾸어 여러 종을 굴복시켰다면 이것은 불교사에 둘도 없는 큰일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왕도, 신하도, 연호도, 날짜도 없다. 연호가 없다는 것은 그 기록이 실제 사건을 그 자리에서 적은 것이 아니라 뒷날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원징을 부르고 전교 · 의진을 부르지 않았는가

둘째 물음은 등장인물에 관한 것이다. 이 기록은 홍법에게 귀의한 여러 종의 학도로 삼론의 도창, 법상의 원인, 화엄의 도웅, 천태의 원징을 든다. 대성인은 천태종 대표로 원징이 이름을 올린 데 주목하신다. 원징은 적광대사, 천태 제이의 좌주다. 홍법이 정말 여러 종의 대표를 불러 즉신성불을 증명하려 했다면, 천태종에서는 제이의 좌주가 아니라 제일의 좌주 의진, 아니 무엇보다 천태종의 근본인 전교대사를 불렀어야 한다. 원징은 전교대사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홍법의 제자이기도 했다. 반쯤 홍법의 제자인 사람을 천태종의 대표로 세웠다면, 그것은 천태종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제 편 사람을 앉혀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원징에 관해 대성인은 「보은초」 제19장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日本国は叡山計りに伝教大師の御時・法華経の行者ましましけり、義真・円澄は第一第二の座主なり第一の義真計り伝教大師ににたり、第二の円澄は半は伝教の御弟子・半は弘法の弟子なり

일본국은 예산에만 전교대사의 때에 법화경의 행자가 계셨느니라. 의진 · 원징은 제일 · 제이의 좌주이니라. 제일의 의진만이 전교대사를 닮았고, 제이의 원징은 반은 전교의 제자요 반은 홍법의 제자이니라

「보은초」 제19장, 310쪽

셋째 물음은 연대다. 이 기록은 「진언 유가의 종, 비밀 만다라가 그때부터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건은 홍법이 귀국한 뒤 진언종이 아직 서지 않았던 때, 곧 전교대사와 의진이 살아 있던 때의 일이 된다. 홍법은 헤이제이 천황 대동 2년(807)에 귀국한 뒤 홍인 13년(822)까지 성대히 진언을 넓혔다. 그동안 전교대사도 의진도 현존하였다. 전교대사는 홍인 13년 6월 4일에 입멸하셨고, 의진은 그 뒤로도 천장 10년(833)까지 살았다. 두 분이 살아 있는데 그들을 제쳐 두고 원징을 불렀다는 것도 이상하고, 만일 두 분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라면 의진이 살아 있던 천장 10년까지는 홍법의 진언이 아직 서지 않았다는 말이 되니 그것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대성인의 지적이다.

홍법의 귀국 시기는 「보은초」 제13장 본문에 「대동 2년 10월 22일 귀국」이라 되어 있고, 일반적으로는 대동 원년(806)에 일본에 돌아와 대동 2년 무렵까지 규슈에 머물다가 뒤에 입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전교대사 · 의진의 생존 기간과 겹친다는 대성인의 논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전교의진
  1. 연력 23년(804)홍법 · 전교 입당
  2. 연력 24년(805)전교 귀국
  3. 대동 원년~2년(806~807)홍법 귀국
  4. 홍인 7년(816)홍법 고야산 하사
  5. 홍인 9년(818)『심경비건』의 「역병 · 밤의 해」, 전교 · 호명의 기우
  6. 홍인 13년(822) 6월 4일전교대사 입멸
  7. 홍인 14년(823)홍법 동사 하사
  8. 천장 원년(824)신센엔 기우(「홍법의 비」), 의진 초대 천태좌주
  9. 천장 10년(833)의진 입멸
  10. 승화 2년(835)홍법 입멸
  11. 승화 3년(836)원징 입멸
「『공작경음의』의 장면은 언제인가 — 연호 없음」
도표 10 · 홍법 · 전교 · 의진 · 원징의 연표

넷째 물음은 출처다. 『공작경음의』의 이 대목은 홍법의 제자 진제가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제자가 스승의 영험을 적은 글은 그 자체로 객관적인 증거가 되기 어렵다. 대성인은 「또 사견의 사람이 공가 · 제가 · 원징의 기록을 끌어올 수 있겠는가. 또 도창 · 원인 · 도웅의 기록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런 대사건이 있었다면 조정과 귀족의 기록에,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원징 · 도창 · 원인 · 도웅 자신의 기록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 기록이 없다면 진제의 글 하나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면문」 — 입이 열려 부처가 되었는가

다섯째 물음은 한 글자에 관한 것이지만 날카롭다. 「면문이 홀연히 열려 금색 비로자나가 되었다」 하는데, 면문이란 입이다. 입이 열렸더니 법신여래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 뜻도 이루지 못한다. 부처의 상호 가운데 빛을 내는 곳은 미간의 백호다. 아마 「미간이 홀연히 열려」라고 쓰려다가 잘못하여 「면문」이라고 쓴 것이 아닌가. 대성인은 「거짓 글(謀書)을 지은 까닭에 이러한 잘못이 있는가」라고 하신다. 실제로 본 일을 적었다면 이런 혼동이 생길 리 없다. 꾸며 낸 글이기에 세부에서 실수가 드러난 것이다.

열반경의 거울 — 「마가 불신을 나타내 정법을 깨뜨린다」

여기까지가 기록과 연대에 의한 검증이었다면, 이제 대성인은 경문으로 판정하신다. 설령 홍법이 정말로 부처의 모습을 나타냈다고 해도,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대성인은 열반경 제5권과 제6권을 인용하신다.

제5권은 사의품의 한 대목이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저는 이 네 종류의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아뢴다. 그 까닭은 『구사라경』에서 부처님이 구사라 장자에게, 천마나 범천이 정법을 깨뜨리려고 부처의 모습으로 변하여 삼십이상 · 팔십종호를 갖추고, 둥근 빛이 한 길이나 되며, 얼굴이 보름달처럼 원만하고 밝으며, 미간의 백호가 눈보다 희고, 왼쪽 옆구리에서 물을 내고 오른쪽 옆구리에서 불을 낸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곧 부처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고 신통을 나타내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부처인지 마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의품에서 부처님은 이어서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법의 사의를 설하신다. 「보은초」 제4장에서 대성인이 열반경의 유계로 드신 바로 그 대목이다.

제6권에서는 부처님이 가섭에게, 내가 반열반한 뒤 마왕 파순이 차츰 나의 정법을 막고 무너뜨릴 것이며, 아라한의 몸이나 부처의 색신으로 변하여, 번뇌가 있는 유루의 형상으로 번뇌가 다한 무루의 몸인 양 꾸며 나의 정법을 깨뜨릴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홍법의 경우에 이 경문을 대어 보면 어떻게 되는가. 홍법은 법화경을 화엄경 · 대일경에 견주어 희론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불신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것은 열반경이 말한 「마가 유루의 형상으로 부처가 되어 나의 정법을 깨뜨린다」는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열반경이 말하는 「정법」은 법화경이다. 열반경 자신이 다음 대목에서 「오래전에 이미 성불하였다」 하고 「법화 가운데와 같다」 하여, 법화경 수량품의 구원실성과 법화경의 설을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은 일체경에 견주어 「법화경은 진실이요 대일경 등 일체경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증명하셨다. 그런데 홍법은 불신을 나타내어 「법화경은 희론」이라 하였다. 대성인은 이렇게 맺으신다. 「불설이 참되다면 홍법은 천마가 아니겠는가.」

이 논증은 이 장의 가장 깊은 곳이다. 기적이 진짜였다고 양보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기적이 진짜일수록 결론은 더 무거워진다.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부처의 경을 깎아내린다면, 그것은 경이 미리 경고한 「마의 불신」에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이다. 제27장의 「불법의 사정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여기서 경문으로 완결된다.

열반경
제5권 사의품「천마 · 범천이 정법을 깨뜨리려 부처의 모습이 되어 삼십이상 · 팔십종호, 원광 한 길, 얼굴은 보름달, 백호는 가설보다 희고, 좌우 옆구리에서 물 · 불」
제6권「마왕 파순이 아라한의 몸 · 부처의 색신을 짓고, 유루의 형상으로 무루의 몸을 지어 나의 정법을 깨뜨리리라」
「열반경의 정법은 법화경」(「오래전에 이미 성불하였다」 · 「법화 가운데와 같다」)
↔
홍법
『공작경음의』「지권인을 맺고 남쪽을 향하니 면문이 열려 금색 비로자나가 됨」
「법화경은 화엄경 · 대일경에 견주면 희론」
결론「불설이 참되다면 홍법은 천마가 아니겠는가」仏説まことならば弘法は天魔にあらずや
도표 11 · 열반경의 예언과 홍법

삼고 — 미리 묻어 둔 것인가

마지막으로 대성인은 삼고 전설을 짚으신다. 「삼고의 일은 특히 의심스럽다.」 설령 중국 사람이 일본에 건너와 땅을 파서 그것을 찾아냈다 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 전에 사람을 보내 묻어 두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물며 홍법은 일본 사람이다. 제 나라 산에 미리 사람을 보내 삼고를 묻어 두는 일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처지였다. 대성인은 「이러한 광란이 그 수가 많다」고 하시며, 이런 이야기들로써 홍법을 부처님 뜻에 맞는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맺으신다.

이 삼고 이야기에 대해서는 법화경 견보탑품의 육난구이(六難九易)를 함께 떠올릴 수 있다.

若し須弥を接って、他方の無数の仏土に擲げ置かんも、亦未だ難しと為ず。若し仏の滅後に悪世の中に於て、能く此の経を説かん、是れ則ち難しとす

만일 수미산을 집어 들어 다른 곳의 무수한 불국토에 던져 놓는다 해도 아직 어렵다 하지 않는다. 만일 부처님 멸후 악세 가운데에서 능히 이 경을 설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렵다 한다

『묘법연화경』 견보탑품 제11, T9 no.262

수미산을 던지는 일도 법화경에서는 「쉬운 일」에 든다. 하물며 작은 삼고 하나를 바다 건너로 던진 일이 무슨 대단한 덕이겠는가. 법화경이 참으로 어렵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 멸후 악세에 이 경을 설하는 일이다. 영험의 크기가 아니라 경을 지니고 넓히는 실천이 법화경의 저울이다. 대성인이 홍법의 광혹을 꾸짖으시는 이 대목을 대성인 자신의 삶과 겹쳐 읽으면, 그 대비는 더욱 선명하다. 대성인은 기적을 내세우신 일이 없고, 오직 악세에 이 경을 설하여 두 번의 유죄와 다쓰노구치의 법난을 겪으셨다.

홍법의 판정 — 『십주심론』의 「희론」과 「무명의 변역」

이 장에서 대성인이 거듭 문제 삼으시는 홍법의 「희론」과 「무명의 변역」은 홍법의 교판에서 나온다. 홍법은 『변현밀이교론』에서 불교를 현교와 밀교로 나누어, 현교는 응화신의 부처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한 얕은 가르침이고, 밀교는 법신 대일여래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그대로 설한 깊은 가르침이라 하였다. 그리고 천장 7년(830) 무렵 조정의 명으로 각 종이 종의를 올릴 때 지은 『비밀만다라십주심론』(『십주심론』) 10권과 그 요약인 『비장보약』 3권에서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는 단계를 열 가지로 세워 모든 가르침을 그 위에 배열하였다.

홍법이 세운 판정
제10비밀장엄심秘密莊嚴心진언
제9극무자성심極無自性心화엄
제8일도무위심一道無爲心천태 · 법화
제7각심불생심覺心不生心삼론
제6타연대승심他緣大乘心법상
제5발업인종심拔業因種心연각
제4유온무아심唯蘊無我心성문
제3영동무외심嬰童無畏心천상을 구하는 마음 · 외도
제2우동지재심愚童持齋心윤리 · 유교
제1이생저양심異生羝羊心범부의 본능적인 마음
밀교
현교
「법화경은 화엄경 · 대일경에 비하면 희론, 석존은 대일여래를 향하면 무명의 변역」(대성인의 요약, 305쪽)
도표 12 · 홍법의 십주심

이 체계에서 법화경을 의지하는 천태종은 제8 일도무위심에, 화엄종은 제9 극무자성심에, 진언종은 제10 비밀장엄심에 놓인다. 법화경은 화엄경보다도 아래인 셋째 자리로 떨어진다. 대성인이 「제일 진언 · 대일경, 제이 화엄, 제삼 법화 · 열반」이라 요약하신 것이 이것이다(305쪽). 그리고 앞의 단계는 뒤의 단계에서 보면 아직 참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희론」이며, 법화경의 교주 석존은 대일여래에 견주면 무명의 변두리에 있는 존재라는 판정이 나온다. 대성인은 이를 「황제와 포로와 같다」고 요약하셨다. 홍법은 또 『변현밀이교론』에서 『육바라밀경』의 오장(五藏) 비유를 들어 진언의 다라니장이 제호(醍醐)인데 천태가 이 제호를 「다투어 훔쳐」 법화경을 제호라 하였다고 하였다. 대성인이 제13장에서 「천태대사는 도둑이다, 진언의 제호를 훔쳐 법화경을 제호라 한다」는 홍법의 말을 드신 것이 이것이다.

제호를 훔쳤다는 홍법의 비난이 근거로 삼은 『육바라밀경』(『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은 당나라 반야(般若)가 8세기 말에 한역한 경으로, 6세기 말에 입멸한 천태대사의 시대에는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다. 천태대사가 보지도 못한 경에서 제호를 훔쳤다는 비난은 연대상 성립하지 않는다.

이 교판은 경문의 근거를 갖지 않는다. 법화경은 스스로 「여러 경 가운데 가장 그 위에 있다」 하고, 법사품에서 이미 설한 경 · 지금 설하는 경 · 앞으로 설할 경 가운데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대일경 어디에도 「법화경은 희론」이라는 말은 없다. 홍법의 판정은 경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홍법 자신의 사견에서 나온 것이다. 「본존문답초」에서 대성인이 홍법 등 세 대사에게 귀의하는 허물을 꾸짖으시며 대일경을 제일로 하는 주장에 경문의 근거가 없음을 밝히신 것도 같은 뜻이다(366~367쪽). 제28장에서 대성인이 영험담을 하나하나 무너뜨리신 것은, 이처럼 경문의 근거가 없는 판정을 영험의 권위로 덮고 있던 껍데기를 벗겨 내는 일이었다.

명성과 법의 정사 — 광혹이 오래 믿어진 까닭

그렇다면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왜 오랫동안 믿어졌는가. 사람들은 일상의 일에는 비판적이면서도 종교의 문제에 이르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홍법의 경우가 그 전형이다. 대성인의 파절에서 분명히 보이듯 불법에 관해서 홍법은 광혹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홍법이 뛰어난 서예가로, 문장가로, 여러 민간 전승의 주인공으로 이름이 높아지자, 세상 사람들은 그 교의까지 옳은 것이라는 묘한 착각에 빠졌다. 재능과 명성이 법의 정사를 대신한 것이다.

「본존문답초」에서도 홍법 · 자각 · 지증 세 대사가 대대의 천황과 신하들의 깊은 귀의를 받아 어리석은 사람들이 오로지 그들을 믿게 되었다는 사정이 다루어진다(368쪽). 그러나 열반경은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유계하였다. 명성과 신앙의 두께는 진리의 증거가 아니다. 이것이 제28장의 마지막 교훈이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홍법의 영험담은 기록 · 연호 · 연대 · 우주관 어디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 광혹이며, 설령 불신을 나타냈다 해도 법화경을 희론이라 하는 자는 열반경이 예언한 「마가 유루의 형상으로 부처가 되어 정법을 깨뜨리는」 모습 그대로다. 판정의 근거는 끝까지 경문이다.

제29장 진언 파절을 맺다
어서 321쪽 7~14행 · 第29章 真言破折を結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321쪽 7~14행
本文 · 어서 원문

されば此の真言.禅宗・念仏等やうやく・かさなり来る程に人王八十二代・尊成・隠岐の法皇.権の太夫殿を失わんと年ごろ・はげませ給いけるゆへに大王たる国主なれば・なにとなくとも師子王の兎を伏するがごとく、 鷹の雉を取るやうにこそ.あるべかりし上.叡山・東寺・園城・奈良七大寺.天照太神・正八幡・山王・加茂.春日等に数年が間・或は調伏・或は神に申させ給いしに二日・三日・だにも・ささへかねて佐渡国・阿波国・隠岐国等にながし失て終にかくれさせ給いぬ、 調伏の上首・御室は但東寺をかへらるるのみならず眼のごとくあひせさせ給いし第一の天童・勢多伽が頚切られたりしかば調伏のしるし還著於本人のゆへとこそ見へて候へ、 これはわづかの事なり此の後定んで日本国の諸臣万民一人もなく乾草を積みて火を放つがごとく大山のくづれて谷をうむるがごとく我が国・他国にせめらるる事出来すべし、

풀이

그러므로 이 진언 · 선종 · 염불 등이 차츰 겹쳐 오는 사이에, 인왕 82대 다카히라(尊成) 오키의 법황(隠岐の法皇)께서 권대부(権の太夫)님을 없애고자 여러 해 힘쓰셨느니라. 대왕인 국주이시니 아무렇지 않게도 사자왕이 토끼를 엎드리게 하듯, 매가 꿩을 잡듯 되었어야 할 터이며, 그 위에 예산 · 동사 · 온조사 · 나라 칠대사와 천조태신 · 정팔번 · 산왕 · 가모 · 가스가 등에 여러 해 동안 혹은 조복하고 혹은 신에게 기원하셨으나, 이틀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사도국 · 아와국 · 오키국 등에 유배되어 끝내 돌아가셨느니라. 조복의 우두머리인 오무로(御室)는 다만 동사를 내놓게 되었을 뿐 아니라, 눈처럼 아끼시던 제일의 천동(天童) 세타카(勢多伽)의 목이 잘렸으니, 조복의 결과는 「환착어본인(還著於本人)」 때문이라고 보이느니라. 이것은 작은 일이니라. 이 뒤에 반드시 일본국의 여러 신하와 만민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마른풀을 쌓아 불을 놓듯, 큰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우듯,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공격당하는 일이 일어나리라.

어구 풀이

人王八十二代・尊成・隠岐の法皇인왕 82대 다카히라 오키의 법황
고토바 상황(1180~1239). 다카쿠라 천황의 넷째 황자로 이름은 다카히라(尊成). 쓰치미카도 · 준토쿠 · 주쿄의 세 천황에 걸쳐 원정(院政)을 폈다. 호조 요시토키 추토의 원선(院宣)을 내려 승구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키로 유배되었다. 유배 직전에 출가하여 법황이 되었다.
権の太夫殿권대부님
호조 요시토키(1163~1224). 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집권. 건보 5년(1217) 우경권대부(右京権大夫)가 된 데서 이렇게 불린다.
師子王の兎を伏するがごとく、鷹の雉を取るやう사자왕이 토끼를 엎드리게 하듯, 매가 꿩을 잡듯
강자가 약자를 손쉽게 제압하는 비유. 국왕이 신하를 치는 것은 당연히 손쉬운 일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본존문답초」에서는 「매가 꿩을 잡고 고양이가 쥐를 먹는 것」에 견주고, 결과는 「고양이가 쥐에게 먹히고 매가 꿩에게 잡힌 것 같다」고 하셨다(371쪽).
東寺동사
간무 천황의 칙명으로 연력 15년(796) 헤이안경 정문인 라조몬(羅城門) 좌우에 좌대사 · 우대사 두 절이 세워졌는데 그 좌대사가 동사다. 홍인 14년(823) 사가 천황이 구카이에게 내려 진언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園城온조사
비와호 서쪽 기슭 오쓰에 있는 절로 미이데라(三井寺)라고도 한다. 덴지 · 덴무 · 지토 세 천황의 탄생수(誕生水)가 있다 하여 「미이(御井)」라 불렀다고 전한다. 당에서 돌아온 지증(엔친)이 9세기 중엽 이 절을 다시 일으켜 엔랴쿠사의 별원으로 삼았고, 정력 4년(993) 지증 문도 천여 명이 예산에서 온조사로 옮긴 뒤 산문(엔랴쿠사)과 사문(온조사)의 대립이 오래 이어졌다.
奈良七大寺나라 칠대사
도다이사 · 고후쿠사 · 간고사 · 다이안사 · 야쿠시사 · 사이다이사 · 호류사. 도읍이 나라에서 나가오카, 헤이안으로 옮겨 가면서 나라가 헤이안경의 남쪽에 있으므로 남도(南都)라 불렀다.
天照太神・正八幡천조태신 · 정팔번
천조태신은 황실의 조상신, 정팔번은 하치만 대보살로서 무가와 조정이 함께 받든 수호신이다. 대성인은 이 신들을 법화경을 수호하는 제천선신으로 보셨다.
山王산왕
히요시 산왕(日吉山王). 히요시는 당시 「히에」라 읽었다. 시가현 오쓰시 사카모토, 히에이산 동쪽 기슭에 있으며, 엔랴쿠사가 세워지자 예산의 지주신이라 하여 산왕이라 일컬어 받들었다.
加茂가모
가모 신사. 간무 천황이 헤이안으로 천도할 때 왕성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春日가스가
가스가 신사. 나라시 가스가노에 있다. 후지와라씨의 씨신이자 고후쿠사의 진수(鎭守)다.
調伏조복
진언의 수법으로 적이나 악인을 굴복시키거나 그 목숨을 빼앗기를 비는 기도. 승구의 난 때 조정은 막부 측, 특히 호조 요시토키를 조복하는 기도를 여러 절에 명하였다.
調伏の上首・御室조복의 우두머리 오무로
제59대 우다 천황이 출가하여 교토 서쪽 산기슭에 닌나사(仁和寺)를 세우고 그곳에 거처(御室)를 마련하여 산 데서 「오무로」라는 말이 생겼다. 그 뒤 법친왕들이 대대로 닌나사를 이어 오무로라 불렸다. 여기의 오무로는 승구의 난의 기도를 행한 고토바 천황의 둘째 황자 도조 법친왕(道助法親王)이다.
勢多伽세타카
사사키 야마시로노카미 히로쓰나(佐々木広綱)의 여섯째 아들로, 도조 법친왕의 시동(侍童)이었다. 승구의 난 뒤 숙부 노부쓰나(信綱)의 참소로 목이 베였다. 『오처경(吾妻鏡)』 승구 3년(1221) 7월 11일 조에 「오늘 야마시로노카미 히로쓰나의 아들 소동(세타카)을 닌나사에서 로쿠하라로 불러냈다. 이는 오무로 도조의 총애하는 아이다」라고 하고, 뒤에 그가 참수된 일을 적고 있다.
還著於本人환착어본인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의 글로 「도리어 본인에게 붙는다」고 읽는다. 정법을 지닌 사람을 저주하는 자는 도리어 그 저주를 자기가 입게 된다는 뜻이다.
乾草を積みて火を放つがごとく大山のくづれて谷をうむるがごとく마른풀을 쌓아 불을 놓듯, 큰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우듯
한번 일어나면 막을 수 없고 남김없이 휩쓸리는 재앙의 모습을 견준 말. 「한 사람도 남김없이(一人もなく)」와 함께, 타국 침핍의 화가 나라 전체에 미칠 것을 경고하신 표현이다.

진언 파절을 맺는 자리

이 장에서 대성인은 진언에 대한 책파를 맺으신다. 첫머리의 「그러므로(されば)」는 제24장 이래의 논증 전체를 받는 말이다. 중국 진언의 세 조사는 기우에 큰 바람을 불러들였고(제24장), 일본 진언의 홍법은 남의 비를 빼앗고 밤중에 해가 떴다는 망어를 했으며 자각은 해를 쏘는 꿈을 길몽이라 하였다(제25장). 꿈과 영험은 법의 증거가 될 수 없고(제26 · 27장), 홍법의 영험담은 기록과 연대와 경문 어디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제28장). 이렇게 문증과 이증으로 진언을 파하신 뒤, 대성인은 마지막으로 누구나 기억하는 역사의 현증을 드신다. 대성인 당시로부터 약 55년 전에 일어난 승구의 난이다.

「진언 · 선종 · 염불 등이 차츰 겹쳐 오는 사이에」라는 말에도 뜻이 있다. 제6편은 주로 진언을 다루지만, 대성인은 「보은초」 제22장에서 나라 안의 방법으로 염불 · 선 · 진언을 함께 드셨다. 이 세 가지가 겹겹이 쌓여 일본 불교의 주류가 되어 가는 그 시기에 승구의 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조정이 마지막으로 의지한 것은 진언의 조복이었다.

승구의 난 — 1221년의 경과

초여름 장맛비에 불어난 우지강과 낡은 나무다리, 건너편 강기슭의 안개 낀 언덕 — 사람 없음
그림 · 초여름 장맛비에 불어난 우지강과 낡은 나무다리, 건너편 강기슭의 안개 낀 언덕 — 사람 없음

고토바 상황은 쓰치미카도 · 준토쿠 · 주쿄 세 천황에 걸쳐 원정을 편 실력자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3대 장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죽은 뒤 막부의 실권은 집권 호조 요시토키에게 있었고, 상황은 여러 해에 걸쳐 그를 쓰러뜨릴 준비를 하였다. 승구 3년(1221) 5월 15일, 상황은 교토에 있던 막부 측 무사 이가 미쓰스에(伊賀光季)를 쳐서 군사를 일으키고 요시토키 추토의 원선을 내렸다.

막부는 곧바로 군을 편성하여 동해도 · 동산도 · 북륙도의 세 길로 교토를 향해 올라왔다. 6월 14일 막부군은 우지(宇治)와 세타(勢多)의 방어선을 깨뜨리고 교토로 들어왔다. 상황이 군사를 일으킨 지 한 달 남짓, 실제 합전으로는 단 하루의 싸움으로 조정 쪽은 완패하였다. 그 결과 고토바 상황은 오키로, 준토쿠 상황은 사도로, 쓰치미카도 상황은 아와로 옮겨지고, 상황 측의 공경과 무사들이 처형되었다. 「본존문답초」는 이 일을 이렇게 전한다.

抑人王八十二代・隠岐の法王と申す王有き去ぬる承久三年太歳辛巳五月十五日伊賀太郎判官光末を打捕まします鎌倉の義時をうち給はむとての門出なり、やがて五畿七道の兵を召して相州鎌倉の権の太夫義時を打ち給はんとし給うところに還りて義時にまけ給いぬ、結句・我が身は隠岐の国にながされ太子二人は佐渡の国・阿波の国にながされ給う公卿七人は忽に頚をはねられてき

도대체 인왕 82대 오키의 법왕이라는 왕이 계셨느니라. 지난 승구 3년 신사 5월 15일 이가 다로 판관 미쓰스에를 치셨으니, 가마쿠라의 요시토키를 치시려는 출발이었느니라. 곧 오기칠도의 군사를 불러 상주 가마쿠라의 권대부 요시토키를 치시려 하셨는데 도리어 요시토키에게 지셨느니라. 끝내 자신은 오키국으로 유배되시고 태자 두 분은 사도국 · 아와국으로 유배되셨으며 공경 일곱 사람은 곧바로 목이 베였느니라

「본존문답초」, 371쪽

조정 쪽과 막부 쪽을 견주어 보면, 조정 쪽이 질 까닭이 없어 보였다. 첫째로 군과 신하의 차이가 있다. 국왕이 신하를 치는 것은 대성인의 말씀대로 「사자왕이 토끼를 엎드리게 하듯, 매가 꿩을 잡듯」 손쉬운 일이어야 했다. 둘째로 조정은 온갖 조복의 기도를 행하였다. 셋째로 조정은 신사들에 기원을 올렸다. 신하이면서 신불에 기원도 조복도 하지 않은 막부 군대가 손쉽게 이기리라고는 상식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단 하루의 싸움으로 조정이 완패하였다. 대성인은 그 까닭을 진언에 의지해 기도한 데서 찾으신다.

  1. 5월 15일고토바 상황이 이가 미쓰스에를 치고 요시토키 추토의 원선
  2. 5월 19일 무렵부터15단의 비법천태좌주 자원 · 동사 · 닌나사 오무로 · 온조사 장리 등 고승 41명, 반승 300여 명
  3. 막부군 동해도 · 동산도 · 북륙도로 상경
  4. 6월 8일오무로가 자신전에서 대법을 시작
  5. 6월 14일우지 · 세타 돌파, 교토 함락
  6. 이후고토바 → 오키, 준토쿠 → 사도, 쓰치미카도 → 아와, 공경 7인 참수, 세타카 참수
  7. 꼭 이레
「오무로의 기도 시작부터 패배까지 꼭 이레」(「본존문답초」 372쪽)
도표 13 · 승구의 난(1221)의 경과

열다섯 단의 비법과 오무로의 기도

본문은 조정이 「예산 · 동사 · 온조사 · 나라 칠대사」에 여러 해 동안 조복을 행하게 했다고 하신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본존문답초」에 자세하다. 조정은 천태좌주 자원(慈円), 진언의 장자, 닌나사의 오무로, 온조사의 장리를 비롯하여 칠대사 · 십오대사의 고승들을 동원하였고, 그 비법은 「홍법 · 자각 등 세 대사의 마음속 깊은 비밀의 대법」인 열다섯 단의 비법이었다.

此の十五壇の法と申すは一字金輪・四天王・不動・大威徳・転法輪・如意輪・愛染王・仏眼・六字・金剛童子・尊星王・太元守護経等の大法なり此の法の詮は国敵王敵となる者を降伏して命を召し取りて其の魂を密厳浄土へつかはすと云う法なり

이 열다섯 단의 법이라 하는 것은 일자금륜 · 사천왕 · 부동 · 대위덕 · 전법륜 · 여의륜 · 애염왕 · 불안 · 육자 · 금강동자 · 존성왕 · 태원 · 수호경 등의 대법이니라. 이 법의 요지는 나라의 적 · 왕의 적이 되는 자를 항복시켜 목숨을 거두고 그 혼을 밀엄정토로 보낸다는 법이니라

「본존문답초」, 372쪽

법을 행한 사람들도 가볍지 않았다. 천태좌주 자원, 동사, 오무로, 미이데라 조주인의 승정 등 41명과 반승 300여 명이었다. 법도 행자도 시대도 모두 무거웠다. 그런데도 조정은 즉시 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오무로의 기도였다. 오무로 도조 법친왕은 6월 8일 궁궐의 정전인 자신전(紫宸殿)에서 「일본국에 건너와 아직 세 번도 행해지지 않은 대법」을 시작하였는데, 같은 달 14일에 막부군이 우지 · 세타를 건너 교토로 들어왔다. 「본존문답초」는 「오무로가 기도를 시작하신 6월 8일부터 같은 14일까지 날을 세어 보면 이레가 차는 날이었다」고 하신다(372쪽). 이레를 기한으로 한 대법이 끝나는 바로 그날 조정이 무너진 것이다.

「본존문답초」에서 대성인은 「권대부님은 이 일을 미리 알지 못하였으니 기도도 없고 대비도 없었다」(372쪽)고 하신다. 기도를 한 쪽이 지고 기도를 하지 않은 쪽이 이겼다. 대성인은 그 까닭을 이렇게 밝히셨다.

然而日蓮小智を以て勘えたるに其の故あり所謂彼の真言の邪法の故なり僻事は一人なれども万国のわづらひなり一人として行ずとも一国二国やぶれぬべし況や三百余人をや国主とともに法華経の大怨敵となりぬいかでかほろびざらん

그런데 니치렌이 작은 지혜로 헤아려 보건대 그 까닭이 있느니라. 이른바 저 진언의 그릇된 법 때문이니라. 잘못된 일은 한 사람의 것이라도 만국의 근심이 되느니라. 한 사람이 행하여도 한 나라 두 나라가 무너질 터인데 하물며 삼백여 명이랴. 국주와 함께 법화경의 큰 원수가 되었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본존문답초」, 372쪽

세타카의 죽음과 환착어본인

본문은 조복의 우두머리 오무로의 운명을 특별히 드신다. 오무로는 동사를 내놓게 되었을 뿐 아니라, 눈처럼 아끼던 제일의 천동 세타카가 목이 잘렸다. 세타카는 사사키 히로쓰나의 여섯째 아들로, 출가하여 닌나사에서 오무로의 총애를 받던 소년이었다. 아버지 히로쓰나가 상황 편에 섰기에 난 뒤에 처벌을 받게 되었고, 『오처경』은 승구 3년 7월 11일 그가 닌나사에서 로쿠하라로 불려 나갔고 뒤에 참수되었다고 적는다. 「본존문답초」는 막부군이 「오무로의 어소에 밀고 들어가 가장 아끼던 제자인 어린아이 세타카라는 이를 끌어내어 끝내 목을 베었다」 하고, 「오무로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죽고 아이도 죽었다. 이 기도를 믿은 사람은 몇천만인지 모를 만큼 죽었다」고 전하신다.

三院をば三国へ流罪し奉りぬ又公卿七人は忽に頚をきる、しかのみならず御室の御所に押し入りて最愛の弟子の小児勢多伽と申せしをせめいだして終に頚をきりにき御室思いに堪えずして死に給い畢んぬ母も死す童も死す、すべて此のいのりをたのみし人いく千万といふ事をしらず死にきたまたまいきたるもかひなし

세 상황을 세 나라로 유배하였고 또 공경 일곱 사람은 곧바로 목을 베었느니라. 그뿐 아니라 오무로의 어소에 밀고 들어가 가장 아끼던 제자인 어린아이 세타카라는 이를 끌어내어 끝내 목을 베었으니, 오무로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돌아가셨느니라. 어머니도 죽고 아이도 죽었느니라. 이 기도를 믿었던 사람은 몇천만인지 모를 만큼 죽었고, 어쩌다 살아남은 이도 보람이 없었느니라

「본존문답초」, 372쪽

대성인은 이것을 「조복의 결과가 환착어본인 때문」이라 하신다. 환착어본인은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글로, 저주와 독약으로 남을 해치려 하는 자에게 그 해가 도리어 본인에게 붙는다는 뜻이다. 사명 지례는 『관음의소기』 권4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풀었다.

還著本人とは、凡そ呪毒薬乃ち鬼法を用いて人を害せんと欲するに、前人邪念ならば方に其の害を受く。若し能く正念ならば還って本人に著きなん

「도리어 본인에게 붙는다」는 것은, 무릇 저주나 독약이나 귀신의 법을 써서 남을 해치려 할 때, 상대가 삿된 생각을 품고 있으면 그 해를 받지만, 만일 바른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도리어 본인에게 붙는다는 것이다

사명 지례 『관음의소기』 권4 —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곧 남을 해치려는 저주가 상대에게 통하느냐 되돌아오느냐는 상대가 바른 생각을 지녔느냐에 달려 있다. 승구의 난에서 진언의 조복은 막부를 겨냥했으나, 그 화는 조복을 명한 상황과 조복을 행한 오무로에게 돌아갔다. 제25장에서 대성인이 아수라가 일천을 쏘자 그 화살이 되돌아와 제 눈에 꽂혔다고 하신 것도 이 도리를 미리 보이신 것이었다. 조복을 당한 쪽은 이기고 조복을 행한 쪽이 도리어 유배되고 목숨을 잃었다는 데에 대성인의 판정이 담겨 있다.

신들의 기원도 통하지 않았다 — 산왕 · 가모 · 가스가

조정은 조복과 함께 천조태신 · 정팔번 · 산왕 · 가모 · 가스가 등의 신들에게도 기원하였다. 천조태신은 황실의 조상신이고 정팔번은 무가와 조정이 함께 받든 하치만 대보살이다. 산왕은 히에이산 동쪽 기슭 사카모토의 히요시 산왕으로, 엔랴쿠사가 세워진 뒤 예산의 지주신으로 받들어졌다. 가모 신사는 간무 천황이 헤이안으로 천도할 때 왕성의 수호신으로 삼은 신사이고, 가스가 신사는 후지와라씨의 씨신이자 고후쿠사의 진수다. 곧 황실 · 무가 · 예산 · 왕성 · 섭관가 · 남도를 지키는 신들이 모두 동원된 것이다.

또 조복을 맡은 절들 가운데 나라 칠대사에 관해 니치칸 상인은 「보은초 문단」에서 이렇게 풀었다.

南都は奈良の七大寺なり、棟梁は東大寺・興福寺なり、ゆえに註には但二寺を標するなり、四箇の大寺というもこれなり。延暦三年十一月奈良の都を長岡に遷す。同十三年十月二十一日に長岡を平安城に遷す、奈良は平安城の南なりゆえに南都という

남도는 나라의 칠대사이다. 그 우두머리는 도다이사 · 고후쿠사이므로 주석에서는 다만 두 절을 내세운다. 「사개(四箇)의 대사」라 하는 것도 이것이다. 연력 3년 11월 나라의 도읍을 나가오카로 옮기고, 같은 13년 10월 21일 나가오카를 헤이안성으로 옮겼다. 나라는 헤이안성의 남쪽이므로 남도라 한다

니치칸 상인 「보은초 문단」 — 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그런데도 신들은 조정을 지키지 않았다.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신들은 법화경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제천선신이며, 나라가 정법을 버리고 법화경의 원수가 되면 그 나라를 지키지 않고 떠나간다. 「입정안국론」에서 밝히신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떠난다」는 원리다. 「본존문답초」에서도 대성인은 「국주가 되는 일은 크든 작든 모두 범왕 · 제석 · 일월 · 사천의 헤아림이니, 법화경의 원수가 되기로 정해지시면 곧 다스려 벌하리라고 맹세하셨다」(373쪽)고 하셨다. 진언의 조복으로 법화경의 원수가 된 조정을 신들이 지키지 않은 것은 경문대로의 결과였다.

세 번째 — 진언 조복의 역사가 가리키는 것

「본존문답초」에서 대성인은 진언의 조복이 나라의 화를 부른 일이 승구의 난만이 아니라고 하신다. 앞서 인왕 81대 안토쿠 천황 때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일문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조복하려고 예산을 씨사(氏寺)로 삼고 산왕을 씨신으로 의지하였으나, 안토쿠 천황은 서쪽 바다에 가라앉고 천태좌주 메이운(明雲)은 요시나카에게 살해되었으며 일문이 모두 한꺼번에 멸망하였다. 승구의 난은 그 두 번째이며, 지금 몽골에 대한 조복은 세 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随つて人王八十一代・安徳天皇に太政入道の一門与力して兵衛佐頼朝を調伏せんがために、叡山を氏寺と定め山王を氏神とたのみしかども安徳は西海に沈み明雲は義仲に殺さる一門・皆一時にほろび畢んぬ、第二度なり今度は第三度にあたるなり

따라서 인왕 81대 안토쿠 천황께 태정입도의 일문이 힘을 보태어 효에노스케 요리토모를 조복하기 위하여 예산을 씨사로 정하고 산왕을 씨신으로 의지하였으나, 안토쿠는 서쪽 바다에 가라앉고 메이운은 요시나카에게 살해되고 일문이 모두 한때에 멸망하고 말았느니라. (승구의 일은) 두 번째이니라. 이번은 세 번째에 해당하느니라

「본존문답초」, 373쪽

日蓮がいさめを御用いなくて真言の悪法を以て大蒙古を調伏せられば日本国還つて調伏せられなむ還著於本人と説けりと申すなり

니치렌의 간언을 쓰지 않으시고 진언의 악법으로 대몽골을 조복하신다면 일본국이 도리어 조복당하리라. 「환착어본인」이라고 설하셨다고 말하느니라

「본존문답초」, 373쪽
  1. 첫째
    조복한 쪽안토쿠 천황 · 다이라씨 일문(예산을 씨사, 산왕을 씨신으로)
    대상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결과안토쿠는 서해에 가라앉고 메이운은 요시나카에게 살해, 일문 멸망
  2. 둘째
    조복한 쪽고토바 상황 · 조정(15단의 비법)
    대상호조 요시토키
    결과세 상황 유배, 오무로의 천동 세타카 참수
  3. 셋째
    조복한 쪽대성인 당시, 진언사들
    대상몽골
    결과대성인의 경고「일본국이 도리어 조복당하리라 — 환착어본인」(「본존문답초」 373쪽)
환착어본인還著於本人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도표 14 · 진언 조복의 세 번

「본존문답초」는 이어 승구의 난 뒤의 사정도 전하신다. 진언의 대악법이 해를 거듭하며 차츰 관동으로 내려와 가마쿠라의 여러 당의 별당 · 공승이 되어 끊임없이 행해졌고, 본래 변방의 무사인 그들은 교법의 정사를 알지 못하여 다만 삼보를 받들어야 한다고만 여겨 자연히 이를 쓰게 되었으며, 예산 · 동사 · 온조사 · 칠대사의 좌주 · 별당이 모두 관동의 처분에 따르게 되니 막부도 오키의 법황처럼 대악법의 단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373쪽). 승구의 난에서 진언의 조복을 이긴 막부가, 이제는 그 진언을 받아들여 몽골을 조복하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은 일이다」 — 타국 침핍의 경고

승구의 난은 세 상황이 유배되고 공경이 처형된 일본사의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대성인은 그것을 「이것은 작은 일이다(これはわづかの事なり)」라고 하신다. 진언의 그릇된 법이 가져올 화에 견주면 승구의 난은 아직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뒤에 반드시 일본국의 여러 신하와 만민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마른풀을 쌓아 불을 놓듯, 큰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우듯, 다른 나라에게 공격당하는 일이 일어나리라.

참으로 엄한 말씀이다. 승구의 난은 일본 안에서 군과 신하가 다툰 일이었고, 화를 입은 것은 조정 쪽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성인이 예고하시는 것은 나라 전체가 다른 나라에 공격당하는 일이며, 그 화는 「여러 신하와 만민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미친다. 마른풀에 붙은 불, 무너져 골짜기를 메우는 큰 산이라는 비유는 한번 시작되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을 가리킨다.

「보은초」를 쓰신 건치 2년(1276)에는 이미 문영 11년(1274)의 첫 번째 몽골 내습이 있었다. 대성인은 보은초 제5편 「대성인의 국가 간효와 재난의 근원」에서 보았듯이 문응 원년(1260) 「입정안국론」 이래 세 번에 걸쳐 국가를 간효하시며 타국 침핍난을 예고하셨고, 문영 11년의 내습은 그 예고의 일부가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막부는 대성인의 간언을 쓰지 않고 진언사들에게 몽골 조복을 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은 일이다」는, 승구의 난의 교훈을 보지 못하고 같은 진언의 조복을 되풀이하는 나라를 향한 경고다. 이 말씀이 있은 지 다섯 해 뒤 홍안 4년(1281)에 두 번째 몽골 내습이 있었다.

이 무렵 대성인은 「종종어진무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かかる日蓮を用いぬるともあしくうやまはば国亡ぶべし、何に況や数百人ににくませ二度まで流しぬ、此の国の亡びん事疑いなかるべけれども且く禁をなして国をたすけ給へと日蓮がひかうればこそ今までは安穏にありつれども・はうに過ぐれば罰あたりぬるなり

이러한 니치렌을 쓰더라도 잘못 공경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물며 수백 명에게 미워하게 하고 두 번이나 유배하였느니라. 이 나라가 망할 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잠시 금하여 나라를 도와주소서」 하고 니치렌이 붙들고 있기에 지금까지는 안온하였으나, 도를 넘으면 벌이 내리는 것이니라

「종종어진무어서」, 919쪽

대성인은 나라의 멸망을 바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천에게 「잠시 금하여 나라를 도와주소서」 하고 붙들고 계신다고 하셨다. 「보은초」 제29장의 엄한 예고도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리는 말이 아니라, 진언에 의지하는 길을 멈추고 정법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간효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릇된 법이 버려지지 않는 한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경계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정법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입정안국」의 원리는 대성인의 생애를 꿰뚫는 근본 주제이기 때문이다.

진언 파절에서 지은보은으로

이 장으로 제24장부터 이어진 진언 파절이 맺어진다. 그리고 다음 제30장은 「이 일은 일본국 가운데 다만 니치렌 한 사람만이 알고 있느니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진언이 나라를 망치는 법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말하면 큰 난이 따를 것을 대성인은 미리 알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신명을 아끼지 않고 다만 무상도를 아낀다」는 법화경의 말씀과 「차라리 신명을 잃을지언정 가르침을 숨기지 말라」는 열반경의 유계에 따라, 이번에 목숨을 아끼면 어느 세상에 부처가 되고 어느 세상에 부모와 스승을 구하겠느냐 하고 결단하여 말하기 시작하셨다.

곧 제6편에서 진언의 그릇됨을 밝히신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성인이 왜 그 모든 대난을 무릅쓰고 말씀하셨는가, 그 말씀이 어떻게 부모 · 스승 · 삼보 · 국가의 은혜를 갚는 일이 되는가를 밝히는 다음 편의 전제가 된다. 진언 파절은 그대로 보은의 실천이었다. 「보은초」라는 제호 아래에 이 긴 진언 파절이 놓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승구의 난에서 진언의 조복이 조복한 쪽에 돌아온 것은 「환착어본인」의 경문 그대로의 현증이다. 대성인은 그것을 「작은 일」이라 하시며, 진언에 의지하는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공격당할 더 큰 화를 경고하셨다. 이 경고는 나라의 멸망을 바라는 말이 아니라 정법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는 간효이며, 그 간효를 목숨 걸고 하신 것이 곧 대성인의 지은보은이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제6편의 다섯 장은 하나의 물음을 여러 방향에서 비춘다. 영험과 꿈은 법의 바름을 증명하는가. 진언가들은 「홍법의 비」, 밤중에 뜬 해, 해를 쏘아 맞힌 꿈, 입이 열려 금색 비로자나가 된 기적, 바다 건너에서 던져 고야산에 떨어진 삼고를 진언이 부처님 뜻에 맞았다는 증거로 내세웠다. 대성인은 그것들을 세 겹으로 다루셨다.

첫째로, 그 현증들을 그대로 받아 그것이 실은 「악한 현증」임을 보이셨다(제25장). 세 이레를 빌고도 비 기운조차 없다가 천자의 어폐 뒤에 내린 비를 빼앗은 일, 이십구 겁 동안 없던 밤의 해라는 망어, 내외전 어디에도 길몽이라 한 곳이 없는 해를 쏘는 꿈은 진언이 법화경과 교주 석존을 거스른 표지였다.

둘째로, 원리로 답하셨다(제26 · 27장). 선도의 꿈이 법화경 방편품과 『무량의경』 앞에서 무너졌듯이 한 종의 개조가 꾼 꿈은 법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외도의 신통, 광택의 감응, 그리고 천태 · 전교의 기우조차 법의 정사를 증명하는 근거가 아니며, 「불법의 사정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 판정의 기준은 그 사람이 남긴 법문, 곧 법화경을 「희론」이라 하고 석존을 「무명의 변역」이라 한 홍법의 붓에 있다.

셋째로, 영험담 그 자체를 검증하셨다(제28장). 날짜도 기록도 없는 역병과 밤의 해, 우주관 안에서도 성립하지 않는 천변, 영산에서 법화경을 들었다면서 법화경을 희론이라 한 모순, 연호도 왕도 없는 「대사」, 전교 · 의진을 제쳐 두고 반쯤 제자인 원징을 부른 부자연스러움, 「면문」이라는 거짓 글의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 「마가 불신을 나타내 정법을 깨뜨린다」는 열반경의 예언. 기적이 진짜였다고 양보해도, 부처의 모습으로 부처의 경을 깎아내리는 자는 경이 말한 마에 해당한다.

그리고 제29장에서 대성인은 승구의 난이라는 역사의 현증으로 진언 파절을 맺으셨다. 조복을 명한 쪽과 행한 쪽에 화가 돌아온 「환착어본인」, 그리고 「이것은 작은 일이다」라는 엄한 경고. 진언의 조복을 되풀이하는 나라는 다른 나라에게 공격당하는 더 큰 화를 입게 되리라는 이 예고는, 정법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라는 「입정안국」의 간효 그 자체였다.

다음 제7편 「지은보은과 제목의 간심」에서 대성인은 「이 일은 일본국 가운데 다만 니치렌 한 사람만이 알고 있느니라」라는 말로, 이 모든 것을 알고서도 왜 목숨을 걸고 말씀하셨는가를 밝히신다. 진언 파절은 대성인에게 부모 · 스승 · 삼보 · 국가의 은혜를 갚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옛 스승 도젠보에 대한 보은과, 법화경 한 부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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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보은초」 · 「선시초」 · 「본존문답초」 · 「창법화제목초」 · 「시모야마어소식」 · 「삼삼장기우사」 · 「종종어진무어서」 — 일본어판 어서전집
  • 『묘법연화경』 방편품 · 견보탑품 · 관세음보살보문품 · 여래신력품, T9 no.262
  • 『무량의경』, T9 no.276
  • 『대반열반경』 사의품, T12 no.374
  • 『법화문구』, T34 no.1718
  • 『대지도론』(용수)
  • 선도 『관무량수경소』 · 『왕생예찬』 · 『관념법문』
  • 구카이 『반야심경비건』 · 『변현밀이교론』 · 『비밀만다라십주심론』 · 『비장보약』
  • 니치칸 상인 「보은초 문단」(해설서를 통한 재인용)

연구

  • Ryūichi Abé, The Weaving of Mantra: Kūkai and the Construction of Esoteric Buddhist Discours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 Paul Groner, Saichō: The Establishment of the Japanese Tendai School, Berkeley Buddhist Studies Series, 1984
  • Edwin O. Reischauer (tr.), Ennin's Diary: The Record of a Pilgrimage to China in Search of the Law, Ronald Press, 1955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On Repaying Debts of Gratitude」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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