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 三身

삼신

대승의 전개

三身「박칼리 경」 · 『유마경』 · 『섭대승론』 · 『법화문구』 · 「제법실상초」 · 「총감문」 · 『어의구전』

라자가하의 한 도공의 작업장에, 박칼리라는 비구가 병들어 누워 있었다. 그는 출가하기 전부터 부처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늘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고 싶어 했고, 이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소원은 단 하나, 세존을 한 번 더 뵙고 그 발에 예배하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석존이 몸소 찾아왔다. 박칼리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석존은 그대로 누워 있으라 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만두어라, 박칼리여. 이 썩어 갈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 박칼리여,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본다.」 부처를 보고 싶어 하는 제자에게, 부처는 자기 몸이 아니라 법을 가리켰다.

부처란 누구인가. 이 물음에는 두 가지 답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기원전 5세기경 북인도에서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마흔 해 남짓 법을 설하다가 여든 살에 쿠시나라의 사라나무 숲에서 숨을 거둔 한 사람이라는 답이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깨달은 진리, 그 사람을 부처로 만든 법이라는 답이다. 앞의 답에 서면 부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뒤의 답에 서면 부처는 사라진 적이 없다. 석존의 입멸 뒤 불교는 이 두 답 사이에서 오랫동안 부처의 몸을 물었다.

이 물음은 단지 신앙의 대상을 정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부처의 몸이 무엇이냐에 따라 성불이 무엇인지가 달라진다. 부처가 서른두 가지 뛰어난 모습(삼십이상)을 갖춘 특별한 몸이라면, 성불은 그런 몸을 얻는 것이고,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수행 끝에야 가능하다. 부처가 진리 자체라면, 성불은 그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진리는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부처가 진리를 깨닫는 지혜이고, 그 지혜로 중생을 구하는 자비의 움직임이기도 하다면 — 부처는 한 몸으로 셋을 갖춘 존재가 된다.

불교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의 삼신(三身)으로 정리했다. 법신은 부처가 깨달은 진리 그 자체, 보신은 그 진리를 깨달은 지혜와 수행의 과보로 얻은 공덕의 몸, 응신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저마다의 근기에 맞추어 이 세상에 나타난 몸이다. 그러나 이 셋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 셋은 서로 다른 부처인가, 한 부처의 세 면인가, 어느 것이 근본인가, 어느 것이 영원한가 — 는 학파마다 달랐다. 그리고 법화경 여래수량품은 이 모든 논의를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이라는 한 구절로 뒤흔들었다.

이 페이지는 삼신이라는 개념이 걸어온 길을 여섯 부로 나누어 읽는다. 1부는 석존과 부처의 몸 — 늙어 가는 몸과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 2부는 부파의 부처 — 끝없는 색신을 말한 대중부와, 태어난 몸과 법의 몸을 나눈 설일체유부. 3부는 대승의 삼신 — 『유마경』의 「여래의 몸은 곧 법신」, 『범망경』의 노사나, 유식의 자성신 · 수용신 · 변화신. 4부는 법화경과 천태의 삼신 — 수량품과 「한 몸이 곧 세 몸」, 보신을 중심에 둔 삼신론, 그리고 「보신은 상주하는가」를 둘러싼 덕일과 전교의 논쟁. 5부는 대성인의 삼신 — 「우리 몸은 법신, 우리 마음은 보신, 우리 몸짓은 응신」. 6부는 무작삼신 — 「범부는 체의 삼신이요 본불이다」라는 「제법실상초」의 말씀과 『어의구전』의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다」이다.

  1. 석존「yo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여래의 이름은 법신(dhammakāya)」
  2. 부파대중부「如來色身實無邊際」여래의 색신은 실로 끝이 없다유부생신과 오분법신
  3. 대승 경전「如來身者 即是法身」여래의 몸은 곧 법신(『유마경』)노사나와 천 석가(『범망경』)
  4. 유식자성신 · 수용신 · 변화신(『섭대승론』)
  5. 천태 · 전교「一身即三身名為祕 三身即一身名為密」한 몸이 곧 세 몸임을 비라 하고, 세 몸이 곧 한 몸임을 밀이라 한다「無作の三身は覚前の実仏」무작의 삼신은 꿈에서 깨어난 자리의 참된 부처
  6. 니치렌 대성인「凡夫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ぞかし」범부는 체의 삼신이요 본불이다「無作の三身とは末法の法華経の行者なり」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다
도표 1 · 삼신 사상의 계보
1부 석존과 부처의 몸「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

붓다와 여래 — 이름이 말하는 것

부처, 곧 붓다(buddha)는 「깨달은 이」, 「눈뜬 이」라는 뜻이다. 석존은 자신을 가리킬 때 흔히 여래(如來, tathāgata)라는 말을 썼다. 「그와 같이(tathā) 온(āgata) 이」 또는 「그와 같이 간(gata) 이」로 풀이되는 이 말을, 한역 경전은 「진여에서 온 이」라는 뜻으로 「여래」라 옮겼다. 붓다와 여래라는 이름은 모두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룬 일 — 깨달음과 진리에 이름 — 을 가리킨다.

그러면서도 초기 경전은 부처의 몸을 특별하게 묘사했다. 『디가 니까야』의 「삼십이상경(Lakkhaṇa sutta)」(DN 30)은 위대한 사람(mahāpurisa)의 몸에 서른두 가지 뛰어난 특징이 있다고 한다. 발바닥이 평평하여 땅에 고루 닿고, 발바닥에 천 개의 바퀴살 무늬가 있으며, 정수리가 솟아 있고,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는 것들이다. 그런데 같은 경은 이 서른두 가지 특징을 갖춘 이에게는 두 가지 길만 있다고 한다. 집에 머물면 온 세계를 정법으로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가 된다. 서른두 가지 모습은 부처만의 표지가 아니었다. 대성인도 뒤에 불상의 개안을 논하시면서 「다만 마음이 없으면 삼십이상을 갖추었어도 반드시 부처는 아니니, 인간과 천상에도 삼십이상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목회이상개안지사」, 468쪽). 부처를 부처로 만드는 것은 몸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있었다.

낡은 수레 — 늙고 병드는 여래의 몸

석존의 몸은 늙고 병드는 몸이었다.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DN 16)은 석존의 마지막 여행을 기록한다. 벨루와 마을에서 우기를 나던 석존은 죽음에 이를 듯한 심한 병에 걸렸다가 의지로 견뎌 낸다. 그리고 걱정하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Ahaṃ kho panānanda, etarahi jiṇṇo vuddho mahallako addhagato vayoanuppatto. Āsītiko me vayo vattati. Seyyathāpi, ānanda, jajjarasakaṭaṃ veḷamissakena yāpeti, evameva kho, ānanda, veḷamissakena maññe tathāgatassa kāyo yāpeti.

아난다여, 나는 이제 늙었고 나이 들었고 노쇠했으며, 인생의 여정을 지나 노년에 이르렀다.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굴러가듯이, 여래의 몸도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굴러가는 것 같다.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경」, DN 16

그 뒤 석존은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올린 공양을 들고 다시 심한 병을 얻었고, 쿠시나라의 사라나무 숲에서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누워 입멸했다. 경은 석존의 유해가 다비되고, 그 사리가 여덟 몫으로 나뉘어 여러 나라와 부족에 모셔졌다고 전한다. 여래의 몸은 다른 모든 몸처럼 늙고, 병들고, 죽고, 타서 재가 되었다. 핵심 개념 「무상」 1부에서 본 석존의 마지막 말 「모든 지어진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는, 여래 자신의 몸을 두고 한 말이기도 했다.

새벽, 안개 낀 사라나무 숲에 큰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사이 풀밭에 꽃잎이 흩어진 낮은 빈 돌 단이 놓이며, 숲 너머 먼 산 위로 하늘이 밝아 오는 금박 수묵화
그림 1 · 새벽의 사라나무 숲

박칼리 —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

그렇다면 여래가 사라진 뒤 제자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석존은 살아 있을 때 이미 그 답을 주었다. 글머리에서 본 박칼리의 이야기다. 『상윳따 니까야』의 「박칼리 경」은 석존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Alaṃ, vakkali, kiṃ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그만두어라, 박칼리여. 이 썩어 갈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 박칼리여,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본다.

『상윳따 니까야』 「박칼리 경」, SN 22.87

석존은 이어서 박칼리에게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서 본 문답을 건넨다.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느낌은, 지각은, 의지 작용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을 두고 「이것이 나다」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 「법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것, 다섯 무더기가 무상하고 괴로우며 「나」가 아님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 짧은 말은 부처를 보는 눈을 바꾸어 놓는다. 부처를 본다는 것은 부처의 몸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몸만 본다면 그것은 「썩어 갈 몸」을 보는 것일 뿐이다. 부처가 깨달은 법을 보는 사람이 참으로 부처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참으로 부처를 보는 사람은 그 안에서 법을 본다. 부처와 법은 둘이 아니다. 뒤에 「법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될 생각의 씨앗이 여기 있다.

박칼리부처의 모습을 보고 싶다발에 예배하고 싶다
석존「kiṃ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이 썩어 갈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yo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본다

법을 본다 = 오온이 무상하고 괴롭고 「나」가 아님을 본다(「박칼리 경」, SN 22.87)

도표 2 · 박칼리가 보고자 한 것과 석존이 보인 것

법과 율이 스승이다

입멸을 앞둔 석존은 아난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다.

Siyā kho panānanda, tumhākaṃ evamassa – 'atītasatthukaṃ pāvacanaṃ, natthi no satthā'ti. Na kho panetaṃ, ānanda, evaṃ daṭṭhabbaṃ. 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아난다여, 그대들에게 「가르침은 이제 스승을 잃었다, 우리에게 스승은 없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그대들에게 설하고 제정한 법과 율이 내가 간 뒤에 그대들의 스승이다.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경」, DN 16

석존은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다. 스승의 자리를 이을 것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었다. 이것은 박칼리에게 한 말과 같은 생각이다. 몸으로서의 스승은 떠나도, 법으로서의 스승은 남는다.

그리고 초기 경전에는 「법신」이라는 말 자체도 드물게나마 나온다. 그 대표적인 자리가 『디가 니까야』의 「세기경(Aggañña sutta)」(DN 27)에서 석존은 바라문 출신의 제자 와셋타에게, 여래에 대한 믿음이 뿌리내린 사람은 「나는 세존의 아들이요, 그 입에서 태어났고, 법에서 태어났고, 법이 지어 낸 법의 상속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Tathāgatassa hetaṃ, vāseṭṭha, adhivacanaṃ 'dhammakāyo' itipi, 'brahmakāyo' itipi, 'dhammabhūto' itipi, 'brahmabhūto' itipi.

와셋타여, 이것은 여래를 부르는 이름이니, 「법의 몸(dhammakāya)」이라고도, 「브라흐마의 몸」이라고도, 「법이 된 이」라고도, 「브라흐마가 된 이」라고도 한다.

『디가 니까야』 「세기경」, DN 27

여기서 「법의 몸」은 아직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여래를 기리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바라문들이 자신을 「브라흐마의 입에서 태어난 자」라고 자랑하는 데 맞서, 석존은 제자들이 「법에서 태어난 자」이며 여래는 「법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이름이 뒤에 삼신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 ①「yo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SN 22.87)부처를 보는 눈
  • ②「dhammo ca vinayo ca … so vo mamaccayena satthā」법과 율이 내가 간 뒤에 그대들의 스승이다(DN 16)부처를 잇는 것
  • ③「tathāgatassa … adhivacanaṃ 'dhammakāyo'」여래를 부르는 이름은 「법의 몸」(DN 27)부처의 이름

몸은 떠나도 법은 남는다

도표 3 · 석존이 남긴 세 마디

여래는 지금 여기서도 붙잡히지 않는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1부에서 보았듯이, 석존은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무기). 「아누라다 경」(SN 22.86)은 그 까닭을 한 걸음 더 밝힌다. 석존은 아누라다에게 묻는다. 여래를 물질이라고 보는가. 물질 안에 여래가 있다고 보는가. 물질과 떨어져 여래가 있다고 보는가. 아누라다는 모두 「아닙니다」라고 답한다. 석존은 이렇게 맺는다. 「아누라다여, 그대는 지금 이 생에서도 참으로, 진실로 여래를 붙잡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 여래가 죽은 뒤를 두고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여래도 다섯 무더기 어느 것으로도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죽은 뒤의 여래를 「있다」, 「없다」로 말할 수 없다. 여래의 몸이 사라졌다고 여래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여래의 몸이 있다고 여래가 거기 있는 것도 아니다. 석존은 부처의 몸에 대한 체계를 세우지 않았다. 다만 「몸만 보지 말라」, 「법을 보라」고 했을 뿐이다. 석존이 떠난 뒤, 제자들은 이 말 사이에 남은 물음 — 그렇다면 부처는 몸인가 법인가, 법이라면 법은 어떻게 「몸」인가 — 을 붙들고 씨름하게 된다.

2부 부파의 부처태어난 몸과 법의 몸

사리와 탑 — 몸을 향한 그리움

석존의 입멸 뒤, 불교도들은 부처의 몸이 남긴 것 — 사리(舍利, śarīra) — 을 탑에 모시고 예배했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은 처음 여덟 탑에 나뉘어 있던 사리를 다시 나누어 인도 곳곳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탑 둘레를 돌며 꽃과 향을 바치는 재가 신자들의 신앙은, 몸으로서의 부처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한편 출가 수행자들은 부처가 남긴 법을 정리하고 해석하며 부처를 이었다. 부처를 몸에서 찾는 흐름과 법에서 찾는 흐름이 나란히 흘렀다.

그리고 부파의 논사들은 묻기 시작했다. 석존의 몸은 다른 사람의 몸과 같았는가. 석존도 땀을 흘리고, 병을 앓고, 잠을 잤는가. 석존의 몸은 번뇌에서 벗어난 몸인가, 아직 번뇌의 세계에 속한 몸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부파는 크게 갈라졌다.

대중부 — 끝없는 부처의 몸

부처를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 본 것은 대중부(大衆部) 계통이었다. 설일체유부의 세우(世友)가 여러 부파의 주장을 정리한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은 대중부 등 네 부파가 함께 주장한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諸佛世尊皆是出世 一切如來無有漏法 … 如來色身實無邊際 如來威力亦無邊際 諸佛壽量亦無邊際 … 佛無睡夢

모든 부처 세존은 다 세간을 벗어난 이들이요, 모든 여래에게는 번뇌의 법이 없다. … 여래의 색신은 실로 끝이 없고, 여래의 위력도 끝이 없으며, 모든 부처의 수명도 끝이 없다. … 부처는 잠자거나 꿈꾸는 일이 없다.

세우 『이부종륜론』, 현장 역, T49 no.2031

대중부에게 부처의 몸은 처음부터 번뇌가 없는 몸(무루)이었고, 그 크기도 힘도 수명도 끝이 없었다. 그렇다면 쿠시나라에서 입멸한 석존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생을 위해 나타낸 모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생각은 뒤에 대승의 「응신」 · 「화신」 개념의 앞자리에 선다. 부처의 수명이 끝이 없다는 주장은, 4부에서 볼 법화경 수량품의 「수명이 한량없다」와도 멀리 이어진다.

설일체유부 — 생신은 번뇌의 세계에, 귀의는 법에

설일체유부는 반대로 석존의 태어난 몸을 사실대로 보았다. 유부의 논사들은 부처가 부모에게서 받아 태어난 몸, 곧 생신(生身)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번뇌의 세계에 속하는 법(유루법)이라고 보았다. 부처 자신에게는 번뇌가 없어도, 그 몸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애착이나 성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몸이 병들고 늙어 입멸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에 귀의하는 것인가. 천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은 이렇게 답한다.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은 부처의 태어난 몸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부처로 만든 무학(無學)의 법 — 더 배울 것이 없는 성자의 공덕 — 에 귀의하는 것이다. 몸은 부처를 이룬 이의 몸이기는 하지만, 그 몸 자체가 부처는 아니다.

이 「부처를 부처로 만드는 법」을 부파 불교는 다섯 가지로 헤아렸다. 계(戒) · 정(定) · 혜(慧) · 해탈(解脫) · 해탈지견(解脫知見), 곧 오분법신(五分法身)이다. 계율을 지키는 덕, 선정에 드는 덕, 진리를 아는 지혜의 덕, 번뇌에서 벗어난 덕, 그리고 자신이 벗어났음을 아는 지혜의 덕이다. 이것이 부처의 「법의 몸」이다. 1부의 「법의 몸」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구체적인 내용을 얻었다. 법신은 아직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부처라는 인격이 지닌 다섯 가지 덕의 모음이었다.

대중부「如來色身實無邊際」여래의 색신은 실로 끝이 없다「諸佛壽量亦無邊際」모든 부처의 수명도 끝이 없다「佛無睡夢」부처는 잠자거나 꿈꾸는 일이 없다(『이부종륜론』)부처의 몸은 처음부터 무루→ 입멸은 중생을 위해 보인 모습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설일체유부태어난 몸(생신)은 유루 · 늙고 병들어 입멸하는 사람의 몸귀의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부처를 이룬 무학의 법 (『구사론』)
오분법신(五分法身)
  •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
도표 4 · 부파의 두 부처관

두 갈래가 남긴 것

대중부는 부처의 몸을 끝없이 높였고, 설일체유부는 부처의 몸을 사람의 몸으로 두고 부처를 법에서 찾았다. 두 흐름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했지만, 같은 결과를 낳았다. 부처는 두 가지 몸으로 나뉘어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입멸하는 몸, 곧 생신(生身) 또는 색신(色身)이다. 다른 하나는 그 몸을 부처로 만드는 법의 몸, 곧 법신(法身)이다. 이 이신설(二身說)이 대승으로 넘어가면서 삼신설로 바뀌어 간다.

생신(生身) · 색신(色身)부모에게서 받은 몸삼십이상늙고 병들어 입멸한다사리와 탑의 신앙
법신(法身)부처를 부처로 만드는 법오분법신(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
이신설(二身說)대승의 삼신설로
도표 5 · 생신과 법신 — 두 몸의 시작
3부 대승의 삼신법의 몸, 누리는 몸, 나타난 몸

아난의 우유 — 『유마경』

대승 경전은 부파의 이신설을 받아들이면서, 그 무게 중심을 법신 쪽으로 크게 옮겼다. 『유마경』 제자품에는 이것을 보여 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석존이 가벼운 병을 앓자, 시자 아난다가 우유를 얻으러 한 바라문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유마힐 거사가 지나가다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세존께서 몸이 편찮으시어 우유를 구한다는 아난다의 대답에, 유마힐은 이렇게 꾸짖는다.

止止阿難 莫作是語 如來身者 金剛之體 諸惡已斷 衆善普會 當有何疾 當有何惱 … 如來身者 即是法身 非思欲身 佛爲世尊 過於三界 佛身無漏 諸漏已盡 佛身無爲 不墮諸數 如此之身 當有何疾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아난이여.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여래의 몸은 금강의 몸이라, 모든 악이 이미 끊어지고 모든 선이 두루 모였는데 무슨 병이 있겠으며 무슨 괴로움이 있겠소. … 여래의 몸은 곧 법신이요, 생각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오. 부처는 세존이라 삼계를 넘어섰고, 부처의 몸은 무루라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으며, 부처의 몸은 무위라 어떤 범주에도 떨어지지 않소. 이러한 몸에 무슨 병이 있겠소.

『유마힐소설경』 제자품 제3, 구마라집 역, T14 no.475

아난다는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아난이여, 거사의 말과 같다. 다만 부처가 다섯 가지 흐림의 악한 세상에 나와 이런 법을 나타내 행하여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 가서 우유를 얻되 부끄러워하지 말라(但爲佛出五濁惡世 現行斯法 度脫衆生 行矣阿難 取乳勿慚).」

이 장면에는 삼신론의 두 축이 다 들어 있다. 여래의 참된 몸은 법신이어서 병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래는 흐린 세상에 나와 병드는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병든 석존은 거짓이 아니라, 중생을 건지기 위해 「이런 법을 나타내 행하는」 것이다. 2부에서 설일체유부가 사실로 받아들였던 석존의 병은, 여기서 법신이 중생을 위해 나타낸 모습이 된다. 같은 경 방편품은 「부처의 몸이란 곧 법신이니,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에서 생기고,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에서 생긴다(佛身者卽法身也 從無量功德智慧生 從戒定慧解脫解脫知見生)」고 하여, 2부의 오분법신을 법신의 내용으로 이어받는다.

아난다세존께서 편찮으시어 우유를 구한다
유마힐「如來身者 即是法身 非思欲身」여래의 몸은 곧 법신이요 생각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다「如此之身 當有何疾」이러한 몸에 무슨 병이 있겠는가
하늘의 소리「但爲佛出五濁惡世 現行斯法 度脫衆生」다만 부처가 흐린 세상에 나와 이런 법을 나타내 행하여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참된 몸 = 법신 · 병든 모습 = 중생을 위해 나타낸 몸(『유마경』 제자품)

도표 6 · 아난의 우유 — 병든 부처는 누구인가

「색으로 나를 보려 하면」 — 『금강경』

반야경 계통의 경전은 1부의 박칼리 이야기를 더 날카롭게 밀고 나간다. 『금강반야경』은 수보리에게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묻고, 「볼 수 없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며, 그 이름이 삼십이상일 뿐입니다」라는 답을 이끌어 낸다. 경의 뒷부분에서는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이리라」고 한 뒤 게송으로 이렇게 맺는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다.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 역, T8 no.235

1부에서 본 「삼십이상경」도 서른두 가지 모습을 갖춘 이가 전륜성왕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서른두 가지 모습은 부처만의 표지가 아니었다. 『금강경』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습과 소리로 부처를 찾는 것 자체를 그릇된 길이라고 한다. 부처를 보려면 형상을 넘어 법을 보아야 한다. 경은 다른 대목에서 「여래란 어디서 오는 바도 없고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한다」고도 한다. 「여래」라는 이름의 「오고 감」조차 공으로 돌린 것이다.

연화대 위의 노사나 — 『화엄경』과 『범망경』

그런데 대승은 법신만 높인 것이 아니었다. 대승 경전에는 부처의 몸에 대한 또 하나의 상상이 펼쳐졌다. 오랜 세월 보살행을 닦은 과보로, 셀 수 없는 공덕이 빛나는 장엄한 몸을 얻은 부처다. 『화엄경』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연꽃 속의 세계, 곧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한가운데에서 무수한 보살들에게 법을 설한다. 이 부처는 쿠시나라에서 입멸한 석존처럼 사람의 눈에 보이는 몸이 아니라, 높은 경지의 보살들만 볼 수 있는 빛나는 몸이다.

『범망경』은 이 장엄한 부처와 이 세상의 석존을 하나의 구조로 이었다. 노사나불(盧舍那佛)은 천 잎 연꽃 받침 위에 앉아 이렇게 말한다.

我今盧舍那 方坐蓮花臺 周匝千花上 復現千釋迦 一花百億國 一國一釋迦 各坐菩提樹 一時成佛道

나 이제 노사나는 바야흐로 연꽃 받침에 앉아 있고, 둘레의 천 개 꽃잎 위에 다시 천 석가를 나타낸다. 한 꽃잎마다 백억의 나라가 있고, 한 나라마다 한 석가가 있어, 저마다 보리수 아래 앉아 한꺼번에 불도를 이룬다.

『범망경』 권하, 구마라집 역, T24 no.1484

연꽃 받침 위의 노사나는 근본의 부처이고, 천 개의 꽃잎 위 천 석가는 그 나타남이며, 다시 그 꽃잎마다 백억 나라의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을 보인다. 인도에서 태어나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이 거대한 구조의 가장 바깥에 있는 천백억 석가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렇게 하여 부처의 몸은 세 겹이 되었다. 형상을 넘어선 법의 몸, 공덕으로 장엄된 누리는 몸, 그리고 중생 앞에 나타난 몸이다.

밤, 넓고 잔잔한 연못 한가운데에 큰 연꽃 한 송이가 높은 줄기 위에 피어 있고, 그 둘레로 작은 연꽃과 연잎들이 물 위에 멀리까지 펼쳐지며, 보름달 빛이 물 위에 길게 비치는 금박 수묵화
그림 2 · 연못 한가운데의 큰 연꽃
  1. 가운데노사나(盧舍那)「方坐蓮花臺」바야흐로 연꽃 받침에 앉아
  2. 둘째 둘레「周匝千花上 復現千釋迦」둘레의 천 꽃잎 위에 다시 천 석가를 나타낸다
  3. 바깥 둘레「一花百億國 一國一釋迦」한 꽃잎마다 백억 나라, 한 나라마다 한 석가
  4. 인도에서 태어난 석존= 천백억 석가의 하나
「各坐菩提樹 一時成佛道」저마다 보리수 아래 앉아 한꺼번에 불도를 이룬다(『범망경』 권하)
도표 7 · 노사나와 천 석가

법성의 몸과 부모에게서 난 몸 — 『대지도론』

용수의 저술로 전하는 『대지도론』은 이 무렵의 대승 불신론을 두 몸으로 정리한다. 하나는 법성신(法性身), 곧 진리의 본성에서 생긴 몸으로, 시방에 두루 가득하여 끝이 없고 높은 경지의 보살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 다른 하나는 부모생신(父母生身), 곧 부모에게서 태어난 몸으로,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 사람처럼 늙고 병들며 입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2부에서 유부가 사실로 받아들였던 석존의 늙고 병든 몸은, 여기서 법성신이 중생을 위해 보인 몸이 된다. 부처가 병든 것도, 데바닷타가 굴린 돌에 발을 다친 것도, 중생을 위한 방편이라는 해석이 여기서 자리 잡는다.

자성신 · 수용신 · 변화신 — 유식의 삼신

삼신설을 처음으로 체계 있게 세운 것은 유식학파였다. 무착의 『섭대승론』은 부처의 지혜가 뛰어남을 세 가지 몸으로 설명한다.

由三種佛身 應知彼果智殊勝 一由自性身 二由受用身 三由變化身

세 가지 부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 과보인 지혜의 뛰어남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이요,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이요,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이다.

무착 『섭대승론』 피과지분, 현장 역, T31 no.1594

자성신은 모든 부처가 평등하게 지닌 진리의 몸, 곧 법신이다. 그 자체로는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수용신은 법의 즐거움을 「받아 누리는(受用)」 몸이다. 오랜 수행의 결과 얻은 공덕으로 장엄되어 정토에 머물며, 높은 경지의 보살들에게 대승의 법을 설한다. 『범망경』의 노사나, 『화엄경』의 연화장의 부처가 여기에 해당한다. 변화신은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범부와 이승을 위해 그들의 세계에 맞추어 「변화하여 나타난」 몸이다. 인도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입멸한 석존이 이것이다.

호법의 해석을 중심으로 엮은 『성유식론』은 수용신을 다시 둘로 나누었다. 자수용신(自受用身)은 부처 자신이 깨달음의 즐거움을 스스로 받아 누리는 몸이고, 타수용신(他受用身)은 십지의 보살들에게 법의 즐거움을 받아 누리게 하는 몸이다. 이렇게 하면 부처의 몸은 넷이 된다. 그리고 유식은 부처의 네 가지 지혜(사지)를 이 몸들과 짝지어, 부처의 몸을 곧 부처의 지혜가 나타난 것으로 설명했다. 6부에서 보듯이 창가학회 교학은 「자수용신」이라는 이름에 「구원원초 자수용신」이라는 전혀 새로운 무게를 싣는다.

「一由自性身 二由受用身 三由變化身」첫째 자성신, 둘째 수용신, 셋째 변화신(『섭대승론』)
자성신(自性身)모든 부처가 평등하게 지닌 진리의 몸 = 법신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수용신(受用身)법의 즐거움을 받아 누리는 몸정토에 머문다
자수용신(自受用身)부처 스스로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몸
타수용신(他受用身)십지 보살에게 법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몸
변화신(變化身)범부와 이승을 위해 그 세계에 맞추어 나타난 몸예: 인도에 태어난 석존

자수용 · 타수용의 구분(『성유식론』)

도표 8 · 유식의 삼신

이름의 혼선 — 「응신」은 어느 몸인가

삼신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같은 세 몸을 경론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고, 같은 이름이 경론마다 다른 몸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의정이 옮긴 『금광명최승왕경』 분별삼신품은 이렇게 말한다.

一切如來有三種身 云何爲三 一者化身 二者應身 三者法身

모든 여래에게는 세 가지 몸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화신(化身)이요, 둘째는 응신(應身)이요, 셋째는 법신(法身)이다.

『금광명최승왕경』 분별삼신품 제3, 의정 역, T16 no.665

이 경에서 화신은 범부와 이승을 위해 나타난 몸이고, 응신은 보살들을 위해 서른두 가지 모습을 갖추어 나타난 몸이다. 곧 『금광명경』의 「응신」은 유식의 수용신(타수용신)에 가깝고, 『금광명경』의 「화신」이 유식의 변화신에 해당한다. 그런데 천태와 대성인이 쓰는 법신 · 보신 · 응신의 체계에서 「응신」은 중생에 응하여 이 세상에 나타난 몸, 곧 유식의 변화신에 해당하고, 수행의 과보로 얻은 공덕의 몸은 「보신」이라 부른다. 「응신」이라는 같은 이름이 체계에 따라 서로 다른 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페이지에서 「응신」은 천태와 대성인의 쓰임을 따른다.

  • 산스크리트진리 그 자체의 몸dharmakāya수행의 공덕을 누리는 몸sāṃbhogikakāya중생에 맞추어 나타난 몸nairmāṇikakāya
  • 『섭대승론』진리 그 자체의 몸자성신수행의 공덕을 누리는 몸수용신(자수용 · 타수용)중생에 맞추어 나타난 몸변화신
  • 『금광명최승왕경』진리 그 자체의 몸법신수행의 공덕을 누리는 몸응신중생에 맞추어 나타난 몸화신
  • 천태 · 니치렌 대성인진리 그 자체의 몸법신수행의 공덕을 누리는 몸보신중생에 맞추어 나타난 몸응신

같은 「응신」이 『금광명경』에서는 보살을 위한 몸, 천태에서는 이 세상에 나타난 몸

도표 9 · 세 몸의 이름 대조

지어진 몸은 영원한가

대승의 삼신설은 1부에서 남은 물음 — 부처는 몸인가 법인가 — 에 「둘 다이며, 그 사이에 하나가 더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새로운 물음이 생겼다. 셋 가운데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법신은 진리 그 자체이므로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변화신 · 응신은 중생을 위해 나타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문제는 그 사이의 보신 · 수용신이다. 보신은 수행의 과보로 얻은 몸이다. 과보로 얻었다는 것은 시작이 있다는 뜻이다. 핵심 개념 「무상」에서 보았듯이 불교는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수행으로 「이루어진」 부처의 몸은 언젠가 사라지는가, 아니면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는가. 4부에서 보듯이 이 물음은 일본에서 법상종의 덕일과 천태종의 전교대사 사이의 논쟁으로 터져 나온다. 그리고 법화경 수량품은 「이루어진 부처」라는 생각 자체를 뒤흔든다.

4부 법화경과 천태의 삼신「한 몸이 곧 세 몸」

수량품 —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존은 세 번 「여래의 진실한 말을 믿으라」고 당부하고, 미륵 등이 네 번 거듭 청한 뒤에야(삼계사청) 이렇게 설하기 시작한다.

汝等諦聽 如來祕密神通之力 一切世間天人及阿修羅 皆謂今釋迦牟尼佛 出釋氏宮 去伽耶城不遠 坐於道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然善男子 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

너희는 자세히 들으라.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을.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는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선남자들이여,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한량없고 끝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 지났다.

『묘법연화경』 여래수량품 제16, T9 no.262

이 선언은 2부와 3부에서 쌓아 온 불신론 전체를 뒤흔든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인도에 태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응신 · 변화신이었고, 그 뒤에 영원한 법신이 있으며, 둘 사이에 수행의 공덕으로 장엄된 보신이 있었다. 그런데 수량품은 바로 그 석존 자신이 「실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했다」고 말한다. 가야성에서의 성불(시성정각, 始成正覺)은 방편이고, 참된 성불은 오백진점겁의 옛날이다(구원실성, 久遠實成). 이 세상에 나타난 응신이 그대로 구원의 부처다.

경은 이어서 이 부처가 그 뒤로 줄곧 이 사바세계에 머물며 법을 설해 왔고, 다른 세계에서도 중생을 이끌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타나는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如來所演經典 皆爲度脫衆生 或說己身 或說他身 或示己身 或示他身 或示己事 或示他事 諸所言說 皆實不虛

여래가 설한 경전은 모두 중생을 건지기 위한 것이니, 혹은 자기 몸을 설하고 혹은 다른 몸을 설하며, 혹은 자기 몸을 보이고 혹은 다른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 일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일을 보이지만, 말한 바는 모두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

같은 품

1부의 늙어 가는 석존, 3부의 연화대 위 노사나, 수많은 세계의 수많은 부처들 — 이 모두가 한 구원의 부처가 「자기 몸」으로 또는 「다른 몸」으로 나타난 모습이 된다. 수량품의 구원실성에 관해서는 계보 四 「구원실성」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법신의 무시무종과 보신 · 응신의 현본

법화경 이전에도 「부처는 영원하다」는 가르침은 있었다. 『열반경』은 「여래는 상주하여 변함이 없다」고 했고, 대승 경전들은 법신이 시작도 끝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수량품이 새로 밝힌 것은 무엇인가.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그 차이를 이렇게 짚으신다.

日蓮案じて云く二乗作仏すら猶爾前づよにをぼゆ、久遠実成は又にるべくも・なき爾前づりなり、其の故は爾前・法華相対するに猶爾前こわき上・爾前のみならず迹門十四品も一向に爾前に同ず、本門十四品も涌出・寿量の二品を除いては皆始成を存せり、雙林最後の大般涅槃経・四十巻・其の外の法華・前後の諸大経に一字一句もなく法身の無始・無終はとけども応身・報身の顕本はとかれず

니치렌이 생각하건대, 이승작불조차 오히려 이전경 쪽이 무겁게 여겨지는데, 구원실성은 또 견줄 수도 없이 이전경 쪽으로 기울어 있느니라. 그 까닭은 이전경과 법화경을 맞대어 보면 오히려 이전경 쪽이 강한 데다, 이전경뿐 아니라 적문 열네 품도 한결같이 이전경과 같고, 본문 열네 품도 용출 · 수량의 두 품을 빼고는 모두 시성(始成)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니라. 사라쌍수 숲에서 마지막에 설한 대반열반경 사십 권과 그 밖에 법화경 앞뒤의 여러 큰 경에는 (구원실성이) 한 글자 한 구절도 없으니, 법신의 무시무종은 설하되 응신 · 보신의 현본(顯本)은 설하지 않았느니라.

「개목초」, 198쪽

「법신의 무시무종은 설하되 응신 · 보신의 현본은 설하지 않았다.」 진리 그 자체가 영원하다는 것은 어느 경이나 말할 수 있다. 진리는 본래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진리를 깨달은 지혜의 몸(보신)과, 그 지혜로 중생 앞에 나타난 몸(응신)까지 영원하다고 밝힌 것 — 곧 보신과 응신의 「본지를 드러낸(顯本)」 것 — 은 오직 수량품뿐이다. 3부 끝에서 남은 물음, 「이루어진 부처의 몸은 영원한가」에 대해, 수량품은 「그 부처는 처음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답한 것이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개목초」 강의는 이 대목을, 법보응 삼신의 현본은 수량품에 한정되며 여러 대승경은 물론 법화경 적문까지도 시성정각을 설하고 있으므로 법화경 본문은 더욱 믿기 어렵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라고 풀이한다. 영원한 진리를 믿기는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 늙어 간 바로 그 부처가 실은 영원한 부처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 믿기 어려운 것을 수량품이 밝혔다.

이전의 여러 대승경 · 『열반경』수량품
법신무시무종 ○○
보신수행으로 이루어짐(시성)○
응신인도에서 처음 성불하고 입멸(시성)○
법신 · 보신 · 응신 모두「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한량없고 끝없다
「法身の無始・無終はとけども応身・報身の顕本はとかれず」법신의 무시무종은 설하되 응신 · 보신의 현본은 설하지 않았다(「개목초」 198쪽)
도표 10 · 무엇이 영원한가 — 이전 경과 수량품

천태의 세 여래

천태대사 지의는 『법화문구』에서 수량품의 제목 「여래수량품」을 풀이하며 삼신을 정리했다. 먼저 「여래」라는 이름에 대해 「여래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 두 부처, 세 부처, 본불 · 적불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如)」와 「래(來)」라는 두 글자로 세 여래를 하나하나 풀이한다.

법신여래는 이렇다. 법이 있는 그대로 그러한 경계(法如如의 境)는 원인도 결과도 아니어서, 부처가 있든 없든 그 성품과 모습이 늘 그러하다. 모든 곳에 두루하여 다름이 없는 것을 「여」라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르는 것을 「래」라 한다. 이것이 법신여래다. 보신여래는 이렇다. 법이 있는 그대로 그러함을 아는 지혜(法如如의 智)가, 있는 그대로 진실한 길을 타고 와서 묘각을 이룬다. 지혜가 이치에 들어맞으니, 이치를 따라 「여」라 하고 지혜를 따라 「래」라 한다. 이것이 보신여래이며, 그 이름을 노사나(盧舍那)라 하고 번역하면 「청정하고 가득함(淨滿)」이다. 응신여래는 이렇다. 있는 그대로의 지혜로 있는 그대로의 길을 타고 삼계에 와서 태어나 정각을 이루는 모습을 보인다. 수은이 순금과 어우러져 갖가지 형상을 칠할 수 있듯이, 공덕이 법신과 어우러져 곳곳에 응하여 나타나니, 여덟 가지 모습으로 도를 이루고 법륜을 굴리는 것이 응신여래다.

천태는 같은 곳에서 세 여래의 이름도 정리한다. 법신여래는 비로자나(毘盧遮那)라 하니 「모든 곳에 두루함(遍一切處)」이요, 보신여래는 노사나라 하니 「청정하고 가득함」이요, 응신여래는 석가문(釋迦文)이라 하니 「번뇌의 불타는 바위를 건너게 함(度沃焦)」이다. 3부의 『화엄경』 비로자나와 『범망경』 노사나와 인도의 석가모니가, 한 여래의 세 이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 법신여래법이 있는 그대로 그러한 경계(境)부처가 있든 없든 늘 그러하다이름비로자나(毘盧遮那) = 모든 곳에 두루함
  • 보신여래그 경계를 아는 지혜(智)가 묘각을 이룬다「理に従つて如と名け智に従つて来と名く」이치를 따라 여라 하고 지혜를 따라 래라 한다(「일념삼천이사」 409쪽 인용)이름노사나(盧舍那) = 「浄満」 청정하고 가득함
  • 응신여래지혜가 삼계에 와서 태어나 정각을 보인다수은과 순금의 비유이름석가문(釋迦文) = 번뇌의 불타는 바위를 건너게 함
「如来とは十方三世の諸仏・二仏・三仏・本仏・迹仏の通号なり」여래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 · 두 부처 · 세 부처 · 본불 · 적불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법화문구』 권9하, 「제법실상초」 인용)
도표 11 · 천태의 세 여래

한 몸이 곧 세 몸 — 비와 밀

천태의 삼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여래를 세 부처로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량품의 첫머리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을 천태는 이렇게 풀이했다. 대성인은 「삼대비법품승사」에서 그 풀이를 인용하신다.

寿量品に云く「如来秘密神通之力」等云云、疏の九に云く「一身即三身なるを名けて秘と為し三身即一身なるを名けて密と為す又昔より説かざる所を名けて秘と為し唯仏のみ自ら知るを名けて密と為す仏三世に於て等しく三身有り諸教の中に於て之を秘して伝えず」等云云

수량품에 이르기를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 하였고, 『법화문구』 제9에 이르기를 「한 몸이 곧 세 몸임을 이름하여 비(祕)라 하고, 세 몸이 곧 한 몸임을 이름하여 밀(密)이라 한다. 또 옛날부터 설하지 않은 것을 이름하여 비라 하고, 오직 부처만이 스스로 아는 것을 이름하여 밀이라 한다. 부처는 삼세에 걸쳐 똑같이 세 몸이 있으나, 여러 가르침 가운데서는 이를 감추어 전하지 않았다」 하였느니라.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한 몸이 곧 세 몸(一身即三身)」이고 「세 몸이 곧 한 몸(三身即一身)」이다. 법신 · 보신 · 응신은 세 부처가 아니라 한 부처의 세 면이다. 진리(법신)와, 그 진리를 깨달은 지혜(보신)와, 그 지혜가 중생을 향해 움직이는 자비(응신)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진리 없는 지혜는 없고, 지혜 없는 자비의 움직임은 없으며, 움직이지 않는 진리와 지혜는 중생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세 몸이 하나인 부처가 「삼세에 걸쳐 똑같이」 있다. 과거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미래에 사라질 것도 아니다. 이것이 이전의 여러 가르침에서는 감추어졌던 「비밀」이다.

같은 대목에서 천태는 「신통의 힘」을 세 몸의 작용으로 풀이한다. 「신(神)」은 본래 그대로(天然) 움직이지 않는 이치이니 법신이요, 「통(通)」은 막힘없이 두루 통하는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이니 보신이요, 「력(力)」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작용이니 응신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비밀」은 세 몸의 본체(體)를, 「신통의 힘」은 세 몸의 작용(用)을 나타낸다. 대성인은 「오타전부인답서」에서 이 『문구』의 「부처는 삼세에 걸쳐 똑같이 세 몸이 있다」는 글을 들어 「이것이야말로 즉신성불의 분명한 글」이라고 하신다(1008쪽). 6부에서 보듯이, 대성인은 「제법실상초」에서 이 「체의 삼신」과 「용의 삼신」의 구분에 전혀 새로운 뜻을 담으신다.

여래의 비밀(如來祕密) — 세 몸의 체(體)
「一身即三身なるを名けて秘と為し」한 몸이 곧 세 몸임을 비라 하고「三身即一身なるを名けて密と為す」세 몸이 곧 한 몸임을 밀이라 한다
신통의 힘(神通之力) — 세 몸의 용(用)
  • 신(神)움직이지 않는 이치= 법신
  • 통(通)두루 통하는 지혜= 보신
  • 력(力)자재한 작용= 응신
「仏三世に於て等しく三身有り諸教の中に於て之を秘して伝えず」부처는 삼세에 똑같이 세 몸이 있으나 여러 가르침에서는 감추어 전하지 않았다(『법화문구』 권9하,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인용)
도표 12 · 「如來祕密神通之力」 — 체와 용

보신을 중심으로 삼신을 논한다

그렇다면 수량품이 밝힌 구원의 부처는 세 몸 가운데 어느 몸을 중심으로 한 것인가. 천태는 『법화문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此品詮量 通明三身 若從別意 正在報身

이 품이 헤아려 밝히는 것은 통틀어서는 세 몸을 밝힌 것이요, 따로 그 뜻을 따르면 바로 보신에 있다.

천태대사 지의 『법화문구』 권9하, T34 no.1718

수량품은 통틀어서는 법 · 보 · 응 세 몸이 다 갖추어진 구원의 부처를 밝히지만, 따로 말하면 보신이 중심이다. 이것을 보신을 중심으로 삼신을 논한다는 뜻에서 「보중론삼(報中論三)」이라 한다. 왜 보신인가.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에 대한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보(報)」란 원인과 서원에 응답한다(因願酬報)는 뜻이다. 성불을 구하는 보살이 스스로 세운 서원을 이루려고 수행에 힘쓰고, 마침내 그 수행이 완성되어 서원이 이루어졌을 때 그 과보로 받는 몸이 보신이다. 그리고 보신은 위로는 법신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응신에 이어진다. 법신은 영원하지만 중생에게는 추상적이고, 응신은 가까이 볼 수 있지만 무상을 면하지 못한다. 그 둘을 이어 영원하면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부처의 생명을 나타내는 자리에 보신이 있다.

수량품의 구원의 부처가 보신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그 부처가 단지 영원한 진리(법신)가 아니라 진리를 깨달아 아는 살아 있는 지혜의 부처라는 뜻이다.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라고 말하는 그 「나」는, 진리를 깨달은 주체다. 6부에서 볼 「본유무작삼신」과, 그것을 구원원초 자수용신으로 읽는 창가학회 교학의 이해는 이 보중론삼의 전통 위에 서 있다.

「此品詮量 通明三身 若從別意 正在報身」이 품은 통틀어 세 몸을 밝히고, 따로는 바로 보신에 있다(『법화문구』 권9하)
법신영원한 진리 · 그러나 중생에게는 추상적
보신「因願酬報」원인과 서원에 응답한 몸진리를 깨달아 아는 지혜위로 법신, 아래로 응신에 이어진다
응신중생 앞에 나타난 몸 · 가까이 보이지만 무상을 면하지 못한다
도표 13 · 보신을 중심으로 — 보중론삼(報中論三)

네 가르침의 네 부처

천태는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의 네 가르침(화법사교)으로 나누었는데, 가르침마다 설해지는 부처의 몸도 다르다고 보았다. 고려의 체관이 정리한 『천태사교의』를 따라 요약하면 이렇다.

장교(소승)의 부처는 열응신(劣應身)이다. 키가 한 장 여섯 자인 보통 사람 크기의 몸으로, 나무 보리수 아래 풀을 깔고 앉아 성불을 보인다.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사는 세계(범성동거토)에 나타난다. 통교의 부처는 열응신을 띤 승응신(帶劣勝應身)이다. 한 장 여섯 자의 몸을 보이면서도 보는 이에 따라 끝없이 큰 몸으로도 보인다. 별교의 부처는 보신, 곧 타수용보신이다. 연화장세계의 칠보 보리수 아래 큰 보배 연꽃 자리에 앉아, 보살들에게 원만한 공덕의 몸을 보인다. 그 세계는 보살의 과보로 이루어진 실보무장애토다. 원교의 부처는 청정한 법신이다. 허공을 자리로 삼아 성불하며, 상적광토(常寂光土)에 머문다.

이 정리에서 부처의 몸은 가르침이 깊어질수록 커지고 높아진다. 천태는 이와 따로 부처와 중생이 머무는 국토를 범성동거토 · 방편유여토 · 실보무장애토 · 상적광토의 넷으로 나누었는데(사토), 대체로 응신은 앞의 두 국토에, 보신은 실보토에, 법신은 적광토에 짝지어진다. 대성인은 「치병대소권실위목」에서 이 차이를 이렇게 정리하신다. 이전경의 부처와 적문의 부처는 열응신 · 승응신 · 보신 · 법신으로 다르지만, 처음 성불했다는 점(시성)은 같다. 5부에서 이 대목을 자세히 본다.

  1. 장교열응신(劣應身)한 장 여섯 자의 몸 · 나무 보리수 아래 풀 자리범성동거토
  2. 통교대열승응신(帶劣勝應身)한 장 여섯 자이면서 끝없이 큰 몸으로도 보인다범성동거토
  3. 별교타수용보신(他受用報身)연화장세계 큰 보배 연꽃 자리실보무장애토
  4. 원교청정법신(淸淨法身)허공을 자리로 삼는다상적광토
사토(四土)
  • 범성동거토
  • 방편유여토
  • 실보무장애토
  • 상적광토
「劣応・勝応・報身・法身異れども始成の辺は同じきぞかし」열응 · 승응 · 보신 · 법신으로 다르지만 처음 성불했다는 점은 같으니라(「치병대소권실위목」 996쪽)
도표 14 · 네 가르침의 네 부처와 네 국토

세 몸 · 세 덕 · 세 진리

천태의 교학에서 삼신은 여러 「셋」의 체계와 짝을 이룬다. 부처의 세 몸(법신 · 보신 · 응신)은 열반의 세 덕(법신 · 반야 · 해탈)과 짝을 이루고, 세 가지 진리(중제 · 공제 · 가제)와 짝을 이루며, 중생이 지닌 세 가지 부처의 성품(정인 · 요인 · 연인 불성)과 짝을 이룬다. 법신은 진리 그 자체이므로 중도의 진리(중제)이고, 모든 중생이 본래 지닌 정인불성이 열린 것이다. 보신은 진리를 비추는 지혜이므로 반야이고, 모든 것이 공함을 꿰뚫는 공제와 짝을 이루며, 지혜를 일으키는 요인불성이 열린 것이다. 응신은 중생을 자유롭게 건지는 작용이므로 해탈이고, 갖가지 모습으로 임시로 나타나는 가제와 짝을 이루며, 선행이 지혜를 돕는 연인불성이 열린 것이다.

이 대응이 뜻하는 것은 크다. 부처의 세 몸은 부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 이미 「불성」으로, 「삼제」로 갖추어져 있다. 중생에게서는 셋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성품이고, 부처에게서는 그 성품이 세 몸으로 드러났다. 5부에서 대성인은 이것을 「중생에게 있을 때는 삼제라 하고, 불과를 이룰 때는 삼신이라 하니, 한 물건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신다.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5부에서 본 「삼도가 곧 삼덕」(「시문불승의」)도 같은 대응 위에 서 있다.

법신보신응신
열반의 세 덕법신반야해탈
세 진리중제공제가제
세 불성정인불성요인불성연인불성
삼도(뒤집히기 전)고(괴로움)번뇌업
세 여시체성상
「衆生に有る時には此れを三諦と云い仏果を成ずる時には此れを三身と云う一物の異名なり」중생에게 있을 때는 삼제라 하고 불과를 이룰 때는 삼신이라 하니 한 물건의 다른 이름이다(「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73쪽)
도표 15 · 세 몸과 여러 「셋」

보신은 상주하는가 — 덕일과 전교

3부 끝에서 남은 물음은 일본에서 격렬한 논쟁이 되었다. 9세기 초, 동국(東國)에서 활동하던 법상종의 학승 덕일(德一)은 천태의 교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 쟁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수량품의 부처, 곧 천태가 「보신을 중심으로」 한다고 본 구원의 보신이 상주하는가였다.

덕일의 논리는 유식의 입장에서 세운 것이었다. 법신은 움직이지 않는 진여의 이치이므로 그 자체로 상주한다(자성상주). 그러나 보신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從因生)」, 곧 보살이 발심하여 수행을 쌓은 결과 진여를 아는 지혜가 나타나 이루어진 부처다. 그러므로 보신은 성불한 「시작이 있고(有始)」, 성불한 뒤로는 「끝이 없는(無終)」 몸이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에 「이어져서 상주한다(相續常)」고는 할 수 있어도, 법신처럼 그 자체로 상주한다고는 할 수 없다. 3부 끝의 「지어진 몸은 영원한가」라는 물음에, 덕일은 「지어진 몸은 이어질 뿐 본래 상주하지는 않는다」고 답한 것이다.

이에 맞서 전교대사 사이초는 『수호국계장』을 지었다. 대성인은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에서 그 핵심 구절을 인용하신다.

故に守護国界章に云く「有為の報仏は夢中の権果前三教の修行の仏無作の三身は覚前の実仏なり後の円教の観心の仏」……此の釈を能く能く意得可きなり、権教は難行苦行して適仏に成りぬと思えば夢中の権の仏なれば本覚の寤の時には実仏無きなり

그러므로 『수호국계장』에 이르기를 「유위(有爲)의 보불은 꿈속의 방편의 과보요(주: 앞의 세 가르침을 수행하여 이룬 부처), 무작(無作)의 삼신은 깨어난 자리(覺前)의 참된 부처이니라(주: 뒤의 원교의 관심의 부처)」 하였느니라. …… 이 해석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 권교는 어렵고 괴로운 수행을 하여 겨우 부처가 되었다고 여기지만 꿈속의 방편의 부처이므로, 본각의 깨어 있을 때에는 참된 부처가 없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0쪽

강의는 이 논쟁을 이렇게 정리한다. 전교는 진여를 둘로 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진여(不變眞如)와 인연을 따라 움직이는 진여(隨緣眞如)다. 유식은 진여를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凝然)으로 보아 변화하는 현상과 떼어 놓았지만, 전교는 움직이지 않는 진여의 바다에 일어나는 물결이 곧 모든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보면 인연을 따라 움직이는 것도 진여의 움직임이므로 상주한다. 그리고 보신에도 두 가지가 있다. 수행으로 「지어진(有爲)」 보신은 꿈속의 방편의 몸이어서 무상하다. 그러나 「지어지지 않은(無作)」 보신, 처음부터 진여에 깨어 있는 본각의 보신은 상주한다. 덕일이 비판한 「시작이 있는 보신」은 권교의 꿈속의 보신이었을 뿐, 천태가 말한 수량품의 보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깨어난 자리(覺前)」의 「앞(前)」은 시간의 앞뒤가 아니라 「꿈속(夢中)」과 맞세운 말이다. 「깨닫기 전」으로 읽으면 범부와 같아져 전교의 뜻을 놓친다고 강의는 주의한다. 같은 대목은 이어서 「권교의 삼신은 아직 무상을 면하지 못하고, 실교의 삼신은 체도 함께하고 용도 함께한다(倶體倶用)」고 한다. 강의는 이 「구체구용」을 법 · 보 · 응 세 몸의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몸의 본체(체)이자 작용(용)이 되는 관계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무작의 삼신」이라는 말이 처음 무게를 얻는다. 수행을 쌓아 「만들어진」 부처는 아무리 오래 이어져도 꿈속의 부처다. 무상과 상주를 가르는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지어진 것인가, 본래 그러한 것인가」다. 「권교의 삼신은 아직 무상을 면하지 못한다」는 핵심 개념 「무상」 4부에서 읽었다. 그리고 6부에서 대성인은 이 「무작」을 「손대어 움직이지 않고, 꾸미지 않고, 본래 그대로」라고 풀이하신다.

덕일(법상종)법신: 진여의 이치 · 자성상주보신:「從因生」원인에서 생겼다시작이 있고 끝이 없다「相續常」이어져서 상주할 뿐진여는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凝然眞如)
전교(천태종, 『수호국계장』)진여에는 움직이지 않는 면(不變)과 인연을 따라 움직이는 면(隨緣)이 있다「有為の報仏は夢中の権果」유위의 보불은 꿈속의 방편의 과보「無作の三身は覚前の実仏なり」무작의 삼신은 꿈에서 깨어난 자리의 참된 부처(「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0쪽 인용)

무상과 상주를 가르는 것 —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지어진 것인가, 본래 그러한 것인가」

도표 16 · 보신은 상주하는가 — 덕일과 전교
5부 니치렌 대성인의 삼신「우리 몸은 법신, 마음은 보신, 몸짓은 응신」

「삼신을 풀이함」 — 「일념삼천이사」

대성인은 초기의 교학 저술인 「일념삼천이사」에서 일념삼천을 이루는 요소들을 차례로 풀이하신 뒤, 마지막 장에서 삼신을 풀이하신다. 대성인이 천태의 삼신론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三身釈の事、先ず法身とは大師大経を引いて「一切の世諦は若し如来に於ては即ち是第一義諦なり衆生顚倒して仏法に非ずと謂えり」と釈せり、然れば則ち自他・依正・魔界・仏界・染浄因果は異なれども悉く皆諸仏の法身に背く事に非ざれば善星比丘が不信なりしも楞伽王の信心に同じく般若蜜外道が意の邪見なりしも須達長者が正見に異らず、即ち知んぬ此の法身の本は衆生の当体なり、十方諸仏の行願は実に法身を証するなり。次に報身とは大師の云く「法如如の智如如真実の道に乗じ来つて妙覚を成ず智如の理に称う理に従つて如と名け智に従つて来と名く即ち報身如来なり盧舎那と名け此には浄満と翻ず」と釈せり、此れは如如法性の智如如真実の道に乗じて妙覚究竟の理智・法界と冥合したる時・理を如と名く智は来なり。

삼신을 풀이하는 일. 먼저 법신이란, 천태대사가 대경(열반경)을 인용하여 「일체의 세제(世諦)는 여래에게는 곧 제일의제이건만, 중생은 뒤바뀌어 불법이 아니라고 여긴다」고 풀이하였느니라. 그렇다면 나와 남, 의보와 정보, 마계와 불계, 물듦과 청정, 원인과 결과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다 제불의 법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므로, 선성 비구의 불신도 능가왕의 신심과 같고, 반야밀 외도의 마음속 사견도 수달 장자의 정견과 다르지 않으니라. 곧 알라, 이 법신의 근본은 중생의 당체이니라. 시방제불의 수행과 서원은 실로 법신을 증득하는 것이니라.

다음으로 보신이란, 천태대사가 이르기를 「법이 여여함을 아는 지혜가 여여하고 진실한 길을 타고 와서 묘각을 이룬다. 지혜가 여여한 이치에 들어맞으니, 이치를 따라 여(如)라 이름하고 지혜를 따라 래(來)라 이름한다. 곧 보신여래이니, 노사나라 이름하고 이곳 말로는 정만(淨滿)이라 옮긴다」고 풀이하였느니라. 이것은 여여한 법성의 지혜가 여여하고 진실한 길을 타고 와서, 묘각 구경의 이치와 지혜가 법계와 하나로 어우러졌을 때, 이치를 여라 이름하고 지혜를 래라 하는 것이니라.

「일념삼천이사」, 409쪽

보신의 풀이는 4부에서 본 『법화문구』의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 눈여겨볼 것은 법신의 풀이다. 대성인은 법신을 「모든 차별을 넘어선 진리」로만 설명하지 않으신다. 나와 남, 마계와 불계, 믿지 않음과 믿음, 사견과 정견 — 이 모든 차별이 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시고, 그 결론으로 「이 법신의 근본은 중생의 당체」라고 하신다. 법신은 중생 저편의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중생 자신이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이 대목에 한 가지 주의를 덧붙인다. 「법신이 곧 중생」이라는 것은 진리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 그 진리를 깨달아 알려면 「시방제불의 행원」처럼 수행과 서원이 채워져야 한다. 중생은 현실에서 번뇌에 미혹하고 생사의 괴로움에 빠져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성불을 목표로 정법을 믿고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글에는 응신의 풀이가 빠져 있다고 강의는 지적하고, 『법화문구』의 응신여래 풀이 — 4부에서 본 「수은과 순금」의 비유 — 로 보충한다.

세 여시가 세 여래 — 「십여시사」

같은 무렵의 「십여시사」에서 대성인은 삼신을 법화경 방편품의 십여시와 직접 잇는다.

我が身が三身即一の本覚の如来にてありける事を今経に説いて云く如是相・如是性・如是体・如是力・如是作・如是因・如是縁・如是果・如是報・如是本末究竟等文、初めに如是相とは我が身の色形に顕れたる相を云うなり是を応身如来とも又は解脱とも又は仮諦とも云うなり、次に如是性とは我が心性を云うなり是を報身如来とも又は般若とも又は空諦とも云うなり、三に如是体とは我が此の身体なり是を法身如来とも又は中道とも法性とも寂滅とも云うなり、されば此の三如是を三身如来とは云うなり此の三如是が三身如来にておはしましけるを・よそに思ひへだてつるがはや我が身の上にてありけるなり、かく知りぬるを法華経をさとれる人とは申すなり

내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의 여래였다는 것을, 이 경(법화경)에 설하여 이르기를 「여시상 · 여시성 · 여시체 · 여시력 · 여시작 · 여시인 · 여시연 · 여시과 · 여시보 · 여시본말구경등」이라 하였느니라. 첫째로 여시상이란 내 몸의 빛깔과 모양으로 드러난 모습을 말하니, 이를 응신여래라고도, 해탈이라고도, 가제라고도 하느니라. 다음으로 여시성이란 내 마음의 성품을 말하니, 이를 보신여래라고도, 반야라고도, 공제라고도 하느니라. 셋째로 여시체란 나의 이 몸 자체이니, 이를 법신여래라고도, 중도라고도, 법성이라고도, 적멸이라고도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세 여시를 삼신여래라 하느니라. 이 세 여시가 삼신여래이셨던 것을 남의 일로 여겨 멀리 떼어 놓고 있었는데, 실은 바로 내 몸 위의 일이었느니라. 이렇게 아는 것을 법화경을 깨달은 사람이라 하느니라.

「십여시사」, 410쪽

십여시의 처음 세 가지 — 상(모습) · 성(성품) · 체(본체) — 가 그대로 삼신이다. 겉으로 드러난 내 몸의 모습이 응신, 안에 있는 내 마음의 성품이 보신, 그 둘을 아우르는 이 몸 자체가 법신이다. 3부와 4부에서 삼신은 부처의 세 몸이었다. 대성인은 그것을 「내 몸의 세 여시」로 읽으신다. 그리고 「남의 일로 여겨 멀리 떼어 놓고 있었는데, 실은 바로 내 몸 위의 일이었다」고 하신다.

같은 무렵의 「일념삼천법문」도 같은 뜻을 이렇게 맺으신다.

此の三を法報応の三身とも空仮中の三諦とも法身・般若・解脱の三徳とも申す此の三身如来全く外になし我が身即三徳究竟の体にて三身即一身の本覚の仏なり、是をしるを如来とも聖人とも悟とも云う知らざるを凡夫とも衆生とも迷とも申す

이 셋을 법 · 보 · 응의 삼신이라고도, 공 · 가 · 중의 삼제라고도, 법신 · 반야 · 해탈의 삼덕이라고도 하느니라. 이 삼신여래는 결코 밖에 있지 않으니, 내 몸이 곧 삼덕 구경의 체로서 삼신즉일신의 본각의 부처이니라. 이것을 아는 것을 여래라고도 성인이라고도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범부라고도 중생이라고도 미혹이라고도 하느니라.

「일념삼천법문」, 412쪽

이 글은 천태의 삼전독문 — 십여시를 공 · 가 · 중의 세 방식으로 읽는 것 — 을 풀이하는 대목에 나온다. 같은 글의 뒷부분에서 대성인은 「내 몸이 과거세의 업(先業)으로 받은 상 · 성 · 체 · 력」을 공 · 가 · 중으로 읽을 때 그대로 보신 · 응신 · 법신의 여래가 된다고 하신다(416쪽). 그 대목은 핵심 개념 「업」 4부에서 읽었다. 업으로 받은 이 몸이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삼신이라는 것이다. 부처와 범부를 가르는 것은 몸의 차이가 아니라 「아는가, 모르는가」다.

  • 409쪽「일념삼천이사」법신「此の法身の本は衆生の当体なり」이 법신의 근본은 중생의 당체이다보신「理に従つて如と名け智に従つて来と名く」이치를 따라 여, 지혜를 따라 래
  • 410쪽「십여시사」여시상(내 몸의 빛깔과 모양)= 응신 · 해탈 · 가제여시성(내 마음의 성품)= 보신 · 반야 · 공제여시체(나의 이 몸 자체)= 법신 · 중도 · 법성
  • 412쪽「일념삼천법문」「此の三身如来全く外になし」이 삼신여래는 결코 밖에 있지 않다
「是をしるを如来とも…知らざるを凡夫とも…申す」이것을 아는 것을 여래라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범부라 한다
도표 17 · 대성인의 초기 삼신 풀이

우리 몸 · 우리 마음 · 우리 몸짓 — 「묘호니부인답서」

대성인은 만년에 한 여성 신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뜻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쓰셨다. 묘호니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기만 해서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데 대한 답이다.

此の法華経には我等が身をば法身如来・我等が心をば報身如来・我等がふるまひをば応身如来と説かれて候へば、此の経の一句一偈を持ち信ずる人は皆此の功徳をそなへ候、南無妙法蓮華経と申すは是れ一句一偈にて候

이 법화경에는 우리의 몸을 법신여래, 우리의 마음을 보신여래, 우리의 몸짓을 응신여래라고 설하셨으니, 이 경의 한 구절 한 게송이라도 지니고 믿는 사람은 모두 이 공덕을 갖추게 되옵니다. 남묘호렌게쿄라 하는 것은 이 한 구절 한 게송이옵니다.

「묘호니부인답서」, 1402쪽

강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다른 권교에서 설한 삼신여래는, 법신여래는 「부처의 몸」, 보신여래는 「부처의 마음」, 응신여래는 「부처의 몸짓」이었다. 거기서는 대일여래나 아미타여래, 비로자나불처럼 부처를 범부와 동떨어진 존재로 설하고, 게다가 그 부처들은 삼신이 원만하지 않고 법신이나 보신만의 부처였다. 그러나 법화경은 범부가 그대로 부처가 되며, 그것도 삼신이 원만하게 범부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설한다.

같은 편지의 끝에서 대성인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我等衆生悪業・煩悩・生死果縛の身が、正・了・縁の三仏性の因によりて即法・報・応の三身と顕われん事疑ひなかるべし

우리 중생의 악업 · 번뇌 · 생사에 묶인 과보의 몸이, 정인 · 요인 · 연인의 세 불성을 원인으로 하여 그대로 법 · 보 · 응의 삼신으로 드러날 것은 의심할 수 없사옵니다.

「묘호니부인답서」, 1403쪽

4부 「세 몸 · 세 덕 · 세 진리」에서 본 대응 — 세 불성과 세 몸 — 이 여기서 성불의 약속이 된다. 악업과 번뇌와 생사에 묶인 몸, 곧 4부에서 본 「삼도」의 몸이 그대로 법 · 보 · 응의 삼신으로 「드러난다」.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세 불성이 세 몸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권교의 삼신법신여래 = 부처의 몸보신여래 = 부처의 마음응신여래 = 부처의 몸짓범부와 동떨어진 부처, 삼신이 원만하지 않다
법화경의 삼신「我等が身をば法身如来」우리의 몸을 법신여래「我等が心をば報身如来」우리의 마음을 보신여래「我等がふるまひをば応身如来」우리의 몸짓을 응신여래(「묘호니부인답서」 1402쪽)
「正・了・縁の三仏性の因によりて即法・報・応の三身と顕われん」정인 · 요인 · 연인의 세 불성을 원인으로 하여 그대로 법 · 보 · 응의 삼신으로 드러난다(1403쪽)
도표 18 · 우리 몸 · 마음 · 몸짓

구슬과 빛과 보배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만년의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은 삼신이 하나임을 여러 비유로 거듭 보이신다. 먼저 십계와 삼신의 관계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此の極楽とは十方法界の正報の有情と十方法界の依報の国土と和合して一体三身即一なり、四土不二にして法身の一仏なり十界を身と為すは法身なり十界を心と為すは報身なり十界を形と為すは応身なり十界の外に仏無し仏の外に十界無くして依正不二なり身土不二なり一仏の身体なるを以て寂光土と云う

이 극락이란 시방법계의 정보인 유정과 시방법계의 의보인 국토가 어우러져 한 몸이 되고 삼신이 곧 하나인 것이니라. 네 국토가 둘이 아니어서 법신의 한 부처이니라. 십계를 몸으로 삼는 것은 법신이요, 십계를 마음으로 삼는 것은 보신이요, 십계를 모습으로 삼는 것은 응신이니라. 십계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십계가 없어서 의보와 정보가 둘이 아니요 몸과 국토가 둘이 아니니라. 한 부처의 몸이므로 적광토라 하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3쪽

「십계를 몸으로 삼는 것이 법신, 마음으로 삼는 것이 보신, 모습으로 삼는 것이 응신」. 「묘호니부인답서」에서 「우리의 몸 · 마음 · 몸짓」이던 삼신이, 여기서는 십계 전체로 넓어진다. 4부에서 본 네 국토 — 범성동거토부터 상적광토까지 — 도 「둘이 아니어서 법신의 한 부처」다. 같은 글은 뒤에서 삼신이 하나임을 여의보주에 비유하신다.

総の三諦とは譬えば珠と光と宝との如し此の三徳有るに由つて如意宝珠と云う故に総の三諦に譬う若し亦珠の三徳を別別に取り放さば何の用にも叶う可からず隔別の方便教の宗宗も亦是くの如し珠をば法身に譬え光をば報身に譬え宝をば応身に譬う此の総の三徳を分別して宗を立つるを不足と嫌うなり之を丸じて一と為すを総の三諦と云う、此の総の三諦は三身即一の本覚の如来なり

총(總)의 삼제란 비유하면 구슬과 빛과 보배와 같으니라. 이 세 덕이 있으므로 여의보주라 하니, 그러므로 총의 삼제에 비유하느니라. 만약 구슬의 세 덕을 따로따로 떼어 놓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으리니, 따로 떨어진 방편교의 여러 종도 이와 같으니라. 구슬을 법신에 비유하고, 빛을 보신에 비유하고, 보배를 응신에 비유하느니라. 이 총의 세 덕을 나누어 종을 세우는 것을 부족하다고 싫어하는 것이니, 이를 둥글게 하나로 모은 것을 총의 삼제라 하느니라. 이 총의 삼제는 삼신즉일의 본각의 여래이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73쪽

여의보주는 구슬 자체(체)와 그 구슬이 내는 빛과, 그 구슬이 원하는 대로 보배를 비 내리는 작용이 하나로 있기에 여의보주다. 구슬만 떼어 내면 빛도 보배도 없고, 빛만 떼어 내면 구슬도 보배도 없다. 삼신도 그렇다. 법신만 세운 종, 보신만 세운 종, 응신만 세운 종은 셋을 떼어 놓았기에 「아무 쓸모가 없다」. 같은 글은 바로 앞에서 「중생에게 있을 때는 이것을 삼제라 하고, 불과를 이룰 때는 이것을 삼신이라 하니 한 물건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신다(같은 쪽). 4부에서 본 삼신과 삼제의 대응을, 대성인은 「한 물건(一物)」으로 묶으신다.

대성인은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에서 같은 뜻을 달에 비유하신다. 모든 부처는 반드시 법신 · 보신 · 응신의 세 여래를 갖추니, 달의 몸은 법신, 달의 빛은 보신, 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응신에 비유된다. 하나의 달에 세 가지 이치가 있듯이 한 부처에게 삼신의 덕이 있다는 것이다(1144쪽).

여의보주
(如意寶珠)
  • 구슬(珠)= 법신
  • 빛(光)= 보신
  • 보배(寶)= 응신
「珠と光と宝との如し此の三徳有るに由つて如意宝珠と云う」구슬과 빛과 보배와 같으니 이 세 덕이 있으므로 여의보주라 한다「別別に取り放さば何の用にも叶う可からず」따로따로 떼어 놓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573쪽)
「十界を身と為すは法身なり十界を心と為すは報身なり十界を形と為すは応身なり」십계를 몸으로 삼는 것은 법신, 마음으로 삼는 것은 보신, 모습으로 삼는 것은 응신(563쪽)
비유달의 몸 = 법신달빛 = 보신물에 비친 달 = 응신(「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
「衆生に有る時には此れを三諦と云い仏果を成ずる時には此れを三身と云う一物の異名なり」중생에게 있을 때는 삼제, 불과를 이룰 때는 삼신, 한 물건의 다른 이름(573쪽) (모두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도표 19 · 구슬 하나의 세 덕

여러 종파의 부처 — 무엇을 본존으로 삼는가

삼신의 문제는 대성인에게 무엇을 본존으로 삼느냐는 실천의 문제였다. 「개목초」는 여러 종파가 세운 부처를 이렇게 판정하신다.

而るを天台宗より外の諸宗は本尊にまどえり、倶舎・成実・律宗は三十四心・断結成道の釈尊を本尊とせり、天尊の太子が迷惑して我が身は民の子とをもうがごとし、華厳宗・真言宗・三論宗・法相宗等の四宗は大乗の宗なり、法相・三論は勝応身ににたる仏を本尊とす大王の太子・我が父は侍と・をもうがごとし、華厳宗・真言宗は釈尊を下げて盧舎那・大日等を本尊と定む天子たる父を下げて種姓もなき者の法王のごとくなるに・つけり

그런데 천태종 밖의 여러 종은 본존에 미혹하였느니라. 구사 · 성실 · 율종은 삼십사심으로 번뇌를 끊고 도를 이룬 석존을 본존으로 삼으니, 천자의 태자가 미혹하여 자기를 백성의 자식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으니라. 화엄종 · 진언종 · 삼론종 · 법상종 등 네 종은 대승의 종이니라. 법상 · 삼론은 승응신과 비슷한 부처를 본존으로 삼으니, 대왕의 태자가 자기 아버지를 무사라고 여기는 것과 같으니라. 화엄종 · 진언종은 석존을 낮추고 노사나 · 대일 등을 본존으로 정하니, 천자인 아버지를 낮추고 가문도 없는 자가 법왕인 양하는 데 붙은 것이니라.

「개목초」, 215쪽

「삼십사심으로 번뇌를 끊고 도를 이룬 석존」은 4부에서 본 장교의 열응신, 곧 보리수 아래에서 서른네 찰나의 마음으로 번뇌를 끊고 성불한 부처다. 「본존문답초」에서도 대성인은 묻는 이의 말을 빌려 「구사 · 성실 · 율의 세 종은 열응신의 작은 석가요, 법상 · 삼론의 두 종은 큰 석가불을 본존으로 삼고, 화엄종은 연화대 위의 노사나 보신의 석가여래, 진언종은 대일여래」라고 정리하신다(366쪽). 4부의 「네 가르침의 네 부처」가 그대로 일본 여러 종파의 본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성인이 이들을 「본존에 미혹하였다」고 하신 까닭은, 그 부처들이 열응신이든 승응신이든 보신이든 법신이든 모두 같은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치병대소권실위목」은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爾前と迹門とは相違ありといへども相似の辺も有りぬべし、所説に八教あり爾前の円と迹門の円は相似せり爾前の仏と迹門の仏は劣応・勝応・報身・法身異れども始成の辺は同じきぞかし、今本門と迹門とは教主已に久始のかわりめ百歳のをきなと一歳の幼子のごとし

이전경과 적문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데도 있을 것이니라. 설한 바에 팔교가 있으니, 이전경의 원교와 적문의 원교는 서로 비슷하니라. 이전경의 부처와 적문의 부처는 열응 · 승응 · 보신 · 법신으로 다르지만 처음 성불했다는 점은 같으니라. 이제 본문과 적문은 교주가 이미 구원과 시성으로 갈리니, 백 살 노인과 한 살 어린아이와 같으니라.

「치병대소권실위목」, 996쪽

열응신에서 법신까지, 이전경과 적문의 부처는 아무리 높아도 「처음 성불한(始成)」 부처다. 4부에서 본 「법신의 무시무종은 설하되 응신 · 보신의 현본은 설하지 않았다」가 여기서 본존의 기준이 된다. 처음 이루어진 부처, 곧 덕일과 전교의 논쟁에서 본 「유위의 보불」은 꿈속의 부처다. 본문의 부처와 비교하면 「백 살 노인과 한 살 어린아이」만큼 다르다.

  1. 구사 · 성실 · 율종열응「三十四心・断結成道の釈尊」삼십사심으로 번뇌를 끊고 도를 이룬 석존= 열응신의 작은 석가
  2. 법상 · 삼론승응「勝応身ににたる仏」승응신과 비슷한 부처= 큰 석가
  3. 화엄종보신「台上のるさな報身の釈迦如来」연화대 위의 노사나 보신의 석가여래
  4. 진언종법신대일여래

(「개목초」 215쪽 · 「본존문답초」 366쪽)

「劣応・勝応・報身・法身異れども始成の辺は同じきぞかし」열응 · 승응 · 보신 · 법신으로 다르지만 처음 성불했다는 점은 같으니라(「치병대소권실위목」 996쪽)
도표 20 · 여러 종파의 부처

법신이 법을 설하는가 — 진언과의 논쟁

삼신을 둘러싼 대성인의 논쟁 가운데 가장 날카로운 것은 진언종과의 논쟁이었다. 진언종은 석존이 설한 가르침을 「응신의 가르침(현교)」이라 하고, 대일여래가 설한 가르침을 「법신의 가르침(밀교)」이라 하여 밀교를 위에 두었다. 「성우문답초」에 등장하는 밀종의 행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교란 사리불 등의 청에 따라 응신여래가 설한 여러 가르침이요, 밀교란 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법신 대일여래가 금강살타를 교화 대상으로 하여 설한 대일경 등의 세 경이다(478쪽). 3부에서 본 대로 법신이 형상을 넘어선 진리라면, 법신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언종은 법신이 직접 법을 설했다고 하여(법신설법), 그 가르침을 석존의 가르침보다 높였다. 고야산의 성각방은 법화경 등의 교주를 두고 「나귀와 소 같은 삼신은 수레를 돕지 못한다(驢牛の三身は車を扶くること能はず)」고까지 했다고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전하신다(278쪽).

대성인은 이에 대해 대일여래가 석존과 다른 부처가 아니라고 답하신다.

其の上・大日如来と云うは久遠実成の教主釈尊・四十二年・和光同塵して其の機に応ずる時・三身即一の如来暫く毘盧遮那と示せり、是の故に開顕実相の前には釈迦の応化と見えたり、爰を以て普賢経には釈迦牟尼仏を毘盧遮那遍一切処と名け其の仏の住処を常寂光と名くと説けり

그 위에 대일여래라 하는 것은, 구원실성의 교주 석존이 사십이 년 동안 빛을 누그러뜨려 티끌에 섞여(和光同塵) 그 근기에 응할 때, 삼신즉일의 여래가 잠시 비로자나라고 보이신 것이니라. 그러므로 실상을 열어 드러낸 앞에서는 석가의 응화로 보이느니라. 이 때문에 보현경에는 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변일체처라 이름하고, 그 부처가 머무는 곳을 상적광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느니라.

「성우문답초」, 486쪽

4부에서 천태는 법신여래를 비로자나, 보신여래를 노사나, 응신여래를 석가문이라 하여 세 이름을 한 여래의 세 면으로 보았다. 대성인은 이것을 그대로 따라, 비로자나(대일)는 석존과 다른 부처가 아니라 「삼신즉일의 여래」인 구원의 석존이 잠시 보인 이름이라고 하신다. 『관보현경』이 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변일체처」라 이름한 것이 그 증거다. 법신(대일)을 응신(석존)에게서 떼어 내 따로 세운 진언종은, 「총감문」의 비유로 하면 구슬(법신)을 보배(응신)에서 떼어 낸 것과 같다.

진언종의 주장현교 응신여래(석존)가 설한 가르침밀교「自受法楽の為に法身大日如来の…説き給う」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법신 대일여래가 설한 가르침(「성우문답초」 478쪽)「驢牛の三身は車を扶くること能はず」나귀와 소 같은 삼신은 수레를 돕지 못한다(성각방, 「선시초」 278쪽 인용)
대성인「三身即一の如来暫く毘盧遮那と示せり」삼신즉일의 여래가 잠시 비로자나라고 보였다「釈迦牟尼仏を毘盧遮那遍一切処と名け」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변일체처라 이름한다(「성우문답초」 486쪽, 『관보현경』 인용)

법신 · 보신 · 응신 = 비로자나 · 노사나 · 석가문 — 한 여래의 세 이름(천태)

도표 21 · 대일과 석가 — 진언과의 논쟁

지옥이 곧 적광 — 「우에노전미망인답서」

대성인의 삼신론이 가장 깊은 위로가 된 자리가 있다. 남편 난조효에시치로를 여읜 우에노 부인에게 보낸 편지다. 대성인은 「지옥」이라는 두 글자를 「땅을 판다」로 읽는다고 하시며, 장례의 광경 — 땅을 파는 일, 시신을 태우는 불, 앞뒤로 다투어 따라가는 처자와 권속, 그 슬피 우는 소리, 집을 나서는 상여 — 이 모두 그대로 지옥의 모습이라고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此の法華経をたもちたてまつる人は此れをうちかへし・地獄は寂光土・火焔は報身如来の智火・死人は法身如来・火坑は大慈悲為室の応身如来、又つえは妙法実相のつえ、三途の愛河は生死即涅槃の大海・死出の山は煩悩即菩提の重山なり、かく御心得させ給へ・即身成仏とも開仏知見ともこれをさとり・これをひらくを申すなり

이 법화경을 지니는 사람은 이것을 뒤집어, 지옥은 적광토요, 불꽃은 보신여래의 지혜의 불이요, 죽은 이는 법신여래요, 불구덩이는 「대자비를 방으로 삼는」 응신여래이며, 또 지팡이는 묘법실상의 지팡이요, 삼도의 애하(愛河)는 생사즉열반의 큰 바다요, 죽음의 산은 번뇌즉보리의 첩첩한 산이니라. 이렇게 마음에 새기시옵소서. 즉신성불이라고도 개불지견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여는 것을 말하느니라.

「우에노전미망인답서」, 1505쪽

죽은 남편의 몸은 법신여래다. 그 몸을 태우는 불꽃은 진리를 비추는 보신의 지혜의 불이다. 그 불구덩이는 법화경 법사품이 「여래의 방은 대자비심」이라고 한 그 방, 곧 중생을 감싸는 응신여래다. 지옥의 모습이 그대로 삼신의 모습으로 뒤집힌다. 계보 一 「십이연기」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서 본 「삼도가 곧 삼덕」이, 여기서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구체적인 모습이 된다. 삼신은 먼 곳의 부처를 설명하는 교리가 아니라, 지금 눈앞의 괴로움을 다르게 보는 눈이다. 대성인은 그것을 「뒤집는다(うちかへす)」고 하셨다.

장례의 모습(지옥으로 보면)
  • 땅을 판다 = 지옥
  • 시신을 태우는 불 = 무간지옥의 불꽃
  • 처자의 슬피 우는 소리 = 옥졸의 소리
  • 집을 나서는 것 = 죽음의 산
「此れをうちかへし」이것을 뒤집어
  • 「地獄は寂光土」지옥은 적광토
  • 「火焔は報身如来の智火」불꽃은 보신여래의 지혜의 불
  • 「死人は法身如来」죽은 이는 법신여래
  • 「火坑は大慈悲為室の応身如来」불구덩이는 대자비를 방으로 삼는 응신여래
(「우에노전미망인답서」 1505쪽)

즉신성불 · 개불지견 = 이것을 깨닫고 여는 것

도표 22 · 지옥이 곧 적광
6부 무작삼신「범부는 체의 삼신이요 본불」

체의 삼신과 용의 삼신 — 「제법실상초」

5부에서 대성인은 삼신이 범부의 몸 · 마음 · 몸짓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셨다. 사도 유배 중에 사이렌보에게 보낸 「제법실상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와 범부의 관계를 뒤집으신다.

されば釈迦・多宝の二仏と云うも用の仏なり、妙法蓮華経こそ本仏にては御座候へ、経に云く「如来秘密神通之力」是なり、如来秘密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なり、神通之力は用の三身にして迹仏ぞかし、凡夫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ぞかし、仏は用の三身にして迹仏なり、然れば釈迦仏は我れ等衆生のためには主師親の三徳を備へ給うと思ひしに、さにては候はず返つて仏に三徳をかふらせ奉るは凡夫なり、其の故は如来と云うは天台の釈に「如来とは十方三世の諸仏・二仏・三仏・本仏・迹仏の通号なり」と判じ給へり、此の釈に本仏と云うは凡夫なり迹仏と云ふは仏なり、然れども迷悟の不同にして生仏・異なるに依つて倶体・倶用の三身と云ふ事をば衆生しらざるなり

그러므로 석가 · 다보 두 부처라고 하는 것도 용(用)의 부처이니,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라. 여래의 비밀은 체(體)의 삼신으로서 본불이요, 신통의 힘은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이니라. 범부는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이요, 부처는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이니라. 그렇다면 석가불은 우리 중생을 위해 주 · 사 · 친의 삼덕을 갖추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고 도리어 부처에게 삼덕을 입혀 드린 것은 범부이니라. 그 까닭은, 여래라 함에 대해 천태의 해석에 「여래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 · 두 부처 · 세 부처 · 본불 · 적불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라고 판정하셨으니, 이 해석에서 본불이라 함은 범부요, 적불이라 함은 부처이니라. 그러나 미혹과 깨달음이 같지 않아 중생과 부처가 다르기 때문에, 체도 함께하고 용도 함께하는(倶體倶用) 삼신이라는 것을 중생은 알지 못하느니라.

「제법실상초」, 1358쪽

4부에서 천태는 「여래의 비밀」을 세 몸의 체(본체)로, 「신통의 힘」을 세 몸의 용(작용)으로 풀이했다. 대성인은 이 구분을 그대로 받으시면서 거기에 놀라운 대응을 하나 더하신다. 체의 삼신은 본불이고, 용의 삼신은 적불이다. 그리고 범부가 체의 삼신이고, 부처가 용의 삼신이다.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장엄된 부처, 경전에 설해진 석가와 다보는 근본인 묘법이 작용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그 근본의 체는 묘법연화경이며, 그 묘법을 몸으로 지닌 범부다.

이 대목을 차례로 읽으면 이렇다. 석가와 다보, 곧 경문에 설해진 부처들은 근본인 묘법연화경이 작용으로 나타난 부처다. 근본의 체는 묘법연화경이다. 그러므로 「석가불이 우리를 위해 주 · 사 · 친의 삼덕을 갖추었다」고 여겼지만, 실은 그 부처에게 삼덕을 「입혀 드린」 것은 묘법을 몸으로 지닌 범부다. 『법화문구』가 「여래」를 「본불 · 적불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라 한 데서, 대성인은 본불을 범부로, 적불을 부처로 읽으신다. 다만 범부와 부처는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다. 자기 생명이 묘법의 당체임을 알지 못하고 미혹 속에 있는 것이 구계의 중생이고, 그것을 깨달은 것이 부처다. 그래서 중생은 자기가 체의 삼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5부의 「일념삼천법문」이 「이것을 아는 것을 여래라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범부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창가학회 교학에서 「범부는 체의 삼신이요 본불」이라 하신 「범부」는, 따로는(別して) 묘법의 당체로서 체의 삼신을 그대로 나타내신 말법의 본불 니치렌 대성인을 가리킨다(창가교학연구실의 어구 풀이는 이 「범부」를 구원원초 자수용법신여래, 곧 니치렌 대성인이라 풀이한다). 총괄해서는(總じて)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남묘호렌게쿄를 믿고 행하는 이들도 체의 삼신으로 드러난다. 『어의구전』의 「총괄해서는 여래란 일체중생이요, 따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가 그 근거다. 경문에 설해진 색상장엄의 부처는 묘법의 작용으로 나타난 용의 삼신, 곧 적불이다.

체(體)의 삼신「如来秘密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なり」여래의 비밀은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凡夫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ぞかし」범부는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妙法蓮華経こそ本仏」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
「仏に三徳をかふらせ奉るは凡夫なり」부처에게 삼덕을 입혀 드린 것은 범부
용(用)의 삼신「神通之力は用の三身にして迹仏」신통의 힘은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仏は用の三身にして迹仏なり」부처는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釈迦・多宝の二仏と云うも用の仏なり」석가 · 다보 두 부처도 용의 부처
「迷悟の不同にして…倶体・倶用の三身と云ふ事をば衆生しらざるなり」미혹과 깨달음이 같지 않아 체도 용도 함께하는 삼신이라는 것을 중생은 알지 못한다(「제법실상초」 1358쪽)
도표 23 · 체의 삼신과 용의 삼신

체도 함께하고 용도 함께한다

「제법실상초」의 마지막 구절 「구체구용(倶體倶用)의 삼신」은 4부에서 본 『수호국계장』의 「실교의 삼신은 체도 함께하고 용도 함께한다」에서 온 말이다. 세 몸을 나누어 보면, 법신을 근본(체)으로 삼고 보신과 응신을 거기서 나온 작용(용)으로 보기 쉽다. 진리가 근본이고 지혜와 자비는 거기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구체구용의 삼신에서는 세 몸이 모두 체이면서 모두 용이다. 법신이 체이자 용이고, 보신도 체이자 용이고, 응신도 체이자 용이다. 진리와 지혜와 자비가 어느 하나에 다른 둘이 딸린 관계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다른 둘의 본체이자 작용이다.

이것을 범부에게 비추면 뜻이 분명해진다. 진리(법신)만 근본이고 몸짓(응신)은 그 그림자라면, 범부의 일상의 몸짓은 부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셋이 모두 체라면, 범부의 몸짓 그 자체가 부처의 본체다. 5부에서 본 「우리의 몸짓을 응신여래라 한다」는 말은 여기서 「몸짓이 그대로 부처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깊어진다.

손대어 움직이지 않고, 꾸미지 않고, 본래 그대로 — 무작

4부의 『수호국계장』은 「유위의 보불」과 「무작의 삼신」을 나누었다. 수행으로 「지어진(有爲 · 有作)」 부처와 「지어지지 않은(無作)」 부처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이 「무작」을 수량품의 「구원(久遠)」이라는 말로 풀이하신다.

御義口伝に云く此の品の所詮は久遠実成なり久遠とははたらかさず・つくろわず・もとの儘と云う義なり、無作の三身なれば初めて成ぜず是れ働かざるなり、卅二相八十種好を具足せず是れ繕わざるなり本有常住の仏なれば本の侭なり是を久遠と云うなり、久遠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実成無作と開けたるなり云云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이 품의 핵심은 구원실성이니라. 구원(久遠)이란 손대어 움직이지 않고, 꾸미지 않고, 본래 그대로라는 뜻이니라. 무작의 삼신이므로 처음으로 이루지 않으니 이것이 손대어 움직이지 않음이요,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추지 않으니 이것이 꾸미지 않음이요, 본유상주의 부처이므로 본래 그대로이니, 이것을 구원이라 하느니라. 구원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니, 실성(實成)이 무작이라고 열린 것이니라.

『어의구전』 수량품 제23 「구원의 일」, 759쪽

「구원」이라는 말은 흔히 아득히 먼 옛날을 뜻한다. 오백진점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대성인은 「구원」을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읽으신다. 손대어 움직이지 않는다 — 수행을 쌓아 처음으로 이룬 부처가 아니다. 꾸미지 않는다 — 서른두 가지 모습과 여든 가지 좋은 특징으로 장엄하지 않는다. 본래 그대로다 — 본래 있는 그대로 상주하는 부처다.

1부의 석존은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고 하여 부처를 몸의 모습에서 떼어 냈다. 3부의 『금강경』은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면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의 불교는 오히려 부처의 몸을 점점 더 장엄하게 그렸다. 천 잎 연꽃 위의 노사나, 끝없이 큰 승응신, 연화장세계의 보신. 대성인의 「무작」은 이 모든 장엄을 걷어 낸다. 무작의 삼신은 삼십이상을 갖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부처는 어떤 모습인가. 꾸미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모습, 곧 범부의 모습이다.

유작(有作) · 유위(有爲)의 부처수행을 쌓아 처음 이룬다(시성)삼십이상 팔십종호로 장엄한다「有為の報仏は夢中の権果」유위의 보불은 꿈속의 방편의 과보(「총감문」 560쪽, 『수호국계장』 인용)
무작(無作)의 부처「はたらかさず」손대어 움직이지 않는다「初めて成ぜず」처음으로 이루지 않는다「つくろわず」꾸미지 않는다「卅二相八十種好を具足せず」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추지 않는다「もとの儘」본래 그대로「本有常住の仏」본유상주의 부처(『어의구전』 759쪽)
「久遠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구원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다
도표 24 · 유작의 부처와 무작의 부처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

그렇다면 무작의 삼신은 누구인가. 『어의구전』 수량품의 첫 장은 「여래수량품」이라는 제목을 이렇게 읽으신다.

御義口伝に云く此の品の題目は日蓮が身に当る大事なり神力品の付属是なり、如来とは釈尊・惣じては十方三世の諸仏なり別しては本地無作の三身なり、今日蓮等の類いの意は惣じては如来とは一切衆生なり別しては日蓮の弟子檀那なり、されば無作の三身とは末法の法華経の行者なり無作の三身の宝号を南無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寿量品の事の三大事とは是なり……惣じて伏惑を以て寿量品の極とせず唯凡夫の当体本有の侭を此の品の極理と心得可きなり、無作の三身の所作は何物ぞと云う時南無妙法蓮華経なり云云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이 품의 제목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대사이니, 신력품의 부촉이 이것이니라. 여래란 석존이요, 총괄해서는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요, 따로는 본지 무작의 삼신이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부류의 뜻으로는, 총괄해서는 여래란 일체중생이요, 따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이니라. 그러므로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니, 무작의 삼신의 보호(寶號)를 남묘호렌게쿄라 하느니라.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사란 이것이니라. …… 대저 번뇌를 눌러 굴복시키는 것을 수량품의 극치로 삼지 않으며, 다만 범부의 당체가 본래 있는 그대로임을 이 품의 극리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무작의 삼신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할 때,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어의구전』 수량품 제1 「남묘호렌게쿄여래수량품제십육의 일」, 752쪽

이 짧은 글에 대성인의 삼신론이 다 들어 있다. 첫째, 「여래」에는 겹이 있다. 경문의 표면에서 여래는 석존이고, 통틀어서는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이며, 따로는 「본지 무작의 삼신」이다. 그리고 대성인의 뜻으로는, 통틀어서는 일체중생이 여래이고, 따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가 여래다. 둘째,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다. 무작의 삼신은 경전 속의 부처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법화경을 행하는 사람이다. 셋째, 그 무작삼신의 「보호(寶號)」, 곧 존귀한 이름이 남묘호렌게쿄다. 넷째, 번뇌를 눌러 굴복시키는 것(伏惑)이 수량품의 극치가 아니라, 「범부의 당체가 본래 있는 그대로」인 것이 극치다. 다섯째, 무작삼신이 하는 일은 남묘호렌게쿄다.

같은 수량품의 둘째 장은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을 「무작삼신의 근거가 되는 글」이라 하시고, 「신통의 힘」을 이렇게 풀이하신다. 「신통의 힘이란 우리 중생이 일하고 일어나며 움직이는(作作發發) 그 몸짓을 신통이라 하느니라. 옥졸이 죄인을 꾸짖는 소리도 모두 신통의 힘이니라.」 그리고 「이 무작의 삼신을 한 글자로 얻으니, 이른바 신(信)의 한 글자이니라」라고 맺으신다(752쪽). 4부에서 천태는 「신통의 힘」을 부처의 자재한 작용으로 풀이했다. 대성인은 그것을 우리 중생의 일상의 몸짓, 심지어 지옥의 옥졸의 소리로까지 넓히신다. 5부의 「우리의 몸짓을 응신여래라 한다」가 여기서 「신통」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 길은 오직 「신(信)」이다.

수량품의 넷째 장은 핵심 개념 「무상」 6부에서 본 대목으로, 삶과 죽음이 모두 본유상주의 몸짓이라 하신 뒤 이렇게 맺으신다.

されば無死退滅は空なり有生出在は仮なり如来如実は中道なり、無死退滅は無作の報身なり有生出在は無作の応身なり如来如実は無作の法身なり、此の三身は我が一身なり、一身即三身名為秘とは是なり、三身即一身名為密も此の意なり、然らば無作の三身の当体の蓮華の仏とは日蓮が弟子檀那等なり南無妙法蓮華経の宝号を持ち奉る故なり云云

그러므로 무 · 사 · 퇴 · 멸은 공이요, 유 · 생 · 출 · 재는 가요, 여래여실은 중도이니라. 무 · 사 · 퇴 · 멸은 무작의 보신이요, 유 · 생 · 출 · 재는 무작의 응신이요, 여래여실은 무작의 법신이니라. 이 삼신은 나의 한 몸이니, 「한 몸이 곧 세 몸임을 비라 한다」는 것이 이것이요, 「세 몸이 곧 한 몸임을 밀이라 한다」도 이 뜻이니라. 그렇다면 무작의 삼신의 당체인 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이니, 남묘호렌게쿄의 보호를 지니기 때문이니라.

『어의구전』 수량품 제4 「여래여실지견삼계지상 무유생사의 일」, 753쪽

4부에서 천태의 「일신즉삼신을 비라 하고, 삼신즉일신을 밀이라 한다」는 부처의 비밀이었다. 대성인은 「이 삼신은 나의 한 몸이니, 일신즉삼신을 비라 한다는 것이 이것」이라고 하신다. 부처의 비밀이 「나의 한 몸」의 일이 된 것이다. 죽음 · 물러남 · 사라짐은 무작의 보신이고, 삶 · 나타남 · 머묾은 무작의 응신이며, 그 둘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작의 법신이다. 같은 수량품의 「자아득불래」를 「아는 법신, 불은 보신, 래는 응신」이라 읽으신 대목(756쪽)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6부에서 보았다.

무시의 고불 — 「관심의 본존초」와 「삼대비법품승사」

대성인은 사도에서 쓰신 「관심의 본존초」에서, 수량품의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寿量品に云く「然るに我実に成仏してより已来・無量無辺百千万億那由佗劫なり」等云云、我等が己心の釈尊は五百塵点乃至所顕の三身にして無始の古仏なり

수량품에 이르기를 「그러나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한량없고 끝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니라」 하였느니라. 우리 기심(己心)의 석존은 오백진점 내지 소현(所顯)의 삼신으로서 무시(無始)의 고불(古佛)이니라.

「관심의 본존초」, 247쪽

「우리 기심의 석존」, 곧 우리 마음속의 석존은 오백진점겁에 나타난 삼신이면서 「시작이 없는 옛 부처」다. 4부에서 수량품은 「처음 성불한 부처」를 깨뜨리고 오백진점겁의 성불을 밝혔다. 그러나 오백진점겁도 아무리 멀어도 「언젠가」의 성불이다. 대성인은 그것을 「무시의 고불」, 곧 시작이 없는 부처로 여신다. 4부의 덕일이 비판한 「시작이 있는 보신」의 문제는 여기서 뿌리째 사라진다. 그리고 그 무시의 고불이 「우리 기심의」 석존이다.

만년의 「삼대비법품승사」는 말법의 본존을 이렇게 밝히신다.

寿量品に建立する所の本尊は五百塵点の当初より以来此土有縁深厚本有無作三身の教主釈尊是れなり

수량품에 건립하는 본존은 오백진점의 당초(當初) 이래 이 국토에 인연이 깊고 두터운 본유무작삼신의 교주 석존이 이것이니라.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같은 글은 앞에서 수량품의 설법 자리를 「머무는 국토는 적광의 본유의 국토요, 거기 머무는 교주는 본유무작의 삼신이요, 교화받는 이들도 같은 몸」이라고 하신다(1021쪽). 4부의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에 대한 『문구』의 풀이 — 「부처는 삼세에 걸쳐 똑같이 세 몸이 있다」 — 는 바로 이 「본유무작삼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다.

창가교학연구실의 강의는 이 「본유무작삼신의 교주 석존」을 이렇게 풀이한다. 이것은 법화경 문상의 수량품에서 시성정각을 깨뜨리고 오백진점겁의 성도를 드러낸 석존 그 사람이 아니다. 「오백진점의 당초」란 문상의 석존이 성도하는 그 「본인(本因)」의 때, 곧 구원원초를 가리킨다. 성불의 근본 원인인 법은 시작도 끝도 없이 있는데, 이것을 사람의 측면에서 보면 구원원초 이래 이 사바세계의 중생과 인연이 깊고 두터우며, 수행이라는 인위적인 원인에 의하지 않고 본래부터 법신 · 보신 · 응신을 갖춘 구원원초 자수용신여래다. 그리고 강의는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라는 『어의구전』의 말씀을 들어, 사람과 법이 하나인(人法一箇) 본존의 당체가 말법의 본불 니치렌 대성인이라고 한다. 「관심의 본존초」의 「소현의 삼신으로서 무시의 고불」에 대해서도, 강의는 그것을 「오백진점의 당초, 명자범부이실 때에 나타나신 삼신」으로 읽는다.

창가학회 교학에서 「본유무작삼신」은 수행이라는 인위적 원인에 의하지 않고 본래 법신 · 보신 · 응신을 갖춘 구원원초 자수용신이며, 그 몸을 말법에 그대로 나타내신 분이 니치렌 대성인이다.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 「무작의 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 한다」는 『어의구전』의 말씀이 사람과 법이 하나인 본존을 밝힌다. 대성인을 스승으로 삼아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제자도 무작삼신의 당체로 드러난다.

총과 별 —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 가운데의 일」

그렇다면 「범부는 체의 삼신」이라는 말씀은 모든 범부가 그대로 무작의 삼신이라는 뜻인가. 사이렌보에게 보내신 「당체의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所詮妙法蓮華の当体とは法華経を信ずる日蓮が弟子檀那等の父母所生の肉身是なり、正直に方便を捨て但法華経を信じ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人は煩悩・業・苦の三道・法身・般若・解脱の三徳と転じて三観・三諦・即一心に顕われ其の人の所住の処は常寂光土なり、能居所居・身土・色心・倶体倶用・無作三身の本門寿量の当体蓮華の仏とは日蓮が弟子檀那等の中の事なり

결국 묘법연화의 당체란 법화경을 믿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이 이것이니라.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다만 법화경을 믿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 업 · 고의 삼도가 법신 · 반야 · 해탈의 삼덕으로 바뀌고, 삼관 · 삼제가 곧 한마음에 나타나며, 그 사람이 머무는 곳은 상적광토이니라. 머무는 이와 머무는 곳, 몸과 국토, 색과 마음이 체도 함께하고 용도 함께하는 무작삼신의 본문수량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 가운데의 일이니라.

「당체의초」, 512쪽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 — 1부에서 「썩어 갈 몸」이라 불렸고 2부에서 「유루의 생신」이라 불렸던 그 몸이, 법화경을 믿는 이에게서 묘법연화의 당체가 된다. 그리고 「구체구용 · 무작삼신의 부처」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 가운데의 일」이다.

여기서 「가운데의 일(中の事)」이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어의구전』은 「총괄해서는 여래란 일체중생이요, 따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라고 하셨다. 「당체의초」는 그 제자 단나 「가운데」서도,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다만 법화경을 믿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에게서 삼도가 삼덕으로 바뀌고 그 사람이 머무는 곳이 상적광토가 된다고 하신다. 범부가 체의 삼신이라는 것은 범부라면 누구나 이미 부처라는 무조건의 선언이 아니라, 묘법을 믿고 행하는 신심 속에서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 무작의 삼신을 한 글자로 얻으니, 이른바 신(信)의 한 글자」라는 『어의구전』의 말씀이 여기서 다시 울린다.

『어의구전』 752쪽
여래경문석존총「十方三世の諸仏」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별「本地無作の三身」본지 무작의 삼신
대성인의 뜻총「如来とは一切衆生なり」여래란 일체중생별「日蓮の弟子檀那なり」니치렌의 제자 단나
「無作の三身とは末法の法華経の行者なり」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
「無作の三身の宝号を南無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무작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 한다
「당체의초」 512쪽「倶体倶用・無作三身の本門寿量の当体蓮華の仏とは日蓮が弟子檀那等の中の事なり」구체구용 · 무작삼신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 가운데의 일
「此の無作の三身をば一字を以て得たり所謂信の一字なり」이 무작의 삼신을 한 글자로 얻으니 신의 한 글자(『어의구전』 752쪽)
도표 25 · 여래와 무작삼신 — 총과 별

부처를 보는 세 눈

1부에서 박칼리는 부처의 몸을 보고 싶어 했고, 석존은 「법을 보라」고 했다. 그 뒤의 불교는 부처를 보는 눈을 세 번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부처를 몸으로 보았다. 서른두 가지 모습, 늙고 병들어 입멸한 몸, 탑에 모신 사리. 다음에는 부처를 법으로 보았다. 형상으로 부처를 보려 하면 여래를 볼 수 없고, 부처의 참된 몸은 법신이다. 그리고 그 법신과 사람들 앞에 나타난 응신 사이에, 수행의 공덕으로 장엄된 보신이 놓였다. 마지막으로 대성인은 부처를 범부의 당체에서 보셨다. 법신 · 보신 · 응신은 우리의 몸 · 마음 · 몸짓이고, 범부가 체의 삼신이요 부처는 용의 삼신이며,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다.

이 세 번째 눈은 첫 번째 눈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대성인이 보신 범부의 몸은 서른두 가지 모습을 갖춘 장엄한 몸이 아니라, 「꾸미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몸이다. 그것은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는 석존의 말을 끝까지 밀고 간 자리이기도 하다. 법을 보는 이가 부처를 본다면, 법을 몸으로 지닌 범부를 보는 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다.

① 몸으로 보는 부처삼십이상 · 늙고 병들어 입멸한 몸 · 사리와 탑「kiṃ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이 썩어 갈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SN 22.87)
② 법으로 보는 부처「如來身者 即是法身」여래의 몸은 곧 법신(『유마경』)법신 · 보신 · 응신의 세 몸「一身即三身」한 몸이 곧 세 몸(천태)
③ 범부의 당체에서 보는 부처「我等が身をば法身如来・我等が心をば報身如来・我等がふるまひをば応身如来」우리의 몸 · 마음 · 몸짓이 법신 · 보신 · 응신(「묘호니부인답서」)「凡夫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ぞかし」범부는 체의 삼신이요 본불(「제법실상초」)「はたらかさず・つくろわず・もとの儘」손대어 움직이지 않고, 꾸미지 않고, 본래 그대로(『어의구전』)
도표 26 · 부처를 보는 세 눈
맺으며

꾸미지 않은 몸

박칼리는 부처의 몸을 보고 싶어 했다. 석존은 「이 썩어 갈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고 했다. 그 말대로 석존의 몸은 여든에 낡은 수레처럼 삐걱이다가 쿠시나라의 사라나무 숲에서 숨을 거두었고, 남은 것은 법과 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으로서의 부처를 잊지 못했다. 사리를 탑에 모셨고, 부처의 몸은 끝이 없다고 했으며, 천 잎 연꽃 위의 노사나와 천백억의 석가를 그렸다. 한편으로는 부처를 법에서 찾아,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의 다섯 덕을 「법의 몸」이라 하고, 형상으로 부처를 보려 하면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이 두 흐름이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으로 정리되었다. 진리 그 자체의 몸, 진리를 깨달은 지혜의 공덕을 누리는 몸, 중생 앞에 나타난 몸. 그러나 셋을 나누는 순간 물음이 생겼다. 어느 것이 근본인가, 어느 것이 영원한가. 법화경 수량품은 「여래의 비밀 · 신통의 힘」을 설하여, 인도에서 처음 성불했다고 여겨진 바로 그 석존이 실은 아득한 옛날에 성불한 부처라고 밝혔다. 천태는 그것을 「한 몸이 곧 세 몸, 세 몸이 곧 한 몸」이라 하고, 보신을 중심으로 세 몸을 하나로 읽었다. 전교는 「유위의 보불은 꿈속의 방편, 무작의 삼신은 꿈에서 깨어난 자리의 참된 부처」라 하여, 부처를 가르는 것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지어진 것인가, 본래 그러한 것인가」임을 보였다.

대성인은 이 모든 것을 받아 범부의 몸으로 돌려놓으셨다. 법신의 근본은 중생의 당체다. 여시상 · 여시성 · 여시체가 그대로 응신 · 보신 · 법신이다. 우리의 몸이 법신, 우리의 마음이 보신, 우리의 몸짓이 응신이다. 십계를 몸으로 삼는 것이 법신이고, 구슬과 빛과 보배가 떨어질 수 없듯이 세 몸은 하나다. 지옥의 불꽃은 보신의 지혜의 불이고, 죽은 이의 몸은 법신여래다. 그리고 「범부는 체의 삼신이요 본불, 부처는 용의 삼신이요 적불」이며,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고, 그 보호가 남묘호렌게쿄다.

무작의 삼신은 「손대어 움직이지 않고, 꾸미지 않고, 본래 그대로」다.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추지 않는다. 부처를 부처로 만드는 것이 장엄한 몸이 아니라는 생각은, 1부에서 석존이 박칼리에게 한 말에 이미 있었다. 그 생각이 대성인에게서, 꾸미지 않은 범부의 몸이 그대로 부처의 본체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의구전』은 이것을 봄의 꽃나무에 견주신다. 벚꽃과 매화와 복숭아와 자두(櫻梅桃李)가 저마다의 당체를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무작삼신이라고 열어 보는 것이라고(784쪽). 벚꽃이 매화가 되어야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매화가 복숭아꽃처럼 꾸며야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의 몸, 저마다의 마음, 저마다의 몸짓이 그대로 법신 · 보신 · 응신이다. 「제법실상초」의 말씀대로, 지옥은 지옥의 모습을, 부처는 부처의 모습을, 범부는 범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실상이다.

하늘에는 달이 하나 떠 있다. 달의 몸과, 그 몸이 내는 빛과, 강물마다 비친 그림자는 셋이면서 하나다. 강물이 흐리면 그림자는 일그러지고, 물이 맑으면 달은 그대로 비친다. 삼신을 묻는 긴 역사는, 하늘의 달을 바라보던 눈이 마침내 자기 안의 물에 비친 달을 보게 되는 과정이었다.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 그 법을 몸으로 지닌 범부를 보는 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다.

봄밤, 낮은 둑 위에 벚나무 · 매화나무 · 복숭아나무 · 자두나무 네 그루가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로 나란히 꽃을 피우고, 앞의 잔잔한 못에 네 나무가 함께 비치며 하늘에 보름달이 뜬 금박 수묵화
그림 3 · 봄 정원의 네 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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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원전

  •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 「아누라다 경」 SN 22.86, 「박칼리 경」 SN 22.87
  •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 「대반열반경」 DN 16, 「세기경」 DN 27, 「삼십이상경」 DN 30
  • 세우 『이부종륜론』, 현장 역, T49 no.2031
  • 천친 『아비달마구사론』, 현장 역, T29 no.1558
  • 『유마힐소설경』 방편품 · 제자품, 구마라집 역, T14 no.475
  •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 역, T8 no.235
  • 『범망경』 권하, 구마라집 역, T24 no.1484
  • 『대지도론』, 구마라집 역, T25 no.1509
  • 무착 『섭대승론』, 현장 역, T31 no.1594
  • 호법 등 『성유식론』, 현장 역, T31 no.1585
  • 『금광명최승왕경』 분별삼신품, 의정 역, T16 no.665
  • 『묘법연화경』 여래수량품, 구마라집 역, T9 no.262
  • 『관보현보살행법경』, 담무밀다 역, T9 no.277
  • 천태대사 지의 『법화문구』 권9하, T34 no.1718
  • 체관 『천태사교의』, T46 no.1931
  • 전교대사 사이초 『수호국계장』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인용)
  • 니치렌 대성인 「일념삼천이사」 · 「십여시사」 · 「일념삼천법문」 · 「개목초」 · 「관심의 본존초」 · 「본존문답초」 · 「성우문답초」 · 「선시초」 · 「목회이상개안지사」 · 「당체의초」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 「치병대소권실위목」 · 「오타전부인답서」 · 「삼대비법품승사」 ·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 · 「제법실상초」 · 「묘호니부인답서」 · 「우에노전미망인답서」 · 『어의구전』 (창가학회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강의 · 연구

  • 창가교학연구실, 「一念三千理事」 · 「開目抄」 · 「如来滅後五五百歳始観心本尊抄」 · 「三世諸仏総勘文教相廃立」 · 「治病大小権実違目」 · 「三大秘法禀承事」 · 「妙法尼御前御返事」 각 장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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