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년 9월 12일 밤, 가마쿠라 유이가하마의 고료 신사 앞에서 호송 행렬이 멈추었다. 「잠깐, 여러분. 여기 알릴 사람이 있다.」 대성인은 따르던 아이 구마오를 하세의 한 무사 집으로 보내셨다. 그는 맨발로 뛰어나왔고, 그의 형제들이 뒤를 따랐다. 그날은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그는 말고삐에 매달려 가타세의 다쓰노구치까지 따라갔고, 대성인의 목이 떨어지면 자기도 배를 가르겠다고 했다. 대성인은 그 일을 열 해가 지나도록 잊지 않으셨다. 「어느 세상에선들 잊겠는가.」 그 무사의 이름이 시조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 요리모토, 사람들이 「시조깅고」라 부르던 사람이다.
시조깅고는 가마쿠라 문하의 중심이었다. 대성인이 사도에서 「개목초」를 써서 맡기신 사람, 문하 전체에 보내는 「성인어난사」를 「사부로자에몬 님 곁에 두라」고 하신 사람이 그였다. 창가학회 강의는 시모우사의 도키조닌, 스루가의 난조도키미쓰와 함께 그를 대성인 외호의 중심으로 들고, 도키조닌과 나란히 「쌍벽」이라 부른다. 도키조닌이 「관심의 본존초」를 받았다면 시조깅고는 「개목초」를 받았다. 도키조닌이 어서를 지킨 사람이었다면, 시조깅고는 어서대로 산 사람이었다. 강의는 그를 한마디로 「실천의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영광으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호조 일문 가운데서도 거듭 모반의 의심을 받은 나고에 집안을 아버지 대부터 섬겼다. 주군이 고쿠라쿠사료칸을 깊이 믿는 가운데 홀로 법화경을 믿었고, 대성인이 사도에서 돌아오신 해에 그 주군에게 법을 설했다가 미움을 샀다. 동료들의 시기와 모함, 형의 등돌림, 영지를 빼앗을 듯한 하문(下文), 밤길의 칼끝이 몇 해 동안 이어졌다. 그는 성미가 급했다. 대성인은 그에게 「그대는 성미가 사나운 사람이라 불이 타오르는 것 같다」고 쓰시고, 술자리를 삼가라, 동생들을 아끼라, 밤에는 문 옆과 마루 밑을 살피라고 편지마다 일러 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씀대로 살아, 주군의 병을 고치고, 잃을 뻔한 땅의 세 배를 받았다. 이 페이지는 그 과정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따라간다.
- 1부 나고에 집안의 무사 — 호조 일문과 나고에 씨, 사료의 층, 이름, 가계와 부모, 형제와 누이, 주군의 집.
- 2부 가마쿠라의 단나 — 입신의 여러 설, 가마쿠라 문하의 중심, 어머니의 죽음과 첫딸의 탄생.
- 3부 다쓰노구치 — 1271년 여름, 9월 12일 밤의 구마오, 형장의 「지금입니다」, 에치까지, 「함께 지옥에」.
- 4부 사도의 해 — 「개목초」를 받은 사람, 2월 소동과 주군 집안의 위기, 사도로 가는 길, 「법화종의 시조깅고」, 교오님.
- 5부 주군과 동료 — 주군을 절복하다, 「이 경은 지니기 어렵다」, 왕사성, 「주군을 떠나지 말라」, 구와가야쓰와 하문, 「요리모토진장」, 「불법은 도리」, 「스슌천황어서」, 출사의 행렬, 돌아온 땅.
- 6부 법화종의 시조깅고 — 기바 대신, 대성인의 약, 니치겐뇨, 아쓰와라와 「성인어난사」, 이케가미의 가을, 우쓰부나의 만년, 대성인이 본 시조깅고, 세 층의 시조깅고.
- 가마쿠라하세의 집 · 나고에 마쓰바가야쓰 · 유이가하마 · 구와가야쓰
- 1246이즈 에마주군 유배 · 시조 집안 영지
- 1271.9.12가타세 다쓰노구치형장
- 1271.9.13사가미 에치에치까지 모심
- 1272 봄사도 이치노사와방문
- 1276에치고영지 교체 문제 · 지역만
- 1278 윤10월가이 미노부방문
- 시나노 도노오카영지 · 설
- 1282.10무사시 이케가미대성인 입멸
- 가이 우쓰부나만년
시대 — 호조 일문과 나고에 씨
12세기 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연 무사 정권은 요리토모와 두 아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실권이 호조 집안으로 넘어갔다. 요리토모의 아내 마사코의 친정인 호조 씨는 본래 이즈의 작은 호족이었다. 아버지 도키마사가 초대 집권(執權)이 되고, 아들 요시토키가 2대 집권으로 1221년 조큐의 난을 이겼다. 그 뒤 막부는 교토에서 내려온 어린 쇼군을 이름으로 받들고, 정치의 실제는 호조 집안의 집권이 맡았다.
요시토키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맏아들 야스토키가 3대 집권이 되었고, 둘째 아들 도모토키(朝時)는 가마쿠라 동남쪽 나고에(名越)에 집을 두어 「나고에 님」이라 불렸다. 나고에 씨는 호조 일문 가운데 집권 집안(得宗家)에 버금가는 명문이었다. 도모토키는 조큐의 난 때 호쿠리쿠 길의 총대장으로 상경했고, 1213년 와다 요시모리의 난에서 공을 세워 와다 일족이 갖고 있던 땅의 일부를 받았다. 창가학회 강의는 그 가운데 아와국 나가사군이 들어 있었으리라고 본다. 대성인이 태어난 고미나토도, 입종선언을 하신 세이초지도 나가사군 안이다.
그러나 나고에 씨는 「불운한 일족」이었다. 강의는 이렇게 쓴다. 나고에 씨는 득종가에 버금가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집권도 연서(連署)도 한 사람 내지 못했고, 막부의 역사에 오를 때마다 모반의 혐의와 함께 올랐다. 1242년 야스토키가 세상을 떠날 무렵 도모토키는 서둘러 출가했다. 1246년(간겐 4년)에는 도모토키의 맏아들 미쓰토키(光時)가 전 쇼군 요리쓰네를 업고 집권 도키요리를 몰아내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머리를 깎고 사죄했으나 관직을 빼앗기고 이즈의 에마(江間)로 유배되었다(「미야 소동」). 미쓰토키가 이 땅의 이름을 따서 「에마 님」이라 불리게 되는 것은 이때부터다. 그리고 1272년 2월에는 미쓰토키의 아우 도키아키와 노리토키가 집권 도키무네의 이복형 도키스케와 한패라는 혐의로 가마쿠라에서 죽임을 당했다(「2월 소동」, 4부 16절).
시조깅고의 집안은 이 나고에 씨를 대대로 섬겼다. 그의 아버지는 도모토키와 미쓰토키를, 그 자신은 미쓰토키와 그 아들 지카토키(親時)를 섬겼다. 대성인의 어서에 나오는 「에마 님」 · 「뉴도 님」 · 「에마의 시로 님」이 그들이다. 다쓰노구치 법난의 밤에 대성인을 형장으로 끌고 간 막부 권력의 한복판에서, 시조깅고는 늘 의심받는 쪽의 가신이었다.
종교의 풍경도 보아 두어야 한다. 13세기 중엽의 가마쿠라에는 교토에서 온 정토 염불, 집권 도키요리가 세운 겐초지의 선종(란케이 도류), 그리고 나라의 율종을 이은 닌쇼(료칸)가 집권층의 귀의를 받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닌쇼는 1252년 간토로 내려와 병자와 빈민을 구제하는 일로 이름을 얻었고, 호조 시게토키가 고쳐 지은 극락사의 개산이 되었다. 시조깅고의 주군 에마 미쓰토키와 지카토키는 이 고쿠라쿠사료칸의 열성 신자였다고 강의는 본다. 그 가신들 대부분도 주군을 따라 료칸을 믿었다. 시조깅고는 그 안에서 혼자 법화경을 믿었다.
- 도키마사(초대 집권) — 요시토키(2대)
- ① 야스토키(3대) — 도키우지 — 쓰네토키(4대) · 도키요리(5대) — 도키무네(8대) · 도키스케(2월 소동)득종가 줄: 야스토키 → 도키우지 → 도키요리 → 도키무네
- ② 도모토키(나고에) — 미쓰토키(에마 · 1246 유배) — 지카토키(에마의 시로)미쓰토키의 아우: 도키아키 · 노리토키(1272.2 죽임) · 시조 집안이 섬긴 줄: 도모토키 → 미쓰토키 → 지카토키
- ③ 시게토키(극락사) — 나가토키(6대)
- ④ 마사무라(7대)
사료의 층
시조깅고의 생애를 전하는 자료는 도키조닌의 경우보다 단순하다. 그 자신이 쓴 글은 남지 않았고, 세상의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대성인의 어서가 다른 어느 문하보다 그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전한다.
① 대성인의 어서 — 시조깅고와 아내 니치겐뇨 앞으로 보낸 어서는, 창가교학연구실 블로그의 목록만으로도 쉰 편에 가깝다(부부 앞 · 딸 앞 포함). 날짜가 분명한 것은 1271년 5월부터 1280년 무렵까지에 몰려 있다. 강의는 1273년 이후에 받은 편지만도 「서른 편 가까이」라고 셈한다. 이 편지들은 그의 주군과 동료, 형제와 누이, 아내와 딸, 병과 약과 영지까지 전한다.
② 「요리모토진장(賴基陳狀)」 — 1277년 6월, 주군의 하문에 답하여 대성인이 시조깅고의 이름으로 대신 쓰신 진술서다(5부 25절). 여기에 그의 아버지와 그 자신이 주군을 위해 한 일이 그의 목소리로 적혀 있다. 닛코상인이 베껴 쓴 사본이 전하고, 초고본과 다듬은 본이 있다고 강의는 전한다.
③ 대성인의 다른 글 — 「종종어진무어서」는 다쓰노구치의 밤을, 「개목초」는 그 글이 「유연(有緣)의 제자」에게 보내졌음을 적는다. 「사도어서」 · 「가연정업서」 · 「효에사칸전답서」 같은 다른 문하 앞 어서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④ 문하의 기록 — 닛코상인 문하의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는 「개목초」가 「시조깅고 요리모토에게 주신 것」이라 적는다. 대성인 장례의 기록에 그가 번(幡)을 들었다는 것도 전한다(6부 34절).
⑤ 계도와 지방 전승 — 그가 만년을 보냈다는 가이국 우쓰부나(지금의 야마나시현 미나미코마군 난부정)의 옛집 시조 쓰타지로 집안에 계도가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에는 자손을 자처하며 「시조」를 성으로 쓰는 집이 수십 호 있다. 강의는 이 계도를 「지금 남은 유일한 자료이므로 참고한다, 신빙성은 더 연구할 여지가 있다」는 단서와 함께 쓴다.
| 항목 | ① 어서 | ② 「요리모토진장」 | ③ 다른 어서종종어진무 · 개목초 · 사도어서 등 | ④ 문하의 기록 | ⑤ 계도 · 지방 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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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노트 — 시조깅고의 생애 연구는 거의 어서에 기댄다. 어서의 연대 추정이 판본과 연구에 따라 한두 해씩 달라지므로, 영지 문제나 주군과의 관계처럼 여러 편지를 이어서 세우는 서술은 그만큼 흔들릴 수 있다. 이 페이지는 창가교학연구실 강의의 연대를 따르고, 강의 안에서 갈리는 곳은 「연대 대조」에 적었다. 또 강의가 인용한 쪽 · 줄 번호에는 오기가 몇 곳 있다(예: 「1272:14」 → 1172:14). 부록 C-4에 모았다.
이름 — 시조 · 나카쓰카사 · 사부로자에몬노조 · 긴고
이 사람의 정식 이름은 「시조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 요리모토(四條中務三郎左衛門尉賴基)」다. 길지만 하나씩 풀면 그의 신분이 보인다.
시조(四條) — 성이다. 우쓰부나의 계도는 이 집안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에서 18대째인 시조 다카스에(四條隆季)로부터 이어진 집안이라 적는다. 다카스에의 5대째가 아버지 요리카즈(賴員)이고, 그 아들이 요리모토다.
나카쓰카사(中務) — 아버지 요리카즈가 나고에 도모토키를 섬기며 나카쓰카사성(中務省)의 소승(少丞)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나카쓰카사성은 율령제 중앙 관제의 여덟 성 가운데 첫째로 궁중의 정무를 맡던 곳이지만, 9세기 초부터 이미 실권이 없었다고 강의는 설명한다. 가마쿠라 시대에 무사들이 받던 이런 관명은 이름일 뿐, 실제 직무와는 관계가 없었다. 「나카쓰카사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대성인은 그를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 님」이라 부르기도 하셨다.
사부로(三郎) — 통칭이다. 셋째 아들이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서에 형과 아우가 다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맏아들도 막내도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5절).
사에몬노조(左衛門尉) — 궁문을 지키는 좌위문부(左衛門府)의 3등관이다. 그는 미쓰토키를 섬기며 이 관에 임명되었다. 대위(大尉)인지 소위(少尉)인지는 알 수 없고, 이것도 실제 권한이 따르는 자리는 아니었다. 다만 강의는 그가 아버지와 2대에 걸쳐 에마 집안을 섬겼고 의술에도 뛰어났던 점에서, 그 지위는 안정되어 있었으리라고 본다.
긴고(金吾) — 좌위문을 당나라의 관명으로 부른 이름이다. 「금(金)」은 칼과 병기, 「오(吾)」는 막는다는 뜻으로, 병기를 들고 궁문 밖을 지키는 관청을 가리킨다. 『한서보주』는 「금오」를 상서롭지 못한 것을 피하는 새의 이름이라 하고, 천자가 나들이할 때 앞에서 길을 여는 직책을 이렇게 불렀다고 적는다. 「시조깅고」는 관명의 중국식 별칭으로 부른 통칭이다.
요리모토(賴基) — 실명이다.
대성인은 편지마다 그를 다르게 부르셨다. 「시조깅고 님」이 가장 많고, 「사에몬노조 님」 · 「시조 사에몬노조 님」 · 「나카쓰카사 사에몬노조 님」 · 「사부로자에몬 님」, 그리고 아내 앞 편지에서는 「사에몬 님(さえもん殿)」이라 쓰셨다. 「성인어난사」의 끝에는 「사부로자에몬 님 곁에 두라(さぶらうざへもん殿のもとに・とどめらるべし)」(1191쪽)고 가나로 적으셨다.
- 四條시조성 · 후지와라 → 시조 다카스에의 집안, 계도
- 中務나카쓰카사아버지 요리카즈의 관명 · 나카쓰카사성 소승
- 三郎사부로통칭 · 맏아들도 막내도 아님
- 左衛門尉사에몬노조그 자신의 관명 · 좌위문부 3등관 · 미쓰토키를 섬기며
- →金吾긴고좌위문의 당나라 이름 · 「금 = 병기, 오 = 막음」
- 賴基요리모토실명
- 四条金吾殿
- 左衛門尉殿
- 四条左衛門尉殿
- 中務左衛門尉殿
- 中務三郎左衛門尉
- さぶらうざへもん殿
- さえもん殿(아내 앞)
가계와 부모 — 「부자 2대, 목숨을 주군께」
시조깅고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태어난 곳으로는 이즈, 가마쿠라, 교토, 그리고 나고에 도모토키의 영지가 있던 에치고 쪽이 거론되지만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 않다. 태어난 해는 1300년(쇼안 2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전승과 그 나이에서 거꾸로 셈하여 1230년(간기 2년) 무렵으로 본다. 대성인보다 여덟 살쯤 아래다.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의 모습이 분명해지는 것은 대성인의 문하가 된 뒤부터다.
아버지 시조 요리카즈
아버지 요리카즈(賴員)는 조큐의 난 뒤 나고에 도모토키를 섬겼고, 1245년 도모토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아들 미쓰토키를 주군으로 모셨다. 이듬해 1246년, 미쓰토키가 모반의 혐의로 이즈 에마에 유배될 때 가신들은 하나같이 주군을 버리고 떠났다. 요리카즈만이 홀로 남아 유배지까지 주군을 따라갔다. 이 일은 31년 뒤 대성인이 아들을 대신해 쓰신 「요리모토진장」에 그대로 적혀 있다.

頼基は父子二代・命を君に・まいらせたる事顕然なり・故親父中務某故君の御勘気かふらせ給いける時・数百人の御内の臣等・心かはりし候けるに中務一人・最後の御供奉して伊豆の国まで参りて候き
요리모토는 부자 2대가 목숨을 주군께 바친 것이 분명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나카쓰카사 아무개는, 돌아가신 주군께서 견책을 받으셨을 때 수백 명의 가신들이 마음이 바뀌었는데도 나카쓰카사 혼자 마지막까지 모시고 이즈국까지 따라갔습니다.
요리카즈는 1253년(겐초 5년) 3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법명은 라이잔(賴山)이었다고 한다. 대성인이 세이초지에서 입종선언을 하신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28일이다. 아버지는 대성인을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이케가미 집안의 딸이라고 전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대성인께 귀의했고, 1270년(분에이 7년)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해 우란분에 대성인은 시조깅고에게 이렇게 쓰셨다.
今月十二日の妙法聖霊は法華経の行者なり、日蓮が檀那なり……是こそ四条金吾殿の母よ母よと、同心に頭をなで悦びほめ給うらめ
이달 12일의 묘법 성령은 법화경의 행자이며 니치렌의 단나이다. …… 「이 사람이야말로 시조깅고 님의 어머니로구나, 어머니로구나」 하고 (여러 부처가) 한마음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뻐하고 칭찬하실 것이다.
이 뒤로 시조깅고는 해마다 어머니의 기일이면 대성인께 추선의 공양을 올렸다. 매달 12일도 어머니의 날이었다. 1271년 9월 12일 밤, 구마오가 하세의 집에 달려왔을 때 형제들이 모여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고 강의는 본다(3부 11절).
연대 대조 — 출생은 1230년 무렵(강의). 「주사친어서」 강의의 어석은 별세를 쇼안 2년(1300) 3월 15일, 나이 일흔하나로 적는다. 이를 세는나이로 거꾸로 셈하면 1230년이 된다. 「四条金吾について」는 별세를 「1300년, 일흔 전후」로만 적는다. 아버지의 이름은 「요리카즈(賴員)」(「四条金吾について」의 계도)와 「요리마사(賴昌)」(「왕사성사」 강의의 어석)로 갈린다. 이 페이지는 계도를 따른다. 입신의 해는 1256년(겐초 8년) 무렵이 일반적이다(2부 7절).
형제와 누이
시조깅고에게는 적어도 세 형제와 한두 누이가 있었다. 계도는 사에몬노조 요리타카, 시로 요리스에, 시치로 요리자네를 형제로 적는다. 어서에는 「그대의 형(殿の兄)」(1172쪽)도, 「그대의 아우들(御をととども)」(1176쪽, 2차 확인)도 나온다. 그러니 그는 맏이도 막내도 아니었다.
1271년 9월 12일 밤, 대성인의 말고삐를 잡은 것은 그 혼자가 아니었다. 「종종어진무어서」는 이렇게 적는다. 「사에몬노조와 형제 네 사람이 말고삐에 매달려 고시고에 다쓰노구치까지 갔다(左衛門尉・兄弟四人・馬の口にとりつきて・こしごへたつの口にゆきぬ)」(913쪽). 강의는 이때 형제들도 대성인께 귀의해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다쓰노구치 뒤 문하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고, 시조깅고가 주군을 절복하여 미움을 산 뒤로, 형제들은 하나둘 그에게서 멀어졌다. 특히 형은 그를 해치는 편에 섰다. 대성인은 1277년 「스슌천황어서」에 이렇게 쓰셨다.
竜象と殿の兄とは殿の御ためにはあしかりつる人ぞかし天の御計いに殿の御心の如くなるぞかし
류조와 그대의 형은 그대에게 해로운 사람이었다. 하늘의 헤아림으로 그대의 뜻대로 된 것이다.
류조보는 시조깅고를 모함한 구와가야쓰의 승려다(5부 24절). 같은 해의 다른 편지에는 「믿음직한 형제가 없다(たのもしき兄弟なし)」(1163쪽, 2차 확인)는 말도 있다. 1278년의 편지는 그의 처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형제에게도 버림받고, 동료에게도 원수로 여겨지고, 귀공자들에게도 외면당하고, 일본국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받으셨지만(兄弟にもすてられ同れいにも・あだまれ・きうだちにもそばめられ日本国の人にもにくまれ給いつれども)」(「시조깅고전답서(소령서)」, 1184쪽, 2차 확인).
그런데도 대성인은 그에게 형제를 버리지 말라고 거듭 이르셨다. 1273년의 「가책방법멸죄초」에는 이렇게 있다.
兄弟も兄弟とおぼすべからず、只子とおぼせ(中略)舎弟等を子とせられたらば今生の方人・人目申す計りなし
형제도 형제라 여기지 말고 그저 자식이라 여기라. (중략) 아우들을 자식으로 삼으면 이 세상에서 그대 편이 되어 줄 것이고, 남 보기에도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1278년의 「시조깅고어서」에서는 더 구체적이다.
御をととどもには常はふびんのよしあるべし。つねにゆぜにざうりのあたいなんど心あるべし。もしやの事のあらむには、かたきはゆるさじ、我がためにいのちをうしなはんずる者ぞかしとをぼして、とがありとも、せうせうの失をばしらぬやうにてあるべし
아우들에게는 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보이라. 늘 목욕값이나 짚신값 같은 것까지 마음을 쓰라. 만일의 일이 있을 때 적은 그들을 놓아두지 않을 것이니, 나를 위해 목숨을 잃을 사람들이라 여기고, 허물이 있더라도 작은 잘못은 모르는 척하라.
누이들에 대해서도 「누이들을 딸이라 여긴다면 어찌 효양하지 않겠는가(妹等を女と念はば、などか孝養せられざるべき)」(1132쪽, 2차 확인), 「내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며 임종 때까지 마음에 걸려 하던 누이들이니, 허물을 용서하고 가엾이 여긴다면 어머니의 마음이 편해져 효양이 될 것이라고 깊이 생각하라」(1176쪽, 2차 확인)고 쓰셨다. 누이들도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성인이 형제를 아끼라고 하신 데는 신앙의 까닭과 함께 현실의 까닭이 있었다. 「스슌천황어서」는 이렇게 쓴다. 「주사위 돌은 둘이 나란히 있으면 잡히지 않고, 수레바퀴는 둘이 있으면 길에서 기울지 않는다. 적도 두 사람 있는 자는 꺼린다. 아무리 허물이 있더라도 아우들을 잠시도 몸에서 떼지 마라(すぐろくの石は二つ並びぬればかけられず車の輪は二あれば道にかたぶかず、敵も二人ある者をば・いぶせがり候ぞ、いかにとがありとも弟ども且くも身をはなち給うな)」(1171쪽). 혼자인 무사는 표적이 되었다.
- 1271.9.12「兄弟四人・馬の口にとりつきて」913
- 1273「兄弟も兄弟とおぼすべからず只子とおぼせ」1132*
- 1277「竜象と殿の兄とは…あしかりつる人」1172「たのもしき兄弟なし」1163*「弟ども且くも身をはなち給うな」1171
- 1278「御をととどもには常はふびんのよし」1176*「兄弟にもすてられ」1184*
연구 노트 — 어서에 여러 번 나오는 「밤순찰의 무사들(夜廻の殿原)」을 시조깅고의 형제로 보는 설이 있다. 「스슌천황어서」는 「이 네 사람은 멀리는 법화경 때문에, 가까이는 니치렌 때문에 목숨을 건 집을 위에 빼앗겼다(此の四人は遠くは法華経のゆへ近くは日蓮がゆへに命を懸けたるやしきを上へ召されたり)」(1172쪽)고 쓴다. 강의는 이것이 모두 형제를 가리킨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형제들이 가마쿠라의 경비(밤순찰)를 맡았을 가능성을 덧붙이는 데 그친다. 이 페이지는 「밤순찰의 무사들」을 「법화경 때문에 집을 빼앗긴 동신의 무사들」로만 적는다.
주군의 집 — 에마 미쓰토키와 지카토키
1246년 유배된 미쓰토키는 뒤에 용서를 받아 가마쿠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직과 영지를 빼앗긴 그는 다시 집안의 당주가 되지 못했다. 1262년의 『관동왕환기』는 그를 「에치고 뉴도, 법명 렌치(蓮智)」라는 재가 사미로 적는다. 가독은 아들 지카토키, 곧 「에마의 시로 님」이 이었다. 1278년의 편지에 「에마의 시로 님이 출사하실 때 따르는 무사」(1175쪽)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지카토키다.
그런데 대성인은 1277년의 「스슌천황어서」에서도, 1279년 무렵의 편지에서도 시조깅고의 주군을 「뉴도 님」이라 부르신다. 강의는 이것을 미쓰토키로 본다. 출가한 은거의 몸이었지만 나고에 · 에마 일문 안에서는 상당한 힘을 가졌을 것이고, 그래서 1272년 2월 소동 때 아우들과 함께 의심을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깅고가 섬긴 주군은 미쓰토키와 지카토키 두 사람이었다고 강의는 정리한다.
주종 관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강의는 시조 집안의 영지가 이즈에도 있었던 데서, 호조 씨가 아직 이즈의 호족이던 시절부터의 주종 관계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시조 집안은 도모토키 · 미쓰토키 · 지카토키 3대에 걸쳐, 요리카즈 · 요리모토 2대가 섬겼다. 그 3대가 모두 득종가에게 의심받고 짓밟힌 「그늘의 주군」이었다. 시조 집안은 그 그늘에서 충성을 지켰다.
연대 대조 — 「요리모토진장」(1277)은 미쓰토키를 「돌아가신 주군(故君)」이라 부르는데, 같은 해의 「스슌천황어서」와 그 뒤의 편지는 「뉴도 님」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적는다. 강의는 닛코상인이 베낀 「요리모토진장」의 초고본에는 「君ノ大方ノ御不審お蒙せ給て」라 되어 있고 다듬은 본에 「故君ノ御勘気カフラセ有ケル時」라 되어 있는 점을 들어, 미쓰토키는 1278년(고안 원년)에는 살아 있었고 1316년(쇼와 5년)에는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본다. 「故君」은 뒤에 다듬으며 들어간 표현일 수 있다.
시조깅고는 늘 의심받는 주군을 섬겼고, 그 주군은 대성인을 박해한 료칸을 믿었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 조건을 그의 신앙을 이해하는 열쇠로 본다. 그는 세상의 충성과 법화경의 신앙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대성인은 그에게 둘 중 하나를 버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군을 떠나지 말고, 그러나 법화경도 버리지 말라. 이 「둘 다」의 길이, 뒤의 몇 해 동안 그가 걸어야 할 길이었다.
입신 — 세 가지 설
대성인과 시조깅고가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그가 어떤 길로 신앙에 들어섰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가 받은 편지로 지금 알려진 것은 모두 1271년 이후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열 해 앞선 편지 한 통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1261년(고초 원년) 4월 28일 자로 전하는 「시지시로전어서(椎地四郎殿御書)」다.

四条金吾殿に見参候はば能く能く語り給い候へ
시조깅고 님을 만나거든 (이 법문을) 잘 이야기해 드리라.
이 편지에서 대성인은 큰 난이 없으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니라 하시고, 법화경의 한 글귀라도 남에게 말하는 사람은 여래의 사자라고 가르치셨다. 그 법문을 시조깅고에게 잘 전하라는 것이다. 이즈 유배(1261년 5월 12일)를 두 주쯤 앞둔 때였다. 강의는 이 한 줄로 보아, 1261년에는 시조깅고가 이미 신앙을 하고 있었고, 문하 가운데 중심인물의 하나로 활약하고 있었다고 본다. 시지시로와의 인연은 열아홉 해 뒤까지 이어졌다. 1280년의 「시조깅고허어문」에는 「시지시로가 와서 그대 앞에서 들은 법문 이야기를 하니 참으로 시원하다」는 말이 있다(1195쪽, 2차 확인).
그러면 언제 만났는가. 강의는 세 가지 생각을 소개한다.
첫째, 1256년(겐초 8년) 무렵설. 가장 널리 쓰이는 연대다. 「주사친어서」 · 「왕사성사」 강의의 어석도 「1256년, 스물일곱 무렵, 이케가미 형제 · 구도요시타카 등과 앞뒤로 귀의했다」고 적는다.
둘째, 겐초지 참선설. 대성인이 가마쿠라에 드신 1253년은 집권 도키요리가 3년에 걸쳐 지은 겐초지가 완성된 해였다. 송에서 온 선승 란케이 도류가 그 개산이 되었고, 도키요리와 도키무네가 참선하자 가마쿠라 무사들 사이에 선이 유행했다. 시조깅고도 도류의 문하에 참선했는데, 「선종은 천마의 법」이라는 대성인의 말을 듣고 분개하여 마쓰바가야쓰로 따지러 갔다가 도리어 대성인의 지혜와 도리에 굴복했고, 함께 참선하던 에바라 요시무네 · 구도요시타카 · 이케가미 무네나카 · 무네나가 형제를 이끌고 함께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셋째, 나고에 인연설. 대성인이 입종선언 뒤 도조 가게노부의 추격을 피해 가마쿠라로 건너와 초암을 맺으신 곳이 나고에의 마쓰바가야쓰였다. 막부가 있는 곳에서 너무 가까운 그 땅에 이름 없는 승려가 초암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그리고 그 도움의 끈을 아와국 나가사군의 영가(領家)에서 찾는다. 대성인이 「영가의 비구니」 · 「나고에의 비구니」 · 「오아마」라 부르신 이 여인은 나고에 일족이고, 대성인의 부모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었다. 대성인은 입종 전에 도조 가게노부가 영가의 땅(세이초지 · 후타마데라)을 빼앗으려 할 때 영가의 편에 서서 두 절을 되찾아 주셨다. 「세이초사대중중」은 「니치렌이 적이 되어 영가 편에 서서 …… 한 해 안에 두 절이 도조의 손을 떠났다」(894쪽)고 적는다. 그렇다면 쫓겨 오신 대성인을 나고에 집안이 도왔을 것이고, 그 나고에 집안을 일찍부터 섬긴 시조 집안의 요리모토가 주군의 명을 받아 초암에 갔다가 대성인을 만났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강의는 이 세 생각 모두 「자료가 없으므로 어서를 통한 고찰이나 상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한다. 이 페이지도 설로만 소개한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1253년 대성인이 가마쿠라에 드신 뒤부터 1261년 이즈 유배까지의 사이에 시조깅고는 대성인의 문하가 되었고, 이즈 유배 무렵에는 가마쿠라 문하의 중심에 서 있었다.
확인된 사실1261.4.28 「시지시로전어서」 — 이미 문하의 중심(1448*)
| 항목 | ① 1256 무렵설 | ② 겐초지 참선설 | ③ 나고에 인연설 |
|---|---|---|---|
| 줄거리 | 1256 무렵 · 27세 | 란케이 도류 → 마쓰바가야쓰에 따지러 감 → 굴복 · 에바라 · 구도 · 이케가미 형제와 함께 | 아와 나가사군의 영가 = 나고에 일족 → 마쓰바가야쓰 초암의 후원 → 주명으로 초암에 감 |
| 근거 | 「주사친어서」 · 「왕사성사」 어석 | 확인 중 | 확인 중 |
|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 아니오 | 아니오 | 아니오 |
| 강의의 처리 | 추정 · 상상의 범위 | 추정 · 상상의 범위 | 추정 · 상상의 범위 |
- 줄거리
- 1256 무렵 · 27세
- 근거
- 「주사친어서」 · 「왕사성사」 어석
-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 아니오
- 강의의 처리
- 추정 · 상상의 범위
- 줄거리
- 란케이 도류 → 마쓰바가야쓰에 따지러 감 → 굴복 · 에바라 · 구도 · 이케가미 형제와 함께
- 근거
- 확인 중
-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 아니오
- 강의의 처리
- 추정 · 상상의 범위
- 줄거리
- 아와 나가사군의 영가 = 나고에 일족 → 마쓰바가야쓰 초암의 후원 → 주명으로 초암에 감
- 근거
- 확인 중
-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 아니오
- 강의의 처리
- 추정 · 상상의 범위
하세의 집 — 가마쿠라 문하의 중심
시조깅고의 집은 가마쿠라 서쪽의 하세(長谷)에 있었다. 1271년 9월 12일 밤 대성인이 구마오를 보내신 곳이 「하세의 요리모토의 집」이었다고 강의는 쓴다. 1277년의 구와가야쓰 문답이 열린 구와가야쓰도 하세의 대불 서쪽 문 근처로, 그의 집에서 가까웠다(5부 24절). 대성인의 초암이 있던 나고에는 가마쿠라의 동남쪽, 하세는 서남쪽이다. 두 곳 사이로 유이가하마의 바닷가가 열려 있다.
1260년대의 시조깅고에 대해서는 편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도키조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강의는 이것을 대성인이 가마쿠라에 계시는 동안 그를 직접 만나 지도하셨기 때문으로 본다. 편지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은 대성인이 멀리 떠나신 뒤, 다쓰노구치와 사도와 미노부의 때다.
이 무렵 가마쿠라의 문하로는 이케가미 무네나카 · 무네나가 형제, 구도요시타카, 에바라 요시무네, 오쿠라 도노쓰지의 주로 뉴도, 사지키부인, 그리고 승려 제자로 벤아사리닛쇼와 다이후 아자리 니치로 등이 있었다. 대성인은 문하 전체에 보내는 편지를 시조깅고에게 맡기시는 일이 많았다. 1272년 3월의 「사도어서」는 「이 글은 도키 님 쪽, 사부로자에몬 님, 오쿠라의 탑 거리의 주로 뉴도 님 등, 사지키부인 부인이 하나하나 보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로」(956쪽) 보내졌다(도키조닌 편 19절). 1279년의 「성인어난사」는 「사람들 가운데」 앞이었지만 끝에 「사부로자에몬 님 곁에 두라」고 적혀 있었다(6부 33절). 「개목초」 서강은 당시의 형편을 이렇게 요약한다. 가마쿠라에 시조깅고, 시모우사에 도키 뉴도, 스루가 우에노에 난조도키미쓰. 이 세 사람이 재가 문하의 중심이었다.
- 마쓰바가야쓰 초암나고에 — 동남쪽
- 전승시조깅고의 집하세 — 서남쪽 · 위치는 전승
- 1277.6구와가야쓰문답 — 대불 서쪽
- 고쿠라쿠지극락사 — 료칸
- 겐초지도류
- 1271.9.12밤의 길마쓰바가야쓰 → 와카미야 대로(하치만구 앞) → 유이가하마 → 고료 신사 앞(정지 · 구마오를 보냄) → 하세의 집 → 가타세 방향
어머니의 죽음과 첫딸 — 1270–1271
다쓰노구치 직전의 두 해, 시조 집안에는 죽음과 탄생이 차례로 왔다. 1270년 7월 12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4절), 이듬해 5월에는 첫딸이 태어났다.
1271년 5월 7일, 아내 니치겐뇨는 아이를 가졌음을 대성인께 알리고 순산을 위한 부적을 청했다.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懐胎のよし承り候い畢んぬ。それについては符の事仰せ候。日蓮相承の中より撰み出して候。能く能く信心あるべく候。たとへば秘薬なりとも毒を入れぬれば薬の用すくなし。……就中、夫婦共に法華の持者なり。法華経流布あるべきたねをつぐ所の玉の子出で生れん。目出度覚え候ぞ
아이를 가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에 관해 부적을 말씀하셨기에 니치렌이 이어받은 것 가운데서 골라 보냅니다. 잘 믿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비유하면 비약이라도 독을 넣으면 약의 효험이 적어집니다. ……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법화경을 지니는 사람입니다. 법화경이 널리 퍼질 씨를 이을 구슬 같은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경사스럽습니다.
이튿날 5월 8일, 딸이 태어났다. 대성인은 곧 이름을 지어 보내셨다.
若童生れさせ給いし由承り候。目出たく覚へ候。殊に今日は八日にて候……いそぎいそぎ名をつけ奉る。月満御前と申すべし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경사스럽습니다. 더구나 오늘은 8일입니다. …… 서둘러 이름을 지어 드립니다. 쓰키마로님(月滿御前)이라 하십시오.
대성인은 아이가 8일에 태어난 것을 특히 기뻐하시고, 「바라던 일이 밀물이 차오르듯, 봄 들판에 꽃이 피듯」 이루어졌다고 쓰셨다. 쓰키마로님은 뒤에 사촌 요리미치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낳았고, 1317년 12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계도는 전한다. 법호는 호렌 니치묘(法蓮日妙)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넉 달 뒤가 다쓰노구치의 밤이다. 갓난아이를 안은 아내를 집에 두고, 그는 맨발로 뛰어나갔다.
연대 대조 — 「시조깅고부인어서」와 「쓰키마로님어서」는 분에이 8년(1271) 5월 7일 · 8일로 본다. 「四条金吾について」 본문에는 「분에이 8년(1272)」이라 적힌 곳이 있는데, 분에이 8년은 1271년이므로 서력이 잘못 적힌 것이다. 이 페이지는 1271년으로 쓴다.
입종 직후부터 이즈 유배까지, 대성인의 문하가 처음 생겨나던 때에 시조깅고는 이미 「만나거든 잘 전하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창가학회 강의는 그가 가마쿠라 문하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학식이나 지위보다 「곧은 신심」에서 찾는다. 그 신심은 아내 니치겐뇨와 함께 한 것이었다. 대성인은 첫딸이 태어나기 전날 「부부가 함께 법화경을 지니는 사람」이라 쓰셨다. 뒤의 고난을 넘게 한 힘의 절반은 이 집안에 있었다(6부 32절).
1271년 여름 — 기우와 고발
1271년 봄부터 여름까지 큰 가뭄이 들었다. 막부는 고쿠라쿠사료칸에게 비를 비는 기도를 명했다. 대성인은 료칸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제안하셨다. 「이레 안에 비를 내리시면 니치렌이 염불무간이라 하는 법문을 버리고 료칸 상인의 제자가 되어 이백오십 계를 지키겠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저 스님이 계를 지키는 듯한 것이 큰 속임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료칸은 6월 18일부터 제자 백수십 명을 모아 기우의 법을 행했으나, 이레가 지나고 두 이레가 지나도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고 거센 바람만 불었다(니치렌 대성인 편 12절).
이 일의 경위는 대성인이 여섯 해 뒤 시조깅고의 이름으로 그의 주군에게 쓰신 「요리모토진장」에 가장 자세히 남아 있다. 시조깅고의 주군이 바로 그 료칸의 열성 신자였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그 글에서 료칸이 이 패배 뒤에 「끝없는 참언을 꾸며 죽을죄로 몰아가려 했다(無尽の讒言を構えて殺罪に申し行はむとせし)」(1157–1158쪽, 2차 확인)고 쓰셨다.
7월 8일 료칸 측은 정광명사의 교빈을 내세워 대성인께 법론을 청했고, 대성인은 공적인 자리의 대결을 요구하셨다. 법론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안 그들은 막부 요인의 부인들을 움직여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를 끌어들였다. 9월 10일 대성인은 평정소에 불려 가 심문을 받으셨고, 그 자리에서 오히려 헤이노사에몬노조를 간하셨다. 9월 12일 오후, 헤이노사에몬노조는 무장한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을 덮쳤다.
9월 12일 밤 — 구마오
붙잡히신 대성인은 공적으로는 무사시노카미 호조 노부토키에게 맡겨져 그의 영국인 사도로 유배하는 것으로 정해졌으나, 실제로는 밤중에 다쓰노구치의 형장에서 목을 베기로 되어 있었다. 한밤중, 대성인은 다시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가마쿠라를 나서셨다. 와카미야 대로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앞에서 말에서 내려 하치만 대보살을 꾸짖으신 뒤, 행렬은 유이가하마로 나왔다. 그다음을 대성인은 「종종어진무어서」에 이렇게 쓰셨다.

ゆいのはまに・うちいでて御りやうのまへに・いたりて又云くしばし・とのばら・これにつぐべき人ありとて、中務三郎左衛門尉と申す者のもとへ熊王と申す童子を・つかわしたりしかば・いそぎいでぬ
유이가하마로 나와 고료 신사 앞에 이르러 또 말하기를 「잠깐, 여러분. 여기 알릴 사람이 있다」 하고,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라는 사람에게 구마오라는 아이를 보냈더니 서둘러 나왔다.
하세의 집에서 구마오의 말을 들은 시조깅고는 이것저것 챙길 겨를도 없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그날은 12일,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강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의 추선 법요를 하고 있었기에 형제들이 곧바로 뒤를 따를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행렬을 따라잡은 그에게 대성인은 말 위에서 말씀하셨다.
今夜頸切られへ・まかるなり、この数年が間・願いつる事これなり、此の娑婆世界にして・きじとなりし時は・たかにつかまれ・ねずみとなりし時は・ねこにくらわれき、或はめこのかたきに身を失いし事・大地微塵より多し、法華経の御ためには一度だも失うことなし、されば日蓮貧道の身と生れて父母の孝養・心にたらず国の恩を報ずべき力なし、今度頸を法華経に奉りて其の功徳を父母に回向せん其のあまりは弟子檀那等にはぶくべしと申せし事これなりと申せしかば
「오늘 밤 목이 잘리러 간다. 이 몇 해 동안 바라던 일이 이것이다. 이 사바세계에서 꿩이 되었을 때는 매에게 잡히고, 쥐가 되었을 때는 고양이에게 먹혔다. 혹은 처자의 원수 때문에 몸을 잃은 일이 대지의 티끌보다 많다. 그러나 법화경을 위해서는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다. 그래서 니치렌은 가난한 승려의 몸으로 태어나 부모의 효양도 마음에 차지 못하고 나라의 은혜를 갚을 힘도 없다. 이번에 목을 법화경에 바쳐 그 공덕을 부모에게 회향하고, 그 나머지는 제자와 단나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말해 온 것이 이것이다」 하고 말하니.
그리고 기록은 짧게 이어진다. 「사에몬노조와 형제 네 사람이 말고삐에 매달려 고시고에 다쓰노구치까지 갔다(左衛門尉・兄弟四人・馬の口にとりつきて・こしごへたつの口にゆきぬ)」(913쪽).
대성인은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되돌아보셨다. 아홉 해 뒤 1280년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셨다. 「분에이 8년의 견책 때, 사가미국 다쓰노구치에서 목이 잘리려 할 때에도, 그대는 말고삐에 매달려 맨발로 걸으며 울고 슬퍼하셨고, 정말 그렇게 되면 배를 가르겠다는 기색이었던 것을, 어느 세상에선들 잊겠는가(文永八年の御勘気の時・既に相模の国・竜の口にて頚切られんとせし時にも殿は馬の口に付いて足歩赤足にて泣き悲み給いし事実にならば腹きらんとの気色なりしをば・いつの世にか思い忘るべき)」(「시조깅고전답서」, 1193쪽, 2차 확인).
- ① 오후 · 마쓰바가야쓰 초암에서 붙잡히심911
- ② 무사시노카미 노부토키에게 맡겨짐
- ③ 한밤 · 와카미야 대로 · 하치만구 앞에서 하치만을 꾸짖으심912–913
- ④ 유이가하마 · 고료 신사 앞 · 구마오를 하세로しばし・とのばら・これにつぐべき人あり913
- ⑤ 시조깅고 맨발로 달려옴今夜頸切られへ・まかるなり913
- ⑥ 고시고에를 지나 다쓰노구치로左衛門尉・兄弟四人・馬の口にとりつきて913
- ⑦ 13일 축시 무렵 · 형장914
「지금입니다」 — 형장
형장에 이르러 병사들이 둘러서서 웅성거리자, 시조깅고는 무너졌다. 대성인은 그 순간을 이렇게 적으셨다.

此にてぞ有らんずらんと・をもうところに案にたがはず兵士どもうちまはり・さわぎしかば、左衛門尉申すやう只今なりとなく、日蓮申すやう不かくのとのばらかな・これほどの悦びをば・わらへかし、いかに・やくそくをば・たがへらるるぞと申せし時
여기서이겠구나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이 둘러서서 웅성거리니, 사에몬노조가 「이제 바로입니다」 하며 울었다. 니치렌이 말하기를 「못난 분들이로군. 이토록 기쁜 일을 웃으시오. 어찌 약속을 어기시오」 하였을 때.
「약속」이란 무엇인가. 법화경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자고, 대성인이 문하에게 늘 말씀해 오신 그 약속이다. 울며 엎드린 제자를 대성인은 꾸짖으며 일으키셨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에노시마 쪽에서 달처럼 빛나는 것이 공처럼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건너가, 칼을 든 자의 눈이 어두워져 쓰러지고 병사들은 겁에 질려 물러났다(914쪽). 대성인은 「어찌하여 이렇게 큰 죄가 있는 죄수에게서 멀어지는가. 가까이 오라, 가까이 오라」고 외치셨으나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 밤의 뜻을 창가학회는 대성인이 상행보살의 재탄이라는 겉모습(迹)을 열고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라는 본지를 드러내신 「발적현본(發迹顯本)」으로 읽는다(니치렌 대성인 편 13절). 그리고 강의는 그 자리에 대성인과 함께 있었던 재가 문하가 시조깅고 단 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한다. 「다쓰노구치 법난이라는 가장 큰 사건 때, 대성인 곁에서 대성인과 함께 죽을 각오로 행동한 사람은 수많은 문하 가운데서도 요리모토 한 사람뿐이었다.」
- 시조깅고「只今なり」(울며)
- 대성인「不かくのとのばらかな・これほどの悦びをば・わらへかし」
- 대성인「いかに・やくそくをば・たがへらるるぞ」
- (빛나는 것 · 914)
- 대성인「いかにとのばら・かかる大禍ある召人にはとをのくぞ近く打ちよれや打ちよれや」
종종어진무어서 913–914
에치까지, 그리고 9월 21일의 편지
날이 밝자 병사 하나가 「사가미의 에치라는 곳으로 드시라」고 했다. 길을 아는 이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대성인 일행은 13일 정오 무렵 에치의 혼마 로쿠로자에몬의 집에 이르렀다. 대성인이 술을 가져오게 하여 병사들에게 먹이자, 돌아가던 그들 가운데 「이제 염불은 하지 않겠다」며 염주를 버리는 이도 있었다. 기록은 이렇게 맺는다. 「로쿠로자에몬의 가신들이 지킴을 넘겨받았다. 사에몬노조도 돌아갔다(六郎左衛門が郎従等・番をばうけとりぬ、さえもんのじようも・かへりぬ)」(914쪽). 시조깅고는 에치까지 대성인을 모시고 가서, 대성인의 몸이 일단 안전해진 것을 보고서야 가마쿠라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그는 가마쿠라에서 몇 번이나 에치로 편지를 보냈다. 9월 21일, 대성인은 답장을 쓰셨다. 「시조깅고전어소식」이다.
度度の御音信申しつくしがたく候、さても・さても去る十二日の難のとき貴辺たつのくちまで・つれさせ給い、しかのみならず腹を切らんと仰せられし事こそ不思議とも申すばかりなけれ
거듭 보내 주신 소식, 그 고마움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지난 12일의 난 때 그대는 다쓰노구치까지 따라오셨고, 그뿐 아니라 배를 가르겠다고 하신 일은 불가사의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대성인은 이어서 다쓰노구치가 어떤 곳인지를 밝히셨다. 과거세에 몸을 버린 곳은 수없이 많았으나 법화경 때문이 아니었으니 그곳들은 불국토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법화경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 「사바세계 가운데 일본국, 일본국 가운데 사가미국, 사가미국 가운데 가타세, 가타세 가운데 다쓰노구치에 니치렌이 목숨을 머물게 한 것은 법화경 때문이니 적광토라고도 할 것이다(娑婆世界の中には日本国・日本国の中には相模の国・相模の国の中には片瀬・片瀬の中には竜口に日蓮が命を・とどめをく事は法華経の御故なれば寂光土ともいうべきか)」(1113쪽). 그리고 시조깅고를 이렇게 기리셨다.
かかる日蓮にともなひて法華経の行者として腹を切らんとの給う事かの弘演が腹をさいて主の懿公がきもを入れたるよりも百千万倍すぐれたる事なり、日蓮・霊山にまいりて・まづ四条金吾こそ法華経の御故に日蓮とをなじく腹切らんと申し候なりと申し上げ候べきぞ
이러한 니치렌을 따라 법화경의 행자로서 배를 가르겠다고 하신 일은, 저 홍연이 제 배를 갈라 주군 의공의 간을 넣은 것보다 백천만 배 뛰어난 일입니다. 니치렌이 영산에 가면 맨 먼저 「시조깅고야말로 법화경 때문에 니치렌과 함께 배를 가르겠다고 한 사람입니다」 하고 아뢰겠습니다.
홍연(弘演)은 춘추시대 위나라의 신하다. 주군 의공이 적에게 죽어 간만 남자, 그는 제 배를 갈라 주군의 간을 넣고 죽었다고 한다. 강의는 이 비유의 무게를 이렇게 짚는다. 무사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무사인 시조깅고가 목숨을 버리려 한 것은 주군이 아닌 법화경과 대성인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백천만 배」인 것이다.
편지의 끝에서 대성인은 사도로 보내질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시고, 「삼광천자 가운데 월천자는 빛나는 것으로 나타나 다쓰노구치의 목을 구하고, 명성천자는 네댓새 전에 내려와 니치렌을 만나셨다. 이제 일천자만 남으셨으니 반드시 지켜 주실 것」(1114쪽)이라고 하시며 「강성한 신력이야말로 고맙다(強盛の信力こそありがたく候へ)」(1114쪽)고 맺으셨다.
「함께 지옥에」 — 법난이 남긴 것
다쓰노구치 뒤 박해는 문하 전체에 미쳤다. 옥에 갇힌 이, 영지를 빼앗긴 이, 주군의 집에서 쫓겨난 이가 있었다. 료칸 측은 가마쿠라 곳곳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대성인 문하의 짓이라 꾸몄다고 강의는 전한다. 겁을 먹고 신앙을 버린 사람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시조깅고의 집과 영지와 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주군 에마 집안이 그를 감싸 주었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뒤에 이 일을 들어, 그 주군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은인인지를 거듭 말씀하셨다(5부 23절).
여섯 해 뒤 1277년, 주군의 병을 고치러 다시 출사하게 된 시조깅고에게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返す返す今に忘れぬ事は頸切れんとせし時殿はともして馬の口に付きて・なきかなしみ給いしをば・いかなる世にか忘れなん、設い殿の罪ふかくして地獄に入り給はば日蓮を・いかに仏になれと釈迦仏こしらへさせ給うとも用ひまいらせ候べからず同じく地獄なるべし、日蓮と殿と共に地獄に入るならば釈迦仏・法華経も地獄にこそ・をはしまさずらめ
거듭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목이 잘리려 할 때 그대가 따라와 말고삐에 매달려 울며 슬퍼하시던 일입니다. 어느 세상에선들 잊겠습니까. 설령 그대의 죄가 깊어 지옥에 들어가신다면, 석가불이 니치렌더러 아무리 부처가 되라고 달래셔도 따르지 않겠습니다. 함께 지옥에 있겠습니다. 니치렌과 그대가 함께 지옥에 들어간다면 석가불도 법화경도 지옥에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둠에 달이 드는 것과 같고, 끓는 물에 찬물을 붓는 것과 같고, 얼음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고, 해에 어둠을 던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대성인과 시조깅고가 함께 있는 곳이면 지옥도 지옥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 대목에서, 시조깅고가 법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에 이미 그의 성불과 숙명의 전환이 정해졌다고 읽는다.
1278년의 「시조깅고전답서(소령서)」도 같은 기억에서 시작한다. 대성인은 그가 받은 뜻밖의 새 영지를 두고 이렇게 쓰셨다. 「지난 분에이 8년 9월 12일 자시 · 축시, 니치렌이 견책을 받았을 때 말고삐에 매달려 가마쿠라를 나서 사가미의 에치까지 모시고 간 것이 일염부제 제일의 법화경의 편이었기에, 범천 · 제석도 버리지 못하시는 것인가. 부처가 되시는 것도 이와 같다(去ぬる文永八年の九月十二日の子丑の時、日蓮が御勘気をかほりし時、馬の口にとりつきて鎌倉を出でて、さがみのえちに御ともありしが、一閻浮提第一の法華経の御かたうどにて有りしかば、梵天・帝釈もすてかねさせ給へるか。仏にならせ給はん事もかくのごとし)」(1184쪽, 2차 확인). 다쓰노구치의 밤은 대성인에게 시조깅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열쇠였다.
법난에서 몇 해
- 01271.9.21「시조깅고전어소식」「腹を切らんと仰せられし事」 · 「霊山にまいりて・まづ四条金吾こそ」1113
- 0.51272.2「개목초」「日蓮といゐし者は去年九月十二日子丑の時に頸はねられぬ」223
- 61277.9.11「스슌천황어서」「同じく地獄なるべし」1173
- 71278.10「소령서」「馬の口にとりつきて鎌倉を出でて、さがみのえちに御ともありしが」1184*
- 91280.10「시조깅고전답서」「いつの世にか思い忘るべき」1193*
창가학회 강의는 다쓰노구치의 시조깅고에게서 「불자석신명(不自惜身命)」의 실천과, 「불법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기개」를 본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도 변함없는 대성인 제자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대성인은 이 밤의 시조깅고를 아홉 해 동안 거듭 떠올리셨다. 스승은 제자의 한 번의 결심을 잊지 않았고, 제자는 그 기억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이 사제의 왕래가 시조깅고 생애의 뼈대다.
「개목초」를 받은 사람
1271년 10월 10일 에치를 떠나신 대성인은 28일 사도에 건너가 11월 1일 쓰카하라의 삼매당에 드셨다. 사도에 유배된 사람은 대부분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221년 조큐의 난 뒤 이 섬에 유배된 준토쿠 상황도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사도 유배는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이었다. 대성인은 그해 겨울 눈 속에서 「개목초」 두 권을 쓰기 시작하셨다.
해가 바뀐 1272년 초, 시조깅고는 사도로 사자를 보내 여러 공양물을 올렸다. 주군을 섬기는 무사가 먼 길을 직접 떠날 수는 없었다. 대성인은 2월에 완성된 「개목초」를 이 사자에게 맡겨 시조깅고에게 보내셨다. 대성인은 뒤에 「종종어진무어서」에 이렇게 적으셨다.
去年の十一月より勘えたる開目抄と申す文二巻造りたり、頸切るるならば日蓮が不思議とどめんと思いて勘えたり、此の文の心は日蓮によりて日本国の有無はあるべし、譬へば宅に柱なければ・たもたず人に魂なければ死人なり、日蓮は日本の人の魂なり平左衛門既に日本の柱をたをしぬ、只今世乱れてそれともなく・ゆめの如くに妄語出来して此の御一門どしうちして後には他国よりせめらるべし、例せば立正安国論に委しきが如し、かやうに書き付けて中務三郎左衛門尉が使にとらせぬ
지난해 11월부터 생각해 온 「개목초」라는 글 두 권을 지었다. 목이 잘린다면 니치렌의 불가사의를 남겨 두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글의 뜻은 니치렌에 의해 일본국의 있고 없음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집에 기둥이 없으면 버티지 못하고 사람에게 혼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니치렌은 일본 사람의 혼이다. 헤이노 사에몬은 이미 일본의 기둥을 쓰러뜨렸다. 이제 세상이 어지러워져 까닭도 없이 꿈처럼 헛소문이 일어 이 일문이 서로 싸우고, 뒤에는 다른 나라가 쳐들어올 것이다. 이를테면 「입정안국론」에 자세히 쓴 바와 같다. 이렇게 써서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의 사자에게 들려 보냈다.
「개목초」는 그 자신을 「죽은 사람」의 자리에서 쓴 글이다. 대성인은 그 안에서 이렇게 쓰셨다.
日蓮といゐし者は去年九月十二日子丑の時に頸はねられぬ、此れは魂魄・佐土の国にいたりて返年の二月・雪中にしるして有縁の弟子へをくればをそろしくて・をそろしからず・みん人いかに・をぢぬらむ
니치렌이라 하던 자는 지난해 9월 12일 자시 · 축시에 목이 베였다. 이것은 혼백이 사도국에 이르러 이듬해 2월 눈 속에서 적어 유연(有緣)의 제자에게 보내는 것이니, 두려운 듯하나 두렵지 않다. 보는 사람은 얼마나 겁을 낼까.
「유연의 제자」. 제자라면 누구나 인연이 있지만, 다쓰노구치에서 말고삐를 잡고 함께 죽으려 한 이 사람이야말로 인연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인연이었다고 「개목초」 강의는 쓴다. 닛코상인 문하의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도 이 글을 「사도국에서 지으신 것, 시조깅고 요리모토에게 주셨다(佐土国の御作・四条金吾頼基に賜う)」(1604쪽, 2차 확인)고 적는다.
창가학회는 「개목초」를 대성인이 스스로 말법의 주사친 삼덕을 갖춘 부처임을 밝히신 「인본존(人本尊) 개현의 서」로 받든다(니치렌 대성인 편 17절). 「개목초」 서강은 그 글이 왜 시조깅고에게 갔는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개목초」는 몸으로 읽는 신독(身讀)의 글이다. 다쓰노구치에서 지극한 신심을 보인 시조깅고야말로 이 글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대성인의 진의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삼류 강적이 들고일어난 본거지인 가마쿠라에 살고 있었다. 법난의 한복판에 있는 문하에게, 법난의 한복판에서 쓴 글이 맡겨진 것이다.
이 글은 시조깅고 혼자 읽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두 달 뒤 대성인은 시모우사의 도키조닌에게 「법문의 일은 지난번 시조 사부로자에몬노조 님에게 적어 들려 보냈으니 그 글을 잘 보라(法門の事先度四条三郎左衛門尉殿に書持せしむ其の書能く能く御覧有る可し)」(「도키전답서」, 962쪽 · 도키조닌 편에서 本文 대조)고 쓰셨다. 「개목초」는 시조깅고를 거쳐 문하 전체에 읽혔다.
- 쓰카하라에서 생각을 시작1271.11
- 1272.2 탈고(두 권) · 223雪中にしるして有縁の弟子へをくれば
- 919中務三郎左衛門尉が使にとらせぬ
- 가마쿠라 하세의 시조깅고
- 1272.4 · 962先度四条三郎左衛門尉殿に書持せしむ
- 시모우사의 도키조닌 · 문하 전체
- 「관심의 본존초」1273.4
- 도키조닌
외호의 두 날개
2월 소동 — 주군 집안의 위기
「개목초」가 가마쿠라에 닿을 무렵, 가마쿠라에서는 싸움이 벌어졌다. 1272년 2월 11일, 집권 도키무네는 나고에 도키아키 · 노리토키 형제를 가마쿠라에서 쳤고, 15일에는 교토 로쿠하라에 있던 이복형 도키스케를 쳤다. 이른바 「2월 소동」이다. 대성인이 다섯 달 전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이 일문이 서로 싸우기 시작할 것」(자계반역난)이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같은 해 5월 사도에서 쓰신 「니치묘성인어서」는 「올해 2월 11일 합전, 그로부터 지금 5월 말까지 아직 세상이 편안하지 않다(今年二月十一日合戦、其れより今五月のすゑ・いまだ世間安穏ならず)」(1217쪽)고 적는다.
도키아키와 노리토키는 시조깅고의 주군 미쓰토키의 아우들이었다. 미쓰토키도 모반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죽음을 앞에 두었다. 시조깅고는 그때 영지가 있는 이즈에 있었다. 「요리모토진장」은 그의 이름으로 이렇게 적는다.
頼基は去る文永十一年二月十二日の鎌倉の合戦の時、折節・伊豆の国に候しかば十日の申の時に承りて唯一人・筥根山を一時に馳せ越えて御前に自害すべき八人の内に候き
요리모토는 지난 분에이 11년 2월 12일 가마쿠라의 합전 때 마침 이즈국에 있었는데, 신시(申時)에 소식을 듣고 홀로 하코네산을 단숨에 넘어 달려와, 주군 앞에서 함께 자결할 여덟 사람 안에 들었습니다.
다행히 에마 집안에 대한 의심은 풀렸고, 주종은 무사했다. 대성인은 「요리모토진장」에서 이 일을 아버지 요리카즈의 이즈 동행과 나란히 놓으셨다(4절). 아버지는 유배되는 주군을 따라 이즈로 갔고, 아들은 이즈에서 하코네를 넘어 주군 곁으로 달려왔다. 「부자 2대, 목숨을 주군께」라는 말은 두 번의 위기에서 나온 말이다.
강의는 이렇게 덧붙인다. 시조깅고의 충성은 무사의 주종 관계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주군의 목숨뿐 아니라 주군의 생명 자체를 구해 성불시키려 했다. 그 뜻이 두 해 뒤의 절복으로 이어진다(5부 20절).
연대 대조 — 「요리모토진장」 本文의 「분에이 11년 2월 12일」은 내용으로 보아 분에이 9년(1272)의 2월 소동을 가리킨다고 강의는 본다. 2월 소동의 날짜는 가마쿠라의 나고에 형제 토벌이 11일(「니치묘성인어서」의 「二月十一日合戦」과 같음), 교토의 도키스케 토벌이 15일이다. 「四条金吾について」는 이 사건을 「2월 15일」로 적은 곳이 있다. 「요리모토진장」의 「十日の申の時」는 날짜와 맞지 않아 本文 대조가 필요하다(C-4). 이 페이지는 「1272년 2월」로만 쓴다.
- 주군 미쓰토키 이즈 에마 유배
- 수백 가신이 떠남
- 아버지 요리카즈 홀로 따라감 「中務一人・最後の御供奉して伊豆の国まで」1161*
- 주군의 아우 도키아키 · 노리토키 죽임 · 미쓰토키 의심
- 요리모토 이즈에서 하코네를 넘어 달려옴
- 「御前に自害すべき八人の内」1161*
사도로 가는 길 — 1272년 봄
소동이 가라앉은 1272년 봄, 시조깅고는 「개목초」에 이어 3월 20일 자 「사도어서」를 받았다. 그 첫 줄에 「사부로자에몬 님」의 이름이 있었다(8절). 유배의 몸으로 문하를 걱정하시는 대성인의 마음에, 그는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주군에게 말미를 청해 사도로 떠났다.

길은 멀었다. 같은 해 사도를 찾은 한 여인(니치묘성인)에게 대성인이 쓰신 글이 그 길을 이렇게 전한다.
相州鎌倉より北国佐渡の国・其の中間・一千余里に及べり、山海はるかに・へだて山は峨峨・海は濤濤・風雨・時にしたがふ事なし、山賊・海賊・充満せり、宿宿とまり・とまり・民の心・虎のごとし・犬のごとし、現身に三悪道の苦をふるか
사가미 가마쿠라에서 북국 사도까지 그 사이가 천여 리에 이른다. 산과 바다가 아득히 가로막고, 산은 험하고 바다는 거세며, 비바람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산적과 해적이 가득하고, 묵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은 범 같고 개 같다. 살아서 삼악도의 괴로움을 겪는 것인가.
주군을 섬기는 무사가 감시의 눈을 피해 이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길을 넘어 대성인이 4월 무렵 옮겨 계시던 이치노사와에 이르렀다. 대성인은 여덟 해 뒤 그 만남을 이렇게 회상하셨다.
佐渡の島に放たれ、北海の雪の下に埋もれ、北山の嶺の山颪に命助かるべしともをぼへず。年来の同朋にも捨てられ、故郷へ帰らん事は、大海の底のちびきの石の思ひして、さすがに凡夫なれば、古郷の人人も恋しきに、在俗の官仕隙なき身に、此の経を信ずる事こそ稀有なるに、山河を凌ぎ、蒼海を経て遥に尋ね来り給いし志、香城に骨を砕き、雪嶺に身を投げし人人にも争でか劣り給うべき
사도의 섬에 버려져 북해의 눈 아래 묻히고, 북산 봉우리의 산바람에 목숨이 살아남으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러 해의 벗들에게도 버림받고, 고향에 돌아가는 일은 큰 바다 밑에 가라앉은 닻돌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범부인지라 고향 사람들이 그리웠는데, 세속에서 벼슬살이로 겨를 없는 몸으로 이 경을 믿는 것만도 드문 일인데, 산과 강을 넘고 푸른 바다를 건너 멀리 찾아오신 뜻은, 향성에서 뼈를 부수고 설산에서 몸을 던진 사람들에게 어찌 뒤지겠는가.
「향성에서 뼈를 부순」 이는 법을 구해 몸을 판 상제보살, 「설산에서 몸을 던진」 이는 반 게송을 위해 몸을 던진 설산동자다. 대성인은 바다를 건너온 무사를 구법의 보살들과 나란히 놓으셨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
대성인은 돌아가는 시조깅고 편에 아내 니치겐뇨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셨다. 「동생동명어서」다. 갓난 쓰키마로를 안고 홀로 집을 지킨 아내였다.
はかばかしき下人もなきに・かかる乱れたる世に此のとのを・つかはされたる心ざし大地よりも・あつし地神定めてしりぬらん・虚空よりも・たかし梵天帝釈もしらせ給いぬらん
믿음직한 하인도 없는데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남편을 보내신 뜻은 대지보다 두터우니 지신(地神)이 반드시 알 것이요, 허공보다 높으니 범천 · 제석도 아실 것입니다.
대성인은 이어서,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동생(同生) · 동명(同名)이라는 두 신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크고 작은 죄와 공덕을 빠짐없이 하늘에 아뢴다고 하시고, 「이 일은 벌써 하늘도 아실 것이다. 든든하고 든든하다(此の事ははや天も・しろしめしぬらん、たのもしし・たのもしし)」(1115쪽)고 맺으셨다. 편지 첫머리에는 「이 글은 도시로 님의 부인과 늘 함께 모여 보시라(此の御文は藤四郎殿の女房と常によりあひて御覧あるべく候)」(1114쪽)는 당부가 있다. 가마쿠라의 여성 문하들도 서로 기대어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 1272.2「개목초」사자 편
- 1272.2.112월 소동
- 1272.3.20「사도어서」
- 1272.4월 무렵사도 방문 · 「동생동명어서」「동생동명어서」는 4월
- 1272.5.2「번뇌즉보리」
「법화종의 시조깅고」 — 1272년 5월 2일
가마쿠라로 돌아간 시조깅고에게 대성인은 곧 감사의 편지를 보내셨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日蓮が諸難について御とぶらひ今に・はじめざる志ありがたく候、法華経の行者として・かかる大難にあひ候は・くやしくおもひ候はず、いかほど生をうけ死にあひ候とも是ほどの果報の生死は候はじ
니치렌의 여러 난에 대해 찾아와 위로해 주시니, 이제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닌 그 뜻이 고맙습니다. 법화경의 행자로서 이런 큰 난을 만난 것은 조금도 분하지 않습니다. 몇 번을 태어나고 죽는다 해도 이만한 과보의 생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닌 뜻(今に・はじめざる志)」. 강의는 이 한마디에서 시조깅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지성을 읽는다. 이 편지에서 대성인은 천태 · 전교가 넓힌 적문의 이(理)의 일념삼천보다 「한 겹 더 들어간」 본문 수량품의 삼대사를 넓힌다 하시고, 제법실상과 경지(境智)를 거쳐 「번뇌즉보리 · 생사즉열반」이 남묘호렌게쿄임을 밝히셨다(불교 교학 三 제법실상). 그리고 그 법을 받아 지닌 시조깅고를 이렇게 부르셨다.
然るに貴辺法華経の行者となり結句大難にもあひ日蓮をもたすけ給う事、法師品の文に「遣化四衆・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と説き給ふ此の中の優婆塞とは貴辺の事にあらずんば・たれをかささむ
그런데 그대가 법화경의 행자가 되어 끝내 큰 난도 만나고 니치렌을 도우신 일은, 법사품의 「변화의 사부대중,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를 보낸다」는 경문의 그 우바새가 그대가 아니라면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다쓰노구치의 밤에 그를 「보낸」 것은 부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그에게 이름을 걸라고 하셨다.
法華経の信心を・とをし給へ・火をきるに・やすみぬれば火をえず、強盛の大信力をいだして法華宗の四条金吾・四条金吾と鎌倉中の上下万人乃至日本国の一切衆生の口にうたはれ給へ、あしき名さへ流す況やよき名をや何に況や法華経ゆへの名をや
법화경의 신심을 끝까지 관철하십시오. 부싯돌로 불을 일으킬 때 쉬면 불을 얻지 못합니다. 강성한 큰 신력을 일으켜 「법화종의 시조깅고, 시조깅고」라고 가마쿠라 안의 위아래 모든 사람, 나아가 일본국의 모든 중생의 입에 오르내리십시오. 나쁜 이름조차 퍼지는데 하물며 좋은 이름이겠습니까. 하물며 법화경 때문에 얻은 이름이겠습니까.
편지는 아내에게도 이 뜻을 일러 「해와 달, 두 눈, 한 쌍의 날개처럼 함께하라(女房にも此の由を云ひふくめて日月・両眼・さうのつばさと調ひ給へ)」(1118쪽)는 당부로 맺는다. 「법화종의 시조깅고」. 다섯 해 뒤 대성인은 「스슌천황어서」에서 같은 소원을 이번에는 세간의 말로 다시 쓰신다(5부 27절).
- ① 법今日蓮が弘通する法門は・せばきやうなれども・はなはだふかし천태 · 전교보다 「一重立入りたる」 본문 수량품의 삼대사 · 1116
- ② 사람此の中の優婆塞とは貴辺の事にあらずんば・たれをかささむ1117
- ③ 이름法華宗の四条金吾・四条金吾と鎌倉中の上下万人…の口にうたはれ給へ1118
「日月・両眼・さうのつばさと調ひ給へ」1118 · 부부
사도의 남은 해 — 교오님
1273년, 대성인은 시조깅고에게 「가책방법멸죄초」를 보내셨다. 법화경을 비방한 죄를 꾸짖어 없애는 길을 밝힌 이 글의 끝에는 가족에 대한 당부들이 이어진다. 형제를 자식처럼 여기라는 말(5절), 그리고 둘째 딸의 이야기가 있다. 「교오님을 얻으셨으니 이 세상에서는 뒤를 이을 효자요, 후생에는 또 이끌려 부처가 되실 것입니다(経王御前を儲けさせ給いて候へば、現世には跡をつぐべき孝子なり。後生には又導かれて仏にならせ給うべし)」(1132쪽, 2차 확인). 대성인이 지어 주신 이름이었을 것이다. 「경왕(經王)」은 「모든 경 가운데 왕」, 곧 법화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교오님이 어려서 병을 앓았다. 같은 해 8월 15일,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夫について経王御前の事・二六時中に日月天に祈り申し候
그런데 교오님의 일은 밤낮 열두 때 내내 일천 · 월천께 빌고 있습니다.
이 편지 바로 앞에 대성인은 시조깅고 집안에 어본존을 수여하셨다. 편지는 「교오님에게는 재앙도 바뀌어 행복이 될 것이다. 부디 신심을 내어 이 어본존께 기원하라. 무엇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는가(経王御前には・わざはひも転じて幸となるべし、あひかまへて御信心を出し此の御本尊に祈念せしめ給へ、何事か成就せざるべき)」(1124쪽)고 이른다. 그리고 「법화경의 칼은 신심이 굳센 사람이라야 쓰는 것이니, 도깨비에게 쇠방망이일 것이다(法華経の剣は信心のけなげなる人こそ用る事なれ鬼に・かなぼうたるべし)」(1124쪽)라고 하셨다. 무사인 아버지에게 맞춘 비유다. 끝에는 「이 나라(사도)의 큰 난이 풀리면 서둘러 가마쿠라로 올라가 만나겠다(又申し候当国の大難ゆり候はば・いそぎ・いそぎ鎌倉へ上り見参いたすべし)」(1125쪽)는 약속이 있다.
교오님의 소식은 이 편지가 마지막이다.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강의는 이를 의심한다. 어머니의 기일마다 빠짐없이 추선을 올린 시조깅고였다. 딸이 죽었다면 1273년 이후 서른 편 가까운 편지 어딘가에 그 일이 보여야 할 텐데 한 군데도 없다. 그러니 적어도 대성인 재세 중에는 건강했으리라는 것이다. 같은 「가책방법멸죄초」에는 「내 아들 시로는 부모를 봉양하는 아들이지만 나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わが子・四郎は父母を養ふ子なれども悪くばなにかせん)」(1132쪽, 2차 확인)는 말도 있어 「시로」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1277년의 편지에는 「그대에게는 자식이 없다(とのは子なし)」(1163쪽, 2차 확인)는 말이 있어, 집안을 이을 아들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의는 이 부분을 「분명하지 않다」고 적는다.
1274년 1월 14일, 사면을 한 달 앞두고 대성인은 「법화행자봉난사」를 쓰셨다. 받는 사람은 다섯 겹으로 적혀 있었고, 그 가운데 「사부로자에몬노조 님(三郎左衛門尉殿)」이 있었다(965쪽 · 도키조닌 편 22절). 대성인은 「도키 · 사부로자에몬노조 · 가와노베 · 야마토 아자리 등 … 각자 서로 읽어 들려 드려라」(965쪽)고 하셨다. 사도의 2년 반 동안, 가마쿠라에서 대성인의 편지를 받아 사람들에게 읽히는 일은 시조깅고의 몫이었다.
연대 대조 — 「가책방법멸죄초」는 분에이 10년(1273)으로 본다. 「四条金吾について」는 교오님의 출생을 알리는 대목(1132)을 「분에이 9년의 편지」라 적은 곳과 「분에이 10년의 「가책방법멸죄초」」라 적은 곳이 있다. 1132쪽은 「가책방법멸죄초」(1125–1132)의 끝이므로, 이 페이지는 1273년의 「가책방법멸죄초」로 쓴다(C-4). 교오님의 출생은 1272–73년 무렵으로만 적는다.
- 11271.9.21「시조깅고전어소식」에치
- 21272.2「개목초」사자 편쓰카하라
- 33.20「사도어서」문하 전체 · 「三郎左衛門殿」쓰카하라
- 44월「동생동명어서」아내 앞 · 사도 방문이치노사와
- 55.2「번뇌즉보리」이치노사와
- 61273「가책방법멸죄초」이치노사와
- 78.15「교오전답서」어본존 수여 뒤이치노사와
- 81274.1.14「법화행자봉난사」다섯 겹 받는 사람 중 「三郎左衛門尉殿」이치노사와
「개목초」는 「나와 나의 제자는 여러 난이 있더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저절로 불계에 이를 것이다」라는 맹세의 글이다. 창가학회 강의는 그 글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 말대로 산 사람이었다는 데 주목한다. 다쓰노구치에서 죽음을 함께하려 했고, 2월 소동에서 주군 곁으로 달려갔고, 바다를 건너 유배지의 스승을 찾아갔다. 대성인은 그에게 「법화종의 시조깅고」라는 이름으로 살라고 하셨다. 이름은 법을 위해 쓸 때 가장 빛난다는 것이 이 부의 결론이다.
주군을 절복하다 — 1274년
1274년 2월, 막부는 대성인의 사면을 결정했다. 사도 유배에서 살아 돌아온 예는 거의 없었다. 3월 대성인은 가마쿠라로 돌아오셨고, 4월 8일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세 번째로 간하신 뒤 5월 미노부에 드셨다. 다쓰노구치 뒤 어둠 속에 있던 문하에게 대성인의 생환은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을 주었다.
시조깅고는 이 해에 주군 에마 씨에게 대성인의 법을 설했다. 료칸을 깊이 믿는 주군이었다. 강의는 그의 마음을 이렇게 헤아린다. 불행의 원인인 료칸을 믿는 주군에게서 악을 없애고 정법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주군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요리모토진장」은 그 마음을 그의 목소리로 이렇게 적는다.
宮仕をつかまつる者、上下ありと申せども、分分に随って主君を重んぜざるは候はず。上の御ため現世後生あしくわたらせ給うべき事を、秘かにも承りて候はむに、傍輩世に憚りて申し上ざらむは、与同罪にこそ候まじきか
벼슬살이하는 자는 위아래가 있다 해도 저마다 분수에 따라 주군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주군께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 나쁜 일이 될 것을 남몰래라도 듣고서, 동료들이 세상을 꺼려 아뢰지 않는다면 그것은 같은 죄(與同罪)가 아니겠습니까.
後生までも随従しまいらせて、頼基成仏し候はば、君をもすくひまいらせ、君成仏しましまさば、頼基もたすけられまいらせむとこそ存じ候へ
다음 세상까지도 모시고 따라, 요리모토가 성불하면 주군도 구해 드리고, 주군이 성불하시면 요리모토도 도움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군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꺼리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강의는 이 일의 무게를 이렇게 쓴다. 지금의 민주주의 세상에서도 고용된 사람이 고용주를 절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신분 질서가 흔들리지 않던 봉건 사회에서, 생사의 열쇠를 쥔 주군에게 가신이 개종을 권하는 것은 일족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다.
9월 26일,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今の世は彼の世に当れり、国主日蓮が申す事を用ゆるならば彼がごとく・なるべきに用いざる上かへりて彼がかたうどとなり一国こぞりて日蓮を・かへりてせむ、上一人より下万民にいたるまで皆五逆に過ぎたる謗法の人となりぬ、されば各各も彼が方ぞかし、心は日蓮に同意なれども身は別なれば与同罪のがれがたきの御事に候に主君に此の法門を耳にふれさせ進せけるこそ・ありがたく候へ、今は御用いなくもあれ殿の御失は脱れ給ひぬ、此れより後には口をつつみて・おはすべし
지금 세상은 저 세상(유덕왕의 때)에 해당한다. 국주가 니치렌의 말을 쓴다면 저와 같이 될 것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 편이 되어 온 나라가 니치렌을 친다. 위로 한 사람부터 아래로 만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역보다 무거운 방법(謗法)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그대들도 그쪽 편이다. 마음은 니치렌과 같아도 몸은 따로이니 같은 죄를 벗어나기 어려운데, 주군의 귀에 이 법문을 들려 드린 것이야말로 고맙다. 지금은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그대의 허물은 벗어났다. 이 뒤로는 입을 다물고 계시라.
절복한 것으로 그의 몫은 다했다. 그러니 이제는 입을 다물라. 대성인은 그가 거듭 주군을 몰아붙이다가 일을 그르칠 것을 걱정하셨다. 그리고 곧 닥칠 일을 내다보셨다.
かまへて・かまへて御用心候べし、いよいよ・にくむ人人ねらひ候らん、御さかもり夜は一向に止め給へ、只女房と酒うち飲んで・なにの御不足あるべき、他人のひるの御さかもりおこたるべからず、酒を離れて・ねらうひま有るべからず
부디 부디 조심하시라.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욱 노릴 것이다. 밤의 술자리는 아예 그만두라. 그저 아내와 술을 마시면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남의 낮 술자리도 게을리하지 마라. 술을 떠나서는 노릴 틈이 없을 것이다.
무예에 뛰어난 무사를 정면으로 이길 수 없는 자들은 술을 권해 틈을 노렸을 것이라고 강의는 본다. 이 편지에서 시작된 대성인의 「생활의 지도」는 이후 몇 해 동안, 편지마다 더 구체적이 되어 간다.
- ① 대성인 생환 · 문하의 확신1274.3
- ② 주군 에마 씨를 절복上の御ため現世後生あしくわたらせ給うべき事を…申し上ざらむは与同罪1274 · 1160*
- ③ 1274.9.26主君に此の法門を耳にふれさせ進せけるこそ・ありがたく候へ · 此れより後には口をつつみて1133
- ④ 주군의 냉대 · 동료의 시기와 참언
- ⑤ 에치고 영지 교체 문제1276.9
- ⑥ 하문(下文)「법화경을 버린다는 기청문을 쓰라, 아니면 영지 몰수」1277.6
- 「御さかもり夜は一向に止め給へ」1133
- 「御内を出でさせ給うべからず」1147*
- 「御訴訟なくて」1152*
- 「起請をかかせ給いなば」1163*
「이 경은 지니기 어렵다」 — 1275년 3월
주군의 냉대는 동료들에게 신호가 되었다. 주군의 은총을 두고 다투는 무사 사회에서, 무예도 의술도 뛰어나 주군의 신임을 받던 시조깅고는 원래 시기의 대상이었다. 강의는 그 시기에 그의 성격이 화를 더했다고 쓴다. 성미가 급하고 생각한 것을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그는 적을 만들기 쉬웠다. 그리고 그 뒤에서 료칸 측의 승려들이 동료 무사들의 마음을 부추겼다. 법화종의 시조깅고는 아미타의 적이요 선 · 진언의 적이었다.
그 압박 속에서 「신심 강성하고 굳센」 그도 약해졌다. 그는 대성인의 제자 벤아사리닛쇼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지니는 사람은 현세안온 · 후생선처라고 들어 지난해부터 오늘까지 나름대로 신심을 해 왔는데, 그렇기는커녕 큰 난이 비처럼 쏟아진다.」 닛쇼는 그 말을 대성인께 전했다. 3월 6일,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此経難持の事、抑弁阿闍梨が申し候は貴辺のかたらせ給ふ様に持つらん者は現世安穏・後生善処と承つて・すでに去年より今日まで・かたの如く信心をいたし申し候処にさにては無くして大難雨の如く来り候と云云、真にてや候らん又弁公がいつはりにて候やらん、いかさま・よきついでに不審をはらし奉らん、法華経の文に難信難解と説き給ふは是なり、此の経をききうくる人は多し、まことに聞き受くる如くに大難来れども憶持不忘の人は希なるなり、受くるは・やすく持つはかたし・さる間・成仏は持つにあり、此の経を持たん人は難に値うべしと心得て持つなり
「이 경은 지니기 어렵다」는 일. 대저 벤 아자리가 말하기를, 그대가 「지니는 사람은 현세안온 · 후생선처라고 들어 지난해부터 오늘까지 나름대로 신심을 해 왔는데, 그렇기는커녕 큰 난이 비처럼 온다」고 하셨다 한다. 정말인가, 아니면 벤 공의 거짓말인가. 어쨌든 좋은 기회에 의심을 풀어 드리겠다. 법화경의 글에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설하신 것이 이것이다. 이 경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들은 대로 큰 난이 왔을 때 기억해 지니고 잊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받기는 쉽고 지니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불은 지니는 데 있다. 이 경을 지니는 사람은 난을 만날 것이라 마음먹고 지니는 것이다.
「정말인가, 아니면 벤 공의 거짓말인가」. 대성인은 제자의 약한 말을 짐짓 믿지 않는 척하며 받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이으셨다. 「불에 장작을 더하면 활활 타고, 큰바람이 불면 구라(求羅)는 더 커진다. 소나무는 만 년을 사는 까닭에 가지가 굽혀진다. 법화경의 행자는 불과 구라와 같고, 장작과 바람은 큰 난과 같다(火にたきぎを加える時はさかんなり、大風吹けば求羅は倍増するなり、松は万年のよはひを持つ故に枝を・まげらる、法華経の行者は火と求羅との如し薪と風とは大難の如し)」(1136쪽). 끝에는 「이 뒤로는 차경난지(此經難持) 네 글자를 잠시도 잊지 말고 생각하라(此れより後は此経難持の四字を暫時もわすれず案じ給うべし)」(1136쪽)고 하셨다.
왕사성 — 1275년 4월의 큰불
1275년 봄, 가마쿠라에 큰불이 나서 료칸의 극락사와 쇼군의 어소가 탔다. 시조깅고는 그 모습을 자세히 대성인께 알렸다. 4월 12일 자 답장 「왕사성사」에서 대성인은 인도의 왕사성 이야기를 하셨다. 큰불이 일곱 번이나 나서 백성들이 달아나려 하자, 한 현인이 큰불은 성인이 떠나고 왕의 복이 다할 때 일어나는 것인데 대궐에는 불이 가까이 오지 않으니 이것은 왕의 허물이 아니라 백성의 허물이라 했고, 백성의 집을 「왕의 집(王舍)」이라 부르자 불이 그쳤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소가 탔다. 대성인은 「이는 국왕이 이미 탄 것이니 일본국의 과보가 다한 표시임을 알라」고 하시고, 료칸을 「양화방(兩火房)」이라 부르셨다.
其の上名と申す事は体を顕し候に両火房と申す謗法の聖人・鎌倉中の上下の師なり、一火は身に留りて極楽寺焼て地獄寺となりぬ、又一火は鎌倉にはなちて御所やけ候ぬ
게다가 이름이라는 것은 몸을 드러내는 것인데, 양화방(兩火房)이라는 방법의 성인이 가마쿠라 위아래의 스승이다. 한 불은 제 몸에 머물러 극락사가 타서 지옥사가 되었고, 또 한 불은 가마쿠라에 놓여 어소가 탔다.
료칸(良觀)의 법명은 닌쇼(忍性)이고, 「良觀」은 「료칸」이라 읽혀 「兩火」와 소리가 같다. 시조깅고가 섬기는 주군이 믿는 그 스승을 대성인은 이렇게 부르셨다.
이 편지에는 무사 시조깅고의 일상이 함께 들어 있다. 대성인은 그가 바친 말이 들에서 짝을 지어 밤색 새끼를 낳았다며 「아, 보여 드리고 싶다(あはれ・あはれ見せまいらせ候はばや)」(1137쪽)고 쓰셨다. 또 「나고에의 일」로, 시조깅고가 어떤 사람을 만나 그가 이구(理具)의 법문을 자랑하는 것을 호되게 깨뜨렸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셨다(1137–1138쪽). 그리고 편지의 뒷부분에서 대성인은 효양과 충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셨다.
一切の事は父母にそむき国王にしたがはざれば不孝の者にして天のせめをかうふる、ただし法華経のかたきに・なりぬれば父母・国主の事をも用ひざるが孝養ともなり国の恩を報ずるにて候
모든 일에서 부모를 거스르고 국왕을 따르지 않으면 불효한 자가 되어 하늘의 꾸짖음을 받는다. 다만 (부모나 국주가) 법화경의 적이 되었을 때는 부모 · 국주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효양도 되고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도 된다.
주군에게 충성하면서도 그 주군의 신앙에는 따르지 않는 시조깅고의 길을, 대성인은 이렇게 근거 지어 주셨다. 편지의 끝은 「저를 위해 악을 없애는 것이 곧 저의 어버이다(彼が為に悪を除くは即ち是れ彼が親なり)」(1139쪽)라는 장안대사의 말이다. 대성인이 나라를 간하는 것은 미워해서가 아니라 대자비라는 것이다. 주군을 절복한 시조깅고의 마음도 이와 같았다.
「주군을 떠나지 말라」 — 1276년
1276년이 되자 압박은 더 거세졌다. 6월 27일 대성인은 짧은 편지 한 통을 보내셨다.
一切衆生・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より外の遊楽なきなり経に云く「衆生所遊楽」云云、此の文・あに自受法楽にあらずや
모든 중생에게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 밖의 유락(遊樂)은 없다. 경에 「중생이 노니는 곳」이라 했다. 이 글이 어찌 자수법락(自受法樂)이 아니겠는가.
ただ世間の留難来るとも・とりあへ給うべからず、賢人・聖人も此の事はのがれず、ただ女房と酒うちのみて南無妙法蓮華経と・となへ給へ、苦をば苦とさとり楽をば楽とひらき苦楽ともに思い合せて南無妙法蓮華経とうちとなへゐさせ給へ、これあに自受法楽にあらずや
다만 세간의 어려움이 오더라도 상대하지 마라. 현인 · 성인도 이 일은 피하지 못한다. 그저 아내와 술을 마시며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라.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깨닫고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열어, 괴로움도 즐거움도 함께 생각하며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러 가라. 이것이 어찌 자수법락이 아니겠는가.
7월, 시조깅고는 부모의 효양을 위해 공양물을 미노부로 보내며 근황을 알렸다. 그 편지에서 그는 주군의 집을 떠나겠다는 뜻을 비쳤다. 대성인의 답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는 단호했다.
御消息の中に申しあはさせ給う事、くはしく事の心を案ずるに、あるべからぬ事なり(中略)日蓮がさどの国にてもかつえしなず、又これまで山中にして法華経をよみまいらせ候は、たれかたすけん。ひとへにとのの御たすけなり。又殿の御たすけは、なにゆへぞとたづぬれば、入道殿の御故ぞかし
편지에서 의논하신 일은, 그 뜻을 자세히 헤아려 보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중략) 니치렌이 사도국에서도 굶어 죽지 않고, 또 지금까지 산중에서 법화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누가 도와서입니까. 오로지 그대의 도움입니다. 그런데 그대의 도움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찾아보면, 뉴도 님(주군)의 덕분입니다.
시조깅고가 대성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주군이 준 녹봉 덕분이다. 그러니 그 주군은 겉으로는 모르시더라도 대성인을 돕는 셈이고, 그것은 주군을 위한 기원이 되며, 다시 시조깅고를 위한 기원이 된다. 대성인은 이렇게 주군과 법화경을 하나의 고리로 이으셨다. 그리고 「설령 허물이 있더라도 함부로 주군의 집을 나가서는 안 된다. 하물며 허물이 없다면 남이 무어라 하든 괜찮다(申させ給う事は御あやまちありとも、左右なく御内を出でさせ給うべからず。まして、なからんには、なにとも人申せ、くるしからず)」(1147쪽, 2차 확인)고 하셨다. 같은 편지는 생활의 주의도 잊지 않는다. 이 편지를 본 뒤 백 일 동안은 동료나 남과 자기 집 아닌 곳에서 밤 술자리를 하지 말 것, 주군이 부르면 낮이면 서둘러 가되 밤이면 세 번까지는 갑작스런 병이라 하고, 세 번이 넘으면 하인이나 다른 사람을 시켜 길목을 살피게 하고 나서 나갈 것(1147쪽, 2차 확인).
에치고로의 영지 교체
얼마 뒤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주군이 시조깅고의 영지를 에치고로 바꾸려 한 것이다. 동료들의 중상에 주군이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치인지, 주군 자신의 배려인지는 알 수 없다고 강의는 쓴다. 9월 6일의 「시조깅고전답서(유지홍정법사)」에서 대성인은 주군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 주셨다.
主の御返事をば申させ給うべし。身に病ありては叶いがたき上、世間すでにかうと見え候。それがしが身は時によりて憶病はいかんが候はんずらん。只今の心はいかなる事も出来候はば、入道殿の御前にして命をすてんと存じ候。若しやの事候ならば、越後よりはせ上らんは、はるかなる上、不定なるべし。たとひ所領をめさるるなりとも、今年はきみをはなれまいらせ候べからず
주군께는 이렇게 답하시라. 「몸에 병이 있어 (먼 땅으로 가는 것은) 어렵고, 세상도 이미 이러한 형편입니다. 저는 때에 따라 겁을 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마음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뉴도 님 앞에서 목숨을 버리려 합니다. 만일의 일이 있을 때 에치고에서 달려 올라오기에는 멀고 또 기약할 수 없습니다. 설령 영지를 거두신다 해도 올해는 주군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몽골이 다시 올지 모르는 「세상이 이러한 형편」에, 먼 영지로 가면 정작 주군의 위급 때 곁에 있을 수 없다. 영지보다 주군 곁을 택한다는 말은, 주군에게 그의 충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었다.
「여덟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현인이라 한다」
그 뒤 반년쯤 지나 시조깅고는 영지 문제의 경과를 알리며 사람을 보냈다. 대성인은 어본존과 함께 답장을 보내셨다. 「시조깅고전답서(팔풍초)」다. 대성인은 먼저 「영지의 일은 주군의 편지와 그대의 편지를 맞추어 보았다. 이 일은 편지가 오기 전에 짐작했다(所領の間の御事は上よりの御文ならびに御消息引き合せて見候い畢んぬ、此の事は御文なきさきにすいして候)」(1150쪽, 2차 확인)고 하시고, 주군의 은혜를 이렇게 일깨우셨다.
我が身と申し、をや・るいしんと申し、かたがた御内に不便といはれまいらせて候大恩の主なる上、すぎにし日蓮が御かんきの時、日本一同ににくむ事なれば、弟子等も或は所領を、ををかたよりめされしかば、又方方の人人も或は御内内をいだし、或は所領をおいなんどせしに、其の御内になに事もなかりしは御身にはゆゆしき大恩と見へ候
그대 자신도 그렇고 어버이와 친족도 그렇고, 여러모로 주군의 집에서 아낌을 받은 큰 은혜의 주군인 데다, 지난번 니치렌이 견책을 받았을 때 온 일본이 미워하는 일이라 제자들도 혹은 영지를 공의에서 거두어 가고, 또 여러 사람들도 혹은 주군의 집에서 내쫓고 혹은 영지를 빼앗고 했는데, 그 주군의 집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그대에게는 대단한 은혜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소송을 하려던 그를 말리셨다. 법화경 때문에 집을 빼앗긴 사람들이 대성인의 만류에도 소송을 일으켰다가 일이 그르쳐진 것을 예로 드시고, 이렇게 이르셨다.
されば此の事御訴訟なくて又うらむる事なく、御内をばいでず、我かまくらにうちいて、さきざきよりも出仕とをきやうにて、ときどきさしいでておはするならば叶う事も候なん
그러니 이 일은 소송하지 말고, 원망하지도 말고, 주군의 집을 나가지 말고, 가마쿠라에 머물며 전보다 출사를 드물게 하되 때때로 얼굴을 내밀고 있으면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편지의 별칭 「팔풍초」는, 이(利) · 쇠(衰) · 훼(毀) · 예(譽) · 칭(稱) · 기(譏) · 고(苦) · 낙(樂)의 여덟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현인이라 한다는 가르침에서 나왔다. 강의는 이 편지를 「일과 신앙의 근본적인 지도」라 부른다. 환경이 나쁘다고 스스로 생활의 기반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역경과 맞붙어 싸워 이기는 것이 자기 숙명의 전환이고, 나아가 사회를 여는 길이라는 것이다.
연대 대조 —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는 1276년(겐지 2년) 7월, 「유지홍정법사」는 1276년 9월 6일로 강의는 본다. 「팔풍초」는 강의가 「반년 뒤」라고만 적어 1277년 봄 무렵이 된다(C-4). 「팔풍초」의 「여덟 바람」 대목은 이번 첨부 자료에 원문이 없어 한국어로만 적었다.
구와가야쓰 문답과 하문 — 1277년 6월
교토 히에이산에서 쫓겨난 류조보(竜象房)라는 승려가 있었다. 교토에서 사람의 살을 먹었다는 소문이 있던 그는 가마쿠라로 내려와 료칸에게 붙어, 하세 대불의 서쪽 문 근처 구와가야쓰(桑ヶ谷)에 도량을 열고 설법하며 대성인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1277년 6월 9일, 대성인의 제자 산미보니치교(三位房日行)가 이 류조보에게 법론을 걸었다. 그는 구와가야쓰 가까이 사는 시조깅고에게 함께 가 달라고 청했다. 주군을 섬기는 몸이라 시조깅고는 함께 가지 못하고 늦게 도착했다. 류조보는 설법을 마치고 「이 자리에서 불법에 관해 의심나는 이는 무엇이든 말하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산미보가 일어섰다. 몇 차례 문답 끝에 류조보는 입을 닫았다. 자리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떠나려는 산미보에게 손을 모아 「좀 더 법문을 해 달라」고 붙잡았다고 강의는 전한다.
그러나 류조보는 일을 제 좋을 대로 료칸을 통해 윗선에 알렸다. 그리고 시조깅고를 시기하던 동료들은 이때다 하고 주군에게, 시조깅고가 무기를 차고 설법 자리에 뛰어들어 욕설과 난동을 부려 산미보를 이기게 했다고 고했다.
6월 23일 자로 주군 에마 씨의 하문(下文)이 나왔고, 25일 에마 집안의 중신 시마다 사에몬 뉴도와 야마시로 민부 뉴도 두 사람이 사자로 와서 그것을 전했다. 하문은 이렇게 시작했다.
竜象御房の御説法の所に参られ候いける次第、をほかた穏便ならざる由、見聞の人遍く一方ならず、同口に申し合い候事、驚き入って候。徒党の仁、其の数兵杖を帯して出入すと云云
류조 스님의 설법 자리에 가신 일의 경위가 대체로 온당하지 않았다고, 보고 들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한입으로 말하니 놀랐습니다. 무리를 지은 자들이 여럿 무기를 차고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이랬다. 법화경을 버리고 니치렌에게 귀의하지 않겠다는 기청문(起請文)을 내라. 내지 않으면 영지를 몰수한다.
시조깅고는 그날로 일의 경위와 하문, 그리고 자신의 서약서를 써서 미노부로 보냈다. 서약서에는 주군 때문에 두 곳의 영지를 다 잃고 목숨에 이르는 일이 있더라도 법화경을 버린다는 기청문은 쓰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 6.9구와가야쓰 문답 — 산미보 vs 류조보 · 시조깅고 늦게 도착
- 동료들의 참언 「兵杖を帯して出入」
- 6.23주군의 하문
- 6.25사자 시마다 사에몬 뉴도 · 야마시로 민부 뉴도 · 그날로 서약서를 미노부로
- 6.27유시 미노부 도착1163*
- 7월「요리모토진장」 대필 · 격려 편지(「불가석소령사」)
시조깅고의 선택 「二所の所領をすてて法華経を信じとをすべし」1163*
「요리모토진장」 — 대성인이 대신 쓰신 글
6월 27일 유시에 시조깅고의 편지가 미노부에 닿았다. 대성인은 곧 두 가지를 쓰셨다. 하나는 주군의 하문에 대한 진술서, 곧 「요리모토진장」이다. 또 하나는 시조깅고에게 보내는 격려의 편지, 「시조깅고전답서(불가석소령사)」다.
去月二十五日の御文、同月の二十七日の酉の時に来りて候。仰せ下さるる状と、又起請かくまじきよしの御せいじゃうとを見候へば、優曇華のさきたるをみるか、赤栴檀のふたばになるをえたるか、めづらしかうばし(中略)設い日蓮一人は杖木・瓦石・悪口・王難をも忍ぶとも、妻子を帯せる無智の俗なんどはいかでか叶うべき。中中信ぜざらんはよかりなん。すへとをらず、しばしならば人にわらはれなんと、不便にをもひ候いしに、度度の難、二箇度の御勘気に心ざしをあらはし給うだにも不思議なるに、かくおどさるるに二所の所領をすてて、法華経を信じとをすべしと御起請候事、いかにとも申す計りなし
지난달 25일의 편지가 같은 달 27일 유시에 왔습니다. 내리신 문서(하문)와, 기청문을 쓰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보니, 우담화가 핀 것을 보는 듯, 적전단이 떡잎을 낸 것을 얻은 듯, 드물고 향기롭습니다. (중략) 설령 니치렌 한 사람은 막대기와 돌팔매와 욕설과 국난을 견딘다 해도, 처자를 거느린 무지한 속인이야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오히려 믿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끝까지 가지 못하고 잠시 하다 말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가엾게 생각했는데, 여러 번의 난과 두 번의 견책에 뜻을 드러내신 것만도 불가사의한데, 이렇게 위협을 받고도 두 곳의 영지를 버리고 법화경을 끝까지 믿겠다고 서약하신 일은 무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대성인은 그가 기청문을 쓰면 료칸과 류조의 무리가 더욱 우쭐하여, 가마쿠라 안의 니치렌 제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몰아칠 것이라고 하셨다(1163쪽, 2차 확인). 시조깅고 한 사람의 선택이 가마쿠라 문하 전체의 운명이었다.
진장의 내용
「요리모토진장」은 시조깅고가 주군에게 올리는 형식의 글이다. 대성인은 그 안에서 하문의 혐의를 하나하나 밝히셨다. 구와가야쓰에 간 것은 법문을 듣기 위해서였고 무기를 지니고 난동한 일은 없다. 그리고 류조보와 료칸이 어떤 사람인지를, 1271년의 기우 대결부터 다쓰노구치의 참언까지 자세히 적으셨다(10절). 대성인이 어떤 분인지도 시조깅고의 입을 빌려 적으셨다. 「니치렌 성인 스님은 삼계의 주인이요, 일체중생의 부모요, 석가여래의 사자요, 상행보살이심이 법화경에 설해져 계시는 것을(日蓮聖人の御房は三界の主・一切衆生の父母・釈迦如来の御使・上行菩薩にて御坐候ける事の法華経に説かれて・ましましけるを)」(1161쪽, 2차 확인). 「시모야마어소식」 강의는 이 구절을 두고, 대성인이 제자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내증을 밝히신 드문 예라고 쓴다.
그리고 진장은 이렇게 맺는다.
此くの如き厳重の法華経にて・をはして候間、主君をも導きまいらせむと存じ候故に・無量の小事をわすれて今に仕われまいらせ候、頼基を讒言申す仁は君の御為不忠の者に候はずや、御内を罷り出て候はば君たちまちに無間地獄に堕ちさせ給うべし、さては頼基・仏に成り候ても甲斐なしとなげき存じ候
이처럼 엄중한 법화경이시기에, 주군도 이끌어 드리고자 하는 까닭에 수많은 작은 일을 잊고 지금도 모시고 있습니다. 요리모토를 참언하는 자는 주군께 불충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주군의 집을 나간다면 주군께서는 곧 무간지옥에 떨어지실 것이니, 그러면 요리모토가 부처가 된다 해도 보람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언제 낼 것인가
대성인은 진장을 언제 어떻게 낼지까지 일러 주셨다. 진장을 가져갈 승려로 처음에는 산미보를 생각했으나 병이 분명치 않아 다른 승려를 보낸다 하시고, 「다이가쿠사부로 님이나 다키 다로 님이나 도키 님에게 겨를 나는 대로 청서(淸書)하게 하여 올리라(だいがくの三郎殿か、たきの太郎殿か、とき殿かに、いとまに随いてかかせて、あげさせ給うべし)」(1164쪽, 2차 확인)고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이것을 올리면 일은 끝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안을 단단히 하고, 동료들이 떠들 만큼 떠들게 둔 뒤에 내라. 그러면 이 진장은 결국 가마쿠라 막부에도 알려지고 집권에게까지 올라갈 것이다. 「이 진장을 사람마다 보게 되면 그들의 부끄러움이 드러날 것이다(此の陳状、人ごとにみるならば彼等がはぢあらわるべし)」(1164쪽, 2차 확인).
주군에게는 이렇게만 말하라고 하셨다.
只一口に申し給へ。我とは御内を出でて、所領をあぐべからず。上よりめされいださむは法華経の御布施、幸と思うべし
그저 한마디로 말하시라. 스스로 주군의 집을 나가 영지를 바치지는 않겠다. 위에서 거두어 가신다면 그것은 법화경께 올리는 보시이니 행복으로 여기겠다.
강의는 여기에 대성인의 다른 당부를 이어 붙인다. 봉행인에게는 결코 아첨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 것. 그리고 「이 영지는 위에서 받은 것이 아니다. 주군의 병을 법화경의 좋은 약으로 고쳐 드린 상으로 받은 영지다. 그것을 거두신다면 주군의 병도 다시 그 몸에 돌아갈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할 것.
진장이 실제로 주군에게 올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7월의 다른 편지(「고계서」)는 「또 이번에 무슨 기회가 생기면 써 둔 진장을 올리라. 중대한 글이니 한바탕 소란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又今度いかなる便も出来せば、したため候いし陳状を上げらるべし。大事の文なれば、ひとさはぎはかならずあるべし)」(1169쪽, 2차 확인)라고 하여, 그때까지는 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두 달 뒤, 일은 전혀 다른 쪽에서 풀렸다(27절). 강의는 진장을 낼 것도 없이 주군을 생각하는 시조깅고의 마음이 통했으리라고 본다.
- ①하문의 인용 「竜象御房の御説法の所に…兵杖を帯して出入すと云云」1153*
- ②구와가야쓰의 사실 — 법문을 들으러 감 · 난동 없음
- ③료칸 · 류조보의 정체 — 1271 기우 대결 · 「無尽の讒言を構えて殺罪に」1157–1158*
- ④부자 2대의 충성 — 1246 · 1272 · 「父子二代・命を君に」1161* · 주군을 성불로 이끌려는 뜻1161*
- ⑤맺음 「頼基を讒言申す仁は君の御為不忠の者」1162*
다이가쿠사부로 · 다키 다로 · 도키 님에게 청서1164*
「불법은 도리」 — 「고계서」
같은 해 여름의 「시조깅고전답서(고계서)」는 하문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쓰인 편지다. 「고계(告誡)」는 타이르고 경계한다는 뜻으로, 이 편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대성인은 이 편지에서 「부디 부디 이 사이에는 다른 일이라도 기청문을 쓰지 마라(かまへてかまへて、此の間はよの事なりとも御起請かかせ給うべからず)」(1168쪽, 2차 확인)고 다짐하시고, 이 사건이 결국 어떻게 판가름 날지를 이렇게 단언하셨다.

仏法と申すは道理なり道理と申すは主に勝つ物なり
불법이라는 것은 도리다. 도리라는 것은 주군을 이기는 것이다.
주군의 권력도 도리를 끝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 도리가 이기려면 시조깅고 자신이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같은 편지는 그의 약점을 정면으로 짚는다.
御辺は腹あしき人なれば火の燃るがごとし一定・人にすかされなん
그대는 성미가 사나운 사람이라 불이 타오르는 것 같으니 반드시 남에게 속아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처신의 길을 일러 주셨다.
吾が家に・あらずんば人に寄合事なかれ、又夜廻の殿原は・ひとりも・たのもしき事はなけれども・法華経の故に屋敷を取られたる人人なり、常はむつばせ給うべし、又夜の用心の為と申しかたがた・殿の守りとなるべし、吾方の人人をば少少の事をば・みずきかずあるべし・さて又法門なんどを聞ばやと仰せ候はんに悦んで見え給うべからず
자기 집이 아니면 남과 어울리지 마라. 또 밤순찰의 무사들은 한 사람도 믿음직하지는 않지만 법화경 때문에 집을 빼앗긴 사람들이니 늘 가까이 지내라. 밤의 경계를 위해서도 여러모로 그대를 지켜 줄 것이다. 자기 편 사람들의 작은 일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 그리고 (주군이) 법문을 듣고 싶다고 하시더라도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마라.
마지막 줄이 흥미롭다. 주군이 법문을 듣고 싶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라. 성급하게 다가가면 다시 일을 그르친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제자의 성미를 알고, 그 성미가 길을 막지 않도록 한 걸음씩 짚어 주셨다.
「스슌천황어서」 — 주군의 병
1277년 봄부터 가마쿠라에 돌던 역병이 가을에는 시조깅고의 주군에게까지 미쳤다. 여러 의사가 손을 썼으나 차도가 없었다. 주군은 근신 중이던 시조깅고를 불러 병을 보게 했다. 전에도 그가 주군의 병을 고쳐 그 공으로 영지를 받은 일이 있었다고 강의는 쓴다. 시조깅고는 이 소식을 미노부에 알렸다. 9월 11일, 대성인은 긴 답장을 쓰셨다. 「스슌천황어서」다. 화광신문판의 별칭은 「동지옥초(同地獄抄)」로, 14절에서 본 「함께 지옥에 있겠다(同じく地獄なるべし)」는 대목에서 나왔다. 창가교학연구실 강의는 「삼종재보어서」라 부른다.
편지는 그가 보낸 흰 소매옷 한 벌과 돈 한 꿰미와 도키 님의 편지, 그리고 감 · 배 · 날톳 · 마른톳 같은 여러 물건에 대한 감사로 시작한다(1170쪽). 그리고 곧 주군의 병을 이야기하신다.
さては・なによりも上の御いたはりなげき入つて候、たとひ上は御信用なき様に候へども・との其の内にをはして其の御恩のかげにて法華経をやしなひ・まいらせ給い候へば偏に上の御祈とぞなり候らん、大木の下の小木・大河の辺の草は正しく其の雨にあたらず其の水をえずといへども露をつたへ・いきをえて・さかうる事に候
그런데 무엇보다 주군의 병환을 몹시 걱정합니다. 설령 주군께서는 (법화경을) 믿지 않으시는 듯해도, 그대가 그 집에 있으면서 그 은혜의 그늘에서 법화경을 받들고 계시니 오로지 주군을 위한 기원이 될 것입니다. 큰 나무 아래의 작은 나무, 큰 강가의 풀은 그 비를 바로 맞지 않고 그 물을 바로 얻지 않아도 이슬을 전해 받고 기운을 얻어 번성합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주군의 병의 까닭을 이렇게 보셨다.
されば御内の人人には天魔ついて前より此の事を知りて殿の此の法門を供養するをささえんがために今度の大妄語をば造り出だしたりしを御信心深ければ十羅刹たすけ奉らんがために此の病はをこれるか、上は我がかたきとは・をぼさねども一たん・かれらが申す事を用い給いぬるによりて御しよらうの大事になりて・ながしらせ給うか、彼等が柱とたのむ竜象すでにたうれぬ、和讒せし人も又其の病にをかされぬ
그러므로 주군의 집 사람들에게 천마가 붙어 전부터 이 일을 알고, 그대가 이 법문을 공양하는 것을 막으려고 이번의 큰 거짓말을 지어냈는데, 그대의 신심이 깊으니 십나찰녀가 그대를 도우려고 이 병이 일어난 것인가. 주군께서는 그대를 원수로 여기지는 않으시지만, 한때 그들의 말을 들어 쓰셨기에 병환이 중해져 오래 끄시는 것인가. 그들이 기둥으로 믿던 류조는 이미 쓰러졌다. 참언한 사람도 또 그 병에 걸렸다.
이 9월, 가마쿠라의 역병에 류조보가 쓰러졌고, 시조깅고를 참언한 사람도 병에 걸렸다. 강의는 이것을 「불법의 상벌은 엄연하다」고 읽는다.
조심하라, 이긴 몸이니
그러나 대성인은 오히려 지금이 위험하다고 하셨다. 「그대의 몸도 위태롭게 생각됩니다. 반드시 적에게 노림을 받을 것입니다(此れにつけても殿の御身もあぶなく思いまいらせ候ぞ、一定かたきに・ねらはれさせ給いなん)」(1171쪽). 주군에게 전보다 더 가까이 끌어당겨지니, 동료들은 겉으로는 잠잠해도 속은 타오를 것이다. 대성인은 출사의 몸가짐을 하나하나 일러 주셨다.
若しきうだちきり者の女房たち・いかに上の御そろうはと問い申されば、いかなる人にても候へ・膝をかがめて手を合せ某が力の及ぶべき御所労には候はず候を・いかに辞退申せども・ただと仰せ候へば御内の者にて候間・かくて候とてびむをも・かかずひたたれこはからず、さはやかなる小袖・色ある物なんども・きずして且く・ねうじて御覧あれ
만일 귀공자들이나 권세 있는 집의 부인들이 「주군의 병환은 어떠한가」 하고 묻거든, 상대가 누구든 무릎을 굽히고 손을 모아 「제 힘이 미칠 병환이 아니라고 아무리 사양해도 그래도 하라고 하시니, 이 집의 사람인지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귀밑머리도 빗지 말고 예복도 빳빳하게 하지 말고, 산뜻한 소매옷이나 색 있는 옷 같은 것도 입지 말고 한동안 참고 지내 보시라.
그리고 이렇게 경계하셨다.
そこばくの人の殿を造り落さんとしつるにをとされずして・はやかちぬる身が穏便ならずして造り落されなば世間に申すこぎこひでの船こぼれ又食の後に湯の無きが如し
수많은 사람이 그대를 모함해 떨어뜨리려 했는데 떨어지지 않고 이미 이긴 몸이, 온당치 못하게 굴어 모함에 떨어진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다 저어 온 배가 엎어지는 것」, 또 「밥 먹은 뒤에 끓인 물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어서 집의 쪽문 옆, 지불당, 마루 밑, 천장 같은 곳을 특히 살피라 하시고, 「이번에는 저들이 전보다 꾀가 늘었을 것」이라 하셨다(1172쪽). 밤순찰의 무사들과 가까이 지내라는 당부, 형과 류조보의 이야기(5절), 다쓰노구치의 기억(14절)이 이 편지 안에 다 들어 있다.
마음의 재보
편지의 한가운데에 강의가 이 어서를 「삼종재보어서」라 부르는 까닭이 된 대목이 있다.
人身は受けがたし爪の上の土・人身は持ちがたし草の上の露、百二十まで持ちて名を・くたして死せんよりは生きて一日なりとも名をあげん事こそ大切なれ、中務三郎左衛門尉は主の御ためにも仏法の御ためにも世間の心ねもよかりけり・よかりけりと鎌倉の人人の口にうたはれ給へ、穴賢・穴賢、蔵の財よりも身の財すぐれたり身の財より心の財第一なり、此の御文を御覧あらんよりは心の財をつませ給うべし
사람 몸은 받기 어렵다, 손톱 위의 흙처럼. 사람 몸은 지니기 어렵다, 풀 위의 이슬처럼. 백이십 살까지 살아 이름을 더럽히고 죽기보다는, 살아서 단 하루라도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는 주군을 위해서도, 불법을 위해서도, 세상의 마음씨도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하고 가마쿠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시라. 부디 부디. 곳간의 재보보다 몸의 재보가 낫고, 몸의 재보보다 마음의 재보가 첫째다. 이 편지를 보시는 것보다 마음의 재보를 쌓으시라.
다섯 해 전 「법화종의 시조깅고」라 불리라 하셨던 소원이(18절), 여기서는 「주군을 위해서도, 불법을 위해서도, 세상의 마음씨도」로 넓어졌다. 강의는 시조깅고가 이 글귀를 「몸으로 읽어 냈다」고 쓴다.
스슌 천황 이야기
편지의 끝에 대성인은 「첫째로 아끼는 이야기」를 적으셨다. 성덕태자의 백부인 스슌 천황이 태자에게 자기 관상을 보라 했더니 태자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상」이라며 오상(五常), 곧 인욕바라밀을 몸에서 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성미 급한 왕은 어느 날 바쳐진 멧돼지 새끼의 눈을 비녀로 찌르며 「언젠가 미운 놈을 이렇게 하리라」 했고, 그 말을 들은 소가노 우마코가 왕을 죽였다(1173–1174쪽). 대성인은 이어서 「공자라는 현인은 구사일언(九思一言)이라 하여 아홉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했다」(1174쪽)고 하시고, 편지를 이렇게 맺으셨다.
一代の肝心は法華経・法華経の修行の肝心は不軽品にて候なり、不軽菩薩の人を敬いしは・いかなる事ぞ教主釈尊の出世の本懐は人の振舞にて候けるぞ、穴賢・穴賢、賢きを人と云いはかなきを畜といふ
일대의 간심은 법화경이고, 법화경 수행의 간심은 불경품입니다. 불경보살이 사람을 공경한 것은 어떤 일입니까. 교주 석존이 세상에 나오신 본뜻은 사람의 행동거지였습니다. 부디 부디. 현명한 것을 사람이라 하고, 어리석은 것을 짐승이라 합니다.
창가학회는 이 「사람의 행동거지(人の振舞)」라는 한마디를 신앙이 생활과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자리, 곧 「불법즉사회」의 원점으로 소중히 여겨 왔다. 그 말을 받은 사람은 성미 급한 한 무사였다.
- 1장내훈외호「大木の下の小木」기바 대신1170
- 2장정법을 막는 자의 벌「彼等が柱とたのむ竜象すでにたうれぬ」1171
- 3장몸조심「敵も二人ある者をば・いぶせがり候ぞ」「びむをも・かかず」1171
- 4장동지의 단결「こぎこひでの船こぼれ」夜廻の殿原1172
- 5장주군의 신뢰는 법화경 덕분「竜象と殿の兄とは」1172–1173
- 6장함께 지옥에「同じく地獄なるべし」1173
- 7장마음의 재보「蔵の財よりも身の財すぐれたり身の財より心の財第一なり」1173
- 8장숭준천황九思一言1173–1174
- 9장사람의 행동거지「教主釈尊の出世の本懐は人の振舞にて候けるぞ」1174
「아, 사나이로다」 — 출사의 행렬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약을 권하고 법화경에 빌며 정성을 다한 끝에 주군의 병은 차도를 보였다. 주군도 참언을 믿고 충신을 잃을 뻔한 것을 뉘우쳤을 것이라고 강의는 본다. 해가 바뀐 1278년 1월, 시조깅고는 다시 출사하게 되었고, 주군 에마의 시로 지카토키가 출사할 때 따르는 무사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쉴 틈도 없이 바쁘다는 소식이 미노부에 닿았다. 1월 25일, 대성인은 「시조깅고어서」를 쓰셨다.

なによりも承りてすずしく候事は、いくばくの御にくまれの人の御出仕に、人かずにめぐせられさせ給いて、一日二日ならず、御ひまもなきよし、うれしさ申すばかりなし……殿のすねんが間のにくまれ、去年のふゆはかうとききしに、かへりて日日の御出仕の御とも、いかなる事ぞ
무엇보다 듣고 시원했던 것은, 그토록 미움을 받던 사람이 (주군의) 출사에 수행하는 사람의 수에 들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쉴 틈도 없다고 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그대가 몇 해 동안 미움을 받고, 지난겨울에는 이제 끝이라고 들었는데, 도리어 날마다 출사를 모시게 되었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대성인은 미노부에 온 엔교보가 전한 가마쿠라의 소문을 그대로 적으셨다.
其の上円教房の来りて候いしが申し候は、えまの四郎殿の御出仕に、御とものさぶらい二十四五、其の中にしうはさてをきたてまつりぬ。ぬしのせいといひ、かを・たましひ・むま・下人までも、中務のさえもんのじゃう第一なり。あはれをとこやをとこやと、かまくらわらはべはつじちにて申しあひて候しとかたり候
게다가 엔교보가 와서 말하기를, 에마의 시로 님이 출사하실 때 따르는 무사가 스물네댓 있었는데, 주군은 제쳐 두고, 몸집이며 얼굴이며 기상이며 말이며 하인까지 나카쓰카사의 사에몬노조가 첫째였다. 「아, 사나이로다, 사나이로다」 하고 가마쿠라의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말하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주군을 절복해 미움을 산 지 3년 4개월, 하문이 내려온 최악의 때로부터 반년 뒤였다. 강의는 이 행렬의 모습을 「삼장사마와 삼류 강적을 이겨 낸 신심의 승리 그 자체」라 부른다. 그러나 대성인은 여기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으셨다. 「그러니 이번에는 특히 몸을 삼가시라(されば今度はことに身をつつしませ給うべし)」(1175쪽, 2차 확인). 주군의 집에 드나들 때, 집에 돌아올 때, 밤에 움직일 때의 주의를 다시 일러 주시고, 「올해는 현명하게 일을 보시라(今年かしこくして物を御らんぜよ)」(1177쪽, 2차 확인)고 하셨다. 아우들을 아끼라는 대목(5절)도 이 편지에 있다.
돌아온 땅 — 세 배의 영지
1278년 10월, 시조깅고는 주군에게서 새 영지를 받았다. 대성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으셨다.
御所領上より給わらせ給いて候なる事、まこととも覚へず候。夢かとあまりに不思議に覚へ候
영지를 위에서 받으셨다니 참말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꿈인가 싶을 만큼 불가사의합니다.
새 영지는 예전 영지 「도노오카」의 세 배라고 했다.
かの処は、とのをかの三倍とあそばして候上、さどの国のもののこれに候が、よくよく其の処をしりて候が申し候は、三箇郷の内にいかだと申すは第一の処なり。田畠はすくなく候へども、とくははかりなしと申し候ぞ
그곳은 도노오카의 세 배라고 적혀 있는 데다, 사도국 사람이 여기 와 있는데 그곳을 잘 알아서 말하기를, 세 고을 가운데 이카다라는 곳이 첫째가는 땅이다, 논밭은 적지만 그 덕은 헤아릴 수 없다고 합니다.
「이카다」가 지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사도국 사람이 그곳을 잘 안다고 했으니 사도라는 설이 있고, 같은 해 윤10월 22일의 편지에 「시나노에서 보내온 물건의 목록(信濃より贈られ候いし物の日記)」(1185쪽)이라는 말이 있어 지금의 나가노현이라는 설도 있다. 「도노오카」에 대해서는 나가노현 이다시에 가미토노오카 · 시모토노오카라는 땅 이름이 있다. 1280년의 편지에 「도노오카에서 쌀을 보내 주셨다(殿岡より米送り給び候)」(1193쪽, 2차 확인)고 있어, 이 영지는 한때 거두어졌다가 다시 돌려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강의는 쓴다.
강의는 이 일의 불가사의함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는 대성인의 법문을 믿는다는 까닭으로 가마쿠라 사람들에게도, 동료 가신들에게도, 귀공자들에게도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주군이 녹을 주려 할 때에도 여러 번 사양했으니, 동료들 눈에는 이상하게, 주군에게는 무례하게 보였을 것이다. 수십 명 동료의 차가운 눈길 속에서, 형제마저 떠난 처지에서, 영지가 늘어난 것이다.
음덕양보
1279년 4월 23일의 「음덕양보어서」에서 대성인은 이 일의 까닭을 이렇게 밝히셨다.
さきざき申し候いしやうに、陰徳あれば陽報ありと申して、皆人は主にうたへ、主もいかんぞをぼせしかども、わどのの正直の心に主の後生をたすけたてまつらむとをもう心がうじゃうにして、すねんをすぐれば、かかるりしゃうにもあづからせ給うぞかし。此は物のはしなり。大果報は又来るべしとおぼしめせ
전부터 말해 온 것처럼 「숨은 덕이 있으면 드러난 보답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주군에게 호소하고 주군도 어찌할까 생각하셨지만, 그대의 정직한 마음에 주군의 후생을 구해 드리려는 마음이 강성하여 몇 해를 지냈기에 이러한 이익을 입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큰 과보는 또 올 것이라 생각하십시오.
같은 해 9월 15일의 편지(「원질대진기파사」)는 그 「큰 과보」가 다시 온 것을 전한다. 「얼마나 주군의 집 사람들이 시기했겠으며, 여러 번 (주군의) 말씀을 되돌리고 때때로 주군의 마음을 거스르셨으니 얼마나 참언이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여러 번 영지를 돌려드리고 이제 또 영지를 받으셨다 한다. 이만한 불가사의는 없다. 이야말로 음덕이 있으면 양보가 있다는 것이다(いくそばくぞ御内の人人そねみ候らんに、度度の仰せをかへし、よりよりの御心にたがはせ給へば、いくそばくのざんげんこそ候らんに、度度の御所領をかへして、今又所領給はらせ給うと云云。此程の不思議は候はず。此れ偏に陰徳あれば陽報ありとは此れなり)」(1180쪽, 2차 확인). 대성인은 그 까닭을 「내 주군께 법화경을 믿게 해 드리려는 마음이 깊은 까닭인가(我が主に法華経を信じさせまいらせんとをぼしめす御心のふかき故か)」(1180쪽, 2차 확인)라고 하셨다.
같은 편지에서 대성인은 이렇게도 쓰셨다. 「니치렌의 마음은 전혀 여래의 사자가 아니다. 범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삼류의 큰 원적에게 원수로 여겨져 두 번의 유배를 당했으니 여래의 사자와 비슷하다(日蓮が心は全く如来の使にはあらず凡夫なる故なり、但し三類の大怨敵にあだまれて二度の流難に値へば如来の御使に似たり)」(1181쪽, 2차 확인). 그리고 그런 니치렌을 「길러 주는 사람들은 어찌 정토에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これをやしなはせ給う人人は豈浄土に同居するの人にあらずや)」(1181쪽, 2차 확인)라고 하셨다.
연대 대조 — 영지 하사를 전하는 「소령서」는 고안 원년(1278) 10월로 본다. 「음덕양보어서」는 강의가 고안 2년(1279) 4월 23일로 적는다. 「원질대진기파사」의 9월 15일은 강의 안에서 고안 원년(1278)으로 적은 곳과 고안 2년(1279)으로 적은 곳이 있다. 이 페이지는 「음덕양보어서」 뒤에 둔 강의의 서술 순서를 따라 1279년으로 쓰고, 1278년설을 함께 적는다(C-4).
- 1276.9에치고로 교체 문제「유지홍정법사」
- 1277 봄「팔풍초」「御訴訟なくて」
- 1277.6하문「起請か所領没収か」「二所の所領をすてて」
- 1277.9주군의 병 · 재출사
- 1278.1출사의 행렬
- 1278.10새 영지「とのをかの三倍」「三箇郷の内にいかだ」1183*
- 1279.4「陰徳あれば陽報あり」1178*
- 1279.9「今又所領給はらせ給う」1180*
- 1280「殿岡より米送り給び候」1193*
- 1276.9에치고로 교체 문제「유지홍정법사」
- 1277 봄「팔풍초」「御訴訟なくて」
- 1277.6하문「起請か所領没収か」「二所の所領をすてて」
- 1277.9주군의 병 · 재출사
- 1278.1출사의 행렬
- 1278.10새 영지「とのをかの三倍」「三箇郷の内にいかだ」1183*
- 1279.4「陰徳あれば陽報あり」1178*
- 1279.9「今又所領給はらせ給う」1180*
- 1280「殿岡より米送り給び候」1193*
| 편지 | 술자리 | 밤길과 집 | 주군 앞의 말 | 동료 | 형제와 동지 | 옷차림과 몸가짐 |
|---|---|---|---|---|---|---|
| 1274.9「주군이입차법문면여동죄사」 | 「御さかもり夜は一向に止め給へ」1133 | |||||
| 1276.7「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 | 「三度までは頓病の由を申させ給いて」1147* | |||||
| 1277「팔풍초」 | 「御訴訟なくて」1152* | |||||
| 1277.7「불가석소령사」 | 「我とは御内を出でて、所領をあぐべからず」1164* | |||||
| 1277「고계서」 | 「吾が家に・あらずんば人に寄合事なかれ」1169* | |||||
| 1277.9「스슌천황어서」 | 「妻戸の脇・持仏堂」1172 | 「びむをも・かかず」1171 | ||||
| 1278.1「시조깅고어서」 | 「御をととどもには常はふびんのよし」1176* |
- 술자리
- 「御さかもり夜は一向に止め給へ」1133
- 밤길과 집
- 주군 앞의 말
- 동료
- 형제와 동지
- 옷차림과 몸가짐
- 술자리
- 밤길과 집
- 「三度までは頓病の由を申させ給いて」1147*
- 주군 앞의 말
- 동료
- 형제와 동지
- 옷차림과 몸가짐
- 술자리
- 밤길과 집
- 주군 앞의 말
- 동료
- 「御訴訟なくて」1152*
- 형제와 동지
- 옷차림과 몸가짐
- 술자리
- 밤길과 집
- 주군 앞의 말
- 「我とは御内を出でて、所領をあぐべからず」1164*
- 동료
- 형제와 동지
- 옷차림과 몸가짐
- 술자리
- 밤길과 집
- 주군 앞의 말
- 동료
- 「吾が家に・あらずんば人に寄合事なかれ」1169*
- 형제와 동지
- 옷차림과 몸가짐
- 술자리
- 밤길과 집
- 「妻戸の脇・持仏堂」1172
- 주군 앞의 말
- 동료
- 형제와 동지
- 옷차림과 몸가짐
- 「びむをも・かかず」1171
- 술자리
- 밤길과 집
- 주군 앞의 말
- 동료
- 형제와 동지
- 「御をととどもには常はふびんのよし」1176*
- 옷차림과 몸가짐
주군을 절복한 1274년부터 영지를 받은 1278년까지, 대성인은 시조깅고에게 「주군을 떠나지 말라」, 「소송하지 말라」, 「술자리를 삼가라」, 「옷차림을 수수하게 하라」고 쓰셨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것을 신심과 생활을 하나로 보는 지도로 읽는다. 「불법은 도리이고, 도리는 주군을 이긴다」. 그 도리가 이기는 길은 산속으로 피하는 것도, 소송으로 다투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고, 몸가짐을 삼가고, 주군의 생명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었다. 시조깅고는 그 길로 이겼다. 강의는 이 승리를 「인간으로서의 승리」라고 부른다.
기바 대신 — 의사로서의 시조깅고
시조깅고는 무사이면서 의술에 뛰어났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의술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다. 강의는 몇 가지 가능성을 든다. 나카쓰카사 집안이 본래 의술에 밝았을 수도 있고, 주군의 집에 의서가 있어 쉽게 구해 볼 수 있었을 수도 있으며, 선종 사찰 같은 곳에서 의학을 공부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독학이었으리라는 것이 강의의 짐작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전에도 주군의 병을 고쳐 그 공으로 영지를 받은 일이 있었고, 1277년 역병 때 여러 의사가 손쓰지 못한 주군의 병을 맡았다는 것이다(27절).
대성인은 그런 그를 인도의 명의 기바(耆婆)에 견주셨다. 기바는 마가다국 아사세왕(阿闍世王)의 대신이었다. 아사세왕은 제바달다를 스승으로 삼아 석존을 적으로 여겼고, 석존께 귀의한 아버지 빈바사라왕을 가두었다. 그 나라에서 기바만이 석존의 제자였다. 그는 어머니까지 해치려는 왕을 간하여 멈추게 했다. 뒤에 왕의 온몸에 큰 종기가 돋아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기바는 왕을 석존께 이끌었고, 왕은 석존이 설한 열반경을 듣고 병이 나아 수명을 마흔 해 늘렸다고 한다. 석존 멸후 경전 결집을 후원한 것도 이 왕이었다.
대성인은 「스슌천황어서」 첫머리에서 이렇게 쓰셨다.
阿闍世王は仏の御かたきなれども其の内にありし耆婆大臣・仏に志ありて常に供養ありしかば其の功大王に帰すとこそ見へて候へ
아사세왕은 부처의 원수였지만 그 안에 있던 기바 대신이 부처께 뜻이 있어 늘 공양했기에, 그 공덕이 대왕에게 돌아갔다고 보입니다.
「요리모토진장」에서는 이 비유를 주군 앞에서 그대로 쓰셨다.
阿闍世王は提婆六師を師として、教主釈尊を敵とせしかば、摩竭提国皆仏教の敵となりて、闍王の眷属五十八万人、仏弟子を敵とする中に、耆婆大臣計り仏の弟子なり。大王は上の頼基を思食すが如く、仏弟子たる事を御心よからず思し食ししかども、最後には六大臣の邪義をすてて、耆婆が正法にこそつかせ給い候しか
아사세왕은 제바와 육사외도를 스승으로 삼아 교주 석존을 적으로 삼았기에 마가다국이 모두 불교의 적이 되었고, 왕의 권속 오십팔만 명이 부처의 제자를 적으로 여기는 가운데 기바 대신만이 부처의 제자였습니다. 대왕은 주군께서 요리모토를 여기시듯 그가 부처의 제자인 것을 언짢게 여기셨지만, 마지막에는 여섯 대신의 삿된 뜻을 버리고 기바의 정법을 따르셨습니다.
「대왕은 주군께서 요리모토를 여기시듯」. 대성인은 주군에게 올리는 글 속에서 주군을 아사세왕에, 시조깅고를 기바에 견주셨다. 정법을 믿지 않는 왕을 섬기면서 왕을 간하고, 마지막에는 왕을 부처께 이끈 신하이자 의사. 강의는 이 비유가 시조깅고의 처지와 꼭 들어맞는다고 쓴다. 그리고 대성인의 이 신뢰에 시조깅고는 「법화종의 시조깅고」로서, 묘법의 명의로서 살아가리라 깊이 다짐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1278년 6월의 「나카쓰카사사에몬노조전답서(이병서)」는 그 의사에게 보낸 법문이다. 대성인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는 몸의 병, 곧 지 · 수 · 화 · 풍의 네 원소가 어그러져 생기는 사백사 병으로, 기바나 편작 같은 의사의 약으로 고친다. 또 하나는 마음의 병, 곧 탐 · 진 · 치 삼독에서 팔만사천에 이르는 병으로, 부처가 아니면 고치기 어렵다(1178쪽). 그리고 지금 일본의 역병은 아사세왕의 종기처럼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 법화경이 아니면 없애기 어렵다고 하셨다(1179쪽). 몸의 의사에게 마음의 병을 가르치신 것이다.
「耆婆大臣・仏に志ありて常に供養ありしかば其の功大王に帰す」1170
| 항목 | 기바 | 시조깅고 |
|---|---|---|
| 나라와 주군 | 마가다국 아사세왕 | 가마쿠라 에마 씨 |
| 주군의 스승 | 제바달다 · 육사외도 | 고쿠라쿠사료칸 |
| 신하의 신앙 | 석존의 제자 | 니치렌의 제자 · 동료 중 홀로 |
| 직분 | 대신 · 명의 | 무사 · 의사 |
| 주군의 병 | 온몸의 종기 · 「心に従て生ず」1179 | 1277 역병 |
| 결말 | 부처께 귀의 · 수명 40년 연장 | 병의 차도 · 재출사 · 영지 |
「大王は上の頼基を思食すが如く」1159–1160*
대성인의 약 — 「목숨이 살아난 것은」
미노부에 드신 뒤 대성인은 자주 병을 앓으셨다. 1277년 12월 30일부터는 설사가 시작되어 해가 바뀌어도 그치지 않았다. 시조깅고는 약을 지어 미노부로 보냈다. 1278년 6월 26일, 대성인은 「이병서」의 끝에 이렇게 쓰셨다.

将又日蓮下痢去年十二月卅日事起り今年六月三日四日日日に度をまし月月に倍増す定業かと存ずる処に貴辺の良薬を服してより已来日日月月に減じて今百分の一となれり、しらず教主釈尊の入りかわり・まいらせて日蓮をたすけ給うか、地涌の菩薩の妙法蓮華経の良薬をさづけ給えるかと疑い候なり
또 니치렌의 설사는 지난해 12월 30일에 시작되어 올해 6월 3일 · 4일에는 날마다 횟수가 늘고 달마다 배로 더하여 정업(定業)인가 했는데, 그대의 좋은 약을 먹은 뒤로 날마다 달마다 줄어 지금은 백분의 일이 되었다. 알 수 없도다, 교주 석존이 들어와 바뀌시어 니치렌을 도우신 것인가, 지용보살이 묘법연화경의 좋은 약을 주신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같은 날 이케가미 무네나가에게 보내신 편지에도 「배앓이는 사에몬 님의 약으로 나았다(はらのけは左衛門どのの御薬になをりて候)」(「효에사칸전답서」, 1090쪽, 2차 확인)고 쓰셨다. 「이병서」의 추신에는 「도키 님의 홑옷을 받아 주시라」, 「부인의 숙부님 일은 몹시 안타깝다고 전해 주시라(女房の御ををぢの御事なげき入つて候よし申し給ふべし)」(1179쪽)는 말도 있다. 약을 보내는 의사와 그 가족의 슬픔까지 대성인은 함께 받으셨다.
그 뒤에도 대성인의 병은 낫다 도지기를 거듭했다. 9월 15일의 편지(「원질대진기파사」)에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고 강의는 전한다.
日蓮が死生をばまかせまいらせて候。全く他のくすしをば用いまじく候なり
니치렌의 죽고 사는 것을 (그대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다른 의사는 결코 쓰지 않겠습니다.
윤10월의 미노부
1278년 윤10월, 시조깅고는 직접 미노부를 찾아 대성인을 진찰하고 치료했다. 대성인의 병은 나았고, 그는 며칠을 머문 뒤 산을 내려갔다. 그가 가마쿠라에 무사히 닿았다는 소식을 들은 대성인은 윤10월 22일 답장을 쓰셨다. 「시조깅고전답서(필가심고신수즉강어서)」다. 편지는 시나노에서 보내온 물건의 목록으로 시작한다. 「돈 세 관, 흰쌀 좋은 쌀 한 섬, 떡 오십 매, 술 큰 통 하나 작은 통 하나, 곶감 다섯 묶음, 석류 열 개(銭三貫文・白米能米俵一・餅五十枚・酒大筒一・小筒一・串柿五把・柘榴十)」(1185쪽). 그리고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又身に当りて所労大事になりて候つるをかたがたの御薬と申し小袖・彼のしなじなの御治法にやうやう験し候て今所労平愈し本よりも・いさぎよくなりて候、弥勒菩薩の瑜伽論・竜樹菩薩の大論を見候へば定業の者は薬変じて毒となる法華経は毒変じて薬となると見えて候、日蓮不肖の身に法華経を弘めんとし候へば天魔競ひて食をうばはんとするかと思いて歎かず候いつるに今度の命たすかり候は偏に釈迦仏の貴辺の身に入り替らせ給いて御たすけ候か
또 이 몸에 병이 중해졌는데, 여러 가지 약이며 소매옷이며 그 갖가지 치료에 차츰 효험이 있어 지금은 병이 낫고 전보다 더 개운해졌습니다. 미륵보살의 「유가론」과 용수보살의 「대론」을 보면 정업의 사람에게는 약이 바뀌어 독이 되고, 법화경은 독이 바뀌어 약이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니치렌이 못난 몸으로 법화경을 넓히려 하니 천마가 다투어 먹을 것을 빼앗으려는 것인가 생각하여 한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목숨이 살아난 것은 오로지 석가불이 그대의 몸에 들어가 바뀌시어 도우신 것인가 합니다.
「석가불이 그대의 몸에 들어가」. 대성인은 제자의 의술을 부처의 손으로 받으셨다. 그리고 곧바로 걱정으로 넘어가셨다. 그가 돌아가는 길이 너무 걱정되어 가마쿠라에서 오는 사람마다 물었더니, 어떤 이는 유모토에서 만났다 하고, 어떤 이는 고즈에서, 어떤 이는 가마쿠라에서 보았다 하여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고 하셨다(1185–1186쪽). 그리고 이렇게 당부하셨다.
是より後はおぼろげならずば御渡りあるべからず大事の御事候はば御使にて承わり候べし、返す返す今度の道は・あまりに・おぼつかなく候いつるなり、敵と申す者はわすれさせてねらふものなり、是より後に若やの御旅には御馬をおしましませ給ふべからず、よき馬にのらせ給へ
이 뒤로는 웬만한 일이 아니면 오지 마십시오. 중대한 일이 있으면 사자를 통해 듣겠습니다. 거듭 이번 길은 너무도 걱정스러웠습니다. 적이라는 것은 잊게 만들어 놓고 노리는 것입니다. 이 뒤로 혹 길을 떠나시게 되면 말을 아끼지 말고 좋은 말을 타십시오.
편지는 한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이야기로 맺는다. 이광은 범에게 어머니를 잃고, 범을 닮은 바위를 범인 줄 알고 쏘았더니 화살이 깃까지 박혔다. 나중에 바위인 줄 알고 쏘니 다시는 박히지 않았다. 그래서 「석호장군」이라 불렸다. 「신이 지켜 주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 굳은 데 달려 있다(神の護ると申すも人の心つよきによるとみえて候)」(1186쪽). 「그대도 이와 같이, 적은 노리겠지만 법화경의 신심이 강성하니 큰 난도 미리 사라지는 것인가(貴辺も又かくのごとく敵は・ねらふらめども法華経の御信心強盛なれば大難も・かねて消え候か)」(1186쪽).
이듬해 1279년, 대성인은 병든 도키조닌의 아내에게 「가연정업서」를 쓰시며 시조깅고를 이렇게 소개하셨다. 「게다가 좋은 의사가 있다.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 님은 법화경의 행자다(しかも善医あり中務三郎左衛門尉殿は法華経の行者なり)」(985쪽, 도키조닌 편 26절). 「선의(善醫)」. 대성인이 그에게 주신 또 하나의 이름이다.
- 11277.9주군의 역병 치료「스슌천황어서」
- 21277.12.30대성인 설사 시작
- 31278.6.26「貴辺の良薬を服してより已来…今百分の一」1179「はらのけは左衛門どのの御薬に」1090*
- 41278.9.15「日蓮が死生をばまかせまいらせて候」1182*
- 51278 윤10월미노부 방문 · 치료
- 6윤10.22「釈迦仏の貴辺の身に入り替らせ給いて」1185「よき馬にのらせ給へ」1186
- 71279「しかも善医あり」985 · 도키니부인 앞
니치겐뇨 — 「일본 제일의 여인」
시조깅고의 아내 니치겐뇨(日眼女)의 태생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 1275년 정월에 서른셋의 액년이었다는 것만이 대성인의 편지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1243년 무렵에 태어났고, 남편보다 열세 살쯤 아래다. 그녀는 첫딸을 낳은 지 넉 달 만에 다쓰노구치의 밤을 맞았고, 이듬해 봄에는 갓난아이를 안고 홀로 집을 지키며 남편을 사도로 보냈다(17절). 그리고 남편이 주군과 동료에게 시달리던 몇 해를 함께 견뎠다.
1275년 정월, 니치겐뇨는 액년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으로 공양과 함께 질문을 보냈다. 1월 27일,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而るにさえもん殿は俗の中・日本には・かたをならぶべき者もなき法華経の信者なり、是にあひつれさせ給いぬるは日本第一の女人なり、法華経の御ためには竜女とこそ仏は・をぼしめされ候らめ
그런데 사에몬 님은 속인 가운데 일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는 법화경의 신자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하시는 분은 일본 제일의 여인입니다. 법화경에서 보면 부처께서는 용녀로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셋의 액은 바뀌어 서른셋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칠난즉멸 · 칠복즉생이란 이것입니다」라고 하셨다고 강의는 전한다. 같은 편지에서 대성인은 「여(女)라는 글자는 『걸린다(かかる)』라고 읽습니다. 등나무가 소나무에 걸리고 여인이 남자에게 기대듯, 지금은 사에몬 님을 스승으로 삼아 법화경으로 이끌림을 받으십시오(女と申す文字をば・かかるとよみ候、藤の松にかかり女の男にかかるも今は左衛門殿を師と・せさせ給いて法華経へ・みちびかれさせ給い候へ)」(1135쪽)라고도 쓰셨다. 다만 대성인은 같은 편지에서 「신심이 약한 사람은 법화경을 지니는 여인이라도 버린다고 되어 있다. 대장군이 약하면 따르는 이도 보람이 없고, 활이 약하면 시위가 느슨하다」(1135쪽)고 하여 신심의 강약을 분명히 짚으셨다.
석 달 뒤 4월의 「왕사성사」에서는 그 말이 더 엄해진다.
又女房の御いのりの事法華経をば疑ひまいらせ候はねども御信心やよはくわたらせ給はんずらん、如法に信じたる様なる人人も実にはさもなき事とも是にて見て候
또 부인의 기원 일은, 법화경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신심이 약하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법답게 믿는 것 같은 사람들도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여기서 봅니다.
御いのりの叶い候はざらんは弓のつよくしてつるよはく・太刀つるぎにて・つかう人の臆病なるやうにて候べし、あへて法華経の御とがにては候べからず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활은 센데 시위가 약하고, 칼은 좋은데 쓰는 사람이 겁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결코 법화경의 허물이 아닙니다.
대성인은 남편에게 들려 이 말을 아내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라」고 하셨다(1138쪽). 강의는 니치겐뇨가 이 엄한 지적을 받아들여 약한 신심을 돌아보고, 남편과 함께 고난을 열어 갔다고 쓴다.
1279년, 니치겐뇨는 서른일곱의 액년을 맞아 교주 석존의 목상 한 구를 조성하고 공양과 함께 미노부에 알렸다. 대성인은 「니치겐뇨조립석가불공양사」에서 「비유하면 머리를 흔들면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인다. …… 교주 석존을 움직여 드리면 흔들리지 않는 초목이 있겠는가, 출렁이지 않는 물이 있겠는가(譬えば頭をふればかみゆるぐ、心はたらけば身うごく。……教主釈尊をうごかし奉れば、ゆるがぬ草木やあるべき、さわがぬ水やあるべき)」(1187쪽, 2차 확인)라고 하시고, 온 일본의 여인이 염불을 부르는 가운데 홀로 법화경을 믿는 그녀를 「이십구억 구만 사천팔백삼십 명의 여인 가운데 첫째라고 생각하시라(二十九億九万四千八百三十人の女人の中の第一なりとおぼしめすべし)」(1188쪽, 2차 확인)고 기리셨다. 강의는 이 「여인 가운데 첫째」가 남편의 지위 때문도, 얻은 명예 때문도 아니고, 오직 신앙을 관철했기 때문이라고 쓴다. 그리고 이렇게 맺는다. 그 숨은 힘이 시조 집안을 훌륭하게 바꾸어 놓았다.
- 1271.5.7「시조깅고부인어서」「夫婦共に法華の持者なり」1109*
- 1271.5.8「쓰키마로님어서」「月満御前と申すべし」1110*
- 1272.4「동생동명어서」「此のとのを・つかはされたる心ざし大地よりも・あつし」1115
- 1275.1.27「시조깅고전부인답서」33세 액년「日本第一の女人なり」1135
- 1275.4.12「왕사성사」「弓のつよくしてつるよはく」1138
- 1279「니치겐뇨조립석가불공양사」37세 액년「女人の中の第一」1188*
- 28?세격려1271.5.7「시조깅고부인어서」「夫婦共に法華の持者なり」1109*
- 격려1271.5.8「쓰키마로님어서」「月満御前と申すべし」1110*
- 격려1272.4「동생동명어서」「此のとのを・つかはされたる心ざし大地よりも・あつし」1115
- 33세격려1275.1.27「시조깅고전부인답서」33세 액년「日本第一の女人なり」1135
- 엄한 지적1275.4.12「왕사성사」「弓のつよくしてつるよはく」1138
- 37세찬탄1279「니치겐뇨조립석가불공양사」37세 액년「女人の中の第一」1188*
아쓰와라와 「성인어난사」 — 「사부로자에몬 님 곁에 두라」
1279년 9월 21일, 스루가 후지군 아쓰와라에서 닛코상인의 교화로 신앙에 들어온 농민 스무 명이 붙잡혀 가마쿠라로 끌려갔다(니치렌 대성인 편 23절). 강의는 이 법난이 시작될 무렵의 정세를 이렇게 쓴다. 겐지 연간에서 고안 초에 걸쳐 료칸 측의 압력은 가마쿠라의 시조깅고에게, 이케가미 형제에게, 가이의 하야마에게, 스루가의 문하에게 동시에 가해졌다. 스루가는 득종가의 영지였다.
10월 1일, 대성인은 「성인어난사」를 쓰셨다. 받는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人人御中)」, 곧 문하 전체였다. 대성인은 입종 이래 스물일곱 해의 대난을 돌아보시고(1189쪽), 문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各各師子王の心を取り出して・いかに人をどすともをづる事なかれ、師子王は百獣にをぢず・師子の子・又かくのごとし、彼等は野干のほうるなり日蓮が一門は師子の吼るなり
각자 사자왕의 마음을 꺼내어, 사람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겁내지 마라. 사자왕은 온갖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자의 새끼도 그러하다. 저들은 여우가 짖는 것이요, 니치렌의 일문은 사자가 포효하는 것이다.
그리고 붙잡힌 아쓰와라의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쓰셨다.
彼のあつわらの愚癡の者ども・いゐはげまして・をどす事なかれ、彼等にはただ一えんにおもい切れ・よからんは不思議わるからんは一定とをもへ、ひだるしとをもわば餓鬼道ををしへよ、さむしといわば八かん地獄ををしへよ
저 아쓰와라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말로 격려하며 겁주지 마라. 그들에게는 그저 한결같이 각오하라, 잘되면 불가사의요 잘못되면 정해진 것이라 생각하라고 하라. 배고프다 하면 아귀도를 가르치고, 춥다 하면 팔한지옥을 가르치라.
이 글의 끝에 대성인은 한 줄을 덧붙이셨다.
さぶらうざへもん殿のもとに・とどめらるべし
사부로자에몬 님 곁에 두라.
문하 전체에 보내는 이 중대한 글을, 대성인은 시조깅고의 집에 두게 하셨다. 강의는 이것을 그가 재가 문하의 대표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가 대성인의 지시를 받아 붙잡힌 아쓰와라 사람들을 격려하고 문하를 이끄는 데 힘썼으리라고 짐작한다. 「성인어난사」 강의는 대성인이 이 법난을 스루가 한 지방의 일로 보지 않고 일문 전체의 큰일로 여기셔서, 시조깅고를 비롯한 가마쿠라의 문하에게 대난을 견디는 신심을 요청하셨다고 쓴다. 아쓰와라의 진시로 · 야고로 · 야로쿠로 세 사람은 끝내 염불을 부르지 않고 제목을 부르며 목숨을 잃었다.
「적에게 노림을 받으셨다니」
그 무렵 시조깅고 자신도 칼끝 앞에 있었다. 동료 가운데 몇이 끝내 그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10월 23일,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고 강의는 전한다.
さてもさても敵人にねらはれさせ給いしか。前前の用心といひ、又けなげといひ、又法華経の信心つよき故に、難なく存命せさせ給い、目出たし目出たし
그렇다면 그렇다면, 적에게 노림을 받으셨던 것입니까. 앞서부터의 조심이며, 또 굳셈이며, 또 법화경의 신심이 강한 까닭에 난 없이 목숨을 보존하셨으니 경사롭고 경사롭습니다.
이 편지는 「법화경병법사」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대성인은 이 편지에서 무사인 그에게 어떤 병법보다 법화경의 병법을 쓰라고 가르치셨다. 강의는 이 일 뒤로 그를 노리던 적들이 자취를 감춘 것 같다고 쓴다. 다섯 해를 넘긴 박해가 여기서 끝났다.
- 1279.9.21아쓰와라 체포
- 10.1「성인어난사」
- 10.23「법화경병법사」「敵人にねらはれさせ給いしか」1192*
이케가미의 가을 — 번(幡)을 든 사람
1280년 10월, 대성인은 시조깅고에게 미노부에 든 지 일곱 해가 되었음을 쓰셨다. 「이 나라 이 산에 들어와 이미 일곱 해의 봄가을을 보냈다(当国・当山に入りて已に七年の春秋を送る)」(1193쪽, 2차 확인). 같은 편지에 다쓰노구치와 사도 방문을 회상한 대목(11 · 17절)이 있다. 그 뒤로 대성인의 병은 깊어졌다. 1281년 대성인은 「이 법문을 말한 지 스물아홉 해, 날마다의 논쟁과 달마다의 난과 두 번의 유배에 몸이 지치고 마음이 아파서인가, 이 일고여덟 해 동안 해마다 병이 났다」고 쓰셨고(1105쪽, 2차 확인), 그해 겨울에는 「올해는 봄부터 이 병이 일어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이르도록 날마다 쇠하고 밤마다 더해, 이 열흘 남짓은 먹는 것도 거의 멈추었다」고 쓰셨다(1583쪽, 2차 확인). 강의는 의사인 시조깅고가 대성인의 몸을 걱정하며 회복에 힘을 다했을 것이라고 쓴다.
1282년 9월, 대성인은 히타치의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시려 미노부를 나서셨고, 강의는 시조깅고가 이 길에 모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사시의 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집에 이르신 대성인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시고, 10월 13일 그곳에서 입멸하셨다.
장례 행렬에서 시조깅고는 이케가미 무네나카와 함께 번(幡)을 받들었다. 강의는 그때의 그의 마음을 「애끊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만 쓴다. 대성인의 유골을 미노부에 모시고 그 곁에 작은 암자를 지어 상을 치렀다는 설도 있다.
- 1260안국론대성인
- 1261이즈대성인
- 1261「시지시로전어서」(이름만)시조깅고 앞 어서
- 1264고마쓰바라대성인
- 1270「시조깅고전어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1다쓰노구치대성인
- 1271「쓰키마로님어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1「시조깅고전어소식」시조깅고 앞 어서
- 1272「개목초」시조깅고 앞 어서
- 1272「동생동명어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2「번뇌즉보리」시조깅고 앞 어서
- 1273「가책방법멸죄초」시조깅고 앞 어서
- 1273「교오전답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4미노부대성인
- 1274「주군이입차법문면여동죄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75「시조깅고전부인답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5「차경난지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5「왕사성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76「시조깅고전답서(1143)」시조깅고 앞 어서
- 1276「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76「유지홍정법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77「팔풍초」시조깅고 앞 어서
- 1277「요리모토진장」시조깅고 앞 어서
- 1277「불가석소령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77「고계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7「스슌천황어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8「시조깅고어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8「이병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8「소령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8「필가심고신수즉강어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9아쓰와라대성인
- 1279「음덕양보어서」시조깅고 앞 어서
- 1279「니치겐뇨조립석가불공양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79「성인어난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79「법화경병법사」시조깅고 앞 어서
- 1280「시조깅고전답서」(1193)시조깅고 앞 어서
- 1280「시조깅고허어문」시조깅고 앞 어서
- 1282입멸대성인
- 1282.10.13번을 받듦
우쓰부나의 만년
대성인 입멸 뒤 시조깅고는 시조 집안의 영지였다는 가이국 우쓰부나(內船), 지금의 야마나시현 미나미코마군 난부정 우쓰부나로 옮겨 남은 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후지강을 끼고 미노부와 스루가 사이에 놓인 땅이다. 강의는 이렇게 쓴다. 대성인의 몸에 닥친 큰 난마다 모시고 따른 그는, 만년에도 대성인을 지키며 살았다.

그는 1300년(쇼안 2년), 일흔 전후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사친어서」 강의의 어석은 그날을 3월 15일, 나이를 일흔하나로 적는다. 우쓰부나에는 지금도 그의 자손을 자처하며 시조를 성으로 쓰는 집이 수십 호 있다고 강의는 전한다. 계도에 따르면 딸 쓰키마로님의 아들 요리사토는 에마 집안을 섬기다 1333년 호조 씨가 망할 때 함께 죽었고, 또 다른 아들 요리마스는 우쓰부나에서 농사를 지으며 예순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요리타카의 아들 요리요시는 출가하여 닛기(日義)라 하고 가이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연대 대조 — 별세는 쇼안 2년(1300). 날짜는 「주사친어서」 · 「성인어난사」 강의의 어석에서 3월 15일 · 일흔하나(어석 일부는 날짜 없이 연도만). 「四条金吾について」는 「일흔 전후」로만 적는다. 이 페이지는 「1300년(3월 15일 전승)」으로 쓴다. 만년의 우쓰부나 이주와 대성인 유골 곁의 암자는 강의가 「설」 또는 「전한다」로 적은 것이다.
대성인이 본 시조깅고
대성인은 열 해 남짓 동안 이 사람에게 마흔 통 가까운 편지를 보내셨다. 그 편지들이 그를 부른 말을 모으면 그의 모습이 보인다.
잊지 못하는 사람. 「영산에 가면 맨 먼저 시조깅고야말로 …… 하고 아뢰겠다」(1113), 「어느 세상에선들 잊겠는가 …… 함께 지옥에 있겠다」(1173), 「말고삐에 매달려 …… 일염부제 제일의 법화경의 편이었기에」(1184*), 「어느 세상에선들 잊겠는가」(1193*). 다쓰노구치의 밤은 열 해 동안 편지마다 되살아났다.
보낸 사람. 「법사품의 우바새가 그대가 아니라면 누구를 가리키겠는가」(1117), 「석가불이 그대의 몸에 들어가 바뀌시어」(1185), 「교주 석존이 들어와 바뀌시어 니치렌을 도우신 것인가」(1179). 대성인은 그를 부처가 보낸 사람으로 보셨다.
짝이 없는 신자. 「속인 가운데 일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는 법화경의 신자」(1135), 「법화종의 시조깅고」(1118), 「주군을 위해서도, 불법을 위해서도, 세상의 마음씨도 훌륭하구나」(1173).
성미를 아신 사람. 「그대는 성미가 사나운 사람이라 불이 타오르는 것 같다」(1169*), 「그대는 틀림없이 성미 사나운 상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殿は一定・腹あしき相かをに顕れたり)」(1171), 「그대는 성미가 사나운 사람이라 아마 (내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殿は腹悪き人にてよも用ひさせ給はじ)」(1172). 대성인은 그 성미를 숨기지 않고 짚으셨고, 그 성미가 그를 해치지 않도록 술자리와 밤길과 옷차림까지 일러 주셨다.
목숨을 맡긴 사람. 「니치렌의 죽고 사는 것을 맡겨 두었다. 다른 의사는 쓰지 않겠다」(1182*), 「게다가 좋은 의사가 있다」(985), 「이 뒤로는 좋은 말을 타라」(1186).
창가학회 강의는 대성인과 시조깅고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본다. 하나는 「실천의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다. 그는 법을 먼저 이해한 사람이라기보다, 대성인의 말씀을 받으면 그대로 몸을 움직인 사람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실천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짚어 주신 스승의 자비다. 강의는 성미 급한 그가 몇 해의 박해를 큰일 없이 견딘 까닭을 「오로지 대성인의 자상한 지도, 그리고 대성인을 평생 유일한 스승으로 믿고 그 지도를 목숨 걸고 받은 그의 신심」에서 찾는다.
- 「日蓮・霊山にまいりて・まづ四条金吾こそ」「시조깅고전어소식」 · 1113쪽
- 「同じく地獄なるべし」「스슌천황어서」 · 1173쪽
- 「馬の口にとりつきて鎌倉を出でて」*「시조깅고전답서(소령서)」 · 1184쪽
- 「いつの世にか思い忘るべき」*「시조깅고전답서」 · 1193쪽
- 「此の中の優婆塞とは貴辺の事にあらずんば・たれをかささむ」「시조깅고전답서(번뇌즉보리)」 · 1117쪽
- 「釈迦仏の貴辺の身に入り替らせ給いて御たすけ候か」「시조깅고전답서(필가심고신수즉강어서)」 · 1185쪽
- 「教主釈尊の入りかわり・まいらせて日蓮をたすけ給うか」「이병서」 · 1179쪽
- 「さえもん殿は俗の中・日本には・かたをならぶべき者もなき法華経の信者なり」「시조깅고전부인답서」 · 1135쪽
- 「法華宗の四条金吾・四条金吾」「시조깅고전답서(번뇌즉보리)」 · 1118쪽
- 「主の御ためにも仏法の御ためにも世間の心ねもよかりけり」「스슌천황어서」 · 1173쪽
- 「御辺は腹あしき人なれば火の燃るがごとし」*「시조깅고전답서(고계서)」 · 1169쪽
- 「殿は一定・腹あしき相かをに顕れたり」「스슌천황어서」 · 1171쪽
- 「殿は腹悪き人にてよも用ひさせ給はじ」「스슌천황어서」 · 1172쪽
- 「日蓮が死生をばまかせまいらせて候」*「시조깅고전답서(원질대진기파사)」 · 1182쪽
- 「しかも善医あり中務三郎左衛門尉殿は法華経の行者なり」「가연정업서」 · 985쪽
- 「よき馬にのらせ給へ」「시조깅고전답서(필가심고신수즉강어서)」 · 1186쪽
세 층의 시조깅고
이 페이지는 시조깅고를 세 층으로 읽었다.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시조깅고를 알수록, 그의 신앙이 얼마나 어려운 자리에서 지켜졌는지가 보인다. 그는 대성인을 박해한 료칸을 믿는 주군의 집에서, 거듭 모반의 의심을 받는 일족의 가신으로 살았다. 문하의 시조깅고를 알수록, 대성인의 편지가 한 사람의 삶의 고비마다 얼마나 정확하게 닿았는지가 보인다. 맨발로 뛰어나온 밤에, 바다를 건너간 봄에, 주군에게 미움받은 해에, 하문이 내려온 여름에, 주군이 병든 가을에, 편지는 왔다. 그리고 법화종의 시조깅고를 알수록, 「법화종의 시조깅고, 시조깅고라고 가마쿠라 안의 위아래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라」는 다섯 해 전의 소원이, 「아, 사나이로다」라는 가마쿠라 아이들의 말로 이루어진 까닭이 보인다. 대성인은 그에게 이름을 드높이라 하셨고, 그 이름은 곳간의 재보도 몸의 재보도 아닌 마음의 재보로 얻은 것이었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 1230—출생별세 연령에서 역산 · 전승
- 12425월나고에 도모토키 출가
- 1245—도모토키 사망 · 미쓰토키가 주군
- 1246—미야 소동 · 미쓰토키 이즈 에마 유배아버지 요리카즈 홀로 동행 · 요리모토진장
- 12533.28아버지 요리카즈 사망법명 라이잔 · 계도
- 12534.28대성인 입종선언
- 1256무렵입신설
- 12614.28「시지시로전어서」「四条金吾殿に見参候はば」
- 12615.12대성인 이즈 유배
- 12707.12어머니 사망「시조깅고전어서」(1111–1112)
- 12715.7「시조깅고부인어서」회임 · 부적
- 12715.8쓰키마로님 출생 · 「쓰키마로님어서」
- 12719.12다쓰노구치 · 말고삐를 잡음형제 네 사람
- 12719.13에치까지 모심
- 12719.21「시조깅고전어소식」에치에서
- 12722월「개목초」를 받음사자 편
- 12722.112월 소동하코네를 넘어 주군 곁으로 · 요리모토진장
- 12723.20「사도어서」「三郎左衛門殿」
- 12724월사도 이치노사와 방문 · 「동생동명어서」아내 앞
- 12725.2「시조깅고전답서(번뇌즉보리)」「法華宗の四条金吾」
- 1273—「가책방법멸죄초」교오님 · 형제
- 12738.15「교오전답서」어본존 수여 뒤
- 12741.14「법화행자봉난사」받는 사람 중 「三郎左衛門尉殿」
- 12742월대성인 사면
- 12745월대성인 미노부 입산
- 1274—주군 에마 씨를 절복
- 12749.26「주군이입차법문면여동죄사」「口をつつみて」
- 12751.27「시조깅고전부인답서」니치겐뇨 33세
- 12753.6「시조깅고전답서(차경난지서)」벤 아자리
- 12754.12「왕사성사」극락사 · 어소 화재
- 12766.27「시조깅고전답서(1143)」
- 12767월「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御内を出でさせ給うべからず」
- 12769.6「시조깅고전답서(유지홍정법사)」에치고 영지 교체
- 1277봄 무렵「시조깅고전답서(팔풍초)」어본존 · 강의 「반년 뒤」
- 12776.9구와가야쓰 문답산미보 vs 류조보
- 12776.23주군의 하문6.25 전달
- 12776월「요리모토진장」대성인 대필
- 12777월「시조깅고전답서(불가석소령사)」「二所の所領をすてて」
- 1277—「시조깅고전답서(고계서)」「仏法と申すは道理なり」
- 12779.11「스슌천황어서」주군의 병 · 마음의 재보
- 127712.30대성인 설사 시작이병서
- 12781.25「시조깅고어서」출사의 행렬
- 12786.26「이병서」「貴辺の良薬」
- 12789.15「시조깅고전답서(원질대진기파사)」1279설도 · 「死生をばまかせ」
- 127810월「시조깅고전답서(소령서)」세 배의 영지
- 1278윤10월미노부 방문 · 치료
- 1278윤10.22「시조깅고전답서(필가심고신수즉강어서)」「よき馬にのらせ給へ」
- 1279—「가연정업서」「しかも善医あり」 · 도키니부인 앞
- 1279—「니치겐뇨조립석가불공양사」니치겐뇨 37세
- 12794.23「음덕양보어서」
- 12799.21아쓰와라 법난
- 127910.1「성인어난사」「さぶらうざへもん殿のもとに」
- 127910.23「시조깅고전답서(법화경병법사)」「敵人にねらはれさせ給いしか」
- 128010월「시조깅고전답서」(1193)「七年の春秋」 · 다쓰노구치 회상
- 1280—「시조깅고허어문」시지시로
- 12829월미노부 출발 · 모심강의
- 128210.13대성인 입멸 · 장례에서 번을 받듦이케가미 무네나카와 함께
- 1282이후가이 우쓰부나로전승
- 13003.15별세71 · 날짜는 어석 · 전승
- 131712.15쓰키마로님 사망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