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갈대 우거진 습지와 잔잔한 강 건너, 낮은 대지 가장자리에 흙둑을 네모나게 두른 무사의 관과 초가지붕 집들, 둘레의 소나무와 잎 진 나무, 왼쪽 먼 산줄기 위로 지는 금빛 해와 옅은 분홍 구름을 그린 금박 수묵화

도키 조닌

富木常忍1216?–1299 · 관심본존초를 받은 사람, 어서를 지킨 사람

1271년 9월 14일, 다쓰노구치의 밤을 넘긴 대성인은 사가미 에치의 무사 집에서 편지 한 통을 쓰셨다. 「이제까지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본의가 아니다.」 받는 사람은 시모우사국 와카미야의 도키 조닌이었다. 한 달 뒤 에치고의 항구에서, 다시 한 달 뒤 사도의 눈 덮인 삼매당에서, 대성인은 가는 곳마다 먼저 이 사람에게 붓을 드셨다. 1273년 4월, 대성인이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큰일」이라 하신 「관심본존초」가 건너간 곳도 그의 집이었다. 그는 시모우사의 수호(守護) 지바 씨를 섬기며 날마다 소송과 공문을 다루던 무사였다. 그리고 대성인이 세상을 떠나신 뒤 열일곱 해 동안, 그 편지들을 한 장도 잃지 않고 지켰다.

도키 조닌은 대성인의 가장 오래된 재가 문하다. 입종선언이 있던 1253년 겨울, 대성인은 이미 그와 법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대성인이 이케가미에서 입멸하시기까지 서른 해 가까이, 그는 시모우사의 문하들을 이끌고, 대성인께 쌀과 돈과 옷을 보내고, 대성인의 편지를 받아 사람들에게 읽혔다. 대성인은 그에게 「일생성불초」를 시작으로 「관심본존초」 · 「법화취요초」 · 「사신오품초」에 이르는 중요한 법문을 보내셨다. 창가학회 강의는 그를 가마쿠라의 시조 긴고와 나란히 대성인 외호(外護)의 「쌍벽」이라 부른다. 시조 긴고가 「개목초」를 받았다면 도키 조닌은 「관심본존초」를 받았다.

그러나 이 페이지가 따라가려는 것은 영예만이 아니다. 조닌은 아흔이 넘은 어머니를 지극히 모신 아들이었고, 병든 아내를 「지팡이요 기둥」으로 의지한 남편이었으며, 몽골의 침공으로 주군을 잃은 가신이었다. 예순 고개에서 그는 자신의 「어두운 근기」를 한탄하며 세상일을 버리고 대성인 곁에서 시봉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대성인은 그를 「니치렌 제일의 잘 잊는 사람」이라 놀리시기도 하고, 「몹시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글을 맡기셨다. 왜 이 사람이었는가. 이 페이지는 그 물음을 따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

사도의 편지 열두 편다쓰노구치에서 사면까지 2년 반 동안 대성인이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문하「관심본존초」(1273) · 「법화행자봉난사」(1274) · 「법화취요초」(1274)
대성인의 한 줄「무이의 뜻이 보이면 이것을 열어 보이라」 — 「관심본존초 송장」, 255쪽無二の志を見ば之を開拆せらる可きか
  1. 이나바 도키 향본관
  2. 1250 무렵~1299시모우사 와카미야관
  3. 가마쿠라대성인 초암 · 출사
  4. 1271.9.14사가미 에치편지
  5. 1271.10.22에치고 데라도마리「사박어서」
  6. 1271.11–1274.3사도 쓰카하라 · 이치노사와사도기의 편지
  7. 1274.5~ · 1276.3가이 미노부입산 · 참배 — 와카미야와 「往復千里」
  8. 1275.8히젠 오기요리타네 사망
  9. 1282.10무사시 이케가미대성인 입멸
위치는 약도 · 옅은 점은 주군 요리타네가 세상을 떠난 히젠 오기 · 점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1 · 도키 조닌의 땅
1부 이나바에서 시모우사로

시대 — 막부와 수호, 그리고 지바 씨

12세기 말 ~ 13세기 · 가마쿠라 막부와 동국 무사

1185년 무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세운 무사 정권은 전국의 나라(國)마다 수호(守護)를, 장원과 공령마다 지두(地頭)를 두었다. 수호는 한 나라의 군사와 치안을 맡고, 막부에 대한 무사들의 의무를 거두어들이는 자리였다. 지두는 땅을 관리하고 연공을 거두었다. 막부를 섬기는 무사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하고, 그 고케닌을 다시 섬기는 가신을 피관(被官)이라 했다. 대성인의 생애에 나오는 재가 문하 대부분은 이 사슬 어딘가에 있던 사람들이다. 시조 긴고는 호조 일문 에마 씨의 가신이었고, 이케가미 형제는 막부의 작사(作事)를 맡은 집안이었으며, 난조 도키미쓰는 스루가 우에노의 지두였다. 도키 조닌은 시모우사국 수호 지바 씨의 피관이었다.

지바 씨(千葉氏)는 간토 동쪽의 오래된 무사 가문이다. 요리토모가 거병했을 때 일족을 이끌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공으로, 지바 쓰네타네 이래 대대로 시모우사의 수호를 이어 받았다. 가문의 우두머리는 「지바노스케(千葉介)」라 불렸다. 지바 씨는 시모우사 말고도 이세 · 이가 · 히젠 등 먼 나라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막부의 의례와 군역을 지는 유력 고케닌이었다. 조닌이 섬긴 주군은 지바노스케 요리타네(千葉介賴胤, 1239–1275)다.

13세기 중엽은 막부의 실권이 호조 가문의 수장(得宗)에게 모여 가던 때다. 1247년 호지 합전으로 미우라 씨가 무너졌고, 이 싸움에는 지바 일족의 일부도 휘말려 화를 입었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쓰신 「좌도어서」에서 「호지의 합전이 벌써 이십육 년(宝治の合戦すでに二十六年)」(957쪽)이라고 이 해를 기억하셨다. 동국 무사들에게 정권의 다툼은 먼 일이 아니었다.

종교의 풍경도 바뀌고 있었다. 교토에서 유행하던 정토 염불이 동국 무사 사이에 퍼졌고, 조닌의 주군 요리타네도 겐초 연간(1249–1256)에 정토종의 료추(良忠)에게 귀의했다. 성교지배문서 가운데는 요리타네가 조닌에게 「정토강(淨土講)」의 준비를 맡긴 기록이 있다고 한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것을 근거로, 조닌도 대성인을 만나기 전에는 염불의 영향 아래 있었으리라고 본다. 조닌이 진언을 믿었다는 다른 전승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가 대성인을 만난 곳은 염불과 밀교가 무사의 일상에 스며 있던 세계였다.

막부와 지바 씨조큐의 난1221호지 합전1247요리타네의 료추 귀의1249–56몽골 국서1268진서 고케닌 하향 명령1271.9분에이의 역1274요리타네 사망1275.8고안의 역1281
대성인탄생1222입종1253안국론1260다쓰노구치1271미노부1274입멸1282
도키 조닌출생1216?시모우사로1250 무렵입도1251–53대성인과 법담1253 겨울「관심본존초」1273어머니의 죽음1276입적1299
옅은 띠 — 조닌의 생애 · 금 막대 — 입도 · 세로 점선 — 1271.9.12 다쓰노구치와 이튿날 9.13 진서 고케닌 하향 명령 · 출생 1216 의 「?」는 4절 연대 대조
도표 2 · 세 줄 연표 1216–1299 — 막부와 지바 씨 · 대성인 · 도키 조닌

사료의 층

13세기 ~ 18세기 · 어서 · 문서 · 전기

도키 조닌의 생애를 전하는 자료는 성격이 다른 다섯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대성인의 어서 — 조닌 앞으로 보낸 어서는 지금 알려진 것만 마흔다섯 편이고, 그 가운데 서른여섯 편의 친필이 남아 있다고 창가학회 강의는 셈한다. 대부분은 조닌 자신이 지켜 온 것이다. 어서는 조닌의 신앙과 가족, 공양과 질문을 날짜까지 전한다. 아내 도키 아마고젠 앞으로 보낸 편지도 몇 편 있다.

② 성교지배문서(聖教紙背文書) — 대성인이 경론의 요문을 베껴 쓴 책자의 뒷면에 남은 공문서들이다. 조닌이 쓰고 난 업무 문서를 대성인께 종이로 공양했고, 대성인은 그 뒷면에 요문을 적으셨다. 그래서 앞면은 대성인의 글씨, 뒷면은 지바 씨 가신단의 행정 문서가 되었다. 이 문서들이 조닌의 신분을 밝혀 주었다(2부).

③ 조닌 자신의 글 — 이나바의 하인 문제를 다룬 소장(訴狀), 1277년 대성인께 올린 것으로 보는 「불심장(不審狀)」을 비롯해 대성인께 보낸 것으로 보이는 편지 세 통, 그리고 1299년 입적 직전에 쓴 치키문(置文, 「정해 두는 조목들」)과 장서 목록 「조슈인 본존성교사(常修院本尊聖教事)」가 전한다. 재가 문하가 대성인께 보낸 편지가 남은 것은 매우 드물다.

④ 문하의 기록 — 닛코 상인이 1309년 무렵 정리하게 한 「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富士一跡門徒存知の事)」는 「관심본존초」 · 「법화취요초」 · 「사신오품초」 세 권이 조닌에게 주어졌고 그 정본이 그의 거처에 있다고 적는다. 닛코 상인이 어본존에 적어 넣은 옆쓰기(添書)는 조닌의 가족 관계를 알려 준다.

⑤ 뒤의 전기 — 18세기의 『본화별두고조전(本化別頭高祖傳)』(1720)과 『본화별두불조통기(本化別頭佛祖統紀)』가 조닌의 생몰년과 입신의 일화를 전한다. 조닌의 나이를 셈하는 근거는 거의 이 『불조통기』 하나뿐이다. 이 두 책에서 「도키 다네쓰구」라는 이름도 처음 나온다(3절).

① 어서조닌 앞 마흔다섯 편
본관 이나바
확인 중
출생
확인 중
시모우사 이주
확인 중
지바 씨의 피관
확인 중
입도
간접「망지경사」의 「身は俗に非ず」
대성인과의 만남
있음
마쓰바가야쓰 뒤의 체재
있음
사도기의 편지
있음
어머니의 죽음
있음
불심장
확인 중
마마 문답
있음
가족
있음
입적
확인 중
어서의 보존
확인 중
② 성교지배문서요문 책자의 뒷면
본관 이나바
확인 중
출생
확인 중
시모우사 이주
확인 중
지바 씨의 피관
있음
입도
있음
대성인과의 만남
간접가나바라 홋쿄
마쓰바가야쓰 뒤의 체재
확인 중
사도기의 편지
확인 중
어머니의 죽음
확인 중
불심장
확인 중
마마 문답
확인 중
가족
확인 중
입적
확인 중
어서의 보존
확인 중
③ 조닌 자신의 글소장 · 불심장 · 치키문 · 목록
본관 이나바
간접소장
출생
확인 중
시모우사 이주
있음소장
지바 씨의 피관
확인 중
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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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인과의 만남
확인 중
마쓰바가야쓰 뒤의 체재
확인 중
사도기의 편지
확인 중
어머니의 죽음
확인 중
불심장
있음
마마 문답
확인 중
가족
확인 중
입적
있음치키문 · 목록
어서의 보존
있음치키문 · 목록
④ 문하의 기록「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 · 옆쓰기
본관 이나바
있음
출생
확인 중
시모우사 이주
확인 중
지바 씨의 피관
확인 중
입도
확인 중
대성인과의 만남
확인 중
마쓰바가야쓰 뒤의 체재
확인 중
사도기의 편지
확인 중
어머니의 죽음
확인 중
불심장
확인 중
마마 문답
확인 중
가족
있음
입적
확인 중
어서의 보존
있음
⑤ 18세기 전기『본화별두고조전』 · 『불조통기』
본관 이나바
확인 중
출생
있음
시모우사 이주
확인 중
지바 씨의 피관
확인 중
입도
확인 중
대성인과의 만남
있음같은 배 이야기
마쓰바가야쓰 뒤의 체재
확인 중
사도기의 편지
확인 중
어머니의 죽음
확인 중
불심장
확인 중
마마 문답
확인 중
가족
확인 중
입적
있음
어서의 보존
확인 중
있음 간접 확인 중출생 · 입적의 설은 4 · 34절 연대 대조
도표 3 · 사료의 층

연구 노트 — 조닌의 사회적 지위는 오랫동안 「막부 문주소(問注所)의 관리」로 여겨졌다. 「문주득의초」에 문주소 안의 「지음(知音)」 · 「같은 곳의 동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성교지배문서의 해독이 진행되면서(창가학회 강의는 1967년 공개를 기점으로 든다) 「지바 씨의 유력 피관」으로 바뀌었다. 니치렌 대성인 편 6절이 그를 「막부 관계 일을 맡은 무사」라 적은 것은 옛 견해의 흔적이다. 문서의 수는 강의에 따라 133통 또는 129통으로 셈이 다르고, 연대는 호지 연간(1247–49)부터 분에이 초년까지 약 스무 해에 걸친다.

여러 이름

이름과 표기

이 사람은 기록마다 이름이 다르다. 대성인의 어서에서는 「도키 님(とき殿)」 · 「도키 뉴도」 · 「조닌 상인(常忍上人)」으로, 그 자신의 서명에서는 「사미 조닌(沙彌常忍)」으로, 성교지배문서의 겉봉에서는 「도키노 고로 님(ときの五郎殿)」 · 「도키노 뉴도 님」 · 「도키 고로 님(富木五郎殿)」으로 불린다. 문하의 기록은 「고로 뉴도 니치조(五郎入道日常)」라 하고, 그가 세운 절은 그를 「조슈인 니치조(常修院日常)」라 부른다.

이것을 차례로 맞추면 이렇게 된다. 집안의 다섯째 아들이라는 뜻의 「고로(五郎)」를 붙여 도키 고로라 불렸고, 실명은 「쓰네노부」라 읽혔을 「常忍」이다. 18세기 나카야마 법화경사의 연기는 「常忍」에 「ツネノブ」라 읽기를 달아 두었다. 그는 출가하지 않은 채 머리를 깎는 입도(入道)를 하면서 이 이름을 그대로 법호로 써서 음독하여 「조닌」이 되었다. 그 뒤 대성인에게서 「니치조(日常)」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전하고, 만년에는 조슈인 니치조라 했다.

성씨의 글자도 셋이다. 대성인은 대부분 「富木」이라 쓰셨지만 「土木」 · 「富城」으로 쓰신 편지도 있다. 「도키」라는 소리를 빌린 글자들이다. 본래 글자는 출신지 이나바의 땅 이름 「富城」이었으리라고 본다(4절). 다만 조닌 자신은 공문서에 「富木」이라 썼다.

오랫동안 그의 본명은 「도키 고로 다네쓰구(富木五郎胤繼)」로 알려져 왔다. 「관심본존초」의 옛 강의도 그를 「도키 다네쓰구」라 부른다. 그러나 대성인의 어서에도, 그와 같은 시대의 문서에도 「다네쓰구」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이름은 1720년의 『본화별두고조전』에 「도키 씨에 다네쓰구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처음 나오고, 『본화별두불조통기』가 「고로 다네쓰구」라 적으면서 퍼졌다. 창가학회 강의는 그 까닭을 이렇게 본다. 조닌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절은 제3대 닛유(日祐) 무렵부터 지바 다네사다(千葉胤貞) 일족의 씨사(氏寺)처럼 되었고, 닛유의 후원자였던 지바 다네쓰구(千葉胤繼)와 조닌이 뒤섞여 「도키 다네쓰구」라는 이름이 생겼으리라는 것이다. 지바 씨 사람들의 이름에 흔한 「다네(胤)」 자가 조닌의 이름에 붙은 것은, 그만큼 조닌과 지바 씨가 가까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시대의 이름
富木五郎(ときの五郎殿)
富木入道(ときの入道殿)
沙彌常忍자서
常忍上人망지경사
とき殿
土木殿
富城殿
五郎入道日常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
뒤의 이름
常修院日常
常忍(ツネノブ)1755 법화경사 연기
富木五郎胤繼오전1720 『본화별두고조전』 이후
도표 4 · 도키 조닌의 이름들

이나바의 도키 향 — 본관과 이주

1216? — 1250 무렵 · 이나바국에서 시모우사국으로

조닌은 본래 시모우사 사람이 아니다. 그의 본관은 동해에 면한 산인 지방의 이나바국(因幡國), 지금의 돗토리현 동부다. 이것을 알려 주는 것은 두 기록이다. 하나는 닛코 상인이 1278년 8월 대성인의 어본존에 적어 넣은 옆쓰기다. 그 본존은 이요보 닛초에게 주어진 것인데, 닛코 상인은 거기에 「이나바국 도키 고로 뉴도의 아들 이요보 닛초의 아우 자쿠센보에게 이것을 부촉한다(因幡国富城五郎入道の息伊与房日頂の舎弟寂仙房に之を付属す)」고 적었다. 또 하나는 「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다.

已上の三巻は因幡国富城荘の本主・今は常住下総国五郎入道日常に賜わる、正本は彼の在所に在り

이상의 세 권은 이나바국 도키 장(富城莊)의 본주(本主)이며 지금은 시모우사국에 상주하는 고로 뉴도 니치조에게 주신 것이다. 정본은 그의 거처에 있다.

「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 1605쪽, 2차 확인

「본주」는 그 땅의 본래 주인이라는 뜻이다. 10세기의 사전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이나바국 호미군(法美郡)에 「도키(度岐)」라고 읽는 향(郷)이 나온다. 표기는 「罵城」으로 되어 있지만 「富城」을 잘못 베낀 것으로 보아, 이곳을 조닌 집안의 본관으로 본다.

조닌 집안이 언제 왜 시모우사로 옮겼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조닌 자신이 쓴 소장 한 통이 실마리를 준다. 이나바국 이치노미야(一宮)의 공문(公文) 모토토미(元富)가 조닌의 하인들을 붙잡아 두고 있으니 빨리 돌려보내게 해 달라고 이치노미야의 정소(政所)에 호소한 글이다. 그 안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 하인들은 지난 겐초 2년(1250) 무렵 도키 주타 뉴도 법명 렌닌(富城中太入道法名蓮忍)의 손에서 조닌이 넘겨받은 자들이다. 넘겨준 문서도 분명하다. 렌닌이 간토로 옮겨 산 뒤 그 하인들이 저절로 모토토미 쪽을 떠돌게 되었다.」

강의는 이 렌닌을 조닌의 아버지로 본다. 렌닌은 1250년 무렵 하인들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간토로 옮겼고, 이나바에 남은 하인들은 주인 없이 떠돌다 남의 손에 들어갔다. 조닌은 이나바의 옛 영지와 사람들에 대한 권리를 시모우사에서도 놓지 않았다. 대성인의 어서가 조닌의 아버지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대성인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고 강의는 본다.

새벽의 잔잔한 바다와 바위 많은 해안, 바람에 휜 소나무, 바다로 열린 좁은 골짜기의 밭과 초가 몇 채, 안개에 잠긴 겹겹의 산줄기 사이로 이어지는 한 줄기 길, 수평선 위의 금빛 해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1 · 이나바의 바다

언제 태어났는가

조닌의 출생에 관한 믿을 만한 기록은 없다. 일반적으로 쓰는 1216년(겐포 4년)은, 『본화별두불조통기』가 그를 「84세에 입적했다」고 적은 것을 거꾸로 셈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대성인보다 여섯 살 위다. 1220년(조큐 2년) 출생설도 있다. 조닌 자신은 1277년의 불심장에서 「내 나이 이미 예순 고개에 이르렀다(余年齢已に六旬に及ぶ)」고 썼다. 1216년 출생이라면 그해 예순두 살이다.

태어난 곳도 시모우사 와카미야설, 가마쿠라설, 이나바 도키 향설이 있다. 아버지가 1250년 무렵에야 간토로 옮겼다면 이나바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지만, 확정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조닌의 모습이 분명해지는 것은 겐초 연간(1249–1256)에 들어서부터다.

연대 대조 — 출생은 1216년설(『본화별두불조통기』의 향년 84세에서 역산)과 1220년설이 있다. 이 페이지와 연표는 1216년설을 쓰되 「?」를 붙인다. 아버지를 미노국 도키(土岐) 씨의 도키 사에몬노조 미쓰유키(土岐左衛門尉光行), 어머니를 지바 다네마사의 딸로 보는 오래된 전승도 있다. 그러나 도키(土岐) 씨는 미노에서 일어난 가문이고 조닌의 본관은 이나바의 도키(富城)이며, 계보에서도 둘을 잇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 전승을 「같은 소리의 이름을 이은 것」으로 보아 따르지 않는다. 이 페이지도 따르지 않는다.

지도: 이나바 호미군 도키 향(본관 · 이치노미야)에서 간토(가마쿠라)로 — 1250 무렵 · 렌닌의 간토 이주 — 그리고 시모우사 와카미야로.1250 무렵 · 렌닌의 간토 이주이나바 호미군 도키 향본관 · 이치노미야간토(가마쿠라)시모우사 와카미야
사미 조닌 소장의 요지①겐초 2년 무렵 렌닌의 손에서 넘겨받음②렌닌 간토 거주 뒤 하인들이 모토토미 쪽을 떠돎③돌려주기를 청함
도표 5 · 이나바에서 시모우사로

와카미야의 관

13세기 중엽 · 시모우사국 가쓰시카군 야와타노쇼 와카미야

조닌이 살던 곳은 시모우사국 가쓰시카군(葛飾郡) 야와타노쇼(八幡莊)의 와카미야(若宮), 지금의 지바현 이치카와시 와카미야다. 에도강(옛 후토이강) 동쪽, 시모우사 대지(臺地)의 가장자리다. 서쪽으로 조금 가면 시모우사의 국부(國府)가 있던 고노다이(國府臺)이고, 남쪽으로는 마마(眞間)의 후미가 바다로 열려 있었다. 같은 야와타노쇼 안의 나카야마(中山)에는 오타 조묘가, 소야(曾谷)에는 소야 교신이 살았다. 조닌과 이웃들의 집은 걸어서 오갈 거리에 모여 있었다.

와카미야에는 지금 나카야마 법화경사의 오쿠노인(奥之院)이 있다. 이곳이 조닌의 관 자리로 전해지며, 둘레에 흙을 쌓아 올린 토루(土壘)가 남아 있다. 「와카미야 관지(若宮館址)」라 불리는 이 유적은 한 겹의 네모난 울타리 안에 집을 두는 단곽방형관(單郭方形館)으로, 중세 전기 무사의 관에 흔한 모습이다. 한때 여러 겹의 울타리를 가졌던 흔적으로 보이는 곳도 있다. 와카미야 일대에는 이 밖에 무사의 관으로 볼 만한 유구가 없어, 강의는 이곳을 가마쿠라 중기에 지어진 도키 집안의 관으로 본다.

이 관에서 조닌의 하루가 시작되고 끝났다. 대성인은 뒤에 그의 하루를 이렇게 적으셨다.

然りと雖も一人の悲母堂に有り朝に出で主君に詣で夕に入て私宅に返り営む所は悲母の為め存する所は孝心のみ

그러나 한 분의 어머니가 집에 계시니, 아침에 나가 주군께 출사하고 저녁에 사택으로 돌아온다. 하는 일은 어머니를 위함이요, 지니는 것은 효심뿐이다.

「망지경사」, 977쪽

아침이면 관을 나서 주군 지바 씨의 수호소로 나가고, 저녁이면 돌아와 노모를 모셨다. 관 안에는 어머니가 머무는 지불당(持佛堂)이 있었다고 강의는 본다. 이 지불당이 뒤에 대성인을 맞는 법화당이 되고, 조닌 만년에는 홋케지(法華寺)가 된다(6부).

안개 낀 이른 아침, 흙둑 위 목책의 문을 나와 갈대 습지 사이 흙길을 따라 먼 대지 위의 지붕들로 향하는 말 탄 사람 하나와 걸어서 따르는 두 사람의 작은 뒷모습, 먼 산 위의 금빛 해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2 · 아침의 출사
  1. 에도강(옛 후토이강)서쪽 경계 — 강 건너 서쪽은 가사이 · 가마쿠라 방향은 남서
  2. 고노다이시모우사의 국부 — 시모우사 대지의 가장자리
  3. 마마 구호지남쪽으로 마마의 후미가 바다로 열림
  4. 소야소야 교신
  5. 나카야마오타 조묘
  6. 와카미야도키 조닌
위치는 약도 · 점을 누르면 해당 절로 간다
도표 6 · 야와타노쇼와 그 이웃
단곽방형관 개념도: 네모난 해자 안쪽에 네모난 토루, 그 안에 주옥 · 지불당 · 창고 세 채, 남쪽에 출입구 하나.주옥지불당창고출입구토루해자
같은 터의 뒤 모습
  1. 지불당
  2. 법화당전승
  3. 홋케지
  4. 나카야마 법화경사 오쿠노인
유구에 따른 개념도 · 건물 배치는 추정
도표 7 · 와카미야 관지

조닌은 날마다 주군의 소송과 공문을 처리하던 실무가였고, 집에 돌아오면 노모를 모시는 아들이었다. 창가학회 강의는 대성인이 그에게 맡긴 일들, 곧 편지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고, 요문을 모아 두고, 마침내 어서 전체를 후세에 남기는 일이, 이 사람의 생활과 능력에 꼭 맞는 것이었다고 본다. 대성인은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를 보고 그 사람에게 맞는 사명을 주셨다.

2부 지바 씨의 집사

성교지배문서 — 종이의 뒷면

호지 연간(1247–49) ~ 분에이 초년 · 문서의 앞과 뒤

13세기 일본에서 종이는 귀했다. 대성인의 편지에는 종이가 없어 쓰지 못한다는 말이 거듭 나온다. 사도에서는 「사도국은 종이가 없는 데다(佐渡の国は紙候はぬ上)」(「좌도어서」, 961쪽)라고 쓰셨다. 경론에서 요긴한 구절을 뽑아 적는 일에는 많은 종이가 들었다. 조닌은 자기 일터에서 쓰고 난 문서, 곧 소송이 끝났거나 처리가 끝난 공문의 뭉치를 대성인께 보냈다. 대성인은 그 뒷면에 요문을 적어 「쌍지요문(雙紙要文)」 · 「천태간요문(天台肝要文)」 · 「파선종(破禪宗)」 · 「비서(祕書)」 같은 책자를 만드셨다. 이 책자들은 조닌의 손을 거쳐 그의 절에 남았다.

달 밝은 밤 툇마루로 열린 방, 낮은 나무 책상 위의 등잔과 벼루와 붓, 끈으로 묶은 종이 묶음과 흩어진 종이, 세로줄만 그어진 펼친 책자, 책상 곁에 뚜껑을 기대어 둔 상자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3 · 종이의 앞과 뒤

수백 년 뒤, 연구자들이 이 책자의 뒷면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시모우사 수호 지바 씨의 가신단이 주고받은 편지와 명령서, 소장과 보고서가 있었다. 강의에 따르면 그 수는 133통에 이른다(다른 셈으로는 129통). 받는 사람이 밝혀진 것은 40통인데, 그 가운데 23통이 조닌 앞으로 온 것이다. 지바노스케 앞이 6통, 홋쿄 고보(法橋御坊) 앞이 3통이다. 관계된 나라가 밝혀진 35통 가운데는 시모우사가 12통, 히젠이 10통, 이가가 4통, 히고가 2통이다. 내용은 막부의 야부사메(流鏑馬, 말 타고 활 쏘는 의례) 3통, 쇼군 어소의 오반(垸飯, 고케닌이 바치는 향응) 2통,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의 방생회 2통, 그리고 지바 씨와 관계된 일, 영지와 하인을 둘러싼 소송과 양도 등 잡다한 행정 업무다.

① 받는 사람이 밝혀진 40통
  • 도키 조닌23통
  • 지바노스케6통
  • 홋쿄 고보3통
  • 기타8통
② 관계된 나라가 밝혀진 35통
  • 시모우사12통
  • 히젠10통
  • 이가4통
  • 히고2통
  • 기타7통
③ 내용 (밝혀진 것만)
  • 야부사메3통
  • 오반2통
  • 방생회2통
  • 그 밖에소송 · 양도 · 잡무 다수
전체 133통(강의 셈 · 다른 셈 129통)
도표 8 · 성교지배문서의 숫자
앞면대성인이 베껴 적은 경론의 요문
뒷면지바 씨 가신단의 공문
  1. 공문 작성조닌의 일터
  2. 처리 끝
  3. 종이로 공양
  4. 대성인이 뒷면에 요문
  5. 책자쌍지요문 · 천태간요문 · 파선종 · 비서
  6. 조닌의 절에 보존
  7. 근대의 해독
글자는 그리지 않음
도표 9 · 문서의 앞과 뒤

수호의 사무

13세기 중엽 · 수호소와 가마쿠라 사이

이 문서들이 그려 보이는 조닌은 지바 씨 수호소의 사무를 쥔 사람이다. 몇 가지 문서를 보자.

조센(長專)이라는 사람이 「도키 고로 님」 앞으로 보낸 편지는 「오반의 일(御垸飯事)」을 다룬다. 막부에서 내려온 명령서의 취지와 그 비용에 대한 주의를 조닌에게 전하고, 이것을 「(주군께) 아뢰어 주시라(御披露有る可く候)」고 맺는다. 「도키노 뉴도 님」 앞으로 온 사이신(さいしむ)의 편지는 「이 일을 헤아려 적당한 때에 (주군께) 보여 드려 주시라」고 부탁한다. 조닌 앞으로 쓰였지만 실은 그 위의 주군에게 전해 달라는 편지들이다. 이런 형식은 이 밖에도 여럿 있다.

또 「조닌 · 가이유(快有) 등 연서 봉서(連署奉書)」는 요시다라는 마을의 농민 겐쿄 로쿠오토코의 일로, 겐쿄 비구니의 딸이 교부 사에몬에게 팔려 간 사건의 처리를 다룬다. 조닌을 비롯한 세 사람이 주군의 명을 받아 이름을 나란히 적고 관계자들에게 알렸다.

주군의 명을 받아 전하고, 아래에서 올라온 편지를 주군께 아뢰는 사람. 강의는 이것이 바로 「집사(執事)」의 역할이라고 본다. 조닌은 와카미야의 관에서 수호소로 출사하여, 막부에서 내려온 통지를 받고, 지두와 영주들 사이를 조정하고, 소송과 양도를 처리했다. 그 판단은 주군 지바노스케 요리타네의 재결을 거쳤다. 막부와의 연락은 가마쿠라에 머물던 동료 조센을 통했다. 조닌이 가마쿠라와 시모우사를 자주 오간 것도 이 일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대성인의 어서에서 읽히던 조닌의 모습이 모두 설명된다. 막부의 관리들 가운데 아는 사람(「지음」)과 동배가 있었고, 하인과 수행원을 거느렸으며, 「아침에 나가 주군께 출사」했고, 한문으로 쓰인 어려운 법문의 편지를 받아 읽을 수 있었다. 수호의 집사라면 한문 공문을 읽고 쓰는 것은 일상이었다.

막부가마쿠라조센지바 씨 가신 · 가마쿠라 거주
도키 조닌와카미야 · 수호소의 사무주군 지바노스케 요리타네재결
지두 · 영주 · 마을소송 · 양도 · 공사
문서 예
  • 조센의 「오반의 일」
  • 사이신의 편지
  • 조닌 · 가이유 등 연서 봉서
명령의 전달(아래로) 아룀(披露 · 위로)
도표 10 · 문서가 흐르는 길

지바 씨의 세 나라 — 요리타네

1239 — 1275 · 지바노스케 요리타네

성교지배문서에 나오는 나라들은 모두 지바 씨와 깊이 이어진 땅이다. 시모우사는 막부 초기부터 지바 씨가 수호를 세습한 나라다. 이가국도 호지 · 겐초 무렵부터 겐코 연간까지 지바 씨가 수호였다. 히젠국에서는 오기군(小城郡)에 영지가 있었다. 조닌의 책상에는 이 먼 나라들의 일까지 올라왔다.

조닌이 섬긴 지바노스케 요리타네는 1239년에 태어나 어려서 가문을 이었다. 조닌보다 스무 살 넘게 어린 주군이었다. 요리타네는 히젠의 영지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1268년 몽골의 국서가 오자, 막부는 1271년 9월 13일 규슈에 영지를 가진 동국 고케닌들에게 본인이나 대리인을 규슈로 보내 그 나라 수호와 함께 방비에 나서라고 명했다. 다쓰노구치 법난 다음 날이다. 요리타네도 히젠 오기로 내려갔고, 그를 섬기던 가신과 하인 다수가 함께 떠났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1274년 10월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요리타네는 그 싸움에서 다쳤고, 이듬해 1275년 8월 히젠 오기에서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부 27절).

  1. 시모우사수호 · 본거지 · 와카미야 — 성교지배문서 12통
  2. 이가수호 — 성교지배문서 4통
  3. 히젠 오기영지 · 1275 요리타네 사망지 — 성교지배문서 10통
  1. 1271.9.13진서 고케닌 하향 명령
  2. 요리타네 히젠 하향
  3. 1274.10분에이의 역 · 부상
  4. 1275.8오기에서 사망(37세)
위치는 약도 · 통수는 관계된 나라가 밝혀진 성교지배문서의 수(도표 8)
도표 11 · 지바 씨의 세 나라

입도 — 「몸은 속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닌」

1251 — 1253 · 「도키 고로」에서 「도키 뉴도」로

성교지배문서의 겉봉은 조닌의 삶에 일어난 한 변화를 날짜까지 알려 준다. 1251년(겐초 3년) 2월 20일 자 조센의 봉서는 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도키노 고로 님(ときの五郎殿)」을 적었다. 그런데 「겐초 5년 12월 30일」이라고 뒷면에 적힌 조센의 편지는 「도키노 뉴도 님(ときの入道殿)」 앞이다. 그 사이 어느 날, 조닌은 머리를 깎고 입도했다.

입도는 출가와 다르다. 머리를 깎고 법명을 쓰지만 집을 떠나지 않고, 관직과 가정을 그대로 유지한다. 가마쿠라 무사들 사이에 흔한 일이었다. 대성인은 조닌을 두고 「몸은 속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닌 대머리 거사(身は俗に非ず道に非ず禿居士)」(「망지경사」, 977쪽)라고 쓰셨다. 반은 승려, 반은 속인인 그의 처지를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입도의 시기는 대성인과 처음 만났다고 보는 시기와 겹친다. 창가학회 강의는 「입도하려면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라며 대성인과의 만남이 그 계기였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한편 「법화취요초」 강의는 입도를 1251–52년 무렵으로 보고, 대성인의 문하가 되었을 때 이미 입도해 있었다고 본다. 입도의 까닭은 기록에 없다.

  1. 1251.2.20「ときの五郎殿」조센 봉서
  2. 입도두 날짜 사이
  3. 1253.4.28입종선언
  4. 1253.12.9(추정)대성인의 편지「よろこびて御殿人給はりて候」
  5. 1253.12.30「ときの入道殿」조센 편지 뒷면 표기
1251.3.20 자 문서를 가장 이른 날짜로 드는 강의도 있음 — 확인 중 · 9절 연대 대조
도표 12 · 겉봉이 말하는 것

연대 대조 — 입도 시기는 성교지배문서의 겉봉으로 1251년 2월 20일과 1253년 12월 30일 사이로 좁혀진다(「富木殿について」). 「법화취요초」 강의는 1251–52년 무렵, 『일련종의 성립과 전개』 등은 1251–53년으로 본다. 같은 강의 안에서도 날짜가 밝혀진 가장 이른 조닌 앞 문서를 「1251년 3월 20일」이라 적은 곳과, 「2월 20일」 자 봉서를 드는 곳이 있다. 부록 C-4에서 확인한다.

성교지배문서는 대성인의 요문 책자의 「뒷면」으로 남았기에 지금까지 전한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 우연 아닌 우연에서, 조닌이 세상 속에서 맡은 일과 불법을 위해 한 일이 한 장의 종이처럼 앞뒤로 붙어 있었음을 읽는다. 그는 수호의 집사로서 익힌 문서 다루는 능력을, 그대로 대성인의 법을 지키는 데 썼다.

3부 가장 오래된 단나

1253년 겨울의 편지 — 만남

1253 — 1254 · 입종선언 직후

대성인과 조닌이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미 가까운 사이였음을 보여 주는 편지가 한 통 전한다. 어서전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1253년(겐초 5년) 12월 9일로 추정되는 「부목전어반사」다.

よろこびて御殿人給はりて候。ひるはみぐるしく候へば、よるまゐり候はんと存じ候。ゆうさりとりのときばかりに給ふべく候。又御はたり候て法門をも御だんぎあるべく候

기쁘게도 마중할 사람을 보내 주셨습니다. 낮에는 남 보기에 좋지 않으니 밤에 찾아가려 합니다. 저녁 유시(酉時, 오후 여섯 시 무렵)쯤 보내 주십시오. 또 이리로 오셔서 법문도 함께 이야기합시다.

「부목전어반사」, 어서전집 미수록 · 1253년 추정, 2차 확인

입종선언이 그해 4월 28일이었다. 여덟 달 뒤, 조닌은 대성인을 집으로 모시려고 사람을 보냈고, 대성인은 낮에는 남의 눈이 있으니 밤에 가겠다고 답하셨다. 그리고 다음에는 조닌이 와서 법문을 이야기하자고 하셨다. 이 편지만으로는 조닌이 이미 신앙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법문을 이야기하는 사이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 편지가 오간 곳은 가마쿠라였을 것이다.

눈 덮인 겨울밤의 좁은 산골짜기, 초승달 아래 등롱을 든 작은 사람과 나란히 눈길을 걷는 한 사람의 작은 뒷모습, 골짜기 너머 다리와 불빛 희미한 집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4 · 밤에 찾아가는 길

입신의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1254년 어느 날 조닌이 가마쿠라로 가는 길에 가쓰시카의 포구에서 우연히 대성인과 같은 배를 타고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본화별두고조전』 등 많은 문헌에 실려 있다. 대성인이 시모우사에 가셨을 때 외가와 사돈 관계였던 도키 집안을 인사차 들렀다가, 진언을 믿던 조닌을 깨뜨려 귀의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꾸로 조닌이 가마쿠라에서 대성인의 소문이나 거리의 설법을 듣고 초암을 찾아가 몇 차례 법론 끝에 귀의했다는 이야기, 대성인의 교토 유학을 조닌이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 이야기들에 「속설이 너무 많이 더해져 그대로 믿을 수 없다」며 설을 소개하는 데 그친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조닌이 업무로 가마쿠라와 시모우사를 자주 오갔던 만큼, 입종 뒤 가마쿠라에서 대성인을 만나 귀의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조닌은 1253년에서 1255년 사이에 대성인께 귀의했고, 대성인의 재가 단나 가운데 가장 이른 사람이다. 니치렌 대성인 편 6절이 대성인의 첫 문하로 그의 이름을 맨 앞에 든 것도 그 때문이다.

전승

확인된 사실1253.12 이미 법담하는 사이 · 1255 「일생성불초」

① 가쓰시카 포구의 같은 배
줄거리
1254년 어느 날 가마쿠라로 가는 길에 가쓰시카의 포구에서 우연히 같은 배를 타고 알게 됨
어디에 전하는가
『본화별두고조전』 등 많은 문헌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아니오
창가학회 강의의 처리
설을 드는 데 그침
② 시모우사 방문과 외가 인척
줄거리
시모우사에 가셨을 때 외가와 사돈 관계였던 도키 집안을 들러 진언을 믿던 조닌을 깨뜨림
어디에 전하는가
확인 중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아니오
창가학회 강의의 처리
설을 드는 데 그침
③ 가마쿠라의 초암 · 거리 설법
줄거리
소문이나 거리의 설법을 듣고 초암을 찾아가 몇 차례의 법론 끝에 귀의
어디에 전하는가
확인 중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아니오
창가학회 강의의 처리
설을 드는 데 그침
④ 교토 유학의 후원
줄거리
대성인의 교토 유학을 조닌이 도움
어디에 전하는가
확인 중
어서에서 확인되는가
아니오
창가학회 강의의 처리
설을 드는 데 그침
도표 13 · 입신에 관한 네 이야기

「일생성불초」 — 첫 가르침

1255 · 겐초 7년

입종 두 해 뒤인 1255년, 대성인은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를 쓰셨다. 받는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예부터 도키 조닌에게 주어진 것으로 전한다. 짧은 글이지만, 대성인의 수행론의 근본을 담은 글로 받들어진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夫れ無始の生死を留めて此の度決定して無上菩提を証せんと思はばすべからく衆生本有の妙理を観ずべし、生本有の妙理とは・妙法蓮華経是なり故に妙法蓮華経と唱へたてまつれば 衆生本有の妙理を観ずるにてあるなり

무릇 시작 없는 생사를 멈추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묘한 이치를 관해야 한다. 중생 본유의 묘리란 묘법연화경이다. 그러므로 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면 중생 본유의 묘리를 관하는 것이 된다.

「일생성불초」, 383쪽

이어서 대성인은 제목을 부르는 이의 마음가짐을 말씀하신다. 제목을 부르더라도 자기 마음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묘법이 아니다. 그리고 수행자의 기본 자세를 이렇게 적으셨다.

然る間・仏の名を唱へ経巻をよみ華をちらし香をひねるまでも皆我が一念に納めたる功徳善根なりと信心を取るべきなり

그러므로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경권을 읽고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는 것까지도, 모두 나의 한 생각 안에 거두어진 공덕과 선근이라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일생성불초」, 383쪽

그리고 저 유명한 거울의 비유가 나온다.

只今も一念無明の迷心は磨かざる鏡なり是を磨かば必ず法性真如の明鏡と成るべし、深く信心を発して日夜朝暮に又懈らず磨くべし何様にしてか磨くべき只南無妙法蓮華経と唱へたてまつるを是をみがくとは云うなり

지금의 한 생각 무명의 어두운 마음은 닦지 않은 거울이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밝은 거울이 될 것이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밤낮 아침저녁으로 게을리하지 말고 닦으라. 어떻게 닦는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 이것을 닦는다고 한다.

「일생성불초」, 384쪽

창가학회 강의는 이 글을, 신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닌에게 신앙의 목적이 일생성불에 있음과 신앙인의 기본 자세를 가르치신 것으로 읽는다. 조닌은 염불이나 진언을 알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대성인은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지 말고, 제목을 부르는 자신의 한 생각 속에서 찾으라고 가르치셨다. 조닌이 받은 첫 법문은 「마음 밖에 법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1. 중생 본유의 묘리 = 묘법연화경衆生本有の妙理を観ずべし383
  2. 제목을 부르는 것 = 묘리를 관하는 것衆生本有の妙理を観ずるにてあるなり383
  3. 마음 밖에 법이 있다고 여기면 묘법이 아님若し心外に道を求めて万行万善を修せんは譬えば貧窮の人日夜に隣の財を計へたれども半銭の得分もなきが如し383
  4. 닦지 않은 거울 → 밝은 거울 · 닦는다 =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름只南無妙法蓮華経と唱へたてまつるを是をみがくとは云うなり384
  5. 「일생성불 다시 의심이 있을 수 없다」此の旨を深く信じて妙法蓮華経と唱へば一生成仏更に疑あるべからず384
쪽수는 「일생성불초」
도표 14 · 「일생성불초」의 길

시모우사의 단나들

1250년대 ~ 1270년대 · 야와타노쇼의 이웃

조닌이 귀의하자 그의 둘레에서 신앙이 퍼졌다. 대성인의 어서에 이름이 나오는 시모우사의 재가 문하는 도키 조닌과 그 아내, 오타 조묘(大田乘明)와 그 아내, 소야 교신(曾谷敎信), 가나바라 홋쿄(金原法橋), 아키모토 다로(秋元太郎) 등이다. 이들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조닌을 통해 신앙에 들어왔다고 강의는 본다.

가장 직접적으로 조닌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이는 가나바라 홋쿄다. 성교지배문서에 따르면 1253년 12월 이전에 가나바라 홋쿄가 공사(公事, 공적 부담)를 지게 되었을 때 조닌에게 의논을 청했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오타 조묘는 나카야마에 살았다. 한 설에 따르면 그는 본래 엣추국 오타 보(大田保)의 지두였는데 지바 씨의 부름을 받아 피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지가 조닌과 비슷하다. 두 사람은 같은 주군을 섬기며 가까워졌고, 조닌은 오타 조묘의 누나와 혼인했다. 첫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두 집안의 인연은 이어졌다. 오타의 아들 닛코(日高)가 뒤에 조닌의 절을 잇는다(6부).

소야 교신은 야와타노쇼 소야 향의 재지 영주였다. 피관인 조닌이나 오타와는 처지가 달랐지만, 오타와 같은 엣추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오타 집안은 소야 향 안에 「오타 저택」이라 불리는 떨어진 땅을 가지고 있었다. 조닌은 오타를 통해 소야를 알게 되었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성교지배문서에는 뒤에 대성인의 단나가 되는 야기 시키부노 다이후(矢木式部大夫) 같은 사람과의 업무 교류도 나온다. 아키모토 다로는 조닌과 친척이었다는 전승이 있다.

대성인은 이 이웃들에게 함께 편지를 보내시는 일이 많았다. 1271년 10월의 「전중경수법문」은 오타 · 소야 · 가나바라 세 사람 앞이다. 대성인은 그 편지에서 「한 사람이 오면 세 사람이 온 것으로 생각한다(一人も来らせ給へば三人と存じ候なり)」(1000쪽)고 하셨다. 시모우사의 문하는 한 덩어리였고, 그 가운데에 조닌이 있었다.

도키 조닌와카미야 · 지바 씨 피관
  • 오타 조묘나카야마 · 지바 씨 피관 · 엣추 오타 보 출신설혼인 — 첫 아내가 오타의 누나
  • 소야 교신소야 향 재지 영주오타와 「오타 저택」
  • 가나바라 홋쿄성교지배문서직무 — 1253 이전부터 아는 사이
  • 야기 시키부노 다이후성교지배문서직무 — 업무 교류
  • 아키모토 다로전승친척 전승
  • 시조 긴고 · 오쿠라 도노쓰지 주로 뉴도 · 사지키 아마가마쿠라「좌도어서」 956 의 받는 사람들
혈연 · 혼인 직무 신앙 전파바깥 원 — 「좌도어서」 956 의 받는 사람들 · 12절
도표 15 · 시모우사의 단나들

마쓰바가야쓰 뒤 — 와카미야의 법화당

1260년 8월 — 1261년 봄

1260년 7월 16일,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을 전 집권 호조 도키요리에게 올리셨다. 대성인은 뒤에 「물으심도 없고 쓰심도 없었다(御尋ねもなく御用いもなかりし)」(「하산어소식」, 355쪽)고 쓰셨다. 한 달 남짓 침묵이 이어지던 8월 27일 밤, 염불자들이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을 덮쳤다(니치렌 대성인 편 8절).

간신히 난을 피하신 대성인은 한동안 가마쿠라를 떠나 시모우사 와카미야의 조닌에게 몸을 의탁하셨다고 전한다. 조닌은 자기 관 가까이에 당을 지어 대성인께 바쳤고, 대성인은 이곳에서 오래 법을 설하셨다고 한다. 하루 한 번씩 백 일 동안, 곧 백 좌(百座)의 설법을 하셨다는 전승도 있다. 「백일 설법」이다. 오타 조묘 · 소야 교신 · 아키모토 다로 등이 이때 귀의했다고 전하며, 시모우사의 교세는 한꺼번에 커졌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 무렵에 시모우사 단나 집단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본다.

초가을 저녁 소나무 사이 흙담 곁에 선 작은 새 불당, 문을 연 불당 안에 멀리 작게 앉은 한 스님과 그 앞 마당에 등을 보이고 줄지어 앉은 사람들, 갈대와 넓은 강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5 · 와카미야의 법화당

대성인은 와카미야에서 해를 넘기고, 이듬해 1261년 봄 가마쿠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5월 12일 붙잡혀 이즈로 유배되셨다. 이즈 유배와 조닌의 관계를 보여 주는 기록은 없다. 1264년 고마쓰바라 법난 뒤에도 대성인이 아와에서 곧장 가마쿠라로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조닌의 집에 머무셨다는 설이 있다.

강의는 이 무렵 조닌이나 시조 긴고 같은 중심 문하에게 보낸 편지가 거의 남지 않은 것을, 대성인이 그들을 직접 만나 지도하셨기 때문이리라고 본다. 편지가 많아지는 것은 대성인이 멀리 떨어지신 뒤, 다쓰노구치와 사도의 때다.

마쓰바가야쓰1260.8.27
장소
가마쿠라 나고에의 초암
가해
한밤에 몰려온 염불자 수천 명 — 배후로 호조 시게토키를 봄
대성인의 기록
「하산어소식」 355쪽
그 뒤
난을 피해 시모우사의 도키 조닌에게(전함)
도키 조닌
와카미야에 체재 · 법화당 · 백일 설법전승
이즈 유배1261.5.12
장소
이즈국 이토
가해
집권 호조 나가토키 — 재판 없는 유배
대성인의 기록
「묘법비구니어반사」 1413쪽 · 「선수미삼랑허어서」 1445쪽
그 뒤
1263년 2월 사면 · 「사은초」 「교기시국초」
도키 조닌
관계 기록 없음
고마쓰바라1264.11.11
장소
아와국 도조의 마쓰바라 큰길
가해
지두 도조 가게노부의 무리 수백 명
대성인의 기록
「남조병위칠랑전어서」 1498쪽 · 「성인어난사」 1189쪽
그 뒤
이마의 상처와 부러진 왼손 · 「일본 제일의 법화경 행자」
도키 조닌
도키 집안 체재설전승
다쓰노구치와 사도 유배1271.9.12
장소
가마쿠라 → 가타세 다쓰노구치 → 사도
가해
헤이노 사에몬노조 요리쓰나와 병사 수백 명
대성인의 기록
「종종어진무어서」 911–919쪽 · 「개목초」 223쪽
그 뒤
발적현본 · 사도 2년 반, 1274년 2월 사면
도키 조닌
에치 · 데라도마리 · 쓰카하라에서 차례로 편지, 사도기 열두 편(4부)
니치렌 편 도표 7 에 「도키 조닌」 줄을 더함 · 점선 칸 — 전승 · 니치렌 편 8절
도표 16 · 네 번의 대난과 도키 조닌

연대 대조 — 마쓰바가야쓰 법난 뒤의 거처를 창가학회 강의들은 「시모우사의 도키 조닌의 집」으로 적는다(「입정안국론」 · 「사은초」 · 「선수미삼랑허어서」 · 「하산어소식」 강의). 법화당과 백일 설법은 『영기(靈記)』 등의 전승이다. 법화당의 자리는 지금 나카야마 법화경사의 오쿠노인으로 전한다. 와카미야에서 해를 넘겨 1261년 봄 가마쿠라로 돌아왔다는 서술은 「하산어소식」 강의에 따른다.

문주소의 소환 — 1269년 5월

1269년 5월 · 분에이 6년

1269년 5월, 조닌과 오타 조묘, 소야 교신 세 사람이 막부의 문주소(問注所)에 불려 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문주소는 소송을 다루던 막부의 기관이다. 무엇 때문에 불려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성인이 이때 세 사람에게 보내신 「문주득의초(問注得意抄)」는 그것이 신앙 때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성인은 그 편지를 이렇게 시작하신다.

三千年に一度花さき菓なる優曇華に値えるの身か、西王母の薗の桃・九千年に三度之を得たる東方朔が心か一期の幸何事か之に如かん

삼천 년에 한 번 꽃 피고 열매 맺는 우담화를 만난 몸인가. 서왕모의 동산의 복숭아를 구천 년에 세 번 얻은 동방삭의 마음인가. 한평생의 행복이 무엇이 이에 미치겠는가.

「문주득의초」, 178쪽

법화경 때문에 관청에 불려 가는 것을 우담화를 만난 행운에 비기신 것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문주소에서 어떻게 처신할지를 자세히 일러 주셨다.

今日の御出仕・公庭に望んでの後は設い知音為りと雖も傍輩に向つて雑言を止めらる可し

오늘 출사하여 공적인 자리에 나간 뒤에는, 비록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동배들을 향해 잡담을 삼가라.

「문주득의초」, 178쪽

문주소의 관리들 가운데 세 사람이 아는 사람, 같은 일터의 동배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어서 봉행인이 소장과 진장을 읽을 때는 묻지 않는 한 한마디도 하지 말고, 상대가 욕을 해도 두 번까지는 못 들은 척하고, 세 번째에는 얼굴빛을 바꾸지 말고 부드러운 말로 답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각자는 한곳의 동배이니 사사로이는 전혀 원한이 없다고 말하라(各各は一処の同輩なり私に於ては全く遺恨無きの由之を申さる可きか)」, 「또 데리고 가는 수행원들에게 단단히 일러 다툼을 일으키지 않게 하라(又御供雑人等に能く能く禁止を加え喧嘩を出す可からざるか)」(178쪽)고 하셨다. 하인과 수행원을 거느리고 출사하는 무사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편지는 「불경과 행자와 단나, 세 가지가 서로 맞아 한 가지 일을 이루기 위해(仏経と行者と檀那と三事相応して一事を成さんが為に)」(178쪽) 이런 말을 한다고 맺고, 5월 9일 자로 「세 사람 가운데(三人御中)」 앞으로 되어 있다. 첫머리의 받는 사람은 「도키 뉴도 님(土木入道殿)」이다. 이 구절이 오랫동안 조닌을 「문주소의 관리」로 보게 한 근거가 되었다(2절 연구 노트). 수호의 집사라면 막부의 관리들과 얼굴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소환 뒤 세 사람의 신상에 변화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처신하여 무사히 넘겼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강의는 이 일을, 당시 문하가 활발히 움직였고 그 중심에 조닌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읽는다.

같은 해 6월의 「부목전어소식」에서는 이달로 예정된 「대사강(大師講)」의 자리에 사정이 생겨, 대성인이 조닌에게 다른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신다. 대사강은 천태대사의 기일인 매달 24일에 문하가 모여 법을 배우던 모임으로, 1266–67년 무렵부터 열렸다고 한다. 다른 종의 승속도 와서 듣던 자리였다. 조닌은 이런 모임을 마련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마의 석가불 — 1270년

1270년 9월 · 분에이 7년

1270년 9월, 조닌은 이웃 마마의 구호지(弘法寺)에 석가불 상을 조성하여 공양했다. 이 무렵 조닌의 아들 이요보 닛초는 이미 대성인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9월 26일, 대성인은 조닌에게 이렇게 쓰셨다.

釈迦仏御造立の御事、無始曠劫よりいまだ顕れましまさぬ己心の一念三千の仏造り顕しましますか、はせまいりてをがみまいらせ候わばや

석가불을 조성하신 일, 아득한 옛적부터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던 자기 마음의 일념삼천의 부처를 지어 나타내신 것인가. 달려가 뵙고 싶다.

「마마석가불어공양축장」, 950쪽

그리고 개안은 닛초에게 맡기라고 하셨다.

但し仏の御開眼の御事はいそぎいそぎ伊よ房をもてはたしまいらせさせ給い候へ、法華経一部御仏の御六根によみ入れまいらせて生身の教主釈尊になしまいらせてかへりて迎い入れまいらせさせ給へ

다만 부처의 개안은 서둘러 이요보에게 맡겨 마치게 하라. 법화경 한 부를 부처의 여섯 감관에 읽어 넣어 살아 있는 교주 석존으로 만들어 모셔 들이라.

「마마석가불어공양축장」, 950쪽

열여덟의 닛초가 아버지가 조성한 불상의 개안을 맡은 것이다. 같은 편지에는 「영지의 불당 일은 다이신 아자리가 들었다(御所領の堂の事等は大進の阿闍梨がききて候)」는 말도 있어, 조닌이 자기 영지에 불당을 두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또 「언젠가 대흑천을 공양하고 난 뒤로는 세상일을 한탄하지 않고 지내시는가(いつぞや大黒を供養して候いし其後より世間なげかずしておはするか)」(950쪽)라는 말도 나온다. 조닌은 불상을 조성하는 일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 일을 이렇게 읽는다. 대성인의 정의(正意)에서는 석존의 불상을 본존으로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본존을 여시기 전이었고, 온 일본이 아미타불의 염불을 부르던 때여서, 대성인은 오로지 제목을 넓히는 데 힘쓰셨다. 그래서 사도 이전에는 본존에 대해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석존 한 분의 불상을 일단 용인하셨다는 것이다. 조닌으로서는 불상을 조성하는 것이 자기 성불의 복덕이 되고, 마마 땅에 대성인의 법이 뿌리내리는 한 걸음이 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절은 둘레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곳이었다. 아미타불보다는 석가불이 낫다는 뜻에서 대성인이 일단 칭찬하신 것이며, 이것은 한 단계의 「일왕(一往)의 교화」였다고 강의는 맺는다.

연대 대조 — 석가불 조성의 해는 1270년(분에이 7년) 무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군과 어머니를 잃은 뒤의 추선 공양으로 보아 건치 2–3년(1276–77)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창가학회 강의는 1270년 무렵으로 본다. 이번에 대조한 本文의 머리는 「분에이 7년 9월」, 날짜는 9월 26일이며, 닛초의 개안은 本文으로 확인된다.

조닌은 가장 오래된 단나로서 대성인을 집에 모시고, 이웃을 신앙으로 이끌고, 대성인이 시키신 대로 관청 앞에 섰다. 그가 직접 큰 난을 당한 일은 없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것을, 지바 씨의 유력 피관이라는 사회적 처지와 시모우사라는 땅이 그를 지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앞에 나서는 사람이라기보다 뒤에서 대성인의 일문을 떠받친 사람이었다. 창가학회는 그 「후위(後衛)」의 자리 역시 대성인이 맡기신 사명으로 본다.

4부 사도의 편지

에치에서 — 「이제까지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이」

1271년 9월 14일 · 분에이 8년 · 사가미 에치

1271년 9월 12일 밤, 다쓰노구치의 형장에서 목숨을 건지신 대성인은 이튿날 사가미 에치의 혼마 로쿠로자에몬 시게쓰라의 집으로 옮겨지셨다(니치렌 대성인 편 13절). 그 소식을 들은 조닌은 곧바로 에치로 편지를 보냈다. 대성인의 답장이 9월 14일 자 「토목전어반사(土木殿御返事)」다. 다쓰노구치 이후 대성인이 쓰신 첫 편지로 전한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위에서 책망하시니 비로소 법화경을 믿는 빛도 드러나는 것이다. 달은 이지러졌다가 차고, 조수는 빠졌다가 차오르는 것이 틀림없다. 이것도 벌이 있으면 반드시 덕이 있을 것이다. 어찌 한탄하겠는가(上のせめさせ給うにこそ法華経を信じたる色もあらわれ候へ、月はかけてみち・しをはひてみつる事疑なし此れも罰あり必ず徳あるべし・なにしにか・なげかん)」(950쪽). 이어서 대성인은 「이달 12일 유시(酉時)에 처벌을 받아 무사시노카미 님에게 맡겨지고, 13일 축시에 가마쿠라를 나와」 지금은 혼마의 에치에 있으며 네댓새 머물 것 같다고 법난의 경위를 짧게 적으신 뒤 이렇게 쓰셨다.

これには一定と本よりごして候へば・なげかず候、いままで頚の切れぬこそ本意なく候へ

이 일은 반드시 올 것이라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으니 한탄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본의가 아니다.

「토목전어반사」, 951쪽

그리고 이 난의 뜻을 법화경의 한 구절로 밝히셨다.

数数見擯出ととかれて度度失にあたりて重罪をけしてこそ仏にもなり候はんずれば我と苦行をいたす事は心ゆへなり

「자주 쫓겨나리라(數數見擯出)」고 설해져 있으니, 거듭 죄를 입어 무거운 죄를 없애야 부처도 될 것이기에, 스스로 고행을 하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서다.

「토목전어반사」, 951쪽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 편지를, 권지품의 「수수견빈출」로 법난의 뜻을 처음 밝히신 글이자 사도 시대 교화의 첫머리로 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다쓰노구치 이후 대성인은 자신의 가슴속을 주로 도키 님 앞의 편지에서 밝히셨다.

조닌은 대성인의 안부를 걱정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사도로 유배가 정해지자 그는 자기 종자 가운데 한 사람(입도한 사람)을 대성인의 길동무로 딸려 보냈다.

데라도마리 — 돌려보낸 종자

1271년 10월 21일 · 22일 · 에치고 데라도마리

10월 10일 에치를 떠나신 대성인은 열이틀의 길 끝에 21일 에치고의 데라도마리(寺泊) 나루에 닿으셨다. 바다를 건널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대성인은 이튿날 22일 유시(酉時)에 조닌에게 긴 편지를 쓰셨다. 「사박어서(寺泊御書)」다. 받는 사람은 「도키 님(土木殿)」이다. 편지는 「거위눈 한 꿰미를 받았다. 뜻 있는 여러 사람은 한곳에 모여 들으라(鵞目一結給び了んぬ、心ざしあらん諸人は一処にあつまりて御聴聞あるべし)」(951쪽)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함께 듣기를 바라고 쓴 편지다. 그리고 편지의 끝에 조닌이 딸려 보낸 종자의 일이 나온다.

此の入道佐渡の国へ御供為す可きの由之を申す然る可き用途と云いかたがた煩有るの故に之を還す、御志し始めて申すに及ばず候人人に是くの如く申させ給え、但し囹僧等のみ心に懸り候便宜の時早早之を聴かす可し

이 입도가 사도국까지 따라가겠다고 하지만, 비용도 그렇고 여러모로 번거로움이 있으므로 돌려보낸다. 그대의 뜻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해 주라. 다만 옥에 갇힌 승려들만이 마음에 걸린다. 기회가 있을 때 서둘러 이것(이 편지의 법문)을 들려주라.

「사박어서」, 954쪽

조닌의 종자는 데라도마리에서 이 편지를 품고 돌아왔다. 그리고 대성인은 조닌에게 두 가지를 맡기셨다. 사람들에게 이 일을 전하는 것, 그리고 가마쿠라의 옥에 갇힌 제자들에게 이 편지의 법문을 서둘러 들려주는 것. 다쓰노구치 뒤 니치로 등 제자 다섯 사람이 옥에 갇혀 있었다. 대성인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닿아야 할 말을 조닌에게 맡기신 것이다.

초겨울 흐린 하늘 아래 거친 바다와 작은 항구 마을, 물가에 끌어올린 목선들과 초가들, 수평선의 낮은 섬 그림자, 언덕길에서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삿갓 쓴 나그네 하나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6 · 데라도마리의 겨울 바다

「사박어서」의 내용은 넷으로 정리된다고 「법화취요초」 강의는 본다. 첫째, 법화경이 일체경의 간요(肝要)라는 것. 둘째, 팔종 · 십종에 대한 총체적인 파절. 셋째, 대성인이 법화경을 몸으로 읽고 있다는 것. 넷째, 그것이 불경보살의 실천과 같다는 것. 대성인은 권지품의 경문을 하나하나 들어 그것이 자신에게 들어맞았음을 보이시고, 이렇게 쓰셨다.

法華経は三世の説法の儀式なり、過去の不軽品は今の勧持品今の勧持品は過去の不軽品なり、 今の勧持品は未来は不軽品為る可し

법화경은 삼세의 설법의 의식이다. 과거의 불경품은 지금의 권지품이고, 지금의 권지품은 과거의 불경품이다. 지금의 권지품은 미래에는 불경품이 될 것이다.

「사박어서」, 953쪽

그리고 권지품에서 부처 멸후의 홍교를 맹세한 수많은 보살이 지금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신 뒤, 「니치렌은 팔십만억 나유타의 모든 보살의 대관(代官)으로서 이것을 말한다. 저 보살들의 가피를 청하는 자다(日蓮は八十万億那由他の諸の菩薩の代官として之を申す彼の諸の菩薩の加被を請う者なり)」(954쪽)라고 하셨다.

대성인은 이 편지에서, 대성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도 넷으로 들어 답하셨다. 「어떤 사람은 니치렌을 비난하여 근기를 모르고 거친 뜻을 세워 난을 만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권지품 같은 것은 깊은 자리의 보살의 일이니 안락행품에 어긋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나도 이 뜻을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다만 교문(敎門)뿐이라고 한다(或る人日蓮を難じて云く機を知らずして麤義を立て難に値うと、或る人云く勧持品の如きは深位の菩薩の義なり安楽行品に違すと、或る人云く我も此の義を存すれども言わずと云云、或る人云く唯教門計りなりと)」(953쪽). 이 비난은 조닌의 둘레, 곧 대성인이 유배되자 흔들리던 문하 사이에서도 들렸을 것이다. 대성인은 그 물음들에 대한 답을 조닌에게 먼저 보내셨다.

①법화경이 일체경의 간요「법화경 전후의 제경은 법화경을 위한 중보(重寶)」952쪽
②팔종 · 십종의 총체적 파절952쪽
③법화경 신독권지품 이십행 게와 들어맞음953쪽
④불경보살과 같은 실천「과거의 불경품은 지금의 권지품」953쪽

「돌려보낸 종자 · 옥중 제자들에게 들려주라」 954쪽

쪽수는 本文 블록 기준 · 17절
도표 17 · 「사박어서」의 네 기둥

쓰카하라의 첫 편지 — 「니치렌이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1271년 11월 23일 · 사도 쓰카하라

10월 28일 사도에 건너가신 대성인은 11월 1일 쓰카하라의 삼매당에 드셨다. 거기서 처음 쓰신 편지로 알려진 것이 11월 23일 자 「부목입도전어반사(富木入道殿御返事)」다. 대성인은 먼저 사도의 겨울을 적으셨다.

相州鎌倉に候し時の思には四節の転変は万国皆同じかるべしと存候し処に此北国佐渡の国に下著候て後二月は寒風頻に吹て霜雪更に降ざる時はあれども日の光をば見ることなし、八寒を現身に感ず

사가미 가마쿠라에 있을 때는 사계절의 바뀜은 어느 나라나 다 같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북국 사도에 내려와 보니 두 달 동안 찬바람이 쉬지 않고 불고, 서리와 눈이 내리지 않는 때는 있어도 햇빛을 보는 일은 없다. 팔한지옥을 이 몸으로 느낀다.

「부목입도전어반사」, 955쪽

그리고 「지난 10월 10일 딸려 보낸 입도를 데라도마리에서 돌려보낼 때 법문을 적어 보냈으니 짐작하시리라(去十月十日に付られ候し入道・寺泊より還し候し時法門を書き遣わし候き推量候らむ)」(955쪽)고 하셨다. 「사박어서」를 이어받는 편지라는 것이다. 같은 편지는 이 혹독함 한가운데서 대성인의 가장 깊은 자각을 처음으로 드러낸다.

天台・伝教は粗釈し給へども之を弘め残せる一大事の秘法を此国に初めて之を弘む日蓮豈其の人に非ずや

천태와 전교는 대략 해석하셨지만 넓히지 않고 남겨 두신 일대사의 비법을, 이 나라에 처음으로 넓힌다. 니치렌이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부목입도전어반사」, 955쪽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 편지의 요점을 셋으로 든다. 정법 · 상법 시대에 넓혀지지 않은 「일대사의 비법」을 대성인이 처음 넓히신다는 것, 쇼카의 대지진 같은 일이 그 법이 말법에 퍼질 전조라는 것, 그리고 대성인이 상행보살의 재탄임을 은근히 보이신 것이다. 대성인은 신력품과 용출품의 경문을 들어 「법은 이미 나타났다(法已に顕れぬ)」(955쪽)고 하셨다. 다쓰노구치를 넘어 사도에 이르신 대성인의 첫 고백을 받은 사람이 조닌이었다.

편지는 「또 어린 승려들에게 담의(談義)가 있어야 한다고 일러 주라(又小僧達談義あるべしと仰らるべく候)」(955쪽)는 당부와 조닌을 격려하는 말로 이어진다. 「유배된 일을 너무 슬퍼하지 마라. 권지품에도 불경품에도 설해져 있다. 목숨에는 끝이 있으니 아까워하지 말라. 마침내 바랄 것은 불국토다(流罪の事痛く歎せ給ふべからず、勧持品に云く不軽品に云く、命限り有り惜む可からず遂に願う可きは仏国也)」(955쪽).

그리고 대성인은 조닌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기셨다.

又貴辺に申付し一切経の要文智論の要文五帖一処に取り集め被る可く候、其外論釈の要文散在あるべからず候

또 그대에게 일러 둔 일체경의 요문과 『대지도론』의 요문 다섯 책을 한곳에 모아 두라. 그 밖의 논과 석의 요문도 흩어지지 않게 하라.

「부목입도전어반사」, 955쪽

대성인이 가마쿠라에서 모으신 경론의 요문 책자들이 조닌에게 맡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 설에 따르면 다쓰노구치 뒤 마쓰바가야쓰 초암의 뒷수습을 조닌이 맡았고, 대성인이 모으신 경전과 책들은 모두 조닌에게 옮겨져 보관되었다고 한다. 강의는 이 한 줄을, 조닌이 만년에 어서와 성교를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은 까닭과 잇는다. 그 사명은 이때 대성인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었다(6부).

같은 편지의 끝에서 대성인은 사도까지 따라온 어린 제자들 몇을 가마쿠라로 돌려보낸다며, 이 나라의 모습과 거처의 형편은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붓으로 적기 어렵다(筆端に載せ難く候)」(956쪽)는 것이다.

「이 글은 도키 님 쪽 …」 — 함께 읽는 자리

1272년 3월 20일 · 「좌도어서」

1272년 2월, 대성인은 쓰카하라에서 「개목초」를 완성하여 시조 긴고를 통해 문하에 보내셨다. 같은 달 조닌에게는 「팔종위목초(八宗違目抄)」가 갔다. 「개목초」에서 논한 참된 일념삼천에 관한 경문과 해석을 모은 글로, 강의는 이것을 「개목초」의 준비가 된 글로 본다. 그리고 3월 20일, 대성인은 「좌도어서(佐渡御書)」를 쓰셨다. 받는 사람은 「니치렌의 제자 단나들」 전체다. 그런데 글의 첫 줄은 이렇다.

此文は富木殿のかた三郎左衛門殿大蔵たうのつじ十郎入道殿等さじきの尼御前一一に見させ給べき人人の御中へなり

이 글은 도키 님 쪽, 사부로자에몬 님, 오쿠라의 탑 거리(塔の辻)의 주로 뉴도 님 등, 사지키의 비구니 부인이 하나하나 보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이다.

「좌도어서」, 956쪽

맨 앞에 「도키 님 쪽」이 있다. 사부로자에몬은 시조 긴고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대성인은 「교토 · 가마쿠라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을 적어 보내라. 외전초 · 『문구』 제2 · 『현의』 제4의 본말 · 감문 · 선지 등을 이리로 오는 사람들이 가지고 건너오게 하라」고 부탁하셨다. 강의는 이 부탁으로 보아 「좌도어서」가 먼저 조닌에게 닿았으리라고 본다. 조닌은 대성인의 책들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의 끝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佐渡の国は紙候はぬ上面面に申せば煩あり一人ももるれば恨ありぬべし此文を心ざしあらん人人は寄合て御覧じ料簡候て心なぐさませ給へ

사도국은 종이가 없는 데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쓰자니 번거롭고,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원망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뜻 있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읽고 헤아려 마음을 위로하라.

「좌도어서」, 961쪽

창가학회 강의는 이 자리를 이렇게 그린다. 문하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는 대개 먼저 조닌에게 닿았다. 그리고 가마쿠라에 있던 조닌의 거처에 시조 긴고, 탑 거리의 주로 뉴도, 사지키의 비구니 같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신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대성인의 편지를 읽었다. 대성인이 유배되고 제자들이 옥에 갇히고 영지를 빼앗기던 때, 한 사람 한 사람은 불안했고 혼자 있으면 겁이 났다. 모여서 서로 격려하면 역경을 넘을 수 있다. 종이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조닌을 가운데 두고 한데 뭉쳐 가장 큰 고난을 넘으라는 뜻이었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눈 내리는 겨울밤, 눈 덮인 소나무와 석등 너머 초가지붕 집의 불 켜진 방 안에 작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가운데 펼친 종이를 함께 보고, 앞뜰의 눈 덮인 덤불과 연못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7 · 함께 읽는 자리

이런 지시는 「좌도어서」만이 아니다. 「진언제종위목」은 첫머리에 「도키 님 등 사람들 가운데(土木殿等の人人御中)」라 쓰고 끝에 「이 글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 보여 원망을 남기지 말라(此の書を以て諸人に触れ示して恨を残すこと勿れ)」(142쪽)고 적었다. 1274년의 「법화행자봉난사」는 받는 사람을 다섯 겹으로 적고 「각자 서로 읽어 들려 드려라」고 했다(22절). 「법화취요초」 강의는 대성인이 문하 전체에 알리라고 지시하신 어서들을 모아 보면 그 받는 사람이 도키 조닌과 시조 긴고에 몰려 있다고 지적한다. 가마쿠라에 사는 시조 긴고가 교류의 요가 된 것은 당연하다. 조닌은 가마쿠라를 자주 오가는 데다 문하의 중진이었기에 늘 요(要)로 삼아졌다.

사도쓰카하라 · 이치노사와
「寄合て御覧じ」 961「互に読聞け」 965바다를 건너
도키 조닌와카미야 · 가마쿠라 체재
  • 시조 긴고가마쿠라
  • 오쿠라 탑 거리 주로 뉴도
  • 사지키 아마
  • 옥중의 제자들「사박어서」 954
  • 오타 · 소야 · 가나바라시모우사
  • 가와노베 · 야마토 아자리「법화행자봉난사」
문하 전체에 알리라는 지시가 있는 어서
「사박어서」951
「좌도어서」956 · 961
「진언제종위목」139 · 142
「법화행자봉난사」965 · 967
「부목전어서」970
— 대부분 조닌 앞
도표 18 · 편지가 가는 길

이치노사와에서 — 「모든 악인은 또한 선지식이다」

1272년 4월 10일 · 5월 5일 · 사도 이치노사와

1272년 4월 무렵 쓰카하라에서 이치노사와로 거처를 옮기신 대성인은, 4월 10일 조닌에게 「부목전어반사」를 보내셨다. 옮기신 뒤 처음 쓰신 편지로 전한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니치렌의 임종은 조금도 의심이 없다. 목이 베일 때는 특히 기쁨이 있을 것이다. 큰 도적을 만나 큰 독을 보배 구슬과 바꾼다고 여겨야 하리라(日蓮が臨終一分も疑無く頭を刎ねらるる時は殊に喜悦有るべし、大賊に値うて大毒を宝珠に易ゆと思う可きか)」(962쪽). 이어서 대성인은 「법문의 일은 지난번 시조 사부로자에몬노조 님에게 적어 들려 보냈으니 그 글을 잘 보라(法門の事先度四条三郎左衛門尉殿に書持せしむ其の書能く能く御覧有る可し)」(962쪽)고 하셨다. 두 달 전 시조 긴고 편에 보낸 「개목초」를 조닌도 읽으라는 것이다. 외호의 두 날개(21절)는 서로의 글을 함께 읽었다.

대성인은 경문으로 보아 자신이 법화경의 행자임이 틀림없다고 하시고, 그런데도 아직 하늘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까닭을 셋으로 드셨다. 「첫째는 제천선신이 이 악한 나라를 떠났기 때문인가, 둘째는 선신이 법미를 맛보지 못해 위광과 세력이 없기 때문인가, 셋째는 큰 악귀가 삼류의 마음속에 들어가 범천 · 제석도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가(一には諸天善神此の悪国を去る故か、二には善神法味を味わざる故に威光勢力無きか、三には大悪鬼三類の心中に入り梵天帝釈も力及ばざるか)」(962쪽). 「개목초」가 「일생의 대사」라 한 물음(니치렌 대성인 편 17절)을 조닌에게도 짧게 풀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맺으셨다.

但生涯本より思い切て候今に飜返ること無く其の上又遺恨無し諸の悪人は又善知識なり、摂受・折伏の二義仏説に依る、敢て私曲に非ず万事霊山浄土を期す

다만 생애는 본디 각오한 것이니 지금 와서 뒤집을 일도 없고, 또 원망도 없다. 모든 악인은 또한 선지식이다. 섭수와 절복 두 가지는 부처의 말씀에 따른 것이지 결코 사사로운 굽음이 아니다. 모든 일은 영산정토를 기약한다.

「부목전어반사」, 962쪽

박해한 사람들까지 자신을 부처로 만드는 「선지식」이라 하신 것이다. 강의는 이 말에서 말법 유포의 대법을 열려는 대성인의 깊은 경애를 읽는다.

그런데 이 무렵 가마쿠라의 문하 사이에는 대성인의 사면을 막부에 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닌도 여러 손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지바 씨의 가신으로서 막부에 닿는 길을 아는 그였다. 강의는 문영 9년 5월 무렵 조닌을 중심으로 문하가 막부를 향해 사면 운동을 일으켰다고 본다. 대성인의 답은 엄했다. 5월 5일의 「진언제종위목」에 이렇게 쓰셨다.

日蓮が御免を蒙らんと欲するの事を色に出す弟子は不孝の者なり

니치렌이 사면받기를 바라는 기색을 드러내는 제자는 불효한 자다.

「진언제종위목」, 139쪽

이 글의 받는 사람은 「도키 님 등 사람들 가운데」이고, 첫머리에 「소리 내어 읽어 외우라, 노인들은 자세히 들으라(空に読み覚えよ老人等は具に聞き奉れ)」(139쪽)는 당부가 있다. 같은 글에서 대성인은 「니치렌은 일본국 사람들에게 어진 아버지요 거룩한 어버이요 도사다(日蓮は日本国の人の為には賢父なり聖親なり導師なり)」(140쪽)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을 무간지옥에서 구하려고 여러 종을 파하는 것이 대자비라는 것이다. 사면을 비는 것은 그 싸움을 스스로 거두는 일이었다. 조닌의 걱정은 진심이었으나, 대성인은 그 걱정이 세상의 셈법으로 흐르는 것을 막으셨다.

「관심본존초」 —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큰일

1273년 4월 25일 · 26일 · 분에이 10년

1273년 4월 25일, 대성인은 이치노사와에서 「여래멸후오오백세시관심본존초」를 다 쓰셨다. 열일곱 장의 한문이다. 이튿날 대성인은 송장(送狀)을 붙여 이것을 조닌에게 보내셨다.

帷一つ・墨三長・筆五官給び候い了んぬ、観心の法門少少之を注して大田殿・教信御房等に奉る、此の事日蓮身に当るの大事なり之を秘す、無二の志を見ば之を開〓せらる可きか、此の書は難多く答少し未聞の事なれば人耳目之を驚動す可きか、設い他見に及ぶとも三人四人座を並べて之を読むこと勿れ、仏滅後二千二百二十余年未だ此の書の心有らず、国難を顧みず五五百歳を期して之を演説す乞い願くば一見を歴来るの輩は師弟共に霊山浄土に詣でて三仏の顔貌を拝見したてまつらん

홑옷 한 벌, 먹 세 자루, 붓 다섯 자루를 받았다. 관심의 법문을 조금 적어 오타 님 · 교신 스님 등에게 드린다. 이 일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큰일이다. 이것을 비밀로 한다. 둘 없는 뜻이 보이면 이것을 열어 보이라. 이 글은 물음은 많고 답은 적다. 아직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니 사람들의 귀와 눈을 놀라게 할 것이다. 설령 남이 보게 되더라도 서너 사람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읽지는 말라. 불멸 후 이천이백이십여 년, 아직 이 글의 마음은 없었다. 나라의 난을 돌아보지 않고 오오백세(五五百歲)를 기하여 이것을 연설한다. 바라건대 한 번 보는 무리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영산정토에 나아가 세 부처의 얼굴을 우러러 뵙자.

「관심본존초 송장」, 255쪽

받는 사람은 「도키 님 회답(富木殿御返事)」이다. 송장은 조닌이 보낸 홑옷과 먹과 붓에 대한 감사로 시작한다. 이 먹과 붓이 「관심본존초」를 쓴 먹과 붓이었을지도 모른다.

송장에는 「오타 님 · 교신 스님 등에게 드린다」는 말이 있어, 「관심본존초」의 대고중(對告衆)을 소야 교신이나 오타 조묘로 보는 이설도 있었다. 그러나 「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는 「관심본존초」 · 「법화취요초」 · 「사신오품초」 세 권을 「고로 뉴도 니치조에게 주신 것」이라 분명히 적고, 그 정본이 그의 거처에 있다고 했다(4절). 창가학회 강의는 대고중을 조닌으로 보고, 오타 · 소야 등 시모우사의 몇 사람이 그와 함께 이 글을 읽었으리라고 본다. 「서너 사람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읽지 말라」는 당부대로, 당시 이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조닌과 시모우사의 두세 사람뿐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글에 담긴 것

「관심본존초」의 교학은 불교 교학 六 남묘호렌게쿄와 니치렌 대성인 편 18절이 다루었다. 창가학회는 이 글을 말법의 사람이 받아 지녀야 할 본존을 밝힌 「법본존(法本尊) 개현의 서」로 받든다. 여기서는 받은 사람의 자리에서 두 대목만 본다. 하나는 「수지즉관심(受持卽觀心)」, 곧 묘법의 다섯 자를 받아 지니는 것이 그대로 관심이라는 가르침이다.

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

석존의 인행과 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갖추어져 있다. 우리가 이 다섯 자를 받아 지니면 저절로 그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

「관심본존초」, 246쪽

열여덟 해 전 조닌이 받은 「일생성불초」는 제목을 부르는 것이 곧 「중생 본유의 묘리를 관하는 것」이라 했다. 「관심본존초」는 같은 길을 훨씬 깊은 자리에서 다시 밝혔다. 또 하나는 글을 맺는 대목이다.

一念三千を識らざる者には仏・大慈悲を起し五字の内に此の珠を裹み末代幼稚の頸に懸けさしめ給う

일념삼천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부처가 큰 자비를 일으켜, 다섯 자 안에 이 구슬을 싸서 말대의 어린아이의 목에 걸어 주신다.

「관심본존초」, 254–255쪽

어려운 교학을 알지 못하는 범부도 다섯 자를 받아 지니면 일념삼천의 구슬을 목에 건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 바로 앞에서 대성인은 「하늘이 개면 땅이 밝다. 법화를 아는 이는 세법을 얻을 것이다(天晴れぬれば地明かなり法華を識る者は世法を得可きか)」(254쪽)라고 쓰셨다. 날마다 세법(世法), 곧 주군의 정사와 소송을 다루던 조닌에게 이 한 줄은 각별했을 것이다.

왜 조닌이었는가

대성인이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큰일」이라 하신 글을 왜 조닌에게 맡기셨는가. 창가학회 강의의 답은 둘이다.

하나는 신뢰다. 시조 긴고에게 「개목초」를, 조닌에게 「관심본존초」를 주셨다는 것은 두 사람이 대성인 외호의 두 날개였음을 보여 준다. 조닌은 가장 오래된 단나였고, 학식이 있었고, 문하의 요였다.

또 하나는 후세다. 강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조닌이 이 글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다(5부 29절). 그럼에도 대성인이 그에게 맡기신 것은, 그가 법문을 이해할 수 있어서라기보다 대성인의 글을 후세에 남길 사람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는 사회도 정치도 불안했다. 사회적 기반이 약한 사람에게 맡겼다면 세월 속에 흩어졌을 것이다. 조닌은 막부의 유력 고케닌인 지바 씨를 섬기는 무사였고, 가장 오래된 신도였다. 대성인은 그를 어서를 후세에 전할 적임자로 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들어맞았다. 「관심본존초」와 송장의 친필은 칠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조닌이 세운 절에 있다.

도키 조닌
  1. 이치노사와에서 탈고1273.4.25 · 17장
  2. 송장4.26 · 富木殿御返事
  3. 와카미야의 조닌 · 시모우사의 두세 사람(오타 · 소야)이 읽음三人四人座を並べて之を読むこと勿れ
  4. 「조슈인 본존성교사」의 「御自筆皮籠」 첫 줄1299.3.6 · 観心本尊抄一帖
  5. 지금 나카야마 법화경사국보
시조 긴고
  1. 「개목초」1272.2
  2. 시조 긴고가마쿠라
  3. 문하 전체

외호의 두 날개

도표 19 · 「관심본존초」가 건너간 길

「법화행자봉난사」 — 다섯 겹의 받는 사람

1273년 7월 · 1274년 1월 14일

「관심본존초」 뒤에도 편지는 이어졌다. 1273년 7월 6일의 「토목전어반사」에서 대성인은 조닌의 아들 이요보 닛초를 두고 이렇게 쓰셨다.

伊与房は機量物にて候ぞ今年留め候い畢んぬ

이요보는 그릇이 큰 사람이다. 올해는 (곁에) 머물게 했다.

「토목전어반사」, 963쪽, 2차 확인

닛초는 이 해 사도에서 대성인을 모시고 있었다. 같은 편지에서 대성인은 전교대사가 정(定)과 혜(慧)는 살아서 넓히고 원계(圓戒)는 죽은 뒤에 드러냈다고 하시며, 「설령 니치렌의 생사는 알 수 없더라도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가 퍼지는 것은 의심이 없다」고 하셨다(963쪽, 2차 확인). 「법화취요초」 강의는 여기서 말법에 유포될 법에 본존 · 제목과 함께 계단이 갖추어진다는 것이 은근히 보인다고 읽는다(전교대사 편 25 · 27절). 11월에는 조닌이 보낸 흰 소매옷 한 벌에 대한 답장이 다시 갔다.

그리고 해가 바뀐 1274년 1월 14일, 사면이 결정되기 한 달 전, 대성인은 「법화행자봉난사(法華行者逢難事)」를 쓰셨다. 받는 사람이 다섯 겹으로 적혀 있다.

河野辺殿等中
大和阿闍梨御房御中
一切我弟子等中
三郎左衛門尉殿
謹上                 日蓮
富木殿

가와노베 님 등 가운데 / 야마토 아자리 스님 가운데 / 모든 나의 제자들 가운데 / 사부로자에몬노조 님 / 삼가 올림, 니치렌 / 도키 님.

「법화행자봉난사」, 965쪽

가장 높이는 자리, 「삼가 올림(謹上)」 다음의 끝자리에 도키 님이 있다. 이 편지도 먼저 조닌에게 닿았을 것이다. 그리고 추신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天台伝教は之を宣べて本門の本尊と四菩薩と戒壇と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と之を残したもう、所詮一には仏・授与したまわざるが故に、二には時機未熟の故なり、今既に時来れり四菩薩出現したまわんか日蓮此の事先ず之を知りぬ

천태와 전교는 이것을 말씀하셨으나 본문의 본존과 사보살과 계단과 남묘호렌게쿄의 다섯 자는 남겨 두셨다. 그 까닭은 첫째 부처가 부촉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시(時)와 기(機)가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 때가 왔으니 사보살이 출현하시지 않겠는가. 니치렌은 이 일을 먼저 알았다.

「법화행자봉난사」, 965쪽

삼대비법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대목이다(니치렌 대성인 편 21절). 대성인은 이어서 이렇게 당부하셨다.

富木・三郎左衛門の尉・河野辺・大和阿闍梨等・殿原・御房達各各互に読聞けまいらせさせ給え、かかる濁世には互につねに・いゐあわせてひまもなく後世ねがわせ給い候へ

도키 · 사부로자에몬노조 · 가와노베 · 야마토 아자리 등 무사 분들과 스님들은 각자 서로 읽어 들려 드려라. 이런 탁한 세상에서는 서로 늘 이야기를 나누며 쉼 없이 후세를 바라라.

「법화행자봉난사」, 965쪽

본문에서 대성인은 1273년 12월 7일 무사시노카미 호조 노부토키가 내린 명령서, 곧 대성인을 따르는 자를 엄히 다스리라는 문서를 그대로 옮겨 적으셨다(966쪽). 그리고 법화경의 행자는 부처와 천태와 전교 세 사람뿐이었으나 「세 사람에 니치렌을 넣어 네 사람으로 하여, 법화경의 행자가 말법에 있는가(三人に日蓮を入れ四人と為して法華経の行者末法に有るか)」(967쪽)라고 하셨다. 끝에는 다시 「일체의 모든 사람이 이것을 보고 듣고, 뜻 있는 사람들은 서로 이것을 이야기하라(一切の諸人之を見聞し志有らん人人は互に之を語れ)」(967쪽, 2차 확인)고 거듭하셨다.

내시(內示)의 사람

「법화취요초」 강의는 다쓰노구치에서 「법화취요초」에 이르는 대성인의 교화를 조닌 앞 편지로 따라간 뒤 이렇게 맺는다. 대성인이 자신의 내증(內證)을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만큼 먼저 도키 조닌에게 내시(內示)하셨고, 또 조닌을 통해 문하에 전하셨다. 법난의 뜻(「토목전어반사」)에서 시작하여, 법화경의 몸 읽음(「사박어서」), 일대사의 비법(「부목입도전어반사」), 「관심본존초」의 법본존, 계단의 암시(「토목전어반사」), 삼대비법의 이름(「법화행자봉난사」)을 거쳐 「법화취요초」의 삼대비법에 이르기까지, 조닌은 사도 시대 대성인 교화의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 본 사람이었다.

다쓰노구치에서 사면까지 2년 반, 지금 전하는 것만으로 조닌 앞 어서는 열두 편이다. 다음이 최련방(最蓮房)의 여덟 편, 시조 긴고와 그 아내의 여섯 편이다. 「가는 곳마다 맨 먼저 조닌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사도 유배 중에 이만큼 집중해서 어서를 받은 신도는 달리 없다」고 강의는 말한다.

  1. 11271.9.14「토목전어반사」수수견빈출에치
  2. 210.22「사박어서」종자를 돌려보냄데라도마리
  3. 311.23「부목입도전어반사」일대사의 비법 · 요문을 모아 두라쓰카하라
  4. 41272.2「팔종위목초」쓰카하라
  5. 53.20「좌도어서」문하 전체 · 「도키 님 쪽」쓰카하라
  6. 64.10「부목전어반사」악인은 선지식이치노사와
  7. 75.5「진언제종위목」사면 운동 경계이치노사와
  8. 81273.4.25「관심본존초」이치노사와
  9. 94.26송장富木殿御返事이치노사와
  10. 107.6「토목전어반사」이요보는 그릇 · 정혜와 원계이치노사와
  11. 1111월「토목전어반사」흰 소매옷이치노사와
  12. 121274.1.14「법화행자봉난사」다섯 겹 받는 사람 · 삼대비법의 이름이치노사와
강의의 「열두 편」과 이 목록의 맞춤은 확인 중 · 22절
도표 20 · 사도기의 편지 열두 편
  1. ⑦본문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오자받는 사람 — 도키 조닌「법화취요초」 336, 1274.5.24
  2. ⑥본존 · 사보살 · 계단 · 오자받는 사람 — 도키 님 외「법화행자봉난사」 965
  3. ⑤정혜는 생전에, 원계는 사후에받는 사람 — 도키 조닌「토목전어반사」 963
  4. ④법본존 · 수지즉관심받는 사람 — 도키 조닌「관심본존초」 246 · 254
  5. ③일대사의 비법「法已に顕れぬ」 · 받는 사람 — 도키 조닌「부목입도전어반사」 955
  6. ②법화경 신독 · 불경보살받는 사람 — 도키 조닌「사박어서」 953
  7. ①법난의 뜻받는 사람 — 도키 조닌「토목전어반사」 951
칸 높이는 차례만 보인다 · 22절 「내시의 사람」
도표 21 · 내시의 계단

사도의 2년 반은 대성인 불법의 골격이 세워진 때다. 그 골격이 세워지는 순서를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에서 받아 본 재가 문하가 도키 조닌이었다. 창가학회 강의는 대성인이 그에게 편지를 맡기신 것을 개인에게 준 영예로 보지 않는다. 그 편지들은 그를 통해 문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그가 지킨 친필을 통해 칠백 년 뒤의 우리에게 왔다. 대성인의 진의는 처음부터 「말대의 제자 단나」를 향해 있었다.

5부 미노부 시대

입산의 편지와 「법화취요초」

1274년 5월 17일 · 24일 · 분에이 11년

1274년 3월 사면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대성인은 4월 8일 헤이노 사에몬노조에게 세 번째로 간하신 뒤, 5월 12일 가마쿠라를 떠나 17일 가이의 하키리 마을에 이르셨다(니치렌 대성인 편 20절). 그날 대성인은 조닌에게 편지를 쓰셨다. 「부목전어서(富木殿御書)」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けかち申すばかりなし米一合もうらずがししぬべし

기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쌀 한 홉도 팔지 않으니 굶어 죽을 판이다.

「부목전어서」, 964쪽, 2차 확인

그리고 길을 적으셨다.

十二日さかわ十三日たけのした十四日くるまがへし十五日ををみや十六日なんぶ、十七日このところ・いまださだまらずといえども、たいしはこの山中・心中に叶いて候へば・しばらくは候はんずらむ、結句は一人になりて日本国に流浪すべきみにて候、又たちとどまるみならば・けさんに入り候べし

12일 사카와, 13일 다케노시타, 14일 구루마가에시, 15일 오미야, 16일 난부, 17일 이곳. 아직 정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이 산중이 마음에 맞으니 한동안은 있을 것이다. 결국은 혼자가 되어 일본국을 떠돌 몸이다. 또 머물게 된다면 만나 뵙자.

「부목전어서」, 964쪽, 2차 확인

미노부에 닿은 날, 가장 먼저 처지와 마음을 털어놓은 상대가 조닌이었다. 「결국은 혼자가 되어 일본국을 떠돌 몸」이라는 말에는 세 번의 간효가 쓰이지 않은 뒤의 쓸쓸함과 결연함이 함께 있다.

그리고 이레 뒤인 5월 24일, 대성인은 「법화취요초(法華取要抄)」를 써서 조닌에게 보내셨다. 미노부에서 처음 쓰신 중요한 법문이다. 대성인은 이 글에서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가 남겨 둔 비법이 「본문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다섯 자」라고 밝히시고(336쪽), 이렇게 쓰셨다.

日蓮は広略を捨てて肝要を好む所謂上行菩薩所伝の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

니치렌은 넓은 것과 간략한 것을 버리고 간요를 좋아한다. 이른바 상행보살이 전한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다.

「법화취요초」, 336쪽

글은 이렇게 맺는다.

是くの如く国土乱れて後に上行等の聖人出現し本門の三つの法門之を建立し一四天・四海一同に妙法蓮華経の広宣流布疑い無からん者か

이처럼 국토가 어지러워진 뒤에 상행 등의 성인이 출현하여 본문의 세 가지 법문을 세우고, 온 사천하 · 사해가 한결같이 묘법연화경의 광선유포가 의심 없을 것이다.

「법화취요초」, 338쪽

「법화취요초」 강의는 삼대비법이 말법에 유포될 요법(要法)임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밝힌 이 글이 조닌에게 주어진 까닭을 이렇게 본다. 조닌의 높은 학식도 있지만, 그가 단나 전체의 요(要)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친필 스물네 장도 조닌의 「御自筆皮籠」에 「관심본존초」와 나란히 적혀 지금 나카야마에 있다.

  1. 1274.5.12가마쿠라 출발
  2. 12사카와
  3. 13다케노시타
  4. 14구루마가에시
  5. 15오미야
  6. 16난부
  7. 17하키리(미노부)「부목전어서」
  8. 24「법화취요초」
「부목전어서」 — 5.17「けかち申すばかりなし」*「結句は一人になりて日本国に流浪すべきみ」*
삽입 지도: 1274년 5월 12일 가마쿠라를 떠나 5월 17일 미노부에.가마쿠라미노부1274.5.12 → 5.171274 입산 길 — 가마쿠라 → 미노부
* 강의 인용 원문 · 삽입 지도는 니치렌 편 도표 13
도표 22 · 입산의 이레

공양 — 쌀과 돈과 옷

1270 — 1281 · 와카미야에서 미노부로

미노부의 산골은 먹을 것이 귀했다. 대성인과 그 곁의 제자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단나들의 공양 덕분이다. 조닌은 가마쿠라로, 사도로, 그리고 미노부로, 자신이 직접 들고 가거나 사람을 시켜 공양을 보냈다. 어서에 남은 조닌의 공양을 연대순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창가학회 강의의 표).

1270년부터 해마다, 많은 해에는 두세 번씩 공양이 이어졌다. 그 이전의 것은 남은 어서가 적어 알 수 없을 뿐, 귀의한 뒤로 줄곧 이어졌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1279년 11월의 「부성전어반사」에는 「내년 3월분의 돈 세 관과 쌀 두 말을 보내 주셨다(来年三月の料の分銭三貫文米二斗送り給び畢んぬ)」(2차 확인)는 말이 있다. 조닌은 대성인의 살림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몇 달 앞을 내다보고 정기적으로 보냈다.

미노부의 형편은 대성인 자신이 조닌에게 숨기지 않으셨다. 1276년 12월, 동전 다섯 관을 받으신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곳은 마을에서 떨어진 깊은 산이다. 입을 것 먹을 것이 모자라 독경 소리가 이어지기 어렵고 담의의 일도 그만두어야 할 판이다(且つ知食すが如く此の所は里中を離れたる深山なり衣食乏少の間読経の声続き難く談義の勤め廃しつ可し)」(「도량신수호사」, 979쪽). 조닌의 공양은 산중의 독경과 강의를 잇게 하는 것이었다. 1275년 8월 동전 한 꿰미에 대한 답장(「부목전어서」)의 끝에서 대성인은 「우리 문가는 밤에는 잠을 끊고 낮에는 쉼을 그쳐 이것을 생각하라. 한평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세에 뉘우치지 말라(我が門家は夜は眠りを断ち昼は暇を止めて之を案ぜよ一生空しく過して万歳悔ゆること勿れ)」(970쪽)고 하시고, 추신에 다시 「뜻 있는 여러 사람은 한곳에 모여 들으라(志有らん諸人は一処に聚集して御聴聞有るべきか)」(970쪽)고 적으셨다. 공양에 대한 답장이 그대로 문하 전체를 향한 법문이 되었다.

공양은 조닌 혼자의 것만이 아니었다. 대성인 입멸 넉 달 전인 1282년 6월의 「치병대소권실위목」에는 「오타 뉴도 님 쪽의 물건들은 도키 님의 일기(목록)대로 받았다(太田入道殿のかたがたのもの・ときどのの日記のごとく給い候了んぬ)」(995쪽)는 말이 있다. 조닌은 이웃들의 공양까지 모아 목록을 적어 보냈다. 수호소에서 문서를 다루던 솜씨가 마지막까지 쓰였다.

강의는 조닌의 공양에서 두 가지 특징을 읽는다. 하나는 돈이 많다는 것이다. 난조 도키미쓰나 시조 긴고의 공양이 주로 물건, 특히 먹을 것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시모우사와 미노부 사이의 먼 거리 때문이기도 하고, 큰 단나들이 서로 연락하여 대성인의 살림에 필요한 것을 나누어 맡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또 하나는 물건도 흰쌀 · 홑옷 · 흰 소매옷처럼 당시로서는 값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조닌의 살림은 넉넉했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미노부 시대의 공양 횟수를 이렇게 셈한다. 난조 도키미쓰 서른두 번, 도키 조닌 열두 번, 시조 긴고 열한 번, 이케가미 형제 여덟 번(하키리 일족은 알 수 없음). 조닌은 사도 시대에도 여섯 번의 공양 기록이 있다.

1275년 11월, 눈이 내리는 미노부로 조닌이 두꺼운 솜을 넣은 흰 소매옷을 보내자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昼夜の行法もはだうすにては堪え難く辛苦にて候に此の小袖を著ては思い有る可からず候なり

밤낮의 수행도 살결에 얇은 옷으로는 견디기 어려워 고생스러웠는데, 이 소매옷을 입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

「관심본존득의초」, 972쪽

대성인은 이어서 상나화수(商那和修)의 옛이야기를 들어 조닌의 신심을 기리셨다. 전생에 병든 벽지불에게 옷을 공양한 공덕으로 태어날 때부터 옷을 입고 태어났다는 부처의 제자다.

  1. 11270흰쌀 한 그릇 · 본두 엿 되「부목전어반사」
  2. 21271.10거위눈 한 꿰미「사박어서」
  3. 31272.4동전 얼마「부목전어반사」
  4. 41273.4홑옷 한 벌 · 먹 세 자루 · 붓 다섯 자루「관심본존초 송장」
  5. 51273.7동전 두 관「토목전어반사」
  6. 61273.11흰 소매옷 한 벌「토목전어반사」
  7. 71274동전 한 관 · 청부 한 관 · 홑옷 한 벌「부목니어전어반사」
  8. 81275.2홑옷 한 벌「부목전어반사」 968
  9. 91275.8동전 한 꿰미「부목전어서」 969–970, 8.23
  10. 101275.9옷감 · 홑옷「어의병단의어서」, 9.28
  11. 111275.11동전 한 관 · 두꺼운 솜 흰 소매옷 한 벌 · 붓 열 자루 · 먹 다섯 정「관심본존득의초」
  12. 121276.3동전 한 관 · 통 하나「부목니어전어반사」
  13. 131276.12동전 다섯 관「도량신수호사」
  14. 141277.4청부 한 꿰미「사신오품초」
  15. 151277동전 한 꿰미 · 삼 년 묵은 술 한 통「서입녹사」
  16. 161278.2청부 일곱 꿰미「시문불승의」
  17. 171279.5흰 소매옷 · 엷은 먹물 법의 · 같은 색 가사 · 동전 한 관「사보살조립초」
  18. 181279.11돈 세 관 · 쌀 두 말「부성전어반사」
  19. 191280.4동전 한 꿰미「부성입도전어반사」
  20. 201280.11동전 한 꿰미「부목전어반사」
  21. 211281.10돈 네 관「부성입도전어반사」, 10.22 · 법화당 수리에 씀

주홍 날짜 — 사도기(1271.10–1274.3)

● 돈(동전 · 청부 · 돈) · ▲ 옷(홑옷 · 소매옷 · 법의 · 가사) · ■ 먹을 것(쌀 · 술) · ◆ 문방(먹 · 붓) · 출처: 「富木殿について」의 공양표 · 점 위의 수는 아래 목록의 번호
도표 23 · 조닌의 공양 연표
  • 난조 도키미쓰32번
  • 도키 조닌12번
  • 시조 긴고11번
  • 이케가미 형제8번
  • 하키리 일족알 수 없음
「법화취요초」 서강의 셈 · 어서에 남은 것만
도표 24 · 미노부기 공양 횟수

어머니 — 「나이 아흔에 이른 어머니」

1275년 2월 · 1276년 2월 하순 — 3월

1275년 2월, 조닌은 미노부로 홑옷 한 벌을 보냈다. 대성인의 답장 「부목전어반사」는 부처 제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기근이 든 해, 한 비구가 자기 가사를 팔아 그 값을 부처께 바쳤다. 부처는 「가사는 삼세 제불의 해탈의 법의다. 이 값에 나는 보답하기 어렵다」며 사양하시고, 「그대에게 어머니가 계신가」 물으셨다. 계신다고 하자 부처는 「이것을 어머니께 공양하라」고 하셨다. 비구가 「부처는 삼계의 가장 존귀한 분이지만 제 어머니는 소처럼 어리석은데 어찌 가사의 공양에 보답하겠습니까」 하자, 부처는 「그대의 몸을 누가 낳았는가. 그대의 어머니가 낳았다. 이 가사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으리라」고 하셨다(968쪽). 그리고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此れは又齢九旬にいたれる悲母の愛子にこれをまいらせさせ給える我と老眼をしぼり身命を尽くせり、我・子の身として此の帷の恩かたしと・をぼして・つかわせるか日蓮又ほうじがたし、しかれども又返すべきにあらず此の帷をきて日天の御前にして此の子細を申し上げば定めて釈梵諸天しろしめすべし、帷は一なれども十方の諸天此れをしり給うべし、露を大海によせ土を大地に加るがごとし生生に失せじ世世にくちざらむかし

이것은 또 나이 아흔에 이른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신 것이다. 스스로 늙은 눈을 짜내고 몸과 목숨을 다하셨다. 아들의 몸으로서 이 홑옷의 은혜는 갚기 어렵다고 여겨 보내셨는가. 니치렌도 갚기 어렵다. 그렇다고 돌려보낼 것도 아니다. 이 홑옷을 입고 해님 앞에서 이 사연을 아뢰면 반드시 석제환인과 범천과 모든 하늘이 아실 것이다. 홑옷은 하나이지만 시방의 모든 하늘이 이것을 아실 것이다. 이슬을 큰 바다에 보태고 흙을 대지에 더하는 것과 같다. 생생에 잃지 않고 세세에 썩지 않으리라.

「부목전어반사」, 968쪽

아흔의 어머니가 늙은 눈을 짜내어 아들에게 지어 준 홑옷. 조닌은 그것을 차마 입지 못하고 대성인께 보냈을 것이라고 강의는 본다. 대성인은 그 마음까지 받으셨다. 조닌의 어머니가 장수했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다.

이듬해 1276년 2월 하순,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조닌과 그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서였다. 아흔셋이었다는 전승이 있다. 조닌은 곧바로 어머니의 유골을 목에 걸고 미노부로 길을 떠났다. 대성인은 이 일을 「망지경사(忘持經事)」에 이렇게 적으셨다.

離別忍び難きの間舎利を頸に懸け足に任せて大道に出で下州より甲州に至る其の中間往復千里に及ぶ国国皆飢饉し山野に盗賊充満し宿宿粮米乏少なり我身羸弱・所従亡きが若く牛馬合期せず峨峨たる大山重重として漫漫たる大河多多なり……然る後深洞に尋ね入りて一菴室を見る法華読誦の音青天に響き一乗談義の言山中に聞ゆ、案内を触れて室に入り教主釈尊の御宝前に母の骨を安置し五躰を地に投げ合掌して両眼を開き尊容を拝し歓喜身に余り心の苦み忽ち息む

이별을 참기 어려워 유골을 목에 걸고 발길 닿는 대로 큰길에 나서, 시모우사에서 가이에 이르니 그 사이 오가는 길이 천 리에 이른다. 나라마다 기근이 들고 산과 들에는 도적이 가득하며 묵는 곳마다 양식이 모자란다. 몸은 약하고 따르는 이는 없는 것과 같으며 소와 말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험한 큰 산이 겹겹이고 아득한 큰 강이 많다. …… 그런 뒤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 한 암실을 보니, 법화경 독송 소리가 푸른 하늘에 울리고 일승을 담의하는 말이 산중에 들린다. 안내를 청해 방에 들어와 교주 석존의 보전에 어머니의 뼈를 모시고, 오체를 땅에 던져 합장하고, 두 눈을 떠 존용을 우러르니, 기쁨이 몸에 넘치고 마음의 괴로움이 곧 그쳤다.

「망지경사」, 977쪽
이른 봄 깊은 강 골짜기, 벼랑을 따라 오르는 좁은 산길 위에 아주 작게 보이는 나그네 하나, 강가의 매화와 벚꽃, 안개 낀 겹겹의 산과 멀리 눈 덮인 봉우리를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8 · 천 리의 길

그리고 대성인은 이 죽음을 「생사의 이치를 보이기 위해 황천의 길로 떠나셨다(生死の理を示さんが為に黄泉の道に趣く)」(977쪽)고 쓰셨다. 창가학회는 이 한 구절을 생과 사를 생명 본유의 두 모습으로 보는 법리 위에서 읽어 왔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어서 이렇게 쓰셨다. 「나의 머리는 부모의 머리, 나의 발은 부모의 발, 나의 열 손가락은 부모의 열 손가락, 나의 입은 부모의 입이다. 비유하면 씨와 열매, 몸과 그림자와 같다(我が頭は父母の頭・我が足は父母の足・我が十指は父母の十指・我が口は父母の口なり、譬えば種子と菓子と身と影との如し)」(977쪽). 아들이 법화경을 행하면 그 공덕이 그대로 어머니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두 해 뒤인 1278년 2월, 조닌은 청부 일곱 꿰미를 미노부로 보냈다. 대성인은 「시문불승의」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으셨다. 「청부 일곱 꿰미를 시모우사에서 가이로 보내셨다. 그 뜻은 어머니의 삼 년째에 해당하는 효양이다(青鳧七結下州より甲州に送らる其の御志悲母の第三年に相当る御孝養なり)」(982쪽). 어머니의 삼회기였다.

잊고 간 지경

조닌은 미노부에서 어머니의 추선을 마치고 오래 대성인의 가르침을 받은 뒤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늘 지니고 다니던 경(持經)을 암실에 놓고 갔다. 대성인은 사자 편에 그것을 돌려보내시며 이렇게 쓰셨다.

夫れ槃特尊者は名を忘る此れ閻浮第一の好く忘るる者なり今常忍上人は持経を忘る日本第一の好く忘るるの仁か

저 반특 존자는 자기 이름을 잊었다. 이는 염부제 제일의 잘 잊는 사람이다. 이제 조닌 상인은 지경을 잊었다. 일본 제일의 잘 잊는 사람인가.

「망지경사」, 976쪽

주리반특은 부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둔해 자기 이름도 잊었다는 사람이다. 어머니를 여의고 천 리 길을 걸어온 예순의 제자에게, 대성인은 「일본 제일의 잘 잊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 그리고 그를 「조닌 상인(常忍上人)」이라 부르셨다. 놀림 속에 위로가 있다. 이 편지의 제목 「망지경사」는 이 일에서 나왔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 편지에서 잘 잊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경을 잊는 것과 법을 잊는 것을 가르셨다. 지경은 잊어도 법은 잊지 말라는 것이었으리라.

봄날 깊은 산골짜기의 초가 암자, 아무도 없는 툇마루 위에 천으로 싼 두루마리 하나, 맑은 개울 건너 골짜기 길 굽이로 사라져 가는 작은 뒷모습, 삼나무 숲과 벚꽃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9 · 잊고 간 경
  1. 1275.2홑옷「齢九旬」
  2. 1276.2 하순어머니 사망
  3. 1276.3미노부 참배 · 유골 안치
  4. 하산 · 지경을 잊음
  5. 1276.3「망지경사」
지도: 시모우사 와카미야와 가이 미노부를 잇는 점선 왕복 길 「往復千里」. 경로는 약도.往復千里가이 미노부시모우사 와카미야
경로는 약도 — 무사시 · 사가미 또는 가이 길 · 사람은 그리지 않고 길만
도표 25 · 천 리의 길

도키 아마고젠 —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활의 힘」

1275 — 1279 · 아내의 병

조닌의 첫 아내는 오타 조묘의 누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뒤에 맞은 아내가 대성인이 「아마고젠(尼御前)」이라 부르신 묘조(妙常)다. 그녀는 스루가국 후지군 오모스에서 태어나 처음 이요노카미 다치바나노 사다토키(橘定時)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이 곧 세상을 떠나 조닌에게 다시 시집왔다고 전한다. 그때 데려온 아들이 이요보 닛초다. 조닌이 입도할 때 그녀도 머리를 깎아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1276년 3월, 조닌이 어머니의 유골을 모시고 미노부에 올랐을 때, 대성인은 돌아가는 조닌 편에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부목니어전어반사(富木尼御前御返事)」다.

やのはしる事は弓のちから・くものゆくことはりうのちから、をとこのしわざはめのちからなり、いまときどののこれへ御わたりある事尼ごぜんの御力なり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활의 힘이요, 구름이 가는 것은 용의 힘이다. 남편이 하는 일은 아내의 힘이다. 지금 도키 님이 이곳에 오신 것은 비구니 부인의 힘이다.

「부목니어전어반사」, 975쪽

그리고 조닌이 대성인 앞에서 한 이야기를 전하셨다.

ときどのの御物がたり候はこのはわのなげきのなかにりんずうのよくをはせしと尼がよくあたりかんびやうせし事のうれしさいつのよにわするべしともをぼえずと・よろこばれ候なり

도키 님이 이야기하시기를, 이번 어머니를 잃은 슬픔 가운데서도 임종이 좋으셨던 것과 아내가 잘 대하고 간병해 준 것의 기쁨은 어느 세상에서 잊을 수 있을까 싶다며 기뻐하셨다.

「부목니어전어반사」, 975쪽

대성인은 이어서 「연기를 보면 불을 보고, 비를 보면 용을 본다. 남편을 보면 아내를 본다. 지금 도키 님을 만나니 비구니 부인을 뵙는 것 같다(けぶりをみれば火をみるあめをみればりうをみる、をとこをみればめをみる、今ときどのにけさんつかまつれば尼ごぜんをみたてまつるとをぼう)」(975쪽)고 하셨다. 조닌의 어머니를 끝까지 돌본 것은 이 며느리였다. 대성인은 「비구니 부인도 또한 법화경의 행자다(尼ごぜん又法華経の行者なり)」(975쪽)라고 하셨다.

아내의 병과 「가연정업서」

그러나 그 아내 자신이 1275년 무렵부터 병을 앓고 있었다. 같은 편지에서 대성인은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병환이다. 부디 앞으로 삼 년은 처음처럼 뜸 치료를 하시라」고 하시고, 「법화경의 행자이니 비업의 죽음은 없을 것이다. 설마 업병은 아닐 것이다. 설령 업병이라 해도 법화경의 힘이 믿음직하다(法華経の行者なり非業の死にはあるべからずよも業病にては候はじ、設い業病なりとも法華経の御力たのもし)」(975쪽)고 격려하셨다.

병은 낫다 도지기를 거듭했다. 대성인이 아내에게 보내신 「가연정업서(可延定業書)」는 정해진 업(定業)조차 늘릴 수 있다는 글이다.

夫れ病に二あり一には軽病二には重病・重病すら善医に値うて急に対治すれば命猶存す何に況や軽病をや、業に二あり一には定業二には不定業、定業すら能く能く懺悔すれば必ず消滅す何に況や不定業をや

무릇 병에는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가벼운 병, 둘은 무거운 병이다. 무거운 병조차 좋은 의사를 만나 서둘러 다스리면 목숨이 오히려 남는다. 하물며 가벼운 병이야. 업에는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정업, 둘은 부정업이다. 정업조차 잘 참회하면 반드시 사라진다. 하물며 부정업이야.

「가연정업서」, 985쪽

대성인은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 기원하여 네 해의 수명을 늘렸던 일을 드시고(니치렌 대성인 편 9절), 「시험 삼아 법화경의 신심을 세워 보라(心みに法華経の信心を立てて御らむあるべし)」(985쪽)고 하셨다. 그리고 좋은 의사가 있다며 시조 긴고를 권하셨다. 「게다가 좋은 의사가 있다. 나카쓰카사 사부로자에몬노조 님은 법화경의 행자다(しかも善医あり中務三郎左衛門尉殿は法華経の行者なり)」(985쪽). 시모우사의 아내와 가마쿠라의 의사를 잇는 일도 대성인이 하셨다.

이 편지에는 조닌의 모습도 나온다.

富木殿も此の尼ごぜんをこそ杖柱とも恃たるになんど申して候いしなり随分にわび候いしぞ・きわめて・まけじだましの人にて我がかたの事をば大事と申す人なり

도키 님도 「이 아내를 지팡이요 기둥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하고 말하며 몹시 걱정했다. 몹시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자기 쪽 일을 대단히 여기는 사람이다.

「가연정업서」, 986쪽

「지기 싫어하는 사람(まけじだましの人)」. 대성인은 조닌의 성격을 이렇게 꿰뚫어 보셨다. 그리고 아내에게, 그런 남편이 하는 말에 기대어 치료를 미루지 말고 몸의 재물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다. 「하루의 목숨은 삼천계의 재물보다 귀하다(一日の命は三千界の財にもすぎて候なり)」, 「아, 아까운 목숨이여, 아까운 목숨이여(あらをしの命や・をしの命や)」(986쪽). 끝에는 「이요 님도 무척 한탄하니 일월천에 자아게를 올리겠다(いよどのもあながちになげき候へば日月天に自我偈をあて候はんずるなり)」(986쪽)고 적으셨다. 아들 닛초도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1279년 무렵 병이 다시 도지자 대성인은 「비구니 부인의 병환은 내 몸의 일로 여겨 밤낮으로 하늘에 아뢰고 있다(尼ごぜんの御所労の御事我身一身の上とをもひ候へば昼夜に天に申し候なり)」(978쪽, 2차 확인)고 쓰셨다.

규슈로 떠나는 남자들

1276년의 「부목니어전어반사」에는 또 하나의 풍경이 있다. 몽골의 방비를 위해 규슈로 내려가는 무사들과 남겨진 처자의 이별이다.

当時つくしへむかへばとどまるめこゆくをとこ、はなるるときはかわをはぐがごとくかをと・かをとをとりあわせ目と目とをあわせてなげきしが……うちそうものはなみだなりともなうものはなげきなり

지금 쓰쿠시로 향하니, 남는 처자와 가는 남자가 헤어질 때는 가죽을 벗기는 듯,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눈과 눈을 맞추며 한탄했는데 …… 따라붙는 것은 눈물이요, 함께 가는 것은 한탄이다.

「부목니어전어반사」, 975쪽

조닌의 주군 요리타네가 히젠으로 내려갔고, 그의 동료들도 많이 떠났다. 와카미야의 이웃에도 이런 이별이 있었을 것이다. 대성인은 그 슬픔을 시모우사의 한 여인에게 적어 보내셨다.

1279년 9월, 대성인은 이 아내에게 어본존을 수여하셨다. 닛코 상인의 옆쓰기에는 「이나바국 도키 자쿠센보 닛초의 어머니 비구니에게(因幡の国富城寂仙房日澄の母尼に)」 홍안 2년 9월에 주었다고 적혀 있다. 대성인은 또 그녀에게 「용녀의 뒤를 이어 마하파사파제 비구니의 줄에 늘어서리라(竜女があとをつぎ摩訶波闍波提比丘尼のれちにつらなるべし)」(976쪽, 2차 확인)고 쓰셨다.

위 세대렌닌 蓮忍도키 주타 뉴도 · 아버지로 봄어머니 1276.2 사망 · 「齢九旬」
조닌과 혼인도키 조닌 富木常忍1216?–1299① 오타 조묘의 누나 일찍 사망 · 오타 조묘(大田乘明)의 누나혼인② 도키 아마고젠 묘조 妙常전승오모스 출생 · 1303.11.1 사망혼인다치바나노 사다토키 橘定時사망아마고젠의 앞 혼인
아래 세대이요보 닛초 日頂1252–1317아마고젠과 사다토키의 아들 · 조닌의 의자자쿠센보 닛초 日澄1262–1310조닌과 아마고젠의 아들오토고젠 乙御前전승?–1308.2.7조닌과 아마고젠의 딸닛코 日高조닌 절의 제2대오타 조묘의 아들
혈연 혼인 의자「전승」 — 쇼린지 사전(寺傳)의 사망 날짜 · 26 · 32절
도표 26 · 도키 집안

주군의 죽음과 출가의 뜻

1274 — 1277 · 몽골 · 주군 · 어머니 · 아내

대성인이 사도로 유배된 1271년부터 1277년까지는 조닌에게 바깥으로는 몽골의 침공과 주군의 죽음, 안으로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내의 병이 겹친 여섯 해였다.

1271년 9월 진서(鎭西) 고케닌 하향 명령으로 주군 요리타네가 히젠 오기로 내려갔다. 조닌은 주군과 동료들을 규슈로 떠나보냈다. 1274년 10월 몽골군이 쳐들어왔고, 요리타네는 그 싸움에서 다쳐 이듬해 8월 오기에서 서른일곱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래 요리타네를 섬긴 조닌에게 주군의 죽음은 지바 집안 안에서의 자리마저 흔들리게 했을 것이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로써 요리타네의 측근으로 활약해 온 조닌의 처지가 바뀌었다고 본다. 이어서 1276년 2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병석에 있었다.

그해 조닌은 예순이었다. 그는 무상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1277년 3월, 닛쇼 편에 대성인께 한 통의 글을 올렸다. 「불심장(不審狀)」이라 불리는 편지다. 강의는 그 일부를 이렇게 옮긴다.

畏て言上せしめ候。受け難き人身を受け、遇い難かるの仏法に遇う事、宿業の感ずる所……適々明師に逢い奉り、法門を聴聞せしむと雖も、根性闇鈍の間所得の法門忽に忘失す。是れ謗法の先業歟、憂喜相交る者なり

삼가 아룁니다.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난 것은 숙업이 느낀 바입니다. …… 다행히 밝은 스승을 만나 뵙고 법문을 들었으나,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얻은 법문을 곧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비방의 선업(先業)일까요. 근심과 기쁨이 뒤섞입니다.

도키 조닌 「불심장」, 강의 인용 · 2차 확인

余年齢已に六旬に及ぶ。縦い長命を期すと雖も余命幾ならず、念念歩歩の所作皆以って三途の業なり。仰て仏法を信ずと雖も、若し罪業を尽さざれば悪趣に堕ちん事疑い無し

제 나이 이미 예순에 이르렀습니다. 설령 오래 산다 해도 남은 목숨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생각 생각, 걸음 걸음 하는 일이 모두 삼악도의 업입니다. 우러러 불법을 믿는다 해도, 죄업을 다하지 못하면 악도에 떨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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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길을 청했다.

唯願くは、聴聞を垂愍せられ、速に世事を捨て、蘭室に入って親近給侍し奉らんと欲す

오직 바라건대 이 청을 가엾이 들어주시어, 속히 세상일을 버리고 스승의 방에 들어 가까이 모시고 시봉하고자 합니다.

같은 글

반은 승려 반은 속인으로 살아온 조닌이 이제 참으로 출가하여 미노부의 대성인 곁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편지에는 수행에 관한 구체적인 물음도 있었다고 강의는 전한다. 관념(觀念)도 이루지 못하고 독송에 전념하려 해도 한 생각을 모으지 못하니 어떻게 수행해야 이치를 얻을 수 있는가. 오신채나 고기를 먹은 부정한 때의 수행도 허락되는가.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 물음들에서 조닌의 결벽함과 성실함을 읽는다. 재가의 생활 속에서 불도를 꿰뚫으려 할 때 생기는 문제들을, 그는 신앙을 더 엄격하게 자기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재가의 생활을 버리는 것으로 넘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시대 불법의 방식에 붙잡힌 생각이었다고 강의는 본다.

「사신오품초」의 답

이 불심장에 대한 대성인의 답이 1277년 4월 10일의 「사신오품초(四信五品抄)」라고 강의는 본다. 법화경 분별공덕품의 「사신(四信)」과 「오품(五品)」을 들어 말법 수행자의 자리를 밝힌 글이다. 글은 청부 한 꿰미에 대한 감사 다음에 곧바로 물음을 든다.

今来の学者一同の御存知に云く「在世滅後異なりと雖も法華を修行するには必ず三学を具す一を欠いても成ぜず」云云

요즈음 학자들이 한결같이 아는 바로는 「부처의 재세와 멸후가 다르다 해도, 법화경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삼학(계 · 정 · 혜)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사신오품초」, 338쪽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통설, 곧 조닌을 출가로 몰아간 그 생각이다. 대성인의 답은 분명했다.

所謂五品の初二三品には仏正しく戒定の二法を制止して一向に慧の一分に限る慧又堪ざれば信を以て慧に代え・信の一字を詮と為す

이른바 오품의 처음 둘째 셋째 품에서는 부처가 바로 계와 정의 두 법을 막고 오로지 혜의 한 부분에 한정하셨다. 혜도 감당하지 못하면 믿음으로 혜를 대신한다. 믿을 신(信) 한 글자를 요체로 삼는다.

「사신오품초」, 339쪽

檀戒等の五度を制止して一向に南無妙法蓮華経と称せしむるを一念信解初随喜の気分と為すなり是れ則ち此の経の本意なり

보시와 지계 등의 다섯 바라밀을 막고 오로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게 하는 것을 일념신해 · 초수희의 기분으로 삼는다. 이것이 곧 이 경의 본뜻이다.

「사신오품초」, 340쪽

그리고 근성이 둔하여 법문을 잊는다고 한탄한 조닌의 물음에 꼭 맞는 대목이 있다.

問う其の義を知らざる人唯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に解義の功徳を具するや否や、答う小児乳を含むに其の味を知らざれども自然に身を益す耆婆が妙薬誰か弁えて之を服せん水心無けれども火を消し火物を焼く豈覚有らんや

묻는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이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기만 해도 뜻을 아는 공덕을 갖추는가. 답한다. 어린아이는 젖을 물고 그 맛을 알지 못해도 저절로 몸에 이롭다. 기바의 묘약을 누가 알고서 먹겠는가. 물은 마음이 없어도 불을 끄고, 불은 물건을 태운다. 어찌 깨달음이 있어서이겠는가.

「사신오품초」, 341쪽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 글의 요지를 넷으로 정리한다.

세상을 버리고 계를 지키고 관법을 닦아야 성불한다는 생각은, 말대의 범부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기가 어둡고 둔하여 법문을 잊는다고 한탄하는 조닌에게, 대성인은 이해가 아니라 믿음이, 산속의 수행이 아니라 지금 자리에서 부르는 제목이 길이라고 답하셨다. 「사신오품초」의 친필에는 조닌의 글씨로 「말대 법화행자의 자리와 용심의 일(末代法華行者位並用心事)」이라는 머리글이 적혀 있다. 조닌은 이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였고, 출가로 의심을 풀려 했던 일을 돌아보았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이후의 어서에서 조닌이 출가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위기를 신심으로 넘었다.

사료 노트 — 불심장의 문장은 강의(「富木殿について」 · 「법화취요초」 서강)에 인용된 훈독문이다. 불심장이 「사신오품초」에 대한 물음이었다는 것은 강의의 견해이며, 「하산어소식」 강의는 조닌의 물음을 「법화경을 수행하려면 계 · 정 · 혜 삼학을 갖추어야 한다는 통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요약한다. 「사신오품초」 첫머리의 물음(338쪽)은 「하산어소식」 강의의 요약과 그대로 맞는다. 불심장의 한문 원문은 『中山法華経寺史料』로 대조한다(부록 C-4).

통설「法華を修行するには必ず三学を具す」 338

조닌의 물음1277.3 · 닛쇼 편 — 불심장
  • 근성이 어둡고 둔해 법문을 잊는다
  • 예순, 남은 목숨이 적다
  • 생각 생각이 삼도의 업
  • 관념도 독송도 한 생각을 모으지 못한다
  • 부정한 때의 수행
  • 세상일을 버리고 곁에서 시봉하고 싶다
대성인의 답1277.4 「사신오품초」
  • 「信を以て慧に代え・信の一字を詮と為す」 339믿음으로 혜를 대신하고, 신(信) 한 글자를 요체로 삼는다
  • 「一向に南無妙法蓮華経と称せしむる」 340오로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게 한다
  • 「小児乳を含むに其の味を知らざれども自然に身を益す」 341아이는 젖 맛을 몰라도 저절로 몸에 이롭다
  • 「我が末弟等を軽ずる事勿れ」 342나의 말제자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末代法華行者位並用心事」친필 머리글 — 조닌의 글씨

도표 27 · 불심장과 「사신오품초」
바깥
  1. 1271.9진서 하향 명령요리타네 히젠으로
  2. 1274.10분에이의 역요리타네 부상
  3. 1275.8요리타네 사망오기 · 37
대성인의 거처1271.10사도1274.5미노부
안
  1. 1275아내 발병
  2. 1275.2어머니의 홑옷
  3. 1276.2 하순어머니 사망
  4. 1276.3미노부 참배「망지경사」 · 「부목니어전어반사」
  5. 1277.3불심장「年齢已に六旬」
  6. 1277.4「사신오품초」
도표 28 · 조닌의 여섯 해 1271–1277

마마 문답 — 「니치렌의 법문은 제삼의 법문」

1278년 9월 · 10월 1일

1278년 9월, 조닌은 시모우사 마마의 학승 료쇼보(了性房)와 시넨(思念)을 상대로 법론을 벌였다. 두 사람은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은 것으로 이름난 천태종의 승려였다. 료쇼보는 마마 구호지의 주지 또는 학두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오래전부터 니치렌을 헐뜯는다고 들었다(彼の了性と思念とは年来・日蓮をそしるとうけ給わる)」(「상인초」, 982쪽)고 대성인이 쓰셨을 만큼 대성인을 비방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법론을 「마마 문답」이라 한다.

연대 대조 — 「상인초」의 해를 어서전집 本文 머리는 건치 3년(1277) 10월로 적는다. 창가교학연구실의 「상인초」 강의는 근년 화압(花押) 형태의 연구로 홍안 원년(1278)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고 하고, 「富木殿について」 · 「법화취요초」 서강도 마마 문답을 홍안 원년 9월로 적는다. 이 페이지는 1278년 9월(문답) · 10월 1일(「상인초」)로 쓰고 어서전집의 1277년을 함께 적는다.

강의에 따르면 료쇼보의 주장은 셋이었다.

조닌은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 권9하의 「권(權)을 받아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허출(虛出)이라 한다」는 문장을 들어, 법화경 본문 밖으로는 득도가 없다고 맞섰다. 료쇼보는 「전혀 그런 해석은 없다(全く以て其の釈無し)」(980쪽)고 했지만, 법론은 조닌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대성인은 뒤에 이 법론이 어떤 자리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말을 쓰셨다. 「이쪽이 졌다고라도 말해 버렸다면 어찌할 뻔했는가(此の方のまけなんども申しつけられなば・いかんがし候べき)」. 아마 공적인 자리, 그것도 윗사람 앞에서 열린 법론이었으리라고 강의는 본다.

조닌이 무사였으면서 천태의 육십 권을 들어 학승을 꺾었다는 것은, 그가 천태의 교학에 상당히 밝았음을 보여 준다. 강의는 「마마 문답은 조닌의 학해(學解)의 깊이를 유감없이 보인 것」이라고 평한다.

조닌의 보고를 받은 대성인은 곧 10월 1일 「상인초(常忍抄)」를 써 보내셨다. 이 글에서 대성인은 법론의 쟁점을 더 깊은 자리에서 가르치시고, 자신이 넓히는 법문의 자리를 이렇게 밝히셨다.

法華経と爾前と引き向えて勝劣・浅深を判ずるに当分・跨節の事に三つの様有り日蓮が法門は第三の法門なり、世間に粗夢の如く一二をば申せども第三をば申さず候、第三の法門は天台・妙楽・伝教も粗之を示せども未だ事了えず所詮末法の今に譲り与えしなり、五五百歳は是なり

법화경과 이전경을 마주 놓고 우열과 얕고 깊음을 판별하는 데 당분(當分)과 과절(跨節)에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니치렌의 법문은 제삼의 법문이다. 세간에서는 대략 꿈처럼 첫째와 둘째는 말하지만 셋째는 말하지 않는다. 제삼의 법문은 천태 · 묘락 · 전교도 대략 보였으나 아직 일을 마치지 않았다. 결국 말법의 지금에 물려준 것이다. 오오백세가 이것이다.

「상인초」, 981쪽, 2차 확인

창가학회는 이 「제삼의 법문」을 「개목초」의 종탈상대(種脫相對), 「관심본존초」의 문저하종(文底下種)과 같은 자리로 읽는다. 천태가 법화경 안에서 세운 우열의 판단을 넘어선, 말법을 위한 하종(下種)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조닌에게 주의를 주셨다.

但し此の法門の御論談は余は承らず候・彼は広学多聞の者なりはばかり・はばかり・みた・みたと候いしかば此の方のまけなんども申しつけられなば・いかんがし候べき

다만 이 법문의 논담은 나는 미리 듣지 못했다. 저쪽은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은 사람이니 조심하고 조심하라, 보고 또 보라고 했는데, 이쪽이 졌다고라도 말해 버렸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상인초」, 981쪽

此れより後は下総にては御法門候べからず了性・思念を・つめつる・上は他人と御論候わば・かへりてあさくなりなん

앞으로는 시모우사에서 법문을 논하지 말라. 료쇼 · 시넨을 몰아붙인 이상, 다른 사람과 논하면 도리어 얕아질 것이다.

「상인초」, 982쪽

이긴 제자를 칭찬하기보다 먼저 주의를 주신 것이다. 「몹시 지기 싫어하는 사람」을 잘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대성인이 첫째와 둘째 쟁점은 대성인의 근본 법문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장마(障魔)가 다투어 일어날 수 있으니 료쇼보의 법론 제의에 응하지 말라 하시고, 이미 료쇼보를 깨뜨린 이상 함부로 다른 사람과 논하면 도리어 평가가 낮아진다고 경계하셨다고 정리한다. 법론에서 진 료쇼보는 구호지를 떠났고, 그 뒤 구호지에는 조닌의 아들 이요보 닛초가 들어가 홍교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①료쇼보의 주장이전의 권교는 득도가 없다는 해석은 천태 · 묘락의 육십 권에 없다조닌의 대응『법화문구기』 권9 「稟權出界名爲虛出」 980「상인초」의 가르침寿量品の疏 · 諸宗は三界・三途を出でず 980
②료쇼보의 주장믿지 않는 것은 비방이 아니며, 믿지 않아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조닌의 대응확인 중「상인초」의 가르침법화경 제5권 「의심하여 믿지 않는 자는 악도에 떨어진다」 981 · 本文 블록은 현대어역만
③료쇼보의 주장지관을 닦는 행자는 계를 지켜야 한다조닌의 대응확인 중「상인초」의 가르침「初随喜に二有り利根の行者は持戒を兼ねたり鈍根は持戒之を制止す」 982

「日蓮が法門は第三の法門なり」* 981

당분 · 과절의 세 방식
첫째「世間に粗夢の如く」*둘째「世間に粗夢の如く」*셋째「末法の今に譲り与えし」*

「此れより後は下総にては御法門候べからず」 982

* 강의 인용 원문 · 28절
도표 29 · 마마 문답의 세 쟁점

적문불독의 소문 — 「본적의 우열은 때와 근기에 따른다」

1275년 11월 · 1279년 5월 17일

「관심본존초」에는 「일품이반(一品二半) 밖의 것은 소승교 · 사교 · 미득도교 · 복상교라 이름한다(一品二半よりの外は小乗教・邪教・未得道教・覆相教と名く)」(249쪽)는 대목이 있다. 이 글을 함께 읽은 시모우사의 사람들 가운데 이 문장을 잘못 읽어, 적문(迹門)은 득도가 없으니 읽지 않겠다고 하는 이가 나왔다. 1275년에는 소야 교신이, 1279년에는 오타 조묘 쪽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같은 시모우사에서 함께 신앙해 온 조닌은 이것을 대성인께 알리고 지도를 청했다.

1275년 11월의 「관심본존득의초(觀心本尊得意抄)」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답하셨다.

抑も今の御状に云く教信の御房・観心本尊抄の未得等の文字に付て迹門をよまじと疑心の候なる事・不相伝の僻見にて候か、去る文永年中に此の書の相伝は整足して貴辺に奉り候しが其の通りを以て御教訓有る可く候

지금 보낸 편지에 교신 스님이 「관심본존초」의 「미득(未得)」 등의 글자 때문에 적문을 읽지 않겠다고 의심을 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상전(相傳)받지 못한 잘못된 견해인가. 지난 분에이 연간에 이 글의 상전은 빠짐없이 갖추어 그대에게 드렸으니, 그대로 가르쳐 주라.

「관심본존득의초」, 972쪽

「이 글의 상전은 빠짐없이 그대에게 드렸다」. 「관심본존초」를 받은 사람으로서 조닌이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곳곳에 적문을 버리라고 쓴 것은 지금 우리가 읽는 적문이 아니라, 히에이산 천태종의 때 지난 적문을 깨뜨린 것이다(所詮・在在・処処に迹門を捨てよと書きて候事は今我等が読む所の迹門にては候はず、叡山天台宗の過時の迹を破し候なり)」(972쪽)라고 설명하셨다.

1279년 5월의 「사보살조립초」에서도 대성인은 오타 쪽 사람들의 「적문 무득도」설을 「이만저만한 잘못이 아니다(是は以ての外の謬なり)」라 하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本・迹二門の浅深・勝劣・与奪・傍正は時と機とに依るべし、一代聖教を弘むべき時に三あり機もつて爾なり、仏滅後・正法の始の五百年は一向小乗・後の五百年は権大乗・像法一千年は法華経の迹門等なり、末法の始には一向に本門なり一向に本門の時なればとて迹門を捨つべきにあらず

본문과 적문 두 문의 얕고 깊음, 우열, 여탈(與奪), 방정(傍正)은 때와 근기에 따른다. 일대성교를 넓힐 때에 셋이 있고 근기도 그러하다. 불멸 후 정법의 처음 오백 년은 오로지 소승, 뒤의 오백 년은 권대승, 상법 천 년은 법화경의 적문 등이다. 말법의 처음은 오로지 본문이다. 오로지 본문의 때라 하여 적문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보살조립초」, 989쪽

「지금의 때는 정(正)으로는 본문, 방(傍)으로는 적문이다(今の時は正には本門・傍には迹門なり)」. 그리고 대성인은 이 일을 다시 조닌에게 맡기셨다.

此の法門は年来貴辺に申し含めたる様に人人にも披露あるべき者なり総じて日蓮が弟子と云つて法華経を修行せん人人は日蓮が如くにし候へ

이 법문은 여러 해 그대에게 일러 둔 대로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한다. 대체로 니치렌의 제자라 하여 법화경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니치렌처럼 하라.

「사보살조립초」, 989쪽

조닌의 물음

같은 「사보살조립초」의 첫머리에는 조닌 자신의 물음이 적혀 있다. 본문의 교주 석존과 사보살을 조성하라는 말씀을 예전에 들었는데, 그것은 언제인가 하는 물음이다(987쪽). 대성인은 그것이 정법 · 상법의 논사들이 끝내 하지 않은 일이며, 말법이야말로 그때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니치렌은 세간으로는 일본 제일의 가난한 자이지만, 불법으로 논하면 일염부제 제일의 부자다(日蓮は世間には日本第一の貧しき者なれども仏法を以て論ずれば一閻浮提第一の富る者なり)」(988쪽)라고 쓰셨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 물음에서 조닌의 한계를 읽는다. 조닌은 이미 「관심본존초」를 받아 읽었고, 대성인이 문하에게 어본존을 수여하시던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1279년에 이런 물음을 던졌다. 강의는 조닌이 본존을 목상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보고, 예부터 조닌이 대성인의 깊은 법문을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매우 의문스럽게 여겨져 왔다고 말한다. 대성인이 그에게 중요한 글을 맡기신 까닭을 「이해」가 아니라 「보존」에서 찾는 강의의 견해(21절)는 여기서 나온다. 이 페이지는 본존의 구성에 관한 이 어서의 내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1275.11소야 교신의 소문「관심본존득의초」「不相伝の僻見」9721279.5오타 쪽의 소문「사보살조립초」「以ての外の謬なり」989
정법 앞 오백 년「一向小乗」
정법 뒤 오백 년「権大乗」
상법 천 년「法華経の迹門等」
말법의 처음「一向に本門」
正には本門傍には迹門

「此の法門は年来貴辺に申し含めたる様に人人にも披露あるべき」 989

「사보살조립초」 989 · 29절
도표 30 · 「때와 근기에 따른다」

아쓰와라와 「우리 일문」 — 1279–1280

1279년 9월 — 1280년 5월 26일

1279년 9월, 스루가 후지의 아쓰와라에서 농민 신도 스무 명이 붙잡혀 가마쿠라로 끌려갔다(니치렌 대성인 편 23절). 닛코 상인을 도와 이 땅에서 법을 넓힌 승려 닛슈(日秀)와 니치벤(日弁)은 붙잡히지는 않았으나 더는 후지에 머물 수 없었다. 대성인은 두 사람을 이요보 닛초에게 딸려 시모우사로 보내고, 조닌 부부에게 그들을 보호하게 하셨다. 11월 25일 아마고젠에게 보내신 「부목전여방니어전어서(富木殿女房尼御前御書)」는 이렇게 시작하고 맺는다.

いよ房は学生になりて候ぞつねに法門きかせ給へ。はるかに見まいらせ候はねば・をぼつかなく候、たうじとても・たのしき事は候はねども・むかしは・ことにわびしく候いし時より・やしなはれまいらせて候へば・ことにをんをもくをもいまいらせ候……さてはえち後房しもつけ房と申す僧を・いよどのにつけて候ぞ、しばらく・ふびんに・あたらせ給へと・とき殿には申させ給へ

이요보는 학승이 되었다. 늘 법문을 들으시라. 오래 뵙지 못해 궁금하다. 지금도 즐거운 일은 없지만, 옛날 특히 어렵던 때부터 길러 주셨으니 그 은혜를 특히 무겁게 여긴다. …… 그런데 에치고보 · 시모쓰케보라는 승려를 이요 님에게 딸려 보냈다. 당분간 가엾이 여겨 돌보아 달라고 도키 님께 전해 주시라.

「부목전여방니어전어서」, 990쪽

에치고보가 니치벤, 시모쓰케보가 닛슈다. 대성인은 쫓기는 제자들을 아내를 통해 남편에게 부탁하셨다. 「옛날 특히 어렵던 때부터 길러 주셨다」는 말은, 대성인이 가마쿠라의 초암에 계실 때부터 이 부부가 대성인의 살림을 돌보았음을 알려 준다.

대성인은 아쓰와라 농민들의 불석신명의 모습에서 민중이 대난을 견디는 강한 신심을 세웠음을 보시고, 10월 1일의 「성인어난사」에서 출세의 본회를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이 어서는 「사람들 가운데(人人御中)」 앞으로 쓰였다(1191쪽). 그런데 창가학회 강의는 이 대목에서 조닌에 대해 아쉬움을 적는다. 닛슈 · 니치벤을 맡아 보호한 조닌이었지만, 이 법난에는 관심이 엷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강의는 시모우사로 피한 사람들에게는 뼈에 새길 일이었으나 도키 님 이하 사람들은 그다지 중대한 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견해를 인용하고, 「조닌의 신해(信解)가 이르지 못한 면이 이런 곳에도 나타나 있을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아쓰와라 법난은 후지 쪽의 법난이었고 대성인 자신에게 닥친 난도 아니었으므로 조닌이 직접 관여하지 않은 것이며, 닛슈 · 니치벤을 맡은 것으로 옆에서 도왔다고 본다.

이듬해 1280년 5월 26일, 대성인은 조닌에게 법화경 법사품의 「난신난해(難信難解)」를 풀어 보내셨다. 받는 사람은 「도키 님 회답」이고, 뒤에 「제경과 법화경의 난이(難易)의 일」 또는 「난신난해법문」이라 불린 글이다. 대성인은 부처 멸후에 이 「난신난해」의 구절을 읽은 사람은 용수 · 천태 · 전교 세 사람뿐이라 하시고, 수자의(隨自意)와 수타의(隨他意)를 가르신 뒤 이렇게 맺으셨다.

仏法は体のごとし世間はかげのごとし体曲れば影ななめなり、幸なるは我が一門仏意に随つて自然に薩般若海に流入す、世間の学者の若きは随他意を信じて苦海に沈まんことなり

불법은 몸과 같고 세간은 그림자와 같다. 몸이 굽으면 그림자도 기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문은 부처의 뜻을 따라 저절로 일체지(薩般若)의 바다로 흘러든다. 세간의 학자들은 수타의를 믿어 괴로움의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다.

「난신난해법문」, 992쪽

「불법은 몸, 세간은 그림자」. 「관심본존초」의 「하늘이 개면 땅이 밝다」와 함께, 세법 한가운데 살던 조닌에게 거듭 주어진 가르침이다.

이케가미의 가을 — 향로를 든 사람

1281 — 1282년 10월

1281년 여름 몽골이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가 윤7월 초하루의 큰 바람으로 물러갔다. 조닌은 윤7월 15일과 10월 14일 미노부로 편지를 보냈다. 규슈에 큰 바람이 불어 포구와 섬마다 부서진 배가 가득하다는 소식, 그리고 교토에서는 시엔 상인(思圓上人, 에이손)의 기도 덕분이라고들 한다는 소식이었다. 주군 지바 씨가 히젠에 영지를 둔 가신으로서 조닌은 규슈의 일을 빨리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병중의 대성인은 10월 22일 「부성입도전어반사」를 쓰셨다.

何よりも去ぬる後の七月御状の内に云く鎮西には大風吹き候て浦浦・島島に破損の船充満の間乃至京都には思円上人・又云く理豈然らんや等云云、此の事別して此の一門の大事なり総じて日本国の凶事なり仍つて病を忍んで一端是れを申し候はん

무엇보다 지난 윤7월 편지에 「진서에는 큰 바람이 불어 포구와 섬마다 부서진 배가 가득하다. 내지 교토에서는 시엔 상인이 …」, 또 「이치가 어찌 그러하겠는가」 등이라 했는데, 이 일은 특히 이 일문의 큰일이요 대체로 일본국의 흉사다. 그래서 병을 참고 한 가지만 말하겠다.

「부성입도전어반사」, 993쪽

대성인은 조큐의 난 때 조정이 히에이산 · 도지 · 온조지 등에 막부를 저주하는 기도를 시켰으나 도리어 패했던 일을 자세히 적으시고, 이번에도 진언사들이 몽골의 배를 부순 것을 기도의 효험이라 하겠지만 「몽골의 대왕의 목이라도 왔느냐고 물으라. 그 밖에는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말라(又蒙古の大王の頸の参りて候かと問い給うべし、其の外はいかに申し候とも御返事あるべからず)」(994쪽)고 하셨다. 진언의 조복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세 번의 간효 이래의 가르침이다. 「이 일문의 사람들에게도 알리라(乃至此の一門の人人にも相触れ給ふべし)」(994쪽)는 당부도 여전했다.

편지의 끝에서 대성인은 조닌이 보낸 돈의 쓰임을 알리셨다.

予既に六十に及び候へば天台大師の御恩報じ奉らんと仕り候あひだみぐるしげに候房をひきつくろい候ときに・さくれうにおろして候なり、銭四貫をもちて一閻浮提第一の法華堂造りたりと霊山浄土に御参り候はん時は申しあげさせ給うべし

나는 이미 예순에 이르렀으니 천태대사의 은혜를 갚고자 하여, 보기 흉한 방을 고칠 때 그 공사비로 내렸다. 돈 네 관으로 일염부제 제일의 법화당을 지었다고, 영산정토에 가실 때 아뢰시라.

「부성입도전어반사」, 995쪽

스물한 해 전 와카미야에서 대성인을 맞았다는 법화당(13절)이 있었다. 이제 조닌의 돈이 미노부의 법화당이 되었다. 조닌 앞 어서 가운데 날짜가 분명한 것으로는 가장 늦은 편에 속한다.

1282년 9월 대성인은 미노부를 떠나 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집에 이르셨다. 10월 8일 본제자 여섯 사람을 정하셨는데, 그 가운데 조닌의 아들 이요보 닛초가 있었다. 10월 13일 진시, 대성인은 이케가미에서 입멸하셨다. 조닌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강의는 전한다. 모인 제자와 단나들의 독경과 창제 속이었다.

장례 행렬에서 조닌은 향로를 받들고 걸었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이렇게 쓴다. 입종 직후부터 입멸까지 약 서른 해, 조닌은 한결같이 외호의 정성을 다했다.

  1. 1253입종대성인
  2. 1253「부목전어반사」조닌 앞 어서
  3. 1255「일생성불초」조닌 앞 어서
  4. 1260안국론 · 마쓰바가야쓰대성인
  5. 1261이즈대성인
  6. 1264고마쓰바라대성인
  7. 1269「문주득의초」조닌 앞 어서
  8. 1270「마마석가불어공양축장」조닌 앞 어서
  9. 1271다쓰노구치 · 사도대성인
  10. 1271「토목전어반사」조닌 앞 어서
  11. 1271「사박어서」조닌 앞 어서
  12. 1271「부목입도전어반사」조닌 앞 어서
  13. 1272「좌도어서」조닌 앞 어서
  14. 1273「관심본존초」조닌 앞 어서
  15. 1274미노부대성인
  16. 1274「법화행자봉난사」조닌 앞 어서
  17. 1274「법화취요초」조닌 앞 어서
  18. 1275「관심본존득의초」조닌 앞 어서
  19. 1276「망지경사」조닌 앞 어서
  20. 1277「사신오품초」조닌 앞 어서
  21. 1278「상인초」조닌 앞 어서
  22. 1279아쓰와라대성인
  23. 1279「사보살조립초」조닌 앞 어서
  24. 1280「난신난해법문」조닌 앞 어서
  25. 1281「부성입도전어반사」조닌 앞 어서
  26. 1282입멸대성인
  27. 1282.10.13향로를 받듦
윗줄 대성인 · 아랫줄 조닌 앞 주요 어서 · 끝점 1282.10.13 「향로를 받듦」 · 31절
도표 31 · 대성인과 조닌의 서른 해

미노부 시대의 조닌은 기쁨만 안은 제자가 아니었다. 주군을 잃고, 어머니를 보내고, 병든 아내를 지켰으며, 예순에 자신의 둔함을 한탄했다. 대성인은 그때마다 그에게 답하셨다. 출가하여 산에 들고 싶다는 그에게는 「믿음」과 「제목」을, 법론에 이겨 들뜬 그에게는 「앞으로 시모우사에서 법문을 논하지 말라」는 주의를, 지경을 잊고 간 그에게는 「일본 제일의 잘 잊는 사람」이라는 웃음을 주셨다. 창가학회는 이 편지들에서 한 사람의 제자를 끝까지 놓지 않는 스승의 자세를 배운다.

6부 어서를 지킨 사람

두 아들과 한 딸

1252 — 1317 · 이요보 닛초 · 자쿠센보 닛초 · 오토고젠

조닌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고 본다. 아들 둘과 딸 하나다. 닛코 상인이 1278년의 어본존에 적은 「도키 고로 뉴도의 아들 이요보 닛초의 아우 자쿠센보」라는 옆쓰기(4절), 그리고 대석사 제17세 닛세이(日精)의 『후지 문가 중견문(富士門家中見聞)』의 「고로 뉴도 조닌, 뒤에 니치조라 함. 아들 둘, 형은 이요 아자리 닛초(日頂)로 고조(高祖)의 직제자 여섯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다음은 자쿠센보 닛초(日澄)다」라는 기록이 그 근거다.

이요보 닛초(伊與房日頂)

닛초는 1252년 스루가국 오모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요노카미 다치바나노 사다토키였고,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가 조닌에게 다시 시집오면서 조닌의 의자(義子)가 되었다고 전한다. 1267년 대성인의 제자가 되었고, 1270년 조닌이 마마 구호지에 석가불을 조성했을 때 대성인은 「개안은 서둘러 이요보에게 맡겨 마치게 하라」(950쪽)고 하셨다. 1273년에는 사도에서 대성인을 모셨다. 대성인은 「이요보는 그릇이 큰 사람이다(伊与房は機量物にて候ぞ)」(963쪽, 2차 확인)라고 쓰셨다.

대성인이 미노부에 드신 뒤 닛초는 마마 구호지에 살며 미노부와 시모우사를 오가며 활동했다. 1279년 11월의 「부목전여방니어전어서」에서 대성인은 「이요보는 학승(學生)이 되었다. 늘 법문을 들으시라(いよ房は学生になりて候ぞつねに法門きかせ給へ)」(990쪽)고 어머니에게 쓰셨다(30절). 시모우사의 지도자로 큰 신뢰를 두신 것이다. 1282년 10월 8일, 대성인은 입멸을 앞두고 본제자 여섯 사람을 정하셨고, 닛초는 그 하나였다.

대성인 입멸 뒤 닛초의 행보에 대해 창가학회 강의는 엄하게 적는다. 묘소를 차례로 지키는 일에 응하지 않았고, 대성인의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닛초는 아버지 조닌에게서 의절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33절), 1302년 마마를 떠나 먼저 후지로 옮겨 가 있던 아우 자쿠센보를 의지해 오모스로 가서 닛코 상인께 귀복했다. 만년에는 오모스에 쇼린지(正林寺)를 세워 살았고, 1317년 3월 8일 예순여섯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쿠센보 닛초(寂仙房日澄)

자쿠센보는 1262년 시모우사 와카미야에서 태어났다. 조닌과 아마고젠 사이의 아들이다. 어려서 민부 닛코(日向)의 제자로 출가했고, 대성인에게서 닛초(日澄)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닛코 상인이 미노부를 떠난 뒤 스승 닛코(日向)를 따라 미노부에 올랐으나, 에이닌 연간(1293–99)에 가이의 지두가 새 불당을 짓고 석존 한 분의 불상을 모신 일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닛코 상인을 찾아가 대성인이 세우신 바른 뜻을 듣고 그것을 자기의 뜻으로 삼았다. 1300년 닛코(日向)가 그 불당과 불상을 개안 공양하자 스승과 갈라서 후지 오모스로 가서 닛코 상인께 귀복했다.

이후 그는 닛코 상인 곁에서 교학을 일으켰고, 1302년 오모스 담소(談所)의 초대 학두(學頭)가 되었다. 1309년에는 닛코 상인의 명으로 「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의 초안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 문서가 바로 「관심본존초」 · 「법화취요초」 · 「사신오품초」가 아버지 조닌에게 주어졌고 그 정본이 그의 거처에 있다고 적은 글이다. 아들이 아버지가 받은 어서를 기록한 셈이다. 『일순 아자리 혈맥(日順阿闍梨血脈)』은 그를 「혜안이 밝아 오천여 권을 두루 알고,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십종의 법수를 다 헤아렸다」고 기렸다. 1310년 3월 14일, 마흔아홉으로 오모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토고젠과 아마고젠의 귀향

딸은 오토고젠(乙御前)이라 불렸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후지 문가 중견문』은 「어머니 묘조와 오토고젠, 모자 형제 네 사람이 후지로 옮겨 여기서 생을 마쳤다」고 적는다. 자쿠센보가 먼저 후지로 옮기자 그를 의지해 어머니와 누이도, 그리고 형 닛초도 닛코 상인께 귀복했다고 강의는 본다. 아마고젠은 고향 오모스로 돌아가 1303년 11월 1일, 오토고젠은 1308년 2월 7일 세상을 떠났다고 쇼린지의 사전(寺傳)은 전한다. 이 오토고젠을 대성인이 「일묘성인」이라 부르신 여인의 딸 오토고젠과 같은 사람으로, 곧 일묘가 조닌과 재혼한 아마고젠이라고 보는 설도 있으나, 강의는 어서로 보아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라고 본다.

  1. 1252닛초 출생(오모스)이요보 닛초
  2. 1262자쿠센보 출생(와카미야)자쿠센보 닛초
  3. 1267닛초 입문이요보 닛초
  4. 1273닛초 사도에서 시봉이요보 닛초
  5. 1278.8어본존 옆쓰기(가족 관계의 사료)이요보 닛초
  6. 1279.9아마고젠에게 어본존(옆쓰기)아마고젠
  7. 1282.10.8닛초 본제자이요보 닛초
  8. 1300자쿠센보 닛코 상인께 귀복자쿠센보 닛초
  9. 1302자쿠센보 오모스 담소 학두자쿠센보 닛초
  10. 1302닛초 오모스로이요보 닛초
  11. 1303.11.1아마고젠 사망아마고젠 · 전승(사전)
  12. 1308.2.7오토고젠 사망오토고젠 · 전승(사전)
  13. 1309「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 초안자쿠센보 닛초
  14. 1310.3.14자쿠센보 사망자쿠센보 닛초
  15. 1317.3.8닛초 사망이요보 닛초
「전승」 — 쇼린지 사전(寺傳)의 날짜 · 32절
도표 32 · 가족의 뒤

홋케지 — 니치조의 만년

1282 — 1299 · 와카미야

대성인 입멸 뒤 시모우사의 신앙 활동은 본제자의 한 사람인 이요보 닛초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에이닌 초년(1293 무렵), 조닌은 닛초를 의절하고 시모우사에서 내보냈다.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나카야마 출신의 닛신(日親)이 쓴 『전등초(傳燈抄)』는 와카미야에서 열린 대성인의 삼회기 법요에 닛초가 종론 때문이라고는 하나 늦게 왔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삼회기는 1284년이므로 십삼회기의 잘못일 수도 있다. 게이초 말년 무렵의 기록 「상사행장 · 삼사초조(常師行狀 · 三寺初祖)」는 구호지의 속별당 오이카와 무네히데가 자기 아들을 구호지의 주지로 삼으려고 「닛초가 진언승과 가까이하며 구호지의 근행을 소홀히 한다」고 조닌에게 참언했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닛초를 내보낸 조닌은 스스로 시모우사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그는 니치조(日常)라 이름하고, 자기 관 안의 지불당을 고쳐 홋케지(法華寺)라 하고 그 주지가 되었다. 어머니가 머물던 지불당, 마쓰바가야쓰 뒤 대성인을 맞았다는 법화당이 절이 된 것이다.

창가학회 강의는 이 무렵의 조닌을 아쉬움과 함께 적는다. 만년의 조닌은 대성인의 가르침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닛코 상인에게서도 멀어져 자신의 문류를 이루었고, 이것이 나카야마 문류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법화취요초」 강의는 「아깝게도 만년에 아들 닛초 · 자쿠센보와 결별하고, 대성인 법문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홋케지 등의 관리를 맡겼다」고 쓴다. 강의는 조닌의 이런 길을, 그가 대성인의 깊은 법문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신해(信解)의 한계(29 · 30절)와 잇는다. 이 페이지는 이 평가를 적는 데 그치고, 그 뒤 나카야마 문류의 역사와 교의는 다루지 않는다.

조닌이 세운 와카미야의 홋케지는 조닌의 절을 이은 닛코(日高)가 나카야마 오타 집안의 땅에 세운 혼묘지(本妙寺)와 뒤에 하나로 합쳐졌다. 이것이 지금의 나카야마 법화경사(中山法華經寺)다. 닛코(日高)는 오타 조묘의 아들로, 조닌의 첫 아내의 조카다. 법화경사는 조닌을 개조(開祖)로 받든다.

와카미야지불당도키 집안 관 · 어머니법화당전승1260 대성인 체재홋케지조닌 = 니치조, 만년
나카야마오타 집안의 땅혼묘지닛코(日高)
확인 중나카야마 법화경사
이은 사람제2대 닛코(日高)오타 조묘의 아들제3대 닛유(日祐)
도표 33 · 와카미야의 지불당에서 나카야마 법화경사까지

「성교는 절 밖으로 내지 말라」 — 1299년 3월

1299년 3월 4일 · 6일 · 20일 · 에이닌 7년

그러나 만년의 조닌이 온 힘을 쏟은 일이 하나 있었다. 대성인의 어서를 지키는 일이다. 강의에 따르면 그는 대성인의 친필 어서는 습기를 생각하여 바람이 잘 통하는 가죽 상자(皮籠)에 넣고, 사본들은 보존에 알맞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었다.

1299년(에이닌 7년) 3월 4일, 세상을 떠나기 보름 남짓 전, 조닌은 홋케지에 지켜 온 성교의 보존에 관한 치키문(置文)을 정했다. 「정해 두는 조목들(定め置く条条の事)」이라는 제목의 「니치조 치키문」이다. 그 첫째와 둘째 조목은 이렇다.

一、聖人の御書並びに六十巻以下の聖教等、寺内を出す可からざる事。
右、聖教を惜む事は法慳に似たりと雖も、借失するに至っては尚彼よりも甚し、よって何なる大事有りと雖も、当寺の困外に出す事、一向に之を停止すべし。但し至要の時は、道場に於いて之を被見する事は制の限りに非ず。聖教目録別紙之有り。
一、聖教殿居の事。
日常存生の時の如く、一分の懈怠も無く之を勤めらるべし。

하나, 성인의 어서와 육십 권 이하의 성교 등은 절 안에서 내보내지 말 것.

이 말인즉, 성교를 아끼는 것은 법을 아끼는 인색(法慳)과 비슷하지만, 빌려주었다가 잃게 되면 그보다 더 심하다. 그러므로 어떤 큰일이 있어도 이 절의 울타리 밖으로 내는 일을 전부 그만두어야 한다. 다만 아주 긴요할 때 도량에서 펴 보는 것은 막는 범위에 들지 않는다. 성교 목록은 따로 있다.

하나, 성교를 지키며 숙직하는 일.

니치조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조금도 게으름 없이 이것을 행하라.

도키 조닌 「니치조 치키문」, 1299.3.4, 강의 인용 · 2차 확인

어서를 빌려주지 않는 것이 법을 아끼는 인색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빌려주었다가 잃는 것은 그보다 무거운 죄라고 했다. 그리고 「성교전(聖教殿)」을 지키는 숙직을 자기가 살아 있을 때처럼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다. 강의는 이 조문에서 대성인의 어서를 후세에 전하는 일에 대한 조닌의 강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읽는다.

밤의 작은 절 창고, 나무 선반 위에 끈으로 묶은 가죽 상자와 오동나무 상자가 가지런히 놓이고, 문 곁 바닥에 등잔 하나와 접어 둔 짚자리, 열린 문 너머 툇마루와 소나무 위의 둥근 달을 그린 금박 수묵화
그림 10 · 가죽 상자의 숙직

이틀 뒤인 3월 6일, 조닌은 홋케지에 있는 성교의 목록을 만들었다. 「조슈인 본존성교사(常修院本尊聖教事)」다. 강의에 따르면 그 짜임은 이렇다.

목록의 첫 줄에 「관심본존초」가 있다. 스물여섯 해 전 송장과 함께 받은 그 글이다. 강의는 조닌이 이토록 사명감을 가지고 어서를 지킨 것은 대성인 자신에게서 그런 지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고, 그 근거로 사도에서 온 첫 편지의 한 줄을 든다. 「그대에게 일러 둔 일체경의 요문과 『대지도론』의 요문 다섯 책을 한곳에 모아 두라. 그 밖의 논과 석의 요문도 흩어지지 않게 하라」(955쪽, 18절).

치키문과 목록을 남긴 뒤 조닌은 「이 절과 본존 · 성교는 소치(帥) 님께 맡기고, 구호지는 효부 아자리에게 맡긴다」고 하여 뒷일을 닛코(日高)와 니치요(日陽)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1299년 3월 20일, 여든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대 대조 — 입적일은 3월 20일(「富木殿について」 · 「법화취요초」 서강 2)과 3월 26일(『본화별두불조통기』를 인용한 「법화취요초」 서강 1)의 두 기록이 있다. 해도 「에이닌 7년(1299)」으로 적은 곳과 연호를 「쇼안 원년」으로 적은 곳이 있는데, 에이닌 7년은 4월 25일에 쇼안으로 바뀌었으므로 3월이면 에이닌 7년이 맞다. 「富木殿について」에는 「1298」로 잘못 적힌 곳이 있다. 이 페이지는 1299년 3월 20일로 쓴다.

  1. 1299.3.4치키문 「寺内を出す可からざる事」* · 「聖教殿居の事」*
  2. 3.6목록
  3. 3.20입적(84)
1299.3.6 목록
「大聖人御自筆」*대성인의 친필 — 주로 조닌 일가가 받은 것
  • 「御自筆皮籠」*観心本尊抄一帖 · 法華取要抄一巻 · 要文集等五帖
  • 「巻物分」*13통
  • 「御消息分」*54통
「写本」*사본 — 조닌이 모으고 보존해 온 것
  • 「御書箱」*立正安国論一巻 · 開目抄上下二帖 등 一巻十六帖 · 本尊問答抄 · 下山御消息 사본 포함
  • 「要文箱」*20종

가죽 상자 — 바람이 통함 · 친필 오동나무 상자 — 사본

* 강의 인용 원문 · 본존 관련 항목은 이름만 · 34절
도표 34 · 「조슈인 본존성교사」의 짜임

칠백 년의 보존

1299 — 지금 · 나카야마 법화경사

조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유언은 지켜졌다. 제2대 닛코(日高), 제3대 닛유가 대성인의 어서를 모으고 보존하는 데 마음을 썼다. 그래서 지금 나카야마 법화경사에는 「관심본존초」를 비롯해 쉰 편이 넘는 대성인의 친필 어서가 전한다. 「관심본존초」와 「입정안국론」의 친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관심본존초」는 열일곱 장의 한문으로, 송장과 함께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은 곳에 있다. 창가학회판 어서전집의 「입정안국론」은 나카야마 법화경사에 있는 대성인의 사본(1269년 12월 8일)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강의는 밝힌다. 「법화행자봉난사」 · 「난신난해법문」의 친필도 이곳에 있다. 도키 · 오타 · 소야 등 시모우사의 단나들이 받은 어서의 친필이 많이 남은 것은 조닌의 공적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대성인의 요문 책자 뒷면에 남은 성교지배문서도 함께 남았다. 조닌의 업무 문서가 대성인의 공부에 쓰이고, 그 책자를 조닌이 다시 지켰기에, 앞면의 대성인 글씨도 뒷면의 13세기 지바 씨 행정 문서도 함께 오늘에 이르렀다. 연구자들에게 이 문서들은 가마쿠라 시대 동국 수호의 행정을 알려 주는 드문 사료가 되었다.

이 보존이 얼마나 드문 일이었는지는 다른 쪽과 견주면 보인다. 대성인 입멸 뒤, 문하 가운데는 대성인이 가나(仮名)로 써 주신 편지를 스승의 수치가 된다며 태우거나 다시 떠서 종이로 쓴 이들도 있었다고 「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는 전한다. 강의는 그런 가운데서 조닌이 굳게 어서를 지켜 냈다고 쓴다. 강의는 만년의 조닌과 그의 절이 걸은 길에 대해서는 엄하지만, 이 한 가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한다. 「이 한 점에 관해서는 조닌의 호법(護法)의 큰 공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1. 1273.4.26「관심본존초」 와카미야에 도착
  2. 1299.3치키문 · 목록조닌
  3. 1309「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正本は彼の在所に在り」
  4. 확인 중제2대 닛코(日高) · 제3대 닛유수집과 보존
  5. 1967(근대) 성교지배문서 해독1967 공개(강의)
  6. 국보「관심본존초」 · 「입정안국론」
  7. 지금나카야마 법화경사 쇼교덴(聖教殿)
점선 칸 — 1309 와 1967 사이의 긴 구간(확인 중) · 35절
도표 35 · 칠백 년

대성인이 본 조닌

어서 속의 도키 조닌

대성인은 서른 해 가까이 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그 편지들 속의 조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대성인이 그를 부르신 말과 그에게 맡기신 일을 모으면 그 모습이 보인다.

맡기신 사람. 「그대에게 일러 둔 요문을 한곳에 모아 두라」(955), 「옥에 갇힌 승려들에게 서둘러 이것을 들려주라」(954), 「무이의 뜻이 보이면 이것을 열어 보이라」(255), 「이 글의 상전은 빠짐없이 그대에게 드렸으니 그대로 가르쳐 주라」(972), 「여러 해 그대에게 일러 둔 대로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한다」(989). 대성인은 그에게 책을, 편지를, 법문을, 사람들을 맡기셨다.

함께 읽는 자리의 첫 이름. 「이 글은 도키 님 쪽 …」(956), 「도키 님 등 사람들 가운데」(139), 「도키 · 사부로자에몬노조 · 가와노베 · 야마토 아자리 등 … 서로 읽어 들려 드려라」(965). 문하 전체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이름은 맨 앞에 있다.

성격을 아신 사람. 「몹시 지기 싫어하는 사람(きわめて・まけじだましの人)」(986). 법론에 이긴 그에게는 「앞으로 시모우사에서 법문을 논하지 말라」(982)고, 사면 운동에 나선 문하에게는 「사면을 바라는 기색을 드러내는 제자는 불효」(139)라고 하셨다.

웃게 하신 사람. 「일본 제일의 잘 잊는 사람인가」(976). 그리고 같은 편지에서 그를 「조닌 상인」이라 부르셨다.

마음을 받으신 사람. 「나이 아흔에 이른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신 것」(968), 「이 소매옷을 입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972), 「남편이 하는 일은 아내의 힘」(975).

창가학회 강의는 대성인과 조닌의 관계를 두 면으로 본다. 하나는 깊은 신뢰다. 대성인은 자신의 내증을 밝히실 때 먼저 그에게 내시하셨고(22절), 가장 중요한 글을 그에게 맡기셨다. 또 하나는 정직한 평가다. 조닌이 대성인의 깊은 법문을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며(29절), 만년의 길은 대성인의 뜻에서 멀어졌다(33절). 그러나 강의는 그 둘을 따로 떼지 않는다. 대성인은 이해의 깊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와 성실함을 보고 사명을 주셨고, 조닌은 그 사명, 곧 어서를 후세에 전하는 일만큼은 끝까지 완수했다는 것이다.

①맡기신 사람
  • 「又貴辺に申付し一切経の要文智論の要文五帖一処に取り集め被る可く候」「부목입도전어반사」 · 955쪽
  • 「便宜の時早早之を聴かす可し」「사박어서」 · 954쪽
  • 「無二の志を見ば之を開拆せらる可きか」「관심본존초 송장」 · 255쪽
  • 「此の書の相伝は整足して貴辺に奉り候しが其の通りを以て御教訓有る可く候」「관심본존득의초」 · 972쪽
  • 「此の法門は年来貴辺に申し含めたる様に人人にも披露あるべき者なり」「사보살조립초」 · 989쪽
②함께 읽는 자리의 첫 이름
  • 「此文は富木殿のかた」「좌도어서」 · 956쪽
  • 「土木殿等の人人御中」「진언제종위목」 · 139쪽
  • 「富木・三郎左衛門の尉・河野辺・大和阿闍梨等・殿原・御房達各各互に読聞けまいらせさせ給え」「법화행자봉난사」 · 965쪽
③성격을 아신 사람
  • 「きわめて・まけじだましの人」「가연정업서」 · 986쪽
  • 「此れより後は下総にては御法門候べからず」「상인초」 · 982쪽
  • 「日蓮が御免を蒙らんと欲するの事を色に出す弟子は不孝の者なり」「진언제종위목」 · 139쪽
④웃게 하신 사람
  • 「日本第一の好く忘るるの仁か」「망지경사」 · 976쪽
  • 「常忍上人」「망지경사」 · 976쪽
⑤마음을 받으신 사람
  • 「齢九旬にいたれる悲母の愛子にこれをまいらせさせ給える」「부목전어반사」 · 968쪽
  • 「此の小袖を著ては思い有る可からず候なり」「관심본존득의초」 · 972쪽
  • 「をとこのしわざはめのちからなり」「부목니어전어반사」 · 975쪽
대성인이 쓰신 성씨 표기 셋富木 · 土木 · 富城
도표 36 · 대성인이 조닌을 부르신 말

세 층의 도키 조닌

이 페이지는 도키 조닌을 세 층으로 읽었다.

누구인가
역사의 조닌1216?–1299, 이나바 도키 장의 본주 집안에서 나 시모우사 와카미야에 산 무사 · 수호 지바노스케 요리타네의 피관, 집사의 자리
문하의 조닌대성인의 가장 오래된 재가 단나 · 시모우사 문하의 중심 · 시조 긴고와 나란한 외호의 두 날개
어서를 지킨 조닌홋케지의 니치조 · 나카야마 법화경사의 개조로 받들어지는 사람
무엇을 했는가
역사의 조닌막부의 통지를 받고 주군께 아뢰고 소송과 양도를 처리함 · 이나바의 하인을 둘러싼 소장
문하의 조닌대성인을 집에 모심 · 이웃을 신앙으로 이끎 · 공양 · 편지를 받아 문하에게 읽힘 · 마마 문답
어서를 지킨 조닌치키문 「寺内を出す可からざる事」 · 목록 「조슈인 본존성교사」 · 성교전의 숙직
무엇을 받았는가
역사의 조닌주군의 신임과 수호소의 실무
문하의 조닌「일생성불초」 · 사도기의 편지 열두 편 · 「관심본존초」 · 「법화취요초」 · 「사신오품초」 · 「상인초」 등 마흔 편 넘는 어서
어서를 지킨 조닌「그대에게 일러 둔 요문을 한곳에 모아 두라」는 부탁
무엇을 남겼는가
역사의 조닌성교지배문서 — 13세기 수호 행정의 드문 사료
문하의 조닌「쌍벽」의 한 사람으로서의 외호 · 어머니와 아내와 주고받은 이야기
어서를 지킨 조닌국보 「관심본존초」 · 「입정안국론」을 비롯한 쉰 편 넘는 친필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의 조닌세상의 일과 불법의 일이 한 장의 종이 앞뒤처럼 붙어 있음 · 「법화를 아는 이는 세법을 얻는다」
문하의 조닌둔함을 한탄한 예순의 제자에게 주어진 답 — 이해가 아니라 믿음, 산이 아니라 지금 자리
어서를 지킨 조닌받은 것을 잃지 않고 전하는 일 · 신해의 한계와 사명의 완수가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음

세 층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역사의 조닌을 알수록, 대성인의 편지가 왜 이 사람에게 먼저 갔는지가 보인다. 그는 문서를 다루는 사람이었고, 가마쿠라와 시모우사를 오가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을 모으는 사람이었다. 문하의 조닌을 알수록, 그 편지들이 한 사람의 삶의 고비마다 닿아 있었음이 보인다. 주군을 잃고 어머니를 보내고 아내의 병을 지키며 예순에 길을 묻던 사람에게, 대성인은 그때마다 답하셨다. 그리고 어서를 지킨 조닌을 알수록, 우리가 지금 「관심본존초」의 친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이 보인다. 대성인은 사도의 눈 속에서 「일념삼천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부처가 다섯 자 안에 이 구슬을 싸서 말대의 어린아이의 목에 걸어 주신다」고 쓰셨다. 그 구슬을 싼 글을 칠백 년 동안 담아 온 가죽 상자의 첫 주인이 도키 조닌이었다.

생애의 연대는 아래 연표에 모았다.

  1. 1216—출생『본화별두불조통기』 향년에서 역산 · 1220설도 · 전승
  2. 1239—지바노스케 요리타네 출생조닌의 주군
  3. 12476월호지 합전좌도어서 957
  4. 1250무렵아버지 렌닌 간토로 · 하인들을 조닌에게 넘김사미 조닌 소장
  5. 12512.20「ときの五郎殿」성교지배문서 · 조센 봉서
  6. 12534.28대성인 입종선언
  7. 125312.9「よろこびて御殿人給はりて候」부목전어반사 · 어서전집 미수록 · 추정
  8. 125312.30「ときの入道殿」성교지배문서 · 입도는 이 사이
  9. 1254무렵입신여러 설 · 전승
  10. 1255—「일생성불초」받는 사람 미기재 · 예부터 조닌
  11. 12607.16「입정안국론」제1차 국주간효
  12. 12608.27 이후대성인 와카미야에 체재 · 법화당 · 백일 설법전승
  13. 1261봄대성인 가마쿠라로5.12 이즈 유배
  14. 1262—자쿠센보 닛초 출생와카미야
  15. 1267—이요보 닛초 입문전승
  16. 12695.9문주소 소환 · 「문주득의초」「三人御中」 · 도키 · 오타 · 소야
  17. 12696월「부목전어소식」 · 대사강
  18. 12709.26마마 구호지 석가불 · 「마마석가불어공양축장」개안은 이요보 닛초
  19. 12719.12다쓰노구치 법난
  20. 12719.13진서 고케닌 하향 명령요리타네 히젠으로
  21. 12719.14「토목전어반사」에치 · 本文 9.14(강의 한 곳 9.15)
  22. 127110.22「사박어서」데라도마리 · 종자를 돌려보냄
  23. 127111.23「부목입도전어반사」쓰카하라 첫 편지
  24. 12722월「팔종위목초」
  25. 12723.20「좌도어서」「富木殿のかた」
  26. 12724.10「부목전어반사」이치노사와
  27. 12725.5「진언제종위목」사면 운동 경계
  28. 12734.25「관심본존초」
  29. 12734.26「관심본존초 송장」「富木殿御返事」
  30. 12737.6「토목전어반사」「伊与房は機量物」
  31. 127311월「토목전어반사」흰 소매옷
  32. 12741.14「법화행자봉난사」다섯 겹 받는 사람
  33. 12745.17「부목전어서」미노부 도착일
  34. 12745.24「법화취요초」
  35. 127410월분에이의 역요리타네 부상
  36. 12752.5「부목전어반사」어머니의 홑옷 · 강의 2.7
  37. 12758월요리타네 사망히젠 오기 · 37
  38. 12758.23「부목전어서」「一生空しく過して万歳悔ゆること勿れ」
  39. 127511월「관심본존득의초」적문불독 · 솜 소매옷
  40. 12762월 하순어머니 사망아흔셋 전승
  41. 12763월미노부 참배 · 「망지경사」유골 안치 · 지경을 잊음
  42. 12763.27「부목니어전어반사」「をとこのしわざはめのちから」
  43. 12773월불심장닛쇼 편
  44. 12774.10「사신오품초」「信の一字を詮と為す」
  45. 12782월「시문불승의」어머니 삼회기 공양
  46. 12788월이요보 닛초에게 어본존 · 닛코 상인 옆쓰기가족 관계의 사료
  47. 12789월마마 문답료쇼보 · 시넨
  48. 127810.1「상인초」「第三の法門」 · 어서전집 1277
  49. 1279—「가연정업서」아내 · 1275설도
  50. 12795.17「사보살조립초」
  51. 12799월아쓰와라 · 닛슈 · 니치벤을 맡음
  52. 12799월아마고젠에게 어본존옆쓰기
  53. 127911월「부성전어반사」「来年三月の料」
  54. 127911.25「부목전여방니어전어서」니치벤 · 닛슈를 맡김 · 「いよ房は学生」
  55. 12805.26「난신난해법문」「我が一門」
  56. 128110.22「부성입도전어반사」진서의 큰 바람 소식 · 돈 네 관으로 법화당
  57. 12826월「치병대소권실위목」「ときどのの日記」
  58. 128210.8이요보 닛초 본제자 여섯 사람에
  59. 128210.13대성인 입멸 · 장례에서 향로
  60. 1293무렵이요보 닛초 의절두 전승
  61. 12993.4「니치조 치키문」「寺内を出す可からざる事」
  62. 12993.6「조슈인 본존성교사」목록
  63. 12993.20입적84 · 3.26설
  64. 1300—자쿠센보 닛코 상인께 귀복
  65. 1302—자쿠센보 오모스 담소 학두 · 이요보 닛초 오모스로
  66. 130311.1아마고젠 사망쇼린지 사전
  67. 1309—「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正本は彼の在所に在り」
  68. 13103.14자쿠센보 닛초 사망49
  69. 13173.8이요보 닛초 사망66
참고 문헌
어서

창가학회판 『日蓮大聖人御書全集』(일본어판) 쪽수. 본문에서 인용한 어서: 「일생성불초」 · 「문주득의초」 · 「마마석가불어공양축장」 · 「토목전어반사」(951 · 963) · 「사박어서」 · 「부목입도전어반사」 · 「좌도어서」 · 「부목전어반사」(962 · 968) · 「진언제종위목」 · 「관심본존초」 · 「관심본존초 송장」 · 「법화행자봉난사」 · 「부목전어서」(964) · 「법화취요초」 · 「관심본존득의초」 · 「망지경사」 · 「부목니어전어반사」 · 「가연정업서」 · 「상인초」 · 「사보살조립초」 · 「부목전여방니어전어서」 · 「난신난해법문」 · 「시문불승의」 · 「도량신수호사」 · 「부목전어서」(969–970) · 「치병대소권실위목」 · 「부성전어반사」 · 「부성입도전어반사」 · 「하산어소식」 · 「성인어난사」 · 「전중경수법문」 / 닛코 상인 「후지 일적 문도 존지사」

조닌의 글과 문서

「사미 조닌 소장」 · 「불심장」 · 「니치조 치키문」(1299.3.4) · 「조슈인 본존성교사」(1299.3.6) · 성교지배문서 (나카야마 법화경사 소장) — 원문은 『中山法華経寺史料』(서지 확인 후 게재)

교학

창가교학연구실 어서 강의: 「富木殿について」(서론 1–3) · 「법화취요초」 서강(「富木常忍について」 · 「富木常忍への賜書と法華取要抄」) · 「관심본존초」 서강 · 「좌도어서」 · 「법화행자봉난사」 · 「부목전어반사」 · 「가연정업서」 · 「사보살조립초」 · 「난신난해법문」 각 강의 / 堀日亨 『富士日興上人詳傳』

전기

智寂日省 『本化別頭高祖傳』(1720) · 六牙院日潮 『本化別頭佛祖統紀』 · 日精 『富士門家中見聞』 · 『日順阿闍梨血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