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강가, 다 타고 남은 장작과 꺼진 불씨

「나」의 논파와 『구사론』의 자리

아비달마구사론 · 제7편 · 파집아품, 천태와 니치렌 대성인

破執我品분별파집아품 제9 · 권29 끝~권30 (현장 역 T29, 152b~159b)
품
파집아품(破執我品) 제9
권
권29 끝~30
게송
품 고유의 본송 없음 · 인용 · 맺음 게송 아홉 묶음
핵심 술어
보특가라 · 상속전변차별 · 장교 · 석공
관련 계보
一 십이연기 · 五 일념삼천

서강과 일곱 편 · 구사론 62장 구성도

아홉 품 → 서강 + 일곱 편

『아비달마구사론』은 여덟 품에 걸쳐 세계를 남김없이 헤아렸다. 일흔다섯 가지로 정리되는 법, 여섯 원인과 네 조건, 삼계와 수미산, 업과 번뇌, 견도와 수도의 계단. 그런데 그 긴 목록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마지막 아홉째 품에서 천친은 그 빈자리를 정면으로 묻는다. 내가 없다면 누가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가. 누가 보고 누가 아는가. 누가 업을 짓고 누가 그 과보를 받는가. 『구사론』의 마지막 품은 이 물음들에 「나」라는 대답을 쓰지 않고 답하는 긴 대론이다. 그리고 그 답의 끝에서 논서 전체가 닫힌다.

파집아품(破執我品)은 이름 그대로 「나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는 품」이다. 앞의 여덟 품이 게송(本頌)과 그 풀이(論曰)로 짜여 있는 것과 달리, 이 품에는 품 고유의 본송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산문의 대론이고, 경전에서 끌어온 게송 몇 수와 천친 자신이 지은 맺음의 게송만이 그 사이에 놓여 있다. 보광은 『구사론기』에서 이 품의 자리를 이렇게 풀었다. 이 논서는 부처의 세 법인 가운데 「모든 법은 내가 없다」를 풀이한 것이니, 앞의 여덟 품은 법의 일(事)을 밝히고 뒤의 한 품은 무아의 이치(理)를 밝힌다. 일은 거칠어 먼저 가리고 이치는 미세하여 뒤에 밝힌다. 품 하나가 논서 전체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이 품의 첫 대론 상대는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사람(補特伽羅, pudgala)」을 세운 독자부다. 이들을 깨뜨리는 천친의 네 갈래 논증과 불과 땔감의 비유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에서 깊게 읽었다. 이 편은 그 다음부터를 읽는다. 독자부가 자기 부파에 전하는 경전으로 버티자 천친이 경전으로 되받는 대목, 용군 장로와 필린타 왕의 망고나무 문답, 석존이 「나는 있는가」에 침묵한 까닭을 노래한 어미 범의 게송, 그리고 「나」 없이 기억과 인식과 행위와 업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하나하나 따지는 문답이다. 품의 후반에서 천친은 인도 철학의 두 정통 학파, 수론(數論, Sāṃkhya)과 승론(勝論, Vaiśeṣika)의 아트만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업의 과보가 「업의 상속이 바뀌어 가다가 특별한 힘을 얻는 것(相續轉變差別)」에서 생긴다는 말로 긴 논증을 마친다.

뒤의 네 장은 『구사론』이 그 뒤에 놓인 자리를 따라간다. 설일체유부의 중현은 『순정리론』으로 이 논서를 한 줄씩 되받았고, 진제와 현장의 두 번역을 거쳐 『구사론』은 동아시아 불교의 기초 교과서가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남도의 한 종파로 이어졌다. 천태대사 지의는 이 논서를 화법사교의 첫째인 장교(삼장교), 곧 「쪼개어 공에 이르는(析空)」 서툰 방편의 자리에 두면서도, 장교의 수행 계위를 거의 그대로 『구사론』 현성품에서 가져왔다. 니치렌 대성인은 구사종을 「일대 성교를 깨닫는 열 개의 거울」 가운데 소승의 하나로 판정하셨지만, 오음 · 견혹 · 사혹 · 삼십사심 같은 『구사론』의 말로 법화경의 법문을 펼치셨다. 이 편은 그 판정과 그 쓰임을 함께 본다.

이 편의 장

파집아품(권29 끝~30)
  1. ①「越此依餘,豈無解脫?理必無有」이 가르침을 떠나 다른 데 의지해서는 해탈이 없다
  2. ②독자부 논파네 논증 · 불과 땔감→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3. ③경증의 다툼 · 무기(無記)의 해석
  1. ④기억 · 인식 · 행위의 주체(수론 논파)
  2. ⑤승론 논파 · 업의 상속전변차별
  3. ⑥맺음 게송「此涅槃宮一廣道」
그 뒤의 자리
  • 중현 『순정리론』
  • 진제 역(563~567)
  • 현장 역(영휘 연간)
  • 남도의 구사종
천태
  • 장교(삼장교)
  • 석공(析空)
  • 칠현 · 칠성
니치렌 대성인
  • 「倶舎・成実・律宗」소승의 세 종
  • 「明鏡十あり」열 개의 거울
(「보은초」 293쪽)
도표 1 · 이 편의 지도
제1장 「이 가르침을 떠나 해탈은 없다」파집아품의 자리와 첫 논증

본송

파집아품에는 앞의 여덟 품과 같은 품 고유의 본송이 없다. 이 품을 대표하는 게송으로, 천친이 「사람은 이름일 뿐」이라는 경증으로 인용하는 세라(世羅) 비구니의 게송을 든다.

『구사론』 권29 · 분별파집아품 · T29, 154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汝墮惡見趣,於空行聚中,妄執有有情,智者達非有。 如即攬眾分,假想立為車,世俗立有情,應知攬諸蘊。

풀이

그대는 그릇된 견해의 길에 떨어져, 빈 지어진 것들의 무더기 가운데서 망령되이 중생이 있다고 붙잡는다. 지혜로운 이는 그것이 있지 않음을 꿰뚫는다. 여러 부분을 끌어모은 데에 거짓 생각으로 수레를 세우듯, 세속에서 중생을 세우는 것도 여러 온을 끌어모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술어 풀이

破執我品파집아품
『구사론』의 아홉째이자 마지막 품. 진제 역에서는 「파설아품(破說我品)」이라 한다. 품 고유의 본송 없이 산문의 대론으로 이루어지며, 본송만을 모은 『구사론본송』(T29 no.1560)도 분별정품에서 끝난다. 이 때문에 이 품이 처음부터 『구사론』의 한 부분으로 구상되었는지, 뒤에 붙인 독립 논문인지를 두고 근대 학계에 견해가 갈린다.
補特伽羅보특가라
범어 pudgala의 음역으로 「사람」, 「개체」를 뜻한다. 한역 경전에서는 「삭취취(數取趣)」, 곧 「거듭 여러 갈래(趣)의 생을 받는 자」로도 옮긴다. 독자부는 이것을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세웠고, 천친은 이것을 오온의 상속에 붙인 이름으로 보았다.
蘊相續온상속
오온이 찰나마다 생멸하면서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이끌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santāna). 천친은 「나」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이 흐름이라고 한다. 이 품 전체의 열쇠말이다.
現量 · 比量현량 · 비량
인식을 바르게 하는 두 가지 수단(pramāṇa). 현량은 감각과 마음이 대상을 직접 아는 것(pratyakṣa), 비량은 드러난 표지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것을 미루어 아는 것(anumāna)이다. 천친은 「나」가 이 둘 어느 쪽으로도 알려지지 않는다는 데서 논증을 시작한다.
實有 · 假有실유 · 가유
따로 자기 체를 가진 존재(dravyasat)와, 여러 법이 모인 것에 붙인 이름으로만 있는 존재(prajñaptisat). 천친은 「색이나 소리처럼 따로 있는 것은 실유, 젖이나 낙처럼 모여서만 있는 것은 가유」라고 정의하고, 독자부에게 보특가라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
爾焰이염
범어 jñeya의 음역으로 「알아야 할 것」, 곧 인식 대상의 총칭. 독자부는 알아야 할 것을 과거 · 미래 · 현재 · 무위 · 「말할 수 없는 것」의 다섯으로 나누었다고 전한다.
六識所識육식소식
「여섯 식 가운데 어느 식이 그것을 아는가」라는 물음. 천친은 보특가라가 실재한다면 반드시 어느 식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따져,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독자부의 자리를 무너뜨린다.
十二處십이처
여섯 감관과 여섯 대상. 석존이 「일체란 오직 십이처」라고 한 경문은 이 품에서 보특가라를 십이처 밖으로 밀어내는 결정적 경증이 된다.

마지막 품의 자리 — 법의 일과 무아의 이치

『구사론』의 여덟째 품 분별정품은 정법이 세간에 머무는 기간과 이 논서가 어떤 이론에 기대어 대법을 풀었는가를 밝히며 끝난다. 천친은 「카슈미르의 비바사사가 논한 이치가 잘 성립되어 있어 나는 대체로 그들에 따라 대법을 풀었다」고 하고, 「바른 이치를 가리는 일은 오직 석가모니에게 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여래의 정법의 목숨이 목에 이른 듯 점점 사그라지고 번뇌의 힘이 더해 가는 때이니, 해탈을 구하여 게으르지 말라」는 게송으로 본송의 체계를 닫는다. 이 마지막 게송의 해설은 「성자의 길」 편에서 다루었다.

파집아품은 그 닫힌 체계의 바깥에서 시작한다. 품 고유의 본송이 없을 뿐 아니라, 문체도 앞의 여덟 품과 다르다. 앞의 품들이 게송 한 구를 들고 「논하여 말한다(論曰)」로 풀어 가는 주석의 형식이라면, 이 품은 질문과 반문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대론의 형식이다. 진제 역에서도 사정은 같아서, 「파설아품」 역시 산문 대론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진제 역은 현장 역이 분별정품의 끝에 둔 「대사의 세간의 눈은 이미 감겼다」로 시작하는 게송들을 파설아품의 첫머리에 두어, 두 번역의 품 경계가 조금 다르다. 이 품을 『구사론』 본체에 덧붙인 독립 논문으로 보는 견해가 근대 학계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주석가들은 이 품을 논서 전체의 결론으로 읽었다. 보광은 『구사론기』에서 이 품의 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此論一部,釋佛契經三法印中諸法無我。前八品明諸法事,後一品明無我理,事麁先辨,理細後明。

이 논서 한 부는 부처의 경에 있는 세 법인 가운데 「모든 법은 내가 없다」를 풀이한 것이다. 앞의 여덟 품은 모든 법의 일을 밝히고, 뒤의 한 품은 무아의 이치를 밝힌다. 일은 거칠므로 먼저 가리고, 이치는 미세하므로 뒤에 밝힌다.

보광 『구사론기』 권29, T41 no.1821

이 읽기에서 여덟 품의 방대한 법의 분석은 모두 마지막 한 품을 위한 준비가 된다. 세계를 일흔다섯 가지 법으로 남김없이 헤아렸는데 그 어디에도 「나」가 없었다면, 그 사실을 논증의 형식으로 확인하는 것이 마지막 품의 일이다. 보광은 이 품 안을 다시 「널리 다른 집착을 깨뜨림」과 「배움을 권하여 유통시킴」의 둘로 나누고, 앞의 것을 「총괄해 깨뜨림」과 「따로 깨뜨림」으로, 따로 깨뜨림을 다시 독자부 · 수론사 · 승론사를 깨뜨리는 세 단락으로 나눈다. 아래의 도표는 이 분과를 현장 역의 대정장 쪽수에 맞춘 것이다.

보광 『구사론기』의 분과에 따름
파집아품
Ⅰ 널리 다른 집착을 깨뜨림
  • ① 총괄해 깨뜨림「越此依餘,豈無解脫」이 가르침을 떠나 해탈이 있는가「나」는 현량 · 비량으로 알려지지 않는다152b~c
  • ② 따로 깨뜨림 1 · 독자부실유인가 가유인가 · 불과 땔감 · 여섯 식 가운데 어느 식이 아는가 · 경전의 증거152c~156c
    • 문답짐과 짐꾼 · 화생 · 용군의 망고나무 · 어미 범의 게송 · 무기 · 생사의 유전 · 기억155b~157b
  • ③ 따로 깨뜨림 2 · 수론사「事用必待事用者」일에는 반드시 일하는 자가 있다식은 대상을 닮아 일어난다157b~c
  • ④ 따로 깨뜨림 3 · 승론사「諸心生時皆從於我」모든 마음은 나에게서 생긴다나와 의근의 결합 · 작자와 수자 · 업의 상속전변차별157c~159b
Ⅱ 배움을 권하여 유통시킴
  • 맺음 게송 세 수「已善說此淨因道」「此涅槃宮一廣道」「於此方隅已略說」159b
도표 2 · 파집아품의 구성

첫 문장 — 「나」라는 허망한 집착

파집아품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 가르침을 넘어서, 다른 데 의지해서는 해탈이 정말 없는가.

『구사론』 권29 · 분별파집아품 · T29, 152b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越此依餘,豈無解脫?理必無有。所以者何?虛妄我執所迷亂故。 謂此法外諸所執我,非即於蘊相續假立執有真實離蘊我故。 由我執力諸煩惱生,三有輪迴無容解脫。

풀이

이 가르침을 떠나 다른 데 의지해서는 해탈이 없는가? 이치상 결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허망한 「나」라는 집착에 미혹되어 어지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곧 이 법 밖에서 집착하는 「나」들은, 온의 상속에 거짓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온을 떠난 진실한 「나」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집착의 힘으로 온갖 번뇌가 생기고, 삼유(三有)에 윤회하여 해탈할 여지가 없다.

이 세 문장에 품 전체의 구도가 들어 있다. 천친이 「이 법 밖」이라 부르는 것은 일차로 외도, 곧 수론과 승론처럼 온을 떠난 아트만을 세운 인도의 정통 학파들이다. 그러나 천친의 기준은 단순히 불교 안이냐 밖이냐가 아니다. 「온의 상속에 거짓으로 세운 것」으로서의 「나」를 인정하느냐, 그 밖에 따로 진실한 「나」를 세우느냐가 기준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불교의 부파이면서 「말할 수 없는 사람」을 세운 독자부도 경계에 선다. 실제로 품의 대론은 외도보다 먼저 독자부를 겨눈다.

여기서 천친은 「나」라는 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온의 상속을 가리키는 이름으로서 정당하게 쓰인다. 부정되는 것은 그 이름 뒤에 따로 있는 실체다. 이 구별은 품의 마지막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천친은 「누가 기억하는가」, 「누가 업을 짓는가」라는 물음에 「아무도 없다」고 답하지 않는다. 「온의 상속이 기억하고, 온의 상속이 업을 짓는다」고 답한다. 무아는 일상의 「나」를 지우는 선언이 아니라, 그 「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바로잡는 작업이다.

둘째 문장의 논리도 눈여겨볼 만하다. 해탈이 없는 이유는 「나」의 집착에서 번뇌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연결은 분별수면품에서 본 번뇌의 체계를 전제한다. 견도에서 끊는 견혹의 첫머리에 유신견, 곧 「오온을 나와 내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다른 번뇌들은 그 뿌리 위에서 자란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집착을 그대로 두고 수행하는 것은 뿌리를 둔 채 가지를 치는 것과 같다. 천친에게 무아의 논증은 철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해탈의 조건이다.

두 가지 앎의 수단 어디에도 「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천친은 먼저 인식의 수단에서 논증을 시작한다.

『구사론』 권29 · 분별파집아품 · T29, 152b~c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以何為證?知諸我名,唯召蘊相續,非別目我體。於彼所計離蘊我中,無有真實現比量故。 謂若我體別有實物,如餘有法。若無障緣,應現量得如六境意,或比量得如五色根。

풀이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모든 「나」라는 이름은 오직 온의 상속을 부를 뿐, 따로 「나」의 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들이 헤아리는 온을 떠난 「나」에 대해서는 진실한 현량도 비량도 없기 때문이다. 곧 만약 「나」의 체가 따로 실재하는 것이라면, 다른 실재하는 법과 같아야 한다. 가로막는 조건이 없다면, 여섯 대상과 의(意)처럼 현량으로 얻어지거나, 다섯 물질적 감관처럼 비량으로 얻어져야 한다.

논증의 짜임은 이렇다. 실재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알려진다. 빛깔 · 소리 · 냄새 · 맛 · 감촉 · 법의 여섯 대상, 그리고 마음(意)은 직접 경험된다. 이것이 현량이다. 눈 · 귀 · 코 · 혀 · 몸의 다섯 감관은 그 자체로는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루어 알 수 있다. 천친은 그 비량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세간에서 보듯이,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도 특정한 조건 하나가 빠지면 결과가 생기지 않고, 빠지지 않으면 생긴다.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 눈앞에 대상이 있고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도 있는데, 눈먼 이에게는 보는 의식이 일어나지 않고 눈먼 이가 아닌 이에게는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 차이를 만드는 별도의 조건이 있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조건이 바로 눈이라는 감관이다.

이 두 길을 「나」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빛깔처럼 보이지도 않고 마음처럼 직접 경험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비량으로라도 알려져야 한다. 그런데 「나」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보여 줄 수 있는 경험의 차이가 없다. 보는 일, 듣는 일, 기억하는 일은 모두 감관과 대상과 마음이라는 조건들로 설명되고, 그 위에 「나」라는 조건을 하나 더 얹어야만 설명되는 결과는 발견되지 않는다. 천친은 결론짓는다.

於離蘊我二量都無,由此證知無真我體。

온을 떠난 「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앎의 수단이 모두 없다. 이로써 진실한 「나」의 체가 없음을 증명하여 안다.

『구사론』 권29 분별파집아품, T29, 152c

이 논증은 경전의 권위를 끌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품의 성격을 미리 보여 준다. 천친은 품의 뒷부분에서 경전을 많이 인용하지만, 출발점은 인식론이다. 실재를 주장하려면 그것이 어떻게 알려지는지를 보여야 한다는 요구는, 유부와 경량부 모두가 공유한 아비달마의 원칙이었다. 「나」는 그 원칙의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한다.

현량(現量)직접 경험됨예「如六境意」여섯 대상과 의(意)
비량(比量)조건의 있고 없음으로 미루어 앎예「如五色根」다섯 물질적 감관「如種生芽」씨앗에서 싹이 트듯
눈먼 이와 눈먼 이가 아닌 이대상 · 주의(作意)는 같은데 안식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 별도의 조건 = 안근
「나」
현량 — 보이지도 경험되지도 않음비량 — 「나」를 더해야만 설명되는 결과가 없음
「於離蘊我二量都無,由此證知無真我體」온을 떠난 「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앎의 수단이 모두 없으니, 진실한 「나」의 체가 없음을 증명하여 안다(권29, T29, 152c)
도표 3 · 「나」는 두 가지 앎의 수단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독자부와의 첫 대결 — 이미 읽은 것과 아직 읽지 않은 것

이어서 천친은 독자부를 불러낸다. 「독자부는 보특가라가 있다고 집착하는데, 그 체는 온과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然犢子部執有補特伽羅,其體與蘊不一不異)」. 이 뒤로 이어지는 논증 — 실유인가 가유인가의 양도논법, 실유라면 원인이 있어야 하고 원인이 없다면 무위가 되어 외도와 같아진다는 지적, 독자부가 내세운 불과 땔감의 비유를 천친이 뒤집는 과정 — 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2부에서 자세히 읽었다. 여기서는 그 페이지가 다루지 않은 두 대목을 짚는다.

첫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다른 범주까지 오염시킨다는 지적이다. 독자부는 알아야 할 것을 과거 · 미래 · 현재 · 무위,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의 다섯으로 나누었다. 천친은 묻는다. 보특가라가 온과 하나라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면, 이 다섯 범주 자체도 말할 수 없게 된다. 보특가라를 다섯째 범주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섯째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음」은 한 군데에만 가두어 둘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을 체계 안에 들이는 순간 체계 전체의 경계가 흐려진다.

둘째는 「여섯 식 가운데 어느 식이 보특가라를 아는가」라는 물음이다. 독자부는 「여섯 식 모두가 안다」고 답했다고 천친은 전한다. 눈의 식이 빛깔을 알 때 그로 인해 보특가라가 있음을 알고, 그러면서도 보특가라가 빛깔과 하나인지 다른지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친은 이 답이 오히려 자기 주장을 증명한다고 받아친다.

『구사론』 권29 · 분별파집아품 · T29, 15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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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爾,所計補特伽羅應同乳等唯假施設。謂如眼識識諸色時,因此若能知有乳等,便說乳等眼識所識,而不可說與色一異。

풀이

그렇다면 그대들이 헤아리는 보특가라는 젖 따위와 같이 오직 거짓으로 시설된 것이어야 한다. 곧 눈의 식이 빛깔들을 알 때 이로 인해 젖 따위가 있음을 알 수 있다면, 젖 따위를 눈의 식이 아는 것이라고 말하되, 빛깔과 하나라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젖은 흰 빛깔, 단맛, 부드러운 감촉, 특유의 냄새가 모인 것이다. 우리는 흰 빛깔을 보고 「젖이 있다」고 알지만, 젖이 흰 빛깔과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젖이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감각 요소의 모임에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독자부가 보특가라를 「여섯 식이 다 알되 그 대상과 하나라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보특가라는 젖과 같은 자리에 선다. 「말할 수 없음」은 실체의 표지가 아니라 가명의 표지라는 것이다.

천친은 이 논증을 경전으로 마무리한다. 석존은 「일체(一切)란 무엇인가, 오직 십이처다」라고 했다. 「보특가라가 처(處)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체가 없다는 이치가 성립하고, 처에 속한다면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인간에 관한 경(人契經)은 눈과 빛깔을 조건으로 눈의 식이 생기고, 셋의 화합인 접촉과 함께 느낌 · 지각 · 의도가 일어나며, 「오직 이만큼에서 사람이라 부른다(唯由此量說名為人)」고 한 뒤 이렇게 맺는다.

苾芻當知,此唯名想,此唯自稱,但隨世俗假施設有。

비구들이여 알라. 이것은 오직 이름과 생각일 뿐이요, 오직 스스로 일컫는 말일 뿐이니, 다만 세속을 따라 거짓으로 시설하여 있는 것이다.

『구사론』 권29 분별파집아품 인용, T29, 154b

천친은 이 경을 「요의경(了義經)」, 곧 뜻이 다 드러나 달리 풀이할 필요가 없는 경이라고 못박는다. 석존이 늘 요의경에 의지하라고 했으니 이 경을 다르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송 자리에서 읽은 세라 비구니의 게송, 석존이 바라문 바타리(婆拕梨)에게 「나에게는 실로 나의 성품이 없건만 뒤바뀌어 있다고 집착한다(我實無我性,顛倒故執有)」고 설한 게송을 차례로 증거로 든다. 세라의 수레 게송은 팔리 경전의 바지라 비구니 게송과 같은 계통이다. 그 팔리 원문과 나가세나의 수레 문답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1~2부에서 읽었다.

세라(世羅, Śailā) 비구니의 게송은 『잡아함경』에도 같은 계통의 게송이 전하며, 『구사론』은 이것을 「아라한 비구니 세라가 마왕에게 설한 것」으로 인용한다. 팔리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같은 문답의 앞부분 게송이 셀라 비구니에게, 수레 비유 게송이 바지라 비구니에게 돌려져 있어, 전승마다 게송의 배분이 조금씩 다르다.

파집아품은 인식론으로 시작한다. 실재하는 것은 현량이나 비량으로 알려져야 하는데, 온을 떠난 「나」는 어느 쪽으로도 알려지지 않는다. 독자부의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여섯 식이 다 안다고 하는 순간 젖과 같은 가명의 자리에 서고, 「일체는 오직 십이처」라는 경문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제2장 경전을 둘러싼 대론짐꾼, 용군의 망고나무, 어미 범의 이빨

본송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6a
원문 대조
原文 · 한문 원문

觀為見所傷,及壞諸善業,故佛說正法,如牝虎銜子。 執真我為有,則為見牙傷,撥俗我為無,便壞善業子。

풀이

견해에 다치는 것과 온갖 선업이 무너지는 것을 살피시어, 부처는 정법을 설하되 어미 범이 새끼를 물어 나르듯 하셨다. 진실한 「나」가 있다고 집착하면 견해의 이빨에 다치고, 세속의 「나」마저 없다고 물리치면 선업의 새끼를 망가뜨린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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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由實命者無,佛不言一異,恐撥無假我,亦不說都無。

풀이

진실한 목숨을 가진 자(命者)가 없기 때문에 부처는 그것이 몸과 하나라고도 다르다고도 말하지 않으셨고, 거짓의 「나」마저 없다고 물리칠까 저어하여 「전혀 없다」고도 말하지 않으셨다.

술어 풀이

部誦부송
각 부파가 자기 전통으로 외워 전한 경전. 부파마다 경장의 구성이 조금씩 달랐으므로, 「우리 부파는 그 경을 외우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 논쟁에서 쓰이는 반론이었다.
重擔 · 荷擔者중담 · 하담자
「짐」과 「짐을 진 자」. 석존이 「다섯 취착의 무더기는 짐이요, 짐을 지는 자는 사람」이라 한 경문(팔리 「짐 경」 SN 22.22)에서 나온 말. 독자부가 보특가라의 근거로 삼은 대표적 경증이다.
化生有情화생유정
태 · 알 · 습기에 의하지 않고 홀연히 태어나는 중생. 경전은 「화생하는 중생이 없다」고 하는 것을 사견이라 한다. 독자부는 이를 근거로 「태어나는 자」의 실재를 주장했다.
命者명자
범어 jīva의 번역. 몸 안에서 몸을 부리는 실체로서의 생명, 곧 영혼. 「명자와 몸은 같은가 다른가」는 석존이 답하지 않은 무기(無記, avyākṛta)의 대표적 물음이다.
阿世耶아세야
범어 āśaya의 음역으로 「묻는 이의 속뜻」, 「의향」. 천친은 석존이 어떤 물음에 답하지 않은 까닭을 언제나 「묻는 이의 아세야를 살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四記사기
물음에 답하는 네 방식. 한 갈래로 단정해 답하는 것(一向記), 나누어 답하는 것(分別記), 되물어 답하는 것(反詰記), 답하지 않고 두는 것(捨置記). 무기의 물음은 넷째에 해당한다.
常邊 · 斷邊상변 · 단변
「항상 있다」는 극단과 「끊어져 없어진다」는 극단. 『구사론』은 「나」가 있다고 집착하면 상변에, 없다고 집착하면 단변에 떨어진다는 아비달마 논사들의 말을 「매우 이치에 맞다」고 받아들인다.
一切智일체지
부처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sarvajña). 독자부는 찰나에 생멸하는 마음은 일체를 알 수 없으므로 일체지의 주체로서 상주하는 보특가라가 있어야 한다고 했고, 천친은 일체지를 「상속의 능력」으로 풀었다.

「우리 부파는 그 경을 외우지 않는다」

천친이 경전을 연달아 인용하자 독자부는 뜻밖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경은 「나를 집착하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고 한다. 나라는 견해와 중생이라는 견해를 일으켜 그릇된 견해의 길에 떨어지고, 외도와 같이 길을 벗어나며, 공의 성품에 마음이 들어가지 못하고 깨끗이 믿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여 해탈을 얻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이 그에게서 맑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독자부는 이렇게 답했다고 천친은 전한다. 「이것들은 모두 권위가 없다. 우리 부파에서는 일찍이 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此皆非量。所以者何?於我部中曾不誦故).」

천친의 응답은 날카롭다. 그대의 종파에서 권위가 되는 것은 부파인가, 부처의 말씀인가. 부파가 권위라면 부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고 그대는 석가의 제자가 아니다. 부처의 말씀이 권위라면 이 경들은 모두 부처의 말씀인데 어찌 권위가 없다 하는가.

『구사론』 권29 · 분별파집아품 · T29, 15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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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如是經文諸部皆誦,不違法性及餘契經,而敢於中輒興誹撥,我不誦故非真佛言。唯縱兇狂,故極非理。

풀이

이러한 경문은 모든 부파가 다 외우고, 법성에도 다른 경들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감히 그 가운데서 함부로 헐뜯고 물리쳐 「우리가 외우지 않으므로 참된 부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하니, 오직 사납고 미친 마음을 내버려 둔 것이라, 그러므로 지극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대목은 부파 시대 경전 논쟁의 실상을 보여 준다. 부파마다 자기 경장을 따로 외워 전했으므로, 어떤 경이 「불설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천친이 세운 기준은 두 가지다. 여러 부파가 함께 외워 전하는가, 그리고 법성 및 다른 경들과 어긋나지 않는가. 이 두 기준을 통과한 경을 자기 부파에 없다는 이유로 물리치는 것은 경전 해석이 아니라 자기 종지를 지키기 위한 방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천친은 이어서 독자부 안에도 「일체법은 모두 나의 성품이 아니다」라는 경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독자부가 이것을 「보특가라는 그것이 의지하는 법과 하나도 다르지도 않으므로, 일체법이 나가 아니라고 한 것」이라 풀이한다면, 그 보특가라는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식은 두 조건(감관과 대상)으로 생긴다고 경이 판정했기 때문이다. 또 경은 「나가 아닌 것을 나라고 헤아리는 데 생각 · 마음 · 견해의 전도가 있다」고 한다. 전도를 말할 때 경은 「나가 아닌 것」만 말했지 「나」를 말하지 않았다. 「나가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 온 · 처 · 계다」. 그렇다면 보특가라가 온과 하나도 다르지도 않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숙명을 기억하는 것과 「옛날의 나」

다음 경증은 기억에 관한 것이다. 경은 「과거 · 현재 · 미래에 갖가지 숙명(宿住)을 기억하는 것은 모두 오직 다섯 취착의 무더기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억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자리는 없다. 독자부는 반문한다. 그렇다면 왜 같은 경에 「나는 과거세에 이러한 색을 가졌다」는 말이 있는가. 「나」가 과거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천친은 이렇게 답한다. 이 경은 숙명을 기억하는 이가 「하나의 상속 가운데 갖가지 일이 있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만약 실재하는 보특가라가 과거생에 색 따위를 가졌다고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유신견에 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이 경은 「총괄적인 거짓의 나에 의지하여, 무더기처럼 흐름처럼 색 따위가 있었다고 말한 것(依總假我,言有色等如聚如流)」이다. 무더기(聚)와 흐름(流)은 모두 여럿이 모여 하나처럼 불리는 것의 비유다.

독자부는 다시 일체지로 반격한다. 마음과 마음작용은 찰나찰나 다르게 생멸하므로, 어느 한 찰나의 마음도 모든 법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부처는 일체지자가 아니게 된다. 일체지가 가능하려면 찰나를 넘어 지속하는 앎의 주체, 곧 보특가라가 있어야 한다. 천친의 답은 일체지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구사론』 권29 · 분별파집아품 · T29, 15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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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我等不言佛於一切能頓遍知故名一切智者,但約相續有堪能故,謂得佛名諸蘊相續成就如是殊勝堪能,纔作意時於所欲知境無倒智起故名一切智,非於一念能頓遍知。

풀이

우리는 부처가 일체를 한꺼번에 두루 알 수 있기 때문에 일체지자라 부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속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곧 부처라는 이름을 얻은 온들의 상속이 이와 같은 뛰어난 능력을 성취하여, 마음을 기울이기만 하면 알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뒤바뀌지 않은 지혜가 일어나므로 일체지라 하는 것이지, 한 생각에 한꺼번에 두루 아는 것이 아니다.

이어 천친은 짧은 게송 하나를 인용한다. 「상속에 능력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이 모든 것을 태운다고 하듯이, 이와 같이 일체지라 하는 것이지, 한꺼번에 두루 알기 때문이 아니다(由相續有能,如火食一切,如是一切智,非由頓遍知).」 불이 「모든 것을 태운다」고 할 때, 한 찰나의 불꽃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태운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이든 거기에 닿으면 태울 수 있는 능력이 불의 흐름에 있다는 뜻이다. 부처의 일체지도 그와 같다. 그리고 천친은 「과거의 모든 부처, 미래의 모든 부처, 현재의 모든 부처」를 노래한 게송을 들어, 경이 부처에게 삼세를 말한 것은 삼세에 걸친 온의 상속을 말한 것이지 보특가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맺는다. 독자부 스스로도 삼세를 갖는 것은 온이지 보특가라가 아니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체지를 「한꺼번에 모두 앎(頓遍知)」이 아니라 「필요할 때 무엇이든 알 수 있는 능력」으로 보는 이 해석은, 뒤에 인도 불교의 인식론 학파가 부처의 전지(全知)를 논할 때 되풀이되는 주제다. 『구사론』의 이 대목은 그 이른 형태의 하나로 꼽힌다.

짐과 짐을 진 자 — 경을 경으로 푼다

권30은 독자부의 가장 강력한 경증에서 시작한다. 「만약 오직 다섯 취착의 무더기를 보특가라라 한다면, 왜 세존은 '내가 지금 그대들을 위해 무거운 짐과, 짐을 지는 것과 내려놓는 것과, 짐을 진 자를 설하리라'고 하셨는가?」 짐이 오온이라면 짐꾼은 오온과 다른 무엇이어야 하지 않는가. 이 경이 무엇이며 독자부가 어떻게 썼는지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1부와 2부에서 보았다. 여기서는 천친이 이 경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본다.

천친은 세 걸음으로 답한다. 첫째, 짐이 곧 짐꾼일 수 없다는 것이 짐꾼이 실체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짐을 「지는 것」, 곧 취(取)도 짐과 다른 무엇이어야 하는데, 경은 짐을 지는 것을 갈애(愛)라고 했고 갈애는 온에 속한다. 짐을 지는 것이 온에 속한다면 짐을 진 자도 그렇게 볼 수 있다. 둘째, 경 자체가 오해를 막아 두었다. 석존은 이 경의 뒤에서 「다만 세속을 따라 이 구수(具壽)는 이러한 이름을 가졌다」고 스스로 풀이하여, 짐꾼이 상주하는 실체가 아니라 세속의 이름임을 밝혔다. 셋째, 그렇다면 짐과 짐꾼은 무엇인가.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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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即五取蘊自相逼害得重擔名。前前剎那引後後故名為荷者,故非實有補特伽羅。

풀이

곧 다섯 취착의 무더기가 서로를 핍박하고 해치므로 「무거운 짐」이라는 이름을 얻고, 앞앞의 찰나가 뒤뒤의 찰나를 이끌어 가므로 「짐을 진 자」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보특가라는 없다.

이 풀이는 같은 오온을 두 측면에서 본다. 오온이 서로 괴롭히는 상태, 곧 괴로움으로서의 오온이 「짐」이다. 그 오온이 찰나마다 다음 찰나를 이끌어 가는 운동, 곧 상속으로서의 오온이 「짐꾼」이다. 짐과 짐꾼은 두 개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지닌 두 얼굴이다. 천친은 경의 비유를 버리지 않고, 그 비유가 가리키는 것을 상속으로 바꾸어 읽었다.

독자부의 경증
「我部不誦」우리 부파는 외우지 않는다
천친의 응답
「如是經文諸部皆誦,不違法性」모든 부파가 외우고 법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독자부의 경증
숙명 기억「我於過去世有如是色」나는 과거세에 이러한 색을 가졌다
천친의 응답
「依總假我,言有色等如聚如流」총괄적인 거짓의 나에 의지해 무더기처럼 흐름처럼 말한 것
독자부의 경증
일체지찰나의 마음은 일체를 모른다
천친의 응답
「但約相續有堪能故」다만 상속에 능력이 있기 때문「如火食一切」불이 모든 것을 태운다고 하듯
독자부의 경증
짐과 짐꾼
천친의 응답
「五取蘊自相逼害得重擔名。前前剎那引後後故名為荷者」오취온이 서로 해치니 짐, 앞 찰나가 뒤 찰나를 이끄니 짐꾼
독자부의 경증
화생의 중생
천친의 응답
「蘊相續能往後世,不由胎卵濕名化生有情」온의 상속이 다음 세상으로 가되 태 · 알 · 습기에 의하지 않으니 화생
독자부의 경증
「一補特伽羅生在世間」한 사람이 세간에 태어난다
천친의 응답
「於總中假說一」총체에 거짓으로 「하나」라 한 것「如世間說一麻一米一聚一言」깨 한 알, 쌀 한 톨이라 하듯
(권29~30)
도표 4 · 독자부의 경증과 천친의 응답

화생, 한 사람의 태어남, 그리고 「작자는 없다」

독자부는 계속해서 경을 든다. 경은 「화생하는 중생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견」이라고 했으니 중생은 실재해야 한다. 천친은 답한다. 누가 화생하는 중생이 없다고 했는가. 온의 상속이 다음 세상으로 가되 태나 알이나 습기에 의하지 않는 것을 화생하는 중생이라 하니, 이것을 없다고 하면 사견이다. 화생하는 온은 실제로 있다. 오히려 독자부에게 되물을 수 있다. 보특가라를 부정하는 것이 사견이라면, 그 사견은 견도에서 끊는가 수도에서 끊는가. 보특가라는 사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견도에서 끊을 수 없고, 사견은 견해이므로 수도에서 끊을 수도 없다.

「한 사람이 세간에 태어난다」는 경문에 대해서는, 세간에서 깨 한 알, 쌀 한 톨, 한 무더기, 한 마디 말이라 하듯 총체에 거짓으로 「하나」라는 말을 붙인 것이라고 답한다. 독자부가 「태어난다는 것은 온이 새로 일어나듯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 다른 온을 취한다는 뜻이다. 세간에서 제사 지내는 이가 '태어났다', 학자가 '태어났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변호하자, 천친은 부처가 이미 그런 해석을 막아 두었다고 하며 「승의공경(勝義空經)」을 인용한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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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有業有異熟,作者不可得。謂能捨此蘊,及能續餘蘊,唯除法假。

풀이

업은 있고 이숙(과보)도 있으나 짓는 자는 얻을 수 없다. 이 온을 버리고 다른 온을 잇는 자는 (얻을 수 없으니), 다만 법에 거짓으로 붙인 이름은 예외다.

「업은 있고 과보도 있으나 짓는 자는 없다」. 이 한 줄은 파집아품 전체의 요약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다만 법에 거짓으로 붙인 이름은 예외(唯除法假)」라는 단서가 천친의 입장을 정확히 보여 준다. 짓는 자라는 말을 아예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법의 흐름에 거짓으로 붙인 이름으로서의 「짓는 자」는 인정된다. 부정되는 것은 이 온을 버리고 저 온을 집어드는, 온 바깥의 주체다. 천친은 「파구나(頗勒具那) 경」의 「나는 끝내 취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를 덧붙여, 세간에서 온을 취하고 버리는 보특가라는 결코 없다고 결론짓는다.

용군의 망고나무

그렇다면 왜 석존은 「명자(命者)는 몸과 하나인가 다른가」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는가. 만약 보특가라가 온과 같은 것이라면 「같다」고 답하면 되지 않았는가. 석존이 답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이 독자부의 물음에 천친은 「묻는 이의 속뜻(阿世耶)을 살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묻는 이는 몸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실체적 사부(士夫)를 명자라 여기고 그것이 몸과 같으냐 다르냐를 물었다. 그런 것은 전혀 없으므로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답할 수 없다. 「거북의 털이 단단한지 부드러운지 답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천친은 「옛 스승들이 이미 이 매듭을 풀었다」며 한 일화를 전한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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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昔有大德名曰龍軍,三明六通具八解脫。于時有一畢隣陀王,至大德所作如是說:我今來意欲請所疑。然諸沙門性好多語,尊能直答,我當請問。大德受請。王即問言:命者與身為一為異?大德答言:此不應記。

풀이

옛날에 용군(龍軍)이라는 대덕이 있었으니, 세 가지 밝음과 여섯 신통을 갖추고 여덟 해탈을 갖춘 이였다. 그때 필린타(畢隣陀) 왕이 대덕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오늘 온 뜻은 의심나는 것을 여쭙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사문들은 본디 말이 많기를 좋아하니, 존자께서 곧바로 답해 주신다면 여쭙겠습니다.」 대덕이 청을 받아들였다. 왕이 곧 물었다. 「명자는 몸과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대덕이 답했다. 「그것은 답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왕은 항의한다. 곧바로 답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용군은 자기도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며, 「국왕들은 본디 말이 많기를 좋아하니, 왕께서 곧바로 답해 주신다면 묻겠다」고 왕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왕이 받아들이자 용군이 묻는다. 「대왕의 궁 안에 있는 망고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는 맛이 신가, 단가?」 왕이 답한다. 「궁 안에는 본래 그런 나무가 없습니다.」 용군이 다시 따진다. 「먼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다른 말을 하며 묻는 것에 답하지 않으십니까?」 왕이 말한다. 「궁 안에 이 나무가 없는데 어떻게 그 열매 맛이 달다 시다 답할 수 있겠습니까?」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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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大德誨曰:命者亦無,如何可言與身一異?

풀이

대덕이 깨우쳐 말했다. 「명자 또한 없는데, 어찌 몸과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있지도 않은 나무의 열매가 단지 신지 물으면, 정직한 대답은 단맛도 신맛도 고르지 않는 것이다. 어느 쪽을 고르든 나무가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명자와 몸의 관계를 묻는 물음도 같다. 「하나다」라고 해도 「다르다」라고 해도 명자가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용군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물음의 전제가 비어 있어서였다. 독자부는 석존의 침묵을 보특가라의 「말할 수 없음」의 증거로 읽었고, 천친은 같은 침묵을 보특가라가 없다는 증거로 읽었다.

용군(龍軍)은 나가세나(Nāgasena)라는 이름의 한역이고, 필린타(畢隣陀) 왕은 밀린다(Milinda) 왕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사론』은 이 일화를 「옛 스승들이 이미 이 매듭을 풀었다」는 전거로만 들 뿐 출처 문헌을 밝히지 않는다. 수레 비유로 알려진 나가세나와 밀린다 왕의 대론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2부에서 다루었다.

궁궐 뜰, 열매 없는 빈 나무 자리와 돌 의자 둘
그림 · 궁궐 뜰, 열매 없는 빈 나무 자리와 돌 의자 둘

어미 범은 새끼를 문다 — 침묵의 두 방향

독자부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석존은 왜 「명자는 전혀 없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천친은 이번에도 묻는 이의 속뜻을 든다. 묻는 이가 온의 상속을 명자라 여기고 물은 경우가 있다. 이때 「명자는 전혀 없다」고 답하면 그는 온의 상속조차 없다고 여겨 사견에 떨어진다. 그는 아직 연기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바른 법의 그릇이 되지 못했으므로, 부처는 그에게 거짓의 「나」마저 설하지 않았다. 천친은 그 근거로 석존이 아난에게 한 말을 전한다. 밧차(筏蹉) 성의 출가 외도가 와서 「세간에 나는 있는가 없는가」를 물었을 때 답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 바차곳타의 침묵과 그 이유 — 있다고 하면 「일체법은 나가 없다」는 진리에 어긋나고, 없다고 하면 「전에 있던 내가 지금 없어졌다」는 더 큰 어리석음을 보탠다 — 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1부에서 팔리 경전으로 읽었다.

『구사론』이 여기에 덧붙인 것은 그 침묵을 하나의 비유로 정리한 게송이다. 본송 자리에서 읽은 「어미 범」의 게송이다. 어미 범은 새끼를 입에 물고 옮긴다. 너무 세게 물면 새끼가 이빨에 다치고, 너무 느슨하게 물면 새끼를 떨어뜨린다. 부처의 설법도 그와 같다. 「진실한 나가 있다」고 하면 듣는 이는 견해의 이빨에 다친다. 상견이다. 「세속의 나도 없다」고 하면 듣는 이는 선업의 새끼를 떨어뜨린다. 지은 업이 과보를 맺는 그 「나」의 흐름까지 부정하면 선을 지을 까닭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단견이다. 석존의 침묵은 이 두 이빨 사이를 지나는 정확한 힘의 조절이었다.

천친은 이어지는 게송에서 이를 다시 풀어 말한다. 「온의 상속 가운데 업과 과보를 지닌 명자가 있으니, 명자가 없다고 말하면 그는 이것마저 없다고 물리친다. 온들 가운데 거짓 이름의 명자가 있다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묻는 이가 참된 공을 이해할 힘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논리로, 「세간은 항상한가」 같은 열 가지 무기의 물음과 「여래는 죽은 뒤에도 있는가」라는 물음에 석존이 답하지 않은 까닭을 차례로 풀어 간다. 묻는 이가 「나」를 세간으로 여기고 물었다면 「나」는 전혀 없으므로 네 가지 답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고, 생사 전체를 세간이라 여기고 물었다면 「항상하다」고 하면 열반이 없게 되고 「무상하다」고 하면 노력 없이도 저절로 끊어져 열반에 든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6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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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阿毘達磨諸論師言:執我有無俱邊見攝,如次墮在常斷邊故。彼師所說深為應理,以執有我則墮常邊,若執無我便墮斷邊。

풀이

아비달마의 논사들은 말한다. 「나가 있다는 집착도 없다는 집착도 모두 변견(邊見)에 속하니, 차례대로 상변과 단변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저 논사들의 말은 매우 이치에 맞다. 나가 있다고 집착하면 상변에 떨어지고, 나가 없다고 집착하면 단변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인용은 파집아품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천친은 「나는 없다」를 하나의 교조로 세우지 않는다. 「나가 없다」고 집착하는 것도 변견, 곧 극단의 견해라는 아비달마 논사들의 말에 동의한다. 파집아품이 깨뜨리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나」에 대한 모든 집착, 곧 「나가 있다」는 집착과 「나가 없다」는 집착 둘 다다. 그리고 그 사이의 길로 제시되는 것이 온의 상속이다.

「나가 없다」는 집착도 극단이라는 이 지적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5부에서 본 대성인의 「십법계사」 — 「굳게 무아에 집착하여 … 이것이 미혹의 근본」 — 과 나란히 놓고 읽을 만하다. 다만 『구사론』의 중도는 상속하는 법의 실재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뒤에 천태가 「석공」이라 평한 자리에 머문다. 이 차이는 아래 천태의 판정에서 다시 본다.

무기(無記)의 물음
  • 명자는 몸과 하나인가 다른가
  • 세간은 항상한가
  • 여래는 죽은 뒤에도 있는가
독자부의 읽기보특가라는 「말할 수 없는 것」이므로 답하지 않았다
천친의 읽기「觀能問者阿世耶故」묻는 이의 속뜻을 살폈기 때문
용군의 망고나무「宮內此樹既無,寧可答言果味甘酢」나무가 없는데 열매가 단지 신지 어찌 답하나「命者亦無,如何可言與身一異」명자도 없는데 어찌 몸과 하나다 다르다 하겠는가(155c)
어미 범
「執真我為有,則為見牙傷」진실한 나가 있다 하면 견해의 이빨에 다치고= 상견
「撥俗我為無,便壞善業子」세속의 나마저 없다 하면 선업의 새끼를 망가뜨린다= 단견
(156a)
「執我有無俱邊見攝」나가 있다는 집착도 없다는 집착도 모두 변견(156b~c)
도표 5 · 석존의 침묵을 읽는 법

들불의 비유와 「옛날의 묘안 스승이 지금의 나」

독자부의 마지막 경증은 윤회와 본생담이다. 보특가라가 정말 없다면 누가 생사에 유전하는가. 생사가 저절로 유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경은 「중생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생사를 치달린다」고 했다. 천친의 답은 짧다. 「앞의 온을 버리고 뒤의 온을 취한다」는 식의 설명은 이미 깨뜨렸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如燎原火雖剎那滅,而由相續說有流轉。如是蘊聚假說有情,愛取為緣流轉生死。

들판을 태우는 불은 찰나마다 사라지지만 상속하므로 옮겨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온의 무더기에 거짓으로 중생이라 이름하고, 갈애와 취착을 조건으로 생사에 유전한다.

『구사론』 권30 분별파집아품, T29, 156c

석존이 본생을 말하며 「나는 옛날에 묘안(妙眼)이라는 세간의 스승이었다」고 한 것도 같은 방식으로 풀린다. 독자부는 이 말이 옛날과 지금이 같은 실체라는 증거라고 했다. 천친은 그렇다면 그 실체는 상주해야 한다고 지적한 뒤, 이 말은 「옛날과 지금이 하나의 상속임을 드러낸 것이니, '이 불이 일찍이 저것을 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답한다. 어제 저 언덕을 태운 불과 오늘 이 골짜기를 태우는 불은 같은 불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불길로 이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이 불이 저것을 태웠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천친은 독자부의 입장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를 경으로 보인다. 진실한 「나」가 있다면 그것을 가장 분명히 보는 이는 부처일 것이고, 부처는 그것을 보고 견고한 아집을 일으킬 것이며, 거기서 「내 것」이라는 집착과 「나와 내 것」에 대한 갈애, 곧 유신견이 생길 것이다. 경은 「나를 집착하면 내 것을 집착하고, 내 것을 집착하므로 온들에 대해 다시 나와 내 것에 대한 갈애와 살가야견(薩迦耶見)을 일으키며, 나에 대한 갈애에 묶이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고 해탈에서 멀어진다」고 했다. 천친은 이렇게 독자부 논파를 맺는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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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如是一類執有不可說補特伽羅。復有一類總撥一切法體皆非有。外道執有別真我性,此等一切見不如理,皆不能免無解脫過。

풀이

이와 같이 한 부류는 말할 수 없는 보특가라가 있다고 집착한다. 또 한 부류는 일체법의 체가 모두 있지 않다고 통째로 물리친다. 외도는 따로 진실한 나의 성품이 있다고 집착한다. 이 모든 견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모두 해탈이 없는 허물을 면할 수 없다.

이 결론에서 천친은 세 부류를 나란히 세운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을 세운 독자부, 일체법을 통째로 없다고 하는 부류, 그리고 따로 진실한 나를 세운 외도다. 보광은 둘째를 「공견(空見) 외도」라 풀이했다. 『구사론』의 입장은 이 셋 사이에 있다. 「나」는 실재하지 않지만 법은 실재하고, 법의 상속에 붙인 이름으로서의 「나」는 세속에서 정당하다. 이 자리가 바로 뒤에 대승이 「아공법유(我空法有)」라 부른 자리다.

독자부가 든 경증 — 짐과 짐꾼, 숙명의 기억, 일체지, 화생, 한 사람의 태어남, 무기, 본생 — 를 천친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온의 상속」으로 다시 읽는다. 석존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사람」의 증거가 아니라 묻는 이의 전제가 비었다는 표시이며, 「나가 없다」는 집착 역시 단변이라는 점을 천친은 놓치지 않는다.

제3장 누가 기억하고 누가 아는가주체 없는 기억과 인식

본송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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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於一孔雀輪,一切種因相,非餘智境界,唯一切智知。

풀이

공작 깃털 하나의 둥근 무늬에 깃든 모든 갖가지 원인의 모습은 다른 지혜의 경계가 아니요, 오직 일체지만이 안다.

술어 풀이

念 · 記知염 · 기지
「기억(smṛti)」과 「알아봄(pratyabhijñā)」. 예전에 본 것을 떠올리는 것이 념, 지금 보는 것이 예전에 본 그것임을 알아보는 것이 기지다. 독자부와 외도는 이 둘을 지속하는 자아의 가장 강력한 증거로 들었다.
心差別심차별
「마음의 특별한 상태」. 기억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상속 안에 형성된 특별한 힘. 보광은 경량부의 입장에서 이것을 「종자의 공능」이라 풀었다.
作意작의
마음을 대상으로 기울이는 작용(manaskāra). 기억이 일어나는 조건 가운데 하나로 든다.
制怛羅제달라
범어 Caitra의 음역. 인도 논리학의 예문에 흔히 쓰이는 사람 이름으로, 우리말의 「아무개」에 해당한다. 「천수(天授, Devadatta)」 · 「사수(祠授, Yajñadatta)」도 같은 쓰임이다.
第六聲제육성
범어 문법의 여섯째 격, 곧 소유격(屬格). 「누구의 기억인가」라고 물을 때의 「~의」. 외도는 소유격이 쓰이는 이상 소유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고, 천친은 소유격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답했다.
數論수론
상키야(Sāṃkhya) 학파. 순수정신(puruṣa)과 근본물질(prakṛti)의 이원론을 세우고, 자아인 순수정신은 아는 자이되 작용하지 않는다고 본다. 보광은 「일하는 데에는 반드시 일하는 자가 있다」는 논변을 수론사의 것으로 분과했다.
帶彼相대피상
「그것의 모습을 띤다」. 식이 대상을 아는 것은 식이 대상에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모습을 띠고 일어나는 것이라는 천친의 설명. 뒤에 유식학의 인식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개념이다.
住異相주이상
유위법이 머무는 동안 변해 가는 모습. 천친은 마음의 상속이 늘 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을 이 성질로 설명한다.

「찰나에 사라지는 마음이 어떻게 기억하는가」

독자부 논파를 맺은 천친에게 곧바로 반문이 들어온다. 보광은 이 물음을 독자부의 것으로 분과한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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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一切類我體都無,剎那滅心於曾所受久相似境何能憶知?

풀이

만약 어떤 부류에도 나의 체가 전혀 없다면, 찰나에 사라지는 마음이 일찍이 경험한 오래된, 비슷한 대상을 어떻게 기억하고 알아보는가?

이것은 무아설에 던져진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직관적인 반론이다. 오늘 아침 마주친 얼굴을 보고 「작년에 만난 그 사람이다」라고 알아보려면, 작년의 경험과 오늘의 경험을 함께 붙잡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작년에 본 마음은 이미 사라졌고 오늘의 마음은 작년에 없었다. 둘을 잇는 지속하는 자아 없이 어떻게 기억이 가능한가.

천친의 답은 기억이 일어나는 원인과 조건을 하나하나 짚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6c~15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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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如是憶知,從相續內念境想類心差別生。且初憶念為從何等心差別無間生? 從有緣彼作意相似相屬想等,不為依止差別愁憂散亂等緣損壞功德心差別起。

풀이

이와 같은 기억과 알아봄은 상속 안에서, 그 대상을 기억하는 생각과 같은 부류의 마음의 특별한 상태(心差別)로부터 생긴다. 그렇다면 처음의 기억은 어떤 마음의 특별한 상태로부터 곧바로 생기는가? 그 대상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작의와, 비슷함과 이어져 있음에 대한 생각 따위가 있고, 몸의 특별한 상태나 근심 · 산란 같은 조건에 공능이 손상되지 않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로부터 일어난다.

여기서 천친은 기억의 성립 조건을 두 축으로 나눈다. 하나는 원인 쪽이다. 예전에 그 대상을 경험한 마음이 상속 안에 남긴 특별한 상태, 곧 「그 부류의 마음의 차별(彼類心差別)」이다. 다른 하나는 조건 쪽이다. 지금 그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작의, 지금 보는 것과 예전 것이 비슷하다는 생각이나 어떤 식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몸의 상태나 근심 · 산란 같은 방해 요인이 그 힘을 손상하지 않았다는 사정이다. 천친은 이어서 이 둘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雖有如是作意等緣,若無彼類心差別者,則無堪能修此憶念。雖有彼類心差別因,若無如是緣,亦無能修理,要具二種方可能修。

이와 같은 작의 따위의 조건이 있어도 그 부류의 마음의 특별한 상태가 없다면 이 기억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 그 부류의 마음의 특별한 상태라는 원인이 있어도 이와 같은 조건이 없다면 역시 일으킬 수 없다. 반드시 두 가지를 갖추어야 일으킬 수 있다.

『구사론』 권30 분별파집아품, T29, 157a

그리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인다. 「모든 기억의 생겨남은 다만 이것에 말미암을 뿐, 이것을 떠나서 따로 공능이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諸憶念生但由於此,不見離此有功能故).」 기억은 원인과 조건의 결합으로 남김없이 설명된다. 그 위에 「나」를 더해도 설명되는 것이 하나도 늘지 않는다. 이것은 품의 첫머리에서 본 논증, 곧 「나」를 더해야만 설명되는 결과가 없다는 논증을 기억이라는 구체적 현상에 적용한 것이다.

보광은 이 「마음의 특별한 상태」를 경량부의 입장에서 「생각과 지각이 훈습하여 이룬 종자(種子)가 마음에 지닌 특별한 공능」이라 풀이한다. 업이 종자로서 상속에 남는다는 경량부 설은 핵심 개념 「업」 2부에서 한 단락으로 소개했다. 『구사론』의 본문 자체는 이 대목에서 「종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마음의 차별」이라고만 한다.

남의 마음은 기억하지 못한다 — 상속의 경계

반론자는 한 걸음 더 들어온다. 서로 다른 마음이 보고 기억한다면, 왜 천수(天授)의 마음이 본 것을 사수(祠授)의 마음이 기억하지 못하는가. 찰나마다 다른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어제의 내 마음과 오늘의 내 마음도, 천수의 마음과 사수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다른 마음」이 아닌가.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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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此難非理,不相屬故。謂彼二心互不相屬,非如一相續有因果性故。我等不言異心見境異心能憶,相續一故。然從過去緣彼境心,引起今時能憶念識。

풀이

이 비난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서로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곧 저 두 마음은 서로 이어져 있지 않아, 하나의 상속 안에서처럼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지 않다. 우리는 다른 마음이 대상을 보고 다른 마음이 기억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상속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에 그 대상을 반연한 마음으로부터 지금 기억하는 식이 이끌려 일어나는 것이다.

천친의 기준은 「같은 마음이냐 다른 마음이냐」가 아니라 「인과로 이어져 있느냐(相屬)」다. 어제의 내 마음과 오늘의 내 마음은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하나의 상속 안에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 있다. 천수와 사수의 마음 사이에는 그런 인과의 이음이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별도의 끈이 없어도 기억이 상속의 경계 안에서만 일어나는 까닭이 설명된다. 천친은 이 과정을 「앞에서 말한 상속의 전변과 차별의 힘으로 기억이 생기니 무슨 허물이 있는가(謂如前說相續轉變差別力故生念何失)」라고 요약하고, 「이 기억의 힘으로 뒤의 알아봄이 생긴다(由此憶念力,有後記知生)」고 덧붙인다. 「상속전변차별」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기억의 설명에 쓰인다. 이 말은 품의 끝에서 업의 과보를 설명하는 열쇠말로 다시 돌아온다.

「누구의 기억인가」 — 소유격의 문법과 소의 주인

그래도 반론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이번에는 언어를 무기로 삼는다. 「나의 체가 없다면 누가 기억하는가(我體既無,孰為能憶)?」 천친은 되묻는다.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기억(念)이 대상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을 취하는 것은 기억 자체이지 기억과 다른 무엇이 아니다. 다만 「기억하는 자」라는 말을 쓸 수는 있는데, 그 「자(作者)」란 앞에서 말한 기억의 원인, 곧 그 부류의 마음의 특별한 상태다. 세간에서 「제달라(아무개)가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온의 상속에 제달라라는 이름을 세우고, 앞서 본 마음으로부터 뒤의 기억이 일어나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반론자는 다시 문법을 든다. 「나의 체가 없다면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무슨 뜻으로 여섯째 격(소유격)을 쓰는가(我體若無,是誰之念?為依何義說第六聲)?」 「~의」라는 말이 쓰이는 이상 그 소유자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천친은 소유격의 뜻을 따진다. 소유격은 「속하는 것과 주인」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엇의 주인인가. 소가 제달라에게 속한다고 할 때, 제달라는 소를 타고 매고 부리는 데 자재하므로 소의 주인이다. 그렇다면 기억의 주인인 「나」는 기억을 어디로 부리려는가.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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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又我於念如何驅役?為令念起、為令念行?念無行故,但應念起。則因名主,果名能屬。由因增上令果得生,故因名主。果於生時是因所有,故名能屬。即生念因足為念主,何勞立我為念主耶?

풀이

또 나는 기억을 어떻게 부리는가? 기억을 일어나게 하는가, 기억을 가게 하는가? 기억에는 가는 일이 없으므로 다만 기억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원인을 주인이라 하고 결과를 속하는 것이라 한다. 원인의 힘으로 결과가 생기게 하므로 원인을 주인이라 하고, 결과는 생길 때 원인이 가진 것이므로 속하는 것이라 한다. 기억을 낳는 원인이 기억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하니, 무엇하러 「나」를 세워 기억의 주인으로 삼는가?

이 대목에서 천친은 「~의」라는 문법을 인과의 관계로 바꾸어 읽는다. 「누구의 기억인가」라는 물음은 「무엇이 그 기억을 낳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뀌고, 그 답은 앞에서 말한 마음의 특별한 상태다. 그리고 천친은 소유의 예문 자체도 같은 방식으로 해체한다.

即諸行聚一類相續,世共施設制怛羅牛,立制怛羅名為牛主。是牛相續於異方生,變異生因故名為主。此中無一實制怛羅亦無實牛,但假施設,故言牛主,亦不離因。

곧 여러 행이 모인 한 부류의 상속에 세간이 함께 제달라와 소를 시설하고, 제달라를 소의 주인이라 이름한다. 소의 상속이 다른 곳에서 생기고 변하여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되므로 주인이라 한다. 여기에는 하나의 실재하는 제달라도 없고 실재하는 소도 없다. 다만 거짓으로 시설한 것이므로 「소의 주인」이라 하되, 그것 역시 원인을 떠나지 않는다.

『구사론』 권30 분별파집아품, T29, 157b

「제달라의 소」라는 평범한 문장에서도 제달라와 소는 각각 행의 상속에 붙인 이름이고, 「주인」이라는 관계는 한 상속이 다른 상속의 변화와 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사실에 붙인 이름이다. 문법이 실체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문법이 인과를 압축해 표현하기 때문이다. 천친은 같은 방식이 「누가 아는가, 누구의 식인가」 같은 물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며, 식의 원인과 조건이 기억의 경우와 다른 점은 감관과 대상 따위라는 것만 덧붙인다.

반론「剎那滅心於曾所受久相似境何能憶知」찰나에 사라지는 마음이 예전에 경험한 대상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원인「彼類心差別」그 부류의 마음의 특별한 상태(예전 경험이 상속에 남긴 힘)
조건「作意」마음을 기울임「相似相屬想」비슷함과 이어짐의 생각몸 · 근심 · 산란에 손상되지 않음
기억「要具二種方可能修」두 가지를 갖추어야 일어난다
상속의 경계
「彼二心互不相屬」천수와 사수의 마음은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相續一故」상속이 하나이기 때문
「누구의 기억인가」
「因名主,果名能屬」원인을 주인, 결과를 속하는 것이라 한다「即生念因足為念主,何勞立我為念主耶」기억을 낳는 원인이 기억의 주인으로 충분하니 무엇하러 나를 세우는가(권30, T29, 156c~157b)
도표 6 · 주체 없는 기억

「일에는 반드시 일하는 자가 있다」 — 수론사의 논변

여기서 대론의 상대가 바뀐다. 보광은 이 대목부터를 「따로 깨뜨림의 둘째, 수론사를 깨뜨림」으로 분과한다. 『구사론』 본문은 다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有作是言)」로 시작한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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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有作是言:決定有我,事用必待事用者故。謂諸事用待事用者,如天授行必待天授。行是事用天授名者,如是識等所有事用,必待所依能了等者。

풀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반드시 있다. 일(事用)은 반드시 일하는 자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곧 모든 일은 일하는 자를 기다리니, 천수가 가는 것이 반드시 천수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가는 것은 일이요 천수는 (일하는) 자라 이름한다. 이와 같이 식 따위가 가진 일도 반드시 의지할 바인 아는 자 따위를 기다린다.」

「간다」는 동사에는 「가는 이」라는 주어가 있다. 「안다」는 동사에도 「아는 이」라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 행위에서 행위자를 추론하는 이 논변은 인도 철학에서 자아를 증명하는 대표적 논법이었다. 천친은 먼저 「천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실재하는 나라면 이미 깨뜨렸다. 거짓의 사부(士夫)라면 그 체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여러 행의 상속에 붙인 이름이다. 그렇다면 「천수가 간다」는 말은 어떤 뜻인가.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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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謂於剎那生滅諸行不異相續立天授名,愚夫於中執為一體,為自相續異處生因。異處生名行,因即名行者。依此理說天授能行。如焰及聲異處相續,世依此說焰聲能行。

풀이

곧 찰나에 생멸하는 여러 행의 끊어지지 않는 상속에 천수라는 이름을 세운 것인데, 어리석은 이는 그 가운데서 하나의 체라고 집착한다. (앞의 찰나가) 자기 상속이 다른 곳에서 생기는 원인이 된다. 다른 곳에서 생기는 것을 「간다」고 하고, 그 원인을 「가는 자」라 한다. 이 이치에 의지하여 「천수가 간다」고 말한다. 불꽃과 소리가 다른 곳으로 이어져 가는 것을 세간이 이에 의지해 「불꽃이 간다, 소리가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천수가 간다」는 것은, 천수라 불리는 행의 상속에서 앞 찰나의 몸이 뒤 찰나의 몸을 조금 떨어진 곳에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생기는 것이 「감」이고, 그 원인이 「가는 자」다. 불꽃이 심지를 따라 번져 가거나 소리가 골짜기를 따라 퍼져 갈 때, 우리는 「불꽃이 간다」, 「소리가 간다」고 하지만 불꽃이나 소리 안에 걸어가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친은 덧붙인다. 「성자들도 세간의 말하는 방식을 따르기 위해 그렇게 말한다(然諸聖者為順世間言說理故,亦作是說).」 무아를 깨달은 이도 「내가 간다」, 「그가 안다」고 말한다. 언어의 관습을 따르는 것과 그 관습 뒤에 실체를 세우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식은 대상을 닮아 일어난다

수론사는 다시 묻는다. 경은 「모든 식이 대상(所緣)을 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식은 대상에게 무엇을 하는가. 안다는 것이 일이라면 식이 대상에 무언가 작용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천친의 답은 『구사론』 전체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의 하나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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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識於所緣為何所作?都無所作,但以境生。如果酬因,雖無所作而似因起,說名酬因。如是識生,雖無所作而似境,故說名了境。如何似境?謂帶彼相。是故諸識雖亦託根生,不名了根,但名為了境。

풀이

식은 대상에게 무엇을 하는가? 전혀 하는 것이 없고, 다만 대상을 조건으로 생길 뿐이다. 결과가 원인에 보답한다고 할 때, 결과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원인을 닮아 일어나므로 「원인에 보답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식이 생길 때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대상을 닮으므로 「대상을 안다」고 한다. 어떻게 대상을 닮는가? 그것의 모습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은 감관에도 의탁하여 생기지만 「감관을 안다」고 하지 않고 다만 「대상을 안다」고 한다.

안다는 것은 식이 대상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식이 대상의 모습을 띠고(帶彼相) 일어나는 것이다. 보광은 이를 「푸른빛을 반연하는 식 위에 푸른 모습이 나타나니, 거울이 바탕을 마주하면 그 모습을 띠고 생기는 것과 같다」고 풀었다. 식은 눈이라는 감관에도 의지하지만 눈의 모습을 띠지는 않으므로 「눈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앎을 「대상의 모습을 띤 식의 생겨남」으로 보는 이 설명은 행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생각은 뒤에 식 안에 나타나는 대상의 모습만을 앎의 직접 대상으로 보는 유식학의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천친은 다른 풀이도 하나 더 허용한다. 식이 대상에 대해 상속하여 생길 때 앞의 식이 원인이 되어 뒤의 식을 이끌어 일으키므로 「식이 안다」고 해도 허물이 없다. 세간은 원인을 「짓는 자」라 부르기 때문이다. 「종이나 북이 운다」, 「등불이 간다」고 하는 것과 같다. 등불이 간다는 것은 불꽃의 상속에 「등불」이라는 이름을 세우고, 그 상속이 다른 곳에서 생기는 것을 「간다」고 하는 것이지 따로 가는 자가 없다. 마음의 상속에 「식」이라는 이름을 세우고, 그것이 다른 대상에 대해 생기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도 같다. 또 「색이 생기고 색이 머문다」고 할 때 따로 생기는 자나 머무는 자가 없는 것처럼, 「식이 안다」도 그렇게 보면 된다.

수론사의 논변「事用必待事用者」일에는 반드시 일하는 자가 있다
천수가 간다 → 천수식이 안다 → 아는 자(나)
천친
「天授」 =
「於剎那生滅諸行不異相續立天授名」찰나에 생멸하는 행의 상속에 붙인 이름
「간다」 =
「異處生名行,因即名行者」다른 곳에서 생김이 감, 그 원인이 가는 자「如焰及聲異處相續」불꽃과 소리가 다른 곳으로 이어지듯
「안다」 =
「都無所作,但以境生」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상을 조건으로 생길 뿐「謂帶彼相」그 모습을 띤다「不名了根,但名為了境」감관을 안다고 하지 않고 대상을 안다고 한다
「如世間說鍾鼓能鳴,或如燈能行」종과 북이 운다, 등불이 간다고 하듯(권30, T29, 157b)
도표 7 · 「간다」와 「안다」 — 행위자 없는 동사

마음은 왜 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수론사의 마지막 물음은 이렇다. 뒤의 식이 「나」가 아니라 앞의 식에서 생긴다면, 왜 뒤의 식은 늘 앞의 식과 같은 모습이 아니며, 싹 · 줄기 · 잎처럼 정해진 차례로 생기지도 않는가. 앞의 식이 원인이라면 같은 원인에서 늘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지 않는가.

천친은 두 가지로 답한다. 첫째, 모든 유위법에는 「머물며 변하는 모습(住異相)」이 있다. 유위법은 본성상 미세하게 상속하면서 뒤의 것이 반드시 앞의 것과 달라진다. 그렇지 않다면 선정에 든 사람의 몸과 마음이 비슷하게 이어지다가 마지막 찰나에 저절로 선정에서 나오는 일도 설명할 수 없다. 둘째, 마음의 상속에도 정해진 차례가 있다. 어떤 마음 다음에 어떤 마음이 생길 수 있는지는 마음의 「종성(種性)」에 따라 정해져 있다. 천친은 구체적인 예를 든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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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如女心無間起嚴污身心,或起彼夫彼子心等。後時從此諸心相續轉變差別還生女心。如是女心於後所起嚴污心等有生功能,異此無功能,由種性別故。

풀이

여인을 생각하는 마음 바로 뒤에 몸을 꾸미거나 몸을 더러운 것으로 보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 여인의 남편이나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뒤에 이 여러 마음의 상속이 바뀌어 가며 특별한 상태가 되어 다시 여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와 같이 여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뒤에 일어나는 꾸미는 마음 · 더러운 것으로 보는 마음 따위에 대해서는 생기게 하는 공능이 있고, 이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공능이 없다. 종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음 뒤에 올 수 있는 마음은 여럿이지만 아무 마음이나 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여럿 가운데 실제로 무엇이 오는가는, 예전에 자주 일으켰던 마음, 또렷했던 마음, 가까이 일으켰던 마음이 먼저 온다. 천친은 「이와 같은 마음은 닦은 힘이 강하기 때문(由如是心修力強故)」이라고 한다. 다만 몸이나 바깥 조건이 특별할 때는 예외가 있다. 가장 강하게 닦인 마음이 늘 결과를 내지 않는 것은 그 마음에도 머물며 변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차례는 습관의 힘과 조건의 결합으로 설명되고, 그것을 늘 같게 만들거나 다르게 만드는 「나」는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천친은 이 긴 설명을 겸손한 말로 맺는다. 「여러 마음의 부류가 차례로 생기는 인연의 대강은 내가 간략히 말했지만, 그것을 자세히 다 아는 것은 오직 세존에게 있으니, 일체법에 대해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본송 자리에서 읽은 공작 깃털의 게송이 여기서 인용된다. 공작 꼬리깃 하나의 둥근 무늬가 어떤 원인들로 그런 빛깔과 모양을 띠게 되었는지조차 부처 아닌 이의 지혜로는 다 알 수 없다. 「물질의 차별의 원인도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마음과 마음작용 같은 물질 아닌 법들의 인연의 차별을 쉽게 알 수 있겠는가.」

이 겸손은 논증의 약점이 아니라 논증의 성격을 보여 준다. 천친이 증명하려는 것은 마음의 모든 움직임을 남김없이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다. 마음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나」라는 가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직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한 인연의 몫이라는 것이다.

기억은 예전 경험이 상속에 남긴 「마음의 특별한 상태」와 지금의 조건이 만나 일어나고, 「누구의 기억인가」의 「~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간다」, 「안다」는 동사도 행위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식은 대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상의 모습을 띠고 일어날 뿐이다. 마음의 차례는 습관의 힘과 종성으로 설명되며, 그 다 헤아릴 수 없는 세부는 일체지의 몫으로 남는다.

제4장 아트만의 논파와 업의 상속『구사론』의 끝맺음

본송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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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此業此熏習,至此時與果,一切種定理,離佛無能知。

풀이

이 업, 이 훈습이 이때에 이르러 과보를 준다는 그 모든 갖가지의 정해진 이치는, 부처를 떠나서는 알 수 있는 이가 없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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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已善說此淨因道,謂佛至言真法性,應捨闇盲諸外執,惡見所為求慧眼。 此涅槃宮一廣道,千聖所遊無我性,諸佛日言光所照,雖開殊眼不能覩。 於此方隅已略說,為開智者慧毒門,庶各隨己力堪能,遍悟所知成勝業。

풀이

이 청정한 원인의 길을 잘 설하였으니, 곧 부처의 지극한 말씀이요 참된 법성이다. 어둡고 눈먼 온갖 바깥의 집착을 버리라. 그것은 그릇된 견해가 지은 것이니, 지혜의 눈을 구하라. 이것은 열반의 궁으로 가는 하나의 넓은 길, 천 명의 성인이 노닌 무아의 성품이다. 모든 부처의 해 같은 말씀의 빛이 비추건만, 눈을 뜨고도 다른 데를 보는 이는 보지 못한다. 이 한 방향의 실마리를 간략히 말하였으니, 지혜로운 이에게 상처에 든 독이 온몸에 퍼지듯 지혜가 두루 번져 갈 문을 열어 주려 함이다. 바라건대 저마다 자기 힘이 감당하는 대로 알아야 할 것을 두루 깨달아 뛰어난 업을 이루라.

술어 풀이

勝論승론
바이셰시카(Vaiśeṣika) 학파. 세계를 실체(實) · 성질(德) · 운동(業) 등의 범주(句義)로 분석하고, 자아(아트만)를 편재하고 상주하는 실체의 하나로 세운다. 기억 · 즐거움 · 괴로움 · 앎 같은 것은 자아에 속하는 성질(德)이라고 본다. 보광은 「모든 마음은 나에게서 생긴다」는 주장을 승론사의 것으로 분과했다.
實句義 · 德句義실구의 · 덕구의
승론의 범주. 실(dravya)은 실체, 덕(guṇa)은 실체에 의지하는 성질. 승론은 기억(念) 따위가 덕이므로 그것이 의지할 실체로서 자아가 있어야 한다고 논증했다.
我意合아의합
자아와 의근(manas)의 결합. 승론은 상주하는 자아가 의근과 결합하는 방식의 차이로 갖가지 인식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普莎訶보사하
범어 svāhā의 음역. 주문 끝에 붙이는 말. 보광은 「길상(吉祥)」으로 풀이했다. 천친은 약으로 병이 나았는데 엉터리 의사가 주문 덕분이라 우기는 비유에 이 말을 쓴다.
作者 · 受者작자 · 수자
업을 짓는 자(kartṛ)와 과보를 받는 자(bhoktṛ). 승론은 자재하게 행위하는 자가 작자라고 정의했다.
相續轉變差別상속전변차별
업이 앞서고 그 뒤로 색과 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상속(santati), 그 상속이 찰나마다 앞과 달라지는 것이 전변(pariṇāma), 그 전변이 마지막에 곧바로 과보를 낳는 특별한 힘을 갖게 된 것이 차별(viśeṣa)이다. 『구사론』이 업과 과보의 연결을 설명하는 최종 개념.
熏習훈습
행위가 상속에 남기는 영향(vāsanā). 향이 옷에 배듯 업이 마음의 흐름에 스며든다는 비유에서 온 말.
慧毒門혜독문
보광은 「몸의 작은 상처에 독을 조금 바르면 잠깐 사이에 독기가 온몸에 퍼지는 것」에 비유했다. 이 논서가 연 작은 지혜의 문이 지혜로운 이에게는 온몸에 퍼지는 독처럼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모든 마음은 나에게서 생긴다」 — 승론의 아트만

보광은 이 대목부터를 「따로 깨뜨림의 셋째, 승론사를 깨뜨림」으로 분과한다. 본문은 「한 부류의 외도가 이렇게 집착한다」로 시작한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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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一類外道作如是執,諸心生時皆從於我。前之二難於彼最切。若諸心生皆從我者,何緣後識不恒似前,及不定次生,如芽莖葉等。

풀이

한 부류의 외도는 이렇게 집착한다. 「모든 마음이 생길 때는 다 나에게서 생긴다.」 앞의 두 비난은 그들에게 가장 절실하다. 만약 모든 마음이 나에게서 생긴다면, 무슨 까닭으로 뒤의 식이 늘 앞과 같지 않으며, 싹 · 줄기 · 잎처럼 정해진 차례로 생기지도 않는가?

천친은 수론사가 불교에 던졌던 두 비난을 그대로 승론에 돌려준다. 불교는 마음이 마음에서 생긴다고 하므로, 앞의 마음이 달라지면 뒤의 마음도 달라진다는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승론은 모든 마음이 하나의 상주하는 자아에서 생긴다고 한다. 원인이 늘 같은데 결과가 늘 달라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광의 말로 하면 「나는 하나이고 자재한데, 무슨 까닭으로 뒤의 식이 늘 앞과 같지 않은가」. 같은 원인에서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

승론은 그 다른 무엇으로 「자아와 의근의 결합 방식의 차이(待意合差別)」를 든다. 천친은 이것을 여러 겹으로 무너뜨린다. 먼저, 자아와 의근이 결합한다는 것 자체가 불교 쪽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승론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결합」이란 「먼저 이르지 않았다가 뒤에 이르는 것」이니, 두 사물의 결합에는 반드시 경계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의근과 결합한다면 자아에도 경계가 있어야 하는데, 승론은 자아가 법계에 두루 편재하여 경계가 없다고 한다. 의근이 옮겨 다니면 자아도 따라 옮겨 다녀야 하거나, 자아가 의근과 함께 무너져야 한다. 자아의 한 부분만 결합한다고 하면, 하나인 자아에는 부분이 없다. 설령 결합을 인정해도, 자아는 상주하고 의근도 따로 다른 것이 없는데 결합에 어떻게 차이가 생기는가.

승론이 다시 「덕(德)의 범주 가운데 다른 앎(覺)이나 다른 행(行)을 기다려서」라고 하면, 같은 비난이 그대로 되풀이된다. 그 앎이나 행의 차이는 또 무엇에서 생기는가. 그리고 행의 차이를 기다려 다른 식이 생긴다면, 마음이 행의 차이를 기다려 다른 식을 낳는다고 하면 그만이지 「나」가 무슨 소용인가. 여기서 천친은 이 품에서 가장 신랄한 비유를 든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7c~15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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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我於識生都無有用,而言諸識皆從我生。如藥事成能除痼疾,誑醫矯說普莎訶言。

풀이

나는 식이 생기는 데 전혀 쓸모가 없는데도 「모든 식은 나에게서 생긴다」고 말한다. 약이 제 일을 하여 오랜 병을 없앴는데, 엉터리 의사가 거짓으로 「보사하」라는 주문 덕분이라 꾸며 말하는 것과 같다.

병을 고친 것은 약이다. 의사가 마지막에 외운 주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식을 생기게 한 것은 앞의 마음과 감관과 대상과 습관의 힘이다. 그 위에 얹힌 「나」는 엉터리 의사의 주문과 같다. 보광은 「행이 마음을 낳기에 충분한데 무엇하러 이 나가 필요한가」라고 풀었다.

땅과 향 — 「그대들의 말이 무아를 증명한다」

승론은 물러서지 않는다. 마음과 행은 「나」로 말미암아 있다. 아니면 「나」는 마음과 행이 의지하는 곳이다. 천친은 「의지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림이 벽에 의지하거나 과일이 그릇에 담기듯 「나」가 마음과 행을 지탱하는 것이라면, 서로 걸리는 허물이 생기고 때로는 따로 떨어져 있는 허물도 생긴다. 승론은 벽이나 그릇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렇게 답한다.

此但如地,能為香等四物所依。

이것은 다만 땅이 향 따위 네 가지의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30 분별파집아품, T29, 158a

땅에는 냄새 · 맛 · 빛깔 · 감촉의 네 성질이 있고, 땅은 그것들이 의지하는 실체다. 「나」와 마음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이다. 천친은 이 비유를 듣고 반가워한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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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彼如是言,證成無我,故我於此深生喜慰。如世間地不離香等,我亦應爾,非離心行。誰能了地離於香等?但於香等聚集差別,世俗流布立以地名。我亦應然,但於心等諸蘊差別,假立我名。

풀이

그들의 이런 말은 무아를 증명해 주니, 나는 이에 깊이 기쁘고 위안을 얻는다. 세간의 땅이 향 따위를 떠나지 않듯이, 나도 그러해야 하니 마음과 행을 떠나지 않는다. 누가 향 따위를 떠나서 땅을 알 수 있겠는가? 다만 향 따위가 모인 특별한 상태에 세속에서 땅이라는 이름을 세워 퍼뜨린 것이다. 나도 그러해야 하니, 다만 마음 따위의 여러 온의 특별한 상태에 거짓으로 나라는 이름을 세운 것이다.

땅의 비유는 승론이 의도한 것과 반대의 결론을 낳는다. 냄새도 맛도 빛깔도 감촉도 없는 「땅 그 자체」를 경험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땅이라 부르는 것은 그 네 성질이 모인 특별한 상태다. 그렇다면 「나」도 마음과 여러 온이 모인 특별한 상태에 붙인 이름이다. 「땅에 향이 있다」는 말은 땅의 체에 향 따위가 있음을 드러내 「이것이지 저것이 아니다」를 알게 하는 말일 뿐이니, 「나무로 만든 상(像)의 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상은 나무이고 몸은 나무의 모양이다. 상과 나무가 둘이 아닌데 소유격으로 묶어 말하는 것이다.

보광은 이 대목을 「불교에 따르면 땅은 네 가지(향 · 미 · 색 · 촉)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 따로 체가 없고, 승론에 따르면 향 따위를 떠나 따로 땅이 있으므로, 비유로써 마음을 떠난 나를 말한 것」이라 풀이한다. 『구사론』은 승론의 비유를 불교의 존재론으로 다시 읽어 되돌려 준 것이다. 땅을 사대종과 소조색으로 분석하는 『구사론』의 색법 이론은 「법의 분류」 편에서 다루었다.

이어 천친은 승론의 범주론 자체를 겨눈다. 승론은 「나의 체는 반드시 실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기억 따위의 덕(德)의 범주가 있고, 덕은 반드시 실체의 범주에 의지하며, 기억 따위가 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논증한다. 천친의 답은 간단하다. 이 증명은 「서로 인정된 전제(極成)」가 아니다. 기억 따위가 덕의 범주에 속하고 그 체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불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따로 체가 있는 것은 모두 실(實)이라 부르며, 경은 「여섯 가지 실물(實物)」을 사문의 과위라 했다. 상대가 인정하지 않는 전제에서 출발한 논증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수론사
주장「事用必待事用者」일에는 반드시 일하는 자가 있다
천친의 논파「天授」는 행의 상속에 붙인 이름「識…但以境生…謂帶彼相」식은 대상을 조건으로 생겨 그 모습을 띨 뿐(157b)
승론사
주장「諸心生時皆從於我」모든 마음은 나에게서 생긴다
천친의 논파「何緣後識不恒似前」원인이 같은데 왜 결과가 늘 다른가나와 의근의 결합은 편재하는 나와 모순「如藥事成能除痼疾,誑醫矯說普莎訶言」약이 병을 고쳤는데 엉터리 의사가 주문 덕분이라 한다(157c~158a)
승론의 비유「此但如地,能為香等四物所依」땅이 향 따위의 의지처이듯
천친「彼如是言,證成無我」그 말이 무아를 증명한다「但於心等諸蘊差別,假立我名」마음 따위 여러 온의 특별한 상태에 거짓으로 나라는 이름을 세운 것(158a)
승론의 범주 논증「以有念等德句義故」기억 따위의 덕이 있으므로
천친「此證非理,不極成故」서로 인정된 전제가 아니므로 증명이 되지 않는다(158a~b)
도표 8 · 수론과 승론 — 두 아트만의 논파

「나」가 없다면 누가 업을 짓고 누가 과보를 받는가

이제 승론사는 무아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다. 이 물음들은 보광의 분과로는 「외도의 비난에 통함」이다. 천친은 그 하나하나에 짧게 답해 간다.

먼저, 「나가 실제로 없다면 무엇을 위해 업을 짓는가(若我實無,為何造業)?」 천친은 「나가 미래에 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를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러면 그 「나」의 체는 무엇인가. 「나라는 집착의 대상이다.」 나라는 집착의 대상은 무엇인가. 「여러 온의 상속이다.」 어떻게 그렇게 아는가.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온을 탐애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렇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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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與白等覺同處起故。謂世有言:我白我黑。我老我少。我瘦我肥。現見世間緣白等覺,與計我執同處而生,非所計我有此差別,故知我執但緣諸蘊。

풀이

흰 것 따위를 아는 생각과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곧 세간에는 「나는 희다, 나는 검다, 나는 늙었다, 나는 젊다, 나는 말랐다, 나는 살쪘다」는 말이 있다. 세간에서 흰 것 따위를 반연하는 생각이 나라고 헤아리는 집착과 같은 자리에서 생기는 것을 눈앞에서 보니, 그대들이 헤아리는 나에게는 이런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집착은 다만 여러 온을 반연할 뿐임을 안다.

사람들은 「나는 늙었다」, 「나는 말랐다」고 말한다. 그때 「나」가 가리키는 것은 늙고 마른 몸이다. 승론이 세우는 상주하고 편재하는 자아는 늙지도 마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일상의 아집이 실제로 붙잡고 있는 것은 승론의 자아가 아니라 온이다. 이것은 무아설의 논증이면서 동시에 아집의 현상학이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실제로 의식하는 것은 몸과 느낌과 생각이다.

승론은 반박한다. 몸이 나를 지켜 주는 은혜가 있으므로 몸을 거짓으로 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하가 왕을 지키므로 왕이 「신하가 곧 내 몸」이라 하는 것과 같다. 천친은 은혜 때문에 거짓으로 부르는 경우는 있지만, 아집이 붙잡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그러면 남의 몸에 대해서는 왜 아집이 일어나지 않는가. 남의 몸은 나의 아집과 인과로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기억의 논증과 같은 구조다. 그러면 아집의 원인은 무엇인가.

謂無始來我執熏習,緣自相續有垢染心。

시작 없는 옛날부터의 아집의 훈습이, 자기 상속을 반연하는 때 묻은 마음이다.

『구사론』 권30 분별파집아품, T29, 158b

아집은 아집에서 생긴다. 시작 없는 옛날부터 「나」라고 붙잡아 온 습관의 훈습이 지금의 아집을 낳는다. 「나」는 아집의 원인이 아니라 아집이 거듭 만들어 온 결과다.

「나가 없다면 누가 괴로움과 즐거움을 갖는가?」 이것에 의지해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기면 「이것에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숲에 열매가 있고 나무에 꽃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안의 여섯 처(內六處)다.

몸의 업이 일어나는 차례 — 「나」는 어디에 쓰이는가

그리고 마지막 물음이 온다. 「나가 실제로 없다면 누가 업을 짓고 누가 과보를 받는가(若我實無,誰能作業?誰能受果)?」 천친이 「짓는다,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라고 묻자, 승론은 「짓는 것은 짓는 자, 받는 것은 받는 자」라고 답한다. 천친은 「이름만 바꾸었지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자 법의 모습을 가리는 승론의 논사(辯法相者)가 정의를 내놓는다. 「자재하게 행하는 것을 짓는 자라 하고, 업의 과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받는 자라 한다. 세간에서 천수가 목욕하고 먹고 걷는 데 자재하므로 '목욕하는 자'라 부르는 것을 본다.」 천친은 다시 천수가 누구냐고 묻는다. 실재하는 나라면 비유가 성립하지 않고, 온이라면 자재한 작자가 아니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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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業有三種,謂身、語、意。且起身業必依身心,身心各依自因緣轉,因緣展轉依自因緣,於中無一自在起者,一切有為屬因緣故。

풀이

업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몸 · 말 · 뜻이다. 우선 몸의 업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몸과 마음에 의지하고, 몸과 마음은 각각 자기 인연에 의지하여 움직이며, 인연은 다시 거듭 자기 인연에 의지한다. 그 가운데 하나도 자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없으니, 모든 유위는 인연에 속하기 때문이다.

자재함이란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몸의 업은 몸과 마음에 기대고, 몸과 마음은 또 그것의 인연에 기댄다. 인연의 사슬 어디에도 자재한 고리는 없다. 그렇다면 승론의 정의대로라면 작자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승론이 세우는 자아는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자재한 작자인가. 천친은 다만 「여러 법이 생기는 인연 가운데 뛰어난 작용을 가진 것이 있으면 거짓으로 작자라 부를 수 있다」고 하고, 몸의 업이 실제로 일어나는 차례를 보인다.

謂從憶念引生樂欲,樂欲生尋伺,尋伺生勤勇,勤勇生風,風起身業。汝所執我,此中何用?

곧 기억으로부터 하고자 함(樂欲)이 이끌려 생기고, 하고자 함이 생각(尋伺)을 낳고, 생각이 애씀(勤勇)을 낳고, 애씀이 바람(風)을 낳고, 바람이 몸의 업을 일으킨다. 그대들이 집착하는 나는 여기서 무슨 소용인가?

『구사론』 권30 분별파집아품, T29, 158c

기억 → 하고자 함 → 생각 → 애씀 → 몸 안의 바람 → 몸의 움직임. 손을 들어 올리는 단순한 동작에도 이만한 인과의 사슬이 있고, 그 사슬의 어느 마디에도 「나」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바람」이 몸의 업을 일으킨다는 것은 『구사론』이 몸의 표업을 몸의 형태(形色)로 보는 유부의 입장을 비판하고 경량부의 입장에 서는 대목과 이어진다. 그 논쟁은 「업의 체계」 편에서 다루었다. 천친은 「말과 뜻의 업이 일어나는 것도 이에 준하여 생각하라」고 맺는다.

「나는 또 어떻게 업의 과보를 받는가?」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과보를 아는 것이라면, 나는 앎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이미 보였다. 「나가 없다면 왜 죄와 복이 정이 없는 것(非情處)에 의지해 자라지 않는가?」 그것들은 애착 따위의 의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안의 여섯 처가 그 의지처다.

승론의 정의「能自在為,名為作者」자재하게 행하는 것이 짓는 자「能領業果,得受者名」업의 과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받는 자
천친「一切有為屬因緣故」모든 유위는 인연에 속하므로 자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없다
몸의 업이 일어나는 차례
  1. 憶念기억
  2. 樂欲하고자 함
  3. 尋伺생각
  4. 勤勇애씀
  5. 風몸 안의 바람
  6. 身業몸의 업
「汝所執我,此中何用」그대들이 집착하는 나는 여기서 무슨 소용인가(권30, T29, 158c)「語意業起,類此應思」말과 뜻의 업도 이에 준한다
도표 9 · 작자도 수자도 없이 업이 일어나는 차례

이미 사라진 업이 어떻게 미래의 과보를 낳는가

남은 물음은 하나다. 업은 찰나에 사라진다. 이미 사라진 업이 어떻게 몇 생 뒤의 과보를 낳는가. 천친은 먼저 이 물음을 승론에게 돌려준다. 「설령 실재하는 나가 있다 해도, 업이 이미 사라졌는데 어떻게 미래의 과보를 낳는가?」 승론이 「나에 의지해 법(dharma)과 비법(adharma)이 생긴다」고 하면, 「의지한다」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이미 보였다. 그러고 나서 천친은 이 품, 그리고 이 논서 전체의 가장 무게 있는 해명을 내놓는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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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然聖教中不作是說,從已壞業未來果生。若爾,從何?從業相續轉變差別,如種生果。如世間說,果從種生。然果不從已壞種起,亦非從種無間即生。若爾,從何?從種相續轉變差別果方得生,謂種次生芽莖葉等,花為最後方引果生。

풀이

그러나 성스러운 가르침에서는 이미 무너진 업에서 미래의 과보가 생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에서인가? 업의 상속이 바뀌어 가다가 특별해진 것(相續轉變差別)에서 생기니, 씨앗이 열매를 낳는 것과 같다. 세간에서 「열매는 씨앗에서 생긴다」고 말하지만, 열매는 이미 무너진 씨앗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씨앗 바로 다음에 곧바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에서인가? 씨앗의 상속이 바뀌어 가다가 특별해진 것에서 비로소 열매가 생긴다. 곧 씨앗 다음에 싹 · 줄기 · 잎 따위가 생기고, 꽃이 마지막이 되어 비로소 열매를 이끌어 낸다.

씨앗을 심으면 씨앗은 곧 사라진다. 그러나 열매는 사라진 씨앗에서 나오는 것도, 씨앗 바로 다음 순간에 나오는 것도 아니다. 씨앗은 싹이 되고, 싹은 줄기가 되고, 줄기는 잎을 내고, 마지막으로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다. 이 과정 전체가 씨앗의 상속이다. 그러면 왜 「열매는 씨앗에서 생긴다」고 하는가. 천친은 「씨앗이 거듭 이끌어 꽃 속에 열매를 낳는 공능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꽃 속의 그 공능이 씨앗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면, 생긴 열매는 씨앗과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업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구사론』 권30 · 분별파집아품 · T29, 15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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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何名相續轉變差別?謂業為先,後色心起,中無間斷,名為相續。即此相續,後後剎那異前前生,名為轉變。即此轉變,於最後時有勝功能無間生果,勝餘轉變,故名差別。

풀이

무엇을 「상속이 바뀌어 가다가 특별해진 것」이라 하는가? 업이 앞서고 그 뒤로 색과 마음이 일어나 중간에 끊어짐이 없는 것을 상속이라 한다. 바로 이 상속이 뒤뒤의 찰나가 앞앞의 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을 전변이라 한다. 바로 이 전변이 마지막 때에 곧바로 과보를 낳는 뛰어난 공능을 가져 다른 전변보다 뛰어나므로 차별이라 한다.

상속 · 전변 · 차별의 세 단어가 각각 하나의 계기를 맡는다. 업이 지어진 뒤 몸과 마음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상속). 그 흐름은 매 찰나 조금씩 달라진다(전변).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달라짐이 과보를 곧바로 낳을 만한 특별한 힘을 띠게 된다(차별). 업은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과보를 맺는 것이 아니라, 업 이후의 생명의 흐름 전체가 그 업의 영향을 띤 채 변해 가다가 과보로 무르익는 것이다. 업과 과보 사이를 잇는 것은 「나」가 아니라 이 흐름이다.

천친은 이 원리를 죽음의 순간에 적용한다. 취착이 있는 식이 목숨을 마칠 때, 다음 생을 이끌 업의 훈습을 여럿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 무겁고 가깝고 자주 익힌 것이 먼저 뚜렷해진다. 그리고 한 게송을 인용한다. 「업이 지극히 무거운 것, 가까이 일으킨 것, 자주 익힌 것, 먼저 지은 것이, 앞앞의 것이 앞서 익어 생사에 윤회한다(業極重近起,數習先所作,前前前後熟,輪轉於生死).」 업의 과보에 순서가 있는 것도 상속 안의 힘의 크기로 설명된다.

「상속전변차별(santati-pariṇāma-viśeṣa)」은 경량부가 업과 과보의 관계를 설명한 개념으로, 『구사론』은 근품의 득(得) 논의, 업품, 그리고 이 마지막 대목에서 거듭 이 말을 쓴다. 유부는 과거의 업이 실재하므로 과보를 맺는다고 보았는데, 이 대립은 「번뇌와 삼세실유」 편과 「업의 체계」 편에서 다루었다. 핵심 개념 「업」은 이 대립을 한 문단으로 요약하고, 상속전변차별이 유식학의 종자 · 아뢰야식 설로 이어짐을 보였다. 여기서는 그 개념이 『구사론』의 마지막 논증에서 「나」를 대신하는 자리에 놓인다는 점을 본다.

이숙과는 다시 이숙을 낳지 않는다 — 구연 꽃의 붉은 속

천친은 이 설명에서 생길 수 있는 마지막 의문 하나를 처리한다. 씨앗에서 열매가 나고 그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어 열매를 낳는다면, 업의 과보(이숙과)도 다시 과보를 낳아 끝없이 이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해탈은 불가능하다. 천친은 먼저 원칙을 세운다. 이숙인이 이끈 공능은 이숙과를 준 뒤 곧 사라진다. 동류인이 이끈 공능은, 번뇌에 물든 것이면 대치의 도가 일어날 때 사라지고, 물들지 않은 것이면 반열반 때 비로소 영원히 사라진다. 그때 색과 마음의 상속이 영원히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앗의 비유도 정확히 보면 같다고 한다. 열매에서 바로 다른 열매가 나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물과 흙 같은 조건을 만나 다시 「익어 변하는 특별한 상태」를 이끌어 낸 뒤에야 싹이 난다. 싹이 나려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그것을 씨앗이라 부를 수 있다. 업도 그렇다. 과보로 받은 생에서 바른 법이나 그릇된 법을 듣는 등의 조건을 만나 새로 선이나 불선의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이 새로운 상속전변차별을 이끌어 다음 과보를 낳는다. 이숙과 그 자체가 다시 이숙을 낳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비유를 든다.

如拘櫞花塗紫礦汁,相續轉變差別為因,後果生時瓤便色赤,從此赤色更不生餘。

구연(拘櫞) 꽃에 자광(紫礦)의 즙을 바르면, 그 상속이 바뀌어 가다가 특별해진 것이 원인이 되어 뒤에 열매가 생길 때 속이 붉은빛이 되지만, 이 붉은빛에서 다시 다른 것이 생기지는 않는 것과 같다.

『구사론』 권30 분별파집아품, T29, 159a~b

꽃에 물감을 바르면 그 영향은 사라지지 않고 꽃의 상속을 따라가다가 열매 속을 붉게 물들인다. 그러나 그 붉은 빛깔이 다시 무언가를 물들이지는 않는다. 업의 과보도 그렇게 한 번 무르익고 나면 끝난다. 새로운 과보는 새로운 업에서 온다. 이것이 해탈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논리다.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면, 그리고 업을 짓게 하는 번뇌가 끊어지면, 상속은 남은 과보를 다 받은 뒤 끝날 수 있다.

씨앗의 비유업
씨앗
업
싹줄기
상속
잎
전변
꽃
차별
열매
과보
이숙의 끝「如拘櫞花塗紫礦汁…從此赤色更不生餘」구연 꽃에 물감을 바르면 열매 속이 붉어지되 그 붉음은 다시 다른 것을 낳지 않는다(159a~b)
씨앗의 비유「果不從已壞種起,亦非從種無間即生」열매는 무너진 씨앗에서도, 씨앗 바로 다음에서도 생기지 않는다
죽음의 때「業極重近起,數習先所作」지극히 무거운 것 · 가까이 일으킨 것 · 자주 익힌 것 · 먼저 지은 것이 앞서 익는다
업
  1. 「謂業為先,後色心起,中無間斷,名為相續」업이 앞서고 색과 마음이 끊임없이 이어짐 = 상속
  2. 「後後剎那異前前生,名為轉變」찰나마다 달라짐 = 전변
  3. 「於最後時有勝功能無間生果…故名差別」마지막에 곧바로 과보를 낳는 뛰어난 힘 = 차별(159a)
도표 10 · 업에서 과보까지 — 상속전변차별

『구사론』의 끝맺음 — 「천 명의 성인이 노닌 무아의 길」

긴 논증을 마친 천친은 다시 겸손으로 돌아간다. 「앞에서는 다만 스스로 깨달은 지혜의 경계를 따라 업과 과보의 거친 모습을 간략히 드러냈을 뿐이다. 그 사이의 다른 부류의 갖가지 공능이 업에 훈습되어 상속하며 바뀌어 가다가 저 자리 저 자리에 이르러 저 과보 저 과보가 생기는 것은 오직 부처만이 증득하여 알 뿐 다른 이의 경계가 아니다.」 그리고 본송 자리에서 읽은 「이 업, 이 훈습이 이때에 이르러 과보를 준다는 모든 정해진 이치는 부처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는 게송을 든다. 앞에서 본 공작 깃털의 게송과 짝을 이루는 말이다. 마음의 차례도, 업이 무르익는 때도, 그 세부는 일체지의 몫이다.

그리고 논서 전체가 세 수의 게송으로 끝난다. 보광은 이 세 게송을 각각 「도를 찬탄하여 버리기를 권함」, 「도를 찬탄하되 보지 못함을 말함」, 「간략함을 드러내어 배우기를 권함」으로 나누었다.

첫째 게송은 지금까지 설한 것이 「청정한 원인의 길」이며, 그것은 천친 자신의 말이 아니라 「부처의 지극한 말씀이요 참된 법성」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둡고 눈먼 바깥의 집착을 버리고 지혜의 눈을 구하라. 둘째 게송은 그 길을 「열반의 궁으로 가는 하나의 넓은 길」, 「천 명의 성인이 노닌 무아의 성품」이라 부른다. 무아는 여기서 부정의 교리가 아니라 길이다. 수많은 성인이 실제로 걸어간, 열반에 이르는 넓은 길이다. 부처의 말씀이 해처럼 그 길을 비추지만, 눈을 떴어도 어두운 눈으로는 보지 못한다. 셋째 게송에서 천친은 자기가 한 일을 「이 한 방향과 모퉁이를 간략히 말한 것」이라고 낮춘다. 그러나 그 작은 문은 「지혜의 독문」이다. 작은 상처에 바른 독이 온몸에 퍼지듯, 지혜로운 이에게는 이 작은 문이 존재 전체를 바꾸는 깨달음으로 번질 것이다. 그러니 저마다 힘껏 알아야 할 것을 깨달아 뛰어난 업을 이루라.

아홉 품, 서른 권에 이르는 논서가 「자기 힘이 감당하는 대로」라는 권유로 끝난다. 일흔다섯 가지 법의 분석도, 여섯 원인과 네 조건의 체계도, 삼계와 업과 번뇌와 성자의 계단도, 결국은 각자가 걸어가야 할 「무아의 길」을 위한 지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놓인 것은 「나」의 부정이 아니라 「뛰어난 업(勝業)」이다. 「나」에 대한 집착을 깨뜨린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업을 짓되 뛰어난 업을 짓는 것이다.

진제 역의 맺음 게송은 현장 역보다 길어서, 세존이 부루나에게 「그대들은 바르게 힘써 이 법을 지녀라. 이에 의지해 관행을 닦으면 반드시 다섯 가지 다섯 공덕을 얻으리라」고 했다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두 번역이 의거한 원본의 차이, 또는 번역 방침의 차이로 보인다.

승론은 「모든 마음은 나에게서 생긴다」고 했지만, 원인이 늘 같은데 결과가 늘 다른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늙었다」는 말에서 보듯 아집이 실제로 붙잡는 것은 온이며, 몸의 업은 기억 · 의욕 · 생각 · 애씀 · 바람의 사슬로 일어난다. 업의 과보는 이미 사라진 업이 아니라 업 이후의 상속이 바뀌어 가다가 특별해진 것에서 생긴다. 『구사론』은 이 「무아의 길」을 「열반의 궁으로 가는 하나의 넓은 길」이라 부르며 끝난다.

제5장 『구사론』 이후중현의 반박, 천친의 전향, 동아시아의 구사학

본송

『구사론』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대표하는 게송으로, 중현이 『구사론』을 요약 · 비판한 『현종론』의 첫머리 게송을 든다.

중현 『아비달마장현종론』 권1 · 서품 · T29 no.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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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我以順理廣博言,對破餘宗顯本義,若經主言順理教,則隨印述不求非。 少違對法旨及經,決定研尋誓除遣,已說論名順正理,樂思擇者所應學。

풀이

나는 이치에 따르는 넓은 말로 다른 종지를 마주하여 깨뜨리고 본래의 뜻을 드러낸다. 만약 경주(經主)의 말이 이치와 가르침에 따른다면, 그대로 인가하여 서술하고 흠을 찾지 않으리라. 대법의 뜻과 경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연구하고 찾아 없애기를 맹세한다. 이미 설한 논을 『순정리』라 이름하였으니, 사유하고 가리기를 즐기는 이가 배워야 할 것이다.

술어 풀이

眾賢중현
범어 Saṅghabhadra. 카슈미르의 설일체유부 논사. 『구사론』을 비판하여 유부의 정통 교의를 지키고자 『아비달마순정리론』 80권(T29 no.1562)과 그 요약인 『아비달마장현종론』 40권(T29 no.1563)을 지었다. 둘 다 현장이 한역했다.
經主경주
「경을 주로 삼는 이」. 중현이 『순정리론』에서 천친을 부르는 호칭. 경량부의 입장에 기운 천친을 경량부의 대표로 보아 이렇게 불렀다.
上座상좌
『순정리론』에서 중현이 자주 비판하는 경량부 계통의 논사. 슈리라타(Śrīlāta)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婆藪槃豆法師傳바수반두법사전
진제(眞諦, Paramārtha)가 한역한 천친의 전기(T50 no.2049). 천친의 형 무착(아상가)과 아우 비린지발바의 이야기, 『구사론』의 성립, 대승 전향의 경위를 전한다. 전기적 사실과 전설이 섞여 있다.
俱舍釋論구사석론
진제 역 『아비달마구사석론』 22권(T29 no.1559). 진(陳) 천가(天嘉) 4년(563)에 번역을 시작했다고 서문에 적혀 있다.
俱舍宗구사종
『구사론』을 중심으로 아비달마를 연구한 학파. 일본에서는 남도(나라) 불교의 학파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법상종에 딸려 연구된 이른바 「우종(寓宗)」이었다고 전한다.
南都六宗남도육종
나라 시대에 성립한 여섯 학파. 삼론 · 성실 · 법상 · 구사 · 화엄 · 율.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이 여섯 종을 차례로 드신다.

중현의 『순정리론』 — 「경주는 제 집착을 따랐을 뿐」

『구사론』은 「카슈미르 비바사사의 이치에 대체로 의거했다」고 스스로 밝히지만, 곳곳에서 「이것은 비바사사의 설이다(傳說)」라며 거리를 두고, 경량부의 입장에서 유부의 교의를 비판한다. 이 태도에 대해 유부 정통의 쪽에서 전면적인 반박이 나왔다. 카슈미르의 논사 중현의 『아비달마순정리론』이다. 「바른 이치에 따르는 논」이라는 이름 그대로, 『구사론』이 이치에서 벗어난 곳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순정리론』의 형식은 독특하다. 중현은 『구사론』의 본송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품마다 다시 풀이하고, 그 과정에서 천친의 장행을 한 줄씩 짚어 반박한다. 천친을 부르는 호칭은 「경주(經主)」다. 경을 주로 삼는 이, 곧 경량부의 대변자라는 뜻이다. 중현의 비판이 어떤 어조인지는 몇 대목만 보아도 드러난다. 천친이 근품에서 유부의 「득(得)」을 부정하고 경량부의 종자설을 내세운 데 대해 중현은 이렇게 말한다.

중현 『순정리론』 권12 · 변차별품 · T29, 39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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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經主於中雖隨自執多有所說而無所成,所執種子理不成故。

풀이

경주는 여기서 비록 제 집착을 따라 많은 말을 했지만 이룬 것이 없다. 그가 집착하는 종자는 이치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계품에서 천친이 「쌓임」이라는 온(蘊)의 뜻을 경에 근거해 판정한 대목을 두고는, 처와 계의 뜻에서는 경증을 구하지 않고 이치로만 풀었으면서 온의 뜻에서만 굳이 경증을 요구하니 「이 뜻과 말을 보건대 오로지 한쪽 편을 드는 것 같다(觀此義言,似專朋黨)」고 꼬집는다(권3, 변본사품, T29, 344a). 『순정리론』은 이런 식으로 『구사론』의 거의 모든 쟁점에서 유부의 입장을 다시 세운다. 삼세실유, 무표색, 득과 비득, 심불상응행의 실재 같은 쟁점에서의 중현의 반론은 「번뇌와 삼세실유」 편을 비롯한 앞의 편들에서 그때그때 다루었다.

그런데 『순정리론』에는 눈에 띄는 공백이 하나 있다. 중현은 『구사론』의 여덟 품 — 『순정리론』에서는 변본사품 · 변차별품 · 변연기품 · 변업품 · 변수면품 · 변현성품 · 변지품 · 변정품 — 에 대해서는 길게 반박하지만, 파집아품에 해당하는 품은 두지 않았다. 『순정리론』 80권은 변정품에서 『구사론』 분별정품의 마지막 게송들을 풀이하고 이렇게 끝난다.

중현 『순정리론』 권80 · 변정품 · T29, 77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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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由此決判諸法正理,唯在真實大牟尼尊。是故定知阿毘達磨,真是佛說,應隨信受,無倒修行,勤求解脫。

풀이

그러므로 모든 법의 바른 이치를 결판하는 것은 오직 진실한 대모니존(석가모니)께 있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는 참으로 부처의 말씀이니, 따라서 믿고 받아들여 뒤바뀜 없이 닦아 행하여 부지런히 해탈을 구해야 함을 결정코 안다.

천친이 「바른 이치를 가리는 일은 석가모니에게 있다」고 한 같은 게송을, 중현은 「그러므로 아비달마는 참으로 부처의 말씀」이라는 결론으로 닫는다. 아비달마는 불설이 아니라는 경량부의 입장을 끝까지 겨눈 것이다. 그러나 「나」를 깨뜨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유부도 경량부도 보특가라를 부정하는 데서는 한목소리였으므로 다툴 것이 없었다고 볼 수도 있고, 중현이 본 『구사론』의 원본에 파집아품이 아직 붙어 있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앞의 해석이 오래된 설명이고, 뒤의 해석은 이 품을 독립 논문으로 보는 근대의 견해와 맞물린다. 어느 쪽이든, 『구사론』을 둘러싼 가장 치열한 논쟁은 법의 실재를 둘러싼 것이었지 「나」의 부정을 둘러싼 것은 아니었다.

중현은 『순정리론』을 완성한 뒤 그것을 요약하여 『현종론』을 지었다. 본송 자리에서 읽은 『현종론』의 첫머리 게송이 그 경위를 말해 준다. 「이미 설한 논을 『순정리』라 이름했다 … 넓은 글을 추려 쉽게 알게 하려고 간략한 논을 지어 '현종'이라 이름한다」. 『현종론』도 변정품에서 끝나며, 「나」를 다루는 품은 없다.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계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본사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근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차별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세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연기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업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업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수면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수면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현성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현성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지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지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정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변정품
『구사론』(현장 역 30권)분별파집아품
『순정리론』(현장 역 80권)(없음)
천친의 호칭「經主」경을 주로 삼는 이
중현의 어조
「經主於中雖隨自執多有所說而無所成」경주는 제 집착을 따라 많은 말을 했지만 이룬 것이 없다(권12, T29, 398b)「似專朋黨」오로지 한쪽 편을 드는 것 같다(권3, T29, 344a)
『순정리론』의 끝「是故定知阿毘達磨,真是佛說」그러므로 아비달마는 참으로 부처의 말씀임을 결정코 안다(권80, T29, 775c)
도표 11 · 『구사론』과 『순정리론』 — 품의 대응

『바수반두법사전』이 전하는 『구사론』의 성립과 그 뒤

천친의 생애와 『구사론』의 성립 연대에 관한 문헌학적 논의는 서강 「『구사론』을 펼치며」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진제가 전한 『바수반두법사전』이 『구사론』의 성립 이후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만 간추린다.

전기에 따르면 천친은 비바사의 뜻을 대중에게 강설하며 하루에 한 게송씩 그날 풀이한 뜻을 거두어 지었고, 그렇게 육백여 게송을 이루니 이것이 『구사론』의 게송이었다.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들은 이 게송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장행으로 풀이해 주기를 청했는데, 천친은 「살바다(설일체유부)의 뜻을 세우되 치우친 곳이 있으면 경부의 뜻으로 깨뜨렸다(立薩婆多義隨有僻處以經部義破之)」. 논이 완성되어 카슈미르에 보내지자, 비바사사들은 「자기들이 집착하던 뜻이 무너진 것을 보고 저마다 근심했다」고 전한다(T50, 190b).

이어서 전기는 중현과의 일화를 전한다. 천친에게 패한 외도가 천축에서 승가발타라(僧伽紱陀羅) 법사를 청해 『구사론』을 깨뜨리게 했다. 그는 비바사의 뜻만을 서술한 『광삼마야론』 1만 게송과, 비바사의 뜻을 구하고 『구사론』을 깨뜨리는 『수실론』 12만 게송을 지었다. 그리고 천친을 불러 대면 논쟁을 청했지만, 천친은 「그가 깨뜨렸어도 『구사론』의 뜻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음」을 알고 응하지 않았다. 「나도 예전에 논을 지어 비바사의 뜻을 깨뜨렸지만 그들을 불러 마주하여 따지지는 않았다. 지혜로운 이라면 스스로 옳고 그름을 알 것이다.」 전기 속의 승가발타라는 중현(Saṅghabhadra)의 다른 음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수실론』은 『순정리론』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리고 전기는 천친의 전향을 전한다. 천친은 소승에 집착하여 대승을 믿지 않았고, 「마하연(대승)은 부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했다. 형 무착(아상가)은 아우가 논을 지어 대승을 깨뜨릴까 염려하여, 병이 깊으니 급히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천친이 찾아가 병의 근원을 묻자 형은 「네가 대승을 믿지 않고 늘 헐뜯으니, 그 악업으로 반드시 악도에 떨어질 것이라 근심하여 병이 났다」고 답했다. 천친은 놀라 대승의 요지를 청해 듣고, 곧 대승의 이치가 소승보다 뛰어남을 깨달았다. 전기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적는다.

진제 역 『바수반두법사전』 · T50, 190c~19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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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始驗小乘為失大乘為得。若無大乘則無三乘道果。 汝舌能善以毀謗大乘。汝若欲滅此罪當善以解說大乘。

풀이

비로소 소승은 잃은 것이요 대승은 얻은 것임을 증험하였다. 대승이 없다면 삼승의 도과도 없다. (형이 말했다.) 「너의 혀는 대승을 헐뜯는 데 능했다. 이 죄를 없애고자 한다면, 이제 그 혀로 대승을 잘 풀어 설하라.」

천친은 혀를 잘라 죄를 갚겠다고 했으나, 형은 「천 개의 혀를 잘라도 이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며 대승을 풀어 설하는 것이 참된 참회라고 일렀다. 전기는 그 뒤 천친이 『화엄』 · 『열반』 · 『법화』 · 『반야』 · 『유마』 · 『승만』 등 여러 대승경의 논을 짓고, 『유식론』과 『섭대승론석』 등을 지었으며, 아유사국에서 여든에 세상을 떠났다고 맺는다. 천친의 유식 저술과 그것이 남긴 영향은 핵심 개념 「구식」에서 다루었다.

『바수반두법사전』의 이야기는 전기이면서 동시에 교훈적 서사다. 『구사론』의 저자와 유식 논서들의 저자가 같은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근대 학계에 두 천친 설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이 문제는 서강에서 다루었고, 여기서는 동아시아 불교가 이 전기를 통해 천친을 「소승의 대가에서 대승의 논사로 돌아선 사람」으로 기억했다는 사실만 짚는다.

진제와 현장 — 두 번의 번역과 「총명론」

『구사론』은 중국에 두 번 번역되었다. 첫 번역은 진제의 『아비달마구사석론』 22권이다. 혜개(慧愷)가 쓴 서문에 따르면, 진제는 진(陳) 천가 4년(563) 정월 광주의 제지사(制旨寺)에서 번역과 강설을 시작하여 그해 윤10월에 마쳤고, 이듬해 다시 고쳐 번역하여 광대 원년(567) 12월에 정본을 완성했다. 서문은 이 논이 「살바다부를 본종으로 하되 그 취사는 경부를 바른 것으로 삼았다」고 소개하고, 인도에서는 이 논을 「총명론(聰明論)」이라 부르며 대승과 소승을 배우는 이가 모두 이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전한다(T29, 161b).

두 번째 번역은 현장의 『아비달마구사론』 30권이다. 보광의 『구사론기』 서문은 이 번역이 「영휘 연간에 대자은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고, 진제가 이미 번역했으나 「지방의 말이 원숙하지 못해 때로 잘못이 있었다」고 새 번역의 이유를 밝힌다(T41, 1b). 같은 서문은 이 논이 「일체유부의 뜻을 서술하면서도 때로 경부로 바로잡았다」고 하고, 인도의 학도들이 이것을 「총명론」이라 불렀다는 말도 되풀이한다. 현장의 번역과 함께 그 문하에서 보광의 『구사론기』, 법보의 『구사론소』, 신태의 『구사론소』가 나왔다. 동아시아의 구사학은 이 세 주석을 중심으로 이어졌고, 이 연재가 각 편에서 주석가의 풀이를 인용한 것도 주로 이 문헌들이다.

『구사론』이 「총명론」이라 불린 것은 이 논서가 특정 부파의 교과서를 넘어 불교 교학 전반의 기초 문법이 되었음을 뜻한다. 진제는 『구사론』과 함께 유식 논서인 『섭대승론』을 번역했고, 현장도 『구사론』과 함께 『성유식론』을 번역했다. 중국의 학승들에게 『구사론』은 대승 교학, 특히 유식을 배우기 위해 먼저 익혀야 할 기초였다. 법수(法數)의 정의, 번뇌의 목록, 수행 계위의 명칭이 모두 여기서 왔다.

남도의 구사종 — 법상종에 딸린 배움

일본에서 『구사론』의 연구는 남도(나라)의 여러 대사원에서 이루어졌다. 나라 시대의 학파를 흔히 「남도육종」이라 부르며, 구사종은 그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구사종은 독립된 종단이라기보다, 법상종의 학승들이 유식을 배우는 기초로서 『구사론』을 연구한 학파였다. 그래서 구사종은 법상종에 딸린 「우종(寓宗)」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성실종이 삼론종에 딸려 연구된 것과 짝을 이룬다. 법상종의 학승들 사이에서 「유식 3년, 구사 8년」이라는 말이 전해 온 것도, 『구사론』이 유식을 배우기 위한 긴 준비 과정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준다.

대성인은 「선시초」에서 일본에 여러 종이 전해진 차례를 이렇게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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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 · 어서 원문

其の後・人王第三十七代に孝徳天王の御宇に三論宗・成実宗を観勒僧正・百済国よりわたす、同御代に道昭法師・漢土より法相宗・倶舎宗をわたす

풀이

그 뒤 인왕 제37대 고토쿠 천황의 치세에 삼론종 · 성실종을 관륵 승정이 백제국에서 건너오게 하였고, 같은 치세에 도쇼 법사가 한토(중국)에서 법상종 · 구사종을 건너오게 하였느니라. (「선시초」, 263쪽)

이 대목은 남도 불교의 학파들이 어떻게 짝을 지어 들어왔는지를 보여 준다. 삼론과 성실이 함께, 법상과 구사가 함께 건너왔다. 대성인은 이어서 화엄종과 율종의 전래를 드시고, 전교대사가 젊은 날 「처음에는 삼론 · 법상 · 화엄 · 구사 · 성실 · 율의 육종과 아울러 선종 등을 행표 승정 등에게 배웠다」고 쓰신다(같은 쪽). 법상종과 짝을 이루어 들어온 구사종은 전교대사가 배운 남도 교학의 하나였다.

법상종의 일본 전래는 도쇼(道昭)의 귀국(7세기 중엽)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구사종이 독립된 종파로 공인된 정확한 시점은 사료에 따라 정리가 다르다. 여기서는 대성인이 「선시초」에서 법상종과 구사종을 함께 도쇼에게 돌리신 정리를 따르며, 구사종이 법상종에 딸린 학파였다는 일반적 이해만 적는다.

인도
천친 『구사론』(본송 → 장행)「立薩婆多義隨有僻處以經部義破之」살바다의 뜻을 세우되 치우친 곳은 경부의 뜻으로 깨뜨렸다(『바수반두법사전』)
중현 『순정리론』 80권 · 『현종론』 40권유부의 반박
중국
563567
진제 역 『구사석론』 22권「以陳天嘉四年」진 천가 4년(563) 번역 시작광대 원년(567) 정본(혜개 서문, T29, 161b)
영휘현장 역 『구사론』 30권「永徽年中於大慈恩寺譯」영휘 연간 대자은사에서 번역(보광 『구사론기』, T41, 1b)
보광 『구사론기』 · 법보 『구사론소』 · 신태 『구사론소』
「聰明論」인도에서 총명론이라 불렀다
일본
「道昭法師・漢土より法相宗・倶舎宗をわたす」도쇼 법사가 법상종 · 구사종을 전했다(「선시초」 263쪽)
남도육종의 하나법상종에 딸린 우종(寓宗)
도표 12 · 『구사론』이 건너온 길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구사론』의 거의 모든 쟁점을 유부의 입장에서 되받았지만 파집아품에 해당하는 품은 두지 않았다. 『바수반두법사전』은 천친이 중현의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뒤에 형 무착의 권유로 대승에 돌아섰다고 전한다. 진제와 현장의 두 번역을 거쳐 『구사론』은 「총명론」, 곧 대승 교학을 배우기 위한 기초 교과서가 되었고, 일본에서는 법상종에 딸린 남도의 구사종으로 이어졌다.

제6장 삼장교라는 자리천태의 판정

본송

이 장은 천태 문헌에서 『구사론』의 자리를 정한 문장들을 읽는다. 대표로 제관 『천태사교의』의 삼장교 정의를 든다.

제관 『천태사교의』 · T46 no.1931, 77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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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第一、三藏教者,一修多羅藏(《四阿含》等經)、二阿毘曇藏(《俱舍》、《婆沙》等論)、三毘尼藏(五部律),此之三藏名通大小,今取小乘三藏也。

풀이

첫째, 삼장교란 첫째 수다라장(『사아함』 등의 경), 둘째 아비담장(『구사』 · 『바사』 등의 논), 셋째 비니장(오부의 율)이다. 이 삼장이라는 이름은 대승과 소승에 통하지만, 여기서는 소승의 삼장을 취한다.

술어 풀이

三藏教삼장교
화법사교의 첫째. 경 · 율 · 논의 삼장으로 이루어진 소승의 가르침. 줄여서 장교(藏教)라 한다. 『구사론』과 『대비바사론』은 이 가운데 아비담장(논장)에 속한다.
析空觀석공관
사물을 그 구성 요소로 쪼개어 분석함으로써 실체가 없음(공)을 아는 관법. 장교의 공관. 『구사론』이 「나」를 오온으로, 오온을 찰나와 극미로 분석하는 방식이 그 전형이다.
體空觀체공관
쪼개지 않고 사물 그 자체가 그대로 공함을 아는 관법. 통교의 공관. 『반야경』의 공이 그 중심이다.
拙度 · 巧度졸도 · 교도
「서툰 건넘」과 「솜씨 있는 건넘」. 천태는 장교의 석공을 졸도, 통교의 체공을 교도라 불렀다. 둘 다 생사를 건너게 하지만 건너는 방식이 다르다.
生滅四諦생멸사제
장교가 보는 사제. 괴로움과 그 원인이 실제로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보는 사제관. 사종사제의 첫째.
數人 · 論人수인 · 논인
천태 문헌의 용어. 「수인」은 법수(法數)를 헤아리는 아비담(毘曇)의 논사들, 곧 설일체유부 계통의 논사를 가리키고, 「논인」 · 「성론사」는 『성실론』의 논사를 가리킨다.
有門 · 空門유문 · 공문
진리에 들어가는 문(門)의 넷 가운데 둘. 천태는 삼장교에도 유문 · 공문 · 역유역공문 · 비유비공문의 네 문이 있다고 하고, 아비담은 유문을, 『성실론』은 공문을 편 것이라 했다.
界內 · 界外계내 · 계외
삼계 안의 생사와 삼계 밖의 미혹. 장교와 통교는 삼계 안의 견사혹을 끊는 「계내의 가르침」이고, 별교와 원교는 삼계 밖의 무명까지 다루는 「계외의 가르침」이다.
但空단공
「다만 공」. 공에서 멈추어 가(假)와 중(中)을 보지 못하는 공. 장교와 통교의 공을 가리킨다.

화법사교의 첫째 — 『사교의』가 정의한 삼장교

천태대사 지의가 세운 화법사교 — 장 · 통 · 별 · 원 — 의 개요와 오시와의 관계, 「장 등 네 가르침은 화법이니 약재의 맛을 가리는 것과 같다」는 『천태사교의』의 비유, 그리고 장교를 「삼장의 소승 · 석공 · 생멸사제」로 요약하는 정의는 핵심 개념 「오시팔교」 5부에서 다루었다. 이 장은 그 첫째 칸, 삼장교 안으로 들어가 『구사론』이 거기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원문으로 본다.

지의 자신의 저술 가운데 화법사교를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사교의(四教義)』 12권이다. 이 책은 첫머리에서 네 가르침의 이름을 하나씩 풀이하는데, 삼장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의 『사교의』 권1 · T46 no.1929, 721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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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第一釋三藏教名者,此教明因緣生滅四聖諦理,正教小乘,傍化菩薩。所言三藏教者,一修多羅藏,二毘尼藏,三阿毘曇藏。

풀이

첫째, 삼장교의 이름을 풀이한다. 이 가르침은 인연으로 생멸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이치를 밝히니, 바로 소승을 가르치고 곁으로 보살을 교화한다. 삼장교라 하는 것은 첫째 수다라장, 둘째 비니장, 셋째 아비담장이다.

「바로 소승을 가르치고 곁으로 보살을 교화한다(正教小乘,傍化菩薩)」는 정의가 중요하다. 삼장교에도 보살이 있다. 『구사론』도 분별업품에서 보살이 삼아승기겁 동안 육바라밀을 닦고 백 겁 동안 상호의 업을 닦는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중심은 아라한이 되는 성문의 길에 있다. 지의는 이어서 아비담을 「무비법(無比法)」, 곧 「성인의 지혜로 법의 뜻을 분별하여 세상에 견줄 데가 없는 것」이라 풀이하고, 「부처가 스스로 법의 뜻을 분별한 것이든 부처의 제자가 법의 뜻을 분별한 것이든 모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경 · 율 · 논을 정 · 계 · 혜의 세 배움에 짝지어 「아비담은 곧 혜장이니 번뇌 없는 지혜의 법을 분별하여 견줄 수 없다」고 하고, 이렇게 맺는다.

此之三藏教的屬小乘,故《法華經》云:「貪著小乘三藏學者。」

이 삼장교는 분명히 소승에 속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에 「소승 삼장을 배우는 이를 탐착한다」고 하였다.

지의 『사교의』 권1, T46 no.1929, 721b

「삼장교」라는 이름이 법화경 안락행품의 「소승 삼장을 배우는 이(小乘三藏學者)」라는 경문에서 왔다는 것은, 『천태사교의』도 같은 경문과 함께 『대지도론』의 「가전연자는 스스로 총명하고 근기가 예리하다 하여, 『바사』에서 삼장의 뜻을 밝히고 대승경을 읽지 않았으니 대보살이 아니다」라는 구절을 들어 확인한다(T46, 776a). 장교라는 이름 자체가 아비달마 논서, 특히 『대비바사론』과 그 계통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제관은 본송 자리에서 읽은 대로, 아비담장의 예로 「『구사』 · 『바사』 등의 논」을 명시했다.

『사교의』는 「삼장교」라는 이름에 대한 반론도 다룬다. 삼장이라는 이름은 대승에도 쓰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의는 「삼장의 이름은 대승과 소승에 통하지만」 경전에서 소승을 가리킬 때 삼장이라는 말을 썼으므로 그것을 따른다고 답한다. 『천태사교의』의 「이 삼장이라는 이름은 대승과 소승에 통하지만 여기서는 소승의 삼장을 취한다」도 같은 뜻이다.

왜 통교도 별교도 원교도 아닌가 — 「삼장교」의 확정

지의는 네 가르침의 이름을 풀이한 뒤 「핵정(覈定)」, 곧 그 이름이 왜 그 가르침에만 붙는지를 다시 따진다. 삼장교에 대한 핵정은 『구사론』을 비롯한 아비달마의 성격을 천태가 어떻게 보았는지 잘 보여 준다. 반론은 이렇다. 삼장교도 무상을 설하고 삼승이 함께 그것을 받아 도에 들어가니 통교가 아닌가. 따로 보살을 위해 홍서와 육도를 설하니 별교가 아닌가. 일체종지를 설하여 불과를 구하게 하니 원교가 아닌가.

지의 『사교의』 권1 · T46 no.1929, 72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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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言說無常通教三乘是通教者,二乘聞無常發真斷結,一世便入涅槃,可是稟教見無常理。菩薩雖稟無常之教,三阿僧祇劫不發真斷結,豈見無常之理?

풀이

만약 무상을 설하여 삼승을 통틀어 가르치므로 통교라 한다면, 이승은 무상을 듣고 참된 지혜를 일으켜 번뇌를 끊어 한 생에 곧 열반에 드니 가르침을 받아 무상의 이치를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살은 무상의 가르침을 받아도 삼아승기겁 동안 참된 지혜를 일으켜 번뇌를 끊지 않으니, 어찌 무상의 이치를 보았다 하겠는가?

이 논변은 『구사론』의 보살론을 정확히 짚는다. 『구사론』에서 보살은 삼아승기겁 동안 육바라밀을 닦지만 번뇌를 끊지 않고, 마지막 생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견도에 들어 서른네 찰나 만에 모든 번뇌를 끊는다. 아래에서 장교의 계위와 함께 볼 「삼십사심」이다. 그렇다면 삼장교의 보살은 수행의 대부분 동안 이승이 본 무상의 이치를 아직 보지 못한 것이 된다. 삼승이 같은 이치를 함께 본다는 통교의 조건이 성립하지 않는다.

별교와 원교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삼장교의 보살이 세우는 원과 행은 「여전히 생멸사제에 기대어 일으킨 것이고, 생멸사제를 보는 데서는 이승에도 미치지 못하니」 별교일 수 없다. 일체종지를 권한다 해도 「보살이 인위에서 일체종지를 갖추지 못하고, 그 종지도 이제(二諦)만 비추고 중도를 비추지 않으니」 원교일 수 없다. 지의는 결론짓는다. 「세 가르침의 요소가 있어도 그 뜻을 따지면 성립하지 않으므로 다만 삼장교라 이름한다.」 『구사론』이 보살을 말하고 일체지를 말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삼장교라는 판정을 바꾸지 못한다.

삼장교의 네 문 — 아비담은 유문, 『성실론』은 공문

천태의 판정이 단순한 등급 매기기가 아님은 「네 문(四門)」의 설에서 드러난다. 지의는 모든 가르침에 진리에 들어가는 네 문 — 유문 · 공문 · 역유역공문 · 비유비공문 — 이 있다고 하고, 삼장교의 네 문을 이렇게 배당한다.

지의 『사교의』 권3 · T46 no.1929, 72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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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一有門者,即三藏教,明正因緣生滅之有。若稟此教,能破十六知見,見陰、界、入一切有為諸法,悉皆觀無常、苦、空、無我,得世第一法,發真無漏。因有見真,有即第一義諦之門也。……此即諸《阿毘曇論》之所申也。

풀이

첫째 유문은 곧 삼장교가 바른 인연으로 생멸하는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가르침을 받으면 열여섯 가지 지견을 깨뜨리고, 음 · 계 · 입의 모든 유위법을 보아 모두 무상 · 고 · 공 · 무아로 관하여 세제일법을 얻고 참된 무루를 일으킨다. 있음으로 인해 참됨을 보니, 있음이 곧 제일의제의 문이다. …… 이것은 곧 여러 『아비담론』이 편 것이다.

이어 둘째 공문은 「인연으로 생긴 가법과 실법을 쪼개어 공에 들어가는 것」으로 『성실론』이 편 것이고, 셋째 역유역공문은 가전연이 이로써 도에 들어 『곤륵론(昆勒論)』을 지었으며, 넷째 비유비공문은 차닉(車匿)이 이로써 도에 들었으나 아직 논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어떤 이는 독자부의 아비담이 이 뜻을 편 것이라 한다. 그 논은 '나는 말할 수 없는 다섯째 곳간에 있으니, 나는 삼세가 아니므로 있음이 아니고 무위법이 아니므로 공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꼭 그렇다고 정할 수 없을 것이다.」 파집아품에서 본 독자부의 「다섯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천태 문헌에도 이렇게 흔적을 남겼다.

『구사론』은 이 네 문 가운데 유문에 해당한다. 법을 하나하나 실재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그 실재하는 법들의 무상 · 고 · 공 · 무아를 관하여 견도에 든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참됨을 본다(因有見真)」는 것이다. 지의는 『사교의』에서 삼장교의 수행 계위를 서술할 때도 「지금 삼장교의 네 문으로 도에 드는 것을 밝히되, 바로 비담의 유문을 써서 계위를 판정한다」고 밝힌다(권4, T46, 732a). 아래에서 볼 삼장교의 계위가 『구사론』 현성품의 계위와 거의 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태는 『구사론』을 포함한 아비담을 삼장교의 유문, 곧 「실재하는 법의 분석을 통해 진리에 드는 문」에 두었다. 『성실론』은 같은 삼장교의 공문이다. 둘 다 진리에 이르는 문이며, 천태는 그 어느 쪽도 「도를 얻지 못하는 가르침」으로 보지 않았다.

「수인의 뜻은 이루어지고 논인의 뜻은 무너진다」 — 유부와 성실의 다툼을 넘어

이 마지막 점은 천태 당시의 학계 상황과 관련된다. 남북조 시대 중국에서는 아비담을 따르는 논사들(數人)과 『성실론』을 따르는 논사들(論人)이 날카롭게 맞섰다. 성실론사들은 「비담의 유문은 다만 마음을 고르는 방편일 뿐 도를 얻지 못하며, 성실의 공을 보아야 도를 얻는다」고 했고, 비담의 논사들은 「우리는 소승의 뜻으로 있음을 보아 도를 얻는다. 그대들은 대승의 뜻을 끌어와 공을 보아 도를 얻는다 하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지의는 두 쪽을 모두 물리친다.

지의 『사교의』 권3 · T46 no.1929, 730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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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今約此四悉檀意作成、壞義:數人四義成,成論四義壞;成論四義成,數人四義壞。是則,成壞敵等,何者是成論成?何者是數人壞?

풀이

이제 이 네 가지 실단(悉檀)의 뜻에 따라 이루어짐과 무너짐의 뜻을 짓는다. 수인의 네 뜻이 이루어지면 성론(성실론)의 네 뜻이 무너지고, 성론의 네 뜻이 이루어지면 수인의 네 뜻이 무너진다. 그렇다면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맞먹으니, 어느 것이 성론의 이루어짐이고 어느 것이 수인의 무너짐이겠는가?

『마하지관』도 같은 논지를 편다. 지의는 발마(跋摩)의 게송 「여러 논이 저마다 실마리를 달리하나 수행의 이치에는 둘이 없다. 치우쳐 집착하면 옳고 그름이 있지만 통달한 이는 어긋나 다툼이 없다」를 들고, 송나라 때 『성실론』이 크게 넓혀져 다른 집착이 다투어 일어나자 이 게송을 지어 꾸짖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만약 정해진 집착을 일으키면 모두 도를 얻지 못하니 어찌 유문만 그러하겠는가. 견혹과 사혹을 없앤다면 네 문이 모두 얻으니 어찌 공문만 그러하겠는가. '논주의 뜻은 이루어지고 수인의 뜻은 무너진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네 실단의 뜻을 얻으면 논과 수가 모두 이루어지고,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논과 수가 모두 무너진다」고 한다(권6상, T46, 74a). 그리고 그 다툼의 원인을 「이승은 스스로 건너는 데만 힘써 한 길로 곧장 들어가니 치우쳐 원융하지 않고, 뒤의 학자들이 이로 인해 허물을 낳았다」고 진단한다.

천태가 아비담의 유문을 『성실론』의 공문보다 낮게 보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 불교의 일반적 흐름에서 『성실론』은 공을 말하므로 대승에 가깝다고 여겨진 적이 있었다. 지의는 『사교의』에서 『대지도론』의 「성문의 경 곳곳에서도 법공의 뜻을 밝혔으니, 어찌 공을 보아 도를 얻는 것이 대승을 밝힌 것이라 하겠는가」를 들어 그 생각을 바로잡는다. 유문이든 공문이든 삼장교 안의 문이다. 『구사론』과 『성실론』은 같은 칸에 놓인 두 개의 문이고, 어느 쪽으로 들어가든 이르는 곳은 같은 「치우친 참(偏真)」이다.

지의는 『사교의』에서 「수인」의 다섯 정심관 순서(부정관을 먼저 함)와 자신이 쓰는 순서(수식관을 먼저 함)가 다른 까닭을 묻는 물음에 「지금은 선문(禪門)에 따라 차례를 가렸으니, 병이 많고 적음은 사람에 따르므로 앞뒤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답한다(권4, T46, 733b). 『구사론』 현성품은 수행에 드는 요긴한 문으로 부정관과 지식념(수식관)의 둘만을 들고, 탐욕이 많은 이는 부정관, 생각이 많은 이는 지식념으로 들어간다고 한다(권22, T29, 117b). 천태가 『구사론』을 그대로 옮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의 관점에서 다시 짰다는 한 예다.

삼장교「明因緣生滅四聖諦理,正教小乘,傍化菩薩」인연 생멸의 사제를 밝히니 바로 소승을 가르치고 곁으로 보살을 교화한다(『사교의』 권1, 721a~b)
유문(有門)「因有見真」있음으로 인해 참됨을 본다「此即諸《阿毘曇論》之所申也」여러 『아비담론』이 편 것
『구사론』『바사』
공문(空門)생멸하는 가법과 실법을 쪼개어 공에 든다『성실론』
역유역공문가전연 · 『곤륵론』
비유비공문차닉
어떤 이는 독자부의 아비담이라 함「此恐未可定用」꼭 그렇다고 정할 수 없다
(권3, 729b)
「數人四義成,成論四義壞;成論四義成,數人四義壞」수인이 이루어지면 성론이 무너지고, 성론이 이루어지면 수인이 무너진다「若得四悉檀意,論、數俱成」네 실단의 뜻을 얻으면 논과 수가 모두 이루어진다(『사교의』 권3, 730c · 『마하지관』 권6상, 74a)
도표 13 · 삼장교의 네 문과 그 논서

쪼개어 공에 이르는 서툰 건넘 — 석공과 졸도

그렇다면 삼장교의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 천태는 그것을 「석공(析空)」과 「졸도(拙度)」라는 두 말로 표현했다. 장교의 석공과 통교의 체공의 구별 — 나가세나의 수레처럼 쪼개어야 비로소 공이 드러나는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공한가 — 은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4부와 계보 二 「공 · 중도」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천태 문헌이 이 말로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원문으로 본다.

『법화현의』는 네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연을 중생의 「즐겨 바람(樂欲)」의 네 등급으로 설명한다.

지의 『법화현의』 권1하 · T33 no.1716, 68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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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十因緣所成眾生有下品樂欲,能生界內事善,拙度破惑,析法入空;具此因緣者,如來則轉生滅四諦法輪,起三藏教也。

풀이

만약 열 가지 인연으로 이루어진 중생이 아래 품의 즐겨 바람이 있어, 삼계 안의 일(事)의 선을 일으킬 수 있고, 서툰 건넘으로 미혹을 깨뜨리며, 법을 쪼개어 공에 든다면, 이러한 인연을 갖춘 이에게 여래는 생멸사제의 법륜을 굴려 삼장교를 일으킨다.

같은 대목은 이어서 중품의 즐겨 바람을 가진 중생에게는 「계내의 이(理)의 선, 교도(巧度)로 미혹을 깨뜨리고 법의 체 그대로 공에 들어감」으로 무생사제의 통교를, 상품에게는 「계외의 일의 선, 차례로 중도에 들어감」으로 무량사제의 별교를, 상상품에게는 「계외의 이의 선, 하나를 깨뜨리면 일체를 깨뜨려 원돈으로 중도에 들어감」으로 무작사제의 원교를 일으킨다고 한다. 네 가르침과 네 가지 사제가 중생의 근기와 짝을 이루어 배열되어 있다. 사종사제 각각의 뜻은 핵심 개념 「무상」 4부에서 읽었다.

『마하지관』은 이 「서툰 건넘」이 무엇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지관을 풀이하는 대목에서 지의는 이승의 수행을 이렇게 평가한다.

지의 『마하지관』 권3상 · T46 no.1911, 23c~2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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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若二乘以九想、十想、八背捨、九次第定,多是事禪,一往止相;有作四諦慧是觀相。此之止觀雖出生死,而是拙度,滅色入空。

풀이

이승이 구상 · 십상 · 팔배사 · 구차제정으로 닦는 것은 대개 일(事)의 선정이니 한번 보면 지(止)의 모습이요, 지음이 있는 사제의 지혜는 관(觀)의 모습이다. 이러한 지관은 비록 생사를 벗어나지만 서툰 건넘이니, 색을 없애어 공에 드는 것이다.

「비록 생사를 벗어나지만(雖出生死)」이라는 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천태는 장교의 길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다. 『구사론』의 길을 따라 견혹과 사혹을 끊으면 실제로 삼계를 벗어나 아라한이 된다. 문제는 벗어나는 방식이다. 「색을 없애어 공에 든다(滅色入空)」. 법을 쪼개고 쪼개어 실체가 없음을 보고, 마지막에는 몸과 지혜까지 사라지는 무여열반에 든다. 지의는 바로 이어서 이것을 「몸을 재로 만들고 지혜를 없애니(灰身滅智) 관이라 이름하지 않는다」고 하고, 「다만 법을 쪼갠 것이니 무루를 모습으로 할 뿐」이라 한다.

『법화현의』는 같은 판정을 「삼장의 네 문은 굽이굽이 좁고 누추하니 서툰 건넘이라 하고, 통교의 네 문은 마하연이니 넓고 곧은 솜씨 있는 건넘」이라는 말로 정리한다(권8하, T33, 785b). 그리고 『마하지관』은 삼장교의 보살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삼장의 보살은 법을 쪼개어 공으로 미혹을 누르며 네 문을 두루 배우고, 남을 교화하기 위해 법상을 널리 알아 성불할 때 「정변지」라 이름한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 가르침의 방편의 설이니」, 『열반경』은 이것을 「반자(半字)」라 하고, 법화경은 「이십 년 동안 늘 똥을 치우게 했다」고 하며, 『대지도론』은 「서툰 의사」라 하고, 『유마경』은 「가난한 이가 즐기는 법」이라 하며, 천친은 「하열승」이라 불렀다(권6상, T46, 74b).

마지막 목록에 천친이 들어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구사론』의 저자가 뒤에 대승의 논사로서 소승을 「하열승」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천태는 『바수반두법사전』이 전하는 천친의 전향을 교판 안에 이렇게 받아들였다. 『구사론』을 지은 이 자신이 그 자리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이근 · 둔근」의 방편 — 판정의 원문

천태 교학에서 장교는 근기가 둔한 이를 위한 방편이라는 판정이 반복된다. 그 판정이 원문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마하지관』은 네 가지 지관이 일어나는 인연을 네 실단에 따라 설명하며, 대치실단(對治悉檀)의 관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의 『마하지관』 권3하 · T46 no.1911, 3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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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為思議鈍根,拙度令入真諦,說三藏觀;為思議利根,巧度令入真諦,故說通觀;為不思議鈍根,拙度令入見中,故說別觀;為不思議利根,巧度令入見中,故說圓觀。

풀이

사의(思議)의 둔근을 위해, 서툰 건넘으로 진제에 들게 하려고 삼장의 관을 설하고, 사의의 이근을 위해, 솜씨 있는 건넘으로 진제에 들게 하려고 통교의 관을 설하며, 불사의(不思議)의 둔근을 위해, 서툰 건넘으로 중도를 보는 데 들게 하려고 별교의 관을 설하고, 불사의의 이근을 위해, 솜씨 있는 건넘으로 중도를 보는 데 들게 하려고 원교의 관을 설한다.

이 문장은 네 가르침을 두 축의 교차로 배열한다. 한 축은 「사의(思議)와 불사의(不思議)」, 곧 진제(공)에 드는 것이냐 중도에 드는 것이냐다. 다른 축은 「둔근과 이근」, 곧 서툰 건넘이냐 솜씨 있는 건넘이냐다. 삼장교는 「사의의 둔근」, 곧 공에 드는 가르침 가운데 둔한 근기를 위한 서툰 건넘이다. 별교도 「불사의의 둔근」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둔근」이 장교만의 표지는 아니다. 장교의 자리는 「진제를 목표로 하는 가르침 가운데 서툰 쪽」으로 정확히 규정된다.

『천태사교의』는 같은 판정을 장교와 통교의 비교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제관 『천태사교의』 · T46 no.1931, 77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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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此之二教是界內教。藏是界內小拙,不通於大故小,析色入空故拙。此教三人,雖當教內有上中下異,望通三人則一概鈍根,故須析破也。

풀이

이 두 가르침(장교와 통교)은 삼계 안의 가르침이다. 장교는 삼계 안의 작고 서툰 것이니, 대승에 통하지 않으므로 작고, 색을 쪼개어 공에 드므로 서툴다. 이 가르침의 세 부류(성문 · 연각 · 보살)는 자기 가르침 안에서는 상 · 중 · 하의 차이가 있지만, 통교의 세 부류에 견주면 하나같이 둔근이다. 그러므로 쪼개어 깨뜨려야 한다.

「작다(小)」와 「서툴다(拙)」의 두 표지가 장교를 규정한다. 작다는 것은 대승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 서툴다는 것은 쪼개어 공에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둔근」이라는 말은 절대적인 낙인이 아니라 상대적인 비교다. 장교 안에서는 근기의 상중하가 있지만, 통교의 사람들과 견주면 모두 둔근이다. 그래서 「쪼개어 깨뜨려야 한다(須析破)」. 둔근이기 때문에 석공이 필요하고, 석공이기 때문에 서툴다. 판정은 경멸이 아니라 처방의 언어다.

사의(思議): 진제에 든다 · 둔근 · 서툰 건넘(拙度)삼장교「拙度令入真諦,說三藏觀」
불사의(不思議): 중도를 본다 · 둔근 · 서툰 건넘(拙度)별교「拙度令入見中,故說別觀」
사의(思議): 진제에 든다 · 이근 · 솜씨 있는 건넘(巧度)통교「巧度令入真諦,故說通觀」
불사의(不思議): 중도를 본다 · 이근 · 솜씨 있는 건넘(巧度)원교「巧度令入見中,故說圓觀」
(『마하지관』 권3하, 34b)
「藏是界內小拙,不通於大故小,析色入空故拙」장교는 삼계 안의 작고 서툰 것이니, 대승에 통하지 않으므로 작고 색을 쪼개어 공에 드므로 서툴다(『천태사교의』, 778a)「下品樂欲…拙度破惑,析法入空…起三藏教」아래 품의 즐겨 바람 … 서툰 건넘으로 미혹을 깨뜨리고 법을 쪼개어 공에 드니 … 삼장교를 일으킨다(『법화현의』 권1하, 688a)
도표 14 · 네 가르침의 두 축

「석공을 관하되 그것이 곧 불성」 — 열린 방편

천태의 판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교는 서툰 방편이지만, 그 방편은 법화경에 이르러 열려(開) 일승의 일부가 된다. 상대묘와 절대묘, 「거친 것을 열면 그대로 묘한 것」이라는 개추현묘의 원리는 핵심 개념 「오시팔교」 5부에서 다루었다. 『법화현의』와 『마하지관』은 그 원리를 삼장교에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법화현의』는 각 가르침의 계위를 「열어서」 묘로 만드는 과정을 서술하며 삼장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의 『법화현의』 권5상 · T33 no.1716, 73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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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三藏斷結位,若未開權,永無反復,如焦種無芽。今開析空,即假、即中,如置毒酪中,亦能殺人。

풀이

삼장교에서 번뇌를 끊은 계위는, 만약 방편을 열지 않으면 영원히 되돌아옴이 없으니 불탄 씨앗에 싹이 없는 것과 같다. 이제 석공을 열면 곧 가(假)요 곧 중(中)이니, 독을 낙(酪)에 넣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과 같다.

「불탄 씨앗(焦種)」은 이승이 성불할 수 없다는 법화경 이전의 판정을 가리키는 비유다. 번뇌를 다 끊고 몸과 지혜를 재로 만드는 길을 끝까지 가면, 다시 중생 곁으로 돌아와 성불할 싹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법화경이 그 방편을 열면, 석공은 그대로 가와 중에 이어진다. 「독을 낙에 넣어도 사람을 죽인다」는 『열반경』의 비유에서, 독은 불성 또는 중도의 진리를,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번뇌와 생사를 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섯 맛의 둘째, 아함의 맛인 낙(酪)에 넣어도 그 독은 작용한다. 『마하지관』도 같은 비유로 이렇게 말한다.

若觀析空,又觀析空即是佛性,佛性即是如來,是名酪中殺人。

만약 석공을 관하고, 또 석공이 곧 불성이며 불성이 곧 여래임을 관한다면, 이것을 「낙 가운데서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지의 『마하지관』 권3하, T46 no.1911, 31c

석공 그 자체는 버려지지 않는다. 석공을 관하는 그 자리에서, 그것이 곧 불성임을 관하면 된다. 『구사론』의 분석은 법화경의 눈으로 보면 그대로 진리에 이르는 길의 한 부분이 된다. 천태가 장교의 수행 계위를 그토록 정밀하게, 『구사론』 현성품을 거의 그대로 옮겨 서술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버릴 것이라면 그렇게 자세히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그 정리를 원문 대조로 본다.

천태는 『구사론』을 장교(삼장교)의 유문에 두었다. 장교는 「삼계 안의 작고 서툰 가르침」이며 「사의의 둔근을 위해 서툰 건넘으로 진제에 들게 하는」 방편이다. 그러나 그 길은 「비록 생사를 벗어나며」, 법화경에서 열리면 「석공이 곧 불성」인 길이 된다. 판정은 등급이자 처방이며, 동시에 열림의 예고다.

제7장 두 계위의 대조현성품과 장교의 칠현 · 칠성

본송

『구사론』 권23 · 분별현성품 · T29, 11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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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從此生煖法,具觀四聖諦,修十六行相,次生頂亦然,如是二善根,皆初法後四。 次忍唯法念,下中品同頂,上唯觀欲苦,一行一剎那,世第一亦然,皆慧五除得。

풀이

이(총상의 법념주)로부터 난법(煖法)이 생기니, 네 성스러운 진리를 모두 관하여 열여섯 가지 행상을 닦는다. 다음에 정법(頂法)이 생기는 것도 그러하다. 이 두 선근은 모두 처음에는 법념주이고 뒤에는 네 념주다. 다음 인법(忍法)은 오직 법념주이니, 하품과 중품은 정법과 같고, 상품은 오직 욕계의 고제만을 관하되 한 행상, 한 찰나다. 세제일법도 그러하다. 모두 지혜(를 체로 하고), (따르는 것까지 합치면) 다섯 온이되 득(得)은 뺀다.

『구사론』 권23 · 분별현성품 · T29, 12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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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世第一無間,即緣欲界苦,生無漏法忍,忍次生法智,次緣餘界苦,生類忍類智,緣集滅道諦,各生四亦然,如是十六心,名聖諦現觀。

풀이

세제일법 바로 다음에 곧 욕계의 고제를 반연하여 무루의 법인(法忍)이 생기고, 인 다음에 법지(法智)가 생긴다. 다음에 나머지 세계(색계 · 무색계)의 고제를 반연하여 유인(類忍)과 유지(類智)가 생긴다. 집 · 멸 · 도의 진리를 반연하여 각각 넷이 생기는 것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열여섯 마음을 성스러운 진리의 현관(現觀)이라 한다.

술어 풀이

順解脫分 · 順決擇分순해탈분 · 순결택분
『구사론』의 수행 단계 구분. 해탈의 씨앗을 처음 심는 선근이 순해탈분, 견도의 「결택(決擇)」에 순응하는 네 선근(난 · 정 · 인 · 세제일법)이 순결택분이다. 천태의 「외범」과 「내범」에 대응한다.
四念住사념주
몸 · 느낌 · 마음 · 법을 관하는 네 가지 새김. 『구사론』은 각각의 자상(自相)을 따로 관하는 것과, 넷을 함께 비상 · 고 · 공 · 비아의 공상(共相)으로 관하는 것을 나눈다. 천태는 앞의 것을 별상념처, 뒤의 것을 총상념처라 부른다.
十六行相십육행상
사제 각각에 대한 네 가지 관찰의 모습. 고제는 비상 · 고 · 공 · 비아, 집제는 인 · 집 · 생 · 연, 멸제는 멸 · 정 · 묘 · 리, 도제는 도 · 여 · 행 · 출.
見道十六心견도십육심
욕계와 상이계의 사제 각각에 대해 인(忍)과 지(智)가 차례로 일어나는 열여섯 찰나. 앞의 열다섯이 견도, 열여섯째 도류지부터는 수도에 속한다.
四向四果사향사과
예류 · 일래 · 불환 · 아라한의 네 과위와 그 각각을 향해 가는 단계. 천태 문헌은 범어 음역인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을 주로 쓴다.
七聖칠성
『구사론』이 학위와 무학위의 성자를 모두 거두어 세운 일곱 부류. 수신행 · 수법행 · 신해 · 견지 · 신증 · 혜해탈 · 구해탈. 천태 『사교의』는 마지막 둘을 시해탈 아라한 · 불시해탈 아라한으로 바꾸어 세운다.
三十四心삼십사심
보살이 보리수 아래에서 견도 열여섯 찰나와 유정(有頂)의 아홉 품 번뇌를 끊는 무간도 · 해탈도 열여덟 찰나, 합하여 서른네 찰나에 모든 번뇌를 끊고 성불한다는 설. 『구사론』과 『대비바사론』에 나오며, 천태는 이것을 장교 부처의 표지로 삼았다.
劣應身열응신
장교의 부처. 장육(一丈六尺)의 몸으로 보리수 아래 풀 자리에서 성불하여 여든에 입멸하는 부처. 네 가르침의 네 부처는 핵심 개념 「삼신」 4부에서 다루었다.

『구사론』에 없는 이름, 『구사론』에 있는 내용

천태 교학을 배우는 이에게 익숙한 장교의 계위 — 오정심 · 별상념처 · 총상념처의 삼현(外凡), 난 · 정 · 인 · 세제일법의 사선근(內凡), 합하여 칠현(七賢), 그리고 견도 · 수도 · 무학도의 칠성(七聖) — 는 『구사론』의 계위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이 이름들을 『구사론』 원문에서 찾아보면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다. 「칠현」 · 「오정심」 · 「외범」 · 「내범」 · 「별상념처」 · 「총상념처」라는 말은 현장 역 『구사론』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비바사론』에도 「칠현」이나 「오정심」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칠성」은 『구사론』에 나온다.

이름이 없다고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사론』 현성품은 견도에 이르기 전의 수행을 다음 차례로 서술한다. 먼저 계를 지키고 문 · 사 · 수의 세 지혜를 닦을 그릇을 갖춘다. 다음에 수행에 드는 두 요긴한 문으로 부정관과 지식념을 닦아 마음을 정(定)에 들게 한다. 정을 이룬 뒤에는 관(觀)을 위해 사념주를 닦되, 먼저 몸 · 느낌 · 마음 · 법을 각각 그 자상으로 관하고, 그 다음 넷을 모두 묶어 비상 · 고 · 공 · 비아로 관하는 「총잡(總雜)의 법념주」에 머문다. 여기서 난법이 생기고, 정 · 인 · 세제일법이 차례로 이어진다. 그리고 세제일법 바로 다음 찰나에 견도가 시작된다.

천태는 이 차례에 이름을 붙여 정리했다. 부정관과 지식념의 두 문에 자비관 · 인연관 · 계분별관(또는 염불관)을 더해 「오정심」으로 만들고, 자상의 사념주를 「별상념처」, 총잡의 법념주를 「총상념처」라 했으며, 이 셋을 「외범」 또는 「삼현」, 그 뒤의 사선근을 「내범」이라 묶어 합하여 「칠현」이라 불렀다. 『사교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지의 『사교의』 권4 · T46 no.1929, 73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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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一明七賢位者,一者五停心觀,二別想四念處,三總想四念處,四煗法,五頂法,六忍法,七世第一法。是為七賢位也。通言賢者,隣聖曰賢。此七位者,皆是非學非無學,等智似解,能伏見惑,因此似解能發苦忍真明,故云「隣聖曰賢」。

풀이

첫째, 칠현위를 밝힌다. 첫째 오정심관, 둘째 별상사념처, 셋째 총상사념처, 넷째 난법, 다섯째 정법, 여섯째 인법, 일곱째 세제일법이다. 이것이 칠현위다. 통틀어 「현(賢)」이라 하는 것은 「성인에 이웃함을 현이라 한다」는 뜻이다. 이 일곱 자리는 모두 유학도 무학도 아니고, 세속의 지혜로 비슷하게 이해하여 견혹을 누를 수 있으며, 이 비슷한 이해로 말미암아 고법인(苦法忍)의 참된 밝음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성인에 이웃함을 현이라 한다」고 한다.

「성인에 이웃한 이(隣聖)」라는 정의가 정확하다. 칠현은 아직 성인이 아니다. 『구사론』의 말로 하면 「이생(異生)」, 곧 범부다. 그러나 세제일법 바로 다음 찰나에 고법지인이 일어나 성인이 되므로, 그 바로 앞까지의 수행자는 「성인의 이웃」이다. 『구사론』은 이 단계의 선근을 「순결택분」이라 부르고, 그 이름의 뜻을 「결택이란 성스러운 도이니, 이 넷이 그것을 이끌어 순응하고 이익되게 하므로 순결택분이라 한다」고 풀었다(권23, T29, 120a). 천태의 「인성(隣聖)」과 『구사론』의 「순결택(順決擇)」은 같은 자리를 다른 말로 부른 것이다.

큰 대조표 — 현성품의 계위와 『천태사교의』의 장교 계위

이제 두 문헌을 한 줄씩 맞대어 본다. 왼쪽은 『구사론』 분별현성품(권22~25)의 원문, 오른쪽은 제관 『천태사교의』의 장교 계위 서술이다. 『천태사교의』는 장교의 수행인과 계위를 「범」과 「성」으로 크게 나누고, 범을 다시 외범과 내범으로 나눈다.

제관 『천태사교의』 · T46 no.1931, 776c~77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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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略明藏教修行人之與位。初明聲聞位分二:初凡、二聖。凡又二:外凡、內凡。釋外凡中自分三:初、五停心:一多貪眾生不淨觀、二多嗔眾生慈悲觀、三多散眾生數息觀、四愚癡眾生因緣觀、五多障眾生念佛觀;二、別相念處(如前四念處是);三、總相念處,一觀身不淨,受、心、法皆不淨,乃至觀法無我,身、受、心亦無我,中間例知(已上三科名外凡,亦名資糧位)。

풀이

장교의 수행인과 그 계위를 간략히 밝힌다. 먼저 성문의 계위는 둘로 나뉘니, 첫째 범(凡), 둘째 성(聖)이다. 범은 다시 둘이니 외범과 내범이다. 외범을 풀이하면 스스로 셋으로 나뉜다. 첫째 오정심이니, ① 탐욕이 많은 중생의 부정관, ② 성냄이 많은 중생의 자비관, ③ 산란이 많은 중생의 수식관, ④ 어리석은 중생의 인연관, ⑤ 장애가 많은 중생의 염불관이다. 둘째 별상념처(앞의 사념처가 이것이다). 셋째 총상념처이니, 몸이 부정하다고 관하되 느낌 · 마음 · 법도 모두 부정하다고 관하고, 나아가 법이 무아라고 관하되 몸 · 느낌 · 마음도 무아라고 관하니, 그 사이는 이에 준하여 안다(이상 세 과를 외범이라 하고 자량위라고도 한다).

제관 『천태사교의』 · T46 no.1931, 77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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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二明內凡者有四:謂煗、頂、忍、世第一(此四位為內凡,亦名加行位,又名四善根位)。上來內凡、外凡總名凡位,亦名七方便位。次明聖位,亦分三:一見道(初果)、二修道(二三果)、三無學道(四果)。

풀이

둘째 내범을 밝히면 넷이 있으니, 난 · 정 · 인 · 세제일이다(이 넷을 내범이라 하고 가행위라고도 하며 사선근위라고도 한다). 이상의 내범과 외범을 통틀어 범위라 하고 칠방편위라고도 한다. 다음에 성위를 밝히면 역시 셋으로 나뉘니, 첫째 견도(초과), 둘째 수도(제2 · 제3과), 셋째 무학도(제4과)다.

① 준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將趣見諦道,應住戒勤修,聞思修所成」견도에 나아가려면 계에 머물러 문 · 사 · 수의 지혜를 닦는다(권22, 116c)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서술 없음 · 『사교의』는 이 단계를 따로 다룸)
② 입문외범범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入修要二門,不淨觀息念,貪尋增上者,如次第應修」수행에 드는 요긴한 두 문은 부정관과 지식념, 탐욕이 많은 이와 생각이 많은 이가 차례로 닦는다(권22, 117b)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五停心」오정심 — 부정관 · 자비관 · 수식관 · 인연관 · 염불관
③외범범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以自相共相,觀身受心法」자상과 공상으로 몸 · 느낌 · 마음 · 법을 관한다 · 자상의 관(권23, 118c~119a)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別相念處」별상념처
④외범범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彼居法念住,總觀四所緣,修非常及苦,空非我行相」법념주에 머물러 네 대상을 총괄해 비상 · 고 · 공 · 비아의 행상을 닦는다(권23, 119a)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總相念處」총상념처「已上三科名外凡,亦名資糧位」이상 셋을 외범, 자량위라 한다
⑤내범범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從此生煖法…次生頂…次忍…世第一亦然」이로부터 난법이 생기고 … 정 … 인 … 세제일법(권23, 119b)「此煖、頂、忍、世第一法四殊勝善根名順決擇分」이 넷을 순결택분이라 한다(권23, 120a)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煗、頂、忍、世第一(此四位為內凡,亦名加行位,又名四善根位)」난 · 정 · 인 · 세제일, 내범 · 가행위 · 사선근위「總名凡位,亦名七方便位」통틀어 범위 · 칠방편위
⑥성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如是十六心,名聖諦現觀」열여섯 마음을 성제현관이라 한다「前十五見道,見未曾見故」앞의 열다섯이 견도이니 보지 못한 것을 보기 때문(권23, 121a~122a)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一見道(初果)」견도(초과)「須陀洹…斷三界八十八使見惑,見真諦故名為見道」수다원은 삼계의 88사 견혹을 끊고 진제를 보므로 견도라 한다
⑦성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斷欲三四品…斷六一來果」 · 「斷七或八品…斷九不還果」욕계 수혹 여섯 품을 끊으면 일래과, 아홉 품을 끊으면 불환과(권24, 123c~124a)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二修道(二三果)」수도(제2 · 제3과)사다함 · 아나함
⑧성위
『구사론』 분별현성품 원문「第九無間道,名金剛喻定,盡得俱盡智,成無學應果」(유정의) 아홉째 무간도를 금강유정이라 하니, 다함을 얻음과 함께 진지가 일어나 무학의 아라한과를 이룬다(권24, 126b)
『천태사교의』 장교 계위「三無學道(四果)」무학도(제4과)「阿羅漢…斷見思俱盡」견사를 모두 끊는다
「칠현」 · 「오정심」 · 「외범」 · 「내범」 · 「별상 · 총상념처」라는 이름은 『구사론』에 없다 — 천태가 붙인 이름 · 내용은 『구사론』 현성품의 차례 그대로
도표 15 · 『구사론』 현성품의 계위 ↔ 『천태사교의』의 장교 계위

이 대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장교의 계위는 『구사론』 현성품의 수행 차례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부정관 · 지식념에서 사념주로, 자상의 관에서 공상의 총관으로, 총관에서 난 · 정 · 인 · 세제일법의 네 선근으로, 그리고 견도 열여섯 찰나와 수도의 아홉 품 단혹을 거쳐 금강유정과 진지에 이르는 길이 한 마디도 빠지지 않고 대응한다. 『천태사교의』가 견혹을 「88사」, 사혹을 「삼계 아홉 지의 81품」으로 헤아리는 것도 『구사론』 수면품의 98수면 가운데 「88은 견소단(八十八見所斷)」이라는 계산(권19, T29, 99c)과 현성품의 「지지마다 허물과 공덕이 아홉 품(地地失德九)」(권23, T29, 123a)에서 온 것이다. 둘째, 천태는 그 차례에 자기의 이름을 붙이고 몇 가지를 더했다. 오정심의 다섯 관이 그 대표다. 『구사론』이 「수행에 드는 요긴한 두 문」만을 든 자리에, 천태는 성냄 · 어리석음 · 장애가 많은 사람을 위한 관을 더해 다섯으로 만들었다.

오정심의 다섯째를 『천태사교의』는 「염불관」이라 하고, 지의의 『사교의』는 「계방편관(界方便觀)」이라 한다(권4, T46, 733b). 수식관과 부정관의 순서도 두 문헌에서 다르다. 오정심관의 구성은 『구사론』보다 중국의 선경(禪經) 계통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천태 문헌 안에서도 다섯 관의 이름과 차례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이 정리가 『구사론』의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천태의 재구성임을 보여 준다.

칠성 — 이름을 바꾼 두 자리

성위(聖位)의 정리에서도 같은 사정이 보인다. 『구사론』은 학위와 무학위의 성자를 일곱 부류로 거둔다.

『구사론』 권25 · 분별현성품 · T29, 13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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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學無學位有七聖者,一切聖者皆此中攝:一隨信行、二隨法行、三信解、四見至、五身證、六慧解脫、七俱解脫。

풀이

학위와 무학위에 일곱 성자가 있어, 모든 성자가 다 여기에 거두어진다. 첫째 수신행, 둘째 수법행, 셋째 신해, 넷째 견지, 다섯째 신증, 여섯째 혜해탈, 일곱째 구해탈이다.

『구사론』은 이 일곱을 세우는 기준이 넷이라 한다. 가행의 차이(남을 따라 믿느냐 법을 따르느냐)로 수신행 · 수법행을, 근기의 차이(신근이 강하냐 혜근이 강하냐)로 신해 · 견지를, 멸진정을 얻었느냐로 신증을, 해탈의 차이(지혜로만 번뇌의 장애를 벗었느냐 선정의 장애까지 벗었느냐)로 혜해탈 · 구해탈을 세운다. 그리고 「이름은 일곱이지만 실제로는 여섯」이라 덧붙인다. 견도의 둘(수신행 · 수법행)이 수도에서 신해 · 견지가 되고, 무학에서 시해탈 · 불시해탈이 되므로 세 도에 각각 둘씩이라는 것이다(권25, T29, 131c).

지의의 『사교의』는 칠성을 이렇게 세운다.

지의 『사교의』 권6 · T46 no.1929, 73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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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二明七聖位者,一隨信行,二隨法行,三信解,四見得,五身證,六時解脫羅漢,七不時解脫羅漢。此七位通名聖者,以正為義,即練道懸鏡也。苦忍真明,捨凡夫性,得入聖人性,真智見理,斷於同類之礙,故名為聖。

풀이

둘째, 칠성위를 밝힌다. 첫째 수신행, 둘째 수법행, 셋째 신해, 넷째 견득, 다섯째 신증, 여섯째 시해탈 아라한, 일곱째 불시해탈 아라한이다. 이 일곱 자리를 통틀어 성인이라 하는 것은 바름(正)을 뜻으로 하니, 곧 도를 닦아 거울을 거는 것이다. 고인(苦忍)의 참된 밝음으로 범부의 성품을 버리고 성인의 성품에 들어가며, 참된 지혜로 이치를 보아 같은 부류의 걸림을 끊으므로 성인이라 한다.

앞의 다섯은 『구사론』과 같다(「견지」를 「견득」이라 한 것만 다르다). 마지막 둘이 다르다. 『구사론』은 해탈의 방식에 따라 혜해탈 · 구해탈을 세웠고, 『사교의』는 무학위의 근기에 따라 시해탈 · 불시해탈 아라한을 세웠다. 그런데 「시해탈 · 불시해탈」이라는 구분 자체는 『구사론』이 「실제로는 여섯」이라고 할 때 무학위의 둘로 이미 쓴 말이다. 『사교의』는 『구사론』이 든 두 기준 가운데 다른 하나를 택했을 뿐이다. 지의는 이어서 칠성을 다시 견도 · 수도 · 무학도의 셋으로 나누고, 「견도는 곧 팔정도이니 이치를 보아 견제혹을 끊어 열다섯 마음에 이르기까지 돌을 깨뜨리는 방편과 같고, 수도는 곧 칠각분이니 한 제씩 관하여 사유혹을 끊는 것이 연뿌리의 실을 끊는 방편과 같다」고 한다(권6, T46, 739a~b). 견도의 열다섯 마음, 곧 『구사론』의 「앞의 열다섯이 견도」가 그대로 들어 있다.

『구사론』 권25「學無學位有七聖者」학위와 무학위의 일곱 성자(131b)
『사교의』 권6「二明七聖位者」칠성위(739a)
①수신행
①수신행
②수법행
②수법행
(견도 · 가행의 차이)
③신해
③신해
④견지
④견득
(수도 · 근기의 차이)
⑤신증
⑤신증
(멸진정)
⑥혜해탈
⑥시해탈 아라한
⑦구해탈
⑦불시해탈 아라한
(해탈의 차이)
견도
수도
무학
「此名雖七事別唯六」이름은 일곱이나 실제로는 여섯(131c)견도 둘 · 수도 둘 · 무학 둘(시해탈 · 불시해탈)
「苦忍真明,捨凡夫性,得入聖人性」고인의 참된 밝음으로 범부의 성품을 버리고 성인의 성품에 든다
견도 =「如破石方便」돌을 깨뜨리듯
수도 =「如斷藕根絲方便」연뿌리의 실을 끊듯
(『사교의』 권6, 739a~b)
도표 16 · 칠성 — 두 문헌의 대조

장교의 보살과 부처 — 삼아승기겁과 삼십사심

장교의 계위 가운데 보살과 부처의 자리는 『구사론』 분별업품과 근품의 서술을 바탕으로 한다. 『천태사교의』는 장교의 보살이 사홍서원을 세우고 삼아승기겁 동안 육도를 닦아 백 겁 동안 상호의 인을 심는다고 하고, 석가보살의 경우를 이렇게 적는다. 옛 석가불에서 시기불까지 7만 5천 부처를 만난 것이 첫째 아승기, 시기불에서 연등불까지 7만 6천 부처를 만난 것이 둘째 아승기, 연등불에서 비바시불까지 7만 7천 부처를 만난 것이 셋째 아승기다(T46, 777b). 이 수와 차례는 『구사론』 업품의 게송 「세 무수겁에 각각 칠만을 공양하되, 또 차례로 오천 · 육천 · 칠천 부처를 공양한다」, 「세 무수겁이 찰 때 거꾸로 차례로 승관(勝觀) · 연등 · 보계(寶髻) 부처를 만났고, 처음에는 석가모니를 만났다」(권18, T29, 95a)와 같은 계통이다.

세 아승기겁의 경계에서 만난 부처의 이름이 두 문헌에서 조금 다르다. 『구사론』은 첫째 겁이 찰 때 보계불, 둘째가 찰 때 연등불, 셋째가 찰 때 승관불(비바시불)을 만났다고 하고, 『천태사교의』는 첫째 아승기의 끝을 시기불로 적는다. 천태는 『대지도론』이 인용하는 가전연자의 설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마하지관』도 「『석론』이 가전연자를 인용하여 보살의 뜻을 밝혀 이르기를, 석가보살이 처음 석가불을 만나 발심하여 시기불에 이르기까지가 첫째 아승기」라고 한다(권6상, T46, 74a~b).

육바라밀이 차는 때에 대해서도 『천태사교의』는 「시비왕이 비둘기를 대신한 것은 보시가 찬 것 … 구빈 대신이 염부제를 일곱으로 나눈 것은 지혜가 찬 것」이라 하는데, 『구사론』 업품의 게송은 「오직 자비로 널리 보시하고, 몸이 잘려도 성냄이 없고, 저사불을 찬탄하고, 다음에 무상보리」의 네 자리에서 여섯 바라밀이 차례로 찬다고 한다(권18, T29, 95b). 『구사론』이 저사불(底沙佛)을 칠 일 동안 한 발을 든 채 찬탄하여 아홉 겁을 뛰어넘은 일을 정진바라밀이 찬 때로 드는 것은 『천태사교의』의 「칠 일 동안 발을 들고 불사불을 찬탄하여 정진이 찼다」와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장교 부처의 성불을 『천태사교의』는 이렇게 적는다.

제관 『천태사교의』 · T46 no.1931, 77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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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次一剎那入上忍位;次一剎那入世第一位,發真無漏,三十四心頓斷見思習氣,坐木菩提樹下,生草為座,成劣應丈六身佛。

풀이

다음 한 찰나에 상인위에 들고, 다음 한 찰나에 세제일위에 들어 참된 무루를 일으키고, 삼십사심으로 견사의 습기를 단번에 끊으니, 나무 보리수 아래 생풀을 자리로 삼아 앉아 열응신 장육의 부처를 이룬다.

「삼십사심」은 『구사론』 근품의 멸진정 논의에서 나온 말이다. 부처는 멸진정을 성불 전에 일으키는가 성불 때 얻는가.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는 「보살은 서른네 찰나의 마음으로 보리를 얻는다고 전하기 때문(傳說菩薩三十四念得菩提故)」에 성불 전에 멸진정을 일으킬 틈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서른넷의 내역을 이렇게 밝힌다.

『구사론』 권5 · 분별근품 · T29, 2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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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諦現觀中有十六念,離有頂貪有十八念,謂斷有頂九品煩惱起九無間九解脫道,如是十八足前十六成三十四。一切菩薩決定先於無所有處已得離貪方入見道,不復須斷下地煩惱。

풀이

사제를 현관하는 가운데 열여섯 찰나가 있고, 유정(有頂)의 탐욕을 떠나는 데 열여덟 찰나가 있으니, 곧 유정의 아홉 품 번뇌를 끊으려고 아홉 무간도와 아홉 해탈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열여덟을 앞의 열여섯에 더하여 서른넷을 이룬다. 모든 보살은 결정코 먼저 무소유처까지의 탐욕을 이미 떠난 뒤에 견도에 들므로, 다시 아래 지의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다.

보살은 범부의 자리에서 세속의 선정으로 무소유처까지의 번뇌를 이미 눌러 떠나 있다. 그러므로 견도에 들어 열여섯 찰나에 견혹을 끊은 뒤, 남은 것은 삼계의 꼭대기인 유정천의 아홉 품 수혹뿐이다. 그것을 끊는 무간도와 해탈도가 각각 아홉, 합하여 열여덟. 이렇게 서른네 찰나 만에 모든 번뇌가 끊어지고 진지가 일어나 부처가 된다. 『대비바사론』도 같은 계산을 「삼십사심찰나」라 부르며 자세히 서술한다(권153, T27, 780c). 천태는 이 『구사론』 계통의 성불관을 장교 부처의 표지로 삼았다. 여섯 해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하룻밤 사이에 성불하고, 여든 해를 살아 「장작이 다하면 불이 꺼지듯(薪盡火滅)」 무여열반에 드는 부처다.

범부의 자리세속의 선정으로「先於無所有處已得離貪」먼저 무소유처까지의 탐욕을 떠남
16+18=34
16 · 견도 16찰나고 · 집 · 멸 · 도 × (욕계 법인 · 법지 + 상이계 유인 · 유지)= 「諦現觀中有十六念」
18 · 유정(有頂) 9품 수혹무간도 9 + 해탈도 9= 「離有頂貪有十八念」
16 + 18 = 34「如是十八足前十六成三十四」서른넷(『구사론』 권5, 25b)「三十四心剎那」(『대비바사론』 권153, 780c)
천태「三十四心頓斷見思習氣,坐木菩提樹下,生草為座,成劣應丈六身佛」삼십사심으로 견사의 습기를 단번에 끊고 나무 보리수 아래 생풀 자리에서 열응신 장육의 부처를 이룬다(『천태사교의』, 777c)
니치렌 대성인「倶舎・成実・律宗は三十四心・断結成道の釈尊を本尊とせり」구사 · 성실 · 율종은 삼십사심으로 번뇌를 끊고 도를 이룬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다(「개목초」 215쪽)
도표 17 · 삼십사심 — 장교 부처의 성불

「같이 넷의 머묾을 끊되, 무명을 누르는 데서는 삼장이 못하다」

『천태사교의』는 원교의 계위를 서술하는 자리에서 장교와 원교를 한 번 더 견준다. 원교의 십신위 가운데 둘째에서 일곱째까지의 자리에서 견혹과 사혹이 모두 끊어지는데, 이것은 장교 · 통교의 부처가 끊은 것과 같다. 제관은 영가대사의 말을 인용한다.

제관 『천태사교의』 · T46 no.1931, 77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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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永嘉大師云:「同除四住,此處為齊。若伏無明,三藏則劣。」

풀이

영가대사가 이르기를 「네 가지 머묾(四住)을 함께 없애는 데서는 이곳에서 가지런하다. 그러나 무명을 누르는 데서는 삼장이 못하다」 하였다.

제관은 이렇게 풀이한다. 넷의 머묾이란 견혹과 사혹이니, 견혹이 하나, 사혹이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셋이다. 이 넷의 머묾은 삼장의 부처와 원교의 육근청정위의 사람이 똑같이 끊는다. 그러나 무명은 삼계 밖에서 중도를 가리는 미혹이니, 삼장교는 삼계 안의 미혹만 다루어 무명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데 어찌 누르고 끊겠는가. 그러므로 「삼장이 못하다」고 한다.

이 문장에 천태의 장교 판정이 압축되어 있다. 견혹과 사혹을 끊는 데서는 『구사론』의 길과 원교의 길이 가지런하다. 『구사론』이 그토록 정밀하게 헤아린 88사의 견혹과 81품의 사혹은, 천태에게도 실제로 끊어야 할 번뇌의 목록으로 그대로 살아 있다. 다만 『구사론』의 체계 안에는 그 너머의 미혹, 곧 중도를 가리는 무명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장교의 길은 바르되 짧다. 끝까지 가도 삼계의 경계에서 멈춘다. 『천태사교의』의 말로 하면 장교의 세 부류는 「같이 견사를 끊고 같이 삼계를 벗어나 같이 치우친 참을 증득하니, 다만 삼백 유순을 가서 화성에 든 것」이다(T46, 777c). 법화경 화성유품의 비유에서, 오백 유순의 길 가운데 삼백 유순에 세운 쉼터의 성이다.

장교의 계위는 『구사론』 현성품의 수행 차례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칠현」 · 「오정심」 · 「외범」 · 「내범」이라는 이름은 『구사론』에 없고 천태가 붙인 것이지만, 내용은 순해탈분 · 순결택분 · 견도 십육심 · 수도 구품 · 금강유정의 차례 그대로다. 칠성의 마지막 두 자리, 오정심의 다섯 관, 세 아승기의 경계불에서 천태의 재구성이 보인다. 그리고 견혹 · 사혹을 끊는 데서는 장교와 원교가 「가지런하되」, 무명에 이르러 「삼장이 못하다」.

제8장 니치렌 대성인과 『구사론』「열 개의 거울」과 방편의 자리

본송

이 장의 본송 자리에는 『구사론』의 게송 대신, 대성인이 구사종을 일대 성교를 비추는 거울의 하나로 드신 「보은초」의 한 대목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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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 · 어서 원문

一代聖教をさとるべき明鏡十あり、所謂る倶舎・成実・律宗・法相・三論・真言・華厳・浄土・禅宗・天台法華宗なり此の十宗を明師として一切経の心をしるべし世間の学者等おもえり此の十の鏡はみな正直に仏道の道を照せりと 小乗の三宗はしばらく・これををく民の消息の是非につけて他国へわたるに用なきがごとし

풀이

일대 성교를 깨달을 수 있는 밝은 거울이 열 개 있으니, 이른바 구사 · 성실 · 율종 · 법상 · 삼론 · 진언 · 화엄 · 정토 · 선종 · 천태법화종이니라. 이 열 종을 밝은 스승으로 삼아 일체경의 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세간의 학자들은 이 열 개의 거울이 모두 곧바르게 불도의 길을 비춘다고 생각하였느니라. 소승의 세 종은 잠시 이것을 두느니라. 백성의 소식이 옳고 그름에 따라 다른 나라로 건너가는 데 쓸모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보은초」, 293쪽)

술어 풀이

明鏡十명경십
「밝은 거울 열 개」. 대성인이 「보은초」에서 일대 성교를 비추는 열 종파를 이르신 말. 구사종이 그 첫째에 놓인다.
小乗の三宗소승의 삼종
구사 · 성실 · 율의 세 종. 대성인은 이 셋을 「소승」으로, 법상 · 삼론 · 화엄 · 진언 등을 「대승」으로 나누신다.
八宗 · 十宗팔종 · 십종
일본 불교의 종파를 헤아리는 두 방식. 남도육종에 천태 · 진언을 더한 것이 팔종, 여기에 정토 · 선을 더한 것이 십종이다.
大小相対대소상대
대성인 교학에서 가르침의 깊이를 다섯 겹으로 견주는 오중상대(五重相對)의 둘째. 내외상대(불교와 외도) 다음에 불교 안에서 대승과 소승을 견준다.
二乗作仏이승작불
성문과 연각의 이승이 성불한다는 법화경 적문의 법문. 법화경 이전에는 이승은 「불탄 씨앗」처럼 성불할 수 없다고 했다.
見思견사
견혹과 사혹. 『구사론』이 88사와 81품으로 헤아린 삼계 안의 번뇌를 천태와 대성인은 이 말로 통칭하신다.
内鑒泠然내감냉연
「안으로는 맑게 비추어 알았다」. 천태가 천친과 용수를 평한 말로, 대성인이 「관심의 본존초」에서 인용하신다.

「열 개의 거울」 — 구사는 그 첫째

대성인이 구사종과 『구사론』을 어떻게 보셨는지는 「보은초」의 첫머리 가까운 대목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성인은 출가하여 불법을 배우던 날을 회고하시며, 일대 성교를 깨닫는 데 쓸 「밝은 거울」이 열 개 있었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첫머리에 구사를 두신다. 구사 · 성실 · 율종 · 법상 · 삼론 · 진언 · 화엄 · 정토 · 선종 · 천태법화종. 대체로 일본에 전해진 차례이면서, 동시에 소승에서 대승으로 나아가는 차례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구사종이 「거울」로 일컬어졌다는 사실이다. 대성인의 시대에 『구사론』은 여전히 불교를 배우는 이가 거쳐야 할 기초 교학이었고, 대성인 자신도 그 거울을 들여다보며 배우셨다. 다른 하나는 그 거울을 「잠시 둔다」고 하신 판단이다. 「백성의 소식이 옳고 그름에 따라 다른 나라로 건너가는 데 쓸모가 없는 것과 같다.」 한 나라 안의 일을 전하는 소식은 그 나라 안에서는 쓸모가 있지만,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로 가는 데는 소용이 없다. 소승의 가르침은 삼계 안의 생사를 다스리는 데는 쓰이지만, 대성인이 묻고 계신 물음 — 일대 성교 가운데 무엇이 부처의 참뜻인가 — 에 답하는 데는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성인은 이어서 「대승의 일곱 거울이야말로 생사의 큰 바다를 건너 정토의 언덕에 닿는 큰 배이니, 이것을 익혀 풀어」라고 하시며 대승 여러 종의 우열을 따지는 데로 나아가신다(같은 쪽).

이 판단은 앞에서 본 천태의 판정과 같은 구조다. 천태는 장교를 「삼계 안의 작고 서툰 가르침」이라 했다. 대성인의 「다른 나라로 건너가는 데 쓸모가 없다」는 비유는, 장교의 길이 삼계 안에서 시작해 삼계의 경계에서 끝난다는 천태의 판정을 일상의 말로 옮긴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잠시 둔다(しばらく・これををく)」는 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의 물음에서는 쓰지 않고 한쪽에 둔다는 뜻이다.

「보은초」는 대성인이 옛 스승 도젠보의 부음을 듣고 지어 기요스미사의 조켄보 · 기조보에게 보내신 글로, 화광 목록은 건치 2년(1276)으로 적는다. 같은 글은 뒤에서 「팔종 · 십종에 따르지 않겠다」고 하시며 여러 종의 다툼을 넘어 경전 자체로 판단하겠다는 뜻을 밝히신다(294쪽).

「작은 수레」는 무엇에 견주어 작은가

대성인은 구사 · 성실 · 율을 「소승의 세 종」이라 부르셨다. 그런데 「소승」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대성인은 사도 유배 중에 도키조닌에게 보내신 「소승대승분별초」에서 그 말의 상대성을 자세히 밝히셨다. 첫머리 가까이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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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 · 어서 원문

外道の法に対しては一切の大小の仏教を皆大乗と云う大法東漸通指仏教以為大法等と釈する是なり、仏教に入つても鹿苑十二年の説・四阿含経等の一切の小乗経をば諸大乗経に対して小乗経と名けたり

풀이

외도의 법에 견주어서는 일체의 대승 · 소승의 불교를 모두 대승이라 하느니라. 「대법이 동쪽으로 번져 왔다 함은 불교를 통틀어 가리켜 대법이라 한 것」 등으로 풀이한 것이 이것이니라. 불교에 들어와서도 녹야원 열두 해의 설법, 사아함경 등 일체의 소승경을 여러 대승경에 견주어 소승경이라 이름하였느니라. (「소승대승분별초」, 520쪽)

외도에 견주면 아함경도 『구사론』도 「대법」이다. 『구사론』이 파집아품에서 수론과 승론의 아트만을 하나하나 깨뜨린 그 논증은, 외도에 견주어서는 위없는 가르침이다. 핵심 개념 「오시팔교」 7부에서 본 『어의구전』의 「외도의 법에 견주면 삼장교는 위없다」가 이것이다. 그러나 같은 가르침이 대승경에 견주어지면 「소승」이 된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견줌을 한 단계 더 밀고 가신다. 천태와 묘락이 법화경의 「만약 소승으로써 교화하되 한 사람에게라도」라는 경문을 풀이하며 아함경만이 아니라 화엄경의 별교, 방등 · 반야의 통교 · 별교의 대승까지 「소승」이라 정했다고 하시고, 마침내 이렇게 쓰신다.

원문 대조
本文 · 어서 원문

此の心ならば涅槃経・大日経等の一切の大小権実顕密の諸経は皆小乗経・八宗の中には倶舎宗・成実宗・律宗を小乗と云うのみならず華厳宗・法相宗・三論宗・真言宗等の諸大乗宗を小乗宗として唯天台の一宗計り実大乗宗なるべし

풀이

이 마음이라면 열반경 · 대일경 등 일체의 대소 · 권실 · 현밀의 여러 경은 모두 소승경이며, 팔종 가운데서는 구사종 · 성실종 · 율종을 소승이라 할 뿐만 아니라, 화엄종 · 법상종 · 삼론종 · 진언종 등 여러 대승종을 소승종으로 삼아, 오직 천태 한 종만이 실대승의 종이 될 것이니라. (「소승대승분별초」, 520쪽)

이 두 대목을 나란히 놓으면 「소승」이 고정된 꼬리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외도에 견주면 대승, 대승경에 견주면 소승, 그리고 법화경의 「실대승」에 견주면 대승의 여러 종도 소승이다. 대성인 교학은 이 견줌의 겹을 내외 · 대소 · 권실 · 본적 · 종탈의 다섯으로 정리한다. 이른바 오중상대다. 『구사론』의 자리는 그 둘째 겹, 대소상대에서 「소」의 쪽이다. 그러나 첫째 겹, 내외상대에서는 분명히 「내」, 곧 불법의 쪽에 서 있다.

대성인의 「소승」은 견주는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말이다. 『구사론』은 외도에 견주면 대법이요, 대승경에 견주면 소승이며, 법화경에 견주면 대승의 여러 종과 함께 방편이다. 구사종을 「소승」이라 하신 판정은 경멸이 아니라 위치의 표시다.

「문의 다툼이지 이치의 다툼이 아니다」

앞에서 천태가 아비담의 유문과 『성실론』의 공문의 다툼을 「어느 쪽도 정해진 집착이면 도를 얻지 못하고, 네 실단의 뜻을 얻으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정리한 것을 보았다. 대성인도 소승 안의 다툼을 같은 눈으로 보셨다. 「현방법초」에서 대성인은 무엇이 방법(謗法)이 되고 무엇이 되지 않는가를 따지시며 이렇게 쓰신다.

원문 대조
本文 · 어서 원문

但し脇尊者の金杖の譬は小乗経は多しといえども同じ苦空無常無我の理なり、諸人同く此の義を存じて十八部・二十部相ひ諍論あれども但門の諍にて理の諍にはあらず故に共に謗法とならず

풀이

다만 협존자의 금 지팡이의 비유는, 소승경은 많지만 같은 고 · 공 · 무상 · 무아의 이치라는 것이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 뜻을 지니고 있어 십팔부 · 이십부가 서로 다투었으나, 다만 문(門)의 다툼이요 이치의 다툼은 아니었으므로 모두 방법이 되지 않느니라. (「현방법초」, 458쪽)

금 지팡이를 여러 토막으로 잘라도 모두 금이듯, 부파가 여럿으로 갈라져 다투어도 그들이 의지한 이치는 같은 고 · 공 · 무상 · 무아다. 유부와 경량부가 삼세실유와 종자를 두고 다투고, 중현이 『순정리론』으로 천친을 되받은 그 치열한 논쟁도, 대성인의 눈으로 보면 「문의 다툼」이다. 같은 집의 다른 문을 두고 다툰 것이지, 들어가려는 집 자체를 두고 다툰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의 「문」이라는 말은 천태가 아비담을 유문, 『성실론』을 공문이라 한 그 「문」과 정확히 겹친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대성인이 외도 · 소승 · 대승 · 법화경의 이치를 견주신 대목 — 외도가 소승을 깨뜨리면 방법이요, 대승의 사람이 소승을 깨뜨리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는 — 은 핵심 개념 「무상」 5부에서 읽었다.

그리고 파집아품의 논쟁 상대였던 독자부도 대성인의 글에 등장한다. 「개목초」는 「독자와 방광이 총명하였어도 대승경과 소승경을 그르쳤다」고 하신다(199쪽). 이 구절과 독자부의 「말할 수 없는 나」에 대해서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2부에서 다루었다. 문의 다툼 안에 머문 부파들과 달리, 독자부는 「나」라는 이치 자체에서 어긋났다는 것이 천친의 판정이었고, 동아시아의 교학이 그들을 「불법에 붙은 외도」라 부른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삼계의 견사를 다 끊었으나 — 이승을 보는 두 눈

『구사론』이 그린 길의 끝은 아라한이다. 견혹과 사혹을 다 끊고 삼계를 벗어난 성자다. 대성인은 이 성취를 낮추지 않으셨다. 「십법계명인과초」는 십법계를 차례로 풀이하며 성문계를 이렇게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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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 · 어서 원문

第七に声聞道とは此の界の因果をば阿含小乗十二年の経に分明に之を明せり、諸大乗経に於ても大に対せんが為に亦之をば明せり、声聞に於て四種有り一には優婆塞・俗男なり五戒を持し苦・空・無常・無我の観を修し自調自度の心強くして敢て化他の意無く見思を断尽して阿羅漢と成る

풀이

일곱째 성문도란, 이 세계의 인과는 아함 · 소승 열두 해의 경에 분명히 밝혔느니라. 여러 대승경에서도 대승에 견주기 위해 또한 이것을 밝혔느니라. 성문에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우바새, 곧 재가의 남자이니라. 오계를 지니고 고 · 공 · 무상 · 무아의 관을 닦되, 스스로를 다스리고 스스로를 건너려는 마음이 강하여 감히 남을 교화하려는 뜻이 없으며, 견혹과 사혹을 다 끊어 아라한이 되느니라. (「십법계명인과초」, 432쪽)

「고 · 공 · 무상 · 무아의 관을 닦아 견사를 다 끊고 아라한이 된다」. 이것은 『구사론』 현성품이 그린 길, 곧 총상념처에서 비상 · 고 · 공 · 비아의 행상을 닦아 난 · 정 · 인 · 세제일법을 거쳐 견도와 수도로 견혹 · 사혹을 끊는 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다. 대성인은 이 길이 「아함 · 소승 열두 해의 경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한계도 같은 문장 안에 적으신다. 「스스로를 건너려는 마음이 강하여 감히 남을 교화하려는 뜻이 없다(自調自度の心強くして敢て化他の意無く)」.

「개목초」는 같은 이승을 다른 각도에서 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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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 · 어서 원문

其の上舎利弗・迦葉等の二乗は二百五十戒三千の威儀・持整して味・浄・無漏の三静慮・阿含経をきわめ三界の見思を尽せり知恩報恩の人の手本なるべし、然るを不知恩の人なりと世尊定め給ぬ

풀이

게다가 사리불 · 가섭 등의 이승은 이백오십 계와 삼천의 위의를 지켜 갖추고, 미(味) · 정(淨) · 무루(無漏)의 세 정려와 아함경을 다 익혀 삼계의 견사를 다 끊었으니,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사람의 본보기가 될 만하였느니라. 그런데도 세존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정하셨느니라. (「개목초」, 192쪽)

계율과 선정과 아함의 지혜, 그리고 삼계의 견사를 다 끊은 성취. 대성인은 이승의 수행을 「은혜를 알고 갚는 사람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까지 높이신다. 「미 · 정 · 무루의 세 정려」는 『구사론』 분별정품이 근본 선정(等至)을 「맛들임(味) · 깨끗함(淨) · 무루(無漏)」의 셋으로 나눈 분류(「謂味淨無漏」, 권28, T29, 146b)와 같은 계통의 말이다. 그런데도 세존은 그들을 「은혜를 모르는 이」라 하셨다. 대성인은 그 까닭을 이렇게 이으신다. 출가하는 것은 반드시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인데, 이승은 자기는 해탈했다고 여기지만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이 빠져, 부모 등을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길」에 들게 하므로 도리어 은혜를 모르는 이가 된다(같은 쪽). 그리고 같은 쪽에서 『방등다라니경』의 「불탄 씨앗에서 싹이 나겠는가」를 인용하신다. 앞에서 본 『법화현의』의 「불탄 씨앗에 싹이 없는 것과 같다」와 같은 비유다.

이 두 어서를 『구사론』의 마지막 게송과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대조가 보인다. 천친은 「저마다 자기 힘이 감당하는 대로 알아야 할 것을 두루 깨달아 뛰어난 업을 이루라」고 논서를 맺었다. 그 「뛰어난 업」은 『구사론』의 체계 안에서는 무엇보다 자기의 해탈을 이루는 업이다. 대성인이 이승에게서 보신 한계는 바로 그 「자기를 건넘」에 갇힌 데 있었다. 법화경은 그 이승에게 성불의 수기를 주어, 불탄 씨앗에서 싹이 나게 한다. 이승작불의 법문과 그것이 일념삼천에 갖는 의미는 계보 五 「일념삼천」에서 다루었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구사 · 성실 · 율종이 「삼십사심으로 번뇌를 끊고 도를 이룬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다」고 하시고, 이것을 「천자의 태자가 미혹하여 자기를 백성의 자식이라 여기는 것」에 비유하셨다(215쪽). 이 대목과 「본존문답초」의 「열응신의 작은 석가」는 핵심 개념 「삼신」 5부에서 읽었다. 앞에서 장교의 계위와 함께 본 『구사론』의 「삼십사념」이 대성인의 본존론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보은초」「明鏡十あり、所謂る倶舎・成実・律宗・法相…」일대 성교를 깨닫는 밝은 거울 열 개, 그 첫째가 구사「小乗の三宗はしばらく・これををく」소승의 세 종은 잠시 둔다293쪽
「선시초」「道昭法師・漢土より法相宗・倶舎宗をわたす」도쇼 법사가 법상종 · 구사종을 전했다263쪽
「개목초」「倶舎・成実・律宗は三十四心・断結成道の釈尊を本尊とせり」삼십사심으로 번뇌를 끊고 도를 이룬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다215쪽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律宗・倶舎・成実等の諸宗…皆悉く法華より已前の八教の中の教なり」모두 법화 이전의 팔교 가운데의 가르침572쪽
「소승대승분별초」「八宗の中には倶舎宗・成実宗・律宗を小乗と云うのみならず」팔종 가운데 구사 · 성실 · 율을 소승이라 할 뿐 아니라520쪽
도표 18 · 대성인의 어서에 나오는 구사종

법화경 교학의 기초 어휘 — 대성인이 인용하신 『구사론』

대성인이 구사종을 「잠시 두셨다」고 해서 『구사론』의 언어를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성인의 교학 저술에는 『구사론』에서 온 개념과 술어가 기초 어휘로 곳곳에 쓰인다. 가장 직접적인 예는 「일념삼천이사」다. 대성인은 삼종세간의 오음세간을 풀이하시며 오음을 하나하나 정의하시는데, 상음에 이르러 「『구사론』에 이르기를 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倶舎に云く想は像を取るを体と為す, 407쪽)라고 『구사론』을 이름까지 들어 인용하신다. 이 인용은 『구사론』 분별계품의 게송과 정확히 대응한다.

『구사론』 권1 · 분별계품 · T29, 3c~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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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한문 원문

受領納隨觸,想取像為體,四餘名行蘊,如是受等三,及無表無為,名法處法界。

풀이

수(受)는 촉을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요, 상(想)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 (색 · 수 · 상 · 식의) 넷 밖의 나머지를 행온이라 한다. 이와 같은 수 따위의 셋과 무표색과 무위를 법처 · 법계라 한다.

「想取像為體」, 곧 「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는 『구사론』 계품 게송의 한 구가 그대로 대성인의 글에 들어 있다. 같은 대목에서 수음을 「받아들임(領納)」이라 하신 것도 같은 게송의 「受領納」과 같다. 장행은 이 상온을 「푸르고 누렇고 길고 짧은 것, 남자와 여자, 원수와 친한 이,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의 모습을 붙잡는 것」이라 풀이한다(권1, T29, 4a). 「일념삼천이사」의 오음 풀이 전체와 그것이 일념삼천에서 갖는 의미는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5부에서 읽었다. 여기서 덧붙이는 것은, 그 풀이의 근거가 『구사론』의 게송 한 구까지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일념삼천의 「오음세간」은 『구사론』이 정밀하게 분석한 오온을 재료로 삼는다.

견혹과 사혹의 목록도 그렇다. 대성인은 「일대성교대의」에서 견혹을 신견 · 변견 · 사견 · 견취견 · 계금취견의 다섯으로 드시고 「견혹은 여든여덟이 있으나 이 다섯이 근본」(見惑は八十八有れども此の五が根本にて有るなり, 393쪽)이라 하신다. 「여든여덟」은 『구사론』 수면품의 「아흔여덟 가운데 여든여덟은 견도에서 끊는 것(八十八見所斷)」(권19, T29, 99c)에서 온 수다. 삼도를 풀이하신 「시문불승의」의 「생사란 우리의 괴로움의 과보인 몸이니 이른바 오음 · 십이입 · 십팔계」(生死とは我等が苦果の依身なり所謂五陰・十二入・十八界なり, 983쪽)도 『구사론』 계품이 세운 삼과(三科)를 그대로 쓴다. 삼계 · 오취 · 사생, 성 · 주 · 괴 · 공의 겁, 견혹과 사혹, 오음 · 십이입 · 십팔계 — 천태와 대성인의 교학이 생사와 미혹을 말할 때 쓰는 이 기초 어휘의 상당 부분은 『구사론』과 그 계통의 아비달마에서 정의된 것이다.

상음
어서「倶舎に云く想は像を取るを体と為す」『구사론』에 이르기를 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일념삼천이사」 407쪽)
『구사론』「想取像為體」(『구사론』 권1 분별계품, T29, 3c)
견혹
어서「見惑は八十八有れども此の五が根本」견혹은 여든여덟이나 이 다섯이 근본(「일대성교대의」 393쪽)
『구사론』「八十八見所斷」여든여덟은 견도에서 끊는 것(권19, T29, 99c)
삼과
어서「所謂五陰・十二入・十八界なり」이른바 오음 · 십이입 · 십팔계(「시문불승의」 983쪽)
『구사론』『구사론』 분별계품의 온 · 처 · 계
이승의 길
어서「苦・空・無常・無我の観を修し…見思を断尽して阿羅漢と成る」고 · 공 · 무상 · 무아의 관을 닦아 견사를 다 끊고 아라한이 된다(「십법계명인과초」 432쪽)
『구사론』「修非常及苦,空非我行相」비상 · 고 · 공 · 비아의 행상을 닦는다(권23, T29, 119a)
정려
어서「味・浄・無漏の三静慮」미 · 정 · 무루의 세 정려(「개목초」 192쪽)
『구사론』「此本等至八,前七各有三,謂味淨無漏」이 근본 등지는 여덟이니 앞의 일곱에 각각 셋이 있어 미 · 정 · 무루다(권28, T29, 146b)
도표 19 · 대성인의 글 속 『구사론』의 어휘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 쪼갬과 갖춤

그렇다면 『구사론』의 법 분석과 대성인의 법문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그 갈림은 천태가 장교의 표지로 삼은 석공과, 법화경의 「갖춤(具)」 사이에 있다.

『구사론』은 「나」를 오온으로, 오온을 찰나와 극미로 쪼개어 「나는 없고 법은 있다」에 이르렀다. 그 분석은 정밀하고, 파집아품의 논증은 지금 읽어도 날카롭다. 그러나 그 분석의 방향은 언제나 「줄여 가는」 쪽이다. 하나의 사람을 다섯 무더기로, 다섯 무더기를 일흔다섯 가지 법으로 나누고, 마지막에는 그 법들의 상속마저 끊어 무여열반에 든다. 천태가 「색을 없애어 공에 든다(滅色入空)」고 평한 것이 이것이다.

일념삼천은 같은 오음을 재료로 하면서 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마하지관』은 오음 가운데 식음, 곧 한 생각의 마음을 관하라고 하고, 그 한 생각에 삼천의 세간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쪼개어 줄여 가는 대신, 한 점에서 전체가 갖추어져 있음을 본다. 그 일념삼천의 법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이렇게 밝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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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 · 어서 원문

一念三千の法門は但法華経の本門・寿量品の文の底にしづめたり、竜樹・天親・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但我が天台智者のみこれをいだけり。

풀이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文)의 밑바닥에 잠겨 있느니라. 용수와 천친은 알고 있었으나 아직 건져 내지 않았고, 다만 우리 천태지자만이 이것을 품었느니라. (「개목초」, 189쪽)

이 대목에 『구사론』의 저자 천친이 등장한다. 대성인은 천친이 일념삼천의 법문을 「알고 있었으나 아직 건져 내지 않았다」고 하신다. 「관심의 본존초」도 천태의 말을 인용하여 같은 뜻을 밝히신다. 「천친과 용수는 안으로 맑게 비추어 알았으나 밖으로는 때의 마땅함에 맞추어 저마다 방편에 의거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인사(人師)들이 치우치게 풀고 학자들이 구차히 집착하여 마침내 화살과 돌을 주고받으며 저마다 한쪽을 지켜 크게 성도에 어긋났다」(天台大師云く「天親竜樹・内鑒泠然たり外には時の宜きに適い各権に拠る所あり、而るに人師偏に解し学者苟も執し遂に矢石を興し各一辺を保ちて大に聖道に乖けり」等云云, 244쪽).

이 평가는 『구사론』을 다시 보게 한다. 천친이 『구사론』에서 소승의 법을 정밀하게 분석한 것은 「때의 마땅함에 맞춘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편을 놓고 후대의 학자들이 화살과 돌을 주고받은 것, 곧 중현의 『순정리론』과 수인과 논인의 다툼 같은 것은 천친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구사론』의 분석은 버려야 할 오류가 아니라 때에 맞춘 방편이며, 그 방편을 쓴 사람 자신은 안으로 더 깊은 법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핵심 개념 「무아 · 오온」 6부에서 본 대성인의 법문 — 오음이 그대로 묘법의 다섯 자이며, 「나」란 법계의 중생이라는 『어의구전』의 말씀 — 을 떠올릴 수 있다. 『구사론』이 「나」를 오온으로 쪼개어 「나는 이름일 뿐」이라 한 바로 그 오온이, 법화경의 눈으로 보면 십계를 다 갖춘 생명의 당체가 된다. 쪼개어 「없음」에 이른 분석과, 그 자리에서 「갖춤」을 본 관법. 두 길은 같은 오음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천친의 「나」에 대한 논파가 없었다면, 「나」를 다시 법계의 중생으로 여는 대성인의 법문도 그 깊이를 드러낼 자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무아를 거치지 않은 「나」는 외도의 아트만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대성인 교학에서 『구사론』을 비롯한 소승의 교의는 오중상대의 대소상대에서 「소」의 자리에 놓이지만, 그 자리는 버려지는 자리가 아니라 법화경으로 이끄는 계단의 자리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이 구사종을 포함한 여러 종을 「겸 · 단 · 대 · 대의 방편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572쪽)이라 하신 판정과 그 뜻은 핵심 개념 「오시팔교」 6부에서 읽었다.

『구사론』
쪼갬析
「나」 → 오온 → 75법 · 찰나 · 극미「但於心等諸蘊差別,假立我名」마음 따위 여러 온의 특별한 상태에 거짓으로 나라는 이름을 세운다(권30, 158a)
결과 — 견사를 끊고 삼계를 벗어남「滅色入空」색을 없애어 공에 든다(『마하지관』 권3상)
일념삼천
갖춤具
오음 가운데 식음 = 한 생각「此三千在一念心」이 삼천이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마하지관』 권5상)
「一念三千の法門は但法華経の本門・寿量品の文の底にしづめたり」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바닥에 잠겨 있다(「개목초」 189쪽)
이음
「竜樹・天親・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용수와 천친은 알았으나 아직 건져 내지 않았다(189쪽)
「天親竜樹・内鑒泠然たり外には時の宜きに適い各権に拠る所あり」천친과 용수는 안으로 맑게 알았으나 밖으로는 때에 맞추어 방편에 의거했다(「관심의 본존초」 244쪽)
도표 20 · 같은 오음 위의 두 길

대성인은 구사종을 「일대 성교를 깨닫는 열 개의 거울」의 첫째로 드시고, 소승의 세 종으로서 「잠시 두셨다」. 「소승」은 견주는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말이며, 소승 안의 다툼은 「문의 다툼이지 이치의 다툼이 아니다」. 대성인은 이승이 삼계의 견사를 다 끊은 성취를 인정하시되 자기만 건너는 데 갇힌 한계를 지적하셨고, 「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 같은 『구사론』의 정의를 일념삼천의 오음세간을 풀이하는 어휘로 쓰셨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천친의 분석은 「때에 맞춘 방편」이고, 같은 오음 위에서 쪼갬은 갖춤으로 열린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구사론』의 마지막 품은 「이 가르침을 떠나 해탈은 없다」는 단언으로 시작했다. 천친은 「나」가 현량으로도 비량으로도 알려지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하여, 독자부가 든 경증 — 짐과 짐꾼, 숙명의 기억, 일체지, 화생, 무기 — 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온의 상속」으로 다시 읽었다. 용군은 있지도 않은 망고나무의 열매 맛을 묻는 왕에게 침묵으로 답했고, 어미 범은 새끼를 너무 세게도 너무 느슨하게도 물지 않았다. 그리고 천친은 「누가 기억하는가」, 「누가 아는가」, 「누가 업을 짓고 누가 받는가」라는 물음에, 기억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와 지금의 조건에서, 앎은 대상의 모습을 띤 식의 생겨남에서, 몸의 업은 기억 · 의욕 · 생각 · 애씀 · 바람의 사슬에서, 업의 과보는 업 이후의 상속이 바뀌어 가다가 특별해진 것에서 생긴다고 답했다. 수론과 승론의 아트만은 엉터리 의사의 주문처럼, 일이 다 끝난 뒤에 덧붙인 이름이었다. 그 끝에서 논서는 「열반의 궁으로 가는 하나의 넓은 길, 천 명의 성인이 노닌 무아의 성품」을 노래하며 닫혔다.

이 논서는 그 뒤로 긴 길을 걸었다. 중현은 『순정리론』으로 거의 모든 쟁점을 되받았지만 「나」의 부정에서는 다투지 않았다. 『바수반두법사전』은 천친이 대승으로 돌아섰다고 전했고, 진제와 현장의 두 번역을 거쳐 『구사론』은 「총명론」이 되어 동아시아 교학의 기초 문법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법상종에 딸린 남도의 구사종으로 이어졌다. 천태는 이 논서를 장교의 유문, 곧 「삼계 안의 작고 서툰 가르침」에 두면서도, 장교의 계위를 『구사론』 현성품의 차례 그대로 정리했다. 견혹과 사혹을 끊는 데서는 원교와 「가지런하되」, 무명에 이르러 「삼장이 못하다」. 그리고 석공을 관하는 그 자리에서 그것이 곧 불성임을 관하면 「낙 가운데서도 사람을 죽인다」. 니치렌 대성인은 구사종을 「일대 성교를 깨닫는 열 개의 거울」의 첫째로 드시고 소승의 세 종으로서 「잠시 두셨지만」, 「상은 모습을 취하는 것을 체로 삼는다」는 『구사론』의 정의로 일념삼천의 오음세간을 풀이하셨다.

이 연재는 서강에서 『구사론』이 어떻게 성립하고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보는 데서 시작했다. 「법의 분류」 편은 일흔다섯 가지 법과 오온 · 십이처 · 십팔계를, 「마음과 인과의 체계」 편은 이십이근과 심 · 심소, 여섯 원인 · 네 조건 · 다섯 결과를, 「세계와 윤회」 편은 삼계와 수미산, 중유와 십이연기, 겁의 생멸을, 「업의 체계」 편은 표업과 무표업, 율의와 업도를, 「번뇌와 삼세실유」 편은 아흔여덟 수면과 유부의 삼세실유 논증을, 「성자의 길」 편은 견도와 수도, 열 가지 지혜와 선정을 읽었다. 그리고 이 편에서, 그 모든 분석의 끝에 「나」는 없었다는 것, 그러나 그 「없음」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상속하는 법의 흐름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읽었다. 『구사론』은 세계를 남김없이 헤아린 논서이면서, 그 헤아림이 모두 무아의 길을 위한 지도였다고 스스로 말하는 논서다.

앵매도리의 「논서 연구」는 이 첫 갈래를 지나 다음 논서로 이어질 예정이다. 『구사론』이 「나는 없고 법은 있다」고 한 그 법의 실재를 겨눈 용수의 『중론』과 그것을 이은 삼론의 전통, 그리고 천친 자신이 뒤에 연 유식과 그것을 이은 법상의 전통이다. 『구사론』의 마지막 품에서 「상속」과 「상속전변차별」로 남겨진 물음 — 찰나마다 생멸하는 흐름을 무엇이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가 — 은 그 두 갈래에서 서로 다른 답을 얻는다.

더 읽기

참고 문헌

원전

  • 천친 『아비달마구사론』 권1 · 5 · 18 · 19 · 22~25 · 28~30, 현장 역, T29 no.1558
  • 천친 『아비달마구사석론』 권21~22, 진제 역, T29 no.1559 (혜개 서문 포함)
  • 『아비달마구사론본송』, 현장 역, T29 no.1560
  • 중현 『아비달마순정리론』 권1 · 3 · 12 · 80, 현장 역, T29 no.1562
  • 중현 『아비달마장현종론』 권1 · 40, 현장 역, T29 no.1563
  •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153, 현장 역, T27 no.1545
  • 보광 『구사론기』 권1 · 29 · 30, T41 no.1821
  • 진제 역 『바수반두법사전』, T50 no.2049
  • 『묘법연화경』 안락행품, 구마라집 역, T9 no.262
  • 천태대사 지의 『마하지관』 권3상 · 3하 · 5상 · 6상, T46 no.1911
  • 천태대사 지의 『법화현의』 권1하 · 5상 · 8하, T33 no.1716
  • 천태대사 지의 『사교의』 권1 · 3 · 4 · 6, T46 no.1929
  • 제관 『천태사교의』, T46 no.1931
  • 니치렌 대성인 「보은초」 · 「선시초」 · 「개목초」 · 「소승대승분별초」 · 「십법계명인과초」 · 「현방법초」 · 「일념삼천이사」 · 「일대성교대의」 · 「시문불승의」 · 「관심의 본존초」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일본어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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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ouis de La Vallée Poussin (tr.), L'Abhidharmakośa de Vasubandhu, 6 vols., Paris: Paul Geuthner, 1923–1931
  • Leo M. Pruden (tr.), Abhidharmakośabhāṣyam, 4 vols.,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88–1990
  • 櫻部建 · 上山春平, 『存在の分析〈アビダルマ〉』(仏教の思想 2), 角川書店, 1969
  • 櫻部建 · 小谷信千代, 『俱舎論の原典解明 賢聖品』, 法藏館, 1999
  • 加藤純章, 『経量部の研究』, 春秋社, 1989
  • 平川彰, 『インド仏教史』 上, 春秋社, 1974
  • 권오민 역, 『아비달마구사론』 1~4, 동국역경원, 2002
  •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