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단에서 주인은 재난의 근원이 법연의 『선택집』에 있다고 경문을 들어 단언했다. 그 말을 들은 객은 마침내 낯빛을 바꾸어, 담란 · 도작 · 선도 · 혜심승도의 권위와 「지혜는 해와 달과 같다」는 법연의 명성을 내세우며 「근년의 재난을 어찌 성대의 성인에게 덮어씌우느냐」고 따지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다. 주인은 웃으며 그를 붙든다. 「매운 것은 여뀌 잎에 익숙해지고, 냄새나는 것은 뒷간에서 잊는다」 — 오래 사법에 젖은 사람은 선한 말을 악한 말로 듣는다는 것이다. 이어 주인은 일대 오시의 권실이라는 도리로 객의 논거를 하나씩 무너뜨리고, 주나라 말 · 진(晋)의 쇠미 · 당나라 무종의 염불과 폐불이라는 중국의 예, 그리고 고토바 상황과 승구의 난이라는 일본의 예를 들어 「조짐이 먼저 나타나고 재앙이 뒤에 이른다」는 이치를 보인다. 아홉 편 가운데 다섯째인 이 편은, 방법의 정체를 밝히는 둘째 갈래(제3~5편)를 맺는 자리이며, 제4편의 문증에 이증과 현증을 더해 「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으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입정안국론의 아홉 편은 네 갈래로 이어진다. 재난의 원인과 그 경증을 밝히는 제1 · 2편, 방법의 정체 — 악한 승려와 법연 — 를 드러내는 제3 · 4 · 5편, 방법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는 제6 · 7 · 8편, 그리고 정법에 귀의하고 객이 맹세하는 제9편이다. 이 편은 둘째 갈래의 끝이다. 제3편에서 주인은 나라 안에 불법이 흥륭한 듯 보이는 겉모습 뒤에 악한 승려가 있음을 경문으로 증명했고, 제4편에서는 그 악한 승려가 누구이며 그 법이 무엇인가 — 법연과 『선택집』의 「버려라 · 닫아라 · 제쳐 두라 · 내던져라」 — 를 낱낱이 밝혔다. 그러나 이름이 지목되자 객은 더 이상 차분히 듣지 못한다. 이 편은 그 성냄으로 시작한다.
네 장의 논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제1장은 객의 반론이다. 정토의 조사들이 다른 법문을 버리고 염불에 귀의했으니 틀릴 리가 없고, 법연은 일체경을 배운 끝에 염불을 택했으니 더욱 틀릴 리가 없으며, 근년의 재난을 수십 년 전의 성인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털을 불어 흠을 찾는 억지라는 것이다. 제2장에서 주인은 먼저 객의 미혹을 여뀌 잎과 뒷간의 비유로 짚고, 석존 일대의 설법에는 앞뒤와 권실의 분별이 있다는 도리로 객의 논거를 뿌리부터 뒤집는다. 제3장은 「근년의 재난으로 지난 시대를 탓하느냐」는 객의 항의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 중국에서 예가 무너져 나라가 기운 세 가지 예를 든다. 제4장은 그 증거를 일본으로 가져와, 법연이 활동한 바로 그 고토바 상황의 치세가 승구의 난과 세 상황의 유배로 끝났음을 가리킨다.
이 단은 대성인께서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을 어떻게 세우셨는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문의 증거(문증)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리에 맞아야 하고(이증), 무엇보다 현실의 결과로 드러나야 한다(현증). 「도리와 증문보다도 현증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말씀은 이 단에서 구체적인 역사로 펼쳐진다. 제2장에 정리한 삼증 · 오중상대 · 종교의 오강은 입정안국론 전체를 읽는 데에도, 대성인의 다른 어서를 읽는 데에도 바탕이 되는 틀이다.
이 편의 장
본문
客殊に色を作して曰く、我が本師釈迦文、浄土の三部経を説きたまいて以来、曇鸞法師は四論の講説を捨てて一向に浄土に帰し、道綽禅師は涅槃の広業を閣いて偏に西方の行を弘め、善導和尚は雑行を抛って専修を立て、慧心僧都は諸経の要文を集めて念仏の一行を宗とす。 弥陀を貴重すること誠に以て然なり。又往生の人其れ幾ばくぞや。就中、法然聖人は幼少にして天台山に昇り、十七にして六十巻に渉り、並びに八宗を究め、具に大意を得たり。其の外一切の経論・七遍反覆し、章疏・伝記、究め看ざることなく、智は日月に斉しく、徳は先師に越えたり。 然りと雖も、猶出離の趣に迷いて、涅槃の旨を弁えず。故に徧く覿、悉く鑒み、深く思い遠く慮り、遂に諸経を抛って専ら念仏を修す。其の上、一夢の霊応を蒙り、四裔の親疎に弘む。故に或は勢至の化身と号し、或は善導の再誕と仰ぐ。 然れば則ち十方の貴賎頭を低れ、一朝の男女歩を運ぶ。爾しより来、春秋推し移り、星霜相積れり。而るに忝くも釈尊の教を疎かにして、恣に弥陀の文を譏る。何ぞ近年の災を以て、聖代の時に課せ、強ちに先師を毀り、更に聖人を罵るや。 毛を吹いて疵を求め、皮を剪つて血を出す。昔より今に至るまで、此くの如き悪言未だ見ず。惶る可く慎む可し。罪業至って重し。科条争でか遁れん。対座猶以て恐れ有り。杖を携えて則ち帰らんと欲す。
객이 몹시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우리 본사(本師) 석가문(釈迦文)께서 정토의 세 부 경을 설하신 이래로, 담란(曇鸞) 법사는 사론(四論)의 강설을 버리고 한결같이 정토에 귀의하였고, 도작(道綽) 선사는 열반의 광업(広業)을 제쳐 두고 오로지 서방의 행을 넓혔으며, 선도(善導) 화상은 잡행(雑行)을 내던지고 전수(専修)를 세웠고, 혜심승도(慧心僧都)는 여러 경의 요긴한 글을 모아 염불의 한 가지 행을 근본으로 삼았느니라. 미타를 귀히 여기고 무겁게 받듦이 참으로 이와 같으니라. 또 왕생한 사람이 그 얼마이겠느냐. 그 가운데서도 법연 성인(法然聖人)은 어려서 천태산(天台山)에 올라 열일곱에 육십 권을 두루 섭렵하고, 아울러 팔종(八宗)을 궁구하여 그 대의를 낱낱이 얻었느니라. 그 밖에 일체의 경론을 일곱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고, 장소(章疏)와 전기도 궁구하여 보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혜는 해와 달과 나란하고 덕은 앞선 스승들을 넘었느니라. 그러하되 오히려 생사를 벗어나는 길에 헤매어 열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두루 보고 낱낱이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멀리 헤아려, 마침내 여러 경을 내던지고 오로지 염불을 닦았느니라. 게다가 한 번 꿈의 영험한 감응을 입어 사방 끝의 가까운 이 · 먼 이에게 이를 넓혔느니라. 그러므로 어떤 이는 세지(勢至)보살의 화신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선도의 재탄이라 우러르느니라. 그러하니 시방의 귀한 이 · 천한 이가 머리를 숙이고, 온 나라의 남녀가 발걸음을 옮겨 왔느니라. 그로부터 봄가을이 바뀌고 별과 서리가 거듭 쌓였느니라. 그런데 황송하게도 석존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함부로 미타의 글을 헐뜯는구나. 어찌하여 근년의 재난을 성대(聖代)의 때에 덮어씌우고, 억지로 앞선 스승들을 헐뜯으며, 더 나아가 성인을 욕하느냐. 털을 불어 흠을 찾고 가죽을 베어 피를 내는 짓이로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악언은 아직 보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고 삼가야 하리라. 그 죄업이 지극히 무거우니 어찌 죄과를 면하겠느냐.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오히려 두려우니, 지팡이를 짚고 곧 돌아가려 하노라.
어구 풀이
- 客殊に色を作して객이 몹시 낯빛을 바꾸며
- 제4단에서 주인이 법연의 이름을 들어 악비구라 단정하고, 근년의 재난이 수십 년 전 법연의 그릇된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설하자, 객이 노여움으로 얼굴빛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몹시(殊に)」라는 말에 앞 단들보다 한층 격해진 객의 감정이 담겨 있다.
- 釈迦文석가문
- 석존을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 샤캬무니(Śākyamuni)를 소리대로 옮긴 말로, 석가모니와 같은 말의 다른 음사다. 객이 굳이 「우리 본사」라 부르는 것은, 정토의 세 부 경도 석존이 설하신 경이니 그것을 따르는 것이 석존을 따르는 것이라는 논리를 깔고 있다.
- 浄土の三部経정토의 세 부 경
- 『무량수경』 · 『관무량수경』 · 『아미타경』. 정토 신앙이 의지하는 근본 경전이다.
- 曇鸞法師は四論の講説を捨てて담란 법사는 사론의 강설을 버리고
- 사론(四論)은 용수의 『중론』 · 『십이문론』, 제바(聖提婆)의 『백론』 세 논서에, 용수의 저작으로 전하는 『대지도론』을 더한 넷이다. 담란은 처음 이 사론을 배워 강설하던 학승이었으나, 이를 버리고 오로지 정토 염불에 귀의하였다고 객은 말한다.
- 道綽禅師は涅槃の広業を閣いて도작 선사는 열반의 광업을 제쳐 두고
- 도작은 정토의 둘째 조사로, 처음 열반경을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광업(広業)」은 열반경이 밝히는 성행 · 범행 · 천행 · 영아행 · 병행의 오행(五行)을 가리킨다는 풀이와, 정토 삼부경 네 권에 견주어 열반경이 마흔 권이나 되는 넓은 업이라는 뜻이라는 풀이가 있다.
- 善導和尚は雑行を抛って専修を立て선도 화상은 잡행을 내던지고 전수를 세웠다
- 선도는 아미타불에 대한 칭명 · 예배 · 독송 등을 정행(正行)으로, 그 밖의 모든 행을 잡행(雑行)으로 나누고, 정행 가운데서도 칭명 염불 하나만을 오로지 닦는 전수(専修)를 세웠다. 법연의 『선택집』이 가장 크게 의지한 조사다.
- 慧心僧都혜심승도
- 겐신(源信). 恵心이라고도 쓴다. 일본 천태종 에신류(恵心流)의 시조로, 야마토국 가쓰라기군 다이마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천력 4년(950) 히에이잔에 올라 제18대 천태좌주 지에(慈慧) 대사를 스승으로 섬기고, 열세 살에 득도 수계하여 겐신이라 하였다. 권소승도가 되어 요카와(横川)의 에신인(恵心院)에 살며 수행하였으므로 에신승도 · 요카와승도라 불렸다. 관화 원년(985)에 『왕생요집(往生要集)』 세 권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정토교에 관한 일본 최초의 저술로 정토종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일승요결(一乗要決)』 세 권을 지어 법화경의 일승 사상을 강조하였다.
- 弥陀を貴重すること誠に以て然なり미타를 귀히 여기고 무겁게 받듦이 참으로 이와 같다
- 네 조사가 모두 아미타불을 높였으니 그 신앙이 옳다는 뜻을 담은 객의 말이다. 다른 법문을 버리고 염불에 돌아간 「사실」을 염불이 옳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 往生の人其れ幾ばくぞや왕생한 사람이 그 얼마이겠느냐
- 염불의 공덕으로 극락에 왕생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 天台山に昇り천태산에 오르다
- 여기서는 일본 천태종의 본산 히에이잔(比叡山)을 가리킨다. 법연은 어려서 히에이잔에 올라 출가하였다.
- 十七にして六十巻に渉り열일곱에 육십 권을 두루 섭렵하다
- 「육십 권」은 천태대사가 강술하고 장안대사가 받아 적은 『묘법연화경현의』 · 『묘법연화경문구』 · 『마하지관』 각 10권과, 이를 묘락대사가 주석한 『법화현의석첨』 · 『법화문구기』 · 『지관보행전홍결』 각 10권을 합한 60권이다. 법화경의 깊은 뜻을 담은 천태학의 근본 전적이다.
- 八宗팔종
- 나라 시대의 구사 · 성실 · 율 · 법상 · 삼론 · 화엄의 여섯 종에 헤이안 시대의 천태 · 진언을 더한 여덟 종. 당시 일본 불교 전체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 智は日月に斉しく지혜는 해와 달과 나란하다
- 『논어』 자장편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仲尼)를 헐뜯자 자공(子貢)이 「다른 현자는 언덕과 같아 넘을 수 있지만 공자는 해와 달과 같아 넘을 수 없다. 사람이 스스로 끊으려 한들 어찌 해와 달을 해치겠는가」라고 답한 고사가 있다. 객은 법연을 공자에 견줄 만큼 높이고 있는 것이다.
- 猶出離の趣に迷いて、涅槃の旨を弁えず오히려 생사를 벗어나는 길에 헤매어 열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다
- 「출리(出離)의 뜻」, 곧 생사의 미혹을 벗어나는 길을 말한다. 객의 말로는, 법연이 천태의 성도문(聖道門)으로는 출리의 길을 찾지 못하고 성불의 경지를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염불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 一夢の霊応を蒙り한 번 꿈의 영험한 감응을 입다
- 법연이 꿈에 금빛 몸의 선도를 만나 염불 홍통의 인가를 받고, 정토 법문의 부촉을 받았다는 전승을 가리킨다. 꿈의 감응으로 가르침의 정당성을 세우려 한 것이다.
- 四裔の親疎に弘む사방 끝의 가까운 이 · 먼 이에게 넓히다
- 사예(四裔)는 나라의 사방 끝이다. 나라 안의 가까운 이에게도 먼 이에게도 염불 신앙이 퍼졌다는 뜻이다.
- 或は勢至の化身と号し어떤 이는 세지보살의 화신이라 부르다
- 법연의 어릴 적 이름이 세시마루(勢至丸)였으므로, 염불 신도들은 법연이 살아 있을 때부터 그를 아미타불의 협시인 세지보살의 화신이라 불렀다.
- 或は善導の再誕と仰ぐ어떤 이는 선도의 재탄이라 우러르다
- 정토 염불가의 상전에서는 선도를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하였으니, 법연을 선도의 재탄이라 함은 곧 법연을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높이는 말이 된다.
- 十方の貴賎頭を低れ시방의 귀한 이 · 천한 이가 머리를 숙이다
- 법연은 마흔세 살 되던 승안 5년(1175)에 정토종을 열었다. 그 뒤 다카쿠라 천황, 싸움에 져 사로잡혀 있던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등이 귀의하였고, 문치 2년(1186)의 오하라 문답(大原問答)에서 여러 종의 고승을 굴복시켜 그들이 귀의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고시라카와 법황 등 조정 사람들과 공경, 구마가이 나오자네(熊谷直実) 같은 유력한 무사들도 잇따라 신앙하게 되었다.
- 春秋推し移り、星霜相積れり봄가을이 바뀌고 별과 서리가 거듭 쌓이다
- 법연이 염불을 넓힌 뒤로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만큼 오래 받들어 온 가르침을 이제 와서 헐뜯느냐는 항의가 담겨 있다.
- 毛を吹いて疵を求め털을 불어 흠을 찾다
- 털로 덮여 있으면 흠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로 두면 아무 일도 없는 것을 굳이 털을 불어 헤쳐 가며 흠을 찾는다는 뜻으로, 도를 넘게 남의 허물을 캐는 것을 말한다. 「취모구자(吹毛求疵)」라 하며, 출전은 『한비자(韓非子)』 대체편(大体篇)이다.
- 皮を剪つて血を出す가죽을 베어 피를 내다
- 멀쩡한 살갗을 일부러 베어 피를 낸다는 뜻으로, 없는 허물을 억지로 만들어 낸다는 앞 구절과 짝을 이룬다.
- 対座猶以て恐れ有り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오히려 두렵다
- 법연을 헐뜯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기만 해도 그 죄에 함께 걸릴까 두렵다는 말이다. 「지팡이를 짚고 곧 돌아가려 한다」는 대화를 끊고 자리를 뜨려는 행동이다.
제5단의 자리 — 문증에서 이증 · 현증으로
제4단에서 주인은 법연의 이름을 정면으로 들어 그를 악비구라 하고, 그 그릇된 뜻을 철저히 파하였다. 그리고 지금 나라를 덮친 재난이 오로지 수십 년 전 법연이 세운 그릇된 뜻에서 생겨났다고 단언하였다. 이 말을 듣고 객은 마침내 성을 내고 만다. 노여움으로 얼굴빛이 한층 달라졌기 때문에 본문은 「몹시 낯빛을 바꾸며」라고 쓴다.
이에 대하여 주인은, 예의를 잃은 나라는 어지러워진다는 것, 그리고 염불을 넓혀 나라가 기운 중국과 일본의 앞선 예를 차례로 보인다. 이것이 제5단이다. 단의 제목이 「화한(和漢)의 예를 들어 염불 망국을 보이다」인 까닭이다.
입정안국론 전체의 논증 구조에서 보면, 앞의 단은 문증(文証)을 들고 이 단은 이증(理証)과 현증(現証)을 설해 낸다. 제2단에서 네 경의 명문으로 재난의 유래를 밝히고, 제3단에서 인왕경 · 법화경 · 열반경으로 악한 승려를 증명하고, 제4단에서 『선택집』의 글을 낱낱이 들어 그 방법을 단정한 것은 모두 경문과 문헌에 의지한 증명이었다. 그러나 객은 경문을 들어도 승복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경문이 아니라 조사들의 권위와 세상의 평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은 이 단에서 석존 일대 설법의 도리(제2장)와 역사가 보여 준 결과(제3 · 4장)로 논증의 무게를 옮긴다.
「몹시 낯빛을 바꾸며」 — 성낸 객과 웃는 주인
일반적으로 「지금 세상의 종교는 그릇되었다」고 말할 때에는 사람들이 비교적 순순히 듣는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장 높이 받들고 믿는 바로 그것을 가리켜 가장 그릇되고 가장 해로운 것이라고 짚으면, 사람은 곧바로 성을 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객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제3단까지 객은 「악한 승려」라는 일반론에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제4단에서 법연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가 「일흉」으로 단정되자, 객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더럽다며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주인의 태도다. 객이 성낸다고 해서 주인까지 함께 성을 내면 법을 바르게 일깨우는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다음 장 첫머리에서 주인은 「웃으며 붙들어(咲み、止めて)」 말을 잇는다. 노여워하는 객에게 대성인은 어본불로서의 절대적인 확신과 상대를 생각하는 자비의 일념에 서서 미소를 띠고 맞이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타협이 아니다. 오히려 한층 엄하고 한층 날카롭게, 도리 위에서 그리고 현증 위에서 차근차근 설해 나가신다. 웃음은 물러섬이 아니라 상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자비의 표현이다.
객의 감정은 단마다 첫머리 말에 드러난다. 제3단은 「객이 낯빛을 바꾸며(客色を作して)」, 제4단은 「객이 여전히 분하여(客猶憤りて)」, 이 제5단은 「객이 몹시 낯빛을 바꾸며(客殊に色を作して)」로 시작하여 노여움이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제6단에 이르러 「객이 조금 누그러져(客聊か和いで)」로 바뀐다. 주인이 웃으며 붙든 이 대목이 문답의 흐름이 바뀌는 고비다.
객의 「상식」 — 네 조사의 권위와 혜심승도의 실제
객의 말은 참으로 단순하고 상식적이며 겉핥기다. 담란 · 도작 · 선도 · 혜심승도 겐신 같은 이름난 조사들이 모두 염불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으니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을 아무런 검토도 없이 의기양양하게 늘어놓는다. 객의 논법은 「훌륭한 사람들이 다른 것을 버리고 이것을 택했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이것이 옳다」는 결론으로 곧장 건너뛴다. 그러나 그 조사들이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버렸는가, 그 근거가 석존의 본의에 맞는가 하는 물음은 객의 머릿속에 아예 없다.
이 「상식」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는 혜심승도에 대한 객의 견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객은 「혜심승도는 여러 경의 요긴한 글을 모아 염불의 한 가지 행을 근본으로 삼았다. 미타를 귀히 여김이 참으로 이와 같다」(慧心僧都は諸経の要文を集めて念仏の一行を宗とす。弥陀を貴重すること誠に以て然なり, 24쪽)고 말한다. 겐신이 『왕생요집』을 지어 일본 정토교의 길을 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일승요결』을 지어 법화경의 일승 사상을 강조하였다. 겐신은 끝내 천태의 학승이었고, 그 귀결은 법화경에 있었다. 객은 겐신의 저술을 전혀 읽지 않고 세상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상식」이라는 것은 그릇된 인식인 경우가 많다. 일단 머릿속에 특정한 견해가 굳어 버리면, 사람은 더 이상 새로운 눈으로 진실을 추구하지 못한다. 객이 네 조사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을수록, 그가 그 조사들의 실제 저술과 사상을 살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 담란사론(중론 · 십이문론 · 백론 · 대지도론)의 강설을 버리고오로지 정토에 귀의四論の講説を捨てて一向に浄土に帰し
- 도작열반경의 넓은 업을 제쳐 두고서방의 행을 넓힘涅槃の広業を閣いて偏に西方の行を弘め
- 선도잡행을 내던지고칭명 전수를 세움雑行を抛って専修を立て
- 혜심승도(겐신)여러 경의 요문을 모아염불 일행을 근본으로 삼음(『왕생요집』)諸経の要文を集めて念仏の一行を宗とす그러나 만년에는 『일승요결』로 법화 일승을 강조
「살아 있는 부처」 법연 — 세지의 화신 · 선도의 재탄
객의 말이 법연에 이르면, 당시 사람들이 법연을 얼마나 존경하고 신뢰하였는가가 잘 드러난다. 어려서 히에이잔에 올라 열일곱에 천태의 육십 권을 섭렵하고, 팔종을 궁구하고, 일체의 경론을 일곱 번 되풀이해 읽고, 지혜는 해와 달 같고 덕은 앞선 스승들을 넘었다 — 객은 법연을 이렇게 그린다. 그런 사람이 천태의 길로는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모든 경을 내던지고 염불을 택했으니, 그 선택이야말로 일체경을 다 살핀 끝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법연의 생애와 그 그릇된 뜻이 세워지기까지의 경과는 이미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 — 법연의 『선택집』」에서 자세히 보았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법화경을 비방하는 그릇된 뜻이었으나, 법연의 가르침은 천황과 법황을 비롯하여 귀족과 무사 계급에까지 퍼졌고, 그 이름은 당시 위아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세지보살의 화신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선도의 재탄이라 우러른다. 그러하니 시방의 귀한 이 · 천한 이가 머리를 숙이고, 온 나라의 남녀가 발걸음을 옮겨 왔다」(故に或は勢至の化身と号し、或は善導の再誕と仰ぐ。然れば則ち十方の貴賎頭を低れ、一朝の男女歩を運ぶ, 24쪽). 이 한 구절이야말로 법연이 당시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부처처럼 여겨졌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선도의 재탄」이라는 말은 염불가의 상전에서 선도를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하였으므로, 결국 법연을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아무리 그릇된 설이라도 그럴듯한 이론을 지어 제 몸을 꾸미면, 세상 사람들은 그럴 법하다고 여겨 깊이 믿어 버린다. 그것은 석존 일대 불법의 얕고 깊음, 높고 낮음을 알지 못하고, 석존이 세상에 나오신 본회(本懐)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존의 제자라 자처하면서 석존 출세의 본회를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사람들은 소승교와 대승교의 차이, 권교와 실교의 차이, 본문과 적문의 구별조차 알지 못했다. 하물며 교상(教相)과 관심(観心), 문상(文上)과 문저(文底)의 구별은 알 길이 없었다. 그 때문에 불교에 헤매었던 것이다.
- 어려서 천태산(히에이잔)에 오름
- 열일곱에 천태 · 묘락의 육십 권을 섭렵
- 팔종을 궁구하고 일체 경론을 일곱 번 되풀이해 읽음
- 「지혜는 해와 달과 나란하고 덕은 앞선 스승을 넘었다」
- 그러나 출리의 길에 헤매어
- 여러 경을 내던지고 오로지 염불
- 꿈에 선도의 영응(인가 · 부촉)
- 세지의 화신 · 선도의 재탄이라 우러름
- 시방의 귀천이 머리를 숙임十方の貴賎頭を低れ、一朝の男女歩を運ぶ
「털을 불어 흠을 찾는다」 — 객의 반론이 겨누는 것
「그런데 황송하게도 석존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함부로 미타의 글을 헐뜯는구나. 어찌하여 근년의 재난을 성대의 때에 덮어씌우고, 억지로 앞선 스승들을 헐뜯으며, 더 나아가 성인을 욕하느냐」(而るに忝くも釈尊の教を疎かにして、恣に弥陀の文を譏る。何ぞ近年の災を以て、聖代の時に課せ、強ちに先師を毀り、更に聖人を罵るや, 24쪽).
객의 반론에는 두 겹이 있다. 하나는 석존이 설하신 정토의 경과 그 조사들, 그리고 법연의 가르침을 헐뜯는다는 항의다. 다른 하나는 더 구체적이다. 근년에 잇달아 일어난 재난의 원인을 굳이 법연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책임을 법연에게 떠넘기는 것은 무슨 일이냐는 것이다. 객에게 법연의 시대는 「성대(聖代)」, 곧 성인이 계셨던 거룩한 시대다. 정가 · 정원 연간의 대지진과 기근 · 역병은 지금의 일이고, 법연은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둘을 잇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 객의 생각이다.
그래서 객은 그런 행위를 「털을 불어 흠을 찾고 가죽을 베어 피를 낸다」고 반박한다. 있지도 않은 허물을 억지로 갖다 붙여 사람을 헐뜯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제3장의 주인의 대답을 불러낸다. 주인은 「대저 근년의 재난을 가지고 지난 시대를 탓하는 것을 그대는 몹시 두려워하는구나」(抑近年の災難を以て往代を難ずるの由、強ちに之を恐る, 25쪽)라고 받아, 조짐이 먼저 나타나고 재앙은 뒤에 이른다는 역사의 예를 든다. 객의 반론이 「시간의 간격」을 문제 삼았기에, 주인의 대답 역시 시간을 두고 드러나는 인과를 보이는 데로 향하는 것이다.
그릇된 사상과 권위, 그리고 분노
이 객의 말을 보면, 사상이란 그것이 비록 그릇된 사상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물론 그릇된 사상에는 반드시 막다른 곳이 있고, 모순이 늘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것이 다수의 의견이 되고, 권위 있는 사람들이 받드는 것이 되면, 사람들은 조금의 모순을 느껴도 개의치 않고 그 권위와 전통을 따른다. 그리고 그 권위 있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곧바로 이성을 잃고 감정에 치달아, 얼굴 가득 노여움을 띠고 비판하는 사람을 욕하고 박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언제까지나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는 없다. 언젠가는 모순과 막다름이 겉으로 드러나고, 기존의 권위와 전통은 무너지게 된다.
대성인 당시, 염불종은 일본 전국에 퍼져 민중의 생명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특히 법연에 대한 숭배는 이상할 만큼 높아져 있었다. 염불의 절들은 북적였고 승려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 때에 대성인께서 법연이야말로 「이 일흉(此の一凶)」이라고 보이셨으니, 당시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민중의 마음을 남김없이 알고 계셨던 대성인은, 여기서 객의 입을 빌려 「그토록 덕 높은 사람을 마치 흠을 캐듯 헐뜯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것은 죄악이다」라고 묻게 하신 것이다. 객의 반론은 곧 당시 일본 사람들 대부분의 목소리였다.
「이와 같은 악언」 — 파사현정의 생애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악언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 두려워하고 삼가야 하리라」(昔より今に至るまで、此くの如き悪言未だ見ず。惶る可く慎む可し, 24쪽). 여기서 「이와 같은 악언」이란 대성인께서 법연의 그릇된 뜻을 모든 각도에서 철저히 파하신 것을 가리킨다. 당시 사회에서 염불이 가장 널리 믿어지던 시대에, 그 중심인 법연을 정면으로 파하신 대성인의 말씀은 염불자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욕설로 들렸다.
객은 이어서 「그 죄업이 지극히 무거우니 어찌 죄과를 면하겠느냐.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오히려 두렵다」고 말한다. 법연을 헐뜯는 사람과 한자리에 있기만 해도 그 죄에 함께 걸린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죄」와 「벌」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보여 준다. 객에게 죄란 존경받는 성인을 헐뜯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참으로 무거운 죄는 바른 법을 버리게 하여 일체중생의 성불의 길을 막는 방법(謗法)이다. 죄의 기준이 서로 정반대다. 이 엇갈림이 다음 장에서 「선한 말을 듣고서 악한 말이라 여긴다」는 말씀으로 정면으로 짚어진다.
니치렌 대성인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파사현정(破邪顕正)의 생애셨다. 법연을 비롯한 갖가지 그릇된 뜻에 물든 일본 국민을 근저에서부터 구하고야 말겠다는 확신에 서신 일생이었다. 그 일생은 민중을 불행에 빠뜨리는 그릇된 종교 · 그릇된 가르침 · 그릇된 지혜와의, 한순간도 쉼 없는 싸움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입정안국론 상주 직후의 마쓰바가야쓰 법난, 이듬해의 이즈 유배는 바로 이 「악언」에 대한 세상의 응답이었다. 객이 「어찌 죄과를 면하겠느냐」고 한 말은, 그 뒤 대성인의 생애에 실제로 닥쳐온 박해를 미리 비추는 말이기도 하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객이 법연을 감싸는 근거는 조사의 권위 · 학식의 명성 · 세상의 평판이며, 경문과 도리는 그 안에 없다. 객이 「악언」이라 부른 것은 일체중생을 구하려는 파사현정의 말이고, 참으로 무거운 죄는 성인을 헐뜯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버리게 하는 방법이다.
본문
主人咲み、止めて曰く、辛きことを蓼の葉に習い、臭きことを溷厠に忘る。善言を聞いて悪言と思い、謗者を指して聖人と謂い、正師を疑つて悪侶に擬す。其の迷誠に深く、其の罪浅からず。事の起りを聞け、委しく其の趣を談ぜん。 釈尊説法の内、一代五時の間に、先後を立てて権実を弁ず。而るに曇鸞・道綽・善導既に権に就いて実を忘れ、先に依って後を捨つ。未だ仏教の淵底を探らざる者なり。就中、法然は其の流を酌むと雖も、其の源を知らず。 所以は何ん。大乗経の六百三十七部・二千八百八十三巻、並びに一切の諸仏菩薩、及び諸の世天等を以て、捨閉閣抛の字を置いて、一切衆生の心を薄す。是れ偏に私曲の詞を展べて、全く仏経の説を見ず。 妄語の至、悪口の科、言うても比無く、責めても余有り。人皆其の妄語を信じ、悉く彼の選択を貴ぶ。故に浄土の三経を崇めて、衆経を抛ち、極楽の一仏を仰いで、諸仏を忘る。誠に是れ諸仏・諸経の怨敵、聖僧・衆人の讎敵なり。 此の邪教広く八荒に弘まり、周く十方に遍す。
주인이 웃으며 (돌아가려는 객을) 붙들어 말하기를, 매운 것은 여뀌 잎에 익숙해지고, 냄새나는 것은 뒷간에서 잊느니라. 선한 말을 듣고서 악한 말이라 여기고, 비방하는 자를 가리켜 성인이라 하며, 바른 스승을 의심하여 악한 승려에 견주는구나. 그 미혹이 참으로 깊고 그 죄가 얕지 않도다. 일이 일어난 까닭을 들으라. 그 뜻을 자세히 이야기하리라. 석존께서 법을 설하신 가운데, 일대 오시(五時)의 사이에 앞과 뒤를 세워 권(権)과 실(実)을 가리셨느니라. 그런데 담란 · 도작 · 선도는 이미 권에 나아가 실을 잊고, 앞의 것에 의지하여 뒤의 것을 버렸느니라. 아직 불교의 깊은 밑바닥을 더듬어 보지 못한 자들이니라. 그 가운데서도 법연은 그 흐름을 떠 마셨으되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느니라. 왜 그러한가. 대승경 637부 2,883권과 아울러 일체의 제불 · 보살 및 여러 세천(世天) 등을 두고 「버려라 · 닫아라 · 제쳐 두라 · 내던져라(捨閉閣抛)」의 글자를 붙여, 일체중생의 마음을 업신여겼느니라. 이는 오로지 사사로이 굽은 말을 늘어놓은 것이요 전혀 부처의 경의 설을 보지 않은 것이니라. 망어의 지극함이요 악구의 허물이라, 말하자면 견줄 데가 없고 꾸짖어도 남음이 있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그 망어를 믿고 다 그 『선택집』을 귀히 여기느니라. 그러므로 정토의 세 경을 받들고 뭇 경을 내던지며, 극락의 한 부처를 우러르고 제불을 잊느니라. 참으로 이는 제불 · 제경의 원적(怨敵)이요, 성승(聖僧) · 뭇사람의 원수이니라. 이 그릇된 가르침이 널리 팔방 끝까지 퍼지고 두루 시방에 가득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 主人咲み、止めて曰く주인이 웃으며 붙들어 말하기를
- 지팡이를 짚고 돌아가려는 객을 주인이 미소 띤 얼굴로 붙들어 앉힌 것이다. 성낸 상대에게 함께 성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주인의 태도가 이 두 글자에 담겨 있다.
- 辛きことを蓼の葉に習い매운 것은 여뀌 잎에 익숙해지다
- 늘 매운 여뀌 잎을 먹고 사는 벌레는 그 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 臭きことを溷厠に忘る냄새나는 것은 뒷간에서 잊다
- 뒷간에 오래 있으면 냄새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사법에 물든 나머지 그것이 사법이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을 비유한다.
- 善言を聞いて悪言と思い선한 말을 듣고서 악한 말이라 여기다
- 앞 장에서 객이 「이와 같은 악언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 뒤집는 구절이다. 객이 악언이라 한 것이 실은 선언(善言)이라는 것이다.
- 謗者を指して聖人と謂い、正師を疑つて悪侶に擬す비방하는 자를 가리켜 성인이라 하고, 바른 스승을 의심하여 악한 승려에 견주다
- 「비방하는 자」는 정법을 비방한 법연, 「바른 스승」은 대성인 자신이다. 객이 법연을 「성인」이라 부르고 주인을 성인을 욕하는 자로 몬 것을 받아, 그 평가가 정반대로 뒤집혀 있음을 짚는다.
- 一代五時일대 오시
- 석존이 성도하여 열반에 이르기까지 50년 설법을 천태대사가 설한 순서에 따라 화엄시 · 아함시 · 방등시 · 반야시 · 법화열반시의 다섯 시기로 나눈 것이다.
- 先後を立てて権実を弁ず앞과 뒤를 세워 권과 실을 가리다
- 먼저 설한 40여 년의 경은 중생의 근기를 이끌기 위한 방편의 권교(権教)이고, 마지막 8년에 설한 법화경이 진실의 실교(実教)라는 분별을 말한다.
- 権に就いて実を忘れ、先に依って後を捨つ권에 나아가 실을 잊고, 앞의 것에 의지하여 뒤의 것을 버리다
- 담란 · 도작 · 선도가 방편의 권교인 정토 삼부경에 매달려 진실의 법화경을 잊고, 먼저 설한 경에 의지하여 나중에 설한 법화경을 버렸다는 것이다.
- 仏教の淵底불교의 깊은 밑바닥
- 연(淵)은 깊은 못, 저(底)는 바닥이다. 석존 일대 불교의 가장 깊은 뜻, 곧 출세의 본회를 말한다.
- 其の流を酌むと雖も、其の源を知らず그 흐름을 떠 마셨으되 그 근원을 알지 못하다
- 법연은 담란 · 도작 · 선도의 흐름을 이었다고 하지만, 그 근원인 세 스승이 권실에 헤맨 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 大乗経の六百三十七部・二千八百八十三巻대승경 637부 2,883권
- 대승 경전 전체를 부수 · 권수로 헤아린 것으로, 법연이 『선택집』에서 정토 삼부경 외의 대승경 전체를 「버려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을 가리킨다.
- 世天세천
- 세간을 지키는 하늘의 신들. 범천 · 제석 · 사천왕 등이다.
- 捨閉閣抛사 · 폐 · 각 · 포
- 법연이 『선택집』에서 정토 이외의 모든 경과 행에 대해 쓴 「버려라(捨) · 닫아라(閉) · 제쳐 두라(閣) · 내던져라(抛)」의 네 글자다.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 — 법연의 『선택집』」에서 그 글을 낱낱이 보았다.
- 一切衆生の心を薄す일체중생의 마음을 업신여기다
- 박(薄)은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일체중생이 법화경으로 성불할 수 있는 길을 가볍게 여겨 버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 私曲の詞사사로이 굽은 말
- 경문에 근거하지 않고 제멋대로 지어낸, 바르지 않은 말이다.
- 諸仏・諸経の怨敵、聖僧・衆人の讎敵제불 · 제경의 원적, 성승 · 뭇사람의 원수
- 讎는 讐와 같은 글자로, 원수 · 앙갚음의 뜻이다. 제불과 제경을 버리게 하였으니 부처와 경의 적이요, 성불의 길을 막았으니 승려와 중생 모두의 적이라는 것이다.
- 八荒팔황
- 나라의 여덟 방향의 끝, 곧 온 나라 방방곡곡이다.
객의 주장을 하나씩 깨뜨리다 — 오시와 권실
객의 주장은 세 가지였다. 정토의 세 부 경은 석존이 설하신 것이다. 담란 · 도작 · 선도 · 혜심은 다른 법문을 버리고 이 경에 귀의했다. 그 가운데서도 법연은 일체경을 배운 끝에 염불을 택했으니 틀림없다. 이 장에서 주인은 이 주장을 철저히 파한다.
먼저 「석존께서 법을 설하신 가운데, 일대 오시의 사이에 앞과 뒤를 세워 권과 실을 가리셨다」(釈尊説法の内、一代五時の間に、先後を立てて権実を弁ず, 24쪽)는 구절은, 객의 「우리 본사 석가문께서 정토의 세 부 경을 설하신 이래로」라는 말을 파하신 것이다. 객은 「석존이 설하셨다」는 사실 하나로 정토의 경을 정당화했다. 주인은 바로 그 석존이 스스로 설법에 앞뒤와 권실의 구별을 세우셨다는 것으로 답한다.
곧 석존은 40여 년의 설법을 마치고 마지막 8년 법화경에 들어가실 때, 무량의경에서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四十余年未顕真実)」고 하시어, 그때까지의 경은 모두 방편이니 버리라고 설하셨다. 정토 삼부경은 바로 그 40여 년의 설법 가운데, 그것도 방등부에서 나온 경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버려야 할 경인 것이다. 그것을 객은 모르고 집착하고 있다. 「석존이 설하셨으니 따른다」는 객의 논리는, 석존의 말씀을 따른다면 오히려 정토의 경을 놓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뒤집힌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권교에 집착하여 실교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부처의 설에 어긋나는 방법이다.
석존 일대의 설법은 이기고 짐 · 얕고 깊음이 분명하여 섞일 까닭이 전혀 없다. 화엄시 21일, 아함시 12년, 방등시 16년, 반야시 14년, 그리고 법화열반시 8년. 앞의 네 시기는 중생의 근기를 다듬기 위한 준비였고, 마지막 법화경에 이르러 비로소 부처의 본의가 드러난다.
근원을 모르는 흐름 — 법연과 세 스승
법연이 의지한 담란 · 도작 · 선도도 권에 나아가 실을 잊고 권교에 집착하여, 그 안에서 성도문 · 정토문, 난행 · 이행, 정행 · 잡행을 논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화경까지 성도 · 난행 · 잡행에 넣어 「버려라 · 닫아라 · 제쳐 두라 · 내던져라」고 논한 법연에 견주면 그 죄는 아직 얕다. 그렇다 해도 「아직 불교의 깊은 밑바닥을 더듬어 보지 못한 자들」(未だ仏教の淵底を探らざる者なり, 24쪽)이라는 평을 면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서도 법연은 담란의 흐름을 이었다고 하지만, 그 근원인 세 스승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부처의 경문에 어떻게 설해져 있는가를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담란 등의 설을 옳다고 하였고, 거기에 더하여 자기 나름대로 방법의 바퀴를 한층 더 크게 굴렸다. 세 스승은 권교의 테두리 안에서 우열을 논했을 뿐이지만, 법연은 법화경까지 포함한 대승경 637부 2,883권 전체에, 그리고 일체의 제불 · 보살과 세천에게까지 「사 · 폐 · 각 · 포」의 네 글자를 붙였다. 흐름이 내려올수록 물은 더 탁해진 것이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법화경만을 가장 높은 유일한 경으로 삼는 것은 삼세 시방의 부처와 보살이 모여든 법회에서 정해진 바다. 그리고 법화경만이 일체중생을 성불시키는 정법이다. 그러므로 이 법화경을 버리라고 설하여 민중을 속이는 것은 삼세 시방 부처의 적이요, 여러 경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민중의 성불득도, 곧 절대적인 행복의 경지를 세우는 길을 끊어 버리는 것이 된다. 「제불 · 제경의 원적이요, 성승 · 뭇사람의 원수」라는 말씀은 이 뜻이다.
염불은 발판, 법화는 보탑 — 「염불무간지옥초」
대성인은 다른 어서에서 정토종이 석존을 등진 허물을 이렇게 밝히셨다.
而るに浄土宗は主師親たる教主釈尊の付属に背き他人たる西方極楽世界の阿弥陀如来を憑む故に主に背けり八逆罪の凶徒なり違勅の咎遁れ難し即ち朝敵なり争か咎無けんや、次に父の釈尊を捨つる故に五逆罪の者なり豈無間地獄に堕ちざる可けんや
그런데 정토종은 주 · 사 · 친이신 교주 석존의 부촉을 등지고 남인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여래를 의지하므로 주군을 등진 것이니라. 팔역죄의 흉도이니라. 칙명을 어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니 곧 조정의 적이니라. 어찌 허물이 없겠느냐. 다음으로 아버지이신 석존을 버리므로 오역죄의 사람이니라. 어찌 무간지옥에 떨어지지 않겠느냐.
석존은 이 사바세계 중생에게 주군이요 스승이요 어버이시다. 그 석존을 버리고 서방의 다른 부처를 의지하는 것은, 제 나라의 임금을 버리고 남의 나라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제 아버지를 버리고 남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같은 어서는 정토 삼부경의 자리를 비유로 보이신다.
浄土の三部経とは釈尊一代五時の説教の内第三方等部の内より出でたり、此の四巻三部の経は全く釈尊の本意に非ず三世諸仏出世の本懐にも非ず唯暫く衆生誘引の方便なり譬えば塔をくむに足代をゆふが如し念仏は足代なり法華は宝塔なり法華を説給までの方便なり法華の塔を説給て後は念仏の足代をば切り捨べきなり
정토의 세 부 경이란 석존 일대 오시의 설교 가운데 제3 방등부 안에서 나온 것이니라. 이 네 권 세 부의 경은 전혀 석존의 본의가 아니요, 삼세 제불이 세상에 나오신 본회도 아니요, 다만 잠시 중생을 이끌어 들이기 위한 방편이니라. 비유하자면 탑을 짤 때 발판을 매는 것과 같으니라. 염불은 발판이요 법화는 보탑이니라. 법화를 설하시기까지의 방편이니라. 법화의 탑을 설하신 뒤에는 염불의 발판은 잘라 버려야 하느니라.
탑을 다 세운 뒤에도 발판에 매달려 탑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대성인은 이어서 법화경을 설하신 뒤에도 염불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그 어리석음이라 하시고, 경문의 증거를 드신다.
然れば法華の序分・無量義経には四十余年未顕真実と説給て念仏の法門を打破り給う、正宗法華経には正直捨方便・但説無上道と宣べ給て念仏三昧を捨て給う
그러므로 법화의 서분인 무량의경에는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설하시어 염불의 법문을 깨뜨리시고, 정종인 법화경에는 「바로 방편을 버리고 다만 위없는 도를 설한다」고 펴시어 염불삼매를 버리셨느니라.
그리고 정토의 경을 직접 들은 사람들조차 그 경을 버리고 법화경으로 성불했다는 것을 보이신다.
之に依て阿弥陀経の対告衆長老・舎利弗尊者・阿弥陀経を打捨て法華経に帰伏して華光如来と成り畢んぬ、四十八願付属の阿難尊者も浄土の三部経を抛て法華経を受持して山海慧自在通王仏と成り畢んぬ
이에 따라 아미타경의 대고중인 장로 사리불 존자도 아미타경을 내버리고 법화경에 귀복하여 화광여래(華光如来)가 되었고, 사십팔원을 부촉받은 아난 존자도 정토의 세 부 경을 내던지고 법화경을 수지하여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仏)이 되었느니라.
아미타경을 직접 들은 사리불은 천이백 아라한 가운데 지혜 제일의 상수였고, 아난은 석존 일대의 설법을 다 외운 다문 제일의 성자였다. 이런 극위의 대아라한조차 정토의 경으로는 왕생 · 성불의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법화경으로 성불했다. 부처 재세의 조사가 이러하니, 그 조사의 자취를 밟으려거든 세 부 경을 내던지고 법화경을 믿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 — 이것이 대성인의 결론이다. 정토가 그 경을 「직접 들은 사람」의 권위를 내세운다면, 바로 그 사람들이 법화경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이 정토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이것을 본문은 「망어의 지극함이요 악구의 허물이라, 말하자면 견줄 데가 없고 꾸짖어도 남음이 있다」(妄語の至、悪口の科、言うても比無く、責めても余有り, 25쪽)고 개탄한다. 이 주인의 개탄은 바꾸어 말하면 니치렌 대성인의 정신 그 자체다.
여뀌 잎과 뒷간 — 거꾸로 선 가치
이제 장의 첫머리로 돌아가 보자. 「매운 것은 여뀌 잎에 익숙해지고, 냄새나는 것은 뒷간에서 잊는다. 선한 말을 듣고서 악한 말이라 여긴다」(辛きことを蓼の葉に習い、臭きことを溷厠に忘る。善言を聞いて悪言と思い, 24쪽).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으로 이와 같다. 대성인 재세 당시, 법연의 그릇된 뜻에 물든 사람들은 자신이 그 독 때문에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깨우쳐 건지려 하신 대성인을 원망하였다. 「냄새나는 것은 뒷간에서 잊는다」는 표현은 그 모습에 꼭 들어맞는다. 매운 맛도 고약한 냄새도 처음에는 분명히 느껴진다. 그러나 그 안에 오래 있으면 감각 자체가 무디어진다. 무디어진 감각으로는 더 이상 무엇이 맵고 무엇이 냄새나는지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선한 말을 악한 말로 듣고, 비방하는 자를 성인이라 부르고, 바른 스승을 악한 승려로 의심하는, 모든 것이 거꾸로 선 상태가 생긴다.
- 본디선한 말을객의 눈악한 말이라 여긴다善言を聞いて悪言と思い
- 본디비방하는 자(법연)를객의 눈성인이라 한다謗者を指して聖人と謂い
- 본디바른 스승(대성인)을객의 눈악한 승려에 견준다正師を疑つて悪侶に擬す
「그 미혹이 참으로 깊고 그 죄가 얕지 않다」

사람에게는 본디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나쁜 상태임을 알더라도 거기서 나오는 것, 그것을 바꾸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 「정들면 고향(住めば都)」이라는 말은 사람의 그런 일면을 참으로 단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에게는 모든 현상에 안주하기를 싫어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마지않는 성정도 있다. 여뀌 잎의 벌레가 되느냐, 매운 것을 맵다고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느냐는 결국 이 두 성정 가운데 어느 쪽에 서느냐에 달려 있다.
세상의 어지러움의 모든 근원을 끝까지 따져 들어가면, 결국 그릇된 뜻 · 그릇된 종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그르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근본으로 삼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그 그릇된 뜻을 주창하여 세상을 어지럽힌 이의 죄를 가장 무겁게 본다. 「그 미혹이 참으로 깊고 그 죄가 얕지 않다」(其の迷誠に深く、其の罪浅からず, 24쪽)는 말씀은 미혹된 객 한 사람을 향한 말이면서, 그 미혹을 퍼뜨린 근원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종교 비판의 원리 — 왜 가려야 하는가
여기서 종교에는 그 승렬과 천심을 밝히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 종교나 다 같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모든 종교가 같은 본존을 갖고 같은 수행을 하며 같은 교의를 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이상, 그 차이를 인식하고 승렬과 천심을 검토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태도다.
종교란 생명의 본질을 해명한 것이며, 생활의 근본법을 설해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그르치는 것은 인생과 생활의 근원을 그르치는 것이 된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근본의 생활법이라 할 종교가 낮고 그릇된 데에 원인이 있다. 따라서 종교의 내용과 본질을 따져 보지도 않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이라거나 습관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삼켜서는 안 된다. 근본의 법이기에 더욱 가장 높고 바른 것을 구하여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법을 구하는 사람의 마땅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객이 조사들의 이름과 세상의 평판을 근거로 삼은 것은 바로 이 검토를 건너뛴 것이었다.
모든 사물에 재는 기준이 있듯이, 종교에도 그 정사 · 승렬을 재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으로 재어 가면 어떤 종교라도 엄격하게 그 성패가 판정되고, 잘못이 없는 종교가 가려진다. 이 종교를 재는 기준을 「종교 비판의 원리」라 한다. 종교 비판의 원리에는 문 · 이 · 현의 삼증(三証), 종교의 오강(五綱), 오중상대(五重相対), 사중흥폐(四重興廃), 삼중비전(三重秘伝)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서는 삼증 · 오중상대 · 종교의 오강, 이 세 가지를 살펴본다. 입정안국론의 제2단부터 이 제5단까지가 바로 문증 · 이증 · 현증을 차례로 쌓아 올린 논증이었으니, 이 원리를 정리해 두는 것은 이 단을 읽는 열쇠가 된다.
문 · 이 · 현의 삼증
삼증이란 문증(文証) · 이증(理証) · 현증(現証)이다.
문증은 문헌상의 증거라는 뜻으로, 그 종교가 어떤 경전을 의지처로 삼는가, 그 가르침이 경문에 근거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불교라면 각 종 각 파가 저마다 의경(依経)으로 삼는 경문이 있다. 경전과 교의가 없는 종교는 종교라 할 수 없다.
이증이란 문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그 문증을 철학적으로 따져 보아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또 이론으로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아무리 경문이 훌륭해도 설해진 내용이 지리멸렬하여 도리로서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버려야 한다. 바른 종교는 합리적이어야 하고 보편타당성을 지녀야 한다. 같은 원인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같은 결과를 나타내어, 모든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현증이란 경문에 설해지고 도리로 보여진 것이 실제 생활 위에 증명되는 것이다. 본래 참된 종교의 의의는 각자가 자기 생명을 바꾸어 숙명을 타개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얻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 도리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이 없다면 참된 종교라 할 수 없다. 그리고 현증이란 그 종교를 실천함으로써 현실 생활에 어떤 증거가 나타나는가 하는 실증이다.
니치렌 대성인도 이 현증을 가장 무겁게 여기셨다. 입정안국론에서도 이어지는 본문처럼 당나라의 예와 일본 승구의 난의 예를 들어, 그릇된 가르침이 나라에 미친 현증을 가르치셨다. 홍안 2년(1279)에 쓰신 「성인어난사」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大田の親昌・長崎次郎兵衛の尉時綱・大進房が落馬等は法華経の罰のあらわるるか、罰は総罰・別罰・顕罰・冥罰・四候、日本国の大疫病と大けかちとどしうちと他国よりせめらるるは総ばちなり、やくびやうは冥罰なり、大田等は現罰なり別ばちなり、各各師子王の心を取り出して・いかに人をどすともをづる事なかれ
오타노 지카마사 · 나가사키 지로효에노조 도키쓰나 · 다이신보가 말에서 떨어진 것 등은 법화경의 벌이 나타난 것이 아니겠느냐. 벌에는 총벌 · 별벌 · 현벌 · 명벌의 네 가지가 있느니라. 일본국의 큰 역병과 큰 기근과 동족끼리의 싸움과 다른 나라에서 쳐들어오는 것은 총벌이니라. 역병은 명벌이니라. 오타 등은 현벌이요 별벌이니라. 각각 사자왕의 마음을 꺼내어 아무리 사람이 위협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현증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바르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다. 대성인은 현증이 가장 중요함을 「삼삼장기우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日蓮仏法をこころみるに道理と証文とにはすぎず、又道理証文よりも現証にはすぎず
니치렌이 불법을 시험해 보건대, 도리와 증문보다 나은 것이 없고, 또 도리와 증문보다도 현증보다 나은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종교를 논할 때는 증거를 첫째로 삼는다.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어본불로 받드는 것도, 문증인 법화경 위에 그것이 분명하고, 그 문증대로 대성인께서 몸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소승교보다 대승교, 대승교 가운데서도 법화경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경문이 뛰어나다는 것이며, 설해진 철리가 높고 깊고 바르다는 것이다.
- 제2~4단 문증
- 제5단 제2장 이증
- 제5단 제3 · 4장 현증
오중상대 — 다섯 겹의 견줌
오중상대(五重相対)란 내외상대 · 대소상대 · 권실상대 · 본적상대 · 종탈상대의 다섯을 말한다. 종교를 차례로 견주어 가며 더 깊고 뛰어난 것을 가려내는 다섯 단계의 기준이다.
내외상대와 대소상대
내외상대는 내도(内道), 곧 불교와 외도(外道), 곧 불교 이외의 가르침을 견주는 것이다. 그 견줌의 기준은 인과의 이법(理法)이 있느냐 없느냐다. 불법은 인과의 이법을 근간으로 삼아,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고 설하며 이것이 하나의 법칙처럼 정해져 있다. 그런데 외도에서는 이 인과론이 분명하게 설해져 있지 않고, 또 인과를 무시한 설이 많아, 불법에 견주면 훨씬 낮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소상대는 불교 안의 대승교와 소승교를 견주는 것이다. 소승교는 자기 한 몸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 성문 · 연각의 가르침이고, 대승교는 자타를 함께 건지는 보살의 가르침이다. 적은 사람을 태우는 작은 수레보다 많은 중생을 태우는 큰 수레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권실상대
권실상대는 대승교 안에도 권대승교와 실대승교가 있어, 실대승교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권대승교는 화엄경 21일의 설법, 방등부 16년의 설법, 반야부 14년의 설법으로, 정토종 · 선종 · 진언종 · 법상종 · 삼론종 등이 이 권대승교의 경문을 의지처로 삼고 있다. 이 가르침은 모두 부처가 중생의 근기를 다듬기 위한 방편으로 설한 경문이어서, 아직 진실의 가르침인 우주의 근본 원리, 생명의 실상관은 설해져 있지 않다. 그것을 설해 밝힌 것이 실대승교, 곧 법화경이다. 그러므로 권대승교는 실대승교에 훨씬 못 미친다. 이 장에서 주인이 「앞과 뒤를 세워 권과 실을 가리셨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권실상대다.
본적상대
본적상대는 실대승교 안에도 본문과 적문의 두 문이 있어, 적문보다 본문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석존은 일대 설법의 핵심으로서 마지막 8년 동안 1부 8권 28품의 법화경을 설하였다. 그 28품 가운데 앞 14품을 적문(迹門), 뒤 14품을 본문(本門)이라 한다. 적문에서는 석존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서른 살에 처음 성불하였다는 시성정각(始成正覚)을 전제로 하여, 생명의 이론상의 실상관을 설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영원한 생명관 위에 서서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설해 밝힌다.
적문의 「적(迹)」은 「그림자」라는 뜻이고 본문의 「본(本)」은 「본체」라는 뜻이다. 영원한 생명인 부처가 처음 부처가 되는 모습을 보이고, 그 입장에서 설한 것이므로 적문이라 한다. 그러므로 부처가 본지에서 설한 본문이 훨씬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본문의 설법을 들음으로써, 법화경 적문까지 성불하지 못했던 적화(迹化)의 보살과 인천의 대중도 비로소 성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적문은 물론 본문이라 하더라도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과 견줄 때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석존의 가르침은 말법에서는 이익이 없는 것이다.
종탈상대
종탈상대는 부처가 되는 데에 가장 긴요한 법문이다. 불법에서 중요한 것은 종(種) · 숙(熟) · 탈(脱)의 세 가지 뜻이다.
종이란 하종(下種)으로, 부처가 되는 근본 원인을 만드는 것, 곧 부처를 만나 부처가 되는 씨앗을 심는 것을 말한다. 숙이란 과거에 심은 씨앗이 싹트고 자라도록 다듬어 기르는 것이며, 탈이란 하종된 불종이 다듬어져 마침내 부처와 같은 경지를 얻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두 불법의 큰 이익이므로 삼익(三益)이라 하여, 각각 하종익 · 숙익 · 탈익이라 한다.
그러면 석존은 이 셋 가운데 어떤 이익을 재세의 중생에게 주었는가. 그것은 탈익이다. 과거 오백진점겁의 세상에 석존이 하종하여 인연을 맺은 중생이 그 긴 세월 동안 다듬어지고, 다시 인도에 석존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그 가르침을 듣고 다듬어져, 마침내 법화경에 이르러 부처의 경지를 얻었다. 그러므로 석존 출세의 본회는 과거의 하종을 익히고 벗어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하종되었으면서도 석존 재세에 득탈하지 못한 이들은, 정법 1,000년 · 상법 1,000년 동안 불법을 수행하여 다듬어지고 벗어났다. 곧 상법 시대에는 약왕보살의 후신인 천태대사가 출현하여 『마하지관』에 이(理)의 일념삼천을 설해 숙익을 베풀었다. 먼 과거에 하종되었던 사람들은 이 천태의 숙익의 가르침으로 다듬어지면서 자연히 득탈하였다.
그러면 말법은 어떠한가. 말법의 중생은 석가 불법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른바 본미유선(本未有善)의 중생이라 하여, 과거에 석가 불법으로 하종된 적도 없고, 따라서 숙익의 공덕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런 선근은 전혀 쌓지 않았다. 그러므로 석존 50년의 경들로는 성불할 수도 없고, 현세에서 성불의 증거로서의 행복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말법의 중생은 현세에서 처음 하종을 받아, 직달정관(直達正観)이라 하여 말법 정법의 불력 · 법력으로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 이 하종 불법의 본불이 니치렌 대성인이시다.
석가 불법에서는 오백진점겁이라는 긴 기간을 수행하여 겨우 성불하는 데 비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일생성불이라 하여 이 한 생 동안에 성불을 얻을 수 있다. 하종 불법이라 하여 씨앗을 심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종 · 조숙 · 득탈을 모두 갖추고 있다. 수지즉관심(受持即観心)이라 하여, 이 묘법을 수지하여 삼대비법의 어본존에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그 당체가 곧 불신이라고 설해진다. 이처럼 범부의 몸 그대로 성불하는 것을 즉신성불이라 한다.
하종의 불법과 탈익의 불법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르며, 말법인 지금은 탈익의 불법을 버리고 하종의 불법을 취해야 한다. 이것을 종탈상대하여 불법을 비판한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법화경이라 하면 석존의 28품 법화경만을 떠올리지만, 법화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석존 이후만 해도 세 가지 법화경이 있다. 석존의 28품은 탈익의 재세 당시의 법화경이고, 숙익의 법화경은 상법 시대 천태의 『마하지관』이며, 말법 하종의 법화경은 니치렌 대성인의 남묘호렌게쿄다.
再往之を見れば迹門には似ず本門は序正流通倶に末法の始を以て詮と為す、在世の本門と末法の始は一同に純円なり但し彼は脱此れは種なり彼は一品二半此れは但題目の五字なり
다시 한 번 이것을 보면, 적문과는 같지 않아 본문은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이 모두 말법의 처음을 위한 것이니라.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똑같이 순원(純円)이니라. 다만 저것은 탈(脱)이요 이것은 종(種)이며, 저것은 일품이반(一品二半)이요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글자이니라.
- 내외상대불교(내도)>불교 밖의 가르침(외도)기준은 인과의 이법
- 대소상대대승교>소승교
- 권실상대실대승교(법화경)>권대승교(화엄 · 방등 · 반야 — 정토 · 선 · 진언 · 법상 · 삼론 등이 의지)
- 본적상대본문(뒤 14품, 구원의 본지)>적문(앞 14품, 시성정각)
- 종탈상대하종의 불법(말법, 남묘호렌게쿄)>탈익의 불법(재세의 28품)
종교의 오강 — 교 · 기 · 시 · 국 · 교법 유포의 선후
오강(五綱)이란 교(教) · 기(機) · 시(時) · 국(国) · 교법 유포의 선후(先後)의 다섯이다. 이 다섯 조건에 맞는 종교가 아니면 바른 종교라 할 수 없다.
먼저 「교」란 어떤 가르침이 가장 높으며 민중을 몸과 마음 모두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판단의 기준은 앞에서 본 삼증 · 오중상대에 따르는데, 대성인은 「교기시국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所以に法華経は一切経の中の第一の経王なりと知るは是れ教を知る者なり
그러므로 법화경이 일체경 가운데 제일의 경왕임을 아는 것이 곧 교(教)를 아는 것이니라.
이어서 대성인은 광택사의 법운 · 도량사의 혜관 등은 열반경이 법화경보다 낫다 하고, 청량산의 징관 · 고야산의 홍법 등은 화엄경 · 대일경이 법화경보다 낫다 하며, 가상사의 길장 · 자은사의 기 법사 등은 반야경 · 해심밀경이 법화경보다 낫다고 하였으나, 천태산의 지자대사 한 사람만이 일체경 가운데 법화경이 뛰어나다고 세웠을 뿐 아니라 법화경보다 뛰어난 경이 있다고 하는 자를 간효하라고 하셨다고 밝히신다. 그리고 그 결론을 이렇게 맺으신다.
教を知れる者之れ無ければ法華経を読む者之れ無し法華経を読む者之れ無ければ国師となる者無きなり
교를 아는 자가 없으면 법화경을 읽는 자가 없고, 법화경을 읽는 자가 없으면 나라의 스승이 될 자가 없느니라.
나라의 스승이 될 자가 없으면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일체경의 대 · 소, 권 · 실, 현 · 밀의 차별에 헤매어, 한 사람도 생사를 벗어나는 이가 없고 결국 방법의 사람이 되어, 법으로 말미암아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자는 대지의 티끌보다 많고 법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벗어나는 자는 손톱 위의 흙보다 적다고 대성인은 이어서 경계하신다. 법화경이야말로 뛰어나며 유일하고 절대라고 아는 것이 교를 아는 것이라고 대성인은 단정하셨다. 그리고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법화경이란 석존의 28품 법화경도 아니고 상법 시대 천태의 『마하지관』도 아니다. 문저(文底)에 비침(秘沈)된 남묘호렌게쿄의 일곱 글자의 법화경이다. 이 남묘호렌게쿄야말로 말법 유일의 교라고 아는 것을 교를 안다고 한다.
둘째로 「기」를 안다는 것은 민중의 근기를 아는 것이다. 가장 높은 가르침인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의 대불법도 정법 · 상법 시대에는 넓힐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는 정 · 상의 민중의 근기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법에서 석가 불법의 긴 세월에 걸친 수행(역겁수행)은 민중의 근기에 맞지 않는다. 그런 수행을 하려 하면 생활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여유 있는 일부 사람의 위안에 그치고 만다.
셋째로 「시」를 안다는 것은, 지금이 정법 · 상법 · 말법 가운데 말법의 시대임을 아는 것이다. 석존의 예언대로 석가 불법의 공력은 사라지고 그릇된 가르침이 횡행하여 오탁(五濁)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민중은 도탄의 괴로움에 빠져 힘 있는 종교, 참된 불법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때야말로 니치렌 대성인의 큰 철리가 넓혀질 때라고 아는 것이 시를 아는 것이다. 이 시를 아는 것은 첫째의 교를 아는 것과 함께 오강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진다. 이것을 밝힌 것이 「선시초」로, 그 첫머리에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夫れ仏法を学せん法は必ず先づ時をならうべし
무릇 불법을 배우는 법은 반드시 먼저 때를 배워야 하느니라.
넷째로 「국」을 안다는 것은, 그 나라가 어떤 법과 인연이 깊은 나라인가를 아는 것이다. 같은 법이라도 나라에 따라 먼저 퍼져야 할 법과 뒤에 퍼져야 할 법이 다르다. 대성인은 일본을 실대승, 곧 법화경과 인연이 있는 나라로 보셨다.
마지막으로 「교법 유포의 선후」에 대해 「교기시국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五に教法流布の先後とは未だ仏法渡らざる国には未だ仏法を聴かざる者あり既に仏法渡れる国には仏法を信ずる者あり必ず先に弘まれる法を知つて後の法を弘むべし先に小乗・権大乗弘らば後に必ず実大乗を弘むべし先に実大乗弘らば後に小乗・権大乗を弘むべからず、瓦礫を捨てて金珠を取るべし金珠を捨てて瓦礫を取ること勿れ
다섯째로 교법 유포의 선후란, 아직 불법이 건너오지 않은 나라에는 아직 불법을 듣지 못한 자가 있고, 이미 불법이 건너온 나라에는 불법을 믿는 자가 있느니라. 반드시 먼저 넓혀진 법을 알고서 뒤의 법을 넓혀야 하느니라. 먼저 소승 · 권대승이 넓혀졌으면 뒤에는 반드시 실대승을 넓혀야 하고, 먼저 실대승이 넓혀졌으면 뒤에 소승 · 권대승을 넓혀서는 안 되느니라. 기와와 자갈을 버리고 금과 구슬을 취해야 하며, 금과 구슬을 버리고 기와와 자갈을 취하지 말지니라.
일본에서는 화엄 · 법상의 권대승이 나라 시대에 넓혀지고, 법화경 적문이 헤이안 시대에 전교대사에 의해 넓혀졌다. 그런데 그 뒤에 권대승인 진언 · 정토종 등이 넓혀져 나라를 어지럽히고 민중을 괴롭혔다. 한 번 법화경이 퍼진 이상, 다음에 퍼져야 할 불법은 법화경 독일본문(独一本門)의 대법이어야 한다. 이것을 교법 유포의 선후라 한다. 법연의 염불은 바로 「금과 구슬을 버리고 기와와 자갈을 취하는」 일이었다. 오강에 비추어 보아도, 법화경이 이미 퍼진 나라에 뒤늦게 권대승의 염불을 넓혀 법화경을 버리게 한 것은 순서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 교특히 중요어떤 가르침이 가장 높은가「법화경이 일체경 가운데 제일의 경왕임을 아는 것이 교를 아는 것」法華経は一切経の中の第一の経王なりと知るは是れ教を知る者なり440쪽
- 기민중의 근기를 안다
- 시특히 중요지금이 말법임을 안다「반드시 먼저 때를 배워야 한다」必ず先づ時をならうべし256쪽
- 국그 나라가 어떤 법과 인연이 깊은가를 안다
- 교법 유포의 선후먼저 퍼진 법을 알고 뒤의 법을 넓힌다「기와와 자갈을 버리고 금과 구슬을 취하라」瓦礫を捨てて金珠を取るべし439쪽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주인은 객이 내세운 「석존이 설하셨다」 · 「조사들이 택했다」 · 「법연은 일체경을 배웠다」를 일대 오시의 선후 · 권실이라는 하나의 도리로 무너뜨린다. 문증 · 이증 · 현증, 오중상대, 오강 가운데 어느 기준으로 보아도, 법화경이 퍼진 나라에서 법화경을 버리게 한 것은 「앞의 것에 의지하여 뒤의 것을 버린」 전도이며, 말법에는 하종의 남묘호렌게쿄가 그 바른 자리다.
본문
抑近年の災難を以て往代を難ずるの由、強ちに之を恐る。聊か先例を引いて汝の迷を悟す可し。止観の第二に史記を引いて云く「周の末に被髪袒身にして礼度に依らざる者有り」と。弘決の第二に此の文を釈するに、左伝を引いて曰く「初め平王の東に遷りしに、伊川に、髪を被にする者の野に於て祭るを見る。 識者の曰く、百年に及ばじ、其の礼先ず亡びぬ」と。爰に知んぬ、徴前に顕れ災い後に致ることを。「又阮藉が逸才なりしに、蓬頭散帯す。後に公卿の子孫皆之に教って、奴苟相辱しむる者を方に自然に達すと云い、撙節し兢持する者を呼んで田舎と為す。 是を司馬氏の滅する相と為す」已上。 又慈覚大師の入唐巡礼記を案ずるに云く「唐の武宗皇帝、会昌元年、勅して章敬寺の鏡霜法師をして、諸寺に於て弥陀念仏の教を伝え令む。寺毎に三日巡輪すること絶えず。同二年、回鶻国の軍兵等唐の堺を侵す。 同三年、河北の節度使忽ち乱を起す。其の後、大蕃国更た命を拒み、回鶻国重ねて地を奪う。凡そ兵乱は秦項の代に同じく、災火は邑里の際に起る。何に況や武宗大に仏法を破し、多く寺塔を滅す。乱を撥ること能わずして遂に以て事有り」已上取意。
대저 근년의 재난을 가지고 지난 시대를 탓하는 것을 그대는 몹시 두려워하는구나. 조금 앞선 예를 들어 그대의 미혹을 깨우치리라. 『마하지관』 제2권에 『사기(史記)』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주(周)나라 말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웃통을 드러내어 예법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었다」고 하였느니라. 『홍결(弘決)』 제2권에 이 글을 풀이하면서 『좌전(左伝)』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처음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길 때, 이천(伊川)에서 머리를 풀어 헤친 자가 들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보았다. 식자(識者)가 말하기를, 백 년이 못 되리라, 그 예가 먼저 망하였도다」라고 하였느니라. 이로써 알지니, 조짐이 앞서 나타나고 재앙은 뒤에 이르느니라. 또 「완적(阮藉)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쑥대 같은 머리에 띠를 풀어 헤치고 다녔다. 뒤에 공경(公卿)의 자손이 모두 이를 본받아, 천한 말로 서로 욕보이는 자를 바야흐로 자연에 통달하였다 하고, 절도를 지키며 삼가는 자를 불러 촌뜨기라 하였다. 이것을 사마씨(司馬氏)가 멸망할 상(相)으로 삼는다」고 하였느니라. 또 자각대사(慈覚大師)의 『입당순례기(入唐巡礼記)』를 살펴보니 이르기를 「당(唐)나라 무종(武宗) 황제는 회창(会昌) 원년에 칙명을 내려 장경사(章敬寺)의 경상(鏡霜) 법사로 하여금 여러 절에 아미타 염불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였다. 절마다 사흘씩 돌아가며 그치지 않았다. 회창 2년에 회골국(回鶻国)의 군병들이 당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회창 3년에 하북(河北)의 절도사가 갑자기 난을 일으켰다. 그 뒤 대번국(大蕃国)이 다시 명을 거스르고, 회골국이 거듭 땅을 빼앗았다. 무릇 병란은 진(秦)나라와 항우(項羽)의 시대와 같았고, 재앙의 불길은 고을과 마을마다 일어났다. 하물며 무종은 크게 불법을 깨뜨리고 많은 절과 탑을 없앴다. 난을 다스리지 못하고 마침내 일이 있었다(죽음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느니라. (이상은 뜻을 취한 것이다.)
어구 풀이
- 往代を難ずる지난 시대를 탓하다
- 객이 「어찌하여 근년의 재난을 성대의 때에 덮어씌우느냐」고 항의한 것을 받는다. 지금의 재난을 지난 시대의 법연에게 돌리는 것을 객이 두려워하므로, 주인은 앞선 예를 들어 그 미혹을 깨우치겠다고 한다.
- 止観『마하지관(摩訶止観)』
- 천태대사 지의가 수나라 개황 14년(594) 4월 26일부터 한여름 90일 동안 형주 옥천사에서 강술한 것을 제자 장안대사 관정이 받아 적은 책이다. 불교의 실천 수행을 「지관(止観)」으로 자세히 체계화하였는데, 그것이 전에 없던 뛰어난 것이어서 「위대하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마하」를 붙였다. 「지(止)」는 바깥 경계나 미혹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멈추는 것이고, 그로써 바른 지혜를 일으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관(観)」이라 한다. 법화경의 일심삼관 · 일념삼천의 법문을 열어 드러내고 그것을 자기 마음에 증득하는 수행의 법도를 보인 책으로, 천태대사 출세의 본회로 여겨진다. 장안대사의 서분과 천태대사의 정설분으로 이루어지며, 정설분은 대의 · 석명 · 체상 · 섭법 · 편원 · 방편 · 정수 · 과보 · 기교 · 지귀의 열 장(十広)으로 세워졌으나, 제7 정수장에서 열 가지 경계(十境)를 세우는 가운데 제8 증상만경 이하는 빠진 채 끝난다.
- 史記『사기』
- 전한의 태사공 사마천이 지은 역사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뒤의 정사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黄帝)부터 사마천과 같은 시대인 한 무제 때까지의 역사를 엮었다.
- 弘決『홍결』
- 『지관보행전홍결(止観輔行伝弘決)』 10권. 당나라 묘락대사 담연(湛然)이 지은 『마하지관』의 주석서다. 제호의 풀이를 비롯하여 무정불성에 관한 열 가지 논란, 화엄종의 「법화는 점돈, 화엄은 돈돈」이라는 설을 깨뜨리는 등, 『마하지관』의 묘지를 밝히면서 천태종 안팎의 다른 뜻을 파하였다.
- 被髪袒身피발단신
- 피발(被髪)은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 헤치는 것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가장 흐트러진 몸가짐으로 여겼다. 단신(袒身)은 옷을 풀어 어깨 등의 살갗을 드러내는 것이다.
- 左伝『좌전』
-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伝)』의 줄임말. 춘추 시대 노나라의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고 전한다. 공자가 지었다고 전하는 『춘추』의 주해서다.
- 平王평왕
- 생몰년 미상. 주나라 제13대 왕. 아버지 유왕(幽王)이 이민족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죽임을 당하자 즉위하여,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 髪を被にする者の野に於て祭る머리를 풀어 헤친 자가 들에서 제사 지내다
- 제사는 신성한 행사이므로 무엇보다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는데, 머리를 풀어 헤친 오랑캐의 모습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주나라를 떠받치던 예절이 뿌리부터 썩었음을 보인다. 이것을 주나라가 망할 조짐으로 보았다.
- 百年に及ばじ、其の礼先ず亡びぬ백 년이 못 되리라, 그 예가 먼저 망하였도다
- 나라가 망하기에 앞서 그 나라를 떠받치는 예가 먼저 망했다는 식자의 예언이다. 「조짐이 앞서 나타나고 재앙은 뒤에 이른다」는 본문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 徴前に顕れ災い後に致る조짐이 앞서 나타나고 재앙은 뒤에 이르다
- 이 장의 핵심 원리다. 객은 지금의 재난과 수십 년 전의 법연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둘을 잇는 것을 억지라 했지만, 주인은 원인이 되는 조짐과 결과로서의 재앙 사이에는 본디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역사의 예로 보인다.
- 阮藉완적
- 阮籍이라고도 쓴다.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문인 · 관료로, 죽림칠현의 중심 인물이다. 아버지 완우(阮瑀)는 조조를 섬겼고, 그 자신도 사마씨 밑에서 보병교위가 되었다. 상중에는 술과 고기를 끊어야 한다는 예교를 어기고 어머니의 상중에 술을 마시며, 술에 젖어 지내며 벗들과 노장의 도를 논하는 등 기이한 언행이 많았다. 위나라 말 실권은 사마씨에게 있었고 세상이 불안하여 명문 자제의 운명은 매우 위태로웠다. 완적과 함께 죽림칠현의 중심이던 혜강(嵆康)은 위 왕실의 인척이었는데 사마소의 참언으로 처형되었다. 그 때문에 완적의 언행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목적 아래 꾸며진 것이었다고 풀이되기도 한다.
- 蓬頭散帯봉두산대
- 쑥대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띠를 풀어 헤친 옷차림. 예법을 아랑곳하지 않는 흐트러진 모습이다.
- 奴苟相辱しむる천한 말로 서로 욕보이다
- 상스러운 말로 서로 헐뜯고 욕보이는 것이다.
- 自然に達す자연에 통달하다
- 딱딱한 형식과 틀을 걷어 내고 사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노장 사상은 이처럼 자연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에 맞서 예의와 형식을 엄하게 설한 것이 공자의 유교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다스려진 시대에는 위정자가 유교를 강조하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민중 사이에서 노장의 흐름을 잇는 도교가 세력을 얻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 撙節し兢持する者を呼んで田舎と為す절도를 지키며 삼가는 자를 불러 촌뜨기라 하다
- 준절(撙節)은 절도 있게 자제하는 것, 긍지(兢持)는 조심하여 몸가짐을 지키는 것이다. 예를 지키는 사람을 도리어 촌스럽다고 비웃는, 가치가 거꾸로 선 풍조를 말한다.
- 司馬氏사마씨
- 위나라를 빼앗아 진(晋)을 세운 사마의(司馬懿) · 사마소 · 사마염(진 무제)의 일족이다. 「사마씨가 멸망할 상」이란 서진(西晋)의 멸망을 가리킨다.
- 慈覚大師の入唐巡礼記자각대사의 『입당순례기』
- 자각대사 엔닌(円仁)이 당나라에 들어가 구법한 여정을 날짜별로 적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를 가리킨다. 엔닌은 회창의 폐불을 당나라 안에서 직접 겪었다.
- 武宗皇帝무종 황제
- 당나라 제15대 황제. 도교에 기울어 불교를 배척하고, 도사 조귀진(趙帰真) 등을 써서 회창 5년(845)에 천하의 절을 헐고 승니를 환속시켰다. 이것을 회창의 폐불이라 하며,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가운데 하나다. 그 이유로는 사탑 건립과 승니의 면세가 나라 재정을 피폐하게 한 것, 불교 교단 내부의 부패 등을 든다. 당시 유학 중이던 엔닌도 환속을 명령받았다. 그 이듬해 무종은 도교에서 불로불사의 약으로 여기던 단약(丹薬)에 중독되어 죽었다.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불교를 되살리는 조서가 내려지고, 조귀진은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 章敬寺の鏡霜法師장경사의 경상 법사
- 장안의 장경사에 있던 승려로, 무종의 칙명을 받아 여러 절을 돌며 아미타 염불을 전하였다.
- 回鶻国회골국
-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은 튀르크계 민족 위구르인이 세운 나라. 744년에 건국하여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데 당나라에 원군을 보내는 등 강한 세력을 떨쳤다. 9세기 중엽 키르기스인에게 패하여 흩어졌고, 그 일부가 서쪽으로 옮겨 갔다.
- 河北の節度使하북의 절도사
- 절도사는 변경의 군사와 행정을 맡긴 지방 장관이다. 안사의 난 뒤 하북의 절도사들은 사실상 독립한 군벌이 되어 조정을 위협하였다.
- 大蕃国대번국
- 토번(吐蕃). 7~9세기에 번영한 티베트의 왕국으로, 자주 당나라와 다투었다.
- 秦項の代진 · 항의 시대
- 진시황의 진나라와 초나라 항우의 시대. 진 말에서 초한 쟁패에 이르는 극심한 전란기를 가리킨다.
- 遂に以て事有り마침내 일이 있었다
- 무종이 난을 다스리지 못한 채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음을 넌지시 말한 것이다.
세 예가 말하는 것
이 장은 객의 물음 가운데 「어찌하여 근년의 재난을 성대의 때에 덮어씌우고, 억지로 앞선 스승들을 헐뜯으며, 더 나아가 성인을 욕하느냐」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파하신 것이다.
이 장에 인용된 세 예는 모두 중국의 예로, 첫째는 주나라 말, 둘째는 진(晋)나라 시대, 셋째는 당나라 말이며, 모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진 예다. 그리고 세 예는 저마다 다른 층위에서 같은 원리를 보인다.
첫째, 주나라 말의 예는 불법과 관계없는 입장에서도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데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음을 보인다. 둘째, 진나라 시대의 예는 외도(불교 밖의 가르침)에서도 나라의 흥망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음을 보인다. 셋째, 당나라 말의 예는 불법에서도 그릇된 법이 퍼지면 한 나라에 재난이 일어남을 보인다.
세 예는 점점 범위를 좁혀 들어간다. 예가 무너지면 나라가 기운다는 것은 불교 이전의 세간 도리로도 분명하다. 노장의 「자연」이 예를 밀어낼 때에도 나라는 기울었다. 그렇다면 불법 안에서 그릇된 법이 바른 법을 밀어낼 때 나라가 무사할 리 없다. 그리고 그 셋째 예의 그릇된 법이 바로 「아미타 염불」이었다는 데에 이 장의 날카로움이 있다. 객이 「석존이 설하신 정토의 가르침」이라 받든 바로 그 염불이, 당나라에서 칙명으로 퍼진 직후에 나라 안팎의 병란이 잇따랐다는 것이다.
- 아미타 염불의 칙명
- 회골 · 하북 절도사 · 대번국의 병란
- 폐불
- 무종의 죽음
주나라 말 — 서주의 쇠퇴와 동천
먼저 주나라 말을 보면, 문왕 · 무왕이 세운 주나라는 처음 서쪽의 호경(鎬京, 지금의 시안 부근으로 본다)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전형적인 봉건 체제가 펼쳐진 시대로, 안정되고 번영하였다. 그런데 제10대 여왕(厲王) 때가 되자 그토록 견고하던 주 왕조도 쇠퇴하여 멸망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왕은 가혹한 정치를 이어 갔고 민중의 괴로움은 커지기만 했다. 민중의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자, 왕은 위(衛)나라에서 무당을 불러들여 왕을 헐뜯는 자의 이름을 신들린 말로 대게 하고, 혐의가 있는 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는 폭거에 나섰다. 마침내 주나라 도읍에 큰 반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일어나 왕궁을 습격하였다. 겨우 목숨을 건진 왕은 동쪽으로 달아났고, 그 뒤 14년 동안 주나라는 왕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여왕의 아들인 영명한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46년의 재위 동안 주 왕실은 크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선왕도 만년에는 실정이 많아 민중의 불만과 반감이 높아졌다. 그리고 선왕의 뒤를 이어 어리석은 유왕(幽王)이 즉위하자 민중은 다시 괴로움의 밑바닥으로 내몰렸다. 특히 가뭄이 이어지고 산시(陝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나는 등 천재가 겹쳐,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중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유왕은 사랑하는 포사(褒姒)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가지 어리석은 일을 벌였다. 포사가 조금도 웃지 않자, 그녀를 웃기려고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를 올리게 하였다. 사방에서 달려온 제후들은 외적이 없음을 알고 맥이 빠진 얼굴을 했고, 이를 본 포사가 크게 웃었다. 포사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던 유왕은 그 뒤로도 여러 번 봉화를 올렸고, 제후들은 봉화의 신호를 전혀 믿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유왕은 왕후 신후(申后)와 태자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그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왕후의 일족은 서북의 견융(犬戎)을 부추겨 유왕을 치게 하였다. 유왕은 봉화를 올려 제후를 불렀으나 모여드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유왕은 견융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주나라의 도읍 호경은 함락되어 완전히 이민족의 손에 넘어갔다.
제후들은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피하여, 본래의 태자를 세워 평왕(平王)으로 삼고 동쪽 도읍 낙읍(洛邑, 지금의 뤄양 부근으로 본다)에서 즉위시켰다. 이 천도를 경계로 그 이전을 서주(西周), 천도 이후를 동주(東周)라 부른다. 본문의 「처음 평왕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길 때」가 바로 이 일이다. 주나라는 중국 역사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봉건 체제가 펼쳐진 시대였지만, 동주가 된 뒤로는 그 제도도 흐트러져, 주나라 왕이라 해도 지방의 한 제후와 같은 정도의 실력밖에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천의 제사와 춘추전국 550년
평왕이 동쪽으로 옮겨 가는 길에 이천(伊川)에서 본 광경 — 머리를 풀어 헤친 사람이 들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를 본 식자는 「백 년이 못 되리라. 그 예가 먼저 망하였도다」라고 예언하였다. 제사라는 가장 신성한 자리에서조차 예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나라를 떠받치는 질서는 이미 안에서 무너진 것이다.
이 주나라 말을 춘추전국 시대라 부른다. 낙읍 천도에서 진(晋)나라가 위 · 조 · 한의 셋으로 나뉜 해까지를 춘추 시대, 그때부터 진(秦)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해까지를 전국 시대로 보는 것이 보통의 견해다. 어느 쪽이든 이 시대는 춘추와 전국의 두 시기로 나뉘지만, 그 내용은 서주의 봉건 제도가 모든 면에서 해체되고 다음에 올 진 · 한 통일 국가가 성립되는 준비 과정으로 일관되어 있다.
동주 초기에는 나라 안에 100여 제후가 저마다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으나, 춘추를 거쳐 전국 시대에 들어서자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병합되어, 진(秦) · 초 · 연 · 제 · 한 · 위 · 조의 이른바 전국칠웅이 넓은 영토 국가를 이루었다. 이 시대에는 각 나라가 안으로는 내란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나라 사이의 싸움이 그치지 않아, 국토는 황폐해지고 군주나 경대부가 망명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전쟁이 날 때마다 이를 조정하는 회의가 열렸고, 조정자로서 패자(覇者)라 불리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제나라 환공 · 진(晋)나라 문공 등이 유명하다. 이 패자들은 때로 왕을 대신하여 중원에 나서 질서를 유지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나라 사이의 다툼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770년의 천도부터 기원전 221년 진의 통일까지 약 550년 동안 전란이 이어졌다. 놀라운 길이다. 특히 전국 말기는 참혹하여, 진나라가 조나라에 섬멸적인 타격을 준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식량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모두 산 채로 묻어 죽였다고 전한다(『사기』는 앞뒤의 전사자를 합쳐 45만이라 한다). 이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이 그 속에 휘말려 얼마나 괴로워했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백 년이 못 되리라」는 예언은 주나라 왕실의 실권이 백 년이 못 되어 무너졌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뒤 반천 년에 걸친 전란의 문을 연 것이었다.
- 문왕 · 무왕 건국, 도읍 호경
- 제10대 여왕의 폭정, 국인의 반란, 왕이 없는 14년
- 선왕의 중흥(46년)
- 유왕과 포사, 봉화, 견융의 침입으로 유왕 피살 · 호경 함락
- 기원전 770년평왕 낙읍 천도(이천의 제사 — 「그 예가 먼저 망하였다」)其の礼先ず亡びぬ
- 춘추 시대(100여 제후 · 패자)
- 전국 시대(전국칠웅 · 장평의 싸움)
- 기원전 221년진의 통일(약 550년의 전란)
- 220년 무렵후한 멸망 · 삼국 정립
- 완적 등 죽림칠현(봉두산대 — 「사마씨가 멸망할 상」)司馬氏の滅する相
- 265년사마염이 진(晋) 건국
- 팔왕의 난
- 영가의 상란(낙양 함락 · 회제 피살)
- 서진 멸망
- 동진 · 오호십육국
- 589년수의 통일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하지 못한 공자의 가르침
예의가 어지러워지는 것이 어째서 세상이 어지러워질 조짐이었는가. 생각건대 예의의 어지러움이야말로 민중의 마음이 어지러워진 나타남이며, 민중의 초조함 · 조급함 · 자포자기, 목적관의 상실, 기존 권위에 대한 불신과 불만 등이 갖가지 모습으로 배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문왕의 시대에 정해져 굳게 지켜지던 주나라의 예의는 시간이 흐르며 차츰 사라져 갔다. 그것은 그대로 주 왕조의 운명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서주는 몰락하고 동주의 시대가 되자 예의는 더욱 돌아보이지 않았고, 주 왕조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 시대에 예의가 얼마나 사라졌는가는, 공자가 노나라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엮은 『춘추』, 곧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 약 240년의 역사를 적은 책에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의 『춘추』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극악무도한 세상을 개탄한 공자가, 주나라의 예를 되살리고 대의명분을 바로잡고 난신적자의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 본래의 연대기에 조금 손을 더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공자의 이상은 주공(周公)이 정한 제도를 되살려 주나라의 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노나라 정공(定公) 밑에서 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환씨(三桓氏)를 쳐서 호족 정치를 무너뜨리려 했다가 호족들의 반격을 받아 실패하고, 기원전 497년 무렵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 뒤 그는 여러 나라를 돌며 예를 설하고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동안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고, 국경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식량이 떨어져 이레 동안 굶기도 하는 등, 13년의 유랑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공자는 실망 끝에 기원전 484년, 일흔을 앞둔 나이에 노나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이 사실 자체가 유교의 한계이며, 한 번 잃어버린 예의는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되살리려 해도 되살릴 수 없다는 증명이라 할 것이다. 곧 예의의 퇴폐는 민중의 생명 깊숙이 뿌리박은 것이어서, 거기에 다시 형식적으로 예의를 강요하려 해도 이미 아무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공자가 실패한 이 사실에서도 그 무렵 예의의 퇴폐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주 왕조 멸망의 모습이었다. 본문에 인용된 「백 년이 못 되리라, 그 예가 먼저 망하였도다」라는 식자의 예언이 적중한 것도 참으로 까닭이 있는 일이다.
진(晋)의 쇠미 — 위진남북조와 죽림칠현
둘째, 진(晋)의 쇠미를 말하기 위해 이 시대를 개관해 보면, 후한이 무너진 3세기 초부터 수나라가 건국된 589년까지 약 360년 동안은 그야말로 동란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위 · 촉 · 오의 이른바 삼국 정립의 시대로 시작하여, 서진(西晋)이 한때 중국 전체를 평정 · 통일하였으나,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은 남쪽으로 내려가 동진(東晋)이 되고, 북에는 오호십육국, 남에는 동진으로 남북이 나뉘어 대립하였다.
북조는 이민족의 성쇠와 흥망이 극심하여, 불과 120년 남짓한 사이에 성(成) · 한 · 후조 · 전연 · 전량 · 전진 · 후연 · 후진 · 서진(西秦) · 후량 · 남량 · 북량 · 남연 · 서량 · 하 · 북연 등 크고 작은 열여섯 왕조가 어지럽게 바뀌었다. 이런 이민족 왕조도 이윽고 일어난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어 한동안 평온이 유지되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여 동위 · 서위로 갈라지고, 다시 북제 · 북주로 왕조가 바뀌어 수의 통일을 기다리게 된다. 한편 남조는 동진의 시대가 한동안 이어진 뒤 다시 격동기를 맞아, 420년 송(宋) 왕조로 바뀌고 이어 제 · 양 · 진(陳)으로 왕조가 교대하다가, 589년 수나라에 멸망하여 남북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 동안 춘추 시대 못지않게 전란에 전란이 이어져 민중의 피폐는 극에 달했다. 중국에서는 전한 · 후한의 한 왕조 약 400년에 걸친 치세의 근저 사상 · 이념으로서, 공자 · 맹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철리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말기에는 그 효제(孝悌) · 인의(仁義)를 뼈대로 하는 사상의 구속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잇따라 나타나, 정통인 유가 사상은 차츰 무너져 갔다.
본문에 인용된 완적도 그런 반항자의 한 사람이었다. 완적을 우두머리로 혜강(嵆康) · 산도(山濤) · 상수(向秀) · 완함(阮咸) · 유령(劉伶) · 왕융(王戎)의 일곱 사람을 죽림칠현이라 부른다. 완적이 태어난 것은 210년이니, 한 왕조가 조조의 위나라에 넘어가기 꼭 10년 전이며, 그가 자랐을 무렵은 삼국 정립의 시대였다.
죽림칠현이라 하면 이름도 좋고 마치 성인군자의 모임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막다른 세태에 넌더리가 난 사람들이 유교 윤리의 형식주의를 일부러 무시하고,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벌였다고 하는 편이 들어맞는다. 그들은 위나라를 무너뜨린 뒤 서진을 세운 사마씨 일문이나 예교에 묶인 사람들을 가련한 자들이라 깔보고, 그런 군자인 척하는 무리를 잠방이 속의 이라고 욕하였다. 일곱 사람은 모두 별난 이들이어서, 일곱 말의 술을 마시는 이, 거문고를 타는 이, 죽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술 단지만 함께 묻어 달라고 부탁하는 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 자리에서 술과 고기를 먹으며 노름을 하는 이 등, 요컨대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 일곱 사람의 우두머리가 완적이었다. 그가 몸가짐도 돌보지 않고 흐트러진 차림으로 관청에 나가자, 그것을 계기로 젊은이들이 모두 그를 흉내 내어 순식간에 유행이 되었다. 그리고 상스러운 말을 쓰며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마치 훌륭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기까지 했다. 본문의 「천한 말로 서로 욕보이는 자를 바야흐로 자연에 통달하였다 하고, 절도를 지키며 삼가는 자를 불러 촌뜨기라 하였다」는 바로 이 풍조다. 예를 지키는 사람이 놀림받고 예를 깨는 사람이 존경받는 — 가치가 거꾸로 선 세상이었다. 앞 장의 「선한 말을 듣고서 악한 말이라 여긴다」는 전도와 같은 모양이다.
팔왕의 난 · 영가의 상란 — 사마씨의 멸망
진(晋)나라 시대의 예의의 퇴폐는 그대로 정치의 난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위나라 건국 시기에 정치와 군사에 큰 공을 세운 사마의(司馬懿, 자는 중달)의 손자 사마염은 마침내 위나라를 빼앗아 진(晋)을 세우고 무제라 칭하였다. 무제는 처음에는 점전 · 과전법(占田課田法)이라는 토지 정책을 시행하는 등 의욕적인 정치를 하였으나, 만년에는 놀이와 잔치에 빠지고 황후와 그 일문을 총애하여 정치가 느슨해지고 어지러워졌다. 석숭(石崇)이나 왕개(王愷) 같은, 사치의 극을 다한 인물들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은 실은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축재가로, 넓은 저택과 많은 노비는 낙양에서 견줄 사람이 없었고, 논밭과 물방아는 천하에 두루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밤의 즐거움은 등불 아래서 아내와 재산을 세는 것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저택에 있는 자두나무는 해마다 돈벌이가 되었는데, 그 좋은 자두 씨가 남의 집에 심어질까 두려워 송곳으로 씨에 구멍을 뚫었다고까지 전한다. 죽림칠현이라 칭송받으며 무위자연을 말하고 성인인 체해도 그 본성은 이러하였다.
이런 사치 생활이 유행하는 가운데 무제가 죽고 어리석은 혜제(恵帝)가 즉위하자, 질투가 많고 꾀가 많은 가황후(賈皇后)를 중심으로 외척 사이의 다툼이 생겼다. 또 일찍이 무제 때 진 왕실의 수비로서 주변에 배치한 같은 일족의 왕들 가운데 유력한 야심가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켜, 낙양에는 살육이 소용돌이쳤다. 이것이 이른바 팔왕(八王)의 난이다. 이 다툼 속에 혜제는 306년에 독살되었는데, 겉으로는 식중독이라고 발표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주민들은 전쟁과 흉작과 약탈에 쫓겨 떠돌아다녔다. 296년 · 297년에는 관중(関中) 일대에 큰 기근이 이어지고 역병이 돌았다. 쌀값이 크게 오르자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자식을 팔고 아내를 팔았다. 298년에는 곳곳이 큰 홍수에 휩쓸렸다. 310년에는 북부 일대에 메뚜기 떼가 일어나 마을에서 마을로 모든 풀과 나무를 먹어 치웠고, 소와 말의 털까지 없어졌다고 한다. 그 위에 역병이 크게 돌아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이런 내부의 다툼을 틈타 흉노 · 갈 · 선비 · 저 · 강(羌), 곧 오호(五胡)의 기마 약탈 부대가 침입하여 도시와 마을을 부수고 서진의 멸망을 결정지었다. 그 가운데서도 흉노는 세력이 커서, 그 장군 유연(劉淵)은 자립하여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이어 황제라 칭하였다. 유연의 넷째 아들 유총(劉聡)은 형을 죽이고 한의 황제가 되어 잔학무도한 살육을 일삼았다. 한편 낙양에서는 팔왕의 난의 마지막을 이루는 동해왕 사마월(司馬越)이 회제(懐帝)의 측근들을 죽이고 실권을 쥐었으나, 황제와의 사이에 불화가 이어졌다. 그 틈을 타 흉노군은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 특히 동해왕 월이 죽자 흉노의 장군 석륵(石勒)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섬멸전을 펼쳐, 흉노 기마 부대에 포위된 진나라 군사 10여만 명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속에 모두 죽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동해왕의 태자 이하 일족, 그리고 대신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이들은 모두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여러 능묘도 파헤쳐져 그 안의 금품이 약탈되었다. 회제도 붙잡혀 온갖 치욕을 당한 뒤 죽임을 당했다. 낙양 함락에서 회제의 피살(313년)에 이르는 이 참화를 세상에서는 영가(永嘉)의 상란(喪乱)이라 부른다. 그 뒤 장안에서 서진의 마지막 황제가 옹립되었으나, 승리에 들뜬 흉노의 기마 부대는 장안에도 침입하였다. 마침 극심한 기근으로 장안은 손쓸 길이 없어 곧 무너졌고, 진의 황제는 죽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건국한 지 50여 년 만에, 흉노군이 짓밟는 가운데 서진은 막을 내렸다. 본문에 「사마씨가 멸망할 상」이라 한 것은 이런 참혹한 사실을 가리킨다.
완적이 쑥대 머리로 관청에 나간 것은 작은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작은 흐트러짐이 공경의 자손들에게 퍼져 「예를 지키는 자는 촌뜨기」라는 풍조가 되었을 때, 이미 사마씨의 나라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상란은 그 조짐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당나라 말 — 안녹산 · 사사명에서 회창의 폐불까지
셋째로 나라가 망한 예로서, 니치렌 대성인은 당나라 말의 예를 드셨다. 당나라 시대라 하면 그 영토의 크기로 보나 화려한 문화로 보나 중국 역사 가운데 가장 번영한 시대였고, 사방의 이민족과도 가장 우호를 맺은 시대였다. 그 도읍 장안은 서쪽의 바그다드 ·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100만을 넘는 번화함을 보였다. 특히 고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제2대 태종 때는 어진 임금 아래 국력이 충실해져, 「정관(貞観)의 치」라 불리는 태평의 한 시기를 이루었다.
그것은 마침 진(陳)나라의 천태대사가 당시 남삼북칠(南三北七)로 어지럽게 갈라져 있던 불교를 법화경으로 통일한 지 약 50년 뒤에 해당하며, 유교 · 도교에 견주어 불교가 나라의 위아래로부터 두텁게 신앙받던 시대였다.
당 왕조는 그 뒤 한때 왕조 내부의 반란으로 흔들렸으나, 제6대 현종 황제 때 다시 국력이 충실해져 「개원 · 천보(開元天宝)의 치」라 불리는 태평의 세상을 이루었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화려한 문화는 이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고, 그 세력은 널리 주변의 이민족을 복종시켰으며, 멀리 페르시아 · 로마와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번영도 현종 황제의 만년부터 차츰 어지러워져, 여러 지방의 안정을 위해 두었던 절도사가 도리어 세력을 얻어 반란을 꾀하였다. 755년 안녹산(安禄山)이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이어 그 부하였던 사사명(史思明)도 반기를 들었다. 이 반란은 763년에야 겨우 진압되었으나, 그 뒤로 중앙의 권력은 극도로 약해지고 지방의 절도사는 군벌이 되어 조정을 위협하였다.
제15대 무종 황제가 즉위한 것은, 이렇게 당 왕조가 바람 앞의 등불이 된 840년이다. 현종 황제로부터 약 100년, 당나라가 망하기 60여 년 전이다. 무종은 즉위한 이듬해를 회창 원년(841)으로 삼고, 그해에 칙명을 내려 경상 법사에게 아미타 염불의 가르침을 여러 절에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당의 서북쪽에 자리하던 위구르(회골)가 반란을 일으켜 당의 영토 안으로 쳐들어왔고, 회창 3년에는 하북에 파견되어 있던 절도사가 반란을 일으켜 조정을 위협하였다.
그 뒤 오래 당과 겨루어 온 티베트(토번)가 다시 당 조정의 명을 거스르고, 위구르의 반란은 갈수록 심해지는 등 당 왕조의 세력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무종 황제가 그 원인을 도사 조귀진에게 묻자, 조귀진은 불교를 넓히게 한 것이 원인이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회창 5년(845), 황제는 칙명을 내려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절 4만 4,600여 곳을 헐고 승니 26만 명에게 환속을 강제하는 등 불교에 대해 극단적인 탄압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나라 안팎은 더욱 소란해졌고, 황제 자신도 이듬해인 회창 6년(846)에 심한 병을 앓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본문이 인용한 『입당순례기』의 글은 이 죽음을 「난을 다스리지 못하고 마침내 일이 있었다」고 맺는다. 불법을 깨뜨린 결과로서의 죽음이라는 뜻이다.
- 618년건국
- 태종 「정관의 치」
- 현종 「개원 · 천보의 치」
- 755년안녹산의 난, 이어 사사명(763년 진압) — 절도사의 군벌화
- 840년무종 즉위
- 841년회창 원년 아미타 염불을 여러 절에 전하게 함
- 회창 2년 회골의 침입
- 회창 3년 하북 절도사의 반란
- 대번국(토번)이 명을 거스르고 회골이 거듭 땅을 빼앗음
- 845년회창의 폐불(절 4만 4,600여 곳 · 승니 26만 명 환속)
- 846년무종의 죽음(「마침내 일이 있었다」)遂に以て事有り
- 875~884년황소의 난(880년 장안 점령)
- 주전충의 실권 장악 · 장안 폐허
- 907년당 멸망(20대 약 290년)
주전충, 당을 멸하다
그 뒤 당 왕조는 더욱 난맥을 거듭하였고 민정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재정난은 극심했고, 절도사는 갈수록 세력을 키웠으며, 환관은 횡포를 일삼고, 이민족의 침입은 더욱 격해졌다. 이 피해는 모두 민중에게 몰렸다. 떠도는 사람들이 잇따랐고 가난한 백성은 굶주림의 거리를 헤맸다.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점에 이르렀다.
이 기회를 잡아 대규모 조직을 만들고 무장한 소금 밀매 상인들의 큰 반란, 곧 황소(黄巣)의 난이 일어났다. 이것이 당 왕조 붕괴의 결정적인 일격이 되었다. 생활 필수품인 소금은 당시에도 전매제로 정부의 중요한 재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나라 재정이 궁핍해지자 소금값이 무섭게 올랐고, 소금을 구하는 민중의 괴로움과 맞물려 소금 밀매 상인의 암약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는 기를 쓰고 단속했으나 역효과를 낳아, 마침내 황소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조직적 반란이 된 것이다.
황소군은 처음 강남으로 남진하여 광주(広州)를 함락시켰다. 이때 황소군에게 죽임을 당한 아라비아 상인이 12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여기서 풍부한 재화와 군수 물자를 확보한 황소군은 수십만의 군세로 「당 왕조 타도」를 내걸고 의기양양하게 북벌을 시작하였다. 관군은 곧 패주하였고, 880년 장안은 점령되었다. 황소는 장안에 피를 흘리지 않고 들어가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대제(大斉),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점령도 오래가지 못했다. 큰 약탈을 일삼은 탓에 민중이 분노하였고, 한편 당군이 지방의 군벌과 연합하여 반격해 장안을 포위했기 때문이다. 황소는 장안을 버렸고, 그 부장이던 주온(朱温)은 황소를 떠나 당에 항복하였으며, 884년 황소는 죽음을 맞아 난은 끝났다. 그런데 얄궂게도 당을 멸한 것은 바로 이 주온이었다.
조정은 장안의 황소를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민족 부대의 우두머리 이극용(李克用)을 견제하기 위해 주온을 우대하여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그를 변주(汴州, 지금의 카이펑)의 절도사로 삼았다. 주전충은 이곳에서 착착 실력을 쌓아 갔다. 마침 장안 가까이 있는 봉상(鳳翔)의 절도사 이무정(李茂貞)은 천하를 잡으려고 여러 차례 장안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리던 주전충은 이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보다 앞서 주전충은 자기 관할 아래에 있던 낙양에 웅장한 궁전을 짓고 여기에 황제를 불러들여 스스로 천하를 호령하려 하고 있었다. 이를 두려워한 조정의 신하들은 주전충이 서쪽으로 향하자 황제를 데리고 이무정의 본거지인 봉상성으로 달아났다. 주전충은 파죽지세로 서진하여 순식간에 봉상을 에워쌌고, 공방전이 여러 달 이어졌다. 성안은 식량이 바닥나 굶어 죽는 이가 잇따랐고, 마침내 사람 고기까지 공공연히 팔렸다고 전한다.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승리에 들뜬 주전충은 일단 장안으로 돌아가 환관들을 뿌리째 죽이고, 계획대로 소종(昭宗) 황제를 낙양으로 옮겼다. 이로써 그토록 화려하던 장안의 도읍은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주전충의 뜻을 따르지 않은 소종은 죽임을 당했고, 이어 열세 살의 애제(哀帝)가 세워졌다. 황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이리하여 당나라는 20대 약 290년 만에 비참한 말로를 걸으며 마침내 사라졌다(907년). 주전충은 스스로 제위에 올라 양(梁, 후량)을 세웠다.
이상의 세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에는 반드시 그 조짐이 있으며, 춘추 시대도 위진남북조도 당나라 말도 모두 그 원리대로 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특히 당나라가 기운 데에는 하나는 그릇된 가르침인 염불의 유행, 둘은 불교의 탄압이라는 두 원인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대성인 재세 당시 법연의 염불이 크게 유행하던 일본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객이 「석존의 가르침」이라 받든 염불을 넓히는 칙명이 내려진 이듬해부터 병란이 잇따랐고, 그 끝에 황제가 불법까지 깨뜨리고 스스로 목숨을 잃었다는 순서가 제4장의 일본의 예로 이어진다.
예의의 퇴폐와 나라의 멸망 — 「재난대치초」의 문답
니치렌 대성인이 입정안국론을 비롯한 많은 어서에서 염불종, 특히 법연의 이름을 들어 파하시자, 「『선택집』이 재난의 원인이라면 법연이 『선택집』을 짓기 전에는 재난이 없었느냐」고 묻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보다 앞서 쓰신 「재난대치초」에서 바로 이 물음을 스스로 세우고 답하셨다.
疑つて云く国土に於て選択集を流布せしむるに依つて災難起ると云わば此の書無き已前は国中に於て災難無かりしか、答えて曰く彼の時も亦災難有り云く五常を破り仏法を失いし者之有りしが故なり所謂周の宇文・元嵩等是なり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라 안에 『선택집』을 퍼뜨렸기 때문에 재난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이 책이 없었던 이전에는 나라 안에 재난이 없었느냐. 답하여 말하기를, 그때에도 재난이 있었느니라. 오상(五常)을 깨뜨리고 불법을 잃은 자가 있었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주(周)나라의 우문(宇文) · 원숭(元嵩) 등이 이들이니라.
이어서 「지금 세상의 재난이 오상을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난다면 어찌 반드시 『선택집』 유포의 허물이라 하겠느냐」는 거듭된 반문에 대해, 대성인은 인왕경 · 금광명경 · 열반경을 들어 정법을 받들지 않는 나라에 재난이 일어남을 보이시고, 미타 이외의 제불 · 제경을 공양하고 예배하고 찬탄하는 것을 모두 「잡행」이라 이름 붙인 『선택집』이 바로 이 경문에 해당한다고 답하신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문답을 이으신다.
難じて云く仏法已前国に於て災難有るは何ぞ謗法の者の故ならんや、答えて云く仏法已前に五常を以て国を治むるは遠く仏誓を以て国を治むるなり礼義を破るは仏の出したまえる五戒を破るなり
따져 묻기를, 불법이 들어오기 이전에 나라에 재난이 있었던 것이 어찌 방법한 자 때문이겠느냐. 답하여 말하기를, 불법 이전에 오상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은 멀리 부처의 맹세로써 나라를 다스린 것이니라. 예의를 깨뜨리는 것은 부처가 내놓으신 오계를 깨뜨리는 것이니라.
그 증거로 대성인은 여러 경론의 글을 드신다. 금광명경의 「일체 세간의 모든 좋은 논은 다 이 경에 말미암는다」, 법화경의 「만약 세속의 경서 · 세상을 다스리는 말 · 생업 등을 설하더라도 모두 정법에 따른다」, 보현경의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인민을 그릇되게 하지 않음을 셋째 참회를 닦는다고 한다」, 열반경의 「일체 세간의 외도의 경서는 모두 부처의 설이요 외도의 설이 아니다」, 『마하지관』의 「만약 세간의 법을 깊이 알면 곧 이것이 불법이다」, 『홍결』의 「예악이 앞서 달려가고 참된 도가 뒤에 열린다」. 그리고 부처가 세 사람을 보내어 잠시 중국을 교화하게 하여 오상으로써 오계의 길을 열었다는 『광석』의 글과, 「서방에 성인이 있으니 석가라 한다」는 공자의 말을 전하는 고사를 드신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으신다.
此等の文を以て之を勘うるに仏法已前の三皇五帝は五常を以て国を治む夏の桀・殷の紂・周の幽等の礼義を破りて国を喪すは遠く仏誓の持破に当れり
이러한 글들로써 이를 헤아려 보건대, 불법 이전의 삼황 · 오제는 오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느니라. 하(夏)의 걸(桀) · 은(殷)의 주(紂) · 주(周)의 유(幽) 등이 예의를 깨뜨려 나라를 잃은 것은, 멀리 부처의 맹세를 지키고 깨뜨림에 해당하느니라.
여기에 제3장의 세 예를 꿰뚫는 원리가 있다. 불법이 퍼지기 이전에는 오상(인 · 의 · 예 · 지 · 신)이 깨어짐으로써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많은 경 · 석에 분명하다. 세간의 바른 도리는 그대로 불법의 한 부분이며,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라는 원리에 따라 세간의 예의를 깨뜨리는 것은 멀리 부처의 계를 깨뜨리는 것과 통한다. 그러므로 주나라 유왕이 예를 깨뜨려 나라를 잃은 것(첫째 예)도, 노장의 「자연」을 내세워 예를 비웃은 진나라의 풍조(둘째 예)도, 결국 부처의 맹세를 지키느냐 깨뜨리느냐의 문제와 이어진다. 하물며 불법이 이미 퍼진 나라에서 불법 그 자체 — 그 가운데서도 일대의 정법인 법화경 — 를 버리게 한다면, 그것은 오상을 깨뜨리는 것과는 견줄 수 없이 큰 파괴이며, 그 나라는 망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유왕의 예가 예의를 깨뜨린 나라의 예라면, 당 무종의 예는 정법을 깨뜨린 나라의 예다.
- 물음『선택집』이 없던 이전에는 재난이 없었느냐답그때에도 재난이 있었다 — 오상을 깨뜨리고 불법을 잃은 자가 있었기 때문(주나라 우문 · 원숭 등)
- 물음그렇다면 어찌 반드시 『선택집』의 허물이라 하느냐답인왕경 · 금광명경 · 열반경 — 정법을 공양 · 존중 · 찬탄하지 않으면 재난이 일어난다 = 미타 밖의 제불 · 제경을 「잡행」이라 한 『선택집』
- 물음불법 이전의 재난이 어찌 방법 때문이냐답오상으로 나라를 다스림은 멀리 부처의 맹세로 다스림이요,예의를 깨뜨림은 부처의 오계를 깨뜨림이다礼義を破るは仏の出したまえる五戒を破るなり
대성인 불법의 관점 — 제3장의 세 예는 「조짐이 앞서 나타나고 재앙은 뒤에 이른다」는 원리를 세간 · 외도 · 불법의 세 층에서 보인다. 세간의 예의를 깨뜨리는 것조차 멀리 부처의 계를 깨뜨리는 것이라면, 정법 그 자체를 버리게 하는 방법이 나라에 미치는 재앙은 그보다 훨씬 크다. 객이 문제 삼은 「시간의 간격」은 인과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본문
此れを以て之を惟うに、法然は後鳥羽院の御宇、建仁年中の者なり。彼の院の御事、既に眼前に在り。然れば則ち大唐に例を残し、吾が朝に証を顕す。汝疑うこと莫かれ、汝怪しむこと莫かれ。唯須く凶を捨てて善に帰し、源を塞ぎ根を截つべし。
이것으로써 생각해 보건대, 법연은 고토바인(後鳥羽院)의 치세, 건인(建仁) 연간의 사람이니라. 그 상황(院)의 일은 이미 눈앞에 있느니라. 그러하니 대당(大唐)에 예를 남기고 우리 나라에 증거를 드러낸 것이니라. 그대는 의심하지 말라. 그대는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오직 모름지기 흉(凶)을 버리고 선(善)에 돌아가,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어야 하느니라.
어구 풀이
- 此れを以て之を惟うに이것으로써 생각해 보건대
- 제3장에서 든 중국의 세 예, 특히 당 무종이 염불을 넓히게 한 뒤 병란이 잇따른 예를 받는다. 그 원리를 일본에 비추어 보겠다는 말이다.
- 後鳥羽院の御宇고토바인의 치세
- 고토바 천황(1180~1239)은 수영 2년(1183) 즉위하여 건구 9년(1198) 쓰치미카도 천황에게 양위한 뒤, 상황으로서 원정(院政)을 펴 조정의 실권을 쥐었다. 「어우(御宇)」는 천하를 다스리는 동안, 곧 치세를 말한다.
- 建仁年中건인 연간
- 1201년부터 1204년 초까지의 연호다. 법연이 『선택집』을 지은 건구 9년(1198)으로부터 몇 해 뒤, 그 가르침이 교토의 위아래에 퍼져 법연 일문의 세력이 가장 왕성하던 무렵이다.
- 彼の院の御事、既に眼前に在り그 상황의 일은 이미 눈앞에 있다
- 고토바 상황이 승구 3년(1221)의 승구의 난에서 가마쿠라 막부에 패하여 오키로 유배된 일을 가리킨다. 입정안국론을 쓰신 문응 원년(1260)으로부터 40년 가까이 전의 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직 생생한 기억이었다.
- 大唐に例を残し、吾が朝に証を顕す대당에 예를 남기고 우리 나라에 증거를 드러내었다
-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염불을 넓힌 뒤 기운 앞선 예가 있고, 일본에서는 상황이 신하 격인 막부에 의해 유배되는 증거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예(例)」와 「증(証)」을 짝지어, 중국의 일은 본보기이고 일본의 일은 그 본보기가 들어맞은 증거임을 보인다.
- 汝疑うこと莫かれ、汝怪しむこと莫かれ그대는 의심하지 말라, 그대는 이상히 여기지 말라
- 「근년의 재난을 어찌 성대의 성인에게 덮어씌우느냐」는 객의 항의에 대한 맺음이다. 화한의 예가 이처럼 분명하니 재난의 근원이 법연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 凶を捨てて善に帰し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다
- 「흉」은 법연이 세운 염불, 제4단에서 「이 일흉(此の一凶)」이라 하신 바로 그것이다. 「선」은 정법이다. 제9단에서 「실승의 일선(実乗の一善)」으로 그 정체가 밝혀진다.
- 源を塞ぎ根を截つ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다
- 재난의 근원인 『선택집』의 그릇된 뜻을 막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뿌리를 끊으라는 것이다. 제6단 이하에서 그 구체적인 방법 — 방법을 금하는 상주와 「그 보시를 멈춘다」 — 으로 이어진다.
이 장의 뜻 — 일본의 현증
앞 장의 중국의 예에 이어, 이 장에서는 승구(承久)의 난을 가리켜 정토종이 퍼지는 것이 한 나라의 재앙의 원인이며 그 조짐이라는 것을 보이신다. 그리고 이 앞선 예로써, 재앙의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으려면 원흉인 방법을 버리고 가장 높은 선인 정법에 귀의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본문은 세 문장으로 짧지만 그 무게는 크다. 첫째 문장은 법연이 고토바인 치세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둘째 문장은 그 고토바인에게 일어난 일이 「이미 눈앞에 있다」고 한다. 셋째 문장은 중국의 「예」와 일본의 「증」을 맞세워 결론을 내리고, 「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라」고 촉구한다. 객이 「성대(聖代)」라 부른 법연의 시대가 실은 어떤 결말을 맞았는가 — 그것을 주인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독자에게는 그 「눈앞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승구의 난의 역사적 의의
본문이 말하는 「그 상황의 일」, 곧 승구의 난은 어떤 사건이었는가. 한마디로 그 역사를 말한다면, 일본의 주도권이 교토의 천황 · 공경에게서 가마쿠라의 무사에게로 옮겨 간 것을 결정지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에 의해 열려 이른바 「동국 무사」에 의한 통일이라는 새 시대가 시작되어 있었지만, 아직은 조정 쪽의 뜻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미나모토 가문이 3대로 끊긴 뒤에는 교토에서 쇼군을 맞아 받들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서국(西国)에 대해서는 가마쿠라의 위세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막부를 이루는 동국 무사들 사이에서조차, 가지와라 가게토키(梶原景時) · 아노 젠조(阿野全成) ·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 등 창업기의 중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로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 것이 요리토모의 아내 마사코(政子)를 낸 호조(北条) 씨다. 오늘날에서 보면 호조 씨가 동국 무사의 주력이었던 것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리토모의 외척이라는 것과 거병 이래의 공신이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힘이 없었다. 가지와라 · 와다 · 미우라 등의 호족에 견주면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이 호조 씨가 만도코로(政所) 벳토로서의 지위를 착실히 강화하고, 교묘한 책략을 구사하며 때로는 실력에 호소하여 마침내 싯켄(執権) 체제를 확립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리하여 3대 쇼군 사네토모(実朝)의 암살, 막부 창업 중신들의 몰락 등의 사건이 교토 쪽에는 막부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로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막부 타도의 중심이 고토바 상황이었다.
발단 — 고토바 상황의 도막 계획
고토바 상황은 쓰치미카도(土御門) 미치치카(通親)를 모신(謀臣)으로 삼아, 먼저 가마쿠라와 사이가 좋던 관백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를 물리치고 고노에 모토미치(近衛基通)를 그 뒤에 앉혔다. 이어 승원 4년(1210)에는 쓰치미카도 천황을 물러나게 하고 막부 타도에 적극적인 준토쿠(順徳) 천황을 즉위시켰다. 이렇게 왕조의 옛 법도와 풍습을 되살리는 듯이 보이면서, 은밀히 원(院)의 근신들을 모으고 서국의 무사와 막부에서 떨어져 나온 고케닌(御家人)을 규합하려 하였다.
내란의 불씨가 된 것은 승구 원년(1219)의 일이다. 사네토모가 암살된 뒤 막부가 그 뒤를 이을 쇼군으로 황족을 가마쿠라에 내려 보내 달라고 청하자, 상황은 「언젠가 누군가를 골라 내려 보내겠지만 지금은 안 된다」며 체면 좋게 거절하였다. 그리고 원에 가까워진 고케닌 니시나 모리토(仁科盛遠)의 영지를 돌려줄 것과, 상황의 총애를 받던 이가노쓰보네(伊賀局)의 영지인 셋쓰(摂津)의 구라하시(倉橋) · 나가에(長江) 두 장원의 지두를 바꿀 것을 명하였다.
이때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는 조정 쪽의 강경한 태도에 놀라, 동생 도키후사(時房)에게 1,000기를 주어 교토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구조 미치이에(九条道家)의 아들로 당시 겨우 두 살이던 미토라(三寅, 뒤의 구조 요리쓰네)를 가마쿠라도노로 맞기로 하고, 상황의 요구는 모조리 거부한 채 가마쿠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조정 쪽의 막부 타도 계획을 부추겼다.
상황은 먼저 승구 3년(1221) 4월, 만일을 생각하여 준토쿠 천황에게서 주쿄(仲恭) 천황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하였다. 이어 5월 14일 도바(鳥羽)의 조난사(城南寺)에서 야부사메(流鏑馬)를 연다는 명목으로 기나이의 군사 1,700여 기를 모으고, 이튿날 요시토키 추토(追討)의 선지를 내렸다. 그리고 미우라 다네요시(三浦胤義) 등에게 명하여 교토 수호 이가 미쓰스에(伊賀光季)를 습격하게 하여 첫 희생으로 삼았다.
경과 — 한 달 만에 끝난 싸움
이 첫 소식이 가마쿠라에 전해지자, 막부에서는 마사코를 중심으로 도토미(遠江) 동쪽 여러 지방의 군사를 불러 모으고, 요시토키와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에게 군정을 맡겨 서쪽으로 올라갈 군의 부서를 정했다.
선봉의 대장 호조 야스토키(北条泰時)가 가마쿠라를 떠날 때는 겨우 18기였으나 군세는 순식간에 불어나,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그 수가 19만 기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 다소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교토로 올라갈수록 큰 군세가 되어 갔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도카이도(東海道)는 도키후사와 야스토키, 도산도(東山道)는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 · 오가사와라 나가키요(小笠原長清), 호쿠리쿠도(北陸道)는 호조 도모토키(北条朝時) · 유키 도모히로(結城朝広) 등을 대장으로 삼아 세 방향에서 쳐 올라가게 하였다.
이를 맞는 조정 쪽 군세는 6만 기라 하는데, 이는 사이멘(西面)의 무사, 관동에서 떨어져 나온 자, 승병 등이 섞인 군대였다. 이를 도카이 · 호쿠리쿠의 두 군으로 나누어 막부군에 맞섰다. 후지와라노 히데야스(藤原秀康) · 미우라 다네요시 · 사사키 히로쓰나(佐々木広綱) 등은 미노 · 오와리까지 나아갔고, 미야자키 사다노리(宮崎定範) · 가스야 아리히사(糟屋有久) · 니시나 모리토 등은 가가로 나아갔으나, 두 군 모두 한 번 부딪쳐 패주하는 형편이었다. 고토바 상황은 쓰치미카도 · 준토쿠 상황을 데리고 엔랴쿠사로 피하였고, 이어 가야인(賀陽院)으로 옮겼다.
그러나 근신 무장들의 요구로 마지막 한판 싸움을 시도하게 되어, 세타(勢多) · 우지(宇治)를 중심으로 히로세 · 요도 · 마키노 · 이모아라이 등의 요지에 패군의 장수들을 배치하여 싸웠다. 그러나 6월 13일 도키후사의 군이 세타 어귀에서 야마다 시게타다(山田重忠)를 깨뜨리고, 이튿날에는 야스토키의 군세가 우지강을 건너 미나모토노 아리마사(源有雅) · 후지와라노 노리시게(藤原範茂) 등을 무너뜨려 달아나게 하였다. 조정군은 무장들도 거의 붙잡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흩어졌다. 이리하여 교토는 막부군에게 점령되었고, 상황은 문을 닫아걸었으며, 승구의 난은 선지가 내린 지 한 달 만에 끝을 고하였다.

- 1196년1196년조정 · 염불구조 가네자네 실각 · 고노에 모토미치 관백
- 1198년1198년조정 · 염불고토바 천황 양위 · 원정 시작(같은 해 법연 『선택집』)
- 1201~1204년1201~1204년조정 · 염불건인 연간(법연 일문의 전성)
- 1210년1210년조정 · 염불준토쿠 천황 즉위
- 1212년1212년조정 · 염불법연 입적
- 1219년1219년조정 · 염불 / 막부사네토모 암살 · 황족 쇼군 요청 거부 · 지두 개체 요구 · 미토라(두 살)를 가마쿠라도노로
- 4월4월조정 · 염불주쿄 천황 즉위
- 5월 14일5월 14일조정 · 염불조난사 야부사메 명목으로 군사 모음
- 5월 15일5월 15일조정 · 염불요시토키 추토 선지 · 이가 미쓰스에 습격
- 막부막부군 세 길로 출진(『아즈마카가미』 19만 기)
- 막부6월 13일 세타 · 6월 14일 우지강
- 막부교토 점령(선지로부터 한 달 만에 끝남)
- 막부근신 공경 참수 · 주쿄 천황 폐위 · 고호리카와 천황 즉위
- 고토바 상황오키
- 준토쿠 상황사도
- 쓰치미카도 상황도사
- 막부영지 3,000곳 몰수 · 신보 지두 · 로쿠하라 단다이
세 상황의 유배와 막부의 처분
이 전란으로 교토는, 보원 · 평치의 난, 기소 요시나카의 난입,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 노리요리가 이끈 동국 무사의 난입 등 잇따른 전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불바다가 되어 지옥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승구기(承久記)』는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반도(坂東)의 군사들이 후카쿠사 · 후시미 · 오카노야 · 고가 · 다이고 · 히노 · 간주사 · 요시다 · 히가시야마 · 기타야마 · 도지 · 요쓰즈카로 흩어져 달려가며, 혹은 1~2만 기, 혹은 4~5천 기씩 깃발을 휘날리며 난입하였다. 삼공 · 경상에서 궁녀 · 시종 · 유녀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갈팡질팡하였다. 천지가 열린 뒤로 왕성(王城)의 낙중에 이런 일이 어찌 있었겠는가, 저 보원의 옛날에도, 헤이케가 도읍을 떠날 때에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이름을 아끼고 가문을 생각하는 대대의 무사들은 여기저기 대장으로 보내져 혹은 죽고 혹은 사로잡혔다. 그 밖에는 언제 말을 타 보았는지, 싸움하는 법도 모르는 자들이 혹은 칙명에 내몰리고 혹은 구경하러 나왔다가 반도의 군사에게 쫓기는 모습이 마치 매 앞의 작은 새와 같았다. 활로 쏘아 죽이고 칼로 베어 죽이고 목을 벤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니, 반도의 군사로서 목 하나씩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고토바 상황은 6월 15일 칙사를 도키후사에게 보내어, 막부 타도가 자신의 본뜻이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교토의 질서 유지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처분은 엄했다. 주쿄 천황을 폐하고 고호리카와(後堀河) 천황을 세웠으며, 원의 근신이던 공경들 — 하무로 무네유키(葉室宗行) 등 — 을 참수에 처하였다. 그리고 고토바 상황을 오키(隠岐)로, 쓰치미카도 상황을 도사(土佐)로, 준토쿠 상황을 사도(佐渡)로 각각 유배하였다. 세 상황이 신하의 손에 섬으로 보내진 것은 일본에 나라가 선 이래 없던 일이었다.
막부는 이런 대담한 처분과 동시에 조정 쪽 사람들의 영지 3,000곳을 몰수하여 전공이 있는 무장들에게 주고, 이들을 신보(新補) 지두로 삼았다. 이로써 지금까지 막부의 권력이 미치지 않던 서국의 영지에도 그 권력과 고케닌을 심게 되었다. 그리고 도키후사 · 야스토키를 로쿠하라(六波羅)에 머물게 하여 남북의 단다이(探題)로서 사실상 서국 전체를 지배하게 하였다. 이로써 조정 쪽은 완전히 막부에 굴복하고, 막부는 이름과 실제 모두 전국 지배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승구의 난의 승패는 당시 사람들의 사상에 큰 변동을 가져왔다. 「일천만승(一天万乗)의 대군(大君)」의 군세는 가련하게도 참패하였고, 한 번 내리면 떨어진 꽃도 가지로 되돌린다는 선지는 이제 그 무력함을 만인의 눈앞에 드러냈다. 「동쪽 오랑캐(あずまえびす)」라 깔보던 무사들의 손에 천황이 폐위되고 세 상황이 유배된다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사건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가마쿠라 중기 이후에 쓰인, 승구의 난의 모습을 전하는 책들 가운데 많은 것이 고토바 상황의 실정을 공격하는 한편, 천하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가장 높은 목적이라며 조정을 무너뜨린 요시토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크게 주목할 점이다. 본문의 「그 상황의 일은 이미 눈앞에 있다」는 말은, 바로 이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대를 향한 말이었다.
염불의 열렬한 신앙도 헛되이 — 법연과 고토바인
이 승구의 난은 법연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의 사건이다. 본문에는 「법연은 고토바인의 치세, 건인 연간의 사람이니라」(法然は後鳥羽院の御宇、建仁年中の者なり, 25쪽)라고 하였다. 건인 연간이란 1201년부터 1204년 초까지를 가리키며, 건구 9년(1198)에 법연이 『선택집』을 지은 지 몇 해 뒤, 그 그릇된 뜻이 차츰 교토의 위아래에 스며들던 때다. 기성 종교인 히에이잔을 비롯하여 고후쿠사(興福寺) 등에서 염불을 금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구조 가네자네를 비롯한 귀족들이 열렬한 신도가 되었기 때문에 교토에서 법연 일문의 지위는 떠오르는 해와 같은 기세였다.
이런 가운데 고토바 상황을 중심으로 한 조정 쪽 공가에서 막부 타도 계획이 꾸며져 갔다. 그리고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염불에 대한 열렬한 신앙과 진언 등의 기도라는 그릇된 뜻 · 그릇된 법의 해독 때문에, 일본에 나라가 선 이래 처음으로 천황 쪽이 패하고 세 상황이 유배되는 비참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법연 일문에 대한 조정의 대응은 일정하지 않았다. 고토바 상황 자신은 건영 2년(1207)에 법연과 그 제자들을 유죄에 처하였다(건영의 법난). 이 경위는 입정안국론 제6편 「염불 금지 감장의 상주」에서 다룬다. 본문이 법연을 「고토바인 치세의 사람」이라 한 것은 상황 개인의 신앙을 말한 것이 아니라, 염불이 나라 안에 퍼진 시대가 곧 그 상황의 치세였음을 가리킨다.
대성인이 보신 승구의 난 — 「도키입도전답서」
대성인은 만년에 쓰신 「도키입도전답서」에서 승구의 난을 자세히 돌아보셨다.
去ぬる承久年中に隠岐の法皇義時を失わしめんが為に調伏を山の座主・東寺・御室・七寺・園城に仰せ付けられ、仍つて同じき三年の五月十五日鎌倉殿の御代官・伊賀太郎判官光末を六波羅に於て失わしめ畢んぬ、然る間同じき十九日二十日鎌倉中に騒ぎて同じき二十一日・山道・海道・北陸道の三道より十九万騎の兵者を指し登す
지난 승구 연간에 오키의 법황께서 요시토키를 없애기 위하여 히에이잔의 좌주 · 도지 · 오무로 · 나라의 일곱 큰 절 · 온조사에 조복을 명하셨느니라. 그리하여 같은 해 3년 5월 15일 가마쿠라도노의 대관인 이가 다로 판관 미쓰스에를 로쿠하라에서 죽였느니라. 그러자 같은 19일 · 20일 가마쿠라 안이 소란해지고, 같은 21일 도산도 · 도카이도 · 호쿠리쿠도의 세 길로 19만 기의 군사를 올려 보냈느니라.
대성인은 이어서 6월 13일 밤,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고 천둥과 번개가 무사들의 머리 위에서 울리며 수레바퀴 같은 굵은 비가 쏟아졌다고 쓰신다. 먼 길을 올라온 19만 기는 병란으로 쌀이 떨어지고 말은 지쳤으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숨어 버렸고, 투구는 비에 젖어 솜처럼 되었다. 무사들이 우지 · 세타에 이르러 보니, 평소에는 서너 정(町)인 강폭이 이미 예닐곱 정, 열 정에 이르렀고, 한두 길 되는 큰 돌이 마른 잎처럼 떠다니고 대여섯 길 되는 큰 나무가 떠내려와 쉴 새 없이 물길을 막았다. 말을 엮어 뗏목을 만들어 건너려 했으나 백 기 · 천 기가 저마다 건너도 건너편에 닿는 자가 하나도 없었고, 붉은 갑옷과 활과 투구가 강물에 떠도는 모습은 늦가을 단풍이 요시노 · 다쓰타의 강에 떠 있는 것 같았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교토의 모습을 이렇게 쓰신다.
爰に叡山・東寺・七寺・園城寺等の高僧等之を聞くことを得て真言の秘法・大法の験とこそ悦び給いける、内裏の紫宸殿には山の座主・東寺・御室・五壇・十五壇の法を弥盛んに行われければ法皇の御叡感極り無く玉の厳を地に付け大法師等の御足を御手にて摩給いしかば大臣・公卿等は庭の上へ走り落ち五体を地に付け高僧等を敬い奉る
이에 히에이잔 · 도지 · 일곱 큰 절 · 온조사 등의 고승들이 이것을 듣고 진언의 비법 · 대법의 영험이라고 기뻐하셨느니라. 대궐의 자신전에서는 히에이잔의 좌주 · 도지 · 오무로가 오단 · 십오단의 법을 더욱 성대하게 행하였으므로, 법황께서는 감격이 끝이 없어 옥 같은 얼굴을 땅에 대고 대법사들의 발을 손으로 어루만지셨으니, 대신 · 공경들은 뜰 위로 달려 내려가 오체를 땅에 대고 고승들을 공경하였느니라.
우지 · 세타로 나아간 공경 · 전상인들은 투구를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요시토키와 그 졸개인 동쪽 오랑캐들은 똑똑히 들어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법에 적이 된 자로서 누가 편안하였느냐(王法に敵を作し奉る者は何者か安穏なるや). 개가 사자를 보고 짖으면 그 배가 터지지 않음이 없고, 아수라가 해와 달을 쏘면 그 화살이 되돌아와 제 눈에 맞지 않음이 없다. 인왕 80여 대 동안 20여 명이 왕법에 적이 되었으나 한 사람도 뜻을 이룬 자가 없이 모두 목이 옥문에 걸리고 시체가 산야에 버려졌다. 관동의 무사들이 대대로 섬긴 주군을 버리고 이즈의 백성인 요시토키의 명을 따르니 이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왕법을 등지고 백성의 명을 따르는 자는 사자왕이 들여우에게 태워져 동서남북으로 끌려다니는 것과 같다. 어서 투구를 벗고 활시위를 풀어 항복하라.」
이 말은 당시 천황의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그대로 보여 준다. 천황이 한 번 명을 내리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조정은 물론 관동의 무사들 사이에서도 강하게 믿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싸움이 벌어지면 어느 쪽 군에 천황의 선지가 내렸느냐에 따라 충신도 되고 조정의 적도 되었다. 무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조정의 적이라는 오명이었고, 한 번 그것이 씌워지면 그 당대는 물론 일족 · 가신의 전멸을 뜻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대성인은 그 결말을 이렇게 맺으신다.
何に有りけん申酉の時にも成りしかば関東の武士等・河を馳せ渡り勝ちかかりて責めし間京方の武者共一人も無く山林に逃げ隠るるの間、四つの王をば四つの島へ放ちまいらせ又高僧・御師・御房達は或は住房を追われ或は恥辱に値い給いて今に六十年の間いまだ・そのはぢをすすがずとこそ見え候
어찌 된 일인지 신 · 유(申酉)의 때(오후 늦게)가 되자 관동의 무사들이 강을 달려 건너 이기며 몰아쳤으므로, 교토 쪽 무사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산림으로 달아나 숨었느니라. 그리하여 네 왕을 네 섬으로 내보내 드렸고, 또 고승 · 어사 · 어방들은 혹은 머물던 방에서 쫓겨나고 혹은 치욕을 당하시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아직 그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였다고 보이느니라.
진언의 고승들이 「비법의 영험」이라 기뻐한 바로 그날 저녁, 교토의 군은 무너졌다. 조복을 위해 동원된 히에이잔 · 도지 · 온조사의 고승들은 그 뒤 60년이 지나도록 그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였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것은 바른 법을 버린 기도가 도리어 기도한 쪽을 무너뜨린 현증이다.
무너진 조정의 절대 권위 — 영지 · 선지와 무사의 마음
요리토모가 이시바시산(石橋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가 한 번 패하여 달아났으면서도 관동의 군사를 순식간에 만여 명이나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황자 모치히토 왕(以仁王)의 영지(令旨)를 받든 거병이라는 최고의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리토모는 거병에서 헤이케 멸망까지 여러 차례 모치히토 왕의 영지라며 문서를 냈다. 그런데 그 모치히토 왕은 요리토모가 거병하기 석 달 전인 치승 4년(1180) 5월 26일, 우지강 싸움에서 헤이케 군에게 패하여 이미 전사하였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끝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진중에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있다 하여 모든 싸움에 대의명분을 세웠다.
그러므로 승구의 난 때에도 조정 쪽이 고토바 상황의 선지가 내린 이상 기나이의 무사는 물론 먼 지방의 무사들도 잇따라 모여들 것이라 예상한 것은 당연했다. 거꾸로 막부 쪽이 무엇보다 두려워한 것은, 천황의 선지를 거슬러 출진하는 데 관동의 무사들이 머뭇거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조정 쪽에는 원의 선지도 내렸으니 이제는 조정의 적 요시토키의 목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안이한 이야기까지 오갔다. 이에 비해 막부 쪽은, 과연 무사들이 모여들 것인가, 모여든 무사들이 교토까지 쳐 올라갈 마음이 있겠는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상황의 선지가 내렸다」는 첫 소식이 막부에 닿았을 때, 막부의 신하들도 동요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달려온 비구니 쇼군 호조 마사코가 눈물을 흘리며 한 연설을 듣고서야 비로소 일어섰다고 전한다. 『아즈마카가미』가 전하는 마사코의 말은 이렇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들으라. 이것이 마지막 말이다. 돌아가신 우대장군(요리토모)께서 조정의 적을 정벌하고 관동을 일으키신 뒤로 관위로 보나 녹봉으로 보나 그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그 은혜에 보답할 뜻이 얕겠는가. 그런데 이제 역신의 참언으로 의롭지 못한 윤지가 내려졌다. 이름을 아끼는 이들은 어서 히데야스 · 다네요시 등을 쳐서 3대 쇼군의 유업을 온전히 하라. 다만 원 쪽에 가담하려는 자는 지금 당장 말하라.」
『승구기』는 같은 장면을 이렇게 적는다. 「모두 보지 못하였는가. 옛날 동국의 무사가 교토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는 맨발로 오르내렸다. 돌아가신 분께서 가마쿠라를 세우신 뒤로 교토의 벼슬살이도 그치고, 은상이 이어져 즐겁고 넉넉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돌아가신 분의 은혜를 어느 세상에 다 갚겠는가. 3대 쇼군의 무덤을 어찌 교토 사람들의 말발굽에 걸리게 하겠는가. 선지를 따르려거든 먼저 이 비구니를 죽이고 가마쿠라를 다 불사른 뒤에 교토로 가라.」 그 자리의 무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한마음으로 일어설 것을 맹세했다고 붓은 전한다.
그러나 막상 출진하려 하자, 교토까지 단숨에 쳐 올라가자는 이, 하코네 · 아시가라의 관문을 굳게 지켜 맞서자는 이 등 의견이 엇갈려, 교토로 나아간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의 사정을 『마스카가미(増鏡)』는 이렇게 쓴다. 아버지 요시토키에게서 「이번 싸움에 우리 쪽에는 꺼림칙한 점이 하나도 없다. 마음을 굳게 먹고 싸워라. 이기지 않고서는 다시 하코네 · 아시가라의 산을 넘지 말라」는 격려를 받고 떠난 야스토키는, 이튿날 홀로 돌아와 천황이 몸소 교토 쪽 선두에 서서 쳐들어올 때는 어찌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요시토키는 「잘 물었다. 그때는 천황의 가마에 활을 당길 수 없다. 갑옷을 벗고 활시위를 끊고 항복하라. 그러나 그 밖의 때에는 천 명이 한 사람이 되더라도 싸워라」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다 듣자마자 야스토키는 다시 말에 채찍을 가해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모습을 전하는 책은 여럿 있지만 모두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다. 한 번은 조정에 대한 철저한 항전을 내세웠으면서도, 무언가 개운치 않은 마음이 무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 그런 상황이었기에 막부 쪽으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출진하여 싸움터 속에서 무사들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 급선무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전란이 끝났을 때 조정 쪽 · 교토 쪽의 놀라움과 막부 쪽의 기쁨은 상상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승리의 소식을 받은 가마쿠라의 요시토키는 「이제 요시토키는 아무 바랄 것이 없다. 과보는 왕의 과보보다도 오히려 나았다」고 외쳤다고 책은 전한다.
불법에서 본 승구의 난
천황의 칙선(勅宣)을 절대적인 것으로 의지하여, 그것이 내리기만 하면 이긴 것처럼 기뻐하고, 서국의 응원만 바라며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서려 하지 않은 무기력함 —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염불의 해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의 일을 스스로 짊어지지 않고 서방의 다른 부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가르침이 공가의 마음을 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정은 도지 등에 명하여 막부 쪽을 조복하는 진언의 가지기도를 성대하게 행하였다. 이 또한 스스로를 멸하는 원인이 되었음은, 대성인이 말씀하신 대로 「도리어 본인에게 붙는다(還著於本人)」는 이치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이 말은, 남을 해치려고 저주하는 독약이 도리어 저주한 본인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요시토키를 거꾸러뜨리려 한 조복의 기도는 거꾸로 세 상황을 섬으로 보내는 결과로 돌아왔다.
시대의 변천이라 할 수도 있다. 사기의 차이라 할 수도 있다. 인심의 움직임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그 가장 밑바닥에서 조정 쪽의 패배를 결정한 것은 실로 방법의 해독이었다. 제3장에서 본 당 무종이 염불을 넓히고 이어 불법을 깨뜨려 나라를 어지럽혔듯이, 일본에서는 염불이 퍼지고 진언의 조복이 행해진 끝에 상황이 신하에게 유배되는 「증거」가 드러났다. 본문이 「대당에 예를 남기고 우리 나라에 증거를 드러내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또 승구의 난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전환은, 니치렌 대성인이 출현하신 시대적 배경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종래의 정치적 권위이자 가치관의 중심이던 조정이 정치상의 실권을 잃었다는 것, 율령제 이래의 낡은 사회 체제가 무너지고 슈고 · 지두 제도가 전국에 세워졌다는 것, 그리고 전통적인 귀족 계급의 주도권이 사라지고 이른바 서민 · 백성 가운데서 자라난 무사 계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승구의 난 이듬해인 정응 원년(1222)에 아와국의 어촌에서 태어나셨다. 낡은 권위가 무너지고 새 질서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시대, 그 가운데서 대성인은 나라의 근본을 묻는 간효의 글을 새 권력자인 막부의 최고 실력자에게 올리신 것이다.
「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라」 — 제5단의 맺음
「그대는 의심하지 말라, 그대는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오직 모름지기 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어야 하느니라」(汝疑うこと莫かれ、汝怪しむこと莫かれ。唯須く凶を捨てて善に帰し、源を塞ぎ根を截つべし, 25쪽).
제5단은 이 한 문장으로 맺어진다. 제1장에서 객은 「근년의 재난을 어찌 성대의 때에 덮어씌우느냐」고 따졌다. 주인은 제2장에서 일대 오시의 도리로, 제3장에서 중국의 세 예로, 제4장에서 일본의 눈앞의 증거로 답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의심을 버리고 행동하는 일이다.
「흉」은 법연의 염불이며, 「선」은 정법이다.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는다」는 것은, 재난이 일어난 뒤에 그 겉모습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재난을 낳는 근원 — 『선택집』의 그릇된 뜻 — 을 막으라는 것이다. 제1단에서 객은 갖가지 기도와 제사로 재난을 막으려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주인의 대답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재난은 겉에서 다스려지지 않는다. 그 근원인 방법을 끊어야 한다.
이 결론은 다음 단의 물음을 부른다. 제6단에서 객은 조금 누그러져 그 취지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교토에서 가마쿠라에 이르기까지 불가의 동량들이 있는데 아직 아무도 염불을 금하라는 감장을 올리지 않았거늘 천한 몸으로 함부로 말하느냐고 묻는다. 주인은 엔랴쿠사 · 고후쿠사의 거듭된 상주와 법연 일문의 유죄라는 역사를 들어 답하게 된다. 그리고 「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라」의 「선」이 무엇인가는, 제9단에서 「실승의 일선」으로 밝혀진다.
대성인 불법의 관점 — 법연이 활동한 고토바인의 치세가 승구의 난과 세 상황의 유배로 끝났다는 것은 당시 누구나 아는 「눈앞의 증거」였다. 중국의 「예」와 일본의 「증」이 같은 원리 — 정법을 버리면 나라가 기운다 — 를 보이며, 그 결론은 「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으라」는 한 문장으로 모인다.
이 편을 맺으며
제5단의 네 장은 하나의 대화가 끊어질 뻔한 순간에서 시작한다. 제4단에서 법연과 『선택집』이 「일흉」으로 지목되자, 객은 몹시 낯빛을 바꾸어 정토의 네 조사와 법연의 학식 · 명성을 내세우며, 근년의 재난을 수십 년 전의 성인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털을 불어 흠을 찾는 억지라고 꾸짖고 일어섰다. 그 노여움은 객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법연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받들던 당시 일본 사람들 대부분의 목소리였다.
주인은 웃으며 객을 붙들었다. 매운 것은 여뀌 잎에 익숙해지고 냄새나는 것은 뒷간에서 잊는다 — 오래 사법에 젖으면 선한 말을 악한 말로 듣고, 비방하는 자를 성인이라 하고, 바른 스승을 악한 승려로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은 객이 내세운 「석존이 설하셨다」는 근거를 바로 그 석존의 설법 순서로 뒤집었다. 일대 오시에는 앞과 뒤, 권과 실의 분별이 있고, 정토의 세 부 경은 「사십여 년에는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신 그 앞의 경에 속한다. 세 스승은 권에 나아가 실을 잊었고, 법연은 그 흐름을 떠 마셨으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대승경 전체에 「사 · 폐 · 각 · 포」의 글자를 붙였다. 문증 · 이증 · 현증의 삼증, 오중상대, 종교의 오강은 모두 이 판단이 어디에 근거하는가를 보여 주는 틀이다.
그리고 주인은 현증으로 나아갔다. 주나라 말 이천의 들에서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지낸 제사는 백 년이 못 되어 무너질 왕실을 예고했고, 완적의 쑥대 머리를 흉내 낸 공경의 자손들은 사마씨의 멸망을 예고했다. 당나라 무종은 아미타 염불을 여러 절에 넓히게 한 이듬해부터 회골 · 하북 절도사 · 토번의 병란을 맞았고, 끝내 불법을 깨뜨린 끝에 목숨을 잃었다. 조짐이 앞서 나타나고 재앙은 뒤에 이른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법연이 활동한 바로 그 고토바인의 치세가, 진언의 조복 기도에도 불구하고 승구의 난과 세 상황의 유배로 끝났다. 「대당에 예를 남기고 우리 나라에 증거를 드러내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이 단은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이 권위와 평판이 아니라 경문 · 도리 · 현실의 결과에 있음을 보이는 대목이다. 객이 「시간의 간격」을 들어 인과를 부정하려 한 데 대해, 주인은 역사의 예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이 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 결론은 「흉을 버리고 선에 돌아가,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어야 한다」는 한 문장으로 모인다.
다음 입정안국론 제6편 「염불 금지 감장의 상주」에서 객은 조금 누그러져, 깊은 뜻은 다 알지 못해도 그 취지는 알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교토에서 가마쿠라에 이르기까지 불가의 동량들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감장을 올려 상주하지 않았거늘, 천한 몸으로 함부로 말하느냐고 따진다. 주인은 엔랴쿠사 · 고후쿠사가 법연의 염불을 금해 달라고 거듭 상주하였고 법연 일문이 유죄에 처해졌다는 역사를 들어, 방법을 꾸짖는 정신이 대성인 한 사람의 독단이 아님을 보이게 된다.
더 읽기
- 입정안국론 제4편 「정법 비방의 원흉 — 법연의 『선택집』」 — 이 편의 객이 노여워한 까닭, 곧 법연의 생애와 「사 · 폐 · 각 · 포」의 글
- 입정안국론 제6편 「염불 금지 감장의 상주」 — 이 편의 결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끊으라」를 이어 법연 일문에 대한 상주와 유죄의 역사를 든다
- 오시팔교 — 「일대 오시에 앞과 뒤를 세워 권실을 가린다」는 천태의 교판
- 선시초 — 「무릇 불법을 배우는 법은 반드시 먼저 때를 배워야 한다」로 시작하는, 오강 가운데 「시」를 밝힌 어서
- 관심의 본존초 — 「저것은 탈이요 이것은 종이다」 — 종탈상대의 근거가 되는 어서
- 보은초 — 「도리와 증문보다도 현증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삼증의 기준을 대성인의 간효와 함께 다룬다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입정안국론」,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일본어판) 17–33쪽 — 인용한 다른 어서(「재난대치초」 · 「염불무간지옥초」 · 「관심의 본존초」 · 「선시초」 · 「교기시국초」 · 「도키입도전답서」 · 「성인어난사」 · 「삼삼장기우사」)의 쪽은 본문 각 인용에 적었다
- 천태대사, 『마하지관』 권2, T46 no.1911
- 묘락대사 담연, 『지관보행전홍결』 권2, T46 no.1912
- 엔닌(자각대사), 『입당구법순례행기』
- 『묘법연화경』, T9 no.262 / 『무량의경』, T9 no.276
- 사마천, 『사기』 / 『춘추좌씨전』
- 『아즈마카가미(吾妻鏡)』 · 『승구기(承久記)』 · 『마스카가미(増鏡)』 — 승구의 난 관련 기사
연구
- 立正大学日蓮教学研究所 編, 『昭和定本日蓮聖人遺文』, 身延山久遠寺, 1952–1959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On Establishing the Correct Teaching for the Peace of the Land」 수록)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