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취요초」의 첫 큰 갈래인 대단 제1은 석존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어느 경이 가장 뛰어난가를 묻는다. 제1편이 「이금당」의 경문으로 법화경 최제일의 정판을 세웠다면, 이 제2편은 같은 물음을 경을 설한 부처 쪽에서 다시 묻는다. 대성인은 법화경이 다른 경보다 뛰어난 스무 가지 가운데 가장 긴요한 두 가지로 「삼오의 이법」 — 화성유품의 삼천진점겁과 수량품의 오백진점겁 — 을 드신다. 삼천진점겁으로는 석존의 인위(因位)를, 오백진점겁으로는 석존의 과위(果位)를 논해, 사바세계 중생과 인연 맺은 부처는 법화경의 교주 석존 한 분뿐임을 밝히신다. 대일 · 아미타 · 약사 등 제경의 제불은 모두 「우리들의 본사 교주 석존」의 소종(所従)이며, 하늘의 달 하나가 만 갈래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그런데도 이 부처를 잊고 다른 부처를 본존으로 받드는 세상의 풍조를 대성인은 아버지를 죽인 아사세 태자의 불효에 견주어 꾸짖으신다. 이 편은 교판의 논의가 본존의 물음으로, 다시 주사친 삼덕과 감응도교의 물음으로 깊어지는 자리다.
대단 제1은 여섯 장으로 되어 있다. 앞의 세 장(제1편)이 경과 경을 맞세워 법화경이 일대성교 가운데 최제일임을 밝혔다면, 뒤의 세 장(이 편)은 각 경이 받드는 부처와 법화경의 교주를 맞세운다. 다섯 편으로 나눈 「법화취요초」 열다섯 장 가운데 이 편은 첫 큰 갈래 「일대 제경의 대의를 밝히다」를 맺는 자리에 있으며, 여기서 확인된 「사바세계 중생에게 인연 있는 부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대단 제2에서 「법화경은 누구를 위해 설해졌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고, 대단 제3에서 「본문의 본존」을 포함한 삼대비법으로 귀결된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이 대목에서 「삼오의 이법」을 드신 까닭을 제종의 본존관을 파절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화엄종은 비로자나불을, 진언종은 대일여래를, 정토종은 아미타불을 받들며 저마다 자기 부처가 석존보다 높다고 했다. 대성인은 이 논쟁을 교리의 차원과 생활의 차원 양쪽에서 다루신다. 교리로는 삼신론을 따라 제불의 몸이 모두 수량품 교주의 수적(垂迹)임을 밝히시고, 생활로는 석존 입멸일인 보름날을 아미타불의 날로, 석존 탄생일인 4월 8일을 약사불의 날로 바꾼 당시의 관습을 지적하신다.
이 편에서 교판 · 불신론 · 신앙 습속을 하나로 꿰는 실은 「부모와 자식」의 비유다. 천태대사와 묘락대사는 아미타불과 사바세계 중생 사이에는 「자부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고, 대성인은 사바세계 중생을 「오백진점겁 이래 교주 석존의 애자(愛子)」라 하셨다. 부처와 중생을 잇는 이 인연이 천태가 말한 권속묘 · 감응묘이며, 하늘의 달 하나가 맑은 물에 또렷이 비치는 비유로 맺어진다.
이 편의 장
- 제1장 일대성교의 승렬을 밝히다
- 제2장 제종의 그릇된 해석을 보이다
- 제3장 법화경 최제일의 정판을 밝히다
- 제4장 삼오의 이법을 표하다
- 제5장 교주의 인위에 의거해 승렬을 판정하다
- 제6장 교주의 과위에 의거해 승렬을 판정하다
본문
今・法華経と諸経とを相対するに一代に超過すること二十種之有り、其の中最要二有り所謂三五の二法なり
이제 법화경과 제경을 상대하건대 일대에 초과하는 것이 이십 종이 있느니라. 그 가운데 가장 긴요한 것이 둘 있으니, 이른바 삼오(三五)의 이법(二法)이니라.
어구 풀이
- 一代に超過すること二十種일대에 초과하는 것 이십 종
- 법화경이 석존 일대의 다른 경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스무 가지라는 뜻. 묘락대사가 『법화문구기』 권4하에서 법화경에만 설해진 법문을 열 쌍, 스무 구절로 찬탄한 「십쌍탄(十双歎)」에 근거한 말씀이다.
- 最要최요
- 가장 긴요함. 스무 가지 뛰어남 가운데 멸후 · 말법의 중생에게 가장 중요한 법문이라는 뜻으로, 강의는 이를 「삼오의 이법」이 중생 성불의 궁극 근거를 밝힌 법문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 三五の二法삼오의 이법
- 「삼」은 화성유품 제7의 삼천진점겁, 「오」는 여래수량품 제16의 오백진점겁. 십쌍탄의 마지막 제10쌍 「況や迹化には三千の塵点を挙げ、本成には五百の微塵に喩えたり」에 해당한다.
- 三千塵点劫삼천진점겁
- 삼천대천세계를 갈아 티끌로 만들어 동쪽으로 천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한 티끌씩 떨어뜨리고, 지나온 국토를 다시 모두 갈아 티끌 하나를 한 겁으로 셈한 수의 겁. 대통지승불의 열여섯 왕자가 법화경을 복강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다.
- 五百塵点劫오백진점겁
-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를 갈아 티끌로 만들고, 동쪽으로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기의 나라를 지날 때마다 한 티끌을 떨어뜨리는 식으로 셈한 겁수보다도 더 긴 시간. 석존이 성불한 이래의 시간으로 수량품에 설해진다.
- 大通覆講대통복강
- 대통지승불이 열여섯 왕자의 청으로 법화경을 설한 뒤, 열여섯 왕자가 보살(사미)로서 그 법화경을 다시 대중에게 강설한 일. 제16왕자가 석존의 인위다.
- 十双歎십쌍탄
- 묘락대사가 『법화문구기』 권4하에서 법화경에만 설해진 법문을 열 쌍 스무 구로 요약해 찬탄한 글. 제1쌍은 이승작불과 구원실성, 제10쌍은 삼천진점과 오백진점이다.
- 十勝십승
- 전교대사가 『법화수구』에서 법화경이 다른 종의 소의경보다 뛰어난 까닭을 열 항목으로 밝힌 것. 「불설이현진실승」에서 「보현보살권발승」까지.
- 十七種の異名십칠종의 이명
- 천친(세친)의 『법화경론』이 서품의 경문에서 뽑아 법화경의 깊은 공덕을 드러낸다고 한 열일곱 가지 이름. 「무량의경」에서 「최상법문」까지.
- 三平等삼평등
- 『법화경론』이 중생의 세 가지 전도된 믿음을 다스리기 위해 법화경에 설해졌다고 한 승평등 · 세간열반평등 · 신평등.
- 十無上십무상
- 『법화경론』이 여래의 법신과 중생의 법신이 평등무차별함을 무상의(無上義)로 삼아 법화경 각 품에서 열 가지로 뽑아낸 것. 종자무상에서 승묘력무상까지.
- 弥勒菩薩미륵보살
- 일생보처 등각의 보살. 수량품에서 오백진점겁은 미륵도 사유할 수 없다고 설해진다. 구계 중생의 최고위가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부처만 아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경을 넘어 부처를 묻다 — 삼오의 이법을 드신 까닭
제4장부터 제6장까지 세 장은 법화경이 다른 경보다 뛰어난 이유로 특히 「삼오의 이법」을 들고, 이 두 법문에 밝혀진 법화경 교주의 인위와 과위를 논한다. 결론은 분명하다. 석존 일대의 제경에 설해진 갖가지 부처 가운데, 사바세계 중생과 인연이 있는 부처는 인위로 보아도 과위로 보아도 법화경의 교주 석존밖에 없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대성인이 여기서 「삼오의 이법」을 드신 까닭을 제종의 본존관을 파절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대단 제1은 전체가 제종과 상대해 법화경이 가장 뛰어남을 밝히는 갈래인데, 앞의 제1~3장이 경의 승렬을 다루었다면 뒤의 제4~6장은 본존관 위에서 제경의 제불과 법화경의 교주를 맞세운다. 경이 다르면 그 경이 받드는 부처가 다르고, 받드는 부처가 다르면 본존이 다르다. 화엄종의 비로자나불, 진언종의 대일여래, 정토종의 아미타불이 저마다 「석존보다 높은 부처」로 받들어지던 시대에, 대성인은 교판의 논의를 본존의 논의로 옮겨 놓으신 것이다.
제4장은 바로 앞의 제3장을 이어받는다. 제3장은 법사품의 「이금당」으로 법화경이 이미 설한 경 · 지금 설하는 경 · 앞으로 설할 경 가운데 제일임을 밝혔다. 이 장은 그 제일의 구체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삼오의 이법」, 곧 화성유품 제7의 삼천진점겁과 여래수량품 제16의 오백진점겁이라고 짚는다. 짧은 한 구절이지만 이어지는 두 장의 표제(標題) 구실을 하므로 문단은 이 장을 「삼오의 이법을 표하다」라 이름한다.
스무 가지 뛰어남과 「최요」
대성인은 법화경이 석존 일대의 제경보다 뛰어난 점이 「이십 종」이라 하신다. 이는 묘락대사가 『법화문구기』 권4하에서 밝힌 「십쌍탄」에 근거한 말씀이다. 십쌍탄은 법화경에만 설해진 법문을 제1쌍부터 제10쌍까지 열 쌍, 스무 구절로 나타내 법화경을 찬탄한 글이며, 그 마지막 제10쌍이 「삼오의 이법」이다.
況や迹化には三千の塵点を挙げ、本成には五百の微塵に喩えたり
하물며 적화에는 삼천의 진점을 들고 본성에는 오백의 미진에 비유하였음에랴
이 구절의 「적화(迹化)」는 적문의 교화, 곧 화성유품이 밝힌 대통복강 이래의 교화를 가리키고, 「본성(本成)」은 본문에서 밝힌 본래의 성불, 곧 수량품의 구원실성을 가리킨다. 스무 가지 가운데 이 두 가지를 「최요」라 하신 까닭은 아래 「십쌍탄」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다시 살핀다. 미리 말하면, 강의는 그것이 이 두 법문이 법화경을 설한 교주와 교화를 받는 중생의 관계를 밝히고, 특히 오백진점겁이 석존 멸후 중생의 성불에 궁극의 근거를 주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장의 강의는 먼저 두 진점겁의 개요를 정리하고, 이어 십쌍탄과 관련해 법화경의 뛰어남을 밝힌 여러 논사 · 인사의 설을 간추린다.
삼천진점겁 — 대통복강과 성문들의 인연
화성유품 제7은 방편품 제2의 법설, 비유품 제3의 비유설을 듣고도 아직 개삼현일(開三顯一)의 뜻을 깨닫지 못한 하근(下根)의 성문들을 위해 설해진다. 법화경의 「삼주설법(三周說法)」에서 세 번째, 곧 인연설주(因緣說周)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석존은 여기서 삼천진점겁이라는 아득한 옛날의 대통복강 이래 자신과 성문들 사이에 맺어진 인연을 밝힌다.
대통복강이란 대통지승불이 열여섯 왕자의 청에 따라 법화경을 설한 뒤, 열여섯 왕자가 보살로서 저마다 무량한 중생에게 그 법화경을 다시 널리 강설한 일을 말한다. 그 열여섯째 왕자가 석존의 인위다. 복강으로 많은 중생이 보리심을 일으켰으나, 법화경은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물러나 소승에 안주한 이들도 있었다. 이런 중생을 득탈시키기 위해 열여섯 왕자는 각각 시방의 국토에 부처로 출세했고, 중생도 결연한 스승의 불국토에 태어나 교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사바세계에서 교화를 이어 가는 부처가 석존이라는 것이다.
강의는 이 설법으로 다음 네 가지가 밝혀졌다고 정리한다.
- 석존의 교화는 삼천진점겁의 아득한 과거부터 이어져 온 장구한 것이다.
- 그 교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 재세의 성문들은 삼천진점겁 과거에 석가보살의 교화로 법화경에 결연한 사람들이다.
- 지금 재세의 법화경 교화로 성문들은 과거의 결연을 성취해 득탈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인연을 알게 됨으로써 하근의 성문들도 개삼현일의 뜻을 깨닫고 법화경에 대한 믿음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삼천진점겁은 이렇듯 「부처가 왜 지금 이 중생에게 이 법을 설하는가」를 과거의 인연으로 풀어 준 법문이다. 천태대사가 법화경의 세 가지 교상 가운데 둘째로 꼽은 「화도시종 부시종(化導始終不始終)의 상(相)」 — 부처의 교화에 처음과 끝이 있음을 밝혔다는 점에서 제경과 다르다는 것 — 이 바로 이 대목에 근거한다.
오백진점겁 — 구원실성 개현의 네 가지 뜻
여래수량품 제16은 석존이 오백진점겁이라는 구원의 과거에 성도했고, 그 이래 늘 사바세계에서 설법 교화해 왔음을 밝힌다. 오백진점겁은 석존이 성불한 때부터 오늘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이다. 그 길이는 뒤에서 따로 살피고, 여기서는 수량품의 구원실성 개현, 곧 석존이 오백진점겁의 구원에 성불했으며 그 사실이 수량품에서 설해졌다는 것이 갖는 주요한 의의를 강의를 따라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구원실성은 석존의 본지(本地)를 밝힌 것이며 그 본지는 불생불멸의 영원한 부처라는 점이다. 수량품은 부처에게는 본래 입멸이 없으나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입멸을 나타낸다고 설한다. 구원실성의 개현이란 곧 석존의 상주하는 본지의 개현이다.
둘째, 구원실성의 부처인 석존과 이전 · 적문에서 설해진 여러 부처의 관계가 밝혀졌다는 점이다. 연등불 같은 과거불을 비롯해 이름이 다르고 수명의 길고 짧음이 다른 갖가지 부처가 설해져 왔지만, 그 부처들은 모두 구원실성의 석존이 성도한 이래 오늘에 이르는 「중간(中間)」에 중생의 근기가 날카롭고 무딘 데 따라 나타난 부처라고 수량품은 설한다. 이전 · 적문의 제불은 모두 구원실성의 부처의 수적이다. 제6장 전체가 이 점 위에 서 있다.
셋째, 사바세계야말로 본래 상주하는 부처가 머무는 상주의 국토임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구원실성의 석존은 늘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한다고 설해지며, 그 부처가 머무는 사바세계는 안온하여 무너지지 않는다고도 설해진다.
넷째, 삼계의 중생도 본래 구원실성의 부처와 같은 상주의 본지에 머물고 있음이 보여졌다는 점이다.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거기에는 생사도 물러남도 나옴도 없다고 설해지고, 또 중생이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심으로 부처를 뵙고자 하면 반드시 상주하는 부처가 법을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설해진다.
이 밖에도 천태대사가 밝힌 본문의 십묘(本門十妙)에서 보듯 구원실성의 개현에는 갖가지 의의가 있다. 강의는 그 상세한 고찰을 개근현원을 논하는 뒤의 장으로 미룬다(이 어서 제9 · 10장).
교주 · 국토 · 중생의 세 측면에서 본 구원실성의 의의는 「개목초」가 교주 · 국토 · 소화(所化)로 나누어 밝힌 대목과 겹친다. 제6장에서 그 어문을 직접 읽는다.
두 진점겁의 길이 — 산사도 셈하지 못하고 미륵도 사유하지 못하다
삼천진점겁은 석존이 성문들을 교화해 온 대통복강 이래의 시간이다. 화성유품에 따라 셈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국토를 갈아 티끌로 만든다. 그 티끌을 지니고 동쪽으로 가며 천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한 티끌을 떨어뜨려, 티끌이 다할 때까지 간다. 그렇게 지나온 국토를 — 티끌을 떨어뜨린 곳이든 아니든 — 모두 모아 다시 갈아 티끌로 만들고, 그 한 티끌을 한 겁으로 셈한다. 그 티끌 수만큼의 겁이 삼천진점겁이다.
삼천대천세계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주(四洲) · 사해 · 해와 달 · 허공 등으로 이루어진 소세계를 10억 개 모은 넓은 세계이므로, 이를 간 티끌 수부터가 이미 막대하다. 하물며 그 티끌 수의 천 배에 이르는 국토를 다시 간 티끌 수는 상상을 넘는다. 게다가 「겁」이라는 시간 단위는 일설에 1,600만 년에 해당한다고 하니, 삼천진점겁은 보통 사람의 사유를 끊은 장구한 시간이다. 그래서 화성유품은 산사(算師)나 그 제자도 셈할 수 없다고 설한다.
오백진점겁은 석존의 구원실성 이래의 시간이다. 셈법은 삼천진점겁과 거의 같으나 두 가지가 다르다.
첫째, 처음에 만드는 티끌이 삼천대천세계 하나를 간 것이 아니라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의 국토를 간 것이다.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기」란 500 × 1,000 × 10,000 × 100,000 × 나유타 × 아승기이며, 나유타나 아승기는 그 자체가 막대한 수의 단위다. 강의는 두 경우의 차이를 비유하자면 은하계 하나와 모든 은하를 모은 대우주의 차이라고 말한다.
둘째, 삼천진점겁은 동쪽으로 「천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한 티끌을 떨어뜨리지만, 오백진점겁은 동쪽으로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기의 나라」를 지날 때마다 한 티끌을 떨어뜨린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가는 국토의 수는 단순히 생각해도 삼천진점겁의 경우의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기 ×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기 ÷ 1,000」배가 된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국토를 간 티끌 수만큼의 겁보다 더 긴 시간이 오백진점겁이다. 강의는 그러므로 오백진점겁을 삼천진점겁에 견주어 「더 길다」는 비교의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비교를 끊은 길이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강의는 경문의 표현 차이에 주목한다. 삼천진점겁에 대해서는 「산사도 셈할 수 없다」고 했는데, 오백진점겁에 대해서는 「일생보처 등각의 보살인 미륵보살도 사유할 수 없다」고 했다. 구계 중생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미륵도 사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구계의 일체중생이 사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오백진점겁은 부처만이 알 수 있는 시간, 곧 영원을 뜻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강의는 이렇게 묻는다.
법화경의 뛰어남을 본 논사들 — 용수 · 천친 · 천태 · 묘락 · 전교
이 장에서 대성인은 묘락대사의 십쌍탄을 근거로 법화경이 뛰어난 까닭이 「이십 종」 있다고 하셨다. 강의는 이 말씀과 관련해, 역사 속에서 법화경의 탁월함을 논한 여러 스승의 설을 개관한다.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법화경의 탁월함을 바르게 파악한 논사 · 인사로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 네 스승의 이름을 드신다. 이 어서에도 뒤에 「如来滅後二千余年・竜樹・天親・天台・伝教の残したまえる所の秘法」(여래 멸후 이천여 년,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가 남기신 비법)이라 하신 대목이 있다(제12장). 묘락대사의 이름은 따로 들지 않으셨지만, 천태대사의 삼대부를 바르게 주석한 사람으로서 천태대사와 한 몸으로 다루신다고 강의는 본다. 그러므로 대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상 법화경을 바르게 파악한 사람을 꼽으면 용수 · 천친 · 천태 · 묘락 · 전교의 다섯 스승이 된다. 천태대사의 법화경관은 앞 장(제1편 제3장)에서 자세히 살폈으므로, 강의는 나머지 네 스승의 법화경관을 차례로 본다.
용수 — 『대지도론』이 본 이승작불의 법화경
용수의 저작에는 법화경을 주제로 논한 것이 없다. 그러나 『대품반야경』을 풀이한 『대지도론』에 법화경 인용이 스무 곳 남짓 있어, 그 인용 방식에서 용수의 법화경관을 엿볼 수 있다. 인용된 대목을 보면 용수는 주로 이승작불을 설한 곳에서 법화경의 특질과 탁월함을 본 것으로 보인다.
『대지도론』 권93은 법화경 방편품 제2의 「한 번 나무라고 부르면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一称南無仏)」는 문을 끌어 법화경은 모든 중생이 반드시 성불한다고 설함을 보이고, 이어 「또 성문의 사람은 모두 마땅히 작불하리라」고 하여 법화경이 성문의 작불을 설함을 보인 다음, 법화경과 다른 경의 차이를 이렇게 밝힌다.
法華経の中に畢定を説くが如きも、余経には退有り、不退あるを説く
법화경 가운데서는 필정(畢定)을 설하나, 다른 경에는 물러남이 있고 물러나지 않음이 있다고 설한다
다른 경은 일체중생이 반드시 성불한다고 설하지 않으나, 법화경은 일체중생의 성불이 「필정」 — 반드시 정해져 있음 — 이라고 설하며, 그 예로 「일칭남무불」의 문과 이승작불의 문을 든다는 것이다. 같은 권93에서는 「불법은 다섯 가지 불가사의 가운데 가장 제일이다. 이제 누진의 아라한이 도리어 작불하는 것은 오직 부처만이 능히 아신다」고 하여, 법화경의 이승작불이 갖가지 불가사의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불가사의이며 부처만의 내증의 법임을 보인다.
또 『대지도론』 권100은 「반야경보다 뛰어난 깊은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취지의 물음을 세우고 이렇게 답한다.
答えて曰く、般若波羅蜜は秘密の法に非ず。而して法華等の諸経には阿羅漢の決を受けて作仏するを説き、大菩薩は能く受持し用う。譬えば大薬師の能く毒を以て薬と為すが如し
답하여 이르되, 반야바라밀은 비밀의 법이 아니다. 그러나 법화 등의 제경에는 아라한이 수기를 받아 작불함을 설하며 대보살은 능히 이를 수지하여 쓴다. 비유하면 대약사가 능히 독으로 약을 만드는 것과 같다
법화경이 반야경보다 뛰어난 까닭은 다른 경에서 성불하지 못한다고 했던 이승의 작불을 설하기 때문이며, 이를 대약사가 독을 바꾸어 약으로 삼는 데 견주고, 그런 법화경이야말로 참된 비밀의 법이라고 한 것이다. 「독을 바꾸어 약으로 삼는다(変毒為薬)」는 말이 법화경의 공덕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게 된 원천의 하나가 이 대목이다.
『대지도론』에는 법화경 본문에 관해서도 주목할 기술이 있다. 권26은 「제도할 중생이 있는데 부처는 어찌하여 입멸하는가」라는 물음에,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 데는 「현전의 득도」와 「멸후의 득도」 두 가지가 있다고 답하고, 그 증거로 여래수량품의 양의병자(良医病子)의 비유를 든다. 약사가 아들들을 위해 약을 지어 주고 다른 나라로 떠난 것은 중생에게 「멸후의 득도」가 있음을 보인 것이라는 풀이다. 강의는 이것이 법화경은 멸후의 중생을 위해 설해졌다고 밝히는 이 어서 제7장 이하의 가르침과 맞아떨어진다고 본다. 이 밖에 지용의 보살을 부처의 법성 자신의 대권속으로 자리매김한 기술도 보인다.
정리하면, 『대지도론』은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이므로 반야경의 법개회(法開会) — 모든 법은 반야바라밀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 — 를 강조하는 데 주안을 둔다. 그러나 반야경에 설해지지 않은 인개회(人開会)를 언급해야 할 때는 오로지 법화경의 이승작불을 들고, 또 그 법화경을 반야경보다 뛰어난 경으로 자리매김한다.
천친 — 『법화경론』의 십칠종 이명 · 삼평등 · 십무상
천친(세친)의 『법화경론』은 인도에서 나온 법화경 주석서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법화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내용은 여러 갈래에 걸치지만, 강의는 천친이 법화경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십칠종의 이명」 · 「삼평등」 · 「십무상」을 소개한다.
첫째, 십칠종의 이명. 천친은 『법화경론』 첫머리에서 서품 제1을 풀이하며, 서품에는 법화경의 「깊은 공덕」을 드러내는 것으로 법화경의 「십칠종의 이름」이 나온다고 밝힌다. 그 이름과 그렇게 부르는 까닭을 강의를 따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1) 무량의경 — 제불여래의 가장 뛰어난 경계인 깊은 묘법의 뜻을 다 설하므로
- (2) 최승수다라 — 경 · 율 · 논 삼장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묘장이므로
- (3) 대방광경 — 무량한 대승 경법 가운데 선법이 성립하므로
- (4) 교보살법 — 근기가 익은 보살을 교화하기 위해 설하므로
- (5) 불소호념 — 여래에 의해 법화경의 법문이 있으므로
- (6) 일체제불비밀법 — 부처만이 아는 깊은 법문이므로
- (7) 일체제불지장 — 여래의 공덕 삼매의 근원이 법화경이므로
- (8) 일체제불비밀처 — 법을 받을 그릇이 못 되는 미숙한 중생에게는 아직 밝히지 않았으므로
- (9) 능생일체제불경 — 제불이 법화경을 듣고 대보리를 성취했으므로
- (10) 일체제불지도량 — 제불의 대보리를 성취하는 법문은 법화경이지 다른 경이 아니므로
- (11) 일체제불소전법륜 — 법화경은 일체의 장애를 능히 깨뜨리므로
- (12) 일체제불견고사리 — 법화경에서는 여래의 진실한 법신이 상주하는 것으로 설해지므로
- (13) 일체제불대교방편경 — 부처는 법화경을 근본으로 중생을 위해 인 · 천 · 이승 등 일체의 방편 선법을 설하므로
- (14) 설일승경 — 법화경에서 여래의 대보리의 구경의 체가 드러나므로
- (15) 제일의주 — 법화경의 법문은 곧 제불여래 법신의 구경의 머무는 곳이므로
- (16) 묘법연화경 — 출수(出水)의 뜻과 화개(華開)의 뜻을 보이므로
- (17) 최상법문 — 위의 열여섯 이름이 모두 최상의 법문임을 보이므로(열여섯 이름의 총명)
둘째, 삼평등. 천친은 법화경에 중생의 「세 가지 전도된 믿음」을 다스리기 위해 「세 가지 평등」이 설해졌다고 한다. 세 가지 전도된 믿음이란 ① 부처가 설한 승(乘)에 이승 · 삼승 같은 갖가지 구별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 ② 세간과 열반이 다르다고 고집하는 것, ③ 불신과 중생이 다르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법화경은 ① 승평등 — 부처가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일불승만을 설함, ② 세간열반평등 — 중생이 머무는 세간과 부처가 머무는 열반의 경계가 평등무차별함, ③ 신평등 — 여래의 법신과 중생의 법신이 평등무차별함을 설한다. 그리고 ①의 증거로는 이승작불의 수기를, ②와 ③의 증거로는 열반에 든 다보여래가 이 국토에 나타난 일을 든다.
셋째, 십무상. 십무상은 여래의 법신과 중생의 법신이 평등무차별함을 「무상의(無上義)」로 삼고, 이 무상의가 법화경에 여러 형태로 설해진 것을 열 가지로 요약해, 법화경이야말로 무상의 경임을 밝힌 것이다. 『법화경론』은 대부분 이름과 설해진 품만 들 뿐이므로, 강의는 『법화경론』의 다른 대목을 참고해 각각의 의의를 추찰한다.
- 종자무상(약초유품 제5) — 갖가지 초목이 모두 같은 대지에서 나고 같은 비에 적셔져 자라듯, 부처는 갖가지 법을 설하는 듯하나 실은 일상일미의 평등한 법을 설하고, 중생도 갖가지 법을 행하는 듯하나 실은 똑같이 성불을 위한 보살행을 행한다. 갖가지 모습의 중생이 모두 같은 불성의 종자에서 자라났음이 밝혀지므로 종자무상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 행무상(화성유품 제7) — 삼천진점겁 과거의 대통복강 이래 늘 묘법연화경을 설해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의 행의 무상을 말한다.
- 증장력무상(화성유품 제7) — 화성보처의 비유에서 부처는 험한 번뇌의 길을 넘게 하려고 화성을 만들어 잠시 쉬게 한 뒤 보처로 향하도록 격려한다. 중생의 수행을 깊게 해 가는 부처의 힘의 무상이다.
- 영해무상(오백제자수기품 제8) — 의리주(衣裏珠)의 비유는 자신 안에 불성이 있다는 성문들의 깨달음을 비유로 보인 것이다. 그런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 부처의 힘의 무상이다.
- 청정국토무상(견보탑품 제11) — 보탑이 열릴 때 삼변토전으로 사바세계와 시방의 불국토가 청정한 하나의 불국토로 통일된다. 불국토의 무상이다.
- 설무상(안락행품 제14) — 계중명주(髻中明珠)의 비유는 법화경이 난신난해하여 설해지는 일이 드묾을 비유한 것이다. 법화경이 무상의 불설임을 보인다.
- 교화중생무상(종지용출품 제15) — 석존이 무량한 지용의 보살을 구원 이래 교화해 왔음이 밝혀져, 중생을 교화하는 무상의 불력이 보인다.
- 성대보리무상(여래수량품 제16) — 『법화경론』은 수량품에 응불 · 보불 · 법불의 세 가지 보리가 갖추어져 밝혀졌으므로 무상이라 한다. 응불보리는 가야성 가까운 보리수 아래에서 석존이 이룬 보리, 보불보리는 오백진점겁 구원에 성취한 이래의 상주하는 보리, 법불보리는 「여래는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한다」 등의 문에 보이는, 중생계가 곧 열반계라는 진여의 법이다. 이것이 부처의 깨달음의 체이므로 법불보리라 한다.
- 열반무상(여래수량품 제16) — 양의병자의 비유에서 여래는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낸다고 설하는데, 이 열반의 진실한 모습을 무상이라 한다.
- 승묘력무상 — 주로 본적 이문의 유통분 여러 품에 보이는 것으로, 천친은 이를 「법력」 · 「지력」 · 「수행력」으로 나눈다. 「법력」은 분별공덕품 제17의 재세 중생의 득탈과 사신오품의 공덕, 수희공덕품 제18의 오십전전의 공덕, 법사공덕품 제19의 육근청정의 공덕 등을 얻게 하는 법화경의 경력이다. 「지력」은 법사품 제10 · 권지품 제13 · 안락행품 제14 등에 설해진 석존 멸후의 갖가지 법화경 수지의 모습으로, 불성이 가까이 있다는 결정심으로 법화경을 수지하므로 대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수행력」은 여래신력품 제21의 광장설상 등, 묘음보살품 제24 ·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에 설해진 갖가지 공덕을 가리키며, 중생의 수행을 장려하고 옹호하는 갖가지 힘을 뜻한다.
두 논사의 한계 — 「알고서도 아직 끌어내지 못했다」
이처럼 용수와 천친은 적문의 개삼현일 · 이승작불을 중심으로 법화경의 특질과 탁월함을 파악했다. 그러나 본문의 의의는 거기에 덧붙여 보일 뿐이고, 천태대사처럼 본적 이문의 교상을 바탕으로 일념삼천의 관법을 세우지도 않았다. 강의는 여기에 대성인의 다음 말씀이 나온 까닭이 있다고 본다.
竜樹・天親・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但我が天台智者のみこれをいだけり
용수 · 천친은 알고서도 아직 끌어내지 않았고, 다만 우리 천태지자만이 이를 품으셨느니라
迹門の一分之を宣べて本門と観心とを云わず
적문의 일부분을 이를 펴고 본문과 관심을 말하지 않았느니라
묘락 — 『법화문구기』의 십쌍탄
묘락대사는 천태대사 이후 중국 불교계에서 법상종 · 화엄종 · 진언종 · 선종 등이 대두하는 흐름에 맞서 천태대사가 설한 뜻을 명확히 하는 데 힘쓴 사람이다. 특히 이 여러 종과 대항할 필요에서 법화경 제일의 뜻을 한층 강하게 내세웠다. 이 장에서 언급된 『법화문구기』 권4하의 십쌍탄은 열 쌍 스무 구로 요약해 법화경을 찬탄한 것으로, 묘락대사의 법화경관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 문언과 근거가 되는 품을 강의를 따라 보이면 다음과 같다.
- (1)二乗に近記を与え이승에게 가까운 수기를 주고방편품 제2 · 수학무학인기품 제9如来の遠本を開く여래의 먼 본을 연다여래수량품 제16
- (2)随喜は第五十の人を軟じ수희는 제오십의 사람을 찬탄하고수희공덕품 제18聞益は一生補処に至る듣는 이익은 일생보처에 이른다분별공덕품 제17
- (3)釈迦は五逆の調達を指して本師と為し석가는 오역의 조달을 가리켜 본사라 하고제바달다품 제12文殊は八歳の竜女を以て本化と為す문수는 여덟 살 용녀를 본화라 한다제바달다품 제12
- (4)凡そ一句を聞くにも咸く授記を与う무릇 한 구절을 들어도 다 수기를 준다법사품 제10経名を守護するに功量るべからず경의 이름을 수호하는 공은 헤아릴 수 없다법사품 제10
- (5)品を聞いて受持するは永く女質を辞し품을 듣고 수지하면 길이 여인의 몸을 떠나고약왕보살본사품 제23若し聞いて読誦するは不老不死なり만약 듣고 독송하면 불로불사다약왕보살본사품 제23
- (6)五師法師は現に相似を得오종법사는 현세에 상사를 얻고법사공덕품 제19四安楽行は銅輪に入る사안락행은 동륜에 든다안락행품 제14
- (7)若し悩乱する者は頭七分に破れ만약 괴롭히는 자는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지고다라니품 제26供養することある者は福十号に過ぎたり공양하는 자는 복이 십호를 넘는다법사품 제10 · 약왕보살본사품 제23
- (8)況や已今当の説は一代に絶えざる所하물며 이금당의 설은 일대에 끊이지 않는 바법사품 제10其の教法歎ずるに七喩を以て称揚す그 교법을 찬탄함에 일곱 비유로써 칭양한다약왕보살본사품 제23
- (9)地より湧出せるをば阿逸多一人も識らず땅에서 솟아난 이를 아일다는 한 사람도 알지 못하고종지용출품 제15東方の蓮華は竜尊王未だ相本を知らず동방의 연화는 용존왕도 아직 그 근본을 알지 못한다묘음보살품 제24
- (10)況や迹化には三千の塵点を挙げ하물며 적화에는 삼천의 진점을 들고화성유품 제7本成には五百の微塵に喩えたり본성에는 오백의 미진에 비유했다여래수량품 제16
- (1) 총괄
- (2)~(6) 수행의 공덕
- (7) 수호와 공양
- (8)(9) 교판
- (10) 교주와 중생
강의는 이 십쌍탄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제1쌍은 법화경 본적 이문의 가장 중요한 법문을 들어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까닭을 총괄적으로 보인다. 앞 구절은 적문의 이승작불의 수기를, 뒤 구절은 본문 구원실성의 개현을 가리키며, 법화경은 바로 이 두 큰 법문으로 묘법을 열어 드러낸 경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태대사의 본적 이문의 구분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둘째, 제2쌍부터 제6쌍까지는 법화경 수행의 갖가지 공덕을 각 품의 설상에 맞춰 보이고 그 공덕을 찬탄한다. 이것들이 제1쌍 다음에 놓인 것은 제1쌍의 두 큰 법문으로 열린 묘법의 공덕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제8쌍과 제9쌍은 법화경 제일의 교판을 보인다. 제8쌍은 법사품의 이금당과 약왕품의 십유를 들어 부처 스스로 법화경을 제일의 교법이라 판정했음을 보이고, 제9쌍은 아일다(미륵)조차 땅에서 솟아난 지용의 보살을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는 용출품의 설과, 팔만사천의 연꽃을 만들어 낸 묘음보살의 힘의 근본을 용존왕조차 알지 못했다는 묘음품의 설을 들어 법화경이 부처만이 다 아는 깊은 법문임을 보인다.
넷째, 마지막 제10쌍은 법화경을 설한 교주 석존과 교화받는 중생의 관계에 관한 본적 이문의 설을 든다. 중생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특히 본문의 오백진점겁은 석존 멸후 중생의 성불에 궁극의 근거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묘락대사는 이를 맨 끝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이는 천태대사가 밝힌 법화경의 세 가지 교상 가운데 제2 · 제3 교상(화도시종 부시종의 상 · 사제원근의 상)과 대응하며, 천태대사도 이것을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근본적 이유로 삼았음은 앞 장에서 본 그대로다.
이렇게 보면 십쌍탄은 먼저 제1쌍에서 본적 이문의 묘법 개현을 가장 중요한 법문으로 들고, 이어 여러 품의 설상을 따라 열린 묘법의 공덕을 보이며, 다시 법화경 제일의 교판을 들고, 마지막으로 중생에게 가장 긴요한 법문을 보이는 구성이다. 대성인이 이 장에서 「삼오의 이법」을 「최요」라 하신 까닭도, 그것이 멸후 말법의 중생에게 가장 중요한 법문이기 때문이라고 강의는 받아들인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십쌍탄의 맨 끝 제10쌍 「삼오의 이법」이 교주와 중생의 관계를 밝힌 법문이며, 대성인이 이를 「최요」라 하신 것은 멸후 말법 중생의 성불에 궁극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교 — 『법화수구』의 십승
전교대사의 법화경관을 아는 데 참고가 되는 저작으로 『법화수구』와 『수호국계장』을 들 수 있다. 두 책 모두 법상종의 도쿠이치(徳一)와의 논쟁을 계기로 쓰였는데, 그 가운데 『법화수구』는 도쿠이치와의 논쟁서로는 마지막 것으로 여겨지며, 논쟁 과정에서 쓰인 『수호국계장』보다 더 종합적인 관점에서 법화경이 가장 뛰어남을 밝혔다.
『법화수구』는 곳곳에 법화경의 요문을 끌어 「십승」, 곧 열 항목에 걸쳐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까닭을 밝힌다. 법상종만이 아니라 삼론종 · 화엄종 등의 이름도 들어, 총체적으로 「다른 종이 의지하는 경」과 「천태법화종이 의지하는 법화경」의 승렬을 밝히며, 또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까닭으로 「즉신성불」을 중시한다. 이로 보아 이름은 들지 않았지만 새로 들어온 진언종을 염두에 두고 법화경의 뜻을 보였음을 엿볼 수 있다.
- (1) 불설이현진실승 — 법상종 도쿠이치의 「삼승진실 · 일승방편」과 「오성각별」을 총괄해 파하고, 「일승진실 · 삼승방편」과 일체중생의 성불을 법화경 경문으로 밝힘
- (2) 불설경명시의승 — 천친이 밝힌 이명 가운데 「무량의경」의 이름에 따라, 제경은 인분의 역겁수행을 설하나 법화경은 과분의 성불의 대직도를 밝힘
- (3) 무문자설과분승 — 부처 스스로 묻지 않았는데 과분의 법을 설한 수자의(随自意)의 가르침
- (4) 오불도동귀일승 — 방편품의 오불이 먼저 방편의 제경을 설하고 뒤에 일불승으로 귀일시킨다고 한 그 일불승을 밝힘
- (5) 불설제경교량승 — 법사품의 이금당에서 법화경은 수자의이므로 난신난해, 제경은 수타의이므로 이신이해
- (6) 불설십유교량승 — 약왕보살본사품의 열 가지 비유 각각의 관점에서 법화경 최승의 이유를 보임
- (7) 즉신육근호용승 — 법사공덕품의 육근청정, 부모가 낳은 몸 그대로의 「즉신」의 공덕
- (8) 즉신성불화도승 — 제바달다품의 용녀 성불은 역겁수행이 아니라 「묘법의 경력」에 의한 즉신성불
- (9) 다보분신부촉승 — 견보탑품에서 법화경은 석가 · 다보 · 분신 제불의 삼불을 위해 부촉된 경
- (10) 보현보살권발승 — 보현보살권발품에서 멸후 법화경 수지자를 보현이 수호하는 것은 경력에 의한 것이며 이 수호로 빨리 성불함
이 십승에 일관되게 보이는 특징은 법화경을 부처의 과분을 밝힌 수자의의 경으로 파악하고, 그러므로 대개 인분을 설하는 데 그치는 다른 종의 소의경보다 뛰어나다고 본 점이다. 『법화수구』의 맺는 글에 있는 「천태법화종은 능설의 부처는 구원의 실성이요, 소설의 경은 계중의 명주다(天台法華宗は、能説の仏は久遠の実成なり。所説の経は髻中の明珠なり)」라는 문에서 분명하듯, 전교대사는 법화경을 구원의 부처가 본지에서 깨달은 법을 밝힌 경으로 파악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이 편 전체의 길잡이가 된다. 「능설의 부처는 구원의 실성」 — 경의 뛰어남은 마침내 그 경을 설한 부처의 뛰어남으로 돌아간다. 대성인이 이 장에서 경과 경의 비교를 「삼오의 이법」이라는 부처의 인위 · 과위의 비교로 옮겨 놓으신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약왕보살본사품은 법화경이 제경 가운데 가장 뛰어남을 바다 · 수미산 · 달 · 해 등에 견주는 열 가지 비유(十喩)를 설한다. 십쌍탄 제8쌍의 「칠유」와 십승 (6)의 「십유」는 모두 이 대목을 가리킨다.
본문
三とは三千塵点劫なり諸経は或は釈尊の因位を明すこと或は三祇・或は動逾塵劫・或は無量劫なり、 梵王云く此の土には二十九劫より已来知行の主なり第六天・帝釈・四天王等も以て是くの如し、 釈尊と梵王等と始めて知行の先後之を諍論す爾りと雖も一指を挙げて之を降伏してより已来梵天頭を傾け魔王掌を合せ三界の衆生をして釈尊に帰伏せしむる是なり、
「삼」이란 삼천진점겁이니라. 제경은 석존의 인위(因位)를 밝히되 혹은 삼기(三祇), 혹은 동유진겁(動逾塵劫), 혹은 무량겁이라 하느니라. 범왕이 이르되 「이 국토에서는 이십구 겁 이래로 지행(知行)의 주인이니라. 제육천 · 제석 · 사천왕 등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하니, 석존과 범왕 등이 처음으로 지행의 선후를 쟁론하였느니라. 그러하나 한 손가락을 들어 이를 항복시킨 이래로 범천은 머리를 숙이고 마왕은 합장하여 삼계의 중생으로 하여금 석존에게 귀복하게 한 것이 이것이니라.
又諸仏の因位と釈尊の因位と之を糾明するに諸仏の因位は或は三祇或は五劫等なり釈尊の因位は既に三千塵点劫より已来娑婆世界の一切衆生の結縁の大士なり、 此の世界の六道の一切衆生は他土の他の菩薩に有縁の者一人も之無し、
또 제불의 인위와 석존의 인위를 규명하건대, 제불의 인위는 혹은 삼기, 혹은 오겁 등이니라. 석존의 인위는 이미 삼천진점겁 이래 사바세계 일체중생의 결연의 대사(大士)이시니라. 이 세계 육도의 일체중생은 타토(他土)의 다른 보살에게 인연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느니라.
法華経に云く「爾の時に法を聞く者は各諸仏の所に在り」等云云、 天台云く「西方は仏別に縁異り故に子父の義成ぜず」等云云、 妙楽云く「弥陀釈迦二仏既に殊なり況や宿昔の縁別にして化導同じからざるをや結縁は生の如く成熟は養の如し生養縁異れば父子成ぜず」等云云、 当世日本国の一切衆生弥陀の来迎を待つは譬えば牛の子に馬の乳を含め瓦の鏡に天月を浮ぶるが如し、
법화경에 이르되 「그때에 법을 들은 자는 저마다 제불의 처소에 있느니라」 등 운운. 천태가 이르되 「서방은 부처가 따로이고 인연이 다르니, 그러므로 자부(子父)의 뜻이 성립하지 않느니라」 등 운운. 묘락이 이르되 「미타와 석가 두 부처는 이미 다르니라. 하물며 숙석(宿昔)의 인연이 따로여서 화도가 같지 않음에랴. 결연은 낳음과 같고 성숙은 기름과 같으니, 낳고 기르는 인연이 다르면 부자가 성립하지 않느니라」 등 운운. 당세 일본국의 일체중생이 미타의 내영을 기다리는 것은, 비유하면 소의 새끼에게 말의 젖을 물리고 기와 거울에 하늘의 달을 띄우려 함과 같으니라.
어구 풀이
- 因位인위
- 부처가 되기 전, 성불의 원인이 되는 수행을 하던 지위. 과위(果位)의 반대말. 이 장은 삼천진점겁에 밝혀진 석존의 인위를 제경의 인위와 견준다.
- 三祇삼기
-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의 준말. 장교(藏敎)에서 설하는 보살 수행의 기간으로, 석존은 삼아승기겁 동안 제불 아래서 육바라밀을 닦고 다시 백 겁 동안 삼십이상의 원인이 되는 백복(百福)을 닦은 뒤 성도했다고 한다(三祇百劫).
- 動逾塵劫동유진겁
- 「動もすれば塵劫を逾ゆ」 — 자칫하면 진겁을 넘는다고 읽는다. 통교(通敎)의 보살이 제9 보살지에서 이타행을 하는 기간이 그만큼 길다는 뜻.
- 無量劫무량겁
- 별교(別敎)에서 설하는 보살행의 기간. 무량한 사제(四諦)와 무량한 계위를 거쳐 무명을 끊어 가므로 무량겁이라 한다.
- 梵王범왕
- 대범천왕. 색계 초선천의 왕으로, 세계를 만든 주인이라 자처했다고 경론에 전한다.
- 二十九劫이십구 겁
- 세계가 성립한 때부터 석존 출세 때까지의 겁수로 해석된다. 성겁 이십 소겁을 지나 주겁 제9 소겁(인수 백 세의 감겁)에 석존이 출현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 知行지행
- 영주가 영지를 다스림. 「지행의 선후」를 다툰다는 것은 누가 참된 사바세계의 주인인가를 다툰 것이다.
- 第六天제육천
- 욕계의 가장 높은 하늘인 타화자재천. 그 왕이 제육천의 마왕으로, 석존의 성도를 방해했다.
- 一指を挙げて한 손가락을 들어
- 석존이 성도할 때 마왕에게 자신의 과거 수행이 마왕의 복덕보다 뛰어남을 증명하려고 대지를 가리켜 지신(地神)을 불러낸 동작. 항마성도의 상징.
- 五劫오겁
- 『무량수경』에서 아미타불의 인위인 법장보살이 사유하고 수행했다고 설하는 기간.
- 結縁の大士결연의 대사
- 중생과 불연을 맺은 대보살. 「대사」는 보살의 미칭. 삼천진점겁 대통복강 때의 제16왕자 석가보살을 가리킨다.
- 有縁유연
- 부처 · 보살과 중생 사이에 인연이 있음. 반대는 무연.
- 爾の時に法を聞く者は各諸仏の所に在り그때 법을 들은 자는 저마다 제불의 처소에 있다
- 화성유품의 문. 대통복강 때 법을 들은 중생은 지금 저마다 인연 있는 부처의 국토에 있다는 뜻.
- 子父の義자부의 뜻
- 부처와 중생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뜻. 신해품 장자궁자의 비유를 두고 한 말.
- 生養생양
- 낳음과 기름. 묘락대사는 과거의 결연을 「낳음」에, 그 뒤 근기를 성숙시키는 교화를 「기름」에 견주었다.
- 来迎내영
- 임종 때 아미타불이 성중과 함께 와서 극락으로 맞아 간다는 정토교의 믿음.
- 牛の子に馬の乳소의 새끼에게 말의 젖
-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추려 함의 비유. 「瓦の鏡に天月」(기와 거울에 하늘의 달)도 같은 뜻으로, 비출 수 없는 것에 비추려 함을 말한다.
이 장의 자리 — 인위로 승렬을 가리다
제4장에서 「삼오의 이법」을 표하신 대성인은 이 장에서 그 첫째인 「삼」, 곧 삼천진점겁을 다루신다. 삼천진점겁은 화성유품에서 밝힌 석존의 인위 — 대통지승불의 제16왕자로서 법화경을 복강한 때 이래의 보살 시절 — 의 시간이다. 이 장은 세 절로 되어 있다.
첫째 절은 제경이 설하는 석존의 인위(삼기 · 동유진겁 · 무량겁)를 들고, 석존이 성도할 때 범천 · 마왕과 「지행의 선후」를 다툰 일을 언급하신다. 둘째 절은 석존 이외의 제불의 인위(삼기 · 오겁)를 들고, 석존만이 삼천진점겁 이래 사바세계 일체중생의 결연의 대사이며 이 세계 중생 가운데 다른 국토의 보살과 인연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하신다. 셋째 절은 화성유품 · 천태 · 묘락의 세 문을 끌어 아미타불과 사바세계 중생 사이에는 부자의 뜻이 성립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당세 일본국 사람들이 아미타의 내영을 기다리는 것은 「소의 새끼에게 말의 젖을 물리는 것」과 같다고 맺으신다.
흐름은 분명하다. 먼저 범천과의 비교, 이어 다른 부처와의 비교, 마지막으로 다른 부처 가운데 대표인 아미타와의 비교로 좁혀 들어간다. 강의는 이 장에서 대성인이 특히 아미타불의 인위를 드신 까닭이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강조하는 염불의 가르침을 파절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제경이 설하는 석존의 인위 — 삼기 · 동유진겁 · 무량겁
첫째 절에서 대성인은 법화경 이외의 제경에 설해진 석존의 인위 수행을 드신다. 「삼기」 · 「동유진겁」 · 「무량겁」은 각각 천태 교학의 화법사교 가운데 장교 · 통교 · 별교에서 설하는 보살 수행의 기간이다.
장교의 삼기백겁
「삼기」는 삼아승기겁의 준말로, 권교에서 설한 보살 수행의 기간이다. 장교(소승)에서는 석존이 과거에 삼아승기겁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제불 아래서 육바라밀을 닦고, 다시 백 겁 동안 삼십이상의 원인이 되는 백복의 수행을 한 뒤 사람 가운데 태어나, 보리수 아래 적멸도량에서 삼십사심(三十四心)으로 번뇌를 끊고 성도했다고 한다.
강의는 그 구체적인 전승으로 두 논서를 든다. 『대비바사론』 권178은 석존이 인위에서 과거의 석가모니불부터 차례로 칠만오천 부처를 섬겨 제1아승기겁을, 다시 칠만육천 부처를 섬겨 제2아승기겁을, 연등불 때부터 칠만칠천 부처를 섬겨 승관불 때에 제3아승기겁을 성취했다고 한다. 또 『대지도론』 권4는 과거의 석가모니불부터 시기불까지의 제1아승기겁에는 자신이 성불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고, 시기불부터 연등불까지의 제2아승기겁에는 마음속으로 성불할 것을 알았으며, 연등불부터 비바시불까지의 제3아승기겁에는 마음으로 또렷이 알아 입으로 작불을 말해도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대지도론』의 이 설은 천태대사의 『법화현의』에서도 쓰인다.
통교의 동유진겁
「동유진겁」은 「動もすれば塵劫を逾ゆ」 — 자칫하면 진겁을 넘는다 — 로 읽으며, 통교 보살의 수행 기간이 그만큼 길다는 뜻이다.
통교는 삼승이 함께 밟는 수행의 단계로 십지(十地)를 설한다. 그 제7 이변지(已弁地)에서 삼계의 견사혹을 끊고, 제8 벽지불지에서 견사혹의 습기까지 끊는다. 이승은 이 단계에서 증득을 취하려는 마음을 일으켜 수행을 그친다. 그러나 보살은 번뇌를 다 끊어 버리면 삼계에 태어나 이타행을 할 수 없게 되므로, 무생법인의 경지에 들어가 일부러 번뇌의 습기를 지닌 채 제9 보살지로 나아간다. 이 제9지에서 보살로서 이타행을 하는 기간이 「동유진겁」, 곧 자칫 진겁을 넘을 만큼 길다고 한 것이다. 그 뒤 제10 불지에서 비로소 번뇌의 습기를 다 끊고 성도하며, 이로써 대자비 · 십력 · 사무외 · 십팔불공법 등 일체의 공덕을 갖춘다고 한다.
별교의 무량겁
「무량겁」은 별교에서 설하는 보살행의 기간이다. 별교는 고 · 집 · 멸 · 도의 사제에 무량한 종류가 있다고 설한다. 집은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 고는 그 결과인 생사, 도는 괴로움을 없애는 수행, 멸은 그 수행의 결과인 깨달음이다. 요컨대 사제는 미혹의 인과와 깨달음의 인과인데, 별교는 그 인과에 무량한 종류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불을 향한 보살의 수행에도 무량한 차별이 있으며, 그 무량한 단계가 경에 따라 사십일지 · 오십이위 · 오십일위 등 여러 형태로 정리된다. 별교의 계위가 지닌 특징은 중도의 이치에 대한 미혹, 곧 무명을 끊어 가는 자리를 구분했다는 데 있다. 별교에서는 무명을 포함한 무량한 모든 미혹을 다 끊고 중도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성불이며, 그에 필요한 수행 기간을 「무량겁」이라 했다.
원교의 인위와 「무차위의 차위」
강의는 장 · 통 · 별 삼교가 설하는 「삼기」 · 「동유진겁」 · 「무량겁」이라는 세 가지 인위가 단순히 수행 기간의 길고 짧음을 보인 것이 아니라, 삼교의 수행관 · 성불관의 차이를 보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 차이를 대성인이 「소승소불요문(小乘小佛要文)」에 실으신 도표를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장교에서는 삼십사심으로 견사혹을 끊고 성불한다고 설하므로, 장교의 「삼기백겁」의 보살은 아직 견사혹을 끊지 않은 보살이다. 통교에서는 견사혹을 끊고 제9지의 보살행을 거친 뒤 진사혹을 끊고 성불한다고 설하므로, 통교의 「동유진겁」의 보살은 이미 견사혹을 끊은 보살이다. 별교에서는 견사 · 진사 두 미혹뿐 아니라 중도의 이치에 대한 무명까지 끊어야 성불한다고 설하므로, 별교의 보살은 무명을 끊어 가는 중인 보살이다.
「소승소불요문」은 여기에 더해 원교의 인위를 「사십일품단무명」, 과위를 「사십이품단무명의 부처」라고 보인다. 원교의 보살은 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 · 등각까지 사십일위에서 사십일품의 무명을 끊지만 마지막 원품(元品)의 무명은 아직 남겨 두고 있으며, 원품의 무명을 끊으면 묘각의 부처가 된다.
무명을 끊는다는 것은 중도의 이치를 증득하는 것이므로, 원교의 보살은 십주부터 등각까지 사십일위에서 분분(分分)의 중도를 증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천태대사에 따르면 원교의 보살은 십주 이전의 십신위에서 이미 중도의 이치를 거의 이해해 무명을 조복하고 육근청정의 공덕을 얻으며, 그 이전의 초심 범부위에서도 중도 제법실상에 대한 믿음을 세워 「일체법이 곧 불법」임을 통달해 안다.
이처럼 원교의 보살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도실상의 이치에 즉해 수행을 진행하며, 거기에 원교 인위의 본질이 있다. 늘 중도의 이치에 즉해 있다는 것은, 천태대사가 「무차위의 차위(無次位の次位)」라 했듯, 원교 보살의 계위가 그때그때 보살의 상태를 일단 계위로 나타낸 것일 뿐 반드시 한 칸씩 오르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어느 계위에서도 곧바로 성불할 수 있으며, 이 측면에서 천태대사는 원교의 위를 「육즉위(六即位)」로 표현했다.
이에 비해 장 · 통 · 별 삼교의 보살은 깊이는 달라도 모두 번뇌를 끊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므로 반드시 계위를 차례로 오르는 수행 형태가 된다. 대성인이 이 어서에서 장 · 통 · 별 삼교의 인위를 「或は三祇・或は動逾塵劫・或は無量劫」라고 나란히 들어 거의 같게 다루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강의는 본다.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어도, 단혹(斷惑)을 전제로 계단을 밟아 오르는 역겁수행이라는 점에서는 한 갈래이기 때문이다.
「소승소불요문」의 도표는 원문이 계통도(괘선) 형식이며, 강의도 그 형태를 그대로 옮겨 실었다. 장 · 통 · 별 · 원의 각 과위에 초좌 · 천의 · 연화좌 · 허공좌의 좌(座)를 배당하는 것은 사교의 부처를 열응 · 승응 · 보 · 법의 네 몸에 배당하는 천태의 전통적 해석과 같은 계열이다.
지행의 쟁론과 항마성도 — 한 손가락을 들다
첫째 절 뒤쪽에서 대성인은 석존이 성도할 때 사바세계 「지행의 선후」를 두고 대범천왕 등 천인들과 쟁론했다고 말씀하신다. 「지행」이란 영주가 영지를 다스리는 것이니, 그 「선후」를 다투었다는 것은 석존과 대범천왕 가운데 누가 참된 사바세계의 주인인가를 다투었다는 뜻이다.
「이십구 겁」의 뜻
먼저 대범천왕의 말로 「此の土には二十九劫より已来知行の主なり」(이 국토에서는 이십구 겁 이래로 지행의 주인이니라)라고 하셨다. 강의는 이 「이십구 겁」을 세계가 성립한 때부터 석존이 출세한 때까지의 겁수로 본다. 불교에서는 성겁 · 주겁 · 괴겁 · 공겁의 사겁을 세계 생성 · 소멸의 주기로 삼고 사겁은 각각 이십 소겁씩이라 하는데, 석존이 출현한 것은 주겁의 제9 감겁, 인수 백 세 때라고 하기 때문이다. 곧 「이십구 겁」은 세계가 형성된 성겁 이십 소겁을 지나 주겁의 제9 소겁에 이르는 기간이다. 대범천왕의 말은 세계 성립 이래 줄곧 삼계를 지배해 온 것은 자신을 비롯한 천계의 여러 왕이라는 주장이다.
「한 손가락을 들어」의 뜻
이 주장에 대해 석존은 「一指を挙げて之を降伏」 — 한 손가락을 들어 이를 항복시켰다고 하신다. 「한 손가락을 든다」는 것은 『마하지관』 권1에 「大覚世尊功を積みて行満じたまい、六年に渉って以て見を伏し、一指を挙げて魔を降したまう」(대각세존은 공을 쌓아 행이 원만해지시고, 육 년에 걸쳐 견(見)을 조복하시며, 한 손가락을 들어 마를 항복시키셨다)라고 한 것처럼, 석존이 성도할 때 마를 항복시킨 몸짓이다. 제육천의 마왕이 세계의 왕이 될 수 있었던 복덕보다 석존의 수행과 과보가 더 뛰어남을 증명하려고 대지를 가리켜 지신을 불러낸 동작이다. 석존 항마성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여러 경론에 널리 전해지며, 갖가지 불상과 불화에도 표현되었다.
성도 때의 항마 경과는 경마다 조금씩 다르다. 강의는 「한 손가락을 든다」의 뜻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 『과거현재인과경』과 『불본행집경』 두 경의 설을 소개한다.
『과거현재인과경』의 항마
『과거현재인과경』은 대략 다음과 같이 설한다. 석존이 보리수 아래 단정히 앉아 사유하며, 정각을 이루기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를 들은 제육천의 마왕은 자기가 다스리는 욕계의 중생이 석존에게 빼앗겨 교화될 것을 두려워해, 석존의 성도를 방해하려고 먼저 스스로 활과 화살을 들고 위협하고, 이어 세 명의 아름다운 마녀를 보내 유혹했으나 석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왕과 석존의 논쟁이 시작된다. 마왕이 먼저 「그대가 인간계의 안락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내 왕위와 오욕의 즐거움을 모두 줄 테니 천계로 올라오라」고 말을 꺼낸다. 권력과 쾌락의 유혹이다. 석존은 「그대의 자재천왕 자리는 과거의 작은 보시행을 원인으로 얻은 한정된 복덕에 지나지 않으니 내가 쓸 바가 아니다. 그대는 반드시 복덕이 다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물리친다. 마왕은 「내 과보의 유래는 그대가 아는 대로다. 그러나 그대의 과보가 내 과보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누가 아는가」 하고 되묻는다. 이에 「이 보살은 과거에 헤아릴 수 없는 보시행을 행했다. 그러므로 마왕은 어떻게 해도 보살의 성도를 방해할 수 없다」는 말로 석존이 뛰어남이 증명된다. 그 뒤 마왕은 허공에 가득할 만큼 많은 이형 · 악형의 마군을 모아 석존을 뇌란시키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이번에는 공중의 신이 「보살이 겁을 지나며 닦아 온 선과는 마군이 결코 깨뜨릴 수 없다」고 다시 증명하자, 마침내 마왕은 교만이 꺾여 물러갔다.
강의는 『과거현재인과경』에서는 「한 손가락을 드는」 몸짓 자체는 그려지지 않지만, 마왕과 논쟁할 때의 「이 땅만이 안다」는 석존의 말이 대지를 가리키는 몸짓에 해당한다고 본다.
『불본행집경』의 항마
이에 비해 『불본행집경』에는 「한 손가락을 드는」 몸짓이 분명히 설해진다. 마왕이 석존의 성도를 방해하려고 무시무시한 마군을 모아 위협했으나 석존이 전혀 흔들리지 않자 마왕의 마음이 동요한다. 이를 알아차린 석존은 마왕의 개심을 재촉하려고 「성도를 막으려는 마왕과 마군의 바람보다 정각을 이루려는 나의 서원과 선근의 힘이 더 강하므로 아무리 방해해도 소용없다」고 타이르고, 다시 「그대는 단 한 번의 무차회(無遮會)의 복덕으로 지금의 힘을 얻었을 뿐이나, 나는 무량억 아승기 동안 보시행을 행해 왔다」고 하여 자신의 힘이 더 뛰어남을 말한다. 마왕이 「내 무차회는 그대 말대로지만 그대의 보시행은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반론하자, 석존은 천만 가지 공덕을 갖춘 오른손을 들어 대지를 가리키며 「이 대지가 나의 허망하지 않음을 증명할 것이다. 대지여, 원컨대 진실 그대로 말하라」고 했다. 그러자 곧바로 대지에서 지신이 나타나 「나는 그대가 과거 천만억 겁 동안 무차회를 베푼 것을 안다」고 증명했고, 대지가 삼천대천세계에 울리는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이에 마군은 흩어지고 마왕은 마침내 석존에게 항복했다.
이것이 석존 성도 때 항마의 대강이다. 여기서 분명하듯 석존은 자신의 인위 수행이 마왕의 과거 선행보다 뛰어남을 보임으로써 마왕을 항복시켰다. 「한 손가락을 든다」는 것은 이 과거 수행의 승렬을 증명하는 몸짓이다. 곧 이 일화는 그 자체가 「인위에 의거해 승렬을 판정하는」 이야기다.
왜 범천과의 쟁론인가
그런데 석존이 직접 항복시킨 것은 제육천의 마왕이지 대범천왕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어서는 대범천왕을 비롯한 천계의 여러 왕을 항복시켰다고 하신다.
강의는 이 점에 대해, 대범천왕과 지행의 오래됨을 다툰 경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예컨대 『대비경』에는 「내가 세계의 주인이며 창조자다」라는 대범천왕의 증상만을 깨기 위해, 석존이 세상 사람들의 괴로운 모습과 악행을 들어 이것도 모두 대범천왕이 만든 것이냐고 묻자 대범천왕이 대답하지 못했고, 석존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업이 만든 것임을 가르쳐 대범천왕에게 불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고 설해진다. 이런 석존과 범천의 논쟁은 아함의 여러 경이나 『대집경』 등에도 설해져 있다. 직접 사바세계 지행의 오래됨을 다툰 것은 아니지만, 역본에 따라서는 범천과의 논쟁 안에 그런 대목이 들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범천과 「지행의 선후」를 다툰 일을 직접 설한 경문은 강의도 특정하지 않는다. 강의는 『대비경』 · 아함 제경 · 『대집경』의 범천 논쟁을 관련 전승으로 든다.
어느 쪽이든 이 어서에서 석존과 대범천왕의 쟁론을 언급하신 까닭은, 제경이 설하는 석존 인위의 길이인 「삼기」 · 「동유진겁」 · 「무량겁」이 대범천왕의 지행 기간인 「이십구 겁」을 훨씬 웃도는 긴 수행 기간임을 보이고, 나아가 그 제경의 기간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 법화경의 삼천진점겁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라고 강의는 본다.
장교의 「삼기백겁」을 예로 들면, 이는 무수한 과거불 아래서 석존이 보살로서 수행해 온 기간이다. 앞에 든 『대지도론』의 설을 쓰면, 제3아승기겁의 마지막은 비바시불 때인데, 비바시불은 이른바 과거칠불의 첫째로 꼽히는 부처이며, 과거칠불의 출현은 과거의 장엄겁부터 현재의 현겁에 걸친다고 한다. 과거 장엄겁에 출현한 비바시불 아래서 석존의 삼아승기겁 수행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하니, 석존 인위의 수행 기간이 현재 대겁의 처음 이래인 대범천왕 등의 지행 기간보다 훨씬 길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어문은 법화경에 설해진 석존의 인위인 「삼천진점겁」의 뜻을 보이신다. 게다가 여기서 「사바세계의 지행」에 초점을 맞추신 것은, 사바세계 중생에게 누가 「주사친」인가라는 주제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행의 주인이란 곧 주(主)의 덕이다. 강의는 이 점을 석존의 과위를 다루는 제6장에서 다시 살핀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범천 · 마왕과의 「지행의 쟁론」을 사바세계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는 물음으로 읽고, 이를 제6장의 주사친 삼덕의 주제로 이어지는 실마리로 본다.
제불의 인위와 석존의 인위 — 삼기 · 오겁과 삼천진점겁
둘째 절에서 대성인은 법화경의 삼천진점겁의 개현이 다른 부처와의 대비 속에서 사바세계의 우리 중생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르치신다. 앞 절은 대범천왕의 지행과 견주었고, 이 절은 석존 이외의 다른 부처와 견준다. 제불의 인위로는 「삼기」와 「오겁」이 거론된다.
「삼기」는 앞에서 본 대로 소승교에서 석존 인위의 기간으로 설한 것이다. 소승교에서는 현재불은 석가 한 부처뿐이지만 과거 제불의 인위 기간도 「삼기」라 했으므로, 이를 제불의 인위 기간으로 드신 것이다.
「오겁」은 『무량수경』에 설해진 아미타불의 인위 기간이다. 이 경은 법장보살이 오겁 동안 수행했다고 설한다. 대승의 제경에서는 현재불이 사바세계의 석존만이 아니라 시방의 제불이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고 설하는데, 여기서는 그 대표로 아미타불의 인위를 드셨다. 이는 이 뒤에 염불을 파절해 가기 위한 전제가 된다.
곧 이 절은 소승과 대승에 설해진 제불의 인위 기간의 대표적인 예로 「삼기」와 「오겁」을 드셨다고 강의는 본다.
이어 대성인은 법화경이 설하는 삼천진점겁이라는 석존 인위의 뜻을 보이시며, 이것이 소승경 · 대승의 제경이 설하는 제불의 인위와 전혀 다르다고 하여 다음 두 가지를 짚으신다.
- 법화경의 삼천진점겁은 삼기나 오겁과는 자릿수가 다를 만큼 길다.
- 게다가 석존은 그 이래 줄곧 사바세계 일체중생과 결연한 보살이다. 그러므로 사바세계 일체중생에게 인연 있는 보살은 석존이며, 다른 국토의 여러 보살은 사바세계 중생과 전혀 인연이 없다.
이 가운데 둘째 점에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란 당시 사람들의 염불 신앙을 파절하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다.
수행의 길이에서 중생과의 인연으로
제경에 설해진 부처의 인위와 법화경에 설해진 석존의 인위는 무엇이 다른가. 강의는 그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제경은 부처의 인위를 갖가지로 설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의 방식으로 설할 뿐 사바세계 중생과의 관계를 설한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화성유품이 설하는 삼천진점겁의 석존 인위는 사바세계 중생과의 인연을 밝힌 것이며, 이로써 석존이야말로 사바세계 일체중생에게 인연 있는 부처임이 보여진다.
「이 세계의 육도 일체중생은 다른 국토의 다른 보살에게 인연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단언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화성유품의 설 그 자체다. 화성유품은 삼천진점겁 과거에 석가보살에게 결연한 중생이 그 뒤 석가불 아래 사바세계에 태어나 그 교화를 받고, 다른 보살에게 결연한 중생은 다른 국토에 태어나 다른 부처의 교화를 받고 있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사바세계에 태어난 중생이라면 다른 국토의 보살이나 부처와 결연했을 도리가 없다.
다른 하나는 시성정각을 깨뜨리고 구원실성을 밝힌 본문의 뜻에 근거한, 더 근본적인 이유다. 본문 수량품에서 석존은 구원실성 이래 늘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설법 교화해 왔다고 설해진다. 이에 따르면 화성유품이 설하는 삼천진점겁의 교화도 그 긴 교화의 도중의 한 장면으로 파악된다. 그렇게 보는 근거로 강의는 「관심의 본존초」의 다음 말씀을 든다.
久種を以て下種と為し大通前四味迹門を熟と為して本門に至つて等妙に登らしむ
구종(久種)으로 하종을 삼고, 대통 · 전사미 · 적문을 숙(熟)으로 삼아, 본문에 이르러 등각 · 묘각에 오르게 하느니라
곧 본문에 설해진 오백진점겁의 구원을 재세 중생에 대한 하종으로 삼고, 삼천진점겁 과거의 대통결연을 중간의 숙익(熟益)의 교화로 자리매김하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참된 하종결연은 적문에 설해진 삼천진점겁 과거의 대통복강이 아니라 본문에 설해진 오백진점겁의 구원이다. 이 장이 삼천진점겁으로 석존의 인위를 논하면서도 다음 장에서 오백진점겁의 과위로 나아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미타와 사바세계 중생 — 화성유품 · 천태 · 묘락의 세 문
셋째 절은 아미타불이 사바세계 중생과 인연 없는 부처임을 밝히신다. 부처의 인위를 논하는 자리에서 특히 아미타불을 언급하신 까닭은 아미타불의 서원력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하는 염불종의 가르침을 파절하기 위해서다. 염불종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인위인 법장보살은 사십팔의 본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모두 성취해 아미타불이 되었으므로, 그 본원의 힘으로 근기가 열등한 중생도 염불만 부르면 쉽게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대성인은 법화경 화성유품의 경문, 천태대사의 『법화문구』와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의 문을 끌어, 그런 염불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밝히신다.
화성유품 — 「저마다 제불의 처소에 있다」
처음 끄신 화성유품의 「爾の時に法を聞く者は各諸仏の所に在り」(그때 법을 들은 자는 저마다 제불의 처소에 있다)라는 문은, 대통지승불의 열여섯 왕자에게 교화된 중생이 저마다 인연 있는 부처 아래 있음을 설한 것이다. 삼천진점겁 과거에 대통불의 법화경을 복강한 열여섯 보살 사미는 그 뒤 성도해 지금 시방의 불국토에 부처로 출세해 있다. 이 현재의 열여섯 부처 가운데 서방 불국토의 부처가 아미타불이며, 동북방 사바세계의 부처가 석존이라고 화성유품은 설한다. 그리고 대통복강 때 법화경에 결연한 중생은 저마다 인연 있는 부처가 있는 국토에 태어나 그 교화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정토교가 받드는 아미타불 자신이 법화경 화성유품에서는 대통지승불의 아들, 곧 석존과 형제인 열여섯 왕자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 법화경의 눈으로 보면 아미타불은 서방에 인연 있는 부처이지 사바세계에 인연 있는 부처가 아니다.
천태 — 「서방은 부처가 따로이고 인연이 다르다」
이어 끄신 천태대사의 말은 『법화문구』 권6의 문이다. 「西方は仏別に縁異り故に子父の義成ぜず」(서방은 부처가 따로이고 인연이 다르니, 그러므로 자부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이 문은, 법화경 신해품 제4 장자궁자의 비유에 나오는 장자를 아미타불이라고 한 광택사 법운(法雲)의 그릇된 해석을 깨뜨린 것이다. 신해품의 장자궁자의 비유는 석존과 중생의 관계를 장자와 궁자,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견준 것이다. 그러므로 궁자를 사바세계의 중생으로 보면 그 아버지인 장자는 사바세계에 출현한 석존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인연 있는 부처이며 사바세계 중생과의 사이에는 부자 관계가 없다 — 이것이 천태대사의 뜻이다.
묘락 — 「결연은 낳음과 같고 성숙은 기름과 같다」
다음에 끄신 「弥陀釈迦二仏既に殊なり……況や宿昔の縁別にして化導同じからざるをや結縁は生の如く成熟は養の如し生養縁異れば父子成ぜず」(미타와 석가 두 부처는 이미 다르다. 하물며 숙석의 인연이 따로여서 화도가 같지 않음에랴. 결연은 낳음과 같고 성숙은 기름과 같으니, 낳고 기르는 인연이 다르면 부자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문은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 권7상의 문이다. 앞의 『법화문구』의 문을 다시 풀이한 것으로, 화성유품에 설해진 삼천진점겁 과거의 결연을 「낳음」, 곧 부모가 자식을 낳는 데 견주고, 그 뒤의 교화로 부처가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키는 것을 「기름」, 곧 자식을 기르는 데 견주어, 사바세계 중생에게 아미타불은 「낳음」의 인연도 「기름」의 인연도 없다고 말한다.
이상의 문에서 분명하듯, 아미타불과 사바세계 중생 사이에는 신해품 장자궁자의 비유에서 보는 것과 같은 부자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 경爾の時に法を聞く者は各諸仏の所に在り그때 법을 들은 자는 저마다 제불의 처소에 있다화성유품 제7대통복강의 결연 중생은 저마다 인연 있는 부처의 국토에 있다
- 천태西方は仏別に縁異り故に子父の義成ぜず서방은 부처가 따로이고 인연이 다르니 자부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법화문구』 권6장자=아미타라는 법운의 설을 깨뜨림
- 묘락結縁は生の如く成熟は養の如し生養縁異れば父子成ぜず결연은 낳음과 같고 성숙은 기름과 같으니 낳고 기르는 인연이 다르면 부자가 성립하지 않는다『법화문구기』 권7상아미타에게는 「낳음」의 인연도 「기름」의 인연도 없다
「부자의 뜻」과 현의의 다섯 묘
「부자의 뜻」이란 무엇인가. 강의는 천태대사의 『법화현의』를 끌어 이를 풀이한다. 『법화현의』는 중생과 부처의 관계를 감응묘 · 신통묘 · 설법묘 · 권속묘 · 공덕이익묘 등 여러 관점에서 밝힌다. 감응묘는 중생의 기(機)와 그에 대한 부처의 작용이라는 관계를 원리적으로 보인 것이고, 이 관계를 부처 쪽에 즉해 밝힌 것이 신통묘와 설법묘, 중생 쪽에 즉해 밝힌 것이 권속묘와 공덕이익묘다. 「부자의 뜻」이란 부처와 중생 사이에 이 여러 뜻이 성립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위의 천태대사와 묘락대사의 문은, 아미타불과 사바세계 중생 사이에는 감응에서 공덕이익에 이르는 일체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이 틀은 제6장 마지막 절에서 다시 펼쳐진다. 대성인이 제6장 끝에 끄신 천태대사의 문은 바로 『법화현의』의 권속묘를 논한 대목이며, 제6장의 「天月の清水に浮ぶ」라는 비유는 감응묘의 비유다. 제5장의 부자 논의는 그 첫걸음이다.
소의 새끼에게 말의 젖을 — 내영을 기다리는 무익함
대성인은 이상 법화경과 천태 · 묘락의 세 문을 받아 「当世日本国の一切衆生弥陀の来迎を待つは譬えば牛の子に馬の乳を含め瓦の鏡に天月を浮ぶるが如し」(당세 일본국의 일체중생이 미타의 내영을 기다리는 것은, 비유하면 소의 새끼에게 말의 젖을 물리고 기와 거울에 하늘의 달을 띄우려 함과 같다)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소의 새끼」와 「말의 젖」, 「기와 거울」과 「하늘의 달」의 관계를 비유로 삼아, 아미타불과 사바세계 중생 사이에는 감응묘를 비롯해 공덕이익묘에 이르는 일체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이시고, 염불 신앙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보이신 것이라고 강의는 본다.
두 비유는 서로 다른 면을 비춘다. 「소의 새끼에게 말의 젖」은 낳고 기르는 인연의 어긋남이다. 소의 새끼는 어미 소의 젖으로 자라야 하는데, 낳아 준 인연도 없는 말의 젖을 물린다. 묘락대사가 말한 「생양의 인연이 다르다」는 것을 생활의 장면으로 옮기신 것이다. 「기와 거울에 하늘의 달」은 비추는 그릇의 어긋남이다. 거울로 쓸 수 없는 기와에는 아무리 밝은 달도 비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제6장 둘째 절의 「天月の清水に浮ぶが如く」(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뜨는 것과 같다)라는 비유와 짝을 이룬다. 인연 있는 부처와 결연한 중생은 맑은 물과 하늘의 달처럼 저절로 비추고 비치지만, 인연 없는 부처를 기다리는 것은 기와에 달을 띄우려는 것과 같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이 장의 결론을, 사바세계 중생에게 인연 있는 부처는 삼천진점겁 이래의 결연의 대사인 석존뿐이며 아미타불과의 사이에는 감응에서 공덕이익에 이르는 어떤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서 찾는다.
본문
又果位を以て之を論ずれば諸仏如来或は十劫・百劫・千劫已来の過去の仏なり、 教主釈尊は既に五百塵点劫より已来妙覚果満の仏なり大日如来・阿弥陀如来・薬師如来等の尽十方の諸仏は我等が本師教主釈尊の所従等なり、 天月の万水に浮ぶ是なり、 華厳経の十方台上の毘盧遮那・大日経・金剛頂経・両界の大日如来は宝塔品の多宝如来の左右の脇士なり、 例せば世の王の両臣の如し此の多宝仏も寿量品の教主釈尊の所従なり、
또 과위(果位)로써 이를 논하건대, 제불여래는 혹은 십 겁 · 백 겁 · 천 겁 이래의 과거의 부처이니라. 교주 석존은 이미 오백진점겁 이래 묘각과만(妙覺果滿)의 부처이시니, 대일여래 · 아미타여래 · 약사여래 등 시방에 두루한 제불은 우리들의 본사(本師)이신 교주 석존의 소종(所從) 등이니라. 하늘의 달이 만 갈래 물에 뜨는 것이 이것이니라. 화엄경의 시방 대상(臺上)의 비로자나와 대일경 · 금강정경 · 양계의 대일여래는 보탑품의 다보여래의 좌우 협사(脇士)이니라. 비유하면 세상 왕의 두 신하와 같으니, 이 다보불도 수량품의 교주 석존의 소종이니라.
此の土の我等衆生は五百塵点劫より已来教主釈尊の愛子なり、…… 有縁の仏と結縁の衆生とは譬えば天月の清水に浮ぶが如く無縁の仏と衆生とは譬えば聾者の雷の声を聞き盲者の日月に向うが如し
이 국토의 우리들 중생은 오백진점겁 이래 교주 석존의 애자(愛子)이니라. 불효의 허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이를 깨달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국토의 중생과는 견줄 바가 아니니라. 인연 있는 부처와 결연한 중생은, 비유하면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뜨는 것과 같고, 인연 없는 부처와 중생은, 비유하면 귀먹은 이가 우레 소리를 듣고 눈먼 이가 해와 달을 향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 대목 本文은 첫 문장과 끝 문장만 싣고, 가운데 구절(불효의 허물로 아직 깨닫지 못하나 다른 국토의 중생과는 견줄 수 없다는 뜻)은 생략 부호로 줄였다. 풀이는 세 문장을 모두 옮겼다.
而るに或る人師は釈尊を下して大日如来を仰崇し或る人師は世尊は無縁なり阿弥陀は有縁なり、 或る人師の云く小乗の釈尊と或は華厳経の釈尊と或は法華経迹門の釈尊と 此等の諸師並びに檀那等釈尊を忘れて諸仏を取ることは例せば阿闍世太子の頻婆沙羅王を殺し釈尊に背いて提婆達多に付きしが如し、
그런데 어떤 인사(人師)는 석존을 낮추고 대일여래를 우러러 받들며, 어떤 인사는 「세존은 무연이요 아미타는 유연이니라」 하고, 어떤 인사는 이르되 「소승의 석존」이라 하고, 혹은 「화엄경의 석존」, 혹은 「법화경 적문의 석존」이라 하느니라. 이들 여러 인사와 그 단나들이 석존을 잊고 제불을 취하는 것은, 비유하면 아사세 태자가 빈바사라왕을 죽이고 석존을 등져 제바달다에게 붙은 것과 같으니라.
二月十五日は釈尊御入滅の日乃至十二月十五日も三界慈父の御遠忌なり、 善導・法然・永観等の提婆達多に誑されて阿弥陀仏の日と定め畢んぬ、 四月八日は世尊御誕生の日なり薬師仏に取り畢んぬ、 我が慈父の忌日を他仏に替るは孝養の者なるか如何、
이월 십오일은 석존 입멸의 날이니, 내지 십이월 십오일도 삼계 자부(慈父)의 원기(遠忌)이니라. 그런데 선도 · 법연 · 에이칸 등의 제바달다에게 속아 아미타불의 날로 정해 버렸느니라. 사월 팔일은 세존 탄생의 날이니라. 그런데 약사불의 날로 취해 버렸느니라. 나의 자부의 기일을 다른 부처로 바꾸는 것이 효양하는 자이겠는가, 어떠한가.
寿量品に云く「我も亦為れ世の父・狂子を治する為の故に」等云云、 天台大師云く「本此の仏に従つて初めて道心を発す亦此の仏に従つて不退地に住す乃至猶百川の海に潮すべきが如く縁に牽かれて応生すること亦復是くの如し」等云云。
수량품에 이르되 「나도 또한 세간의 아버지라, 미친 아들을 다스리기 위한 까닭이니라」 등 운운. 천태대사가 이르되 「본래 이 부처를 따라 처음으로 도심을 일으키고, 또한 이 부처를 따라 불퇴지에 머무느니라. 내지 마치 백 갈래 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인연에 이끌려 응생(應生)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등 운운.
어구 풀이
- 果位과위
- 수행의 결과로 부처가 된 지위. 이 장은 오백진점겁 이래의 석존의 과위를 제경의 제불의 과위와 견준다.
- 妙覚果満묘각과만
- 보살 수행의 마지막 계위인 묘각에 이르러 불과(佛果)를 원만히 갖춤. 수량품의 석존이 오백진점겁에 이미 성취한 경지.
- 本師본사
- 근본의 스승. 「우리들의 본사 교주 석존」은 사바세계 중생이 처음 불연을 맺고 줄곧 교화를 받아 온 근본의 부처라는 뜻.
- 所従소종
- 주군을 따르는 사람, 가신 · 권속. 제불이 수량품 교주의 수적 · 권속임을 주종 관계로 나타낸 말.
- 天月の万水に浮ぶ천월이 만수에 뜨다
- 하늘의 달 하나가 수많은 물에 그림자를 비춤. 본지의 부처 하나와 그 수적인 제불의 관계를 비유한 것. 천태대사는 원교의 감응을 「한 달이 내려오지 않고 백 갈래 물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비유로 나타냈다.
- 十方台上の毘盧遮那시방 대상의 비로자나
- 『범망경』이 설하는 연화대 위의 노사나불. 대 둘레의 천 잎은 천 세계이며, 노사나는 그 잎마다 천의 석가로, 다시 백억의 석가로 나타난다고 한다.
- 両界の大日如来양계의 대일여래
- 『대일경』에 근거한 태장계 만다라와 『금강정경』에 근거한 금강계 만다라의 주존인 대일여래.
- 脇士협사
- 주존의 좌우에 모시는 존재. 화엄의 비로자나와 진언의 대일을 다보여래의 좌우 협사라 하신 것은 그 지위를 「세상 왕의 두 신하」에 견준 것이다.
- 多宝如来다보여래
- 견보탑품에서 땅에서 솟은 보탑 안에서 법화경이 모두 진실이라고 증명한 동방 보정세계의 부처.
- 愛子애자
- 사랑하는 자식. 사바세계 중생이 오백진점겁 이래 석존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주사친 삼덕 가운데 친(親)의 덕에 해당한다.
- 不孝の失불효의 허물
- 부모인 부처를 잊고 따르지 않는 허물. 이 장 其の三 · 其の四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든다.
- 阿闍世太子아사세 태자
- 마가다국 빈바사라왕의 아들. 제바달다의 꾐에 넘어가 부왕을 가두어 죽게 하고 석존을 등졌다가, 뒤에 참회하고 석존에게 귀의했다고 전한다.
- 三界慈父の御遠忌삼계 자부의 원기
- 삼계 중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인 석존의 기일. 입멸일 2월 15일에 따라 달마다 15일을 석존의 기일로 본 말씀.
- 永観에이칸(永観)
- 헤이안 후기의 삼론 학승. 『왕생강식』을 지어 왕생강을 스스로 행하는 등 염불 신앙의 보급에 힘썼다.
- 十斎日십재일
- 한 달 가운데 팔재계를 지니는 열흘. 십왕 신앙과 결합해 날마다 인연 있는 부처 · 보살이 배당되었다.
- 狂子광자
- 수량품 양의병자의 비유에서 독약을 마시고 본심을 잃어 아버지의 좋은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 아들들.
- 応生응생
- 과거의 본연(本緣)에 이끌려 부처가 출현한 곳에 권속으로 태어남. 『법화현의』 권속묘의 말.
- 感応道交감응도교
- 중생의 감(기)과 부처의 응이 서로 통함. 『법화현의』 감응묘의 핵심 개념.
이 장의 자리 — 과위로 승렬을 가리다
제5장이 「삼오의 이법」 가운데 「삼」, 곧 삼천진점겁의 석존 인위를 다루었다면, 이 장은 「오」, 곧 오백진점겁의 석존 과위를 다룬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이 장에서 대성인이 부처의 과위라는 면에서 법화경 수량품의 교주 석존과 제경의 제불의 승렬을 밝히시고, 제불을 본존으로 받들며 석존을 낮추는 제종의 본존관을 파절하신다고 본다.
이 장은 다섯 절로 이루어진다. 其の一은 수량품의 교주 석존과 제경의 제불이 본지와 수적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둘의 승렬을 밝힌다. 其の二는 사바세계 중생이 오백진점겁 이래 석존의 애자이며 인연 있는 부처와의 사이에서만 감응이 성립함을 밝힌다. 其の三은 이 부처를 잊고 다른 부처를 본존으로 취하는 제종의 다섯 예를 들어 아사세 태자의 불효에 견준다. 其の四는 석존의 입멸일과 탄생일을 다른 부처의 날로 바꾼 당시의 습속을 「불효」의 실례로 든다. 其の五는 수량품과 천태대사의 문을 끌어 장 전체를, 그리고 대단 제1을 맺는다.
강의는 其の一의 어문을 세 가지로 나누어 읽는다.
- 대일여래 · 아미타여래 · 약사여래 등 제경의 제불은 십 겁 · 백 겁 · 천 겁 등의 옛날에 성불한 부처라 하지만, 수량품의 석존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는 오백진점겁의 구원에 불과를 성취하고 그 이래 상주하는 부처로 설해진다. 성도 이래의 시간의 길이라는 단적인 관점에서 둘의 차이를 보이신 것이다.
- 이어 수량품의 석존과 제불의 관계를 「주군과 소종」의 관계에 견주신다. 이 비유는 수량품의 석존과 다른 모든 부처 사이에 「부처로서의 격의 차이」가 있음을 보이신 것이다. 또 천월과 수월(水月)의 비유를 드신 데서 알 수 있듯, 이 차이는 결국 「본지와 수적」의 문제로 귀착한다.
- 끝으로 화엄경의 교주 비로자나불과 『대일경』 · 『금강정경』의 교주 대일여래를 특히 언급하시어, 이 부처들은 법화경 보탑품의 다보여래의 협사에 자리하며, 그 다보여래 자신도 교주 석존의 소종이라고 하신다.
강의는 이 가르침에서 두 가지 물음을 뽑아낸다. 첫째, 성도 이래 시간의 길이 차이가 왜 부처의 몸의 격(身格)의 차이로 이어지는가. 둘째, 왜 특히 화엄경의 비로자나불과 진언의 대일여래를 들어, 이 두 부처 → 다보여래 →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라는 두 단계의 관계를 보이셨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두 물음은 모두 불신(佛身)에서의 본적의 차이와 깊이 관련된다. 이 불신의 본적에 대해서는 천태대사와 묘락대사가 삼신론에 근거해 밝혔으며 대성인도 그것을 바탕으로 하신다. 그러므로 강의는 삼신론의 관점에서 교주 석존과 제불의 관계를 고찰해 간다.
「수량품의 교주」 — 능설의 주와 경교의 주존
이 장에서 대성인은 부처의 과위를 논하시며 「寿量品の教主釈尊」(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라 하신다. 앞 장에서 단지 「석존」이라 하신 것과 달리, 이 장에서는 「수량품의 교주」라는 입장이 강조된다.
강의는 그 까닭을 이렇게 푼다. 앞 장은 부처의 인위에 대해 이전 제경의 여러 설과 법화경 적문의 설의 차이를 논했다. 이전경도 적문도 그 교주가 시성정각의 석존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므로 단지 「석존」이라 하셨다. 이에 비해 부처의 과위를 논하는 이 장에서는 본문 수량품에서 시성정각을 깨뜨리고 구원의 본지를 드러낸 구원실성의 석존과 제경의 제불의 승렬을 논하신다. 본문에서는 「교주」로서의 입장이 이전 · 적문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 점을 밝히려고 단지 「석존」이 아니라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라 하셨다는 것이다.
「교주」란 교법을 설해 드러내는 이를 뜻하는데, 이 말에는 두 면이 있다. 하나는 「교법을 능히 설하는 주인(教法能説の主)」에 중점을 두는 경우, 다른 하나는 「경교의 주존(経教の主尊)」에 중점을 두는 경우다. 뒤의 것이 「본존」의 뜻으로 통한다.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라 할 때의 「교주」에는 이 두 뜻, 곧 「수량품을 설한 석존」이라는 뜻과 「수량품에서 밝혀진 주존으로서의 석존」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이전의 제경과 법화경 적문에서는 설하는 이로서의 교주는 시성정각의 석존이지만, 설해 드러낸 주존은 경에 따라 갖가지였다. 어떤 경은 석존을, 어떤 경은 비로자나불을, 어떤 경은 아미타불을, 어떤 경은 대일여래를 주존으로 설했다. 그래서 제종은 이 여러 부처를 본존으로 삼았다.
그런데 법화경 수량품에서 석존은 발적현본(發迹顯本), 곧 이전 · 적문의 시성정각의 입장을 걷어 내고 구원의 본지를 밝혔다. 이로써 이전 · 적문의 경교를 설한 석존이 이 본불의 수적불이라는 입장이 되는 동시에, 그런 석존이 설한 제경에서 주존이었던 제불도 적불이 되고, 수량품에서 드러난 구원의 석존이야말로 참된 주존임이 분명해졌다. 수량품에서는 능설의 교주인 석존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동시에, 받들 본존도 이전까지의 적불 · 권불이 아니라 구원실성의 참된 부처임이 보여졌다. 대성인은 이 두 뜻을 담아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라 표현하셨다고 강의는 본다.
수량품이 밝힌 구원실성 — 「중간」의 제불은 모두 수적
여래수량품 제16의 설을 따라 「수량품의 교주 석존」과 제경의 제불의 관계를 정리해 보자.
수량품에서는 먼저 석존이 세 번 경계하고(三誡) 회좌의 대중이 세 번 청하고 거듭 청한(三請重請) 뒤, 석존이 다시 경계하고(重誡) 다음과 같이 구원실성을 밝힌다.
一切世間の天人、及び阿修羅は皆今の釈迦牟尼仏、釈氏の宮を出でて伽耶城を去ること遠からず、道場に坐して、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得たまえりと謂えり。然るに善男子、我実に成仏してより已来、無量無辺百千万億那由佗劫なり
일체 세간의 천인과 아수라는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니라
이 문의 앞부분은 일체 사람들이 시성정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이고, 「然るに善男子」 이하는 구원실성을 밝혀 그 집착을 깨뜨린다. 일체 세간의 중생은 석존이 왕궁을 나와 출가하고 수행을 거쳐 가야성 가까운 보리수 아래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열었다고 생각하지만, 진실로는 석존은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라는 장구한 과거에 이미 성불해 있었다는 것이다.
수량품은 이어 오백진점겁이라는 장구한 과거를 설하고, 다시 「是れより来、我常に此の娑婆世界に在って説法教化す」(이로부터 이래 나는 늘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설법 교화한다)라고 설해, 이 오백진점겁의 구원 이래 늘 사바세계 중생을 교화하는 상주의 부처임을 밝힌다. 또 「亦、余処の百千万億那由佗阿僧祇の国に於いても、衆生を導利す」(또한 다른 곳의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나라에서도 중생을 이끌어 이롭게 한다)라고 설해, 다른 많은 국토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많은 부처도 실은 구원실성 석존의 수적임을 밝힌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도 설해진다.
諸の善男子、是の中間に於いて、我然燈仏と説き又復、其涅槃に入ると言いき、是の如きは皆方便を以って分別せしなり
여러 선남자여, 이 중간에 나는 연등불이라 설하고 또 그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했으나,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방편으로 분별한 것이니라
구원실성 이래 오늘 인도에 응현해 태어나기까지의 「중간」의 시기에 출현하고 또 입멸해 간 연등불 등 과거의 제불도 모두 구원실성의 석존이 방편으로 나타낸 모습, 곧 수적불이라는 것이다. 이 「수적」에 대해서는 다시 이렇게 자세히 설해진다.
若し衆生有って我が所に来至するには我仏眼を以って、其の信等の諸根の利鈍を観じて、応に度すべき所に随って、処処に自ら名字の不同、年記の大小を説き、亦復、現じて当に涅槃に入るべしと言い
만약 중생이 있어 나의 처소에 오면 나는 불안으로써 그 믿음 등 여러 근기의 날카롭고 무딤을 관하여, 제도할 바에 따라 곳곳에서 스스로 이름이 같지 않음과 수명의 길고 짧음을 설하고, 또 나타나서 열반에 들 것이라고 말하며
갖가지 국토에서 수명이 다른 갖가지 부처로 출현한 것은 모두 중생 근기의 날카롭고 무딤에 따라 나타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총괄적으로 보인 것이 「或いは己身を説き、或いは他身を説き、或いは己身を示し、或いは他身を示し、或いは己事を示し、或いは他事を示す」(혹은 자기 몸을 설하고 혹은 남의 몸을 설하며, 혹은 자기 몸을 보이고 혹은 남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 일을 보이고 혹은 남의 일을 보인다)라는 경문이다.
강의는 이 경문을 이렇게 푼다. 처음의 「혹은 자기 몸을 설하고 혹은 남의 몸을 설한다」는 제경에 설해진 석존이나 다른 제불이 모두 구원실성의 석존이 방편으로 설한 불신임을 보인다. 다음의 「혹은 자기 몸을 보이고 혹은 남의 몸을 보인다」는 시성정각의 석존을 포함해 과거 · 현재에 출현한 모든 제불이 구원실성의 석존이 방편으로 수적해 나타난 부처임을 보인다. 끝의 「혹은 자기 일을 보이고 혹은 남의 일을 보인다」는 그 수적불이 중생 교화를 위해 한 모든 불사(佛事)도 구원실성의 석존이 방편으로 나타낸 것임을 보인다.
수량품은 다시 「所作の仏事未だ曾て暫くも廃せず」(하는 바의 불사는 아직 일찍이 잠시도 그친 적이 없다)라고 설해 구원실성 석존의 교화가 조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보인 뒤, 석존의 본지가 상주불멸의 부처임을 이렇게 밝힌다.
是の如く、我成仏してより已来、甚だ大いに久遠なり、寿命無量阿僧祇劫なり、常住にして滅せず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이래 매우 크게 구원하니라. 수명은 무량 아승기겁이며 상주하여 멸하지 않느니라
이상의 수량품의 설은 결국 석존의 본지는 구원실성 이래의 상주하는 부처이며, 시성정각의 석존이나 다른 제불은 모두 이 본지에서 중생 근기의 날카롭고 무딤에 따라 응현하거나 설해 보인 수적불임을 보인다.
이 장에 이름이 오른 부처들 — 대일 · 아미타 · 약사, 그리고 비로자나 · 대일
이 장은 먼저 제경의 제불의 예로 「대일여래」 · 「아미타여래」 · 「약사여래」의 세 부처를 들고, 다음에 「비로자나」 · 「대일여래」의 두 부처를 들어, 법화경에 설해진 「보탑품의 다보여래」와 「수량품의 교주 석존」과의 관계를 보이신다.
처음 든 세 부처는 모두 당시 일본에서 사람들이 널리 믿던 부처이며, 그런 뜻에서 제경의 제불의 대표로 드셨다고 강의는 본다.
- 대일여래 — 진언밀교에서 금강계 · 태장계 두 만다라의 주존으로 숭배되었다. 불상으로도 많이 조성되어 각지의 대일당(大日堂)에 모셔져 사람들의 신앙 대상이 되었다.
- 아미타여래 — 말할 것도 없이 염불종의 본존이다. 서방 극락세계에서 지금 설법하는 현재불로 믿어졌고, 임종 때 내영해 극락정토로 이끌어 주는 부처로 갈앙되었다. 특히 가마쿠라 시대에는 전국 각지에 아미타당이 세워져 아미타 신앙이 퍼져 갔다.
- 약사여래 — 중고(中古) 일본 불교계의 중심지였던 히에이산 엔랴쿠지 근본중당(根本中堂)의 본존이었고, 어떤 병이든 고치는 힘을 지닌 부처로 민간에도 널리 신앙되어 약사여래상을 모신 약사사 · 약사당이 각지에 세워졌다.
이처럼 세 부처는 실제로 당시 사람들의 신앙 대상, 곧 「본존」으로 퍼져 있던 부처이며, 대성인은 이 현실을 바탕으로 제경의 제불의 대표로 세 부처의 이름을 드셨다. 그러나 일체경에 설해진 부처 가운데 말법의 중생이 「본존」으로 삼아야 할 가장 존귀한 부처는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므로 「我等が本師教主釈尊」(우리들의 본사 교주 석존)이라 하시고, 세 부처를 비롯한 제경의 제불은 이 교주 석존의 「소종」이라는 자리매김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총체적으로 제경의 제불과 수량품의 교주 석존의 관계를 밝히신 것이며, 세 부처의 이름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실제 종교 상황에 맞춘 예시라고 강의는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이어서 「비로자나」와 「대일여래」의 이름을 드신 것은 앞의 세 부처와는 다른 뜻이 있다. 이 두 부처는 각각 화엄경, 그리고 『대일경』 · 『금강정경』의 「교주」로 여겨져 화엄종이나 진언종 등에서 그 신격(身格)이 활발히 논의된 부처다. 그 논의에서 비로자나불이나 대일여래는 법신 또는 보신으로 여겨진 반면, 법화경의 교주인 석존은 응신으로 여겨져 두 부처 아래에 놓였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수량품의 교주 석존」을 내세워, 교리적인 뜻에서 이 두 부처와 교주 석존의 신격상의 관계를 특히 밝히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의 교주 비로자나불이나 진언밀교의 교주 대일여래를 「법신」 또는 「보신」으로 보고 법화경의 교주 석존을 「응신」으로 보는 생각에는 불신 · 불격에 대한 근본적인 잘못이 들어 있다. 그 잘못이란 「본지의 삼신」과 「수적의 삼신」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강의는 이를 밝히기 위해 먼저 여러 경론에서 전개된 불신론의 개요를 정리한다.
경론의 불신론 — 이신 · 삼신 · 사신
「불신(佛身)」이란 불과를 증득한 몸이라는 뜻인데, 여러 경론에서 그 갖가지 구분이 논해져 왔다. 강의는 주요한 설과 출전을 다섯으로 정리한다.
- 진신 · 응신의 이신설 — 소승 · 대승을 통해 여러 경론에 설해지며, 이 밖에 「법신 · 생신」 · 「상신 · 무상신」 등의 이름도 있으나 내용은 거의 같다. 상주하는 법을 체로 하는 진리의 몸을 「진신」 등이라 하고, 중생에게 응해 나타나는 생신의 부처를 「응신」 등이라 한다.
-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설 — 삼신의 이름은 『십지경론』의 설이지만, 『섭대승론』의 「자성신 · 수용신 · 변화신」, 『금강반야론』의 「법신불 · 보불 · 화불」, 『승만경』의 「일체법상주신 · 색무진지혜신 · 묘색신」 등도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거의 같으며, 대승의 경론 전반을 통해 가장 많이 보이는 설이다. 1의 진신을 열어 「법신」과 「보신」으로 나눈 것으로, 「법신」은 진리를 체로 하는 몸, 「보신」은 인행(因行)의 과보로 얻은 지혜와 공덕의 면을 부처의 몸으로 세운 것이다.
- 법신 · 보신 · 화신의 삼신설 — 『금광명경』의 설이다. 한편으로 2의 법신과 보신을 합해 「법신」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2의 응신을 열어 「응신」과 「화신」으로 나눈 것이다.
- 법신 · 보신 · 응신 · 화신의 사신설 — 『입능가경』의 설로, 정확히는 「법불 · 보불 · 응화불 · 소작응불」이라 하지만 2 · 3과의 대응을 보이려고 이렇게 표기했다. 2와 3을 합해 모든 구분을 열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언밀교의 사종법신은 이 사신설의 구분에 상응한다.
- 법신 · 자수용신 · 타수용신 · 응신의 사신설 — 『불지경론』의 설로, 2의 보신을 열어 「자수용신」과 「타수용신」으로 나눈 것이다.
이 다섯 설 말고도 이승과 부처의 차이를 강조한 『해심밀경』의 삼신설, 중중무진의 법계를 강조한 화엄경의 십신설 등이 있으나 강의는 이름만 든다.
불신에 관한 이 여러 설은 경론에 따라 표현과 뜻에 세부의 차이가 있어도 큰 줄기에서 보면 동공이곡(同工異曲)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뼈대는 1의 진 · 응 이신설과 2의 법 · 보 · 응 삼신설에 있다고 강의는 본다. 앞의 것은 대승 · 소승을 통해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구분이며, 뒤의 것은 대승 고유의 구분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진 · 응 이신설은 불신에 중생에게 응해 나타난 면과 중생에게는 보이지 않는 진리의 몸이라는 면의 두 면이 있음을 보임으로써, 중생 앞에 출현한 생신의 붓다에만 사로잡히지 않는 종합적이고 본질적인 불신관을 제시했다. 특히 이 이신설에서 중요한 것은 「응신」 · 「생신」에 대해 「진신」 · 「법신」이 세워진 데서 보듯 「법」 혹은 「진리」가 불신의 본질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법 · 보 · 응 삼신설은 「보신」을 도입함으로써 이신설보다 더 본질적이고 종합적인 불신관을 보였다. 부처의 몸을 「법」만이 아니라 「법」을 깨닫는 「지혜」, 나아가 「법」을 깨달아 성취된 「공덕」으로도 파악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보신」이란 이 「지혜」와 「공덕」을 뜻한다. 이로써 이신설에서는 자칫 객관적 · 분리적으로 파악되기 쉬웠던 「법신」이 부처의 생명에 상응하는 것임이 분명해지는 동시에, 「응신」도 단순한 무상의 생신이라는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진리와 지혜가 하나가 된 곳에 생기는 「자비」의 작용으로 더 본질적으로 다시 파악된다.
천태대사도 『법화문구』 권9하에서 「여래수량품」이라는 제목을 풀이하며 「如来とは、十方三世の諸仏、二仏、三仏、本仏、迹仏の通号なり」(여래란 시방삼세의 제불, 이불 · 삼불 · 본불 · 적불의 통호다)라고 하여, 진 · 응의 「이불」과 법 · 보 · 응의 「삼불」을 「여래」의 뜻을 보이는 기본적인 구분으로 든다. 이 문에는 다시 「본불 · 적불」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경론의 「이불」 · 「삼불」의 구분을 넘어선 법화경 불신론의 특징을 보이는 것인데, 이 점은 아래 「본지의 삼신과 수적의 삼신」에서 자세히 살핀다.
화엄의 비로자나 · 진언의 대일과 다보여래
이제 다보여래와 비로자나불 · 대일여래의 관계를 삼신론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비로자나」 · 「노사나」는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사이며, 「대일」은 범어 마하바이로차나(Mahāvairocana)의 번역으로, 부처의 광대무변한 경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이름이다. 화엄경이나 밀교 경전은 이 상징적인 부처를 주존으로 설하는데, 화엄종이나 진언밀교는 이 경전들을 소의경으로 삼아 비로자나불이나 대일여래를 가장 존귀한 부처로 받들고 석존을 낮추는 잘못을 범했다고 강의는 본다.
화엄경 · 범망경의 비로자나
화엄경 권2 비로자나불품은 비로자나불이 무량겁 동안 수행해 정각을 이루고, 연화장장엄세계에 머물며 시방에 큰 광명을 놓고, 털구멍에서 화신의 구름을 내어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설한다.
또 화엄경의 결경으로 여겨지는 『범망경』은 노사나불을 백 아승기겁의 수행을 거쳐 비로소 정각을 이루고 연화대장세계에 머무는 부처라고 설한다. 이 경은 다시 노사나불이 머무는 연화대 둘레의 천 잎이 곧 천 세계이며, 노사나는 그 하나하나의 세계에 천의 석가로 나타나고, 다시 그 각 세계 안의 백억 세계에 백억의 석가불로 출현해 불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곧 『범망경』은 대 위의 노사나불이 천 잎 위의 석가, 각 잎 속의 백억의 작은 석가의 본신(本身)이라고 설한다. 이 『범망경』의 노사나불이 이 어서에서 말씀하신 「十方台上の毘盧遮那」(시방 대상의 비로자나)다.
천태의 해석 — 「대를 본으로 삼고 잎을 말로 삼는다」
『범망경』의 이 설에 대해 천태대사는 『법화문구』 권9하에서 이렇게 말한다.
梵網経は華厳教を結成す。果台を本と為し、華葉を末と為す。別して一縁の為に此の如きの説を作す。而して本末相離れることを得ず
범망경은 화엄의 가르침을 맺어 이룬다. 과대(果台)를 본으로 삼고 화엽(華葉)을 말로 삼는다. 따로 한 인연을 위해 이와 같은 설을 지었다. 그러나 본과 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범망경』이 연화대 위의 노사나불을 본, 잎 위 · 잎 속의 석가불을 말로 나누는 것은 한 인연에 응해 세운 방편의 설이라는 것이다. 천태대사의 이 풀이는 법화경의 결경인 『관보현보살행법경』에 근거한다. 이 경에는 「釈迦牟尼仏を毗廬遮那遍一切処と名づけたてまつる」(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 변일체처라 이름하여 받든다)라고 하여, 석가불과 비로자나불이 다른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 이에 근거해 천태대사는 『법화문구』 권9하에서 보현경의 「비로자나불」을 법신여래, 화엄경의 「노사나불」을 보신여래, 「석가모니불」을 응신여래에 배당해 삼신의 상즉을 밝히고, 삼신이 상즉함이야말로 진실이며 삼신을 따로따로 파악하는 『범망경』 같은 설은 방편의 설이라고 했다.
화엄종의 「법계신」과 천태의 「승응신」
그런데 천태대사 이후 화엄종의 여러 스승은 화엄경의 교주 비로자나불을 응신도 보신도 아니며 시방을 갖추어 법계에 두루한 법계신이고 진신과 응신이 상즉하는 원만한 부처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법장의 『화엄경탐현기』 권2는 「唯、是れ周遍法界の十仏の身となるなり」(오직 이는 법계에 두루한 십불의 몸이 된다)라 하고, 징관의 『화엄경소』 권1은 「即ち是れ法界無尽の身雲にして、真応相融し一多無礙なり」(곧 이는 법계 무진의 몸 구름이며, 진과 응이 서로 융합하고 하나와 여럿이 걸림이 없다)라 한다.
강의는 이 설들이 언뜻 천태대사의 삼신상즉설과 같아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르다고 본다. 비로자나불을 무진의 법계불이라 함으로써 비로자나불이야말로 본신이고 석존은 그 화신이라는 방편의 설을 되풀이할 뿐이며, 이로써 비로자나불이 설한 화엄경이 석존이 설한 다른 제경보다 뛰어나다는 그릇된 설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화엄종의 설에 대해 천태종에서는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이 「승응신(勝応身)」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다. 승응신이란 근기가 둔한 이승 · 범부에게 나타나는 응신이 아니라 상근의 대보살에게 나타나는 뛰어난 응신을 말한다. 예컨대 묘락대사는 『법화문구기』 권7상에서 「勝応は華厳に在り」(승응은 화엄에 있다)라 했고, 사명지례(四明知礼)도 『십불이문지요초』 권하에서 「遮那は乃ち是れ釈迦の異名なり。縦い勝劣殊なり有れども、而も説は必ず是れ応なり」(자나는 곧 석가의 다른 이름이다. 설사 승렬의 다름이 있더라도 그 설하는 것은 반드시 응신이다)라 했다. 비로자나불과 석존에 대한 화엄종의 「본신과 화신」이라는 구분에 맞서, 비로자나불은 소승의 열응신보다는 뛰어나지만 응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사명지례는 다시 「凡そ円教を説くは皆即ち法身なり、何ぞ独り華厳のみならん。但彼の経は小を隔つるが故に勝身を現ず。乃ち報身の像にして而も即ち法身なり、今経は権を開する故に、応身に於いて即ち法身なり」(무릇 원교를 설하는 것은 모두 곧 법신이니, 어찌 홀로 화엄뿐이겠는가. 다만 저 경은 소승을 막으므로 뛰어난 몸을 나타낸다. 곧 보신의 상(像)이면서 곧 법신이다. 이 경은 권을 열기 때문에 응신에서 곧 법신이다)라 하여, 화엄경의 비로자나불과 법화경 적문의 석존의 차이를 밝힌다. 두 부처 모두 원교를 설하는 부처로서 법신불에 자리매김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은 「보신의 상에 즉한 법신」에 지나지 않고 법화경 적문의 교주는 「응신에 즉한 법신」이라는 것이다. 곧 비로자나불은 어디까지나 응신 석존이 설한 「보신의 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본신은 오히려 응신 석존이다. 법화경 적문은 그 본신인 응신에 즉해 법신을 보인 가르침이므로 「보신의 상」에 즉해 법신을 보인 화엄경보다 뛰어나다고 강의는 정리한다.
진언의 대일여래 — 법신설법 · 가지신 · 자수용신
다음으로 진언밀교의 교주 대일여래의 신격을 보자. 진언밀교의 소의경인 『대일경』이나 『금강정경』에서는 대일여래가 신 · 어 · 의 삼업이 허공에 두루한 부처이며, 그 가지력(加持力)으로 삼밀평등의 법을 설한다고 한다.
이렇게 설해진 대일여래를, 선무외의 가르침을 받아 일행(一行)이 지은 『대일경소』는 본지법신과 가지수용신으로 나누어 풀이한다. 대일여래의 본지는 일체처에 두루한 비로자나불이지만 가지력으로 법을 설하는 것은 수용신이며, 이 두 몸은 하나라는 것이다.
『대일경소』의 이 설을 받아 일본 밀교에서도 대일여래에 대해 갖가지 설명이 나왔다. 구카이(홍법)는 『변현밀이교론』 · 『비장보약』 등에서, 밀교의 삼밀의 가르침은 자성수용불인 대일여래가 스스로 법락을 받기 위해 자기 권속인 보살에게 여래 내증의 경계를 설한 법문이라고 했다. 대일여래는 그 내증의 본지는 법신이며, 스스로 그 내증의 법락을 수용하기 위해 법을 설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신불이 스스로를 위해 법을 설하고 그 법락을 수용한다는 생각을 「법신설법」이라 하는데, 이는 고의진언(古義眞言)의 특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에 대해 신의진언(新義眞言)에서는 비로자나 법신불은 어디까지나 설함이 없으며(無說), 법을 설하는 대일여래는 중생 교화를 위해 자증보살의 덕에서 만다라 중대팔엽의 주존으로 몸을 나타낸 가지신이라고 한다. 일종의 분신설이라 할 수 있다. 또 천태밀교(台密)의 자각 · 지증 등은 대일여래를 법신불인 비로자나불과 구분해 자수용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밖에도 타수용신설, 법신 · 자수용신 · 타수용신의 삼신일체설 등 갖가지 설이 세워졌다.
이처럼 진언밀교에서는 대일여래의 신격에 대해 갖가지 번잡한 논의가 있지만, 큰 줄기로는 법신 혹은 법신에 즉한 보신으로 자리매김하며, 응신 석존보다 뛰어난 부처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 강의는 이 자리매김이 삼신론의 관점에서 화엄종의 비로자나불 자리매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화엄종에 대한 천태종의 비판은 그대로 진언종의 대일여래관에도 들어맞는다. 대일여래도 비로자나불과 마찬가지로 응신 석존이 방편으로 설한 상(像)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양계 만다라와 본존관의 각인
다만 이 어서에서 「大日経・金剛頂経・両界の大日如来」(대일경 · 금강정경 · 양계의 대일여래)라 하셨듯, 대일여래는 『대일경』 · 『금강정경』 두 경에 근거한 양계 만다라의 주존으로 구체화되어 본존으로 퍼졌고, 현실적인 영향력에서 비로자나불과는 달랐다.
『대일경』에 근거한 태장계 만다라는 여래의 일체 공덕을 낳아 기르는 평등한 이치가 범부의 마음에 감추어져 있음을 보인다고 하고, 『금강정경』에 근거한 금강계 만다라는 평등한 이치를 증득하는 여래의 지혜를 보인다고 한다. 양계 만다라는 부처의 이(理) · 지(智) 두 면을 상징하며, 그것을 많은 부처 · 보살의 배치로 표현한다. 대일여래는 태장계에서는 이법신(理法身), 금강계에서는 지법신(智法身)으로서 이 · 지 두 면에서 일체의 부처 · 보살을 포섭 · 통합하는 최고의 법신불로 자리매김되며, 형식 면에서도 대일여래를 중존으로 하여 둘레에 많은 부처 · 보살이 배치된다. 강의는 양계 만다라가 이런 자리매김을 실제로 사람들 마음에 상(像)으로 심는 구실을 했다고 본다.
이처럼 불신론에서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석존보다 뛰어난 부처로 자리매김되어 온 교리적 배경이 있었고, 특히 대일여래는 진언밀교 만다라의 중존이 됨으로써 「대일여래야말로 가장 존귀한 부처」라는 그릇된 본존관을 사람들 마음에 심었다. 이런 본존관에 대해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먼저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를 「보탑품의 다보여래」의 좌우 협사로 자리매김하신 것이다.
보탑품의 삼불 — 다보는 법신, 석존은 보신, 분신은 응신
「다보여래」는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 솟아오른 다보탑 안에서 큰 음성을 내어 법화경의 진실을 증명한 부처다. 이 품에서 다보여래는 동방 보정세계에 머물며 법화경의 증명을 본서원으로 삼으므로, 스스로는 법을 설하지 않지만 시방의 어느 국토든 법화경이 설해지면 그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보탑과 함께 출현한다고 한다. 또 부처의 분신불이 시방에서 모이면 보탑을 열어 그 몸을 회좌의 중생 앞에 나타낸다고 설해진다. 그래서 석존이 시방의 분신 제불을 모아 보탑을 열고, 석가 · 다보 두 부처가 보탑 안에 나란히 앉아 허공회의 의식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허공회의 의식에는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의 삼불이 갖추어진다. 이 삼불을 『법화문구』 권8하는 「多宝は法仏を表し、釈尊は報仏を表し、分身は応仏を表す」(다보는 법불을 나타내고, 석존은 보불을 나타내며, 분신은 응불을 나타낸다)라고 풀이한다. 천태대사는 보탑품에 근거해, 법화경을 설하는 주역인 석존이 보신, 그 법화경을 증명하는 다보여래가 법신, 법화경 회좌에 모인 시방 분신 제불이 응신을 나타낸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천태대사는 진실의 설인 법화경의 설법을 핵심으로 한 참된 뜻의 삼신을, 삼불이 갖추어진 보탑품의 설상에 근거해 보였다. 이에 비해 화엄종이나 진언밀교는 이전의 방편설 안에서 상(像)으로 화현된 비로자나불이나 대일여래를 부처의 본신으로 삼고, 그것을 설한 응신 석존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본말전도에 빠졌다고 강의는 본다.
이 어서에서 보탑품의 삼불 가운데 특히 다보여래를 드신 것은, 다보여래가 삼불 가운데 법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화엄 · 진언에서는 법신을 불신의 근본으로 삼았고 진언밀교의 양계 만다라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였다. 이에 대해 보탑품에서 다보여래가 출현한 일은 법화경이 설해지는 곳에서야말로 진실한 법신이 나타남을 보인다. 그러므로 방편의 가르침 속에서 화현된 법신 · 보신인 비로자나불 등은 법화경 회좌에 출현한 진실한 법신인 다보여래의 협사로 자리매김되었다고 강의는 받아들인다.
다보도 수량품 교주의 소종 — 「이중으로 열등하다」
그런데 이 어서는 다시 그 다보여래도 수량품 교주 석존의 「소종」이라고 하신다. 석가 · 다보여래 · 분신 제불로 보여진 삼신은 아직 적문이 설한 각별(各別)의 삼신이지 참된 삼신상즉의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문의 삼신은 법화경이라는 법을 근본으로 해 보여졌으므로, 이전경의 비로자나불 · 대일여래와의 비교에서는 법신불끼리의 비교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적문의 삼신도 본문 수량품에서 열어 드러나는 삼세상주 · 삼신원만의 교주 석존에서 보면 열등하므로, 대성인은 다보여래를 교주 석존의 「소종」으로 자리매김하셨다. 그리고 이로써 이전경이 설한 삼신은 본문의 삼신원만한 교주 석존보다 이중으로 열등함을 보이셨다고 강의는 본다.
- 1단수량품의 교주 석존본문 · 삼세상주 · 삼신원만(본지의 삼신)
- 2단보탑품의 다보여래적문 · 법화경을 증명한 진실의 법신(석가=보 · 다보=법 · 분신=응의 각별의 삼신)此の多宝仏も寿量品の教主釈尊の所従なり이 다보불도 수량품 교주 석존의 소종이니라
- 3단화엄의 비로자나 · 진언 양계의 대일여래이전 · 방편설 안의 법신 · 보신의 상다보여래의 좌우 협사世の王の両臣세상 왕의 두 신하
창가학회의 강의는 대성인이 비로자나 · 대일 → 다보 → 수량품 교주라는 두 단계를 보이신 까닭을, 이전의 법신불이 적문의 법신(다보)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적문의 삼신조차 본문의 삼신원만한 교주에 미치지 못함 — 곧 「이중의 열등」 — 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본다.
본지의 삼신과 수적의 삼신
지금까지 여러 번 언급했듯,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16의 교주 석존과 제경의 제불은 본지와 수적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본지와 수적의 관계는 법화경 이외의 제경에도 설해진다. 그렇다면 법화경이 설하는 본지 · 수적과 제경이 설하는 본지 · 수적은 무엇이 다른가. 강의는 이 점을 천태 · 묘락 등의 석에 근거해 고찰하면서, 삼신론의 관점에서 「수량품의 교주 석존」의 뜻을 밝힌다.
「바로 본지 삼불의 공덕을 전량한다」
천태대사는 『법화문구』 권9하에서 여래수량품이라는 제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寿量とは詮量なり。十方三世の二仏・三仏・本仏迹仏の功徳を詮量するなり。今正しく本地三仏の功徳を詮量す。故に如来寿量品と言うなり
수량이란 전량(詮量)이다. 시방삼세의 이불 · 삼불 · 본불 · 적불의 공덕을 전량하는 것이다. 이제 바로 본지 삼불의 공덕을 전량한다. 그러므로 여래수량품이라 한다
강의는 이 문의 뜻을 다음과 같이 푼다. 「수량」이란 부처가 성취한 공덕을 밝히는 것인데, 그 부처에는 진 · 응의 이불, 법 · 보 · 응의 삼불, 본불 · 적불 등 갖가지 구분이 있다. 제경이 설하는 부처의 공덕은 그런 갖가지 부처의 공덕 가운데 어느 한 면을 설한 데 지나지 않는다. 수량품은 그 가운데서도 「본지 삼불」의 공덕을 밝히는 것이 바른 뜻이며, 이것은 법화경 여래수량품 이외에는 설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래수량품」이라 제목한다는 것이다.
제경도 갖가지 불신을 밝히고 그 공덕의 장엄함을 설한다. 또 삼신을 구분해 부처의 본지는 법신 혹은 보신이라고 하는 본적의 구분도 밝힌다. 그러나 천태대사는 본지의 삼신은 수량품 이외에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묘락 — 「현원하고 나면 본과 적에 각각 셋이 있다」
이 점에 대해 묘락대사는 『법화문구기』 권9중에서 먼저 「법 · 보는 본이고 응신은 적에 속하는데, 어찌하여 본지의 삼불이라 하는가(法・報は是れ本、応身は迹に属す、何を以ってか乃ち本地の三仏というや)」라는 물음을 세우고 이렇게 답한다.
若し其れ未だ開せざれば法・報は迹に非ず。若し顕遠し已れば本迹各三なり
만약 아직 열지 않았다면 법 · 보는 적이 아니다. 만약 먼 것을 드러내고 나면 본과 적에 각각 셋이 있다
수량품에서 구원실성이 열려 드러나기 전에는 법신 · 보신이 본지였지만, 구원실성이 열려 드러난 뒤에는 본지와 수적에 각각 삼신이 있다는 것이다. 「법 · 보 이신이 본지, 응신이 수적」이라는 것은 수량품의 현본 이전, 적불에 관한 설이며, 현본 이후에는 「본지의 삼신」과 「수적의 삼신」이라는 두 종류의 삼신이 있음이 분명해졌다.
본지 삼신의 경증 — 수량품의 세 문
먼저 「본지의 삼신」에 대해 말하면, 수량품에서는 석존이 오백진점겁의 구원에 성불한 이래 늘 중생을 교화해 온 상주의 부처임이 밝혀진다. 천태대사는 『법화문구』 권9상에서, 구원 이래 상주하는 수량품의 석존이 삼신원만의 부처라는 것은 다음 경문으로 분명하다고 한다.
- 「如来は如実に三界の相を知見す」(여래는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한다) — 삼계라는 경계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지혜를 설하므로 보신여래를 나타낸다.
- 「如に非ず、異に非ず、三界の三界を見るが如くならず」(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삼계가 삼계를 보는 것과 같지 않다) — 세간 사람들이 파악하는 치우친 진리를 넘은 궁극의 진리를 깨달았음을 설하므로 법신여래를 나타낸다.
- 「或は己身を示し、或は他身を示し、或は己事を示し、或は他事を示す」(혹은 자기 몸을 보이고 혹은 남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 일을 보이고 혹은 남의 일을 보인다) — 갖가지로 응현해 중생을 교화함을 설하므로 응신여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수량품의 부처가 구원에 처음 삼신을 성취한 이래 삼신상즉의 여래로 상주하고 있음은 분명하며, 이를 「본지의 삼신」이라 한다.
이 본지의 삼신에서는 법신만이 아니라 보신 · 응신도 상주한다. 이 점이 법신의 상주만 설하는 제경의 삼신과 다른 점이다. 특히 응신도 상주한다는 것은 오백진점겁의 구원 이래 출현한 제불, 곧 일체의 제불이 본지 응신의 응현임을 뜻하며, 이로써 제불은 본지 삼신의 수적임이 분명해진다. 또 「법신 · 보신이 본지, 응신이 수적」 혹은 「법신은 무시무종, 보신은 유시유종」 같은 이전 제경의 삼신각별의 불신관이 깨뜨려지고, 그런 각별의 삼신이 모두 방편으로 나타나고 설해진 「수적의 삼신」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수량품의 교주 석존은 법 · 보 · 응 삼신이 상주하는 본지이며, 세 몸이 각별한 제경의 제불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천태대사는 『법화문구』 권9상에서 「発迹顕本の三如来は、永く諸経に異なる」(발적현본의 세 여래는 길이 제경과 다르다)라고 결론짓는다.
이상에서, 법신으로 상주한다고 한 비로자나불이나 대일여래, 장엄한 정토에 머문다는 아미타여래를 비롯한 이전경의 제불, 나아가 법화경 적문의 다보여래까지 포함해, 석존이 적불의 입장에서 설한 모든 부처는 본지의 삼신인 「수량품의 교주 석존」의 수적임이 분명하다.
- 보신如来は如実に三界の相を知見す여래는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한다
- 법신如に非ず、異に非ず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 응신或は己身を示し、或は他身を示し혹은 자기 몸을 보이고 혹은 남의 몸을 보이며
어서에 비친 수량품의 부처 — 제불 · 제토 · 제존
이제 「수량품의 교주 석존」에 대한 대성인의 가르침을 다른 어서에서 살펴보자.
「개목초」는 수량품에서 구원실성이 열려 드러난 뜻을 교주 · 국토 · 소화의 셋으로 나누어 보이신다. 먼저 교주 석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此の過去常顕るる時・諸仏皆釈尊の分身なり爾前・迹門の時は諸仏・釈尊に肩を並べて各修・各行の仏なり、かるがゆへに諸仏を本尊とする者・釈尊等を下す、今華厳の台上・方等・般若・大日経等の諸仏は皆釈尊の眷属なり
이 과거상이 드러날 때 제불은 모두 석존의 분신이니라. 이전 · 적문의 때에는 제불이 석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각각 닦고 각각 행하는 부처이니라. 그러므로 제불을 본존으로 하는 자는 석존 등을 낮추느니라. 이제 화엄의 대상 · 방등 · 반야 · 대일경 등의 제불은 모두 석존의 권속이니라
「과거상(過去常)」이란 석존이 오백진점겁의 구원 이래 상주해 왔음을 말한다. 이전 · 적문에서는 제경의 제불이 석존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선배격의 부처로 여겨졌지만, 수량품에서 석존의 구원실성이 열려 드러난 뒤로는 일체 제불이 석존의 분신이며 권속, 곧 수적의 부처임이 분명해졌다.
「개목초」는 이어서 구원실성의 개현과 함께 분명해진 정토관을 이렇게 보이신다.
今爾前・迹門にして十方を浄土と・がうして此の土を穢土ととかれしを打ちかへして此の土は本土なり十方の浄土は垂迹の穢土となる
이제 이전 · 적문에서 시방을 정토라 부르고 이 국토를 예토라 설하신 것을 뒤집어, 이 국토는 본토이며 시방의 정토는 수적의 예토가 되느니라
제경에서는 제불이 머무는 시방의 다른 국토가 정토라 했지만, 수량품의 구원실성 개현 뒤에는 구원실성의 석존이 상주하는 이 사바세계야말로 참된 정토이며, 제경에 설해져 온 시방의 정토는 도리어 수적의 예토임이 분명해졌다. 제경의 제불은 시성정각의 석존이 설한 화신의 부처이며 그 부처들이 머무는 불토도 화현의 정토에 지나지 않으므로 「예토」라 하신 것이다.
「개목초」는 이어 제불이 교화한 보살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부처가 구원의 부처이므로 적화 · 타방의 대보살도 교주 석존의 제자이며, 일체경 가운데 이 수량품이 없다면 하늘에 해와 달이 없고 나라에 대왕이 없으며 산하에 구슬이 없고 사람에게 혼이 없는 것과 같으리라고 하신다. 그런데 징관 · 가상 · 자은 · 홍법 등 권종의 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기 의경을 찬탄하려고 「화엄경의 교주는 보신, 법화경은 응신」, 「법화 수량품의 부처는 무명의 변역(邊域), 대일경의 부처는 명(明)의 분위」 등이라 하여 수량품의 구슬을 가렸다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맺으신다.
今久遠実成あらはれぬれば東方の薬師如来の日光・月光・西方阿弥陀如来の観音勢至・乃至十方世界の諸仏の御弟子・大日・金剛頂等の両部の大日如来の御弟子の諸大菩薩・猶教主釈尊の御弟子なり、諸仏・釈迦如来の分身たる上は諸仏の所化申すにをよばず何に況や此の土の劫初より・このかたの日月・衆星等・教主釈尊の御弟子にあらずや
이제 구원실성이 드러났으니, 동방 약사여래의 일광 · 월광, 서방 아미타여래의 관음 · 세지, 내지 시방세계 제불의 제자, 대일 · 금강정 등 양부의 대일여래의 제자인 여러 대보살도 오히려 교주 석존의 제자이니라. 제불이 석가여래의 분신인 이상 제불의 소화는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이 국토의 겁초 이래의 해와 달과 뭇 별 등이 교주 석존의 제자가 아니겠는가
제경에 설해진 제불이 석존의 분신인 이상 그 제불의 제자인 관음 · 세지 등의 보살도 석존의 제자가 되며, 하물며 이 사바세계의 해와 달과 뭇 별 같은 제천이 수량품 교주 석존의 제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제5장에서 본 범천 · 마왕과의 「지행의 쟁론」이 여기서 결말을 얻는다. 겁초부터 이 국토를 다스려 온 범천 · 제석 · 해와 달도 교주 석존의 제자다.
이런 가르침은 다른 어서에서도 볼 수 있다. 「소승대승분별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久遠実成を説かざる華厳経の円乃至方等般若法華経の迹門十四品の円頓の大法まで小乗の法なり、又華厳経等の諸大乗経の教主の法身・報身・毘盧遮那盧舎那・大日如来等をも小仏なりと釈し給ふ
구원실성을 설하지 않은 화엄경의 원교, 내지 방등 · 반야 · 법화경 적문 십사품의 원돈의 대법까지 소승의 법이니라. 또 화엄경 등 여러 대승경의 교주인 법신 · 보신, 비로자나 · 노사나 · 대일여래 등도 소불(小佛)이라고 풀이하셨느니라
수량품에 비하면 제경은 소승의 법에 지나지 않고, 수량품의 구원실성의 본불에 비하면 제경에 설해진 제불은 소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쇼미쓰보어서」에서는 제존과 교주 석존의 관계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久遠実成は一切の仏の本地・譬へば大海は久遠実成・魚鳥は千二百余尊なり、久遠実成なくば千二百余尊はうきくさの根なきがごとし夜の露の日輪の出でざる程なるべし
구원실성은 일체 부처의 본지이니라. 비유하면 대해는 구원실성이요 물고기와 새는 천이백여 존이니라. 구원실성이 없으면 천이백여 존은 뿌리 없는 부평초와 같고, 해가 뜨기 전까지만의 밤이슬과 같으리라
본지인 구원실성의 석존과 수적인 일체의 제불 · 제존을 대해와 물고기 · 새의 관계에 견주어 밝히신 것이다. 「천이백여 존」은 진언 만다라에 그려진 제존을 가리킨다.
정토관에 대해서는 「관심의 본존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夫れ始め寂滅道場・華蔵世界より沙羅林に終るまで五十余年の間・華蔵・密厳・三変・四見等の三土四土は皆成劫の上の無常の土に変化する所の方便・実報・寂光・安養・浄瑠璃・密厳等なり能変の教主涅槃に入りぬれば所変の諸仏随つて滅尽す土も又以て是くの如し
무릇 처음 적멸도량 · 화장세계에서 시작해 사라림에서 마치기까지 오십여 년 동안의 화장 · 밀엄 · 삼변 · 사견 등의 삼토 · 사토는 모두 성겁 위의 무상한 국토에 변화한 방편 · 실보 · 적광 · 안양 · 정유리 · 밀엄 등이니라. 능변의 교주가 열반에 드시면 소변의 제불도 따라서 멸진하고 국토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전 · 적문에 설해진 정토는 시성정각의 석존이 방편으로 나타내고 설해 보인 것이므로, 능변(能變)의 교주인 석존이 입멸하면 그와 함께 멸진하는 무상한 불토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같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今本時の娑婆世界は三災を離れ四劫を出でたる常住の浄土なり」(이제 본시의 사바세계는 삼재를 여의고 사겁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니라, 247쪽)라고 하셨듯, 구원실성의 석존이 상주하는 수량품의 사바세계야말로 상주불괴의 정토다.
이처럼 대성인은 구원실성의 부처가 일체 제불 · 제존의 본지임을 밝히시고, 이로써 교주 석존을 소홀히 하고 수적인 제불 · 제존을 본존으로 삼는 제종의 잘못을 엄하게 지적하셨다.
무시무종의 논란과 「본무금유」
천태 · 묘락은 이전 · 적문은 「수적의 삼신」을 밝히는 데 그치는 데 비해 법화경 수량품은 「본지의 삼신」을 밝힌다고 하여, 삼신론의 관점에서 수량품의 독자성을 밝혔다. 이 구분의 근거는 수량품에서 석존 스스로 가야시성을 깨뜨리고 오백진점겁 구원의 성도를 밝힌 데 있다. 이로써 ① 제경의 일체 제불은 시성정각의 석존이 방편으로 설한 부처에 지나지 않으며, ② 오백진점겁의 구원은 과거에 출현했다는 일체 부처가 활동한 때보다 더 옛날이므로 일체의 부처는 오백진점겁 과거에 성도한 석존의 수적임이 분명해졌다.
삼신론으로 말하면, 오백진점겁의 구원 이래 상주하는 석존의 삼신만이 여래의 진실한 몸이며, 따라서 응신에 대한 여래의 참된 몸으로 제경에 설해진 보신이나 법신도 아직 여래의 진실한 몸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천태대사는 이를 「본지의 삼신」과 「수적의 삼신」의 구분으로 보였다.
대성인도 이 구분을 강조하신다. 「개목초」에서는 「雙林最後の大般涅槃経・四十巻・其の外の法華・前後の諸大経に一字一句もなく法身の無始・無終はとけども応身・報身の顕本はとかれず」(쌍림 최후의 대반열반경 사십 권, 그 밖의 법화경 전후의 여러 대경에 한 글자 한 구절도 없으니, 법신의 무시무종은 설하나 응신 · 보신의 현본은 설하지 않았느니라, 198쪽)라고 하신다. 이전의 여러 대승경은 불신의 상주를 설해도 그것은 법신만을 무시무종이라 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법화경 수량품은 보신 · 응신까지 갖춘 삼신상즉의 본지불이 오백진점겁의 구원 이래 상주함을 밝혔다. 이 삼신의 상주야말로 제경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수량품의 독자성이다.
「법화진언승렬사」에서는 삼신의 상주를 설하지 않은 제경의 제불은 모두 「본무금유(本無今有)」 ·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고 하신다.
諸経には始成正覚の旨を談じて三身相即の無始の古仏を顕さず、本無今有の失有れば大日如来は有名無実なり、寿量品に此の旨を顕す釈尊は天の一月・諸仏菩薩は万水に浮べる影なりと見えたり
제경에는 시성정각의 뜻을 말하여 삼신상즉의 무시의 고불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본무금유의 허물이 있으므로 대일여래는 유명무실이니라. 수량품에 이 뜻을 드러내니, 석존은 하늘의 한 달이요 제불 · 보살은 만 갈래 물에 뜬 그림자라고 보이느니라
진언밀교에서 아무리 대일여래의 무시무종을 말해도, 그것을 설하는 석존 자신이 시성정각이어서 삼신상주의 본지불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본무금유」 —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다 — 다. 그리고 「본무금유」라면 대일의 무시무종도 아무런 실재적 의의를 갖지 못하는 말이나 관념뿐인 공론이므로 「유명무실」이다. 이 어서의 「天月の万水に浮ぶ」라는 말씀이 「법화진언승렬사」에서는 「천의 한 달 · 만수에 뜬 그림자」로 그대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량품에서 밝힌 오백진점겁의 구원은 장구하다 해도 유한한 시간이므로 구원실성의 석존도 유한한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었다. 강의는 이것이 진언밀교에서 말하는 대일여래 등의 유명무실한 무시무종에 사로잡힌 논란이며, 수량품은 그런 이전 · 적문의 불신관을 모두 깨뜨려 본지의 삼신을 열어 드러낸 것이므로 수량 개현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과녁을 벗어난 논란이라고 본다. 그래서 대성인은 「법화진언승렬사」에서 이 논란에 대해, 수량품에서 시성정각의 불신관이 깨뜨려진 데에 중대한 뜻이 있다고 하여 이렇게 답하신다.
今大日経並に諸大乗経の無始無終は法身の無始無終なり三身の無始無終に非ず、法華経の五百塵点は諸大乗経の破せざる伽耶の始成之を破りたる五百塵点なり、大日経等の諸大乗経には全く此の義無し
이제 대일경과 여러 대승경의 무시무종은 법신의 무시무종이요 삼신의 무시무종이 아니니라. 법화경의 오백진점은 여러 대승경이 깨뜨리지 못한 가야의 시성을 깨뜨린 오백진점이니라. 대일경 등 여러 대승경에는 전혀 이 뜻이 없느니라
강의는 수량품의 부처를 이전경의 관념적인 법신불의 무시무종과 견주어 논하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며, 대성인이 이 말씀에서 구원실성의 부처가 무시무종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직접 답하지 않으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또 강의는 「제종문답초」(382쪽)의 말씀을 들어, 대일여래에 대해 말하는 법신의 무시무종은 모든 중생에게 해당하는 것이므로 무시무종이라 해서 특히 대일여래가 뛰어난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셨다고 소개한다. 대성인은 주로 진언밀교의 불신관을 파절하시려고 제경의 삼신각별의 불신관과 맞세워 수량품에서 삼신상주의 본지불이 열려 드러난 뜻을 강조하신 것이다.
문저의 「무작의 삼신」
이처럼 대성인은 제경의 불신관과 대비하는 자리에서는 문상 수량품에 열려 드러난 본지 삼신의 뜻을 강조하시지만, 다시 문저의 입장에서 「무작(無作)의 삼신」을 가르치신다.
강의에 따르면 니치칸 상인은 『법화취요초 문단』에서 무작의 삼신을 문상 수량품의 법문이 아니라 내증의 수량품의 법문이라 하셨다. 곧 무작의 삼신은 엄밀히 말하면 문저에 속하는 법문이다. 대성인은 제경에 설해진 제불을 본존으로 하는 제종의 본존관을 깨뜨리실 때는 문상의 구원실성의 부처를 앞에 세워 제불과의 승렬을 정하시지만, 대성인 자신의 법문을 밝히실 때의 「수량품의 석존」은 수량 문저의 무작의 삼신을 가리킨다고 강의는 본다. 이 「일왕 · 재왕」의 구분은 뒤의 장(이 어서 제12장)에서 본문의 본존을 논할 때 다시 나온다.
이런 뜻의 말씀은 곳곳에 보인다. 예컨대 「관심의 본존초」에는 「寿量品に云く『然るに我実に成仏してより已来・無量無辺百千万億那由佗劫なり』」(수량품에 이르되 「그러나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니라」, 247쪽)라고 하시고 이어서 「우리들 기심(己心)의 석존은 오백진점 내지 소현의 삼신으로서 무시의 고불이니라」라고 하신다. 「삼대비법품승사」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所居の土は寂光本有の国土なり能居の教主は本有無作の三身なり所化以て同体なり
머무시는 국토는 적광본유의 국토이며, 머무시는 교주는 본유무작의 삼신이요, 교화받는 이도 같은 체니라
대성인이 무작의 삼신을 강조하시는 까닭은, 무작의 삼신이야말로 본존으로 삼아야 할 궁극의 불신이기 때문이며, 또 무작의 삼신이 아니면 법즉인 · 인즉법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의는 본다.
무작의 삼신과 체가 하나인 「법」은 곧 일념삼천이다. 이 점에 대해 「소승대승분별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二乗作仏・久遠実成は法華経の肝用にして諸経に対すれば奇たりと云へども法華経の中にてはいまだ奇妙ならず一念三千と申す法門こそ奇が中の奇妙が中の妙にて華厳大日経等に分絶たるのみならず
이승작불 · 구원실성은 법화경의 간요로서 제경에 대하면 기이하다 하더라도 법화경 안에서는 아직 기묘하지 않으니라. 일념삼천이라는 법문이야말로 기이한 가운데 기이하고 묘한 가운데 묘한 것으로서, 화엄 · 대일경 등에 분(分)이 끊어졌을 뿐 아니라
문상 수량품이 설한 구원실성은 일대 제경의 간요이지만, 일념삼천의 법문이야말로 묘한 가운데 묘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일념삼천을 「사(事)」 위에 드러낸 것이 「남묘호렌게쿄」이며, 일념삼천의 법즉인인 무작삼신의 보호(寶號)를 「남묘호렌게쿄」라 하는 것은 『어의구전』의 「無作の三身の宝号を南無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무작의 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 하느니라, 752쪽)라는 말씀으로 분명하다.
오백진점겁 이래의 애자 — 친의 덕
其の二는 「此の土の我等衆生は五百塵点劫より已来教主釈尊の愛子なり」(이 국토의 우리들 중생은 오백진점겁 이래 교주 석존의 애자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강의는 이 절에서 두 가지가 가르쳐진다고 본다.
첫째, 수량품의 교주 석존과 사바세계 중생은 오백진점겁 과거 이래 부자 관계에 있다. 이는 부처의 주 · 사 · 친 삼덕 가운데 친(親)의 덕에 맞추어 수량품의 석존과 사바세계 중생의 관계를 보이신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사바세계 중생은 석존과의 사이에서만 감응도교의 관계가 성립하고 다른 부처와의 사이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연 있는 부처와 결연한 중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비치는 것과 같고, 인연 없는 부처와 중생은 귀먹은 이가 우레 소리를 듣고 눈먼 이가 해와 달을 향하는 것과 같다.
둘째의 감응도교는 其の五를 읽는 자리에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첫째의 석존과 중생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다.
서강에서 강의는 이 대목을 이렇게 짚었다. 제5장에서는 사바세계 중생과 인연 있는 「보살」이 삼천진점겁 과거의 석존뿐임이 보여졌다면, 여기서는 사바세계 중생과 인연 있는 「부처」가 오백진점겁 구원에 성도한 본문의 교주 석존뿐임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인위에서 과위로, 보살의 결연에서 부처의 부자 관계로 — 「삼오의 이법」은 이렇게 한 걸음씩 깊어진다.
법화경이 강조한 주사친 삼덕
법화경은 석존이 중생에게 주 · 사 · 친 삼덕을 갖춘 부처임을 강조한다. 비유품 제3에는 「今此の三界は、皆是れ我が有なり、其の中の衆生は、悉く是れ吾が子なり、而も今此の処は、諸の患難多し、唯我れ一人のみ、能く救護を為す」(지금 이 삼계는 모두 나의 것이요, 그 가운데 중생은 모두 나의 아들이니라. 그런데 지금 이곳은 여러 환난이 많으니,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능히 구호하느니라)라고 있다. 「지금 이 삼계는 모두 나의 것」은 주의 덕, 「그 가운데 중생은 모두 나의 아들」은 친의 덕, 「지금 이곳은 환난이 많으니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능히 구호한다」는 사의 덕을 나타낸다.
또 신해품 제4에서는 비유품의 설법을 깨달은 성문들이 장자궁자의 비유를 말하는데, 이 비유야말로 부자 관계에 맞추어 석존과 중생의 관계를 보인 것이다. 이상은 적문의 설이지만, 수량품에도 「我が此の土は安穏」(나의 이 국토는 안온하다), 「我常に此の娑婆世界に在って説法教化す」(나는 늘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설법 교화한다), 「我も亦為れ世の父、諸の苦患を救う者なり」(나도 또한 세간의 아버지로 여러 괴로움과 근심을 구하는 자니라)가 있어 차례로 주 · 사 · 친의 삼덕을 나타낸다. 수량품의 양의병자의 비유도 부자 관계로 교주 석존과 중생의 관계를 보인다.
엄애의 뜻을 갖춘 아버지
이처럼 법화경은 교주 석존의 삼덕, 그 가운데서도 「친」의 덕을 강조하며, 이 어서도 사바세계 일체중생이 교주 석존의 「애자」라고 하신다. 강의는 친의 덕의 특질로 중생을 사랑하는 「자비」를 든다.
부처의 자비가 일체중생에게 평등하게 미친다는 것은 제경의 부처에게도 공통된다. 그러나 법화경 교주 석존의 자비에 대해 전교대사는 『법화수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他宗所依の経は一分仏母の義有りと雖も然も但愛のみ有って巌の義を闕く。天台法華宗は厳愛の義を具して、一切の賢聖、学無学、及び菩提心を発せる者の父なり
다른 종이 의지하는 경은 일부분 불모(佛母)의 뜻이 있으나 다만 사랑만 있고 엄함의 뜻이 빠져 있다. 천태법화종은 엄애(嚴愛)의 뜻을 갖추어 일체의 현성 · 학무학 및 보리심을 일으킨 자의 아버지다
이전경에서는 중생의 괴로움을 슬퍼한다는 뜻에서의 부처의 자비가 설해져 있지만,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법화경에서는 일체중생을 성불시키기 위해 부처의 수자의의 묘법이 열려 드러난다. 이 묘법은 난신난해하므로, 중생이 이를 증득하려면 자신의 무명에 도전해야 하고, 하물며 탁세에 이 묘법을 넓혀 가려면 삼류의 강적과 싸워 가야 하므로 엄함이 따른다. 그러므로 법화경 교주 석존의 자비는 중생의 괴로움을 슬퍼하는 「사랑」의 뜻만이 아니라, 중생에게 도전을 권하는 「아버지」로서의 「엄함」의 뜻을 갖춘다. 법화경에서 수량품의 「我も亦為れ世の父」라는 문에 상징되듯 교주 석존이 일체중생의 「아버지」임이 강조되는 것은 부처 자비의 「엄함」의 뜻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며, 여기에 이 어서에서 교주 석존을 일체중생의 「아버지」 — 「三界慈父」 — 라 하신 까닭이 있다고 강의는 본다.
이처럼 「엄」 · 「애」의 두 뜻을 갖추므로 법화경의 교주 석존이야말로 참된 친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제불의 자비는 「엄」의 뜻이 빠져 있어 참된 친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엄애」의 부자 관계의 바탕에는 자식을 자기와 똑같은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으로 키우고 싶다는 기대가 있으며, 이는 특히 「아버지」에게서 두드러진다.
불성이 같으므로 자식이다 — 니치칸 상인의 해석
강의는 이 점에 대해 니치칸 상인의 「주사친삼덕초(主師親三德抄)」를 끌어, 일체중생이 똑같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부처의 자식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소개한다.
이 글은 먼저 『법화문구』 권5하의 「삼자 · 화택의 비유는 일체중생에게 똑같이 불성이 있음을 비유한다. 불성이 같으므로 똑같이 자식이다」라는 문과, 묘락대사의 『금강비』에서 「사람에게는 과인(果人)의 성품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라는 문을 끈다. 일체중생이 부처의 자식이라 할 수 있는 근거는 중생이 똑같이 불성을 갖추고 있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사람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같은 사람이며, 부모의 자질이 자식에게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부처와 같으며,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부자 관계의 기본이 된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그 불성을 이미 드러냈는가 아닌가에 있다. 부모가 자식의 성장을 바라듯, 부처는 불성을 드러내어 광대무변한 경계를 성취하고 대자비로 일체중생의 성장, 곧 불성을 드러내어 자라 가기를 바란다. 여기에 부처는 부모, 중생은 자식이라는 관계가 생긴다.
니치칸 상인은 다시 중생의 삼인불성의 측면에서 부처와 중생의 관계를 가르치신다. 삼인불성에 대해서는 『법화현의』 권9하에 「손가락을 퉁기고 꽃을 흩음은 연인(緣因)의 종자, 한 구절을 따라 들음은 요인(了因)의 종자, 무릇 마음이 있는 자는 정인(正因)의 종자다」라는 취지의 문이 있다. 정인은 본래 불계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 요인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신해하는 것, 연인은 불계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불성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부처의 교화도 성립한다.
이 중생의 정 · 요 · 연 삼인과 부처의 법 · 보 · 응 삼신의 관계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此の中の正了縁と果中の法報応と同じきなり。故に仏性と同じきが故に等しく是れ子なりと云ふ。譬へば石中の火と現具の火と同じきが如し。猶ほ子の身と親の身と同じきが如し。故に悉是吾子と云ふなり
이 가운데의 정 · 요 · 연과 과(果) 가운데의 법 · 보 · 응은 같으니라. 그러므로 불성과 같은 까닭에 똑같이 자식이라 하느니라. 비유하면 돌 속의 불과 드러난 불이 같은 것과 같고, 또 자식의 몸과 부모의 몸이 같은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모두 나의 아들(悉是吾子)」이라 하느니라
정 · 요 · 연의 삼인불성은 불계를 깨달았을 때 법 · 보 · 응의 삼신으로 성취되므로, 인(因) 가운데서는 삼인불성, 과(果) 가운데서는 삼신으로, 인과의 차이는 있어도 체는 같다. 따라서 중생은 삼인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으므로 부처의 자식이며, 부처는 중생의 삼인불성을 작용시켜 성취한 때의 모습이므로 중생의 부모다. 이런 부처와 중생의 깊은 관계를 밝힌 것이 법화경이며, 그 가운데서도 본문 수량품이다.
대통의 부자에서 구원의 부자로
이미 보았듯 법화경 적문은 삼천진점겁 과거의 대통복강 이래 석존과 중생의 결연 관계를 밝혔다. 이 점에 대해 천태대사는 『법화현의』 권6하에서 「大通の覆講に於いて妙法華を説くに大乗の父子を結ぶことを得たり」(대통의 복강에서 묘법화를 설해 대승의 부자를 맺을 수 있었다)라고 한다. 삼천진점겁 과거의 대통복강 때 중생에게 묘법의 불종을 내린 석존은 아버지이며, 그 법을 들은 중생은 부처의 자식이다. 적문에서는 석존과 중생이 부자의 인연을 맺은 처음의 때를 삼천진점겁 과거로 밝혔고, 이 삼천진점겁의 개현으로 사바세계 중생은 다른 제불이 아니라 석존의 결연 중생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적문에서는 석존 자신이 아직 시성정각의 부처였다. 본문 수량품에서 구원실성이 열려 드러나 석존이 제불을 통합하는 근원적인 본지불임이 분명해지자, 필연적으로 시방세계의 일체중생에게도 석존이야말로 삼덕을 갖춘 인연 있는 부처가 된다. 또 오백진점겁이라는 장구한 과거부터 인연이 있다는 것은 어떤 부처보다 깊이 결연해 있다는 뜻이며, 그런 뜻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유연성(有緣性)을 보인다. 요컨대 수량품에서는 다른 부처와의 상대성을 넘어 본지불로서 일체중생과의 궁극적인 혈연 관계가 밝혀졌고, 양의병자의 비유에서는 그런 근본적인 유연성이 부자 관계로 보여졌다.
교주 석존은 곧 우리들 중생 — 법계의 성불
그 본문에서 교주 석존과 일체중생의 근본적인 유연성은 결국 석존과 중생의 근원적인 일체성으로 귀착한다. 이미 보았듯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같은 체라는 데 근거하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후나모리야사부로허어서」에서 교주 석존과 중생의 일체성을 이렇게 가르치신다.
我等衆生無始よりこのかた生死海の中にありしが・法華経の行者となりて無始色心・本是理性・妙境妙智・金剛不滅の仏身とならん事あにかの仏にかわるべきや、過去久遠五百塵点のそのかみ唯我一人の教主釈尊とは我等衆生の事なり、法華経の一念三千の法門・常住此説法のふるまいなり、かかるたうとき法華経と釈尊にてをはせども凡夫はしる事なし。寿量品に云く『顛倒の衆生をして近しと雖も而も見えざらしむ』とはこれなり、迷悟の不同は沙羅の四見の如し、一念三千の仏と申すは法界の成仏と云う事にて候ぞ
우리들 중생은 무시 이래로 생사의 바다 가운데 있었으나, 법화경의 행자가 되어 무시의 색심이 본래 이성(理性)이요 묘경 · 묘지인 금강불멸의 불신이 될 것이니, 어찌 저 부처와 다르겠는가. 과거 구원 오백진점의 그 옛날 「유아일인」의 교주 석존이란 우리들 중생을 말함이니라. 법화경의 일념삼천의 법문은 「상주차설법」의 행동이니라. 이렇게 존귀한 법화경과 석존이시지만 범부는 알지 못하느니라. 수량품에 이르되 「전도된 중생으로 하여금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한다」 함이 이것이니라. 미오의 같지 않음은 사라의 사견과 같으니, 일념삼천의 부처라 함은 법계의 성불이라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일념삼천을 설해 밝힌 것이 법화경이므로 법화경을 행하는 사람은 「무시의 색심이 본래 이성이요 묘경 · 묘지인 금강불멸의 불신」이 될 수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시방 십계의 모든 중생이 즉신성불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 일념삼천의 법문이므로, 무시 이래의 범부가 본래의 이성을 깨달음으로써 수량품의 일념삼천의 부처와 똑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 곧 우리들 중생이며 구원실성이 곧 법계의 성불이라는 가르침은 「교행증어서」에서도 볼 수 있다.
此の経には二十の大事あり就中五百塵点顕本の寿量に何なる事を説き給へるとか人人は思召し候、我等が如き凡夫無始已来生死の苦底に沈輪して仏道の彼岸を夢にも知らざりし衆生界を・無作本覚の三身と成し実に一念三千の極理を説く
이 경에는 스무 가지 대사가 있으니, 그 가운데서도 오백진점 현본의 수량품에 어떤 일을 설하셨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가. 우리 같은 범부가 무시 이래 생사의 고통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불도의 피안을 꿈에도 알지 못하던 중생계를 무작본각의 삼신으로 이루어 실로 일념삼천의 극리를 설하셨느니라
수량품의 오백진점겁 현본이란 결국 중생을 그대로 무작의 삼신으로 이루는 일념삼천의 묘법이 밝혀진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어서 제4장의 「이십 종」이 여기서는 「이십의 대사」로 불리며, 그 가운데 「오백진점 현본」이 가장 큰 일로 꼽히고 있음도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대성인은 우리 중생의 현실의 미혹한 색심이 아무 수행 없이 그대로 불신이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후나모리야사부로허어서」에 「法華経の行者となりて」(법화경의 행자가 되어)라고 하셨듯, 법화경을 행하는 수행이 있어야 비로소 무시의 색심 위에 불신을 이룰 수 있다. 총(總)하여 말하면 일체중생이 곧 교주 석존이지만, 별(別)하여 말하면 법화경을 행하는 자야말로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며 무작삼신여래다. 이 점은 『어의구전』의 다음 말씀으로 분명하다.
此の品の題目は日蓮が身に当る大事なり神力品の付属是なり、如来とは釈尊・惣じては十方三世の諸仏なり別しては本地無作の三身なり、今日蓮等の類いの意は惣じては如来とは一切衆生なり別しては日蓮の弟子檀那なり、されば無作の三身とは末法の法華経の行者なり無作の三身の宝号を南無妙法蓮華経と云うなり、寿量品の事の三大事とは是なり
이 품의 제목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대사이니 신력품의 부촉이 이것이니라. 여래란 석존이요, 총하여서는 시방삼세의 제불이요, 별하여서는 본지무작의 삼신이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부류의 뜻은, 총하여서는 여래란 일체중생이요, 별하여서는 니치렌의 제자 · 단나이니라. 그러므로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니라. 무작의 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 하느니라.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사란 이것이니라
여기서 「별하여서는 니치렌의 제자 · 단나」라 하셨는데, 강의는 문자 그대로 법화경을 끝까지 행하신 분은 니치렌 대성인 한 분이므로 「니치렌의 제자 · 단나」도 총하여서는 같은 입장이고, 별하여서는 니치렌 대성인 한 분이야말로 참된 법화경의 행자이며 무작삼신의 부처라고 본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교주 석존의 애자」라는 말씀을 친의 덕으로 읽고, 부처와 중생의 부자 관계는 불성(삼인불성)이 같다는 데 근거하며, 그것이 수량품에서 교주 석존과 중생의 근원적인 일체성 — 「법계의 성불」 — 으로 귀착한다고 본다.
석존을 잊고 제불을 취하는 다섯 가지 — 아사세의 불효
其の三에서 대성인은 수량품의 교주 석존을 잊고 다른 제불을 본존으로 취하는 제종의 본존관으로 다섯 예를 드신다. 그 가운데 처음 두 예는 분명히 석존을 낮추고 다른 부처를 본존으로 삼는 것이며, 뒤의 세 예는 일단 석존을 본존으로 세우지만 역시 수량품의 교주 석존을 잊은 예다.
이 본존들은 모두 불법상 중생의 참된 부모인 수량품의 교주 석존에게 적대하는 것이 되므로, 부모를 죽이고 석존을 등진 아사세왕에 견주어진다. 앞의 其の二에서 중생은 수량품 교주 석존과의 부자 관계를 잊고 「불효의 허물」을 범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불효의 허물」의 예를 보이셨다고 할 수 있다.
「개목초」의 다섯 비유
「개목초」는 제종의 본존관이 「불효의 허물」에 해당함을 더 자세히 보이신다. 강의를 따라 그 가르침을 이 어서의 다섯 예와 맞추어 본다.
먼저 열응신의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 소승의 여러 종에 대해서는 「倶舎・成実・律宗は三十四心・断結成道の釈尊を本尊とせり、天尊の太子が迷惑して我が身は民の子とをもうがごとし」(구사 · 성실 · 율종은 삼십사심 · 단결성도의 석존을 본존으로 삼았으니, 천존의 태자가 미혹하여 자기 몸을 백성의 자식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라, 「개목초」 215쪽)라고 하신다. 중생은 본래 제불의 왕인 수량품 교주 석존의 자식이므로 천존의 태자와 같은데, 그 중생이 소승의 열응신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 것은 스스로를 백성의 자식으로 낮추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수량품의 교주 석존을 천존이라 하면 소승의 석존은 백성에 해당한다. 이것이 이 어서의 「小乗の釈尊」(소승의 석존)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승응신의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 법상 · 삼론 등의 대승 여러 종에 대해서는 「法相・三論は勝応身ににたる仏を本尊とす天王の太子・我が父は侍と・をもうがごとし」(법상 · 삼론은 승응신과 닮은 부처를 본존으로 삼으니, 천왕의 태자가 자기 아버지를 시종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라, 215쪽)라고 하신다. 천왕인 수량품의 석존에서 보면 승응신의 석존은 가신인 시종과 같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것이 이 어서로 말하면 「華厳経の釈尊」(화엄경의 석존)에 해당한다고 본다. 화엄경의 석존은 보살에게 나타난 승응신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권대승의 제경은 보살승의 가르침이므로 승응신인 「화엄경의 석존」으로 권대승 여러 종의 본존관을 대표하셨다는 것이다.
또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나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삼는 화엄종 · 진언종에 대해서는 「華厳宗・真言宗は釈尊を下げて盧舎那・大日等を本尊と定む天子たる父を下げて種姓もなき者の法王のごとくなるに・つけり」(화엄종 · 진언종은 석존을 낮추어 노사나 · 대일 등을 본존으로 정하니, 천자인 아버지를 낮추고 종성(種姓)도 없는 자로서 법왕처럼 된 자를 따랐느니라, 215쪽)라고 하신다. 이미 자세히 보았듯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이나 진언 경전의 대일여래는 이전경의 삼신각별의 불신관에서 보여진 법신이며, 삼신상즉 · 삼세상주의 수량품 교주 석존에서 보면 훨씬 열등하다. 또 이 부처들은 본래 석존이 방편으로 설한 부처에 지나지 않는데, 화엄 · 진언 두 종은 이 법신불을 본존으로 삼고 석존을 응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낮춘다. 일단은 법신불로 자리매김되므로 「법왕처럼 된」 것이지만, 본래 임시로 설해진 부처이므로 「종성도 없는 자」다. 이 두 종의 본존관은 이 어서로 말하면 「釈尊を下して大日如来を仰崇し」(석존을 낮추고 대일여래를 우러러 받든다)에 해당한다.
또 「개목초」는 정토종에 대해 「浄土宗は釈迦の分身の阿弥陀仏を有縁の仏とをもうて教主をすてたり」(정토종은 석가의 분신인 아미타불을 인연 있는 부처라 생각하여 교주를 버렸느니라, 215쪽)라고 하신다.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이 근기가 열등한 중생을 극락정토에 왕생시키는 것을 본원으로 하므로, 이 본원력에 의지하는 것이 말법의 열등한 범부에게 맞는 이행도이며, 그 밖의 석존의 가르침은 말법 탁세에서는 무익하다고 한다. 곧 근기론에서 아미타불이야말로 말법 중생에게 인연 있는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본존관은 이 어서의 「世尊は無縁なり阿弥陀は有縁なり」(세존은 무연이요 아미타는 유연이다)에 해당한다. 제5장에서 화성유품 · 천태 · 묘락의 세 문으로 증명된 결론 — 아미타와 사바세계 중생 사이에는 부자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 을 정면으로 뒤집은 주장이다.
끝으로 선종에 대해서는 「禅宗は下賤の者・一分の徳あつて父母をさぐるがごとし」(선종은 천한 자가 일분의 덕이 있어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으니라, 215쪽)라고 하신다. 선종은 특별히 본존을 세우지 않고 정법은 이심전심으로 교외별전된다고 하며, 인사의 견성 체험을 강조해 「불향상인(佛向上人)」, 「비로의 정수리를 밟는다」 등이라 하며 교만하다. 범부의 아견을 근본으로 삼으므로 「천한 자」이며, 일분의 견성 체험에 교만해 부처를 낮추므로 「일분의 덕이 있어 부모를 업신여긴다」고 하셨다고 강의는 본다.
또 이 어서의 「法華経迹門の釈尊」(법화경 적문의 석존)은 「개목초」에는 나오지 않는다. 강의는 이 본존관을, 법화경을 세우지만 적문의 이치를 중시해 수량품의 교주 석존을 잊은 당시의 천태종에 대한 말씀으로 본다.
「아버지의 수명을 모르면」 — 묘락의 경책
이처럼 제종은 모두 저마다의 본존관으로 결국 수량품의 교주 석존을 낮추고 있다. 그래서 「개목초」는 이상의 가르침의 결론으로 제종의 본존관을 총괄해 이렇게 파절하신다.
仏をさげ経を下す此皆本尊に迷えり、例せば三皇已前に父をしらず人皆禽獣に同ぜしが如し、寿量品をしらざる諸宗の者は畜に同じ不知恩の者なり、故に妙楽云く『一代教の中未だ曾て遠を顕さず、父母の寿知らずんばある可からず若し父の寿の遠きを知らずんば復父統の邦に迷う、徒に才能と謂うとも全く人の子に非ず』等云云
부처를 낮추고 경을 낮추니 이는 모두 본존에 미혹한 것이니라. 비유하면 삼황 이전에 아버지를 알지 못해 사람들이 모두 금수와 같았던 것과 같으니라. 수량품을 알지 못하는 제종의 자는 짐승과 같은 은혜를 모르는 자이니라. 그러므로 묘락이 이르되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아직 일찍이 먼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모의 수명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아버지의 수명이 먼 것을 알지 못하면 또한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 미혹한다. 헛되이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전혀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등 운운
「개목초」는 이어 묘락대사가 당나라 천보 연간의 사람으로서 삼론 · 화엄 · 법상 · 진언 등 여러 종과 그 의경을 깊이 보고 널리 살핀 끝에, 수량품의 부처를 알지 못하는 자를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 미혹한, 재능만 있는 자」라고 썼다고 말씀하신다. 「부모의 수명을 알지 못하면」 — 오백진점겁이라는 아버지의 수명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어서의 「석존을 잊고 제불을 취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 「아버지의 수명을 모름」을 가리킨다.
「개목초」의 이 대목은 은혜를 모르는 것을 짐승에 견주는 강한 표현을 쓴다. 이는 수량품의 부처라는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 곧 불은을 모르는 것이라는, 효(孝)와 지은(知恩)의 논리 위에 선 비유다.
아사세 태자의 비유
이 어서는 이 다섯 가지를 아사세 태자에 견주신다. 아사세는 마가다국 빈바사라왕의 아들로, 석존에게 반역한 제바달다의 꾐에 넘어가 부왕을 죽이고 석존을 등졌다. 아버지를 죽인 것은 친의 덕에 대한 반역이요, 석존을 등지고 제바달다를 따른 것은 사의 덕에 대한 반역이다. 수량품의 교주 석존이라는 참된 부모를 잊고 다른 부처를 본존으로 받드는 것은, 불법의 차원에서 바로 이 두 겹의 반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바달다」라는 말은 바로 다음 其の四에서 다시 나온다.
석존의 기일을 바꾸다 — 십재일과 서민의 강
其の四에서 대성인은 사바세계 중생에게 아버지라 할 석존을 잊고 인연 없는 다른 부처를 본존으로 삼는 제종과 그 신도의 미망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로, 당시 염불 신앙의 유행과 함께 민간에 퍼져 있던 종교적 관습을 들어 비판하신다. 앞 절이 교리의 차원에서 「불효」를 보였다면, 이 절은 생활의 차원에서 「불효」를 보인다.
이월 십오일 — 『열반경』이 설한 입멸의 뜻
어문은 먼저 「二月十五日は釈尊御入滅の日」(이월 십오일은 석존 입멸의 날)이라고 하신다. 『열반경』 권30은 석존 입멸일인 「이월 십오일」의 뜻을 이렇게 설한다. 「이월」은 만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봄볕의 달이며, 부처의 상락아정을 지자가 즐기기에 걸맞은 달이므로 석존은 2월에 대열반에 든다고 한다. 또 「십오일」은 보름달의 날이므로, 어둠을 능히 깨뜨리고 중생에게 길과 길 아닌 것의 경계를 또렷이 보이며, 일체의 도적이 도둑질할 마음을 끊게 하는 등 보름달 광명의 열한 가지 뜻을 든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이 보름달 같은 대열반에도 큰 어둠을 깨뜨리고 정도와 사도의 구별을 설하며 번뇌의 도적을 깨뜨리는 등 열한 가지 공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보인다. 이처럼 『열반경』은 부처의 입멸이 2월 15일임을 밝힌다.
이어 「十二月十五日も三界慈父の御遠忌なり」(십이월 십오일도 삼계 자부의 원기니라)라고 하신 것은, 2월 15일이 석존 입멸일이므로 한 해 열두 달의 매달 15일이 석존의 원기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석존의 원기가 되어야 할 매달 15일이 당시 가마쿠라의 관습에서는 「아미타불의 날」로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석존 탄생일인 4월 8일도 「약사불의 날」로 바뀌어 있음을 지적하신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매달 정해진 날을 특정한 부처 · 보살에게 인연 있는 날로 삼는 당시의 관습이 있었다. 강의는 오늘날 다른 종파에서 말하는 「엔니치(縁日)」가 그 흔적일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관습은 「십왕 신앙」에 근거한 「십재일」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문에 이름이 나오는 에이칸의 『왕생강식』에 채택된 것을 계기로 헤이안 시대 이후 정토 신앙의 유행과 결합해 민간에 퍼져 있었다고 강의는 본다. 그 경위를 밝히기 위해 강의는 「십왕 신앙」에 근거한 「십재일」과, 당시 염불 신앙 유행의 축이 된 이른바 「서민 강(講)」의 전개를 차례로 설명한다.
십왕 신앙과 십재일
「십왕 신앙」이란 사람이 죽은 뒤 생전의 행위에 따라 죄가 정해지는데, 저승에서 차례로 열 명의 왕에게 심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그 심판에는 죽은 뒤 유족이 행하는 추선공양이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으므로, 그 필연적인 결과로 죽은 이의 명복을 십왕에게 비는 일이 성행하게 되었다.
십왕은 초칠일의 진광왕(秦廣王)의 심판을 비롯해, 이칠일 초강왕(初江王), 삼칠일 송제왕(宋帝王), 사칠일 오관왕(五官王), 오칠일 염마왕(閻魔王), 육칠일 변성왕(變成王), 칠칠일 태산왕(太山王)으로 이어지고, 다시 백일 평등왕(平等王), 1년 도시왕(都市王), 3년 오도전륜왕(五道轉輪王)에 이르기까지 재판이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신앙의 근거는 『예수시왕생칠경(預修十王生七經)』에 있으며, 이 십왕경은 중국에서 도교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고 한다. 이 경은 매달 1 · 8 · 14 · 15 · 18 · 23 · 24 · 28 · 29 · 30일을 십재일로 하고 날마다 인연 있는 부처 · 보살을 배당한다. 「재일」이란 팔재계를 지니는 날이며, 그날을 한 달에 열흘 두므로 「십재일」이라 한다. 「십재일」 자체는 『지장본원경』 권상에 설해져 있으나, 이를 십왕 신앙과 결합해 날마다 부처 · 보살을 배당한 것은 십왕경에 의한 것이다.
이 십왕 신앙은 일본에서도 퍼져 『지장보살발심인연십왕경』이 위작되기에 이르렀다. 이 경도 「십재일」에 부처 · 보살을 배당하는데, 15일에 아미타여래, 8일에 약사여래가 배당되어 있다. 중국 성립의 십왕경이나 일본 성립의 지장십왕경이 「십재일」의 각 날에 부처 · 보살을 배당한 교리적 배경으로, 저승 십왕의 본지로 부동 · 석가 · 문수 · 보현 · 지장 · 미륵 · 약사 · 관음 · 아촉 · 아미타가 꼽히며, 그 가운데 특히 저승의 지배자로 여겨진 염마왕의 본지인 지장보살에게 비는 것으로 오칠일의 추선공양이 중요하다고 했다.
십재일과 그 배당 부처는 경과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한다. 여기서는 강의가 든 『예수시왕생칠경』 · 『지장보살발심인연십왕경』의 설을 따랐다. 「4월 8일 = 약사」의 배당은 매달 8일을 약사여래의 날로 삼는 관습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본지수적설의 전용
강의는 여기서 「본지수적」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짚는다. 본지수적의 사고방식은 지금까지 보아 온 대로 본래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16의 구원 개현의 본적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응용되어 중국 유교 · 도교의 성인을 불교 보살의 수적으로 보는 생각이 세워졌다. 이는 천태대사도 쓴 것으로, 『마하지관』 권6하에 「我、三聖を遣わして彼の真丹を化す」(내가 세 성인을 보내어 저 진단을 교화한다)라고 있고, 묘락대사는 이를 『청정법행경』의 문으로서 『지관보행전홍결』 권6의 3에 「月光菩薩彼に顔回と称し、光浄菩薩彼に仲尼と称し、迦葉菩薩彼に老子と称す」(월광보살은 그곳에서 안회라 일컫고, 광정보살은 그곳에서 중니라 일컬으며, 가섭보살은 그곳에서 노자라 일컫는다)라고 끌었다.
이는 천태대사의 법문에서는 일체법이 불법의 일부분이라는 원리에서 말해진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신불습합 사상의 근거로 갖가지 것에 적용되었다. 일본의 불교 수용에서 가장 고심한 것은 일본 고래의 신기(神祇) 신앙을 어떻게 불교 신앙과 조화시키느냐였으며, 그 때문에 이 본지수적설이 쓰였다. 구체적으로는 10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신들은 부처 · 보살의 수적이라는 사상이 선전되어 불교와 신기 신앙의 융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 예컨대 11세기 말 무렵에는 하치만구(八幡宮)의 본지불은 아미타여래라는 식의 배당이 이루어졌다. 강의는 일본의 경우 그 부처 · 보살과 신의 생명적 특질을 파악한 근거 있는 배당이 아니라 신사 세력의 강약에 따라 그 신의 본지불이 정해져 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일본의 십왕 신앙과 십재일의 사고방식도 이런 신불습합 사상의 영향 아래 퍼진 것이며, 이를 민중 사이에 정착시킨 것이 염불의 「강」이었다.
수량품의 본적이라는 깊은 법문이 거꾸로 「석존의 날을 아미타의 날로 바꾸는」 근거로 쓰였다는 점에 이 절의 역설이 있다. 본지인 석존을 잊고 수적에 지나지 않는 부처를 본존으로 삼는 「불효」가 생활의 달력 속에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서민 강의 보급과 에이칸의 『왕생강식』
불교의 「강(講)」은 「강경(講經)」, 곧 경전 강의에서 비롯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강경을 위한 모임, 곧 「강회(講會)」 혹은 「강연(講筵)」이 성행했다. 이런 강은 쇼토쿠 태자 시대에 이미 행해졌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강연 형식에서 종교 의식의 색채를 강하게 띠어 갔다. 종교 의식적 모임인 강은 당시 천태종 · 진언종 등이 귀족 계층을 신도로 했으므로 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헤이안 시대 말기에 이르러 염불 신앙이 서민 사이에 퍼지면서 서민을 대상으로 한 「서민 강」이 성해진다.
본래 율령 체제 아래의 불교는 승려와 귀족 사이에서만 성립했고 민중 포교는 제도상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른바 기나이(畿內)에 한정된 것이었고, 당시 외국이라 불리던 칠도(七道)에서는 민중 포교가 방치되어 있었다. 그 제도의 틈을 타서 율령 체제 아래의 구세력인 남도 육종에 맞서 헤이안 시대에 새로 일어난 천태 · 진언 두 종도 도고쿠(東國)나 규슈 · 시코쿠 등에 포교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본격적인 민중 포교는 오히려 헤이안 시대 후기에 새로 일어난 정토교가 앞장섰다. 이윽고 율령 체제가 무너지면서 기나이의 민중 포교 금제도 사실상 무효가 되어 갔고, 예컨대 10세기 교토에서 민중을 상대로 성행한 염불 권진(勸進)은 금지 처분을 면했다.
이렇게 헤이안 시대의 불교는 초기에는 귀족만의 것이었으나 중기 이후 널리 민중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변화 속에서 민중과 불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진전시킨 것이 「서민 강」이었다. 서민 강의 성립은 문헌상 그다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승속 · 귀천 ·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로 퍼져 있었던 듯하다.
예컨대 『곤자쿠모노가타리집』 권17의 「승 닌코(仁康)가 지장을 기념하여 역병의 난을 피한 이야기」 제10에는, 기다린사(祇陀林寺)의 닌코가 도심을 일으켜 대불사 고조(康成)의 집에 가서 반금색의 지장상을 만들게 하고 이를 개안 공양한 뒤 처음으로 지장강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이 강에 결연한 도속남녀는 역병의 난을 피할 수 있었으므로 강이 더욱 번성했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는 같은 시대의 이야기에 자주 보이는데, 공통점으로 ① 강의 대상자가 도속남녀를 가리지 않았다는 것, ② 강이 강연의 자리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의 기원 의식의 자리로 변해 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강은 서민 사이에 열린 신앙의 자리로 퍼져 갔다.
이렇게 퍼진 서민 강의 특색으로, 첫째 신앙의 대상에서 아미타강 · 사리강 · 관음강 · 지장강 · 미륵강 등 다채로운 강이 나타났다. 이는 헤이안 중 · 후기의 관음 신앙 · 미륵 신앙 · 약사 신앙 · 지장 신앙 등 민간 신앙의 다양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기원의 내용에서 죽은 이의 추선공양에 비중이 옮겨 갔다. 여기에 앞에서 본 십왕 신앙이 관계된다. 또 강이 사후의 극락왕생을 설하는 염불 신앙의 유력한 포교 수단이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추선공양을 특징으로 하며 민간에서도 자연스럽게 퍼진 강이었지만, 점차 정착하면서 강의 의식 순서를 규정한 이른바 「강식(講式)」이 만들어졌다. 서민 강 이전의 강식 문헌으로는 전교대사 최징의 『약사여래강식』 1권을 비롯해, 대표적인 강마다 정해진 가쿠반(覚鑁)의 『애염왕강식』, 조케이(貞慶)의 『관음강식』 · 『미륵강식』, 고벤(高辨)의 『사좌강식』 등이 알려져 있다. 이는 주로 승려의 강에서 쓰였으나 『관음강식』은 민간의 강에서도 쓰인 흔적이 있고, 겐신(源信)이 지은 『지장강식』은 민간의 여러 강에 쓰이도록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염불 신앙의 유행에 따라 민간의 강에 본격적인 영향을 준 것이 에이칸의 『왕생강식』 1권이었다. 에이칸은 삼론의 학승이지만 『아미타경요기』 1권, 『왕생십인』 1권 등을 짓고 정토교에 근거한 왕생강의 강식을 정해 스스로 이를 행하는 등 염불 신앙의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그 이전의 강은 대부분 관음강은 18일, 지장강은 24일처럼 한 달에 한 번 행해졌는데, 에이칸의 왕생강도 일단은 아미타불의 날로 여겨진 매달 15일에 행한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습유왕생전』 권하에 「十斎日毎に往生講を勤修せり」(십재일마다 왕생강을 근수했다)라는 기록도 있어, 왕생강을 매달 「십재일」마다 되풀이해 행한 듯하다.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염불의 민간 포교의 축이 된 것이 서민 강이었으며, 그 강식이 에이칸의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릇된 본지수적설에 근거해 「십재일」을 각 부처에 배분하는 얕은 관습이 민중 사이에 퍼졌다. 그 결과 본래 석가모니불에게 가장 인연 깊은 날로 지켜야 할 15일이나 8일이 서민의 신앙 대상이 된 아미타불이나 약사불의 날이 되어 갔다.
선도 · 법연 · 에이칸 — 왜 이 세 사람인가
여기에 이 어서에서 「善導・法然・永観等の提婆達多に誑されて」(선도 · 법연 · 에이칸 등의 제바달다에게 속아)라고 하신 까닭이 있다고 강의는 본다. 선도는 중국 정토교의 대성자이며 법연은 일본 정토종의 창시자다. 이 두 사람은 교리 면에서 염불의 유행에 영향력을 가졌는데, 그들에 더해 에이칸을 드신 것은 그가 염불 포교의 축이 된 「강」의 의식 순서의, 말하자면 「고안자」로서 현실의 포교 면에서 영향을 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교리를 세운 사람과 그것을 생활의 의례로 만든 사람을 함께 드신 셈이다. 그리고 이들을 「제바달다」라 하신 것은 앞 절의 아사세 비유와 이어진다. 아사세가 제바달다에게 속아 아버지를 죽이고 석존을 등졌듯, 당세의 사람들은 이 사람들에게 속아 아버지인 석존의 기일을 다른 부처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 『열반경』2월 15일 석존 입멸매달 15일 =三界慈父の御遠忌삼계 자부의 원기4월 8일 =世尊御誕生の日세존 탄생의 날
- 중국 『예수시왕생칠경』십왕 신앙 + 십재일(1 · 8 · 14 · 15 · 18 · 23 · 24 · 28 · 29 · 30일)에 부처 · 보살 배당
- 일본 『지장보살발심인연십왕경』15일 = 아미타, 8일 = 약사신불습합의 본지수적설
- 에이칸 『왕생강식』매달 15일 · 십재일마다 왕생강→ 서민 강 · 아미타당을 통해 민간에 정착
아미타당의 범람
서민 강의 보급과 함께 도시나 근교 이외의 절이 없는 지역에도 민간의 당우(堂宇)가 잇따라 세워졌는데, 특히 아미타당의 건립이 성했다. 「이치노사와입도어서」에는 그 모습이 이렇게 보인다.
又此の国の一切衆生のためには教主釈尊は明師にて・おはするぞかし、父母を知るも師の恩なり黒白を弁うも釈尊の恩なり、而るを天魔の身に入つて候・善導・法然なんどが申すに付いて・国土に阿弥陀堂を造り.或は一郡・一郷・一村等に阿弥陀堂を造り・或は百姓万民の宅ごとに阿弥陀堂を造り・或は宅宅.人人ごとに阿弥陀仏を書造り・或は人ごとに口口に或は高声に唱へ・或は一万遍・或は六万遍なんど唱うるに・少しも智慧ある者は・いよいよ・これをすすむ、譬へば火に・かれたる草をくわへ・水に風を合せたるに似たり
또 이 나라의 일체중생을 위해서는 교주 석존은 밝은 스승이시니라. 부모를 아는 것도 스승의 은혜요, 흑백을 분별하는 것도 석존의 은혜이니라. 그런데 천마가 몸에 들어간 선도 · 법연 따위가 말하는 데 따라, 국토에 아미타당을 짓고, 혹은 한 군 · 한 향 · 한 마을 등에 아미타당을 짓고, 혹은 백성 만민의 집마다 아미타당을 짓고, 혹은 집집마다 사람마다 아미타불을 그리고 만들며, 혹은 사람마다 입입마다 혹은 큰 소리로 부르고, 혹은 일만 번 혹은 육만 번 따위로 부르니, 조금이라도 지혜 있는 자는 더욱더 이를 권하느니라. 비유하면 불에 마른 풀을 더하고 물에 바람을 합친 것과 같으니라
이런 지적은 어서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강의는 아미타당의 건립 · 보급이 염불 신앙의 보급과 정착을 가져온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는 뜻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지적하셨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그릇된 본당 · 당우 · 신앙의 만연에 맞서, 정법에 의한 말법 중생의 구제를 위해 대성인은 본문의 본존 · 계단 · 제목의 삼대비법을 드러내시고 그 광선유포를 선언하신다. 이 어서 제12장의 「본문의 본존과 계단과 제목의 오자」가 그것이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이 절을, 석존의 기일을 다른 부처의 날로 바꾼 관습 — 십왕 신앙 · 십재일 · 에이칸의 왕생강을 통해 신불습합의 본지수적설 위에 퍼진 것 — 을 「불효」의 생활 속 실례로 드신 것으로 읽는다.
「나도 또한 세간의 아버지」 — 권속묘
其の五는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16의 교주 석존의 뜻을 밝힌 제6장의 맺음으로 경과 석의 문을 끄신다.
처음 문은 수량품에서 줄여 끄신 것이다. 자세히는 이 품에 「医の善き方便をもって、狂子を冶せんが為の故に、実には在れども而も死すと言うに、能く虚妄を説くもの無きが如く、我も亦為れ世の父、諸の苦患を救う者なり」(의사가 좋은 방편으로 미친 아들을 다스리기 위해 실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었다고 말한 것을 능히 허망하다 할 자가 없는 것처럼, 나도 또한 세간의 아버지로 여러 괴로움과 근심을 구하는 자니라)라고 있다. 수량품의 양의병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인 양의가 광자를 구했듯, 수량품의 교주 석존도 세간 중생의 아버지로서 여러 괴로움에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 부자 관계는 이미 살폈다.
다음에 끄신 천태대사의 말은 『법화현의』 권6하에서 권속묘를 논한 대목의 문으로, 중생은 본연(本緣)에 따라 부처 아래 그 권속으로 응생함을 말한다. 강의는 그 취지를 이렇게 풀이한다. 법신보살은 과거에 부처를 스승으로 삼아 처음 발심하고 그 스승 아래서 법신을 얻어 불퇴지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수행의 스승이던 부처가 사바세계에 출현해 불사를 할 때는 과거의 본연의 견인력으로 저절로 인연 있는 부처 아래 왕생한다. 비유하면 백 갈래 냇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강의는 천태대사의 이 말과 관련해 법화경에서 부처와 중생의 관계를 「권속묘」와 「감응묘」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감응묘까지 다루는 까닭은 감응도교야말로 신통 · 설법 · 권속 · 공덕이익 등 부처와 중생의 관계가 성립하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其の二의 「有縁の仏と結縁の衆生とは譬えば天月の清水に浮ぶが如く無縁の仏と衆生とは譬えば聾者の雷の声を聞き盲者の日月に向うが如し」(인연 있는 부처와 결연한 중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뜨는 것과 같고, 인연 없는 부처와 중생은 귀먹은 이가 우레 소리를 듣고 눈먼 이가 해와 달을 향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씀과 이어진다.
다섯 가지 권속과 응생의 세 뜻
『법화현의』 권6하는 부처의 일체 권속을 이성권속 · 업생권속 · 원생권속 · 신통생권속 · 응생권속의 다섯 가지로 나눈다.
- 이성권속(理性眷属) — 일체중생은 불성이라는 궁극의 이치에서 부처와 하나이므로 본래 부처의 자식이며, 그런 뜻에서 구체적인 결연의 유무와 관계없이 부처의 권속이다.
- 업생권속(業生眷属) — 과거에 부처와 결연했으나 아직 득도하지 못하고 업연으로 금생에 부처의 권속이 된 자.
- 원생권속(願生眷属) — 마찬가지로 과거에 득도하지 못했으나 강한 원력으로 부처의 권속으로 태어나는 자.
- 신통생권속(神通生眷属) — 과거 부처의 교화로 일부분의 진리를 얻어 성위에 올랐고 그 과보로 다른 세계에 태어났으나, 스스로의 원력과 신통력으로 부처의 세계에 와서 태어나 부처의 교화를 돕는 자.
- 응생권속(応生眷属) — 과거에 무명을 깨뜨리고 법신을 얻어 실보토에 머무는 보살이 부처가 출현한 곳에 응신으로 태어나는 경우.
천태대사는 이 「응생」에 세 가지 뜻을 밝힌다. ① 숙타(熟他) — 다른 이의 근기를 익게 하려고 자비력으로 응생함, ② 자성(自成) — 자신의 수행을 나아가게 하려고 응생함, ③ 본연(本緣) — 자신이 발심 · 수행한 스승인 부처와의 본연에 이끌려 부처가 교화하는 곳에 저절로 응생함.
이 어서에 끄신 문은 ③의 본연에 의한 응생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은 실보토에 머무는 법신보살의 응생을 말한 문이지만, 대성인은 이를 사바세계의 일체중생으로 넓혀 끄셨다고 강의는 본다. 그리고 그렇게 넓혀 끌 수 있는 근거는 법화경이 밝힌 「권속묘」에 있다.

「천성을 정하고 부자를 밝힌다」 — 법화경의 권속묘
천태대사는 위의 다섯 권속이나 응생권속의 세 뜻은 제경에 설해진 여러 권속의 일단의 구분이며, 법화경은 그 여러 권속이 궁극적으로 모두 묘함을 밝힌다고 한다. 그 갖가지 중생이 부처의 권속이라는 모든 근거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으며, 이를 밝히기 위해 법화경은 근패(根敗)의 이승이나 선근을 끊은 일천제의 성불을 설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일체 권속의 묘가 성립한다. 이에 비해 제경은 일체중생의 불성의 묘를 설하지 않으므로 권속묘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천태대사는 『법화현의』 권6하에서 이렇게 말한다.
諸経には麤の眷属を明かして、皆仏性を見ず。今の法華には天性を定め、父子を審かにするに復客作に非ず
제경에는 거친 권속을 밝혀 모두 불성을 보지 못한다. 지금의 법화에는 천성을 정하고 부자를 밝히니 다시는 품팔이꾼이 아니다
「객작(客作)」, 곧 품팔이꾼이란 신해품의 궁자가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가 아들인 줄 모르고 품을 팔던 모습이다. 법화경에서 비로소 「천성(天性)」 — 타고난 부자의 관계 — 이 정해져 궁자는 더 이상 품팔이꾼이 아니라 아들이 된다. 천태대사는 또 법화경에서는 일체의 권속이 묘하다는 것을 이렇게도 말한다.
謂ゆる結縁妙・成熟妙・業生妙・願生妙・応生妙・内眷属妙・外眷属妙なり。能く妙道を受け妙事に影響す。是の故に妙と称す
이른바 결연묘 · 성숙묘 · 업생묘 · 원생묘 · 응생묘 · 내권속묘 · 외권속묘다. 능히 묘도를 받고 묘사에 영향한다. 그러므로 묘라 일컫는다
과거의 결연이나 성숙도, 금생에 업생 · 원생 · 응생한 것도, 또 업생권속 가운데 도를 얻은 법내(法內)의 권속도 도를 얻지 못한 법외(法外)의 권속도 법화경에서는 모두 묘하며, 이 일체의 권속은 부처가 설하는 묘도를 받고 부처가 하는 묘사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한다는 것이다. 제5장에서 묘락대사가 말한 「결연은 낳음, 성숙은 기름」이 여기서는 「결연묘 · 성숙묘」로 법화경 안에서 묘로 거두어진다.
예컨대 천태대사는 석존의 육친이나 제자 같은 친연자는 물론, 제바달다나 아사세왕 등 부처를 원망하고 적대한 자조차 일단은 업생의 권속이지만 실은 숙타를 위해 응생해 부처의 교화를 도운 법신보살이라고 한다. 이는 법화경의 「内に菩薩の行を秘し、外に是れ声聞なりと現ず」(안으로 보살의 행을 감추고 밖으로 성문이라 나타낸다) 등의 설에 근거한다. 이 문은 부루나에게 수기를 줄 때의 말로, 부루나 등 성문의 모습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며 실은 보살행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제바달다품은 제바달다가 석존에게 적대한 것이 석존의 교화를 돕는 선지식의 작용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 수학무학인기품 제9에서는 석존 출가 전의 아들인 라후라가 육친이 곧 불자임을 중생에게 보이고 있다고 설해진다.
이런 법화경의 설에 근거해 천태대사는 중생이 부처에게 보이는 법내 · 법외, 좋음 · 나쁨, 순 · 역 등 갖가지 모습은 모두 임시의 모습이며, 법화경의 묘의 관점에서는 이런 구분을 모두 넘어 일체의 권속이 불자로서 묘한 존재가 된다고 한다. 其の三 · 其の四에서 아사세와 제바달다는 「불효」의 상징으로 쓰였지만, 법화경의 권속묘에서는 그들조차 부처의 교화를 돕는 권속으로 거두어진다. 순연(順緣)만이 아니라 역연(逆緣)도 부처와의 인연이라는 이 관점은, 법화경이 왜 「묘」의 경인지를 보여 준다.
「이 부처」는 수량품의 「나」
이상에서 이 어서에 끄신 천태대사의 말은 단지 응생권속인 법신보살의 본연을 말한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일체중생의 본연을 말한 것으로 넓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本此の仏に従って」(본래 이 부처를 따라)라는 말에 보이는 본연이란, 당연히 각각의 법신보살이 과거 수행할 때의 불연이 아니라 「본지불인 수량품 교주 석존과의 불연」을 뜻한다. 일체경 가운데 수량품의 교주 석존만이 구원 이래 일체중생을 교화해 온 부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태대사도 『법화현의』에서 「今経には、仏自ら近の権を開して遠の実を顕す。諸の眷属の迹の権を開して本の実を顕す。故に文に云く『今当に汝等が為に、最実事を説く』と」(지금 이 경에서는 부처 스스로 가까운 권을 열어 먼 실을 드러낸다. 여러 권속의 적의 권을 열어 본의 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경문에 이르되 「이제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가장 진실한 일을 설하리라」고 했다)라고 말한다. 교주 석존이 구원의 본지를 드러낸 수량품의 개근현원과 중생의 권속묘의 개현이 밀접하게 관계됨을 보이는 동시에, 「최실사(最實事)」라는 법화경의 말을 끌어 본지불과의 본연이야말로 중생에게 궁극의 사실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곧 법화경도 적문의 단계에서는 「이성권속」에 머물지만, 본문 수량품에서 구원의 부처와 지용의 보살의 사제 · 부자 관계가 분명해졌고, 여기서 「응생권속」의 설명을 말법의 중생에게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석존에게 인연 있는 중생이 본이유선(本已有善)인 데 비해 말법의 중생은 그것만으로는 본미유선(本未有善)이지만, 묘법 수지로 지용의 권속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의는 본다.
또 강의는 이 어서에 끄신 천태대사의 「本此の仏に従って」라는 문이, 지용의 보살과 구원실성 석존의 본연을 보인 법화경 종지용출품 제15의 경문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찰한다.
是の諸の大菩薩は、無数劫より来、仏の智慧を修習せり。……此等は是れ我が子なり……我伽耶城、菩提樹下に於いて坐して、最正覚を成ずることを得て、無上の法輪を転じ、爾して乃ち教化して、初めて道心を発さしむ。今皆不退に住せり、悉く当に仏道を得べし
이 여러 대보살은 무수겁 이래 부처의 지혜를 닦아 익혔느니라. …… 이들은 나의 아들이니라 …… 나는 가야성 보리수 아래 앉아 최정각을 이루고 무상의 법륜을 굴려 이에 교화하여 처음 도심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지금 모두 불퇴에 머물러 모두 마땅히 불도를 얻으리라
「처음 도심을 일으키게 했다」 · 「지금 모두 불퇴에 머문다」라는 용출품의 말이 천태대사의 「처음 도심을 일으키고 …… 불퇴지에 머문다」와 그대로 겹친다. 그러므로 이 어서가 수량품의 「我も亦為れ世の父」라는 경문에 이어 「本此の仏に従って」라는 천태대사의 말을 끄신 것은, 「이 부처」가 곧 수량품의 「나」, 교주 석존임을 시사하신 것이라고 강의는 본다.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 감응묘
다음으로 부처와 중생의 관계의 근본인 감응도교에 대해 천태대사의 『법화현의』 권6의 논술에 근거해 살펴보자.
기와 응 — 「감이 있으면 반드시 드러난다」
「감(感)」은 「기(機)」의 다른 이름이며, 「기」는 부처를 감하는 중생의 정신적인 기능이다. 「응(應)」은 중생의 감에 응하는 부처의 작용이다. 이 응에 대해 천태대사는 『법화현의』에서 「果智は寂にして照らし、感有れば必ず彰る」(과지는 고요하면서 비추니 감이 있으면 반드시 드러난다)라고 말한다. 부처의 지혜는 고요하지만 일체법을 비추고 있으므로 중생의 감이 있으면 반드시 어떤 작용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천태대사는 중생의 「기」에 「미(微)」 · 「관(關)」 · 「의(宜)」의 세 뜻을, 부처의 「응」에 「부(赴)」 · 「대(對)」 · 「응(應)」의 세 뜻을 들어 각각 대응시킨다.
먼저 기의 「미」란 중생에게 막 생겨나려 하는 선을 말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잠재해 있으므로 「미」라 한다. 「미」 자는 눈에 띄지 않음, 드러나지 않음을 뜻한다. 곧 「미」의 뜻은 중생에게 가능성의 단계에 있는 선을 가리킨다. 이 잠재적 가능성은 부처의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실현되므로 『법화현의』는 이렇게 말한다.
衆生に生ず可きの善有り。故に聖応ずるときは則ち善生じ、応ぜざるときは則ち生ぜず。故に機は微なりと言うなり
중생에게 생길 수 있는 선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이 응할 때는 선이 생기고 응하지 않을 때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는 미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의 「미」에 대응하는 응의 뜻으로 「부」가 거론된다. 「부」란 중생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부처의 작용을 보인다.
「기(機)」라는 한자에는 본래 쇠뇌가 돌을 튕겨 내는 작용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 작용은 쏘는 이가 쏘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바로 「미」와 통하는 뜻을 지닌다. 예컨대 『주역』에는 「機とは動の機にして、吉の先ず見わるる者なり」(기란 움직임의 기미로서 길함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있다. 그러므로 「미」로 「기」의 뜻을 설명하는 것은 그 글자의 본래 뜻에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었다고 강의는 본다.
천태대사는 「생길 수 있는 선」의 「생길 수 있는」을 넓은 뜻의 가능성으로 해석해 「미」의 뜻을 채택했다. 종래의 성실종 등의 생각에서는 「생길 수 있는 선」이란 지금 막 생기려는 선의 조짐이며 이에 부처 · 보살이 응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천태대사는 「今、生ず可きの善を明かすは、此の語則ち寛し」(지금 생길 수 있는 선을 밝히는 것은 이 말이 곧 넓다)라고 하여, 단지 지금 움직여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개별적 가능성이 아니라 더 넓은 뜻의 보편적 가능성이라고 하고, 이 보편적 가능성을 미래에 실현하기 위해 부처가 응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다만 「若し通じて論ずれば、三世の善悪を皆機と為す。別して論ずれば、但、未来の善悪を取りて正義と為すなり」(만약 통하여 논하면 삼세의 선악을 모두 기로 삼는다. 별하여 논하면 다만 미래의 선악을 취해 바른 뜻으로 삼는다)라고 했듯, 천태대사는 선만이 아니라 악에도 부처의 응이 있다고 한다. 이를 밝힌 것이 ②의 「관 · 대」와 ③의 「의 · 응」이다.
②의 「관 · 대」는 중생의 기가 선인가 악인가를 넘어 부처와 중생이 본질적으로 서로 관계되어 있음을 보인다. 천태대사는 이를 「衆生に善有りて、聖の慈悲に関わる。故に機は是れ関の義なり」(중생에게 선이 있어 성인의 자비에 관계한다. 그러므로 기는 관의 뜻이다)라고 한다. 중생의 선악은 모두 부처의 자비에 관계하므로 기는 「관」의 뜻이며, 부처의 자비는 단지 중생의 가능성으로서의 선의 기만이 아니라 중생의 현실의 선악의 사실에 응하므로 응은 「대」의 뜻이다. 천태대사는 이 「대」의 뜻을 장사에 비유한다. 한쪽이 팔려 해도 다른 쪽이 사려 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파는 이는 파는 이일 수 없듯, 중생의 선악이 부처와 관계되어 있기에 부처도 중생에게 자비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 「관 · 대」의 뜻이, 부처와 중생을 전혀 별개로 나눈 뒤 둘의 관계를 논하는 성실종의 감응론을 비판하고 대승의 공의 입장에서 감과 응이 인연의 관계로 성립함을 강조한 삼론종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천태대사는 이런 공의 입장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감응의 뜻을 밝힌다.
그것이 ③의 「의 · 응」이다. 이는 단지 감과 응의 상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구체적 · 행동적인 둘의 대응을 파악한 것이다. 기의 「의」란 중생이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 무명의 괴로움을 뽑고 법성의 즐거움을 주려는 부처의 자비에 맞는다는 뜻이다. 이런 부처의 자비에 맞는 「기」가 있기에, 부처는 그 마땅한 바에 따라 발고 혹은 여락을 위해 갖가지 법으로 응한다. 이렇게 천태대사는 「의 · 응」의 뜻으로 중생 기의 선악이 모두 부처의 자비의 응과 대응함을 보이고, 이런 뜻에서 단지 선만을 바른 기로 삼거나 거꾸로 단지 악만을 바른 기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깨뜨리며, 「闡提の改悔の心を起こすより、上等覚に至るまで、皆、善悪相帯すること有り、故に機と為すことを得」(일천제가 뉘우치는 마음을 일으키는 데서부터 위로 등각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악을 서로 띠고 있으므로 기가 될 수 있다)라고 결론짓는다.
사구 · 삼십육구 · 육만사천팔백 — 명응의 깊이
부처가 중생의 선악 어느 쪽에도 응한다는 것은 부처의 응이 여러 갈래에 걸친다는 뜻이다. 천태대사는 감응의 이 다양성을 「명기명응(冥機冥應)」 · 「명기현응(冥機顯應)」 · 「현기현응(顯機顯應)」 · 「현기명응(顯機冥應)」의 사구로 분별한다. 명기란 과거에 선근을 쌓아 익은 기이며, 현기란 현재 불도 수행에 힘써 선근을 쌓고 있는 기다. 명응이란 분명히 감득할 수는 없으나 부처의 법신의 응으로 보이지 않는 이익이 있는 경우이며, 현응이란 분명히 감득할 수 있는 형태로 부처의 공력이 응현하는 경우다. 이 사구는 두 기와 두 응의 조합에 갖가지 경우가 있음을 보인 것인데, 이를 열어 사기 · 사응을 조합한 삼십육구를 세우고, 다시 십계호구의 원리 위에서 모두 64,800가지 감응의 형태까지 밝힌다.
강의는 『법화현의』의 이 논술에서 주목할 점으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 일체의 기에 감응이 있을 수 있다고 한 것. 둘째, 분명히 감득할 수 없는 명응이 있다고 한 것. 이로써 종래처럼 특수한 경우에 감득되는 특수한 영험만을 감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면서 본질적인 감응의 방식이 보여지며, 특수한 영험은 오히려 특수한 장면에 맞춘 나타남, 말하자면 본질적인 감응의 방편으로 자리매김된다.
이선에 응하다 — 아비지옥에도 불계의 기가 있다
두 점 가운데 일체의 기에 감응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다시 부처가 단지 중생의 「사선(事善)」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일체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이선(理善)」에 응한다는 파악으로 극에 이른다. 이 파악은 앞의 기의 세 뜻과 응의 세 뜻을 사실단에 배당한 데서 보인다. 「미 · 부」는 중생이 선을 바라는 마음에 부처가 다가가는 것이므로 세계실단, 「관 · 대」는 발고의 비(悲)로 중생의 괴로움에 마주하고 여락의 자(慈)로 중생의 선에 마주하므로 대치실단이며, 「의 · 응」에 대해서는 각자에게 구체적 · 개별적인 선인 「사선」을 생기게 하는 데 마땅한 감응은 위인실단, 일체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보편적인 선인 「이선」을 생기게 하는 데 마땅한 감응은 제일의실단에 해당한다고 나눈다. 강의는 이것이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보편적인 「이선」에 부처가 응하는 것이야말로 감응의 근본임을 보인다고 본다.
이 파악은 십계호구의 원리에 근거해 일체중생이 불계의 묘기(妙機)를 갖추고 있음을 보인 『법화현의』의 다음 문에도 보인다.
阿鼻は楽間つること無ければ、則ち事善無し、云何ぞ十を具せん。然るに阿鼻に性善の断ぜざること有るが故なり。又、近世に事善無しと雖も、遠劫に或いは有らん。悪強く善弱ければ妙伏して未だ発せず、若し因縁に遇はば発することも亦何ぞ定まらん。是の故に阿鼻の十機を具すことを得べし、即ち麤妙を判ぜば、九界の機を麤と為し、仏界の機を妙と為す
아비지옥은 즐거움의 틈이 없으니 곧 사선이 없다. 어찌 열을 갖추겠는가. 그러나 아비에도 성선(性善)이 끊어지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가까운 생에 사선이 없더라도 먼 겁에는 혹 있었을 것이다. 악이 강하고 선이 약하면 묘가 엎드려 아직 일어나지 않지만, 만약 인연을 만나면 일어나는 것을 또한 어찌 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아비도 열 가지 기를 갖출 수 있다. 곧 추묘를 가리면 구계의 기를 추로 삼고 불계의 기를 묘로 삼는다
이 문은 일체중생이 십계의 기를 본래 갖추고 있다고 하고, 그 십계의 기 가운데 구계를 추(麤), 불계를 묘(妙)로 나눈다. 이로써 아비지옥의 중생이라도 안에 갖춘 불계의 묘기에 부처가 응할 수 있음을 보인다. 「이선」은 생명에 본래 갖추어진 것이므로 아비지옥의 중생에게도 결코 끊어져 있지 않으며, 그런 뜻에서 부처가 일체의 기에 응하는 근저의 기반이 된다.
법신의 응이 묘응이다
다음으로 분명히 감득할 수 없는 「명응」은 천태대사에게서 참된 「묘응」으로 자리매김된다. 『법화현의』에 「未だ法身の応を得ざれば麤、法身の応を得るは妙なるものなり」(아직 법신의 응을 얻지 못하면 추요, 법신의 응을 얻으면 묘다)라고 있다. 응신의 응이 아니라 법신의 응이므로 감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명응이지만, 보이는 응신의 응보다 보이지 않는 법신의 응이야말로 부처의 응의 본질이다. 따라서 법신의 응이 없으면 어떤 영험도 추의 감응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법신의 응이야말로 이선을 생기게 하는 데 마땅한 감응이라고 강의는 본다.
「한 달이 내려오지 않고 백 갈래 물이 올라가지 않는다」
이제 지금까지의 고찰을 이 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자. 강의는 이 장에서 사바세계 중생과 수량품의 교주 석존의 관계에 대해 다음 두 가지가 밝혀졌다고 정리한다.
- 일체경에 설해진 부처 가운데 사바세계 중생에게 본연의 부처는 수량품의 교주 석존 말고는 없다.
- 사바세계 중생은 수량품의 교주 석존과의 사이에서만 참된 감응도교가 성립한다.
이 감응도교에 대해 이 장은 「有縁の仏と結縁の衆生とは譬えば天月の清水に浮ぶが如く」(인연 있는 부처와 결연한 중생은 비유하면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뜨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다. 이 말씀의 「하늘의 달」은 수량품 교주 석존의 「응」을, 「맑은 물」은 사바세계 중생의 「감」을 비유하신 것인데, 이 비유는 천태대사가 『법화현의』 권6에서 원교의 감응에 대해 말한 다음 문의 취지와 일치한다고 강의는 본다.
一月降らず、百水昇らずして、河の短長に随い、器の規矩に任せて、前無く後無く、一時に普く現ずるが如し。此は是れ不思議の妙応なり
한 달이 내려오지 않고 백 갈래 물이 올라가지 않는데도, 강의 길고 짧음을 따르고 그릇의 모나고 둥근 데 맡겨 앞도 없고 뒤도 없이 한때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불가사의한 묘응이다
하늘의 한 달인 부처가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땅의 백 갈래 물인 중생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달이 강의 길고 짧음이나 그릇의 크고 작음 같은 차이를 넘어 모든 물에 두루 그림자를 비추듯, 일체의 기에 한때에 응하는 불가사의한 묘응이 원교의 감응이라는 것이다.
이 『법화현의』의 문을 바탕으로 하면, 이 어서의 「譬えば天月の清水に浮ぶが如く」라는 비유의 뜻으로 두 가지를 볼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첫째, 하나와 여럿의 관계, 곧 하늘의 한 달인 수량품의 교주 석존과 땅의 만 갈래 물인 사바세계 일체중생의 감응을 보이신 것이다. 수량품의 교주 석존은 삼세상주의 본지불이므로 일체의 기에 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전 제경의 제불은 삼신각별의 권불이며 일정한 기에 방편으로 나타난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其の一의 「天月の万水に浮ぶ是なり」가 본지와 수적의 관계를 하늘의 달과 물의 그림자로 보였다면, 其の二의 「天月の清水に浮ぶ」는 같은 비유를 감응의 관계로 뒤집어 보인 것이다.
둘째, 묘기와 묘응의 관계를 보이신 것이다. 이 말씀의 「맑은 물」이란 「결연」이 있다는 것인데, 중생의 주체적인 자세로 말하면 「신심」이라고 강의는 받아들인다. 그 「신심」이라는 맑은 물에 하늘의 한 달인 수량품의 부처가 또렷이 비친다는 것은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불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여기에는 불계의 묘기 · 묘응이 보여졌다. 그리고 이 묘기 · 묘응의 감응도교를 방해하는 것이 추기(麤機) · 추응(麤應)에 대한 집착이다. 그 추기 · 추응의 대표가 당시에는 아미타여래였으며, 그래서 이 장에서는 염불에 대한 집착을 중심적으로 파절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5장의 「瓦の鏡に天月を浮ぶるが如し」(기와 거울에 하늘의 달을 띄움과 같다)와 이 장의 「天月の清水に浮ぶが如く」, 그리고 「聾者の雷の声を聞き盲者の日月に向うが如し」(귀먹은 이가 우레 소리를 듣고 눈먼 이가 해와 달을 향하는 것과 같다)는 하나의 비유 체계를 이룬다. 달은 하나지만, 그것을 비추는 그릇이 맑은 물이냐 기와냐에 따라, 또 감각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에 따라 감응이 성립하기도 하고 성립하지 않기도 한다.
- 천월 · 만수天月の万水に浮ぶ是なり하늘의 달이 만 갈래 물에 뜨는 것이 이것이니라其の一본지와 수적: 수량품 교주 하나 ↔ 시방의 제불
- 천월 · 청수有縁の仏と結縁の衆生とは譬えば天月の清水に浮ぶが如く인연 있는 부처와 결연한 중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뜨는 것과 같고其の二묘응과 묘기: 수량품 교주의 응 ↔ 결연 · 신심의 맑은 물
- 농자 · 맹자無縁の仏と衆生とは譬えば聾者の雷の声を聞き盲者の日月に向うが如し인연 없는 부처와 중생은 귀먹은 이가 우레를 듣고 눈먼 이가 해와 달을 향하는 것과 같다其の二감응 불성립
- 와경 · 천월瓦の鏡に天月を浮ぶるが如し기와 거울에 하늘의 달을 띄움과 같다제5장아미타의 내영을 기다림
법화경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감응
천태대사는 『법화현의』 권6상에서 감응도교를 근본으로 하는 부처 교화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신륜(身輪) · 구륜(口輪) · 타심륜(他心輪)의 삼륜, 곧 신 · 구 · 의 삼업에 의한 전법륜을 든다. 신륜은 설법 전에 서상으로 보이는 갖가지 신통, 구륜은 설법 그 자체, 타심륜은 중생의 마음에 대한 작용이다. 타심륜은 신통 · 설법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고 신통은 설법을 위한 전제이므로, 결국 중생에 대한 부처의 「응」의 중심은 설법에 있다.
그 설법으로 말하면, 석존 일대 설법의 궁극이 법화경임은 이 어서에서 이미 밝혀졌다. 따라서 묘기에 대한 묘응은 법화경의 설법으로 집약되며, 법화경에 의해서만 참된 감응도교가 성립한다. 특히 수량품에서 본지불인 구원실성의 석존과 재세 중생의 감응도교가 실현되어, 중생은 스스로의 생명 위에 일념삼천을 깨달았다.
이 어서의 다음 단 이후는 법화경이 말법의 중생을 정기(正機)로 삼음을 밝힌다. 강의는 그 한 가지 뜻이 법화경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만 말법 중생의 묘기와 본지불의 묘응의 감응도교가 성립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다만 이 경우의 법화경이란 니치렌 대성인이 법화경의 근저로 돌아가 밝히신 사(事)의 일념삼천의 묘법이며, 나아가 이 묘법의 유통을 법체로 하여 건립된 삼대비법임은 말할 것도 없다고 강의는 맺는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天月の清水に浮ぶ」를 원교의 감응묘에 비추어, 하나의 본지불과 일체중생의 감응(일과 다), 그리고 신심이라는 맑은 물에 불계가 드러나는 묘기 · 묘응으로 읽는다. 이 감응은 법화경 — 말법에서는 삼대비법 — 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대단 제1을 맺으며 — 경에서 부처로, 부처에서 중생으로
이 장으로 대단 제1 「일대 제경의 대의를 밝히다」가 끝난다. 서강에서 강의는 대단 제1 전체를 이렇게 정리했다. 먼저 「이금당」의 문으로 「법화 최제일」이야말로 석존 자신과 일체 부처가 세운 바른 판정임을 보이고(제1~3장), 다음으로 「삼오의 이법」을 논해 법화경의 교주 석존이 인위 · 과위 모두에서 일체의 부처보다 뛰어남을 밝혔다(제4~6장). 이를 통해 석존 일대의 제경 가운데 사바세계 일체중생에게 인연 있는 부처는 법화경 본문의 구원실성의 교주 석존뿐임이 보여졌다. 이로써 사바세계 중생은 석존 일대의 성교 가운데 오로지 법화경을 골라 신수해야 함이 시사된다.
이 말씀은 석존을 잊고 대일여래나 아미타불 등 다른 부처를 숭배하는 진언종이나 염불종 사람들을 파절하는 뜻이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같은 석존이라도 「소승의 석존」 · 「화엄경의 석존」 · 「법화경 적문의 석존」 등, 곧 시성정각의 석존에 사로잡혀 가장 근원적인 부처인 본문의 교주 석존을 알지 못하는 일체의 제종을 총괄해 파절하신 것이다.
이 편을 맺으며
이 편의 세 장은 「법화경이 왜 제경보다 뛰어난가」라는 대단 제1의 물음을 경에서 부처로 옮겨 놓았다. 대성인은 법화경이 제경을 넘어서는 스무 가지 가운데 가장 긴요한 것으로 「삼오의 이법」을 드셨다(제4장). 묘락대사의 십쌍탄이 맨 끝에 둔 이 두 법문은, 법화경을 설한 교주와 교화를 받는 중생의 관계를 밝힌 법문이었다. 용수 · 천친이 적문의 이승작불에서 법화경의 뛰어남을 보았고, 전교대사가 「능설의 부처는 구원의 실성」이라 맺었듯, 경의 뛰어남은 끝내 그 경을 설한 부처의 뛰어남으로 돌아간다.
제5장은 삼천진점겁으로 석존의 인위를 보았다. 장 · 통 · 별 삼교의 삼기 · 동유진겁 · 무량겁이 단혹을 전제로 한 역겁수행이라는 점에서 한 갈래이고, 범천의 이십구 겁 지행도 석존 인위의 수행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인연이었다. 제경의 인위는 보살이 부처가 되는 수행을 설했을 뿐 사바세계 중생과의 관계를 설하지 않았고, 화성유품의 삼천진점겁만이 석존을 「사바세계 일체중생의 결연의 대사」로 밝혔다. 천태와 묘락이 말했듯 아미타와 사바세계 중생 사이에는 낳음의 인연도 기름의 인연도 없으며, 그 내영을 기다림은 소의 새끼에게 말의 젖을 물리는 일이다.
제6장은 오백진점겁으로 석존의 과위를 보았다. 수량품의 교주는 본지의 삼신이 상주하는 부처이며, 대일 · 아미타 · 약사, 화엄의 비로자나와 진언의 대일, 그리고 적문의 다보까지 모두 그 수적이다. 경론의 불신론이 법신을 근본으로 하여 응신의 석존을 낮추었던 것은 본지의 삼신과 수적의 삼신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온 잘못이었다. 이 부처가 사바세계 중생의 주 · 사 · 친이며, 중생은 오백진점겁 이래 그 애자다. 그런데도 이 부처를 잊고 다른 부처를 본존으로 받드는 것, 석존의 기일을 다른 부처의 날로 바꾸는 것은 아사세의 불효와 같다. 끝으로 대성인은 수량품의 「나도 또한 세간의 아버지」와 천태대사의 권속묘의 문으로 장을 맺으셨다. 하늘의 달 하나가 맑은 물마다 비치듯, 인연 있는 부처와 결연한 중생 사이에서만 감응이 성립한다.
이렇게 대단 제1은 「사바세계 중생에게 인연 있는 부처는 법화경 본문의 교주 석존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그 법화경은 누구를 위해 설해졌는가. 재세의 중생인가, 멸후의 중생인가. 다음 제3편에서 대성인은 「問うて曰く法華経は誰人の為に之を説くや」(묻노니 법화경은 누구를 위해 이를 설했는가)라는 물음으로 대단 제2를 여시고, 적문과 본문을 거꾸로 읽어 「말법 중에서는 니치렌을 바로 삼는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신다.
더 읽기
- 개목초 · 제1편 주사친 삼덕 — 주 · 사 · 친의 세 덕과 「불효」의 논리
- 개목초 · 제3편 본적상대 — 「이 과거상이 드러날 때」 제불 · 제토 · 제존의 개현
- 관심의 본존초 — 「능변의 교주 열반에 들면」과 본시의 사바세계
- 불교 교학 四 · 구원실성 — 오백진점겁과 발적현본
- 법화취요초 · 제1편 이금당의 교판 — 앞 편
- 법화취요초 · 제3편 법화경은 누구를 위해 설해졌는가 — 다음 편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법화취요초」 · 「개목초」 · 「관심의 본존초」 · 「법화진언승렬사」 · 「소승대승분별초」 · 「소승소불요문」 · 「쇼미쓰보어서」 · 「제종문답초」 · 「삼대비법품승사」 · 「교행증어서」 · 「이치노사와입도어서」 · 「후나모리야사부로허어서」 · 『어의구전』 (창가학회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 『묘법연화경』 T9 no.262 (화성유품 · 견보탑품 · 종지용출품 · 여래수량품 · 약왕보살본사품 등)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대반열반경』 T12 no.374
- 용수 『대지도론』 T25 no.1509 / 천친 『묘법연화경우바제사』(『법화경론』)
- 천태대사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마하지관』 T46 no.1911
- 묘락대사 『법화문구기』 T34 no.1719 ·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 전교대사 『법화수구』 · 『수호국계장』
- 니치칸 상인 『법화취요초 문단』 · 「주사친삼덕초」
연구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