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지금니 풍으로 다시 그린 고려 사경 법화경 변상도

일념삼천의 출처

관심의 본존초 · 제1편 · 제1~4장

一念三千の出処어서 238–239쪽
저술
1273년(문영 10) 4월 · 사도 이치노사와
대고중
도키조닌
장
제1~4장
쪽수
238–239쪽

「관심의 본존초」는 대성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천태대사의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마하지관』 권5의 「무릇 한 마음에 십법계를 갖춘다」로 열리는 일념삼천의 문이다. 말법의 범부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닦아 성불하는가를 밝히려는 어서가, 왜 육백여 년 전 중국의 한 수행론에서 출발하는가. 제1~4장은 그 물음에 대한 대성인의 첫 대답이다. 일념삼천이라는 법문이 어디에서 처음 이름을 얻었는가(제1 · 2장), 그것이 불교사에서 얼마나 귀한 보배이며 어떻게 도둑맞았는가(제3장), 그리고 그것이 마음 있는 것만이 아니라 풀과 나무와 국토에까지 걸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제4장). 이 네 장을 지나야 본초는 제5장에서 「출처는 이미 들었으니, 관심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본초의 제목에는 「관심」과 「본존」이라는 두 낱말이 있다. 관심은 수행이고, 본존은 수행하는 이가 마주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이 둘을 꿰는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념삼천이다. 관심이란 자기 마음에 갖추어진 십계, 곧 일념삼천을 보는 일이고, 본존이란 그 일념삼천이 범부가 마주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성인은 관심도 본존도 말하기 전에 먼저 일념삼천의 「출처(出處)」, 곧 그것이 어느 경론의 어느 대목에서 비롯되었는가를 확정해 둔다. 출처를 밝히는 일은 단순한 서지 확인이 아니다. 일념삼천이 천태의 오랜 강설 가운데에서도 맨 마지막, 수행을 바로 밝히는 자리에서야 처음 설해졌다는 사실은, 이 법문이 천태 교학 전체의 결론이자 극치라는 것을 말해 준다.

니치칸 상인은 「관심본존초 문단」에서 이 첫머리를 두 겹으로 읽었다. 문장을 글자대로 따라가는 「부문(附文)의 변」에서는 천태 일념삼천의 출처를 보인 것이지만, 대성인이 이 문장을 첫머리에 둔 본뜻을 헤아리는 「원의(元意)의 변」에서는 이 인용 하나가 이미 본초 전체의 결론, 곧 사(事)의 일념삼천인 본존의 모습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창가학회의 강의는 이 읽기를 따라 제1장을 해설하고, 이어서 「일념」이라는 말 자체를 여섯 측면에서 깊이 파고든다. 이 편은 그 강의를 장마다 빠짐없이 옮기고, 본문이 인용한 경론과 대성인의 다른 어서로 그 뜻을 넓힌다.

『마하지관』 권5의 문장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풀이 — 십계 · 십여시 · 삼세간의 셈, 십경과 십승관법, 「세로도 가로도 아니다」라는 단서, 송대의 산가 · 산외 논쟁 — 는 불교 교학 「五 일념삼천」에서 이미 읽었다. 이 편은 그 위에서, 대성인이 이 문장을 어떻게 인용하고 어떤 문답으로 감쌌는지를 장의 순서대로 따라간다.

이 편의 장

第一章一念三千の出処を示す제1장 일념삼천의 출처를 보이다 — 『마하지관』 권5의 일념삼천 문을 첫머리에 인용하고, 세간과 여시의 개합과 「어떤 본」의 차이를 짚는다.
第二章止観の前四等に一念三千を明かさざるを示す제2장 지관의 앞 넷 등에 일념삼천을 밝히지 않았음을 보이다 — 『현의』 · 『문구』 · 『관음현의』와 『마하지관』 앞 네 권에는 일념삼천의 명목이 없으며, 정수장에 이르러서야 「끝까지 궁구한 궁극의 설」로 설해졌음을 묘락의 『홍결』로 증명한다.
第三章一念三千を結歎す제3장 일념삼천을 결탄하다 — 천태 30년 홍법의 공을 기리고, 화엄 · 진언의 원조에게 일념삼천을 도둑맞은 천태 말학을 탄식한다.
第四章一念三千情非情にわたるを明かす제4장 일념삼천이 정 · 비정에 걸침을 밝히다 — 백계천여는 유정에 한하고 일념삼천은 정 · 비정에 걸친다. 교문 · 관문의 난신난해와 목화이상의 개안, 초목성불의 문증을 든다.
제1장 일념삼천의 출처를 보이다
어서 238쪽 1행 ~ 4행 · 第一章 一念三千の出処を示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38쪽 1~4행
本文 · 어서 원문

如来滅後五五百歳始観心本尊抄   本朝沙門日蓮撰   文永十年   五十二歳御作 摩訶止観第五に云く世間と如是と一なり開合の異なり。 「夫れ一心に十法界を具す一法界に又十法界を具すれば百法界なり一界に三十種の世間を具すれば百法界に即三千種の世間を具す、 此の三千・一念の心に在り若し心無んば而已介爾も心有れば即ち三千を具す乃至所以に称して不可思議境と為す意此に在り」等云云 或本に云く一界に三種の世間を具す。

풀이

여래멸후 오오백세 시 관심본존초 — 본조(일본)의 사문 니치렌이 지음 (문영 10년, 52세에 쓰심) 『마하지관』 제5에 이르기를 — 세간과 여시는 하나이니, 다만 열고 합함의 차이일 뿐이니라 — 「무릇 한 마음(一心)에 십법계를 갖추고, 한 법계에 또 십법계를 갖추니 백법계이니라. 한 계에 삼십 종의 세간을 갖추니, 백법계에는 곧 삼천 종의 세간을 갖추느니라. 이 삼천은 한 생각(一念)의 마음에 있느니라. 만약 마음이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지극히 미미하게나마(介爾) 마음이 있으면 곧 삼천을 갖추느니라. 내지 그러므로 일컬어 불가사의경(不可思議境)이라 하나니, 뜻이 여기에 있느니라」라고 하였느니라. 어떤 본(或本)에는 「한 계에 세 가지 세간을 갖춘다」고 되어 있느니라.

어구 풀이

如来滅後五五百歳始観心本尊抄여래멸후 오오백세 시 관심본존초
본초의 정식 제목. 「여래가 멸도한 뒤 다섯 번째 오백 년(말법의 처음)에 비로소 나타나는, 마음을 관하는 본존」에 관한 글이라는 뜻이다. 제목의 풀이는 서강에서 자세히 다루었고, 이 편에서는 제목이 「관심」과 「본존」을 한데 묶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둘을 잇는 것이 첫 장부터 등장하는 일념삼천이라는 점만 짚어 둔다.
本朝沙門日蓮撰본조 사문 니치렌 찬
「본조」는 일본, 「사문」은 출가 수행자다. 사도 유배 중의 죄인 신분이었음에도 대성인은 스스로를 일본 국의 사문으로 적었다. 「문영 10년 52세 어작」은 뒷날 편집자가 붙인 저술 연차 표기다.
摩訶止観마하지관
천태대사 지의가 수나라 개황 14년(594) 4월 26일부터 한 여름 90일 동안 형주 옥천사에서 강술하고, 제자 장안대사 관정이 받아 적은 책. 불교의 수행을 「지(止)」와 「관(觀)」으로 체계화했다. 지는 바깥 경계와 미혹에 흔들리지 않게 마음을 멈추는 것, 관은 그로써 일어난 바른 지혜로 대상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장안의 서분과 천태의 정설분으로 되어 있고, 정설분은 ① 대의 ② 석명 ③ 체상 ④ 섭법 ⑤ 편원 ⑥ 방편 ⑦ 정관(정수) ⑧ 과보 ⑨ 기교 ⑩ 지귀의 열 장(十廣)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⑦ 정관장에서 열 가지 관의 대상(十境)을 세우는 가운데 여덟째 증상만경 이하는 설해지지 않은 채 끝났다. 법화경의 일심삼관 · 일념삼천을 열어 보이고 그것을 자기 마음에서 증득하는 수행의 법칙을 밝혔으므로, 천태의 출세의 본회라 일컬어진다.
世間と如是と一なり開合の異なり세간과 여시는 하나이니 열고 합함의 차이일 뿐이니라
『마하지관』 권5에는 일념삼천을 밝히는 문장이 두 곳 있다. 앞의 「개석(開釋)」에서는 여시(如是)에 맞추어 수를 이루고, 뒤의 「결성(結成)」에서는 세간(世間)에 맞추어 수를 이룬다. 셈하는 길은 다르지만 삼천이라는 수에는 다름이 없으므로, 대성인은 둘이 「하나」이며 어느 쪽을 열고 어느 쪽을 합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를 다신 것이다(해설 참조).
十法界십법계
십계와 같은 뜻. 범부와 성인, 미혹과 깨달음의 모든 세계를 열 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 · 성문 · 연각 · 보살 · 불계다. 「십계」라는 명문은 경론에 따로 없지만, 법화경 법사공덕품에는 지옥의 소리 · 축생의 소리 · 아귀의 소리 · 비구의 소리 · 성문의 소리 · 벽지불의 소리 · 보살의 소리 · 부처의 소리가 열거되고, 『대지도론』 권27에는 「네 가지 도 — 성문도 · 벽지불도 · 보살도 · 불도 … 또 여섯 가지 도 — 지옥도 · 축생 · 아귀 · 인 · 천 · 아수라도」가 나와 십계의 이름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천태는 『법화현의』 권2상에서 이를 받아 「기류가 서로 비슷한 것을 취해 네 무리로 합하니, 처음은 사취, 다음은 인천, 다음은 이승, 다음은 보살 · 불」이라 했다.
法界법계
『법화현의』 권2상은 열 가지를 모두 「법계」라 부르는 까닭을 셋으로 든다. 첫째, 열 가지가 모두 법계에 의지하며 법계 밖에 따로 법이 없으므로 능(能)과 소(所)를 합해 십법계라 한다. 둘째, 열 가지 법은 저마다 나뉨(分齊)이 같지 않고 인과가 따로 떨어져 범성의 다름이 있으므로 「계(界)」를 붙인다. 셋째, 열 가지는 모두 그대로 법계로서 일체법을 거둔다. 일체법이 지옥으로 향해도 그 향함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당체가 곧 이치이고 따로 의지할 바가 없으므로 법계라 한다. 불법계도 이와 같다.
三十種の世間삼십 종의 세간
한 법계에 갖추어진 십여시 각각에 오음 · 중생 · 국토의 세 세간이 있으므로 10 × 3 = 30이다. 여기서 「세간」은 「차별」, 곧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층이라는 뜻이다.
介爾개이
「아주 미미한」, 「조금이라도」. 깊은 선정 속의 맑은 마음이 아니라, 지금 막 일어난 평범한 한 생각을 가리킨다.
不可思議境불가사의경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말로 나타낼 수도 없는 경계. 『마하지관』 십승관법의 첫째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의 대상이며, 일념삼천은 바로 이 관의 내용으로 설해졌다.
或本に云く一界に三種の世間を具す어떤 본에는 「한 계에 세 가지 세간을 갖춘다」
본문에 인용한 본은 십여시 하나하나에 삼세간을 갖추는 뜻이므로 「한 계에 삼십 종」이다. 「어떤 본」은 십여시 가운데 한 여시에 맞추어 말하므로 「세 가지 세간」이라 한다. 하나를 들어 나머지 아홉을 미루어 알게 한 것이다. 두 본 모두 십여시를 따로 들지 않았지만, 십계와 삼세간을 들어 십여시를 저절로 그 안에 품어 나타내고 있다.

왜 『마하지관』의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가

출처에서 관심으로

본초의 짜임은 제5장 첫머리의 한 물음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問うて曰く出処既に之を聞く観心の心如何

묻기를, 출처는 이미 이것을 들었거니와 관심의 마음은 어떠한가.

「관심의 본존초」, 240쪽

「출처는 이미 들었다」 — 곧 제1장부터 제4장까지는 일념삼천의 「출처」를 밝히는 단락이고, 제5장부터 비로소 「관심」을 묻는다. 그러므로 첫 네 장은 본초 전체의 머릿돌이다. 관심을 말하려면 무엇을 관하는지가 먼저 정해져야 하고, 본존을 세우려면 그 본존이 무엇의 당체인지가 먼저 밝혀져야 한다. 대성인은 그 「무엇」을 일념삼천으로 정하고,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천태 자신의 문장으로 확정해 두셨다.

서강에서 보았듯, 강의는 「말법에 홍통될 관심의 본존을 밝히는 어서가 왜 처음에 일념삼천의 출처를 보이는가」를 묻고, 법화경의 적문에도 본문에도 일념삼천은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체는 말법에 건립될 관심의 본존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첫 장의 인용 하나가 이미 본초의 끝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선은 아래 「부문의 변과 원의의 변」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대성인이 고르신 문장

『마하지관』 권5상의 이 대목(대정장 T46, 54a)은 천태 교학 전체에서도 가장 유명한 문장이지만, 대성인은 그것을 그대로 옮기지 않으셨다. 세 가지 손길이 보인다.

첫째, 인용 앞에 「세간과 여시는 하나이니 열고 합함의 차이일 뿐」이라는 짧은 주를 붙이셨다. 『마하지관』 권5에 일념삼천을 셈하는 방식이 두 가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 둘이 결국 같은 것임을 미리 말해 두신 것이다.

둘째, 인용 중간에 「내지(乃至)」를 넣어, 「개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곧 삼천을 갖춘다」와 「그러므로 불가사의경이라 한다」 사이의 긴 논의를 줄이셨다. 사이트 「五 일념삼천」에서 읽은 「세로도 가로도 아니다(非縱非橫)」라는 단서가 바로 이 생략된 부분에 들어 있다. 대성인은 그 논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머리(一心에 十法界를 갖춤)와 몸통(이 삼천이 一念의 마음에 있음)과 꼬리(不可思議境)만 남겨 문장의 뼈대를 드러내셨다.

셋째, 인용 끝에 「어떤 본」의 이문을 덧붙이셨다. 같은 대목이 판본에 따라 「삼십 종의 세간」과 「세 가지 세간」으로 다르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신 것은, 이 인용이 기억에 기댄 것이 아니라 문헌을 대조한 위에 선 것임을 보여 준다. 유배지 사도에서, 그것도 경론을 구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쓰신 글임을 생각하면 이 정밀함은 더욱 무겁다.

『마하지관』 권5상 일념삼천 문의 원문 전체와 「세로도 가로도 아니다」의 해설, 십경(十境) 가운데 음입계경과 십승관법의 관부사의경에 대해서는 불교 교학 「五 일념삼천」 4절을 보라. 이 편은 대성인의 인용 방식과 강의의 읽기에 집중한다.

세간과 여시 — 열고 합하는 두 셈법

개석과 결성

『마하지관』 권5에서 일념삼천의 수가 나오는 곳은 두 군데다. 앞의 개석(開釋)에서는 여시를 중심으로 셈한다. 십계가 서로를 갖추어 백계, 백계에 삼세간을 갖추어 삼백 세간, 그 삼백 세간에 십여시를 갖추어 삼천 여시가 된다. 뒤의 결성(結成), 곧 본초가 인용한 대목에서는 세간을 중심으로 셈한다. 백계에 십여시를 갖추어 천여시, 그 천여시에 삼세간을 갖추어 삼천 세간이 된다.

개석(開釋) — 여시에 맞춤
  1. 百界백계
  2. 三百世間삼백 세간
  3. 三千如是삼천 여시
결성(結成) — 세간에 맞춤
  1. 百界백계
  2. 千如是천여시
  3. 三千世間삼천 세간
世間と如是と一なり開合の異なり세간과 여시는 하나이니 열고 합함의 차이일 뿐이니라「관심의 본존초」, 238쪽
도표 1 · 세간과 여시의 개합 — 두 셈법

어느 길로 가든 마지막 수는 삼천이다. 다른 것은 도중의 순서뿐이다. 개석에서는 세간을 합해 두고 여시를 열었고, 결성에서는 여시를 합해 두고 세간을 열었다. 그래서 대성인은 「세간과 여시는 하나이니 열고 합함의 차이」라고 하셨다.

왜 두 가지인가 — 적면본리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천태가 일념삼천을 세운 근거는 법화경 방편품의 십여시였다. 그렇다면 여시에 맞추어 셈하는 것이 정도이고, 세간에 맞추어 셈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강의는 이 물음에 천태의 「적면본리(迹面本裏)」로 답한다. 천태는 겉으로는 적문을 세우고, 그 안쪽에 본문의 뜻을 두고서 일념삼천을 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석에서는 적문 방편품의 여시에 맞추어 수를 이루고, 결성에서는 국토세간이 드러난 본문의 뜻에 따라 세간에 맞추어 수를 이루었다. 두 셈법의 차이는 단순한 계산 순서의 차이가 아니라, 적문의 재료와 본문의 완성이라는 일념삼천의 두 층을 비추고 있다.

대성인은 「십장초」에서 이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셨다.

一念三千の出処は略開三の十如実相なれども義分は本門に限る

일념삼천의 출처는 약개삼현일의 십여실상이지만, 그 뜻은 본문에 한하느니라.

「십장초」, 1274쪽 — 강의 인용, 쪽 확인 중

「약개삼(略開三)」은 방편품의 앞부분, 석존이 삼승을 열어 일승을 나타내는 가르침을 간략하게 처음 비친 대목으로, 십여시의 경문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일념삼천이라는 이름과 재료의 출처는 적문 방편품이다. 그러나 그 재료가 참으로 일념삼천이 되는 것은 본문에서다. 제4장에서 보듯 국토세간, 곧 부처가 사는 국토가 사바세계로 확정되는 것은 수량품에 이르러서이기 때문이다. 결성이 세간으로 수를 맺은 것은, 이 본문의 뜻이 천태의 셈법 안에 이미 새겨져 있었다는 표시다.

강의의 관점: 개석은 적문 방편품의 십여시로, 결성은 국토세간이 드러난 본문의 뜻으로 삼천을 셈한다. 천태는 적문을 겉에 세우고 본문을 안에 두었으며, 대성인은 「출처는 방편품이나 뜻은 본문에 한한다」고 정리하셨다.

「어떤 본」의 셈

본문 끝의 「어떤 본에는 『한 계에 세 가지 세간을 갖춘다』」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본초가 인용한 본은 한 계에 십여시가 있고 그 각각에 삼세간이 있으니 「삼십 종의 세간」이라 했다. 어떤 본은 한 여시만 들어 「세 가지 세간」이라 했다. 하나를 들어 아홉을 미루어 보게 한 것이다. 어느 본도 십여시를 따로 이름하지는 않지만, 십계와 삼세간이 나오면 그 사이에 십여시가 저절로 들어 있다. 대성인이 두 본을 나란히 적으신 것은,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이 숫자의 겉모양이 아니라 「한 계 안에 세간 전체가 갖추어진다」는 구조라는 것을 보여 준다.

부문의 변과 원의의 변 — 니치칸 상인의 읽기

두 겹의 읽기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관심본존초 문단」을 따라, 이 『마하지관』의 문장을 보통의 주석처럼 풀이하는 것은 「부문의 변(附文の辺)」, 곧 글에 붙어서 겉의 뜻을 읽는 데 그친다고 말한다. 관심의 본존을 밝히려는 어서의 맨 처음에 대성인이 이 문장을 두신 「원의(元意)」, 곧 근본의 뜻을 헤아리면, 이 인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인 본존의 모습을 보이신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치칸 상인은 인용문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본존의 문夫れ一心に十法界を具す무릇 한 마음에 십법계를 갖춘다
부문의 변천태가 범부의 한 마음에 십계가 갖추어짐을 밝힘
원의의 변「一心」은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일념의 심법, 곧 본존의 남묘호렌게쿄이며 「十法界を具す」는 본존에 나타난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삼천세간
관심의 문此の三千・一念の心に在り … 介爾も心有れば即ち三千を具す이 삼천은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 …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곧 삼천을 갖춘다
부문의 변지금 일어난 한 생각에 삼천이 갖추어짐
원의의 변일념삼천의 본존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 중생의 신심 속에 있으며, 미미한 신심이라도 있으면 그 본존을 내 한 몸에 갖춘다
결문所以に称して不可思議境と為す意此に在り그러므로 불가사의경이라 하나니 뜻이 여기에 있다
부문의 변이 경계가 불가사의함을 맺음
원의의 변「불가사의경」은 묘경, 곧 남묘호렌게쿄의 본존을 맺고, 「뜻이 여기에 있다」는 관심을 맺어 천태의 깊은 뜻이 바로 여기 있음을 밝힘

강의(니치칸 상인 「관심본존초 문단」)의 읽기 — 글로만 나타내며 본존의 구성을 그리지 않음

도표 2 · 첫머리 인용의 세 부분 — 부문과 원의

첫째는 본존의 문이다. 「무릇 한 마음」의 한 마음이란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일념의 심법이며, 곧 본존 중앙의 남묘호렌게쿄다. 「십법계를 갖춘다」는 남묘호렌게쿄 좌우에 쓰인 부처 · 보살 · 범천 · 제석 · 귀자모신 등으로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삼천세간이 나타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강의는 이 본존을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신 니치렌 대성인의 마음에 갖추어진 십계 삼천, 곧 대성인 생명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그 증거로 대성인 자신의 말씀을 든다.

此の曼荼羅能く能く信ぜさせ給うべし

이 만다라를 잘 믿으시오.

「교오전답서」, 1124쪽

日蓮がたましひをすみにそめながして・かきて候ぞ信じさせ給へ、仏の御意は法華経なり日蓮が・たましひは南無妙法蓮華経に・すぎたるはなし

니치렌의 혼을 먹물에 물들여 흘려서 썼으니 믿으시오. 부처의 마음은 법화경이요, 니치렌의 혼은 남묘호렌게쿄보다 더한 것이 없느니라.

「교오전답서」, 1124쪽

둘째는 관심의 문이다. 「이 삼천은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는 일념삼천의 본존이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오직 우리 중생의 신심 가운데 있다는 뜻이며, 「만약 마음이 없으면 그만」은 신심이 없으면 일념삼천을 갖추지 못한다는 뜻이다. 「개이라도 마음이 있으면」은 아주 미미한 신심이라도 있으면 일념삼천의 본존을 내 한 몸에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결문이다. 「불가사의경」은 본존을 맺는다. 불가사의경이란 묘경(妙境)이요, 묘경이란 남묘호렌게쿄의 본존이다. 「뜻이 여기에 있다」는 관심을 맺어, 천태대사의 깊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신 것이다.

이 읽기에서 첫머리 인용은 본초 전체의 축소판이 된다. 본존(一心具十法界) — 관심(此三千在一念心) — 그 둘의 일치(不可思議境 · 意在於此). 제5장 이후 대성인이 긴 문답을 거쳐 이르는 결론, 곧 「수지즉관심」과 「본문의 본존」이 이미 첫 줄에 접혀 있다는 것이다.

강의의 관점: 첫머리의 『마하지관』 인용은 글자대로는 천태 일념삼천의 출처이지만, 원의로는 사행의 일념삼천인 본존의 모습(본존의 문), 그 본존을 신심으로 내 몸에 갖추는 길(관심의 문), 그리고 그 둘을 맺는 결문으로 읽는다.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 이(理)와 사(事)

이 읽기에 대해 강의는 니치칸 상인을 따라 두 가지 문답을 세운다. 첫째 물음은 이렇다. 믿는 이의 한 생각에는 삼천이 갖추어지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갖추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십계의 의보와 정보가 모두 묘법연화경의 당체」라는 어서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가.

실제로 「당체의초」는 첫머리에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問う妙法蓮華経とは其の体何物ぞや、答う十界の依正即ち妙法蓮華の当体なり

묻기를, 묘법연화경이란 그 체가 무엇인가. 답하기를, 십계의 의보와 정보가 곧 묘법연화의 당체이니라.

「당체의초」, 510쪽

답은 이(理)와 사(事)의 구별이다. 이치로 논하면 법계 아닌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다 삼천의 당체다. 그러나 사실(事)로 논하면,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갖추느냐 갖추지 못하느냐가 정해진다. 「당체의초」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준다. 첫머리에서 십계의 의정이 모두 묘법의 당체라고 하신 뒤, 같은 어서는 다시 묻고 답하신다.

正直に方便を捨て但法華経を信じ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人は煩悩・業・苦の三道・法身・般若・解脱の三徳と転じて三観・三諦・即一心に顕われ其の人の所住の処は常寂光土なり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다만 법화경을 믿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 업 · 고의 삼도가 법신 · 반야 · 해탈의 삼덕으로 바뀌어 삼관 · 삼제가 곧 한 마음에 나타나고, 그 사람이 사는 곳은 상적광토이니라.

「당체의초」, 512쪽

能居所居・身土・色心・倶体倶用・無作三身の本門寿量の当体蓮華の仏とは日蓮が弟子檀那等の中の事なり

능거와 소거, 몸과 국토, 색과 심이 체를 함께하고 용을 함께하는 무작삼신의 본문 수량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들 가운데의 일이니라.

「당체의초」, 512쪽

이치로는 모두가 묘법의 당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당체연화의 부처」로 나타나는 것은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사람에게서다. 강의는 이를 이어, 문저하종의 법화경인 삼대비법의 본존을 믿지 않으면 당체연화의 부처로 나타나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강의는 여기서 묘락의 「한 생각에 집착하면 삼천을 갖추지 못한다(取着一念 不具三千)」를 든다. 문상(文上)의 숙탈(熟脫)의 석존을 본존으로 집착하고 문저하종의 신심이 없다면, 어떻게 일념삼천의 본존을 갖출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를 든다. 물이 없는 못에는 달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적은 물이라도 있으면 곧 달그림자를 비춘다. 달은 하늘에 늘 떠 있다 — 이것이 이(理)다. 그 달이 내 못에 비치느냐는 물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 이것이 사(事)다. 개이(介爾)의 마음, 곧 미미한 신심이 바로 그 물이다.

「전대미문」이라는 물음 — 본인묘초의 한 구절

둘째 물음은 이렇다. 「무릇 한 마음」을 이처럼 본존으로 읽는 것은 전대미문이 아닌가.

강의는 이 대목에서 상전(相傳)을 근거로 들어 답하는데, 여기서는 그 논거를 싣지 않고 강의가 함께 인용한 어서만을 든다.

観行理観の一念三千を開して名字自行の一念三千を顕す、大師の深意・釈尊の慈悲・上行所伝の秘曲・是なり

관행 · 이관의 일념삼천을 열어서 명자 · 자행의 일념삼천을 나타내느니라. 대사의 깊은 뜻, 석존의 자비, 상행이 전한 비곡이 바로 이것이니라.

「본인묘초」, 872쪽

「관행 · 이관의 일념삼천」은 천태가 지관의 관법으로 이치를 관하게 한 일념삼천이다. 「명자 · 자행의 일념삼천」은 이름을 듣고 믿는 명자즉(名字即)의 범부가 스스로 수행하는 일념삼천이다. 앞의 것을 열어 뒤의 것을 나타내는 것 — 이것이 천태대사의 깊은 뜻이자 석존의 자비이며 상행보살이 전한 비곡이라고 한다. 강의는 이 구절을, 석존도 천태도 궁극에 뜻한 최대의 비밀의 대법이 사행의 일념삼천의 본존이며, 이것이 바로 상행이 전한 비곡이고 대성인이 건립하신 본존이라는 뜻으로 읽는다. 첫머리 인용을 본존으로 읽는 것은 대성인 자신이 「대사의 깊은 뜻」이라 하신 그 자리를 따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문단에 근거한 해설을 여기서 마치고, 십계호구 등은 뒤의 장으로 미룬 채 일념삼천의 「일념」으로 돌아간다.

일념이란 무엇인가 — 찰나와 생명

일상어의 「일념」과 불법의 「일념」

「일념」이라는 말은 일상에서도 쓰인다. 마음에 깊이 새겨 생각함, 굳게 믿음, 문득 떠올림, 아주 짧은 시간. 그러나 강의는 이 말의 뿌리가 불법에 있다고 말한다. 생명의 가장 깊은 곳을 설해 다하는 불법에서 일념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모든 성현이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념삼천의 철리도 일념을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삼천세간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고, 법화경의 극리도 이 일념의 해명에 철저하다는 것이다. 강의는 불법이 말하는 일념에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정리한다.

첫째 뜻 — 가장 짧은 시간

하나는 시간의 짧음이다. 법화경 신력품과 『관보현보살행법경』에는 「탄지(彈指)」가 설해진다.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으로 집게손가락을 눌렀다가 갑자기 놓아 소리를 내는 동안이 한 탄지다. 이 한 탄지를 육십으로 나눈 것을 일념이라 한다. 『대지도론』 권30에는 「한 번 손가락을 튕기는 사이에 육십 념이 있다」고 하고, 같은 책 권38에는 「시간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육십 념 가운데의 한 념이요, 큰 시간을 겁이라 한다」고 한다. 『인왕경』 상권에는 「구십 찰나를 한 념으로 한다」, 『마하지관』 권3상에는 「육백 생멸을 한 념으로 한다」, 또 「육십 찰나를 한 념으로 한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① 시간의 극촉(極促)一念は時節の極促なり일념은 시절의 극촉이다『법화문구』 권8상
  • 一彈指 = 六十念한 번 손가락을 튕기는 사이에 육십 념『대지도론』 권30
  • 時中最小 = 六十念中の一念시간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육십 념 가운데의 한 념『대지도론』 권38
  • 九十刹那 = 一念구십 찰나를 한 념으로 한다『인왕경』 상
  • 六百生滅 = 一念 · 六十刹那 = 一念육백 생멸을 한 념으로 한다 · 육십 찰나를 한 념으로 한다『마하지관』 권3상
② 순간의 생명一心法일심법묘락
  • 천태: 일념 = 일심
  • 묘락: 한 때의 길이를 말함이 아니라 일심법을 가리켜 일념이라 함
  • 심왕과 심수 가운데 심왕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찰나 · 순간을 가리킨다 — 그 순간이 곧 생명 전체

도표 3 · 일념의 두 뜻

수치는 서로 다르지만, 『법화문구』 권8상의 「일념은 시절의 극촉(極促)이다」라는 말처럼 모두 찰나, 순간의 시간을 가리킨다.

둘째 뜻 — 순간의 생명

다른 하나는 순간의 생명이다. 천태는 일념을 「일심(一心)」이라고도 했고, 묘락은 「일심법(一心法)」이라 했다. 『마하지관』 정관장에서 일념삼천을 밝힌 그 일념이 바로 이것이다. 천태는 한 순간의 생명을 붙잡아 자세히 관찰하면, 거기에 십계 · 백계천여 · 삼천세간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혔다. 묘락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일념이라 한 것은 단지 한 생각의 시간 길이를 거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일심법을 가리켜 일념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일념은 시간의 미소함만이 아니라 순간의 심법, 곧 생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대성인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다.

一念円満謂く根塵相対して一念の心起るに三千世間を具するが故に

일념원만이란, 근(감각 기관)과 진(대상)이 서로 마주하여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날 때 삼천세간을 갖추기 때문이니라.

「십팔원만초」, 1362쪽

눈이 빛깔을 만나고 귀가 소리를 만나는 그 순간 일어나는 한 생각에 삼천세간이 갖추어진다. 마음의 주체(心王)와 그에 딸린 작용(心數)으로 말하면, 일념은 심왕에 해당한다. 또 「지묘법화문답초」에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命已に一念にすぎざれば仏は一念随喜の功徳と説き給へり

목숨은 이미 한 생각에 지나지 않으므로, 부처는 일념수희의 공덕이라고 설하셨느니라.

「지묘법화문답초」, 466쪽

목숨은 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역시 순간순간의 생명을 가리킨다.

순간이 곧 전체다

강의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경탄한다. 생명만큼 불가사의한 것은 없다. 순간순간의 생명에 행복과 불행을 느끼고, 인과를 갖추고, 삼라만상도, 과거의 아득한 겁도 미래의 영원도 품고, 선과 악도, 색법과 심법도 모두 갖추고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마음」 같은 관념적 의미가 아니다. 모든 것을 포함하기에, 이를 구명한 철학은 모든 철학과 사상을 이끌어 가는 큰 철학이 된다고 강의는 말한다.

그리고 그 계보를 그린다. 삼천 년 전 석존은 법화경에서 이것을 설했고, 상법 시대의 천태는 관념관법이라는 실천의 입장에서 설했다. 칠백 년 전에 출현하신 니치렌 대성인은 그것들을 포함하면서 더욱 철저하게 순간의 생명에 언급하시고, 나아가 수지즉관심을 밝혀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큰 철리를 보이셨다. 강의는 대성인의 「지자에게 나의 뜻이 깨뜨려지지 않는 한 쓰지 않으리라」(「개목초」)라는 대선언을 들어, 이 철리가 유일무이한 것이며 동양 철학의 정수라는 확신을 밝힌다.

이어 강의는 일념을 여섯 측면에서 논하겠다고 예고한다. ① 색심불이의 일념 ② 선악을 일으키는 근본의 일념 ③ 의정불이의 일념 ④ 인과구시의 일념 ⑤ 신심의 일념 ⑥ 본존 중앙의 남묘호렌게쿄인 일념.

일념의 여섯 얼굴

  1. ①색심불이色心不二なるを一極と云うなり색심불이인 것을 일극이라 한다『어의구전』 708쪽
  2. ②선악의 근본善悪業成を名づけて一念となす선악의 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일념이라 한다『홍결』 권8
  3. ③의정불이十界の依正を三千につづめたり십계의 의정을 삼천에 줄였다「성우문답초」 487쪽
  4. ④인과구시因果倶時・不思議の一法인과구시 · 불가사의의 일법「당체의초」 513쪽
  5. ⑤신심의 일념이(理)로는 모두 삼천을 갖추나 사(事)로는 신심의 일념에 삼천을 갖춤
  6. ⑥일념삼천의 구극五字の内に此の珠を裹み다섯 글자 안에 이 구슬을 싸서「관심의 본존초」 254쪽

강의가 든 여섯 측면 — 순서대로 한 칸씩

도표 4 · 일념의 여섯 측면

① 색심불이의 일념

일념은 서양 철학이 말하는 「관념」이나 「마음」이 아니다. 그것들은 육체와 물질을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불법이 설하는 일념은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일념이다.

대성인은 「일념삼천이사」에서 십여시를 하나하나 몸(色)과 마음(心)에 배당하신다.

十如是とは如是相は身なり玄二に云く相以て外に拠る覧て別つ可し文籤六に云く相は唯色に在り文、如是性は心なり玄二に云く性以て内に拠る自分改めず文籤六に云く性は唯心に在り文、如是体は身と心となり玄二に云く主質を名けて体となす文

십여시란, 여시상은 몸이니라. 『현의』 권2에 「상은 밖에 의거하니 보고 가를 수 있다」, 『석첨』 권6에 「상은 오직 색에 있다」고 하였느니라. 여시성은 마음이니라. 『현의』 권2에 「성은 안에 의거하니 스스로의 몫이 바뀌지 않는다」, 『석첨』 권6에 「성은 오직 마음에 있다」고 하였느니라. 여시체는 몸과 마음이니라. 『현의』 권2에 「주된 바탕을 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일념삼천이사」, 407쪽

이어서 여시력 · 여시작은 몸과 마음이고, 여시인은 마음이며, 연 · 과 · 보 · 본말구경등에도 각각 천태와 묘락의 풀이가 붙는다. 이처럼 십여시가 색과 심에 걸쳐 있음은 분명하다. 십여시가 일념에 거두어지는 이상, 색과 심의 두 법은 모두 일념에 갖추어진다.

또 일념에는 공 · 가 · 중의 삼제가 갖추어진다. 공제는 심법, 가제는 색법, 중제는 색심 두 법이다. 그러므로 일념은 색과 심이 모두 들어 있는(色心總在) 일념이다. 니치칸 상인은 「당체의초 문단」에서 이렇게 묻고 답한다. 인과구시 불가사의의 일법이란 그 체가 무엇인가 — 곧 일념의 심법이다. 그러므로 전교의 풀이를 끌어와 「일심의 묘법연화」라 한다. 마땅히 알라, 일념의 심법이란 곧 색심총재의 일념이다. 묘락이 「총재일념」이라 한 것은 따로 색과 심으로 나누었다가, 그 따로를 거두어 총에 들인 것이라고.

강의는 이를 일상의 경험으로 비춘다. 지옥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고뇌가 얼굴과 온몸에 배어 나온다. 아귀도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색법에 뚜렷이 드러나고, 수라의 경애인 사람도 천계의 경애인 사람도 저마다의 심법이 엄연히 색법에 나타난다. 거꾸로 몸의 변화는 곧바로 심법에 영향을 주어 갖가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색법은 심법에, 심법은 색법에 서로 영향을 주며 하나이면서 둘이 아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생명의 실체라는 것이다.

강의는 당시의 과학에서도 그 방증을 찾는다. 물리학이 소립자의 세계를 구명하면서 질량과 에너지가 같은 것의 다른 형태이며 서로 바뀐다는 것을 밝혔고, 모든 물질에 입자의 성격만이 아니라 파동의 성격도 있다는 것이 알려져 삼라만상을 한쪽 면만으로는 붙잡을 수 없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생명학에서도 색심불이에 가까운 발상을 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고, 의학에서도 실제로 환자를 다루면서 정신의 작용이 치료에 중요함을 절감하게 되었으며, 정신신체의학이 주목받게 된 것도 그 흐름이라고 한다. 강의는 이를 두고 현대 과학이 귀납적으로 불법의 색심불이 생명철학을 증명해 가는 것이 시대의 추세이며, 무엇보다 우리 생활의 실상 자체가 색심불이라고 말한다.

色心不二なるを一極と云うなり

색심불이인 것을 일극(一極)이라 하느니라.

『어의구전』, 708쪽

강의는 이 말씀을 들어, 색심불이의 생명철학이야말로 최고 · 구극의 철학이며, 유물과 유심의 두 사상을 이끌고 세계 평화의 지침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 항을 맺는다.

② 선악을 일으키는 근본의 일념

순간의 생명에는 선과 악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묘락은 『지관보행전홍결』 권8에서 「일념이란 극촉 일찰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업이 이루어짐을 이름하여 일념이라 한다」고 했다. 일념은 시간의 단위이기 전에 선과 악을 일으키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法性の妙理に染浄の二法有り染法は熏じて迷と成り浄法は熏じて悟と成る悟は即ち仏界なり迷は即ち衆生なり、此の迷悟の二法二なりと雖も然も法性真如の一理なり

법성의 묘리에 염(染)과 정(淨)의 두 법이 있느니라. 염법은 훈습하여 미혹이 되고, 정법은 훈습하여 깨달음이 되느니라. 깨달음은 곧 불계요, 미혹은 곧 중생이니라. 이 미혹과 깨달음의 두 법은 둘이지만 그러나 법성진여의 한 이치이니라.

「당체의초」, 510쪽

法華宗の心は一念三千・性悪性善・妙覚の位に猶備われり元品の法性は梵天・帝釈等と顕われ元品の無明は第六天の魔王と顕われたり

법화종의 마음은 일념삼천이니, 성악과 성선이 묘각의 지위에도 오히려 갖추어져 있느니라. 근본의 법성은 범천 · 제석 등으로 나타나고, 근본의 무명은 제육천의 마왕으로 나타났느니라.

「치병대소권실위목」, 997쪽

부처의 경지인 묘각의 자리에도 성악(性惡)이 갖추어져 있다. 선과 악이 함께 갖추어진 그 본질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강의는 이것을 중국 사상과 견준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만, 맹자는 선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이는 인간 생명의 본질을 한쪽 면에서만 본 부분관이며, 둘 다 불법의 선악불이(善惡不二)의 생명관에 포섭된다.

또 강의는 오늘날의 많은 사상이 번뇌와 아욕을 불행의 근본으로 보고 그것을 끊거나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비판한다. 그것은 너무 관념적이며 생활의 실상을 놓친 편견이다. 번뇌를 꺼리고 아욕을 싫어하여 마치 성인군자 같은 특별한 인간을 이상으로 삼는 것은 현실에서 떠나려는 것, 곧 도피의 철학이다. 힘 있는 사상은 번뇌와 아욕에 좌우되지 않는 자기를 형성해 가므로, 그것들을 끊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써서 행복의 방향으로 전환시킨다.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가공의 논의일 뿐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인간의 생활을 허심하게 바라보면 순간순간이 번뇌즉보리를 바라는 생활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선악불이야말로 생명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며, 이를 설해 다한 불법은 인간성을 최고도로 발양시키고 인간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욕구를 채워 행복으로 이끄는 대철리라는 것이다.

③ 의정불이의 일념

此の妙法蓮華経は一代の観門を一念にすべ十界の依正を三千につづめたり

이 묘법연화경은 석존 일대의 관문(觀門)을 한 생각에 거느리고, 십계의 의보와 정보를 삼천에 줄였느니라.

「성우문답초」, 487쪽

의보(환경)와 정보(주체)가 함께 일념에 갖추어져 있다. 삼세간 가운데 국토세간은 의보이고, 그 삼세간이 일념 가운데 갖추어진다고 설해져 있으니, 일념이 의정불이의 일념임은 분명하다. 이 원리에서 보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일념에 갖추어진다.

본초 제16장의 끝에도 묘락의 이런 말이 인용된다(강의는 이를 『법화문구기』의 말로 든다).

妙楽大師云く「当に知るべし身土一念の三千なり故に成道の時此の本理に称うて一身一念法界に遍し」等云云

묘락대사가 이르기를 「마땅히 알라, 몸과 국토가 일념의 삼천이니라. 그러므로 성도할 때 이 본래의 이치에 맞아 한 몸 한 생각이 법계에 두루 미치느니라」고 하였느니라.

「관심의 본존초」, 247쪽

여기서 「법계」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뜻한다. 「일생성불초」는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一心法界の旨とは十界三千の依正色心・非情草木・虚空刹土いづれも除かず・ちりも残らず一念の心に収めて此の一念の心・法界に徧満するを指して万法とは云うなり

일심법계의 뜻이란, 십계 삼천의 의정 · 색심, 비정의 초목, 허공과 국토를 어느 것도 빼지 않고 티끌 하나 남김없이 한 생각의 마음에 거두고, 이 한 생각의 마음이 법계에 두루 가득 찬 것을 가리켜 만법이라 하느니라.

「일생성불초」, 383쪽

우리의 생명은 대우주에 두루 미친다. 강의는 의정불이를 뒤(제4장)에서 자세히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세 가지만 짚는다. 우리의 생명은 환경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 자기의 일념으로 환경을 바꾸고 국토까지 낙토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순간순간 우주의 큰 리듬과 합치하는 생활을 해 가는 길이 여기에 보였다는 것이다.

④ 인과구시의 일념

至理は名無し聖人理を観じて万物に名を付くる時・因果倶時・不思議の一法之れ有り之を名けて妙法蓮華と為す此の妙法蓮華の一法に十界三千の諸法を具足して闕減無し之を修行する者は仏因・仏果・同時に之を得るなり

지극한 이치에는 이름이 없느니라. 성인이 이치를 관하여 만물에 이름을 붙일 때, 인과구시 · 불가사의의 일법이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묘법연화라 하느니라. 이 묘법연화의 일법에 십계 삼천의 제법을 구족하여 모자람이 없느니라.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불인과 불과를 동시에 얻느니라.

「당체의초」, 513쪽

이 「인과구시 불가사의의 일법」이 일심의 묘법연화경이며 색심총재의 일념이라는 것은 앞의 「당체의초 문단」에서 보았다. 니치칸 상인은 같은 문단에서 일념의 생명에 인과가 동시에 갖추어지는 모습을 두 겹으로 밝힌다.

첫째는 「일왕(一往), 구인일과(九因一果)에 맞춘」 풀이다. 이 일념의 마음에 십법계를 갖추되, 구계를 인으로 하고 불계를 과로 한다. 십계가 뚜렷이 있으면서도 서로 갖추고 서로 녹아 일념의 심법에 있으므로 인과구시 불가사의의 일법이라 한다.

둘째는 「재왕(再往), 각구(各具)에 맞춘」 풀이다. 이를테면 지옥의 인과처럼, 악한 경계와 지혜가 화합하면 곧 인과가 있다. 성냄(瞋恚)은 악구의 인이고 악구는 성냄의 과다. 인과를 갖추되 다만 찰나에 있다. 선한 경계와 지혜가 화합해도 인과가 있다. 신심은 창제의 인이고 창제는 신심의 과다. 인과를 갖추되 오직 일념에 있다. 이것이 불계의 인과다. 처음(지옥)과 끝(불계)만 들었으니, 그 사이의 팔계도 이에 준해 알라고 한다.

인과이시(因果異時)생명의 나타난 현상면人を軽しめば還て我身人に軽易せられん남을 업신여기면 도리어 내 몸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사도어서」 960쪽과거의 업현재의 과보미래
인과구시(因果倶時)생명의 본원
일왕 구계(인) · 불계(과)가 일념에
재왕瞋恚(인)성냄惡口(과)악구— 찰나에信心(인)신심唱題(과)창제— 일념에
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에 구족한다「관심의 본존초」 246쪽

인과의 두 면 — 강의(니치칸 상인 「당체의초 문단」)

도표 5 · 인과구시와 인과이시

강의는 여기서 두 가지 인과관을 대비한다. 역겁수행을 근간으로 하는 석가 불법은 인과이시(因果異時)의 입장이고, 수지즉관심을 설해 다하는 대성인의 불법은 인과구시(因果倶時)의 입장이다. 그러나 둘은 생명의 인과의 양면이다. 생명이 나타난 현상의 면을 문제 삼으면 인과이시이고, 생명의 근원을 찾으면 인과구시다.

人を軽しめば還て我身人に軽易せられん形状端厳をそしれば醜陋の報いを得

남을 업신여기면 도리어 내 몸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생김새가 단정하고 위엄 있는 이를 비방하면 추한 과보를 얻느니라.

「사도어서」, 960쪽

같은 대목은 「이것은 보통의 인과가 정해진 법이니라(是は常の因果の定れる法なり)」로 맺는다. 과거의 행업의 과보를 현재에 받고, 현재의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과이시의 입장이다. 그래서 석가 불법에서는 과거세의 죄업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며 하나씩 지워 간다. 그 때문에 현재의 태도는 그저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고 강의는 말한다.

대성인의 불법은 순간순간의 생명을 설해 다하여, 과거 아득한 겁의 숙명도 전환하고 미래 영원의 복운도 이 순간에 결정짓는다. 본초 제16장의 수지즉관심 대목 —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글자에 구족한다. 우리가 이 다섯 글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 — 은 묘법을 부르는 한 생각에 삼세시방 제불의 모든 인위의 수행도, 과위의 만덕도 갖추어진다는 것을 보이신 것으로서, 인과구시를 나타낸다.

강의는 여기까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순간순간의 생명에는 우주의 삼라만상, 색심, 선악, 의정, 인과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생명이란 결국 순간의 연속이며 순간 밖에 생명의 실재는 없다. 이 순간의 생명이야말로 참된 존재이며, 불법에서는 이를 중도법상(中道法相)이라 한다. 지금 그 순간이라고 생각한 찰나는 곧 과거가 되고, 미래라고 생각한 순간은 현재가 되어 곧 과거로 옮겨 가므로,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있는 「공」의 개념에 해당하는 실재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 생명 전체라 할 수 있다. 이 순간의 생명에 세로로는 과거 · 현재 · 미래를, 가로로는 삼천의 만법을 갖추고 있다. 천태대사가 자기의 생명을 불가사의경이라 한 것도 까닭이 없지 않다.

⑤ 신심의 일념

지금까지는 생명에 삼천의 만법이 갖추어져 있다는 입장에서 일념을 논했다. 그러나 대성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념삼천의 일념이란 신심의 일념이라고 설하셨다고 강의는 말한다. 이치로 논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삼천을 갖추지만, 사실로 논하면 신심이 없는 이에게는 삼천이 갖추어지지 않으며, 오직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신심의 일념에 삼천의 만법이 갖추어진다. 첫머리 『마하지관』 정관장 문장의 원의도 실로 여기에 있다는 것은, 앞의 니치칸 상인 문단에 근거한 해설에서 본 그대로다.

그것은 「당체의초」가 첫머리에서는 일체중생이 모두 묘법연화경의 당체라고 하시면서, 다음에는 신심 없는 이는 묘법연화의 당체가 아니며 오직 대성인의 제자 단나로서 본존을 믿고 묘법을 부르는 강성한 신력과 행력을 지닌 이만이 당체연화의 부처라고 보이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심의 일념에야말로 우주의 삼천 만법도 갖추어지고, 삼세시방의 제불 · 보살도 자기 마음에 거두어져, 유연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⑥ 일념삼천의 구극 — 본존

강의는 마지막으로 일념삼천의 구극은 본존이라고 말한다. 그 근거는 본초 결론부의 한 구절이다.

一念三千を識らざる者には仏・大慈悲を起し五字の内に此の珠を裹み末代幼稚の頸に懸けさしめ給う

일념삼천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부처가 대자비를 일으켜 다섯 글자 안에 이 구슬을 싸서 말대 유치한 이들의 목에 걸게 하시느니라.

「관심의 본존초」, 254–255쪽

강의는 이 문장의 「부처」를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곧 니치렌 대성인으로 읽는다. 본불이신 대성인이 대자비를 일으켜 묘법 오자의 본존에 자수용신 즉 일념삼천의 모습을 나타내어 말대 유치한 이들의 목에 걸어 주셨다는 것이다. 「초목성불구결」의 말씀도 같은 뜻이라고 한다.

一念三千の法門をふりすすぎたてたるは大曼荼羅なり、当世の習いそこないの学者ゆめにもしらざる法門なり

일념삼천의 법문을 흔들어 씻어 세운 것이 대만다라이니라. 지금 세상의 잘못 배운 학자들은 꿈에도 모르는 법문이니라.

「초목성불구결」, 1339쪽

강의는 본존에 맞추어 일념삼천을 논하면, 일념삼천의 「일념」은 본존 중앙의 남묘호렌게쿄이고 「삼천」은 좌우의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삼천세간이라고 말한다. 본존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한 법도 빠짐없이 갖추었으므로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 하고, 삼세시방 제불의 모든 공덕이 구름처럼 모여 있으므로 공덕취(功德聚)라 한다. 우리가 본존에 귀명할 때 나의 일념에 삼천을 갖출 수 있는 것도, 결국 본존이 일념삼천의 당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의의 관점: 일념은 순간의 생명이며, 그 안에 색심 · 선악 · 의정 · 인과가 모두 갖추어진다. 그러나 이(理)로 모두가 갖추는 삼천이 사(事)로 나타나는 것은 신심의 일념에서이며, 그 신심이 향하는 일념삼천의 당체가 본존이다.

본존의 상모(相貌)는 본초 제18 · 19장(이 연구의 제4편 「세 가지 본존」)에서 본문을 따라 다시 읽는다. 이 사이트는 본존의 구성을 그림이나 배치도로 나타내지 않는다.

제2장 지관의 앞 넷 등에 일념삼천을 밝히지 않았음을 보이다
어서 238쪽 5행 ~ 239쪽 2행 · 第二章 止観の前四等に一念三千を明かさざるを示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38쪽 5행 ~ 239쪽 2행
本文 · 어서 원문

問うて云く玄義に一念三千の名目を明かすや、 答えて曰く妙楽云く明かさず、 問うて曰く文句に一念三千の名目を明かすや、 答えて曰く妙楽云く明かさず、 問うて曰く其の妙楽の釈如何、 答えて曰く並に未だ一念三千と云わず等云云、 問うて曰く止観の一二三四等に一念三千の名目を明かすや、 答えて曰く之れ無し、 問うて曰く其の証如何、 答えて曰く妙楽云く「故に止観に至つて正しく観法を明かす並びに三千を以て指南と為す」等云云、 疑つて曰く玄義第二に云く「又一法界に九法界を具すれば百法界に千如是」等云云、 文句第一に云く「一入に十法界を具すれば一界又十界なり十界各十如是あれば即ち是れ一千」等云云、 観音玄に云く「十法界交互なれば即ち百法界有り千種の性相・冥伏して心に在り現前せずと雖も宛然として具足す」等云云、 問うて曰く止観の前の四に一念三千の名目を明かすや、 答えて曰く妙楽云く明さず、 問うて云く其の釈如何、 答う弘決第五に云く「若し正観に望めば全く未だ行を論ぜず亦二十五法に歴て事に約して解を生ず方に能く正修の方便と為すに堪えたり是の故に前の六をば皆解に属す」等云云、 又云く「故に止観の正しく観法を明かすに至つて並びに三千を以て指南と為す乃ち是れ終窮究竟の極説なり故に序の中に「説己心中所行法門」と云う良に以所有るなり請う尋ね読まん者心に異縁無れ」等云云。

풀이

묻기를, 『현의』에 일념삼천의 명목을 밝혔는가. 답하기를, 묘락은 밝히지 않았다고 하였느니라. 묻기를, 『문구』에 일념삼천의 명목을 밝혔는가. 답하기를, 묘락은 밝히지 않았다고 하였느니라. 묻기를, 그 묘락의 해석은 어떠한가. 답하기를, 「모두 아직 일념삼천이라 하지 않았다」고 하였느니라. 묻기를, 『지관』의 제1 · 2 · 3 · 4 등에 일념삼천의 명목을 밝혔는가. 답하기를, 그것은 없느니라. 묻기를, 그 증거는 어떠한가. 답하기를, 묘락이 이르기를 「그러므로 『지관』에 이르러 바로 관법을 밝히매 모두 삼천으로써 지남으로 삼았다」고 하였느니라. 의심하여 이르기를, 『현의』 제2에 「또 한 법계에 아홉 법계를 갖추면 백법계에 천여시」라 하였고, 『문구』 제1에 「한 입(入)에 십법계를 갖추면 한 계가 또 십계이니라. 십계에 각각 십여시가 있으면 곧 일천이니라」라 하였으며, 『관음현의』에 「십법계가 서로 어우러지면 곧 백법계가 있고, 천 가지 성상(性相)이 가라앉아 숨어서 마음에 있으며, 앞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뚜렷이 갖추어져 있느니라」라 하였느니라. 묻기를, 『지관』의 앞 넷에 일념삼천의 명목을 밝혔는가. 답하기를, 묘락은 밝히지 않았다고 하였느니라. 묻기를, 그 해석은 어떠한가. 답하기를, 『홍결』 제5에 이르기를 「만약 정관(正觀)에 견주면 전혀 아직 행(行)을 논하지 않았느니라. 또 이십오법을 거쳐 사(事)에 맞추어 해(解)를 일으키니, 바야흐로 정수(正修)의 방편이 되기에 족하느니라. 그러므로 앞의 여섯은 모두 해에 속하느니라」고 하였느니라. 또 이르기를 「그러므로 『지관』이 바로 관법을 밝히는 데 이르러 모두 삼천으로써 지남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끝까지 궁구한 궁극의 설(終窮究竟の極說)이니라. 그러므로 서문 가운데에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바의 법문을 설한다(說己心中所行法門)』고 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느니라. 바라건대 찾아 읽는 이는 마음에 다른 생각(異緣)을 두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玄義현의
『묘법연화경현의』, 열 권. 천태대사 강술, 장안대사 필기. 『법화현의』라고도 한다. 법화경의 제목인 묘법연화경의 깊은 뜻을 밝힌 책으로, 『법화문구』와 함께 천태 교학의 교상(敎相)을 설한다. 제목이 경 전체의 뜻을 나타낸다고 보아 석명 · 변체 · 명종 · 논용 · 판교의 오중현의(五重玄義)로 제목의 뜻을 밝히고 법화경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보인다.
文句문구
『법화문구』, 열 권. 천태대사의 강의를 장안대사가 편집 · 정리한 법화경 주석서. 경의 글귀 하나하나를 인연 · 약교 · 본적 · 관심의 사석(四釋)으로 풀어, 적문의 개삼현일, 본문의 개근현원 등 법화경의 깊은 뜻을 밝혔다.
妙楽묘락
묘락대사 담연(711–782). 당나라 사람으로 천태종 제9조. 천태대사로부터 6대째 법손이며 천태종 중흥의 조사. 상주 진릉현 형계 사람이라 형계존자라고도 한다. 처음 난릉의 묘락사에 살았기에 묘락대사라 불린다. 개원 18년(730) 좌계 현랑에게 천태 교학을 배우고, 천보 7년(748) 38세에 의흥 정락사에서 출가했다. 선 · 화엄 · 진언 · 법상 등이 성하고 천태종이 쇠퇴하던 때에 법화일승의 입장에서 각 종을 논파하고 삼대부의 주석서를 지어 천태학을 크게 선양했다. 현종 · 숙종 · 대종의 부름에도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고, 만년에 천태산 국청사에 들어가 불롱도량에서 입적했다. 『법화현의석첨』 · 『법화문구기』 · 『지관보행전홍결』 각 열 권, 『오백문론』 세 권 등을 지었다. 전교대사가 당에 건너가 사사한 도수 · 행만이 그의 직제자다.
名目명목
이름과 조목. 일념삼천이라는 「이름」과 그것을 이루는 법수(法數)의 체계를 가리킨다. 본장은 그 내용의 일부(백계천여)가 앞의 저술에 있더라도, 「일념삼천」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곳은 『마하지관』 정수장뿐임을 묻고 답한다.
止観の一二三四 / 止観の前の四지관의 1 · 2 · 3 · 4 / 앞의 넷
『마하지관』의 권1부터 권4까지. 일념삼천을 밝힌 정수지관장은 권5상에서 시작하므로, 그 앞의 네 권을 가리킨다. 아래 『홍결』의 「앞의 여섯」은 열 장(十廣) 가운데 대의 · 석명 · 체상 · 섭법 · 편원 · 방편의 여섯 장이며, 그 범위가 권1~4와 겹친다.
指南지남
방향을 가리키는 수레(指南車)에서 온 말로, 나아갈 길의 기준을 뜻한다. 정수장의 모든 관법이 삼천을 기준으로 삼아 짜였다는 뜻이다.
一入일입
십이입(十二入)의 하나. 십이입이란 육근(안 · 이 · 비 · 설 · 신 · 의)과 육경(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열둘로, 십이처라고도 한다. 「입」은 건너 들어간다(涉入)는 뜻이다. 근과 경이 서로 관계하여 육식(六識)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귀가 바깥의 소리에 닿아 그 작용을 일으키는 것 등이다.
観音玄관음현
『관음현의』 두 권. 천태의 저술 가운데 오소부(五小部)의 하나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대강을 오중현의의 틀로 풀었다. 장안의 필록이지만 천태가 언제 어디서 강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백계천여를 설하는 내용으로 보아 『마하지관』 이전의 설로 보는 견해가 있다.
冥伏명복
가라앉아 숨어 있음. 드러나지 않았으나 없어지지 않고 잠재해 있는 상태. 「현전하지 않더라도 뚜렷이(宛然) 갖추어져 있다」와 짝을 이룬다.
弘決홍결
『지관보행전홍결』 열 권. 묘락대사 저. 『마하지관』의 주석서로, 제목 풀이를 비롯해 무정불성에 관한 열 가지 논란, 화엄종의 「법화는 점돈, 화엄은 돈돈」이라는 설의 논파 등을 담아 『마하지관』의 묘지를 밝히고 천태종 안팎의 이의를 깨뜨렸다.
二十五法이십오법
『마하지관』 제6 방편장에 설한 스물다섯 가지 방편. 제7 정관장에 들어가기 전에 관심을 완전하게 하려고 몸과 마음을 고르고 선정과 지혜를 닦는 예비 수행이다(해설 참조).
前の六앞의 여섯
십광 가운데 정수장 앞의 여섯 장. 모두 「해(解)」, 곧 이해의 단계에 속하며, 「행(行)」, 곧 실제 수행은 정수장에서 비로소 논한다.
終窮究竟の極説종궁구경의 극설
끝까지 다 궁구한 궁극의 가르침. 묘락이 일념삼천을 천태의 궁극의 법문으로 찬탄한 말.
説己心中所行法門설기심중소행법문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바의 법문을 설한다」. 『마하지관』 서분에서 장안대사가 이 책의 성격을 말한 구절. 천태가 남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서 실제로 행하여 증득한 법문을 설했다는 뜻이다.
異縁이연
다른 인연, 곧 다른 생각. 「마음에 이연을 두지 말라」는, 이 글을 읽는 이가 일념삼천 외에 다른 데로 마음을 돌리지 말라는 당부다.

「명목」을 묻는 문답의 짜임

다섯 번의 물음, 한 번의 의심

제2장은 짧은 문답이 빠르게 이어지는 장이다. 묻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다. 「일념삼천」이라는 이름(名目)이 어디에서 처음 세워졌는가. 대성인은 천태의 주요 저술을 하나씩 짚어 가며 지운다.

  1. ①
    물음玄義に一念三千の名目を明かすや『현의』에 일념삼천의 명목을 밝혔는가
    답明かさず밝히지 않았다
  2. ②
    물음文句に…『문구』에 …
    답明かさず밝히지 않았다
  3. ③
    물음其の妙楽の釈如何그 묘락의 해석은
    답並に未だ一念三千と云わず모두 아직 일념삼천이라 하지 않았다
  4. ④
    물음止観の一二三四等に…『지관』 권1~4에
    답之れ無し없다증거止観に至つて正しく観法を明かす並びに三千を以て指南と為す『지관』에 이르러 바로 관법을 밝히매 모두 삼천으로써 지남으로 삼았다
  5. ⑤의심 — 답 생략
    의심『현의』 권2 · 『문구』 권1 · 『관음현의』의 문장
    답(답은 생략 — 모두 천여시에 그침)
  6. ⑥
    물음止観の前の四に…『지관』의 앞 넷에 …
    답明さず밝히지 않았다
    『홍결』 권5前の六をば皆解に属す앞의 여섯은 모두 해에 속한다終窮究竟の極説끝까지 궁구한 궁극의 설
도표 6 · 제2장의 문답 — 명목은 어디에 있는가

물음은 다섯 번, 의심은 한 번이다. 『현의』 — 없다. 『문구』 — 없다. 묘락의 해석 — 「모두 아직 일념삼천이라 하지 않았다」. 『지관』 권1부터 권4까지 — 없다. 그 증거 — 묘락이 「『지관』에 이르러 바로 관법을 밝히매 삼천으로 지남을 삼았다」고 했다. 그러자 의심이 끼어든다. 『현의』에도 『문구』에도 『관음현의』에도 그와 비슷한 문장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대성인은 이 의심에 답을 적지 않으셨다. 곧바로 다시 묻는다. 『지관』의 앞 넷에 밝혔는가 — 묘락은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 해석은 — 『홍결』 권5의 두 문장. 이것으로 장이 끝난다.

답이 없는 의심은 무엇을 뜻하는가. 강의의 현대어역은 이렇게 풀이한다. 그 답은 없지만, 이 문장들이 모두 천여시를 밝힐 뿐 일념삼천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문장 자체에서 분명하다. 대성인은 세 문장을 나란히 늘어놓는 것만으로 답을 대신하셨다. 셋 모두 「천」에서 멈추고 「삼천」에 이르지 않는다. 이것을 보는 순간 의심은 저절로 풀린다.

왜 「이름」이 문제인가

대성인이 묻는 것이 내용이 아니라 「명목」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십계호구도, 백계천여도 천태는 이미 앞의 저술들에서 설했다. 그러나 그것을 삼세간과 합해 「일념삼천」이라는 이름으로 세우고, 그것을 수행의 지남으로 삼은 것은 『마하지관』의 정수장에서 처음이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하나의 법문이 독립된 체계로 완결되었다는 뜻이다. 제1장의 「출처」가 문헌상의 자리를 가리켰다면, 제2장은 그 자리가 천태의 저술 전체에서 얼마나 늦게,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보인다.

『마하지관』은 열 권(판본에 따라 각 권을 상하로 나누어 스무 권)이며, 일념삼천을 설한 정수지관장은 권5상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본문은 「지관의 앞 넷」(권1~4)이라 하고, 『홍결』은 열 장 가운데 「앞의 여섯」(대의~방편)이라 한다. 권과 장이라는 단위가 다를 뿐 같은 범위를 가리킨다.

『현의』 · 『문구』 · 『관음현의』의 세 문장 — 천여에 머문 까닭

세 문장을 나란히

의심의 근거로 든 세 문장을 하나씩 보자.

『현의』 권2의 「또 한 법계에 아홉 법계를 갖추면 백법계에 천여시」는 십계호구로 백계를 이루고, 거기에 십여시를 곱해 천여시에 이르는 셈이다. 이것은 천태가 법화경의 제목과 깊은 뜻을 풀면서, 방편품의 「제법실상 · 십여시」를 십계에 맞춘 것이다.

『문구』 권1의 「한 입(入)에 십법계를 갖추면 한 계가 또 십계이니라. 십계에 각각 십여시가 있으면 곧 일천」은 출발점이 다르다. 「일입」, 곧 눈과 빛깔, 귀와 소리처럼 감각 기관과 대상이 만나는 하나의 자리에 십법계가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백계를 거쳐 「일천」에서 멈춘다.

『관음현의』의 「십법계가 서로 어우러지면 곧 백법계가 있고, 천 가지 성상이 가라앉아 숨어서 마음에 있으며, 앞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뚜렷이 갖추어져 있다」는 셋 가운데 가장 일념삼천에 가깝다. 「마음에 있다」, 「현전하지 않아도 뚜렷이 갖추어져 있다」는 표현은 『마하지관』의 「이 삼천은 한 생각의 마음에 있다」를 거의 그대로 예고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는 「천 가지 성상」, 곧 천여시다.

『법화현의』 권2
원문 구절
又一法界に九法界を具すれば百法界に千如是또 한 법계에 아홉 법계를 갖추면 백법계에 천여시
도달한 수
백계천여
『법화문구』 권1
원문 구절
一入に十法界を具すれば…即ち是れ一千한 입에 십법계를 갖추면 … 곧 일천
도달한 수
백계천여
『관음현의』
원문 구절
千種の性相・冥伏して心に在り천 가지 성상이 가라앉아 숨어서 마음에 있다
도달한 수
백계천여
『마하지관』 권5상
원문 구절
一界に三十種の世間を具すれば百法界に即三千種の世間を具す한 계에 삼십 종 세간을 갖추면 백법계에 곧 삼천 종 세간
도달한 수
일념삼천

빠진 것 — 삼세간(특히 국토세간)

도표 7 · 천태 저술에 나타난 수 — 천여에서 삼천으로

빠진 것은 삼세간이다

세 문장이 천여에서 멈춘 까닭은 분명하다. 삼세간, 특히 국토세간이 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묘락은 『법화현의석첨』 권2에서 바로 이 빈자리를 메운다. 대성인이 초기 어서 「일념삼천이사」에 옮겨 두신 구절이다.

籤の二に云く「仮は即ち衆生実は即ち五陰及び国土即ち三世間なり千の法は皆三なり故に三千有り」

『석첨』 권2에 이르기를 「가(假)는 곧 중생이요, 실(實)은 곧 오음과 국토이니 곧 삼세간이니라. 천의 법이 모두 셋이므로 삼천이 있느니라」고 하였느니라.

「일념삼천이사」, 408쪽

『현의』의 천여시를 주석하면서 묘락은 그 천 가지 법 하나하나에 세 세간이 있으므로 삼천이 된다고 덧붙였다. 거꾸로 말하면, 『현의』 자체는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빈자리는 제4장의 첫 문답으로 곧장 이어진다. 「백계천여와 일념삼천의 차이는 무엇인가 — 백계천여는 유정계에 한하고, 일념삼천은 정 · 비정에 걸친다.」 『현의』 · 『문구』 · 『관음현의』의 백계천여가 일념삼천이 되지 못한 것은 단지 셈이 덜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 있는 중생(유정)만을 말하고, 그 중생이 사는 국토와 풀과 나무(비정)를 아직 그 안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장에서 결성이 「세간」으로 수를 맺었던 것, 강의가 그것을 본문의 뜻이라고 읽었던 것이 여기서 다시 의미를 얻는다.

강의의 관점: 『현의』 · 『문구』 · 『관음현의』는 모두 백계천여를 밝힐 뿐 일념삼천을 밝히지 않았다. 대성인이 의심에 답을 적지 않으신 것은 세 문장을 보는 것만으로 이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십오방편 — 「해(解)」와 「행(行)」

『홍결』의 첫째 문장

『지관』 앞 넷에 일념삼천이 없는 까닭을 묘락은 『홍결』 권5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정관(正觀)에 견주면, 앞부분은 전혀 아직 「행」을 논하지 않았다. 또 이십오법을 거쳐 구체적인 일(事)에 맞추어 「해」를 일으키게 한 것으로, 바야흐로 정수(正修)의 방편이 될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여섯 장은 모두 「해」에 속한다.

『마하지관』의 열 장(十廣)은 이렇게 배열되어 있다.

前の六をば皆解に属す앞의 여섯은 모두 해(解)에 속한다
①大意대의②釋名석명③體相체상④攝法섭법⑤偏圓편원⑥方便방편(이십오방편)
止観の正しく観法を明かす『지관』이 바로 관법을 밝힘 — 행(行)
⑦正修정수 (정관)十境 · 十乘觀法 · 一念三千
설해지지 않음
⑧果報과보⑨起敎기교⑩旨歸지귀
권1~권4 = 止観の前の四 (지관의 앞 넷) · 권5상부터 정수장

정수장의 십경 가운데 제8 증상만경 이하도 설해지지 않았다

도표 8 · 『마하지관』 십광과 정수장의 자리

첫 여섯 장은 지관이 무엇이며(대의),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이고(석명), 그 체와 모습이 어떠하며(체상), 모든 법을 어떻게 거두고(섭법), 치우친 것과 원만한 것이 어떻게 다르며(편원),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방편)를 설한다. 모두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알아야 할 것, 곧 「해(解)」다. 일곱째 정수장에서 비로소 실제로 마음을 관하는 「행(行)」이 설해지고, 일념삼천은 그 행의 첫머리, 관부사의경에 놓였다. 뒤의 세 장(과보 · 기교 · 지귀)은 끝내 강설되지 않았고, 정수장 안에서도 열 가지 관의 대상 가운데 여덟째 증상만경 이하는 설해지지 않았다.

이십오방편의 다섯 묶음

「이십오법」은 제6 방편장에 설한 스물다섯 가지 방편으로, 정관에 들어가기 전에 관심을 완전하게 하려고 몸과 마음을 고르고 선정과 지혜를 연마하는 준비 수행이다. 다섯 가지씩 다섯 묶음이다.

①具五緣다섯 인연을 갖춤
  • 持戒淸淨계를 지켜 청정함
  • 衣食具足옷과 음식을 갖춤
  • 閑居靜處한적한 곳에 머묾
  • 息諸緣務여러 세상일을 쉼
  • 近善知識선지식을 가까이함
②呵五欲다섯 욕망을 꾸짖음
  • 色색
  • 聲성
  • 香향
  • 味미
  • 觸촉
③棄五蓋다섯 덮개를 버림
  • 貪欲탐욕
  • 瞋恚진에
  • 睡眠수면
  • 掉悔도회
  • 疑의
④調五事다섯 일을 고름
  • 調心조심
  • 調身조신
  • 調息조식(調息)
  • 調眠조면
  • 調食조식(調食)
⑤行五法다섯 법을 행함
  • 欲욕
  • 精進정진
  • 念염
  • 巧慧교혜
  • 一心일심

정수(正修)의 방편 — 事에 맞추어 解를 일으킴 (『홍결』 권5)

도표 9 · 이십오방편

이 다섯 묶음은 바깥 조건(인연을 갖춤)에서 감각의 욕망(다섯 욕망), 마음의 장애(다섯 덮개), 몸과 숨과 잠과 음식의 조율(다섯 일), 그리고 수행의 의지(다섯 법)로 점점 안으로 좁혀 들어간다. 묘락이 이것을 「사(事)에 맞추어 해(解)를 일으킨다」고 한 것은, 이 방편들이 구체적인 생활의 일을 통해 수행의 뜻을 몸에 익히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일념삼천은 「행」의 자리에서 설해졌다

이 구별이 왜 중요한가. 일념삼천은 이해의 대상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수행의 자리에서, 수행의 내용으로 설해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천태는 수많은 강설에서 교리를 풀었지만, 일념삼천이라는 이름은 「이제 실제로 마음을 관하라」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야 꺼냈다. 일념삼천은 알아야 할 이론이기 전에 닦아서 체득해야 할 법이다.

이 점은 본초의 제목과 바로 이어진다. 「관심」이란 바로 이 「행」이다. 대성인이 제5장 이하에서 「관심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마침내 말법의 범부에게 그 「행」이 무엇인지를 수지(受持)로 밝히시는 것은, 일념삼천이 처음부터 행의 법문이었기 때문이다. 천태에게 행은 지관의 관법이었고, 대성인에게 행은 묘법 오자를 받아 지니는 것이다. 행의 내용은 바뀌었지만, 일념삼천이 행의 자리에 있다는 구조는 그대로다.

삼대부와 「끝까지 궁구한 궁극의 설」

삼대부의 세 얼굴

강의는 천태 일대의 불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저술이 『현의』 · 『문구』 · 『지관』의 삼대부라 하고, 셋의 성격을 이렇게 정리한다. 『현의』는 법화경의 그윽한 뜻을 개설하여 이 경이 일대 불교에서 가장 높고 위없는 경임을 밝혔다. 『문구』는 법화경 여덟 권의 글귀 하나하나에 과단을 나누고 자구를 풀어 법화경만이 홀로 높다는 뜻을 밝혔다. 『지관』은 일념삼천의 법문에 여러 대승의 원만한 뜻을 모두 거두고, 자기 마음에서 닦아 증득하는 법칙으로 십경 · 십승의 행문을 밝혀 법화원돈의 행법으로 삼았다.

그리고 『현의』와 『문구』와 『지관』 권4까지는 오시 · 팔교 · 백계천여 등을 설했을 뿐, 아직 구극의 극설인 일념삼천을 밝히지 않았다. 일념삼천이야말로 불교의 극리이며, 그것은 「개목초」의 다음 말씀대로라고 강의는 말한다.

一念三千の法門は但法華経の本門・寿量品の文の底にしづめたり、竜樹・天親・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但我が天台智者のみこれをいだけり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글 밑바닥에 잠겨 있느니라. 용수와 천친은 알면서도 아직 건져 내지 않았고, 다만 우리 천태 지자만이 이것을 품었느니라.

「개목초」, 189쪽

용수와 천친이 「알면서도 건져 내지 않았다」는 것은 본초 제13장에도 천태의 말로 다시 나온다.

天台大師云く「天親竜樹・内鑒泠然たり外には時の宜きに適い各権に拠る所あり」

천태대사가 이르기를 「천친과 용수는 안으로는 맑고 분명하게 비추어 알았으나, 밖으로는 그때의 형편에 맞추어 저마다 방편에 의거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느니라.

「관심의 본존초」, 244쪽

일념삼천의 법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일념삼천의 법문이란 무엇인가. 강의는 이것이야말로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라고 답한다. 석존도 용수도 천태도 이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고 부촉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남을 교화할 때에는 계 · 정 · 혜의 삼학으로 설하고 삼대비법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석가불은 법화경 28품을 설했고, 용수와 천친은 권대승교를 넓혔으며, 천태와 전교는 이(理)의 일념삼천 등을 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곳은 문저하종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의는 문저하종 사행의 일념삼천을 모르는 학자는 아무리 박학다재하고 세간의 존경을 받더라도 불법의 바른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삼대비법의 본존을 모르는 일련종 각파가 대성인에게 스승을 거스르는 비방법의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강의의 관점: 『마하지관』 정수장의 일념삼천이 「종궁구경의 극설」인 것은, 그것이 석존 · 용수 · 천태가 알면서도 때가 이르지 않아 드러내지 않은 문저의 법, 곧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설기심중소행법문」 — 자기 마음속에서 행한 법문

천태의 기심, 대성인의 기심

『홍결』의 둘째 문장은 장안대사가 『마하지관』 서분에 쓴 「설기심중소행법문(說己心中所行法門)」을 끌어온다.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바의 법문을 설한다」는 뜻이다. 천태는 일념삼천을 설해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삼천세간을 세우고, 온 우주가 곧 나의 일념에 갖추어지며 나의 일념이 곧 온 우주에 두루 미친다고 설했다. 이 법문이 천태가 지남으로 삼은 근본의 뜻이며,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법문이다. 묘락은 바로 이 때문에 장안이 서문에서 그렇게 썼다고, 「참으로 까닭이 있다」고 한 것이다.

강의는 여기서 둘을 나눈다. 천태는 관념관법(觀念觀法)으로 생명의 본질을 체득하려 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사행의 일념삼천을 삼대비법의 본존으로 세우셨다. 이 사의 일념삼천의 본존이야말로 대성인의 내증의 법문이며, 대성인이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하신 법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름으로써 관행을 성취하고, 나의 생명이 본존과 하나이며 온 우주와 하나임을 증득할 수 있다.

생활은 「기심중소행」을 설하고 있다

강의는 「설기심중소행법문」을 다시 생명론과 생활에 맞추어 읽는다. 우리의 생활이란 순간순간 생명 활동이 드러난 현실이다. 모든 행동, 모든 모습이 다 나의 일념이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전체가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바의 법문을 설법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옥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일념이 강하게 그 사람의 모습과 행동에 드러난다. 수라의 경애인 사람도 그것이 행동과 모습에 강하게 배어 나온다. 하늘에라도 오를 듯 즐거운 경애일 때는 얼굴이 생기 있고 몸도 발걸음도 가벼우며 입에서는 저절로 가벼운 노래가 나오기도 한다.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 사람의 경애를 설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제법실상이고 「설기심중소행법문」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불법의 눈으로 보면, 가장 깊은 곳의 일념이 모든 것을 결정해 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아무리 겉을 꾸미고 위선을 차려도 일념이 드러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秘とはきびしきなり三千羅列なり是より外に不思議之無し

비(秘)란 엄격하다는 것이니, 삼천이 늘어서 있음이니라. 이것 밖에 불가사의는 없느니라.

『어의구전』, 714쪽

삼천의 만법이 모두 일념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 생명의 실상이며, 그것은 엄격한 대우주의 철칙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 내느냐가 중요하다. 강의는 이렇게 말한다. 신심을 잃으면 겉모습이 어떻든 그 사람 생명의 밑바닥은 지옥이며, 그 증거로 그 사람의 인생은 반드시 파괴의 길을 걷는다. 반대로 본존에 대한 절대의 믿음에 선 인생은 곧 무량한 복운과 광휘로 가득한 인생이며, 그 증거로 미래가 넓게 열리고 10년, 20년, 30년이 지나는 동안 공덕이 끝없이 생활에 나타난다.

강의는 국토에까지 이 원리를 넓힌다. 엄격히 말하면 국토를 낙토로 만드는 것도 악국토로 만드는 것도 우리의 일념이다. 비방법의 사람이 가득 차면 국토에 천변지요가 잇따르고, 생명력이 약해진 곳에 역병도 번진다. 전쟁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도 우리의 일념이다. 결국 「설기심중소행법문」이므로 일념의 각성이야말로 모든 것을 행복으로 이끄는 원천이며, 신심을 근본으로 하여 스스로에게 돌아간다면 어떠한 난관도 태양 앞의 서리와 이슬 같은 것이라고 확신해야 한다고 강의는 맺는다.

「입정관초」가 읽은 같은 문장 (보강)

같은 『홍결』의 문장은 대성인의 「입정관초」(1274)에서 정반대의 방향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천태종 학자들 가운데 관심 수행만을 귀히 여기고 법화경 본적이문을 버리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바로 이 「설기심중소행법문」을 근거로, 『마하지관』은 천태가 자기 마음에서 얻은 것이니 법화경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성인은 그 주장을 이렇게 되받으신다.

此の文は全く法華経に依らずと云う文に非ず既に説己心中所行の法門と云うが故なり天台の所行の法門は法華経なるが故に此の意は法華経に依ると見えたる証文なり

이 글은 결코 법화경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글이 아니니라. 이미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바의 법문을 설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니라. 천태가 행한 법문은 법화경이므로, 이 뜻은 법화경에 의지한다는 것이 드러난 증문이니라.

「입정관초」, 527쪽

천태가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것은 다름 아닌 법화경이었다. 그러므로 「기심중소행」은 법화경을 떠난 독자적 깨달음이 아니라, 법화경을 자기 마음에서 실제로 행해 얻은 법문이라는 뜻이다. 대성인은 같은 대목에서 천태의 「경전(修多羅)과 맞으면 기록하여 쓰고, 글도 없고 뜻도 없는 것은 믿고 받지 말라」, 석존의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不依人)」를 들어, 천태가 법화경에 의지하지 않고 『마하지관』을 지었을 리 없다고 하신다.

이 보강은 제2장의 「종궁구경의 극설」을 바르게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일념삼천이 천태 교학의 극설이라는 것은 그것이 법화경을 넘어섰다는 뜻이 아니라, 법화경을 가장 깊이 행한 결과라는 뜻이다. 그리고 제3장에서 보듯, 이 사실을 잊고 다른 데서 일념삼천을 찾은 것이 천태 말학의 실패였다.

「마음에 이연을 두지 말라」

『홍결』의 문장은 「바라건대 찾아 읽는 이는 마음에 다른 생각을 두지 말지어다」로 끝난다. 묘락은 『마하지관』을 읽는 후학에게, 이 책의 중심이 일념삼천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대성인이 이 당부까지 그대로 인용하신 것은 본초를 받아 읽을 도키조닌과 문하에게도 같은 당부를 하신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어서를 읽는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념삼천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것이다.

제3장 일념삼천을 결탄하다
어서 239쪽 3행 ~ 7행 · 第三章 一念三千を結歎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39쪽 3~7행
本文 · 어서 원문

夫れ智者の弘法三十年・二十九年の間は玄文等の諸義を説いて五時・八教・百界千如を明かし前き五百余年の間の諸非を責め並びに天竺の論師未だ述べざるを顕す、 章安大師云く「天竺の大論尚其の類に非ず震旦の人師何ぞ労わしく語るに及ばん此れ誇耀に非ず法相の然らしむるのみ」等云云、 墓ないかな天台の末学等華厳真言の元祖の盗人に一念三千の重宝を盗み取られて還つて彼等が門家と成りぬ 章安大師兼ねて此の事を知つて歎いて言く「斯の言若し墜ちなば将来悲む可し」云云。

풀이

무릇 지자대사의 홍법 30년 가운데 29년 동안은 『현의』 · 『문구』 등의 여러 뜻을 설하여 오시 · 팔교 · 백계천여를 밝히고, 그 앞 오백여 년 동안의 여러 잘못을 꾸짖으며, 아울러 천축의 논사들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었느니라. 장안대사가 이르기를 「천축의 대론사들도 오히려 그 무리가 아니거늘, 진단(중국)의 인사(人師)들을 어찌 번거로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뽐내는 것이 아니라 법의 모습(法相)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뿐이니라」고 하였느니라. 덧없도다, 천태의 말학들이 화엄 · 진언의 원조인 도둑들에게 일념삼천의 귀한 보배를 도둑맞고, 도리어 저들의 문하가 되어 버렸느니라. 장안대사는 미리 이 일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말이 만약 땅에 떨어진다면 장래에 슬퍼할 만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智者지자
천태대사 지의(538–597). 중국 남북조에서 수나라에 걸친 사람으로 천태종의 개조다(북제의 혜문, 남악 혜사에 이은 제3조, 용수를 고조로 하면 제4조). 지자대사라 존칭하고, 천태산에 살았으므로 천태대사라 한다. 성은 진(陳) 씨, 자는 덕안, 형주 화용현 사람이다. 열여덟 살에 상주 과원사의 법서에게 출가하고, 스물셋에 광주 대소산으로 남악대사 혜사를 찾아가 수행 끝에 법화경 약왕품의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으로 여래를 공양한다고 이름한다」에 이르러 법화삼매를 감득했다(대소개오). 진의 도읍 금릉 와관사에서 8년 동안 법화경 · 『대지도론』 등을 강설해 이름을 떨쳤으나, 깨닫는 이가 해마다 줄어드는 것을 한탄해 태건 7년(575) 천태산에 들어갔다. 지덕 3년(585) 다시 금릉으로 나와 광택사 등에서 강설하고, 정명 원년(587) 법화경을 강해 장안이 필록한 것이 『법화문구』다. 개황 11년(591) 수의 진왕 양광(뒤의 양제)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자대사의 호를 받았다. 고향 형주의 옥천사에서 『법화현의』와 『마하지관』을 강술해 삼대부를 완성하고, 개황 17년(597) 석성사에서 예순 살로 입적했다. 『관음현의』 · 『관음의소』 · 『금광명현의』 · 『금광명문구』 · 『관경소』의 오소부도 있다. (인물탐구 「천태대사」 참조)
弘法三十年・二十九年홍법 30년 · 29년
천태가 법을 넓힌 30년 가운데 29년 동안. 본문은 이 29년 동안에 『현의』 · 『문구』 등을 설해 오시팔교 · 백계천여를 밝혔다고 하여, 일념삼천을 설한 『마하지관』을 그 뒤에 놓는다.
玄文等の諸義현문 등의 여러 뜻
『법화현의』와 『법화문구』 등에서 밝힌 교리.
五時・八教오시 · 팔교
천태가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설한 시기(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 · 법화열반의 오시)와 가르침의 형식(돈 · 점 · 비밀 · 부정의 화의사교)과 내용(장 · 통 · 별 · 원의 화법사교)으로 정리한 교판.
百界千如백계천여
천태 교학에서 제법실상을 분석적으로 나타낸 말. 십계 각각이 자기 자신과 다른 아홉 계를 다음에 나타날 가능성으로 갖추고 있어(십계호구) 백계가 되고, 이 백계 각각에 모든 법이 공통으로 갖춘 특성인 십여시가 있어 천여가 된다.
前き五百余年の間の諸非앞 오백여 년 동안의 여러 잘못
후한 시대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뒤 천태에 이르기까지 오백여 년 동안 중국 불교계의 여러 학설이 서로 다투며 저지른 잘못. 대표적인 것이 남삼북칠(南三北七)의 교판이다.
天竺の論師천축의 논사
인도의 대론사들. 용수 · 천친 등을 가리킨다.
章安大師장안대사
장안대사 관정(561–632). 천태대사의 제자로, 스승의 강설을 모두 듣고 결집했다. 자는 법운, 절강성 임해현 장안 사람. 일곱 살에 섭정사에 들어가고, 진 지덕 원년(583) 천태를 뵙고 관법을 받은 뒤 늘 곁에서 모시며 설해진 법문을 모두 이해했다. 그가 듣고 결집한 것이 삼대부를 비롯한 대소부 백여 권이다. 스승이 입적한 뒤 『열반현의』 두 권, 『열반경소』 서른세 권을 지었다. 삼론종의 길장이 장안의 『의기』를 빌려 보고 천태에 귀복했다고 전한다. 당 정관 6년(632) 8월 7일 천태산 국청사에서 일흔둘로 입적했다.
震旦진단
인도에서 중국을 부르던 이름.
誇耀과요
뽐내어 자랑함.
法相の然らしむるのみ법상이 그렇게 만들 뿐
「법상」은 여기서 법상종이 아니라 「법의 모습」, 곧 천태가 설한 법 자체의 뛰어남을 말한다.
華厳真言の元祖の盗人화엄 · 진언의 원조인 도둑
구체적으로는 화엄종의 징관, 진언종의 선무외 등을 가리킨다(해설 참조).
重宝중보
귀하고 소중한 보배. 일념삼천을 말한다. 본초 결론부의 「일념삼천의 구슬(珠)」과 짝을 이룬다.
門家문가
그 문하, 그 종의 무리.
斯の言若し墜ちなば이 말이 만약 떨어진다면
일념삼천의 법의가 장래에 땅에 떨어져 잊힌다면.

천태 30년의 홍법

「29년」 다음에 오는 것

제3장은 제1 · 2장의 문헌 확인을 마치고 일념삼천을 「결탄(結歎)」, 곧 맺으며 찬탄하고 탄식하는 장이다. 찬탄은 앞의 두 문장에, 탄식은 뒤의 두 문장에 있다.

첫 문장은 천태의 생애를 한 줄로 요약한다. 홍법 30년 가운데 29년 동안은 『현의』 · 『문구』 등을 설해 오시팔교와 백계천여를 밝혔다. 이 「29년」은 제2장의 결론을 연대로 다시 말한 것이다. 오시팔교의 교판도, 백계천여도 천태 교학의 큰 업적이지만, 그것은 아직 일념삼천이 아니다. 일념삼천은 그 긴 세월이 다 지난 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옥천사에서 『마하지관』을 강술하며 비로소 설해졌다.

와관사 강설 ~ 591 무렵弘法三十年・二十九年の間は玄文等の諸義を説いて五時・八教・百界千如を明かし홍법 30년 가운데 29년 동안 현의 · 문구 등을 설해 오시팔교 · 백계천여를 밝힘
  1. 538탄생 (형주 화용현)
  2. 555 무렵18세 출가 (상주 과원사)
  3. 56023세 대소산에서 남악대사 혜사를 만남 — 대소개오
  4. 금릉 와관사에서 8년 강설
  5. 575천태산에 들어감
  6. 585금릉으로 나옴
  7. 587『법화문구』 강설
  8. 591지자대사의 호
  9. 594형주 옥천사에서 『법화현의』 · 『마하지관』 강술一念三千
  10. 597입적 (60세)
연대는 강의 어석 기준 · 홍법 30년의 기점은 확인 중
도표 10 · 천태대사의 생애와 일념삼천

천태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 이 배치의 무게가 느껴진다. 스물셋의 대소개오에서 시작해 금릉에서의 강설, 천태산 은거, 다시 금릉, 그리고 고향 형주로. 『마하지관』의 강술은 그 긴 길의 끝 무렵에 있다. 일념삼천은 젊은 천재의 착상이 아니라, 평생의 강설과 수행이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였다. 묘락이 「종궁구경의 극설」이라 한 것은 이 의미에서도 정확하다.

그림 준비 중
B-1 · 옥천사의 여름 강설

남삼북칠의 「여러 잘못」을 꾸짖다

오백여 년의 혼란

「앞 오백여 년 동안의 여러 잘못을 꾸짖었다」는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뒤 천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가리킨다. 강의는 천태의 30년 홍법이 정법 천 년은 말할 것도 없고, 상법에 들어선 뒤 오백 년 동안에도 누구 한 사람 말하지 않았던 깊은 뜻이라고 말한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이 오백여 년을 이렇게 요약하신다.

後漢の永平に漢土に仏法わたりて邪典やぶれて内典立つ、内典に南三・北七の異執をこりて蘭菊なりしかども陳隋の智者大師にうちやぶられて仏法二び群類をすくう

후한 영평 때 한토에 불법이 건너와 삿된 전적이 깨지고 내전(불교)이 섰느니라. 내전에 남삼 · 북칠의 다른 집착이 일어나 난초와 국화처럼 다투어 피었으나, 진 · 수의 지자대사에게 깨뜨려져 불법이 다시 뭇 중생을 구하였느니라.

「개목초」, 189–190쪽

남삼북칠이란 양자강 남쪽의 세 학파와 북쪽의 일곱 학파를 말한다. 저마다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나누고 우열을 정했지만, 법화경을 첫째로 둔 곳이 없었다.

광택사 법운의 「화엄 제일」

「보은초」는 그 대표로 남삼의 셋째, 광택사의 법운을 든다.

此の人は一代の仏教を五にわかつ其の五の中に三経をえらびいだす、所謂華厳経・涅槃経・法華経なり一切経の中には華厳経第一・大王のごとし涅槃経第二・摂政関白のごとし第三法華経は公卿等のごとし此れより已下は万民のごとし

이 사람은 일대의 불교를 다섯으로 나누고, 그 다섯 가운데 세 경을 골라냈으니, 이른바 화엄경 · 열반경 · 법화경이니라. 일체경 가운데 화엄경이 제일로 대왕과 같고, 열반경이 제이로 섭정 · 관백과 같으며, 제삼 법화경은 공경 등과 같고, 그 아래는 만민과 같다고 하였느니라.

「보은초」, 298쪽

법운은 지혜가 뛰어나고 양 무제의 존숭을 받았으며, 그가 법화경을 강하면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고 할 만큼 명망이 높았다. 그의 법화경 주석에는 「이 경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의 설이 중국은 물론 신라 · 백제 · 고려 · 일본까지 퍼져 「법화경은 화엄경 · 열반경보다 못하다」는 것이 대체로 일치된 생각이 되었다. 천태는 일체경을 다시 검토해 「법화 제일 · 열반 제이 · 화엄 제삼」으로 판정하고, 법운이 비방법으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공언했다. 그러자 남북의 학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까마귀처럼 모였다고 「보은초」는 전한다. 천태가 「여러 잘못을 꾸짖었다」는 것은 이처럼 시대 전체의 상식과 맞선 일이었다.

천축의 논사도 말하지 않은 것

「아울러 천축의 논사들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나타냈다」는 용수와 천친을 가리킨다. 제2장에서 본 「개목초」의 말씀대로 그들은 일념삼천을 「알면서도 아직 건져 내지 않았다」. 본초 제13장은 그 까닭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펴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신다. 천태는 인도의 대론사들도 드러내지 않은 법문을 처음으로 이름 붙여 세운 사람이다.

「천축의 대론도 그 무리가 아니다」 — 장안의 찬탄

장안대사의 찬탄은 짧고 강하다. 인도의 대론사들도 천태와 견줄 바가 아닌데, 중국의 학자들을 어찌 하나하나 들어 비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곧바로 덧붙인다. 이것은 뽐내는 것이 아니라 법상(法相), 곧 천태가 설한 법 그 자체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덧붙임에 장안의 태도가 있다. 스승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법의 높고 낮음을 바르게 말하는 것이 목적이다. 천태를 높이는 것은 천태가 설한 일념삼천이 높기 때문이다. 이 말은 본초 제13장에서도 다시 인용된다. 거기서 대성인은 천친 · 용수 · 마명 · 견혜 등은 안으로 분명히 알았으나 때가 이르지 않아 펴지 않았고, 천태 이전의 인사들은 혹은 구슬을 머금고 혹은 전혀 몰랐으며, 이후의 인사들은 처음에 깨뜨리다가 뒤에 귀복하거나 끝내 쓰지 않았다고 정리하신다. 제3장의 찬탄은 그 긴 논의의 씨앗이다.

강의의 관점: 천태의 30년 홍법은 정법 천 년은 물론 상법에 들어 오백 년 동안 누구도 말하지 않은 깊은 뜻이었다. 장안의 찬탄은 스승의 자랑이 아니라 일념삼천이라는 법 자체의 뛰어남을 말한 것이다.

화엄 · 진언의 원조라는 도둑

「개목초」가 밝힌 도둑질

찬탄 뒤에 탄식이 온다. 「덧없도다, 천태의 말학들이 화엄 · 진언의 원조인 도둑들에게 일념삼천의 귀한 보배를 도둑맞았다.」 도둑이 누구인지는 「개목초」가 분명히 밝히신다.

華厳宗と真言宗とは本は権経・権宗なり善無畏三蔵・金剛智三蔵・天台の一念三千の義を盗みとつて自宗の肝心とし其の上に印と真言とを加て超過の心ををこす、其の子細をしらぬ学者等は天竺より大日経に一念三千の法門ありけりと・うちをもう、華厳宗は澄観が時・華厳経の心如工画師の文に天台の一念三千の法門を偸み入れたり、人これをしらず

화엄종과 진언종은 본래 권경 · 권종이니라. 선무외 삼장과 금강지 삼장이 천태의 일념삼천의 뜻을 훔쳐 자기 종의 간심으로 삼고, 그 위에 인(印)과 진언을 더해 뛰어넘었다는 마음을 일으켰느니라. 그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학자들은 천축에서부터 대일경에 일념삼천의 법문이 있었다고 생각하느니라. 화엄종은 징관 때에 화엄경의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는 글에 천태의 일념삼천의 법문을 훔쳐 넣었으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느니라.

「개목초」, 190쪽

같은 「개목초」의 앞부분에서는 법화경의 「두 가지 대사(二箇の大事)」 — 이승작불과 구원실성 — 를 들면서 「구사종 · 성실종 · 율종 · 법상종 · 삼론종 등은 이름도 모르고, 화엄종과 진언종의 두 종은 몰래 훔쳐서 자기 종의 골목(骨目)으로 삼았다」(189쪽)고 하신다.

진언종善無畏三藏 · 金剛智三藏선무외 삼장 · 금강지 삼장
무엇을 했는가
天台の一念三千の義を盗みとつて自宗の肝心とし其の上に印と真言とを加て천태의 일념삼천의 뜻을 훔쳐 자기 종의 간심으로 삼고 그 위에 인과 진언을 더함「개목초」 190쪽
결과
대일경에 본래 일념삼천이 있었다고 여겨짐
화엄종澄觀징관
무엇을 했는가
華厳経の心如工画師の文に天台の一念三千の法門を偸み入れたり화엄경의 『마음은 화가와 같다』는 글에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쳐 넣음「개목초」 190쪽
결과
법화 · 화엄 모두 일념삼천이라 하며 화엄을 근본으로 삼음
천태 말학
무엇을 했는가
還つて彼等が門家と成りぬ도리어 저들의 문가가 됨「관심의 본존초」 239쪽
결과
법화를 화엄 · 대일경과 같다고 봄
도표 11 · 일념삼천을 훔친 이들

「목회이상개안지사」가 덧붙이는 것

징관의 도둑질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목회이상개안지사」(1264)가 더 자세히 전한다.

華厳の澄観が天台の一念三千をぬすみて華厳にさしいれ法華華厳ともに一念三千なり、但し華厳は頓頓・さきなれば法華は漸頓のちなれば華厳は根本さきをしぬれば法華は枝葉等といふて我理をえたりとおもへる意山の如し

화엄의 징관이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쳐 화엄에 넣고, 법화와 화엄이 모두 일념삼천이지만 다만 화엄은 돈돈(頓頓)이며 먼저이고 법화는 점돈(漸頓)이며 나중이니, 화엄은 근본으로서 먼저 하였으므로 법화는 지엽이라고 하여, 자기가 이치를 얻었다고 여기는 마음이 산과 같으니라.

「목회이상개안지사」, 469쪽

징관은 일념삼천을 훔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훔친 것을 근거로 화엄을 「근본」, 법화를 「지엽」이라 하여 순서를 뒤집었다. 그런데 같은 어서는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일념삼천의 간심인 초목성불을 알지 못하는 것을 묘락이 비웃으셨다.」 훔친 이는 보배의 겉은 가져갔지만 그 알맹이, 곧 일념삼천이 풀과 나무에까지 걸친다는 것은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4장이 바로 이 「알맹이」를 다룬다. 『홍결』의 저자 묘락이 『금강비』를 지어 징관의 「비정에는 불성이 없다」는 설을 깨뜨린 것도 이 맥락이다.

「도리어 저들의 문가가 되었다」 — 천태 말학의 전락

보배를 도둑맞고 도둑의 문하로

강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불교의 극리인 일념삼천을 천태대사가 설해 나타냈는데도, 천태종의 말학들은 일념삼천의 법문이 불법의 가장 높은 이치임을 알지 못하고 다른 종이 좋다고 생각했다. 또 화엄 · 진언 등의 개조가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법문 가운데 일념삼천이라는 귀한 보배가 있다고 믿어, 도리어 그들의 문가가 되어 버렸다. 참으로 덧없지 않은가.

보배를 도둑맞은 것만으로도 큰일인데, 도둑맞은 줄 모르고 도둑이 보배의 주인인 줄 알아 그 문하에 들어갔다. 대성인이 「덧없도다(墓ないかな)」라고 탄식하신 것은 이 이중의 어리석음이다.

「목회이상개안지사」는 대성인 당시 일본 천태종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신다.

今の天台の学者等・我一念三千を得たりと思ふ、然りと雖も法華をもつて或は華厳に同じ或は大日経に同ず其の義を論ずるに澄観の見を出でず善無畏・不空に同ず

지금의 천태 학자들은 자기가 일념삼천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니라. 그러나 법화를 혹은 화엄과 같다 하고 혹은 대일경과 같다 하니, 그 뜻을 논하면 징관의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선무외 · 불공과 같으니라.

「목회이상개안지사」, 469쪽

강의는 이 탄식을 근대에까지 겹쳐 읽는다. 대성인 · 닛코상인의 흐름을 이으면서도 전시 중에 미노부와 합동한 기타야마 본문사 · 니시야마 본문사 · 요법사 등도 이 부류이며, 참으로 덧없는 자들이라고 강의는 비판한다.

일념삼천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만, 법화경을 화엄이나 대일경과 같은 자리에 둔다면 그 일념삼천은 이미 징관과 선무외의 일념삼천이다. 이름은 천태의 것이되 뜻은 도둑의 것이다. 이것이 「저들의 문가가 되었다」의 실상이다.

장안의 탄식

장안대사는 이 일을 미리 알고 탄식했다. 「이 말이 만약 땅에 떨어진다면 장래에 슬퍼할 만하리라.」 스승의 법문이 후세에 잊히거나 왜곡될 것을 장안은 내다보고 있었다. 대성인이 제3장을 이 탄식으로 맺으신 것은, 그 「장래」가 바로 지금 자신이 사는 시대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일념삼천은 이름만 남고 뜻은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다시 일으킬 것인가. 본초의 마지막, 부처가 대자비를 일으켜 「일념삼천의 구슬」을 다섯 글자에 싸서 말대 유치한 이들의 목에 걸게 하시고 네 보살이 그 사람을 수호한다는 결론은, 제3장의 이 탄식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강의의 관점: 천태 말학은 일념삼천이 불법의 극리임을 모르고, 화엄 · 진언의 개조가 그것을 훔친 것도 모른 채 그들의 법문에 일념삼천이 있다고 믿어 도리어 그 문하가 되었다. 장안은 이를 미리 알고 탄식했다.

제4장 일념삼천이 정 · 비정에 걸침을 밝히다
어서 239쪽 8행 ~ 18행 · 第四章 一念三千情非情にわたるを明か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39쪽 8~18행
本文 · 어서 원문

問うて曰く百界千如と一念三千と差別如何、 答えて曰く百界千如は有情界に限り一念三千は情非情に亘る、 不審して云く非情に十如是亘るならば草木に心有つて有情の如く成仏を為す可きや如何、 答えて曰く此の事難信難解なり天台の難信難解に二有り一には教門の難信難解二には観門の難信難解なり、 其の教門の難信難解とは一仏の所説に於て爾前の諸経には二乗闡提・未来に永く成仏せず教主釈尊は始めて正覚を成ず法華経迹本二門に来至し給い彼の二説を壊る一仏二言水火なり誰人か之を信ぜん此れは教門の難信難解なり、 観門の難信難解は百界千如一念三千・非情の上の色心の二法十如是是なり、 爾りと雖も木画の二像に於ては外典内典共に之を許して本尊と為す其の義に於ては天台一家より出でたり、 草木の上に色心の因果を置かずんば木画の像を本尊に恃み奉ること無益なり、 疑つて云く草木国土の上の十如是の因果の二法は何れの文に出でたるや、 答えて曰く止観第五に云く「国土世間亦十種の法を具す所以に悪国土・相・性・体・力等」と云云、 釈籤第六に云く「相は唯色に在り性は唯心に在り体・力・作・縁は義色心を兼ね因果は唯心・報は唯色に在り」等云云、 金錍論に云く「乃ち是れ一草・一木・一礫・一塵・各一仏性・各一因果あり縁了を具足す」等云云。

풀이

묻기를, 백계천여와 일념삼천은 어떻게 다른가. 답하기를, 백계천여는 유정계(有情界)에 한하고, 일념삼천은 정(情)과 비정(非情)에 걸치느니라. 의아히 여겨 이르기를, 비정에도 십여시가 걸친다면 풀과 나무에도 마음이 있어 유정처럼 성불한다는 것인가. 답하기를, 이 일은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라(難信難解). 천태가 말한 난신난해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교문(敎門)의 난신난해요 둘은 관문(觀門)의 난신난해이니라. 그 교문의 난신난해란, 한 부처가 설하신 것인데도 이전(爾前)의 여러 경에서는 이승과 천제는 미래에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며 교주 석존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다고 하였으나, 법화경의 적문 · 본문 두 문에 이르러서는 저 두 설을 깨뜨리셨으니, 한 부처에 두 말씀이 물과 불 같으니라. 누가 이것을 믿겠는가. 이것이 교문의 난신난해이니라. 관문의 난신난해는 백계천여 · 일념삼천에서 비정의 위에 색심의 두 법과 십여시가 있다는 것이니라. 그러하나 목상과 화상(木畫の二像)에 대해서는 외전과 내전이 모두 이를 허용하여 본존으로 삼거니와, 그 뜻은 천태 일가에서 나왔느니라. 풀과 나무 위에 색심의 인과를 두지 않는다면, 목상과 화상을 본존으로 의지하여 받드는 것이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의심하여 이르기를, 초목과 국토 위의 십여시의 인과 두 법은 어느 글에 나와 있는가. 답하기를, 『지관』 제5에 이르기를 「국토세간도 또한 열 가지 법을 갖추니, 그러므로 악한 국토에도 상 · 성 · 체 · 역 등이 있느니라」고 하였느니라. 『석첨』 제6에 이르기를 「상은 오직 색에 있고, 성은 오직 마음에 있으며, 체 · 역 · 작 · 연은 뜻이 색과 마음을 겸하고, 인과는 오직 마음, 보는 오직 색에 있느니라」고 하였느니라. 『금비론』에 이르기를 「곧 이것은 한 풀, 한 나무, 한 조약돌, 한 티끌이 저마다 하나의 불성, 저마다 하나의 인과가 있어 연인과 요인을 갖추고 있느니라」고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有情・非情유정 · 비정
유정은 감정과 의식을 지니고 스스로 의지 활동을 하는 것(사람 · 동물 등), 비정은 감정과 의식이 없고 그 활동도 바깥의 힘에 의한 것(초목 · 산하 · 대지 등)이다. 「유정」은 범어 사트바(薩埵)의 신역이며, 구역에서는 「중생」으로 옮겼다.
難信難解난신난해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움. 법화경 법사품에 「이 법화경은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설해진 데서 나온 말. 천태는 이를 교문과 관문의 둘로 나누었다.
教門・観門교문 · 관문
교문은 부처가 설한 가르침(교상)의 면, 관문은 그 가르침을 자기 마음에서 관하는 수행(관심)의 면이다.
二乗闡提이승 · 천제
이승은 성문과 연각, 천제는 일천제(一闡提) — 바른 법을 믿지 않아 성불의 인이 끊어졌다는 이들. 이전의 경에서는 둘 다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永不成佛)고 설해졌다.
始めて正覚を成ず처음으로 정각을 이룸
시성정각(始成正覺). 석존이 이 세상에 태어나 출가 · 수행하여 가야성 가까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깨달았다는 이전 · 적문의 설.
一仏二言水火なり한 부처에 두 말씀이 물과 불 같음
같은 부처가 이전에서는 「이승은 성불하지 못한다 · 처음 성불했다」고 하고, 법화경에서는 「이승도 성불한다 · 구원에 성불했다」고 하여, 두 말씀이 물과 불처럼 정반대라는 것.
木画の二像목화의 이상
나무로 새긴 불상과 그림으로 그린 불상. 「목회이상(木繪二像)」이라고도 한다.
外典内典외전 · 내전
외전은 불교 밖의 전적(유교 · 도교 등), 내전은 불교의 경론.
天台一家천태 일가
천태대사와 그 교학을 잇는 흐름.
国土世間국토세간
삼세간의 하나. 십계의 중생이 사는 곳에 저마다 차별이 있음을 말한다. 국토란 그 세계를 이루는 산천초목 등 비정 전체다. 『마하지관』 권5상은 이렇게 말한다. 「열 가지 사는 곳을 통틀어 국토세간이라 하는 것은, 지옥은 붉은 쇠에 의지해 살고, 축생은 땅 · 물 · 허공에 의지해 살며, 수라는 바닷가와 바다 밑에 의지해 살고, 사람은 땅에 의지해 살며, 하늘은 궁전에 의지해 산다. 육도의 보살은 사람과 같이 땅에 의지해 살고, 통교의 보살로서 미혹이 아직 다하지 않은 이는 인천과 같이 의지해 살며, 미혹을 다 끊은 이는 방편토에 의지해 산다. 별교 · 원교의 보살로서 미혹이 아직 다하지 않은 이는 인천 · 방편 등에 사는 것과 같고, 미혹을 다 끊은 이는 실보토에 의지해 살며, 여래는 상적광토에 의지해 산다 … 국토마다 같지 않으므로 국토세간이라 이름한다.」
釈籤석첨
『법화현의석첨』 열 권(또는 스무 권). 묘락대사가 천태산에서 『법화현의』를 강의할 때 학인들이 의문 나는 곳에 쪽지(籤)를 붙여 물은 데 답한 것을 바탕으로, 뒤에 고치고 정리한 주석서. 『현의』의 본문을 나누어 큰 과단과 작은 과단을 세우고 차례로 뜻을 풀어 천태 교의를 넓히고 보강했다.
金錍論금비론
『금강비론(金剛錍論)』, 한 권. 묘락대사 저. 화엄종 징관 등의 「비정에는 불성이 없다」는 설을 깨뜨리고 불성이 정 · 비정에 걸침을 밝혔다. 천태의 법문을 눈의 막을 걷어 내는 금강의 칼(錍)에 비유한 제목이다.
縁了연료
연인불성(緣因佛性)과 요인불성(了因佛性). 정인불성(正因佛性)과 합해 삼인불성이라 한다(해설 참조).

백계천여와 일념삼천 — 국토세간이라는 차이

첫 물음의 무게

제4장은 제2장의 「답이 없는 의심」에 대한 정식 답에서 시작한다. 백계천여와 일념삼천은 무엇이 다른가. 백계천여는 유정계에 한하고, 일념삼천은 정 · 비정에 걸친다.

삼세간 가운데 중생세간과 오음세간은 유정이고, 국토세간은 비정이다. 백계천여까지는 마음 있는 생명의 열 가지 경애와 그 존재 방식만을 말한다. 거기에 국토세간이 더해져야, 곧 생명이 사는 환경과 풀과 나무와 돌까지 들어와야 삼천이 된다. 그러므로 강의는 백계천여까지만 설한 법화경 적문에서는 아직 유정의 성불만을 밝혔을 뿐이고, 법화경 본문에서 국토세간을 설했기 때문에 정 · 비정의 성불이 밝혀지고 일념삼천이 확립된다고 말한다.

百界千如は有情界に限り백계천여는 유정계에 한하고
  • 십계 × 십계 × 십여시
  • 중생세간 · 오음세간
  • 적문
一念三千は情非情に亘る일념삼천은 정 · 비정에 걸친다
  • + 국토세간
  • 본문 수량품 『我常在此娑婆世界』나는 늘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教門の難信難解교문의 난신난해
  1. 이전二乗闡提・未来に永く成仏せず이승 · 천제는 영원히 성불 못 함
  2. 적문이승작불 · 제바 수기
  1. 이전 · 적문始めて正覚を成ず처음 정각을 이룸
  2. 본문구원실성
一仏二言水火なり한 부처에 두 말씀이 물과 불 같다
観門の難信難解관문의 난신난해非情の上の色心の二法十如是비정 위의 색심 두 법과 십여시
문증『지관』 권5 · 『석첨』 권6 · 『금비론』
현증木画の二像を本尊と為す목상과 화상을 본존으로 삼음
도표 12 · 백계천여와 일념삼천, 그리고 두 가지 난신난해

수량품의 사바세계

본문에서 국토세간이 드러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강의는 수량품의 두 구절을 든다.

我常在此娑婆世界 說法敎化

나는 늘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법을 설하여 교화해 왔느니라.

법화경 여래수량품

常住此說法

늘 여기에 머물러 법을 설하느니라.

법화경 여래수량품 자아게

수량품에서 석존은 자신이 이 사바세계에 상주하며 설법해 왔다고 말한다. 강의는 이것이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부처는 사바세계에 상주하지 않고 다른 세계에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국토를 동거토 · 방편토 · 실보토 · 적광토의 네 가지로 차별하고, 부처는 적광토에 산다고 설했다. 앞의 어구 풀이에서 본 『마하지관』의 「열 가지 사는 곳」이 그 차별이다. 그런데 수량품에 이르러 부처가 실제로 구원 이래 사바세계에 상주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사바즉적광(娑婆即寂光)의 원리가 세워졌다.

이것은 교상의 면이다. 생명론으로 말하면, 우리가 사는 현실의 국토에 불계가 갖추어진다는 뜻이다. 곧 비정의 초목과 국토에 불성이 있음을 보인다. 그래서 본문에 『지관』 권5의 「국토세간도 또한 열 가지 법을 갖춘다」와 『금비론』의 「한 풀, 한 나무, 한 조약돌, 한 티끌이 저마다 하나의 불성」이 인용되는 것이다.

자기 마음 밖에 법은 없다

국토세간이 확립되면서 국토에도 십계호구 · 백계천여가 갖추어진다고 설해지고, 삼천세간의 수가 밝혀진다. 강의는 이 삼천세간도 일념의 생명 가운데 있다고 설한 데 불법의 위대함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주위의 다양한 세계에 눈을 빼앗겨 그것을 자기와 대립하는 것으로 보려 한다. 그러나 삼라만상은 결코 밖에 있지 않고 자기의 생명에 거두어진다. 비정의 초목과 국토도 내 생명 안에 있으며, 내 마음이 곧 일체법이고 일체법이 곧 내 마음이다. 「자기 마음 밖에 법은 없다」는 것이 이것이다.

「풀과 나무에도 마음이 있는가」

그러자 의아한 물음이 이어진다. 비정에도 십여시가 걸친다면, 풀과 나무에도 마음이 있어 유정처럼 수행하여 성불한다는 말인가. 상식으로는 당연한 의문이다. 대성인은 이 물음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먼저 「이 일은 난신난해이다」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천태가 말한 난신난해에 두 가지가 있다며 교문과 관문을 나누신다.

교문의 난신난해 — 한 부처의 두 말씀

강의는 대성인의 말씀대로 천태의 난신난해에 교문과 관문의 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그러하다고 하며, 먼저 교문의 난신난해를 길게 풀어 간다.

이전의 경에서는 성문의 성불을 설하지 않았고, 부처의 영원한 생명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법화경에 이르러 성문의 성불은 물론 제바달다와 용녀의 성불까지 설해,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皆成佛道)」 하여 악인도 여인도 성문도 모두 성불하며, 중생과 부처가 함께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다. 이전의 경에 매여 있는 이에게는 실로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을 놀라게 하는(惑耳驚心)」,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는 사건이었다. 강의는 근래의 학자들이 「법화경은 부처의 친설(金口)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이런 데서 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강의는 이 사정이, 말법에 대성인이 출현하여 법화경의 문상과 문저를 가려 「제3의 법문」으로서 종(種)과 탈(脫)의 법을 나타내신 것과 같다고 한다. 법화경 문상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대성인의 하종의 법문, 문저에 잠긴 대법을 듣는 것이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승을 향한 꾸짖음

먼저 이승작불이다. 이전의 경에서 이승은 철저히 배척되어, 큰 악인보다 더한 취급을 받았다. 강의는 그 예를 차례로 든다.

『대방광불화엄경』에는 「여래의 지혜인 대약왕수는 오직 두 곳에서만 자라나 이익을 짓지 못하니, 이승이 무위의 넓고 큰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 것과, 선근을 무너뜨린 그릇 아닌 중생이 큰 사견과 탐애의 물에 빠진 것이다」라고 설해진다. 경의 뜻은 이렇다. 설산에 큰 나무가 있어 무진근(無盡根) 또는 대약왕수라 하니, 세상 모든 나무 가운데 대왕이다. 높이가 16만 8천 유순이고, 세상의 모든 초목이 이 나무의 뿌리에서 나며 그 가지와 잎, 꽃과 열매의 차례를 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는다. 이 나무를 부처의 불성에, 모든 초목을 일체중생에 비유한다. 그런데 이 큰 나무도 불구덩이와 물바퀴(水輪) 가운데서는 자라지 못한다. 이승의 마음을 불구덩이에, 일천제의 마음을 물바퀴에 비유하여, 이승과 일천제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함을 보인 것이다.

『대집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반드시 죽어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끝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지 못한다. 하나는 성문이요 둘은 연각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도 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는 것과 같이, 성문과 연각도 해탈의 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도 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이승은 자기의 작은 깨달음에 만족해 그 안에 틀어박혀, 스스로 성불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모까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길로 들게 하므로 은혜를 모르는 자라는 것이다.

『유마경』에서는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무엇이 여래의 종자인가를 묻자, 문수는 「모든 번뇌(塵勞)의 무리가 여래의 종자가 된다. 다섯 무간죄를 갖추었더라도 오히려 큰 도의 뜻을 일으킬 수 있다」고 답한다. 또 「비유하면 높은 언덕의 마른 땅에는 청련 · 부용 같은 꽃이 나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밭에서 이 꽃이 나는 것과 같다」, 「이미 아라한을 얻어 응진이 된 이는 끝내 다시 도의 뜻을 일으켜 불법을 갖추지 못하니, 근(根)이 무너진 사람이 다섯 가지 즐거움에서 다시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탐 · 진 · 치의 삼독도 부처의 종자가 되고, 아버지를 죽이는 등의 오역죄도 부처의 종자가 되며, 높은 언덕에 청련화가 피는 일이 있어도 이승은 결코 부처가 되지 못한다 — 이승의 선은 비방하고 범부의 악은 칭찬한 것이다.

또 『방등다라니경』에는, 마른 나무에 꽃이 피지 않듯,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거꾸로 산으로 돌아가지 않듯, 깨진 돌이 다시 붙지 않듯, 볶은 씨앗에서 싹이 나지 않듯, 이승은 결코 성불하지 못한다고 한다. 『정명경』에는 이승을 공양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고까지 설하고, 『대품반야경』 · 『수능엄경』 등 그 밖의 여러 경에서도 이승의 영불성불을 말한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이 경문들을 인용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此等の聖僧は仏陀を除きたてまつりては人天の眼目・一切衆生の導師とこそ・をもひしに幾許の人天大会の中にして・かう度度・仰せられしは本意なかりし事なり只詮ずるところは我が御弟子を責めころさんとにや

이 성승들은 부처를 제외하고는 인천의 눈이요 일체중생의 도사라고 생각하였는데, 수많은 인천 대중 가운데서 이렇게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은 뜻밖의 일이었느니라. 결국은 자기 제자를 꾸짖어 죽이려 하신 것인가.

「개목초」, 193쪽

같은 대목은 이어서, 소와 나귀의 젖, 질그릇과 금그릇, 반딧불과 햇빛 등 헤아릴 수 없는 비유로 이승을 꾸짖으셨고, 그것이 한두 마디가 아니요 하루 이틀이 아니며 한두 해가 아니고 한두 경이 아니라 사십여 년 동안 무량무변의 경에서 한 마디도 용서하지 않고 비방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시방세계에서 모여든 인천 · 이승 · 대보살이 모두 이를 듣고 저마다의 나라로 돌아가 전했기에, 시방무변 세계의 일체중생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섭 · 사리불 등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자이며 공양하면 해롭다고 알게 되었다고 하신다(193쪽).

부처의 꾸짖음은 이처럼 「꾸짖어 죽이려는 것인가」 싶을 만큼 엄했다. 그래서 가섭존자의 울음소리는 삼천대천세계에 울렸고, 수보리존자는 망연히 손에 든 발우를 내던졌으며, 사리불은 먹던 밥을 토했고, 부루나는 보배 그릇에 똥을 담은 것 같은 하열한 자라고 싫어함을 받았다.

이토록 싫어함을 받고 꾸짖음을 받던 이승이 법화경에 이르러 겁 · 국토 · 명호를 정해 수기를 받았다. 이것이 난신난해인 까닭이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그 충격을 이렇게 그리신다.

而るを後八年の法華経に忽に悔還して二乗作仏すべしと仏陀とかせ給はんに人天大会・信仰をなすべしや、用ゆべからざる上・先後の経経に疑網をなし五十余年の説教・皆虚妄の説となりなん

그런데 뒤의 8년 법화경에서 갑자기 뒤집어 이승이 성불할 것이라고 부처께서 설하신다면 인천 대중이 믿을 수 있겠는가. 쓰지 못할 뿐 아니라 앞뒤의 경들에 의심의 그물을 치게 되어 오십여 년의 설교가 모두 허망한 설이 되어 버릴 것이니라.

「개목초」, 193쪽

劫・国・名号と申して二乗成仏の国をさだめ劫をしるし所化の弟子なんどを定めさせ給へば教主釈尊の御語すでに二言になりぬ自語相違と申すはこれなり、外道が仏陀を大妄語の者と咲いしこと・これなり

겁 · 국토 · 명호라 하여 이승이 성불할 나라를 정하고 겁을 적고 교화할 제자들까지 정하시니, 교주 석존의 말씀이 이미 두 말이 되었느니라. 자어상위(自語相違)라 함이 이것이니라. 외도가 부처를 대망어자라고 비웃은 것이 이것이니라.

「개목초」, 193–194쪽

본초의 「한 부처에 두 말씀이 물과 불 같다」가 바로 이 「자어상위」다.

일천제의 성불 — 제바달다

다음은 일천제의 성불이다. 그 대표가 제바달다다. 강의는 그 이야기를 자세히 전한다. 제바달다는 석존의 사촌 동생이며 아난존자의 형이다. 석존의 팔만 법장과 외도의 육만 장을 외우고 출가해 신통을 배워 학도가 크게 나아갔지만, 본래 교만한 마음의 소유자로 허영심과 이욕의 속념이 강해, 부처로 존경받는 석존을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 마침 석존이 그 교만한 마음을 지적하며 「너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남의 침을 먹는 자다」라고 꾸짖은 일이 있었다. 제바달다는 독화살이 가슴에 박힌 듯 여겨 원망하며 말했다. 「구담은 부처가 아니다. 나는 곡반왕의 적자이고 아난의 형이며 구담과는 사촌 사이다. 아무리 잘못이 있어도 조용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대중 앞에서 일족을 꾸짖는 이가 대인이나 부처 가운데 있겠는가. 그렇다면 석가는 출가 전에는 연인을 빼앗은 원수이고 지금은 이 자리의 원수다. 오늘부터 세세생생 반드시 석가의 큰 원수가 되리라.」

그 뒤 제바달다는 석존을 없애려고 온갖 책략을 꾸며 삼역죄를 범하고, 평생 석존을 비방하고 박해하며 정법을 비방하다가 끝내 무간지옥의 불꽃에 떨어진다. 그런데 법화경에 이르러 그토록 석존에게 적대한 제바달다에게 천왕여래(天王如來)의 수기가 주어졌다. 영산회 대중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의는 이것이야말로 선악불이(善惡不二), 사정일여(邪正一如)의 대원리를 보인 것이지만, 이전의 경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전대미문이며 난신난해였다고 말한다.

시성정각에서 구원실성으로

이렇게 석존은 법화경에서 지금까지의 설을 깨뜨리고 진실 최고의 법문을 세웠다. 그러나 법화경 적문에서는 아직 시성정각의 생각에 서 있었고, 구원실성은 숨겨져 있었다.

열아홉에 출가하여 난행고행하고, 서른에 가야성 가까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했다 — 겉으로는 이대로이며 아무 의심도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잡아함경』에는 「처음 성도하였다」, 『대집경』에는 「여래가 성도한 지 비로소 16년」, 『정명경』에는 「처음 부처의 나무 아래 앉아 힘써 마군을 항복시켰다」, 『대일경』에는 「내가 옛적 도량에 앉아」, 『인왕반야경』에는 「29년」 등으로 설해져, 모두 석존이 인도에 태어나 출가 · 수행하여 성불했다고 한다. 법화경 수량품의 구원실성, 영원한 생명관은 털끝만큼도 설해져 있지 않다. 법화경의 서분인 『무량의경』에도, 법화경 방편품에도 여전히 시성정각이 바탕이다.

我先道場 菩提樹下 端坐六年 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내가 앞서 도량의 보리수 아래 단정히 앉은 지 6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었느니라.

『무량의경』 설법품

我始坐道場 觀樹亦經行

내가 처음 도량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고 또 거닐며 …

법화경 방편품

석존은 종지용출품에 이르러, 땅에서 솟아 나온 지용보살을 가리키며 「이 모든 대보살마하살들,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아승기로서 땅에서 솟아 나온, 너희가 예로부터 아직 보지 못한 이들은,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나서 이 보살들을 교화하고 이끌어 그 마음을 조복하여 도의 뜻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라고 설한다. 이에 미륵보살이 묻는다.

如來爲太子時 出於釋宮 去伽耶城不遠 坐於道場 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從是已來 始過四十餘年

여래께서는 태자였을 때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로부터 이제 겨우 사십여 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법화경 종지용출품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큰 불사를 지으셨는가. 이 의문을 풀려고 석존은 수량품을 설하며, 먼저 이전 · 적문에서 설해 온 것을 든다.

一切世間天人及阿修羅 皆謂今釋迦牟尼佛 出釋氏宮 去伽耶城不遠 坐於道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는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니라.

법화경 여래수량품

그리고 바로 그 의문에 답한다.

然善男子 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 百千萬億 那由他劫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로 성불한 지는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니라.

법화경 여래수량품

이렇게 오백진점겁이 밝혀졌다. 강의는 이것이야말로 석가 불교의 골수이며, 그때까지의 모든 경전에 밝히지 않은 매우 깊은 뜻이므로 난신난해라고 말한다. 이승작불 · 제바달다의 수기 · 구원실성 — 이상은 모두 석존의 경문 위의 난신난해이며, 이것을 교문의 난신난해라 한다.

강의의 관점: 교문의 난신난해란, 같은 부처가 이전에서는 이승 · 천제의 영불성불과 시성정각을 설하고 법화경 적문 · 본문에서 이승작불 · 제바 수기 · 구원실성을 설하여 「한 부처의 두 말씀」이 된 것이다. 이는 말법에 대성인이 문상 · 문저를 가려 하종의 법문을 나타내신 것이 문상에 집착하는 이에게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을 놀라게 하는」 것과 같다.

관문의 난신난해 — 풀과 나무의 색심

난신난해 가운데 난신난해

강의는 관문의 난신난해에 이르면 난신난해 가운데서도 난신난해라고 말한다. 본문은 「관문의 난신난해는 백계천여 · 일념삼천에서 비정 위에 색심의 두 법과 십여시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석존이든 천태든 본불 대성인이든, 모든 비정에 불성이 있다고 깨달으신 것을 나타낸다고 강의는 말한다. 나무든 종이든 사기그릇이든 나뭇잎 한 장이든 불성이 있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교문의 난신난해는 그래도 경문이라는 근거가 있다. 부처가 그렇게 설했다는 사실이 있으니, 믿기 어려워도 경문을 따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관문의 난신난해는 우리 눈앞의 돌과 나무에 마음과 인과가 있다는 것이다. 상식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목상과 화상이라는 도리

그래서 대성인은 도리로 답하신다. 그러하나 목상과 화상에 대해서는 외전과 내전이 모두 이를 본존으로 삼고 있다. 그 뜻은 천태 일가에서 나왔다. 풀과 나무 위에 색심의 인과를 두지 않는다면, 목상과 화상을 본존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무 이익이 없다.

나무로 깎은 상이나 종이와 물감으로 그린 상 앞에 사람들은 기원하고, 그 기원에 이익이 있다고 믿는다. 불교 밖의 전적도 불교의 경론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나무와 물감은 비정이다. 비정에 색심의 인과가 없다면, 그 앞에서 무엇을 기원해도 아무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목상과 화상을 본존으로 삼는 관행 자체가 이미 비정에 색심의 인과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제를 이론으로 세운 것은 천태 일가, 곧 일념삼천의 법문이다. 다른 종파들이 목상 · 화상을 받들면서 그 근거를 모른다면, 그들은 제3장에서 본 대로 천태의 보배를 빌려 쓰고 있는 셈이다.

강의는 이를 현증으로 확인한다. 석가 불법의 시대에도 목화이상을 부처로 받들어 이익이 있었고, 말법에서도 본존을 받들어 이익이 있다. 이 사실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므로 초목에 불성이 있음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증, 곧 불교 철학의 이론으로서 본문은 『지관』 권5, 『석첨』 권6, 『금비론』을 인용해 설명한다.

세 가지 문증

첫째, 『지관』 권5의 「국토세간도 또한 열 가지 법을 갖춘다. 그러므로 악한 국토에도 상 · 성 · 체 · 역 등이 있다」. 강의의 현대어역은 이를 풀어, 비정의 국토에도 십여시가 있으므로 악한 국토에는 악한 국토의 상 · 성 · 체 · 역 · 작 · 인 · 연 · 과 · 보 · 본말구경등이 있고, 선한 국토에도 이승의 국토에도 보살의 국토에도 불국토에도 저마다의 십여시가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국토도 십계를 갖춘다.

둘째, 『석첨』 권6의 「상은 오직 색에, 성은 오직 마음에, 체 · 역 · 작 · 연은 색과 마음을 겸하고, 인과는 오직 마음, 보는 오직 색에 있다」. 상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니 물질이고, 성은 안에 있는 성질이니 마음이다. 체는 사물의 본체로 색과 마음을 겸하고, 역은 밖에 응하는 내재의 힘, 작은 바깥으로 향하는 활동, 연은 선악의 일을 일으키는 도움의 연이니, 이들은 모두 색심 두 법을 겸한다. 인과 과는 오직 마음, 보는 오직 색이다. 제1장의 해설에서 본 「일념삼천이사」의 십여시 색심 배당이 바로 이 『석첨』 권6의 문장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십여시를 갖춘 것은 반드시 색과 심을 갖추고, 그 인과를 갖춘다. 국토가 십여시를 갖춘다면 국토도 색과 심과 인과를 갖춘다.

셋째, 『금비론』의 「한 풀, 한 나무, 한 조약돌, 한 티끌이 저마다 하나의 불성, 저마다 하나의 인과가 있어 연인과 요인을 갖추고 있다」. 현대어역은 이를, 실재하는 것은 모두 본래 상주하는 삼인불성을 갖추고 있으며, 비정의 초목이라도 유정과 같이 색심 · 인과를 갖추어 성불한다는 뜻으로 푼다. 묘락이 이 책을 지은 것은 화엄종 징관 등이 「비정에는 불성이 없다」고 한 설을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제3장에서 본 대로 징관은 일념삼천을 훔쳤으면서 그 간심인 초목성불을 알지 못했다. 묘락은 그 빈자리를 정면으로 찔렀다.

『금비론』의 「一草一木…」 구절은 대성인의 초기 어서 「일념삼천법문」(415쪽)에도 인용되어 있다. 무정유성(無情有性)의 사상사적 배경은 불교 교학 「三 제법실상」 10절, 「五 일념삼천」 3절에서 다루었다.

초목성불의 두 뜻 — 불개본위와 목화이상

강의는 여러 어서의 뜻을 헤아려 보면 초목성불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니치칸 상인이 말했다고 전한다. 하나는 불개본위(不改本位)의 성불, 둘은 목화이상(木畫二像)의 성불이다.

불개본위(不改本位)의 성불초목 전체가 본유무작의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의 각체草にも木にも成る仏なり풀에도 나무에도 되는 부처「초목성불구결」 1339쪽
삼신 배당
草木の体초목의 체
= 본각의 법신
때를 어기지 않고 꽃 피고 열매 맺는 지혜
= 본각의 보신
一切の有情を養育し일체 유정을 기르는 자비
= 본각의 응신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74쪽
목화이상(木畫二像)의 성불목화의 이상에 일념삼천의 혼백을 넣을 때 생신의 부처가 됨法華経を心法とさだめて三十一相の木絵の像に印すれば木絵二像の全体生身の仏なり법화경을 심법으로 정하여 삼십일상의 목회의 상에 새기면 목회이상의 전체가 생신의 부처「목회이상개안지사」 469쪽

니치칸 상인의 두 뜻 — 강의의 정리

도표 13 · 초목성불의 두 뜻

불개본위의 성불

불개본위의 성불이란 초목의 전체(비정)가 본래 있는 그대로 지어지지 않은(本有無作)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의 깨달음의 몸이라는 것이다. 강의는 이를 좀 더 쉽게 말하면 우주의 생명 그 자체라고 한다. 본래의 자리를 고치지 않은 채로, 풀은 풀인 채로 나무는 나무인 채로 부처라는 뜻이다.

口決に云く「草にも木にも成る仏なり」云云、此の意は草木にも成り給へる寿量品の釈尊なり

구결에 이르기를 「풀에도 나무에도 되는 부처이니라」고 하였느니라. 이 뜻은 풀과 나무에도 되신 수량품의 석존이니라.

「초목성불구결」, 1339쪽

강의는 여기서 「수량품의 석존」이란 삼대비법의 본존을 가리킨다고 읽는다. 또 「초목의 근본은 본각의 여래이며 본유상주의 묘체」라는 말씀도 같은 뜻이라고 한다. 「초목성불구결」은 이 구절 뒤에 「경에 이르기를 『여래비밀신통지력』이라 하였느니라. 법계는 석가여래의 몸이 아닌 것이 없느니라」라고 이어 간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은 초목의 사계를 들어 이 성불을 그리신다.

春の時来りて風雨の縁に値いぬれば無心の草木も皆悉く萠え出生して華敷き栄えて世に値う気色なり秋の時に至りて月光の縁に値いぬれば草木皆悉く実成熟して一切の有情を養育し寿命を続き長養し終に成仏の徳用を顕す

봄이 와서 바람과 비의 연을 만나면 마음 없는 초목도 모두 싹이 트고 자라 꽃이 피고 번성하여 세상을 만난 기색이니라. 가을이 되어 달빛의 연을 만나면 초목은 모두 열매가 익어 일체의 유정을 기르고 목숨을 이어 오래 기르며, 마침내 성불의 덕용을 나타내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74쪽

이 말씀에 따르면, 초목의 체, 곧 초목 그 자체가 본각의 법신이고, 때를 어기지 않고 꽃 피고 열매 맺는 지혜가 본각의 보신이며, 유정을 기르는 자비가 본각의 응신이다. 초목이 모두 그 모습 그대로 본각의 삼신여래이므로 불개본위의 성불이라 한다. 강의는 곧 우주 생명이 발동하고 변화하는 그 자체가 불개본위의 성불이라고 말한다. 같은 어서는 바로 이어서 「이것을 의심하고 믿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마음 없는 초목조차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라고 하신다.

그림 준비 중
B-2 · 한 그루 감나무의 봄과 가을

목화이상의 성불 — 개안

목화이상의 성불이란, 목화의 이상에 일념삼천의 혼백을 넣을 때 목화이상이 생신(生身)의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강의는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를 든다.

一念三千の法門と申すは三種の世間よりをこれり。三種の世間と申すは一には衆生世間、二には五陰世間、三には国土世間なり。前の二は且く之を置く。第三の国土世間と申すは草木世間なり。草木世間と申すは五色のゑのぐは草木なり。画像これより起る。木と申すは木像是より出来す。此の画木に魂魄と申す神を入るる事は法華経の力なり、天台大師のさとりなり。此の法門は衆生にて申せば即身成仏といはれ、画木にて申せば草木成仏と申すなり

일념삼천의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세 가지 세간에서 일어났느니라. 세 가지 세간이라 하는 것은 첫째 중생세간, 둘째 오음세간, 셋째 국토세간이니라. 앞의 둘은 잠시 두고, 셋째 국토세간이라 하는 것은 초목세간이니라. 초목세간이라 하는 것은, 다섯 빛깔의 물감은 초목이니 화상은 여기서 일어나고, 나무라 하는 것은 목상이 여기서 나오느니라. 이 그림과 나무에 혼백이라는 신(神)을 넣는 것은 법화경의 힘이요 천태대사의 깨달음이니라. 이 법문은 중생으로 말하면 즉신성불이라 하고, 그림과 나무로 말하면 초목성불이라 하느니라.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 1144쪽

강의는 여기서 「이 법문」이란 일념삼천의 법문으로서 문저에 잠긴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이고, 「혼백」이란 생명이며, 「법화경의 힘」이란 본존이라고 읽는다.

「목회이상개안지사」는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法華経を心法とさだめて三十一相の木絵の像に印すれば木絵二像の全体生身の仏なり、草木成仏といへるは是なり

법화경을 심법(心法)으로 정하여 삼십일상의 목회의 상에 새기면, 목회이상의 전체가 생신의 부처이니라. 초목성불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목회이상개안지사」, 469쪽

「목회이상개안지사」의 논리 (보강)

이 짧은 어서(1264)는 왜 「삼십일상」인지, 왜 「법화경을 심법으로」 정해야 하는지를 처음부터 논증한다. 강의가 인용한 한 문장의 앞뒤를 따라가면 제4장의 「목화의 이상을 본존으로 삼는 것」의 뜻이 한층 분명해진다.

仏に三十二相有す皆色法なり、最下の千輻輪より終り無見頂相に至るまでの三十一相は可見有対色なれば書きつべし作りつべし梵音声の一相は不可見無対色なれば書く可らず作る可らず

부처에게는 삼십이상이 있으니 모두 색법이니라. 맨 아래 천폭륜상에서 마지막 무견정상에 이르기까지의 삼십일상은 볼 수 있고 마주할 수 있는 색이므로 그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느니라. 범음성의 한 상은 볼 수 없고 마주할 수 없는 색이므로 그릴 수도 만들 수도 없느니라.

「목회이상개안지사」, 468쪽

부처의 서른두 가지 특징 가운데 서른하나는 형상이므로 그리고 새길 수 있다. 그러나 부처의 목소리(범음성)만은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불멸 후의 목상과 화상은 「삼십일상이며 범음성이 빠져 있으므로 부처가 아니며, 또 심법이 빠져 있다」(468쪽). 그렇다면 무엇이 빠진 범음성과 심법을 채우는가. 어서는 목상 · 화상 앞에 어떤 경을 두느냐에 따라 그 상이 무엇이 되는지를 차례로 든다. 오계경을 두면 전륜왕과 같고, 아함경을 두면 성문과 같으며, 화엄 · 방등 · 반야의 별교 · 원교를 두면 보살과 같아 결코 부처가 아니다. 그러나 「삼십일상의 부처 앞에 법화경을 두어 받들면 반드시 순원(純圓)의 부처」라고 하신다(468쪽).

이어서 범음성과 법화경의 문자를 잇는다. 「법화경의 문자는 부처의 범음성인 볼 수 없고 마주할 수 없는 색을, 볼 수 있고 마주할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냈으므로」(468쪽), 사라진 부처의 목소리가 도리어 형상을 나타내어 문자가 되어 중생을 이익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읽으시는 이는 문자라고 생각하지 말라. 곧 부처의 마음이다」라고 하신다(469쪽). 법화경을 심법으로 정해 목화의 상에 새기면 그 상 전체가 생신의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빠진 범음성과 심법을 법화경의 문자가 채운다는 논리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같은 어서는 반대의 경우를 엄하게 경계한다. 진언사가 목화이상을 개안 공양하면 「실불이 아니라 권불이며, 권불도 아니고 형상은 부처와 비슷하나 뜻은 본래의 비정의 초목이며, 본래의 비정의 초목도 아니고 마요 귀신이다」(469쪽). 진언사의 사의(邪義)가 인(印)과 진언이 되어 목화이상의 뜻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3장에서 진언의 원조가 일념삼천을 훔쳐 그 위에 「인과 진언을 더했다」는 말씀이 여기서 실천의 문제로 돌아온다. 일념삼천을 모르는 개안은 비정에 혼백을 넣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집에 도둑을 들이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본존을 소홀히 하지 말라

강의는 요컨대 이 초목성불의 두 뜻이 분명해지면, 우리가 밤낮으로 신앙하는 문저하종 삼대비법의 본존이 생신의 본불이심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현세에도 미래세에도 절대의 행복을 얻고, 비방하는 이는 무간지옥의 고뇌에 떨어진다. 결코 나무나 종이라고 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의는 당부한다.

강의의 관점: 초목성불에는 초목이 그대로 본각의 삼신인 「불개본위의 성불」과, 목화의 이상에 일념삼천의 혼백을 넣어 생신의 부처로 삼는 「목화이상의 성불」의 두 뜻이 있다(니치칸 상인). 이 두 뜻이 분명해지면 본존이 생신의 본불임이 분명해진다.

유정과 비정 —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생물과 무생물, 유정과 비정

강의는 이어서 유정과 비정의 관계를 넓게 논한다. 현대 과학은 우주에 실재하는 모든 것을 생물과 무생물로 나눈다. 그러나 불법에는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구별이 없고, 그 대신 유정과 비정이라는 분류가 있다. 유정은 사람과 동물처럼 감정과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의지 활동을 하는 것, 비정은 초목 · 산하 · 대지처럼 감정과 의식이 없고 그 활동도 바깥의 힘에 의한 것이다. 엄밀한 정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생물학적으로 아주 쉽게 말하면 유정은 「신경이 있는 것」, 비정은 「신경이 없는 것」이다. 넓게 말하면 유정을 동물계, 비정을 식물계(무생물을 포함)로 세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식물은 생물학에서는 동물과 함께 생물이지만, 불법에서는 비정으로서 흙이나 돌과 같은 범주에 든다.

한 몸 안의 유정과 비정

나아가 한 사람 안에서도 유정과 비정을 논할 수 있다.

我等一身の上には有情非情具足せり、爪と髪とは非情なり・きるにもいたまず・其の外は有情なれば・切るにもいたみ・くるしむなり

우리 한 몸 위에는 유정과 비정이 갖추어져 있느니라. 손톱과 머리카락은 비정이니 잘라도 아프지 않고, 그 밖의 것은 유정이므로 자르면 아프고 괴로우니라.

「초목성불구결」, 1339쪽

같은 어서는 이어서 「한 몸에 갖추어진 유정 · 비정이니라. 이 유정 · 비정이 십여시의 인과 두 법을 갖추고 있느니라. 중생세간 · 오음세간 · 국토세간, 이 세 세간이 유정 · 비정이니라」(1339쪽)라고 하신다. 강의는 피부의 일부라도 발바닥처럼 꼬집어도 아프지 않은 곳은 오히려 비정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유정과 비정을 나누기는 하지만 거기에 엄밀한 경계가 있는 것도, 이것은 유정이고 이것은 비정이라고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구분이며, 그러므로 우리 한 몸에 갖추어진 유정 · 비정도 논할 수 있다.

또 유정과 비정을 삶과 죽음으로 나누면 유정은 삶, 비정은 죽음이다. 정보와 의보로 나누면 유정은 정보, 비정은 의보다. 그런데 불법은 본래 생사불이(生死不二)를 설하고 의정불이(依正不二)를 밝힌다. 그러므로 유정과 비정도 「둘이면서 둘이 아니며」, 함께 묘법연화경의 당체로서 본질적으로는 차별이 없고, 연을 만나 차별된 모습을 나타낸다. 유정과 비정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유정은 비정으로, 비정은 유정으로 서로 오가고 서로 바뀐다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는 이 관계를 의정불이와 생사불이의 두 관점에서 논한다.

의정불이의 관점에서

夫十方は依報なり・衆生は正報なり譬へば依報は影のごとし正報は体のごとし・身なくば影なし正報なくば依報なし・又正報をば依報をもつて此れをつくる

무릇 시방은 의보이고 중생은 정보이니라. 비유하면 의보는 그림자와 같고 정보는 몸과 같으니, 몸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고 정보가 없으면 의보가 없느니라. 또 정보는 의보로써 이것을 만드느니라.

「서상어서」, 1140쪽

여기서 중생은 유정과 같은 뜻이다. 범어 사트바를 신역에서는 유정, 구역에서는 중생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중생은 정보이다」는 유정의 생명이 정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에 대해 비정의 초목 · 국토는 의보다. 유정의 생명은 몸(體)이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환경에서 물질을 받아들이고 또 몸 안에서 물질을 내보낸다. 거기에는 끊임없는 자기 유지와 발전이 있다. 그 때문에 환경에 순응하려 하고 또 환경을 바꾸려 한다.

그런데 이 유정의 생명은 또한 비정인 초목 · 국토로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인용한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에도 「초목이 모두 열매가 익어 일체의 유정을 기르고 목숨을 이어 오래 기른다」고 하신 그대로다. 「서상어서」의 「정보는 의보로써 만든다」가 바로 이것이다.

강의는 국토 자체도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발전하며, 안으로는 위대한 힘을 갖추고, 때로는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죽음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대우주도, 성운도, 무수한 별도 마치 인생의 생로병사처럼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를 거치며 흘러간다. 천체의 운행, 지구의 자전과 공전 등에도 엄연한 법이 관철되어 있다. 참으로 국토 자체도 묘법의 당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본문에 인용된 『지관』 권5에도 「국토세간도 또한 열 가지 법을 갖춘다」고 한 것이다.

국토 자체가 묘법의 당체인 이상,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국토에 본래 있던 힘이 발휘되어 거기에 생명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중생(유정)이라 하든 국토(비정)라 하든 그것은 같은 것의 두 가지 나타남이며, 근저에는 차별이 없다고 설한 것이 불법이다. 그러므로 강의는 어딘가의 천체에 일찍이 지구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고, 다른 천체에 사람이 없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현대 과학이 차츰 이를 실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생사불이의 관점에서

다음으로 강의는 유정과 비정의 관계를 생사불이의 관점에서 논한다.

有情は生の成仏・非情は死の成仏・生死の成仏と云うが有情非情の成仏の事なり、其の故は我等衆生死する時塔婆を立て開眼供養するは死の成仏にして草木成仏なり

유정은 삶의 성불, 비정은 죽음의 성불이니, 생사의 성불이라 하는 것이 유정 · 비정의 성불이니라. 그 까닭은 우리 중생이 죽을 때 탑파를 세워 개안 공양하는 것은 죽음의 성불이며 초목성불이기 때문이니라.

「초목성불구결」, 1338쪽

理の顕本は死を表す妙法と顕る・事の顕本は生を表す蓮華と顕る、理の顕本は死にて有情をつかさどる・事の顕本は生にして非情をつかさどる、我等衆生のために依怙・依託なるは非情の蓮華がなりたるなり・我等衆生の言語・音声・生の位には妙法が有情となりぬるなり

이(理)의 현본은 죽음을 나타내어 묘법으로 나타나고, 사(事)의 현본은 삶을 나타내어 연화로 나타나느니라. 이의 현본은 죽음으로서 유정을 맡고, 사의 현본은 삶으로서 비정을 맡느니라. 우리 중생을 위해 의지처가 되는 것은 비정의 연화가 된 것이며, 우리 중생의 말과 음성, 삶의 자리에서는 묘법이 유정이 된 것이니라.

「초목성불구결」, 1339쪽

「초목성불구결」은 첫머리에서 「묘법이란 유정의 성불이요 연화란 비정의 성불」이라 하여(1338쪽), 묘법연화경이라는 제목 자체가 유정과 비정의 성불을 함께 담고 있다고 하신다. 강의는 이 말씀을 따라, 우리의 생명은 죽은 뒤 비정에 머물러 대우주 그 자체가 되고, 거기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이룬다고 말한다. 강의는 그 예로, 죽음의 순간의 고뇌가 그대로 이어져 지옥계에 머문다는 것, 혹독한 추위 속에서 숨진 이의 생명은 극한의 지옥에 들어 눈과 얼음 속에 실재한다는 것을 든다. 이렇게 죽은 뒤 우리의 생명은 비정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다시 연을 만나 유정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유정에서 비정으로, 비정에서 유정으로 이어지며 영원히 그 유전을 되풀이한다.

유정에서 비정으로, 비정에서 유정으로 옮겨 가는 모습은 현실의 우리 몸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비정이다. 그것이 몸에 들어가 소화되고 흡수되어 유정을 이룬다. 한편 유정인 이 몸은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하여 죽은 세포가 버려진다. 이것은 유정에서 비정으로의 이행이다. 앞에서 본 한 몸에 갖추어진 유정 · 비정도 이 사실을 증명한다. 또 비정에서 유정으로의 전환은 현대 과학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비정인 지구에서 생명체가 발생하고 동물계도 바로 이 대지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전교대사의 『수선사상전일기』에 설해진 십팔원만의 법문 가운데 제15 내외원만(內外圓滿)의 글에 「비정의 바깥 그릇에 육정을 갖추고, 유정의 수 가운데 또한 비정을 갖춘다」고 한 것도 유정과 비정의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보인 것이다. 나아가 불법은 이러한 응신론적인 육체 · 형질의 연속만이 아니라,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상주를 설해 법신 · 보신의 연속까지 밝힌다. 강의는 어쨌든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은 엄연한 대우주의 철칙이며, 누가 부정하든 사실은 엄하게 유전해 가고 있는 것이 생명의 실상이라고 맺는다.

불성이란 무엇인가 — 존엄 · 평등 · 자유의 근거

「불」과 「성」

강의는 이어서 불성(佛性)을 논한다. 「불」이란 십계 가운데 불계를 뜻하며, 맑고 물들지 않으며 힘차고 금강석처럼 결코 부서지지 않는 큰 생명이다. 「성」이란 고쳐지지 않는다(不改)는 뜻이며, 그 불계의 생명이 누가 만든 것도 아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도 아니며, 본래 갖추어져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최고의 불법 철학은 이 불성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유정 · 비정에 걸쳐 삼라만상에 갖추어져 있음을 설해 밝힌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 중생에게 내재한 불성을 열어 무너지지 않는 행복의 경애를 세울 것인가를 끝까지 구명한다. 강의는 불법의 구극이 이것에 다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한다.

존엄 · 평등 · 자유

강의는 불법만큼 생명의 존엄을 분명히 설해 다한 철학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최고의 가치인 불계라는 큰 생명을 품은 존귀한 몸이라고 설하고, 그것을 사실 위에서 증명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고 단언하므로 이것이 참된 평등이다. 불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고 아무것에도 침범당하지 않는 자유자재의 행복 경애이니, 이것이 참된 자유다. 그러므로 강의는 자유 · 평등 · 존엄을 기조로 하는 민주주의의 실체가 모두 불법에 있다고 외친다.

강의는 세간에서 민주주의를 입으로 외치고, 자유를 말하고, 평등을 주장하고, 존엄을 논하는 것에 대해 두 면을 본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의 본연의 욕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대의 흐름에 동화되어 아무런 주체성 없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근대인인 양 여기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의 관용어가 되어 있기도 하다. 후자는 전쟁 중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감정적으로 국수주의를 떠들거나 충군애국을 외친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강의는 꼬집는다.

민주주의를 아무리 입으로 외쳐도,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자유」도 아름다운 말이고, 「평등」에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울림이 있으며, 「존엄」도 훌륭하다. 그러나 무엇을 자유라 하는가. 무엇을 평등이라 하는가. 무엇을 근거로 존엄이라 하는가. 그것을 논하지 않고 낱말만 늘어놓으면 뿌리 없는 풀이며 유명무실하다. 결국 생명의 가장 깊은 곳을 설해 다한 불법의 철리를 근저에 두지 않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 환영을 좇다가 이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 앞에서 괴로워한다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는 그 현실을 당시의 국내외 정세로 든다. 세계에는 동란이 끊이지 않아 어린아이까지 총칼에 젊은 생명을 잃고, 민중은 핵전쟁의 공포에 떨며, 강대국의 뜻대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약소국은 가난과 무지에 시달린다. 나라 안에서는 중소기업의 도산이 잇따르고 정치의 부패와 살벌한 사건이 이어진다. 마치 삼악도 · 사악도 그대로의 현실이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으며 존엄이 있느냐고 강의는 묻는다. 그것은 불법의 정신이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낮은 철학과 편협한 사상, 탐 · 진 · 치의 삼독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존엄을 남김없이 설해 밝힌 대성인의 생명철학을 온 세계 사람들의 지주로 삼아야 한다고 강의는 호소한다.

정 · 요 · 연의 삼인불성

체와 용

본문의 『금비론』은 「연인과 요인을 갖춘다」고 했다. 강의는 이를 받아 삼인불성(三因佛性)을 논한다. 삼인불성은 정인불성 · 요인불성 · 연인불성이다. 정인불성은 우주 삼라만상이 본래 지닌 불계라는 생명의 본질이며 본체다. 요인불성은 정인불성을 깨달아 아는 지혜의 작용이고, 연인불성은 바른 경계에 연함으로써 요인의 지혜를 돕고 정인불성을 열어 가는 작용이다. 정인이 체(體)라면 요인과 연인은 그 용(用)이다.

正因仏性정인불성
뜻
正は謂く中正정은 중정불계라는 생명의 본체
감씨
씨앗 그 자체
토중의 금『금광명현의』
흙 속에 감추어진 금
삼궤『법화현의』 권5
진성궤
삼제
중제
삼신으로 나타남
법신
절복 · 신심에서「시문불승의」 983쪽
凡そ心有る者は是れ正因の種なり마음 있는 이는 모두 정인의 종자
了因仏性요인불성
뜻
了は謂く照了요는 조료정인을 깨달아 아는 지혜
감씨
감나무가 될 성질
토중의 금『금광명현의』
금이 있음을 아는 지혜
삼궤『법화현의』 권5
관조궤
삼제
공제
삼신으로 나타남
보신
절복 · 신심에서「시문불승의」 983쪽
随って一句を聞くは是れ了因の種なり한 구절을 들음은 요인의 종자
縁因仏性연인불성
뜻
縁は謂く助縁연은 조연요인을 돕고 정인을 여는 작용
감씨
햇빛 · 비 · 양분에 응해 자라는 작용
토중의 금『금광명현의』
풀과 흙을 걷어 내고 금을 캐냄
삼궤『법화현의』 권5
자성궤
삼제
가제
삼신으로 나타남
응신
절복 · 신심에서「시문불승의」 983쪽
低頭挙手は是れ縁因の種なり머리 숙이고 손 듦은 연인의 종자

강의(니치칸 상인 · 사명 지례 등)의 정리

도표 14 · 정 · 요 · 연의 삼인불성

북송의 천태 학승 사명 지례는 『금광명현의습유기』(강의는 「습유기」라고만 부른다)에서 셋의 관계를 이렇게 밝혔다. 정은 중정(中正), 요는 조료(照了), 연은 조연(助緣)이다. 연인은 요인을 돕고, 요인은 정인을 나타내며, 정인은 뛰어난 연을 일으킨다. 또 정인은 요인에서 일어나고, 요인은 연인에 이끌리며, 연인은 정인을 장엄하고, 정인은 뛰어난 연을 일으킨다. 이에 따르면 정 · 요 · 연의 삼인불성은 서로 다른 것을 일깨우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 생명 안에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감씨와 흙 속의 금

강의는 이를 감씨 한 알로 비유한다. 여기 감씨 한 알이 있다. 그 씨앗 자체는 정인불성에 비유된다. 그 감씨는 복숭아나무나 밤나무로 자라는 일이 결코 없고, 씨앗 자체 안에 장차 감나무가 될 성질을 갖추고 있다. 이 지혜라 할까 성질이라 할까, 감 자체가 본래 지닌 작용은 요인불성에 비유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감나무가 되지 않고 감도 열리지 않는다. 햇빛 · 비 · 습도 · 양분 등을 연으로 하여 바깥과 안의 요소가 서로 응해 차츰 자라 간다. 이처럼 바깥의 것을 호흡하고 바깥에 반응하며 자라는 작용은 연인불성에 비유된다. 더구나 이 작용들도 씨앗 한 알 안에 들어 있는 것이며, 다른 데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삼인불성은 생명에 본래 갖추어진 것이고, 따로따로가 아니라 혼연일체이며, 체를 함께하고 용을 함께한다(倶體倶用)는 것이다.

천태대사는 『금광명현의』에서 삼불성을 흙 속의 금에 비유했다. 무엇이 삼불성인가. 불은 깨달음(覺)이라 하고, 성은 고쳐지지 않음(不改)이라 한다. 고쳐지지 않음은 항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어서, 흙 속에 금이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천마와 외도도 깨뜨릴 수 없으니 이를 정인불성이라 한다. 요인불성이란, 깨달음의 지혜는 항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며 지혜가 이치와 서로 응하여, 사람이 금이 감추어져 있음을 아는 것과 같으니, 이 지혜를 깨뜨릴 수 없으므로 요인불성이라 한다. 연인불성이란, 항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모든 공덕과 선근이 깨달음의 지혜를 돕고 정성(正性)을 열어 나타내니, 풀과 더러운 것을 김매어 없애고 감추어진 금을 파내는 것과 같으므로 연인불성이라 한다. 마땅히 알라, 삼불성은 모두 상락아정이며 삼덕과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다. 이미 「금광명」의 세 글자를 보고 삼덕에 비유한 것이다.

곧 흙 속의 금은 모든 것 가운데 고쳐지지 않는 부처의 성품으로서 스스로 있는 정인불성을, 흙 속의 금을 아는 것은 지혜와 이치가 서로 응해 정인불성을 깨달아 아는 요인불성을, 풀과 흙을 걷어 내고 금을 캐내는 것은 바른 경계에 연하여 공덕과 선근을 쌓고 요인을 도와 정인불성을 열어 가는 연인불성을 비유한 것이다.

그림 준비 중
B-3 · 흙 속의 금

절복과 삼인불성

강의는 이 정 · 요 · 연이 모든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절복 활동과의 관계에서 논한다. 일체중생의 생명에 불성이 있다는 것은 정인불성을 두고 한 말이다. 어떤 사람이 신심하는 이에게서 절복을 받았다고 하자.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본존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것은 문법하종(聞法下種)이 된다. 겉으로는 아무리 반대를 이어 가도, 마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저절로 신심하려는 마음이 일깨워진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생명에 요인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무엇을 연으로 하여 본존을 믿게 된다. 이른바 발심하종(發心下種)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연인불성이 있다는 증거다.

凡そ心有る者は是れ正因の種なり随って一句を聞くは是れ了因の種なり低頭挙手は是れ縁因の種なり

무릇 마음이 있는 이는 모두 정인의 종자이니라. 따라서 한 구절을 듣는 것은 요인의 종자이고, 머리를 숙이고 손을 드는 것은 연인의 종자이니라.

「시문불승의」, 983쪽

또 증진(證眞)은 「법을 듣는 것을 하종으로 삼으니 요인의 종자이기 때문이고, 발심을 결연으로 삼으니 불과의 연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강의는 우리의 절복 활동이야말로 상대 생명의 존엄을 최고로 인정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 깊은 곳에 불계라는 위대한 생명이 있으며, 절복해 두면 그때 입신하지 않더라도 그 절복이 연이 되어 불종이 일깨워지고, 마침내 입신하여 참으로 광휘 있는 인생을 걸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강의는 그 증거로, 학회원 가운데 처음 절복을 받았을 때 맹렬히 반대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든다. 아니, 모든 사람이 크든 작든 반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입을 모아 학회의 신앙이 최고라고 말한다. 이만큼 불가사의한 일, 이만큼 위대한 일이 있겠느냐며, 이것이야말로 불법이 바른 원리임을 사실 위에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불경보살의 예배

법화경 상불경보살품에는, 위음왕불의 상법 시대에 불경보살이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한다」로 시작하는 스물네 글자의 법화경으로 당시의 일체중생을 구하려 한 일이 설해져 있다. 그때 불경보살은 「다만 예배를 행했다(但行禮拜)」. 민중은 불경을 보고 욕하고 돌을 던지고 지팡이로 때리는 등 갖가지로 박해했다. 그러나 불경은 예배의 행을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박해하고 억누르는 중생을 왜 예배하며 다녔는가. 강의는 그러한 경멸의 중생이라도 묘법의 당체이며 존엄한 불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内証には汝等三因仏性の善因あり、事に顕す時は善果と成って皆当作仏す可しと礼拝し給うなり

내증(內證)에는 그대들에게 삼인불성의 선인(善因)이 있고, 사(事)에 나타날 때에는 선과(善果)가 되어 모두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고 예배하신 것이니라.

『어의구전』, 768쪽

불경이 예배한 것은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삼인불성이었다. 강의는 예배의 행 자체는 지금은 그대로 쓰이지 않지만, 불법의 한결같은 방정식을 보여 주고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또 앞에서 본 대로 법화경 제바달다품에는 제바달다의 천왕여래 수기가 설해져 있다. 그토록 석존을 미워하고 거역하며 석존을 없애려고 필사적이었던 제바달다가 성불의 수기를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불법이 일부의 특별한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명의 존엄을 설하고 그것을 사실 위에 나타내려 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니치렌 대성인은 마쓰바가야쓰의 방화 습격, 고마쓰바라 법난, 사도 유배, 다쓰노구치 법난 등 온갖 박해를 당하셨다. 그러나 대성인은 박해한 장본인인 헤이노사에몬노조 등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일의 선지식이라 부르셨다. 나아가 당시의 집권자들에 대해서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願くは我を損ずる国主等をば最初に之を導かん

원하건대 나를 해치는 국주 등을 맨 먼저 인도하리라.

「현불미래기」, 509쪽

강의는 이것이 일체중생을 모두 포용하신 말법의 본불 대성인의 넓고 깊은 경애이며, 학회의 절복 활동은 어디까지나 이 불법의 정신, 대성인의 행동에 서 있다고 말한다.

신심에 맞추어 본 삼인불성

다음으로 강의는 신심에 맞추어 삼인불성을 논한다. 우리가 신심하는 목적은 이 정 · 요 · 연 삼인불성을 여는 데 있다. 법화경 방편품에는 부처가 세상에 나온 목적이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열고(開) 보이고(示) 깨닫게 하고(悟) 들게 하는(入) 데 있다고 설해져 있다. 본초 제13장은 이 방편품의 문장을 받은 천태와 장안의 해석을 인용한다.

天台此の経文を承けて云く「若し衆生に仏の知見無んば何ぞ開を論ずる所あらん当に知るべし仏の知見衆生に蘊在することを」云云、章安大師の云く「衆生に若し仏の知見無くんば何ぞ開悟する所あらん若し貧女に蔵無んば何ぞ示す所あらんや」等云云

천태가 이 경문을 받아 이르기를 「만약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이 없다면 어찌 연다고 논할 바가 있겠는가. 마땅히 알라, 부처의 지견이 중생에게 감추어져 있음을」이라 하였고, 장안대사가 이르기를 「중생에게 만약 부처의 지견이 없다면 무엇을 열어 깨닫겠는가. 만약 가난한 여인에게 보배 창고가 없다면 무엇을 보이겠는가」라고 하였느니라.

「관심의 본존초」, 244쪽

부처의 생명, 성불의 경애는 결코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 범부의 생명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 최고의 행복 경애인 불계의 생명(정인불성)을 솟아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의는 이것이 불법의 구극의 문제이며, 대성인은 그것을 위해 삼대비법의 본존을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며 절복에 힘쓰는 것은 연인불성의 작용이다. 그로써 자기 생명의 지혜의 작용이 풍부해지고,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깨달아 성불의 경애를 얻는다. 이것이 요인불성의 작용이다.

『대반열반경』 사정품에는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나 반드시 지계에 의하여 그 뒤에야 보며, 불성을 봄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강의는 이 문장을 셋으로 나누어 읽는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정인불성이다. 「지계에 의하여 그 뒤에야 본다」의 「지계」는 연인불성이다. 지계란 말법의 오늘날에는 수지즉지계(受持即持戒)이며, 본존을 수지하는 것이다. 이로써 불성을 열 수 있다. 「불성을 봄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의 「불성을 본다」는 요인불성이다. 곧 본존을 수지함으로써 내 몸이 묘법의 당체라고 깨달아 즉신성불한다는 것이다.

『법화현의』 권5는 삼불성을 삼궤(三軌)에 맞추어 「삼인불성에 유통시키면 진성궤는 곧 정인의 성, 관조궤는 곧 요인의 성, 자성궤는 곧 연인의 성이다. 그러므로 아래의 글(신해품)에 『너는 실로 나의 아들이고 나는 실로 너의 아버지다』라고 한 것은 곧 정인의 성이다」라고 한다. 강의는 이를 이렇게 푼다. 대우주에, 또 우리의 생명에 진리로서 엄연히 존재하는 불계의 생명을 진성궤(眞性軌)라 하니 정인불성이다. 그것을 투철한 지혜로 관하는 것을 관조궤(觀照軌)라 하니 요인불성이다. 여기서 관조란 천태종에서는 관념관법으로 자기 생명을 비추어 불계를 관하는 것이지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본존을 믿고 불지(佛智)로 내 몸이 묘법의 당체라고 깨닫는 것이다. 자성궤(資成軌)의 「자」는 돕는다는 뜻으로, 요인불성을 도와 불계를 나타내고 즉신성불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제목을 부르고 절복을 하며 복운을 쌓아, 안팎이 서로 응해 참된 행복 경애를 자재하게 노니는 것이니, 곧 연인불성이다.

또 삼인불성은 니치칸 상인의 말대로 공 · 가 · 중의 삼제가 된다. 정인불성이 중제, 요인불성이 공제, 연인불성이 가제다. 그리고 이 삼인불성은 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며 절복을 행하면 본존의 위대한 공력에 의해 곧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으로 나타난다.

我等衆生悪業・煩悩・生死果縛の身が、正・了・縁の三仏性の因によりて即法・報・応の三身と顕われん事疑ひなかるべし、妙法経力即身成仏と伝教大師も釈せられて候

우리 중생의 악업 · 번뇌 · 생사에 묶인 몸이 정 · 요 · 연의 세 불성의 인(因)에 의하여 곧 법 · 보 · 응의 삼신으로 나타날 것은 의심할 바 없느니라. 「묘법경력 즉신성불」이라고 전교대사도 해석하셨느니라.

「묘호니부인답서」, 1403쪽

그러므로 우리의 정인불성은 금강불괴의 불신으로 나타나, 어떠한 삼류의 폭풍에도 꿈쩍하지 않는 높은 산처럼 확고부동한 행복 경애를 살아갈 수 있다. 요인불성은 불지로 나타나, 우주와 인생과 사회를 투철한 지혜로 보아 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른 인생을 걷고 사회와 민중에게 바른 방향을 주는 원천이다. 연인불성은 응신으로 나타나, 사실의 생활 위에 공덕이 나타나고 복덕이 가득하여 생기 넘치는 나날의 행동을 해 갈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종이에 쓰인 본존

강의는 이 장의 해설을 다시 본문의 물음으로 돌려 맺는다. 정 · 요 · 연의 삼인불성이 비정의 초목, 또 한 티끌에도 갖추어진다는 것은 앞에서 논한 유정 · 비정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존은 종이다. 그러나 종이라도 대성인이 남묘호렌게쿄라고 쓰시는 순간 본존으로서 위대한 역용을 발휘한다. 이것이 비정에도 삼인불성이 내재해 있다는 증거라고 강의는 말한다. 「풀과 나무에도 마음이 있어 성불하는가」라는 첫 물음에 대한 강의의 마지막 대답이 여기에 있다.

강의의 관점: 정인불성(체)은 모든 생명과 비정에까지 본래 갖추어진 불계이고, 요인 · 연인(용)은 그것을 깨닫는 지혜와 그것을 여는 연이다. 절복은 상대의 삼인불성을 일깨우는 행위이며, 신심(창제 · 절복)은 연인으로서 요인의 지혜를 도와 정인을 열어, 삼인이 곧 삼신으로 나타나게 한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제1편의 네 장은 「관심의 본존초」 전체에서 가장 짧은 단락이지만, 본초가 서 있는 땅을 다지는 단락이다.

제1장에서 대성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마하지관』 권5의 한 문장으로 붓을 드셨다. 세간과 여시의 두 셈법이 결국 하나라는 짧은 주, 「내지」로 줄인 가운데 부분, 「어떤 본」의 이문까지 — 그 인용의 손길은 일념삼천이 적문 방편품을 재료로 하되 본문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이미 비추고 있었다. 강의는 니치칸 상인을 따라 이 인용을 두 겹으로 읽었다. 글자대로는 천태 일념삼천의 출처이지만, 원의로는 사(事)의 일념삼천인 본존과 그것을 신심으로 내 몸에 갖추는 관심을 한꺼번에 보인 것이라고. 그리고 「일념」이라는 말을 색심불이 · 선악 · 의정불이 · 인과구시 · 신심 · 본존의 여섯 측면에서 파고들었다. 순간의 생명이 곧 생명 전체이며, 그 생명이 삼천을 「사실로」 갖추는 것은 신심의 일념에서라는 것이 그 결론이었다.

제2장은 일념삼천이라는 이름이 천태의 긴 저술 가운데 어디에 처음 나타나는지를 물었다. 『현의』도 『문구』도 『관음현의』도 백계천여에서 멈추었고, 『마하지관』도 앞의 넷은 「해(解)」에 머물렀다. 일념삼천은 「행(行)」을 바로 밝히는 정수장에서, 「끝까지 궁구한 궁극의 설」로서 처음 이름을 얻었다. 그것은 천태가 자기 마음 가운데 행한 법문, 곧 법화경을 가장 깊이 행한 결과였다.

제3장은 그 법문을 찬탄하고 탄식했다. 천태는 오백여 년 중국 불교의 잘못을 깨뜨리고 인도의 대론사들도 말하지 않은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 보배는 화엄 · 진언의 원조들에게 도둑맞았고, 천태의 말학들은 도둑의 문하가 되었다. 장안대사가 「장래에 슬퍼할 만하다」고 탄식한 그 장래가 대성인의 시대였다.

제4장은 도둑들이 끝내 가져가지 못한 알맹이를 밝혔다. 백계천여는 유정에 한하고, 일념삼천은 정 · 비정에 걸친다.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이라는 교문의 난신난해 위에, 풀과 나무에도 색심과 인과가 있다는 관문의 난신난해가 있다. 대성인은 그것을 목상과 화상을 본존으로 삼는 도리로 증명하고, 『지관』 · 『석첨』 · 『금비론』의 세 문으로 뒷받침하셨다. 강의는 초목성불의 두 뜻, 유정과 비정의 불이, 그리고 정 · 요 · 연의 삼인불성으로 이 장을 넓혀, 종이에 쓰인 본존이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맺었다.

이렇게 「출처」는 다 들었다. 이제 본초는 묻는다. 「출처는 이미 들었거니와, 관심의 마음은 어떠한가.」 다음 제2편 「관심 — 기심의 십계」에서는 「관심이란 나의 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이라는 정의와 명경의 비유, 법화경과 천태 · 장안의 십계호구 문증, 남의 얼굴에 나타나는 육도와 인계에 갖추어진 삼성, 그리고 가장 믿기 어려운 「범부의 마음에 불계가 있다」는 것을 대성인이 어떻게 논증하시는지(제5~10장)를 읽는다.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관심의 본존초」 · 「개목초」 · 「보은초」 · 「입정관초」 · 「당체의초」 · 「목회이상개안지사」 · 「초목성불구결」 · 「일념삼천이사」 · 「일념삼천법문」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 · 「서상어서」 · 「시문불승의」 · 「현불미래기」 · 「묘호니부인답서」 · 「교오전답서」 · 「본인묘초」 · 「십장초」 · 「십팔원만초」 · 「치병대소권실위목」 · 「성우문답초」 · 「일생성불초」 · 「지묘법화문답초」 · 「사도어서」 · 『어의구전』 (일본어판 어서전집 / 한국어판 쪽수 동일)
  • 『묘법연화경』 방편품 · 법사품 · 제바달다품 · 종지용출품 · 여래수량품 · 상불경보살품, T9 no.262
  • 『무량의경』 T9 no.276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대반열반경』 T12 no.374
  • 천태 지의, 『마하지관』 T46 no.1911 (권5상 일념삼천 문: T46, 54a) /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관음현의』 T34 no.1726
  • 묘락 담연,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 『법화현의석첨』 T33 no.1717 / 『법화문구기』 T34 no.1719 / 『금강비』 T46 no.1932
  • 『대지도론』 T25 no.1509
  • 니치칸 상인, 「관심본존초 문단」 · 「당체의초 문단」 (창가학회 교학부 강의를 통해 참조)

연구 · 강의

  • 창가교학연구실, 「0238~0255 如来滅後五五百歳始観心本尊抄」 제1~4장 강의 (本文 · 現代語訳 · 語釈 · 講義)
  • 창가학회 교학부, 『世界広布の翼を広げて 教学研鑽のために — 観心本尊抄』 제2판, 聖教新聞社, 2024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岩田諦靜, 「『摩訶止観』第五上第七正修止観における心意識(一念三千)説について」, 『身延論叢』 2, 1997, 1–21쪽
  • Paul L. Swanson (tr.), Clear Serenity, Quiet Insight: T'ien-t'ai Chih-i's Mo-ho chih-ku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8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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