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본존초」의 정식 제목은 「여래멸후 오오백세 시 관심본존초」다. 제1편(1~4장)이 『마하지관』 권5의 일념삼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했다면, 이 제2편(5~10장)은 제목의 앞 두 글자, 곧 「관심(觀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대성인의 답은 한 줄이다. 「관심이란 나의 기심(己心)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 그러나 이 한 줄이 곧바로 의문을 부른다. 내 얼굴은 거울로 볼 수 있어도 내 마음의 열 세계는 어디에서 보는가. 대성인은 이 의문을 다섯 번 거듭 받아 주면서, 경문으로, 난신난해의 법리로, 얼굴에 나타나는 육도로, 도리로 짐작되는 이승 · 보살로, 마지막에 현증으로 믿는 불계로 차례차례 증명해 나가신다. 이 편의 끝에서 「말대의 범부가 태어나 법화경을 믿는 것은 인계에 불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그 불계를 범부가 어떻게 여는가라는 물음이 제3편 「수지즉관심」으로 넘어간다.
관심은 본래 천태 교학의 말이다. 천태대사는 『마하지관』에서 지금 일어나는 한 생각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삼천을 갖춘 부사의경임을 관하는 수행을 세웠다. 5장의 문장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천태의 관심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창가학회 강의는 이 대목을 두 겹으로 읽는다. 글에 붙여 읽으면(附文の辺) 천태의 관심이고, 대성인의 본뜻으로 읽으면(元意の辺)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것」이 곧 관심이다. 이 두 겹의 읽기가 이 편 전체를 꿰는 열쇠다.
6장부터 10장까지는 짧은 문답이 이어진다. 묻는 이는 처음에는 경문의 근거를 묻고, 다음에는 「경문은 알겠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이어서 「불설이라도 불을 물이라 하는 것 같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마지막에는 「이것을 믿지 못하면 일천제가 될 테니 대자비로 믿게 해 달라」고 호소한다. 질문자의 의심이 깊어질수록 대성인의 답은 경문에서 생활로, 생활에서 도리로, 도리에서 현증으로 내려온다. 이 사다리를 따라 읽으면, 십계호구라는 거대한 교리가 결국 「지금 이 사람이 법화경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로 모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십계와 일념삼천을 다룬 사이트 페이지 「五 일념삼천」(/doctrine/ichinen-sanzen)은 8 · 9장의 인용문으로 「한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십계」를 그렸다. 이 편은 그 문장들을 되풀이하지 않고, 강의를 따라 장마다 더 깊이 들어간다. 5장에서는 관심의 역사와 명경의 세 겹 의미를, 6장에서는 열두 경문의 원래 자리를, 7장에서는 난신난해와 수자의를, 8 · 9장에서는 미신과 관념론 사이에서 십계를 읽는 법과 오안(五眼)을, 10장에서는 기근의 두 종류와 교외의 득도, 그리고 세 가지 현증을 읽는다.
이 편의 장
- 5장증명 방식 · 정의물음「관심의 마음은 무엇인가(観心の心如何)」답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본다 — 명경을 향할 때 비로소 보인다
- 6장증명 방식 · 문증물음「법화경은 어느 글인가」답총: 방편품 · 수량품 / 별: 지옥계~불계의 열 경문
- 7장증명 방식 · 법리물음「얼굴의 육근은 보이나 십계는 보이지 않는다」답난신난해 · 육난구이 — 쉽게 믿어진다면 정법이 아니다
- 8장증명 방식 · 현상물음「불을 물이라 하는 것 같다. 어떻게 신심을 세우겠는가」답남의 얼굴에 때때로 나타나는 육도
- 9장증명 방식 · 도리물음「사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답무상을 보는 눈은 이승, 처자를 아끼는 마음은 보살 — 법화경을 믿는 것은 불계
- 10장증명 방식 · 현증물음「믿지 못하면 일천제가 된다. 믿게 해 달라」답석중의 화 · 수중의 화 — 요순 · 불경 · 실달의 현증
본문
問うて曰く出処既に之を聞く観心の心如何 答えて曰く観心とは我が己心を観じて十法界を見る是を観心と云うなり、 譬えば他人の六根を見ると雖も未だ自面の六根を見ざれば自具の六根を知らず明鏡に向うの時始めて自具の六根を見るが如し、 設い諸経の中に処処に六道並びに四聖を載すと雖も法華経並びに天台大師所述の摩訶止観等の明鏡を見ざれば自具の十界・百界千如・一念三千を知らざるなり。
묻노라. 일념삼천의 출처는 이미 들었느니라. 그러면 관심의 뜻은 무엇인가. 답하노라. 관심이란 나의 기심(己心)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이니, 이를 관심이라 하느니라. 비유하건대 남의 육근(六根)은 볼 수 있어도 아직 자기 얼굴의 육근은 보지 못하므로 자기에게 갖추어진 육근을 알지 못하다가, 밝은 거울을 향할 때 비로소 자기에게 갖추어진 육근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설령 여러 경 가운데 곳곳에 육도와 사성을 실었다 할지라도, 법화경과 천태대사가 지은 『마하지관』 등의 밝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기에게 갖추어진 십계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을 알지 못하느니라.
어구 풀이
- 観心관심
- 마음을 관한다는 뜻. 불교 일반에서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 그 실상을 살피는 수행을 말하며, 「교상(敎相)」의 짝말이다. 교상이 부처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판정하는 이론 쪽이라면, 관심은 그 가르침의 핵심을 자기 마음에서 체득하는 실천 쪽이다. 천태 교학에서는 일념삼천 · 일심삼관을 관하는 관념관법을 가리킨다.
- 己心기심
- 자기 마음. 여기서는 의식의 한 작용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한 생각에 담긴 생명 전체를 가리킨다. 천태가 관의 대상으로 삼은 「음입계경」의 한 생각과 같은 자리이며, 대성인은 이 기심 속에 불계까지 갖추어져 있음을 이 편 전체에서 증명하신다.
- 十法界십법계
-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 · 성문 · 연각 · 보살 · 불의 열 세계. 「법계」는 저마다 다른 경계라는 뜻이다. 앞의 여섯을 육도(六道) 또는 육범(六凡), 뒤의 넷을 사성(四聖)이라 한다.
- 六根육근
- 눈 · 귀 · 코 · 혀 · 몸 · 뜻(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감각 기관. 「근(根)」은 대상을 만나면 곧바로 인식을 일으키는 힘의 뿌리라는 뜻이다. 앞의 다섯은 색법(물질), 의근은 심법(마음)에 속한다. 아래 「육근 — 몸은 보배 그릇」 절 참조.
- 自具자구
-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음. 「자구의 육근」은 거울 없이는 볼 수 없는 자기 얼굴, 「자구의 십계」는 경과 석의 거울 없이는 볼 수 없는 자기 생명의 십계다.
- 明鏡명경
- 밝은 거울. 부문의 변에서는 법화경과 『마하지관』을 가리키고, 강의는 원의의 변에서 이것을 본존으로 읽는다. 「명경의 비유」 절 참조.
- 六道並びに四聖육도와 사성
- 육도는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상의 여섯으로, 미혹한 범부의 경계(육범)다. 사성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로, 깨달은 성인의 경계다. 이전(爾前)의 여러 경에도 이 열 가지 이름은 나오지만, 그것이 서로를 갖춘다(호구)고는 설하지 않았다.
- 百界千如백계천여
- 십계가 저마다 십계를 갖추어 백계가 되고, 그 백계가 저마다 십여시를 갖추어 천여가 된다는 것. 여기에 삼세간을 곱하면 일념삼천이 된다(제1편 · 「五 일념삼천」 참조).
- 摩訶止観마하지관
- 천태대사 지의가 594년 형주 옥천사에서 강설하고 제자 장안대사 관정이 기록한 열 권의 수행서(T46 no.1911). 권5 「정수지관」 장에서 일념삼천이 처음 설해졌다. 법화삼대부의 하나.
마음을 관한다는 것 — 관심이라는 말의 내력
5장은 제1편의 문답을 받아 시작한다. 「출처는 이미 들었다」는 질문자의 말은, 1~4장에서 일념삼천이 『마하지관』 권5에서 처음 설해졌고 그것이 정(情) · 비정(非情)에 걸친다는 데까지 들었다는 뜻이다. 이제 질문은 제목의 둘째 축으로 옮겨 간다. 일념삼천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 이것이 「관심의 마음은 무엇인가(観心の心如何)」라는 물음이다.
마음은 만법의 주인
강의는 먼저 관심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뜻부터 짚는다. 관심이란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사유하고 분명히 보는 일이다. 마음은 모든 법의 주인이며, 어떤 법도 마음에서 빠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관하는 것은 결국 일체를 꿰뚫어 보는 일이 된다. 강의는 마음이 만법의 주인임을 보이는 글로 세 가지를 든다.
첫째는 화엄경의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心如工畫師)」는 게송이다. 마음은 화가가 갖가지 그림을 그리듯 오음을 지어내며, 일체 세계 가운데 마음이 짓지 않는 법이 없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 셋은 차별이 없다는 내용이다(『대방광불화엄경』 60권본 야마천궁보살설게품, T9 no.278, 쪽 확인 중). 이 게송이 일념삼천과 어떻게 다른지는 「五 일념삼천」 4절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강의가 이 게송을 「마음이 만법의 주인」이라는 일반론의 근거로 든다는 점만 적어 둔다.
둘째는 천태의 『법화현의』 권2다. 천태는 마음 · 부처 · 중생의 셋 가운데 무엇을 관할 것인가를 이렇게 정리한다.
但衆生法太廣 佛法太高 於初學為難 然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但自觀己心則為易
다만 중생법은 너무 넓고 불법은 너무 높아 처음 배우는 이에게는 어렵다. 그러나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으니, 다만 스스로 기심을 관하는 것이 쉽다.
중생 전체를 관하자니 너무 넓고, 부처의 경계를 관하자니 너무 높다. 그러나 셋이 차별 없다면 가장 가까운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이 들어가는 문이 된다. 「기심을 관한다」는 5장의 말이 천태의 이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는 대성인의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이다.
無量義経に云く『無相・不相の一法より無量義を出生す』已上、無相・不相の一法とは一切衆生の一念の心是なり
무량의경에 「무상 · 불상의 한 법에서 무량한 뜻이 나온다」고 하였다. 무상 · 불상의 한 법이란 일체중생의 한 생각의 마음이 이것이다.
무량의경은 법화경의 개경(開經)이다. 거기서 「무량한 뜻이 나오는 한 법」을 대성인은 중생의 한 생각으로 읽으셨다. 모든 법의 근원을 멀리 찾지 않고 지금 이 한 생각에서 찾는 것, 이것이 관심이라는 말의 바탕이다.
정법 시대의 관심 — 이름은 있으나
이러한 이유로 정법 · 상법 시대에는 여러 관심이 주장되었다. 강의는 정법 시대의 대표적인 두 가지를 든다.
- 불기(不起)의 일념을 관하는 것 — 강의는 화엄경의 「돈(頓)이란 언설이 끊어지고 이성(理性)이 단번에 드러나며 이해와 수행이 단번에 이루어지니,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곧 부처다(一念不生即是佛)」를 근거로 든다.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를 관하는 것이니, 공관(空觀)에 해당한다.
- 팔식 원초(八識元初)의 일념을 관하는 것 — 법상종 등에서 제8식 아뢰야식을 근본식으로 세우고, 그 근본식의 한 생각을 관하려는 것이다.
강의는 이것들이 「관심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참으로 자기 마음을 끝까지 바라보는 철학은 아니」라고 평한다. 앞의 것은 생각이 끊어진 공의 자리에 머물러 지금 일어나는 생각의 다양함을 놓치고, 뒤의 것은 마음을 여러 층의 식(識)으로 나누어 그 바닥을 찾되 그 바닥이 곧 십계를 갖춘 생명이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상법 시대 — 천태의 관심
상법 시대에 들어 천태대사가 나타났다. 천태는 법화경 방편품의 십여실상, 그리고 적문 · 본문을 통해 드러난 십계호구의 글에 근거해 일념삼천의 법문을 세우고, 이것을 관심으로 삼아 일념삼천의 관법과 일심삼관의 수행을 주창했다. 천태가의 관심을 관념관법(觀念觀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법화경의 궁극의 이치를 실천의 체계로 짠 것이다.
강의는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붙인다. 천태가 관하라고 한 「마음」은 단순히 유식론에서 말하는 심리 작용으로서의 마음이 아니며, 오늘의 말로 하면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라고. 천태는 『마하지관』 권5에서 그 마음이 세로도 가로도 아니며 하나도 다름도 아니어서 「앎으로 알 바가 아니고 말로 말할 바가 아니므로 불가사의경이라 한다」고 했다(이 대목의 원문과 풀이는 「五 일념삼천」 4절 참조). 대성인은 「일생성불초」에서 같은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抑妙とは何と云う心ぞや只我が一念の心・不思議なる処を妙とは云うなり不思議とは心も及ばず語も及ばずと云う事なり、然れば・すなはち起るところの一念の心を尋ね見れば有りと云はんとすれば色も質もなし又無しと云はんとすれば様様に心起る有と思ふべきに非ず無と思ふべきにも非ず、有無の二の語も及ばず有無の二の心も及ばず有無に非ずして而も有無に徧して中道一実の妙体にして不思議なるを妙とは名くるなり
대저 묘(妙)란 무슨 뜻인가. 다만 나의 한 생각의 마음이 불가사의한 곳을 묘라 하는 것이다. 불가사의란 마음도 미치지 못하고 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한 생각의 마음을 찾아보면, 있다고 하려 해도 빛깔도 형체도 없고, 없다고 하려 해도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난다. 있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없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유무 두 말도 미치지 못하고 유무 두 마음도 미치지 못한다. 유무가 아니면서 유무에 두루하여 중도일실의 묘한 체로서 불가사의한 것을 묘라 이름한다.
강의는 이 묘한 생명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관심이며, 자기의 생명이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의 당체임을 깨닫는 것이 천태가의 관심이라고 정리한다. 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십승관법 등의 수행 방법이 세워졌다.
강의는 관심의 역사를 세 단계로 본다. 정법 시대의 관심(불기의 일념 · 팔식 원초의 일념)은 이름뿐이고, 상법 시대 천태의 관심은 법화경에 근거해 생명의 실상을 꿰뚫었으나 이(理)에 머물렀으며, 말법의 관심은 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는 수지즉관심이다.
교상과 관심 — 천태 관심의 구조와 그 한계
교상과 관심은 짝말이다
관심은 교상(敎相)의 짝말이다. 천태는 『법화현의』 권1에서 「교(敎)란 성인이 아래에 베푸는 말이요, 상(相)이란 같고 다름을 분별하는 것(教者聖人被下之言也 相者分別同異也)」이라고 풀었다(T33 no.1716, 쪽 확인 중). 부처가 설한 가르침의 모양을 분별하고 판정하는 일이 교상이고, 「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본다」고 하듯 교상의 핵심과 밑바닥을 자기 마음에서 관해 들어가는 실천이 관심이다.
교상과 관심의 두 축은 대승의 여러 종파가 모두 세운다. 강의가 드는 예로, 법상종은 유(有) · 공(空) · 중도(中道)의 「삼시교판(三時の判)」을 교상으로 삼고, 「오중유식관(五重唯識)」을 관심으로 삼았다. 천태가는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 · 법화의 오시(五時)와, 장 · 통 · 별 · 원의 화법사교(化法四敎) 및 돈 · 점 · 비밀 · 부정의 화의사교(化儀四敎)를 합한 팔교(八敎)로 나누어, 법화경이 석존 출세의 본회인 최고의 경이고 그 이전의 경교는 권교임을 밝혔다. 이것이 천태의 교상이다.
왜 법화경이 최고인가 — 원융의 삼제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까닭은 여기에 생명의 궁극의 이치가 설해져 참으로 성불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경교는 공 · 가 · 중의 삼제를 따로따로 설했다. 이것을 격력(隔歷)의 삼제라 한다. 그러나 생명은 본래 삼제가 서로 막힘없이 녹아 있는 원융(圓融)의 삼제를 실상으로 한다. 이 원융의 삼제를 더 밀고 나가면 일념삼천이 된다. 천태는 방편품의 십여시의 글에 근거하고 본문의 뜻을 뒷받침으로 삼아 일념삼천을 설해 밝혔다.
천태는 마음에서 진리를 관념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 관법을 세웠다고 강의는 말한다. 일에 의탁해 관하는 탁사관(託事觀), 법문에 붙여 관하는 부법관(附法觀), 수행에 맞추어 관하는 약행관(約行觀)이다. 이 가운데 셋째 약행관이 핵심으로, 한 생각의 마음을 관하는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즉공 · 즉가 · 즉중임을 살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의 참모습은 원융의 삼제이며 백계천여 · 일념삼천이다. 자신의 한 생각의 마음이 곧 삼제이며 일념삼천임을 살피는 일심삼관 · 일념삼천의 관법이 천태의 관심이다. 그리고 천태는 이 관심을 이루는 수행 규칙으로 열 가지 승법(乘法), 곧 십승관법을 세우고, 이 십승의 관행을 닦는 관념관법으로 중생이 성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탁사관 · 부법관 · 약행관의 삼종관법은 천태의 『관음현의』 · 『금광명경현의』 계열 저술과 송대 지례의 해석에서 체계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의는 출전을 밝히지 않으므로 여기서도 「천태가 세운 관법」이라는 강의의 서술만 옮긴다.
천태의 관심은 법화경의 실천이다
그러나 강의는 천태가의 관심이 어디까지나 석존이 설한 법화경의 실천 수행이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천태 말류의 사람들이 천태의 관심 수행을 존중한 나머지 「지관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며 법화경의 본적 이문을 버린 것은 큰 잘못이다. 강의는 그 잘못을 천태가 자신의 글로 반박한다.
- 『마하지관』 — 「점(漸)과 부정(不定)은 두고 논하지 않는다. 지금 이 경에 의지해 다시 원돈을 밝히겠다.」
- 『지관보행전홍결』(홍결) — 「법화경의 뜻을 모아 부사의 · 십승 · 십경 · 대절멸절 · 적조의 행을 이룬다.」
- 『지관대의』(묘락) — 「법화를 풀이하려면 더욱 권실 · 본적을 분명히 알아야 비로소 행을 세울 수 있다. 이 경만이 홀로 묘라 일컬어진다. 마땅히 이에 의지해 관의 뜻을 세워야 한다. 오방편과 십승궤행은 곧 원돈지관으로서 온전히 법화에 의지한다. 원돈지관은 곧 법화삼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 『법화문구기』(소기) — 「관과 경이 합하면 남의 보배를 세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알라, 지관 한 부는 법화삼매의 통발과 올무다. 이 뜻을 얻으면 바야흐로 가르침의 뜻에 맞는다.」
- 행만(行滿)의 『천태학법문대의』 — 「『마하지관』 한 부의 대의는 법화삼매의 다른 이름을 벗어나지 않으니, 경에 의지해 관을 닦는다.」
「통발과 올무(筌罤)」는 물고기와 토끼를 잡는 도구다. 지관은 법화경이라는 물고기를 잡는 도구일 뿐, 도구가 물고기보다 귀할 수는 없다. 이 글들에 비추어 보면, 천태의 관심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거나 법화경을 버리고 관심만 닦아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분명하다. 대성인은 「입정관초」에서 이 점을 못박으셨다.
若し止観修行の観心に依るとならば法華経に背く可からず止観一部は法華経に依つて建立す一心三観の修行は妙法の不可得なるを感得せんが為なり、故に知んぬ法華経を捨てて但だ観を正とするの輩は大謗法・大邪見・天魔の所為なることを
만약 지관 수행의 관심에 의지한다면 법화경을 등져서는 안 된다. 지관 한 부는 법화경에 의지해 세워졌다. 일심삼관의 수행은 묘법이 헤아릴 수 없음을 감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법화경을 버리고 다만 관만을 바른 것으로 삼는 무리는 대방법 · 대사견이며 천마의 소행임을.
말법에는 천태의 관심도 힘을 잃는다
강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말법의 오늘에는 석존 불법의 「백법은몰(白法隱沒)」과 함께 천태가의 관심도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법화경이라 해도 이미 공력을 잃었다면, 그것에 의지해 성립한 천태가의 관심은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강의는 그 근거로 두 어서를 든다.
今末法に入りぬれば余経も法華経もせんなし、但(ただ)南無妙法蓮華経なるべし
이제 말법에 들어서면 다른 경도 법화경도 소용이 없다. 다만 남묘호렌게쿄여야 한다.
法華経は文字はありとも衆生の病の薬とはなるべからず
법화경은 문자는 있어도 중생의 병의 약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또 천태가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천태 자신이 마음에서 깨달은 법문(己心の法門)이며, 적불(迹佛)의 지견에 속한다는 데 한계가 있다. 「입정관초」는 이렇게 말한다.
止観の二字をば観名仏知・止名仏見と釈すれども迹門の仏智仏見にして妙覚極果の知見には非ざるなり、其の故は止観は天台己証の界如三千・三諦三観を正と為す迹門の正意是なり、故に知んぬ迹仏の知見なりと云う事を但止観に絶待不思議の妙観を明かすと云えども只一念三千の妙観に且らく与えて絶待不思議と名けるなり
지관 두 글자를 「관은 불지, 지는 불견이라 한다」고 풀이하지만, 이는 적문의 불지 · 불견이지 묘각 극과의 지견이 아니다. 그 까닭은 지관은 천태가 스스로 깨달은 계여삼천 · 삼제삼관을 바른 것으로 삼으니, 이것이 적문의 바른 뜻이다. 그러므로 적불의 지견임을 알라. 다만 지관에 절대부사의의 묘관을 밝혔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만 일념삼천의 묘관에 잠시 허락하여 절대부사의라 이름한 것이다.
강의의 논지 — 천태의 관심은 법화경에 근거한 실천으로서 정당하지만, ① 법화경을 떠나면 성립하지 않고, ② 말법에는 법화경 자체가 공력을 잃었으며, ③ 천태가 깨달은 것은 적문의 지견, 곧 이(理)의 일념삼천이었다. 그러므로 말법의 관심은 따로 세워져야 한다.
이(理)의 관심에서 사(事)의 관심으로 — 말법의 관심
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는 것
강의는 오늘 관심을 논한다면 대성인의 불법에서 설하는 수지즉관심(受持即觀心) 이야말로 말법 모든 민중의 행복을 위한 대원리이며, 그것은 대성인이 건립하신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데 다한다고 말한다. 천태가처럼 인적 드문 산림에 들어가 관념관법을 닦는 일은, 오늘처럼 복잡하고 바쁜 사회에서는 현실 도피이거나 일부 특권층 · 지식인의 놀음에 그칠 것이라고 강의는 비판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고, 설령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해도, 바라본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말법에 이르러 대성인이 출현하시어 삼대비법의 본존을 건립하시고, 말법의 관심을 중생을 위해 보이셨다. 강의는 말법의 관심을 「자기 생명의 실체를 바라보아 행복을 증득하는 것」, 곧 「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어서 전체 속의 5장
강의는 5장이 이 어서 전체의 흐름에서 어디에 놓이는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5장에서 「관심이란 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이라 하시고 명경을 향해 자구의 십계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을 보아야 함을 보이셨다. 이어 「기심의 십계는 믿을 수 없다」는 물음에 육도를 밝히고 사성을 밝히셨다(6~10장). 다시 11장 「묻노라, 교주석존은 (이로부터 견고히 이것을 숨긴다)…」(242:14) 이하에서는 범부의 한 생각에 불계가 갖추어졌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문을 세우고, 15장 「다만 처음의 큰 난을 막는다면…」(245:09)부터 본존의 묘용과 대공덕을 밝혀, 마침내 16장에서 이 본존을 수지하는 것이 관심이라고 결론지으셨다.
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
석존의 인행과 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되어 있다.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
석존이 과거 무량겁에 걸쳐 쌓은 인위의 만행과 과위의 만덕은 모두 묘법 오자의 본존에 갖추어져 있다. 우리가 이 본존을 수지하면 자연히 부처와 같아지니, 곧 범부가 그대로 제법실상의 부처로 열린다(凡夫即諸法實相の仏と開顯する). 5장의 한 줄은 이 결론을 향해 놓인 첫 돌이다. 이 결론의 자세한 풀이는 제3편이 맡는다.
이(理)와 사(事) — 천지의 차이
천태가의 관심과 말법의 관심 사이의 우열에 대해, 강의는 「치병대소권실위목」의 한 구절을 든다.
一念三千の観法に二つあり一には理・二には事なり天台・伝教等の御時には理なり今は事なり観念すでに勝る故に大難又色まさる、彼は迹門の一念三千・此れは本門の一念三千なり天地はるかに殊なりことなりと御臨終の御時は御心へ有るべく候
일념삼천의 관법에 둘이 있다. 하나는 이(理), 둘은 사(事)다. 천태 · 전교 등의 때에는 이였고 지금은 사다. 관념이 이미 뛰어나므로 큰 난 또한 더 크다. 저것은 적문의 일념삼천, 이것은 본문의 일념삼천이니 하늘과 땅만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임종 때에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관념이 이미 뛰어나므로 큰 난 또한 더 크다」는 말에 주목하자. 사의 일념삼천을 행하는 이에게 닥치는 난은 이의 일념삼천을 관하던 천태 · 전교 때보다 크다. 관심이 머릿속의 관조가 아니라 삶 전체를 건 실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천태의 관심도 대성인에게는 교상이다
강의는 천태가의 관심과 대성인의 관심의 관계를 보여 주는 글로 「백육개초」와 「본인묘초」를 든다.
- 「재세의 관심 · 법화경의 본적. 일품이반은 재세 일단의 관심이요, 천태의 본문이며, 니치렌에게는 교상의 적문이다.」 (「백육개초」, 856쪽 「재세관심법화경의 본적」 항)
- 「저(천태)의 관심은 이(대성인)의 교상……」 (「본인묘초」, 875쪽)
- 「넷째, 회교현관(會敎顯觀) — 교상의 법화를 버리고 관심의 법화를 믿으라.」 (「본인묘초」, 872쪽)
- 「부처는 숙탈의 교주, 나는 하종의 법주다. 저 일품이반은 사리불 등에게는 관심이지만 우리 범부에게는 교상이다.」 (「본인묘초」, 874쪽)
이 글들에 따르면, 천태가의 관심도 대성인의 관심에 견주면 교상이 된다. 일품이반(一品二半), 곧 종지용출품 후반 · 여래수량품 · 분별공덕품 전반은 재세의 사리불 등에게는 깨달음을 얻는 관심이었지만, 말법의 범부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있다」는 교상일 뿐이다. 말법의 범부에게 관심이 되는 것은 문저의 하종의 법이다. 교상과 관심의 경계가 시대와 기근에 따라 한 층씩 깊어지는 것이다. 이 「교상 · 관심의 겹」은 제5편 오중삼단에서 다시 만난다.
부문의 변과 원의의 변 — 수지즉관심
같은 문장을 두 겹으로 읽기
강의는 「관심이란 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본다」는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천태의 관심이라고 다시 확인한다. 이것을 부문(附文)의 변, 곧 글에 붙여 읽는 측면이라 한다. 반면 이 말을 통해 대성인의 마음을 받드는 것을 원의(元意)의 변, 곧 본뜻의 측면이라 한다.
부문의 변에서 논하면, 관심이란 자기 마음을 잘 살펴 자기 생명 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을 십계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이라고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은 십법계는 곧 부처의 마음이며 대우주 그 자체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은 곧 우주의 생명이며 부처의 생명이다.
강의는 여기서 한 가지 비유를 짚는다. 자기 생명을 「소우주」라고 간파한 철인이 있었고, 그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생명이 우주와 닮았다는 의식을 일으킨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닮음이 아니라 즉(即) 이다. 대우주가 곧 소우주다. 이렇게 말하면 말의 뜻은 알겠지만, 「우주가 곧 나」, 「내가 곧 부처」라는 실감은 솟아나지 않는다. 불도 수행의 궁극에서는 바로 이 실감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천태가의 관념관법이 말법에 쓸모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그 실감을 얻기 위해 대성인의 불법이 필요해진다. 이 짧은 문장을 부문의 변과 원의의 변으로 나누어 읽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원의의 변 — 「기심을 관함」은 믿음, 「십법계를 봄」은 부름
원의의 변에서 관심을 논하면, 「기심을 관하여」란 곧 본존을 믿는다는 뜻이고, 「십법계를 본다」란 남묘호렌게쿄를 부른다는 뜻이다. 다만 본존을 믿고 묘법을 부르면 본존의 십법계가 고스란히 나의 기심의 십법계와 명합(冥合)하여 하나로 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는 이것을 니치칸 상인이 「관심본존초 문단」에서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을 인용해 설한 대목으로 뒷받침한다.
所詮己心と仏身と一なりと観ずれば速かに仏に成るなり、故に弘決に又云く『一切の諸仏己心は仏心と異ならずと観じ給うに由るが故に仏に成ることを得る』と已上、此れを観心と云う
요컨대 기심과 불신이 하나라고 관하면 속히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홍결』에 또 「일체의 제불은 기심이 불심과 다르지 않다고 관하셨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관심이라 한다.
니치칸 상인의 풀이는 이렇다. 불심도 묘법 오자의 본존이고, 기심도 묘법 오자의 본존이다. 기심과 불심은 서로 다르지만 묘법 오자의 본존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하나라고 관하면」이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觀)」은 곧 「신(信)」을 말한다. 그러므로 처음 신심하는 행자가 그 뜻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다만 본존을 믿고 묘법을 부르면 자연히 기심과 불심이 하나라고 관하게 된다. 이것을 말법의 관심이라 한다.
「관(觀)은 곧 신(信)」 — 말법의 관심은 지관의 정밀한 관조가 아니라 본존에 대한 믿음이다. 뜻을 모르는 초심자라도 믿고 부르면 기심과 불심이 하나라고 「관한 것」이 된다. 이것이 수지즉관심의 핵심이며, 16장에서 정식으로 밝혀진다.
명경의 비유 — 거울에 비치는 것과 거울 자체
거울에는 오근만 비치는데 왜 「육근」인가
대성인은 남의 얼굴과 자기 얼굴의 비유를 드셨다. 자기 얼굴의 육근을 보려면 거울을 향해야 비로소 볼 수 있다. 강의는 여기서 작은 물음을 던진다.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것은 눈 · 귀 · 코 · 혀 · 몸의 오근이지 육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곧 의근(意根)은 어떻게 거울에 비치는가. 강의의 답은, 기쁨 · 노여움 · 슬픔 · 즐거움 같은 마음의 움직임은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얼굴에 나타난다. 그래서 거울은 오근만이 아니라 의근까지, 곧 육근 전체를 비춘다.
이 작은 물음이 다음 장들로 이어지는 실마리다.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다면,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마음의 십계도 짐작할 수 있다. 8장에서 대성인이 남의 얼굴에서 육도를 찾으시는 것은 이 5장의 거울 비유를 이어받은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아홉, 거울 자체인 하나
강의는 거울 앞에 설 때 십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거울에 십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성냄(瞋), 탐냄(貪), 어리석음(癡), 아첨(諂曲), 평온(平), 기쁨(喜), 무상(無常)을 느끼는 마음, 자애(慈愛) 등이 차례로 비친다. 그런데 이것을 세어 보면 아홉 세계뿐이다. 나머지 하나는 어디에 있는가. 강의는 그 하나가 거울 자체이며, 거울은 불계를 뜻한다고 본다.
이 해석은 깊다. 불계는 다른 아홉 세계처럼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홉 세계를 비추어 내는 그 밝음 자체가 불계다. 그래서 9장에서 「다만 불계만은 드러나기 어렵다」고 하신 것이고, 10장에서 그 불계를 믿게 하기 위해 현증을 드신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아홉 · 거울 자체인 하나
강의의 풀이
다섯 거울 (『어의구전』, 724쪽)
- 妙の鏡묘의 거울법계의 불가사의
- 法の鏡법의 거울법계의 체
- 蓮の鏡연의 거울법계의 과
- 華の鏡화의 거울법계의 인
- 経の鏡경의 거울만법의 언어
부문의 거울과 원의의 거울
대성인은 「법화경과 천태대사가 지은 『마하지관』 등의 명경을 보지 않으면 자구의 십계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어 법화경과 『마하지관』을 명경으로 가리키셨다. 부문의 변에서 논하면 여기서 말하는 명경이 법화경과 지관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강의는 원의의 변에서는 바로 본존을 명경으로 삼는다고 읽는다. 그 근거로 강의는 『어의구전』의 세 대목을 든다.
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の希有の地とは末法弘通の明鏡たる本尊なり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의 희유한 땅이란 말법에 홍통되는 명경인 본존이다.
惣じて鏡像の譬とは自浮自影の鏡の事なり此の鏡とは一心の鏡なり、惣じて鏡に付て重重の相伝之有り所詮鏡の能徳とは万像を浮ぶるを本とせり妙法蓮華経の五字は万像を浮べて一法も残る物之無し
무릇 거울과 그림자의 비유란 스스로 띄우고 스스로 비추는 거울을 말한다. 이 거울이란 한마음의 거울이다. 무릇 거울에 관해서는 겹겹의 상전이 있으나, 요컨대 거울의 공능은 만상을 띄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묘법연화경의 오자는 만상을 띄워 한 법도 남기는 것이 없다.
鏡に於て五鏡之れ有り妙の鏡には法界の不思議を浮べ・法の鏡には法界の体を浮べ・蓮の鏡には法界の果を浮べ・華の鏡には法界の因を浮べ・経の鏡には万法の言語を浮べたり
거울에 다섯 거울이 있다. 묘의 거울에는 법계의 불가사의를 띄우고, 법의 거울에는 법계의 체를 띄우며, 연의 거울에는 법계의 과를 띄우고, 화의 거울에는 법계의 인을 띄우며, 경의 거울에는 만법의 언어를 띄운다.
같은 항목은 이어서 「우리 중생의 오체 오륜이 묘법연화경으로 떠올라 나타나므로 보탑품을 거울로 배운다. 믿음과 비방이 어떻게 떠오르는지를 잘 생각하라. 스스로 띄우고 스스로 비추는 거울이란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다」라고 맺는다. 강의는 이 『어의구전』의 글들로 결론짓는다. 대성인이 「명경을 향할 때」라 하신 명경은 원의에서는 법화경 · 지관이 아니라 일념삼천의 남묘호렌게쿄라고. 그래서 원의의 변이라 하는 것이다.
신심이 곧 거울이다
강의는 거울의 뜻을 한 겹 더 연다. 신심에 맞추어 말하면, 우리의 신심이야말로 거울이다. 앞의 『어의구전』이 「한마음의 거울(一心の鏡)」이라 하신 까닭이다. 여기서 「한마음」은 스승에 맞추면 자수용신(自受用身)의 한 생각의 심법, 곧 사의 일념삼천의 본존이고, 제자에 맞추면 본존을 믿는 한 생각이다.
우리는 신심을 통해 생명의 밑바닥에서 불지(佛智)가 솟아난다. 마음을 맑게 하여 자신의 생활을 바라보고, 인생과 사회, 나아가 정치 · 경제 · 시대의 흐름까지 바르게 보고 이끌어 갈 수 있게 된다고 강의는 말한다. 거울은 자신을 비추는 도구이면서, 맑아진 거울로 세상을 비추어 보는 눈이 된다.
육근 — 몸은 보배 그릇
근(根)이란 무엇인가
5장의 비유에 나오는 육근을 강의는 따로 한 절을 두어 풀이한다. 육근의 「육」은 눈 · 귀 · 코 · 혀 · 몸 · 뜻의 여섯 기관이다. 「근」이란, 생명에는 대상(境)을 만나면 즉시 작용하는 힘과 기능이 있는데 그 힘과 기능의 본원을 말한다. 생명에 안근이 있으므로 빛깔의 대상(色境)을 만나면 안식(시각)이 생기고, 이근이 있으므로 소리의 대상(聲境)을 만나면 이식(청각)이 생기며, 의근이 있으므로 대상을 만나 「무섭다」, 「즐겁다」 같은 의식이 생긴다. 육근 가운데 앞의 오근은 모두 색법이고, 의근만이 심법이다.
육근청정 — 법사공덕품
법화경 법사공덕품 제19는 이 육근이 법화경을 지니는 공덕으로 청정해진다고 설한다.
若善男子善女人 受持是法華經 若讀若誦若解說若書寫 是人當得八百眼功德 千二百耳功德 八百鼻功德 千二百舌功德 八百身功德 千二百意功德 以是功德 莊嚴六根 皆令清淨
만약 선남자 · 선여인이 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읽거나 외우거나 해설하거나 서사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눈의 공덕 팔백, 귀의 공덕 천이백, 코의 공덕 팔백, 혀의 공덕 천이백, 몸의 공덕 팔백, 뜻의 공덕 천이백을 얻을 것이다. 이 공덕으로 육근을 장엄하여 모두 청정하게 하리라.
법화경은 즉신성불의 법이다. 이것을 믿고 행하는 범부는 부정한 범부의 몸을 그대로 청정한 부처의 몸으로 바꿀 수 있으며, 그 육근도 청정해진다. 강의는 의근을 예로 든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 사람은 갖가지를 생각하고 의식하는데, 그 생각과 의식에는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며, 흔히 「성근(性根)」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것이 의근이다. 이 의근 자체가 묘법의 힘으로 정화된다. 그래서 일체의 생각이 우주의 리듬에 맞게 되고, 그로부터 나오는 행동도 바른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강의는 『어의구전』의 「육근청정의 일」을 인용한다.
眼の功徳とは法華不信の者は無間に堕在し信ずる者は成仏なりと見るを以て眼の功徳とするなり、法華経を持ち奉る処に眼の八百の功徳を得るなり、眼とは法華経なり此の大乗経典は諸仏の眼目と、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は眼の功徳を得るなり云云、耳・鼻・舌・身・意又又此くの如きなり
눈의 공덕이란 법화경을 믿지 않는 이는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믿는 이는 성불한다고 보는 것을 눈의 공덕으로 삼는다. 법화경을 지니는 곳에 눈의 팔백 공덕을 얻는다. 눈이란 법화경이다. 「이 대승경전은 제불의 안목」이라 하였으니,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는 눈의 공덕을 얻는다. 귀 · 코 · 혀 · 몸 · 뜻도 또한 이와 같다.
눈의 공덕이 「멀리 보는 시력」이 아니라 「믿음과 불신의 갈림을 꿰뚫어 보는 것」으로 풀린다는 점이 중요하다. 육근청정은 감각 기관의 기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는 생명의 경애가 바뀌는 것이다.
이 몸은 보배 그릇
강의는 육근을 생각할 때마다 이 몸이 참으로 보배 그릇(寶器)임을 절감한다고 한다. 우주의 다양한 현상도, 인생의 천변만화도 육근이 없으면 느낄 수 없다. 인생의 깊은 맛도 슬픔도 모두 이 육근을 통해 안다.
만약 생명이 위축되어 지옥의 고뇌에 잠겨 있다면, 눈에 비치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향기도, 맛도, 몸에 닿는 것도, 마음에 생각하는 것도 모두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한번 경애를 열면, 우리에게 비치는 세계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상적광토가 된다. 그러므로 「이 몸이 보배 그릇이다」라고 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생명에 불계를 나타낸 인생, 곧 신심을 근본으로 한 인생에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강의는 맺는다.
5장의 「자구의 육근」이 거울 비유의 소재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거울에 비친 육근은 그대로 십계를 담는 그릇이고, 그 그릇이 지옥의 그릇이 되느냐 상적광토의 그릇이 되느냐는 어떤 거울을 향하느냐에 달려 있다.
본문
問うて云く法華経は何れの文ぞ天台の釈は如何 答えて曰く法華経第一方便品に云く「衆生をして仏知見を開かしめんと欲す」等云云 是は九界所具の仏界なり、 寿量品に云く「是くの如く我成仏してより已来甚大に久遠なり寿命・無量阿僧祇劫・常住にして滅せず諸の善男子・我本菩薩の道を行じて成ぜし所の寿命今猶未だ尽きず復上の数に倍せり」等云云 此の経文は仏界所具の九界なり、経に云く「提婆達多乃至天王如来」等云云 地獄界所具の仏界なり、経に云く「一を藍婆と名け乃至汝等但能く法華の名を持つ者を護るは福量るべからず」等云云、 是れ餓鬼界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竜女乃至成等正覚」等云云 此れ畜生界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婆稚阿修羅王乃至一偈一句を聞いて・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得べし」等云云 修羅界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若し人仏の為の故に乃至皆已に仏道を成ず」等云云 此れ人界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大梵天王乃至我等も亦是くの如く・必ず当に作仏することを得べし」等云云 此れ天界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舎利弗乃至華光如来」等云云 此れ声聞界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其の縁覚を求むる者・比丘比丘尼乃至合掌し敬心を以て具足の道を聞かんと欲す」等云云、 此れ即ち縁覚界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地涌千界乃至真浄大法」等云云 此れ即ち菩薩所具の十界なり、経に云く「或説己身或説他身」等云云 即ち仏界所具の十界なり。
묻노라. 법화경은 어느 글이며, 천태의 해석은 어떠한가. 답하노라. 법화경 제1권 방편품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한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구계에 갖추어진 불계이니라. 수량품에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이래 매우 크게 오래되었느니라. 수명은 무량 아승기겁이며 상주하여 멸하지 않느니라. 여러 선남자여, 내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으며, 다시 위의 수의 갑절이니라」 등이라 하였으니, 이 경문은 불계에 갖추어진 구계이니라. 경에 「제바달다 …… 천왕여래」 등이라 하였으니 지옥계에 갖추어진 불계이니라. 경에 「첫째를 남바라 이름하고 …… 그대들이 다만 능히 법화의 이름을 지니는 이를 보호하기만 해도 복은 헤아릴 수 없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아귀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용녀 …… 등정각을 이루었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축생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바치 아수라왕 …… 한 게송 한 구절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등이라 하였으니 수라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만약 사람이 부처를 위하는 까닭에 ……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인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대범천왕 …… 우리도 또한 이와 같이 반드시 마땅히 성불하리라」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천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사리불 …… 화광여래」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성문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연각을 구하는 이 비구 · 비구니 ……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연각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지용천계 …… 진정대법」 등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보살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경에 「혹은 자기의 몸을 설하고 혹은 남의 몸을 설한다」 등이라 하였으니 곧 불계에 갖추어진 십계이니라.
어구 풀이
- 仏知見불지견
- 부처의 지혜와 견해, 곧 부처가 깨달은 실상을 아는 지혜. 방편품은 부처가 세상에 나오는 일대사인연을 이 불지견을 「열고(開) 보이고(示) 깨닫게 하고(悟) 들게 하는(入)」 데 있다고 설한다.
- 九界所具の仏界 · 仏界所具の九界구계소구의 불계 · 불계소구의 구계
- 구계의 중생에게 불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 불계에 구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 앞은 적문 방편품, 뒤는 본문 수량품이 그 근거가 된다. 둘을 합하면 십계호구의 양면이 된다.
- 提婆達多제바달다
- 범어 데바닷타(Devadatta)의 음역. 조달(調達)이라고도 하며, 천열(天熱) · 천수(天授)로 번역한다. 석존의 사촌으로 아난의 형이라 한다(『대지도론』 권3, 이설 있음). 출가 후 교단 분열(파화합승), 석존의 발가락에 피를 낸 일(출불신혈), 연화색 비구니를 때려 죽인 일(살아라한)의 삼역죄를 지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한다. 법화경 제바달다품 제12에서 석존이 과거세에 국왕으로서 아사선인을 천 년 섬겨 법화경을 배웠는데 그 선인이 제바달다의 전신이었다는 인연이 밝혀지고, 미래에 천왕여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악인성불).
- 藍婆 · 十羅刹女남바 · 십나찰녀
- 다라니품 제26에 나오는 열 나찰녀의 첫째. 남바 · 비남바 · 곡치 · 화치 · 흑치 · 다발 · 무염족 · 지영락 · 고제 · 탈일체중생정기의 열이다. 귀자모신과 그 아들들과 함께 사람의 정기를 빼앗는 악귀로서 아귀계를 나타내지만, 법화경에서 지자(持者)를 지키겠다고 서원하여 선신으로 바뀐다. 강의는 이것이 선악불이 · 십계호구, 곧 백계천여 · 일념삼천을 나타낸다고 본다.
- 竜女용녀
- 사갈라 용왕의 여덟 살 딸. 제바달다품에서 문수보살의 교화를 받아 즉석에서 남방 무구세계에 가서 등정각을 이루었다. 축생의 몸, 여인의 몸, 어린 나이라는 세 가지 「불가능」을 한 번에 넘은 즉신성불의 예다.
- 婆稚阿修羅王바치 아수라왕
- 서품 제1에 열거된 네 아수라왕 가운데 첫째. 『법화문구』 권2에 따르면 「바치」는 피박(被縛) · 오처피박이라는 뜻으로, 제석과 싸우다 져서 묶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나머지 셋은 거라건타(후여뢰, 어깨가 넓어 광견갑이라고도 함) · 비마질다라(정심, 딸 사지 부인을 제석에게 시집보냄) · 라후(장지 · 집월, 손으로 해와 달을 가림)다. 모두 늘 제석과 싸운다.
- 華光如来화광여래
- 사리불이 비유품 제3에서 받은 미래성불의 이름. 이전 경전에서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배척된 성문이 법화경에서 처음 수기를 받은 상징적 사건이다. 나라 이름은 이구(離垢).
- 具足の道구족의 도
- 방편품의 게송에서 대중이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고자 한」 법. 현대어역은 이를 일념삼천의 묘법연화경으로 풀이한다.
- 地涌千界 · 真浄大法지용천계 · 진정대법
- 여래신력품 제21에서 땅에서 솟아나온 「천 세계 미진수」의 보살들이 부처 멸후에 넓히겠다고 맹세하며 「우리도 스스로 이 참되고 깨끗한 큰 법을 얻고자 한다」고 말한 대목. 현대어역은 진정대법을 사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로 풀이한다.
- 或説己身或説他身혹설기신 혹설타신
- 수량품 제16의 「혹은 자기의 몸을 설하고 혹은 남의 몸을 설하며, 혹은 자기의 몸을 보이고 혹은 남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의 일을 보이고 혹은 남의 일을 보인다」는 육혹시현(六或示現). 부처가 십계의 모든 몸을 나타내 중생을 구하니, 불계에 십계가 갖추어진 증거다.
총(總)과 별(別) — 열두 경문의 짜임
왜 경문부터 드는가
우리 중생의 기심에 십계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존엄하기 그지없는 불계도 고뇌의 밑바닥인 지옥계도 모두 우리의 한 생각에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 생명 안에 부처의 경애가 있다는 것, 곧 우리가 부처가 될 소질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대성인은 먼저 전제로서 십계호구라는 철리를 알게 하시려고, 사실의 위에서 그것을 설해 밝힌 법화경의 글을 인용하신다고 강의는 말한다. 질문자가 「법화경의 어느 글이며 천태의 해석은 어떠한가」라고 물은 것도, 문증(文證)이 없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교의 기본 태도를 따른 것이다.
총 — 두 경문으로 십계호구의 양면을
인용된 글에는 총(總)과 별(別)이 있다. 방편품의 글은 총괄해서 구계에 갖추어진 불계를 밝히고, 수량품의 글은 총괄해서 불계에 갖추어진 구계를 밝힌다.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한다」는 말은, 구계의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이 이미 깊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열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중생에게 불지견이 없다면 연다느니 열지 않는다느니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강의의 비유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이에게 「자기 창고를 연다, 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있다는 것이다.
「보살의 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으며 다시 위의 수의 갑절이다」라는 말은, 인위(因位)의 만행이 과해(果海)에 흘러들어 있으므로 불계에 갖추어진 구계라고 하는 것이다. 곧 구원에 행한 보살행이 성불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그 보살행이 그대로 불계에 흘러들어 지금도 다하지 않았고, 다시 오백진점겁의 갑절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보살행을 「구계」라고 하는가. 보살은 구계의 자리에 있으며, 하나(보살계)를 들어 나머지 여덟을 예시한 것이라고 강의는 푼다.
이 수량품의 글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는 대성인 불법에서 본인묘(本因妙)의 글로 중시된다. 「소성수명 금유미진 부배상수」는 부처가 된 뒤에도 보살의 생명, 곧 구계의 생명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불계 안에 구계가 상주한다는 본문의 십계호구다. 이 글은 제3편(16장)과 「四 구원실성」(/doctrine/kuon-jitsujo)과 이어진다.
별 — 지옥계부터 불계까지
「제바달다 …… 지옥계에 갖추어진 불계」 이하는 십계를 하나하나 따로(別) 들어 서로 갖춤을 밝힌 글이다. 여기서 강의는 한 가지 미세한 점을 짚는다. 지옥계만 「갖추어진 불계」라 하고, 아귀계 이하는 모두 「갖추어진 십계」라고 하셨다. 왜 표현이 다른가. 강의의 답은, 불계를 갖추었다면 십계를 갖춤은 분명하고, 또 십계를 갖추었다면 불계를 갖춤은 당연한 이치여서, 두 표현이 서로를 드러내는 호현(互顯)이 된다는 것이다. 지옥계에서 「불계」라고만 하셔도 실은 십계 전체를 갖춘다는 뜻이고, 아귀계 이하에서 「십계」라고 하셔도 그 핵심은 불계를 갖춘다는 데 있다.
강의의 정리 — 방편품(구계소구의 불계)과 수량품(불계소구의 구계)이 총(總)으로 십계호구의 두 방향을 세우고, 제바달다부터 육혹시현까지 열 경문이 별(別)로 각 세계의 호구를 증명한다. 지옥계의 「불계」와 나머지의 「십계」는 서로를 드러내는 표현(互顯)이다.
열두 경문의 원래 자리 — 누가, 어디서, 어떤 수기를 받았는가
대성인은 열두 경문을 「乃至(내지)」로 줄여 첫머리와 끝만 드셨다. 그 사이에 생략된 장면을 되살려 보면, 대성인이 왜 이 글들을 고르셨는지가 더 분명해진다. 이 절은 강의의 현대어역과 어구 풀이를 바탕으로 경문의 원 맥락을 보강한 것이다(경문은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 T9 no.262).
방편품 — 일대사인연의 선언
諸佛世尊 欲令衆生開佛知見 使得清淨故 出現於世 欲示衆生佛之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悟佛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入佛知見道故 出現於世
제불세존은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열어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이려고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깨닫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의 도에 들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한다.
이른바 개시오입(開示悟入)의 사불지견이다. 석존이 사리불의 세 번의 청을 받고 비로소 설하기 시작한 대목으로, 부처가 세상에 나오는 「오직 하나의 큰 일의 인연(唯以一大事因緣)」이 이것이다. 10장 첫머리의 「유일대사인연의 경문」도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대성인은 이 글을 9장에서 「인계를 설한」 글로도 다시 인용하신다. 한 경문이 총(구계소구의 불계)으로도, 별(인계소구의 불계)로도 쓰이는 것이다.
수량품 — 구원의 수명과 보살의 수명
如是我成佛已來 甚大久遠 壽命無量阿僧祇劫 常住不滅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 復倍上數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이래 매우 크게 오래되었으니, 수명은 무량 아승기겁이며 상주하여 멸하지 않는다. 여러 선남자여,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으며 다시 위의 수의 갑절이다.
석존이 오백진점겁의 비유로 구원실성을 밝힌 직후의 글이다. 앞부분 「성불한 이래 매우 오래」가 본과(本果), 뒷부분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가 본인(本因)이며, 이 둘이 함께 상주한다는 데서 불계에 구계가 갖추어진다.
제바달다품 — 지옥에 떨어진 이의 수기
提婆達多卻後過無量劫 當得成佛 號曰天王如來
제바달다는 이후 무량겁을 지나 마땅히 성불하리니, 이름을 천왕여래라 하리라.
석존은 과거세에 국왕이었을 때 왕위를 버리고 아사선인을 천 년 동안 섬겨 법화경을 배웠고, 그 선인이 바로 제바달다였다고 밝힌다. 삼역죄를 지어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진 이가 부처가 된다면, 지옥계에도 불계가 있다는 증거다. 현대어역은 「지옥계에 불계를 갖추었다면 나머지 팔계를 갖춤은 말할 것도 없다」고 덧붙인다.
다라니품 — 사람의 정기를 빼앗던 이들의 서원
爾時有羅剎女等 一名藍婆 二名毘藍婆 …… 十名奪一切衆生精氣 …… 佛告諸羅剎女 善哉善哉 汝等但能擁護受持法華名者 福不可量
그때 나찰녀들이 있었으니 첫째 이름은 남바, 둘째 이름은 비남바 …… 열째 이름은 탈일체중생정기였다. …… 부처가 나찰녀들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그대들이 다만 법화경의 이름을 수지하는 이를 옹호하기만 해도 복은 헤아릴 수 없다.」
열 나찰녀는 귀자모신과 그 아들들과 함께 부처 앞에 나아가 법화경 지자를 지키는 다라니를 설하고, 지자를 괴롭히는 자의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지리라고 서원한다. 사람의 정기를 빼앗던 아귀계의 존재가 「헤아릴 수 없는 복」, 곧 불과를 얻는다면 아귀계에 불계가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머지 팔계도 갖춘다는 것이 현대어역의 풀이다.
제바달다품 — 여덟 살 용녀의 즉신성불
當時衆會 皆見龍女忽然之間變成男子 具菩薩行 即往南方無垢世界 坐寶蓮華 成等正覺
그때 모인 대중이 모두 보니, 용녀가 홀연히 남자로 변하여 보살행을 갖추고 곧 남방 무구세계에 가서 보배 연꽃에 앉아 등정각을 이루었다.
지적보살과 사리불은 「여자의 몸은 더럽고 다섯 가지 장애가 있는데 어찌 빨리 성불하겠는가」라며 의심했다. 용녀는 보배 구슬 하나를 부처에게 바치고 부처가 그것을 받는 짧은 순간보다 빠르게 성불을 보였다. 용은 축생이므로, 그 딸이 성불한 것은 축생계에 십계가 갖추어진 글이 된다.
서품과 법사품 — 아수라왕도 한 게송으로
본문의 「바치 아수라왕 …… 한 게송 한 구절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는 두 품의 글을 「乃至」로 이은 것이다. 앞부분은 서품 제1에서 법화경의 청중으로 네 아수라왕이 각각 수백천의 권속과 함께 와 있었다는 대목이고, 뒷부분은 법사품 제10의 첫머리다.
藥王 汝見是大衆中 無量諸天 龍王 夜叉 乾闥婆 阿修羅 …… 如是等類 咸於佛前 聞妙法華經一偈一句 乃至一念隨喜者 我皆與授記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약왕이여, 그대는 이 대중 가운데 한량없는 하늘 · 용왕 · 야차 · 건달바 · 아수라 …… 를 보는가. 이러한 무리가 모두 부처 앞에서 묘법화경의 한 게송 한 구절을 듣고 한 생각이라도 따라 기뻐한다면, 나는 모두에게 수기를 주리니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늘 제석과 싸우고 해와 달을 손으로 가리던 아수라왕이 법화경 한 구절에 기뻐하는 것만으로 성불의 수기를 받는다. 수라계에 십계가 갖추어진 글이다.
방편품 — 불상을 세운 사람들
若人為佛故 建立諸形像 刻雕成衆相 皆已成佛道
만약 사람이 부처를 위하여 여러 형상을 세우고 새기고 조각하여 여러 상호를 이루면,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
방편품 게송의 이른바 「소선성불(小善成佛)」 대목이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어도, 한 번 「나무불」이라 불러도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인간의 작은 선행 하나하나에 불계가 열려 있으니 인계에 십계가 갖추어진 글이다.
비유품 — 천자들의 기쁨과 사리불의 수기
천계의 글은 비유품 제3에서 사리불이 수기를 받는 것을 보고 제석 · 범천왕 등과 수많은 천자들이 하늘 옷을 뿌리며 기뻐하여 「우리도 또한 이와 같이 반드시 성불하리라(我等亦如是 必當得作佛)」고 노래한 대목이다. 천상의 즐거움에 머무는 이들 안에도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니 천계에 십계가 갖추어진다.
성문계의 글은 같은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받은 수기다.
舍利弗 汝於未來世 過無量無邊不可思議劫 …… 當得作佛 號曰華光如來
사리불이여, 그대는 미래세에 무량무변 불가사의겁을 지나 …… 마땅히 성불하리니, 이름을 화광여래라 하리라.
「五 일념삼천」 2절에서 보았듯, 이승이 성불하지 못한다면 십계호구라는 원은 닫히지 않는다. 사리불의 수기는 그 원을 닫는 첫 사건이었다.
방편품 —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하는 연각들
연각계의 글은 방편품 게송에서 사리불이 대중의 의심을 대변하며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는 대목이다. 「연각을 구하는 이 비구 · 비구니(其求緣覺者 比丘比丘尼)」가 서로 바라보며 의심을 품고 있고, 이어 여러 하늘과 용과 보살들, 전륜성왕들이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合掌以敬心 欲聞具足道)」고 한다. 홀로 깨달음을 구하던 연각이 「구족의 도」, 곧 일념삼천의 묘법을 듣고자 하니 연각계에 십계가 갖추어진 글이다.
신력품 — 땅에서 솟은 보살들의 서원
爾時千世界微塵等菩薩摩訶薩 從地踊出者 …… 而白佛言 世尊 我等於佛滅後 世尊分身所在國土 滅度之處 當廣說此經 所以者何 我等亦自欲得是真淨大法 受持讀誦解說書寫而供養之
그때 천 세계 미진수와 같은 보살마하살로서 땅에서 솟아나온 이들이 …… 부처에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부처님 멸후에 세존의 분신이 계시던 국토, 멸도하신 곳에서 이 경을 널리 설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도 스스로 이 참되고 깨끗한 큰 법을 얻어 수지 · 독송 · 해설 · 서사하고 공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지용보살은 본화의 보살이다. 이들이 「얻고자 한다」고 한 진정대법을 현대어역은 사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로 풀이한다. 보살계에 십계가 갖추어진 글이면서, 이 어서 후반(제6 · 7편)의 결요부촉과 본화 출현으로 이어지는 복선이기도 하다.
수량품 — 부처가 나타내는 열 세계의 몸
如來所演經典 皆為度脫衆生 或說己身 或說他身 或示己身 或示他身 或示己事 或示他事 諸所言說 皆實不虛
여래가 설한 경전은 모두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키기 위한 것이니, 혹은 자기의 몸을 설하고 혹은 남의 몸을 설하며, 혹은 자기의 몸을 보이고 혹은 남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의 일을 보이고 혹은 남의 일을 보인다. 말한 바는 모두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
부처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부처의 몸만이 아니라 보살 · 성문 · 천 · 인, 때로는 악인의 모습까지 나타낸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불계 안에 구계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불계에 십계가 갖추어진 글로 열두 경문이 닫힌다.
위 경문 가운데 「연각계」의 글은 방편품 게송의 두 대목(「其求緣覺者 比丘比丘尼」와 「合掌以敬心 欲聞具足道」)을 「乃至」로 이은 것이며, 「천계」의 글도 비유품 천자 게송의 앞뒤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경문 고르기에 담긴 뜻
열두 경문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무늬가 보인다. 지옥계는 삼역죄의 악인, 아귀계는 사람의 정기를 빼앗던 악귀, 축생계는 여덟 살 용녀, 수라계는 싸움을 일삼던 아수라왕, 성문계는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던 사리불이다. 이전의 경에서 성불의 문밖에 놓였던 이들이 하나씩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는다. 대성인은 「가장 멀어 보이는 자리에도 불계가 있다」는 사실로 십계호구를 증명하셨다. 가장 먼 곳에 불계가 있다면, 그보다 가까운 곳에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질문자는 이 열두 경문을 듣고도 승복하지 않는다. 경문은 알겠다, 그러나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문증만으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 지점에서 7장이 시작된다.
본문
問うて曰く自他面の六根共に之を見る彼此の十界に於ては未だ之を見ず如何が之を信ぜん 答えて曰く法華経法師品に云く「難信難解」宝塔品に云く「六難九易」等云云、 天台大師云く「二門悉く昔と反すれば難信難解なり」章安大師云く「仏此れを将て大事と為す何ぞ解し易きことを得可けんや」等云云、 伝教大師云く「此の法華経は最も為れ難信難解なり随自意の故に」等云云、 夫れ在世の正機は過去の宿習厚き上教主釈尊・多宝仏・十方分身の諸仏・地涌千界・文殊・弥勒等之を扶けて諫暁せしむるに猶信ぜざる者之れ有り五千席を去り人天移さる況や正像をや何に況や末法の初をや汝之を信ぜば正法に非じ。
묻노라. 나와 남의 얼굴의 육근은 둘 다 이를 보느니라. 그러나 저와 이의 십계는 아직 이를 보지 못하나니, 어찌 이를 믿겠는가. 답하노라. 법화경 법사품에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하였고, 보탑품에 「육난구이」 등이라 하였느니라. 천태대사는 「두 문이 모두 옛것과 반대되므로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하였고, 장안대사는 「부처가 이것을 큰 일로 삼으셨으니 어찌 쉽게 알 수 있겠는가」 등이라 하였느니라. 전교대사는 「이 법화경은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수자의(隨自意)이기 때문이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무릇 재세의 정기(正機)는 과거의 숙습이 두터운 데다가, 교주석존 · 다보불 · 시방분신의 제불 · 지용천계 · 문수 · 미륵 등이 이를 도와 간효하셨건만, 그래도 믿지 않는 이가 있었느니라. 오천 명이 자리를 떠났고, 인천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느니라. 하물며 정법 · 상법 시대이겠는가. 더구나 말법의 처음이겠는가. 그대가 이것을 쉽게 믿는다면 그것은 정법이 아니리라.
어구 풀이
- 難信難解난신난해
-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이신이해(易信易解)의 반대말. 법사품 제10에서 법화경이 여러 경 가운데 가장 난신난해하다고 밝혔다. 부처가 자신의 깨달음을 그대로 설한 가르침(수자의)은 범부에게 믿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난신난해는 부처의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증거로 여겨진다.
- 六難九易육난구이
- 견보탑품 제11에서 법화경을 지니는 어려움을 보인 비유. 거의 불가능한 아홉 가지 일(九易)조차 여섯 가지 어려운 일(六難)에 견주면 오히려 쉽다고 설해, 멸후에 법화경을 홍통하도록 권한 것이다. 내용은 도표 8 참조.
- 二門悉く昔と反す이문이 모두 옛것과 반대된다
- 『법화문구』 권8의 글. 적문은 이승작불을, 본문은 구원실성을 설해, 40여 년 동안 설한 이전의 가르침(이승은 성불하지 못한다, 석존은 금생에 처음 성불했다)과 모두 반대되므로 난신난해라는 뜻이다.
- 章安大師장안대사
- 관정(灌頂, 561–632). 천태대사의 제자로 『마하지관』 · 『법화현의』 · 『법화문구』를 받아 적어 정리했다. 본문의 인용은 장안대사의 글로 전하나 출전은 확인 중.
- 伝教大師 · 随自意전교대사 · 수자의
- 전교대사 사이초(767–822)는 일본 천태종의 개조. 히에이산에 들어가 수행하고, 804년 입당해 도수 · 행만에게 천태의 깊은 뜻을 배우고 이듬해 귀국해 806년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대승계단 건립에 힘써 입적 7일 뒤 칙허가 내렸다. 저서에 『법화수구』 · 『현계론』 · 『수호국계장』 · 『산가학생식』 등이 있다. 본문의 「수자의이기 때문」이라는 글은 『법화수구』의 글로 알려져 있다. 수자의는 부처가 깨달은 그대로를 설한 가르침이다(인물탐구 전교대사 참조).
- 在世の正機재세의 정기
- 석존 재세에 법화경을 듣고 깨달을 바른 근기의 중생. 과거세에 하종을 받아 숙습(宿習)이 두텁다.
- 諫暁간효
- 간(諫)은 예로써 남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 효(曉)는 깨우쳐 밝히는 것.
- 五千席を去り오천 명이 자리를 떠남
- 방편품에서 석존이 광개삼현일(廣開三顯一)의 설법에 들어가려 할 때,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오천 명이 「죄의 뿌리가 깊고 무거우며 증상만이어서,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하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 한」 까닭에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고, 세존은 잠자코 말리지 않았다는 이른바 오천기거(五千起去).
- 人天移さる인천을 옮김
- 보탑품에서 시방의 분신불을 모으기 위해 석존이 세 번 국토를 정화(삼변토전)하실 때, 그 자리의 인계 · 천계의 중생을 다른 국토로 옮기셨다는 것. 법회에 남을 근기가 못 되는 이들이 옮겨진 것이다.
- 正像 · 末法の初정상 · 말법의 처음
- 석존 멸후 정법 천 년, 상법 천 년을 지나 말법에 들어간다. 말법의 처음은 「투쟁언송 · 백법은몰」의 시대로, 이 어서가 쓰인 때다.
물음의 뜻 — 얼굴은 보이나 십계는 보이지 않는다
강의는 이 장에서 난신난해를 보이는 이유를, 이런 의심을 들어 십계호구 · 일념삼천이라는 법체가 얼마나 깊은지를 칭탄하려는 데 있다고 본다. 의심이 깊을수록 그 법의 깊이가 드러난다.
질문의 뜻은 이렇다. 세간의 거울을 향하면 나와 남의 얼굴의 육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법화경 등의 거울을 향해도 나나 남의 십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이것을 믿으라는 것인가. 5장의 거울 비유를 질문자가 그대로 되돌려 던진 셈이다.
무엇이 정말 믿기 어려운가 — 십계호구
인간계의 십계는 설명할 수 있다
강의는 여기서 오늘의 독자를 향해 문제를 다시 세운다. 인간계의 십계는 난신난해라고 해도 설명하는 데 그다지 무리가 없다. 저마다의 생활 속에서 구계까지는 뚜렷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난신난해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오히려 십계호구가 아니겠느냐고 강의는 묻는다.
인간계의 십계는 믿는다 해도, 인간계 밖의 십계, 곧 앞의 표에서 본 지옥계의 십계, 축생계의 십계, 나아가 보살계 · 불계의 십계란 어떤 상태이며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것이 큰 문제가 된다. 현대 사람이 불교 철학을 궁구할 때 가장 먼저 부딪치는 곳이 여기일 것이라고 강의는 본다.
생명의 활동에서 출발하다
강의는 사색의 첫걸음을 우리 생명의 활동 상태에 둔다. 이 방법은 천태의 「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본다」에 해당하고, 대성인의 「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른다」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의 십계의 생활을 일단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성냄(瞋) — 분노가 지나쳐 고뇌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생활 · 지옥계
- 탐냄(貪) — 물건을 탐내는 생활 · 아귀계
- 어리석음(癡) — 눈앞의 것에 사로잡혀 큰 뜻을 잃는 생활 · 축생계
- 아첨(諂曲) — 남에게 아첨하고 자기 마음을 굽히며 다툼을 일삼는 생활 · 수라계
- 평온(平) — 사람다운 생활 · 인계
- 기쁨(喜) — 환희에 불타는 생활, 그러나 시간의 제한이 있다 · 천계
- 무상(無常) —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닫고 자기의 사색에서 안심을 구하는 생활 · 성문계 · 연각계
- 덕(德) — 인간의 덕성의 생활 · 보살계
- 신앙(信仰) —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생활 · 불계
- 瞋성냄분노가 지나쳐 고뇌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생활지옥계
- 貪탐냄물건을 탐내는 생활아귀계
- 癡어리석음눈앞의 것에 사로잡혀 큰 뜻을 잃는 생활축생계
- 諂曲아첨남에게 아첨하고 자기 마음을 굽히며 다툼을 일삼는 생활수라계
- 平평온사람다운 생활인계
- 喜기쁨환희에 불타는 생활, 그러나 시간의 제한이 있다천계
- 無常무상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닫고 자기의 사색에서 안심을 구하는 생활성문계 · 연각계
- 德덕인간의 덕성의 생활보살계
- 信仰신앙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생활불계
연을 만나지 않으면 그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강의, 7장)
이러한 생활의 장면이 일상생활 속에 갑자기 나타난다. 그 한 장면이 늘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실재하지만 연(緣)을 만나지 않으면 그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이 십계의 생활의 실체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십계의 생활이 우리 생명에 실재함을 인식한 이상, 그러한 생명이 우주에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의는 나아간다.
십계는 어디에 있는가 — 장소가 아니라 생명
장소로 생각하는 오류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불계라 하면 부처가 사는 청정한 세계가 우주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다고. 보살계라 하면 관음 · 미륵 · 문수 같은 보살이 그림에 그려진 모습으로 우주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지옥계라 하면 귀신이 사는 세계가 있어 악한 일을 한 사람이 그곳에서 괴롭힘을 당한다고. 천이라 하면 하늘 한쪽에 천국 같은 곳이 있어 범천 · 제석과 신들이 더러움을 잊고 유유히 노닌다고.
강의는 이런 생각이 모두 잘못이라고 단언한다. 그런 생명을 알게 하기 위한 비유로 불교 경전 속에 표현되어 있을 뿐, 그것은 권대승 이하 경전의 설명 방식이지 결코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십계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대우주라는 하나의 생명
먼저 우리의 생명이 곧 우주의 생명이라고 관해야 한다. 그 대우주는 하나의 큰 생명이다. 이 큰 생명 속에, 우리의 생명 속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십계가 실재한다. 지옥계가 불계 위에 겹쳐 있는 것도 아니고, 불계와 아귀계가 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혼연일체로 융화하여 막힘없이 통하는 상태에 있다.
강의는 이것을 라디오 전파에 빗댄다. 라디오로 잡을 수 있는 여러 나라 여러 방송의 전파는 겹쳐 있는 것도 아니고 섞여 있는 것도 아니며, 혼연일체 같은 상태로 공간에 있다. 수신기의 주파수를 맞추면(연을 만나면) 그 방송이 들린다. 마찬가지로 연을 만나 그 생명이 약동할 뿐이며, 불계의 생명에도 십계를 갖추고 보살계의 생명에도 십계를 갖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뒤의 생명
강의는 죽은 뒤의 생명에도 이 원리를 적용한다. 죽은 뒤의 생명은 대우주의 생명에 융화하여 녹아든다. 그 생명이 불계의 업을 느끼는 것도, 지옥계의 업을 느끼는 것도 모두 생전의 업에 따른 것이며, 그 업을 느끼는 상태는 육체도 마음도 없는 생명이라는 것의 특질이다. 강의는 이것을 다 써내기는 지극히 어렵다고 고백하면서도, 대우주 그 자체가 십계의 생명이며 그 십계가 또 서로 십계를 갖춘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난신난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장에서 경문과 천태 · 장안 · 전교의 말로 난신난해를 설하신 것이라고 강의는 정리한다.
강의의 핵심 — 십계는 우주 어딘가의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상태」이며, 대우주라는 하나의 생명 안에 혼연일체로 실재하다가 연을 만나 나타난다. 「지옥은 땅 밑에 있다」는 생각은 권대승 이하 경전의 비유적 설명 방식일 뿐이다. 이 관점은 8장 강의의 「미신과 관념론」 비판으로 이어진다.
경과 석의 증언 — 법사품 · 보탑품과 세 논사
법사품의 「난신난해」
대성인이 처음 드신 법사품의 글은 다음과 같다.
我所說經典 無量千萬億 已說今說當說 而於其中 此法華經最為難信難解
내가 설한 경전은 한량없는 천만억이니,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고 앞으로 설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이미 설한 것(已說)」은 법화경 이전의 40여 년의 경, 「지금 설하는 것(今說)」은 무량의경, 「앞으로 설할 것(當說)」은 열반경이라고 천태는 풀었다. 법화경은 이 모든 경보다 믿기 어렵다. 난신난해가 곧 최고의 증거가 되는 역설이 여기서 성립한다.
보탑품의 육난구이
보탑품의 육난구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 아홉 가지를 먼저 들고, 그것조차 「쉽다」고 한 뒤 멸후에 법화경을 지니는 여섯 가지 일을 「어렵다」고 한다. 예컨대 수미산을 들어 다른 무수한 불국토에 던지는 것도, 마른 풀을 지고 큰 불 속에 들어가 타지 않는 것도 아직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부처 멸후 악세에서 이 경을 설하는 것, 잠시라도 읽는 것, 한 사람을 위해 설하는 것은 어렵다.
- ①법화경 외의 무수한 경을 설한다
- ②수미산을 들어 다른 무수한 불국토에 던진다
- ③발가락으로 대천세계를 움직여 먼 나라에 던진다
- ④유정천에 서서 무량한 다른 경을 설한다
- ⑤손에 허공을 쥐고 노닌다
- ⑥대지를 발등에 올려 범천에 오른다
- ⑦마른 풀을 지고 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 ⑧팔만사천 법문을 설해 듣는 이에게 육신통을 얻게 한다
- ⑨무량한 중생에게 아라한과와 육신통을 얻게 한다
- ①악세에 법화경을 설한다
- ②법화경을 쓰고 남에게 쓰게 한다
- ③악세에 잠시라도 법화경을 읽는다
- ④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법화경을 설한다
- ⑤법화경을 듣고 받아 그 뜻을 묻는다
- ⑥법화경을 능히 수지한다
아홉은 힘의 과시, 여섯은 멸후 악세에 법화경을 지니는 일
구이(九易)가 모두 초자연적인 힘의 과시인 반면, 육난(六難)은 모두 「악세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쓰고 읽고 듣고 지니는 일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어려움은 힘의 크기가 아니라 시대와 법에서 온다. 멸후 악세에 법화경을 지니는 일이 수미산을 던지는 일보다 어렵다는 이 역설은, 7장 끝의 「하물며 말법의 처음이겠는가」로 곧장 이어진다.
천태 · 장안 · 전교의 말
천태대사의 「이문이 모두 옛것과 반대되므로 난신난해」라는 말은 『법화문구』 권8에서 법사품의 난신난해를 풀이한 대목이다. 현대어역의 풀이대로, 적문은 이승작불을, 본문은 구원실성을 설하여, 지난 40여 년 동안 설한 권교와 모두 서로 반대되므로 난신난해다. 이전의 경에서는 「이승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 하더니 법화경 적문에서는 사리불이 화광여래가 된다. 이전의 경에서는 「석존은 이 생에 가야성 가까이서 처음 성불했다(始成正覺)」 하더니 본문에서는 오백진점겁 전에 이미 성불했다고 한다. 같은 부처가 앞뒤로 정반대의 말을 하니 믿기 어렵다. 제1편 4장에서 대성인이 이것을 「교문(敎門)의 난신난해」라 하시고 「한 부처의 두 말이 물과 불 같으니 누가 이를 믿겠는가」라고 하신 것과 같은 자리다.
장안대사의 「부처가 이것을 큰 일로 삼으셨으니 어찌 쉽게 알 수 있겠는가」는, 부처가 출세의 일대사로 삼으신 법이 가벼울 리 없다는 말이다. 전교대사의 「이 법화경은 가장 난신난해하니 수자의이기 때문이다」는 난신난해의 까닭을 수자의에서 찾는다. 이것이 다음 절의 주제다.
수자의와 수타의 — 부처의 뜻을 따르는 가르침
두 가지 설법
수자의(隨自意)는 수타의(隨他意)의 짝말이다. 중생이 믿고 이해하든 말든,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내증의 법문을 곧바로 설하는 것이 수자의다. 대성인은 「제경과 법화경과 난이의 사」에서 이것을 부모와 자식에 빗대셨다.
仏九界の衆生の意楽に随つて説く所の経経を随他意という譬えば賢父が愚子に随うが如し、仏・仏界に随つて説く所の経を随自意という、譬へば聖父が愚子を随えたるが如きなり
부처가 구계 중생의 바람에 따라 설한 경들을 수타의라 한다. 비유하면 어진 아버지가 어리석은 자식에게 맞추어 주는 것과 같다. 부처가 불계에 따라 설한 경을 수자의라 한다. 비유하면 성스러운 아버지가 어리석은 자식을 이끌어 따르게 하는 것과 같다.
석존의 수자의의 교법은 법화경이고, 이전의 경은 수타의다. 방편품은 이렇게 말한다.
我以無數方便 種種因緣 譬喩言辭 演說諸法 是法非思量分別之所能解 唯有諸佛乃能知之
나는 무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 비유와 언사로 여러 법을 설했다. 이 법은 사량 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니, 오직 제불만이 이를 아신다.
이전의 경에서는 중생이 이해하기 쉽도록 갖가지 방편 · 인연 · 비유로 중생을 이끌어 왔지만, 지금 설하는 법화경은 사려 분별로는 미칠 수 없는 난신난해의 대법이며 부처만이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소대부동 — 비교하는 상대에 따라
강의는 수자의 · 수타의가 「소대부동(所對不同)」, 곧 무엇과 견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정리한다.
- 권실상대(권교와 실교를 견줄 때) — 권교는 수타의, 법화경은 수자의
- 본적상대(적문과 본문을 견줄 때) — 적문은 수타의, 본문은 수자의
- 종탈상대(탈익과 하종을 견줄 때) — 색상장엄의 석존이 설한 일대불교는 설령 법화경 본문이라도 세간의 정에 따르는 수타의의 법이며, 문저하종의 남묘호렌게쿄야말로 수자의
강의는 대성인의 불법이야말로 팔만법장의 밑바닥, 생명의 본원을 남김없이 설해 밝혀 모든 민중을 근저에서 구하는 대철학이라고 한다. 모든 부처는 남묘호렌게쿄로 부처가 되었고, 모든 부처가 돌아가는 곳도 남묘호렌게쿄다. 시방삼세 제불의 골수이며 혼이며 안목이다. 그러므로 난신난해함은 당연하고, 본문의 「그대가 이것을 쉽게 믿는다면 그것은 정법이 아니리라」는 말씀에도 참으로 까닭이 있다고 강의는 맺는다.
재세의 정기조차 — 오천기거와 인천의 이동
7장의 후반은 시간의 축으로 난신난해를 밝힌다. 석존 재세의 정기(正機)는 조건이 가장 좋았다. 첫째, 과거세에 하종을 받아 숙습이 두터웠다. 둘째, 교주석존이 직접 설하고, 다보불이 증명하고, 시방분신의 제불이 모이고, 지용천계의 대보살과 문수 · 미륵 등의 보살이 설법을 도와 간효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이가 있었다.
방편품에서 광개삼현일의 설법이 시작되려 할 때 오천 명의 증상만이 자리를 떠났고, 석존은 잠자코 말리지 않았다. 보탑품에서는 분신불을 맞이하려 국토를 세 번 정화할 때 그 자리의 인천이 다른 국토로 옮겨졌다. 재세의 정기조차 이러했으니, 부처 멸후의 정법 · 상법 시대에는 더욱 난신난해하고, 투쟁견고 · 백법은몰의 말법에 이르러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대성인은 「그대가 이것을 쉽게 믿는다면 그것은 정법이 아니리라」고 하셨다.
이 마지막 한 마디는 질문자의 의심을 꾸짖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의심을 정면으로 인정하는 말이다. 「믿기 어렵다」는 그대의 느낌은 옳다. 그것이 쉽게 믿어진다면 오히려 그 법이 가짜라는 증거다. 질문자는 이 말에 기대어 다음 장에서 더 솔직한 의심을 털어놓는다.
재세 → 정법 · 상법 → 말법의 처음으로 내려갈수록 난신난해가 깊어진다. 그러나 이 사다리는 제1편 4장의 「교문 · 관문의 난신난해」와 함께, 말법에야말로 그 난신난해를 넘는 법이 필요하다는 제3편 이후의 논지를 준비한다.
신심과 생활의 수자의 — 강의가 덧붙인 두 가지
강의는 수자의를 교판의 용어로만 두지 않고 신심과 생활에 적용해 논한다. 이 대목은 강의가 집필된 1960년대 일본 사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여기서는 그 논지만 추려 싣는다.
「정견(定見)」으로서의 수자의
당시 일부 지식인 · 평론가들은 창가학회를 지적 수준이 낮고 비판 정신 없이 「병이 낫는다」, 「돈을 번다」는 말에 맹종하는 집단으로 보았고, 학회가 크게 발전하자 이번에는 「파쇼(파시즘)」라는 딱지를 붙였다. 강의는 이것을 사물을 자기 머릿속의 기존 범주에 끼워 맞추려는 편견이라고 반박한다. 중세 교회가 과학자를 「무신론자」라 부르고, 전시의 일본이 바른말 하는 이에게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였듯, 딱지만 바뀌었을 뿐 인간 생명에 깃든 사대주의 · 편견 · 미신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의는 파시즘의 특징으로 폭력에 의한 독재, 독점자본의 옹호, 전체주의에 의한 의회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의 부정, 인간 가치의 평등의 부정을 들고, 학회와 그 근본인 불법이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나하나 논한다. 뛰어난 지도 원리가 있는 곳에는 독재가 성립하지 않으며, 후배를 자기보다 크게 키우려는 영법구주(令法久住)의 정신은 독재와 정반대다. 일생성불이란 오늘의 말로 개인의 주체성과 참된 자아의 확립이며, 불법은 사회적 지위 · 학력 · 성별 · 나이 · 인종을 묻지 않고 모든 사람이 사의 일념삼천의 당체이자 부처의 자식이라고 설한다. 강의는 학회의 주장이 누구에게 아첨할 필요가 없는 「정견」이며, 그런 의미에서 「수자의」라고 말한다.
신심이 곧 수자의다
강의는 이어서 신심과 생활에 맞추어 수자의 · 수타의를 논한다. 신심이야말로 수자의이고, 지위 · 명예 · 재산 등은 모두 수타의다. 천상계의 즐거움도 오쇠(五衰)를 맞고, 지위 · 명예 · 재산도 화성(化城)과 같다. 어떤 시대가 와도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고, 모든 고난을 열어 젖히며 모든 복운을 만 리 밖에서 불러들이는 큰 원천은 신심이다.
또 환경에 지배되는 생활은 수타의이고,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바꾸고 주도하며 마음대로 노니는 생활은 수자의다. 생명력이 약한 사람은 환경의 무게에 짓눌려 몸부림치고, 생명력이 강한 사람은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참으로 자유자재한 경애를 누린다. 그것도 결국 신심이 근본이다. 신심은 큰 벼리(大綱)와 같고 자기의 생활과 환경은 그물코와 같아서, 벼리를 당기면 모든 그물코가 끌려오듯 신심으로 일체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강의는 맺는다.
본문
問うて曰く経文並に天台章安等の解釈は疑網無し但し火を以て水と云い墨を以て白しと云う設い仏説為りと雖も信を取り難し、 今数ば他面を見るに但人界に限つて余界を見ず自面も亦復是くの如し如何が信心を立てんや 答う数ば他面を見るに或時は喜び或時は瞋り或時は平に或時は貪り現じ或時は癡現じ或時は諂曲なり、 瞋るは地獄・貪るは餓鬼・癡は畜生・諂曲なるは修羅・喜ぶは天・平かなるは人なり他面の色法に於ては六道共に之れ有り四聖は冥伏して現われざれども委細に之を尋ねば之れ有る可し。
묻노라. 경문과 천태 · 장안 등의 해석은 의심의 그물이 없느니라. 다만 불을 물이라 하고 먹을 희다 하는 것과 같으니, 설령 불설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내기 어렵느니라. 지금 자주 남의 얼굴을 보건대 다만 인계뿐이어서 다른 세계는 보이지 않으며, 자기 얼굴도 또한 이와 같으니, 어떻게 신심을 세우겠는가. 답하노라. 자주 남의 얼굴을 보건대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성내며, 어떤 때는 평온하고, 어떤 때는 탐욕이 나타나며, 어떤 때는 어리석음이 나타나고, 어떤 때는 아첨하느니라. 성냄은 지옥, 탐냄은 아귀, 어리석음은 축생, 아첨은 수라, 기쁨은 천, 평온은 인이니라. 남의 얼굴의 색법에는 육도가 모두 있느니라. 사성은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으나, 자세히 찾으면 반드시 있으리라.
어구 풀이
- 疑網의망
- 의심의 그물. 의심이 그물처럼 마음을 얽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 「의망이 없다」는 경문과 해석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 火を以て水と云い墨を以て白し불을 물이라 하고 먹을 희다 함
- 상식과 정반대되는 말의 비유. 질문자는 십계호구를 「불을 물이라 하는 것」에 견주어, 설령 부처의 말이라도 감각과 상식에 어긋나면 믿기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 瞋るは地獄성냄은 지옥
- 탐 · 진 · 치의 삼독은 지옥 · 아귀 · 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는 원인으로 여겨진다. 진에(瞋恚)는 수라의 다툼과도 통하지만, 여기서는 분노가 지나쳐 생활 일체를 부수고 고뇌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 貪るは餓鬼탐냄은 아귀
- 간탐(慳貪)이라고도 한다. 남에게 인색하고 끝없이 탐하는 것. 이 원인으로 아귀도에 떨어져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린다.
- 癡は畜生어리석음은 축생
- 부모 자식 · 형제가 서로 해치고, 눈앞의 안온과 이익에 미혹하는 등의 우치를 축생의 성품으로 삼는다.
- 諂曲なるは修羅아첨은 수라
- 아첨하고 굽은 마음을 수라라 한다. 다툼을 일삼고 서로 헐뜯고 아첨한다. 겉으로는 굽히나 속으로는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다.
- 平かなるは人평온은 인
- 오상(五常) · 오륜(五倫) 등의 도를 지키고, 한 집안을 평화롭게 하며 사회를 위해 잘 일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 인간계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반이고, 사람은 그 사이에서 상도를 지키며 평화를 구한다.
- 喜ぶは天기쁨은 천
- 천계는 나날의 생활을 기뻐하고 즐기는 경애다. 그러나 천계의 기쁨은 일시적이어서 반드시 쇠하고 옮겨 간다.
- 色法색법
- 물질적 존재. 여기서는 얼굴 생김새와 표정처럼 눈에 보이는 모습. 마음(심법)이 색법인 얼굴에 드러난다는 데서 「남의 얼굴의 색법에 육도가 있다」고 하셨다.
- 冥伏명복
- 그윽이 숨어 있음.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 사성(성문 · 연각 · 보살 · 불)은 일상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으나 생명 안에 숨어 있다.
물음의 강도 — 「어떻게 신심을 세우겠는가」
질문자의 의심이 한 단계 깊어졌다. 6장에서는 경문의 근거를 물었고, 7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8장에서는 경문과 천태 · 장안의 해석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불을 물이라 하고 먹을 희다 하는 것 같아서, 설령 불설이라도 믿기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질문을 이렇게 맺는다. 「어떻게 신심을 세우겠는가(如何が信心を立てんや)」.
이 말이 중요하다. 질문자는 교리를 논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데 믿을 근거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다. 경문의 권위는 인정한다. 그러나 권위만으로는 신심이 서지 않는다. 신심이 서려면 자기 경험과 맞닿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대성인은 이 호소에 응해 경문을 다시 들지 않으시고, 질문자가 매일 보고 있는 「남의 얼굴」로 답하신다. 7장까지가 문증(文證)이었다면, 8장부터는 생활 속의 증거로 내려온다.
하루의 얼굴 — 육도윤회의 중생
강의는 대성인이 인계에 십계가 갖추어졌음을 밝히시면서 먼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미루어 육도를 갖추었음을 밝히셨다고 본다. 우리의 생활은 어떤 때는 성내고, 어떤 때는 탐내며, 어떤 때는 평온하고, 어떤 때는 기뻐하고 즐긴다. 이러한 육도를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이다.
「육도윤회」라는 말은 흔히 죽은 뒤 여섯 세계를 떠도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강의의 읽기에서 육도윤회는 무엇보다 하루 안의 일이다.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나(天) 출근길에 새치기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地獄), 점심에는 남의 성과를 부러워하며(餓鬼), 상사 앞에서는 속을 숨기고 웃으며(修羅), 저녁에는 가족과 평온하게 밥을 먹는다(人). 사이트 「五 일념삼천」 2절이 이 대목을 「장소에서 상태로」라는 관점에서 다루었다면, 강의는 그 상태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윤회의 속도에 주목한다.
대성인이 육도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의 순서가 아니라 「기쁨 · 성냄 · 평온 · 탐냄 · 어리석음 · 아첨」의 순서로 드신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것은 교리의 위계 순서가 아니라 얼굴을 볼 때 실제로 마주치는 순서, 곧 무작위로 바뀌는 생활의 순서다. 그리고 그 뒤에 비로소 「성냄은 지옥 …… 평온은 인」이라고 교리의 이름을 붙이신다. 경험이 먼저이고 이름이 나중이다.
- 8장 · 현상「남의 얼굴의 색법에 육도가 모두 있다」증명된 것: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
- 9장 · 도리「시험 삼아 도리를 더하여 만에 하나라도 펴리라」증명된 것: 성문 · 연각(무상을 보는 눈), 보살(처자를 아끼는 마음)
- 10장 · 현증「현증이 있으면 이를 쓴다」증명된 것: 불계(요순 · 불경보살 · 실달태자, 그리고 법화경을 믿는 마음)
문증(6장) · 이증(7 · 9장) · 현증(8 · 10장) — 불교는 현증을 가장 중히 여긴다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 미신과 관념론 사이
강의는 이 장의 해설 대부분을 십계에 관한 두 가지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데 쓴다. 하나는 대중의 미신이고, 다른 하나는 학자의 관념론이다.
대중의 미신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미신이 횡행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불교에서 설한 것이 잘못 전해져 생긴 것도 적지 않다. 십계도 그 하나다. 세상 사람에게 지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땅 밑 어딘가에 있어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떨어지는 곳, 삼도천을 건너 옥졸에게 시달리고 염마왕 앞에서 심판을 받아 괴로워하는 곳」 정도로밖에 답하지 못하는 것이 실정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학자의 관념론
한편에 미신을 진실로 믿는 대중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생활과 동떨어진 알 수 없는 말로 넘어가는 학자 계층이 있다. 강의는 당시 불교 사전들의 십계 정의를 예로 든다. 강의가 「大蔵法教, 五十三」으로 출처를 단 사전류는 「십계란 미오의 계급을 열 가지로 나눈 것 …… 법계란 제불과 중생의 본체이며, 사성육범이 과보를 받는 경계의 나뉨이 같지 않으므로 십법계가 있다」는 식으로 한문을 늘어놓고, 모치즈키 신코의 『불교대사전』은 「현교에서는 법화경에 의해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 · 천의 육범과 성문 · 연각 · 보살 · 불의 사성으로 십법계를 삼고, 밀교에서는 『이취석경』에 의해 지 · 귀 · 축 · 인 · 천의 오범과 성 · 연 · 보살 · 권불 · 실불의 오성으로 십법계를 삼는다」고 정리한다. 강의는 이것으로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며, 난해한 말을 늘어놓아 마치 고원한 철학인 양 휘두르는 데에 현대 불교계의 혼란이 있다고 비판한다.
강의는 더 나아가 야마베 슈가쿠(山辺習学)의 『불교에서의 지옥의 신연구』를 예로 든다. 야마베는 「지옥 · 극락이나 삼세인과의 설은 말하자면 과거에 연주된 음악과 같은 것」, 「삼세인과설의 종교적 임무는 전적으로 심령상의 기초 공사, 또는 자각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적 시설」이라고 했다. 곧 그에 따르면 지옥 · 극락은 예술적 · 종교적 표현이어서 과학적 · 실증적 입장과 모순되어도 괜찮고, 석가는 그 사상을 종교적 내성(內省)의 수단으로 썼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로 깊은 죄의 자각을 불러일으켜 내면적으로 종교적 자각을 얻게 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옥은 실제로는 없고,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야마베는 또 「현세의 향상은 지옥의 향상이다. 인간이 바르게 교양을 쌓아 가면 마침내 가장 밑의 무간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 마가 극에 달하면 부처가 출현한다」고까지 말했다.
강의는 이것을 불법이 참된 생명 철학임을 모르기 때문에 불교의 원리를 굽혀 제멋대로 견강부회한 설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지옥을 나쁜 짓을 막으려고 가공으로 설정한 것처럼 말하거나, 「현세의 향상은 지옥의 향상」 같은 설을 세우는 것은 불법을 모르는 관념의 유희라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도 주장하는 바는 달라도, 불법을 모르고 관념론을 가지고 노는 점에서는 같다고 강의는 본다.
강의가 인용한 사전 정의와 야마베 슈가쿠의 문장은 강의에서 옮긴 것이며, 원서의 판본 · 쪽은 확인하지 못했다. 야마베 슈가쿠(1882–1944)는 정토진종 오타니파 계열의 불교학자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강의의 비판 논지를 옮기되 강의보다 표현을 세게 하지 않았다.
「팔만사천 법장은 나 한 사람의 일기」
미신도 관념론도 아니라면 십계는 무엇인가. 강의의 답은 「불법은 생활법」이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八万四千の法蔵は我身一人の日記文書なり
팔만사천의 법장은 내 몸 한 사람의 일기 문서다.
팔만사천이라는 방대한 가르침이 모두 나 한 사람의 생명의 기록이다. 지옥을 설한 경전은 내 안의 지옥을, 부처를 설한 경전은 내 안의 부처를 기록한 일기다. 대성인은 지옥과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를 「십자어서」에서 분명히 하셨다.
抑地獄と仏とはいづれの所に候ぞとたづね候へば・或は地の下と申す経文もあり・或は西方等と申す経も候、しかれども委細にたづね候へば我等が五尺の身の内に候とみへて候、さもやをぼへ候事は我等が心の内に父をあなづり母ををろかにする人は地獄其の人の心の内に候
대저 지옥과 부처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혹은 땅 밑이라는 경문도 있고 혹은 서방 등이라는 경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찾아보면 우리 오척의 몸 안에 있다고 보인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어머니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옥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찾아보면(委細にたづね候へば)」이라는 말이 8장의 「자세히 찾으면 반드시 있으리라(委細に之を尋ねば之れ有る可し)」와 겹친다. 경문이 지옥을 땅 밑에, 정토를 서방에 둔 것은 방편의 설명이고, 자세히 찾으면 모두 이 몸 안에 있다. 대성인은 「우에노전미망인답서」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夫れ浄土と云うも地獄と云うも外には候はず・ただ我等がむねの間にあり、これをさとるを仏といふ・これにまよふを凡夫と云う、これをさとるは法華経なり
무릇 정토라 하는 것도 지옥이라 하는 것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가슴속에 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을 부처라 하고, 이것에 미혹한 것을 범부라 한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법화경이다.
강의는 본문에서 말하는 십계란 실로 우리의 고민 · 괴로움 · 슬픔 · 욕망 · 분노 · 어리석음, 그리고 기쁨 등의 생명 상태를 빠짐없이 설해 밝힌 것이라고 정리한다. 불교를 미신 · 신화 · 전설처럼 생각하는 현대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이렇게 지옥 · 아귀 · 축생 같은 말이 나타내는 참뜻을 알고, 십계상주 · 일념삼천의 법문이야말로 참된 종교이며 바른 철학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의는 맺는다.
강의의 논지 — 십계를 땅 밑과 하늘 위의 장소로 믿는 것은 미신이고, 지옥을 도덕 교육을 위한 가공의 장치로 보는 것은 관념론이다. 대성인의 십계는 둘 다 아니다. 지옥도 부처도 「우리 오척의 몸 안에」, 「우리의 가슴속에」 실재하는 생명의 상태다.
명복 — 숨어 있으나 없는 것이 아니다
8장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 장을 여는 열쇠다. 「사성은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으나(冥伏して現われざれども), 자세히 찾으면 반드시 있으리라.」
「명복(冥伏)」은 7장 강의의 「연을 만나지 않으면 그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와 같은 원리다. 사성이 일상의 얼굴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서가 아니라 연을 만나지 않아 숨어 있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없다」고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고도 하지 않으시고, 「숨어 있다」와 「찾으면 있다」를 함께 말씀하신다. 이 두 마디 사이에 9장과 10장 전체가 놓여 있다.
또한 대성인이 육도를 「남의 얼굴의 색법에서」 찾으신 점도 의미가 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얼굴(색법)에 드러난다. 5장에서 거울에 의근까지 비치는 까닭이 「마음의 움직임은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던 강의의 풀이가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色心不二). 그러나 사성, 특히 불계는 얼굴에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찾는가. 9장은 「도리」로, 10장은 「현증」으로 찾는다.
본문
問うて曰く六道に於て分明ならずと雖も粗之を聞くに之を備うるに似たり、四聖は全く見えざるは如何 答えて曰く前には人界の六道之を疑う、 然りと雖も強いて之を言つて相似の言を出だせしなり四聖も又爾る可きか試みに道理を添加して万が一之を宣べん、 所以世間の無常は眼前に有り豈人界に二乗界無からんや、無顧の悪人も猶妻子を慈愛す菩薩界の一分なり、 但仏界計り現じ難し九界を具するを以て強いて之を信じ疑惑せしむること勿れ、 法華経の文に人界を説いて云く「衆生をして仏知見を開かしめんと欲す」涅槃経に云く「大乗を学する者は肉眼有りと雖も名けて仏眼と為す」等云云、 末代の凡夫出生して法華経を信ずるは人界に仏界を具足する故なり。
묻노라. 육도는 분명하지 않다 할지라도 대략 들으니 이를 갖춘 것 같으니라. 그러나 사성은 전혀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가. 답하노라. 앞서는 인계의 육도조차 의심하였느니라. 그러나 굳이 말하여 비슷한 예를 들었던 것이니, 사성도 또한 그러하리라. 시험 삼아 도리를 더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를 펴리라. 이른바 세간의 무상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인계에 이승계가 없겠는가. 돌아볼 줄 모르는 악인도 오히려 처자를 자애하나니 보살계의 일분이니라. 다만 불계만은 나타나기 어려우나, 구계를 갖춘 것으로써 굳이 이를 믿고 의혹하지 말지니라. 법화경의 글에 인계를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고, 열반경에 「대승을 배우는 이는 육안이 있다 할지라도 이름하여 불안이라 한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말대의 범부가 태어나 법화경을 믿는 것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한 까닭이니라.
어구 풀이
- 相似の言상사의 말
- 비슷한 예를 든 말. 8장에서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을 육도에 견준 것을 가리킨다. 엄밀한 증명이 아니라 짐작하게 하는 비유라는 겸손한 표현이다.
- 道理を添加して도리를 더하여
- 8장이 눈에 보이는 현상(얼굴)으로 보였다면, 9장은 이치로 미루어 보인다는 뜻.
- 世間の無常세간의 무상
- 세간은 중생이 사는 세계, 무상은 늘 생멸 변화하여 한순간도 같은 상태에 머물지 않는 것. 이승은 세간의 무상을 관하고 공적한 열반에 돌아가는 것을 궁극으로 삼았다.
- 二乗界이승계
- 성문계와 연각계. 성문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이, 연각(독각)은 스스로 연기의 이치나 자연의 변화를 보고 깨닫는 이다. 둘 다 무상의 관찰에서 출발한다.
- 無顧の悪人무고의 악인
- 남을 돌아보지 않는 악인, 앞뒤를 가리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
- 菩薩界の一分보살계의 일분
- 보살계의 일부분. 악인이 처자를 아끼는 마음은 온전한 보살의 자비는 아니지만, 남을 위하는 마음의 싹이라는 점에서 보살계의 한 조각이다.
- 涅槃経열반경
- 『대반열반경』. 석존이 입멸 직전에 설했다는 경으로, 일체중생실유불성을 설한다. 본문의 「대승을 배우는 이는 육안이 있다 할지라도 이름하여 불안이라 한다」는 이 경의 글이다(T12 no.374, 권 · 쪽 확인 중).
- 肉眼 · 仏眼 · 五眼육안 · 불안 · 오안
- 육안 · 천안 · 혜안 · 법안 · 불안을 오안이라 한다. 육안은 몸에 갖춘 보통의 눈, 천안은 원근 ·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는 천인의 눈, 혜안은 이승이 공리를 보는 지혜의 눈, 법안은 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법문을 분명히 아는 눈, 불안은 삼세시방의 일체를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이며 나머지 사안을 모두 갖춘다(오안구족).
- 末代の凡夫말대의 범부
- 말법 시대의 범부. 석존에게서 직접 하종을 받지 못한, 탐 · 진 · 치가 치성한 시대의 사람들.
왜 「삼성」인가 — 사성에서 불계를 따로 떼다
질문은 「사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인데, 장의 제목은 「마음에 갖춘 삼성(三聖)을 보이다」다. 강의의 장 구분이 왜 「사성」이 아니라 「삼성」인가. 이 장에서 도리로 밝혀지는 것은 성문 · 연각(이승계)과 보살계, 곧 세 성인의 세계이고, 넷째인 불계는 「다만 불계만은 나타나기 어렵다」며 따로 떼어 다음 장 「불계를 밝히다」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강의는 이렇게 정리한다. 지옥계부터 불계까지 가운데 보살계까지의 구계는 지옥이나 보살의 본성의 일부를 상식적인 도리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불계만은 말이나 설명이 미치는 곳이 아니다. 9장 하나 안에서 세 세계(삼성)는 도리로 증명되고, 불계는 도리의 한계에서 「믿음」의 문제로 넘겨진다. 장의 이름이 이 구조를 그대로 보여 준다.
상사에서 도리로 — 증명 방식의 전환
대성인의 답은 질문자의 태도를 짚는 데서 시작한다. 「앞서는 인계의 육도조차 의심하였다. 그래서 굳이 비슷한 예를 들었다.」 그리고 「사성도 그러할 것이다. 시험 삼아 도리를 더하여 만에 하나라도 펴리라」고 하신다.
여기에는 증명 방식의 전환이 있다. 8장의 육도는 남의 얼굴이라는 현상으로 보였다. 표정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성은 얼굴에 잘 떠오르지 않으므로 같은 방법을 쓸 수 없다. 그래서 9장은 도리, 곧 이치로 미루어 아는 방법을 쓴다. 그리고 10장의 불계는 도리로도 다 증명되지 않으므로 현증, 곧 실제로 나타난 증거를 든다. 8 · 9 · 10장은 현상 → 도리 → 현증이라는 세 단계의 증명이다(도표 10).
「만에 하나라도(万が一)」라는 말에도 주의할 만하다. 대성인은 도리로 사성을 완전히 증명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신다. 도리는 짐작하게 할 뿐이며, 특히 불계는 끝내 도리 너머에 있다. 이 겸손한 한정이 10장의 「현증」으로 가는 다리가 된다.
무상을 보는 눈, 처자를 아끼는 마음 — 이승과 보살
무상을 보는 눈이 곧 이승계
「세간의 무상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인계에 이승계가 없겠는가.」 현대어역은 이것을 이렇게 푼다. 세간의 모습을 보면 유위전변(有爲轉變)의 모습이 눈앞에 있다. 이 무상을 밤낮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인계에 이승계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도리는 「무상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무상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근거한다. 꽃이 지고 사람이 늙고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보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구나」라고 느낀다. 그 느낌이 일어나는 자리가 성문 · 연각의 마음이다. 성문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연각은 스스로 꽃잎과 낙엽을 보고 그 이치를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의 싹은 무상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 7장 강의의 십계 생활표에서 성문계 · 연각계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닫고 자기의 사색에서 안심을 구하는 생활」로 정리한 것과 같은 자리다.
악인도 처자는 아낀다 — 보살계의 일분
「돌아볼 줄 모르는 악인도 오히려 처자를 자애하니 보살계의 일분이다.」 남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악인이라도 자기 아내와 자식은 사랑한다. 그 사랑은 범위가 좁고 집착이 섞여 있어 온전한 보살의 자비는 아니다. 그러나 「남을 위하는 마음」의 싹이라는 점에서 보살계의 한 조각이다. 대성인이 「일분(一分)」이라고 정확히 한정하신 것은, 그것을 보살계 전체라고 과장하지도 않고 없다고 하지도 않으시려는 것이다.
이 도리가 강력한 것은 「악인」을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에게 보살계가 있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다. 가장 멀어 보이는 악인에게도 보살계의 일분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있다. 6장에서 대성인이 제바달다 · 나찰녀 · 용녀처럼 가장 먼 자리의 성불로 십계호구를 증명하신 것과 같은 방법이다.
불계만은 나타나기 어렵다 — 믿음이 곧 증거
구계를 갖추었으니 불계도 믿어라
「다만 불계만은 나타나기 어렵다. 구계를 갖춘 것으로써 굳이 이를 믿고 의혹하지 말라.」 지옥부터 보살까지 아홉 세계가 인계에 갖추어졌음을 인정했다면, 십계호구의 원리상 불계도 갖추어졌다고 믿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리고 경문 둘을 증거로 드신다. 법화경 방편품의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열게 하고자 한다」(6장에서는 「구계소구의 불계」의 총론으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인계를 설한」 글로 쓰였다), 그리고 열반경의 「대승을 배우는 이는 육안이 있다 할지라도 이름하여 불안이라 한다」.
오안 — 육안이 곧 불안
열반경의 글은 오안(五眼)의 사상 위에 서 있다. 육안 · 천안 · 혜안 · 법안 · 불안의 다섯 가운데, 범부가 가진 것은 육안뿐이다. 그런데 열반경은 대승을 배우는 이는 육안을 가졌어도 그것을 불안이라 부른다고 한다. 눈이라는 기관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눈으로 보는 생명의 경애가 바뀌는 것이다. 5장의 육근청정에서 「눈의 공덕」이 시력이 아니라 믿음과 불신의 갈림을 보는 것으로 풀렸던 것과 같은 구조다.
강의는 어구 풀이에서 오안을 오늘의 말로 옮긴다. 혜안은 범부의 입장에서 말하면 깊은 지식과 체험에 근거한 판단력이고, 법안은 불법의 법칙 위에서 일체의 사물을 판단하는 힘이다. 그리고 대성인의 「개목초」를 인용한다.
諸の声聞は爾前の経経にては肉眼の上に天眼慧眼をう法華経にして法眼・仏眼備われり
여러 성문은 이전의 경들에서는 육안 위에 천안 · 혜안을 얻었고, 법화경에서 법안 · 불안을 갖추었다.
강의는 근본의 판단력은 본존을 믿음으로써 얻은 법안 · 불안에 의할 수밖에 없다고 맺는다.
- 佛眼불안삼세시방의 일체를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 나머지 사안을 모두 갖춤(오안구족)
- 法眼법안보살이 중생을 구하려 법문을 분명히 아는 눈(강의) 불법의 법칙 위에서 일체를 판단하는 힘
- 慧眼혜안이승이 공리를 보는 지혜의 눈(강의) 깊은 지식과 체험에 근거한 판단력
- 天眼천안원근 ·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는 천인의 눈
- 肉眼육안몸에 갖춘 보통의 눈
말대의 범부가 법화경을 믿는 것
그리고 9장의 결론이 온다. 「말대의 범부가 태어나 법화경을 믿는 것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한 까닭이다.」 이 문장의 논리적 구조는 「五 일념삼천」 2절이 이미 짚었다. 불계가 없다면 부처의 가르침을 믿으려는 마음이 일어날 수 없으므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불계의 증거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강의를 따라 이 문장을 한 걸음 더 들어가 읽는다.
강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의 생명에는 본유상주(本有常住)의 불계가 있다. 그 불계를 사실 위에 나타내어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경」을 향해 내 생명의 실체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명경」이란 본존이고, 「향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본존을 유일 최존(唯一最尊)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대의 범부가 태어나 법화경을 믿는다」는 것은 본존을 믿는 것이며, 우리 범부가 본존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인계에 불계를 갖춘 증거다.
5장의 「명경을 향할 때 비로소 자구의 육근을 본다」가 9장 끝에서 다시 돌아온다. 5장에서 거울은 「무엇을 비추어 보는 도구」였다면, 9장에서는 「그 거울을 향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불계」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강의가 5장에서 「거울 자체가 불계」라고 풀었던 것과 정확히 맞물린다.
9장의 결론은 증명의 방향을 뒤집는다. 「불계가 보여야 믿을 수 있다」가 아니라 「믿는다는 사실이 불계가 있다는 증거」다. 말법의 범부가 본존을 믿는 그 한 생각이 곧 인계소구의 불계다.
본문
問うて曰く十界互具の仏語分明なり然りと雖も我等が劣心に仏法界を具すること信を取り難き者なり今時之を信ぜずば必ず一闡提と成らん願くば大慈悲を起して之を信ぜしめ阿鼻の苦を救護したまえ。 答えて曰く汝既に唯一大事因縁の経文を見聞して之を信ぜざれば釈尊より已下四依の菩薩並びに末代理即の我等如何が汝が不信を救護せんや、 然りと雖も試みに之を云わん仏に値いたてまつつて覚らざる者・阿難等の辺にして得道する者之れ有ればなり、 其れ機に二有り一には仏を見たてまつり法華にして得道す二には仏を見たてまつらざれども法華にて得道するなり、 其の上仏教已前は漢土の道士・月支の外道・儒教・四韋陀等を以て縁と為して正見に入る者之れ有り、 又利根の菩薩凡夫等の華厳・方等・般若等の諸大乗経を聞きし縁を以て大通久遠の下種を顕示する者多々なり例せば独覚の飛花落葉の如し教外の得道是なり、 過去の下種結縁無き者の権小に執着する者は設い法華経に値い奉れども小権の見を出でず、 自見を以て正義と為るが故に還つて法華経を以て或は小乗経に同じ或は華厳大日経等に同じ或は之を下す、 此等の諸師は儒家外道の賢聖より劣れる者なり、此等は且らく之を置く、 十界互具之を立つるは石中の火・木中の花信じ難けれども縁に値うて出生すれば之を信ず人界所具の仏界は水中の火・火中の水最も甚だ信じ難し、 然りと雖も竜火は水より出で竜水は火より生ず心得られざれども現証有れば之を用ゆ、既に人界の八界之を信ず、 仏界何ぞ之を用いざらん堯舜等の聖人の如きは万民に於て偏頗無し人界の仏界の一分なり、 不軽菩薩は所見の人に於て仏身を見る悉達太子は人界より仏身を成ず此等の現証を以て之を信ず可きなり。
묻노라. 십계호구의 부처의 말씀은 분명하니라. 그러나 우리의 열등한 마음에 불법계를 갖추었다는 것은 믿음을 내기 어려운 것이니라. 지금 이것을 믿지 않으면 반드시 일천제가 되리라. 원컨대 대자비를 일으켜 이것을 믿게 하시어 아비지옥의 고통을 구호해 주소서. 답하노라. 그대가 이미 유일대사인연의 경문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석존 이하 사의의 보살과 말대 이즉의 우리가 어떻게 그대의 불신을 구호하겠는가. 그러나 시험 삼아 이를 말하리라. 부처를 만나고도 깨닫지 못한 이가 아난 등의 곁에서 득도한 일이 있기 때문이니라. 무릇 기(機)에 둘이 있느니라. 하나는 부처를 뵙고 법화경에서 득도하고, 둘은 부처를 뵙지 못하더라도 법화경으로 득도하느니라. 그뿐 아니라 불교 이전에는 한토의 도사와 월지의 외도가 유교와 사위타 등을 연으로 삼아 정견에 든 이가 있었느니라. 또 근기가 날카로운 보살과 범부 등이 화엄 · 방등 · 반야 등의 여러 대승경을 들은 연으로 대통 · 구원의 하종을 드러낸 이가 많고 많으니, 예컨대 독각이 날리는 꽃과 지는 잎을 보고 깨닫는 것과 같으니라. 교외(敎外)의 득도가 이것이니라. 과거의 하종 결연이 없는 이로서 권교 · 소승에 집착하는 이는, 설령 법화경을 만나더라도 소승 · 권교의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견해를 정의로 삼는 까닭에 도리어 법화경을 혹은 소승경과 같다 하고, 혹은 화엄경 · 대일경 등과 같다 하며, 혹은 이를 낮추느니라. 이러한 여러 스승은 유가 · 외도의 현성보다 못한 이들이니라. 이것들은 잠시 두기로 하느니라. 십계호구를 세우는 것은 돌 속의 불, 나무 속의 꽃과 같아서 믿기 어려우나, 연을 만나 나타나면 이를 믿느니라. 인계에 갖추어진 불계는 물속의 불, 불 속의 물과 같아서 가장 심히 믿기 어려우니라. 그러나 용의 불은 물에서 나오고 용의 물은 불에서 생기나니, 마음으로 헤아려지지 않아도 현증이 있으면 이를 쓰느니라. 이미 인계의 팔계는 이를 믿었거늘 불계를 어찌 쓰지 않겠는가. 요 · 순 등의 성인 같은 이는 만민에게 치우침이 없었으니 인계에 갖춘 불계의 일분이니라. 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불신(佛身)을 보았고, 실달태자는 인계로부터 불신을 이루었느니라. 이러한 현증으로써 이를 믿어야 하느니라.
어구 풀이
- 一闡提일천제
- 범어 잇찬티카(icchantika)의 음역. 신불구(信不具) · 단선근(斷善根)으로 번역한다. 바른 법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성불의 인연을 끊은 사람.
- 阿鼻아비
- 범어 아비치(avīci)의 음역으로 무간(無間)이라 번역한다. 팔대지옥 가운데 가장 밑에 있어 고통이 끊임없는 지옥. 정법을 비방한 죄로 떨어진다고 한다.
- 唯一大事因縁유일대사인연
- 방편품의 「제불세존은 오직 하나의 큰 일의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다(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 그 일대사가 중생의 불지견을 개시오입하게 하는 것이다(6장 참조).
- 四依の菩薩사의의 보살
- 사의에는 법의 사의와 사람의 사의가 있으며, 여기서는 사람의 사의다. 부처 멸후에 불법을 홍통하여 중생이 의지할 곳이 되는 사람들을 네 단계로 나눈 것이다. 소승 · 별교 · 원교의 지위에 배당하면, 초의는 삼현(별교 십주 · 십행 · 십회향, 원교 십신), 이의는 수다원 · 사다함(별교 초지~육지, 원교 초주~육주), 삼의는 아나함(별교 칠지~구지, 원교 칠주~구주), 사의는 아라한(별교 십지 · 등각, 원교 십주 이상)이다. 강의는 말법의 사의는 지용보살이며, 별해서는 대성인, 총해서는 절복하는 모든 이가 사의의 보살이라고 한다.
- 理即이즉
- 천태가 세운 육즉(六即)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 이치(理)의 위에서만 부처와 같다는 뜻으로, 이치로 논하면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이즉의 범부라 한다. 육즉은 이즉 · 명자즉 · 관행즉 · 상사즉 · 분진즉 · 구경즉이다. 대성인은 자신을 「말대 이즉의 우리」 가운데 두셨다.
- 阿難아난
- 석존의 시자로 다문제일. 석존 멸후 경전 결집에서 경을 외웠다. 부처를 직접 뵙고도 깨닫지 못한 이가 부처 멸후 아난 등을 통해 득도한 예가 있다는 것이 「제2의 기근」의 근거다.
- 道士 · 月支 · 外道도사 · 월지 · 외도
- 도사는 중국 도교의 수행자. 월지(月氏)는 중국 · 일본에서 쓰인 인도의 이름으로, 기원전 2세기 흉노에 쫓겨 중앙아시아로 옮긴 월지족을 거쳐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기 때문에 인도 자체를 월지라 불렀다. 외도는 불교 밖의 가르침.
- 四韋陀사위타
- 네 가지 베다(Veda). 고대 인도 바라문교의 네 성전, 곧 리그 · 야주르 · 사마 · 아타르바 베다다. 베다는 「안다」에서 온 말로 성스러운 지식을 뜻한다. 성립은 기원전 1500~1000년 무렵부터 기원전 500년 무렵까지에 걸친다.
- 大通久遠の下種대통 · 구원의 하종
- 대통은 삼천진점겁 전 대통지승불 때 석존이 열여섯째 왕자로서 법화경을 복강(覆講)하여 중생에게 심은 하종(대통하종), 구원은 오백진점겁 전 석존이 성불한 때의 하종(구원하종). 재세의 중생 가운데는 법화경 이전의 대승경을 듣는 것을 연으로 이 과거의 하종을 드러낸 이가 많았다.
- 独覚の飛花落葉독각의 비화낙엽
- 독각(연각)은 부처가 없는 세상에 태어나 날리는 꽃과 지는 잎 같은 자연의 변화를 보고 스스로 무상을 깨닫는다. 교외의 득도의 비유.
- 教外の得道교외의 득도
- 부처의 직접적인 가르침(교) 밖에서 도를 얻는 것.
- 小権の見소권의 견
- 소승 · 권대승에 사로잡힌 견해.
- 石中の火 · 木中の花석중의 화 · 목중의 화
- 돌 속에 불이 있다는 것, 나무 속에 꽃이 있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아 믿기 어렵지만, 부싯돌을 치거나 봄이 오면(연을 만나면) 실제로 나타난다.
- 水中の火 · 火中の水수중의 화 · 화중의 수
- 물속의 불, 불 속의 물.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 안에 있다는 것으로, 석중의 화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의 비유. 인계에 갖춘 불계가 이렇다.
- 竜火 · 竜水용화 · 용수
- 용이 물에서 불을 내고 불에서 물을 낸다는 전승.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있다고 여겨진 현증의 비유다(출전 확인 중).
- 堯舜요순
- 중국 고대 전설의 성왕. 요는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순은 서른 살에 요의 신임을 얻어 섭정이 되고 왕위를 이어 받아 팔원 · 팔개의 인재 열여섯을 등용해 선정을 폈다. 순은 효로 이름났는데, 후처의 말에 미혹된 완고한 아버지가 지붕에 올려 불을 지르고 우물에 묻으려 하는 등 거듭 해치려 했으나 끝까지 효양을 다했다고 한다. 『사기』는 둘을 오제(五帝)에 든다.
- 不軽菩薩불경보살
- 상불경보살품 제20의 상불경보살. 석존의 과거세 수행의 한 모습으로, 위음왕불의 상법 시대에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하여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스물네 글자를 외우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배했다. 증상만의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았지만, 이 수행이 성불의 인이 되었다.
- 悉達太子실달태자
- 싯다르타(Siddhārtha) 태자. 출가 전 석존의 이름.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가 되었으니 인계로부터 불신을 이룬 현증이다(인물탐구 석가모니 세존 참조).
물음의 절박함 — 「믿지 못하면 일천제가 된다」
질문자의 마지막 질문은 앞의 것들과 결이 다르다. 그는 십계호구의 부처 말씀이 분명함을 인정한다. 지옥부터 보살까지 아홉 세계가 인계에 있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우리의 열등한 마음(劣心)에 불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믿지 못하면 반드시 일천제가 되어 아비지옥에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원컨대 대자비를 일으켜 이것을 믿게 하시어 아비의 고통을 구호해 달라」고 호소한다.
강의는 이 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육도를 밝히고 삼성을 밝힌 다음, 「다만 불계만은 나타나기 어렵다」는 앞 글을 받아, 십계호구의 경문은 분명하지만 범부의 열등한 마음에 불계를 갖추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고, 그 뜻을 믿지 못하면 반드시 일천제가 될 것이니 믿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질문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인계에 반드시 불계를 갖추었음을 간절히 보이셨다.
강의는 또 이 장의 무게를 어서 전체의 목적에서 찾는다. 이 어서는 말법의 범우(凡愚)인 우리가 믿어야 할 본존을 밝히시는 것이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생명 속에 불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불계가 없다면 본존을 믿을 주체도 없다. 그래서 10장은 이 편의 결론이면서 다음 편(본존을 수지하는 관심)의 전제가 된다.
일대사인연 — 불지견을 무엇으로 여는가
대성인의 답은 엄하게 시작한다. 그대가 이미 유일대사인연의 경문을 보고 들었으면서 믿지 않는다면, 석존 이하 사의의 보살도, 말대 이즉의 우리도 그대의 불신을 구할 수 없다. 이 엄한 말 다음에 곧바로 「그러나 시험 삼아 말하리라」가 온다. 부처를 만나고도 깨닫지 못한 이가 아난 등을 통해 득도한 예가 있으니, 지금 여기서 설명해 그대가 알게 되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강의는 일대사인연의 경문을 다시 풀이한다. 부처가 출현하는 근본 목적은 중생의 불지견을 개발해, 그 불지견을 중생에게 보이고, 깨닫게 하고, 불지견의 도에 들게 하는 데 있다. 아무리 부처에게 힘이 있어도 중생에게 불지견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열 수 있겠는가. 중생에게 불계가 갖추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말법에 이르러 어떻게 그 불지견을 열게 하느냐에 있다.
강의의 답은 시대에 따라 여는 도구가 다르다는 것이다. 재세의 석존은 법화경 28품으로 중생의 불지견을 열었고, 상법의 천태 · 전교는 『마하지관』으로 열었다. 그러나 말법에 이르러서는 법화경 28품도 『마하지관』도 이(理)의 위의 것이어서 사실로는 쓸모가 없다. 그래서 말법 민중의 불지견을 열어 최고 유일의 행복을 얻게 하시려고 대성인은 삼대비법의 본존을 도현하시어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이 본존을 믿고 행하지 않고는 불지견을 열 수 없다고 강의는 말한다.
- 재세석존법화경 28품으로 불지견을 엶
- 상법천태 · 전교『마하지관』으로 불지견을 엶
- 말법대성인삼대비법의 본존강의: 「이 본존을 믿고 행하지 않고는 불지견을 열 수 없다」
두 종류의 기근과 교외의 득도
부처를 뵙고, 부처를 뵙지 못하고
「무릇 기에 둘이 있다. 하나는 부처를 뵙고 법화경에서 득도하고, 둘은 부처를 뵙지 못하더라도 법화경으로 득도한다.」 강의는 이 말씀이 일단(一往)은 석존 재세에 통하지만, 재차(再往) 보면 그 기(機)는 말법의 기를 가리킨다고 읽는다. 말법의 기에서는 대성인을 직접 뵙고 자행화타의 제목을 부른 이, 또는 본존을 받아 제목을 부른 이가 모두 성불했다. 그리고 우리처럼 대성인을 뵐 수 없더라도 본존을 믿고 행하는 이는 또한 성불할 수 있다. 부처를 직접 뵙느냐 뵙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법화경으로」, 곧 그 법으로 득도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불교 이전의 득도와 대승경을 연으로 한 득도
대성인은 이어 두 가지 「교외의 득도」를 드신다. 하나는 불교 이전에 중국의 도사와 인도의 외도가 유교와 사위타 등을 연으로 정견에 든 경우, 다른 하나는 근기가 날카로운 보살과 범부가 법화경 이전의 화엄 · 방등 · 반야 등의 대승경을 들은 연으로 대통 · 구원의 하종을 드러낸 경우다. 현대어역은 뒤의 경우를 이렇게 푼다. 법화경 적문의 설법을 듣기 전에 이미 대통지승불 때의 하종을 받은 중생이 자기라는 과거세의 인연을 떠올릴 수 있었다. 독각이 부처 없는 세상에서 날리는 꽃과 지는 잎을 보고 무상관의 극치를 깨닫는 것과 같다. 이것들을 교외의 득도라 한다.
강의는 이 두 가지를 말법의 관점에서 다시 평가한다. 불교 이전의 득도에 대해서는, 대성인이 「유교 · 사위타 등으로 정견에 든다」고 하셨지만 이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 유여열반(有餘涅槃), 곧 성문 · 연각의 깨달음이라고 본다. 오늘날로 치면 그리스도교 등이 이 범주에 들 것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대승경을 연으로 한 득도에 대해서는, 그것은 정법 · 상법 시대의 일이며 말법에서는 이것으로 결코 득도 성불할 수 없다고 한다. 말법에서는 오직 제목의 오자만이 불지견을 개발한다. 강의는 이 어서의 예에 비추어, 아직 삼대비법의 본존이 유포되지 않은 나라에서도 근기가 날카로운 보살 · 범부가 있으면 다만 제목을 부르는 것으로 구원원초의 하종을 드러낼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인다.
「교외의 득도」에 관한 강의의 평가(유여열반 · 그리스도교 언급 · 말법에는 제목뿐)는 1960년대 강의의 관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강의보다 표현을 세게 하지 않았다.
권소에 집착하는 이 — 하종 결연과 열린 마음
대성인은 반대의 경우도 드신다. 과거의 하종 결연이 없는 이로서 권교 · 소승에 집착하는 이는, 설령 법화경을 만나도 그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견해를 정의로 삼아 도리어 법화경을 소승경과 같다 하거나, 화엄경 · 대일경과 같다 하거나, 그보다 낮다고 한다. 이런 여러 스승은 유가 · 외도의 현성보다 못하다. 이 대목은 법화경을 소승과 동일시한 이들, 화엄종 · 진언종처럼 법화경을 화엄경 · 대일경과 같거나 그보다 아래로 본 이들을 겨냥한 것이다.
강의는 여기서 두 가지를 짚는다. 하나는, 설령 말법 하종의 본존인 삼대비법의 대만다라를 만나더라도 다른 사종(邪宗)에 집착이 있는 이는 결코 불지견을 열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니치칸 상인의 말씀을 인용해 그 반대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過去の下種結縁無しと雖も権小に執着せざれば今日始めて下種結縁して正法の行者と成るなり
과거의 하종 결연이 없다 할지라도 권교 · 소승에 집착하지 않으면, 오늘 비로소 하종 결연하여 정법의 행자가 된다.
현대어역도 「과거세에 하종 결연이 없어도 권소에 집착하지 않는 이는 법화의 정견에 들어 득도할 수 있다」고 보충한다. 결정적인 것은 과거의 인연이 아니라 지금의 집착이다. 과거에 씨를 받지 못했어도 집착을 내려놓으면 오늘 씨를 받을 수 있다. 말법이 하종의 시대라는 제5편 이후의 논지가 여기서 이미 예고된다.
돌 속의 불, 물속의 불 — 믿음의 두 단계
「이것들은 잠시 두기로 한다」고 하신 뒤, 대성인은 본론으로 돌아오신다. 이 대목의 비유는 두 단계로 짜여 있다.
첫 단계는 십계호구 일반이다. 그것은 「돌 속의 불, 나무 속의 꽃」과 같다. 돌을 보고 불이 들어 있다고, 겨울의 마른 가지를 보고 꽃이 들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싯돌을 치면 불꽃이 튀고, 봄이 오면 꽃이 핀다. 연을 만나 나타나면 사람들은 믿는다.
둘째 단계는 인계소구의 불계다. 그것은 「물속의 불, 불 속의 물」과 같아서 가장 심히 믿기 어렵다. 돌과 불, 나무와 꽃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과 불은 정반대다. 탐 · 진 · 치에 물든 범부의 열등한 마음과 청정한 불계는 물과 불처럼 반대되어 보인다. 그 반대되는 것이 서로 안에 있다는 것이니 가장 믿기 어렵다.
그러나 대성인은 곧바로 「용의 불은 물에서 나오고 용의 물은 불에서 생긴다」는 전승을 드신다. 마음으로 헤아려지지 않아도 현증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쓴다. 그리고 질문자를 향해 논리를 닫으신다. 「이미 인계의 팔계는 이를 믿었거늘 불계를 어찌 쓰지 않겠는가.」 질문자는 8 · 9장에서 육도와 이승 · 보살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팔계」라 하신 것은 인계 자신을 뺀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 · 성문 · 연각 · 보살의 여덟이다. 여덟을 믿었다면 마지막 하나도 믿어야 한다.
세 가지 현증 — 요순 · 불경 · 실달
대성인은 인계에 불계가 있다는 현증으로 세 사람을 드신다. 이 세 예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불계를 보여 준다.
요순 — 치우침 없는 마음은 불계의 일분
「요 · 순 등의 성인 같은 이는 만민에게 치우침이 없었으니 인계에 갖춘 불계의 일분이다.」 현대어역은 중국 고대의 요왕 · 순왕이 만민에게 치우친 마음 없이 평등하게 선정을 행한 것이 인계에 갖춘 불계의 일분이 나타난 것이라고 푼다. 불교를 몰랐던 고대의 왕들이지만,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대하는 그 마음에 부처의 평등한 자비의 한 조각이 나타났다. 9장의 「악인도 처자를 아끼니 보살계의 일분」과 같이, 여기서도 대성인은 「일분」이라고 정확히 한정하신다. 그것은 불계 전체가 아니라 불계가 인간의 행위에 비친 한 조각이다. 순이 자기를 해치려는 아버지에게 끝까지 효를 다했다는 전승은, 그 「치우침 없음」이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불경보살 — 만나는 사람마다 불신을 보다
「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불신을 보았다.」 현대어역은 「불경보살은 보는 사람마다 모두 예배하여 『그대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다」고 푼다. 상불경보살품에 따르면 불경보살은 경전을 읽고 외우는 수행을 하지 않고, 다만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하여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예배했다.
我深敬汝等 不敢輕慢 所以者何 汝等皆行菩薩道 當得作佛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하여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팡이로 때리고 돌을 던졌지만, 그는 멀리 피해서도 큰 소리로 같은 말을 외쳤다. 불경보살이 사람들에게서 「불신을 보았다」는 것은, 그 사람들 각자의 인계에 불계가 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요순이 불계의 일분을 「행한」 예라면, 불경보살은 남의 불계를 「본」 예다. 그리고 그 봄 자체가 불경보살 자신의 불계의 작용이며, 그 수행이 그대로 성불의 인이 되었다. 이 품은 대성인이 자신의 홍교와 박해를 비추어 보신 거울이기도 하다.
실달태자 — 인계로부터 불신을 이루다
「실달태자는 인계로부터 불신을 이루었다.」 석존은 인도 카필라 성의 태자로 태어나 생로병사를 고민하고 출가해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이가 부처가 되었으니, 인계에 불계가 있다는 가장 직접적인 현증이다. 요순이 불계의 「일분」이었다면, 실달태자는 불계의 「온전함」을 인간의 몸으로 이룬 예다.
세 예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사다리가 보인다. 요순은 불교 밖에서 불계의 일분을 나타냈고, 불경보살은 남의 생명에서 불계를 보았으며, 실달태자는 자기의 생명에서 불계를 온전히 이루었다. 「이러한 현증으로써 이를 믿어야 한다.」
- 요순만민에게 치우침이 없었다불계의 「일분」을 행함
- 불경보살만나는 사람마다 불신을 보았다남의 불계를 봄我深敬汝等 不敢輕慢 … 當得作佛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하여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 … 마땅히 성불하리라
- 실달태자인계로부터 불신을 이루었다불계를 온전히 이룸
현증을 가장 중히 여긴다 — 문증 · 이증 · 현증
강의는 「석중의 화 · 목중의 화와 같아 믿을 수 없지만 연을 만나 나타나면 믿는다」는 말씀에서 불교의 증거주의를 읽는다. 불교는 모두 증거주의이며, 문증(文證) · 이증(理證) · 현증(現證)의 세 증거를 세우는데, 그 가운데서도 현증을 가장 중히 여긴다. 본존을 믿으면 행복해지고 불지견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경문이나 이론이 있어도, 실제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진실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강의는 이 본존을 믿는 이는 반드시 행복해지는 증거를 잡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 편 전체를 돌아보면 세 증거가 차례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6장의 열두 경문은 문증이었다. 7장의 난신난해와 9장의 「도리를 더하여」는 이증이었다. 그리고 8장의 얼굴과 10장의 요순 · 불경 · 실달은 현증이었다. 대성인은 질문자의 의심이 깊어질 때마다 다른 종류의 증거를 꺼내 드셨고, 마지막에 현증으로 닫으셨다. 「현증이 있으면 이를 쓴다」는 말씀은 이 편의 방법론 자체를 요약한다.
10장의 결론 — 인계소구의 불계는 「물속의 불」처럼 가장 믿기 어렵다. 그러나 요순의 치우침 없는 마음, 불경보살의 예배, 실달태자의 성불이라는 현증이 있고, 무엇보다 말대의 범부가 법화경을 믿는다는 사실이 있다. 불교는 현증을 가장 중히 여긴다.
이 편을 맺으며
제2편은 「관심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인계에 불계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길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5장에서 대성인은 관심을 「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이라 정의하시고, 자기 얼굴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하듯 자기 생명의 십계를 보려면 명경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강의는 이 문장을 두 겹으로 읽었다. 글에 붙여 읽으면 천태의 관심이고 명경은 법화경과 『마하지관』이다. 대성인의 본뜻으로 읽으면 관심은 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는 것이며, 명경은 본존이고, 나아가 우리의 신심이다. 거울에 비치는 아홉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거울 자체인 불계 — 이 그림이 이 편 전체의 밑그림이었다.
6장부터 10장까지는 질문자의 의심이 다섯 번 깊어지는 과정이었다. 경문을 묻고(6장), 보이지 않는다 하고(7장), 불설이라도 믿기 어렵다 하고(8장), 사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고(9장), 마침내 믿지 못하면 일천제가 되리라며 구원을 청한다(10장). 대성인은 그때마다 증명의 방법을 바꾸셨다. 열두 경문의 문증, 난신난해와 수자의의 법리,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얼굴의 육도, 무상을 보는 눈과 처자를 아끼는 마음이라는 도리, 그리고 요순 · 불경 · 실달의 현증. 그 끝에서 「말대의 범부가 법화경을 믿는 것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한 까닭」이라는 한 문장이, 믿음 자체를 불계의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질문자의 의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3편(11~16장)에서 그는 한층 근본적인 반문을 던진다. 교주석존은 삼혹을 끊고 삼신을 갖춘 존귀한 부처인데, 어떻게 범부의 한 생각에 그런 부처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인가(11장, 교주에 맞추어 묻다). 또 경론의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12장, 교론에 맞추어 묻다). 대성인은 이 큰 난을 하나씩 풀어 가시며(13 · 14장), 본존의 덕용을 밝히시고(15장), 마침내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되어 있다.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는 수지즉관심의 결론에 이르신다(16장). 이 편에서 「거울을 향하는 마음」이라 불렀던 것이, 다음 편에서 「오자를 수지하는 것」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참고 문헌
원전
- 『묘법연화경』 방편품 · 비유품 · 법사품 · 견보탑품 · 제바달다품 · 종지용출품 · 여래수량품 · 법사공덕품 · 상불경보살품 · 여래신력품 · 다라니품, 구마라집 역, T9 no.262
- 『대반열반경』, T12 no.374
- 『대방광불화엄경』(60권본), T9 no.278
- 천태 지의, 『마하지관』 T46 no.1911 /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묘락 담연,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 『법화문구기』 T34 no.1719 / 『지관대의』
- 니치렌 대성인, 「관심의 본존초」 · 「개목초」 · 「일생성불초」 · 「입정관초」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 「치병대소권실위목」 · 「제경과 법화경과 난이의 사」 · 「십자어서」 · 「우에노전미망인답서」 · 「우에노전답서」 · 「다카하시입도전답서」 · 「백육개초」 · 「본인묘초」 · 『어의구전』
- 니치칸 상인, 「관심본존초 문단」
연구
- 창가학회 교학부, 『世界広布の翼を広げて 教学研鑽のために — 観心本尊抄』 제2판, 聖教新聞社, 2024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岩田諦靜, 「『摩訶止観』第五上第七正修止観における心意識(一念三千)説について」, 『身延論叢』 2, 1997
- Paul L. Swanson (tr.), Clear Serenity, Quiet Insight: T'ien-t'ai Chih-i's Mo-ho chih-ku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8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