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지금니 풍으로 다시 그린 고려 사경 법화경 변상도

수지즉관심

관심의 본존초 · 제3편 · 제11~16장

受持即観心 — 観心本尊抄 第十一章~第十六章어서 242–247쪽
저술
1273년(분에이 10) 4월 25일 · 사도 이치노사와
장
제11장~제16장 (6장)
쪽수
어서 242쪽 14행 ~ 247쪽 8행
계보
교리 五 일념삼천 · 六 남묘호렌게쿄

제2편에서 대성인은 「관심이란 자기 마음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이라 정의하시고, 인계에 갖추어진 아홉 세계를 하나하나 짚으신 끝에 「범부의 마음에 불계가 있다」는 것까지 밝히셨다. 그러나 묻는 이는 아직 납득하지 못한다. 삼혹을 모두 끊고 범천과 제석을 좌우에 거느린 저 교주석존이, 어찌 우리 범부의 마음속에 산다는 말인가. 제3편의 여섯 장은 이 마지막 의심, 「관심의 본존초」 전체에서 가장 무거운 의심을 정면으로 다룬다. 묻는 이는 경전의 권위와 논사 · 인사의 권위를 모두 끌어와 반박하고, 대성인은 그 가운데 경과 논에 관한 반박을 먼저 풀고, 교주에 관한 반박은 「난신난해」로 막은 뒤, 본존의 덕용을 밝히고, 마침내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한다.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는 한 문장으로 답하신다. 수행하여 마음을 관하는 길이 아니라, 오자를 받아 지니는 것이 곧 마음을 관하는 것이라는 이 답을 창가학회 교학은 「수지즉관심(受持即觀心)」이라 부르고, 대성인 불법의 실천 전체의 근거로 삼는다.

이 편의 여섯 장은 한 덩어리의 문답이다. 제11장과 제12장이 두 갈래의 큰 물음 — 교주에 관한 물음과 교론(경전 · 논서)에 관한 물음 — 을 세우고, 제13장이 교론의 물음을 풀며, 제14장이 교주의 물음을 풀기에 앞서 이 법문이 본래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것임을 보이고, 제15장이 본존이 지닌 힘(덕용)을 밝히고, 제16장이 마침내 수지즉관심을 밝힌다. 묻고 답하는 순서를 보면 대성인이 어디에 무게를 두셨는지가 드러난다. 경과 논에 관한 반박은 비교적 짧게 풀리지만, 「교주석존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물음은 세 장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된 끝에야 답이 나온다.

강의는 이 편의 첫 문장에 끼워 넣어진 「이로부터 굳게 비밀로 한다(此れより堅固に之を秘す)」는 말에 주목한다. 대성인 스스로 이 대목부터가 비밀의 법문이라고 밝히신 것이다. 니치칸 상인은 그 까닭을 「여기서 본존의 묘능에 의해 수지즉관심을 이루는 뜻을 밝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므로 이 편을 읽는 일은 「관심의 본존초」라는 제목의 두 낱말, 관심과 본존이 어떻게 하나로 맺어지는가를 보는 일이다. 관심은 본존을 받아 지니는 데서 이루어지고, 본존은 관심을 이루게 하는 힘을 지닌다. 제4편 이후 대성인이 「본존의 위체」를 밝히시는 것도, 이 편에서 「무엇을 받아 지니는가」가 물어졌기 때문이다.

수지즉관심의 요지 — 거울의 비유, 범어 「살(薩)」이 구족이며 묘라는 것, 일념삼천의 구슬을 다섯 글자에 싸서 목에 걸어 준다는 것 — 은 이 사이트의 교리 五 「일념삼천」 8절과 六 「남묘호렌게쿄」의 「묘의 세 뜻」에서 이미 다루었다. 이 편은 그 요지를 장마다 한 겹씩 더 깊이 들어가, 질문이 어떤 논리로 세워지고 답이 어떤 경문의 사슬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니치칸 상인이 그 문장들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따라간다.

이 편의 장

第十一章教主に約して問う제11장 교주에 약하여 묻다 — 권 · 적 · 본 세 겹의 석존의 인행과 과덕이 어찌 범부의 마음에 있는가
第十二章教論に約して問う제12장 교론에 약하여 묻다 — 세 경 · 두 논 · 논사 · 인사의 권위로 십계호구와 일념삼천을 부정하다
第十三章教論の難を会す제13장 교론의 난을 회통하다 — 네 가지 대비로 경의 승렬을 가리고, 「개불지견」으로 십계호구를 증명하다
第十四章教主の難を会すにまず難信難解を示す제14장 교주의 난을 회통함에 먼저 난신난해를 보이다 — 이금당의 난신난해와 삼국의 세 성인
第十五章所受の本尊の徳用を明かす제15장 받아 지니는 본존의 덕용을 밝히다 — 무량의경 · 보현경으로 본존의 능생의 덕을 보이다
第十六章受持即観心を明かす제16장 수지즉관심을 밝히다 — 석존의 인행과덕은 오자에 구족하고,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물려받는다
제11장 교주에 약하여 묻다
어서 242쪽 14행 ~ 243쪽 10행 · 第十一章 教主に約して問う

본문

원문 대조어서 242쪽 14행 ~ 243쪽 10행
本文 · 어서 원문

問うて曰く教主釈尊は此れより堅固に之を秘す三惑已断の仏なり又十方世界の国主・一切の菩薩・二乗・人天等の主君なり 行の時は梵天左に在り帝釈右に侍べり四衆八部後に聳い金剛前に導びき八万法蔵を演説して一切衆生を得脱せしむ 是くの如き仏陀何を以て我等凡夫の己心に住せしめんや、 又迹門爾前の意を以て之を論ずれば教主釈尊は始成正覚の仏なり、 過去の因行を尋ね求れば或は能施太子或は儒童菩薩或は尸毘王或は薩埵王子或は三祇・百劫或は動喩塵劫或は無量阿僧祇劫或は初発心時或は三千塵点等の間七万・五千・六千・七千等の仏を供養し劫を積み行満じて今の教主釈尊と成り給う、 是くの如き因位の諸行は皆我等が己心所具の菩薩界の功徳か、 果位を以て之を論ずれば教主釈尊は始成正覚の仏四十余年の間四教の色身を示現し爾前・迹門・涅槃経等を演説して一切衆生を利益し給う、 所謂華蔵の時・十方台上の盧舎那・阿含経の三十四心・断結成道の仏、方等般若の千仏等、大日・金剛頂等の千二百余尊、 並びに迹門宝塔品の四土色身、涅槃経の或は丈六と見る或は小身大身と現じ或は盧舎那と見る或は身虚空に同じと見る四種の身乃至八十御入滅舎利を留めて正像末を利益し給う、 本門を以て之れを疑わば教主釈尊は五百塵点已前の仏なり因位も又是くの如し、 其れより已来十方世界に分身し一代聖教を演説して塵数の衆生を教化し給う、 本門の所化を以て迹門の所化に比校すれば一渧と大海と一塵と大山となり、 本門の一菩薩を迹門十方世界の文殊観音等に対向すれば猿猴を以て帝釈に比するに尚及ばず、 其の外十方世界の断惑証果の二乗並びに梵天・帝釈・日月・四天・四輪王・乃至無間大城の大火炎等此等は皆我が一念の十界か己心の三千か、 仏説為りと雖も之を信ず可からず。

풀이

묻기를, 교주석존은 — 이로부터는 굳게 이를 비밀로 하느니라 — 견사 · 진사 · 무명의 삼혹을 이미 끊으신 부처이시니라. 또 시방세계의 국주이시며 일체의 보살 · 이승 · 인천 등의 주군이시니라. 가실 때에는 범천이 왼쪽에 있고 제석이 오른쪽에 모시며, 사중과 팔부가 뒤를 따르고 금강신이 앞을 인도하며, 팔만 법장을 연설하시어 일체중생을 득탈케 하시느니라. 이와 같은 부처께서 어찌하여 우리 범부의 기심에 머무신다 하겠는가. 또 적문과 이전의 뜻으로 이를 논하건대, 교주석존은 이 세상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신 부처이시니라. 과거의 인행을 찾아 구하건대, 혹은 능시태자, 혹은 유동보살, 혹은 시비왕, 혹은 살타왕자로서, 혹은 삼아승기 · 백대겁, 혹은 걸핏하면 진겁에 비유하는 오랜 세월, 혹은 무량아승기겁, 혹은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혹은 삼천진점겁 등의 동안에 칠만 · 오천 · 육천 · 칠천 등의 부처를 공양하고 겁을 쌓아 수행을 원만히 하시어 지금의 교주석존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은 인위의 모든 수행이 다 우리 기심에 갖추어진 보살계의 공덕이라는 것인가. 과위로써 이를 논하건대, 교주석존은 처음 정각을 이루신 부처로서 사십여 년 동안 사교의 색신을 나타내시어 이전 · 적문 · 열반경 등을 연설하시고 일체중생을 이익하셨느니라. 이른바 화엄을 설하실 때의 시방 연화대 위의 노사나불, 아함경의 삼십사심으로 번뇌를 끊고 성도하신 부처, 방등과 반야의 천불 등, 대일경 · 금강정경 등의 천이백여 존, 아울러 적문 보탑품의 사토의 색신, 열반경에서 혹은 장륙으로 보고 혹은 소신 · 대신으로 나타나며 혹은 노사나로 보고 혹은 몸이 허공과 같다고 보는 네 가지 몸, 나아가 여든에 입멸하시어 사리를 남겨 정법 · 상법 · 말법을 이익하시느니라. 본문으로써 이를 의심하건대, 교주석존은 오백진점겁 이전의 부처이시며 인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 이래로 시방세계에 분신하시어 일대성교를 연설하시고 티끌 수의 중생을 교화하셨느니라. 본문의 교화를 받은 이들을 적문의 교화를 받은 이들과 견주면 한 방울과 큰 바다, 한 티끌과 큰 산과 같으니라. 본문의 한 보살을 적문에서 시방세계로부터 온 문수 · 관음 등에 마주 세우면 원숭이를 제석에 견주는 것에도 오히려 미치지 못하느니라. 그 밖에 시방세계의 혹을 끊고 과를 증득한 이승, 아울러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왕 · 사륜왕, 나아가 무간대성의 큰 불꽃 등, 이것들이 다 나의 일념의 십계이며 기심의 삼천이라는 것인가. 부처의 설법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믿을 수 없느니라.

어구 풀이

三惑已断삼혹이단
견사혹(見思惑) · 진사혹(塵沙惑) · 무명혹(無明惑)의 세 가지 미혹을 이미 모두 끊었다는 뜻. 견사혹은 삼계에 윤회하게 하는 이치와 사물에 대한 미혹, 진사혹은 중생을 교화할 때 티끌 모래처럼 많은 법문을 모르는 미혹, 무명혹은 중도의 실상을 가리는 근본의 미혹이다. 천태 교학에서는 이 셋을 다 끊은 이가 부처다. 묻는 이는 교주석존을 먼저 이 「끊음」의 극치로 우러른다.
四衆八部사중팔부
사중은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곧 출가와 재가의 남녀 제자. 팔부는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부류의 천과 귀신(천 · 용 · 야차 · 건달바 · 아수라 · 가루라 · 긴나라 · 마후라가)으로, 천룡팔부라고도 한다. 법화경 비유품 등에 나온다.
金剛금강
집금강신(執金剛神). 금강저를 들고 늘 부처 곁에서 호위하는 신으로, 대일경은 「야차왕으로서 금강저를 들고 늘 부처를 모시고 지키므로 금강수라 한다」고 한다. 절 문 좌우에 모시는 두 신(인왕)도 여기서 나왔다.
能施太子능시태자
석존이 과거세에 보시(단바라밀)를 닦을 때의 이름. 대시태자라고도 한다. 『현우경』 권8 · 『대지도론』 권12에 따르면, 백성이 가난에 시달려 짐승을 죽여 살아가는 것을 가엾이 여겨 가진 보배를 모두 베풀고, 다시 용궁에 들어가 온갖 보배를 내는 여의보주를 얻어 중생에게 베풀었다.
儒童菩薩유동보살
석존이 과거세에 수행하던 때의 이름. 『태자서응본기경』 권상에 따르면, 오백 금전으로 산 다섯 줄기 푸른 연꽃을 정광불(연등불)께 바치고 머리를 풀어 진흙 땅에 깔아 부처가 밟고 지나가게 했다. 그 공덕으로 「너는 장래 석가모니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尸毘王시비왕
석존의 과거세의 이름. 매에 쫓기는 비둘기를 구하려고 자기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다. 비둘기와 매는 비사문천과 제석천이 왕의 구도심을 시험하려고 나타낸 모습이었다. 『보살본생만론』 권1 · 『대장엄론』 권12 등에 나온다.
薩埵王子살타왕자
석존의 과거세의 이름. 마하라타왕의 셋째 아들 마하살타. 『금광명경』 권4에 따르면, 두 형과 대숲에서 놀다가 새끼를 낳고 굶주린 호랑이를 보고, 형들이 떠난 뒤 자기 몸을 던져 호랑이를 살렸다.
三祇・百劫삼기 · 백겁
장교(藏敎)의 보살이 삼아승기겁 동안 육바라밀을 닦고, 다시 백대겁 동안 삼십이상의 원인을 심는다는 수행 기간.
動喩塵劫동유진겁
「걸핏하면 진겁에 비유한다」로 읽는다. 통교의 보살이 제7지에서 삼계의 견사혹을 끊되, 다 끊으면 삼계에 태어날 수 없으므로 일부러 습기를 남겨 중생을 교화하며, 진겁에 이르는 오랜 세월을 지나 제10지 불지에서 남은 습기를 끊고 성도한다는 것.
無量阿僧祇劫・初発心時무량아승기겁 · 초발심시
무량아승기겁은 별교 보살의 수행 기간. 초발심시는 원교에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사십이위를 차례로 닦는다는 것.
三千塵点삼천진점
법화경 화성유품에서 석존이 대통지승불의 열여섯째 왕자로서 법화경을 강설한 이래의 아득한 세월(삼천진점겁)을 설한 것. 적문에서 밝혀진 가장 먼 인연이다.
十方台上の盧舎那시방대상의 노사나
화엄경의 결경인 범망경에 설해진 보신불. 연화장세계의 연꽃 가운데 앉고, 천 잎 위에 천 석가, 잎마다 백억의 작은 석가가 있다고 한다.
三十四心・断結成道삼십사심 · 단결성도
아함(장교)에서 보살이 마지막에 성도할 때, 팔인 · 팔지 · 구무애 · 구해탈의 서른네 찰나의 마음으로 견사의 번뇌를 끊고 부처가 된다는 것. 장교의 보살은 마지막까지 번뇌를 지닌 채 육도에 태어나 교화의 공을 쌓다가 마지막에 번뇌를 끊는다.
四土色身사토의 색신
보탑품에서 석존이 세 번 국토를 깨끗이 하여(삼변토전) 시방 분신불을 모을 때, 범성동거토에서는 열응신, 방편유여토에서는 승응신, 실보무장애토에서는 보신, 상적광토에서는 법신으로 나타냈다는 것.
四種の身네 가지 몸
열반경에서 같은 부처를 대중이 저마다 다르게 본 것. 「장륙」은 열응신, 「소신 · 대신」은 승응신, 「노사나」는 보신, 「몸이 허공과 같다」는 법신이다.

「이로부터 굳게 비밀로 한다」 — 문장 속에 끼워 넣은 경계

제11장의 첫 문장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묻기를, 교주석존은」 하고 말을 꺼낸 바로 다음에, 문장의 흐름을 끊고 「이로부터 굳게 이를 비밀로 한다(此れより堅固に之を秘す)」는 한 마디가 끼어든다. 그리고 다시 「삼혹을 이미 끊으신 부처이시니라」로 이어진다. 묻는 이의 말 가운데에 대성인 자신의 주의(注意)가 삽입된 것이다. 강의는 이 한 마디를 이 편 전체를 여는 열쇠로 본다.

왜 여기서부터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가. 강의는 그 뜻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로부터 설하는 것은 정법 · 상법 시대에 아직 펼쳐진 적이 없는 본존의 묘능에 기대어 수지즉관심을 이룬다는 법문이다. 권교와 소승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것을 좀처럼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비방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악도에 떨어지는 죄를 짓게 될 뿐 아니라, 대성인이 세상에 나오신 본회 자체를 헛되게 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면 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뜻은 「관심의 본존초」를 도키조닌에게 보내며 붙이신 송장에 그대로 드러난다.

観心の法門少少之を注して大田殿・教信御房等に奉る、此の事日蓮身に当るの大事なり之を秘す、無二の志を見ば之を開祏せらる可きか、此の書は難多く答少し未聞の事なれば人耳目之を驚動す可きか、設い他見に及ぶとも三人四人座を並べて之を読むこと勿れ

관심의 법문을 조금 적어서 오타 님 · 교신 스님 등께 드리느니라. 이 일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대사이므로 이를 비밀로 하느니라. 둘도 없는 뜻을 보거든 이를 열어 보이실 것이니라. 이 글은 난이 많고 답이 적으며 일찍이 듣지 못한 일이므로 사람의 귀와 눈을 놀라게 할 것이니라. 설령 다른 이가 보게 되더라도 서너 사람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이것을 읽지 말지니라.
「관심의 본존초송장」, 255쪽

「이 일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하는 대사」라는 말과 「이로부터 굳게 비밀로 한다」는 말은 같은 무게를 지닌다. 송장은 이어서 「부처 멸후 이천이백이십여 년, 아직 이 글의 마음이 있지 않았다. 국난을 돌보지 않고 오오백세를 기약하여 이를 연설한다. 바라건대 한 번 보는 이들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영산정토에 나아가 세 부처의 얼굴을 뵙고자 한다」고 맺는다. 아무에게나 보여서는 안 되는 글이면서, 동시에 말법 오오백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남기는 글이라는 이중의 성격이 이 송장에 있다.

강의는 여기에 니치칸 상인의 일화 하나를 덧붙인다. 니치칸 상인이 「관심의 본존초」를 강의하게 된 경위를 스스로 적은 글이다. 교호 6년(1721) 초여름, 시모사(総州)의 호소쿠사 학교와 그 산에 머무는 학도 등 사십여 명이 한마음으로 이 초를 강의해 달라고 청했다. 그 정성이 한결같고 신심이 둘도 없었다. 니치칸 상인은 「사십여 명이 한 사람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서너 사람이 자리를 나란히 하지 말라는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여, 늙고 병들어 감당하기 어려웠으나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글의 시작과 끝을 대강 나누고 뜻의 요강을 간략히 보였다. 그리고 「이것을 후대의 군자에게 보내어, 함께 세 부처의 얼굴을 뵙기를 바랄 뿐」이라고 맺었다. 「서너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읽지 말라」는 송장의 경계를 「이체동심(異體同心)의 사십여 명은 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넘어선 것이다. 비밀의 법문은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 된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하기 위해 「비밀」로 다루어졌다는 것을 이 일화가 보여 준다.

옛 해석이 든 여섯 가지 까닭

강의는 「굳게 비밀로 한다」는 말의 까닭에 대해 예로부터 여러 관점의 해석이 있었다며 다음 여섯 가지를 든다.

여섯 가지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앞의 넷이 천태의 일념삼천과 본문의 깊이에 무게를 둔다면, 다섯째와 여섯째는 말법 범부의 신심과 본존의 묘능으로 초점을 옮긴다. 강의가 니치칸 상인의 해석을 맨 끝에 두는 것은 그것이 앞의 다섯을 아우르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직달정관」이란 오랜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수행(역겁수행)을 거치지 않고, 범부의 자리(명자즉)에서 곧바로 부처의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이 장의 해설 끝에서 「인과구시」라는 말로 다시 돌아온다.

삼덕을 갖춘 교주가 어찌 범부의 마음에

물음의 첫 부분은 교주석존을 총괄해서 찬탄한다. 강의는 이 찬탄을 주 · 사 · 친의 삼덕으로 읽는다. 삼혹을 이미 끊은 부처라는 것은 「친(親)의 덕」, 시방세계의 국주요 보살 · 이승 · 인천의 주군이라는 것은 「주(主)의 덕」, 범천 · 제석 · 사중 · 팔부 · 금강신의 장엄 속에 팔만 법장을 연설하여 일체중생을 득탈케 한다는 것은 「사(師)의 덕」이다. 이처럼 훌륭한 부처가 어찌 우리 범부의 마음에 머문다는 말인가. 강의의 말로 하면, 이전까지의 권교와 소승의 종교에서는 부처가 「자기 밖에, 자기보다 높은 것으로」 있었다. 그런데 십계호구가 참이라면, 그 부처가 우리 마음속에 안으로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물음의 핵심이다.

제2편의 끝, 제10장에서 묻는 이는 이미 「십계호구의 불어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열등한 마음에 불법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믿음을 취하기 어렵다」고 했다. 제11장은 그 의심을 「교주석존」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막연한 「불계」가 아니라, 사바세계를 교화한 바로 그 석존이 내 마음에 있느냐고 묻는다. 강의는 대성인이 이 물음을 일부러 이렇게 무겁게 세우셨다고 본다. 믿기 어렵다는 것을 먼저 극한까지 밀어붙인 뒤에야, 「믿기 어렵지만 안에 있다」는 답이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음은 부처의 인위(因位)와 과위(果位)를 이전 · 적문 · 본문의 세 겹으로 나누어 의심을 점점 깊게 한다.

범천은 왼쪽, 제석은 오른쪽인가

강의는 「가실 때에는 범천이 왼쪽에 있고 제석이 오른쪽에 모신다」는 구절에 대한 니치칸 상인의 견해도 소개한다. 이 구절은 『마하지관』의 글을 그대로 쓴 것인데, 니치칸 상인은 아마도 좌우가 뒤바뀐 것으로, 범천이 오른쪽이고 제석이 왼쪽이어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 까닭은 이렇다. 인도의 풍속은 오른쪽을 높이고 왼쪽을 낮춘다(右尊左卑). 임금 · 아버지 · 스승은 동쪽을 향해 앉으므로 오른쪽은 남쪽에 해당하여 양(陽)이고 높으며, 왼쪽은 북쪽에 해당하여 음(陰)이고 낮다. 그래서 여러 글에 제석은 왼쪽, 범천은 오른쪽이라 했고, 사리불은 오른쪽, 목련은 왼쪽이라는 글도 있다. 이것은 부처가 다닐 때나 앉을 때 동쪽을 향하는 것을 바른 자리로 삼기 때문이다. 다만 법을 들을 때는 부처가 동쪽을 향하면 대중은 서쪽을 향하고, 부처가 서쪽을 향하면 대중은 동쪽을 향한다. 법화경 보탑품 이후에는 부처가 서쪽을 향해 설법하고 중생은 동쪽을 향해 듣는다.

범천과 제석의 좌우는 경전과 논서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혀 있다. 본문은 『마하지관』의 표현을 따랐고, 니치칸 상인은 인도의 우존좌비 풍속을 근거로 그것을 바로잡을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대목의 요점은 좌우가 아니라, 범천과 제석이라는 세간 최고의 신들조차 시종으로 거느리는 교주의 위엄에 있다.

권 · 적 · 본 세 겹으로 깊어지는 의심

총괄의 물음 뒤에 물음은 「따로(別して)」 권교 · 적문 · 본문의 부처에 약하여, 그 인위의 만행과 과위의 만덕을 하나하나 찬탄하고, 그것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의심한다.

이전 · 적문의 인위 — 무수한 겁의 보살행

먼저 이전과 적문의 뜻으로 보면, 석존은 열아홉에 출가하여 서른에 성도한 「시성정각(始成正覺)」의 부처다. 그 과거의 인행을 찾아보면 석존은 갖가지 몸으로 보살행을 닦았다. 능시태자로서 모든 보배를 베풀었고, 유동보살로서 머리털을 진흙에 깔아 정광불을 공양했고, 시비왕으로서 비둘기 대신 자기 살을 매에게 주었고, 살타왕자로서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졌다. 이 본생담들은 모두 보시바라밀, 곧 「자기를 내어 주는 수행」의 극치를 보여 준다.

그 수행의 기간은 가르침(사교)에 따라 다르게 설해졌다. 장교에서는 삼아승기겁과 백대겁, 통교에서는 걸핏하면 진겁에 이르는 세월, 별교에서는 무량아승기겁, 원교에서는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사십이위를 차례로 밟는 수행을 설했다. 이렇게 사교를 설한 뒤, 법화경 적문 화성유품에서는 삼천진점겁에 걸친 인연을 설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칠만 · 오천 · 육천 · 칠천의 부처들을 공양하고, 겁을 쌓고, 수행을 원만히 하여 인도에 나타나 깨달음을 열고 지금의 교주석존이 되었다는 것이다. 묻는 이는 묻는다. 이 무수한 인위의 수행이 모두 우리 몸에 갖추어진 「보살계의 공덕」이라는 것인가.

강의는 여기서 대성인이 「보살계」라는 말을 쓰신 데 주목한다. 십계호구의 도리에서 보면 우리 각자의 생명에는 보살계가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묻는 이의 물음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석존의 보살행 전부가 내 안의 보살계라는 것인가」라는 형태로 십계호구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이전 · 적문의 과위 — 네 가지 가르침의 네 가지 부처

이어서 과위로 논한다. 석존은 사십여 년 동안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를 설해 나가며, 장 · 통 · 별 · 원의 사교를 설할 때마다 그에 맞는 부처의 몸을 나타냈다. 화엄경을 설할 때는 시방에 화현한 부처들 가운데 연화대 위의 노사나불로 나타났고, 아함경을 설할 때는 삼십사심으로 견사혹을 끊고 성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방등을 설할 때는 모여든 부처들 가운데서 설법했고, 반야를 설할 때는 천불과 함께 나타났다.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설할 때는 태장계 칠백여 존과 금강계 오백여 존, 합해서 천이백여 존의 위의를 나타냈다. 법화경 적문 보탑품에서는 세 번 국토를 변화시켜 범성동거토 · 방편유여토 · 실보무장애토 · 상적광토의 사토에 맞는 불신을 나타냈다. 열반경에서는 대중이 같은 부처를 장륙의 몸으로, 소신 · 대신으로, 노사나 보신으로, 허공과 같은 법신으로 저마다 다르게 보았다. 그리고 여든에 입멸한 뒤에도 사리를 남겨 정법 · 상법 · 말법의 삼시에 걸쳐 중생을 이익한다.

현대어역은 이 대목 끝에 「이러한 부처가 범부의 몸에 머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을 보충해 읽는다. 사교의 부처 하나하나가 이미 범부와는 아득히 먼 존재인데, 그 모두가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본문 — 오백진점겁과 지용의 보살

본문으로 의심하면 더 아득해진다. 석존은 오백진점겁 이전에 성불한 부처이며, 그 인위 역시 오백진점겁의 몇 배에 이르는 길이다. 그 이래로 사바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시방세계에 분신의 부처들을 보내어 일대성교를 연설하고 대지의 티끌처럼 많은 중생을 교화해 왔다.

본문은 여기서 독특한 비교를 한다. 본문의 교화를 받은 이들을 적문의 교화를 받은 이들과 견주면 한 방울의 물과 큰 바다, 한 티끌과 큰 산의 차이다. 본문의 보살 한 사람을 적문에서 시방세계로부터 모여온 문수 · 관음 등의 보살과 마주 세우면, 원숭이를 제석에 견주는 것보다도 차이가 크다. 강의는 「본문의 교화를 받은 이들」이 바로 종지용출품에서 땅에서 솟아난 지용의 보살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 비교는 제3편 뒤에서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 등은 우리 기심의 보살」(제16장)이라는 답으로 이어지고, 제4편 이후 본존의 위체와 본화 출현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토록 무량무변한 대보살들을 교화해 온 대덕의 석가불이 우리 마음에 머문다는 것은 한층 더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머지 여덟 세계까지

물음은 마지막으로 그 밖의 모든 세계로 범위를 넓힌다. 시방세계에서 혹을 끊고 과를 증득한 이승(성문 · 연각),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왕 · 사륜왕 같은 천계, 그리고 무간대성의 큰 불꽃(지옥계)까지, 이 모두가 「나의 일념의 십계」이며 「기심의 삼천」이라는 것인가. 부처의 설법이라 해도 이것은 믿을 수 없다.

강의는 이 마지막 물음이 불계와 보살계뿐 아니라 성문 · 연각 · 천 · 지옥 · 수라 등 나머지 여덟 세계까지 우리 생명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거꾸로 확인하는 장치라고 본다. 십계호구의 도리를 믿지 않는 한 이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대성인은 이로부터 장을 따라 문증 · 이증 · 현증을 들어 설명해 나가시고, 결론으로 말법의 관심과 말법의 본존을 밝혀, 말법의 범부를 구하는 자비를 보이신다는 것이다.

①총괄 — 친 · 주 · 사의 삼덕
  • 친三惑已断の仏삼혹을 이미 끊은 부처
  • 주十方世界の国主시방세계의 국주
  • 사八万法蔵を演説して一切衆生を得脱せしむ팔만 법장을 연설하여 일체중생을 득탈케 함
②이전 · 적문
인위
능시태자유동보살시비왕살타왕자
삼기백겁(장)동유진겁(통)무량아승기겁(별)초발심시(원)삼천진점(적문)
과위
화엄의 노사나아함의 삼십사심방등 · 반야의 천불대일 · 금강정의 천이백여 존보탑품의 사토의 색신열반경의 네 가지 몸
③본문
五百塵点已前の仏なり因位も又是くの如し오백진점 이전의 부처이며 인위도 이와 같음

본문의 교화를 받은 이(지용의 보살)와 적문의 교화를 받은 이 = 한 방울과 큰 바다

此等は皆我が一念の十界か己心の三千か이것들이 다 나의 일념의 십계이며 기심의 삼천인가
도표 1 · 교주에 약한 물음의 세 겹

역겁수행 — 석가불법의 인과관

강의는 이 물음의 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이 물음 자체에 「석가불법과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의 차이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물음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은 「부처의 경지란 역겁수행(歷劫修行)에 의해 겨우 다다르는 특별한 것이며, 범부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이상경」이라는 사상이다.

당시의 중생은 석존을 먼 세계에서 보았을 것이다. 먼 세계에 있는 부처를 우러러 사모하고, 그 부처를 향해 스스로도 오랜 겁의 수행에 힘써 이상으로 삼는 부처에 다가가려 했다. 중생의 눈에 비친 부처는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 색상장엄의 부처, 완성된 부처, 이상적 인격 그 자체였다. 강의는 이것이 석가불법 전반에 통하는 것이라고 본다. 법화경 본문에서 오백진점겁을 설하고 구원 이래 상주하는 부처를 설해도, 그 부처가 되기까지 그 몇 배의 세월 동안 보살도를 닦았다고 설하는 한, 그 부처는 「만들어진 부처」이며 우주와 함께 상주하는 부처가 아니다. 강의는 이를 「적중화타(迹中化他)의 허불(虛佛)」이라 부른다.

그래서 석가불법은 완성된 부처를 중심으로 하는 가르침이므로 「본과묘(本果妙)의 불법」이라 하고, 부처의 결과(果)와 거기에 이르는 수행(因)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인과이시(因果異時)」라 이름한다. 이 「역겁수행으로 부처가 된다」는 생각 밑에는 석가불법 본래의 인과론이 깔려 있다.

삼세의 인과와 「보통의 인과」

강의는 석존이 설한 삼세의 인과를 이렇게 든다. 이 세상에서 병이 많고 명이 짧은 것은 살생의 과보, 가난하고 어리석고 재물을 잃는 것은 도둑질의 과보, 권속이 좋지 않고 배우자가 정숙하지 않은 것은 사음의 과보, 비방을 받고 남에게 속는 것은 망어의 과보, 친척과 멀어지고 친구에게 버림받는 것은 이간질(양설)의 과보, 나쁜 소리를 듣고 소송이 일어나는 것은 악구의 과보, 남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고 말이 분명치 않은 것은 꾸밈말(기어)의 과보, 욕심이 많아 만족을 모르는 것은 탐욕의 과보, 남에게 틈을 엿보이거나 해를 입는 것은 성냄의 과보, 삿된 견해의 집에 태어나 마음이 비뚤어진 것은 어리석음의 과보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사도어서」에서 『반니원경』을 끌어 같은 인과를 이렇게 쓰셨다.

我人を軽しめば還て我身人に軽易せられん形状端厳をそしれば醜陋の報いを得人の衣服飲食をうばへば必ず餓鬼となる持戒尊貴を笑へば貧賤の家に生ず正法の家をそしれば邪見の家に生ず善戒を笑へば国土の民となり王難に遇ふ是は常の因果の定れる法なり

내가 남을 업신여기면 도리어 내 몸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으리라. 단정한 모습을 비방하면 추한 과보를 얻고, 남의 옷과 음식을 빼앗으면 반드시 아귀가 되며, 계를 지키는 존귀한 이를 비웃으면 빈천한 집에 태어나고, 정법의 집을 비방하면 사견의 집에 태어나며, 선한 계를 비웃으면 국토의 백성이 되어 왕난을 만나느니라. 이는 보통의 인과의 정해진 법이니라.
「사도어서」, 960쪽

대성인은 이것을 「보통의 인과의 정해진 법(常の因果の定れる法)」이라 하셨다. 석가불법에서 설하는 일반적인 인과이며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과다. 강의는 이것을 「낮은 인과, 얕은 인과」라 부르면서도, 낮고 얕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이 인과의 이법은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이 낮은 인과의 설법을 불법의 전부로 삼으면, 운명은 정해진 것이 되고 인생은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생활로 떨어지고 만다. 석가불법에서는 아주 먼 과거로부터의 악업이 원인이 되어 금생에 불행한 결과가 나타났으니, 그 원인을 금세 · 내세 · 그다음 생으로 차례로 끊어 가면 먼 미래 언젠가 악업을 모두 끊고 행복한 결과를 얻는다고 설한다. 이것이 역겁수행이며, 이상경을 먼 저편에 두는 까닭이다.

「사도어서」의 이 대목은 위 인용 바로 뒤에서 「니치렌은 이 인과가 아니다. 법화경의 행자를 과거에 업신여긴 까닭에…」(960쪽)라고 이어진다. 대성인은 「보통의 인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과 다른 차원 — 법화경을 비방한 과거의 업을 법화경을 위한 난으로 지금 가볍게 받는다는 「전중경수(轉重輕受)」의 차원 — 을 자신의 몸으로 보이셨다. 강의가 「보통의 인과」를 넘어 인과구시로 나아가는 것도 같은 방향이다.

인과구시 — 수지즉관심을 떠받치는 생명관

이에 대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석존의 오백진점겁 성도마저 넘어서, 그보다 더 근원을 밝힌다. 강의는 이것을 「구원원초(久遠元初)의 현본」이라 부르고, 일하게 하지도 꾸미지도 않은 본래 그대로의 상주하는 생명관(本有常住)을 세운 것이라고 말한다.

釈迦如来・五百塵点劫の当初・凡夫にて御坐せし時我が身は地水火風空なりと知しめして即座に悟を開き給いき

석가여래는 오백진점겁의 당초에 범부로 계실 때, 내 몸은 지 · 수 · 화 · 풍 · 공이라고 아시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여셨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8쪽

강의는 이 글의 「석가여래」를 법화경 본문 문저의 석존, 곧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여래로, 「오백진점겁의 당초」를 구원원초로 읽는다. 「내 몸은 지수화풍공」이란 「내 몸이 곧 전 우주」라는 것이다. 생명은 우주보다 먼저 생긴 것도 아니고 우주보다 뒤에 생겨난 것도 아니며, 우주와 동시에 있고, 우주가 흘러가는 한 우주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대성인은 나아가 이 시작도 끝도 없는 생명이 실은 「순간」 속에 담겨 있다고 설하셨다. 순간은 영원을 품고, 영원은 순간의 연속이다. 강의는 이것을 「구원즉말법(久遠即末法)」이라 한다. 과거 · 현재 · 미래라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현재의 한 순간은 화살처럼 흘러 다음 순간에는 과거가 되고, 미래는 순식간에 현재로 흘러든다. 그 순간은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있는, 이른바 「공(空)」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실재다. 그러나 생명의 실재는 그 순간에만 있고, 영원도 순간의 연속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진실의 존재이며 생명의 전체이고, 불법에서는 이것을 「중도법상(中道法相)」이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순간에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맛보며, 희망을 품고 실망하는 생활을 한다.

인과론으로 말하면, 이 한 순간의 생명에 인과가 갖추어져 있다. 과거의 모든 행위가 쌓여 원인이 되어 현재를 규정하고 현재에 결과로 나타난다. 또 현재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 미래에 결과를 낳는다. 현재의 순간을 떠나 미래는 없다. 아니, 미래는 현재 순간의 한 생각으로 어떻게든 바꿀 수 있다. 한 순간의 실상 속에 과거 영원의 생명을 품고, 동시에 미래 영원의 생명을 품는다. 이것을 「인과구시 불가사의의 일법(因果俱時不思議の一法)」, 곧 묘법연화경이라 이름한다. 강의는 대성인의 불법이 이 순간의 생명을 남김없이 설해 영원한 행복을 확립하는 길을 보인 데에 석가불법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강의는 이 생명관의 문증으로 여러 어서를 잇달아 든다.

過去と未来と現在とは三なりと雖も一念の心中の理なれば無分別なり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셋이라 할지라도 일념의 마음속의 이치이므로 분별이 없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2쪽

『어의구전』의 「이른바 남묘호렌게쿄는 삼세일념이니라(所謂南無妙法蓮華経は三世一念なり)」(788쪽), 「백육개초」의 「구원 일념 원초의 묘법(久遠一念元初の妙法)」, 「본인묘초」의 「구원 일념의 남묘호렌게(久遠一念の南無妙法蓮華)」와 「인과 일념의 종(因果一念の宗)」이 모두 같은 뜻이다. 강의는 이 글들에 의해 구원의 생명도 한 생각에 거두어진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생명철학을 근본으로 하여 수지즉관심을 밝히셨다. 이 편의 결론인 제16장의 문장 —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한다.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246쪽) — 이 그것이다. 강의는 여기의 「석존」이 권 · 적 · 본의 석존이며, 또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를 대표한 이름이라고 본다. 모든 부처의 인위의 만행과 과위의 만덕이 본존을 믿는 한 생각 속에 구족한다. 이것이 인과구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석가불법처럼 아주 먼 과거로부터의 악인을 앞으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며 지워 가는 것이 아니다. 설령 과거에 복운을 조금도 쌓지 않았더라도, 본존을 믿는 한 생각 속에 모든 인위의 만행이 담겨 그만큼의 수행을 쌓은 것과 같아지고, 미래의 모든 행복한 경애를 현재의 순간에 연다. 강의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란 어딘가 먼 곳에 있는 특별한 세계가 아니다. 과거의 원인 때문에 현재가 꼼짝 못하게 묶여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를 떠난 미래도 아니다. 이 순간순간이 전부다. 그리고 본존을 믿는 한 생각이야말로 현재의 순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원천이다. 결론하면, 역겁수행을 설하는 석가불법은 인과이시이고, 수지즉관심을 설하는 대성인의 불법은 인과구시의 생명관에 서 있다.

인과이시(因果異時)— 석가불법
  • · 역겁수행
  • · 본과묘의 불법
  • · 부처는 먼 저편의 완성된 이상
  • · 과거의 악인을 생을 거듭하며 끊어 감
근거是は常の因果の定れる法なり이는 보통의 인과의 정해진 법이니라「사도어서」 960
인과구시(因果俱時)— 대성인의 불법
  • · 수지즉관심
  • · 구원원초의 본유상주
  • · 순간 속에 영원 — 구원즉말법
  • · 본존을 믿는 한 생각에 인행과덕이 구족
근거過去と未来と現在とは三なりと雖も一念の心中の理なれば無分別なり과거 · 미래 · 현재는 셋이라 할지라도 일념의 마음속 이치이므로 분별이 없느니라「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2
因果異時も因果俱時に摂せらる인과이시도 인과구시에 포섭된다나타난 모습은 인과이시, 생명의 밑바닥은 인과구시
도표 2 · 인과이시와 인과구시

씨앗과 열매 — 생활에 비춘 인과이시와 인과구시

강의는 석가불법과 대성인 불법의 차이를 분명히 알려면 인과이시와 인과구시를 더 따져야 한다며, 이것을 우리의 생활에 견주어 논한다.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가 맺힌다.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에 합격한다. 약을 먹으면 약이 온몸에 돌아 효과가 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런 일들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있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인과를 쫓으면 인과이시다. 반면 끓는 물에 손을 넣어 뜨겁다고 느끼는 것, 화를 내면 얼굴빛이 바뀌는 것은 순간의 인과다. 이처럼 인과가 동시인 것을 인과구시라 한다. 그러나 강의는 이것들이 인과구시를 알기 쉽게 하려는 비슷한 예일 뿐 인과구시 그 자체는 아니라고 단서를 단다. 인과구시는 불법, 그 가운데서도 대성인의 생명철학의 밑바닥을 이루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과이시의 예로 든 봄의 씨앗과 가을의 열매도, 인과구시의 예로 든 끓는 물도, 모두 인과이시이다. 인과이시와 인과구시는 「이것은 이시, 저것은 구시」 하는 식으로 인과의 법칙을 분류하는 말이 아니다. 바르게 말하면 모든 것이 인과이시이고, 동시에 모든 것이 인과구시이다. 봄에 뿌린 씨에서 가을에 열매가 맺히는 것은 분명 인과이시로 보인다. 그러나 봄에 뿌린 씨앗 속에 가을에 맺힐 열매가 이미 담겨 있다고 보면 그것은 인과구시다. 어떤 현상에 나타난 모습을 따라 인과를 밝혀 가면 인과이시이고, 그 현상의 본질을 보면 인과구시인 것이다.

헤이노사에몬노조의 예

강의는 이것을 칠백 년 전 대성인을 박해한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平左衛門尉頼綱)의 생애로 설명한다. 요리쓰나는 다쓰노구치에서 대성인의 목을 베려 한 장본인이며, 사도 유배를 꾸민 장본인이며, 아쓰하라 법난에서 진시로 · 야고로 · 야로쿠로 세 사람의 목을 벤 장본인이다. 그는 당시 집권(執權)의 가사(家司)이자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소사(所司)를 겸했다. 호조 씨의 정무는 평정(評定) 제도로 운영되었지만 최종 결정권은 집권에게 있었으므로, 집권의 집사인 가사의 정치적 권력은 막대했다. 게다가 사무라이도코로의 소사로서 군사 · 경찰권까지 쥐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정부와 군부의 대권을 한 손에 쥔 셈이며, 그 집안이 3대에 걸쳐 이 직책을 맡았다는 것만 보아도 그 권세를 알 수 있다. 대성인이 「열한 통의 어서」 가운데 요리쓰나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귀하는 천하의 대들보이시며 만민의 손발이시니라(貴殿は一天の屋梁為り万民の手足為り)」(「헤이노사에몬노조요리쓰나에의 어장」, 171쪽)라고 쓰신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요리쓰나의 말년은 비참했다. 강의에 따르면, 그는 둘째 아들 스케무네(資宗)를 장군의 자리에 올리려 꾀하다가 맏아들 무네쓰나(宗綱)에게 고발당해, 에이닌 원년(1293) 4월 호조 사다토키에게 부자가 함께 죽임을 당했고, 맏아들 무네쓰나는 사도로 유배되었다. 대성인 입멸 후 12년째의 일이다. 니치칸 상인은 「선시초 문단」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금 생각건대, 헤이노사에몬 입도 가엔(果圓)은 목이 베였다. 이는 곧 연조 대성인의 얼굴을 친 까닭이다. 또 가장 사랑하던 둘째 아들 아와노카미도 목이 베였다. 이는 곧 아와 지방 출신의 연조 대성인의 목을 베려 했기 때문이다. 맏아들 무네쓰나는 사도로 유배되었다. 이는 곧 연조 대성인을 사도섬에 유배 보낸 까닭이다.」

대성인은 겐지 3년(1277) 6월의 「시모야마어소식」에서 이렇게 쓰셨다.

教主釈尊より大事なる行者を法華経の第五の巻を以て日蓮が頭を打ち十巻共に引き散して散散に蹋たりし大禍は現当二世にのがれがたくこそ候はんずらめ

교주석존보다 소중한 행자를, 법화경 제5권으로 니치렌의 머리를 치고 열 권을 모두 끌어 흩뜨려 마구 짓밟은 큰 재앙은, 현세와 내세 두 세상에 걸쳐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니라.
「시모야마어소식」, 363쪽

또 아쓰하라 법난이 한창이던 고안 2년(1279) 10월의 「성인어난사」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말법의 법화경 행자를 업신여기는 왕 · 신하 · 만민은 처음에는 아무 일 없는 듯하나 끝내 망하지 않는 이가 없느니라(過去現在の末法の法華経の行者を軽賎する王臣万民始めは事なきやうにて終にほろびざるは候はず)」(1190쪽)라고 하셨다.

이 어서들을 쓰실 때 요리쓰나는 하늘을 찌를 기세로 권세를 휘두르고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그의 비참한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현실만 보면 그때의 요리쓰나는 화려하고 만인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 생명의 밑바닥은 무간지옥의 고뇌를 품은 생명이었다. 요리쓰나가 대성인 입멸 12년 뒤에 멸망했다고 보면 인과이시다. 대성인을 박해한 그때 이미 그의 멸망이 정해졌다고 보면 인과구시다. 강의는 대성인의 불법이 드러난 사실을 겉으로 인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 · 생명의 밑바닥을 문제 삼고, 「순간」을 철저히 설해 마친 데에 그 특질이 있다고 말한다.

『심지관경』의 「과거의 인을 알고자 하면 그 현재의 과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고자 하면 그 현재의 인을 보라」는 글도 겉으로 보면 석가불법의 인과설이다. 그러나 대성인 불법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인과구시를 나타낸다. 과거의 인은 현재의 순간에 있고, 미래의 과도 현재의 순간에 있다. 강의는 이 예에서 분명하듯 신심을 잃으면 곧바로 지옥이라고 말한다. 서서히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드러난 모습만 주목하는 피상적인 보기다. 생명의 궁극에서 보면, 형태가 어떻든 생명의 본질은 이미 지옥이다.

요리쓰나의 최후(1293년 「헤이노젠몬의 난」)와 그 경위 — 둘째 아들을 장군으로 세우려 했다는 것, 맏아들의 고발 — 는 강의가 전하는 대로 적었다. 이 경위는 후대의 사서에 전하는 내용으로, 역사학에서는 세부에 다른 견해도 있다.

믿는 쪽에서 본 인과구시

거꾸로 본존을 믿는 입장에서 인과구시를 생각해 보자. 이삼십 년 꾸준히 신심을 관철하면 반드시 행복이 넘치는 생활이 된다. 아무리 영락한 사람이라도 마음으로 본존을 믿으면 장래 반드시 행복해진다. 강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직 인과이시의 입장이라고 말한다. 본존을 한 번 수지한 사람은 몸이 아무리 빈천해도 그 생명의 본질은 즉시 불계이며, 어떤 대왕보다도 존귀하다.

又法華経の薬王品に云く能く是の経典を受持すること有らん者も亦復是くの如し一切衆生の中に於て亦為れ第一等云云、文の意は法華経を持つ人は男ならば何なる田夫にても候へ、三界の主たる大梵天王・釈提桓因・四大天王・転輪聖王乃至漢土・日本の国主等にも勝れたり

또 법화경 약왕품에 「능히 이 경전을 수지하는 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일체중생 가운데 또한 제일이니라」라고 하였느니라. 글의 뜻은, 법화경을 지니는 사람은 남자라면 어떤 농부라도 삼계의 주인인 대범천왕 · 제석환인 · 사대천왕 · 전륜성왕, 나아가 중국 · 일본의 국주 등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니라.
「마쓰노전어소식」, 1378쪽

같은 어서는 이어서 「하물며 일본국의 대신 · 공경 · 겐지와 헤이시의 무사 · 백성 등보다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여인이라면 교시가녀 · 길상천녀 · 한나라의 이부인 · 양귀비 등 무량무변한 일체의 여인보다 뛰어나다고 설하셨느니라」고 하신다. 강의는 그러므로 본존을 모시는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으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지금은 불행하지만 이삼십 년 뒤에는 행복해진다」는 것은 드러난 모습에 대해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이 행복이며, 지금 큰 복운을 쌓고 있다. 「이렇게 되면 행복할 텐데, 저렇게 하면 좋을 텐데」 하고 바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나 바라기만 하고 할 바를 모르며, 순간순간의 행동이 행복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답답하게 즐겁지 못한 나날을 보낸다면, 그것은 인과이시에 사로잡힌 것이며 석가불법의 아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의는 엄하게 말한다.

「십자어서」의 「이제 또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행복을 만 리 밖에서도 모을 것이니라(今又法華経を信ずる人は・さいわいを万里の外よりあつむべし)」(1492쪽)는 말씀처럼, 본존을 믿은 사람은 이미 온갖 복운을 쌓고 있다. 현재의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대성인의 불법에 사는 태도다. 그렇다고 인과이시가 틀린 것은 아니다. 생명의 본질과 밑바닥은 인과구시이지만, 드러난 현상과 모습은 인과이시인 것이 당연하다. 직달정관이나 즉신성불은 인과구시에 대해, 곧 생명의 밑바닥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증거로서 행복한 모습을 5년, 10년, 20년 뒤에 나타내 간다. 그러므로 인과이시도 인과구시에 포섭된다.

불법은 엄격하다. 겉의 인과를 쫓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의 한 생각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어의구전』은 「비(秘)란 엄격한 것이다. 삼천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이 밖에 불가사의는 없다(秘とはきびしきなり三千羅列なり是より外に不思議之無し)」(713쪽)라고 한다. 삼천의 만법도 한 생각에 거두어지고, 한 생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크게 열린 미래를 여는 것도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것도 현재의 지위나 신분이나 입장이 아니라 자기의 한 생각이 정한다. 그렇다면 「이 정도면 됐다」는 현재에 대한 자기만족을 깨뜨리고 이 둘도 없는 순간순간을 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자고 강의는 말한다.

一切衆生・南無妙法蓮華経と唱うるより外の遊楽なきなり経に云く「衆生所遊楽」云云、此の文・あに自受法楽にあらずや

일체중생에게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 외에 유락은 없느니라. 경에 「중생이 유락하는 곳」이라 하였느니라. 이 글이 어찌 자수법락이 아니겠는가.
「시조깅고전답서」, 1143쪽

이 어서는 이어서 「유락이란 우리의 색심과 의정이 다 일념삼천 · 자수용신의 부처가 아니겠는가. 법화경을 지니는 것 외에 유락은 없다. 현세안온 · 후생선처란 이것이다」라고 하시고,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깨닫고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열어,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생각하며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라. 이것이 어찌 자수법락이 아니겠는가. 더욱더 강성한 신력을 다하시라」고 맺으신다. 강의는 이것이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바로 지금의 생활이 유유한 생활이며 행복의 경애라는 말씀이라고 본다. 신심보다 강한 것은 없다. 신심의 한 생각이 있으면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다. 국토를 안온하게 하고, 비참한 세계를 평화로운 세계로 바꾸고, 삼재칠난을 막는 것도 신심으로 이룰 수 있다. 과거 오랜 겁의 죄업을 모두 숙명전환하고 위대한 미래를 쌓는 것도 오직 신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 이 장에 대한 강의의 맺음이다.

제11장의 물음은 「부처는 먼 곳에 있는 완성된 존재」라는 생각의 가장 정교한 표현이다. 강의는 이 물음을 석가불법의 인과이시 · 역겁수행의 사상으로 읽고, 그 답인 수지즉관심을 인과구시의 생명관으로 읽는다. 물음이 무거울수록 답의 전환도 크다. 부처의 인행과덕 전부가 본존을 믿는 한 생각에 담긴다면, 범부는 먼 길을 걸어 부처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의 생명을 연다.

제12장 교론에 약하여 묻다
어서 243쪽 11행 ~ 244쪽 6행 · 第十二章 教論に約して問う

본문

원문 대조어서 243쪽 11행 ~ 244쪽 6행
本文 · 어서 원문

此れを以て之を思うに爾前の諸経は実事なり実語なり、 華厳経に云く「究竟して虚妄を離れ染無きこと虚空の如し」と仁王経に云く「源を窮め性を尽して妙智存せり」金剛般若経に云く「清浄の善のみ有り」 馬鳴菩薩の起信論に云く「如来蔵の中に清浄の功徳のみ有り」 天親菩薩の唯識論に云く「謂く余の有漏と劣の無漏と種は金剛喩定が現在前する時極円明純浄の本識を引く彼の依に非ざるが故に皆永く棄捨す」等云云、 爾前の経経と法華経と之を校量するに彼の経経は無数なり時説既に長し一仏二言彼に付く可し、 馬鳴菩薩は付法蔵第十一にして仏記に之れ有り天親は千部の論師・四依の大士なり、天台大師は辺鄙の小僧にして一論をも宣べず誰か之を信ぜん、 其の上多を捨て小に付くとも法華経の文分明ならば少し恃怙有らんも法華経の文に何れの所にか十界互具・百界千如・一念三千の分明なる証文之れ有りや、 随つて経文を開祏するに「断諸法中悪」等云云、 天親菩薩の法華論・堅慧菩薩の宝性論に十界互具之れ無く漢土南北の諸大人師・日本七寺の末師の中にも此の義無し但天台一人の僻見なり伝教一人の謬伝なり、 故に清涼国師の云く「天台の謬りなり」慧苑法師の云く「然るに天台は小乗を呼んで三蔵教と為し其の名謬濫するを以て」等云云、 了洪が云く「天台独り未だ華厳の意を尽さず」等云云、 得一が云く「咄いかな智公汝は是れ誰が弟子ぞ、三寸に足らざる舌根を以て覆面舌の所説の教時を謗ず」等云云、 弘法大師の云く「震旦の人師等諍つて醍醐を盗んで各自宗に名く」等云云、 夫れ一念三千の法門は一代の権実に名目を削り四依の諸論師其の義を載せず漢土日域の人師も之を用いず、如何が之を信ぜん。

풀이

이로써 이것을 생각하건대, 이전의 여러 경이야말로 실사이며 실어이니라. 화엄경에 「구경에는 허망을 떠나 물듦이 없음이 허공과 같다」 하였고, 인왕경에 「근원을 다하고 본성을 다하여 묘지만이 남아 있다」 하였으며, 금강반야경에 「청정한 선만이 있다」 하였느니라. 마명보살의 기신론에 「여래장 가운데에는 청정한 공덕만이 있다」 하였고, 천친보살의 유식론에 「이른바 나머지 유루와 열등한 무루의 종자는, 금강유정이 앞에 나타날 때 지극히 원만하고 밝고 순수하고 청정한 본식을 이끌어 내니, 그것들은 의지할 바가 아니므로 모두 길이 버린다」 하였느니라. 이전의 경들과 법화경을 견주어 헤아리면 저 경들은 무수하고 설한 시간도 이미 기니라. 한 부처에게 두 말이 있다면 저쪽을 따라야 하느니라. 마명보살은 부법장의 제11로서 부처의 예언에 나와 있고, 천친은 천 부의 논을 지은 논사이며 사의의 대사이니라. 천태대사는 변두리의 보잘것없는 승려로서 한 권의 논도 펴지 않았으니 누가 이를 믿겠는가. 그뿐 아니라 많은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을 따른다 하더라도, 법화경의 글이 분명하다면 조금은 의지할 데가 있겠으나, 법화경의 글 어디에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의 분명한 증문이 있는가. 그래서 경문을 열어 보건대 「모든 법 가운데의 악을 끊었다」 하였느니라. 천친보살의 법화론과 견혜보살의 보성론에도 십계호구는 없고, 중국 남북의 여러 큰 인사와 일본 칠사의 말사들 가운데에도 이 뜻은 없느니라. 다만 천태 한 사람의 치우친 견해이며 전교 한 사람의 잘못 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청량국사는 「천태의 잘못이다」 하였고, 혜원법사는 「그런데 천태는 소승을 불러 삼장교라 하니 그 이름이 어지럽고 잘못되었다」 하였으며, 요코는 「천태 혼자 아직 화엄의 뜻을 다하지 못했다」 하였고, 도쿠이치는 「쯧쯧, 지공(智公)이여, 너는 누구의 제자인가. 세 치도 안 되는 혀뿌리로 얼굴을 덮는 혀를 지닌 부처가 설한 교시를 비방하는가」 하였으며, 홍법대사는 「중국의 인사들이 다투어 제호를 훔쳐 저마다 자기 종에 이름 붙였다」 하였느니라. 무릇 일념삼천의 법문은 일대의 권교와 실교에 그 이름조차 없고, 사의의 여러 논사도 그 뜻을 싣지 않았으며, 중국과 일본의 인사들도 이를 쓰지 않았느니라. 어찌 이것을 믿겠는가.

「開祏」의 「祏」은 강의 本文에서 한 글자가 깨져 있던 자리를 강의 講義의 표기로 보충한 것이다.

어구 풀이

華厳経・仁王経・金剛般若経화엄경 · 인왕경 · 금강반야경
묻는 이가 드는 세 경. 화엄경의 글은 초주(初住)의 깨달음이 허망을 떠나 허공처럼 깨끗하다는 것, 인왕경의 글은 대각 열반에 이르면 무명의 근원과 본성을 다 없애 묘지만 남는다는 것, 금강반야경의 글은 깨달음에 이르면 청정한 선만 있다는 것. 셋 모두 「부처의 생명에는 악(구계)이 없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馬鳴菩薩마명보살
범어 아슈바고샤. 2세기 무렵 인도의 불교 사상가 · 시인으로 부법장의 제11. 본래 바라문 학자로 불교를 비난하다가 부나사에게 논파되어 귀의했다. 불전 문학 『불소행찬』의 저자로 알려진다.
起信論기신론
『대승기신론』. 진제 역 1권과 실차난타 역 2권이 있다. 모든 중생에게 여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여래장 사상의 입장에서 대승의 교리와 실천을 요약했다. 「마명보살 지음」이라 되어 있으나, 내용상 5~6세기 성립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 중국 찬술설도 있다.
天親菩薩천친보살
4~5세기 인도의 논사 바수반두. 구역 천친, 신역 세친. 처음 설일체유부를 배워 『구사론』을 지었으나 형 무착에게 이끌려 대승으로 돌아섰고, 유식 사상을 발전시켰다. 『법화론』을 비롯한 많은 논서로 「천 부의 논사」라 불린다. 인물탐구 천친보살.
唯識論유식론
본문의 인용은 천친의 『유식삼십송』을 호법의 설을 중심으로 열 논사의 해석과 함께 현장이 한 책으로 엮어 옮긴 『성유식론』(10권)의 글이다. 법상종의 근본 논서.
金剛喩定금강유정
보살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나는, 금강처럼 견고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리는 선정. 이 선정이 나타나면 남은 유루 · 열등한 무루의 종자를 모두 버리고 청정한 본식에 이른다는 것이 유식의 설이다.
付法蔵부법장
석존의 법을 차례로 전한 스물넷(또는 스물셋)의 조사. 『부법장인연전』에 근거한다. 마명은 그 제11, 용수는 제13.
四依の大士사의의 대사
부처 멸후에 중생이 의지할 만한 네 단계의 보살 · 성인. 천친은 그 가운데 하나로 우러러졌다.
堅慧菩薩・宝性論견혜보살 · 보성론
견혜(사라마티)는 날란다의 학자로 전한다. 『구경일승보성론』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어 이승 · 일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한 여래장 계열의 논서. 저자를 미륵으로 보는 설도 있다.
南北の諸大人師・日本七寺남북의 여러 대인사 · 일본 칠사
천태 이전 중국의 남쪽 세 학파와 북쪽 일곱 학파(남삼북칠), 그리고 나라(奈良)의 일곱 큰 절에 속한 학승들.
清涼国師청량국사
징관(738~839). 중국 화엄종 제4조. 묘락대사에게 천태의 지관을 배우기도 했다. 『화엄경소』에서 법화경 등 일체경이 돌아갈 근본은 화엄경이라 했으나,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心如工畫師)」는 화엄경 글을 풀 때는 천태의 일념삼천 위에서만 가능한 성악 · 성선의 법문을 썼다.
慧苑法師혜원법사
화엄종 제3조 법장의 제자. 스승이 세운 오교가 천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스스로 사교를 세웠다가 이단으로 여겨져 정통을 잇지 못했다.
了洪요코
전기가 분명하지 않다. 나라의 화엄종 승려라고도 한다.
得一도쿠이치
헤이안 초기 법상종 승려(徳一). 법화일승은 방편이고 삼승이 진실이라는 설을 세워 전교대사와 여러 차례 논쟁했다(삼일권실 논쟁). 「세 치도 안 되는 혀뿌리」의 글은 그의 저술 『중변의경잔』에 있다고 한다.
弘法大師홍법대사
구카이(空海). 일본 진언종의 개조. 천태가 법화경을 제호(醍醐)에 비유한 것은 육바라밀경의 다라니장 제호를 훔쳐 온 것이라고 비난했다.

세 경 · 두 논 — 「부처의 생명에는 청정한 선만 있다」

제11장이 「교주」를 들어 물었다면, 제12장은 「교론」, 곧 경전과 논서를 들어 묻는다. 묻는 이는 먼저 결론부터 말한다. 십계호구와 일념삼천을 믿을 수 없다는 데서 생각하면, 법화경이 틀렸고 이전의 여러 경이 실사 · 실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세 경과 두 논을 든다. 화엄경 · 인왕경 · 금강반야경은 모두 부처의 깨달음을 「허망을 떠나 물듦이 없다」, 「무명의 근원을 다해 묘지만 남는다」, 「청정한 선만 있다」고 설한다. 부처가 멸한 뒤에도 마명의 『기신론』은 「여래장 가운데 청정한 공덕만 있다」고 하고, 천친의 『유식론』은 금강유정이 나타날 때 남은 유루와 열등한 무루의 종자를 모두 버리고 청정한 본식에 이른다고 한다. 이 경론들에서 부처의 생명에는 청정한 선만 있고, 구계의 악은 끊어져 없다. 그러니 「불계에 구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십계호구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묻는 이는 두 가지 「상식적인」 논거를 덧붙인다. 첫째는 수와 시간의 논거다. 이전의 경은 무수하고 법화경은 한 경뿐이다. 설한 기간도 이전은 사십여 년이고 법화경은 팔 년이다. 한 부처에게 두 말이 있다면 많은 쪽을 따라야 한다. 둘째는 인물의 권위다. 마명은 부법장의 제11이며 부처의 예언(불기)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고, 천친은 천 부의 논을 지은 논사이자 사의의 대사다. 그에 비해 천태대사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중국에 태어난 「보잘것없는 승려」이며, 논 한 권도 짓지 않았다. 누가 그를 믿겠는가.

법화경 안에서의 반증

묻는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설령 많은 쪽을 버리고 적은 쪽을 따른다 해도, 법화경의 글에 십계호구가 분명히 설해져 있다면 조금은 의지할 데가 있다. 그러나 법화경 어디에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의 분명한 증문이 있는가. 오히려 법화경을 펴 보면 방편품에 「모든 법 가운데의 악을 끊었다(斷諸法中惡)」는 글이 있다. 부처의 경지에는 구계의 악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법화경 스스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법화경의 주석서인 천친의 『법화론』에도, 견혜의 『보성론』에도 십계호구는 없다. 중국에서도 천태 이전의 남삼북칠의 여러 인사들, 일본 나라 칠대사의 학승들 가운데서도 이 뜻을 말한 사람이 없다. 「다만 천태 한 사람의 치우친 견해(僻見)이며 전교 한 사람의 잘못 전한 것(謬傳)」이라는 것이다.

이 반박은 교묘하게 짜여 있다. 경전(세 경) → 논서(두 논) → 법화경 자체(「단제법중악」) → 법화경의 주석(법화론 · 보성론) → 인사(남삼북칠 · 칠사)의 순서로,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권위가 십계호구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그림을 그린다. 강의는 이런 반론을 보면 권교와 소승에 집착하는 사람의 생각이 분명해지는 동시에,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법문이 일대 불교의 진수이자 궁극의 이치라는 것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①세 경
華厳経화엄경究竟して虚妄を離れ染無きこと虚空の如し구경에 허망을 떠나 물듦이 없음이 허공과 같다
仁王経인왕경源を窮め性を尽して妙智存せり근원을 다하고 본성을 다하여 묘지만 남는다
金剛般若経금강반야경清浄の善のみ有り청정한 선만 있다
②두 논
起信論기신론如来蔵の中に清浄の功徳のみ有り여래장 안에 청정한 공덕만 있다
唯識論유식론금강유정에서 남은 종자를 모두 버림
③수 · 시간 · 인물
彼の経経は無数なり時説既に長し저 경들은 무수하고 설한 시간도 길다
마명(부법장 제11)천친(천 부의 논사)
대天台大師は辺鄙の小僧천태대사는 변두리의 보잘것없는 승려
④법화경 자체
断諸法中悪모든 법 가운데의 악을 끊었다

법화론 · 보성론 · 남삼북칠 · 일본 칠사에 없음

⑤다섯 비판자
청량혜원요코도쿠이치홍법
但天台一人の僻見なり伝教一人の謬伝なり다만 천태 한 사람의 치우친 견해요 전교 한 사람의 잘못 전한 것이니라
도표 3 · 교론에 약한 물음의 논거

천태를 비판한 다섯 사람

물음은 마지막으로 천태를 직접 비판한 다섯 사람의 말을 든다. 이들은 모두 실제로 천태 교학과 맞섰던 종파의 대표자들이다.

첫째, 화엄종의 청량국사 징관은 「천태의 잘못이다」라고 했다. 현대어역은 이것을 「화엄경을 낮추고 법화경을 높이는 것은 천태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읽는다. 그런데 어구 풀이에서 보았듯 징관은 묘락대사에게서 천태의 지관을 배운 사람이며, 화엄경의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는 글을 풀 때 천태 일념삼천의 성악 · 성선의 법문을 빌려 썼다. 천태를 비판하면서 천태의 법문으로 자기 경을 풀었다는 이 모순은 제14장에서 대성인이 「처음에는 반역하다가 뒤에는 오로지 귀복했다」고 하실 때의 한 근거가 된다.

둘째, 화엄종의 혜원법사는 「천태는 소승을 불러 삼장교라 하니 그 이름이 어지럽고 잘못되었다」고 했다. 삼장(경 · 율 · 논)은 소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승에도 있는데, 천태가 소승만을 「삼장교」라 부르는 것은 대승과 소승을 어지럽힌 것이라는 비판이다.

셋째, 요코는 「천태 혼자 아직 화엄의 뜻을 다하지 못했다」고 했다. 천태의 교판이 상당한 것이기는 하나 화엄경의 깊은 뜻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넷째, 법상종의 도쿠이치는 「쯧쯧, 지공이여, 너는 누구의 제자인가. 세 치도 안 되는 혀뿌리로, 얼굴을 덮는 혀를 가진 부처가 설한 교시를 비방하는가」라고 했다. 「얼굴을 덮는 혀(覆面舌)」는 진실만을 말하는 부처의 상호를 가리킨다. 도쿠이치는 법상종의 삼시교판(유 · 공 · 중)이야말로 부처가 설한 진실의 교시인데, 천태는 제멋대로 오시팔교를 세워 그것을 비방했다고 공격한 것이다. 도쿠이치와 전교대사 사이의 이 논쟁은 일본 불교사에서 삼일권실(三一權實)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째, 진언종의 홍법대사는 「중국의 인사들이 다투어 제호를 훔쳐 저마다 자기 종에 이름 붙였다」고 했다. 『육바라밀경』에 설해진 다섯 가지 법장 가운데 제5 다라니장(진언)이 제호에 비유되어 있는데, 천태가 법화경을 제호에 비유한 것은 이것을 훔쳐 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묻는 이는 이렇게 맺는다. 일념삼천의 법문은 석존 일대의 권교에도 실교에도 그 이름조차 없고, 멸후 사의의 논사들도 그 뜻을 싣지 않았으며, 중국과 일본의 인사들도 아무도 쓰지 않았다. 어찌 이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본문이 이 다섯 사람의 말을 정확히 어느 저술에서 인용했는지는 연구에 따라 견해가 갈린다. 도쿠이치의 글은 『중변의경잔』에 있다고 전하고, 홍법의 글은 그의 『변현밀이교론』 계열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서는 인용처를 확정하지 않는다.

권교에 사로잡힌 눈에는 미로로 보인다

강의는 이 물음에 붙여 하나의 일화를 든다. 고이즈미 야쿠모(라프카디오 헌)가 『고등불교교리론(The Higher Buddhism)』에서 「일본의 대승불교를 연구하면 마치 미로에 들어간 느낌이 든다」고 썼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것을 권대승경에 사로잡히면 실대승교의 이론을 붙잡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권교와 소승의 종교, 곧 염불 · 진언 · 선 · 법화경 문상의 천태 등에 집착하면 말법 본문의 원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말법 본문의 삼대비법의 원리를 모르면 경교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강의의 판단이다.

강의는 이 문제를 불교 내부의 논쟁에만 가두지 않는다. 정치 · 경제 · 교육 · 문화 · 과학 · 도덕 등 모든 활동이 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구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일상생활의 근본에는 모두 종교가 있고, 그 종교는 십계상주 · 일념삼천을 궁극의 이치로 삼는 종교여야 한다. 강의는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십계호구 · 일념삼천을 모르는 종교를 아무리 믿고 수행해도, 그것을 모르는 한 자기 생명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생명의 실체와 본질을 모르면 세간 여러 현상의 근원도 꿰뚫어 볼 수 없다.

수량품에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如來如實知見三界之相)」는 글이 있다. 우리는 삼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므로 미혹한 범부가 되고 고뇌에 허덕이는 중생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안의 십계, 기심의 삼천을 알 수 있는가. 강의의 답은 하나다. 오직 한결같이 십계호구의 본문의 본존을 수지하여 신행에 힘쓰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제12장의 물음은 이렇게 이미 제16장의 답을 향해 열려 있다.

제12장의 물음은 경전 · 논서 · 인사의 권위를 총동원한 「불계에는 악이 없다」는 주장이다. 강의는 이 물음이 보여 주는 것이 십계호구 · 일념삼천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법문인가라는 사실이라고 본다. 권위의 수와 무게로 진리를 가리려는 한 일념삼천은 미로처럼 보인다. 그 미로를 빠져나가는 열쇠는 제13장의 경문 대조와, 제16장의 수지에 있다.

제13장 교론의 난을 회통하다
어서 244쪽 7행 ~ 244쪽 17행 · 第十三章 教論の難を会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44쪽 7~17행
本文 · 어서 원문

答えて曰く此の難最も甚し最も甚し 但し諸経と法華との相違は経文より事起つて分明なり未顕と已顕と証明と舌相と二乗の成不と始成と久成と等之を顕わす、 諸論師の事、天台大師云く「天親竜樹・内鑒泠然たり外には時の宜きに適い各権に拠る所あり、而るに人師偏に解し学者苟も執し遂に矢石を興し各一辺を保ちて大に聖道に乖けり」等云云、 章安大師云く「天竺の大論尚其の類に非ず真旦の人師何ぞ労わしく語るに及ばん此れ誇耀に非ず法相の然らしむるのみ」等云云、 天親・竜樹・馬鳴・堅慧等は内鑒泠然なり然りと雖も時未だ至らざるが故に之を宣べざるか、 人師に於ては天台已前は或は珠を含み或は一向に之を知らず已後の人師或は初に之を破して後に帰伏する人有り或は一向用いざる者も之れ有り 但し断諸法中悪の経文を会す可きなり、彼は法華経に爾前の経文を載するなり往いて之を見るに経文分明に十界互具之を説く所謂「欲令衆生開仏知見」等云云、 天台此の経文を承けて云く「若し衆生に仏の知見無んば何ぞ開を論ずる所あらん当に知るべし仏の知見衆生に蘊在することを」云云、 章安大師の云く「衆生に若し仏の知見無くんば何ぞ開悟する所あらん若し貧女に蔵無んば何ぞ示す所あらんや」等云云。

풀이

답하기를, 이 난은 가장 심하고 가장 심하도다. 다만 여러 경과 법화경의 차이는 경문으로부터 일이 일어나 분명하니라. 아직 드러내지 않음과 이미 드러냄, 증명과 혀의 상, 이승의 성불과 불성불, 처음 성불함과 오래전 성불함 등이 이것을 드러내느니라. 여러 논사의 일은, 천태대사가 「천친 · 용수는 안으로는 맑고 분명하게 알았으나, 밖으로는 그때의 형편에 맞추어 저마다 권교에 의거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인사들은 치우치게 풀고 학자들은 함부로 집착하여 마침내 화살과 돌을 일으켜 저마다 한쪽만을 지키며 크게 성인의 도에 어긋났다」 하였느니라. 장안대사는 「천축의 대론도 오히려 그와 같은 부류가 아니거늘, 중국의 인사를 어찌 번거롭게 말할 것인가. 이것은 자랑함이 아니라 법상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느니라. 천친 · 용수 · 마명 · 견혜 등은 안으로 맑고 분명하게 알았으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펴지 않았던 것이니라. 인사에 있어서는, 천태 이전은 혹은 구슬을 머금었고 혹은 전혀 이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이후의 인사는 혹은 처음에 이것을 깨뜨리다가 뒤에 귀복한 사람이 있고, 혹은 전혀 쓰지 않는 사람도 있느니라. 다만 「모든 법 가운데의 악을 끊었다」는 경문은 회통해야 하느니라. 그것은 법화경에 이전의 경문을 실은 것이니라. 나아가 이를 보건대 경문에 분명히 십계호구를 설하였으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하신다」 하였느니라. 천태는 이 경문을 받아 「만약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이 없다면 어찌 연다고 논할 바가 있겠는가. 마땅히 알라, 부처의 지견이 중생에게 쌓여 있음을」 하였고, 장안대사는 「중생에게 만약 부처의 지견이 없다면 어찌 열어 깨닫는 바가 있겠는가. 만약 가난한 여인에게 창고가 없다면 어찌 보여 줄 바가 있겠는가」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未顕と已顕미현과 이현
무량의경의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四十餘年未顯眞實)」와, 법화경 방편품의 「바로 방편을 버리고 다만 위없는 도를 설한다(正直捨方便 但說無上道)」의 대비. 이전은 「아직 드러내지 않은」 가르침, 법화경은 「이미 드러낸」 가르침.
証明と舌相증명과 설상
법화경 보탑품에서 다보여래가 「석가모니 세존이 설한 바는 모두 진실이다(皆是眞實)」라고 증명하고, 신력품에서 석존과 시방 분신불이 넓고 긴 혀를 범천까지 내밀어(廣長舌相) 진실을 증명한 것. 이전의 경에는 이런 증명이 없다.
二乗の成不이승의 성불 · 불성불
이전의 경에서는 성문 · 연각의 이승이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했으나, 법화경 적문에서는 이승이 수기를 받는다.
始成と久成시성과 구성
이전과 적문은 석존이 이 세상에서 처음 성불했다(始成正覺)고 설하고, 본문 수량품은 구원에 이미 성불했다(久遠實成)고 설한다.
内鑒泠然내감냉연
안으로는 맑고 분명하게 비추어 안다는 뜻. 천친 · 용수 같은 논사는 일념삼천을 마음속으로는 알았으나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천태의 평가.
矢石を興し시석을 일으켜
화살과 돌은 옛 전쟁의 도구로, 불교 각 종파가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가리킨다. 호랑이로 잘못 보고 돌을 쏘았다는 중국 고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天台已前は或は珠を含み천태 이전은 혹은 구슬을 머금고
천태 이전에 일념삼천의 구슬을 마음에 머금고 있었던 이들. 강의의 어석은 부대사 · 혜문 · 남악 · 구마라집 · 도생 같은 인사를 든다. 이들은 법화경의 참뜻을 체득한 위에서 권교를 폈고, 남삼북칠처럼 법화경에 적대하지 않았다.
欲令衆生開仏知見욕령중생개불지견
방편품의 「제불세존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여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나오신다」. 이어서 보이고(示) · 깨닫게 하고(悟) · 들어가게 하려(入) 한다는 「개시오입(開示悟入)」의 네 가지를 설하며, 이것이 부처가 세상에 나오는 「일대사인연」이다.
蘊在온재
쌓여 감추어져 있음. 부처의 지견이 중생의 생명 안에 본래 갖추어 쌓여 있다는 뜻.
貧女の蔵빈녀의 창고
열반경의 비유. 가난한 여인의 집 땅속에 금 창고가 묻혀 있으나 본인은 모르는데, 누군가 파내어 보여 주자 비로소 알게 된다.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나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비유한다.

「이 난은 가장 심하다」 — 네 가지 대비로 경을 가리다

대성인은 답의 첫머리에서 「이 난은 가장 심하고 가장 심하다」고 두 번 거듭하신다. 묻는 이의 반박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정면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답은 오히려 간결하다. 강의는 이 장에서 대성인이 앞 장의 세 경 · 두 논에 대해 「네 가지 뜻(四義)」을 들어 반박하신다고 정리한다.

이 넷은 모두 경문 자체가 증언하는 차이다. 대성인은 「여러 경과 법화경의 차이는 경문으로부터 일이 일어나 분명하다」고 하신다. 경전의 우열은 학자의 주장이나 종파의 권위가 아니라 경전이 스스로 말한 것으로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성인이 여러 어서에서 일관되게 쓰신 「문증」 우선의 방법이다.

첫째로, 무량의경은 법화경 직전에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이전의 경은 스스로 「아직 드러내지 않은」 가르침이라고 고백한 셈이다. 법화경 방편품은 「바로 방편을 버리고 다만 위없는 도를 설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전의 경과 법화경의 말이 서로 다르다면, 묻는 이처럼 수가 많은 이전의 경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낸」 법화경을 따라야 한다.

둘째로, 법화경에는 다보여래와 시방 분신의 부처들의 증명, 그리고 범천까지 이르는 넓고 긴 혀의 증명이 있다. 이전의 여러 경에는 이런 증명이 없다. 현대어역은 「아미타불의 설상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아미타경에도 여러 부처가 혀를 내밀어 증명하는 장면이 있으나, 그것은 법화경의 증명과 견줄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전에서는 이승이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지만 법화경에서는 모든 이가 불도를 이룬다. 이전의 경에서 「부처의 생명에는 청정한 선만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승의 생명과 부처의 생명을 끊어 놓은 세계관의 표현이다. 이승이 성불한다는 것은 이승계에 불계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십계호구다.

넷째로, 이전의 경은 석존이 이 세상에서 수행하여 처음 성불했다고 설하지만(시성정각), 법화경은 구원실성을 설해 드러냈다. 제11장의 물음에서 석존의 인위와 과위가 이전 · 적문 · 본문의 세 겹으로 나뉘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 네 번째 대비가 그대로 제11장의 물음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견주면 이전은 열등하고 작은 가르침이고, 법화경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진실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경문에 의해 분명하다. 수와 시간의 논거(「저 경들은 무수하고 설한 시간도 길다」)는 이 네 대비 앞에서 힘을 잃는다.

未顕と已顕と証明と舌相と二乗の成不と始成と久成と等之を顕わす미현과 이현, 증명과 설상, 이승의 성불과 불성불, 시성과 구성 등이 이것을 드러내느니라
① 미현 · 이현
이전의 여러 경
四十余年未顕真実사십여 년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음무량의경
법화경
正直捨方便 但説無上道바로 방편을 버리고 다만 위없는 도를 설함방편품
② 증명 · 설상
이전의 여러 경
증명 없음
법화경
皆是真実모두 진실이다다보여래 · 보탑품시방 분신불의 광장설상(신력품)
③ 이승의 성불
이전의 여러 경
이승 영불성불
법화경
이승작불(비유품 이하 수기)
④ 시성 · 구성
이전의 여러 경
시성정각
법화경
我実成仏已来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수량품
도표 4 · 경문이 증언하는 네 가지 대비

안으로 알았으나 밖으로 펴지 않은 논사들

다음으로 대성인은 논사와 인사에 관한 반박을 푸신다. 근거는 천태와 장안의 말이다.

천태대사는 「천친 · 용수는 안으로 맑고 분명하게 알았으나(內鑒泠然), 밖으로는 그때의 형편에 맞추어 저마다 권교에 의거한 바가 있었다」고 했다. 현대어역은 이것을 「천친이나 용수는 일념삼천의 법문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는 정법시대에 맞는 법문을 세워 권대승교를 폈다」로 읽는다. 그런데 그 뒤의 인사들은 치우친 견해에 집착하고 학자들도 아견을 세워, 마침내 논쟁에 논쟁을 거듭하며 중생 구제를 잊고 서로 싸웠으며, 각 종파는 불교의 한 귀퉁이만을 지켜 크게 석존의 참뜻에 어긋났다는 것이다.

장안대사는 더 나아가 「천축의 대론도 오히려 그와 같은 부류가 아니거늘, 중국의 인사를 어찌 번거롭게 말할 것인가. 이것은 자랑함이 아니라 법상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인도의 대논사들조차 천태와 견줄 수 없는데, 중국의 학자들을 하나하나 논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장안은 이것이 스승을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천태가 설한 법문 자체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대성인은 이 두 글로 「마명은 부법장 제11, 천친은 천 부의 논사, 천태는 변두리의 보잘것없는 승려」라는 인물의 권위 논거를 뒤집으신다.

그리고 결론하신다. 천친 · 용수 · 마명 · 견혜 등은 안으로 일념삼천을 알았으나, 아직 정법시대여서 법화경이 널리 퍼질 때가 아니었으므로 이것을 펴지 않았다. 인사들에 대해서는, 천태 이전의 사람들은 혹은 일념삼천의 구슬을 마음에 머금었고(부대사 · 혜문 · 남악 · 구마라집 · 도생 등), 혹은 전혀 알지 못했다. 천태 이후의 사람들은 혹은 처음에 일념삼천을 깨뜨리다가 뒤에 귀복했고, 혹은 끝내 쓰지 않았다.

강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정리한다. 앞 장에서 든 논사 · 인사의 의견은 의지할 만한 문증도 도리도 없다고 논파하시고, 천태 이전에도 천친 · 용수 · 마명 · 견혜 같은 사람들은 십계호구 · 일념삼천을 알고 있었다고 설하셨다. 실대승경을 참으로 연구한다면 일체 우주가 곧 남묘호렌게쿄이며 남묘호렌게쿄가 곧 우주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옛 불교 연구자들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13장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펴지 않았다」는 판단은 제14장에서 「혹은 근기는 있으나 때가 없었는가, 혹은 근기와 때가 모두 없었는가」로 다시 다루어지고, 제7편(제29~31장)의 「본화 출현의 시절」 논의에서 크게 펼쳐진다. 교 · 기 · 시 · 국 · 서(敎機時國序)의 다섯 가지로 법의 홍통을 가리는 대성인의 오강(五綱)의 관점이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다.

「모든 법 가운데의 악을 끊었다」를 회통하다

이제 남은 것은 묻는 이가 법화경 안에서 찾아낸 반증, 「모든 법 가운데의 악을 끊었다」는 방편품의 글이다. 대성인은 이렇게 회통하신다. 「그것은 법화경에 이전의 경문을 실은 것이다.」

강의는 이 글이 놓인 맥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글은 부처가 법화경을 설하기에 앞서, 법화경 이전 사십이 년 동안 아함 · 방등 · 반야 · 화엄을 설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있으며, 이전의 부처의 경지를 말한 말이다. 지금까지 부처는 장엄한 존재로서 중생에게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을 설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방편이었고, 실은 일승의 묘법을 설하는 것이 부처가 세상에 나온 본회다. 그 방편의 교상 속에서, 삼승을 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말하는 한 구절이 「단제법중악」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법화경의 결론이 아니라, 법화경이 이전의 부처관을 인용하여 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를 보건대(往いて之を見るに)」, 같은 방편품의 경문은 분명히 십계호구를 설하고 있다. 그것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하신다」는 글이다. 천태는 이 글을 받아 『법화문구』에서 「만약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이 없다면 어찌 연다고 논할 바가 있겠는가. 마땅히 알라, 부처의 지견이 중생에게 쌓여 있음을」이라고 했다. 열 것이 없다면 「연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연다」고 설한 이상, 부처의 지견은 이미 중생 안에 쌓여 있다. 이것이 바로 구계에 불계가 갖추어진다는 십계호구다.

장안대사는 열반경의 「가난한 여인의 금 창고」 비유로 이것을 거듭 풀었다. 가난한 여인의 집 땅속에 금 창고가 없다면 누가 무엇을 파내어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열고(開) · 보이고(示) · 깨닫게 하고(悟) · 들어가게 한다(入)」는 부처의 일대사인연은 모두 중생 안에 이미 부처의 지견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대성인은 여기서 묻는 이의 논법을 그대로 되돌려 주신 셈이다. 묻는 이는 「법화경의 글 어디에 십계호구의 분명한 증문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대성인의 답은, 법화경이 세상에 설해진 이유 그 자체, 부처가 세상에 나온 일대사인연을 밝힌 글이 바로 그 증문이라는 것이다. 제2편 제10장에서 대성인이 「너는 이미 유일대사인연의 경문을 보고 들었으면서 믿지 않는다」고 꾸짖으신 것도 같은 글을 가리킨다.

강의는 「개(開)」에 관한 이 논의를 제16장에서 다시 살린다. 묘락대사가 「법화경 이전은 아직 권을 열지 않았으므로 구족이라 이름하지 않는다」고 한 것을 근거로, 「열다」와 「구족」이 같은 뜻의 두 면이라는 것을 밝히는 대목이다. 개불지견의 「개」가 제16장의 「구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제13장에서 대성인은 경론의 권위 논쟁을 경문 대조로 끝내신다. 네 가지 대비가 법화경의 우위를 정하고, 「내감냉연」이 논사의 침묵을 설명하며, 「개불지견」이 법화경 안의 십계호구를 증명한다. 교론의 난은 이렇게 풀렸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진짜 어려운 것은 다음, 「교주석존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난이다.

제14장 교주의 난을 회통함에 먼저 난신난해를 보이다
어서 244쪽 18행 ~ 245쪽 8행 · 第十四章 教主の難を会すにまず難信難解を示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44쪽 18행 ~ 245쪽 8행
本文 · 어서 원문

但し会し難き所は上の教主釈尊等の大難なり、 此の事を仏遮会して云く「已今当説最為難信難解」と次下の六難九易是なり、 天台大師云く「二門悉く昔と反すれば信じ難く解し難し鉾に当るの難事なり」 章安大師の云く「仏此れを将つて大事と為す何ぞ解し易きことを得可けんや」 伝教大師云く「此の法華経は最も為れ難信難解なり随自意の故に」等云云、 夫れ仏滅後に至つて一千八百余年・三国に経歴して但三人のみ有つて始めて此の正法を覚知せり所謂月支の釈尊・真旦の智者大師・日域の伝教此の三人は内典の聖人なり、 問うて曰く竜樹天親等は如何、答えて曰く此等の聖人は知つて之を言わざる仁なり、 或は迹門の一分之を宣べて本門と観心とを云わず或は機有つて時無きか或は機と時と共に之れ無きか、 天台伝教已後は之を知る者多多なり二聖の智を用ゆるが故なり 所謂三論の嘉祥・南三北七の百余人・華厳宗の法蔵・清涼等・法相宗の玄奘三蔵・慈恩大師等・真言宗の善無畏三蔵・金剛智三蔵・不空三蔵等・律宗の道宣等初には反逆を存し後には一向に帰伏せしなり。

풀이

다만 회통하기 어려운 곳은 위의 교주석존 등의 대난이니라. 이 일을 부처께서 막고 회통하시어 「이미 설하였고 지금 설하고 앞으로 설할 것 가운데 이 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하셨으니, 그 다음의 육난구이가 이것이니라. 천태대사는 「두 문이 모두 옛 가르침과 반대되므로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창끝에 맞서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다」 하였고, 장안대사는 「부처께서 이것을 큰일로 삼으셨으니 어찌 알기 쉬울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전교대사는 「이 법화경은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수자의(隨自意)이기 때문이다」 하였느니라. 무릇 부처 멸후 일천팔백여 년에 이르기까지 세 나라를 거치면서 다만 세 사람만이 비로소 이 정법을 깨달아 알았느니라. 이른바 월지의 석존, 진단의 지자대사, 일본의 전교이니, 이 세 사람은 내전의 성인이니라. 묻기를, 용수 · 천친 등은 어떠한가. 답하기를, 이 성인들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분들이니라. 혹은 적문의 일부분을 폈으나 본문과 관심은 말하지 않았으며, 혹은 근기는 있었으나 때가 없었는가, 혹은 근기와 때가 모두 없었는가. 천태 · 전교 이후에는 이것을 아는 이가 많았으니, 두 성인의 지혜를 썼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삼론의 가상, 남삼북칠의 백여 명, 화엄종의 법장 · 청량 등, 법상종의 현장삼장 · 자은대사 등, 진언종의 선무외삼장 · 금강지삼장 · 불공삼장 등, 율종의 도선 등은 처음에는 반역하였으나 뒤에는 오로지 귀복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遮会차회
「차」는 막는다, 「회」는 회통한다는 뜻. 회통이란 경론의 서로 다른 설을 맞추어 비추어 보고(和會) 조리가 통하게 하여(疏通) 한 뜻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여기서는 「십계호구는 난신난해이므로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쉽게 알려는 것을 먼저 막고서 회통한다는 뜻.
已今当説最為難信難解이금당설 최위난신난해
법화경 법사품의 글. 「내가 설한 경전은 한량없는 천만억이니, 이미 설하였고(已說) 지금 설하며(今說) 앞으로 설할 것(當說)이다. 그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천태는 「이」를 사십여 년의 이전 경, 「금」을 무량의경, 「당」을 열반경으로 풀었다.
六難九易육난구이
보탑품에서 법화경을 지니는 어려움을 보인 비유. 아홉 가지 「쉬운 일」은 ① 다른 무수한 경을 설하는 것 ② 수미산을 들어 다른 무수한 불국토에 던지는 것 ③ 발가락으로 대천세계를 움직여 먼 나라에 던지는 것 ④ 유정천에 서서 무량한 다른 경을 설하는 것 ⑤ 손에 허공을 쥐고 다니는 것 ⑥ 대지를 발등에 얹고 범천에 오르는 것 ⑦ 마른 풀을 지고 큰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 ⑧ 팔만사천 법문을 설해 듣는 이에게 육신통을 얻게 하는 것 ⑨ 무량한 중생에게 아라한위를 얻게 하는 것. 여섯 가지 「어려운 일」은 ① 악세에 이 경을 널리 설하는 것 ② 이 경을 쓰고 남에게 쓰게 하는 것 ③ 악세에 잠시라도 이 경을 읽는 것 ④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 경을 설하는 것 ⑤ 이 경을 듣고 그 뜻을 묻는 것 ⑥ 이 경을 잘 수지하는 것.
鉾に当るの難事창끝에 맞서는 어려운 일
전장 맨 앞에서 많은 병사가 창을 빈틈없이 겨누고 늘어선 진에 돌진해 부딪치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
随自意수자의
부처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隨他意) 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 그대로 설한 것. 법화경은 수자의의 경, 이전의 경은 수타의의 경이다.
三国の三人삼국의 세 사람
인도(월지)의 석존, 중국(진단)의 천태지자대사, 일본의 전교대사.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이 셋을 「삼국 삼사」라 부르셨다. 인물탐구 석가모니 세존 · 천태대사 · 전교대사.
三論の嘉祥삼론의 가상
길장(549~623). 삼론교학의 대성자. 가상사에 머물러 가상대사라 불린다. 『법화현론』에서 반야경을 가장 뛰어나다고 했으나 뒤에 천태에게 귀복했다.
法蔵법장
(643~712) 화엄종 제3조. 현수대사. 천태에 맞서 화엄경을 근거로 오교십종의 교판을 세웠다.
玄奘・慈恩현장 · 자은
현장(602~664)은 인도에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한 당나라 승려로 법상종의 초조로 세워진다. 자은(632~682, 규기)은 현장의 제자로 법상종의 실질적인 개조.
善無畏・金剛智・不空선무외 · 금강지 · 불공
모두 당나라에 와서 진언(밀교)을 편 승려들.
道宣도선
(596~667) 당나라 율종(남산율종)의 개조. 『사분율행사초』 · 『속고승전』 등을 지었다. 감진은 그의 손제자다.

막고서 푼다 — 「이금당」의 난신난해

제13장에서 교론의 난은 풀렸다. 그러나 대성인은 「다만 회통하기 어려운 곳은 위의 교주석존 등의 대난이다」라고 하신다. 경론의 문제는 경문을 대조하면 풀린다. 그러나 「권교 · 적문 · 본문의 교주석존이 우리 마음에 있고, 지옥계에서 보살계까지 아홉 세계가 모두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경문을 대조하는 것만으로는 납득되지 않는다. 현대어역이 보충하듯, 이 십계호구의 법문은 오직 법화경에만 있는 법문이므로, 부처는 미리 법화경이 난신난해라는 것을 보이셨다.

대성인은 이것을 「부처께서 막고 회통하셨다(遮會)」고 표현하신다. 어구 풀이에서 보았듯, 「막는다」는 것은 「쉽게 알려고 하지 말라」고 먼저 막는 것이고, 「회통한다」는 것은 그 의문이 당연한 것임을 밝혀 푸는 것이다. 곧 부처 스스로 「이 경은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선언해 두셨으므로, 믿기 어렵다는 것 자체가 이 법문이 진실하다는 증거가 된다.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 당연함이 경에 이미 예고되어 있다는 것이 「차회」의 뜻이다.

부처의 선언은 법사품의 「이금당설 최위난신난해」다. 이미 설한 사십여 년의 이전 경, 지금 설하는 무량의경, 앞으로 설할 열반경, 그 모든 경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그리고 이어지는 보탑품에서 부처는 육난구이의 비유로 이것을 거듭 보였다. 수미산을 들어 다른 불국토에 던지는 것, 대지를 발등에 얹고 범천에 오르는 것, 마른 풀을 지고 큰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조차 「쉬운 일」이고, 악세에 이 경을 설하고 읽고 쓰고 지니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강의의 어석은 이 육난구이가 단지 법화경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멸후의 법화경 홍통을 재촉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九易아홉 가지 쉬운 일
余経説法다른 무수한 경을 설함
須弥擲置수미산을 다른 불국토에 던짐
世界足擲발가락으로 대천세계를 던짐
有頂説法유정천에 서서 다른 경을 설함
把空遊行허공을 쥐고 다님
足地昇天대지를 발등에 얹고 범천에 오름
大火不焼마른 풀을 지고 큰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음
広説得通팔만사천 법문을 설해 육신통을 얻게 함
大衆羅漢무량한 중생에게 아라한위를 얻게 함
六難여섯 가지 어려운 일
広説此経악세에 이 경을 널리 설함
書持此経이 경을 쓰고 쓰게 함
暫読此経악세에 잠시라도 이 경을 읽음
少説此経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설함
聴受此経이 경을 듣고 뜻을 물음
受持此経이 경을 잘 수지함

受持此経 — 제16장의 수지즉관심으로 이어짐

도표 5 · 육난구이

이 육난의 마지막이 「이 경을 잘 수지하는 것(受持此經)」이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여섯 가지 어려운 일의 끝, 가장 어려운 일로 놓인 것이 「수지」다. 제16장에서 대성인이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이라고 하실 때의 「수지」는, 이렇게 법화경 스스로 가장 어렵다고 한 일이다. 쉬워 보이는 수지가 실은 가장 어렵고, 가장 어렵기에 가장 깊다.

세 스승의 증언

대성인은 이어 천태 · 장안 · 전교 세 스승의 말을 드신다.

천태대사는 『법화문구』에서 「두 문이 모두 옛 가르침과 반대되므로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창끝에 맞서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했다. 현대어역은 이것을 「법화경 적문에 이승작불 · 십계호구를 설하고 본문에 구원실성을 설하는데, 두 문이 모두 옛날 설한 이전의 경과 반대되므로 믿기 어렵다」로 읽는다. 적문의 이승작불은 「이승은 성불하지 못한다」는 이전의 설과 반대이고, 본문의 구원실성은 「석존은 이 세상에서 처음 성불했다」는 이전과 적문의 설과 반대다. 사십여 년 동안 들어 온 것과 정반대의 것을 믿으라는 것이니, 빽빽이 늘어선 창끝을 향해 돌진하는 것만큼 어렵다.

장안대사는 「부처께서 이것을 큰일로 삼으셨으니 어찌 알기 쉬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법화경은 부처가 세상에 나온 본회, 일대사인연을 설한 경이므로 쉬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전교대사는 「이 법화경은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수자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현대어역은 「십계호구야말로 부처의 본회이며 수자의이므로 난신난해인 것이 당연하다」고 정리한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한 수타의의 경은 중생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알기 쉽다. 수자의의 경은 부처의 깨달음 그대로를 설하므로 중생의 이해를 넘어선다. 알기 어렵다는 것이 곧 부처의 깨달음 그대로라는 증거다.

천태의 글은 『법화문구』, 전교의 글은 『법화수구』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서는 권과 대정장 쪽을 확인하지 못했다.

삼국의 세 성인과 「알면서 말하지 않은」 논사들

대성인은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부처 멸후 일천팔백여 년, 인도 · 중국 · 일본 세 나라를 거치는 동안 이 정법을 비로소 깨달아 안 이는 단 세 사람뿐이다. 인도의 석존, 중국의 천태지자대사, 일본의 전교대사. 이 세 사람이 내전(불교)의 성인이다.

여기서 「이 정법」은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법문을 가리킨다. 석존은 그것을 설했고, 천태는 『마하지관』에서 일념삼천으로 체계화했으며, 전교는 그것을 일본에 전해 법화일승을 세웠다. 이 셋이 「삼국 삼사(三國三師)」다. 대성인은 뒤에 「현불미래기」 등에서 이 셋에 자신을 더해 「삼국 사사(四師)」라 하셨다.

그러면 용수와 천친은 어떠한가. 제13장에서 이미 「안으로 맑고 분명하게 알았다」고 했다. 대성인은 이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분들」이라 하시고, 그 까닭을 세 가지 가능성으로 든다. 혹은 적문의 일부분은 폈으나 본문과 관심은 말하지 않았다. 혹은 근기는 있었으나 때가 없었다. 혹은 근기와 때가 모두 없었다.

「적문의 일부분을 펴고 본문과 관심은 말하지 않았다」는 구절은 짧지만 중요하다. 용수의 『대지도론』은 법화경의 이승작불을 언급하고, 천친의 『법화론』은 법화경을 주석했다. 그러나 그것은 적문의 일부분일 뿐, 본문의 구원실성과 그것을 자기 마음에서 보는 관심의 법문에는 이르지 않았다. 여기서 「본문과 관심」이 나란히 놓인 것은, 이 편의 주제인 관심이 바로 본문에 뿌리를 둔다는 것을 암시한다.

천태와 전교 이후 — 반역하다가 귀복한 사람들

그런데 천태 · 전교 이후에는 이것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두 성인의 지혜를 썼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그 사람들을 종파별로 나열하신다. 삼론의 가상, 남삼북칠의 백여 명, 화엄종의 법장 · 청량, 법상종의 현장 · 자은, 진언종의 선무외 · 금강지 · 불공, 율종의 도선. 이들은 각 종파에서 개조나 대학자로 존경받는 사람들이지만, 「처음에는 반역하다가 뒤에는 오로지 귀복했다」.

강의의 어석은 이들이 천태에 귀복한 근거를 대성인의 다른 어서에서 하나하나 찾아 보인다.

삼론의 가상에 대해 「개목초」는 이렇게 쓴다.

三論の嘉祥は法華玄十巻に法華経を第四時・会二破二と定れども天台に帰伏して七年つかへ廃講散衆して身を肉橋となせり

삼론의 가상은 『법화현론』 열 권에서 법화경을 제4시 · 회이파이라 정하였으나, 천태에게 귀복하여 칠 년을 섬기며 강의를 그만두고 대중을 흩어 버리고 몸을 살로 된 다리로 삼았느니라.
「개목초」, 215–216쪽

「몸을 살로 된 다리로 삼았다(身を肉橋となせり)」는 것은, 천태가 높은 자리에 오를 때 가상이 엎드려 자기 몸을 디딤돌로 삼게 했다는 전승을 가리킨다. 반야를 가장 뛰어나다고 하던 대학자가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흩고 천태를 섬긴 것이다.

화엄종의 법장에 대해서는 「선시초」가 「화엄종의 법장대사가 천태를 찬탄하여 말하기를 『남악 · 지자 같은 분은 신이에 감통하여 자취가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영산의 청법을 생각함이 지금도 있다』」고 한 것을 인용한다(「선시초」, 267–271쪽 가운데). 청량에 대해서는 「개목초」가 「화엄의 징관은 화엄의 소를 지어 화엄과 법화를 상대하여 법화를 방편이라 쓴 듯하나, 『저 종은 이것을 실로 삼는다. 이 종의 입의는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등이라 쓴 것은 뉘우쳐 돌이킨 것이 아니겠는가」(215–216쪽 가운데)라고 한다.

법상종의 현장과 자은에 대해서는 「개목초」가 이렇게 쓴다.

玄奘三蔵・慈恩大師・委細に天台の御釈を見ける程に自宗の邪見ひるがへるかのゆへに自宗をば・すてねども其の心天台に帰伏すと見へたり

현장삼장과 자은대사는 천태의 해석을 자세히 보았던 까닭에 자기 종의 사견이 뒤집혔는지, 자기 종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 마음은 천태에게 귀복한 것으로 보이느니라.
「개목초」, 190쪽

또 같은 어서 하권은 「법상의 자은은 『법원의림장』 일곱 권 · 열두 권에서 일승방편 · 삼승진실 등의 망언이 많으나, 『법화현찬』 제4에는 『그러므로 또한 둘 다 둔다(故亦兩存)』 등이라 하여 자기 종을 정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말은 양쪽이나 마음은 천태에게 귀복했다」(215–216쪽 가운데)고 한다.

진언종의 세 삼장에 대해 「개목초」는 「선무외삼장이 염마의 책망을 받으신 것은 이 사견 때문이다. 뒤에 마음을 돌이켜 법화경에 귀복해서야 이 책망을 벗으셨다」고 하고, 「그 뒤 선무외 · 불공 등이 법화경을 양계의 가운데에 두어 대왕처럼 하고, 태장의 대일경과 금강의 금강정경을 좌우의 신하처럼 했다」(215–216쪽 가운데)고 한다. 「선시초」는 불공삼장과 그 제자 함광이 인도에 갔을 때 그곳의 승려가 「대당에 천태의 가르침이 있어 사정을 가리고 편원을 밝히는 데 가장 뛰어나다. 이것을 번역하여 이 땅에 가져올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는 『고승전』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것은 함광이 묘락대사에게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267–271쪽 가운데).

율종의 도선에 대해서는 「선시초」가 이렇게 인용한다. 「남산의 도선율사가 천태대사를 찬탄하여 말하기를, 『법화를 비추어 밝힘은 높은 빛이 깊은 골짜기에 임하는 것 같고, 마하연을 설함은 긴 바람이 큰 허공에 노니는 것과 같다. 설령 문자의 스승이 천 무리 만 무리가 있어 그 묘한 변론을 헤아려 찾더라도 능히 다할 자가 없다』」(267–271쪽 가운데).

이렇게 보면 대성인이 열거하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각 종파의 정점에 선 이들이며, 그들이 처음에는 천태에 맞섰다가 뒤에는 마음으로 귀복했다는 것이 대성인의 다른 어서들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제12장에서 묻는 이가 들었던 청량국사의 비판도, 그 청량 자신이 뒤에 「이 종의 입의는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쓴 것으로 무너진다.

初には反逆を存し後には一向に帰伏せしなり처음에는 반역하였으나 뒤에는 오로지 귀복하였느니라
① 삼론종가상(길장)
天台に帰伏して七年つかへ廃講散衆して身を肉橋となせり천태에게 귀복하여 칠 년을 섬기며 강의를 그만두고 대중을 흩고 몸을 살의 다리로 삼았느니라「개목초」 215–216
② 화엄종법장 · 청량
법장의 천태 찬탄(「선시초」)此の宗の立義・理通ぜざること無し이 종의 입의는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청량 · 「개목초」
③ 법상종현장 · 자은
自宗をば・すてねども其の心天台に帰伏す자기 종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 마음은 천태에게 귀복하였느니라「개목초」 190
④ 진언종선무외 · 금강지 · 불공
염마의 책망과 법화경 귀복(「개목초」)불공 · 함광의 이야기(「선시초」)
⑤ 율종도선
法華を照了すること高輝の幽谷に臨むが若く법화를 비추어 밝힘은 높은 빛이 깊은 골짜기에 임하는 것 같다「선시초」
도표 6 · 천태에 귀복한 사람들

중중의 난신난해 — 오직 문저하종만이 참된 난신난해

강의는 이 장의 강의를 짧지만 무겁게 맺는다. 불법의 궁극의 이치는 난신난해다. 세상 사람들, 특히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법은 세상의 상식이나 범부의 지혜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넓고 깊은 철리이며, 믿어야 비로소 그 문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부처는 「난신난해」라고 미리 일러 두었다.

그런데 이 난신난해에도 겹겹의 단계가 있다. 강의는 이것을 다섯 겹의 상대로 정리한다.

이 다섯 겹은 대성인이 「개목초」 등에서 세우신 오중상대(五重相對)의 틀을 「난이(難易)」의 관점에서 다시 읽은 것이다. 법화경 법사품이 「가장 믿기 어렵다」고 한 것은 문상으로 보면 법화경 자체이지만, 강의는 그 「가장」이 마지막으로 가리키는 것이 문저하종의 법문, 곧 이 편 제16장에서 밝혀지는 「오자의 수지」라고 본다. 묻는 이가 「교주석존이 범부의 마음에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할 때, 그 믿기 어려움은 이 다섯 겹의 가장 깊은 곳에 닿아 있다.

已今当説最為難信難解이금당설 가운데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움법사품
  1. ① 내외상대외도 易 · 소승 難
  2. ② 대소상대소승 易 · 대승 難
  3. ③ 권실상대권교 易 · 적문 難
  4. ④ 본적상대적문 易 · 본문 難
  5. ⑤ 종탈상대문상 탈익 본문 易 · 문저하종 難
ただひとり文底下種法門のみが真実の難信難解오직 문저하종의 법문만이 참된 난신난해
도표 7 · 중중의 난신난해

제14장은 답이 아니라 답을 위한 준비다. 대성인은 교주의 난을 곧바로 풀지 않고, 먼저 「이 법문은 본래 믿기 어렵다」는 것을 부처 자신과 삼국의 스승들의 말로 확인하신다. 믿기 어렵다는 것은 틀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부처의 깨달음 그대로라는 증거다. 그리고 육난의 마지막이 「수지」라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범부 앞에 놓인다는 것을 예고한다.

제15장 받아 지니는 본존의 덕용을 밝히다
어서 245쪽 9행 ~ 246쪽 9행 · 第十五章 所受の本尊の徳用を明か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45쪽 9행 ~ 246쪽 9행
本文 · 어서 원문

但し初の大難を遮せば無量義経に云く「譬えば国王と夫人と新たに王子を生ぜん若は一日若は二日若は七日に至り若は一月若は二月若は七月に至り若は一歳若は二歳若は七歳に至り復国事を領理すること能わずと雖も已に臣民に宗敬せられ諸の大王の子以て伴侶と為らん、 王及び夫人の愛心偏に重くして常に与共に語らん所以は何ん稚小なるを以ての故にと云うが如く、 善男子是の持経者も亦復是くの如し、諸仏の国王と是の経の夫人と和合して共に是の菩薩の子を生ず 若し菩薩是の経を聞くことを得て若しは一句若しは一偈若しは一転若しは二転若しは十若しは百若しは千若しは万若しは億万恒河沙・無量無数転せば復真理の極を体すること能わずと雖も、 乃至已に一切の四衆八部に宗仰せられ諸の大菩薩を以て眷属と為し乃至常に諸仏に護念せられ慈愛偏に覆われん新学なるを以ての故なり」等云云、 普賢経に云く「此の大乗経典は諸仏の宝蔵十方三世の諸仏の眼目なり乃至三世の諸の如来を出生する種なり乃至汝大乗を行じて仏種を断ぜざれ」等云云、 又云く「此の方等経は是れ諸仏の眼なり諸仏是に因つて五眼を具することを得・仏の三種の身は方等従り生ず是れ大法印にして涅槃海に印す此くの如き海中能く三種の仏の清浄身を生ず此の三種の身は人天の福田なり」等云云。 夫れ以れば・釈迦如来の一代・顕密・大小の二教・華厳・真言等の諸宗の依経往いて之を勘うるに 或は十方台葉・毘盧遮那仏・大集雲集の諸仏如来・般若染浄の千仏示現・大日金剛頂等の千二百尊・但其の近因近果を演説して其の遠因果を顕さず、 速疾頓成之を説けども三五の遠化を亡失し化導の始終跡を削りて見えず、 華厳経・大日経等は一往之を見るに別円四蔵等に似たれども再往之を勘うれば蔵通二教に同じて未だ別円にも及ばず本有の三因之れ無し何を以てか仏の種子を定めん、 而るに新訳の訳者等漢土に来入するの日・天台の一念三千の法門を見聞して或は自ら所持の経経に添加し或は天竺より受持するの由之を称す、 天台の学者等或は自宗に同ずるを悦び或は遠きを貴んで近きを蔑みし或は旧を捨てて新を取り魔心・愚心出来す、 然りと雖も詮ずる所は一念三千の仏種に非ずんば有情の成仏・木画二像の本尊は有名無実なり。

풀이

다만 처음의 대난을 막는다면, 무량의경에 이르기를 「비유하면 국왕과 부인 사이에 새로 왕자가 태어났다고 하자. 하루 · 이틀 혹은 이레에 이르고, 한 달 · 두 달 혹은 일곱 달에 이르고, 한 살 · 두 살 혹은 일곱 살에 이르러, 아직 나랏일을 다스리지는 못하지만 이미 신하와 백성의 존경을 받고 여러 대왕의 아들들이 벗이 되느니라. 왕과 부인의 사랑하는 마음은 오로지 깊어서 늘 함께 이야기하느니라. 왜냐하면 어리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 경을 지니는 이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모든 부처의 국왕과 이 경의 부인이 화합하여 함께 이 보살의 아들을 낳느니라. 만약 보살이 이 경을 들을 수 있어 한 구절이나 한 게송, 한 번 굴리거나 두 번 굴리거나, 열 · 백 · 천 · 만, 억만 항하사, 무량무수 번 굴리면, 아직 진리의 궁극을 몸으로 체득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미 일체의 사중과 팔부에게 우러름을 받고 여러 대보살을 권속으로 삼으며, 늘 모든 부처에게 호념되고 자애로 오로지 덮이리니, 새로 배우는 이이기 때문이니라」 하였느니라. 보현경에 이르기를 「이 대승경전은 모든 부처의 보배 창고이며 시방삼세 모든 부처의 눈이니라. 삼세의 모든 여래를 낳는 씨앗이니라. 너는 대승을 행하여 부처의 씨앗을 끊지 말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 방등경은 모든 부처의 눈이니라. 모든 부처는 이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눈을 갖출 수 있었고, 부처의 세 가지 몸은 방등에서 나느니라. 이것은 큰 법인이니 열반의 바다에 찍느니라. 이와 같은 바다 가운데서 능히 세 가지 부처의 청정한 몸을 낳으니, 이 세 가지 몸은 인천의 복전이니라」 하였느니라. 무릇 생각해 보건대, 석가여래의 일대에 걸친 현교와 밀교, 대승과 소승의 두 가르침, 화엄 · 진언 등 여러 종의 의지하는 경을 나아가 살펴보니, 혹은 시방 연화대 잎 위의 비로자나불, 대집경에 구름처럼 모인 여러 부처와 여래, 반야경에 물듦과 깨끗함의 천불이 나타남, 대일경 · 금강정경 등의 천이백 존은, 다만 그 가까운 인과를 연설하였을 뿐 그 먼 인과를 드러내지 않았느니라. 빠르게 단번에 이룬다고 설하기는 하였으나 삼천진점 · 오백진점의 먼 교화를 잃어버리고, 교화하고 이끈 처음과 끝의 자취를 지워 보이지 않느니라. 화엄경 · 대일경 등은 한 번 보면 별교 · 원교와 사장 등과 비슷하나, 거듭 살펴보면 장교 · 통교의 두 가르침과 같아서 아직 별교 · 원교에도 미치지 못하며, 본래 갖추어진 삼인이 없으니 무엇으로 부처의 씨앗을 정하겠는가. 그런데 신역의 역자들이 중국에 들어오던 날, 천태의 일념삼천의 법문을 보고 들어, 혹은 스스로 가진 경들에 덧붙이고, 혹은 천축에서 받아 지녀 온 것이라고 일컬었느니라. 천태의 학자들은 혹은 자기 종과 같아진 것을 기뻐하고, 혹은 먼 것을 귀히 여겨 가까운 것을 업신여기며, 혹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여 마의 마음 · 어리석은 마음이 생겨났느니라. 그렇다 할지라도 결국은 일념삼천의 불종이 아니면 유정의 성불도, 목상 · 화상 두 가지 상의 본존도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느니라.

어구 풀이

無量義経무량의경
법화삼부경 가운데 개경(開經). 남제의 담마가타야사 번역(481년). 「무량의는 한 법에서 생긴다」고 설하고,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여 그때까지의 가르침이 방편이었음을 밝혔다. 법화경 서품에 석존이 「무량의」라는 경을 설한 뒤 무량의처삼매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중국에서 이 경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본문의 인용은 십공덕품 가운데 제4의 공덕을 설한 대목이다.
新学신학
새로 보리심을 일으킨 이. 아직 물러나지 않는 자리(불퇴위)에 이르지 못한 보살. 그러나 여기서는 한 번 법화경(본존)을 지니면 삼세시방의 부처들에게 지켜진다는 뜻으로 쓰였다.
普賢経보현경
『관보현보살행법경』. 유송의 담무밀다 번역(441년 무렵). 법화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관법의 실천을 설하므로 법화경을 맺는 결경(結經)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무량의경(개경) · 법화경(본경) · 보현경(결경)을 합해 법화삼부경이라 한다.
五眼오안
육안 · 천안 · 혜안 · 법안 · 불안. 부처는 이 다섯 눈을 모두 갖춘다.
三種の身세 가지 몸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
大法印・涅槃海に印す대법인 · 열반해에 찍다
인(印)은 거짓 없음을 증명하는 도장. 대법인은 진실하고 절대적인 불법이라는 뜻. 그 도장이 열반의 바다에 찍힌다는 것은, 이 경이 깨달음의 세계 전체를 보증한다는 비유.
十方台葉・毘盧遮那仏시방대엽의 비로자나불
제11장의 「시방대상의 노사나」와 같은, 화엄의 연화장세계 연화대 위의 부처. 화엄종은 노사나가 비로자나의 줄임말이라 하여, 천태종이 비로자나를 법신 · 노사나를 보신으로 나눈 것에 반대했다.
近因近果・遠因果가까운 인과 · 먼 인과
이 세상에서 수행하여 이 세상에서 성불했다는 인과가 가까운 인과. 삼천진점 · 오백진점의 먼 옛날부터의 인과가 먼 인과.
速疾頓成속질돈성
진언 등에서 설하는, 빠르게 단번에 성불한다는 주장.
三五の遠化삼오의 원화
삼천진점겁(적문 화성유품)과 오백진점겁(본문 수량품)에 걸친 먼 교화.
別円四蔵별원사장
별교 · 원교와, 『법화현의』가 설하는 성문장 · 잡장 · 보살장 · 불장의 네 창고(장 · 통 · 별 · 원에 배당). 「다이가쿠사부로전어서」는 대일경이 설하는 사승 가운데 대승의 보살승은 장교의 삼기보살승이고 불승도 법화경에 미치지 못하여 아함 · 방등의 두 경일 뿐이라고 판정한다.
本有の三因본유의 삼인
정인불성(본래 갖추어진 진리) · 요인불성(그것을 비추는 지혜) · 연인불성(지혜를 일으키는 선행)의 세 가지 불성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 성불의 씨앗이 본래 있다는 근거.
新訳の訳者신역의 역자
현장 이후 당나라 때의 번역자들. 구마라집 등의 구역과 구별된다. 「개목초」는 선무외 · 금강지가 천태의 일념삼천의 뜻을 훔쳐 자기 종의 간심으로 삼았다고 한다.
木画二像목화이상
나무로 깎은 불상과 그림으로 그린 불상. 넓게는 경배의 대상으로 모시는 상 전체를 가리킨다.

왜 관심 앞에 본존의 덕용인가

제14장에서 교주의 난을 「난신난해」로 막은 대성인은, 제15장에서 드디어 그 난을 풀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그 첫걸음이 뜻밖이다. 관심을 밝혀야 할 자리에서, 무량의경과 보현경, 곧 법화경의 개경과 결경의 글을 빌려 「본존의 덕용」을 먼저 밝히신다.

강의는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말법 오늘의 관심은 자력의 관심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천태와 대성인 불법의 차이가 있다. 천태는 관념관법(觀念觀法)으로 자기 힘으로 자기 마음의 십법계를 보려 했다. 이에 비해 말법에서는 본존의 덕용에 의해 관심의 뜻을 이룬다. 그러므로 본존의 덕용이 분명하지 않으면 관심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경과 결경 두 경의 글로 본존에 어떤 힘이 있는지를 먼저 밝히신 것이다.

이 본존의 힘은 「능히 낳는 덕(能生の德)」이어야 한다. 능히 불계를 낳는 덕이 있는 본존을 믿어야 비로소 불계를 이룰 수 있다. 무량의경은 바로 이 대목, 십공덕품의 제4 공덕을 맺으며 「이것을 이 경의 제4의 공덕, 불가사의한 힘이라 이름한다」고 했다. 강의는 이 「불가사의한 힘」이야말로 본존의 덕용이며 능생의 덕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앞에서 논란되었던 물음 — 우리의 열등한 마음에 불계가 있을 리 없다, 권 · 적 · 본의 부처를 보아도 모두 훌륭한 부처인데 어찌 우리 마음에 있겠는가 — 에 대한 답으로, 「능히 불계를 낳는 본존에 의하면 반드시 불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무량의경의 글을 끌어오셨다는 것이 강의의 정리다.

이 장의 제목 「소수(所受)의 본존」은 「받아 지니는 대상인 본존」이라는 뜻이다. 제16장의 「수지(受持)」와 짝을 이루는 말로, 받는 쪽(능수 · 能受)인 우리와 받아지는 쪽(소수)인 본존이 이 두 장에서 마주 선다. 이 사이트 교리 五 8절이 말한 「천태에서 수행이었던 일념삼천이 대성인에게서 본존이 된다」는 전환이 여기서 경문으로 근거 지어진다.

국왕과 부인과 어린 왕자 — 무량의경의 비유

무량의경의 비유는 이렇다. 국왕과 부인 사이에 왕자가 새로 태어난다. 하루 · 이틀 · 이레, 한 달 · 두 달 · 일곱 달, 한 살 · 두 살 · 일곱 살이 되어도 아직 나랏일을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신하와 백성의 존경을 받고, 다른 나라 대왕의 아들들이 벗이 된다. 왕과 부인은 이 아이를 오로지 깊이 사랑하여 늘 함께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아이가 어리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이렇게 존경받고 장래를 기대받는 것은 그 아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국왕의 위덕이 강성하기 때문이다.

그림 준비 중
B-1 · 무량의경의 왕자 비유

경은 이어서 말한다. 선남자여, 이 경을 지니는 이도 이와 같다. 모든 부처의 국왕과 이 경의 부인이 화합하여 함께 이 보살의 아들을 낳는다. 보살이 이 경을 듣고 한 구절, 한 게송, 한 번, 두 번,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억만 항하사, 무량무수 번 굴리면, 아직 진리의 궁극을 몸으로 체득하지는 못했어도 이미 일체의 사중 · 팔부에게 우러름을 받고, 여러 대보살을 권속으로 삼으며, 늘 모든 부처에게 지켜지고 자애로 덮인다. 새로 배우는 이이기 때문이다.

현대어역은 이 비유를 말법의 신앙에 맞추어 괄호를 넣어 읽는다. 「모든 부처의 국왕과 이 경의 부인이 화합하여」는 「인법일개(人法一箇)의 본존이 건립되어」로, 「이 보살의 아들을 낳는다」는 「본존을 신앙하여 지용의 보살이 된다」로, 「이 경을 들을 수 있어」는 「본존을 믿고 제목을 불러」로, 「한 구절 · 한 게송」은 「남묘호렌게쿄」로, 「한 번 · 두 번 … 무량무수 번 굴린다」는 「창제」로, 「새로 배우는 이이기 때문」은 「본존의 공덕 덕분」으로 읽는다. 어린 왕자가 아직 나라를 다스리지 못해도 이미 존귀하듯, 본존을 받아 지닌 범부는 아직 진리의 궁극을 체득하지 못했어도 이미 부처들에게 지켜지는 존재가 된다.

강의는 이 비유의 핵심 낱말을 하나하나 짚는다. 「모든 부처의 국왕」은 능생의 지(智)이고, 「이 경의 부인」은 소생의 경(境)이다. 「화합하여」는 경(境)과 지(智)가 하나로 맞붙는 것, 곧 경지명합(境智冥合)이다. 경지가 명합하면 반드시 씨앗을 낳는 덕을 머금는다. 그 씨앗이 부처가 되는 씨앗이며, 경의 「보살의 아들을 낳는다」가 바로 그것이다. 「보살이 이 경을 들을 수 있어」란 그 씨앗을 낳는 덕이 있는 본존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계를 자기 마음에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가려면 능생의 씨앗인 본존을 믿고 행해야 한다. 제13장의 「개불지견」이 여기서 「본존을 믿음」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러면 말법에서 씨앗을 낳는 본존이란 어떤 것인가. 강의는 그것이 문저의 깊이 비밀한 본지난사(本地難思)의 묘법이지만, 그 모습은 제19장에서 자세히 밝혀지며, 이 장에서는 본존의 모습을 설하지 않고 다만 관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편에서 「무엇을」보다 「어떻게」가 먼저 다루어지는 까닭이다.

강의는 이 뜻을 뒷받침하는 어서로 「아키모토어서」를 든다.

三世十方の仏は必ず妙法蓮華経の五字を種として仏になり給へり

삼세시방의 부처는 반드시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씨앗으로 하여 부처가 되셨느니라.
「아키모토어서」, 1072쪽

삼세시방의 부처들도 씨앗을 낳는 덕이 있는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믿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법에서는 오직 부처가 되는 씨앗인 본존을 믿음으로써 관심이 성립한다.

①諸仏の国王모든 부처의 국왕
현대어역의 보충—
강의의 해석능생의 지(智)
②是の経の夫人이 경의 부인
현대어역의 보충—
강의의 해석소생의 경(境)
③和合して화합하여
현대어역의 보충인법일개의 본존이 건립되어
강의의 해석경지명합
④共に是の菩薩の子を生ず함께 이 보살의 아들을 낳는다
현대어역의 보충본존을 신앙하여 지용의 보살이 됨
강의의 해석씨앗을 낳는 덕 — 불종
⑤若し菩薩是の経を聞くことを得て만약 보살이 이 경을 들을 수 있어
현대어역의 보충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름
강의의 해석능생의 본존을 믿음
⑥若しは一句若しは一偈한 구절 한 게송
현대어역의 보충남묘호렌게쿄
강의의 해석—
⑦無量無数転무량무수 번 굴림
현대어역의 보충창제
강의의 해석—
⑧新学なるを以ての故なり새로 배우는 이이기 때문이니라
현대어역의 보충본존의 공덕 덕분
강의의 해석수지하면 곧 지켜짐

보현경의 두 글과 삼덕

①此の大乗経典は (이 대승경전은)
  • 諸仏の宝蔵모든 부처의 보배 창고→ 주의 덕
  • 十方三世の諸仏の眼目시방삼세 모든 부처의 눈→ 사의 덕
  • 三世の諸の如来を出生する種삼세의 모든 여래를 낳는 씨앗→ 친의 덕
맺음汝大乗を行じて仏種を断ぜざれ너는 대승을 행하여 부처의 씨앗을 끊지 말라
②此の方等経は (이 방등경은)
  • 是れ諸仏の眼なり모든 부처의 눈이다→ 사의 덕
  • 諸仏是に因つて모든 부처는 이로 말미암아→ 능생
  • 五眼を具することを得다섯 눈을 갖춘다→ 소생
  • 仏の三種の身は方等従り生ず부처의 세 몸은 방등에서 난다→ 부모 능생의 덕(친)
  • 是れ大法印이것은 큰 법인→ 주의 덕

방등경 = 주 · 사 · 친의 삼존을 능생하는 씨앗

도표 8 · 본존의 능생의 덕 — 무량의경의 비유와 보현경의 삼덕

보현경 — 주 · 사 · 친을 갖춘 「대승경전」

대성인은 이어서 결경인 보현경의 두 글을 드신다. 강의는 이 두 글을 모두 주 · 사 · 친의 삼덕과 능생 · 소생의 관계로 읽는다.

첫째 글은 「이 대승경전은 모든 부처의 보배 창고이며 시방삼세 모든 부처의 눈이다. 삼세의 모든 여래를 낳는 씨앗이다. 너는 대승을 행하여 부처의 씨앗을 끊지 말라」이다. 강의는 여기의 「대승경전」이 구원원초의 씨앗을 낳는 묘법연화경을 가리킨다고 보고, 「모든 부처의 보배 창고」는 주의 덕, 「시방삼세 모든 부처의 눈」은 사의 덕, 「삼세의 모든 여래를 낳는 씨앗」은 친의 덕이라고 배당한다.

대승경전을 구원원초의 씨앗을 낳는 묘법이라고 단정하는 까닭은, 이 대승경전에 주 · 사 · 친의 삼덕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승경전」이라 이름하는 문상의 경전은 많이 있다. 그러나 말법 오늘에 주 · 사 · 친의 삼덕을 갖춘 대승경전은 구원원초의 씨앗을 낳는 묘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 강의의 판단이다. 제11장의 물음이 교주석존의 삼덕을 들어 「이런 부처가 어찌 범부의 마음에 있겠는가」 물었다면, 여기서는 그 삼덕이 본래 「법」에 갖추어져 있고 그 법이 부처를 낳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물음과 답이 삼덕으로 짝을 이룬다.

맺음의 글 「너는 대승을 행하여 부처의 씨앗을 끊지 말라」는, 우리의 열등한 마음에 불계를 이룰 씨앗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강의는 이것을 잘 음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글은 「이 방등경은 모든 부처의 눈이다. 모든 부처는 이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눈을 갖출 수 있었고, 부처의 세 가지 몸은 방등에서 난다. 이것은 큰 법인이니 열반의 바다에 찍는다. 이와 같은 바다 가운데서 능히 세 가지 부처의 청정한 몸을 낳으니, 이 세 가지 몸은 인천의 복전이다」이다. 강의는 여기의 「방등경」도 앞의 「대승경전」과 같이 구원원초의 묘법을 가리킨다고 보고 이렇게 배당한다.

곧 모든 부처는 방등경(능생)을 믿고 행하여(관심) 부처가 되었다(소생). 그러므로 재세든 말법이든, 씨앗을 낳는 본존을 믿고 행해야 관심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방등경은 주 · 사 · 친의 삼존을 「능생」하는 씨앗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의는 여기서 결정적인 말을 한다. 다만 「방등경」이라 해도 그것은 석가불법에서 붙인 이름이 아니라 「방등경」이라는 말의 형식일 뿐이며, 말법에서 그 실체를 찾는다면 말할 것도 없이 이 초에 설해진 니치렌 대성인이 도현(圖顯)하신 본존이다. 대성인은 이 본존을 「일념삼천의 불종」이라 하셨고 — 바로 이 장의 끝 문장이다 — 니치칸 상인은 「대성인의 극설 가운데 극설」이라 하셨다. 강의는 거듭 말한다. 우리 마음에 장엄한 불계가 있을 수 없다는 논란에 대해,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묘법이야말로 우리 생명 속에 잠복해 있는 불계를 활동하게 하는 씨앗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 열어야 한다.

가까운 인과만 설한 경들 — 여러 종의 의경을 가리다

이 장의 둘째 단락에서 대성인은 시선을 돌려, 석존 일대의 현교 · 밀교, 대승 · 소승, 그리고 화엄 · 진언 등 여러 종이 의지하는 경전들을 살피신다. 화엄경의 연화대 위 비로자나불, 대집경에 구름처럼 모인 여러 부처, 반야경의 천불, 대일경 · 금강정경의 천이백 존. 이 경들은 모두 「가까운 인과」만을 연설하고 「먼 인과」를 드러내지 않았다.

현대어역은 이 대목을 이렇게 풀어 쓴다. 이전의 경들은 「빠르게 단번에 이룬다」고 설하여 눈앞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삼천진점겁 · 오백진점겁의 아득한 옛날부터 교화해 온 일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이 세상에서 우연히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은 우연한 깨달음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때에 씨를 뿌리고 어떻게 익혀 왔는지, 교화의 처음과 끝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으므로 이 세상의 득탈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다.

「교화하고 이끈 처음과 끝(化導の始終)」이라는 말은 하종 · 숙 · 탈의 삼익을 가리킨다. 법화경 적문의 화성유품은 삼천진점겁 전 대통지승불 때의 결연을 밝혔고, 본문의 수량품은 오백진점겁의 구원을 밝혔다. 이것이 「삼오의 원화」다. 씨를 뿌리고(하종) 기르고(숙) 거두는(탈) 전 과정이 밝혀져야 성불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된다. 이전의 경들은 그 처음과 끝을 「지워서 보이지 않는다(跡を削りて見えず)」. 이 판정은 제5편 오중삼단에서 「종 · 숙 · 탈」의 구조로 크게 펼쳐진다.

이어서 대성인은 화엄경과 대일경에 대한 판정을 내리신다. 세상의 학자들은 이 두 경을 특히 뛰어난 경이라 한다. 한 번 보면 별교 · 원교나 사장 가운데 높은 쪽과 비슷하여 성불할 수 있는 가르침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듭 살펴보면 장교 · 통교와 같아서 삼계 육도를 대상으로 한 열등한 법문이며, 별교 · 원교에도 미치지 못한다. 「본래 갖추어진 삼인(本有の三因)」이 설해져 있지 않으니 무엇으로 부처의 씨앗을 정하겠는가.

본유의 삼인은 정인 · 요인 · 연인의 세 불성이 본래 중생에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성불의 씨앗이 본래 있다는 것을 설하지 않는 경은, 아무리 화려한 부처의 모습을 설해도 그 부처가 무엇에서 나왔는지, 중생이 무엇으로 부처가 되는지를 말할 수 없다. 앞 단락의 보현경이 「삼세의 모든 여래를 낳는 씨앗」을 설한 것과 정확히 대비된다.

훔쳐 넣은 일념삼천

대성인은 더 나아가 날카로운 역사적 지적을 하신다. 현장 이후 신역의 번역자들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 천태의 일념삼천의 법문을 보고 듣고서, 혹은 스스로 가져온 경전에 그것을 덧붙여 넣었고, 혹은 인도에서부터 받아 지녀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목초」는 이 일을 더 구체적으로 쓴다.

華厳宗と真言宗とは本は権経・権宗なり善無畏三蔵・金剛智三蔵・天台の一念三千の義を盗みとつて自宗の肝心とし

화엄종과 진언종은 본래 권경 · 권종이니라. 선무외삼장 · 금강지삼장이 천태의 일념삼천의 뜻을 훔쳐 자기 종의 간심으로 삼고…
「개목초」, 190쪽

그런데 천태의 학자들은 이렇게 법문을 도둑맞고서도, 혹은 다른 종에서도 천태와 같이 일념삼천을 설하는 것을 기뻐하고, 혹은 먼 인도를 귀히 여겨 중국에 나타난 천태의 법문을 업신여기고, 혹은 옛날 천태가 설한 법문을 버리고 새로 들어온 종파의 교의를 취했다. 대성인은 이것을 「마의 마음 · 어리석은 마음이 생겨났다」고 하신다. 제14장에서 「처음에는 반역하다가 뒤에 귀복했다」고 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이렇게 귀복하면서 훔쳐 가는 사람들과, 도둑맞고도 기뻐하는 천태 문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일념삼천의 불종」이 아니면 — 목화이상의 본존

그리고 이 장은 한 문장으로 맺어진다. 「그렇다 할지라도 결국은 일념삼천의 불종이 아니면 유정의 성불도, 목상 · 화상 두 가지 상의 본존도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다.」

이 문장에는 두 가지가 묶여 있다. 하나는 「유정의 성불」, 곧 마음이 있는 중생의 성불이다. 다른 하나는 「목화이상의 본존」, 곧 나무와 그림으로 된 상, 마음이 없는 비정(非情)의 성불이다. 유정과 비정 모두, 그 성불의 근거는 일념삼천의 불종이다. 일념삼천은 십계호구 · 십여시 · 삼세간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삼세간 가운데 국토세간이 있기에 비정의 초목과 국토에도 십계가 갖추어진다. 그래서 목상 · 화상도 일념삼천의 법이 깃들 때 비로소 「본존」이 될 수 있다.

대성인은 일찍이 「목회이상개안지사」에서 이 이치를 이렇게 쓰셨다.

法華経を心法とさだめて三十一相の木絵の像に印すれば木絵二像の全体生身の仏なり、草木成仏といへるは是なり

법화경을 심법으로 정하여 삼십일상의 목상 · 화상에 찍으면 목화 두 상의 전체가 생신의 부처이니라. 초목성불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니라.
「목회이상개안지사」, 469쪽

삼십이상 가운데 마음(범음성)만 없는 서른한 가지 모습의 상에, 법화경을 마음으로 정해 찍을 때 그 상은 살아 있는 부처가 된다. 제15장의 맺음은 이 이치를 뒤집어 말한 것이다. 일념삼천의 불종이 없으면, 아무리 장엄한 불상을 세워도 그것은 이름뿐이다. 이 문장은 이 장이 밝힌 「본존의 덕용」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마지막에 못 박는다. 본존이 불계를 낳는 힘(능생의 덕)을 지니는 것은 그것이 일념삼천의 불종이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 교리 五 「일념삼천」이 다룬 초목성불과 목화이상의 문제가, 여기서 본존의 문제로 수렴된다.

제15장은 「무엇이 범부의 마음에 불계를 낳는가」에 대한 답의 절반이다. 강의는 무량의경의 왕자 비유를 경지명합과 불종으로, 보현경의 두 글을 주 · 사 · 친과 능생 · 소생으로 읽고, 그 「경」의 말법에서의 실체를 대성인이 도현하신 본존이라고 한다. 말법의 관심은 자력으로 마음을 관하는 것이 아니라, 능생의 덕을 지닌 본존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머지 절반, 「그 본존을 어떻게 받는가」가 제16장이다.

제16장 수지즉관심을 밝히다
어서 246쪽 10행 ~ 247쪽 8행 · 第十六章 受持即観心を明かす

본문

원문 대조어서 246쪽 10행 ~ 247쪽 8행
本文 · 어서 원문

問うて曰く上の大難未だ其の会通を聞かず如何。 答えて曰く無量義経に云く「未だ六波羅蜜を修行する事を得ずと雖も六波羅蜜自然に在前す」等云云、 法華経に云く「具足の道を聞かんと欲す」等云云、涅槃経に云く「薩とは具足に名く」等云云、竜樹菩薩云く「薩とは六なり」等云云、 無依無得大乗四論玄義記に云く「沙とは訳して六と云う胡法には六を以て具足の義と為すなり」吉蔵疏に云く「沙とは翻じて具足と為す」天台大師云く「薩とは梵語なり此には妙と翻ず」等云云、 私に会通を加えば本文を黷が如し 爾りと雖も文の心は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 四大声聞の領解に云く「無上宝聚・不求自得」云云、我等が己心の声聞界なり、 「我が如く等くして異なる事無し我が昔の所願の如き今は已に満足しぬ一切衆生を化して皆仏道に入らしむ」、 妙覚の釈尊は我等が血肉なり因果の功徳は骨髄に非ずや、 宝塔品に云く「其れ能く此の経法を護る事有らん者は則ち為れ我及び多宝を供養するなり、乃至亦復諸の来り給える化仏の諸の世界を荘厳し光飾し給う者を供養するなり」等云云、 釈迦・多宝・十方の諸仏は我が仏界なり其の跡を継紹して其の功徳を受得す「須臾も之を聞く・即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究竟するを得」とは是なり、 寿量品に云く「然るに我実に成仏してより已来・無量無辺百千万億那由佗劫なり」等云云、 我等が己心の釈尊は五百塵点乃至所顕の三身にして無始の古仏なり、 経に云く「我本菩薩の道を行じて・成ぜし所の寿命・今猶未だ尽きず・復上の数に倍せり」等云云、我等が己心の菩薩等なり、 地涌千界の菩薩は己心の釈尊の眷属なり、 例せば大公・周公旦等は周武の臣下・成王幼稚の眷属・武内の大臣は神功皇后の棟梁・仁徳王子の臣下なるが如し、 上行・無辺行・浄行・安立行等は我等が己心の菩薩なり、 妙楽大師云く「当に知るべし身土一念の三千なり故に成道の時此の本理に称うて一身一念法界に遍し」等云云。

풀이

묻기를, 위의 대난은 아직 그 회통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떠한가. 답하기를, 무량의경에 이르기를 「아직 육바라밀을 수행하지 못하였더라도 육바라밀이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 하였고, 법화경에 이르기를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하였으며, 열반경에 이르기를 「살(薩)이란 구족을 이름한다」 하였고, 용수보살은 「살이란 여섯이다」 하였으며, 『무의무득대승사론현의기』에 이르기를 「사(沙)는 번역하여 여섯이라 한다. 호법(胡法)에서는 여섯으로써 구족의 뜻을 삼는다」 하였고, 길장의 소에 이르기를 「사는 번역하여 구족이라 한다」 하였으며, 천태대사는 「살은 범어이니 이곳 말로는 묘라 번역한다」 하였느니라. 사사로이 회통을 더한다면 본문을 더럽히는 것과 같으니라. 그렇지만 글의 마음은,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하느니라.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 사대성문이 깨달아 말하기를 「위없는 보배 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얻었다」 하였으니, 우리 기심의 성문계이니라.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게 하리라. 내가 옛날 세운 서원과 같이 이제 이미 만족하였느니라.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불도에 들게 하였느니라.」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이니라. 인과의 공덕은 뼈와 골수가 아니겠는가. 보탑품에 이르기를 「능히 이 경법을 지키는 이가 있다면 곧 나와 다보를 공양하는 것이니라. 또한 여러 오신 화불로서 모든 세계를 장엄하고 빛나게 꾸미시는 분들을 공양하는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은 나의 불계이니라. 그 자취를 이어받아 그 공덕을 받아 얻느니라. 「잠시라도 이것을 들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이니라. 수량품에 이르기를 「그러나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 하였느니라. 우리 기심의 석존은 오백진점, 내지 나타난 삼신으로서 무시의 옛 부처이시니라. 경에 이르기를 「내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으며 또 위의 수의 갑절이니라」 하였으니, 우리 기심의 보살 등이니라. 지용천계의 보살은 기심의 석존의 권속이니라. 비유하면 태공 · 주공단 등은 주나라 무왕의 신하이자 어린 성왕의 권속이며, 다케우치 대신은 진구 황후의 동량이자 닌토쿠 왕자의 신하인 것과 같으니라.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 등은 우리 기심의 보살이니라. 묘락대사가 이르기를 「마땅히 알라, 신토는 일념의 삼천이니라. 그러므로 성도할 때에 이 본리에 맞아 한 몸 한 생각이 법계에 두루 한다」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会通회통
경론의 서로 다른 설을 맞추어 비추어 보고(화회) 조리가 통하게 하여(소통) 한 뜻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화회 · 융회 · 회석이라고도 한다. 제11장의 「대난」은 제14장에서 「막아(遮)」 두었고, 여기서 비로소 「회통」된다.
六波羅蜜自然在前육바라밀 자연재전
무량의경 십공덕품의 글.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의 여섯 바라밀을 따로 닦지 않았어도, 이 경을 믿고 지니는 공덕으로 그것이 저절로 갖추어진다는 것.
具足の道を聞かんと欲す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사리불 등이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며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欲聞具足道)」고 한 글.
薩とは具足に名く살은 구족을 이름한다
열반경의 글. 「살달마분타리가(Saddharmapuṇḍarīka · 묘법연화)」의 「살(sad)」이 구족의 뜻이라는 것.
竜樹「薩とは六なり」용수 「살은 여섯이다」
『대지도론』에 근거한다고 전한다. 인도에서는 여섯으로 구족을 나타냈다.
無依無得大乗四論玄義記무의무득대승사론현의기
당나라 혜균의 저술(10권). 비담 · 성실 · 지론 · 섭론 각 학파의 주장을 들어 유소득의 견해라 논파하고 삼론의 무소득 중도의 뜻을 드러냈다. 「사론」은 용수의 『중론』 · 『대지도론』 · 『십이문론』과 제바의 『백론』.
吉蔵疏길장의 소
삼론의 가상대사 길장의 법화경 주석(『법화의소』 등). 제14장에서 천태에 귀복한 이로 이름이 나온 그 길장이다.
天台「薩とは梵語なり此には妙と翻ず」천태 「살은 범어이니 묘라 번역한다」
『법화현의』의 풀이. 이로써 살 = 구족 = 여섯 = 묘의 등식이 완성된다.
四大声聞사대성문
법화경 신해품에서 장자궁자의 비유로 깨달음을 말한 수보리 · 가전연 · 가섭 · 목건련의 네 성문.
無上宝聚・不求自得무상보취 · 불구자득
신해품의 「위없는 보배 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얻었다(無上寶聚 不求自得)」. 가난한 아들(궁자)이 뜻밖에 장자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 비유의 결말.
如我等無異여아등무이
방편품의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게 하리라. 내가 옛날 세운 서원과 같이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如我等無異 如我昔所願 今者已滿足)」.
妙覚묘각
보살 수행 오십이위의 마지막, 부처의 깨달음 그 자체.
継紹계소
이어받아 잇는 것. 선왕의 자리를 잇듯 부처의 자취를 잇는다는 뜻.
須臾聞之即得究竟수유문지 즉득구경
법사품의 「잠시라도 이것을 들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경할 수 있다」.
地涌千界の菩薩지용천계의 보살
종지용출품에서 삼천대천세계의 땅을 가르고 솟아난 무량천만억의 보살들.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의 네 보살이 그 상수(上首)다.
大公태공
태공망 여상(呂尙). 위수에서 낚시하다가 주나라 서백(뒤의 문왕)을 만나 그 스승이 되었다. 문왕의 할아버지 태공이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이라 불렸다. 문왕이 죽은 뒤 무왕을 도와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周公旦주공단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 무왕을 도와 은을 멸하고, 무왕이 죽은 뒤 어린 성왕을 도와 정치를 맡아 주나라의 기초를 다졌다. 예악을 사회 질서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공자가 깊이 존경한 인물이다.
周武・成王주무 · 성왕
주무는 주나라를 연 무왕(이름은 발). 성왕은 무왕의 아들로, 어려서 즉위하여 숙부 주공단 등의 보필을 받았다. 성왕과 그 아들 강왕의 시대를 「성강의 치」라 한다.
武内の大臣다케우치 대신
다케우치노스쿠네(武內宿禰). 『고사기』 · 『일본서기』에 전하는 전설상의 대신으로, 여러 천황을 섬기고 진구 황후의 신라 출병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神功皇后・仁徳王子진구 황후 · 닌토쿠 왕자
진구 황후는 주아이 천황의 황후로, 『일본서기』가 전하는 전설상의 인물. 대성인 당시에는 역대 천황의 하나로 셈해졌다. 닌토쿠는 오진 천황의 아들로, 즉위 뒤 백성의 부엌에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3년 동안 세금을 면제했다는 전승으로 알려진 천황이다.
妙楽大師「身土一念の三千」묘락대사 「신토 일념의 삼천」
『지관보행전홍결』의 글로 전한다(권 · 쪽 확인 중). 「신(身)」은 정보(중생 · 오음), 「토(土)」는 의보(국토). 부처의 몸과 국토가 곧 일념의 삼천이라는 것.

회통의 열쇠는 「구족」 — 경론의 사슬

제16장은 「위의 대난은 아직 그 회통을 듣지 못했으니 어떠한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현대어역은 이것을 「앞에서 인계에 갖추어진 십계를 논란했는데, 아직 그 회통을 듣지 못했다」로 읽는다. 제11장에서 세운 교주의 대난, 제14장에서 난신난해로 막아 두었던 그 대난에 이제 답할 차례다.

대성인의 답은 다시 경론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의 인용은 제12장 · 제13장의 인용과 성격이 다르다. 일곱 개의 인용이 한 줄로 이어져 하나의 등식을 만든다.

현대어역은 이 사슬을 「살 · 사 · 구족 · 묘가 모두 다르지 않아, 묘법연화경의 한 법에 십계 삼천의 제법을 구족하여 빠짐이 없다」고 맺는다. 이 등식의 요지는 이 사이트 교리 六 「남묘호렌게쿄」의 「묘의 세 뜻」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강의가 덧붙이는 두 가지에 집중한다.

첫째, 강의는 무량의경의 「육바라밀이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를 「인위의 만행이 묘법 오자에 구족한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이 묘법 오자를 수지하면 인위의 만행을 닦지 않아도 그것을 닦은 것과 같게 된다. 이것이 곧 수지즉관심이다. 인위의 만행을 닦지 않아도 수지만으로 닦은 것과 같다면, 과위의 만덕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1장의 물음이 「인위의 모든 수행」과 「과위」를 나누어 물었던 것에 대해, 첫 인용이 이미 인위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강의는 법화경 이하의 글들이 「묘법이란 곧 구족의 뜻」임을 드러낸다고 하면서, 「구족」을 「개(開)」와 연결한다. 묘락대사는 『지관보행전홍결』 권1에서 「법화경 이전은 아직 권을 열지 않았으므로 구족이라 이름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족이란 권을 열고, 적을 열고, 탈익을 열어 문저하종을 드러내야 비로소 구족이라 한다. 「연다」는 것으로 불법을 논하면 다음과 같은 겹이 생긴다.

그러므로 문저하종 본지난사의 묘법을 「구족」이라 이름한다. 그래서 대성인은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한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제13장에서 본 「개불지견」의 「개」가 여기서 「구족」의 조건으로 되살아난다. 부처의 지견을 「연다」는 것과 오자에 모든 것이 「구족한다」는 것은 같은 사실의 두 면이다.

  1. 無量義経六波羅蜜自然に在前す육바라밀이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
  2. 法華経具足の道を聞かんと欲す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3. 涅槃経薩とは具足に名く살은 구족을 이름한다
  4. 竜樹薩とは六なり살은 여섯이다
  5. 四論玄義記胡法には六を以て具足の義と為す호법에서는 여섯으로 구족의 뜻을 삼는다
  6. 吉蔵沙とは翻じて具足と為す사는 번역하여 구족이라 한다
  7. 天台薩とは梵語なり此には妙と翻ず살은 범어이니 묘라 번역한다
  8. 결론薩 = 具足 = 六 = 妙살 = 구족 = 여섯 = 묘
열림의 세 겹
  1. 이전(소개)적문(능개)
  2. 적문(소개)본문(능개)
  3. 탈익(소개)하종(능개)
「문저하종 본지난사의 묘법을 구족이라 이름한다」묘락 「법화경 이전은 아직 권을 열지 않았으므로 구족이라 이름하지 않는다」(『홍결』 권1)
능생과 소생
능생本地難思境智の妙法 · 妙法蓮華経の五字본지난사 경지의 묘법 · 묘법연화경의 오자
소생
  • · 권의 석존
  • · 적의 석존
  • · 본의 석존
  • · 시방삼세 제불의 인행과덕
所生は必ず能生に帰す소생은 반드시 능생으로 돌아간다권 → 실 · 적 → 본 · 탈 → 종
百千枝葉同じく一根に趣くが如し백천의 가지와 잎이 함께 한 뿌리로 향하는 것과 같다『법화현의』 권7
도표 9 · 「구족」의 문증 사슬 · 열림의 겹 · 능생과 소생

「사사로이 회통을 더하면 본문을 더럽힌다」 — 한 문장의 무게

경론의 사슬을 늘어놓은 뒤, 대성인은 「사사로이 회통을 더한다면 본문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현대어역은 「내가 회통을 더하면 오히려 인용한 글의 뜻을 더럽힐까 두렵다」로 읽는다. 경론이 이미 다 말했으니 덧붙일 것이 없다는 겸사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렇지만 글의 마음은」 하고 이어서, 이 편 전체의 결론이 되는 한 문장을 내놓으신다.

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하느니라.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
「관심의 본존초」, 246쪽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문단에 따라 이 문장을 낱말 단위로 읽는다.

「석존」은 권 · 적 · 본의 석존이다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의 석존은, 앞의 제11장에서 「우리 마음에 권 · 적 · 본의 교주가 머물 수 없다」고 논란했던 바로 그 권 · 적 · 본의 석존이다. 능시태자 · 유동보살의 인행, 사교의 색신과 사토의 색신의 과덕, 오백진점겁의 인위와 과위 — 그 모두가 「인행과덕의 두 법」이다. 그리고 「묘법 오자에 구족한다」의 묘법 오자는, 앞에서 개경과 결경의 글로 밝힌 「본지난사의 경지의 묘법」이다.

여기서 강의는 능생과 소생의 관계를 다시 꺼낸다. 권 · 적 · 본 석존의 인과의 두 법은 「소생(所生)」, 곧 낳아진 것이고, 본지난사 경지의 묘법은 「능생(能生)」, 곧 낳는 것이다. 낳아진 것은 반드시 낳은 것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권은 반드시 실로 돌아가고, 적은 반드시 본으로 돌아가고, 탈은 반드시 종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저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이 묘법 오자에 구족한다고 하는 것이다.

강의는 이것을 『법화현의』 권7의 글로 뒷받침한다. 「과거에 처음 증득한 권실의 법을 본(本)이라 한다. 본래 증득한 뒤로 방편으로 남을 교화하며 개삼현일 · 발적현본하는 것도 도리어 최초를 가리켜 본이라 한다. 중간에 나타낸 발적현본도 최초를 가리켜 본이라 하고, 금일의 발적현본도 최초를 가리켜 본이라 하며, 미래의 발적현본도 최초를 가리켜 본이라 한다. 삼세가 다르지만 비로자나는 하나의 본으로 다르지 않으니, 백천의 가지와 잎이 함께 한 뿌리로 향하는 것과 같다.」 강의는 이 글이 바로 구원원초를 「한 뿌리」에, 본과 제일번 이후의 모든 수적화타를 「가지와 잎」에 비유한 것이며, 권 · 적 · 본 석존의 인과의 공덕이 본지난사 경지의 묘법에 구족한다는 것을 밝힌 글이라고 본다.

왜 「석존 한 부처」인가

그렇다면 하나의 물음이 생긴다. 본지난사 경지의 묘법은 석존 한 부처만이 아니라 시방삼세 모든 부처의 인행과덕을 다 구족해야 할 텐데, 왜 「석존의 인행과덕」이라고만 하셨는가. 강의의 답은 이렇다. 석존 한 부처를 들어 모든 부처에 견주었을 뿐이다. 방편품이 「나의 방편이 이와 같으니 제불도 또한 그러하다」, 「제불여래의 법이 모두 이와 같다」고 한 것과 같은 어법이다. 그러므로 일체 제불의 인위의 만행과 과위의 만덕이 모두 이 묘법 오자에 구족한다. 그래서 말법 하종의 본존의 공덕은 무량무변하며, 넓고 깊은 힘을 갖추고 있다.

받아 지님이 곧 관심 — 신력품과 수지의 두 뜻

다음으로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 강의는 이것이 바로 수지즉관심의 뜻이라고 한다. 본존을 수지하는 것 자체가 공덕을 느끼는 것이니, 수지가 곧 관심이 아닌가.

신력품의 글과 맞추어 읽다

강의는 이 문장을 법화경 신력품의 「내가 멸도한 뒤에 마땅히 이 경을 수지해야 한다(於我滅度後 應受持斯經)」에 정확히 대응시킨다.

신력품에서 말하는 「이 경」은 장항(산문 부분)에서 결요부촉의 대상으로 설한 사구의 요법(四句要法)이다. 대성인이 「삼대비법품승사」에서 「명 · 체 · 종 · 용 · 교의 오중현의 오자(名體宗用敎の五重玄の五字)」(1022쪽)라 하신 것처럼, 석존 멸후 말법의 우리 중생이 이 오자칠자의 본존을 수지하는 것을 곧 관심이라 이름한다. 결요부촉은 제6편 이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만, 강의는 이미 여기서 수지즉관심과 신력품의 부촉이 한 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보인다.

왜 수지가 관심인가 — 신심과 구창

그러면 왜 수지를 곧 관심이라 하는가. 강의의 답은 짧다. 무릇 하종가(下種家)의 관심은 오직 신심과 구창(口唱)을 관심으로 삼는다. 수지란 바로 신심과 구창이므로 수지즉관심이라 한다.

다시 왜 신심과 구창이 바로 수지에 해당하는가.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문단에 따라 경문을 살피고, 수지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총체(總體)의 수지다. 수지 · 독 · 송 · 해설 · 서사의 오종묘행을 「수지」 한 가지에 담아 수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뜻에서는 수지라는 한 낱말 속에 다섯 가지 묘행이 다 들어 있다. 법화경 곳곳에 「능히 이 경을 지닌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둘째는 별체(別體)의 수지다. 오종묘행 가운데 첫째로 꼽히는 수지다. 천태가 「신력 때문에 받고, 염력 때문에 지니며, 글을 보는 것을 독이라 하고, 잊지 않는 것을 송이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신력품 결요부촉의 글에서도, 장항에서는 별체에 약하여 「마땅히 일심으로 수지 · 독송 · 해설 · 서사하고 설한 대로 수행하라」고 설했다. 이것이 요법의 오종묘행이다. 게송에서는 총체에 약하여 「마땅히 이 경을 수지해야 한다」고 설했다. 강의는 이것이 곧 대성인이 말씀하신 「유수지(唯受持)의 일행」이며, 이 수지에 의해 즉신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초의 뜻도 바로 게송의 총체의 수지이므로, 오종묘행을 통틀어 수지로 삼는다.

그러면 수지가 바로 신심과 구창에 해당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신심은 곧 「수지의 집 안의 수지」이고, 구창은 곧 「수지의 집 안의 독송」이다. 그러므로 수지와 독송은 곧 수지의 집 안의 자행(自行)이다. 지금은 자행의 관심을 밝히므로 자행의 측면만을 취한다. 해설과 서사는 남을 교화하는 것(化他)을 앞면으로 삼으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으나, 강의는 해설이 곧 절복과 설법이라고 덧붙인다.

총체의 수지수지 · 독 · 송 · 해설 · 서사의 오종묘행을 「수지」 하나에 담음
경문於我滅度後 応受持斯経내가 멸도한 뒤에 마땅히 이 경을 수지해야 한다신력품 게송
「관심의 본존초」의 수지 = 총체
별체의 수지오종묘행 가운데 첫째
경문応当一心受持読誦解説書写如説修行마땅히 일심으로 수지 · 독송 · 해설 · 서사하고 설한 대로 수행하라신력품 장항
천태信力の故に受け念力の故に持ち신력 때문에 받고 염력 때문에 지닌다
자행신심(수지가의 수지) · 구창(수지가의 독송)
화타해설(절복 · 설법) · 서사
도표 10 · 총체의 수지와 별체의 수지

신력 · 행력 · 법력 · 불력 — 연꽃과 물과 햇빛

강의는 이 한 문장 안에 네 가지 힘(四力)이 밝혀져 있다고 한다. 니치칸 상인의 해석이다.

신력이란 오로지 이 본존을 믿어, 이 본존 외에는 절대로 성불할 길이 없다고 강성하게 믿는 것이다. 천태가 「다만 법성을 믿고 그 나머지를 믿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행력이란 해가 뜨면 등불이 쓸데없고 비가 오면 이슬이 쓸데없다는 도리대로, 지금 말법에서는 다른 경도 법화경도 쓸데없다고 하신 말씀처럼(「이제 말법에 들어서면 다른 경도 법화경도 쓸데없다. 다만 남묘호렌게쿄여야 한다(今末法に入りぬれば余経も法華経もせんなし、但南無妙法蓮華経なるべし)」 · 「우에노전답서」, 1546쪽), 다른 일을 섞지 않고 오직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것이다.

법력이란 이미 적중화타의 삼세제불의 인과의 공덕이 모두 본지자행의 묘법 오자에 구족하므로, 이 본존의 역용과 교화의 공이 넓고 이익이 깊은 것이다.

불력이란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의 자행화타의 인과의 공덕을 원만히 구족한 묘법 오자를 한 폭의 본존으로 도현하여 말법의 어린 중생에게 주신 것이다. 이것은 「나는 본래 서원을 세웠다(我本立誓願)」는 큰 자비의 힘 때문이므로, 우리가 이 본존을 수지하면 자연히 저 자행화타의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어 모두 우리 범부의 공덕으로 삼게 하시고,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게 하리라」는 깨달음을 열게 하신다. 이것은 오로지 불력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강의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이 불력과 법력에 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관심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용수의 『대지도론』 권1의 비유를 든다. 「비유하면 연꽃이 물에 있어도 햇빛을 얻지 못하면 시들어 죽는 것이 의심 없듯이, 중생의 선근도 만약 부처를 만나지 못하면 이룰 길이 없다.」 강의는 이 글을 이렇게 읽는다. 꽃(華)은 신력, 연(蓮)은 행력, 물은 법력, 해는 불력이다. 연꽃이 물에 의해 나듯이 우리의 신력과 행력도 반드시 법력에 의해 생긴다. 물이 없으면 연꽃이 나지 않듯이, 법력이 없으면 우리의 신력과 행력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존을 우러러 법력을 빌어야 한다. 또 물에 의해 연꽃이 나도 햇빛이 없으면 시드는 것이 의심 없다. 우리가 법력에 의해 신력과 행력을 일으켜도 불력을 얻지 못하면 신행이 물러나는 것이 의심 없다. 연꽃이 햇빛을 얻으면 반드시 피어나듯, 우리는 불력을 입어야 신행을 성취하고 빨리 최고의 행복을 얻는다. 그러므로 말법의 어린아이인 우리 중생은 오직 불력과 법력에 의해 관심을 이루며, 자력으로 생각하여 관찰할 필요가 없다.

  • 我等受持우리가 수지하면= 신력 · 행력
  • 此の五字이 오자= 법력
  • 自然に譲り与え給う자연히 물려주신다= 불력
①②연(蓮)화(華)행력신력
비유의 뜻연꽃이 물에 있음
우리에게의 뜻우리 범부가 신력 · 행력을 힘씀
③물법력
비유의 뜻연꽃은 물에 의해 남
우리에게의 뜻우리는 법력에 의해 신력 · 행력을 일으킴
④햇빛불력
비유의 뜻연꽃은 햇빛을 만나 핌
우리에게의 뜻우리는 불력에 의해 즉신성불함
譬えば蓮華、水に在り、若し日光を得ざれば翳死すること疑いなきが如く비유하면 연꽃이 물에 있어도 햇빛을 얻지 못하면 시들어 죽는 것이 의심 없듯이『대지도론』 권1
도표 11 · 사력과 연꽃의 비유

강의는 이렇게 맺는다. 우리 중생이 즉신성불의 큰 이익을 얻는 것은 모두 묘법 오자의 본존의 법력과,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인 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불력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마하지관』 권5의 「향성에서 뼈를 부수고 설산에서 몸을 던져도 어찌 그 덕을 갚기에 족하겠는가」, 권1의 「상제는 동쪽으로 청하고, 선재는 남쪽으로 구하고, 약왕은 손을 태우고, 보명은 머리를 베였으며, 하루에 세 번 항하사만큼 몸을 버려도 오히려 한 구절의 힘을 갚을 수 없거늘, 하물며 두 어깨에 지고 백천만겁을 지낸들 어찌 불법의 은혜를 갚겠는가」를 들어, 본존의 무거운 은혜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상제보살은 반야를 구해 동쪽으로 가며 자기 몸을 팔았고, 선재동자는 남쪽으로 쉰셋의 선지식을 찾아갔으며, 약왕보살은 팔을 태워 공양했다. 그런 구도의 희생으로도 한 구절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 마디로 요약하면

강의는 이 한 문장을 간단히 결론하면 이렇다고 한다.

「무상보취 불구자득」 — 구하지 않았는데 얻은 보배

대성인은 이 문장을 받아 곧바로 신해품의 사대성문의 영해를 드신다. 「위없는 보배 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얻었다.」 그리고 「우리 기심의 성문계이다」라고 하신다. 강의는 이 인용이 위를 받아 아래를 일으키는 자리에 있으며, 「본존과 행자가 한 몸(本尊行者體一)」이라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본다.

「무상보취」를 강의는 이렇게 읽는다. 이전은 위가 있고(有上) 적문은 위가 없다(無上). 적문은 위가 있고 본문은 위가 없다. 탈익은 위가 있고 하종은 위가 없다. 그러므로 문저하종의 본존은 무상 가운데서도 지극한 무상이다. 이 문저하종의 본존에 석존의 인위의 만행과 과위의 만덕의 보배가 모여 있으므로 「무상보취」라 이름하며, 또 이 본존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한다. 이런 위없는 보배 무더기를 아무 수고 없이, 아무 수행의 공 없이, 오직 신심과 구창으로 받아 얻을 수 있으므로 「불구자득」이라 한다.

신해품의 장자궁자 비유에서 가난한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오랫동안 품팔이를 하다가, 임종을 앞둔 장자가 친아들임을 밝히고 모든 재산을 물려주자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얻었다」고 기뻐한다. 사대성문은 이 비유로 법화경에서 성불의 수기를 받은 기쁨을 말했다. 대성인은 이것을 「우리 기심의 성문계」라 하신다. 현대어역은 「우리 기심의 성문계가 묘법연화경을 수지하여 위없는 큰 공덕에 환희하는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고 풀이한다. 강의는 성문의 불구자득이 곧 우리 기심의 성문계의 불구자득이므로, 그것이 우리의 불구자득이 된다고 한다.

『어의구전』은 앞에서 본 수량품 「자아득불래」의 강의를 「무상보취 불구자득,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756쪽)는 말로 맺는다. 한 구절에 삼신이 갖추어지고 그 삼신이 무시무종의 옛 부처로서 「저절로 얻은(自得)」 것이라는 이 대목은, 이 장의 뒤에서 「무시의 고불」이 나올 때 다시 돌아온다.

「나와 같이 평등하여」 —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

대성인은 이어서 방편품의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게 하리라. 내가 옛날 세운 서원과 같이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불도에 들게 하였다」를 드시고,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이다. 인과의 공덕은 뼈와 골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신다.

강의는 이 대목이 삼신즉일신(三身即一身)에 약하여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을 밝히고 사제불이(師弟不二)를 보이신 것이라고 한다. 현대어역도 「스승도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제자도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으로 나타나, 자수용신에 약하여 스승과 제자가 둘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풀이한다.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는 것은 「내가 옛날 세운 서원과 같이 이제 이미 만족했기」 때문이다. 이 「나」는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다. 「옛날의 서원」의 「옛날」은 구원원초를 뜻한다. 강의는 여기서 다른 문류의 해석을 비판한다. 다른 문류는 이 「옛날」을 수량품의 「내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할 때(我本行菩薩道)」에 세운 서원으로 풀지만, 당류(當流)에서는 「아본행보살도」의 때는 아직 가까운 때이며, 그보다 훨씬 먼 무시(無始), 곧 구원원초의 때로 본다. 그러므로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의 서원을 「내가 옛날 세운 서원과 같이」라 하고, 이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 말법에 출현하여 삼대비법의 본존을 어린 중생에게 주셨으므로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고 한다. 또 이 본존을 수지하는 중생은 모두 구원원초의 불도에 들게 되므로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불도에 들게 하였다」고 한다.

이미 구원원초의 불도에 들었다면, 우리 중생의 범부의 몸 그 자체가 완전히 구원원초의 자수용신과 한 몸이다. 그래서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이다. 인과의 공덕은 뼈와 골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신다. 자수용신은 스승이고 우리는 제자다.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는 것으로 사제불이를 보이신 것이다.

『어의구전』의 방편품 「여아등무이 여아석소원의 일」은 이 대목을 이렇게 푼다.

我とは釈尊・我実成仏久遠の仏なり此の本門の釈尊は我等衆生の事なり……我等衆生は親なり仏は子なり父子一体にして本末究竟等なり、此の我等を寿量品に無作の三身と説きたるなり……如我昔所願は本因妙如我等無異は本果妙なり妙覚の釈尊は我等が血肉なり因果の功徳骨髄に非ずや

나란 석존이며, 「내가 실로 성불한」 구원의 부처이니라. 이 본문의 석존은 우리 중생의 일이니라. …… 우리 중생은 어버이요 부처는 자식이니, 부자가 한 몸이 되어 본말구경등이니라. 이 우리를 수량품에서 무작의 삼신이라 설하였느니라. …… 「내가 옛날 세운 서원과 같이」는 본인묘요,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는 본과묘이니라.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이니라. 인과의 공덕은 뼈와 골수가 아니겠는가.
『어의구전』, 720쪽

「여아석소원은 본인묘, 여아등무이는 본과묘」라는 이 대목은, 이 장의 결론부에서 「기심의 석존 = 본과묘」, 「기심의 보살 = 본인묘」로 다시 나타난다. 「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이라는 「관심의 본존초」의 문장이 『어의구전』에서 거의 그대로 되풀이된다는 것도, 이 문장이 대성인 법문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보탑품 — 무작삼신과 부자일체

다음에 대성인은 보탑품의 글을 드신다. 「능히 이 경법을 지키는 이가 있다면 곧 나와 다보를 공양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오신 화불로서 모든 세계를 장엄하고 빛나게 꾸미시는 분들을 공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은 나의 불계이다. 그 자취를 이어받아 그 공덕을 받아 얻는다」고 하신다.

강의는 이것이 무작삼신(無作三身)에 약하여 부자일체(父子一體)를 보이신 것이라고 한다. 본지의 무작삼신이란 일신즉삼신(一身即三身)에 약한 것이다. 강의는 경문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읽는다.

이렇게 경문을 읽으면 「능히 이 본존을 지키는 이는」이 되어, 이 본존을 지키는 우리 중생은 수지즉관심의 이치에 의해 곧 무작의 삼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이 우리 기심의 불계가 된다. 현대어역은 이것을 「무작의 보신인 석존, 무작의 법신인 다보, 무작의 응신인 분신, 곧 무작삼신여래는 묘법 오자를 수지하는 우리의 불계이며, 무작삼신의 자취를 이어 무작삼신의 공덕을 받아 얻는다」고 풀이한다.

그래서 「잠시라도 이것을 들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잠시라도 본존을 수지하면 우리의 몸 그대로가 완전히 구경원만한 무작삼신이다. 현대어역은 이것을 「범부의 몸 그대로 명자묘각의 깨달음에 들 수 있다」고 한다. 강의는 이것을 비유하여, 태자가 선제의 자취를 이어 제위에 오르면 완전히 선제와 같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므로 본존도 무작삼신, 우리도 무작삼신이다. 어버이도 부처, 자식도 부처, 어버이도 제왕, 자식도 제왕이니, 완전히 어버이와 자식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 대목을 도해로 보였다. 여기서는 본존을 도식 · 배치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그 도해를 경문의 낱말과 삼신 · 경지의 대응을 적은 목록으로만 옮겼다.

「무시의 고불」 — 수량품과 군신합체

이어서 대성인은 수량품의 「그러나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다」를 드시고, 「우리 기심의 석존은 오백진점, 내지 나타난 삼신으로서 무시의 옛 부처이다」라고 하신다. 강의는 이것이 구원원초에 약하여 군신합체(君臣合體)를 보이신 것이라고 한다.

한 구절에 삼신 — 「연아실성불이래」

「연아실성불이래(然我實成佛已來)」는 통틀어 삼신을 밝힌 글이다. 「나(我)」는 곧 무작의 법신, 「성불」은 곧 무작의 보신, 「이래」는 곧 무작의 응신이다. 강의는 『어의구전』의 「자아득불래」 강의를 이 뜻의 문증으로 든다.

御義口伝に云く一句三身の習いの文と云うなり……我は法身・仏は報身・来は応身なり此の三身・無始無終の古仏にして自得なり、無上宝聚不求自得之を思う可し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한 구절에 삼신을 익히는 글이라 하느니라. …… 아(我)는 법신, 불(佛)은 보신, 내(來)는 응신이니라. 이 삼신은 무시무종의 옛 부처로서 저절로 얻은 것이니라. 무상보취 불구자득, 이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어의구전』, 756쪽

그러므로 무량무변 나유타겁의, 곧 구원원초의 무작삼신을 우리가 수지하므로 「우리 기심의 석존은 오백진점, 내지 나타난 삼신으로서 무시의 옛 부처이다」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乃至」를 어떻게 읽는가

강의는 여기서 이 문장의 한 낱말, 「내지(乃至)」의 독법을 길게 다룬다. 「오백진점 내지 나타난 삼신」의 「내지」는 무엇을 뜻하는가.

강의에 따르면 『몽초(蒙抄)』 등은 「능현(能顯)을 내지라 한다. 소현(所顯) 두 글자에 대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곧 「오백진점겁에 나타낸 것과 나타난 삼신」이라는 식으로 읽는다. 강의는 이것이 대성인의 원의에 이르지 못한 해석이라고 비판한다. 『몽초』처럼 읽으면 「오백진점겁의 능현 · 소현의 삼신으로서 무시의 옛 부처」가 된다. 그렇다면 오백진점겁과 무시가 같은 것이 되는가. 오백진점겁이 멀다 해도 무시에서 보면 매우 가깝다. 큰 잘못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면 「내지」를 어떻게 읽는가.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해석에 따라, 「내지」를 「때(時)」에 약하여 읽어야 하며, 그것도 뒤에서 앞으로 향하여 「내지」한다고 한다. 오백진점은 곧 구원 본과(本果)의 때다. 나타난 삼신은 구원 명자(名字)의 때에 있다. 지금 구원 본과의 때로부터 구원 명자의 때를 향하여 그 사이를 「내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어서의 「오백진점겁의 당초(當初)」라는 글과 같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지」 두 글자는 여러 어서의 「당초」 두 글자와 같다고 읽어야 한다.

강의는 「당초」의 문증으로 세 어서를 든다.

釈尊五百塵点劫の当初此の妙法の当体蓮華を証得して世世番番に成道を唱え能証所証の本理を顕し給えり

석존은 오백진점겁의 당초에 이 묘법의 당체연화를 증득하시어, 세세번번에 성도를 부르시고 능증 · 소증의 본리를 나타내셨느니라.
「당체의초」, 513쪽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의 「석가여래는 오백진점겁의 당초에 범부로 계실 때 내 몸은 지수화풍공이라고 아시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여셨다」(568쪽)는 제11장에서 이미 보았다.

寿量品に建立する所の本尊は五百塵点の当初より以来此土有縁深厚本有無作三身の教主釈尊是れなり

수량품에 건립하는 바의 본존은 오백진점의 당초로부터 이래 이 땅에 인연이 깊고 두터운 본유무작삼신의 교주석존이 이것이니라.
「삼대비법품승사」, 1022쪽

그러므로 지금 문장의 뜻은 「우리 기심의 석존은 오백진점의 당초, 명자 범부의 때에 나타난 삼신으로서 무시의 옛 부처이다」가 된다. 강의는 이 석존이야말로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며, 보신을 중심으로 삼신을 논하는(報中論三) 무작삼신이시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문류의 무리는 이 무시의 본불을 모르므로 이 글의 깊은 뜻에 이르지 못하니 가엾다고까지 말한다.

①『몽초』 등
能顕を以て乃至と云う능현을 내지라 한다→ 「오백진점겁의 능현 · 소현의 삼신으로서 무시의 고불」→ 강의의 비판: 오백진점과 무시가 같아지는 잘못
②니치칸 상인 · 강의 — 때에 약함, 뒤에서 앞으로
오백진점 = 구원 본과의 때← 내지 ←소현의 삼신 = 구원 명자의 때
→ 「乃至」 = 「当初」「내지」 = 「당초」
→我等己心の釈尊は五百塵点の当初・名字凡夫の御時に所顕の三身にして無始の古仏우리 기심의 석존은 오백진점의 당초, 명자 범부의 때에 나타난 삼신으로서 무시의 고불
문증「당체의초」 513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68 · 「삼대비법품승사」 1022五百塵点劫の当初오백진점겁의 당초
도표 12 · 「乃至」의 두 독법

기심의 보살 — 본인묘

이어서 대성인은 수량품의 「내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으며 또 위의 수의 갑절이다」를 드시고, 「우리 기심의 보살 등이다」라고 하신다. 현대어역은 「이것이 곧 우리 기심의 보살 등의 구계이다」라고 풀이한다.

강의는 이 문장의 뜻을 이렇게 논한다. 우리 기심의 석존은 곧 종가(種家)의 본과묘이며 무시의 불계다. 우리 기심의 보살계는 곧 종가의 본인묘이며 무시의 구계다. 이 본인 · 본과의 석존은 우리 기심의 주군이다. 지용천계의 보살은 기심의 석존의 권속이다. 늘 부처의 교화를 도와 온 것은 태공이나 주공단과 같다. 이렇게 군과 신이 이미 우리 한마음에 있으므로 군신합체라 한다.

이 사이트 교리 四 「구원실성」이 「개목초」의 「구계도 무시의 불계에 갖추어지고 불계도 무시의 구계에 갖추어진다」를 「참된 십계호구」라 한 것이, 여기서 「기심의 석존(무시의 불계)」과 「기심의 보살(무시의 구계)」로 우리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제11장의 물음에서 「무량무변한 대보살을 교화해 온 석가불이 어찌 우리 마음에」라고 했던 바로 그 「대보살」이 여기서 「우리 기심의 보살」이 된다.

태공 · 주공단과 다케우치 대신 — 군신의 비유

대성인은 지용천계의 보살이 기심의 석존의 권속이라는 것을 두 가지 역사의 예로 보이신다. 하나는 중국, 하나는 일본이다.

그림 준비 중
B-2 · 태공망과 군신의 비유

중국의 예는 태공망과 주공단이다. 이 둘은 주나라 무왕의 신하로서 은나라 주왕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고, 무왕이 일찍 죽자 어린 성왕의 권속으로서 그를 보필했다. 일본의 예는 다케우치 대신이다. 그는 진구 황후의 동량(棟梁), 곧 첫째가는 신하였고, 또 닌토쿠 왕자에게도 충의로운 신하였다. 두 예는 모두 한 신하가 두 대에 걸쳐 군주를 섬기는 모습이다. 현대어역은 이 비유를 이렇게 맺는다. 군주인 불계도 구원원초, 신하인 구계도 구원원초에 약하면 모두 군신이 합체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비유가 굳이 「두 대」를 섬기는 신하를 드는 데에는 뜻이 있어 보인다. 지용의 보살은 구원에 석존의 교화를 도왔고, 다시 말법에 나타나 묘법을 편다. 이 초의 마지막 제31장 총결도 같은 비유로 맺어진다. 「일념삼천을 모르는 이에게는 부처가 대자비를 일으켜 오자 안에 이 구슬을 싸서 말대의 어린 이의 목에 걸게 하신다. 사대보살이 이 사람을 수호하실 것은 태공과 주공이 문왕을 보필하고 사호가 혜제를 모신 것과 다르지 않다(四大菩薩の此の人を守護し給わんこと太公周公の文王を摂扶し四皓が恵帝に侍奉せしに異ならざる者なり)」(254–255쪽). 제16장에서 「기심의 석존」의 권속이던 태공 · 주공이, 제31장에서는 「말대의 어린 이」를 지키는 사대보살의 비유가 된다. 어린 성왕과 말대의 어린 이(末代幼稚)가 겹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 등은 우리 기심의 보살이다」라고 못 박으신다. 강의는 초의 첫 난문이 이미 삼덕을 들었으므로, 지금 또 삼덕에 약하여 한 몸임을 보이신 것이라고 한다. 사제불이(여아등무이), 부자일체(보탑품), 군신합체(수량품) — 사 · 친 · 주의 삼덕이 각각 우리 한 몸 안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제11장에서 「삼혹을 끊은 부처(친), 시방의 국주(주), 팔만 법장을 연설하는 부처(사)」라는 삼덕으로 교주를 우러렀던 물음은, 이렇게 삼덕 그대로 우리 자신 안으로 돌아온다. 강의는 여러 문류의 무리가 이 초의 깊은 비밀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릇된 풀이에 그릇된 풀이를 거듭하며 갑론을박하여 대중을 미혹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①如我等無異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방편품
대성인의 글妙覚の釈尊は我等が血肉なり묘각의 석존은 우리의 피와 살
강의의 뜻사제불이 · 삼신즉일신
삼덕사의 덕
②其れ能く此の経法を護る事有らん者は則ち為れ我及び多宝を供養するなり능히 이 경법을 지키는 이는 곧 나와 다보를 공양하는 것
대성인의 글釈迦・多宝・十方の諸仏は我が仏界なり석가 · 다보 · 시방 제불은 나의 불계
강의의 뜻부자일체 · 일신즉삼신(무작삼신)
삼덕친의 덕
③然るに我実に成仏してより已来그러나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수량품
대성인의 글我等が己心の釈尊は…無始の古仏なり우리 기심의 석존은 … 무시의 고불上行・無辺行等…我等が己心の菩薩なり상행 · 무변행 등은 우리 기심의 보살
강의의 뜻군신합체 · 구원원초
삼덕주의 덕
무작삼신 대응 (②의 경문)
  • 「我 (나)」 = 무작의 보신 · 지
  • 「多宝 (다보)」 = 무작의 법신 · 경
  • 「及 (와)」 = 경지명합
  • 「化仏 (화불)」 = 무작의 응신 · 자비
도표 13 · 제16장의 세 가지 하나 됨

「신토 일념의 삼천」 — 묘락의 글로 맺다

이 절은 묘락대사의 글로 맺어진다. 「마땅히 알라, 신토는 일념의 삼천이다. 그러므로 성도할 때에 이 본리에 맞아 한 몸 한 생각이 법계에 두루 한다.」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문단에 따라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한다.

먼저 「마땅히 알라, 신토」는 본존을 보인 것이며, 이 초 첫머리의 「무릇 한마음에 십법계를 갖춘다 … 삼천 가지 세간을 갖춘다」는 글과 같다. 「일념삼천」의 네 글자는 관심을 밝힌 것이며, 이 초 첫머리의 「이 삼천이 일념의 마음에 있다 … 삼천을 갖춘다」는 글과 같다. 곧 제1편에서 본 『마하지관』의 일념삼천 문 가운데 앞부분이 본존에, 뒷부분이 관심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관심의 본존초」라는 제목의 두 낱말이 묘락의 한 글 안에 다 들어 있다.

이어서 낱말마다 뜻을 정한다.

그러므로 글의 뜻은 이렇게 된다. 「마땅히 알라, 본지 자수용신의 신토는 우리의 한 생각 속의 삼천이다. 그러므로 성불할 때 이 본지난사의 경지의 묘법에 맞아, 한 몸의 오대가 법계에 두루 하여 소증(所證)이 되고, 한 생각의 신심이 법계에 두루 하여 능증(能證)의 지혜가 되어, 구원원초의 경지명합의 자수용신으로 나타난다.」 현대어역도 같은 뜻으로, 「자수용신의 신토는 믿는 우리 중생의 일념에 곧 삼천으로 나타나며, 성불할 때 우리의 한 몸도 믿는 한 생각도 함께 법계에 두루 한다」고 풀이한다.

제11장에서 본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의 「내 몸은 지수화풍공이라고 아시고」가 여기서 「한 몸의 오대가 법계에 두루 한다」로 되돌아온다. 범부의 몸을 이루는 다섯 원소가 그대로 법계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성도」다.

「본리」는 왜 사의 일념삼천인가

강의는 다시, 「본리」가 본지난사의 경지의 묘법이며 곧 사(事)의 일념삼천인 까닭을 밝힌다. 근거는 앞에서 든 「당체의초」의 글이다. 「석존은 오백진점겁의 당초에 이 묘법의 당체연화를 증득하시어 세세번번에 성도를 부르시고 능증 · 소증의 본리를 나타내셨다.」

이 글에서 「오백진점겁의 당초」는 곧 본지다. 「증득」 두 글자는 능증의 지(智)이고, 「묘법의 당체연화」는 소증의 경(境)이다. 「세세번번의 성도」는 곧 수적이다. 능증은 「증득」 두 글자에, 소증은 곧 「묘법당체연화」 여섯 글자에 해당한다. 또 「본리」의 「본」은 오백진점겁의 당초이고, 「리」는 묘법의 당체연화를 증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지난사의 경지의 묘법을 「본리」라 이름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세세번번의 자취(迹)에 대하여 구원원초를 「본」이라 이름하고, 적불 등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으므로 난사경지의 묘법을 「리」라 이름한다.

그러면 이것을 왜 「사(事)의 일념삼천」이라 부르는가. 강의는 이렇게 답한다. 이 본지난사의 경지의 묘법은 니치렌 대성인이 소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대성인의 행동(御振舞)은 완전히 본지난사의 경지의 묘법의 행동이므로 사의 일념삼천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이 본지난사의 묘법에는 무량한 덕이 담겨 있으므로, 그 덕에 따라 저마다의 이름이 생긴 것이니 결코 한 가지로 논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본리」, 「묘법당체연화」, 「경지의 묘법」, 「사의 일념삼천」은 같은 하나를 다른 덕에서 부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当に知るべし身土一念の三千なり故に成道の時此の本理に称うて一身一念法界に遍し마땅히 알라, 신토는 일념의 삼천이다. 그러므로 성도할 때 이 본리에 맞아 한 몸 한 생각이 법계에 두루 한다
身土
본지 자수용신의 신토 = 본존(身 = 정보 · 중생세간 · 오음세간 이천 / 土 = 의보 · 국토세간 일천)
一念
우리의 신심
三千
자수용신의 신토
成道
우리의 성불
本
본지 구원원초
理
난사경지의 묘법
一身
우리의 오대 → 법계에 두루 하여 소증
一念
우리의 신심 → 법계에 두루 하여 능증의 지
法界に遍し
경지명합의 자수용신
제1장과의 대응
「身土」 ↔ 제1장夫れ一心に十法界を具す무릇 한마음에 십법계를 갖춘다(본존)
「一念三千」 ↔ 제1장此の三千・一念の心に在り이 삼천이 일념의 마음에 있다(관심)
도표 14 · 묘락의 글 「身土一念の三千」을 읽는 법

말법의 관심 — 대상을 절대로 믿을 때

강의는 제16장의 강의를 말법에서 관심이 무엇인가를 다시 밝히는 것으로 맺는다. 요컨대 수지즉관심을 바로 밝힌다는 것은 「독일본문(獨一本門)의 본존을 수지하는 것 그 자체가 관심이 된다」는 한마디로 다한다.

본래 관심이란 「자기 마음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천태류로 읽으면 자기 마음의 십법계를 관하여 보는 것이다. 곧 자기가 자기 마음의 상태를, 지금은 괴롭다, 지금은 기쁘다, 지금은 화가 났다, 지금은 평화롭다 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거기서 하나의 깨달음을 여는 것이다. 강의는 이것이 천태 시대의 아주 상류 사람들의 수행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현대에도 「인간계에 십계가 있다」, 「우주가 자기 마음에 머문다」는 식의 이론 문제를 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강의는 그것이 관념론자의 의견이며 천태의 위대한 철학에 압도된 생각이라고 본다. 지금 말법의 사람들은 그런 천태의 관념관법으로 행복한 경애를 얻을 수 없다. 문저로 읽으면 「자기 마음을 관한다」는 것은 본존을 믿는 것이고, 「십법계를 본다」는 것은 묘법을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존을 믿고 묘법을 부를 때 본존의 십법계가 곧 자기 마음의 십법계가 되기 때문이다. 믿고 수지함으로써 본존의 인행과덕을 물려받아 환희의 경애에 머물 수 있다. 강의는 여기에 말법의 본불로서 대성인이 세상에 나오신 깊은 뜻이 있다고 한다.

어머니를 믿는 아이

강의는 여기서 「우리의 말로 회통을 더한다면」 하고, 수지즉관심을 생활의 말로 풀어 보인다. 수지즉관심의 관심이란, 어떤 대상을 절대라고 믿으면 그 대상이 지닌 힘이 그 사람의 생명과 생활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댓 살 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머니를 절대라고 믿으므로, 어머니가 하는 말과 하는 일은 아이에게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 그 때문에 어머니가 지닌 힘이 아이의 생활에 나타난다. 어머니를 수지하여 어머니가 하는 대로 행하므로 안심이 있다. 이것이 곧 수지즉관심의 정리(定理)다.

강의는 이 비유의 반대쪽도 보여 준다. 어머니가 도둑질을 한다. 그 아이가 어머니를 신뢰한다면 도둑질하는 어머니를 수지하는 셈이 되므로, 어머니의 도둑질의 영향을 그 생활에 받는다. 그것은 도둑질하는 어머니를 수지한 아이의 관심이 아니겠는가. 이 반례가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수지즉관심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가 생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지의 대상, 곧 본존이 무엇인가가 다음 편의 물음이 된다.

이 수지즉관심이란 대상을 절대라고 믿음으로써 대상이 지닌 힘을 자기 생명과 생활에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람들 가운데에도 스스로 생각하여 인생관을 세우고 거기에 집착하여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세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의지하여 자기 마음속에 그린 세계가 가장 옳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강의는 이런 생각을 너그럽게 보면 상법시대 천태의 방식 가운데 아주 초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엄하게 말하면 달마선의 가장 낮은 것, 아니 하등한 야호선(野狐禪)보다도 철저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성인은 이런 무리를 「어린 이(幼稚)」라고도, 「빈궁 · 하천」이라고도 하셨다는 것이다.

본존을 세우신 자비

강의는 이렇게 맺는다. 대성인은 이 어리고 빈궁하고 하천하고 덕이 얇고 때가 두꺼운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어 문저의 깊이 비밀한 본존을 세우셨다. 강의는 그 뜻을 대성인의 말씀처럼 이렇게 풀어 쓴다. 「너희는 어리고 하천한 몸으로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십계호구의 세계를 관할 수 없다. 저 상근의 천태의 말류가 자기 마음을 관하여 십법계를 보는 것 같은 관심은 결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본존을 세워 둔다. 이 본존을 수지하라. 이 본존을 수지한다면 아무 수고 없이 천태가 관한 자기 마음의 세계를 나타낼 것이다.」 이런 자비로 우리가 알 수 없는 큰 공력이 있는 본존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나라의 법이나 세상의 법을 수지해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불계를, 이 본존에 의해 어리고 하천한 우리가 느껴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이 본존의 수지야말로 관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강의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천태류 이하의 관심은 버려라. 다만 무심히 본존을 배하라. 그러면 너희의 관심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수지즉관심이다.」

제16장은 제11장의 물음 전체에 대한 답이다. 권 · 적 · 본 석존의 인행과덕은 소생이고 묘법 오자는 능생이므로, 모든 것이 오자에 구족한다. 그 오자를 수지하는 것은 신력품의 「응수지사경」 그대로이며, 수지는 곧 신심과 구창이다. 신력 · 행력이 법력과 불력을 만날 때 관심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제불이 · 부자일체 · 군신합체로, 제11장에서 우러른 교주의 삼덕이 모두 우리 기심 안에서 하나가 된다. 강의는 이것을 「대상을 절대라고 믿을 때 그 힘이 생명에 나타난다」는 생활의 말로 맺고, 그러므로 무엇을 믿는가 — 본존이 무엇인가 — 를 다음 편으로 넘긴다.

맺으며

이 편을 맺으며

제3편의 여섯 장은 하나의 큰 물음과 하나의 짧은 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음은 「삼덕을 갖춘 교주석존이 어찌 범부의 마음에 있겠는가」이고, 답은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오자에 구족하며, 우리가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이다. 그 사이에 대성인은 경론의 권위 논쟁을 경문 대조로 끝내시고(제12 · 13장), 이 법문이 본래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는 것을 부처와 삼국의 스승의 말로 확인하시고(제14장), 본존이 불계를 낳는 힘을 지녔다는 것을 개경과 결경으로 밝히셨다(제15장).

강의는 이 흐름을 석가불법과 대성인 불법의 대비로 읽는다. 제11장의 물음 밑에 깔린 것은 역겁수행 · 인과이시 · 본과묘의 불법이며, 제16장의 답이 세운 것은 수지즉관심 · 인과구시 · 본인묘의 불법이다. 부처는 먼 곳에 완성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본존을 믿는 한 생각 속에서 지금 열리는 생명이다. 그리고 그 열림은 범부의 자력이 아니라 본존의 법력과 불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천태가 자기 힘으로 마음을 관하던 길과, 말법의 범부가 본존을 받아 지니는 길이 여기서 갈라진다.

니치칸 상인의 문단을 따른 강의의 해석은 이 짧은 답의 낱말 하나하나에 깊이를 더했다. 「석존」은 권 · 적 · 본의 석존이며 모든 부처의 대표다. 「오자」는 능생이고 석존의 인과는 소생이다. 「수지」는 신력품의 「응수지사경」이며 총체의 수지, 곧 신심과 구창이다. 「자연히 물려주신다」에는 신력 · 행력 · 법력 · 불력의 사력이 담겨 있다. 「무시의 고불」의 「내지」는 「당초」이며, 묘락의 「신토 일념의 삼천」은 본존과 관심을 한 글에 담는다. 사제불이 · 부자일체 · 군신합체로 교주의 삼덕은 우리 안으로 돌아온다.

이 편을 닫으며 남는 물음은 하나다. 「무엇을 받아 지니는가」. 강의가 어머니를 믿는 아이의 비유에서 「도둑질하는 어머니」라는 반례를 굳이 든 것도 이 물음 때문이다. 수지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관심의 내용이 정해진다. 그래서 다음 제4편에서 대성인은 「세 가지 본존」, 곧 본존의 위체(爲體)를 밝히신다. 본시의 사바세계, 보탑, 그리고 그 본존이 왜 정법 · 상법 이천 년 동안 세워지지 않았는가 — 제3편의 수지즉관심이 그 모든 논의의 바탕이 된다.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관심의 본존초」 · 「관심의 본존초송장」 —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창가학회판) 238–255쪽. 한국어 쪽수는 화광신문 한국어판과 같다.
  • 같은 어서전집의 「개목초」 · 「선시초」 · 「사도어서」 · 「시모야마어소식」 · 「성인어난사」 · 「마쓰노전어소식」 · 「십자어서」 · 「시조깅고전답서」 · 「아키모토어서」 · 「우에노전답서」 · 「목회이상개안지사」 · 「삼대비법품승사」 · 「당체의초」 ·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 『어의구전』 · 「헤이노사에몬노조요리쓰나에의 어장」.
  • 『묘법연화경』 T9 no.262 · 『무량의경』 T9 no.276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대반열반경』 T12 no.374 (쪽 확인 중).
  • 천태지의,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마하지관』 T46 no.1911 (쪽 확인 중).
  • 담연(묘락대사),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쪽 확인 중).
  • 용수, 『대지도론』 T25 no.1509 (쪽 확인 중).

연구 · 해설

  • 창가교학연구실, 「0238~0255 如来滅後五五百歳始観心本尊抄」 제11~16장 강의(블로그, 2020년 6월 게재).
  • 니치칸 상인, 「관심본존초 문단」 — 위 강의를 통해 참조.
  • 창가학회 교학부, 『世界広布の翼を広げて 教学研鑽のために — 観心本尊抄』 제2판, 聖教新聞社, 2024.
  • 庵谷行亨, 「『観心本尊抄』題号における「観心本尊」の意味」, 『法華文化研究』 46, 2020, 11–32쪽.
  • 茂田井教亨, 『観心本尊抄研究序説 — 宗学体系化への試み』, 立正大学 학위논문, 1989.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더 읽기

이 편에 인용된 어서

어서 연구 전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