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에서 대성인은 숙익 · 탈익 · 하종의 세 가지 본존을 차례로 보이시고, 「말법에 들어와 비로소 이 불상이 출현하실 것인가」라는 말로 문저하종의 본존을 드러내셨다. 그러자 객은 정법 · 상법 이천여 년 동안 아무도 숭상한 일이 없는 본존이라는 말에 「귀와 눈이 놀라고 마음이 어지럽다」며 다시 자세히 설해 달라고 청한다. 제5편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의 첫머리다. 대성인은 여기서 석존 일대의 모든 경을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의 세 단으로 다섯 번 거듭 나누어 보이신다. 이것이 오중삼단(五重三段)이다. 다섯 번째에 이르러 과거 대통불의 법화경으로부터 시방삼세 제불의 미진의 경경까지가 모두 「수량품의 서분」이 되고, 문상의 적문 · 본문이 모두 말법의 유통분이 된다. 무엇이 정종분으로 남는가 — 이 편은 그 물음을 끝까지 좁혀 「다만 제목의 다섯 자」에 이르는 논증이다.
서 · 정 · 유통이라는 세 단은 경전을 읽는 오래된 틀이다. 한 경의 첫머리가 무대를 마련하고(서분), 본론이 부처의 본뜻을 밝히며(정종분), 끝부분이 그 법을 뒷세상에 흘려 보낸다(유통분). 대성인은 이 평범한 틀을 다섯 번 겹쳐 쓰시면서 그 대상을 한 번씩 바꾸신다. 처음에는 석존 오십 년 설법 전체를 한 경으로 보고(일대삼단), 다음에는 법화경과 그 앞뒤 두 경 열 권을 한 경으로 보며(십권삼단), 이어 적문 열네 품(적문숙익삼단), 본문 열네 품(본문탈익삼단)을 차례로 한 경으로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 「또 본문에 있어 서 · 정 · 유통이 있다」고 하시며 문상의 어느 경문에도 그대로는 적혀 있지 않은 다섯 번째 삼단, 곧 문저하종삼단을 세우신다.
강의는 이 오중삼단이 「개목초」의 오중상대(내외 · 권실 · 권적 · 본적 · 종탈)와 같은 뜻의 짜임이라고 본다. 「개목초」가 다섯 겹의 비교로 법의 깊고 얕음을 가렸다면, 「관심의 본존초」는 다섯 겹의 삼단으로 그 법이 일대 불교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정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 서는 것이 말법에 세워질 문저하종의 본존이라는 것이 강의의 일관된 독법이다. 이 편을 읽는 열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같은 경문이 「무엇과 견주느냐(소대(所對))」에 따라 정종분도 되고 서분 · 유통분도 된다는 것, 또 하나는 같은 「일품이반」이라는 이름이 천태의 배립과 대성인의 배립에서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편은 니치칸 상인의 「관심본존초 문단」이 가장 공들여 논한 대목이기도 하다. 강의는 그 문단을 따라 「죽막을 사이에 둔다」는 한 구절에 대한 열일곱 가지 이설, 다섯 번째 삼단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여러 학설, 유통분에 관한 이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논파한다. 이 편은 그 논의를 빠짐없이 옮겨, 오중삼단이 단순한 경전 분류표가 아니라 「무엇을 말법의 본존으로 삼는가」를 가르는 교판임을 보이고자 한다.
이 편의 장
본문
答えて曰く法華経一部八巻二十八品・進んでは前四味・退いては涅槃経等の一代の諸経惣じて之を括るに但一経なり 始め寂滅道場より終り般若経に至るまでは序分なり 無量義経・法華経・普賢経の十巻は正宗なり 涅槃経等は流通分なり、 正宗十巻の中に於て亦序正流通有り無量義経並に序品は序分なり、 方便品より分別功徳品の十九行の偈に至るまで十五品半は正宗分なり、 分別功徳品の現在の四信より普賢経に至るまでの十一品半と一巻は流通分なり。
답하여 가로되, 법화경 일부 팔 권 이십팔 품과, 나아가서는 그 앞의 사미(四味), 물러나서는 열반경 등 일대(一代)의 제경을 통틀어 이를 묶으면 다만 한 경이니라. 처음 적멸도량(寂滅道場)으로부터 마지막 반야경에 이르기까지는 서분(序分)이요, 무량의경 · 법화경 · 보현경의 십 권은 정종(正宗)이며, 열반경 등은 유통분(流通分)이니라. 정종인 십 권 가운데에도 또한 서 · 정 · 유통이 있으니, 무량의경과 서품은 서분이요, 방편품으로부터 분별공덕품의 십구행의 게(偈)에 이르기까지 십오 품 반은 정종분이며, 분별공덕품의 현재의 사신(四信)으로부터 보현경에 이르기까지의 십일 품 반과 한 권은 유통분이니라.
어구 풀이
- 序正流通서정유통
-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의 삼단(三段). 서분은 한 경의 서론으로 설법의 인연과 준비를 보이는 단이고, 정종분은 본론으로 설법의 중심이 되어 부처의 본회(本懷)가 설해지는 단이며, 유통분은 정종분의 법수(法水)를 흘려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미 설한 경의 취지를 뒷세상에 전하려는 뜻으로 설해진 단이다.
- 前四味전사미
- 천태의 오시(五時) 교판에서 법화 · 열반시 앞의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의 네 시기. 열반경의 오미(五味) 비유 — 젖(乳) · 낙(酪) · 생소(生酥) · 숙소(熟酥) · 제호(醍醐) — 가운데 앞의 넷에 해당하므로 「전사미」라 한다. 「나아가서는 전사미」는 법화경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 범위를, 「물러나서는 열반경 등」은 법화경 뒤로 내려온 범위를 가리킨다.
- 寂滅道場적멸도량
- 석존이 성도한 보리수 아래의 자리. 화엄경이 이 자리에서 설해졌다고 하므로, 「처음 적멸도량으로부터」는 일대 설법의 첫 경인 화엄경을 가리킨다.
- 十巻십권
- 법화경 팔 권에 개경(開經) 무량의경 한 권과 결경(結經) 관보현보살행법경(보현경) 한 권을 더한 열 권. 이 셋을 「법화삼부경」이라고도 한다.
- 分別功徳品の十九行の偈분별공덕품의 십구행의 게
- 분별공덕품 제17 전반부에서 미륵보살이 부처의 수명 장원함을 듣고 대중이 얻은 공덕을 찬탄한 열아홉 줄의 게송. 이 게송까지가 정종분이고, 그 뒤 「그때 부처가 미륵보살마하살에게 이르시기를」부터는 유통분에 든다.
- 現在の四信현재의 사신
- 분별공덕품 후반에 설해진, 부처의 재세 중에 수량품을 듣고 일으키는 네 단계의 신앙. ① 일념신해(一念信解) ② 약해언취(略解言趣) ③ 광위타설(廣爲他說) ④ 심신관성(深信觀成). 이어 부처의 멸후를 위한 오품(五品)이 설해진다. 자세한 것은 도표 4.
- 十一品半と一巻십일품반과 일권
- 분별공덕품의 후반 반 품과 수희공덕품 제18부터 보현보살권발품 제28까지의 열한 품, 그리고 결경인 보현경 한 권.
- 一代の諸経일대의 제경
- 석존이 성도로부터 입멸까지 약 오십 년에 걸쳐 설한 모든 경. 「오십여 년」이라는 연수는 전통적 교판의 셈법이다.
「답하여 가로되」 — 물음에 대한 대답이 시작되다
제21장은 제20장의 물음에 대한 대답의 첫마디다. 제20장에서 객은 이렇게 물었다. 정법 · 상법 이천여 년 동안 사의(四依)의 보살과 인사(人師)들이 여러 부처와 소승 · 권대승 · 이전 · 적문의 석존을 모신 절과 탑을 세웠지만, 본문수량품의 본존과 사대보살은 삼국(인도 · 중국 · 일본)의 왕과 신하가 아직 숭상한 일이 없다 — 대성인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대략 들었으나 「전대미문이라 귀와 눈이 놀라고 마음이 어지럽다(前代未聞の故に耳目を驚動し心意を迷惑す)」, 그러니 거듭 자세히 설해 달라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 물음에 곧바로 본존의 모습을 다시 설명하는 방식으로 답하지 않으신다. 대신 석존 일대의 모든 경을 놓고 그것을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으로 나누는 일을 다섯 번 거듭하신다. 왜 이런 우회로를 택하셨는가. 객이 놀란 까닭은 「이천 년 동안 아무도 세우지 않은 본존」이라는 말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본존이 왜 이천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왜 지금 나타나야 하는지를, 일대 불교 전체의 짜임 속에서 보여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대답이 된다. 오중삼단은 바로 그 짜임을 보이는 장치다. 다섯 번 거듭 나누는 동안 정종분의 범위는 점점 좁아지고, 앞의 단계에서 정종분이던 것이 뒤의 단계에서는 서분이나 유통분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정종분이 말법의 본존이다.
현대어역은 이 대답의 첫머리를 「말법 하종의 삼대비법의 어본존은 일대 불교 가운데 어떤 지위에 있으며 또 어떤 실체인가에 대해 오중의 삼단을 세워 자세히 설명하겠다」는 뜻으로 풀어 읽는다. 곧 오중삼단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본존의 「지위」와 「실체」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이다.
서 · 정 · 유통이라는 틀
경전을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으로 나누어 읽는 방법은 대성인이 처음 만드신 것이 아니다. 중국 불교에서는 동진의 도안(道安)이 경전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한 데서 이 방법이 비롯되었다고 전하며, 천태대사는 『법화문구』에서 이 틀을 법화경에 적용해 일경 전체와 적문 · 본문 각각에 서 · 정 · 유통을 세웠다. 대성인이 이 장과 다음 두 장에서 보이시는 일대삼단 · 십권삼단 · 적문삼단 · 본문삼단의 배당은 대체로 천태의 해석을 이어받은 것이다.
도안이 경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한 시초라는 것은 후대 주석가들이 전하는 설이다(전거 확인 중). 천태의 법화경 삼단 해석은 『법화문구』 권1 첫머리에 보인다(T34 no.1718, 쪽 확인 중). 오중삼단 가운데 앞의 네 겹은 이렇게 천태 교학에 근거가 있고, 다섯 번째 문저하종삼단만이 대성인 자신이 세우신 것이라는 점이 이 편 전체의 요점이다.
삼단이라는 틀이 왜 중요한가. 서분과 유통분은 정종분이 있어야 비로소 서분 · 유통분이 된다. 무대 장치는 주인공이 등장하기 위해 있고, 후일담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전하기 위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문을 「서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경문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해 있다고 판정하는 것이다. 오중삼단이 다섯 번 거듭 서분과 유통분의 범위를 넓혀 가는 것은, 곧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가」를 다섯 번 거듭 판정하는 일이다.
일대삼단 — 오십 년 설법을 한 경으로 묶다
첫 번째 삼단은 석존 일대의 모든 경을 「다만 한 경(但一經)」으로 묶는다. 화엄경으로부터 반야경까지, 곧 전사미가 서분이다. 무량의경 · 법화경 · 보현경의 십 권이 정종분이다. 열반경 등 법화경 뒤에 설해진 경이 유통분이다.
이 배당은 천태의 오시 교판을 바탕에 두고 있다. 천태는 석존의 설법을 화엄시 · 아함시 · 방등시 · 반야시 · 법화열반시의 다섯 시기로 나누고, 이를 열반경의 오미 비유에 맞추었다. 소의 젖이 낙이 되고, 낙이 생소가 되고, 생소가 숙소가 되고, 숙소가 마지막에 제호가 되듯이, 중생의 근기도 앞의 네 시기를 거쳐 차츰 다듬어져 마지막 법화경에서 제호의 맛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네 맛은 제호를 위한 준비이므로 서분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법화경 뒤에 설해진 열반경은 법화경에서 미처 건지지 못한 이들을 다시 거두는 가르침이라 하여 천태 교학에서 「주워 담는 가르침(捃拾教)」이라 불리는데, 이 성격이 바로 법화경의 법수를 흘려 보내는 유통분에 해당한다.
일대삼단에서 중요한 것은 「통틀어 묶으면 다만 한 경」이라는 시각이다. 오십 년 동안 장소와 상대를 바꾸어 설해진 수많은 경이 하나의 경의 서론 · 본론 · 결론처럼 하나의 목적 아래 놓인다. 그 목적은 법화경이다. 강의는 이 일대삼단과 다음의 십권삼단을 묶어 「일왕(一往) 총(總)의 삼단」이라 부른다. 뒤에 오는 세 겹의 「재왕(再往) 별(別)의 삼단」을 드러내기 위해 먼저 세운 큰 틀이라는 뜻이다.
십권삼단 — 법화 개결 열 권의 서 · 정 · 유통
두 번째 삼단은 일대삼단에서 정종분이었던 열 권을 다시 한 경으로 보고 그 안을 나눈다. 무량의경과 서품이 서분, 방편품 제2부터 분별공덕품 제17의 십구행 게까지 십오 품 반이 정종분, 분별공덕품의 현재의 사신부터 보현경까지 십일 품 반과 한 권이 유통분이다.
품 수를 세어 보면 배당의 짜임이 드러난다. 방편품(제2)부터 여래수량품(제16)까지가 열다섯 품이고, 여기에 분별공덕품의 앞 절반을 더하면 십오 품 반이 된다. 나머지는 분별공덕품의 뒤 절반과 수희공덕품(제18)부터 보현보살권발품(제28)까지의 열한 품이므로 십일 품 반이고, 결경인 보현경 한 권이 더해진다. 곧 십권삼단의 정종분은 적문의 정설(방편품 이하)과 본문의 정설(수량품)을 함께 품고 있다. 이 정종분이 다음 두 장에서 적문과 본문으로 다시 갈라진다.
분별공덕품이 반으로 나뉘는 자리에는 까닭이 있다. 어구 풀이에서 보았듯이 분별공덕품은 앞부분에서 수량품을 들은 대중이 얻은 공덕의 깊고 얕음을 분별하고, 미륵이 십구행의 게송으로 이를 찬탄한다. 여기까지는 수량품 설법의 직접적인 결과이므로 정종분에 든다. 그 뒤 부처가 다시 미륵에게 말을 걸며 「현재의 사신」과 「멸후의 오품」을 설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수량품을 들은 뒤 그것을 믿고 행하는 사람이 얻는 공덕, 곧 법이 퍼져 나가는 국면을 다루므로 유통분이 된다.
어구 풀이에서 소개한 현재의 사신과 멸후의 오품은 이 대목의 중심이다. 강의의 어구 풀이를 따라 그 뜻을 조금 더 살펴 두자. 사신의 첫째 일념신해는 법화경 현본(顯本)의 이치를 듣고 즉석에서 「고맙다」고 여기는 한 마음이다. 둘째 약해언취는 그 한 마음의 신심이 나아가 경의 취지가 대략 이해되는 단계로, 한 글자 한 구절에서 시작해 부처가 무엇을 목적으로 이 가르침을 설했는지를 대강 파악해 가는 상태다. 셋째 광위타설은 마음에 기쁨이 생겨 다른 사람에게도 설하고 싶어지는 단계다. 넷째 심신관성은 스스로는 알았다고 여겼으나 남에게 말해 보니 모르는 것이 많음을 깨닫고, 신심을 더욱 굳혀 더 깊이 알아 가며 안으로 비추어 보는(內鑑) 단계다. 오품은 ① 법을 듣고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초수희품 ② 경을 읽고 외우는 독송품 ③ 남에게 법을 권하는 설법품 ④ 자타를 함께 구하는 육도(六度)의 행도 겸하는 겸행육도품 ⑤ 바르게 육바라밀을 행하는 정행육도품이다. 강의의 어구 풀이는 대성인이 말법에서는 이 가운데 일념신해와 초수희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다고 덧붙인다.
- ①일념신해一念信解현본의 이치를 듣고 즉시 고맙다고 여기는 한 마음
- ②약해언취略解言趣경의 취지를 대략 이해함
- ③광위타설廣爲他說기쁨이 생겨 남에게도 설함
- ④심신관성深信觀成신심을 굳혀 더 깊이 안으로 비추어 봄
- ⑴초수희품初隨喜品법을 듣고 따라 기뻐함
- ⑵독송품讀誦品경을 읽고 외움
- ⑶설법품說法品남에게 권함
- ⑷겸행육도품兼行六度品육도의 행도 겸함
- ⑸정행육도품正行六度品바르게 육바라밀을 행함
대성인은 「사신오품초」에서 이 사신 · 오품을 말법 수행의 위계로 자세히 논하시며, 말법의 초심 행자의 자리를 일념신해 · 초수희품에 두셨다. 여기서는 강의가 언급한 범위에서만 소개하고, 자세한 해설은 「사신오품초」를 다루는 페이지에 미룬다.
오중상대와 오중삼단 — 이 편 전체의 지도
강의는 이 장의 강의 첫머리에서 이 편 전체를 내려다보는 지도를 먼저 펼친다. 「이제부터 오중삼단을 세워 다섯 번째 삼단인 문저하종삼단에서 대성인 출세의 본회를 남김없이 말씀하신다. 「개목초」에서는 오중상대를 세우셨고, 여기서는 오중삼단을 세우신다. 그 근본 뜻은 종탈(種脫)을 상대하여 세우는 말법 유포 하종의 삼대비법을 드러내 보이시는 데 있다.」
강의가 제시하는 대응은 이렇다. 일대일경의 삼단은 내외상대에, 법화십권의 삼단은 권실상대에 해당하며, 이 둘이 「일왕 총의 삼단」이다. 적문숙익삼단은 권적상대에, 본문탈익삼단은 본적상대에, 문저하종삼단은 종탈상대에 해당하며, 이 셋이 「재왕 별의 삼단」이다. 일왕 총의 삼단은 재왕 별의 삼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세운 것이므로 「일왕」이라 하고, 재왕의 셋은 적문숙익 · 본문탈익 · 문저하종 각각의 본존을 드러내므로 「재왕 별의 삼단」이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강의는 천태의 세 가지 교상(敎相)과 대성인이 세우신 세 가지 법문을 겹쳐 놓는다. 천태는 『법화현의』에서 법화경이 다른 경보다 뛰어난 점을 세 가지 교상으로 밝혔다. 첫째는 근성(根性)의 융(融) · 불융(不融)으로, 중생의 근기가 하나로 녹아들었는가를 보는 것이며 주로 방편품에 근거한다. 둘째는 화도(化導)의 시종(始終) · 불시종으로, 부처가 중생을 처음 인도하고 마지막에 이끌어 들이는 과정이 밝혀졌는가를 보는 것이며 화성유품에 근거한다. 셋째는 사제(師弟)의 원근(遠近) · 불원근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먼 과거로부터임이 밝혀졌는가를 보는 것이며 수량품에 근거한다.
강의에 따르면 천태의 첫째 · 둘째 교상은 모두 적문과 이전경을 비교하는 것이므로, 대성인이 세우신 첫째 법문인 권적상대에 해당한다. 천태의 셋째 교상은 이전 · 적문의 시성정각을 깨뜨리고 본문의 구원실성과 「삼묘합론(三妙合論)」 — 본인묘 · 본과묘 · 본국토묘를 함께 밝힘 — 을 드러내지만, 이것은 대성인이 세우신 둘째 법문인 본적상대다. 대성인이 세우신 셋째 법문은 문상의 탈익 · 적문의 본존을 가려내고 문저 독일 본문의 본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개목초」에서 종탈상대를 세우시고 「관심의 본존초」에서 문저하종삼단을 세우신 까닭이며, 「조닌초」에서 「니치렌의 법문은 셋째 법문이니라(日蓮が法門は第三の法門なり)」(981쪽)라고 판정하신 깊은 뜻이 여기에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오중삼단은 경전 분류표처럼 보이지만, 강의의 관점에서 그것은 「개목초」의 오중상대를 「본존이 어디에 서는가」의 물음으로 다시 쓴 것이다. 앞의 두 겹(일왕 총의 삼단)은 큰 틀을 마련하고, 뒤의 세 겹(재왕 별의 삼단)이 숙익 · 탈익 · 하종의 세 본존을 차례로 드러낸다. 제4편에서 세 가지 본존을 보인 것과 제5편에서 세 겹의 별의 삼단을 세운 것은 한 쌍이다.
이 대응은 제4편과 제5편을 잇는 다리이기도 하다. 제17~19장은 권적숙익의 본존, 본문탈익의 본존, 문저하종의 본존을 차례로 밝혔다. 그 세 본존이 각각 어느 삼단의 정종분에 서는지를 보이는 것이 제22~24장이다. 그러므로 이 편을 읽을 때에는 늘 제4편의 세 본존과 짝지어 읽어야 하며, 특히 다섯 번째 삼단의 정종분은 제19장에서 「말법에 들어와 비로소 출현하실 것인가」라고 하신 그 본존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본문
又法華経等の十巻に於ても二経有り各序正流通を具するなり、 無量義経と序品は序分なり方便品より人記品に至るまでの八品は正宗分なり、 法師品より安楽行品に至るまでの五品は流通分なり、 其の教主を論ずれば始成正覚の仏・本無今有の百界千如を説いて已今当に超過せる随自意・難信難解の正法なり、 過去の結縁を尋れば大通十六の時仏果の下種を下し進んでは華厳経等の前四味を以て助縁と為して大通の種子を覚知せしむ、 此れは仏の本意に非ず但毒発等の一分なり、 二乗凡夫等は前四味を縁と為し漸漸に法華に来至して種子を顕わし開顕を遂ぐるの機是なり、 又在世に於て始めて八品を聞く人天等或は一句一偈等を聞て下種とし或は熟し或は脱し或は普賢・涅槃等に至り或は正像末等に小権等を以て縁と為して法華に入る例せば在世の前四味の者の如し。
또 법화경 등 십 권에 있어서도 두 경이 있어 각각 서 · 정 · 유통을 갖추느니라. 무량의경과 서품은 서분이요, 방편품으로부터 인기품에 이르기까지의 여덟 품은 정종분이며, 법사품으로부터 안락행품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품은 유통분이니라. 그 교주를 논하면 시성정각(始成正覺)의 부처요, 본무금유(本無今有)의 백계천여(百界千如)를 설하였으되, 이금당(已今當)을 뛰어넘은 수자의(隨自意) · 난신난해(難信難解)의 정법이니라. 과거의 결연(結緣)을 찾으면, 대통(大通) 십육 왕자 때 불과(佛果)의 종자를 내리고, 나아가서는 화엄경 등 전사미로써 조연(助緣)을 삼아 대통의 종자를 깨달아 알게 하느니라. 이것은 부처의 본의가 아니요 다만 독발(毒發) 등의 일분이니라. 이승 · 범부 등이 전사미를 연으로 삼아 점점 법화에 이르러 종자를 드러내고 개현(開顯)을 이루는 근기가 이것이니라. 또 재세에 있어 비로소 여덟 품을 들은 인 · 천 등은, 혹은 한 구절 한 게송 등을 듣고 하종(下種)으로 삼고, 혹은 숙(熟)하고 혹은 탈(脫)하며, 혹은 보현경 · 열반경 등에 이르고, 혹은 정 · 상 · 말 등에 소승 · 권교 등을 연으로 삼아 법화에 드느니라. 예컨대 재세의 전사미의 사람과 같으니라.
어구 풀이
- 二経이경
- 법화경 십 권 가운데의 적문과 본문을 각각 한 경으로 보아 「두 경」이라 한다. 서품 제1부터 안락행품 제14까지가 적문, 종지용출품 제15부터 보현보살권발품 제28까지가 본문이다.
- 人記品인기품
- 수학무학인기품 제9. 아난 · 라후라와 배우는 이 · 다 배운 이(學無學) 이천 명의 성문에게 수기를 주는 품. 방편품 이하 여기까지 여덟 품에서 성문 수기가 완결되므로 적문 정종분의 끝이 된다.
- 始成正覚시성정각
- 석존이 이 세상 인도에 태어나 출가 · 수행하여 가야성 근처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 이전경부터 적문까지의 교주의 모습이다.
- 本無今有본무금유
- 「본래는 없고 지금 있다」. 적문에서 성불을 허락받은 이들은 본(本)이 없이 지금 부처가 되고, 부처 역시 구원을 설하지 않았으므로 본이 없이 지금 있으며, 따라서 설하는 법문도 본이 없이 지금 있는 법을 설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본문의 본유상주(本有常住)에 대한 말이다.
- 百界千如백계천여
- 십계가 저마다 십계를 갖추어 백계, 백계가 저마다 십여시를 갖추어 천여. 여기에 삼세간을 곱하면 삼천이 되므로, 「백계천여」는 국토세간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적문의 일념삼천을 가리킨다(23장 「국토세간」 참조). 더 읽기: 불교 교학 五 일념삼천.
- 已今当이금당
- 법사품의 「이미 설한 것 · 지금 설하는 것 · 장차 설할 것」. 법화경이 그 모든 경 가운데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설한 경문에서 나온 말.
- 過去の結縁과거의 결연
- 금생에 법화경을 믿고 수행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우연히 믿은 것이 아니라 과거세에 하종을 받아 인연을 맺었다는 것. 적문은 삼천진점겁 대통지승불의 하종을, 본문은 오백진점겁의 하종을, 수량품 문저는 구원원초 이래 본불의 제자 · 권속이었음을 밝힌다.
- 大通十六の時대통십육의 때
- 석존이 과거세에 대통지승불의 열여섯째 왕자였을 때. 화성유품 제7에 설해진다(아래 해설 참조).
- 毒発等の一分독발등의 일분
- 몸 안에 독이 있으면 언제 발하여 죽을지 모르는 것처럼, 이전경을 듣고 과거세의 법화 하종을 깨달은 이를 「독이 발하는 일부」에 비유한 것.
- 小権소권
- 소승교와 권대승교.
적문숙익삼단의 다섯 마디
세 번째 삼단은 십권삼단의 정종분 가운데 적문을 한 경으로 본다. 강의는 이 장의 本文을 다섯 마디로 나누어 읽는다. ① 바로 삼단을 밝히는 대목, ② 설하는 교주(能說의 敎主), ③ 설해진 법체(所說의 法體), ④ 권실의 승렬, ⑤ 화도의 시종이다. 이 다섯 마디는 다음 장 본문탈익삼단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므로, 두 장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적문과 본문의 차이가 항목마다 선명해진다.
첫째 마디, 삼단은 이렇다. 서분은 무량의경과 서품, 정종분은 방편품 제2부터 수학무학인기품 제9까지 여덟 품, 유통분은 법사품 제10부터 안락행품 제14까지 다섯 품이다. 방편품에서 제법실상과 개삼현일(開三顯一)이 설해지고, 비유품 · 신해품 · 약초유품 · 수기품 · 화성유품 · 오백제자수기품 · 인기품에 걸쳐 법설 · 비유설 · 인연설의 세 번(삼주(三周))의 설법으로 상근 · 중근 · 하근의 성문이 차례로 깨닫고 수기를 받는다. 여기까지가 적문의 본론이다. 법사품부터는 부처가 멸후에 이 경을 누가 어떻게 넓힐 것인가를 묻고 권하는 내용이므로 유통분이 된다. 법사품의 오종법사, 보탑품의 삼개칙선(三箇勅宣), 제바품의 두 가지 깨우침, 권지품의 이십행 게, 안락행품의 사안락행이 모두 이 유통의 흐름에 속한다.
시성정각의 교주와 본무금유의 백계천여
둘째 마디, 적문을 설한 부처는 「시성정각의 부처」다. 구원실성의 부처는 본문 수량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강의는 그 증거로 적문 정종분인 방편품의 게송을 든다. 「나는 처음 도량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고 또 거닐며, 삼칠일 동안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였노라(我始坐道場 觀樹亦經行 於三七日中 思惟如是事)」. 이 세상에서 보리수 아래 앉아 깨달음을 이루고 이십일 동안 설법을 망설였다는 이 경문은, 적문의 교주가 분명히 이 세상에서 수행하여 성불한 부처임을 보여 준다.
셋째 마디, 설해진 법체는 「본무금유의 백계천여」다. 강의는 이 말이 뒤에 설할 본문과 견주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본다. 같은 적문을 놓고도 「주고(與)」 논할 때와 「빼앗아(奪)」 논할 때가 다르다. 주어서 논하면 적문은 「이(理)의 일념삼천」이라 이름할 수 있다. 빼앗아 논하면 적문은 본무금유의 백계천여에 지나지 않는다. 대성인은 이 판정의 근거를 여러 어서에서 밝히셨다. 강의가 인용하는 두 대목을 보자.
迹門方便品は一念三千・二乗作仏を説いて爾前二種の失・一つを脱れたり、しかりと・いえども・いまだ発迹顕本せざれば・まことの一念三千もあらはれず二乗作仏も定まらず
적문 방편품은 일념삼천 · 이승작불을 설하여 이전의 두 가지 허물 가운데 하나를 벗어났느니라. 그러나 아직 발적현본(發迹顯本)하지 않았으므로 참된 일념삼천도 나타나지 않고 이승작불도 정해지지 않았느니라.
迹門には但是れ始覚の十界互具を説きて未だ必ず本覚本有の十界互具を明さず故に所化の大衆能化の円仏皆是れ悉く始覚なり、若し爾らば本無今有の失何ぞ免るることを得んや
적문에는 다만 시각(始覺)의 십계호구를 설하고 아직 본각본유(本覺本有)의 십계호구는 반드시 밝히지 않았으므로, 교화받는 대중도 교화하는 원불(圓佛)도 모두 다 시각이니라. 만약 그렇다면 본무금유의 허물을 어찌 면할 수 있으리오.
「개목초」가 말하는 이전의 두 가지 허물이란 이전경이 이승의 성불을 허락하지 않은 것(行布를 남김)과 부처의 성도를 시성정각으로만 설한 것(始成을 말함)이다. 적문은 방편품에서 일념삼천과 이승작불을 설해 첫째 허물은 벗어났지만, 부처가 아직 시성정각의 모습 그대로이므로 둘째 허물은 남아 있다. 근본인 부처가 「지금 처음 이루어진」 존재라면 그 부처가 설한 십계호구도 「지금 처음 있는」 것이 되고, 그 위에 선 이승작불도 뿌리가 없다. 「십법계사」의 시각 · 본각이라는 말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 것이다. 깨달음을 수행의 결과로 처음 얻은 것으로 보면 시각이요, 본래부터 갖추어 있던 것으로 보면 본각이다. 적문의 십계호구는 시각의 십계호구이므로, 아무리 원만한 교리라도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는」 허물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금당을 넘어선 수자의 · 난신난해의 정법
넷째 마디, 같은 적문이 이번에는 권교와 견주어진다. 「이금당을 뛰어넘은 수자의 · 난신난해의 정법」이라는 말은 권실의 승렬을 밝힌 것이다. 본문에 견주면 본무금유의 백계천여였던 적문이, 권교에 견주면 부처 자신의 뜻대로 설한(隨自意)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정법이 된다. 반대로 권교는 중생의 근기를 따라 설한 수타의(隨他意)이며, 믿기 쉽고 알기 쉬운(易信易解) 가르침이다.
「이금당」은 법사품 제10의 경문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설한 경전이 한량없는 천만억이니, 이미 설하였고 지금 설하며 장차 설하리라. 그러나 그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라(我所說經典 無量千萬億 已說今說當說 而於其中 此法華經 最爲難信難解)」. 이미 설한 것은 이전의 제경, 지금 설하는 것은 무량의경, 장차 설할 것은 열반경으로 배당하는 것이 천태 · 묘락 이래의 해석이다. 법화경은 이 셋 모두를 넘어선다.
여기서 하나의 원칙이 처음 드러난다. 같은 적문이 본문과 견주면 낮고, 권교와 견주면 높다. 어떤 법의 높낮이는 그 법 혼자서 정해지지 않고 무엇과 견주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이 원칙은 다음 장의 「죽막을 사이에 둔다」는 구절을 풀 때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강의도 다음 장 해설 끝에서 이 대목을 다시 돌아보라고 권한다.
화도의 시종 — 대통 하종을 받은 세 부류
다섯째 마디, 「과거의 결연을 찾으면」 이하는 화도의 시종을 밝힌다. 부처가 중생을 언제 처음 인도했고(시) 어떻게 이끌어 마지막에 성불시켰는가(종)를 보이는 대목이다.
대통지승불과 십육 왕자
먼저 배경이 되는 화성유품의 이야기를 강의의 어구 풀이를 따라 정리해 두자. 삼천진점겁이라는 아득한 옛날, 대상(大相)이라는 겁에 호성(好成)이라는 나라에 대통지승불이 출현했다. 이 부처에게는 출가 전에 열여섯 왕자가 있었다. 부처는 마군을 깨뜨린 뒤 십 소겁 동안 가만히 앉아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성도 뒤 십육 왕자와 여러 범천왕의 청에 따라 사제 · 십이인연의 법을 설했고, 십육 왕자도 출가했다. 다시 이만 겁이 지나 십육 왕자의 청으로 법화경을 설했다. 그 뒤 팔천 겁 동안 법화경을 설했으나 십육 왕자와 소수의 성문 말고는 아무도 믿고 이해하지 못했고, 부처는 마침내 고요한 방에 들어 팔만사천 겁 동안 선정에 머물렀다. 그사이 십육 왕자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널리 법화경을 설하여 각각 육백만억 나유타 항하사의 중생을 성불의 길로 이끌었다. 이를 「대통복강(大通覆講)」이라 하고, 이때 법을 들은 중생을 「대통결연의 무리」라 한다. 대통지승불은 선정에서 나온 뒤 법좌에 올라 십육 왕자의 법을 믿고 받은 이는 성불한다고 설했다. 이 십육 왕자 가운데 아홉째가 아미타불, 열여섯째가 석존이다.
곧 석가모니불은 삼천진점겁 전에 대통불의 열여섯째 왕자로서 법화경을 설해 중생에게 불과의 종자를 내렸다. 그때 종자를 받은 중생이 오랜 세월 동안 차츰 다듬어져(調機調養) 이제 인도에 태어난 석존의 설법을 듣는다. 이들이 어떤 경로로 그 종자를 깨닫는가에 따라 강의는 세 부류를 나눈다.
- 대통 하종
- 사미 · 삼교를 들음
- 이전경에서 종자를 깨달음
- 대통 하종
- 전사미를 연으로 함
- 법화에 와서 종자를 드러냄이승 · 범부
- 대통에서 들었으나 믿지 않음
- 재세에 비로소 여덟 품을 듣고 발심하종니치칸 상인
- 혹은 숙 · 탈, 혹은 보현경 · 열반경, 혹은 정 · 상 · 말에 소권을 연으로 법화에 듦
득탈이란 종자를 깨달아 아는 것 —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 (오백제자수기품)
첫째 부류 — 이전입실(爾前入實)
첫째는 「이전입실」이다. 사미 · 삼교(四味三敎), 곧 법화경 이전의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의 가르침을 듣고 법화의 뜻을 알아 대통의 종자를 깨닫는 이들이다. 이전경을 통해 실교의 경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를 「부처의 본의가 아니요 다만 독발 등의 일분」이라고 하신다. 몸에 숨어 있던 독이 어느 때 갑자기 발하듯이, 이전경을 듣다가 우연히 과거의 종자가 발한 것일 뿐 부처가 의도한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강의는 이런 이들이 정해진 경로가 없는 「부정(不定)」의 무리이며, 그 종류도 하나가 아니므로 「일분」이라 하셨다고 풀이한다.
둘째 부류 — 금경당기(今經當機)와 득탈의 뜻
둘째는 「금경당기」다. 이승 · 범부 등이 재세에 전사미를 연으로 삼아 점점 법화경에 이르러 득탈하는 이들로, 바로 법화경의 설법을 받을 당사자(當機衆)다. 강의는 여기서 득탈의 뜻을 깊이 짚는다. 득탈이란 종자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그러므로 종자를 깨달아 아는 것과 득탈하는 것은 같은 뜻이다. 적문의 중생은 대통의 종자를 깨달아 아는 것이 득탈이고, 본문의 중생은 오백진점겁의 하종을 깨달아 아는 것이 득탈이다. 그리고 강의는 이어서, 지금 말법의 우리는 구원의 하종을 깨달아 알고 구원의 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본래 권속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득탈이며 즉신성불이라고 말한다.
강의는 이를 오백제자수기품의 의리계주(衣裏繫珠) 비유로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친구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 구슬을 그의 옷 안에 꿰매어 주고 떠났다. 그는 그것을 모른 채 여러 나라를 떠돌며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았다. 훗날 다시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자네 옷 안에 이런 구슬이 있는데 어째서 모르고 이렇게 곤궁하게 살았는가」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기가 지닌 구슬을 알았다. 강의는 이것이 「탈은 반드시 하종으로 돌아간다」는 분명한 경문이라고 본다. 득탈이란 새로운 것을 얻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받은 종자를 알아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묘락대사의 『법화현의석첨』 권1도 「법을 듣는 것은 구슬을 매어 주는 것이니 이를 원인(圓因)으로 삼고, 수기를 얻는 것은 구슬을 보여 주는 것이니 이름하여 원과(圓果)라 한다」고 풀이한다.
강의는 이 비유를 우리 자신에게로 돌린다. 우리도 구원의 본불로부터 묘법 다섯 자의 하종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모른 채 빈궁하고 괴로운 삶을 헤매 왔다. 이제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만나 구원의 하종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절대적 행복의 경지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부류 — 결연중과 하종의 두 뜻
셋째는 결연중(結緣衆)이다. 本文의 「또 재세에 있어 비로소 여덟 품을 들은 인 · 천 등은」이 이들이다. 이들은 한 구절 한 게송을 듣고 하종으로 삼는다고 하신다. 강의는 여기서 하종에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짚는다. 법을 들음으로써 종자가 심어지는 「문법하종(聞法下種)」과,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종자가 심어지는 「발심하종(發心下種)」이다.
그렇다면 이 경문의 하종은 어느 쪽인가. 문법하종이라 하면 의문이 생긴다. 재세의 중생은 모두 「본래 이미 선근이 있는(本已有善)」 이들이므로 이제 와서 처음 법을 듣고 종자를 받는 이가 있을 리 없다. 발심하종이라 하면 또 의문이 생긴다. 이미 문법하종이 있었다면 「비로소 여덟 품을 듣는다」는 말이 맞지 않는다. 이 물음에 대해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해석을 소개한다. 니치칸 상인은 이것이 발심하종이라고 하신다. 대통 십육 왕자 때 이미 법화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으므로 듣지 않은 것과 같고, 그래서 「비로소 여덟 품을 듣는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대통 결연의 셋째 부류 사람을 두고 「일찍이 대승의 뜻을 듣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고 강의는 덧붙인다.
또 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법화경에서 탈하지 못하고 「보현경 · 열반경 등에 이른다」고 하셨다. 왜 「본문 수량품에서 득탈한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강의는 본문에서 득탈하는 이는 본문의 하종을 받은 이로서 대통 하종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사리불의 경우도 「대통 하종」으로 논할 때와 「오백진점겁 하종」으로 논할 때가 전혀 다른 것과 같다. 적문의 화도 시종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는 대통 하종의 틀 안에서만 말씀하신 것이다.
「혹은 정 · 상 · 말 등에」라는 구절도 강의는 주목한다. 석가 불법은 정법 · 상법으로 끝나지만, 말법의 본불이 출현하기까지 상당한 햇수가 있었다. 실제로 말법에 들어선 처음 이백 년, 대성인이 출현하시기까지는 석가 불법의 흐름을 잇는 본이유선의 중생이 나왔다는 것이다. 제27장에서 「셋째 적문의 사의(四依)는 많은 부분이 상법 천 년, 적은 부분이 말법의 처음이니라(三に迹門の四依は多分は像法一千年・少分は末法の初なり)」(251쪽)라고 하신 것도 이 뜻이다.
왜 「숙익」의 삼단인가
이렇게 이 장은 적문에서도 화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적문숙익삼단」이라 부르는가. 강의의 답은 간결하다. 「적문」이라는 말은 이전경과 견준 것이고, 「숙익」이라는 말은 본문탈익과 견준 것이다. 이전경과 견주면 적문은 대통 하종에서 시작해 법화에서 득탈하는 화도의 시종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본문과 견주면 그 전체가 통틀어 「숙」, 곧 익히는 단계에 속한다. 제25장의 「일왕 이를 볼 때는 구종(久種)으로 하종을 삼고 대통 · 전사미 · 적문으로 숙을 삼아 본문에 이르러 등묘(等妙)에 오르게 하느니라」(249쪽)라는 경문이 바로 이 뜻이다. 오백진점겁의 구원에 종자가 심어졌다면, 대통의 결연도, 전사미도, 적문의 득탈도 모두 그 종자를 익히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강의는 화도의 시종이 당가(當家) 문류의 첫째 법문(권적상대)이며, 둘째 법문(본적상대)의 교상에서 보면 그것이 곧 숙익의 범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리한다. 같은 적문이 이전경과 견주면 「시종을 갖춘 가르침」이고, 본문과 견주면 「익히는 단계」다. 이름 하나에 견주는 대상이 둘 들어 있다.
이 장을 읽고 나면, 적문이라는 하나의 가르침이 세 겹의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전과 견주면 수자의 · 난신난해의 정법이고, 본문과 견주면 본무금유의 백계천여이며, 화도로 보면 구원의 종자를 익히는 숙익의 단계다. 이 세 얼굴은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무엇과 견주느냐가 다를 뿐이다. 다음 장은 같은 다섯 마디로 본문을 읽으며, 이 「견주는 대상」의 원리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간다.
본문
又本門十四品の一経に序正流通有り涌出品の半品を序分と為し寿量品と前後の二半と此れを正宗と為す其の余は流通分なり、 其の教主を論ずれば始成正覚の釈尊に非ず所説の法門も亦天地の如し十界久遠の上に国土世間既に顕われ一念三千殆んど竹膜を隔つ、 又迹門並びに前四味・無量義経・涅槃経等の三説は悉く随他意の易信易解・本門は三説の外の難信難解・随自意なり。
또 본문 십사 품의 한 경에 서 · 정 · 유통이 있으니, 용출품의 반 품을 서분으로 삼고, 수량품과 그 앞뒤의 두 반 품, 이를 정종으로 삼으며, 그 나머지는 유통분이니라. 그 교주를 논하면 시성정각의 석존이 아니요, 설하는 법문도 또한 하늘과 땅 같으니라. 십계 구원(久遠)의 위에 국토세간(國土世間)이 이미 나타나, 일념삼천이 거의 죽막(竹膜)을 사이에 두었느니라. 또 적문과 아울러 전사미 · 무량의경 · 열반경 등의 삼설(三說)은 모두 수타의(隨他意)의 이신이해(易信易解)요, 본문은 삼설 밖의 난신난해 · 수자의니라.
어구 풀이
- 涌出品の半品용출품의 반품
- 종지용출품 제15의 앞 절반. 땅에서 무수한 보살이 솟아 나오고 미륵이 그 내력을 묻는 데까지로, 본문 설법의 서론이 된다.
- 寿量品と前後の二半수량품과 전후의 이반
- 여래수량품 제16 한 품과, 그 앞의 용출품 후반 반 품 및 그 뒤의 분별공덕품 전반 반 품. 합쳐 「일품이반(一品二半)」이라 한다. 이 장의 일품이반은 천태가 세운 「약개근현원」의 일품이반이다(24장 해설 참조).
- 始成正覚の釈尊に非ず시성정각의 석존이 아니다
- 이 세상에서 수행해 성불했다는 것이 이전경부터 적문까지 설해 온 시성정각의 부처다. 여기서는 본문의 석존이 오백진점겁에 성도한 부처임을 밝힌다.
- 十界久遠십계구원
- 부처의 깨달음(불계)만이 아니라 구계의 중생도 함께 구원으로부터 상주한다는 것. 본인 · 본과가 함께 상주함을 뜻한다.
- 国土世間국토세간
- 삼세간(오음세간 · 중생세간 · 국토세간) 가운데 중생이 사는 환경의 세계. 오음세간과 중생세간은 적문까지도 밝혀 왔지만, 수량품에 이르러 비로소 이 사바세계가 부처의 본국토임이 밝혀졌다.
- 竹膜を隔つ죽막을 격하다
- 죽막은 대나무 속의 얇은 껍질. 대나무 껍질 한 겹의 두께만큼의 아주 작은 차이를 말한다.
- 三説삼설
- 이설(已說) · 금설(今說) · 당설(當說). 법사품의 「이미 설하였고 지금 설하며 장차 설하리라」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전사미(이설) · 무량의경(금설) · 열반경(당설)에 적문까지 함께 묶어 「삼설」이라 하셨다.
- 随他意・随自意수타의 · 수자의
- 수타의는 중생의 근기와 뜻을 따라 설한 가르침, 수자의는 부처 자신의 깨달음을 그대로 설한 가르침.
본문탈익삼단의 다섯 마디
네 번째 삼단은 본문 열네 품을 한 경으로 본다. 강의는 앞 장과 똑같이 다섯 마디로 이 장을 읽는다.
첫째, 바로 삼단을 밝힌다. 서분은 용출품의 반 품, 정종분은 수량품과 앞뒤의 두 반 품, 곧 일품이반이며, 유통분은 그 나머지인 분별공덕품의 반 품부터의 십일 품 반과 보현경이다. 강의는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붙인다. 이 장의 일품이반은 천태가 세운 「약개근현원(略開近顯遠)」의 일품이반이며, 다음 장 문저하종삼단에 나오는 일품이반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이름이 두 번 나오지만 그 범위와 뜻이 다르다는 이 지적은 다음 장의 핵심 논점이 된다.
둘째, 설하는 교주는 시성정각의 석존이 아니라 구원실성의 본불이다. 수량품에서 석존은 「나는 실로 성불한 지 한량없고 끝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니라(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 百千萬億 那由他劫)」라고 하여, 가야성 근처에서 처음 깨달았다는 지금까지의 모습을 벗고 오백진점겁이라는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한 부처임을 드러냈다. 더 읽기: 불교 교학 四 구원실성.
셋째, 설해진 법체는 십계 구원상주의 사(事)의 일념삼천이며, 적문의 일념삼천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문저하종의 독일본문(獨一本門)과 견주면 문상 탈익의 본적의 차이는 죽막을 사이에 둔 정도의 작은 차이가 된다.
넷째, 본적의 승렬이다. 문저의 뜻에 견주면 문상 탈익의 본적의 차이는 죽막만 한 작은 차이지만, 적문이나 전사미와 문상 탈익의 본문을 견주면 본문은 삼설 밖의 난신난해 · 수자의다. 앞 장에서 적문이 권교와 견주어 「이금당을 뛰어넘은」 법이었다면, 이 장에서는 그 적문마저 「삼설」 안에 묶여 수타의 · 이신이해 쪽으로 물러나고, 본문만이 삼설 밖에 선다.
다섯째, 화도의 시종이다. 이 장에는 화도 시종의 경문이 생략되어 있지만, 적문삼단과 문저삼단에서 미루어 보면 분명하다고 강의는 말한다. 곧 제25장의 「일왕 이를 볼 때는 구원으로 하종을 삼고 대통 · 전사미 · 적문으로 숙을 삼아 본문에 이르러 등묘에 오르게 한다」는 것이 그 시종이다.
구원실성의 교주와 국토세간 — 「하늘과 땅 같다」
본문의 교주와 법이 적문과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태는 수량품의 세 경문에 근거해 본문이 세 가지 묘(妙)를 함께 밝혔다고 보았다.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느니라(我本行菩薩道 所成壽命 今猶未盡)」는 부처가 성불하기 전에 행한 본래의 원인, 곧 본인묘(本因妙)를 밝힌다. 「나는 실로 성불한 지 한량없고 끝없는…」은 본래의 결과인 본과묘(本果妙)를 밝힌다.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어 설법 교화하느니라(我常在此娑婆世界 說法敎化)」는 부처가 본래 머무는 국토인 본국토묘(本國土妙)를 밝힌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논한 것이 앞의 21장 해설에서 본 「삼묘합론」이다.
本文의 「십계 구원의 위에 국토세간이 이미 나타나」는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적문에서는 부처가 시성정각이었으므로 불계도 구계도 「지금 처음 있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부처가 구원에 성불했음이 밝혀지자, 불계가 구원으로부터 상주하고(본과), 그 부처가 성불 전에 행한 보살도 곧 구계도 상주하며(본인), 십계가 모두 구원으로부터 상주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그 부처가 머무는 국토가 다른 정토가 아니라 바로 이 사바세계라는 것이 밝혀져, 삼세간 가운데 마지막 국토세간까지 갖추어진다. 적문의 「백계천여」가 본문에 이르러 비로소 「일념삼천」으로 완결되는 것이다. 어구 풀이가 「오음세간과 중생세간은 적문까지도 밝혀 왔지만 수량품에 이르러 바로 이 사바세계가 본국토임을 밝혔다」고 한 것도 같은 뜻이다.
「죽막을 사이에 둔다」 — 열일곱 가지 이해와 그 논파
그런데 本文은 「하늘과 땅 같다」고 하신 바로 뒤에 「일념삼천이 거의 죽막을 사이에 두었다」고 하신다.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어떻게 대나무 껍질 한 겹의 차이가 되는가. 이 구절은 옛날부터 해석이 엇갈려 온 난해한 대목이다. 강의는 결론부터 말한다. 문상에서 곧바로 적문과 본문을 견주면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고, 이어서 문저에 비추어 문상의 본적을 판정하면 그 본적의 차이는 「죽막을 사이에 둔」 차이가 된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오해가 있었으므로, 먼저 이설을 깨뜨리고 이어서 정의(正義)를 보이겠다고 한다. 이 대목은 니치칸 상인의 「관심본존초 문단」이 열거한 이설들을 강의가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강의가 소개하는 열일곱 가지 이해는 다음과 같다.
- 『본적초(本迹抄)』 — 국토세간과 십여시는 다만 펼치고 합치는(開合) 차이일 뿐이므로 죽막을 사이에 둔다고 한다.
- 『결의초(決疑抄)』 — 구계의 일념삼천과 불계의 일념삼천이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또 다른 설 — 머무는 주체인 십계(能居)와 머무는 곳인 국토(所居)를 이미 한 생각에 갖추었으므로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유미록(幽微錄)』 — 적화(迹化)의 내증(內證)으로서 자행(自行)의 측면과, 종문의 자행화타의 구창(口唱)이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또 다른 설 — 시성의 부처를 가리키는 것과, 구성(久成)의 부처 · 구성의 십계를 설하는 것이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또 다른 설 — 재세 중생이 가까운 성불(近成)에 집착하는 미혹과 부처의 뜻인 깨달음이 거의 죽막을 사이에 둔다.
- 또 다른 설 — 십계 구원의 대만다라와 일념삼천이 거의 죽막을 사이에 둔다.
- 또 다른 설 — 법상(法相)에 약하면 본유의 삼천, 행자에 약하면 일념삼천이니, 이는 적은 차이이므로 죽막을 사이에 둔다.
- 또 다른 설 — 「거의 사이에 둔다」 위에 「개오(開悟)」 두 글자를 더해 보라, 예컨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손바닥 뒤집기와 같다고 하는 것과 같다.
- 『일조초(日朝抄)』 — 적문의 이원(理圓)과 본문의 사원(事圓), 사와 리의 마음과 이치가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또 다른 설 — 본문의 일념삼천이 이미 나타났으면 자기의 일념삼천과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향초(享抄)』 — 적문에는 아직 국토세간을 설하지 않고 본문에는 이를 설했으니, 이 같지 않은 모습이 거의 죽막을 사이에 둔 것이다.
- 『안심록(安心錄)』 — 일념삼천은 범부와 성인이 한 몸이니, 미혹과 깨달음의 사이는 마치 죽막과 같다.
- 『몽초(蒙抄)』 — 수량품의 인 · 과 · 국토를 설한 모습과 일념삼천의 본존이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충초(忠抄)』 — 십계 구원의 위에 국토세간이 이미 나타난 것과 일념삼천의 법문이 다만 죽막을 사이에 둔다.
- 『진초(辰抄)』 — 일념삼천의 처음의 차이는 죽막 같고 뒤의 차이는 하늘과 땅 같다. 곧 적문의 묘법연화경을 일념삼천이라 이름하는 것과 본문의 묘법연화경을 일념삼천이라 이름하는 것은 거의 죽막을 사이에 두지만, 종탈의 유통에 약하여 본화 · 적화의 삼천이 같지 않음을 논하면 하늘과 땅, 물과 불처럼 다르다.
- 『일아초(日我抄)』 — 「거의 죽막을 사이에 둔다」는 구성과 시성, 사의 일념삼천과 이의 일념삼천을 말한다.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雖近而不見)」는 부류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의 일념삼천을 알지 못하는 것을 죽막을 사이에 둔다고 한 것이다.
강의는 이 열일곱 가지가 모두 대성인 멸후의 학자들이 문저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기 견해로 해석한 것이며, 대성인의 참뜻이 아니라고 판정한다. 그리고 니치칸 상인이 이렇게 한꺼번에 늘어놓아 보이셨기 때문에 그 잘못이 모두 분명해졌고, 이 밖의 오류나 억지 해석은 거의 없다고 덧붙인다.
위 서명들은 강의(곧 니치칸 상인의 문단)가 약칭으로 든 것을 그대로 옮겼다. 『결의초』는 日澄의 저술로 25장에서 다시 나오고, 『몽초』는 日講의 『녹내계몽(録内啓蒙)』, 『진초』는 日辰, 『충초』는 日忠, 『일조초』는 日朝, 『일아초』는 日我의 저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각 서목의 정식 제목과 저자는 확인 중이다.
이 열일곱 가지를 찬찬히 보면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이 「죽막」의 양쪽에 놓이는 두 항목을 문상의 범위 안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구계와 불계, 국토세간과 십여시, 능거와 소거, 법상과 행자, 미혹과 깨달음, 이원과 사원 — 모두 문상의 교리 안에서 서로 가까운 두 개념을 짝지어 「얇은 차이」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本文의 문맥은 바로 앞에서 「하늘과 땅 같다」고 한 적문과 본문의 차이를 이어받고 있다.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어떻게 죽막으로 줄어드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면, 이 구절은 앞 구절과 모순되는 말이 되어 버린다.
정의 — 견주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차이
강의가 밝히는 정의는 이 구절에 두 가지 뜻이 겹쳐 있다는 것이다. 이 단은 설해진 법체를 밝히는데, 첫째는 곧바로 적문과 본문을 견준다. 저것(적문)은 본무금유의 백계천여이고 이것(본문)은 본유상주의 일념삼천이므로 「설하는 법문도 또한 하늘과 땅 같다」고 하셨다. 둘째는 거듭 문저에 비추어 본적을 판정한다. 본적의 다름이 하늘과 땅 같다 하더라도, 문저 독일의 본문 · 참된 사의 일념삼천에 견주어 거꾸로 적본 이문의 일념삼천을 보면, 그 차이는 거의 죽막을 사이에 둔 것과 같다.
강의는 이를 여러 비유로 설명한다. 1미터와 10미터를 견주면 큰 차이가 있지만, 100미터나 1,000미터에서 보면 그 차이는 죽막 같은 작은 차이가 된다. 불교의 시간으로 말하면, 이만억 부처가 출현했다는 시간은 길어 보이지만 삼천진점겁과 견주면 어제와 같다. 삼천진점겁은 아득한 옛날 같지만 오백진점겁과 견주면 이틀 밤(信宿) 사이와 같다. 묘락대사는 「무릇 모든 법상은 견주는 대상에 따라 같지 않다」고 했고, 대성인은 「법화취요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所詮所対を見て経経の勝劣を弁うべきなり
결국 견주는 대상을 보고서 경경의 승렬을 분별해야 하느니라.
지상과 2층 — 비행기에서 보면 둘 다 낮다. 그래도 2층은 2층이다 (본적일치가 아님)
또 문저의 대사(大事)에 견줄 때는 적 · 본 이문이 함께 「이(理)의 일념삼천」이라 불린다. 강의는 그 근거로 「본인묘초」의 두 대목을 든다.
一代応仏のいきをひかえたる方は理の上の法相なれば一部共に理の一念三千迹の上の本門寿量ぞと得意せしむる事を脱益の文の上と申すなり
일대 응불(應佛)의 숨결을 잇고 있는 쪽은 이(理) 위의 법상이므로, 한 부가 함께 이의 일념삼천이요 적(迹) 위의 본문수량이라고 알게 하는 것을 탈익의 문상이라 하느니라.
迹門を理具の一念三千と云う脱益の法華は本迹共に迹なり、本門を事行の一念三千と云う下種の法華は独一の本門なり
적문을 이구(理具)의 일념삼천이라 하니 탈익의 법화는 본 · 적이 함께 적이니라. 본문을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이라 하니 하종의 법화는 독일의 본문이니라.
이것을 강의는 다시 비유로 푼다. 지상과 2층을 견주면 2층은 높다. 그러나 수천 미터 상공을 나는 비행기 위에서 보면 지상도 2층도 함께 낮다. 묘락은 「제일의(第一義)는 이(理)라 하더라도 관(觀)에 견주면 사(事)에 속한다」고 했다. 이전경이 개별 문제를 다루는 사(事)라면 법화경은 제법실상을 설하는 이(理)이고 근본이다. 그러나 법화경 안의 제일의는 이(理)라 하더라도 관심과 견주면 사가 되며, 문저의 관심만이 최고 유일의 이가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류(當流)의 뜻은 「본문은 사(事)라 하더라도 문저에 견주면 이의 일념삼천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저에 견줄 때는 본적이 함께 이의 일념삼천이라 불리니, 이제 「죽막을 사이에 둔다」고 판정하신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강의는 여기서 앞 장으로 시선을 돌리라고 권한다. 적문숙익삼단의 법체에서도 「본무금유의 백계천여」라 하여 적문을 본문에 견주고, 이어서 「이금당을 뛰어넘은 수자의 · 난신난해의 정법」이라 하여 적문을 이전경에 견주셨다. 한 문장 안에서 두 대상과 견주는 같은 서술법이 이 장에서도 쓰였다는 것이다. 적문을 다룬 22장의 문장이 「아래로 이전 · 위로 본문」을 함께 보았듯이, 본문을 다룬 23장의 문장은 「아래로 적문 · 위로 문저」를 함께 본다.
죽막이라 해도 본적일치는 아니다
그런데 문상의 본문과 적문이 죽막을 사이에 둔 정도라면, 결국 본문과 적문은 같다는 말인가. 강의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한다. 본적의 다름은 실로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다. 다만 문저 독일의 본문 · 참된 사의 일념삼천에 견주기 때문에 죽막을 사이에 둔다고 했을 뿐이다. 죽막을 사이에 둔다고 해서 하늘과 땅 같은 다름이 갑자기 죽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만억 부처의 시간이 갑자기 어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삼천진점겁이라는 아득한 시간과 견주었기 때문에 어제 같다고 하는 것이고, 삼천진점겁이 갑자기 이틀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백진점겁의 아득함과 견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저에 견준다 해도 본적이 일치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문저의 대사를 알지 못하는 본적일치를 주장하는 문류가 어찌 본적일치를 말할 수 있겠는가 — 강의는 이렇게 일치파를 비판한다. 그리고 비유를 든다. 국왕과 견주면 만민이 모두 신하가 되지만, 신하 가운데에도 품계의 높고 낮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치파는 국왕을 알지 못하면서 만민이 일치한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왕을 알아야 비로소 「모두 신하」라는 말이 성립하고, 그때에도 신하들 사이의 품계는 그대로 남는다. 문저를 알아야 비로소 「본적이 함께 이의 일념삼천」이라는 말이 성립하고, 그때에도 본적의 승렬은 그대로 남는다.
일본 일련종 계통에서는 중세 이래 법화경 본문과 적문의 관계를 둘러싸고 「본적일치(本迹一致)」와 「본적승렬(本迹勝劣)」의 두 입장이 대립해 왔다는 것이 교학사의 일반적 정리다. 강의가 비판하는 「일치파」는 그 가운데 앞의 입장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강의의 비판을 그대로 옮기며, 각 문류의 역사적 전개는 다루지 않는다.
왜 「탈익」의 삼단인가
이 장도 앞 장처럼 화도의 시종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본문의 삼단」이라 하지 않고 「탈익삼단」이라 하는가. 강의의 답은 앞 장과 짝을 이룬다. 「본문」이라는 말은 적문과 견준 것이고, 「탈익」이라는 말은 문저하종과 견준 것이다. 적문과 견줄 때는 화도의 시종을 밝히고 있지만, 문저에 견줄 때는 탈익이라 이름한다. 그래서 제25장에서 「저것은 탈, 이것은 종 · 저것은 일품이반,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라고 하시게 된다. 곧 당가가 세운 둘째 교상인 문상 본문의 종 · 숙 · 탈은, 당가가 세운 셋째 교상인 문저하종의 본문과 견주면 다만 탈익이 된다.
제22장과 제23장의 이름은 같은 짜임으로 지어졌다. 「적문 · 본문」은 아래(이전 · 적문)와 견준 이름이고, 「숙익 · 탈익」은 위(본문 · 문저)와 견준 이름이다. 그러므로 「본문탈익」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다섯 번째 삼단, 곧 그 위에 문저하종이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네 겹의 삼단이 끝났다. 앞의 두 겹이 큰 틀을, 셋째 겹이 적문을, 넷째 겹이 본문을 각각 한 경으로 보았다. 넷째 겹에 이르러 법화경 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 곧 구원실성의 부처와 십계 구원 · 국토세간을 갖춘 사의 일념삼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성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막」이라는 한 마디로 그보다 더 높은 시점이 있음을 보이셨다. 다음 장에서 그 시점이 정면으로 드러난다.
본문
又本門に於て序正流通有り過去大通仏の法華経より乃至現在の華厳経乃至迹門十四品涅槃経等の一代五十余年の諸経・十方三世諸仏の微塵の経経は皆寿量の序分なり 一品二半よりの外は小乗教・邪教・未得道教・覆相教と名く、 其の機を論ずれば徳薄垢重・幼稚・貧窮・孤露にして禽獣に同ずるなり、 爾前迹門の円教尚仏因に非ず何に況や大日経等の諸小乗経をや何に況や華厳・真言等の七宗等の論師・人師の宗をや、 与えて之を論ずれば前三教を出でず奪つて之を云えば蔵通に同ず、 設い法は甚深と称すとも未だ種熟脱を論ぜず還つて灰断に同じ化の始終無しとは是なり、 譬えば王女たりと雖も畜種を懐妊すれば其の子尚旃陀羅に劣れるが如し、 此等は且く之を閣く
또 본문에 있어 서 · 정 · 유통이 있으니, 과거 대통불의 법화경으로부터 내지 현재의 화엄경, 내지 적문 십사 품 · 열반경 등 일대 오십여 년의 제경과 시방삼세 제불의 미진(微塵)의 경경은 모두 수량(壽量)의 서분이니라. 일품이반 밖은 소승교 · 사교(邪敎) · 미득도교(未得道敎) · 부상교(覆相敎)라 이름하느니라. 그 근기를 논하면 덕박구중(德薄垢重) · 유치(幼稚) · 빈궁(貧窮) · 고로(孤露)하여 금수(禽獸)와 같으니라. 이전 · 적문의 원교조차 오히려 불인(佛因)이 아니거늘, 하물며 대일경 등의 모든 소승경이랴, 하물며 화엄 · 진언 등 칠종(七宗) 등 논사 · 인사의 종(宗)이랴. 주어서 이를 논하면 전삼교(前三敎)를 벗어나지 못하고, 빼앗아 이를 말하면 장 · 통(藏通)과 같으니라. 설령 법은 매우 깊다고 일컫더라도 아직 종 · 숙 · 탈을 논하지 않았으니, 도리어 회단(灰斷)과 같아 화도의 시종이 없다 함이 이것이니라. 비유컨대 왕녀라 할지라도 축생의 씨를 잉태하면 그 아이는 오히려 전다라(旃陀羅)보다 못한 것과 같으니라. 이들은 잠시 그대로 두느니라.
어구 풀이
- 一品二半일품이반
- 여래수량품 제16의 한 품과 그 앞뒤 두 품의 반씩(종지용출품 제15의 후반, 분별공덕품 제17의 전반). 23장에서는 본문 열네 품을 한 경으로 보아 이를 정종분으로 삼았고, 이 장에서는 하종의 법인 「본문의 간심 남묘호렌게쿄의 다섯 자」가 어디에 설해졌는가를 보이는 관점에서 다시 서 · 정 · 유통을 나누어 수량품 중심의 일품이반을 정종분으로 삼으셨다. 이 장의 일품이반은 천태 교학의 그것과 달리 대성인이 새로 세우신 것이다(아래 해설).
- 覆相教부상교
- 진실을 덮어 감추고 있는 낮은 가르침. 문저하종의 일품이반 밖의 모든 가르침은 본유상주 사의 일념삼천의 실상을 덮어 감추므로 부상교다.
- 徳薄垢重덕박구중
- 여래수량품 제16의 경문. 복덕이 엷고 번뇌의 때가 겹겹이 쌓인 것. 수량품에서 석존은 구원실성이라는 본지를 밝히면서, 열등한 법에 집착하는 이런 이들을 위해 방편으로 시성정각을 설해 왔다고 말한다.
- 孤露고로
- 고(孤)는 고아, 로(露)는 자애로 덮어 주는 이가 없다는 뜻. 곧 구원의 본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 七宗칠종
- 대성인 당시 일본에 있던 여러 종파 가운데 천태 법화종을 제외한 종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本文은 화엄 · 진언을 대표로 들었다.
- 前三教전삼교
- 천태의 화법사교(化法四敎) 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 가운데 앞의 셋.
- 蔵通장통
- 장교(소승교)와 통교(성문 · 연각 · 보살에 공통되는 초보적 대승교).
- 種熟脱종숙탈
- 하종 · 조숙 · 득탈. 부처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세 단계로, 각 단계에서 부처가 주는 이익에 따라 하종익 · 숙익 · 탈익이라 하고 합해 삼익(三益)이라 한다.
- 灰断회단
- 몸을 재로 만들어 아무것도 없게 한다는 이승의 수행법, 곧 회신멸지(灰身滅智). 소승교에서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 번뇌에 있다고 보아 번뇌를 끊으면 무여열반에 이른다고 설하고, 다시 삼계에 태어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모두 없애려 했다. 강의의 어구 풀이는 이것이 성불의 경지보다 훨씬 낮을 뿐 아니라 이를 이상으로 삼아 수행하면 참된 행복의 경지에서 오히려 멀어진다고 평한다.
- 化の始終無し화도의 시종이 없다
- 종숙탈을 논하지 않았으므로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그것은 회단이며, 언제 어떤 부처로부터 어떤 불법의 하종을 받아 어떻게 익고 어떻게 득탈하는가의 화도의 시종이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
- 旃陀羅전다라
- 산스크리트 찬달라(caṇḍāla)의 음사. 폭악 · 도자(屠者) 등으로 번역한다. 인도 사성 계급 밖에 놓인 사람들로, 사냥 · 도살 등을 생업으로 삼아 가장 천한 이들로 멸시받았다(아래 해설).
이 단을 아느냐 모르느냐
드디어 다섯 번째 삼단이다. 강의는 첫머리에서 이 단의 무게를 이렇게 말한다. 이 단이 문저하종삼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에 따라 말법의 참된 불법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갈린다. 강의는 그 예로 삼보(三寶)를 세우는 방식을 든다. 일부 일련종 문류가 구원실성의 탈익의 석존을 불보로, 묘법연화경을 법보로, 니치렌 대성인을 승보로 삼는 것은 이 대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즉 니치렌 대성인을 불보로 삼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당가는 이 대목의 성지(聖旨)를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本文의 첫마디는 「또 본문에 있어 서 · 정 · 유통이 있다」이다. 바로 앞 장이 「또 본문 십사 품의 한 경에 서 · 정 · 유통이 있다」였던 것과 견주어 보면 「십사 품의 한 경」이라는 말이 빠졌다. 이번에 말하는 「본문」은 열네 품이라는 경문의 범위로 정해지는 본문이 아니다. 그 「본문」의 서분에 적문 열네 품이 들어가고, 일대 오십여 년의 제경이 들어가고, 과거 대통불의 법화경과 시방삼세 제불의 경경까지 들어간다. 경문의 범위를 넘어선 본문, 곧 문저의 본문이다.
「문저하종삼단」이라 부르는 다섯 근거
이 다섯 번째 삼단을 왜 「문저하종삼단」이라 이름하는가. 강의는 그 까닭이 여럿이지만 간추려 다섯을 든다.
첫째, 오중상대에 준한다
「개목초」와 「관심의 본존초」는 하나는 교상, 하나는 관심이 되고, 혹은 한 권의 처음과 끝이 되는 관계이므로 그 큰 뜻이 다를 리 없다. 「개목초」에는 내외상대 · 권실상대 · 권적상대 · 적본상대 · 종탈상대의 오중상대가 설해져 있다. 이제 「관심의 본존초」를 보면 오중의 삼단이 「개목초」의 뜻과 똑같으므로, 다섯 번째 삼단은 바로 종탈상대를 밝힌 것이며 문저하종삼단임이 틀림없다.
둘째, 삼중비전에 준한다
일왕 총의 삼단을 제외하고 재왕 별의 삼단만 논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적문숙익삼단은 이전이 당분(當分) · 적문이 과절(跨節)이며 권실상대, 첫째 교상이다. 둘째 본문탈익삼단은 적문이 당분 · 본문이 과절이며 본적상대, 둘째 교상이다. 셋째 문저하종삼단은 탈익이 당분 · 하종이 과절이며 종탈상대, 셋째 교상이다. 그러므로 삼중비전의 뜻에 준하면 당가가 세운 셋째 교상은 바로 문저하종삼단이다.
여기서 당분 · 과절이라는 말은 천태 교학에서 온 것이다. 당분은 「그 분수 그대로」, 곧 어떤 가르침을 그 가르침 자체의 범위 안에서 보는 것이고, 과절은 「마디를 넘어서」, 곧 한 단계 위의 가르침이 그 범위를 넘어 드러낸 것을 보는 것이다. 각 삼단마다 아래 단계의 가르침은 당분에 머물고 위 단계의 가르침이 과절에 선다. 그리고 세 번째 겹에서는 문상 탈익의 본문마저 당분으로 물러나고 하종이 과절에 선다. 삼중비전은 니치칸 상인의 「삼중비전초」가 「개목초」의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수량품의 문저에 잠겨 있다」는 경문을 권실 · 본적 · 종탈의 세 겹으로 풀어 밝힌 것이다.
셋째, 본문의 두 뜻에 준한다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본문에 두 가지 뜻이 있음을 밝히셨다. 하나는 재세 중생을 위한 본문이고, 또 하나는 멸후 말법을 위한 본문이다. 강의는 「법화취요초」를 인용한다.
本門に於て二の心有り一には涌出品の略開近顕遠は前四味並に迹門の諸衆をして脱せしめんが為なり、二には涌出品の動執生疑より一半並びに寿量品・分別功徳品の半品已上一品二半を広開近顕遠と名く一向に滅後の為なり
본문에 두 가지 마음이 있으니, 첫째로 용출품의 약개근현원(略開近顯遠)은 전사미와 적문의 모든 대중을 탈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용출품의 동집생의(動執生疑)부터의 한 반 품과 수량품 · 분별공덕품의 반 품, 이상 일품이반을 광개근현원(廣開近顯遠)이라 이름하니 오로지 멸후를 위함이니라.
寿量品の一品二半は始より終に至るまで正く滅後衆生の為なり滅後の中には末法今時の日蓮等が為なり
수량품의 일품이반은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바로 멸후 중생을 위함이요, 멸후 가운데에는 말법 금시의 니치렌 등을 위함이니라.
이 어서의 뜻으로 보면 문상 탈익의 넷째 삼단은 바로 재세 중생을 득탈시키기 위한 설법이고, 그 아래의 다섯째 삼단은 말법 하종의 삼단임이 분명하다고 강의는 말한다.
넷째, 물음 속의 뜻에 준한다
오중삼단을 설하게 만든 제20장의 물음에는 「이 일을 대략 듣기는 했으나 전대미문이라 귀와 눈이 놀라고」라는 말이 있었다.
此の事粗之を聞くと雖も前代未聞の故に耳目を驚動し心意を迷惑す
이 일을 대략 이를 들었으나 전대미문이므로 귀와 눈이 놀라고 마음이 어지러우니라.
객은 이미 전대미문의 법문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이 이 다섯 번째 문저하종삼단이다. 그렇다면 그 답은 정 · 상 이천 년 동안 아무도 넓힌 일이 없는 미증유의 대법이어야 하므로, 문저하종삼단임이 분명하다. 앞의 네 겹은 천태가 이미 밝힌 것이어서 전대미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 서분의 광대함에 준한다
한 자 깊이의 못에는 한 길 높이의 물결이 일지 않는다. 서분이 좁으면 정종분도 좁다. 그런데 이 단의 서분은 실로 광대하므로, 그 정종분도 광대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정종분이 이전의 어느 것보다 광대하다는 것, 이것이 곧 전대미문이 아닌가. 천태는 「비가 세찬 것을 보고 용이 큼을 알고, 꽃이 성한 것을 보고 못이 깊음을 안다」고 했다. 대성인도 「가책방법멸죄초」에서 「법화경 서품의 육서(六瑞)는 일대를 넘어선 큰 상서요, 용출품은 또 이것과는 견줄 수도 없는 큰 상서니라(法華経序品の六瑞は一代超過の大瑞なり、涌出品は又此れには似るべくもなき大瑞なり)」(1129쪽)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시방삼세 미진의 경경을 서분으로 삼는 이상, 그에 걸맞은 광대한 정종분과 유통분이 갖추어져 전대미문의 문저하종삼단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이름에 대한 니치칸 상인의 논파
강의는 이어 옛 학자들이 이 단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니치칸 상인의 문단을 따라 소개한다.
첫째, 『몽초』는 이 대목을 「서정의 승렬을 판정한다(序正勝劣と判ず)」고 이름하고 문저하종삼단이라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단에 이르기까지의 넷째 삼단까지는 결국 다섯째 문저하종삼단을 밝히기 위한 수단이다. 만약 다섯째 문저삼단을 밝히지 않는다면 하늘에 해와 달이 없고, 나라에 대왕이 없고, 산과 강에 구슬이 없고, 사람에게 혼이 없는 것과 같다. 『계몽』의 저자는 이미 종조 홍통의 골목(骨目) · 진수를 잃은 논의를 세웠으니 실로 천마파순이라 해야 한다 — 니치칸 상인의 비판은 이처럼 엄하다.
둘째, 『진초』는 이 대목을 「광서(廣序)의 삼단」이라 이름한다. 서분이 넓다는 데 주목한 이름이다. 이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논파하신다. 그렇다면 넷째 삼단 다음에 다섯째 삼단을 세운 뜻이 없어진다. 또 서분의 광대함만 논한다면, 일대삼단이 뛰어나고 적문삼단이 열등하며, 적문삼단이 뛰어나고 본문삼단이 열등하다는 이상한 결론이 된다. 본문보다 적문 쪽이, 적문보다 일대 쪽이 서분이 넓기 때문이다. 하물며 서분만 특별히 광대하고 정종분 · 유통분은 보통의 석가 불교와 같다는 것은 이치가 통하지 않는다. 천태의 비유를 「비는 세찬데 용은 작고, 꽃은 성한데 못은 얕다」고 고칠 셈인가. 더구나 유통의 경문과 뜻이 함께 빠져 있다는 생각은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충초』의 뜻은 이 대목을 「법계(法界)의 삼단」이라 이름한다. 이에 대해서도 니치칸 상인은 논파하신다. 日忠이 말하는 법계는 아직 문저하종의 삼단을 알지 못하므로 부분부분의 법계일 뿐 온 우주를 품는 전분(全分)의 법계가 아니다. 더구나 「법계」라는 말은 막연히 넓고 크다는 관념에 그치므로 큰 잘못이다.
강의는 이것으로 이 단이 문저하종삼단임이 분명해졌다고 맺고, 本文의 해설로 들어간다.
대통불의 법화경부터 시방삼세 제불의 미진의 경경까지
「과거 대통불의 법화경」
本文은 서분의 첫머리에 「과거 대통불의 법화경」을 둔다. 옛 해석은 이것을 곧바로 대통지승불이 설한 법화경으로 보았으나, 강의는 이것이 대통불이 설한 법화경이 아니라 대통 십육 왕자가 설하여 하종한 법화경이어야 한다고 본다. 本文에서 줄여서 「대통불의 법화경」이라 하신 것은 늘 「대통 하종」이라 하듯이 적문의 일상적 어법이다. 그 법화경 안에 수량품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따지는 이가 있지만, 그것은 문제로 삼을 것이 못 된다고 강의는 말한다.
그렇다면 대통불이 설한 법화경은 뒤의 「시방삼세 제불」 안에 들어가야 할 것인데, 왜 특별히 「대통불의 법화경」이라 하셨는가. 강의는 그 뜻을 이렇게 읽는다. 이 서분의 큰 뜻은 적문에 설해진 화도의 시종의 경경이 모두 문저하종의 서분에 속한다는 데 있다. 곧 22장에서 본 화도의 시종을 경전에 배당하면, 대통 십육 왕자의 법화경은 결연의 처음의 경이고, 석존 재세의 화엄경 등은 첫째 부류의 독발 등의 경이자 둘째 부류인 당기중이 익어 가는 마지막 경이며, 적문 열네 품은 당기중이 득탈하는 마지막 경이자 결연중이 발심하는 처음의 경이고, 열반경 등은 결연중이 득탈하는 마지막 경이다. 本文이 「대통불의 법화경으로부터 내지 현재의 화엄경 내지 적문 십사 품 · 열반경 등」이라고 차례로 든 것은 바로 이 화도의 시종 전체를 하나도 빠짐없이 서분으로 거두어들이는 순서다.
「시방삼세 제불의 미진의 경경」
그리고 시방삼세의 제불도 마찬가지로, 제불이 적문에서 설한 화도의 시종의 미진의 경경이 모두 문저하종의 서분이 된다. 법화경에 「이것은 나의 방편이니 제불도 또한 그러하니라(是我方便 諸佛亦然)」고 설한 것이 이 뜻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그런데 저 제불의 미진의 경경은 각각 그 부처의 문저의 서분이 되어야 할 것인데, 왜 특별히 대성인의 문저의 서분이 된다고 하셨는가. 강의의 답은 이렇다. 대성인의 문저의 뜻으로는 동방의 선덕불 · 중앙의 대일여래 · 시방의 제불 · 삼세의 제불 등이 모두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수적(垂迹)이다. 천태가 말한 「한 달이 만 개의 그림자를 드리운다(一月萬影)」는 것처럼, 저 시방삼세 미진의 경경은 모두 이 문저하종의 서분이 된다. 강의는 『법화현의』 권7의 「삼세가 곧 다르더라도 비로자나는 하나의 근본으로 다르지 않으니, 백천의 가지와 잎이 함께 한 뿌리로 향하는 것과 같다」는 구절을 들고, 여기서 비로자나는 곧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라고 풀이한다.
다섯 번째 삼단의 서분은 「석존 일대」라는 경계를 넘는다. 시방삼세 제불의 경경까지 서분이 된다는 것은, 정종분이 석존 한 부처의 설법 안에 있는 어떤 경문이 아니라 모든 부처를 수적으로 삼는 근원의 법임을 뜻한다. 서분의 크기가 곧 정종분의 크기를 말해 준다.
일품이반의 두 뜻 — 천태의 배립과 대성인의 배립
「수량」과 「일품이반」
강의는 이 장의 강의 한가운데에 「일품이반의 두 뜻」이라는 독립된 절을 둔다. 그 첫머리는 이렇다. 말법 중생이 의지할 본존이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밝혀져 왔다. 대성인 출세의 본회는 이 자수용신을 한 폭의 만다라에 담아 우리 민중에게 수여하는 데 있다. 「관심의 본존초」도 이를 밝히기 위해 설해졌으며, 이를 가장 분명히 드러낸 것이 이 문저삼단이다. 이 문저삼단에서 정종분으로 말씀하신 말은 「수량품의 서분이니라」의 「수량」과 「일품이반 밖은 소승교 · 사교」의 「일품이반」이다. 「수량」과 「일품이반」은 이름은 다르지만 똑같이 문저하종 불법의 정종분이다.
그런데 탈익의 삼단에도 일품이반이 있고 문저하종삼단에도 일품이반이 있다. 말은 같지만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문저하종 불법의 참뜻을 알 수 없다고 강의는 강조한다.
범위의 차이 — 용출품의 반 품
일품이반은 용출품의 뒤 반 품, 수량품, 분별공덕품의 앞 반 품을 말한다. 천태의 배립과 대성인의 배립은 용출품의 반 품에서 차이가 난다. 천태는 약개근현원과 동집생의를 함께 용출품의 반 품으로 삼고, 대성인은 동집생의만을 용출품의 반 품으로 삼으신다.
- 용출품 전반
- 약개근현원천태
- 동집생의천태대성인
- 수량품천태대성인
- 분별공덕품 전반천태대성인
이름은 같고 뜻은 다르다(名同義異)
二には涌出品の動執生疑より一半並びに寿量品・分別功徳品の半品已上一品二半を広開近顕遠と名く一向に滅後の為なり둘째로 용출품의 동집생의부터의 한 반 품과 수량품 · 분별공덕품의 반 품, 이상 일품이반을 광개근현원이라 이름하니 오로지 멸후를 위함이니라「법화취요초」, 334쪽강의는 용출품의 해당 경문을 길게 인용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약개근현원(천태의 배립은 여기서부터) — 땅에서 솟아난 무수한 보살들을 보고 대중이 놀라자, 세존은 미륵(아일다)에게 말한다. 「너희가 예로부터 보지 못한 이 대보살들은,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 교화하고 인도하여 그 마음을 다스려 도의 뜻을 일으키게 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 사바세계 아래 허공 가운데 머물며, 모든 경전을 읽고 외워 통달하고 사유하고 분별하여 바르게 기억했다. 대중 속에서 많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늘 고요한 곳을 좋아하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쉰 적이 없고, 인 · 천에 의지해 머물지 않으며, 늘 깊은 지혜를 좋아해 걸림이 없다.」 이어 게송으로 「이들은 나의 아들이니 … 나는 가야성 보리수 아래 앉아 최정각을 이루고 무상의 법륜을 굴려 이들을 교화하여 처음 도심을 일으키게 하였노라. … 나는 지금 진실한 말을 하노니 너희는 일심으로 믿으라. 나는 구원으로부터 이 무리를 교화해 왔노라」라고 설한다. 「구원으로부터」라고 했으니 구원실성을 대략 연 것이다.
동집생의(대성인의 배립은 여기서부터) — 이 말을 듣고 미륵과 무수한 보살들은 마음에 의혹이 생겨 미증유라 여기며 생각한다. 「세존은 어찌하여 짧은 시간에 이렇게 한량없는 대보살을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게 하셨는가.」 그리고 부처에게 묻는다. 「세존께서는 태자로서 석가족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깨달음을 이루셨고, 그로부터 이제 겨우 사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 대보살들은 누가 천만억 겁을 세어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오래전부터 무량무변의 부처 처소에서 선근을 심고 보살도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비유하면 얼굴빛 곱고 머리 검은 스물다섯 살 된 사람이 백 살 된 사람을 가리켜 내 아들이라 하고, 백 살 된 사람도 젊은이를 가리켜 내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의심을 풀어 달라며, 지금의 대중은 믿더라도 부처의 멸후에 새로 발심한 보살들이 이 말을 들으면 믿지 않고 법을 깨뜨리는 죄업의 인연을 일으킬 것이니 그들을 위해서도 설해 달라고 청한다. 게송에서도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며 「원컨대 부처님은 미래를 위해 연설하여 열어 알게 하소서」라고 청한다.
이름은 같고 뜻은 다르다
이렇게 같은 일품이반이라도 문상 탈익의 일품이반과 문저하종의 일품이반은 이름은 같고 뜻은 다르다(名同義異). 이 뜻의 다름은 어디서 생겼는가. 천태의 배립은 재세 탈익을 위한 것이고 종조의 배립은 말법 하종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그래서 천태의 배립을 「약개근현원의 일품이반」, 대성인의 배립을 「광개근현원의 일품이반」이라 부른다. 일품이반과 수량품은 같은 것을 가리키므로, 천태의 배립을 「약개근현원의 수량품」, 대성인의 배립을 「광개근현원의 수량품」이라고도 한다. 또 천태의 일품이반을 「재세의 본문」, 대성인의 일품이반을 「말법의 본문」이라 부른다. 대성인의 일품이반이 오로지 멸후 말법을 위한 것임은 앞서 인용한 「법화취요초」(334쪽)에서 분명하다.
강의는 그 밖에도 근거를 든다. 「관심의 본존초」 뒤의 문장(25장)에 「저것은 일품이반,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라고 하신 것이 있고, 「본인묘초」에 「적 위의 본문수량이라고 알게 한다(迹の上の本門寿量ぞと得意)」(877쪽)고 하신 것은 법화경 본문을 적문의 중생을 득탈시키고 적문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한 본문수량품으로 여기는 것을 「탈익의 문상」이라 한 것이며, 문저란 「구원실성의 명자의 묘법을 곧바로 정관(正觀)한다」고 하신 데서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약 · 광 개현의 일품이반은 넷째 본문탈익삼단의 정종분이고, 광개근현원의 일품이반은 다섯째 문저하종삼단의 정종분이다.
왜 약개근현원을 빼셨는가
그렇다면 대성인은 왜 천태의 약개근현원을 빼고 동집생의의 반 품을 정종분으로 삼으셨는가. 강의는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고 한다. 수량품은 한 문장이지만 그 뜻에는 양면이 있다. 문상은 재세 탈익을 위한 것이고, 문저는 말법 하종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미륵의 질문을 잘 보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이렇다.
我等は復た仏の随宜の所説・仏所出の言未だ曾て虚妄ならず・仏の所知は皆悉く通達し給えりと信ずと雖も
우리들은 또한 부처님이 근기에 맞추어 설하신 바와, 부처님이 내신 말씀이 일찍이 허망하지 않고, 부처님이 아시는 바는 모두 다 통달하셨다고 믿기는 하오나
이 앞부분의 뜻, 곧 지금 재세의 대중은 믿는다는 데서 문상 탈익 · 재세를 위한 수량품을 약개근현원에 속하게 하신다. 뒷부분은 이렇다.
然も諸の新発意の菩薩・仏の滅後に於て若し是の語を聞かば或は信受せずして法を破する罪業の因縁を起さん
그러나 모든 새로 발심한 보살이 부처님 멸후에 만약 이 말을 들으면 혹은 믿고 받지 않아 법을 깨뜨리는 죄업의 인연을 일으킬 것이옵니다.
이 뒷부분의 뜻, 곧 멸후의 새 발심 보살을 위해 묻는다는 데서 문저하종 · 말법을 위한 수량품을 동집생의의 경문에 속하게 하신다. 곧 미륵이 질문한 내용에 따라 대성인이 이렇게 나누셨다는 것이다. 대성인 자신도 제27장에서 이 경문을 인용한 뒤 「문의 뜻은 수량의 법문은 멸후를 위해 이를 청하는 것이니라(文の意は寿量の法門は滅後の為に之を請ずるなり)」(251쪽)라고 풀이하셨다.
니치주 문류에 대한 비판
강의는 이어서 니치주(日什, 현본법화종의 개조, 대성인 멸후 백 년 무렵) 문류의 사람들이 「일품이반의 남묘호렌게쿄」를 말하지만, 그 문류는 아직 문저의 대사를 알지 못하므로 넷째 삼단, 곧 재세 탈익의 일품이반을 취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같은 「일품이반」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그것이 어느 배립의 일품이반인지를 가리지 못하면 탈익의 법을 말법에 가져오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소승교 · 사교 · 미득도교 · 부상교
서분의 경경을 부르는 네 이름
여기에 대성인 내증의 일품이반이 분명해져 말법의 참된 불법인 문저하종의 본존이 확립되면, 그 밖의 가르침은 소 · 사 · 미 · 부의 가르침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서분의 경경은 구원원초의 종자의 법체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소 · 사 · 미 · 부라 한다. 따로 나누어 논하면 이렇다. 구원원초의 대구(大久)의 불도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소승교다. 구원원초의 종가(種家)의 인과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사견교(邪見敎)다. 구원원초의 무상의 종자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미득도교다. 구원원초의 진비(眞祕)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부상교다.
- 덕박德薄본종을 잊고 물러나 공덕이 없음
- 구중垢重적에 집착해 번뇌에 시달림
- 유치幼稚본을 버리고 적을, 체를 잊고 그림자를 취함
- 빈궁貧窮구원원초의 주군을 알지 못함
- 고로孤露구원원초의 부모를 알지 못함
여기서 「소승」은 흔히 말하는 아함경 계통의 소승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구원원초라는 가장 큰 오래됨에 견주면, 그것을 밝히지 않은 모든 가르침이 「작은 탈것」이 된다. 「사교」도 다른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성불의 참된 인과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견해가 된다는 뜻이다. 네 이름 모두 「구원원초를 밝히지 않았다」는 하나의 기준에서 나온다.
문상 본문은 소 · 사 · 미 · 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저하종의 정종분 밖의 경이 모두 소 · 사 · 미 · 부라면, 문상의 수량품과 본문의 나머지 열세 품도 모두 소 · 사 · 미 · 부가 되는가. 강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이 경문은 서분과 정종분을 견주어 말씀하신 것이고, 서분 속에 문상 본문은 들어 있지 않으므로 본문을 소 · 사 · 미 · 부라 할 수는 없다. 실제로 本文이 서분으로 열거한 것은 대통불의 법화경 · 현재의 화엄경 · 적문 십사 품 · 열반경 등과 시방삼세 제불의 경경이며, 본문 열네 품은 이름이 오르지 않는다.
또 적문 열네 품은 혹은 서분이 되고 혹은 유통분이 되므로 문상 본문도 서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만, 25장의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한결같이 순원이니라」는 말씀대로 둘 다 즉신성불의 가르침이므로 사교 · 소승교 · 미득도교 · 부상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옛 여러 스승은 본문 유통분의 십일 품 반을 소 · 사 · 미 · 부라 했다. 강의는 이것이 대성인의 바른 뜻을 늘리고 줄이는 두 가지 비방이라고 비판한다. 문저의 정종분을 빠뜨린 것은 줄인 비방이요, 유통의 여러 품을 소 · 사 · 미 · 부로 삼은 것은 늘린 비방이다. 묘락이 수량품에서 현본한 뒤에는 그 이후의 유통분에서도 구원의 본지가 설해지는 데 변함이 없다고 한 것으로도 그 잘못을 알 수 있다고 강의는 덧붙인다.
덕박구중 · 유치 · 빈궁 · 고로 — 그 근기
다섯 말의 뜻
이 소승교 · 사교 · 미득도교 · 부상교의 근기를 논하면 「덕박구중 · 유치 · 빈궁 · 고로」라고 하신다. 강의는 하나하나를 풀이한다. 본래의 종자(本種)를 잊고 물러나므로 덕이 엷다(德薄) 하여 공덕이 없다. 적(迹)에 집착하므로 때가 무겁다(垢重) 하여 번뇌에 시달린다. 본을 버리고 적을 취하며 본체를 잊고 그림자에 집착하는 그 어리석음이 어린아이와 같으므로 유치라 한다. 구원원초의 주군을 알지 못해 그 가호를 받지 못하므로 빈궁이라 한다. 구원원초의 부모를 알지 못해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고로라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이 「금수와 같다」고 하신 것은, 현대어역의 풀이처럼 말법의 우리를 위해 출현하신 주 · 사 · 친 삼덕을 갖춘 구원원초의 본불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부모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섯 말이 주 · 사 · 친의 삼덕과 짝을 이룬다는 데 주목할 수 있다. 덕박구중과 유치는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스승(師)을 알지 못한 데서, 빈궁은 지켜 주는 주군(主)을 알지 못한 데서, 고로는 길러 주는 부모(親)를 알지 못한 데서 온다. 「개목초」가 첫머리에서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이 셋 있으니 이른바 주 · 사 · 친이니라(一切衆生の尊敬すべき者三あり所謂主師親これなり)」(186쪽)라고 하신 것과 이 대목은 같은 축 위에 있다.
오늘의 삶에 비추어
강의는 이 다섯 말을 오늘의 삶에 비추어 본다. 지금의 인생을 보면 모두 덕박구중 · 유치 · 빈궁 · 고로의 사람들뿐이 아닌가. 가난에 빠져도 누구에게 의지할 수 없다. 사업에 고민해도 상의할 상대가 없다. 병에 시달려도 의사가 만능은 아니며, 의사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면 오로지 인생을 슬퍼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성인 출현의 뜻이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소 · 사 · 미 · 부의 가르침 때문에 덕박구중 · 유치 · 빈궁 · 고로에 시달리는 중생을 구하려고, 본래의 종자를 잊은 이들에게 그것을 떠올리게 하여 적에 대한 집착을 잊게 하려고 스승의 덕을 드러내시고, 구원원초의 주군과 부모를 알게 하여 빈궁 · 고로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정종분의 법과 그 사람
그러므로 서분의 소 · 사 · 미 · 부와 정반대로, 첫째 법을 논하면 대성인 내증의 수량품은 구원원초의 대구의 불도를 밝혔으므로 「대승경」이고, 구원원초의 종가의 인과를 밝혔으므로 「정견(正見)」의 가르침이며, 구원원초의 무상의 종자를 밝혔으므로 「득도」의 가르침이고, 구원원초의 신비를 밝혔으므로 「현로(顯露)」의 가르침이다. 둘째 그 사람을 논하면, 이 법을 받는 이는 법화 본문의 직기(直機)이며 문저하종의 주 · 사 · 친인 구원원초 자수용신이 가장 아끼는 신하요, 사랑하는 아들이며, 입실의 제자라고 강의는 말한다. 서분의 근기가 「주군 · 스승 · 부모를 알지 못하는」 이였다면, 정종분의 근기는 그 주군의 신하요 부모의 아들이요 스승의 제자다.
이전 · 적문의 원교조차 불인이 아니다 — 멸후에 약한 판정
재세에 약함과 멸후에 약함
다음 구절 「이전 · 적문의 원교조차 오히려 불인이 아니다」에 대해 강의는 이 장 本文의 짜임을 이렇게 정리한다. 「일품이반 밖은」부터는 서분의 그릇됨(非)으로써 정종분의 옳음(是)을 드러내는데, 그 가운데 「일품이반 밖은」 이하는 재세에 약하여 말씀하신 것이고, 이 「이전 · 적문의 원교」 이하는 멸후에 약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석가불이 설한 경교를 논하는 것이니 재세에 약하기만 하면 될 터인데 왜 멸후에도 약하는가. 강의는 두 가지로 답한다. 이 다섯째 삼단의 정종분은 바로 말법에 대성인이 건립하시는 법문이므로 멸후에 약한다. 또 그 서분의 경경은 정 · 상 이천 년에 유포한 여러 종파의 의지하는 경(依經)이므로 멸후에 약한다.
정 · 상의 종파들이 말법 대불법의 서분이 되는 뜻
그렇다면 정 · 상에 유포한 종파들이 어떻게 말법 대불법의 서분이 되는가. 강의는 두 어서를 든다.
迹化他方の大菩薩に法華経の半分・迹門十四品を譲り給う、これは又地涌の大菩薩・末法の初めに出現せさせ給いて本門寿量品の肝心たる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を一閻浮提の一切衆生に唱えさせ給うべき先序のためなり
적화 · 타방의 대보살에게 법화경의 절반인 적문 십사 품을 물려주셨느니라. 이것은 또 지용의 대보살이 말법의 처음에 출현하시어 본문수량품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의 다섯 자를 일염부제의 일체중생에게 부르게 하실 앞선 서(序)를 위함이니라.
権大乗経の題目の広宣流布するは実大乗経の題目の流布せんずる序にあらずや
권대승경의 제목이 광선유포하는 것은 실대승경의 제목이 유포할 서가 아니겠는가.
「선시초」의 이 대목은 호넨이 『선택집』을 지은 뒤 온 나라의 염불자가 염불을 부르게 된 일을 두고, 이 염불이란 쌍관경 · 관경 · 아미타경의 제명이니 권대승경의 제목이 넓게 퍼진 것은 실대승경의 제목이 퍼질 서분이 아니냐고 하신 것이다. 곧 염불이 한 나라에 유포하여 위아래 만민이 모두 염불을 부른 것이 실은 법화경의 제목인 남묘호렌게쿄가 유포할 앞선 서(先序)였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 논리를 오늘에까지 연장하여, 대성인 멸후 칠백 년 동안 미노부산 등 다른 일련종 문류가 한 나라에 유포한 것도 당가의 어본존이 바르게 한 나라에 유포할 앞선 서라고 굳게 믿는다고 말한다.
천태 · 전교의 법을 서분의 그릇됨에 속하게 한 두 뜻
또 이전 · 적문의 원교란 천태종이 의지하는 경경이다. 천태종은 법화경 · 무량의경을 정(正)으로 삼고, 곁으로 열반경과 여러 대승경에 설해진 원교를 의지한다. 이 천태종의 원교조차 구원원초의 하종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불인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대일경 등의 모든 소승경이 불인이 될 리 없다고 대성인은 분명히 결정하셨다고 강의는 말한다.
그렇다면 왜 천태 · 전교가 홍통한 법을 서분의 그릇됨에 속하게 하셨는가. 강의는 두 뜻을 든다. 첫째, 천태 · 전교는 상법 시대에 맞는 홍통의 스승이므로 상법 시대에는 그릇됨이 아니다. 다만 천태 · 전교가 의지한 이전 · 적문의 경경에는 구원원초의 하종이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말법에서는 서분의 그릇됨에 속한다. 둘째, 그 스승들이 의지한 경은 상법 숙익의 법이지 말법 하종의 법이 아니다. 그런데 천태의 말제자들은 때와 근기를 알지 못하고 지금도 말법에 이익이 있다고 여긴다. 설령 천태 · 전교의 법문을 그대로 넓힌다 해도 말법에 이르러서는 지난해의 달력과 같아 아무 효용이 없다. 하물며 자각대사 이후로는 진언을 합류시켜 큰 방법(謗法)의 종문이 되었으므로 서분의 그릇됨으로 파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의 달력」이라는 비유는 법 자체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때(時)에 맞느냐를 가리킨다. 천태 · 전교를 상법의 바른 스승으로 높이면서도 그 법을 말법의 서분으로 판정하는 것은 이 편 전체를 관통하는 「소대(所對)」 · 「시(時)」의 원리를 보여 준다. 더 읽기: 인물탐구 천태대사 · 전교대사.
주고 빼앗아 논함 — 전삼교와 장통, 회단, 왕녀와 축생의 씨
법에 약한 판정
이처럼 천태 불립종(佛立宗)의 의경조차 불인이 되지 못함이 분명하다면, 하물며 불멸후의 논사 · 인사가 세운 종파들의 의경이 불인이 될 리 없다. 그래서 「주어서 이를 논하면 … 화도의 시종이 없다 함이 이것이니라」라고 법에 약하여 판정하셨다고 강의는 말한다.
이 견지에서 저 논사 · 인사의 종파들의 의경은 주어서 논하면 전삼교(장 · 통 · 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빼앗아 논하면 장 · 통과 같다. 왜 장 · 통과 같은가. 설령 화엄 · 진언 등의 경경에 일생에 초지(初地)에 오르는 즉신성불을 밝히고 법이 매우 깊다고 일컫더라도, 아직 종숙탈을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이승의 회단과 같아지고, 그래서 장 · 통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현대어역은 이 대목을, 과거의 하종도 미래의 득탈도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니 「즉신성불」을 말해도 성불의 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어 읽는다.
여기서 「종숙탈을 논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가장 무겁다. 아무리 깊은 법리를 설해도, 그 법을 누가 언제 심었고 어떻게 익히며 어떻게 거두는가 하는 화도의 과정이 없으면, 그것은 중생에게 실제로 작용하는 성불의 길이 되지 못한다. 22장 · 23장이 적문과 본문에서 각각 「화도의 시종」을 다섯째 마디로 다룬 까닭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화도의 시종이 있느냐 없느냐가 불인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를 가르는 기준이다.
사람에 약한 판정 — 왕녀와 축생의 씨
다음의 「비유컨대 왕녀라 할지라도 내지 전다라보다 못한 것과 같다」는 문장은 사람에 약하여 저들의 그릇됨을 판정하신 것이다. 저 칠종의 논사 · 인사가 존귀한 것은 비유하면 왕녀와 같지만, 장 · 통처럼 열등한 경경을 받아 지니는 것은 축생의 씨를 잉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결과는 가장 낮은 신분인 전다라보다도 못하다고 판정하셨다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는 이 판정을 매우 통쾌한 파절로 받아들이며, 오늘의 종파들과 그 신자들도 이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전다라라는 말에 대하여
전다라라는 말에 대해 강의의 어구 풀이는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대성인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사도어감죄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日蓮は日本国・東夷・東条・安房の国・海辺の旃陀羅が子なり
니치렌은 일본국 · 동이(東夷) · 도조 · 아와국 · 바닷가의 전다라의 자식이니라.
그리고 이어서 「헛되이 썩어 갈 몸을 법화경 때문에 버린다면 어찌 돌을 금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다. 그 밖에도 「전다라의 집에서 나왔다」, 「백성의 집에서 나와」, 「천민의 자식이니라」 등의 말씀이 있다. 이를 근거로 「대성인은 어업에 종사하는 집에서 태어나셨다」는 해설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구 풀이는, 대성인이 출신을 이렇게 낮추어 일컬으실 때는 반드시 법화경 수지의 법열이 한없음을 자신의 더러운 범부의 육신과 견주어 설명하는 장면이므로 이 자칭을 그대로 사실로 보는 것이 반드시 타당하지는 않다는 견해도 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이 「관심의 본존초」에서는 전다라의 자리가 뒤바뀐다고 어구 풀이는 짚는다. 「왕녀」는 화엄 · 진언 등 칠종의 논사 · 인사들, 곧 세상의 존경을 받는 신분의 승려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들은 존귀한 신분이면서도 전다라보다 못한 「축생의 씨」라 할 낮은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고 대성인은 꿰뚫어 말씀하신 것이다. 스스로를 전다라의 자식이라 하신 분이, 존귀하다는 왕녀를 전다라보다 못하다고 판정하신다. 신분의 높낮이가 아니라 무엇을 품고 무엇을 낳는가, 곧 어떤 법을 지니느냐가 사람의 귀천을 정한다는 것이다.
사성 계급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전다라」라는 말은 오늘의 관점에서는 차별적인 신분 개념이다. 本文은 이 말을 당시 인도와 일본에서 통용되던 비유로 쓰고 있으며, 대성인 자신이 스스로를 그 자식이라 일컬으셨다는 점에서, 이 비유의 초점은 신분이 아니라 지니는 법에 있다.
「이들은 잠시 그대로 두느니라」로 이 장은 끝난다. 여러 종파에 대한 판정은 여기서 그치고, 다음 장에서 대성인은 다섯째 삼단의 유통분으로 넘어가신다.
본문
迹門十四品の正宗の八品は一往之を見るに二乗を以て正と為し菩薩凡夫を以て傍と為す、 再往之を勘うれば凡夫・正像末を以て正と為す正像末の三時の中にも末法の始を以て正が中の正と為す、 問うて曰く其の証如何ん、 答えて曰く法師品に云く「而も此の経は如来の現在すら猶怨嫉多し況や滅度の後をや」 宝塔品に云く「法をして久住せしむ乃至来れる所の化仏当に此の意を知るべし」等、 勧持安楽等之を見る可し迹門是くの如し、 本門を以て之を論ずれば一向に末法の初を以て正機と為す 所謂一往之を見る時は久種を以て下種と為し大通前四味迹門を熟と為して本門に至つて等妙に登らしむ、 再往之を見れば迹門には似ず本門は序正流通倶に末法の始を以て詮と為す、 在世の本門と末法の始は一同に純円なり但し彼は脱此れは種なり彼は一品二半此れは但題目の五字なり。
적문 십사 품의 정종인 여덟 품은 일왕(一往) 이를 보면 이승을 정(正)으로 삼고 보살 · 범부를 방(傍)으로 삼느니라. 재왕(再往) 이를 생각하면 범부와 정 · 상 · 말을 정으로 삼으며, 정 · 상 · 말의 삼시 가운데에도 말법의 처음을 정 가운데의 정으로 삼느니라. 묻기를, 그 증거는 어떠한가. 답하기를, 법사품에 이르기를 「더구나 이 경은 여래의 현재에도 오히려 원질(怨嫉)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이랴」 하고, 보탑품에 이르기를 「법으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리라 내지 온 바의 화불은 마땅히 이 뜻을 알지어다」 등이라 하였으니, 권지품 · 안락행품 등에서 이를 볼 것이니라. 적문은 이와 같으니라. 본문으로써 이를 논하면 오로지 말법의 처음으로 정기(正機)를 삼느니라. 이른바 일왕 이를 볼 때는 구종(久種)으로써 하종을 삼고 대통 · 전사미 · 적문으로 숙을 삼아 본문에 이르러 등묘(等妙)에 오르게 하느니라. 재왕 이를 보면 적문과 같지 않아 본문은 서 · 정 · 유통이 모두 말법의 처음으로써 궁극(詮)으로 삼느니라.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한결같이 순원(純圓)이니라. 다만 저것은 탈(脫)이요 이것은 종(種)이며, 저것은 일품이반이요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이니라.
어구 풀이
- 一往・再往일왕 · 재왕
- 일왕은 「한 번 가서」 곧 겉으로 드러난 대로 일단 보는 것, 재왕은 「다시 가서」 곧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참뜻을 보는 것.
- 怨嫉원질
- 반발하고 적대함. 특히 정법과 그것을 넓히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반발하여 비방하거나 박해하는 것. 대성인은 「묘락이 이르기를 장애가 아직 없어지지 않은 자를 원(怨)이라 하고 듣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를 질(嫉)이라 한다」는 해석을 인용하셨다.
- 法をして久住せしむ법으로 하여금 구주하게 하다
- 영법구주(令法久住). 견보탑품 제11의 경문. 미래 영원히 묘법이 전해지도록 하는 것.
- 勧持安楽권지 · 안락
- 권지품 제13과 안락행품 제14. 권지품에서는 여러 대보살이 삼류의 강적을 견디며 멸후에 넓힐 것을 맹세하고, 안락행품에서는 멸후 홍통의 규범으로 사안락행이 설해진다.
- 久種구종
- 구원의 하종. 오백진점겁의 옛날에 심어진 성불의 종자.
- 等妙등묘
- 등각 · 묘각의 위. 보살 수행 단계의 가장 높은 자리다. 등각은 오십이위 가운데 제51위로 보살의 극위이며 유상사(有上士) · 인극(隣極)이라고도 한다. 오랜 보살 수행을 완성하여 곧 묘각의 불과를 얻으려는 단계다. 묘각은 등각위의 보살이 사십이품의 무명혹 가운데 마지막 원품(元品)의 무명을 끊고 도달한 위로 부처와 같은 위이며, 육즉위에서는 구경즉에 해당한다.
- 詮전
- 궁극의 정의(正意), 목적.
- 純円순원
- 방편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원만한 가르침.
- 題目の五字제목의 오자
-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 곧 남묘호렌게쿄. 더 읽기: 불교 교학 六 남묘호렌게쿄.
문상의 적 · 본 이문이 모두 문저의 유통분이 되다
왜 유통분인가
이 장은 법화경 문상의 적문 · 본문이 함께 문저의 유통분에 속함을 밝힌다. 적문에도 본문에도 각각 서분과 정종분이 있는데 어떻게 문저의 유통분에 속하는가. 강의는 이렇게 답한다. 문상에서 논하면 서 · 정이 분명하여 유통분이 되지 않지만, 문저하종의 정종분에 견주면 문상의 삼단은 통틀어 모두 유통분에 속한다. 무릇 유통이란 재세 정종분의 법수를 멸후 말대에 흘려 통하게 하는 것이므로 유통이라 한다. 그런데 이 장의 경문은 적문 · 본문이 함께 재왕은 멸후 말법을 위해 설해졌다고 하므로 이것은 유통분이다.
강의는 『어의구전』을 인용한다.
惣じては流通とは未来当今の為なり、法華経一部は一往は在世の為なり再往は末法当今の為なり、其の故は妙法蓮華経の五字は三世の諸仏共に許して未来滅後の者の為なり、品品の法門は題目の用なり体の妙法・末法の用たらば何ぞ用の品品別ならむや
총괄하면 유통이란 미래 당금을 위함이니라. 법화경 일부는 일왕은 재세를 위함이요 재왕은 말법 당금을 위함이니라. 그 까닭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는 삼세의 제불이 함께 허락하여 미래 멸후의 사람을 위함이며, 품품의 법문은 제목의 용(用)이니라. 체(體)인 묘법이 말법의 용이라면 어찌 용인 품품이 따로이겠는가.
다섯 자가 체이고 이십팔 품의 법문은 그 용이다. 체인 묘법이 말법을 위한 것이라면 그 용인 각 품도 말법을 위한 것이 된다. 곧 법화경 이십팔 품 전체가 말법의 유통분이 된다는 것이다.
유통에 속해도 본적일치는 아니다
그렇다면 적 · 본 이문이 함께 유통에 속하니 본적일치라 세워도 되는가. 강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같은 유통에 속해도 본적의 승렬은 분명하다. 그래서 대성인은 「지금의 때는 바로는 본문, 곁으로는 적문(今の時は正には本門・傍には迹門)」(「사보살조립초」, 989쪽)이라 하셨고, 또 「바로는 수량품 … 곁으로는 방편품」이라고도 하셨다. 23장에서 「죽막」을 두고 본적일치를 경계한 것과 같은 논리가 유통분에서도 되풀이된다.
적문의 두 뜻 — 적문 당분과 본문의 집의 적문
적문 열네 품이 문저하종삼단의 유통분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근거로 강의는 「백육개초」를 든다. 「앞의 십사 품은 모두 유통분의 본적이니, 여래의 내증은 서품부터 멸후 정 · 상 · 말을 위함이니라(前十四品悉く流通分の本迹、如来の内証は序品より滅後正像末の為なり)」(857쪽).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앞 장에서는 적문을 서분에 넣고 소 · 사 · 미 · 부라 했는데, 왜 이제 유통분에 넣는가. 강의는 적문에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답한다.
첫째는 「적문 당분」이다. 본문이 나타나기 이전의 적문, 그 자체만으로 본 적문이다. 이것은 본무금유의 법으로, 「하늘의 달을 알지 못하고 다만 못의 달만 본다」는 부류이며 서분의 그릇됨에 속한다.
둘째는 「본문의 집의 적문(本門が家の迹門)」이다. 본문이 나타난 뒤 본문의 입장에서 다시 본 적문으로, 본유상주의 법이다. 「근본으로부터 자취를 드리우는 것이 달이 물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달도 상주하고 그림자도 상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 장에서는 적문 당분의 측면을 서분으로 삼아 소 · 사 · 미 · 부라 파했고, 이제는 본문의 집의 적문을 유통에 속하게 하므로 말법을 정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집의 적문이 본유상주의 법이라 해도 본유 속의 승렬은 엄연히 정해져 있다. 이를 알지 못하면 저 일치파의 미혹과 같아진다. 강의는 두 어서를 든다.
天月水月本有の法と成りて本迹倶に三世常住と顕るるなり
하늘의 달과 물의 달이 본유의 법이 되어 본적이 함께 삼세상주로 나타나느니라.
본유상주라 해도 하늘의 달과 물의 달로 본적을 분명히 나누어 놓으셨다. 또 「십장초」에서 「설령 개회를 깨달은 염불이라 해도 여전히 체내(體內)의 권(權)이니 체내의 실(實)에 미치지 못하느니라(設い開会をさとれる念仏なりとも猶体内の権なり体内の実に及ばず)」(1275쪽)라고 하신 것도 같은 뜻이다. 개회된 뒤에도 권은 권, 실은 실이다.
일왕 — 이승을 정, 보살 · 범부를 방으로 삼다
이 적문 유통의 경문은 먼저 재세에 약하여 방편품부터 차례로 보면 이승을 정으로, 보살 · 범부를 방으로 삼는다. 왜인가. 강의는 보살과 범부는 오히려 성불이 쉬웠고 이승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보살은 법화 이전에 종자를 개현한 이가 있고, 범부는 법화 이후에 개현하는 이가 있으므로 이승을 정으로, 보살 · 범부를 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22장의 적문숙익삼단에서 논한 것과 이어진다. 보살 · 범부의 종자 각지는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은 부처의 본의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그것이 곧 보살 · 범부를 방으로 삼는 까닭이다. 그리고 「다만 독발 등의 일분」이라 하셨으니, 결코 보살을 교화하여 득도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승은 법화에 와서 삼주의 설법을 듣고 삼천진점겁의 종자를 드러내니, 이것이 적문삼단에서 부처의 본의다. 그래서 이승을 정으로 삼는다.
강의는 이 정 · 방의 구분이 득탈에 약한 것이지 경문의 차례를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도 짚는다. 경문의 차례를 따른 어서로는 「법화취요초」가 있는데, 거기서는 첫째 보살, 둘째 이승, 셋째 범부의 순서로 되어 있다. 방편품의 게송에도 「보살은 이 법을 듣고 의심의 그물이 모두 이미 없어졌으며, 천이백의 나한도 모두 또한 마땅히 성불하리라(菩薩聞是法 疑網皆已除 千二百羅漢 悉亦當作佛)」라고 하여 보살과 나한(이승)을 나란히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부처의 정의가 아님은 앞의 경문에서 분명하다는 것이다.
재왕 — 거꾸로 읽으면 말법의 처음이 정 가운데의 정
다음 「재왕 이를 생각하면」은 멸후의 유통을 보이신 것이다. 강의는 그 독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적문 열네 품을 서품 제1부터 제2 · 제3으로 차례로 읽으면 재세의 이승을 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거꾸로 안락행품 제14부터 제13 · 제12로 거슬러 읽으면 통틀어 멸후의 정 · 상 · 말을 정으로 삼고 있으며, 따로는 말법의 처음을 정 가운데의 정으로 삼고 있다.
그 증거로 인용하신 것이 법사품과 보탑품의 경문이다. 법사품의 「여래의 현재에도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이랴(如來現在 猶多怨嫉 況滅度後)」에서 강의는 「하물며 멸도한 뒤이랴」를 「하물며 정법의 때이랴, 하물며 상법의 때이랴, 하물며 말법의 때이랴」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질도, 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는 뜻도, 재세보다 멸후의 정법 시대, 정법보다 상법, 상법보다 말법에 부처의 정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어역은 이 증문들의 맥락을 이렇게 풀어 준다. 법사품은 이 법화경을 행하면 석가불의 재세에조차 원질이 많아 아홉 가지 큰 난(九橫の大難)을 만났는데 하물며 멸후에는 더 큰 원질과 박해를 받으리라고 설해, 적문의 유통분에서 멸후를 주체로 논한다. 보탑품에서 부처는 멸후의 홍통을 권하며 여러 대보살에게 멸후 홍통의 맹세를 세우라고 하고, 이는 오로지 부처가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는 것이며 보탑품에 모여든 분신의 제불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고 설해, 마찬가지로 재세의 대중은 곁으로 하고 멸후의 「영법구주」를 정의로 삼는다. 권지품에서는 여러 대보살이 삼류의 강적을 견디며 불멸후의 홍통을 맹세하고, 안락행품에서는 홍통의 규범으로 사안락행에 머물 것을 설한다. 적문은 이처럼 멸후 말법을 위해 설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멸후 말법을 정 가운데의 정으로 삼으므로 적문 열네 품을 말법 하종의 유통단으로 삼는다고 강의는 맺는다.
본문은 오로지 말법의 처음을 정기로 삼다
일왕 — 일체에 걸쳐 구원에 하종하고 본문에서 등묘에
다음 「본문으로써 이를 논하면」부터는 본문 열네 품이 모두 문저삼단의 유통분이 됨을 밝히신다. 강의는 「백육개초」를 인용한다. 「본과묘의 석존이 본인묘의 상행보살을 불러내신 것은 오로지 멸후 말법의 이익을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니치렌 수행의 때는 뒤의 십사 품이 모두 멸후의 유통분이니라(本果妙の釈尊・本因妙の上行菩薩を召し出す事は一向に滅後末法利益の為なり、然る間日蓮修行の時は後の十四品皆滅後の流通分なり)」(864쪽).
「오로지 말법의 처음으로써 정기로 삼는다」는 것은, 적문이 일왕은 재세를 위하고 재왕은 말법을 위하는 데 비해 본문은 처음부터 오로지 말법을 위한다는 뜻이다.
또 「구종으로써 하종을 삼고 대통 · 전사미 · 적문으로 숙을 삼아 본문에 이르러 등묘에 오르게 한다」는 경문은 어느 한 부류에 약해 읽을 것이 아니라 일체에 걸친다고 읽어야 한다고 강의는 말한다. 일체가 구원에 하종하고 본문에서 등묘에 오른다. 앞의 적문에서도 일왕 · 재왕으로 나누었고 그 일왕의 뜻도 일체에 걸쳤는데, 본문도 그와 같다. 「관심의 본존초」 뒤의 경문에 「병이 모두 없어져 나았다 등이라 운운. 구원 하종 · 대통 결연 내지 전사미 · 적문 등의 일체의 보살 · 이승 · 인천 등이 본문에서 득도함이 이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어 일체에 걸침을 보여 준다.
久遠下種・大通結縁乃至前四味迹門等の一切の菩薩・二乗・人天等の本門に於て得道する是なり
구원 하종 · 대통 결연 내지 전사미 · 적문 등의 일체의 보살 · 이승 · 인천 등이 본문에서 득도함이 이것이니라.
日澄의 『결의초』에 대한 비판
그런데 『결의초』는 이 경문을 한 부류에 약해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존 재세의 이승은 대통불 때 하종하여 적문에서 득탈한 사람이므로, 이 경문은 「사절(四節) 가운데 제일절, 본종현탈(本種現脫)의 한 부류」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것이 큰 편견이라고 비판한다.
이승이 대통에서 하종하여 적문에서 득탈한다는 것은 천태의 둘째 교상, 곧 화도의 시종 · 불시종의 모습이며 당가의 첫째 법문인 권적상대의 설상이다. 이것은 일왕이다. 천태의 셋째 교상, 곧 당가의 둘째 법문인 본적상대에서는 이승도 오백진점겁에 하종하고 대통 · 전사미 · 적문을 숙익으로 삼는다. 또 적문의 득탈은 당분의 득탈이지 과절의 득탈이 아니다. 구원의 하종을 밝히지 않았으니 참으로 득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문을 숙익에 속하게 한다. 더구나 사절 가운데 제일절은 서품에서 득탈한 사람인데 日澄은 이를 본문에서 득탈한 사람과 혼동하고 있다. 강의는 이것이 日澄이 천태의 법문조차 알지 못한 데서 일어난 일이니 하물며 당가의 깊은 법문을 알 리 없다고 비판한다.
「등묘에 오르게 한다」 — 명자묘각
또 「본문 득탈에서 등묘에 오르게 한다」고 하셨는데, 법화경 문상에서는 득탈이 등각위까지이고 묘각위는 설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대성인은 「등묘에 오르게 한다」고 하셨다. 강의는 이것이 문저의 뜻이라고 본다. 문저의 뜻으로는 모두 명자묘각(名字妙覺)의 위에 든다. 곧 수량품을 들은 대중은 문상의 수량품을 듣고 등각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문상을 듣는 동시에 문저의 신비를 깨달아 모두 구원원초로 돌아가 명자묘각의 위에 들었다는 것이다. 묘락이 「탈은 현재에 있다 해도 갖추어 본종을 드러낸다(脱は現に在りと雖も具さに本種を騰ぐ)」고 한 것과, 전해 오는 법문에 「등각에서 한 번 굴러 명자묘각(等覚一転名字妙覚)」이라 한 것이 이 뜻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명자즉은 천태의 육즉 가운데 둘째로, 처음 법의 이름을 듣고 믿는 자리다. 문상의 수행 계위로는 오십이위의 맨 아래에 가깝다. 그런데 문저의 뜻으로는 등각이라는 맨 위의 자리에서 한 번 굴러 바로 이 명자의 자리에서 묘각에 든다. 21장에서 본 「일념신해」 · 「초수희」가 말법 수행의 중심이 되는 까닭이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적문과 같지 않다」 — 본문은 서분부터 말법의 유통
이상으로 일왕은 정종분을 밝혔고, 「재왕 이를 보면」은 말법의 유통을 밝혀 본문이 법의 유통분임을 보인다. 「적문과 같지 않다」는 것은, 적문은 각 항목에서 논했듯이 유통단에서 거슬러 올라가 보았을 때 말법의 유통분이 되는 데 반해, 본문은 서분부터 이미 말법의 유통분이 된다는 뜻이다. 용출품에서 먼저 본화 지용의 대보살이 출현하는 것이 오로지 말법 유통을 위한 것임을 보면 알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본문은 서 · 정 · 유통이 모두 말법의 처음으로써 궁극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이 본문이 만약 문저하종의 본문이라면 다섯째 삼단의 정종분이 되어 유통분이 되지 않는다. 만약 문상 탈익의 본문이라면 재세 탈익을 위한 설법이므로 「말법을 궁극으로 삼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말법의 유통이 되는 본문은 어느 쪽인가. 강의는 문상 탈익의 본문에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답한다. 하나는 「탈익 당분」이고 또 하나는 「종가(種家)의 탈익」이다. 지금 유통단에 속하게 하는 것은 종가의 탈익 본문이다.
강의는 이것을 하늘의 달과 못의 달로 비유한다. 문저하종의 본문은 하늘의 달이며 다섯째 삼단의 정종분이다. 문상 탈익의 본문은 못의 물에 비친 달이다. 그 가운데 탈익 당분은 하늘의 달을 알지 못하고 다만 못의 달만 보는 것이고, 종가의 탈익은 「근본으로부터 자취를 드리운다」는 것처럼 달이 물에 나타날 때 하늘의 달을 알고서 못의 달을 보는 것이다. 같은 물의 달이라도 하늘의 달을 모를 때와 알고 난 뒤가 크게 다르듯이, 같은 탈익의 본문이라도 문저를 모를 때와 알고 난 뒤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앞 장에서 적문에 두 뜻(적문 당분 · 본문의 집의 적문)을 세웠듯이, 이 장에서는 본문에도 두 뜻(탈익 당분 · 종가의 탈익)을 세운다. 하늘의 달(문저)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같은 경문을 서분의 그릇됨으로도, 말법의 유통분으로도 만든다. 문상의 법화경 전체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문저의 빛을 받아 말법의 유통분으로 다시 살아난다.
유통분에 관한 옛 학설들
이처럼 법화경의 적문 · 본문이 모두 문저하종삼단의 유통분이 됨이 분명한데, 옛 학자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해 갖가지 자기 견해를 세웠다. 강의는 그 가운데 두세 가지를 든다.
- 『일충초(日忠抄)』 — 삼세가 함께 상행 부촉의 측면을 유통에 속하게 한다.
- 『파결(破決)』 제4 — 늘 하던 대로 십일 품 반을 유통단으로 삼는다.
- 『일아초(日我抄)』 — 일품이반의 수량의 서 · 정 때에는 유통의 논의가 없다. 탈익의 수량품은 재세의 정종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강의는 이런 해석이 모두 대성인의 뜻에 어긋나는 곡해라고 비판한다. 문저하종삼단의 첫머리에 「또 본문에 있어 서 · 정 · 유통이 있다」고 하셨으니 유통의 논의가 없을 리 없다. 분명히 유통분을 보이셨는데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탈익의 수량품은 재세의 정종분으로 끝나지만, 내증의 수량은 오로지 말법을 위한 것이다. 어찌 내증의 수량의 유통단을 밝히지 않으셨겠는가.
체외와 체내 — 일체의 경교가 서분이 되고 유통분이 되다
강의는 여기서 다섯째 삼단 전체를 다시 정리한다. 문저하종삼단을 바르게 밝히면, 정종분은 앞서 보인 대로 구원원초의 유밀(唯密)의 정법인 삼대비법의 어본존이다. 그리고 일대 오십여 년의 제경, 시방삼세의 미진의 경경, 아울러 모든 종파의 경전 해석 등을 모두 서분으로 삼고 혹은 유통분으로 삼는다. 곧 모든 경교의 「체외(體外)」, 곧 문저하종을 개회하지 않은 측면을 서분으로 삼고, 「체내(體內)」, 곧 문저하종을 개회한 측면을 유통분으로 삼는다. 이 장의 경문은 다만 법화경의 본적 이문을 유통으로 삼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글을 줄인 것이며, 모든 경교를 다 유통에 속하게 하는 것은 다음 어서에 보인 바와 같다고 강의는 말한다.
此の大法を弘通せしむるの法には必ず一代の聖教を安置し八宗の章疏を習学すべし
이 대법을 홍통하게 하는 법에는 반드시 일대의 성교를 안치하고 팔종의 장소(章疏)를 배워 익혀야 하느니라.
24장에서 서분이었던 일대의 제경과 여러 종파의 장소가 이 장에서는 유통분으로 다시 등장한다. 같은 경교가 문저와 떨어져 있으면 서분의 그릇됨이고, 문저에 의해 개회되면 유통분의 옳음이 된다.
강의는 이 원리를 불법 밖으로까지 넓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학문과 철학, 세법과 국법에 통하여 말법 민중 구제를 위해 일염부제 유일의 본존을 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본존을 근저에 둘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살아난다. 묘법을 근저에 두지 않은 지식 · 학문 · 철학 · 사상은 사람들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죽은 법문」이지만, 대불법에 의해 그것들을 쓰면 시들었던 초목이 다시 햇빛을 받고 물을 얻어 생기 있게 자라듯이 모두 「살아 있는 법문」이 된다. 강의는 대성인의 말씀을 든다.
一切世間の治生産業は皆実相と相違背せず
일체 세간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과 서로 어긋나지 않느니라.
그리고 창가학회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화의(化儀)의 광선유포, 곧 묘법을 근저로 하여 모든 문화의 꽃을 피워 가는 데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체외 · 체내의 원리가 경전 해석에서 사회와 문화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일체 세간의 치생산업은 모두 실상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원래 천태대사가 『법화현의』에서 인용한 법화경 법사공덕품의 취지(제법실상)를 바탕으로 한 말로, 대성인은 여러 어서에서 이 구절을 쓰셨다. 강의가 든 쪽(1295쪽)은 「단월모답서」에 해당하며, 같은 구절은 다른 어서에도 보인다.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한결같이 순원」 — 일왕은 이름이 같다
마지막 문장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한결같이 순원이니라 …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이니라」는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본문의 차이를 판정하고, 말법에 유통하는 어본존의 정체를 보여 관심의 본존을 결성하는 대목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는 이 문장을 두 층으로 나누어 읽는다. 「재세의 본문 … 한결같이 순원이니라」는 일왕 이름이 같음(一往名同)이고, 「다만 저것은 탈 … 다만 제목의 다섯 자이니라」는 재왕 체가 다름(再往體異)이다.
이 문장의 「재세의 본문」은 넷째 삼단, 곧 문상 탈익의 본문이다. 「말법의 처음」은 곧 구원원초이며, 「구원과 말법이 한결같다(久末一同)」는 깊은 뜻에서 보면 다섯째 삼단 · 문저하종의 정종분 · 말법의 본문이다. 그러므로 「처음(初)」이라는 글자는 「본문」으로 읽어야 함에 유의하라고 강의는 말한다. 「말법의 처음」은 시간의 한 시점이 아니라 「말법의 본문」이다.
「한결같이 순원」이란 무엇인가. 강의는 사람과 법에 각각 약하여 설명한다. 사람에 약하면, 재세 본문의 교주는 구원실성의 부처로서 시성정각의 방편을 띠지 않고, 말법 본문의 교주는 구원원초의 명자의 범부로서 색상장엄(色相莊嚴)의 방편을 띠지 않는다. 이처럼 재세의 교주도 말법의 교주도 함께 방편을 띠지 않는 즉신성불의 불신이므로 「한결같이 순원」이다. 법에 약하면, 재세 본문이 설한 것은 십계 구원의 삼천으로서 본무금유의 방편을 띠지 않고, 말법 본문이 설한 것은 다른 행을 섞지 않는(不渡餘行) 묘법으로서 숙탈의 방편을 띠지 않는다.
이렇게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본문은 일왕 보면 똑같이 순원하여 함께 완전무결한 교법이다. 그러나 재왕 보면 그 체가 다르다. 왜 이렇게 일왕 · 재왕으로 나누는가. 먼저 일왕 이름이 같음을 보이는 것은 재왕 체가 다름을 보이기 위해서다. 강의는 『법화현의』 권2의 예를 든다. 천태는 이전의 원교와 법화의 원교의 차이를 보이기 위해 「이 묘와 저 묘는 묘의 뜻이 다르지 않다. 다만 방편을 띠었느냐 띠지 않았느냐로 다름을 삼을 뿐이다」라고 했다. 같은 원교라는 이름이지만 방편을 띠느냐 띠지 않느냐로 이전의 원과 법화의 원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같은 「순원」이라는 이름 아래 체의 다름이 감추어져 있다.
「저것은 탈, 이것은 종 · 저것은 일품이반,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 — 재왕은 체가 다르다
두 구절의 뜻
「저것은 탈이요 이것은 종이며, 저것은 일품이반이요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이니라」는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본문의 체가 다름을 보인다. 강의는 두 구절을 나누어 읽는다.
「저것은 탈, 이것은 종」 — 저것은 탈익의 부처, 이것은 하종익의 부처로, 설하는 교주의 차이다. 여기에는 탈은 열등하고 종은 뛰어나다는 승렬의 뜻이 담겨 있다.
「저것은 일품이반,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 — 설해진 법체가 일품이반과 제목의 다섯 자로 다르다. 여기에는 또 화도의 시종도 담겨 있다.
이로써 22장 · 23장에서 다섯 마디로 견주어 온 교주와 법체가, 다섯째 삼단에서 최종적으로 「탈 대 종」, 「일품이반 대 제목의 다섯 자」로 정리된다. 24장에서 「일품이반 밖은 소 · 사 · 미 · 부」라 하여 정종분으로 세웠던 일품이반이, 여기서는 「저것은 일품이반」이라 하여 재세의 쪽으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본 대로 24장의 일품이반은 대성인 배립의 광개근현원 일품이반이며 그 본체는 「수량품의 간심인 묘법의 다섯 자」다. 25장의 「저것은 일품이반」은 재세 탈익의 경문으로서의 일품이반이다. 이름은 같고 뜻은 다르다는 24장의 논점이 여기서 마지막으로 매듭지어진다.
「본동익이」에 대한 비판
그런데 옛 학자들은 본문은 부처도 법도 같은 체이고 이익에 탈과 하종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日辰도 「본동익이(本同益異)」, 곧 근본은 같고 이익만 다르다고 했다. 강의는 이런 뜻이 큰 방법의 시작이며 종탈을 혼란시키는 사의(邪義)의 근원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문상을 자세히 하고, 종탈을 자세히 하고, 본존을 자세히 하여 사의를 꺾고 정의를 보이겠다며 논의를 이어 간다. 이 편은 그 가운데 강의가 실제로 전개하는 본존론을 강의의 순서대로 옮긴다.
색상장엄의 불상을 말법의 본존으로 삼지 않는 까닭
강의는 말법 금시에는 색상장엄의 불상을 본존으로 우러러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그 까닭으로 첫째 도리, 둘째 삼덕의 인연이 얕음, 셋째 인법의 승렬을 든다.
첫째 도리. 석존은 탈익의 교주다. 석존이 구원 오백진점겁의 옛날에 하종하고, 그 중생은 대통불에 결연하여, 그 근기가 무르익어 부처의 출세를 감응하자, 석존은 근본으로부터 자취를 드리워 인도의 왕궁에 태어나 출가하여 나무 아래 앉아 성도하고, 세간의 정에 따라 색상을 장엄하고 이전 · 적문을 설해 다시 그 기연을 익히며, 이어 본문수량을 설해 하종 결연한 중생을 모두 탈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색상장엄의 존형은 재세 탈익의 교주이지 말법 하종의 본존이 아니다.
둘째 삼덕의 인연. 재세는 본이유선의 근기이므로 색상장엄의 부처와 인연이 가장 깊다. 지금 말법은 본미유선(本未有善)의 중생이므로 색상장엄의 부처와는 삼덕의 인연이 얕다. 그러므로 말법 금시 우리의 본존이 되지 못한다.
셋째 인법의 승렬. 「본존문답초」에 「본존이란 뛰어난 것을 써야 한다」고 하셨고, 천태는 「법은 성인의 스승이니, 낳고 기르고 이루고 영화롭게 하는 데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으며, 묘락은 「네 가지가 같지 않으나 법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했다. 이처럼 색상장엄의 부처는 열등하고 법이 뛰어나므로 색상장엄의 부처를 본존으로 삼을 수 없다.
이어 강의는 문증을 든다. 법화경 법사품에 「다시 사리를 안치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천태는 「다시 생신의 사리를 안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묘락은 「생신의 전신 · 쇄신은 석가 · 다보와 같다」고 했고, 『법화삼매(참의)』에는 「반드시 형상 · 사리를 안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본존문답초」의 문답을 든다.
汝云何ぞ釈迦を以て本尊とせずして法華経の題目を本尊とするや
그대는 어찌하여 석가를 본존으로 삼지 않고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는가.
이 물음에 대성인은 「위에 든 경 · 석을 보시라. 나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다. 석존과 천태는 법화경을 본존으로 정하셨느니라」라고 답하셨다. 또 강의는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에서, 다섯 노승이 한결같이 본존으로는 석가여래를 숭상해야 한다고 한 데 대해 닛코상인이 「성인께서 세우신 법문에서는 결코 그림 · 나무로 만든 부처 · 보살을 본존으로 삼지 않으며, 오로지 어서의 뜻에 맡겨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본존으로 삼아야 하니 곧 친필의 본존이 이것이니라」라고 하신 대목을 든다. 이처럼 석가의 불상을 본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증문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본존으로 삼는 까닭
이어 강의는 종조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본존으로 삼아야 함을 보인다. 먼저 도리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 하종의 교주이기 때문이다. 말법은 본미유선의 중생이다. 그러므로 불경보살이 대승으로 강하게 독고(毒鼓)를 울렸듯이 니치렌 대성인이 묘법의 다섯 자로 하종해야 할 때다. 그래서 「성인지삼세사」에 「니치렌은 법화경의 행자니라. 불경의 자취를 이어받기 때문이니라(日蓮は是れ法華経の行者なり不軽の跡を紹継するの故に)」(974쪽)라고 하셨다.
둘째, 삼덕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개목초」에 「니치렌은 일본국 모든 사람의 주 · 사 · 부모니라(日蓮は日本国の諸人にしうし父母なり)」(237쪽)라고 하셨다. 『어의구전』에 「자수용신이란 일념삼천이니라」(759쪽), 전교대사는 「일념삼천이 곧 자수용신」, 묘락대사는 「본지의 자행은 오직 원과 합한다」고 했으며, 「제법실상초」에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1358쪽)라고 하셨다.
다음 문증으로 「백육개초」의 「우리들의 내증의 수량품이란 탈익수량의 문저의 본인묘의 일이니라. 그 교주는 아무개(某)니라」(863쪽)와, 「개목초」의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이 셋 있으니 이른바 주 · 사 · 친이니라」(186쪽) 및 앞의 237쪽 말씀을 들고, 그 밖의 예문은 무수하므로 줄인다고 한다.
我等が内証の寿量品とは脱益寿量の文底の本因妙の事なり、其の教主は某なり
우리들의 내증의 수량품이란 탈익수량의 문저의 본인묘의 일이니라. 그 교주는 아무개니라.
석가불 조립설에 대한 일곱 가지 논파
이어 강의는 어서의 한 구절을 곡해하여 석가불 조립의 근거로 삼는 이들이 있다며, 미노부산 등의 부류가 내세우는 근거를 일곱 가지로 들어 한꺼번에 논파한다.
첫째, 「관심의 본존초」의 「사행의 남묘호렌게쿄 다섯 자와 아울러 본문의 본존은 아직 널리 이를 행하지 않았다」는 경문의 「본문의 본존」 네 글자를 색상장엄의 불상으로 보는 이가 있다.
事行の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並びに本門の本尊未だ広く之を行ぜず
사행(事行)의 남묘호렌게쿄의 다섯 자와 아울러 본문의 본존은 아직 널리 이를 행하지 않았느니라.
강의는 이것이 이 어서의 대의에 어두운 것이라고 한다. 이 경문의 뜻은 남악 · 천태가 다만 이구(理具)를 논했을 뿐 관심 · 본존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행의 남묘호렌게쿄는 곧 관심이고 본문의 본존은 곧 본존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본존」 네 글자는 바로 이 어서에서 밝히는 대성인 건립의 대어본존이니 어찌 색상장엄의 부처라 하겠느냐는 것이다(제7편에서 다시 다룬다).
둘째, 「삼대비법품승사」의 다음 경문의 「석존」을 색상장엄의 불상으로 헤매는 이가 있다.
寿量品に建立する所の本尊は五百塵点の当初より以来此土有縁深厚本有無作三身の教主釈尊是れなり
수량품에 건립하는 바의 본존은 오백진점의 당초부터 이래 이 땅에 인연이 깊고 두터운 본유무작삼신의 교주 석존이 이것이니라.
강의는 이 경문의 뜻이 「나의 내증의 수량품에 건립하는 본존은 곧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 본인묘의 교주 석존이 이것이다」라는 석존과 같다고 본다. 「오백진점겁의 당초」는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의 「오백진점겁의 당초 범부로 계실 때(五百塵点劫の当初・凡夫にて御坐せし時)」(568쪽)의 당초와 같은 뜻으로, 곧 구원원초를 말한다. 구원원초의 본유무작삼신은 곧 니치렌 대성인이시며 결코 색상장엄의 석가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보은초」의 다음 경문에 헤매는 이가 있다.
日本・乃至一閻浮提・一同に本門の教主釈尊を本尊とすべし
일본 내지 일염부제가 한결같이 본문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이 문장은 이어서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밖의 제불, 아울러 상행 등 사보살은 협사가 되어야 하느니라」라고 한다. 강의는 이 문장이 인법일체의 깊은 뜻을 드러내는 명문이라고 본다. 처음에 사람에 약하여 「교주 석존」이라 표하고, 이어 법본존에 약하여 「이른바 보탑 안의 석가 · 다보」 등이라 풀이한 것이다. 곧 「이른바」 이하의 풀이 문장은 대어본존의 설명으로, 이 어서에서 밝히는 십계호구 일념삼천의 대어본존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표하는 문장의 「본문의 교주 석존」은 곧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 본인묘의 교주 석존이며, 이 본인묘의 교주 석존의 당체는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묘법 다섯 자이므로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인도에 응탄한 석가는 보탑 안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아울러 생각하면 분명해진다고 강의는 덧붙인다.
넷째, 그렇다면 본인묘의 교주 석존을 본존으로 삼아야지 어찌 니치렌 대성인이 본존이냐며, 본인묘의 교주 석존과 니치렌 대성인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강의는 본인묘의 교주 석존이 곧 니치렌 대성인이시라고 답하며 앞의 「백육개초」 863쪽 경문과 「보은초」의 다음 말씀을 든다.
日蓮が慈悲曠大ならば南無妙法蓮華経は万年の外・未来までもながるべし、日本国の一切衆生の盲目をひらける功徳あり、無間地獄の道をふさぎぬ
니치렌의 자비가 광대하다면 남묘호렌게쿄는 만년 밖 미래까지도 흐를 것이니라. 일본국 일체중생의 눈먼 눈을 뜨게 한 공덕이 있고, 무간지옥의 길을 막았느니라.
강의는 이것이 삼덕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므로 본존으로 숭상한다고 본다. 그리고 교주 석존이라는 이름은 일대에 통하지만 그 체에는 장교의 석존 · 통교의 석존 · 별교의 석존 · 적문의 석존 · 본문의 석존 · 문저의 석존이라는 여섯 가지가 있으며, 「이름은 같고 체는 다르다」는 전해 오는 법문이 이것이고, 여섯째 문저의 석존이 곧 니치렌 대성인이시라고 강의는 말한다.
다섯째,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 · 「니치겐뇨조립석가불공양사」 · 「마마석가불어공양축장」 등에서 석가불 조립을 찬탄하신 것을 근거로 색상장엄의 석존 조립이 대성인의 뜻이라고 오해하는 이가 있다. 강의는 여기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답한다. 첫째, 한 근기 한 인연을 위한 것으로, 상대에 따라 일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며 이 불상들은 일체불(一體佛)이다. 닛코상인은 「오인소파초」에서 「한 몸의 형상이 어찌 두타(頭陀)의 응신이 아니겠는가(一躰の形像豈頭陀の応身に非ずや)」(1614쪽)라고 파절하셨다. 둘째, 아미타불 조립에 대해 허락하신 것이다. 온 일본이 아미타상을 세워 믿던 때에 석가불을 조립하는 것은 권불을 버리고 실불인 석가로 돌아가 법화경에 귀의하는 첫걸음이므로 칭찬하셨다. 셋째, 내증의 관견에 약한 것이다. 대성인의 내증에서는 이 석가의 일체상이 곧 기심의 일념삼천 자수용신의 본불이므로 쓰셨다는 것이다. 또 「창법화제목초」에는 다음 말씀이 있지만, 이것은 사도 이전의 어서라고 강의는 지적한다.
本尊は法華経八巻一巻一品或は題目を書いて本尊と定む可しと法師品並に神力品に見えたり
본존은 법화경 팔 권 · 한 권 · 한 품 혹은 제목을 써서 본존으로 정해야 한다고 법사품과 신력품에 보이느니라.
이 문장은 이어서 「또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석가여래 · 다보불을 그리거나 만들어 법화경의 좌우에 세워야 한다」고 한다.
여섯째, 「보경법중사」의 「일염부제 안에 법화경 수량품의 석가불의 형상을 그리고 만든 당탑은 아직 없다(一閻浮提の内に法華経の寿量品の釈迦仏の形像を・かきつくれる堂塔いまだ候はず)」(1475쪽)라는 문장의 석가불을 색상장엄의 불상으로 보는 이가 있다. 강의는 이 문장도 인법체일의 깊은 뜻을 나타낸다고 본다. 하종의 법화경 · 나의 내증의 수량품의 석가불의 모습을 문자로 쓰면 곧 대만다라가 되고, 나무나 그림으로 만들면 니치렌 대성인의 모습이 된다. 그래서 「그리고 만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어서의 첫머리에는 사람은 가볍고 법은 무겁다(人輕法重)는 내용이 설해져 있어 색상장엄의 사람이 법보다 열등함이 분명하다고 강의는 덧붙인다.
일곱째, 「본존문답초」에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왜 니치렌 대성인의 어영상을 조립하는가에 대해 강의는 한마디 덧붙인다.
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
법화경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법화경의 제목이란 니치렌 대성인의 일이며, 니치렌 대성인의 당체는 곧 법화경의 제목이다. 「제법실상초」에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라 해도 용(用)의 부처니라.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1358쪽)라고 하셨고, 이 점은 니치칸 상인이 「말법상응초」에서 자세히 설하셨다고 강의는 말한다. 다만 대성인의 상을 조립한다 해도 그 안에 일염부제 총여(總與)의 대만다라를 모시지 않으면 사람에게 혼이 없는 것과 같아 불상이라 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대성인의 상을 단지 모습으로만 새긴 것은 안치해서는 안 된다고 강의는 맺는다.
이 절은 강의가 「저것은 탈, 이것은 종」의 체이(體異)를 밝히며 전개한 본존론을 강의의 순서대로 옮긴 것이다. 강의가 인용한 어서 가운데 일부는 本文을 확인하지 못한 2차 인용이다. 본존의 상모와 배치는 이 편의 도표에서 다루지 않는다.
「다만 제목의 다섯 자」라는 마지막 말은 오중삼단의 다섯 겹이 좁혀 온 끝이다. 일대 오십 년 → 법화 열 권 → 적문 여덟 품 → 본문 일품이반 → 제목의 다섯 자. 정종분은 겹을 거듭할수록 좁아지고, 서분과 유통분은 넓어져 시방삼세의 모든 경교를 품는다. 가장 좁은 정종분이 가장 넓은 서분 · 유통분을 거느린다는 것, 이것이 오중삼단이 보여 주는 문저하종의 본존의 「지위」다.
이 편을 맺으며
제5편의 다섯 장은 하나의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객은 「이천 년 동안 아무도 세우지 않은 본존」이라는 말에 놀랐다. 대성인은 그 본존이 어디에 서는지를 보이기 위해 석존 일대의 경을 다섯 번 거듭 서 · 정 · 유통으로 나누셨다.
첫째와 둘째 겹(21장)은 큰 틀이다. 오십 년 설법 전체를 한 경으로 묶으면 법화 열 권이 정종분이 되고, 그 열 권을 한 경으로 묶으면 방편품부터 분별공덕품 전반까지 십오 품 반이 정종분이 된다. 강의는 이 둘을 「일왕 총의 삼단」이라 하여 뒤의 세 겹을 드러내기 위한 마련으로 보았다.
셋째 겹(22장)은 적문이다. 교주는 시성정각의 부처, 법은 본무금유의 백계천여이지만, 이전과 견주면 이금당을 넘어선 난신난해의 정법이다. 대통 하종을 받은 중생은 세 부류로 나뉘어 그 종자를 깨달아 가는데, 본문과 견주면 이 전체가 「숙」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 겹(23장)은 본문이다. 교주는 구원실성의 부처, 법은 십계 구원 · 국토세간을 갖춘 사의 일념삼천으로 적문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문저와 견주면 그 차이도 죽막 한 겹에 지나지 않는다. 강의는 니치칸 상인을 따라 이 「죽막」에 대한 열일곱 가지 이설을 물리치고, 「견주는 대상에 따라 차이가 달라진다」는 소대의 원리로 이 구절을 풀었다.
다섯째 겹(24 · 25장)에서 비로소 문저하종삼단이 선다. 과거 대통불의 법화경부터 시방삼세 제불의 미진의 경경까지가 모두 「수량품의 서분」이 되고, 문상의 적문 · 본문은 모두 말법의 유통분이 된다. 정종분은 대성인이 동집생의부터 새로 세우신 광개근현원의 일품이반, 그 간심인 「다만 제목의 다섯 자」다. 같은 「일품이반」이라는 이름이 천태의 배립에서는 재세 탈익의 정종분이고 대성인의 배립에서는 말법 하종의 정종분이라는 것, 같은 적문 · 본문이 문저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서분의 그릇됨도 되고 유통분의 옳음도 된다는 것 — 이 두 가지가 이 편의 열쇠였다. 그리고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한결같이 순원」이라 하여 이름의 같음을 먼저 보이신 뒤, 「저것은 탈, 이것은 종 · 저것은 일품이반, 이것은 다만 제목의 다섯 자」라 하여 체의 다름을 밝히심으로써 오중삼단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대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객은 「그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다음 제6편(제26~28장)에서 대성인은 다섯째 삼단의 서 · 정 · 유통이 법화경 본문의 어느 경문에 근거하는지를 차례로 보이신다. 용출품에서 타방의 보살들의 홍통 청원을 「그만두라」고 물리치신 장면(서분), 미륵의 의청과 수량품의 양의(良醫) 비유(정종분), 신력품의 결요부촉(유통분)이 그것이다. 오중삼단이 본존의 「지위」를 정했다면, 제6편은 그 지위를 경문으로 증명하는 편이다.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관심의 본존초」 · 「개목초」 · 「법화취요초」 · 「본인묘초」 · 「백육개초」 · 『어의구전』 · 「십법계사」 · 「시모야마어소식」 · 「선시초」 · 「보은초」 · 「본존문답초」 · 「소야입도전허어서」 외 (창가학회판 『日蓮大聖人御書全集』 / 한국어판 화광신문 어서)
- 『묘법연화경』 (구마라집 역), T9 no.262 — 방편품 · 화성유품 · 오백제자수기품 · 법사품 · 견보탑품 · 권지품 · 안락행품 · 종지용출품 · 여래수량품 · 분별공덕품
- 『무량의경』 T9 no.276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대반열반경』 T12 no.374
- 천태대사 지의,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묘락대사 담연, 『법화현의석첨』 T33 no.1717 · 『법화문구기』 T34 no.1719
- 니치칸 상인, 「관심본존초 문단」 · 「삼중비전초」 · 「말법상응초」 (강의를 통해 참조)
연구
- 창가학회 교학부, 『世界広布の翼を広げて 教学研鑽のために — 観心本尊抄』 제2판, 聖教新聞社, 2024
- 茂田井教亨, 『観心本尊抄研究序説 — 宗学体系化への試み』, 立正大学 학위논문, 198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