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본존초」는 제목 그대로 「관심」과 「본존」 두 축으로 짜여 있다. 앞의 세 편이 기심의 십계와 수지즉관심을 밝혀 「관심」의 축을 세웠다면, 이 제4편의 네 장은 마침내 「본존」의 축으로 돌아선다. 대성인은 석존 일대 오십여 년의 국토와 교주를 차례로 들어 올려, 무상하게 변해 가는 본존과 상주하는 본존을 가리고, 끝내 재세에도 정법 · 상법 이천 년에도 없던 본존이 말법에 비로소 출현한다고 선언하신다. 강의는 이 흐름을 권적숙익(權迹熟益) · 본문탈익(本門脫益) · 문저하종(文底下種)의 세 본존으로 정리한다. 17장은 이전 · 적문의 무상한 국토를, 18장은 수량품이 밝힌 상주의 정토와 재세의 관심을, 19장은 지용보살에게 부촉된 남묘호렌게쿄의 오자와 그 본존의 위체(爲體)를, 20장은 그 본존을 거듭 묻는 대고중의 질문을 담는다. 이 편을 읽고 나면 「관심의 본존」이라는 제목의 뒷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비로소 또렷해진다.
본존(本尊)이란 「근본으로 존경하는 대상」이다.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에 따라 수행의 방향도, 얻는 이익도 달라진다. 그래서 대성인은 본존을 논할 때 언제나 국토와 교주와 협사(脇士)를 함께 따지신다. 어떤 국토에 머무는 부처인가, 그 부처는 언제 성불한 부처인가, 그 곁에는 누가 모시고 있는가. 이 세 물음에 답하면 그 본존이 일시적인 방편인지, 상주하는 진실인지가 드러난다. 17~19장은 바로 이 세 물음을 세 겹으로 되풀이하는 구조다.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관심본존초 문단」을 따라 이 네 장을 읽는다. 17장은 숙익(熟益) — 이전 · 적문에서 중생의 근기를 익혀 온 단계의 본존이고, 18장은 탈익(脫益) — 수량품에서 재세의 중생을 해탈시킨 본존이며, 19장은 하종(下種) — 말법의 중생에게 처음 성불의 씨앗을 심는 본존이다. 숙 · 탈 · 하종은 씨앗을 심고(下種) 기르고(熟) 거두는(脫) 농사의 비유에서 온 말로, 제3편에서 본 수지즉관심이 「무엇을 받아 지니는가」를 물었다면 이 편은 「그 받아 지니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 편에는 본존을 둘러싼 날 선 논쟁도 실려 있다. 19장의 「팔품을 설하여」와 「이 불상」이라는 구절은 대성인 멸후 여러 문류(門流)가 저마다 다른 본존을 세우는 근거가 되었고, 강의는 그 해석들을 하나하나 들어 논파한다. 여기서는 강의의 논지를 그대로 옮기되, 출처를 밝혀 「강의는 …라고 본다」는 방식으로 싣는다.
이 편의 장
| 구분 | 권적숙익(權迹熟益)의 본존 | 본문탈익(本門脫益)의 본존 | 문저하종(文底下種)의 본존 |
|---|---|---|---|
| 장 | 제17장 | 제18장 | 제19장 |
| 국토 | 화장 · 밀엄 · 삼변 · 사견의 삼토 · 사토 — 성겁 위의 무상한 국토 | 본시의 사바세계 — 삼재를 여의고 사겁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 | 본사의 사바 — 강의: 자수용신이 머무는 적광토 |
| 교주 | 이전 · 적문의 시성정각의 석존과 소변의 제불 | 수량품의 구원실성의 석존 — 과거에도 멸하지 않고 미래에도 생하지 않는다 | 강의: 구원원초 자수용신 — 인법체일 |
| 이익 | 숙(熟) — 근기를 익힘 | 탈(脫) — 재세 중생의 해탈 | 하종(下種) — 말법 중생에게 성불의 씨앗을 심음 |
| 핵심 구절 | 能変の教主涅槃に入りぬれば所変の諸仏随つて滅尽す능변의 교주가 열반에 드시면 소변의 제불도 따라서 멸진하느니라 | 所化以て同体なり소화도 또한 동체이니라 | 末法に来入して始めて此の仏像出現せしむ可きか말법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 불상이 출현하게 될 것인가 |
| 판정(강의) | 무상변화의 본존은 유명무실 | 재세의 관심 — 말법에서 보면 「교상의 적문」 | 지용보살에게만 부촉, 재세 · 정상 이천 년에 없고 말법에 비로소 출현 |
본문
夫れ始め寂滅道場・華蔵世界より沙羅林に終るまで五十余年の間・華蔵・密厳・三変・四見等の三土四土は皆成劫の上の無常の土に変化する所の方便・実報・寂光・安養・浄瑠璃・密厳等なり 能変の教主涅槃に入りぬれば所変の諸仏随つて滅尽す土も又以て是くの如し。
무릇 처음 적멸도량(寂滅道場) · 화장세계(華藏世界)로부터 사라림(沙羅林)에서 마치기까지 오십여 년 동안 설하신 화장 · 밀엄(密嚴) · 삼변(三變) · 사견(四見) 등의 삼토(三土) · 사토(四土)는, 모두 성겁(成劫) 위의 무상한 국토에서 변화하여 나타난 방편토 · 실보토 · 적광토 · 안양(安養) · 정유리(淨瑠璃) · 밀엄 등이니라. 능변(能變)의 교주가 열반에 드시면 소변(所變)의 제불도 따라서 멸진하나니, 국토 또한 이와 같으니라.
어구 풀이
- 寂滅道場적멸도량
-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자리. 화엄경은 이 성도 직후의 설법으로 여겨지므로, 「적멸도량 · 화장세계로부터」는 일대 설법의 맨 처음을 가리킨다.
- 沙羅林사라림
-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숲. 석존이 열반경을 설하고 입멸한 곳으로, 일대 설법의 맨 끝을 가리킨다. 처음과 끝을 함께 들어 「오십여 년」 전체를 한꺼번에 묶는 표현이다.
- 華蔵世界화장세계
- 연화장세계의 준말. 화엄경 권8에서 보현보살이 설한 비로자나(노사나)불의 세계로, 노사나불이 미진수의 수행으로 깨끗이 한 국토다. 맨 아래 풍륜 위에 향수해가 있고 그 가운데서 하나의 큰 연꽃이 피어나, 그 연꽃 안에 머금어진 세계라 한다. 스무 겹으로 포개진 중앙 세계를 중심으로 백열한 개의 세계가 그물처럼 둘러 있고, 그 하나하나에 부처가 출현하고 중생이 가득하다고 한다. 화엄장엄세계해라고도 한다.
- 密厳밀엄
- 밀엄세계 · 밀엄정토. 대승밀엄경에 설해진, 대일여래가 머무는 세계다. 신 · 구 · 의 삼밀(三密)로 장엄한 국토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원정기(院政期)에 진언종의 가쿠반(覺鑁)이 정토 사상을 밀교적으로 해석하면서 특히 이 말을 썼다.
- 三変삼변
- 삼변토전(三變土田)의 준말. 견보탑품 제11에서 다보여래의 보탑을 열기 위해 시방 분신의 제불을 모을 때, 석존이 세 차례 국토를 깨끗이 한 일. 처음에는 백호의 빛을 놓아 사바세계를 정화하고 법화경 청중이 아닌 인 · 천을 다른 국토로 옮겼으나 분신불이 다 들어오지 못하자, 다시 팔방의 이백만억 나유타 아승기 세계를 두 차례 더 정화하여 「시방세계 통일불토」의 모습을 나타냈다.
- 四見사견
- 열반경에 설한다. 같은 사라쌍수의 숲이 보는 이의 근기와 경애에 따라 범성동거토 · 방편유여토 · 실보무장애토 · 상적광토의 네 가지로 달리 보이는 것.
- 三土・四土삼토 · 사토
- 삼토는 「삼변의 국토」로 동거 · 방편 · 실보이고, 사토는 「사견의 국토」로 동거 · 방편 · 실보 · 적광이다.
- 成劫の上の無常の土성겁 위의 무상한 국토
- 성 · 주 · 괴 · 공의 사겁(四劫)을 따라 생겨나고 머물다 무너져 사라지는 국토. 아무리 장엄하게 설해진 정토라도 성겁에서 비롯한 이상 결국 괴겁 · 공겁을 피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 方便・実報・寂光방편 · 실보 · 적광
- 사토 가운데 동거토를 뺀 세 국토. 방편유여토는 견혹 · 사혹을 끊었으나 진사혹 · 무명혹이 남은 이승 · 보살의 거처, 실보무장애토는 별교 초지 이상 · 원교 초주 이상 등각까지의 보살이 무명을 조금씩 끊어 머무는 국토, 상적광토는 부처의 국토로 상(常)은 법신, 적(寂)은 해탈, 광(光)은 반야 지혜가 밝음을 나타낸다.
- 安養안양
- 안양세계. 범어 수카바티(sukhāvatī)의 번역으로, 사바세계 서방에 있다는 아미타불의 정토. 극락이라고도 번역한다. 왕생한 이가 마음을 편안히 하고(安) 몸을 기른다(養) 하여 붙은 이름이다.
- 浄瑠璃정유리
- 정유리세계. 사바세계 동방에 있다는 약사여래의 정토. 칠보의 하나인 감청색 유리로 대지를 삼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며, 약사여래본원경 등에 병을 없애고 모든 감관을 갖추게 하는 정토로 설해진다.
- 能変の教主・所変の諸仏능변의 교주 · 소변의 제불
- 「능변」은 변화하여 나타내는 주체, 「소변」은 그렇게 나타난 대상이다. 인도에 출현한 석존이 능변의 교주이고, 그가 경마다 설해 보인 방편토의 승응신 · 실보토의 타수용신 · 적광토의 법신 · 안양의 아미타 · 정유리의 약사 · 밀엄의 대일 등이 소변의 제불이다.
국토로 본존을 가리는 까닭
이 장은 「본존」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는다. 대성인은 오직 국토가 무상하게 변한다는 사실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강의는 이 장의 제목을 「권적숙익의 본존을 밝히다」라고 붙인다. 왜 그런가.
강의의 답은 간명하다. 숙익의 본존, 곧 이전과 적문에서 설해진 교주의 모습은 이미 제11장 「교주에 약하여 묻다」에서 자세히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 장에서 대고중은 석존을 「삼혹을 이미 끊은 부처」로, 행차할 때 범천이 왼편에 있고 제석이 오른편에 모시며 사중 팔부가 뒤따르고 금강신이 앞장서는 부처로 묘사했다. 또 화엄의 대 위의 노사나, 아함의 삼십사심 단결성도의 부처, 방등 · 반야의 천불, 대일경 · 금강정경의 천이백여 존, 적문 보탑품의 사토의 색신, 열반경에서 장육 · 소신 · 대신 · 노사나 · 허공과 같은 몸으로 보이는 네 가지 몸까지, 이전 · 적문의 교주를 남김없이 늘어놓았다(0242:14~0243:10). 교주의 신상(身相)과 협사가 이미 거기서 다 드러났으므로, 여기서는 그 교주가 머무는 국토만을 들어 「무상하게 변화하는 본존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다(有名無實)」는 결론을 보이신 것이라고 강의는 해설한다.
이 「유명무실」이라는 말은 제15장 끝에서 이미 한 번 나왔다. 대성인은 화엄 · 진언 등 여러 종이 자기 경전에 일념삼천의 법문을 덧붙였음을 지적한 뒤, 「일념삼천의 불종(佛種)이 아니면 유정의 성불도, 목화이상(木畵二像)의 본존도 유명무실하다」고 결론지으셨다. 그러므로 17장은 15장의 그 판정을 국토의 측면에서 다시 확인하는 자리다. 본존이 본존이려면 그 본존이 머무는 국토와 그 본존을 이루는 부처가 상주해야 한다. 국토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선 부처도, 그 부처를 새긴 상(像)도 함께 무너진다.
강의는 17장을 「무상변화의 본존은 유명무실」이라는 한 마디로 읽는다. 교주의 모습은 11장에서 이미 보였으므로, 여기서는 국토의 무상만으로 이전 · 적문의 본존을 가린다.
화장 · 밀엄 · 삼변 · 사견 — 오십여 년의 정토들
본문은 일대 오십여 년의 정토를 네 이름으로 묶는다. 이 넷은 각기 다른 경전의 다른 국토관을 대표한다.
첫째, 화장세계는 화엄경의 국토다. 노사나불이 한량없는 수행으로 깨끗이 한 이 세계는 연꽃 한 송이에 우주가 담긴 장대한 그림이다. 그러나 그 장엄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은 「수행하여 이룬」 국토, 곧 인(因)을 쌓아 과(果)를 얻은 국토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다. 화엄의 노사나는 석존이 성도 직후 보인 보신의 모습이며, 석존이라는 능변의 교주를 떠나 따로 있지 않다.
둘째, 밀엄은 대일여래의 국토다. 진언 밀교는 대일여래를 석존보다 높은 법신불로 세우고 그 국토를 밀엄정토라 했다. 그러나 대성인의 판정에서 대일여래 역시 석존 일대 설법 안에서 방편으로 설해진 「소변의 제불」의 하나다. 제15장에서 대성인이 「대일 · 금강정 등의 천이백 존은 다만 그 근인근과(近因近果)를 연설할 뿐 그 원인과(遠因果)를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신 판정이 여기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셋째, 삼변은 법화경 적문 보탑품의 국토다. 석존은 분신불을 모으기 위해 세 번에 걸쳐 국토를 정화했다. 이것은 법화경 안에서 설해진 정토이므로 앞의 둘보다 한층 깊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적문이다. 석존이 시성정각(始成正覺) — 이번 생에 처음 성불한 부처로 머물러 있는 한, 그 부처가 정화한 국토 역시 그 부처의 입멸과 함께 사라지는 국토다. 삼변토전이 일시적으로 「시방세계 통일불토」를 나타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본래의 상태가 아니라 신통으로 일으킨 변화였음을 말해 준다.
넷째, 사견은 열반경의 국토다. 같은 사라쌍수 숲이 범부에게는 동거토로, 이승에게는 방편토로, 보살에게는 실보토로, 부처에게는 적광토로 보인다는 이 가르침은, 국토가 보는 이의 경애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에서 18장의 「사바즉적광」 사상에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열반경의 사토는 어디까지나 네 국토를 계위에 따라 나누어 늘어놓은 것이어서, 범부가 사는 동거토와 부처의 적광토 사이에는 여전히 넘기 어려운 간격이 남는다.
이 넷을 들어 대성인은 「삼토 · 사토」라 하시고, 그것이 모두 「성겁 위의 무상한 국토」에서 변화한 것이라 판정하신다. 現代語訳은 이 대목을 「모두 성 · 주 · 괴 · 공의 법칙을 따라 변해 가는 무상한 동거토이며, 이전 · 적문에서 설한 국토는 삼계 동거의 예토」라고 풀어, 아무리 이름이 방편토 · 실보토 · 적광토라 해도 그 실체는 무상한 동거의 예토일 뿐임을 분명히 한다.
능변의 교주와 소변의 제불
본문의 뒷구절 「능변의 교주가 열반에 드시면 소변의 제불도 따라서 멸진하나니, 국토 또한 이와 같으니라」는 이 장의 결론이다.
능변의 교주는 인도에 출현한 석존이다. 그가 화엄을 설할 때는 노사나의 모습으로, 아함을 설할 때는 장육의 비구 모습으로, 방등 · 반야에서는 천불로, 정토경에서는 아미타불의 국토를 가리키며, 약사경에서는 약사여래의 국토를 가리키며 설했다. 이렇게 하여 나타난 방편토의 승응신, 실보토의 타수용신, 적광토의 법신, 안양의 아미타, 정유리의 약사, 밀엄의 대일이 모두 소변의 제불이다. 그러므로 근본인 석존이 열반에 들면, 석존이 설해 보인 그 모든 부처들도 함께 사라진다. 뿌리가 마르면 가지와 잎도 마르는 것과 같다.
국토도 마찬가지다. 부처가 머물러야 정토이지, 부처가 떠난 국토는 정토가 아니다. 교주가 시성정각의 부처, 곧 이번 생에 처음 성불하여 팔십 세에 입멸하는 부처라면 그 부처가 머문 국토도 처음과 끝이 있는 국토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토도 또한 이와 같다」는 구절의 뜻이다. 부처의 무상과 국토의 무상은 함께 간다. 이 「부처와 국토가 함께 간다」는 원리를 뒤집어 놓으면 바로 18장이 된다. 부처가 상주하면 국토도 상주한다.
현대의 독자는 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를 믿는 이들은 그 부처가 석존과 별개로 서방 · 동방에 실재한다고 믿는데, 그것이 왜 석존의 입멸과 함께 사라지는가. 대성인의 논리는 경전 자체에 근거한다. 아미타불도 약사여래도 석존이 설한 경전을 통해서만 알려진 부처다. 그 부처를 설한 경전의 설자(說者)가 석존인 이상, 그 부처는 석존의 설법 안에서 방편으로 보여진 부처다. 그리고 그 설법이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四十餘年未顯眞實)」고 무량의경에서 석존 스스로 밝힌 이전의 가르침이라면, 그 부처들은 진실의 본존이 될 수 없다.
사토는 결국 일토 — 총감문초의 판정
語釈은 「방편 · 실보 · 적광」 항목 끝에 「이렇게 나누지만 그 궁극의 뜻은 다음 총감문초에서 보는 바와 같다」며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의 한 대목을 덧붙인다.
寂光をば鏡に譬え同居と方便と実報の三土をば鏡に遷る像に譬う四土も一土なり三身も一仏なり今は此の三身と四土と和合して仏の一体の徳なるを寂光の仏と云う
적광토를 거울에 비유하고 동거 · 방편 · 실보의 삼토를 거울에 비치는 영상에 비유하느니라. 사토도 일토이며 삼신도 일불이니라. 지금 이 삼신과 사토가 화합하여 부처의 한 몸의 덕이 되는 것을 적광의 부처라 하느니라.
이전에서는 네 국토를 계위에 따라 나누었다. 그러나 궁극에서 보면 적광토는 거울이요 나머지 삼토는 그 거울에 비친 그림자다. 그림자는 거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사토가 일토이고 삼신이 일불이라는 이 판정은 18장에서 수량품이 사바세계를 그대로 상주의 정토로 드러낸 것과 이어진다. 17장에서 이전의 국토들이 무상하다고 판정받는 것은 그 국토들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을 따로따로 떼어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견해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거울을 모르고 그림자만 붙잡으면 그림자가 사라질 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제11장(0242:14~0243:10)에서 대고중이 늘어놓은 이전 · 적문의 교주 목록과 이 장의 국토 목록은 짝을 이룬다. 11장이 「누가」를, 17장이 「어디서」를 맡는다. 두 장을 나란히 읽으면 숙익의 본존이 교주와 국토 두 면에서 모두 무상하다는 판정이 완성된다. 11장의 해설은 제3편에 있다.
17장의 판정 — 이전 · 적문의 정토는 이름이 아무리 높아도 성겁에서 비롯한 무상한 국토이며, 능변의 교주 석존이 입멸하면 소변의 제불과 그 국토도 함께 멸한다. 무상한 본존은 유명무실하다.
본문
今本時の娑婆世界は三災を離れ四劫を出でたる常住の浄土なり 仏既に過去にも滅せず未来にも生ぜず所化以て同体なり 此れ即ち己心の三千具足・三種の世間なり 迹門十四品には未だ之を説かず法華経の内に於ても時機未熟の故なるか。
지금 본시(本時)의 사바세계는 삼재(三災)를 여의고 사겁(四劫)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이니라. 부처는 이미 과거에도 멸하지 않고 미래에도 생하지 않으며, 소화(所化)도 또한 부처와 동체(同體)이니라. 이것이 곧 기심(己心)의 삼천구족 · 삼종의 세간이니라. 적문 14품에서는 아직 이것을 설하지 않았으니, 법화경 안에서도 시기(時機)가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구 풀이
- 今지금
- 법화경 본문 수량품을 설하는 때를 가리킨다. 17장의 「오십여 년 동안」과 대비하여, 그 무상한 국토들을 뒤로하고 「지금」 수량품에 이르렀음을 밝히는 말이다.
- 本時본시
- 수량품에서 본인(本因) · 본과(本果) · 본국토(本國土)가 설해지고 구원상주가 밝혀진 때. 語釈은 여기에 「그러나 그 문저의 뜻으로는 말법에 삼대비법의 본존이 건립되는 때를 본시라 한다」고 덧붙인다.
- 三災삼재
- 대삼재와 소삼재가 있다. 소겁의 감겁(減劫) 때 곡귀(기근 등으로 곡식 값이 치솟음) · 병혁(전란) · 역병(전염병)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소삼재라 하며 대집경에 설한다. 대겁 가운데 주겁이 끝나고 괴겁에 들 때 일어나는 화재 · 풍재 · 수재를 대삼재라 한다.
- 四劫사겁
-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 중생이 머무는 주겁(住劫), 무너지는 괴겁(壞劫), 텅 비는 공겁(空劫). 이 넷이 끝없이 순환한다.
- 常住の浄土상주의 정토
- 성 · 주 · 괴 · 공에 좌우되지 않고 늘 머무는 정토. 17장의 「성겁 위의 무상한 국토」와 정반대다.
- 所化以て同体소화이동체
- 「소화」는 부처에게 교화받는 중생. 수량품에서 부처가 상주함이 밝혀지자, 그 부처에게 교화받아 온 제자들 또한 부처와 함께 삼세에 상주하는 존재임이 드러난다. 「삼대비법품승사」도 수량품의 의식을 「소거의 국토는 적광본유의 국토이며, 능거의 교주는 본유무작의 삼신이요, 소화이동체」라고 묘사한다(1021쪽).
- 三種の世間삼종의 세간
- 일념삼천을 이루는 오음(五陰)세간 · 중생세간 · 국토세간. 십계호구의 백계에 십여시를 곱한 천여(千如)에 이 셋을 곱하여 삼천이 된다.
- 時機未熟시기미숙
- 설할 때(時)와 들을 이의 근기(機)가 아직 익지 않았다는 뜻. 적문 14품에서 본국토와 상주의 부처를 설하지 않은 까닭을 시기에 돌리신 말이다.
「時我及衆僧倶出霊鷲山」 — 수량품의 한 구절로 푸는 탈익의 본존
강의는 이 장을 「바로 본문탈익의 본존을 밝히면서, 『此れ即ち己心の三千具足』 등이라 하시어 재세 중생의 관심(觀心)을 밝힌 장」이라고 규정한다. 한 장 안에 본존과 관심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관심의 본존초」라는 제목 자체가 관심과 본존을 한 몸으로 묶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다.
강의는 먼저 탈익의 본존을 수량품 자아게의 한 구절로 풀이한다. 「때에 나와 중승이 함께 영취산에 나오느니라(時我及衆僧倶出霊鷲山)」이다. 강의의 消釈에 따르면 이 구절의 「時(때)」는 곧 본시이고, 「我(나)」는 부처이며, 「衆僧(중승)」은 소화의 제자들이다. 「倶出(함께 나옴)」은 곧 동체로서 스승과 제자가 함께 삼세에 상주함을 뜻하고, 「霊鷲山(영취산)」은 곧 삼재를 여의고 사겁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다. 본문의 네 구 — 본시의 사바세계, 상주의 정토, 과거에도 멸하지 않고 미래에도 생하지 않는 부처, 소화이동체 — 가 자아게 한 구절에 모두 담겨 있는 셈이다.
강의는 여기에 전교대사의 「영산의 보토(寶土)는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는다」는 말을 든다. 영취산이라는 국토가 괴겁의 불길에도 타지 않는다는 이 말은, 본문의 「삼재를 여의고 사겁을 벗어난」이라는 구절과 정확히 같은 뜻이다. 수량품 자아게의 「중생이 겁이 다하여 큰 불에 타는 것을 볼 때에도 나의 이 국토는 안온하여 천인이 늘 가득하다(衆生見劫盡 大火所焼時 我此土安穏 天人常充満)」는 경문이 이 생각의 뿌리다.
어의구전의 두 읽기 — 재세와 말법
그러나 강의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문상(文上) 탈익 수량품의 뜻」이라고 선을 긋는다. 대성인의 「어의구전」을 보면 같은 구절이 전혀 다른 깊이로 읽힌다는 것이다. 강의가 인용하는 「어의구전」의 해당 항목은 두 겹의 읽기를 담고 있다.
時とは感応末法の時なり我とは釈尊・及とは菩薩・聖衆を衆僧と説かれたり倶とは十界なり霊鷲山とは寂光土なり、時に我も及も衆僧も倶に霊鷲山に出ずるなり秘す可し秘す可し、本門事の一念三千の明文なり御本尊は此の文を顕し出だし給うなり
시(時)란 감응하는 말법의 때이니라. 아(我)란 석존, 급(及)이란 보살, 성중(聖衆)을 중승이라 설하셨느니라. 구(倶)란 십계이며 영취산이란 적광토이니라. 때에 아도 급도 중승도 함께 영취산에 나오는 것이니라. 비밀로 하라, 비밀로 하라. 본문 사(事)의 일념삼천의 명문이며, 어본존은 이 문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니라.
又云く時とは本時娑婆世界の時なり下は十界宛然の曼陀羅を顕す文なり、其の故は時とは末法第五時の時なり、我とは釈尊・及は菩薩・衆僧は二乗・倶とは六道なり・出とは霊山浄土に列出するなり霊山とは御本尊並びに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の住所を説くなり
또 이르기를, 시(時)란 본시 사바세계의 때이니라. 아래는 십계가 완연한 만다라를 나타내는 문이니라. 그 까닭은, 시란 말법 제오시(第五時)의 때이며, 아란 석존, 급은 보살, 중승은 이승, 구란 육도이고, 출(出)이란 영산정토에 늘어서 나오는 것이니라. 영산이란 어본존 및 니치렌 등의 무리로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가 머무는 곳을 설한 것이니라.
문상에서 「때」는 석존이 수량품을 설하는 재세의 때였다. 그러나 「어의구전」에서 「때」는 「감응하는 말법의 때」, 「말법 제오시의 때」다. 문상에서 「영취산」은 인도의 기사굴산이 상주의 정토로 드러난 것이었으나, 「어의구전」에서 영산은 「어본존 및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가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나와 중승이 함께 나옴」은 석존과 보살 · 이승 · 육도, 곧 십계가 함께 늘어서는 모습으로서 「십계가 완연한 만다라」를 나타내는 문이라 하신다.
강의는 이 대비를 두고 「본시의 사바세계」에도 재세와 말법, 문상과 문저의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18장은 문상으로는 재세 탈익의 본존을 말하지만, 그 같은 구절을 문저의 눈으로 다시 읽으면 19장에서 밝혀질 말법 하종의 본존이 이미 비쳐 있다. 語釈이 「본시」 항목에 「문저의 뜻으로는 말법에 삼대비법의 어본존이 건립되는 때를 본시라 한다」고 덧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에도 멸하지 않고 미래에도 생하지 않는다」
본문의 「부처는 이미 과거에도 멸하지 않고 미래에도 생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대해 강의는 수량품의 경문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이래 매우 오래되었으니 수명은 무량 아승기겁이며 상주하여 멸하지 않느니라(如是我成仏已来、甚大久遠、寿命無量阿僧祇劫、常住不滅)」를 근거로 든다. 천태대사는 이 경문에서 부처가 과거에 멸하지 않았음을 설하고 아울러 미래의 상주를 밝혔다. 그래서 대성인도 「미래에도 생하지 않는다」고 하여 미래의 상주를 밝히신 것이라고 강의는 설명한다.
여기서 「생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시성정각의 부처는 어느 때 태어나 어느 때 성도하고 어느 때 입멸한다. 생과 멸이 있는 부처다. 그런데 수량품의 부처는 오백진점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과거에 이미 성불했고, 그 뒤로 늘 이 사바세계에서 설법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 수명이 다하지 않는다. 그 부처에게 「다시 생겨남」이란 없다. 늘 있는 것은 새로 생겨나지 않는다. 17장에서 「능변의 교주가 열반에 드시면」 모든 것이 멸진했던 것과 정반대로, 18장의 교주는 열반에 들지 않으므로 국토도 제자도 멸하지 않는다.
강의는 「時我及衆僧倶出霊鷲山」의 한 구절로 본문을 消釈한다 — 時는 본시, 我는 부처, 衆僧은 소화, 倶出은 동체, 霊鷲山은 상주의 정토. 그러나 「어의구전」은 같은 구절을 말법의 어본존과 봉창자의 머무는 곳으로 읽으니, 재세와 말법 · 문상과 문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재세의 관심 — 기심의 삼천구족
본국토가 일천, 부처와 소화가 이천
본문은 수량품의 국토 · 부처 · 소화를 말한 뒤 곧바로 「이것이 곧 기심의 삼천구족 · 삼종의 세간이니라」고 하신다. 강의는 이 「이것이 곧」이 앞의 「본시의 사바세계」 이하 문장 전체를 가리킨다고 본다.
강의의 消釈은 이렇다. 「본시의 사바」는 본국토로서 의보(依報)의 일천, 곧 국토세간이다. 부처와 소화는 본인 · 본과로서 중생세간과 오음세간의 이천이다. 국토세간의 일천과 중생 · 오음세간의 이천을 합하면 삼천세간이 된다. 이것이 곧 재세의 사리불 등이 자기 마음에 갖추고 있던 삼종세간 · 삼천세간이다.
강의는 묘락대사의 「그러므로 장수(長壽)를 듣고 다시 종지(宗旨)를 깨닫는다」는 말을 근거로 든다. 사리불 등은 부처의 본인 · 본과의 수명이 장구하고 구원하다는 것을 듣고서 일념삼천의 종지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적문에서 사리불은 이미 성불의 수기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이(理)」로서 십계호구를 안 것이었다. 수량품에서 부처의 구원과 국토의 상주를 들었을 때 비로소 일념삼천이 국토세간까지 갖춘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제23장(0249)에서 대성인이 본문 수량품을 두고 「십계구원의 위에 국토세간이 이미 나타나 일념삼천이 거의 대나무 막(竹膜)을 사이에 두었다」고 하신 것도 이 뜻이다.
재세의 관심은 말법에서 보면 「교상의 적문」
그러면 이 재세의 관심은 말법의 우리에게 무엇인가. 강의는 「백육개초」의 한 구절을 든다.
在世観心法華経の本迹、一品二半は在世一段の観心なり天台の本門なり、日蓮が為には教相の迹門なり
재세 관심의 법화경의 본적. 일품이반(一品二半)은 재세 일단의 관심이니라. 천태의 본문이니라. 니치렌에게는 교상(敎相)의 적문이니라.
재세 중생에게 수량품의 일품이반은 그대로 관심, 곧 자기 마음을 보고 깨닫는 실천이었다. 천태대사에게도 이것은 본문이었다. 그러나 말법의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 보면, 그것은 「교상의 적문」 — 가르침의 형태로 설해진 적문에 지나지 않는다. 강의는 「이 점이 당문(當門)과 타문(他門)의 중대한 차이이며, 이것을 모르면 말법의 불법을 체득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18장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재세의 관심이고, 말법의 관심은 앞의 16장에서 밝힌 수지즉관심이다.
이 문을 말법에 배당하는 이설과 강의의 논파
강의는 이 대목을 둘러싼 다른 문류의 해석 두 가지를 들어 비판한다.
하나는 팔품파(八品派)의 닛추(日忠)다. 그는 「『今本時』 이하는 재세에 약(約)하고, 『此れ即ち己心』 이하는 말법에 약한다」고 했다. 같은 장 안에서 앞부분은 석존 재세의 일로, 뒷부분 「이것이 곧 기심의 삼천구족」은 말법의 일로 나누어 읽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요법사(要法寺)의 닛신(日辰)이다. 그는 「『此れ即ち己心の三千具足』이란 렌소(蓮祖) 문제(門弟)의 신자 · 행자의 기심의 일념삼천이다」라고 하여, 역시 이 구절을 말법 니치렌 문하의 관심으로 읽었다.
강의는 두 해석을 「잘못도 심한 것」이라 하며 네 가지 이유로 논파한다.
첫째, 17장 「무릇 처음 적멸도량」에서 18장 「시기미숙의 고인가」까지는 전부 석존 재세의 일을 논하고 있으며, 말법의 일을 논한 글이 하나도 없다. 이 한 구절만 말법에 배당할 이유가 없다.
둘째, 이 단락은 본문에 약하여 「적문 14품에서는 아직 이것을 설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적문과 대비되는 이 본문은 석존 재세의 본문이지 말법이 아니다.
셋째, 이것을 말법에 배당한다면 앞에서 본 묘락대사의 「장수를 듣고 다시 종지를 깨닫는다」는 해석과, 「백육개초」의 「일품이반은 재세 일단의 관심」이라는 대성인의 상전(相傳)에 어긋난다.
넷째, 무엇보다 이 문을 억지로 말법의 관심으로 삼아 재세의 관심과 말법의 관심을 뒤섞는 것은 이 어서 전체의 뜻에 정면으로 반한다. 「관심의 본존초」는 재세의 관심과 말법의 관심, 재세의 본존과 말법의 본존을 엄격히 구별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今本時」 (지금 본시) 이하는 재세, 「此れ即ち己心」 (이것이 곧 기심) 이하는 말법에 약한다
「此れ即ち己心の三千具足」 (이것이 곧 기심의 삼천구족)은 렌소 문제의 신자 · 행자의 기심의 일념삼천
- ①17장 첫머리부터 18장 끝까지 모두 석존 재세의 일이며 말법을 논한 글이 없다
- ②「적문 14품에서는 아직 설하지 않았다」는 재세의 본문에 약한 말이다
- ③묘락의 「장수를 듣고 다시 종지를 깨닫는다」와 「백육개초」의 「일품이반은 재세 일단의 관심」에 어긋난다
- ④재세의 관심과 말법의 관심을 뒤섞는 것은 본초의 뜻에 반한다
닛추(日忠)는 법화경 본문 팔품을 중시하는 팔품파의 학승, 닛신(日辰)은 교토 요법사의 학승으로, 둘 다 대성인 멸후 수백 년 뒤 「관심의 본존초」에 주석을 남긴 이들이다. 강의는 두 사람의 주석을 「忠抄」 · 「辰抄」라는 약칭으로도 부른다. 생몰년과 저작명은 확인 중이다.
성주괴공과 영원한 생명
사겁이란 무엇인가
본문의 「삼재를 여의고 사겁을 벗어난」이라는 구절에 대해, 강의는 긴 지면을 들여 우주관 · 생명관 · 행복론의 입장에서 논한다. 출발점은 물음이다. 삼재와 사겁은 국토 자체도 다른 모든 것처럼 성 · 주 · 괴 · 공의 네 단계를 거쳐 반드시 파괴되고 사멸한다는 우주의 실상을 설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수량품은 왜 이 국토를 「상주」라고 설하는가.
강의는 먼저 겁(劫)을 설명한다. 겁은 범어로 「긴 시간 · 큰 시간」을 뜻하며 경론마다 설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소겁 · 중겁 · 대겁의 세 가지로 설명된다.
소겁은 이렇게 센다. 주겁의 처음, 사람의 수명이 무량세일 때부터 백 년마다 한 살씩 줄어 마침내 수명 열 살에 이르는 것을 제1 감겁이라 한다. 다음에 수명 열 살에서 백 년마다 한 살씩 늘어 팔만 세에 이르고, 다시 팔만 세에서 백 년마다 한 살씩 줄어 열 살에 이르는 이 한 번의 증감을 제2 증감겁이라 한다. 이렇게 증감하기를 열여덟 번, 마지막으로 열 살에서 백 년마다 한 살씩 늘어 무량세에 이르는 것이 제20 증겁이다. 제1은 감(減)만, 제20은 증(增)만 있으나 그 길이는 중간의 한 번 증감과 같다. 이 한 번 증감의 시간을 일소겁이라 한다. 강의는 이것을 일천육백만 년에서 이천 년을 뺀 수, 곧 15,998,000년으로 계산한다.
중겁은 주겁의 처음 일감부터 중간 십팔 증감, 마지막 일증까지 스무 번의 증감을 합한 시간, 곧 이십 소겁이다. 강의의 계산으로 319,960,000년이다. 이 중겁을 넷 합한 것이 일대겁이며, 이것이 하나의 세계 — 당시로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일소세계, 오늘날로 치면 태양계 — 의 처음과 끝의 길이다. 네 중겁이 곧 성 · 주 · 괴 · 공이며, 본문이 말하는 사겁이다.
세계가 성립하기까지의 기간이 성겁, 성립한 뒤 중생이 사는 기간이 주겁, 화재 · 풍재 · 수재의 삼재로 무너지는 기간이 괴겁, 소멸하여 텅 빈 기간이 공겁이다. 공겁이 지나면 다시 성겁이 시작되어, 이 네 겁은 끝없이 순환한다. 소삼재와 대삼재는 語釈에서 본 대로다.
- 성겁세계가 이루어지는 기간인생에 견주면 태어나 자라는 청소년기
- 주겁중생이 머무는 기간장년기
- 괴겁화재 · 풍재 · 수재로 무너지는 기간노년기
- 공겁소멸하여 텅 빈 기간죽어서 생명이 우주에 녹아든 상태
- 다시 성겁으로
| 구분 | 내용 |
|---|---|
| 소삼재 | 소겁의 감겁 때 — 곡귀(기근) · 병혁(전란) · 역병 |
| 대삼재 | 주겁이 끝나고 괴겁에 들 때 — 화재 · 풍재 · 수재 |
| 일소겁 | 한 번의 증감 — 강의의 계산 15,998,000년 |
| 일중겁 | 이십 소겁 — 강의의 계산 319,960,000년 |
| 일대겁 | 네 중겁(성 · 주 · 괴 · 공) — 하나의 세계의 처음과 끝 |
인생의 성주괴공, 우주의 성주괴공
우주에 있는 것 가운데 영원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엇이든 반드시 탄생 · 존속 · 파괴 · 사멸을 되풀이하며 쉼 없이 변해 간다. 불법은 이것을 성주괴공이라 부른다.
강의는 이것을 사람의 일생에 견준다. 어머니의 태에 깃들어 태어나 자라는 청소년기가 「성」, 인생이 무르익는 장년기가 「주」, 노년기가 「괴」, 죽어서 생명이 우주 속에 녹아든 상태가 「공」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아메바 같은 미생물부터 책상이나 컵 같은 비정(非情)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만물은 모두 이 네 단계를 순환한다고 불법은 설한다.
강의는 이것을 현대 천문학과 견준다. 항성도, 항성으로 이루어진 은하계 같은 섬우주도 모두 성주괴공의 유전을 되풀이한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근대 천문학의 우주관과 삼천 년 전 불법의 우주관이 신기하게도 일치한다고 강의는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지금의 지구는 「주겁 제9의 감(減)」에 해당하여 성겁을 이미 지나 머지않아 주겁의 절반에 이르려 하는 때라고 하는데, 천문학이 「지금의 지구는 성립 후 약 오십억 년, 생물이 생긴 지 삼십억 년이 지난 장년기의 행성」이라고 결론 내린 것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를 들어, 소승 · 권대승에서 이미 설한 성주괴공의 원리조차 최근의 천문학이 겨우 다다른 결론이라면, 법화경 본문의 생명관과 그 근저인 대성인의 생명철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강의의 천문학 수치(지구 나이 약 오십억 년 등)는 강의가 작성된 시기의 서술이다. 오늘날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 년으로 추정된다. 강의의 논지 — 성주괴공이라는 변화의 원리 자체는 이미 소승 · 권대승에서 설해졌다 — 는 수치와 관계없이 성립한다.
변화의 근저에 있는 상주
그러나 최고의 불법은 변화하고 유전하는 면만을 설하지 않는다.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그 근저에 상주의 세계를 밝힌다. 현상만 보면 모든 것이 변하고 흘러간다. 그러나 그 깊은 바닥에는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하는, 상주하며 불멸하는 근원의 힘이 있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현상을 다루는 분야이지 본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는 이 점에 대해 호리고메 닛준 상인(堀米日淳上人)의 말을 인용한다. 그 요지는 이렇다. 과학의 대상은 가유(假有)의 세계이며, 가유의 세계는 일체 세간의 한 작은 부문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가유의 세계는 유전하는 세계이므로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지식도 변천을 면하지 못하고, 그래서 과학에서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생각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참된 종교는 일체 세간을 대상으로 하므로 그 지혜는 절대불변이다. 종교가 일체 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생명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과학은 종교의 한 작은 부문, 곧 「종교의 전위」라는 것이다.
성주괴공은 변화의 세계, 유전의 세계다. 이것을 설한 이전 · 적문과 과학의 최근 발견이 일치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수량품에 이르러 성주괴공에 좌우되지 않는 불멸의 상적광 세계가 설해졌다. 그리고 그 상적광의 세계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우리 자신의 생명이 그것이라고 설해 마쳤다. 그래서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강의는 인용한다.
一切経の中に此の寿量品ましまさずは天に日月無く国に大王なく山海に玉なく人にたましゐ無からんがごとし、されば寿量品なくしては一切経いたづらごとなるべし
일체경 가운데 이 수량품이 없다면, 하늘에 해와 달이 없고 나라에 대왕이 없으며 산과 바다에 구슬이 없고 사람에게 혼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수량품이 없으면 일체경은 헛된 것이 되리라.
남묘호렌게쿄 — 변화를 일으키는 근원의 생명
무엇에도 좌우되지 않고 만법의 근원이면서,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하고 유전하게 하는 우주에 내재한 대생명. 강의는 그것이 수량품의 문저에 숨겨진 남묘호렌게쿄라고 말한다. 강의는 「소전 수량품의 간심 남묘호렌게쿄야말로 시방삼세 제불의 어머니이시니라(所詮寿量品の肝心南無妙法蓮華経こそ十方三世の諸仏の母にて御坐し候へ)」라는 어문을 「본초의 다음 글」로 인용하며, 상법의 천태대사는 이것을 설할 수 없었기에 일념삼천이라 설하고 지관으로 넓혔으며, 대성인은 이 대우주의 근원력인 남묘호렌게쿄를 그대로 한 폭의 어본존으로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대우주에 아무리 변화가 있고 성 · 주 · 괴 · 공을 되풀이해도, 그것은 남묘호렌게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남묘호렌게쿄의 나타남이며 남묘호렌게쿄를 토대로 성립한다. 「일어남은 법성의 일어남이요 멸함은 법성의 멸함(起は是れ法性の起、滅は是れ法性の滅)」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뜻한다고 강의는 풀이한다.
강의는 무량의경의 한 대목을 길게 인용한다. 「크도다, 대오(大悟)하신 대성주(大聖主)는 때 없고 물듦 없고 집착하는 바 없도다 … 그 몸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자타(自他)도 아니고, 모남도 아니고 둥긂도 아니며 짧고 긺도 아니고, 나옴도 아니고 사라짐도 아니며 생멸도 아니고, 지음도 아니고 일어남도 아니며 하는 바도 아니고, 앉음도 아니고 누움도 아니며 가고 머묾도 아니고 … 푸름도 아니고 누름도 아니며 붉고 흼도 아니고 …」(무량의경 덕행품). 또 안락행품의 십팔공(十八空)의 경문 — 「일체의 법은 공하여 실상과 같으며, 뒤바뀌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물러나지 않고 구르지 않으며, 허공과 같아 소유의 성품이 없고, 일체 말의 길이 끊어져 생하지 않고 나오지 않고 일어나지 않으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실로 소유가 없고, 한량없고 끝없으며 걸림 없고 막힘 없다고 관하라」 — 을 든다.
강의는 이 무량의경과 안락행품에서 설한 것도 문저의 눈을 뜨고 보면 그 실체는 남묘호렌게쿄라고 말하며, 「어의구전」의 「십팔공의 체란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니라」(750쪽, 제2 일체법공의 일)와 「이른바 남묘호렌게쿄는 본래 기멸(起滅)이 없느니라」(790쪽)를 근거로 든다.
남묘호렌게쿄 그 자체는 유도 무도 아니고, 생하거나 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난 현상의 세계는 유이고 무이며, 인이고 연이며, 자타이고 모나고 둥글며 짧고 길며, 나오고 사라지며 생멸한다. 곧 차별의 세계, 변화의 세계, 유전의 세계다.
생명의 본질과 생사의 현상
강의는 이 원리가 생명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생명 그 자체는 만들어지지도 생겨나지도 않으며, 부서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물론 생명 현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생사 · 생사로 유전한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 그 자체는 어떤 변화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生と死と二つの理は生死の夢の理なり妄想なり顚倒なり本覚の寤を以て我が心性を糾せば生ず可き始めも無きが故に死す可き終りも無し既に生死を離れたる心法に非ずや、劫火にも焼けず水災にも朽ちず剣刀にも切られず弓箭にも射られず芥子の中に入るれども芥子も広からず心法も縮まらず虚空の中に満つれども虚空も広からず心法も狭からず
생과 사의 두 이치는 생사의 꿈의 이치이며 망상이요 전도이니라. 본각의 깨어남으로써 내 마음의 본성을 살피면, 생겨날 처음도 없으므로 죽을 끝도 없느니라. 이미 생사를 여읜 심법이 아니겠느냐. 겁화에도 타지 않고 수재에도 썩지 않으며, 칼에도 베이지 않고 활과 화살에도 맞지 않느니라. 겨자씨 속에 넣어도 겨자씨가 넓어지지 않고 심법도 줄어들지 않으며, 허공 속에 가득 차도 허공이 넓어지지 않고 심법도 좁아지지 않느니라.
강의는 여기서 「심법」이 곧 생명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생명 그 자체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겁화에도 타지 않으며, 무엇으로 부수려 해도 결코 파괴되지 않고, 더구나 우주만큼 크다. 「겁화에도 타지 않는다」는 표현은 앞에서 본 전교대사의 「영산의 보토는 겁화에 타지 않는다」와 정확히 겹친다. 국토의 상주와 생명의 상주는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본질에 대해 한 말이다. 나타난 현상을 보면 그것은 엄연한 생사의 유전이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다. 이를 「어의구전」은 「자신 법성의 대지를 생사 생사로 굴러가는 것이니라」(724쪽, 제8 유유일문의 일)라고 하셨다. 강의는 「법성의 대지」를 생명론으로 말하면 생명의 본질, 결코 부서지지 않는 불멸의 실체이고, 「생사 생사로 굴러간다」는 영원불멸의 생명을 근저에 두고 생사의 유전을 되풀이해 간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또 이 글은 영원한 생명관에 입각하여 현실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영원한 생명을 모르는 생활은 뿌리 없는 풀처럼 덧없이 유위전변의 무상한 세계를 떠돌 뿐이지만, 영원한 생명관 위에 선 생사는 본유(本有)의 생사이며 묘법에 비추어진 힘찬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我等が滅する当体は化城なり、此の滅を滅と見れば化城なり不滅の滅と知見するを宝処とは云うなり
우리가 멸하는 당체는 화성(化城)이니라. 이 멸을 멸이라고 보면 화성이요, 불멸의 멸이라고 지견하는 것을 보처(寶處)라 하느니라.
「불멸의 멸」이란 영원한 생명관에 입각한 죽음이며, 이 또한 본유의 생사다. 이렇게 깨닫는 것을 보처라 하며 참된 행복 경애라 설하신 것이라고 강의는 풀이한다.
강의는 같은 「어의구전」에서 더 깊은 어문을 든다.
如来とは三界の衆生なり此の衆生を寿量品の眼開けてみれば十界本有と実の如く知見せり、三界之相とは生老病死なり本有の生死とみれば無有生死なり生死無ければ退出も無し唯生死無きに非ざるなり、生死を見て厭離するを迷と云い始覚と云うなりさて本有の生死と知見するを悟と云い本覚と云うなり、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時本有の生死本有の退出と開覚するなり
여래란 삼계의 중생이니라. 이 중생을 수량품의 눈을 뜨고 보면 십계본유(十界本有)라고 실답게 지견하느니라. 삼계의 상(相)이란 생로병사이니라. 본유의 생사로 보면 생사가 있음이 없느니라. 생사가 없으면 물러나고 나옴도 없느니라. 다만 생사가 없는 것이 아니니라. 생사를 보고 싫어하여 떠나려는 것을 미혹이라 하고 시각(始覺)이라 하며, 본유의 생사라고 지견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본각(本覺)이라 하느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할 때 본유의 생사 · 본유의 퇴출이라고 개각하느니라.
강의는 이 가운데 「생사가 없으면 퇴출도 없다」는 생명의 본질을 말한 것이고, 「본유의 생사」는 영원한 생명에 입각한 생사의 유전이라고 풀이한다. 생사를 떠나려는 것은 이전 · 적문의 사고방식이다. 생사는 엄연한 실상이며, 동시에 생사불이이고 상주라고 설해 마친 것이 본문의 뜻이다.
강의는 특히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할 때 본유의 생사 · 본유의 퇴출이라고 개각한다」는 구절을 「참으로 중대하다」고 한다. 관념적으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아무리 스스로 타일러도,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요 미망이다. 신심이 없으면 영구히 유전의 세계에 있으며 무상의 슬픔에 갇힌 채다. 신심을 열었을 때 비로소 상주의 세계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말법에 어본존을 믿는 이는 기근 · 역병 · 전란의 소삼재나 주겁 끝의 화 · 풍 · 수 대삼재에도 위협받지 않고, 성주괴공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여설수행초」의 「인법 함께 불로불사의 이치가 나타날 때」(502쪽)는 어본존을 수지한 생활이야말로 불로이며 불사라는 말씀이라고 강의는 풀이한다. 생사 · 생사로 유전하면서도 늘 행복이 가득하여, 태어나서는 큰 복운의 몸으로 나고 죽어서는 대우주와 명합하여 막힘이 없으며, 생사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생사를 즐겨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강의의 생명론 — 현상은 성주괴공 · 생사로 유전하지만, 그 근저의 생명 자체는 겁화에도 타지 않는다. 그 근원이 수량품 문저의 남묘호렌게쿄이며, 신심으로 봉창할 때 생사가 「본유의 생사」로 열린다.
사바즉적광토 — 이 국토가 본토다
이전의 정토관을 뒤집다
강의는 이어서 「사바즉적광토」의 원리를 논한다. 이전 · 적문의 여러 경전은 범부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번뇌와 괴로움이 가득한 예토(穢土)로 보고, 시방의 국토를 부처와 보살이 사는 정토로 보았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꺼리고 미워하며, 먼 저편에 이상 세계가 있다고 했다. 서방 십만억 국토를 지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가 있다 하고, 동방에 약사여래의 정유리세계가 있다 하며, 화장세계 · 밀엄세계 등 경전마다 갖가지 세계를 설했다. 또 사바세계를 동거의 예토로, 부처가 사는 국토를 적광토로, 보살이 사는 세계를 실보토로, 이승이 사는 국토를 방편토로 나누어, 국토를 넷으로 구분해 각기 다른 세계라고 했다. 17장이 늘어놓은 바로 그 국토들이다.
그러나 법화경 본문 수량품에 이르러, 이 사바세계에 부처가 실제로 상주해 왔음이 밝혀졌다. 그토록 꺼리던 사바세계가 곧 본유의 적광토로 드러난 것이다. 또 사토도 일토가 되어, 그 국토를 적광토로 삼느냐 예토로 삼느냐는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일념으로 정해짐이 밝혀졌다.
今爾前・迹門にして十方を浄土と・がうして此の土を穢土ととかれしを打ちかへして此の土は本土なり十方の浄土は垂迹の穢土となる
이제까지 이전 · 적문에서 시방을 정토라 부르고 이 국토를 예토라 설하셨던 것을 뒤집어, 이 국토는 본토이고 시방의 정토는 수적(垂迹)의 예토가 되느니라.
四土不二にして法身の一仏なり十界を身と為すは法身なり十界を心と為すは報身なり十界を形と為すは応身なり十界の外に仏無し仏の外に十界無くして依正不二なり身土不二なり一仏の身体なるを以て寂光土と云う
사토는 불이(不二)여서 법신의 일불이니라. 십계를 몸으로 하는 것은 법신, 십계를 마음으로 하는 것은 보신, 십계를 형체로 하는 것은 응신이니라. 십계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십계가 없어 의정불이이며 신토불이이니라. 일불의 신체이므로 적광토라 하느니라.
강의는 같은 「총감문초」에서 17장의 語釈이 인용한 「적광을 거울에 비유하고 … 사토도 일토이며 삼신도 일불」(573쪽)의 문을 다시 든다. 17장에서는 이전의 사토 구분이 궁극에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이는 데 쓰였다면, 여기서는 그 하나의 국토가 바로 이 사바세계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라는 것이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강의는 이렇게 답한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현실에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있다고 설한 것이 사바즉적광의 원리다. 이전 · 적문과 같은 철학과 사상으로는 현실에서 행복을 쌓을 수 없다. 그래서 일을 미래에 미루고 현실의 고뇌를 체념으로 덜어 보려는 소극적인 설법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석존은 수량품에서 이것을 철저히 깨뜨리고 자신의 경애 위에 이 원리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어서 말법에는 대성인의 생명철학 말고는 어떤 세계도 행복한 낙토로 만들 수 없으며, 그 밖의 체념의 철학 · 도피의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어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 가장 전형적인 예로 강의는 염불 사상을 든다. 이 세상은 예토이니 염불을 부르고 죽으면 극락에 왕생한다는 단순한 이론에 속아 따른 사람이 예전에 매우 많았고, 그 해독이 역사에도 뚜렷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강의는 그 예로 중국 정토교의 선도(善導)의 최후에 관한 전승을 든다. 선도가 자기 절 앞 버드나무에 올라 목을 매고 뛰어내렸으나 줄이 끊어졌는지 가지가 부러졌는지 단단한 땅에 떨어져 허리뼈가 부러지고, 이레 동안 괴로워하다 죽었다는 이야기다. 강의는 그가 나무 위에서 「이 몸은 싫어할 만하다. 온갖 괴로움에 시달려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고 하고, 서쪽을 향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나를 데려가시고, 관음 · 세지께서 와서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쳤다고 전하며, 여기에 정토 사상의 해독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또 일본에서도 헤이안 말기 호겐 · 헤이지의 난 이후 사회 혼란을 틈타 정토교가 퍼져 민중을 체념과 퇴폐의 기분에 젖게 하고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으며, 도쿠가와 시대에 막부가 염불을 퍼뜨린 것도 민중의 불평불만을 누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강의는 본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염불 사상이 민중을 무기력하게 하고 현상에 안주하게 하는 데 얼마나 편리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선도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일본 중세에 널리 퍼진 전승이다. 중국 측 전기 자료와의 차이 등 역사적 사실 여부는 따로 논의되므로, 여기서는 강의가 든 전승으로만 싣는다. 강의가 든 일본사의 서술(헤이안 말기, 도쿠가와 시대) 역시 강의의 견해다.
이에 비해 대성인의 불법은 어떻게 현실의 불행을 타개하고 이 세계에 참된 행복 경애를 나타낼지를 남김없이 설한다. 불행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끊고 깨뜨려 행복을 불러온다. 먼 저편의 꿈을 좇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확고한 인생을 쌓고, 미래영겁에 걸친 행복을 얻게 한다. 이 「사바즉적광」의 대원리가 세워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영구히 불행의 거리를 유전할 수밖에 없다고 강의는 말한다.
국토는 일념에 따라
이 세계를 사바로 느끼느냐 상적광으로 느끼느냐는 그 사람의 경애의 문제이며 일념의 강약에 달려 있다. 내 깊은 일념이 지옥이면 내가 사는 세계는 모두 지옥이고, 수라계이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모두 수라계이며, 천계이면 국토도 천계다. 내 일념에 불계를 용현하면 내가 가는 곳은 모두 상적광토다.
衆生の心けがるれば土もけがれ心清ければ土も清しとて浄土と云ひ穢土と云うも土に二の隔なし只我等が心の善悪によると見えたり
중생의 마음이 더러우면 국토도 더럽고, 마음이 맑으면 국토도 맑다고 하여, 정토라 하고 예토라 하는 것도 국토에 두 가지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마음의 선악에 달려 있다고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괴로운 처지에 서 있고 어떤 난관이 가로놓여 있어도, 신심으로 경애를 열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성장시키고 장엄하게 하는 것이 된다. 그것들을 강한 생명력으로 이겨 나가는 데 인생의 참맛이 있고, 이 세계를 자재하게 유희할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夫れ浄土と云うも地獄と云うも外には候はず・ただ我等がむねの間にあり、これをさとるを仏といふ・これにまよふを凡夫と云う、これをさとるは法華経なり、もししからば法華経をたもちたてまつるものは地獄即寂光とさとり候ぞ
무릇 정토라 하고 지옥이라 하는 것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우리 가슴속에 있느니라. 이것을 깨닫는 이를 부처라 하고, 이것에 미혹한 이를 범부라 하느니라.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법화경이니라. 그렇다면 법화경을 수지하는 이는 지옥즉적광이라고 깨닫느니라.
이 어서는 이어서 「설령 무량억 년 동안 권교를 수행하더라도 법화경을 떠나면 언제나 지옥」이라고 하신다. 강의는 이를 두고, 지옥 · 정토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심이 있으면 바로 적광토이고 신심이 없으면 바로 지옥이며, 지옥의 고뇌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자신이라도 어본존을 수지하면 곧바로 「지옥즉적광」으로 열린다는 것, 그리고 어떤 철학 · 사상에 기대고 어떻게 노력해도 어본존을 떠나면 늘 지옥이라는 엄한 불법의 방정식을 보이신 것이라고 풀이한다.
「보은초」의 「극락 백 년의 수행은 예토 하루의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329쪽)는 어문에 대해 강의는, 이 세계에서 아무리 괴롭고 난이 있어도 날마다 제목을 부르고 절복을 행하는 행동이 가장 큰 복운을 쌓고 가장 크게 인간혁명해 가는 원천이라는 말씀이며, 그러므로 하루하루, 아니 순간순간이 더없이 존귀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바즉적광토다. 또 「교오전답서」의 「어떤 곳에서 놀고 장난치더라도 탈이 없을 것이며, 유행하여 두려움 없음이 사자왕과 같으리라」(1124쪽)를 들어, 어본존은 대우주의 모든 힘, 시방삼세 제불의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 어본존을 수지해 나가면 날마다의 행동이 우주의 큰 리듬에 맞고 제천의 작용이 가득하여 유유하고 힘찬 인생을 걸을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광선유포와 국토의 적광화
강의는 여기까지를 「개인에서의 인간혁명」으로서의 사바즉적광이라 하고, 나아가 묘법이 광선유포된 세계야말로 「사바즉적광토」라고 단언한다. 오늘날 우리 눈앞에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이 펼쳐지고, 인류는 핵전쟁의 공포에 노출되어 있으며, 약소국에는 동란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사바세계다. 그러나 이런 세상도 그 근원을 찾으면 인간 생명의 탐 · 진 · 치 삼독의 반영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일으키지 않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세상의 식자들이 모두 인정하지만, 그것을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기댈 지주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법은 인간 생명의 궁극을 밝힌 불법철리에 의할 수밖에 없다고 강의는 주장한다.
강의는 『법화문구』의 「상(相)이란 사탁(四濁)이 더욱 심해져 이때에 모여 있으니, 진에가 심해져 도병이 일어나고, 탐욕이 심해져 기아가 일어나며, 우치가 심해져 질역이 일어나니, 삼재가 일어나므로 번뇌가 더욱 왕성하고 제견(諸見)이 더욱 치성하다」는 해석을 든다. 오탁이 어지러이 넘치는 세상의 근원이 실로 인간 생명의 탁함임을 보인 말이다. 앞에서 본 소삼재 — 기근 · 전란 · 역병 — 가 바로 삼독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묘법을 전 세계에 광선유포하면 이 어지러운 사바세계도 반드시 상적광토로 바뀐다고 강의는 확신한다.
汝早く信仰の寸心を改めて速に実乗の一善に帰せよ、然れば則ち三界は皆仏国なり仏国其れ衰んや十方は悉く宝土なり宝土何ぞ壊れんや、国に衰微無く土に破壊無んば身は是れ安全・心は是れ禅定ならん
그대는 어서 신앙의 작은 마음을 고쳐 속히 실승(實乘)의 일선(一善)에 귀의하라. 그렇게 하면 삼계는 모두 불국이니, 불국이 어찌 쇠하겠느냐. 시방은 모두 보토이니, 보토가 어찌 무너지겠느냐. 나라에 쇠미함이 없고 국토에 파괴가 없으면 몸은 안전하고 마음은 선정이리라.
강의는 이 원리가 한 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똑같이 해당한다고 하며, 하루라도 빨리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본존의 위대한 힘을 알려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항구 평화를 쌓아 가자고 맺는다. 「보토가 어찌 무너지겠느냐」는 「입정안국론」의 말은 18장의 「삼재를 여의고 사겁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를 사회와 국토의 차원에서 다시 말한 것이다.
적문 14품에서 설하지 않은 까닭 — 시기미숙
본문의 마지막 구절 「적문 14품에서는 아직 이것을 설하지 않았으니, 법화경 안에서도 시기가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리라」는 짧지만 무게가 있다. 現代語訳은 이것을 「적문 14품에서 아직 이러한 삼묘합론(三妙合論)의 사(事)의 일념삼천이 설해지지 않은 것은 법화경 안에서도 아직 시기가 익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푼다.
「삼묘합론」이란 본인묘 · 본과묘 · 본국토묘의 셋을 함께 논한다는 뜻이다. 적문에서도 십계호구와 백계천여는 설해졌다. 그러나 부처가 언제 성불했는가(본과), 무엇을 수행하여 성불했는가(본인), 어디에 상주하는가(본국토)는 밝혀지지 않았다. 부처가 시성정각에 머물러 있는 한 국토세간은 온전히 드러날 수 없고, 국토세간이 없는 일념삼천은 아직 「이(理)」의 일념삼천이다. 수량품에서 셋이 함께 밝혀졌을 때 비로소 일념삼천이 「사(事)」로서, 곧 실제의 부처와 실제의 국토와 실제의 제자 위에 나타난다.
같은 법화경 안에서도 적문 14품을 설할 때는 아직 그것을 들을 시기와 근기가 익지 않았다. 대성인은 「~이리라(故なるか)」라고 추량의 말씨로 맺으셨다. 이것은 19장 끝의 「출현하게 될 것인가(出現せしむ可きか)」와 같은 어법으로, 단정의 회피가 아니라 부처의 뜻을 삼가 헤아리는 어조다. 그리고 「시기」라는 이 말은 19장에서 정법 · 상법 이천 년 동안 아무도 세우지 못한 본존이 「말법에 들어와서 비로소」 출현한다는 데로 그대로 이어진다. 적문에서 본문을 설하지 않은 것이 시기 때문이었다면, 정법 · 상법에서 문저의 본존이 세워지지 않은 것도 시기 때문이다.
18장의 판정 — 수량품에서 본인 · 본과 · 본국토가 함께 밝혀져 사바세계가 상주의 정토로, 부처와 소화가 삼세 상주의 동체로 드러났다. 이것이 재세 중생의 기심의 삼천이며 본문탈익의 본존이다. 그러나 이것도 말법에서 보면 「교상의 적문」이다.
본문
此の本門の肝心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に於ては仏猶文殊薬王等にも之を付属し給わず何に況や其の已外をや但地涌千界を召して八品を説いて之を付属し給う、 其の本尊の為体本師の娑婆の上に宝塔空に居し塔中の妙法蓮華経の左右に釈迦牟尼仏・多宝仏・釈尊の脇士上行等の四菩薩・文殊弥勒等は四菩薩の眷属として末座に居し迹化他方の大小の諸菩薩は万民の大地に処して雲閣月卿を見るが如く十方の諸仏は大地の上に処し給う迹仏迹土を表する故なり、 是くの如き本尊は在世五十余年に之れ無し八年の間にも但八品に限る、 正像二千年の間は小乗の釈尊は迦葉・阿難を脇士と為し権大乗並に涅槃・法華経の迹門等の釈尊は文殊普賢等を以て脇士と為す此等の仏をば正像に造り画けども未だ寿量の仏有さず、 末法に来入して始めて此の仏像出現せしむ可きか。
이 본문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의 오자에 대해서는, 부처는 문수 · 약왕 등에게도 이를 부촉하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그 밖의 이들에게랴. 다만 지용천계(地涌千界)를 불러내어 팔품을 설하여 이를 부촉하셨느니라. 그 본존의 위체(爲體)는, 본사(本師)의 사바 위에 보탑이 허공에 머물고, 탑 안의 묘법연화경 좌우에 석가모니불 · 다보불, 석존의 협사인 상행 등의 사보살이 있으며, 문수 · 미륵 등은 사보살의 권속으로서 말좌에 있고, 적화(迹化) · 타방의 크고 작은 모든 보살은 만민이 대지에 엎드려 운각월경(雲閣月卿)을 우러러보는 것과 같으며, 시방의 제불은 대지 위에 계시니, 적불(迹佛) · 적토(迹土)를 나타내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본존은 재세 오십여 년에 없었고, 팔 년 동안에도 다만 팔품에 한하느니라. 정법 · 상법 이천 년 동안에는 소승의 석존은 가섭 · 아난을 협사로 삼고, 권대승 및 열반경 · 법화경 적문 등의 석존은 문수 · 보현 등을 협사로 삼았느니라. 이러한 부처들은 정법 · 상법 시대에 만들고 그렸으나 아직 수량품의 부처는 계시지 않았느니라. 말법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 불상이 출현하게 될 것인가.
어구 풀이
- 此の本門の肝心이 본문의 간심
- 강의는 「이 본문」의 세 글자가 숙익 적문의 본존을 가리고, 「간심」의 두 글자가 문상 탈익의 본존을 가린다고 본다. 그러므로 다섯 글자 전체가 문저하종의 본존을 나타낸다.
- 文殊문수
- 문수사리보살. 범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로 「아름다운 빛을 지닌 이」라는 뜻이며, 묘덕 · 묘수 · 묘길상으로 번역한다.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며 제불요집경에 「박문제일」이라 할 만큼 모든 보살 가운데 지혜가 뛰어나다. 적화보살의 상수로서 사자를 타고 석존의 왼편에 모시며 지(智) · 혜(慧) · 증(證)의 덕을 맡는다. 법화경 서품에서 육서(六瑞)가 법화경을 설할 상서임을 밝혔고, 제바달다품에서는 사갈라 용왕의 궁에 가서 용녀를 교화했다.
- 薬王약왕
- 약왕보살. 범어 바이샤이쟈라자(Bhaiṣajya-rāja). 관약왕약상이보살경에 따르면 유리광조불 멸후 일장비구가 정법을 펼 때, 장자 형제 성수광 · 전광명이 설산의 좋은 약을 캐어 공양하고 중생의 몸과 마음의 두 병을 고치겠다고 서원했으며, 그때의 성수광이 지금의 약왕, 전광명이 약상이라 한다. 법화경에서는 적문 유통의 대고중의 첫머리이며, 약왕보살본사품에서는 과거에 일체중생희견보살로서 칠만이천 세 동안 팔을 태워 공양한 인행이 설해진다. 「어의구전」에 「천태대사도 본지는 약왕보살이니라」라고 한다.
- 地涌千界지용천계
- 종지용출품에서 대지를 가르고 솟아나온 삼천대천세계 미진수의 보살들.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의 사보살이 상수다. 석존의 「초발심의 제자」, 곧 본화(本化)의 보살이다.
- 八品팔품
- 종지용출품 제15부터 촉루품 제22까지의 여덟 품. 지용보살이 법화경 회좌에 머문 동안이다.
- 為体위체
- 「되어 있는 모습」, 곧 상모(相貌). 강의는 「본존의 상모」라고 풀이한다.
- 本師の娑婆본사의 사바
- 본사, 곧 구원의 본불이 상주하며 교화해 온 사바세계. 18장의 「본시의 사바세계」와 같은 국토다.
- 脇士협사
- 협시(脇侍)라고도 쓴다. 중존(본존)의 좌우나 주위에 있으면서 중존의 덕용을 나타내고 그 일을 돕는 성중. 협사의 위(位)와 모습으로 그 본존의 덕용의 높낮이를 판별한다.
- 弥勒미륵
- 범어 마이트레야(Maitreya). 자씨(慈氏)라 번역한다. 이름은 아일다로 무능승이라 번역한다. 인도 바라문 집안에 태어나 석존의 제자가 되었고, 다음 생에 부처가 되어 석존의 자리를 잇는다 하여 일생보처의 보살이라 한다. 석존보다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 내원에 나고, 56억 7천만 년 뒤 다시 세상에 나와 석존의 뒤를 잇는다고 보살처태경에 설한다. 종지용출품에서 발기중(發起衆)이 되고, 수량품 · 분별공덕품 · 수희공덕품에서 대고중이 되었다. 인도 유가행파의 학자 미륵과 혼동되어 온 것도 미륵 하생 신앙에서 비롯한다.
- 雲閣月卿운각월경
- 운각은 사위 · 오위 · 육위로서 궁전에 오를 수 있는 이, 곧 전상인(殿上人)을 말하고, 월경은 천황을 해에 견주어 삼위 이상의 공경을 달에 견준 말이다. 대지의 만민이 구름 위의 귀인을 우러러보듯, 적화 · 타방의 보살이 본화의 보살을 우러러본다는 비유다.
- 普賢보현
- 범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 문수와 함께 적화보살의 상수로 석존의 협사다. 여섯 상아의 흰 코끼리를 타고 오른편에 모시며 이(理) · 정(定) · 행(行)의 덕을 맡는다. 보(普)는 두루 가득함, 현(賢)은 선(善)을 뜻한다. 보현보살권발품에서 동방으로부터 올 때 지나는 나라마다 두루 진동했다고 설한다.
- 迹仏迹土적불적토
- 시방에서 모여든 분신의 제불은 구원의 본불이 나타낸 적(迹)의 부처이고, 그들이 머무는 시방의 국토도 적의 국토다. 그래서 대지 위에 자리한다.
- 迦葉・阿難가섭 · 아난
- 석존의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 마하가섭과 다문제일 아난. 소승의 석존상은 이 두 성문을 협사로 삼았다.
- 仏像불상
- 이 장의 마지막 구절 「이 불상」. 이것을 무엇으로 읽느냐가 이 장 해석의 큰 쟁점이다(아래 「『이 불상』을 불상으로 읽는 설과 강의의 논파」).
장의 세 단락 — 부촉의 사람 · 본존의 상모 · 말법 출현
강의는 이 장을 「문상 숙탈의 본존을 가리고 문저하종의 본존을 나타내는 장」이라 한다. 그리고 셋으로 나눈다. 처음은 부촉받는 사람이 본화 지용의 대보살임을 밝히고, 「그 본존의 위체」 이하는 바로 부촉된 본존의 상모를 밝히며, 「이와 같은 본존」 이하는 반드시 말법에 출현한다고 맺는다.
17장이 국토의 무상으로 숙익의 본존을 가렸고 18장이 국토와 부처의 상주로 탈익의 본존을 밝혔다면, 19장은 「누구에게 부촉되었는가」 · 「어떤 모습인가」 · 「언제 출현하는가」의 세 물음으로 하종의 본존을 밝힌다. 18장까지의 기준이 국토와 교주였다면, 19장에는 부촉과 시(時)라는 새로운 기준이 더해진다.
「이 본문의 간심」 — 다섯 글자의 간택
강의는 첫 구절 「이 본문의 간심」을 글자 단위로 읽는다. 「이 본문」의 세 글자는 숙익 적문의 본존을 가린다. 적문이 아니라 본문이라는 것이다. 「간심」의 두 글자는 문상 탈익의 본존을 가린다. 본문이되 그 문상이 아니라 그 간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간심」 다섯 글자는 문저하종의 본존을 나타내는 글이 된다. 그리고 「남묘호렌게쿄의 오자에 대해서는」은 문저하종의 본문 사(事)의 일념삼천의 어본존을 밝힌 것으로, 이것이 곧 본화에게 부촉된 법체(法體)라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는 닛가(日我)의 「본적의 부동(不同), 재세와 멸후의 본존을 잘 유의해야 한다」는 말을 든다. 그리고 이렇게 풀이한다. 재세의 본적이란 시성정각과 구원실성의 차이이고, 멸후의 본적이란 탈익과 하종익의 차이이므로 「본적의 부동」이라 한다. 또 문상의 탈적(脫迹)은 재세의 본존이고 문저는 말법의 본존이므로 「재세 · 멸후의 본존」이라 한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성인이 여러 어서에서 「수량품의 간심」 또는 「수량품의 간요」라고 하신 것은 모두 수량품의 문저를 가리키신 것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이 가장 큰 일인 말법 홍통의 본존이므로 「부처는 문수 · 약왕 등에게도 이를 부촉하지 않으셨다」고 하신 것이다.
教主釈尊此の秘法をば三世に隠れ無き普賢文殊等にも譲り給はず況や其の以下をや
교주 석존은 이 비법을 삼세에 숨김없는 보현 · 문수 등에게도 물려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그 이하의 이들에게랴.
「삼대비법품승사」의 이 대목은 이어서 그 비법을 설한 의식이 사미삼교와 적문 14품과 달랐으며, 「소거의 국토는 적광본유의 국토이며, 능거의 교주는 본유무작의 삼신이요, 소화이동체」였고, 그런 자리였기에 구원 이래의 본권속인 상행 등 사보살을 적광의 대지 밑에서 불러내어 부촉하셨다고 한다. 18장의 상주의 국토 · 소화이동체와 19장의 지용 부촉이 한 장면 안에 이어져 있다.
왜 문수 · 약왕에게는 부촉하지 않으셨는가
문수는 지혜제일의 보살로 적화보살의 상수이고, 약왕은 적문 유통의 대고중의 첫머리다. 그런데도 부처는 이들에게 오자를 부촉하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이 어서의 뒤 장에서 대성인 스스로 밝히신다.
所詮迹化他方の大菩薩等に我が内証の寿量品を以て授与すべからず末法の初は謗法の国にして悪機なる故に之を止めて地涌千界の大菩薩を召して寿量品の肝心たる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閻浮の衆生に授与せしめ給う
결국 적화 · 타방의 대보살 등에게는 나의 내증의 수량품을 수여할 수 없느니라. 말법의 처음은 방법(謗法)의 나라이며 악한 근기이므로, 그들을 멈추게 하고 지용천계의 대보살을 불러 수량품의 간심인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염부의 중생에게 수여하게 하셨느니라.
같은 대목에서 대성인은 적화의 대중이 「석존 초발심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드시고, 천태의 「이는 나의 제자이니 마땅히 나의 법을 펴리라」, 묘락의 「아들이 아버지의 법을 펴면 세계의 이익이 있다」, 『보정기』의 「법이 구성(久成)의 법이므로 구성의 사람에게 부촉한다」를 인용하신다. 구원의 법은 구원의 제자에게 부촉된다. 「신니부인답서」도 문수 · 미륵 · 관음 · 약왕 등의 대사들이 「나도 나도」 하며 바랐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그들은 지혜가 뛰어나고 학식이 있다고 알려졌어도 아직 법화경을 배운 날이 얕아 말대의 대난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고 하신다(905쪽). 이 대목은 제5편 이후에서 다시 자세히 다룬다.
「팔품을 설하여 부촉하셨다」 — 여덟 품의 역할
「다만 지용천계를 불러내어 팔품을 설하여 이를 부촉하셨다」에서 「팔품」은 종지용출품 제15부터 촉루품 제22까지다. 강의는 여덟 품이 저마다 부촉의 한 단계를 맡는다고 정리한다.
- 종지용출품 제15 — 부촉할 지용보살을 불러낸다.
- 여래수량품 제16 — 부촉할 본존을 설해 나타낸다.
- 분별공덕품 제17 — 이 본존에 대해 일념의 신해를 일으키는 공덕을 밝힌다.
- 수희공덕품 제18 — 이 본존을 듣고 오십 번째로 전해 들어도 따라 기뻐하는(五十展轉) 공덕을 밝힌다.
- 법사공덕품 제19 — 이 본존의 오종묘행(수지 · 독 · 송 · 해설 · 서사)의 큰 이익을 밝힌다.
- 상불경보살품 제20 — 이 본존이 말법에 홍통되는 방식을 보인다.
- 여래신력품 제21 — 별(別)하여 이 본존을 바로 지용보살에게 부촉한다.
- 촉루품 제22 — 부촉을 마치고 지용보살이 물러간다.
그래서 「팔품을 설하여 이를 부촉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이 정리에서 주목할 것은, 팔품 가운데 본존을 「설해 나타내는」 것은 오직 수량품이고, 나머지 일곱 품은 그 본존을 부촉하는 의식의 앞뒤라는 점이다.
- 종지용출품 제15부촉할 지용보살을 불러낸다
- 여래수량품 제16부촉할 본존을 설해 나타낸다
- 분별공덕품 제17일념의 신해를 일으키는 공덕
- 수희공덕품 제18듣고 오십 번째로 전해 들어도 따라 기뻐하는 공덕
- 법사공덕품 제19오종묘행의 큰 이익
- 상불경보살품 제20말법에 홍통하는 방식
- 여래신력품 제21별하여 지용보살에게 부촉
- 촉루품 제22부촉을 마치고 지용보살이 물러감
묘락 · 천태 · 대성인 — 세 가지 말투
강의는 부촉을 말하는 세 가지 표현을 비교한다. 묘락대사는 「지금 석가불이 본적을 다 설하시고 모두 추요(樞要)를 뽑아 제보살에게 부촉하셨다」고 했다. 천태대사는 「지금 본문을 설하여 일체 제불이 가진 법을 부촉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대성인은 「팔품을 설하여」라고 하셨다.
강의에 따르면 묘락은 일경삼단(一經三段)의 뜻에 약하여 통(通)하여 법화경 한 부의 처음과 끝을 들었으므로 「본적을 설하여」라 했고, 천태는 이경육단(二經六段)의 뜻에 약하여 별(別)하여 본문의 처음과 끝을 보였으므로 「본문을 설하여」라 했다. 대성인은 지용보살이 법화경 회좌에 늘어서 있던 때에 약하여 부촉의 처음과 끝을 밝히셨으므로 「팔품을 설하여」라 하신 것이다. 세 표현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부촉을 보는 범위가 다를 뿐이다. 이 비교는 곧이어 팔품파의 해석을 논파하는 데 쓰인다.
수량소현의 본존 — 「팔품소현」설에 대한 강의의 논파
본존은 수량품에서 설해 나타났다
강의는 「그 본존의 위체」를 해설하기에 앞서 이 본존이 「수량소현(壽量所顯)」, 곧 수량품에서 설해 나타난 본존임을 먼저 확정한다. 근거는 여러 어서다.
今此の御本尊は教主釈尊・五百塵点劫より心中にをさめさせ給いて世に出現せさせ給いても四十余年・其の後又法華経の中にも迹門はせすぎて宝塔品より事をこりて寿量品に説き顕し神力品・属累に事極りて候いしが
지금 이 어본존은 교주 석존이 오백진점겁부터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세상에 출현하셔서도 사십여 년, 그 뒤 법화경 안에서도 적문은 지나쳐, 보탑품에서 일이 일어나 수량품에서 설해 나타내고 신력품 · 촉루품에서 일이 끝났느니라.
「어의구전」도 「무릇 묘법연화경을 상행보살에게 부촉하신 일은 보탑품 때 일이 일어나고, 수량품 때 일이 나타나며, 신력 · 촉루 때 일이 끝나느니라」(770쪽, 묘법연화경 여래신력의 일)라 하고, 다른 곳에서도 「보탑품에 일이 일어나 … 용출 · 수량에 일이 나타나고 신력 · 촉루에 일이 끝나느니라」(782쪽)라고 한다. 이처럼 여러 어서가 모두 「수량품에서 설해 나타낸다」고 하시며, 본초도 뒤에 「아직 수량의 부처는 계시지 않았다」 · 「본문수량품의 본존 및 사대보살」이라고 하시니, 대성인의 진의가 수량소현의 부처임은 분명하다고 강의는 말한다.
「팔품의 부처」 · 「팔품의 본존」이라는 설
그런데 「팔품의 부처」 · 「팔품의 본존」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강의는 이것을 「큰 사견(邪見)」이라 한다. 「팔품을 설하여」는 다만 부촉의 처음과 끝을 나타낸 것임을 알지 못하면 큰 편견(僻見)에 빠진다는 것이다. 강의는 오늘날의 부쓰류슈(佛立宗) 같은 팔품 문류가 팔품이 수량소현의 본존을 부촉하는 의식임을 모르고 「팔품소현의 본존」이라 하여 큰 방법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팔품파의 닛추는 「이 본문의 간심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는 팔품 사이에 설하여 상행보살에게 부촉하고 이것을 본존으로 삼는다. 또 『이것은 다만 제목의 오자』란 『이것은 다만 팔품』이라고 구전한다」고 했다. 강의는 대성인 멸후 백 년쯤에 생긴 팔품파의 이 사의(邪義)가 본초의 이 문장들에 근거하고 있지만, 대성인은 「수량소현」이라 하셨지 결코 「팔품소현」이라 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강의의 반론은 앞의 세 표현 비교를 그대로 활용한다. 만약 「팔품을 설하여」가 팔품소현이라는 뜻이라면, 묘락은 「본적을 설하여」라고 했으니 이십팔품소현이라는 말인가. 천태는 「본문을 설하여」라고 했으니 십사품소현이라는 말인가. 더구나 본초 제25장의 「저것은 일품이반, 이것은 다만 제목의 오자(彼は一品二半此れは但題目の五字)」를 「이것은 다만 팔품」이라고 억지로 바꿔 읽는 오류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강의는 이를 「완전히 사적대(師敵對)의 방법」이라고 단정한다.
「다만 팔품에 한한다」의 바른 뜻
팔품파는 또 「이와 같은 본존은 … 다만 팔품에 한한다」는 구절에 집착하여 팔품소현의 본존을 주장한다. 강의는 이 구절의 뜻이, 수량소현의 본존이 다만 팔품 동안에 걸치고 다른 품에는 걸치지 않으므로 「다만 팔품에 한한다」고 하신 것이라고 풀이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 글에는 결코 팔품소현의 뜻이 없다는 것이다.
「팔품의 의식」설 — 여러 문류의 공통된 오류
강의는 나아가 여러 문류가 한결같이 이 본존을 「팔품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큰 편견이며, 바로 수량품의 의식이라고 말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보탑품 때 두 부처가 자리를 나란히 하고 분신의 제불이 모였으며, 용출품 때 지용보살이 솟아나왔고, 수량품 때 십계호구 위에 국토세간이 이미 나타나 일념삼천의 본존의 의식이 원만히 갖추어져 한 가지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니 수량소현의 본존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여러 문류는 지용천계가 늘어선 재세 팔품의 의식을 그대로 말법의 본존이라고 곡해하므로, 대성인의 바른 뜻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법화경의 뜻조차 알지 못한다고 강의는 비판한다.
닛신의 「통 · 별」설과 『몽초』의 설
강의는 두 가지 이설을 더 든다.
하나는 닛신의 주석(辰抄)이다. 닛신은 통(通)하여 본존을 밝힐 때는 팔품소현의 본존이고, 별(別)하여 본존을 밝힐 때는 수량소현의 본존이므로 「본문수량의 본존」이라 한다고 했다. 강의는 이것도 큰 편견이라 한다. 통하여 본존을 밝힐 때 팔품소현이라는 설은 대성인의 어서 어디에도 없다. 또 닛신이 말하는 수량소현도 문상 탈익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당류(當流)가 증득하는 수량소현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몽초(蒙抄)』의 설이다. 『몽초』는 일부 팔권 이십팔품이 모두 본존이며, 「다만 팔품에 한한다」는 것은 본불의 일념의 존상을 다만 팔품 동안에 사상(事相)으로 보였기 때문이고, 이렇게 사상으로 나타나느냐 숨느냐는 근기에 따라 다를 뿐 불의(佛意)로는 당연하다고 했다. 강의는 이것도 어긋난 곡설이라 한다. 대성인은 이미 「본존문답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問うて云く末代悪世の凡夫は何物を以て本尊と定むべきや、答えて云く法華経の題目を以て本尊とすべし
묻기를, 말대 악세의 범부는 무엇으로 본존을 정해야 하느냐. 답하기를, 법화경의 제목으로 본존을 삼아야 하느니라.
다만 「창법화제목초」에 「본존은 법화경 팔권 · 일권 · 일품 혹은 제목을 써서 본존으로 정해야 한다」(12쪽)고 하신 것은 사도 이전, 문응 원년(1260)의 어서로서, 부처가 이전경을 설하던 때처럼 아직 본회(本懷)를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강의는 풀이한다.
강의의 판정 — 이 본존은 「수량소현」이다. 「팔품을 설하여」는 부촉의 처음과 끝을 말할 뿐이고, 「다만 팔품에 한한다」는 그 본존이 팔품 동안에만 걸친다는 뜻이다. 팔품소현 · 팔품의식 · 통별 · 이십팔품 본존의 설은 모두 강의가 논파한다.
「그 본존의 위체」 — 문저하종의 본존의 상모
일곱 가지 문증
「그 본존의 위체」 이하는 지용보살에게 부촉된 본존의 상모를 밝힌 글이다. 강의는 이 본존이 바로 문저하종 · 본지난사(本地難思)의 경지명합(境智冥合) · 구원원초 자수용신(自受用身)의 일신(一身)의 상모라고 한다. 그리고 이 뜻을 밝히기 위해 일곱 가지 문증을 든다.
첫째는 수량품의 「여래비밀신통지력(如來秘密神通之力)」이다.
此の本尊の依文とは如来秘密神通之力の文なり、戒定慧の三学は寿量品の事の三大秘法是れなり、日蓮慥に霊山に於て面授口決せしなり、本尊とは法華経の行者の一身の当体なり
이 본존의 의문(依文)이란 「여래비밀신통지력」의 문이니라. 계 · 정 · 혜의 삼학은 수량품의 사(事)의 삼대비법이 이것이니라. 니치렌이 확실히 영산에서 면수구결하였느니라. 본존이란 법화경 행자의 일신의 당체이니라.
されば釈迦・多宝の二仏と云うも用の仏なり、妙法蓮華経こそ本仏にては御座候へ、経に云く「如来秘密神通之力」是なり、如来秘密は体の三身にして本仏なり、神通之力は用の三身にして迹仏ぞかし
그러므로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라 해도 용(用)의 부처이니라.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 경에 이르기를 「여래비밀신통지력」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라. 여래비밀은 체(體)의 삼신으로서 본불이요, 신통지력은 용의 삼신으로서 적불이니라.
둘째는 수량품의 「이 좋은 양약을 지금 여기에 남겨 두노라(是好良薬今留在此)」다. 본초 뒤 장에서 대성인은 「시호양약이란 수량품의 간요인 명 · 체 · 종 · 용 · 교의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니라. 이 양약을 부처는 적화에게도 수여하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타방에게랴」(0251:09)라고 하신다.
셋째는 다시 수량품의 「時我及衆僧倶出霊鷲山」이다. 18장에서 본 「어의구전」의 「본문 사의 일념삼천의 명문이며 어본존은 이 문을 나타내 보이신 것 … 영산이란 어본존 및 니치렌 등의 무리로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가 머무는 곳」(756–757쪽)이 그것이다. 같은 구절이 18장에서는 탈익의 본존을 푸는 열쇠였고, 19장에서는 하종의 본존의 문증이 된다.
넷째는 본초의 「결국 적화 · 타방의 대보살에게는 나의 내증의 수량품을 수여할 수 없으며 … 지용천계의 대보살을 불러 수량품의 간심인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염부의 중생에게 수여하게 하셨다」(0250:09)이다. 앞에서 인용했다.
다섯째는 「선시초」다.
寿量品の南無妙法蓮華経の末法に流布せんずるゆへに、此の菩薩を召し出されたる
수량품의 남묘호렌게쿄가 말법에 유포될 것이므로 이 보살을 불러내신 것이니라.
여섯째와 일곱째는 「시모야마어소식」의 두 대목이다.
地涌の大菩薩・末法の初めに出現せさせ給いて本門寿量品の肝心たる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を一閻浮提の一切衆生に唱えさせ給うべき先序のためなり
지용의 대보살이 말법의 처음에 출현하시어 본문수량품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를 일염부제의 일체중생에게 봉창하게 하실 선서(先序)를 위함이니라.
釈迦・多宝・十方の諸仏・寿量品の肝要たる南無妙法蓮華経の五字を信ぜしめんが為なりと出し給う広長舌なり
석가 · 다보 · 시방의 제불이 수량품의 간요인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내미신 광장설(廣長舌)이니라.
강의는 이처럼 여러 어서에서 「본문수량의 간요」라 하신 것은, 숙익의 적문을 가리고 탈익의 본문을 취하므로 「본문수량품」이라 하고, 탈익의 문상을 가리고 문저하종을 취하므로 「간요」라 한 것이라고 정리한다. 앞에서 「이 본문의 간심」을 다섯 글자로 나누어 읽은 것과 같은 구조다. 「개목초」에서 「문저비침(文底秘沈)」이라 하시고 여러 어서에서 「간요」라 하신 것도 같은 뜻이다. 강의는 「수량품문저대사」의 「문저란 구원하종의 법화경 · 명자의 묘법에 금일 숙탈의 법화경을 귀입시키는 곳을 뜻하신 것이니라. 그러므로 묘락대사가 해석하기를 『탈은 현재에 있으나 갖추어 본종을 든다(雖脫在現具騰本種)』고 하였느니라」는 문을 함께 든다.
왜 재세 수량품의 의식을 빌리는가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생긴다. 「그 본존의 위체」에 나오는 석가 · 다보의 두 부처, 본화 · 적화의 보살, 시방의 제불은 모두 석존 재세의 수량품 의식에 나오는 그대로다. 그렇다면 이것은 재세의 본존과 무엇이 다른가.
강의는 이렇게 답한다. 어본존의 체상은 석가 · 다보의 두 부처, 본화 · 적화, 사리불 · 목련 등 석가 재세의 수량품 의식과 같다. 그러나 이것을 재세 수량품의 의식일 뿐이라고 단정하면, 그것은 문상 탈익의 적문 · 이(理)의 일념삼천의 교상의 본존이 된다. 지금 말법의 지용에게 부촉된 본존은 문저하종의 본문 · 사(事)의 일념삼천의 관심의 법문이다. 그런데 왜 재세의 의식을 쓰는가. 「만약 적(迹)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본(本)을 알 수 있겠는가(若し迹を借らずんば何ぞ能く本を識らんや)」이기 때문에, 재세 수량품의 의식으로써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상모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묘락의 「탈은 현재에 있으나 갖추어 본종을 든다」는 뜻을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고 강의는 말한다.
시 · 개 · 폐 — 문상과 문저
강의는 이것을 더 설명하기 위해 시개폐(施開廢)의 상전을 든다. 시(施)는 본에서 적을 드리우는 것, 개(開)는 적을 열어 본을 나타내는 것, 폐(廢)는 본을 나타내고 나면 적을 버리는 것이다.
문상의 뜻으로는 이렇다. (시) 구원 본과의 본에서 중간 · 금일의 적을 드리운다. (개) 중간 · 금일의 적을 열어 구원 본과의 본을 나타낸다. (폐) 구원 본과의 본을 나타내고 나면 다시 한 구절의 남은 법도 없으니, 구원 본과의 위체가 일념삼천의 의식이다.
문저의 뜻으로는 이렇다. (시) 구원원초의 본에서 본과 · 중간 · 금일의 적을 드리운다. (개) 본과 · 중간 · 금일의 적을 열어 구원원초의 본을 나타낸다. (폐) 구원원초의 본을 나타내고 나면 다시 한 구절의 남은 법도 없으니,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의 당체 상모로서 참된 사의 일념삼천의 위체다.
강의는 이것을 연못에 비친 달에 비유한다. 연못의 달을 보고 하늘의 달의 모습을 알고, 하늘의 달을 알고 나면 연못의 달그림자를 걷어내고 하늘의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여러 문류의 무리는 하늘의 달을 모르고 다만 연못의 달만 본다고 강의는 비판하며, 이들을 「아아, 놀랍구나, 어찌 도를 논하랴(嗚呼・聳駭なりなんぞ道を論ぜん)」의 무리라고 부른다.
- (시)구원 본과의 본에서 중간 · 금일의 적을 드리운다
- (개)중간 · 금일의 적을 열어 구원 본과의 본을 나타낸다
- (폐)구원 본과의 본을 나타내고 나면 한 구절의 남은 법도 없다 — 구원 본과의 위체가 일념삼천의 의식
- (시)구원원초의 본에서 본과 · 중간 · 금일의 적을 드리운다
- (개)본과 · 중간 · 금일의 적을 열어 구원원초의 본을 나타낸다
- (폐)구원원초의 본을 나타내고 나면 한 구절의 남은 법도 없다 —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당체 상모, 참된 사의 일념삼천의 위체
연못의 달을 보고 하늘의 달을 알고, 하늘의 달을 알고 나면 연못의 달그림자를 걷어내고 하늘의 달을 가리킨다
본과도 적에 속한다
강의는 말법의 불법에서 「본과(本果)를 적에 속하게 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이며 이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저의 뜻으로는 오직 구원원초를 본지로 삼고, 본과 이후는 모두 적에 속한다. 왜냐하면 본과 제일번 성도 때 이미 사교 · 팔교의 깊고 얕음이 다른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이다. 천태의 『법화문구』 권1에 「오직 본지의 사불(四佛)은 모두 이 본이다」라 하고, 묘락의 『석첨』 권7에 「이미 사의(四義)에 깊고 얕음이 같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같지 않음이 있다는 것은, 비록 구원의 성도라도 적에 속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판정은 구원실성의 본과의 부처 — 오백진점겁에 성불한 석존 — 조차 말법의 본존이 아님을 뜻한다. 그 부처도 성불한 뒤 근기에 맞추어 갖가지 가르침을 설했으니 화타(化他)의 부처이고, 화타의 부처는 적이다. 본지는 그보다 앞선 구원원초다. 이것이 18장의 탈익의 본존과 19장의 하종의 본존이 갈리는 지점이다.
강의는 「그 본존의 위체」를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일신의 상모로 본다. 재세 수량품의 의식을 그대로 쓰는 것은 「적을 빌려 본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문상의 시개폐는 구원 본과에서, 문저의 시개폐는 구원원초에서 멈춘다.
글을 따라 풀다 — 본사의 사바 · 보탑 · 이중의 협사
본사의 사바 위에 보탑이 허공에 머물다
강의는 이제 본문을 한 구절씩 푼다. 「본사의 사바 위에 보탑이 허공에 머문다」에서 본사의 사바란 곧 「늘 영취산에 있다(常在霊鷲山)」의 영취산이다. 묘락은 「상재(常在)의 말에 의거하면 곧 자수용토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능거(能居)인 오백 유순의 보탑은 곧 본유의 오대(五大)를 뜻하고, 소거(所居)인 허공은 곧 자수용신이 머무는 적광토를 뜻한다고 강의는 풀이한다. 17장의 무상한 국토, 18장의 상주의 국토를 지나, 19장의 국토는 자수용신의 적광토다.
이중의 협사
「탑 안의 묘법연화경 좌우에 석가모니불 · 다보불」 등에 대해, 강의는 닛추의 주석(忠抄)이 「중앙의 묘법연화경의 협사는 석가 · 다보이고, 석가 · 다보의 협사는 사대보살이며, 문수 · 미륵 등은 사대보살의 권속」이라고 한 것을 들고, 니치칸 상인이 이 뜻을 「가장 아름답다(最美)」고 하셨다고 전한다. 앞에서 팔품소현설로 강의가 강하게 논파한 닛추의 주석이지만, 협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니치칸 상인이 그 해석을 받아들인 것이다. 곧 묘법연화경의 협사는 이중의 협사이며, 정법 · 상법의 불상과는 크게 다르다.
語釈의 「협사」 항목도 같은 정리를 한다. 각 교주의 협사를 보면, 소승의 석존은 가섭 · 아난을, 권대승 · 열반 · 법화경 적문 등의 석존은 문수 · 보현 등을 협사로 삼았다. 법화경 본문의 석존은 상행 등 사보살을 협사로 삼고 문수 · 미륵 등은 사보살의 권속으로 말좌에 있다. 그리고 문저독일본문의 교주, 곧 어본존의 모습은 「묘법연화경의 좌우에 석가모니불 · 다보불」이고, 다시 「석존의 협사」로서 「상행 등의 사보살」이 있다. 협사의 위와 모습으로 본존의 덕용의 높낮이를 판별하므로, 묘법연화경을 중심으로 석가 · 다보가 협사가 되고 그 협사에 다시 사보살이 협사가 되는 이 이중의 협사는 정법 · 상법의 본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협사의 관계를 글과 표로만 적는다. 「좌우」 · 「말좌」 · 「대지」 같은 본문의 말은 인용 · 해설하되, 이것을 자리 배치 그림으로 옮기지 않는다(본존에 관한 원칙).
탑 안의 묘법연화경 — 세 가지 뜻
강의는 재세 보탑 안의 묘법연화경의 체(體)에 대해 니치칸 상인의 문단을 따라 세 가지 뜻을 든다.
첫째, 묘법연화경은 곧 본유의 오대다. 재세에 출현한 오백 유순의 보탑은 은밀히 본지 자수용신의 본유의 오대를 나타낸다. 자수용신의 본유의 오대 — 지 · 수 · 화 · 풍 · 공 — 가 곧 묘법연화경이다.
五行とは地水火風空なり……今経に之を開して一切衆生の心中の五仏性・五智の如来の種子と説けり是則ち妙法蓮華経の五字なり、此の五字を以て人身の体を造るなり本有常住なり本覚の如来なり
오행이란 지 · 수 · 화 · 풍 · 공이니라. … 이 경에 이것을 열어 일체중생의 마음속의 오불성 · 오지의 여래의 종자라고 설하였느니라. 이것이 곧 묘법연화경의 오자이니라. 이 오자로써 사람의 몸의 체를 만드느니라. 본유상주이며 본각의 여래이니라.
둘째, 묘법연화경은 곧 십계호구다. 재세 허공회의 의식에 나타나는 십계의 성중은 본지 자수용신의 일념의 심법에 갖춘 십계호구의 묘법연화경을 나타낸다.
因果倶時・不思議の一法之れ有り之を名けて妙法蓮華と為す此の妙法蓮華の一法に十界三千の諸法を具足して闕減無し
인과구시(因果倶時)의 불가사의한 일법이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묘법연화라 하느니라. 이 묘법연화의 일법에 십계 삼천의 제법을 구족하여 모자람이 없느니라.
셋째, 묘법연화경은 곧 경(境) · 지(智)의 이법이다. 십계의 성중이 좌우에 앉아 본지난사의 경지의 묘법연화경을 나타낸다. 천태는 「경과 지가 화합하면 곧 인과가 있다. 경을 비추어 아직 다하지 못함을 인이라 하고, 근원을 다함을 과라 한다」고 했다. 늘어선 구계는 경(객관 세계)을 아직 다 비추지 못하므로 묘인(妙因)을 나타내고,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는 근원을 다하여 지덕이 원만하므로 묘과(妙果)를 나타낸다. 이렇게 경지화합 · 인과의 이법을 나타낸다고 강의는 풀이한다.
색상장엄의 불보살과 문저의 불보살
종자와 가지와 잎
강의는 어본존의 묘법연화경 좌우에 문자로 써서 나타낸 불보살을 색상장엄(色相莊嚴)의 탈익의 불보살로 우러르는 이가 있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한다. 종본(種本)과 탈익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어본존에 문자로 쓰인 불보살 등은 본지자증(本地自證)의 묘법 · 무작본유(無作本有)의 체덕이다. 비유하면 한 알의 씨앗 속에 백천의 가지와 잎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색상장엄으로 조립한 불보살 등은 적중화타(迹中化他)의 형상이며, 씨앗에서 생겨난 백천의 가지와 잎과 같다.
그런데 예부터 권 · 적의 색상장엄 불보살에 집착하는 이들은 이것이 적중화타의 형상임을 모른다. 이 적중화타의 형상으로는 말법의 중생을 구할 수 없다고 강의는 말한다.
왜 색상장엄은 화타의 형상인가
왜 색상장엄의 불보살이 적중화타의 형상인가. 강의는 『교시의(敎時義)』의 「세간은 모두 부처가 삼십이상을 갖춘 것을 안다. 이 세정(世情)을 따라 삼십이상으로써 부처로 삼는다」를 든다. 열응신의 삼십이상 팔십종호, 승응신의 팔만사천 상호, 화엄경 등의 타수용보신의 십연화장미진의 상호, 미묘정법신구상삼십이, 응불승진의 자수용신 등은 모두 세간의 인정을 따라 나타낸 불신이다. 그래서 근기에 따라 그 상호에도 많고 적음이 있다. 『마하지관』 권7에 「연(緣)을 위하여 같지 않으니, 많고 적음은 저쪽에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구원 본과의 부처라면 자행의 성도」라는 반론
그러나 색상장엄의 부처에 집착하는 이들은, 비록 색상장엄이라도 구원 본과의 부처라면 곧 본지 자행(自行)의 성도이므로 결코 적중화타의 형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강의는 이것을 큰 편견이라 한다. 본과 제일번 성도에 이미 사불이 있고 사교 · 팔교를 설했기 때문이다. 천태는 「본지의 사불은 모두 이 본이다」라 하고, 묘락은 「구원에도 또한 사교가 있다」고 했다. 이미 방편을 베풀어 사교 · 팔교를 설했으므로 화타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묘락은 또 「본지의 자행은 오직 원(圓)과 합하고, 화타는 부정(不定)이어서 또한 팔교가 있다」고 했다. 이 문들에 분명하지 않은가 하고 강의는 묻는다. 앞에서 본 「본과도 적에 속한다」는 판정이 여기서 색상장엄 본존론을 논파하는 근거로 쓰인다.
닛신의 「총체 · 별체」설과 니치칸 상인의 판정
강의는 본존에 관한 닛신의 주석(辰抄)을 하나 더 든다. 닛신은 이렇게 말했다. 「본존에 총체(惣體)와 별체(別體)가 있다. 총체의 본존이란 한 폭의 대만다라로서 곧 이 글이 이것이다. 별체의 본존에 또 두 뜻이 있다. 하나는 인본존으로, 「보은초」 · 「삼대비법초」 · 「사도초」 · 본초 아래 글의 사행(事行)의 남묘호렌게쿄 오자 · 칠자 및 본문의 본존이라는 글이 이것이다. 둘은 법본존으로, 「본존문답초」의 『말대 악세의 범부는 법화경의 제목을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는 글이 이것이다.」
강의는 이에 대한 니치칸 상인의 판정을 인용한다. 그 요지는 이렇다. 닛신의 설은 문저의 대사를 모르고 인법체일의 깊은 뜻에 미혹하여, 다만 재세 탈익 교상의 본존에 집착해 그것을 말법 하종의 관심의 본존으로 삼고 있다. 대성인의 여러 어서의 뜻에 전혀 통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 총체 · 별체의 명목을 세워 조사의 글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고 있다. 닛신이 인용한 글은 모두 인법체일의 본존이다. 인법체일이라 해도 인과 법은 완연히 갖추어져 있다. 인즉법(人卽法)의 본존이란 곧 자수용신 즉 일념삼천의 대만다라이고, 법즉인(法卽人)의 본존이란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의 니치렌 대성인이시다. 지금 「그 본존의 위체」의 이 글과 본초의 「사행의 남묘호렌게쿄 및 본문의 본존」의 글, 「본존문답초」의 글은 인즉법의 본존이며, 「삼대비법초」 · 「보은초」 등은 법즉인의 본존이다.
- 보현경 「삼세의 모든 여래를 출생시키는 씨앗」
- 약왕품 「칠보 공양이 사구게 하나 수지에 미치지 못한다」
- 『법화문구』 권10 「사람은 가볍고 법은 무겁다」
- 『석첨』 권8 「부모가 아니면 날 수 없고…」
- 법사품 「이미 여래의 전신이 계신다」
- 천태 「이 경은 법신의 사리」
- 『열반경회소』 권13 「사람과 법이 하나이며 둘이 없다」
- 自受用身とは一念三千なり자수용신이란 일념삼천이니라「어의구전」, 759쪽
- 인즉법의 본존
- 자수용신 즉 일념삼천의 대만다라
- 법즉인의 본존
-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의 니치렌 대성인
- 「其の本尊の為体」 (그 본존의 위체) · 본초 「事行の南無妙法蓮華経並びに本門の本尊」 (사행의 남묘호렌게쿄 및 본문의 본존) · 「본존문답초」
- 인즉법
- 「삼대비법품승사」 · 「보은초」
- 법즉인
강의의 판정 — 어본존의 불보살은 「본지자증의 묘법 · 무작본유의 체덕」으로서 씨앗과 같고, 색상장엄의 불보살은 「적중화타의 형상」으로서 가지와 잎과 같다. 구원 본과의 부처도 사교 · 팔교를 설했으므로 화타이며, 말법의 중생을 구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본존」에서 「이 불상」까지 — 하나로 이어진 글
팔품파의 끊어 읽기
강의는 다시 「이와 같은 본존은 다만 팔품에 한한다」를 자세히 논한다. 이 대목의 뜻은 이렇게 하나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존은 재세 사십 년에 없고, 팔 년 동안에도 다만 팔품에 한한다. 재세 팔품에 한할 뿐이고, 정법 · 상법 이천 년 동안에는 소승 · 권교 · 적문의 부처는 만들고 그렸으나 아직 이와 같은 수량의 부처는 계시지 않았다. 말법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 수량품의 불상이 출현한다.」 곧 「이와 같은」에서 「이 불상이 출현하게 될 것인가」까지는 하나로 이어진(一連相續) 글이다.
팔품파처럼 「팔품소현의 본존은 다만 팔품에 한한다」고 끊어 읽어서는 안 된다. 「말법에 들어와서 비로소」의 「비로소(始)」라는 글자에 유의하면 그런 읽기가 얼마나 심한 곡해인지 분명하다고 강의는 말한다. 팔품에 이미 있었던 본존이라면 말법에 「비로소」 출현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의는 이런 데서 사교(邪敎)가 어지러이 생겨났다고 비판한다.
「수량의 부처」 · 「이 불상」 — 인법체일
그런데 앞에서는 「본존의 위체」로서 법의 본존을 밝히면서, 왜 여기서는 「수량의 부처」 · 「이 불상」이라고 사람(부처)으로 말하는가. 강의는 이것이 인법체일의 깊은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답한다. 앞에서는 인즉법에 약하여 본존의 위체를 밝히고, 지금은 법즉인에 약하여 말법 출현을 맺는다. 그리고 궁극에서 그 인과 법은 체가 하나다. 앞에서 밝힌 본존의 위체는 완전히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당체의 상모이므로, 지금 「수량의 부처」 · 「이 불상」이라 한다는 것이다.
문상에서는 인법승렬
강의는 인법의 관계를 문상과 문저로 나눈다. 문상 숙탈에서는 인법승렬(人法勝劣)이고, 문저하종에서는 인법체일이다.
문상 숙탈에서 인법의 승렬을 말하면, 여러 경문에서 사람과 법의 승렬은 하늘과 땅 같고 공양의 공덕은 물과 불처럼 다르다고 설한다. 강의는 그 문증을 길게 든다. 보현경의 「이 대승경전은 제불의 보장이며 시방삼세 제불의 안목이요, 삼세의 모든 여래를 출생시키는 씨앗이다」. 약왕품의 「만약 어떤 사람이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워 부처와 대보살 · 벽지불 · 아라한에게 공양한다 해도, 이 사람이 얻는 공덕은 이 법화경의 사구게 하나를 수지하는 복이 가장 많은 것에 미치지 못한다」. 『법화문구』 권10의 「칠보를 사성(四聖)에게 바치는 것은 한 게송을 지니는 것만 못하다. 법은 성인의 스승이며 능히 낳고 이루고 영화롭게 하니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가볍고 법은 무겁다」. 묘락의 「넷이 같지 않으나 법을 근본으로 삼는다」. 『석첨』 권8의 「부모가 아니면 날 수 없고, 사장(師長)이 아니면 이룰 수 없으며, 군주가 아니면 영화로울 수 없다」. 이 문들의 뜻은 법으로 말미암아 나고, 법으로 말미암아 자라며, 법으로 말미암아 영화롭다는 것이다. 삼세의 제불이 이미 법으로 말미암아 났으니, 우리 중생도 법을 공양하는 공덕이 뛰어남이 분명하다.
그래서 방편품에 「법을 듣고 환희하여 찬탄하고 한 마디라도 내면 이미 일체 삼세의 부처를 공양한 것이다」, 보탑품에 「능히 이 경법을 지키는 이는 곧 나와 다보를 공양하는 것이다」, 다라니품에 「팔백만억 나유타 항하사의 제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이 경의 사구게 하나라도 수지 · 독송 · 해의하고 설한 대로 수행하는 공덕이 매우 많다」, 선주천자경에 「법을 듣고 비방을 일으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항하사의 부처를 공양하는 것보다 낫다」, 『유마경소(名疏)』 권10에 「실상은 삼세 제불의 어머니이다 … 불모(佛母)인 실상을 공양하면 삼세 시방의 부처 계신 곳에서 함께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이처럼 공양의 공덕도 법과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강의는 정리한다.
문저에서는 인법체일
그러나 문저하종의 불법에서 인과 법은 체가 하나다. 문저하종의 본존은 사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사람이 없으며, 사람은 그대로 법이고 법은 그대로 사람이다. 인과 법의 이름은 달라도 그 체는 하나다.
강의는 그 문증을 든다. 법사품의 「경권이 있는 곳에는 … 이미 여래의 전신이 계신다」. 천태의 「이 경은 법신의 사리」 — 여기서 천태가 말하는 법신은 곧 자수용신이다. 보탑품의 「만약 능히 지니는 이가 있으면 곧 불신을 지니는 것이다」. 『법화문구』 권10의 「법을 지니는 것은 곧 불신을 지니는 것이다」. 또 열반경은 여래행을, 법화경은 안락행을 설하는데, 천태는 이를 회통하여 「여래는 사람이요 안락은 법이니, 여래는 안락의 사람이요 안락은 여래의 법이다. 통틀어 말하면 그 뜻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묘락은 「여래와 열반은 사람과 법으로 이름은 다르나 대리(大理)는 다르지 않으니, 사람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라 했다. 『열반경회소』 권13은 「여래는 곧 사람의 제호요, 일실제(一實諦)는 법의 제호이다. 제호의 사람이 제호의 법을 설하고, 제호의 법이 제호의 사람이 된다. 사람과 법이 하나이며 둘이 없다」고 했다. 『약법화경』은 「육만구천삼백팔십사 글자, 한 글자 한 글자가 참된 부처이다」라고 했다. 강의는 이 문들의 뜻이 실로 하종의 본존 · 하종의 본불 · 인법체일의 깊은 뜻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량품의 「일심으로 부처를 뵙고자 하여 스스로 신명을 아끼지 않으면, 때에 나와 중승이 함께 영취산에 나온다」는 경문이 바로 인법체일의 깊은 뜻을 보인 것이니 잘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인법체일의 해석으로 강의는 십계호구를 원불(圓佛)이라 이름하는 것을 들고, 전교대사의 『비밀장엄론』의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 「어의구전」의 「자수용신이란 일념삼천이니라」(759쪽, 제22 자아게시종의 일), 그리고 「제법실상초」의 「그러므로 석가 · 다보의 두 부처라 해도 용의 부처이니라. 묘법연화경이야말로 본불이시니라」(1358쪽)를 든다.
강의는 「수량의 부처」 · 「이 불상」이라는 말을 인법체일로 읽는다. 「그 본존의 위체」는 인즉법에서, 「이 불상」은 법즉인에서 말한 것이며, 두 말이 가리키는 체는 하나 —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당체다.
「이 불상」을 불상으로 읽는 설과 강의의 논파
색상장엄의 석존을 만드는 이들의 논리
이 장의 마지막 구절 「말법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 불상이 출현하게 될 것인가」는 대성인 멸후 본존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강의는 미노부 등 문저하종의 불법을 모르는 무리가 색상장엄의 석존상을 만들고도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수량품의 부처」와 「이 불상」을 본문수량의 교주 석존, 곧 색상장엄의 화상(畫像) · 목상(木像)으로 이해한다. 그들의 생각은 이렇다. 석존 일대의 성교를 정 · 상 · 말 삼시에 배당하면 정법 · 상법은 소승교 · 권교 · 적문의 때이고 말법의 지금은 본문의 때다. 그러므로 정법 · 상법 때 이미 소 · 권 · 적의 석가불을 만들어 본존으로 삼았으니, 말법의 지금은 본문수량의 교주 석존을 만들고 그려 본존으로 삼아야 한다.
강의는 이것이 「일단은 그렇다」고 인정한다. 정 · 상 · 말에 소 · 권 · 적 · 본을 배당하는 틀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본문」에 대해 투철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다. 대성인의 진의인 문저하종의 불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말법 지금의 본문은 문상 탈익의 본문이 아니라 문저독일(文底獨一)의 본문이다. 그래서 대성인은 「본문에 대하여 두 가지 마음이 있으니, 하나는 재세를 위함이요 둘은 멸후를 위함」이라고 하셨다고 강의는 인용한다(「법화취요초」의 「본문에 대하여 두 가지 마음이 있다」는 대목 — 용출품의 약개근현원(略開近顯遠)은 재세의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함이고, 일품이반의 광개근현원은 오로지 멸후를 위함이라는 취지). 재세 수량의 교주 · 색상장엄의 부처는 재세 탈익의 본존이고, 문저하종의 본존은 멸후 말법의 본존이다. 그러므로 정 · 상 · 말 삼시의 배립에 조금도 모순이 없다고 강의는 말한다.
「불상」은 화상 · 목상에 한하지 않는다
또 「불상」이라 했다고 해서 반드시 화상 · 목상에 한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의는 말한다. 정법 · 상법에 대해서는 「만들고 그렸다(造り画けども)」라 하시고, 말법에 대해서는 「출현」이라 하신 것을 보아도 그 뜻을 알아야 한다. 만들고 그리는 것은 사람이 손으로 짓는 일이고, 출현은 스스로 나타나는 일이다.
강의는 본초의 다른 대목과 대어본존의 찬문을 함께 든다. 본초 제29장(0253)에 「이때 지용의 보살이 비로소 세상에 출현하여 다만 묘법연화경의 오자로써 어린아이에게 복용하게 한다(此の時地涌の菩薩始めて世に出現し但妙法蓮華経の五字を以て幼稚に服せしむ)」고 하셨고, 만년구호본존의 찬문에 「상행보살이 세상에 출현하여 비로소 이를 넓혀 편다(上行菩薩世に出現して始めて之を弘宣す)」고 하셨다. 19장의 「비로소 이 불상이 출현」까지 세 곳에서 똑같이 「비로소 출현」이라 하신 뜻을 잘 새겨야 한다고 강의는 말한다. 세 곳을 나란히 놓으면, 말법에 「비로소 출현」하는 것은 지용의 보살 · 상행보살과 그가 넓히는 묘법연화경의 오자이며, 「이 불상」은 그것과 떨어진 조각상이 아니다.
「寿量の仏」 (수량의 부처) · 「此の仏像」 (이 불상) = 본문수량의 교주 석존의 화상 · 목상
- 말법의 본문은 문저독일의 본문
- 「寿量の仏」 (수량의 부처) · 「此の仏像」 (이 불상) = 인법체일 — 법즉인에 약해 말법 출현을 맺은 말
- 정상에는 「造り画けども」 (만들고 그렸으나), 말법에는 「出現」 (출현)
- 세 곳의 「始めて出現」 (비로소 출현)本抄 (본초)此の時地涌の菩薩始めて世に出現し이때 지용의 보살이 비로소 세상에 출현하여0253찬문上行菩薩世に出現して始めて之を弘宣す상행보살이 세상에 출현하여 비로소 이를 넓혀 편다本抄 (본초)末法に来入して始めて此の仏像出現せしむ可きか말법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 불상이 출현하게 될 것인가
19장 끝의 「~하게 될 것인가(せしむ可きか)」는 18장 끝의 「~이리라(故なるか)」와 같은 추량의 말씨다. 現代語訳은 이것을 「말법에 이르러 비로소 문저하종 · 인법일개의 어본존이 반드시 건립되는 것이다」라고 단정형으로 푼다. 강의는 이 구절을 말법 출현의 「결(結)」로 읽는다.
강의의 논파 — 「이 불상」을 색상장엄의 석존상으로 읽는 설은 정 · 상 · 말 배당의 틀은 맞으나 말법의 본문이 「문저독일의 본문」임을 모른다. 정법 · 상법에는 「만들고 그렸다」, 말법에는 「출현」이라 하셨으며, 본초 · 찬문의 세 곳이 모두 「비로소 출현」이라 하신다.
본문
問う正像二千余年の間は四依の菩薩並びに人師等余仏・小乗・権大乗・爾前・迹門の釈尊等の寺塔を建立すれども本門寿量品の本尊並びに四大菩薩をば三国の王臣倶に未だ之を崇重せざる由之を申す、 此の事粗之を聞くと雖も前代未聞の故に耳目を驚動し心意を迷惑す請う重ねて之を説け委細に之を聞かん。
묻기를, 정법 · 상법 이천여 년 동안에는 사의(四依)의 보살 및 인사(人師) 등이 다른 부처 · 소승 · 권대승 · 이전 · 적문의 석존 등의 사탑은 건립하였으나, 본문수량품의 본존 및 사대보살은 삼국의 왕과 신하가 함께 아직 이를 숭중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느니라. 이 일을 대강 들었으나 전대미문이므로 이목을 놀라게 하고 마음을 미혹케 하느니라. 청컨대 거듭 이것을 설하라. 자세히 이것을 듣고자 하느니라.
어구 풀이
- 四依の菩薩사의의 보살
- 부처 멸후에 불법을 홍통하여 중생 제도의 중심이 된 이들의 위(位)를 네 단계로 나누어 초의 · 이의 · 삼의 · 사의라 한다. 사의에는 소승 · 권대승 · 적문 · 본문의 네 종류가 있으며 배립에는 여러 설이 있다. 제10장에 이미 나왔다. 본초 뒤 장(0251)에서 대성인은 소승의 사의는 대부분 정법 전반 오백 년, 대승의 사의는 대부분 정법 후반 오백 년, 적문의 사의는 대부분 상법 일천 년과 일부 말법 처음, 본문의 사의인 지용천계는 말법의 처음에 반드시 출현한다고 하신다.
- 人師인사
- 경전을 해석하고 펴는 논사 · 학승. 인도의 논사(四依의 보살)와 구별하여 주로 중국 · 일본의 학승을 가리킨다.
- 余仏다른 부처
- 석존 이외의 부처. 아미타불 · 약사여래 · 대일여래 등. 17장에서 본 「소변의 제불」이다.
- 寺塔사탑
- 절과 탑. 본존을 모시고 공양하는 시설 전체를 가리킨다.
- 本門寿量品の本尊並びに四大菩薩본문수량품의 본존 및 사대보살
- 19장에서 밝힌 본존과 그 협사인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 강의는 앞의 것을 인즉법의 본존, 뒤의 것을 법즉인의 본존으로 읽는다.
- 三国の王臣삼국의 왕신
- 인도 · 중국 · 일본 세 나라의 국왕과 신하. 불교가 전해진 세계 전체에서 국가 차원으로 숭중한 일이 없다는 뜻이다.
- 崇重숭중
- 높이 받들어 소중히 모심.
- 前代未聞전대미문
- 이전 시대에 들어 본 적 없는 일. 대고중이 받은 충격의 크기를 나타낸다.
- 耳目を驚動し心意を迷惑す이목을 놀라게 하고 마음을 미혹케 함
- 듣고 보는 것이 놀라워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뜻. 제10장 이래 대고중이 거듭 「믿기 어렵다」고 물어 온 흐름을 잇는 말이다.
약석에서 광석으로 — 질문의 자리
강의는 이 장을 짧게 정리한다. 앞 장의 약석(略釋)을 듣고 「이 일을 대강 들었다」는 단계에 이르러, 이제 다시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질문이며, 이에 대한 답이 다음 장부터의 오중삼단(五重三段)이 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의 형식은 「관심의 본존초」 전체의 문답 구조를 잘 보여 준다. 대고중은 처음부터 거듭 의문을 던져 왔다. 제10장에서는 「범부의 열등한 마음에 불계를 갖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물었고, 제11장에서는 교주 석존 같은 거룩한 부처가 어떻게 범부의 기심에 머무를 수 있느냐고 물었으며, 제12장에서는 이전의 경론과 논사들이 일념삼천을 말하지 않았다고 따졌다. 대성인은 그 하나하나에 답해 제16장에서 수지즉관심을 밝히고, 17~19장에서 세 본존을 차례로 밝히셨다. 그런데 19장의 결론 — 재세에도 정법 · 상법에도 없던 본존이 말법에 비로소 출현한다 — 은 대고중에게 지금까지의 어떤 대답보다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전대미문」이라 하고 「이목을 놀라게 하고 마음을 미혹케 한다」고 한 것이다.
본초에서 대고중의 질문은 대성인 당시 사람들이 품었을 법한 상식적인 의문을 대신한다. 불교가 전해진 지 이천 년이 넘었고, 인도 · 중국 · 일본의 수많은 고승과 국왕이 절과 탑을 세웠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 본존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불교 전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말이 된다. 이 질문의 무게가 그만큼 크기에, 대성인은 다음 장부터 법화경 일부와 일대 성교 전체를 다섯 겹으로 나누어 하나하나 짚는 긴 답을 시작하신다.
정법 · 상법 이천 년의 사탑
질문은 정법 · 상법 이천여 년 동안 세워진 사탑을 「다른 부처 · 소승 · 권대승 · 이전 · 적문의 석존」으로 나눈다. 이것은 19장의 「소승의 석존은 가섭 · 아난을 협사로 삼고, 권대승 및 열반경 · 법화경 적문 등의 석존은 문수 · 보현 등을 협사로 삼았다」는 구절을 받은 것이다. 17장에서 국토로, 19장에서 협사로 가렸던 그 본존들이 여기서는 실제로 세워진 사탑으로 다시 등장한다.
본초 뒤 장(제29장)에서 대성인은 정법 · 상법에 지용천계가 출현하지 않은 까닭을 이렇게 밝히신다. 정법 일천 년 동안은 소승 · 권대승의 때로 근기도 때도 없었으며, 사의의 대사들은 소 · 권을 연으로 삼아 재세의 하종을 해탈시켰다. 상법의 중 · 말에는 관음 · 약왕이 남악 · 천태 등으로 나타나 적문을 겉으로 삼고 본문을 속으로 삼아 백계천여 · 일념삼천의 뜻을 다했으나, 「다만 이구(理具)를 논하여 사행의 남묘호렌게쿄의 오자 및 본문의 본존은 아직 널리 행하지 않았다. 결국 원기(圓機)는 있었으나 원시(圓時)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0253). 20장의 질문은 이 대답을 미리 불러내는 물음이다.
「본문수량품의 본존 및 사대보살」 — 인즉법과 법즉인
강의는 질문 가운데 「본문수량품의 본존 및 사대보살」이라고 특별히 말씀하신 데에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 「본문수량품의 본존」은 앞의 정석(正釋), 곧 19장에서 밝힌 인즉법의 본존을 가리키고, 「및 사대보살」은 법즉인의 본존을 든 것이라는 해석이다.
색상장엄의 석존도, 금색의 사협사도 아니다
강의는 이 「본문수량의 본존」이 수량품의 교주 · 색상장엄의 석존이 아니고, 사대보살 또한 몸이 모두 금빛인 네 협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앞 장에서 「그 본존의 위체」로서 「탑 안의 묘법연화경」이라 하여 본경의 정체를 이미 밝혔다. 석가 · 다보는 이 문저하종의 묘법연화경의 협사이고, 사대보살은 다시 그 석가 · 다보의 협사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사대보살은 문상 탈익의 사대보살이 아님이 분명하다.
둘째,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끝에서 대성인은 「저것은 탈, 이것은 종(彼は脫此れは種)」이라 하여 탈과 적을 가리는 설상(說相)을 취하신다(제25장, 0249). 그러므로 이 본존이 색상장엄의 부처가 아님은 분명하다.
셋째, 19장에서 본 대로 정법 · 상법의 본존은 「만들고 그렸다」 하고 말법의 본존은 「출현」이라 하셨다. 색상장엄의 석존이라면 정법 · 상법에도 만들고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대보살이 법즉인인 까닭 — 섭전현후
그러면 사대보살이 왜 법즉인의 본존인가. 강의는 그것이 섭전현후(攝前顯後)의 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의 자수용신을 거두어들이고(攝前) 뒤의 니치렌을 나타낸다(顯後). 그래서 사대보살을 들어 그 양쪽을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강의는 그 근거로 「백육개초」의 다음 구절을 든다.
本地自受用報身の垂迹・上行菩薩の再誕・本門の大師日蓮
본지 자수용보신의 수적이요, 상행보살의 재탄이며, 본문의 대사 니치렌.
본지는 자수용보신, 그 수적(垂迹)이 상행보살, 상행보살의 재탄이 본문의 대사 니치렌이다. 사대보살, 특히 상행보살은 앞의 자수용신과 뒤의 니치렌 대성인을 잇는 고리에 서 있다. 강의는 이 대목을 「명이체동(名異體同)」의 상전이라 부른다. 이름은 다르나 체는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위의 글 뜻에서 보면, 사대보살이라 해도 그 뜻은 별(別)하여 상행보살에게 있음이 분명해진다고 강의는 말한다. 그래서 만년구호본존의 찬문에는 「상행이 출현」이라 하고, 본초에도 「이때 지용의 보살이 출현하여」라고 하신 것이다.
강의는 「本地自受用報身の垂迹・上行菩薩の再誕・本門の大師日蓮」을 「당류 깊은 비밀의 명이체동의 상전」으로 소개한다. 여기서는 이 구절을 「백육개초」의 어문으로 인용하는 데 그치고, 상전서의 전수 경위에 관한 서술은 싣지 않는다.
답의 예고 — 오중삼단으로
20장의 질문에 대한 대성인의 답은 제21장부터 제25장에 걸친 오중삼단이다. 일대 성교 전체를 한 경으로 보아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으로 나누는 일대삼단, 무량의경 · 법화경 · 보현경의 십 권을 셋으로 나누는 십권삼단, 적문 14품의 적문숙익삼단, 본문 14품의 본문탈익삼단, 그리고 문저하종삼단이다. 다섯 겹으로 거듭 나누어 갈수록 정종분이 좁혀지고, 마지막 문저하종삼단에서 정종분은 「일품이반」을 넘어 「다만 제목의 오자」에 이른다.
이 오중삼단은 17~19장에서 밝힌 세 본존의 구별을 법화경 경문의 구조로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다. 17장의 권적숙익은 적문숙익삼단에, 18장의 본문탈익은 본문탈익삼단에, 19장의 문저하종은 문저하종삼단에 대응한다. 질문이 「거듭 설하라, 자세히 듣고자 한다」고 한 대로, 답은 앞의 약석을 경문의 틀 위에서 다시 한 번 촘촘히 펼쳐 보인다. 이것은 제5편의 주제다.
20장의 판정 — 「본문수량품의 본존」은 인즉법, 「및 사대보살」은 법즉인의 본존이다. 그 본존은 색상장엄의 석존이 아니며 사대보살도 금색의 네 협사가 아니다. 사대보살의 뜻은 별하여 상행보살에 있으며, 답은 오중삼단으로 이어진다.
이 편을 맺으며
제4편의 네 장은 하나의 물음을 세 번 되풀이한다. 무엇이 본존인가. 17장은 그 물음에 국토로 답했다. 이전 · 적문의 화장 · 밀엄 · 삼변 · 사견은 모두 성겁 위의 무상한 국토이며, 능변의 교주가 입멸하면 소변의 제불도 국토도 함께 멸한다. 무상한 본존은 유명무실하다. 18장은 같은 물음에 국토와 부처의 상주로 답했다. 수량품에서 본인 · 본과 · 본국토가 함께 밝혀져, 사바세계는 삼재를 여의고 사겁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가 되고 부처와 소화는 삼세에 상주하는 동체가 되었다. 이것이 재세 중생의 기심의 삼천이요 본문탈익의 본존이다. 그러나 「백육개초」가 말하듯 그것도 말법에서 보면 「교상의 적문」이다. 19장은 부촉과 시(時)로 답했다. 이 본문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의 오자는 문수 · 약왕에게도 부촉되지 않고 오직 지용보살에게 부촉되었으며, 그 본존의 위체는 재세 오십여 년에도, 정법 · 상법 이천 년에도 없었고, 말법에 들어와 비로소 출현한다.
강의는 이 흐름을 니치칸 상인의 문단을 따라 권적숙익 · 본문탈익 · 문저하종의 세 본존으로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문류의 해석을 논파했다. 18장의 「이것이 곧 기심의 삼천구족」을 말법에 배당하는 설, 19장의 「팔품을 설하여」를 팔품소현으로 읽는 설, 이 본존을 팔품의 의식으로 보는 설, 통 · 별이나 총체 · 별체로 나누는 설, 「이 불상」을 색상장엄의 석존상으로 읽는 설이 그것이다. 강의의 논파는 하나의 원리로 모인다. 재세와 말법, 문상과 문저, 탈익과 하종을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재세 수량품의 의식을 쓰는 것은 「적을 빌려 본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연못의 달을 보고 하늘의 달을 알았다면 연못의 달그림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편의 해설에서 거듭 드러나듯, 본존의 문제는 생활의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다. 18장의 강의가 성주괴공과 영원한 생명, 사바즉적광을 그토록 길게 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상주의 국토는 먼 곳에 있지 않고, 상주의 생명은 관념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할 때 본유의 생사 · 본유의 퇴출이라고 개각한다」는 「어의구전」의 말씀처럼, 강의는 그 문이 수지와 봉창에 있다고 본다. 제3편의 수지즉관심과 이 편의 세 가지 본존은 그렇게 한 몸으로 이어진다.
다음 제5편 「오중삼단」은 20장의 질문에 대한 대성인의 긴 답이다. 일대 성교를 다섯 겹으로 나누어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을 거듭 가려 가며, 정종분이 마침내 「다만 제목의 오자」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간다. 「저것은 탈, 이것은 종이며, 저것은 일품이반, 이것은 다만 제목의 오자」라는 판정이 거기서 나온다.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관심의 본존초」(어서 238–255쪽), 창가학회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 같은 어서전집 수록: 「어의구전」, 「백육개초」, 「수량품득의초」,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여설수행초」, 「개목초」, 「일생성불초」, 「우에노전미망인답서」, 「보은초」, 「교오전답서」, 「입정안국론」, 「삼대비법품승사」, 「신니부인답서」, 「제법실상초」, 「선시초」, 「시모야마어소식」, 「본존문답초」, 「창법화제목초」, 「당체의초」, 「법화취요초」
- 『묘법연화경』 T9 no.262 · 『무량의경』 T9 no.276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대반열반경』 T12 no.374
- 천태대사 『법화문구』 T34 no.1718 · 『마하지관』 T46 no.1911 · 『법화현의』 T33 no.1716
- 묘락대사 『법화현의석첨』 T33 no.1717 · 『법화문구기』 T34 no.1719 ·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 니치칸 상인, 「관심본존초 문단」(강의를 통해 참조)
연구
- 창가교학연구실 블로그, 「0238~0255 如来滅後五五百歳始観心本尊抄」 제17~20장 강의
- 창가학회 교학부, 『世界広布の翼を広げて 教学研鑽のために — 観心本尊抄』 제2판, 聖教新聞社, 2024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