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목초」 하권은 「또 이제부터야말로(又今よりこそ)」라는 말로 시작한다. 상권 끝에서 대성인은 이승의 법화 심은을 길게 논한 뒤, 그 은혜를 입은 이들이 왜 법화경의 행자를 지키러 오지 않는가를 물으셨다. 하권 첫머리의 일곱 장은 같은 물음을 이번에는 보살과 제천에게 돌려, 그들이 법화경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를 적문의 보탑품에서 본문의 종지용출품 · 여래수량품까지 차례로 밝혀 간다. 그 길은 증전기후의 보탑, 시방 분신의 내집, 지용 보살의 출현, 약개근현원과 광개근현원을 지나 「이 국토는 본토이니라」라는 국토관의 역전에 이른다. 그리고 수량품을 모르는 제종이 「모두 본존에 미혹하였다」는 꾸짖음과 「하종의 아버지」의 해명, 종자의 덕용과 의경을 가리는 논의로 맺어진다. 니치칸 상인은 개목초를 인본존(人本尊)을 개현하는 책으로 보았는데, 이 편은 그 개현이 경문 위에서 본격적으로 준비되는 자리다. 오중상대로 말하면 본적상대의 내용을 다시 펼치면서 종탈상대로 넘어가는 접점이며, 개목초 끝 「일본국의 모든 사람에게 주사친」이라는 선언의 경문적 토대가 여기서 놓인다.
상권(제1~34장)은 주사친 삼덕을 표시하고 유교 · 외도 · 불교를 견준 뒤, 오중상대를 세워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느니라」(189쪽)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권적상대에서는 이승작불을, 본적상대에서는 구원실성을 경문으로 증명하고, 말법에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이 왜 이토록 큰 난을 만나는가를 물었다. 「이 의문은 이 책의 간심(此の疑は此の書の肝心)」이라고 하신 그 물음이다. 상권은 이승이 법화경에서 입은 은혜를 들어 「그렇다면 이승은 어찌하여 지키러 오지 않는가」라는 데에서 멈추었다.
하권은 같은 물음을 보살 ·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왕에게 넓힌다. 적문에서 보살들은 보탑품의 칙명에 「큰바람이 작은 나무의 가지를 부는 것 같이」 따랐다. 그러나 대성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본문으로 나아가, 분신 제불의 내집이 이미 수량품의 「먼 서(遠序)」였고, 지용 보살의 출현이 회중 전체를 흔들어 놓았으며, 수량품의 한마디가 사십여 년의 「시성정각」을 모두 깨뜨렸음을 차례로 보이신다. 그 결과 시방의 제불은 석존의 분신이 되고, 이 사바세계는 본토가 되며, 모든 보살과 제천은 구원의 제자가 된다. 이것이 수량품 석존의 「탈익의 삼덕」이다.
그런데 이 탈익의 삼덕을 모르면,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모르는 자식처럼 본존에 미혹한다. 제40장은 구사 · 성실 · 율에서 화엄 · 진언 · 정토 · 선에 이르는 제종의 본존을 하나하나 들어 꾸짖고, 묘락대사의 「부통(父統)의 나라에 미혹한다」는 말과 전교대사의 「엄(厳)과 애(愛)를 갖춘 아버지」라는 말로 「하종의 아버지」를 드러낸다. 제41장은 성불의 종자가 무엇이며 어느 경에 있는가를 가리면서, 제종이 천태의 일념삼천을 몰래 가져다 썼다는 사실과 그 인사들이 끝내 법화경에 귀복한 자취를 든다. 강의는 이 대목들을 니치칸 상인의 해석에 따라 「문저하종」으로 읽어, 탈익의 석존을 넘어선 말법 하종의 주사친을 가리킨다.
이 편의 장:
- 내외상대
- 대소상대
- 권실상대
- 본적상대◀ 이 편(제35~39장)
- 종탈상대◀ 이 편(제40~41장)
본문
又今よりこそ諸大菩薩も梵帝・日月・四天等も教主釈尊の御弟子にては候へ、 されば宝塔品には此等の大菩薩を仏我が御弟子等とをぼすゆへに諫暁して云く「諸の大衆に告ぐ我が滅度の後・誰か能く此の経を護持し読誦する今仏前に於て自ら誓言を説け」とは・したたかに仰せ下せしか、 又諸大菩薩も「譬えば大風の小樹の枝を吹くが如し」等と吉祥草の大風に随い河水の大海へ引くがごとく仏には随いまいらせしか。 而れども霊山日浅くして夢のごとく・うつつならずありしに証前の宝塔の上に起後の宝塔あつて十方の諸仏・来集せる皆我が分身なりとなのらせ給い宝塔は虚空に釈迦・多宝坐を並べ日月の青天に並出せるが如し、 人天大会は星をつらね分身の諸仏は大地の上宝樹の下の師子のゆかにまします、 華厳経の蓮華蔵世界は十方・此土の報仏・各各に国国にして彼の界の仏・此の土に来つて分身となのらず此の界の仏・彼の界へゆかず但法慧等の大菩薩のみ互いに来会せり、 大日経・金剛頂経等の八葉九尊・三十七尊等・大日如来の化身とはみゆれども其の化身・三身円満の古仏にあらず、 大品経の千仏・阿弥陀経の六方の諸仏いまだ来集の仏にあらず大集経の来集の仏・又分身ならず、金光明経の四方の四仏は化身なり、 総じて一切経の中に各修・各行の三身円満の諸仏を集めて我が分身とはとかれず、これ寿量品の遠序なり、 始成四十余年の釈尊が一劫・十劫等・已前の諸仏を集めて分身ととかる・さすが平等意趣にもにず・をびただしくをどろかし、 又始成の仏ならば所化・十方に充満すべからざれば分身の徳は備わりたりとも示現して益なし、 天台云く「分身既に多し当に知るべし成仏の久しきことを」等云云、大会のをどろきし意をかかれたり。
또 이제부터야말로 모든 대보살도, 범천 · 제석 · 일천 · 월천 · 사천왕 등도 교주 석존의 제자가 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탑품에서는 이들 대보살을 부처가 「나의 제자들」로 여기시는 까닭에 간효하여 이르시되 「모든 대중에게 고하노라. 내가 멸도한 뒤에 누가 능히 이 경을 호지하고 독송하겠느냐. 지금 부처 앞에서 스스로 서원의 말을 하라」고 엄중히 분부하셨느니라. 또 모든 대보살도 「비유하면 큰바람이 작은 나무의 가지를 부는 것과 같다」 하여, 길상초가 큰바람에 쏠리고 강물이 큰 바다로 흘러들 듯이 부처에게 따르셨느니라. 그러나 영산의 날이 아직 얕아 꿈처럼 생시가 아닌 듯하였는데, 증전(證前)의 보탑 위에 기후(起後)의 보탑이 있어, 시방에서 모여 온 제불을 「모두 나의 분신이니라」 하고 밝히셨느니라. 보탑은 허공에 있고 석가 · 다보가 자리를 나란히 하시니 해와 달이 푸른 하늘에 나란히 떠오른 것과 같고, 인천의 대회중은 별을 늘어놓은 듯하며, 분신의 제불은 대지 위 보배나무 아래의 사자좌에 계셨느니라. 화엄경의 연화장세계는 시방과 이 국토의 보불(報佛)이 저마다 제 나라에 있어, 저 세계의 부처가 이 국토에 와서 분신이라 이름하지 않고 이 세계의 부처가 저 세계로 가지도 않으며, 다만 법혜 등의 대보살만이 서로 와서 모였을 뿐이니라. 대일경 · 금강정경 등의 팔엽구존 · 삼십칠존 등은 대일여래의 화신으로는 보이지만, 그 화신이 삼신원만의 옛 부처는 아니니라. 대품경의 천불, 아미타경의 육방의 제불도 아직 모여 온 부처가 아니며, 대집경에 모여 온 부처도 분신이 아니니라. 금광명경의 사방의 사불은 화신이니라. 통틀어 일체경 가운데 저마다 따로 닦고 따로 행한 삼신원만의 제불을 모아 「나의 분신」이라고 설한 곳은 없느니라. 이것이 수량품의 먼 서(遠序)이니라. 성도한 지 사십여 년인 석존이 일겁 · 십겁 이전에 성불한 제불을 모아 분신이라고 설하시니, 과연 평등의취(平等意趣)와도 같지 않아 몹시 놀라게 하였느니라. 또 처음 성불한 부처라면 교화받는 이가 시방에 가득할 리 없으니, 분신의 덕은 갖추었다 하여도 나타내 보여서 이익이 없느니라. 천태가 이르되 「분신이 이미 많으니 마땅히 알라, 성불한 지 오래임을」 등이라 하였으니, 대회중이 놀란 마음을 쓴 것이니라.
어구 풀이
- 梵帝・日月・四天범제 · 일월 · 사천
- 범천왕 · 제석천 · 일천(日天) · 월천(月天) · 사천왕. 불법을 수호하는 제천의 대표다. 상권 끝에서 이승의 수호를 물은 대성인은 하권 첫머리에서 같은 물음을 보살과 이 제천들에게 돌리신다.
- 諫暁して云く간효하여 이르시되
- 견보탑품 제11에서 석존이 멸후의 홍경을 맡을 사람을 세 번 거듭 찾으신 「삼개의 칙선」 가운데 첫째 칙명이다. 대성인은 이를 「したたかに(엄중히, 단단히)」 내리신 명령이라고 표현하신다. 세 칙명 전체는 제43장에서 다시 인용된다.
- 吉祥草길상초
- 길상란 · 관음초 · 향모 · 희생초라고도 한다. 습지에 나는 띠 비슷한 풀로, 백합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이며 길이는 60센티미터쯤이다. 겨울에도 마르지 않고 눈 속에서 꽃을 피운다.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성한 풀로 여겨, 의식 때 이 풀을 엮어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공물을 놓거나 스스로 앉았다.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할 때에도 이 풀을 깔았다고 전한다. 바람에 쉽게 쏠리는 풀이어서, 보살들이 부처의 칙명에 그대로 따른 모습의 비유가 되었다.
- 証前の宝塔の上に起後の宝塔증전의 보탑 위에 기후의 보탑
- 천태대사가 『법화문구』에서 견보탑품의 다보탑을 풀이한 말. 다보탑이 솟아 다보여래가 「선재 선재 …… 묘법화경은 모두 진실이니라」라고 증명한 것은 앞의 열 품, 곧 적문의 진실을 증명한 것이므로 「증전(앞을 증명함)」이라 하고, 이어 탑을 열기 위해 시방 분신의 제불을 모으고 이불병좌하여 멸후의 홍법을 부촉할 지용의 보살을 불러 수량품(본문)을 설하는 실마리가 되었으므로 「기후(뒤를 일으킴)」라 한다.
- 師子のゆか사자좌
- 사자가 백수의 왕이듯 부처는 사람 가운데의 사자로 비유되고 그 설법에 두려움이 없으므로, 부처가 앉으시는 자리를 모두 사자좌라 한다. 예좌(猊座)도 같은 뜻이다.
- 華厳経の蓮華蔵世界화엄경의 연화장세계
- 『화엄경』에 설해지는 노사나불(보신불)의 정토. 현대어역은 이를 타수용보신불의 설법 세계로 풀이한다. 그곳에서는 시방의 세계와 이 국토가 따로따로여서, 부처끼리 오가며 분신이라 밝히는 일이 없다.
- 法慧等の大菩薩법혜 등의 대보살
- 법혜 외에 공덕림 · 금강당 · 금강장 세 보살을 더해 화엄경의 사보살이라 한다. 화엄경 설법의 칠처팔회(인간의 세 곳과 천상의 네 곳) 가운데 천상 네 곳의 설법주다.
- 八葉九尊・三十七尊팔엽구존 · 삼십칠존
- 팔엽구존은 『대일경』에 의한 태장계 만다라 중앙 팔엽원의 대일여래와 사불 · 사보살, 삼십칠존은 『금강정경』에 의한 금강계 만다라의 주요 존격이다. 대성인은 이들이 대일여래의 화신으로 보이기는 하나 「삼신원만의 옛 부처」, 곧 오래전에 따로 성불한 부처가 아니므로 법화경의 분신과는 다르다고 하신다.
- 大品経の千仏대품경의 천불
- 『대품반야경』에 설해진 천불. 동서남북의 사방, 동북 · 동남 · 서북 · 서남의 사유, 위아래 이방을 합친 시방에 저마다 천불이 나타나 반야바라밀을 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석존 아래로 모여 와 분신이라 밝혀진 부처가 아니다.
- 各修・各行の三身円満の諸仏각수 · 각행의 삼신원만의 제불
- 각자 따로 수행하여 따로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을 원만히 갖춘 부처들. 이전과 적문에서는 제불이 석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등한 부처였다는 뜻이며, 제39장 「이전 · 적문의 때에는 제불이 석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각수 · 각행의 부처니라」로 이어진다.
- 寿量品の遠序수량품의 먼 서
- 분신 제불의 내집은 그 자리에서는 보탑을 열기 위한 조건이지만, 멀리 보면 수량품의 구원실성을 예고하는 서막이라는 뜻.
- 平等意趣평등의취
- 사의취(四意趣)의 하나. 의취는 마음이 향하는 바, 곧 설법의 의도를 말하며 무착보살의 『섭대승론』에 나온다. 예컨대 옛날 세상에 나온 비바시불과 지금 인도에 나온 석존은 다른 부처이지만 「실은 내가 옛날 비바시불이었다」고 설하는 것처럼, 부처가 깨달은 법이 평등하므로 「저가 곧 나, 내가 곧 저」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를 통평등이라 하고, 부처마다 인행과 과덕이 다르지만 모두 같다고 설하는 것을 별평등이라 한다. 대성인은 법화경의 분신 선언이 이러한 평등의 수사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신다.
- 分身既に多し当に知るべし成仏の久しきことを분신이 이미 많으니 성불이 오래임을 알라
- 천태대사의 『법화문구』 견보탑품 해석의 말. 분신이 많다는 것은 교화한 중생이 많다는 것이고, 그것은 성불한 지 오래되었음을 뜻한다는 추론이다.
하권의 첫머리 — 보살의 수호가 없다는 의문
강의는 하권의 첫머리를 개목초 전체의 흐름 위에 놓고 읽는다. 상권에서 대성인은 오중상대를 세워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느니라」라고 결론지은 뒤, 권적상대와 본적상대를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이라는 두 가지 경문 사실로 증명하셨다. 그런데 이 증명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강의에 따르면 그 목적은 말법에 출현하는 지용의 보살이 말법의 본불이며 니치렌이야말로 그 본불이라는 것을 단정하는 데 있고, 그 때문에 「이 의문은 이 책의 간심」이라는 물음을 세워 논의를 끌고 오신 것이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이 참된 법화경의 행자이며 일본국의 상하 만민이 모두 삼류의 강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 그래서 개목초는 하나하나 경문을 들어 증명하고 도리와 현증을 보인 뒤, 하권 끝에 이르러 「니치렌은 일본국의 모든 사람에게 주사부모(主師父母)이니라」라고 단정하신다. 하권 첫머리의 일곱 장은 이 단정의 경문적 바탕을 쌓는 단계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도, 제자와 단나도 가장 크게 품은 의문은 무엇이었는가. 강의는 그것을 날마다 달마다 대성인에게 몰아친 대박해의 폭풍이라고 말한다. 이즈 이토 유배, 고마쓰바라의 습격, 다쓰노구치의 참수 위기로 점점 깊어진 박해는 마침내 대성인을 사도의 외딴 섬으로 보냈다. 언제 다시 가마쿠라로 돌아오실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고, 열심한 제자와 단나는 추방되거나 투옥되었으며, 법문을 조금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이런 때에 왜 니치렌과 그 제자 단나는 박해를 받는가. 이승이든 대보살이든 일체경 가운데 법화경이 없으면 하늘에 해와 달이 없고 사람에게 혼이 없는 것과 같지 않은가. 설령 니치렌이 악인이라 하더라도, 법화경의 행자라면 이승도 보살도 곧바로 날아와 지켜야 마땅하다. 이 단은 바로 그 「제보살의 수호가 없음」을 의심하는 단이다.
강의는 본문의 구분도 짚는다. 「또 이제부터야말로(又今よりこそ)」에서 「부처에게 따르셨느니라(仏には随いまいらせしか)」까지는 적문의 입장에서, 「그러나 영산의(而れども霊山)」 이하는 본문의 뜻으로 이 의문을 따지는 단이다. 적문의 보탑품에서 이미 보살들은 석존의 제자로 정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은혜의 깊이가 다 드러나지 않는다. 대성인은 본문으로 나아가 분신 · 지용 · 수량품의 개현을 차례로 보이심으로써, 보살과 제천이 법화경에서 입은 은혜가 상권의 이승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깊다는 것을 밝히려 하신다. 그 은혜가 깊을수록 「왜 지키러 오지 않는가」라는 물음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그 물음의 답은 제42장 이후, 그리고 끝내 하권 후반의 「법화경의 행자」 논증으로 이어진다.
강의는 하권 첫머리를 「제보살의 수호가 없음을 의심하는 단」으로 읽는다. 적문(보탑품)에서 이미 제자로 정해진 보살들이 본문(분신 · 지용 · 수량품)에 이르러 더 깊은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보여, 그들이 법화경의 행자를 지켜야 할 이유를 경문으로 굳히는 것이다.
증전기후의 보탑 — 적문을 증명하고 본문을 일으키다
다보탑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이미 설한 적문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뒤에 본문을 설해 일으키는 것이다. 천태대사가 『법화문구』에서 이를 「증전(證前)」과 「기후(起後)」라 이름했다. 견보탑품에서 땅에서 솟은 다보탑 안의 다보여래가 「선재 선재 …… 묘법화경은 모두 진실이니라」라고 소리 낸 것은 방편품부터 수학무학인기품까지의 적문이 참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탑을 열려면 석존의 분신 제불을 모두 모아야 한다는 다보여래의 서원 때문에 시방의 분신이 모였고, 탑이 열려 이불병좌가 이루어졌으며, 석존은 허공에서 멸후의 홍경을 맡을 이를 찾았다. 이 부름에 응해 종지용출품에서 지용의 보살이 솟아나고, 그들의 출현이 수량품의 개현을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보탑은 본문을 일으키는 기점이다.
강의는 이 증전과 기후 사이에 방정(傍正), 곧 곁과 바름의 구별이 있다고 말한다. 증전은 곁이고 기후가 바름이다. 본적 두 문의 증명으로 말해도 적문은 곁이고 본문이 바름이다. 석존 재세와 멸후 말법을 견주면 재세는 곁이고 멸후가 바름이다. 이는 「법화취요초」에서 적문은 거꾸로 읽으면 멸후를 위한 것이고 본문은 오로지 멸후를 위한 것이라고 하신 뜻과 같다. 강의의 결론은 분명하다. 증전기후의 보탑이라 하지만, 그것은 결국 말법에 넓힐 하종의 삼대비법을 설해 일으키고 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 증전은 곁 · 기후는 바름
- 적문은 곁 · 본문은 바름
- 재세는 곁 · 멸후는 바름
→ 멸후 말법의 하종을 일으키고 증명하기 위함
이렇게 보면 하권 첫머리에서 대성인이 「증전의 보탑 위에 기후의 보탑」이라는 천태의 말을 굳이 쓰신 까닭이 드러난다. 적문까지의 은혜는 「영산의 날이 아직 얕아 꿈처럼 생시가 아닌」 상태였다. 보살들은 칙명에 따랐지만 아직 석존이 누구인지를 다 알지 못했다. 그 꿈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기후의 보탑, 곧 분신의 내집이다.
이전 제경에는 분신이 없다 — 수량품의 먼 서
본문의 중심은 비교다. 대성인은 이전의 대승 경전들이 펼친 장엄한 집회를 하나하나 들어, 그 어디에도 법화경 보탑품과 같은 「분신의 내집」이 없다는 것을 보이신다.
먼저 『화엄경』이다. 연화장세계에서는 시방의 보불과 이 국토의 보불이 각자 제 나라에 있다. 저 세계의 부처가 이 국토에 와서 「나는 분신이다」라고 밝히지도 않고, 이 세계의 부처가 저 세계로 가지도 않는다. 오가는 것은 법혜 · 공덕림 · 금강당 · 금강장 같은 대보살뿐이다. 이 네 보살은 칠처팔회 가운데 천상 네 곳의 설법주다. 곧 화엄의 집회는 장엄하지만, 부처와 부처가 하나의 근원으로 묶이는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다음은 『대일경』 · 『금강정경』이다. 태장계의 팔엽구존, 금강계의 삼십칠존은 대일여래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그 화신은 「삼신원만의 옛 부처」가 아니다. 여기서 대성인이 문제 삼는 것은 오래전에 따로 성불하여 법 · 보 · 응 삼신을 다 갖춘 부처가 「나는 이 부처의 분신이다」라고 밝혀지는가 하는 점이다. 밀교 만다라의 존격들은 중심 부처에서 흘러나온 화현으로 그려질 뿐, 독립된 옛 부처가 한 부처의 분신으로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품반야경』에서는 시방에 저마다 천불이 나타나 반야를 설했고, 『아미타경』에서는 육방의 제불이 아미타불의 공덕을 찬탄했다. 그러나 이 부처들은 석존 앞에 모여 온 부처가 아니다. 『대집경』에는 부처들이 모여 오는 장면이 있지만 그들은 분신이 아니고, 『금광명경』의 사방 사불은 화신이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통틀어 일체경 가운데 각수 · 각행의 삼신원만의 제불을 모아 나의 분신이라고 설한 곳은 없다」고 결론지으신다.
이 비교가 왜 중요한가. 대성인은 이것을 「수량품의 먼 서」라고 부르신다. 보탑품의 분신 내집은 그 자리에서는 탑을 열기 위한 절차였지만, 거기에는 이미 놀라운 함의가 숨어 있었다. 성도한 지 사십여 년밖에 되지 않은 석존이, 일겁 · 십겁 전에 성불한 부처들을 모아 「나의 분신」이라 불렀다. 이것은 『섭대승론』의 평등의취처럼 「부처가 깨달은 법은 같으니 저가 곧 나다」라고 말하는 수사와는 다르다. 평등의취는 다른 부처를 같은 깨달음의 이름으로 묶는 말일 뿐, 그 부처들이 실제로 한 부처에게서 나뉘어 나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탑품은 시방의 제불이 실제로 석존의 몸을 나눈 분신이라고 했다. 대회중이 크게 놀란 것은 당연하다.
대성인은 여기에 또 하나의 논리를 더하신다. 처음 성불한 부처라면 교화받는 중생이 시방에 가득할 리 없다. 분신의 덕을 갖추었다 해도, 나누어 보낼 곳에 인연 있는 중생이 없다면 분신을 나타내 보여도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분신이 시방에 가득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오래전부터 중생을 교화해 왔다는 증거가 된다. 천태대사가 「분신이 이미 많으니 마땅히 알라, 성불한 지 오래임을」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추론이며, 대성인은 이를 「대회중이 놀란 마음을 쓴 것」이라고 하신다. 분신의 많음에서 성불의 오램을 미루어 아는 이 추론은 제38장의 광개근현원에서 경문으로 확정되고, 제39장의 「과거의 상주가 드러날 때 제불은 모두 석존의 분신이니라」로 완결된다.
견보탑품에서 다보여래는 「나의 이 보탑을 열어 보이려면 부처의 분신으로 시방에서 설법하는 제불을 모두 한곳에 모아야 한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설해진다. 분신 내집은 이 서원을 채우기 위한 것이며, 석존은 이를 위해 사바세계를 세 번 변화시켜 청정하게 했다(삼변토전). 제39장의 「이 국토는 본토이니라」라는 국토관은 이 삼변토전과 대비해 읽을 수 있다.
보탑의 의식과 기심의 십계
강의는 여기서 허공회 의식 자체에 대한 물음을 다룬다.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이 허공에 서고, 석가 · 다보 두 부처가 탑 안에 나란히 앉으며, 시방 분신의 제불과 적화 · 타방의 대보살, 이승과 인천이 그 둘레에 늘어선다. 이것을 겉으로만 보면 매우 비과학적인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강의는 불법의 깊은 곳에서 보면 이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식이라고 말한다.
강의의 논법은 이렇다. 이것을 의심한다면 서품에서 이미 큰 불가사의가 있다. 수십만의 보살과 성문, 십계의 중생이 모두 모여 석가불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는데, 확성기도 없이 그런 큰 소리가 날 리 없고, 그 자리가 팔 년이나 이어질 리도 없다. 이것은 곧 석존 기심(己心)의 중생이며 석존 기심의 십계이기 때문에, 몇십만이 모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보탑품의 의식도 관심(觀心)의 차원에서 펼쳐진 의식이다. 우리의 생명에는 불계라는 큰 불가사의의 생명이 숨어 있다(명복). 그 힘과 상태는 상상도 미치지 못하고 붓과 혀로도 다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생명체 위에 구현할 수는 있다. 현실의 우리 생명 그 자체가 숨은 불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설해 보인 것이 보탑품의 의식이며, 석존은 보탑의 의식으로 자신의 기심의 십계호구 · 일념삼천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강의는 이렇게 이어 간다. 니치렌 대성인은 같은 보탑의 의식을 빌려, 수량 문저 하종의 법문을 한 폭의 본존으로 건립하셨다. 본존은 석가불의 보탑 의식을 빌리고 있으나, 그 실체는 대성인 기심의 십계호구 일념삼천, 곧 본불의 생명이다. 이 본존은 본불의 영원한 생명을 도현하신 것이므로 말법 유일무이의 즉신성불의 본존이며, 말법의 민중은 이 본존에 의해서만 구제된다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가 이 대목에서 인용하는 어서가 「신니부인답서」다.
今此の御本尊は……宝塔品より事をこりて寿量品に説き顕し神力品・属累に事極りて候
지금 이 본존은 …… 보탑품에서 일이 일어나 수량품에서 설해 드러내고 신력품 · 촉루품에서 일이 다하였느니라
보탑품이 「일이 일어난(事起こりて)」 자리라는 이 말은, 증전기후의 보탑을 본존 건립의 기점으로 읽는 강의의 해석과 겹친다. 허공회의 의식은 보탑품에서 시작되어 수량품의 개현을 거쳐 신력품 · 촉루품의 부촉으로 마무리되며, 대성인은 이 일련의 흐름 전체를 말법의 본존과 결부하신다.
강의는 보탑의 의식을 석존 기심의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표현으로 보고, 대성인이 같은 의식을 빌려 수량 문저 하종의 법문을 본존으로 건립하셨다고 읽는다. 겉모습은 석존의 의식을 빌렸으나 그 실체는 대성인 기심의 일념삼천이라는 것이다.
석가 · 다보 · 분신 — 경지명합과 무작삼신
보탑품에 나타나는 부처는 석가 · 다보 · 분신의 세 부처다. 강의는 이 세 부처의 관계를 니치칸 상인의 해석에 따라 풀이한다. 석가 · 다보 두 부처가 나란히 앉은 것은 경(境)과 지(智)의 두 법을 나타낸다. 다보는 경으로서 법신을, 석가는 지로서 보신을 나타낸다. 경과 지가 명합하는 곳에 자비가 있으니, 이것이 응신여래다. 그러므로 이불병좌와 분신 내집은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곧 「보신 가운데 삼신을 논하는(報中論三)」 무작삼신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무작삼신은 말법에 출현하는 니치렌 대성인이시라고 강의는 말한다. 『어의구전』의 다음 말이 그 근거다.
無作の三身とは末法の法華経の行者なり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이니라
다음으로 시방 제불의 내집, 곧 석가불 외의 부처들이 같은 법화경의 회좌에 나타나는 문제다. 다보의 출현은 앞서 본 대로 석존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분신의 제불은 수량품에서 돌이켜 보면 모두 수량품에서 본지를 드러낸 석존의 분신이다. 그런데 강의는 수량품의 현본(顯本)에도 문상의 현본과 문저의 현본이 있다고 구별한다. 문상의 현본은 구원실성 본과(本果)의 석존을 본불로 삼으므로 석존 밖에 다른 부처들이 있게 된다. 문저의 현본은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을 본불로 삼으므로 자수용신 한 부처뿐이다.
강의는 또 「보탑은 허공에 있고」 이하의 장면이 본인 · 본과 · 본국토의 삼묘(三妙)를 나타낸다고 본다. 보탑은 본국토묘, 석가 · 다보 · 분신은 본과의 삼신, 인천의 대회중은 본인의 구계를 나타낸다. 이 삼묘는 곧 사(事)의 일념삼천이며, 강의는 사의 일념삼천이 곧 본문의 본존이라고 말한다. 앞의 「신니부인답서」 인용은 바로 이 맥락에서 나온다. 말법에 대성인이 출현하신 데에서 돌이켜 보면, 보탑의 출현은 대성인이 건립하실 본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강의의 결론이다.
분신의 뜻과 동명이체의 부처
분신이란 무엇인가. 강의에 따르면, 어떤 부처가 성불했을 때 그 부처와 인연을 맺은 중생이 너무 많아 자기 불국토에 다 거둘 수 없으면, 다른 곳에 불국토를 세우고 자기 몸을 나누어 그 국토의 중생을 구제한다. 그러므로 분신의 부처도 근본의 부처와 같은 불법으로 중생을 건진다. 결코 다른 불법을 쓰지 않는다. 석존의 분신이 선덕불의 불법으로 중생을 건지는 일은 없고, 반드시 석존의 가르침으로 건진다. 『무량의경』 십공덕품은 이 경의 아홉째 공덕을 이렇게 설한다.
선남자여, 아홉째로 이 경의 불가사의한 공덕력이란 …… 속히 윗자리로 뛰어넘음을 얻고, 능히 몸을 나누고 흩어 시방의 국토에 두루 하여, 일체 이십오유의 극심한 고통을 받는 중생을 건져 모두 해탈하게 하리라
그런데 천태는 석존 외의 부처에게도 분신이 있다고 보았다. 근거는 『관보현보살행법경』이다. 이 경은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다보불탑, 나무시방석가모니불분신제불」이라 한 뒤, 「두루 시방의 부처께 예배하되 나무동방선덕불 및 분신제불」이라 하라고 설하고, 또 「남방에 부처가 계시니 전단덕이라 이름하며 저 부처께도 한량없는 분신이 계시다」고 설한다(『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이 문증에 따라 천태는 다른 부처에게도 분신이 있다고 했다. 강의는 이것을 천태가 적문을 겉으로 하고 본문을 속으로 하는(迹面本裏) 불법을 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대성인은 시방의 제불을 모두 본불의 분신으로 거두신다.
강의는 니치렌종 각파 가운데 이 천태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견해를 비판한다. 그들은 경의 문상을 따른다면서, 대성인의 뜻을 「시방의 제불은 수량 문상 석존의 분신」이라고 풀어, 본불의 분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의는 「경의 문상에 따른다」는 말이 천태와 대성인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모르는 데서 나온 얼버무림이며, 문저의 깊은 비밀을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긴 혼란이라고 논파한다. 천태는 다른 부처에게도 분신이 있다고 하여 그 부처들을 석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했지만, 대성인은 석존 한 부처만을 세우고 다른 부처의 분신은 모두 그 부처의 교화를 받는 이로 하여, 모든 것이 석존 한 부처의 분신이라고 하셨다. 이 깊은 뜻을 바르게 풀지 못하므로 미혹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의는 「석존」이라는 이름 자체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석존이라 하지만 석존에는 여섯 갈래가 있다. 장교의 석존, 통교의 석존, 별교의 석존, 적문의 석존, 본문 문상의 석존, 문저 하종 본문의 석존이다. 대성인의 어서를 읽을 때 석존의 뜻은 문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이 장에서 삼세시방의 제불을 석존 한 부처의 분신으로 삼는 뜻은 문저 하종 본문의 석존이기 때문이다. 천태가 다른 부처에게도 분신이 있다고 한 까닭은 석존의 뜻을 본문 문상의 석존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대성인의 불법은 말법을 이익하는 불법이며 그 법문은 문저 하종의 본문이다. 문저의 본문이 드러난 뒤에는 모든 불법을 이 경에 비추어 보아야 대성인의 참뜻을 알 수 있다고 강의는 강조한다.
- 문저 하종 본문의 석존대성인: 삼세시방의 제불은 모두 한 부처의 분신
- 본문 문상의 석존천태: 다른 부처에게도 분신이 있다
- 적문의 석존
- 별교의 석존
- 통교의 석존
- 장교의 석존
같은 이름 다른 실체(同名異體)의 부처를 이해하기 쉽게 강의는 아미타불의 예를 든다. 오늘날 염불종의 아미타불은 사십팔원을 세워 성불한 법장비구의 아미타다. 법화경 적문의 아미타는 화성유품에서 대통지승불의 열여섯 왕자가 법화경을 다시 강설한(대통복강) 때 그 열여섯 가운데 든 아미타다. 법화경 본문의 아미타는 본문 문상 석존의 분신으로서의 아미타다. 이름이 같아도 실체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끝으로 강의는 본존에도 분신산체(分身散體)의 이치가 있다고 말한다. 말법의 지금 중생을 이익하는 본존의 공덕을 사람들이 입고자 할 때, 그 본존은 분신산체의 이치에 의해 같은 공덕력을 지닌 본존으로 각처 · 각 가정에 나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량의경』이 「몸을 나누고 흩어 시방의 국토에 두루 한다」고 설한 공덕이 본존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해석이다.
『관보현보살행법경』의 「동방 선덕불 및 분신제불」, 「남방 전단덕불의 한량없는 분신」은 법화경의 결경(結經)인 이 경이 시방의 부처들에게도 각기 분신이 있다고 설하는 대목이다. 천태는 이를 근거로 여불(餘佛)에게도 분신이 있다고 보았고, 강의는 수량품 문저에 비추어 모든 부처를 한 부처에 거두는 대성인의 해석과 이를 구별한다.
본문
其の上に地涌千界の大菩薩・大地より出来せり釈尊に第一の御弟子とをぼしき普賢文殊等にも・にるべくもなし、 華厳・方等・般若・法華経の宝塔品に来集する大菩薩・大日経等の金剛薩埵等の十六の大菩薩なんども此の菩薩に対当すれば獼猴の群る中に帝釈の来り給うが如し、 山人に月卿等のまじはるにことならず、補処の弥勒すら猶迷惑せり何に況や其の已下をや、 此の千世界の大菩薩の中に四人の大聖まします所謂・上行・無辺行・浄行・安立行なり、此の四人は虚空・霊山の諸菩薩等・眼もあはせ心もをよばず、 華厳経の四菩薩・大日経の四菩薩・金剛頂経の十六大菩薩等も此の菩薩に対すれば翳眼のものの日輪を見るが如く海人が皇帝に向い奉るが如し、 大公等の四聖の衆中にありしに・にたり商山の四皓が恵帝に仕えしにことならず、巍巍堂堂として尊高なり、 釈迦・多宝・十方の分身を除いては一切衆生の善知識ともたのみ奉りぬべし、弥勒菩薩・心に念言すらく、 我は仏の太子の御時より三十成道・今の霊山まで四十二年が間此の界の菩薩・十方世界より来集せし諸大菩薩皆しりたり、 又十方の浄穢土に或は御使い或は我と遊戯して其の国国に大菩薩を見聞せり、此の大菩薩の御師なんどは・いかなる仏にてや・あるらん、 よも此の釈迦・多宝・十方の分身の仏陀にはにるべくもなき仏にてこそ・をはすらめ、 雨の猛を見て竜の大なる事をしり華の大なるを見て池のふかきことは・しんぬべし、 此等の大菩薩の来る国・又誰と申す仏にあいたてまつり・いかなる大法をか習修し給うらんと疑いし、 あまりの不審さに音をも・いだすべくも・なけれども仏力にやありけん、 弥勒菩薩疑つて云く「無量千万億の大衆の諸の菩薩は昔より未だ曾て見ざる所なり是の諸の大威徳の精進の菩薩衆は誰か其の為に法を説いて教化して成就せる、 誰に従つてか初めて発心し何れの仏法をか称揚せる、世尊我昔より来未だ曾つて是の事を見ず、願くは其の所従の国土の名号を説きたまえ、 我常に諸国に遊べども未だ曾つて是の事を見ず、我れ此の衆の中に於て乃し一人をも識らず忽然に地より出でたり願くは其の因縁を説きたまえ」等云云、 天台云く「寂場より已降今座已往十方の大士来会絶えず限る可からずと雖も我補処の智力を以つて悉く見悉く知る、 而れども此の衆に於て一人をも識らず然るに我れ十方に遊戯して諸仏に覲奉し大衆に快く識知せらる」等云云、 妙楽云く「智人は起を知る蛇は自ら蛇を識る」等云云、 経釈の心・分明なり詮ずるところは初成道よりこのかた此の土十方にて此等の菩薩を見たてまつらず・きかずと申すなり。
그 위에 지용천계(地涌千界)의 대보살이 대지에서 솟아 나왔느니라. 석존에게 첫째가는 제자로 여겨지던 보현 · 문수 등과도 견줄 수 없느니라. 화엄 · 방등 · 반야, 그리고 법화경 보탑품에 모여 온 대보살과 대일경 등의 금강살타 등 십육 대보살 같은 이들도 이 보살에 견주면 원숭이 무리 속에 제석이 오신 것과 같고, 산사람 속에 월경(月卿)들이 섞인 것과 다름이 없느니라. 보처의 미륵조차 오히려 어리둥절하였으니 하물며 그 아래의 이들이랴. 이 천세계의 대보살 가운데 네 분의 대성(大聖)이 계시니, 이른바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이니라. 이 네 분에게는 허공회 · 영산회의 모든 보살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마음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화엄경의 사보살, 대일경의 사보살, 금강정경의 십육 대보살 등도 이 보살을 대하면 눈병 난 이가 해를 보는 것과 같고, 어부가 황제를 마주한 것과 같으니라. 태공 등 사성(四聖)이 대중 가운데 있는 것과 같고, 상산의 사호(四皓)가 혜제를 섬긴 것과 다름이 없으니, 높고 크고 당당하여 존귀하기 그지없느니라. 석가 · 다보 · 시방의 분신을 제외하고는 일체중생의 선지식으로 의지할 만한 분들이니라. 미륵보살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부처가 태자였을 때부터 서른 살에 성도하여 지금의 영산에 이르기까지 사십이 년 동안, 이 세계의 보살도 시방세계에서 모여 온 모든 대보살도 다 알고 있다. 또 시방의 정토와 예토에 혹은 사자로 가고 혹은 스스로 노닐며 그 나라들의 대보살을 보고 들었다. 이 대보살들의 스승은 어떠한 부처이실까. 아마 이 석가 · 다보 · 시방 분신의 부처와는 견줄 수도 없는 부처이시리라. 비가 거센 것을 보면 용이 큰 줄 알고, 꽃이 큰 것을 보면 못이 깊은 줄 알 수 있다. 이 대보살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또 어떤 부처를 만나 어떤 대법을 닦아 익히셨을까」 하고 의심하였느니라. 너무도 이상하여 소리조차 낼 수 없었으나 부처의 힘이었던지, 미륵보살이 의심하여 이르되 「한량없는 천만억의 대중인 모든 보살은 예부터 일찍이 보지 못한 바이옵니다. 이 큰 위덕과 정진의 보살들은 누가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교화하여 성취시켰나이까. 누구를 따라 처음 발심하였으며 어느 불법을 칭양하였나이까. 세존이시여, 저는 예부터 일찍이 이러한 일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원하옵건대 그들이 온 국토의 이름을 설하여 주옵소서. 저는 늘 여러 나라를 다녔으나 일찍이 이러한 일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저는 이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데 홀연히 땅에서 솟아 나왔나이다. 원하옵건대 그 인연을 설하여 주옵소서」 등이라 하였느니라. 천태가 이르되 「적멸도량 이후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시방의 대사가 끊임없이 모여 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나, 나는 보처의 지혜의 힘으로 모두 보고 모두 안다. 그러나 이 대중은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시방에 노닐며 제불을 뵙고 섬겨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등이라 하였고, 묘락이 이르되 「지혜로운 사람은 일어날 일을 알고, 뱀은 스스로 뱀을 안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경과 석의 뜻이 분명하니, 요컨대 처음 성도한 이래 이 국토와 시방에서 이러한 보살들을 뵌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어구 풀이
- 地涌千界지용천계
- 땅에서 솟아 나온 무수한 지용의 보살. 천계는 천세계를 말한다. 법화경 여래신력품 제21에 「천세계 미진수 등의 보살마하살로서 땅에서 솟아 나온 이들」이라 했으니, 지용의 보살은 천 개의 세계를 부수어 만든 티끌만큼 많다고 설해진다.
- 普賢文殊보현 · 문수
- 석존의 협시로서 지혜(문수)와 행(보현)을 대표하는 대보살. 이전과 적문에서 석존 제일의 제자로 여겨졌으나, 대성인은 이들조차 지용의 보살과는 「견줄 수도 없다」고 하신다. 문수 · 보현 등은 석존이 성도한 뒤 교화한 적화(迹化) · 타방의 보살이기 때문이다.
- 金剛薩埵等の十六の大菩薩금강살타 등 십육 대보살
- 『금강정경』에 설해진 금강계 만다라에 등장하는 열여섯 보살. 중앙의 대일여래를 뺀 네 부처를 각각 네 보살이 둘러싸고 있어 모두 십육 대보살이라 한다. 금강살타는 그 첫째다.
- 獼猴미후
- 원숭이. 「원숭이 무리 속에 제석이 오신 것 같다」는 비유는 지용의 보살과 그 밖의 보살들 사이의 격차를 보인다.
- 月卿월경
- 공경(公卿)과 같다. 궁중을 하늘에, 천자를 해에, 공경을 달에 비겨 부른 말이다. 공(公)과 경(卿)을 함께 부른 것으로, 공은 태정대신 · 좌대신 · 우대신, 경은 대납언 · 중납언 · 참의 및 삼위 이상의 조정 관리다. 대신과 공경을 나누어 말할 때 공경은 납언 이하의 공가를 가리킨다.
- 補処の弥勒보처의 미륵
- 일생보처, 곧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자리에 있는 미륵보살. 석존의 뒤를 이을 부처로 여겨졌으며 적화 보살의 대표로서 지용 보살을 보고 회중을 대신해 묻는다. 경에서 석존은 미륵을 「아일다(阿逸多)」라 부른다.
- 上行・無辺行・浄行・安立行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
- 지용 보살의 우두머리인 네 보살(사대보살). 종지용출품에 「이 보살 대중 가운데 네 도사가 있으니」라 하여 이름이 처음 나온다. 상행보살은 그 상수이며, 여래신력품에서 결요부촉을 받는다.
- 華厳経の四菩薩화엄경의 사보살
- 법혜 · 공덕림 · 금강당 · 금강장의 네 보살. 화엄경 설법의 칠처팔회 가운데 천상 네 곳의 설법주다.
- 大日経の四菩薩대일경의 사보살
- 『대일경』에 설해진 태장계 만다라 중앙 팔엽 연꽃 위에 앉은 사불 · 사보살 가운데 보현 · 관음 · 문수 · 미륵의 네 보살.
- 翳眼のもの예안의 사람
- 눈에 백태가 낀 사람, 곧 눈병 난 사람. 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 大公等の四聖태공 등 사성
- 태공은 태공망. 사성은 윤수 · 무성 · 태공망 · 노자의 네 사람으로, 모두 중국 고대 현왕의 스승이 된 유교의 성인이다. 개목초 첫머리(제2장)의 유가 삼덕 논의에 나오는 이름들이다.
- 商山の四皓상산의 사호
- 진나라 말 난리를 피해 섬서성 상산에 들어간 은사 동원공 · 기리계 · 하황공 · 녹리선생의 네 사람. 모두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이어서 사호(四皓)라 불렸다. 한 고조가 성품이 유약한 영태자를 폐하고 척부인의 아들 조왕 여의를 세우려 하자, 영태자의 어머니 여후가 고조의 공신 장량과 꾀하여 사호를 태자의 보좌로 모셨다. 고조는 고령이면서도 위엄 있는 이 네 사람이 상산의 사호임을 알고 태자를 폐할 수 없음을 깨달아 뜻을 거두었다. 이 영태자가 고조가 죽은 뒤 즉위하여 제2대 혜제가 되었다.
- 巍巍堂堂외외당당
- 높고 크며 당당한 모습.
- 補処の智力보처의 지혜의 힘
- 일생보처의 보살인 미륵이 지닌 지혜. 천태는 미륵의 입장에서, 그 지혜로도 지용의 보살은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고 풀이한다.
- 智人は起を知る蛇は自ら蛇を識る지혜로운 사람은 일어남을 알고 뱀은 스스로 뱀을 안다
-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 해석의 말. 지혜로운 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같은 무리끼리는 서로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지용의 보살이 누구인지는 그와 같은 경지에 있는 부처만이 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회중을 뒤흔든 지용 보살의 출현
제35장에서 본 대로 다보탑의 출현은 적문에 이어 본문을 설해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장은 그 본문의 서분(序分)으로서, 종지용출품 제15에서 지용의 보살이 출현하는 대목이다. 이전 사십이 년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법화경 적문에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지용의 대보살이 갑자기 나타나자, 법화경을 듣고 있던 회좌의 대중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본문에 그려진 그대로다.
경의 장면을 보면 그 놀람의 크기가 실감된다. 견보탑품에서 석존이 멸후의 홍경을 맡을 사람을 찾자, 권지품에서 팔십만억 나유타의 보살과 타방에서 온 보살들이 앞다투어 서원했다. 그런데 종지용출품 첫머리에서 석존은 그 타방의 보살들에게 「그만두라(止みね)」고 하시고, 이 사바세계에 이미 육만 항하사의 보살이 있어 멸후에 이 경을 넓힐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순간 삼천대천국토의 땅이 진동하며 갈라지고, 그 가운데서 한량없는 천만억의 보살이 일시에 솟아 나온다. 그들은 모두 금빛 몸에 삼십이상을 갖추고 한량없는 광명을 지녔다. 대성인은 이들을 문수 · 보현과도 견줄 수 없고, 화엄 · 방등 · 반야 · 보탑품의 대보살이나 대일경의 금강살타 등 십육 대보살도 이들 앞에서는 원숭이 무리 속에 제석이 온 것 같다고 하신다.
강의는 미륵의 마음속 생각 가운데 「어떠한 부처이실까(いかなる仏にてや・あるらん)」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 말은 지용의 보살이 법화경의 문상에서조차 이미 단순한 보살이 아니라 부처로서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지용 보살의 스승을 「석가 · 다보 · 시방 분신의 부처와는 견줄 수도 없는 부처」로 짐작했다는 것은, 제자의 위의를 보고 스승의 크기를 미루어 안 것이다. 미륵이 든 「비가 거센 것을 보고 용이 큰 줄 알고, 꽃이 큰 것을 보고 못이 깊은 줄 안다」는 비유가 바로 그 추론의 형식이다.
또 「어떤 부처를 만나 어떤 불법을 닦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강의는 오늘날 사람들이 부처라 하면 석존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 안에서 이미 미륵은 지용 보살의 스승이 석존과는 다른 부처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이 의심은 제37장에서 「내가 구원 이래로 이들을 교화했다」는 대답으로 풀리지만, 그 대답 자체가 또 하나의 더 큰 의심을 낳는다.
비유들 — 원숭이 무리의 제석, 산사람 속의 월경, 상산의 사호
이 장의 본문은 비유가 겹겹이 쌓여 있다. 그 하나하나가 지용 보살과 다른 보살들 사이의 거리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준다.
「원숭이 무리 속에 제석이 오신 것 같다」는 존재의 격이 다르다는 비유다. 「산사람 속에 월경이 섞인 것 같다」는 신분의 비유다. 월경은 궁중을 하늘, 천자를 해, 공경을 달에 비긴 말이니, 산에서 나무하는 사람들 사이에 조정의 귀인이 섞여 있는 모습이다. 「눈병 난 이가 해를 보는 것 같다」는 감당할 수 없는 광명의 비유이고, 「어부가 황제를 마주한 것 같다」는 다시 신분의 비유다.
이어지는 두 비유는 중국 고사를 쓴다. 「태공 등 사성이 대중 가운데 있는 것 같다」의 사성은 윤수 · 무성 · 태공망 · 노자, 곧 고대 현왕의 스승이 된 성인들이다. 개목초 첫머리에서 유가의 삼덕을 논할 때 대성인은 이 이름들을 이미 쓰셨다. 지용의 보살을 왕의 스승인 성인들에 비긴 것은, 그들이 단지 높은 신분일 뿐 아니라 「스승」의 자리에 있는 존재라는 뜻을 담는다.
「상산의 사호가 혜제를 섬긴 것 같다」는 비유는 더 미묘하다. 한 고조가 태자를 바꾸려 했을 때, 장량의 계책으로 상산에 숨어 살던 네 노인이 태자 곁에 섰다. 고조는 자신이 불러도 오지 않던 이 고결한 노인들이 태자를 섬기는 것을 보고 태자의 덕이 이미 굳건함을 알아 폐위를 단념했다. 이 비유는 제37장에서 다시 떠오르는 주제, 곧 「늙고 존귀해 보이는 이들이 젊은 이를 섬긴다」는 역설을 미리 보여 준다. 지용의 보살은 위의로 보면 석존의 스승인 듯하지만 실은 석존의 제자이며, 그 사실이 석존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대성인은 지용의 보살을 「석가 · 다보 · 시방의 분신을 제외하고는 일체중생의 선지식으로 의지할 만한 분들」이라고 하신다. 이 말은 지용 보살의 지위를 부처 바로 아래, 모든 보살 위에 놓는다.
미륵도 한 사람을 알지 못하다 — 경과 석
본문에 인용된 미륵의 질문은 종지용출품의 게송이다. 미륵은 석존이 태자였을 때부터 서른 살 성도를 거쳐 영산에 이르기까지 사십이 년 동안, 이 세계와 시방에서 모여 온 모든 보살을 알고 있었다. 사자로, 또 스스로 노닐며 시방의 정토와 예토를 다니며 그 나라의 보살들도 보았다. 그런 미륵이 「이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묻는다. 누가 이들에게 법을 설해 교화했는가, 누구를 따라 처음 발심했는가, 어느 불법을 칭양했는가, 그들이 온 국토의 이름은 무엇인가.
천태대사는 『법화문구』에서 이 장면을 미륵의 입장에서 풀었다. 적멸도량의 첫 설법 이래 법화경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시방의 대사가 끊임없이 모여 왔지만, 보처의 지혜로 모두 보고 모두 알았다. 시방에 노닐며 제불을 섬겨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자신이 이 대중만은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 묘락대사는 『법화문구기』에서 이를 다시 「지혜로운 사람은 일어날 일을 알고, 뱀은 스스로 뱀을 안다」고 풀었다. 미륵이 지용의 보살을 알지 못한 것은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지용의 보살이 미륵이 속한 세계, 곧 석존 성도 이후의 교화의 세계 밖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아는 것은 그들과 같은 경지에 있는 이뿐이다.
대성인은 경과 석의 뜻을 「요컨대 처음 성도한 이래 이 국토와 시방에서 이러한 보살들을 뵌 적도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라고 정리하신다. 이 확인이 중요한 것은, 다음 장에서 석존이 「이들은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성도한 뒤 교화한 이들」이라고 대답하실 때 그 대답이 얼마나 불가해한지를 미리 못 박아 두기 때문이다. 사십여 년 동안 미륵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을 석존이 언제 교화했다는 말인가.
사대보살과 상락아정 — 별체의 지용과 총체의 지용
지용의 보살 가운데 우두머리가 상행 · 무변행 · 정행 · 안립행의 사대보살이다. 강의는 이 네 보살의 뜻을 도섬(道暹)의 『법화문구보정기』 권9의 해석으로 푼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이 문을 인용하셨다.
経に四導師有りとは今四徳を表す上行は我を表し無辺行は常を表し浄行は浄を表し安立行は楽を表す、有る時には一人に此の四義を具す二死の表に出づるを上行と名け断常の際を踰ゆるを無辺行と称し五住の垢累を超ゆる故に浄行と名け道樹にして徳円かなり故に安立行と曰うなり
경에 네 도사가 있다는 것은 사덕을 나타낸다. 상행은 아(我)를, 무변행은 상(常)을, 정행은 정(淨)을, 안립행은 낙(樂)을 나타낸다. 어떤 때는 한 사람에게 이 네 뜻을 갖춘다. 두 가지 생사의 밖으로 나오므로 상행이라 이름하고, 단견과 상견의 경계를 넘으므로 무변행이라 칭하며, 오주(五住)의 번뇌의 때를 넘으므로 정행이라 이름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덕이 원만하므로 안립행이라 한다
강의는 지용의 보살에 총체의 지용과 별체의 지용이 있다고 하고, 이 문으로 그 구별을 설명한다. 「두 가지 생사(분단생사와 변역생사) 속에 잠긴다」는 것은 내려가는 뜻, 곧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두 가지 생사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올라가는 뜻, 곧 해탈하여 자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행은 아(我)를 나타낸다. 「단견 · 상견을 넘어 끝이 없다」는 것은 중도로서 상주하는 것이므로 무변행은 상(常)을 나타낸다. 「오주의 번뇌의 때를 넘는다」는 것은 청정이므로 정행은 정(淨)을 나타낸다. 「도량의 보리수 아래에서 만덕이 원만하다」는 것은 안락하게 성립하는 것이므로 안립행은 낙(樂)을 나타낸다. 이처럼 네 보살이 각각 하나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 별체의 지용이다.
다음으로 「어떤 때는 한 사람에게 이 네 뜻을 갖춘다」는 것이 총체의 지용이다. 강의는 재세는 별체의 지용이고 말법은 총체의 지용이라고 본다. 「어떤 때(有る時)」란 말법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법의 지용 보살에게는 상락아정의 사덕이 한 몸에 갖추어져 있으며, 강의는 이것이 곧 본불 니치렌 대성인이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今日蓮等の類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る者は皆地涌の流類なり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로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는 모두 지용의 유류(流類)이니라
사보살의 행과 머무는 곳 — 사대와 하방
강의는 이어 『어의구전』의 다른 대목으로 사보살의 행(行)을 설명한다.
又云く火は物を焼くを以て行とし水は物を浄むるを以て行とし風は塵垢を払うを以て行とし大地は草木を長ずるを以て行とするなり四菩薩の利益是なり、四菩薩の行は不同なりと雖も、倶に妙法蓮華経の修行なり
또 이르기를, 불은 물건을 태우는 것을 행으로 삼고, 물은 물건을 깨끗이 하는 것을 행으로 삼으며, 바람은 티끌과 때를 털어 내는 것을 행으로 삼고, 대지는 초목을 기르는 것을 행으로 삼느니라. 네 보살의 이익이 이것이니라. 네 보살의 행은 같지 않지만 함께 묘법연화경의 수행이니라
곧 사대보살을 만물을 이루는 지 · 수 · 화 · 풍의 사대에 배대하면, 불은 위로 오르므로 상행은 화대, 바람은 끝이 없으므로 무변행은 풍대, 물은 청정하므로 정행은 수대, 땅은 만물을 편안히 세우므로 안립행은 지대에 해당한다. 네 보살은 각각 이러한 행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주지만, 총체의 지용에서 말하면 이것은 모두 묘법연화경의 수행이며 묘법연화경의 이익이다.
지용의 보살이 머무는 곳에 대해서도 『어의구전』은 말한다.
此の四菩薩は下方に住する故に釈に『法性之淵底玄宗之極地』と云えり、下方を以て住処とす下方とは真理なり、輔正記に云く『下方とは生公の云く住して理に在るなり』と云云、此の理の住処より顕れ出づるを事と云うなり
이 네 보살은 하방에 머무는 까닭에 석에 「법성의 깊은 밑바닥, 현묘한 종지의 궁극의 땅」이라 하였느니라. 하방을 머무는 곳으로 삼으니 하방이란 진리이니라. 『보정기』에 「하방이란 생공(도생)이 이르기를, 머물러 이(理)에 있는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이 이(理)의 머무는 곳에서 드러나 나오는 것을 사(事)라 하느니라
종지용출품에서 지용의 보살은 사바세계 아래의 허공에 머물러 있다가 땅을 가르고 솟아 나왔다고 설해진다. 『어의구전』은 이 「하방」을 공간의 아래가 아니라 법성의 깊은 밑바닥, 곧 진리로 읽는다. 진리의 머무는 곳에서 현실로 드러나 나오는 것이 「사(事)」다. 지용 보살의 출현은 이(理)가 사(事)로 드러나는 사건이며, 제35장에서 본 「사의 일념삼천」과 같은 결을 가진다.
본법 소지의 사람 — 지용 보살의 깊은 뜻
지용의 보살은 사대보살과 그를 따라 종지용출품에서 솟아 나온 권속들이다. 경에 따르면 그 권속은 육만 항하사, 또는 오만 · 사만 · 삼만 · 이만 · 일만 항하사, 나아가 한 항하사 · 반 항하사, 십만억 나유타, 나아가 천 · 십 · 오 · 사 · 삼 · 이 · 일, 그리고 홀로 온 이(單己)에 이르는 보살들이다. 말법에 출현하신 니치렌 대성인은 문상의 뜻에서는 지용의 대도사 상행보살의 재탄이시라고 여러 어서에 밝혀져 있다. 강의는 또 본존을 받들고 절복을 행하는 이는 모두 지용의 보살이라는 것이 대성인의 뜻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성인은 지용의 보살에 대해 더욱 깊이 말씀하셨다. 강의가 인용하는 『어의구전』의 대목이다.
又云く千草万木・地涌の菩薩に非ずと云う事なし、されば地涌の菩薩を本化と云えり本とは過去久遠五百塵点よりの利益として無始無終の利益なり、此の菩薩は本法所持の人なり本法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此の題目は必ず地涌の所持の物にして迹化の菩薩の所持に非ず、此の本法の体より用を出して止観と弘め一念三千と云う、惣じて大師人師の所釈も此の妙法の用を弘め給うなり、此の本法を受持するは信の一字なり、元品の無明を対治する利剣は信の一字なり無疑曰信の釈之を思ふ可し
또 이르기를, 천초만목이 지용의 보살 아님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지용의 보살을 본화(本化)라 하느니라. 본이란 과거 구원 오백진점 때부터의 이익으로서 무시무종의 이익이니라. 이 보살은 본법을 지닌 사람이니, 본법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이 제목은 반드시 지용이 지닌 것이요 적화의 보살이 지닌 것이 아니니라. 이 본법의 체(體)에서 용(用)을 내어 지관이라 넓히고 일념삼천이라 하느니라. 통틀어 대사 · 인사의 해석도 이 묘법의 용을 넓히신 것이니라. 이 본법을 수지하는 것은 신(信)의 한 글자이니라. 원품의 무명을 다스리는 날카로운 칼은 신의 한 글자이니라. 「의심 없음을 신이라 한다」는 석을 생각할지니라
강의는 이 문을 이렇게 읽는다. 「본법을 지닌 지용의 보살」이란 별(別)하여 말하면 본불 니치렌 대성인이시고, 「본법의 체」란 다름 아닌 본존이다. 무시무종으로부터 남묘호렌게쿄를 지니신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그 내증이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심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본법을 수지하여 원품의 무명을 다스리고 성불하는 길도, 이 인법일개의 본존을 믿는 것 외에는 없다고 강의는 맺는다.
여기서 「천초만목이 지용의 보살 아님이 없다」는 첫 구절은 지용 보살의 뜻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우주 만물의 차원으로 넓힌다. 앞의 「하방은 진리」라는 해석과 합쳐 보면, 지용의 보살이란 진리의 땅에서 솟아 나와 현실 속에서 묘법을 행하는 모든 생명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본법 그 자체를 지닌 이가 상행보살이며, 강의는 말법에서 그 실체를 대성인으로 본다. 본법의 「체」에서 「용」이 나와 천태의 지관과 일념삼천이 되었다는 대목은, 제41장에서 일념삼천을 성불의 종자로 논할 때 다시 중요해진다.
강의는 지용 보살의 출현을 본문의 서분으로 읽으면서, 상락아정의 사덕을 한 몸에 갖춘 「총체의 지용」이 말법에 출현하며 그분이 본법(남묘호렌게쿄)을 지닌 대성인이시라고 본다. 「본법의 체」는 본존이고, 그것을 받드는 이는 모두 지용의 유류다.
본문
仏此の疑を答えて云く「阿逸多・汝等昔より未だ見ざる所の者は我是の娑婆世界に於て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得已つて是の諸の菩薩を教化し示導して其の心を調伏して道の意を発こさしめたり」等、 又云く「我伽耶城菩提樹下に於て坐して最正覚を成ずることを得て無上の法輪を転じ爾して乃ち之を教化して初めて道心を発さしむ今皆不退に住せり、 乃至我久遠より来是等の衆を教化せり」等云云、此に弥勒等の大菩薩大に疑いをもう、 華厳経の時・法慧等の無量の大菩薩あつまるいかなる人人なるらんと・をもへば我が善知識なりとをほせられしかば、さもやと・うちをもひき、 其の後の大宝坊・白鷺池等の来会の大菩薩も・しかのごとし、 此の大菩薩は彼等にはにるべくもなき・ふりたりげにまします定めて釈尊の御師匠かなんどおぼしきを令初発道心とて幼稚のものども・なりしを教化して弟子となせりなんど・をほせあれば・大なる疑なるべし、 日本の聖徳太子は人王第三十二代・用明天皇の御子なり、 御年六歳の時・百済・高麗・唐土より老人どものわたりたりしを六歳の太子・我が弟子なりと・をほせありしかば彼の老人ども又合掌して我が師なり等云云、 不思議なりし事なり、外典に申す或者道をゆけば路のほとりに年三十計りなる・わかものが八十計りなる老人を・とらへて打ちけり、 いかなる事ぞと・とえば此の老翁は我が子なりなんど申すと・かたるにもにたり、 されば弥勒菩薩等疑つて云く「世尊・如来太子為りし時・釈の宮を出で伽耶城を去ること遠からずして道場に坐して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成ずることを得給えり、 是より已来始めて四十余年を過ぎたり、世尊・云何ぞ此の少時に於て大いに仏事を作し給える」等云云、 一切の菩薩始め華厳経より四十余年・会会に疑をまうけて一切衆生の疑網をはらす中に此の疑・第一の疑なるべし、 無量義経の大荘厳等の八万の大士・四十余年と今との歴劫・疾成の疑にも超過せり、 観無量寿経に韋提希夫人の子阿闍世王が提婆にすかされて父の王をいましめ母を殺さんとせしが耆婆月光に・をどされて母をはなちたりし時仏を請じたてまつて・まづ第一の問に云く「我れ宿し何の罪あつて此の悪子を生む世尊・復た何等の因縁有つて提婆達多と共に眷属となり給う」等云云、 此の疑の中に「世尊復た何等の因縁有つて」等の疑は大なる大事なり、 輪王は敵と共に生れず帝釈は鬼と・ともならず仏は無量劫の慈悲者なりいかに大怨と共にはまします還つて仏には・ましまさざるかと疑うなるべし、 而れども仏答え給はず、されば観経を読誦せん人・法華経の提婆品へ入らずば・いたづらごとなるべし、 大涅槃経に迦葉菩薩の三十六の問もこれには及ばず、されば仏・此の疑を晴させ給はずば一代の聖教は泡沫にどうじ一切衆生は疑網にかかるべし、 寿量の一品の大切なるこれなり。
부처가 이 의문에 답하여 이르시되 「아일다여, 그대들이 예부터 일찍이 보지 못한 이들은,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나서 이 모든 보살을 교화하고 이끌어 그 마음을 조복하여 도의 뜻을 일으키게 한 것이니라」 등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내가 가야성 보리수 아래에 앉아 최정각을 이루고 위없는 법륜을 굴리며, 그리하여 이들을 교화하여 처음으로 도심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지금 모두 불퇴에 머물러 있느니라. 내지 나는 구원 이래로 이들 대중을 교화하였느니라」 등이라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미륵 등의 대보살이 크게 의심하였느니라. 화엄경 때에 법혜 등 한량없는 대보살이 모였을 때,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생각하니 「나의 선지식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느니라. 그 뒤 대보방 · 백로지 등에 모여 온 대보살도 그러하였느니라. 이 대보살들은 그들과 견줄 수도 없이 연륜이 깊고 존귀해 보이시니, 틀림없이 석존의 스승인가 하고 여겨졌는데, 「영초발도심(令初發道心)」이라 하여 어린아이 같았던 이들을 교화하여 제자로 삼았다는 등으로 말씀하시니 큰 의문이 될 수밖에 없느니라.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인왕 제32대 요메이 천황의 아드님이니라. 여섯 살 때 백제 · 고구려 · 당나라에서 노인들이 건너오자 여섯 살 태자가 「나의 제자이니라」 하고 말씀하시니, 그 노인들 또한 합장하여 「우리의 스승이시니라」 등이라 하였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니라. 외전에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길가에서 서른 살쯤 된 젊은이가 여든 살쯤 된 노인을 붙잡고 때리고 있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이 노인은 내 자식이니라」 하고 말했다는 이야기와도 같으니라. 그러므로 미륵보살 등이 의심하여 이르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태자이셨을 때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나이다. 그로부터 겨우 사십여 년이 지났나이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이 짧은 시간에 크게 불사를 지으셨나이까」 등이라 하였느니라. 모든 보살이 화엄경 이래 사십여 년 동안 회좌마다 의문을 세워 일체중생의 의심의 그물을 걷어 온 가운데, 이 의문이 으뜸가는 의문이니라. 무량의경의 대장엄 등 팔만 대사가 사십여 년의 가르침과 지금의 가르침 사이에서 품은 역겁 수행과 빠른 성불에 대한 의문보다도 더 크니라. 관무량수경에서 위제희 부인의 아들 아사세왕이 제바에게 꾀여 아버지 왕을 가두고 어머니를 죽이려 하다가, 기바 · 월광에게 위협당해 어머니를 풀어 주었을 때, 부인이 부처를 청하여 맨 먼저 물어 이르되 「제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악한 자식을 낳았나이까. 세존께서는 또 무슨 인연이 있어 제바달다와 함께 권속이 되셨나이까」 등이라 하였느니라. 이 의문 가운데 「세존께서는 또 무슨 인연이 있어」라는 의문은 크나큰 일이니라. 전륜왕은 원수와 함께 태어나지 않고, 제석은 귀신과 함께하지 않는데, 부처는 무량겁의 자비로운 분이거늘 어찌하여 큰 원수와 함께 계시는가, 도리어 부처가 아니신가 하고 의심한 것이니라. 그러나 부처는 답하지 않으셨느니라. 그러므로 관경을 독송하는 사람이 법화경의 제바품에 들어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될 것이니라. 대열반경에서 가섭보살이 물은 서른여섯 가지 물음도 이에는 미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가 이 의문을 풀어 주지 않으셨다면 일대의 성교는 물거품과 같고 일체중생은 의심의 그물에 걸렸을 것이니라. 수량품 한 품이 소중한 까닭이 이것이니라.
어구 풀이
- 阿逸多아일다
- 미륵보살의 이름(Ajita, 이길 수 없는 이). 석존이 종지용출품에서 미륵을 부르실 때 쓰신 이름이다.
- 略開近顕遠약개근현원
- 가까운 것(가야 성도)을 열어 먼 것(구원의 성불)을 드러내는 것을 간략히 보인 것. 종지용출품의 「나는 구원 이래로 이들 대중을 교화하였느니라」가 그 문이다. 이에 대해 수량품에서 구원실성을 자세히 밝힌 것을 광개근현원이라 한다.
- 大宝坊대보방
- 대집부 경전이 설해진 곳. 욕계와 색계 사이에 있는 큰 뜰로 여겨진다.
- 白鷺池백로지
- 『대반야경』 사처십육회 가운데 제16회의 설법 장소. 마가다국 왕사성 근처 죽림정사 부근에 있었던 듯하나 유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 令初発道心영초발도심
- 「처음으로 도심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읽는다. 석존이 맨 처음 자신의 제자로서 불도 수행의 마음을 일으키게 했다는 뜻이다. 회중이 보기에 석존의 스승 같은 지용의 보살을 석존이 「처음 발심시킨」 제자라 했으니 큰 의문이 되었다.
- 聖徳太子쇼토쿠 태자
- 요메이 천황의 아들로, 일본 불교 융성의 기초를 놓은 인물. 대성인 시대의 일본에서는 관음보살이 남악대사로 나타나고, 다시 남악의 후신으로 쇼토쿠 태자가 나타나 불법을 넓혔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 百済・高麗・唐土より老人どものわたりたりしを……백제 · 고구려 · 당에서 노인들이 건너오자 ……
- 쇼토쿠 태자가 과거세의 스승으로서 대륙에서 건너온 제자를 대했다는 이야기다. 『일본서기』에는 비다쓰 천황 6년 겨울 11월, 백제 국왕이 귀국하는 사신 오와케노오키미 등에게 딸려 경론 약간 권과 함께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 조불공 · 조사공 여섯 사람을 바쳤다고 한다. 『쇼토쿠 태자전력』에 따르면 이때 여섯 살의 태자가 천황에게 「가져온 경론을 보고 싶다」고 아뢰었고, 천황이 까닭을 묻자 「나는 옛날 한(漢)의 형산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답했다. 천황이 「너는 여섯 살인데 어찌 거짓을 말하느냐」 하자 태자는 「나의 전신(前身)이 마음에 떠오르는 바」라고 했다고 한다. 형산은 중국 오악의 하나로 남악이라 불렸으며, 천태대사의 스승 혜사가 이곳에 머물러 남악대사라 불렸다.
- 聖徳太子伝暦쇼토쿠 태자전력
- 쇼토쿠 태자의 전기. 통설로는 후지와라노 가네스케가 엔기 17년(917)에 편찬했다고 하나 다른 설도 있다.
- 歴劫・疾成の疑역겁 · 질성의 의문
- 석존은 서른 살에 성도한 뒤 법화경을 설하기까지 사십이 년 동안 여러 경을 설하며 늘 한량없는 겁에 걸쳐 수행해야 성불한다(역겁수행)고 가르쳤다. 그런데 『무량의경』에 와서 비로소 빠르게 성불한다(질성 · 속질돈성)고 밝히자 대장엄보살 등 팔만의 보살이 크게 놀랐다. 그러나 종지용출품에서 무수한 지용 보살이 땅에서 솟아 나온 것을 보았을 때 적화 보살들의 놀람은 그때의 놀람을 훨씬 넘어섰다.
- 観無量寿経관무량수경
- 중국 유송 시대 강량야사가 번역했다. 『관경』이라 줄여 부르며 한 권이다. 악한 아들 아사세가 있는 탁악세를 한탄하고 극락정토를 원하는 위제희 부인에게, 석존이 신통력으로 여러 정토를 보이고 그곳에 나기 위한 세 가지 정업(삼복)을 설하며, 특히 아미타불과 그 정토의 장엄을 열여섯 가지 관(십육관)으로 나누어 설한 경이다. 그러나 위제희 부인의 탄식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그 답이 설해지는 것은 법화경 제바달다품 제12이며, 관경은 물음을 일으킨 데 그친다. 서방 십만억 국토를 설한 것도 부인의 현재의 고뇌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 韋提希夫人위제희 부인
- 마가다국 빈바사라왕의 부인이자 아사세왕의 어머니.
- 耆婆기바
- 산스크리트 지바카(Jīvaka)의 음사. 석존 재세의 명의로 아사세왕의 시의였다. 획기적인 외과 치료를 했다고 전한다.
- 月光월광
- 아사세왕의 신하. 기바와 힘을 합쳐 왕을 간하고 석존에게 귀의하게 했다.
- 輪王は敵と共に生れず帝釈は鬼と・ともならず전륜왕은 원수와 함께 나지 않고 제석은 귀신과 함께하지 않는다
- 세간의 위대한 왕도 원수와 함께 태어나지 않는데, 부처가 제바달다 같은 큰 원수와 친족으로 태어난 것은 이상하다는 의문의 근거.
- 迦葉菩薩の三十六の問가섭보살의 서른여섯 물음
- 가섭보살은 열반경 가섭보살품의 대고중으로, 가섭동자 · 가섭동자보살이라고도 하며 이른바 마하가섭과는 다른 사람이다. 열반경에서 부처에게 서른여섯 가지 물음을 던졌는데, 앞의 사십여 년의 회좌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법화경의 회좌에서도 빠진, 이삭을 줍듯 구제되는(군습) 근기의 사람이다.
약개근현원과 동집생의
이 장은 약개근현원의 문이다. 종지용출품에서 지용 보살의 출현을 보고 놀란 대중을 대표하여 미륵보살이 물은 것은 앞 장에서 본 대로이며, 부처가 이 의문에 답하여 간략히 그 본지를 설하신 말씀이 「나는 구원 이래로 이들 대중을 교화하였느니라」라는 문이다.
강의는 여기서 「동집생의(動執生疑)」라는 설법의 순서를 짚는다. 참으로 중대한 문제를 풀어 밝히려면 먼저 듣는 이의 집착을 흔들어 의심을 일으키게 한 다음 진실을 설해 보인다. 종지용출품은 약개근현원과 동집생의의 순서를 거치고, 이어지는 수량품에서 바로 광개근현원을 설해 밝힌다.
그 흐름을 경문으로 따라가 보자. 미륵의 첫 물음에 석존은 먼저 「이들은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 교화한 이들」이라고 답하신다. 이것만으로도 회중은 놀란다. 사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을 언제 교화하셨다는 말인가. 석존은 게송으로 다시 「내가 가야성 보리수 아래에서 최정각을 이루고 …… 처음으로 도심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지금 모두 불퇴에 머문다」고 하신 뒤, 「나는 구원 이래로 이들 대중을 교화하였느니라(我久遠より来是等の衆を教化せり)」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이라는 한마디가 가야 성도라는 「가까움」을 열어 「멂」을 살짝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경은 아직 그 멂이 얼마나 먼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회중의 의심은 오히려 커진다. 이것이 동집생의다.
「영초발도심」 — 늙은 제자, 젊은 스승
대성인은 회중의 의문이 얼마나 컸는지를 이전의 집회와 견주어 보이신다. 화엄경 때 법혜 등 한량없는 대보살이 모였다.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생각하니 석존은 「나의 선지식」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석존이 성도하기 전부터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있던 보살들이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긍할 수 있었다. 그 뒤 대집경의 대보방, 대반야경의 백로지에 모여 온 대보살들도 그러했다. 대보방은 욕계와 색계 사이의 큰 뜰, 백로지는 『대반야경』 제16회의 설법 장소로 전한다.
그런데 지용의 보살은 그들과 견줄 수도 없이 「연륜이 깊고 존귀해 보인다(ふりたりげにまします)」. 당연히 석존의 스승쯤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석존은 그들을 「처음으로 도심을 일으키게 하였다(令初発道心)」고, 곧 어린아이 같던 이들을 교화하여 제자로 삼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대성인은 이 역설을 두 가지 이야기로 비유하신다. 하나는 쇼토쿠 태자의 이야기다. 인왕 제32대 요메이 천황의 아들인 태자가 여섯 살 때, 백제 · 고구려 · 당에서 건너온 노인들을 보고 「나의 제자」라고 하자 노인들도 합장하여 「우리의 스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석에 따르면 『일본서기』에는 비다쓰 천황 6년 겨울 11월, 백제 국왕이 경론과 함께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 조불공 · 조사공 여섯 사람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쇼토쿠 태자전력』은 이때 여섯 살 태자가 「나는 옛날 한의 형산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아뢰었다고 전한다. 형산은 천태대사의 스승 남악대사 혜사가 머문 곳이며, 대성인 시대에는 남악대사의 후신이 쇼토쿠 태자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어석은 이것을 생명이 삼세에 걸친다는 관점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본다. 지금 생에서는 어린 태자가 과거세의 스승으로서 대륙의 노인 제자들을 맞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외전의 이야기다. 길가에서 서른 살쯤 된 젊은이가 여든 살쯤 된 노인을 붙잡고 때리기에 까닭을 물으니 「이 노인은 내 자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실제의 관계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지용 보살과 석존의 관계를 그대로 비춘다. 제36장의 상산 사호 비유가 이미 이 주제를 예고했다.

일대 제일의 의문
그래서 미륵 등은 거듭 묻는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태자였을 때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성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겨우 사십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토록 큰 불사를 이루셨습니까.」 종지용출품은 이 물음에 이어 「비유하면 얼굴빛이 아름답고 머리가 검은 스물다섯 살의 사람이 백 살 된 사람을 가리켜 내 아들이라 하고, 백 살 된 사람도 젊은이를 가리켜 내 아버지라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미륵의 입으로 말하게 한다. 대성인이 든 외전의 이야기는 이 경문의 비유와 같은 구조다.
대성인은 이 의문을 일대의 모든 의문 가운데 「첫째가는 의문」이라고 하신다. 화엄경 이래 사십여 년 동안 보살들은 회좌마다 의문을 세워 일체중생의 의심의 그물을 걷어 왔다. 그 가운데서도 이것이 으뜸이다. 무량의경에서 대장엄보살 등 팔만의 보살이 품은 의문, 곧 사십여 년 동안 역겁수행을 설하다가 지금 와서 빠른 성불을 설하는 것에 대한 의문보다도 크다. 어석에 따르면 무량의경에서 속질돈성을 처음 밝혔을 때 보살들의 놀람은 대단했지만, 종지용출품에서 무수한 지용 보살이 대지에서 솟아 나온 것을 보았을 때의 놀람은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대성인은 또 다른 두 가지 의문과 견주신다. 하나는 『관무량수경』에서 위제희 부인이 던진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대열반경』에서 가섭보살이 던진 서른여섯 가지 물음이다. 가섭보살은 마하가섭과는 다른 사람으로, 사십여 년의 회좌에도, 법화경의 회좌에도 함께하지 못하고 열반경에서 이삭을 줍듯 구제된 근기의 사람이다. 그의 서른여섯 물음도 이 미륵의 의문에는 미치지 못한다. 부처가 이 의문을 풀지 않았다면 일대의 성교는 물거품과 같고 일체중생은 의심의 그물에 걸렸을 것이다. 수량품 한 품이 소중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량품이 소중한 두 가지 뜻 — 재세의 탈익과 멸후의 하종
강의는 미륵의 물음이 참으로 일대 불교의 가장 중대한 문제임을 대성인이 이전의 경들과 견주어 보이고 수량품이 소중한 까닭을 증명하셨다고 본다. 그런데 수량품이 소중한 까닭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재세의 대중을 득탈시키기 위함이다. 「본인묘초」에 「적문 위의 본문 수량이라고 알게 하는(迹の上の本門寿量ぞと得意せしむる)」이라고 하신 뜻으로, 이것은 탈익의 문상이다. 둘째는 수량품이 오로지 멸후의 중생을 위해 설해졌다는 점이다. 곧 그 문 밑에 「구원실성 명자의 묘법을 곧바로 바르게 관하게 하는 일, 사행의 일념삼천인 남묘호렌게쿄(久遠実成名字の妙法を直達正観せしむる事行の一念三千の南無妙法蓮華経)」가 비밀로 잠겨 있기 때문에 수량품 한 품이 소중하다.
이 두 뜻은 「일품이반(一品二半)」을 어떻게 나누느냐의 차이로 나타난다. 약개근현원에서 시작하는 일품이반과 동집생의에서 시작하는 일품이반, 곧 천태대사와 니치렌 대성인 사이에 일품이반을 나누는 법이 다르다는 것은 「법화취요초」의 다음 문에 나타나 있다.
本門に於て二の心有り一には涌出品の略開近顕遠は前四味並に迹門の諸衆をして脱せしめんが為なり、二には涌出品の動執生疑より一半並びに寿量品・分別功徳品の半品已上一品二半を広開近顕遠と名く一向に滅後の為なり
본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용출품의 약개근현원은 앞의 사미와 적문의 대중을 득탈시키기 위함이다. 둘째로 용출품의 동집생의부터 반 품과 수량품, 분별공덕품의 반 품, 이상 일품이반을 광개근현원이라 이름하니 오로지 멸후를 위함이니라
니치칸 상인은 같은 일품이반이라도 다음과 같이 다르다고 보이셨다. 첫째는 나누는 법(配立)의 차이다. 천태의 배립은 용출품의 약개근현원과 동집생의의 반 품, 수량품, 분별공덕품의 반 품을 일품이반으로 삼는다. 대성인의 배립은 앞의 용출품 약개근현원 삼십여 행을 빼고, 용출품의 동집생의 반 품과 수량품, 분별공덕품의 반 품을 일품이반이라 이름하신다. 둘째는 종탈(種脫)의 차이다. 천태의 일품이반은 재세 탈익을 위한 것이고, 대성인의 일품이반은 말법 하종익을 위한 것이다. 셋째는 이름의 차이다. 천태의 일품이반은 약광개근의 일품이반, 또는 재세의 본문이라 한다. 대성인의 일품이반은 광개근현원의 일품이반이며, 말법의 본문, 또는 나의 내증의 수량품, 또는 문저 하종의 본인묘 등으로 불리고, 줄여서 그냥 수량품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천태의 배립인 약광개현의 일품이반은 오중삼단 가운데 제4 본문 탈익 삼단의 정종분이고, 대성인의 배립인 광개근현원의 일품이반은 제5 문저 하종 삼단의 정종분이다. 같은 일품이반이라도 이름은 같고 실체는 다르며(名同體異), 그 차이는 매우 크다. 이 대목은 「관심의 본존초」의 오중삼단과 이어지므로, 그 편과 함께 읽으면 좋다.
강의는 수량품이 소중한 까닭을 재세 탈익의 문상과 멸후 하종의 문저 두 가지로 나누고, 이것이 천태와 대성인의 일품이반 배립 차이로 나타난다고 본다. 대성인은 약개근현원을 빼고 동집생의부터를 일품이반으로 삼아 「오로지 멸후를 위함」이라고 하셨다.
「관경을 독송하는 사람이 제바품에 들어가지 않으면」
강의는 본문의 「관경을 독송하는 사람이 법화경의 제바품에 들어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리라」는 구절을 길게 풀이한다. 먼저 정토 계통의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한 주장을 소개하고 반박한다. 그들은 관무량수경이 법화경과 같은 때 같은 곳에서 설해진 것이므로 법화경과 같으며, 법화경은 실대승이고 관경은 권대승이라는 구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두 경의 첫머리를 든다. 관경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가 왕사성 기사굴산 가운데 계시며 큰 비구 대중 천이백오십 명과 함께하셨다. 보살이 삼만이천 명이니 문수사리법왕자가 상수였다」로 시작한다. 법화경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가 왕사성 기사굴산 가운데 머무시며 큰 비구 대중 만이천 명과 함께하셨으니 모두 아라한이었다 …… 또 배우는 이와 다 배운 이 이천 명이 있었다. 마하파사파제 비구니는 권속 육천 명과 함께하였다. 라후라의 어머니 야수다라 비구니도 권속과 함께하였다 …… 보살마하살 팔만 명이 함께하였다」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문장이 비슷하다. 그러나 강의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장소는 같은 기사굴산이지만 때와 기연이 다르다. 경의 「한때(一時)」란 중생의 기연이 무르익어 부처가 그에 감응한 때를 말한다. 부처는 중생의 기연이 무르익는 곳이면 어느 때든 감응하여 법을 설하신다. 그래서 일체경은 모두 연월일을 정하지 않고 다만 「한때」라고 한다. 관경의 중생과 법화경의 중생은 기연이 하늘과 땅만큼 다르므로, 문장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때라고 볼 수 없다. 내용까지 갈 것도 없이 회좌 대중의 수만 보아도 천이백오십 명과 만이천 명, 보살 삼만이천 명과 팔만 명으로 큰 차이가 있으니, 설하는 법 또한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제희 부인과 아사세의 인연
이어서 강의는 위제희 부인의 물음이 나온 배경을 자세히 전한다. 위제희 부인은 아사세왕의 어머니이며 빈바사라왕의 부인이다. 빈바사라왕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점술가에게 부인을 점치게 했다. 점술가는 「산속에 한 도인이 있는데, 그가 죽으면 부인의 태에 들어 태자가 된다」고 말했다. 하루빨리 태자를 얻고 싶었던 왕은 산속 도인의 양식을 끊고, 도인이 변한 흰 토끼를 죽여 버렸다. 부인은 곧 잉태했다. 왕이 다시 점을 치게 하니 「아들이 태어나지만 그 태자는 왕의 원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달이 차서 과연 용모가 단정한 아들이 태어났다. 점술가의 말에 따라, 태어나기도 전부터 원한을 품은 아이라 하여 「미생원(未生怨)」이라 이름 붙였다. 이 인연은 열반경에 와서 밝혀진 것이다. 왕은 아이가 자라는 것이 두려워 부인과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왕자를 땅에 던졌으나, 아이는 손가락 하나만 부러진 채 살아났다. 「절지(折指) 태자」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왕은 아들을 죽이기를 단념하고 마침내 태자로 삼았다. 이가 곧 아사세 태자다. 그 뒤 왕은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부처에게 귀의하여 오로지 공양에 힘썼다.
그 무렵 제바달다가 석존을 등지고 교단을 세워 한때 이름이 높았다. 제바달다는 신통력으로 아사세 태자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고, 태자에게 이렇게 꾀었다. 「태자여, 부왕 빈바사라는 구담사문(석존)을 믿고 귀의하여 나라의 절반을 희사해 버렸습니다. 이는 태자의 재산을 줄이는 일입니다. 앞날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태자여, 부왕을 죽이고 새 왕이 되십시오. 나는 구담을 죽이고 새 부처가 되겠습니다.」 태자는 부모의 은혜와 사랑이 깊다며 차마 할 수 없다고 한 번은 뿌리쳤다. 그러나 제바는 「태자는 모르고 있지만, 온 나라 사람들이 태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왕의 원수였다고 헐뜯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바사라왕은 태자가 갓 태어났을 때 죽이려 했습니다」라고 부추겼다.
마침내 아사세는 역심을 일으켜 부왕을 가두고 음식을 주지 않았으며, 스스로 새 왕이 되었다. 어머니 위제희 부인은 몸에 꿀을 발라 왕을 먹여 살리려 애썼다. 이를 안 아사세는 노하여 어머니마저 죽이려 했다. 그때 기바와 월광이 「어머니를 해친다는 이런 극악한 일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간하자, 아사세는 이를 멈추고 일단 풀어 주었으나,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깊은 궁에 가두어 버렸다. 빈바사라왕은 멀리서 석존을 예배하고 목련존자를 보내 계를 받게 해 달라고 청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왕에게 계를 주었다. 왕은 꿀을 먹고 얼굴빛이 붉어졌으며, 설법을 듣고 기뻐하며 세상을 떠났다.
위제희 부인도 근심으로 초췌해져 기사굴산을 향해 부처를 염했다. 부처는 크게 가엾이 여겨 목련 · 아난 두 존자를 데리고 부인이 갇힌 방에 나타났다. 그때 부인이 소리 내어 울며 한 말이 「제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악한 자식을 낳았나이까. 세존께서는 또 무슨 인연이 있어 제바달다와 함께 권속이 되셨나이까」라는 물음이다. 부처는 부인을 위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임시의 가르침으로 관무량수경을 설했다. 그러나 이 의문을 관경은 풀어 밝히지 않았다. 특히 「세존께서는 또 무슨 인연이 있어」라는 중요한 물음은 법화경 제바품에 와서야 비로소 해결된다.
그래서 대성인은 「관경을 독송하는 사람이 법화경의 제바품에 들어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대성인이 이 물음의 무게를 「전륜왕은 원수와 함께 나지 않고 제석은 귀신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무량겁의 자비로운 분인 부처가 왜 큰 원수와 친족으로 태어났는가. 그렇다면 도리어 부처가 아닌 것은 아닌가. 이 의문을 풀지 못하면 부처라는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
제바달다 — 과거의 스승 아사선
제바품의 답은 이렇다. 제바달다는 무량겁 전에 아사선(阿私仙)이라는 선인이었으며 법화경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때 석존은 국왕으로 태어나 법화경을 구하는 마음이 뜨거웠다. 아사선이 법화경을 지니고 있음을 알자 왕위를 버리고 그 제자가 되어, 천 년 동안 땔나무를 하고 과일을 따고 물을 긷고 몸을 평상 삼아 선인을 섬기며 법화경을 수행하여 마침내 성불했다. 그래서 석가불은 제바달다품에서 제바달다를 「나의 선지식」이라 부르셨다.
그런 법화경의 행자가 왜 스스로 오역죄를 지어 현재에 지옥에 떨어졌는가. 강의는 그것이 업인감과(業因感果), 곧 업의 원인이 과보를 부르는 이치를 중생에게 보이기 위함이며, 또 석존의 큰 선을 더욱 성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제바달다가 천왕여래라는 수기를 받아 성불한 것은 법화경의 공덕이 깊고 무거움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관경의 의문도 제바달다품에 와야 분명해진다. 제바달다의 성불은 제7편(제48장)에서 「이개의 간효」의 하나로 다시 다루어진다.
업인감과와 숙명전환
강의는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때, 석존이든 니치렌 대성인이든 불법을 설하실 때에는 전세의 업인이 금세의 업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생명의 철리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에도 살았고 지금도 살며 미래에도 생명 활동을 이어 간다는 것을 좀처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과거세의 업인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아사선이 제바달다로 태어나 석존의 불법을 돕고 업인업과를 중생에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의 스승이 금세의 제자로 나타난 것이다. 대성인도 전세와 후세를 굳게 믿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過去の宿縁追い来つて今度日蓮が弟子と成り給うか・釈迦多宝こそ御存知候らめ、『在在諸仏土常与師倶生』よも虚事候はじ
과거의 숙연이 따라와 이번에 니치렌의 제자가 되셨는가. 석가 · 다보께서 아실 것이니라. 「곳곳의 모든 불국토에 늘 스승과 함께 태어난다」는 말씀이 설마 거짓이겠느냐
위제희 부인이 아사세라는 악한 자식을 낳은 것도 업인감과의 이법에 따른 것이며, 앞서 말한 대로 열반경에 그 인연이 자세히 설해져 있다.
그렇다면 업인감과의 이법이 정해져 있다면 사람의 숙명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현세의 불행이라는 과보를 과거세의 불행한 원인 탓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만으로는 인생에 구원이 없다. 요점은 그 과거세의 불행한 원인을 어떻게 바꾸어 현세에 행복을 누리느냐에 있다. 「당신이 지금 불행한 것은 과거에 이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원인을 밝혀 준들 무슨 소용인가. 그것을 숙명전환하여 그 사람이 불행을 타개하고 행복을 얻게 해야 참된 종교라 할 수 있다고 강의는 말한다. 과거세 악업의 원인을 바꾸어 그대로 선업의 원인으로 삼는 것이 법화경의 힘이다. 다만 말법의 법화경이란 남묘호렌게쿄의 일곱 글자이며 삼대비법의 본존이다. 이 본존에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어떤 숙명이라도 바꾸지 못할 것이 없다고 강의는 강조한다.
강의는 그 근거로 두 어서를 든다.
般泥洹経に云く『善男子過去に無量の諸罪・種種の悪業を作らんに是の諸の罪報・或は軽易せられ……余の種種の人間の苦報現世に軽く受くるは斯れ護法の功徳力に由る故なり』
반니원경에 이르되 「선남자여, 과거에 한량없는 여러 죄와 갖가지 악업을 지었다면, 그 모든 죄보로 혹은 업신여김을 받고 …… 그 밖의 갖가지 인간의 괴로운 과보를 현세에 가볍게 받는 것은 이것이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기 때문이니라」
涅槃経に転重軽受と申す法門あり、先業の重き今生につきずして未来に地獄の苦を受くべきが今生にかかる重苦に値い候へば地獄の苦みぱつときへて死に候へば人天・三乗・一乗の益をうる事の候
열반경에 전중경수라는 법문이 있느니라. 전생의 업이 무거워 금생에 다하지 않고 미래에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 금생에 이러한 무거운 고난을 만나면 지옥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죽으면 인천 · 삼승 · 일승의 이익을 얻는 일이 있느니라
「사도어서」와 「전중경수법문」은 모두 개목초와 같은 사도 유배 시기 전후의 어서로, 법화경의 행자가 받는 난을 과거세 업보의 전환으로 읽는 시각을 공유한다. 이 시각은 제57장 「전중경수를 밝히다」에서 개목초 자신의 논리로 다시 전개된다. 제37장에서 위제희의 물음이 업인감과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은, 개목초 전체를 꿰는 「왜 법화경의 행자가 난을 만나는가」라는 물음과 깊이 통한다.
위제희 부인과 아사세 · 빈바사라왕의 이야기는 『관무량수경』 서분(왕사성의 비극)에 나오며, 아사세가 「미생원」이라 불린 인연과 절지의 일은 『대반열반경』에 설해진다. 강의가 전하는 줄거리는 이 두 경의 서술을 합친 것이다.
본문
其の後・仏・寿量品を説いて云く「一切世間の天人及び阿修羅は皆今の釈迦牟尼仏は釈氏の宮を出で伽耶城を去ること遠からず道場に坐して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得給えりと謂えり」等云云、 此の経文は始め寂滅道場より終り法華経の安楽行品にいたるまでの一切の大菩薩等の所知をあげたるなり、 「然るに善男子・我れ実に成仏してより已来・無量無辺百千万億那由佗劫なり」等云云、 此の文は華厳経の三処の「始成正覚」阿含経に云く「初成」浄名経の「始坐仏樹」大集経に云く「始十六年」大日経の「我昔坐道場」等・仁王経の「二十九年」無量義経の「我先道場」法華経の方便品に云く「我始坐道場」等を一言に大虚妄なりと・やぶるもんなり。
그 뒤 부처가 수량품을 설하여 이르시되 「일체 세간의 하늘 · 사람 및 아수라는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고 여기느니라」 등이라 하셨느니라. 이 경문은 처음 적멸도량부터 끝으로 법화경의 안락행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보살 등이 알고 있던 바를 든 것이니라.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로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 등이라 하셨느니라. 이 문은 화엄경 세 곳의 「처음 정각을 이루었다(始成正覚)」, 아함경에 이른 「처음 이루었다(初成)」, 정명경의 「처음 부처의 나무 아래에 앉았다(始坐仏樹)」, 대집경에 이른 「처음 십육 년(始十六年)」, 대일경의 「내가 옛날 도량에 앉았다(我昔坐道場)」 등, 인왕경의 「이십구 년(二十九年)」, 무량의경의 「내가 앞서 도량에(我先道場)」, 법화경 방편품에 이른 「내가 처음 도량에 앉았다(我始坐道場)」 등을 한마디로 크나큰 거짓이라고 깨뜨리는 문이니라.
어구 풀이
- 寿量品수량품
- 여래수량품의 줄임. 묘법연화경 제16품. 이 품에서 석존은 구원실성을 설해 밝히고, 성불한 원인과 결과, 부처로서 행동해 온 국토를 밝혔다. 구원실성이란 인도에 태어나 금생에 성불했다고 설해 온 석존이 실은 오백진점겁이라는 매우 먼 과거(구원)에 성불해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석존은 자신이 구원의 옛날부터 사바세계에서 많은 중생을 설법 교화하여 하종 결연해 왔다고 밝혔다. 오백진점겁의 구원에 설법하여 하종 결연한 것을 구원하종이라 한다.
- 広開近顕遠광개근현원
- 가까운 가야 성도를 열어 먼 구원의 성불을 자세히 드러내는 것. 수량품의 「내가 실로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 그 핵심 문이다.
- 釈氏の宮석씨의 궁
- 석가족의 왕궁, 곧 카필라성. 석존이 출가 전 태자로 지낸 곳이다.
- 伽耶城가야성
- 석존이 성도한 보드가야 근처의 성.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이 곧 보리수 아래의 성도 자리다.
- 安楽行品안락행품
- 법화경 제14품, 적문의 마지막 품. 「적멸도량부터 안락행품까지」는 곧 이전과 적문 전체를 말한다.
- 那由佗劫나유타겁
- 나유타는 매우 큰 수의 단위, 겁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의 단위. 수량품은 이를 오백진점겁의 비유로 보인다.
- 華厳経の三処の始成正覚화엄경 세 곳의 시성정각
- 『화엄경』 여러 곳에 부처가 「처음 정각을 이루었다」고 설해진 것. 석존의 성불을 보리수 아래의 첫 성도로 설한 이전 경전의 대표다.
- 浄名経の始坐仏樹정명경의 시좌불수
- 정명경은 『유마경』. 불국품의 게송에 부처가 처음 보리수 아래에서 마군을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뜻의 말이 있다.
- 仁王経の二十九年인왕경의 이십구 년
- 『인왕경』 서품에 석존이 성도 이후 이십구 년 동안 반야 등을 설해 왔다는 말이 있다. 성도의 시점을 인도의 첫 성도로 잡은 것이다.
- 無量義経の我先道場무량의경의 아선도량
- 『무량의경』 설법품의 「내가 앞서 도량 보리수 아래에 단정히 앉은 지 육 년 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다」는 문. 법화경의 개경(開經)조차 시성정각의 입장에 있다는 증거다.
- 方便品の我始坐道場방편품의 아시좌도량
- 법화경 방편품 게송의 「내가 처음 도량에 앉아 나무를 보며 거닐고 삼칠일 동안 이와 같은 일을 사유했다」는 문. 법화경 적문조차 시성정각의 틀 안에 있었다.
- 大虚妄대허망
- 크나큰 거짓. 수량품의 한마디가 이전 · 적문의 시성정각을 모두 방편의 말로 돌려놓는다는 뜻이다.
「시성정각」을 한마디로 깨뜨리다
이 장은 광개근현원의 문이다. 앞 장에서 석존은 「구원 이래」라는 말로 가까움을 열고 멂을 간략히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은 회중의 의심을 키웠을 뿐이다. 수량품에 이르러 석존은 먼저 일체 세간의 하늘 · 사람 · 아수라가 「지금의 석가모니불은 석씨의 궁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성도했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대성인은 이 경문이 처음 적멸도량부터 끝으로 법화경 안락행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보살이 알고 있던 바를 든 것이라고 하신다. 곧 이전과 적문 전체의 상식이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
그리고 석존은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로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라고 선언하신다. 대성인은 이 한마디가 이전의 경들이 저마다 설해 온 시성정각의 문을 모두 「크나큰 거짓」이라고 깨뜨린다고 하신다. 본문에 열거된 경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화엄경(세 곳)始成正覚처음 정각을 이루었다
- 아함경初成처음 이루었다
- 정명경(유마경)始坐仏樹처음 부처의 나무 아래 앉았다
- 대집경始十六年처음 십육 년
- 대일경我昔坐道場내가 옛날 도량에 앉았다
- 인왕경二十九年이십구 년
- 무량의경我先道場내가 앞서 도량에
- 법화경 방편품我始坐道場내가 처음 도량에 앉았다
이 목록에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 두 항목이다. 무량의경은 법화경의 개경이며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여 이전을 방편으로 돌린 경이다. 그런데 그 무량의경조차 「내가 앞서 도량에」라고 하여 석존의 성불을 가야의 첫 성도로 말한다. 법화경 방편품 역시 「내가 처음 도량에 앉아」라고 한다. 곧 적문에서 이승작불을 밝혀 이전의 한 허물을 깨뜨렸어도, 석존이 처음 성불했다는 시성정각의 틀은 적문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깨뜨린 것이 수량품의 한마디다.
이것이 개목초 제20장에서 대성인이 말씀하신 이전 · 적문의 두 허물 가운데 둘째, 「시성정각」의 허물이다. 그 장에서 대성인은 본문에 이르러 시성정각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렇게 밝히셨다.
本門にいたりて始成正覚をやぶれば四教の果をやぶる四教の果をやぶれば四教の因やぶれぬ爾前迹門の十界の因果を打ちやぶつて本門の十界の因果をとき顕す此即ち本因本果の法門なり九界も無始の仏界に具し仏界も無始の九界に備りて真の十界互具百界千如一念三千なるべし
본문에 이르러 시성정각을 깨뜨리면 사교의 과(果)를 깨뜨리고, 사교의 과를 깨뜨리면 사교의 인(因)도 깨어지느니라. 이전 · 적문의 십계의 인과를 깨뜨리고 본문의 십계의 인과를 설해 드러내니, 이것이 곧 본인본과의 법문이니라. 구계도 무시의 불계에 갖추어지고 불계도 무시의 구계에 갖추어져, 참된 십계호구 · 백계천여 · 일념삼천이 되느니라
제38장은 이 논리를 수량품의 경문 자체로 확정하는 자리다. 「시성」이 깨지면 부처의 과(果)가 무시(無始)가 되고, 과가 무시이면 그 과에 이른 인(因)도 무시가 된다. 부처가 처음 된 적이 없다면 구계의 중생 역시 처음부터 불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참된 일념삼천」이 성립한다. 시성정각의 부정은 단지 석존의 나이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십계의 인과 구조 전체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수량품은 구원의 길이를 「오백진점겁」의 비유로 보인다.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티끌로 만들고, 동쪽으로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나라를 지날 때마다 한 티끌씩 떨어뜨려 티끌이 다하기까지 지나간 세계를, 티끌이 떨어진 곳이든 아니든 모두 부수어 다시 티끌로 만들고 그 한 티끌을 한 겁으로 삼아도, 성불한 이래의 시간은 그보다 더 길다는 것이다.
삼세의 생명과 오백진점의 하종
강의는 수량품의 개현을 생명관의 문제로 읽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명이 이 세상뿐이라고 생각하여, 내세나 과거세라고 하면 미신처럼 여기는 이가 많다. 그러나 불교는 처음부터 생명이 삼세에 걸친다는 전제로 가르침을 설해 왔다. 게다가 생명의 실체를 끝까지 파고들면 모든 생명은 지옥계에서 불계에 이르는 십계를 본디 갖추고 있다. 석존 재세의 중생은 오백진점겁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옛날에 석가불이 설한 법화경을 듣고 하종 결연을 받았으며, 그 인연으로 지금 다시 석존의 법화경을 듣고 성불한다고 설해진 것이다.
석존이 오백진점겁 이래 부처로서 상주해 왔다고 설한 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인도에서 처음 성불했다는 시성정각을 설해 왔기 때문이다. 수량품과 이전 · 적문의 설법 사이에는 이처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강의는 수량품이야말로 석존 일대의 골수이며 안목이며 본원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은 앞 장의 「구원하종」 개념과 이어진다. 어석이 정리하듯, 오백진점겁의 구원에 석존이 설법하여 하종 결연한 것을 구원하종이라 한다. 그렇다면 재세의 중생이 수량품을 듣고 득탈한 것은 오백진점겁에 심은 종자가 사십여 년의 가르침으로 익고(숙) 수량품에서 거두어진(탈) 것이다. 이 종 · 숙 · 탈의 구조는 제40 · 41장에서 정면으로 다루어진다.
문저에서 본 수량품 — 구원원초와 무작삼신
그러나 강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비록 오백진점겁에 성도한 석존이라 해도, 문저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색상(色相)이 장엄한 부처, 지어진 부처다.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 이상화된 부처이며, 미래의 중생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존재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 오백진점겁을 다시 깨뜨려 구원원초를 드러내고, 시작도 끝도 없는(무시무종) 부처를 설해 내셨다고 강의는 말한다. 이것은 가로로는 우주가 곧 나라는 원리를 철저히 설한 것이고, 세로로는 영원한 생명을 끝까지 설하면서 그것이 한순간에 있다고 설해 낸 것이다. 이 입장에서 수량품의 「아실성불이래(我実成仏已来)」의 문을 읽으면, 「나(我)」란 별(別)하여서는 니치렌 대성인이시고, 대성인이 구원원초에 「실로 이룬」, 곧 무작삼신여래로 나타나신 이래 무시무종이라는 뜻이 된다. 총(總)하여서는 「나」란 십계의 중생 전체이며, 모든 생명이 무시무종이라는 뜻이다. 강의가 근거로 드는 것은 『어의구전』의 다음 대목이다.
我実成仏已来無量無辺等の事 御義口伝に云く我実とは釈尊の久遠実成道なりと云う事を説かれたり、然りと雖も当品の意は我とは法界の衆生なり十界己己を指して我と云うなり、実とは無作三身の仏なりと定めたり此れを実と云うなり成とは能成所成なり成は開く義なり法界無作の三身の仏なりと開きたり、仏とは此れを覚知するを云うなり已とは過去なり来とは未来なり已来の言の中に現在は有るなり、我実と成けたる仏にして已も来も無量なり無辺なり
아실성불이래 무량무변 등의 일. 어의구전에 이르기를, 아실(我實)이란 석존의 구원의 실성도(實成道)라는 것을 설하신 것이니라. 그렇지만 이 품의 뜻은, 아(我)란 법계의 중생이니 십계 각각을 가리켜 아라 하느니라. 실(實)이란 무작삼신의 부처라고 정하였으니 이를 실이라 하느니라. 성(成)이란 능성(能成)과 소성(所成)이니 성은 연다는 뜻이니라. 법계가 무작삼신의 부처라고 열었느니라. 불(佛)이란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하느니라. 이(已)란 과거요 래(來)란 미래이니, 이래(已來)라는 말 가운데 현재가 있느니라. 내가 실로 이룬 부처로서 이(已)도 래(來)도 한량없고 가없느니라
석존의 수량품이 일체경의 골수인 까닭은 그 문 밑에 구원원초의 묘법이 비밀로 잠겨 있기 때문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바라보면, 석존의 광개근현원인 수량품도 약광개(略廣開)의 수량품에 지나지 않으며, 대성인의 구원원초의 묘법이야말로 참된 광개근현원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완전무결하게 설해 낸 대철리이기 때문이다. 제37장에서 본 일품이반의 두 배립 가운데 대성인의 배립이 「광개근현원의 일품이반」이라 불린 것도 이 뜻이다.
강의는 수량품의 「아실성불이래」를 문상에서는 오백진점겁의 구원실성으로, 문저에서는 구원원초의 무작삼신으로 읽는다. 『어의구전』은 「아」를 법계의 중생, 「실」을 무작삼신, 「성」을 연다는 뜻으로 풀어, 모든 생명이 본디 무작삼신의 부처임을 열어 보인다.
본문
此の過去常顕るる時・諸仏皆釈尊の分身なり爾前・迹門の時は諸仏・釈尊に肩を並べて各修・各行の仏なり、 かるがゆへに諸仏を本尊とする者・釈尊等を下す、今華厳の台上・方等・般若・大日経等の諸仏は皆釈尊の眷属なり、 仏三十成道の御時は大梵天王・第六天等の知行の娑婆世界を奪い取り給いき、 今爾前・迹門にして十方を浄土と・がうして此の土を穢土ととかれしを打ちかへして此の土は本土なり十方の浄土は垂迹の穢土となる、 仏は久遠の仏なれば迹化・他方の大菩薩も教主釈尊の御弟子なり、 一切経の中に此の寿量品ましまさずば天に日月の・国に大王の・山河に珠の無く・人に神のなからんが・ごとくして・あるべきを華厳・真言等の権宗の智者とをぼしき澄観・嘉祥・慈恩・弘法等の一往・権宗の人人・且は自の依経を讃歎せんために或は云く「華厳経の教主は報身・法華経は応身」と・或は云く「法華寿量品の仏は無明の辺域・大日経の仏は明の分位」等云云、 雲は月をかくし讒臣は賢人をかくす・人讒すれば黄石も玉とみへ諛臣も賢人かとをぼゆ、今濁世の学者等・彼等の讒義に隠されて寿量品の玉を翫ばず、 又天台宗の人人もたぼらかされて金石・一同のをもひを・なせる人人もあり、仏・久成に・ましまさずば所化の少かるべき事を弁うべきなり、 月は影を慳ざれども水なくば・うつるべからず、仏・衆生を化せんと・をぼせども結縁うすければ八相を現ぜず、 例せば諸の声聞が初地・初住には・のぼれども爾前にして自調自度なりしかば未来の八相をごするなるべし、 しかれば教主釈尊始成ならば今此の世界の梵帝・日月・四天等は劫初より此の土を領すれども四十余年の仏弟子なり、 霊山・八年の法華結縁の衆今まいりの主君にをもひつかず久住の者にへだてらるるがごとし、 今久遠実成あらはれぬれば東方の薬師如来の日光・月光・西方阿弥陀如来の観音勢至・乃至十方世界の諸仏の御弟子・大日・金剛頂等の両部の大日如来の御弟子の諸大菩薩・猶教主釈尊の御弟子なり、 諸仏・釈迦如来の分身たる上は諸仏の所化申すにをよばず何に況や此の土の劫初より・このかたの日月・衆星等・教主釈尊の御弟子にあらずや。
이 과거의 상주가 드러날 때 제불은 모두 석존의 분신이니라. 이전 · 적문의 때에는 제불이 석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저마다 따로 닦고 따로 행한 부처였느니라. 그러므로 제불을 본존으로 삼는 이는 석존 등을 낮추었느니라. 이제 화엄의 연화대 위의 부처, 방등 · 반야 · 대일경 등의 제불은 모두 석존의 권속이니라. 부처가 서른에 성도하셨을 때에는 대범천왕 · 제육천 등이 다스리던 사바세계를 빼앗아 가지셨느니라. 이제 이전 · 적문에서 시방을 정토라 부르고 이 국토를 예토라 설하셨던 것을 뒤집어, 이 국토는 본토이고 시방의 정토는 수적(垂迹)의 예토가 되느니라. 부처는 구원의 부처이니 적화 · 타방의 대보살도 교주 석존의 제자이니라. 일체경 가운데 이 수량품이 계시지 않았다면 하늘에 해와 달이 없고, 나라에 대왕이 없고, 산하에 보배 구슬이 없고, 사람에게 혼이 없는 것과 같았을 것이거늘, 화엄 · 진언 등 권종의 지자라 여겨지는 징관 · 가상 · 자은 · 홍법 등, 일단 권종의 사람들이 또한 자기가 의지하는 경을 찬탄하기 위하여 혹은 이르되 「화엄경의 교주는 보신, 법화경은 응신」이라 하고, 혹은 이르되 「법화 수량품의 부처는 무명의 변역, 대일경의 부처는 명(明)의 분위」 등이라 하였느니라. 구름은 달을 가리고 아첨하는 신하는 현인을 가리느니라. 사람이 헐뜯고 추어올리면 누런 돌도 옥으로 보이고 아첨하는 신하도 현인인가 여겨지느니라. 지금 탁세의 학자들은 그들의 참언에 가려져 수량품의 구슬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또 천태종의 사람들도 속아서 금과 돌을 한가지로 여기는 이들이 있느니라. 부처가 구원에 성불하신 분이 아니라면 교화받는 이가 적을 것임을 분별해야 하느니라. 달은 그림자를 아끼지 않지만 물이 없으면 비치지 못하고,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셔도 결연이 엷으면 팔상을 나타내지 않으시느니라. 예컨대 모든 성문이 초지 · 초주에는 올랐어도 이전에서는 자조자도(自調自度)였으므로 미래의 팔상을 기약하였던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교주 석존이 처음 성불한 부처라면, 지금 이 세계의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 등은 겁초부터 이 국토를 다스려 왔으나 사십여 년의 불제자이니라. 영산 팔 년의 법화에 결연한 대중이 새로 온 주군에게 마음이 붙지 않고 오래 머문 이들에게 막히는 것과 같으니라. 이제 구원실성이 드러났으니, 동방 약사여래의 일광 · 월광, 서방 아미타여래의 관음 · 세지, 내지 시방세계 제불의 제자들, 대일 · 금강정 등 양부의 대일여래의 제자인 모든 대보살도 모두 교주 석존의 제자이니라. 제불이 석가여래의 분신인 이상 제불이 교화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이 국토의 겁초 이래의 일월 · 뭇별 등이 교주 석존의 제자가 아니겠느냐.
어구 풀이
- 過去常과거상
- 부처가 과거부터 상주해 왔다는 것. 수량품의 구원실성이 드러나 「부처는 과거에도 멸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을 말한다.
- 華厳の台上화엄의 대상
- 화엄경의 교주 노사나불. 연화대 위에 앉은 보신불이다.
- 大梵天王・第六天等の知行の娑婆世界대범천왕 · 제육천 등이 다스리던 사바세계
- 대범천왕은 색계 초선천의 왕으로 사바세계의 주인을 자처했고, 제육천은 욕계 맨 위의 타화자재천으로 그 왕은 마왕이다. 석존이 성도하기 전 사바세계는 이들이 다스리는 땅이었다.
- 垂迹の穢土수적의 예토
- 본토가 아닌, 본불이 자취를 드리운 곳으로서의 시방 국토. 수량품에 이르러 이 사바세계가 본토가 되고 시방의 정토는 오히려 수적의 국토가 된다.
- 澄観・嘉祥・慈恩・弘法징관 · 가상 · 자은 · 홍법
- 징관은 화엄종 제4조, 가상(길장)은 삼론종의 대성자, 자은(규기)은 법상종의 개조, 홍법(구카이)은 일본 진언종의 개조. 대성인은 이들을 「일단 권종의 지자」로 들어, 자기 종의 의지하는 경을 높이려 법화경을 낮춘 인사로 비판하신다.
- 無明の辺域・明の分位무명의 변역 · 명의 분위
- 법화경 수량품의 부처는 아직 무명(無明)의 경계 언저리에 있는 부처이고, 대일경의 부처는 밝음(明)의 자리에 있는 부처라는 진언 쪽의 판정. 대성인은 이를 법화경을 낮춘 진언종의 대표적인 주장으로 여러 어서에서 거듭 비판하신다.
- 八相を現ぜず팔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 팔상은 부처가 응신 또는 화신을 나타내어 성불을 중심으로 보이는 여덟 가지 모습이다. 하천(도솔천에서 내려옴) · 탁태 · 출태 · 출가 · 항마 · 성도 · 전법륜 · 입열반을 말한다. 팔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부처가 남을 교화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初地・初住초지 · 초주
- 초지는 보살 수행의 단계인 오십이위 가운데 제41위로 십지의 첫째이며 환희지라고도 한다. 초주는 오십이위 가운데 제11위로 십주의 첫째이며 발심주라고도 한다. 오십이위는 『화엄경』이나 『보살영락본업경』에 근거한다고 하며, 십신 · 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 · 등각 · 묘각을 합친 것이다. 천태종의 해석에서는 오십이위를 나누는 법이 별교와 원교에서 다르다. 별교에서는 초지 이상을 성위, 십회향 이하를 범위로 하고, 원교에서는 초주 이상을 성위, 십신 이하를 범위로 한다. 본문의 「초지 · 초주」는 별교든 원교든 수행하여 물러서지 않는 자리에 오른 성자임을 보이신 것이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초주의 자리 이전에, 묘법(남묘호렌게쿄)을 믿고 받아들인 명자즉의 자리에서 곧바로 묘각의 자리에 이른다고 설한다.
- 自調自度자조자도
- 자기만 번뇌를 다스리고 자기만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 이승은 보살처럼 중생을 구하려는 큰 서원이 없으므로 자조자도라 한다.
- 今まいりの主君새로 온 주군
- 새로 들어온 주군. 여기서는 석존을 가리킨다.
- 久住の者오래 머문 이
- 구원의 옛날부터 이 국토에 머물러 온 이들. 여기서는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 등을 가리킨다.
- 日光・月光・観音勢至일광 · 월광 · 관음 · 세지
- 일광 · 월광은 동방 약사여래의 협시보살, 관음 · 세지는 서방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 수량품이 드러난 뒤에는 이들도 모두 교주 석존의 제자가 된다.
본문 제2 · 탈익의 삼덕 — 국토에서 본 수량품
강의는 이 장부터 「본문의 제2, 탈익의 삼덕」을 밝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장은 국토의 측면에서 수량품의 부처가 일체경의 중심임을 설해 보인다고 정리한다. 장 제목의 「탈익의 삼덕」이란, 수량품에서 구원실성을 드러낸 석존이 재세의 중생에게 주 · 사 · 친의 삼덕을 갖춘 부처로서 득탈의 이익을 주었다는 뜻이다. 개목초 첫머리에서 대성인은 「무릇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이 셋 있으니, 이른바 주 · 사 · 친이니라」라고 표시하셨다. 그 삼덕이 유교 · 외도 · 이전 · 적문을 거쳐 마침내 수량품의 석존에게서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 장이다.
본문은 세 가지 역전을 차례로 보인다. 첫째는 제불의 역전이다. 이전 · 적문에서는 제불이 석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각수 · 각행의 부처였으나, 과거의 상주가 드러나자 모두 석존의 분신이 된다. 둘째는 국토의 역전이다. 이전 · 적문에서는 시방을 정토, 이 국토를 예토라 했으나, 이제 이 국토가 본토가 되고 시방의 정토는 수적의 예토가 된다. 셋째는 제자의 역전이다. 적화 · 타방의 대보살도, 동방 약사 · 서방 아미타의 협시도, 양부 대일여래의 제자인 대보살도, 그리고 겁초부터 이 국토에 살아온 일월과 뭇별도 모두 교주 석존의 제자가 된다.
제불은 모두 석존의 분신 — 최초 하종의 스승
강의는 「제불은 모두 석존의 분신」이라는 문을 이렇게 풀이한다. 석존과 결연한 중생이 시방에 가득하기 때문에, 석존은 동방에 분신하여 약사불로 나타나고 서방에 분신하여 아미타불로 나타나 중생을 이익하고 있다. 그러므로 약사의 제자도 아미타의 제자도 그 근원을 찾으면 모두 석존의 제자다.
이전 · 적문에서는 다만 그 자리에서의(當分) 근원만을 밝혀 왔으나, 본문 수량품에 이르러 참된 근원을 밝혔다. 이전 · 적문에서는 최초에 하종해 준 스승을 알지 못하므로 참된 성불이 있을 수 없다. 수량품에서 최초 하종의 스승의 깊고 무거운 불은을 느끼고, 본지의 헤아리기 어려운 경지(境智)의 묘법을 믿어 명자묘각의 깨달음을 연다. 그러므로 수량품을 일체경의 간심이라 한다. 다른 부처의 제자조차 이러하니, 하물며 이 사바세계의 중생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해석은 제35장에서 본 분신의 뜻과 짝을 이룬다. 분신의 부처는 근본 부처와 같은 불법으로 중생을 건진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을 믿는 이도 실은 석존이 심은 종자의 인연으로 아미타불을 만난 것이며, 그 근원은 석존에게 있다. 근원을 모르는 신앙은 「아버지를 모르는 자식」과 같다는 제40장의 꾸짖음이 여기서 준비된다.
또 본문의 「제불을 본존으로 삼는 이는 석존 등을 낮추었다」는 구절도 같은 맥락이다. 이전 · 적문의 입장에서 제불은 석존과 대등하므로, 아미타불이나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삼으면 자연히 석존을 그 아래에 두게 된다. 수량품이 드러난 뒤에는 이 구도가 뒤집힌다. 화엄의 연화대 위의 노사나불도, 방등 · 반야 · 대일경의 제불도 모두 석존의 권속이다.
국토의 지행 — 범천 · 제육천과 석존
본문의 「부처가 서른에 성도하셨을 때에는 대범천왕 · 제육천 등이 다스리던 사바세계를 빼앗아 가지셨다」는 구절에 대해, 강의는 「법화취요초」의 다음 문을 든다.
梵王云く此の土には二十九劫より已来知行の主なり第六天・帝釈・四天王等も以て是くの如し、釈尊と梵王等と始めて知行の先後之を諍論す爾りと雖も一指を挙げて之を降伏してより已来梵天頭を傾け魔王掌を合せ三界の衆生をして釈尊に帰伏せしむる是なり
범왕이 이르되 「이 국토에서 나는 이십구 겁 이래 다스려 온 주인이다」 하였고, 제육천 · 제석 · 사천왕 등도 그러하였느니라. 석존과 범왕 등이 처음으로 다스림의 앞뒤를 다투었으나, 손가락 하나를 들어 그들을 항복시킨 이래 범천은 머리를 숙이고 마왕은 합장하여 삼계의 중생을 석존에게 귀복하게 하였으니 이것이니라
석존이 성도할 때 이 국토는 이미 범천과 마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석존은 성도로 그 지배권을 빼앗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 온 주군」이 「오래 머문 이들」을 힘으로 복종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대성인은 석존이 시성의 부처라면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은 겁초부터 이 국토를 다스려 왔더라도 「사십여 년의 불제자」에 지나지 않으며, 영산 팔 년 동안 법화경에 결연한 대중도 새로 온 주군에게 마음이 붙지 않고 오래 머문 이들에게 막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주(主)의 덕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수량품에서 구원실성이 드러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석존은 오백진점겁 이래 이 사바세계에서 설법 교화해 왔다. 수량품 자신이 「나는 늘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설법 교화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국토의 참된 주인은 처음부터 석존이었고, 범천과 마왕이 오히려 나중에 온 이들이다. 그래서 이 국토는 「본토」가 된다. 「관심의 본존초」는 이 국토관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今本時の娑婆世界は三災を離れ四劫を出でたる常住の浄土なり仏既に過去にも滅せず未来にも生ぜず所化以て同体なり
지금 본시의 사바세계는 삼재를 떠나고 사겁을 벗어난 상주의 정토이니라. 부처가 이미 과거에도 멸하지 않고 미래에도 나지 않으니, 교화받는 이도 이와 한 몸이니라
시방을 정토로, 이 국토를 예토로 보는 이전의 국토관은 중생에게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가르친다. 수량품의 국토관은 그것을 뒤집어 「이곳이 본토」라고 말한다. 개목초가 사도의 눈 덮인 묘지 한가운데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국토관의 역전이 지니는 무게가 더 분명해진다.
누가 언제 석존의 제자가 되었는가
강의는 이어서, 석존이 성도한 뒤 누가 어느 시점에 석존의 제자가 되었는가를 「법화취요초」의 다른 문으로 보인다.
文殊弥勒等の諸大菩薩・梵天・帝釈・日月・衆星・竜王等初成道の時より般若経に至る已来は一人も釈尊の御弟子に非ず此等の菩薩天人は初成道の時仏未だ説法したまわざる已前に不思議解脱に住して我と別円二教を演説す釈尊其の後に阿含・方等・般若を宣説し給う然りと雖も全く此等の諸人の得分に非ず、既に別円二教を知りぬれば蔵通をも又知れり勝は劣を兼ぬる是なり委細に之を論ぜば或は釈尊の師匠なるか善知識とは是なり釈尊に随うに非ず、法華経の迹門の八品に来至して始めて未聞の法を聞いて此等の人人は弟子と成りぬ舎利弗目連等は鹿苑より已来初発心の弟子なり、然りと雖も権法のみを許せり、今法華経に来至して実法を授与し法華経本門の略開近顕遠に来至して華厳よりの大菩薩・二乗・大梵天・帝釈・日月・四天・竜王等は位妙覚に隣り又妙覚の位に入るなり
문수 · 미륵 등의 모든 대보살과 범천 · 제석 · 일월 · 뭇별 · 용왕 등은 처음 성도한 때부터 반야경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석존의 제자가 아니니라. 이 보살과 천인들은 처음 성도한 때 부처가 아직 설법하시기 전에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물러 스스로 별교 · 원교의 두 가르침을 펼쳤느니라. 석존은 그 뒤에 아함 · 방등 · 반야를 설하셨으나 전혀 이들의 몫이 아니었느니라. 이미 별 · 원 두 가르침을 알았으니 장 · 통도 알았으니, 뛰어난 것은 못한 것을 겸한다는 것이 이것이니라. 자세히 논하면 혹은 석존의 스승인가. 선지식이란 이것이니, 석존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법화경 적문의 여덟 품에 와서 비로소 듣지 못한 법을 듣고 이 사람들은 제자가 되었느니라. 사리불 · 목련 등은 녹야원 이래 처음 발심한 제자이니라. 그러나 권법만을 허락하였느니라. 이제 법화경에 와서 실법을 주고, 법화경 본문의 약개근현원에 와서 화엄 이래의 대보살 · 이승 · 대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 · 용왕 등은 자리가 묘각에 이웃하고, 또 묘각의 자리에 들었느니라
이 문은 제37장의 「화엄경 때 법혜 등은 나의 선지식」이라는 대목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 문수 · 미륵 등 대보살과 범천 · 제석 등은 반야경까지는 석존의 제자가 아니라 오히려 석존과 대등하거나 스승에 가까운 「선지식」이었다. 그들이 처음 석존의 제자가 된 것은 법화경 적문에서 듣지 못한 법을 들었을 때다. 그리고 본문의 약개근현원에 이르러 그들은 묘각에 이웃하는 자리, 또 묘각의 자리에 들었다. 제35장 첫머리의 「이제부터야말로 모든 대보살도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 등도 교주 석존의 제자」라는 말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은혜가 이토록 깊기에, 그들이 법화경의 행자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의문이 된다.
권종 인사의 참언과 월영의 비유
본문은 수량품이 일체경 가운데 차지하는 자리를 「하늘의 해와 달, 나라의 대왕, 산하의 보배 구슬, 사람의 혼」에 비긴 뒤, 이 수량품을 깎아내린 권종 인사들의 말을 든다. 화엄종 쪽에서는 「화엄경의 교주는 보신, 법화경의 교주는 응신」이라 하여 법화경의 부처를 낮추고, 진언종 쪽에서는 「법화 수량품의 부처는 무명의 변역, 대일경의 부처는 명의 분위」라 하여, 수량품의 부처는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미혹의 자리에 있고 대일경의 부처가 깨달은 부처라고 했다. 징관 · 가상 · 자은 · 홍법 같은 이들이 지자로 우러름을 받으면서도, 석존이 방편으로 일단 설한 이전의 경에 집착하여 다시 살핀 참뜻인 법화경을 알지 못하고, 자기 종의 경을 찬탄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것을 「구름은 달을 가리고 아첨하는 신하는 현인을 가린다」는 비유로 꾸짖으신다. 많은 사람이 칭찬하면 누런 돌도 옥처럼 보이고, 아첨하는 신하도 현인처럼 보인다. 지금 탁세의 학자들은 그들의 참언에 가려져 수량품이라는 보배 구슬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법화경을 의지하는 경으로 삼는 천태종 사람들조차 속아서, 금과 돌을 한가지로 여기듯 이전과 법화경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고 하신다. 이 비판은 제41장에서 천태종 안에 진언이 섞여 든 경위로 다시 이어진다.
이어서 대성인은 또 하나의 비유를 드신다. 「달은 그림자를 아끼지 않지만 물이 없으면 비치지 못한다.」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려 해도 중생과의 결연이 엷으면 팔상, 곧 하천 · 탁태 · 출태 · 출가 · 항마 · 성도 · 전법륜 · 입열반의 여덟 모습을 나타내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다. 부처가 이 세상에 나타나 그토록 많은 제자를 거느린 것은 그만큼 오랜 결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구원에 성불하지 않았다면 교화받는 이도 적었을 것이다. 제35장의 「분신이 이미 많으니 성불이 오래임을 알라」와 같은 추론이다.

대성인은 이 이치를 성문의 예로 보충하신다. 모든 성문이 별교의 초지나 원교의 초주까지 올랐다 해도, 이전에서는 자기만 다스리고 자기만 건너는(자조자도) 수행에 머물러 남을 교화하는 행이 없었으므로, 현세에 성불하지 못하고 먼 미래의 팔상작불을 기약해야 했다. 어석에 따르면 오십이위에서 별교는 초지 이상을, 원교는 초주 이상을 성위로 삼으므로, 「초지 · 초주」는 어느 쪽이든 물러서지 않는 성자의 자리에 오른 것을 뜻한다. 그런 성자라도 결연이 없으면 팔상을 나타낼 수 없다. 그리고 어석은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초주 이전, 묘법을 믿어 받아들인 명자즉의 자리에서 곧바로 묘각에 이른다고 덧붙인다. 앞에서 강의가 말한 「명자묘각의 깨달음」이 이것이다.
강의는 제39장을 「본문 제2 · 탈익의 삼덕」으로 읽고, 국토의 측면에서 수량품의 부처가 일체경의 중심임을 보인 장으로 본다. 이전 · 적문은 그 자리의 근원만 밝혔고, 수량품에 와서 최초 하종의 스승이 밝혀졌으며, 그 불은을 느끼고 묘법을 믿어 명자묘각의 깨달음을 연다는 것이다.
본문
而るを天台宗より外の諸宗は本尊にまどえり、倶舎・成実・律宗は三十四心・断結成道の釈尊を本尊とせり、 天尊の太子が迷惑して我が身は民の子とをもうがごとし、華厳宗・真言宗・三論宗・法相宗等の四宗は大乗の宗なり、 法相・三論は勝応身ににたる仏を本尊とす大王の太子・我が父は侍と・をもうがごとし、 華厳宗・真言宗は釈尊を下げて盧舎那・大日等を本尊と定む天子たる父を下げて種姓もなき者の法王のごとくなるに・つけり、 浄土宗は釈迦の分身の阿弥陀仏を有縁の仏とをもうて教主をすてたり、禅宗は下賤の者・一分の徳あつて父母をさぐるがごとし、 仏をさげ経を下す此皆本尊に迷えり、例せば三皇已前に父をしらず人皆禽獣に同ぜしが如し、寿量品をしらざる諸宗の者は畜に同じ不知恩の者なり、 故に妙楽云く「一代教の中未だ曾て遠を顕さず、父母の寿知らずんばある可からず若し父の寿の遠きを知らずんば復父統の邦に迷う、 徒に才能と謂うとも全く人の子に非ず」等云云、 妙楽大師は唐の末・天宝年中の者なり三論・華厳・法相・真言等の諸宗・並に依経を深くみ広く勘えて寿量品の仏をしらざる者は父統の邦に迷える才能ある畜生とかけるなり、 徒謂才能とは華厳宗の法蔵・澄観・乃至真言宗の善無畏三蔵等は才能の人師なれども子の父を知らざるがごとし、 伝教大師は日本顕密の元祖・秀句に云く「他宗所依の経は一分仏母の義有りと雖も然も但愛のみ有つて厳の義を闕く、 天台法華宗は厳愛の義を具す一切の賢聖・学・無学及び菩提心を発せる者の父なり」等云云、 真言・華厳等の経経には種熟脱の三義・名字すら猶なし何に況や其の義をや、華厳・真言経等の一生初地の即身成仏等は経は権経にして過去をかくせり、 種をしらざる脱なれば超高が位にのぼり道鏡が王位に居せんとせしがごとし。
그런데 천태종 이외의 제종은 본존에 미혹하였느니라. 구사 · 성실 · 율종은 삼십사심 · 단결성도의 석존을 본존으로 삼았으니, 천존(天尊)의 태자가 미혹하여 제 몸을 백성의 자식으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라. 화엄종 · 진언종 · 삼론종 · 법상종 등 네 종은 대승의 종이니라. 법상 · 삼론은 승응신과 비슷한 부처를 본존으로 삼으니, 대왕의 태자가 내 아버지는 무사라고 여기는 것과 같으니라. 화엄종 · 진언종은 석존을 낮추고 노사나 · 대일 등을 본존으로 정하니, 천자인 아버지를 낮추고 종성(種姓)도 없는 자가 법왕인 양하는 데에 붙은 것이니라. 정토종은 석가의 분신인 아미타불을 인연 있는 부처라 여겨 교주를 버렸느니라. 선종은 천한 자가 한 푼의 덕이 있다고 부모를 깔보는 것과 같으니라. 부처를 낮추고 경을 낮추니 이는 모두 본존에 미혹한 것이니라. 예컨대 삼황 이전에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 사람이 모두 금수와 같았던 것과 같으니라. 수량품을 모르는 제종의 사람은 축생과 같으니 은혜를 모르는 자이니라. 그러므로 묘락이 이르되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아직 일찍이 먼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모의 수명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아버지의 수명이 긴 것을 알지 못하면 또한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 미혹한다. 헛되이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도 전혀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묘락대사는 당나라 말 천보 연간의 사람이니라. 삼론 · 화엄 · 법상 · 진언 등의 제종과 그 의지하는 경을 깊이 보고 널리 헤아려, 수량품의 부처를 모르는 자는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 미혹한 재능 있는 축생이라고 쓴 것이니라. 「헛되이 재능이 있다고 일컫는다」는 것은 화엄종의 법장 · 징관 내지 진언종의 선무외삼장 등이 재능 있는 인사이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라. 전교대사는 일본 현밀의 원조이니라. 『수구』에 이르되 「타종이 의지하는 경은 한 푼 불모(佛母)의 뜻은 있으나 다만 애(愛)만 있고 엄(嚴)의 뜻을 결하였다. 천태법화종은 엄과 애의 뜻을 갖추었으니, 일체의 현성 · 학 · 무학 및 보리심을 일으킨 이의 아버지이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진언 · 화엄 등의 경들에는 종 · 숙 · 탈의 세 뜻이 이름조차 없으니 하물며 그 뜻이랴. 화엄 · 진언경 등의 일생초지의 즉신성불 등은 경이 권경이어서 과거를 감추었느니라. 종자를 모르는 탈이니, 조고가 지위에 오르고 도경이 왕위에 앉으려 한 것과 같으니라.
어구 풀이
- 本尊본존
- 근본으로 삼아 존숭하는 대상. 강의는 본존이 외도와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통하는 말이며, 각 종파에서 「근본으로 삼아 존숭하는」 것이 본존이라고 정의한다.
- 天台宗천태종
- 법화경을 의지하는 경으로 삼아 중국 수나라 때 천태대사 지의가 연 종파. 법화종 · 천태법화종 · 천태법화원종이라고도 한다. 교상으로는 남삼북칠의 여러 설을 깨뜨리고 오시팔교를 세웠으며, 관심으로는 원융의 삼제를 주창하여 일념삼천 · 일심삼관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즉신성불을 기한다고 설했다. 중국에서는 북제 시대의 혜문이 용수의 『대지도론』과 『중론』에 의해 일심삼관의 이치를 설했고, 이것이 남악대사 혜사를 거쳐 천태에게 전해졌다. 천태는 『법화문구』 · 『법화현의』 · 『마하지관』의 법화삼대부를 지어 천태종의 교의와 관심의 행법을 대성했다.
- 三十四心・断結成道の釈尊삼십사심 · 단결성도의 석존
- 삼십사심이란 팔인팔지의 십육심과 구무애 · 구해탈의 십팔심이다. 십육심으로 견혹을 끊고 십팔심으로 사혹을 끊는다. 이 삼십사심으로 견사혹을 끊고 성도하는 것을 삼십사심 단결성도라 한다. 삼장교(소승)의 과위를 얻어 번뇌를 다 끊은 열응신, 곧 키 일 장 육 척의 석존이다.
- 天尊の太子천존의 태자
- 천자 같은 지존의 아들. 현대어역은 「천왕의 황태자」로 푼다.
- 勝応身승응신
- 법 · 보 · 응 삼신 가운데 응신을 설법의 내용으로 나누어, 삼장교의 부처를 열응신, 대승의 첫 문인 통교의 부처를 승응신이라 한다. 승응신은 오십이위 가운데 초지 이상의 보살에게 응하여 나타나는 부처의 몸이며, 사토(四土) 가운데 방편유여토에 머문다.
- 盧舎那・大日노사나 · 대일
- 노사나불은 화엄경의 교주인 보신불, 대일여래는 대일경 · 금강정경의 교주인 법신불. 화엄종과 진언종은 석존보다 이 부처들을 높여 본존으로 삼았다.
- 種姓もなき者종성도 없는 자
- 가문이나 혈통이 없는 사람. 정통성 없는 자가 법왕인 양 행세하는 데 붙었다는 비유다.
- 有縁の仏유연의 부처
- 인연 있는 부처. 정토종은 아미타불이 말법 중생과 인연 있는 부처라 하여 석존을 제쳐 두었다. 수량품에서 보면 아미타불은 석존의 분신이다.
- 三皇삼황
- 중국 고대 전설상의 군주. 복희 · 신농 · 황제로 보는 설, 복희 · 신농까지는 같으나 셋째를 여와 · 수인 또는 축융으로 보는 여러 설이 있다. 천황 · 지황 · 인황으로 보는 설도 있다. 삼황 이전에는 사람이 아버지를 알지 못해 금수와 같았다는 이야기는 개목초 첫머리 유가의 논의에도 나온다.
- 父統の邦부통의 나라
-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 묘락대사의 말로, 부처(아버지)의 수명이 긴 것을 모르면 그 부처가 다스리는 국토(사바세계가 본토임)도 모르게 된다는 뜻이다. 제39장의 「이 국토는 본토이니라」와 짝을 이룬다.
- 天宝年中천보 연간
- 당 현종의 연호(742~756). 묘락대사 담연이 활동한 시기다.
- 法蔵법장
- (643~712) 화엄종 제3조. 화엄화상 · 현수대사 · 향상대사라 불린다. 지엄에게 화엄경을 배웠고 실차난타의 화엄경 새 번역에도 참여했다. 법화경에 의한 천태대사에 맞서, 화엄경을 근거로 한 석가 일대 불교의 교판을 오교십종판으로 세웠다. 『화엄경탐현기』 · 『화엄오교장』 · 『화엄경전기』 등을 지었으며 측천무후의 귀의를 받았다.
- 澄観징관
- (738~839) 화엄종 제4조. 청량대사. 열한 살에 출가하여 남산율 · 삼론 등을 배우고, 묘락대사 담연에게 천태의 지관 등을 배웠다. 오대산 청량사에 머물며 화엄종을 넓혔다. 『화엄경소』 60권, 『화엄경수소연의초』 90권 등 저술이 많다.
- 善無畏三蔵선무외삼장
- (637~735) 중국 당나라 진언종의 개조. 『송고승전』에 따르면 동인도 오다국의 왕자로 태어나 열세 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형들의 시기를 받아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했다. 마가다국 나란타사에서 달마국다에게 밀교를 배웠다. 당 개원 4년(716) 중국에 건너가 현종 황제에게 국사로 맞아들여졌다. 『대일경』 · 『소바호동자경』 · 『소실지갈라경』 등을 번역하고 『대일경소』를 엮어 중국에 처음으로 밀교를 전했다. 금강지 · 불공과 함께 삼삼장이라 불린다. 강의는 그가 『대일경소』에서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의 뜻을 가져다 넣고 이동사승(理同事勝)의 주장을 세웠다고 비판한다.
- 秀句수구
- 『법화수구』. 3권(또는 5권). 전교대사 사이초의 저술로 고닌 12년(821)에 이루어졌다. 법화경이 모든 경보다 뛰어난 점 열 가지(법화십승)를 들어 설하고, 당시 성행한 법상 · 삼론 · 화엄 · 진언 등 제종의 주장을 깨뜨렸다. 특히 법상종의 도쿠이쓰가 법화경을 비방한 것을 규탄했다.
- 学・無学학 · 무학
- 「학」은 아직 배움이 남은 사람, 「무학」은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세간에서 쓰는 뜻과는 반대다.
- 種熟脱종숙탈
-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처음과 끝. 성불의 종자를 심고(종), 그것을 기르고 익히며(숙), 마침내 득탈시키는(탈) 세 단계다. 제41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 一生初地の即身成仏일생초지의 즉신성불
- 화엄경 · 대일경 등에 설해진 권교의 법문. 이 몸이 화엄종이나 진언종을 신앙함으로써 오십이위의 십지의 처음인 환희지의 자리에 이르고, 나아가 등각 · 묘각의 부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어 성불이 의심 없다고 하는 설이다. 그러나 권교 방편의 가르침이므로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어 참된 성불은 되지 못한다.
- 超高조고
- (?~기원전 207) 趙高와 같다. 중국 진나라의 환관. 『사기』 등에 따르면 시황제를 섬겼으나, 황제가 죽은 뒤 승상 이사와 꾀하여 조서를 위조해 장남 부소를 죽이고 막내 호해를 즉위시켜 권력을 잡았다. 옛 신하들을 물리치고 가혹한 정치를 하여 나라 안에 난리를 불렀다. 이세황제(호해)를 마음대로 조종하여 이사까지 죽이게 했으나, 진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세황제를 죽였다. 그러나 이어 즉위한 자영에게 죽임을 당했다.
- 道鏡도경(도쿄)
- (?~772) 나라 시대 법상종의 승려. 속성은 유게(弓削) 씨. 가와치국 사람으로, 출가하여 가쓰라기산에서 수행한 뒤 도다이지에 들어갔다. 덴표호지 5년(761) 고켄 상황의 병을 고쳐 신임을 얻었고, 상황이 다시 즉위하여 쇼토쿠 천황이 되자 태정대신선사에 임명되고 이어 법왕의 자리에 올라 정치의 실권을 쥐고 전횡을 일삼았다. 나아가 황위를 엿보았으나 와케노 기요마로에게 저지되었다. 천황이 죽은 뒤 시모쓰케국 야쿠시지 별당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모두 본존에 미혹하였느니라」 — 본존이란 무엇인가
강의는 「이는 모두 본존에 미혹한 것이니라(此皆本尊に迷えり)」라는 구절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본존이란 외도에도 불교에도, 모든 종교에 통하는 말이다. 곧 각 종파에서 「근본으로 삼아 존숭하는」 것이 본존이다. 본문에 보이신 대로 제종은 모두 본존에 미혹했다. 어떤 종은 대일여래를, 어떤 종은 아미타여래를, 어떤 종은 응신의 석존을, 어떤 종은 타수용보신의 석존을 본존으로 삼았다. 왜 이렇게 미혹하는가. 믿어야 할 부처와 경교에 미혹했기 때문이다.
이 장의 자리를 개목초 전체에서 보면, 제39장까지는 수량품의 개현이 무엇을 바꾸었는가를 보였다. 제불은 분신이 되고, 국토는 본토가 되며, 보살과 제천은 구원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수량품을 모르는 이들은 이 모든 것을 거꾸로 보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들은 분신을 근본으로 여기고, 수적을 본토로 여기며, 근원의 부처를 낮춘다. 제40장은 그 전도를 「본존의 미혹」이라는 한마디로 집약한다.
장 제목의 둘째 부분 「바로 하종의 아버지를 밝히다」는 이 장의 다른 축이다. 묘락의 「부통의 나라」, 전교의 「엄애를 갖춘 아버지」, 그리고 「종 · 숙 · 탈」의 이름이 모두 이 장에 나온다. 본존의 미혹은 결국 「누가 나의 아버지인가」, 곧 누가 내 생명에 성불의 종자를 심었는가를 모르는 데서 온다. 개목초 첫머리에서 표시된 주 · 사 · 친 가운데 「친」의 덕이 여기서 「하종의 아버지」라는 형태로 정면에 나온다.
다섯 갈래의 미혹 — 제종의 본존과 비유
본문은 제종의 본존을 다섯 무리로 나누어, 각각을 아버지를 잘못 아는 자식에 비유한다.
첫째는 소승의 구사 · 성실 · 율종이다. 이들은 삼십사심 · 단결성도의 석존, 곧 삼장교에서 견사혹을 끊고 성도한 열응신의 석존을 본존으로 삼는다. 대성인은 이를 「천존의 태자가 미혹하여 제 몸을 백성의 자식으로 여기는 것」에 비유하신다. 아버지는 지존인데 자신을 백성의 자식이라 여기니, 아버지를 가장 낮게 잘못 안 것이다.
둘째는 대승 가운데 법상과 삼론이다. 이들은 통교의 부처인 승응신과 비슷한 부처를 본존으로 삼는다. 「대왕의 태자가 내 아버지는 무사라고 여기는 것」이니, 백성보다는 높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참모습을 모른다.
셋째는 화엄과 진언이다. 이들은 석존을 낮추고 노사나불이나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정한다. 「천자인 아버지를 낮추고 종성도 없는 자가 법왕인 양하는 데에 붙은 것」이다. 앞의 두 무리는 아버지를 낮게 보았을 뿐이지만, 이 무리는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이를 아버지로 섬긴다.
넷째는 정토종이다. 석가의 분신인 아미타불을 「인연 있는 부처」라 여겨 교주 석존을 버렸다. 제39장에서 본 대로 아미타불은 석존이 서방에 분신한 부처이니, 정토종은 아버지의 분신을 아버지로 여기고 아버지를 버린 것이다.
다섯째는 선종이다. 「천한 자가 한 푼의 덕이 있다고 부모를 깔보는 것」이다. 현대어역은 이를 좌선으로 견성성불을 세워 부처와 경을 낮춘 것이라고 푼다. 경 밖에 따로 전한다는 입장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낮추었다는 비판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모두를 「부처를 낮추고 경을 낮추니 이는 모두 본존에 미혹한 것」이라고 맺으신다. 이어 삼황 이전에 사람이 아버지를 알지 못해 금수와 같았다는 비유를 드시고, 수량품을 모르는 제종의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하신다. 개목초 첫머리에서 유가의 삼덕을 논할 때 대성인은 삼황 · 오제 이전의 사람들이 아버지를 모르고 금수와 같았으나 성인이 나와 효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쓰셨다. 같은 비유가 여기서는 불교 안의 일로 옮겨진다. 수량품을 모르는 것은 불교 안에서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다.
강의는 이 미혹이 대성인 문하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목이 고마운 것은 누구나 알면서도, 본존으로는 어떤 이는 석가를, 어떤 이는 만다라를, 어떤 이는 대성인의 상을 모시고, 그 혼란을 틈타 이나리 신이나 귀자모신, 조상의 계명까지 본존으로 삼아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의는 이 혼란의 원인이 모두 대성인의 불법에서 누구를 본불로 우러르고 무엇을 본존으로 믿어야 하는가에 미혹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주사친 삼덕의 본불이시며 대성인이 도현하신 만다라를 본존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묘락의 「부통의 나라」와 재능 있는 사람의 미혹
대성인은 이 꾸짖음의 근거로 묘락대사의 말을 인용하신다.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아직 일찍이 먼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모의 수명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아버지의 수명이 긴 것을 알지 못하면 또한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 미혹한다. 헛되이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도 전혀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이 말은 묘락대사가 『법화문구기』에서 수량품을 풀이하며 한 말이다.
이 문에는 세 겹의 논리가 있다. 첫째,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부처의 수명이 먼 것을 드러낸 곳은 수량품뿐이다. 둘째, 자식은 부모의 나이를 알아야 하듯 중생은 부처의 수명을 알아야 한다. 셋째, 아버지의 수명이 긴 것을 모르면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 곧 부처가 구원 이래 교화해 온 이 사바세계가 본토라는 것도 모르게 된다. 제39장의 「이 국토는 본토」라는 국토관이 여기서 「부통의 나라」라는 말로 받쳐진다. 부처의 수명(시간)과 부처의 국토(공간)는 함께 알려지고 함께 미혹된다.
대성인은 묘락대사가 당나라 말 천보 연간의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신다. 그는 삼론 · 화엄 · 법상 · 진언 등의 제종과 그 의지하는 경을 깊이 보고 널리 헤아린 뒤에 이 말을 했다. 곧 여러 종이 이미 성립하여 각자의 교학을 펼친 뒤에, 그 모두를 살펴보고 내린 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능이 있다고 일컫는다」는 말은 막연한 비난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물을 향한다. 대성인은 그 인물로 화엄종의 법장 · 징관, 진언종의 선무외삼장을 드신다.
어석이 전하는 이들의 이력을 보면 「재능」이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법장은 실차난타의 화엄경 번역에 참여하고 오교십종판을 세워 측천무후의 귀의를 받았다. 징관은 묘락대사 자신에게서 천태의 지관을 배운 사람이며, 『화엄경소』 60권과 『연의초』 90권을 남겼다. 선무외는 인도의 왕자로서 나란타사에서 밀교를 배우고 당 현종의 국사가 되어 『대일경』을 번역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학장이었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들이 재능 있는 인사이면서도 「자식이 아버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학식의 크기와 근원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본문은 이들을 묘락의 말에 따라 「재능 있는 축생」이라 부른다. 강의는 이를 매우 적절한 비판이라고 하면서, 법화경이나 천태학을 배우고 어서의 해석을 아무리 공부해도 부처와 본존에 미혹한 이는 사람의 도리를 잃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무지하고 악하더라도 자기의 주인과 스승과 어버이를 모르는 이는 없다. 주사친을 모르는 이는 재능이 있다 해도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교의 「엄과 애」 — 하종의 아버지
대성인은 이어 전교대사의 『법화수구』를 인용하신다. 「타종이 의지하는 경은 한 푼 불모의 뜻은 있으나 다만 애만 있고 엄의 뜻을 결하였다. 천태법화종은 엄과 애의 뜻을 갖추었으니, 일체의 현성 · 학 · 무학 및 보리심을 일으킨 이의 아버지이다.」
이 말은 부모의 덕을 엄(嚴)과 애(愛)로 나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기르고, 아버지는 엄함으로 이끈다. 타종의 경도 중생을 기르는 어머니의 뜻이 한 푼은 있다. 그러나 엄의 뜻, 곧 그릇된 것을 꾸짖고 바른 길로 이끄는 아버지의 뜻이 없다. 천태법화종은 엄과 애를 모두 갖추었으므로 일체의 현인 · 성인, 배우는 이와 다 배운 이, 보리심을 일으킨 모든 이의 「아버지」다. 현대어역은 이를 「곧 불도 수행에서 하종의 아버지이며 본원」이라고 풀이한다.
어석에 따르면 『법화수구』는 고닌 12년(821)에 이루어진 전교대사 만년의 저술로, 법화경이 모든 경보다 뛰어난 열 가지(법화십승)를 들고 법상 · 삼론 · 화엄 · 진언 등을 깨뜨렸으며, 특히 법상종의 도쿠이쓰가 법화경을 비방한 것을 규탄한 책이다. 대성인이 전교대사를 「일본 현밀의 원조」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일본에 천태의 원교와 함께 밀교도 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전교대사가 법화경만이 「아버지」라고 판정했다는 점에 무게가 있다. 「학 · 무학」은 어석이 말하듯 세간의 용법과 반대로, 「학」은 아직 배울 것이 남은 이, 「무학」은 배움을 마친 이를 말한다. 곧 수행의 어느 단계에 있는 이든 모두 법화경을 아버지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묘락의 「부통의 나라」와 전교의 「엄애를 갖춘 아버지」가 하나로 모인다. 수량품의 부처를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를 아는 것은 그 아버지가 심어 준 종자를 아는 것이다. 장 제목이 말하는 「하종의 아버지」가 바로 이것이다.
종숙탈의 이름조차 없다 — 조고와 도경
본문의 마지막 단락은 다음 장의 주제를 미리 꺼낸다. 「진언 · 화엄 등의 경들에는 종 · 숙 · 탈의 세 뜻이 이름조차 없으니 하물며 그 뜻이랴.」 화엄경이나 대일경도 즉신성불을 설한다. 이 몸 그대로 십지의 첫 자리인 환희지에 이르고 나아가 묘각까지 오른다는 「일생초지의 즉신성불」이다. 그러나 대성인은 그것이 권경의 설이어서 「과거를 감추었다」고 하신다. 곧 그 성불이 언제 어떤 종자를 심은 결과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종자를 모르는 탈(脫), 곧 원인을 모르는 결과다.
대성인은 이것을 조고와 도경에 비유하신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은 뒤 조서를 위조해 정통의 장남 부소를 죽이고 막내 호해를 세워 권력을 잡았으며, 끝내 이세황제마저 죽였으나 자영에게 죽임을 당했다. 도경은 고켄 상황의 병을 고쳐 총애를 얻고 태정대신선사 · 법왕의 자리에 올라 전횡하다가 황위까지 엿보았으나 와케노 기요마로에게 저지되어 좌천지에서 죽었다. 둘 다 정통의 혈통이 없는 자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 한 사례다. 종자를 모르는 성불이란 혈통 없이 왕위에 앉으려는 것과 같다. 겉으로는 즉신성불이라는 높은 자리를 말하지만, 그 자리에 이를 정당한 근원이 없다.
이 비유는 앞의 「종성도 없는 자가 법왕인 양하는 데에 붙었다」는 화엄 · 진언 비판과 정확히 겹친다. 「종성」이 없다는 것은 곧 「종자」가 없다는 것이다. 본존의 미혹은 종자의 미혹이며, 아버지를 모르는 것은 자신에게 심어진 종자를 모르는 것이다. 이 연결이 제41장 「종자의 덕용과 종자의 의경」으로 이어진다.
인법일개와 말법의 인본존
강의는 이 장의 마지막에 본존론을 정면으로 다룬다. 대성인의 이름을 내세우는 여러 문파를 크게 나누면, 니치렌 대성인을 인본존으로 우러르는 쪽과 구원실성의 석존을 인본존으로 우러르는 쪽이 있다. 어느 쪽이 참인가. 강의는 대성인의 이름을 내세운다면 대성인이 말씀하신 그대로의 종지여야 하며, 제멋대로 교의를 만들거나 대성인의 가르침을 굽혀 해석하는 것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다고 말한다.
이 본존론에 대해 강의는 이렇게 정리한다. 법의 본존은 일곱 글자의 남묘호렌게쿄이며, 바꾸어 말하면 대성인이 도현하신 만다라다. 그렇다면 인본존을 대성인으로 해야 하는가, 석존으로 해야 하는가. 이것을 논하려면 사람과 법이 하나(인법일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의는 의사의 비유를 든다. 「이 사람은 의사다」라고 할 때 의업이 법이고 의업을 행하는 그 사람이 사람이다. 의업이라는 법과 의업의 사람이 합쳐져 의사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인법일개다. 만약 의사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채소 가게를 하고 있다면 법과 사람이 맞지 않으므로 인법일개라 할 수 없다.
석존은 법화경 이십팔품을 설했지만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법화경의 수지 · 독 · 송 · 해설 · 서사의 다섯 가지 수행(오종법사)을 권했지만 남묘호렌게쿄를 권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법의 본존을 남묘호렌게쿄로 하고 석존을 인본존으로 하면, 사람과 법의 체가 따로따로(人法體別)여서 인법일개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니치렌 대성인은 스스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고, 남묘호렌게쿄 오자칠자의 제목이야말로 민중을 구하는 것이라 하시며, 「말법에 들어오면 다른 경도 법화경도 소용없다」고 하여 법화경 본문의 독송 수행을 그치게 하고 삼십 년 동안 소리 높여 제목을 권하셨다. 대성인에게서 제목의 수행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이렇게 보면 대성인이야말로 남묘호렌게쿄 그 사람이시며, 그러므로 인법일개의 본체이시고, 인본존은 대성인밖에 없다고 강의는 결론짓는다. 그리고 석존을 인본존으로 삼는 것은 「부통의 나라에 미혹하여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라는 이 장의 꾸짖음에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논파한다.
강의는 「모두 본존에 미혹하였다」는 꾸짖음을 본존론의 핵심으로 읽는다. 본존의 미혹은 믿어야 할 부처와 경에 미혹한 데서 오며,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대성인이 주사친 삼덕의 본불이시다. 법본존(남묘호렌게쿄)과 인본존은 인법일개여야 하므로, 남묘호렌게쿄를 부르고 넓히신 대성인이 말법의 인본존이라는 것이다.
묘락대사의 「일대교 가운데 아직 일찍이 먼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는 『법화문구기』 수량품 해석의 문으로, 대성인은 이 문을 여러 어서에서 수량품을 모르는 제종을 꾸짖는 근거로 인용하신다.
본문
宗宗・互に種を諍う予此をあらそはず但経に任すべし、法華経の種に依つて天親菩薩は種子無上を立てたり天台の一念三千これなり、 華厳経・乃至諸大乗経・大日経等の諸尊の種子・皆一念三千なり天台智者大師・一人此の法門を得給えり、 華厳宗の澄観・此の義を盗んで華厳経の心如工画師の文の神とす、真言・大日経等には二乗作仏・久遠実成・一念三千の法門これなし、 善無畏三蔵・震旦に来つて後・天台の止観を見て智発し大日経の心実相・我一切本初の文の神に天台の一念三千を盗み入れて真言宗の肝心として其の上に印と真言とをかざり法華経と大日経との勝劣を判ずる時・理同事勝の釈をつくれり、 両界の漫荼羅の二乗作仏・十界互具は一定・大日経にありや第一の誑惑なり、故に伝教大師云く「新来の真言家は則ち筆受の相承を泯じ、 旧到の華厳家は則ち影響の規模を隠す」等云云、 俘囚の嶋なんどに・わたて・ほのぼのといううたはわれよみたりなんど申すは・えぞていの者は・さこそとをもうべし、漢土・日本の学者又かくのごとし、 良諝和尚云く「真言・禅門・華厳・三論乃至若し法華等に望めば是接引門」等云云、 善無畏三蔵の閻魔の責にあづからせ給しは此の邪見による後に心をひるがへし法華経に帰伏してこそ・このせめをば脱させ給いしか、 其の後善無畏・不空等・法華経を両界の中央にをきて大王のごとくし胎蔵の大日経・金剛の金剛頂経をば左右の臣下のごとくせし・これなり、 日本の弘法も教相の時は華厳宗に心をよせて法華経をば第八にをきしかども事相の時には実慧・真雅・円澄・光定等の人人に伝え給いし時・両界の中央に上のごとく・をかれたり、 例せば三論の嘉祥は法華玄十巻に法華経を第四時・会二破二と定れども天台に帰伏して七年つかへ廃講散衆して身を肉橋となせり、 法相の慈恩は法苑林・七巻・十二巻に一乗方便・三乗真実等の妄言多し、しかれども玄賛の第四には故亦両存等と我が宗を不定になせり、 言は両方なれども心は天台に帰伏せり、 華厳の澄観は華厳の疏を造て華厳・法華・相対して法華を方便とかけるに似れども彼の宗之を以て実と為す此の宗の立義・理通ぜざること無し等とかけるは悔い還すにあらずや、 弘法も又かくのごとし、亀鏡なければ我が面をみず敵なければ我が非をしらず、 真言等の諸宗の学者等・我が非をしらざりし程に伝教大師にあひたてまつて自宗の失をしるなるべし。
종(宗)마다 서로 종자를 다투나, 나는 이것을 다투지 않고 다만 경에 맡기리라. 법화경의 종자에 의하여 천친보살은 종자무상(種子無上)을 세웠으니, 천태의 일념삼천이 이것이니라. 화엄경 내지 모든 대승경과 대일경 등의 제존의 종자는 모두 일념삼천이니라. 천태지자대사 한 분만이 이 법문을 얻으셨느니라. 화엄종의 징관은 이 뜻을 훔쳐 화엄경의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心如工畫師)」는 문의 정수로 삼았느니라. 진언 · 대일경 등에는 이승작불 · 구원실성 · 일념삼천의 법문이 없느니라. 선무외삼장은 진단에 온 뒤 천태의 지관을 보고 지혜가 열려, 대일경의 「마음의 실상」, 「나는 일체의 본초」라는 문의 정수에 천태의 일념삼천을 몰래 넣어 진언종의 간심으로 삼고, 그 위에 인(印)과 진언으로 꾸며, 법화경과 대일경의 승렬을 판정할 때 이동사승(理同事勝)의 해석을 지었느니라. 양계 만다라의 이승작불 · 십계호구가 정녕 대일경에 있느냐. 으뜸가는 속임이니라. 그러므로 전교대사가 이르되 「새로 온 진언가는 곧 필수(筆受)의 상승을 없애고, 예전에 온 화엄가는 곧 영향(影響)의 규모를 감춘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포로의 섬 같은 곳에 건너가 「호노보노토」라는 노래는 내가 지었다고 말하면, 에조 같은 이들은 그런가 하고 여길 것이니라. 한토 · 일본의 학자들 또한 이와 같으니라. 양서(良諝) 화상이 이르되 「진언 · 선문 · 화엄 · 삼론 내지 만약 법화 등에 견주면 이는 접인문(接引門)이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선무외삼장이 염마의 책망을 받으신 것은 이 사견 때문이니라. 뒤에 마음을 돌려 법화경에 귀복하였기에 이 책망을 벗어나셨느니라. 그 뒤 선무외 · 불공 등이 법화경을 양계의 중앙에 두어 대왕처럼 하고, 태장의 대일경과 금강의 금강정경을 좌우의 신하처럼 한 것이 이것이니라. 일본의 홍법도 교상(教相)의 때에는 화엄종에 마음을 기울여 법화경을 제8에 두었으나, 사상(事相)의 때에 실혜 · 진아 · 원징 · 광정 등의 사람들에게 전하실 때에는 양계의 중앙에 위와 같이 두셨느니라. 예컨대 삼론의 가상은 『법화현론』 10권에서 법화경을 제4시 · 회이파이(會二破二)로 정하였으나, 천태에게 귀복하여 칠 년 동안 섬기고 강의를 폐하고 대중을 흩으며 몸을 육교(肉橋)로 삼았느니라. 법상의 자은은 『법원림』 7권 · 12권에 「일승은 방편, 삼승은 진실」 등의 망언이 많으나, 『현찬』 제4에서는 「그러므로 또한 둘 다 둔다(故亦兩存)」 등이라 하여 자기 종을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으니, 말은 양쪽이지만 마음은 천태에게 귀복한 것이니라. 화엄의 징관은 화엄의 소를 지어 화엄과 법화를 견주어 법화를 방편이라 쓴 것 같으나, 「저 종은 이것으로 실(實)을 삼으니 이 종의 입의(立義)와 이치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 등이라 쓴 것은 뉘우쳐 되돌린 것이 아니겠느냐. 홍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거울이 없으면 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적이 없으면 제 잘못을 알지 못하느니라. 진언 등 제종의 학자들이 제 잘못을 알지 못하다가, 전교대사를 만나 뵙고 자기 종의 허물을 알게 된 것이니라.
어구 풀이
- 宗宗・互に種を諍う종마다 서로 종자를 다툰다
- 각 종파가 성불의 종자는 자기 종의 경에 있다고 서로 다투는 것. 대성인은 이 다툼에 끼지 않고 「다만 경에 맡기리라」 하여, 경문을 증거로 판정하겠다고 하신다.
- 天親菩薩천친보살
- 생몰년 미상. 4~5세기 무렵 인도의 학승. 산스크리트로 바수반두(Vasubandhu)이며 세친이라고도 번역한다. 『대당서역기』 권5 등에 따르면 북인도 건타라국 출신으로 무착의 아우다. 처음 아유사국에서 설일체유부의 소승교를 배워 『대비바사론』을 강설하고 『구사론』을 지었다. 뒤에 형 무착의 인도로 소승을 버리고 대승을 배웠다. 그때 소승에 집착한 잘못을 뉘우쳐 혀를 자르려 하자, 형이 「혀로 대승을 비방했다면 이후로는 혀로 대승을 찬탄하여 죄를 갚으라」고 타일러, 크게 대승의 논을 지어 대승을 선양했다. 유식사상(실재하는 것은 인식 주체인 식뿐이고 외계는 마음에 나타날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구사론』 30권, 『십지경론』 12권, 『법화론』 2권, 『섭대승론석』 15권, 『불성론』 6권 등 저술이 많아 「천부의 논사」라 불린다.
- 種子無上종자무상
- 천친의 『법화론』에 설해진 십무상(十無上)의 하나. 법화경에 설해진 성불의 종자가 위없음을 말한 것이다.
- 心如工画師심여공화사
- 화엄경에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가 갖가지 오음을 그려 내는 것과 같아서, 일체 세계 가운데 법으로서 짓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말한다. 우리의 한마음이 모든 법을 지어내는 것을 솜씨 좋은 화가가 갖가지 그림을 그려 온갖 모습을 나타내는 데 비유한 문이다. 화엄종의 징관은 천태의 일념삼천을 가져다가 이 문이 일념삼천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 澄観징관
- (738~839) 중국 화엄종 제4조. 절강성 월주 산음 사람으로 성은 하후 씨, 자는 대휴이며 청량국사라 불렸다. 열한 살에 보림사에서 출가하여 남산율 · 삼론 등을 배우고, 소주에서 묘락대사에게 천태의 지관 등을 익히는 등 여러 명사를 찾아다녔다. 그 뒤 오대산 대화엄사(청량사)에서 청을 받아 화엄경을 강의했다. 많은 책을 지어 화엄종의 흥륭에 힘썼다. 『화엄경수소연의초』 권19에서는 화엄경의 「심여공화사」 문을, 천태대사의 일념삼천 법문이 설해지고서야 비로소 가능한 성악 · 성선의 법문을 써서 해석했다.
- 震旦진단
- 중국의 역사적 호칭. 산스크리트 치나 스타나(Cīna-sthāna)의 음사로 진단(真旦) · 진단(真丹)이라고도 쓴다. 중국 사람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치나는 진(秦)의 음사이고 스타나는 지역 · 장소의 뜻이다. 고대 인도인이 진(중국)을 가리킨 이름으로 주로 불전에 쓰였다.
- 心実相・我一切本初심실상 · 아일체본초
- 대일경의 「마음의 실상」, 「나는 일체의 본초이다」라는 문. 선무외는 이 문들에 천태의 일념삼천을 넣어 해석했다고 대성인은 말씀하신다.
- 理同事勝이동사승
- 법화경과 대일경은 이(理), 곧 일념삼천의 이치에서는 같지만, 사(事), 곧 인(印)과 진언을 갖춘 점에서 대일경이 뛰어나다는 진언종의 주장.
- 両界の漫荼羅양계 만다라
- 대일경에 의한 태장계 만다라와 금강정경에 의한 금강계 만다라.
- 新来の真言家は則ち筆受の相承を泯じ새로 온 진언가는 필수의 상승을 없앤다
- 전교대사가 『의빙천태집』에서 진언을 깨뜨린 문. 「필수의 상승」이란 당나라 진언종의 일행아사리가 선무외삼장에게서 받아 적은 진언의 상승을 말한다. 일행은 숭산의 보적에게 선을 배우고 여러 곳에서 율장과 경론을 연구했으며 천태의 교의에도 통했다고 한다. 선무외가 설하고 일행이 기록한 『대일경소』는 전적으로 천태종의 뜻으로 대일경을 해석한 것인데, 일본의 진언(동밀)은 대일경을 배우는 데 이 『대일경소』를 유일 절대의 권위로 삼으면서도 천태법화를 대일 삼부보다 못하다고 낮추었다. 그래서 선무외 · 일행의 진언의 상승을 깨뜨렸다고 하는 것이다. 「민(泯)한다」는 없애다 · 쇠퇴시키다의 뜻이다.
- 旧到の華厳家は則ち影響の規模を隠す예전에 온 화엄가는 영향의 규모를 감춘다
- 앞 항과 같이 전교대사가 『의빙천태집』에서 화엄종의 주장을 깨뜨린 문. 화엄종 법장의 오교(소승교 · 대승시교 · 대승종교 · 대승돈교 · 대승원교)는 천태의 오시(화엄시 · 아함시 · 방등시 · 반야시 · 법화열반시)를 본보기로 하여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빙천태집』에는 「화엄종의 사문 혜원이 판정하여 이르기를, 법장 스님이 세운 뜻은 천태의 뜻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명한 문이 있는데도, 일본의 화엄종은 이를 감추고 천태종을 낮추었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예전에 온」이란 화엄종이 진언종 등보다 일찍 전해졌기 때문에 한 말이다. 「영향의 규모」란 영향을 받아 본보기로 삼은 것을 말한다. 규모(規模)에는 「구조 · 짜임새의 크기」만이 아니라 본보기 · 모범, 명예 · 면목, 효과 · 성과, 대가 · 보답, 근거 · 증거 등 고어로서 여러 뜻이 있다.
- 俘囚の嶋・えぞ포로의 섬 · 에조
- 조정에 복속한 변경의 사람들이 사는 땅과 그 사람들을 부른 옛말. 본문에서는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비유로 쓰였다.
- ほのぼのといううた「호노보노토」라는 노래
- 「ほのぼのと 明石の浦の 朝霧に 島隠れ行く 舟をしぞ思ふ(희붐한 아카시 포구의 아침 안개 속에 섬 그늘로 숨어 가는 배를 생각하노라)」라는 『고킨와카슈』의 노래로,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누구나 아는 명가를 자기가 지었다고 주장하는 비유다.
- 良諝和尚양서 화상
- 생몰년 미상. 중국 당나라 천태종의 승려. 良湑로도 쓴다. 천태대사로부터 제9대 전법 제자다. 개원사에 머물렀고, 뒤에 일본 천태종 제5대가 되는 지증이 가쇼 4년(851)에 이 절을 찾았을 때 천태의 종지를 강술했다. 화상은 제자가 스승을 부르는 칭호로, 선종에서는 「오쇼」, 천태에서는 「가쇼」, 진언 · 율종에서는 「와조」라 읽는다.
- 接引門접인문
- 중생을 이끌어 들이기 위한 임시의 문. 법화경에 견주면 다른 종의 경은 모두 방편의 문이라는 뜻이다.
- 閻魔の責염마의 책망
- 선무외가 강술하고 일행이 기록한 『대일경소』 권5에 「아사리(선무외)가 말하기를, 어렸을 때 일찍이 중병으로 정신이 끊어져 명부에 가서 이 법왕(염마)을 보았다 …… 그로 인해 풀려나 이곳으로 돌아왔다. 깨어난 뒤에도 두 팔이 밧줄에 묶였던 곳에 아직 상처 자국이 있었는데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 나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성인은 「선무외삼장초」에서, 선무외가 갑자기 죽었다가 되살아나, 지옥에 떨어져 옥졸에게 쇠사슬로 묶여 염마왕 앞에 끌려갔을 때 진언을 외워도 소용없었으나 법화경 비유품의 「今此三界 皆是我有 其中衆生 悉是吾子 而今此処 多諸患難 唯我一人 能為救護」의 문을 외워 쇠사슬을 벗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문을 외운 것은 법화경과 석가불에게 귀의함을 나타내며, 이 문은 교주 석존이 스스로 사바세계 일체중생에게 주 · 사 · 친 삼덕을 갖춘 부처임을 선언한 문으로 유명하다.
- 両界の中央に양계의 중앙에
- 선무외 · 불공 이후의 진언사들이 법화경을 양계 만다라의 중앙에 두었다는 것. 대성인은 이를 그들이 속으로는 법화경에 귀복한 증거로 보신다.
- 教相・事相교상 · 사상
- 진언종에서 교리의 판정과 이론을 교상, 인 · 진언 · 관정 등의 실천 의례를 사상이라 한다. 홍법은 교상에서는 『십주심론』 등의 판정으로 법화경을 제8주심에 두었으나, 사상의 전수에서는 법화경을 양계의 중앙에 두었다는 것이다.
- 実慧실혜
- (786~847) 헤이안 초기의 진언승. 홍법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속성은 사에키 씨이며 사누키국 다도군에서 태어났다. 도지의 초대 장자. 만년에 가와치의 히노오에 살아 히노오 승도라 불렸다. 조와 14년(847) 62세로 죽었다.
- 真雅진아
- (801~879) 헤이안 전기의 진언승. 홍법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홍법의 아우다. 속성은 사에키 씨이며 사누키국 다도군에서 태어났다. 세이와 천황의 총애를 받았고 조와 14년 도다이지 별당, 조간 2년 도지의 장자가 되었다. 간교 3년(879) 79세로 죽었다.
- 円澄원징
- (771~836) 헤이안 전기의 천태종 승려. 무사시국 사이타마군 사람으로 속성은 미부 씨. 처음 감진의 고제자 도추에게 출가하여 법경행자라 했다. 도추가 죽은 뒤 전교대사에게 사사하여 이름을 원징으로 고쳤다. 다이도 원년(806) 전교대사가 처음 원돈계를 줄 때 그 수계자의 상수였고, 이듬해 법화장강에서 전교에 이어 제2권을 강의했다. 고닌 3년부터 8년에 걸쳐 전교에게서 원교삼신 · 지관삼덕의 뜻 등을 받았고, 대사가 죽은 뒤 칙명으로 엔랴쿠지 제2대 좌주가 되었다. 그러나 「보은초」에 「원징은 천태 제2의 좌주로 전교대사의 제자이지만 또 홍법대사의 제자이니라」라고 하신 것처럼, 원징 때부터 천태종에 진언이 절반쯤 들어오게 되었다. 시호는 적광대사.
- 光定광정
- (779~858) 헤이안 전기의 천태종 승려. 전교대사의 제자. 이요국 가자하야군 사람으로 속성은 니에 씨. 부모를 여읜 뒤 승려 근각의 권유로 다이도 초에 상경했다. 다이도 3년(808) 히에이산에 올라 전교대사에게 사사하고 의진에게서 지관 강의를 들었다. 고닌 3년(812) 도다이지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여러 종을 널리 배웠으며 전교대사와 사가 천황의 총애를 받았다. 만년에 칙명으로 엔랴쿠지 별당이 되어 별당대사라 불렸다. 전교대사의 뜻을 받아 대승계단 설립에 힘썼다. 저서에 『일심계문』 등이 있다. 덴안 2년(858) 80세로 죽었다.
- 法華経を第四時・会二破二と定れども법화경을 제4시 · 회이파이로 정했으나
- 가상이 『법화현론』에서 법화경을 반야경보다 못하다 하여 오시의 제4시에 넣고, 법화경은 이승을 모아 이승을 깨뜨리는 교법일 뿐 보살에 대해서는 모음도 깨뜨림도 없다고 한 것.
- 肉橋육교
- 몸을 다리로 삼음. 가상이 천태대사에게 귀복한 뒤 대사가 지나갈 때 자기 몸을 엎드려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고 전하는 고사.
- 法苑林・七巻・十二巻に一乗方便・三乗真実等の妄言多し『법원림』 7권 · 12권에 일승 방편 · 삼승 진실 등의 망언이 많다
- 『법원림』은 중국 당나라 자은대사 규기의 『대승법원의림장』 7권이다. 각 권에 상하가 있어 모두 14권이다. 그 제7권과 제12권에 일승(법화경)은 방편이고 삼승이 진실이라는 주장이 많다. 경문을 허심탄회하게 읽으면 일승의 법화경이 최고이고 삼승의 이전 경이 그것을 위한 방편임이 분명한데, 자은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었다.
- 玄賛の第四には故亦両存等と我が宗を不定になせり『현찬』 제4에서는 「고역양존」 등이라 하여 자기 종을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 어석은 『현찬』을 자은의 제자 서복의 『법화경현찬요집』으로 보고, 그 제4권에 「그러므로 또한 둘 다 둔다」, 곧 일승의 법과 삼승의 법이 둘 다 있다고 설하여 법상종의 주장인 오성각별을 애매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풀이한다.
- 亀鏡귀경
- 거울. 옛날 거북의 등딱지로 점을 치고 거울로 모습을 비추었으므로 본보기 · 판단의 기준이라는 뜻으로 쓴다.
종자를 다투는 제종 — 「다만 경에 맡기리라」
강의는 이 장을 종자의 문제로 연다. 종 · 숙 · 탈을 논하지 않는 불법은 재와 같아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성불이니 공덕이니 하지만, 언제 어떤 불법을 종자로 삼아 수행했는지를 모르고 성불이나 공덕의 모습만 논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이 씨에서 자란 덩굴에 가지가 열릴 리 없다. 불교는 여러 가지 수행과 공덕을 설하지만, 어느 경교가 성불의 근본이 되고 종자가 되는가가 문제다. 그 근본은 법화경이며, 천친보살은 법화경을 「종자무상」이라 세웠고, 천태는 일념삼천이라 설했으며, 니치렌 대성인은 제불을 낳는 근원인 문저 하종의 삼대비법을 건립하시어 일체중생 즉신성불의 바탕으로 삼으셨다고 강의는 말한다.
본문 첫머리 「종마다 서로 종자를 다투나, 나는 이것을 다투지 않고 다만 경에 맡기리라」는 대성인의 논증 방법을 압축해 보여 준다. 대성인은 개목초 전체에서 「문증 · 이증 · 현증」을 갖추어 논하시는데, 여기서는 특히 경문을 기준으로 삼겠다고 선언하신다. 종파 사이의 다툼은 각자 자기 경을 높이는 데서 끝나지 않지만, 경문 자체에 무엇이 설해져 있는가를 보면 판정은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 판정은 이렇다. 천친보살은 『법화론』에서 법화경의 열 가지 위없음(십무상)을 세웠고, 그 가운데 하나가 「종자무상」이다. 법화경에 설해진 종자가 위없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 종자가 곧 천태의 일념삼천이라고 하신다. 나아가 화엄경 내지 모든 대승경, 대일경 등에 등장하는 제존(諸尊)이 성불한 종자도 모두 일념삼천이다. 그리고 그 일념삼천의 법문을 얻은 이는 천태지자대사 한 분뿐이다. 어석이 전하듯 천친은 형 무착의 인도로 소승에서 대승으로 돌아섰고, 대승을 비방한 혀로 대승을 찬탄하겠다며 수많은 논을 지어 「천부의 논사」라 불렸다. 그런 천친이 『법화론』을 지어 법화경의 종자가 위없다고 했다는 것은, 대승의 논사들조차 성불의 종자를 법화경에서 찾았다는 증거가 된다.
종 · 숙 · 탈 — 화도의 처음과 끝
그렇다면 우리의 신심 수행에서 종 · 숙 · 탈은 어떻게 되는가. 강의는 묘락대사의 『법화현의석첨』 권2의 문을 든다. 「법을 듣는 것을 종자로 삼고, 발심을 싹으로 삼으며, 현위(賢位)에 있는 것은 익음과 같고, 성위(聖位)에 드는 것은 벗어남과 같다.」
니치칸 상인은 이 문을 이렇게 풀이하셨다. 법을 듣는 것을 종자로 삼는 것은 문법하종(聞法下種)이고, 발심을 싹으로 삼는 것은 발심하종(發心下種)이니, 문법과 발심은 모두 명자즉의 자리다. 현위에 있는 것은 관행즉 · 상사즉이고, 성위에 드는 것은 분진즉 · 구경즉이다. 요컨대 종 · 숙 · 탈이란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처음과 끝(化導の始終)이다.
이것을 법화경의 적문과 본문에 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적문에서는 삼천진점겁 전 대통지승불 때 하종하고, 그 중간에 익히며, 법화경에서 장래의 화광여래 등이라는 수기를 받는다. 본문에서는 오백진점겁에 하종하고, 그 중간과 사미 · 삼교 · 적문까지를 숙으로 하며, 수량품에서 득탈하는 것을 탈로 한다. 이처럼 법화경은 종 · 숙 · 탈이라는 화도의 처음과 끝을 논하지만, 이전의 경에는 그것이 없다. 제40장 끝의 「진언 · 화엄 등의 경들에는 종 · 숙 · 탈의 세 뜻이 이름조차 없다」는 판정이 바로 이것이다.
- 법을 들음 = 종문법하종 · 명자즉
- 발심 = 싹발심하종 · 명자즉
- 현위에 있음 = 숙관행즉 · 상사즉
- 성위에 듦 = 탈분진즉 · 구경즉
- 대통지승불 때 하종
- 중간에 숙
- 법화경에서 수기(화광여래 등)
- 오백진점겁에 하종
- 중간 · 사미 · 삼교 · 적문에서 숙
- 수량품에서 득탈
그러나 강의는 참된 위없는 종자는 법화경 수량품의 문 밑에 비밀로 잠겨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 어서를 든다.
一念三千の法門は但法華経の本門・寿量品の文の底にしづめたり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느니라
在世の本門と末法の始は一同に純円なり但し彼は脱此れは種なり彼は一品二半此れは但題目の五字なり
재세의 본문과 말법의 처음은 한가지로 순원이니라. 다만 저것은 탈이요 이것은 종이니라. 저것은 일품이반이요 이것은 다만 제목의 오자이니라
種熟脱の法門・法華経の肝心なり、三世十方の仏は必ず妙法蓮華経の五字を種として仏になり給へり
종숙탈의 법문은 법화경의 간심이니라. 삼세시방의 부처는 반드시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종자로 삼아 부처가 되셨느니라
이상과 같이 법화경의 일념삼천은 성불의 종자다. 화엄 · 진언은 성불의 이치를 자기 법문에 끌어들여, 성불의 종자가 아닌 것을 성불의 종자인 양 꾸며 왔으므로 그 종파에서는 성불이 있을 수 없다고 강의는 말한다. 성불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법 지금의 성불의 종자는 수량품의 문 밑에 비밀로 잠겨 있다고 하신 그 비밀의 묘법, 곧 문저 하종의 본존이라는 것이 강의의 결론이다.
「관심의 본존초」의 「저것은 탈이요 이것은 종」은 제37장에서 본 일품이반의 두 배립과 정확히 대응한다. 재세의 본문(일품이반)은 탈이고, 말법의 처음(제목의 오자)은 종이다. 제39장의 「탈익의 삼덕」이 수량품 석존의 삼덕이라면, 제40 · 41장은 그것을 넘어 「하종의 아버지」와 「종자」를 가리킨다. 개목초의 논의는 이렇게 탈익에서 하종으로 넘어간다.
강의는 종 · 숙 · 탈을 화도의 처음과 끝으로 보고, 법화경만이 그것을 논하며 이전의 경에는 그 이름조차 없다고 한다. 그리고 참된 성불의 종자는 수량품의 문 밑에 잠긴 묘법이며, 말법의 성불의 종자는 문저 하종의 본존이라고 본다.
도용된 일념삼천 — 징관과 선무외
본문은 이어서 일념삼천이라는 종자가 어떻게 다른 종으로 옮겨졌는지를 보인다. 첫째는 화엄종의 징관이다. 징관은 천태의 일념삼천의 뜻을 훔쳐, 화엄경의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는 문의 정수로 삼았다. 어석에 따르면 화엄경에는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가 갖가지 오음을 그려 내는 것과 같아서, 일체 세계 가운데 법으로서 짓지 않는 것이 없다」는 문이 있다. 한마음이 모든 법을 지어낸다는 뜻이니, 얼핏 일념삼천과 비슷해 보인다. 징관은 『화엄경수소연의초』 권19에서 이 문을, 천태의 일념삼천이 설해지고서야 비로소 가능한 성악 · 성선의 법문으로 풀이했다. 징관이 묘락대사에게서 천태의 지관을 배운 사람이라는 이력이 여기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천태에게서 배운 것을 화엄경의 문에 넣어 화엄의 교리로 삼은 것이다.
둘째는 진언종의 선무외다. 대성인은 먼저 「진언 · 대일경 등에는 이승작불 · 구원실성 · 일념삼천의 법문이 없다」고 못 박으신다. 그런데 선무외삼장은 중국에 온 뒤 천태의 『마하지관』을 보고 지혜가 열려, 대일경의 「마음의 실상」, 「나는 일체의 본초」라는 문에 천태의 일념삼천을 몰래 넣어 진언종의 간심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위에 인과 진언을 꾸며 덧붙이고, 법화경과 대일경의 승렬을 판정할 때 「이(理)는 같고 사(事)는 뛰어나다」는 이동사승의 해석을 지었다. 이치로는 둘 다 일념삼천이어서 같지만, 인과 진언이라는 사상(事相)이 있는 진언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것을 「으뜸가는 속임」이라고 꾸짖으신다. 양계 만다라에 그려진 이승작불 · 십계호구가 정녕 대일경에 있느냐는 것이다. 이승작불과 십계호구는 법화경에만 있는 법문이다. 그런데 진언의 만다라에는 그것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법화경에서 가져온 것이다. 대성인은 「선무외삼장초」에서도 같은 판단을 보이신다.
大日経には本一念三千の深理なし此の理は法華経に限るべし善無畏三蔵天台大師の法華経の深理を読み出でさせ給いしを盗み取つて大日経に入れ法華経の荘厳として説かれて候大日経の印真言を彼の経の得分と思へり理も同じと申すは僻見なり真言印契を得分と思ふも邪見なり
대일경에는 본디 일념삼천의 깊은 이치가 없느니라. 이 이치는 법화경에 한하느니라. 선무외삼장이 천태대사가 법화경의 깊은 이치를 읽어 내신 것을 훔쳐 대일경에 넣고, 법화경의 장엄으로 설해진 대일경의 인과 진언을 저 경의 몫으로 여겼느니라. 이치도 같다고 하는 것은 편벽된 견해이고, 진언과 인계를 제 몫으로 여기는 것도 삿된 견해이니라
전교의 『의빙천태집』 — 필수의 상승과 영향의 규모
대성인은 이 도용의 증거로 전교대사의 말을 인용하신다. 「새로 온 진언가는 곧 필수의 상승을 없애고, 예전에 온 화엄가는 곧 영향의 규모를 감춘다.」 어석에 따르면 이 문은 전교대사의 『의빙천태집』에 나온다. 이 책의 이름 자체가 「천태에 의지하고 기댄(依憑) 문집」이라는 뜻으로, 여러 종의 조사들이 천태의 교학에 의지했다는 증거를 모은 책이다.
「필수의 상승」이란 당나라 진언종의 일행아사리가 선무외삼장의 강설을 받아 적은 진언의 상승을 말한다. 일행은 숭산의 보적에게 선을 배우고 여러 곳에서 율장과 경론을 연구했으며, 천태의 교의에도 밝았다고 한다. 선무외가 설하고 일행이 기록한 『대일경소』는 전적으로 천태종의 뜻으로 대일경을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진언, 곧 홍법의 동밀은 대일경을 배우는 데 이 『대일경소』를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로 삼으면서도, 천태법화를 대일 삼부의 경보다 못하다고 낮추었다. 『대일경소』의 근거가 천태의 뜻인데 그 천태를 낮추었으니, 이것은 선무외 · 일행의 상승 자체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이것이 「필수의 상승을 없앤다」는 뜻이다.
「영향의 규모」는 화엄종에 대한 비판이다. 화엄종 법장의 오교, 곧 소승교 · 대승시교 · 대승종교 · 대승돈교 · 대승원교는 천태의 오시, 곧 화엄시 · 아함시 · 방등시 · 반야시 · 법화열반시를 본보기로 삼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빙천태집』에는 「화엄종의 사문 혜원이 판정하기를, 법장 스님이 세운 뜻은 천태의 뜻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명한 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일본의 화엄종은 이를 감추고 천태종을 낮추었다. 「예전에 온 화엄가」라 한 것은 화엄종이 진언종보다 먼저 일본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어석은 「규모」라는 말이 오늘날의 「크기」라는 뜻 외에도 고어로서 본보기 · 모범, 명예 · 면목, 효과 · 성과, 근거 · 증거 등의 뜻을 가졌다고 설명한다. 여기서는 영향을 받아 본보기로 삼은 것, 곧 천태에게서 빌려 온 틀을 말한다.
「호노보노토」의 노래와 양서 화상의 증언
대성인은 이 도용을 일본의 노래에 비유하신다. 「희붐한 아카시 포구의 아침 안개 속에 섬 그늘로 숨어 가는 배를 생각하노라」는 『고킨와카슈』에 실리고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의 작품으로 전하는 명가다. 누구나 아는 이 노래를 변경의 섬에 건너가 「내가 지었다」고 말하면, 사정을 모르는 그곳 사람들은 그런가 하고 믿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천태의 일념삼천을 모르는 이들 앞에서 그것을 자기 종의 교리라고 내세우면, 사람들은 그대로 믿는다.
그리고 대성인은 천태종 안의 증언을 하나 더 드신다. 양서 화상의 말이다. 「진언 · 선문 · 화엄 · 삼론 내지 만약 법화 등에 견주면 이는 접인문이다.」 진언 · 선 · 화엄 · 삼론 등의 경은 한때 뛰어난 법문처럼 보여도 법화경에 견주면 중생을 이끌어 들이기 위해 임시로 설한 방편의 문이라는 것이다. 어석에 따르면 양서 화상은 천태대사로부터 제9대의 전법 제자로, 개원사에 머물렀으며, 뒤에 일본 천태종 제5대 좌주가 되는 지증(엔친)이 가쇼 4년(851)에 그 절을 찾았을 때 천태의 종지를 강술해 주었다. 지증은 일본 천태종에 진언을 깊이 끌어들인 인물로 대성인이 여러 어서에서 비판하시는데, 그 지증이 중국에서 직접 배운 스승이 진언을 「접인문」이라 판정했다는 점에 이 인용의 날카로움이 있다.
선무외의 염마의 책망
대성인은 선무외삼장이 염마의 책망을 받은 것이 바로 이 사견, 곧 이동사승의 판정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뒤에 마음을 돌려 법화경에 귀복했기에 그 책망을 벗어났다고 하신다.
이 일의 출전은 선무외 자신의 말을 일행이 기록한 『대일경소』 권5다. 어석이 전하는 그 내용은 이렇다. 선무외가 어렸을 때 중병으로 정신이 끊어져 명부에 가서 염마 법왕을 보았고, 풀려나 이곳으로 돌아왔는데, 깨어난 뒤에도 두 팔이 밧줄에 묶였던 자리에 상처 자국이 남아 있다가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서야 나았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선무외삼장초」에서 이 일을 자세히 논하셨다. 선무외는 갑자기 죽어 옥졸들에게 쇠사슬 일곱 가닥에 묶여 염마왕궁에 끌려갔다. 그가 익힌 진언을 외웠으나 책망은 더욱 심해졌고, 겨우 법화경의 제목을 염하자 목의 사슬이 느슨해졌으며, 이어 법화경 비유품의 「今此三界 皆是我有 其中衆生 悉是吾子 而今此処 多諸患難 唯我一人 能為救護(지금 이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요, 그 가운데 중생은 모두 나의 자식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환난이 많으니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능히 구호하노라)」의 문을 소리 높여 외우자 쇠사슬이 끊어져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대성인은 그가 책망을 받은 까닭을 두 가지 허물로 정리하셨다.
日蓮此の事を委く勘うるに二つの失有つて閻魔王の責に予り給へり一つには大日経は法華経に劣るのみに非ず涅槃経華厳経般若経等にも及ばざる経にて候を法華経に勝れたりとする謗法の失なり二つには大日如来は釈尊の分身なり而るを大日如来は教主釈尊に勝れたりと思ひし僻見なり
니치렌이 이 일을 자세히 헤아려 보건대, 두 가지 허물이 있어 염마왕의 책망을 받으셨느니라. 첫째는 대일경이 법화경에 못할 뿐 아니라 열반경 · 화엄경 · 반야경 등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인데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한 방법(謗法)의 허물이니라. 둘째는 대일여래는 석존의 분신인데 대일여래가 교주 석존보다 뛰어나다고 여긴 편벽된 견해이니라
이 둘째 허물은 제39 · 40장의 논의와 그대로 이어진다. 대일여래는 석존의 분신이다. 분신을 근본보다 높인 것은 아버지를 낮추고 종성 없는 자를 법왕으로 섬긴 것이다. 그리고 선무외를 구한 비유품의 문은, 어석이 말하듯 교주 석존이 스스로 사바세계 일체중생에게 주 · 사 · 친 삼덕을 갖춘 부처임을 선언한 문으로 유명하다. 「이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는 주덕, 「그 가운데 중생은 모두 나의 자식」은 친덕,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능히 구호한다」는 사덕이다. 그 문을 외운 것은 법화경과 석가불에 귀의함을 나타낸다. 선무외는 주사친을 모른 허물로 책망을 받고, 주사친을 선언한 문으로 풀려났다. 개목초 첫머리부터 이어 온 주사친의 주제가 여기서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비유품의 이 문을 주 · 사 · 친 삼덕의 선언으로 읽는 것은 니치렌 불법의 교학에서 이어져 온 해석이며, 개목초 끝의 「니치렌은 일본국의 모든 사람에게 주사부모이니라」라는 선언과도 이어진다.
제종 인사의 귀복 — 선무외 · 불공 · 홍법 · 가상 · 자은 · 징관
대성인은 제종의 조사들이 겉으로는 법화경을 낮추면서도 속으로는 법화경에 귀복했다는 자취를 하나하나 드신다.
먼저 진언이다. 선무외와 불공 등은 법화경을 양계 만다라의 중앙에 두어 대왕처럼 하고, 태장계의 대일경과 금강계의 금강정경을 좌우의 신하처럼 했다. 일본의 홍법도 교상, 곧 교리의 판정에서는 화엄종에 마음을 기울여 『십주심론』 등의 판정에서 화엄을 제9, 법화경을 제8에 두었다. 그러나 사상, 곧 실제의 수법 전수에서 제자인 실혜 · 진아 · 원징 · 광정 등에게 전할 때에는 양계의 중앙에 법화경을 두었다. 어석에 따르면 실혜는 도지의 초대 장자, 진아는 홍법의 아우로 도지의 장자가 된 인물이다. 원징은 전교대사의 제자로 엔랴쿠지 제2대 좌주가 되었으나 「보은초」에서 「또 홍법대사의 제자이니라」라고 하셨듯이 그때부터 천태종에 진언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광정은 전교대사의 뜻을 받아 대승계단 설립에 힘쓴 별당대사다. 천태종 승려에게까지 법화경을 중앙에 둔 수법을 전했다는 것은, 홍법 자신도 속으로는 법화경을 으뜸으로 알았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다음은 삼론의 가상(길장)이다. 그는 『법화현론』 10권에서 법화경을 반야경보다 못한 제4시에 넣고, 법화경은 이승을 모아 이승을 깨뜨릴 뿐 보살에 대해서는 모음도 깨뜨림도 없다(회이파이)고 했다. 그러나 뒤에 자기 주장의 잘못을 깨닫고 천태에게 귀복하여 칠 년 동안 섬겼으며, 자신의 강석을 폐하고 문도를 흩었고, 천태대사가 지나갈 때 자기 몸을 엎드려 다리로 삼아 건너게 했다고 전한다.
법상의 자은(규기)은 『대승법원의림장』 7권 가운데 제7권과 제12권에서 「일승은 방편이고 삼승이 진실」이라는 망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현찬』 제4에서는 「그러므로 또한 둘 다 둔다」고 하여 일승과 삼승을 모두 인정함으로써, 법상종의 근본 주장인 오성각별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대성인은 이것을 「말은 양쪽이지만 마음은 천태에게 귀복한 것」이라고 판정하신다.
화엄의 징관은 『화엄경소』를 지어 화엄과 법화를 견주며 법화를 방편이라 쓴 듯하지만, 「저 종(천태종)은 이것으로 실(實)을 삼으니 이 종의 입의와 이치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썼다. 대성인은 이것이 뉘우쳐 되돌린 것, 곧 천태종 비방을 그만둔 증거가 아니냐고 하신다. 그리고 「홍법도 또한 이와 같다」고 덧붙이신다.
- 선무외 · 불공법화경을 양계 만다라의 중앙에, 대일경 · 금강정경은 좌우의 신하처럼
- 홍법교상에서는 법화경을 제8사상에서는 실혜 · 진아 · 원징 · 광정에게 양계 중앙에 법화경을 두어 전함
- 가상(삼론)『법화현론』에서 제4시 · 회이파이천태에게 칠 년 섬김 · 강석을 폐하고 대중을 흩음 · 몸을 다리로 삼음
- 자은(법상)『법원림』에서 일승 방편 · 삼승 진실『현찬』 제4故亦両存그러므로 또한 둘 다 둔다
- 징관(화엄)『화엄경소』에서 법화를 방편이라 한 듯하나彼の宗之を以て実と為す저 종은 이것으로 실을 삼는다
대성인은 이 장을 「거울이 없으면 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적이 없으면 제 잘못을 알지 못한다」는 말로 맺으신다. 진언 등 제종의 학자들은 자기 잘못을 몰랐으나 전교대사를 만나 자기 종의 허물을 알게 되었다. 전교대사가 바로 그들의 거울이며 적이었다는 것이다. 제종의 허물을 비추는 이가 있어야 그 허물이 드러난다는 이 말은, 하권 후반에서 제종의 그릇됨을 가리고(제53장) 법화경의 행자를 드러내는(제54장) 논의와도 통한다.
문저에 잠긴 위없는 종자
제41장의 논의를 처음으로 되돌려 정리하면 이렇다. 성불에는 종자가 있어야 한다. 그 종자는 법화경의 일념삼천이며, 천친은 이를 종자무상이라 했고 천태 한 분만이 이 법문을 얻었다. 다른 종은 이 종자를 자기 경에 몰래 옮겨 심었으나, 경 자체에는 그 종자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종자를 모르는 탈, 혈통 없는 왕위에 머문다. 그리고 그 조사들조차 끝내 법화경에 귀복했다.
강의가 「참된 위없는 종자는 수량품의 문 밑에 비밀로 잠겨 있다」고 할 때, 그 종자는 천태가 이론으로 밝힌 일념삼천을 넘어 수량품 문저에 잠긴 묘법, 곧 남묘호렌게쿄를 가리킨다. 「아키모토어서」의 「삼세시방의 부처는 반드시 묘법연화경의 오자를 종자로 삼아 부처가 되셨다」는 말이 그것이다. 제36장에서 본 『어의구전』의 「이 본법의 체에서 용을 내어 지관이라 넓히고 일념삼천이라 한다」는 말도 같은 구조다. 천태의 지관과 일념삼천은 본법(남묘호렌게쿄)의 「용」이며, 그 「체」는 지용의 보살이 지닌 제목이다. 장 제목 「종자의 덕용 · 종자의 의경」은 성불의 종자가 지닌 힘(덕용)과 그 종자가 설해진 경(의경)을 가린다는 뜻이며, 강의는 그 논의가 마침내 말법의 하종을 가리킨다고 읽는다.
강의는 법화경의 일념삼천만이 성불의 종자이며, 화엄 · 진언은 그 이치를 자기 법문에 끌어들였을 뿐 성불의 종자를 갖지 못했다고 본다. 그리고 말법의 성불의 종자는 수량품 문저에 잠긴 비밀의 묘법, 곧 문저 하종의 본존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편을 맺으며
하권 첫머리의 일곱 장은 하나의 물음에서 출발했다. 보살과 제천이 법화경에서 받은 은혜는 얼마나 깊은가. 대성인은 그 깊이를 재기 위해 법화경의 장면을 차례로 펼치셨다. 보탑품에서 보살들은 칙명에 따라 석존의 제자가 되었고(제35장), 분신의 내집은 석존이 처음 성불한 부처가 아님을 예고하는 수량품의 먼 서였다. 종지용출품에서 지용의 대보살이 솟아나 보처의 미륵조차 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고(제36장), 석존이 「구원 이래 이들을 교화했다」고 답하자 회중의 의문은 일대 제일의 의문으로 커졌다(제37장). 수량품의 「아실성불이래」는 그 의문을 풀며, 이전과 적문의 시성정각을 한마디로 깨뜨렸다(제38장). 그 결과 제불은 석존의 분신이 되고, 이 국토는 본토가 되며, 모든 보살과 제천은 구원의 제자가 되었다(제39장). 이것이 수량품 석존의 탈익의 삼덕이다.
그러나 대성인은 탈익의 삼덕에서 멈추지 않으셨다. 수량품을 모르는 제종은 모두 본존에 미혹하여 아버지를 모르는 자식과 같고(제40장), 진언 · 화엄의 경에는 종 · 숙 · 탈의 이름조차 없다. 성불의 종자는 법화경의 일념삼천뿐이며, 제종은 그것을 몰래 가져다 썼고 그 조사들도 끝내 법화경에 귀복했다(제41장). 강의는 니치칸 상인의 해석에 따라, 이 논의가 수량품 문저에 잠긴 하종의 묘법과 그것을 지닌 말법의 주사친을 가리킨다고 읽는다. 「관심의 본존초」의 말로 하면 「저것은 탈이요 이것은 종」이다.
이렇게 하여 은혜의 깊이는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물음은 더 날카로워진다. 이토록 깊은 은혜를 입은 보살과 제천이 왜 법화경의 행자를 지키지 않는가. 다음 편(제42~48장)은 이 의문을 맺으면서 보탑품의 세 가지 칙선과 제바품의 두 가지 간효를 인용하여, 법화경을 넓히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일대의 경 가운데 무엇이 참된 성불의 경인지를 다시 가린다.
더 읽기
- 불교 교학 四 · 구원실성 — 수량품의 오백진점겁과 본인 · 본과 · 본국토
- 불교 교학 五 · 일념삼천 — 일념삼천의 구조와 이 · 사의 구별
- 관심의 본존초 · 본문의 서 · 정 · 유통 — 일품이반과 오중삼단, 「저것은 탈이요 이것은 종」
- 관심의 본존초 · 본화 출현의 시절과 총결 — 지용 보살이 말법에 출현하는 때
- 개목초 제3편 · 본적상대 — 구원실성과 이전 · 적문의 두 허물 — 이 편이 다시 펼치는 본적상대의 원래 자리
- 인물탐구 · 천태대사 — 일념삼천을 홀로 얻은 이
참고 문헌
원전
- 『묘법연화경』 견보탑품 제11 · 제바달다품 제12 · 권지품 제13 · 안락행품 제14 · 종지용출품 제15 · 여래수량품 제16 · 여래신력품 제21, T9 no.262
- 『무량의경』, T9 no.276 / 『관보현보살행법경』, T9 no.277
- 『관무량수경』, T12 no.365 / 『대반열반경』, T12 no.374
- 『화엄경』(60권), T9 no.278 / 『유마경』(유마힐소설경), T14 no.475 / 『대품반야경』, T8 no.223 / 『대일경』, T18 no.848
- 천친 『묘법연화경우바제사』(법화론)
- 천태대사 『법화문구』, T34 no.1718 / 묘락대사 『법화문구기』, T34 no.1719 / 『법화현의석첨』, T33 no.1717
- 도섬 『법화문구보정기』
- 전교대사 『법화수구』 · 『의빙천태집』
- 선무외 설 · 일행 기 『대일경소』
- 니치렌 대성인 「개목초」 · 「관심의 본존초」 · 「법화취요초」 · 「선무외삼장초」 · 「신니부인답서」 · 「사도어서」 · 「전중경수법문」 · 「아키모토어서」 · 「생사일대사혈맥초」 · 『어의구전』 · 「본인묘초」 (창가학회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연구
- 창가교학연구실, 「0186~0237 開目抄」 제35~41장 강의 (니치칸 상인 「개목초 문단」에 의거)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