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목초 하권의 마지막 다섯 장은 이 긴 글의 결론부다. 앞 편에서 대성인은 권지품의 삼류 강적이 눈앞에 나타났음을 들어 말법의 법화경 행자가 당신 한 분임을 증명하고, 「천도 버리라, 제난도 만나라, 신명을 걸겠노라」는 서원으로 그 증명을 맺으셨다. 그러나 「법화경의 행자라면 왜 제천의 가호가 없고 유죄 · 사죄를 당하는가」라는 개목초 전체의 물음은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 이 편은 그 물음에 세 갈래로 답한다. 첫째, 행자의 난은 과거 세상의 중죄를 지금 가볍게 받아 끝내는 전중경수(転重軽受)의 증거이다. 둘째, 의심하지 않는 신심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불계에 이르는 불구자득(不求自得)의 이익을 연다. 셋째, 다른 종파를 책망하는 것은 다투는 마음이 아니라 때에 맞는 홍교, 곧 절복(折伏)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대성인은 「일본국 제인의 주사친」임을 선언하여, 첫머리의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은 주 · 사 · 친」이라는 표시를 스스로 완결하신다.
개목초는 「표(標) · 석(釈) · 결(結)」의 세 단으로 짜여 있다. 첫머리 한 줄이 주사친 삼덕과 유 · 외 · 내 세 가르침을 표시하는 「표」이고, 그 뒤 유교 · 외도 · 불교의 삼덕을 차례로 판정해 들어가 오중상대로 문저의 일념삼천에 이르고, 다시 대성인이 말법의 법화경 행자임을 경문과 대난으로 증명하는 긴 본론이 「석」이다. 이 편의 제57~60장은 그 「석」의 마지막 부분으로, 행자가 난을 만나는 까닭과 그 난을 견디는 신심, 그리고 난을 부르는 홍교 방식의 정당성을 밝힌다. 제61장은 「결」, 곧 결권(結勧)이다.
이 다섯 장은 교리의 정점이라기보다 실천의 정점이다. 앞의 여러 편이 경문의 승렬과 교판을 다루었다면, 여기서 대성인은 눈 덮인 삼매당에서 흩어진 문하에게 직접 말을 거신다. 「나와 나의 제자는 제난이 있더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는 구절이 바로 이 편에 있다. 다쓰노쿠치 법난과 사도 유배를 거치며 가마쿠라의 문하 가운데 많은 이가 퇴전했고, 남은 이들도 「스승이 정말 법화경의 행자라면 왜 하늘이 지켜 주지 않는가」라는 의심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편은 그 의심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며, 동시에 「약속한 일을 진실한 때에 잊지 말라」는 당부다.
교학적으로도 이 편에는 무게 있는 쟁점이 모여 있다. 숙업과 숙명전환의 관계, 인업(引業)과 성불의 인(因), 「일념삼천의 구슬」을 품은 유일한 경, 섭수와 절복의 원리와 그 판정 기준(니치칸 상인의 「다섯 가지 뜻」),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은 그의 원수」라는 절복의 자비관, 그리고 「때에 맞을 따름(適時而已)」이라는 천태의 말로 압축되는 홍교의 시간론이다. 강의는 이 모든 것을 「인본존 개현」이라는 개목초의 대의로 모아 들인다.
이 편의 장
본문
疑つて云くいかにとして汝が流罪・死罪等を過去の宿習としらむ、 答えて云く銅鏡は色形を顕わす秦王・験偽の鏡は現在の罪を顕わす仏法の鏡は過去の業因を現ず、 般泥洹経に云く「善男子過去に曾て無量の諸罪種種の悪業を作るに是の諸の罪報は或は軽易せられ・或は形状醜陋・衣服足らず・飲食麤疎・財を求むるに利あらず・貧賤の家邪見の家に生れ・或は王難に遭い・及び余の種種の人間の苦報あらん現世に軽く受るは斯れ護法の功徳力に由るが故なり」云云、 此の経文・日蓮が身に宛も符契のごとし狐疑の氷とけぬ千万の難も由なし一一の句を我が身にあわせん、 或被軽易等云云、法華経に云く「軽賤憎嫉」等云云・二十余年が間の軽慢せらる、 或は形状醜陋・又云く衣服不足は予が身なり飲食麤疎は予が身なり求財不利は予が身なり生貧賤家は予が身なり、 或遭王難等・此の経文人疑うべしや、 法華経に云く「数数擯出せられん」此の経文に云く「種種」等云云、 斯由護法功徳力故等とは摩訶止観の第五に云く「散善微弱なるは動ぜしむること能わず今止観を修して健病虧ざれば生死の輪を動ず」等云云、 又云く「三障四魔紛然として競い起る」等云云 我れ無始よりこのかた悪王と生れて法華経の行者の衣食・田畠等を奪いとりせしこと・かずしらず、 当世・日本国の諸人の法華経の山寺をたうすがごとし、 又法華経の行者の頸を刎こと其の数をしらず此等の重罪はたせるもあり・いまだ・はたさざるも・あるらん、 果すも余残いまだ・つきず生死を離るる時は必ず此の重罪をけしはてて出離すべし、 功徳は浅軽なり此等の罪は深重なり、 権経を行ぜしには此の重罪いまだ・をこらず鉄を熱にいたう・きたわざればきず隠れてみえず、 度度せむれば・きずあらはる、麻子を・しぼるに・つよくせめざれば油少きがごとし、 今ま日蓮・強盛に国土の謗法を責むれば此の大難の来るは過去の重罪の今生の護法に招き出だせるなるべし、 鉄は火に値わざれば黒し火と合いぬれば赤し木をもつて急流をかけば波山のごとし睡れる師子に手をつくれば大に吼ゆ。
의심하여 이르되, 어떻게 하여 그대의 유죄 · 사죄 등을 과거의 숙습(宿習)이라고 알겠는가. 답하여 이르되, 구리 거울은 빛깔과 모양을 드러내고, 진왕(秦王)의 험위(験偽)의 거울은 현재의 죄를 드러내며, 불법의 거울은 과거의 업인(業因)을 나타내느니라. 반니원경(般泥洹経)에 이르되 「선남자여, 과거에 일찍이 한량없는 모든 죄와 갖가지 악업을 지으면, 이 모든 죄보로 혹은 업신여김을 당하고, 혹은 형상이 추하고, 의복이 넉넉지 못하고, 음식이 거칠고, 재물을 구하여도 이익이 없고, 빈천한 집과 사견(邪見)의 집에 태어나며, 혹은 왕난(王難)을 만나고, 그 밖의 갖가지 인간의 고보(苦報)가 있으리라. 이를 현세에 가볍게 받는 것은 이것이 호법(護法)의 공덕력에 말미암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였느니라. 이 경문은 니치렌의 몸에 마치 부절(符節)을 맞춘 것과 같으니, 여우 같은 의심의 얼음이 풀렸느니라. 천만 가지 난도 까닭 없는 것이 아니니, 한 구 한 구를 내 몸에 맞추어 보리라. 「혹은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것은, 법화경에 「가벼이 여기고 천히 여기며 미워하고 시기한다(軽賤憎嫉)」고 하였듯이 이십여 년 동안 업신여김을 당하였느니라. 「혹은 형상이 추하다」, 또 「의복이 넉넉지 못하다」는 내 몸이니라. 「음식이 거칠다」는 내 몸이니라. 「재물을 구하여도 이익이 없다」는 내 몸이니라. 「빈천한 집에 태어난다」는 내 몸이니라. 「혹은 왕난을 만난다」 등의 이 경문을 사람이 의심할 수 있겠는가. 법화경에 「자주자주 쫓겨나리라(数数擯出)」고 하였고, 이 경문에는 「갖가지(種種)」라고 하였느니라. 「이것이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다」 함은, 마하지관 제5에 이르되 「산란한 마음으로 짓는 미약한 선(散善)으로는 (생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제 지관을 닦아 건(健)과 병(病)을 빠뜨리지 않으면 생사의 바퀴를 움직이느니라」고 하였고, 또 이르되 「삼장사마(三障四魔)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고 하였느니라. 나는 무시(無始) 이래로 악왕으로 태어나 법화경 행자의 의식(衣食)과 전답 등을 빼앗은 일이 헤아릴 수 없느니라. 지금 세상 일본국의 사람들이 법화경의 산사(山寺)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으니라. 또 법화경 행자의 목을 벤 일도 그 수를 알 수 없으니, 이러한 중죄는 이미 다 갚은 것도 있고 아직 갚지 못한 것도 있으리라. 갚았다 하여도 남은 것(余残)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생사를 떠날 때는 반드시 이 중죄를 다 지워 버리고서 벗어나야 하느니라. 공덕은 얕고 가벼우며, 이러한 죄는 깊고 무거우니라. 권경(権経)을 행하였을 때에는 이 중죄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니라. 쇠를 불에 달구어 세게 단련하지 않으면 흠이 숨어서 보이지 않다가, 여러 번 단련하면 흠이 드러나느니라. 삼씨를 짤 때 세게 짜지 않으면 기름이 적은 것과 같으니라. 이제 니치렌이 강성하게 국토의 방법(謗法)을 책망하니, 이 대난이 오는 것은 과거의 중죄를 금생의 호법(護法)이 불러낸 것이리라. 쇠는 불을 만나지 않으면 검고 불과 합하면 붉어지며, 나무로 급류를 휘저으면 물결이 산과 같이 일고, 잠든 사자에게 손을 대면 크게 포효하느니라.
어구 풀이
- 宿習숙습
- 과거 세상에서 거듭 지어 몸에 밴 업(業)과 그 습기(習気). 여기서는 대성인이 받는 유죄 · 사죄를 과거 세상의 업인이 지금 나타난 것으로 보는 말로, 질문자는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고 그 인식의 근거를 묻는다.
- 秦王・験偽の鏡진왕 · 험위의 거울
- 진시황이 가졌다고 전하는 거울. 『서경잡기(西京雑記)』에 진시황에게 네모난 거울이 있어 사람의 심장과 쓸개까지 비추었고, 여인 가운데 사악한 마음을 품은 이가 이 거울에 비치면 쓸개가 떨리고 심장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마음속을 밝혀낸다 하여 「조심경(照心鏡)」이라고도 부른다. 구리 거울이 겉모습을, 험위의 거울이 현재의 죄를 비춘다면, 불법의 거울은 그보다 깊이 과거 세상의 업인까지 비춘다는 대비의 둘째 단이다.
- 仏法の鏡불법의 거울
- 경문이 곧 거울이라는 뜻. 대성인은 대반니원경의 경문을 거울로 삼아 당신의 현재 처지에서 과거의 업인을 읽어 내신다. 제49장에서 권지품을 「명경(明鏡)의 경문」이라 하신 것과 같은 발상이다.
- 般泥洹経반니원경
- 동진(東晋)의 법현(法顕)이 번역한 6권본 『대반니원경』(T12 no.376). 대승 열반경 앞부분의 이역(異訳)에 해당한다. 개목초는 제49장에서도 「6권의 반니원경」을 인용했다. 여기 인용된 문은 과거의 죄업이 금생에 여러 가지 고보로 나타나되, 그것을 현세에 가볍게 받는 것은 호법 공덕의 힘이라는 「전중경수」의 근거가 된다.
- 符契부계
- 둘로 쪼개어 나눠 가졌다가 맞추어 보는 증표(부절). 경문과 대성인의 몸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들어맞음을 말한다.
- 軽賤憎嫉경천증질
- 법화경 비유품의 문. 이 경을 지니는 이를 사람들이 가벼이 여기고 천히 여기며 미워하고 시기한다는 뜻. 대성인은 입종(建長 5년, 1253) 이래 「이십여 년」의 박해를 이 문에 맞추신다.
- 数数擯出삭삭빈출
- 법화경 권지품 이십행게의 문 「자주자주 쫓겨나리라」. 대성인은 이즈 유죄와 사도 유죄, 두 번의 유죄로 이 경문을 몸으로 읽으셨다. 여기서는 권지품의 「자주자주」와 반니원경의 「갖가지(種種)」를 나란히 놓아, 두 경이 같은 사태를 예언했음을 보이신다.
- 健病虧ざれば건병이 빠지지 않으면
- 마하지관 권5의 문. 지관의 관법 대상인 열 가지 경계(十境) 가운데 첫째 음입계경(陰入界境)과 둘째 번뇌경(煩悩境)은 몸과 마음의 본체를 관하므로 「건(健)」이라 하고, 셋째 병환경(病患境)을 「병(病)」이라 한다. 이 셋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관하면 번뇌에 미혹한 육도윤회의 「생사의 바퀴」를 움직여 숙명을 타파할 수 있다는 뜻이다.
- 散善산선
- 산란한 마음 그대로 짓는 선. 마음을 한 곳에 모은 정선(定善)에 대비된다. 산선은 미약하여 숙업의 무거운 바퀴를 움직이지 못한다.
- 三障四魔삼장사마
- 불도 수행을 막고 선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장애와 네 가지 마. 삼장은 ①번뇌장(탐 · 진 · 치 등의 미혹에서 일어나는 장애) ②업장(오역 · 십악 등의 업에 의한 장애, 또는 처자 등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장애) ③보장(방법 · 일천제로 받는 삼악도의 과보가 불도의 장애가 되는 것, 또는 국왕 · 부모 · 권력자로부터의 장애). 사마는 ①번뇌마(탐 · 진 · 치의 미혹이 마가 됨) ②음마(중생은 오음이 임시로 화합한 것이어서 늘 고뇌 속에 있으므로 오음을 마로 봄) ③사마(죽음이 목숨을 끊으므로 마라 함) ④천자마(타화자재천자마의 줄임말. 타화자재천왕이 사람의 선행을 해치는 것. 권력자에 의한 박해가 이에 해당함).
- 余残여잔
- 갚고 남은 나머지. 중죄를 일부 갚았어도 그 남은 기운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생사를 떠날 때」 곧 성불할 때에는 반드시 다 지워야 한다.
- 出離출리
- 생사의 고뇌, 곧 육도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여기서는 성불을 뜻한다.
- 麻子마자
- 삼씨(참깨나 들깨 따위 기름을 짜는 씨앗). 세게 짜야 기름이 많이 나온다는 비유로, 강하게 책망할수록 과거의 업이 남김없이 드러남을 말한다.
세 가지 거울 — 숙업을 아는 근거
제57장은 짧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어떻게 그대의 유죄 · 사죄를 과거의 숙습이라 알겠는가.」 앞의 제55~56장에서 대성인은 법화경 행자가 현세에 안온하지 못한 까닭을 여러 갈래로 들고, 「천도 버리라, 제난도 만나라」는 서원으로 그 논의를 일단 맺으셨다. 제55장에서 대성인은 행자가 난을 만나는 까닭을 세 가지로 드셨다. 첫째 행자에게 과거 세상의 법화경 비방의 죄가 있는가, 둘째 비방하는 자가 지옥에 떨어질 것이 정해져 있을 때에는 현벌이 없다, 셋째 제천이 국토를 버리고 떠났기에 현벌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장은 그 첫째 갈래를 깊이 파고든다. 질문자의 물음은 날카롭다. 「과거의 업 때문이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과거를 무엇으로 증명하느냐는 것이다.
대성인은 세 가지 거울로 답하신다. 구리 거울은 사물의 빛깔과 모양, 곧 바깥 모습만 비춘다. 진시황의 험위의 거울은 그보다 깊어, 사람 마음속의 사악함, 곧 현재의 죄를 비춘다. 그러나 불법의 거울은 다시 그보다 깊어 과거 세상의 업인을 비춘다. 이 세 단의 대비는 개목초 첫머리에서 유교 · 외도 · 불교를 차례로 판정할 때 쓰인 논법, 곧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종천지심(従浅至深)」의 구조를 그대로 닮았다. 유교가 현세를, 외도가 과거와 미래를 어렴풋이 말하되 인과를 바로 알지 못했다면, 불법은 삼세의 인과를 밝힌다는 것이 상권의 논지였다. 여기서도 같은 위계가 거울의 비유로 반복된다.
불법의 거울이란 구체적으로 경문이다. 대성인은 대반니원경의 문을 들어, 과거의 죄업이 금생에 나타나는 모습을 여덟 가지로 열거하신다. 업신여김을 당함, 형상이 추함, 의복이 넉넉지 못함, 음식이 거침, 재물을 구해도 이익이 없음, 빈천한 집에 태어남, 사견의 집에 태어남, 왕난을 만남. 그리고 경은 「이를 현세에 가볍게 받는 것은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다」고 맺는다. 강의는 이 여덟 가지를 「팔난(八難)」이라 부르면서, 모양이 추함 · 먹을 것이 없음 · 옷이 모자람 · 가난함 같은 난은 모두 우리가 날마다 몸으로 겪는 괴로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경전 속의 추상적인 목록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이다.
- ①或は軽易せられ혹은 업신여김을 당한다대성인의 몸軽賤憎嫉가벼이 여기고 천히 여기며 미워하고 시기한다(법화경 비유품) · 이십여 년 동안 업신여김을 당함
- ②形状醜陋형상이 추하다대성인의 몸予が身なり내 몸이니라
- ③衣服足らず의복이 넉넉지 못하다대성인의 몸衣服不足は予が身なり「의복이 넉넉지 못하다」는 내 몸이니라
- ④飲食麤疎음식이 거칠다대성인의 몸飲食麤疎は予が身なり「음식이 거칠다」는 내 몸이니라
- ⑤財を求むるに利あらず재물을 구해도 이익이 없다대성인의 몸求財不利は予が身なり「재물을 구하여도 이익이 없다」는 내 몸이니라
- ⑥貧賤の家빈천한 집대성인의 몸生貧賤家は予が身なり「빈천한 집에 태어난다」는 내 몸이니라
- ⑦邪見の家に生れ사견의 집에 태어난다대성인의 몸正法の家をそしれば邪見の家に生ず정법의 집을 헐뜯으면 사견의 집에 태어난다(사도어서)
- ⑧或は王難に遭い혹은 왕난을 만난다대성인의 몸数数擯出せられん자주자주 쫓겨나리라(권지품) · 이즈 · 사도 두 번의 유죄
「내 몸이니라」 — 경문을 몸으로 읽다
대성인은 이 경문이 「니치렌의 몸에 마치 부절을 맞춘 것과 같다」고 하시고, 「여우 같은 의심의 얼음이 풀렸다(狐疑の氷とけぬ)」고 말씀하신다. 의심이 풀린 것은 질문자만이 아니라 대성인 자신이기도 하다는 어감이 담겨 있다. 「천만 가지 난도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다(千万の難も由なし)」 — 난에는 까닭이 있고, 그 까닭이 경문에 이미 적혀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대성인은 경문의 구절 하나하나를 당신의 몸에 맞추어 가신다.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비유품의 「경천증질」과 겹쳐 이십여 년의 박해가 되고, 「의복이 넉넉지 못하다」 「음식이 거칠다」 「재물을 구해도 이익이 없다」 「빈천한 집에 태어났다」에는 모두 「내 몸이니라(予が身なり)」라는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 강의는 이 대목에서 대성인이 「확신을 가지고 현실로 보이셨다」고 평한다. 같은 구절을 반복하는 문체 자체가 경문과 몸의 일치를 하나씩 확인해 나가는 행위다.
이 「내 몸이니라」의 반복은 개목초 전체를 꿰는 「신독(身読)」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제27장에서 대성인은 권지품 이십행게의 경문 하나하나가 당신의 몸에 부합함을 밝히셨고, 제49~54장에서는 삼류의 강적이 눈앞에 나타났음으로 행자임을 증명하셨다. 그 증명은 모두 「경문이 예언한 박해를 몸으로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여기서는 방향이 바뀌어, 박해를 받는 그 처지가 과거의 업인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경문은 앞을 내다보는 예언이자 뒤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특히 「왕난을 만난다」에 대해서는 「이 경문을 사람이 의심할 수 있겠는가(此の経文人疑うべしや)」라고 반문하신다. 다쓰노쿠치에서 목이 베일 뻔하고 지금 사도에 유배된 몸에게 왕난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권지품의 「자주자주 쫓겨나리라(数数擯出)」와 반니원경의 「갖가지(種種)」를 나란히 놓으신다. 한 경은 「자주자주」라 하고 한 경은 「갖가지」라 하여, 거듭되는 박해와 여러 형태의 박해를 각각 예언했다는 것이다.
사도에서 이듬해(문영 9년 3월) 쓰신 「사도어서」는 이 장의 내용을 더 자세히 풀어 쓰셨다. 거기서 대성인은 반니원경의 여덟 가지를 다시 들면서, 그것들이 각각 어떤 원인에서 생기는지를 밝히신다. 예컨대 「정법의 집을 헐뜯으면 사견의 집에 태어난다」는 식으로, 보통은 이것이 「늘 정해진 인과의 법」이라 하신 다음, 당신은 그 일반 인과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日蓮は此因果にはあらず法華経の行者を過去に軽易せし故に法華経は月と月とを並べ星と星とをつらね華山に華山をかさね玉と玉とをつらねたるが如くなる御経を或は上げ或は下て嘲弄せし故に此八種の大難に値るなり、此八種は尽未来際が間一づつこそ現ずべかりしを日蓮つよく法華経の敵を責るによて一時に聚り起せるなり
니치렌은 이 인과가 아니니라. 법화경의 행자를 과거에 업신여긴 까닭에, 그리고 달과 달을 나란히 하고 별과 별을 잇고 화산(華山)에 화산을 겹치고 구슬과 구슬을 꿴 것과 같은 법화경을 혹은 치켜올리고 혹은 깎아내려 조롱한 까닭에 이 여덟 가지 대난을 만나는 것이니라. 이 여덟 가지는 미래가 다할 때까지 하나씩 나타나야 했던 것을, 니치렌이 강하게 법화경의 적을 책망하였으므로 한꺼번에 모여 일어난 것이니라
강의는 바로 이 「사도어서」의 문을 들어 제57장을 푼다. 여덟 가지 고보는 본래 미래 영겁에 걸쳐 하나씩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법화경의 적을 강하게 책망했기 때문에 그것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바꾸어 말하면, 한꺼번에 일어났기에 금생에 끝낼 수 있다. 이것이 「무거운 것을 바꾸어 가볍게 받는다」는 전중경수의 뜻이다.
호법의 공덕력과 삼장사마
경문의 끝 구절 「이것이 호법의 공덕력에 말미암는다(斯由護法功徳力故)」를 대성인은 마하지관 권5의 두 문으로 푸신다.
첫째 문은 「산란한 마음으로 짓는 미약한 선으로는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제 지관을 닦아 건과 병을 빠뜨리지 않으면 생사의 바퀴를 움직인다」이다. 천태대사는 마하지관에서 관법의 대상을 열 가지 경계(十境)로 세우는데, 첫째가 음입계경(오음 · 십이입 · 십팔계, 곧 지금의 몸과 마음), 둘째가 번뇌경, 셋째가 병환경이다. 어석에 따르면 앞의 둘은 몸과 마음의 본체를 관하므로 「건」, 병환경은 「병」이라 한다. 이 경계들을 빠짐없이 관하면 육도윤회의 바퀴, 곧 숙명의 회전을 움직일 수 있다. 산란한 마음의 작은 선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숙업의 바퀴가 바른 수행의 강한 힘을 만나야 비로소 움직인다는 것이다. 대성인이 이 문을 「호법의 공덕력」의 풀이로 드신 것은, 금생에 숙업을 끝내는 힘이 막연한 선행이 아니라 정법을 지키는 강한 실천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둘째 문은 「삼장사마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이다. 마하지관의 원문은 「수행과 이해가 이미 부지런해지면(行解既に勤めぬれば)」이라는 조건을 앞에 두고 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그것을 막는 장애와 마가 다투어 일어난다. 강의가 현대어역에서 덧붙이듯, 천태대사는 이어서 「이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도 안 된다」고 경계한다. 대성인은 이 문을 「형제초」에서 이케가미 형제에게 다시 보내셨다.
行解既に勤めぬれば三障四魔紛然として競い起る乃至随う可らず畏る可らず之に随えば将に人をして悪道に向わしむ之を畏れば正法を修することを妨ぐ」等云云、此の釈は日蓮が身に当るのみならず門家の明鏡なり謹んで習い伝えて未来の資糧とせよ
「수행과 이해가 이미 부지런해지면 삼장사마가 어지러이 다투어 일어난다. 내지 따라서도 안 되고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이를 따르면 사람을 악도로 향하게 하고, 이를 두려워하면 정법을 닦는 것을 방해한다」 하였느니라. 이 해석은 니치렌의 몸에 해당할 뿐 아니라 문하의 맑은 거울이니, 삼가 익히고 전하여 미래의 양식으로 삼으라
「종종어진무어서」에서는 같은 마하지관 문을 들고 그 뜻을 풀어, 법화경을 가르침대로 기근과 때에 맞게 수행하면 일곱 가지 대사(삼장 · 사마)가 일어나며, 그 가운데 천자마는 제육천의 마왕이 국주 · 부모 · 처자 · 단나 · 악인 등에 붙어 법화경의 수행을 막는 것이라 하셨다(916~917쪽). 어석이 천자마를 「권력자에 의한 박해」로 설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장사마가 「다투어 일어난다」는 것은 수행이 바른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다. 이렇게 보면 대성인에게 닥친 대난은 호법의 공덕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그 힘이 무거운 업을 가볍게 바꾸어 받게 한다.
무시 이래의 중죄 — 공덕은 얕고 죄는 깊다
이어서 대성인은 놀라운 고백을 하신다. 「나는 무시 이래로 악왕으로 태어나 법화경 행자의 의식과 전답을 빼앗은 일이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세상 일본국 사람들이 법화경의 산사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지금 눈앞에서 사람들이 법화경을 받드는 산사를 허무는 모습을 거울로 삼아, 과거 세상의 당신을 비추어 보신 것이다. 또 「법화경 행자의 목을 벤 일도 그 수를 알 수 없다」고 하신다. 지금 당신의 목을 베려 한 막부의 모습이 곧 과거 세상의 당신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중죄 가운데는 이미 갚은 것도 있고 아직 갚지 못한 것도 있으며, 갚았다 해도 「남은 것(余残)」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사를 떠날 때는 반드시 이 중죄를 다 지워 버리고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신다. 성불이란 과거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지워야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엄격한 원리다. 「공덕은 얕고 가벼우며 이러한 죄는 깊고 무겁다(功徳は浅軽なり此等の罪は深重なり)」는 한 구절이 그 엄격함을 압축한다.
강의는 이 대목을 우리 자신의 문제로 끌어당긴다. 무시 이래 악왕으로 태어나 행자의 옷과 밭을 빼앗고 행자의 목을 베었다고 하면 누구나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지금 괴로움 많은 자신의 생활은 모두 그 나타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덕은 얕고 죄는 깊다」는 자각을 늘 지니고, 금생에 어떤 대난과 박해를 만나더라도 참된 불법을 구하여 굳게 믿고, 반드시 이 죄를 금생에 다 지우고 금생에 성불의 확증을 붙잡고 죽어야 한다고 강의는 맺는다.
서강에서 강의는 이 대목의 의미에 한 가지 단서를 붙인다. 대성인이 당신에게 과거 세상의 방법이 있다고 하신 것은 「범부와 같음을 보이신(示同凡夫)」 측면에서 하신 말씀이며, 또 중생이 모두 방법의 사람뿐인 이때에 출현하는 부처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대성인이 몸소 숙업을 짊어진 범부의 자리에 서서 전중경수를 보이셨기에, 그 길이 그대로 같은 범부인 문하의 길이 된다.
권경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난 — 쇠 · 삼씨 · 급류 · 사자의 비유
「권경을 행하였을 때에는 이 중죄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 짧은 문장은 중요하다. 대성인은 출가 후 여러 해 동안 염불과 여러 종파를 배우셨다. 그때에는 이런 대난이 없었다. 권경의 수행은 숙업을 건드리지 못하므로 업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따라서 지워지지도 않는다. 현대어역이 풀이하듯 「권경의 수행으로는 이 중죄의 갚음을 현세에 지울 수 없으므로 대난을 받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난이 없다는 것은 안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숙업이 숨어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를 대성인은 네 가지 비유로 보이신다.
첫째, 쇠의 비유다. 쇠를 불에 달구어 세게 단련하지 않으면 그 속의 흠이 숨어서 보이지 않지만, 여러 번 단련하면 흠이 드러난다. 둘째, 삼씨의 비유다. 삼씨를 짤 때 세게 짜지 않으면 기름이 적게 나온다. 두 비유는 모두 「강하게 할수록 숨은 것이 드러난다」는 한 가지를 말한다. 그리고 결론이 온다. 「이제 니치렌이 강성하게 국토의 방법을 책망하니 이 대난이 오는 것은 과거의 중죄를 금생의 호법이 불러낸 것이리라.」 금생의 호법이 과거의 중죄를 「불러낸다(招き出だせる)」는 표현이 이 장의 핵심이다. 난은 바깥에서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강한 호법의 실천이 생명 깊은 곳에서 끌어낸 것이다.
마지막 세 비유는 그 끌어냄의 모습이다. 쇠는 불을 만나지 않으면 검지만 불과 합하면 붉어진다. 나무로 급류를 휘저으면 물결이 산과 같이 인다. 잠든 사자에게 손을 대면 크게 포효한다. 조용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강한 힘이 가해지자 숨어 있던 것이 격렬하게 반응한다. 「사도어서」에서 대성인은 같은 이치를 「쇠는 달구어 두드리면 칼이 되고, 현성은 욕설로 시험받는 것이리라(鉄は炎打てば剣となる賢聖は罵詈して試みるなるべし)」(958쪽)고 표현하셨다. 쇠의 비유는 흠이 드러나는 단계에서 칼이 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숙업이 드러나는 것은 단련의 과정이며, 그 끝에 단단한 칼, 곧 부처의 생명이 단련되어 나온다.
전중경수법문과 숙명전환 — 체념의 불법이 아니다
「전중경수」라는 말 자체는 개목초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강의는 이 장의 제목으로 이 말을 쓴다. 다쓰노쿠치 법난 직후인 문영 8년(1271) 10월 5일, 사가미 지방 에치의 혼마 저택에서 오타 · 소야 · 가나바라 세 사람에게 보내신 「전중경수법문」에 이 말이 정면으로 나온다.
涅槃経に転重軽受と申す法門あり、先業の重き今生につきずして未来に地獄の苦を受くべきが今生にかかる重苦に値い候へば地獄の苦みぱつときへて死に候へば人天・三乗・一乗の益をうる事の候
열반경에 전중경수(転重軽受)라고 하는 법문이 있느니라. 선업(先業)이 무거워 금생에 다하지 못하고 미래에 지옥의 괴로움을 받아야 할 것이, 금생에 이와 같은 무거운 괴로움을 만나면 지옥의 괴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죽으면 인 · 천 · 삼승 · 일승의 이익을 얻는 일이 있느니라
같은 글에서 대성인은 불경보살이 악구매리와 장목와석을 당한 것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니라 과거 정법 비방의 죄 때문이었으며, 불경품의 「그 죄를 다 마치고(其罪畢已)」라는 경문이 바로 난을 만남으로써 과거의 죄가 소멸함을 보인다고 하셨다. 또 부법장의 제14 제바보살은 외도에게, 사자존자는 단미라왕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반대로 난 없이 왕법의 귀의를 받아 법을 넓힌 사람도 있었다고 하시고, 그 차이를 「세상에 악국과 선국이 있고 법에 섭수와 절복이 있기 때문인가」라고 풀이하셨다. 전중경수의 법리와 섭수 · 절복의 법리가 이미 이때 한 글 속에 이어져 있었던 셈이다. 개목초 제57장에서 제59~60장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이 사색의 연장 위에 있다.
강의는 제57장 해설의 끝에서 숙명론에 대한 정면의 답을 내놓는다. 우리의 인생이 과거 세상의 죄업과 선근으로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믿든 믿지 않든 사실이다. 그러나 운명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체념의 인생이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체념의 불법이다. 체념의 인생에서는 불행한 사람이 어찌할 길이 없다. 그래서 대성인은 과거 세상에 악업을 쌓아 현세에 불행한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구할 것인가를 사유하시어,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주셨다는 것이다. 강의는 「그러므로 문저에 비침된 남묘호렌게쿄야말로 우리의 숙명전환의 존귀한 가르침」이라 하고, 숙명을 바꾸게 하려고 일생을 거신 대성인의 대자대비에 깊이 감사하며 그 가르침대로 행해야 한다고,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일본의 모든 사람이 문저하종의 불법을 믿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맺는다.
강의의 관점 — 전중경수는 「난은 과거의 업 때문이니 참으라」는 체념의 가르침이 아니다. 금생의 강한 호법이 과거의 중죄를 불러내어 한꺼번에 끝내게 하는 적극적인 숙명전환의 법리이며, 그 근본은 문저의 남묘호렌게쿄다.
「전중경수(転重軽受)」는 대반열반경(북본) 권31에 나오는 말로 전한다. 개목초가 인용한 대반니원경의 문은 같은 취지를 담은 이역의 문이다. 대성인은 개목초 이전의 「전중경수법문」(문영 8년 10월)에서 이 법문을 처음 정면으로 쓰셨고, 개목초(문영 9년 2월)와 「사도어서」(같은 해 3월)에서 그것을 당신의 몸에 맞추어 자세히 푸셨다.
본문
涅槃経に曰く「譬えば貧女の如し居家救護の者有ること無く加うるに復病苦飢渇に逼められて遊行乞丐す、 他の客舎に止り一子を寄生す是の客舎の主駈逐して去らしむ、 其の産して未だ久しからず是の児を擕抱して他国に至らんと欲し、 其の中路に於て悪風雨に遇て寒苦並び至り多く蚊虻蜂螫毒虫の唼い食う所となる、 恒河に逕由し児を抱いて渡る其の水漂疾なれども而も放ち捨てず是に於て母子遂に共倶に没しぬ、 是くの如き女人慈念の功徳命終の後梵天に生ず、 文殊師利若し善男子有つて正法を護らんと欲せば彼の貧女の恒河に在つて子を愛念するが為に身命を捨つるが如くせよ、 善男子護法の菩薩も亦是くの如くなるべし、寧ろ身命を捨てよ是くの如きの人解脱を求めずと雖も解脱自ら至ること彼の貧女の梵天を求めざれども梵天自ら至るが如し」等云云、 此の経文は章安大師・三障をもつて釈し給へり、それをみるべし、 貧人とは法財のなきなり女人とは一分の慈ある者なり、客舎とは穢土なり一子とは法華経の信心・了因の子なり舎主駈逐とは流罪せらる其の産して未だ久しからずとはいまだ信じて・ひさしからず、 悪風とは流罪の勅宣なり蚊虻等とは諸の無智の人有り悪口罵詈等なり母子共に没すとは終に法華経の信心をやぶらずして頸を刎らるるなり、 梵天とは仏界に生るるをいうなり引業と申すは仏界までかはらず、 日本・漢土の万国の諸人を殺すとも五逆・謗法なければ無間地獄には堕ちず、余の悪道にして多歳をふべし、 色天に生るること万戒を持てども万善を修すれども散善にては生れず、 又梵天王となる事・有漏の引業の上に慈悲を加えて生ずべし、 今此の貧女が子を念うゆへに梵天に生る常の性相には相違せり、 章安の二はあれども詮ずるところは子を念う慈念より外の事なし、 念を一境にする、定に似たり専子を思う又慈悲にも・にたり、かるがゆへに他事なけれども天に生るるか、 又仏になる道は華厳の唯心法界・三論の八不・法相の唯識・真言の五輪観等も実には叶うべしともみへず、 但天台の一念三千こそ仏になるべき道とみゆれ、 此の一念三千も我等一分の慧解もなし、而ども一代経経の中には此の経計り一念三千の玉をいだけり、 余経の理は玉に・にたる黄石なり沙をしぼるに油なし石女に子のなきがごとし、 諸経は智者・猶仏にならず此の経は愚人も仏因を種べし不求解脱・解脱自至等と云云、 我並びに我が弟子・諸難ありとも疑う心なくば自然に仏界にいたるべし、 天の加護なき事を疑はざれ現世の安穏ならざる事をなげかざれ、 我が弟子に朝夕教えしかども・疑いを・をこして皆すてけんつたなき者のならひは約束せし事を・まことの時はわするるなるべし、 妻子を不便と・をもうゆへ現身にわかれん事を・なげくらん、 多生曠劫に・したしみし妻子には心とはなれしか仏道のために・はなれしか、いつも同じわかれなるべし、 我法華経の信心をやぶらずして霊山にまいりて返てみちびけかし。
열반경에 이르되 「비유하면 가난한 여인과 같으니, 머물 집도 구호해 줄 이도 없고, 게다가 병고와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며 떠돌아다니며 빌어먹었느니라. 다른 이의 객사에 머물러 한 아이를 낳았는데, 그 객사의 주인이 내쫓아 떠나게 하였느니라. 아이를 낳은 지 오래지 않았으나 이 아이를 안고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였는데, 그 도중에 사나운 비바람을 만나 추위와 괴로움이 함께 닥치고, 모기 · 등에 · 벌 · 독충에게 많이 물어뜯겼느니라. 갠지스강(恒河)을 지나게 되어 아이를 안고 건너는데, 그 물이 거세고 빨랐으나 아이를 놓아 버리지 않으니, 이에 어머니와 아들이 마침내 함께 빠져 죽었느니라. 이와 같은 여인은 자애로운 생각(慈念)의 공덕으로 목숨을 마친 뒤 범천(梵天)에 태어났느니라. 문수사리여, 만약 선남자가 정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저 가난한 여인이 갠지스강에서 아이를 사랑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신명을 버린 것과 같이 하라. 선남자여, 호법의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 차라리 신명을 버리라. 이와 같은 사람은 해탈을 구하지 않더라도 해탈이 스스로 이르니, 저 가난한 여인이 범천을 구하지 않았어도 범천이 스스로 이른 것과 같으니라」 하였느니라. 이 경문은 장안대사가 삼장(三障)으로 풀이하셨으니 그것을 보아야 하느니라. 「가난한 사람」이란 법의 재물이 없는 것이요, 「여인」이란 한 분(分)의 자비가 있는 자이니라. 「객사」란 예토(穢土)요, 「한 아이」란 법화경의 신심, 곧 요인(了因)의 아이니라. 「객사 주인이 내쫓았다」 함은 유죄를 당하는 것이요, 「낳은 지 오래지 않았다」 함은 아직 믿은 지 오래지 않은 것이니라. 「사나운 바람」이란 유죄의 칙선(勅宣)이요, 「모기 · 등에 등」이란 「여러 무지한 사람이 있어 악구매리한다」는 것이니라.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빠져 죽었다」 함은 끝내 법화경의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목이 베이는 것이니라. 「범천」이란 불계(仏界)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느니라. 인업(引業)이라 하는 것은 불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느니라. 일본 · 중국 등 만국의 사람들을 죽이더라도 오역죄와 방법이 없으면 무간지옥에는 떨어지지 않고, 그 밖의 악도에서 여러 해를 지내게 되느니라. 색계천(色天)에 태어나는 일은 만 가지 계를 지니고 만 가지 선을 닦더라도 산선(散善)으로는 태어나지 못하느니라. 또 범천왕이 되는 일은 유루(有漏)의 인업 위에 자비를 더하여야 태어나는 것이니라. 지금 이 가난한 여인이 아이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범천에 태어난 것은 일반적인 성상(性相)과는 어긋나느니라. 장안의 두 가지 해석이 있으나, 결국은 아이를 생각하는 자애로운 마음(慈念) 외의 일이 아니니라. 생각을 한 경계에 모은 것은 선정(定)과 비슷하고, 오로지 아이를 생각한 것은 또한 자비와도 비슷하니라. 그러므로 다른 선행은 없어도 하늘에 태어난 것이리라. 또 부처가 되는 길은 화엄의 유심법계(唯心法界), 삼론의 팔불(八不), 법상의 유식(唯識), 진언의 오륜관(五輪観) 등으로도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느니라. 다만 천태의 일념삼천이야말로 부처가 될 수 있는 길로 보이느니라. 이 일념삼천도 우리에게는 한 분의 혜해(慧解)도 없으나, 일대의 여러 경 가운데 오직 이 경만이 일념삼천의 구슬을 품고 있느니라. 다른 경의 이치는 구슬과 비슷한 누런 돌이니, 모래를 짜도 기름이 없고 석녀(石女)에게 아이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러 경에서는 지자도 오히려 부처가 되지 못하나, 이 경은 어리석은 사람도 부처의 인(因)을 심을 수 있느니라. 「해탈을 구하지 않아도 해탈이 스스로 이른다」 함이 이것이니라. 나와 나의 제자는 제난이 있더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 하늘의 가호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고,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라. 나의 제자에게 아침저녁으로 가르쳤건만, 의심을 일으켜 모두 버렸으리라. 어리석은 자의 버릇은 약속한 일을 진실한 때에는 잊어버리는 것이니라. 처자를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이 몸으로 헤어질 것을 한탄하리라. 그러나 여러 생 오랜 겁 동안 가까이하였던 처자와 마음먹고 헤어졌던가, 불도를 위하여 헤어졌던가. 언제나 같은 이별이니라. 나는 법화경의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영산(霊山)에 가서 도리어 (처자를) 인도하리라.
어구 풀이
- 恒河항하
- 인도의 갠지스강. 경전에서 넓고 물살이 센 큰 강의 대명사로 쓰이며, 「항하의 모래(恒河沙)」처럼 무수함의 비유로도 자주 나온다.
- 梵天범천
- 색계 초선천(初禅天)의 하늘, 또는 그 주인인 범천왕. 욕계를 벗어난 청정한 하늘로, 보통은 선정을 닦아야 태어나는 곳이다.
- 章安大師장안대사
- 관정(灌頂, 561–632). 천태대사의 제자로, 스승의 강의를 듣고 기록하여 『법화현의』 · 『법화문구』 · 『마하지관』의 이른바 법화삼대부로 정리했다. 열반경에 대한 주석서 『대반열반경소』도 지었다. 대성인은 이 장에서 장안이 빈녀의 비유를 삼장으로 풀이한 것을 「보라」고 권하신다.
- 三障삼장
- 불도 수행의 실천을 방해하는 세 가지 작용. 번뇌장(탐냄 · 성냄 · 어리석음의 미혹), 업장(오역죄나 십악업 등), 보장(과거 세상 악업의 갚음으로 금생에 받는 지옥 · 아귀 · 축생의 고보의 경애). 장안은 빈녀의 비유에서 「객사 주인」을 보장, 「사나운 비바람을 만나 모기 · 등에 · 벌에게 물어뜯김」을 업장, 「갠지스강을 지남」을 번뇌장에 배당했다.
- 了因の子요인의 아이
- 요인은 삼인불성(三因仏性) 가운데 요인불성. 천태 교학은 중생에게 갖추어진 불성을 정인(正因 — 본래 갖춘 진리 그 자체) · 요인(了因 — 그것을 비추어 아는 지혜) · 연인(縁因 — 지혜를 돕는 선행)의 셋으로 나눈다. 강의는 신심을 굳게 계속 지니면 요인불성이 보신여래로 나타나니, 곧 「나는 부처이다」라고 깨달아 알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대성인은 빈녀가 끝까지 놓지 않은 「한 아이」를 법화경의 신심, 곧 이 요인의 아이로 보신다.
- 勅宣칙선
- 천황이나 국가 권력의 명령. 여기서는 대성인을 사도로 보낸 유죄의 명령을 「사나운 바람」에 배당하신다.
- 引業인업
- 업 가운데 다음 생의 생명 경애를 정하는 가장 강력한 업. 육도(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와 사생(난생 · 태생 · 습생 · 화생)의 과보를 끌어오는 업을 말한다. 『구사론』 권17에 따르면 미래에 과보를 일으키는 업은 인업과 만업(満業)으로 나뉜다. 예컨대 사람으로 태어날 때 사람으로서 공통된 몸과 다섯 감관을 「총보(総報)」라 하고, 남녀 · 귀천 · 미추 · 현우처럼 개인마다 다른 면을 「별보(別報)」라 하는데, 어느 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총보를 일으키는 업이 인업, 그 안에서 개개의 별보를 채우는 업이 만업이다.
- 五逆오역
- 다섯 가지 가장 무거운 죄. 아버지를 죽임, 어머니를 죽임, 아라한을 죽임, 부처의 몸에서 피를 냄, 화합승단을 깨뜨림.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업으로 일컬어진다. 대성인은 여기에 방법(謗法)을 나란히 두어, 방법이 오역에 맞먹는 무간의 업임을 보이신다.
- 色天색천
- 색계(色界), 색계천. 삼계(욕계 · 색계 · 무색계)의 하나로, 욕계와 같은 탐욕과 번뇌는 없으나 몸 같은 물질의 제약은 남아 있는 세계. 선정을 닦아야 태어나므로 산선으로는 태어나지 못한다.
- 有漏유루
- 번뇌가 새어 나오는 상태. 세간의 선정과 선행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유루의 업이다.
- 性相성상
- 사물의 본성과 겉모습, 곧 교학에서 정해 둔 일반 원칙. 여기서는 「범천에 태어나려면 선정과 자비가 있어야 한다」는 정해진 규칙을 말한다.
- 唯心法界・八不・唯識・五輪観유심법계 · 팔불 · 유식 · 오륜관
- 각 종파가 성불의 길로 내세우는 관법. 화엄종의 「삼계는 오직 한 마음(唯心)」이라는 법계관, 삼론종의 불생 · 불멸 · 불상 · 부단 · 불일 · 불이 · 불래 · 불거의 팔불중도관, 법상종의 만법유식관, 진언종에서 몸의 다섯 부분을 지 · 수 · 화 · 풍 · 공의 오륜에 배당해 관하는 오륜관.
- 石女석녀
-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성불의 씨앗이 없는 이전의 경을 비유한다.
- 霊山영산
- 영취산(霊鷲山). 석존이 법화경을 설한 곳이며, 법화경을 지닌 이가 죽은 뒤 가는 부처의 정토로서 「영산정토」라고 부른다.
빈녀의 비유 — 열반경과 장안의 삼장 해석
제58장은 열반경의 긴 비유로 시작한다. 머물 집도 도와줄 이도 없는 가난한 여인이 병과 굶주림 속에 떠돌며 빌어먹다가, 남의 객사에서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객사의 주인은 그녀를 내쫓는다.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나라로 가려던 길에 사나운 비바람을 만나고, 추위와 괴로움에 더해 모기 · 등에 · 벌 · 독충에게 물어뜯긴다. 마침내 갠지스강에 이르러 아이를 안고 건너는데, 물살이 거세었으나 아이를 놓지 않았고, 어머니와 아이는 함께 물에 빠져 죽는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이를 사랑하는 자애의 공덕으로 죽은 뒤 범천에 태어났다. 부처는 문수사리에게 말한다. 정법을 지키려거든 이 여인이 아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처럼 하라. 그러면 해탈을 구하지 않아도 해탈이 스스로 이르니, 그 여인이 범천을 구하지 않았어도 범천이 스스로 이른 것과 같다.
강의는 이 비유를 「삼고(三苦)」의 구조로 읽는다. 여인은 번뇌장 · 업장 · 보장의 세 괴로움에 시달려 괴로움의 밑바닥에 가라앉았고,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아이를 생각하는 한 생각으로 마침내 범천에 태어났다. 구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범천의 공덕을 얻은 것이다.
대성인은 이 경문을 장안대사가 삼장으로 풀이했으니 「그것을 보라」고 하신다. 어석에 따르면 장안은 「객사의 주인」을 보장에, 「사나운 비바람을 만나 모기 · 등에 · 벌에게 물어뜯김」을 업장에, 「갠지스강을 지남」을 번뇌장에 배당했다. 빈녀가 겪는 고난의 장면 하나하나가 불도를 가로막는 세 장애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장안의 해석은 앞 장의 「삼장사마가 다투어 일어난다」는 마하지관의 문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앞 장이 장애가 일어나는 이치를 말했다면, 이 장은 그 장애를 모두 겪으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비유를 대성인의 몸에 맞추다
대성인은 장안의 해석을 참조하라 하신 다음, 당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으신다. 비유의 요소 하나하나를 법화경 행자의 처지에 배당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법의 재물이 없는 이, 「여인」은 한 분의 자비가 있는 이다. 「객사」는 예토, 곧 삼독이 강성한 이 사바세계이며, 「한 아이」는 법화경의 신심, 요인의 아이다. 「객사 주인이 내쫓았다」는 것은 유죄를 당하는 것이고, 「낳은 지 오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믿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나운 바람」은 유죄의 칙선, 「모기 · 등에」는 권지품의 「여러 무지한 사람이 있어 악구매리한다」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빠져 죽었다」는 것은 끝내 법화경의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목이 베이는 것이며, 「범천」은 불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 배당에서 가장 무게 있는 것은 「한 아이」가 「법화경의 신심」이라는 해석이다. 빈녀가 거센 물살 속에서도 아이를 놓지 않았듯이, 행자는 유죄와 악구매리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심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빠져 죽었다」는 장면을 대성인은 「끝내 법화경의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목이 베이는 것」으로 읽으신다. 다쓰노쿠치에서 실제로 목이 베일 뻔했던 체험이 이 해석에 생생하게 겹친다. 제49장에서 「니치렌이라 하던 자는 지난해 9월 12일 자시 · 축시에 목이 베였다(日蓮といゐし者は去年九月十二日子丑の時に頸はねられぬ)」(223쪽)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면, 「함께 빠져 죽었다」는 비유는 대성인에게 이미 겪은 일이었다.
또 「아이를 낳은 지 오래지 않았다 = 믿은 지 오래지 않았다」는 해석은 문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입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곧바로 거센 박해의 강을 건너야 했던 당시의 현실이 이 배당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경문은 말한다. 신심을 끝까지 놓지 않으면 구하지 않아도 범천, 곧 불계가 스스로 이른다.
- 貧人가난한 사람—대성인法財のなきなり법의 재물이 없는 이
- 女人여인—대성인一分の慈ある者なり한 분의 자비가 있는 이
- 客舎객사—대성인穢土なり예토
- 一子한 아이—대성인法華経の信心・了因の子なり법화경의 신심 · 요인의 아이
- 舎主駈逐객사 주인이 내쫓음장안보장(報障)대성인流罪せらる유죄를 당함
- 其の産して未だ久しからず낳은 지 오래지 않음—대성인いまだ信じて・ひさしからず믿은 지 오래지 않음
- 悪風사나운 바람장안업장(業障)대성인流罪の勅宣なり유죄의 칙선
- 蚊虻等모기 · 등에 등장안업장(業障)대성인諸の無智の人有り悪口罵詈等なり여러 무지한 사람의 악구매리
- 恒河に逕由갠지스강을 지남장안번뇌장(煩悩障)—
- 母子共に没す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빠져 죽음—대성인終に法華経の信心をやぶらずして頸を刎らるるなり끝내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목이 베임
- 梵天범천—대성인仏界に生るるをいうなり불계에 태어남

인업과 범천 — 「늘 정해진 성상과 어긋난다」
이어서 대성인은 교학적인 문제를 하나 제기하신다. 빈녀가 범천에 태어난 것은 정해진 교리, 곧 성상(性相)에 비추어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현대어역으로도 이해가 쉽지 않은 곳이어서 구조를 차례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인업이라 하는 것은 불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인업은 다음 생에 어느 세계에 태어날지를 정하는 업이다. 이 원리는 육도에서뿐 아니라 불계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작동한다.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어느 경애에 태어나느냐를 정한다는 인과의 법칙에 예외는 없다는 것이다.
그 예로 대성인은 두 가지를 드신다. 첫째, 일본과 중국 등 만국의 사람을 죽이더라도 오역죄와 방법이 없으면 무간지옥에는 떨어지지 않고 다른 악도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 무간지옥이라는 가장 깊은 과보를 끌어오는 인업은 오역과 방법이며, 살생의 양이 아무리 많아도 그 종류가 다르면 끌어오는 세계도 다르다. 여기서 방법이 오역과 나란히 무간의 업으로 놓인다는 점은 개목초 전체의 방법론과 이어진다. 둘째, 색계천에 태어나는 것은 만 가지 계를 지니고 만 가지 선을 닦더라도 산선으로는 불가능하다. 색계는 선정의 세계이므로, 마음을 한 곳에 모은 정선이 아니면 그 세계를 끌어올 수 없다. 더구나 색계 초선천의 주인인 범천왕이 되려면 세간의 유루 선정이라는 인업 위에 자비를 더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빈녀가 범천에 태어난 것은 이상하다. 그녀는 선정을 닦은 것도 아니고 계를 지닌 것도 아니며, 오히려 빌어먹으며 떠돌던 사람이다. 대성인은 이것이 「늘 정해진 성상과는 어긋난다」고 인정하신다. 그리고 장안의 두 가지 해석이 있지만 결국은 「아이를 생각한 자애로운 마음(慈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으신다. 생각을 한 경계에 모은 것은 선정과 비슷하고, 오로지 아이를 생각한 것은 자비와도 비슷하다. 그러므로 다른 선행이 없어도 범천에 태어난 것이리라.
이 논의는 정교하다. 범천에 태어나기 위한 두 조건, 곧 선정과 자비를 빈녀는 의도하지 않은 채 한 생각 속에 모두 갖추고 있었다. 아이를 놓지 않겠다는 한 생각이 흐트러짐 없는 선정의 모습이 되고, 그 생각의 내용이 자비가 된 것이다. 무엇을 구하겠다는 목적의식이 아니라, 한 가지를 끝까지 지키는 한결같은 마음이 그 자체로 높은 경애를 끌어왔다. 이것이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얻는다」는 이익의 구조이며, 대성인은 이를 바로 법화경의 신심에 겹치신다. 신심을 끝까지 지키는 한 생각이 구하지 않아도 불계를 끌어오는 인업이 된다.
일념삼천의 구슬 — 성불의 길은 오직 법화경
범천의 문제에서 대성인은 곧바로 성불의 인(因)이라는 더 큰 문제로 옮겨 가신다. 범천에 태어나는 데에도 그에 맞는 인업이 있어야 한다면, 부처가 되는 데에는 어떤 인이 필요한가.
대성인은 먼저 다른 종파들이 내세우는 성불의 길을 차례로 드신다. 화엄종의 유심법계, 삼론종의 팔불, 법상종의 유식, 진언종의 오륜관. 그리고 이것들은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신다. 오직 천태의 일념삼천만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로 보인다.
여기서 대성인은 겸허한 단서를 다신다. 「이 일념삼천도 우리에게는 한 분의 혜해도 없다.」 천태대사처럼 일념삼천을 지혜로 관할 능력이 말법의 범부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서 「일대의 여러 경 가운데 오직 이 경만이 일념삼천의 구슬을 품고 있다」고 하신다. 혜해가 없어도 구슬을 품은 경을 지니면 구슬도 함께 지니게 된다. 반면 다른 경의 이치는 「구슬과 비슷한 누런 돌」이어서, 아무리 갈고닦아도 구슬이 되지 않는다. 모래를 짜도 기름이 나오지 않고 석녀에게 아이가 없듯이, 성불의 씨앗이 없는 경에서는 성불이 나올 수 없다. 앞 장의 「삼씨를 세게 짜면 기름이 많다」는 비유와 여기의 「모래를 짜도 기름이 없다」는 비유는 짝을 이룬다. 짜는 힘이 아니라 짜는 대상에 기름이 있느냐가 먼저다.
그래서 결론이 온다. 「여러 경에서는 지자도 오히려 부처가 되지 못하나, 이 경은 어리석은 사람도 부처의 인을 심을 수 있다.」 지혜로 관하는 길은 지자에게도 막혀 있지만, 일념삼천의 구슬을 품은 법화경을 믿고 지니는 길은 어리석은 범부에게도 열려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해탈을 구하지 않아도 해탈이 스스로 이른다」는 경문의 뜻이다. 빈녀가 범천을 구하지 않고 아이를 놓지 않았을 뿐인데 범천에 태어났듯이, 범부는 지혜로 해탈을 구하지 않아도 법화경의 신심을 놓지 않으면 해탈이 스스로 이른다.
강의는 이 「천태의 일념삼천이야말로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라는 문을 상권 제7장의 문저 판정과 연결한다.
一念三千の法門は但法華経の本門・寿量品の文の底にしづめたり、竜樹・天親・知つてしかも・いまだ・ひろいいださず但我が天台智者のみこれをいだけり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느니라. 용수 · 천친은 알고서도 아직 건져 내지 않았고, 다만 우리 천태지자만이 이것을 품었느니라
강의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일념삼천은 실은 문저하종의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이며, 그것이 곧 삼대비법의 어본존이다. 우리가 이 어본존을 굳게 믿고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얻는 큰 이익, 곧 즉신성불이라는 절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의는 설명한다. 그리고 「관심의 본존초」의 다음 문을 근거로 든다.
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四大声聞の領解に云く「無上宝聚・不求自得」云云
석존의 인행(因行)과 과덕(果徳)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갖추어져 있느니라. 우리가 이 다섯 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 사대성문의 영해(領解)에 이르되 「위없는 보배 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얻었다(無上宝聚 不求自得)」 하였느니라
「무상보취 불구자득」은 법화경 신해품에서 수보리 · 가전연 · 가섭 · 목건련의 사대성문이 장자궁자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의 깨달음을 아뢴 말이다. 이승은 이전의 경에서 성불할 수 없다고 배척당했으나, 법화경에서 구하지도 않았던 위없는 보배를 얻었다고 기뻐한다. 개목초 상권이 길게 다룬 이승작불의 은혜가 여기 「불구자득」이라는 말로 다시 울린다. 「관심의 본존초」는 이것을 「수지즉관심」의 근거로 들어, 묘법 다섯 자를 받아 지니는 것만으로 석존의 인행과 과덕이 모두 「자연히」 물려진다고 밝힌다. 개목초의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와 관심의 본존초의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는 같은 「자연(自然)」의 말로 이어져 있다.
『어의구전』의 신해품 해석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信は無疑曰信とて疑惑を断破する利剣なり解とは智慧の異名なり信は価の如く解は宝の如し三世の諸仏の智慧をかうは信の一字なり
신(信)이란 「의심 없음을 신이라 한다(無疑曰信)」 하여 의혹을 끊어 깨뜨리는 날카로운 칼이니라. 해(解)란 지혜의 다른 이름이니라. 신은 값과 같고 해는 보배와 같으니, 삼세 제불의 지혜를 사는 것은 신의 한 글자이니라
같은 대목에서 『어의구전』은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를 믿어 받아들이므로 무상보취 불구자득의 큰 보배 구슬을 얻는다」고 이어 간다. 개목초의 「한 분의 혜해도 없다」는 고백과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이라는 조건은, 혜해 대신 신이 보배를 산다는 이 논리 속에서 하나로 맞물린다.
강의의 관점 — 「천태의 일념삼천」은 문저하종 사행의 일념삼천, 곧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가리킨다. 혜해가 없는 범부도 이를 의심 없이 믿으면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얻는」 즉신성불의 이익을 얻는다.
「나와 나의 제자」 —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장의 정점은 다음 한 구절이다.
我並びに我が弟子・諸難ありとも疑う心なくば自然に仏界にいたるべし、天の加護なき事を疑はざれ現世の安穏ならざる事をなげかざれ
나와 나의 제자는 제난이 있더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 하늘의 가호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고,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라
이 구절은 개목초 전체의 물음에 대한 실천적인 답이다. 개목초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화경의 행자라면 왜 제천의 가호가 없고 현세가 안온하지 않은가」를 물어 왔다. 법화경 약초유품에는 「현세는 안온하고 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現世安穏・後生善処)」는 경문이 있고, 제55장에서 질문자는 바로 이 경문을 들어 대성인을 몰아세웠다. 대성인은 앞 장들에서 그 까닭을 이론으로 푸셨고, 이제 문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하늘의 가호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라.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라. 그것은 전중경수의 과정이며, 의심하지 않는 신심이 있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른다.
이 구절의 주어가 「나」만이 아니라 「나와 나의 제자」라는 점이 결정적이다. 앞 장에서 대성인은 반니원경의 여덟 가지 고보를 「내 몸이니라」고 하나하나 당신의 몸에 맞추셨다. 그 길을 대성인 혼자 가시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난을 만나는 제자들도 함께 간다. 그리고 그 길의 조건은 단 하나,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이다. 빈녀가 거센 물살 속에서 아이를 놓지 않았듯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심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히(自然に)」라는 말도 무게가 있다. 빈녀가 범천을 구하지 않았는데 범천이 스스로 이르렀듯이, 불계는 노력해서 쟁취하는 목표라기보다 신심을 지키는 사람에게 저절로 이르는 경애다. 앞서 본 대로 관심의 본존초의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와 같은 말이다.
「진실한 때에 잊는다」 — 퇴전한 문하를 향한 말씀
이어지는 문장은 비통하다. 「나의 제자에게 아침저녁으로 가르쳤건만, 의심을 일으켜 모두 버렸으리라. 어리석은 자의 버릇은 약속한 일을 진실한 때에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다쓰노쿠치 법난과 사도 유배를 전후하여 가마쿠라의 문하에게도 탄압이 미쳤다. 투옥된 제자가 있었고, 영지를 빼앗기거나 위협을 받은 신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신앙을 버렸다. 대성인은 뒷날 「신니부인답서」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하셨다.
かまくらにも御勘気の時・千が九百九十九人は堕ちて候
가마쿠라에서도 어감기(御勘気) 때에 천 명 가운데 구백구십구 명은 떨어졌느니라
대성인은 제자들에게 평소에 「법화경을 지니면 반드시 난이 있다」고 아침저녁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막상 난이 닥치자 그들은 의심을 일으켜 신앙을 버렸다. 「약속한 일을 진실한 때에 잊는다」는 말은 평소의 다짐이 위기의 순간에 무너지는 인간의 약함을 꿰뚫는다. 「진실한 때(まことの時)」란 신심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판가름 나는 때, 곧 난이 닥친 때다. 개목초가 시조깅고에게 주어지고 문하 일동에게 읽히도록 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은 살아남은 문하를 향한 간곡한 경계이기도 하다.
처자와의 이별 — 「언제나 같은 이별」
대성인은 퇴전의 이유 가운데 하나를 짚으신다. 「처자를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이 몸으로 헤어질 것을 한탄하리라.」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거나 유배되면 처자와 헤어져야 한다. 그 두려움이 신앙을 버리게 한다.
이에 대해 대성인은 시간의 틀을 넓혀 보이신다. 「여러 생 오랜 겁 동안 가까이하였던 처자와 마음먹고 헤어졌던가, 불도를 위하여 헤어졌던가. 언제나 같은 이별이다.」 무시 이래 우리는 수없이 태어나 처자와 친하게 지냈고, 그때마다 결국 죽음으로 헤어졌다. 그 이별은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불도를 위해 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진다. 그렇다면 이번 생의 이별만을 특별히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다만 이번에는 그 이별을 불도를 위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온다. 「나는 법화경의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영산에 가서 도리어 인도하리라.」 현대어역은 이 문장의 주어를 대성인 자신으로 보면서도 그 뜻을 「먼저 자신이 법화경의 신심을 끝까지 깨뜨리지 않고 즉신성불하여 영산정토에 가서 도리어 처자를 인도하라」고 문하에 대한 권유로 풀었다. 「みちびけかし」라는 끝맺음이 대성인의 결의이면서 동시에 제자에게 같은 길을 권하는 말로 읽히는 것이다. 처자를 진정으로 아낀다면, 처자 때문에 신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신심을 지켜 성불함으로써 처자까지 이끌어야 한다. 현대어역은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신도 처자도 절대의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덧붙인다.
강의는 이 대목의 교계를 「참으로 중대하다」고 평한다. 처자를 불쌍히 여겨 이 몸으로 헤어짐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영원한 옛적부터 늘 태어나서는 처자와 사별해 왔지 않은가. 먼저 자신이 마지막까지 결코 퇴전하지 않고 신심을 다하여 영취산에 가서 도리어 처자를 인도하라. 이는 늘 가르쳐 온 대로이나, 어리석은 자는 진실한 때에 이것을 잊으니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사도어감기초」의 말씀과 겹쳐 읽을 수 있다. 사도 유배가 정해진 직후,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仏になる道は必ず身命をすつるほどの事ありてこそ仏にはなり候らめと・をしはからる、既に経文のごとく悪口・罵詈・刀杖・瓦礫・数数見擯出と説かれてかかるめに値い候こそ法華経をよむにて候らめと、いよいよ信心もおこり後生もたのもしく候、死して候はば必ず各各をも・たすけたてまつるべし
부처가 되는 길은 반드시 신명을 버릴 만한 일이 있어야 부처가 되는 것이리라 짐작하느니라. 이미 경문대로 악구 · 매리 · 도장 · 와력 · 삭삭견빈출이라 설해진 그대로 이러한 일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법화경을 읽는 것이리라 하여 더욱더 신심도 일어나고 후생도 든든하니라. 죽게 되면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 드리리라
「죽게 되면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 드리리라」와 「영산에 가서 도리어 인도하리라」는 같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신명을 버릴 만한 난을 만나는 것이 곧 성불의 길이며, 그 길을 끝까지 간 사람이 남은 이들을 이끈다.
현세의 이익을 넘어선 경지
강의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이 대목에 담긴 대성인의 심경을 누가 알 수 있는가를 묻는다. 현세의 이익만을 바라고 형식적인 신앙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이 심경이 이해되지 않는다. 민중이 불행의 밑바닥에서 괴로워하는 국토를 보고 광선유포의 큰 서원에 불타오르며, 삼세에 걸친 영원한 생명관 아래 어떤 대난도 넘어 절복행에 나아가는 사람만이 그 만분의 일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의는 확신한다.
이 지적은 제58장의 구조와 정확히 맞물린다. 「하늘의 가호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라」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라」는 말씀은 현세의 이익이라는 잣대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다. 처자와의 이별을 「언제나 같은 이별」로 보는 시선, 「영산에 가서 도리어 인도하라」는 시선은 모두 금생 한 번을 넘어선 삼세의 생명관 위에 서 있다. 빈녀가 금생에서는 아이와 함께 물에 빠져 죽었으나 범천에 태어났듯이, 금생의 고난은 삼세의 시간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얻는 큰 이익」이란 그 시간 감각 속에서만 보이는 이익이다.
「현세안온 · 후생선처(現世安穏・後生善処)」는 법화경 약초유품의 문이다. 제55장에서 질문자가 이 경문을 들어 대성인을 힐난했고, 개목초 하권 후반은 그 힐난에 대한 긴 답이다. 제58장의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라」는 그 답의 실천적 결론에 해당한다.
본문
疑つて云く念仏者と禅宗等を無間と申すは諍う心あり修羅道にや堕つべかるらむ、 又法華経の安楽行品に云く「楽つて人及び経典の過を説かざれ亦諸余の法師を軽慢せざれ」等云云、 汝此の経文に相違するゆへに天にすてられたるか、 答て云く止観に云く「夫れ仏に両説あり一には摂・二には折・安楽行に不称長短という如き是れ摂の義なり、大経に刀杖を執持し乃至首を斬れという是れ折の義なり与奪・途を殊にすと雖も倶に利益せしむ」等云云、 弘決に云く「夫れ仏に両説あり等とは大経に刀杖を執持すとは第三に云く正法を護る者は五戒を受けず威儀を修せず、乃至下の文仙予国王等の文、又新医禁じて云く若し更に為すこと有れば当に其の首を断つべし是くの如き等の文並びに是れ破法の人を折伏するなり一切の経論此の二を出でず」等云云、 文句に云く「問う大経には国王に親付し弓を持ち箭を帯し悪人を摧伏せよと明す、此の経は豪勢を遠離し謙下慈善せよと剛柔碩いに乖く云何ぞ異ならざらん、 答う大経には偏に折伏を論ずれども一子地に住す何ぞ曾て摂受無からん、此の経には偏に摂受を明せども頭破七分と云う折伏無きに非ず各一端を挙げて時に適う而已」等云云、 涅槃経の疏に云く「出家在家法を護らんには其の元心の所為を取り事を棄て理を存して匡に大経を弘む故に護持正法と言うは小節に拘わらず故に不修威儀と言うなり、 昔の時は平にして法弘まる応に戒を持つべし杖を持つこと勿れ今の時は嶮にして法翳る応に杖を持つべし戒を持つこと勿れ、 今昔倶に嶮ならば倶に杖を持つべし今昔倶に平ならば倶に戒を持つべし、取捨宜きを得て一向にす可からず」等云云、 汝が不審をば世間の学者・多分・道理とをもう、いかに諫暁すれども日蓮が弟子等も此のをもひをすてず一闡提人の・ごとくなるゆへに先づ天台・妙楽等の釈をいだして・かれが邪難をふせぐ、 夫れ摂受・折伏と申す法門は水火のごとし火は水をいとう水は火をにくむ、 摂受の者は折伏をわらう折伏の者は摂受をかなしむ、 無智・悪人の国土に充満の時は摂受を前とす安楽行品のごとし、 邪智・謗法の者の多き時は折伏を前とす常不軽品のごとし、 譬へば熱き時に寒水を用い寒き時に火をこのむがごとし、 草木は日輪の眷属・寒月に苦をう諸水は月輪の所従・熱時に本性を失う、 末法に摂受・折伏あるべし所謂悪国・破法の両国あるべきゆへなり、 日本国の当世は悪国か破法の国かと・しるべし。
의심하여 이르되, 염불자와 선종 등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다투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수라도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또 법화경 안락행품에 이르되 「즐겨 남과 경전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 또 다른 여러 법사를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대는 이 경문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늘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답하여 이르되, 마하지관에 이르되 「무릇 부처에게 두 가지 설이 있으니 하나는 섭(摂)이요 둘은 절(折)이니라. 안락행품에 『(남의) 장단을 말하지 말라(不称長短)』 함과 같은 것은 섭의 뜻이요, 대경(大経)에 『칼과 막대기를 잡아 지니고, 내지 목을 베라』 함은 절의 뜻이니라. 주는 것(与)과 빼앗는 것(奪)은 길을 달리하나 모두 이익을 얻게 하느니라」 하였느니라. 홍결(弘決)에 이르되 「『무릇 부처에게 두 가지 설이 있다』 등이라 함에서, 『대경에 칼과 막대기를 잡아 지닌다』 함은 (열반경) 제3권에 이르되 『정법을 지키는 자는 오계(五戒)를 받지 않고 위의(威儀)를 닦지 않는다』 함이요, 내지 아래의 문 선예국왕(仙予国王) 등의 문이요, 또 새 의사가 금하여 이르되 『만약 다시 (그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목을 베리라』 함이니, 이와 같은 문들은 모두 법을 깨뜨리는 사람을 절복하는 것이니라. 일체의 경론은 이 둘을 벗어나지 않느니라」 하였느니라. 법화문구에 이르되 「묻는다. 대경에는 국왕에게 친히 의탁하여 활을 지니고 화살을 차고 악인을 꺾어 굴복시키라고 밝히고, 이 경은 권세 있는 이를 멀리 떠나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자애롭고 선하라 하니, 굳셈과 부드러움이 크게 어긋나는데 어찌 다르지 않다 하겠는가. 답한다. 대경에는 오로지 절복을 논하나 일자지(一子地)에 머무니 어찌 일찍이 섭수가 없겠는가. 이 경에는 오로지 섭수를 밝히나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진다(頭破七分)』 하니 절복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 각각 한 끝을 들어 때에 맞출 따름이니라」 하였느니라. 열반경소에 이르되 「출가와 재가가 법을 지키려면 그 근본 마음의 하는 바를 취하고, 형식(事)을 버리고 이치(理)를 남겨 바로 대경을 넓히느니라. 그러므로 『정법을 호지한다』 함은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위의를 닦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옛날은 (세상이) 평온하여 법이 넓혀졌으니 마땅히 계를 지니고 막대기를 지니지 말아야 하며, 지금은 (세상이) 험하여 법이 가려졌으니 마땅히 막대기를 지니고 계를 지니지 말아야 하느니라. 지금과 옛날이 모두 험하면 모두 막대기를 지니고, 지금과 옛날이 모두 평온하면 모두 계를 지닐 것이니라. 취하고 버림을 마땅하게 하여 한쪽으로만 해서는 안 되느니라」 하였느니라. 그대의 의문을 세간의 학자들은 대부분 도리라고 여기느니라. 아무리 간효(諫暁)하여도 니치렌의 제자들조차 이 생각을 버리지 못하여 일천제인(一闡提人)과 같으므로, 먼저 천태 · 묘락 등의 해석을 내어 그들의 그릇된 힐난을 막느니라. 무릇 섭수 · 절복이라 하는 법문은 물과 불과 같으니, 불은 물을 싫어하고 물은 불을 미워하느니라. 섭수하는 자는 절복을 비웃고, 절복하는 자는 섭수를 슬퍼하느니라. 무지하고 악한 사람이 국토에 가득할 때는 섭수를 앞세우니 안락행품과 같으니라. 삿된 지혜를 지닌 방법(謗法)의 자가 많을 때는 절복을 앞세우니 상불경품과 같으니라. 비유하면 더울 때에 찬물을 쓰고 추울 때에 불을 좋아하는 것과 같으니라. 초목은 해(日輪)의 권속이니 추운 달에는 괴로움을 받고, 모든 물은 달(月輪)의 소종(所従)이니 더울 때에는 본성을 잃느니라. 말법에도 섭수와 절복이 있어야 하니, 이른바 악국(悪国)과 파법(破法)의 두 나라가 있기 때문이니라. 일본국의 지금 세상은 악국인가 파법의 나라인가를 알아야 하느니라.
어구 풀이
- 修羅道수라도
- 아수라의 세계. 시기와 다툼을 일삼는 경애로, 십계 가운데 넷째. 질문자는 다른 종파를 「무간」이라 단정하는 것이 다투는 마음이니 대성인 자신이 수라도에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힐난한다.
- 安楽行品안락행품
- 법화경 제14품. 부처 멸후 악세에 법화경을 넓히는 보살이 몸 · 입 · 뜻 · 서원의 네 가지 안락행을 지키라고 설한다. 인용된 문은 그 가운데 입의 안락행(口安楽行)으로, 남과 경전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 다른 법사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섭수의 대표적인 경문.
- 摂受・折伏섭수 · 절복
- 불법을 넓히는 두 방식. 강의에 따르면 이 이름은 『승만경』에서 나왔으며, 절복은 「깨뜨려 꺾고 다스려 굴복시킨다(破折調伏)」는 뜻, 섭수는 「상대의 기근을 거두어 받아들인다(彼機を摂して受容する)」는 뜻이다. 섭수는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고 너그럽게 이끄는 방식, 절복은 그릇된 가르침을 깨뜨려 바른 법에 들게 하는 방식이다.
- 与奪여탈
- 주는 것과 빼앗는 것. 섭수는 상대의 입장을 일단 인정해 주며(与) 법을 넓히고, 절복은 그 입장을 빼앗아(奪) 법을 넓힌다. 길은 다르지만 둘 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
- 弘決홍결
- 묘락대사 담연(湛然, 711–782)의 『지관보행전홍결』. 『마하지관』의 주석서다. 묘락은 천태종 중흥의 조사로 「묘락대사」로 불린다.
- 第三に云く正法を護る者は제3에 이르되 정법을 지키는 자는
- 열반경 제3권(금강신품)의 문. 정법을 지키는 자는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더라도 칼과 활을 지녀 정법을 지키라는 내용으로, 제60장에 자세히 인용된다.
- 仙予国王선예국왕
- 열반경 성행품에 나오는 석존 과거세의 이야기. 석존이 옛날 염부제의 대국 왕으로 태어나 이름을 선예라 했는데, 바라문이 정법을 비방하는 것을 듣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었으며, 이 인연으로 그 뒤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입정안국론」에도 인용된다.
- 新医신의
- 열반경에 나오는 비유. 어떤 나라의 의사(구의)가 오로지 젖으로 만든 약만 쓰며 병의 본체를 보지 못했는데, 병의 근원을 잘 아는 새 의사(신의)가 나타나자 왕은 구의를 내쫓고 「앞으로 젖약을 먹게 하는 자는 목을 벤다」고 포고했다. 그릇된 법을 엄하게 금하는 절복의 예다.
- 文句문구
- 천태대사의 『법화문구』. 법화경의 문을 구절마다 풀이한 주석서로, 장안대사가 필록했다.
- 一子地일자지
- 일체중생을 외아들처럼 사랑하는 경지. 보살 수행 계위의 초지(初地)로, 법계의 중생을 모두 자애롭게 생각한다는 뜻. 별교의 초지는 원교의 초주(初住)에 해당한다. 천태대사의 『법화현의』 권4상에 「자 · 비 · 희는 화타의 사행(事行)이요 일자지는 그 증(証)이며, 사(捨)의 마음은 화타의 이(理)요 공평등은 그 증이다」라고 한다.
- 頭破七分두파칠분
- 법화경 다라니품에서 십나찰녀가 「법화경 행자를 괴롭히는 자는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지리라」고 맹세한 문. 섭수를 주로 설하는 법화경에도 절복의 뜻이 있다는 근거다.
- 涅槃経の疏열반경소
- 장안대사 관정의 『대반열반경소』. 여기 인용된 문은 시대에 따라 섭수와 절복을 취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다.
- 威儀위의
- 계율에 맞는 몸가짐과 행동거지. 「위의를 닦지 않는다」는 형식적인 계율의 세목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一闡提人일천제인
- 범어 잇찬티카의 음사. 불법을 믿지 않고 성불의 인을 끊은 사람. 대성인은 당신의 말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일천제인에 비기셨다.
- 常不軽品상불경품
- 법화경 제20품. 상불경보살이 위음왕불 멸후 증상만의 사중에게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한다.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부처가 되리라」는 스물넉 자를 외치며 예배하다가 장목와석의 박해를 받았다. 겉모습은 부드러우나 상대가 거부하더라도 굳이 법을 들려주는 절복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 眷属・所従권속 · 소종
- 따르는 무리, 딸린 것. 초목은 해를 따라 자라므로 해의 권속, 물은 달에 따라 밀물과 썰물이 일므로 달의 소종이라 한다.
- 悪国・破法악국 · 파법
- 악국은 무지하고 악한 사람이 가득한 나라, 파법의 나라는 삿된 지혜를 지닌 방법의 사람이 많은 나라. 앞의 것에는 섭수, 뒤의 것에는 절복이 맞는다.
물음 — 「다투는 마음」과 안락행품
제59장은 다시 날카로운 물음으로 시작한다. 염불자와 선종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다투는 마음이니, 그렇게 말하는 대성인이야말로 수라도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법화경 안락행품은 「즐겨 남과 경전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 다른 법사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대는 이 경문을 어겼기 때문에 하늘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이 물음은 앞 장까지의 논의를 정면으로 뒤집으려 한다. 대성인은 제57~58장에서 대난이 전중경수의 증거이며 의심하지 않는 신심은 불계에 이른다고 하셨다. 그러나 질문자는 말한다. 그 난은 과거의 업 때문이 아니라 지금 그대가 법화경 자신의 가르침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늘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대의 홍교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목초 전체의 물음, 곧 「왜 제천의 가호가 없는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반론이며, 대성인의 행자 자격을 근본에서 흔드는 공격이다.
대성인은 이 물음이 결코 질문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대의 의문을 세간의 학자들은 대부분 도리라고 여긴다. 아무리 간효하여도 니치렌의 제자들조차 이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강의도 이 점을 짚는다. 세간은 물론이고 문하조차 절복을 꺼리는 풍조가 있었기에, 대성인은 천태와 묘락의 해석을 내어 바르게 풀이하셨다는 것이다. 다른 종파를 비판하는 대성인의 방식이 지나치다는 비판은 당시 문하 내부에도 퍼져 있었고, 대난을 겪으며 그 의심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대성인이 이를 「일천제인과 같다」고까지 엄하게 말씀하신 데에서, 이 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읽힌다.
그래서 대성인은 당신의 말이 아니라 천태 · 묘락 · 장안의 해석, 곧 상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천태 교학의 권위로 답하신다. 「먼저 천태 · 묘락 등의 해석을 내어 그들의 그릇된 힐난을 막는다.」
네 가지 문증 — 지관 · 홍결 · 문구 · 열반경소
마하지관 — 섭과 절, 여와 탈
첫 문증은 『마하지관』이다. 「무릇 부처에게 두 가지 설이 있으니 하나는 섭이요 둘은 절이다.」 안락행품의 「장단을 말하지 말라」는 섭의 뜻이고, 열반경의 「칼과 막대기를 잡아 지니고 내지 목을 베라」는 절의 뜻이다. 그리고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은 길을 달리하나 모두 이익을 얻게 한다.」
이 문의 요점은 셋이다. 첫째, 섭수와 절복은 모두 부처의 설이다. 어느 한쪽만이 불법이 아니다. 둘째, 질문자가 든 안락행품은 섭수의 경문이며, 그것과 정반대처럼 보이는 열반경의 절복 경문도 똑같이 부처의 말씀이다. 셋째, 둘 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목적에서 하나다. 질문자는 안락행품만을 들어 대성인을 비판했지만, 천태대사는 이미 부처의 가르침에 두 길이 있음을 밝혀 두었다.
홍결 — 열반경의 세 가지 절복 문
둘째 문증은 묘락대사의 『홍결』이다. 묘락은 지관의 「대경에 칼과 막대기를 잡아 지닌다」는 말이 열반경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든다. 첫째, 열반경 제3권의 「정법을 지키는 자는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는다」(금강신품). 둘째, 그 아래 문에 나오는 선예국왕의 이야기(성행품). 셋째, 새 의사가 「다시 젖약을 쓰는 자는 목을 벤다」고 금한 비유. 그리고 「이와 같은 문들은 모두 법을 깨뜨리는 사람을 절복하는 것이며, 일체의 경론은 이 둘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맺는다.
어석이 풀이하듯, 선예국왕은 석존이 과거세에 대국의 왕으로 태어났을 때 바라문이 정법을 비방하는 것을 듣고 그 목숨을 끊었으며, 이 인연으로 그 뒤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신의의 비유는 병의 근원을 모르고 젖약만 쓰던 구의를 쫓아내고, 앞으로 젖약을 쓰는 자는 목을 벤다고 포고했다는 이야기다. 경전 속 이 강렬한 표현들은 문자 그대로 살생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법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단호해야 함을 말하는 비유로 읽힌다. 대성인 자신이 「입정안국론」에서 이 경문들을 인용하면서, 석존 이후의 불법에서는 비방하는 승려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그 보시를 끊는 것이라고 해석하신 바 있다. 묘락의 「일체의 경론은 이 둘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맺음은 섭수와 절복이 불교 홍교의 보편적 두 원리임을 확인한다.
법화문구 — 굳셈과 부드러움, 각각 한 끝
셋째 문증은 천태대사의 『법화문구』로, 질문자의 물음과 거의 같은 문답을 담고 있다. 묻는다. 열반경은 국왕에게 의탁하여 활과 화살을 지니고 악인을 꺾으라 하고, 법화경(안락행품)은 권세를 멀리하고 겸손하며 자애로우라 한다. 굳셈과 부드러움이 이렇게 크게 어긋나는데 어찌 다르지 않다 하는가.
답한다. 열반경은 오로지 절복을 논하지만 일자지에 머무니 어찌 섭수가 없겠는가. 법화경은 오로지 섭수를 밝히지만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진다」고 하니 절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각각 한 끝을 들어 때에 맞출 따름이다.
이 답은 섬세하다. 열반경의 절복은 겉으로는 엄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일체중생을 외아들처럼 사랑하는 일자지의 자비가 있다. 어석에 따르면 일자지는 보살의 초지이며, 『법화현의』는 「자 · 비 · 희는 화타의 사행이요 일자지는 그 증」이라 한다. 절복은 자비의 결과다. 반대로 법화경의 섭수는 부드럽지만, 다라니품에서 십나찰녀가 행자를 괴롭히는 자는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깨지리라고 맹세하듯 그 안에 절복의 엄함이 있다. 두 경이 서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한쪽 끝을 들어 보였을 뿐이며, 어느 끝을 드느냐는 「때에 맞출(適時)」 따름이다. 이 「適時而已」라는 말은 제61장의 마지막에 다시 나와 개목초 전체를 맺는 열쇠말이 된다.
열반경소 — 옛날은 평온, 지금은 험하다
넷째 문증은 장안대사의 『열반경소』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법을 지키려면 그 근본 마음의 하는 바를 취하고, 형식을 버리고 이치를 남겨 바로 대경을 넓힌다. 그러므로 「정법을 호지한다」는 것은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위의를 닦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은 평온하여 법이 넓혀졌으므로 계를 지니고 막대기를 지니지 말아야 했으나, 지금은 험하여 법이 가려졌으므로 막대기를 지니고 계를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금과 옛날이 모두 험하면 모두 막대기를, 모두 평온하면 모두 계를 지닌다. 취하고 버림을 마땅하게 하여 한쪽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장안의 해석은 섭수와 절복의 선택 기준을 「시대」에 둔다는 점에서 결정적이다. 지계와 위의로 상징되는 섭수는 평온한 시대, 법이 저절로 넓혀지는 시대의 방식이다. 막대기로 상징되는 절복은 험한 시대, 법이 가려진 시대의 방식이다. 어느 하나가 늘 옳은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취사해야 한다. 「한쪽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一向にす可からず)」는 말은 섭수만 고집하는 것도, 절복만 고집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뜻이다. 제60장에서 대성인은 이 문을 다시 인용하신다.
물과 불 — 섭수와 절복의 판정 기준
천태 · 묘락 · 장안의 해석을 다 든 뒤, 대성인은 당신의 말로 섭수와 절복의 관계를 정리하신다. 「무릇 섭수 · 절복이라 하는 법문은 물과 불과 같으니, 불은 물을 싫어하고 물은 불을 미워한다. 섭수하는 자는 절복을 비웃고, 절복하는 자는 섭수를 슬퍼한다.」
이 묘사는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짚는다. 섭수를 행하는 이는 절복하는 이를 거칠고 지나치다고 비웃는다. 절복을 행하는 이는 섭수하는 이를 보며 그 미지근함을 슬퍼한다. 두 방식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성립하기 어렵고, 서로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어느 때에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기준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성인이 세우신 기준은 이렇다. 무지하고 악한 사람이 국토에 가득할 때는 섭수를 앞세우니 안락행품과 같다. 삿된 지혜를 지닌 방법의 자가 많을 때는 절복을 앞세우니 상불경품과 같다. 이 대비에서 핵심은 「무지(無智)」와 「사지(邪智)」, 「악인(悪人)」과 「방법(謗法)」의 차이다. 무지한 사람은 아직 법을 모를 뿐이니,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차근차근 이끌면 된다. 그러나 삿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릇된 가르침을 바른 것으로 굳게 믿고 정법을 비방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 그릇됨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바른 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를 대성인은 일상의 비유로 보이신다. 더울 때에 찬물을 쓰고 추울 때에 불을 좋아한다. 같은 물이 여름에는 생명을 살리고 겨울에는 괴로움이 되며, 같은 불이 겨울에는 반갑고 여름에는 견디기 어렵다. 이어서 자연의 비유를 더하신다. 초목은 해의 권속이라 추운 달에는 괴로움을 받고, 모든 물은 달의 소종이라 더울 때에는 본성을 잃는다. 무엇이 옳으냐는 그것이 놓인 때와 조건을 떠나서는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불경보살 — 절복의 본보기
절복의 본보기로 상불경품을 드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 겉으로 보면 상불경보살의 행동은 결코 공격적이지 않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배하며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한다,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부처가 되리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절복인가.
니치칸 상인이 인용하는 『법화문구』 권10의 해석이 그 답을 준다. 「본래 선근이 있는 이(本已有善)에게는 석가가 작은 법(小)으로 지켜 보호하고, 본래 선근이 없는 이(本未有善)에게는 불경이 큰 법(大)으로 강하게 독을 준다(強毒).」 상불경보살이 상대한 증상만의 사중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며 막대기와 돌로 그를 때렸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상대가 거부하고 박해하는데도 굳이 법을 들려준다는 것, 그리하여 비방이라는 역연(逆縁)으로라도 법과 인연을 맺게 하는 것이 「강독」의 뜻이다. 상불경보살이 맺게 한 역연의 사람들은 오랜 고통 끝에 다시 그를 만나 법화경 회좌에서 교화받았다고 경은 설한다. 절복의 핵심은 말투의 강약이 아니라, 상대가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바른 법을 들려주어 성불의 종자를 심는 데 있다.
대성인은 「법화취요초」에서 말법의 홍교를 바로 이 상불경품에 비기셨다.
末法に於ては大小・権実・顕密共に教のみ有つて得道無し一閻浮提皆謗法と為り畢んぬ逆縁の為には但妙法蓮華経の五字に限る例せば不軽品の如し我が門弟は順縁なり日本国は逆縁なり
말법에 있어서는 대승 · 소승, 권교 · 실교, 현교 · 밀교 모두 가르침만 있고 득도는 없으며, 일염부제가 모두 방법이 되어 버렸느니라. 역연을 위해서는 다만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한하느니, 예컨대 불경품과 같으니라. 나의 문제는 순연이요, 일본국은 역연이니라
「무지 · 악인」과 「사지 · 방법」의 대비는 제57~58장의 「삼장사마」와도 이어진다. 무지한 사람에게는 섭수로 충분하지만, 정법을 알면서 비방하는 사지의 사람이 가득한 때에 섭수만 행하면 정법은 끝내 가려지고 만다. 대성인이 당세 일본을 「파법의 나라」로 보신 근거는 염불 · 선 · 진언 등이 법화경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현실에 있었다.
「말법에도 섭수와 절복이 있어야 한다」 — 악국과 파법의 나라
장의 끝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맺으신다. 「말법에도 섭수와 절복이 있어야 하니, 이른바 악국과 파법의 두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국의 지금 세상은 악국인가 파법의 나라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 문장은 읽기에 따라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말법에 섭수 · 절복이 있어야 한다」는 말만 떼어 보면, 말법에도 섭수와 절복을 겸하여 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는 바로 이 점을 경계한다. 개목초를 비롯하여 「여설수행초」 · 「사도어서」 등 대성인은 생애를 통해 섭절 두 문 가운데 말법은 절복이라고 말씀하셨고, 대성인 자신의 일생이 실제로 몸소 절복을 행하신 것이었다. 그런데도 섭수라도 좋은 듯한 설을 세우거나, 입으로는 절복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절복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또 이 「섭수 · 절복이 있어야 한다」는 문에서 말법에도 섭수와 절복을 겸해 행한다는 착각에 빠진 이도 있다. 강의는 이러한 그릇된 해석을 바로잡기 위해 니치칸 상인의 「개목초우기(開目抄愚記)」를 인용한다.
현대어역은 이 마지막 문장의 뜻을 이렇게 풀었다. 말법에도 무지 · 악인의 악국과 사지 · 방법의 파법의 나라가 있을 수 있으니, 악국에서는 섭수를 행하고 파법의 나라에서는 절복을 행한다. 그렇다면 일본국의 지금 세상은 어느 쪽인가. 사지 · 방법의 나라임은 분명하며, 절복이 아니면 홍법도 불가능하고 결코 공덕을 받을 수 없다. 대성인은 「알아야 한다(しるべし)」고 물음의 형태로 맺으셨지만, 그 답은 앞 장들에서 이미 주어져 있었다. 염불이 「법화경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선종이 「교외별전」을 내세우는 나라, 정법을 비방하는 가르침이 온 나라에 가득한 일본은 파법의 나라다.
니치칸 상인의 「다섯 가지 뜻」 — 말법은 왜 절복인가
강의가 인용하는 니치칸 상인의 「개목초우기」는 「말법에 섭수 · 절복이 있어야 한다」는 문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묻는다. 그렇다면 말법에 또한 섭수를 행해야 하는가. 답한다. 섭절 두 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여러 뜻이 난만하나, 이제 잠시 다섯 가지 뜻(五義)으로 정리한다.
첫째, 가르침(教法)에 따라
그 대지를 논하면 법화경은 바로 절복의 가르침이다. 법화경의 개현은 이전 경의 권리(権理)를 깨뜨리고 법화경의 실리(実理)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법화현의』 제9에 「법화는 절복이니 권문의 이치를 깨뜨린다(法華折伏・破権門理)」고 한 것이 그 근거이며, 본문과 적문의 개현도 이에 준하여 알 수 있다. 대성인은 「여설수행초」에서 이 천태의 말을 들어 말법의 홍교를 이렇게 밝히셨다.
此の時は闘諍堅固・白法隠没の時と定めて権実雑乱の砌なり、敵有る時は刀杖弓箭を持つ可し敵無き時は弓箭兵杖何にかせん、今の時は権教即実教の敵と成るなり、一乗流布の時は権教有つて敵と成りて・まぎらはしくば実教より之を責む可し、是を摂折二門の中には法華経の折伏と申すなり
이때는 투쟁견고 · 백법은몰의 때로 정해져 있으며 권교와 실교가 뒤섞여 어지러운 때이니라. 적이 있을 때는 칼과 막대기와 활과 화살을 지녀야 하고, 적이 없을 때는 활과 화살과 병장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때에는 권교가 곧 실교의 적이 되었느니라. 일승이 유포할 때에 권교가 있어 적이 되어 헷갈리게 한다면 실교로부터 이를 책망해야 하느니, 이것을 섭절 두 문 가운데 법화경의 절복이라 하느니라
둘째, 기연(機縁)에 따라
만약 본래 선근이 있는 중생(本已有善)이라면 섭수의 문으로 지켜 보호하고, 본래 선근이 없는 중생(本未有善)이라면 절복의 문으로 강하게 독을 준다. 그러므로 『법화문구』 제10에 「본이유선은 석가가 소(小)로 지켜 보호하고, 본미유선은 불경이 대(大)로 강하게 독을 준다」고 했다. 석존 재세의 중생은 과거에 이미 성불의 씨앗을 받은 본이유선의 사람들이었으므로 석존은 근기에 맞추어 차례로 법을 설해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말법의 중생은 과거에 씨앗을 받지 못한 본미유선의 사람들이므로, 상불경보살처럼 곧바로 큰 법을 들려주어 역연으로라도 씨앗을 심어야 한다. 이것이 개목초가 거듭 밝혀 온 「하종」의 뜻과 이어진다.
셋째, 시절(時節)에 따라
니치칸 상인은 대성인의 말씀을 들어, 말법에는 대소 · 권실 · 현밀 모두 가르침만 있고 득도는 없으며, 일염부제가 모두 방법이 되었으니 역연을 위해서는 다만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한하며 예컨대 불경품과 같다고 한다. 앞에서 본 「법화취요초」의 문이다. 그리고 「아래 문(下文)」, 곧 개목초 제60장의 「설령 산림에 섞여 일념삼천의 관을 닦더라도 … 때와 기근을 알지 못하고 섭절 두 문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찌 생사를 떠날 수 있겠는가」를 들고, 이러한 문은 일일이 헤아릴 겨를이 없다고 한다. 「선시초」의 첫머리도 같은 원리를 선언한다.
夫れ仏法を学せん法は必ず先づ時をならうべし
무릇 불법을 배우는 법은 반드시 먼저 때를 익혀야 하느니라
넷째, 국토(国土)에 따라 — 이 문의 뜻
넷째가 바로 개목초 제59장의 이 문의 뜻이다. 말법은 절복의 때라고 하지만, 만약 옆으로 다른 나라를 찾아본다면 어찌 악국이 없겠는가. 그 악국에서는 섭수를 앞세워야 한다. 그러나 일본국의 지금 세상은 파법의 나라임이 분명하니, 그러므로 절복을 앞세워야 한다. 니치칸 상인의 해석에 따르면 「말법에 섭수 · 절복이 있어야 한다」는 문은 말법의 한 나라 안에서 두 방식을 겸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말법이라는 같은 시대 안에서도 나라에 따라 무지 · 악인의 나라와 사지 · 방법의 나라가 있을 수 있다는 원리적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당세 일본은 분명히 파법의 나라이므로 절복이 정해진다.
다섯째, 교법 유포의 앞뒤에 따라
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 등은 모두 그 앞에 유포되어 있던 교법을 깨뜨리고, 그때의 기근에 맞아 중생을 이롭게 하는 교법을 넓혔다. 이제 대성인도 그러하시니, 앞 시대에 유포된 이전과 적문을 깨뜨리고 말법에 때를 맞춘 큰 백법(大白法), 곧 본문 수량품의 간심을 넓히신다. 그 모습은 여러 어서와 같으므로 줄인다. 이 다섯째 뜻은 불법의 역사 전체가 「앞의 교법을 깨뜨리고 때에 맞는 교법을 세우는」 절복의 연속이었다는 관점이다. 천태는 남삼북칠의 학설을 깨뜨렸고 전교는 남도 육종을 깨뜨렸다. 대성인의 절복은 그 정통의 계승이다.
- ①교법(教法)에 따라법화는 바로 절복의 가르침法華折伏・破権門理법화는 절복이니 권문의 이치를 깨뜨린다(법화현의 제9)
- ②기연(機縁)에 따라본이유선은 섭수로 지켜 보호, 본미유선은 절복으로 강독本已有善釈迦以小而将護之 本未有善不軽以大而強毒之본이유선은 석가가 소(小)로 지켜 보호하고, 본미유선은 불경이 대(大)로 강하게 독을 준다(법화문구 제10)
- ③시절(時節)에 따라말법은 교만 있고 득도 없음 · 역연을 위해 다만 묘법 다섯 자 · 불경품과 같다
- ④국토(国土)에 따라이 문의 뜻다른 나라에 악국이 있으면 섭수, 당세 일본은 파법의 나라이므로 절복
- ⑤교법 유포의 앞뒤에 따라용수 · 천친 · 천태 · 전교가 앞의 교법을 깨뜨리고 때에 맞는 교법을 넓혔듯, 대성인은 이전 · 적문을 깨뜨리고 본문 수량품의 간심을 넓히신다
『승만경』의 섭수 · 절복 — 「영법구주」를 위하여
강의가 밝히듯 「섭수」와 「절복」이라는 이름은 『승만경』(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T12 no.353)에서 나왔다. 승만부인은 부처 앞에서 열 가지 큰 서원(十大受)을 세우는데, 그 끝에 이렇게 말한다.
我得力時。於彼彼處見此衆生。應折伏者而折伏之。應攝受者而攝受之。何以故。以折伏攝受故令法久住。
제가 힘을 얻을 때, 이곳저곳에서 이러한 중생을 보면 절복해야 할 자는 절복하고 섭수해야 할 자는 섭수하겠나이다. 왜냐하면 절복하고 섭수함으로써 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옵니다
섭수와 절복의 목적이 「법을 오래 머물게 함(令法久住)」에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제61장의 첫머리에서 대성인은 보탑품의 「영법구주 고래지차(令法久住・故来至此)」를 인용하신다. 석가 · 다보 · 시방분신의 제불이 모인 까닭이 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함이었듯, 섭수와 절복도 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절복은 다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법이 미래에 전해지게 하기 위한 자비의 실천이라는 것, 이것이 제59장의 물음 「다투는 마음이 아닌가」에 대한 근본의 답이다.
「사도어서」와 「여설수행초」 — 때에 따른 실천
개목초 직후에 쓰신 「사도어서」는 이 장의 원리를 더 구체적으로 펼친다.
仏法は摂受・折伏時によるべし譬ば世間の文・武二道の如しされば昔の大聖は時によりて法を行ず雪山童子・薩埵王子は身を布施とせば法を教へん菩薩の行となるべしと責しかば身をすつ、肉をほしがらざる時身を捨つ可きや紙なからん世には身の皮を紙とし筆なからん時は骨を筆とすべし
불법은 섭수 · 절복이 때에 따라야 하느니, 비유하면 세간의 문(文)과 무(武) 두 길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옛날의 대성은 때에 따라 법을 행하였느니라. 설산동자와 살타왕자는 「몸을 보시하면 법을 가르쳐 주리라, 보살의 행이 되리라」고 요구받았기에 몸을 버렸느니라. 고기를 원하지 않는 때에 몸을 버려야 하겠는가. 종이가 없는 세상에서는 몸의 가죽을 종이로 삼고, 붓이 없을 때는 뼈를 붓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이어서 대성인은 파계 · 무계를 헐뜯고 지계와 정법을 쓰는 세상에서는 계를 굳게 지니고, 유교 · 도교로 불교를 막는 날에는 도안 · 혜원 · 법도삼장처럼 왕과 논쟁하여 목숨을 가벼이 하며, 불교 안에서 대소 · 권실이 뒤섞여 구슬과 기와를 가리지 못할 때는 천태 · 전교처럼 대소 · 권실 · 현밀을 강성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하신다. 같은 「법을 위해 몸을 바침」이라도 그 형태는 때에 따라 다르다. 설산동자의 투신, 「가죽을 종이로 뼈를 붓으로」 삼는 일은 제61장에서 낙법범지의 고사로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사도어서」는 「정법은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때와 기근에 맞으면 반드시 득도하고, 천 가지 경과 만 가지 논을 배워도 때와 기근에 어긋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맺는다.
「여설수행초」는 더 직설적이다.
然るに摂受たる四安楽の修行を今の時行ずるならば冬種子を下して春菓を求る者にあらずや、鷄の暁に鳴くは用なり宵に鳴くは物怪なり、権実雑乱の時法華経の御敵を責めずして山林に閉じ篭り摂受を修行せんは豈法華経修行の時を失う物怪にあらずや。
그런데 섭수인 사안락행의 수행을 지금 때에 행한다면 겨울에 씨앗을 뿌리고 봄에 열매를 구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닭이 새벽에 우는 것은 쓸모가 있으나 초저녁에 우는 것은 괴이한 일이니라. 권교와 실교가 뒤섞여 어지러운 때에 법화경의 적을 책망하지 않고 산림에 틀어박혀 섭수를 수행한다면 어찌 법화경 수행의 때를 잃은 괴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질문자가 근거로 든 안락행품의 수행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섭수의 때에 맞는 바른 수행이다. 그러나 때를 잃으면 바른 수행도 「겨울에 뿌린 씨앗」이 되고 「초저녁에 우는 닭」이 된다. 이 「때를 잃은 수행」의 비유는 제60장의 「가을 끝에 씨앗을 뿌린다」는 비유로 이어진다.
강의의 관점 — 「말법에 섭수 · 절복이 있어야 한다」는 문은 말법에 두 방식을 겸행하라는 뜻이 아니다. 니치칸 상인의 다섯 가지 뜻에 따르면 가르침 · 기근 · 시절 · 국토 · 교법 유포의 앞뒤 어느 쪽으로 보아도 말법의 일본은 절복이며, 대성인의 일생이 그 실천이었다.
본문
問うて云く摂受の時・折伏を行ずると折伏の時・摂受を行ずると利益あるべしや、 答えて云く涅槃経に云く「迦葉菩薩仏に白して言く如来の法身は金剛不壊なり未だ所因を知ること能わず云何、 仏の言く迦葉能く正法を護持する因縁を以ての故に是の金剛身を成就することを得たり、 迦葉我護持正法の因縁にて今是の金剛身常住不壊を成就することを得たり、 善男子正法を護持する者は五戒を受けず威儀を修せず応に刀剣弓箭を持つべし、 是くの如く種種に法を説くも然も故師子吼を作すこと能わず非法の悪人を降伏すること能わず、 是くの如き比丘自利し及び衆生を利すること能わず、 当に知るべし是の輩は懈怠懶惰なり能く戒を持ち浄行を守護すと雖も当に知るべし是の人は能く為す所無からん、 乃至時に破戒の者有つて是の語を聞き已つて咸共に瞋恚して是の法師を害せん是の説法の者・設い復命終すとも故持戒自利利他と名く」等云云、 章安の云く「取捨宜きを得て一向にす可からず」等、天台云く「時に適う而已」等云云、 譬へば秋の終りに種子を下し田畠をかえさんに稲米をうることかたし、 建仁年中に法然・大日の二人・出来して念仏宗・禅宗を興行す、 法然云く「法華経は末法に入つては未有一人得者・千中無一」等云云、 大日云く「教外別伝」等云云、此の両義・国土に充満せり、 天台真言の学者等・念仏・禅の檀那を・へつらいをづる事犬の主にををふり・ねづみの猫ををそるるがごとし、 国王・将軍に・みやづかひ破仏法の因縁・破国の因縁を能く説き能くかたるなり、 天台・真言の学者等・今生には餓鬼道に堕ち後生には阿鼻を招くべし、 設い山林にまじわつて一念三千の観をこらすとも空閑にして三密の油をこぼさずとも時機をしらず摂折の二門を弁へずば・いかでか生死を離るべき。 問うて云く念仏者・禅宗等を責めて彼等に・あだまれたる・いかなる利益かあるや、 答えて云く涅槃経に云く「若し善比丘法を壊る者を見て置いて呵責し駈遣し挙処せずんば当に知るべし是の人は仏法の中の怨なり、 若し能く駈遣し呵責し挙処せば是れ我が弟子真の声聞なり」等云云、 「仏法を壊乱するは仏法中の怨なり慈無くして詐り親しむは是れ彼が怨なり能く糾治せんは是れ護法の声聞真の我が弟子なり彼が為に悪を除くは即ち是れ彼が親なり能く呵責する者は是れ我が弟子駈遣せざらん者は仏法中の怨なり」等云云。
물어 이르되, 섭수의 때에 절복을 행하고, 절복의 때에 섭수를 행하면 이익이 있겠는가. 답하여 이르되, 열반경에 이르되 「가섭보살이 부처께 아뢰기를, 여래의 법신은 금강과 같아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 아직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니 어찌 된 것이옵니까. 부처께서 말씀하시되, 가섭이여, 정법을 잘 호지한 인연으로 이 금강신을 성취할 수 있었느니라. 가섭이여, 나는 정법을 호지한 인연으로 지금 이 금강신의 상주불괴(常住不壊)를 성취할 수 있었느니라. 선남자여, 정법을 호지하는 자는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더라도 마땅히 칼과 검과 활과 화살을 지녀야 하느니라. (계를 지니고) 이와 같이 갖가지로 법을 설하더라도 끝내 사자후를 하지 못하고 법 아닌 악인을 항복시키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자신을 이롭게 하지도 중생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느니라. 마땅히 알라, 이러한 무리는 게으르고 나태하니, 계를 잘 지니고 청정한 행을 지킨다 하더라도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할 수 있는 바가 없으리라. 내지 그때 파계한 자가 있어 이 말을 다 듣고는 모두 함께 성내어 이 법사를 해치더라도, 이 설법하는 자는 설령 목숨을 마치더라도 여전히 지계(持戒)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자라고 이름하느니라」 하였느니라. 장안이 이르되 「취하고 버림을 마땅하게 하여 한쪽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천태가 이르되 「때에 맞출 따름이다」 하였느니라. 비유하면 가을 끝에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갈아도 벼와 쌀을 얻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라. 건인(建仁) 연간에 호넨(法然) · 다이니치(大日) 두 사람이 나와서 염불종 · 선종을 일으켰느니라. 호넨은 이르되 「법화경은 말법에 들어서는 아직 한 사람도 얻은 자가 없고(未有一人得者), 천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千中無一)」 하였고, 다이니치는 이르되 「교외별전(教外別伝)」이라 하였느니라. 이 두 뜻이 국토에 가득하느니라. 천태 · 진언의 학자들이 염불과 선의 단나(檀那)에게 아첨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개가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쥐가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으니라. 국왕과 장군을 섬기며 불법을 깨뜨리는 인연과 나라를 깨뜨리는 인연을 잘 설하고 잘 말하느니라. 천태 · 진언의 학자들은 금생에는 아귀도에 떨어지고 후생에는 아비지옥을 부르리라. 설령 산림에 섞여 일념삼천의 관(観)을 닦고, 고요한 곳에서 삼밀(三密)의 기름을 엎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와 기근을 알지 못하고 섭절 두 문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찌 생사를 떠날 수 있겠는가. 물어 이르되, 염불자 · 선종 등을 책망하여 그들에게 원망을 받는 것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답하여 이르되, 열반경에 이르되 「만약 선한 비구가 법을 무너뜨리는 자를 보고도 그대로 두어 꾸짖지 않고(呵責) 쫓아내지 않고(駈遣) 죄를 들어 처분하지 않는다면(挙処),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불법 가운데의 원수이니라. 만약 잘 쫓아내고 꾸짖고 죄를 들어 처분한다면, 이는 나의 제자요 참된 성문이니라」 하였느니라. (장안은 이르되) 「불법을 무너뜨려 어지럽히는 것은 불법 가운데의 원수이니라.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은 그의 원수이니라. 잘 바로잡아 다스리는 자는 호법의 성문이요 참된 나의 제자이니라.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니라. 잘 꾸짖는 자는 나의 제자요, 쫓아내지 않는 자는 불법 가운데의 원수이니라」 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 迦葉菩薩가섭보살
- 열반경 가섭보살품의 대고중. 가섭동자, 가섭동자보살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십대제자의 마하가섭과는 다른 사람이다. 열반경에서 부처에게 서른여섯 가지 물음을 내었으며, 이전 사십여 년의 회좌에도 법화경의 회좌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열반경에서 비로소 거두어진 「군습(捃拾)의 기근」의 사람이다.
- 金剛身금강신
- 금강처럼 단단하여 무너지지 않는 여래의 몸. 열반경 금강신품은 여래의 법신이 상주불괴인 까닭을 「정법을 호지한 인연」에서 찾는다.
- 師子吼사자후
- 사자가 울부짖으면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듯, 부처나 보살이 두려움 없이 바른 법을 설하는 것. 여기서는 그릇된 가르침을 깨뜨리는 당당한 설법을 뜻한다.
- 懈怠懶惰해태나타
- 게으르고 나태함. 계율은 지키되 정법을 지키려 나서지 않는 비구를 열반경은 이렇게 꾸짖는다.
- 自利利他자리이타
-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 대승 보살행의 두 측면.
- 建仁年中건인 연간
- 쓰치미카도 천황 때의 연호로 1201~1204년. 대성인은 호넨과 다이니치가 이 무렵 염불종과 선종을 일으켜 세상에 퍼뜨렸다고 보신다.
- 法然호넨
- 1133–1212. 일본 정토종의 개조. 『선택본원염불집』을 지어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경을 「버리고(捨) 닫고(閉) 내버려 두고(閣) 던지라(抛)」고 하여 칭명염불만을 권했다. 「미유일인득자(未有一人得者)」는 중국 정토교의 도작이 『안락집』에서, 「천중무일(千中無一)」은 선도가 말한 것을 호넨이 인용하여 성도문의 수행으로는 말법에 득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 말이다.
- 大日다이니치
- 다이니치 노닌(大日能忍). 헤이안 말 · 가마쿠라 초의 선승으로,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다고 하며 제자를 송나라에 보내 인가를 받아 달마종을 열었다. 생몰년은 분명하지 않다. 대성인은 그를 일본 선종의 시초로 보아 호넨과 나란히 드신다.
- 教外別伝교외별전
- 부처의 참된 깨달음은 경전의 가르침 밖에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다는 선종의 주장. 현대어역은 「경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석가의 깨달음은 달 자체이니, 가르침 밖에 따로 전해진 것이 선종」이라고 풀었다.
- 檀那단나
- 범어 다나의 음사로 보시하는 사람, 시주. 사찰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신도.
- 餓鬼道・阿鼻아귀도 · 아비
- 아귀도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애. 아비는 무간지옥. 금생에는 단나에게 매달려 탐내는 아귀의 삶을 살고, 후생에는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는 뜻.
- 三密の油をこぼさず삼밀의 기름을 엎지르지 않는다
- 삼밀은 손으로 인계(印契)를 맺는 신밀, 입으로 진언을 외우는 어밀, 마음으로 본존을 관념하는 의밀. 「기름을 엎지르지 않는다」는 기름이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한 방울도 흘리지 않듯 한마음으로 흐트러짐 없이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 呵責・駈遣・挙処가책 · 구견 · 거처
- 가책은 말로 상대의 죄과를 꾸짖고 추궁하는 것. 구견은 그곳에서 쫓아내는 것. 거처는 그 죄과를 들추어 처분하는 것, 곧 세상과 나라를 들어 방법의 자를 처분하는 것이다.
- 声聞성문
- 본래 부처의 목소리를 듣고 깨닫는 제자. 여기서 「참된 성문」은 부처의 가르침을 바로 듣고 지키는 참된 제자를 뜻한다.
- 糾治규치
- 잘못을 바로잡아 다스림.
때를 어긴 수행에는 이익이 없다
제60장은 앞 장의 결론을 이어받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섭수의 때에 절복을 행하고 절복의 때에 섭수를 행하면 이익이 있겠는가. 대성인은 「이익이 없다」고 직접 말씀하지 않고, 열반경의 긴 문을 들어 답하신다. 현대어역은 이 답을 「다시 말해 이익은 없다」고 맺었다.
열반경 금강신품의 문은 가섭보살의 물음에서 시작한다. 여래의 법신은 금강과 같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부처는 답한다. 정법을 잘 호지한 인연으로 이 금강신을 성취했다. 이 대답은 놀랍다. 부처의 몸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 선정이나 지혜가 아니라 「정법을 지킨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57장의 「호법의 공덕력」과 정확히 이어진다. 금생에 숙업을 가볍게 받아 끝내는 힘도, 부처의 몸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힘도 모두 호법에서 나온다.
이어서 경은 정법을 지키는 자의 모습을 그린다. 정법을 호지하는 자는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더라도 칼과 활을 지녀야 한다. 계를 지니고 갖가지로 법을 설하더라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고 법 아닌 악인을 항복시키지 못한다면, 그 비구는 자신도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 그런 무리는 게으르고 나태하니, 계를 잘 지니고 청정한 행을 지킨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반대로 파계한 자들이 이 말을 듣고 성내어 법사를 해치더라도, 그 설법자는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여전히 「지계하여 자리이타하는 자」라고 불린다.
이 경문은 계율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다. 계를 지키는 것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하지만, 정법을 지키려 나서지 않는다면 계를 지켜도 「자리」조차 되지 않는다. 반대로 계의 형식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정법을 지키다 목숨을 잃는 이는 참된 「지계」의 사람이다. 앞 장에서 장안이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풀이한 「위의를 닦지 않는다」의 뜻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섭수의 때가 아닌 때에 섭수를 고집하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해태나타」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성인은 앞 장의 두 해석을 다시 드신다. 장안의 「취하고 버림을 마땅하게 하여 한쪽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와 천태의 「때에 맞출 따름」. 그리고 비유를 더하신다. 「가을 끝에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갈아도 벼와 쌀을 얻기 어렵다.」 씨앗도 좋고 밭도 좋고 농부의 노력도 성실하지만, 때가 틀리면 수확은 없다. 「여설수행초」의 「겨울에 씨앗을 뿌리고 봄에 열매를 구한다」는 비유와 같은 뜻이다. 수행의 좋고 나쁨은 수행 그 자체가 아니라 때와의 맞음에 따라 정해진다.

호넨과 다이니치 — 「이 두 뜻이 국토에 가득하다」
이어서 대성인은 일본의 현실로 눈을 돌리신다. 건인 연간에 호넨과 다이니치 두 사람이 나와 염불종과 선종을 일으켰다. 호넨은 「법화경은 말법에 들어서는 아직 한 사람도 얻은 자가 없고 천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고 했고, 다이니치는 「교외별전」이라 했다. 이 두 뜻이 온 나라에 가득하다.
「미유일인득자」와 「천중무일」은 본래 중국 정토교의 도작과 선도의 말이다. 호넨은 이것을 이어받아 법화경을 비롯한 성도문의 수행으로는 말법에 아무도 깨달을 수 없으니, 그런 경들을 버리고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만 외우라고 가르쳤다. 다이니치의 「교외별전」은 경전의 가르침 자체를 부처의 참된 깨달음 밖에 둔다. 두 주장은 방향은 다르지만 모두 법화경을 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같다. 제59장에서 말한 「사지 · 방법의 자가 많은 때」란 바로 이 상황이다. 이 두 뜻이 온 나라에 가득한 일본은 파법의 나라이며, 그러므로 절복의 때다.
천태 · 진언 학자들의 아첨 — 「개가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듯」
대성인의 비판은 염불과 선의 개조들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 앞에서 침묵하는 천태 · 진언의 학자들에게로 향한다. 「천태 · 진언의 학자들이 염불과 선의 단나에게 아첨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개가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쥐가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법화경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천태종의 학자들이 오히려 염불과 선을 믿는 유력한 단나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매달린다. 게다가 국왕과 장군을 섬기면서 불법을 깨뜨리고 나라를 깨뜨리는 인연을 잘 설하고 잘 말한다. 그러니 금생에는 아귀도에 떨어지고 후생에는 아비지옥을 부르리라고 대성인은 단언하신다.
「사도어서」에서 대성인은 같은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축생의 마음은 약한 자를 위협하고 강한 자를 두려워한다. 지금 세상의 학자들은 축생과 같으니, 지자의 약함을 업신여기고 왕법의 삿됨을 두려워한다. 아첨하는 신하라 함이 이것이다(畜生の心は弱きをおどし強きをおそる当世の学者等は畜生の如し智者の弱きをあなづり王法の邪をおそる諛臣と申すは是なり)」(957쪽). 개와 쥐의 비유는 권력 앞에서 진리를 굽히는 학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 장의 핵심 문장이 이어진다. 「설령 산림에 섞여 일념삼천의 관을 닦고, 고요한 곳에서 삼밀의 기름을 엎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와 기근을 알지 못하고 섭절 두 문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찌 생사를 떠날 수 있겠는가.」 일념삼천의 관법은 천태종의 가장 높은 수행이고, 삼밀의 수행은 진언종의 가장 높은 수행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흐트러짐 없이 닦아도, 지금이 어떤 때이고 중생이 어떤 기근이며 섭수와 절복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생사를 떠날 수 없다. 법화경이 버려지는 것을 보면서 산속에 틀어박혀 관법만 닦는 것은 「여설수행초」의 말대로 「때를 잃은 괴이한 일」이다. 니치칸 상인이 「다섯 가지 뜻」의 셋째, 시절의 뜻에서 이 문을 인용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강의는 이 대목에 대해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천태산(히에이산)은 법화경의 산인데, 대성인께서 법화경, 법화경 하고 강하게 외치시면서도 왜 그 산을 쓰지 않으셨는가. 여기에는 여러 깊은 까닭이 있으나 이 문에 한해서 논하면, 천태가 이미 법을 낮추고 방법을 책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제자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법화경을 독송해도 방법이 있으면 부처는 그 산에 머물지 않는다고 강의는 말한다. 전교대사가 세운 법화경의 도량이 자각 · 지증 이래 진언에 물들고, 이제는 염불 · 선의 단나에게 아첨하게 된 것이 대성인 당시 히에이산의 모습이었다.
강의의 관점 — 아무리 높은 관법과 수행을 닦아도 때와 기근을 모르고 섭수와 절복을 분별하지 못하면 생사를 떠날 수 없다. 방법을 보고도 책망하지 않으면 법화경의 산이라도 부처는 머물지 않는다.
「불법 가운데의 원수」와 「참된 나의 제자」
제60장의 둘째 문답은 더 직접적이다. 염불자와 선종을 책망하여 그들에게 원망을 받는 것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 대성인은 다시 열반경으로 답하신다.
「만약 선한 비구가 법을 무너뜨리는 자를 보고도 그대로 두어 꾸짖지 않고 쫓아내지 않고 죄를 들어 처분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불법 가운데의 원수이다. 만약 잘 쫓아내고 꾸짖고 죄를 들어 처분한다면, 이는 나의 제자요 참된 성문이다.」
이 경문은 「선한 비구」를 주어로 삼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스스로 계를 지키고 선하게 사는 비구라도, 법을 무너뜨리는 자를 보고 침묵하면 그는 「불법 가운데의 원수」가 된다. 그 자신이 악을 짓지 않아도, 악을 보고 방치하는 것이 이미 불법을 해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석은 가책 · 구견 · 거처를 세 단계로 설명한다. 말로 꾸짖고, 그곳에서 쫓아내고, 세상과 나라를 들어 처분한다. 대성인이 「입정안국론」에서 국주에게 방법의 시주를 끊으라고 간효하신 것은 이 「거처」를 국가에 요구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대성인은 장안의 『열반경소』의 문을 드신다(본문에는 출처가 적혀 있지 않으나 현대어역은 장안의 열반경소로 밝혔다). 「불법을 무너뜨려 어지럽히는 것은 불법 가운데의 원수이다.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은 그의 원수이다. 잘 바로잡아 다스리는 자는 호법의 성문이요 참된 나의 제자이다.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이다. 잘 꾸짖는 자는 나의 제자요, 쫓아내지 않는 자는 불법 가운데의 원수이다.」
이 문에는 두 종류의 「원수」가 나온다. 하나는 「불법 가운데의 원수」, 곧 불법 자체를 해치는 자다. 다른 하나는 「그의 원수」, 곧 상대 한 사람을 해치는 자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이 바로 그 상대의 원수라고 한다. 상대가 그릇된 가르침에 빠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관계가 상할까 두려워 말하지 않고 겉으로만 친하게 지내는 것, 그것은 상대를 불행으로 내모는 것을 방관하는 일이므로 상대에게 원수와 같다. 반대로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그의 어버이」다. 상대가 듣기 싫어하고 화를 내더라도 그 그릇됨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참된 부모의 마음이다.
- 가책(呵責)말로 꾸짖음
- 구견(駈遣)쫓아냄
- 거처(挙処)죄를 들어 처분함
자비로서의 절복 —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앤다」
강의는 이 문을 일상의 인간관계로 끌어와 푼다. 절복을 행해야 할 시대에는 반드시 절복이어야 한다. 친구든 부모와 자식이든 부부든, 「자비의 마음」 없이 거짓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은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서로 원수의 사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앤다」는 것은 언뜻 친밀함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상대에게 「어버이」가 되는 것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강의는 이어서 악에도 작은 악과 중간의 악이 있을 것이라 한다. 작고 중간인 악은 그렇다 해도, 큰 악만은 반드시 없애 주어야 한다. 큰 악이란 그릇된 종교를 믿는 것이며, 또 그것을 믿는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 것도 큰 악이다. 저급한 사상과 종교만큼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으며, 대성인이 목숨을 걸고 불행의 원인으로 외치신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고 민중의 불행을 슬퍼하는 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정법에 귀의하여 한 나라의 낙토 건설에 온 힘을 다해야 할 때라고 맺는다.
이 「작은 악 · 중간의 악 · 큰 악」의 구별은 절복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한다. 절복은 사람의 사소한 결점이나 생활 습관을 하나하나 꾸짖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근본을 그르치는 큰 악, 곧 정법을 비방하고 그릇된 가르침을 믿는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그를 위하여」, 곧 상대의 행복을 위한 자비다. 제59장의 물음 「다투는 마음이 아닌가」에 대해, 제60장은 「다투는 마음이 아니라 어버이의 마음」이라고 답한다.
이 논리는 다음 장의 첫머리로 곧바로 이어진다. 제61장에서 대성인은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은 곧 그의 원수」와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라는 이 두 문을 다시 인용하시고,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에게 주사부모이니라」는 선언으로 나아가신다. 제60장의 「어버이(親)」는 개목초 첫머리의 주사친 삼덕 가운데 「친덕」으로 되돌아가는 다리다.
본문
夫れ法華経の宝塔品を拝見するに釈迦・多宝・十方分身の諸仏の来集はなに心ぞ「令法久住・故来至此」等云云、 三仏の未来に法華経を弘めて未来の一切の仏子にあたえんと・おぼしめす御心の中をすいするに父母の一子の大苦に値うを見るよりも強盛にこそ・みへたるを 法然いたはしとも・おもはで末法には法華経の門を堅く閉じて人を入れじとせき狂児をたぼらかして宝をすてさするやうに法華経を抛させける心こそ無慚に見へ候へ、 我が父母を人の殺さんに父母につげざるべしや、 悪子の酔狂して父母を殺すをせいせざるべしや、 悪人・寺塔に火を放たんにせいせざるべしや、 一子の重病を炙せざるべしや、 日本の禅と念仏者とを・みて制せざる者は・かくのごとし「慈無くして詐り親しむは即ち是れ彼が怨なり」等云云。 日蓮は日本国の諸人にしうし父母なり一切天台宗の人は彼等が大怨敵なり「彼が為に悪を除くは即ち是れ彼が親」等云云、 無道心の者生死をはなるる事はなきなり、 教主釈尊の一切の外道に大悪人と罵詈せられさせ給い天台大師の南北・並びに得一に三寸の舌もつて五尺の身をたつと伝教大師の南京の諸人に「最澄未だ唐都を見ず」等といはれさせ給いし皆法華経のゆへなればはぢならず 愚人にほめられたるは第一のはぢなり、 日蓮が御勘気を・かほれば天台・真言の法師等・悦ばしくや・をもうらんかつはむざんなり・かつはきくわいなり、 夫れ釈尊は娑婆に入り羅什は秦に入り伝教は尸那に入り提婆師子は身をすつ薬王は臂をやく上宮は手の皮をはぐ釈迦菩薩は肉をうる楽法は骨を筆とす、 天台の云く「適時而已」等云云、 仏法は時によるべし日蓮が流罪は今生の小苦なれば・なげかしからず、 後生には大楽を・うくべければ大に悦ばし。
무릇 법화경 보탑품을 배견하건대, 석가 · 다보 · 시방분신의 제불이 와서 모이신 것은 무슨 마음인가. 「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고 이곳에 왔다(令法久住・故来至此)」 하였느니라. 세 부처께서 미래에 법화경을 넓혀 미래의 일체 불자에게 주고자 하시는 마음속을 헤아려 보건대, 부모가 외아들이 큰 고통을 만나는 것을 보는 것보다도 강성하게 보이시거늘, 호넨은 이를 가엾게도 여기지 않고, 말법에는 법화경의 문을 굳게 닫아 사람을 들이지 않으려고 막고, 미친 아이를 속여 보배를 버리게 하듯이 법화경을 내던지게 한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무참하게 보이느니라. 내 부모를 남이 죽이려 하는데 부모에게 알리지 않겠는가. 못된 자식이 술에 취해 미쳐서 부모를 죽이려 하는 것을 막지 않겠는가. 악인이 사탑에 불을 지르려 하는 것을 막지 않겠는가. 외아들의 중병에 뜸을 뜨지 않겠는가. 일본의 선과 염불자를 보고도 막지 않는 자는 이와 같으니,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은 곧 그의 원수이다」라고 하였느니라.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諸人)에게 주사부모(主師父母)이니라. 일체의 천태종 사람은 그들의 큰 원수이니라.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라고 하였느니라. 도심(道心)이 없는 자가 생사를 떠나는 일은 없느니라. 교주 석존께서 일체의 외도에게 대악인이라 매리당하시고, 천태대사께서 남북(南北)과 아울러 득일(得一)에게 「세 치 혀로 다섯 자의 몸을 끊는다」는 말을 들으시고, 전교대사께서 남경(南京)의 여러 사람에게 「최징은 아직 당나라 도읍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들으신 것은 모두 법화경 때문이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라.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제일의 부끄러움이니라. 니치렌이 어감기(御勘気)를 입으니 천태 · 진언의 법사들은 기쁘게 여기리라. 한편으로는 무참하고 한편으로는 기괴하니라. 무릇 석존은 사바에 들어오셨고, 나집은 진(秦)에 들어갔고, 전교는 중국에 들어갔으며, 제바와 사자는 몸을 버렸고, 약왕은 팔을 태웠고, 상궁은 손의 가죽을 벗겼고, 석가보살은 살을 팔았고, 낙법은 뼈를 붓으로 삼았느니라. 천태가 이르되 「때에 맞출 따름이다(適時而已)」 하였느니라. 불법은 때에 따라야 하느니라. 니치렌의 유죄는 금생의 작은 괴로움이니 한탄스럽지 않으니라. 후생에는 큰 즐거움을 받을 것이니 크게 기쁘니라.
어구 풀이
- 令法久住・故来至此영법구주 · 고래지차
- 법화경 견보탑품의 문. 「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고 이곳에 왔다」는 뜻. 석가 · 다보 · 시방분신의 제불이 허공회에 모인 목적이 부처 멸후 법화경을 오래 머물게 하는 데 있음을 밝힌다. 제43장에서 다룬 「보탑품 삼개의 칙선」의 배경이 되는 문이다.
- 三仏삼불
- 석가불 · 다보불 · 시방분신의 제불. 보탑품의 허공회에 모여 법화경의 진실을 증명하고 멸후의 홍통을 권한 세 부처.
- 狂児광아
- 미친 아이. 법화경 여래수량품의 양의(良医)의 비유에서 독약을 마시고 본심을 잃은 아이들이 좋은 약을 먹지 않으려 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대성인은 호넨이 사람들을 속여 보배인 법화경을 버리게 한 것을 미친 아이를 꾀어 보배를 버리게 하는 데 비기셨다.
- 抛포
- 내던짐. 호넨이 『선택본원염불집』에서 법화경 등 정토 삼부경 이외의 경을 「버리라 · 닫으라 · 내버려 두라 · 던지라(捨閉閣抛)」고 한 것을 가리킨다.
- しうし父母주사부모
- 주인(主) · 스승(師) · 부모(父母). 개목초 첫머리에 표시한 주사친 삼덕을 갖추었다는 선언이다.
- 一切天台宗の人일체의 천태종 사람
- 대성인 당시 천태종의 승려들. 법화경을 근본으로 삼는 종파이면서도 염불 · 선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진언에 기운 당시의 천태종을 가리킨다.
- 無道心무도심
- 불도를 구하는 마음(道心, 보리심)이 없음. 진실한 도심이 있다면 법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침묵할 수 없다.
- 南北남북
- 남삼북칠(南三北七). 천태대사 당시 중국 강남의 세 학파와 강북의 일곱 학파. 천태대사는 이들의 교판을 깨뜨리고 오시팔교의 교판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이들의 원망과 비난을 받았다.
- 得一득일
- 생몰년 미상. 헤이안 시대 초기의 법상종 승려. 덕일(徳一) · 덕일(徳溢)이라고도 쓴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출가하여 고후쿠사의 슈엔(修円)에게 법상종을 배우고 도다이사에서 홍교했다고 한다. 법화일승은 권교라 하여 「삼승진실 · 일승방편」의 설을 세우고 전교대사와 법화경의 권실에 관한 논쟁(삼일권실논쟁)을 벌였다. 히타치 지방 쓰쿠바산에 주젠사를, 무쓰 지방 아이즈에 에니치사를 세웠다. 저서로 『불성초』 1권, 『중변의경』 3권, 『중변의경잔』 20권, 『혜일우족』 3권 등이 있다. 「세 치 혀로」라는 말은 『중변의경잔』에 「아, 지공(智公)이여, 그대는 누구의 제자인가. 세 치도 되지 않는 혓바닥으로 덮개 혀(覆面舌)의 설을 비방하고 다섯 자의 불신을 끊는구나」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 最澄未だ唐都を見ず최징은 아직 당나라 도읍을 보지 못했다
- 전교대사 최징(767–822)은 서른일곱 살 때 당나라에 건너가 태주와 천태산에서 여덟 달 동안 배웠으나 도읍 장안에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남도 육종의 승려들은 「최징은 당나라 도읍을 본 적이 없다」며 불교의 본류를 모른다고 비난했다.
- 御勘気어감기
- 주군이나 막부의 꾸지람, 처벌. 여기서는 다쓰노쿠치 법난과 사도 유죄를 가리킨다.
- 羅什나집
-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09년. 생몰년에는 다른 설이 있다). 범어 쿠마라지바의 음사로 동수(童寿)라 번역한다. 중국 요진(후진) 시대의 역경승. 아버지 구마라염은 인도 한 나라의 재상 가문에서 출가한 사람이고, 어머니 기바는 구자국 왕 백순의 누이였다.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하루에 천 게, 삼만 이천 자의 경을 외웠다고 한다. 아홉 살에 계빈국에 유학하여 반두달다에게 소승을 배우고, 돌아와 서역을 다니며 수리야소마에게 대승을 배워 구자국에 대승을 넓혔다. 전진의 왕 부견이 장군 여광에게 서역을 치게 했을 때 나집은 여광에게 이끌려 중국으로 가던 중 전진이 망하자 여광의 보호 아래 양주에 머물렀다. 그 뒤 후진의 왕 요흥에게 맞아들여져 홍시 3년(401) 장안에 들어가 국사의 대우를 받으며 역경에 종사했다.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여 초기 한역 경전의 잘못을 바로잡고 초역을 완역하는 등 많은 경을 번역했으며, 그 수는 『출삼장기집』 권2에 따르면 35부 294권, 『개원석교록』 권4에 따르면 74부 384권에 이른다. 『묘법연화경』 8권, 『대품반야경』 27권, 『대지도론』 100권, 『중론』 4권, 『백론』 2권 등이 대표적이다. 홍시 11년(409) 8월 20일 장안에서 입적했는데, 예언한 대로 혀만은 타지 않아 번역이 바름을 증명했다고 전한다.
- 提婆師子제바 · 사자
- 부법장의 제14 제바보살과 제25 사자존자(개목초 제55장 本文의 셈. 『부법장인연전』의 계보로는 마지막 전등자로서 제23 또는 제24로 센다). 제바보살은 외도에게, 사자존자는 외도에게 부추김을 받은 단미라왕에게 각각 죽임을 당했다.
- 薬王약왕
- 약왕보살. 범어 바이샤지야라자. 『관약왕약상이보살경』에 따르면 유리광조불 멸후 일장비구가 정법을 넓힐 때, 성수광 · 전광명이라는 장자 형제가 일장을 따라 부처의 지혜를 듣고 설산의 좋은 약을 캐어 일장과 대중에게 공양하며 미래에 중생의 몸과 마음의 두 병을 고치겠다고 서원했다. 석존은 그때의 성수광이 지금의 약왕, 전광명이 약상이라 밝히고, 미륵보살에게 그들이 미래에 정안 · 정장이라는 여래가 되리라고 했다. 법화경 회좌에서는 적문 유통의 대고중 가운데 으뜸이며, 과거 인위의 수행 때 칠만 이천 세 동안 팔을 태워 부처에게 공양했다.
- 上宮상궁
- 상궁태자, 곧 쇼토쿠 태자의 다른 이름. 자기 손의 가죽을 벗겨 그것을 종이로 삼아 경문을 썼다고 전한다. 「백미일표어서」에 「쇼토쿠 태자라 하는 사람은 손의 가죽을 벗겨 법화경을 써 드렸다」고 하셨다. 다만 전해지는 자료에서 그 경은 범망경으로 되어 있다.
- 釈迦菩薩석가보살
- 석존이 과거 오랜 세월 보살행을 닦던 때를 가리키는 말. 자기 살을 팔아 부처에게 공양했다고 한다.
- 楽法낙법
- 낙법범지. 석존의 인위 때 이름. 보살행을 닦을 때 부처의 한 게송을 듣기 위해 가죽을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붓으로, 피를 먹으로 삼아 쓰려 했다.
- 適時而已적시이이
- 「때에 맞출 따름이다」. 제59장에 인용된 『법화문구』의 「각각 한 끝을 들어 때에 맞출 따름(各一端を挙げて時に適う而已)」의 끝 구절이다.
결권 — 표와 결의 호응
제61장은 개목초 상 · 하권 전체를 셋으로 나눈 마지막 「결권(結勧)」에 해당한다. 강의는 이 장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상권 첫머리에서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으로 주 · 사 · 친을 들고, 이제 이 장에 이르러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에게 주사부모이니라」고 하여 본불이자 인본존이 니치렌이라고 선언하시고 이 글을 끝맺으셨다는 것이다.
夫れ一切衆生の尊敬すべき者三あり所謂主師親これなり、又習学すべき物三あり、所謂儒外内これなり。
무릇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이 셋 있으니 이른바 주 · 사 · 친이 이것이니라. 또 배워야 할 것이 셋 있으니 이른바 유 · 외 · 내가 이것이니라
서강에서 강의는 이 첫 문장에서 주사친은 사람을, 유외내는 법을 나타내며 개목초에서는 법을 곁으로 하고 사람의 삼덕을 바른 뜻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 「표」와 제61장의 「결」을 함께 읽어야 대성인의 근본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개목초는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유교의 성인들, 외도의 선인들, 그리고 불교의 석존에 이르기까지 주사친의 삼덕을 차례로 검토했다. 그리고 긴 판정의 끝에 「말법의 일본국 사람들에게 주사친의 삼덕을 갖춘 이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놓는다. 개목초 전체가 이 한 문장을 향해 쓰인 글이다.
「영법구주」 — 세 부처의 마음과 호넨
결권은 보탑품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석가 · 다보 · 시방분신의 제불이 허공회에 모인 것은 무슨 마음에서인가. 경문은 「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고 이곳에 왔다」고 답한다. 대성인은 그 세 부처의 마음속을 헤아리신다. 미래에 법화경을 넓혀 미래의 일체 불자에게 주고자 하시는 마음은, 부모가 외아들이 큰 고통을 만나는 것을 보는 것보다도 강성하다. 제43장에서 다룬 보탑품 「삼개의 칙선」은 이 세 부처의 간절함이 말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호넨은 이 부처의 마음을 가엾게 여기지도 않고, 말법에는 법화경의 문을 굳게 닫아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대성인은 이것을 「미친 아이를 속여 보배를 버리게 하는 것」에 비기신다. 보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는 미친 아이에게 「그것은 쓸모없다」고 속여 버리게 하는 것, 그것이 호넨이 사람들에게 법화경을 「내던지게(抛)」 한 모습이다. 『선택본원염불집』의 「버리라 · 닫으라 · 내버려 두라 · 던지라」는 가르침이 「법화경의 문을 굳게 닫는다」는 표현에 그대로 담겨 있다. 대성인은 그 마음을 「무참(無慚)」, 곧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이라 하신다.
이어서 대성인은 네 가지 비유를 물음의 형태로 던지신다. 내 부모를 남이 죽이려 하는데 부모에게 알리지 않겠는가. 못된 자식이 술에 취해 부모를 죽이려 하는 것을 막지 않겠는가. 악인이 사탑에 불을 지르려 하는 것을 막지 않겠는가. 외아들이 중병에 걸렸는데 뜨겁다고 싫어한다 하여 뜸을 뜨지 않겠는가. 모두 대답이 분명한 물음이다. 어떤 사람도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의 선과 염불을 보고도 막지 않는 자는 바로 이렇게 침묵하는 자와 같다. 그리고 대성인은 제60장에서 인용한 장안의 말을 다시 드신다.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은 곧 그의 원수이다.」
네 비유의 순서에도 뜻이 있다. 첫째와 둘째는 부모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 셋째는 사탑, 곧 불법이 위협받는 상황, 넷째는 외아들의 병을 고치는 상황이다. 부모를 지키는 효, 불법을 지키는 호법, 자식을 고치는 자비가 모두 「막지 않을 수 없다」는 한 가지로 모인다. 특히 마지막 「외아들의 중병에 뜸을 뜬다」는 비유는 절복의 본질을 보여 준다. 뜸은 아프고 뜨겁다. 아이는 싫어하고 울 것이다. 그러나 병을 고치려면 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않는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병을 방치하는 것이다.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에게 주사부모이니라」
그리고 개목초의 가장 무게 있는 선언이 나온다.
日蓮は日本国の諸人にしうし父母なり一切天台宗の人は彼等が大怨敵なり「彼が為に悪を除くは即ち是れ彼が親」等云云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에게 주사부모이니라. 일체의 천태종 사람은 그들의 큰 원수이니라.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라고 하였느니라
이 선언은 앞의 논리에서 곧바로 나온다.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것은 곧 그의 어버이」라면, 일본국 사람들을 위해 염불과 선의 악을 없애려 대난을 무릅쓰는 니치렌이 바로 그들의 어버이다. 반대로 「자비 없이 거짓으로 친한 것은 그의 원수」라면,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염불과 선을 보고 침묵하는 천태종 사람들은 일본국 사람들의 큰 원수다. 현대어역은 「이 문에 비추어 볼 때 누가 일본국 지금 세상에서 어버이로서 행동하고 있는가. 니치렌을 빼고는 결코 없다」고 풀었다.
그런데 대성인은 「어버이」에 그치지 않고 「주사부모」라 하신다. 주덕 · 사덕 · 친덕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서강에서 강의는 제56장의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리라, 일본의 안목이 되리라, 일본의 큰 배가 되리라」는 서원에서 기둥은 주덕, 안목은 사덕, 큰 배는 친덕을 나타낸다고 했다. 서원으로 세운 삼덕이 결권에서 선언으로 완성된다.
같은 무렵의 다른 어서들도 이 자각을 보여 준다. 「종종어진무어서」에서 대성인은 개목초를 쓰신 뜻을 이렇게 회상하셨다.
去年の十一月より勘えたる開目抄と申す文二巻造りたり、頸切るるならば日蓮が不思議とどめんと思いて勘えたり、此の文の心は日蓮によりて日本国の有無はあるべし、譬へば宅に柱なければ・たもたず人に魂なければ死人なり、日蓮は日本の人の魂なり
지난해 11월부터 생각해 온 개목초라는 글 두 권을 지었느니라. 목이 베인다면 니치렌의 불가사의를 남겨 두려고 생각하여 지었느니라. 이 글의 마음은 니치렌에 의하여 일본국의 존망이 있다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집에 기둥이 없으면 지탱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혼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니라. 니치렌은 일본 사람의 혼이니라
또 「사도어서」에서는 「니치렌은 지금 세상에서 이 (북조) 일문의 부모이니라(日蓮当世には此御一門の父母なり)」(958쪽)라고 하셨다. 유배된 죄인의 몸으로 당신을 유배한 권력자들의 「부모」임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니치칸 상인은 「개목초 문단」에서 개목초의 대의를 「말법 하종의 인본존을 드러냄」이라 하고, 개목초의 마지막에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의 주사부모」라 하신 것과 아울러, 대성인이 「일본국의 혼」이라 하신 것도 곧 대성인이 일본국의 주사친이시기 때문이라고 풀었다.
강의의 입장에서 이 선언은 개목초의 결론이자 「인본존 개현」의 완성이다. 개목초 하권은 지용출현과 개근현원으로 석존의 탈익의 삼덕을 밝히고(제39장), 본존에 미혹함을 꾸짖으며 바로 하종의 아버지를 밝혔다(제40장). 석존의 삼덕은 과거에 하종을 받은 사람들을 거두어들이는 탈익의 삼덕이었다. 그러나 말법의 중생은 과거에 하종을 받지 못한 본미유선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처음으로 성불의 종자를 심어 주는 하종의 주사친이 필요하며, 그분이 바로 대성인이시라는 것이 강의의 해석이다. 제58장에서 대성인이 「영산에 가서 도리어 인도하리라」고 하신 것도, 제60장에서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는 것은 그의 어버이」를 인용하신 것도 모두 이 선언으로 모인다.
강의의 관점 —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에게 주사부모이니라」는 개목초 첫머리의 「주사친」에 대한 결론이며, 대성인이 말법 하종의 주사친 삼덕을 갖춘 본불, 곧 인본존이심을 선언하신 문이다. 개목초는 이 선언으로 끝난다.
법화경 때문에 받는 비난은 부끄럽지 않다
「도심이 없는 자가 생사를 떠나는 일은 없다.」 이 짧은 문장은 천태종 사람들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문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참된 도심이 있다면 법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침묵할 수 없다. 침묵하는 것은 도심이 없다는 증거이며, 도심이 없으면 생사를 떠날 수 없다.
이어서 대성인은 법화경 때문에 비난받은 선인들을 드신다. 교주 석존은 일체의 외도에게 대악인이라 매리당하셨다. 천태대사는 남삼북칠의 학자들에게, 그리고 뒷날 일본의 득일에게 「세 치 혀로 다섯 자의 몸을 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어석에 따르면 득일은 『중변의경잔』에서 「아, 지공이여, 그대는 누구의 제자인가. 세 치도 되지 않는 혓바닥으로 덮개 혀의 설을 비방하고 다섯 자의 불신을 끊는구나」라고 천태대사를 공격했다. 「덮개 혀(覆面舌)」란 얼굴을 덮을 만큼 넓은 부처의 혀, 곧 부처의 진실한 말씀을 뜻한다. 득일은 천태대사가 법화경을 높여 다른 경을 깎아내린 것을 부처의 말씀을 비방하고 부처의 몸을 끊는 일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전교대사는 남도의 학자들에게 「최징은 아직 당나라 도읍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당에 유학했으나 장안에 가지 않고 천태산에서만 배웠으니 불교의 본류를 모른다는 비아냥이었다.
대성인은 이것들이 「모두 법화경 때문이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시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제일의 부끄러움이다」라고 단언하신다. 어석이 정리하듯, 대성인은 석존과 천태대사가 난을 받은 일과 함께 이것을 드신 위에, 이것들은 모두 법화경을 원인으로 한 것이니 부끄러움이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제일의 부끄러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강의는 이 구절에 대해 하나의 일화를 전한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제일의 부끄러움이다」는 말씀은 창가학회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가 늘 좌우명으로 삼았던 신조였다는 것이다. 마키구치 회장은 이 어문대로 법화경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과 박해도 부끄러움이 아니며,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야말로 제일의 부끄러움이고 거꾸로 말하면 성인에게 칭찬받는 것이 제일의 영광이라는 신념에 따라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넓히려다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1944년). 강의는 대성인의 불법을 믿는 이에게 이것이 제일의 귀감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대성인은 당신의 유죄를 두고 천태 · 진언의 법사들이 기뻐할 것이라 하시며, 그것이 「한편으로는 무참하고 한편으로는 기괴하다」고 하신다. 같은 법화경을 받든다는 천태종 승려들이 법화경의 행자가 유죄당한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이며 이상한 일이다. 「사도어서」에서 대성인은 「(부모와 같은 니치렌을) 유죄하고 주종이 함께 기뻐하니 가엾고 무참한 자들이다」라고 하시고, 「방법의 법사들이 한때는 기뻐하겠지만 뒤에는 그들의 탄식이 니치렌의 일문보다 덜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958쪽).
법을 위해 몸을 버린 사람들 — 「때에 맞출 따름」
이어서 대성인은 법을 위해 몸을 바친 아홉 가지 예를 한 문장에 늘어놓으신다. 석존은 사바세계에 들어오셨고, 나집은 진나라에 들어갔고, 전교는 중국에 들어갔다. 제바와 사자는 몸을 버렸고, 약왕은 팔을 태웠고, 상궁태자는 손의 가죽을 벗겼다. 석가보살은 살을 팔았고, 낙법범지는 뼈를 붓으로 삼았다.
이 열거는 세 무리로 읽을 수 있다. 첫째 무리는 법을 위해 낯선 땅에 들어간 이들이다. 석존은 오탁의 사바세계에 출현하셨고, 구마라집은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법화경을 번역했으며, 전교대사는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천태의 법을 배워 왔다. 어석이 상세히 전하듯 구마라집은 전쟁 포로처럼 여광에게 이끌려 중국에 왔고, 양주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뒤에야 장안에 들어가 역경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가 번역한 『묘법연화경』이 없었다면 동아시아의 법화경 신앙은 없었을 것이며, 입적 후 혀만 타지 않았다는 전승은 그 번역의 바름을 증명하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둘째 무리는 법을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이다. 부법장의 제14 제바보살은 외도를 논파하다가 외도에게 살해당했고, 제25 사자존자는 단미라왕에게 목이 베였다. 대성인은 「전중경수법문」에서도 이 두 사람을 들어, 바른 법을 넓힌 사람도 난을 만났음을 보이셨다.
셋째 무리는 법을 위해 자기 몸을 공양한 이들이다. 약왕보살은 과거세에 일체중생희견보살로서 칠만 이천 세 동안 팔을 태워 부처에게 공양했다(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상궁태자, 곧 쇼토쿠 태자는 손의 가죽을 벗겨 경을 썼다고 전한다. 석가보살은 살을 팔아 부처를 공양했다. 낙법범지는 부처의 한 게송을 듣기 위해 가죽을 종이로, 뼈를 붓으로, 피를 먹으로 삼으려 했다.
어석은 낙법범지의 이야기를 『대지도론』 권49에서 인용한다. 석가모니불이 옛날 보살이었을 때 이름을 낙법이라 했다. 그때 세상에 부처가 없어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없었기에 사방으로 법을 구하며 부지런히 게으르지 않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그때 마가 바라문으로 변하여 「나에게 부처가 설한 한 게송이 있다. 그대가 가죽을 종이로, 뼈를 붓으로, 피를 먹으로 삼아 이 게송을 쓴다면 그대에게 주리라」고 했다. 낙법은 곧 「나는 세세에 몸을 잃은 것이 무수하나 이러한 이익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가죽을 벗겨 볕에 말리고 그 게송을 쓰려 했다. 그러자 마는 곧 사라지고, 부처가 그 지극한 마음을 아시고 아래에서 솟아나와 깊은 법을 설하니 낙법은 곧 무생법인을 얻었다. 어석은 이 『대지도론』의 이야기에서는 뼈를 뽑기 전에 마가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홍결』에서는 애법범지를 낙법범지로 하여 뜻을 취해 인용하면서 「이 말대로 뼈를 깨고 가죽을 벗겨 피로 게송을 썼다」고 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모든 것을 천태의 한마디로 묶으신다. 「때에 맞출 따름(適時而已).」 현대어역은 「이러한 것들을 천태는 『때에 맞출 따름』이라 했다」고 풀었다. 아홉 사람이 법을 위해 한 일은 모두 달랐다. 어떤 이는 먼 길을 갔고, 어떤 이는 목숨을 잃었으며, 어떤 이는 몸을 태웠다. 그 형태가 다른 것은 각자가 처한 때가 달랐기 때문이다. 「사도어서」의 「종이가 없는 세상에서는 몸의 가죽을 종이로 삼고, 붓이 없을 때는 뼈를 붓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과 정확히 같은 뜻이다. 「불법은 때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말법 일본의 지금은 어떤 때인가. 사지 · 방법이 가득한 파법의 나라이며 절복의 때다. 그 때에 맞추어 대성인은 절복을 행하셨고, 그 결과로 유죄를 받으셨다. 대성인의 유죄는 앞의 아홉 사람이 법을 위해 몸을 바친 것과 같은 계열에 선다.
「금생의 작은 괴로움 · 후생의 큰 즐거움」
개목초의 마지막 문장이다.
仏法は時によるべし日蓮が流罪は今生の小苦なれば・なげかしからず、後生には大楽を・うくべければ大に悦ばし。
불법은 때에 따라야 하느니라. 니치렌의 유죄는 금생의 작은 괴로움이니 한탄스럽지 않으니라. 후생에는 큰 즐거움을 받을 것이니 크게 기쁘니라
강의는 이 말씀을 두고 「얼마나 숭고하고 확신에 찬 말씀인가」라고 감탄한다. 이 심경은 범부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대성인 자신은 이미 불신(仏身)을 증득하셨으나 그것을 드러내어 말씀하지 않고 「후생」에 맡겨 단언하셨다. 부처의 경지에 서셨기에 사도 유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보다 부처를 증득하신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이 한마디를 깊이 음미해야 한다」고 강의는 말한다.
이 마지막 문장은 개목초 하권 후반의 긴 논의를 하나로 거둔다. 「금생의 작은 괴로움」은 제57장의 전중경수, 곧 무거운 업을 금생에 가볍게 받는다는 법리 위에 선다. 무시 이래의 중죄를 생각하면 사도 유죄는 「작은」 괴로움이다. 「후생의 큰 즐거움」은 제58장의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와 「영산에 가서 도리어 인도하리라」에 이어진다. 그리고 「한탄스럽지 않다 · 크게 기쁘다」는 제58장의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라」에 대한 대성인 자신의 실천이다. 문하에게 「한탄하지 말라」고 하신 대성인이, 마지막 문장에서 몸소 「한탄스럽지 않다」고 보여 주신다.
눈 덮인 쓰카하라 삼매당에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지 않은 몸으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유배인이 쓴 글의 마지막 말이 「크게 기쁘다(大に悦ばし)」라는 것은 개목초가 어떤 글인지를 잘 보여 준다. 「사도어감기초」에서 「더욱더 신심도 일어나고 후생도 든든하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마음이다. 제57장에서 「여우 같은 의심의 얼음이 풀렸다」고 하신 대성인은 이제 의심이 아니라 기쁨으로 글을 맺으신다. 개목초는 「눈을 뜨게 하는 글」이다. 그 눈은 대난 속에서 대성인의 참된 모습을 보는 눈이며, 동시에 금생의 괴로움 너머 삼세의 큰 즐거움을 보는 눈이다.
광선유포의 확신
강의는 마지막으로 광선유포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광선유포는 부처의 예언이므로 반드시 이루어져 한 나라의 평화가 올 때가 온다. 범부의 눈으로는 그때를 알 수 없으나, 어서의 마음에 따라 생각하면 광선유포의 실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때에 이르기까지의 길이 매우 험난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대난이 닥치더라도 개목초에서 보이신 말법 본불로서의 개현을 깊이 받들고, 대자대비의 서원의 한 마디 한 구절을 굳게 몸에 지니고 나아가야 한다고 강의는 맺는다.
강의의 관점 — 「금생의 작은 괴로움, 후생의 큰 즐거움」은 이미 불신을 증득하신 대성인의 경지에서 나온 말씀이다. 개목초는 말법 본불의 개현을 받들고 대난 속에서도 나아가라는 결권으로 끝난다.
이 편을 맺으며
제9편의 다섯 장은 개목초가 처음부터 품어 온 물음, 곧 「법화경의 행자라면 왜 제천의 가호가 없고 현세가 안온하지 않은가」에 대한 마지막 답이었다. 제57장은 난의 원인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대성인의 대난이 과거의 중죄를 금생의 호법이 불러내어 가볍게 받아 끝내는 전중경수의 증거임을 밝혔다. 제58장은 난의 끝을 미래로 내다보아, 의심 없는 신심이 구하지 않아도 불계를 끌어온다는 불구자득의 이익을 밝히고 「나와 나의 제자」에게 진실한 때에 약속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59~60장은 난을 부르는 홍교 방식 자체를 문제 삼아, 섭수와 절복이 모두 부처의 설이되 때와 나라에 따라 취사해야 하며, 사지 · 방법이 가득한 말법 일본에서는 절복이 때에 맞는 홍교임을 밝혔다. 그리고 그 절복이 다투는 마음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악을 없애 주는」 어버이의 마음이라는 것도. 제61장은 이 모든 것을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에게 주사부모이니라」는 선언으로 거두고, 「금생의 작은 괴로움, 후생의 큰 즐거움」이라는 기쁨의 말로 글을 맺었다.
이 편을 마지막으로 개목초 상 · 하권의 해설도 끝난다. 아홉 편을 돌아보면 개목초의 길은 이렇게 정리된다.
상권(제1~34장)은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제1편은 주사친 삼덕과 유 · 외 · 내 세 가르침을 표시하고, 유교와 외도의 삼덕을 검토한 뒤 내외상대 · 권실상대를 거쳐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다」는 문저의 판정에 이르렀다. 제2편은 권적상대로 이승작불과 다보 · 분신의 증명을, 제3편은 본적상대로 구원실성과 이전 · 적문의 두 허물을 밝혔다. 법화경 적문의 이승작불과 본문의 구원실성, 이 「두 가지 큰일」이 오중상대의 뼈대였다. 제4편에서 대성인은 「일본국에서 이것을 아는 자는 다만 니치렌 한 사람」이라는 자각과 「말하면 삼장사마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난다」는 각오로 말법 법화경 행자의 길에 들어서셨음을 밝혔고, 「이 의심은 이 글의 간심이요 일생의 대사」라는 물음을 세우셨다. 제5편은 이승과 보살이 법화경에서 받은 깊은 은혜를 논하며 상권을 맺었다.
하권(제35~61장)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이다. 제6편은 지용출현과 개근현원으로 석존의 탈익의 삼덕을 밝히고, 본존에 미혹함을 꾸짖으며 하종의 아버지를 밝혔다. 제7편은 보탑품 삼개의 칙선과 제바품 이개의 간효, 곧 「다섯 개의 봉조」로 멸후 홍경의 어려움과 악인 · 여인의 성불을 밝혔다. 제8편은 권지품의 삼류 강적이 눈앞에 나타났음을 들어 대성인이 말법의 법화경 행자임을 증명하고,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리라」는 서원으로 그 증명을 맺었다. 그리고 이 제9편이 행자가 난을 만나는 까닭과 그 난을 넘는 신심, 때에 맞는 홍교를 밝히고 결권으로 글 전체를 끝맺었다.
이 긴 길의 처음과 끝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은 주 · 사 · 친」이라는 첫 문장과 「니치렌은 일본국 제인에게 주사부모」라는 끝 문장이다. 강의와 니치칸 상인의 해석에 따르면, 개목초는 이 표와 결의 호응을 통해 말법의 중생이 존경해야 할 주사친, 곧 사람으로서의 본존(인본존)을 드러낸 글이다. 「눈을 뜬다(開目)」는 것은 그 사람을 바로 보는 눈을 뜨는 것이다.
개목초를 쓰신 이듬해인 문영 10년(1273) 4월 25일, 대성인은 같은 사도의 이치노사와에서 「관심의 본존초」를 지어 도키조닌에게 보내셨다. 니치칸 상인은 개목초를 「인본존 개현의 글」, 관심의 본존초를 「법본존 개현의 글」로 보았다. 개목초가 「누가」 말법의 주사친인가를 밝혔다면, 관심의 본존초는 「무엇을」 말법 중생이 수지해야 할 근본의 법으로 세우는가를 밝힌다. 개목초 상권에서 「문 밑에 잠겨 있다」고만 하신 일념삼천이, 관심의 본존초에서는 「말법 관심」의 법문으로 정면에서 풀리고, 「수지즉관심」과 오중삼단의 교판을 거쳐 본문의 본존으로 나아간다. 제58장에서 본 「무상보취 불구자득」과 「자연히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는 두 글을 잇는 다리였다. 사람과 법, 두 글은 한 쌍이다. 앵매도리의 어서 연구는 「관심의 본존초」 일곱 편에서 그 법의 측면을 이미 다루었다. 개목초의 눈으로 다시 읽으면, 관심의 본존초의 한 줄 한 줄이 개목초의 물음에 대한 또 하나의 답으로 보일 것이다.
더 읽기
- 관심의 본존초 — 개목초 이듬해의 「법본존 개현의 글」. 특히 수지즉관심에서 「무상보취 불구자득」의 문을 다룬다.
- 관심의 본존초 · 본화 출현의 시절과 총결 — 말법의 시절과 본화의 출현.
- 개목초 제8편 삼류의 강적과 법화경의 행자 — 이 편 바로 앞,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리라」의 서원까지.
- 개목초 제1편 주사친 삼덕 — 유교 · 외도 · 불교 — 결권과 호응하는 첫머리의 표시.
- 불교 교학 五 일념삼천 — 「일념삼천의 구슬」의 교리적 배경.
- 인물탐구 니치렌 대성인 · 시조깅고 — 사도 유배기의 대성인과 개목초를 받은 문하.
참고 문헌
원전
- 「개목초」 상 · 하(어서 186–237쪽), 「사도어서」(956–961쪽), 「전중경수법문」(1000–1001쪽), 「형제초」(1079–1089쪽), 「종종어진무어서」(909–925쪽), 「사도어감기초」(891쪽), 「관심의 본존초」(238–255쪽), 「선시초」(256–292쪽), 「여설수행초」(501–505쪽), 「법화취요초」(331–338쪽), 「신니부인답서」(904–907쪽), 『어의구전』(701–803쪽), 「백미일표어서」(1596–1597쪽)
- 『묘법연화경』 비유품 · 신해품 · 약초유품 · 견보탑품 · 권지품 · 안락행품 · 상불경품 · 약왕보살본사품 · 다라니품, T9 no.262
- 『대반열반경』(북본) 금강신품 · 성행품 등, T12 no.374
- 『대반니원경』(법현 역, 6권), T12 no.376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승만경), T12 no.353
- 천태대사 『마하지관』, T46 no.1911 /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 T34 no.1718
- 묘락대사 『지관보행전홍결』, T46 no.1912
- 장안대사 『대반열반경소』, T38 no.1767
- 『대지도론』, T25 no.1509
- 니치칸 상인 「개목초 문단」 · 「개목초우기」(강의를 통해)
연구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Paul L. Swanson (tr.), Clear Serenity, Quiet Insight: T'ien-t'ai Chih-i's Mo-ho chih-ku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8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The Opening of the Eyes」 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