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에서 대성인은 권지품 이십행게의 예언이 당신의 몸에 하나하나 들어맞았음을 밝히면서도, 그렇다면 어찌하여 제천이 법화경의 행자를 지키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셨다. 「이 의문은 이 글의 간심이요 일기의 대사」라고 하신 그 물음을, 이 편은 이승과 보살과 제천이 법화경에서 받은 은혜의 깊이를 하나하나 따지는 방식으로 다시 세운다. 사리불 · 가섭 같은 대성문은 사십여 년 동안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버림받았다가 법화경에서 비로소 화광여래 · 광명여래의 이름을 받았다. 문수 · 미륵 같은 대보살도 이전의 경들에서는 이름뿐인 수기를 받았을 뿐, 법화경에 이르러 처음으로 「구족의 도」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법화경의 행자를 마땅히 지켜야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은 대성인 개인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이 아니라, 법화경이 일대 불교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 곧 이승작불 · 구원실성이 「일념삼천의 대강 · 골수」라는 사실을 은혜의 언어로 다시 확인하는 논증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대성인은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뜻을 「묘는 구족」으로 풀어 상권을 맺으신다.
개목초 상권은 주사친 삼덕의 표시에서 시작해, 유교와 외도와 불교를 견주고(내외상대), 불교 안에서 권교와 실교(권실상대), 법화경의 적문과 본문(본적상대)을 차례로 가른 다음, 제25장부터 말법에 법화경의 행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데로 나아갔다. 앞의 네 편이 경전의 높낮이를 가리는 교판의 언어였다면, 제25장 이후는 그 교판을 대성인 자신의 몸으로 읽는 신독의 언어다. 이 편은 그 두 언어가 만나는 곳에 있다.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이라는 교판의 두 기둥이 이 편에서는 「은혜」라는 말로 바뀌어, 법화경의 행자를 지켜야 할 의무의 근거가 된다.
이 편의 논리는 니치칸 상인의 「개목초 문단」이 정리한 순서를 따른다. 먼저 이승에 대해 법화경의 깊은 은혜를 논하고(제29장), 이전의 경들에서 이승이 받은 꾸짖음을 들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증명하며(제30장), 그런데도 이승의 수호가 없다는 의문을 세운다(제31장). 이어 보살과 제천에 대해, 이전의 경들은 그들에게 은혜가 되지 못했음을 밝히고(제32장), 법화경 적문의 서분과 정종분에서 그들이 처음으로 깊은 은혜를 입었음을 보인 뒤(제33장), 묘법연화경의 이름을 풀어 그 은혜의 실체를 드러낸다(제34장). 보살 · 제천에 대한 논의는 하권 첫머리(제35장 이하)로 이어지며, 보탑품의 세 번 칙선과 지용보살의 출현을 거쳐 제42장에서 「보살 등의 수호가 없다는 의문」으로 맺어진다.
은혜를 묻는 이 논증은 상권 첫머리의 주사친 삼덕과도 맞물린다. 은혜를 아는 것(지은)과 갚는 것(보은)은 주사친을 존경하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며, 개목초는 처음부터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을 묻는 글이었다. 이 편에서 대성인이 계찰과 공윤의 보은, 모보의 거북과 곤명지의 큰 물고기를 끌어오시는 것은, 외전의 현인과 축생조차 아는 도리를 불제자가 모를 리 없다는 논법이며, 동시에 법화경이야말로 일체중생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푼 경, 곧 주사친의 덕을 갖춘 가르침임을 보이는 준비다.
이 편의 장
- 내외상대
- 대소상대
- 권실상대
- 본적상대
- 종탈상대
- 제1편 · 1~10장주사친 삼덕
- 제2편 · 11~17장권적상대
- 제3편 · 18~24장본적상대
- 제4편 · 25~28장말법 법화경 행자의 소유
- 제5편 · 29~34장이승 · 보살의 법화 심은권실 · 본적상대에서 가려낸 이승작불 · 구원실성을 〈은혜〉로 다시 묻는다 → 하권 제35장 이하로 이어짐
본문
季札といひし者は心のやくそくを・たがへじと王の重宝たる剣を徐君が墓にかく・王寿と云いし人は河の水を飲んで金の鵞目を水に入れ・公胤といひし人は腹をさいて主君の肝を入る・此等は賢人なり恩をほうずるなるべし、 況や舎利弗迦葉等の大聖は・二百五十戒・三千の威儀・一もかけず見思を断じ三界を離れたる聖人なり、梵帝・諸天の導師・一切衆生の眼目なり、 而るに四十余年が間・永不成仏と嫌いすてはてられて・ありしが法華経の不死の良薬をなめて燋種の生い破石の合い・枯木の華菓なんどならんとせるがごとく仏になるべしと許されて・いまだ八相をとなえず・いかでか此の経の重恩をば・ほうぜざらん、 若しほうぜずば彼彼の賢人にも・をとりて不知恩の畜生なるべし、毛宝が亀はあをの恩をわすれず昆明池の大魚は命の恩をほうぜんと明珠を夜中にささげたり、 畜生すら猶恩をほうず何に況や大聖をや、阿難尊者は斛飯王の次男・羅睺羅尊者は浄飯王の孫なり、人中に家高き上証果の身となつて成仏を・をさへられたりしに八年の霊山の席にて山海慧・蹋七宝華なんど如来の号をさづけられ給う、 若し法華経ましまさずば・いかに・いえたかく大聖なりとも誰か恭敬したてまつるべき、夏の桀・殷の紂と申すは万乗の主・土民の帰依なり、 しかれども政あしくして世をほろぼせしかば今に・わるきものの手本には桀紂・桀紂とこそ申せ、下賤の者・癩病の者も桀紂のごとしと・いはれぬればのられたりと腹たつなり、 千二百・無量の声聞は法華経ましまさずば誰か名をも・きくべき其の音をも習うべき、一千の声聞・一切経を結集せりとも見る人よもあらじ、 まして此等の人人を絵像・木像にあらはして本尊と仰ぐべしや、此偏に法華経の御力によつて一切の羅漢帰依せられさせ給うなるべし、 諸の声聞・法華を・はなれさせ給いなば魚の水をはなれ猿の木をはなれ小児の乳をはなれ民の王を・はなれたるが・ごとし、いかでか法華経の行者をすて給うべき、 諸の声聞は爾前の経経にては肉眼の上に天眼慧眼をう法華経にして法眼・仏眼備われり、十方世界すら猶照見し給うらん、何に況や此の娑婆世界の中法華経の行者を知見せられざるべしや、 設い日蓮・悪人にて一言・二言・一年・二年・一劫・二劫・乃至百千万億劫・此等の声聞を悪口・罵詈し奉り刀杖を加えまいらする色なりとも法華経をだにも信仰したる行者ならばすて給うべからず、 譬へば幼稚の父母をのる父母これを・すつるや、梟鳥が母を食う母これをすてず・破鏡父をがいす父これにしたがふ、畜生すら猶かくのごとし大聖・法華経の行者を捨つべしや、
계찰이라는 사람은 마음속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왕의 보배인 칼을 서군의 무덤에 걸었고, 왕수라는 사람은 강물을 마시고는 그 값으로 금으로 된 아목(鵞目)을 물에 넣었으며, 공윤이라는 사람은 제 배를 갈라 주군의 간을 넣었느니라. 이들은 현인이니 은혜를 갚은 것이니라. 하물며 사리불 · 가섭 등의 대성은 이백오십계와 삼천의 위의를 하나도 빠뜨림 없이 지키고, 견사혹을 끊어 삼계를 벗어난 성인이니라. 범천 · 제석 등 제천의 도사요, 일체중생의 안목이니라. 그런데도 사십여 년 동안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미움받아 버려졌다가, 법화경이라는 불사의 양약을 맛보고는, 불탄 씨앗에서 싹이 나고 깨진 돌이 다시 합치고 마른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맺히려는 것처럼, 부처가 되리라고 허락받았으되 아직 팔상을 나타내지는 않았느니라. 어찌 이 경의 무거운 은혜를 갚지 않으리오. 만약 갚지 않는다면 저 현인들보다도 못한, 은혜를 모르는 축생이 되리라. 모보의 거북은 옷을 팔아 저를 살려 준 은혜를 잊지 않았고, 곤명지의 큰 물고기는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갚으려 한밤중에 밝은 구슬을 바쳤느니라. 축생조차 은혜를 갚거늘 하물며 대성이리오. 아난존자는 곡반왕의 둘째 아들이요, 라후라존자는 정반왕의 손자이니라. 사람들 가운데 가문이 높은 데다 증과를 얻은 몸이 되었으되 성불은 막혀 있었는데, 팔 년 동안의 영산 자리에서 산해혜 · 도칠보화 등 여래의 이름을 받으셨느니라. 만약 법화경이 계시지 않았다면 아무리 가문이 높고 대성이라 한들 누가 공경해 드렸으리오. 하의 걸, 은의 주라 하는 이는 만승의 임금이요 백성이 귀의하던 이였느니라. 그러나 정치가 그릇되어 세상을 망쳤으므로 지금도 나쁜 자의 본보기로는 「걸주, 걸주」라고 하느니라. 천한 자나 나병(癩病)을 앓는 자라도 「걸주 같다」는 말을 들으면 욕을 들었다고 화를 내느니라. 천이백의 성문과 무량의 성문은 법화경이 계시지 않았다면 누가 그 이름인들 듣고 그 소리인들 배웠으리오. 일천의 성문이 일체경을 결집했다 한들 그것을 보는 사람도 결코 없었으리라. 하물며 이 사람들을 그림 상과 나무 상으로 나타내어 본존으로 우러르겠는가. 이는 오로지 법화경의 힘으로 일체의 아라한이 귀의를 받게 되신 것이니라. 모든 성문이 법화경을 떠나신다면, 물고기가 물을 떠나고 원숭이가 나무를 떠나고 어린아이가 젖을 떠나고 백성이 왕을 떠난 것과 같으리라. 어찌 법화경의 행자를 버리시겠는가. 모든 성문은 이전의 경들에서 육안 위에 천안 · 혜안을 얻었고, 법화경에서 법안 · 불안을 갖추셨느니라. 시방세계조차 비추어 보실 터인데, 하물며 이 사바세계 안의 법화경의 행자를 알아보지 못하시겠는가. 설령 니치렌이 악인이어서 한마디 두 마디, 한 해 두 해, 일 겁 이 겁 내지 백천만억 겁 동안 이 성문들에게 악구하고 매리하며 칼과 막대를 더하는 기색이 있다 하더라도, 법화경만이라도 신앙하는 행자라면 버리셔서는 안 되느니라. 비유컨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욕을 한다고 부모가 그 아이를 버리겠는가. 올빼미는 어미를 먹지만 어미는 이를 버리지 않고, 파경은 아비를 해치지만 아비는 이를 따르느니라. 축생조차 이와 같거늘, 대성이 법화경의 행자를 버리시겠는가.
어구 풀이
- 季札계찰
- 기원전 6세기 춘추시대 오나라의 현인. 오왕 수몽의 넷째 아들로, 아버지가 그의 현명함을 보고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사양했고, 연릉에 봉해져 「연릉계자」로 불렸다. 진(晋)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서(徐)나라를 지날 때 서군이 그의 보검을 탐냈으나 입 밖에 내지 못했고, 계찰도 그 마음을 알았지만 사행 중이라 돌아오는 길에 주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돌아와 보니 서군은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으므로 그 다짐을 지키려 칼을 무덤가 나무에 걸어 두고 떠났다고 한다. 「계찰괘검」이라 하여 신의를 중히 여기는 비유로 이름 높다.
- 王寿왕수
- 강물을 마시고 그 값으로 금전을 물에 던졌다는 인물. 강의의 어석은 「전기 미상」이라 하며, 출전을 밝히지 않는다. 현대어역은 「그냥 마셔서는 안 된다고 여겨 금 아목을 대가로 물에 넣었다」고 풀어, 사소한 은혜도 공짜로 받지 않는 마음의 예로 읽는다.
- 公胤공윤
- 개목초 제2장(유가의 삼덕)에 이미 나온 인물로, 홍연(弘演)을 가리킨다. 기원전 660년 무렵 위(衛)나라 의공을 섬긴 충신으로, 『여씨춘추』 권11 중동기 충렴편, 『한시외전』 권7, 『위지』 진교전 등에 따르면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위나라가 북방의 적(狄)에게 멸망하고 의공은 살해되어 그 내장이 흩어져 있었다. 홍연은 주군의 명예를 지키려 제 배를 갈라 의공의 내장을 거두어 넣고 죽었다고 한다.
- 鵞目아목
-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린 동전. 모양이 거위의 눈과 같다 하여 이렇게 불렀다. 本文의 「금 아목」은 금으로 된 돈이다.
- 二百五十戒・三千の威儀이백오십계 · 삼천의 위의
- 이백오십계는 비구가 지켜야 할 구족계의 수. 삼천의 위의는 행 · 주 · 좌 · 와의 몸가짐에 관한 세세한 규범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소승의 계율을 남김없이 지킨 성문의 청정함을 나타낸다.
- 見思を断じ三界を離れたる견사를 끊고 삼계를 벗어난
- 견사혹은 이치에 미혹한 견혹과 사물에 미혹한 사혹(수혹). 이를 다 끊으면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삼계 육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아라한이 된다. 소승의 최고 과위다.
- 梵帝범제
- 범천과 제석천. 범천은 색계 초선천의 주인, 제석천은 욕계 도리천의 주인으로 불법을 지키는 대표적인 천신이다. 本文은 대성문을 「범천 · 제석 등 제천의 도사」라고 하여, 천신들조차 스승으로 받드는 존재라고 한다.
- 永不成仏영불성불
-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 이전의 대승경들이 성문 · 연각의 이승을 두고 내린 판정이다. 개목초 제13 · 14장에서 유마경 · 반야경 등의 문을 들어 자세히 보였다.
- 燋種・破石・枯木초종 · 파석 · 고목
- 불탄 씨앗, 깨진 돌, 마른 나무. 이전의 경들에서 이승을 다시는 싹틀 수 없는 존재에 견준 비유다. 유마경 부사의품에서 가섭은 「우리는 대승에 대해 이미 썩은 씨앗(敗種)과 같다」고 탄식했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나고 깨진 돌이 합치는 것처럼 법화경에서 성불이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 八相팔상
- 부처가 응신 · 화신으로 세상에 나타나 성불을 중심으로 보이는 여덟 가지 모습. ① 하천(도솔천에서 내려옴) ② 탁태 ③ 출태 ④ 출가 ⑤ 항마 ⑥ 성도 ⑦ 전법륜 ⑧ 입열반이다. 「아직 팔상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은 성문들이 수기를 받았을 뿐 아직 실제로 부처로서 출현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 毛宝が亀모보의 거북
- 『수신기』 계통의 전승에 따르면, 진(晋)나라 때 모보라는 소년이 강가에서 어부가 흰 거북을 잡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제 옷과 바꾸어 사서 강에 놓아주었다. 이십 년 뒤 모보가 예주자사로 주성(邾城)을 지키다가 적에게 패해 성이 함락되자 강가로 달아났으나 탈 배가 없어 물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큰 돌 위에 올라탄 듯 몸이 떠올라 강기슭에 닿아 살아났는데, 보니 옛날 놓아준 그 흰 거북이었다고 한다. 本文의 「あを」는 옷을 말한다.
- 昆明池の大魚곤명지의 큰 물고기
- 곤명지는 전한 무제가 수전 훈련을 위해 도읍 장안에 판 큰 못이다. 무제가 이 못에서 큰 물고기를 낚았으나 줄이 끊어져 놓쳤는데, 그 물고기가 꿈에 나타나 낚싯바늘을 삼켜 괴로우니 빼 달라고 간청했다. 이튿날 가 보니 과연 바늘을 삼킨 물고기가 있어 바늘을 빼 주고 놓아주었다. 뒤에 무제가 밝은 구슬을 얻었는데, 물고기가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전한다.
- 阿難・羅睺羅아난 · 라후라
- 아난은 곡반왕의 아들로 석존의 사촌 동생이며 다문제일, 라후라는 정반왕의 손자로 석존의 친아들이며 밀행제일이다. 법화경 수학무학인기품 제9에서 아난은 산해혜자재통왕여래, 라후라는 도칠보화여래의 수기를 받았다. 本文의 「蹋七宝華」는 경과 개목초 제12장에 「蹈七宝華」로 나온다.
- 夏の桀・殷の紂하의 걸 · 은의 주
- 걸은 하 왕조 마지막 왕(이름 이계). 말희에게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고, 간하는 충신의 목을 베는 등 백관을 해쳐 인심을 잃고 은의 탕왕에게 멸망했다. 주는 기원전 11세기 무렵 은 왕조 마지막 왕(이름 신). 재주와 힘이 뛰어났으나 달기에게 빠져 주지육림의 잔치를 벌이고 어진 신하를 죽이며 백성을 괴롭혀 주의 무왕에게 멸망했다. 두 사람을 아울러 「걸주」라 하여 악한 임금의 대명사로 쓴다.
- 結集결집
- 석존 입멸 뒤 제자들이 모여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한 일. 第一結集에서 가섭을 상수로 한 아라한들이 왕사성에 모여 아난이 경을, 우바리가 율을 송출했다고 전한다. 本文의 「일천의 성문」은 이 결집에 모인 아라한들을 가리킨다.
- 肉眼・天眼・慧眼・法眼・仏眼육안 · 천안 · 혜안 · 법안 · 불안
- 다섯 가지 눈, 곧 오안. 육안은 보통 사람의 눈, 천안은 천계에 갖추어진 눈으로 멀고 가까움과 낮밤을 가리지 않고 본다. 혜안은 이승이 공(空)의 이치를 보는 지혜의 눈이다. 여기까지는 외도와 이전의 경에서도 얻을 수 있다. 법안은 보살이 모든 가명의 법에 통달해 그르치지 않고 중생을 건지려 법문을 비추어 아는 눈, 불안은 삼세 시방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이다.
- 梟鳥・破鏡효조 · 파경
- 효조는 올빼미. 자라면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속설이 있어 「어미 먹는 새」 「불효조」라고도 했다. 파경(破獍)은 너구리 무리의 짐승으로 아비를 잡아먹는다고 전한다. 『사기』 봉선서 등에 보인다. 어버이는 이런 자식조차 버리지 않는다는 비유로 쓰였다.
이 의문은 이 글의 간심 — 제28장의 물음을 받아
제29장은 홀로 서 있는 장이 아니다. 바로 앞 제28장에서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但し世間の疑といゐ自心の疑と申しいかでか天扶け給わざるらん、諸天等の守護神は仏前の御誓言あり法華経の行者には・さるになりとも法華経の行者とがうして早早に仏前の御誓言を・とげんとこそをぼすべきに其の義なきは我が身・法華経の行者にあらざるか、此の疑は此の書の肝心・一期の大事なれば処処にこれをかく上疑を強くして答をかまうべし。
다만 세간의 의심이라 하고 내 마음의 의심이라 하는 것은, 어찌하여 하늘이 도우시지 않는가 하는 것이니라. 제천 등의 수호신은 부처님 앞에서 맹세하신 말씀이 있으니, 법화경의 행자에게는 설령 원숭이라도 법화경의 행자라 부르며 서둘러 부처님 앞의 맹세를 이루려 하셔야 할 터인데 그런 일이 없는 것은 내 몸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이 의문은 이 글의 간심이요 일기의 대사이므로 곳곳에 이를 쓰고, 의문을 강하게 하여 답을 마련하리라.
「의문을 강하게 하여」라는 말이 이 편 전체의 설계도다. 대성인은 의문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오히려 수호해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쌓아 올려 「그런데도 왜 지키지 않는가」를 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만드신다. 수호의 의무가 무거울수록, 수호가 없다는 현실은 더 날카로운 의문이 된다. 그리고 그 의문이 날카로울수록, 마침내 그것을 풀어내는 답, 곧 대성인이야말로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이며 주사친 삼덕을 갖춘 분이라는 결론은 더 확고해진다.
니치칸 상인의 「개목초 문단」은 이 대목부터 제42장까지를 「수호가 없음을 의심하는」 긴 단락으로 보고, 그 안을 이승(제29~31장), 보살 · 제천(제32~42장)으로 나눈다. 강의도 이 장을 「이승의 수호 없음을 의심하는 글 가운데, 이승이 법화의 깊은 은혜를 갚아야 할 도리를 보이신 대목」이라고 규정한다. 곧 제29장은 의문 그 자체가 아니라 의문의 전제, 「이승은 법화경의 행자를 지켜야 할 까닭이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장이다.
- 법화의 심은을 논함(29)
- 옛 탄가로 증명(30)
- 수호 없음을 의심(31)
- 이전의 무은(32)
- 법화의 심은 · 적문 서분과 정종분(33)
- 묘법연화경의 뜻(34)
- 「보살 등의 수호가 없다는 의문을 맺다」(제42장)
- 삼류의 강적과 법화경의 행자(제49장 이하)
현인도 축생도 은혜를 갚는다 — 외전의 보은담
장의 첫머리에 대성인은 외전의 현인 셋을 늘어놓으신다. 계찰은 입 밖에 내지 않은 마음속 약속을 상대가 죽은 뒤에도 지켰고, 왕수는 강물 한 모금에도 값을 치렀으며, 공윤(홍연)은 죽은 주군의 몸을 제 몸에 거두었다. 세 이야기는 서로 결이 다르다. 계찰의 이야기는 신의(信)의 이야기이고, 왕수의 이야기는 받은 것을 공짜로 여기지 않는 염치의 이야기이며, 공윤의 이야기는 주군에 대한 충(忠)의 극한이다. 대성인은 이 셋을 묶어 「이들은 현인이니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하신다. 신의든 염치든 충성이든, 그 뿌리는 받은 것을 잊지 않는 마음, 곧 지은(知恩)이라는 것이다.
공윤의 고사는 대성인이 다른 곳에서도 즐겨 드신 이야기다. 「보은초」의 첫머리는 이 장과 거의 같은 짜임으로 시작한다.
夫れ老狐は塚をあとにせず白亀は毛宝が恩をほうず畜生すらかくのごとし・いわうや人倫をや、されば古への賢者・予譲といゐし者は剣をのみて智伯が恩にあて・こう演と申せし臣下は腹をさひて衛の懿公が肝を入れたり、いかにいわうや仏教をならはん者・父母・師匠・国恩をわするべしや
대저 늙은 여우는 제 굴 언덕을 등지지 않고, 흰 거북은 모보의 은혜를 갚았느니라. 축생조차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리오. 그러므로 옛 현인 예양이라는 이는 칼을 삼켜 지백의 은혜에 보답했고, 홍연이라는 신하는 배를 갈라 위나라 의공의 간을 넣었느니라. 하물며 불교를 배우는 자가 부모와 스승과 국가의 은혜를 잊어서야 되겠는가.
「보은초」는 개목초보다 네 해 뒤, 옛 스승 도젠보의 부음을 듣고 쓰신 글이다. 축생의 보은에서 현인의 보은으로, 현인의 보은에서 불제자의 보은으로 올라가는 논법, 그리고 흰 거북과 홍연이라는 같은 소재가 두 글을 꿰뚫는다. 개목초에서 이 논법은 「대성문이 법화경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보은초」에서는 「불교를 배우는 자는 부모 · 스승 · 국가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대성인에게 보은은 한때의 수사가 아니라 생애를 꿰는 사유의 축이었다.
공윤의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울림이 있다. 개목초를 받은 시조깅고는 다쓰노구치 법난 때 대성인의 말고삐를 붙들고 함께 죽겠다며 따라간 사람이다. 대성인은 그 일을 두고 「시조깅고전어소식」에서 이렇게 쓰셨다.
かかる日蓮にともなひて法華経の行者として腹を切らんとの給う事かの弘演が腹をさいて主の懿公がきもを入れたるよりも百千万倍すぐれたる事なり
이러한 니치렌을 따라 법화경의 행자로서 배를 가르겠다고 하신 일은, 저 홍연이 배를 갈라 주군 의공의 간을 넣은 것보다 백천만 배 뛰어난 일이니라.
개목초의 대고중이 바로 그 시조깅고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장에서 공윤의 이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홍연의 충은 외전의 덕목 가운데 가장 극한의 것이지만, 법화경의 행자를 따르는 마음은 그보다 백천만 배 뛰어나다. 같은 척도가 이 장에서는 대성문에게로 향한다. 외전의 현인도 은혜를 이렇게 갚았거늘, 하물며 법화경에서 성불을 허락받은 대성문이랴.

이어 대성인은 축생의 보은을 드신다. 모보의 거북은 옷 한 벌의 값으로 목숨을 건진 은혜를 이십 년 뒤에 목숨으로 갚았고, 곤명지의 물고기는 바늘 하나를 빼 준 은혜를 밝은 구슬로 갚았다. 「축생조차 은혜를 갚거늘 하물며 대성이리오(畜生すら猶恩をほうず何に況や大聖をや)」. 이 「하물며」의 논법이 장 전체를 이끈다. 현인보다 못하면 「은혜를 모르는 축생」이고, 그런데 축생조차 은혜를 안다. 그렇다면 은혜를 갚지 않는 대성문은 축생보다도 못한 자리에 서게 된다. 대성인은 대성문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이 극단적인 대비로 드러내신다.
- 계찰(信)마음속 약속을 지켜 칼을 서군의 무덤에 걸다
- 왕수강물을 마시고 금 아목을 물에 넣다
- 공윤(홍연)(忠)배를 갈라 주군 의공의 간을 넣다
- 모보의 거북옷과 바꾸어 살려 준 은혜를 이십 년 뒤 갚다
- 곤명지의 큰 물고기낚싯바늘을 빼 준 무제에게 밤중에 밝은 구슬을 바치다
사십여 년의 「영불성불」과 법화경의 수기
대성인은 사리불 · 가섭 등을 「대성」이라 부르신다. 이백오십계와 삼천의 위의를 하나도 어기지 않고, 견사혹을 끊어 삼계를 벗어났으며, 범천 · 제석조차 스승으로 받드는 이들이다. 소승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수행의 정점에 선 성인이다. 그런데도 이전의 대승경들은 이들에게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 판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개목초 제12장에서 대성인이 인용하신 화엄경과 대집경의 문에 잘 드러난다. 화엄경은 여래의 지혜를 설산의 대약왕수에 견주면서, 이 나무가 오직 두 곳에서만은 자라지 못하니 이승이 떨어지는 「무위의 깊은 구덩이」와 선근을 깨뜨린 일천제가 빠지는 「사견과 탐애의 물」이라고 했다. 대집경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大集経に云く「二種の人有り必ず死して活きず畢竟して恩を知り恩を報ずること能わず、一には声聞・二には縁覚なり、譬えば人有りて深坑に堕墜し是の人・自ら利し他を利すること能わざるが如く声聞・縁覚も亦復是くの如し解脱の坑に堕して自ら利し及以び他を利すること能わず」等云云
대집경에 이르기를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반드시 죽어 살아나지 못하며, 끝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지 못한다. 첫째는 성문이요 둘째는 연각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면 스스로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문 · 연각도 그러하여 해탈의 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 운운.
이전의 경들은 이승을 바로 「은혜를 알지도 갚지도 못하는 자」로 규정했다. 제12장에서 대성인은 그 까닭을 이렇게 풀이하셨다. 출가는 본디 부모를 구하기 위한 것인데, 이승은 자기 해탈만 얻고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이 없으며, 부모까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길에 들게 하니 도리어 은혜를 모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지은 · 보은의 본보기여야 할 성인들이 「불지은의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 이것이 이전의 경들 아래에서 성문이 놓인 자리였다.
이 장의 논리는 그 판정을 그대로 뒤집는다. 이전에서 「은혜를 모르는 자」로 판정받은 이승이, 법화경에서 성불을 허락받았다. 그러니 이제 그들에게 은혜를 아는 길은 오직 하나, 그 성불을 허락한 법화경과 그 경을 행하는 자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이전의 경들이 내린 「불지은」의 판정이 옳았다는 것이 되고 만다. 「저 현인들보다 못한, 은혜를 모르는 축생」이라는 本文의 말은 이 이중의 의미를 품고 있다.
대성인은 법화경의 수기를 「불사의 양약」이라 부르시고, 불탄 씨앗 · 깨진 돌 · 마른 나무의 비유로 그 극적인 반전을 그리신다. 유마경에서 가섭이 「우리는 대승에 대해 썩은 씨앗과 같다」고 통곡했던 바로 그 씨앗에서 싹이 텄다는 것이다. 법화경 비유품에서 사리불은 화광여래, 수기품에서 가섭은 광명여래, 수보리는 명상여래, 가전연은 염부나제금광여래, 목련은 다마라발전단향여래, 오백제자수기품에서 부루나는 법명여래, 수학무학인기품에서 아난은 산해혜자재통왕여래, 라후라는 도칠보화여래의 수기를 받았다.
그런데 대성인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신다. 「아직 팔상을 나타내지 않았다(いまだ八相をとなえず)」. 수기는 받았으되 아직 실제로 부처가 되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한 마디가 논증의 고리를 단단히 죈다. 성문의 성불은 이미 끝난 일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져 가는 과정 위에 있다. 그렇다면 그 성불을 보증한 법화경은 지금도 그들의 생명줄이며, 그 경을 홍통하는 행자를 버린다는 것은 제 성불의 근거를 스스로 버리는 일이 된다. 은혜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빚이다.
이름도 공경도 법화경에서 — 걸주와 결집과 성문의 상
이어 대성인은 아난과 라후라를 드신다. 아난은 곡반왕의 아들이요 라후라는 정반왕의 손자, 곧 둘 다 석가족 왕가의 핏줄이다. 가문이 높은 데다 아라한의 증과까지 얻었으니 세간으로 보나 출세간으로 보나 더할 나위 없는 몸이다. 그런데도 대성인은 「법화경이 없었다면 아무리 가문이 높고 대성이라 한들 누가 공경했으랴」라고 하신다.
이 말을 뒷받침하는 것이 걸주의 비유다. 걸과 주는 만승의 천자였고 백성이 귀의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가 그릇되어 나라를 망쳤으므로 오늘날까지 악인의 본보기가 되어, 가장 천대받는 사람조차 「걸주 같다」는 말을 들으면 모욕으로 여긴다. 현대어역은 이 대목을 「국왕이라도 덕이 없으면 누구도 우러르지 않는다」고 풀이한다. 높은 지위나 가문 자체가 공경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위에 걸맞은 덕이 있어야 공경을 받는다. 성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공경받는 까닭은 왕가의 혈통이나 아라한의 과위가 아니라, 법화경에서 받은 성불의 보증에 있다는 것이다.
대성인의 논법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천이백의 성문, 무량의 성문은 법화경이 없었다면 그 이름조차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않았으리라. 석존 입멸 뒤 가섭을 상수로 한 아라한들이 결집을 하여 일체경을 남겼지만, 그 결집조차 「보는 사람이 결코 없었으리라」. 하물며 그들의 모습을 그림과 나무로 새겨 본존으로 우러르는 일이 있었겠는가. 불멸 뒤 인도와 중국과 일본에서 가섭 · 아난을 비롯한 성문의 상이 조성되고 공경을 받은 것은 엄연한 역사이지만, 대성인은 그 공경의 근원을 법화경의 힘에서 찾으신다. 「이는 오로지 법화경의 힘으로 일체의 아라한이 귀의를 받게 되신 것이니라」.
이 지적은 역사를 거꾸로 읽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소승의 아라한 숭배는 법화경 성립 이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성인의 논점은 연대가 아니라 교판에 있다. 이전의 대승경들이 「영불성불」을 선언한 이상, 그 판정을 뒤집어 성문을 「미래의 부처」로 세운 법화경이 없었다면, 대승의 입장에서 성문을 공경할 근거는 사라진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고, 원숭이가 나무를 떠나고, 어린아이가 젖을 떠나고, 백성이 왕을 떠난 것과 같다」는 네 겹의 비유는, 성문과 법화경의 관계가 그들의 존립 자체와 맞닿아 있음을 보인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살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법화경의 행자를 버리시겠는가」.
오안을 갖춘 성문이 행자를 모를 리 없다
다음으로 대성인은 성문의 「눈」을 문제 삼으신다. 이전의 경들에서 성문은 육안 위에 천안과 혜안을 얻었고, 법화경에서는 법안과 불안까지 갖추었다. 그렇다면 시방세계조차 비추어 볼 터인데, 바로 이 사바세계에서 난을 당하는 법화경의 행자를 못 볼 리가 없다.
오안의 차례는 그대로 수행의 깊이를 나타낸다. 육안과 천안은 범부와 천인의 눈이고, 혜안은 이승이 공의 이치를 보는 눈이다. 강의의 어석은 이 혜안을 「우리 범부로 말하면 깊은 지식과 체험에 바탕한 판단력」이라 하고, 법안은 「불법의 법칙 위에서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힘」이라고 풀이한다. 여기까지 가운데 혜안까지는 외도나 이전의 경에서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법안과 불안은 법화경에 와서야 성문에게 갖추어졌다. 대성인은 「십법계사」에서 법화경 방편품의 개불지견을 설하실 때의 광경을 이렇게 쓰셨다.
爾の時八機並に悪趣の衆生悉く皆同じく釈迦如来と成り互に五眼を具し一界に十界を具し十界に百界を具せり
그때 팔기와 악취의 중생이 모두 한가지로 석가여래가 되어, 서로 오안을 갖추고 한 계에 십계를 갖추며 십계에 백계를 갖추었느니라.
오안을 「서로 갖춘다」는 것은 십계호구의 다른 표현이다. 성문계에 불계가 갖추어졌기에 성문도 불안을 갖춘다. 「관심의 본존초」가 열반경을 인용해 「대승을 배우는 자는 육안이 있더라도 불안이라 이름한다」(241쪽)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화경은 성문에게 성불의 보증만 준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 자체를 부처의 눈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 눈을 가진 이들이 법화경의 행자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수호가 없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남고, 이것이 다음 장들의 의문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설령 니치렌이 악인이라도」 — 부모와 자식의 비유
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대성인은 극단적인 가정을 세우신다. 설령 니치렌이 악인이어서 한두 마디, 한두 해, 한두 겁, 나아가 백천만억 겁에 걸쳐 이 성문들을 욕하고 칼과 막대를 더하는 기색이 있다 하더라도, 법화경을 신앙하는 행자라면 성문은 그를 버려서는 안 된다. 여기서 「법화경만이라도(法華経をだにも)」라는 말이 핵심이다. 행자 개인의 허물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가 법화경을 신앙하는 한 성문의 수호 의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수호의 근거는 행자의 인품이 아니라 그가 지닌 법화경에 있기 때문이다.
이 가정을 뒷받침하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비유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욕을 한다고 부모가 그 아이를 버리지는 않는다. 올빼미는 자라서 어미를 먹는다지만 어미는 그 새끼를 버리지 않고, 파경은 아비를 해친다지만 아비는 그 새끼를 따른다. 이 두 짐승은 동아시아의 오랜 전승에서 불효의 상징이었다. 『사기』 봉선서에는 옛 천자가 봄에 황제(黃帝)에게 제사 지낼 때 올빼미와 파경을 썼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악한 짐승을 없애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다. 대성인은 그 가장 불효한 짐승의 어버이조차 새끼를 버리지 않는다는 데서 논점을 끌어내신다. 「축생조차 이와 같거늘 대성이 법화경의 행자를 버리시겠는가」.
여기서 대성인이 성문과 행자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견주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앞에서는 성문이 법화경의 은혜를 갚아야 할 「자식」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 비유에서 성문은 오히려 행자를 품어야 할 「어버이」의 자리에 놓인다.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은혜를 다음 사람에게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법화경에서 성불을 허락받은 성문은, 같은 법화경을 지닌 말법의 행자에게 어버이와 같은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과 보은은 받은 이에게 되갚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법을 매개로 다음 세대에게로 이어진다.
지은 · 보은이 사람의 길 — 세 가지 효
강의는 이 장을 풀이하면서 지은 · 보은의 도리를 인간론의 차원으로 넓힌다. 사람이 다른 생류와 다른 까닭은 은혜를 알고 갚는 데 있다. 좋고 싫음을 기준으로 삼거나, 강한 자에게만 따르거나, 미혹에 휘둘려 은혜를 모르고 갚지 않는 것은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강의는 지은 · 보은을 아는 사람이 드문 데서 사회의 혼란과 원망의 삶이 생긴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으려면 일승의 묘법을 널리 펴서 모든 민중에게 돌아갈 곳을 알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의는 특히 부모의 은혜를 예로 든다. 세상에 자식은 많지만 부모의 은혜를 알고 갚는 이는 몇이나 되는가.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시늉을 하는 이는 더러 있어도, 돌아가신 부모에게 은혜를 갚는 이는 거의 없다. 그것은 은혜 갚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갚는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생명이 삼세에 걸쳐 이어진다는 것을 모르기에, 돌아가신 부모가 어떤 괴로움 속에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고, 그 괴로움을 어떻게 구할지 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강의는 효를 세 단계로 나눈다. 부모에게 옷과 음식을 드리는 것이 하품의 효,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품의 효, 부모에게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 상품의 효다. 상품의 효란 삼대비법의 참된 불법을 알려 드려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는 것이며, 돌아가신 뒤에는 삼대비법의 이익으로 명토에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다.
이 세 단계의 효는 개목초 자체의 논리와 맞닿는다. 대성인은 상권 첫머리에서 유교의 성현이 「과거와 미래를 모르기에 부모 · 주군 · 스승의 후세를 돕지 못하니 은혜를 모르는 자」(「개목초 상」, 186–187쪽)라 하셨고, 하권에서는 이렇게 쓰셨다.
儒家の孝養は今生にかぎる未来の父母を扶けざれば外家の聖賢は有名無実なり
유가의 효양은 금생에 그치니, 미래의 부모를 돕지 못하므로 외가의 성현은 이름만 있고 실이 없느니라.
하품 · 중품의 효는 유가의 효양으로도 이룰 수 있지만, 상품의 효, 곧 부모의 생명을 삼세에 걸쳐 구하는 효는 법화경 없이는 이룰 수 없다. 제12장에서 대성인은 「불제자는 반드시 사은을 알아 지은 · 보은을 다해야 한다(仏弟子は必ず四恩をしつて知恩報恩をいたすべし)」(191–192쪽)고 하셨다. 이승이 이전에서 「불지은」의 판정을 받은 것도, 법화경에서 비로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자가 된 것도, 모두 이 삼세의 효, 삼세의 보은이라는 기준에서 나온다. 이 장에서 대성문에게 요구되는 보은은, 바로 이 가장 높은 단계의 보은, 곧 법을 지키고 법을 펴는 이를 지킴으로써 은혜를 갚는 것이다.
강의는 이 장의 요점을 지은 · 보은에서 찾는다. 은혜를 알고 갚는 것이 사람의 길이며, 그 극치는 생명의 삼세를 꿰뚫는 법으로 부모와 사람들을 구하는 데 있다. 법화경에서 성불을 허락받은 이승이 법화경의 행자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그 보은의 도리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적용한 것이다.
본문
されば四大声聞の領解の文に云く「我等今は真に是れ声聞なり仏道の声を以て一切をして聞かしむ我等今は真に阿羅漢なり諸の世間天人・魔・梵に於て普く其の中に於て・応に供養を受くべし、世尊は大恩まします希有の事を以て憐愍教化して我等を利益し給う、無量億劫にも誰か能く報ずる者あらん手足をもつて供給し頭頂をもつて礼敬し一切をもつて供養すとも皆報ずること能わじ、若しは以て頂戴し両肩に荷負して恒沙劫に於て心を尽して恭敬し又美膳・無量の宝衣及び諸の臥具・種種の湯薬を以てし、牛頭栴檀及び諸の珍宝を以て塔廟を起て宝衣を地に布き斯くの如き等の事を以用て供養すること恒沙劫に於てすとも亦報ずること能わじ」等云云。 諸の声聞等は前四味の経経にいくそばくぞの呵嘖を蒙り人天大会の中にして恥辱がましき事・其の数をしらず、しかれば迦葉尊者の渧泣の音は三千をひびかし須菩提尊者は亡然として手の一鉢をすつ、 舎利弗は飯食をはき富楼那は画瓶に糞を入ると嫌わる、世尊・鹿野苑にしては阿含経を讃歎し二百五十戒を師とせよなんど慇懃にほめさせ給いて、 今又いつのまに我が所説をば・かうはそしらせ給うと二言・相違の失とも申しぬべし、例せば世尊・提婆達多を汝愚人・人の唾を食うと罵詈せさせ給しかば毒箭の胸に入るがごとく・をもひて・うらみて云く「瞿曇は仏陀にはあらず我は斛飯王の嫡子・阿難尊者が兄・瞿曇が一類なり、いかにあしき事ありとも内内・教訓すべし、此等程の人天大会に此程の大禍を現に向つて申すもの大人・仏陀の中にあるべしや、されば先先は妻のかたき今は一座のかたき今日よりは生生・世世に大怨敵となるべし」と誓いしぞかし、 此れをもつて思うに今諸の大声聞は本と外道・婆羅門の家より出でたり、又諸の外道の長者なりしかば諸王に帰依せられ諸檀那にたつとまる、 或は種姓・高貴の人もあり或は富福・充満のやからもあり、而るに彼彼の栄官等をうちすて慢心の幢を倒して俗服を脱ぎ壊色の糞衣を身にまとひ白払・弓箭等をうちすてて一鉢を手ににぎり貧人・乞丐なんどの・ごとくして世尊につき奉り風雨を防ぐ宅もなく身命をつぐ衣食乏少なりし・ありさまなるに五天・四海・皆外道の弟子・檀那なれば仏すら九横の大難にあひ給ふ、 所謂提婆が大石をとばせし阿闍世王の酔象を放ちし阿耆多王の馬麦・婆羅門城のこんづ・せんしや婆羅門女が鉢を腹にふせし、何に況や所化の弟子の数難申す計りなし、 無量の釈子は波瑠璃王に殺され千万の眷属は酔象にふまれ、華色比丘尼は提婆にがいせられ迦盧提尊者は馬糞にうづまれ目犍尊者は竹杖にがいせらる、 其の上六師同心して阿闍世・婆斯匿王等に讒奏して云く「瞿曇は閻浮第一の大悪人なり、彼がいたる処は三災七難を前とす、大海の衆流をあつめ大山の衆木をあつめたるが・ごとし、瞿曇がところには衆悪をあつめたり、所謂迦葉・舎利弗・目連・須菩提等なり、人身を受けたる者は忠孝を先とすべし、彼等は瞿曇にすかされて父母の教訓をも用いず、家をいで王法の宣旨をも・そむいて山林にいたる、一国に跡をとどむべき者にはあらず、されば天には日月・衆星・変をなす地には衆夭さかんなり」なんど・うつたう、 堪べしとも・おぼえざりしに又うちそうわざわいと仏陀にもうちそい・がたくて・ありしなり、人天大会の衆会の砌にて時時呵嘖の音をききしかば・いかにあるべしとも・おぼへず只あわつる心のみなり、 其の上大の大難の第一なりしは浄名経の「其れ汝に施す者は福田と名けず汝を供養する者は三悪道に堕す」等云云、文の心は仏・菴羅苑と申すところに・をはせしに梵天・帝釈・日月・四天・三界諸天・地神・竜神等・無数恒沙の大会の中にして云く須菩提等の比丘等を供養せん天人は三悪道に堕つべし、 此等をうちきく天人・此等の声聞を供養すべしや、詮ずるところは仏の御言を用つて諸の二乗を殺害せさせ給うかと見ゆ、心あらん人人は仏をも・うとみぬべし、 されば此等の人人は仏を供養したてまつりしついでに・こそ・わづかの身命をも扶けさせ給いしか、
그러므로 사대성문이 영해한 글에 이르기를 「우리는 이제야 참으로 성문이니, 불도의 소리로써 일체로 하여금 듣게 하리라. 우리는 이제야 참으로 아라한이니, 모든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마와 범천 가운데서 널리 마땅히 공양을 받으리라. 세존께서는 큰 은혜가 있으시어, 희유한 일로써 불쌍히 여겨 교화하시어 우리를 이롭게 하셨도다. 무량억 겁에도 누가 능히 그 은혜를 갚으리오. 손발로 받들어 모시고, 머리를 조아려 예경하고, 온갖 것으로 공양할지라도 다 갚을 수 없으며, 혹은 머리에 이고 두 어깨에 짊어지고 항하사 겁 동안 마음을 다해 공경하고, 또 맛있는 음식과 한량없는 보배 옷과 온갖 침구와 갖가지 탕약으로 하며, 우두전단과 온갖 진귀한 보배로 탑묘를 세우고 보배 옷을 땅에 깔아, 이러한 일들로 항하사 겁 동안 공양할지라도 또한 갚을 수 없으리라」 운운. 모든 성문들은 앞의 사미의 경들에서 얼마나 많은 꾸짖음을 입었으며, 인천의 대회 가운데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가섭존자의 우는 소리는 삼천세계를 울렸고, 수보리존자는 망연히 손의 바리때를 버렸으며, 사리불은 먹던 밥을 토했고, 부루나는 그림 그린 병에 똥을 넣는다고 미움을 받았느니라. 세존께서 녹야원에서는 아함경을 찬탄하시고 「이백오십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정성껏 칭찬하시더니, 이제 또 언제 사이에 당신이 설하신 것을 이렇게까지 비방하시는가 하니, 두 말이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라고도 할 만하니라. 예컨대 세존께서 제바달다를 「너는 어리석은 자, 남의 침을 먹는 자」라고 꾸짖으셨으므로, 제바는 독화살이 가슴에 박힌 듯이 여겨 원망하여 말하기를 「구담은 부처가 아니다. 나는 곡반왕의 적자요 아난존자의 형이니 구담과 한 집안이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더라도 안에서 조용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만한 인천의 대회에서 이만한 큰 허물을 면전에 대고 말하는 자가 대인이나 부처 가운데 있겠는가. 그렇다면 예전에는 아내를 빼앗은 원수요 지금은 한 자리의 원수이니, 오늘부터는 생생세세에 큰 원적이 되리라」고 맹세했느니라. 이로써 생각하건대, 지금의 모든 대성문은 본래 외도 · 바라문의 집안에서 나왔느니라. 또 모든 외도의 장자였으므로 여러 왕에게 귀의를 받고 여러 단나에게 존경을 받았느니라. 혹은 종성이 고귀한 사람도 있고 혹은 부귀가 충만한 무리도 있었느니라. 그런데 그 영화로운 벼슬 등을 내던지고 교만의 깃대를 쓰러뜨리고 속복을 벗고 괴색의 분소의를 몸에 걸치며, 백불과 활과 화살 등을 내던지고 바리때 하나를 손에 쥐고, 가난한 이와 걸인처럼 되어 세존을 따랐으니, 비바람을 막을 집도 없고 목숨을 이을 옷과 밥도 모자라는 형편이었느니라. 게다가 오천축과 사해가 모두 외도의 제자와 단나였으므로 부처님조차 구횡의 대난을 만나셨느니라. 이른바 제바가 큰 돌을 날린 일, 아사세왕이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은 일, 아기다왕의 말먹이 보리, 바라문성의 썩은 쌀뜨물, 전차 바라문녀가 바리때를 배에 엎어 넣은 일이니라. 하물며 교화받는 제자들이 당한 숱한 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느니라. 무량한 석가족은 바유리왕에게 죽고, 천만의 권속은 술 취한 코끼리에 밟혔으며, 화색비구니는 제바에게 해침을 당하고, 가로제존자는 말똥에 묻혔으며, 목건련존자는 죽장외도에게 해침을 당했느니라. 그 위에 육사외도가 마음을 모아 아사세왕 · 바사닉왕 등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구담은 염부제 제일의 대악인이다. 그가 이르는 곳에는 삼재칠난이 먼저 일어난다. 큰 바다가 뭇 물줄기를 모으고 큰 산이 뭇 나무를 모으듯, 구담이 있는 곳에는 뭇 악을 모았으니, 이른바 가섭 · 사리불 · 목련 · 수보리 등이다. 사람의 몸을 받은 자는 충과 효를 앞세워야 하거늘, 저들은 구담에게 꾀여 부모의 가르침도 쓰지 않고 집을 나와 왕법의 선지마저 거스르고 산림으로 들어갔다. 한 나라에 발붙여 둘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해와 달과 뭇 별이 이변을 일으키고 땅에는 뭇 재앙이 성하다」라고 호소했느니라. 견딜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는데, 거기에 더하여 겹치는 화는 부처님께도 기댈 수 없었다는 것이니라. 인천 대회의 모임 자리에서 때때로 꾸짖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오직 허둥대는 마음뿐이었느니라. 그 위에 큰 난 중에서도 첫째가는 것은 정명경의 「너에게 보시하는 자는 복전이라 이름하지 않으며, 너를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 운운이니라. 글의 뜻은, 부처님이 암라원이라는 곳에 계실 때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왕 · 삼계의 제천 · 지신 · 용신 등 무수 항하사의 대회 가운데서 「수보리 등의 비구들을 공양하는 하늘과 사람은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니라. 이를 들은 하늘과 사람이 이 성문들을 공양하겠는가. 결국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모든 이승을 죽이시려는 것인가 하고 보이느니라. 마음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마저 꺼렸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부처님을 공양해 드리는 김에야 겨우 목숨을 부지하셨던 것이니라.
어구 풀이
- 四大声聞の領解사대성문의 영해
- 법화경 신해품 제4. 방편품 · 비유품의 설법과 사리불의 수기를 들은 중근의 성문 넷, 곧 수보리 · 가전연 · 가섭 · 목련이 장자궁자의 비유로 자신들의 깨달음을 아뢰는 대목이다. 本文에 인용된 것은 신해품 끝 게송의 결말 부분으로, 법화경을 듣고 비로소 「참된 성문 · 참된 아라한」이 되었다는 기쁨과 불은을 다 갚을 수 없다는 고백이다.
- 牛頭栴檀우두전단
- 남천축 우두산(마라야산)에서 나는 전단향. 적동색이어서 적전단이라고도 한다. 사향 같은 향이 나며 예부터 만병을 없애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졌다.
- 前四味전사미
- 천태의 오시 교판에서 법화 · 열반 이전의 네 시기, 곧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를 열반경의 오미(유 · 낙 · 생소 · 숙소 · 제호)에 견주어 이르는 말. 법화경을 제호미로 보고, 그 앞의 네 맛을 전사미라 한다.
- 迦葉尊者の渧泣の音は三千をひびかし가섭존자의 우는 소리가 삼천을 울리다
- 마하가섭은 소승의 대성자로 견사의 번뇌를 끊었지만, 유마경 부사의품에서 유마힐이 설하는 보살의 불가사의해탈 법문을 듣고 「우리는 대승에 대해 썩은 씨앗과 같다」며 울었고, 그 소리가 삼천대천세계를 흔들었다고 한다.
- 須菩提尊者は亡然として手の一鉢をすつ수보리존자가 망연히 바리때를 버리다
- 유마경 제자품. 유마힐이 병들자 석존이 수보리에게 문병을 명했는데, 수보리는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아뢰며, 예전에 유마힐이 바리때에 밥을 담아 주면서 소승의 공에 빠진 태도를 꾸짖고 「이것을 감당할 수 있으면 먹으라」고 했을 때 바리때를 두고 물러났던 일을 고백한다.
- 舎利弗は飯食をはき사리불이 밥을 토하다
- 강의는 방등부 경에서 사리불이 석존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는다」고 꾸짖음을 받은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 富楼那は画瓶に糞を入ると嫌わる부루나가 그림 병에 똥을 넣는다고 미움받다
- 유마경 제자품. 부루나가 새로 배우는 비구들에게 소승법을 설하고 있을 때 유마힐이 와서 「먼저 이 사람들의 마음을 살핀 뒤에 설법하라. 더러운 음식을 보배 그릇에 담지 말라」고 했다. 대승의 그릇인 이들에게 소승을 설하는 것을 꾸짖은 것이다.
- 鹿野苑녹야원
- 범어 므리가다바의 번역. 고대 인도 바라나국(오늘의 바라나시)에 있던 동산으로, 오늘날 바라나시 북쪽의 사르나트에 해당한다.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뒤 이곳에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처음 법을 설했으므로 초전법륜의 땅이라 한다. 일찍부터 순례지가 되어 탑과 승원이 세워졌고, 인도 조각사의 걸작인 아소카왕 석주의 사자 주두도 이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 提婆達多제바달다
- 석존의 사촌으로 곡반왕(또는 백반왕)의 아들이요 아난의 형이라 전한다. 출가했으나 석존을 시기해 교단을 분열시키고 석존을 해치려 했다. 本文의 「남의 침을 먹는 자」는 제바가 교단의 지도권을 넘겨 달라고 했을 때 석존이 꾸짖은 말로 율장 등에 전한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는 과거세의 아사선인으로서 석존의 스승이었다고 밝혀지고 천왕여래의 수기를 받는다.
- 先先は妻のかたき예전에는 아내의 원수
- 석존이 출가 전 실달태자였을 때 인도 제일의 미녀라는 구리성주의 딸 야수다라를 아내로 맞았는데, 제바달다도 그녀를 연모하고 있었으므로 깊이 원망했다고 전한다.
- 壊色の糞衣괴색의 분소의
- 법에 맞는 옷(여법의)의 하나. 괴색은 오정색(청 · 적 · 백 · 흑 · 황)과 오간색(비 · 홍 · 자 · 녹 · 유황)을 벗어난 탁한 색이다. 인도에서는 흰색을 귀히 여겼으나 출가자는 재가자의 흰색이나 정색을 피하고 목란색(황 · 홍 · 적이 섞인 색)이나 진흙색을 썼다. 진흙색이 일본에 와서 엷은 먹색이 되었고, 대성인 당시에는 천태종의 승려가 이 엷은 먹색 옷을 입었다. 분소의는 무덤 등에서 주운 헝겊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색으로 물들여 기운 옷으로, 옷에 집착하지 않는 뜻을 나타낸다.
- 白払백불
- 흰 털로 만든 불자(拂子). 모기나 파리를 쫓는 도구로, 여기서는 활과 화살과 함께 세속의 귀인 · 무인이 지니던 물건을 상징한다.
- 九横の大難구횡의 대난
- 석존이 겪은 아홉 가지 큰 난. 경론과 어서에 따라 꼽는 법이 조금씩 다르다. 강의의 어석은 ① 손타리의 비방 ② 바라문성의 썩은 쌀뜨물 ③ 아기다왕의 말먹이 보리 ④ 유리왕의 석가족 살해 ⑤ 걸식하여 빈 바리때 ⑥ 전차녀의 비방 ⑦ 제바달다가 산을 밀어 바위를 떨어뜨림 ⑧ 찬바람에 옷을 구함 ⑨ 아사세왕이 취한 코끼리를 풂의 아홉을 든다. 자세한 내용은 해설에서 다룬다.
- 波瑠璃王바유리왕
- 사위국 바사닉왕의 아들. 어린 시절 석가족에게 받은 모욕을 원망해 왕위에 오른 뒤 가비라위국을 쳐서 석가족을 멸했다고 전한다.
- 華色比丘尼화색비구니
- 연화색비구니, 연화녀라고도 한다. 석존 재세의 비구니로, 『대지도론』 권14에 따르면 산에서 바위를 굴려 석존을 죽이려 한 제바달다를 꾸짖다가 그의 주먹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사은초」는 「증과의 아라한 연화비구니」라고 부른다.
- 迦盧提尊者가로제존자
- 범명 칼로다인의 음사로, 가류타이라고도 쓰며 흑광 · 흑요라 번역한다. 몸이 검고 빛났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출가한 뒤에도 계를 어기는 일이 많았으나 아라한과를 얻고 나서 고쳐, 사위국의 구백구십구 집을 교화했다. 천 번째로 어느 바라문 집을 교화하던 중, 그 집 며느리가 도적의 우두머리와 정을 통하고 있는 것을 그가 알아챘다고 여긴 이들이 도적을 시켜 그를 죽였고, 그 머리는 말똥 속에 묻혔다고 한다.
- 目犍尊者목건존자
- 마하목건련. 석존의 십대제자 가운데 신통제일. 석존 입멸 전 나열성(왕사성)에서 걸식하던 중 죽장외도에게 둘러싸였는데, 한 번은 벗어났으나 과거세의 숙업임을 알고 스스로 외도에게 죽임을 당해 업을 멸했다고 전한다.
- 六師육사
- 석존 당시 중인도에서 세력을 떨친 여섯 사상가, 곧 육사외도. 부란나가섭 · 말가리구사리자 · 산사야비라지자 · 아기다시사흠바라 · 가라구타가전연 · 니건타야제자를 이른다.
- 三災七難삼재칠난
- 삼재는 곡귀(기근) · 병역(역병) · 도병(전란), 칠난은 경에 따라 다르나 해 · 달의 이변, 별의 이변, 화재, 수재, 풍재, 가뭄, 외적 등을 이른다. 육사외도는 석존이 가는 곳마다 이런 재앙이 먼저 일어난다고 참소했다.
- 浄名経정명경
- 유마경의 다른 이름. 유마힐(비말라키르티)을 번역하면 「정명」이 되므로 이렇게 부른다. 구마라집 역 『유마힐소설경』 3권이 널리 읽혔다. 방등부의 대표 경전으로, 재가의 보살 유마힐이 소승의 성문들을 차례로 꾸짖는 내용이 많다.
- 菴羅苑암라원
- 암라는 범어로 망고. 중인도 비사리국에 있던 동산으로, 유마경 등이 설해진 곳이다.
- 福田복전
- 공양하면 복덕이 생겨나는 밭이라는 뜻. 부처와 승가는 공양받을 만한 복전이라 하여 공경을 받았다. 정명경의 말은 성문을 공양해도 복이 생기지 않으며 도리어 악도에 떨어진다는 것이니, 출가자의 존립 근거를 정면으로 부정한 말이다.
사대성문의 영해와 「세존의 대은」
제30장은 법화경 신해품의 게송으로 시작한다. 방편품에서 개삼현일의 법문이 설해지고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화광여래의 수기를 받자, 그때까지 이해하지 못하던 중근의 성문 넷, 곧 수보리 · 가전연 · 마하가섭 · 마하목건련이 일어나 장자궁자의 비유로 자신들의 깨달음을 아뢴다. 本文에 인용된 것은 그 영해의 마지막 게송이다. 「우리는 이제야 참으로 성문이다」, 「우리는 이제야 참으로 아라한이다」라는 두 번의 「이제야」가 이 영해의 핵심이다. 이전의 경들에서 그들은 성문이었고 아라한이었지만, 그것은 「참된」 성문 · 아라한이 아니었다. 부처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로 일체를 듣게 하는 자가 참된 성문이요, 하늘과 사람과 마와 범천의 공양을 받을 만한 자가 참된 아라한이다. 그 자격을 그들은 법화경에서 비로소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백한다. 손발로 받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온갖 것으로 공양해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짊어지고 항하사 겁 동안 공경해도, 온갖 음식과 옷과 침구와 탕약으로, 우두전단과 진보로 탑묘를 세워 공양해도, 이 은혜는 다 갚을 수 없다고. 제29장에서 대성인이 외전의 현인과 축생의 보은을 들어 「어찌 갚지 않으리오」라고 물으셨다면, 이 장은 그 물음에 성문들 스스로가 경 안에서 이미 답했음을 보이는 것이다. 성문들은 법화경의 은혜가 갚을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말에 걸맞은 행동이 있어야 한다.
이 「세존의 대은」에 대해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世尊とは釈尊大恩とは南無妙法蓮華経なり釈尊の大恩を報ぜんと思わば法華経を受持す可き者なり是れ即ち釈尊の御恩を報じ奉るなり……今日蓮等の類い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奉りて日本国の一切衆生を助けんと思うは豈世尊の大恩に非ずや
세존이란 석존이요, 대은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석존의 대은을 갚고자 한다면 법화경을 수지해야 하느니라. 이것이 곧 석존의 은혜를 갚는 것이니라. …… 지금 니치렌 등의 무리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여 일본국의 일체중생을 돕고자 하는 것이 어찌 세존의 대은이 아니겠는가.
『어의구전』은 같은 항목에서 「대은을 제목이라 하는 것은 바로 다음에 〈희유한 일로써〉라고 설하니, 희유한 일이란 제목이다」라고 하고, 이 대은의 묘법연화경을 사십여 년 동안 감추셨다가 뒤의 팔 년에 여셨다고 풀이한다. 또 장안대사가 든 부처의 열 가지 은혜를 소개하는데, 그 가운데 여섯째가 「작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큰 것을 사모하게 한 은혜(耻小慕大の恩)」다. 『어의구전』은 이 은혜를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 권6에 기대어 이렇게 설명한다.
第六の耻小慕大の恩を記の六に云く故に頓の後に於て便ち小化を垂れ弾斥淘汰し槌砧鍛錬すと
여섯째 치소모대의 은혜를 「문구기」 권6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돈교 뒤에 곧 작은 교화를 드리우고, 탄척하고 도태하며, 망치와 모루로 단련한다」고 하였느니라.
이 문은 이 장을 읽는 열쇠가 된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성문들이 이전의 경들에서 받은 꾸짖음, 곧 「탄가」를 나열하는데, 『어의구전』의 관점에서 보면 그 꾸짖음 자체가 이미 부처의 은혜였다. 쇠를 망치로 두드리고 모루에 올려 단련하듯, 부처는 소승에 안주하려는 성문을 꾸짖어 작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큰 것을 사모하게 했다. 그 단련이 있었기에 성문들은 법화경에 이르러 일승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꾸짖음을 견뎌 낸 끝에 얻은 성불은, 꾸짖음의 쓰라림만큼 더 큰 은혜가 된다.
강의는 이 사대성문의 영해를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얻은 부처의 경애에 대해 감사를 다하고, 사람과 법에 함께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한 것」이라 하여 「성문의 서원」이라 부를 만하다고 말한다. 신해품에서 사대성문은 「무상의 보배 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얻었다(無上宝聚 不求自得)」고 기뻐했는데,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이 구절을 「우리 기심의 성문계」의 일로 읽으셨다(246쪽). 이 「불구자득」은 개목초 하권 제58장의 주제이기도 하다. 강의는 이어서, 부처에게는 꾸짖음을 받고 외도에게는 괴롭힘을 당해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던 성문들이 마침내 허락을 받아 등각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이 어떠했겠느냐고 말한다.
사대성문의 영해 게송은 신해품 끝부분에 있다. 本文의 「我等今は真に是れ声聞なり」는 경문 「我等今者 真是声聞 以仏道声 令一切聞」을, 「世尊は大恩まします」는 「世尊大恩 以希有事 憐愍教化 利益我等」를 훈독한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절대묘 — 강의의 관점
강의는 이 장의 해설에서 부처의 교화 전체를 꿰는 관점 하나를 제시한다. 부처가 보살 · 이승 · 인천을 어떻게 지도했는가 하면,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을 밝히고 그 목적을 향해 이끌었다. 그 목적은 보살이 되는 것도, 이승이나 천인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며, 오직 부처의 경애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애를 이루는 길은 재세에는 법화경, 말법에는 남묘호렌게쿄 외에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전의 경들은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준비였다. 강의는 이처럼 법화경의 입장에서 이전의 경들을 보는 것을 「절대묘」라고 한다. 천태대사는 『법화현의』에서 법화경의 묘를 상대묘와 절대묘로 풀었는데, 상대묘는 이전의 경들(추)과 견주어 법화경이 묘하다고 하는 것이고, 절대묘는 법화경의 입장에서 이전의 경들조차 묘법 안에 거두어 살리는 것이다. 이 장에서 이전의 탄가가 결국 성문을 법화경으로 이끈 단련이었다고 읽는 것도 바로 절대묘의 읽기다. 꾸짖음은 꾸짖음으로 끝나지 않고, 법화경에 이르러 은혜로 다시 읽힌다.
이전의 탄가 — 유마경의 네 장면
이제 대성인은 성문들이 「앞의 사미의 경들」에서 받은 꾸짖음을 하나하나 드신다. 가섭의 통곡, 수보리의 바리때, 사리불의 밥, 부루나의 그림 병. 이 가운데 셋은 유마경에서 나온 장면이다. 유마경은 방등부의 대표 경전으로, 재가의 보살 유마힐이 병을 핑계로 집에 누워 있고, 석존이 제자들에게 차례로 문병을 명하는데 제자들마다 「예전에 유마힐에게 꾸짖음을 받은 일이 있어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성문의 대표들이 하나같이 재가 보살에게 말문이 막혔던 일을 고백하는, 성문에게는 더없이 굴욕적인 경이다.
수보리는 유마힐의 집에 걸식하러 갔다가, 유마힐이 바리때에 밥을 가득 담아 주면서 「음식에 평등한 자라야 법에도 평등하다」는 식의 대승의 논리로 소승의 공에 머무는 태도를 꾸짖자, 어찌할 바를 몰라 바리때를 두고 나왔다. 부루나는 새로 배우는 비구들에게 소승법을 설하다가, 유마힐에게 「먼저 듣는 이의 마음을 살피라. 더러운 음식을 보배 그릇에 담지 말라」는 꾸짖음을 들었다. 대승의 그릇을 가진 이들에게 소승을 설하는 것은 보배 그릇에 똥을 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사의품에서 유마힐이 보살의 불가사의해탈을 설하자 가섭은 「일체의 성문은 이 법문을 듣고 마땅히 소리 내어 울어야 하니, 그 소리가 삼천대천세계를 진동하리라. 우리는 어찌하여 그 뿌리를 영원히 끊었는가. 이 대승에 대해 이미 썩은 씨앗과 같다」고 탄식했다. 사리불이 밥을 토했다는 일은, 강의가 방등부 경에서 사리불이 「부정한 음식을 먹는다」는 꾸짖음을 받은 일로 보는 대목이다.
- 가섭迦葉尊者の渧泣の音は三千をひびかし가섭존자의 우는 소리는 삼천을 울리고유마경 부사의품 — 「대승에 대해 썩은 씨앗과 같다」며 통곡
- 수보리須菩提尊者は亡然として手の一鉢をすつ수보리존자는 망연히 손의 바리때를 버리고유마경 제자품 — 유마힐에게 꾸짖음 받고 바리때를 두고 물러남
- 사리불舎利弗は飯食をはき사리불은 밥을 토하고방등부 경 — 「부정한 음식을 먹는다」는 꾸짖음(강의의 견해)
- 부루나富楼那は画瓶に糞を入ると嫌わる부루나는 그림 병에 똥을 넣는다고 미움받다유마경 제자품 — 「더러운 음식을 보배 그릇에 담지 말라」
대성인은 이 꾸짖음들을 「인천의 대회 가운데서」 받은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하늘과 사람이 다 모인 공개된 법회의 자리에서 받은 수치였다. 그리고 그 꾸짖음을 내린 이가 바로 녹야원에서 아함경을 찬탄하고 「이백오십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정성껏 칭찬했던 그 세존이었다. 대성인은 이를 「두 말이 서로 어긋나는 허물(二言・相違の失)」이라고까지 하신다. 이것은 개목초 제12장 「일불이언 · 난신의 모습」에서 이미 다룬 문제, 곧 같은 부처가 이전에서는 이승불성불을 말하고 법화경에서는 이승작불을 말했다는 「일불이언」의 문제와 짝을 이룬다. 제12장이 이전과 법화경 사이의 모순을 다루었다면, 이 장은 아함과 방등 사이, 곧 이전의 경들 안에서조차 부처의 말이 바뀌었음을 지적한다. 성문들은 처음에 칭찬받았던 바로 그 소승의 수행 때문에 뒤에 꾸짖음을 받았다.
제바달다의 원한과 아사선인
공개된 자리에서의 꾸짖음이 얼마나 쓰라린지를 보이려고 대성인은 제바달다의 예를 드신다. 세존이 제바를 「어리석은 자, 남의 침을 먹는 자」라고 꾸짖자, 제바는 독화살이 가슴에 박힌 듯 원망하며 「구담은 부처가 아니다. 나는 곡반왕의 적자요 아난의 형으로 구담과 한 집안이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안에서 조용히 가르쳐야지, 이만한 대중 앞에서 이런 큰 허물을 면전에 대고 말하는 자가 대인이나 부처일 수 있는가. 예전에는 아내의 원수요 지금은 한 자리의 원수이니, 오늘부터 생생세세에 큰 원적이 되리라」고 맹세했다.
제바의 원망에는 두 겹이 있다. 하나는 석존이 출가 전 야수다라를 아내로 맞았을 때 그녀를 연모하던 제바가 품은 사적인 원한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 앞에서 꾸짖음을 받은 공적인 수치다. 대성인이 이 이야기를 드신 뜻은 성문들의 처지를 비추어 보이는 데 있다. 제바는 단 한 번 공개적으로 꾸짖음을 받고 생생세세의 원적이 되기로 맹세했다. 그런데 성문들은 사십여 년 동안 대중 앞에서 거듭 꾸짖음을 받으면서도 부처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인내가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 인내 끝에 법화경에서 받은 성불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제바의 반응이 거꾸로 증명한다.
강의는 여기서 제바달다라는 인물의 다른 면을 짚는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에 따르면 석존은 과거세에 왕으로서 법을 구했는데, 그때 법화경을 가르쳐 준 아사선인이 바로 지금의 제바달다였다. 석존의 과거의 스승이 이번 생에는 석존 교화의 마지막에 함께 태어나 부처의 적의 총대장이 되었고, 그 적대로 오히려 부처의 위덕을 도왔다. 강의는 이를 「참으로 흥미로운 인연」이라 하고, 최고의 남묘호렌게쿄의 경애에서 보면 선악일여라 할 만하다고 말한다. 대성인 자신도 사도 쓰카하라에서 이 인연을 당신의 처지에 비추어 읽으셨다.
檀王は阿私仙人にせめられて法華経の功徳を得給いき、不軽菩薩は上慢の比丘等の杖にあたりて一乗の行者といはれ給ふ、今日蓮は末法に生れて妙法蓮華経の五字を弘めてかかるせめにあへり
단왕은 아사선인에게 시달려 법화경의 공덕을 얻으셨고, 불경보살은 증상만의 비구들의 막대에 맞아 일승의 행자라 불리셨느니라. 지금 니치렌은 말법에 태어나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펴서 이러한 책망을 만났느니라.
「종종어진무어서」의 이 대목은 쓰카하라 삼매당에서 대성인이 법열을 술회하시는 부분이다. 같은 글에서 대성인은 이어 「사가미노카미 님이야말로 선지식이요, 헤이노사에몬이야말로 제바달다」라고까지 쓰셨다. 박해자를 선지식으로, 원적을 수행을 완성시키는 인연으로 읽는 눈,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선악일여의 경애다. 제30장에서 제바의 원한은 성문의 인내를 비추는 거울이지만, 그 거울 뒤에는 원적조차 법의 공덕을 드러내는 인연이 된다는 법화경의 깊은 논리가 숨어 있다.
영화를 버린 출가자들
이어 대성인은 성문들의 출신을 상기시키신다. 그들은 본래 외도 · 바라문의 집안에서 나왔다. 사리불과 목련은 산사야의 제자였고, 가섭 삼형제는 불을 섬기는 외도의 지도자였으며, 마하가섭은 큰 부호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외도의 장자로서 왕들의 귀의를 받고 단나들의 존경을 받았고, 고귀한 종성의 사람도 있고 부귀가 넘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영화로운 지위를 내던지고 「교만의 깃대를 쓰러뜨리고」 속복을 벗고 괴색의 분소의를 입었으며, 백불과 활과 화살을 버리고 바리때 하나를 쥐고 걸인처럼 세존을 따랐다.
괴색의 분소의는 출가자의 무소유를 상징한다. 인도에서는 흰색이 귀하게 여겨졌지만 출가자는 재가의 흰옷이나 순수한 정색을 피하고 섞인 탁한 색을 썼으며, 무덤에서 주운 헝겊을 기워 만든 분소의를 입었다. 옷에 대한 집착조차 버린다는 뜻이다. 백불과 활과 화살은 세속의 귀인과 무인의 물건이니, 그것을 버렸다는 것은 세속의 신분과 무력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비바람을 막을 집도, 목숨을 이을 옷과 밥도 넉넉하지 못한 채 부처를 따랐다.
이 대목은 성문들이 부처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버렸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세간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 그런데 그렇게 따른 부처에게서 사십여 년 동안 꾸짖음을 들었고, 다음에 보듯 세간으로부터는 박해를 받았다. 버린 것은 많고 얻은 것은 꾸짖음뿐이었던 그들에게, 법화경의 수기가 어떤 의미였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구횡의 대난과 제자들의 수난
성문들의 고난은 부처의 꾸짖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천축과 사해가 모두 외도의 제자요 단나였으므로, 부처조차 구횡의 대난을 만나셨다. 本文은 그 가운데 다섯을 든다. 제바가 큰 돌을 날린 일, 아사세왕이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은 일, 아기다왕의 말먹이 보리, 바라문성의 썩은 쌀뜨물, 전차 바라문녀가 바리때를 배에 넣은 일이다.
강의의 어석은 구횡의 대난 아홉을 이렇게 든다. 첫째, 손타리의 비방. 외도의 미녀 손타리가 외도에게 사주받아 석존과 관계가 있다고 퍼뜨렸다. 둘째, 바라문성의 썩은 쌀뜨물. 석존이 바라문성에서 걸식할 때 늙은 하녀가 공양할 것이 없어 버리려던 썩은 쌀뜨물을 공양했는데, 그 과보를 설하신 석존을 한 외도가 거짓말이라고 비방했다. 셋째, 아기다왕의 말먹이 보리. 아기다왕의 청을 받아 석존이 오백 제자와 함께 비란읍에 갔는데, 왕이 놀이에 빠져 석존이 온 것을 잊어버려 구십 일 동안 음식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말먹이 보리로 주림을 견뎠다. 넷째, 유리왕의 석가족 살해. 사위국의 바유리왕이 과거의 원한으로 석가족을 멸망시켰다. 다섯째, 걸식하여 빈 바리때. 석존이 바라문성에 들어가려 했으나 왕이 사람들에게 보시와 청법을 금했으므로 걸식해도 아무도 공양하지 않았다. 여섯째, 전차녀의 비방. 바라문의 딸 전차녀가 배에 바리때를 넣고 끈으로 묶어 석존의 아이를 배었다고 비방했는데, 제석천이 쥐로 변해 끈을 끊어 바리때가 떨어져 거짓이 드러났다. 일곱째, 제바달다가 산을 민 일. 제바가 기사굴산에서 길이 세 길, 폭 한 길 여섯 자의 큰 돌을 떨어뜨렸는데, 그 파편이 석존의 발가락에 맞아 피가 났다. 여덟째, 찬바람에 옷을 구한 일. 동지 무렵 여드레 밤 동안 찬바람이 불어 석존이 삼의를 구해 추위를 막았다. 아홉째, 아사세왕이 취한 코끼리를 푼 일. 아사세왕이 제바에게 사주받아 사나운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석존 일행 가운데 풀어놓았다.
구횡의 대난을 꼽는 법은 경론과 어서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강의는 『흥기행경』에 「손타리의 비방, 사미발의 비방, 두통, 골절통, 등의 통증, 나무창에 발을 찔림, 조달이 돌을 던짐, 전차의 비방, 말먹이 보리를 먹음, 고행」이 들려 있고, 『대지도론』에는 「손타리의 비방, 전차녀의 비방, 제바가 산을 밂, 튀어 오른 나무가 발을 찌름, 유리왕의 석가족 살해, 한여름의 말먹이 보리, 찬바람과 등의 통증, 육 년 고행, 걸식하여 빈 바리때」가 들려 있다고 소개한다. 목록은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부처조차 세상의 시기와 비방과 폭력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 ①손타리의 비방외도의 사주를 받은 손타리가 석존과 관계가 있다고 퍼뜨림
- ②바라문성의 썩은 쌀뜨물하녀가 공양한 썩은 쌀뜨물의 과보를 설하자 외도가 거짓이라 비방
- ③아기다왕의 말먹이 보리구십 일 동안 공양이 끊겨 말먹이 보리로 견딤
- ④유리왕의 석가족 살해바유리왕이 과거의 원한으로 석가족을 멸함
- ⑤걸식하여 빈 바리때왕의 금령으로 아무도 공양하지 않음
- ⑥전차녀의 비방배에 바리때를 넣고 석존의 아이를 배었다고 비방
- ⑦제바가 산을 밂기사굴산에서 큰 돌을 떨어뜨려 발가락에 피가 남
- ⑧찬바람에 옷을 구함동지 무렵 여드레 밤의 찬바람
- ⑨아사세왕의 취한 코끼리술 먹인 코끼리를 풀어놓음
부처조차 이러했으니 「교화받는 제자들의 숱한 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량한 석가족은 바유리왕에게 죽고, 천만의 권속은 취한 코끼리에 밟혔으며, 화색비구니는 제바에게 맞아 죽고, 가로제존자는 도적에게 죽어 그 머리가 말똥에 묻혔으며, 목련은 죽장외도에게 맞아 죽었다. 대성인은 「사은초」에서도 같은 사실을 들어 이렇게 쓰셨다.
竹杖外道は神通第一の目連尊者を殺し阿闍世王は悪象を放て三界の独尊ををどし奉り提婆達多は証果の阿羅漢蓮華比丘尼を害し瞿伽利尊者は智慧第一の舎利弗に悪名を立てき
죽장외도는 신통제일의 목련존자를 죽였고, 아사세왕은 사나운 코끼리를 풀어 삼계의 독존을 위협했으며, 제바달다는 증과의 아라한 연화비구니를 해쳤고, 구가리존자는 지혜제일의 사리불에게 악명을 세웠느니라.
「사은초」는 이 사실들을 들어 「부처의 재세조차 이러했거늘 하물며 오탁이 성한 말대에 법화경을 믿는 자가 시기받는 일은 엄청날 것」이라 하고, 「여래의 현재에도 오히려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 후이랴」라는 법사품의 문이 당신의 몸에 들어맞았다고 하셨다. 「여설수행초」에서도 「석존은 법화경을 위해 이번에 구횡의 대난을 만나셨다(釈尊は法華経の御為に今度九横の大難に値ひ給ふ)」(501쪽)고 하시며, 불경보살 · 축도생 · 법도삼장 · 사자존자 · 천태 · 전교를 들어 법화경의 행자는 반드시 난을 만난다는 것을 밝히셨다. 성문들이 겪은 박해의 기록은 그대로 말법 법화경의 행자가 걸을 길의 예고였다.
마침내 육사외도가 마음을 모아 아사세왕과 바사닉왕에게 참소했다. 그 참소의 내용이 주목할 만하다. 구담은 염부제 제일의 대악인이며, 그가 가는 곳마다 삼재칠난이 먼저 일어난다. 큰 바다가 뭇 물줄기를 모으듯 구담에게는 뭇 악인이 모이니 가섭 · 사리불 · 목련 · 수보리가 그들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충효를 앞세워야 하는데 저들은 구담에게 꾀여 부모의 가르침을 버리고 출가하고 왕법의 선지마저 거슬러 산림으로 들어갔다. 이런 자들은 나라에 발붙여 둘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이변을 일으키고 땅에는 재앙이 성하다.
이 참소는 놀라울 만큼 대성인 자신이 받은 비난과 닮아 있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서 재난의 원인이 정법을 버리고 악법에 귀의한 데 있다고 국가에 간했는데, 거꾸로 세상은 대성인이야말로 재난을 부르는 자요, 나라에 두어서는 안 될 자라 하여 유배를 보냈다. 「사은초」에서 대성인은 당신의 악명이 천하에 가득한 것을 두고 「아마도 재세에 석존을 여러 외도가 헐뜯었던 것과 같다」고 쓰셨다. 육사외도의 참소를 상세히 인용하신 것은, 지금 대성인과 문하가 받는 비난이 바로 석존과 그 제자들이 받았던 비난의 재현이라는 것을 보이시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너를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
외도의 박해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웠는데, 성문들에게는 부처에게 기댈 수도 없는 화가 겹쳤다. 인천 대회의 자리에서 때때로 꾸짖는 소리를 들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그리고 대성인은 그 모든 난 가운데 「큰 난 중의 첫째」로 정명경의 한 구절을 드신다. 「너에게 보시하는 자는 복전이라 이름하지 않으며, 너를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
이 구절은 유마경 제자품에서 수보리가 유마힐에게 들은 말로 나온다. 대성인은 이를 「부처가 암라원에서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왕 · 삼계의 제천 · 지신 · 용신 등 무수한 대중 앞에서 하신 말」로 받으신다. 유마경 전체가 암라원에서 부처의 설법 자리를 배경으로 설해진 경이므로, 경 안의 말은 부처가 대중 앞에 내보인 말이 된다. 그 대중 가운데는 성문들에게 공양해야 할 천인과 신들이 모두 있었다.
왜 이것이 「큰 난 중의 첫째」인가. 출가자는 스스로 생산하지 않고 재가의 공양으로 살아간다. 공양하는 이는 복전에 씨를 뿌려 복을 얻는다는 믿음이 그 공양을 떠받친다. 그런데 정명경은 성문이 복전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을 공양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들은 하늘과 사람이 성문을 공양할 리 없다. 대성인은 「결국은 부처의 말씀으로 모든 이승을 죽이시려는 것인가」라고까지 하신다. 외도의 칼보다 부처의 말 한마디가 더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성문의 생존 기반 자체를 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마음 있는 사람들은 부처마저 꺼렸을 것이다」.
그래서 성문들은 사람들이 부처를 공양하는 「김에」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부처에게 바쳐진 공양의 남은 것으로 연명했다는 것이다. 이 처참한 정경이 다음 장의 「법화경이 없었다면 성문들은 살아서 아귀도에 있었으리라」는 말로 이어진다.
강의는 이 장의 끝에서 바라문이 불교에 적대했다는 사실 자체도 불교 흥륭의 전제였다고 본다. 바라문의 적대가 없었다면 불교가 그토록 빨리 성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제바달다의 적대가 부처의 위덕을 도왔듯, 외도의 박해는 불교가 자신을 분명히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법을 가로막는 힘이 도리어 법을 드러내는 인연이 된다는 이 관점은, 개목초 하권에서 대성인이 삼류의 강적을 법화경의 행자임을 증명하는 증거로 읽으시는 논리와 이어진다.
강의는 이 장을 「이승은 법화경에서야 비로소 성불을 허락받았으니 마땅히 법화경의 행자를 수호해야 한다」는 논증의 증거로 본다. 이전에서 성문은 부처에게 꾸짖음을 받고, 외도에게 박해를 받고, 공양마저 끊긴 처지였다. 그 바닥에서 성문을 건져 올린 것이 법화경이며, 『어의구전』이 말하듯 세존의 대은이란 남묘호렌게쿄요, 그 은혜를 갚는 길은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이다.
본문
されば事の心を案ずるに四十余年の経経のみとかれて法華八箇年の所説なくて御入滅ならせ給いたらましかば誰の人か此等の尊者をば供養し奉るべき現身に餓鬼道にこそ・をはすべけれ。 而るに四十余年の経経をば東春の大日輪・寒冰を消滅するがごとく無量の草露を大風の零落するがごとく一言一時に未顕真実と打ちけし、 大風の黒雲をまき大虚に満月の処するがごとく青天に日輪の懸り給うがごとく世尊法久後・要当説真実と照させ給いて華光如来・光明如来等と舎利弗・迦葉等を赫赫たる日輪・明明たる月輪のごとく鳳文にしるし亀鏡に浮べられて候へばこそ如来滅後の人天の諸檀那等には仏陀のごとくは仰がれ給しか、 水すまば月・影を・をしむべからず風ふかば草木なびかざるべしや、法華経の行者あるならば此等の聖者は大火の中をすぎても大石の中を・とをりてもとぶらはせ給うべし、 迦葉の入定もことにこそ・よれ、いかにと・なりぬるぞ・いぶかしとも申すばかりなし、後五百歳のあたらざるか広宣流布の妄語となるべきか日蓮が法華経の行者ならざるか、 法華経を教内と下して別伝と称する大妄語の者をまほり給うべきか、捨閉閣抛と定めて法華経の門をとぢよ巻をなげすてよと・ゑりつけて法華堂を失える者を守護し給うべきか、 仏前の誓いはありしかども濁世の・大難のはげしさ・をみて諸天下り給わざるか、日月・天にまします須弥山いまも・くづれず海潮も増減す四季も・かたのごとく・たがはず・いかに・なりぬるやらんと大疑いよいよ・つもり候。
그러므로 일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사십여 년의 경들만 설하시고 법화경 팔 년의 설법이 없이 입멸하셨다면, 누가 이 존자들을 공양했으리오. 살아 있는 몸으로 아귀도에 계셨으리라. 그런데 사십여 년의 경들을, 이른 봄의 큰 해가 찬 얼음을 녹이듯, 무량한 풀잎의 이슬을 큰 바람이 떨어뜨리듯, 한마디 한때에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지워 버리시고, 큰 바람이 검은 구름을 걷어 내어 큰 허공에 보름달이 자리하듯, 푸른 하늘에 해가 걸리듯, 「세존의 법은 오랜 뒤에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고 비추시어, 화광여래 · 광명여래 등으로 사리불 · 가섭 등을 빛나는 해와 밝은 달처럼 봉문에 적고 귀경에 띄우셨기에, 여래 멸후의 인천의 모든 단나들에게 부처처럼 우러름을 받으셨느니라. 물이 맑으면 달이 그림자를 아끼지 않을 것이요, 바람이 불면 풀과 나무가 눕지 않겠는가. 법화경의 행자가 있다면 이 성자들은 큰 불 속을 지나서라도, 큰 바위 속을 뚫고서라도 찾아오셔야 하느니라. 가섭의 입정도 일에 따른 것이거늘, 어찌 된 일인가. 의아하다고 말할 수조차 없느니라. 후오백세가 맞지 않는 것인가. 광선유포가 망어가 되는 것인가.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닌 것인가. 법화경을 「교내」라고 깎아내리고 「별전」이라 일컫는 대망어의 무리를 지키시려는가. 「사폐각포」라고 정하여 법화경의 문을 닫으라, 두루마리를 내던지라고 새겨 넣고 법화당을 없앤 자를 수호하시려는가. 부처님 앞의 맹세는 있었으나 탁세의 대난이 거센 것을 보고 제천이 내려오지 않으시는가. 해와 달은 하늘에 계시고, 수미산은 지금도 무너지지 않았으며, 바다의 조수도 들고 나고, 사계도 법대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된 일인가 하여 큰 의문이 더욱더 쌓이느니라.
어구 풀이
- 法華八箇年법화 팔 년
- 천태의 오시 교판에서 석존이 일생의 마지막 팔 년 동안 법화경을 설했다고 보는 것. 「사십여 년의 경들」, 곧 이전의 경들과 짝을 이룬다.
- 餓鬼道아귀도
- 육도의 하나. 늘 굶주림에 시달리는 세계다. 공양이 끊긴 성문들의 처지를 「살아 있는 몸으로 아귀도에 있었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 未顕真実미현진실
- 무량의경 설법품의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四十余年未顕真実)」. 법화경의 개경인 무량의경에서 석존 스스로 이전의 경들이 방편이었음을 밝힌 문이다.
- 世尊法久後・要当説真実세존법구후 요당설진실
- 법화경 방편품의 「세존의 법은 오랜 뒤에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 무량의경의 「미현진실」과 짝을 이루어, 법화경이야말로 진실을 설한 경임을 밝히는 문이다.
- 鳳文・亀鏡봉문 · 귀경
- 봉문은 봉황처럼 귀한 글, 곧 경문을 높여 이르는 말. 귀경은 거북 등딱지의 점(亀)과 거울(鏡)로, 길흉과 시비를 비추어 보이는 본보기를 뜻한다. 성문의 수기가 경전에 분명히 적혀 거울처럼 드러났다는 뜻이다.
- 迦葉の入定가섭의 입정
- 『부법장인연전』에 따르면, 불멸 뒤 마하가섭은 교화를 마치고 법을 아난에게 부촉한 다음 인도 가야성 동남쪽 계족산에 들어가 선정에 들었다. 세 봉우리 사이에 풀을 깔고 앉아 석존의 경전과 가사를 받들고, 오십육억칠천만 년 뒤 미륵의 출현을 기다린다고 한다.
- 後五百歳후오백세
-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의 「내가 멸도한 뒤 후오백세 가운데 염부제에 광선유포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 대집경의 오오백세 가운데 마지막 오백 년, 곧 말법의 시작을 가리킨다. 대성인은 이 문을 말법에 법화경이 널리 퍼진다는 부처의 예언으로 읽으셨다.
- 広宣流布광선유포
- 법을 널리 펴서 흘러 퍼지게 하는 것. 위 약왕품의 문에서 나온 말이다.
- 教内・別伝교내 · 별전
- 선종의 주장. 석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 지었고(염화미소), 이로써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 법이 가르침 밖으로 따로 가섭에게 전해졌다고 하며(교외별전 · 불립문자), 경전의 가르침은 「교내」라 하여 그 아래에 둔다.
- 捨閉閣抛사폐각포
- 법연(호넨)이 『선택본원염불집』에서 정토 삼부경 이외의 일체 경전과 수행을 「버리고 · 닫고 · 제쳐 두고 · 내던지라」고 한 것.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서 이를 일체 경전을 비방한 대표적인 문구로 들어 파절하셨다.
- 法華堂법화당
- 법화경을 독송하고 법화삼매를 닦는 당우. 本文은 염불의 무리가 법화당을 없앤 것을 가리킨다.
- 須弥山수미산
- 고대 인도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솟아 있다는 거대한 산. 해와 달이 그 둘레를 돈다고 한다. 해와 달과 수미산과 조수와 사계는 우주의 질서가 변함없음을 나타낸다.
법화경이 없었다면 — 「살아서 아귀도에」
제31장은 제29 · 30장의 논증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서 시작한다. 「사십여 년의 경들만 설하시고 법화경 팔 년의 설법이 없이 입멸하셨다면, 누가 이 존자들을 공양했으리오. 살아 있는 몸으로 아귀도에 계셨으리라」. 제30장에서 본 대로 정명경은 「성문을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고 했으니, 이전의 경들만 있었다면 성문을 공양할 이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서 이미 굶주림의 세계, 아귀도에 있었으리라.
강의는 이 문이 석존 재세의 성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석존이 법화경을 설하지 않았다면, 재세의 중생은 물론 정법 · 상법 이천 년의 대중도 모두 빈궁하고 하천한 자일 뿐 한 사람도 성불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법에 대성인이 출현하여 문저에 감추어진 대법인 남묘호렌게쿄를 설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둠이며 아무리 몸부림쳐도 민중을 참으로 구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법화경의 유무가 성문의 생사를 갈랐듯, 말법에서는 문저의 대법의 유무가 일체중생의 생사를 가른다. 강의는 이렇게 이 장의 첫 문장을 재세 · 정상 · 말법의 삼시를 꿰는 원리로 확장한다.
「미현진실」과 「요당설진실」 — 다섯 겹의 비유
그런데 법화경은 설해졌다. 대성인은 그 순간을 다섯 겹의 비유로 그리신다. 먼저 무량의경의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한마디가 이전의 경들을 지워 버린 모습을 두 비유로 그리신다. 이른 봄의 큰 해가 찬 얼음을 녹이듯, 큰 바람이 무량한 풀잎의 이슬을 떨어뜨리듯. 얼음과 이슬은 사십여 년의 경들이다. 그것은 한때 단단해 보였고 무수히 많았지만, 진실의 해와 바람 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진다. 「한마디 한때에(一言一時に)」라는 표현이 그 순간성을 강조한다.
이어 방편품의 「세존의 법은 오랜 뒤에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가 진실을 비추는 모습을 다시 세 비유로 그리신다. 큰 바람이 검은 구름을 걷어 내어 허공에 보름달이 드러나듯, 푸른 하늘에 해가 걸리듯. 그리고 그 빛 속에 사리불은 화광여래, 가섭은 광명여래라는 이름이 「빛나는 해와 밝은 달처럼」 경문에 새겨졌다. 앞의 비유가 지우는 비유라면 뒤의 비유는 드러내는 비유다. 무량의경이 이전을 지우고, 방편품이 진실을 드러내며, 그 진실 속에서 성문의 수기가 해와 달처럼 빛난다.
이 「미현진실」과 「요당설진실」은 개목초 제11~15장에서 권적상대를 논할 때 대성인이 거듭 드신 문이다. 제15장에서는 이 두 문 때문에 오히려 「석존의 말이 두 말이 되었다」는 의혹이 생겼고, 그것을 다보여래의 증명과 시방분신의 광장설이 풀어 주었다고 하셨다. 같은 두 문이 이 장에서는 성문을 구원한 빛으로 다시 등장한다. 교판의 문이 구원의 문으로 읽히는 것, 이것이 이 편 전체의 특징이다.
그 결과 성문들은 「여래 멸후의 인천의 모든 단나에게 부처처럼 우러름을 받았다」. 강의는 이 문을 두고, 성문이 부처처럼 우러름을 받은 것이 법화경이 계셨기 때문이듯, 말법 탁악세의 범부도 대성인의 대자비로 문저의 삼대비법의 본존을 수지하면 대성인과 마찬가지로 법화경을 수호하는 제천선신에게 지켜진다고 말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환희의 극치이며,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참된 불법을 사람들에게 알려 온 나라가 법화경을 수호하는 제천선신의 지킴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 강의의 결론이다.
「물이 맑으면 달이 비친다」 — 감응의 도리
「물이 맑으면 달이 그림자를 아끼지 않을 것이요, 바람이 불면 풀과 나무가 눕지 않겠는가」. 이 짧은 대구에 수호의 논리가 담겨 있다. 맑은 물에 달이 비치는 것은 달이 애써 비추려 해서가 아니라 물이 맑기 때문이다. 바람에 풀이 눕는 것은 풀이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감(感)이 있으면 응(應)이 있다는 것은 자연의 도리다. 그렇다면 법화경의 행자라는 맑은 물이 있는 이상, 법화경에서 은혜를 입은 성자들이 그 물에 비치는 달처럼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큰 불 속을 지나서라도, 큰 바위 속을 뚫고서라도 찾아오셔야 한다」.
같은 비유는 하권 제42장, 이 긴 의문의 단락을 맺는 대목에서 다시 나온다.
法華経の二処三会の座にましましし日月等の諸天は法華経の行者出来せば磁石の鉄を吸うがごとく月の水に遷るがごとく須臾に来つて行者に代り仏前の御誓をはたさせ給べしとこそをぼへ候に、いままで日蓮をとぶらひ給はぬは日蓮・法華経の行者にあらざるか
법화경 이처삼회의 자리에 계셨던 일월 등의 제천은, 법화경의 행자가 나타나면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 달이 물에 비치듯, 순식간에 와서 행자를 대신하여 부처님 앞의 맹세를 이루셔야 하리라 여겼거늘, 지금까지 니치렌을 찾아오지 않으시니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닌 것인가.
제31장의 「물과 달」이 이승의 수호에 대한 의문을 맺는다면, 제42장의 「자석과 쇠, 물과 달」은 보살 · 제천의 수호에 대한 의문을 맺는다. 대성인은 같은 의문을 두 번, 이승에 대해 한 번, 보살 · 제천에 대해 한 번, 거의 같은 말로 세우신다. 이것이 제28장에서 말씀하신 「곳곳에 이를 쓰고, 의문을 강하게 한다」의 실제 모습이다.
가섭의 입정과 여섯 갈래의 의문

대성인은 먼저 가섭을 거론하신다. 『부법장인연전』에 따르면 가섭은 불멸 뒤 법을 아난에게 부촉하고 계족산에 들어가 석존의 가사를 받든 채 선정에 들어, 오십육억칠천만 년 뒤 미륵이 출현하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대성인은 「가섭의 입정도 일에 따른 것(迦葉の入定もことにこそ・よれ)」이라고 하신다. 강의의 어석은 이를 두고, 말법 법화경의 행자가 대난을 만나고 있는데 한가로이 미륵이나 기다리고 있을 때냐는 꾸짖음이라고 풀이한다. 아무리 깊은 선정이라도 법화경의 행자가 난을 당하는 지금 그것을 이유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선정은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이어 대성인은 수호가 없는 까닭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갈래를 하나하나 따지신다.
첫째, 후오백세의 예언이 맞지 않는 것인가. 약왕품은 「내가 멸도한 뒤 후오백세 가운데 염부제에 광선유포하라」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 후오백세인데 법화경의 행자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예언이 틀렸다는 것이 된다.
둘째, 광선유포가 망어가 되는 것인가. 같은 약왕품의 광선유포의 문이 거짓말이 되는가.
셋째, 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닌 것인가. 예언도 틀리지 않았고 광선유포도 망어가 아니라면, 남는 것은 니치렌이 행자가 아니라는 가능성이다.
넷째, 법화경을 「교내」라 깎아내리고 「교외별전」을 일컫는 선종의 무리를 지키려는 것인가. 선종은 석존이 영산에서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만이 미소 지었고, 이로써 문자를 세우지 않는 법이 가르침 밖으로 가섭에게 따로 전해졌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의 「정법안장 · 열반묘심 · 미묘의 법문이 있으니, 문자를 세우지 않고 교외에 별전하여 가섭에게 부촉한다」는 문을 든다. 이 법이 가섭에서 아난 · 상나화수로 이어져 달마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대성인이 여기서 가섭의 이름을 거론하신 것과 선종을 거론하신 것은 이어져 있다. 선종이 스스로 가섭의 법을 이었다고 주장하니, 가섭은 그 무리를 지키려고 법화경의 행자를 돌보지 않는 것인가 하고 물으신 것이다. 강의의 어석은, 부처 스스로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고 한 법화경을 「교내」라 깎아내려 정법을 비방하는 것이므로, 대성인이 선종을 부처에 적대하는 마의 권속이라고 판정하셨다고 설명한다. 「선시초」는 선종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禅宗と申す宗は教外別伝と申して釈尊の一切経の外に迦葉尊者にひそかにささやかせ給へり
선종이라 하는 종은 교외별전이라 하여, 석존이 일체경 밖에서 가섭존자에게 남몰래 속삭이셨다고 하느니라.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은 중국 송대 이후 선종 문헌에 인용되어 알려진 경으로, 근대 불교학에서는 대체로 중국에서 지어진 경전으로 본다. 염화미소의 이야기도 선종 등사 문헌에서 형성된 전승으로 연구된다.
다섯째, 「사폐각포」를 정하여 법화경의 문을 닫고 두루마리를 내던지라 새기고 법화당을 없앤 염불의 무리를 수호하려는 것인가. 법연은 『선택본원염불집』에서 정토 삼부경 이외의 일체 경을 「버리고 · 닫고 · 제쳐 두고 · 내던지라」 했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서 이를 이렇게 파절하셨다.
大乗経の六百三十七部・二千八百八十三巻・並びに一切の諸仏・菩薩及び諸の世天等を以て捨閉閣抛の字を置いて一切衆生の心を薄す、是れ偏に私曲の詞を展べて全く仏経の説を見ず
대승경 육백삼십칠 부 이천팔백팔십삼 권과 일체의 제불 · 보살 및 모든 세천 등에 「사폐각포」의 글자를 두어 일체중생의 마음을 어지럽혔으니, 이는 오로지 사사로운 말을 늘어놓은 것이요 전혀 불경의 설을 보지 않은 것이니라.
여섯째, 부처님 앞에서 맹세는 했으나 탁세의 대난이 너무 거세어 제천이 겁을 먹고 내려오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대성인은 마지막으로 우주의 질서를 돌아보신다. 해와 달은 여전히 하늘에 있고, 수미산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조수는 들고 나고, 사계는 어긋나지 않는다. 세계는 아무 일 없이 제 질서대로 돌아가는데, 어찌 법화경의 행자에게만 수호가 없는가. 「큰 의문이 더욱더 쌓인다(大疑いよいよ・つもり候)」. 제천이 사라진 것도, 세계가 무너진 것도 아닌데 수호가 없다는 것, 이 대비가 의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 1後五百歳のあたらざるか후오백세가 맞지 않는 것인가
- 2広宣流布の妄語となるべきか광선유포가 망어가 되는 것인가
- 3日蓮が法華経の行者ならざるか니치렌이 법화경의 행자가 아닌 것인가
- 4法華経を教内と下して別伝と称する大妄語の者をまほり給うべきか법화경을 교내라 깎아내리고 별전이라 일컫는 대망어의 무리를 지키시려는가선종
- 5捨閉閣抛と定めて……法華堂を失える者を守護し給うべきか사폐각포라 정하여 …… 법화당을 없앤 자를 수호하시려는가염불
- 6濁世の・大難のはげしさ・をみて諸天下り給わざるか탁세의 대난이 거센 것을 보고 제천이 내려오지 않으시는가
의문은 결정을 위한 것
강의는 이 장의 의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대성인이 이 의문을 세우신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대성인이 법화경의 행자이며 말법의 주사친의 본불이라는 단정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성인이 왜 난을 만나시는가에 대해서는 하권에서 자세히 밝힌다.
실제로 하권에서 대성인은 이 의문에 여러 겹으로 답하신다. 법화경의 행자가 과거세에 법화경을 비방한 죄가 있어 그 업보를 지금 가볍게 받는 것이라는 답(전중경수), 비방하는 자가 지옥에 떨어질 것이 정해져 있을 때는 현세의 벌이 없다는 답, 그리고 나라가 정법을 버렸으므로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떠났다는 답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답에 앞서, 대성인은 수호가 있고 없음을 넘어선 결의를 밝히신다.
詮ずるところは天もすて給え諸難にもあえ身命を期とせん
결국은 하늘도 버리시라. 여러 난에도 만나리라. 신명을 걸 뿐이니라.
이 장에서 「어찌 된 일인가」 하고 그토록 강하게 물으신 수호의 문제가, 하권에서는 「하늘도 버리시라」로 뒤집힌다. 수호를 따지는 것은 행자로서의 확신이 흔들려서가 아니다. 경문대로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수호가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따져 들어감으로써, 수호 없음조차 경문이 예언한 행자의 모습이라는 결론, 그리고 그 결론 위에서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리라」는 서원이 세워진다. 제31장의 큰 의문은 그 결정을 위한 지렛대다.
강의는 이 장의 의문이 대성인이 법화경의 행자요 말법 주사친의 본불임을 단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법화경이 있었기에 성문이 살아났듯, 말법에서는 문저의 대법이 있기에 중생이 구원받는다. 그 대법을 수지하는 이는 대성인과 마찬가지로 제천선신의 수호를 받는다는 것이 강의의 확신이다.
본문
又諸大菩薩天人等のごときは爾前の経経にして記莂を・うるやうなれども水中の月を取らんと・するがごとく影を体とおもうがごとく・いろかたち・のみあつて実義もなし、 又仏の御恩も深くて深からず、世尊初成道の時はいまだ説教もなかりしに法慧菩薩・功徳林菩薩・金剛幢菩薩・金剛蔵菩薩等なんど申せし六十余の大菩薩・十方の諸仏の国土より教主釈尊の御前に来り給いて賢首菩薩・解脱月等の菩薩の請にをもむいて十住・十行・十回向・十地等の法門を説き給いき、 此等の大菩薩の所説の法門は釈尊に習いたてまつるにあらず、十方世界の諸の梵天等も来つて法をとく又釈尊に・ならいたてまつらず、 総じて華厳会座の大菩薩・天竜等は釈尊以前に不思議解脱に住せる大菩薩なり、釈尊の過去・因位の御弟子にや有るらん・十方世界の先仏の御弟子にや有るらん、 一代教主・始成の正覚の仏の弟子にはあらず、阿含・方等・般若の時・四教を仏の説き給いし時こそ・やうやく御弟子は出来して候へ、 此も又・仏の自説なれども正説にはあらず、ゆへ・いかんとなれば方等・般若の別・円・二教は華厳経の別・円・二教の義趣をいでず、 彼の別・円・二教は教主釈尊の別・円・二教にはあらず、法慧等の大菩薩の別・円・二教なり、此等の大菩薩は人目には仏の御弟子かとは見ゆれども仏の御師とも・いゐぬべし、 世尊・彼の菩薩の所説を聴聞して智発して後・重ねて方等・般若の別・円をとけり、色もかわらぬ華厳経の別・円・二教なり、されば此等の大菩薩は釈尊の師なり、 華厳経に此等の菩薩をかずへて善知識ととかれしはこれなり、善知識と申すは一向・師にもあらず一向・弟子にもあらずある事なり、 蔵・通・二教は又・別・円の枝流なり別・円・二教をしる人必ず蔵・通・二教をしるべし、人の師と申すは弟子のしらぬ事を教えたるが師にては候なり、 例せば仏より前の一切の人天・外道は二天・三仙の弟子なり、九十五種まで流派したりしかども三仙の見を出でず、教主釈尊もかれに習い伝えて外道の弟子にて・ましませしが苦行・楽行・十二年の時・苦・空・無常・無我の理をさとり出してこそ外道の弟子の名をば離れさせ給いて無師智とはなのらせ給いしか、 又人天も大師とは仰ぎまいらせしか、されば前四味の間は教主釈尊・法慧菩薩等の御弟子なり、例せば文殊は釈尊九代の御師と申すがごとし、 つねは諸経に不説一字と・とかせ給うも・これなり。
또 모든 대보살과 천인 등은 이전의 경들에서 기별을 얻은 듯하나, 물속의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그림자를 몸으로 여기는 것과 같아서, 빛깔과 모양만 있을 뿐 참된 뜻은 없느니라. 또 부처님의 은혜도 깊은 듯하나 깊지 않으니라. 세존께서 처음 성도하셨을 때에는 아직 설교도 없었는데, 법혜보살 · 공덕림보살 · 금강당보살 · 금강장보살 등이라 하는 육십여 대보살이 시방 제불의 국토로부터 교주 석존의 앞에 오시어, 현수보살 · 해탈월 등 보살의 청에 응하여 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 등의 법문을 설하셨느니라. 이 대보살들이 설한 법문은 석존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시방세계의 모든 범천 등도 와서 법을 설했으나 그 또한 석존에게 배운 것이 아니니라. 무릇 화엄 회좌의 대보살과 천룡 등은 석존 이전에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물던 대보살이니라. 석존의 과거 인위 때의 제자였을까, 시방세계의 앞선 부처의 제자였을까. 일대의 교주요 처음 정각을 이룬 부처의 제자는 아니니라. 아함 · 방등 · 반야의 때, 부처님이 사교를 설하신 때에야 비로소 제자가 생겨났느니라. 이것도 또한 부처님 스스로의 설이지만 바른 설은 아니니라. 왜냐하면 방등 · 반야의 별교 · 원교 두 가르침은 화엄경의 별교 · 원교 두 가르침의 뜻을 벗어나지 않으며, 저 별교 · 원교 두 가르침은 교주 석존의 별 · 원 이교가 아니라 법혜 등 대보살의 별 · 원 이교이기 때문이니라. 이 대보살들은 사람들 눈에는 부처님의 제자인가 보이지만, 부처님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느니라. 세존께서는 저 보살들이 설한 것을 듣고 지혜가 일어난 뒤에 거듭 방등 · 반야의 별 · 원을 설하셨으니, 빛깔도 다르지 않은 화엄경의 별 · 원 이교이니라. 그러므로 이 대보살들은 석존의 스승이니라. 화엄경에서 이 보살들을 헤아려 선지식이라 설한 것이 이것이니라. 선지식이란 한결같이 스승인 것도 아니요 한결같이 제자인 것도 아닌 것을 말하느니라. 장교 · 통교 두 가르침은 또 별교 · 원교의 갈래이니, 별 · 원 이교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장 · 통 이교를 아느니라. 사람의 스승이란 제자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스승이니라. 예컨대 부처님 이전의 모든 인천과 외도는 이천 · 삼선의 제자이니라. 구십오 종으로까지 갈라졌지만 삼선의 견해를 벗어나지 못했느니라. 교주 석존께서도 저들에게 배워 전해 받아 외도의 제자이셨으나, 고행과 낙행 십이 년 만에 고 · 공 · 무상 · 무아의 이치를 깨달아 내시고서야 외도의 제자라는 이름을 떠나시어 「무사지」라고 이름하셨고, 또 인천도 대사로 우러러 모셨느니라. 그러므로 앞의 사미 동안은 교주 석존께서 법혜보살 등의 제자이시니라. 예컨대 문수가 석존의 구대의 스승이라 하는 것과 같으니라. 늘 여러 경에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설하신 것도 이것이니라.
어구 풀이
- 記莂기별
- 수기. 부처가 제자에게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것을 국토 · 겁 · 이름까지 들어 예언하는 것. 이전의 경들에도 보살에 대한 수기가 있으나 「빛깔과 모양만 있을 뿐 참된 뜻은 없다」는 것이 本文의 판정이다.
- 水中の月・影を体とおもう물속의 달 · 그림자를 몸으로 여김
-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하고, 그림자를 실체로 여기는 것. 이름은 있으되 실체가 없는 것의 비유다.
- 法慧・功徳林・金剛幢・金剛蔵법혜 · 공덕림 · 금강당 · 금강장
- 화엄경의 사보살이라 한다. 화엄경의 설법은 인간 세계의 세 곳과 천상의 네 곳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넷은 천상 네 곳의 설법주다. 60권 화엄경을 기준으로 법혜는 도리천회(제3회)에서 십주의 법문, 공덕림은 야마천회(제4회)에서 십행의 법문, 금강당은 도솔천회(제5회)에서 십회향의 법문, 금강장은 타화자재천회(제6회)에서 십지의 법문을 설했다.
- 賢首・解脱月현수 · 해탈월
- 해탈월은 화엄경 제6회 타화자재천궁의 회좌에 금강장보살을 상수로 모인 보살 가운데 하나다. 금강장이 이 자리에서 십지의 이름만 말하고 자세히 설하지 않자, 해탈월 등이 대중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풀어 달라고 청했다. 두 번 사양하고 세 번 청한 끝에(이지삼청) 금강장이 십지의 법문을 설했으니, 이것이 화엄경 십지품이다. 현수보살은 화엄경의 앞부분(제2회)에서 게송으로 신(信)의 공덕을 설하는 보살이다.
- 十住・十行・十回向・十地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
- 별교에서 세우는 보살 수행 오십이위 가운데 단계들. 십신(견사를 누름, 외범) → 십주(견사를 끊고 진사를 누름) → 십행(진사를 끊음) → 십회향(무명을 누름; 십주~십회향이 내범) → 십지(무명 열 품을 끊음) → 등각(열한 품을 끊음) → 묘각(열두 품을 끊음; 십지~묘각이 성위).
- 六十余の大菩薩육십여 대보살
- 화엄경의 각 회좌에 시방의 불국토에서 모여든 보살들. 本文은 이들이 석존이 아직 아무것도 설하지 않았을 때 와서 법을 설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 不思議解脱부사의해탈
-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해탈의 경지. 화엄 회좌의 대보살들이 석존 이전부터 이미 이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 始成の正覚시성의 정각
- 석존이 이번 생에 인도에서 태어나 서른 살(일설에 서른다섯)에 처음 정각을 이루었다는 것. 이전 · 적문의 부처를 본문의 구원실성과 견주어 이르는 말이다.
- 四教사교
- 천태대사가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오시팔교로 나누고, 팔교를 다시 화법의 사교와 화의의 사교로 나눈 가운데 화법의 사교, 곧 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 장교는 삼장교의 줄임으로 아함경의 가르침이며 육도 안의 인과를 밝힌다. 통교는 대승의 처음으로, 앞의 장교와 뒤의 별교에 통한다. 별교는 오직 보살만을 대상으로 역겁수행을 설하며 오십이위를 세운다. 원교는 그 법문이 원융원만한 가르침으로, 이전의 원과 법화의 원이 있다.
- 善知識선지식
- 사람을 바른 도로 이끄는 벗이나 스승. 本文은 「한결같이 스승인 것도 아니요 한결같이 제자인 것도 아닌 것」이라 하여, 화엄 회좌의 대보살이 석존에게 선지식이었던 관계를 설명한다.
- 二天・三仙이천 · 삼선
- 고대 인도 바라문교에서 특히 숭배한 두 하늘과 세 신선. 이천은 마혜수라천과 비뉴천, 삼선은 가비라(수론파의 조사) · 구루승거(승론파의 조사) · 늑사바(니건자 외도의 조사)다. 이들이 신의 계시를 받아 베다를 설했다고 한다. 개목초 제4장(외도의 삼덕)에서 이미 다루었다.
- 九十五種구십오 종
- 석존 당시 인도의 외도가 갈라진 갈래의 수. 九十六種이라고도 한다.
- 苦行・楽行十二年고행 · 낙행 십이 년
- 출가에서 성도에 이르기까지 석존이 거친 수행 기간. 세속의 쾌락에 머문 낙행과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모두 거친 끝에 중도의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읽힌다.
- 無師智무사지
- 스승 없이 스스로 얻은 지혜, 곧 부처의 지혜. 법화경 비유품에 일체지 · 불지 · 자연지와 함께 무사지가 든다.
- 文殊は釈尊九代の御師문수는 석존의 구대 스승
- 법화경 서품에 따르면 옛날 일월등명불 때 묘광보살이 있었는데, 그 부처의 입멸 뒤 부처의 여덟 왕자가 모두 묘광을 스승으로 삼아 무상보리를 얻었고, 그 마지막이 연등불이 되었다. 그 묘광보살의 후신이 문수보살이다. 또 『태자서응본기경』 권상에 따르면 석존이 인위에 유동보살로서 연등불(정광불)에게 다섯 줄기 연꽃을 바치고 머리칼을 길에 깔아 부처를 지나게 하여, 장래에 석가모니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그러므로 문수(묘광)의 제자가 연등불이요, 연등불의 제자가 석존이니, 문수를 석존의 구대 전의 스승이라 한다.
- 不説一字불설일자
-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능가경 등에 보이는 말로, 부처가 성도한 밤부터 열반에 드는 밤까지 그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문이다.
보살에게도 이전은 은혜가 아니다
제29~31장이 이승을 다루었다면, 제32장부터는 대보살과 천인을 다룬다. 강의는 이 장을 「제보살의 수호가 없음을 의심하는 단락」의 시작으로 보고, 그 요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이전의 경교에서 제보살은 성불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의 별교 · 원교 두 가르침은 화엄의 때에 법혜보살 등이 설한 가르침이고 석존은 오히려 그 제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보살에게 이전의 경은 은혜가 되지 못한다.
이 논증은 이승의 경우와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한다. 이승은 이전에서 「영불성불」이라는 분명한 부정을 받았으므로, 법화경의 은혜가 누구 눈에도 분명했다. 그러나 보살은 이전의 경들에서도 성불의 수기를 받았고 높은 지위를 누렸다. 그렇다면 보살은 굳이 법화경에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대성인은 이 반론을 먼저 차단하신다. 보살이 이전에서 받은 수기는 「물속의 달을 잡으려는 것, 그림자를 몸으로 여기는 것」과 같아서 빛깔과 모양만 있을 뿐 참된 뜻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은혜도 깊은 듯하나 깊지 않다(仏の御恩も深くて深からず)」.
강의는 이전의 경들이 보살의 성불을 설한 까닭을 이렇게 풀이한다. 이전에서 보살이 성불한다고 설한 것은 이승의 불작불을 끊기 위해서다. 이승에게 「너희는 성불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성불한다」고 대비시켜 이승을 꾸짖고 대승으로 이끌려는 방편이었다. 그러나 보살만 특별히 성불한다고 설해도, 십계가 모두 성불한다는 것(십계개성)을 설하지 않으니 이름뿐이고 실이 없다. 또 과거의 하종결연이 설해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유명무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이유는 개목초 전체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첫째 이유, 곧 십계개성이 설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권실상대의 핵심인 이승작불과 연결된다. 이승이 성불하지 못한다면 십계호구가 성립하지 않고, 십계호구가 성립하지 않으면 보살계에 갖추어진 불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보살 혼자서는 성불할 수 없다. 둘째 이유, 곧 과거의 하종결연이 설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본적상대의 핵심인 구원실성과 연결된다. 이전의 부처는 이번 생에 처음 성도한 시성정각의 부처이므로, 그 부처와 보살 사이에는 과거로부터의 인연이 없다. 성불의 씨앗을 언제 누가 심었는지가 밝혀지지 않은 수기는 뿌리 없는 꽃과 같다. 이승작불과 구원실성, 이 두 가지가 없으면 보살의 성불도 공허하다. 이것이 제34장 끝에서 대성인이 「이승작불 · 구원실성은 일념삼천의 대강 · 골수」라고 하시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화엄 회좌의 대보살들 — 석존보다 먼저 설한 이들
대성인은 보살과 이전의 부처의 관계를 화엄경의 장면에서 구체적으로 보이신다.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성도했을 때, 아직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는데 법혜 · 공덕림 · 금강당 · 금강장 등 육십여 대보살이 시방의 불국토에서 석존 앞에 와서, 현수 · 해탈월 등의 청에 응하여 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의 법문을 설했다. 시방세계의 범천 등도 와서 법을 설했다. 그 법문은 석존에게 배운 것이 아니었다.
화엄경은 석존이 성도한 직후 깨달음의 경지를 그대로 설했다고 하는 경이다. 그런데 그 경을 실제로 설하는 이는 대부분 석존이 아니라 보살들이다. 60권 화엄경의 구성으로 보면, 인간 세계의 세 곳(적멸도량 · 보광법당 · 서다림)과 천상의 네 곳(도리천 · 야마천 · 도솔천 · 타화자재천)에서 여덟 번의 법회가 열리는데, 천상 네 곳에서는 법혜가 십주를, 공덕림이 십행을, 금강당이 십회향을, 금강장이 십지를 설한다. 십지품에서 금강장이 십지의 이름만 들고 자세히 설하지 않자 해탈월이 대중을 대표해 청했고, 금강장은 두 번 사양한 뒤 세 번째 청에 응해 설했다.
화엄경의 구성은 번역본에 따라 다르다. 불타발타라 역 60권본은 일곱 곳에서 여덟 번의 법회(칠처팔회), 실차난타 역 80권본은 일곱 곳에서 아홉 번의 법회(칠처구회)로 이루어진다. 강의의 어석이 든 회의 차례(도리천회 제3회 ~ 타화자재천회 제6회)는 60권본에 따른 것이다.
이 보살들이 설한 십주 · 십행 · 십회향 · 십지는 별교의 수행 단계, 곧 오십이위의 중심 부분이다. 별교는 오직 보살만을 위한 가르침으로, 십신에서 시작해 십주 · 십행 · 십회향을 거쳐 십지 · 등각 · 묘각에 이르기까지 한량없는 겁을 거쳐 차례로 번뇌를 끊어 가는 역겁수행을 설한다. 십신에서 견사혹을 누르고, 십주에서 견사를 끊고 진사혹을 누르며, 십행에서 진사를 끊고, 십회향에서 무명을 누르며, 십지에서 무명 열 품, 등각에서 열한 품, 묘각에서 열두 품을 끊는다. 십신이 외범, 십주~십회향이 내범, 십지~묘각이 성위다.
- 묘각열두 품을 끊음성
- 등각열한 품을 끊음성
- 십지무명 열 품을 끊음성금강장보살 · 타화자재천회(제6회, 해탈월 등의 청)
- 십회향무명을 누름내범금강당보살 · 도솔천회(제5회)
- 십행진사를 끊음내범공덕림보살 · 야마천회(제4회)
- 십주견사를 끊고 진사를 누름내범법혜보살 · 도리천회(제3회)
- 십신견사를 누름외범
대성인은 이 화엄 회좌의 대보살과 천룡들을 「석존 이전에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물던 대보살」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석존이 처음 성도한 그 순간 이미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의 제자인가. 「석존의 과거 인위 때의 제자였을까, 시방세계의 앞선 부처의 제자였을까」. 어느 쪽이든 「일대의 교주요 처음 정각을 이룬 부처의 제자는 아니다」. 강의는 「석존의 과거 인위의 제자」라는 말을, 이 대보살들이 석존이 과거세에 성불하려고 수행하던 때의 제자였을까 하는 뜻으로 풀이하고, 과를 이룬 석존의 제자는 아니지만 과거세에 인연을 맺었으므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스승과 제자가 뒤바뀌다
석존에게 비로소 제자가 생긴 것은 아함 · 방등 · 반야의 때, 장 · 통 · 별 · 원의 사교를 설한 때였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것도 「부처님 스스로의 설이지만 바른 설은 아니다」라고 하신다. 방등 · 반야에서 설한 별교 · 원교는 화엄경의 별교 · 원교의 뜻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화엄의 별 · 원은 석존의 것이 아니라 법혜 등 대보살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성인은 대담한 결론을 내리신다. 이 대보살들은 사람들 눈에는 부처의 제자로 보이지만 오히려 부처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세존은 화엄의 자리에서 그 보살들이 설한 것을 듣고 지혜가 일어난 뒤에 거듭 방등 · 반야의 별 · 원을 설했으니, 그것은 「빛깔도 다르지 않은 화엄경의 별 · 원 이교」다. 그러므로 「이 대보살들은 석존의 스승이다」. 화엄경에서 이 보살들을 헤아려 「선지식」이라 설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선지식이란 한결같이 스승도 아니고 한결같이 제자도 아닌 관계를 말한다.
장교와 통교는 다시 별교 · 원교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이므로, 별 · 원을 아는 사람은 장 · 통도 반드시 안다. 그렇다면 화엄의 대보살은 사교 전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석존이 이전의 사십여 년 동안 설한 사교 가운데 화엄의 대보살이 모르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이전의 석존은 그들에게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천태의 화법사교로 보면 이 논리가 더 분명해진다. 장교는 아함경의 가르침으로 육도 안의 인과를 밝히고, 통교는 대승의 처음이지만 대체로 육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별교는 오직 보살을 위해 역겁수행과 오십이위를 설하고, 원교는 원융원만한 가르침인데 원교에도 「이전의 원」과 「법화의 원」이 있다. 이전의 원은 이전의 경에서도 범부가 차례를 거치지 않고 성불한다거나 번뇌를 끊지 않고 성불한다고 설하는 가르침이고, 법화의 원은 삼제 · 십계호구 · 일념삼천이다. 화엄의 대보살이 설한 원은 이전의 원이며, 법화의 원, 곧 십계호구와 일념삼천은 그들이 아직 듣지 못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다음 장들에서 그들이 법화경에 와서 「구족의 도」를 청하는 까닭이다.
「사람의 스승」이란 무엇인가 — 무사지와 구대의 스승
대성인은 스승의 정의를 분명히 하신다. 「사람의 스승이란 제자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스승이다」. 이 정의에 비추면, 화엄의 대보살이 이미 알고 있던 것밖에 설하지 않은 이전의 석존은 그들의 스승이 아니다. 강의도 이 대목을 「처음 성도한 석존은 화엄 회좌 이상의 것을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스승이라 할 수 없다」고 풀이한다.
대성인은 이 정의를 외도의 예로 뒷받침하신다. 부처 이전의 모든 인천과 외도는 이천 · 삼선의 제자다. 외도는 구십오 종으로까지 갈라졌지만 결국 삼선의 견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교주 석존도 처음에는 외도에게 배워 외도의 제자였다. 그러나 고행과 낙행의 십이 년 끝에 고 · 공 · 무상 · 무아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을 때 비로소 외도의 제자라는 이름을 떠나 「무사지」, 스승 없이 얻은 지혜를 이름하였고, 인천도 석존을 대사로 우러렀다. 외도의 스승에게서 배운 것 이상의 것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석존은 외도의 제자가 아니게 되었고, 비로소 인천의 스승이 되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누가 먼저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가 상대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느냐로 정해진다.
이 논리를 화엄의 보살에게 그대로 적용하면, 「앞의 사미 동안은 교주 석존이 법혜보살 등의 제자」가 된다. 대성인은 이를 「문수는 석존의 구대 스승」이라는 전승에 견주신다. 법화경 서품에서 문수는 과거 일월등명불 때 묘광보살이었고, 그 부처의 여덟 왕자를 가르쳤는데 그 마지막 왕자가 연등불이 되었다. 그리고 석존은 인위에 유동보살로서 연등불에게 연꽃을 바치고 머리칼을 길에 깔아 부처를 지나게 하여 미래 성불의 수기를 받았다. 문수의 제자가 연등불이요 연등불의 제자가 석존이니, 문수는 석존의 먼 스승이 된다. 이전의 경들에서 문수가 늘 석존 곁에서 지혜제일의 보살로 등장하지만, 그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승과 제자가 뒤바뀌어 있다.
화의와 내증 — 니치칸 상인의 해석
이 장의 논리에 대해 강의는 하나의 의문을 소개한다. 화엄경 곳곳에는 보살들이 「부처의 힘(仏力)」을 받아 설한다고 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보살들도 결국 석존의 제자가 아닌가. 이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답하셨다고 강의는 전한다. 「지금은 내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화의를 논하는 것이다. 이미 이 보살들은 개권이나 개적 등의 법문을 아직 듣지 못했으므로 참된 제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화의에 의탁해 이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화의란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형식과 방법, 내증이란 부처가 안으로 깨달은 경지를 말한다. 내증의 차원에서 보면 석존의 깨달음은 화엄의 보살들보다 깊고, 보살들이 부처의 힘을 받아 설한다는 경문도 그 차원의 진실을 말한다. 그러나 화의의 차원, 곧 실제로 무엇을 설해 보살들을 이끌었느냐의 차원에서 보면, 이전의 석존은 보살들이 이미 아는 것 이상을 설하지 않았다. 「개권현실」(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냄)과 「개적현본」(적을 열어 본을 드러냄)의 법문, 곧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을 아직 듣지 못한 이상, 보살들은 석존의 「참된 제자」가 아니다. 대성인이 이 장에서 「석존은 보살의 제자」라고 하신 것은 석존의 깨달음을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경들이 보살에게 은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화의의 측면에서 보이려는 것이다.
이어 강의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不説一字)」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소개한다. 첫째 해석은 「앞선 스승이 설한 것 외에 나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문을 끌어와, 네 보살이 설한 것 밖으로 석존이 한 글자도 더 설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본다. 둘째 해석은 『마하지관』 권5의 문을 끌어와 「여래가 스스로 깨달은 근본의 법은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고, 법화경에 이르러 비로소 이를 설했다」는 뜻으로 본다. 니치칸 상인은 첫째 해석이 옳다고 하셨다. 이 장의 문맥이 「앞의 사미 동안 석존은 법혜 등의 제자」라는 데 있으므로, 「불설일자」도 스승의 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는다.
화엄의 대보살과 석존의 이 뒤바뀐 관계는 하권에서 한 번 더 뒤집힌다. 종지용출품에서 대지로부터 무수한 대보살이 솟아나 석존을 「스승」으로 예배하자, 미륵은 크게 의아해한다. 대성인은 하권 제37장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쓰셨다.
華厳経の時・法慧等の無量の大菩薩あつまるいかなる人人なるらんとをもへば我が善知識なりとをほせられしかば・さもやと・うちをもひき
화엄경 때에 법혜 등 무량한 대보살이 모였는데 어떠한 사람들일까 생각했더니, 「나의 선지식이다」라고 하셨으므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느니라.
미륵은 화엄의 대보살들이 석존의 「선지식」이라는 말을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 솟아난 지용의 보살들은 화엄의 대보살과는 견줄 수도 없이 위덕이 높은데, 석존은 그들을 「내가 처음 발심하게 하여 교화한 제자」라고 한다. 이 의문이 개근현원, 곧 석존이 실은 구원에 성불한 부처라는 본문의 법문을 끌어낸다. 제32장에서 「석존은 화엄 보살의 제자」라고 하신 것은, 하권에서 「석존은 구원 이래 무수한 보살의 스승」이라는 본문의 진실이 드러날 때 그 대비를 극대화하기 위한 복선이기도 하다.
강의는 이 장의 끝에서 선지식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인다. 선지식의 뜻은 本文에 말씀하신 대로이지만, 말법에서는 삼대비법의 본존으로 이끄는 사람이 곧 선지식이라는 것이다.
강의는 이 장의 요지를 보살에게 이전의 경이 은혜가 되지 못한다는 데서 찾는다. 이전의 보살 성불은 이승을 꾸짖기 위한 대비로 설해졌을 뿐, 십계개성과 과거의 하종결연이 없으므로 유명무실하다. 화엄의 대보살은 오히려 이전 석존의 스승이었으니, 보살에게 참된 은혜는 법화경에서 처음 주어진다.
본문
仏・御年・七十二の年・摩竭提国・霊鷲山と申す山にして無量義経を・とかせ給いしに四十余年の経経をあげて枝葉をば其の中におさめて四十余年・未顕真実と打消し給うは此なり、 此の時こそ諸大菩薩・諸天人等はあはてて実義を請ぜんとは申せしか、無量義経にて実義とをぼしき事一言ありしかども・いまだまことなし、 譬へば月の出でんとして其の体東山にかくれて光り西山に及べども諸人月体を見ざるがごとし、法華経・方便品の略開三顕一の時・仏略して一念三千・心中の本懐を宣べ給う、 始の事なればほととぎすの初音をねをびれたる者の一音ききたるが・やうに月の山の半を出でたれども薄雲の・をほへるが・ごとく・かそかなりしを舎利弗等・驚いて諸天・竜神・大菩薩等をもよをして諸天・竜神等・其の数恒沙の如し仏を求むる諸の菩薩大数八万有り・又諸の万億国の転輪聖王の至れる合掌して敬心を以て具足の道を聞かんと欲す等とは請ぜしなり、 文の心は四味・三教・四十余年の間いまだ・きかざる法門うけ給はらんと請ぜしなり、此の文に具足の道を聞かんと欲すと申すは大経に云く「薩とは具足の義に名く」等云云、 無依無得大乗四論玄義記に云く「沙とは訳して六と云う胡法に六を以て具足の義と為すなり」等云云、吉蔵の疏に云く「沙とは翻じて具足と為す」等云云、 天台の玄義の八に云く「薩とは梵語此に妙と翻ずるなり」等云云、付法蔵の第十三真言・華厳・諸宗の元祖・本地は法雲自在王如来・迹に竜猛菩薩・初地の大聖の大智度論千巻の肝心に云く「薩とは六なり」等云云、
부처님께서 일흔두 살 되시던 해, 마갈타국 영취산이라는 산에서 무량의경을 설하실 때, 사십여 년의 경들을 들어 그 가지와 잎을 그 안에 거두시고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지워 버리신 것이 이것이니라. 이때야말로 모든 대보살과 제천 · 인 등은 허둥대며 참된 뜻을 청하려 하였느니라. 무량의경에서 참된 뜻인 듯한 말이 한마디 있었으나 아직 참은 아니었느니라. 비유컨대 달이 뜨려 할 때 그 몸은 동산에 숨어 있고 빛은 서산에 미치지만 사람들이 달의 몸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법화경 방편품의 약개삼현일 때에 부처님께서 간략히 일념삼천, 마음속의 본회를 펴셨느니라. 처음의 일이었으므로, 두견새의 첫 울음을 잠결에 한 소리 들은 것처럼, 달이 산 중턱까지 나왔으나 엷은 구름이 덮은 것처럼 희미하였는데, 사리불 등이 놀라 제천 · 용신 · 대보살 등을 재촉하여 「제천과 용신 등은 그 수가 항하사와 같고, 부처를 구하는 모든 보살은 그 큰 수가 팔만이며, 또 모든 만억 나라의 전륜성왕이 이르러,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등이라고 청하였느니라. 글의 마음은 사미 · 삼교 사십여 년 동안 아직 듣지 못한 법문을 받들어 듣고자 청한 것이니라. 이 글에서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고 한 것은, 대경에 이르기를 「살(薩)이란 구족의 뜻을 이름한다」 운운, 무의무득대승사론현의기에 이르기를 「사(沙)란 번역하여 육(六)이라 한다. 호법에서는 육으로써 구족의 뜻을 삼는다」 운운, 길장의 소에 이르기를 「사(沙)란 번역하여 구족이라 한다」 운운, 천태의 현의 권8에 이르기를 「살이란 범어이니 이곳에서는 묘(妙)라 번역한다」 운운, 부법장의 제13이요 진언 · 화엄 등 여러 종의 원조이며, 본지는 법운자재왕여래요 적으로는 용맹보살이신 초지의 대성의 대지도론 천 권의 간심에 이르기를 「살이란 육이다」 운운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 仏・御年・七十二부처님의 연세 일흔둘
- 천태 교학의 전승에서 석존은 일흔둘에 무량의경과 법화경을 설하기 시작해 마지막 팔 년 동안 법화경을 설하고 여든에 입멸했다고 본다. 本文은 이 전승에 따른다.
- 摩竭提国・霊鷲山마갈타국 · 영취산
- 영취산은 중인도 마갈타국(갠지스강 하류 지역)의 수도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법화경이 설해진 곳이다. 범명 그리드라쿠타, 음사하여 기사굴산. 그 남쪽이 시다림이라는 시신 버리는 곳이어서 독수리가 날아들므로 「취산」이라 하고, 삼세제불이 성도하는 법인 법화경이 설해졌으므로 「영산」이라 한다. 강의의 어석은 말법에서는 어본존이 계신 곳이 곧 영취산이며, 어본존을 수지하는 이가 사는 곳도 영취산이라고 덧붙인다.
- 無量義経무량의경
- 법화경의 개경(서론의 경). 1권 3품(덕행품 · 설법품 · 십공덕품). 설법품에서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고, 「무량의는 한 법에서 생긴다(無量義者 従一法生)」고 설한다.
- 枝葉지엽
- 가지와 잎. 이전 사십여 년의 갖가지 가르침을 근본(법화경)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와 잎에 견준 말이다.
- 略開三顕一약개삼현일
- 법화경 방편품 앞부분에서 간략히 삼승을 열어 일승을 드러낸 것. 뒤의 광개삼현일(자세히 연 것)과 짝을 이룬다. 그 핵심이 십여실상(「이른바 제법의 여시상 · 여시성 …… 여시본말구경 등」)의 문이다.
- 一念三千・心中の本懐일념삼천 · 심중의 본회
- 부처가 세상에 나온 참뜻, 곧 마음속에 품어 온 근본의 뜻. 本文은 방편품의 십여실상에서 그 본회인 일념삼천이 간략히 펼쳐졌다고 하신다.
- ほととぎすの初音두견새의 첫 울음
- 초여름에 처음 우는 두견새의 소리. 잠결에 한 번 들은 그 소리처럼 희미하고 확실하지 않았다는 비유다.
- 具足の道구족의 도
- 방편품에서 사리불이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는 게송 속의 말. 本文은 이를 「묘법」 그 자체를 청한 것으로 읽는다.
- 大経대경
- 대반열반경의 약칭. 북량 담무참 역 40권본(북본)과, 북본을 바탕으로 송나라의 혜관 · 혜엄 · 사령운 등이 고쳐 엮은 36권본(남본)이 있다.
- 無依無得大乗四論玄義記무의무득대승사론현의기
- 줄여서 『대승사론현의』. 당의 균정(혜균 승정) 찬술, 10권. 삼론학 계통의 문헌이다.
- 吉蔵길장
- 549~623. 중국 남북조에서 당에 걸친 승려로 삼론종의 대성자. 조부 또는 부친이 안식(파르티아) 사람이었으므로 호길장이라 불렸고, 가상사(절강성 소흥)에 머물렀으므로 가상대사라 한다. 열두 살에 법랑에게 삼론(중론 · 백론 · 십이문론)을 배웠고, 수 초기 가상사에서 강설하며 삼론종을 세워 반야 최제일의 뜻을 폈다. 뒤에 진왕 광(뒤의 양제)의 부름으로 양주 혜일도량에 옮겼다. 천태대사와도 교류가 있었다. 저서에 『삼론현의』 · 『중관론소』 · 『대승현론』 · 『법화현론』 · 『법화유의』 등이 있다. 『법화유의』에서는 이승작불을 밝히는 점에서는 법화경이 반야경보다 뛰어나지만, 보살을 위해 실혜와 방편의 두 지혜를 밝히는 점에서는 반야경이 뛰어나다고 했다.
- 天台の玄義の八천태의 현의 권8
- 천태대사의 『법화현의』 권8. 경제(經題) 「묘법연화경」의 오중현의 가운데 명(名)을 풀이하는 대목에서 범어 경제를 들어 「살」을 「묘」로 번역한다고 했다.
- 付法蔵の第十三・竜猛菩薩부법장의 제13 · 용맹보살
- 용수(나가르주나). 『부법장인연전』의 부법 계보에서 제13조(제14조라고도 함)에 해당한다. 현장 등의 신역에서는 용맹이라 번역하며, 홍법(구카이)의 『비밀만다라교부법전』은 「당에서는 용맹보살이라 하고, 예전에 용수라 한 것은 잘못 줄인 것」이라 하여 진언종에서는 용맹이라 부른다.
- 法雲自在王如来법운자재왕여래
- 「묘운자재왕여래」를 가리킨다. 묘운여래 · 묘운상불이라고도 한다. 밀교에서 용맹보살의 본지로 삼는 부처다.
- 大智度論千巻대지도론 천 권
- 용수가 대품반야경을 주석한 논. 구마라집이 번역할 때 원본이 매우 방대하여, 첫 품만 다 번역하고 나머지는 줄여 100권으로 했다고 전하므로, 원본을 「천 권」이라 일컫는 전승이 있다.
법화의 심은 — 적문 서분에서 정종분으로
제32장에서 보살에게 이전의 경이 은혜가 되지 못한 까닭을 밝히신 대성인은, 제33장에서 보살이 법화경에서 처음으로 입은 깊은 은혜를 밝히신다. 강의는 「부처님의 연세 일흔둘」 이하가 법화의 깊은 은혜를 밝히는 대목이며, 그 안에서 먼저 적문, 다음에 본문을 들고, 적문은 다시 서분 · 정종분 · 그리고 하권 첫머리의 유통분 순서로 밝힌다고 정리한다. 곧 제33장은 적문의 서분(무량의경)과 정종분의 첫머리(방편품의 약개삼현일), 제34장은 정종분의 법문(개불지견과 제천의 영해), 하권 제35장은 유통분(보탑품의 칙선)을 거쳐 본문(지용출현 · 개근현원)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은 대성인이 법화경의 구조를 은혜의 관점에서 다시 읽으시는 대목이다. 제31장에서 이승을 구한 빛으로 등장했던 「미현진실」의 문이 여기서는 보살에게도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석존이 일흔둘에 영취산에서 무량의경을 설하여 사십여 년의 경들을 들고, 그 가지와 잎을 모두 그 안에 거두어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지워 버렸을 때, 「이때야말로 모든 대보살과 제천 · 인 등은 허둥대며 참된 뜻을 청하려 했다」. 이승만이 아니라 대보살도 허둥댔다. 사십여 년 동안 듣고 배우고 스스로 설하기까지 한 법문이 모두 진실이 아니었다고 하니, 그들도 발 디딜 곳을 잃었다. 보살이 이전에서 받은 은혜가 「깊은 듯하나 깊지 않다」는 것을, 보살 스스로가 이 순간 깨달은 것이다.
무량의경의 「한마디」 — 일법에서 무량으로
대성인은 무량의경에서 「참된 뜻인 듯한 말이 한마디 있었으나 아직 참은 아니었다」고 하신다. 강의는 이 한마디를 무량의경 설법품의 「무량의는 한 법에서 생긴다(無量義者 従一法生)」라는 문으로 본다. 이 문은 하나의 법에서 무량한 법이 생긴다는 것을 밝혔지만, 아직 무량한 법이 하나의 법으로 돌아가야 함을 설하지 않았으므로, 대성인이 「아직 참은 아니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일법에서 무량의가 생긴다」는 것은 근본에서 지엽이 나오는 방향, 곧 하나의 진실에서 갖가지 방편이 갈라져 나오는 방향이다. 무량의경은 그 근본의 일법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지만, 그 일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갈라져 나온 갖가지 가르침이 어떻게 그 일법으로 돌아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 「돌아감」, 곧 삼승을 열어 일승으로 돌아가게 하는 개삼현일과 회삼귀일은 법화경 방편품에서 비로소 설해진다. 대성인은 이 상태를 「달이 뜨려 할 때 그 몸은 동산에 숨어 있고 빛은 서산에 미치지만 사람들이 달의 몸을 보지 못하는 것」에 견주신다. 빛은 이미 비치기 시작했지만 달 자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두견새의 첫 울음 — 약개삼현일의 희미함
다음 단계가 방편품의 약개삼현일이다. 방편품 앞부분에서 석존은 삼매에서 일어나 「제불의 지혜는 매우 깊고 한량없다」며 부처의 지혜를 찬탄하고,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제법의 실상을 다 알 수 있으니, 이른바 제법의 여시상 · 여시성 · 여시체 · 여시력 · 여시작 · 여시인 · 여시연 · 여시과 · 여시보 · 여시본말구경 등이다」라고 설한다. 이것이 십여실상의 문이다. 대성인은 이때 「부처님께서 간략히 일념삼천, 마음속의 본회를 펴셨다」고 하신다. 강의도 이 대목을 십여실상의 문을 가리킨 것으로 본다.
천태대사는 이 십여시에 십계와 십계호구, 그리고 삼세간을 곱하여 일념삼천의 법문을 세웠다. 개목초 제7장에서 대성인은 이 일념삼천이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다」고 하셨는데, 그 일념삼천이 처음으로 경문 위에 얼굴을 내민 곳이 방편품의 십여실상이다. 그러나 처음이었기에 희미했다. 대성인은 이를 두 비유로 그리신다. 두견새의 첫 울음을 잠결에 한 소리 들은 것처럼, 달이 산 중턱까지 나왔으나 엷은 구름이 덮은 것처럼. 강의는 이 비유의 뜻을 「아직 일념삼천의 이름만 있고 실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십여실상은 일념삼천의 근거이지만, 그 자체로 일념삼천의 구조 전체를 밝힌 것은 아니다. 일념삼천이 참으로 성립하려면 이승작불(십계호구)과 구원실성(본국토와 본인본과)이 밝혀져야 한다. 그것이 다음 장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제33장의 달 비유는 제31장의 달 비유와 이어져 있다. 제31장에서 방편품의 「요당설진실」은 「큰 허공에 보름달이 자리하듯」 빛났다. 제33장에서는 그 같은 방편품이 「산 중턱의 달을 엷은 구름이 덮은 듯」 희미하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같은 방편품을 다른 관점에서 본 것이다. 성문의 입장에서 보면 방편품은 사십여 년의 어둠을 걷어 낸 보름달이다. 그러나 일념삼천의 법문 전체에서 보면, 방편품은 아직 달이 산 중턱에 걸린 단계, 본문 수량품에서 완전히 떠오를 달의 첫 모습이다. 대성인은 비유의 같은 소재로 법화경 안의 단계를 정밀하게 구분하신다.
- 1 이전 사십여 년無量の草露무량한 풀잎의 이슬제31장
- 2 무량의경月の出でんとして其の体東山にかくれて光り西山に及べども諸人月体を見ざるがごとし달이 뜨려 할 때 몸은 동산에 숨고 빛은 서산에 미치나 사람들이 달의 몸을 보지 못함제33장
- 3 방편품 약개삼현일月の山の半を出でたれども薄雲の・をほへるが・ごとく달이 산 중턱까지 나왔으나 엷은 구름이 덮은 것처럼제33장
- 4 성문의 수기大虚に満月の処するがごとく큰 허공에 보름달이 자리하듯제31장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 사리불의 청
희미한 첫 울음에 놀란 사리불은 제천 · 용신 · 대보살을 재촉하여 부처에게 법을 청했다. 방편품에서 사리불은 세 번 설법을 청하는데(삼청), 本文에 인용된 것은 그 첫 청의 게송이다. 「제천과 용신 등은 그 수가 항하사와 같고, 부처를 구하는 모든 보살은 그 큰 수가 팔만이며, 또 모든 만억 나라의 전륜성왕이 이르러,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이 게송에서 주목할 것은 청하는 주체에 대보살과 제천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32장에서 이전의 경이 보살에게 은혜가 되지 못했다고 하신 대성인은, 바로 이 게송을 들어 보살들 스스로가 법화경에서 「아직 듣지 못한 법」을 청했음을 보이신다. 대성인은 이 문의 마음을 「사미 · 삼교 사십여 년 동안 아직 듣지 못한 법문을 받들어 듣고자 청한 것」이라고 하신다. 사미는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의 네 시기, 삼교는 장 · 통 · 별의 세 가르침이다. 원교가 빠진 것은, 이전에도 원교는 있었지만 그것이 장 · 통 · 별과 섞여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겸 · 단 · 대). 화엄의 대보살이 법혜 등으로서 이미 알고 있던 것은 바로 이 사미 · 삼교였다. 그들이 법화경에서 처음 청한 것은 그 밖의 것, 곧 「구족의 도」였다.
「관심의 본존초」는 방편품의 같은 문을 십계호구를 증명하는 문으로 인용하면서, 「그 연각을 구하는 자 ……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를 「연각계에 갖추어진 십계」의 증거로 들었다(240쪽). 청하는 이가 구족의 도를 청할 수 있는 것은, 그 청하는 생명 안에 이미 구족의 가능성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살」의 다섯 증문
그러면 「구족의 도」란 무엇인가. 대성인은 여기서 다섯 개의 증문을 늘어놓으신다. 열쇠는 범어 경제 「삿다르마푼다리카 수트라」의 첫 음절 「삿(薩)」이다.
첫째, 대경, 곧 대반열반경에 「살이란 구족의 뜻을 이름한다」고 했다. 둘째, 균정의 『무의무득대승사론현의기』에 「사(沙)란 번역하여 육이라 한다. 호법(서역 · 인도의 법)에서는 육으로써 구족의 뜻을 삼는다」고 했다. 셋째, 길장의 소에 「사란 번역하여 구족이라 한다」고 했다. 넷째, 천태대사의 『법화현의』 권8에 「살이란 범어이니 이곳에서는 묘라 번역한다」고 했다. 다섯째, 용수의 『대지도론』에 「살이란 육이다」라고 했다.
이 다섯 증문을 이으면 하나의 등식이 생긴다. 살 = 구족(열반경 · 길장), 살 = 육(대지도론 · 사론현의), 육 = 구족(사론현의), 살 = 묘(천태). 그러므로 묘 = 구족 = 육이다. 방편품에서 사리불이 청한 「구족의 도」는 곧 「묘」의 도, 묘법 그 자체를 청한 것이 된다. 이 등식이 다음 장에서 「묘란 구족이요, 육이란 육도만행」으로 풀이된다.
- 1대경(대반열반경)薩とは具足の義に名く살이란 구족의 뜻을 이름한다
- 2무의무득대승사론현의기(균정)沙とは訳して六と云う胡法に六を以て具足の義と為すなり사란 번역하여 육이라 한다. 호법에서는 육으로써 구족의 뜻을 삼는다
- 3길장의 소沙とは翻じて具足と為す사란 번역하여 구족이라 한다
- 4천태 『법화현의』 권8薩とは梵語此に妙と翻ずるなり살이란 범어이니 이곳에서는 묘라 번역한다
- 5용수 『대지도론』薩とは六なり살이란 육이다
다섯 증문을 고른 방식에도 뜻이 있다. 열반경은 법화경과 같은 제호미의 경이요, 천태는 법화경을 근본으로 한 종의 조사다. 그런데 길장은 삼론종의 대성자로 반야경을 최제일로 세운 사람이며, 강의의 어석이 소개하듯 『법화유의』에서 보살을 위한 두 지혜를 밝히는 점에서는 반야경이 법화경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그리고 용수에 대해 대성인은 「부법장의 제13이요 진언 · 화엄 등 여러 종의 원조이며, 본지는 법운자재왕여래요 적으로는 용맹보살이신 초지의 대성」이라고 길게 수식하신다. 이 수식은 진언종과 화엄종이 스스로 받드는 용수의 권위를 그들의 말 그대로 들어 보이신 것이다. 진언종은 용수를 용맹이라 부르며 밀교 부법의 조사로, 그 본지를 묘운자재왕여래로 받든다. 법화경을 낮추는 종들이 받드는 조사의 말이 오히려 「살 = 육 = 구족」을 증명한다. 대성인은 법화경 계통의 문헌만이 아니라 다른 종이 받드는 문헌까지 동원하여, 「살」이 「묘」요 「구족」이라는 것이 종파를 넘어 인정되는 뜻임을 보이신다.
『대지도론』은 구마라집이 번역할 때 원본이 매우 길어 첫 품만 다 번역하고 나머지는 줄여 100권으로 했다고 승예의 서문 등에 전한다. 「천 권」이라는 말은 이 원본의 분량에 대한 전승에 따른 표현이다.
「관심의 본존초」와의 대응 — 수지즉관심
이 다섯 증문은 개목초보다 한 해 뒤에 쓰신 「관심의 본존초」에서 거의 같은 순서로 다시 인용된다. 강의도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에 대해 「관심의 본존초」의 문을 들어 보인다. 「관심의 본존초」에서 대성인은 범부가 어떻게 부처의 공덕을 얻을 수 있느냐는 큰 난문에 답하면서 이렇게 쓰셨다.
無量義経に云く「未だ六波羅蜜を修行する事を得ずと雖も六波羅蜜自然に在前す」等云云、法華経に云く「具足の道を聞かんと欲す」等云云、涅槃経に云く「薩とは具足に名く」等云云、竜樹菩薩云く「薩とは六なり」等云云……私に会通を加えば本文を黷が如し爾りと雖も文の心は釈尊の因行果徳の二法は妙法蓮華経の五字に具足す我等此の五字を受持すれば自然に彼の因果の功徳を譲り与え給う
무량의경에 이르기를 「아직 육바라밀을 수행하지 못했을지라도 육바라밀이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 운운, 법화경에 이르기를 「구족의 도를 듣고자 한다」 운운, 열반경에 이르기를 「살이란 구족을 이름한다」 운운, 용수보살이 이르기를 「살이란 육이다」 운운. …… 사사로이 회통을 더하면 본문을 더럽히는 것과 같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글의 마음은, 석존의 인행과 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구족되어 있으니, 우리가 이 다섯 자를 수지하면 저절로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
개목초의 「살」의 증문이 「묘 = 구족」이라는 등식을 세웠다면, 「관심의 본존초」는 그 등식에서 「무엇이 구족되어 있는가」를 밝힌다. 석존이 한량없는 겁 동안 닦은 인행(육바라밀의 수행)과 그 결과 얻은 과덕(부처의 공덕)이 모두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구족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다섯 자를 수지하면, 스스로 육바라밀을 닦지 않아도 그 인과의 공덕이 저절로 물려진다. 이것이 수지즉관심의 법문이다. 개목초 제33장의 「구족의 도」는 「관심의 본존초」의 수지즉관심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다. 개목초가 인본존을 드러내는 글이요 「관심의 본존초」가 법본존을 드러내는 글이라는 니치칸 상인의 구분에서 보면, 두 글은 「묘 = 구족」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은 셈이다.
강의는 이 장을 법화의 깊은 은혜를 밝히는 대목의 시작으로 보고, 무량의경의 「한마디」는 「무량의는 한 법에서 생긴다」는 문으로 일법에서 무량법이 생김을 밝혔을 뿐 무량법이 일법으로 돌아감을 설하지 않았으며, 방편품의 약개삼현일은 십여실상의 문으로 일념삼천의 이름만 있고 실의가 없다고 본다. 「구족의 도」의 참뜻은 「관심의 본존초」의 「석존의 인행과덕의 두 법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 구족되어 있다」는 문에서 더 자세히 밝혀진다.
본문
妙法蓮華経と申すは漢語なり、月支には薩達磨分陀利伽蘇多攬と申す、善無畏三蔵の法華経の肝心真言に云く「曩謨三曼陀没駄南帰命普仏陀唵三身如来阿阿暗悪開示悟入薩縛勃陀一切仏枳攘知 娑乞蒭毘耶見 誐誐曩三娑縛如虚空性羅乞叉儞離塵相也薩哩達磨正法浮陀哩迦白蓮華蘇駄覧経 惹入 吽遍 鑁住 発歓喜縛曰羅堅固羅乞叉〓擁護吽空無相無願娑婆訶決定成就」此の真言は南天竺の鉄塔の中の法華経の肝心の真言なり、 此の真言の中に薩哩達磨と申すは正法なり薩と申すは正なり正は妙なり妙は正なり正法華・妙法華是なり、又妙法蓮華経の上に南無の二字ををけり南無妙法蓮華経これなり、 妙とは具足・六とは六度万行、諸の菩薩の六度万行を具足するやうを・きかんとをもう、具とは十界互具・足と申すは一界に十界あれば当位に余界あり満足の義なり、 此の経一部八巻・二十八品・六万九千三百八十四字・一一に皆妙の一字を備えて三十二相・八十種好の仏陀なり、十界に皆己界の仏界を顕す妙楽云く「尚仏果を具す、余果も亦然り」等云云、 仏此れを答えて云く、「衆生をして仏知見を開か令めんと欲す」等云云、衆生と申すは舎利弗・衆生と申すは一闡提・衆生と申すは九法界・衆生無辺誓願度・此に満足す、 「我本誓願を立つ一切の衆をして我が如く等しくして異なること無からしめんと欲す我が昔の願ぜし所の如き今は已に満足しぬ」等云云。 諸大菩薩・諸天等・此の法門をきひて領解して云く「我等昔より来数世尊の説を聞きたてまつれども未だ曾て是の如き深妙の上法を聞かず」等云云、 伝教大師云く「我等昔より来数世尊の説を聞く・と謂うは昔法華経の前・華厳等の大法を説くを聞けども・となり、未だ曾て是くの如き深妙の上法を聞かずと謂うは未だ法華経の唯一仏乗の教を聞かざるなり」等云云、 華厳・方等・般若・深密・大日等の恒河沙の諸大乗経はいまだ一代の肝心たる一念三千の大綱・骨髄たる二乗作仏・久遠実成等をいまだきかずと領解せり。
묘법연화경이라 하는 것은 한어이니라. 월지에서는 살달마분타리가소다람이라 하느니라. 선무외삼장의 법화경 간심 진언에 이르기를 「(범어 진언의 음사. 음절마다 붙은 풀이를 차례로 들면) 널리 모든 부처님께 귀명함 · 삼신여래 · 개시오입 · 일체의 부처 · 지 · 견 · 허공의 성품과 같음 · 티끌을 떠난 모습 · 정법(살리달마) · 백련화(부타리가) · 경(소타람) · 입 · 두루 · 머묾 · 환희를 일으킴 · 견고 · 옹호 · 공 · 무상 · 무원 · 결정 성취」. 이 진언은 남천축의 철탑 안에 있던 법화경의 간심 진언이니라. 이 진언 가운데 「살리달마」라 한 것은 정법이니라. 「살」이란 정(正)이니, 정은 묘요 묘는 정이니라. 정법화 · 묘법화가 이것이니라. 또 묘법연화경 위에 「남무」 두 자를 두었으니,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니라. 묘란 구족이요, 육이란 육도만행이니, 모든 보살이 육도만행을 구족하는 모습을 듣고자 한 것이니라. 구란 십계호구요, 족이라 함은 한 계에 십계가 있으니 그 자리에 다른 계가 있어 만족하다는 뜻이니라. 이 경 한 부 여덟 권, 이십팔 품, 육만 구천삼백팔십사 자는 하나하나에 모두 묘의 한 글자를 갖추어 삼십이상 · 팔십종호의 부처이니라. 십계에 모두 자기 계의 불계를 나타내느니라. 묘락이 이르기를 「오히려 불과를 갖추니, 다른 과도 또한 그러하다」 운운. 부처님께서 이에 답하여 이르시기를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한다」 운운. 중생이라 함은 사리불이요, 중생이라 함은 일천제요, 중생이라 함은 구법계이니, 「중생무변서원도」가 여기서 만족하느니라. 「내가 본래 서원을 세우기를, 일체의 대중으로 하여금 나와 같이 같아서 다름이 없게 하고자 하였으니, 내가 옛날에 원한 바와 같이 이제 이미 만족하였느니라」 운운. 모든 대보살과 제천 등이 이 법문을 듣고 영해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옛날부터 여러 번 세존의 설법을 들었으나 아직 일찍이 이와 같은 깊고 묘한 최상의 법을 듣지 못하였다」 운운. 전교대사가 이르기를 「〈우리는 옛날부터 여러 번 세존의 설법을 들었다〉라고 한 것은 옛날 법화경 이전에 화엄 등의 대법을 설하는 것을 들었으나라는 뜻이요, 〈아직 일찍이 이와 같은 깊고 묘한 최상의 법을 듣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은 아직 법화경의 오직 일불승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운운. 화엄 · 방등 · 반야 · 심밀 · 대일 등 항하사와 같은 모든 대승경은 아직 일대의 간심인 일념삼천의 대강이요 골수인 이승작불 · 구원실성 등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영해하였느니라.
어구 풀이
- 妙法蓮華経묘법연화경
- 대승 경전의 극설. 범명 삿다르마푼다리카 수트라, 「흰 연꽃과 같은 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경전으로 엮인 것은 1세기 무렵으로 보며, 인도에서 이미 이본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한역할 때 역자마다 쓴 원본이 달라 여러 한역본이 생겼다. ① 『법화삼매경』 6권(위 정무외 역, 256년) ② 『살담분타리경』 6권(서진 축법호 역, 265년) ③ 『정법화경』 10권(서진 축법호 역, 286년) ④ 『방등법화경』 5권(동진 지도근 역, 335년) ⑤ 『묘법연화경』 8권(요진 구마라집 역, 406년) ⑥ 『첨품묘법연화경』 7권(수 사나굴다 · 달마급다 공역, 601년)의 여섯이다. 이 가운데 ③ ⑤ ⑥의 셋이 현존하여 「육역삼존」이라 하며, ⑤가 예부터 명역으로 가장 널리 퍼져 보통 법화경이라 하면 이를 가리킨다. 강의의 어석은 그 내용을, 그때까지의 소승과 대승의 대립을 지양 · 통일하고 만인의 성불을 가르치는 법화경을 설하는 것이 제불이 세상에 나온 본회이며,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경전 가운데 최고의 경전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 薩達磨分陀利伽蘇多攬살달마분타리가소다람
- 범어 경제의 음사. 살달마는 삿다르마의 음사로 「바른 법」, 분타리가는 푼다리카의 음사로 「흰 연꽃」, 소다람은 수트라의 음사로 「경」이다. 분타리가는 분타리화라고도 쓰며, 선무외의 진언에는 부타리가로 나온다. 꽃잎이 많아 백엽화라고도 하고, 아뇩지에 많이 피고 인간 세상에는 없다 하여 인중호화 · 희유화라고도 한다. 『법화현의』 권8 상에 「법화경의 경제를 풀면 살달마분타리수다라라 하며, 분타리를 중국에서는 연화라 풀이한다」고 했다.
- 善無畏三蔵선무외삼장
- 637~735. 중인도 출신의 밀교승. 716년 당의 장안에 와서 『대일경』을 번역했으며, 금강지 · 불공과 함께 개원의 삼대사로 불린다. 대성인은 진언종의 근본 조사의 하나로 그 교의를 자주 파절하셨다.
- 法華経の肝心真言법화경의 간심 진언
- 법화경의 핵심을 범어 진언으로 나타냈다는 다라니. 本文에는 진언의 각 음절 아래에 그 뜻을 한자로 붙여 놓았다(帰命普仏陀 · 三身如来 · 開示悟入 · 一切仏 · 知 · 見 · 如虚空性 · 離塵相也 · 正法 · 白蓮華 · 経 · 入 · 遍 · 住 · 発歓喜 · 堅固 · 擁護 · 空無相無願 · 決定成就).
- 南天竺の鉄塔남천축의 철탑
- 진언종의 전승에서, 용수(용맹)가 남천축의 철탑을 열고 그 안에서 금강살타로부터 밀교의 경전을 받았다고 하는 탑. 本文은 이 진언이 그 철탑 안에 있던 것이라 한다.
- 正法華・妙法華정법화 · 묘법화
- 축법호 역 『정법화경』과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 같은 「삿」을 축법호는 「정」으로, 구마라집은 「묘」로 옮겼다. 本文은 이를 「정은 묘요 묘는 정」의 증거로 드신다.
- 南無남무
- 범어 나마스의 음사. 귀명 · 귀의라 번역한다. 本文은 진언 첫머리의 「나모(曩謨)」가 「귀명」으로 풀이되어 있는 것과 같이, 묘법연화경 위에 남무 두 자를 둔 것이 곧 남묘호렌게쿄라고 하신다.
- 六度万行육도만행
- 육도는 육바라밀, 곧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 만행은 보살이 닦는 한량없는 수행. 보살의 모든 수행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 十界互具십계호구
- 지옥에서 부처까지의 십계가 저마다 다른 아홉 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 일념삼천의 핵심 구조다.
- 六万九千三百八十四字육만 구천삼백팔십사 자
-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 8권 28품의 글자 수로 전해지는 수.
- 三十二相・八十種好삼십이상 · 팔십종호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서른두 가지 뛰어난 모습과 여든 가지 세밀한 특징. 本文은 경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이 상호를 갖춘 부처라고 하신다.
- 妙楽묘락
- 묘락대사 담연(711~782). 당나라 천태종의 중흥조로 천태 제6조(일설에 제9조). 천태삼대부의 주석서인 『법화현의석첨』 · 『법화문구기』 · 『지관보행전홍결』을 지었다.
- 開仏知見개불지견
- 방편품의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한다」. 이어지는 시(示) · 오(悟) · 입(入)과 함께 개시오입의 사불지견이라 하며, 부처가 세상에 나온 일대사인연을 밝힌 문이다. 진언에 「開示悟入」이 들어 있는 것도 이 문에서 온 것이다.
- 一闡提일천제
- 범어 잇찬티카의 음사. 선근을 끊어 성불할 인연이 없는 자, 특히 정법을 믿지 않고 비방하는 자를 이른다. 열반경에서 자세히 논한다.
- 九法界구법계
- 십계 가운데 불계를 뺀 아홉 계, 곧 지옥에서 보살까지.
- 衆生無辺誓願度중생무변서원도
- 모든 보살이 세우는 사홍서원의 하나. 중생무변서원도(가없는 중생을 모두 건지기를 서원함) · 번뇌무수서원단(수없는 번뇌를 모두 끊기를 서원함) · 법문무진서원지(다함없는 법문을 모두 알기를 서원함) · 불도무상서원성(위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함)의 넷이다.
- 深密심밀
- 『해심밀경』. 법상종(유식학파)이 근본으로 삼는 경으로, 삼시교판을 세워 자종의 가르침을 제3시 요의교라 했다.
- 大綱・骨髄대강 · 골수
- 대강은 그물의 벼리, 곧 전체를 거느리는 근본 줄. 골수는 뼈와 골, 곧 가장 깊은 핵심. 本文은 이승작불 · 구원실성을 일념삼천의 대강이요 골수라고 하신다.
범어 경제와 진언의 증거
제33장에서 「살」의 다섯 증문으로 「묘 = 구족」의 등식을 세우신 대성인은, 제34장에서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 자체를 풀이하신다. 먼저 「묘법연화경이라 하는 것은 한어」라고 하신다. 인도의 말로는 「살달마분타리가소다람」, 곧 삿다르마푼다리카 수트라다. 그리고 그 증거로 선무외삼장이 전한 「법화경의 간심 진언」을 그 전문 그대로 인용하신다.
이 인용은 주목할 만하다. 선무외는 『대일경』을 번역한 진언종의 근본 조사이며, 대성인은 「선무외삼장초」 등에서 그의 교의를 엄하게 파절하셨다. 그런 선무외가 전한 진언을, 그것도 진언종이 용수가 남천축의 철탑에서 받았다고 받드는 진언을 대성인이 그대로 인용하신 데는 뜻이 있다. 제33장에서 진언 · 화엄 등이 받드는 용수의 『대지도론』을 증문으로 드신 것과 같은 논법이다. 법화경을 대일경 아래에 두는 진언종 스스로가, 법화경의 핵심을 진언으로 받들어 「정법 · 백련화 · 경」이라 풀이하고 있다. 진언종의 문헌이 오히려 묘법연화경의 존귀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진언에서 대성인은 「살리달마」에 주목하신다. 진언 본문에 한자로 「정법」이라 풀이되어 있다. 「살」은 정이다. 그런데 제33장에서 천태는 「살」을 「묘」라 번역했다. 그러므로 「정은 묘요 묘는 정」이다. 그 증거가 같은 범어 경전을 축법호는 『정법화경』으로, 구마라집은 『묘법연화경』으로 옮긴 것이다. 같은 「삿」이 한쪽에서는 「정」이 되고 한쪽에서는 「묘」가 되었다.
그리고 대성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또 묘법연화경 위에 남무 두 자를 두었으니,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니라」. 진언의 첫머리 「曩謨三曼陀没駄南」에는 「帰命普仏陀」, 곧 「널리 모든 부처님께 귀명한다」는 풀이가 붙어 있다. 법화경의 핵심을 나타내는 진언 자체가 「귀명」으로 시작하여 「정법 · 백련화 · 경」을 담고 있다. 이것을 대성인은 「묘법연화경 위에 남무를 둔 것」, 곧 남묘호렌게쿄의 증거로 읽으신다. 개목초는 상 · 하권을 통틀어 「남묘호렌게쿄」라는 말이 本文에 직접 나오는 곳이 이 대목 말고는 거의 없는 글이다. 그 한 자리가 상권을 맺는 이 장, 법화경의 이름을 풀이하는 끝이다. 개목초가 문저의 법을 경문의 이름 풀이 속에 조용히 드러내는 방식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묘 · 육 · 구 · 족 — 묘는 구족
이제 대성인은 제33장의 등식을 풀어 쓰신다. 「묘란 구족이요, 육이란 육도만행이니, 모든 보살이 육도만행을 구족하는 모습을 듣고자 한 것이니라」. 방편품에서 보살들이 청한 「구족의 도」는, 보살이 한량없는 겁에 걸쳐 닦아야 하는 육바라밀과 온갖 수행을 하나에 구족하는 길이었다. 이전의 경들에서 보살은 별교의 오십이위를 차례로 거치며 역겁수행을 해야 했다. 그런데 법화경은 그 모든 수행이 묘법 하나에 구족되어 있음을 밝힌다. 「관심의 본존초」에서 인용된 무량의경의 「아직 육바라밀을 수행하지 못했을지라도 육바라밀이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가 바로 이 뜻이다.
이어 「구족」의 두 글자를 따로 풀이하신다. 「구란 십계호구요, 족이라 함은 한 계에 십계가 있으니 그 자리에 다른 계가 있어 만족하다는 뜻이니라」. 「구(具)」는 갖춘다는 것, 곧 십계가 서로 다른 계를 갖추는 십계호구다. 「족(足)」은 넉넉하다는 것, 곧 한 계에 십계가 있으므로 그 계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도(당위에) 다른 아홉 계를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지옥계는 지옥계인 채로 불계를 갖추고, 불계는 불계인 채로 지옥계를 갖춘다. 어느 계도 다른 계가 되기 위해 제 자리를 떠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만족」의 뜻이다.
- 妙とは具足묘란 구족
- 六とは六度万行육이란 육도만행보살의 육바라밀과 온갖 수행
- 具とは十界互具구란 십계호구
- 足と申すは一界に十界あれば当位に余界あり満足の義なり족이라 함은 한 계에 십계가 있으니 그 자리에 다른 계가 있어 만족하다는 뜻
대성인은 이 구족을 경전 자체에 적용하신다. 「이 경 한 부 여덟 권, 이십팔 품, 육만 구천삼백팔십사 자는 하나하나에 모두 묘의 한 글자를 갖추어 삼십이상 · 팔십종호의 부처이니라」. 경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묘를 갖추었으므로 모두 부처다. 그리고 「십계에 모두 자기 계의 불계를 나타낸다」. 묘락대사는 이를 「오히려 불과를 갖추니, 다른 과도 또한 그러하다」고 했다. 각 계가 가장 멀리 있는 듯한 불과조차 갖추었으니, 그 밖의 과를 갖추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강의는 이 「묘는 구족, 육은 육도만행, 구는 십계호구」 등을 이렇게 풀이한다. 모든 제법은 모두 일념삼천의 당체이며 구족원만한 본불의 당체라는 뜻이다. 그 당체를 묘법연화경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지옥은 지옥 그대로, 아귀는 아귀 그대로, 탐 · 진 · 치의 삼독에 시달리는 범부의 모습 그대로가 곧 묘법연화경의 당체다. 이를 깨닫는 것을 부처라 하고, 이에 미혹한 것을 범부라 한다. 일대 불교의 골수인 묘법연화경의 당체는 결코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며, 우리의 행주좌와 그대로가 곧 당체 진실의 부처의 몸이다.
개불지견과 「중생」의 세 겹
대성인은 보살들의 청에 부처가 답한 말로 방편품의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게 하고자 한다」를 드신다. 부처가 세상에 나온 일대사인연, 곧 개 · 시 · 오 · 입의 사불지견 가운데 첫째다. 그리고 그 「중생」을 세 겹으로 풀이하신다. 「중생이라 함은 사리불이요, 중생이라 함은 일천제요, 중생이라 함은 구법계이니라」.
첫째, 중생은 사리불, 곧 이승이다. 이전에서 「영불성불」을 선고받은 이승이 부처의 지견을 여는 중생에 들어간다. 둘째, 중생은 일천제, 곧 선근을 끊은 자다. 개목초 제12장에서 대성인은 화엄경이 이승과 함께 일천제를 대약왕수가 자라지 못하는 곳으로 들었음을 보이셨다. 이전에서 성불할 수 없다고 한 두 부류, 이승과 일천제가 모두 법화경의 「중생」에 포함된다. 셋째, 중생은 구법계, 곧 지옥에서 보살까지의 아홉 계 전부다. 「관심의 본존초」는 같은 방편품의 문을 「구계에 갖추어진 불계」의 증거로 인용하고, 또 「인계를 설한 것」이라 하여 「말대의 범부가 태어나 법화경을 믿는 것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240 · 241쪽). 부처의 지견을 연다는 것은, 구법계의 중생 안에 이미 부처의 지견, 곧 불계가 갖추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대성인은 「중생무변서원도가 여기서 만족한다」고 하신다. 모든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 세우는 사홍서원의 첫째, 가없는 중생을 모두 건지겠다는 서원은 이전의 경들에서는 이룰 수 없었다. 이승과 일천제가 빠진 이상 「가없는 중생」은 가없지 않았다. 법화경에서 이승과 일천제와 구법계가 모두 「중생」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그 서원이 만족된다. 부처 스스로도 방편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본래 서원을 세우기를, 일체의 대중으로 하여금 나와 같이 같아서 다름이 없게 하고자 하였으니, 내가 옛날에 원한 바와 같이 이제 이미 만족하였느니라」.
이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今者已満足)」는 문은 하권 제42장에서 다시 인용된다.
されば諸経の諸仏・菩薩・人天等は彼彼の経経にして仏にならせ給うやうなれども実には法華経にして正覚なり給へり、釈迦・諸仏の衆生無辺の総願は皆此の経にをいて満足す今者已満足の文これなり
그러므로 여러 경의 제불 · 보살 · 인천 등은 저마다의 경에서 부처가 되신 듯하나 실은 법화경에서 정각을 이루셨느니라. 석가와 제불의 「중생무변」의 총원은 모두 이 경에서 만족하니, 「이제 이미 만족하였다」는 문이 이것이니라.
제32장에서 「이전의 수기는 물속의 달」이라 하신 판정이, 제42장에서 「여러 경의 제불 · 보살은 실은 법화경에서 정각을 이루었다」는 결론으로 맺어진다. 그 사이를 잇는 것이 제34장의 「중생무변서원도가 여기서 만족한다」다. 보살이 법화경에 입은 은혜는, 자기 한 몸의 성불이 아니라 보살로서 세운 서원 그 자체가 법화경에서 처음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보살의 존재 이유인 서원을 완성시켜 준 경, 그것이 법화경이 보살에게 베푼 깊은 은혜다.
제천의 영해와 전교의 석 — 대강 · 골수
이 법문을 들은 대보살과 제천 등은 영해하여 말했다. 「우리는 옛날부터 여러 번 세존의 설법을 들었으나 아직 일찍이 이와 같은 깊고 묘한 최상의 법을 듣지 못하였다」. 법화경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화광여래의 수기를 받은 뒤 사부대중과 제천이 기뻐하며 읊은 게송의 한 구절이다. 전교대사는 이 문을 풀이하여, 「옛날부터 여러 번 들었다」는 것은 법화경 이전에 화엄 등의 대법을 들었다는 뜻이요, 「아직 이와 같은 깊고 묘한 최상의 법을 듣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직 법화경의 오직 일불승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 영해는 제32장의 논증을 보살과 제천 스스로가 확인한 것이다. 그들은 화엄 이래 사십여 년 동안 세존의 설법을 「여러 번」 들었다. 화엄의 대보살은 스스로 설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법화경에서 처음으로 「깊고 묘한 최상의 법」을 들었다고 고백한다. 이전의 경들이 보살에게 은혜가 되지 못했다는 대성인의 판정은, 보살들 자신의 입으로 증언된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영해의 뜻을 이렇게 맺으신다. 「화엄 · 방등 · 반야 · 심밀 · 대일 등 항하사와 같은 모든 대승경은 아직 일대의 간심인 일념삼천의 대강이요 골수인 이승작불 · 구원실성 등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영해하였느니라」. 화엄종의 화엄경, 삼론종이 받드는 반야경, 법상종의 해심밀경, 진언종의 대일경, 곧 여러 종이 저마다 최고라 내세우는 대승경을 낱낱이 들어, 그 어느 것도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을 설하지 않았음을 밝히신다.
「일념삼천의 대강 · 골수인 이승작불 · 구원실성」. 이 한 구절은 개목초 상권 전체를 요약한다. 제11장에서 대성인은 이전 사십여 년과 뒤의 팔 년 사이의 차이를 헤아리면 「세간의 학자도 인정하고 나 자신도 그렇다고 여기는 것은 이승작불 · 구원실성일 것」이라고 하셨다. 권적상대(제2편)는 이승작불을, 본적상대(제3편)는 구원실성을 다루었다. 그리고 상권의 끝인 이 장에서, 그 둘이 일념삼천이라는 그물의 벼리요 몸의 골수라고 정리하신다.
강의는 이 연결을 이렇게 풀이한다. 이전의 여러 경에서는 중생의 기근이 천차만별이었는데, 법화경 적문에서 근성의 원융을 설하고 제법실상에 입각해 일념삼천을 밝혀 처음으로 이승작불을 설했다. 이어 본문 수량품에 이르러 구원실성을 설하여 영원히 실재하는 생명의 실체가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승작불 · 구원실성은 일념삼천의 대강이요 골수라고 하신다. 여기서 십계가 모두 성불을 나타내어 석존의 사명은 끝났다.
이승작불이 없으면 십계호구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승에 불계가 없다면 「일계에 십계」라는 말이 깨진다. 구원실성이 없으면 부처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고, 불계에 구계가 갖추어진다는 것, 그리고 국토세간이 영원하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십계호구는 이승작불로, 삼세간의 영원성은 구원실성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일념삼천은 그 두 기둥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대성인은 이 둘을 「대강」, 그물 전체를 들어 올리는 벼리라 하시고, 「골수」, 몸 전체를 살리는 가장 깊은 곳이라 하신다. 그리고 이 둘이 법화경에만 있다는 것, 이것이 이승과 보살이 법화경에 진 깊은 은혜의 실체다.
문저에서 본 「구족」 — 신심으로 열리는 당체
강의는 이 장의 해설을 말법의 수행으로 이어 간다. 그렇다면 말법의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가. 그 길은 오직 하나, 대성인이 건립하신 어본존을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범부즉극, 당체의 연화불로 나타난다. 이때에는 석가가 설한 법화경의 본문 · 적문은 모두 이(理)의 일념삼천이 되며, 만약 사(事)에 의거해 논한다면 이 어본존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구(具)」와 「불구(不具)」가 생긴다. 다행히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믿기에, 범부 그대로 구체구용의 본불이라는 것이 강의의 설명이다.
여기서 「구」와 「불구」라는 말은 이 장의 「구란 십계호구」를 문저의 관점에서 다시 읽은 것이다. 이(理)로 말하면 모든 중생은 본래 십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사(事)로 말하면, 그 구족이 실제로 드러나느냐 아니냐는 믿음에 달려 있다. 개목초 제7장에서 대성인이 일념삼천은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다」고 하신 그 문저의 일념삼천은, 경문 위의 이론이 아니라 신수의 실천으로 열리는 사의 일념삼천이다.
강의는 이어서, 어본존을 믿는 이는 아직 육바라밀을 수행하지 않았더라도 보시 · 지계 · 인욕 · 선정 · 정진 · 지혜의 과덕이 엄연히 구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묘는 구족, 육은 육도만행」의 실천적 의미이며, 앞에서 본 무량의경의 「아직 육바라밀을 수행하지 못했을지라도 육바라밀이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와 「관심의 본존초」의 「이 다섯 자를 수지하면 저절로 저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신다」가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범부의 당체에 불계가 구족되어 있는 이상, 다른 아홉 계도 구족되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의는 경계의 말도 잊지 않는다. 어본존의 공덕은 무량무변하고 광대심원한 묘용이 있지만, 어본존을 수지하면서도 신심이 약하고, 절복을 행하지 않으며, 형식적인 신심에 머물러 방법(謗法)을 거듭한다면, 현세에서 성불득도할 기회를 잃고 다시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잡아 신심을 강성하게 하고, 게으름 없이 꾸준히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족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신심 속에서 드러난다.
강의는 「묘는 구족」의 뜻을 모든 제법이 일념삼천의 당체요 구족원만한 본불의 당체라는 데서 찾고, 이를 깨닫는 것을 부처, 미혹한 것을 범부라 한다. 이승작불 · 구원실성은 일념삼천의 대강 · 골수이며, 말법에서는 어본존에 대한 신 · 불신이 「구」와 「불구」를 가른다. 그러므로 신심을 강성히 하여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결론이다.
이 편을 맺으며
제5편의 여섯 장은 제28장에서 대성인이 「이 글의 간심이요 일기의 대사」라고 하신 물음, 곧 「어찌하여 하늘은 법화경의 행자를 돕지 않는가」를 이승과 보살과 제천이 법화경에서 입은 은혜의 깊이로 다시 세운 대목이다. 대성인은 의문을 가볍게 풀지 않으시고, 수호해야 할 까닭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수호가 없다는 현실을 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만드셨다.
제29장은 외전의 현인(계찰 · 왕수 · 공윤)과 축생(모보의 거북 · 곤명지의 큰 물고기)조차 은혜를 갚는데, 사십여 년 「영불성불」의 판정을 받았다가 법화경에서 처음 성불을 허락받은 대성문이 어찌 그 은혜를 잊겠느냐고 물었다. 「아직 팔상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한마디는 그 은혜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빚임을 보였고, 오안을 갖춘 성문이 행자를 모를 리 없으며, 설령 행자가 악인이라도 법화경을 신앙하는 한 버려서는 안 된다는 데까지 논증이 이어졌다. 제30장은 신해품 사대성문의 영해를 들어 성문들 스스로가 「세존의 대은은 다 갚을 수 없다」고 고백했음을 보이고, 이전의 경들에서 그들이 받은 꾸짖음, 구횡의 대난과 제자들의 수난, 육사외도의 참소, 그리고 「너를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정명경의 말을 차례로 들어 그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를 증명했다. 제31장은 그 논증을 모아 「법화경이 없었다면 성문은 살아서 아귀도에 있었으리라」고 맺은 뒤, 「물이 맑으면 달이 비친다」는 감응의 도리에 비추어 수호가 없는 까닭을 여섯 갈래로 따지고, 해와 달과 수미산과 조수와 사계가 변함없는데 「큰 의문이 더욱더 쌓인다」고 의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제32장부터는 보살과 제천이다. 이전의 경들이 보살에게 준 수기는 「물속의 달」과 같아 빛깔과 모양만 있을 뿐 실의가 없었고, 화엄 회좌의 대보살은 오히려 이전 석존의 스승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보살에게 이전의 경은 은혜가 되지 못한다. 제33장은 무량의경의 「미현진실」에 대보살과 제천이 허둥대며 실의를 청했고, 방편품의 약개삼현일에서 일념삼천이 두견새의 첫 울음처럼 희미하게 드러나자 사리불이 그들을 재촉해 「구족의 도」를 청했음을 보이고, 「살」의 다섯 증문으로 「묘 = 구족 = 육」의 등식을 세웠다. 제34장은 그 등식으로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을 풀었다. 묘는 구족이요, 육은 육도만행이며, 구는 십계호구, 족은 한 계에 십계가 있어 그 자리에서 만족함이다. 개불지견의 「중생」은 사리불이요 일천제요 구법계이니, 보살의 중생무변서원도가 여기서 처음 만족한다. 그리고 대보살과 제천의 영해를 들어, 화엄 · 방등 · 반야 · 심밀 · 대일 등 모든 대승경이 일대의 간심인 일념삼천의 대강 · 골수, 곧 이승작불 · 구원실성을 설하지 않았음을 밝혀 상권을 맺으셨다.
이 결론은 상권 전체를 하나로 꿴다. 상권은 「일체중생이 존경해야 할 것」, 곧 주사친 삼덕을 묻는 데서 시작했다(제1편). 유교와 외도와 불교를 견주고, 불교 안에서 권교와 실교, 적문과 본문을 차례로 가려 낸 오중상대의 교판(제1~3편)은,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이 법화경에만 있다는 두 기둥을 세우는 일이었다. 제7장에서 「일념삼천의 법문은 다만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 밑에 잠겨 있다」고 하신 그 일념삼천이, 이 두 기둥 위에 서 있다. 제4편에서 그 교판을 당신의 몸으로 읽으신 대성인은, 이 편에서 같은 두 기둥을 「은혜」의 말로 바꾸어, 그 은혜를 입은 이승과 보살과 제천이 법화경의 행자를 지켜야 할 까닭으로 삼으셨다. 교판의 논리가 보은의 논리가 되고, 보은의 논리가 수호의 의문이 되었다. 그리고 상권의 마지막 자리에서 법화경의 이름을 풀며 「남무 두 자를 두었으니, 남묘호렌게쿄가 이것이니라」라고 쓰셨다. 경의 이름을 풀이하는 끝에 문저의 법의 이름이 조용히 놓인 것이다. 주사친을 묻는 것으로 시작한 상권이, 일체중생을 구족의 도로 이끄는 법의 이름으로 끝난다.
다음 제6편 「지용출현과 개근현원 — 탈익과 하종의 삼덕」(제35~41장)은 하권의 첫머리다. 대성인은 「이제부터야말로 모든 대보살도 범천 · 제석 · 일월 · 사천 등도 교주 석존의 제자」라고 하시며 법화의 심은을 거듭 밝히고, 보탑품에서 석존이 「누가 이 경을 호지하겠는가」라고 대중에게 맹세를 재촉한 장면과 분신의 제불이 모여드는 광경을 그리신다. 이어 종지용출품에서 대지로부터 무수한 보살이 솟아나자 미륵이 품은 의문, 곧 화엄의 대보살조차 「선지식」이었던 석존이 어떻게 이 보살들을 「처음 발심하게 한 제자」라 하는가를 실마리로, 약개근현원과 광개근현원을 거쳐 구원실성의 본문이 열린다. 제32장에서 「석존은 화엄 보살의 제자」라 하신 판정은 여기서 완전히 뒤집힌다. 그리고 그 끝에서 대성인은 탈익의 삼덕과 하종의 아버지를 가리고, 종자의 덕용과 의경을 밝히신다. 이 편이 「은혜」로 물은 것을, 다음 편은 「누가 참된 주사친인가」로 다시 묻는다.
더 읽기
- 개목초 제2편 권적상대 — 이승작불과 다보 · 분신의 증명
- 개목초 제4편 말법 법화경 행자의 소유
- 개목초 제6편 지용출현과 개근현원 — 탈익과 하종의 삼덕
- 관심의 본존초 제3편 수지즉관심
- 불교 교학 五 일념삼천
- 불교 교학 六 남묘호렌게쿄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개목초」 상 · 하,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186–237쪽
- 「보은초」 · 「시조깅고전어소식」 · 「십법계사」 · 「관심의 본존초」 · 「종종어진무어서」 · 「사은초」 · 「여설수행초」 · 「선시초」 · 「입정안국론」 · 『어의구전』(신해품 육개의 대사)
- 『묘법연화경』 서품 · 방편품 · 비유품 · 신해품 · 수기품 · 오백제자수기품 · 수학무학인기품 · 견보탑품 · 제바달다품 · 종지용출품 · 약왕보살본사품, T9 no.262
- 『정법화경』, T9 no.263 / 『첨품묘법연화경』, T9 no.264
- 『무량의경』, T9 no.276
- 『대반열반경』, T12 no.374
- 『유마경』(유마힐소설경), T14 no.475
- 『화엄경』(60권), T9 no.278
- 『대지도론』, T25 no.1509
- 『법화현의』, T33 no.1716 / 『법화문구기』, T34 no.1719 / 『마하지관』, T46 no.1911
- 『부법장인연전』, T50 no.2058
- 『태자서응본기경』, T3 no.185 / 『흥기행경』, T4 no.197
- 길장 『법화유의』, T34 no.1722
- 『수신기』 · 『여씨춘추』 · 『한시외전』 · 『사기』
연구 · 번역
- 창가교학연구실, 「0186~0237 開目抄」 제29~34장 강의
- 니치칸 상인, 「개목초 문단」 (강의를 통해 참조)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The Opening of the Eyes」 수록)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