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에서 대성인은 유교 · 외도 · 불교를 견주어 주사친 삼덕을 갖춘 이를 찾고, 오중상대의 길을 따라 일념삼천의 법문이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저(文底)에 잠겨 있음을 밝히셨다. 그리고 「이 경에 두 가지 대사가 있다」고 하시며, 정법이 사라져 가는 일본 불교의 현실까지 짚으셨다. 제2편은 그 두 가지 대사 가운데 첫째, 곧 이승작불(二乘作佛)을 정면으로 다룬다. 사십여 년의 이전 제경은 성문 · 연각이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거듭 못 박았는데, 마지막 팔 년의 법화경은 그들 하나하나에게 부처의 이름과 나라와 겁을 주었다. 같은 부처의 입에서 나온 정반대의 두 말 — 일불이언(一佛二言) — 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대성인은 이 모순을 덮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드러내신 다음, 다보여래와 시방 분신 제불의 증명으로 법화경의 진실을 세우신다. 이 편은 결국 「믿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 믿는가」라는 물음, 곧 난신난해(難信難解)의 신앙론으로 이어진다.
개목초 상권의 구성에서 보면, 제11장은 법화경을 세우는 근거를 「이승작불」과 「구원실성」 두 가지로 압축해 제시하는 대목이고, 제12장부터 제17장까지가 그 첫째인 이승작불을 다룬다. 둘째인 구원실성은 「二には教主釈尊は…」로 시작하는 제18장부터 제24장까지(제3편)에서 다룬다. 오중상대의 틀로 말하면 제2편은 권교(이전 제경)와 법화경 적문을 맞대는 자리, 곧 강의가 「권적상대(權迹相對)」라 부르는 자리이며, 제3편은 적문과 본문을 맞대는 「본적상대」의 자리다.
- 내외상대
- 대소상대
- 권실상대제2편 · 권적상대 — 이전 제경 대 법화경 적문 · 이승작불
- 본적상대제3편 · 본적상대 — 구원실성
- 종탈상대
논의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먼저 법화경에서 십대제자를 비롯한 성문들이 받은 수기를 열거하고, 이어서 화엄경 · 대집경 · 유마경 · 방등다라니경 · 대품반야경 · 수릉엄경 · 정명경의 이승 탄가(彈呵)를 차례로 들어 「불지은(不知恩)의 사람」 「썩은 씨앗」 「공양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혹독한 판정을 확인한다. 그 판정은 한두 마디가 아니라 사십여 년 동안 시방에서 모여든 대중 앞에서 되풀이되었기에, 법화경의 수기는 듣는 이들에게 「천마가 부처로 변해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의심을 걷어 낸 것이 대지에서 솟은 보탑의 「개시진실(皆是眞實)」이라는 음성과, 시방 분신 제불이 범천까지 내민 광장설이다. 대성인은 이전 제경에도 제불의 증명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소승을 깨뜨리기 위한 한 단계의 증명이었을 뿐 「장비마작불(將非魔作佛)」의 의심을 풀어 줄 만한 대사(大事)가 아니었음을 가려내신다.
마지막 두 장에서 시선은 부처 재세에서 멸후로, 다시 대성인 자신의 시대로 옮겨진다. 재세에는 그래도 사십여 년을 버리고 법화경에 귀의한 사람이 있었겠지만, 멸후에 경문만으로 법화경을 믿기란 훨씬 어렵다. 일본 사람들은 모두 법화경을 믿는다고 하나 실은 법화경을 대일경 · 화엄경 · 아미타경과 「같다」고 하는 이를 반기고, 「다르다」고 하는 이를 물리친다. 대성인은 육난구이(六難九易)의 경문과 열반경의 조상토(爪上土) 경문을 들어 「전교대사 한 사람만이 법화경을 읽었다」는 자신의 강의(強義)가 경문에 들어맞음을 보이시고, 「성인의 세상에 법화경의 실의가 나타나리라」는 말씀으로 이 편을 맺으신다.
이 편의 장
본문
此に予愚見をもつて前四十余年と後八年との相違をかんがへみるに其の相違多しといえども 先ず世間の学者もゆるし我が身にも・さもやと・うちをぼうる事は二乗作仏・久遠実成なるべし、
이에 내가 어리석은 소견으로써 앞의 사십여 년의 경과 뒤의 팔 년의 법화경과의 상위(相違)를 생각해 보건대, 그 상위가 많다고는 하나, 먼저 세간의 학자도 인정하고 나 자신도 과연 그러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승작불(二乘作佛)과 구원실성(久遠實成)이니라.
어구 풀이
- 予愚見をもつて내가 어리석은 소견으로써
- 대성인이 자신의 판단을 낮추어 이르신 말이다. 겸사(謙辭)이지만, 이어지는 논의는 경문을 근거로 한 판정이므로 「사견(私見)」이 아니라 경문에 비추어 본 결론이라는 뜻을 함께 담고 있다.
- 前四十余年・後八年앞의 사십여 년 · 뒤의 팔 년
- 석존 일대 오십여 년의 설법 가운데 법화경 이전의 사십여 년(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과 마지막 팔 년의 법화경을 가리킨다. 『무량의경』의 「사십여년미현진실(四十餘年未顯眞實)」에 근거한 구분이다.
- 世間の学者もゆるし세간의 학자도 인정하고
- 법화경과 이전 제경의 차이 가운데 이승작불과 구원실성 두 가지는 대성인 한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여러 종파의 학자들도 부정하지 못하는 경문상의 사실이라는 뜻이다.
- 二乗作仏이승작불
- 성문 · 연각의 이승이 성불한다는 것. 법화경 이외의 대승경에서 이승은 자기의 깨달음에만 몰두해 이타행이 없으므로 성불의 인(因)인 불종(佛種)이 끊어져 성불할 수 없다고 했다. 법화경 적문은 이승에게도 본래 불지견(佛知見)이 갖추어져 있고 그들도 본래 성불을 지향하는 보살이라 밝혀, 미래에 보살도를 이루어 성불할 것을 구체적인 겁 · 국토 · 여래의 이름까지 들어 보증했다. 이 이승작불에 제바달다품의 여인성불 · 악인성불이 더해져 일체중생의 성불이 보증되고,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법문이 이(理)의 차원에서 완성되었다.
- 久遠実成구원실성
- 인도에 태어나 금세에 성불했다고 설해 온 석존이 실은 오백진점겁이라는 아득한 과거(구원)에 성불해 있었다는 것. 여래수량품 제16에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 百千萬億 那由他劫)」라 설한다. 석존은 구원 이래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고 하종결연(下種結緣)해 왔다고 밝혔으며, 오백진점겁의 구원에서의 설법에 의한 하종결연을 구원하종(久遠下種)이라 한다.
법화경을 세우는 두 기둥
제10장까지 대성인은 인도 · 중국 · 일본에 불법이 전해진 경과를 더듬으며, 일본에서 정법이 마침내 「失せはてぬ(사라져 버렸다)」(190쪽)는 데까지 서술하셨다. 남도 육종과 진언에 밀리고 다시 선종 · 정토종에 밀려, 천태종의 석학들조차 그쪽으로 옮겨 가 버린 현실이다. 제11장은 이 현실을 받아,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법화경을 다시 세울 것인가를 묻는 데서 시작한다. 강의는 이 장을 「본초(本抄) 이후 먼저 법화경을 세워야 할 까닭을 보이시면서, 첫째로 이승작불을, 이어서 제18장 이후에 구원실성을 설하시는」 대목으로 정리한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이미 제7장에서 예고되어 있었다. 대성인은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但し此の経に二箇の大事あり
다만 이 경에 두 가지 대사가 있느니라
강의의 현대어역은 이 두 가지 대사를 「적문 · 이(理)의 일념삼천과 본문 · 사(事)의 일념삼천」이라고 풀었다. 제11장에서 꼽는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은 바로 이 둘에 대응한다. 이승작불은 적문에서 십계호구가 성립하는 관건이고, 구원실성은 본문에서 부처의 생명이 삼세에 걸쳐 실재함을 드러내어 일념삼천을 사(事)의 법문으로 완성하는 관건이다. 제2편과 제3편은 이렇게 하나의 문장 안에 짝지어진 두 가지를 차례로 다루며, 그래서 제18장은 「二には(둘째로는)」라는 말로 시작한다. 제11장의 本文이 쉼표로 끝나 제12장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이 문맥 때문이다.
대성인이 이 두 가지를 「세간의 학자도 인정하는」 것이라 하신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법화경과 이전 제경의 차이를 말하는 방식은 종파마다 달랐지만, 이승의 성불 여부와 석존 성도(成道)의 시기라는 두 가지는 경문에 너무나 뚜렷이 쓰여 있어 어느 종파도 부정할 수 없었다. 대성인은 논쟁의 출발점을 상대가 이미 인정하는 사실에 두고, 거기서부터 그 사실이 함축하는 바를 끝까지 따라가신다. 개목초 전체에 흐르는 이 논증 방식은 제2편에서 특히 선명하다.
사십여 년이 참이라면 법화경은 거짓이 된다
강의의 요점은 간결하다. 법화경 적문에서 이승이 성불한다고 설하고, 본문에서 석가불이 구원의 옛적에 성도했다고 설하는 것은, 사십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설해 온 내용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만일 사십여 년의 설이 사실이라면 법화경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법화경이 진실이며, 사십여 년 동안은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강의는 이 판단을 세 방향에서 뒷받침한다. 법화경의 현문(現文)을 보아도, 도리에 비추어 보아도, 현증(現證)에 비추어 보아도 법화경이야말로 석존 출세의 본회(本懷)이며 최고 유일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문증 · 이증 · 현증의 삼증(三證)은 대성인이 여러 어서에서 가르침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으로 쓰신 것이며, 제2편 안에서도 이 세 가지가 차례로 등장한다. 제12장의 수기 경문과 제15장의 다보 증명은 문증에 해당하고, 제12장의 「불지은」 논리와 제13장의 「범부의 악과 이승의 선」에 관한 논의는 도리에 해당하며, 제17장에서 대성인이 자신이 겪는 박해를 경문에 비추시는 대목은 현증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강의는 곧바로 덧붙인다. 법화경이 진실이라는 그 사실 자체가 난신난해여서, 범부의 지혜로는 쉽게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제2편 전체가 이 난신난해의 구조를 해부하는 데 바쳐진다. 제12장의 장 제목이 「일불이언 · 난신의 모습」이고, 제16장이 「멸후 난신의 모습」, 제17장이 「난신의 신을 권하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금당 가운데 가장 믿기 어렵다」 — 경문과 세 스승의 풀이
강의는 난신난해를 말하는 근거로 먼저 법사품 제10의 경문을 든다.
已に説き、今説き、当に説くべし。而も其の中に於いて、此の法華経は最も為れ難信難解なり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며 앞으로 설할 것이로되, 그 가운데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니라
이미 설한 것(이전 제경), 지금 설하는 것(무량의경), 앞으로 설할 것(열반경)을 모두 견주어 법화경이 가장 난신난해라는 이 경문은 이금당(已今當) 삼설의 경문이라 불린다.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이 경문을 천태 · 장안 · 전교의 풀이와 함께 이렇게 묶어 인용하셨다.
天台大師云く二門悉く昔と反すれば信じ難く解し難し鉾に当るの難事なり 章安大師の云く仏此れを将つて大事と為す何ぞ解し易きことを得可けんや 伝教大師云く此の法華経は最も為れ難信難解なり随自意の故に
천태대사는 「적문 · 본문의 두 문이 모두 옛 설과 상반되므로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니, 창끝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니라」라고 했고, 장안대사는 「부처가 이것을 대사(大事)로 삼으셨으니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오」라고 했으며, 전교대사는 「이 법화경은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니, 수자의(隨自意)이기 때문이니라」라고 했느니라
천태대사의 「두 문(二門)」은 적문과 본문이다. 적문의 이승작불은 이전의 「이승불성불」과 상반되고, 본문의 구원실성은 이전과 적문의 「시성정각(始成正覺)」과 상반된다. 그러니 두 문이 모두 「옛 설과 반대(昔と反す)」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목초 제11장이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을 나란히 든 것과 정확히 겹친다. 「창끝을 마주한다(鉾に当る)」는 비유는, 이전의 설에 익숙한 이들에게 법화경의 설은 정면으로 날아드는 창끝처럼 맞서 받아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전교대사가 덧붙인 「수자의(隨自意)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도 중요하다. 대성인은 「제경과 법화경과 난이의 사」에서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셨다.
易信易解は随他意の故に難信難解は随自意の故なり
믿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것은 수타의(隨他意)이기 때문이요,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수자의이기 때문이니라
수타의는 중생의 근기와 바람에 맞추어 설한 가르침이고, 수자의는 부처가 자신의 깨달음 그대로를 설한 가르침이다. 듣는 이의 마음에 맞추어 설한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만, 부처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은 범부의 마음에 맞지 않으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같은 어서에서 대성인은 이를 「현명한 아버지가 어리석은 자식을 따르는 것」과 「성스러운 아버지가 어리석은 자식을 따르게 하는 것」에 비유하셨다. 법화경이 어려운 것은 법화경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부처의 본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강의는 대성인 자신의 말씀으로 「관심의 본존초」의 「일불이언 수화(一佛二言水火)」를 든다. 그 원문은 천태의 난신난해론 위에 서 있다.
天台の難信難解に二有り一には教門の難信難解二には観門の難信難解なり 其の教門の難信難解とは一仏の所説に於て爾前の諸経には二乗闡提未来に永く成仏せず教主釈尊は始めて正覚を成ず 法華経迹本二門に来至し給い彼の二説を壊る一仏二言水火なり誰人か之を信ぜん 此れは教門の難信難解なり
천태의 난신난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교문(敎門)의 난신난해요 둘째는 관문(觀門)의 난신난해이니라. 그 교문의 난신난해란, 한 부처의 설하신 바에 있어서 이전의 제경에서는 이승과 천제(闡提)가 미래에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고 교주 석존은 비로소 정각을 이루었다고 하였는데, 법화경 적문 · 본문의 두 문에 이르러 그 두 설을 깨뜨리셨으니, 한 부처의 두 말이 물과 불 같으니라. 누가 이것을 믿으리오. 이것이 교문의 난신난해이니라
「관심의 본존초」에서 이 대목은 비정(非情)에까지 십여시가 미치는가 하는 관문(觀門)의 문제로 넘어가기 위한 전제였다. 반면 개목초는 바로 이 교문의 난신난해 — 이승의 불성불과 시성정각을 깨뜨린 두 문 — 를 정면 주제로 삼는다. 두 어서는 같은 천태의 틀을 공유하면서, 관심의 본존초는 관문 쪽으로, 개목초는 교문 쪽으로 각각 깊이 들어간다.
중중의 난신난해
그렇다면 난신난해란 적문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본문을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 외도에 비하면 불교 전체가 난신난해 아닌가. 강의는 이 물음에 「중중(重重)의 난신난해가 있다」고 답하며 다섯 겹을 든다.
- 외도와 불교를 맞대면, 불교는 난신난해요 외도는 이신이해(易信易解)다.
- 소승과 대승을 맞대면, 대승은 난신난해요 소승은 이신이해다.
- 권교와 실교를 맞대면, 실교인 법화경은 난신난해요 권교는 이신이해다.
- 적문과 본문을 맞대면, 본문은 난신난해요 적문은 이신이해다.
- 문상(文上)과 문저(文底)를 맞대면, 문저 하종(下種)의 독일본문(獨一本門)이야말로 난신난해요 문상의 탈익(脫益) 본문은 이신이해다.
- 5문상 탈익의 본문 · 이신이해↔문저 하종의 독일본문 · 난신난해
- 4적문 · 이신이해↔본문 · 난신난해← 제3편
- 3권교(이전 제경) · 이신이해↔실교(법화경) · 난신난해← 제2편
- 2소승 · 이신이해↔대승 · 난신난해
- 1외도 · 이신이해↔불교 · 난신난해
이 다섯 겹은 그대로 오중상대(五重相對)의 구조다. 난신난해는 한 번의 비교로 결판나는 성질이 아니라, 더 깊은 가르침에 들어갈수록 새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성인 자신도 「제경과 법화경과 난이의 사」에서 홍법 · 자각 · 지증 계통의 이해를 비판하며 겹겹의 난이를 이렇게 정리하셨다.
日蓮読んで云く外道の経は易信易解小乗経は難信難解小乗経は易信易解大日経等は難信難解大日経等は易信易解般若経は難信難解なり般若と華厳と華厳と涅槃と涅槃と法華と迹門と本門と重重の難易あり
니치렌이 읽어 이르기를, 외도의 경은 이신이해요 소승경은 난신난해이며, 소승경은 이신이해요 대일경 등은 난신난해이며, 대일경 등은 이신이해요 반야경은 난신난해이니라. 반야와 화엄, 화엄과 열반, 열반과 법화, 적문과 본문에 겹겹의 난이가 있느니라
이 문장에는 진언종에 대한 비판이 함께 담겨 있다. 같은 어서는 그 바로 앞에서, 홍법대사와 동사(東寺)의 문인들은 법화경이 현교 안에서는 난신난해이지만 밀교에 견주면 이신이해라 하고, 자각 · 지증 계통은 법화경과 대일경이 함께 난신난해이되 대일경이 더욱 난신난해라고 한다고 소개한 뒤 이를 뒤집으셨다. 대일경은 반야경보다도 얕은 자리에 놓인다는 것이 대성인의 판정이다. 난신난해의 순서를 어떻게 놓느냐가 곧 교판(敎判)의 문제이며, 개목초 제2편의 논의가 뒤에서 화엄 · 진언 · 정토에 대한 비판(제15장 · 제16장)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의는 법화경이 「믿기 어려운」 까닭을 법화경의 결함이 아니라 법화경이 부처의 본의 그대로인 데서 찾는다. 난신난해는 외도→불교→대승→법화경→본문→문저로 갈수록 겹겹이 깊어지며, 제2편은 그 셋째 겹인 권교와 법화경 적문의 상대, 곧 이승작불의 난신을 다룬다.
본문
法華経の現文を拝見するに舎利弗は華光如来・迦葉は光明如来・須菩提は名相如来・迦旃延は閻浮那提金光如来・目連は多摩羅跋栴檀香仏・富楼那は法明如来・阿難は山海慧自在通王仏・羅睺羅は蹈七宝華如来・五百七百は普明如来・学無学二千人は宝相如来・摩訶波闍波提比丘尼・耶輸多羅比丘尼等は一切衆生喜見如来・具足千万光相如来等なり、 此等の人人は法華経を拝見したてまつるには尊きやうなれども爾前の経経を披見の時はけをさむる事どもをほし、 其の故は仏世尊は実語の人なり故に聖人・大人と号す、外典・外道の中の賢人・聖人・天仙なんど申すは実語につけたる名なるべし此等の人人に勝れて第一なる故に世尊をば大人とは・申すぞかし、 此の大人「唯以一大事因縁故・出現於世」となのらせ給いて「未だ真実を顕さず・世尊は法久しうして後・要ず当に真実を説くべし・正直に方便を捨て」等云云、 多宝仏・証明を加え分身・舌を出す等は舎利弗が未来の華光如来・迦葉が光明如来等の説をば誰の人か疑網をなすべき。 而れども爾前の諸経も又仏陀の実語なり・ 大方広仏華厳経に云く「如来の智慧・大薬王樹は唯二処に於て生長して利益を為作すこと能わず、所謂二乗の無為広大の深坑に堕つると及び善根を壊る非器の衆生は大邪見・貪愛の水に溺るるとなり」等云云、 此の経文の心は雪山に大樹あり無尽根となづく此を大薬王樹と号す、閻浮提の諸木の中の大王なり此の木の高さは十六万八千由旬なり、一閻浮提の一切の草木は此の木の根ざし枝葉・華菓の次第に随つて華菓なるなるべし、 此の木をば仏の仏性に譬へたり一切衆生をば一切の草木にたとう、但し此の大樹は火坑と水輪の中に生長せず、二乗の心中をば火坑にたとえ一闡提人の心中をば水輪にたとえたり、此の二類は永く仏になるべからずと申す経文なり、 大集経に云く「二種の人有り必ず死して活きず畢竟して恩を知り恩を報ずること能わず、一には声聞二には縁覚なり、譬えば人有りて深坑に堕墜し是の人自ら利し他を利すること能わざるが如く声聞・縁覚も亦復是くの如し、解脱の坑に堕して自ら利し及以び他を利すること能わず」等云云、 外典・三千余巻の所詮に二つあり所謂孝と忠となり忠も又孝の家よりいでたり、孝と申すは高なり天高けれども孝よりも高からず又孝とは厚なり地あつけれども孝よりは厚からず、聖賢の二類は孝の家よりいでたり何に況や仏法を学せん人・知恩報恩なかるべしや、 仏弟子は必ず四恩をしつて知恩報恩をいたすべし、 其の上舎利弗・迦葉等の二乗は二百五十戒三千の威儀・持整して味・浄・無漏の三静慮・阿含経をきわめ三界の見思を尽せり知恩報恩の人の手本なるべし、 然るを不知恩の人なりと世尊定め給ぬ、 其の故は父母の家を出て出家の身となるは必ず父母を・すくはんがためなり、二乗は自身は解脱と・をもえども利他の行かけぬ設い分分の利他ありといえども父母等を永不成仏の道に入るれば・かへりて不知恩の者となる。
법화경의 현문(現文)을 배견하건대, 사리불은 화광여래, 가섭은 광명여래, 수보리는 명상여래, 가전연은 염부나제금광여래, 목련은 다마라발전단향불, 부루나는 법명여래, 아난은 산해혜자재통왕불, 라후라는 도칠보화여래, 오백 · 칠백의 아라한은 보명여래, 학 · 무학의 이천 인은 보상여래, 마하파사파제 비구니와 야수다라 비구니 등은 일체중생희견여래 · 구족천만광상여래 등이니라. 이 사람들은 법화경을 배견할 때에는 존귀한 듯하나, 이전(爾前)의 경경을 펼쳐 볼 때에는 실망스러운 일이 많으니라. 그 까닭은, 부처 세존은 실어(實語)의 사람이니라. 그러므로 성인(聖人) · 대인(大人)이라 부르느니라. 외전 · 외도 가운데 현인 · 성인 · 천선(天仙)이라 하는 것도 실어에 붙인 이름일 것이로되, 이 사람들보다 뛰어나 제일이므로 세존을 대인이라 하는 것이니라. 이 대인이 「오직 일대사인연을 위한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이름을 대시고,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존은 법이 오래된 뒤에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등이라 하셨으며, 다보불이 증명을 더하고 분신의 부처들이 혀를 내미신 것 등을 보면, 사리불이 미래에 화광여래가 되고 가섭이 광명여래가 된다는 등의 설을 누가 의심하리오. 그러나 이전의 제경도 또한 부처의 실어이니라. 『대방광불화엄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지혜인 대약왕수(大藥王樹)는 오직 두 곳에서는 자라나 이익을 지을 수 없으니, 이른바 이승이 무위광대(無爲廣大)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 것과, 선근을 무너뜨린 그릇이 아닌 중생이 대사견(大邪見)과 탐애(貪愛)의 물에 빠진 것이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이 경문의 마음은, 설산에 큰 나무가 있어 무진근(無盡根)이라 이름하고 이를 대약왕수라 부르니, 염부제의 모든 나무 가운데 대왕이니라. 이 나무의 높이는 십육만 팔천 유순이니라. 일염부제의 일체 초목은 이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차례를 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느니라. 이 나무를 부처의 불성에 비유하고 일체중생을 일체 초목에 비유하였느니라. 다만 이 큰 나무는 불구덩이(火坑)와 물의 바퀴(水輪) 속에서는 자라지 않느니라. 이승의 마음속을 불구덩이에 비유하고 일천제인(一闡提人)의 마음속을 물의 바퀴에 비유하였으니, 이 두 부류는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경문이니라. 『대집경』에 이르기를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반드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고 끝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지 못하느니라. 하나는 성문이요 둘은 연각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이 사람이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도 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는 것과 같이, 성문 · 연각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해탈의 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도 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느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외전 삼천여 권이 귀결하는 바는 두 가지이니, 이른바 효(孝)와 충(忠)이니라. 충도 또한 효의 집에서 나왔느니라. 효라 함은 높음(高)이니, 하늘이 높다 해도 효보다 높지 않으며, 또 효란 두터움(厚)이니, 땅이 두텁다 해도 효보다 두텁지 않느니라. 성인과 현인 두 부류는 모두 효의 집에서 나왔느니라. 하물며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은혜를 알고 갚음이 없어서 되겠는가. 불제자는 반드시 사은(四恩)을 알아 지은보은(知恩報恩)을 다해야 하느니라. 더욱이 사리불 · 가섭 등의 이승은 이백오십계와 삼천의 위의를 지니고 갖추어, 미(味) · 정(淨) · 무루(無漏)의 세 정려(靜慮)와 아함경을 궁구하고 삼계의 견사혹(見思惑)을 다 끊었으니, 지은보은하는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니라. 그런데 세존은 이들을 불지은(不知恩)의 사람이라 정하셨느니라. 그 까닭은, 부모의 집을 나와 출가의 몸이 되는 것은 반드시 부모를 구하기 위함이니라. 이승은 자신은 해탈했다고 여기나 이타(利他)의 행이 빠졌느니라. 설령 얼마간의 이타가 있다 해도 부모 등을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길에 들게 한다면 도리어 불지은의 사람이 되느니라.
어구 풀이
- 舎利弗사리불
- 범어 샤리푸트라(Śāriputra)의 음사로 신자(身子) · 추로자(鶖鷺子) 등으로 번역한다. 석존 십대제자의 한 사람으로 지혜제일이라 불린다. 마가다국 왕사성 밖 바라문의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여덟 살 때 왕사성의 학자들과 논의해 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산자야에게 배웠으나 동문인 목련과 함께 석존에게 귀의했다. 법화경 비유품 제3 첫머리에서 방편품의 제법실상의 묘리를 깨닫고 뛸 듯이 기뻐하며, 미래에 화광여래(華光如來)가 되리라는 기별(記別)을 받았다.
- 迦葉가섭
- 범어 마하카샤파(Mahākāśyapa)의 음사인 마하가섭의 약칭으로, 대음광(大飮光)이라 번역한다. 왕사성 바라문 출신으로 석존의 제자가 된 지 여드레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의식주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엄격한 수행을 관철해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린다. 석존 멸후 부법장(付法藏)의 제1로서 왕사성 밖 필발라굴에서 제1회 불전 결집을 주재했고, 이후 이십 년 동안 소승교를 홍통하다 아난에게 법을 부촉한 뒤 계족산에서 입적했다고 전한다. 신해품 제4에서 수보리 · 가전연 · 목련과 함께 사대성문으로서 삼거화택의 비유를 통해 개삼현일의 불의를 깨닫고, 수기품 제6에서 광명여래(光明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須菩提수보리
- 범어 수부티(Subhūti)의 음사. 신해품에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라 나온다. 기원정사를 공양한 수닷타(須達多) 장자의 조카라 전한다. 사색에 뛰어나 제법의 진리를 잘 깨달았으므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린다. 수기품 제6에서 명상여래(名相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迦旃延가전연
- 범어 마하카티야야나(Mahākātyāyana)의 음사인 마하가전연의 약칭. 부처가 간략히 설한 가르침을 자세히 분석하고 해설해 홍교에 힘썼으므로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 불린다. 수기품 제6에서 염부나제금광여래(閻浮那提金光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目連목련
- 범어 마하마우드갈랴야나(Mahāmaudgalyāyana)의 음사인 마하목건련의 약칭. 왕사성 근처 바라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사리불과 함께 산자야에게 배웠으나, 석존의 가르침을 구해 이백오십 명의 제자와 함께 불제자가 되었다. 신통제일이라 불린다. 『우란분경』에 따르면 어머니가 아귀도에 떨어진 것을 신통력으로 알았으나 자기 힘으로는 구하지 못해 석존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공양의 공덕을 회향해 구했다고 한다. 수기품 제6에서 다마라발전단향여래(多摩羅跋栴檀香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本文은 「다마라발전단향불」이라 적는다.
- 富楼那부루나
- 범어 푸르나 마이트라야니푸트라(Pūrṇa Maitrāyaṇīputra)의 음사인 부루나미다라니자의 약칭. 석존의 부친 정반왕의 국사(國師)인 바라문의 아들로, 석존과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다고 전한다. 총명하고 변론에 뛰어나 설법제일이라 불리며, 뒷날 뛰어난 말솜씨를 「부루나의 변(辯)」이라 일컫게 되었다. 화성유품 제7의 화성보처의 비유를 통해 개삼현일의 불의를 깨닫고, 오백제자수기품 제8에서 법명여래(法明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阿難아난
- 범어 아난다(Ānanda)의 음사인 아난타의 약칭. 늘 석존을 곁에서 모시며 석존이 설한 여러 경에 통달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린다. 제바달다의 아우이며 석존의 사촌 동생이다. 불멸 후 마하가섭의 뒤를 이어 부법장의 제2로서 여러 나라를 다니며 중생을 이익했다. 수학무학인기품 제9에서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羅睺羅라후라
- 범어 라훌라(Rāhula)의 음사로, 나운(羅云)이라고도 쓴다. 석존이 출가하기 전 야수다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석존의 출가를 두려워한 마(魔)가 육 년 동안 태어나지 못하게 했다는 전승이 있다. 스무 살에 불제자가 되어 사리불을 따라 수행하며 계율을 어기지 않고 독송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불린다. 수학무학인기품 제9에서 도칠보화여래(蹈七寶華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五百七百・学無学二千人오백 · 칠백, 학 · 무학 이천 인
- 오백제자수기품 제8에서 부루나에 이어 천이백 아라한이 수기를 받는데, 먼저 교진여를 비롯한 오백 아라한이 보명여래(普明如來)라는 같은 이름의 기별을 받고, 나머지 칠백도 같은 이름을 받는다. 수학무학인기품 제9에서는 아직 배울 것이 남은 유학(有學)과 더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의 성문 이천 인이 보상여래(寶相如來)의 기별을 받는다.
- 摩訶波闍波提比丘尼마하파사파제 비구니
- 범어 마하프라자파티(Mahāprajāpatī)의 음사. 석가족 여성의 대표로서 고타미(교담미)라고도 불린다. 석존의 이모로, 생모 마야부인이 석존을 낳고 이레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정반왕의 비가 되어 석존을 길렀다. 정반왕이 죽은 뒤 출가를 지원해 세 번 청한 끝에 허락받아 석존 교단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권지품 제13에서 일체중생희견여래(一切衆生喜見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耶輸多羅比丘尼야수다라 비구니
- 범어 야쇼다라(Yaśodharā)의 음사. 출가 전 실달태자의 정비이자 라후라의 어머니다. 석존이 성도한 지 십이 년째에 가비라위국으로 돌아왔을 때 교화를 받아 비구니가 되었다고 전한다. 권지품 제13에서 구족천만광상여래(具足千萬光相如來)의 기별을 받았다.
- けをさむる흥이 깨지다
- 기대하던 마음이 식어 실망한다는 뜻의 옛말이다. 법화경에서 존귀한 미래불로 수기받는 성문들이 이전 경에서는 거듭 꾸지람만 듣는 모습을 보면 김이 샌다는 말이다. 제15장에도 「人天大会けをさめて」라는 같은 표현이 나온다.
- 大人대인
-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라는 뜻의 부처의 존칭. 외전의 현인 · 성인이나 외도의 천선도 그 말이 거짓이 아니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지만, 부처는 그들보다 뛰어나 제일이므로 「대인」이라 한다.
- 唯以一大事因縁故・出現於世유이일대사인연고 출현어세
- 방편품 제2의 경문. 「제불세존은 오직 일대사인연을 위한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신다」. 그 일대사인연이란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열고(開) 보이고(示) 깨닫게 하고(悟) 들게 하는(入) 것이라고 경은 이어서 밝힌다(개시오입의 사불지견).
- 未だ真実を顕さず・世尊は法久しうして後・要ず当に真実を説くべし・正直に方便を捨て미현진실 · 세존법구후 요당설진실 · 정직사방편
- 첫 구는 『무량의경』 설법품의 「사십여년미현진실(四十餘年未顯眞實)」, 둘째 구는 방편품의 「세존법구후 요당설진실(世尊法久後 要當說眞實)」, 셋째 구는 같은 방편품의 「정직사방편 단설무상도(正直捨方便 但說無上道)」다. 세 구절을 합쳐 사십여 년의 가르침은 방편이고 법화경이 진실이라는 부처 자신의 선언을 이룬다.
- 大薬王樹대약왕수
- 화엄경이 여래의 지혜를 비유한 큰 나무. 설산에 있어 무진근이라 하고, 높이가 십육만 팔천 유순이며, 염부제의 모든 초목이 이 나무를 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는다고 한다. 대성인은 이 나무를 부처의 불성에, 일체 초목을 일체중생에 비유한 것이라 풀이하셨다.
- 二乗の無為広大の深坑に堕つ이승이 무위광대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다
- 소승교에서 이승은 「삼계에 태어나는 것은 색심(色心)의 두 법이 있기 때문이니,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괴로움의 원인인 색심을 멸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겨 무루의 선정을 닦아 견사의 번뇌를 끊는다. 번뇌를 다 끊은 경지를 열반이라 하고, 아직 남아 있는 몸과 마음까지 재로 만들어 없애는 것을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한다. 이것은 번뇌와 함께 보리의 인(因)마저 멸해 버리므로,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비유한 것이다.
- 一闡提人일천제인
- 범어 잇찬티카(icchantika)의 음사로 일천저가(一闡底迦)라고도 쓴다. 본래 「욕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진리를 믿지 않는 쾌락주의자나 현세주의자를 가리켰다. 불법에서는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 성불의 기연(機緣)을 갖지 못한 중생, 곧 부처의 정법을 믿지 않고 도리어 반발 · 비방하며 그 중죄를 뉘우치지 않는 불신 · 방법(謗法)의 사람을 말하며,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 大集経대집경
- 『대방등대집경』의 약칭. 북량의 담무참 등이 번역한 육십 권의 경으로, 대승의 여러 경을 모아 한 부를 이룬 것이다. 국왕이 불법을 수호하지 않으면 삼재가 일어난다고 설하고, 석존 멸후 정법이 쇠퇴하는 모습을 오백 년씩 다섯으로 나눈 오오백세(五五百歲)를 설한다(T13 no.397).
- 孝と忠효와 충
- 외전 삼천여 권의 귀결을 효와 충의 두 가지로 보고, 충도 효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제2장의 유가의 삼덕 논의와 이어진다. 「효는 높음이요 두터움」이라는 풀이는 효를 하늘과 땅에 견주어 그보다 높고 두텁다고 한 것이다.
- 四恩사은
- 네 가지 은혜. 『심지관경』(대승본생심지관경)에서는 부모의 은혜 · 일체중생의 은혜 · 국왕의 은혜 · 삼보(불법승)의 은혜를 들며, 대성인은 이를 「사은초」 등에서 인용하셨다. 「보은초」에서는 일체중생의 은혜 대신 스승의 은혜를 든다.
- 二百五十戒이백오십계
- 남성 출가자인 비구가 지켜야 할 이백오십 조의 율. 『사분율행사초』 등에 설해진다. 사바라이(교단에서 추방되는 가장 무거운 죄로, 살생 · 투도 · 사음 · 망어) · 십삼승잔 · 이부정 · 삼십사타 · 구십단제 · 사제사니 · 백중학 · 칠멸쟁으로 이루어진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를 받아야 정식 승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예산대사전』 홍인 9년(818) 늦봄 조에는 전교대사가 「이백오십계는 곧바로 버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전교대사는 율은 소승의 것이라 비판하고 대승의 보살은 대승계(범망경의 계)로 출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흐름을 이어 대성인은 말법의 지계(持戒)는 일체의 공덕이 담긴 남묘호렌게쿄를 수지하는 데 다한다고 하셨다.
- 三千の威儀삼천의 위의
- 율에 정해진 세세한 작법. 「삼천」은 수가 많음을 나타내는 말로, 『예기』의 「예의 삼백, 위의 삼천」에 근거한 표현이다.
- 味・浄・無漏の三静慮미 · 정 · 무루의 세 정려
- 정려는 선정이다. 세속의 인연을 떠나 얽매임을 끊고, 생각을 고요히 하여 마음을 밝혀 참된 이치에 이른다는 뜻이다. 천태대사는 『법화현의』 권4상에서 선정을 세간선 · 출세간선 · 출세간상상선의 셋으로 나누었다. 세간선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세속의 지혜를 일으키는 선정으로 근본미선(味等至)과 근본정선(淨等至)으로 나뉘고, 출세간선(무루선)은 번뇌를 떠난 청정한 지혜를 일으키는 선정이며, 출세간상상선은 다시 보리를 얻기 위한 선정이다. 本文의 「미 · 정 · 무루」는 이 가운데 근본미선 · 근본정선 · 무루선을 가리킨다.
- 三界の見思삼계의 견사
- 견혹(見惑)과 사혹(思惑). 견혹은 이치에 어두워 일어나는 잘못된 견해이고, 사혹은 사물에 대한 탐욕 · 성냄 등의 습관적 번뇌다. 이 둘을 끊으면 삼계의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며, 이승의 깨달음은 이 견사혹을 다 끊는 데 있다.
삼주의 설법 — 성문들은 어떻게 수기를 받았는가
제12장 첫머리는 이전 제경을 펼치기 전에 먼저 법화경의 「현문」을 내놓는다. 열 명의 대성문과 오백 · 칠백의 아라한, 학무학 이천 인이 받은 여래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이다. 강의는 이 장의 목적을 「일대성교 가운데 법화경만이 일념삼천을 비장(秘藏)하고 있는 까닭을 밝히기 위해, 이승작불이 법화경에 한정됨을 보이신 것」이라 정리한다.
이전 제경은 성문 · 연각의 성불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그와 비슷한 말이 있더라도 겁(劫) · 국(國) · 명호(名號)가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법화경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승이 차례로 성불의 수기를 받는데, 그 과정은 듣는 이의 근기에 따라 세 단계로 나뉜다. 이를 삼주(三周)의 설법이라 한다.
- 법설주(法說周) — 상근(上根)의 사리불은 방편품의 개삼현일, 개시오입의 사불지견, 부처의 일대사인연을 법 그대로 듣고 곧바로 깨달아 비유품에서 수기를 받는다.
- 비설주(譬說周) — 중근의 가섭 · 수보리 · 가전연 · 목련은 그것만으로는 깨닫지 못하다가, 비유품의 삼거화택 비유를 듣고 신해품에서 장자궁자의 비유로 자신들의 이해를 아뢴 뒤 수기품에서 기별을 받는다.
- 인연주(因緣周) — 하근의 부루나 · 아난 · 라후라 등은 화성유품에서 「나와 그대들의 숙세의 인연을 내가 이제 설하리니 그대들은 잘 들으라」 하여 삼천진점겁 전 대통지승불 때의 결연을 듣고서야 깨닫는다. 부루나와 천이백 인은 오백제자수기품에서, 아난 · 라후라와 학무학 이천 인은 수학무학인기품에서 각각 수기를 받는다.
- ① 법설주 · 상근방편품의 개삼현일을 듣고 깨달음→ 비유품 · 사리불 · 화광여래
- ② 비설주 · 중근삼거화택 · 장자궁자의 비유→ 신해품 · 수기품 · 가섭 · 수보리 · 가전연 · 목련
- ③ 인연주 · 하근삼천진점겁의 결연→ 화성유품 · 오백제자수기품 · 수학무학인기품 · 부루나 · 천이백 아라한 · 아난 · 라후라 · 학무학 이천 인
이 구조에서 가장 아래 단계인 인연주는 개목초 뒤의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띤다. 하근의 성문을 깨닫게 한 것은 법리도 비유도 아닌 「과거의 인연」, 곧 대통지승불 때 이미 법화경을 듣고 결연했다는 사실이었다. 성불의 근거를 과거의 하종에서 찾는 이 사고방식은 본문에서 오백진점겁의 구원하종으로 한층 깊어지고, 개목초 하권의 종(種) · 숙(熟) · 탈(脫) 논의로 이어진다.
이들의 수기를 아래 도표로 정리해 둔다. 강의 어석이 전하는 그들의 출신과 「제일」의 칭호를 함께 보면, 이들이 교단의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혜제일 · 두타제일 · 해공제일 · 논의제일 · 신통제일 · 설법제일 · 다문제일 · 밀행제일 — 이들이 이전 제경에서는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는 자」로 불렸다는 사실이, 이어지는 대목의 놀라움을 만든다.
대성인은 「성우문답초」에서 이 수기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셨다.
敗種の二乗仏種を萠す四十二年の間は永不成仏と嫌はれて在在処処の集会にして罵詈誹謗の音をのみ聞き人天大会に思いうとまれて既に飢え死ぬべかりし人人も今の経に来つて舎利弗は華光如来目連は多摩羅跋旃檀香如来阿難は山海慧自在通王仏羅睺羅は蹋七宝華如来五百の羅漢は普明如来二千の声聞は宝相如来の記莂に予る
썩은 씨앗의 이승이 부처의 씨앗을 틔웠느니라. 사십이 년 동안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미움받아, 곳곳의 모임에서 꾸짖고 헐뜯는 소리만 듣고 인천의 대중에게도 멀리함을 받아 이미 굶어 죽을 뻔한 사람들도, 지금의 경에 와서 사리불은 화광여래, 목련은 다마라발전단향여래, 아난은 산해혜자재통왕불, 라후라는 도칠보화여래, 오백 나한은 보명여래, 이천 성문은 보상여래의 기별을 받았느니라
「굶어 죽을 뻔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제14장에서 보듯 이전 경에서는 이승을 공양하는 자가 삼악도에 떨어진다고 했으니, 걸식으로 살아가는 출가자에게 그것은 생계가 끊기는 선고였다.
이승작불 없이는 일념삼천도 없다
왜 이승작불이 그토록 중요한가. 강의는 이것을 일념삼천의 성립 조건으로 설명한다. 지옥에서 보살에 이르는 아홉 계 가운데 일곱 계(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 · 보살)에는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성문 · 연각 두 계에는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하면, 십계호구(十界互具)가 성립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이 일곱 계와 불계에 성문 · 연각의 계가 갖추어져 있는 이상, 이승이 성불하지 못한다면 그 이승계를 갖춘 다른 모든 계도 결국 성불할 수 없게 된다. 이승의 득도를 허락하지 않는 이전 제경에는 십계호구가 없고, 따라서 백계(百界) · 천여(千如) · 삼천세간으로 전개될 도리가 없다.
강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음세간 · 중생세간 · 국토세간의 삼세간은 법화경 본문에 들어가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으므로, 적문에서는 백계천여까지일 뿐 일념삼천이 되지 못한다. 적문에 대해서는 본문의 입장에서 되돌아보아 일념삼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理)의 일념삼천에 지나지 않는다. 제11장에서 이승작불과 구원실성을 짝지은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이승작불은 십계호구의 문을 열고, 구원실성은 삼세간을 드러내어 일념삼천을 완성한다.
대성인은 이승작불의 의의를 「지묘법화문답초」에서 천태대사의 판정을 빌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二乗の作仏は一切衆生の成仏を顕すと天台は判じ給へり
이승의 작불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드러낸다고 천태는 판정하셨느니라
이전 제경에서 가장 성불하기 어려운 자로 낙인찍힌 이승이 성불한다면, 성불하지 못할 중생은 하나도 없다. 이승작불은 이승이라는 한 부류의 문제가 아니라 일체중생 성불의 보증이다. 「현방법초」는 이 논리를 거꾸로 돌려, 이승의 불성을 감추는 가르침은 결국 모든 중생의 불성을 감추는 것이라고 하셨다.
二乗を永不成仏と説く仏は余の菩薩の成仏をゆるすも又妄語にあらずや 五乗は但一仏性なり二乗の仏性をかくし菩薩凡夫の仏性をあらはすは返つて菩薩凡夫の仏性をかくすなり
이승을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고 설한 부처가 다른 보살의 성불을 허락한 것도 또한 망어가 아니겠는가. 오승(五乘)은 다만 하나의 불성이니라. 이승의 불성을 감추고 보살 · 범부의 불성을 드러낸 것은 도리어 보살 · 범부의 불성을 감춘 것이니라
불성이 하나라면, 그 하나를 어느 한 부류에게서 부정하는 순간 모든 부류에게서 부정한 셈이 된다. 이전 제경이 보살과 범부의 성불을 아무리 찬탄해도 그것이 참된 성불의 보증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일념삼천의 법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불교 교학 五 일념삼천에 미룬다.
실어의 대인이 남긴 두 개의 실어
本文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대성인은 먼저 부처가 「실어의 사람」임을 확인하신다. 부처를 성인 · 대인이라 부르는 것은 그 말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외전의 현인 · 성인이나 외도의 천선도 그 말이 거짓이 아니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지만, 부처는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대인」이라 한다. 이 대인이 방편품에서 「오직 일대사인연을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자신의 출세 목적을 밝히고, 무량의경에서 「사십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방편품에서 「법이 오래된 뒤에 반드시 진실을 설하리라」 「정직하게 방편을 버린다」고 선언했다. 거기에 다보불이 증명하고 분신의 부처들이 혀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사리불이 화광여래가 된다는 법화경의 설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여기까지는 순탄하다. 그런데 대성인은 곧바로 「而れども(그러나)」라고 방향을 틀어 「이전의 제경도 또한 부처의 실어」라고 하신다. 이 한 마디가 제12장의 장 제목인 「일불이언」의 핵심이다. 부처가 실어의 사람이라는 바로 그 전제가, 이전 제경의 이승 불성불 판정도 부처의 진실한 말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법화경을 믿게 하는 근거가 동시에 이전 제경을 믿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대성인은 이 딜레마를 피하지 않고, 이전 제경의 경문을 하나하나 들어 그 판정이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보이신다.
이것이 개목초 특유의 논법이다. 법화경의 우위를 처음부터 전제하고 이전 제경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전 제경의 말씀을 부처의 실어로서 정면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것이 법화경과 얼마나 날카롭게 충돌하는지를 끝까지 보인다. 그래야만 제15장에서 다보 · 분신의 증명이 왜 필요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심이 깊을수록 그 의심을 걷어 낸 증명의 무게도 커진다.
화엄경의 대약왕수 — 불구덩이와 물의 바퀴
첫 번째로 드는 이전 경은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석존이 성도 직후 처음 설한 경으로 천태의 오시 교판에서 화엄시에 해당하며, 대성인도 제18장에서 「一部六十巻は一字一点もなく円満経なり(한 부 육십 권은 한 글자 한 점도 빠짐없는 원만경이니라)」(196쪽)라고 그 장엄함을 인정하신다. 그런 화엄경이 여래의 지혜를 대약왕수에 비유하면서, 이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두 곳을 명시한다. 하나는 이승이 떨어진 「무위광대의 깊은 구덩이」, 다른 하나는 선근을 무너뜨린 그릇 아닌 중생이 빠진 「대사견 · 탐애의 물」이다.

대성인은 이 경문의 마음을 풀어 주신다. 설산의 대약왕수는 무진근이라 불리며 높이가 십육만 팔천 유순으로 염부제의 모든 나무의 대왕이다. 세상의 모든 초목은 이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차례를 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는다. 이 나무는 부처의 불성이고, 초목은 일체중생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불구덩이와 물의 바퀴 속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이승의 마음은 불구덩이요, 일천제의 마음은 물의 바퀴다. 두 부류는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다.
불구덩이라는 비유는 어석이 설명하는 무여열반의 실상과 겹친다. 이승은 생사의 괴로움이 색심(色心)이 있기 때문이라 보고, 번뇌를 다 끊은 뒤 남은 몸과 마음까지 재로 만들어 없애는 회신멸지(灰身滅智)를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번뇌와 함께 보리의 인까지 태워 버리면, 불성의 나무가 뿌리내릴 땅이 남지 않는다. 일천제의 물의 바퀴는 정반대의 이유, 곧 대사견과 탐애에 빠져 정법을 믿지 않고 비방하는 데서 온다. 화엄경은 지나친 끊음(이승)과 지나친 빠짐(천제)을 나란히 성불의 불모지로 지목한 것이다. 이승과 천제를 한 쌍으로 묶는 이 짝은 「관심의 본존초」의 「爾前の諸経には二乗闡提未来に永く成仏せず」(239쪽)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집경의 「불지은」 — 효의 논리로 본 이승
두 번째는 대집경이다. 대집경은 성문 · 연각을 「반드시 죽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라 하며, 그들은 끝내 은혜를 알지도 갚지도 못한다고 한다.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 사람이 자기도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듯이, 이승은 「해탈의 구덩이」에 떨어져 자리(自利)도 이타(利他)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화엄경의 「무위광대의 깊은 구덩이」가 여기서는 「해탈의 구덩이」로 바뀌었다. 해탈 그 자체가 구덩이가 된다는 표현은 매우 날카롭다.
대성인은 이 「불지은」이라는 판정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이기 위해 제1편의 유가 논의로 되돌아가신다. 외전 삼천여 권이 귀결하는 바는 효와 충이며, 충도 효에서 나온다. 효는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두텁다. 성인과 현인은 모두 효의 집에서 나왔다. 하물며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은혜를 모를 수 있겠는가. 불제자는 반드시 사은을 알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
사은은 『심지관경』에서 부모 · 일체중생 · 국왕 · 삼보의 은혜를 드는데,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일체중생의 은혜 대신 스승의 은혜를 드셨다. 「보은초」가 스승 도젠보의 은혜를 갚기 위해 쓰인 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차이는 의미가 깊다. 개목초 제12장이 이승을 「불지은」으로 규정하는 논의는, 뒤에 「보은초」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되는 보은의 사상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더구나 사리불 · 가섭 등은 결코 게으른 수행자가 아니었다. 이백오십계와 삼천의 위의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켰고, 근본미선 · 근본정선 · 무루선의 세 정려와 아함경을 궁구하여 삼계의 견사혹을 다 끊었다. 계 · 정 · 혜의 삼학을 모두 갖춘 셈이니, 은혜를 알고 갚는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세존은 그들을 불지은의 사람이라 정했다.
그 이유를 대성인은 출가의 본래 뜻에서 찾으신다. 부모의 집을 나와 출가하는 것은 반드시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다. 이승은 자기는 해탈했다고 여기지만 이타의 행이 없다. 설령 조금의 이타가 있다 해도, 자기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길에 들어 버렸다면 부모 역시 그 길에 함께 들게 한 셈이 된다. 자기가 성불하지 못하는 자식은 부모를 성불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엄격한 수행자가 가장 큰 불효자, 가장 큰 불지은의 사람이 되는 역설이 생긴다.
여기서 출가의 목적이 「부모를 구하는 것」이라는 대성인의 말씀은, 출가를 가족과의 단절로 보는 일반적 이해와 다르다. 대성인에게 출가는 효의 완성이며, 그 효는 부모를 성불시키는 데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 사상은 개목초 하권 결론부에서 대성인이 자신을 일본국 사람들의 「주사친」이라 하시는 대목으로 이어지며, 「목련이 어머니를 구하려 했으나 자기 힘으로는 구하지 못했다」는 우란분경의 전승(어구 풀이 「목련」 참조)과도 맞닿는다. 소승의 신통제일조차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법화경 이전의 수행으로는 부모를 참으로 구할 수 없다는 개목초의 논지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이승의 모습을 오늘에 비추어
강의는 이 장의 이승을 오늘의 삶에 적용해 읽는다. 성문은 학문에 뜻을 두고 연구에 전념하는 학자층에, 연각은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이른바 진리에 접한 대학자나 대예술가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다는 것이다. 이전 제경이 이들을 그토록 철저히 꾸짖은 까닭이 여기서 드러난다.
대집경의 「해탈의 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도 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한다」는 경문을 강의는 이렇게 읽는다. 자기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착각하고 홀로 높은 체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다. 지식과 교양을 쌓은 사람이 그 성취에 안주해 남과 사회를 위한 실천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전 경이 말하는 이승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강의는 학자라 불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이 경문이 거울에 비춘 듯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강의의 결론은 비난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전 제경은 그런 이승을 엄하게 꾸짖고 성불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지만, 그 이승의 성불을 허락한 유일한 경이 바로 법화경이다. 이승적 경향을 가진 사람에게 법화경은 비판의 경이 아니라 구원의 경이며, 그 은혜를 모르고 법화경을 등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지은이라는 것이 강의의 요지다. 개목초 상권 끝의 제29장이 「이승의 법화 심은(深恩)」을 논하며, 사십여 년 동안 버림받았던 사리불 · 가섭이 법화경의 「불사의 양약」을 맛보고 「초종(燋種)이 싹트고 깨진 돌이 합쳐지고 마른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맺듯이」(204쪽) 성불을 허락받았으니 어찌 이 경의 중은을 갚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은, 바로 이 제12장의 「불지은」 판정을 뒤집는 대목이다.
강의는 이승작불을 십계호구 · 일념삼천의 성립 조건으로 본다. 이승이 성불하지 못하면 십계호구가 무너지고, 백계천여 · 삼천세간으로 전개될 수 없다. 이전 제경에서 「불지은」으로 단죄된 이승이 법화경에서 수기받는 것은 일체중생 성불의 보증이며, 그 은혜를 아는 것이 참된 지은보은이다.
본문
維摩経に云く「維摩詰又文殊師利に問う何等をか如来の種と為す、答えて曰く一切塵労の疇は如来の種と為る、五無間を以て具すと雖も猶能く此の大道意を発す」等云云 又云く「譬えば族姓の子・高原陸土には青蓮芙蓉衡華を生ぜず卑湿汚田乃ち此の華を生ずるが如し」等云云、 又云く「已に阿羅漢を得て応真と為る者は終に復道意を起して仏法を具すること能わざるなり、根敗の士・其の五楽に於て復利すること能わざるが如し」等云云、 文の心は貪・瞋・癡等の三毒は仏の種となるべし殺父等の五逆罪は仏種となるべし高原の陸土には青蓮華生ずべし、二乗は仏になるべからず、 いう心は二乗の諸善と凡夫の悪と相対するに凡夫の悪は仏になるとも二乗の善は仏にならじとなり、 諸の小乗経には悪をいましめ善をほむ、此の経には二乗の善をそしり凡夫の悪をほめたり、かへつて仏経とも・をぼへず外道の法門のやうなれども詮ずるところは二乗の永不成仏をつよく定めさせ給うにや、 方等陀羅尼経に云く「文殊・舎利弗に語らく猶枯樹の如く更に華を生ずるや不や亦山水の如く本処に還るや不や折石還つて合うや不や焦種芽を生ずるや不や、舎利弗の言く不なり、文殊の言く若し得べからずんば云何ぞ我に菩提の記を得るを問うて心に歓喜を生ずるや」等云云、 文の心は枯れたる木・華さかず山水・山にかへらず破れたる石あはず・いれる種をいず、二乗また・かくのごとし仏種をいれり等となん。
『유마경』에 이르기를 「유마힐이 또 문수사리에게 묻기를, 무엇을 여래의 종자로 삼는가. 답하여 이르기를, 일체 진로(塵勞)의 무리가 여래의 종자가 되느니라. 오무간(五無間)의 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능히 이 대도의 뜻을 일으키느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또 이르기를 「비유하면 족성(族姓)의 자여, 높은 언덕의 마른 땅에는 청련 · 부용 · 형화(衡華)가 나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 밭에서 비로소 이 꽃이 나는 것과 같으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또 이르기를 「이미 아라한을 얻어 응진(應眞)이 된 자는 끝내 다시 도의 뜻을 일으켜 불법을 갖출 수 없느니라. 근(根)이 무너진 사람이 그 오락(五樂)에 다시 이로움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경문의 마음은, 탐 · 진 · 치 등의 삼독은 부처의 종자가 되고, 아버지를 죽이는 등의 오역죄도 불종이 되며, 높은 언덕의 마른 땅에 청련화가 날지언정, 이승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니라. 그 이르는 마음은, 이승의 모든 선과 범부의 악을 견주건대 범부의 악은 부처가 되어도 이승의 선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니라. 모든 소승경에서는 악을 경계하고 선을 칭찬하였는데, 이 경에서는 이승의 선을 헐뜯고 범부의 악을 칭찬하였으니, 도리어 불경(佛經)으로도 여겨지지 않고 외도의 법문 같으나, 귀결하는 바는 이승의 영불성불(永不成佛)을 강하게 정하신 것이리라. 『방등다라니경』에 이르기를 「문수가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마른 나무가 다시 꽃을 피우겠는가, 아니겠는가. 또 산의 물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겠는가, 아니겠는가. 꺾인 돌이 다시 합쳐지겠는가, 아니겠는가. 볶은 씨앗이 싹을 틔우겠는가, 아니겠는가. 사리불이 말하기를, 아니니라. 문수가 말하기를,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어찌하여 나에게 보리의 기별을 얻는 일을 묻고 마음에 환희를 일으키는가」 등이라 하였느니라. 경문의 마음은, 마른 나무는 꽃이 피지 않고, 산의 물은 산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깨진 돌은 합쳐지지 않고, 볶은 씨앗은 싹트지 않으니, 이승도 또한 이와 같아 불종을 볶아 버렸다는 것이니라.
어구 풀이
- 維摩経유마경
- 석존 방등시의 경. 재가의 큰 신자인 유마힐이 편협한 이승의 제자들을 일깨우며 반야의 공리에 의해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지를 보이고, 일체 만법이 거기에 돌아감을 설한다. 후한의 엄불조 이래 일곱 번 한역되었다고 전하나 현존하는 것은 오 지겸 역 『유마힐경』 2권, 요진 구마라집 역 『유마힐소설경』 3권(T14 no.475), 당 현장 역 『설무구칭경』 6권의 셋이다. 예로부터 많은 주석서가 지어졌으며,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법화경 · 승만경과 함께 유마경의 의소를 지었다고 전한다(『삼경의소』). 本文과 제14장의 「정명경(淨名經)」도 같은 경이다.
- 維摩詰유마힐
- 범어 비말라키르티(Vimalakīrti)의 음사로 정명(淨名) · 무구칭(無垢稱) 등으로 번역한다. 중인도 비사리성의 큰 부호로, 재가의 몸이면서 법문에 깊이 통달해 사리불 등도 당하지 못했다고 한다.
- 文殊師利문수사리
- 범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직역하면 「아름다운 빛을 지닌 이」.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불상에서는 사자를 탄 모습으로 석존의 왼쪽(마주 보아)에 놓인다. 법화경에서는 미륵보살 · 약왕보살과 함께 보살의 대표로 등장한다.
- 一切塵労の疇일체 진로의 무리
- 진로(塵勞)란 탐 · 진 · 치의 삼독을 말한다. 진(塵)은 육진, 곧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여섯 대상이 심성을 더럽히는 것이고, 노(勞)는 지치고 고단함이다. 진에 의해 노가 생기므로 진로라 한다. 주(疇)는 무리 · 부류를 뜻한다.
- 五無間오무간
-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죄, 곧 오역죄(아버지를 죽임 · 어머니를 죽임 · 아라한을 죽임 · 부처의 몸에서 피를 냄 · 화합승을 깨뜨림)를 말한다. 本文의 「殺父等の五逆罪」가 이것이다.
- 族姓の子족성의 자
- 부르는 말로, 「선남자」와 같다.
- 青蓮芙蓉衡華・卑湿汚田청련 · 부용 · 형화 · 낮고 습한 진흙 밭
- 연꽃 종류는 높은 언덕의 마른 땅이 아니라 낮고 축축한 진흙에서 핀다는 비유다. 진흙은 번뇌, 꽃은 깨달음에 해당하며, 번뇌를 떠난 이승의 마른 땅에는 깨달음의 꽃이 피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 応真응진
- 「아라한」과 같은 뜻. 견사혹을 다 끊어 소승의 깨달음을 다한 자리로, 인천의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 根敗の士근이 무너진 사람
- 근(根)은 눈 · 귀 · 코 · 혀 · 몸의 오근이다. 이 다섯 감관의 작용이 무너진 사람은 오욕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그와 같이 이승은 견사의 번뇌를 끊어 버렸기 때문에 성불을 구하는 도심을 일으켜 불법을 갖출 수 없다는 비유다.
- 方等陀羅尼経방등다라니경
- 『대방등다라니경』. 북량의 법중(法衆)이 번역했다고 전하는 방등부의 경이다. 本文에 인용된 문수와 사리불의 문답에서 마른 나무 · 산의 물 · 꺾인 돌 · 볶은 씨앗의 네 비유로 이승의 불성불을 말한다.
- 焦種초종 · 볶은 씨앗
- 볶거나 불에 그을린 씨앗은 땅에 심어도 싹이 나지 않는다. 이승이 회신멸지로 불종을 태워 버린 것에 비유한다. 本文 끝의 「いれる種をいず」는 「볶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성인은 이승의 성불을 말할 때 「초종(燋種)이 싹튼다」는 말을 자주 쓰신다.
- 三毒삼독
- 탐(貪) · 진(瞋) · 치(癡)의 세 번뇌. 모든 번뇌의 근본으로서 중생의 선근을 해치므로 독이라 한다.
유마경의 역설 — 「일체 진로의 무리가 여래의 종자」
제12장이 화엄경과 대집경을 들었다면, 제13장은 방등부의 유마경과 방등다라니경을 든다. 천태의 오시 교판에서 방등시는 소승에 집착하는 이승을 대승의 입장에서 꾸짖는 시기, 곧 탄가(彈呵)의 시기로 규정된다. 유마경은 그 대표다. 재가의 유마힐이 병을 칭하고 누워 있을 때 석존이 제자들에게 문병을 가라고 하자, 사리불을 비롯한 성문들이 하나같이 「예전에 유마힐에게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어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는 장면은 유마경의 유명한 대목이다. 성문들이 재가 신자에게조차 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경은 이승의 깨달음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드러낸다.
本文에 인용된 첫 구절에서 유마힐은 문수에게 「무엇을 여래의 종자로 삼는가」 묻고, 문수는 「일체 진로의 무리가 여래의 종자」라 답한다. 탐 · 진 · 치의 번뇌에 휩싸인 중생이야말로 부처의 씨앗이며, 오역죄를 지은 자조차 대도의 뜻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높은 언덕의 마른 땅에는 연꽃이 피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에서 핀다는 비유가 이어진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미 아라한이 되어 응진이 된 자는 끝내 다시 도심을 일으켜 불법을 갖출 수 없다고 한다. 근이 무너진 사람이 오욕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듯이.
대성인은 이 세 구절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신다. 삼독도 불종이 되고 오역죄도 불종이 되며, 높은 언덕의 마른 땅에 청련화가 날지언정 이승은 부처가 될 수 없다. 경문은 「높은 언덕에는 연꽃이 피지 않는다」고 했는데, 대성인은 이를 뒤집어 「높은 언덕에 청련화가 날지언정」이라 하신 것으로 읽힌다. 불가능한 일의 대명사인 「마른 땅의 연꽃」조차 피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이승의 성불은 그보다도 더 불가능하다는 강조다.
「범부의 악은 부처가 되어도 이승의 선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
이어지는 대성인의 해석은 이 장의 핵심이다. 이승의 모든 선과 범부의 악을 견주면, 범부의 악은 부처가 되어도 이승의 선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 소승경은 악을 경계하고 선을 칭찬했는데, 이 경은 이승의 선을 헐뜯고 범부의 악을 칭찬했다. 그래서 오히려 불경 같지 않고 외도의 법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귀결은 이승의 영불성불을 강하게 정하신 데 있다.
강의는 이 판정을 정확히 위치 짓는다.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의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는 부처가 되어도, 성문 · 연각의 이승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권대승교의 가르침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방편교이며, 최후의 법화경에서 이승도 성불을 허락받는다. 그러나 강의는 여기에 불법의 깊이와 위대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대승교가 일부러 이승을 이토록 깎아내린 것은, 번뇌를 끊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소승적 이해를 깨뜨리고, 번뇌 속에서야말로 깨달음의 꽃이 핀다는 대승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강의는 이승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이승이란 자기 몸을 닦고 군자연하며 홀로 높은 체하는 이기주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말법에서 이런 중생은, 강의가 천태대사의 말로 인용하는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겉으로만 훌륭해 보이는 위선자가 되기 쉽다. 말법의 중생은 탐 · 진 · 치의 삼독이 강하며 고뇌 많은 인생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오탁이 가득한 말법에 고뇌 없는 훌륭한 인격자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 번뇌를 누르고 선행을 쌓아 인격을 완성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길은, 이전 경이 꾸짖은 이승의 길과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법화경과 대성인의 불법이 가르치는 것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다. 강의는 고뇌를 안고 현세의 행복을 바라며 어본존을 배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최고의 행복 경애를 확립할 수 있다고 하며, 「번뇌의 장작이 많을수록 보리의 불은 크게 타오른다」는 가르침을 든다. 유마경의 「진흙 속의 연꽃」과 「진로의 무리가 여래의 종자」는 권교의 단계에서 이미 이 원리를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권교는 그 원리를 이승을 꾸짖는 데에만 쓰고 이승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았으며, 법화경에 이르러서야 범부의 번뇌와 이승의 선이 함께 불종으로 열린다.
강의는 이 원리를 사회의 차원으로 넓힌다. 만일 욕망이 없고 고뇌를 억누른 사람들만으로 사회가 가득 찬다면, 그 사회는 무기력해지고 향상도 발전도 없는 정체된 사회가 되어 버릴 것이다. 고뇌가 있는 곳에 향상이 있고, 욕망이 있는 곳에 발전과 전진이 있다. 요점은 그 욕망을 바르고 유익하게 살려 내는 올바른 이념과 철학을 구하는 데 있으며, 강의는 그것이 대성인의 생명철학이라고 주장한다.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살려 보리로 바꾸는 것 — 제13장이 이전 경의 이승 탄가를 통해 거꾸로 비추어 내는 것은 바로 이 대승의 인간관이다.
방등다라니경의 네 비유 — 마른 나무 · 산의 물 · 깨진 돌 · 볶은 씨앗
방등다라니경의 인용은 이승 불성불을 네 가지 이미지로 각인한다. 문수가 사리불에게 묻는다. 마른 나무가 다시 꽃을 피우겠는가.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겠는가. 꺾인 돌이 다시 합쳐지겠는가. 볶은 씨앗이 싹을 틔우겠는가. 사리불은 모두 「아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문수는 되묻는다. 그럴 수 없다면 어찌하여 나에게 보리의 기별을 얻는 일을 묻고 기뻐하는가. 이승인 사리불이 보살의 수기에 관해 묻고 기뻐하는 것 자체가 헛되다는 것이다.
네 비유는 모두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말한다. 시든 생명, 흘러가 버린 물, 깨진 형체, 생명력을 잃은 씨앗. 이승이 번뇌를 다 끊고 회신멸지에 들어간 것은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므로, 그들에게는 다시 보리심이 싹틀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성인이 이 네 비유를 자세히 소개하신 데에는 뒤를 위한 복선이 있다. 개목초 상권 끝의 제29장에서 대성인은 사리불 · 가섭 등이 「法華経の不死の良薬をなめて燋種の生い破石の合い・枯木の華菓なんどならんとせるがごとく仏になるべしと許されて(법화경의 불사의 양약을 맛보고, 볶은 씨앗이 싹트고 깨진 돌이 합쳐지고 마른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맺으려 하는 것처럼 부처가 되리라고 허락받아)」(204쪽)라고 하신다. 제13장에서 「불가능」의 상징으로 쓰인 비유들이 제29장에서는 그대로 법화경의 위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반전된다. 제13장을 읽는 독자는 이 반전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전의 약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
대성인은 「지묘법화문답초」에서 이 네 비유와 같은 계열의 이전 경문들을 묶어, 이승작불이 왜 법화경의 「규모(規模)」, 곧 법화경만의 자랑거리인지를 설명하셨다. 화엄경은 지옥의 중생은 부처가 되어도 이승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했고, 방등부는 높은 봉우리에 연꽃이 나지 않듯 이승은 부처의 종자를 볶아 버렸다고 했으며, 반야부는 오역죄를 지은 자는 부처가 될 수 있어도 이승은 될 수 없다고 버렸다. 그러고 나서 대성인은 천태대사의 말을 인용하신다.
華厳大品も之を治すること能わず唯法華のみ有りて能く無学をして還つて善根を生じ仏道を成ずることを得せしむ所以に妙と称す 又闡提は心有り猶作仏す可し二乗は智を滅す心生ず可からず法華能く治す復称して妙と為す
화엄과 대품도 이것을 고칠 수 없고, 오직 법화만이 무학(無學)으로 하여금 도리어 선근을 내어 불도를 이루게 하니, 그러므로 묘(妙)라 하느니라. 또 천제는 마음이 있으므로 오히려 작불할 수 있으나 이승은 지혜를 멸하여 마음이 날 수 없으니, 법화가 능히 고치므로 다시 묘라 하느니라
천태대사의 이 말은 제12장의 화엄경 경문, 곧 이승과 천제를 나란히 불모지로 지목한 경문과 대조할 때 더욱 날카롭다. 천제는 비록 정법을 비방하지만 「마음」이 있으므로 언젠가 돌이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승은 「지혜를 멸해」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승이 천제보다 더 고치기 어려운 중병이다. 그 중병을 고친 것이 법화경이며, 그래서 법화경을 「묘」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어서는 이어서 묘락대사의 말도 인용한다.
余趣を実に会すること諸経に或は有れども二乗は全く無し故に菩薩に合して二乗に対し難きに従つて説く
다른 갈래를 진실에 모으는 일은 제경에도 간혹 있으나 이승은 전혀 없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에 합하여 이승에 대하고, 어려운 쪽을 따라 설하는 것이니라
이전 제경도 지옥 · 아귀 · 축생 · 인 · 천 등의 다른 갈래가 진실에 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이승에 대해서만은 전혀 그런 말이 없다. 법화경이 굳이 이승작불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가장 어려운 쪽」을 해결함으로써 나머지 모두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대성인은 결론으로 「仏性の種あるものは仏になるべしと爾前にも説けども未だ焦種の者作仏すべしとは説かず(불성의 종자가 있는 자는 부처가 되리라고 이전에도 설했으나, 아직 볶은 씨앗의 자가 작불하리라고는 설하지 않았느니라)」(463쪽)라고 하셨다. 방등다라니경의 「초종」 비유가 여기서 이전과 법화경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강의는 「범부의 악은 부처가 되어도 이승의 선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권대승의 판정을 방편으로 보면서도, 그 안에 번뇌즉보리의 원리가 예고되어 있다고 읽는다. 번뇌를 끊어 없애는 이승의 길이 아니라, 번뇌를 살려 보리로 바꾸는 길이 법화경과 대성인의 불법의 인간관이다.
본문
大品般若経に云く「諸の天子今未だ三菩提心を発さずんば応に発すべし、若し声聞の正位に入れば是の人能く三菩提心を発さざるなり、何を以ての故に生死の為に障隔を作す故」等云云、 文の心は二乗は菩提心を・をこさざれば我随喜せじ諸天は菩提心を・をこせば我随喜せん、 首楞厳経に云く「五逆罪の人・是の首楞厳三昧を聞いて阿耨菩提心を発せば還つて仏と作るを得、世尊・漏尽の阿羅漢は猶破器の如く永く是の三昧を受くるに堪忍せず」等云云、 浄名経に云く「其れ汝に施す者は福田と名けず、汝を供養する者は三悪道に堕す」等云云、 文の心は迦葉・舎利弗等の聖僧を供養せん人天等は必ず三悪道に堕つべしとなり、 此等の聖僧は仏陀を除きたてまつりては人天の眼目・一切衆生の導師とこそ・をもひしに幾許の人天大会の中にして・かう度度・仰せられしは本意なかりし事なり只詮ずるところは我が御弟子を責めころさんとにや、 此の外牛驢の二乳・瓦器・金器・螢火・日光等の無量の譬をとつて二乗を呵嘖せさせ給き、 一言二言ならず一日二日ならず一月二月ならず一年二年ならず一経二経ならず、四十余年が間・無量・無辺の経経に無量の大会の諸人に対して一言もゆるし給う事もなく・そしり給いしかば世尊の不妄語なりと我もしる人もしる天もしる地もしる、 一人二人ならず百千万人・三界の諸天・竜神・阿修羅・五天・四洲・六欲・色・無色・十方世界より雲集せる人天・二乗・大菩薩等皆これをしる又皆これをきく、 各各国国へ還りて娑婆世界の釈尊の説法を彼れ彼れの国国にして一一にかたるに十方無辺の世界の一切衆生・一人もなく迦葉・舎利弗等は永不成仏の者・供養しては・あしかりぬべしと・しりぬ。
『대품반야경』에 이르기를 「모든 천자여, 지금 아직 삼보리심(三菩提心)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마땅히 일으키라. 만일 성문의 정위(正位)에 들면 이 사람은 삼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생사에 대하여 장애와 간격을 짓기 때문이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경문의 마음은, 이승은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나는 수희하지 않으리라, 제천은 보리심을 일으키므로 나는 수희하리라는 것이니라. 『수릉엄경』에 이르기를 「오역죄의 사람이 이 수릉엄삼매를 듣고 아뇩보리심을 일으키면 도리어 부처가 될 수 있느니라. 세존이시여, 누진(漏盡)의 아라한은 깨진 그릇과 같아서 영원히 이 삼매를 받기에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정명경』에 이르기를 「그대에게 보시하는 자는 복전(福田)이라 이름하지 못하고, 그대를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지느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경문의 마음은, 가섭 · 사리불 등의 성승(聖僧)을 공양하는 인천 등은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것이니라. 이 성승들은 부처를 제외하고는 인천의 안목이요 일체중생의 도사라고 여겼는데, 그 많은 인천의 대중 가운데서 이처럼 거듭거듭 말씀하신 것은 뜻밖의 일이었느니라. 결국은 자신의 제자를 꾸짖어 죽이려 하신 것인가. 이 밖에도 소의 젖과 나귀의 젖, 질그릇과 금그릇, 반딧불과 햇빛 등 무량한 비유를 들어 이승을 꾸짖으셨느니라. 한두 마디가 아니요, 하루 이틀이 아니요, 한두 달이 아니요, 한두 해가 아니요, 한두 경이 아니니라. 사십여 년 동안 무량무변의 경경에서 무량한 대중의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마디도 허락하심이 없이 헐뜯으셨으니, 세존은 망어하지 않으신다고 나도 알고 남도 알며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느니라. 한두 사람이 아니요, 백천만 인과 삼계의 제천 · 용신 · 아수라, 오천축 · 사주 · 육욕천 · 색계 · 무색계, 시방세계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인천 · 이승 · 대보살 등이 모두 이것을 알고 또 모두 이것을 들었느니라. 저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 사바세계 석존의 설법을 그 나라들에서 하나하나 이야기하였으므로, 시방 무변 세계의 일체중생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섭 · 사리불 등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자이며 공양해서는 안 될 자라고 알게 되었느니라.
어구 풀이
- 大品般若経대품반야경
- 반야경 한역의 하나로 후진 구마라집이 번역한 27권의 경(『마하반야바라밀경』, T8 no.223). 천태 교학의 오시 가운데 반야시를 대표하는 경전이다. 용수가 짓고 구마라집이 번역한 『대지도론』은 이 경의 주석서다.
- 三菩提心삼보리심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약칭에 「심」을 붙인 것.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각을 뜻하며, 부처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말한다. 本文의 「阿耨菩提心」도 같은 뜻으로, 아뇩다라는 「무상(無上)」, 삼보리는 「참된 도」를 뜻한다.
- 声聞の正位성문의 정위
- 성문이 견혹을 끊어 성자의 지위에 들어간 것. 소승의 깨달음이 확정된 자리를 말한다.
- 生死の為に障隔を作す생사에 대하여 장애와 간격을 짓는다
- 정위에 든 삼장교의 이승은 견사의 번뇌를 끊으므로 다시 삼계 안에 태어날 수 없게 된다. 장격(障隔)이란 가로막아 떼어 놓는 것이다. 보살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생사의 세계에 거듭 태어나야 하는데, 이승은 그 길이 막혀 버리므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삼보리심)도 일으킬 수 없다는 뜻이다.
- 首楞厳経수릉엄경
-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릉엄삼매경』의 약칭으로 후진 구마라집이 번역한 2권의 경이다. 오로지 수릉엄삼매의 힘과 작용을 설하고, 이 삼매로 얻는 신력과 공덕을 밝힌다(T15 no.642). 다른 하나는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의 약칭으로 『대불정경』이라고도 한다. 당의 반랄밀제가 번역했다고 하는 10권의 경으로, 마등가녀의 주력에 해를 입은 아난을 부처가 신통력으로 구하는 데서 시작해 선정의 힘과 백산개다라니의 공덕을 설하며, 이승성불의 뜻도 보인다. 선종에서 중시되었다.
- 漏尽の阿羅漢・破器누진의 아라한 · 깨진 그릇
- 누(漏)는 번뇌이며, 누진은 번뇌를 다 끊었다는 뜻이다. 깨진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듯이, 번뇌를 다 끊은 아라한은 더 이상 대승의 삼매를 받아 담을 수 없다는 비유다.
- 浄名経정명경
- 유마경의 다른 이름. 유마힐을 한역하면 정명(淨名)이므로 이렇게 부른다. 인용된 구절은 제자품에서 유마힐이 수보리를 꾸짖는 대목으로 알려져 있다.
- 福田복전
- 복덕을 낳는 밭. 밭이 작물을 맺게 하듯, 부처나 승려를 공경하고 보시하면 복덕이 생기므로 이르는 말이다. 이승에게 보시해도 복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승이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극단적인 선언이다.
- 牛驢の二乳소와 나귀의 두 젖
- 소젖과 나귀젖은 빛깔은 같지만 소젖은 정제하면 생소(生酥)가 되고 마침내 제호미가 되는 데 비해, 나귀젖은 맛이 없어 마시기 어렵다. 내도와 외도, 대승과 소승을 비유한 말이다. 『대지도론』 권18에 「비유하면 소젖과 나귀젖 같으니, 그 빛깔은 같으나 소젖을 휘저으면 소(酥)가 되고 나귀젖을 휘저으면 오줌이 된다」고 하며, 전교대사의 『현계론』 권중에도 「소와 나귀의 젖은 그 빛깔을 가리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 瓦器・金器・螢火・日光질그릇 · 금그릇 · 반딧불 · 햇빛
- 소승과 대승, 이승과 보살 · 부처의 차이를 비유한 말들이다. 겉모양이 비슷한 그릇이라도 질그릇과 금그릇은 값이 다르고, 반딧불과 햇빛은 같은 빛이라도 밝기가 비교되지 않는다.
- 五天・四洲・六欲・色・無色오천 · 사주 · 육욕 · 색 · 무색
- 오천은 동 · 서 · 남 · 북 · 중의 다섯 천축, 곧 인도 전체다. 사주는 수미산 둘레의 네 대륙(남섬부주 · 동승신주 · 서우화주 · 북구로주)이다. 육욕은 욕계의 여섯 하늘이다. 색은 색계로, 욕계보다 높은 곳에 있는 청정한 세계이며 욕망은 없고 물질만 남은 천상계로서 욕계 육욕천 위에 색계 십팔천이 있고 그 맨 위를 색구경천이라 한다. 무색은 무색계로, 욕망도 물질도 넘어선 정신의 세계이며 오온 가운데 색이 없는 수 · 상 · 행 · 식의 사온으로 이루어진다. 색계 십팔천 위에 무색계의 사처가 있고 그 맨 위를 유정천(有頂天)이라 한다.
대품반야와 수릉엄 —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는 자
제14장은 반야시의 대품반야경으로 시작한다. 대품반야경은 제천의 천자들에게 「아직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일으키라」고 권하면서, 성문의 정위에 든 자는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생사에 대하여 장애와 간격을 짓기 때문」이다. 어석의 설명대로, 정위에 든 이승은 견사의 번뇌를 끊었으므로 다시 삼계에 태어날 수 없다. 그런데 대승의 보살도는 생사의 세계에 거듭 태어나 중생과 함께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생사를 떠나 버린 이승에게는 보살도의 무대가 사라진 것이다. 대성인은 경문의 마음을 「이승은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나는 수희하지 않고, 제천은 보리심을 일으키므로 나는 수희한다」라고 풀이하신다. 하늘의 신들조차 수희의 대상이 되는데 이승은 그 밖으로 밀려난다.
반야경이 이승작불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은 대성인이 「수호국가론」에서 용수의 『대지도론』을 근거로 따로 논하신 바 있다. 『대지도론』은 반야경의 주석서이지만, 그 안에서 법화경의 이승작불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般若経に依る時は二乗作仏を許さず法華経に依れば二乗作仏を許す
반야경에 의할 때는 이승작불을 허락하지 않고, 법화경에 의하면 이승작불을 허락하느니라
法華等の諸経は阿羅漢の受決作仏を説く所以に大菩薩能く受けて持用す譬えば大薬師の能く毒を以て薬と為すが如し
법화 등의 제경은 아라한이 수기를 받아 작불함을 설하니, 그러므로 대보살이 능히 받아 지니고 쓰느니라. 비유하면 큰 의사가 능히 독으로써 약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라
반야경 자신의 주석서가 「아라한의 성불은 반야경이 아니라 법화경이 설하는 것」이라고 인정한 셈이다. 『대지도론』은 같은 맥락에서 「阿羅漢の成仏は論義者の知る所に非ず唯仏のみ能く了し給う(아라한의 성불은 논의하는 자가 알 바가 아니요 오직 부처만이 능히 아시느니라)」(57–58쪽, 『대지도론』 권93을 인용)라고도 했다. 「독으로써 약을 만든다」는 비유는 천태 교학에서 법화경의 「묘」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비유가 되었으며, 대성인도 여러 어서에서 이 비유를 쓰신다. 이승이라는 「독」이 법화경에서 「약」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어 인용되는 수릉엄경은 대비를 더욱 극명하게 한다. 오역죄를 지은 사람도 수릉엄삼매를 듣고 보리심을 일으키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번뇌를 다 끊은 아라한은 깨진 그릇과 같아 이 삼매를 영원히 받을 수 없다. 제13장의 유마경이 「범부의 악은 부처가 되어도 이승의 선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은 구도다. 극악의 오역죄인이 가능성을 얻고, 계율을 완벽하게 지킨 성자가 가능성을 잃는다.
「이승을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
가장 충격적인 판정은 정명경(유마경)의 경문이다. 「그대에게 보시하는 자는 복전이라 이름하지 못하고, 그대를 공양하는 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 대성인은 이를 「가섭 · 사리불 등의 성승을 공양하는 인천은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풀이하셨다.
강의는 이 판정의 현실적 무게를 짚는다. 당시 이 성승들은 발우를 들고 마을을 돌며 음식 공양을 받아 목숨을 이어 갔다. 그러니 그들을 공양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석존의 한마디는, 대성인의 말씀 그대로 「자신의 제자를 꾸짖어 죽이려 하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성우문답초」의 「既に飢え死ぬべかりし人人(이미 굶어 죽을 뻔한 사람들)」(490쪽)이라는 표현도 이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강의는 이것을 단순한 가혹함으로 보지 않는다. 소승의 작은 법에 집착하는 제자들의 미혹을 뿌리째 끊기 위한 엄한 자비, 곧 엄애(嚴愛)로 배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먹을 길이 끊기고 집착의 뿌리가 잘리고 나서야 비로소 성문 제자들의 미망이 깨었고, 그리하여 법화경의 설법과 깨달음이 있게 되었다. 사십여 년의 혹독한 탄가는 법화경에서의 수기를 위한 준비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12장 첫머리의 수기와 제14장의 「공양하면 삼악도」는 같은 자비의 두 얼굴이 된다.
대성인은 성승들이 본래 「부처를 제외하고는 인천의 안목이요 일체중생의 도사」라고 여겨졌다고 하신다. 인천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이들이 수많은 대중 앞에서 거듭 이런 말을 들었으니 「本意なかりし事(뜻밖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였다. 대성인은 성문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는 필치로 이 장면을 그리신다. 그것은 단지 경문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문을 직접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헤아리는 서술이다.
사십여 년, 시방의 모든 이가 들었다
대성인은 이 밖에도 소와 나귀의 젖, 질그릇과 금그릇, 반딧불과 햇빛 등 무량한 비유로 이승을 꾸짖었다고 하신 뒤, 이 탄가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리듬 있는 반복으로 강조하신다. 한두 마디가 아니고, 하루 이틀이 아니며, 한두 달이 아니고, 한두 해가 아니며, 한두 경이 아니다. 사십여 년 동안 무량무변의 경에서 무량한 대중을 향해 한 마디의 허락도 없이 헐뜯었다.
「世尊の不妄語なりと我もしる人もしる天もしる地もしる(세존은 망어하지 않으신다고 나도 알고 남도 알며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라는 표현은 숨길 수 없을 만큼 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이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백천만의 사람, 삼계의 제천과 용신과 아수라, 인도 전역과 사대주, 욕계 · 색계 · 무색계, 시방세계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인천 · 이승 · 대보살이 모두 들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 석존의 설법을 전했으므로, 시방 무변 세계의 일체중생이 「가섭 · 사리불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자, 공양해서는 안 될 자」라고 알게 되었다.
이 서술의 논리적 기능은 분명하다. 이전 제경의 이승 불성불은 한 경, 한 자리의 우연한 발언이 아니라 사십여 년 동안 시방세계 전체에 공표된 「공적인 사실」이 되었다. 그렇기에 법화경에서 이를 뒤집는 것은 그만큼 큰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확고하게 공표된 판정일수록 그것을 뒤집는 새 판정은 의심을 산다. 대성인은 제15장에서 이 의심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것을 걷어 내기 위해 어떤 증명이 필요했는지로 나아가신다. 제14장 끝의 「一人もなく…しりぬ(한 사람도 빠짐없이 알게 되었다)」는 제15장 첫머리의 「而るを(그런데)」로 곧바로 이어진다.
방법(謗法)에의 공양을 경계하다
강의는 제14장의 「공양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판정에서 공양의 원리를 끌어낸다. 부처의 제자인 소승의 성승에게조차 이러하다면, 하물며 부처의 적, 곧 정법을 비방하는 자를 공양하는 이는 더 무거운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공양하느냐가 그 사람의 선악을 결정한다는 이 원리를 강의는 대성인의 두 어서로 뒷받침한다.
먼저 「소야전답서」다.
法華経の敵を見ながら置いてせめずんば師檀ともに無間地獄は疑いなかるべし、南岳大師の云く『諸の悪人と倶に地獄に堕ちん』云云、謗法を責めずして成仏を願はば火の中に水を求め水の中に火を尋ぬるが如くなるべし
법화경의 적을 보면서도 내버려 두고 꾸짖지 않는다면 스승과 단나가 함께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은 의심할 바 없느니라. 남악대사는 「모든 악인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리라」라고 하였느니라. 방법을 꾸짖지 않고 성불을 바란다면 불 속에서 물을 구하고 물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으니라
이어서 「입정안국론」이다.
夫れ釈迦の以前仏教は其の罪を斬ると雖も能忍の以後経説は則ち其の施を止む、然れば則ち四海万邦一切の四衆其の悪に施さず皆此の善に帰せば何なる難か並び起り何なる災か競い来らん
무릇 석가 이전의 불교에서는 그 죄를 베었으나, 능인(能忍) 이후의 경설에서는 곧 그 보시를 멈추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사해 만방의 일체 사중이 그 악에 보시하지 않고 모두 이 선에 귀의한다면 어떤 난이 함께 일어나고 어떤 재앙이 다투어 오겠는가
「입정안국론」의 이 문장 바로 앞에서 대성인은 「全く仏子を禁むるには非ず唯偏に謗法を悪むなり(결코 불자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방법을 미워할 따름이니라)」(30쪽)라고 하셨다. 석가 이전에는 방법의 죄를 「베었다」고 하지만, 석가 이후의 불교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보시를 멈추는」 방법으로 방법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공양을 거둔다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법이 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을 막는 일이다.
강의는 여기서 민중이 무엇이 정법이고 무엇이 방법인지를 알지 못한 채 방법에 공양하며 악업의 인을 쌓는 현실을 개탄한다. 방법에 공양하는 개인과 단체는 현실에서 불행에 시달리고 사회와 국가의 혼란을 부르며, 내세에는 악도에 떨어진다고 강의는 경고한다. 그 경고의 근거는 제14장이 보여 준 「공양의 대상이 공양하는 자의 과보를 정한다」는 경문의 원리에 있다.
강의는 이승을 공양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이전 경의 판정을, 소승에 집착하는 제자들의 미혹을 끊기 위한 엄한 자비로 읽는다. 동시에 그 판정에서 「무엇을 공양하느냐가 과보를 정한다」는 원리를 끌어내어, 방법에의 공양을 멈추고 정법에 귀의하라는 「입정안국론」의 가르침으로 잇는다.
본문
而るを後八年の法華経に忽に悔還して二乗作仏すべしと仏陀とかせ給はんに人天大会・信仰をなすべしや、用ゆべからざる上・先後の経経に疑網をなし五十余年の説教・皆虚妄の説となりなん、 されば四十余年・未顕真実等の経文はあらませしか天魔の仏陀と現じて後八年の経をばとかせ給うかと疑網するところに・げにげにしげに劫・国・名号と申して二乗成仏の国をさだめ劫をしるし所化の弟子なんどを定めさせ給へば教主釈尊の御語すでに二言になりぬ自語相違と申すはこれなり、外道が仏陀を大妄語の者と咲いしこと・これなり、 人天大会けをさめて・ありし程に爾の時に東方・宝浄世界の多宝如来・高さ五百由旬・広さ二百五十由旬の大七宝塔に乗じて教主釈尊の人天大会に自語相違をせめられて・とのべ・かうのべさまざまに宣べさせ給いしかども不審猶をはるべしとも・みへず・もてあつかいて・をはせし時・仏前に大地より涌現して虚空にのぼり給う、 例せば暗夜に満月の東山より出づるがごとし七宝の塔・大虚にかからせ給いて大地にも・つかず大虚にも付かせ給はず・天中に懸りて宝塔の中より梵音声を出して証明して云く 「爾の時に宝塔の中より大音声を出して歎めて云く、善哉善哉・釈迦牟尼世尊・能く平等大慧・教菩薩法・仏所護念の妙法華経を以て大衆の為に説きたもう、是くの如し是くの如し、釈迦牟尼世尊の所説の如きは皆是れ真実なり」等云云、 又云く「爾の時に世尊・文殊師利等の無量百千万億・旧住娑婆世界の菩薩・乃至人非人等一切の衆の前に於て大神力を現じたもう、広長舌を出して上み梵世に至らしめ一切の毛孔より乃至十方世界・衆の宝樹の下の師子の座の上の諸仏も亦復是くの如く広長舌を出し無量の光を放ちたもう」等云云、 又云く「十方より来りたまえる諸の分身の仏をして各本土に還らしめ乃至多宝仏の塔も還つて故の如くし給うべし」等云云、 大覚世尊・初成道の時・諸仏十方に現じて釈尊を慰諭し給う上・諸の大菩薩を遣しき、 般若経の御時は釈尊・長舌を三千にをほひ千仏・十方に現じ給い・金光明経には四方の四仏現ぜり、阿弥陀経には六方の諸仏・舌を三千にををう、大集経には十方の諸仏菩薩・大宝坊にあつまれり、 此等を法華経に引き合せて・かんがうるに黄石と黄金と白雲と白山と白冰と銀鏡と黒色と青色とをば翳眼の者・眇目の者・一眼の者・邪眼の者は・みたがへつべし、 華厳経には先後の経なければ仏語相違なしなにに・つけてか大疑いで来べき、 大集経・大品経・金光明経・阿弥陀経等は諸小乗経の二乗を弾呵せんがために十方に浄土をとき凡夫・菩薩を欣慕せしめ二乗を・わずらはす、 小乗経と諸大乗経と一分の相違あるゆへに或は十方に仏現じ給ひ或は十方より大菩薩をつかはし或は十方世界にも此の経をとくよしをしめし或は十方より諸仏あつまり給う或は釈尊・舌を三千に・をほひ或は諸仏の舌をいだす・よしをとかせ給う、 此ひとえに諸小乗経の十方世界・唯有一仏と・とかせ給いしをもひを・やぶるなるべし、 法華経のごとくに先後の諸大乗経と相違・出来して舎利弗等の諸の声聞・大菩薩・人天等に将非魔作仏と・をもはれさせ給う大事にはあらず、 而るを華厳・法相・三論・真言・念仏等の翳眼の輩・彼彼の経経と法華経とは同じと・うちをもへるは・つたなき眼なるべし。
그런데 뒤의 팔 년 법화경에서 갑자기 말씀을 뒤집어 이승이 작불하리라고 부처가 설하신다면 인천의 대중이 믿고 우러를 수 있겠는가.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앞뒤의 경경에 의심을 품어 오십여 년의 설교가 모두 허망한 설이 되어 버리리라. 그러므로 「사십여 년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등의 경문은 있었다 하더라도, 천마가 부처로 나타나 뒤의 팔 년의 경을 설하시는 것인가 하고 의심하고 있는 터에, 참으로 그럴듯하게 겁 · 국 · 명호라 하여 이승이 성불할 나라를 정하고 겁을 기록하며 교화할 제자까지 정하시니, 교주 석존의 말씀은 이미 두 말이 되었느니라. 자어상위(自語相違)라 함은 이것이니라. 외도가 부처를 큰 망어의 사람이라고 비웃은 것이 이것이니라. 인천의 대중이 흥이 깨져 있을 때, 그때에 동방 보정세계(寶淨世界)의 다보여래가 높이 오백 유순, 너비 이백오십 유순의 대칠보탑을 타고서, 교주 석존이 인천의 대중에게 자어상위를 추궁당하여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으나 의심이 여전히 풀릴 것 같지 않아 난처해하고 계실 때, 부처 앞에 대지로부터 솟아올라 허공에 오르셨느니라. 비유하면 어두운 밤에 보름달이 동쪽 산에서 떠오르는 것과 같으니라. 칠보의 탑이 큰 허공에 걸리시어 대지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도 붙지 않으시고 하늘 한가운데 걸려, 보탑 속에서 범음성을 내어 증명하여 이르시기를, 「그때에 보탑 속에서 큰 음성을 내어 찬탄하여 이르기를,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석가모니세존이시여. 능히 평등대혜(平等大慧) · 교보살법(敎菩薩法) · 불소호념(佛所護念)의 묘법화경으로써 대중을 위하여 설하시는도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석가모니세존께서 설하신 바는 모두 진실이니라」 등이라 하셨느니라. 또 이르기를 「그때에 세존께서 문수사리 등 무량 백천만억의 예부터 사바세계에 머물던 보살 내지 사람과 사람 아닌 이 등 일체 대중 앞에서 큰 신력을 나타내셨으니, 넓고 긴 혀를 내어 위로 범천에 이르게 하시고 일체의 털구멍에서 내지 시방세계의 뭇 보배 나무 아래 사자좌 위의 제불도 또한 이와 같이 넓고 긴 혀를 내고 무량한 빛을 놓으셨느니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또 이르기를 「시방에서 오신 모든 분신의 부처들로 하여금 각각 본토로 돌아가게 하고, 내지 다보불의 탑도 돌아가 본래와 같이 하시리라」 등이라 하였느니라. 대각세존께서 처음 성도하셨을 때 제불이 시방에 나타나 석존을 위로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대보살을 보내셨느니라. 반야경 때에는 석존께서 긴 혀로 삼천대천세계를 덮으시고 천불이 시방에 나타나셨으며, 금광명경에서는 사방의 네 부처가 나타나셨고, 아미타경에서는 육방의 제불이 혀로 삼천세계를 덮으셨으며, 대집경에서는 시방의 제불 · 보살이 대보방(大寶坊)에 모이셨느니라. 이것들을 법화경에 견주어 생각하건대, 누런 돌과 황금, 흰 구름과 흰 산, 흰 얼음과 은거울, 검은빛과 푸른빛을, 흐린 눈의 자 · 사팔눈의 자 · 외눈의 자 · 삿된 눈의 자는 잘못 볼 것이니라. 화엄경에는 앞뒤의 경이 없으므로 부처의 말씀에 상위가 없느니라. 무엇에 의하여 큰 의심이 생겨나겠는가. 대집경 · 대품경 · 금광명경 · 아미타경 등은 모든 소승경의 이승을 탄가하기 위하여 시방에 정토를 설하여 범부와 보살로 하여금 기뻐 사모하게 하고 이승을 괴롭혔느니라. 소승경과 제대승경 사이에 일부의 상위가 있으므로, 혹은 시방에 부처가 나타나시고, 혹은 시방에서 대보살을 보내시고, 혹은 시방세계에서도 이 경을 설한다는 것을 보이시고, 혹은 시방에서 제불이 모이시고, 혹은 석존이 혀로 삼천세계를 덮으시고, 혹은 제불이 혀를 내미신다는 것을 설하셨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모든 소승경에서 「시방세계에 오직 한 부처만 계신다(十方世界唯有一佛)」고 설하신 생각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니라. 법화경처럼 앞뒤의 제대승경과 상위가 생겨나 사리불 등의 모든 성문 · 대보살 · 인천 등에게 「장차 마가 부처가 된 것이 아닌가(將非魔作佛)」라고 여겨지실 만한 대사는 아니니라. 그런데 화엄 · 법상 · 삼론 · 진언 · 염불 등의 흐린 눈의 무리가 그 경경과 법화경이 같다고 여기는 것은 졸렬한 눈이니라.
어구 풀이
- 悔還して말씀을 뒤집어
- 앞서 한 말을 후회하고 되돌린다는 뜻. 사십여 년 동안 이승불성불을 설하다가 법화경에서 갑자기 이승작불을 설한 것을, 듣는 이의 입장에서 「말을 뒤집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 天魔の仏陀と現じて천마가 부처로 나타나
- 욕계 제6천의 마왕인 천마가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 本文 뒤의 「将非魔作仏」과 같은 뜻이다.
- げにげに・しげに참으로 그럴듯하게
- 정말인 것처럼, 그야말로 그런 듯이. 「げにげに」는 「참으로」, 「しげに」는 「~인 듯이 · ~다운 듯이」의 뜻이다.
- 劫・国・名号겁 · 국 · 명호
- 수기의 세 요소. 언제(겁) 어느 나라(국토)에서 어떤 이름(여래의 명호)으로 성불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예컨대 사리불은 미래에 「대보장엄(大寶莊嚴)」이라는 겁에 「이구(離垢)」라는 나라에서 화광여래가 되리라고 수기받는다. 이전 제경에 이승 성불을 시사하는 듯한 말이 있어도 겁 · 국 · 명호가 없으면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의가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自語相違자어상위
- 자기의 말이 앞뒤로 서로 어긋나는 것. 인명(因明, 불교 논리학)에서 주장 자체가 자기의 앞선 말과 모순되는 과실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 多宝如来・宝浄世界다보여래 · 보정세계
- 동방 보정세계의 부처. 견보탑품 제11에 따르면, 다보여래는 보살이었을 때 자신이 성불하여 멸도한 뒤 시방 국토 어디서든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자신의 탑묘가 그 앞에 솟아나 증명하고 찬탄하리라는 큰 서원을 세웠다. 석존이 법화경을 설하자 그 서원대로 보탑이 땅에서 솟아났다.
- 五百由旬・二百五十由旬오백 유순 · 이백오십 유순
- 유순(由旬)은 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 제왕이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라고 한다. 보탑은 높이 오백 유순, 너비 이백오십 유순으로 설해진다.
- 梵音声범음성
- 부처의 맑고 깨끗한 음성. 부처의 삼십이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平等大慧・教菩薩法・仏所護念평등대혜 · 교보살법 · 불소호념
- 다보여래가 법화경을 찬탄한 말.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성불시키는 큰 지혜이며,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제불이 지키고 생각하는 경이라는 뜻이다. 「교보살법 · 불소호념」은 서품 등에서도 법화경을 수식하는 말로 쓰인다.
- 皆是真実개시진실
- 「모두 이것이 진실이니라」. 다보여래가 석존의 설법 전체를 증명한 말로, 니치렌 대성인은 이를 법화경 진실의 결정적 증거로 거듭 인용하신다.
- 旧住娑婆世界の菩薩예부터 사바세계에 머물던 보살
- 여래신력품에서 신력을 나타내는 장면에 모인 대중 가운데, 타방에서 온 보살이 아니라 본래 사바세계에 머물던 문수 등의 보살을 가리킨다.
- 広長舌광장설
- 넓고 긴 혀. 부처의 삼십이상의 하나로, 말에 거짓이 없음을 나타낸다. 여래신력품에서 석존과 시방 분신 제불이 혀를 범천에까지 내민 것은 열 가지 신력의 첫째로서, 법화경이 진실임을 온몸으로 증명한 것이다.
- 師子の座사자좌
- 부처를 사자왕에 비유하여 그 자리를 사자좌라 한다. 금강보좌라고도 하며, 부처가 앉는 곳은 어떤 악마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자리라는 뜻이다.
- 分身の仏분신의 부처
- 석존이 시방세계에 몸을 나누어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들.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의 문을 열기 위해 석존이 시방의 분신불을 모두 불러 모은다(삼변토전). 촉루품 제22에서 석존은 그들을 각각 본토로 돌려보낸다.
- 初成道の時처음 성도하셨을 때
-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직후. 대성인은 이때 제불이 시방에 나타나 석존을 위로하고 대보살을 보냈다고 하신다. 화엄경 설법의 장면과 관련된다.
- 般若経반야경
- 천태 교학의 오시 가운데 반야시 경전의 총칭. 범본 이만오천송 반야는 구마라집 역 『대품반야경』 27권, 팔천송 반야는 같은 역자의 『소품반야경』 10권, 삼백송 반야는 같은 역자의 『금강반야경』 1권 등으로 번역되었다(구역). 이것들을 집대성한 것이 당 현장 역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이다(신역). 『인왕반야바라밀경』(인왕경)은 대반야경에 포함되지 않으며 중국 찬술의 의혹이 지적되고 있다.
- 金光明経금광명경
- 이 경이 유포되는 곳에서는 사천왕을 비롯한 제천선신이 그 나라를 지키고 이익되게 하여 재액이 없고 사람들이 행복해진다고 설한다. 한역은 다섯 종 가운데 세 종이 현존하며, 북량 담무참 역 『금광명경』 4권(T16 no.663), 당 의정 역 『금광명최승왕경』 10권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담무참 역이 널리 쓰였고 길장의 소가 있으며 천태대사도 이 경을 주석했다. 일본에서는 법화경 · 인왕경과 함께 호국삼부경의 하나로 꼽혔으며, 쇼무 천황은 의정 역 최승왕경을 사경해 전국에 배포하고 전국에 국분사를 세워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라 일컬었다.
- 阿弥陀経아미타경
- 정토삼부경의 하나로 구마라집이 번역한 1권의 경(T12 no.366). 극락정토의 장엄과 아미타불의 명호를 지니는 공덕을 설하며, 동 · 남 · 서 · 북 · 하 · 상 육방의 제불이 각각 광장설상을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덮고 이 경을 믿으라고 권한다고 설한다.
- 大集経・大宝坊대집경 · 대보방
- 대보방은 대집부의 경교가 설해진 곳으로, 욕계와 색계의 중간에 있는 큰 뜰이라 한다. 대집경은 시방의 제불 · 보살이 이곳에 모였다고 설한다.
- 大品経대품경
- 대품반야경. 정식 이름은 『마하반야바라밀경』이다(제14장 어구 풀이 참조).
- 翳眼・眇目흐린 눈 · 사팔눈
- 예안(翳眼)은 흐릿하게 가려진 눈이다. 묘목(眇目)은 한쪽 눈이 가늘거나 먼 것, 또는 사팔눈을 말한다. 本文은 여기에 외눈(一眼) · 삿된 눈(邪眼)을 더해 바르게 보지 못하는 네 가지 눈을 든다.
- 十方世界・唯有一仏시방세계 유유일불
- 「시방세계에 오직 한 부처만 계신다」. 소승경의 세계관으로, 이 세계에는 석존 한 부처만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다. 제7장에서도 대성인은 구사 · 성실 · 율종이 「十方唯有一仏と云つて一方有仏だにもあかさず(시방에 오직 한 부처만 있다고 하여 다른 한 방향에 부처가 있음조차 밝히지 않는다)」(189쪽)고 하셨다.
- 将非魔作仏장비마작불
- 「장차 마가 부처가 된 것이 아닌가」.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처음 부처의 설하신 바를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놀라고 의심하여, 마가 부처가 되어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고 고백하는 게송의 구절이다.
「천마가 부처로 나타난 것인가」 — 자어상위의 의심
제12장부터 제14장까지 대성인은 이전 제경의 이승 불성불 판정이 얼마나 단호하고 철저했는지를 보이셨다. 제15장은 그 위에서 「그런데(而るを)」라고 시작한다. 사십여 년 동안 그토록 거듭 공표된 판정을, 뒤의 팔 년의 법화경에서 갑자기 뒤집어 「이승이 작불한다」고 설한다면, 인천의 대중이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믿지 못할 뿐 아니라, 앞뒤 경이 어긋나니 오십여 년의 모든 설교가 의심스러워져 「모두 허망한 설」이 되어 버린다.
대성인은 이 의심의 심리를 생생하게 그리신다. 무량의경에서 「사십여 년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미리 말해 두었다 해도, 듣는 이들은 「천마가 부처로 나타나 이 팔 년의 경을 설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그런데 하필 그때 법화경은 「참으로 그럴듯하게」 겁 · 국 · 명호까지 갖추어 이승이 성불할 나라와 시기와 교화할 제자까지 정해 버린다.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기이기에, 이전 경과의 모순은 피할 수 없이 선명해진다. 석존의 말씀은 이제 분명히 「두 말」이 되었다. 이것이 자어상위이며, 외도가 부처를 「큰 망어의 사람」이라고 비웃은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장비마작불」의 의심은 경 안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다. 비유품에서 사리불 자신이 「처음 부처의 설법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놀라고 의심하여, 마가 부처가 되어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고 고백한다. 수기를 받는 당사자인 사리불조차 처음에는 이렇게 의심했던 것이다. 대성인이 本文 끝에서 「장비마작불이라고 여겨지실 만한 대사」라고 하신 것은 이 경문을 염두에 둔 말이다.
강의는 이 상황을 논리적으로 정리한다. 대성인은 먼저 법화경에서 이승이 작불한다고 설한 경문을 들고(제12장 첫머리), 이어 이전 경에서 이승은 작불하지 않는다고 한 수많은 경문을 들어(제12~14장) 둘의 상위를 논하셨다. 그러면 법화경을 진실로 삼을 것인가, 이전 경을 진실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전이 진실이라 주장하든 법화경이 진실이라 주장하든, 그것만으로는 서로 물 끼얹기 같은 논쟁에 그칠 것이다. 양쪽 모두 「부처의 실어」라는 같은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착을 깨뜨리는 제3의 근거로서 대성인은 다보의 증명과 제불의 설상 · 방광을 내세우신다.
대지에서 솟은 보탑 — 다보여래의 증명
인천의 대중이 흥이 깨져 있고, 석존이 이렇게 저렇게 말씀해도 의심이 풀리지 않아 난처해하던 바로 그때, 동방 보정세계의 다보여래가 높이 오백 유순, 너비 이백오십 유순의 대칠보탑을 타고 부처 앞의 대지에서 솟아올라 허공에 오른다. 대성인은 이 장면을 「어두운 밤에 보름달이 동쪽 산에서 떠오르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신다. 의심의 어둠 속에 진실의 빛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칠보탑은 대지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도 붙지 않은 채 하늘 한가운데 걸리고, 그 안에서 범음성이 울린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석가모니세존이시여 … 석가모니세존께서 설하신 바는 모두 진실이니라.」
- ① 견보탑품 제11다보여래의 보탑이 대지에서 솟아 허공에 걸림釈迦牟尼世尊の所説の如きは皆是れ真実なり석가모니세존께서 설하신 바는 모두 진실이니라
- ② 여래신력품 제21석존과 시방 분신 제불이 광장설을 범천에 이르게 함広長舌を出して上み梵世に至らしめ넓고 긴 혀를 내어 위로 범천에 이르게 하시고
- ③ 촉루품 제22분신불은 본토로, 다보탑은 본래대로各本土に還らしめ각각 본토로 돌아가게 하고
다보여래의 증명이 왜 결정적인가. 다보여래는 석존과 별개의 부처이며, 보살 시절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면 어디든 내 탑이 솟아 증명하리라」고 서원한 부처다. 석존이 자기 말이 진실이라고 아무리 거듭 말해도 자어상위의 의심은 풀리지 않는다. 의심받는 당사자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다른 부처가 자신의 서원에 따라 스스로 나타나 「모두 진실」이라고 증언한다면, 그것은 제3자의 증언이 된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이 증명의 의도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我が滅後はいかんかと疑いおぼして東方宝浄世界の多宝仏を証人に立て給いしかば多宝仏大地よりをどり出でて妙法華経皆是真実と証し十方分身の諸仏重ねてあつまらせ給い広長舌を大梵天に付け又教主釈尊も付け給う
내가 멸도한 뒤에는 어떠할까 하고 의심하시어 동방 보정세계의 다보불을 증인으로 세우셨으니, 다보불이 대지에서 뛰어나와 「묘법화경은 모두 진실」이라 증명하고, 시방 분신의 제불이 거듭 모이시어 넓고 긴 혀를 대범천에 대시고 또 교주 석존도 대셨느니라
「증인으로 세운다」는 표현에서 보듯, 대성인은 다보여래를 법정의 증인처럼 보신다. 「선시초」에서는 같은 장면을 「多宝仏は真実なりと御判をそへ(다보불은 진실이라고 도장을 찍어 주시고)」(265쪽)라고 표현하셨다. 문서에 날인하여 그 진정성을 보증하듯이, 다보여래가 석존의 설법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개목초 제6장에서도 대성인은 이 증명을 이렇게 찬탄하셨다.
多宝仏大地より出現して皆是真実と証明す分身の諸仏来集して長舌を梵天に付く 此の言赫赫たり明明たり晴天の日よりもあきらかに夜中の満月のごとし仰いで信ぜよ伏して懐うべし
다보불이 대지에서 출현하여 「모두 진실」이라 증명하고, 분신의 제불이 모여 와 긴 혀를 범천에 대었느니라. 이 말씀은 혁혁하고 명명하여 맑은 하늘의 해보다도 밝고 한밤의 보름달과 같으니, 우러러 믿고 엎드려 생각할지어다
제6장의 「한밤의 보름달」과 제15장의 「어두운 밤에 동쪽 산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은 같은 이미지다. 제6장에서 권실상대의 결론으로 짧게 제시된 것이, 제15장에서 의심이 일어나는 과정과 함께 극적으로 다시 그려진다.
신력품의 광장설과 촉루품의 환귀 — 증명의 완결
대성인은 보탑품의 증명에 이어 여래신력품과 촉루품의 경문을 인용하신다. 신력품에서 석존은 문수 등 예부터 사바세계에 머물던 무량한 보살과 일체 대중 앞에서 큰 신력을 나타내는데, 그 첫째가 넓고 긴 혀를 범천에까지 내미는 것이다. 그리고 시방세계 보배 나무 아래 사자좌 위의 제불도 똑같이 광장설을 내고 무량한 빛을 놓는다. 이어 촉루품에서 석존은 시방에서 온 분신의 부처들을 각각 본토로 돌려보내고 다보탑도 본래대로 돌아가게 한다.
현대어역은 이를 「보탑품에서 촉루품에 이르는 동안 이처럼 법화경은 진실이라고 증명되는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보탑품에서 시작된 허공회(虛空會)의 의식은 신력품의 광장설로 정점에 이르고, 촉루품에서 증인들이 돌아감으로써 완결된다. 다보여래 한 부처의 증명이 시방 분신 제불 전체의 증명으로 확대되고, 그것이 다시 석존 자신의 광장설과 합쳐진다. 석가 · 다보 · 시방 분신의 이른바 삼불(三佛)이 법화경의 진실을 함께 증명한 것이다.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신력품의 이 경문을 인용하신 뒤, 이전 제경의 설상과 법화경의 설상을 이렇게 가르셨다.
夫れ顕密二道一切の大小乗経の中に釈迦諸仏並び坐し舌相梵天に至る文之無し 阿弥陀経の広長舌相三千を覆うは有名無実なり 般若経の舌相三千光を放つて般若を説きしも全く証明に非ず 此は皆兼帯の故に久遠を覆相する故なり
무릇 현밀 이도와 일체의 대소승경 가운데 석가와 제불이 나란히 앉아 설상이 범천에 이른다는 글은 없느니라. 아미타경의 광장설상이 삼천세계를 덮었다는 것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으며, 반야경에서 설상이 삼천세계에 빛을 놓아 반야를 설한 것도 전혀 증명이 아니니라. 이것은 모두 방편을 겸하여 띠었기 때문이요 구원을 덮어 감추었기 때문이니라
제15장에서 대성인이 열거하신 반야경 · 아미타경의 설상이 여기서는 「유명무실」 「전혀 증명이 아니다」라고 더 단호하게 판정된다. 그 이유로 「겸대(兼帶)」, 곧 방편을 섞어 설했다는 것과 「구원을 덮어 감추었다」는 것이 들려 있다. 이전 제경의 증명은 이승작불도 구원실성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루어진 증명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개목초 제15장에서 신력품의 광장설은 이승작불의 증명으로 인용되지만, 신력품은 본래 본문의 유통분으로서 지용보살에게 법을 부촉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다보 · 분신의 증명은 적문의 이승작불뿐 아니라 본문의 구원실성, 나아가 멸후의 홍통까지 꿰뚫는 증명이다. 제3편과 제7편(보탑품 삼개의 칙선)에서 이 증명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전 제경에도 증명은 있었다 — 그 차이
여기서 당연한 반론이 예상된다. 제불의 증명은 이전 경에도 있지 않은가. 대성인은 이 반론을 스스로 꺼내신다. 석존이 처음 성도했을 때 제불이 시방에 나타나 위로하고 대보살을 보냈다. 반야경에서는 석존이 긴 혀로 삼천세계를 덮고 천불이 시방에 나타났다. 금광명경에서는 사방의 네 부처가 나타났다. 아미타경에서는 육방의 제불이 혀로 삼천세계를 덮었다. 대집경에서는 시방의 제불 · 보살이 대보방에 모였다.
강의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아미타경에 육방의 제불이 혀로 삼천세계를 덮었다고 한 것이 좋은 예이며, 그 밖의 증명도 本文에 설해진 대로다. 그렇다면 어느 경에나 증명이 있으니, 제불의 증명으로 법화경의 진실을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여기서 강의는 「제불의 증명은 무엇을 위해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증명은 앞의 낮은 경문을 탄가하고 더 높은 경론을 설할 때 쓰인다. 그러므로 상대하여 더 높고 깊은 교의로 들어갈수록, 앞의 증명보다 더욱 장엄한 증명이 이루어지도록 짜여 있다. 대승경에서 제불의 증명은 소승경을 깨뜨리기 위한 것임을 깊이 알아야 한다.
대성인의 本文은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보이신다. 화엄경은 첫 설법이므로 앞뒤의 경이 없고, 따라서 부처의 말씀에 상위가 없다. 큰 의심이 생겨날 이유가 없었다. 대집경 · 대품경 · 금광명경 · 아미타경 등은 소승경의 이승을 탄가하기 위해 시방에 정토를 설하여 범부와 보살은 기뻐하게 하고 이승은 괴롭혔다. 소승경과 대승경 사이에는 「일부의 상위」가 있었으므로, 시방에 부처가 나타나거나 대보살을 보내거나 제불이 모이거나 혀를 내미는 등의 증명이 필요했다. 그것은 오로지 소승경의 「시방세계에 오직 한 부처만 계신다」는 생각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 초성도 · 제불이 시방에 나타나 위로하고 대보살을 보냄
- 반야경 · 석존이 긴 혀로 삼천세계를 덮고 천불이 시방에 나타남
- 금광명경 · 사방의 네 부처가 나타남
- 아미타경 · 육방의 제불이 혀로 삼천세계를 덮음
- 대집경 · 시방의 제불 · 보살이 대보방에 모임
- 다보여래의 보탑 용현 ·皆是真実모두 이것이 진실이니라
- 석존과 시방 분신 제불의 광장설 · 범천에 이름
- 분신불의 환귀와 보탑의 복귀
결정적인 차이는 「상위의 크기」에 있다. 소승과 대승의 상위는 「일부의 상위」였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앞뒤의 제대승경과 근본적인 상위가 생겨, 사리불 등의 성문과 대보살과 인천이 「마가 부처가 된 것이 아닌가」라고 여길 정도의 대사가 되었다. 이전 제경의 증명은 그만한 대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의심이 클수록 증명도 커야 한다. 강의는 그래서 법화경에서의 제불의 증명은 권대승경의 증명과 하늘과 땅만큼 다르며, 다른 경에서는 볼 수 없는 대장엄의 증명이기에 법화경은 진실이라고 결론짓는다.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이전 제경과 법화경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셨다.
諸経と法華との相違は経文より事起つて分明なり未顕と已顕と証明と舌相と二乗の成不と始成と久成と等之を顕わす
제경과 법화경의 상위는 경문으로부터 일이 일어나 분명하니라. 미현(未顯)과 이현(已顯), 증명과 설상, 이승의 성불 · 불성불, 시성과 구성 등이 이것을 드러내느니라
미현진실과 이현진실, 다보의 증명과 분신의 설상, 이승의 성불 여부, 시성정각과 구원실성 — 이 항목들은 개목초 제11장에서 제24장까지 다루는 주제를 거의 그대로 망라한다. 「증명」과 「설상」이 이승작불(제2편)과 구원실성(제3편) 사이에 놓여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증명은 적문과 본문 모두를 떠받치는 것이다.
흐린 눈의 무리 — 「법화경과 같다」고 하는 자들
대성인은 이전 제경의 증명과 법화경의 증명을 혼동하는 것을 「흐린 눈」에 비유하신다. 누런 돌과 황금, 흰 구름과 흰 산, 흰 얼음과 은거울, 검은빛과 푸른빛 — 겉보기에 비슷한 이 짝들을 바른 눈이라면 분명히 가려 보겠지만, 흐린 눈 · 사팔눈 · 외눈 · 삿된 눈은 잘못 본다. 강의도 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며 법화경의 증명이 다른 경의 증명과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은 비판의 화살을 당대의 종파들로 돌린다. 화엄 · 법상 · 삼론 · 진언 · 염불 등의 흐린 눈의 무리가 자기 종파의 경과 법화경이 같다고 여기는 것은 졸렬한 눈이다. 이 비판은 다음 제16장의 「법화경과 대일경과, 법화경과 화엄경과, 법화경과 아미타경과 하나라고 설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증명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눈은 결국 경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차이를 보지 못하면 「모두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법화경이 설하는 인생의 목적
강의는 이 장의 결론에서 법화경이 무엇을 논하는 경인지를 묻는다. 인생의 목적은 이승이나 보살이 되는 데 있지 않고 부처가 되는 데 있다. 법화경은 부처라고 스스로 깨닫는 경애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 경애를 얻을 수 있는지를 설하고, 그 이익을 밝힌 경이다. 이승작불이라는 주제는 결국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며, 그 선언이 다보 · 분신의 증명으로 보증되었다는 것이 제15장의 요지다.
강의는 이를 일상의 감각에 비추어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박사가 되고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여기기 쉽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다. 참된 인생의 최고 목적은 절대적 행복을 얻는 것이며, 그 경애를 부처의 경애라 한다. 나날의 생활을 즐겁게 보내면서 영원한 생명 속에 살고 우주 그 자체의 생명과 하나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라 할 것이다. 강의는 말법의 오늘 이 경애를 얻으려 할 때 석존의 법화경을 백만 번 읽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고,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삼대비법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한다. 제7장에서 일념삼천이 「본문 수량품의 문저」에 잠겨 있다고 하신 대성인의 말씀이, 강의의 이 결론과 맞닿는다.
강의는 제불의 증명이 언제나 「낮은 경을 탄가하고 높은 경을 설할 때」 쓰이며, 교의가 깊어질수록 더 장엄한 증명이 따른다고 본다. 이전 제경의 증명은 소승의 「시방 유일불」을 깨뜨리는 일부의 상위를 위한 것이었고, 법화경의 다보 · 분신의 증명은 「장비마작불」이라는 최대의 의심을 걷어 내는 대장엄의 증명이다.
본문
但在世は四十余年をすてて法華経につき候ものもや・ありけん、仏滅後に此の経文を開見して信受せんこと・かたかるべし、 先ず一つには爾前の経経は多言なり法華経は一言なり爾前の経経は多経なり此の経は一経なり彼彼の経経は多年なり此の経は八年なり、 仏は大妄語の人・永く信ずべからず不信の上に信を立てば爾前の経経は信ずる事もありなん法華経は永く信ずべからず、 当世も法華経をば皆信じたるやうなれども法華経にては・なきなり、 其の故は法華経と大日経と法華経と華厳経と法華経と阿弥陀経と一なるやうを・とく人をば悦んで帰依し別別なるなんど申す人をば用いずたとい用ゆれども本意なき事とをもへり。
다만 재세(在世)에는 사십여 년을 버리고 법화경에 따른 자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부처 멸후에 이 경문을 펴 보고 믿어 받기는 어려우리라. 먼저 첫째로, 이전의 경경은 많은 말(多言)이요 법화경은 한 말(一言)이니라. 이전의 경경은 많은 경이요 이 경은 한 경이니라. 그 경경은 여러 해에 걸쳤고 이 경은 팔 년이니라. 부처는 큰 망어의 사람이니 영원히 믿을 수 없느니라. 믿지 못하는 위에 굳이 믿음을 세운다면 이전의 경경은 믿는 일도 있으려니와 법화경은 영원히 믿을 수 없으리라. 지금 세상도 법화경을 모두 믿는 듯하나 법화경을 믿는 것이 아니니라. 그 까닭은, 법화경과 대일경, 법화경과 화엄경, 법화경과 아미타경이 하나라고 설하는 사람을 기뻐하여 귀의하고, 따로따로라고 말하는 사람은 쓰지 않으며, 설령 쓰더라도 뜻에 맞지 않는 일로 여기느니라.
어구 풀이
- 在世재세
- 석존이 세상에 계실 때. 직접 설법을 듣고, 다보 · 분신의 증명을 눈앞에서 본 시대다. 이에 대하여 「멸후(滅後)」는 석존 입멸 뒤 경문으로만 법을 접하는 시대를 말한다.
- 多言・一言많은 말 · 한 말
- 이전 제경에서 이승불성불을 설한 말은 수없이 많으나, 법화경에서 이승작불을 설한 것은 오직 한 번의 말이라는 뜻이다.
- 多経・一経많은 경 · 한 경
- 이승불성불을 설한 경은 화엄 · 방등 · 반야의 수많은 경이지만, 이승작불을 설한 경은 법화경 한 경뿐이다.
- 多年・八年여러 해 · 팔 년
- 이전 제경은 사십여 년에 걸쳐 설해졌고 법화경은 마지막 팔 년 동안 설해졌다.
- 仏は大妄語の人부처는 큰 망어의 사람
- 이승에 대해 정반대의 두 말을 한 이상,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부처가 큰 거짓말쟁이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뜻. 대성인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경문만 보고 판단하는 멸후 사람들의 시선을 대신 말씀하신 것이다.
- 不信の上に信を立てば믿지 못하는 위에 믿음을 세운다면
- 이전 경과 법화경의 설이 너무나 어긋나 석존의 가르침 전체를 믿기 어렵다. 그러나 그 믿기 어려운 가운데서 굳이 어느 한쪽을 믿기로 한다면, 수가 많은 쪽 — 다언 · 다경 · 다년인 이전 경 — 을 믿게 되리라는 뜻이다.
- 大日経대일경
-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 당의 선무외와 일행이 번역한 7권의 경(T18 no.848)으로, 진언종이 의지하는 근본 경전이다. 대일여래가 설한 밀교의 경이라 하여 진언종은 이를 석존이 설한 현교보다 높게 둔다.
- 別別なるなんど申す人따로따로라고 말하는 사람
- 이전 경은 방편의 권경이므로 성불의 법이 아니며, 법화경만이 진실의 가르침이요 성불득도의 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곧 니치렌 대성인 자신이다.
- 本意なき事뜻에 맞지 않는 일
- 마음에 들지 않는 일, 탐탁지 않은 일. 대성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내키지 않아 한다는 뜻이다.
재세와 멸후 — 왜 멸후가 더 어려운가
제15장에서 대성인은 다보 · 분신의 증명으로 법화경의 진실을 세우셨다. 그러나 제16장은 곧바로 「다만」이라고 단서를 단다. 그 증명이 효력을 가진 것은 재세의 일이다. 석존의 재세에는 그래도 사십여 년을 버리고 법화경에 따른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눈앞에서 보탑이 솟고 제불이 혀를 내미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가 멸도한 뒤,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하고 경문만 펼쳐 보는 사람이 법화경을 믿고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재세조차 쉽지 않았다는 점은 대성인이 「관심의 본존초」에서 분명히 하셨다.
夫れ在世の正機は過去の宿習厚き上教主釈尊多宝仏十方分身の諸仏地涌千界文殊弥勒等之を扶けて諫暁せしむるに猶信ぜざる者之れ有り五千席を去り人天移さる況や正像をや何に況や末法の初をや
무릇 재세의 정기(正機)는 과거의 숙습이 두터운 데다 교주 석존 · 다보불 · 시방 분신의 제불 · 지용천계 · 문수 · 미륵 등이 이를 도와 간효하셨는데도 오히려 믿지 않는 자가 있었느니라. 오천 명이 자리를 떠났고 인천이 옮겨졌느니라. 하물며 정법 · 상법 시대이랴, 하물며 말법의 처음이랴
방편품에서 석존이 진실을 설하려 하자 오천 명의 증상만이 자리를 떠났다(오천기거). 견보탑품에서는 분신불을 맞이하기 위해 국토를 정화하면서 인천을 다른 국토로 옮겼다. 과거의 인연이 두텁고 삼불과 대보살이 함께 도왔던 재세에도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다면, 멸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성인은 멸후가 어려운 이유의 「첫째」로 양의 불균형을 드신다. 이전 경은 다언 · 다경 · 다년이고, 법화경은 일언 · 일경 · 팔 년이다. 수많은 경에서 사십여 년 동안 수없이 반복된 말과, 한 경에서 팔 년 동안 한 번 설해진 말이 정반대일 때, 경문만 보는 사람은 어느 쪽을 믿겠는가. 대성인은 이것을 대담한 가정으로 말씀하신다. 부처는 두 말을 했으니 큰 망어의 사람이며 영원히 믿을 수 없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위에 굳이 믿음을 세운다면, 이전 경을 믿는 일은 있어도 법화경은 영원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첫째」라는 말은 멸후 난신의 이유가 이것만이 아님을 시사한다. 실제로 대성인은 제24장 「멸후의 난신을 맺다」에서 본문과 관련된 멸후 난신의 이유를 더 드신다. 논사 · 인사의 다수가 이전 쪽으로 기울어 있고, 세상이 점점 말세가 되어 성현은 숨고 미혹한 자는 많아지며, 나라도 멀고 말도 다르고 근기도 둔하다는 것이다. 제16장과 제24장은 적문과 본문 각각에 대해 「멸후의 난신」을 맺는 짝을 이룬다.
다보 · 분신의 증명이 재세의 의심을 풀었다면, 멸후의 의심은 무엇이 풀 것인가. 대성인은 「법화취요초」에서 다보의 증명 자체가 실은 멸후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신다.
誰人の疑を晴さんが為に多宝仏の証明を借り諸仏舌を出し地涌の菩薩を召さんや方方以て謂れ無き事なり 経文に随つて況滅度後令法久住等云云此等の経文を以て之を案ずるに偏に我等が為なり
누구의 의심을 풀기 위해 다보불의 증명을 빌리고 제불이 혀를 내밀고 지용의 보살을 부르셨겠는가. 어느 모로 보나 까닭이 없는 일이니라. 경문에 따르면 「하물며 멸도 후랴」 「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는 까닭에」 등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경문으로써 이를 생각하건대 오로지 우리를 위한 것이니라
같은 어서에서 대성인은 사리불 · 목련 같은 재세의 대성문은 본래 「내비외현(內秘外現)의 옛 보살」이었으므로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고 하신다. 재세의 청중 가운데는 지혜 없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장엄한 증명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況滅度後(하물며 멸도 후랴)」라는 법사품의 경문과 「令法久住(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는 까닭에)」라는 견보탑품의 경문이 보이듯, 그것은 멸후의 중생, 곧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개목초 하권 끝의 제61장도 「釈迦多宝十方分身の諸仏の来集はなに心ぞ令法久住故来至此等云云(석가 · 다보 · 시방 분신의 제불이 모여 오신 것은 무슨 마음인가. 「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는 까닭에 여기에 왔다」 등이라 하였느니라)」(236쪽)라고 하여 같은 결론에 이른다. 제16장의 「멸후 난신」은 이 결론을 향해 열린 물음이다.
「법화경을 믿는 것이 아니다」 — 무엇이 법화경을 믿는 것인가
대성인은 이어서 당세를 비판하신다. 지금 세상 사람들도 모두 법화경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법화경을 믿는 것이 아니다. 강의는 「法華経にては・なきなり」를 「법화경을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믿는 것이 법화경을 믿는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선시초」와 「보은초」의 두 문장으로 답한다.
経文のごとく已今当にすぐれて法華経より外は仏になる道なしと強盛に信じて
경문대로 이금당(已今當)보다 뛰어나 법화경 외에는 부처가 되는 길이 없다고 강성하게 믿고
法華経をよむ人の此の経をば信ずるようなれども諸経にても得道なるとおもうは此の経をよまぬ人なり
법화경을 읽는 사람이 이 경을 믿는 듯하지만 다른 경으로도 득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니라
법화경을 믿는다는 것은 법화경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 외에는 성불의 길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다른 경으로도 득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른 경과 법화경이 「하나」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은 법화경을 믿는 듯하면서 실은 믿지 않는 것이다. 「보은초」는 이 문장 바로 뒤에서 그 예로 가상대사를 든다. 가상은 『법화현론』 열 권을 지어 법화경을 찬탄했지만 묘락대사는 「훼손이 그 가운데 있으니 어찌 홍찬이 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법화경을 칭찬하는 글 속에 법화경을 깎아내리는 뜻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상은 「법화경과 제대승경은 문은 깊고 얕음이 있으나 마음은 하나」라고 썼고, 대성인은 이것이 방법의 근본이라고 하셨다(「보은초」, 315쪽).
강의는 같은 구조가 대성인 이후에도 되풀이된다고 지적한다. 스스로 제목을 부르고 니치렌의 문류라고 자칭하면서도 대성인의 가르침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대성인을 믿는 듯하면서 실은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법화경을 믿는 듯 믿지 않는 당세의 모습을 비판한 대성인의 말씀은, 대성인의 불법을 받드는 이들 자신에게도 거울이 된다.
「하나」라고 설하는 사람들 — 진언 · 화엄 · 정토
대성인이 「법화경과 하나라고 설하는 사람」으로 대일경 · 화엄경 · 아미타경을 드신 것은 당시 일본의 주요 종파, 곧 진언종 · 화엄종 · 정토종을 가리킨다. 강의는 각 종파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 진언종은 대일경의 「我一切本初(나는 일체의 근본이요 시초이니라)」라는 문을 일념삼천의 의거하는 글이라 주장한다. 그리하여 일념삼천의 법리에서는 법화경과 대일경이 같지만, 대일경에는 인(印)과 진언(眞言)이 있으므로 이 「사(事)」의 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했다. 이른바 이동사승(理同事勝)의 설이다.
- 화엄종은 화엄경의 「心如工画師(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라는 문에 일념삼천이 보인다고 하여, 역시 화엄경은 법화경과 같다고 했다.
- 정토종은 법화경도 훌륭하지만 가르침이 너무 높아 말법 중생의 근기에 맞지 않으므로 염불을 믿어야 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진언과 화엄의 주장에 대해서는 대성인이 이미 제7장에서 판정을 내리셨다. 「華厳宗と真言宗との二宗は偸に盗んで自宗の骨目とせり(화엄종과 진언종의 두 종은 몰래 훔쳐 자기 종의 골격으로 삼았느니라)」(189쪽). 개목초 제9장에서도 대성인은 화엄종의 징관이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쳐 「심여공화사」의 문의 혼으로 삼고, 진언종이 대일경의 「심실상 · 아일체본초」의 문에 천태의 일념삼천을 훔쳐 넣었다고 지적하신다. 그들이 법화경과 「같다」고 하는 근거 자체가 법화경에서 훔쳐 온 것이라는 비판이다.
강의는 이들을 이 御文 그대로의 사견의 무리라 하며, 불법에 무지한 중생의 마음을 현혹해 급속히 퍼졌다고 논한다. 그것은 「사십여년미현진실」 「세존법구후 요당설진실」이라는 부처의 금언을 등지는 그릇된 뜻이며, 제15장까지 대성인이 자세히 논하신 그대로다. 강의는 부처의 금언을 가볍게 여기고 진실을 가리려 하는 이들 제종의 인사(人師)를 불적(佛敵)이라 하고, 그들에게 미혹되어 그 문하가 되는 자도 그 과보를 면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강의는 이 논의를 오늘의 종교 상황으로 넓혀,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것을 가르친다」는 이른바 만교귀일(萬敎歸一)의 주장을 비판한다. 「어떤 종교든 다 같다」는 말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는 각 종파의 교의를 조금만 공부해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개목초 제16장이 「같다」고 하는 사람을 반기고 「다르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는 당세의 풍조를 비판한 것은, 경의 차이를 분명히 가리는 것이야말로 법화경을 믿는 첫걸음이라는 뜻이다. 차이를 흐리는 관용은 겉으로는 너그러워 보이지만, 성불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덮어 버린다.
강의는 「법화경을 믿는다」는 것을 「법화경 외에는 성불의 길이 없다」고 강성하게 믿는 것으로 정의한다. 다른 경으로도 득도한다고 여기거나 제경과 법화경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법화경을 믿는 듯하면서 실은 믿지 않는 것이며, 진언 · 화엄 · 정토의 「같다」는 주장이 그 전형이다.
본문
日蓮云く日本に仏法わたりて・すでに七百余年・但伝教大師・一人計り法華経をよめりと申すをば諸人これを用いず、 但し法華経に云く「若し須弥を接つて他方の無数の仏土に擲置かんも亦未だ為難しとせず、乃至若し仏滅後に悪世中に於て能く此の経を説かん是れ則ち為難し」等云云、日蓮が強義・経文に普合せり 法華経の流通たる涅槃経に末代濁世に謗法の者は十方の地のごとし正法の者は爪上の土のごとしと・とかれて候は・いかんがし候べき、日本の諸人は爪上の土か日蓮は十方の土かよくよく思惟あるべし、 賢王の世には道理かつべし愚主の世に非道・先をすべし、聖人の世に法華経の実義顕るべし等と心うべし、 此の法門は迹門と爾前と相対して爾前の強きやうに・をぼゆもし爾前つよるならば舎利弗等の諸の二乗は永不成仏の者なるべし・いかんが・なげかせ給うらん。
니치렌이 이르기를, 일본에 불법이 건너온 지 이미 칠백여 년, 다만 전교대사 한 사람만이 법화경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느니라. 그러나 법화경에 이르기를 「만일 수미산을 집어 다른 곳의 무수한 불토에 던져 둔다 해도 아직 어렵다 하지 않느니라. 내지 만일 부처가 멸도한 뒤 악세 가운데서 능히 이 경을 설한다면 이것이 곧 어려우니라」 등이라 하였으니, 니치렌의 강의(强義)는 경문에 부합하느니라. 법화경의 유통분인 열반경에 「말대 탁세에 방법의 자는 시방의 땅과 같고, 정법의 자는 손톱 위의 흙과 같으니라」고 설해져 있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일본의 사람들이 손톱 위의 흙인가, 니치렌이 시방의 흙인가. 잘 생각해 보라. 현명한 왕의 세상에는 도리가 이기고, 어리석은 군주의 세상에는 비도(非道)가 앞서느니라. 성인의 세상에 법화경의 실의가 나타나리라고 마음에 새길지니라. 이 법문은 적문과 이전을 견주어 보면 이전이 강한 듯이 여겨지느니라. 만일 이전이 강하다면 사리불 등 모든 이승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자가 되리니, 얼마나 탄식하시겠는가.
어구 풀이
- 日本に仏法わたりて・すでに七百余年일본에 불법이 건너온 지 이미 칠백여 년
- 일본에 불법이 전해진 것은 긴메이 천황 때로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천황 13년(552)이라 하고, 『상궁성덕법왕제설』과 『원흥사가람연기』에 공통되는 「무오년」의 538년 설이 유력하며 그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대성인이 어서에서 쓰신 것은 『일본서기』의 설이다. 그에 따르면 긴메이 천황 13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성왕)이 사신을 보내 석가불의 금동상 한 구와 번개(幡蓋) 약간, 경론 약간 권을 바쳤다. 함께 올린 표문은 「이 법은 모든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우니, 주공 · 공자도 알지 못했다」 하고, 이 법은 무량무변의 복덕과 과보를 낳아 무상보리를 이루게 하며, 여의보주를 품은 사람이 쓰고자 하는 대로 모두 얻듯이 이 묘법의 보배도 기원하는 대로 모자람이 없다고 찬탄했다. 또 이 법이 멀리 천축에서 삼한에 이르기까지 받들어 공경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백제왕이 이를 일본에 전하는 것은 「나의 법은 동쪽으로 흐르리라」는 부처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 伝教大師・一人計り法華経をよめり전교대사 한 사람만이 법화경을 읽었다
- 일본 불교 칠백여 년의 역사에서 법화경을 경문대로 읽고 실천한 사람은 전교대사뿐이라는 대성인의 판정. 여기서 「읽는다」는 것은 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경문대로 법화경이 제경 가운데 최제일임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 須弥수미
-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산. 범어 수메루(Sumeru)의 음사로 수미루 · 소미로 등으로도 쓰고 묘고(妙高) · 안명(安明) 등으로 번역한다. 이 세계의 아래에는 풍륜 · 수륜 · 금륜의 삼륜이 있고, 맨 위 금륜 위에 아홉 산과 여덟 바다가 있어 이 구산팔해를 하나의 소세계로 삼는다. 수미산은 아홉 산의 하나로 소세계의 중심이며 높이는 물밑에서 십육만 팔천 유순이라 한다. 그 둘레를 일곱 겹의 향수해와 금산이 번갈아 둘러싸고, 바깥에 짠물의 바다가 있으며, 그 바다에 염부제 등 사대주가 떠 있다고 한다.
- 若し須弥を接つて…是れ則ち為難し육난구이의 경문
- 견보탑품 제11에서 석존이 멸후의 홍경을 권하며 설한 육난구이(六難九易) 가운데 한 대목. 수미산을 집어 타방의 무수한 불토에 던지는 일조차 「쉬운 일」에 속하고, 부처 멸후의 악세에 이 경을 설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 強義강의(强義)
- 강한 주장. 남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호한 주장으로, 여기서는 「칠백 년 동안 전교대사 한 사람만이 법화경을 읽었다」는 대성인의 주장을 말한다.
- 普合부합
- 本文은 「普合」이라 적는다. 경문과 꼭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 法華経の流通たる涅槃経법화경의 유통분인 열반경
- 불경은 일반적으로 서분 · 정종분 · 유통분의 세 단으로 나뉜다. 서분은 설하려는 가르침을 밝히기 위한 도입부로 법회의 청중과 경의 유래 · 인연을 설하고, 정종분은 그 중심인 가르침의 본체를 펴 설하며, 유통분은 정종분의 가르침에 따라 그 홍통을 밝혀 경을 수지하는 공덕을 설하고 제자에게 부촉해 유포를 권한다. 여기서는 석존 일대의 경전을 서 · 정 · 유통의 세 단으로 나누어 열반경을 법화경의 유통분으로 본 것이다.
- 爪上の土・十方の土손톱 위의 흙 · 시방의 흙
- 열반경에서 정법을 믿는 자는 손톱 위에 올린 흙처럼 적고, 믿지 않는 자는 시방세계의 흙처럼 많다고 한 비유다. 대성인은 이 경문을 여러 어서에서 인용하신다.
- 賢王・愚主현명한 왕 · 어리석은 군주
- 도리를 아는 지도자와 도리를 모르는 지도자. 지도자가 현명하면 도리가 이기고, 어리석으면 도리에 어긋난 것이 앞선다는 뜻이다.
- 聖人성인
- 여기서는 법화경의 실의를 드러내는 성인을 말한다. 강의는 이를 대성인 자신으로 배견한다.
「전교대사 한 사람만이 법화경을 읽었다」 — 강의(強義)와 육난구이
제17장은 「日蓮云く(니치렌이 이르기를)」라는 말로 시작한다. 제11장에서 「予愚見をもつて(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써)」라고 겸손하게 시작한 논의가, 이전 제경과 법화경의 상위를 끝까지 따라간 끝에 이제 대성인 자신의 단언으로 이어진다. 일본에 불법이 건너온 지 칠백여 년, 법화경을 읽은 사람은 전교대사 한 사람뿐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성인은 이 「강의」가 법화경의 경문에 부합한다고 하신다.
그 경문이 견보탑품의 육난구이다. 석존은 다보탑 안에 다보여래와 나란히 앉은 뒤, 멸후에 누가 이 경을 홍통할 것인가를 묻고, 그 어려움을 아홉 가지 쉬운 일과 여섯 가지 어려운 일로 대비해 보인다.
- 1항하사의 다른 경을 설하는 것
- 2수미산을 집어 타방의 무수한 불토에 던지는 것
- 3발가락으로 대천세계를 움직여 멀리 타국에 던지는 것
- 4유정천에 서서 무량한 다른 경을 설하는 것
- 5손에 허공을 쥐고 노니는 것
- 6대지를 발등에 올려 범천에 오르는 것
- 7마른 풀을 지고 겁화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
- 8팔만사천 법장을 지니고 설하여 듣는 이에게 육신통을 얻게 하는 것
- 9항하사 중생에게 아라한과를 얻게 하는 것
- 1악세에 이 경을 설하는 것
- 2이 경을 쓰거나 남에게 쓰게 하는 것
- 3잠시라도 이 경을 읽는 것
- 4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 경을 설하는 것
- 5이 경을 듣고 받아 그 뜻을 묻는 것
- 6이 경을 받들어 지니는 것
수미산을 집어 던지는 것, 마른 풀을 지고 겁화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 —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쉬운 일」로 분류되고, 멸후 악세에 이 경을 설하고 지니는 일이 「어려운 일」로 분류된다. 이 극단적인 대비는 멸후의 법화경 홍통이 초인적인 신통력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대성인은 제25장에서 바로 이 육난구이를 자신의 결의와 연결하신다.
宝塔品の六難九易これなり、我等程の小力の者・須弥山はなぐとも我等程の無通の者・乾草を負うて劫火には・やけずとも我等程の無智の者・恒沙の経経をば・よみをぼうとも法華経は一句一偈も末代に持ちがたしと・とかるるは・これなるべし
보탑품의 육난구이가 이것이니라. 우리처럼 힘없는 자가 수미산을 던진다 해도, 우리처럼 신통 없는 자가 마른 풀을 지고 겁화에 타지 않는다 해도, 우리처럼 지혜 없는 자가 항하사의 경경을 읽어 외운다 해도, 법화경은 한 구 한 게도 말대에 지니기 어렵다고 설해진 것은 이것이리라
강의는 「能く此の経を説かん(능히 이 경을 설한다면)」의 「능히 설한다」가 무엇인지를 「선시초」로 풀이한다.
よくとくと申すはいかなるぞと申すに於諸経中最在其上と申して大日経・華厳経・涅槃経・般若経等に法華経はすぐれて候なりと申す者をこそ経文には法華経の行者とはとかれて候へ、……もし経文のごとくならば日本国に仏法わたて七百余年、伝教大師と日蓮とが外は一人も法華経の行者はなきぞかし
「잘 설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경 가운데 가장 그 위에 있다」고 하여 대일경 · 화엄경 · 열반경 · 반야경 등보다 법화경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자를 경문에서는 법화경의 행자라고 설한 것이니라. …… 만일 경문대로라면 일본국에 불법이 건너온 지 칠백여 년, 전교대사와 니치렌 외에는 한 사람도 법화경의 행자가 없느니라
「능히 설한다」는 것은 법화경을 낭랑하게 강설하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이 제경 가운데 최제일임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제16장의 결론, 곧 법화경과 다른 경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법화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판정이 여기서 「설하는」 쪽에서 다시 확인된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곧 「능히 설하는」 것이며, 그것이 멸후 악세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경문대로 법화경을 설한 이는 칠백 년 동안 전교대사와 대성인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대성인은 이렇게 「강의」가 경문에 부합함을 보이셨다.
강의는 이 경문을 대성인의 가르침을 홍통하려는 이들 자신의 체험으로 읽는다. 대성인의 말씀대로 참된 불법을 홍통하려 하면 오늘날에도 그것은 실로 큰 어려움이다. 삼대비법의 참된 불법을 외쳐 고뇌하는 중생에게 전하려 해도,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이는 적고 오히려 반대하는 이가 훨씬 많다. 이 참된 불법을 알고 환희에 넘쳐 남에게 설해 보면 그 반대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자신이 믿는 불법이 얼마나 바른지, 그리고 대성인이 고뇌하는 중생을 위해 가마쿠라 시대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를 절실히 알게 될 것이라고 강의는 말한다. 그리하여 말법의 어본불 대성인의 자비를 깊이 느끼고 눈물짓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육난구이의 경문은 멀리서 바라보는 교리가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 몸으로 확인하는 경문이다.

열반경의 조상토 — 적다는 것이 그르다는 뜻은 아니다
대성인은 이어서 열반경의 경문을 드신다. 말대 탁세에 방법의 자는 시방의 땅처럼 많고, 정법의 자는 손톱 위의 흙처럼 적다. 그리고 물으신다. 일본의 사람들이 손톱 위의 흙인가, 니치렌이 시방의 흙인가. 잘 생각해 보라.
열반경을 「법화경의 유통분」이라 하신 것은 석존 일대의 경전 전체를 서 · 정 · 유통의 세 단으로 나눈 판정에 근거한다. 무량의경이 서분, 법화경이 정종분, 열반경이 유통분이다.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열반경의 이 조상토 경문을 인용하시며, 「열반경의 문에서는 열반경의 행자가 손톱 위의 흙이라 했는데 그대는 법화경이라 하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는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다.
涅槃経に云く法華の中の如し等云云 妙楽大師云く大経自ら法華を指して極と為す等云云
열반경에 이르기를 「법화 가운데서와 같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묘락대사가 이르기를 「대경(열반경)은 스스로 법화를 가리켜 궁극으로 삼는다」 등이라 하였느니라
열반경 자신이 법화경을 궁극으로 가리키므로, 열반경을 읽는다는 것은 곧 법화경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이 말하는 「정법의 자」는 곧 법화경을 믿는 자다. 「보은초」는 같은 대목에서 당세의 모습을 이렇게 대비하신다. 일본국 사람들은 저마다 「나도 법화경을 믿는다」고 하니 그 말대로라면 방법의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경문에는 말법에 방법의 자가 시방의 흙처럼 많다고 했다. 「経文と世間とは水火なり(경문과 세간은 물과 불이니라)」(314쪽). 그리고 세간은 「일본국에서 니치렌 한 사람이 방법의 자」라고 한다. 경문을 따를 것인가, 세간을 따를 것인가.
정법의 자가 극히 적다는 이 판정은 개목초 안에서도 거듭 나타난다. 제24장 「멸후의 난신을 맺다」에서 대성인은 같은 열반경 경문을 「末法には正法の者は爪上の土・謗法の者は十方の土」(199쪽)라는 형태로 인용하시고, 「현불미래기」에서는 「正法を行じて仏道を得る者は爪上の土よりも少きなり(정법을 행하여 불도를 얻는 자는 손톱 위의 흙보다도 적으니라)」(506쪽)라고 하셨다.
강의는 이 경문에서 중요한 원리를 끌어낸다. 정법을 믿는 사람이 적다고 해서 그것이 바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 그릇되다는 것을 이 경문이 밝혀 준다. 오히려 바르기 때문에 적다고 할 수 있다. 다수가 따르는 것이 옳고 소수가 주장하는 것이 그르다는 판단은, 적어도 말법의 불법에 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경문 자체가 말법에는 정법의 자가 「손톱 위의 흙」처럼 적을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강의는 불법이 일본에 전해진 지 칠백 년 만에 대성인이 출현하여 종교계에 큰 혁명이 일어났다고 회고한다.
현명한 왕의 세상과 어리석은 군주의 세상
「현명한 왕의 세상에는 도리가 이기고, 어리석은 군주의 세상에는 비도가 앞선다.」 강의는 이 말씀으로 현대를 비추어 본다. 나라가 법치국가로서 부정과 악을 엄하게 단속한다 해도, 법의 허점을 파고드는 교묘한 부정은 정계 · 재계, 나아가 교육과 학문의 세계에까지 상식처럼 되어 있다. 그 세계의 실력자란 그런 뒷길에 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억지가 통하면 도리가 물러난다」, 「정직한 사람이 바보가 된다」는 세상에서는 참된 일인자가 그늘에 묻히고, 문화와 사회의 바른 번영과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그 원인이 「어리석은 군주의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갈파한 것이 이 御文이라고 강의는 읽는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현명한 왕이란 무엇이고 어리석은 군주란 무엇인가. 강의는 민주주의의 시대에 그것은 민중이라고 답한다. 민중이 무지하고 무기력하면 민주주의도 중우정치가 되어 비도와 부정이 판을 친다. 민중이 현명하여 자신의 생활 향상과 사회의 번영을 지혜롭게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도리가 이긴다. 그리고 그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현명하게 하는 법이란 불법에 의해 생명의 철리와 생활의 원리를 근본에서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이다. 아무리 학문이 발달하고 인지가 발전해도 이 근본을 잊는다면 모든 것이 생활에 살려지지 않는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고 강의는 말한다.
대성인 당시에 「현명한 왕」과 「어리석은 군주」는 국주를 가리켰다. 「입정안국론」으로 국주에게 간효하셨다가 이즈와 사도로 유배된 대성인에게, 이 말씀은 지금의 일본이 어리석은 군주의 세상이기에 정법의 니치렌이 쓰이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이었다. 현대어역도 이 대목을 「지금의 일본은 우왕이어서 정법의 니치렌을 쓰지 않는다」고 풀었다. 개목초가 사도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짧은 한 줄에 담긴 무게가 느껴진다.
「성인의 세상에 법화경의 실의가 나타나리라」
이어지는 「聖人の世に法華経の実義顕るべし(성인의 세상에 법화경의 실의가 나타나리라)」에 대해 강의는, 이 법화경이란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라고 풀이한다. 대성인의 출현으로 삼대비법이 건립되고 법화경의 실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의(實義)」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화경의 문자는 칠백 년 동안 일본에서 읽혀 왔다. 그러나 그 「실의」, 곧 참된 뜻은 드러나지 않았다. 제7장에서 일념삼천이 법화경 본문 수량품의 「문저」에 잠겨 있다고 하신 것, 제11장에서 중중의 난신난해의 마지막 단계로 「문저 하종의 독일본문」을 든 것이 이 「실의」의 내용이다. 법화경의 문상(文上)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그 문저에 잠긴 실의는 성인이 출현해야 비로소 드러난다. 개목초 상권이 하권의 하종의 삼덕 · 말법의 주사친으로 나아가는 길이 이 한 줄에 예고되어 있다.
이전이 강하다면 — 이승의 탄식, 그리고 다음 편으로
제17장의 마지막 문장은 다시 이승작불의 주제로 돌아온다. 이 법문은 적문과 이전을 견주어 보면 이전이 강한 듯이 여겨진다. 다언 · 다경 · 다년인 이전이 수에서 압도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전이 강하다면 사리불 등 모든 이승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자가 될 것이니, 그들이 얼마나 탄식하겠는가.
이 탄식은 두 방향을 가리킨다. 하나는 앞으로, 개목초 상권 끝의 제29장 이하에서 대성인이 「이승의 법화 심은」을 논하며, 법화경으로 성불을 허락받은 사리불 · 가섭 등이 어찌하여 법화경의 행자인 대성인을 수호하지 않는가를 물으시는 대목이다. 이승에게 법화경은 생명의 은인이며, 그 은혜를 생각하면 이승은 법화경을 지키는 사람을 버릴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바로 다음, 제18장에서 시작되는 「둘째」, 곧 구원실성의 문제다. 적문과 이전을 견주면 이전이 강해 보이듯, 본문과 이전 · 적문을 견주면 이전 · 적문이 더욱 강해 보인다. 시성정각을 설한 경은 이승불성불을 설한 경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제2편의 결론인 「난신의 신」은 제3편에서 한층 깊은 난신 앞에 선다.
강의는 육난구이의 경문을 법화경을 홍통하는 사람이 몸으로 확인하는 경문으로 읽는다. 법화경이 제경 가운데 최제일이라고 「능히 설하는」 것이 멸후 악세의 가장 어려운 일이며, 정법의 자가 적다는 것은 그 가르침이 그르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바르다는 증거다. 법화경의 실의, 곧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는 성인의 출현으로 드러났다.
이 편을 맺으며
제2편의 일곱 장은 하나의 물음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같은 부처가 이승에 대해 정반대의 두 말을 했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대성인은 이 물음을 쉽게 풀지 않으셨다. 먼저 법화경에서 성문들이 받은 수기를 하나하나 열거하시고(제12장), 이어서 화엄경의 대약왕수, 대집경의 「불지은」, 유마경의 「범부의 악과 이승의 선」, 방등다라니경의 네 비유, 대품반야경과 수릉엄경의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하는 자」, 정명경의 「공양하면 삼악도」를 차례로 들어 이전 제경의 판정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이셨다(제12~14장). 그 판정은 사십여 년 동안 시방세계 전체에 공표된 것이었기에, 법화경의 수기는 「천마가 부처로 나타난 것인가」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제15장).
그 의심을 걷어 낸 것이 다보여래의 「개시진실」과 시방 분신 제불의 광장설이다. 이전 제경에도 제불의 증명은 있었지만, 그것은 소승의 「시방 유일불」을 깨뜨리는 「일부의 상위」를 위한 것이었고, 법화경의 증명은 「장비마작불」이라는 최대의 의심에 맞선 대장엄의 증명이었다(제15장). 그러나 그 증명을 눈앞에서 본 재세와 달리, 경문만 펼쳐 보는 멸후에는 다언 · 다경 · 다년인 이전이 더 믿음직해 보인다. 그래서 세상은 「같다」고 하는 이를 반기고 「다르다」고 하는 이를 물리친다(제16장). 대성인은 육난구이와 조상토의 경문으로, 「다르다」고 능히 설하는 것이 멸후 악세의 가장 어려운 일이며 정법의 자가 적다는 것은 오히려 바름의 증거임을 보이시고, 성인의 세상에 법화경의 실의가 나타나리라고 맺으셨다(제17장).
이 과정에서 두 가지가 분명해졌다. 첫째, 이승작불은 이승 한 부류의 문제가 아니라 십계호구와 일념삼천의 성립 조건이며 일체중생 성불의 보증이다. 가장 성불하기 어려운 자가 성불하므로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 둘째, 법화경의 난신난해는 법화경의 결함이 아니라 법화경이 부처의 본의 그대로인 데서 온다. 난신난해는 오중상대를 따라 겹겹이 깊어지며, 그 맨 끝에 문저 하종의 독일본문이 있다.
다음 제3편 「본적상대 — 구원실성과 이전 · 적문의 두 허물」에서 대성인은 「둘째」인 구원실성으로 나아가신다. 화엄경 · 아함경 · 대일경 등이 모두 석존이 「처음 성도했다」고 설하는 가운데, 법화경 수량품만이 오백진점겁의 구원을 밝힌다. 적문과 이전의 상위가 이승작불이었다면, 본문과 이전 · 적문의 상위는 구원실성이다. 그리고 그 상위는 이승작불의 경우보다 더 크고, 더 믿기 어렵다.
더 읽기
- 개목초 서강 — 유래 · 대의 · 원의
- 개목초 · 제1편 주사친 삼덕 — 유교 · 외도 · 불교
- 개목초 · 제3편 본적상대 — 구원실성과 이전 · 적문의 두 허물
- 불교 교학 五 일념삼천
- 관심의 본존초 · 제1편 일념삼천의 출처
- 인물탐구 · 전교대사
참고 문헌
원전
- 니치렌 대성인, 「개목초」 상권(어서 186–210쪽) · 「관심의 본존초」 · 「제경과 법화경과 난이의 사」 · 「현방법초」 · 「지묘법화문답초」 · 「성우문답초」 · 「수호국가론」 · 「법화취요초」 · 「보은초」 · 「선시초」 · 「현불미래기」 · 「소야전답서」 · 「입정안국론」 (일본어판 어서전집 · 화광신문 한국어판 어서전집)
- 『묘법연화경』(구마라집 역) 방편품 · 비유품 · 신해품 · 수기품 · 화성유품 · 오백제자수기품 · 수학무학인기품 · 법사품 · 견보탑품 · 권지품 · 여래신력품 · 촉루품, T9 no.262
- 『무량의경』, T9 no.276
- 『화엄경』(60권), T9 no.278
- 『대방등대집경』, T13 no.397
- 『유마힐소설경』, T14 no.475
- 『대방등다라니경』, T21 no.1339
- 『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경), T8 no.223
- 『수릉엄삼매경』, T15 no.642
- 『금광명경』, T16 no.663
- 『아미타경』, T12 no.366
- 『대반열반경』, T12 no.374
-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대일경), T18 no.848
- 『대지도론』, T25 no.1509
- 『법화현의』, T33 no.1716
연구 · 번역
- The Gosho Translation Committee (tr.), The Writings of Nichiren Daishonin, vol. 1, Soka Gakkai, 1999 (「The Opening of the Eyes」 수록)
- Jacqueline I. Ston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 安藤俊雄, 『天台学 — 根本思想とその展開』, 平楽寺書店, 1968
